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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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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 제 4장 : 몽상가의 '코기토'(1)/ 제5장); 몽상과 우주(1) 댓글:  조회:887  추천:0  2018-10-20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 4장 몽상가의 ‘코기토’ (1)   **너 자신을 위해 붉은 밀과 연기의 꿈이 되어라 (...) 너는 결코 늙지 않으리라. -장 루슬로,   **항상 손안에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삶은 견딜 수 없다. -모리스 바레스    **밤의 꿈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산이 아니다. 밤들은 이야기가 없다. 그것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감성은 우리가 밤의 심연으로 접근하는 것을 도와준다. “마치 밤에 꿈들이 자리에 없는 자를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다른 잠자는 자에 의해 형성되는 꿈들이 있다고 믿는다. 자리를 비우는 존재에게서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 이것이 절대적인 달아남이고, 존재가 지닌 모든 힘들의 포기이며,우리 존재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흩뿌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대적인 꿈 속에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존재의 그런 재앙으로부터 무엇을 되찾을 수 있는가? 밤의 생활에는 우리가 묻혀버리고 우리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의향이 없는 그런 심층이 존재한다. 그런 심층에서 내밀하게 우리는 무(무 ne’ant) 우리의 무를 스쳐간다. 밤에 일어나는 모든 소멸은 우리 존재의 이와 같은 무로 수렴한다. 극단적인 경우, 절대적인 꿈은 우리를 무(Rien) 세계에 잠기게 한다. -무 (Rein): 네앙, 여명의 상태, 니힐(허무, 텅빔)이지만 생물학적인 면, -무 (ne’ant) -無 (철학적 없음)   **우리는 이 무(Rien)가 물로 가득 찰 때 생명을 다시 얻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론적 드라마에서 구원되어 보다 잘 자게 된다. 깊은 잠의 물속에 잠길 때, 우리는 평화 속에서 한 세계와 균형있게 존재한다.   무(Rien)나 물속에는 이야기 없는 꿈들, 절멸의 관점에서만 밝혀질 수 있을 꿈들이 존재한다. **나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나는 꿈꾸는 실체이다. “그때 꿈은 꿈꾸는 실체 속에 더없이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될 터이다.” 우리는 사유를 반박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꿈은? 꿈꾸는 실체의 꿈은? -이와 같은 꿈꾸는 실체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그렇다. 모든 것은 밤의 형이상학의 문턱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그처럼 멀리 나아가기 전에, 아마 밤의 정신이 꾸는 꿈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영역에 있는 보다 덜한 미흡 존재 속에 잠기는 현상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밤의 꿈의 코기토가 아니라 몽상의 코기토를 다루면서 깊이 생각해 볼 것.   ****인간 정신 현상의 시적인 힘 —단순한 몽상의 특수성을 분명히 도출하려고 시도하면서 우리의 연구를 단순한 몽상에 집중시키는 것. 밤의 꿈과 몽상의 근본적 차이, 즉, 밤에 꿈을 꾸는 자가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그림자인 반면에, 몽상하는 몽상가는 그가 다소라도 철학자라면 몽상하는 자아의 중심에서 하나의 코기토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상은 의식의 섬광이 존속하는 몽환적 활동이다.   **몽상이 태어나게 되는 것은 긴장 없는 자각 속에서이고, 즐거움을 주는 이미지 —이 이미지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떠한 책임도 벗어나 몽상의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그것을 방금 창조했기 때문이다. --를 맞이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수월한 코기토 속에서이다.   **몽상하는 자의 존재는 그가 자극하는 이미지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미지는 우리를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고 우리의 깨어남은 하나의 코기토로 알려진다. 또 한 번의 가치 부여를 하면 우리는 긍정적인 몽상 앞에 있게 되며, 이 몽상은 그것이 산출하는 것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무언가 산출을 하며 시적인 몽상이라 명명될 수 있다. 몽상은 몽상가 주변에 존재를 결집시킨다. 그것은 그에게 그가 현재의 존재 모습 그 이상이라는 환상을 준다. 몽상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우리를 존재론의 뉘앙스로 초대한다. 이러한 존재론은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락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몽상이 없이는 안락도 없다. 안락이 없이는 몽상도 없다. (존재는 하나의 가치!)   **생각하는 코기토는 방황하고, 기다리며 선택할 수 있다 —몽상의 코기토는 곧바로 그것의 대상,그것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위대한 몽상가는 반짝이는 의식의 대가들이다. 일종의 다원적인 코기토가 한 편의 시의 닫혀진 세계 속에서 소생한다. 아마 이 시의 총체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의식적인 힘이 필요할 것이다. (텍스트 195쪽까지)   **코기토적 몽상에 대한 의미부여:     **내 시적 가치는 어떤 코기토를 지향하는가?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5장; 몽상과 우주(1)   **“영혼이 있는 인간은 우주에만 복종한다.” —가브리엘 제르맹   **“나는 매우 방대한 금언 속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우주가 필요했다.” -로베르 사바티에   **몽상을 하는 자가 일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관심사들’을 물리쳤을 때, 그가 타자의 근심으로부터 오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때, 그리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기 고독의 장본인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운 측면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몽상가는 자신 안에서 열리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갑자기 그런 몽상가는 세계의 몽상가가 된다. 그는 자신을 세계로 개방시키고 세계는 그에게 자기를 개방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을 몽상하지 않았다면, 세계를 결코 잘 보지 못한 것이다. .....시간은 정지된다. 시간은 더 이상 어제도 내일도 없다. 시간은 몽상가와 세계의 이중적 깊이 속에 매몰된다.   **이성적 인간은 아마 도취라는 낱말을 추상적인 낱말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도취가 진실하도록 시인은 세계의 잔에도 마신다. 그에게 은유만으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예컨대 확대된 잔의 우주적 이미지는 이렇다.   “수평선이 가장자리를 이루는 내 잔에도 나는 한 잔 가득히 창백하고 얼음장 같은 태양빛을 단숨에 꿀꺽 마신다.“ -피에르 샤퓌   **피에르 샤퓌의 매력은 용어들의 이례적인 결합과 은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확대되는 변화 정도를 따라가는 독자에게 모든 것은 위대함 속에 결합된다. 시인은 방금 세계의 잔에다 구체적으로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고독한 몽상 안에서 우주적 몽상을 하는 자는 '관조하다'라는 동사의 진정한 주체이고, 관조가 지닌 힘을 첫 번째로 증언한다. 몽상하면서 응시하는 것은 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해한다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지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몽상하는 눈은 보는 게 아니거나 최소한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 우주적인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지각 이전이라고 지칭해야 할 상태에서 살도록 해준다. 몽상가와 그의 세계 사이의 소통은 고독한 몽상 속에서 아주 가까우며 ‘거리’가 없다. 지각된 세계, 지각에 의해 파편화된 세계를 나타내는 그 거리 말이다.   ** -하나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사상가들이 기나긴 반성의 길을 그리는 반면에 우주적 이미지는 즉각적이다. 그것은 부분보다 먼저 전체를 우리에게 준다. 그것은 그것의 기호들 가운데 하나로 우주를 붙들고 있다. 단 하나의 이미지가 전 우주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묶어둔다. --과일은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약속이고, 세계에 존재하도록 권유하는 초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적 상상력이 이와같은 근본적 이미지에 작용할 때, 거대한 과일은 세계 자체이다. 달과 대지는 과일 맛이 나는 별들이다.   “오 대지처럼 둥근 침묵 말없는 별의 움직임 점토질 핵을 중심으로 한 과일의 인력.” --장 케이론   --이처럼 세계는 둥근 모습으로, 과일 같이 둥근 모습으로 몽상된다. 그때 행복은 세계로부터 과일로 역류한다.   **시인이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에 위대함의 운명을 부여하자마자 하나의 특수한 우주가 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시인은 현실적 대상에 자신의 상상적인 분신, 자신의 이상화된 분신을 부여한다. 이 이상화된 분신은 곧바로 이상화 작용을 하며, 그렇게 하여 확대되는 이미지로부터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다.   **몽상과 이미지 –4원소   **확실히 이미지는 우주적 생성에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몽상의 통일적 단위가 된다. 몽상가가 자신의 몽상 속에서 ‘사물의 심층’으로 내려갈 때, 몽상이 우주와 실체가 결합하며 모든 것은 위대하고 동시에 안정적이다. 인간이 세계의 통일적 단위를 주장하기 위해 예로부터 끊임없이 상상해 왔던 ‘4원소’라는 물질의 상상력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매우 자주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주적인 이미지들의 작용에 대해 몽상했다. 우리가 우리의 불 앞에서 몽상에 잠기면, 상상력은 이 불이 한 세계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샘 앞에서 몽상을 하면, 상상력은 물이 대지의 피이고, 대지는 살아있는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부드럽고 향기 나는 반죽을 손가락에 느끼면 세계의 실체를 반죽하기 시작한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우주적 물질에 의해 실체화된 세계들에 대한 분명한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꿈이었다. 몽상을 몽상하고,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보다도 더 과감한 몽상: 우주생성론은 사유를 조직화하지 않았다는 것, 과감한 몽상이며 신화의 환상태로 몽상했다는 것, 그 중 “물은 원소들 가운데 가장 신화적인 것”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이미지의 우주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우주적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에 거주케 한다. 그것은 몽상가에게 상상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상상된 세계는 확장되는 자신의 집, 방 안에서 느끼는 자신의 집과는 반대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몽상하면서 끊임없이 떠나고, 다른 곳 -언제나 안락한 다른 곳-에 거주한다. 몽상된 세계를 잘 지칭하기 위해선 그 세계를 행복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   **우주적 이미지는 구체적인 휴식을 우리에게 준다. 이러한 휴식은 어떤 욕구, 어떤 식욕에 부응한다. “세계는 나의 재현이다”라는 철학자의 일반적 표현을 ‘세계는 나의 식욕이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야 한다. ‘물어뜯는다’는 행복 이외에 다른 ‘염려’ 없이 세계를 물어뜯는 것, 이것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어뜯기는 세계에 대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인가.   “부드러운 살, 강한 이빨, 총체적 존재의 얼마나 대단한 조화이고, 얼마나 대단한 통일성인가!” -장 발(철학자)   “물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능한 유일한 증거, 가장 설득력 있고 가장 내밀하게 진실한 증거---그것은 목마름이다.” -프란츠 폰 바아더   **각각의 식욕마다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때 몽상가는 세계의 실체들 가운데 하나에서 영양을 취하면서 세계에 참여한다. 이 실체는 그의 상상력의 기질에 따라 밀도가 높거나 낮고, 따뜻하거나 부드러우며, 투명하거나 어스레한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이 세계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갱신하면서 몽상가를 도와주러 올 때, 몽상가는 우주적 건강에 다다른다.   ##나에게 찾아온 우주 맞이하기 – 내가 창조한 우주적 이미지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기:   ##이민숙 : 바람 연작시, 하화도 연작시,  
8    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제3장)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댓글:  조회:1101  추천:0  2018-10-20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4) : (텍스트 138쪽~ )   **지극히 먼 추억을 추구하는 시인은 자기 이야기의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추억보다 더 큰 근본적인 가치, 어떤 의지처를 원한다.   “내가 추억한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내가 다만 원했던 것은 약간의 소금이고 나를 알아보고 다시 떠나는 것이네.“   **감각이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어린 시절’ 안에서 세계와 결부시키는 이 광물적 꿈, ‘원소들’의 그 꿈을 감성적인 것의 고고학에서 되찾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나이는 광물적 꿈이 아닐까? (의미 생각해 보기: )   **시인이 기억할 줄 모르는 영역은 어떤 저편인가? 근본적인 삶은 영원의 시도가 아닌가?   **우리가 삶의 시작에 대해 명상할 때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기억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몽상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기원에 대해 몽상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망각이 우리를 죌 때, 과거를 돌파하기 위해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다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우리에게 ‘기억의 과감성’을 가르쳐 준다.   “꾸며내라, 기억을ㅡ 깊은 곳에 소멸된 축제는 없다.”   (생각해 보기) : 기억 속의 추억을 향하여 시적인 문장 하나: @ @   **어린 시절은 인간적 물이고, 어둠에서 나오는 물이다. 안개와 섬광 속에 있는 그 어린 시절, 완만한 모호한 영역 속에 있는 그 어린 시절, 완만한 모호한 영역 속에 있는 그 삶은 우리에게 탄생들의 어떤 두께를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시작했던가! 그러나 흘러가 사라져 버린 원천은 얼마나 많은가! 몽상은 상상력의 기억술이다.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운명이 사용할 줄 몰랐던 가능성들과 접촉한다.   **어린 시절은 존재의 우물: 그리하여 하나의 원형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몽상할 때면, 나는 내가 또 다른 원형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잘 안다. 우물은 하나의 원형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안 라몬 히메네즈- “우물! 그 얼마나 깊고 ,청록색이며,신선하고 잘 울리는 낱말인가1 돌면서 어두운 땅을 파 신선한 물에까지 이르는 게 이 낱말 자체인 것 같지 않은가”   **순수한 추억, 무용한 어린 시절의 그 무용한 추억은 얼마나 자주 몽상의 양식처럼, 우리가 잠시 삶의 여백에서 살도록 도와주는 비(非)삶의 혜택처럼 되돌아오는가. 휴식과 행동, 몽상과 사유의 변증법적 철학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은 무용한 것의 무용성을 꽤 명료하게 말해준다.   **시인이 체험하는 ‘미소 짓는 그리움’ 속에서 우리는 그리움과 위안의 이상한 종합을 실현하는 것 같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우리로 하여금 매우 오래된 슬픔을 용서하게 해준다. 그 어떤 옛날의 분위기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억을 탈사회화해야 한다. 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초창기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가르쳐 준 그 모든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 언급되고 이야기된 추억들을 넘어서, 우리는 어린아이의 영혼이라는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총합인 미지의 존재를 되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아이 전체가 놀라운 존재이고, 존재의 놀라움을 실현하는 존재인 때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달력의 톱니바퀴로부터 해방된 부동의 어린 시절, 변전이 없는 어린 시절을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삶을 부코의 이름을 통해서만 나타내면서 일상의 시간을 매일 배급하는 존재인 성인들의 시간도 인간들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위대한 네 신(神)인 사계절이다. 