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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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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스크랩] 중남미 시와 옥따비오 빠스-정경원 댓글:  조회:1237  추천:0  2018-10-19
중남미 시와 옥따비오 빠스  정경원         시인의 운명   단어들? 그래, 바람의 단어들,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렸구나. 나를 단어들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소서, 나를 입술 사이의 바람되게 해주소서, 윤곽없이 헤매는 단 한번의 입김 바람을 잠재운다.   빛 또한 제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Condici`on de nube, 1944)   야수(夜水)   밤이면 떨어대는 두 눈을 가진 말이 있는 밤이, 잠든 들녘에 물의 눈을 가진 밤이, 떠는 말의 눈을 가진 네 눈에 있고, 비밀스런 물의 눈을 가진 네 눈에 있다.   어두운 물의 눈, 연못 물의 눈, 꿈결 물의 눈,   침묵과 고독, 달에 인도되는 어린 두 마리 짐승, 그 눈에서 마시고, 그 물에서 마신다.   네가 눈을 뜨면,  밤은 이끼낀 문들로 열리고, 밤의 복판에서는 물로 비밀스런 왕국이 열린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달콤하고 잔잔한 강의 흐름은 안으로 너를 빠뜨리며 어둡게 한다: 밤은 네 영혼의 해변을 적신다.  (El girasol, 1943-1948)     다리(橋)   지금과 지금 사이에, 지금의 나와 지금의 너 사이에, 다리라는 두 글자.   네가 글자로 들어갈 때, 너는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의 반지되어 세상은 닫힌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언제나 몸은 펼쳐지고, 하나의 무지개된다.   나 그 아치 아래에서 잠을 청하리라.  (Salamandra, 1958-1961)     내 안의 나무   내 이마에 자란 한 그루 나무, 내 안으로 자랐다. 뿌리는 혈관, 신경은 가지, 어수선한 나뭇잎은 사유.   너의 시선은 나무를 불 붙이고 어둠의 열매는  피의 오렌지 불씨의 석류.   동이 튼다 몸둥아리의 밤으로부터. 먼 저 속에서, 나의 이마에서, 나무가 말한다. 가까이 오너라, 들리느냐?  (Arbol adentro, 1976-1988)   Ⅰ. 중남미 시   1. 원주민 문학   정복 이전 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은 문학사적 발전과 의미가 미미했다. 이렇게 문학이 침체했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적 통일과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같은 완벽한 언어 체계를 가진 문자가 없었다.1) 둘째, 상이한 문화가 동일한 지역에서 공존하며 발전했다. 셋째 문자 문학에 대한 구전 문학의 우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다수의 작가들이 무기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많은 시, 이야기, 희곡 등이 익명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오늘날 알려진 시인으로는 잉까 빠차꾸떽(Inca Pachacutec)과 네싸우알꼬요뜰 데 떽스꼬꼬(Netzahualcoyotl de Texcoco)왕이다. 그러나 이러한 척박한 상황에서도 문학 작품들이 서정시, 서사시, 희곡 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서정시는 노래와 음악이 곁들어졌다. 서사시에서는 한 제국의 창시자를 기리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신화나 전설이 소개되었으며2) 희곡은 신에게 바치는 제식 행사에서 유래되었다. 대표적인 희곡 작품으로는 마야-끼체어로 된 『라비날-아치』Rabinal-Achi)와 께추아어로 된 『오얀따이』(Ollantay)가 있다.    1) 서정시 신비한 사상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되었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상류층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신비의 시대, 종교의 시대, 정복 이전 역사의 시대 등의 개념이 혼재되어 우주에 대한 개념이 설명되었다. 멕시코에서 고고학적으로 3천 년 전부터 인류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당시의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무력했으며 신비한 힘에 사로잡힌 채 소규모의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축복을 기원하기 위해 주문을 외웠는데 이 때 사용한 언어는 제식의 성격이 농후하며 즉흥적이고 계시적이었다.  후에 이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는 비장한 나우아틀어로 씌어진 시의 형태로 정복자의 손에 의해 원주민의 문화가 말살되는 현장의 산 증거가 된다.     (1)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서정시 나우아뜰어로 ‘시’를 ‘꾸이까뜰’(Cuicatl)이라고 한다. 또 그림으로 표현될 때는 꽃으로 장식된 소용돌이 무늬가 되며 ‘꽃이 만발한 단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꾸이까삑끼’(Cuicapicqui)로서 ‘꽃이 만발한 단어들’을 노래하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떽스꼬꼬(Texcoco)와 떼노치띠뜰란(Tenochtitlan)의 예배장에서는 춤과 노래의 집들(Casas de Danza y Canto)이 있어 가수, 무용수, 음악가들이 황실의 후견 아래 그 곳에 거주했다. 아스떼까인들의 서정시는 ‘꽃들의 노래’(Xochicnicatl), ‘슬픔의 노래’(Ecnocuicatl), ‘사색의 노래’ 등 세 가지 종류의 시로 분류된다. 그 중 ‘사색의 노래’ 시는 짤막해서 일본의 하이꾸와 대단히 유사하다. 주로 다루어지는 시의 주제로는 이별, 인생무상 등이다. 『멕시코의 노래』(Cantares mexicanos) 중의 시 한 수를 보기로 하자.   우리는 두 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닐진대 치치메까 왕자들이여 즐기세! 우리의 꽃들을 무덤으로 가지고 갈 셈인가? 단지 우리는 꽃들을 빌렸을 뿐이다.3)   (2)안데스 지역의 서정시 이 지역에서는 주로 현인들과 대중 시인들에 의해서 지어졌다. 시의 각 행은 3음절에서 8음절 내로 다양하며 수확과 축제를 주로 노래했다. 가끔 시인과 합창단 사이에 대화가 시 중에 등장하는 것이 특이하다. ‘아이모라이’(aymoray)는 농부들의 축제를 다룬 시이고, ‘아이예’(haylle)는 시골과 영웅심이 주된 주제이고 ‘아라위스’(harawis) 또는 ‘하라비’(jaravi)는 감정적인 주제로 슬픔을 그렸으며 ‘우르삐’(urpi)와 ‘와이노’(waino)는 다음의 시 같이 따뜻한 사랑 노래를 담고 있다.    네가 입고 있는 꽃 뜨개질된 외투 황금실로  꿰매어져 있고 섬세한 장식은  나의 순진함에 연결되어 있네.4)   (3)아마존 지역의 서정시 아메리카인들의 또 다른 시 언어의 보고는 아마존 셀바 지역과 큰 강들이 있는 지역이다. 구아라니인들과 뚜삐족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우주의 기원, 교육, 예식, 가정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음브야(mbya)족의 자장가 속에 나타난 순박함이 다음 시에 엿보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냐 아들아; 자거라 어서 오너라 잘자라 아가야, 아빠가 네 애완동물로 점박이 사슴 한 마리와  네 목걸이로 토끼 귀 하나와 네 장난감으로 점박이가 있는  가시나무 열매를 가지고 오신단다.5) 2. 정복 시기의 문학   끄리스또발 꼴론(콜럼부스)의 항해 일기로부터 정복 시기의 문학이 시작된다. 그의 일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과 인간이 처음 소개된다. 다시말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연대기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연대기 작가들은 유럽의 독자들을 신세계의 경이로운 자연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놀라게 했다. 이 연대기에서 우화와 먼 옛날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연대기 작가들이 현실과 환상을 혼재하여 묘사하였기 때문에 15세기에 역사적 사실과 허구 문학 사이 또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벽이 없었다. 그래서 신화적 인물들인 아마존 전사, 식인종, 거인족들이 거주하던 지명이 실제 지도에 나타나곤 했다. 꼴론은 그의 일기에서 인어를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베르날 디아스 델 까스띠요는 아스떼까 제국의 수도를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의 세계와 비유하기도 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정복자들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금, 영광, 복음이 그것이다. 이렇게해서 정복 시기의 문학은 연대기 작가들의 글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 문화의 이식, 인디오 문화의 말살, 두 문화의 혼합으로 특징지워지는 식민지 시대의 출현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 앞에서 언급한 현실과 환상 그리고 역사와 상상의 융합은 많은 역사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흥미심을 야기시켰다. 20세기 중남미 문학에 나타나는 ‘환상적 현실’은 바로 연대기 문학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다. 이 연대기 문학과 20세기 중남미 문학에도 기사 문학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음을 알 수있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작가들은 베르날 디아스같은 평범한 군인 또는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같은 교육받은 성직자 그리고 곤살로 훼르난데스 데 오비에도와 같이 르네상스 문학에 조예가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Bernardino de Sahagun)은 『누에바 에스빠냐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la Nueva Espana)에서 인디오들의 습관과 문화를 최초로 소개했다. 또 아메리카에서 태어나 그들 자신의 연대기를 작성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황실주해』(Comentarios reales)를 남긴 꾸스꼬 왕가의 자손인 잉까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silaso de la Vega)이다. 일반적으로 연대기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첫째,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일반 연대기, 둘째, 한 통치 기간의 연대기, 셋째, 특별한 일의 연대기 등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관한 연대기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다. 끄리스또발 꼴론이 항해 내용을 그의 후견인인 왕에게 보낸 편지와 같이 많은 연대기 작가들의 연대기들이 전 유럽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자 공명심 많은 독자들은 정복에 관한 사실을 인지하며 나름대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더우기나 현실과 상상이 교묘하게 섞인 채로 언급되어 있는 연대기 정보를 근거로 당시 스페인에 반기를 들고 있던 유럽의 궁정들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들로 인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가톨릭교 복음 전파라는 명분으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을 옹호하는 이론과 인디오의 권리를 찬탈하려는 목적으로 정복을 자행하는 스페인의 무력을 비난하는 이론간의 논쟁이 비롯되었다. 휄리페 2세는 왕실의 권위 유지를 위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에 관한 글을 집대성해서 『인디아스 대연대기』(Cr -onica Mayor de las Indias)를 작성했다. 1571년에는 스페인 수석 연대기 작성자로 지리학자 로뻬스 데 벨라스꼬(Lopez de Velasco)가 임명되어 『인디아스 전도』(Geografia Universal de las Indias)를 작성했다. 같은 해에 뻬루의 부왕인 후란시스꼬 똘레도는 연대기 작가 뻬드로 사르미엔또 데 감보아(Pedro Sarmiento de Gamboa)에게 잉까의 공식적인 역사를 저술하는 임부를 부여했다. 또 후란시스꼬 쎄르반떼스 살라사르(Francisco Cervantes de Salazar)도 멕시코에서 누에바 에스빠냐의 연대기 재편집자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연대기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대조적인 시각이 있었다. 다시말해 인디오 문화와 유럽 문화의 관점에서 정복을 기술할 때 서로의 관점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의 연대기 작가들은 르네상스시대의 정신이 번영과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것임을 암시하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반면 인디오 연대기 작가들은 불길한 역사의 흐름을 예견하는 등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주었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인간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의미가 있었으며 반면에 인디오 연대기 작가들에게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은 파국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3. 식민지시대 문학   15세기와 16세기 동안에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이 참여했던 정복 사업의 업적을 소개하거나 그들이 본 신세계를 묘사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정복과 식민지 과정에 근거했다. 17세기부터 이러한 문학의 성격은 부왕 제도로 사회의 안정이 도모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는 16세기 말 경부터 초기 스페인 정복자들의 후예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인디오의 피를 받은 혼혈인이었다. 경제적 번영, 사치스러운 도시 귀족의 출현, 대학과 수도원의 소수 지식인층 등은 아메리카 대륙에 머지 않아 훌륭한 문인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끄리오요(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작가들은 스페인적 요소와 인디오적 요소를 혼합한 아메리카의 독특한 바로크 양식 문학으로 유럽의 문학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문필 활동을 했다.  한 예로 후안 데 에스삐노사 메드라노(Juan de Espinosa Medrano, 1640-1688)는 인디오의 후예로 뻬루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 공부를 시작해 후에 꾸스꼬 대학에 입학했다. 스페인어와 께추아어를 구사했던 그는 연설가, 신학교수, 극작가, 수필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1) 식민지 시대 초기 문학(16, 17세기) 정복시기에서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연대기의 역사적 형식에서 궁중 교육을 반영하는 바로끄 형식의 문학으로 바뀐다. 둘째, 유럽 문화, 스콜라 철학, 과학 지식을 습득한 끄리오요 작가들이 유럽의 작가들과 견줄만한 작품 활동을 한다. 셋째, 인디오 언어들과 스페인어의 혼용 과정에서 새로운 아메리카 정신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문화적 발전은 스페인 문학의 형식과 문체의 이식에서 기인한다. 많은 작가들이 스페인의 문학을 모델로 삼고 기존의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 영향을 받아 새로운 문체의 문학 작품을 생산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식 활동이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럽보다 아메리카의 문학은 항상 시기적으로 뒤졌다.    (1)서정시 아메리카 시는 서정적인 요소와 서사적인 요소를 같이 담고 있다. 알론소 데 에르시야(Alonso de Ercilla)의 『라 아라우까나』(La Araucana)의 뒤를 이어 종교시를 남긴 레오노르 데 오반도(Leonor de Ovando)와 멕시코의 서정시인 후란시스꼬 데 떼라사스(Francisco de Terrazas)가 등장한다. 후란시스꼬는 16세기 중남미 최고 시인으로 사랑의 감정이 배어 있는 그의 시는 구띠에레 데 쎄띠나(Gutierre de Cetina)와 가르실라소(Garcilaso)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소네트는 지방색보다는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이태리식 표현을 선호했다. 쎄르반떼스는 그의 작품 『라 갈라떼아』(La Galatea)에서 후란시스꼬를 ‘새로운 아폴로’(nuevo Apolo)라고 격찬했다.   (2)풍자시 이 당시 아메리카 문학을 특징짓는 문학 양식 중의 하나로 풍자시를 꼽을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과 끄리오요들을 비방하는 시들이 발표되었지만 이 중에는 익명으로 발표된 시도 있었다. 세비야 출신인 마떼오 로사스 데 오껜도(Mateo Rosas de Oquendo)는 리마에 거주하면서 『1598년 뻬루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풍자』(Satira a las cosas que pasan en el Peru, ano de 1598)를 남겼다.   (3)연대기 현실이 환상과 교차하며 운율을 수반하며 시적으로 전개된다. 1589년 후안 데 까스떼야노스(Juan de Csatellanos)의 기념비적 작품인 「인디아스의 저명한 남성들에 대한 애가」(Elegias de varones ilustres de Indias)가 발표된다.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인 마르띤 델 바르꼬 쎈떼네라(Martin del Barco Centenera)는 1602년 그의 연대기시 『라 아르헨띠나』(La Argentina)를 세상에 내놓는다.   2) 바로끄 시대(17, 18세기)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성숙된 창작력은 예술 가치의 기본적인 잣대가 되었다. 이러한 면이 새로운 문학 양식 또는 불후의 아메리카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래 ‘바로꼬’라는 단어는 라틴어 ‘verruca’라는 단어에서 기인된 말로 그 의미는 비정상적인 진주를 뜻하는데 예술 분야에서 처음 이 용어가 쓰인 예는 르네상스 후기의 장식이 많은 건축 양식을 지칭한 것이다. 바로끄 문학은 열려진 형식의 문학이다. 한 편의 시에 있어서 바로끄 시대와 같이 한 개의 중심축이 해체가 되어 여러 개의 하위 중심축들이 조화를 이룬다.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끄루스(Sor Juana Ines de la Cruz)의 「첫 꿈」(Primero sueno)이 대표적인 예로서 시의 형식적인 면에서 역동적인 요소가 두드러져 주제가 복잡하며 복합적 의미를 추구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요소는 문체, 반어, 대조, 과장 그리고 은유와 같은 수사법의 빈도 높은 사용을 통해 알 수 있다.   (1)서사시 스페인에서의 서사시는 휄리뻬 2세때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 이후에도 꾸준하게 발전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베르나르도 데 발부에나(Bernardo de Balbuena)의 『까르삐오의 베르나르도 혹은 론세스바예스의 승리』(El Beernardo del Carpio o la Victoria de Roncesvalles)같은 작품이 나타났다. 또 다른 서사시의 양식은 종교적 서사시이다. 디에고 데 오헤다(Diego de Hojeda, 1571-1615)는 리마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바로끄 시 「라 끄리스띠아다」(La Cristiada)를 발표한다.    (2)서정시 또는 신비주의 과식주의 또는 공고리즘은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졌으며 세속적인 사랑을 성스러운 사랑으로 대치시켰다. 소르 후란시스까 호세파 델 까스띠요 이 게바라(sor Francisca Josefa del Castillo y Guevara)는 ‘라 마드레 까스띠요’(la Madre Castillo)로 더 잘 알려졌는데 작품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추구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신비적인 싯귀를 『영적인 호감 또는 감정』(Afectos o sentimientos espirituales)에서 선보였다. 또한 그녀의 산문은 소르 후아나 이네스와 함께 바로끄 문학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서의 자리를 확실하게 했다.   (3) 풍자시 식민지 시대의 풍자시는 께베도의 영향을 받아 서민적인 영감으로 종전보다 과격하고 공격적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후안 델 바예 까비에데스(Juan del valle Caviedes, 1652-1697)의 『빠르나소의 이』(Diente del Parnaso)가 있다.   4. 독립 시대 문학   중남미 문학에서 1800년에서 1830년까지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문예사조는 유럽의 불란서와 서반아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신고전주의 문학적 특징은 바로끄 시대와는 달리 균형을 이룬 이성, 과거의 전통과 보편성 추구, 예술의 제 원칙 준수, 예술을 도덕적 측면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주의 문학 작품은 위에 언급된 일반적인 특징 외에도 다음과 같은 독특한 면들이 있었다. 첫째, 독립을 위해 문학을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했다. 둘째, 끄리오요 출신 작가들이 고전적 규칙을 고려하기 이전에 아메리카 사회를 반영하는데 더 충실했다. 셋째,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 가치를 재고했다. 넷째,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을 인간이 개발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1) 신고전주의 시 바로끄주의에 반발하면서 나타난 개념으로 국가를 찬양하는 서정시와 혁명을 고취하는 경향이 짙다. 일반적인 분위기는 서정적인 면 보다는 국가를 찬미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목가시 호세 마누엘 마르띠네스 데 나바레떼(Joe Manuel Martinez de Navarrete, 1768-1809)수사의 『시적 유희』(Entretenimientos po-eticos)와 후안 바우띠스따 아기레(Juan Bautista Aguirre)의 연가에서 볼 수 있듯이 친밀한 시적 감흥을 노래했다. 예수회 신부인 후안 바우띠스따 아기레는 바로끄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과도기적 인물로 『이그나시오 성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영웅시』(Poema heroico sore las acciones y vida de San Ignacio)를 남겼다. 1937년에는 뒤늦게 『서반아 운문, 청춘기 작품들, 잡기들』(Versos castellanos, obras juveniles, miscelaneas)라는 이름으로 그의 서정시들이 출판되었다. 그의 서정시는 불란서의 영향을 받아 바로끄의 흔적이 없으며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과식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간집에 있는 『구야야낄과 끼또시에 대한 간단한 도안』(Breve diseno de las ciudades de Guayaquil y Quito)이라는 시에 향토와 국가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2)영웅시 또는 애국시 대부분의 영웅시와 애국시들이 서반아 시인들인 마누엘 호세 데 낀따나(Manuel Jose de Quintana), 후안 니까시오 가예고스(Juan Nicasio Gallegos), 알바레스 씨엔후에고스(Alvarez Cienfuegos) 그리고 훼르난도 데 에레라(Fernando de Herrera)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웅시와 애국시는 독립심을 고취시켰고 장엄하고 서사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애국가도 그 한 형태였다.   (3)아메리카 자연을 노래한 시 이 분야의 시에서는 단연 안드레스 베요(Andres Bello)의 『실바스 아메리카스』(Silvas Americanas)가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지엽적인 주제를 지양한 채 교육적인 의도를 가지고 아메리카의 자연을 묘사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시인들로는 마누엘 호세 데 라바르덴(Manuel Jos de Lavarden), 마누엘 데 세께이라 이 아랑고(Manuel de Zequeira y Arango), 호세 마리아 데 에레디아(Jose Maria de Heredia) 등이다. 구아테말라 출신의 라파엘 란디바르(Rafael Landivar) 신부는 『루스띠까띠오 메히까나』(Rusticatio Mexicana)에서 자기 고향의 땅을 노래했다.    (4)대중시(poesia plpular) 가우쵸 시(la poes`ia gauchesca)의 형식은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지역에서 바르똘로메 이달고(Bartolome Hidalgo)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화의 형태로 인위적으로 창작된 동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정치 현실과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한다. 우화 작가로는 호세 누뇨스 까세레스(Jose Nunez Caceres), 도밍고 데 아스꾸에나가(Domingo de Azcuenaga), 마띠아스 데 꼬르도바 수사(fray Matias de Cordoba), 라파엘 가르시아 고예나(Rafael Garcia Goyena) 등이 있다.   5. 낭만주의 문학   중남미의 낭만주의 문학은 대략 1830년에서 1860년까지를 포함한다. 이 기간은 사회적 불안, 내란, 전제주의로 특징지워진다. 또한 지역의 족장들이 국가 권력의 공백을 대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힘있는 자들이 출현해 정적들과 역경을 이겨내며 통치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는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며 1829년에서 1852년까지 아르헨띠나를 통치했다. 에꾸아도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가 1854년에서 1861년까지 신정 정치를 유지했다. 베네스엘라에서는 안또니오 구스만 블랑꼬(Antonio Guzman Blanco)가 1870에서 1887년까지 독재 정치를 자행했으며 빠라구와이에서는 후란시아(el doctor Francia)가 1840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군주제로 복귀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뚜르비데(Iturbide)와 합스부르가의 막시밀리아노의 군주제가 있었으나 막시밀리아노는 1876년 베니또 후아레스(Benito Juarez)에 의해 제거되었다. 폭력으로 대변되는 내란의 시대가 지나고 정치적인 안정의 시대가 도래해 국가권력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 특징으로는 자기 중심적, 이국적 요소, 독창성, 개인주의, 상상력,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 등이 있다.    1)시  낭만주의자를 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인간의 가장 고양된 정신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시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슬픈 심적 상태를 표현할 욕구를 느낄 때에는 고통을 토로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따라서 주정적인 한 편의 시가 사회에 주는 영향은 점점 커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에스떼반 에체베리아(Esteban Echeverri -a)의 『포로』(La Cautiva), 『도살장』(El matadero), 호세 안또니오 마이띤(Jos Antonio Maitin)의 『시집』,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띤(Juan Zorrilla de San Martin)의 『따바레』(Tabare), 가우쵸 문학6)으로 호세 에르난데스(Jos Hernandez)의 『마르띤 휘에로』(Martin Fierro)가 있다.   6.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   중남미대륙의 19세기는 역사적 정치적으로 3시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 독립기(100-1830), 둘째, 지방 호족의 시대 또는 무정부 시대(1830-1860), 셋째, 국가 확립기(1860-1890) 등이다. 첫째 시기가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되었고 낭만주의가 둘째 시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셋째 시기에 각각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국가적 특징을 추구하였고 후에 국민의 생활상과 습관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시기가 바로 초기 산업주의의 개혁과 이민의 물결이 있었던 때이다. 또 이 때부터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 나타난다. 소리야 산 마르띤의 『따바레』가 그 한 예이다. 