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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 임 봄 , 문학평론가 댓글:  조회:1045  추천:0  2018-11-03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고래와 수증기』를 통해 본 김경주의 시세계                                                                     임 봄,  문확평론가           시의 특권이자 기쁨은 낯선 이미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이 개념에 저항하며 포괄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데 있다. 엘리아데는 “이미지들은 모두 無明으로부터 깨달음으로의 이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는 젊은 시들의 경우 단어와 기호 등 다양한 이종교배 형식으로 파장이 깊고 넓고 복잡해졌으며 예전에 비해 특별한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는 경향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무정형의 시들은 독자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하는 느낌도 든다. 현대시 독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이런 힌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그 힌트들은 대부분 이미지로 주어지고 상징계와 상상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때론 모호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현대의 이미지즘은 젊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기이하게 분절된 이미지로 낯설지만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무엇을 내포하고 어떤 형식을 구성하며 흐르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경주 시인을 지칭할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단어는 ‘천재’다. 특히 『기담』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적 실험들과 그 실험을 통해 생산된 다양하고 현란한 이미지들은 많은 시인과 평론가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일명 ‘프랑켄슈타인어’라는 말이 붙기도 했으며 ‘괴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 화려한 명성에 비한다면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고래와 수증기』는 단순하고 평범해 보인다. 첫 번째 시집에서 보여준 낭만적 언어들의 퍼포먼스나 장르의 문법을 넘나드는 현란한 시적 실험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뜻을 최대한 되살린 시적 언어들이 각 행마다 깊고 확장된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동안 다양하게 모색됐던 그의 시적 실험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반갑다. 김경주의 시에는 언어가 갖는 실재들이 기호화하며 때론 전체적인 문맥을 벗어난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때론 각각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전체 속으로 녹아들며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   ‘파레르곤’, 처음과 끝이 사라진 이미지들     김경주의 시에서 언어와 기호들로 이뤄진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의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의미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를 하나로 꿰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뒤흔들지만 그렇다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작품을 발생시킨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 『호화 속의 진리』 에서 하나의 작품이나 원작에 영향을 미치며 서고 간의 경계를 없애는 존재를 ‘파레르곤’이라 정의한다. 파레르곤은 미술작품의 경우 액자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거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전에 제작했던 다양한 소품들이 원작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김경주의 시에서 하나의 작품을 위해 만들어지는 각각의 이미지들 역시 전체적인 시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는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개개의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있다. 낯설지 않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이미지들은 시 전체적인 메시지나 형식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파레르곤으로 기능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시를 완성하는 파레르곤 현상들은 김경주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순록들 내 입술 위를 걸어간다   혀로 발아래 얼음을 핥으며 간다     얼음 밑에 거꾸로 떠오른   누군가의 희멀건 발바닥을 핥는다     순록은 내 입술을 뜯어 먹는다 차가운 나무뿌리를,   얼어 죽은 새끼 순록의 뿔에서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을 뜯어 먹는다     수염고래 한 마리가   내 입술 위로 올라온 적도 있다   귀가 뜨거워지면 얼음이 녹아내리므로   순록은 가만히 퍼덕이는 고래를 핥았다   내 입술에 쌓인 나뭇잎 아래서 순록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순록은 내 입술 위에 앉아   수평선이 혀에 얼어붙을 때까지   서러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눈들의 지느러미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설국(雪國)으로 끌려가서 비관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암각(暗角)이 되기도 했어요   속눈썹을 얼음 위로   하나씩 떨어뜨리며   되돌아오는 길을 표시했지요     행렬 속에서 길을 잃고   얼음 위에 서서 잠들어버린 순록은,   봄이 되면 내 입술 위의 따뜻한 얼음이 된다   살얼음 아래로 녹아내려 내 입술이 된다     내 입술 위의 벼랑 끝에서   순록들은 아슬아슬하다      - 「내 입술 위 순록들」 전문     김경주의 시에서 이미지들은 서로를 연결하며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느리게 음미할수록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현실이나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며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를 부여한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신선하고 새롭다. “입술”과 “순록”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단어다. 그러나 타자와의 소통을 꾀하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눈 덮인 북극지방에 사는 순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시적자아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멀지 않은 심연에서 파견돼 의미 없이 분절된 낱말들은 표면 위에서 스스로 직조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파레르곤적인 이미지들은 때로 단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주어와 서술어를 가진 하나의 문장이 될 수도 있다. 기호가 될 수도 있고, 행간의 침묵이 될 수도 있다. 입술과 순록은 본연의 이미지에서 탈주하고 서로 접속을 꾀하면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숙명을 보는 것도 같다.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시인은 자신의 분신이자 입술의 분신인 순록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적기법으로 아름답고 슬픈 동화 같은 시 한편을 선보이고 있다.     좁고 어두운 입술의 안쪽과 광활한 입술의 바깥쪽이 얼음으로 차단되면서 말을 잃어버린 자아는 세계와의 단절을 겪는다. 그에게 있어 “수염고래”는 감춰둔 이드(ID)로 세상 속에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면 “귀가 뜨거워지”고 그로인해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상과의 단절이자 자신을 가두는 존재인 얼음은 녹이기 힘든 존재이자 녹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고립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김경주는 이런 숙명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입술이 순록을 낳고 순록이 다시 입술이 되는 무한순환을 통해 처음과 끝을 상실한 각각의 이미지들은 김경주에게 있어 윤회의 삶을 성찰하는 자세이며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순록이 뱉어내는 서러운 독백은 시인의 독백이며 때론 모호한 이미지로 시를 쓰는 미래파 시인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절벽에 표류된   등반가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협곡을 후 불어   밀어내고 있다     날아가는 협곡들     바위가 부었다   조용히   연필을 깎는다     지우개는 면도 중이다     햇볕이 서서 졸다가   발밑에서 잠들었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      -「백치」 전문     행이나 연들은 완성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며 투명해진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날아가는 협곡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라는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선명한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백치’라는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향해 마치 짧은 영화필름을 돌리듯이 전개되며 서로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모든 필름이 상영된 후 남겨진 이미지들은 ‘백치’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쏠리면서 점차 페이드아웃(fade-out) 된다. 여기서 각각의 이미지가 내포하는 의미들을 하나하나 쫓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희미한 기의들을 따라가고 그 이미지들이 연결되면서 최종적으로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만 떠올리면 된다. 그 이미지는 본연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시인마다 갖고 있는 무늬이자 세상을 읽는 시인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김경주의 파레르곤 방식의 이미지들은 시인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탈주를 감행하며 자신만의 시적세계를 구축해내는 도구, 주체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독특한 사유 방식인 셈이다.   ​   감각의 노마드과 탈주의 상상력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새 떼를 쓸다」 전문     노마드는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체의 방식은 철학적 개념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까지도 두루 포괄하고 있다. 노마드는 단순한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땅으로 바꾸는 것,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노마드는 김경주 시의 기저에 깔려 있는 자유로운 사유의 여행이다.     일반적으로 ‘새’는 ‘자유’의 상징이다. 새와 자유는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다. 현실과 이상의 이 기묘한 조합은 새라는 상징물과 탈주를 도모하는 시인의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새로움을 시도하는 탈주, 그리고 그 지점에 시인의 상상력이 접속했을 때 새는 비로소 자유와 비상을 꿈꾸는 제3의 존재로 재탄생 한다.   ‘A=∞’를 만들어내는 이런 이미지 공식은 현대 시단에 쏟아지는 시들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것으로 김경주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러나 김경주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들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평범한 단어들을 조합해 낯설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과 그 이미지에 오래 머물수록 더 깊은 의미의 울림을 음미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것들은 편안하고 낯익었던 세계에 독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특정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비상하는 ‘새’는 시인의 시작詩作을 위한 도구적 방식으로 이번 시집에는 유독 이런 새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김경주의 ‘새’는 시인의 본질이 노마드에 닿아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시를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새 떼’로 표현되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간절함은 어느새 역동성을 갖는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모든 시의 기저에는 자유가 있으며 자유가 사라진 문학은 상상하기 어렵다. 감각은 예리하게 벼려있는 날선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길들여진 감각은 이미 죽은 감각이다. 야생에서 먹이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본능적인 행위다. 이런 본능에서 살아있는 감각이 사유된다. 김경주의 시 쓰기는 이런 야생의 살아있는 번득임에서 비롯되고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그래서 낯설지만 신선하다.     새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찬 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로 비유하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 역시 이런 자유의 기저 아래서만 사유될 수 있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새 떼를 좇으며 시인은 자유를 갈구하는 욕망을 표출해낸다. 새 떼는 시인의 시적 발화지점이기 때문이다. “새 떼”의 “종아리에”는 “능선”도 걸려있고 “찔레꽃”도 피어있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만드는 시적인 영감들이 “내 몸을 통과” 할 때까지 시인은 오랜 기다림을 갖는다. 이곳에 시적화자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시인은 시가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존재다. 시가 스스로 찾아오는 일, 오랜 기다림을 거치면서도 시마가 찾아기를 기다리는 건 어쩌면 시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가 있을 거라 믿으며 새의 날개를 좇고 죽어 떨어진 새를 쓸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시가 찾아올 거라 믿는 믿음 때문이다.     시를 갈구하는 시인은 자다가도 “혀에 하얀 새 떼가/ 돋아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이 날숨으론/ 말語에게 돌아갈 수 없다”(「詩作-干涉」)고 탄식하기도 한다. 시는 시인에게 있어 “두 눈이 없이 태어나/ 평생 서로를 몰라보는 쌍둥이”이고 “한 눈씩 나누어 가지고 태어나/ 평생 서로의 몸을 그리워할 쌍둥이”(사시斜視-시인의 피3)인 것이다.   ​   미시세계를 꿈꾸는 시어들     거시적 환경에 익숙한 우리는 미시적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진 않다. 미시적 세계에서 ‘이것’은 ‘저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또한 ‘저것’은 ‘이것’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두 개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는 뉴튼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시세계’와 원자처럼 아주 작은 단위로 내려갔을 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이 서로 연결되고 쌓여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 거시세계라면 미시세계는 거시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나 또는 허공처럼 형상이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우리는 대부분 지구에서 허용하는 법칙, 즉 개념에 익숙해져 있지만 개념을 벗어나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더 많은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일 이런 과학의 양자역학을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운이다. 시는 가장 함축적인 문장으로 가장 거대한 담론을 지향하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김경주가 이전에 비해 한 단계 올라섰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동안의 시 쓰기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가’라는 점에 천착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나’ 하는 점에 천착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 떼에 걸려,     문장은 기척을 내기도 한다     내 얼굴에서 내려야 하는데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문장은 행진곡을 못 듣고   횃불로 들어가   날을 지새운다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내 난동과   잘 지내야 하는데     꿈속의 새가   내 배게위에 침을 흘린다   침으로 기울고 있는   내 얼굴처럼     문장은 나의 타향살이다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난다      -「기척도 없이」전문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는 가장 최소한의 언어로 시 본래의 원형을 찾아가고 최소한의 문장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백 속에서 한층 확장된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각각의 행은 ‘주어+서술어’로 만들어진 문장이 대부분이며 가장 긴 문장도 ‘주어+목적어+서술어’를 넘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연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런 시적기법의 가장 큰 효과는 호흡을 그곳에서 멈추게 해 의미를 오래 되새김질 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그가 적절하게 배치하는 쉼표나 마침표들은 이런 여백에 더 강한 울림으로 작용한다.     「13월의 월령체」에서는 1월부터 12월까지를 숲·그림자·햇볕·진눈깨비·속주머니·헬멧·밤·빵·집·악어포클레인·동물원·동전·달·새로 형상화해 그려내는데 문장마다 마침표를 찍어 각각의 달마다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 다름을 단적으로 표현해내고 다른 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 장치를 하고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면 하나의 행이 단어 하나로 이뤄진 시가 어떤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문장들   통성명   하지 않아   출생신고   하러 온   이미지들     -중략-     공원의 침들   좋아   발 없이 굴러간   비눗방울   좋아   아무도 모르는 방   세만   놓지      -「시인의 피 4」 부분     “문장들” “통성명” “출생신고” “비눗방울” “좋아” 등은 이 자체로 하나의 행이다. 긴 문장에 삽입돼 요소로 전락한 단어들과는 달리 이 자체만으로 확장된 의미를 갖는다. 문장들은 단순한 문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출생신고 역시 그 외에 부가적으로 존재하는 많은 사연들로 의미를 확장시킨다. 언어의 미시적 효과를 톡톡히 얻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도록 만드는 것은 단어가 주는 여백에 있으며 미시적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김경주의 시에는 이런 미시적 세계가 주는 울림으로 더 큰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더 큰 시적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고, 끊임없이 접속을 꾀하고, 끊임없이 낯선 이미지로 구축된 새로운 고원을 탈환해 내는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 언어들의 미시적 접근을 통해 시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여백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세계를 담아내는 그의 행보는 향후 그가 보여줄 시들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    ========================================== ======================================================  임 봄, 문학평론가  ​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석사. 2009년 계간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계간 《시와 사상》 평론부문 당선.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작가회의 회원.   
9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석환 댓글:  조회:1183  추천:0  2018-11-03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석환(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머리말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화 운동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문화의 한 부분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 역시 모더니즘 사조는 크게 일어났는데 영미주지주의와 대륙의 아방가르드 운동, 즉 미래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종합적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한국 현대시에 그러한 사조가 유입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이며 영미주지주의 계열에 정지용, 초현실주의 계열의 이상 등을 당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후 전후 후반기 동인을 필두로 해서 다시 일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변화되면서 더욱 다양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더니즘만으로 그 다양한 양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현대 시단엔 이전에 풍미하던 리얼리즘적 경향이 쇠퇴하고 모더니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까지 민주화 및 노동자 또는 소외계층들의 권익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만은 아니지만 1990년대 이후 컴퓨터를 추동력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의 물결이 밀려 온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변화는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에 유용한 리얼리즘 시의 흐름을 약화시키고 모더니즘의 강세를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 시단에 강하게 일어난 모더니즘의 조류를 살펴보는 것은 요즈음 시문학의 전체 흐름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고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의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소재로 하는 예술로서 하나의 구조체인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구조체, 즉 2차적 구조체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곧 시적 특성을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에 사용된 언어가 어떻게 시적 구조를 구축하는가 또는 탈구축을 하며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고찰의 타당성 또는 필요성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구체적으로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시에서 각 요소들, 즉 시어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성이 있으므로 구축과 탈구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곧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피는 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 역시 각각의 시들이 갖는 특징을 고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2. 구조의 탈구축과 의미의 확장   시인 이상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유럽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을 종합하여 최종 매듭을 지은 사조로서 무의식의 세계가 진정한 현실이라 여기며 이에 대한 탐색을 주요한 시적 과제로 삼았다. 다음의 시 역시 연작시의 한 편으로서 이른바 자동기술법으로 인간의 정신 심층에 내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 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이상, 「烏瞰圖 -시제15호」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거울 속의 '나'와 일치하지 않은 '나'는 ‘罪를 품고’ 침상에서 잠을 자며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는 ‘缺席’하여 부재중이고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 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은 것만을 확인한다. '軍用長靴'는 곧 거울 밖에 있다가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白紙'로 들어간 '나'를 대신하는데, 욕망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解放하려고’ 한다. 즉 분열된 채 존재하는 두 얼굴의 '나'가 부조화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와 미안한 뜻을 전하는데 서로 분열된 채 거울 속과 실내에 ‘囹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얼굴의 '나'는 서로 만나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거울'과 등가치인 '꿈'의 공간은 생각하는 '나'만 있을 뿐 현실 속의 나, 즉 '내 위조'는 결석하여 늘 부재중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즉 '자아의 이상'은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현실을 규제하는 법과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예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살할 수 있는 통로인 '들창'을 가리키는데 그 들창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자살이다. 들창 밖으로 나와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에 '나'가 존재하는 한 살아 있으니 '불사조'에 가깝다. 이 역시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언제나 분열된 채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적 층위에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역설적 어법이 독자들에게 낯설음을 주지만 내적 논리로서 시적 구조를 구축하여 무의식의 세계와 그 흐름을 보여 준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인들의 시들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동지사대학 졸업 논문에서 영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연구하였다. 그렇게 일찍 영미모더니즘 시를 접한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 줌으로써 회화성이 강한 시를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영미 모더니즘은 아폴론적 경향이 강하여 디오니소스적인 유럽의 아방가르드 계열의 시에 비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의미에 통합함으로써 구조의 견고성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시는 그가 후기에 쓴 것으로서 한밤중의 산골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내면 깊이 잠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남ㄱ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놋다 밤 이윽고 화로ㅅ불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정지용,「溫井」전문   화자인 나는 그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걸어 먼 골짜기를 벗어나 산방에 도착한다. 가지를 스치며 창을 치는 바람은 그곳에 도착한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한다. 밤이 이슥하여 화롯불이 아쉽게 식어 가고 촛불도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이 더욱 깊어지자 화자의 시선은 '누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대도 ‘나’를 잠들이고 잠자리로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슬기와 외롬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곳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사방이 어둠에 가려진 한 밤인데 그대마저 곁에서 떠나 홀로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들의 욕망을 좇아 살던 현실이 차단되자 시인은 그 동안 소외된 채 '외롬'에 처해 있던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찾는다.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은 소외되었다가 솟아오르는 그  욕망의 상징이다.   그렇게 화자는 비로소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확인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소외된 욕망의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타자는 타자의 욕망이 얽힌 현실로부터 차단된 산골의 밤에 자신을 성찰하며 고유한 욕망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8. pp.79-80 참조)  한편 별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성긴 눈발'이 내리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얻은 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 어리디어린, 생물/ 무생물, 밝음/ 어두움, 구체/ 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일상적 논리를 벗어나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적 전체성을 유추하기가 불가능한 탈구축 양상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으로써 그 실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효율적이다.       사과나무의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산다화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김춘수, 「시 3」 전문  사과나무의 사과알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어항에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 등은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사과알, 금붕어, 산다화, 부러진 못, 사랑’ 등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면서 낯설음과 시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는 시적 상황은 제목인 '시'와 비유적 관계를 맺으면서 '시'의 의미를 지연시키며 확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미지의 전개와 그들 사이의 충돌과 논리를 벗어난 묘사와 진술로 탈구축의 양상을 보이며 '시'의 의미는 일상어로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즉 시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하면서 독자들과 대화를 요구하며 무한한 상상과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전문     ‘나의 본적’을 비유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들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즉 나의 본적은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맑은 거울, 독수리, 고장, 교회당 모퉁이, 인류의 짚신, 맨발’ 등과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수정된다. 그러는 중에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본적'의 의미를 확장하며 그 모호성을 증대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이 상징하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암시한다.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박용래, 「코스모스」 전문   한편 시 「코스모스」에서 1연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간인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긴 꽃대 위에 핀 ‘코스모스’와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 마술을 부리는 ‘곡마단’이 비유적 관계를 맺게 한다. 이어서 코스모스 꽃은 하얀 눈이 덮인 ‘아라스카의 햇빛’과 그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와 다시 비유적 관계를 맺고 다시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과 그 ‘소녀의/ 지문’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지구의 북극에 가까운 '아라스카의 햇살', '위도', '지역', '소녀', '지문' 등으로 점점 축소 또는 확대되며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의 비약적인 변화와 서술어의 생략에 의한 여백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생략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코스모스의 시적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뿐 어느 의미로 한정하기에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그것으로부터 경험된 의미를 독자적인 언어적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을 판단하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아니한 욕망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낸다.(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p.327 참조) 따라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며 상징계로 진입할 때 타자들의 욕망이나 상징계를 지배하는 법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의 양면인 기의와 기표가 일치하지 않고 떠도는 원인이 되는데 어떤 기표로 의미나 욕망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어 또 다른 기표가 요구된다. 그래서 시에서 하나의 기의에 다양한 기표, 그 역으로 하나의 기표에 다양한 기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양한 기표의 연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여 그 기의, 즉 시인의 욕망 또는 시적 의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reality)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를 구축하는 기표, 즉 다양한 이미지들은 다만 그 실재의 흐릿한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란 없으면서도 있는 것으로서 그 일부가 기표로 상징계에 나타나는 순간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조의 구축과 시적 의미의 집중   영미모더니즘의 시의 구조는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당대 영국의 사회적 구조와 상동성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자본가들이 부상하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혼탁해지던 유럽에서 선구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대륙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전통을 존중하며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통합을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배열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시키고 구조의 전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시인인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 시에는 성서, 신화, 오페라의 대사, 일상적인 군중들의 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열되어 텍스트를 구축하면서 산업혁명으로 혼란해지는 시대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은 영미모더니즘 시의 구조적 특징의 핵심이며 한국 현대시단에서도 영미모더니즘 시의 영향을 받은 시들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서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네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明晣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孔子의 生活難」 전문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게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다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  모순이다. 