순수한 추억은 날짜가 없다. 그것은 계절이 있다. 그 계절은 추억의 근본적인 흔적이라는 계절이다. 잊기 어려운 그날 태양은 어떠했고, 바람은 어떠했던가? 이것이 무의지적인 기억의 어김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다. 그렇게 하여 추억은 커다란 이미지, 확대되고 확장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것은 어떤 계절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이 계절은 속이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완벽의 부동성 속에서 휴식하는 총체적 계절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이 총체적 계절인 이유는 그것의 모든 이미지들이 동일한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요, 우리가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겨울, 가을, 태양, 여름의 강은 총체적인 계절의 뿌리들이다. 그것들은 시선을 통한 광경들일 뿐 아니라 영혼의 가치들이며, 직접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부동의 심리적 가치들이다. 기억 속에서 체험될 때, 그것들은 언제나 호의적이다. 추억의 계절은 미화한다.-우리가 몽상하면서 어린 시절의 계절이 지닌 단순함의 깊이로, 그것의 가치의 중심 자체로 내려 할 때, 그것은 시인의 계절이 된다.   **모든 어린아이는 신화적이고 당연히 신화적이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어른들처럼 화석화된 이야기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우화들로 살아간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자신의 몽상 속에서 자신의 우화들, 그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그런 우화들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화는 삶 자체이다.   “나는 내가 나의 우화를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우화는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매혹시킨다. 우리는 매혹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꿈을 말하려는 데 성숙한 나이의 속에서 애를 태우기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꿈은 그것의 언어를 배울 수 있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 -데이비드 소로-     (빗살의 시간과 몽상)     -우리의 우화를 복원하는 시간, 우리의 어린 시절 우화의 가장 선명한 장면은?       -우화는 현실적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드러내고 싶은 몽상적 사건: 그 사건에 의미부여하기.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5) : (텍스트 153쪽~ )     **시적 실존주의 → (상상력×기억의 융합) :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념적 특권을 강제하는 역사가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추억의 장소들에 충분히 머물지 않은 채 날짜들에 따라 달려가는 기억은 살아있는 기억이 아니다.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발적인 것들에서 벗어나는 시적인 것의 실존주의로 비(非) 실존주의를 체험한다. 추억하면서 상상하는 몽상 속에서 우리의 과거는 실체를 되찾는다. 인간 영혼과 세계의 관계는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 강력하다. 그때 우리의 내부에서는 이야기의 기억이 아니라 우주의 기억이 살고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들이 되돌아온다.   “권태는 지방이 주는 가장 큰 행복이다. 나는 격렬함을 통해 우리의 내부에서 몽상을 끌어내는 그 심층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태의 소리를 듣는다.” --그런 시간들은 되찾은 상상력 속에서 영속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고요의 세계 속에, 몽상의 세계 속에 있었다. 삶을 지배하는 어떤 삶 속에서, 지속하지 않는 어떤 지속 속에서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복원시켜 줄 줄 아는 매력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기억은 매우 생생한 상상력, 다시 말해 감동을 주기 쉽고, 따라서 과거의 장면들을 삶의 매혹처럼 제시함으로써 그것들을 매 감각에 의지해 환기시킬 수 있는 상상력 속에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들레르   **몽상은 폭넓은 촬영이 되도록 충분한 빛으로 현실을 둘러싼다. (추억의 촬영, 일종의 본능) -수완 있는 사진작가는 자신의 스냅사진에 어떤 지속, 아주 정확히 말해 몽상의 지속을 부여할 줄 안다.시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시적인 것의 실존주의에 따라 우리의 기억에 맡기는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 속하며 우리 자신이다.   **“나는 내가 나 지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인정했던 온전한 어린 시절을 상상적 기억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아마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열망했던 금지된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고요하고 친근한 집에서 놀이 동무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때때로 그런 동무들을 갖고자 열망했던 것처럼 말이다.” -앙리 보스코, 『히아신스』   **어린 시절은 심층심리학의 바로 그 양식으로 진정한 원형처럼 나타난다. 확실히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하나의 이미지이며, 행복한 이미지들을 끌어당기고 불행의 경험들을 물리치는 이미지들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 원리상 전적으로 우리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단순한 추억보다 더 심층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   **원형들의 시적 합일: 우리는 시가 인간 존재를 위한 종합의 힘임을 입증할 수 있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원형들은 우리가 세계를 믿고 세계를 사랑하며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도와주는 영감의 보고들이다. 각각의 원형은 세계로의 개방이고, 세계로의 초대이다. 각각의 개방으로부터 비상의 몽상이 솟아오른다.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은 우리를 근본적 몽상의 효력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린아이의 물, 어린아이의 불, 어린아이의 나무, 어린아이의 봄꽃......세계의 분석을 위한 얼마나 많은 진정한 원리들인가!   **원형은 강력한 이미지의 기원으로 언제나 남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부성적인 힘, 모성적인 힘....모든 위대한 원형들)--그것들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은 콤플렉스가 없다. 몽상 속에서 어린아이는 시적 통일성을 실현한다.     &&질문: 내가 실현하고 싶은 시적 통일성은??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 찾아가서 몽상하기: 세계로의 초대 세계로의 개방을 실현하는 시 쓰기               **어린 시절이 몽상되고 명상될 때, 고독한 몽상의 그 내밀함 속에서 명상될 때, 그것은 철학적인 시의 색조를 띤다. ‘철학적 반성’ 속에서 몽상에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 철학자는 명상된 어린 시절을 통해 하나의 코기토를 경험한다. 이 코기토는 어둠으로부터 나오며, 어둠의 가장자리를 간직하고 있고, 아마 어떤 ‘어둠/그림자’의 코기토라 할 것이다. -삶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몽상하지 않는 삶 속에서인가 몽상하는 삶 속에서인가? 그 처음은 어디였는가?   **코기토 에르고 슘(Cogito Ergo Sum) -코기토의 진정한 의미: 인식론의 시초-단순한 ‘생각’이 아닌 ‘이성’-복합적 정신 기능—방법적 회의의 의미. 신으로부터의 독립. **인간 존재의 무의미들의 총체인 어린 시절은 고유한 현상학적 의미, 순수한 현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탄의 기호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시인 덕분에 우리는 경탄하다는 동사의 순수하고 단순한 주체가 된다.   **지붕에서 올라가는 연기....! 그것은 마을과 하늘을 연결하는 선이다......추억 속에서 그것은 언제나 푸르고, 완만하며 가볍다.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보는 것, 어른들이 보여준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인들의 보여줌은 이미 자신들의 잃어버린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본다’고 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몽상하는 어린아이는 얼마나 대단한 우주적 존재인가!   **모든 몽상이 태어나게 하는 가벼운 우울과 많이 몽상을 한 어린아이의 아득한 우울 사이의 일치는 심원하다. 몽상하는 어린아이의 우울을 통해서 모든 몽상의 우울은 과거를 지닌다. 존재의 연속성, 그러니까 몽상하는 존재의 실존주의의 연속성은 이러한 일치 속에서 형성된다.   **정신분석학은 사건의 삶을 연구한다. 그러나 시인은 사건 없는 삶,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삶과 맞물리지 않는 삶을 경험하고자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사건들을 가져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다. 모든 사건들은 몽상 속에서만 우리의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아니마, 즉 여성적 존재의 자연스러운 평화를 동요시키는 ‘외상’이고 남성적인 난폭함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시적 질료면에서 어떤 것인가?? (개념 이해하기) : 몽상의 시학은 몽상을 고요함의 의식 속에 유지하는, 몽상의 유익한 점들을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그것은 충실성에 대한 향수이다!   **상태의 추억과 마주하는 일: 색깔도 없고 사건도 없는 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상태들을 알아본다. 왜냐하면 더없이 소란스럽고 지극히 즐거운 어린 시절에도 ‘북쪽’의 시간들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시계 없는 그 시간들 또한 우리 안에 있다.몽상은 호의적이고 진정시키는 그 시간들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그것들은 단순하게 그러나 고귀하게 인간적이다.   **우리에게 그런 존재의 가치들을 드러내주기 위해선 아마 시인이 필요할 것이다.....우리의 내부에서 여전히 우리의 내부에서,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서 어린 시절은 영혼의 상태이다.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6) : (텍스트 168쪽~ ) ** –선함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은 우리의 몽상들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것인 바,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인간의 스승이 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형이상학적으로 위대할 것인지 이해했다. “누가 나에게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가르칠 것인가! 상상적 혹은 현실적인 욕구가 근심이나 낙담에 빠뜨리고, 침울하게 만들거나 의기소침하게 만들 때, 우리는 어린아이의 친절한 영향을 느끼고 싶고, 그에게서 배우고 싶으며, 영혼이 평온해지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우리 자신의 스승으로 부르고 싶어한다.”-키에르 케고르   ** – 신화 속의 어린아이는 신화소(神話素)의 분명한 사례이다. 이 신화소,다시 말해 존재가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그 진입의 가치와 작용을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전기의 흐름을 멈추어야 하고, 어린 시절의 상태가 삶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삶의 불사신이 될 수 있을 만큼 어린아이에게 뚜렷한 위상을 부여해야 한다. -에르베 루소   **인간의 가족에서는 고아이지만 신들의 가족에서는 사랑받는다는 것, 이것이 신화소의 두 극점이다. 우리가 이 두 극점의 모든 몽환을 인간적 차원에서 되살리기 위해선 대단히 긴장된 몽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소간 고아였고 우리의 희망을 이상화된 존재들, 즉 희망의 신들 자체로 향하게 했던 그런 몽상이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몽상으로 보면, 우리가 신격화된 어린 시절의 신화소에 민감하게 되는 것은 본원적인 우주에 밀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린아이 신(神)은 세계의 아들이다. 그리고 세계는 연속적인 탄생을 표상하는 이 어린아이 앞에서 젊다. 달리 말하면 젊은 우주는 고양된 어린 시절이다.   **신격화된 그 모든 어린 시절은 인간 영혼의 심층에 살고 있는 한 원형의 활동을 증거한다. 모든 몽상가 내부에는 어린아이, 몽상이 찬양하고 안정시키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몽상은 어린아이를 내력 이야기에서 떼어내고, 그를 시간에서 벗어나게 하며, 시간에 낯설게 한다. 또 하나의 몽상으로서 찬양받는 항구적인 이 어린아이 그가 바로 신이다.   **-어린 시절의 식물적 힘을 전설에 의해 자양을 얻어 인생 내내 우리의 내부에 존속한다. 우리의 심층적 식물적 태도가 지닌 비밀은 거기에 있다. “어린 시절은 우리 안에서 죽어가고 주기를 마치자마자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보물 가운데 가장 살아 있는 것이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줄 모르고, 자신의 육체 안의 육체처럼, 낡은 피 속의 새로운 피처럼 자신 안에서 어린 시절을 다시 포착할 줄 모르는 자는 불행할 지어다. 그는 어린 시절이 그를 떠나자마자 죽어버린 것이다.” -프란스 엘렝스   **시인을 따라갈 때, 우리가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을 심화시키면 우리는 우리 운명의 나무를 보다 깊이 뿌리박게 하는 것 같다. 인간 운명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나는 대단히 안도를 느낀다.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었다. 즉 인간의 어린 시절을 그의 삶 전체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성숙한 나이의 소관이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지니고 30년을 걸었지만 그것에 어떤 사상을 주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내가 길을 나섰을 때 모든 게 이미 언급되었다는 것을 안다.” -프란스 엘렝스   ** - 냄새! 그것은 세계와 우리의 융합을 나타내는 최초의 증거이다. 옛날의 냄새에 대한 그 추억을 우리는 두 눈을 감을 때 되찾는다. 현재에서처럼 과거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냄새는 내밀성의 중심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냄새의 다발이다. -Louis Chadoume   “달아난 날들의 막연한 매력을 환기시킨다. 숨을 쉬는 게 기억일 때는 모든 냄새가 좋다. 위대한 몽상가는 그렇게 과거를 호흡할 줄 안다.” 사라진 집들의 방들, 복도, 지하실, 다락방은 변함없는 냄새의 거처인데, 이 냄새는 몽상가가 알고 있듯이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빌로드의 향기를 영원하게 만든다. -Yves Cosson   **하나의 계절, 개인적인 계절이 그 특이한 냄새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가을 너에 의해/ 축축하게 젖은 가련한 두건 냄새/   /--새싹의 씁쓰름하고 끈적끈적한 향기 속에 [담긴]/ --포플러의 끈적이는 새싹을 손가락으로 으깨어 보고,그 미끈거리는 씁쓰름한 반죽을 맛보가. 그러면 그대들은 온 생애 동안 추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알랭 보스케   /박하로 둘러쳐진/오솔길의 향기가/내 어린 시절 속에서 춤춘다./ -C.A.Bozombres   **이미지들 가운데 가장 번역 불가능하고 가장 미묘한 냄새적 이미지-장 드 구르몽   **어린 시절의 눈에 대해-‘장미와 소금의 냄새’-앙리 보스코-를 맡았다. 그것은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차가움의 냄새 자체이다.   **씁쓰름한 회양목과 사향 냄새 나는 카네이션의 조화 –마리 도게   **“내 고장의 냄새는 한 개의 사과였다.” -뤼시 들라뤼 마르드뤼스   **“나는 땅, 밀, 새 포도주의 냄새 속에서 자랐다. 내가 그 냄새에 대해 생각할 때면, 기쁨과 젊음의 생생한 향기가 나에게 되살아난다.” -앙리 보스코 (추억은 과거 속에 보관된 향이다.)   **행복한 날들에 세계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향연을 준비했던 대단한 냄새들이 기억 속에 떠오를 때,보들레르를 좋아했던 나는 ‘추억들을 먹는’ 것 같다. 갑자기 나는 모든 더운 빵을 시인들에게서 수집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재시작되는 축제의 대단한 냄새, 우리가 최초의 행복에 대해 단호하게 표명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그런 삶의 대단한 냄새를 내가 추억에 부여하도록 그들이 도와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   &&냄새에 대한 추억, 추억에 냄새의 이미지 부여해서 스케치해 보기.   -나는 그에게서 (                                     )냄새를 맡았다.   -내 고향에서는 (                                                )냄새가 났다.   -내 추억의 가장 강렬한 냄새는??
