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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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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리좀 자료[스크랩] 댓글:  조회:871  추천:0  2018-11-06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새물결)   1. 서 론 리좀   우리는 둘이서『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이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없는 몸체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화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 접속 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특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 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어린 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징들. 원리 1과 원리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多質性)의 원리: 리즘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리즘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산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나 유사성은 없다. 다만 기표작용적인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이 있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이 있을 뿐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에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수염뿌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위계적이지 않은 척 제시되고 언표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계적인 해답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 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한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1장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영문과 최진범  1.책에 관하여  1)책이란 무엇인가  리좀이란 중심뿌리 없이 갈라지고 접속되는 모양을 가지는데 들뢰즈,가타리는 전통적인 책의 구성을 벗어나 책을 리좀과 같은 구도에 따라 만들려고 한다. '천 개의 고원'의 각 장은 다른 장과 이어질 수 있지만 독립적으로도 읽을 수 있는(평지와는 구별되는 높이와 강밀도를 갖는 여러 개의 고원으로 구성된 것이다.-형식의 문제  이 책은 두 사람이 쓴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발언한 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삶 속에서 관계했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각자가 여러 명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고 말한다.-저자의 문제  책의 형식과 저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에서 두 사람의 책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는데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맑스의 자본  저자들은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라고 말하며 상이한 속도를 갖는 흐름들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책은 하나의 다양체"라고 말한다.  **예 -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 , 맑스의 '자본'  2)책과 외부  어떤 책도 그 외부의 산물이며 책의 내부란 그것의 외부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사회,역사적 환경의 산물) - 예 :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스콜라철학의 개념이용, 국부론은 18세기 자본주의의 산물, 신채호의 역사적 상황)  외부란 사회,역사적 환경뿐 아니라 다른 책들, 그 책들이 대결하고자 하는 사유들, 독자들이 대결하고자하는 사유들, 이미 씌여진 어떤 책이 만나는 역사적 사건들도 포함한다.(사회주의 혁명을 향하던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과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에 그것을 읽는 것의 차이, 독자의 관심분야의 차이, 그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책의 차이, 목적의 차이)  어떤 책도 그것이 어떤 외부와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내용과 다른 효과를 갖는다. 외부와의 접속지점에 따라 다른 책-기계가 된다.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책은 작동하며 다른 책-기계로 변환된다. 책은 그 외부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  3)책의 유형들  -수목형 모델(뿌리형모델)  중간가지를 거쳐 하나의 중심으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 형태를 수목형 모델이라고 하는데 이런 책들은 하나의 결론에 귀착하며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는 책으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책은 반성적이며 고전적이고 이분법과 일대일대응의 방법이다라고 한다.  -총생뿌리(곁뿌리형)  저작집이나 전집처럼 귀착되는 중심은 없어도 여러 책들이 저자로 귀착되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한 명의 작가라 할지라도 역사적,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 귀결로 인해 많은 작품들을 왜소화, 단순화시킬 수 있다. 또한 이는 책들이 각기 다른 외부와의 접속과 변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증식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리좀적 유형  각각의 장들이 정점없는 고원으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으며 각 고원들은 서로 다른 고원들의 환경이며 다른 고원으로 가는 표지판이기도 하다.(예: 원오 극근의 벽암록)  들뢰즈, 가타리는 뿌리형 책의 모델이 국가라고 본다. 이러한 국가의 초월화, 특권화는 세계질서에 로고스라는 내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국가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외부를 통해 작동하는 책-기계는 외부에 따라 변이하는 책이란 개념을 낳음으로써 책이나 사유가 하나의 모델에 뿌리박는 것을 방해하고 상이한 외부를 향해 달리게 한다는 점에서 유목적인 사유를 촉발하며 국가장치에 반하는 (유목민적)전쟁기계가 된다.  "책으로 하여금 모든 유동적인 기계의 부품이 되게 하며 줄기로 하여금 리좀이 되게하는 배치"를 리좀적 유형의 책이란 개념을 통해 저자들이 말한다.  2. 리좀의 몇가지 특징들  1)접속의 원리  -접속(-와-) : A와 B가 등위적으로 결합하여 제3의 것인 C를 만들어내는 것  -이접 : 배타적 이접(A냐 B냐?), 포함적 이접(A든 B든), 둘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호오의 가치판단  -통접(그리하여-) :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통일체로 귀결되는 것, 여러기관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것(유기적통접)이나 여러 요소가 모여 하나의 흐름(흐름으로서의 통접)이 되는것  통상적으로 이접과 통접은 관련항을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가지만 접속은 두 항이 등가적으로 만나 제3의 것,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 이는 귀결점이나 호오의 선별이 없으며 접속의 항이나 지점이 달라지면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생성의 가능성)  2)이질성의 원리  리좀은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접속가능성을 가지는데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이질성이 결합하여 새로운 이질성을 생성한다. 반면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접속가능한 것을 특정한 계열로 제한하는 조치들이 국가적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의 '중심(일자)'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며 새로운 증식의 선을 통제한다.  3)다양성의 원리  차이가 차이로서 의미를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양성이다. 차이가 하나의 '일자'로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것이 다양성이다. 하나의 척도에 의해 차이들이 규정될 때 종류가 늘고 추가된다면 그것은 전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수목형 다양성'일 뿐이다.  반면 리좀적인 다양성은 하나의 척도로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집합이며 전체의 의미가 뒤바뀌는 다양성이다. 이는 배치의 문제인데 배치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서 전체의 의미가 바뀌는 다양체를 설명할 수 있다.(축구공의 문제)리좀은 접속하는 선의 수가 늘어나면 그에 따라 차원수가 증가하는 만큼 그 다양성내지 복잡성이 증가하는 프랙탈(?)한 다양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체는 외부에 의해 정의된다."는 말은 어떤 외부와 어떤 접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형태가 바뀌는 리좀적 다양체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추가되는 외부의 선(외부로 분기하는 탈주선,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다양체가 정의된다는 의미이다.  4)비의미적 단절의 원리  -절단 :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르는 것. 소리의 흐름을 일정한 언어적규칙에 따라 음소로자르고 절단된 것을 기표적 연쇄로 만들며 그것을 통해 소리를 의미화한다.  -단절: 주어진 선과 연(緣)을 끊는 것이고 그 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노다지-기존기표적계열에서 벗어나 다른계열의 일부가 되는 탈영토화, 탈주)  비기표적인 단절은 리좀의 특징이다. 