그런 현실을 두고 '너'는 제 자리에서 상승과 하강 운동을 반복하며 줄을 돌리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표인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모순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렵다'. 같은 대상을 두고 한국에서는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 하는 것처럼 그 지시체 또는 기의와 기표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를 통하여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듯이 사물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와 진정한 의미의 실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적 관계, 그 수량과 한도를 바로 보겠다고 한다. 알고 보면 사물은 우매하여 형상 뒤에 숨은 본질, 그 명절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인간이 우매하여 형상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실재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위의 시에는 서로 이질적인 상황 또는 이미지들이 병치적으로 나열되면서 긴장감을 주고 시적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해석을 어렵게 하는데 그것은 이 시가 갖는 독특한 미학이다. 이 시는 언어의 불확실성과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소외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은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이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下棺」 전문     이 시는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배열되면서 추수가 끝나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의 들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한 구조물로서 그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내포한 이차적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다른 것 또는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시 전체를 구축하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볏가리가 걷힌 논두렁'은 벼들의 한 해 살이가 끝난 죽음의 현장이요 '남은 발자국'은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에 끼인 살얼음'은 유동성이 있는 물이 고체화 된 부동의 물이며 우렁 껍질도 죽은 우렁이가 남긴 것이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의 햇살로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기 위해 지평선 위를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떼 역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의 세계로 떠나가는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계열체들로서 주검을 매장하는 절차인 '하관'과 은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죽음의 의미에 집중되며 시 전체를 구축한다.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 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날빛으로 바꾸어지다가                                                      -김종삼, 「꿈속의 나라」 전문   '꿈 속의 나라'에서 공간을 지시하는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꿈 속의 나라, 뜬 구름 위' 등이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는데 모두 지상과 다른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곳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도향, 한하운, 지그문트 프로이드, 구스타프 말러' 등 국내외의 소설가, 시인, 심리학자, 작가 등이다. 작가와 시인은 상상력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인데 무의식은 꿈을 꾸는 정신적 영역이며 초현실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물들과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들은 모두 비현실성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또한 말을 주고받는 세계, 즉 현실이 아니라 '영롱한 날빛'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또는 상상의 세계로서 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시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선구적으로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던 황지우 시인의 실험적인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심인」전문   이 시는 화자인 '나'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신문의 광고난에 실린 '심인' 광고문을 보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 광고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서로 다른 이들이 가출한 이들을 찾고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가출한 가족을 찾고 있는 광고문의 내용과 그것을 읽으며 똥을 누는 상황이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서로 우연히 인접하여 실려 있을 뿐 각각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광고문이 그대로 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패러디의 일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크게 부상한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최근에 이런 광고문뿐이 아니라 만화, 영화, 유행가, 음악 등 문학의 주변 예술 또는 대중예술이 시와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현상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이 주요한 미학으로 부상한 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직조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모든 텍스트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원텍스트인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를 차용하고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을 새롭게 변용하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사람들이 꾸는 부활의 꿈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3월에 눈이 오는데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욕망의 피가 활발하게 돌아 정맥이 돋는다. 하늘에서 내려 온 축복의 메시지인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곧 시작됨을 알리며 사나이의 가슴에 겨우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피를 새로 활발하게 돌게 한다. 그리고 지붕과 굴뚝을 덮으며 사나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새 봄을 맞으려는  욕망을 더욱 익히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샤갈 마을 사람들의 욕망의 실체인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아낙들도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며 생명이 새롭게 부활하는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인물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변용되며 집중적으로 겨우내 억압된 욕망의 실현을 암시한다. 샤갈의 그림을 페러디 한 이 시는 그림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데 김춘수 시인은 이 외에도 화가 이중섭의 생애나 그림 또는 토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등 다양한 원텍스트를 패러디 한 시들이 많다.   한편 하이퍼(hyper)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심상운 시인의 다음 시에 서로 이질적인 네 가지 국면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하기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와 구조적 유사성을 엿보게 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촉촉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심상운, 「헤드라이트」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국면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어둠/ 빛’의 대립상이 내재된 계열체들이다. 첫째로 화자인 나는 감자밭 이랑에서 감자의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질문을 하며 그 ‘붉은 피’는 ‘우주의 꽃빛 파일’이라고 한다. 다음 국면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그녀가 자신이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검정고양이가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뛰어 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헌혈한 피와 '헛간'에서 나온 검정고양이는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국면에서 화자는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이 역시 위의 두 가지 국면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국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또는 상황이 이질적이다. 이는 화면의 전환이 자유롭고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상통하는데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비약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세 국면 속에는 모두 닫힌 공간에 내재되어 있던 '어둠'의 계열체들이 빛의 계열체가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감자가 묻힌 흙속, 그녀의 혈관, 고양이가 머물러 있는 헛간, 화자가 머물러 있는 승용차는 모두 그 무의식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 국면은 표층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갖고 모두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욕망들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비약적인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이 빛이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이 현실,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부르르 떠는', ‘깜짝 놀라면' 등은 욕망이 질서와 규칙으로 얽힌 현실로 진입하는 순간 받아야 하는 억압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여 주는 징후들이다. 또는 그것을 이기고 현실로 진입한 주체가 느끼는 경이감과 환희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인은 그녀의 '붉은 피'를 '우주의 꽃빛 파일'에 비유한 것에서 보듯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어둠이 암시하는 욕망이 오히려 빛의 세계인 현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선 시인의 다음 시는 디카시이자 하이퍼 시의 일종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차용하여 시의 일부로 배열하고 그 원텍스트를 패러디하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 프리다 칼로의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선, 「프리다 칼로 2-자화상․다친 사슴」전문   보름달을 삼켜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라임나무를 훔쳐 먹은 죄로 ‘노새사슴’이 된 나는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별은 '디에고 리베라'와 동일시되며, 그 이름은 '라임 파이'에 비유된다. 따라서 ‘보름달, 라임나무, 별, 디에고 리베라, 라임 파이’ 등은 모두 노새사슴의 몸통 안에 저장된 욕망의 대상을 대신하는 계열체적 기표들이다. 욕망의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에 의해 드러나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한다. 그런데 노새사슴의 몸통은 타자들의 상징인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어 목과 허리에 화살이 박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으며 별을 향해 1cm씩 그리움의 뿔을 키우고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화구로 삼아 이상세계인 푸른 바다와 클리토리아 해변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을 내던지고 새 뿔 왕관을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려 그 욕망의 대상에 이르고자 한다.    화자인 노새사슴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다시 뿔을 키우고 낡은 뿔을 가는 것은 욕망의 끝없는 분출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패러디하며 자신의 '자화상'이라 밝힌 노새사슴을 통하여 타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이상세계를 향하려는 강한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산물인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에 시를 덧붙이는 디카시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의 일종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원용하여 쓴 '하이퍼 시'라고 볼 수 있는데 화가의 그림 사진이 시텍스트의 일부가 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디카시들이 흔히 자연풍경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는 데 비하여 화가의 그림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시의 소재와 기법이 더욱 확대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카 초목의 꽃들은 단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 유카 나방이는 그런 꽃들 중의 하나에서 그 꽃가루를 꺼내 반죽해 조그만 덩어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나방이는 다시 또 한 유카 꽃을 찾아가, 그 암술을 찢어 열고 배추들 사이에 제 알들을 낳고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암술의 터진 틈을 그 꽃가루 반죽덩어리를 메워넣어 막는다. 제 일생 중 단 한 번 유카 나방이는 이 복잡한 일을 행한다.”(칼 구스타프 융,『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서 인용)  1. 현대 문명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유카 나방이의 필요가 유카 꽃을 발명한다.  2. 이것은 저 유구한 문제의 또 한 변형판이다.  심(心)이 먼저인가 물(物)이 먼저인가,  심(心)이 있으매 물(物)이 있나 물(物)이 있으며 심(心)이 있나.  사실은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이다.  유카 나방이/ 유카 꽃의 관계는 빛/ 그림자, 양/ 음, 생명-력(力)/ 생명-형태, 영(靈) /혼(魂), 마음/ 육체, 이성/ 정서, 의미/ 이미지 등등의 관계와 같다.  3. 내가 왜 이런 것을 시(詩)라고 쓰냐 하면,  내가 한 마리의 유카 나방이-융을 받아들이는,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는, 한 송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의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최승자, 「유카 나방이」   1연에서는 ‘유카  꽃’과 ‘유카 나방이’와의 미묘한 상생 관계를 밝힌 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러한 생태를 현대문명적으로 해석하고 3연에서는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를 ‘심(心)과 물(物)의 관계’에 비교하며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러 이항 대립상에 비교하며 그 자연 속의 상생 원리가 철학, 사상, 예술에까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시 쓰기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자신은 '유카 나방이 -융을 받아들이는,/ 유카 꽃'이요,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화자는 '물(物)에 심(心)이 보태진'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식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생태를 밝힌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심(心)과 물(物)과의 관계에 비교해 보고, 다시 시 쓰기와 관련시키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인 문장에 시인의 해석과 비유적 상상력이 더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즉 유카나방과 유카꽃이 서로 ‘자웅동체의 유카꽃’을 이루는 상생 원리로써 시 쓰기의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주와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술적 문장을 도입하여 패러디하고 연에 번호까지 부여하면서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관계에 다양한 논리적 관계를 병치하여 비유적 관계를 맺어 시를 완성한 이 메타시는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시의 구조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전체성을 갖는다.   4. 결론   이상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에 나타난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상 시인의 「오감도- 시제15호」와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등의 경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의미에 집중되지 않은 채 구조의 탈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한 시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고 대상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에 김수영 시인의 이나 박용래 시인의 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텍스트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유지하며 견고하게 구조가 구축된 시들이 있다.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영미모더니즘 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 김춘수, 김종삼 등의 시인의 경우를 보면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패러디를 한 시 또는 하이퍼 시 등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에서도 그 구조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축 또는 탈구축,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추상적인 기준으로 시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칫 그 구체적 특성과 시적 효과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모더니즘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특성이나 문예사조 또는 소재나 기법의 특성으로 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시란 굳어버린 일상어의 어법으로 다 보여주지 못하는, 오히려 그 아래 가려져 억압받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이나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의 실재를 보여 주기 위해 언어로 구축한 2차적 상징체계요 예술이다.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그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여 언어의 그물을 엮는다. 시는 예술이기 때문에 창의성과 개성이 필수적 요소이지만 궁극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소재나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실재에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눈길을 일시적으로 끌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의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고급스런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의 얇은 감성을 자극하고, 요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낭비시키는 시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깊이 가려져 있는 그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시, 그곳으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이미지 또는 문장으로 쓴 고급스런 시만이 문화 창달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다. 
8    환유적 어법의 미적 특성 / 김광기, 시인 댓글:  조회:882  추천:0  2018-11-03
환유적 어법의 미적 특성                        김광기, 시인           흔히 은유적 글쓰기는 시를 쓰는 방식이고 환유적 글쓰기는 산문을 쓰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또 이러한 비유 활용의 글쓰기 방식에서 ‘시는 은유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작(詩作)의 은유적 어법 활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시 쓰기에서의 환유적 어법 활용은 좀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시들은 모던한 형태를 지향하며 환유적 어법 활용으로 창작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야콥슨은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의 자립 단위인 모티브를 ‘A→B→C→D…’처럼 계기적이나 인과적으로 이동하는 어법을 환유적 어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어법적 기능을 활용하여 언어에서 언어로 전이되는 데 그치는 은유적 정조(情調)보다는 문장에서 문장으로 연속되는 정조가 시적기운을 더 확장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인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시 전체적인 문장의 구조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닉한 의미구조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의미 구조는 정서가 비슷한 독자가 아니면 그 의미를 곧 찾아낼 수 없거나 복잡한 의미함수를 내재한 문장으로 비쳐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의미구조를 자의적으로라도 파악하여 유추하게 되면 시를 읽는 묘미가 더하게 되고 아이러닉한 시적 긴장구조의 맛에 흠뻑 취하게 된다.     여기에는 또 아이러니가 형태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의 간극, 즉 의미의 거리에 따른 그 맛을 각기 맛보게도 된다. 기표와 기의의 거리가 멀수록 문장 자체가 낯설고 의미 또한 파악하기 어렵고, 그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거리가 멀든 가깝든 텍스트(시적 문장)에서 풍기는 의미의 정서가 잘 전달되어야 독자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지난 계절이나 최근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의미구조가 대별되면서도 도드라지게 개성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들을 몇 편 골라서 살펴보기로 한다.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 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때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꿇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ㅡ윤제림 「아름다움에 대하여」, 계간 『시산맥』 2017년 여름호     시인은 어느 날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작품 하나를 만난 듯하다. 자신도 나름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전포고와 같은 시 문장을 담은 “종잇장 하나”가 “날아와 꽂”힌 것이다. 읽어보니 도대체가 납득이 가지 않으니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겠다.     듣고 보니 “수레바퀴만 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라 한다. 모름지기 ‘수레바퀴’란 것이 무엇을 싣고자 하는 것인데 아무것도 없이 ‘바퀴’만 있는 모양새로 목적도 없이 참 열심히도 ‘전투적’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래도 화자는 혹시나 하여 ‘변복’도 하고 ‘동서남북’을 열심히도 살폈는데 도대체가 ‘그가 적’이라면 이길 방도 아니 싸울 방도가 없더라는 것이다.     머리가 시끄러우니 이거고 저거고 간에 다 잊고 “바둑이나 한 판” 두자고 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세월이 가고나면 내가 옳은지 네가 옳은지 알 터이니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갈 테고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의미도 없는 기교를 어떻게 그렇게 전투적으로 키울 수 있는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테니 심심풀이로 “기술이나 두어 가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읽고 나니 갑자기 머리가 비어지고 몸이 허공에 툭 던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시적기교나 작위를 나무라는 것 같고 부질없는 시작(詩作)의 일상을 책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상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위보다도 시인의 골계 내지는 해학적 표현이 적(適)으로 간주되는 나조차도 일단 경계를 풀게 하는 위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읽는 방식이 다분히 자의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떤 현상으로 대입해서 해석을 하더라도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묘미가 있다. 이것이 기표와 기의의 의미가 다소 먼 아이러니의 특장(特長)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의미가 멀게만 느껴지는 텍스트에서 문장의 열쇠를 풀 고리(코드)를 발견한다면 그 의미는 쉽게 다가갈 수 있기도 할 것이다. 또 이 작품의 코드를 제목 ‘아름다움에 대하여’로 본다면 그것을 미학적 범주로 간주해서 그 의미거리를 연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의미거리가 아주 짧아 읽는 대로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은 작품이다.     밤하늘이 저리 푸른 까닭은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높이 떠 빛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 별자리와 더불어 수많은 별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많은 별들이 함께 어울려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니! 우리의 눈이 가닿지 못하는 별들까지도 어디선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만이 덩그러니 놓인 하늘이라면 우리의 태양은 대낮에조차 울려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름 모를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별 하나하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없어도 좋은 별은 없을 것이며   우주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수명이 다하기까지는 빠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위대한 천문가가 천문도를 다시 그린다고 칩시다.   저 별은 너무 작아, 저 별은 너무 약해, 저 별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빼버린다면 그 위대한 천문가는 이미 위대한 전문가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그 자리에 박혔기에 천문도 또한 아름답지만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는 이름 없는 뭇별, 연약한 뭇별, 쓸쓸한 뭇별과 함께 수수억 년을 빛나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주의 위대함과   우주의 변함없음과   우리가 받아 갖는 위안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주의 운행은 무한량이지마는   우리의 수명은 순식간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은 함께 빛나는 것입니다.   그를 일컬어 다투어 빛난다 한다지요?   ‘다투어’ 빛난다는 건 저마다 타고난 품이 다르다는 것이고, 그 타고난 숨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외되거나 무시된다면 우주는 우주로서의 ‘다움’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숱한 별 가운데 하나인 태양에 얹혀   우리는 아침저녁을 챙기고 잠자리에 들며 나이를 보태다가 돌아갑니다.   매양 두꺼운 어둠이 덮칠지라도 점점 살 오르는 달빛과 개밥바라기 아래 내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작은 별 한 촉도 초롱초롱 솟는 밤하늘   우리의 하루하루도 우리의 한 명 한 명도 그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별도 위대하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소중하지 않다고 여겨서는 안 되느니라,고 모든 별 한눈에 펴 보이는 밤하늘     한 줄의 시조차도   갓 태어났거나   힘없이 늙은 한 명의 시인조차도   우리의 천문도에서 빼먹어선 안 될 별들입니다.     온밤을 망원경으로 지새우는 천문학자는 아주 먼별에서부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하나에 이르기까지 찾고 기억하며 이름 붙여주려 애쓴다지요. 이 작은 지구에서, 이 애달픈 찰나의 인생에서     북극성보다 북두칠성보다 카시오페이아보다 하찮은 별이란 없습니다.   혹자, 혹은 신의 눈에는     저 또한   당신 또한   이파리 뒤의 버러지 또한   다 같은 쪽이며 꼴일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기댈 곳 없는 이 지구상에서 잠시 글썽이는 몸이랄 밖에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생명과 운명은 스스로의 작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연히 맺혔다가 사라지는 피요, 환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ㅡ정숙자 「흙북」, 웹진 『시인광장』 2017년 3월호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정숙자 시인의 「흙북」은 마음으로 쓴 시이다. 따듯함이 듬뿍듬뿍 배어나오는 온정의 의미들이 가슴으로 읽히는 듯하다. 시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ㅂ니다’의 문체가 시인의 진중한 시작태도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짧은 시라도 사족이 많아 덜어낼 문장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데, 환유적 어법의 이 작품의 긴 문장에서는 어디 하나 덜어내고 싶은 사족 하나가 없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절절하게 그 의미를 다하고 있을 뿐더러 주술적인 내러티브가 시인이 인도하는 대로 그 감상에 푹 젖게 한다. 문장의 여백미가 짧은 문장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끝까지 다 읽었음에도 문장 속에 담겨있는 여운이 한동안 그 의미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장 속의 여백미가 있다. 문장 사이사이를 맴돌고 있는 시인의 시적 기운이 생동감 있게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시적 텍스트의 의미거리는 거의 밀착되어 있다시피 하지만 그 감동스러운 의미파동은 의미거리가 아주 멀고 낯선 어떤 텍스트들보다 더 크다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가닿지 못하는 별들까지도 어디선가 빛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하며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시문이 존재론의 심오한 경지를 가늠하게도 한다. 우리 시각에 비치는 현상은 멀고 가까움의 차이 때문에 크고 작게 보일 뿐이지 그 크기와 존재의미는 일일이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량차이가 다소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미는 누구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구구절절 내재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기댈 곳 없는 이 지구상에서 잠시 글썽이는 몸이”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 모두의 생명과 운명은 스스로의 작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연히 맺혔다가 사라지는 피요, 환상일 뿐이기 때문”에 서로 보듬고 아끼지 않으면 자신조차도 그 존재의미가 없다는 지각이 형성되기도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고 일상에서 잊고 살면 절대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시인이 이렇게 구구절절 환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잃고 살아가는 시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시 백인덕 시인의 「춘천」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캄캄한 시대를 뚫고 가는 이야기를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정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밤 내 써지지 않는 글자가 있다. 열린 몸은 처음 부는 바람마저 읽는데 머리, 입술까지 달뜬 글자를 손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아니, 완강히 거부한다. 일목요연하게 앓는 몸이 출렁이는 기억의 간헐천을 지난다.   한 밤 내 몰려가는 개미는 검다. 검은 개미가 몰려가는 빈 방은 붉다. 검은 개미가 붉게 몰려가는 한 밤의 붉은 빈 방, 기억에는 없고 몸에만 있는 신열(身熱)은 문을 만든다. 문 밖에는 글자를 벗은 세계, 담장은 낮아지고 달빛에 애가 슬고 길은 한 가운데부터 꺼진다. 중심이 지워진 그림자를 달고 길게 족쇄를 끄는 남자와 여자, 아이 몇 검은 개미에 쫓기는 일가(一家)의 붉은 유배, 툭, 툭 몸의 사슬이 끊어진다. 약 먹은 듯, 술 게운 듯 한 밤 끝끝내 써지지 않는 글자가 선명하다.    ㅡ백인덕 「춘천」, 계간 『문학과 창작』 2017년 여름호       캄캄한 열차 속에서, 아니 캄캄한 자의식 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기억하고 기록해내려 하는 것일까. 출렁이며 가는 열차의 몸 같은 신체를 “일목요연하게 앓는 몸”이라 한다. 무심히 살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 신열을 앓고 있는 것 같은 화자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모든 삶의 상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읽으면 시인과 함께 어디론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감상에 젖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을 시인은 “한 밤 내 몰려가는 개미”들과 같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열차의 굴곡진 마디마디가 줄을 잇고 있는 개미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마디마디 텅 빈 붉은 방에서 화자는 신열(身熱)을 앓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화자의 열망이 분출되지 않아서거나 “중심이 지워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가 ‘유배’ 같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게 족쇄를” 끌며 쾌속의 “검은 개미에 쫓기는” 듯한 자의식 속 개미들의 “붉은 유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인들, 마음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약 먹은 듯, 술 게운 듯” “툭, 툭 몸의 사슬”을 끊어낼 뿐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여로인 듯하다. 그런데 화자는 ‘춘천’으로 가는 길에 있다. 춘천(春川)이란 목적지를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고뇌를 안고 그것을 흘려버릴 봄 냇가로 가고 있는 탈출구 같다. 그것은 아마도 춘천(春天)과 같은 목적지일 것이다. 삶은 고뇌가 가득한 밤 열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지만 우리 여행의 끝은 결코 불운하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의미의 거리를 팽팽하게 유지하면서도 행간을 탄력 있게 유지하는 시문의 조합이 다양한 의미를 긴장감 있게 확장시키고 있다. 아이러닉한 시적 상황과 텍스트에서 분출되는 시적 기운이 우리의 심상을 한참 동안 감싸며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감동을 주는 시도 있지만 먼저 살펴본 작품들과 같이 그 의미거리가 멀든 짧든 각기 개성적으로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시들도 있다. 작품마다 밝히고자하는 주제에 따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어떻게 독자에게 다가서는지 텍스트의 미적 특성을 찬찬히 살펴보며 감상할 필요가 있다.                ================================================================================= 김광기, 시인 1959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 전략과 논술』 등이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도서출판 『문학과 사람』 편집발행.