7    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제 2장 -아니무스, 아니마 댓글:  조회:953  추천:0  2018-10-20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1.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   **“과거의 근원이 결합되어 있는 심연보다 더 깊은 심원한 여인이여. 왜 그대는 나하고만 함께 있지 않은가?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그대는 전생의 존재들의 골짜기로 소멸하는구나“ –이반 골, [다양한 모습의 여자]   “내 영혼은 목신의 영혼이자 쳐녀의 영혼이다.” -프랑시스 잠, [토끼 소설]   **꿈과 몽상의 대립 속에서—말로 하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부재하는 연인에게 하게 될 말을 준비하는 몽상에서 낱말들, 아름다운 낱말들은 충만한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또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낱말들이 몽상의 언어에 속하느냐, 명료한 삶의 언어에 속하느냐 (휴식의 언어에 속하느냐, 감시받는 언어에 속하느냐) 자연스러운 시의 언어에 속하느냐, 권위적인 운율법에 단련된 언어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신적 ‘무게’가 다르다는 점이다. 밤의 꿈은 검열에 대한 격렬한 혹은 교활한 투쟁일 수 있다.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겸열 없는 언어를 알게 해준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진정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료한 의식을 아직은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시에 경험한다고 해서 놀랄 게 아무것도 없다. 어떤 정념의 미래를 체험하는 몽상은 자신의 정념의 대상을 이상화한다. 이상적인 여성적 존재는 정념에 사로잡힌 몽상가에 귀를 기울인다. 몽상은 이상화된 남자의 고백을 야기한다.   **우리 자신을 현실적 존재와 이상화하는 존재로 이중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몽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몽상이 ‘심층심리학’의 가장 좋은 학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심층심리학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가르침을 우리는 몽상의 실존주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적용할 것이다. 인간 정신 현상의 그 어떠한 요소에도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는 완전한 심리학 같으면 가장 극단적인 이상화, 즉 우리가 앞서 출간한 한 책에서 절대적인 승화라고 지칭했던 지대에 도달하는 이상화를 통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심리학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인간에 결부시켜야 하고, 몽상의 시학을 삶의 단조로움과 결합시켜야 한다.   **사실 우리가 볼 때 분명한 것은 말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충에서 움직이는 지극히 멀고 지극히 모호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의식은 중얼거리며 우리는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듣는다. 자유로운 몽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서로에게 고백하기 위해. 잘 화합된 고요한 이중적 본성 속에서 교감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모든 학파 가운데, 인간 정신 현상이 그 원초성에서 양성적이라는 점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것은 C.G.융의 학파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된 추억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성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자기 무의식의 심층을 이중의 안테나를 갖고 가볍게 건드린다.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현재의 심리학이 될 정도로 흥미롭다. 예컨대 왜 니체는 “엠페도클레스가 자신이 사내와 계집이었음을 (...) 기억했다”고 이야기하는가? 니체의 여성성읜 보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다 심원하다.   **우리의 검토를 몽상의 세계로 한정하는 우리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경우에도 조화로운 양성성은 마음을 평온케 하는 작용 속에 몽상을 유지시켜 주는 그 나름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원초적인 양성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그것들 사이의 경쟁을 표시한다. 양성성은 자신의 거처 —심층적 몽상의 거처 같은 곳—를 떠나자마자, 불균형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흔들림에 빠진다. 심리학자가 비정상 상태라고 표시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흔들림이다. 그러나 몽상이 깊어지면 이런 흔들림은 잦아들고, 정신 현상은 성의 평화, 즉 말의 몽상가가 경험하는 그 평화를 되찾는다.   **심리학자 뵈이텐디예크는 [여자]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정상적 남자는 남성성이 51퍼센트이고 정상적 여자는 여성성이 51퍼센트라는 점을 참조하고 있다. .....완전한 남성성과 완전한 여성이라는 두 평행적인 단일주의에 대한 조용한 확신을 깨트리는 것, 그러나 시간은 모든 균형에 영향을 미친다. 낮과 밤, 계절과 나이는 우리의 균형 잡힌 양성성을 고요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각각의 인간 존재 안에서 남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와 여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수치와 측정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여성의 시계는 조용하게 흐르는 지속 속에서 연속적으로 나아간다. 남성의 시계는 급격한 움직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몽상과 인식노력을 솔직하게 변증법적으로 대비시켜 보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을 것.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을 따라 전개된다. 그것은 보다 덜 깊은 것, 언제나 덜 깊은 것(남성)으로부터 언제나 깊은 것, 언제나 더 깊은 것(여성)으로 간다. 단순한 고요함의 휴식 속에서 포괄적으로 펼쳐지는 여성성을 우리가 만나는 곳은 몽상 속에서이고, 앙리 보스코가 언급하듯이 ‘잠재적 삶의 무궁한 저장고’에서이다. 정염의 삶에서조차 남자와 여자는 각기 자신의 이중적인 힘을 이용할 줄 안다. 따라서 두 파트너의 각자 안에 그들이 지닌 이중적 성의 조화를 가져오거나 유지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 어려운 문제가 된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8.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성격학적 분류를 결정하기 위해 열거하는 여성성의 징후들은 정상적인 아니마, 다시 말해 정상적인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살아가는 아니마와의 진정한 접촉을 제시하지 못 한다. 그건 심리학자의 방식이며 동요된 아니마, 그러니까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니마의 거품만을 주목한다. 마치 여성적인 휴식의 안전을 경험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리적인 성적 구분의 두 기호로 인간은 너무 급격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부드러움, 이중적 부드러움, 아니무스의 부드러움과 아니마의 부드러움을 다루는 심리학이 가동될 수가 없다. 새로운 낱말들을 가지고 오래된 언어를 말한다는 건 나름의 모순에 빠질 수가 있다는 뜻.   **일상 속의 남자와 여자는 드레스와 바지로 이해되듯이 두 개의 반대 개념으로 규정된다. 아니무스는 정신적 성장 속에서 밝혀지고 지배하는 반면, 아니마는 존재의 지하실을 향해 심화되고 그 속에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몽상적 차원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다르다. 그것은 몽상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마라는 점이다. 아니마는 고독이다. 몽상은 모든 아니마의 자유로운 확장이다. 시인이 아니무스적인 관념들에 노래의 구조, 노래의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아니마의 몽상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아니마의 몽상이 없다면, 시인이 아니마의 몽상으로 쓴 것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은 몽상을 하면서만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심리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아니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직무에서는 권위적인 사람들, 빳빳한 군모를 쓴 어떤 군인이, 저녁이면 부인이나 노모의 권위에 움츠린 채 매우 겸손해진다. --이러한 성격상의 모순들이 소설적 진실 속에 깃든 심리적 정확성이다.   **심층적 인간, 곧 고독 속에 있는 인간을 다루는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처럼 단순하고 그처럼 명백한 결정이 정교한 존재론의 연구를 멈추게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비스마르크의 눈물(융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눈물에서 돌연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무스의 그와 같은 무너짐이 아니마의 긍정적 나타남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아니마는 허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무스의 가사 상태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힘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 휴식의 내적 원리이다. ‘눈물’이 아니마의 기호는 아니다. 슬픔, 회한, 피로의 길 끝에서 오는 게 아니다. 심리학적 관찰은 서로 분리되는 시점이 아니라,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에 의해 관찰된다. 그것은 우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의해서만 관찰되지는 않는다.   **아니마는 우발적인 일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실체이고, 자신의 화합된 존재를 부드럽고 천천히 즐기고자 하는 화합된 실체이다. 우리는 몽상을 심화시킬 때, 몽상, 특히 잔잔한 물의 대단한 휴식 속에서 물의 몽상을 사랑할 때 보다 확실하게 아니마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 이상화하는 몽상 속에서 아니마의 순수성을 새롭게 해 주는 죄 없는 물이여! 휴식 상태에 있는 물에 의해 이처럼 단순화된 세계 앞에서 몽상하는 영혼의 자각은 단순하다. 단순하고 순수한 몽상의 현상학은 우리를 우발사(遇發事) 없는 정신 현상으로, 휴식의 정신 현상을 향해 인도하는 길을 열어준다. 잔잔한 물 앞에서의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아니마의 선(善)인 항구적인 정신적 일관성을 경험하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고요함의 가르침이로, 우리의 본성이 지닌 고요함, 우리의 아니마가 지닌 실체적인 고요함을 자각하라는 간청이다.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스스로 자족하는 본성이고, 고요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심층적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잔잔한 물의 존재이다.   **연금술사의 애니미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찬가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실험하고 수많은 실험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것의 애니미즘이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몽상을 실험한다. 이때부터 연금술의 언어는 몽상의 언어이고, 우주적 몽상의 모어이다. 이 언어는 몽상되었던 바대로 고독 속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연금술의 책을 읽을 때 가장 혼자가 된다. 우리는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바로 우리는 세계를 몽상하며 태초의 언어를 말한다. 그런 몽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의 용어들을 주의 깊게 탈사회화(脫社會化)해야 한다. 그러니까 은유에 완전한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전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낱말의 몽상가에게는 얼마나 많은 훈련인가!   **이때 은유는 기원, 다시 말해 직접적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이미지의 기원이다. 연금술사의 몽상에서 왕과 왕비가 어떤 실체를 만드는 데 참석하러 온다며 그들은 요소들의 결합을 주재하기 위해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작품의 위대함의 상징인 것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들은 우주적 창조를 위해 작업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위엄을 나타낸다. 단번에 우리는 분화된 애니미즘의 정점으로 이동해 있다. 살아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위대한 활동 속에서 왕과 왕비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분리시킨다면 현실이 없는 결합된 두 힘이다. 연금술사의 왕과 왕비는 세계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이며, 이것들은 몽상하는 연금술사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확대된 모습들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내부에서 가까이 있듯이 세상에서도 아주 가까이 있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5.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3)     **연금술사의 언어는 정열적인 언어이고, 몽상가의 영혼 속에 결합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대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연금술은 왜 서로 통합된 언어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대화에서 어떤 보석으로 제련시킬 것인가? 연금술사의 사유를 펼쳐보자.   **아니무스와 아니마는 그 나름의 어휘를 지니고 있고, 그 어휘를 따라갈 때 모든 것은 이 두 어휘의 결합으로부터 태어난다. 사물, 물질, 별....그것들의 이름이 지닌 위엄에 복종해야 한다.   **이 이름들은 찬양이나 멸시를 나타내지만, 거의 언제나 찬양을 나타낸다. 어쨌거나 저주의 어휘는 보다 간단하다. 저주는 몽상을 깬다. 연금술에서 그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물질의 힘을 일깨워야 할 때 찬양은 절대적이다. 찬양은 마법적 작용을 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찬양과 찬탄의 언어, 몽상적 연금술로 연습하기) 예; 1.찔레꽃 그대는 ***이다! 2.고양이 너는 ***하다! 3.돌멩이는 ***을 위하여 **한다! 4.바다는 ***하다! 5.( )은 나의 ( )처럼 아름답다. 6.나의 ( )을 위하여 오늘 지금 ( ) 할 것이다.   “그처럼 찬양에 뒤덮이자 인드라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뒤메질’-   **반죽의 아니마—우리가 작업을 할 때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몽상은 손으로부터 사물로 이어지며 몽상적 상태를 체험한다. 영혼과 사물에게 신비는 내부에 있으므로, 인간의 내면은 몽상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열린다. 우리는 관념과 몽상의 복합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실체에 대한 몽상, 말로 표현된 몽상은 물질이 탄생, 생명, 정신성을 획득하기를 바란다. 문학은 여기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문학이 없다면 모든 것은 소멸하고, 현상들은 가치의 광채를 상실하고 만다.   **투사: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의 교감에 관한 심리학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변증법은 ‘심리적인 투사’의 현상처럼 나타난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의 아니마에서 자기가 경배하는 모든 가치를 이 여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자는 자신의 아니무스가 정복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를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투사한다. ---이 두 교차된 투사가 균형이 잘 잡혀 있을 때, 그것들은 강력하게 결합한다. 이 ‘투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현실에 실망을 한다면 실패한 삶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러나 몽상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삶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몽상의 진정한 본능은 우리의 아니마 속에서 활동적이며 정신에 연속적인 휴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실패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비현실적인 기능이 지닌 구체적인 용도는 매우 정연한 이상화(理想化) 속에 있다. 여자의 아니무스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남자와 남자의 아니마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여자는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결합적인 힘들이다.   **고독한 몽상의 비밀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암영들이 아니라 사랑의 새벽을 밝히는 미광들이다. (아니무스의 잠재성과 아니마의 잠재성을 포함하는 두 개의 정신 현상 사이에 4극적인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상화와 현실 그 어느 쪽도 망각하지 않는 것! (교재 97페이지 도표 참조)   **어떤 책들의 등장인물들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형태들은 독서의 시기들 그때마다 동일한 풍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위대한 책은 특히 심리적으로 살아있다. 우리는 그것을 읽고 또 읽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예를 들어)   **연금술에서 우리는 지적인 인내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의식의 불순물들을 뒤지는 심적 인내의 작용 자체 속에 있다. 연금술사는 물질을 가르치는 자이다. 지상의 모든 실체에게 그것의 젊은 활력을 다시 주겠다는 꿈은 근본적인 덕성이 얼마나 대단한 꿈인가! 그 덕성의 기나긴 작업을 한 후 자웅 양성 속에 결합된 원리들은 성스러운 결혼이라 마땅할 정도로 ‘순화’된다. 양성에서 성혼(聖婚)으로까지 이것이 연금술의 명상이 가는 심리적 거리이다.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힘에 의지한 복잡한 확신을 통해 연금술사는 세계의 영혼을 포착하고 이 영혼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연금술은 세계에서 인간으로 가는(물질로부터 언어적 몽상으로 투사되는) 영혼의 문제가 된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사랑받으며 미덕으로 치장된 존재의 모든 이상화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또 삶을 몽상하면서 표명된 이상적인 것들에 심리적인 현실을 부여하는 그 모든 치환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자가 만나는 전이와는 전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복잡한 전이를 생각해야 한다. ‘전이’(몽상적인 의미)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우주적인 상황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상적인 세부적 관계를 넘어서며. 사회적 상황을 넘어선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그가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세계를 가공하는 그의 이상화 충동을 따라서 이해하도록 요구받는다. 그것은 자웅양성적 특성인데, 그 특성의 이중적 고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자웅양성적 특성은 생명의 모호한 기원에, 어떤 불분명한 동물성 속에 묻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정점(頂點)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부터 오면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고양을 보여준다. 그것은 초(超)남성성과 초(超)여성성이 결합된 몽상을 준비한다.     ------------------------------------------------------------ ------------------------------------------------------------     ##몽상적 아니마와 결합적 자웅양성과 정점의 변증법을 위하여! 창작의 언어를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 그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투사와 복잡한 전이의 다양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할 것이다. 빗살의 눈빛들이여 몸과 영혼의 아니마 아니무스의 총체적 시간들이여 함께 가자 이상화의 세계를 향해! 현실의 몽상적 길을 밟으며....한 발 한 발, 매순간 아름다운 시어를 만나보자!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12.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4)     **몽상은 몽상가를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음으로써 몽상가를 그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다른 존재는 여전히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의 복제 분신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를 반영하는 존재인가?” 철학자라면 그것들을 회의(懷疑) 속에서 강화할 것이다. 사실 몽상은 존재를 보다 부드럽게, 보다 자연스럽게 양분한다. 그것도 참으로 대단한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내가 나보다 덜한 존재가 되는 몽상이 있다. 그때 그림자는 풍부한 존재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의 심리학자보다 더 예리한 심리학자이다. 우리 존재의 분신인 그림자는 우리의 몽상 안에서 ‘심층심리학’을 경험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이중적이듯이 이중적 분신인 그림자를 통해, 역설들의 핵심에 다다른다. ‘분신은 이중적 존재의 분신이다.’     **지극히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가 죽은 존재를 불러올 때,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이상화시킬 때, 독서 속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삶 전체가 이중화되는 현상을 느끼고 세계가 우리의 공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통합함을 느낀다. 공상의 심리학이 없다면 진짜 심리학도 없으며, 완전한 심리학도 없다. 자신의 몽상 속에서 인간은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몽상을 하는 고독한 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심리적인 잠재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명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혼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넷이다. 고독한 몽상가는 4극(책 97쪽, 표 참조)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우리는 한 여자 옆에 우리의 영혼을 부분부분 놓아둠으로써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양분하고 예전에 우리에게 중성적이었고 무심했던 사랑받는 여자는 우리의 또 다른 자아의 옷을 입기 시작하고 이중적이 된다.” /스트린드 버그/   **몽상은 창조하는 심리의 작품인 것이다. 이상화된 존재는 이상화하는 존재와 말하기 시작한다.....자신의 이중적 분신에게 말하면서 이중적이 되는 존재에게 이원적인 언어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이원적인 두 배, 즉 ‘사중(四重)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사유와 몽상, 현실의 정신적 기능과 비현실의 기능의 매개적 유희가 인간 상상력의 그 심리적인 경이로움을 생산하기 위해 증대되고 교차한다. 인간은 상상해야 할 존재이다. 왜냐하면 결국 비현실의 기능은 우주 앞에서처럼 인간 앞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을 창안하는 소설가와 인간적인 것의 매력적인 멋을 계속해서 창안하는 시인들을 읽을 때 우리는 참으로 심리학적 세련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없는 몽상 속에서 감히 말하지 않고 체험하는 것은 그 모든 자기 초월이다.   “누이야, 나와 함께 기도하러 가자, 식물의 영속성을 되찾기 위해.” -에드몬드 반데르캄멘-   ‘식물의 영속성,’ --아니마를 나타내는 진실, 몽상에 어울리는 세계, 영혼의 휴식을 위한 얼마나 대단한 상징인가!   **가치의 개입은 사실이 제기하는 문제를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철학과 종교는 자웅양성적 특성을 하나의 인류학의 토대로 만들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수많은 감정적 실패를 통해 이 러시아 철학자(솔로바예프)는 내세의 자웅양성적 삶을 준비하는 순수한 사랑의 그 영웅적 태도를 유지했다. **두 진정한 연인 사이의 상호적 이상화의 심리학을 위한 명구:   “너의 가치를 크게 하기 위해 너의 사랑을 더 크게 하라.” -바레트 브라우닝-   **작품의 예; 발자크의 에세이  -제1장; 세라피투스 , 제2장; 세라피타, 제3장; 세라피타-세라피투스, (Seraphita –양성적 인간을 이르는 발자크의 소설 및 에세이에서 쓰인 용어) (--인간의 총체인 완전한 인간은 남성적 요소의 능동적 미덕들로, 그리고 여성적 요소에 의한 보존하는 힘들로 계속적으로 제시되며, 마침내는 그것들의 종합이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전적인 결속처럼 이루어진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자웅양성적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고, 분신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세라피투스, 세라피타만이 모든 몽상을 유인하는 이중의 자기(磁氣)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우리는 네 개의 극을 지닌 몽상 앞에 있다. 두 정념을 이상화된 삶으로 상승시키고자 할 때, 아니무스가 아니마로, 아니마가 아니무스로 가는 얼마나 많은 ‘투사’가 이루어지는가!   **이상화하는 몽상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면서 수준이 높아지는 일방통행이다. 그러나 보다 잘 몽상하는 자는 아무것도 억압할 게 없다는 것을 깨우친다. 극단적인 이상화의 몽상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어 있다.그것은 날아오르는 상태에서 ‘정신분석학자의 벽을 넘어선’ 것이다.   **아무튼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은 여자를 훌륭하게 이상화하려면 남자가 되어야 하며, 아니마의 의식에서 원기가 풍부한 몽상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테의 철학—베아트리체; 지극히 위대한 이상화들의 종합 —여자, 교회, 신학—그것은 인간적 가치들의 몽상가에게는 현학적인 대문자 아니마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을 통해 빛을 발한다.....을 참조할 것.   ------------------------------------------------------------------- -------------------------------------------------------------------     **빗살과 아니마를 위한 질문 및 시어 탐사     ## 내 안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총화는 현실 속에서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시어( 詩語)로 표현해보자.   **나는 ----------------------------------------------------!!   **나는 ----------------------------------------------------!!   ## 가장 나다운 아니마는 어떤 아니무스를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기억이 있는가? (둘의 결합이 보여준 결과와 그 과정에 대하여)       ## 요즘의 자연 현상에서 느낀 아니마의 진실을 시어로 표현해보자. ‘식물의 영속성’을 대입해서.
