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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 현중문 댓글:  조회:1786  추천:0  2018-09-03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시 작품을 중심으로 번역·소개하려고 한다.  이른바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는 고려하지 않았다.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통의 부정과  혁신의 연속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시인들이 "영향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한결 풍성한 시 작품으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려는 지난한 시도라고  평가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먼저 중남미 현대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의 시는  몇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고루해진 전통적이고 정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려는 중남미 최초의 시운동으로,  세기말적 감수성과 중남미 크리오요(criollo)의 비전을  담아내려고 했다.  ☞ 루벤 다리오:「백조」  백조  다리오 / 현중문 옮김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의 시학을 잘 표현한 작품  시 제목에서 '고니' 대신에 '백조'라는 말을 선택한 까닭은  희고 청순한 하얀색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고육책  원제는 El cisne. 출전은 『불경한 산문시』(Prosas profanas y otros poemas, 1896)  원문과 상세한 주석은 한글문서에 있습니다.  그때는 인류에게 신성한 시절이니  백조는 죽기전에 단한번 노래했다.  바그너 백조노래 멀리서 들려올땐  여명이 한창이고 재탄생 순간이니.  인간세 바다에서 춤추는 폭풍우 위  백조의 노래소리 끊임없이 들린다.  게르만 늙은신 토르의 망치소리와  아르간튀르의 칼 찬미가 잠재우며.  신성한 새 백조여! 백옥미녀 헬레네  레다의 청란(靑卵)에서 우아하게 태어난  절세미모의 공주, 불후불멸의 공주.  네 하얀 날개 아래 새로운 시는 빛과  조화의 영광으로 순수한 헬레네를,  영원한 이상의 헬레네를 생각한다.  Corregio(1490-1534)  Leda with the Swan(1531-32)  Oil on canvas, 152 x 191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이어 전위 운동(Avant-garde)의 시작과 더불어  기존의 시 형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시학이  1910년대 칠레의 시인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가  주창한 창조주의이다.  우이도브로에 따르면, 시적 대상이란 언어 내부에만,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언어로서만 존재한다.  ☞ 우이도브로:「시학」  시학  우이도브로 / 박병규 옮김  비센테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는  칠레 출신의 아방가르드 시인.  1916년부터 프랑스에서 르베르디(Reverdy)와 함께  활동하면서 창조주의 시학을 주창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높은 매』(Altazor, 1931)  시가 열쇠가 되기를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기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라,  그리하여 듣는 이의 영혼이 감흥에 떨도록.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언어를 조심하라.  생명 없는 형용사를 죽여라.  우리들은 신경 조직이다.  근육은 옛 유물이니  박물관에나 진열하라.  그렇다고 힘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활력은  머리 속에 있다.  시인들이여! 왜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서 장미가 피게 하라.  우리들이 보기에 만물은  오로지 태양 아래 살고 있다.  시인은 작은 하느님이다.  『물거울』(1916) 중에서  이러한 일련의 아방가르드적 시 개혁 운동 정점에  위치한 시인을 들라면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초기 네루다(Pablo Neruda)를 꼽겠다.  이 때의 네루다 시는 시인의 가슴에서 편린처럼 튀어나와  이내 명멸하는 덧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다.  ☞ 네루다: 시학 (Arte poética)  ☞ 네루다: 시  시학  네루다 / 조민현 옮김  어둠과 공간 사이에서, 성장(盛裝)과 처녀 사이에서  유별난 심장과 불길한 꿈을 안고,  때 이르게 창백한 안색, 시들어버린 이마  하루하루 삶을 여윈 분노로 상복을 입고,  아, 꿈결처럼 마시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과  전율하며 받아들이는 모든 소리 앞에서  나는 언제나 갈증 없는 목마름과 차가운 열병을 앓는다.  마치 도둑이나 유령이 나타나듯이,  불현듯 돋아나는 청각(聽覺), 종잡을 수 없는 고뇌.  그리고 두껍고 단단하게 펼쳐진 겉껍질,  망신당한 웨이터 같고, 약간 목쉰 종소리 같고  낡은 거울 같고, 외딴집의 냄새 같은  그곳에 밤이 되면 만취한 손님들이 들어온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 냄새, 꽃도 없는데,  ― 이렇게 얘기하면 훨씬 덜 우울하겠지 ―  그러나, 사실, 내 가슴을 후려치는 바람과  침실에 굴러 떨어진 밑도 끝도 없는 밤들과  희생으로 불타는 하루의 소음은  우울하게, 내 안에 있는 예언의 목소리를 요구하는데,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을 듣지 못한 사물들의 주먹질과  휴전 없는 동요와 혼미한 이름 하나 있으니.  『지상의 거처 I』(1933)에서  시 (詩)  네루다 / 김현균 옮김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 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 중에서  후기 네루다는 이러한 단련의 과정을 거쳐  누구나 읽어도 수긍할 수 있는 일반적인 비유와 이지미와  시상을 노래하는데, 보르헤스 또한 이와 유사한 도정을 걸어갔다.  