이렇게 신대륙에서는 새로운 문학 조류가 뒤 늦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문학 사조가 유행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사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의 결여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시대에는 소설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결과 상대적으로 시가 매우 위축되었다.   7. 모더니즘   모더니즘 문체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상징주의(simbolismo)와 고답주의(parnasianismo)에서 영향을 받은 혁신과 새로운 언어의 추구이었다. 원래 고답주의는 사회적 측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형식의 잔잔함을 옹호하였다. 그리스 고전 신화에서 작품의 주제를 삼아 시를 통해 정적이고 대리석같은 미를 표현하였다. 불란서의 T. 고띠에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불란서에서 1870년에서 1880년까지 고답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예 운동이다. 음악적으로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수한 언어를 찾는다. 언어는 더이상 이성의 언어가 아니고 상징으로 짜여진 환상의 언어이다. 한 담론의 논리적 구문적 연결은 서정적 음악적 연결로 대치된다. 운율, 리듬, 유성 현상, 첩운법 등이 상징주의자들의 시에서는 관능적인 이메지의 부각을 위해 무시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폴 발레리 등이 문학에서 음악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모더니즘 문체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면은 루벤 다리오가 언급했듯이 시에다 ‘언어의 조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율감이 있는 세련된 시어들을 사용하여 시의 형식에서 자연스러운 음악성이 베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고답주의에서 회화적인 면으로 중요시 되었던 시어들과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음악적으로 가치를 부여 받았던 시어들이 모더니즘의 시인들과 산문가들에 의해 새로운 운율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단순한 언어적 표현과 귀족적인 시각에서 요구되어온 교훈적 내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의 구사를 지향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상아탑의 주인임을 자각한다. 그 상아탑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루벤 다리오(Ruben Dario)는 ‘나의 시에서 공주, 왕, 황실의 일, 먼 나라와 상상적인 나라들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삶과 내가 태어난 시간을 나는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속세에서 격리된 시인의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는 무관심한 예술, 다시 말해서 소수를 위한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초창기에 등장한 무관심의 예술, 이름지어 ‘세련주의예술’(preciosista)은 사실주의와 실증적 물질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예술 운동이다. 세게적인 예술가의 의지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길목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 운동도 그들에게 남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답주의의 변화없는 형식과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한 시에 내재하는 음악성을 그들 나름대로 수용해서 모더니즘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예술가를 일반인과 차별하여 예술가의 낭만적인 정신을 고양하여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의 탑이여! 시인이여! 하늘의 피뢰침이여! (루벤 다리오)   모더니즘주의자들은 사실주의를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아름다움의 순수한 형태를 형상화할 수 있는 먼 도시, 신화, 상징, 이국적인 이름 등을 찾아나섰다. ‘모데르노(moderno)’라는 용어도 불란서의 상징주의에서 택했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하나의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운동을 이루었다. 중남미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문학운동을 넘어 19세기와 20세기의 과도기로서의 ‘한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격이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1) 시 19세기 말부터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은 독립국가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들 사이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 문학도 월터 휘트만과 에드가 알렌 포우의 시와 함께 더 이상 영국 문학의 아류가 아님을 선언했다.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의 작가들도 모더니즘의 첫 세대들로서 불란서의 고답주의와 상징주의를 소화해내며 중남미 문학이 스페인 문학의 음지가 아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벤 다리오의 『푸름』(Azul)으로부터 이러한 문학적 독립은 중남미 대륙에서 커다란 물결을 이루며 진행되었다. 주요 작가와 작품으로는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e Asuncion Silva)의 『야곡 III』(Nocturno III), 호세 마르띠(Jos -e Marti)의 『이스마엘리요』(Ismaelillo), 『자유시』(Versos libres), 『유배지의 꽃들』『Flores del destierro), 『황금시기의 시』(Versos de la edad de oro), 마누엘 구띠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errez Najera)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La serenata de Schubert), 『그 때를 위하여』(Para entonces), 『공작부인 욥』『La duquesa Job), 루벤 다리오(Ruben Dario)의 『푸름』(Azul), 『불경스런 산문들』(Prosas profanas), 『삶과 희망의 노래들』(Cantos de vida y esperanza), 아마도 네루보(Amado Nervo)의 『흑진주』(Perlas negras), 『작은 목소리로』(En voz baja), 『고즈넉함』(Serenidad),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Julio Herrera y Reissig)의 『시간의 빠스꾸아』(Las pascuas del tiempo), 『밤의 근행』(Los maitines de la noche), 레오뽈도 루곤네스(Leopoldo Lugones)의 『황금산』(Las montanas del oro),『가축과 과일 예찬』(Oda a los ganados y las mieses), 『마른 강의 로만세』(Romances del Rio Seco) 등이 있다.   8. 현대시   중남미 현대시는 20세기 예술이 경험했던 모든 혁신적인 면들이 그대로 반영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최초로 그려낸 루벤 다리오를 선두로 전위시를 선 보인 바예호(Vallejo), 네루다(Neruda), 우이도브로(Huidobro), 보르헤스(Borges), 히론도(Girondo) 등의 낯설지 않은 시인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감수성’을 소개한 위에 언급된 시인들의 노력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안목이 젊은 세대의 시인들 사이에 심어졌다. 시기적으로 볼 때 중남미 시의 발전 단계는 후기 모더니즘(Posmodernismo), 전위주의(Vanguardismo), 후기 전위주의(Posvanguardismo)로 나뉘어진다.     1) 후기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사이의 세대를 일컫는다. 구체적인 시기는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해당된다. 후기모더니즘의 문체적 특징은 간결함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인 표현형식과 내용을 순화하는 것이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발도메로 훼르난데스 모레노(Baldomero Fernandez Moreno)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이며, 의사이면서 시인이었다. 두 직업 사이에서 시를 선택하기까지의 고뇌를 노래한 『한 의사의 삶과 사라짐』을 1957년에 발표한 데 이어 『꽃 한송이 없는 70개의 발코니』를 선보인다. 몬떼비데오 태생인 델미라 아구스띠니(Delmira Agustini)는 『흰 책』(El libro blanco, 1907), 『아침의 노래』(Cantos de la manana, 1910), 『빈 성잔들』(Los calices vacios, 1903) 등이 있다. 『아침의 노래』의 시집은 인간 내면의 세계, 꿈의 비젼, 힘의 원동력으로서의 삶, 감정을 담은 어둠의 세계를 주제 면에서 다루고 있다. 라몬 로뻬스 벨라르데(Ramon Lopez Velarde)는 멕시코풍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 중남미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심오한 시적 형상으로 옮기는 빼어난 면이 돋보였다.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현란한 장식을 피하면서 구어체 표현법을 견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숭고한 피』(La sangre devota, 1919), 『비탄』(Zosobra) 등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남긴 예술가의 십계명을 보기로 하자.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으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리울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 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리움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도주이다. 네가 남자나 여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이상 예술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황폐』(Desolacion)가 있는데 이 시집은 「예술가의 십계명」을 비롯해 불후의 명작인 「시골 선생님」(La maestra rural), 「바램」(El ruego)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 등의 시를 담고 있다.   2) 전위주의(El vanguardismo) 일 이차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기간 동안의 전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혁신적인 예술 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전위주의는 시기적으로 1920년과 1940년 사이에 유행한 예술 운동으로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포기,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 운동으로는 칠레에서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과격주의(Ultraismo), 뿌에르또 리꼬에서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ens Torres)의 빤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까에서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 Jime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꼴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o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 Nuevos)그룹, 꾸바에서 마리아노 브불(Mariano Brull)의 순수시, 뻬루에서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에서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비센떼 우이도브로는 1931년 『알따소르』(Altazor)를 발표한다. 그의 창조주의는 형식의 자유로운 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 면에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7)   뻬루의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는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에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을 발표하고 뒤이어 1922년 『뜨릴세』(Trilce)를 발표했다. 『뜨릴세』는 표현법, 그림, 심상,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조각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 소원, 음식을 권하는 말, 물,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8)   빠블로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 1924), 『땅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 『총 가요집』(Canto general), 유고집인 『내가 살았음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가 있다. 『땅에서의 거주』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 이성을 배제하고 소위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서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심상,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은 이해될 만하다.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이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ia negra)라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꾸바, 뿌에르또 리꼬, 도미니까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e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꾸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as Guille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1937), 『송고로 꼬송고와 다른 시들』(Songoro cosongo y otros poemas, 1942), 『전체의 소리』(El son entero, 1947),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대중의 몸짓으로 날으는 비enf기』(La paloma de vuelo popular, 1958)가 있다.    3) 후기전위주의(El posvanguardismo)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시는 전위주의 추구와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구어체와 일상적인 언어를 선호하지만 단지 사실묘사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서사적 담론의 형태로 현실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증언한다. 중남미 후기전위주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시의 구조가 열려져 있다. 한 편의 시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독자들이 자기나름대로 시를 해석할 수 있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열려진 시를 ‘움직이는 시’라고 했다. 둘째, 시어가 이미지와 은유법의 사용이 아니라 다양한 글자의 혼합인 ‘꼴라쥬’ 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셋째, 주제의 선택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후기전위주의자의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는 오늘날 중남미의 시와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뿌리』(Raiz del hombre, 1937), 『단어속에 자유』(Libertad bajo palabra, 1949), 산문으로는 『고독속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 『활과 칠현금』(El arco y la lira)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있다.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는 칠레에서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현실을 증언하는 시각과 초현실주의의 시각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태동되기 시작해 신중한 산문시가 되거나 놀람과 유머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와 반시』(Poemas y antipoemas, 1954), 『러시아의 노래들』(Canciones rusas, 1967)이 있다.  문학아카데미에서  
12    [공유] 들뢰즈 천 개의 고원 _리좀, 매끄러운 공간 댓글:  조회:760  추천:0  2018-10-19
 flower/ing | 혜령  http://iamflowering.blog.me/220300492890 / 잡초는 인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 우리가 식물, 짐승, 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 중에서 잡초가 가장 만족스런 삶을 영위해 간다. 그렇다, 잡초는 백합도 전함도 산상수훈도 낳지 않는다. (...) 결국 잡초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은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 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 백합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먹을거리이고,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무성하게 자란다. (...) 이것이 교훈이다." _헨리 밀러, Hamlet, New York : Carrefour, 1939, 105-106쪽 / 비트족, 언더그라운드, 지하의 것들, 밴드와 갱들, 바깥과 직접 연결접속되어 있는 측면의 잇다나 돌출들. 미국이 아무리 나무를 추구하려 해도 미국 책과 유럽 책은 다르다. "풀잎." (...) 나무 형태의 추구와 구세계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곳은 동부이다. 하지만 서부는 리좀적이다. 거기에는 선조 없는 인디언들, 끊임없이 달아나는 한계, 이동하고 교차되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다. 서부에는 미국식 "지도"가 있는데, 거기서는 나무조차 리좀을 형성한다. 미국은 방위를 뒤집었다. 마치 지구가 바로 미국에서 둥글어졌다는 듯이. (...) 미국의 서부는 동부의 가장자리이다. 미국의 여가수 패티 스미스는 미국인 치과의사의 바이블을 노래한다. 뿌리를 찾지 마세요, 수로를 따라가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_자본주의와 분열증2, 43-44쪽 / 프랑스 왕들은 백합을 선호했다. 백합은 비탈에 매달려 있을 만큼 깊은 뿌리를 가진 식물이기 때문이다.  / 어떤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비정확한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히 그것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근사치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비정확함은 결코 하나의 근사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일어나는 일이 지나가는 정확한 통로이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 낼 방법이 필요하다. 솜씨 좋은 인쇄술도, 합성어나 신조어 같은 기민한 어휘 구사도, 대담한 문장 성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사실 이것들은 대개 이미지-책을 생산하려는 속임수, 다른 차원 속에 담겨 유지되고 있는 통일성을 산종하거나 해체하기 위해 사용되는 속임수일 뿐이다. 테크노나르시즘. 창조적 인쇄술, 어휘, 구문이 제 값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숨어 있는 통일성의 표현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다양체의 한 차원이 되는 때뿐이다. 이런 식으로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을 알지 못했다. /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장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는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목론이 빠져있다. / 안드르제예브스키의 책 은 마침표없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 _p.53-54 n에서, n-1을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꺽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고다르). 짧은 관념을 가져라!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독일 낭만주의 운동)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문학은, 그리고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p.920 이미 오래 전에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도시 한가운데서도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고.  [출처] [공유] 들뢰즈 천 개의 고원 _리좀, 매끄러운 공간|작성자 옥토끼
11    서론 : 리좀 '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 정리해보았어요. /이동현 댓글:  조회:622  추천:0  2018-10-19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은 와 의 후속작에 해당한다. 이 책은 총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장’이 아니라 날짜가 붙어 있는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론을 제외한 나머지 고원은 순서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 번째 고원, ‘리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뿌리, 수염뿌리, 리좀 - 책의 문제 - 와 - 나무와 리좀 - 지리적 방향들, 동양, 서양, 미국 - 나무의 폐해 - 고원이란 무엇인가?”     * 신승철 샘의 멘션   - 천 개의 고원은 가타리의 저작 중 가장 읽기 쉬운 책입니다. (여기저기서 비명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 들뢰즈: '차이의 철학'을 역설하던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면서 '욕망과 접속'하게 되지요. "욕망하는 기계"   - 푸코: 푸코는 가타리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도, 또 배려해주는 관계였다고. 특히 권력의 미시적인 움직임에 집중.   - 리좀은 풀뿌리에서 나오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녹색당의 어휘) '생태적 지혜', 나무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진리, 분리된 진리는 아카데미의 방법론. (모든 의미화된 것에 의문을 가지세요!)   - 'n-1'은 유일 대신 다양성을 만드는 방법이다. 'n+1'은 초월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음.   - '고른판'은 모두가 다른 소리를 하지만 그러면서 결정을 내리는, 차이 속에서 공감을 하여 자발적인 의사수렴이 가능한 형태의 의사소통.   - 합일의 두 가지 층위 : 공통성과 보편성. 공통성은 우리 관계 속에서 찾아낸 합일점, 반면 보편성은 모든 상황에 적용가능한 진리 같은 합일점. 리좀의 사유로 얻어낸 합일점이 공통성에 기반한다면, 나무-아카데미 형태의 합일점은 보편성을 주장(또는 강제)한다.     * 참가자들의 멘션, 리좀 등에 대해   - 리좀은 구근, 덩이줄기, 땅밑줄기.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어요. 고구마가 바로 리좀이에요! // 담쟁이 넝쿨도 리좀.   - 기업 조직도는 전통적으로 수직적인 계층구조로 형상화되었지만, 구글 등 혁신적인 기업의 조직도는 네트워크 조직도의 형태, 방사형으로 뻗어나갑니다. 나무형태의 조직도와 리좀 조직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 신쌤 코멘트, 가타리 曰, 생태계가 네트워크.   - IT쪽 용어로 텍소노미와 폭소노미 개념을 비교해보면 나무와 리좀 같습니다. 데이터가 개발자에 의해 카테고리화된 분류방식이 텍소노미, 수평적으로 검색어가 중복되는 분류방식이 폭소노미(클라우드 태그 같은 형태로),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데이터의 양이 많아지면서 폭소노미 방식이 효율적임.   -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지를 땅으로 전달하는 역할,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땅으로 내려와 전달하듯이. 그러나 리좀은 수직적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도, 법, 영으로 거듭나는 것, "네가 나고, 나는 너다."   - 또 IT쪽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체의 원리'는 '객체지향언어' 개념과 같음. (명쾌한 프로그래머의 설명을 들으며 한쪽에서 가타리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 새누리당이 리좀 형태로 움직이고 있는가?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의 점조직은 뿌리줄기 스타일 정도? 의사결정의 중추에는 여왕님-나무와 이권집단이 결탁해 있다고 본다.       --- 아래는 읽는 데 집중이 하도 안 돼서 본문을 필사하며 메모한 흔적입니다. (제가 임의로 첨부한 메모는 #표시로 파란색 표시해두었어요.)   1. 서론 : 리좀, 본문 발췌독   (전략) 더 이상 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들어갔고 다양화되었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f: agencement, e: assemblage)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들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f: multiplicité)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la multiple)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實辭 #명사나 용언의 어간처럼 실질적인 뜻을 나타내는 형태소#)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f: signification)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corps sans organes: CsO)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 없는 몸체는 끊임 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환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의 기관 없는 몸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다. 고려되고 있는 선(線)들의 본성에 따라, 선들의 농도나 고유밀도에 따라, 선들을 선별해내는 “고른 판(plan de consistance)”에 선들이 수렴할 가능성에 따라 여러 기관 없는 몸체들이 있다.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이다. 글을 양화하라. #양화란 量化를 의미하나?#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차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표든 기의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접속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를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원용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의 유일한 문제는 문학 기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다른 기계와 이어질 수 있고 또 이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 기계(#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von Kleist를 의미하는 듯, 괴테와 카프카를 연결하는 작가라는 평, 작품 찾아볼 것#),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주의 기계 ...... (그리고 설사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분명 문학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닌가?) #이 괄호 속의 문장은 무슨 소리인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 적도 없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단위들, 수렴의 CsO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signifier)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나온 ‘글을 양화하라.’