7    빛나는 것들, 은유 | 양선규 댓글:  조회:761  추천:0  2018-11-03
  빛나는 것들, 은유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아래에 소개하는 시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작용 중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의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 유관한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상상작용만으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시인은 조급증이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조급증과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상당히 저의 조급증과싸우면서 읽은 시입니다. 조급증을 내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시입니다. 시에 관심 없는 분들은 아예 건너뛰시는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한 일이 되지 싶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향로와 내 부끄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 「푸른빛과 싸우다 - 등대가 있는 바다」 송재학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     이 시를 한 번 읽고서는 시인이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금방 알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핏얼핏 보이는데 그게 일상의 언어로, 자동적으로, 치환되지 않습니다(언어의 비자동화가 강조되는 시스템 언어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되겠습니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탓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인은 아무나 그저 한번 후딱 자기 시를 읽고 지나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조급증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급증 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해야 합니다. 비단 이런 이미지 중심의 시를 읽을 때가 아니더라도, 주로 섣부른 전문적(?) 독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만, 자기 문맥으로 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막말로 ‘난해하다’는 등의 말을 내뱉으면서 쉽게 시를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무조건 쉽게 쓰는 게 도덕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불문율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보낸, 그 아름답거나 절망적인 시간들을 반드시 충분히고려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내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내 절망이 무엇이냐를 지속적으로 물어주어야 합니다.시인은 그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어렵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는 입에 넣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녹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닙니다(그 안에 깨물어 먹어야 할 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를 읽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시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시는 뜻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뜻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뜻보다는 오히려 그 다른 쪽들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겉으로 뜻에 목을 매고 있는 것처럼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인들은 가차 없이 그 허구를 들추어냅니다. 시인은 항상 뜻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시어의 총체성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말뜻(Sense), 느낌(Feeling), 어조(Tone), 의도(Intention) 등을 두루 살펴야만 우리는 ‘시인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이 시, 이 기록을 남기는 발화자(시인)의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물론 이 시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적 발화의 ‘의도(Intention)’에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정도의 큰 방향이 가능하겠습니다. 하나는, 마치 화가가 좋은 풍경을 풍경화로 남기고 싶어 하듯이, 시인도 ‘등대가 있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멋지게 한번 그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에서라면 이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음미하면서 우리도 느긋하게그와 함께 등대가 있는 바다를 한번 그려보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그냥 끝내면 됩니다. 만약, 그러고 말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림’ 위에다 다시 한 번 내 물감으로 덧칠을 해 보면 됩니다. ‘내안의 풍경’을 꺼내서 그것에다 겹쳐 보면 됩니다. 아마 우리는 후자 쪽을 택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풍경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의 성찰’을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푸른빛과싸우다’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들었던 사실입니다. 시인의 ‘싸움의 기술’을 잘 읽어내어야 한다는 각오가 처음부터 들게 합니다. 이미 그 언사에서부터 시인이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는 ‘삶의 등대지기’를 자처하는 것 같은, 어떤 구도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고, 싸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푸른 빛’이 발산해내는 그 신비한 아우라에도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와 같은 시와는 벌써 제목부터 다릅니다. 그런 느낌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시가 어떤 식으로 ‘자기 성찰’의 과정을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성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내면 성찰’ 쪽에서 살피려면 우선 그가 내세우는 ‘푸른빛’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푸른빛’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함축적 의미는 늘 사전에없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니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색깔일 텐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내용인지알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적 삶이 서로 대립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 그 자체가 고통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아프게 반추(반성)하도록 강요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가 고통인지 그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리저리 독자를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쩌면, 그런 사실적인 것(원인)에 관심하지 말고 ‘고통’ 그 자체에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없는 자는 내 시를 읽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시인이 이 시를 쓴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공유, 시 내용은 그 다음 문제고, 시인은 고통(기억)을 잊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는 이른바 ‘비유와 상징’이 개인적인 경험, 혹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짜여 있습니다. 특히 ‘나무’와 ‘등대’는 전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어서, 그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독자들은 쉽게 의미의 그물을 짜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첫 줄부터 그렇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라는 말을 ‘등대가 있는 바다(세계의 거울)에 도착하자 나는 망연자실했다(세속적 욕망들의 행진이 일순 정지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읽고 싶은데, 그 뒤를 보면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금방 낯선 것은어쩔 수 없다’라고 그런 식으로 독자가 쉽게 읽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어깃장 문맥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의일로 치부하고 쉽게 읽어내는 시 읽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라는 말을 위안 삼아 다음 줄로 넘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모르겠다(의문이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십중팔구는 그 부분이 트라우마의 원적지라는 말입니다(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마 시인은 그 장소에서 ‘상처 입은 주체’가 되는 자극(충격)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푸른빛’으로(색채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연에서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두 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우선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 나무들은, 특히 밤이면, ‘잠언’처럼‘나’에게 다가와서 ‘기억’을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괴롭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등대’,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과 같은 또 다른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들은 ‘해송과 배롱나무’와는 달리 한 번 더 가공된 기억들입니다. 유년기의 ‘상처’가 긴 세월 숙성기를 거쳐그렇게 몇 개의 단어들로 삼투압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의식화(의미화)하겠다는 의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런 식의 사후작용事後作用이 어떤 의미화를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계선 밖의 것을 생각하고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시인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이 그 과정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푸른빛’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그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환치될 때 비로소 ‘의미’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계속해서 모호한 발화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 연까지 읽어도 여전히 ‘푸른빛’을 이해하는 데에는 미진함이 남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싸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시인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그저 ‘푸른빛’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런 의심마저 듭니다.   셋째 연으로 가 보겠습니다. 셋째 연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등대에 오르는 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경험인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이 ‘검은 비단’과도같은 심리상태를 선사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무겁고 부드러우며 균질적인 매끄러움이 있는 세계, 안정감이 있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현재 자기 안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시인은, 그런 바다 앞에섰을 때 돌연히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환기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죽음을관조하고(시인은 바닷가 무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도 ‘기억’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반추합니다. 마지막 부분,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 하는가’라는 말이 이 시를 주제의 차원에서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등대’는, 넷째 연에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을 대표하는, 혹은 통어하는, 하나의 중심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굳이 그 관습적 상징의 의미를 들추자면, 지상에 수직으로 서서 먼 바다의 행로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화자 자신의 자기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연은 그 날, ‘푸른빛’을 만나던 그 날의 심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햇빛’이 ‘폭풍처럼 기록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가 입은 상처의 흔적이 컸다는 뜻입니다. ‘햇빛’의 원관념이 ‘강렬’이 되든 ‘각성’이 되든 ‘경탄’이 되든 ‘경악’이 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강렬하게 자신의 내면에 금이 간 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은 아주 협소합니다. 시인이 스스로 ‘상처 입은 주체’임을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시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관계없이우리는 그러한 ‘시의 형식’을 통해 ‘주체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심리학적 용어를 동원한다면, 이 시의 내적 형식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異化의 고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시인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의 고통을 색채 이미지 ‘푸른빛’이라는말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푸른빛’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 새로운 자기통합의 과정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의 주제를 찾아보겠습니다. 시에서 주제는 항상 마지막 주자입니다. 단체전의 주장이지요. 주장이라고 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면 주장의 경기는 그저 ‘폼생폼사’일 수도있습니다. 시에서 주제의 위상이 딱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서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이라면 그 시는 일류 시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日常性과 본래성本來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좀 쉬운 해설을 할 수도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실존적인 층위에서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뜻 전달의 모호성이 강한 이 시의 ‘설명과 이해’에는 오히려 적절한 ‘서술어’의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그것을 비본래적으로 사용하여 대지 위에 문화라는 울타리를 건설하고 뿌리 없는 불안정한 생존 조건을 극복하여 일상성이라는 안락한 거소居所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사는 일상인으로서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인 대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오히려 문화의 테두리 안에 길들임으로 해서 울타리의 존재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인 대지와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비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과의 단절은 비록 삶의 표면에 있어서는 안락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으나, 때때로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불안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근심이나 걱정과는 달리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無로서,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불안은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오히려 배반했던 대지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이요, 또는 망각하고 있던 본래성으로부터 흘러오는 거부할 수 없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일상언어(비본래적인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그에게 일상성에 대한 배반을 요구하는 불안이다.” (하이데거, 이진흥, 『한국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홍익출판사, 199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을 보면 「푸른빛과 싸우다」에서 왜 ‘푸른빛’의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명이 됩니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도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나무들은 내 본래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성에서 멀리 떨어져나온 우리는 모두 ‘불탄 폐허’ 위에서 ‘안락한 일상성의 거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시인의 일상성이 ‘본래적 자아’ 혹은 ‘불안’을 만나 ‘배반’을 강요받았던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에게는 특히 ‘일상성에의 몰입’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은 ‘대양大洋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양’과 ‘대지’가 그저 이음동의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족 한 마디. 지금까지 저는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시와 한 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시인의실존이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을 어기며 도발해 왔지만 저는 그의 반칙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상을 같이 나눈 친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 싸움은 오늘 처음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싸움의 기록’입니다. 앞서 나온 저의 다른 책에도 이미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그것을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소감은처음 때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시의 이미지 중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있고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시의 이미지들은 바다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것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늘내 안에 있습니다. 바다에 큰 해일이 몰려올 때 안에 든 것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늘 잔잔한 바다일 때는 이 시에서처럼 우정 스스로 ‘등대’가 되어 그것들을, 저 깊은 곳에서, 비추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6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 심은섭 댓글:  조회:859  추천:0  2018-11-03
난간을 마시다 / 최정애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나는 매일 모래를 마신다 난간이 넘어간다 비린내를 풍기는, 난간은 뾰족하다 꿈틀거린다 차갑게 등을 노출한 아스팔트에서 핸들을 잡고 달린다 난간으로 머리가 날린다 다리가 빠진다 속력을 거부하는 몸체의 부작용일까? 아니다 난간에 긁혀야만 하는 감정의 거부 반응일지도 몰라 물 속의 파장처럼 파장의 경계처럼 나는 난간을 발목에 걸고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코끼리 그림자 / 최정애       렌즈 속에 내 얼굴을 가득 채웠지 모서리에 잘리지 않으려고 그에게 웃음을 보내 주었지 눈 밖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렌즈를 꽉 물고 있는 어금니, 속엔 고층 빌딩과 샌들이 걸어가고 나의 사랑과 짖어 대는 개와 봄날의 젖은 밤이 째각거리고 있었지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눈만 감으면 지하로 이동하는 너는, 하지만 오늘 나를 습득할 수밖에 없지   옹이 박힌, 나의 그림자 하나를 끌고 추억의 갠지스 강을 찾아가야 하지 흙 속에 발자국을 던져 놓고         한 장의 벽 / 최정애       그를 소유하지 못하고 직선과 사선을 내가 감상할 때 그는 외면한다 눈을 감은 채 어두워지고   굳은살이 기어다니는 바닥으로 비가 내린다 벽지 속에서 눈망울들이 흘러나온다 빗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벽, 수많은 입술이 벽과 벽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방싯거린다 물에 지워지고 흔들리는 안개 속에서   풀잎 하나 지워지는 저녁 무늬가 퇴색한 달빛과 곰팡내 풍기는 방에서 빗물은 어둠 한 줄을 칠하고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아이를 만들다 / 최정애     야심한 밤, 희미한 스탠드 아래 누워 잉태에 필요한 음식을 조리하는, 나는 아이 만드는 사람   1시간이 70분이면 넉넉할 텐데, 언제나 십 분씩 모자라는 시계를 차고 아침이면 방을 떠났다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시계 바늘을 꽂은 달빛 속으로 들어가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생산하러 이 세상에 온 기계라고) 혼자 중얼중얼 생각하다가 잠시 머뭇머뭇 고민하다가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금성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심은섭 (시인·문학평론가)   1. 시작하며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사고를 하는데 있다. 최정애 시인은 이성적 사고를 통한 시쓰기로 생산력이 낡은 시의식을 깨부수고 있다. 몇 편의 시작품으로 그 시인의 시세계를 짚어본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 권 분량의 시집으로는 그 시인의 시세계, 또는 시의식이 어떤 세계에 와 닿아 있는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최정애 시인의 시집을 통해 그의 시(詩)세계나 시의식을 큰 틀에서 두 개의 본류(本流)와 몇 개의 지류(支流)를 구분하여 모색할 수 있다. 최정애 시인의 먼저 첫 번째 본류는 유목적 사유를 함으로써 서열의 지층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의 시세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이며, 허공에서 몰입하는 정신의 푯대다. 계층구조를 깨뜨리며 지속적인 횡단운동을 한다. 또 다원적 무질서와 예측불허의 우발성이 시적 사유에 선명한 무늬로 삽입된다. 두 번째로는 언어에 밝은 색을 칠하며, 성찰하는 자아를 반추하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가 ‘자성(自性)’과 함께 노마드적 삶의 방정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의 무게로부터 이탈을 시도한다. 또 그의 시의식은 치열한 삶과 치열한 예술성이 함께 동행한다. 그리고 그는 삶과 예술을 동시에 찬미한다. 이처럼 크게 두 개의 본류로 구분 지을 수 있으나, 몇 개의 지류가 시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적 사유를 탈근대적인 인식으로 병렬 접속을 하며,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최정애 시인이 추구하는 모더니티의 본질 또한 영원성과 새로움이다. 낡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과 극단적인 전통 파괴로 현재를 구성한다. 요약하면 최정애 시인은 예술성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원성에 둔다고 하겠다.       2. 횡단하는 쪽으로 시를 완성하는 사유   최정애 시인의 사유의 종착점은 정신분열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근대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리고 전복하는 행동이다. 근대를 탈출하여 새로운 영혼과 인간해방을 가지려 한다. ‘여간 해선 별이 뜨지 않는 방’(「장마」)에 별을 띄우려고 한다.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난간을 마시다」일부     에서 ‘난간’은 난간으로써 그 자체가 불안이다. 여기서의 ‘난간’은 경험했던 불안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불안의 총체적인 불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안과 단절을 꾀하며, 또는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정애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불안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불안과 소통을 통하여 대립적인 관계를 청산하려고 한다. 바로 고통을 고통으로 맞섬으로써 고통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 속을 면면히 들여다 보면 주정시(主情詩)에 돌멩이를 과감히 던지고 있다. 그 예로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고 시적 진술의 한 부분을 그 한 예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Irony)이고, 이 아이러니는 모더니즘의 시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사법이고, 이 아이러니를 통해 현대의 부조리, 부패, 무능 등을 비판하며 풍자하는 이중적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또 모더니즘의 시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지성주의를 앞세우고 성찰, 반성, 통찰, 압축, 상징을 통해 시의 깊이를 만들고, 언어의 밀도를 높여 난해함을 만든다. 거기에 당혹감마저 준다. 첨언하면 성찰, 반성, 통찰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통사규칙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 역시, 근대의 모든 것과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고 그들을 적으로 삼고 있다. 특히 그는 과거의 모순이나 문제를 모더니티(modernity)로 극복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적인 모델로는 어떤 제도(현실)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모델로 제도(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탈근대의 의식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그는 파편적 글쓰기를 한다. 그러면 파편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후기현대와 파편적 글쓰기」에서 정의한 바 있는 윤호병의 말을 요약해보면 “반―유기적 형식의 글쓰기이자, 정의가 유보된 글쓰기”라고 파악했다. 반―유기적 글쓰기는 통일성의 해체, 다시 말하면 이것은 콜리지(Coleridge, Samuel Taylor)가 강조했고 신비평에서 시 읽기의 기본원리로 인식했던 시의 유기체론에 대한 반전 혹은 뒤집기라고 볼 수 있다.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난간을 마시다」일부     난간, 즉 불안을 끌어 안아야 평온을 얻을 수 있듯이, 곡선을 포용해야 직선이 될 수 있다. ‘사방에서 직선과 곡선이 난간을 모으는 동안’ 그는 휘어져 버린다. 그러나 휘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절망’의 본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휘어질 수 있는 부드러움이 없다면 난간을 마실 수 없고, 뾰족한 난간 위로 달릴 수도 없다. 또 휘어짐은 ‘여유’이며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수용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관용인 것이다. 그는 ‘난간’에 대해, 또는 ‘불안’에 대해, 어찌 보면 실존하는 현상학을 추구하고 있다. 즉 팔이 없어도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시는 고안되고 제작되는 것으로 인식할 뿐,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최성애 시인은 그의 시 작품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생각하는 자아, 사유하는 자아로서 단일성, 즉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이라는 결국 ‘난간=나’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그의 ‘자아’는 단일자아임을 말 한다. 즉 그의 ‘자아’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어 대체가 불가능한 자아이다. 따라서 자아는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자아다. 