이는 기원이나 근원적인 의미(일자)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채 떼어내어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오르키데와 말벌의 리좀-서로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존재간의 비평행적 진화(?)) 리좀은 선들이 넘나들고 횡단,접속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두 개의 지층간에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이러한 비기표적인 단절을 주 지층간의 평행론이라고도 한다. 이는 '만나지 않는다'와 '상응한다'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5)지도그리기(cartographie)와 전사술(de'calcomanie)  이 두가지의 원리는 모방이나 재현과 관념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리좀이란 "모상이 아니라 지도"라고 한다. 지도는 구체적인 행동의 경로를 찾는데 사용되는데 이는 우리의 행동의 경로와 진행, 분기 등을 표시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다이어그램이다. 다이어그램으로서의 지도는 행동과 삶의 길/방법이 접속되고 분기되는 양상이고 그 경로들의 위상학적 관계이며 그 경로의 장애물의 적절한 표시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모상도 삶의 다이어그램이 되지 못한다면 지도가 아니라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 정확성은 삶의 경로를 그리는 데 필요한 요구에 의해서만 유의미하다. 데칼코마니는 접는 순간 원래 그렸던 형상이 접히는 면에 의해 변형된다.(탈모상) 현실에 따라 지도를 그리지만 그려지는 지도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 그것을 저자들은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한다. 몰적,분자적 선분성의 선들의 배치(?)  3.수목적 사유와 리좀적 사유  1)수목적 체계와 위계적 체계  수목에서는 중심과 가까운 것, 먼 것간의 위계가 발생하고 잔가지들은 중심에 동일화하고 그것과 포개진다. "수목적 체계는 의미화와 주체화의 중심을 포함하며 중심적 자동장치를 갖고 있다." 이는 상위이웃만이 있을 뿐 나란히 선 이웃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우정의 정리) 이 경우 다양성이란 중심으로 환원된다는 의미에서 사이비다양성이다. 이런 복수성의 '흉내'는 의미화와 주체화, 조직된 기억등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통해 각각의 개체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중심화된 위계체계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위계화에서 벗어나려면 중심(독재자)을 제거해야한다(n-1). 중심의 제거 그것이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비체계가 아닌 비중심화된 체계이다. 다양한 집결지를 만들 수 있는 체계이며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이며 접속의 항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라 할 수 있다.  2)초월성과 내재성  수목적 체계는 '일자'라는 중심으로 인해 초월적 사유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원리를 찾아 거슬러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이를 첫 번째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이다. 이것은 그 보편적인 제1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이다. 근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근거지움을 하이데거는 '신'이라고 한다('존재신론').  반면 연기적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상호간의 내재적 관계에 의해 도든 것을 포착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재성은 서양에 대비한 동양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특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서양의 사유의 모델은 각각의 생활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 서양이 숲과 밭의 수목적 유형의 농경과 목축의 모습이라면 동양은 스텝, 초원과의 관계를 맺으며 개체의 분열에 의해 진행되는 덩이줄기의 문화를 이루었다. (동서양의 차이의 예 1 : 성에 대한 상반된 태도 - 서양은 자손의 생산의 개념에서만 성을 허용, 동양은 양생술처럼 삶 자체의 기술로서 다루어졌다. 예 2 :관료제의 개념 - 계급에 상응하는 수목성의 도식에 따라 형성되는 서양의 관료제, 동양은 운하의 관료제로서 전제군주는 하나의 점이나 원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흘러가는 강, 일자가 아닌 리좀이다.)  3)리좀 속의 수목, 수목속의 리좀  리좀과 수목은 이분법적인 개념임은 분명하지만 두 개념 각각이 상대개념의 싹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가 겹치거나 포개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보고 있다.  이항적인 개념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고 그런 선택으로 좋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의 의미도 아니다. 이는 이항적 대립선이 고정적이거나 항구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또한 탈주선이 허무주의적일 때 어떠한 선분성의 선들 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과 매끄러운공간이 더욱끔찍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리좀과 수목의 상호발생계기(가능성)를 가지고 있다. "리좀안에 수목적인 마디가 있으며 뿌리안에 리좀적인 압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상호대립이 아니라 "끈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것이며, 끊임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들의 이분법적인 개념은 해체된다. 모든 것은 전화될 수 있고 연기적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리좀도, 나무도 자성(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평가가 초월적이란 것은 아니다. "표현과 행동을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 내재성의 구도위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리좀은 시작, 끝이 아닌 중간, 중도의 사유이다. 중간은 평균이 아니라 사물들이 속도를 취할 수 있는 표면이다. 수직적인 방향이며 하나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횡단적 운동이고 두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개울이다.  리좀은 일자성의 중심을 제거함으로써 내재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내재성이란 어떤 것의 본질이 달라진다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이는 모든 것을 일자로 통일하려는 초월성과 대립하며 그러한 초월자를 제거하거나(n-1)그것을 무나 공으로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내재성속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의 고정된 본질, 내적인 본질이 없으며 다만 외부와의 관계에 따라 접속한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고 본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재성은 외부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사유이고 외부에 의한 사유이다.  리좀은 초월자를 제거함으로써 나무나 뿌리의 초월성을 내재성으로 바꾸는 것이며, 외부와의 접속이란 원리를 통해 '외부'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형성한다. 내재성의 원리에 따라 접속가능한 양태들 전체의 장을 내재성의 장이라고 한다   
14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 / 정 신 재 댓글:  조회:1101  추천:0  2018-11-06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   정 신 재   “얼마나 많은 기차가 지나갔는지/ 얼마나 많은 이별을 했는지/ 낡은 침목은 가끔 쿨럭거리고/ 날것의 비를 온종일 맞은 침목처럼/ 갈비뼈는 평생 울음을 받치고 있었다/그 새벽 기차 소리 듣는 사람은/ 소리가 시나브로 사라질 무렵/ 한 가지 깨닫는 게 있다/ 더 이상 기차가 가슴 위를 지나지 않을 때/ 마지막 승객이 내가 된다는 것/ 철커덩철커덩 기차가 멀리 떠나고 소리 잠든다/ 아직 새벽이다”(이성주,「기차 떠나는 새벽」에서)   사람들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곳은 미지의 세계일 수도 있고,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일 수도 있다. 우리가 창작을 하는 것은 현실을 닮은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한 고독과 사색의 경험도 포함된다. 그곳에 가면 진실과 진리와 아름다움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모두(冒頭)에서 이성주의 「기차 떠나는 새벽」을 인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침목은 가끔 쿨럭거리고/ 날것의 비를 온종일 맞은 침목처럼/ 갈비뼈는 평생 울음을 받치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들의 갈비뼈는 실재(實在)에 가 닿기 위한 창작열로 불타고 있다. 우리가 왜 전국 각지에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여기에 모여 있는가. 그것은 단지 하나 문학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문학이 우리를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 모여서 우리는 각자 그동안 쌓아 두었던 고독의 짐을 풀어 놓고 영혼을 전율시키는 감동을 찾아 그것을 독자들에게 실어나르기 위해서 잠시 정거장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찾아나서기 위한 기착지(寄着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인간 구원과 존재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창작의 길이 쉽지  않음을 실감할 것이다. 