는 지시문과 같은 맥락의 비유인 듯. 여기서 ‘미래의 나라들’이란 표현은 아직 그와 같은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 책의 세 가지 유형   (p.14.)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중략)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중략) (p.16.)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겉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중략)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택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쪼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 (중략) (pp.17~18.)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알듯말듯하지만 마음에 꽂히는 말이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 뭐가 좋고 뭐가 나쁘지?#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다. #갑자기 개밀이 왕바랭이가 됐다. 둘 다 외떡잎식물이며 벼과에 속하는 잡초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 하다. #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미궁에 빠져든다. 원예기술과 생물학과 정신분석과 언어학이 뒤섞인다. 리좀의 특성을 알려준대도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이 밀려온다.#     # 리좀의 특성 원리 1~6 (그러나 굳이 숫자로 분류해 설명한 이 원리들은 분절되지 않는 내용인 것 같다.)   (pp.19~20. :리좀의 특성)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계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고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초헤계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定言 #단정하여 말하기)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자으이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화행론: 1960년대 영국 언어학자들이 창시한 언어학 이론. 언어란 무엇인가보다 언어는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언어학의 한 유파. 언어의 의미를 ‘언어 행위 실천’에서 찾으려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실 언어 행위의 의미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명령어/질서어로 본다. 기존의 언어학과 언어철학이 가장 급진적으로 나아간 형태이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소쉬르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보편적이고 고정적인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바인라이히,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군대가 지지하는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다.”라고 하는 오병헌씨의 인용문이 생각났다.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됨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pp.20~21. :리좀의 특성)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 다양은 사실상 실사로서, 다양체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주체나 객체, 자연적 실재나 정신적 실재, 이미지와 세계로서의 와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게 된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나무 모양을 한 가짜 다양체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 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양체의 본성이 변할 때에만 증가할 수 있다(따라서 조합의 법칙들은 다양체와 함께 증가한다). (중략, pp.22~23.)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고른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비록 이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결접속들의 수에 따라 판의 차원 수가 커지기는 할 테지만. 디양체들은 , 즉 추상적인 선, 도주선(ligne de fuiete)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거해 정의되며, 다양체들은 이 선에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연결접속하면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고른판(격자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그리고 나서 도주선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얽히고 섥힌 나무의 가는 뿌리들을 상상하다가 갑자기 고른 판 위에 선이 뻗어가는 모양을 상상하려니 과부하로 죽을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한다.#   (p.24. :리좀의 특성)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 이것들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개미떼를 죽여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놈들이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복구될 수 있는 동물 리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나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과 이라는 조악한 형식으로도 말이다. 우리는 끊어도 보고 도주선도 그려 본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 선 위에서 전체를 다시 지층화하는 조직들, 기표에 권력을 다시 부여하는 대형들, 주제를 다시 구성하는 귀속 작용들, 즉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키까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에 직면할 집단들과 개인들은, 단지 결정화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 개밀 역시도 리좀이다. 과 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선별의 소산일 뿐이며, 이 선별은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중략) # 그리고 탈영토화 운동과 재영토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서양란과 말벌이 인용되고, 비비와 고양이의 유전정보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고, 악어와 카멜레온이 주변을 복제하지 않으며, 핑크팬더는 분홍 위에 분홍으로 자기 색깔로 세상을 그리는데 이것이 핑크 팬더의 세계-되기라는 미친 신들린 것 같은 설명이 나오고, 나는 눈물이 났다. 핑크팬더라니 핑크팬더라니 도대체 어쩌라고!#      (p.29~30. :리좀의 특성)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제도)과 전사의 원리 :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주축뿌리이건 수염뿌리이건)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예컨대 촘스키의 “나무”는 기저 시퀀스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항 논리에 따라 그것의 발생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정신분성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結晶)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도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 나무와 반대되는 리좀, 나무가 뿌리 중심에서 뻗어나가 위계적 질서인 반면, 리좀은...? #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 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 리좀이 지형이 아니라 지도라는 설명은 납득할 수 있다. 어렴풋이 맥락이 좀 잡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제기가 나와버린다. #     (pp.31~33.)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도와 사본을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면서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사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뿌리를 교차시키고 때로는 뿌리와 뒤섞인다는 것은 리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하나의 지도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사본들인 잉여 현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하지만 그 역 또한 참이며,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놓아야 한다. (중략) # 그리고 사본의 위험함을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예로 드는데, 프로이트의 꼬마 한스와 멜라니 클라인의 꼬마 리처드 연구에 대한 살벌한 비판이 이어진 뒤 단호하게 경고한다. #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 (중략)     (pp.35~37.)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 부당하게도 “수상돌기(化石樹 #화석수라니, 수상돌기의 다른 말인가, 아님 어떤 은유일까?#)”라 불리는 것은 뉴런들을 연속적인 조직 내에서 서로 연결접속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중략)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고 또 다시 읽는다고 해도 글을 쓸 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 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 짧은 기억은 망각을 과정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짧은 기억은 순간과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또는 문명)은 복사하고 번역한다. 하지만 긴 기억이 번역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거리를 두고, 뜻하지 않게, “비시대적으로” 그러나 결코 동시적이지는 않게 계속해서 작용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뿌리-가지들의 집합을 고려한다면, 나무의 몸통은 밑에서 위까지 걸쳐있는 부분 집합들 중 하나에 대해 대립 절편의 역할을 한다. (중략) # 나무 모양과 뿌리 모양을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뒤어어 나오는 세부적인 설명은, 아..... 몰라. 서양의 사고체계가 나무 같지만 동양은 아니라는 서술은, 정말로 모르겠다. 내가 아는 동양이 이미 서구화되어버린 또는 서구지향적인 동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오리엔탈리즘 또는 서양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동양문명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까? #     (pp.46~48.)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접속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로도 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셋, 넷, 다섯 등이 되는 도 아니다. 리좀은 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구조는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 관계들과 이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성층 작용의 선들이 여러 차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도 있다. 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이 선을 따라가며 본성이 변하면서 변신한다. 우리는 그런 선들이나 윤곽선들을 나무 유형의 계통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 유형의 계통들은 연결된다 해도 단지 점들과 위치들 사이에서만 자리가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는 달리 리좀은 복제 대상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이미지-나무로서의 외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고, 나무-구조로서의 내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다. 리좀은 일종의 반(anti-)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문자 표기법, 데셍, 사진과는 달리, 또한 사본과도 달리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지도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본이지, 역으로 지도를 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다.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설사 여러 중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와는 달리,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리좀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성(性 #성별?#)과의 관계이며, 또한 동물, 식물, 세계, 정치, 책, 자연물 및 인공물과의 관계, 즉 나무 형태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 리좀은 나무 형태와 다르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너덜거리는 모양일 것 같다. 뒤이어서 고원에 대한 설명. #     (pp.48~50.)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 (중략) “강렬함이 연속되는 일종의 고원이 오르가슴을 대체한다.” 또 그것은 전쟁이나 정점을 대체한다. 표현과 행위를 그것이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인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적 정신의 유감스런 특질이다. 예를 들어 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정점과 종결지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뇌처럼 미세한 균열들을 가로질러 서로 소통하는 책,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어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일종의 리좀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고원들로 구성했다. 우리는 이 책이 순환적 형식을 갖도록 했지만 그것은 웃자고 그랬던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는 각자 어떤 고원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자문하고, 여기 다섯 줄, 저기 열 줄을 쓰곤 했다. 우리는 환각을 경험했으며, 작은 개미떼 대열 같은 선들이 한 고원을 단념하고는 다른 고원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수렴원들을 만들었다. 각각의 고원은 어느 지점부터든 읽을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고원과도 관계 맺을 수 있다.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낼 방법이 필요하다. (중략) 우리는 단지 몇 단어를 골랐고, 그 단어들이 나름대로 고원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리좀학=분열분석=지층분석=화행론=미시정치. 이 단어들은 개념들이다. 하지만 개념들은 선들, 즉 다양체들의 이런저런 차원(지층들, 분자적 사슬들, 도주선들이나 단절선들, 수렴원들 등)에 부착되어 있는 수 체계들이다. 우리는 결코 과학의 지위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과학성도 알지 못하며 다만 배치물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들이 있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기계적인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의미생성도 없고 주체화도 없다. (중략)     (p.51.)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정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물론이 빠져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선 훌륭한 작품들의 예가 거론된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예시이기 때문에 넘어간다.#     (p.53.) 어쨌든 과학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과학은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다. 수학을 보라. 수학은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굉장한 은어이며 유목민적인 것이다. 이론적 영역에서조차, 아니 무엇보다도 이론적 영역에서, 아무리 암시적으로 화행론적인 발판일지라도 개념들의 복사나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개념들의 절단과 진보보다는 낫다. 기표작용을 하는 절단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단절을 행하라. 유목민들은 국가 장치에 대항해서 전쟁 기계를 발명했다. 역사가 유목민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pp.54~55.)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방법적, 교육학적, 통과제의적, 상징적인......)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운동에 대한 언급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시작과 끝을 상정하지 않고 중간을 통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어떤 의미일까?# 나아가 미국 문학은, 그리고 이미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sens)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영미문학은 화행론을 행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고원지대, 기차에서 만났던 시안 사람 왕선생이 자기 고향을 자랑하며 첫 마디로 시안은 ‘황토고원’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란저우도 간쑤성의 고원지대에 있으며, 쿤밍 역시 고원의 춘성이다. 중국영토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지는 망설여지지만 티벳고원도 빼놓을 수 없지. 독특한 문명이 꽃피었던 곳, 또는 한 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도시들. 들뢰즈와 가타리가 중국의 지형을 생각했을 것 같진 않지만, 나에게는 이런 고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개마고원과 백두고원이 있고, 남한에는 무주의 진안고원이 있지. 언젠가 마이산에 가보고 싶다.     # 기계의 비유, 하필이면 왜 기계일까? 뭔가 프랑스적인 감성이 있는 것 같다.   # forvo.com 프랑스어 발음이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보다 발견했다. 외국어가 녹음된 음원을 들을 수 있는 홈페이지. 각 지역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올린다. 일테면 프랑스어의 경우, 프랑스 북부, 남부, 벨기에, 캐나다 등지의 사용자의 발음을 비교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전문적인 성우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자발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출처] '1. 서론 : 리좀 '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 정리해보았어요. /이동현|작성자 옥토끼  
10    리좀 / 들뢰즈 댓글:  조회:785  추천:0  2018-10-19
리좀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 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 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 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 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   (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 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 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 (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 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 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 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 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 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 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출처] 리좀 (1) - 텍스트와 층화 /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작성자 옥토끼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 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 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 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 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 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 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              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 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출처] 리좀 (2) - 기계, 배치, 디아그람|작성자 옥토끼   제5강 탈기관체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 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 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 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 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 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 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 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출처] 리좀 (3) - 탈기관체|작성자 옥토끼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 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 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 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 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 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 (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 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것이 중요하다. [출처] 리좀 (4) - 글쓰기의 양화|작성자 옥토끼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 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 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 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 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 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 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 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 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출처] 리좀 (5) - 혼효면, 혼화면, 기계 / 책의 두 가지 유형|작성자 옥토끼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 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 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 (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 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끝-   [출처] 리좀 (6) -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작성자 옥토끼    
9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리좀 해설 댓글:  조회:628  추천:0  2018-10-19