첨언하면 ‘네’가 누구인가를 ‘내’가 설명해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빗소리’이고, 이 ‘빗소리’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최시인에겐 음악이다. 결국 ‘나’는 ‘음악’이다. 그러므로 ‘빗소리’를 ‘비명’으로, ‘비명’을 음악으로 은유 시켜 전통적인 감정의 그 무엇과 대립 시키며, 사물을 사단(四端)의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아픔으로 보고 있다.     그를 창살에 매달아 놓았어 부드러운 동작을 내 귀에 고정시켜 놓았어 마음껏 다리를 흔들어 보렴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는   건널목에 그의 비명이 쌓이고 있어 이럴 때 나에겐 따뜻한 입술이 필요해 그의 눈빛을 저장할 오선지가 필요해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는   내 혀가 자라고 있어 드라마가 끝나고 녹음기도 꺼졌는데 종일 기둥에서,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고 있어 그림자만 바닥으로 쏟아 내는, 그는 도대체 어디 숨은 걸까?   그의 몸, 마디마디 악보가 있을 꺼야 젖어 있을 꺼야 울음을 그치고 내 아늑한 포켓으로 몸을 던져도 좋아 지금 나는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이거든     -「빗소리」전문       서로 몸을 부대끼며 내리는 소리, 이 빗소리는 최정애 시인의 시 몸 속에서 나오는 삶의 아우성이다. 이 비명소리는 건널목에도 높게 쌓이고, 악보에도, 아늑한 포켓 속에도 쌓인다. 이렇게 시는 인간의 체험을 언어로 그려 놓는 재현성의 결과물이다. 그의 체험에서 얻어낸 시의 모티브는 슬프지 않다. ‘빗소리’가 삶의 ‘비명’소리이고, 이 비명소리는 온전한 음표이기 때문이다. 이 음표는 비명소리로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으로 오선지에 머무른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빗소리’와 ‘비명’을 상호적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 삶의 애환을 미적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최정애 시인의 시적 가치는 아이러니, 위트, 언어의 경제성, 그리고 시인과 시적 화자가 단절되는 현대시의 몰개성(impersonality)과 형식의 완벽성에 근거를 둔다. 어찌 보면 그의 시적 모험은 시적 가치에 대한 도전의 양상이다.   최 시인은 형식에 억압된 삶의 본능적 흐름을 시작품에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그래서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엔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무질서를 표현하면서 원형 혹은 신화 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이런 자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공적이고 반자연적인 문명의 세계를 표방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형식의 완벽성은 형식의 폐쇄성이며, 이 폐쇄적 형식은 내적 유기성, 통일성, 수미일관성, 표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를 강조하다. 최정애 시인을 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또 다른 측면의 시세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는 ‘빗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즉, 탐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라며 ‘중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최 시인이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인 유목적 사유를 적극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이런 시작(詩作)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하는 차연(difference)이며, 개방성, ‘탈중심’의 의미를 생성 반복하는 것이다. 앞의 시 「빗소리」에서도 최 시인은 형식의 개방성을 지향하는 해체시를 추구한다. 이 개방성은 미적 형식과 관련되는 인위적 세련성보다는 자발적 직접성을 강조한다.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일부       흔히 미술의 기법 중의 하나인 고전적인 방식으로 ‘유화’가 있다. 이 방식은 순간적인 동작들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크로키(croquis)는 짧은 시간 내에 움직이는 대상물의 형태를 그리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최정애 시인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어제의 나팔꽃이었지만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그리고 죽은 척하고 있는 내 생각들을 크로키로 ‘찰라’를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과거에 대한 현재의 반란이다. 또 과거의 안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피이며 반복에 대한 차이(差異)인 것이다. 이런 정황들이 최정애 시인이 시적 대상의 인식의 주체로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요약하면 ‘현재’라는 정당성 확보 차원인 것이다. 과거의 ‘~주의’와 현재에 싸우는 중이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와의 전쟁이고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어떤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난간을 마시다」는 이 시에서 근대적 단일자아를 보여 오다가 「코끼리 그림자」에서 와서 복수의 자아를 보이고 있다. 즉 두 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컨대 코끼리 그림자가 ‘나팔꽃’이고, ‘뭉게구름’이고, 죽은 척 하는 ‘내 생각들’이 그렇다고 함의 할 수 있다. 이것은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정신의 울혈증(鬱血症)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최정애 시인의 시정신이며, 그의 문학성에 대한 본질이다.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한 장의 벽」일부     벽은 소통을 단절시키는 근본이다. 그는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라도 단절된 벽과 벽 사이에서 무한한 소통을 꾀하려 한다. 최정애 시인이 이 작품에서 소통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심미적으로 소통을 끌어 들여 조용히 탐미한다. 천국의 계단을 가볍게 오르려면 누구나 몸을 말려야 한다. 몸을 말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무소유의 일환이다. 그래서 ‘수북하던 달’도 몸을 말리고 있다. 몸을 말리는 것은 보름달이 그믐달로 가기 위한 절차상의 절대적 통관의례다. 이것은 달이 달로 태어나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한 윤회사상이 바탕이 된다.   앞의 시 「한 장의 벽」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의식이 표층에서 심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에서 언어가 표층에서 표층으로 미끄러지는 ‘다원주의’로 이동됨을 알 수 있다. 소통을 위해 벽 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벽 속으로 이동’하며 미끄러지고 있다. 어쩌면 중심이 없는, 행위가 종결되지 않고 계속 유예되는, 다시 말해 차이에 대해 연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최 시인이 횡단하고 미끄러지는 이 운동 그 자체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직 수평적인 비대칭만의 고집이며,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는 생산이고, 리좀(rhizome)과 같은 다원주의와 비(非)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이다. 지금도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저 한 장의 벽,/속으로’ 최 시인은 횡단이라는 운동을 하며,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횡단하고, 미끄러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허허로움을 추구하는 최정애 시인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낭만주의로의 회귀(?)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처음엔 그 소리가 바닥을 쓸고, 책장에서 흘러내린 낙서이거나 ①귀에 잠시 머무는 이명耳鳴이려니, 오후를 지나가는 구름의 균열이려니, 끝없이//지워진 안테나를 지나 나를 회전하는 반사경을 지나 몸을 끌어당기는, 터널로 이어지는 소파 위에서 모래 가득한 ②혀를 내밀고 날름거리는 바람,//…………//③목에 손을 넣었다 ④귀를 잡아당기다 바람은 계속 불고 있다 고단한 침대에선 ⑤머리칼이 한 올 두 올 부서져 모서리를 날아다니고     -「몸을 엿듣다」일부     귀와 혀, 그리고 목, 머리카락 등의 신체 일부를 통해 몸을 엿듣고 있다. ‘몸을 엿듣’는다 것은 표층에서 간접적으로 엿 듣는 행위를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를 성찰한다는 것이고, 이 성찰은 소통을 위한 엿 듣기인 것이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소통을 위해 ‘벽에 걸린 새장’마저 허물고 있다. 내면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자성이고, 반성이고, 자아를 찾는 일이다. 앞의 시작품인 「한 장의 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다가「몸을 엿듣다」의 시작품에서는 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결국 두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뜻도 된다. 또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초월성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두 경향,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동행을 하지만, 서로 상반된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두 개의 세계를 최정애 시인은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시적 사유가 초월성에 근거를 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심주의’에서 ‘탈중심주의’로, ‘탈중심주의’에서 ‘중심주의’으로, ‘수목적 체계’에서 ‘노마드적 체계’로, ‘노마드 체계’에서 ‘수목적 체계’로, ‘단일자아’에서 ‘복수자아’로, ‘복수자아’에서 ‘단일자아’로 넘나드는 그의 유연한 시세계는 영역과 영토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그리고 시적 사유가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런 까닭으로 최정애 시인에게서 확인되는 것은 문학과 예술적 감각을 재배치하는 시의식이 감춰진 이교도(異敎徒)적 시간관의 발견이다. 그는 지금도 대칭과 비대칭의 경계에서 고유한 언어로 집 짓기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   꿈틀대는 구름 속, 터널에서 이별의 거리는 눈 위에 떨어지는 눈금일 뿐 벼랑을 목에 걸고 뱀과 바퀴가 회전하는 속력 위에서   이별은 초침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친다   -「컨베이어 벨트」일부       시적 화자는「컨베이어 벨트」의 시에서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가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은 ‘뱀’은 ‘컨베이어 벨트’이고 ‘컨베이어 벨트’는 인간 삶의 양식이다. 그것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을 구속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컨베이어 벨트」는 문명을 비판하는 의미도 되지만, 바퀴와 바퀴에 걸쳐 일정하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획일적인 인간 사회의 형상화다. 서양의 물심이원론은 대립적인 삶으로써 인간성 본질을 늪으로 한층 가라앉게 한다. 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컨베이어 벨트 역시, 두 바퀴의 상호소통이라는 미명아래 공간을 점령하고 이성적 사고를 마비 시킨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최정애 시인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치며 산다고, 인간의 영원성과 불멸성을 시라는 미적 양식으로 담론화하고 있다. 그는 또 비리와 허망, 그리고 욕망에 맹목적인 현대인의 ‘수많은 눈’과 ‘발자국’은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뱀 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최정애 시인은 ‘벼랑에 목을 걸고’ 회전하는 ‘뱀의 고통’을 절대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를 신화에서 구원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죄는 인간의 삶을 규격화한다. 규격화는 일종의 억압이고, 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예술은 예술을 낳는다. 시의 소재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은「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형식주의적 태도를 보여온 부조리한 사회성, 관료성, 인간 본성의 취약으로 ‘안개에 손을 말리는 사람’(「시계가 고장나」)들을 보곤 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티의 우연성, 순간성, 일시성으로 전통시를 봄볕에 고드름 녹이듯 거리를 두는 이유는 기존의 담론과 제도들에 의해 구현된 규범을 무너뜨리고 ‘탈영토화’에 시적 사유를 두려는 그의 믿음이다.       3. 언어에 색칠하고 봉사하는 견자   칸트는 “언어를 목적으로 사용할 때 시가 나온다”고 했다. 언어란 시인으로부터 고통의 외침을 자아내는 통점의 기호이다. 이런 언어로 시인은 타자를 인도(引導)해야 한다. 타자를 인도한다는 것은 언어로 그려 놓은 높은 빌딩을 보고, 타자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노와 비판의 소리를 통점의 기호로 나타내는 최정애 시인의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시를 감상해 보자   그 시간 나는 회전문 속에 있었다   에스카레이터가 2층을 관통하고 있을 때 그녀의 발목이 접히고 있었다 절반으로 잘리는 건널목에서 그녀의 허리가 접히고 있었다 빨간 샌들이 함께 접히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리고 ………… 나는 회전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접히고 있다」일     최정애 시인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보여 주었던, 일시성과 우연성, 그리고 순간성을 보았다. 예시된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이 시 역시 「컨베이어 벨트」의 시와 같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과 시적 화자가 같은 목소리를 내는 단일 자아로서 개성론에 가깝다. ‘그녀’가 시적 화자이고, 시적 화자는 시인이고 최정애 시인은 시인으로서 시적 화자가 된다. 따라서 ‘그녀’가 ‘최정애’라고 할 때 최 시인이 ‘회전문을 나오’려면 몸을 접어야 한다. 접는 행위는 자세를 낮추는 태도이고, 자세를 낮추는 태도는 수목적 사유체계가 가진 위계질서로 형성된 계급사회의 지층을 흔드는 일이다. 접힌 발목의 ‘샌들이 함께 접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린다는 사유는 인간, 동식물, 무기물 등과 같은 모든 우주 만물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감화 시키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시정신이다. 예컨대 적당한 수분과 햇볕, 그리고 바람과 땅이 유기적인 관계망를 형성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날 수 있다. 그는 낡은 전통을 아무 조건 없이 버리자는 극렬 분자는 아니다. 익히고 배우되 지층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에겐 ‘동시대’란 말은 폭력이다. 그가 ‘회전문’을 나오는 것은 ‘나와 함께 태어난 사람이 나와 동일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지 않는 행위이다. 최정애 시인이 「그녀가 접히고 있다」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의식은 ‘나’는 ‘나’와 다르고, ‘너’는 ‘너’와 다르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자아가 상호 ‘다름’의 동일성을 보이고 있다. 인격체로서 ‘나’와 ‘너’는 다른 것이지만 ‘아픔’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서로 같은 동질성을 갖는다. 시적 진술은 자성과 해명이 작품의 축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의 진술은 ‘성찰’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한다.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또 다른 어떤 것과도 접촉할 수 있고, 접촉되어야 하는 접속의 원리를 양산한다.   돌멩이를 던졌는데 꽃 한 송이가 피고 있다 꽃을 피우며 돌은 호수 가득 적막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는다 어제의 빗물을 흘리다가 바람의 뼈대를 쏟아 낸다 붉은 공기가 팽창하는 틈새에서, ‘돌이 살아 있나 봐’ 돌멩이 한 알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의 경계를 가르며   -「돌이 핀다」일부     ‘허공에 색칠하며 사는 것이’ (「거미 소리」) 거미의 운명이라면 언어에 색칠하면 사는 일은 최정애 시인의 운명이다. 그 동안 온 몸에 색칠하던 그는 언어에 색칠 하기 시작한 것은 순간성의 ‘현재’에 있다. 즉 낡은 전통성으로부터 과감한 이탈의 정신에서 비롯된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돌이 핀다」에서는 몸과 언어에 동시적으로 색칠 한다. 온 몸엔 저녁 노을빛을 색칠하고, 언어엔 새파란 청춘을 색칠 한다. 지난날의 시간은 ‘돌멩이를 던졌는데 한 송이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최 시인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밤의 근육질」)’라고 회고한다. 실험적이고 파편적인 글쓰기를 하던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황급하게 ‘인생론’으로 돌아선다. 그의 ‘목에 걸린 쇠 방울이 눈에서 불똥을 일으’(「일식」)킬 만큼 삶을 달려왔으나 이젠 ‘스웨터의 검은 털들이 놀라 등에 납작 엎드(「일식」)’리고, 이따금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서면 내 뒤에 아련하게 따라오는 소리/오늘도 그 소리를 덮고 그 쪽으로 기울다 잠들(「아직도 살아있다」)’고 있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꽃으로 피어나던 돌은 호숫가에 가득 쌓인 ‘적막을 밀어’ 낸다. 시간이 최정애 시인에게 가져다 준 숙명의 결과다. ‘운명’과 ‘숙명’은 분명히 다른 개념을 각각 함의 한다. ‘운명’은 본능적으로 피할 수 있거나 개척할 수가 있다. 그러나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순환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시간은 최정애 시인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만남이다. 이 숙명적인 시간과의 만남이 최정애 시인을 ‘인생론’으로 몰고 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세월은 ‘푸른 절벽’이 최정애 시인의 ‘발목을 부수고’ 설상가상으로 ‘빠른 속도로 몸이 가라앉’ (「돌이 핀다」)게 한다. 그러나 황혼빛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시적 화자는 ‘돌멩이 한 알에서 숨소리를’ 듣는 듯이 삶에 애착하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다 왔습니다” 라는 ‘소리 들리는 길에서 가던 길을 놓치고 마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 (「어항 속으로 들어가다」)’가 될 때까지 그는 언어에 색칠할 것이다.   늦가을 오후가 날린다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린다 ………… 밤이슬에 젖으며 내가 만장輓章처럼 날리고 있다   -「내가 날리고 있다」일부     오후가 날리는 늦가을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바람의 한쪽 모서리’로 날리던 시적 화자는 ‘만장(輓章)처럼 날리’며 ‘밤 이슬에 젖’는다. 최정애 시인은 특히「내가 날리고 있다」는 시에서 그의 시의식이 ‘인생’ 쪽으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잃지 않고 가야 하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려고 물고기처럼 뜬 눈으로 죽음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존하려고 한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이 날’리고, ‘내 방이 하얗게’ 날린다는 인식으로 조용히 죽음을 탐미한다. ‘늦가을 오후가 날리’는 것도,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리’는 것도, 모두 상상적 질서 속에서 가능하다. 이 상상적 질서는 환상과 이미지의 영역이며, 상징적 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체가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또한 주체가 재현되거나 구성되는 것 역시 상징적 질서, 곧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 시인은 언어로 날리고 있다. 그것도 ‘잔뜩 발기된 달의 표면처럼’ 접신(接神)된 광기로 날리고 있다. 그는 ‘둥근 배가 봉지 속에서 불룩 불룩’하게 날린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처럼 날리고 또 날린다.     머리 속엔 아침부터 스카프에서 빠져 나온 새들이 나선형 방향을 돌며 날고 있다 …………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 새들이 날아다니는 건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난다」일부     돌 속에서 한 송이의 꽃을 피워도 어차피 인간은 한 장의 스카프로 날릴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개체로서 고독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고 인간에게 무상의 은총을 내려주었던, 예수의 그 고통에 필적할 만한 자신의 고통이 수반될 때 시인은 언어로 본질의 실체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스스로 받아 들이는 최정애 시인은 낡은 언어로는 존재의 성안에 들어갈 수 없고, 낡은 의식의 언어로서는 실존하는 사물을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겐 ‘스카프’가 언어이고 기호가 된다. 그 ‘스카프’가 언어인 것은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고 ‘스카프가 구름’인 까닭이다. ‘스카프’란 언어로 ‘스카프’의 실체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언어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 하고자 한다. 그것도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니는 건/ⓑ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에서 ⓑ와 ⓒ구절은 도치된 ⓐ의 조건 절이다. 다시 말해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에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닐’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을 언어로 진술하게 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로서 상생의 관계를 만든다 그의 언어는 ‘온통 구름’이고, ‘스카프’이고, ‘구름’이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나=구름’이고, ‘스카프=구름’이다. 그렇다면 ‘나=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나=구름=스카프’는 동일한 존재이고, 최정애 시인은 언어로 이 동일성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언어는 사물의 안쪽을 파고 들어가 본질을 파악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은 본질 파악의 주역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스카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못한다.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 주었을 때 ‘스카프’는 ‘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기여하고, 따라서 시인은 언어를 버릴 수 없고 최정애 시인 역시 언어를 떠난 시쓰기란 상상 조차할 수 없다. ‘스카프 속에서 빠져 나온 새들’의 행위는 언어만이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언어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카프가 점점 두꺼워’지는 현상을 타자에게 가시화 내지 가청화하는 주체도 역시 언어이다. 때문에 언어는 혼돈을 질서화 한다.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아이를 만들다」일부       인간의 출생은 탄생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우주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神)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이「아이를 만들다」의 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는 인간의 위대한 승전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과 시학」에서 “어떤 언어 공동체나 어떤 화자(話者)에건 언어는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명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체는 존재로서 동일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언어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언어는 명명행위의 도구일 뿐 존재의 주체는 아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시인 최정애는 ‘시니피앙 정자’이고 시인 최정애의 삶의 타자는 시니피에 ‘난자’이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빛으로 잉태한 ‘알전구’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인 동시에 삶의 무늬가 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처럼 언어로 ‘아이’를 만들 때 시인은 본질의 현상과 존재의 가치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다.   작금의 시대에서 시(詩)가 중요시 하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다. 최정애 시인은 ‘우량아에 필요한’ 언어를 ‘몽땅 사들’이고 있다. 이것은 존재로부터 창조된 언어(langage)의 힘을 옹호하는 일이다. ‘죽는 그날에도 어쩜’ 언어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하는 최 시인은 진정한 언어의 봉사자이다. 언어로 탑을 쌓는 일, 즉 언어로 ‘아이’를 만드는 일이 곧 시인이며, 창조적 행위자이다. 이렇게 그 언어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뮤즈(Muses)가 시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시를 낳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시의 주체가 된다. 즉 시를 만드는 원천은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상상력(imagination)으로 인지하고 있다. 여기 최정애 시인 역시 영감으로 사물을 인지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시적 대상을 인지하고 관찰한다.     4. 마치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시인은 실패하는 쪽으로 인생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그는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고, 산문가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발레리(Velery)는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춤”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의 명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말해왔던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 ‘실패’는 ‘성공’이라는 역설의 의미다. 그렇다면 최정애 시인은 ‘성공’의 시를 한층 더 나아가 ‘완성’해 가고자 한다. ‘이제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너’ (「12월 31일」) 즉,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언어를 버리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통시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로는 존재의 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없으므로 철저히 언어 고르기로 봉사한다. 또 하나는 최정애 시인의 시는 보행을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정지 버튼을 누르면 go go가 달려와’ 춤을 춘다. 이「빗소리」의 시에서도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고 있고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는 태도로 보아 그의 시는 일관되게 춤추고 있다. 그는 음악이 흐르는 시에만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시는 최정애 시인에게 억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정애 시인 스스로 억압을 필요로 한다. 그 필요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쓰기 작업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는 참 젊다. 젊다 못해 매우 푸르다. 푸르다 못해 연초록빛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가 젊다는 것은 시가 건강하다는 것이고, 그의 시가 건강하다는 것은 한국의 문단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는 나이와 무관하다. 그것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무관하다. 다만 예술의 치열성과 관계가 깊을 뿐이다.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걸어온 긴 여정 속의 피곤함을 잠재우기 위해 이 평자는 최정애 시인에게 “몰입의 낭만은 오직 젊은 시에서 나온다”는 이 한 마디 꼭 들려주고 싶다.       시인의 말    시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이고 동시에 울음이기도 하다. 어느날은 고통과 놀고 어느날은 고독과 놀면서 내 상상력이 닿는, 어느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서성거리며 나를 확인하고 조명한다. 세월이 거슬러 이쪽으로 오기도 하고 저쪽으로 가기도 하는, 마치 내가 시간을 갖고 노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따금 나를 목마르게도 하지만 행복한 존재임이 분명한 건, 시는 내 온몸을 적시는 사랑의 환유이기 때문이다.