6    대지 그리고 휴식의몽상 - 바슐라르 [스크랩] 댓글:  조회:985  추천:0  2018-10-20
바슐라르 -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스의 철학자, 과학철학 및 과학사 교수, 문학 비평가, 시인. 독창적인 사고와 기발한 문체, 새로운 철학적 화법으로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며,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 일컬어진다. 상파뉴 지방의 바르 쉬르 오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교사, 우체국 직원 등으로 일하다, 마흔 무렵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1927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디종 대학을 거쳐 1940년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 흙의 시학  나는 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흙은 다른 원소보다 훨씬 불활성이며 고정되기 쉽고 포착하기 쉽다. 흙은 확실하고 선명하게 우리 앞에 물질적 대상으로 주어진다. 흙은 손에 쥘 수도 있으며 뭉칠 수도 있고 불로 반죽할 수도 있다. 흙은 주물러 형태를 만들기도 쉽고 우리의 일상적 지각방식을 쉽게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감각적이다. 물은 손아귀를 벗어나 미끄러지고 불은 만질 수 없으며 공기 역시 손에 잡히지 않지만 흙은 다르다. 흙은 만져지고 쥐어지고 잡힌다. 흙은 우리 앞에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분명한 존재감, 분명한 실재감은 우리로 하여금 흙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망을 불러낸다. 우리는 흙을 다루고 흙에 대항하며 그렇게 해서 흙으로 작업한다. 말하자면 흙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흙을 다루고자 할 때 흙에 대한 외향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흙의 물체성, 고정성, 단단함이 우리로 하여금 흙을 다루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낸다. 그러나 흙은 우리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흙은 흙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욕망에 대립하는 흙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를 불러낸다. 우리는 흙의 의지와 대립하여 싸우고 분노하며 달래고 설득한다. 흙의 세계에 우리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흙을 때리며 부수고 깨트린다. 망치와 끌, 칼 등 도구가 이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흙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적 흙의 세계이다.    흙과 돌, 바위, 산 등 단단함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 흙의 세계. 이 세계 앞에 선 인간은 이 세계와 대항하고 싸우고 길들이면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 그런데 이 양자 간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흙의 세계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의지 대 의지의 싸움이다. 여기서 망치로 두드리는 바위나 쇠는 대장장이의 힘을 거부하면서 허용한다. 망치의 두둘김은 대장장이 편에서의 힘과 쇠의 편에서의 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이 싸움 속에서 바위나 쇠의 힘은 대장장이에게 전이되고 대장장이의 힘 역시 그가 두드리는 대상에게 전이된다. 이 두 존재 사이에서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어떤 리듬이 탄생하는 것이다.    2. 진흙 덩어리  우리는 진흙을 빚어 세계를 창조해왔다.   돌과 바위와 같은 단단한 사물이 우리에게 불러내는 상상이 도발과 저항, 의지의 실현과 관계되어 있고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지닌다면 물과 섞인 진흙은 이와는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진흙 덩어리, 밀가루반죽, 밀랍덩어리 등 반죽으로 된 부드러운 사물들은 우리 내면의 부드러운 의지, 완화된 의지를 불러낸다. 이 세계는 우리의 촉각적 욕망을 건드리는 세계이며 우리는 손으로 이 세계와 만난다.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주물럭대면서 우리는 이 세계에 우리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계에 부여하는 우리의 꿈은 이 세계에서 우리를 향해 주어지는 힘과 만나면서 변형된다. 반죽의 세계는 한편으로 끌어당기면서 한편으로 밀어낸다. 우리는 손으로 이 반죽의 세계와 만나 우리 역시 이렇게 하면서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반죽은 생명체의 이미지를 낳는다. 반죽으로 작업하는 조각가는 미리 설계된 관념을 일방적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성형이다. 반죽의 꿈은 반죽과의 교감이며 이 교감을 통한 활동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된다.    반죽하는 코기토의 창조성은 어린아이를 출산하는 창조성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다. 반죽하는 코기토에게 세계는 관조적 대상도 아니며 기하학적 세계도 아니다. 이 세계는 끈적이는 세계이며 주무르는 세계, 내 손의 힘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내 힘을 수용하는 세계다. 세계는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의지를 저항하면서 받아들인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반죽을 상대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반죽 속에 숨은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그는 이때 산파가 된다. 이 반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다시 꿈과 몽상은 무의식으로부터, 그리고 집단무의식 너머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이미지가 길어 올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꾸는 인간, 몽상하는 인간은 우주적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이다.    3.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연금술의 몽상 속에서 연금술사와 물질은 서로 연결되어 얽히며 투쟁한다.   땅 속에서는 금속과 보석들이 자란다. 땅 속의 보석들은 완성된 대지의 태아다. 이들은 모두 씨앗이며, 별이며, 생명이다. 보석들은 불변의 아름다움으로, 단단함으로, 투명함으로, 빛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땅이 잉태하고 키운 것이므로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다른 생명체들 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훨씬 완성된 생명체의 이미지를 갖는다. 연금술의 몽상은 이 오래된 생명의 과정을 연금의 용기 속에서 단 기간에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탄생한다. 황금은 영원하며 빛나며 오래되었고 생명력으로 가득찬 지하세계의 태양왕의 이미지이다. 연금술의 몽상에서 식물, 동물, 광물은 모두 같은 생장법칙을 공유한다. 광물 역시 식물처럼 씨를 뿌리며 동물처럼 아이를 낳는다. 그러므로 황금이라는 아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연금술사는 땅의 자식들인 여러 가지 금속들에게 인간의 삶의 조건들을 강요한다. 금속들은 땅이라는 생명의 자궁의 대리물인 연금술사의 그릇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미워하고 싸우며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이 드라마는 금속들의 드라마인 동시에 우주적 드라마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천체계를 넘나들며 가면을 바꿔 쓴다.    연금술의 몽상은 아타노르 위에 놓인 그릇 속에서 죽음과 재탄생의 서사를 실현하는 것이다. 비천한 금속들은 내부에 적의를 지니고 있다. 금속들은 차겁고 무겁고 모가 나 있으며, 상처를 입힌다. 그러므로 연금술사들은 금속들의 적의에 맞서 이들 속에 숨겨진 생명의 불을 끄집어내어 이들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연금술사는 먼저 이들의 때를 벗겨내야 한다. 부패의 단계를 거친 금속은 다시 끓여진다.    금속의 드라마는 연금술사의 몽상 속에서 태어나 연금술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그의 삶을 변형시킨다. 연금술은 황금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이득을 보려는 기술이 아니다. 연금술은 꿈의 기술, 영혼의 기술이다. 연금술의 몽상 속에서 연금술사와 물질은 서로 연결되어 얽히며, 연금술사의 의지와 금속의 의지가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일종의 사랑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 서평  바슐라르의 몽상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저는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집에 대한 명상 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책 ‘공간의 시학’과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의 집에 관한 부분을 보십시오. 저는 이 사람의 책 이 부분만을 조금씩 다시 읽곤 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숲 속이나 벌판의 오두막집에서 안전하게 머무르는 몽상을 그 사람 파리 한복판의 아파트 안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해 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5. 7. 31)      우리는 대지 위에 살며 대지에 저항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대지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살 수 없으며 또 땅을 일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렇게 대지와 인류는 서로 불가분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여 있다.    대지의 흙은 우리와 가장 친숙하기도 하다. 우리는 흙을 반죽해 집도 짓고 그릇도 만들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흙의 세계는 우리의 촉각적 욕망을 건드리는 세계이며 우리의 의지를 충동질한다. 우리는 흙을 빚어 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지배해왔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창조성은 흙을 반죽하면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는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의지를 저항하면서 받아들인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반죽을 상대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반죽 속에 숨은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이 반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5    불꽃의 수직성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꽃의 미학> 중 세 번째 장) 댓글:  조회:1144  추천:0  2018-10-20
퍼온 자료 불꽃의 수직성              높은 곳에서... 빛은 그의 옷을 벗는다. - 옥타비오 빠스.   1. 우리들을 가볍게 하는 몽상 가운데서도 아주 유효하며 단순한 것은 높이의 몽상이다. 모든 직립되어 있는 사물들은 천정을 가 리키고 있다. 직립된 형태는 솟아오르고, 우리들을 그 수직성에 실어 데려간다. 현실의 정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스포츠적인 장 한 일에 그치는 것이다. 꿈은 더욱 높이 올라가며, 수직성의 피안에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 똑바르고 수직인 존재를 앞에 한 수직성의 결합에서 많은 비상의 꿈이 태어난다. 높이의 몽상은 우리들의 수직성의 본능, 공동생활과 평평하게 수평적인 생 활의 의무에 의해 억눌려진 본능을 양육한다.   인간을 수직화시키는 몽상은 여러 몽상들 가운데서도 가장 인간을 해방시키는 몽상이다. 다른 곳을 꿈꾸는 것만큼 잘 꿈꾸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다른 곳 가운데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위쪽에 있는 다른 곳이 아닐까? 위쪽이 아래쪽을 잊 어버리고 제거해 버린 꿈. 직립해 있는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을 쌓음으로써, 우리들은 존재의 하나의  초월을 알 게 된 것이다. 수직성의 이마주는 우리들을 가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한다. 상상력을 통하여 직립해 있는 사물의 수직성과 일 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상승력의 은혜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그것은 아름다운 형태, 스스로의 수직성을 보증하는 형태에 사는  숨어 있는 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줄저 의 한 장에서 이와 같은 수직성의 주제를 상세하게 논한 바 있다. 그 장을 참조해 본다면, 불꽃 의 수직성에 대해 당면한 몽상의 배경을 모두 보게 될 것이다.   2.   대상이 단순하면 할수록 몽상은 커진다. 고독한 사람의 책상 위에서 촛불의 불꽃은 수직성에 대한 모든 몽상을 준비한다. 불꽃 은 꿋꿋하고 약한 수직이다. 한번으 입김이 불꽃을 흐트러지게 하지만 그것은 다시 곧바로 선다. 일종의 상승력이 그의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촛불은 고고하게 타며, 그 주홍빛은 불끈 일어선다. - 독일 사화집 제 2 권   이렇게 트라클의 한 시구가 말하고 있다. 불꽃은 생명이 깃들어 있는 수직성이다. 모든 불꽃의 몽상가는 불꽃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수직성을  예민한 반사 작용으로 지킨다. 연소에 지장을 가져와 천정에의 비약이 방해되면 불꽃은 바로 반사 작용을 일으킨다. 불꽃 앞에 서 교훈을 얻게 된 수직화의 의지와 몽상가는 그 자신도 다시 곧바로 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게 타며 온 힘을 다하여 열정의 꼭대기까지 가고자 하는 의욕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이 잘 타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커다란 시간,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길게 뻗치고, 끝이 뾰족해진 불꽃 속의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생명의 미묘함! 삶과 꿈의 가치가 그때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의 불! 사람들은 과연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  에드몽 자베.   이렇게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 불꽃의 줄기는 아주 곧바르고 연약해서 그것은 꽃과도 같다. 그리하여 이마주와 사물은 서로 그들의 미덕을 교환한다. 불꽃의 몽상가의 방 전체가 수직성의 분위기를 띤다. 부드러운, 그러 나 확고한 역동성이 몽상을 정점으로 끌고 간다. 사람들은 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내적 선풍에 매우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불 꽃의 복부에서 어둠과 빛이 싸우고 있는 소용돌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불꽃의 몽상가는 그의 꿈을 정점 쪽으로 끌어올 린다. 불이 빛이 되는 것은 바로 그곳이다. 빌리에 드 릴라당은 그의 라는 작품 제 1 장의 제사로서 다음과 같은 아 라비아 속담을 채용하고 있다. 즉 '관솔불은 자기 밑을 비추지 않는다.'라는 말을.   가장 큰 꿈이 있는 곳은 꼭대기이다. 존재의 몽상가에게 있어서 불꽃은 피안의 저편, 에텔적인 비존재 쪽으로 몸을 뻗깇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으로 수직 읻. '불꽃'이라는 제목을 붙인 어떤 시 작품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진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함이여    -  로제 아슬리노   무(無)로써, 불꽃으로써, 아아 단순히 상상된 불꽃으로써, 존재와 비존재를 연주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게시받은 형이상학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러나 모든 심오한 혼은 그 개인의 피안을 가지고 있다. 불꽃은 모든 초월을 깨닫게 한다. 꽃 앞에서 클로델은 이렇게 자문한다. '어디서 이 소재는 성스러운 범주 안으로 가기 위한 비상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만약 우리들이 예전적(禮典的)인 주제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불꽃의 상징주의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기란 아주 쉬운 일일 것이 다. 그때 우리들은 지식을 마주 대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상징주의의 윤곽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작은 책의 기도를 넘 어서게 될 것이다. 불의 표징 밑에 놓여있는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칼 마르틴 에즈만의 대작 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3.   서장에서 우리들은 지식에 대한 모든 배려, 불꽃의 현상에 대한 모든 과학적 내지는 의사과학적 실험을 멀리했다. 우리들은 상 상하는 몽상, 고독한 몽상가의 것인 몽상의 동질성 속에 머무르도록 최선을 다했다. 불꽃을 깊이 꿈꿀 때,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일 수는 없다. 괴테와 에케르만이라는 선생과 제자에 의해 공동으로 이룩된 저 천진난만한 관찰은 어떤 사상을 마련해 주 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은 과학적 탐구에 알맞는 진지한 개조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독일 낭만주의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친 우주 철학에의 통로를 우리들에게 열어 주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   노발리스와 함께 사람들이 가치의 물리학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실의 물리학의 지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두기 위해, 미노르판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금언 '빛이 불을 붙인다'는 말에 주석을 달아 두기로 한다. 