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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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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스크랩] 댓글:  조회:1258  추천:0  2018-10-24
  [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바르트의 이런 말, "문학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인 미메시스(Mimesis)도, 세계의 인지 수단인 마테시스(Mathesis)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인 세미오시스(Semiosis), 즉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롤랑 바르트 평전 R. Barthes par lui-meme, p123)라고. 그리고 이 구분은 그의 문학 편력을 요약하는 것으로, 미메시스는 브레히트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신화에 관심을 가졌던 제1기, 마테시스는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적 기호학적인 모험의 제2기, 세미오시스는 데리다나 솔레르스, 크리스테바 등 후기구조주의자의 보호체계하에 텍스트에 관심을 가졌던 제3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얕은 배움들, 주워삼킨 옅은 지식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정화시켜버린 무지의 확증이란, 어찌나 폭력적인지. 언제나 늘, 어찌나 늘, 얕은 앎과 옅은 이해는 보잘 것 없다. 그리고 텍스트는 그 마저도 거부하려 한다. 마치 손아귀에 틀어 잡히면 죽어버릴 것 처럼, 끊임없이 탈주하려는. 늘 탈주 중의 텍스트. 지드였던가. 자신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엔 그 모든 걸 버려버리라고 했던게. 어쨋건 일이 귀찮아져버렸다. 늦바람 마냥 갈증이라니. 바르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년 프랑스 북쪽 셰르부르 출생. 1980년 사망. 그보다 열살 많은 사르트르(1905~1980)와 같은 해에 죽었으며, 그보다 열한살 어린 절친했던 미셸 푸코(1926 ~ 1984)보다는 4년 전에 죽은. 그의 생과 죽음의 해를 굳이 상기하는 이유라는 것은, 같은 해의 사르트르의 죽음 때문에 그의 죽음이 묻혔던 이유와 비슷하게 롤랑 바르트의 입지 같은 것 때문이다. 칼베Calvet는 이렇게 얘기한다. "바르트가 이론가가 아니라면, 타자의 이론을 이용할 줄 아는 에세이스트도 아닌 하나의 시선, 목소리, 스타일이다."     텍스트의 즐거움,La Plaiser du texte. 롤랑 바르트 1973년 作. (참고로, 뒤이어 읽을 사진에 관한 책인 '밝은 방'은 1980년 作). 동문선東文選에서 번역, 발간한 책에는 '저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는 그의 후기 작업들,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의 즐거움' 등이 실려있다.     1. 텍스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것/비상징적인건,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항상 그 마지막에 시니피에, 총체적이고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그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 의사소통, 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현상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 상징화, 생산성(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발생텍스트)의 영역이다.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내어 유희, 작업, 생산, 실천을 수용하게 한다.     이런 텍스트론에 따라,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바흐친의 상호텍스트 개념도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인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나'가 종이 위에 씌어진 '나'에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저자의 죽음.p.33)   1) (현실이란 주체와는 무관한 완전히 외적인 세계,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실재는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 현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이 관계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보여지는 것이나, 텍스트는 증명되는 것이며, 작품은 손 안에 쥐어지지만,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2) 텍스트는 정확히 Doxa(일반 견해)의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Paradox적인(반론적인), ㅡ 일반견해 밖에 있는 ㅡ 것이다.   3) 작품은 하나의 기의(signifie)로 닫혀진다.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 그것의 영역은 기표(signifiant)이다. 작품의 경우 평범하게 상징적인 것이나(그 상징성은 곧 고갈되어 정지된다),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의 전적으로 상징적인 속성 안에서 구상되고 인지되고 수용되는 작품 곧 텍스트이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는 언어로 회수된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인 것이며, 닫힌 것이 아니다.(구조란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이다)   4) 텍스트는 복수태(pluriel)이다. (여러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텍스트의 복수태는 그 내용의 모호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짜고 있는(어원적으로 텍스트는 직물) 기표들의 입체적인 복수태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그 개별성이 아니라)에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5) 텍스트의 은유는 망(reseau)의 은유이다. 즉 텍스트가 확장된다면, 그것은 체계나 배합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어진 나일 뿐이다.   6)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내(만약 작품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유희, 노동, 생산, 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연주자는 일종의 공저자로서, 악보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악보를 완성하는 자이다. 텍스트도 이런 새로운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7) 텍스트는 즐김에, 다시말해 분리가 없는 즐거움에 연결된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는(circuler. 이 단어의 순환적인 의미를 간직하면서) 바로 그 공간이다.     2.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을 중심으로)(즐거움과 즐김 사이의 구별은 바르트가 말하듯이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에서 즐거움plaisir이란 육체적, 도덕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가리키며, 즐김jouissance은 동사 즐기다jouir에서 나온 말로 보다 내밀한, 그리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보다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문화와 단절되지 않은 즐거움 및, 문화와 단절된 즐김, 자아의 강화에 연관된 즐거움과 자아의 상실을 유도하는 즐김의 구별)      균열(Clivage), 즐거움의 텍스트는 만족시켜 주고, 채워 주고, 행복감을 주고, 문화로부터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상실의 상태로 몰고 가서 마음을 불편케 하고(어쩌면 권태감마저도 느끼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취향, 가치관, 추억의 견고함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이 두 개의 텍스트를, 자신의 손 안에 즐거움과 즐김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주체는 요컨데 시대착오적인 주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순되게도 동시에 모든 문화의 심오한 쾌락주의('삶의 기술'이라는 포장하에 독자의 마음 속에 편안하게 스며드는, 요컨대 과거의 책들이 공유했던 것)와, 그 문화의 파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그는 자아의 강화를 즐기며(이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또 그 상실을 추구한다(이것이 그의 즐김이다). 이 주체는 이중으로 균열된, 이중으로 변태적인 주체이다.  p.61_62.     다만 하나의 "살아 있는 모순"(contradiction vivante), 즉 텍스트를 통해 자아의 강화와 동시에 그 붕기를 즐기는 균열된 주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p.68     차이가 살며시 갈등을 대체하기를. .. 갈등이란 다만 차이의 도덕적인 상태일 뿐이다.  p.62.     텍스트의 즐거움, 즐거움의 텍스트. 이 표현은 동시에 즐거움(만족감)과 즐김(소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가 없어서 애매하기만 하다. 따라서 "즐거움"은 때로 여기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아무 예고도 없이), 때로는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애매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텍스트의 지나침이나, 혹은 텍스트 안에서 모든 기능이나(사회적인) 기능화(구조적인)를 초과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즐거움"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김에 고유한 충격, 진동, 상실로부터 행복감, 충족, 편안함(문화가 자유롭게 스며들 때 느끼는 포만의 감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모든 즐거움의 단순한 일부인 어떤 특정한 즐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67     여기서 언급한 체계들이 우리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그 중 하나 속에 사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는,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 속에서 무얼 하고 있지? 라고 말하든가.  p.77     텍스트는 그 소비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생산 속에서 탈장소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화법도 허구도 아니며, 시스템은 그 안에서 넘쳐흘러 해체된다(이 넘침, 이 벗어남이 곧 시니피앙스이다).  p.77     프루스트는 내가 호출하는 것이 아닌 그냥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서"가 아닌, 단지 순환적인 추억이다. 이것이 바로 상호 텍스트(inter - texte)이다. 그것이 프루스트이든 신문이든 텔레비전 화면이든간에 무한한 텍스트를 벗어난 삶의 불가능성. 책은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삶을 만든다.  p.84     즐김의 비사회적인 성격은 사회성의 갑작스러운 상실이다. 그렇지만 어떤 결과도 주체(주관성), 인간, 고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완전히 상실된다. 내밀함의 극단적인 단계, 영화관의 암흑.  p.87     모든 과거의 언어는 즉각적으로 연루되며, 모든 언어는 그것이 반복되기만 하면 옛것이 된다. 그런데 권력 언어(권력의 보호하에 생산되고 전파되는 언어)란 규정상 반복 언어이며, 모든 공식적인 언어 제도는 되새기는 기계들이다. 학교며 스포츠며 광고며 대중 작품이며 유행가며 뉴스며,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똑같은 구조, 똑같은 의미, 대개는 똑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상투성은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형상, 정치적 사실이다. 이와 대립하여 새로움은 바로 즐김이다(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인에게서 새것은 항상 오르가슴의 필수조건이다"). (중략) 한편에는 대중의 진부함(언어의 반복과 관련된) ㅡ 반드시 탈즐거움적인 것은 아니지만 탈즐김의 진부함 ㅡ 다른 한편에는 새로움을 향한 격앙(주변적인, 탈중심적인), 담론의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격렬한 열광이 있다. (중략) 그런데 규칙은 남용이며, 예외는 즐김이다.     그렇지만 이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반복자체가 즐김을 야기한다라는. 거기에는 많은 민속학적 사례가 있다. 집요한 리듬들. 주술(呪術)의 음악, 연도문, 제의, 불교의 염불 등. 과도한 반복은 상실로, 기의의 부재로 몰고 간다. 하지만 반복이 관능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어야 하며, 문자 그대로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공공연한(과도한) 반복은 탈중심적인/괴팍한 것이 되며, 음악의 몇몇 주변적인 영역으로 밀려 나간다. 대중 문화의 조잡한 형태는 수치스러운 반복이다. 그것은 내용, 이데올로기적인 도식, 모순의 삭제마저도 반복한다. 그러나 그 겉모습은 다양하다. 언제나 새 책, 새 방송 프로그램, 새 영화, 삼면 기사,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의미.     요컨데 말이란 두 개의 대립되는 조건, 둘 다 과도한 조건에서만 관능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반복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새로움으로 넘쳐흘러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되든가 하면 말이다.  p.88_89         그리고 무언가 자명해지면, 나는 그것을 버린다. 이것이 바로 즐김이다.  p.91     모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기원을 찾기 위한, 혹은 법칙과의 갈등을 말하며 증오와 연민의 변증법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중략) 사람들이 그 결말을 모르는 극적 이야기에 비해,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에서는 즐거움은 사라지지만 즐김은 증가된다(오늘날 대중문화에서는 "극적" 이야기의 소비는 많으나, 즐김은 거의 없다).  p.95     "모든 이데올로기적 행위는 구성상 완결된 언표의 형태로 제시된다." 크리스테바의 이 명제를 반대로 돌려 말한다면, 모든 완결된 언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8     텍스트의 즐김은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쁜 철이른 것이다. 그것은 제때에 오지 않으며, 어떤 성숙 과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단번에 미쳐 날뛴다. 이 격앙은 오늘날의 회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것으로, 그 격앙이 이해되는 순간 상실의 원칙은 무용해지며,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모든 것은 첫번째 시각에서 행해지며 즐겨진다.  p.100     낡지 않을 것은 아미엘의 철학이 아닌, 바로 그 날씨일 텐데.  p.101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텍스트의 분리에 대항하여 행해진 권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자기 이름의 특수성을 통해 말하는 것은 즐거움의 편재성, 즐김의 아토피(atopie)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즐김의 관계가 삶의 즐김과 텍스트의 즐김이,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엮어지고 짜여지는 한 권의 책(텍스트)에 대한 상념, 그리하여 동일한 건망증이 삶의 모험과 텍스트의 독서를 사로잡는 그런 책에 대한 상념.  p.107     "우리는 아마도 변전의 절대적인 흐름을 인지할 만큼 그렇게 정교하지 못한지도 모른다. 영속적인 것은 단지 사물을 요약하거나 평범한 도식으로만 몰고 가는 우리의 조잡한 기관 덕분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 무엇도 그런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매순간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움직임의 그 정교함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다."(니체)   텍스트 또한 우리의 조잡한 기관에 의해 명명된(일시적으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우리는 정교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p.108     시니피앙스(Signifiance)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으로 생산되는 한에 있어서의 의미이다.  p.109     (왜냐하면 즐김은 거기서 말해짐 없이 그 자신의 마멸의 전율을 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텍스트, 즐거움, 즐김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누가 해석하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정념으로 존재하는 것은(하나의 존재가 아닌 과정이나 변전으로서) 힘의 의지의 형태인, 바로 해석(interpretation)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니체) 그리하여 주체는 아마도 환상이 아닌 허구로서 회귀할 것이다. 하나의 즐거움은 자신을 개별체로 상상하는 방식으로, 최종적인 가장 진귀한 허구, 즉 정체성의 허구를 고안하는 방식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이 허구는 더 이상 통합의 환상이 아닌, 반대로 우리의 복수성을 등장하게 하는 사회의 연극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개별체적인(individuel) 것이지 개인적인(personnel) 것은 아니다.