보르헤스는 전위운동(극단주의, Ultraísmo)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만년에는 "유치하다"고 초기 시작품을 부정적으로 평했으며,  일부 작품은 재출판을 극구 반대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시학」은 만년의 작품인데,  우리는 시와 산문을 포함하여 보르헤스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를 접할 수 있다.  ☞ 보르헤스:「시학」  시학  보르헤스 / 현중문 옮김  보르헤스 후기 시에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도 물, 세월, 강물, 거울 같은 평범한 이미지를  중첩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리((琉璃))라는  미학적 응결물을 창출해내고 있다. 원제는 Arte poética  물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강을 보고  시간이란 또 다른 강임을 기억하라.  우리들은 강처럼 사라지고  우리 얼굴은 물처럼 흘러감을 알라.  깨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꿈이며  우리 육신이 두려워하는 죽음이란  밤마다 찾아오는 죽음, 꿈이라 생각하라.  나날의 일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유구한 세월의 상징을 보고,  세월의 전횡을 음악과  속삭임과 상징으로 바꾸어라.  죽음에서 찾아낸 꿈, 석양에서 찾아낸  서글픈 황금, 이것이 시일지니,  가난하고도 불멸하는 시일지니,  여명과 석양처럼 번갈아드는 시일지니.  오후가 되면 종종 거울 깊은 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얼굴 하나 있으니  예술은 그 같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  불가사의한 일에 신물이 난 율리시즈는  눈물이 났단다, 먼발치로 보이는 이타카  푸르고 소박한 고향, 예술은 그런 이타카  영원히 푸르지만 불가사의는 없는 이타카.  예술은 또한 흐르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르는  끊임없는 강물이며, 그 끊임없는 강물처럼  자신이면서 다른 사람으로 유전하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유리(琉璃)이다.  『제작자』(1960)중에서  20세기에 시를 쓰는 작업,  특히 네루다의 매끄러운 시와 시낭송 열풍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침묵으로 변한 이후에 시를 창작하는 작업은  성냥개비 하나로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의 거리를 밝히보려는  안타깝고도 안쓰러운 일임을 모두들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인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시란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다시 말해서, 시 창작을 다룬 시, 메타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메타시의 첫 운을 뗀 시인은, 내가 보기에,  멕시코 시인 파스(Octavio Paz)이다.  파스의 시세계는 매우 복잡하여 한마디로 축약하기 곤란하나,  이제는 시인의 의도를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의미의 주변이나 어슬렁거리는  시어(詩語)를 붙잡고 대판 씨름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 파스:「시인」 (업로드 예정)  이어 우리는 파라(Nicanor Parra)의 반시(反詩)를 만난다.  파라는 모데르니모에서 보여준 시어의 조탁을 거부하고  일상어를 도입하며, 네루다가 보여준 부드러운 리듬과 서정성에  반기를 들어 일상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시를 시답게 만든다고 여겨온 대부분의 자질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흙먼지 이는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 파라:「선언문」  선언문  파라 / 박병규 옮김  반시(反詩) 선언문으로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 1914-)가 거부하는  시의 전통과 옹호하는 글쓰기를 잘 드러낸 작품  원제는 Manifiesto(Manifiesto, 1963)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이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보기에  시란 사치품이었습니다만  우리들에게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정중하게 말씀드려  우리는 선조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시인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성벽을 쌓는 미장공이고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꾼입니다.  우리들은  일상 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뿐  언어의 연금술을 믿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시인이 저기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무는 올곧게 자란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들은 창조주 같은 시인  싸구려 시인  백면서생 같은 시인을 고발합니다.  공손하게 말씀 드려  이분들은 모두  피고소인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허공에 성채를 지으려고 한 죄  시간과 공간을 허비한 죄입니다.  달에 바치는 소네트를 만들면서  파리의 최신 유행을 따라  단어들을 우연하게 결합한 죄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상(思想)은 입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은  짙은 선글라스의 시  영풍 농월의 시  챙 넓은 모자의 시를 배격합니다.  그 대신  안경을 벗은 눈의 시  진솔한 가슴의 시  모자를 벗은 사람의 시를 옹호합니다.  우리들은 요정이나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시란 이런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삭으로 치창한 여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이제 정치적인 차원입니다.  