독일어로 표기하 면 3음절로 된 이 문장은 극히 훌륭한 것으로서 그것은 보통의 감각이 그 찢긴 상처를 곧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른 사상의 화살이다. 모든 일상 생활은 우리들에게 이 말을 거꾸로 읽도록 가르치고 있다. 보통의 생활에서 빛을 내기 위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가치의 우주론에 동의할 때야 바로소 이러한 도전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Licht macht Feuer'라는 세 음절의 문장은 불꽃의 현상상의 관념론적 혁명, 제 1막이다. 이것은 몽상가가 자기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 반복 하는 중추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다. 몇 시간이라도 계속하여 시인의 입술 위에서 이 세 개의 음절이 반복되는 것을 나는 상상하 며 듣는다.   관념론적 증거는 그것이 틀린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노발리스에게 있어서 빛의 관념성이 불의 물질적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노발리스의 단장(斷章)은 더욱 계속된다. '빛은 불의 과정의 수호신이다.' 이것은 물질적 여러 요소의 시학에 있어서 매우 중대 한 선언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위성이 불에서 그의 절대적 주체로서의 권한을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은 이미 거 기에서 빛이 되는 하나의 과정의 종국에서만 참다운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더욱이 그러한 때에는 불꽃의 고뇌 속에서 불은 그의 모든 물질성을 박탈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 의 필자는 '불'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밝고 생기 있는 불꽃은 벌겋게 달은 숯불보다 더 많은 열을 낸다.]   만약 불꽃에서 이와 같은 인과관계의 전도를 읽는다면 그 작용을 저장하고 있는 것은 첨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첨단에서 정화된 빛은 심지 전체 위에 내려앉는다. 그때 빛은 불꽃의 상승하는 존재를 결정하는 참다운 동력이 된다. 그 행위 자체에 있 어서 사실을 뛰어넘고 스스로의 상승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발리스의 관념화하는 우주 론의 원리 자체다. 모든 관념론자들은 불꽃에 대해 명상하면서 동일한 상승적 허위를 발견한다. 클로드 드 생-마르탱은 이렇게 쓰고 있다.'정신의 운동은 불의 그것과 같으며, 스스로를 상승시킨다'라고   4.   노발리스가 불꽃의 수직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단장을 모두 정리해 보면, 대우주 안에서 직립하고 있는 모든 것, 수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불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을 불꽃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의 환위명제는 다소 그 강도를 약하게 할 뿐 아주 명백하다. '촛불의 불꽃 속에서는 모든 자연의 힘이 활동하고 있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노발리스는 이것을 역으로 '불꽃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쓰고 있다. 불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벌거벗은 그대로의 동물성이며 일종의 극단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식가이다. 이와 같은 아포리 즘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단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신념의 직접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 이 깊은 몽환 상태를 체험하여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몽상하는 것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몽상의 진실이다.   각각의 생명계는 그때는 특수한 불꽃의 한 타입이 된다. 메테르링크가 번역한 일부분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 을 수 있다.   '나무는 꽃 피는 불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꽃의 배설물로 표현되어 있는 특이한 페이지를 참조할 것. 우리들은 타고 있는 존재의 찌꺼기에 지    나지 않는다. 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 / 미완성의 것으로,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동화된다.'   폴 클로델은  
4    불의 시학의 단편들/가스통 바슐라르 댓글:  조회:1010  추천:0  2018-10-20
내 가슴에는  정열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빼냈다  이제 더 이상 내 가슴을 느낄 수 없다    시의 끝부분은 이렇다    내 노래가 다시 불평을 한다  “날카로운 금 가시여,  나 그대을 느끼고 싶구나  내 가슴속에 박힌 그대를.“  -안토니오 마차도-    날개 돋친 불꽃과 재, 죽고 다시 태어나는 불새에게 끌리는 매력  “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晩年)에 불사조적 몽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피닉스.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종합’, 자웅동체의 새, 최후의 원대한 꿈 속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중개자.  “나의 불사조적 꿈들’, 부제는 ‘명암과 잿빛 삶’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존재의 책상 앞에 있기보다는, 나의 무(無)를 쓰다듬으면서 내 비존재의 책상 앞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씌어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사람을 늙게 한다. 언젠가는 결론을 맺고 끝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제한된 문학 이미지들의 문제는 그 어떤 철학적 도구의 도움없이 아주 단순하게 취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고를 연구해오던 방식처럼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으로 이미지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견치 않던 것을 언어에까지 부여하는 상상력의 비약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지 나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예들을 추가하다보면 어떤 법칙을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독서량을 늘린다면 글쓰기의 의지로 부각된 언어, 즉 시적 언어의 인문과학적 조감도가 그려지리라 기대했다.    내가 산책하고 있는 식물학자이며, 나의 독서가 이끄는 대로 ‘시적 꽃들’을 모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주론의 상상력에 관한 기초 철학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4원소, 즉 불, 물, 공기, 대지는 우주론의 백과사전을 위한 책 제목으로 서두가 장식되었다. 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4원소 중 하나의 기호 아래 세계를 ‘사고’했으므로, 우리는 시인들의 이미지가 우주론의 소박함을 되살리면서 매우 오래된 학설들을 다시 빛내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별 문제 없이 독서에 내 열정을 쏟아 부을 계획을 세웠다. 네 개의 자료. 네 개의 곳간이라니, 추수한 곡식과 수확한 포도를 저장하기에 얼마나 안전한 곳인가. 끊임없이 작업하기 이한 얼마나 멋진 상상 속의 시설인가!    시는, 그 자체로-시적 이미지 그 자체- 내게는 특별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상상력의 현상으로 간주된 시는 교감할 수 있는 현상이다. 상상하는 독자는 상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서 상상력의 충동을 받아들인다.    고전 심리학에서 상상력보다 더 막연하게 정의된 정신적 힘은 없다. 극도로 혼동하는 경우에는 상상력을 사라져버린 과거의 지각에 종속시키면서 ‘재생적 상상’과 혼합할 뿐 아니라,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이 상상력을 모든 정신의 창조적 활동에 연결시키고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든 기발함에 결합시킨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학자에게, 정치가에게 부여한다.    사고 영역에서 창안하는 것과 이미지들을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정신적 행위이다. 게다가 사고 영역에서 작업할 때는 이미지들을 쫒아내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수정하지 않고는 사고를 창안하지 못한다. 수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진정한 사고를 끌어내리라 기대해볼 수 있다. 원초적인 진리란 없고, 단지 원초적인 오류들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사고는 오류로 점철된 기나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시적 상상력, 그것에는 과거가 없다. 그것은 준비된 모든 것을 위반한다. 시적 이미지란 진정 말 paroled 의 한 순간으로, 베르그송적 의식의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 상에 위치를 설정하려 할 때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순간이다. 시적 언어의 기습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화경적인 의식에 내맡겨야 한다.    시적 이미지가 있으면 우리는 언어가 씌어지기를 원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글쓰기의 행복을 알 때는 거기에 몸과 마음, 손과 작품을 바쳐야 한다. 조르주 상드는 그점을 알고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각과 말은 서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 글쓰기란, 이를테면 말 위로 불쑥 솟아오른 차원이다. 문학 이미지는 말해진 언어, 즉 의미에 종속된 언어 위로 올라온 진정한 돌출부이다. 돌출부라고? 지적 가치는 판타지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견고해지는 것을 체험하고, 유희적이었던 문학 이미지가 시적 이미지화할 때, 우리는 시란 언어의 세계라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존재의 철학가들은 세상을 말하고,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로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항상 존재, 한존재, 여러 존재들은 말의 보증서이다. 말의 존재는 존재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말은 절대로 자율성을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나아봤자 그것은 외침의 문명이다. 말의 존재 안에는 항상 말의 존재 이전의 존재가 있는것이며 말은 ‘표현한다’. 그 표현의 존재는 단지 위임받은 한 존재, 즉 말하는 존재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에서 드러나는 초인간성의 분출이 위대한 서정적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조화롭게 맞춰지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살펴 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상은 이미지를 능가하길 원한다. 불은 그 유용성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지성주의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중요한 이미지들은 시초의 지배력을 잃지 않는다. 항상 어떻게 인간이, 초인간이, 반신이, 제우스의 아들이 태양 원반 속으로 불을 찾으러 갔다가 그것을 훔칠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를 보여주지만, 급히 만들어진 이 분명한 한 문장이 이 해괴한 이야기를 요약해준다. 특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쳤다는 것이다. 이미지들을 꿈꾸고 자신의 몽상 한가운데에 중심 이비지를 놓는, 이미지에 의한 분석만이 허황된 이야기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할 수 있다. 그 어두운 구멍이 작은 태양, 태양 원반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주형에 뾰족한 도구를 돌리면서 많이 꿈꿔야 한다. 그러면 붗으로 넘치는 도가니에서 불을 훔치게 된다.    불 또는 빛, 작업 또는 지식, 이 양극 사이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광대한 영역이 돈개된다. 이 범위는 대단히 넓어 프로메테우스의 시학에서는 그 단일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허무에는 이미지들이 없다. 허무란 관념에 불과하다. 오로지 이미지들, 시적 이미지들만이 파괴적인 순간을 불멸화시킬 수 있다. 소멸의 미학은 엠페도클레스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시적 이미지를 발견한다. 즉 그것은 미(美) 안에서의, 미를 위한 소멸인 것이다.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라는 부제 아래 씌어진 이 세장이 바로 아니무스로 씌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지배하는 존재들이다. 절대적인 아니무스의 이상형 속에서, 아니마의 온화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니무스의 힘의 의지에 몰두해야만 비로소 그들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순수하고 강인한 아니무스처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경험하고 자신 안에서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안다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체험의 의식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 하나의 단어로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험’이란 단어는 다른 모든 경험이 그렇듯 끊임없이 분석으로 정제되어야 하는 경험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    ‘체험’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체험’을 다루지 않고 쉬운 추상 놀이에 만족하는 자들이라고 우리가 조금은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철학자들에 대립하여 씌어졌다.    사실 스쳐 지나가는 사건 속에서, 특별한 정신적 선택에 따라 느끼는 상대적인 강렬한 속에서, 사람들이 모든 삶을, 깊이 있는 모든 삶을 소중히 여긴다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 체험은 그것이 재체험될 수 없다면 덧없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지닌다. 그리고 규율이 없는 것 중에 으뜸인 상상된 체험을 어떻게 체험과 융합하지 않겠는가? 인간적 체험, 인간 존재의 현실은 상상적인 것을 만드는 요인이다.    게다가, 누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 누가 본래의 삶의 풍부함과 다양함 속에서 그 삶을 살고 있는가? 본래의 삶은 우리 없이 우리 안에서 체험된다. 우리가 그 삶을 잘 산다면, 그와는 반대로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을 너무 능숙하게 표현한다면, 그 삶을 더 이상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기 한 존재로 결정될 수 있는 존재의 단위가 아니다. 인간 존재란 존재들이 밀집해 있는 벌집이다. 존재의 꿀을 만들고 시적 삶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아련히 먼 생각들이며 광적인 이미지들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중심이 없다. 삶은 어느 주변에서 생동하는가? 그런데 삶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면서 생동하는 것이니, 존재는 과연 어떤 이미지 부근에서, 어떤 시들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 넘치는 생명을 찾아내는 것일까? 인간 존재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이 그가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시간에, 또 스스로 자신이 살고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시간에 살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절대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파도에서 흘러나와 모든 존재를 존재의 일반적인 생성으로 데려가는 물줄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아니 거의 항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지나간 정체된 존재들이다. 우리 안에서 삶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베르그송은 체험의 경험 속에서 시간 측정기란 쓸모없거나 혹은 속아넘기는 도구라는 걸 별 어려움 없이 보여 주었다. 시간 측정기, 그것은 다른 이들의 시간이며, 우리의 체험시간, 즉 지속을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시간대’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은 잘 묶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시간들의 다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들’은 우리의 체험 시간(지속)을 조절할 박자를 찾지 못한 채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다. 우리 존재의 역동성, 우리 존재의 다양한 역동력을 강한 필치로 나타내줄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미지들만 바꾸면 된다. 불의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존재로 형성된 불덩어리이다. 우리에게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우리의 불 속에 중심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내일의 불을 따뜻하게 지탱해주는 재의 시간인가?    불새가 탄생하는 그 결합에 의해 더 큰 가치가 부여된 두 단어의 매듭에서 다양한 현실이 연합한다. 