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분석"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주관성"이 아닌 내 "개별체"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켜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이 즐김의 육체는 또한 내 역사적 주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즐거움(문화적인)과 즐김(비문화적인)의 그 모순된 유희를 조정하고, 또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서 현재로서는 잘못 위치한 주체로서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전기적, 역사적, 사회적, 신경증적인 요소들의 아주 섬세한 배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시대착오적인 주체가 표류한다.  p.109_110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중략) 이 직물,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p.111     즐거움의 유보(suspension)의 힘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진정한 에포케(epoche - 그리스어 어원은 정지라는 뜻으로,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에게서는 모든 판단의 유보를 뜻한다. 후엘 에트문트 후설은 세상의 현실에 관한 모든 판단의 유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이렇게 지칭하였다)요. 모든 공인된(스스로 공인한) 가치들을 멀리서 응결시키는 제동장치이다. 즐거움은 중성이다(악마적인 것에서도 가장 변태적인 형태). 또는 적어도 즐거움이 유보하는 것은 기의의 가치, 그 (거창한) 대의명분이다. (중략)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그것이다. 기표의 화려한 위치로 이동한 가치.  p.112     기의를 저 멀리 추방하고, 말하자면 내 귀에 배우의 익명의 육체만을 내던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알갱이로 만들고, 탁탁 튀고, 어루만지고, 줄로 썰고, 자른다. 그것은 즐긴다.  p.114     3. 권력, (강의講議를 중심으로)     그러나 이제 우리는 권력이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상이며, 우리가 단번에 권력을 알아채지 못하는 곳, 즉 제도나 교육 속으로 슬며시 스며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교환의 가장 미세한 메커니즘 속에서도 권력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해방적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현존합니다. 저는 과실을 유발하고, 그 때문에 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죄의식을 유발하는 담론은 모두 권력 담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혁명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금방 다시 살아나 새로운 상태에서 싹틉니다. 이런 끈질김과 편재성의 이유는 바로 권력이 정치적, 역사적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역사에 관계된 통사회적 조직의 기생충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태고적부터 권력이 기재된 이 대상이 바로 언어(langage),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표현인 언어체(langue)입니다.     언어가 법규라면 langue는 그 약호(code)입니다. 우리는 언어체 안에 있는 권력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langue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선 하나의 행위를 발화하기 이전에 자신을 주어로 설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 행위는 나를 수식해주는 말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의 결과이자 연속일 뿐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하물며 담론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해서 말하듯이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한 것입니다.     langue를 구성하는 기호는 그것이 인지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반복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기호는 맹종적이고, 군생적입니다. 각각의 기호 안에는 상투적인 것(stereotype)이라는 괴물이 잠자고 있습니다.   **langue에는 필연적으로 예속과 권력이 뒤섞여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권력에서 벗어나는 힘뿐만 아니라, 특히 그 누구도 굴종시키지 않는 힘을 자유라 부른다면, 자유는 언어 밖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언어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폐된 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불가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langue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langue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원의 속임수, 이 도피, 이 놀라운 술책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영속적인 혁명의 그 찬란함 속에 탈권력의 언어체를 이해하게 해주며, 나로서는 이것을 문학이라 부릅니다.     문학에서 제가 겨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텍스트, 다시 말하면 작품을 구성하는 기표들의 짜임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란 langue가 드러남 그 자체이며, 또 langue가 공격당해서 길을 잃어야만 하는 곳은 바로 langue 내부이기 때문입니다. langue를 도구로 삼는 메시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langue를 무대로 삼는 단어들의 유희에 의해서. 그러므로 저는 문학, 글쓰기, 텍스트를 별차이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문학 안에 존재하는 자유의 힘은 작가가 언어에 행사하는 이동(deplacement) 작업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한다는 것(s'enteter)은 문학의 비환원성 ㅡ 즉 문학 안에서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철학, 과학, 심리학의 그 전형적 담론들에 저항하면서 살아남는다는 ㅡ을 긍정하고, 마치 문학이 비교할 수 없는 불멸의 것인 양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실천의 주체로서)는 다른 모든 담론의 교차로에서 학설의 순수성에 비해 저속한(trivial,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trivialis는 세 개의 길이 나 있는 교차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창녀를 가리킵니다) 입장에서 망을 보는 사람의 고집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고집한다는 것은 요컨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류의, 기다림의 힘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군생적인 권력이 당신이 쓴 것을 이용하고 예속하려 할 때,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abjurer. 그렇다고 당신이 생각한 것마저 버리는 것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행동을 하기 이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권력과 그 문화로의 병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그런 위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 그렇지만 행동을 한 후에는 우리가 얼마만큼 권력에 의해 이용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의 진솔함이나 절박함이 예속되었거나 조작되었다면, 절대적으로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75)     고집하며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요컨대 유희 방법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언어의 무정부상태라는 그 불가능한 지평에서 ㅡ 즉 langue가 그 자체의 권력, 그 자체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ㅡ 연극과 관계된 그 무엇을 발견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문학의 그 기호학적 힘은, 기호를 파괴하기보다는 기호를 유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전장치와 걸쇠장치가 폭파된 언어의 기관실 안에 기호를 집어넣는 것, 간단히 말해 예속적인 langue의 한복판에다 사물의 진정한 동철자의어(heteronymie, 철자는 같지만 발음이나 뜻이 다른 단어)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로의 규칙적인 몰입은 기호학으로 하여금 차이 위에서 작업하게 하며, 그리하여 기호학이 교조적인 학설이 되는 것을, 기호학이 굳어지는(prendre) 것 ㅡ 보편적 담론이 아닌데도 보편적 담론으로 자신을 간주하는 ㅡ 을 막아 줍니다. 또 텍스트 위에 놓인 기호학적 시선은 문학을 둘러싸며 압박하는 저 군생적인 말로부터 문학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존하는 신화, 즉 순수 창조의 신화를 거부하게 해줍니다. 어쩌면 기호란,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호학은 틀(grille)이 아닙니다. 기호학은 실재를 명료하게 만드는 어떤 일반적인 투명성을 부여하면서, 실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게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호학은 실재를 여기저기서 때때로 들어올리려고 하며, 실재를 들어올리는 이런 효과가 틀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로 기호학이 틀이 되고자 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들어올리조 못합니다. 기호가 다른 모든 담론에 대해 그렇듯이 모든 연구를 도와 주는 일종의 회전의자, 오늘날의 앎의 조커(joker)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호학은 해석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헤친다기(via di levare)보다는 채색하는(via di porre) 것입니다. 그것이 선호하는 대상은 상상계의 텍스트로서, 이야기, 그림, 초상화, 표현, 개인어, 정념, 사실임직한 것의 외관 아래 진실의 불확실성을 연출하는 구조들입니다. 그 조작 과정 내내 하나의 채색된 베일이나, 혹은 허구처럼 기호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가능한, 혹은 그렇게 기대되는 것을 저는 기꺼이 "기호학"이라 부릅니다.     교수가 자신의 여행 방향을 결정해야 할 순간에 매해마다 돌아가야 하는 곳은 바로 팡타즘입니다. 그 팡타즘이 말해진 것이든 말해지지 않은 것이든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는 곳,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죽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팡타즘을 가지며, 아들만이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놀라웁게도 롤랑 바르트는 20세기가 거쳤던 거의 모든 사유에 직접적으로 발을 걸치고 있다. 대부분의 이해에 놀라운 매듭을 연결짓는 시선, 스타일, 목소리. 재밌지. 기호는 상징으로 '굳어버린' 그 자체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탈주하기 위한 숱한 무엇들이라니. 혹은, 구조는 이미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라니. ㅡ 모든 중심, 혹은 모든 끝의 연속이라는 것과의 시각 차. 굳어가는 모든, 또 권력의 지독한 편재 안에서, 자유로의 반항같은 것. (늘, 모두 그렇다시피, 그랬다시피) 모든 이미 죽은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기위해 치뤄야할 불가능의 대가, 혹은 유희. 즐거움, 즐김. 삶 자체, 실천으로서의 글쓰기. 읽기. 텍스트의 즐거움, 그리고 즐김.      +       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Author, 롤랑 바르트의 이 유명한 아티클은 이 텍스트에서 pp.27~35에 실려있다.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 아티클을 다시금 살핀다. 첫 문제제기는, 발자크의 소설 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 문장에서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p.27)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 아닌 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앞서의 언술과 같이, 저자author, 마찬가지 저자에게 권위authority를 부여하는 기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p.32) 과거, 저자, 기원의 부재(무無라기 보다는 부재)는 이제 그 각각의 현전에서 의미가 된다. 요는,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p.31)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isentangled)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eciphered)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p.33)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저자, 혹은 기원, 숨겨진 의미라는 것이 있어서, 저자의 은유를 뒤집어서 그 밑에 있는 암호를 해독하거나,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구조는 연속적이므로, 바닥이 없고, 그러므로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p.34) 정리하자면, 앞서 발자크의 문장에서의 문제제기에서, "아무도 그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p.34)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독자는, 저자와 달리,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p.35)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아, 정리 잘했군. 더하여 이 아티클에서, 위에도 옮겼던.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 아닌 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번역 김희영)라는 문장의 영역英譯 부분을 옮기면, "I is nothing other than the instance saying I : language knows a 'subject', not a 'person, and this subject, empty outside of the very enunciation which defines it, suffices to make language 'hold together', suffices, that is to say, to exhaust it." 주어라고 번역된 subject는, 작금의 주체의 의미를 환원시킨다. subject는 주변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문맥 상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띠는 것이다. 주체 역시, 더는 절대적 정체성의 self가 아니라, 이와 같다. 지하철에선 승객, 술집에선 꽐라, 등등등, 뉘앙스도 각개 달라지겠지. [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작성자 정기석    
5    [스크랩] 은유와 환유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 이론 댓글:  조회:1085  추천:0  2018-10-24