천개의 고원(새물결), 리좀, 4,5 문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구조화(형식화)된 틀 속에서의 지속적인 노출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조화된 관점으로 바라보다가 개인들은 다양한 개인들을 만나고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다양한 관점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토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면, 그것은 배가 고파서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배가 아파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면, 음식을 찾아 먹는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배가 고픈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남과 동시에 배의 허기짐을 느끼게 되고, 식사를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상황등의 여러 이유들 때문이다.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우리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꼬르륵 소리를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파악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P.16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제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 버로스의 잘라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예로 들은 것처럼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배고픔을 나타낸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조건들이 갖추어 져야만 한다. 만약 이 조건들을 모른다면 꼬르륵 소리는 다양한 이유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배가 고파서인지 배가 아파서인지 정확히 파악해낼 수 없다. 친구가 그 소리의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한.)      이러한 전제들을 토대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 것, 이것을 리좀이라고 부른다. 리좀은 일반적으론 다양체의 형태로 존재를 하지만, 어떠한 조건들과 연결되었을 때, 하나의 의미를 나타낸다.     -P.17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리좀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를 말하기 전에 앞의 글,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한 단어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꼬르륵 소리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게 되지만, 전제가 존재해서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해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분명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들뢰즈는 리좀을 쥐 굴, 감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의 이유를 살펴보자.      쥐굴의 경우, 쥐가 굴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다면 쥐 굴은 쥐의 식당으로 의미하며, 쥐가 굴에 들어가 잠을 잔다면 쥐 굴은 침실을 의미하고, 쥐가 천적을 피해 숨는다면 은신처를 의미한다. 즉 굴 하나가 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활용도를 지닌 쥐 굴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리좀과 같은 방식이 되는 것이다.        감자의 경우, 감자는 다양한 뿌리들 중간이나 끝에 감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뿌리를 통해서든 말이다. 어떤 뿌리로든 간에 감자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감자는 다양한 뿌리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하나의 감자는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즉 감자는 다양한 뿌리에서 자라날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의 뿌리에서 감자는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리좀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자료 . 2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새물결)   1. 서 론 리좀   우리는 둘이서『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이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없는 몸체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화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 접속 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특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 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어린 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징들. 원리 1과 원리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多質性)의 원리: 리즘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리즘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산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나 유사성은 없다. 다만 기표작용적인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이 있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이 있을 뿐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에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수염뿌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위계적이지 않은 척 제시되고 언표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계적인 해답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 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한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출처]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리좀 해설|작성자 옥토끼  
8    샤를 보들레르,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 발제: 김민지[스크랩] 댓글:  조회:1719  추천:0  2018-10-19
『현대시 창작시론』 - 1. 샤를 보들레르,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발제: 김민지   1) 보들레르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상징주의의 문을 연 현대시인. -상징주의, 현대 도시시의 시초. 현대적 예술의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한 예술가. -『악의 꽃』에는 생의 모순이 잘 드러나 있고, 시적 주체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징후를 관찰하고 꿈꾸고 좌절하는 ‘현대성의 감내자’이다. 현대성의 필연적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유토피아 앞에서의 좌절 등 자신의 내면에 투영된 생의 모든 국면들에게로 진입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상징: 인간은 물질세계의 상징을 통과해야만 정신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상형문자이며, 시인은 암호 해독자 또는 번역자가 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세계(상징적 외관)와 관념세계(정신적 실재)를 하나의 기호로 결합시키는 자이다. -상상력, 예술가의 첫 번째 자질. 모든 창조를 분해하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따라 다시 수집하고 배열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의 시에 등장하는 파리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닌, ‘의도적으로 구성한 상상적 도시’이다. 현실 모사가 아닌 현실 변형.   2) 추의 미학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시학. -단순한 ‘더러움의 미’가 아닌, ‘기괴함과 더러움의 공존하는 불협화의 미’. -보들레르는 ‘미’에도 악마가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악마성’과 ‘숭고함’, 선과 악, 하늘과 지옥, 순간과 영원. -『악의 꽃』 역시 ‘악’과 ‘꽃’의 대비처럼, 현대성의 불협화음을 담아낸 텍스트.   3) 현대성(Modernity)   -도시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징후. ‘더러운 수도’와 ‘창녀’, ‘쾌락’ 등과 같은 ‘도시의 매력’ -보들레르가 평론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처음 사용 -『1846년의 살롱』에서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관건이 되는 바는 유행으로부터 당대적인 것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을 추출해내고, 변해가는 것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대성은 예술의 절반을 구성하는 일시적이며 스쳐가는 우연적인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 화가에게도 각자의 현대성이 있었다.”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의복과 머리 모양, 동작과 시선 그리고 미소마저도(각 시대는 나름의 자세와 시선과 미소를 갖고 있다) 생명력이라는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시적이며 흘러가는 요소의 변화가 매우 빈번하다고 해서, 독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순 없다.” -한편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두고, “현대성이란 식기 세트 혹은 광학 기구에 붙어 있는 상표와 같다”며 “자기 작품에 상표를 찍는 것이 보들레르의 분명한 의도였다”고 언급한다. 이 상표는 영속성을 가지면서도 신속히 낡은 것이 되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예술의 이중성과 ‘미(美)’의 개념과 연결.. -‘미’는 모든 발생 가능한 현상들처럼, 영원하며 순간적이고, 절대적이며 독특한 이중성을 지닌다. -보들레르는 ‘미’를 범속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으로 ‘기괴한 것’, ‘경악스러운 것’의 ‘미’로써 도발한다. 이러한 시도로 그는 당시의 고답파와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추구하는 ‘미’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조화롭고 평화로운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미의식을 보여주었다. (찰나의 아름다움 + 절대의 미 → 덧없음의 쾌락, 우울의 미학)  
7    [스크랩]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심상운 댓글:  조회:665  추천:0  2018-10-19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6    보들레르 시학 흐름 자료 두편[ 스크랩] 댓글:  조회:808  추천:0  2018-10-19
보들레르는 라바테르로부터, 특히 스웨덴보르그로부터 이끌어낸 ꡐ유추ꡑ라는 추상적 개념에다가 ꡐ상징ꡑ과 ꡐ상응ꡑ이라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적인 이론을 결부시킨다. 그는 또한 이라는 글에서 스웨덴보르그와 라바테르를 직접 언급하면서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다 뚜렷이 강조한다.      더구나 훨씬 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스웨덴보르그는 일찌기 하늘이 하나의 거대한 인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있다. 그리고 또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형태, 운동, 수, 색깔, 향기 등 모든 것이 의미 깊고 교호적이고, 상호 봉사적이고, 상응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바 있다. 사람의 얼굴에 우주적인 진실이 나타나고 있음을 국한시켜 살폈던 라바테르도 우리에게 윤곽, 형태, 차원의 정신적 의미를 밝혀준 바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긴밀히 보들레르의 상응 이념에 결부되는 사람으로는 푸리에와 죠셉 드 메스트르를 들 수 있다. ꡒ자연은 하나의 언어다ꡓ라고 말한 푸리에와, 에서 ꡒ감각적 법칙이면서 정신적 법칙을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적 법칙이란 정신적 법칙의 가시적 표현에 불과하다ꡓ고 말한 죠셉 드 메스트르의 주장은 보들레르로 하여금 시적 또는 미학적 ꡐ초자연주의ꡑ에 대한 확신을 보다 강하게 갖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보들레르는 이러한 초자연주의에다 카발라비법의 계시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념을 접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ꡐ무덤 저너머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환희에 찬 통찰력ꡑ을 보다 확고하게 믿게 만든 것은 의 저자인 에드가 포우이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 쓴 테오펄 고티에에 관한 유명한 글에서 자신의 시적 신념을 표명하기 위해 에드가 포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그대로 빌려 온다.       미를 향한 바로 이 경탄스럽고 영원불멸한 본능으로 해서 우리는 이 ꡐ대지ꡑ와 거기에 펼쳐지는 장엄한 광경을 마치 하나의 전체적인 포착, 혹은 ꡐ하늘ꡑ의 상응처럼 바라보게 된다. 저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 삶이 환기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갈망은 우리의 불멸성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활기찬 증거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무덤 저너머에 있는 찬란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시에 의해서, 그리고 시를 통해서이고, 또 동시에 음악에 의해서,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이들 신비사상가들이나 시인들로부터 ꡐ철학적으로ꡑ 영향을 받아 상징의 시학을 수립하게 된 것으로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보들레르는 그의 시를 통해서 ‘상징ꡑ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에서 ꡐ상징ꡑ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는 시는 , , 등 세 편에 불과하다. 그는 차라리 ꡐ상징ꡑ이라는 낱말보다는 ꡐ알레고리ꡑ나 ꡐ상응ꡑ이라는 낱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다. 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상징주의라는 말을 적용하고자 한다면, 알프레드 드 비니가 말하는 ꡐ상징적 전이ꡑ와 같은 의미 밖에는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보들레르에 있어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넘쳐 흐르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직조물, 알레고리의 편물, 상응의 그물을 재료로 하여 ꡐ깊고 어두운 통일성ꡑ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가장 빼어난 상징시학의 이론이며 동시에 선언이기도 한 저 유명한 소네트 을 읽어보면, 보들레르가 추구하고자 한 ꡐ상징의 숲ꡑ의 두 개의 기본적인 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수평적 상응과 수직적 상응이라는 기하학적 은유의 축이다. 가로좌표로서의 수평적 상응은 비교 및 은유와 같은 수사법을 통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요소들을 서로 접근시키고 화해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 의 중심부를 이루는 6행의 시귀는 전형적인 공감각 세계의 놀라운 변주를 보여주면서 지극히 조화로운 상호적 유추관계를 이룬다.     어둠처럼 빛처럼 광막한    깊고 어두운 통일성 속에서    아스라히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한다.    어린아이 살결처럼 싱그러운 향기, 오보에 소리처럼    부드러운 향기, 초원처럼 푸르른 향기가 있다.       세로좌표로서의 수직적 상응은 수평적 상응과는 달리 훨씬 더 절묘하고 본질적이다. 수직적 상응에 있어서는 감각적 현실의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서로 접근시키고 화답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요소들이 지니는 의미가 천상적인 계시나 정신적인 신성함을 지닐 수 있게끔 어떤 지고한 합일의 상태, 즉 열광의 절정 상태에까지 고양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소네트의 마지막 4행의 시귀는 이같은 ꡐ확신ꡑ과 ꡐ열광적 전이ꡑ를 역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썩고, 풍부하고, 호기로운 향기    무한한 것들의 확산을 지니면서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정신과 감각의 열광을 노래하는 향기도 있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상응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그의 주목할 만한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외계의 자연을 ꡐ아날로지의 거대한 저장고, 일종의 상상력의 자극제ꡑ로 간주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ꡒ가시적 세계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들에게 제각기 알맞는 자리와 가치를 부여하기를 기다리는 이미지와 기호들의 저장고일 뿐이며, 그것은 상상력이 먹어서 소화하여 다른 것으로 변형시켜주지 않으면 안될 일종의 목초지인 것이다.ꡓ    그러기 때문에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의 역할이다. 그는 1856년 1월 21일자 알퐁스 뚜스넬에게 보낸 편지에서 ꡒ상상력이 기능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것ꡓ으로, ꡒ이 기능의 여왕으로서의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 즉 참다운 시인만이 가시적인 것과 물질적인 대상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번역하고 해독할 수 있다ꡓ고 쓰고 있다. 우주만상이 상형문자이지만 그 뜻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시인)에게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독력이란 지식의 영역이 아니고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한 ꡐ거의 초자연적인 어떤 영혼의 상태ꡑ에 도달한 시인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에서 시인은 ꡒ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ꡓ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ꡐ어둡고 깊은 통일성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스웨덴보르그, 호프만, 라바테르, 네르발, 발자크 등에 의해 개발된 신비주의의 전통을 참조하여, 그렇지만 스스로의 상상력을 희생시킴이 없이 의 소네트를 씀으로써 상징주의의 시조가 된다. 이 유명한 상응의 시학은 보들레르의 자연관과 우주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1890년대의 상징파 시인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론의 복음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세기의 후계자들의 시창작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924년 라는 제목으로 행한 한 강연에시 발레리는 ꡒ베를렌느나 말라르메 그리고 랭보가 결정적인 시기에 을 읽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렸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ꡓ 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는 보들레르가 상징주의 시의 제 2세대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세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의 깊이를 말해 준다.    마르셀 레이몽이 에서 명쾌하게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발레리 역시 보들레르를 근원으로 해서 두 개의 줄기로 흘러 내려가는 계보를 그려 보여준다. ꡒ베를렌느와 랭보가 감성과 감각의 질서 속에서 보들레르를 이어 받았다면, 말라르메는 완벽성과 시적 순수성의 분야에서 보들레르를 신장시켰다.ꡓ 이 두 가닥의 계열은 다같이 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편에서는 ꡐ여행ꡑ의 시인인 보들레르가 그 입구에서 멈추어 선 ꡐ심연의 밑바닥ꡑ에까지 내려가보려는 모험을 감행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와 세계의 신비를 언어로 번역하고 암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베를렌느, 랭보, 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 시인 등의 ꡐ연금술사들ꡑ을 가리키며, 후자는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파 시인들과 발레리 등의 ꡐ예술가들ꡑ을 가리킨다. http://cafe.daum.net/beautiful926/Cu9L/504?q= 상징주의/ 보들레르 시학의 흐름      1. [상징주의] 상징주의 시학의 성립...    서구 상징주의 시학의 성립과 전개    ─ 보들레르 시학의 흐름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시의 주요 흐름을 특징짓는 상징주의가 무엇인가를 엄밀한 말로써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징주의는 흔히 그것을 보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알카의 용에 비유되는 매우 종잡기 어려운 사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폴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정의가 상징주의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데 비교적 가까이 다가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ꡒ상징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미적 태도는 음악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다시 찾아가겠다는 여러 집단의 시인들이(사실 그들 서로간의 의견대립 또한 대단하지만) 공통으로 지닌 의도라고 매우 간단하게 요약된다.ꡓ 그러나 이같은 발레리의 간단한 요약에도 불구하고, 문예사조로서의 상징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의 성립 시기와 전개과정, 그리고 그 쇠퇴기를 명확히 구분하여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1936년 벨기에의 국영방송은 ꡐ상징주의 50주년ꡑ을 기념하는 소책자 《상징주의 1886~1936》의 간행을 기획하여, 당시 상징주의에 가장 정통한 시인으로 알려진 발레리에게 기고를 의뢰한 바 있다. 1936년이라는 해는 쟝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지에 이른바 을 발표한지 50년의 세월이 흘러간 해이다. 상징주의 선언문의 발표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벨기에 방송 측의 시사적 기획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나, 이른바 모레이스 등이 벌인"상징파" 시인들의 운동을 상징주의 성립의 기점으로 삼는 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상징주의'를 "상징파"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쟝 모레아스를 비롯하여 르네 길, 스튜아트 매릴, 프랑시스 비엘레 그리팽, 귀스타브 칸 등 1880년 경에 활동한 군소 시인들에게 상당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느, 말라르메를 단순한 선구자로서만 취급해 버린다면 상징주의 이해에 혼선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 1885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운동을 하나의 문학 유파로 규정하여 그것을 "상징파"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상징주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전개된 시적 이상주의의 방대한 흐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정토로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반동, 합리적 이성과 과학정신을 표방하는 실증주의와 결정론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반동, 딱딱하고 고정되고 대리석같이 싸늘한 형식미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파로니스파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상징주의는 보들레르라는 한 혁신적인 ꡐ현대성ꡑ의 시인에 의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따라서 상징주의의 기본적 성격과 이론적 핵심을 어느 정도 체계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징주의 시의 원점에 놓여 있는 보들레르 시학의 골자를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이다.        "삼라만상이 상형문자로 되어 있다" 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보들레르의 독특한 우주관은 1840년부터 그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나 신비주의 작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맨 먼저 언급해야 할 사람은 에른스트 호프만이다. 보들레르는 이 독일 낭만주의 작가에게서 소리와 향기가 서로 화답하는 공감각 체계를 발견한다. 그는 미술평론 에서 호프만의 작품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상응의 이념을 간접적으로 피력한다.        내가 색깔과 소리와 향기들 사이의 어떤 유추관계나 내적 결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잠들기 전에 찾아오는 가벼운 혼미와 꿈 속에서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을 때, 즉 음악을 듣고 있을 때도 가능하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 모든 것이 어떤 한 같은 광원(光源)에서 태어났던 것 같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어떤 한 협주곡 속에서 통합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5    발레리 시학 자료 두편 [스크랩] 댓글:  조회:863  추천:0  2018-10-19
자료 1   발레리의 시학      발레리의 문학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에도 봉사치 않는 자유로운 창조적 지성의 훈련이고, 따라서 시적 영감·감상·정열·안일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테마에 규약·정형·통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싸늘한 순수지성의 미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관능적인 감각에서 오는 풍부한 이미지와 절묘한 음악적 운율의 구사로 하여 그의 미학을 넘은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적 시론을 담고 있는 에는 먼저 말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말은 "복합적 실체로서, 실제로는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기능상 '독립'적인 고유성들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 연구가 음성학, 의미론, 통사론,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운율학, 어원학 등에 의하여 차례차레 검토되어야 하듯이, 시인도 소리와 의미에 대해 차례로 사색하여야 하며 인습적인 규칙들 외에도 화성과 악절 그리고 논리성, 문법, 시의 주제, 문채 및 온갖 부류의 장식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 문학예술의 불확실하고 치밀한 '조작'들이 시작되는데, 발레리는 그것을 다시 '산문'과 '운문'이라는 두 양식으로 나누고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다.   산문을 보행에 비유하고 시를 무용에 비유했다 ...      위의 비유는 단순한 외면상의 유사성 이상의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빌리면 시와 산문은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기능의 순간적인 특정규칙 혹은 관습의 차이"데 의해 구별되기 때문이다. 산문을 다루듯 시를 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의 비유를 좀 더 들어보자.      산문처럼 보행에는 언제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입니다. ... 보행의 모든 특징들이 언제나 그때그때 특이하게 구성되는 이 즉각적인 조건들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이동에는 단 두 개의 동일한 이동도 존재할 수 없고, 매번 즉각 폐기되어 성취된 행위 속에 통합되어 버리는 각각의 특수한 창조가 있을 뿐입니다.    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가 분명합니다. ... 그러나, 공리적인 운동과 아무리 다르다 해도, 무용은 보행 자체와 동일한 사지, 동일한 신체기관과 뼈대, 근육, 신경들을 사용한다는 이 극히 단순하면서 중요한 주석에 유의해 주십시오.      위의 인용에서 보행은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이고 무용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무리 "동일한 사지, 신체기관 등을 사용한다"손치더라도 그 나타난 결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선 산문이라는 언어의 실제적이거나 추상적인 사용에 있어서, 형식은 보존되지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 존속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명확성 속에 해소되어 영향을 미치고,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사라져버린다. 이와는 달리 시는 사용된 후에도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발레리는 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시는 자신의 형식 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영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도록 부추긴다, ... 산업기술에서 빌린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시적 형식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회복시킨다.      