즉 날아다니는 불길,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룻밤에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의 날개, 알록달록한 몇 마리 새들이 여름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불새들이 불의 특성들이다.   내가 불새를 처음으로 본 것은 불새가 나의 강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유년기에 더욱 커 보이는 강, 하늘처럼 고요하고 아주 푸르른 강, 그 강의 이름이 바로 오브였다. 창공으로 쏘아올린 화살처럼 불새가 솟아오른다. 날카로운 외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다. 새는, 아주 빨리, 수면을 흔들며, 아마 그의 유일한 노획물이었을 물방울을 뿌리면서 하늘을 향해 다시 떠났다. 불로 달궈진 쇠처럼 푸른 물총새였다. 새는 사라졌고 꿈이 시작된다. 그 새는 나무들 저편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온 것이다! 이 불새는 태양 속에, 유월의 태양 속에 자기 둥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토록 평화로운 물에 대한 얼마나 큰 침해이며 죄인가! 자연에서는 빨리 가버리는 모든 것이 범죄이다. 하늘에서 내려운 이 불길은 어째서 거울 같은 물에 살며시 자신을 비춰보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멋진 존재가 어떻게 그토록 탐욕스러울 수 있는가? 물총새와 은빛 잉어의 결합이라니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이런 푸르름의 잔혹함이 한 어린아이의 세계관을 뒤흔들 수 있을까?    한 어린아이의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은 그 어린아이의 세계의 사건이 아닌가. 그러니 곧 이 세계의 사건이 아니던가. 이러한 추억은 그것이 단일하다는 점에서 우주극cosmodrame이다. 하나의 추억이 이렇게 우주극으로 상승할 수 있을때는 그것이 역사의 한 점인지 아니면 하나의 전설의 출발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물총새는 내 회상의 나라에서는 한 마리 피닉스이다.    신기한 일이 허무해져버렸을 때 경이로움은 우수로 바뀌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시절 나는 다시 한번 같은 강에서 그 물총새를 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름날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날 우리 둘이 있었다! 나는 책에서 읽은 전설들과 연결시키면서 이미지들을 늘리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전설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경이로운 이미지를 응시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섬광을 발하는 새는 피닉스의 근본 이미지이다.    그후로 피닉스-물총새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사는 동안 중요한 것은 거의 못 본다. 망태기 속에 노획물을 집어 넣는 사냥꾼이 여름날의 하늘이나 서늘한 강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그 지극한 영광 속에서 죽음을 맞는 새를 생각하고 또 꿈꿀 수 있겠는가? 찬란함에서 유용함으로 넘어가면서 사냥꾼은 ‘멋진 깃털은 맛없는 고깃살을 감추고 있다’는 식도락가들의 격언을 떠올리기나 할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멀리서 꿈꾸는 것을 금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몽상가는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멋진 대상이 있을 만한 세상을 보는 비율 속에서 본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화살, 불새, 타는 듯한 이미지는 한 세계의 중심이다.    T.S 엘리엇은 이 이미지를 빛의 순간으로 적고 있다.    물총새의 날개가 빛에 빛으로 화답하고 나서  ......빛은 고요하다.  시인은 이 능동적인 빛의 순간을 진정한 시간의 부조relief 여 temps로 느낀다. 엘리엇은 다음 두 행으로 시를 끝맺는다.    우스꽝스럽구나 슬프고 헛된 시간이여  이전과 이후로 펼쳐지니.    우리는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서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의 근본 이미지를 주시할 것이다. 이 시적 이미지가 시적 몽상들의 어떤 통합에서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시적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를 인간의 미학에 초대한다.  -태양 원반에서 프로메테우스이 불까지  -찔린 눈과 시선의 불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몽상이 솟아오르는가!  키플로페스 이마 한 가운데 외눈이라. 키클로페스의 눈이 회오리치는 불을 내던지지는 않는가? 눈의 둥근 윤곽을 따라 완전히 돌려가면서 그 눈을 후벼파야한다. 많이 돌려 후벼팔수록 많이 복수하는 것이다. 단검으로 잘라 다듬은 올리브 나뭇가지 끝이 투창처럼 뾰족해진다해도 충분치 않으리라. 오디세우스는 나무를 불태워 단단하게 만든다. 초록빛 나무가 검은 나무로 변한다. 나무는 뜨거운 쇠와 같은 것이리라. 키클로페스 눈 속에서 깊은 불이 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반(反)불이 있어야 한다. 이 흉기는 그의 불구멍 속에서 뾰족한 도구가 된다. 불을 끄려는 몽상이 불을 탄생시키는 몽상과 합류한다. 이 시선의 불을 끄기를 원할 때, 그 깊숙한 온상까지 불을 끄기를 원하면, 뽀족한 도구로 불을 창조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불의 탄생과 불의 죽음이 같은 인미지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언급하면서 가장 자주 덧붙이는 것이 불복종의 표시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콤플렉스의 시사성을 느낀다. 신화에서 사람들은 오로지 불복종의 매혹만 생각한다.    영웅 프로메테우스는 건설적인 불복종의 상징이다. 아버지보다 더 잘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불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불복종하는 것은 창조자의 신념이다. 불복종은 벌을 피할 만큼 미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매한 죄의식, 혼미한 죄의식이 남는다. 모든 지식에 활력을 주는 불복종의 역동성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불을 준비하는 것이 ‘더할 나위없는’의식의 행위이며, 불은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어두운 상태를 없앤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의 가족으로 제우스가 그들에게 가한 박해에 관련이 되었다. 그는 카프카스 산이 있는 스키티아에 은거해야 했고, 제우스가 통치하는 동안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황량한 고장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비애는 그의 간을 갉아먹는 독수리이다. 아니면 이 독수리가 한 철학자의 깊고 비통한 명상의 생생한 이미지는 아닐까? 스키티아 주민들은 극도로 야만스러웠으며 법도 관습도 없이 살고 있었다. 공손하고 학식있는 이 왕자는 그들에게 좀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쳤다. 어떠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미네르바의 도움을 얻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그가 하늘에서 빌려온 이 불은 그가 스키티아에 세운 대장간들이다. 아마도 프로메테우스는 그 고장에서 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며칠공안 불을 보존하기에 알맞은 식물인 큰 회향풀 줄기속에 불을 넣어 그곳에 가져왔을 것이다. 마침내 프로메테우스는 스키티아의 쓸쓸한 생활에 지루해져서 최후의 날을 맞으러 그리스로 온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에세 신들의 영예, 적어도 영웅의 영예를 되찾아 주었다. -이 항목은 Jaucourt가 작성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치고 카프카스 산 정상에서 신들의 복수를 감내한다. 프로메테우스는 한 새에게 고통받는다.  불, 새, 대담한 사람은 정상의 존재다.    에트나 화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불의 시학을 격상시킨다.    엠페도클레스는 소멸의 시학을 보여주는 가장 중대한 이미지들 중 하나다.    불에 헌신하는 것, 그것은 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는 불에 헌신한다는 것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닌가? 불길의 장엄함에서 무의 장엄함으로 가는 중요한 이행passage. 또는 이 중대한 불, 이 완전한 불은 총체적인 정화의 근거가 아닌가? 그런데, 정화된다는 것은 재탄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피닉스에 대한 몇 가닥 희망이 철학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의 장은 열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다음과 같이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분명 탄생과 죽음은 두 가지 모두 순간의 영광이다. 그렇지만 탄생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전설에는 날짜가 없다. 전설은 머무는 것이며, 어떤 시인이 전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하면 그 즉시 전설은 새로운 삶을 되찾기 때문이다. 정상의 전설들은 변하지 않는다. 카프카스 이에 못박힌 프로메테우스, 에트나 산의 불이 사방에 뿌리는 엠페도클레스, 이러한 전설에서 정상은 하나의 인물이다.    신세계의 주민,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같은 시인은 자신의 우주성에 대한 몽상들에 고 사고의 고귀함을 부여하기 위해 지중해를 필요로 한다. 포는 그의 『유레카』를 선포하기 ㅇ위해 불의 산 정상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정상에서 초인간적인 존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동과 서, 남과 북, 뜨고 지는 모든 것을 같은 시선 속에 , 원래의 시선 속에 통합시키기 위해 사방에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에트나의 정상에서 한가로이 자기 주변을 두루 살펴보는 자는 무엇보다도 경관의 광활함과 다양함에 감동한다. 그는 발꿈치를 축으로 한 바퀴 재빨리 돌아야만 그 숭고한 단일성 속에서 파노라마를 포착한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우주(나는 가장 광범위하고 유일하게 합법적인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구상을 철회시키는 단 하나의 조약도 모른다. 그러니 에트나의 관념성은 영원히 찬양받지 않는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은 분명히 굴광성의 피해자이다. 이것이 동물심리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즉각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몽상가에게는 어떠한가? 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시인에게는 어떠한가?  “나는 어느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나는 라마 모양의 거대한 동물을 점토로 빚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동물은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불길이 그 괴물을 관통하며 그에게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자줏빛 망이 파고 들어간 그 괴물은 동맥과 정맥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털 뭉치와 지느러미의 섬유질 부속체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식물의 모습을 띠고 있던, 말하자면 자동력이 없는 물질을 번식력이 있게 만들면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이 걸작품을 감상하느라 걸음을 멈췄다. 뜻하지 않게 신의 창조의 비밀을 간파한 것 같았다.    질료에 활력을 넣어주는 프로메테우스적 행위를 꿈꾸자마자 그는 곧 금은 세공사들이 지상에 알려지지 않은 철강을 가지고 일하는 또다른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진사와 흡사한 붉은 철과 쪽빛 철. 장식들은 망치로 두드려져 단련되지도 않았고 끌로 조각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형태가 잡히고 착색되었으며 마치 어떤 화학적 혼합이 만들어내는 철제식물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적 행위의 서곡이 아니겠는가? 네르발이 한 직공에게 묻는다. “인간은 만들지 않나요?” 내가 한 직공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할 수 있겠소?”  “우리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공동 운명은 지적 기능의 발달과정이 더 조숙하고 폭넓은 자들에게 더욱 무거운 것이리라...... 결국, 인간은 항상 자신을 성찰하도록 강요당한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사람들은 가장 힘든 순간에 ‘의사여, 너 자신을 치료해라’ 라고 소리친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얼마나 여러 번 고통스러운 한숨을 지으며 ‘나는 혼자서 압착기를 압착한다’ 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 했던가. 나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방법을 생각할 때면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가진 풍요로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신화적 형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신들에게서 떨어져나와 자신의 아틀리에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온 세계를 채워 넣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였다. 나는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고는 주목할 만한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큰 성공을 거둔 내 작품들은 고독의 산물이었다. 내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래도, 나에게는 힘도 창작적 열정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지만 작품 완성은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산문이나 시에서 내 고유의 문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도움을 차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본받아 신과 나를 분리했다. 왜냐하면 내 성격과 지적 습관에서는 늘 하나의 생각이 다른 것들을 매몰시키고 내쫒아버리기 때문이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내 안에서 활기를 띠었다. 나는 내 크기에 맞춰 티탄의 낡은 옷을 제작했다. 통치하고 있던 신들은 티탄과 인간 사이에 불법으로 개입한 존재로 간주될 수 있었으니 불평할 자격이 있었다. -괴테-    일신교에서 악마가 그렇듯이, 다신교에서는 티탄들이 이를테면 그림에서의 어둠과 같은 것이다.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은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작은 화상 앞에서 벌써 망설인다. 애초부터 너무 뜨거운 것은 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적 방어현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안전하게 엠페도클레스적인 유혹을 즐길 수 있다. 결국 엠페도쿨레스는 한 번도 희생자를 만들지 않은 아주 희귀한 이미지들이다.    때로는,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은 육체 안에서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장작더미이다. 사람들은 불태워질 수 있다. “사람과 대등한 불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질 수 있다”고 시는 말한다.  명상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나에게 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보여주는 자는 밝히지 않는다. 증명하는 자는 보여주기를 싫어한다.”  이미지가 빛날수록 그 모호성은 더욱 당혹스럽다. 그것은 깊이의 애매함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은 이미지가 피상적이고 덧없기를 바란다. 움직이지 않는 모래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물, 그 흐름에 아득한 하늘을 반사하는 물…… 그러나 하늘과 대지는 모두 이미지에 수직성을 부여한다. 상승하는 모든 것은 깊이의 힘을 감추고 있다.   