[스크랩] 은유와 환유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 이론     은유와 환유1   은유와 환유는 아주 넓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에 은유는 직유와, 직유와 대비되는 은유, 상징, 알레고리 등을 포괄하며, 환유의 경우에도 제유와 환유를 포함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을 수사법의 일종으로 다루는 일이 많은데 제 생각으로는 심상(image)의 일종으로, 즉 비유적인 이미지로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사법의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면 비유가 내용을 잘 포장하기 위한 장식적의로 도구적인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포장하기 위한 포장지와, 문학의 내용과 형식은 아주 성질이 다르지요. 포장지의 종류에 따라 포장한 내용이 변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문학의 형식은 내용을 제한하고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포장지는 내용을 감싸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내용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지요. 그래서 수사법적인 차원에서 은유와 환유를 다루는 것이 알맞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은유와 환유가 성립하는 원리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비유가 이루어지려면 주지와 매개어가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원관념, 매개어를 보조관념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조관념이라는 번역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수단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개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은유와 환유를 나누는 기준은 이 두 요소 사이의 관계입니다. 즉 은유는 주지와 매개어 사이의 유사성에, 환유는 인접성(연관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것(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에서 깃발(주지)과 아우성(매개어)는 유사한 관계가 있지요.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과 아우성치는 모습이 말입니다. 환유의 예는 ‘청와대의 성명 발표’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는데, 청와대와 한국의 대통령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지요. 여자를 뜻하는 치마라든가 하는 것도 환유의 일상적인 예지요.       은유와 환유2(구조주의 문학이론)   은유와 환유는 문학이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에서 설명할까 합니다. 구조주의 문학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소쉬르의 언어학이론 가운데 하나로 계열적 관계와 통합적(통사적)관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나무는 푸르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먼저, ‘나무’ 대신에 ‘수풀’ ‘장미’들이 들어가도 원리적으로 문장이 얼마든지 성립합니다. 이 경우에 나무와 수풀, 장미는 계열적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설명하면 ‘언어 연속 중의 개개의 단어를, 그와 유사한 동시에 상이하며 그 언어 연속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단어들과 마음속에 대조시킴으로써, 그 존재를 밝혀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나무’라는 언어 기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유사하거나 다른 것과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데 ‘나무는 푸르다’는 문장(언어의 연속)에서 ‘수풀’이나 ‘장미’는 드러나는 않았으니까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열적 관계에 있는 요소들을 계열체라고 합니다. 통합적 관계는 ‘나무는 푸르다’라는 문장에서 단어들 간의 통사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관계들은 문장 또는 언어가 성립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야콥슨이라는 또 한 사람의 구조주의 언어학자가 계열적 관계를 은유에, 통합적 관계를 환유에 연결시켰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은유와 환유에 딱 들어맞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원리상으로 가능한 얘기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야콥슨의 설명에 기대면 재미있는 얘기가 가능해집니다. 리듬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요. 리듬이 형성되니까 말입니다. 이제까지 설명한 개념으로 하면 유사성의 원리(같거나 비슷한 소리)가 인접성의 원리(소리의 연속)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야콥슨은 “시적 기능은 선택(계열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실제 문장의 한 요소, 즉 ‘나무’는 계열체를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결과입니다.)의 축에서부터 결합(통합)의 축에로 등가(유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의 원리를 투사한다”고 말합니다.       은유와 환유3(프로이트의 꿈 이론)   은유와 환유와 함께 프로이트의 꿈 이론도 이해해야 합니다. 학문이란 것이 이렇게 개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나오니 얼마나 복잡하고 재미있습니까?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먼저 꿈은 무의식의 활동입니다. 의식에 의하여 억압된 무의식적인 욕망의 위장된 충족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현실이 직접적인 만족을 허락하지 않는 욕망의 승화 방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꿈은 잠재적 꿈과 현시적(드러난) 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인과론적 관련성을 지닙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 꿈의 사고라는 것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꿈의 작업이라는 변형(위장) 과정을 거쳐서 의식계에 떠오른 것이 우리가 잠이 깨서 기억하는 현시적 꿈이라는 것입니다. 잠재적 꿈이 위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계에 떠오르기에 부적절하기 때문에 의식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그 검열자를 적당히 따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도덕적인 의식이 놀라서 잠을 깨고 말지요. 그러니 무의식을 감시하는 의식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것이 마치 간첩이 위장하는 식과 같이 그 욕망을 변형시켜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것이 꿈 사고를 이루는 잠재적 꿈이고 위장하는 과정이 꿈 작업이며 실제로 우리가 꾸는 꿈이 현시적 꿈이지요. 그러니까 꿈의 해석은 현시적 꿈을 재료로 해서 꿈 작업을 해명하여 잠재적 꿈을 알아내는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 작업에는 압축, 전치(치환, 자리바꿈), 표상(재현) 가능성의 고려, 제 2차적 수정 작업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압축이란 하나의 꿈이 잠재적인 꿈보다 내용이 적어지는 것으로 잠재적인 것이 생략되는 과정입니다. 압축을 통해서 (1) 잠재적인 요소 중에서 어떤 요소들이 완전히 탈락되고, (2) 잠재적인 꿈 가운데서 어느 일부분만이 현시적인 꿈으로 옮겨지며, (3) 어떤 공통점을 가진 잠재적 요소들이 꿈에서 한데 뭉쳐 하나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꿈에서 여러 사람이 압축되어 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한 건판위에 여러 개의 사진을 겹쳐 찍어 놓은 것 같이 현시적 꿈은 불분명한 희미한 형상이 됩니다. 여기서 중층 결정(복수 결정)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여러 개의 잠재적인 꿈의 요소가 하나의 현시적인 꿈의 요소로 압축된다는 뜻입니다.(참고로, 알튀세르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중층 결정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하부구조의 상부구조에 대한 결정적인 작용만을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을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전치는 위장을 하기 위해 일련의 연상을 통해 잠재적 꿈 사고의 요소들을 현시적 꿈의 요소들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잠재적 꿈에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 실제로 꿈에서는 별 가치가 없는 요소로 변해버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요소에서 그렇지 않은 요소로 강조점이 옮겨진 결과 꿈의 중심점이 변하여 꿈은 얼른 해석할 수 없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프로이트는 전치를 꿈 검열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전치의 예를 들면 어머니가 핸드백이나 머플러 등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예로 든 것을 다시 이용하여 말하면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꿈의 사고가 어머니와 연관되는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는 현시적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의 표상 가능성의 고려는 꿈 사고가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으로서 꿈의 사고를 시각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관념 같은 것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2차 수정 작업은 꿈을 인지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과정입니다.이 작업은 앞에서 본 변형 과정을 거친 후 현시적 꿈으로 등장하기 위한 마무리 작업으로 의식적 요구에 따라 꿈의 군데군데 벌어져 있는 틈새나 간격을 메우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이제 꿈은 상당한 정도로 정합성과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어 해석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프로이트는 꿈과 문학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해석을 해야 하는 똑같은 텍스트라는 거지요.     은유와 환유 4(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자크 라캉)   여러분은 자크 라캉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프로이트를 다시 읽자는 걸 내세우면서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경지를 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론이나 글은 무척 어렵습니다. 프로이트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니까요.   자크 라캉의 주장 가운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유와 환유를 알아야 합니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명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야콥슨은 언어의 기본적인 두 가지 기능인 계열적 관계와 통합적 관계를 각각 은유와 환유에 연결시킨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라캉은 이 은유와 환유야말로 각각 프로이트의 압축과 전치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압축은 서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니까 유사성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은유와 같은 것이고, 전치는 연관되는 것으로 바꿔치는 것이니까 인접성을 그 원리로 갖는 환유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무의식은 언어의 구조를 따른다고말할 수 있게 됩니다. 무의식의 대표적인 활동이 꿈이고 그 꿈 작업의 대표적인 것이 압축과 전치니까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의식적인 의도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언어가 무의식이라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적인 주체는자신을 잘 모르는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의미할 수도 없고 스스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은 라캉의 유명한 발언, 즉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바로 이런 측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의 이성적인 주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철학을 전복하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스크랩 원문 : 화타 윤경재
4    롤랑 바르트,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gt; 댓글:  조회:794  추천:0  2018-10-24
즐거움과 즐김    쾌락, 요컨대  그것은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철학의 주체다. 처음엔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다음엔  합리주의에  의해서,  그  다음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바르트가 보기에  현대  지식인들의  언어는  일체의 즐김을  배제하는  식의  교훈적  요구에  너무 쉽게  복종하고  있다.     그가  즐거움의  개념을  자신의  영역  안에  다분히  '전략적으로' 도입하여  '탈억압'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즐거움plaisir' 과   '즐김iouissance' 은  바르트의  정신  세계  전체를  횡단하는  근원적인  개념인데, 특히  이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항목은  '균열Clivage' '말하기Dire' '즐거움 Plaisir ' 등이다.    가령  '균열'이라는 항목에서  바르트는 자아, 즉  주체의  정신과  관련하여  즐거움의  텍스트와 즐김의  텍스트를   구별하였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독자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행복감을 주는  독서,  문화로부터  와서  문화와  단절되지  않는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이때  독자는  자아의  강화를  느끼게  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를  흔들리게  하며, 심지어는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마저  금이 가게  한다.  이때  독자는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자아를  채울  때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비워낼  때도  즐거움을  느낀다. 이  후자의  즐거움,  즉  변태적  즐거움,  이것이  바로  즐김의  내용이다.   참고문헌 롤랑 바르트대담집, 유기환 옮김, , 강출판사, 1998.   '말하기'라는  항목에서  바르트는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즐거움과   즐김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인데  반해, 즐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다.    비평이  항상  즐거움의  텍스트만  다루며  즐김의  텍스트를  결코  다루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플로베르,  푸루스트,  스탕달,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고전적인  텍스트는  비평가에게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감당할  수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가  시작되는  것은  즐김의  작가  및  그  독자에  의해서다. 이런  텍스트는  비평  밖에  존재한다.  우리는  즐김의  텍스트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다만  그것 '안에서'  그것의  방식대로  말하거나,   아니면  미친  듯이  그것을  표절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편  바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물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즐거움이란  작은  즐김에  불과한   걸까?  즐김이란  지극한  즐거움에  불과한  걸까?'   즐거움은  약화된,  안정된,  이를테면  일련의  타협  과정을  통해  굴절된  즐김에  지나지  않는  걸까? 즐김은  가공되지  않는  즉각적인  즐거움일까?'   요컨대  그  경계선상에서  즐거움은  때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때로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 줄거움'이란  항목에서  다시  즐거움과  즐김의  비교를 시도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고전,  문화,  지성,  행복감,  자제력,  안정감,  등의  개념과  결부된다. 그것은  자아의  놀라운  강화,  포근한  무의식을  낳는다.  이런  즐거움은  물론  말해질 수  있으며, 바로 거기서부터  비평이  나온다.     즐김의  텍스트는  조각난  즐거움,  조각난  언어,  조각난  문화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궁극  목적  밖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변태적이다. 심지어  그것은  즐거움의  목적조차  추구하지  않는데,  그  결과  그것은  독자를  한없이 지루하게 할  수도  있다.     목적지는  없는  즐김을  정의하는  것은  그러므로  극단적인  이동,  극단적   공허,  극단적  예측 불능이다.  즐김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한다는  것,  즉  그것의  의미를  고정시킨다는  것은 이처럼  처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즐거움의  텍스트,  즐김의  텍스트를  종합 정리하자면, 즐거움이란  자아의  강화에  연결되는  것으로서,  문화,  지식,  안락의  가치를  지니는  고전  작품의 독서  영역이 이에  해당된다.   즐김은  자아의  상실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이미지와  상상력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의 차원에서  우리를  뒤흔드는  텍스트들,   현대의  전위적인  텍스트들의  독서영역이  이에  해당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읽을  수  없는'  전위적인  텍스트들은  오직  즐김의 방법에  의해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우연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문  단  하나에서  독자는  충격과 진동을  느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에는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전적  작품의  작가와  독자가  고정된  기의를  가지고  숨박꼭질을  하는  독자라면, 전위적  텍스트의  작가와  독자는  기의의  불확정성  혹은  기표의  물질성을  가지고  무한히 유희하는  자들이라고.....     롤랑  바르트, 
3    자크 라캉 ㅡ 언어와 무의식 댓글:  조회:1453  추천:0  2018-10-24