5    현실과 초월의 접목체椄木体 하이퍼시 탐색하기 (김 필 영) 댓글:  조회:754  추천:0  2018-11-03
평론부문 당선작   현실과 초월의 접목체椄木体 하이퍼시 탐색하기 (김 필 영) 1. 서문      스마트시대를 맞아 하이퍼텍스트를 손바닥 안에서 읽고 사용한다. 보편화된 인터넷망을 통해 방대한 학문영역과 정보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됨에 따라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구별의 개념이 없이 누구나 하이퍼텍스트를 읽으며 살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종이 하이퍼텍스트를 포함) 사람의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한 무한한 사이버공간의 가상적 영역에서 ‘하이퍼텍스트시스템’은 문자적인 텍스트와 무한의 이미지 간에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변화상황에 따른 하이퍼텍스트 등장에 있어 학자들은 그 등장의 의미를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한국에서도 2000년 전후로 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바탕에는 기존문학의 수동적 전달과정을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범위를 ‘하이퍼텍스트시’(이하, 하이퍼시), 특히 전자(電子)가 아닌 종이 하이퍼시로 범위를 좁혀 탐색하고자 하며, 본 논점에서 밝히고자하는 핵심은 그간의 하이퍼시의 성립과 관점에 대한 일부 오류를 지적하고 조정된 방향에서의 2000년대 하이퍼시의 이해와 관점을 재고하여 발전방향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2. 하이퍼시 비판관점 조정의 필요성      비판하는 제도적 기준이나 방법이 비판 후의 건전한 발전적 의도에 부합되지 않을 때 비판의 가치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간의 하이퍼시에 대한 비판시각에는 ‘등장의 의미’에 무게가 실렸으며 외적 성과물에 대한 결과도출의 기대가 성급하여 평가를 속단한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이치적이다. 왜냐하면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당사자든, 읽는 자든, 비판하는 자든 중요한 것은 하이퍼시가 우리 환경에 접목되어 대중에게 다가갈 가치나 시문학에 기여할 가치가 있느냐의 문제나 어떤 메스미디어를 통해 하이퍼시가 어떻게 제작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시의 시적 구성요건과 시적 완성도에 대한 냉철한 고찰과 이론이 정립되어 계도되는 일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의 방향과 선입견이 거세게 일어나 평가자체의 방향과 평가의미가 가치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의 시문학적 역사에서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에도 ‘하이퍼적 특성’은 시대마다 있었다. 1930년대 외부 세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세계의 이론을 배경으로 현실의 시간과 공간구조를 벗어난 내면세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초현실적 이론이 한국의 문학계에는 실제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었으며 한국은 전통적 서정과 이데올로기적 시류가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이단자처럼 등장한 시인이 이상(李箱,1910~1937)이었다. 이상의 초현실적, 기호학적 지식 터득 수준이 어떠했든, 그가 기존의 전통적 문체를 부정 또는 파괴하려는 실험을 감행한 의도의 유무를 떠나 그의 기존 구문과 차별화된 이질적인 이미지의 자유로운 전개와 결합은 한국현대시사의 ‘초현실적 시쓰기’와 하이퍼텍스트의 효시였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李箱)이후, 하이퍼적 요소를 지향하는 아방가르드적 작품의 발표는 조향(趙鄕, 1917~1984), 김춘수(金春洙, 1922~2004), 문덕수(文德守, 1928~ )를 걸쳐 발전해 왔으며, 황지우, 박남철, 오남구, 심상운 등이 이 계열로 볼 수 있으며, 근래 ‘월간 시문학’의 김규화 등이 전개하는 ‘하이퍼시클럽’도 그 맥을 잇는 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하이퍼시적 요소(초현실적 시-3.4문학)가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실패의 소산물이라고 단정하거나 계도부족으로 인한 단편적 조명을 냉소적으로 비판만 하는 것은 한국의 현대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연구와 이론적 정립은 비판에 답할 만큼은 발표되었으나 충분히 계도(啓導)되지 못한 점도 문제 중 하나이다. 이제는 하이퍼시론이 상당수 발표된 바 있으며, 창작과 경험적 이론정립과 탐구가 지속되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지나간 시대의 작품에서 하이퍼적 작품을 발굴해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시작(詩作)의 새로운 시도로서의 하이퍼시의 창작을 긍정적으로 주시해보는 것이 합리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하이퍼적 구조로 창작되어 발표된 작품이 기존의 흐름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그것이 작가의 자연적인 소양이었든,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 의도였든, 그 용기와 노력을 비판만 할일은 아니다. 물론 이 주장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창작하는 당사자들도 하이퍼시가 아닌 타 경향의 시를 겸허히 바라보고 건전하게 비판하며, 하이퍼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복이 선도되도록 서정과 이해의 지평을 넓혀 위로와 감동을 제공하며 진리와 정의로 향하는 하나의 길잡이임을 증명할 수 있을 때, 편견과 오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서는 현재 하이퍼시의 가능성에 대해 작품과 시론을 동시에 실행하고 있는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과 또 한 평론가의 하이퍼시론에 문덕수 시인의 시를 반추시켜 하이퍼시의 성립을 분석해보고 검증해봄으로써 하이퍼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3. 두 권의 하이퍼시론 탐색   (1) 문덕수 하이퍼시론 요약 ◉ 하이퍼시의 전 단계 와 현 단계 요약    문덕수 평론집 『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 중심으로 논문에서 동일인물의 시와 시론에서 논점으로 대두시켜볼 수 있는 부분 요약을 거론해본다.    문덕수 시인은 위 평론집의 「하이퍼시의 전 단계와 하이퍼시의 현단계」*『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 124~125쪽) 머리말에서, “전자(電子)가 아니라 종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시험해보려는 하이퍼시동인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의 충격을 가라앉힐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이퍼시의 성공을 상정(想定)해 볼 수 있는 영역에는 많은 문제점의 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이퍼시의 가능성’과 ‘하이퍼시의 성공’과 ‘문제점’이라는 세 가지 상황을 문제적인 것처럼 기정사실화하고 있지 않음이다. 그러나 이 세 상황은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일반 독자대중의 보편적 인식의 관점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객관화된 관점은 하이퍼시만이 현대시가 지향하여 나아가야 할 점이라고 강변하고 있지 않음이며, 시문학을 대하는 시인으로서, 학자로서의 합리적 자세를 인지할 수 있다.(이 논문에 문덕수의 시와 시론을 적용한 이유도 그러한 객관적 관점에 바탕을 둔 것임을 밝힌다.) 그 논의 방향은, (1) 언어 예술인 시의 하이퍼적 가능성, (2) 사물과 기호가 가지는 하이퍼성과 하이퍼성이 아닌 단계, (3)컴퓨터의 인공언어와 시어(詩語)와의 관련성에 대해 논하였다. ‘하이퍼시의 전 단계’는 “지각의 원인으로서 감관(감관: 즉 눈)과 대상을 분석하였다. 그 점에서 체득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논리는 “지각이나 지각 이전 단계의 사물세계는 하이퍼성(hyper性)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과 “시의 언어가 하이퍼 가능성을 지니게 된 하나의 조건으로 ‘원근법의 파괴’와 둘 이상의 사물에서의 관계성”이라고 했다. ‘하이퍼시의 현 단계’는 “20세기 전위회화에 와서 원근법이 완전히 부정된 것”으로 보이는 ‘고정된 시점의 파괴라는 점에서 하이퍼시로 나아가는 단계의 구실을 함을 거론하였으며, ‘관계성의 발견’에서 ‘유사성’이 폐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동 평론집 136쪽) 그리고 “아날로그 의미의 세계로부터 디지털 의미의 세계로 이동 때, 기호의 지향대상(指向對象)이 소멸”된다고 볼 때, “데이터로서의 자연언어는 외부세계의 사물과 연관되어 있지만, 컴퓨터에 입력되면 이진법의 언어로 변환되고 다시 기계신호로 바뀌어 출력에 도달한다.”(생략) 즉 “컴퓨터에서 인공 언어로 바뀌고 지향대상을 소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대상의 소멸은 시간과 공간을 비약한다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즉 “시간과 공간을 무화(無化)하거나 축소〮〮,확대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춘수는 ‘현대시의 계보’라는 글에서 이러한 현상을 ‘무의미’ 또는 ‘언어의 방임상태(언어의 유희)’라고 했다. ◉ 하이퍼시의 구조* 요약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현실과 초월』 하이퍼시의 방향: 시문학사 발행) 165~187쪽)    문덕수 시인이 위 주제의 논고에서 기술한 예문을 생략하고 평설의 요지를 소제목형식으로 임의적으로 정리하여 ‘하이퍼 시의 구조’로서 10개항으로 요약해본다. 논문에 열거된 주요한 구조를 놓치는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미묘한 의미중복이 있음을 밝힌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구조’를 소제목처럼 열거했다고 해서 한편의 시에 10개 항 모두 충족되어야함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의 시에서 이러한 구조가 복합적으로 나타날 때 하이퍼적 요소가 짙어질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시의 전개에서 반드시 아래 순서에 따라 의미를 다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 “하이퍼시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를 연결한 시”이다. 2) “표현에 있어서 설명보다(관념적 진술보다) 묘사(암시적 묘사 등)를 더 강조”한다. 3) 단위를 모아 구성(연이나 절, 리좀덩어리 등과 구별하여 단위라고 부르기를 권함) 4) 두 존재의 관계 사이의 심연, 단절, 틈을 포괄적으로 초월이라는 이쪽과 저쪽을 지닌다. 5) 초월의 구성 : 한 단위와 단위 각각의 관계 有와 無의 대립적 관계 구성을 중시 한다. 6) 〔A〕단위와〔B〕단위간을 연결하는 부분이 전체구조로서의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 7) 본의(本義, tenor)와 유의(喩義, vehrcle)간의 유사성에 의한 결합인 교유(交喩, diaphor). 8) 〔A〕단위와〔B〕단위간을 연결할 수 있는 현실과 초월의 고리 찾기(살리기)를 중시 한다. 9) ‘리좀’이나 ‘모듈’ 같은 연(聯)인 단위(單位, unit) 구분하기(필수적인 것은 아님)도 하나 굳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10) 묘사와 실제 의미사이의 간극, 차이성에 의한 긴장을 지향하는 차유(差喩, trensphor)를 말하는 견해도 있다.     (2) 심상운 하이퍼시론 요약- 하이퍼시 창작법      심상운 시인은 2006년 경 디지털시론에 몰두했다. 『디지털 시의 이해』라는 혁신 시론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탈관념시론과 디지털시론, 하이퍼시론을 집필하여 발표해 왔다. 시론에 더하여 김규화 시인 등과 하이퍼시동인, 하이퍼시클럽을 결성하였으며 정연덕 시인 등과 ‘시현장’ 동인을 이끌며 ‘하이퍼시쓰기 운동’에 불을 지피고 ‘하이퍼시쓰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심상운은 2010년에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평론집을 발표하여 현대시의 다양한 기법, 변화의 추이에서 ‘하이퍼시의 필연성과 이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그의 저서내용 중 ‘21세기 하이퍼 시 이해를 위하여’라는 부제로 집필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평론집에 수록된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내용에서 ‘하이퍼시 창작법’으로 기술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심상운 저,『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푸른사상, 2010. 103~131쪽) ◉ 하이퍼시 쓰기를 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의 이동방법 (본 소제목은 논고의 이해를 돕도록 필자가 임의로 설정한 제목임)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전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자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시의 특성과 결합한,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를 통한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변형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 ‘선택과 집중’, ‘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 ‘가상현실의 세계’라는 하이퍼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한다. 3) 다시점의 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사물도 캐릭터가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적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심상운 저,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푸른사상, 2010. 130~131쪽)에서 인용 이 경우에서도 시에서 문덕수 시인의 시론 적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9가지 방법이 다 적용된 시만이 하이퍼시라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4. 하이퍼적 요소의 시 들여다보기 (문덕수 시집, 『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 중심으로)      문덕수 시인은 평론집 『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의 ‘한국시의 현황’이란 주제의 글에서 “한국시의 현황을 ‘방법’이라는 기준으로 1)전통과 서정(전통적 서정시), 2)메시지와 관념(관념시), 3)이미지와 사물(물리시), 4)탈관념의 모험(실험시),주지적 처리(주지시) 등으로 분류하여 논한 바 있다.* * 『현실과 초월』 50쪽, 2014년 시문학사 발행)    문덕수 시집,『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는 시선집으로서 수록된 시는 하이퍼적 요소가 희소한 시들도 여러 편 수록 되었으며 문덕수 시인이 쓴 시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55년 현대문학 10월 시 「침묵」「화석」「바람 속에서」 등으로 등단한 이후, 1956년 첫 시집 『황홀』을 상재하고, 1966년 〮〮〮『선.공간』, 1968년 3인시집 『본적지』, 1975년 『새벽바다』, 1976년『영원한 꽃밭』, 1980년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1981년 『수로부인의 독백』, 1982년 『다리놓기』, 1990년 『만남을 위한 알레그로』, 1994년 『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 1995년『조금씩 줄이면서』, 1996년 『그대, 말씀의 안개』, 1997년 『빌딩에 관한 소문』, 2002년 『꽃잎세기』, 2007년 『꽃먼지 속의 비둘기』, 2009년 장시집 『우체부』, 2012년 『아라의 목걸이』(5권의 시선집과 4권의 번역시집 제외)까지 발간된 시집 속의 셀 수 없이 방대한 작품을 모르고 『라일락 향기』에 수록된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문덕수 시세계의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는 것일 수 있다. 허나 시집 내에 서평이나 평설이 없는 점을 고려하여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시인의 시를 놓고 동일 인물의 시론과 다른 논자의 시론을 대입해 하이퍼시의 성립요소와 효용성 그리고 하이퍼시의 방향에 대해 논할 때 그 객관성 입증에 논리적일 수 있다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덕수 시인의 근래 출간되어 대중 가까이 보급된 시집 (문덕수 시집, 『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에 수록된 시들 중에서 하이퍼적 요소가 내재된 시를 중심으로 평을 펼쳐본다. (시집에 편집된 시들의 목차는 창작 순서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함)     (1) 선(線)의 하이퍼적 소묘(素描)      시집 서두에는 5편의 선(線)을 소묘(素描)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선(線)이란 면(面) 위에 길게 그어 놓은 금, 또는 수학적으로 점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이루어진 자취로 정의 하는 바, 점(點)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발생하는 운동선(moving line)이라 할 수 있다. 소묘(素描)는, 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연필이나 콘티, 목탄, 파스텔 등을 사용해 선으로 그린 그림 또는 그 회화표현으로 그린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파생된 단어 흔히 데생(dessin)이라고 부르는 회화기법이다. 그렇다면 그 단순한 선(線)이 어떻게 하이퍼적 구조를 지녀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색채가 없는 점이라 할지라도 연필을 들고 백지 위에 점을 찍어보자. 그 점을 똑바로 그으면 직선이 되고, 구부려 그리면 곡선이 된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선이 각에서 만나는 점을 모서리라 한다. 고개를 들어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보면, 처음 바라보는 지점에서 다음 바라보는 지점이 있겠으나 우리 눈은 전광석화처럼 ‘총천연색 전자동 카메라’ 기능을 발휘하여 촬영하는 데 그 행위를 슬로비디오로 구현한다면 무수한 점과 점이 이어지는 선(線)을 동시에 촬영하여 뇌로 보내어 물체를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측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을 보면 선(線)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시인이 선(線)을 소묘(素描)한 묘사에서 어떤 묘사가 현실과 초월의 각자 영역을 드러내므로 하이퍼적 구성요소를 보여주는가. 첫 시,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을 들여다본다.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동그란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 전문      까만 밤하늘에 한 유성이 춤을 추듯 등장하여 선의 질주로 시작되는 이 광경은 샌프란시스코 거리나 홍콩거리의 야경을 공중에서 원적외선 촬영기법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는 듯하다. 이 시 첫 행에서 나타난 “한 가닥 선(線)”은 어떤 사물을 직유하고 있지 않다. 선(線)에는 어떤 관념이 없다. 그러나 그 ‘실뱀처럼’ 달아나는 선을 ‘또 한 가닥 선이 뒤쫓’으므로 시작된 점의 운동인 ‘선의 상상의 이미지’가 태동하여 결합하게 된다. 마치 SF영화에서 지구라는 별에 점(點) 하나가 떨어져 움직이기 시작하자 발생하게 되는 광경을 연상하게 된다. “빛살처럼 쏟아져 나”와 뱀처럼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들이 꽃잎을 물고 질주하는 선(線)의 출처를 주목하면 “어둠 속”이다. ‘어둠’은 상징적으로는 빛과 대칭적인 상태인 진리나 정의와 반대편이라 한다면 ‘빛살처럼 쏟아져 나온 선이 문 “꽃잎”은 거짓이나 불의로 유혹하는 물체로 유추할 수 있다. 하반절에서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물자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것이 있다. 연속적으로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꽃이다. 이 때의 꽃의 출처는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이며, ‘단절의 틈’에서 나와 “불꽃처럼 피어나”온 것이므로 그릇된 욕망일 수 있으며 그릇된 욕망의 말로는 결국 ‘찢어지고 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뱀처럼 꼬리를 물고 질주한 선의 세계는 그릇된 욕망을 향한 몸부림이며, ‘진실’이라는 과녁을 빗나간 위장된 ‘빛살’, 또는 ‘정의’의 길을 위장한 ‘빛살’이 물고 물려 현란하게 뒤따르는 ‘혼돈의 세상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는 사물을 촬영하여 과대하게 확대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이는 점묘의 집합체로 보이는 그물망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물리적으로 우주라는 무한공간을 볼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우주를 무슨 수단을 통해 포획할 수 있는가. 오직 창작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만이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은 “동그란 우주”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線)은 ‘현실’이나, 선(線)이 꽃잎을 물고 질주하는 것은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이다. “동그란 우주”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은 “동그란 우주”를 받아내는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을 지향하는 차유(差喩, trensphor)기법이 적용되었으며, 우주와 망사를 대치시킴으로 현실과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을 통한 시적상태를 ‘하이퍼적 고리’라 볼 수 있다. ‘리좀’이나 ‘모듈’ 같은 연(聯)인 단위(單位, unit)가 이 시에서는 도입하지 않은 것은 리드미칼 한 운율과 이미지결합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시인의 의도로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상의 혼돈을 여러 가닥의 선(線)으로 동시에 끌어들여 은유함으로 하이퍼적인 시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2」를 통해 선(線)의 하이퍼적 묘사를 좀 더 들여다본다.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 불사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2」 전문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은 무엇일까, 진리를 탐구하는 길일 수도 있고, 우리 인간이 아직 겪지 못한 미래를 상징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에서 현재라는 지점이 활시위라면 어느 목표를 향하여 활시위를 떠난 화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면 한마디로 “의문의 화살”이 아닐까. 그 “의문의 화살”이 진리를 탐구하는 몸부림이든, 비켜가지 못하고 불의와 장애와 맞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든, 사람의 수만큼 또는 사람이 상상하는 수효만큼 무수할 수 있다고 본다면 “의문”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합한 묘사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한 가닥의 선(線)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線)이 와서 걸”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가 벌어진다. 한 가닥 선은 탈관념의 사물이며, 또 하나의 선이 와서 불꽃을 뿜고 난무하여 결합하므로 ‘상상의 이미지’가 태동하게 된다. 본문에서는 이 “의문의 화살”을 “불사의 짐승일까”라고 암시적으로 묘사하여 초월적 긴장구조가 상승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 생을 살아가는 길에 무수히 따라 붙는 ‘불사의 짐승’은 무엇인가. 다음 행의 묘사에서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가 “삭아서 떨어”졌다는 묘사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과 환경에 따른 언어의 구조적 결함이나, 주관적 주장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로 나타난 몰이성적 양태가 상대를 향해 던지는 “짐승”의 행위와 같은 언어행위라 할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불사조”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어 우리를 향해 불꽃 속에서 얽어매고 태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에 남는 것이 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짧은 생애라는 피하지 못할 한계로 인해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생의 진리가 “신비한 매듭”으로 남는 것이다. 결구는 그 한탄을 재판장의 망치처럼 명징하게 내리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은 ‘화살’이나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의 의문의 비행’은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이다. ‘한 가닥 선’은 현실이나 서로 얽혀 난무하여 불꽃을 뿜는 ‘불사의 짐승’은 초월이다.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현실이나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은 초월이라 볼 때, “일체가 불타버”린 것과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은 초월의 이쪽과 저쪽이며,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관계구성이자 차유(差喩, trensphor)의 성립구조로 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초월의 관점은 명백해지고 두 상황의 접목체인 하이퍼적 요소가 시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언어와 사물의 하이퍼적 소묘(素描)      언어의 현실과 초월을 시어로 실현하는 것이 의도적일 때 그 비평은 독자의 몫이다. 아래의 시는 1961년 현대문학 74호에 발표 되어 『선(線) • 공간(空間)』(1966)>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인 50년 전 작품이나 그때는 스마트 시대에 읽어도 한 폭의 일러스트(illust)화면을 보는 듯하다. 다시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꽃과 언어」 전문      긴 세월 이 시에 대한 세간의 평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쇄반응에 의한 순수 조형(造形)에 관심을 보이는 무의미의 시로서 표현 그 자체로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초현실주의 시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무의식이란 이성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방임상태에서 무질서하게 축적된 의식의 단편들을 아무런 의미 관련도 없이 자동기술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떠오르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 김현승(金顯承)이 그의 시론적 저서에서 가장 새로운 시로서 인용한 작품이다.    [상징사전]에서는, “언어 자체는 내연(內燃)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생명력을 눈치 채고, 감지한 시인에 의해서만 생명의 참 모습, 참 의미(나비와 꿀벌)를 찾게 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이 시의 주제는 ‘꽃을 통한 언어의 생명력’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언어’라고 하는 무형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꽃잎 · 나비 · 깃발 · 밀물 · 불꽃 · 꿀벌’과 ‘되다 · 찢기다 · 펄럭이다 · 쓰러지다 · 밀려오다 · 타다’ 등의 이미지만을 느끼면 그만인 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그러면 위 시의 감상평에 앞서,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하이퍼시 구조’에 위의 시를 의도적으로 대입시켜 궁금증을 해소시켜보고자 한다.      첫 행에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는 묘사에서 ‘언어’나 ‘꽃잎’은 ‘탈관념의 사물’이나 “언어가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것은 ‘상상의 이미지’이므로 ‘하이퍼시의 구조’ 제 (1)항을 충족 시켰다고 볼 수 있다. 2연에서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는 묘사는 (2)항을 충족시키는 ‘암시적 묘사’라 할 수 있다. 모두 4연으로 ‘단위를 모아 구성’된 것은 (3)항,(9)항의 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꽃과 언어는 두 존재 사이에 있는 ‘초월의 이쪽과 저쪽’을 상징하므로 (4항)을 충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다간 꺼”지는 무(無)의 이미지와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되는 유(有)의 이미지는 초월의 구성상 무(無)와 有의 대립적 관계구성인 (5)항인 동시에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 성립 구조인 (6항)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개 연을 통해 ‘단위’를 구성하고 있으므로〔A〕단위와〔B〕단위 간을 연결할 수 있는(8)항 구조의 ‘현실과 초월의 고리’는 “꽃”임을 알 수 있다.