우리 앞 세대는  -정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굴절하고 산란했습니다.  몇 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우리들은 그렇게 추정합니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민중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존경받는 부르주아 시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몇 분들만이 민중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지배적인 시를 비판하고  현재의 시를 비판하고  플로레타리아의 시를 비판했습니다.  우리들이 인정하는 공산주의자들,  그러나 시는 볼품이 없었고  초현실주의 아류였으며  삼류 퇴폐주의였으며  물 건너 온 낡은 도식이었습니다.  형용사의 시  후각과 미각의 시  자의적인 시  책을 베낀 시  그리고  언어 혁명에 기초한 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기초한 시  관념 혁명에 기초한 시였습니다.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악순환의 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런 시를 썼을까.  쁘띠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고?  한심하게도 시간만 낭비했으니!  쁘띠 부르주아는 먹거리가 아니면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로 놀라게 하려고 들다니!  지금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황혼의 시  밤의 시를 썼다면  우리들은  새벽의 시를 옹호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메시지입니다.  시의 광채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시는 누구나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료 여러분, 이것 뿐입니다.  젊잖게 얘기하면  우리들은  작은 하느님의 시  신성한 소의 시  분노한 투우의 시를 비판합니다.  구름의 시에 반대하는  우리들은  지상의 시를 주장합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들은 지상에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카페의 시에 반대하여  자연의 시를 주장하며,  살롱의 시에 반대하여  광장의 시  저항의 시를 주장합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선언문』(1963) 중에서  더 이상 내려딛을 곳이 없는 일상의 평면에서  시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테면,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의 작품에서 보듯이,  상호텍스트성으로서의 시 개념이 등장하고,  독자의 위상은 공동 창작자로 격상된다.  ☞ 파체코:「익명의 옹호」  ☞ 파체코:「동조운에 관한 고찰」  익명의 옹호 (인터뷰를 거절하기 위해 조지 무어에게 보내는 편지)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 1939-)는  멕시코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원제는 Una defensa del anonimato  친애하는 조지 씨, 나는 우리가 왜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써 놓은 것을 후에 출판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메시지가 담긴 병들과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에 병 한 개를 던지는 것입니다.  조류를 타고 누구에게로, 어디로 흘러갈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십중팔구 깊은 바다의 풍랑에 휩쓸려,  바다 밑바닥, 죽음의 모래에 처박힐 테지요.  하지만  조난자의 찡그린 얼굴이 영 부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일요일  콜로라도의 에스테스 파크에서 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으니까요.  당신은 병 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읽었으며  (바다를 통해 우리의 두 언어가 만났습니다.)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내가 단 한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나의 꿈은 읽히는 것이지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텍스트일 뿐 텍스트의 저자는 중요치 않고,  내가 문학 곡마단을 혐오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후에 장문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걸 보내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썼겠습니까.)  나는 회신을 보낼 수도 그렇다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시행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이건 시가 아니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의 특권을 꿈꾸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오늘날 산문으로 말하는 모든 것들  (이야기, 서간문, 드라마, 역사, 농사교본)의  도구로 운문을 사용할 뿐입니다.  당신의 전보에 답하지 않기 위해 말하겠습니다.  나의 시 안에 있는 것 말고는 덧붙일 게 전혀  없습니다.  나는 시를 논평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역사 속에서의 자리"  (혹 나의 자리가 있다해도)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들 모두에게 조난이  닥칠 테니까요.)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시의 절반만을  씁니다.  시는 백지 위에 그려진 검은 부호가 아닙니다.  나는 타인의 경험과 교유하는 만남의  광장을 시라고 부릅니다. 독자들이  내가 스케치한 시를 완성할(혹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읽습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 거울에 비쳐보인다는 건  기적과 같습니다.  여기에 가치가 있다면 ―뻬소아가 말했습니다―  그건 시의 몫이지 시의 저자의 몫이 아닙니다.  