자크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자크 라캉 (1901 ~ 1981)    그는 1901년 프랑스 도매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가 그의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할아버지는 그의 연약한 아버지를 짓눌렀다. 그는 네 아이 중의 장남으로서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였다. 성격적으로 보면, 관계가 단절되어 회복할 수 없으면 앙심을 품음으로써 나르시스적인 취약성을 보였으며, 편집증 환자라는 말을 들었고, 과장적 자아, 나르시시즘적 성격장애를 보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일찍이 소쉬르의 탁월성을 깨닫고 언어학과 기호학적 통찰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을 재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전후의 소쉬르와 프로이트를 극적으로 개조하며, 라캉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노선에 따라 수정한다. 특히 그는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었다」라는 이론과 「꿈작업(dream work)은 기표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런 놀라운 통찰이 뜻하는 바를 세심히 밝히는 가운데 라캉은 현대 정신분석학을 태동시켰으며 기호학의 제2주자로 부상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구조가 밑받침이 된다. 먼저 이 세 가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그의 핵심 주장인 「언어와 무의식」에 대해 알아보겠다.    1. (1) 상상계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울리며 반가워한다. 아이는 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하여 주체의 형성에 원천이 되는 모형으로 제시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는 없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것으로 가정한다. 이 형태는 정신분석 용어로 이상적 자아(ideal-I)라 부르는데 타자에 의해 보여짐을 모르는 객관화되기 전의 ‘나’에 해당된다. 거울단계는 ‘상상계(the Imaginary)’라고도 한다. 거울단계는 비활동성 혹은 고착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신경증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머물러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그는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인 혹은 환상의 단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에 타자의식이 전혀 없다.    1. (2) 상징계    ‘상상계’는 ‘상징계(the Symbolic)’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이자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거울단계(상상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1. (3) 실재계    라캉에게 ‘실재계(the Real)’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식의 출발을 상상계라는 오인의 구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란 없다. 그러므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단계의 설정은 데카르트의 이성절대주의는 물론이고 실존주의나 현상학이 암시하는 실존적 자아까지도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이 오인의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이성, 혹은 현실원칙에만 굳건히 서 있는 의식의 체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오인의 구조를 실재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라캉은 의식이 지닌 환상을 강조하기에 자기의 의견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을 환자의 범주에 넣는다.      2. 언어와 무의식    ⑴ 기표의 물질성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알다시피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의 경험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해낸 것은 언어의 구조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모든 효과는 정신과 아무 상관없이 문자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신의 허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살펴보면 모든 면에서 문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담론이나 텍스트 구조 속에서 또는 관용어법 속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소쉬르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언어의 구조는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개인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규약으로서, 객관적 구조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기호들을 조직해내는 고유한 규칙에 의해서이며,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흔히 언어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서 언어가 발화주체에게 봉사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기능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구조는 각각의 주체가 그 정신적 발전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려는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이 조직되는 그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기호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인 규칙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발화하는 주체는 언어의 노예로 나타나고, 나아가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기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표를 조직해내는 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한 언어적인 구조에, 즉 기표를 조직해내는 규칙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기표들은 주체를 복속시키는 물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표들의 구조가 주체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물질적인 힘을 그는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여기서 ‘물질성’이란 말이 실증주의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관념들과 달리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기표의 구조가 갖는 강제성과 구속성을 뜻한다는 점이다.  라캉 말대로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무의식에 대한 연구 역시 무의식의 기호들이 조직되는 규칙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론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담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의 차이는 재현가능성(Darstellbarkeit)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기호가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표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증상이나 꿈은 직접적으로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현전이며, 언어와 담론에서 은유와 환유가 표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호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처럼, 무의식에서 은유와 환유 역시 증상이나 꿈이 조직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 간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고, 그 기표들의 결합을 통해 정해지듯이, 증상이나 꿈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결국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한다.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게 됨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이자, 타자와 주체의 개념에 이르는 중심적인 테제이기도 하다.    ⑵ 기표의 고정점  라캉은 기표(S)와 기의(s)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룬다고 본다. S/s에서 바bar는 이 양자를 가르는 구분선이며 기표가 기의에 이르는 것에 저항하는 저항선이라고 한다. 소쉬르는 기표의 자의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기표와 기의간의 관계는 자의적이란 것이다.      3. 결론-정리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그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나 성본능을 억압하고 자아의 자율성만을 강조한 모던시대 정신분석학이 보수적인 엘리트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본능을 귀환시키면서 이것에 소쉬르의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 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기 기호학과 구조주의로 가는 토대가 되는데 앞의 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일 대 일의 정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기의가 미끄러져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는 언어의 비유성 쪽으로 나가고, 뒤의 것은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정립되어 정 ․ 반의 대립항이라는 구조주의 시학을 낳는다. 라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여 주체와 욕망을 해석한다.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의미가 꼬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된다.    자료 2     라캉 Jacques Lacan 의 심리분석적 저서들은 비평가들에게 주관 subject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공해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형식주의자들과 구조주의자들은 '주관적' 비평을 낭만주의적이고 반동적이라고 부정해 왔다. 하지만 라캉의 비평 이론은 '말하는 주관'의 '유물론적' 분석을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욱 수긍할 만하다.   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에 의하면 '나' '그' '그녀' 등은 단지 언어가 규정하는 극단적 위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말할 때, 나는 나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여 상대방을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신'이 대답할 때엔 위치가 뒤바뀌어 '나'는 '당신'이 된다. 우리는 인칭의 이러한 전도를 받아들일 때만 비로소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아는 그 '나'와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일 나는 졸업한다"라고 말할 때, 그 진술 속의 '나'는 '공표의 주체'로서 알려지며, 그 진술을 한 자아는 '공표하는 주체'가 된다. 낭만주의 사상이 단지 그것들을 무시하는 반면, 후기 구조주의 사상은 그 두 주체 사이의 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라캉은 인간의 주관이 언어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취하는 기존의 '지시어'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언어 속으로의 그러한 진입은 우리로 하여금 관련 체계(남성/여성, 부친/모친/딸) 안에서 주관적 위치를 발견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과정과 그 과정이 이전의 상태는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기의 가장 초기의 성적 충동은 구체적인 성적 대상이 없고, 다만 신체의 여러 성감대 (입.항문.'남근')를 가지고 노는 것뿐이다. 性이나 정체성이 수립되기 전에 다만 '쾌락의 원칙'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현실의 원칙'이 아버지의 형태로 등장하여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외디푸스적 욕망을 '거세'라는 처벌로 위협하게 된다.   욕망의 이와 같은 억압은 남자 어린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친의 위치에 놓고 '남성의' 역활을 하도록 해 준다. 여성의 외디푸스적 도정은 휠씬 덜 직선적이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프로이트의 명백한 성차별주의는 여러 페미니스트 비평가들로부터 공격받아 왔다.   이 단계에서 어린이는 '부권적 법칙'으로 상징화된 도덕.법률.종교 등을 배우게 되며, '초자아 superego'가 개발되도록 유도된다. 하지만 이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 남아 있어, 본질적으로 분열된 split 주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욕망의 힘이 바로 무의식인 것이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에 대한 라캉의 구별은 '기호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구분과 부합된다. 이 '상징적인' 것이란 주관과 객관 사이에 아무런 명백한 구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ㅡ 즉 주관과 객관을 구별한 중심 자아가 부재하는 것이다.    이 언어 이전의 '거울 상태'에서, 즉 이 '상징적인' 존재의 상태 속에서, 어린 아이는 거울(꼭 실재 거울일 필요는 없다) 속의 단편적인 자아 이미지 속에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허구적인 ' 이상, 곧 '자아'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이 거울(반사경 = 거울)의 이미지는 아직도 부분적으로는 상상적이지만 (그것이 그 아이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타자 another'로서 구별되기도 한다. 이 상상적인 경향은 자아의 형성 이후에도 계속된다. 왜냐하면 통일된 자아의 신화는 '타자'로 알려진 세상의 객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또한 만일 스스로 주관적인 주체가 되고 싶다면 자신을 타자와 구별하는 것도 배워야만 한다. 부친의 금지와 더불어 어린 아이는 차이의 '상징적' 세계(남성/여성, 부친/아들, 현존/부재 등)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과연 '남근상 phallus'(음경 penis 자체가 아닌 그것의 '상징')은 라캉의 체계 속에서, 모든 '지시어'로 하여금 스스로의 '지시 대상' 속에서 통일성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특권을 가진 지시어이다. 상징적인 영역에서 남근은 왕이 된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 점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상상적인 것도 또한 상징적인 것도 도달할 수 없는 저 켠에 남아 있는 진짜 현실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의 본능적인 필요 needs는 만족의 요구 demands를 표명하는 언술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필요에 대한 언술의 틀은 만족이 아닌 욕망을 초래하며, 이 욕망은 일련의 '지시어' 속에서 작용한다.   '내'가 말로써 내 욕망을 표시할 때, '나'는 언제나 옆에서 억누르는 그 무의식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이 무의식은 의식을 피하는 은유적.환유적 대체와 대치들 속에서 작용하며 꿈이나 농담이나 예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라캉은 소쉬르의 언어 속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진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무의식적 과정은 불안정한 '지시어'와 동일시 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지시어'와 '지시 대상'의 분리된 체계 사이의 틈을 메꾸어보려고 했던 소쉬르으이 시도는 헛된 것이었다.   예컨대, 하나의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들어와서 '아들'이나 '딸'의 '위치'를 받아들일 때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의 어떤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는 결코 나의 위치에 완전한 존재를 부여하지 못한 채, 찢어진 존재로서 '지시어' 와 '지시 대상' 사이의 축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라캉의 기호학에서는, '지시 대상'은 '떠 있는 float ' '지시어' 밑에서 '미끄러져 slide' 달아난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욕망의 주요 배출구로 생각했다. 그러나 라캉에 오면 그의 꿈의 이론은 텍스트 이론으로서 재해석된다.   무의식은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상징적 이미지 속에 그 의미를 숨긴다. 꿈의 이미지는 '압축 condensation'(몇 개의 이미지가 섞여지는)과 '자리바꿈 displacement'(의미가 하나의 이미지에서 인접한 이미지로 바꿔지는)을 겪게 된다.  