그것은 문학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전철을 타거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갤럭시를 보는 데 익숙하고, 맛집이나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데서 쾌락을 맛보기도 한다. TV 시청자들은 리모콘을 들고 보다 재미 있는 프로를 찾아 채널 돌리는 데에 익숙해 있다. 이제 전철에서 책을 보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에 따라 문학은 몇몇 유명 문예 잡지를 제외하고는 온라인 문학 카페에 정착하기도 한다. 달라진 것은 비단 문인들의 모임만이 아니다. 문학 양식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시에 소설적인 이야기나 대화가 들어가는가 하면, 극적 구성이 짜여지기도 하고 소설에서 시나 소설적인 요소가 나타나기도 한다. 장르의 탈경계나 가로지르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의 음보만 보더라도 예전의 3,4음보보다 훨씬 긴 음보가 유행하고, 아예 산문율로 이야기나 대화가 전개되기도 하며, 극단적이거나 엽기적인 행위가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이 컨시트로 엮어지거나, 현실과 환상이 하이퍼링크로 연결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기법들이 문예 잡지사마다 특징을 가지고 자리잡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하이퍼시를 소개하려 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단편적인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는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하여 정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 그림이나 밑줄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화면에 나오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하여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는데,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쌍방향성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 텍스트가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통의 지식, 성장하는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연결 고리는 리좀(rhizome)의 사유에 닿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tree)형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 바 있다. 리좀은 우리말로 근경(根莖)이나 뿌리 줄기에 해당한다.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속을 파고들어 사방팔방으로 소통하면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모호해진 상태를 말한다. 수목의 개념이 계통화되고 위계화되는 방식에 있다면, 리좀의 개념은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성에 있다. 리좀은 새로운 접속과 창조가 이어지면서 열린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리좀은 원줄기를 가지고 있으나 수만 갈래의 뿌리 줄기와 네트워크화를 이루고 있어 원줄기와 단절되어도 생명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리좀은 탈중심성, 탈고정성, 탈유한성을 지향하는 담론에서 즐겨 비유된다. 리좀은 이성적 사유, 전통적 시적 주체를 해체하고 시인과 독자의 소통 구조를 단선적 구조에서 다양한 해석 체계로 전환시켜 주고 있다. 리좀적 사유를 담고 있는 하이퍼시는 시어 혹은 시행을 따라가다 보면 시적 주체가 더욱 탄탄해진다. 좌충우돌하는 듯한 이미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교차되면서 더욱 탄탄한 의미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시는 생명을 얻고 이미지는 성장을 한다. 초현실주의시들이 이미지조차 단절시키고 있는 데 비하여,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새로운 결합을 보여준다. 하이퍼시는 첫 시어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이미지가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절은 영구한 단절이 아니라 또다른 연결고리를 위한 일시적인 단절이다. 결국 그 연결망은 한 편의 작품에서 충실한 의미를 가진다.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정보가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퍼시가 가진 의미의 단단함과 주제의 생명성은 하나의 주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해석, 즉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행은 끝이 나도 이미지의 구성은 끝나지 않고 독자들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래서 언어적 유희, 발랄한 상상, 재빠른 이미지의 전환 등과 같은 요소들이 비틀어짜기로 결합될 수 있다.  심상운은 「하이퍼시의 창작 방법」(, 2008.10)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 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 현실의 보여주기는 갈등 구조인 소설적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떠한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되었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 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를 보면 하이퍼시는 초현실주의시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시가 의식과 무의식 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이미지와 이미지, 현실과 상상, 행과 행, 구절과 구절이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제시하고 두 사물 간의 거리를 멀게 함으로써 상상의 힘이나 의미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하이퍼시는 사물 간, 이미지 간 거리가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의식과 무의식, 존재와 존재, 사물과 언어가 하이퍼링크로 연결되어 있음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이성주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어머니 나를 물에 빠트린다 괘씸한 년, 말 없는 손이 무겁게 짓누른다 수초를 뒤집어 쓴 어머니 나를 잡아끌었다, 떨칠 수 없이 엄마, 나는 물에 젖어 울었다 사람들이 명당이라고 말한 송추松楸는 시름시름 앓았고 차오르는 물보다 더 빠르게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유택幽宅으로 향하는 길목 번번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나도 이끼로 덮여갈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수의 하나 맞췄다 물에 잠겨 퉁퉁 분 몸으로 관 속에 들어갔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 물은 바닥을 다 드러내고 어머니 안녕하시다  - 이성주,「이장移葬」전문   이 작품에서는 죽은 어머니와 산 화자가 하이퍼링크로 만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은 슬픔으로만 고착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화자를 “물에 빠트”리는 악마도 될 수 있고, 화자는 어머니와 놀아주는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이때 무덤은 놀이의 공간이 되고, 물은 두 존재를 맺어 주는 수단이 된다. 놀이는 화자가 관 속으로 들어가는 입관의식으로까지 발전한다. “나도 이끼로 덮여갈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수의 하나 맞췄다/ 물에 잠겨 퉁퉁 분 몸으로/ 관 속에 들어갔다”. 이 작품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는 꿈 장면과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무덤)을 다룬 현실이 하이퍼링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하여 존재와 존재-화자와 죽은 어머니-, 존재 存在와 부재不在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시선을 해체하고 현실과 무덤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가져다 준다. 이는 하이퍼링크가 가져다 준 놀이의 방식이다.      잘 익은 부사를 깎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이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깎아낸 부사 쟁반을,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전문   이 작품에서도 “잘 익은 부사”와 “문장 부사”가 하이퍼링크되어 있다. “부사”는 “꽃뱀 한 마리”와 연결되지만 “또아리를” 트는 사과 껍질을 연상하면 두 사물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행에서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도 “부사”와 단절되어 있는 것 같지만, “부사”의 둥근 모양과 사람의 둥근 얼굴이 환유의 관계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등을 비롯한 현대의 철학자들은 해체를 강조하여 왔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 간에 기존의 관계를 해체하여 존재나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해체가 존재로 나아가는 다양한 의미를 표출한다고는 하지만, 존재나 사물이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해체된 의미들이 엮어져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결합이 요구된다. 하이퍼링크는 흩어져 있는 의미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데 소용된다. 이미지나 사물의 단절과 결합은 생명력 있는 존재나 사물을 만드는 필요적절한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존재와 존재를 해체하고 결합함으로써 시에 생동감과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를 응용하는 것은 여러분의 권리이다.            * 정신재 약력                                 1983년 1월 지를 통해 문학평론으로 등단. 1992년 국민대에서 문학박사학위 취득. 제14회 문학평론가협회상, 제4회 이은상 문학상 수상. 현재 시인, 문학평론가. 저서-『 성과 광기의 담론』외 14권.  