어쩌다 위대한 시인이라 해도  숱한 좌절과 허섭쓰레기 틈에서  너덧 편의 빼어난 시를 남길 뿐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들은  정말이지 별로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세상은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시인들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 가는데,  시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드니 말입니다.  시인은 이미 종족의 목소리이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인은 또 하나의 연예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의 술주정, 간음, 병력(病歷),  그리고 곡마단의 다른 광대들이나 곡예사, 혹은  코끼리 조련사와의 야합과 분쟁은  이미 시를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폭넓은 관객으로 확보했습니다.  나는 시란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시는 두 사람, 거의 영영 알지 못할  두 사람 사이의 밀약(密約) 속에  오직 침묵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형식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반세기 전에 환 라몬 히메네스가  한 잡지를 발간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잡지에 《익명》이라는 제목을 붙인 다음  서명이 아니라 텍스트를 발표하고,  시인이 아니라 시로 잡지를 꾸미려 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의 대가처럼  시가 익명이기를 바랍니다. 시는 집단적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나의 시와 나의 번역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도 내 생각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내 시를 읽었지만 나를 알지 못합니다.  영영 만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친구입니다.  내 시가 당신 맘에 드셨다면  내 것이든 / 타인의 것이든 /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읽은 시는 진정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시를 읽을 때 그것을 창작하는 저자입니다.  『바다의 일』(Los trabajos del mar, 1983) 중에서  동조운(同調韻)에 대한 고찰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e Emilo Pacheco)는  멕시코 태생의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문학평론가.  이 시의 원제는 Disertación sobre la consonancia  (동조운(同調韻)이란,  정형시의 율격 가운데 하나로  운(韻)을 구성하는 모음뿐만 아니라  이에 뒤따르는 자음까지도 동일한 형태를 일컫는다.)  때때로 스페인어의 소리 울림 때문에 여전히  시가 운율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운율에서 나와 운율을 지니며 운율을 생성한다고 해도,  최근 반세기 동안 씌어진 가장 좋은 시들은  과거의 학자들이나 규범가들이 얘기하던  〈시〉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시의 한계를 확장할 새로운 정의가  상정되어야 한다(만일 아직도 한계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가령 고전주의자들이 불굴의 도전으로도 발굴해내지  못했던 어떤 단어.  ―지당하게도― 한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이건 이미 시가 아니다" 라고 내뱉는  사람들의 놀라움과 노여움을 피할 수 있는  (암시가 용인되는) 하나의 명칭, 그 어떤 용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내게 묻지마』(1969) 중에서  이와 더불어 창작에 대한 자의식 또한 고개를 들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시가 바로  엔리케 린(Enrique Lihn)의 메타시(metapoesía)이다.  ☞ 린:「시를 올바르게 쓰려면」(업로드 예정)  이 글처럼 각 시인의 시학에 해당하는 작품을 통해서  중남미 현대시사를 조망하려는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시도는 필연적으로 몇몇 대가를 누락시키는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보유로서  서인도 제도와 브라질의 독특한 흑인 혼혈 문화,  즉 물라토(mulato) 문화를 노래한 쿠바 태생의 시인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 작품 「성벽」을 소개한다.  성벽(城壁)  기옌 / 현중문 옮김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은 쿠바 시인  원제는 La muralla  - 크리스티나 루스 아고스티에게-  성벽을 세우려니  일손을 빌려주게,  흑인은 검은 손을  백인은 하얀 손을.  아,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 쿵쿵  - 누구야?  - 장미와 카네이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대령의 칼...  - 성문을 닫아라  - 쿵쿵  - 누구야?  - 비둘기와 월계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전갈과 지네...  - 성문을 닫아라  우리편 가슴을 향해  성문을 열어라.  독약과 비수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도금양과 박하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뱀의 이빨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꽃에 앉은 나이팅게일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모두들 합세하여  성벽을 세워보세,  흑인은 검은 손으로  백인은 하얀 손으로.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비상하는 민중의 비둘기』(1958) 중에서 [출처]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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