라캉은 이 첫번째 과정을 '은유'라고 부르며, 두번째 과정을 '환유'라고 부른다.    말을 바꾸면,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이 사실은 '지시어'의 법칙에 따른다고 믿고 있다. 프로이트의 '방어 장치'도 역시 스피치의 양태(아이러니.생략 등)로서 처리된다. 어떤 종류의 심리적 왜곡이라도 어떤 이상한 언어 이전의 충동으로서보다는, '지시어'의 변형으로서 재진술되는 것이다.   라캉에게는 왜곡되지 않는 '지시어'란 없다. 그의 심리분석학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프로이트주의는 현대 문학 이론으로 하여금, 사물을 지시하고 관념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힘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도록 권장했다. 모더니스트 문학은 간혹 지배적인 내러티브의 위치를 피함으로써, 그리고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로 말미암아 꿈과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라캉 자신도 두 개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인, 포우의 를 분석한 유명한 논문을 썼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왕비가 자신이 탁자에 놓아둔 편지를 갑자기 내실에 들어온 왕이 보게 될까 봐 조바심하고 있는 것을 장관이 눈치챈다. 그리고 장관은 그 편지를 비슷한 다른 편지와 바꿔치기 한다. 왕비는 왕이 알게 될까 두려워서 그걸 막지 못한다.   두번째 에피스드에서는, 파리 경찰 국장이 장관의 숙소를 뒤졌으나 편지를 찾지 못한 일이 있은 후, 뒤팽(탐정)은 곧 그 편지가 장관의 벽난로 위의 카드꽂이에 공공연하게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다시 장관을 찾아가서 그의 주위를 산만하게 한 다음, 그 편지를 비슷한 다른 편지와 바꿔치기 한다.   라캉은 그 편지의 내용이 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이야기는 개인의 성격이나 편지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에피소드에서  사람의 상호 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편지의 에 의해 전개된다. 편지에 대한 이러한 관계는, 라캉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시각'에 따라 정의된다.   ㅡ 첫째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왕과 경찰국장); 두번째 시각은 앞의 두 부류의 시각이 '감추어진' 편지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왕비와 두번째 에피소드의 장관) ; 세째 시각은 앞의 두 부류의 시각이 '감추어진' 편지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장관과 뒤팽). 그렇다면 그 편지를 내러티브 속에서 등장 인물들을 위한 주관적 위치를 만들언냄으로 인해서 '지시어'처럼 행동한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은 이 이야기가, 상징적 질서는 "주관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심리분석 이론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냐하면 주관적 주체는 '지시어의 여정으로'으로부터 '결정적인 방향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심리분석의 한 우화로 생각했지만, 동시에 심리분석을 픽션의 한 모델로 생각하기도 했다.   두번째 장면에서 첫번째 장면의 구조를 되풀이한 것은 순수한 지시어(편지)의 효과에 의해 지배된다. 즉 등장 인물들은 무의식적 충동으로서 자기들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라캉의 글뿐만 아니라 라캉의 해설을 비판적으로 읽은 데리다(자크 데리다)의 독서에 대한, 보다 더 포괄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바바라 존슨 Barbara Johnson 의 탁월한 에세이를 읽으면 될 것이다. 후기 구조주의 사상을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그녀는 의미의 자리바꿈을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우>라캉>데리다>존슨의 끝없는 연속 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2    환유와 은유 ㅡ 연관과 유사성[스크랩] 댓글:  조회:836  추천:0  2018-10-24
장 즈네의 의 한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데리다의 에 대한 하트만의 다음 글을 보라.        60년대에 힐리스 밀러 J. Hillis Miller는 제네바 학파의 '현상학적' 비평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70년 이래 그의 작품은 픽션의 해체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특히 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진전은 그의 야곱슨의 은유와 환유 이론을 다루고 있는, 1970년에 쓴 디킨즈에 대한 훌륭한 논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미메틱 효과가 아닌 비유적 효과를 내는가를 보여 주면서 그 글을 시작하고 있다. 먼마우드 거리를 바라보며 보즈는 "사물들, 인간의 인공품들, 거리들, 건물들, 차들, 상점의 낡은 옷들"을 본다. 이러한 것들은 환유적으로 부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그것들 사이에서 살았던 인생"을 추론해 낸다.   그러나 밀러의 이야기는 리얼리즘에 대한 이 비교적 구조주의적인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보즈가 지금은 부재하는 그 옷들의 주인들을 상상함에 따라 보즈의 마음 속에서 그 죽은 사람의 옷이 어떻게 환유적으로 살아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조끼들은 스스로 입어보고 싶은 욕망으로 거의 터질 뻔했다.라고 쓰고 있다.   개인과 그의 주위 환경(집. 소유물 등) 사이의 '상호성 reciprocity'은 "디킨즈의 픽션 속에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 은유적 대체의 기초가 된다." 환유는 옷과 옷입는 자 사이의 연관을 주장하는 반면, 은유는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첫째, 옷과 옷주인은 전후 관계에 의해 연관되어 있으며, 둘째, 전후 관계가 희미해져 감에 따라 우리는 옷으로 하여금 옷주인을 대체하게 하는 것이다. 밀러는 연극적 은유에 대한 디킨즈의 선호 속의 자의식적인 허구성을 인식한다. 그는 개인들의 행동을 흔히 연극적 스타일이나 예술 작품의 모방으로 묘사한다.(한 등장 인물은 '진지한 무언극의 일부'를 통해 '무대에서의 속삭임'으로 말하며, 나중에 '극의 텐트 장면에 나오는 앤 왕비의 유령처럼, 나타난다)   거기엔 현존의 끊임없는 유보가 있다. 모든 사람은 실제 인물이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한다.     참고문헌 탈구조주의 이론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1    [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스크랩] 댓글:  조회:1300  추천:0  2018-10-24
퍼온 자료임   [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   [수사학의 세계]  -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 -  [ 목 차 ]  1. 비유 개괄..................................................30  2.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31  3. 은유........................................................35  (1) 치환은유...............................................35  (2) 병치은유와 존재의 시................................37  (3) 비동일성의 원리......................................39  4. 환유........................................................41  1. 비유 개괄  사전적 의미로 직유란 이른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마치 ~같다. 꼭 ~같다, ~과 비슷하다. ~처럼, ~인양, ~같이, ~듯 ' 등의 보조 수단을 매개로 연결되는 표현방식으로, 이 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는 서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천사처럼 아름다운 우리아가” ,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니”  등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며, 은유란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 연결시키는 비유 방식이다. 또한 은유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미적인 기능을 강화하거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연결이 더욱 돌발적이어서 직유에 비해 그 긴장의 정도가 훨씬 강렬하기 때문이다.  또 은유법은 직유법에 비해 대상을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드러낸다. 논리상 직유는 유사개념이나 은유는 동일개념, 동가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의 거울” , “마음의 거울” , “오월은 계절의 여왕” , “소녀는 인생의 봄”등과 같이“ A는 B다”는 식으로 표현 속에 비유를 숨기는 기법을 말한다. 이러한 비유의 근거는 유추, 즉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속성에 있다. 따라서 비유는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일성의 서술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비유의 동기는 인간의 마음과 외부 세계를 결합하여 마침내 동일화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인 것이라 할 것이며 시적 세계관 즉 시정신의 본질은 세계의 동일성에 있으므로 비유적인 언어야 말로 가장 시적인 언어이며 시의 대표적인 장치가 된다. 그렇지만 이 동일성 못지않게 차이성 또한 중요하다. 비유적 언어는 연합적 언어이다. 그러나 이 연합은 서로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물의 결합이기 때문에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필요 충분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환유란 사전적 의미로 비유법의 한 가지로, 표현하려는 대상과 관련되는 다른 사물이나 속성을 대신 들어 그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을 말한다.  수사학이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정치 연설이나 법정 변론에 효과를 올리기 위해 행해진 화법 연구에서 그 첫 번째 꽃을 피웠다.  소피스트들이 바로 수사학의 지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비유는 수사학의 한 부분으로 그 기능을 ‘장식성’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에겐 이런 비유는 진리를 왜곡하고 숨기는 기술의 일종으로 보았다. 반면 드문 일이었지만 비유의 인식론적 기능을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은유에 대한 아래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자들에게 화두가 되어 준다.  ① 은유란 유(類 : 전체)에서 종(種 : 부분)으로, 또는 종(種 : 부분)에서 유(類 : 전체)로, 또는 종(種)에서 종(種)으로, 또는 유추(類椎)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②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은유에 능한 것이다. 이것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위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①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네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 유에서 종으로, 종에서 유로 대치하는 것은 종과 유의 자리바꿈이므로 제유, 또는 환유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은유’라는 용어는 다양한 비유의 갈래들을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②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유(은유)에서 서로 다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간파해 내는 인식론적 능력을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다. 서정시의 본질을 자아와 세계의 통일(화해와 조화)에서 찾는다면, 은유는 시적 세계의 구성원리와 일맥상통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한다면 환유는 대체로 A와B 사이의 인접성이 가진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연상에 기반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서로 다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간파해 내는 게 인식론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라면, 환유는 은유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유에는 A와B사이의 관련성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야콥슨(Roman Jakobson)의 은유와 환유  야콥슨은 실어증 환자의 상태를 관찰한 결과 두 가지 유형의 장애를 발견하였다. 즉 일군의 사람들은 '아이가 밥을 먹는다' 고 말할 경우 '아이'에 해당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환자들은 각각의 단어는 떠오르되 그 단어를 연결짓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대상에 해당하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서 선택의 축에 이상이 생겨서 실어증이 걸린 것이고 후자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짓는 결합의 축에 이상이 생겨서 언어 장애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은유와 환유를 두 축으로 삼는 선구적인 견해로서 문장 구성의 두 축을 선택의 축(수직축 : 계열적 관계)과 결합의 축(수평축 : 통합적 관계)으로 나누고, 전자에 은유를, 후자에 환유를 연결시켰다.  비 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 결합축(환유)  바람부는 오후엔 극장에 간다 ( 네 어구가 모여 한 문장을 만든다. 이것을 인접성의 원리라 하며 통사적 관계에서 연속성 원리에 의해 연 결된다)  선택축(등가성의 원리 : 은유)  일반적인 언어생활에 있어서 '비 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는 문장의 '비 오는 '에 대치할 수 있는 많은 항목들이 나열될 수 있다. 바람 부는, 눈 오는, 달 밝은, 등 유사성을 지닌 많은 항목 중 비 오는 이라는 말이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 세로로 나열되는 이 항목들을 계열적 관계(paradigmatic relation)에 있다고 하는데 그 각각의 항목들은 유사성(similarity)의 원리에 의해 나열된다. 한편 '비 오는‘ , ’날이면‘ , ’압구정동에‘ , ’간다‘ 라는 네 어구가 모여서 한 문장을 이루는 것은 각각의 어구가 서로 인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결된 것인데 그렇게 가로로 연결되는 항목들은 통사적 관계(syntagmatic relation)에 있다고 말하며 각각의 항목들은 연속성(contiguity)의 원리에 의해 연결된다. 야콥슨은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계열적 관계를 은유라고 했고 연속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통사적 관계를 환유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시의 경우는 은유, 산문의 경우는 환유가 지배적인 언어운용의 원리가 된다.  환유는 굴뚝을 보면 연기를 연상하고 포크를 보면 나이프를 연상하듯, 어떤 기호를 그것과 인접한 다른 기호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은유는 회유와 위협을 당근과 채찍으로, 남근을 고추로 바꾸어 표현하듯 어떤 기호를 그것과 유사한 다른 기호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사학적 비유양식이다.  이러한 선택의 축과 결합의 축은 비단 언어 현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식생활이나 의복의 착용 등 문화의 양상까지 이러한 관계에 의해 설명하려고 했다. 즉 쌀밥과 미역국과 배추김치가 있다고 할 때 이 세 항목은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는 환유적 관계의 음식이다. 즉 밥을 먹고 국을 떠먹고 김치를 반찬으로 먹는 것이 정상적인 식사법이다. 여기에 대해 쌀밥과 잡곡밥,미역국과 시금치국, 배추김치와 겉절이 등은 각각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은유적 관계의 음식이다. 즉 쌀밥과 잡곡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미역국과 시금치국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물론 배추김치와 겉절이는 둘 다 선택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유사한 관계에 있는 음식인 것은 틀림없다. 우리가 옷 입는 것도 이런 관계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은유가 주로 유추를 통해 유사성을 발견한다면, 환유는 대개 연상을 통해 인접한 것들을 연결시킨다. 은유에선 보편성이 중시되는 데 비해 환유에서는 개별성이 강조된다. 