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지는 ‘언어’와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되는 ‘어떤 언어’사이엔 ‘언어’라는 교유(交喩,diaphor)가 이루어진 것으로 (7)항의 구조요건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10)항의 차유(差喩, trensphor) 구조도 적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시를 심미주의(審美主義)적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어떠한가. 그러한 관점으로 시읽기를 시도해보는 연유는 하이퍼시가 독자에 따라 어떤 상상을 제공해 주는지 ‘시의 수용성면(受容性面)’에서의 하이퍼시의 가치를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언어’가 “꽃잎에 닿자” 어떻게 “한 마리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 추한 꽃잎은 없다. ‘꽃잎’이라는 ‘아름다움의 실체’나 상징적 대상을 바라본 사람은 그 감흥을 나비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언어로 나타낸다. 이때의 언어는 결코 추하지 않으며 상처를 주지 않는다. 이때 발하는 본능적인 언어는 훨훨 나래를 저어 날아오르듯 자유와 평화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지상의 첫 남자가 자신 앞에선 첫 여자에게 한 언어가 연상되는 이 도입부는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발하는 향기로운 언어도 2연의 묘사처럼, 서로 미워할 때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그 뜻을 전하지 못하고 패배진영에 매달려 “찢긴 깃발처럼” 허공에서 펄럭이다 쓰러져 갔는가. 이 묘사는 불통의 시대를 향한 처절한 외침처럼 들린다. 언어로 수많은 생명의 생사가 결정됨을 생각할 때, 언어는 어떤 무기보다 강하고 파괴적이며 그만큼 비극적이다. 3연에서 묘사된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는 모습은 곱고 바르게 “꽃‘처럼 살아보려는 우리들이 격랑의 밀물처럼 세상을 향해 꽃처럼 달려와 포말로 부서지는 우리 생의 아픈 모습들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역사는 무수히 내뱉는 언어가 밀물처럼 밀려와 산을 태워버리듯 삶이란 짧고 허망한 시간을 불살라 황패케 하는 역사가 이어졌기에, 언어가 향기를 발하여 꽃가루를 날라 꽃씨를 맺게 하는 “한 마리 꿀벌”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기에, 지구상에 ‘꽃 같은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표현방법의 절정이 시(詩)라는 표현의 형태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다른 그물망에 비친 하이퍼시 소묘(素描)      이번에는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를 자신의 시론이 아닌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론의 그물망에 올려 심미적 시각을 접사시켜 들여다본다.   수천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춤이다. 벽이 일천의 벽이 앞질러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나 솟기도 하고 줄 지어 멀리 달아나듯 쫓아온다. 벽이 꺾이어 막아서기도 하고 때로는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기도 하고,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고, 벽이 유리처럼 환해지면서 그 안에 또 다른 벽이 우뚝우뚝 솟는다. 도시는 커다란 어항 빌딩도 층층이 쌓아올린 어항이다. 어디로 가나 나는 그 어항 속의 금붕어다.     「벽 2」 전문      수천의 발자국 소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수천’은 무수한 수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완전수이고, ‘발자국소리’라는 현실적 묘사는 ‘지구 위를 걷는 무수한 인간들의 삶의 꿈틀거림’을 의미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수천의 발자국과의 결합을 기다리는 다음 행간의 이미지는 파격적이다. “그것은 춤이다”라는 단정으로 ‘발자국과 춤’이 ‘집합적 결합’을 이루는 것은 단아하고 명징하다. 시어의 울림에 있어서 깊이와 너비는 독자의 상상력에 비례할 것이나 ‘벽’이라는 주제 앞에 ‘발자국’이 ‘춤’으로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하고, 2연인 단위의 변환에서 주제인 “벽이 일천의 벽이 앞질러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나 솟기도 하고 줄 지어 멀리 달아나듯 쫓아온다.”고 묘사함으로 ‘발자국’과 ‘춤’이 ‘쫓아오는 벽’으로 化하는 ‘다시점(多示點)’ 즉 ‘다선구조(多線構造)’로 펼쳐지는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전개되는 ‘가상현실 묘사’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하여 큰 울림으로 들려온다. ‘소통의 단절’을 상징할 수 있는 ‘벽’을 ‘춤’이라는 율동체로 변환시킨 것은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라 할 수 있으며 ’현실을 초월한 공상의 세계로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가장 가까우나 등을 지고 서있는 ‘벽’이란 고정물체는 “벽이 꺾이어 막아서기도 하고 때로는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기도 하고,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므로 ‘정지된 이미지’에서 벽이라는 이미저리가 확장된 ‘동영상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우리는 호흡하며 얼마나 다양한 벽 앞에 좌절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지금의 나는 ‘미로 찾기’보다, 사면초가보다 답답한 온갖 ‘벽’의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여 야위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벽을 대할 것인지를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게 하여 시인은 묻고 있다. 이제 시의 결구로 향하는 단위에서 시인은 ‘연출자’ 입장으로 시를 향해 나아간다. 4연인 단위 하반부에서 답답하게 막힌 벽을 투시해주는 “유리처럼 환해지”는 ‘투명한 벽’을 등장시키는 연출로 ‘벽의 이면과 벽 너머의 세상’을 통찰케 한다. “벽이 유리처럼 환해지면서 그 안에 또 다른 벽이 우뚝우뚝 솟는” “커다란 어항”안에 존재하는 인간존재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어항 속의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탈출하여 살 수 없듯, 우리가 지구를 떠나 아니 ‘벽’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문덕수의 시인은 ‘벽’이란 사물을 통해 우리 스스로 지각하도록 ‘시의 벽’을 제시하여 시의 생명인 ‘진리를 향하는 길잡이’로서의 ‘벽’의 역할을 에둘러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벽’을 투시하며 벽을 넘어가려는 우리의 발길엔 ‘계단’이라는 사물이 기다리고 있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난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스치고 부딪힐 때마다 발등은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그 사나이도 이제는 돌이 되어 올라간다. 「계단」 전문        ‘계단’ 앞에서 ‘계단’을 올려다본다. 반드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 ‘계단’으로 시는 우리를 데리고 오르고자 한다. 점점 물이 차오르는 구멍 난 배에서 구조선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절대 절명의 긴장감이 흐르는 ‘계단’이라는 이미지에 ‘구르는 돌’이라는 불안정한 이미지가 집합적으로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한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삶의 계단을 올려다봤을 때, 그냥 오르기도 쉽지 않은데,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계단이란 어떤 계단인가. 여기서 계단을 올려다보는 화자의 시점과 돌이 굴러 내려오는 타자의 시점과 그 두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의 시점이 다시점(多示點)으로 형성된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지기도 하고,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나는 가상현실의 전개는 소설적 서사(敍事)를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묘사된 돌들의 다양한 모습,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는 묘사는 우리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며 감성을 건드려 유혹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나는 돌은 무엇인가. 어쩌면 ‘눈의 욕망’으로 야기된 ‘살의’와 물질의 기만적인 힘 앞에 욕망을 드러내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다선구조(多線構造)’로, ‘동영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존재가 있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이는 ‘의식 세계’의 우리의 모습인 ‘자아’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간에서는 “스치고 부딪힐 때마다 발등은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그 사나이”가 있음을 묘사하는데 그 상황을 ‘무의식 세계’라 볼 때,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행간에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전 편의 시 「벽 2」에서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인 벽에서 투시할 수 있는 ‘유리벽’을 등장시켜 ‘현실과 초월의 고리’인 희망의 고리를 제시한 문덕수의 시는 「계단」에서도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불굴의 사나이를 ‘현실과 초월의 고리’로 등장시키므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야 하는 우리들에게 ‘돌파구’와 같은 희망을 제시하고 있음에 문덕수의 시의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이번 논의를 통해 들여다본 문덕수의 시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초상」을 통해 “천개의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모습을 비우고 타자에게 맞는 ‘다정한 악수’를 청한다. 「네 개의 막대기」를 통해 ‘환경을 파괴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선함을 말살하려는 ‘막대기’에게는 ‘죽음을 선고’하기도 하고, 「원(圓)에 관한 소묘」에서는 ‘한 개의 원을 ‘천개의 원’으로 증폭, 분할시켜 ‘신의 눈알’로 치환함으로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을 결코 가릴 수 없는 것임을, 어떤 불의도 결국 드러나고 마는 것임을 알려준다. 「라일락 향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도심의 삭막한 골목길에 비둘기 한 쌍의 주둥이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냄새나는 작은 트럭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원(圓)에 대하여」에서는 원이 점에서 출발하여 선이 되고 형(型)을 이루어 생명체로 존재하여 완성체에 이르는 시련의 과정에서 스스로 ‘원’이 되고자 한다. ‘원’은 결코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 찬 충실이”라고, 한 점 지극히 작은 씨로 시작된 원, 우리는 “하나의 물방울로”, 마땅히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일 것인가를 자문하게 한다. 「섬」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가 ‘외딴 섬’이기에 눈과 눈을 반짝이고 입김서린 잔잔한 마음을 서로 나누라 한다. “「사과」한 알”에서 ‘천체(天體)’를 보며 사과를 붉게 맛 들게 하는 태양의 한 점 원초의 빛깔에서 “자아”를 찾는다.    이상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를 본인의 시론의 그물망에 비춰보기도 하고, 타자인 심상운 시인의 시론에 접사시켜 들여다 본 결과는 논하기 전에는 예측 못했던 큰 지진과 해일로 다가왔기에 하이퍼시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공상적이어서 난해하여 소통이 어렵고, 서정의 결핍으로 감동이 없으며, 다선구조의 복잡한 이미지망으로 인해 혼란스럽다는 등의 종래의 문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이 그 점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아니 ‘현실과 초월’을 접목한 생경한 묘사들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채로운 상상으로 읽힐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시편들의 행간들에서 지루함 없이 흥미를 느낄 수 있었음이 필자가 조장한 일이거나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더욱이 모든 시편들에는 인류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이 녹아있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어 시인의 역할에서 충실히 임하고 있음을 본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며, 곁길로 가지 않고 쉼 없이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열정적인 시인의 시적 행보에 경의를 표한다.   5. 결론      필자는 하이퍼시를 예찬하고자 이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지향해야할 가장 우수한 시쓰기가 하이퍼시라고 주장하고자 함도 아니다. 문덕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이 다 하이퍼시가 아니듯 문덕수 시인이 하이퍼시만을 쓰는 시인도 아니며 평론가로서 학자로서의 문덕수의 평론이 다 하이퍼시론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덕수의 하이퍼시론을 한편의 시가 아닌 몇 행의 시적 행간에만 적용해보아도 이 논의의 진의를 파악하리라 생각한다.    하이퍼적 묘사는 지금까지의 시도된 어떤 묘사보다도 시의 ‘낯설게 하기’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여 시어의 식상함을 불식시켜준다는 것을 본 논의에 인용된 작품들이 스스로 증명한다. 표현에 있어서 관념적 설명보다 ‘암시적 묘사’는 통찰력을 갖게 하여 사물의 틈과 이면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물의 이쪽과 저쪽의 대조적 상황은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현실과 초월의 대조 상황을 제공하여 상상의 이미지를 확장시켜주므로 시를 읽는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다채로운 상상의 세계를 선사한다. 이는 시가 ‘현실과 초월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섰을 때, 하이퍼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임을 밝혀주며 지금까지의 묘사에서 느끼지 못한 상상이 확장된 초월적 묘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새로운 언어의 꽃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이 점은 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논리인 것이다.    그 점에 관한 심상운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심상운 시인의 시집과 지면을 통해 발표한 시들 역시 다 하이퍼시가 아니며 많은 평론들이 모두 하이퍼시론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그의 저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평론집에 수록된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내용에서 ‘하이퍼시 창작법’으로 기술한 것을 인용하여 문덕수의 시를 접사시켜 해부해 봤을 때 시가 스스럼없이 증명해주었다. 그가 논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한 시들의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하여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한 시들은 다시점(多示點)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개성을 등장’시켜주어 새로운 시쓰기를 제시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긍정하는 것이 무리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활용을 통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 점은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켜주는 역할에 기여하고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아울러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공존하는 시를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제작할 수 있게 하는 창작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논리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하이퍼시적 요소가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실패의 소산물이라고 단정하거나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한국현대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현재 하이퍼적 구조로 창작되어 발표된 작품이 기존의 흐름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그것이 작가의 자연적인 소양이었든,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 의도였든, 그 장르를 인정하고 건전하게 비판하는 자세가 합리적이다. 물론 이 논리는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창작하는 당사자들도 하이퍼시가 아닌 타 경향의 시를 겸허히 바라보고 건전하게 비판하며, 하이퍼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복이 선도되도록 ‘서정과 이해’의 지평을 넓혀 나아가 위로와 감동을 제공하며 진리와 정의로 향하는 하나의 길잡이임을 증명할 때,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꽃 같은 언어’로 향기를 발하여 꿀벌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4    하이퍼텍스트 시 들여다보기/ 이선 댓글:  조회:790  추천:0  2018-11-03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3    사물과 기호/ 문덕수 댓글:  조회:772  추천:0  2018-11-03
사물과 기호 ― 사물시와 기호시의 가능성                                           문 덕 수(시인, 예술원 회원)            1. 탈관념(脫觀念)은 유행어인가, 시론의 한 중심개념인가. 탈이데올로기, 탈서구(脫西歐), 탈모더니즘 등이 갖는 비슷한 유행성 및 인문학적 개념 등과의 이중성을 갖는다. 우연히 걸리는 길바닥의 지푸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덮치는 강력한 회오리 같은 것이 아닐까. ‘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낡은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다는 뜻이다. 벗어 던져야 할 ‘관념’이란 어떤 관념의,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관념을 벗어던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물’(物 또는 사물)이라면 물이란 관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이란 또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물음이 서로 얽혀서 꼬리를 문다. ‘탈관념! 탈관념!’ 하고 외쳐도 이론이 뒷받침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빈 양철 두들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그리스어의 이데아(idea)의 역어라고 한다. ‘notion’도 이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불타나 진리를 관찰하고 사념(思念)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관상념불’(觀想念佛)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한자의 ‘관(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두루 자세하고 똑똑하게 본다’는 뜻이고, ‘염’(念)은 생각하여 마음 속에 굳게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데아’도 ‘본다’는 의미의 동사인 ‘에이도스’(eidos)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어원적으로 ‘본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데아는 보이는 모습, 형상(形狀), 형식 등, 이른바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념이건 이데아건 ‘감각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어원을 공유한다. 근대 이후 ‘관념’은 사유(思惟)의 대상으로 한정되어 사물을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떨어져 버린 것 같다. 한편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갈려 논의되는 경향도, 관념에서 감각적 경험이 떨어져 버린 것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의 형상을 관념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상’이라고 하고, 사유를 형성하는 능력을 ‘오성’(悟性)이라 하여 구별하는 것도 관념에서 감각적 기능이 탈락되고 있는 추세다. 관념에는 가상성(可想性)과 가감성(可感性)이 논란의 핵으로 불거지면서, 어느새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상성’만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관념이란 넓은 의미의 정신적 원리(의지, 이성 등)에 의하여 세계의 현실을 해석한 내용을 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론에서 그런 것 같다.        2. 탈관념시 운동의 효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부터인 듯하다. 정지용(鄭芝溶)과 이상(李箱)이 그 주역이다. 이 때가 탈관념시 운동의 제1기라면 오늘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제1기가 지닌 아방가르드성(性), 실험성 등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적 의미의 요청으로 변용․계속되고 있다. 정지용과 이상은 외부와 내부, 외면 사생(寫生)과 내면 기록의 대립상을 보이나, 기존의 시적 관념세계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둘의 전위적 성과의 물량은 적으나 퍽 감동적이다. 광복 후 조향(趙鄕)도 방황을 거쳐 이 노선에 합류한다.(탈관념 운동의 3인방이라고나 할까.)     바다는 뽈뽈이 달어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 정지용, 「바다 2」에서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 임화, 「玄海灘」에서     두 편 모두 30년대의 작품으로서 ‘바다’가 대상이다. 정지용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는, 그냥 벌거숭이 바다이나, 임화는 한․일간의 역사적 굴곡이 투영되어 있다. 30년대의 모더니즘이 역사주의 회피를 위한 탈출구가 아니었지만, 역사주의 쪽에서는 그런 비난을 한다. 이런 비난은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 있다. 분단상황과 통일 및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반민족적 예술지상주의라는 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 탈관념 시론은 관념주의의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물’(사물) 자체를 중요시하고, ‘관념’은 그 다음 것으로 본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 이상, 「꽃나무」에서     ‘꽃나무’에는 역사주의적 관념이 없고, 정지용과 같은 외적 객관적인 존재도 아니다. 주체(이상)의 내면 속에 상상된 점에서 정지용의 사물 점묘(事物點描)와는 다른 심리주의적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심리 속의 사물이긴 하나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니다. 30년대 탈관념론은 사회주의에 편승한 카프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운동이다. 카프계와의 골치 아픈 논전을 피하고(카프계의 조직적․전투적 논리의 과격성이 싫었던 것 같다), 정지용은 모던한 감각적 물리성에서, 이상은 내면의 역설적 고뇌의 회오리에서 조용히 사물을 응시하는 탈관념 시쓰기로 혁명한다. 그런데, 조향은 이 두 선배보다 더 치열하고 극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탈관념 시쓰기와 더불어 탈관념 이론(초현실주의 수법, 단절의 논리, 오브제론 등)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노선은 이상 쪽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손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 조향, 「EPISODE」에서     광복 후, 문단이 좌우로 분열되면서 관념시의 정치적 폭위에 맞선 조향의 탈관념 운동의 보기다. 초현실주의 시론의 영향에 압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조향이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서정주의 전통적 서정주의나 정지용 계열의 모더니즘(이미지즘)에도 맞섰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로 많이 다가간 오늘의 탈관념론 운동의 한 방향을 시사한다.     조향의 초현실주의 클럽의 멤버이면서조향의 지도를 받은 이선외(李善外)의 글이 있다. “논리적 계산하에 뒤에 올 말이 빤히 집히는 수직적인 언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진 언어들보다는 벌거숭이 언어, 인간의 현실적인 지휘(指揮)를 받지 않는, 생동하는 언어, 존재로서의 언어가 더 시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이선외, 「의식(존재)의 확대」, 초현실주의문학 예술연구회 편, ������오브제������, 덕문출판사, 1980. 3, p. 44) ‘날 이미지’나 ‘날 것’보다 훨씬 앞선 “벌거숭이 언어”라는 말이 유난히 돋보인다.        3. 탈관념 시쓰기는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고 물 또는 물체를 중시한다. 기존의 관념을 배제한다는 뜻은, 구문(構文) 구조에서 굳어진 기존의 선조적(線條的)․시간적인 단선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구문의 종지점(終止點)이건 구문의 중간 지점이건 간에 어디든 접속되어(링크하여) 새 맥락의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 맥락에서 다시 새 구문이 발생하여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도 포함된다. 이리하여 ‘물’ 또는 ‘물체’의 의미는, 내면세계의 무질서와 비슷한 하이퍼텍스트 속의 사물이나, 외적 현실 세계의 사물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세계에서 흔히 날 것, 벌거숭이 언어, 날 이미지, 있는 그대로의 사물 등을 강조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김소월, 「가는길」에서     ‘그리움’은 사물인가, 관념인가. 이 시에는 ‘이별의 현장’이 전제되어 있지만, 며칠 몇 시, 어느 곳에서, 누구와의 이별이라는 구체적․개별적 현장체험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실제의 체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도 ‘이 사람’ 또는 ‘저기 계시는 저분’에 대한 그리움임이라고 특정할 수 가 없다. 시행(詩行)의 연결에도 관념적 연속성이 있고 또 인간중심주의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도 관념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위」에서     유치환의 ‘바위’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1인칭 주체의 의지세계를 강조한 인간중심주의가 돋보이고, 사물 자체도 개념화되어 그것에 흡수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가 이어져, 바위가 지닌 물성(物性) 즉 바위의 견고성, 무게와 부동성, 풍화작용 등의 물리성을 암시하지만 바위에 대한 관념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관념이긴 하나 해석에 의하여 물성 또는 물리성을 파악할 수 있고, 이 물성을 근거로 ‘바위’라는 실물에까지 닿게 된다. 그러나 이 시를 탈관념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 서정주, 「문둥이」에서     서정주의 「문둥이」도 체험적 현장성이 약하다. 특히 문둥이의 서러움이 어떤 모양의, 어떤 성질의 서러움이냐고 묻는다면 그 구체성을 대답하기 어려운 즉 구체성이나 개별성이 없는 추상된 관념성이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밀어」),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부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귀촉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당도 청마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여서 인간 바깥에 실재하는 사물이 개념화되어 인간 쪽으로 수렴되고 있다.     -나의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 다오 -나의 더러운 몸을 말끔히 씻기게 해 다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에 물줄기는 끊기고 몇 군데 웅덩이에 웅덩이물만 남았다 그 변두리에 어떤 돌은 옆으로 서 있고 어떤 돌은 자폭(自爆)인가 엎드려 있고 어떤 돌은 엉거주춤 앉고 어떤 돌은 손을 들고 기도하듯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다 -내 죄가 있다면 물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입니다 -내 죄가 있다면 수석가의 선별 대상이 되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박명용의 「돌」 전문     이 시는 ‘돌’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타자’(他者 other)로 인식하고 있고, 돌이 의인화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그렇다고 돌을 자기화(自己化)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치사한꼴…”의 ‘나’는 의인법을 말해주는 근거이나,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바위」), “노오란 네 꽃잎이 필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 「국화 옆에서」)와 같은 ‘나’와 비교해 보면 돌과 나와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박명용은 ‘사물과 주체 사이와의 거리’를 많이 떼어 놓고, 사물을 비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바로보는 한 계기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람과 날개」, 「춤꾼」, 「숯」, 「보길도」 연작시 등이 모두 그런 작품이고, 특히 「보길도․2」 등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려는 태도를 훨씬 짙게 드러내고 있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 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에서     이 시는 박명용의 태도를 더욱 철저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 자체가 주체(시인)로부터 떨어져 거의 별개의 존재(실재)로 독립되어 있는 대상이 되어 있다. 표현에서 관조하는 시인의 감각적 시선(視線)이 감지되나, 시인의 인간주의적 어떤 감정이나 어떤 사회적 관념(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의 개입을 최대한도로 억제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이 시인은 마치 관찰의 기술자나 시 제작의 직공처럼 사물의 미세한 운동을 놓치지 않고 더듬는 운동을 보여준다.(그러나 이런 시의 경향만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성질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존 로크(1632~1704)는 사물의 성질을 세 갈래로 분석해서 보여준다. (1)물체의 고성(solidity)이 지닌 양, 형태,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靜止). 이것을 물체의 1차성질(primary Quality)이라고 한다. (2)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는 색, 성, 향, 미 등. 이것을 2차성질(second Quality)이라고 한다. (3)물체의 1차성질이 다른 별개 물체의 양, 형태, 조직, 운동을 변화시키는 능력. 이것을 물체의 능력(Power)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물 그 자체가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성질과, 물이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성질로 대별된다. 1차성질과 2차성질은 전자에, (3)의 능력은 후자에 해당된다.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 -박명용 「보길도․2」에서     파도라는 사물의 모양이나 운동을 묘사한 이 시는 존 로크가 말하는 사물의 1차성질이다. 앞에 예로 든 이솔의 시도 역시 1차성질의 것이다. 사물을 강조하는 시는 존 로크가 든 사물의 성질(1차성질, 2차성질 및 능력)을 읊은 것, 사물에서 기존의 어떤 관념을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오규원, 조영서), 사물 자체가 다른 어떤 관념이나 의미를 배후에 거느리고 마치 상징이나 메타포의 유의(喩義)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마지막 경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카프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주의적 관념이다. 청마의 의지나 미당의 서정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이다. 모두 휴머니즘을 지향하지만, 탈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임화나 청마나 미당이나 모두 오십보 백보의 관념세계다. 오늘의 분단을 강조하고 통일과 평화를 외치는 민중시도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나 역사주의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4. 이제 모더니즘의 또 한 갈래인 좀더 과격한 전위시를 보기로 한다. 이 경향은 물리주의(사물을 중시하는 모든 경향을 일단 이렇게 부른다)보다는 대상(사물)과 주체(시인)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기호의 매개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사물의 실체와 그 실체의 성질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보다는, 그 사물을 표현하는 ‘매개적 기호’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이다. 이미 이상(李箱), 조향(趙鄕) 등이 그렇게 해 왔다. 그런대로 의미 있는 이 계열의 상속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황지우, 박남철은 해체시 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기호파’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심상운, 양준호, 박찬일 등의 최근 실험은 모두 이 계열로 보인다.     앞 바다를 빨래처럼 걸어 줄에 매어놓고 나면 나부끼는 바다 핏빛 선명한 해가 미끈, 미끄러지며 캄캄하게 사라졌다 -오남구 「서해」에서     이 시는 고군산군도 근처 서해의 일몰(日沒) 현장 풍경의 이미지이지만 결코 서해 일몰의 리얼한 사생(寫生)은 아니다. 서해라는 현실적 현장의 일몰풍경이, 하이퍼텍스트 이미지 형성의 모티프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시인 자신의 자유로운 원근법에 의한 별개의 기호세계를 이루고 있다. ‘원근법’도 매개적 관계자다. 이 텍스트는 바깥에 존재하는 현장의 사물을 지향대상(referent)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자체는 사물의 세계를 넘어선 기호세계의 텍스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에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시문학, 2007. 6)의 제1연만으로는 여느 물리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분명히 사생(寫生)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2연은 다음과 같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 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심상운 윗 시의 제2연     시위 장면의 촬영현장과 제1연의 안개 속의 나무, 사회와 자연이라는 두 장면이 한 작품의 구조 속에서 몽타주처럼 연결된다. 더욱이 이 시의 제3연, 제4연에서는 계속 더욱 이질적인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연결되어 겹쳐진다. 즉 제3연은 촬영한 안개 속의 나무를 벽에 걸어놓은 식탁의 한 광경이고, 제4연은 회를 먹는 리포터의 입이 화면 가득히 확대되는 TV의 사이버 이미지다. 이 작품은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집합적 결합’(문덕수 「나의 시쓰기」)이라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분명, 우리 시의 미지의 세계다. 조향의 “유리창에 시꺼먼 손바닥/따악 붙어 있다/指紋엔 나비의 눈들이/(M․S)/쇠사슬을 끊고”로 시작되는 「검은 SERIES」는 역사주의도 아니고 인간중심주의도 아니다.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은 물체이면서 그 기호(記號)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론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일종의 혁명적 징조다. 임화, 미당, 청마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성질의 시다. ‘물체에의 접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호의 혁명적 전환에 의한 기호의 외적 지향성의 관련사물일 따름이다. 임화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물론 아니요, 청마류의 의지나 미당류의 서정 같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이퍼텍스트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물체의 벌거숭이, 날 것 그대로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 이미지’에는 내적 맥락의 연속성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맥락의 연속성도 관념이다.) 「아시체놀이」는 그런 맥락도 없다. 더욱 과격하다. 「아시체놀이」의 관념은 더욱 철저히 배제했다고 볼 수 있다. 「雅屍体 놀이」라는 시는 조향이 서울에서 주도한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연구회에서 발행한 ������오브제������(덕문출판, 1980. 3)에 수록된 작품이다. ‘놀이’라는 말에서, 여러 사람의 합작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조향 씨 주동의 학습클럽 멤버들(김요환, 이용진, 김병만, 민장호, 이선외 등 제씨)이 참여한 합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검은 SERIES」가 보여준 행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는 그것마저 단절되고, 마치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처럼 엉뚱하고 기발하고 충격적이다. 다음에 양준호의 시 「눈뜨는 나뭇잎의 9월」과 「아시체놀이」를 함께 든다.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양준호의 하이퍼텍스트도 「아시체놀이」와 비슷하다. 송시월, 박유라도 이 계열에서 논할 수 있을 것 같다.(다음 기회에는 ‘서정시와 관념시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 시궁창에 쳐 넣어진 거야. 안경알에 비친 무지개 빛깔은? 머리카락이다 세모꼴의 치아의 촌수는? 미학의 꽁무니다 -「雅屍体놀이(문답시 1)」 전문     내가 깔고 앉았던 바다를 공중변소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온 날, 뜰 앞의 노오란 민들레는 눈 멀어 종일 바닷새가 회항(回航)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준호 「눈뜨는 나뭇잎의 9월」 전문      
2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심상운 댓글:  조회:838  추천:0  2018-11-03
한국시문학아카데미 금요포럼 주제발표 원고 (2011년 8월 26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정리 : 조 명 제     ☞ 구조주의의 한계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공허하고 분명치 못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면을 ‘언어의 감옥’이라고 비판한 경우도 있다(프레드 리 제임슨『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72).   ②본디 반역사주의적인 성향에서 오는 문학의 배경 등에 걸친 입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③언어구조 등에 치우치는 데서 오는 탈사물화(脫事物化)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 다.   이런 취약성을 안고 있는 구조주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해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구조주의의 특성과 제문제   196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 특성은, 우선 그것이 ‘언어(기호)’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 곧 구조의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대별된다. 이 같은 관념은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문화, 문학, 인류학, 신화 및 기타 사회적 관습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저에 숨어 있는 공통된 체계나 법칙, 혹은 틀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그 특성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개별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켜 버리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첫째 구조주의자들은, 리얼리티는 작가의 언어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가 창조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공시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통시성을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 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서 생성되고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개체’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특권을 부여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랑그/빠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자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을 이분화한 다음, 전자(前者)에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이항대립적) 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기호의 재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없는 포스트구조주의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포스트구조구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에서 ‘해체’ 또는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가진 포스트구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우선 전술한 여섯 가지 구조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면서 시작된다.     1)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2)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이성 중심적 태도를 지양 한다. 3)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 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4)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5)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이는 곧 형이상학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 능력을 불신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서 하라리는 여섯 번째 것, 즉 재현에 대한 차이를 든다. 그에 의하면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들의 재현 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 그리고 기호와 대상 사이의 연계성을 믿는 이상주의적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구조주의의 그러한 이상주의적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안정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낙관적인 생각이 틀린 것이며, 사실 의미란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유보적인 상태일 뿐이며,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및 기호학 이론가로 자신을 해체시켜 가면서 탈바꿈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 계열의 주요 저작으로는『S/Z』(1970)가 있다.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인「사라진느(Sarrasine)」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적 책읽기를 통해 반재현적 독서를 유발하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S/Z』에서 바르트는 독자가 어떻게 고정된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후기의 바르트는,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와 가치 있는 텍스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유희(play)'할 줄 아는 작가와 텍스트를 의미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저작인『글쓰기의 영도』를 보면, 당시 사상의 중심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관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여는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르트르의 언어의 도구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관과는 달리, 바르트는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신화(myth)'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작용에는 두 수준의 질서가 있다. 제1차의 질서는 현실의 수준 또는 자연의 수준이며, 제2차의 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다. 의미작용의 제1차 질서는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외시(外示) 의미만을 생산한다. 이 수준에서 ‘한 알의 모래’는 모래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제2차 질서는 기호의 두 기본 소자들, 즉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들로부터 비롯된다. 기호가 두 개의 기본 소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2차 질서 또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함축적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신화의 질서이다. 먼저, 함축은 기표의 제2차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표가 기호의 형태를 결정한다. 기호 형태의 변이와 변용들이 여러 가지 주관적 함축 의미를 일으킨다. 이 수준에서 예의 ‘한 알의 모래’는 모래 이상의 것이 된다. 영국의 시인 W.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토목 건축업자들이라면 ‘한 알의 모래’라는 기표에서 거대한 건축 구조물을 떠올리고, 반도체 공학자들은 거대한 인공 통신조직을 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표는 보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 의미들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니는 함축 의미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 함축 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호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째로 기호를 통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신화에 의한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화를 ‘함축 의미의 체계’라고 정의하는데, 이 신화는 끊임없는 변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고전적인 신화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호의 ‘의미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섬유조직 자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패션의 체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그 텍스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의상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제 의상이 아니라 패션잡지에 글로 기술된 의상이라는 점이다. 그 글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이미 소쉬르의 제안들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에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이 언어학에 속해 있는 학문임을 주장한다. 그러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할 때는 항상 그 대상을 언어화해서 이해하도록 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피할 도리 없이 의미를 짓는 언어체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며, 나아가서 언어체는 현실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뿌리 깊은 신념인 것이다.   후기의 바르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영향과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 아래에 서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텍스트이다. 그는 텍스트의 유희성을 다룬『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비롯해서, 포스트구조주의 문학 논쟁으로 번진『저자의 죽음』(1968)을 썼는데, 다원적 텍스트론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쓸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히 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의 개념은 고정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수용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한 창조적인 하나의 저자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 있어서, 수용미학(독자 지향 이론)과 더불어 독자의 위치를 높이고 독자의 능동적 독서 행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반적인 텍스트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 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영화, TV프로그램,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code)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정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나중에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낳게 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같은 학자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리다의 초기 3부작인『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이』『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했던, 후서얼의 기호학 체계 비판과 소쉬르의 언어 중심주의 비판에는 흔히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알려진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에 있었다. 그래서 존재신학 혹은 서구 중심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공격하는 이런 데리다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논문의 핵심은 섣부르게 오해되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거 작가들에 대한 신화를 전복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바르트 역시 단일한 의미란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소설이나 미슐레의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세부 사항에 주목한다. 그것은 지시 사항과 기표의 직접적인 공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의는 기호에서 추방되고 지시 대상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형성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장치는 사실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J.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기호(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연구는 초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기표의 물결을 뒤덮는다. 데카르트 이래 소쉬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의였으며, 그것은 구조주의자들과 초기 롤랑 바르트에게까지는 중요한 입장으로 실천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와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전복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사람은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그의 강의 속에서 그 같은 전복의 관계를 설명한다. 어떤 구조 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공존하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또는 이원항)이라고 할 때, 그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보드리야르에 이르게 되면 기의는 사라지고 오직 기표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데리다는 라캉과 보드리야르 사이에서, 라캉식으로 보자면 기존의 담론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보드리야르식으로 보자면 기표들의 유희를 만들어 낸다.   데리다가 문학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 내부에서가 아니었다. 데리다의 이론은 동시대인인 미셀 푸코와 함께 빠르게 미국 학계에 전해졌는데,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인 폴 드 만을 비롯해서 해롤드 블룸에 이르기까지 해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강단에서 환영받게 된다.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파는 버로우즈나 토머스 핀천 같은 기존의 비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른바 해체비평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들   언어로 표명되는 성욕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적인 ‘무의식’을 추구하면서 특히 세 가지 주요 양상, 즉 저자(‘등장인물’), 독자, 그리고 텍스트를 취급했다. 정신분석 비평의 시작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학작품을 예술가의 징후로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 정신분석 비평은 정신분석적 독자반응 비평을 통해 포스트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문학작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는 칼 융의 ‘원형’ 비평에 의해 논박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 의해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었다. 이들은 ‘욕망’의 역동적인 개념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형을 결합시켜 영향력 있는 쇄신 작업을 해 왔다.   1.자크 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혼합한 것 같은 자크 라캉의 이론은 우선 주체(주관Subject)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조주의와 정면 충돌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불안정한 지시어에 비교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처럼 지시 어와 지시 대상 사이도 역시 불안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술행위는 만족이 아닌 욕망만을 가져다 주는데, 이 욕망은 물론 무의식과 상통하고 있다. 모든 지시어는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권하며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를 제안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따르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미끄러진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어와 혁명     문학적 의미에 관한 크레스테바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특별한 사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정렬되고 합리적으로 수용돤 것이 ‘이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에 의해 계속 위협당하는 과정을 천착하려 한다. 