3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댓글:  조회:1174  추천:0  2018-10-20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적힘은 매우 다른 두개의 축위에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새로움앞에서 비약을 찾는, 즉 회화적인것이나 다양함, 예기치 않은 사건을 즐기는것이다. … 또 하나의 상상적힘은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것과 영원적인것을 동시에 존재속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8   작품의 언어의 다양성과 변화하는 빛의 생명을 지니기 위해서는 감상적 요인이나 심정적요인이 형식적요인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의 이미지가 형식, 즉 소멸하기 쉬운 형식,공허한 이미지, 변화하는 표면에서 멀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본질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꿈을 꾼다. 그것은 무게를 가지며 핵심을 갖게 되는것이다.9   우선 파괴적인 철학자들만이 미에서 모든 접미사를 떼여내고, 나타나있는 이미지뒤에 숨어있는 이미지를 찾아내기위해 전력을 다하며, 상상하는 기능의 뿌리 자체에이르는 이 막중한 일에 손을 댈수 있는것이다. 물질의 근원에는 어두운 하나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물질의 밤에는 검은 꽃들이 피여있다. 꽃들은 이미 벨벳의 꽃잎과향기의 방식을 갖고있다.10   시적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것이다.12   우리는 상상력의 령역에 있어서 불,공기, 물, 흙의 어느것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적상상력을 분류하는 , 4원소의 법칙을 규정하는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2   담즙질 인간의 몽상은 불과 화재와 전쟁과 교살이며, 우울 질인간의 몽상은 매장과분묘와 유령과 도망과 무덤, 즉 음산한 모든것들이며, 점액질인간의 몽상은 호수와강물의 범람과 난파이며, 다혈질인간의 몽상은 새의 비상과 경쟁과 향연과 음악회,그리고 사람이 차마 이름 붙이기를 꺼리는것과 같은 사물들이다.13-14   꿈의 우주론에서 물질적원소는 근본적원소 그대로이다.14   몽환적인 풍격은 여러인상으로 가득 차있는 하나의 액자가 아니고, 부풀어오르는 하나의 물질인것이다. 15   존재란 무엇보다 먼저 각성이며, 더욱이 이상한 인상의 의식 속에서 눈을 뜨기때문이다.20   고향이라는것은 공간의 넓이라기보다는 물질이다. 즉 화강암 이나 흙, 바람이나 건조함, 물이나 빛인것이다.21   심리적대립감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물질은 끊임없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분신을 찾을수 없다. 28   에드거포의 말 ‘만일 가능한 론리와 과학을 비주체화 해야 한다면,  반대로 어휘와 통사론을 비객체화하는것도 그에 못지 않게 불가결 한것이다.’라고 말하고있다. 대상의 이러한 비객체화가 없다면, 또 대상밑에 우리가 물질을 볼수있게 하는 형식의 변형이 없다면, 잡다한 사물들로 움직이지 않고 생기없는 고체나 우리들 자신들과 무관한것으로 , 세계는 흩어져버릴 것이다.29   실체가 없는 작품은 생명력이 없다35   상상력은 그 어원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고 ,현실을 넘어서 현실을 노래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초인간성 능력이다…. 상상력은 사물과 드라마이상으로 창조하는것이며, 새로운 생명과 정신을 창조하고 , 여러가지 새로운 타입을 지니는 비전의 눈을 뜨게 하는것이다. 36   참다운 포에지(시, 시작법, 시학…)라고 하는것은 눈을 뜨게 하는 기능을 말한다37   상상할수 있는 세계의 지도(그림)는 꿈속에서밖에는 그릴수 없다. 감각할수 있는 세계는 무한히 적다! 몽상과 꿈은 어떤 혼(사람)에게는 미의 재료가 되는것이다. 38   신이나서 그린 환상은 행동하기를 멈추는 환상이다. 여러가지 물질원소에는 힘을 지니고있는 환상이 호응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물질에 충실한 한도내에서이며, 또한거의 같은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원초적꿈에 충실한 한도에서이다39   콤플렉스는라는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이러한 변형을 계속한다…만약 승화작용이 개념에 관한 단순한 일이라면, 이미지가 개념론적 도식속에 갇히게 되자마자 곧 그작용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색갈은 넘쳐흐르고 , 물질은 부풀어오르고 , 이미지는 스스로를 교화한다. 40   한편의 시를 낳는 꿈의 이러한 항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적이미지이상의것을 눈앞에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속에서 태어나 우리의 꿈속에서 사는 이 이미지, 물질적 상상력을 위해 무궁무진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꿈의 물질로 가득찬이 이미지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42   피상적인 포에지와 같은 포에지를 구별하는 이러한 밀도를 사람들은 ‘감성적가치’에서 ‘감각적가치’로 이행시킴으로써 맛보게 될것이다. ‘감각적가치’와의 관계에서 바르게 분류할수 있을 때에만 상상력의 교의가 밝혀지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단지감각적가치만이 ‘만물조응’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성적 가치는 번역밖에는 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이란 의미는 감각과 지각의 수용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것이고, 감각적이라 함은 지각하고 감각하는 능력을 가리키는것이라 할수있다. 주해에서.)46   인생은 자라나고, 존재를 변형시키고 순결함을 취하여 꽃을 피게 하며 상상력은 가장 먼 은유로 열려 갖가지 꽃의 삶에 참가하는것이다. 51   백조는 문학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대용물이다.73   무의식에서 움직이는 모든 이미지와 같이, 백조의 이미지는 남녀양성인것이다. 백조는 빛나는 물의 응시에 있어서는 여성이며 , 행동에 있어서는 남성이다. 무의식에 있어서 활동은 행위이다. 무의식에 있어서는 ‘어떤 현실적행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행위를 암시하는 이미지는, 무의식계에 있어 여성에서 남성에로 발전하는것이다. 76   석양의 수평선 깊숙이 붉은 백조는 변함없이 영원한 도전을 펼치고 있다. … 그는 공간의 왕이며 , 빛나는 왕관의 발밑에 있는 노예처럼 바다는 창백해있다. 87   역동적인 포에지에 있어서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는것이 아니고 생성하는것이다. 사물은 이미지에 있어서 우리의 몽상, 끝없는 몽상속에 생성하는것이다. 물을 응시한다는것, 그것은 흘러간 다는것, 분해한다는것, 죽어간다는것이다. 95   몽상은 때때로 무한한 반영과 수정을 닮은 음악으로 소리를 내는 맑은 물앞에서 시작된다.95   만약 독자가 시인의 모든 이미지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신의 리얼리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는 여행에의 유혹을 겪게 될것이며, 이윽고 그 자신도 ‘이상함의미묘한 감정에 감싸일’것이다. “자연의 관념은 아직 존재하고있으나 이미 변질되여,그 성격에 있어 흥미깊은 수정을 받고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의 신비하고 장엄한 균형이며, 감동적인 균일성, 마법적인 정정인것이다. ” …환영이 현실을정정 하는것이다. 환영은 현실로부터 이음매나 비참함을 떨쳐버  리는것이다.98-99   물질화하는 몽상-물질을 꿈꾸는 저 몽상- 은 형식의 저쪽에 있는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물질은 형식의 무의식 의이라는것이 이해될것이다. 그것은 덩어리속의물 그자체이다. … 다만 물질만이 복잡한 인상과 감정의 무게를 받아들일수 있는것이다. 물질은 감정의 재산이다. 101   물의 요정, 즉 환영의 수호자는, 하늘의 모든 새들을 자기손으로 붙잡고있는것이다.물웅덩이는 우주를 내포하고 있다. 꿈의 한순간은 홈 전체를 내포하고 있는것이다.101   물은 일종의 우주적 고향이 되여, 하늘에 고기를 번식시 키는것이다. 고생하는 이미지가 깊은 물에 새를, 그리고 하늘에 물고기를 주는것이다. 별-섬이라는 무력하고 양의적인 개념으로 나타낸 도치가 여기서는 새-물고기라는 살아있는 양의적 개념으로표현되여있다. 이러한 양의적개념을 상상력속에서 구성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이렇게 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이미지가 갑자기 얻게 되는 매혹적인 애매성을 맛보게될것이다.103   죽어가는 어머니의 추억은 에드거포의 작품에서는 독창적으로 두드러진것이다. 그는 동화의 힘과 괴상한 표현의 힘을 지니고있다.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이미지가 어떤 무의식의 추억에 강하게 덧붙혀있는것은 이미 그 이미지들이 미래의 긴밀함을 서로들 사이에 지니고있기 때문인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체이다. 물론이러한 긴밀성은 논리적인것이 아니다. 또 직접적으로 현실적이지도 않다. 현실속에서 나무그늘이 물결에 빨아들여지는것을 보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상상력은이미지와 몽상의 이러한 긴밀성을 정당화 하는것이다…. 이미지의 측면 그자체, 표현수단의 단계 그자체에 따라 발전시키는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거듭 되풀이되여 말하지만 , 우리의 현재의 연구가 바쳐지는것은 , 이미지이에 대한 보다 표면적인 삼리학에 대해서인것이다.112   새로운 분석방법에 따라서 책을 읽게 되자마자 멀리 떨어져있는 이미지를 받아들여,다양한 길로 상상력을 자유로이 비약시키는, 매우 변화 많은 승화작용에 참가하게 되는것이다. 고전적인 문학비평은 이러한 다양한 비약을 구속한다.114   끊임없이 다시 상상하고 있을 때만이 시적기능이 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새로운형식을 부여하는것임을 비평은 쉽사리 잊어버리고있는것이다.114   몽사가는 이제 더 이상 이미지를 꿈꾸지 않고, 물질을 꿈꾼다.124   우리는 상상력이 그 창조적형식에 있어서 , 창조하는 모두에 생성을 강요하고 있음을 믿고(있다)130   참으로 강력한 리익이란 공상적인것이다. 즉 그것은 꿈꾸는 리익이지 계산하는 리익이 아니다. 가공적리익인것이다. 바다의 영웅은 죽음의 영웅이다. 최초의 수부는 사자(死者)와 마찬가지로 영감했던 최초의 생자를 말하는것이다. 141   죽음은 여행이며 여행은 죽음인것이다 142   나는 그대가 출발한 오솔길을 보았다! 잠과 죽음은 우리를 더 오랫동안 때어놓지 않으리라… 들어보라! 환영같은 급류가 와글거림을 멀리서 음악으로 가득찬 숲의 속삭이는 미풍에 뒤섞고있다. (셸리의 시)145   이미지의 자연스런 싹, 물질적원소의 힘에 의해서 길러진 싹에 의해서만 이미지는번식되고 모아지는것이다. 161   아침의 조용한 물소리 장미처럼, 내일물의 사자는 거슬러 오리라. 은빛종소리는 헤염치리라, 얼마나 상냥한 바다인가… 아! 내방의 갈대는 얼마나 울부짖고 있는것일가(정채로운 이미지)165   시의 기능을 지니는 모든 위대한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오필리아의콤플렉스도 우주적 단계에까지 올라갈수가 있다. 그때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는 달과 물결의 일치를상징화 한다.165   이미지가 갖는 특징이 전혀 현실주의적인 기원을 갖지 않는다느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가? 그것들의 특징은 꿈꾸는 존재의 투영에 의해서 생기는것이다. 물에 비친달속에서 다시 오필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기에는 강한 시적교양이 필요한것이다. 167   다양한 이미지를 동일한 주제아래 모을수는 없는것이다 169   닫힌 물속을 흘러가는 배와 같아 죽은자처럼 단 하나의 원소를 지니고있었을뿐173   형식이란 상상력에는 ‘구성’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물질적 상상력은 ‘결합’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176   몽상의 이미지는 일원적이거나 아니면 이원적이다. 그런 이미지들은 실체의 단조로움속에서 꿈꿀수 있다. 만약 그런 이미지들이 결합을 원한다면, 그것은 두 원소의 결합인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의 지배속에서 모든 결합은 결혼이며, 삼자사이의 결혼이란 존재하지않는것이다.181   돌발적인 은유, 놀라운 대담성, 전격적인 아름다움이 독창적인 이미지의 힘을 증명할수 있다…. ‘물은 불타는 물체이다’ ‘물은 젖은 불꽃이다’ 라고 말하는 노발리스의수수께끼같은 완벽한 말도 똑같은 말이다. 183-184   본질적인 몽상은 , 그야말로 반대물들의 결혼인것이다.185   상상력은 작은것을 커다란것에, 그리고 커다란것을 작은것에 번갈아 투영하는것이다. 만약 태양이 바다의 영광스러운 남편이라면, 리바송의 차원에서 물은 불에 몸을바치는것이 필요하며 , 불은 물을 지니는것이 필요하리라. 불은 자신의 어머니를 낳는것이지만 , 이것이 바로 연금술사들이 리그베다를 모르는채 싫증날만큼 사용하는공식인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몽상의 근원적인 이미지이다.187   ‘구리빛’의 독특한 똑같은 구름이 나타난다.192   상상할수 있는것을 뛰여넘어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족할만큼 강력한  현실을 갖게 되리라. 193   밤의 꿀은 천천히 소모된다. 태양의 냄새는 너무나 강해서 햇볕을 쬔 물은 자신의 향기를 우리에게 줄수가 없다.밤이 너무나 고요하여 내게는 그것이 짜디짜게  생각될 정도이다. 밤은 때때로 가까이에서부터 우리를 감싸며 입술을 차갑게 하려고 다가오는 아주 가벼운 물과 같다.우리는 자신속에 있는 수분에 의해서 밤을 빨아들이는것이다. 196   반죽의 꿈(흙과 물의 어울림)에 속하는 이와 같은 꿈은, 창조하고 , 형성하고, 변형하고, 반죽하기위한 투쟁 또는 패배의 교차인것이다.200   열손가락은 양조통속에서 준마를 내갈기고있다.204   눈물은 너의 비참한 뇌수를 물에 빠지게 했던것이다. 소금기 없는 언어는 너의 입위로 미지근한 물처럼 흐르고 있다.211   물질적몽상은 조각하는것이다. 조각하는것은 언제나 몽상 이다.213   형식은 완성된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물질 이란 끝없는 몽상의 도식인것이다.213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원적 감정속에서 힘을 길어올리러 갈 필요가 점점 더 많아 질것이다.218   마음을 다 바쳐 어떤 현실을 사랑하자마자 그것은 벌써 혼이 되고 추억이 되는것이다. 219   상상력의 령역에서 사람들이 흰색에 대해 기분을 맞추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달의 금빛 어린 빛이 내물위에 덧붙혀질 때… 227   우리의 모든 문학교육은, 형식에 관한 상상력과 명확한 상상력을 기르는데 만족하고있다. 244   모든 이미지는 부재이며, 하늘은 텅 비여있으나, 운동은 생생하고 원만하게 , 또 리듬을 지닌채 거기에 있다.247   물질적상상력만이 끊임없이 전통적이미지를 활기차게 하며, 몇몇 오래된 신화적형식을 부단히 소생시키는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은 형식을 변형시킴으로써 형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형식이 변형하는것은 스스로의 존재양식에 반대되는것이다. 254   순수성을 몽상할수 없이는 순수성을 알수 없는것이다. 255   사라져버린 문명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특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이러한 ‘몽상’인것이다. 단지 사실의 무게를 잴뿐만 아니라 꿈의 무게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왜내하면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라 할지라도 모든것은 보여지기전에 꿈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56   물질적상상력은 근원적법칙의 한 례가 있다. 즉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가치부여된 실체는, 미소한 량이라도 , 다른 실체를 매우 큰 덩어리에 작용학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힘의 몽상의 법칙 그자체. 즉 손바닥속의 작은 량으로 우주적지배의 수단을 지니는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형태로서는 열쇠가 되는 말이나 조그만  말이 아주 깊숙이 숨겨진 비밀도 드러나게  할수있다는 리상이기도 하다… 순수한 한방울의 물은 태양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불순한 한방울의 물은 우주를 오염시키기에 충분한것이다. 모든것은 물질적상상력으로 선택된 행동의 윤리적의미에 달린것으로서, 만약 그것이 악을 꿈꾼다면, 불순성을 전파하여 악마적싹을 개화시킬것이고 만약 선을 꿈꾼다면 순수한 실체의 한방울을 신뢰하여 자비로운 순수성을 빛나게 할것이다. 실체의 행동은 스스로의 내면성에서  원했던 실체적생성으로서 꿈꾸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인격의 생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행동은 모든 상황을 뒤엎고 모든 장해를 뛰여넘으며, 모든 경계를 부숴버릴수 있는것이다. 사악한 물은 음흉하나 , 순수한 물은 예민하다. 두가지 의미에서 물은 의지가 된다. 모든 일상적성질이나 표면적가치는 부차적특성의 한단게로 옮겨진다. 명령하는것이 바로 내면인것이다. 실체적 행동이 빛을 발하는것은 , 중심적인 점이나 응집된 의지로부터인것이다.270   물질적상상력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됐을 때, 스스로의 원소적 힘속에서 꿈꾸어진 물질은 정신이나 의지가 되기까지 앙양 되는것이다. 273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의미사이에 ‘교감’이 있다고 할 때,그러한 비유의 심리학은 만들어진것이 아니고-속임수로 감추어진것이다. 그때의 교감은 련상일 뿐이리라. 사실 교감은 감성적인 여러 인상의 살아있는 통합인것이다. 참으로 물질적인 상상력의 진전을 사는生 자에게 비유적의미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비유적의미는 감성의 일정한 무게, 즉 일정한 감성적물질을 유지하고 있는것이다. 모든것은 이러한 영속적인 감성적 물질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273   ?상상력의… 직접적인 행동이 명백하게 되는것은 , 문체의 신선함이 가장 어려운 성질에 속하는 문학적상상력을 물로 할 때이다. 그것은 작가에 달린것이지 취급된 주제에 달린것은 아니다183   물질적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연극화한다. 물질적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속에서 찾아내는것이다.280   선천적으로 위대한 시인은, 깊은 삶속에 자신의 자연스런 자리를 갖고있는 여러가치를 상상하는것이다. 281   바람을 일으키는 영웅은 “나는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는 갈대의 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다리는것, 힘앞에서 자신을 구부리는것을 권하는 ‘수동적인 금언’에 다름 아니기때문이다. 그것은 걷는 사람의 능동적 금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굴’의 보행자는 바람을 마주하고, 또 바람에 대항해서, ‘전진하면서’ 스스로를 굽히기 때문이다. 그의 지팡이는 폭풍을 똟고 대지에 구명을 내며,질풍을 검으로 자른다. 역동적관점에서 본다면, 바람속의 보행자는 갈대의 반대인것이다.303   폭풍속에 둘러싸인 보행자는 얼마나 쉽게 사모트라케의 승리를 상징하고있는가! 그는 곧 작은 깃발이고, 국기이며, 군기인 것이다. 그는 용기의 표시이고 , 힘의 증거이며, 토지의 점령인것이다. 폭풍에 펄럭이는 외투는 그러므로 바람의 영웅에 내재하는 일종의 깃발, 빼앗을수 없는 깃발인것이다.304   특수화된 콤플렉스는 원초적콤플렉스의 산물이기는 하나 , 회화적특징으로 스스로를 덮고, 객관적 아름다움속에서 스스로 를 나타내면서 우주적 경험속에서 스스로를 특징화할 때에만 미적기능을 갖기에 이르는것이다. 315   상상된 사실은 ‘현실적사실’보다 더 중요한것이다. 330   현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리학적으로 광기어린 은유는, 그러나 시적진실인것이다. 그것은 은유가 시적인 혼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현상이며,우주적자연위에 던져진 인간적지연의 투영이기도 한것이다. 343   눈을 깜박거리는것의 행위는 현실적인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다른 행위는 그것이 수반하는 소리에 의해서 그 말의 뿌리역할을 하는 음향을 아주 잘 상기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듣기 위해서  ‘생산하며’ ‘투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일종의 대표적의성어, 즉 떨어지는 눈꺼플에 소리를 주는 일종의 추상적의성어가 존재하는것이다. 폭풍이 지나간위에 나뭇잎에서 떨어지면서 이상에서 말한바와 같이 눈을 깜박거리며 빛과 물의 거울을 떨게 하는 물방울이 있다. 그것을 ‘바라볼’ 때, 떠는것이 ‘들리는’것이다.353   ㅁ 물은 가장 충실한  ‘목소리의 거울’ ㅁ싸락눈은 타닥타닥 튀고 ㅁ바다는 번쩍이는 등뼈, 벌겋게 달군 쇠로 낙인을 찍히는 얼빠진 암소와 같다. ㅁ 나는 흐름을 바이올린처럼 지닌다 ㅁ물에 대한 말라르메의 노래   오! 거울이여   권태로 인해 너의 테두리속에 얼어붙은 차디찬 물 몇번인가 , 그리고 몇시간 동안인가, 가지가지의 꿈으로 비탄에 잠기며 깊은 구덩이의 네 얼음밑에 나뭇잎같은 내추억을 찾아 헤매며, 아득한 그림자처럼 나는 네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두렵구나! 저녁이면 네 엄숙한 샘물속에 어수선한 내 꿈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는 알았다49   2015.2.9.  