은유는 본질과 필연성을 지향하지만 환유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텍스트 수용자가 은유적인 표현과 기능에 주목하여 읽으면 텍스트의 주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되고(보편성), 반면 환유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읽으면 텍스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맥락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특수성)  은유란 화자가 숨겨진, 혹은 진술되지 않은 의미를 갖고서, 이미 정해놓고서 언어 등을 소통의 수단으로서 구사한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시적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은유는 전통과 권위에 결부되어 있다. "내 마음은 호수다"는 대표적인 은유는, 호수가 갖는 이미지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로만 귀결되어 있으며, 그 의미를 독자가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또, “독수리=연세대”라는 은유가 가능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독수리가 연세대학교의 상징물이라는 동의, 전제된 앎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유는 필연적으로 동일성을 우선하며 그에 기반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의 확장을 용납치 않는다.  따라서 "일반수사학적인 전략으로서의 은유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연역해낼 수 있는 의미의 약호를 내포하고 있다. 은유는 차이의 사고보다 동일성을 선호하는 유추적인 사고를 특권화한다. 달리 말하면 한 이미지가 유추에 의해 어떤 의미와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환유는 독수리가 연세대학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둥지나 숲, 혹은 멸종될 위협을 받는 생물, 공중에서 쥐 따위를 날쌔게 낚아채는 맹금류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의미할 수도 있는 경우의 수사인 경우는 은유가 아닌 환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유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대비하여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동일한 수준의 지시대상과 연관시킨다."  은유와 환유를 비교하자면, "은유가 우리의 사고를 현실로부터 끌어올려서 초물질적인 이상, 예컨대 '자유'같은 관념적인 것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현실주의적이고 구체적이며, 유물론적인 방향을 띤다.  *야콥슨은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고 말하였다. 선택의 축은 야콥슨의 개념으로는 은유이고 결합의 축은 환유에 해당한다. 등가의 원리는 유사성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원래는 선택의 축에 해당하는 요소다. 그러면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등가의 원리가 투사될 때 시적 기능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가) 늙은 悲哀다.  (나)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다)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라) 어리디 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느티나무 (마) 잎새에서 이는  (바) 연두빛 바람이다.    이 시에서 하나님은 여러 개의 매개항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 중 '늙은 비애'(가) '푸줏간에 걸린 살점'(나) '놋쇠 항아리'(다)는 부정적 이미지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부정적 이미지를 세 개 열거한 다음에는 '어리디 어린 순결'(라) '삼월의 젊은 느티나무 잎새'(마) '연두빛 바람'(바) 등의 긍정적 이미지가 제시되는데, 7행의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은 부정적 이미지에서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징표의 기능을 한다. 이 시의 문맥을 산문으로 정확히 바꿀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윤곽은, 하나님의 존재가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는 낡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고 푸줏간의 살덩이처럼 죽어버린 존재 같지만 그래도 나의 하나님은 불멸의 존재이며 어린이처럼 순결하고 봄날의 바람처럼 청신한 존재 의의를 지닌다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 앞의 부정적 이미지는 서로 간의 유사성을 지니고 연결되었고 뒤의 긍정적 이미지 역시 유사성에 근거하여 연결되었다. 따라서 앞의 (가), (나), (다)와 뒤의 (라), (마), (바)는 각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야콥슨의 용어)의 관계에 있고 (가) (나) (다):(라) (마) (바)는 의미상 대립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이라는 주어와 '늙은 비애다'라는 서술어는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어 한 문장을 이룬 것이므로 환유(야콥슨의 용어)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신', '주님', '창조주' 등의 말은 선택의 축에 나란히 나열될 수 있는, 다시 말해 유사성을 지닌 말들이다. 그러나 '늙은 비애'와 '하나님'은 표면적으로는 유사성이 없는, 이질적인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이질적인 두 말을 연결하여 A=B의 형식으로 붙여 놓았다.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은 원래 선택의 축에 속해 있는 등가성을 지닌 말을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시적인 발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상적인 진술이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는 말은 분명히 시적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등가가 아닌 것 같은 두 말을 등가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결합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는 말은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은 시인이 주관적으로 생각한 어떤 유사성에 의해 두 개의 어구가 결합된 것이다. 즉 형식적으로는 말과 말의 결합이므로 환유로 보이지만 사실은 주관적 유사성에 의해 폭력적으로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은유에 속한다. 시의 언술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위의 시는 이런 언어 사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야콥슨은 시에는 은유가, 산문에는 환유가 중심원리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야콥슨은 이러한 은유와 환유의 원리가 모든 담화에 다 적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야콥슨의 개념이 수사법에서 이야기하는 은유와 환유에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보겠다.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仙桃山  수정그늘  어려 보라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이 시에서 '~름'으로 끝나는 세 행은 음악적으로 동일한 어감의 말이 통사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것 역시 등가의 원리가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된 것으로, 일상적 어법과는 구분되는 시적 기능을 나타낸다. 각 시행에 제시된 정경은 부드러운 해조와 은은한 아름다움이라는 유사성에 의해 선택된 말들이므로 은유적 사고의 발현이다. 그리고 각각의 정경의 내적 연결은 결합될 만한 전후 관계(연속성)에 의해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환유의 원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2연의 '청모시 옷고름'은 수사법으로 보면 환유에 속한다.전통 수사법에 기대면,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키는 것을 제유라고 하고 특징이나 소유물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을 환유라고 한다. 즉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말은 청모시 옷고름을 띤 한국 여인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고의 과정에 의해 분석해 보면, 한국 여인과 그가 입는 의상은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결합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한복 의상과 옷고름 역시 연속성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국 여인'을 '청모시 옷고름'으로 대치한 것은 환유의 원리에 의거한 것이다. 여기서 수사법에서의 환유와 야콥슨의 환유의 개념이 부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만일 '그대 마음은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시구가 있다면 이것은 '그대 마음'과 '청모시 옷고름'의 유사성에 바탕을 둔 표현이기 때문에 은유의 사고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리고 수사법으로도 이것은 은유에 속한다. 결국 야콥슨의 개념이 그 나름의 독특한 시각에 의해 정립된 것이지만 그것이 전통 수사학의 개념과도 어긋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3 은유(隱喩, metaphor)  光化門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宗敎    *위의 예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은유는 명명행위이고 명명행위는 인식의 행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未知의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것을 旣知의 것으로 바꾸어 부르는 명명의 '전이양식'으로 은유를 파악했다. 우리가 새로운 사물을 경험했을 때 이것을 기술할 새로운 언어가 없어서 이와 '유사한' 그리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다른 사물의 이름을 여기에 부여하는 것이 은유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은유는 '전이'이고 전이는 유추, 곧 유사성이다. 시적인 것의 본질을 '옮겨 놓기', 곧 전이양식이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이름 부르기의 전이양식이라고 파악한 것은 여간 의미심장하지 않다. 은유는 시적 상상력과 수사적 장식이 고안한 것으로서 그리고 언어의 특징으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은유 유형이 시사하듯이 은유는 문학예술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충만 되어 있으며 꼭 언어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도 충만 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그의 생각은 얕다" 또는 "그의 생각은 깊다"고 말한다. 이 두 술어는 개념(관념)에 공간적 방향을 부여한 '방향은유(orientatidnal metaphor)'다. 또 우리는 "그의 성격은 매우 싱겁다" 또는 "우리는 갖가지 폭력과 투쟁할 필요가 있다", "李箱 시를 읽으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최근 그의 정서적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런 은유들은 공간적 방향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체험이 방향은유를 낳듯이 물리적 대상(특히 우리의 신체)의 체험이 사건, 행위, 관념, 정서들을 어떤 물리적 실체로 보는 데서 발생되는 '존재론적 은유'(ontological metaphor)다.    (1) 치환은유(置煥隱喩 : epiphor)  치환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한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여 생기는 전통적인 은유이다. A=B 또는 A의 B라는 비유가 비유 형태가 그 기본이다.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불확실한 미지의 사물(취의 : 원관념)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구체적 사물(매재 : 보조관념) 로 전이하여 의미의 변용 혹은 확대를 가져오는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은유의 예들이 이 치환은유들 이라고 할 수 있다.  휠라이트는 치환은유의 핵심적인 작용이 비교에 있고 보조관념(매재)과 원관념(취의) 사이에 유사성을 전제로 하지만 그렇다고 유사성이 두드러지거나 비교가 명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유사성의 포착이 미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충격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보조관념(매재)과 원관념(취의) 사이에 활기와 긴장감이 흘러야 한다. 그는 또한 치환은유의 특이한 양상으로 ‘감각적 전이’를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따라 ‘공감각(共感覺)’을 은유의 치환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내 마음은 湖水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門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위의 시에서 보이는 은유는 ”A는 B이다“라는 서술형식으로 , ”마음“이라는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 ”호수“ ”나그네“등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과 확대를 가져오고 있다.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있지만 쉽게 이시가 이해가 되는 것은 ”유사성“에 근거한 전이이기 때문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위 시는 눈이 내리는 겨울날, 시골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몇몇 사람들은 졸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졸고 있는 사람들(원관념 : 취의)이 ‘보름’이나 ‘초승’이 아니고 ‘그믐’(보조관념 : 매재)처럼 존다 라고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생의 쓸쓸함과 고단함 따위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다는 것’에 대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이 시적 비유를 통해서 구체화 되어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다는 것(원관념 : 취의)’이 때론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보조관념 : 매재)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귀향하는 사람들의 고향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묻어 있으며 선물로 준비한 굴비 한 두름, 사과 한 광주리에는 가난과 생의 애환들이 묻어 있다. 또한 이것들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하는 이를 통해 생의 남루함과 근원적인 그리움이 환기되고, ‘산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와 질감에 도달하게 됨을 알 수 있다.  (2) *병치은유와 존재의 시  휠라이트는 "군중 속의 얼굴들의 모습/ 촉촉이 젖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잎들"이라는 파운드(E. Pound)의 시구를 병치은유의 예로 든다. 이것은 병렬과 종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은유의 한 형태다. 여기서 의미론적 운동은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시인이 자기체험의 어떤 특수한 면들을 통해서 병렬되는 요소와 그 요소의 종합으로 이룩된다. 휠라이트는 이 은유형태에 조합(combi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합이란 치환은유처럼 사물들 사이에 유사 · 등식 같은 상호 모방적 인자가 있는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됨으로써 빚어지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다. 사실 병치은유는 휠라이트의 독창적 몫이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던진 것처럼 이질적 사물들의 '병치' 형태가 어째서 은유가 되는가 하는 질문이 야기되고 또 그가 병치은유를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는 만큼 모호해서 논란의 여지를 배제할 수 없다. 전이(또는 치환)가 아닌 병치(또는 조합)가 은유가 되는 근거, 곧 병치은유도 은유의 한 형태로 성립되는 근거는 그가 은유를 어디까지나 의미론적 변용작용으로 본 데 있다.  그는 병치은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가상적 자연현상을 예로 든다. 곧 수소원자와 산소원자가 합치되기 이전 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우주사의 어느 시기에 이 두 원자가 결합하여 비로소 물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계의 요소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자질을 생성하듯이 시에 있어서도 이전에 없었던 방법으로 언어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병치도 치환과 더불어 은유의 한 원리가 된다. 말하자만 치환은유가 전통은유라면 병치은유는 새로운 은유형태가 된다. 특히 "얼굴들의 모습"과 "꽃잎들"의 양자가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 판단이 유보된 점에서 병치은유는 해체주의적 관심까지 불러일으킨다.  男子와 女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도 치환은유적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男子와 女子"의 이미지와 "오갈피나무"의 이미지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는 공통성과 유사성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미지의 연결은 느닷없는 통합의 이질감을 준다. 더구나 5행 이하의 장면은 그 앞의 장면과 이질적이다. 