윗글은 시의 특징적인 고유성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형태와 내용 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 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는 일종의 왕복운동이, 대칭이, 가치의 균등성과 힘의 균등성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발레리에 의하면 인상과 표현 사이의 이 조화로운 교환작용은 시적 역학, 즉 언어에 의한 시적 창조의 주요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본업은 언어의 이 특이한 형식들을 행운에 의해 발견하고 직업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발레리는 이번에는 '소설독자'와 '시의 독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독자가 일종의 '정신착란'과 '경신의 발작'에 사로잡혀 "그의 본성을 분열시키고 순전히 허구적인 거짓 삶에 대한 환상을 부여함으로써"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시의 독자는 "영혼의 순종"과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함을 아래와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리듬에 의해 그의 근육조직을 자극하고, 자신이 그 총체적 활동을 촉진시키는 언어기능을 해방 혹은 폭발시키며, 그를 심층적으로 조직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나타나는 자아의 통일성과 조화, 놀라운 통일성을 환기시키거나 재창조하려는 까닭입니다.        요컨대, 시의 작용과 평범한 이야기의 작용간의 차이는 생리학적 目의 차이이다. 특히 후자가 "환각에 사로잡힌 꿈과 기능의 주체로 변모"되어버리는데 반해서 전자는 "완전한 행위에 보다 가까운 적극적 참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시 초점을 시인의 조작 자체와 구성과 제작의 문제로 옮겨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시인의 작업을 세상에서 가장 불확실하고 고된 것으로 만드는 무한한 고뇌와 결코 끝날 수 없는 논쟁들, 시련, 수수께끼, 근심거리 심지어 절망까지 존재한다. 발레리는 시작이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시의 창조가 우연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혹은 "초자연적 교섭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시인을 수동적인 역할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걸작들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이나 황홀경의 녹음기의 특성으로 환원되기엔 지나치게 다양한 특성들을 요구하는, 지성과 줄기찬 작업의 기념비들이요 의도와 분석의 산물입니다. ...      윗글에서처럼 발레리는 시인에게 특별한 자질, 즉 고유한 개인적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시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만 가치 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이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그대로의 경이들이 그 안에서 해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이들도 그에 의하면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열광과 섬광 속에서 번쩍거리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레리는 자신이 해방시키는 자연발생적인 표현력에 의해 성격지워지는 감정이 시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문학사상 가장 지성적이었던 그의 시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정제된 어휘와 고양된 정신이 방사하는 광채로 가득 차있다. 바로 그러한 그의 시정신은 아래의 글 속에 잘 요약되어있다. 이 글을 음미해보며 그의 시론의 요약을 마치기로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시인이 자기 예술의 최상을 겨냥하고 있다면, 그의 욕망은 그의 조화된 삶의 숭고한 지속, 모든 형식의 구성, 측정되며 그의 온갖 감각적, 운율적 잠재력의 반응들이 교환되는 지속으로 낯선 영혼을 안내해 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 2   폴 발레리의 시학 (1)      젊은 파르크(1917) 및 매혹(1922)과 함께 시로 돌아온 폴 발레리는, 자기 자신과 남에 비추어, 시 창조의 메카니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 "나는 언제나 시를 쓰는 나를 관찰하면서 시를 써 왔다" 한 시인의 수첩, 이러한 체험, 이러한 성찰이, 콜레드 즈 프랑스에 시의 강의와, 바리에떼와 땡 껠에서 서술된 하나의 시학을 낳았다. 그의 시들에 대한 연구에의 정상적인 길잡이는 그러니, 시의 본질과 문학 창조의 조건들에 관한 그의 생각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발레리 자신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시란 무엇인가 ?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 이어 발레리도 산문에 딸린 불순한 요소를 시에서 몰아내려고 든다 ; 그래서 시의 우주의 개념을 구해냄으로써 순수시가 나타낸 이상을 밝혀낸다.       1. 언어 속의 한 언어 시는 "특수한 한 악곡"과 합쳐진 "하나의 산문 이야기"가 되고 말 수는 없다 ; 시란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는커녕, "감각있는 존재 모두를 끌어넣는 하나의 시적 상태의 전달"인 것이다 ; 시는 죽지 않고서는 다른 표현들로 옮겨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산문에서는 내용만이 요구되는 데 반해, 시에서는 형식만이 정리하고 살아 남는다,       일정한 뜻 하나로 소비된다는 낱말들의 특성을 희생시켜 가며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음이고, 바로 리듬이고, 바로 낱말들의 물리적인 접근이고, 낱말들의 귀납 효과 또는       상호 영향인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에서는 뜻이 형식을 능가해 깨뜨려 버릴 수가       없어야 한다 ; 반대로 그것은, 형식이 독자에게 방금 발생시킨 상태나 생각, 시의 힘의       원동력인 상태나 생각의 재현이자 보존된 형식이며, 더 정확히는 필요한  유일한 표현       으로써 재현된 형식인 것이다. 한 줄의 아름다운 싯귀는 제 잿더미에서 무한정 되     살아나, 또다시 --- 마치 제 결과의 결과인양 --- 저 자신의 조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매혹의 주석)   시란 그러니 "언어 속의 하나의 언어"인 것이다.           2. 시의 우주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마치 소리들 중이 한 순수음이 넋더러 하나의 음악의 우주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듯이, 넋을 시의 우주로 끌어넣는 하나의 공명"을 일깨우는 데 있다.           1. 어떤 다른 삶을 살기 일련의 파고든 분석들을 통해 발레리는 우리를, 진짜 시의 텍스트 하나가 우리 속에서 창조하는 이러한 "우주의 감동"을 안내한다 ; "그 텍스트는 우리 더러 어떤 다른 삶을 살며 그 제 2의 삶에 따라 호흡하도록 작용하며, 하나의 상태나 세계를 가정한다. 그 속에서는 저기 있는 대상들과 존재들이, 아니 그보다도 그것들이 이미지들이 실지 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자유들과 관계들을 갖는 그런 상태나 세계를 말이다, (---)   이 모두가 하나의 홀린 본성을, 마치 어떤 마술에 걸린 듯 변덕과 현혹과 언어의 힘들에 굴복한 본성을  짐작케 해준다"  (영적인 찬가)         2. 말과 정신의 밀접한 결합 이러한 마력은 인위적인 리듬을 붙임으로써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 별난 말은 저를 지탱해 주는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이 말의 발생과 하도 밀접하게, 아니 하도 신비롭게조차 매어지게 마련이어서, 음과 뜻이 서로 갈라질 수도 없이 기억 속에서 무한정 서로 어울릴 정도인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제 이름을 대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말라르메의 작품이 이러한 시이 마력의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교묘하게 부딪히거나 녹아들어, 하나의 광채로, 하나의 충만으로, 하나의 놀라운 공명으로 싯귀들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의미들과, 울려퍼짐들과, 심지어는 표정들과도 맞먹는 그런 가치들을 시는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놀라운 성과들을 통해 입증했다.  한편으로는 각운과 두운들이, 또 한편으로는 상징과 비유와 은유들이 여기서는, 이야기의 없어도 되는 디테일이나 장식들은 이미 아니고 ; 작품들의 실질적인 특성들인 것이다 ; "내용"은 이미 형식의 원인이 아니다 ; 그 결과들의 하나인 것이다."(말라르메)    그러니 시는 낭독되는 순간에만 제 가치를 다 발휘하게 될 것이다. 즉 "작자의 창조 행위에 생명과 힘찬 현존을 주기 위해, 우리의 목소리와 지능 그리고 우리의 감성의 원동력들 모두가 합쳐지도록, 우리 자신이 그 쓰여진 것의 악기가 될 때에만 말이다", 그래서 "시작품의 연주가 바로 시작품인 것이다."   폴 발레리의 시학 (2)   (이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 ; 순수시       폴 발레리는 1920년에 어느 시집의 머리말을 쓰다가 "순수시"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 버린 적이 있다. 이 용어가 곧 빚어내게 될 말썽은, 특히 브레몽 신부의 글을 통해 빚어내게 될 말썽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시와 기도의 유사성에 언급하던 이 신부는 드디어 발레리를 두고, 지적, 또는 감성적인 요소와는 상관 없는 시에 대한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시, 1926년 ; 라시느와 발레리.1930) 순수시에 관한 논쟁이 그래서 벌어지고, 발레리는 자기가 시의 우주의 감동에다 밀접하게 결합시키던 그 개념을 합리적인 한계들로 되돌려보낼 생각을 하게 된다.   감각 없는 것이라고 내가 부른 언어의 요소들과는 그토록 판이하게 뚜렷한 이 요소들에 힘입어 하나의 작품 전체를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 ---따라서, 운문으로 씌여진 또는 그렇지 않은 하나의 작품에 힘입어,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념들과 이미지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표현수단들 사이의 상호 관계들의 완전한 조직, -- 넋의 민감한 상태 창조에 특히 부합되는 조직의 인상을 줄 수 있느냐는 것, 순수시의 문제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물리학자가 순수한 물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에서 나는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적이 아닌 요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작품 하나를 구성해낼 수 있는냐의 여부를 아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시란 언제나 이 순전히 이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고, 또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시작품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실지로, 한 이야기의 자료 속에 끼워 넣어진 순수시 조각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썩 아름다운 싯귀 하나는 시의 썩 순수한 요소의 하나인 것이다. 아름다운 싯귀를 흔히 금강석에다 비교한다는 사실이, 순수함의 이러한 특질에 대한 깨달음이 모든 사람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순수시 라는 용어의 단점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도 않는 어떤 정신적인 순수함을 생각케 한다는 데 있다. 순수시의 관념이 내게는 반대로 하나의 주로 분석적인 관념인데 말이다.  요컨대 순수시란 일반적인 사작품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어 준다, 언어와 언어가 사람들에게 내는 효과와의 갖가지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그토록 어렵고도 중요한 연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어야 하는, 관찰에서 연역된 하나의 픽션인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순수시라는 말 대신 절대적인 시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며 그 때는 이 말을, 낱말들의 관계들에서, 아니 그보다도 낱말들 서로 사이의 공명들의 관계들에서 말미암는 효과들의 탐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언어가 다스리는 이 감성의 영역 모두의 탐험을 암시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텀험은 더듬어서 행해질 수가 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조직적으로 인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역설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만 있다면, 말하자면, 산문에 딸린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말 그런 작품들을, 음악적인 영속성이 말 그대로 중단되지 않고, 의미들의 관계들 자체가 화성의 관계들을 늘 닮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생각들 서로 사이의 변모가 생각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보이고, 말의 겉모습들의 활동이 주제의 알맹이를 지니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시인이 구성해내는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 때 우리는 마치 실존하는 사물에대해 그러듯이 순수시에 대해 말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사정을 그렇지가 못하니,--- 순수시의 개념은, 가 닿지 못할 어떤 전형의 개념이고, 시인의 욕망들과 노력들과 능력들에 가해진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의 개념인 것이다,(한 시인의 수첩, 순수시)   폴 발레리의 시학 (3)   (이어서)   영감과 작업  시인 발레리가 영감에는 등을 돌렸다고들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설사 그가 "흥분(영감)은 작가의 넋의 상태는 아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흥분만에 의해" 글을 쓰는 것을 그가 못난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시인 특유의 개인적인 일종의 정신력(에너지) 이, "보다 나은 정신력 ; 말하자면 다른 모든 인간 에너지들이 꾸미거나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1. 영감받은 시인의 신화 "꿈에 보물을 보는 것이, 깨어나 자기 침대 밑에 반짝이는 보물을 되찿기에 족하지는 않듯이", "영감받은" 것만으로는 딱하게도 시인 되기에 족하지는 않은 것이다. 시인의 구실이 "시적인 상태"를 느끼는 일이 아니고, 그 상태를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창조해내는 일. 독자를 "영감받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이 생긴 발레리는, 영감받는 시인이라는 신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어떤 길이의 한편의 아름다운 시 앞에서 우리가 곧잘 깨닫는 것은, 끊임없는 밑천들과 한결같은 조화및 늘 잘된 생각들을 지녀 유달리 자신만만한 이야기 하나를, 우연한 사고도 약함이나 무능력의 흔적도, 황홀을 깨뜨려 시의 우주를 망가뜨릴 그 딱한 말썽들도 없어 호리기를 그만두지 않는 그런 이야기 하나를, 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쓰거나 진술하는 고생 말고는 다른 고생도 없이 그 자리서 곧장 꾸며낼 수 있기에는 아주 작은 찬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 다만 영감은 "짧고 우연한 표시들에 의해서"만 작용하며, 그래서 변덕스럽고 고르지가 못한 것이다 ; "이 한없이 값진 순간들, 제가 낳는 관계들과 직감들에 일종이 보편적인 품위를 주는 이 찰나들은, 허망하거나 전달되지 못할 가치들이 덜 많은 것이 아니다.--- 흥분의 고비에서는,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닌 것이다. (시에 관한 프로포)     2. 의식적으로 창조하기 "마음 설레임에서 용솟음치는" 이 표현들은 이따금씩밖엔 순수하지 않으므로, 발레리는 "늘 영감없이 얻어지는 원리"라는 것을 시인할 줄은 모른다 ; 시란 하나의 선택의, 하나의 의식적인 노고의 열매일 것이다.       a 작업의 필요성 "백개의 거룩한 순간도 한 편의 시를 구성하진 않는다. 성장의 한 지속이자 시간 속의 하나의 형상과도 같은 시를 말이다 ; 그래서 자연적인 시 현상이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음들의 혼란 속에서의 하나의 예외적인 만남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이 예술에서 시는우리가 운수좋게만 이어진 일련의 시도 끝에만 나타날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면, 숱한 인내와 끈덕짐과 솜씨가 필요하다 ; 또한 우리의 시작품이, 심사숙고라는 문제들에 맞서 응수하는 것 못지않게 리듬과 음향과 이미지들의 마력으로 뜻들을 사로잡기를 우리가 바란다면, 우리는 이제 더없이 엉뚱한 내기들과 마주하게 되고 만다, (나는 가끔 스테파느 말라르메에게 말했었다 ---)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첫 싯귀를 우리에게 거저 준다 ; 그러나 그것과 화음을 이루어 초자연적인 재 형과 어울리지 않아서는 안 될 둘 째 싯귀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그것을 하나의 선물이던 첫 싯귀와 견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과 정신의 밑천들을 다해도 지나치지는 않는 것이다." (아도니스에 대해)   b 의식적인 창조의 고귀함 발레리는 영감받은 시인을, 제가 신비롭게 받아쓰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통 없는 그 "순간적인 영매"를 비웃는다, 매혹의 작자는 반대로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강조한다 ;" 정신적인 우연이 (10만 번의 시시한 시도 중에) 우리에게 엄겨 주는 흥미롭거나 쓸모있는  성과들과도 비슷한 어던 성과들을 의식적인 의지로 되찾아 보려고 애쓰기"가 그 공식이 될 그런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말이다. 그는 이렇게 언명하는 수조차 있었다 ; "나는 어떤 최면상태 덕분에 흥분해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 중의 하나를 낳기보다는 철저히 의식하고 온전히 맑은 정신으로 엉성한 그 무엇을 쓰는 편이 사뭇 더 낫겠다."고 (말라르메에 관한 편지). 그리고는 이런 모욕적인 말에 화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번갯불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번갯불은 나 자신에 감탄할 건덕지밖엔 내게 갖다주지 않는다, 아주 작은 불티를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줄 아는 데에 나는 사뭇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폴 발레리이 시학 (4)  (이어서)   시의 솜씨  그러니 시의 솜씨 없이는 시도 없다. 발레레의 고찰들이 여기서는, 자신의 내적인 체험에 의지하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더욱 값지다 ; 이 솜씨란, 영감이 우리에게 "이따금씩"주는 불가사의들을 분간해 이용할 줄 아는 데 있고, 그래서 못나지도 않은 명석한 자발적 창조를 통해 그 불가사의들을 보충하는 데 있는 것이다,        1. 기능중인 시인은 하나의 기다림이다 첫 특성은 참을성이다. 시작품을 낳아 줄 "씨눈"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 인간 속에서 깨어나는 것은, 어떤 뜻하지 않은 사건, 밖이나 안에서 생기는 어떤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다 ; 즉 한 그루의 나무, 하나의 얼굴, 하나의 "테마" ,  하나의 감동, 하나의 낱말에 의해서인 것이다. 또 때로는, 내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표현 의지. 즉 자기가 느끼는 바를 나타내려는 욕구이다 ; 그러나 때로는 반대로, 하나의 형식 요소, 즉 제 원인을 찾는, 내 넋의 공간에 저를 위해 하나의 뜻을 찾는 그런 표현의 초안이기도 하다 --- 그 무엇이 자기 표현을 바라다가는, 어떤 수단이 쓸모있는 그 무엇을 바라기도 하는, 내기 시작이 가능한 이 2원성을 잘 관찰하도록 하라." (시의 추상적 사고) 이 문제에서는, 젊은 파르크, 아폴로 신전의 무녀, 바다의 묘지에 관한 발레리 자신의 속내 이야기들보다 더 교훈적인 것은 없다. 또한 매혹을 빚어낼 낱말들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뜻하지 않은 낱말을,  ----- 예측될 수는 없어도 기다려질 수 있는 낱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맨 먼저 그 낱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한 시인의 수첩)       2. 능력의 바램과 대담 기다림, 명석한 선택, 자발적인 거부, 쉬운 것에 대한 저항, 의식적인 창조의 의사 표시들, " 어떤 사람의 능력과 바램과의 사정없는 대담, "시작품의 건축가"는 주로 표현 문재들과 드잡이한다 ; "사람들의 싯귀들을 만드는 것은 관념들을 가지고가 아니고, 낱말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 라고, 이미 말라르메가 말했었다. 그러니 시인이란 무엇보다도, 깊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언어의 밑천들을, "음과 뜻의 일치들"을, " 낱말들과 낱말들의 표정들의 집단들이 빚어내는 물리적 효과들"을 알아보는 사람인 것이다. ---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나는 여성형이고, 2음절로 된  P나 F를 포함한, 무음글자로 끝나는, 틈이나 분열의 동의어이고, 현학적이기도 드물지도 않은, 그런 낱말 하나를 찾고 있다. 7가지 조건  - 적어도 !" (나침판의 다른 각거리들), 끝없이 꼼꼼하고 복잡한 탐구 ! 그리고 이러한 뉘앙스들로 고생하는 예술가는 그러나, 자기 작 품이 그 속에서 느껴질 판이한 조건들도 고려해야 한다 ; "심지어는 아주 짧은 시 한 편의 제작 기간이 여러 해를 삼킬 수가 있는데도, 그 시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작용은 몇 분만에 끝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몇 분만에 그 독자는, 탐구와 기다림과 참을성과 조바심의 몇 달 동안에 쌓이고 쌓인 발견들과 비교 대조들과 표현의 섬광들의 쇼크를 받게 될 것이다" (시와 추상적 사고)       3. 희한한 답답함들 의식적인 노고를 치러 흥분의 단계, 또는 낭만풍의 심정토로 단계를 넘어서기. 이게 바로 위대한 시인들의 비결이다. 그래서 발레리는 자기가 낭만주의 엉성함과 대응시키는 그 고전 예술의 완벽에 대해 자신의 감탄을 숨기지 않는다 ; "제 솜씨를 배운 낭만주의자는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또는, "낭만주의는 다 앞선 하나의 낭만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는 단일성들이나 고정된 형식들, 운율법적 규칙들, 어휘의 제한들에 항의하기는 커녕, 이러한 속박들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의 걸작들의 근원 자체를 본다. 그것은 이 모든 "희한한 답답함들"이 영감의 충동적이고 무정부적인 비약을 억누름으로써, 시작품의 제작을 명석하게 통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고전주의자란, 자기자신 속에 하나의 비평가를 지니고 있어, 마음 속으로 그 비평가를 자기 작업들에 가담시키는 그런 작가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4. 하나의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작품은 다 "거의 언제나 손질해 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작업 상태" 다. 발레리에게는 하나의 "완성된 소네트"란 실지로, 노고에 의해 여전히 뜯어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버려 둔 소네트"인 것이다. ; "하나의 작품은 꼭 완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가 거기서 끌어낸  능력이나 날쌤이 그것을 개선할 재능 등등을 바로 그에게 태워 주는 것이니까 --- 그는 거기서 그것을 지워 다시 만들 건덕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 (한 시인의 수첩), 발레리는 가능한 것들이 이러한 양성을 시 창조 중에 스스로 체험했다 ; 그는 익살스럽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같은 시의 다른 텍스트들을 발표하는 수도 있었다 ; 심지어는 서로 어긋나는 것들도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제로 영락없이 나를 비판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고쳐쓰기를 내가 삼갔어야 할 까닭을 내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이러한 객관적 고찰에들에서 우리는 발레리 - 텍스트를 알아보게 된다. 그는 드디어 시 창조를 하나의 "내기"로, 하나의 순수한 훈련으로, 그 가장 중요한 산물도 작품이 아니고 그 작자의 지능의 성장인 그런 훈련으로, 정신의 메카니즘에 대한 하나의 보다 깊은 인식으로, 여기게 되지 않았던가?   (이어서 마지막 회)   시의 난해성 마치 말라르메의 연금술 비밀에 대해 말하듯이 발레리의 난해성에 대해 말들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젊은 파르크에 대해, 자신의 난해성은 말라르메의 그것처럼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언명한 적이 있다.      1. 젊은 파르크의 모험 1913년에 예시 앨범 수록 작품들을 손질하다가 발레리는, 40행 가량의 시 한 편을, 이를테면 "그 청년기의 장난들에 대한 작별 인사와도 같은 것"을 거기에 덧붙이고 싶어졌다. 이게 바로 "그가 시인한 것보다는 백 배나 더 읽기 어려운"  412행의 시, 젊은 파르크의 시초였다. 이 별난 현상은, 4년(1913~1917)이나 끈 노고 동안의 "한 송이 조화의 자연적인 성장"으로 설명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자기가 운문 예술을 이미 잊고만 것으로 알고 있던 발레리는, 시작품을 하나의 "훈련"으로 우선 생각했던 것이다. (앙드레 지드에의 헌시). 이어 전쟁이 왔고, 훈련은 불안 속에서 또 반은 불안과 맞서 가며" 계속되었다 ; 동원될 수 없었던 시인은, 겉보기에는 잔잔하면서도, 더없이 엄격한 운율법에 짐짓 굴복한 작품 하나에 자기 모두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을 속였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위협받고 있는 프랑스어에다, "가장 순수한 낱말들과 그 가장 고상한 형태들로 된" 이 작품을 불러주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점점 더 벗어나 마지막의 크기로 부풀어나고 말았다고, 그는 1917년에 쓰고 있다. 이 512행의 싯귀를 위해 그는 100도 더 되는 초고들을, 옮겨 베끼면서 600페이지나 될 초고들을 작성했던 것이다 !      2.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나는 결코 난해해지고 싶지 않으며, 그러나 내가 난해하다면 - 내 말은 : 교양 있고 피상적이 아닌 어느 독자에게 내가 난해하다면, - 난해하지 않을 능력이 없어 나는 난해한 것이다" (에메 라퐁에게, 1922). 이러한 난해성은 오래 전부터 자기 머리를 차지해 오던 관념적인 우리 말투가, 한 살아 있는 존재의 넋의 복잡한 상태들을 우리가 정확히 표현하려들 때는 극도로 빈약하며, 더구나 우리말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태반이 시의 음조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것을 빈약하게 만들도록 강요 당하기도 한다. 어려움은 아닌게 아니라 시인에게 과해지는 조건들 때문에 갑절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 " 시인이 조화를, 이 조화의 연장을, 조형적인 효과들의 계속을, 생각 자체의 계속을, 구문의 멋과 유연성을, 충족시키려 들면, 그래서 고전적인 운율법의 뼈대 속에 전체가 포함되기를 바라면, 그의 노력의 복잡함이, 그가 스스로에게 과한 조건들의 독립성이 그를, 자기 문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위험에, 자기 작품의 소재를 너무 빽빽하게 만드는 위험에, 독자의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요약과 생략을 이용하는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수가 있고, 또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프레데릭 르페르에게, 1917).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은, 그 푸짐한 밑천들, 그 뉘앙스들, "하나의 시 텍스트 이의 너무 오래 끈 작업의 축적" 덕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3. 고된 예술의 이론 이러한 설명들은, 매혹 속의 어떤 작품들의 일부러 그런 것만 같아 보이는 연금술 비빌 (난해성)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 한 시작품의 난해성은, 읽혀지는 사물과 읽는 존재라는 두 요인의 산물이다." 라고 발레리는 언명하고 있다. 여느 사람에게는 데카르트나 몽테스큐도 난해하다. 매혹의 작가는 엘리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고, 말라르메의 제자인 그는, 깨우침 받은 사람의 주의력을 부추기고, 그를 "적극적이게" 만들어 그의 시적인 감흥을 북돋우는 것이 능사인 고된 예술의 아론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때 시작품은, 독자의 넋과  정신이 연주하는 하나의 "악보"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 하나의 텍스트의 진짜 뜻이란 없다. 작자의 권위란 없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건, 그는 자기가 쓴 것만을 썼다. 하나의 텍스트란 한 번 발표되고 나면 저마다가 자기 방법에 따라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구와도 같은 것이다 ; 제작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사용한다는 말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바다의 묘지에 관해서).   끝.  