13    조향 자료 댓글:  조회:1452  추천:0  2018-11-06
문자 반복법,   나뭇가지를 간질이고 가는 상냥한 푸른 바람 소리도 들리고 거기에 섞어 드는 소녀의 한숨 소리 계절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소리가소리가. 나는 사람들과 화안한 웃음들 이 살고 있는 세계가 무던히도 그립다. · · · 내 머리 위로 지나간 검은 直線 위엔 세삐아의 밤이 타악 자빠져 있는데 그 밑창에 가서 비둘기들은 목을 뽑아 거머테테한 臨終을 마련하고 · · · 있다. 참 많기도 한 세삐아 빛 밤밤밤밤. 밤의 꾸부러진 지평선엔 · · · · · 바아미리온이 곱게 탄다. 그럼. 너는 아무도 없는 밤의 低邊에서. 메키시코 의 사막 지대. 너와 나와 사보텐 꽃과. 행복한가? 그럼요.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밑에서 이렇게 당신이 내 곁에 누어 있고. 그럼요! 비쥬! 너는 박꽃처 럼 웃는다. 特號 活字를 위하여. 오오. 오오. 디엔· 푸우. 首相들의 悲壯한 연 설. 電波. 파아란 電波가 地球에 마구 휘감긴다. 가이가 計器는 파업한다. 애인들은 바닷가에 있다. 엘시노아의 파도 소리 지층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나는 아아라한 고대처럼 잠자고 있다. 있어야 한다. 나는 영원을 산다. 개 울 물소리. ― 「녹색의 地層」 일부       아래 시는 「바다의 層階」 전문이다. 이 시에는 부호 ‘ · ’가 외국어 방점처럼 등장한다. 필자는 컴퓨터 위에 방점을 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였음을 밝힌다. 컴퓨터 세대도 아닌데 조향 시인은 시의 ‘시각 디자인’에 일찍 눈을 뜬 것 같다.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 여보세요?   · · · · · 폰폰따리아 · · · · 마주르카 · · ·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 · · ·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조향, 「바다의 層階」 전문   위의 시에서 ‘방점 위치’를 주목하여 보자. 많은 평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조향의 초현실주의 대표시다.그러나 본 장에서는  시로 분류한다. 방점은 통통 튀는 음악성을 시에 부여한다. 문자 배치와 이질적 이미지의 배열은 시각적으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 는 ‘경쾌한 전화소리-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문자 위 방점 있음)-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 랑데부우- 기중기의 허리 - 푸른 바다의 층계’ 등 더 복잡하고 많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모두 ‘- 가볍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무거운 이미지의 ‘푸른 바다’와 ‘기중기’까지도 ‘푸른 바다의 층계’라고 시각 디자인된 감각적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는 바다 위에 층계를 그리며, 바다로 내려가는 여인을 상상한다. 시의 중심어들이 모두 가벼움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무거운 ‘기중기’도 ‘기중기의 허리’라고 하여 가벼움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오늘에 부르는 너의 이름은 -回想의 노래   3연 1행 ‘밤마다 듣는 빗소리 초록 초로록’ 청각 이미지를 색깔 이미지로 치환함. 공감각적 이미지의 하이퍼시     체조 - 어느 女學校에서   까만 부루우라로 발끈 자른 눈[설원]빛 토실한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2연 1-2행 감각적 표현,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에로티시즘 이미지다.           2장 5연 ‘바다에서 바람이 오더니 내 넥타이를 만져 보곤 가 버린다/ 바람은 검은 망토를 입고 있구나/ 나는 너를 보내러 왔다 항구로 왔다.//― 「RON VIYAGE!」 부분   김춘수 시의 영향? 동인으로서 서로 시어를 소통하며 나누었다. 김춘수 시 검은 망토의 부분 찾아서 넣을 것. 부산에서 동인활동     비행기는 은으로 칠한 “나이프”다 하늘에 그어 놓은 숱한 “피규어” 끝에 회색 그림자가 장 미의 睡眠 위에 사뿐 포개진다. 구름은 OBLATE 휘날리는 “나프킨” 되어 食卓에 와 앉는다.   이질적인 언어의 결합으로 된 낯설게하기의 성공적인 문장이다.   현재 필자는 하이퍼시 동인으로 하이퍼시를 쓰고 있다. 이선 첫 퍼포먼스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과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에서 다수의 하이퍼시를 발표하였다. 또한 문화원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면서 을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결론   하이퍼시의 모듈 개념은 똑 같은 크기의 상자를 포개어 책꽂이를 만들거나, 똑같은 플라스틱 상자를 만들어 도시락에 넣는 반찬통과 같은 개념이다. 작은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뭉쳐서 시 제목을 완결하는 원리다. 모듈과 리좀의 구조는 기존의 관념시, 서정시와 차별화된다. 서정시는 주의주장이 강하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고 명령적이다. 관념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제한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영화 기법을 차용하여 상황을 ‘보여주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상황으로 느낀다. 상황을 제시만 하고 시적 화자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서정시와 차별성을 보여준다. 비논리성과 분리성의 연결이다.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주장하였다. 필자는 와 상상력의 비약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주장한다. 또한 하이퍼시는 미술의 추상화 기법과 같다. 불특정한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날아다닌다. 도안이나 디자인처럼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단절되거나 이질적 이미지들이 결합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한 영상감각을 가지고 미술의 구성기법처럼 색깔 이미지가 선명한 것도 필자의 하이퍼 시의 특징이다. 동인지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조향은 초현실주의적 하이퍼시에서 무의미 시를 주장하였지만, 의미화도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질적 문장들의 결합, 각 행의 분절, 즉 단절을 지향하였다. 전위, 이질적 이미지 결합, 폭력적 언어결합-고정관념을 벗은 시어, 이미         연구 범위?? 조향의 시는 전반기 서정시는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 거의 없다. 후반기 작품 중에서도 말기로 갈수록 점점 작품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에 동인을 결성하였으나 전쟁 발발로 동인이 해체되었다. 그후1952년 부산에서 
12    하이퍼시의 현실성 / 이영지 댓글:  조회:1010  추천:0  2018-11-06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MmP7&fldid=cMZO&datanum=120
11    후기 현대와 파편적 글쓰기 /윤호병 댓글:  조회:1056  추천:0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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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스크랩]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댓글:  조회:790  추천:0  2018-11-06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9    [스크랩]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상운 댓글:  조회:1477  추천:0  2018-11-06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출처 :시의 꽃이 피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비밀의 숲    
8    인식에서 탐색한 불확실성의 해법 /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댓글:  조회:973  추천:0  2018-11-06