크리스테바의 제목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견해로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권위 있는 담론들의 분열과 연루되어 있다. 시적 언어는 사회의 ‘닫힌’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학적’인 것의 전복적인 개방성을 도입한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 분석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앙띠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5)과『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1972)에서 정신분석을 과격하게 비판하고-라캉을 끌어들이나 그를 초월하면서-동시에 그들이 ‘정신분열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을 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 분석’은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며, 편집증적 무의식적 욕망과는 달리, 분열증적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총체성의 전복을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를 한다. 문학과 정신분열의 관계는 문학도 역시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고 체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텍스트도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담론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을 해방시키는 독자’, 즉 ‘분열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rhizome)이다[엘리자베스 라이트].   해체 이론     해체비평(Deconstruructive Criticism)은 더러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해체주의는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하부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평방법을 지니고 있는 해체비평은 재래적인 작품 읽기나 해석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주장한다. 소쉬르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주의 기호학에 의해 발달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태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띤 이론이다.     1. 자크 데리다의 해체 이론     롤랑 바르트가 구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었다면, 자크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기본 명제들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며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36세 무렵의 무명학자이던 그는 1966년 미국의 존즈 홉킨즈 대학에서 열린 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여 세계적인 구조주의 석학들을 놀라게 한 논문「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이론은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의 해체적 이론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구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지만,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의 구조 개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첨예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에 새삼 주목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며,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의미가 형성된다고 여겼다. 하나의 기표는 시대의 흐름과 변천에 따라 새로운 기의가 덧씌워지곤 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들은 ‘중심’을 원한다. 중심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例)의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의 내면에서 그것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어떤 의미의 ‘중심(center)’이 ‘완전한 현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중심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욕망과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데리다는 서구의 ‘말(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 또는 ‘음성 중심주의’(『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를 들고 있다. ‘로고스’(희랍어로 ‘말’을 뜻함) 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다. 글은 말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음성을 글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 중심주의의 고전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호 체계 즉 글은 현존해 있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회의를 던지며, 근원과 현존의 부재를 주장한다. 만일 현존에 도달, 완전한 재현이 가능한 것이라면 모방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예술이나 언어도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존이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글의 서열제도를 없애 버렸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들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왜 기호는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말 중심주의는 틀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diffe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프랑스어 동사인 ‘differer’는 ‘차이나다(다르게 하다), to differ’와 ‘연기하다(지연시키다), to defer’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것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과 맥락에 의해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현존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영원히 ‘차이’를 갖게 되며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상호텍스트성 또는 범텍스트성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중심과 근원이 유보되어 있는 현 상태는 작가들에게 활발한 유희 를 유발시키며, 현실은 곧 꿈의 속성을 띠게 된다. 또한 절대적 진리의 유보는 곧 해석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고정된 결합까지도 부정하고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열린 지평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태도나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비이데올로기적이고 비투쟁적이며 텍스트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과 괴리된 비평가라는 비판을 가져다 주고 있다.   2. 미국의 해체 이론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신비평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자 수많은 외국의 이론들을 자유롭게 섭렵하고 있었다. 노드롭 프라이의 과학적 ‘신화비평’, 루카치의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뿔레의 현상학, 그리고 엄격한 프랑스 구조주의가 각각 유행하였다. 데리다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미국의 해체론과 프랑스 해체론 간의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는 비평적 글쓰기의 양 식에 있다. 예컨대 데리다와 바르트가 때로(특히 1970년대 이래로) 파편화되고 장난스러운 담론을 선보이는 데 반해, 드 만과 밀러 그들은 잘 짜여진 관습적 텍스트를 내놓는다. 그러니까 미국의 해체론자들은 온갖 텍스트성의 자유 유희를 주창하면서도 전통적인 담론 양식을 실천한다.   ✿폴 드 만(Paul de mann)/ 드 만은 모든 언어는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반대의 뜻을 갖는 것은 언어의 지칭력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언어의 수사성’이라고 불렀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상반된 뜻을 갖는 경우에 해석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신비평의 모호성과는 다르다. 모호성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이지만, 드 만의 수사성은 이미 언어 자체가 서로 반대 의미를 품고 있어 해체되어 버리므로 엄밀히 어느 쪽 의미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헤이든 화이트/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사적 유형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바, 역사 편찬학(역사 이론)에서 화이트는 잘 알려진 역사가들의 저작들에 대해 과감한 해체를 시도했다.『담론의 수사학』(1978)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서술을 객관적이 라고 믿지만, 구조와 관계되는 그들의 기술 행위는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롤드 블룸/ 블룸은 전통에 대항하는 시인의 강한 자기 주장이 괴기한 오독을 낳는다고 했다. 시인은 늘 앞선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강한 에고는 선배의 시를 잘못 읽는다. 그러나 억압된 선배의 시는 흔적으로서 후배의 시에 수정되어 나타난다. 블룸은 ‘시적 오독’에 관한 4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후 영미의 주요 시인을 탐구했다.   ✿제프리 하트만/ 하트만은 모든 것이 자리바꿈이고, 다만 과정에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비평의 사회적 책임 역시 텍스트를 서로 공유하는 상호 관련성에 있을 뿐이다. 그는 ‘연기(delay)’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면서 의미의 결정이 늦춰지는 게 아니라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스스로 해체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J. 힐리스 밀러/ 밀러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라고 설파한다. 그의 수사비평은 데리다의 ‘차이’와 폴 드 만의 수사성이 묘하게 혼합되어 단어, 이미지, 작품들의 관계가 모두 반복이고 자리바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셸 푸코의 언술과 권력     미셸 푸코는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언어를 모든 역사적, 사회적 틀에서 분리시켜 언어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이다.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푸코는 ‘글쓰기’란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언술의 힘을 통해, 그리고 특정 의미의 부여를 통해 저자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언술행위라는 것은 곧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그래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배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개념이란 사실 그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합법화시킨 것일 뿐, 혁명 후에는 그것이 곧 불의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절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곧 임의적인 것이 되고 불안하게 되며, 드디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영합한 공식적인 언술행위와 그것의 억압에 대한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그러한 공식적인 언술행위가 오랫동안 제외해 온 또 다른 소외된 언술행위로 눈을 돌리게 해 주었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온갖 억압을 합법화,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당화는, 압제자에게는 스스로 당연한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그리고 피압제자에게는 압제가 당연한 것으로 순응토록 만든다는 점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감시와 규율과 교화의 목적은 비정상인의 정상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정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문제려니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간 정상화되었다고 판정을 받는 비정상인들은 대부분 모범수가 되어 이번에는 제도적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동료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결탁과, 제도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문제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형무소, 복지원, 고아원, 학교, 정부, 성(性) 등의 모든 사회제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푸코는 시사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교묘히 모든 것 속에 들어가 있고 너무도 널리 편재해 있어서 밖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푸코는 바로 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탐색하여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 비평가의 작업이라고 했다.『광기의 역사』『말과 사물』『지식의 고고학』『감시와 처벌』『감옥의탄생』『性의 역사』등 그의 저서들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에 큰 획을 그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작 이론/ 푸코의 미국쪽 제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중요한 저서『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푸코의 담론 이론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데리다를 세속성(worldiness)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한 더욱 급진적인 비평가이다. 사이드는 텍스트가 산출되고 위치해 있는 역사적 순간이나 그 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무시한 채, 텍스트 내면의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 문학비평의 현황을 개탄하며, 텍스트는 고고한 고립에서 벗어나 보다 더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사이드가 말하는 세속화란 물론 텍스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텍스트와 현실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을 의미한다. 사이드의『시작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우선 그것이 그 동안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지배적 언술행위의 군림과 횡포에 저항하여, 그것과 다른 언술행위를 찾아 내고 인정하며, 또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   신역사주의 비평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던 해체론이 80년대 후반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역사 또는 역사주의를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는 비평 이론의 하나로 등장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이론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신비평과 해체비평에 이르는 여러 비평 경향들을 원용하여 낡고 고착된 ‘역사’의 개념을 다시 꺼내어 재조정하고 재조합해 보려는 일종의 역사 새로보기 작업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모든 표현적 행위는 유물론적 실천의 그물망에 내재되어 있고, 문학과 비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그 전략을 살펴보면 신역사주의 이론이 해체비평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와의 근친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신역사주의가 푸코의 역사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 이론과 카니발 개념까지 넘나들면서 해체주의와 변별성을 유지하고 이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유물론이란 용어는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좌파 전통의 진보적 정치비평가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것의 실천적 활동은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 진행되어 온 문화 분석의 여러 형태를 토대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역사학, 사회학, 문학연구 분야의 영문학, 여성론, 대륙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혼합, 수렴되어 왔다. 알뛰세와 미하일 바흐찐의 영향하에 있는 영국 문화유물론의 기본 가설과 개념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깔려 있는데, 문화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을 특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설사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렇듯 사회적 과정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보편적 진리라든가 인간의 본질적 본성 등에 집착해 왔던 관념적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코 한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조의 이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심문을 하면서 비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형이상학 전체의 전제와 가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 그것이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항해 해체되도록 하는 비평태도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현대 서구 문학비평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 방대한 지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으며,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절대적 의미의 안정된 근원을 교란시키고 해석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며 모든 결론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 체제나 지배 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개체’의 해방을 외치며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끔 인정하듯이 주장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숙명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만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려는 것조차도 그들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신역사주의자들은 그 이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도와 주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입주의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 텍스트적인 역사 이론을 창시한다. 문화유물론의 경우 그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하는 반면에 의미의 순진한 자유 유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 ❧   ⓛ.담론(談論): ‘discourse’의 역어인 ‘담론’은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학문분야와 사상조류들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말로 하는 언어에서는 한 마디의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을 가리키고,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 말 또는 한 문장만을 분석하는 언어학적 방법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문장이 다른 말 또는 다른 문장과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론이란 한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이론의 범위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셸 푸코는 담론을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고 자기 지시적인 집합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 형성, 권력의 체계 및 행사에서 담론과 권력은 구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담론이 비평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전개, 편입되면서 담론비평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담론비평의 이론적 원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반기를 든 바흐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흐찐은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언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언어를 이데올로기, 물질성, 계급 투쟁과 분리시키려는 일체의 언어론에 맞서고 있다. ②.의미작용(의미화):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③.코드와 코드화: 코드화란 기의와 기표간의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작을 말한다. 의미 작용과 코드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코드화가 자의적 조작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려면 기호 사용자들에게 코드화된 것을 관습화시켜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화를 필요로 하지만, 의미 작용은 코드화와 동시에 탈코드화를 허용한다. 탈코드화는 예술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술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예술에 생명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코드란 메시지를 한 가지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변환시켜 주는 명료한 규칙들의 묶음이다. 즉, 코드란 ‘기호를 위한 명료한 사회적 관습들의 체제’이다. --------------------------------------------------------------------------- ❧ 라만 셀던 외(정정호 외 譯)-현대문학 이론 개관(한신문화사), 레이먼 셀던(현대문학이론연구회 譯)-현대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문덕수-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시문학사), 이명재-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권택영-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민음사), 김용권-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윤호병-후기구조주의(고려원), 인문과학연구소(편)-현대 문학비평 이론의 전망(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움베르토 에코-기호학 이론(문지), 자크 라캉(권택영 엮음)-욕망 이론(문예출판사),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한국기호학회 엮음-문화와 기호(문지), 한국기호학회 엮음-현대사회와 기호(문지), 이상우 외-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이승훈(편집)-현대시사상ㆍ2(고려원, 1988) 외. ------------------------------------------------------------------------ ❧   ‘살려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김춘수「처용단장-제2부, 3」,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同,4). ☞ 대상과 주제가 없이도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해체적 인식 끝에 얻은「처용단장」제2부는 일체의 관념이나 설명이 제거되고 증발된 탈관념의 세계요, 통일된 어떤 아이콘[像]으로서의 이미지도 없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언어와 언어, 또는 문맥과 문맥 사이의 단절과 차단으로 중심이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기호는 그 고유한 의미를 잃고 오직 무한한 상호지시의 관계로 존재할 뿐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도 춤추며 노래한 처용의 그 기이한 행위처럼, 일상적 혹은 논리적 의미체계를 일거에 소거시킨 이 비논리적 리듬의 연속성은 의미가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애절한 분위기의 주술적 충격으로만 전해 온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시니피에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뒤덮고 물결치는 시니피앙의 화려한 유희,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전복된 탈중심의 소용돌이(궤적)가 현저한 상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돌아가는 긴장으로 하여 팽이가 일어서듯, 그리고 현기증 나는 회전으로 하여 울음 울 듯 시니피앙의 유희와 울림의 효과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탈중심 탈이미지의 세계는 현기나는 리듬의 실존적 환열 바로 그것이다. (조명제). ------------------------------------------------------------------------ ✯   (1) p.184-7~9행:만일 구조주의가 영웅적으로 인위적인 기호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희극적이고도 반영웅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한신문화사)/만일 구조주의가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것이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희극적이고 반(反)영웅적인 것이 된다.(문학과지성사), p.185-4~6행:이것은 마치 다양한 언어들이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이념들의 세계를 다른 개념(기의)들로 조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단어들(기표)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한신)/그것은 마치 여러 언어들이 사물과 관념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개념(‘지시어’)과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지시 대상’)로 분리하는 것과도 같다.(문지), pp.185-맨 아래~186-1~2행:소쉬르는 언어가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하나의 총체적 체계라고 설정한 후, 비록 기호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킨 것이 기호의 일관성을 없애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호의 일관성에 관한 감각을 보유하고자 노력했다.(한신)/언어를 외적 현실과 독립된 완전한 체계로 확립시킴으로써, 그는(*소쉬르) 비록 기호를 둘로 나누는 것이 그것의 응집력을 위협하는 것이긴 했지만, 기호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문지)☯  
1    하이퍼시 시론/ 심상운 댓글:  조회:725  추천:0  2018-11-03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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