이런 이질적 이미지들과 장면들의 통합이 이 작품의 시적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작품 은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의 공백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사실 과거에 시도된 적이 없는, 요소들의 새로운 결합작용으로 새로운 의미와 자질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할 때, 새로운 결합작용이란 이미지나 장면의 당돌한 통합일 수밖에 없고 여기서 탄생 가능한 그 새로운 의미와 자질도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와 무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휠라이트가 순수한 병치는 비모방적 음악이나 추상화에서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병치는 예술을 독자적이게 하는 원리임을, 다시 말하면 일상적이고 논리적 의미를 배제하는 원리임을 시사한 것이다. 자연과 현실의 모방이든 관념의 묘사든 또는 선행 예술의 모방이든 모든 모방적 요소가 있을 때는 치환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치환은 의미의 예술이게 하지만 병치는 무의미의 예술이 되게 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①, 비대상시(이승훈)②, 또는 절대시는 비모방음악과 추상화처럼 병치은유가 그 구성원리가 된다. 조향의 를 다시 예로 들어 새로운 결합으로서 병치은유를 분석해 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 작품에서 장면과 장면,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벗어나고 있다. 이질적인 너무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비논리적으로 병치되어 현실이나 관념의 모방적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 현실을 해체하여 인위적으로 조립한, 아주 난해한 추상화와 같다. 첫 연에서 병치된 네 개의 이미지는 같은 자리와 같은 시간에 놓일 수 없는 사물들의 결합이며, 마지막 연의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 있음으로써 원래의 장소에서(나비가 있을 곳은 꽃이기에) 추방되어 있다. 이런 병치는 모더니즘시의 주된 기법이 되어 있다. 치환은유의 시는 '의미의 시'가 되고 병치은유의 시는 '존재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휠라이트는 의미심장한 은유에서는 이 두 요소가 요청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치환과 병치가 이미지들의 결합방식이고 양자가 다같이 의미론적 변용작용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은유로 처리한 것은 독창적 은유론으로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질적 이미지들의 돌연한 결합이나 장면의 급격한 전환을 병치은유적 요소로 기술한 것은 현대시의 은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많은 현대시들의 은유는 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일성의 원리'(휠라이트의 용어로 병치은유적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동일성의 원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전문  위 예문의 마지막 행은 형식상으로 치환은유임에도 불구하고 병치은유적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 왜냐하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매우 엉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육사의 의 이 마지막 행은 작품 전체로 볼 때 하나의 일대 전환이며 이 전환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병치은유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쟁반같이 둥근 달"이나 "인생은 일장춘몽이다"와 같은 비유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너무 크거나 관습적이어서 우리는 시적 긴장을 느낄 수 없다.더욱이 현대시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아예 없는 것을 선택하여 억지로 결합시키는 경향을 띠어 간다.  이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는 일종의 '힘의 긴장'이 흘러야 하는데, 이 긴장은 두 사물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고조되게 마련이다.테이트(A. Tate)에 의하면 긴장(tention)이란 외연(extention)과 내포(intention)의 접두사 ex와 in을 제거한 조어로서 이 외연과 내포가 먼 거리에 있을수록 서로 잡아당기는 팽팽한 힘이 고조되어 긴장이 탄생된다. 여기서 외연은 보조관념을, 내포는 원관념을 가리킨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人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원관념 "하나님"에 이를 해명하는 보조관념 "늙은 悲哀"와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과 "놋쇠 항아리"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조관념들은 아무런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원관념으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그리하여 돌연한 결합에서 우리는 '놀람'의 시적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의미 차원과는 다른 매우 모호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기이한 것으로 변용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보조관념들과의 결합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결합 속에서 보조관념들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비유는 두 사물의 결합으로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 내는 형식이다. 테이트가 내포와 외연의 접두사를 제거했다는 것은 일상적 차원에서 보면 대립 ·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먼 거리에 있는 두 사물을 파괴하여 새로운 제3의 의미차원으로 변용 · 융합시켰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시적 긴장이 되는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시의 은유에서 도피의 원리를 가져왔다면 이 도피의 다른 한 양상은 대결이 된다. 현대시는 의도상으로 보면 현실과의 '대결의 시'가 된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가 자아와 타인간의, 자아와 물리적 환경간의 사랑과 적개심, 본능적 충동과 이성적 사고가 내리는 결정간의, 생의 충동과 죽음의 열망 사이의 여러 긴장 속에 나타나는 투쟁이라고 보고 언어도 살아 있는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긴장적 언어(tensive language)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현대시의 은유는 과거와는 달리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 속에서 성립한다.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 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한없이 깊은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暗黑이 된다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하리만큼 이 작품의 화자는 죽어서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暗黑"이 되고, 또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동양적 인연관이 은유형식으로 나타나 있는 이 작품에서, 원관념인 화자(나)와 보조관념인 疾患 · 暗黑 · 칼자국 등 사이에는 동일성의 화해가 아니라 대립 · 갈등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보조관념들과 만날수록 원관념인 '나'는 점점 현실의 인간과는 다른 익명의 존재로 추상화된다. 말하자면 그만큼 현실의 모습이 지워진다. 앞에서 인용한 김춘수의 에 있어서도 원관념인 "하나님"과 보조관념인 "푸줏간에 걸린 살점", "놋쇠 항아리" 사이의 그 당돌한 결합만큼 대립 · 갈등의 이질성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은유의 형태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시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적 질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절대시 또는 순수시)① 그리고 이승훈의 비대상시②란 '세계상실의 시'다. 외부세계를 상실한 상황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신의 내면세계다. 이 내면세계는 외부세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 만큼 순수한 추상적 세계다. 세계 상실은 언어붕괴와 등가 된다. 다시 말하면 세계상실의 추상시에서 은유는 화자를 포함해서 사물들의 현실적 모습을 지우며 사물들 사이의 연관성도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추상시의 은유는 참조할 수 없는 은유, 곧 '절대은유'다. 그러니까 추상시의 이미지들은 언어와 지시적 기능이 무화된, 시 속에만 존재하는 절대적 심상이다. 이런 추상시가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우세한 리얼리즘시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됨은 물론이다.  이처럼 현대시의 은유는 현저하게 동일성의 원리에서 비동일성의 원리, 곧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환유(換喩, metonymy)  환유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개념의 명칭 대신 표현하고자 하는 원래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거나 그 대상이 시사하는 말을 사용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 왕' 대신 '왕관'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왕관의 권위는 치명적으로 약해졌다') 어떤 작가의 작품 대신 그 작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나는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고 있다")이 그 보기이다.  야콥슨은 시의 원리에 은유를, 산문의 원리에 환유를 연결시켰으며, 환유는 인접성을 바탕으로 배열된다고 했다. 은유가 서로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상이한 것들 사이에 구심점을 구축해내는 데 반해 환유에는 발견의 힘이나 통일성을 부여하는 구심력이 별로 없다. 대부분 환유적 연결에는 이미 인접성과 관련성이 관습적으로 인정되므로, 그 연결 자체가 인식론적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식론적 가치로 따지자면 환유는 은유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어쨌든, 문제는 근래에 들어 왜 환유적인 원리가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조명되고 있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여기 박진, 김행숙 지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256쪽~259쪽)를 참조하여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어떤 학생이 방과 후에 혼자 남아서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녀석의 마음엔 문득 ‘반성’이란 게 무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반성’이란 단어를 엣센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반성 : ①자기의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그 선악. 가부를 고찰함.②[심] 주체가 자기 자신을 관찰함 ③[논]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함.” 녀석에겐 ‘선악’ , ‘가부’라는 단어가 맘에 걸린다. 나는 선한가. 악한가. 옳은가. 그른가. 녀석은 자못 철학적이 된다. 그래서 내친 김에 ‘선악’이란 단어의 뜻도 알아보기로 한다. ‘선악’이란 단어 근처에 ‘선악과’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선악과 : [기] 선악을 알게 된다는 나무 열매(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따먹었다는 열매).” 나무열매라고? 이쯤 되면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다. 반성-선악-선악과-나무-열매-자방(子房)-주머니-돈-엽전......  이렇게 환유적인 고리들은 의미를 모으지 않고 이미지를 미끄러지게 하고 흩어지게 한다. 하나 하나의 고리들은 인접해 있지만, 그 연결은 필연적인 게 아니고 우연에 기대어 있다.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끝도 알 수 없고, 끝이란 건 있지도 않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의미는 해체된다.  어떤 환유적인 시들은 우연과 불확정성(발산, 흩어짐, 이탈, 미완성, 미숙함)에서 미학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신나는 자유 혹은 불안한 자유에 의해 이끌린다. 은유적인 에너지가 구심력으로 작용하는데 반해 환유적인 에너지가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또한 어떤 경우엔 환유적인 원리나 방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현실의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표 나게 드러내고 환기시킨다. 나아가 은유적으로 봉합된(통합된) 세계란 허상일 뿐이라고 폭로 한다.  따라서 환유적인 원리와 방법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와 그 감수성에 잇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 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 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  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부분에서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로 지루하게 나열된 동작들은 시간적인 인접성에 의해 연결된 것들이다. 그리고 ’나갔다‘와 ’들어온다‘ 사이엔 거리를 걸으며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 행위가 끼여 있다. ’거리의 모든 것‘은 공간적인 인접성에 따라 읽힌다. 이 시가 보여주는 환유적인 연결 고리에는 어떠한 놀랄 만한 사건이나 관찰도 꿰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어쩐지, 어쩐지 황당하지 않는가. 특히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 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으로 이루어진 5층짜리 건물은 길러리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한 건물일 뿐인데, 지하. 1층. 2층. 3층. 4층. 5층의 간판들 그리고 옥상의 광고탑까지 그냥 그대로 쭉 열거해 놓고 보니 어쩐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공간적인 인접성의 정도로 따지자면 매우 밀접하지만, 이 배치 이 연결 어디에서도 유사성과 필연성은 찾을 수 없다. 이렇듯 기괴한 연결을 우리가 지극히 심상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점이 삶의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환기시킨다. 이 한 채의 건물이 그럴진대, 제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거리를 걷는 것은, 우리 자본, 우리 기술과 같은 슬로건과 수많은 간판들 그리고 벽보들까지, 즉 ’거리의 모든 것‘을 또박또박 읽으면서 그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환기시키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질구레한 경험들도 감정과 해석을 빼고 이렇듯 건조하게 한번 환유적으로 진술해 보면, 그로테스크하지만 평범한 5층짜리 건물과 같은 인상에 닿게 될지도 모른다.    *은유적 언어체계로부터 환유적 언어체계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은 요즈음 우리 시단에 유통되고 있는 작품의, 혹은 시 쓰기의 주요 특성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창작의 방법론과 시 쓰기의 자의식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현대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는 시인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세상에는 등에 거울을 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단다  경없이 가는 길,  그것이 문자의 운명인데도  너희, 거북이 아저씨 알지?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 사람,  우리 동네 시인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런 거울 백 개를  모을 수 있다면  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단다    경없이 가는 길이 문자의 운명이자 시인의 운명일 때, 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그런 거울 백 개를 모으는 것이, 달리 말하여 사물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시인의 꿈일 때, (그것은 환유적 사유체계의 몫이다. 은유적 사유란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 동사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워진 문자를 활용하는 명사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땡볕 아래 좌선하는  거미  처럼  내부를 향해 무한 증식되던 이 몸께서  어느 날 대낮, 대책 없이 몸밖으로 쏟아졌을 때  자기가 자기를 숙주로 삼아 드디어 몽땅 죽는  처럼  조심해, 사랑을 받아주는구나 감격해서 끌어안으면 와지끈 손가락까지 삼켜버릴걸. 몸통이 먹혀 버리는  날도 있을걸. 내장이 주렁주렁 몸 밖에 달린, 그래, 시를 생산 중이시래. 