  ㅁ 조대희의 시 세계 인식에서 탐색한 불확실성의 해법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序-현대시의 유형과 경향 현대시의 유형과 그 경향은 대체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시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정성이 충만한 리리시즘(lyricism-詠嘆調)이나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낭만적인(romanticism)시법에서 주제의 창출(創出)에 근원을 두고 많은 시인들이 만유(萬有)의 자연과 인간의 소통에 관한 교감을 시적 진실로 현현(顯現)하면서 미감(美感)의 언어와 잠언적(箴言的)인 구도에 집착한 경향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 후에는 민족적, 역사적으로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문질문명의 팽배(彭排)로 다양한 사회적인 변혁(變革)이 현실적으로 삶과(혹은 인생과) 직결됨으로써 우리 인간의 사유(思惟)에도 혁기적(劃期的)인 변화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6. 25라는 단일민족의 상쟁(相爭)과 4. 19의거, 5. 16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우리들의 정서에서 발현된 시적 구현은 그 시대적인 모순과 불합리들이 문학적인 비평의 대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천은 결과적으로 우리 문학에도 다원적(多元的)인 영향을 주면서 오늘까지 발전해 왔다. 그것이 시대적으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성이 복합적으로 포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학의 지향점을 적시(摘示)하는 과도기적인 역할을 충분히 발휘한 것이라고 평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대체로 그 변화를 살펴보면 20세기 초 영국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의 다다이즘(dadaism)과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그리고 독일의 표현주의나 미래파 등이 주창하여 세계적인 문학운동을 포괄한 반항적이며 실험적이었던 모더니즘(modernism)이 우리 문학에도 도입되고 그후에 포스트 모던(post modern)이라는 경향까지 대두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김춘수는 시에서 역사와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체의 선입관을 중지하는 현상학적 환원으로 몰두함으로써 언어의 물화(物化)를 주장하면서 모더니즘을 철저하게 심화(深化)한 ‘무의미 시’를 내세워서 시적 인식이 대단히 낯설고 난해한 인상을 우리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다시 우리들은 정치적인 참여시(혹은 민중시, 노동시 등)의 시대를 지나서 디지털시대를 접하면서 디지털 시(digital poetry))와 하이퍼 시(hyper poetry)의 출현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우선 이 두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오남구의 「디지털 시대의 시 전망」중에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 ‘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심상운의 「하이퍼시의 구조적 전망」중에서   이와 같이 ‘탈-관념’이라는 시인의 주제(의미)의식을 배제한다면 독자들에게 전해질 메시지가 애매해진다는 점이다. 결국 사물시(physical poetry)의 형태로 남아 모든 관념은 사물에게 의탁(依託)하게 되는 것이다. 조대희 첫 시집『오돌뼈』를 읽으면서 먼저 왜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느냐 하면 그의 표현 기법이 어쩌면 관념의 이탈(離脫) 어법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완전한 티지털이나 하이퍼가 아니면서도 약간 난해성이 포함된 시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우리의 서정주의의 범주(範疇)에서 변형된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의 암시(暗示)가 짙게 흐르고 있다.   바람 많던 어느 여름날 문 밖의 사람이 스치듯 초인종을 눌렀다. 머릿기름의 양복쟁이는 일만원권 상품권 열장을 부챗살처럼 펼치더니 굉장한 행운이라도 안긴 듯 말씀이 많다 말씀은 허공을 울리고 난 그의 얼굴과 몸짓을 신기한 듯 관찰한다 몇 분 뒤 그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배고픈 나는 비빔밥을 맵게 비벼 먹었다. 얼마 뒤 하나님의 나라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하늘님과 전화선을 연결하는 꿈을 꾸던 나는 직접 통화를 하고 싶었다 문밖의 사람들은 비밀인 듯 난처해 한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천국을 빼앗으려 했다. 무례한 그들을 그냥 둘 수 없던 나는 재봉틀 바늘처럼 말박음질을 해두었다 그날 밤은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편안히 잤다. 며칠 뒤 온종일 비가 내렸다. 문 밖의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나는 공손하게 문 밖의 사람을 문 안으로 들였다. 문 안의 사람은 자식은 딸만 둘을 두었고, 두 딸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 하며, 주일이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음식으로는 후춧가루 듬뿍 친 카레를 좋아한단다. 결국 나와는 닮은 게 없는 문 안의 사람 나는 문 밖으로 문 안의 그림자를 내쫓고 모든 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 문 밖의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다.   그렇다. 실제로 이 작품「문 밖의 사람」 전체에서 풍겨지는 관념이나 이미지는 별 흡인력(吸引力)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대희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인 광활한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내어 우리 인간들과 접맥(接脈)하려는 언술(言述)이 하나의 스토리로 전개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강렬하게 취택(取擇)하려는 주제의 향방은 ‘나’라는 화자(話者)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대체로 자아(自我)의 인식을 통해서 미지(未知)이거나 미확인(未確認)된 진실을 탐색하는 현실적인 고뇌가 응집(凝集)되어 있어서 그의 깊은 시혼(詩魂)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2. 자아 인식과 시적 진실 조대희 시인은 그의 시적 체취(體臭)에서 풍기듯 시어나 소재 혹은 주제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자아의 인식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무엇을 갈구(渴求)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몰입(沒入)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으로 많은 시인들이 추구하거나 탐색하는 시적 구도의 상황(situation)은 대체로 자아를 인식하기 전에 상상력을 통한 체험의 회상(回想)이 현실적인 존재와 생명성 그리고 가치관 등이 복합적으로 창조를 위한 한 단계의 의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그 시인이 지향하는 실생활(real life)에서 가감(加減) 없는 인식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는 현실과 상충(相衝)하는 고뇌와 갈등의 요인이 발견된다. 시인들은 이 요인들을 새롭고 진취적인 인생관의 정립을 위해서 또 다른 진실을 탐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대시의 보편적인 흐름으로 나타나지만, 작금(昨今)의 우리 현대시의 경향은 다소 다른 세계의 시법을 이해하게 한다.   이랑 사이를 구르며 밤새 내린 서리처럼 김장독을 파묻은 땅 속만큼의 온기도 없이 나의 몸속은 한겨울 밭고랑이었나 파르르 떠는 이파리를 지나 저 멀리 첩첩산중 넘어간 바람의 속도로만 달려 왔는가 장작불 연기가 더 높이 오르는 나무 가지마다 터질 듯한 열망들이 자라고 썩은 동아밧줄인 줄도 모른 채 고기 심줄 같은 고집이 내 몸 속에 자라고 있는가 간간이 돌부리 사이로 돋은 황갈색 겨울풀들을 위안 삼는 동안 짧은 해가 나를 넘어가고 있구나 내가 그늘지고 있구나 남은 것은 속도뿐 깊은 고랑엔 하얀 눈물이 고이는구나 겨울 땅속 지렁이처럼 그림자도 없이 젖어가고 있구나 --「남은 것은 속도뿐」전문   조대희 시인이 ‘나’를 인식하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 감지(感知)할 수 있듯이 ‘저 멀리 첩첩산중 넘어간 / 바람의 속도로만 달려’온 ‘나’는 ‘온기도 없이 / 나의 몸속은 한겨울 밭고랑이’며 ‘고기 심줄 같은 고집이 / 내 몸속에 자라고 있’으며 ‘짧은 해가 나를 넘어가고 있’으며 ‘그림자도 없이 젖어가고 있’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이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아니 절대 절망에서도 ‘나’를 발견하고 자성(自省)의 언어를 매정스러운 현실 속에 녹이고 있다. 