4    수사법 모음 댓글:  조회:1304  추천:0  2018-10-19
수사법 표현방법에 따라 강조법(强調法)·변화법(變化法)·비유법(比喩法) 등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강조법은 표현하려는 내용을 뚜렷하게 나타내어 읽는 이에게 뚜렷한 인상이 느껴지게 하는 표현법이다. 과장법(誇張法)·반복법(反復法)·점층법(漸層法) 등이 여기 속한다. 변화법은 단조로움을 없이 하여 문장에 생기 있는 변화를 주기 위한 표현법이다. 설의법(設疑法)·돈호법(頓呼法)·대구법(對句法) 등이 여기 속한다. 비유법은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직유법(直喩法)·은유법(隱喩法)·환유법(換喩法)·제유법(提喩法)·대유법(代喩法) 등이 여기 해당한다. 과장법이란 어떤 사물을 실제보다 훨씬 더하게, 또는 훨씬 덜하게 나타내는 방법으로, '눈물의 홍수' '쥐꼬리만한 월급' 등이 그 예이다. 반복법은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되풀이하여 문장의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방법으로,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등이 이에 속한다. 점층법은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겹쳐 써서 문장의 뜻이 점점 강조되고, 커지고, 높아지게 하여 독자의 감흥을 고조시켜 절정으로 이끄는 표현법이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하는 따위이다. 설의법은 대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학적 효과만을 노리는 질문의 형식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은 '온다', 혹은 '안 온다'와 같은 독자들의 대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돈호법은 어떤 추상적 특성이나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마치 현재 존재하는 듯이 부르는 표현법이다. 예컨대, "오! 그대 신이여, 이들을 굽어보소서" 같은 표현을 들 수 있다. 대구법은 어조가 비슷한 문구를 나란히 벌여 문장에 변화를 주는 표현법이다. 예컨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따위이다. 직유법이란 상사성이나 유사성을 토대로 두 사물을 비교하는 표현법을 의미한다. 예컨대 '전봇대처럼 키가 큰오빠'에서 '오빠'를 '전봇대'에 비교하는 것은 키가 크다는 점에서 두 사물이 유사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은유법이란 직유법과는 달리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를 의미한다. 언어적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에 적합한 이름이 다른 사물로 전이됨을 뜻한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에서 '마음'과 '호수'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없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며, 또한 '마음'이 '호수'로 전이됨으로서 의미론적 전이가 나타난다. 환유법은 접촉성에 토대를 두고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치환하는 표현법으로, 이때 접촉성은 공간적 접촉과 논리적 접촉으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왕관'으로 '왕'을 대신하는 것은 전자에 속하며, '이광수'가 '이광수의 소설'을 대신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제유법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두 사물을 치환하는 표현법이다. 예컨대, "바다에 돛이 떠 있다."에서 '돛'은 '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배'라는 전체를 '돛'이라는 부분으로 치환한 경우이다. 대유법은 사물의 일부나 그 속성을 들어서 그 전체나 자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이다. '백의의 천사'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같은 표현 등이 이것에 속한다.      1. alliteration 頭韻(法). ·한 어군의 둘 이상의 낱말을 같은 문자나 음으로 시작하기 ; the sad sight of the sea. 구(句)의 첫머리에 같은 음을 갖는 글자를 되풀이해서 쓰는 수사법. 각운(脚韻)에 대응한다. 고대 영어나 중세 영어의 시(詩)에서 보듯이 같은 1행에 중요한 몇 개의 말의 강세가 있는 개개의 음절이 동일한 자음 또는 다른 모음으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고대 영어의 시에서는 휴지(休止;caesura) 다음의 강음절을 보면 그 시행의 두성(頭聲)을 알 수 있는데, 고대 영어·중세 영어·올드색슨(Old Saxon)·아이슬란드어 등 게르만어 시에서는 공통적인 특징이며, 각운은 로만스어의 영향으로 고대 영어에서 중세 영어로 옮겨가면서 사용되었다. 두성은 각운의 발달과 함께 차차 시구 구성에서의 구실을 잃고, 마침내 단순한 장식적 요소로 변했다. 최후 대작은 W. 랭글란드의 《농부 피어스의 환상(The Vision concerning Piers the Plowman)》이며, 한편 각운을 보급시킨 힘이 된 것은 G.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이다. 두성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의 중요한 장식적 요소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적 의미에서 같은 글자 또는 같은 음으로 시작하는 2개 이상의 말이 연속적으로 쓰인 것을 말한다. 그런 두성은 운문·산문에서도 많이 쓰이며, 속담, 일상의 관용구를 비롯하여 표어·표제어·광고문 등에서 사용되는 예를 많이 보게 된다. the repetition of initial consonant sounds in a line or succeeding lines of verse. Example: Shakespeare, Romeo and Juliet: "Gallop apace, you fiery-footed steeds/ Towards Phoebus' lodging!"  The weary, wayworn wanderer bore (Poe)     2. assonance 類韻, 腰韻, 母音韻 단어의 마지막 모음이 다음에 이어지는 낱말 가운데 강세를 받는 모음과 반복되는 현상.  시(詩)를 지을 때 많이 쓰는 기교이다. 유럽에서 중세시대 초기 《롤랑의 노래》를 비롯한 프랑스 시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free as a breeze처럼 한 절 안에서 긴 모음이 겹치도록 시를 짓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작가 G.홉킨스, W.오언의 시에서도 보이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발라드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the repetition of similar vowel sounds within a line or succeeding lines of verse. Example: the short i and e sounds in Shakespeare, Antony and Cleopatra: "then is it sin/ To rush into the secret house of death/ Ere death dare come to us?"      3. metaphor 隱喩, 暗喩 ·비유의 하나로 simile과 달리 like, as 등의 단어를 쓰지 않음. ·the curtain of night 밤의 장막. ·Life is a journey. 인생은 여행이다. cf. MIXED METAPHOR, SIMILE 1. 직유법과 대조되며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묘사하는 표현법이다. 원관념과 비유되는 보조관념을 같은 것으로 보므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 나타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김동명 《내 마음》)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김동명 《파초》) 고독은 나의 광장(조병화 《고독》)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깃발》)   은유의 종류에는 ‘암시적 은유(implicit metaphor)’과 ‘혼합 은유(mixed metaphor)’, ‘죽은 은유(dead metaphor)’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죽은 은유란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울한 상황, 새벽은 희망적인 상황)’에서처럼 듣는 사람이 곧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일상화하여 신선함이나 생명력을 잃어버린 은유를 말한다.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양쪽에서 어쩌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의 비유(figure of speech)일 은유는 행동, 개념, 물체가 지닌 특성을 밝히되, 보통 그것 이외의 어떤 것, 흔히는 그것과 아주 다른 것을 표시하는 데에 쓰이는 말로 밝히는 것이다. 은유는 묘사되고 있는 사물과 그것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 사물 사이의 비교를 암암리에 포함하지만 명확히 비교로서 제시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랑은 위험한 게임이다”라는 어구는 사랑이라는 활동과 판돈이 많이 드는 경쟁 사이의 비교를 넌지시 비추지만 그 비교는 암시적인 것에 머문다. 이와 대조적으로 직유(SIMILE)는 어떤 것을 그와 다른 어떤 것의 용어로 묘사하는 은유적 관행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명시적인 비교 표현에도 의존한다. 그래서 로버트 번즈가 “나의 사랑은 한 송이 붉은, 붉은 장미와 같다”고 쓸 때, 그는 은유 속에 작용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에 이르지 못하고 대신에 부분적 유사성(similarity)이나 비슷함(resemblance)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은유(dead metaphor)란 ‘법의 힘(the long arm of the law; 경찰력)’처럼 그 자체에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하고 일상언어로 넘어간 은유이다. 뒤섞인 은유(mixed metaphor)란 비교를 이룬 조합이 비논리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은유이다. 예를 들어 “저 족제비들에게 발밑을 채였다`those weasels pulled the rug out from under us”고 말하면, 신용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을 표현하는 것이 요점이었겠으나 약간 풍자만화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I. A. 리처즈에서 시작하는 현대의 은유 분석은 은유의 주의(主意; tenor)와 매체(媒體; vehicle)를 구별함으로써 은유 분석을 도식화했다. 주의는 원래의 문자 그대로의 말을 가리키고, 매체는 그것에 응용된 비유적인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은유 “사랑은 위험한 게임이다”의 경우, 주의는 ‘사랑’이고 매체는 ‘게임’이다. CATACHRESIS, METONYMY도 참조.     4. simile 直喩 비유법 중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형식으로, 2개의 사물을 직접적으로 비교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내포된 비유를 사용하는 은유법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비유이므로 묘사가 정확하고 논리적·설명적인 것이 특징이다.  즉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기 위해 다른 사물의 비슷한 속성을 직접 끌어내어 비교하므로, 공식적인 비교표현 매체를 사용하여 유사성을 명백히 지적한다. 이 때 비유되는 사물과 비유하는 사물은 '마치 ∼같다' '∼인 양' '∼같은' '∼처럼' '∼듯이'의 형식으로 연결한다. 이를테면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꽃처럼 예쁜 우리 아기' '차기가 마치 얼음 같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등이 직유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문장이다. 수사법 중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현대언어의 중요한 재원이기도 하다.      5. hyperbole 誇張 어떤 사물을 실제보다 훨씬 더하게 또는 훨씬 덜하게 나타내는 수사법.  강조법의 한 가지로서, 사실을 불려 선명한 인상을 주기 위하여 사용된다. 한문체에서 많이 쓰며, 은유법과 함께 쓰기도 하나 주로 직유법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사물을 실제보다 크게 표현하는 강조법을 과대진술, 작게 표현하는 것은 과소진술 또는 격하(格下)라고도 한다.  과대진술의 예로는 백발 삼천장(白髮 三千丈)/산더미 같은 파도/천년을 하루같이/어머니 은혜는 산같이 높다/찌는 듯한 더위/배가 남산만하다 등이 있고, 과소진술의 예로는 간이 콩알만하다/문짝이 바늘구멍만 하다/월급이 쥐꼬리만하다 등이 있다     6. personification 擬人法 사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간인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적 방법.  미개인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을 인간이나 인간의 행위와 동일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연적인 작용이었으나 문명인이 예술창작에 의식적으로 이용할 때는 의인법이 된다. 즉, 인간이 아닌 생물이나 무생물,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도 인간 또는 인간의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솝이야기》의 에서 까마귀나 여우는 모두 의인화된 경우라 하겠으며 조형미술의 예를 들면, 티치아노의 《성애(聖愛)와 속애(俗愛)》에서 성장한 여인과 나체의 여인으로 각각 나타낸 그림도 의인화의 한 예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성행한 한국의 가전체(假傳體) 문학도 여기에 포함되며, 신라 때 설총(薛聰)이 지었다는 《화왕계(花王戒)》도 이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7. allusion 引喩, 引用法 남의 말이나 글 또는 고사·격언 등에서 필요한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글의 뜻을 더욱 분명히 하는 표현방법.  인유법(引喩法)이라고도 한다. 남의 말이나 글을 인용해 글의 신뢰도를 높이거나 내용을 충실히 하고, 자기 이론의 정확성을 꾀하며, 문장에 변화를 주는 표현방법이다. 인용법에는 남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직접인용법과 남의 말을 고쳐서 옮겨놓는 간접인용법이 있다.  직접인용법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과 그것을 옮겨다 쓰는 사람의 말을 분명히 구별하기 위하여 따다 쓴 말 앞뒤에 따옴표를 찍는다. 간접인용법에서는 대명사 ·공대법 ·날짜 등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바뀌고, 따옴표를 찍지 않는다.  an indirect or oblique reference within a text to another text or work. Hence a subtle artistic quotation or homage. For example, the opening sentence of Cat's Cradle--"Call me Jonah"--alludes to both an Old Testament prophet and the opening line of Melville's Moby Dick.      8. synecdoche 提喩 사물의 명칭을 직접 쓰지 않고 사물의 일부나 특징을 들어서 그 자체나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으로, 환유법(換喩法)과 제유법(提喩法)이 있다.  환유법은 나타내고자 하는 관념이나 사물의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예를 들어 '요람에서 무덤까지'에서 '요람'은 '탄생'을, '무덤'은 '죽음'을 의미한다거나, '한 잔 마셨다'에서 '잔'이 '음료수'나 '술'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또 원인으로써 결과를, 또는 결과로써 원인을 대신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독약을 마시면 죽는다'라는 인과관계에 근거하여 '독약을 마셨다' 대신 '죽음을 마셨다'라고 표현한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예를 들어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에서 '빵'은 식량의 일부로 '식량' 전체를 의미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은 국토의 일부로 '국토' 전체를 의미한다.      9. metonymy 換喩 환유는 표현하려는 대상과 경험상 밀접하게 연상되는 다른 사물이나 속성을 대신 들어 나타내는 표현방법이다. 즉 접촉성에 토대를 두고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치환하는 표현법으로, 이때 접촉성은 공간적 접촉과 논리적 접촉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왕관’이나 ‘왕홀’로 ‘왕’을 대신하는 것은 전자에 속하며, ‘나는 밀턴을 모두 읽었다.’에서 ‘밀턴’이 ‘밀턴의 저작물’을 대신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은유(METAPHOR)와의 상반관계 속에서 흔히 논의되는 환유는 한 사물의 이름을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사물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말의 비유이다. 가령 “오늘 워싱턴이 지난 4/4분기의 무역수지 수치를 발표했다”고 말한다면 워싱턴이라는 말은 미국 정부를 대신하는 것이다. 다른 예에는 왕정을 대신하는 ‘관’, 권투시합을 대신하는 ‘링’, 찰즈 디킨즈의 저작을 대신하는 ‘디킨즈’, 운동선수를 대신하는 ‘조크(jock 탈장(脫腸)을 방지하는 지지물.)'등이 있다. 특수하지만 종종 쓰이는 환유의 한 유형은 제유(synecdoche)이다. 제유에서는 한 부분의 이름이 전체를 대신하거나(예컨대, 배를 대신하는 ‘돛’, 소나 말을 대신하는 ‘머리’) 빈도가 낮기는 하지만 전체가 부분을 대신한다. 근래에 문학비평은 환유의 범위를 넓혀서 환유가 이해되고 산출되는 방식도 지시한다. 이 넓은 의미에서의 환유는 두 사물 사이에 유사성(similarity)의 관계를 정립하는 은유와 달리 인접성(contiguity)의 관계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1840년대에 사회개혁자들은 흔히 노동자계급이 주거지역과 점점 ‘하나가 되고 있다(of a piece)’고 썼다. 그 집들 중의 다수는 파손되고 통풍이 나쁘고 몹시 더러웠다. 따라서 빈민들이 그들의 주거지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과 집 사이에 인접성에 기초한 연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은유와 환유의 구별은 종종 패러다임(계열체; PARADIGM)과 신탐(통합체; SYNTAGM)의 대비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10. conceit 奇想 상식적으로는 결부시킬 수 없는 2개 이상의 관계로부터 공통성을 발견하여 억지로 결부시키는 것으로 규모가 큰 비유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영국문학, 특히 형이상시(形而上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J.던의 시 《벼룩》에서, 말하는 사람과 그의 연인의 피를 빨아먹은 벼룩이, 두 사람이 하나가 된 혼인의 잠자리에 비유된 것은 그 일례이다.      11. paradox 逆說 패러독스는 자기 모순인 것처럼 혹은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진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진술이다. 패러독스의 좋은 예는 패러독스를 중심으로 많은 시를 지은 17세기 작가 존 단의 시에 풍부하다. 예를 들면 「내 마음을 때려부수세요……」라는 소네트에서 그는 신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를 당신에게 데려가 감옥에 가둬주세요     12. symbol 象徵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具體化)하는 것, 또는 그와 같이 나타내어지는 것. 표상(表象)·기호(記號)라고도 한다. 왕관이 군주정치를, 신부의 흰 웨딩드레스가 순결을 나타내듯이 어떤 사물(事物)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것을 상징이라 하는데 이 경우 왕관이나 흰 웨딩드레스는 상징이며 군주정치·순결이라는 의미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물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 간단한 예로 빨강·노랑·파랑인 교통신호의 색이 뜻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운전이 불가능하며 안전하게 걸을 수도 없다. 사회에는 교통신호의 색처럼 거의 세계 공통인 것도 있으나 사물의 의미는 사회에 따라 다른 것이 많다. 따라서 다른 사회의 사물이나 사람들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야만 그곳에서 비로소 생존해 갈 수가 있다. 상징에 대하여 자주 쓰이는 정의를 몇 가지 알아보면, C.개츠는 상징을 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은덴부족(族)의 연구로 유명한 V.터너는 상징을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의거하여 으로 정의하고 있다. 터너에 따르면 란 같은 문화권 속의 사람들에 의한 동의이며 나 도 마찬가지로 특정 문화 속에 한정된 것이다. 상징은 의미하는 것으로서 매개수단 또는 매체(媒體), 의미내용으로 구분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상징과 기호(sign)를 구별한다. 터너는 일정한 문화에서 매체와 의미내용 사이에 무언가 유사성이 있는 것을 상징이라 하고 이 둘 사이에 그와 같은 유사성이 없는 자의적(恣意的)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를 라 하였다. 터너에 따르면 상징에서의 매체는 의미내용과 은유적 또는 환유적인 관계에 있다. 터너는 상징이 은유적인 것과 환유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고 했으나, E.리치는 기호인 경우의 의미내용과의 관계는 인접적·환유적이라 하고 상징에서 의미내용과의 관계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적인 것이라 하였다. 대수방정식의 χ, 汝, 濾는 상징이고, 대수식의 蒔, -, 詩 처럼 고정되어 언제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관습적 표기를 기호로 본다. 리치에 따르면 왕관은 왕권을 나타낼 때 환유에 바탕을 둔 기호이다. 사과는 특정 과일을 표시하는 기호이지만 라고 할 때의 고유명사는 상징이다. R.니덤은 상징과 기호를 구별하지 않고 군주정치를 나타내는 왕관도, 미국을 표시하는 독수리도 상징으로 보았으며 상징을 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독수리를 새의 일종으로 보는 분류와 함께 독수리나 그 밖의 동물을 국가나 씨족 또는 무엇인가의 집단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파악하는 관습을 볼 수 있다. 사회와 자연, 우주가 상징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전통사회가 있고, 이와 같은 상징적 분류의 하나로 상징적 이원론(象徵的二元論)이 있다. an object, sign, or image that is used to stand for something else, as a flag may be used to symbolize a nation. Whitman uses the hermit-thrush as a symbol of American poetry; Henry Adams uses the dynamo as a symbol of vast, inhuman power.      13. antithesis 對句, 對照法 상반(相反)되거나 대립되는 사물(事物)을 함께 내세워, 양자의 대조적인 상태를 강조하는 수식법(修飾法).  문학적 수법으로서는 특히 고전주의(古典主義) 시인이 즐겨 인용하여 풍자적인 기지(機智)를 발휘하는 수단이 되었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묘사할 때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반대되는 것, 또는 그 주위의 것을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묘사대상을 돋보이게 하는 문체상(文體上)의 기법을 가리킨다.      14. allegory 諷喩, 寓意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egoria, 다른 이야기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문학형식이다. 의인화하는 경우가 많다. 중세의 도덕우의극(道德寓意劇)이나 《장미설화》, 스펜서의 《페어리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등이 대표적이다. 지나치게 유형적이며 교훈적이라고 하여 현대 작가들은 사용을 꺼리나 정치나 종교를 문제로 할 때에는 유효한 형식이며 현대 문학에서도 넓은 의미에서 ‘알레고리컬’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도 많다.  a universal symbol or personified abstraction. Example: Death portrayed as a cloaked "grim reaper" with scythe and hourglass, or Justice depicted as a blindfolded figure with a sword and balances. Also a literary work or genre (e.g., John Bunyan's Pilgrim's Progress) that makes widespread use of such devices.  가장 통상적인 용법에서 알레고리는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이 중 하나는 가시적이거나 축자적인 의미에 부분적으로 감춰져 있다―를 갖고 있는 이야기나 이미지를 가리킨다. 흔히 알레고리는 추상물을 인간 내지 인간적 성질을 가진 존재로 그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여신상, 정의의 상이나 승리의 상은 알레고리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알레고리는 교리나 사상 체계 속에 있는 추상물을 이야기에 끌어들여 그것을 장소나 인물이나 사건으로 제시한다. 영국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알레고리의 하나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 Progress』에서 세재씨(世才氏), 충실씨(忠實氏), 희망씨(希望氏)는 주인공 기독교도를 따라 파멸시(市)에서 천상시까지 여행한다. 이 이야기의 인물과 장소는 청교도 교리의 특수한 개념들을 표상한다. 그리고 주인공 기독교도의 순례는 그 자체로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면서 또한 모든 기독교도의 구원을 향한 인생 역정을 그린, 보다 일반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레고리는 물론 종교적 저작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조너선 스위프트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들은 정치 문제에 관한 작품에서 알레고리를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알레고리는 중세 기독교의 어떤 종류의 성서 주석(注釋; EXEGESIS)에서 영혼 세계와 물질 세계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서 조응을 찾아내는 방법으로서 중요했다.(TYPOLOGY 참조) 낭만주의 시대에 비평가들은 그때까지 거의 호환적으로 사용되어온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낭만파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성직자였던 새무얼 테일러 코울리지는 상징이란 “실제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표상하는 전체의 일부”라고 논했다. 반면에 알레고리는 자의적이고 따라서 상징만큼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구별은 지금까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간 몇몇 유력한 비평가들에 의해 거부되곤 했다. 예컨대,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가 텍스트나 회화에 신화적이고 역사화된 배경을 설정하기 때문에 상징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벤야민에게 상징은 알레고리와 대조적으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폴 드 만도 알레고리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상징은 이미지와 실체를 결합하여 어떤 초월적 지식이나 진리를 암시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드 만이 보기에 그런 지식이나 진리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알레고리는 상징과 대조적으로 더욱 유용하고 ‘정직’하다. 그것은 그 자체의 기원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데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알레고리는 인간의 인식과 실존의 우연성 너머에 불변의 초월적 진리가 성립한다는 듯이 굴지 않는다. DECONSTRUCTION도 참조.   자료 2   수사법(修辭法)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현의 기교로 보아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유법 :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과 비겨서 표현.  강조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변화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절히 주는 방법.      1. 비유법(比喩法)  직유법(直喩法), 은유법(隱喩法), 의인법(擬人法), 활유법(活喩法), 의성법(擬聲法), 의태법(擬態法), 풍유법(諷喩法), 대유법(代喩法), 중의법(重義法), 상징법(象徵法), 우화법(寓話法)    (1) 직유법 : 원관념을 보조 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이다. 이를 '명유(明喩)'라고도 하는데 '찢긴 깃발처럼 허공을 향한 도시의 하늘'과 같이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등의 연결어를 사용하는 기교이다.    (예)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    *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 .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2) 은유법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내용을 같은 성질로써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두 관념의 밀도는 직유보다 강하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예)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 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를 사은유(deadmetaphor)라고 한다.    (예)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3) 의인법 :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예)  *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  베에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4) 활유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활유법'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의인법'이다.    (예)  *청산이 깃을 친다.  *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5) 의성법 : 어떤 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예)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 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6) 의태법 :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낸 기교로서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예)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 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7) 풍유법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 등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서,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도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 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예)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  *간밤의 부던  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 라.  ?蕩?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糖?오.      (8) 대유법 :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분으로써 혹은 그 살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대한민국)    위의 두 글에서 ㉠은 제유법이고, ㉡은 환유법이다. ㉠의 '들'은 국토의 일부로서 '국토'를 나타내었고, ㉡의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의 특징으로서 '우리 나라'를 나타내었다.    (9) 중의법 : 하나의 말을 가지고서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예)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10) 상징법 : 원관념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 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이 나타나 있지 않아도 그 표현만으로써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예)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11) 우화법 :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 강조법(强調法)  과장법(誇張法), 반복법(反復法), 열거법(列擧法), 점층법(漸層法), 점강법(漸降法), 비교법(比較法), 대조법(對照法), 억양법(抑揚法), 예증법(例證法), 미화법(美化法), 연쇄법(連鎖法), 영탄법(泳嘆法), 현재법(現在法)    (1)과장법 :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리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예)  *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2) 반복법 : 같은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이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예)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3) 열거법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 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예)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대체로 셋 이상을 늘어 놓을 때만 열거법으로 본다.  같은 어구가 늘어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고 반복법이다.    (4) 점층법 :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올리는 표현 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하여 감동시키는 데에 효과적이다.    (예)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유교의 목적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5) 점강법 : 점층법과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않게 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명예를 잃은 것은 모두를 잃은 것이요  용기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은것은 아무 것도 안 잃는 것이다.    ※ 점층,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점층법과 점강법을 아울러서 점층법이라고 한다.    (6) 비교법 :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흔히 '∼만큼', '∼보다', '∼처럼', '∼같이' 등의 비교격 조사를 사용한다.    (예)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푸른  그 마음 흘러라.      ※ 직유와 비교의 차이 :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 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 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7) 대조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① 단어의 대조  (예)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예)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    ③ 색상의 대조  (예)  *  미   니 새 더욱  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예)  *들을 제  우레러니 보니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8) 억양법 :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던지 하는 표현 방법    (예)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9) 예증법 :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예)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10) 미화법 :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예)  *집 없는 천사(천사→거지)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우리는 그 백의의 천사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간호원→백의의 천사)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 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11) 연쇄법 :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어키게 하는 데에 있다.    (예)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        (12) 영탄법 :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1920년대 우리 시에서 많이 썼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13) 현재법 :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예)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3. 변화법(變化法)  도치법(倒置法), 대구법(對句法), 설의법(設疑法), 인용법(引用法), 반어법(反語法), 역설법(逆說法),생략법(省略法), 문답법(問答法), 명령법(命令法), 경구법(警句法), 돈호법(頓呼法)    (1) 도치법 :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예)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니 이 밤을 분쇠할 벽력을.    (2) 대구법 :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歌辭)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예)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3) 설의법 :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 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표현 형식이다. 내용상으?灌? 의문이 아니며,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독자의 판단에 맡겨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표현하는 기교이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예)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4) 인용법 :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로서 '인용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에 따옴표가 드러나 있는 명인(明引)과 따옴표가 드러나 있지 않은 암인(暗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5) 반어법 :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면서 칭찬하는 방법으로서'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예)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자녀를 버린다.)  *후기(後期)ㄴ지 바랐더니 이리 잘 되었소.    (6) 역설법(Paradox, 모순 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안 맞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예)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도치법,반어법)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7) 생략법 : 글의 간결성,압축성,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기교이다. 그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예)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8) 문답법 : 글 속의 어느 일부의 문장을 문답 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 자답(自問自答) 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  옌가 ?搭遺?.  *그렇다면 그 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다.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9) 명령법 : 평범한 서술로 해도 무방할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또는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예)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 보라:문어체(文語體), 보아라:구어체(口語體)    (10) 경구법 :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헌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예)  *시간은 금이다.  *웅변은 은(銀)이고 침묵은 금이다.(은유법, 대구법)  *유비(有備)면 무환(無患)이다.    (11) 돈호법 :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편짓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예)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3    문학용어 모음 댓글:  조회:917  추천:0  2018-10-19
*가나다 순*    ■ 가면극(假面劇) :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 정교한 형식을 지닌 궁정 오락으로서 시극 음악 무용 화려한 의상 무대 장관으로 구성.  ■ 가전(假傳) : 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체로 서술한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로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으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다.  ■ 가전체 문학(假傳體文學) :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 일명 의인 전기체.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켜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가전 혹은 의인 전기로 불림.  ■ 갈래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장르.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 가정 소설(家庭小說) : 구소설의 내용적 분류의 하나 소재는 가정 생활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그린 소설  ■ 각색(脚色) : 연극 용어 소설이나 논픽션 등 어떤 원작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한 대본으로 바꿔 쓰는 것을 말함  ■ 갈등(葛藤) : 희곡이나 소설 등에서 의지적인 두 성격의 대립 관계를 뜻한다. 인물과 인물 인물과 환경 사이의 갈등을 외적 갈등이라 하고 한 인물 내부의 대립적 욕구로 인한 갈등을 내적 갈등이라고 한다.  ■ 감상주의(感傷主義) : 어떤 원칙을 주장하는 뜻에서 주의가 아니고 감정 과정의 의미에서 주의이다. 슬픔이나 기쁨 등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러한 정서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데서 생긴다.  ■ 감정이입(感情移入) :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집어넣어 대신 나타내는 표현 기법 상의 하나,.시에서 많이 쓰인다.  ■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을 이르는 말. 엘리어트가 처음 말함.  ■ 경향 문학(傾向文學) : 순수 문학이 아닌 의식적으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계급적인 것을 취급하여 대중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계몽하고 유도하자는 목적 아래 쓰이는 작품 교훈시나 프로 문학이 속함  ■ 계급주의(階級主義)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곧 카프(KARF)가 주창 실천하려 했던 문학 사상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에 의한 계급 혁명을 선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주의 이념  ■ 계몽주의(啓蒙主義) : 서양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왕성했던 사조로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다. 계몽주의 문학은 작가가 교사 선각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합리성에 호소하여 가르치려 하는 일종의 교훈주의 문학이다.  ■ 고전주의(古典主義) :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미를 전범으로 하여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경향 개성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면 일반 미를 지향한다.  ■ 구비문학(口碑文學) : 문자로 정착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문학이다 말로 되었고 구연되며 공동작이며 민중적 민족적인 것이 특징이다.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 교술시(敎述時) :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 설명, 하여 알리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  ■ 구조(構造) : 내부 요소들이 짜임 또는 그러한 짜임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 작품의 전체  ■ 구조주의(構造主義) : 문학 작품을 작품 속의 여러 요소들의 상호 관계로서 조직된 구조로 보는 연구 방법론 이 사상은 프랑스의 언어 학 이론에서 나왔다.  ■ 기록 문학(記錄 文學) : 보고 문학이라고도 함 현실에 일어나 사건의 진전이나 사물의 상태를 충실히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 문학 작품  ■ 기지(機智) : 지적인 것이며 언어적 표현에 의존한다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압축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  ■ 기호학(記號學) : 문학 작품을 하나의 기호 체계로 보고 이를 분석하는 문학 연구의 한 방법 작품의 언어 분석을 통한 문화 요서의 분석 문체론적 접근 의미론에 따른 분석 등을 행한다.  ■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 고려 가요에서 남녀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그린 노래를 조선 시대 한학자들이 업신여겨 일컫던 말  ■ 낭만주의(浪漫主義) :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유행한 문예사조의 하나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것으로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풍만해 감정 표출을 특징으로 한다.  ■ 내재율(內在律) : 자유시나 산문시에서처럼 문장 안에 미묘한 음악적 요소로 잠재되어 있는 운율 외형률과 대조가 된다.  ■ 내적 독백(內的獨白) : 20세기 심리 소설의 한 서술 방법으로 인물의 심리 적 독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외적 사건을 그리는 기교  ■ 내포(內包) : 사전적 의미가 작품 구조 내에서 새롭게 이루어 내는 의미 함축적 의미  ■ 농민 소설(農民小說) :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민의 문제점을 파헤친 소설  ■ 다다이즘 : 1차 세계대전 중 나타난 전위적 예술 운동에 대해 시인 트리스탄 짜라가 붙인 이름 전쟁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합리적 기술 문명을 부정하여 일체의 제약을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과격한 실험주의적 경향 뒤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 다의성(多義性) :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암시적으로 여러 갈래의 의미를 드러내는 문학 언어의 한 특성.  ■ 다큐멘터리 : 허구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전개에 따라 구성된 기록 문학에서는 기록 문학을 뜻한다.  ■ 대단원(大團圓) : 연극에서 갈등이 해소되어 결말을 짓는 마지막 장면 결말 파국  ■ 대본(臺本) : 연극이나 영화의 기본이 되는 각본  ■ 대유법(代喩法) : 어떤 유사성을 가진 사물을 통하여 그와 관련되는 다른 사물을 가리키거나 부분으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도록 하는 비유법 제유법과 환유법으로 나눈다.  ■ 대중 소설(大衆小說) : 일반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흥미 위주의 소설 연애 소설 과학소설 추리 소설 등이 있음  ■ 대하 소설(大河小說) : 사회적 변화와 인간의 변모를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하는 소설 장구한 기간에 걸친 집단과 개인의 갈등과 대결을 막대한 분량으로 전개시키는 소설  ■ 데카당스 : 퇴폐주의  19세기말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에서 유럽 각 국에 퍼져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예술 경향으로 뒤에 상징주의로 발전하였다.  ■ 독백(獨白) : 일인극 단독 대사. 배우가 마음속의 생각을 관객에게 알리려고 상대자 없이 혼자 말함. 모놀로그  ■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 :  러시아 혁명 후 혁명의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심정적으로 는 동조하는 작가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카프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에 동조한 유진오, 이효석, 채만식 등을 말한다.  ■ 로망스 :  원래는 로마 말의 방언으로 쓴 하찮은 글이란 뜻 그후 환상적 무용담 연애담 또는 무용 연애 담을 뜻하게 되었다. 로망이라는 말이 유럽 대륙에서 소설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 리얼리즘 : 사실주의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응하는 유파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에 대하여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충실히 묘사하려고 하는 예술 상의 한 경향  ■ 매너리즘 : 예술 창작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가 생기와 신선미를 잃는 일  ■ 멜로드라마 : 연애를 주제로 하며 우연에 따른 변화와 호화스러움이 있고 그 내용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흥미 중심의 대중극  ■ 모더니즘 : 철학 미술 문학 등에서 전통주의에 대립하여 주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바였나 주관적이 예술 경향의 총칭 시에 있어서는 1910년이래 영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함께 말한다.  ■ 모티프 : 일정한 소재가 예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고 통일감을 주는 중요 단위를 말한다. 이것은 한 작가 한 시대 나아가 한 갈래에 반복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 몽타주 따로따로 촬영된 화면을 효과적으로 떼어 붙여서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영화나 사진 편집의 한 수법  ■ 묘사(描寫) : 어떤 대상을 객관적 구체적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나타내는 일  ■ 문체(文體) : 작자의 독특한 사상이나 개성이 문자의 어구에 나타나 이루어 내는 전체의 특색  ■ 문학 사회학(文學 社會學) : 미를 이해하는 감각과 경험 미적인 것을 수용하고 산출하는 정신 태도에 작용하는 의식  ■ 미학(美學) : 예술에 있어서의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  ■ 민담(民譚) : 말로 전승되는 길지 않는 동화 야담 일화 우화 전설 신화 등을 총칭하는 말  ■ 민속극(民俗劇) : 민간 전승의 연극 가장한 배우가 집약적인 행위로 이루어진 사건을 대화와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극, 가면극, 인형극이 있다.  ■ 민요(民謠) : 민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민중의 생활 감정을 소박하게 반영시킨 노래  ■ 반어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나타내는 수사학의 일종  ■ 방백(傍白) : 연극에서 관객에게는 들리나 무대 위의 상대방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을 약속하고 말하는 대사  ■ 배경(背景) : 작품에서 어떤 사건의 원인이 되거나 공간으로서 작용하는 구체적 풍경 분위기 시대성 등의 요소  ■ 번안(飜案) 외국 작품에서 원작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등을 자기 나라에 맞게 바꾸어 고침  ■ 보조 관념(補助觀念) : 어떤 다른 생각을 나타내는 매개로 쓰이는 사물이나 생각. '비둘기'가 '평화'를 나타낼 때 '비둘기'는 보조 관념, '평화'는 원관념  ■ 부조리(不條理) :  문학 베케트나 카뮈의 작품이 그것으로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 인간 사이의 의사 소통의 불가능함. 인간 의지의 전적인 무력함 인간의 근본적인 야수성, 물질성, 비생명성. 요컨대 인간의 부조리를 아이러니컬하게 나타내는 문학을 말한다. 특히 부조리극은 내용만이 아니라 극 구성 자체가 부조리하다.  ■ 비극(悲劇) : 희곡의 한 종류 결말이 비장미가 느껴지도록 꾸밈 희극과 대립된다.  ■ 비교문학 : 다른 나라끼리의 문학을 비교하여 상호간의 영향 관계를 과학적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전체적인 문학의 특징을 밝히는 학문  ■ 비유(比喩) : 하나의 사상이나 사건을 설명할 때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 직유, 은유, 풍유, 의인, 대유 등이 있음  ■ 비평(批評) : 예술 자체에 대한 또는 개개의 작품에 대해서 꾀한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의 가치평가  ■ 사실주의(寫實主義) :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립하여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예술의 경향 또는 인간의 본질을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보는 세계관  ■ 산문시(散文詩) : 일정한 운율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로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시 산문 정신 운문의 외형적 규범 및 낭만주의적인 시적 감각을 배제하고 사회적 현실주의에 의하여 파악된 현실을 순전한 사문으로써 표현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  ■ 삼일치 법칙(三一致法則) : 17세기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이 주창한 연극 이론으로 시간 장소 행동의 세 가지가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  ■ 상징(象徵) : 한 사물 자체로서 다른 관념을 나타내는 일 즉 보조 관념만으로 원관념을 나타내는 일  ■ 상징주의(象徵主義) :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 상의 경향 내면적이고 신비적인 세계를 상징으로써 암시하려고 했다.  ■ 서사시(敍事詩) : 민족적이거나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 또는 전설과 영웅의 사적 등을 이야기 중심으로 꾸며 놓은 시 ■ 서사체(敍事體) : 어떤 사건이나 사실 전달을 위주로 서술해 나가는 문체  ■ 서술자(敍述者) :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  ■ 서정시(敍情詩) : 서사시 극시와 달리 주관적이며 관조적인 수법으로 자기 감정을 운율로서 나타내는 시의 한 갈래  ■ 서정적 자아(抒情的自我) :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보통 시인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인이 시적 표현 효과를 위해 허구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시적 자아라고도 한다,  ■ 서정주의(抒情主義) : 시 소설 등에서 작자의 주관적 체험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 경향. 주로 사람, 죽음, 자연 등을 제재로 내적 감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리리시즘  ■ 소재(素材) : 예술 창작 상의 요소가 되는 재료 곧 자연물 환경 인물의 행동 감정 같은 것  ■ 수사학(修辭學) : 역사 전설 도덕 철학 등의 산문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적 기능만을 활용하여 짓는 시  ■ 스토리 : 소설, 희곡, 영화 등의 내용상의 줄거리. 이야기  ■ 시점(視點) : 소설에서 서술자가 사건을 서술해 나가는 시각 4가지로 나뉘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이다  ■ 시튜에이션 : 상황 어떤 인물이 처한 정세를 가리킨 것으로 연극 소설 영화 등에서 결정적 장면을 말함  ■ 시학(詩學) : 시에 대한 조직적 체계적 이론으로 시의 본질과 분류, 형식과 기교, 효용, 그 밖에 다른 예술과의 관계, 시의 기원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엽까지의 유럽 문학 사조를 가리킨다, 신고전주의는 사람의 불완전성을 강조하고 고전 문학에서 발견한 자연의 보편성, 조화, 균형, 합리성을 더욱 철저히 방법적으로 따르기를 주장하였다.  ■ 신비평(新批評) : 1930년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문예비평으로 작품을 독립된 자율적 산물로 보고 작품의 언어 기능을 세세히 분석 설명하고자 하는 비평 태도  ■ 신파극(新派劇) : 신파 연극의 준말 재래의 전통적인 창극의 테두리를 벗어나 현대의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 등을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 개화기로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다.  ■ 신화(神話) : 구전되는 신들의 이야기. 한 집단이나 민족의 기원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 민족이 살아 남기 위한 투쟁, 지도 이념, 삶과 죽음, 인간의 미래 등 한 민족 내지 인류 전체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 것  ■ 실존주의(實存主義) : 실제로 존재하는 체험적 개인의 상황 자체가 중요하며 개인의 실존은 비합리적이라는 입장 실존주의 문학은 인간 존재를 그 근원적 부조리성에서 추구하는 것.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앙가주망도 여기에서 나왔다.  ■ 실험 소설(實驗小說) : 작자의 상상적 행위를 떠나서 작자 자신이 관찰 실험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구성하는 소설 자연주의 작가인 프랑스의 에밀 졸라가 주장하였다.  ■ 심리 소설(心理小說) : 인간의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소설 평면적인 심리뿐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 파고 드는 초현실주의 작품까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 심리주의 비평(心理主義批評) : 비평 양식이 한 갈래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자의 심리를 재구성하든가 정신 분석학의 원리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든가 하는 비평  ■ 심볼 : 상징 인간이나 사물 추상적인 사고를 그 연상에 의해 표현하는 것  ■ 심상(心像) : 이미지  ■ 아이러니 : 반어법, 수사학에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말의 표면상 의미 뒤에 숨어 그와의 반대의 뜻을 대조적으로 비치는 표현 형식  ■ 악한 소설(惡漢小說) : 악한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16세기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서 스페인 어로 악한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 알레고리 : 흔히 풍유 또는 우유라고도 함 표면적으로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합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 구조를 가진 작품  ■ 앙가주망 : 사회 참여, 현실 참여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주창하였다.  ■ 애매성(曖昧性) : 신비평의 용어 함축적 의미의 언어가 사용되는 시에서 상식적인 의미 이외에 풍부한 암시성을 수반하거나 동시에 둘 이상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융통성 복합적 의미 풍부한 의미라는 뜻으로서 난해성과는 구별된다.  ■ 액자(額子) 구성 : ㉠외부 이야기(外話)속에 내부 이야기(內話)가 들어 있는 구성 방식. ㉡외부 이야기가 액자의 역할을 하고 내부 이야기가 핵심 이야기가 된다. ㉢액자는 내부 이야기를 도입하고 또 그것을 객관화하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예) 김동인의 '배따라기', 김동리의 '무녀도' 등  ■ 어조(語調) :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물과 독자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말의 가락  ■ 에피소드 : 이야기나 소설 등의 본 줄거리에 딸려 부분적으로 끼어 넣는 이야기 삽화  ■ 에필로그 : 시, 소설, 연극 등의 종결부 프롤로그와 대립  ■ 역사 소설(歷史小說) : 역사상의 사실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 대개 교훈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 역사주의(歷史主義) :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과 사상과 문학적 전통과 관습 등의 포괄적인 문맥 속의 적절한 자리에 되돌려 놓여져야만 그 의미와 본질이 밝혀진다는 이론적 주장  ■ 역사주의 비평(歷史主義批評) : 비평 양식의 한 갈래 작가가 처해 있던 역사적 환경을 근거로 실증적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비평  ■ 역설(逆說) :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은 표현이나 사실은 그 속에 진리를 품은 말. 패러독스  ■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은 오직 미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주장으로 유미주의자들이 내세운 구호에서 비롯되었으며 미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함  ■ 오버랩 : 영화에서 어떤 화면 위에 다른 화면이 겹쳐지는 것으로 시간 경과에 대한 생략의 의미로 쓰인다.  ■ 용명(溶明) : 화면이 차차 밝아 옴. 한 장면이 시작할 때 쓴다.  ■ 용암(溶暗) : 화면이 차차 어두어짐. 한 장면이 끝날 때 쓴다.  ■ 외연(外延) : 한 낱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 지시적 의미라고도 하며 내포와 대립된다  ■ 우화(寓話) : 인간의 정화를 인간 이외의 동물, 신 또는 사물들 사이에 생기는 일로 꾸며서 말하는 짧은 이야기로서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  ■ 우화 소설(寓話小說) : 인격화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 운율(韻律) : 시의 음악적 요서 같은 소리의 반복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운이라 하고 말의 고저 장단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율이라고 한다.  ■ 원관념(元觀念) : 어떤 말을 통하여 달리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 생각 보조 관념과 대립  ■ 원형(原形) : 근본적인 형식으로 그것으로부터 많은 실제적 개체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프레이저의 인류학과 융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문학 비평에 이 방법이 원용되어졌다. 인간의 원초적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되어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유전되며 그것이 문학에서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입장  ■ 위트 : 기지 사물을 신속하고 지적인 예지로 인식하여 다른 사람이 기쁘게 즐길 수 있도록 교묘하고 기발하게 표현하는 능력  ■ 유미주의(唯美主義) : 탐미주의라고도 함 미를 최고의 것으로 보고 여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로서 문학 예술의 목적을 도덕이나 실용성에서 분리시켜 미 자체를 추구하는 것  ■ 율격(律格) :  율, 즉 말의 고저 장단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음악적 격식 은유처럼 같이 등 연결어가 없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결합시켜 나타내는 비유법의 하나. 'A는 B이다', 'A의B'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 음보(音步) : 시의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어절로서의 최소 단위  ■ 음성 상징(音聲象徵) : 시적 표현에서 음성 자체가 감각적으로 떠올리는 표현 가치를 이른다.  ■ 의미 작용 : 문학 작품의 내적 구조 관계를 통해 자율적으로 의미를 산출해 내는 일  ■ 의식(意識)의 흐름 : 인간의 잠재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하는 문학상의 수법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이 기법으로 쓰여진 유명한 작품이며 이상의 날개도 이런 유의 작품에 속한다.  ■ 이미지 : 오관을 통한 육체적 지각 작용에 의해 마음속에 재생된 여러 감각적 현상 심상 영상  ■ 이미지즘 : 일차 대전 말기 영미의 시인들이 사물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써 명확한 심상을 제시하고자 창도한 문학 운동으로 이미지의 색채와 율동을 중시하고 적확한 용어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려고 했음  ■ 인본주의(人本主義)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에 따라 다름으로 휴머니즘의 내포적 의미를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 인상주의(印象主義) : 회화나 조각에 있어 자연에 대한 순간적인 시각적 인상을 중시하고 여러 가지 기교로 인상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주의와 그 작가들을 말함  ■ 자기화(自己化) : 문학 작품 통해 얻어지는 여러 가치를 자기 변화의 동기로 삼는 일  ■ 자연주의(自然主義) :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문예사조로 진화론 물질의 기계적 결정론 실증주의 등의 사상을 배경으로 일어났으며 생물학적, 사회 환경적 지배하에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자연 과학자와 같은 눈으로 분석 관찰하고 검토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자유시(自由詩) : 전통적인 정형적 리듬을 벗어나 자유로운 리듬의 가락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의 현대시  ■ 자율성(自律性) : 문학 작품이 그 자체의 내적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는 특성  ■ 장르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갈래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 전기(傳記) : 괴이한 내용으로 엮은 문학 작품  ■ 전기 문학(傳記文學) : 개인 생애의 행적 을 주제로 한 문학  ■ 전설(傳說) : 실재하는 장소 시대 인물을 구체적 내용으로 하는 설화로서 지방의 구체물에 결부되어 토착성, 고정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 전원 문학(田園文學) : 전원을 무대로 한 문학 궁정이나 문명 사회의 유폐를 통탄하는 심정에서 목자의 생활을 찬미하여 노래한 시  ■ 정화 작용(淨化作用)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울적한 공포에 질린 감정을 해소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카타르시스  ■ 주지주의(主知主義) : 종래의 주정주의에 대립하여 감각과 정서보다 지성을 중시하는 창작 태도와 경향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 성했다.  ■ 지문(地文) : 희곡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등을 지시하여 서술한 글  ■ 지시적 의미(指示的意味) : 사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의미  ■ 직관(直觀) : 판단 추리 등의 사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작용.  ■ 직유 : '처럼', '같이' 등을 사용하여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해 주는 말에 의해 나타내는 비유법  ■ 참여 문학(參與文學) :  문학의 현실 참여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경향의 문학.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1960년대 이후 제기됨  ■ 창극(唱劇) : 민속 악극의 하나 배역을 나누어 판소리를 연창하는 극  ■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 쉬르리얼리즘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1920년대에 다다이즘에 이어 프로이트의 심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성의 미학 도덕과는 관계없이 내적 생활의 충동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 초점(焦點) : 주의에 상상적인 작품의 제재가 집중된 중심 초점은 한 작품 속에서 순간 순간 이동될 수도 있고 지속적으로 고정될 수도 있음  ■ 추체험(追體驗) : 작품을 읽으며 자신을 작품 속의 인물과 같은 입장에서 그 작품 세계를 행동하고 경험하는 것  ■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공포와 연민을 통해 감정을 해방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 캐릭터 :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혹은 인물의 성격  ■ 커팅 : 영화에서 하나의 장면을 잘라 다음 장면으로 변환 접속하는 것으로 각 장면의 전환을 뜻한다.  ■ 콩트 : 장편소설(掌篇小說) 혹은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도 함 프랑스에서 발달함 200자 원고지 20-30매 이내의 미니 소설로 기지와 풍자로써 인생의 어떤 측면을 경묘(경쾌하고 교묘함)하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임  ■ 클라이맥스 : 전개 부분이 확대 또는 상승되는 부분 정점 소설에서의 갈등이 가장 심화되는 부분을 말함  ■ 테마 :  작품 속에 나타난 중심 사상이며 작품 속에 구현되어진 의미여 제재에 대한 해석이다. 창작 과정으로 보아서는 동기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음 주제  ■ 텍스트 :  주석 번역 서문 및 부록에 대한 본문 원문 원전을 말한다.  ■ 패관 문학(稗官文學) : 설화 문학 패관이 채집한 가설 항담에 패관의 창의와 윤색이 가미되어 일종의 문학 형태를 갖추게 된 문학  ■ 패러디 : 어느 작가나 시인의 내용 문체 운율 등을 모방하여 풍자적으로 꾸민 작품  ■ 폭풍 노도(暴風怒濤) : 1770-1780년 무렵에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적 문학 운동 합리적인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격렬한 감정과 개성을 존중했다.  ■ 표현주의(表現主義) :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특히 연극 분야에서 성행했다. 작가 개인의 강력한 주관적 표현을 내세운다.  ■ 풍유법(諷諭法) : 본래의 뜻을 감추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이상의 깊은 내용이나 뜻을 짐작하게 하며 흔히 교훈적인 수사법. 알레고리  ■ 풍자(諷刺) :  인간의 약점 사회의 부조리 비논리 같은 것을 조소적으로 표현하는 수법  ■ 프로 문학 : 프롤레타리아 문학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을 강조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반영하는 문학 맑스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문학. 우리 나라에서는 1925년 결성된 카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플롯 : 소설, 희곡, 각본 등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줄거리 또는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을 하나로 얽어 짜는 일과 그 수법  ■ 피카레스크 소설 : 악한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소설로 악한 소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서 스페인 어의 '악한(picaro)'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 함축적 의미(含蓄的意味) : 문학 작품에 있어서 내부 구조를 통해 드러내는 의미 지시적 의미의 반대되는 뜻으로 쓰인다.  ■ 해학(諧謔) :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며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인간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이나 실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극복하게 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다.  ■ 허구 소설(虛構小說) : 희곡 등에서와 같이 실제로는 없으나 있을 법한 사건을 작자의 상상력으로 꾸며내는 일 소설 작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픽션  ■ 형식주의(形式主義) :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 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를 분석 평가하는 문학론. 구체적으로는 러시아 형식주의를 지칭하며 신비평은 여기서 나왔다.  ■ 휴머니즘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심적 태도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띤다. 인도주의  ■ 희극(喜劇) : 연극의 한 갈래로 웃음을 자아내며 행복한 종말을 낳게 하는 형태로서 개인의 교양과 속해 있는 사회 습관 전통에 따라 다양한 면을 갖고 있음  
2    서양 문예사조의 흐름 댓글:  조회:635  추천:0  2018-10-19
서양 문예사조의 흐름     1. 서양 문예사조의 바탕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1) 헬레니즘(Hellenism) : 고대 그리스의 예술, 철학, 정치 등 여러 분야에 나타난 문화적 이상(理想)을 뜻한다.            현세적(現世的), 사실적(事實的), 물질적 경향을 띤다.   (2) 헤브라이즘(Hebraism) : 헬레니즘에 대립하는 사조로 고대의 유태교적 종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다. 내세적           (來世的), 이상적(理想的), 정신적, 금욕적이며 신의 의지(意志)를 인정하고 이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2.서양 문예사조의 주류적(主流的) 계보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고전주의 → 낭만주의 (17,8세기)                          ↓                       사실주의 → 자연주의 → 유미주의 → 상징주의 (19세기)                                                               ↓                           행동주의 ← 주지주의 ← 초현실주의                              ↓ (20세기)                           실존주의     [보충설명]          ■ 헬레니즘-'고전주의→사실주의→자연주의'로 전개          ■ 헤브라이즘-'낭만주의→유미주의→상징주의'로 전개    3. 서양의 근대 문예사조     (1) 고전주의(古典主義;classicism) : 헬레니즘을 직접 계승한 사조. 16,7세기 문예 부흥기에 유럽 예술 전반에            나타났던 경향. 인생에 대하여 이지(理智)와 감정(感情),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얻는 것에 미(美)의 주안점을           두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예술을 모방하려 했다. 고전주의의 특징은 조화(調和)와 완성, 통제와 형식미에           있다.          ▶ 대표작가 - 프랑스(코르네유, 몰리에르) 영국(셰익스피어, 드라이든) 독일(괴테, 레싱) 등     (2) 낭만주의(浪漫主義;romanticism) : 통제와 형식의 사조인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조.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초에 유럽 전체를 지배했던 경향. 개성을 존중하여 자유 분방을 구가하고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해             형식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감정의 해방, 미지의 세계 동경, 끝없는 공상, 미묘한 정서, 자연에 대한 열애            등의 특징을 갖는다.           ▶ 대표작가 - 독일(실레겔, 노발리스) 프랑스(샤토브리앙, 위고) 영국(바이런, 셸리, 키츠) 등     (3)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 : 19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인간의 상상력에 주안점을 둔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            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한 문예운동. 현실을 과장하거나, 주관적으로 파악하여, 그 사물과 현실의            개성적인 면을 묘사하며, 추악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특징이 있다.             사실주의가 문예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기계 문명이 발달하고,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유행한 콩트 류의 실증 철학(實證哲學) 등이 그 바탕이 되어 사실주의의 개화를 보게 되었다.           ▶ 대표작가 - 프랑스(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영국(디킨스) 러시아(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등     (4) 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 : 사실주의가 극단적으로 흐른 결과에서 나온 사조. 모든 것을 논리와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실증주의적 사고 방식을 배경으로 출발, 인간과 세계를 자연 과학의 이론과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문학 운동. 인간을 하나의 자연물로 보고, 작자의 주관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인간의 행동             이나 생각을 자연 과학적 법칙에 따라 서술하는 특징이 있다.           ▶ 대표작가 - 프랑스(졸라, 모파상) 영국(무어, 기싱, 코난 도일) 독일(하우프트만) 노르웨이(입센) 등    4. 서양의 현대 문예사조     (1) 유미주의(唯美主義;aestheticism) : 미의 창조를 언어 예술의 지상 목표로 삼는 경향. 탐미주의(耽美主義),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사실주의 내지 자연             주의와 상반된 하나의 흐름이다. 그 특징으로, 첫째 인공(人工)을 중시하고, 둘째 인간적 의의와 내용보다             예술적 형식이나 기교를 중시하며, 셋째 참신(斬新)과 신기(新奇)를 중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대표작가 - 프랑스(플로베르, 고티에) 영국(페이터, 와일드)     (2) 상징주의(象徵主義;symbolism)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주로 프랑스 시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사조.            유미주의처럼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이며 유미주의의 일면을 계승, 심화시킨 것이다. 자연주의나 사실            주의는 객관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데 불과하나, 이것은 하나의 문헌이나 사진이지 예술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지성화된 감성으로 내면 세계를 통해 정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하였다.           ▶ 대표작가 - 프랑스(말라르메, 랭보, 베를렌, 발레리) 독일(게오르게, 릴케) 아일랜드(예이츠)                                오스트리아(호프만슈탈) 등     (3)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surrealism) : 1차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사조. 합리주의나 논리적            사고를 부정하고 오로지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논쟁으로 발생하는 생각이나 느낌, 곧 잠재             의식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잠재 의식이야말로 순수한 상태의 인간 정신이며 인간을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게 해 준다는 신념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에서는 시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논리적 순서 없이 그대로 배열하는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을 사용하는데 소설에서는 이를 '의식의 흐름'            이라고 한다.           ▶ 대표작가 - 프랑스(부르통, 푸르스트) 영국(조이스, 울프) 등     (4) 주지주의(主知主義;modernism) : 1차 대전 후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적 경향. 원래는 20세기 초에 나타난           예술상의 여러 사조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지적(知的) 언어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영.미의 경향(imagism)만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윤곽이 선명한 시, 명확한 이미지의 창조, 음악성의           배격 등의 특징을 보여 준다.           ▶ 대표작가 - 영국(흄, 파운드) 미국(엘리어트) 등     (5) 행동주의(行動主義;behaviourism) : 1차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조. 세기말 사상이나 초현실           주의에 내재하는 허무적 경향을 배격하고 인간의 객관적 행동을 주로 다루는 경향이다. 현대인의 불안과           절망을 인간의 내면 의식 탐구가 아니라 사회적 행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따라서, 문학의 소재도 스포츠, 여행, 연애, 혁명, 전쟁 등 행동적 세계에서 취하였으며, 2차 대전 후에는 더욱           적극적인 행동성을 보여 실존주의(實存主義)를 파생시키기도 했다.            ▶ 대표작가 - 프랑스(말로, 지드, 생텍쥐베리) 미국(헤밍웨이) 등     (6)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 : 2차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철학적 경향. 인간의 내면적 본질           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을 중시하여, 현대인이 처한 고뇌와 허무 등의 상황 속에서 적극적 의미를 찾으려 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 철학은 인간성 일반에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으나 실존주의는 인간 개개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존재[실존(實存)]로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한 것이다. 이 실존의 개념을 문학에 적용한 것이           실존주의 문학이다. 이 문학은 2차 대전 후 유럽을 뒤엎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태동한 것이니,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고뇌, 허무성을 들추어 냄으로써 어떤 적극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수법을 썼다.            ▶ 대표작가 - 프랑스(사르트르, 카뮈) 오스트리아(카프카) 등    [보충 설명]  ▣고전주의 - 형식미를 존중하고, 이성(理性)을 중시. 유형적, 보편적 미의 추구. 연극에서 삼일치(三一致) 중시.            시에서의 정형성 중시  ▣ 낭만주의 - 격렬한 생명감을 표현하려는 문학 운동에서 출발. 음악적, 주관적 양식이며 미의 다양성을 지향하고           개성을 중시함. 무한의 이념을 추구함  ▣ '문예사조'의 뜻 - 특정한 시기의 특정 사회에서, 하나의 공통적 흐름으로 나타나는 문학상의 경향  ▣ 작가와 '문예사조' - 한 작가나 작품을 특정한 문예사조 속에 고정시켜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 사실주의 - 산업혁명 이후 제재의 범위가 넓어지고 인간의 일상적 실재성(實在性)이 크게 문제된 데 따른 현실의            기록적 태도가 바탕이 된 사조  ▣ 자연주의 - 생물학적 인간관. 실험, 관찰에 의한 분석 중시. 인간의 추악성 폭로  ▣ 유미주의 - 세기말(世紀末) 사조의 주축을 이루며 그 한 가닥은 상징주의에 계승되었다.  ▣ 세기말 사상 - 19세기 말 유럽에 나타난 퇴폐적 경향. 도덕이나 예술에서 일체의 전통을 부정하고 찰나적, 관능적,            향략적 풍조로 나타남  ▣ 상징주의 - 현대시의 가장 대표적 사조. 표현 방법에 있어서 언어의 음성 현상에 의한 미묘한 음악성을 중시하는            한편 명징(明澄)한 표현보다는 모호한 표현을 하였다.  ▣ 초현실주의 - 합리주의적, 논리적 질서를 배격하고 순수한 정신 세계의 조화와 질서를 추구. 어휘의 사전적 의미            보다 연상적 의미, 즉 환기 작용을 중시하고, 따라서 의미의 연결보다 이미지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 주지주의 - 감정보다는 지성을 존중하며 시에서의 회화성(시각적 심상)을 중시하며 탐미적, 관능적, 몽환적인             경향에 반대하였다.  ▣ 행동주의 문학 - 작가가 사는 방법으로서 서재형(書齋型)과 반대로 몸소 실천으로 보여 준 점에 이 문학의 의의가            있으며 사르트르 이전의 참여 문학이기도 하다.  ▣ 실존주의 문학 - 현대의 위기적 상태에서 믿을 것은 자기 존재 이외에 없다는 극한적 개인주의 문학이다.  ▣ 상황론 -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한계 상황. 인생은 순간마다 단절하며 이것을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 행동            함으로써 연속시켜 나갈 때 삶의 한계가 드러난다는 주장.   --- 출처: http://mskorean.com.ne.kr/midkor/mast/munyea2.htm  
1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댓글:  조회:1227  추천:0  2018-10-19
★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현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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