2    천개고원 / 들뢰즈 댓글:  조회:821  추천:0  2018-10-20
용량 많아 퍼올릴수없어 사이트주소를 복제해 올려놓습니다. 사이트주소들을  클릭하면 해당페지로 이동합니다 ^^ 들뢰즈 천개의 고원 (1) http://cafe.daum.net/ko.art./am0K/841   들뢰즈 천개의 고원 (2) http://cafe.daum.net/ko.art./am0K/843   들뢰즈 천개의 고원 (3) http://cafe.daum.net/ko.art./am0K/844   들뢰즈 천개의 고원 (4) http://cafe.daum.net/ko.art./am0K/845   들뢰즈 천개의 고원 (5) http://cafe.daum.net/ko.art./am0K/846   들뢰즈 천개의 고원 (6) - 요약1 http://cafe.daum.net/ko.art./am0K/847   들뢰즈 천개의 고원 (7) - 요약2 http://cafe.daum.net/ko.art./am0K/848   들뢰즈 천개의 고원 (8) - 비인간주의 존재론 1 http://cafe.daum.net/ko.art./am0K/849   들뢰즈 천개의 고원 (9) - 비인간주의 존재론 2  http://cafe.daum.net/ko.art./am0K/850   들뢰즈 천개의 고원 (10) http://cafe.daum.net/ko.art./am0K/851   들뢰즈 천개의 고원 (11) - 대담 http://cafe.daum.net/ko.art./am0K/855   들뢰즈 천개의 고원 (12) http://cafe.daum.net/ko.art./am0K/856   들뢰즈 천개의 고원 (13) - 내재의 평면 . 다양체 http://cafe.daum.net/ko.art./am0K/857   들뢰즈 천개의 고원 (14) – 시네마 http://cafe.daum.net/ko.art./am0K/860   들뢰즈 천개의 고원 (14) – 예술 http://cafe.daum.net/ko.art./am0K/861   들뢰즈 천개의 고원 (15) http://cafe.daum.net/ko.art./am0K/863   들뢰즈 천개의 고원 (16) http://cafe.daum.net/ko.art./am0K/865   들뢰즈 천개의 고원 (17) http://cafe.daum.net/ko.art./am0K/869    
1    [스크랩] 배워두면 유용한 주제별 고사성어 댓글:  조회:820  추천:0  2018-10-20
효(孝), 우정(友情),  학문(學問),  부부(夫婦), 교우(交友), 세태(世態),  속담(俗談), 형세(形勢), 미인(美人), 거리(距離) , 희생(犧牲), 향수(鄕愁), 독서( 讀書), 전쟁(戰爭), 소문(所聞), 애정(愛情). 기쁨/슬픔, 무례(無禮),  인재(人才).           1. 事親以孝(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 세속오계의 하나 2. 父子有親(부자유친) : 아버지와 아들의 道는 친애에 있음. 五倫의 하나 3. 父爲子綱(부위자강) :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지킬 떳떳한 도리. 삼강의 하나. 4. 昏定晨省(혼정신성) :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핌 5. 反哺之孝(반포지효) :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 6. 反哺報恩(반포보은) : 자식이 부모가 길러 준 은혜를 갚음   7. 風樹之嘆(풍수지탄) : 효도하고자 할 때에 이미 부모는 돌아가셔서, 효행을 다하지    못하는 슬픔 8. 出必告反必面(출필곡반필면) : 밖에 나갈 때 가는 곳을 반드시 아뢰고, 되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여 드린다.     ☞ 出告反面   9. 昊天罔極(호천망극) : 끝없는 하늘과 같이 부모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말함   10.望雲之情(망운지정) : 객지에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11.白雲孤飛(백운고비) : 멀리 떠나는 자식이 어버이를 그리워 함 12.冬溫夏 (동온하청) : 부모에 효도함. 겨울은 따뜻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해드림.   13.伯兪之孝(백유지효) : 韓伯兪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로부터 종아리를 맞아도     아프지 않다하여 어머니의 노쇠함을 탄식함.           1. 管鮑之交(관포지교) : 썩 친밀한 교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사귐    2. 水魚之交(수어지교) :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뗄 수 없는 사이 3. 竹馬故友(죽마고우) : 어릴 때부터의 친한 벗 4. 莫逆之友(막역지우) : 아주 허물 없는 벗                5. 金石之交(금석지교) : 쇠와 돌처럼 굳은 사귐                       6. 肝膽相照(간담상조) : 간과 쓸개가 가까이 서로 잘보여 주듯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귐   7. 膠漆之交(교칠지교) : 매우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귐                  8. 刎頸之交(문경지교) : 죽고 살기를 같이 할 만한 친한 사이나 벗 9. 金蘭之交(금란지교) : 쇠처럼 날카롭고 난초처럼 향기나는 친구 사이. 10.芝蘭之交(지란지교) : 영지와 난초의 향기로운 향기 같은 벗 사이의 교제 11.斷金之交(단금지교) : 매우 정의가 두터운 사이의 교제             12.交友以信(교우이신) : 친구를 믿음으로써 사귐. 世俗五戒의 하나 13.朋友有信(붕우유신) : 친구사이의 도리는 신의에 있음.五倫의 하나 14.布衣之交(포의지교) : 곤경한 상황에서 사귄 친구 15.知音知己(지음지기) : 소리를 듣고 나를 인정해 주는 친구         1. 溫故知新(온고지신) : 옛 것을 익혀서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깨달음.     ☞ 法古創新(법고창신) 2. 稽古(계고) : 옛일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는 것을 일컬음. 3. 螢雪之功(형설지공) : 고생을 하면서도 꾸준히 학문을 닦은 보람. 4.日就月將(일취월장) : 학문이 날로 달로 나아감.  ☞刮目相對괄목상대 5. 盈科後進(영과후진) : 구덩이에 물이 찬 후에 밖으로 흐르듯 학문도 단계에 맞게    진행해야 한다는 뜻. 6. 敎學相長(교학상장) :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의 학업을 증진시킨다는 뜻. 7. 讀書三到(독서삼도) : 독서하는 데는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 깨우쳐야 함.     ☞ 手不釋卷, 讀書三昧, 讀書尙友, 三餘(수불석권, 독서삼매, 독서상우, 삼여) 8. 亡羊之歎(망양지탄) :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탄식한다는 뜻으로, 학문의 길도     여러 갈래여서 진리를 찾기 어렵다는 말.     ☞ 多岐亡羊(다기망양) 9. 不恥下問(불치하문) : 자기보다 아래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 10.靑出於藍(청출어람) :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낫다는 말. 11.後生可畏(후생가외) : 후배들이 선배들보다 훌륭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 12.孟母三遷(맹모삼천) :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의 준말.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처음에 공동묘지 가까이 살다가, 맹자가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서,     시전 가까이 옮겼더니 이번에는 물건파는 흉내를 내므로,     다시 글방 있는 곳으로 옮겨 공부시켰다 함. 13.曲學阿世(곡학아세) : 올바른 학문을 굽혀, 속된 세상에 아부함 14.換骨奪胎(환골탈태) : 뼈를 바꾸고 태를 빼앗았다는 뜻으로,     옛사람이나 타인의 글에서 그 뜻을 취하거나 모방하여 자기의 작품인 것처럼 꾸미는 일 15. 自强不息(자강불식) : 스스로 힘써 행하여쉬지 않음 16. 發憤忘食(발분망식) : 발분(분발)하여 끼니를 잊고 노력함 17.手不釋卷(수불석권) : 손에서 책을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공부함 18.螢窓雪案(형창설안) : 반딧불이 비치는 창과 눈(雪)이 비치는 책상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문에 힘씀을 비유한 말.     참고:  螢窓雪案의 고사의 주인공은 '차윤'과 '손강'이다. 19.切磋啄磨(절차탁마) : 옥돌을 쪼고 갈아서 빛을 냄. 곧 학문이나 인격을 수련, 연마함 20.走馬加鞭(주마가편) :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한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노력함.         ㅇ 금슬지락 (琴瑟之樂 ) : 거문고와 비파. 금슬 좋은 부부간의 애정.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합주를 만들어 내듯이     아내와 남편이 서로 양보하며 서로를 존중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ㅇ 부창부수 (夫唱婦隨 ) : 부부의 화합을 뜻하는 말로 예로부터 남편이 부르면 부인이     따른다는 말. ㅇ 賢婦令夫貴和六親(현부영부귀화육친) : 현명한 부인은 남편을 귀하게 하고, 또한      일가 친척을 화목하게 함. ㅇ 백년가약(百年佳約) : 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아름다운     언약(言約)이란 뜻.           1. 知音(지음) :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사이의 고사로부터 (거문고) 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뜻에서 유래.       ※ 보충) 伯牙絶鉉(백아절현)은 '친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 2. 水魚之交(수어지교) : 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떨어질 수 없는 특별한 친분 3. 莫逆之友(막역지우) : 서로 거역하지 아니하는 친구 4. 金蘭之契(금란지계) : 금이나 난초와 같이 귀하고 향기로움을 풍기는 친구의 사이의    맺음(사귐) 5. 管鮑之交(관포지교) : 관중과 포숙의 사귐과 같은 친구 사이의 허물없는 교재 6. 竹馬故友(죽마고우) : 어릴 때, 대나무말을 타고 놀며 같이 자란 친구 7. 刎頸之交(문경지교) : 대신 목을 내주어도 좋을 정도로 친한 친구의 사귐         1. 桑田碧海(상전벽해) :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됨 2. 天旋地轉(천선지전) : 세상일이 크게 변함 3. 吳越同舟(오월동주) : 서로 원수의 사이인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탐    (참고) 吳越同舟는     ①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② 세상 일이 크게 변한다.     ③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의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1. 得朧望蜀(득롱망촉) : 말타면 경마(말의 고삐) 잡히고 싶다.     농땅을 얻고 또 촉나라를 탐낸다는 뜻으로 인간의 욕심이 무한정함을 나타냄. 2. 磨斧爲針(마부위침)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도끼를 갈면 바늘이 된다"    는 뜻으로  아무리 어렵고 험난한 일도 계속 정진하면 꼭 이룰 수가 있다는 말. 3. 登高自卑(등고자비)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일을 하는 데는 반드시 차례를 밟아야    한다는 말. 4. 狐假虎威(호가호위) : 원님 덕에 나팔 분다. 다른 사람의 권세를 빌어서 위세를 부림. 5. 金枝玉葉(금지옥엽) :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아주 귀한 집안의 소중한 자식. 6. 同族相殘(동족상잔) : 갈치가 갈치 꼬리 문다. 동족끼리 서로 헐뜯고 싸움. 7. 螳螂拒轍(당랑거철) :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사마귀가 수레에 항거한다 "    는 뜻으로  자기 힘을 생각하지 않고 강적 앞에서 분수없이 날뛰는 것을 비유한 말. 8. 烏飛梨落(오비이락)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우연히 때가 같음으로 인하여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의심을 받게 되는 것. 9. 咸興差使(함흥차사) : 강원도 포수.     일을 보러 밖에 나간 사람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 하는 말. 10. 走馬加鞭(주마가편) : 닫는 말에 채찍질 하랬다.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잘되어 가도록 부추기거나 몰아침. 11.走馬看山(주마간산) : 수박 겉 핥기.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수를 본다는 뜻으로     바쁘게 대충 보며 지나감을 일컫는 말. 12.矯角殺牛(교각살우) :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  곧 조그마한 일을 하려다 큰 일을 그르친다는 뜻. 13.牝鷄司晨(빈계사신)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집안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활달하여 아팎 일을 간섭하면 집안 일이 잘 안된다는 말.         1. 風前燈火(풍전등화) :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사물이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비유하는 말. 2. 焦眉之急(초미지급) : 눈썹이 타면 끄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매우 다급한 일을 일컬음. 3. 危機一髮(위기일발) : 위급함이 매우 절박한 순간.(거의 여유가 없는 위급한 순간) 4. 累卵之勢(누란지세) : 새알을 쌓아놓은 듯한 위태로운 형세. 5. 百尺竿頭(백척간두) : 백척 높이의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     몹시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 빠짐. 6. 如履薄氷(여리박빙) :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다는 뜻으로, 몹시 위험하여 조심함을     이르는 말. 7. 四面楚歌(사면초가) : 사방에서 적군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옴.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 8. 一觸卽發(일촉즉발) : 조금만 닿아도 곧 폭발할 것 같은 모양. 막 일이 일어날 듯하여     위험한 지경. 9. 進退兩難(진퇴양란) :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렵고 뒤로 물러나기도 어려움 10. 進退維谷(진퇴유곡) : 앞으로 나아가도 뒤로 물러나도 골짜기만 있음.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빠진 상태 11. 鷄肋(계륵) : '닭갈비'라는 뜻으로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움                 1. 傾國之色(경국지색) : 임금이 혹하여 국정을 게을리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게     할 미인이라는 뜻. 2. 傾城之美(경성지미) : 한 성(城)을 기울어뜨릴 만한 미색(美色). 3. 花容月態(화용월태) : 꽃같은 용모에 달같은 몸매.   4. 丹脣皓齒(단순호치) : 붉은 입술에 흰 이를 가진 여자.           1. 咫尺之地(지척지지) : 매우 가까운 곳. 2. 咫尺之間(지척지간) : 매우 가까운 거리. 3. 指呼之間(지호지간) : 손짓하여 부를만한 가까운 거리. 4.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 피차의 사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에 나온 말임)             1. 先公後私(선공후사) : 공적인 것을 앞세우고 사적인 것은 뒤로 함. 2. 大義滅親(대의멸친) : 대의를 위해서 사사로움을 버림. 3. 見危致命(견위치명) :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버림. 4. 滅私奉公(멸사봉공) :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해 희생함.         1. 首邱初心(수구초심) :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저 살던 굴 쪽으로 향한다는 뜻,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2. 看雲步月(간운보월) : 낮에는 구름을 바라버고 밤에는 달빛 아래 거닌다는 뜻,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1. 韋編三絶(위편삼절) : 옛날에 공자가 주역을 즐겨 열심히 읽은 나머지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책을 정독(精讀)함을 일컬음. 2. 男兒須讀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 : 당(唐)의 두보(杜甫)가 한 말로 남자라면 다섯    수레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으로  책을 다독(多讀)할 것을 일컬음. 3 晝耕夜讀(주경야독) :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음. 4. 三餘之功(삼여지공) : 독서하기에 가장 좋은 '겨울, 밤, 음우(陰雨)'를 일컬음. 5. 汗牛充棟(한우충동) : '짐으로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들보에 가득 찬다'는    뜻으로 썩 많은 장서(臧書)를 이르는 말. 6. 博而不精(박이부정) :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아나 정통하지는 못함.     즉, '숲은 보되 나무는 보지 못함' 7. 博而精(박이정) :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 뿐만 아니라 깊게도 앎. 즉, '나무도 보고    숲도 봄'   ※ 참고 : 博而不精은 多讀과 연관된 말이며 博而精은 가장 바람직한 독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1. 背水之陣(배수지진) : "적과 싸울 때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친 진"이란 말로,     한신이 초나라의 군대와 싸울 때 시용한 진법에서 유래하여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2. 乾坤一擲(건곤일척) :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나 승패를 겨룸. 3. 捲土重來(권토중래) : 한 번 실패하였다가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옴. 4. 臥薪嘗膽(와신상담) :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운 일을 참으고 겪음.     옛날 오왕 부차가 섶 위에서 잠을 자면서 월왕 구천에게 패한 설움을 설욕하였고,     구천 역시 쓴 쓸개의 맛을 보면서 부차에게 다시 복수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성어.         1. 流言蜚語(유언비어) :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 풍설. 떠돌아다니는 말. 2. 道聽途說(도청도설) :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뜬 소문. 3. 街談巷語(가담항어) : 거리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1. 戀慕之情(연모지정) :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정. 2. 相思病(상사병) : 남녀가 서로 몹시 그리워하여 생기는 병. 3. 相思不忘(상사불망) : 서로 그리워하여 잊지 못함. 4. 同病相憐(동병상련) :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동정함.         1. 抱腹絶倒(포복절도) : 배를 끌어안고 넘어질 정도로 몹시 웃음. 2. 弄璋之慶(농장지경) 또는 弄璋之喜(농장지희) : '장(璋)'은 사내 아이의 장난감인    '구슬'이라는 뜻으로,  아들을 낳은 기쁨. 또는 아들을 낳은 일을 이르는 말. 3. 弄瓦之慶(농와지경) 또는 弄瓦之喜(농와지희) : '와(瓦)'는 계집 아이의 장난감인      '실패'라는 뜻으로,     딸을 낳은 기쁨을 이르는 말. 4. 錦上添花(금상첨화) : 비단 위에 꽃을 놓는다는 뜻으로, 좋은 일이 겹침을 비유. 5. 多多益善(다다익선) : 많을수록 더욱 좋음. 6. 拍掌大笑(박장대소) :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음.           1. 哀而不悲(애이불비) :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함.     김소월 '진달래꽃'의 사상. 2. 哀而不傷(애이불상) : 슬퍼하되 도를 넘지 아니함. 3. 天人共怒(천인공노) : 하늘과 땅이 함께 분노한다는 뜻으로, 같은 무리의 불행을    슬퍼한다. 4. 含憤蓄怨(함분축원) :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음. 5. 悲憤慷慨(비분강개) : 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음. 6. 切齒腐心(절치부심) :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 속을 썩임.               1. 雪上加霜(설상가상) :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불행한 일이 거듭하여 겹침을    비유. 2. 七顚八倒(칠전팔도) :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진다는 말로,     실패를 거듭하거나 몹시 고생함을 이르는 말. 3. 鷄卵有骨(계란유골) : 달걀에도 뼈가 있다는 뜻으로,     운수가 나쁜 사람은 좋은 기회를 만나도 역시 일이 잘 안됨을 이르는 말. 4. 前途有望(전도유망) : 앞으로 잘 될 희망이 있음. 장래가 유망함. 5. 風雲兒(풍운아) : 좋은 기회를 타고 활약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 6. 遠禍召福(원화소복) : 재앙을 물리쳐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임.             1. 傍若無人(방약무인) :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뜻.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함. 2. 眼下無人(안하무인) : 방자하고 교만하여 사람을 모두 얕잡아 보는 것. 3. 回賓作主(회빈작주) : 주장하는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 4. 厚顔無恥(후안무치) :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름. 5. 破廉恥漢(파렴치한) : 염치를 모르는 뻔뻔한 사람. 6. 天方地軸(천방지축) : 함부로 날뛰는 모양.           1. 群鷄一鶴(군계일학) : 닭의 무리 가운데서 한 마리의 학이란 뜻.     여럿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 2. 棟梁之材(동량지재) : 한 집안이나 한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훌륭한 인재.   3. 鐵中錚錚(철중쟁쟁) : 평범한 사람 가운데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 4. 囊中之錐(낭중지추) :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 5. 泰斗(태두) : 남에게 존경받는 뛰어난 존재. 泰山北斗의 준말. 6. 綺羅星(기라성) :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     즉, 실력자들이 늘어선 것을 비유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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