이는 그가 ‘한겨울 밭고랑이었나’, ‘달려 왔는가’ 혹은 ‘자라고 있는가’ 등의 의문형으로 시적 진실을 탐색하고 있는데 마지막 두 연에서는 ‘있구나’라는 긍정의 의식으로 전환하는 특성이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 살 여름 늦은 오후 그날따라 난 혼자였다. --중략--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위로해 줄 사람도 없었으므로 --「일곱 살 그 어느 날 먹빛 하늘의 밤」중에서   슬픈 인형놀음 같던 지난 날들 썰물에 던져버려라 소용없던 침묵의 세례 밤하늘에 날려버려라 --「섬」중에서   조대희 시인은 다시 ‘난 혼자’라는 고독감에 젖어 있으나 ‘나를 구해줄 사람’과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너는 햇살에 춤추고 / 빗물로 자라는 꽃 / 나는 부들부들 떨며 / 나를 지키는 눈이었을 뿐(「애인」중에서)’이라는 체념(諦念)과 자성으로 이러한 절망의 ‘먹빛 하늘의 밤’을 쳐다보면서 그는 ‘지난 날들’은 ‘밤하늘에 날려버’리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망은 결국 부질없다 마음이 주저앉아 있을 때도 실핏줄 가득한 낙엽은 차곡차곡 쌓여 씨앗의 대동맥으로 뻗어가고 있다는 것을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네 겨울 숲길을 나오며 난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했네 --「행복」중에서   그는 이와 같은 인식의 계곡을 지나 비로소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으며 ‘난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심리적인 변환(變換)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러한 고뇌를 ‘내 노래의 유일한 반주는 / 외롭고 긴 침묵(「행복」중에서)’이라는 진솔한 심경을 토로(吐露)하고 있어서 그가 감응(感應)한 ‘깨달음’은 바로 ‘나’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나’를 정립하는 그의 진실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밖에도 ‘나 다시 태어나면 / 인정 깊은 산골마을에 / 개봉숭아나무 한 그루로 서고 싶다’거나 ‘내 몸은 견딜 수 없어 / 햇살에 바람에 날아갈 듯 / 낼개춤을 출 것이다(이상「구두 발자국」중에서)’라는 긍정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그가 탐색하는 자아의 인식은 현실과의 괴리(乖離)에서 파생(派生)된 잡다한 모순과 불합리에서 탈피하려는 진실 지향의 시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3. 불확실성 시대의 해법 조대희 시인은 이러한 시적 상황을 중시하면서 다시 그에게서 시적인 절정(絶頂)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불확실 시대에 대한 해법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은 / 둘 중 하나다 / 인생을 통찰通察했거나 / 아니면 / 무지몽매無知蒙昧 // 그런 점에서 / 난 / 부자유不自由하다(「자유」전문)’는 언술과 같이 어쩐지 ‘부자유’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인생의 통찰’은 그의 시야에서 미지(未知)이거나 불확실성(不確實性)이다. 그는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요(「우문 즉답」중에서)’라거나 ‘담장 그늘 밑 얼음이 녹고 / 장독대 위로 하얀 나비가 날 때쯤이면 / 풀잎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오돌뼈」중에서)’라는 시적 화자(話者)의 단정이나 의문과 같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은 모두가 불투명한 채 인생행로를 달리고 있다.   땅 위의 삶은 행복했을까. 어쩌면 옮기고 싶지 않은 용궁에서 계속 헤엄치며 살고 싶었을지도 몰라. 울긋불긋한 국방색 무늬와 너무 커져버린 몸뚱어리가 내내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꼬리 없는 엉덩이를 흔들며 미나리깡 풀섶을 하염없이 맴돌고 다녔을지도 몰라. 흐르다, 변신하며 떠밀려 온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올챙이에 대한 단상」중에서   그렇다. 조대희 시인은 ‘몰라’라는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미지나 불확실성에 대해서 자신만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데 ‘싶었을지도 몰라’,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다녔을지도 몰라’, ‘있었을지도 몰라’라는 그의 절실한 호소는 ‘올챙이’가 ‘땅 위의 삶은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불투명한 대답이다. 결론적으로 ‘몰라’라는 대답은 현실적인 의식에서 불확실하게 작용하는 모든 불합리나 부도덕 그리고 불평등 등에 적용된다. 그는 이러한 미확인의 갈등에서 생성하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시적 구도를 형성하면서 더욱 미지의 세계를 확인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그는 작품 「문 밖의 사람」에서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으며 /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지 못한다 / 배달을 언제부터 했는지 /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 아내도 모를 것이다’라거나 ‘가정방문 받은 어린 아이처럼 / 허둥거리는 나에게 / 수치를 적은 아저씨는 / 오래 말린 곶감 같은 입술로 / 고맙다는 인삿말을 남긴다. / 뒤돌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 내년쯤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라고 ‘우유 배달부’와 ‘가스 검침 아저씨’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 ‘모른다’라고 일관함으로써 그의 미지에 대한 시적 발상은 더욱 현실적인 거리감이 팽배한 우리 인간들의 갈등이 상존(常存)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 그림자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물기에 젖어 빛나는 / 깊은 구렁 속 그 눈빛과 / 멀리서도 언제나 혼자였던 / 그의 뒷모습만을 /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어조와 같이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서만 현실을 유추(類推)할 뿐이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나 불확실성의 현실은 ‘물이 물의 이름을 갖기 전 / 바람이 바람의 이름을 갖기 전 / 내가 내 이름을 갖기 전 / 서 있던 자리마다 / 내가 보이기 전까지 / 난 사람도 아니다(「난 가끔 사람도 아니다」중에서)’거나 ‘이제는 바라는 것도 없어 / 그저 무덤도 없는 남편이 불쌍할 뿐이야 / 세상이 나를 참 오랫동안 속였어(「꽃다지」중에서)’와 같이 깊은 자책(自責)을 하거나 수긍(首肯)하고 있다.   네가 나무로 서 있던 시절 내 몸 속이 온갖 잡초로 무성해 바람에 이리저리 나자빠질 때 물줄기를 끌어 올리던 힘으로 나를 끌어 올리던 것이 혹시 너였을지도 그래, 나무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라 --「나를 벤 종이와 대화하기」중에서   나는 또 물었다. 너는 어디 있느냐고 오래 전 떠났던 길로 돌아와 동무들과 술을 건네고 때론 어깨동무같은 촌스런 몸짓을 부리다 뜨듯한 국밥 한 그릇 나누다 보면 너를 만날 수 있느냐고 --「여행」중에서   보라. 조대희 시인의 사유는 이제 ‘나’와의 대칭인 ‘네(너)’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네가 나무로 서 있던 시절’에는 ‘내 몸 속이 온갖 잡초로 무성’했으며 ‘나를 끌어 올리던 것이 / 혹시 너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라’라는 어조로 서로의 의문을 대화로 해법을 탐색하고 있다. 다시 그는 ‘너는 어디 있느냐’ 또는 ‘너를 만날 수 있느냐’하고 ‘나는 또 물’어 보고 있다. ‘오래된 주인과 함께 늙은 / 벽걸이 그림, 속 / 서늘한 달빛 하늘을 / 수십 년동안 목을 빼고 바라보는 저 사슴이 / 네가 아니더냐’라는 물음에 그의 사유가 집착되면서 ‘나는 나와 마주한 거울 속 사내에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적절한 화해(和解)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화해의 언어는 이 시집의 표제(標題詩)가 되는 「오돌뼈」에서 그 해답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는 ‘뱃속을 두툼하게 입힌 소주의 온기에도 / 덜덜거리는 입속의 한기에 / 오도독 오도독 이빨 조각들을 씹는 것인지 / 이빨 사이로 흐르는 감탄사를 씹는 것인지 / 헛소리만 뻥뻥 쳐놓고 / 마른 장작처럼 갈라질 거면서 / 오래된 찰흙 인형처럼 똑똑 부러지고 말거면서 / 타액과 섞이다 이내 부서지는 / 오돌뼈 같은 삶'이라는 결론으로 유로(流路)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4. 結-현실적 고뇌와 기원 그렇다면 조대희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기원하는 시적 진실은 무엇인가. 그가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내 시의 주인은 / 고향이고 바람이고 꽃이고 이웃이다.’라는 간명(簡明)한 언술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그가 지향하려는 심저(心底)에는 이미 ‘고향’과 ‘바람’, ‘꽃’ 그리고 ‘이웃’을 연결하는 정서의 원류(源流)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가 지금까지 시적 구도로 설정한 자아의 인식이나 불확실성에 관한 다원적인 문제들이 결국 삶의 현장에서 파생한 현실적인 보편성에 근원을 두고 새롭고 진취적인 기원의식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나이 마흔, 앞으로만 달리기에는 지나간 시간이 아프고 시리기만 하여 갈바람을 등짝으로 맞서며 휘휘 자유롭게 날아보는 꿈을 꿈꾸고 싶다 --「여로(旅路)」중에서   혼합된 덩어리색들로 어지럽고 무거워 숨도 고르게 쉬지 못했다. 땟국물같은 물감을 씻어내고 계곡물속의 모래알을 보듯 멀리로 아름답게만 갈 수 있는 시냇물이고 싶었다. --「전시회」중에서   사래라도 잔뜩 낀 양 토하지도 못하고 어두운 새벽길을 홀로 길들여 왔듯 이젠 눈부신 강 너머 꽃밭길을 해 다 지도록 걸어봤으면 좋겠네 --「십일원의 새벽 안개」중에서   이들 작룸에서 일별(一瞥)할 수 있듯이 ‘내 나이 마흔’이라는 시간성을 먼저 설정하고 이를 전제로 한 기원이 현현되고 있는데 그는 ‘.....싶다’라거나 ‘....싶었다’ 그리고 ‘좋겠네’라는 기원의 언어로 현실적인 삶과 상관관계를 심층적(深層的으로 적나라(赤裸裸)한 어법으로 열망(熱望)하고 있다. 