인도네시아, 이 땡볕의 정원, 냄새나는 눈물 저 혼자 삼키는 처럼    여성의, 여성적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김혜순이 몸, 그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위의 시에서와 같이 탈중심적 해체의식을 강하게 보여줄 때,  잎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는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날고    대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후박나무/어미 개/새끼/싸락눈/태반/선혈’ 등이 어미 개를 중심으로 한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사물들로서의 환유적 언어체계를 보여줄 때, 우리는 은유적 사유체계로부터 환유적 사유체계로 이행해 온 한국 현대시의 한 모습을 본다.    앙상한 생각들이 바람에 떤다.  묵은 시간의 잎사귀가 발 밑에 쌓이고,  죽어간 폭양(曝陽)의 빈 거리에서  나마저 들것에 실려나가고,  대낮을 사납게 헐뜯는 열 개의 손,  저 집념의 끌. 부서져내리는  눈발 속에 눈 드는 이마.  나는 들것에 실려  회상의 먼 부둣가에 잠든다.  잠든 파도의 주름살 너머  여윈 시간들이 헐떡인다.  긴 항해의 짧은 일몰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눈물을,  축축히 젖어드는 체험의 지평선에서  이윽고 불붙는 파도여 달려 오라.    *위의 시에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규범이 모두 파괴되고 해체되어 있다. 서정적 질서란 주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그 주체가 이미 죽어 있다. 주체의 죽음은 중심의 상실을 가져오고, 그 중심의 상실은 질서의 붕괴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 질서의 붕괴는 시간의 파괴를 가져온다. 시간이란 질서의 다른 이름이고, 논리의 다른 이름이다. 위의 시에서 모든 사물들은 논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병치되고 있다. 병치란 결국 선조적 시간의 죽음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묵은 시간의 잎사귀가 발 밑에 쌓이고' 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발 밑에 쌓이는 잎사귀란 낙엽을 의미하고, 낙엽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묵은' 시간이란 것 자체가 부정되어야할, 극복되어야 할 근대적 시간임을 나타낸다.  근대적 시간이란 선조적으로 나아가는 직선적 시간이다. 이 직선적 시간이란 합리적 주체, 곧 이성적 주체의 산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는 이미 들것에 실려나가 부둣가에 묻혀졌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세계에다 총체적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중심이 사라진 것이다. 이처럼 중심이 사라진 해체시에는 자아도 세계도 모두 다 병들거나 죽은 상태로 나타난다. '죽어간 폭양'이 그러하다. 태양은 자연,우주의 중심으로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런 상징적 존재인 태양이 죽었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反생명적인 해체시는 환유적인 사유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환유란 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지향한다. 일상화된 삶에 총체적 질서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원래 언어의 고유 기능이다. 기의는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언어적 질서란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질서 상태를 지향하는 사유구조를 우리는 은유라 부른다. 은유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꿈이다. 특히 근대체험 이후 은유는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파괴하는 힘에 대한저항 이데올로기이다. 그에 비해 환유는 그렇게 파괴된 사물들의 정황을 폭로하는 양식이다. 환유도 하나의 저항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환유에는 생명이 없다. 모든 사물들은 죽어 있는것으로 나타난다. 죽음으로써 그 죽음을 초래하는 것들에게 저항하는 방식이다. 사물의 생명, 곧 사물의 생명적 본질이 다름 아닌 기의이다. 그러나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오면 사물의 선험적 기의는 부정된다. 환유에서 기표는 죽은 사물의 표면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앙상한 눈들이 내린다.  헌 외투의 승려가 지나가고  식어버린 어휘들이 굴러다닌다.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로  여윈 발들이 달린다.  내벽엔 겨울 신앙이  못 박힌다.  로마인이 서너 명 해머를 들고  얼어붙은 시간을 깨고 있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잠드는 바람  갈릴리 내해에 눈은 내리고,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갈앉고,  차고 매운 발자국들이 수런대면서  황폐한 의식 위로 몰려간다.  모든 것은 닫히고 나는 서 있고  아득한 곳에서 기계가 울고 있다.  나는 꿈꾼다.  떨리는 귀에 들려오는 복음을,  깨어진 공간 위에 식어내린 햇빛을,  엷은 꿈들 위에 눈은 내리고  나는 소리치면서  어리석은 신앙으로 얼고 있다.    기의와 분리된 기표, 더 나아가 기의를 부정해버린 기표는 죽음에 이른다. 언어의 죽음을 오세영은 '식어버린 어휘'가 굴러다닌다고,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를 '여윈 발들'이 달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가 행복하게 만나지 못하는 곳에 대화는 단절된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황폐해진다. 모든 사물은 내 앞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있고, 나는 그 밖에 서서 얼고 있다. 서정적 언어란 본질적 언어이고,본질적 언어란 대화적 언어이다. 기의를 부정해 버리고 나면 대화는 죽고 없어진다. 환유란 곧 대화의 죽음을 의미한다. 대화가 죽고 없어진 곳에 바로 이미지의 불연속성이 나타난다. 위의 시에 나타나는 해체적인 국면, 이미지의 파편성은 바로 환유의 실체이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바람이 잠든다는 것과 침울한 내장에 세계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내적인 연속성이 없다. 눈이 내리는 것과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가라앉는다는 것도 의미의 연속성이 없다. 이것들은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으로 연결될 뿐이다. 인접성이란 우연성의 산물이다. 필연이 없는 우연의 연발이란 무의미의 나열이고, 무의미란 바로 '어리석은 신앙'이라서 병든 주체는 모든 사물의 문 밖에서 얼고 있을 뿐이다.    [ 참 고 ]  ① 무의미시(순수시 또는 절대시)김춘수의 '무의미시(nonsenspoetry)'는 '순수시', 또는 '절대시'라고도 불린다. 벤의 '절대시'라는 명칭 역시 벤 자신의 창의적 조어가 아니라 폴 발레리(Paul Valery)류의 '순수시'를 비롯한 기존의 서구 '절대예술'의 개념에서 빌어온 것이다.그러나 벤의 '절대시'는 벤 자신의 작명을 따라서 '정시 靜詩 statische Gedichte'라 불리기도 한다. 이 명칭 속에는 같은 범주의 서구의 다른 시인들과는 구별되는 벤의 시론과 세계인식의 고유성이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포괄적 별칭인 '순수시',또는 '절대시' 역시 한국문학 내의 자생적 개념이 아니라, 기존의 서구 근대예술의 명의들에서 차용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무의미시'가 "허무의 아들"이라는 진술은 곧 무의미시의 탄생배경에는 세계에 대한 허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가치관의 공백,회의, 허무를 대체하거나, 초극하는 한 방식으로서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유구조는 김춘수의 특허품이 아니라,독일낭만주의와 프랑스 상징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서구 근대 예술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체현한 것의 복제품이거나 유사품일 수 있다. 니체의 예술지상주의 적인 교의는 이러한 범유럽적 현상에 대한 포괄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의 초기 무의미시론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3가지 요소는 이미지, 대상, 의미이다. 그리고 이 3가지 요소의 상관관계를 통해 그는 그의 무의미시의 성격을 규정한다. 우선 시를 이미지의 구성물로 파악함과 동시에, 그것을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二分하는 데 그는 매우 익숙해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근본적으로 순수한 서술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념의 도구 또는 수단"이 아닌, "이미지 그 자체가 목적인 이미지", 즉 절대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무의미시는 대상(현실적 의미 또는 관념의 매체)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순수 서술적 이미지들의 구성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의 해체는 의미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항은 무의미시의 구성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실제의 풍경과는 다른 풍경의 재구성, 즉 무의미시의 구성에는 논리와 자유연상이 필연적인 방법론으로 동원된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아울러 대상의 해체, 또는 소멸은 이 양자의 개입과정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논리는 통제되지 않은 자유연상이 가져다줄 어떤 시적인 혼돈상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의식의 통제기능을 말한다. 양자의 상호작용을 그는 "무의미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쳐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의 草稿에 시인의 의도가 개입하는 상황, 또는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자유연상은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서구의 초현실주의 시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다음으로 방법론에 있어서의 양자의 유사성은 우선 절대시가 "매혹적으로 짜 맞추는 언어들로 이루어진 시"라는 위의 인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짜 맞춘다'는 독일어 'montieren'(몽타쥬하다)의 번역이다. 그런데 벤의 이 몽타쥬기법은 김춘수의 방법론인 "풍경, 또는 대상의 재구성", '논리성의 개입'과 흡사한 측면을 지닌다. 왜냐하면 무의미시나 절대시를 위하여 양자는 예술의 '인공적 구성'이라는 작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가 의미의 확정을 차단하기 위해 애용하는 독립적인 이미지의 병치나, 대상의 재구성, 그리고 논리성의 개입은 벤의 몽타주 적인 구성원리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일차적으로 얻어진 원재료에 대한 작가의 인위적인 구성의지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벤과 일치하는 것이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궁극적으로 의미불확정의 상태, 즉 판단유보의 상태를 지향하는 반면에, 벤의 절대시들의 배후에는 모종의 거대한 관념, 즉 자아와 세계의 분열을 넘어서는 어떤 통합세계를 향한 꿈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② 비대상시  비대상의 시란 노래하는 대상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와, 자연세계나 일상세계를 노래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이승훈)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외부세계를 묘사하거나 분명한 대상을 형상화하기보다 자신의 깊숙하고도 은밀한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컨대, 는 목이 달아난 채 한 마리의 흰 닭이 뒤뚱거리며 마당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실재하는 외적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시인의 황량하고도 불안정한 내면의식을 표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작 경향은 이승훈이 참가하였던  동인들의 성향과도 유사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내면세계 혹은 내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동기술법, 자유연상기법 등과 같은 현대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이런 방법들을 통하여 시인이란 자기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고, 따라서 시는 독백의 양식이라는 극단적인 견해에까지 나아가기도 하였다.  ③ 복습(2005.가을) : 시와 언어에서  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와 비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의 언어적 특징을 밝히려고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들은 시가 일상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의 언어와 일상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시는 일상언어를 재료로 하고 일상언어의 문법에 구속되기는 하지만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언어이며 표면적인 의미와 시적 의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앰비규이티(ambiguity : 모호성), 역설, 아이러니 등 각기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의 언어가 다의성을 지닌 언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역시 시와 비(非)시, 문학과 비문학적 담화 사이의 차이를 밝히고 문학 연구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들은 문학연구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주는 특징, 즉 문학성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문학이 언어를 사용하는 형식적 특징에서 찾았다. 그 결과 그들은 문학은 다른 발화 양식과 달리 일상적인 언어 용법을 왜곡하고 비틀어서 낯설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하였다.즉 문학은 다른 발화양식과는 달리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형식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내용을 새롭게 인지시킨다는 것이다. 일상적 발화에서는 내용만 인지되면 형식은 버려지고 잊혀진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기계적 지각을 막고 지각을 탈자동화시켜 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형식은 기존의 내용/형식의 이분법을 떠난다. 과거의 내용/형식 이분법에서 형식은 포도주와 포도주 잔의 관계처럼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포도주지 용기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형식은 생명체와 그 내용인 생명의 관계처럼 내용과 분리될 수 없고 내용이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일상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왜곡된, 낯설게 된 언어이며 시를 일상언어처럼 읽으려고 할 때 비문법적인 언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신비평가들이 밝혀낸 일상언어와 시어 사이의 차이는 현대 기호학자들에게 와서는 시의 언어와 일상언어는 동일한 언어가 아니라 다른 문법을 가진 또 다른 종류의 언어라는 견해로 발전한다.  러시아의 유리 로트만은 문학이 일상언어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재료로서의 언어와 예술로서의 문학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문학을 다른 예술과 달리 예술로 생각되는 것을 어렵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언어를 세가지로 구분하여 자연언어, 인공언어, 2차모델링체계로 나누고 시는 자연언어를 재료로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결합원리를 가진 또다른 언어로 자연언어가 기호들을 결합 세계를 모델화하는 것처럼 시 역시 하나의 기호로서 세계를 모델화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말한다. 자연언어가 세계를 모델화하는 1차언어라면 시는 1차언어 위에 나름의 2차적인 질서를 덧붙여 세계를 모델화하는 2차언어라는 것이다. 그는 2차적인 질서를 덧붙임으로써 시에서는 모든 성분들, 심지어 일상적 발화에서는 형식적인 요소까지 의미론화 되며, 일상언어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을 2차적인 질서화에 의해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 시는 일상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정보량을 지니게 되고 보다 현실감 있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시의 이러한 2차적 질서화를 야콥슨은 "시는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시킨다"는 말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일상언어의 결합규칙은 계열체 내에서 단어를 선택하여 그것들을 계기적 사슬로 결합하는 인접성의 원리에 의한 것임에 비해 시는 이와 반대로 등가의 원리를 결합의 원리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문법적 특징은 시로 하여금 일상언어의 문법적 규칙을 위반하게 하고 시를 일상적인 담화로 읽으려고 할 적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 비문법적인 담화로 만들어 놓는다.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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