그는 ‘자유롭게 날아보는 꿈’과 ‘멀리로 아름답게만 갈 수 있는 /시냇물’과 ‘눈부신 강너머 꽃밭길을 / 해 다 지도록 / 걸어봤으면’하는 소박하면서도 청순한 소망이 어찌보면 조대희 시인이 탐색하는 진지한 해법으로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작품「바람 1」에서 ‘난 / 바람이 / 참 좋다’라거나 「어느 날」에서 ‘멈추고 싶지 않은 예행연습 / 끝내야 할 때를 // 알고 끝낼 것’ 그리고 「바람 2」에서 ‘숲을 열고 머리칼 빗는 / 햇살 한 무리에 섞여 / 강으로 들판으로 나는 / 바람이었으면 해’라는 긍정의 해법으로 기원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에게 내재된 진실의 중심에는 미지와 불확실 혹은 미확인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고뇌와 갈등을 스스로 해법을 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대희 시인은 이러한 현실성과 공감하는 사회성과 시사성에 대한 작품도 대할 수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적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순정적이며 서정성을 잃지 않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잘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불란서의 시인 볼테르가 말했듯이 시는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녹아 흘러야 할 것이다. 이는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리라. 그의 시가 고향과 바람과 꽃과 이웃이 공존하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더욱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진실로 각인(刻印)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시인들의 숙명(宿命)이며 영원한 과제로 남는 것이다.*  
7    상징 시에 대하여 [스크랩] 댓글:  조회:840  추천:0  2018-11-06
상징 시에 대하여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일어나 20세기초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사조로 사실주의에 반대하고 낭만주의를 계승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주의·자연주의·고답파 등의 외면적이고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의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하려 했던 문예사조. 여기서 말하는 상징은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직유에 의해 암시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는 낭만주의적 표현방법이다. 상징주의에서 말하는 상징이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 즉 어느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결합하여 조립되고 환기되어 전혀 엉뚱한 관념 등과 연결되는 상징을 흔히 썼던 것이다. 여기서 새로 창조된 새로운 이미지는 결국 초월적인 세계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까지 연결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후반에 정착되기 시작한 고도의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 서구 사회.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들의 끊임없는 세력확장으로 온 사회가 빈틈없이 얽매어지게 된다. .  1차 세계대전  직후 노동계급과 부르좌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던 시기. 사회 전반에 위기감과 불안감이 팽배해지자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이 부활하게 되었던 것. 상징주의는  초월적 정신 세계의 상징으로 보고, 문학을 통해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정신세계에 접근하려 한 것. 현실세계에서 자아를 구속하는 여러 규범과 사고의 통제를 벗어나 무한한 꿈과 신비의 세계를  노래하던 문예사조 .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려 하지 않고, 감각의 대상이 암시하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  대표 작가로는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등.         상징주의(象徵主義)  1. 상징주의(象徵主義)의 개념  (1) 상징주의의 말뜻 ① 상징 : 상징의 서양어인 'symbol' 은 '함께 내던진다'는 뜻인 그리스어 'symballein'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어원에는 '하나로 맞추어 보다, 비교해 보다'란 뜻이 들어 있었고, 나중에 '표시, 표지, 표징, 기호'등의 의미를 얻었다. 동양어로 상징(象徵)은 유형의 사물을 이용하여 무형의 주관적인 것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이 때 상(象)은 실재의 세계에 대한 표징을 가리키고, 징(徵)은 징조를 가리키므로 '괘상(卦象)을 통해서 표현된 하늘의 징조'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실재(實在)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암시해 주는 표징이다.  ② 상징주의의 일반적 개념 상징을 사용하여 사물, 정서, 사상 등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와 경향을 의미한다.  (2) 상징주의의 개념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의 예술 운동과 그 경향. 사실주의, 자연주의, 고답파 등의 외면적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적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또는 신비적 내용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의 예술 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경향을 가리킨다.  2 . 상징주의의 시대적 조건  (1) 사회의 상태 19세기 후반의 서양 사회는 경제적으로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다. 이에 따라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 범위와 관세 구역, 독점 영역, 카르텔, 트러스트, 신디케이트 등이 빈틈없이 사회를 얽어 맨다. 이와 함께 파리 코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이것은 불원간 1차 세계 대전으로 분출되지만 제국주의의 국가 간의 경쟁과 함께 한 국가 사회 내에서도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2) 사상적 배경 사회 전반에 팽배한 위기감과 불안 의식은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을 부활시키고, 한편으로 사회의 비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력한 신앙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상징주의가 기대고 있었던 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타난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 칼라일의 '의상 철학'에서 표현된 상징이 의미의 제시와 은폐를 동시에 행한다는 관점 등이다. 이 밖에 영혼의 불멸성, 영혼의 비물질성 등을 주장한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또한 직관의 중요성과 체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상징주의의 사상적 배경으로 들 수 있다.  3.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은 체계적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 따라서, 작품 속에 자신들의 문학관을 피력한 시인들의 관점이 상징주의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징주의가 성립된 배경에는 낭만주의와 프랑스의 고답파의 이론이 큰 작용을 하였다. 낭만주의에서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분하여 알레고리는 구체적 이미지의 형태로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지만 관념이 이미지에서 어느 정도 독립되는 데 반하여, 상징에서는 이미지와 관념이 완전히 통일되어 분리될 수 없으므로 보수의 의미를 지니고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이론이 성립되었다. 한편 예술 지상주의의 고답파는 시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형식의 순수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는 관점이 생겨났다.  즉 낭만주의에서 발전되어 온 상징 이론과 고답파의 심미주의적 이론이 상징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경향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시적 완결성을 기하면서도 도덕적 규범에 매이지 않고 그로테스크한(기괴한) 것이나 퇴폐적인 감정을 문학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상징주의는 정제된 표현을 지향하는 아폴로적 경향과 그로테스크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악마주의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 양분되었다. 즉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했던 말라르메나 발레리가 아폴로적인 경향이라면, 시인은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고 본 랭보는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4. 상징주의 문학의 전개  상징주의는 세기말에 상징파 운동을 낳는다. 하지만 다른 문예 사조와는 달리 상징주의는 유파 활동보다 선구자와 창시자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1) 선구자   고티에는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헌정한 시인으로 고답파라는 예술 지상주의를 이끌었다. 그에 의해서 작품의 완결성, 예술적 가치만이 작품 평가의 기준이라는 관점이 성립되었다. 상징주의가 극도의 예술성을 추구하고 심미주의적 특질을 지니게 된 데에는 고티에의 영향이 크다. 한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도 지대하다.  그는 문학이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반대하여 기괴한 것, 퇴폐적인 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낭만주의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엄밀하게 계획된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 신비한 효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포의 이러한 생각은 보들레르와 예이츠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보들레르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 문명의 정화인 도시의 인공적 삶을 재현하여 인간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즉 도시는 죽음으로 제시되며 그 속에서 현실의 삶이 무기력과 쇠락의 분위기에 빠져있음이 환기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산문적 형태를 시험하기도 하며 언어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시집의 '상응'은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들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고 그것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상징주의의 핵심적 교의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3) 랭보 견자(見者) 시인으로 불리는 랭보는 감각의 착란과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현실과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천재 시인이었다. 평상적인 경험과 습관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완전히 계시에 의해 빚어진 듯한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보들레르가 시작한 산문시를 적극적으로 계발하기도 했다. 사물이 배후에 지니고 있는 미를 발견하기 위해 평소의 습관과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을 냉철히 투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감각을 평소의 무디어져 있는 상태에서 예리하게 분리하여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즉 ' ~처럼', '~같은' 등의 설명적인 말을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서 독자들이 스스로 의미를 추론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설명되지 않은 상징들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여러 감각 영역들 사이에 있는 여러 관계와 상응의 양상을 표현하도록 하는 방법을 시에 도입하였다. 말라르메에 이르러서 상징주의는 정점에 이른다.
6    판타지론 / 유창근 댓글:  조회:1078  추천:0  2018-11-06
판타지론 유창근     아동문학 작품에 판타지가 많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이들이 전래동화를 좋아하므로 전래동화와 유사한 요소를 지닌 판타지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이들의 ‘동심’이 판타지를 좋아하고 그 속에 빠져들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판타지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따라서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이 함께 공존하며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탈출하여 만물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 판타지의 개념 판타지는 영상映像·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인데, 일반적으로 환상이나 공상을 뜻하며, 문학에서는 몽상적 이야기를 가리킨다. 중세 유럽을 그 배경으로 하며, 19세기 말 E. 네즈비트는 마술적 존재를 그린 아동문학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일상의 마술>이라 하여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오늘날에는 환상문학 가운데 괴기와 공포를 주제로 하지 않는 작품, 공상과학소설(SF) 가운데 과학이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작품, 현실과 전혀 다른 가공의 신화적 세계를 무대로 영웅모험담을 그린 작품을 가리킨다. 판타지는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이라 할 수 있다. 토도로프는 판타지를 망설임의 문학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현실의 질서와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황당무계하고 초자연적인 이야기 앞에서 자연법칙과 상식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이 마음속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망설임과 갈등이야말로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판타지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8∼19세기에 걸쳐 요정이야기가 유행하였지만 괴기소설·암흑소설에 밀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등을 제외하고는 공포이야기가 판타지로 불리는 예가 많았다. 따라서 판타지 걸작은 앵글로색슨 및 북유럽 권에서 많이 나왔으며 L.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L.F. 봄의 『오즈의 마법사』(1900) 등이 대표적이다. 판타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톨킨(1892∼1973)의 『반지의 제왕』도 모든 판타지의 효시라기보다는 현대 장르 판타지, 곧 모험형 장르 판타지의 공식과 문법을 처음으로 제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판타지는 흔히 도피문학이라고 비판되지만, 1938년 발표된 평론 「요정이야기에 대하여」에서 톨킨이 도피를 용기 있는 행위로 평가한 뒤 인식이 바뀌어 오늘날에는 문학의 한 장르로써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근대의 아동용 공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장르로 판타지를 쓰고 있으며, 성인용 공상이야기는 ‘에덜트 판타지’라 하여 구별한다.     2. 판타지의 유형 판타지의 양식을 일정한 유형별로 분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판타지는 그 특성상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양식이 창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판타지 동화에서는 다른 장르처럼 유형들 간의 특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이다. 현대동화에 나타난 판타지의 유형은 학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① 상위판타지high fantasy : 이 세상과 관련이 없는 다른 세상을, 이른바 2차 세계secondary world를 무대로 삼는다.이 용어는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1939년에 쓰기 시작한 용어로, 이 세상의 실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관된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세상을 말한다. 즉 2차 세계가 존재하며 2차 세계에서 비합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② 하위판타지low fantasy : 이 견해는 널리 수용되어졌으나, 용어의 선택은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위판타지’는 스타일이나 성취도에서 낮은 작품이란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하위판타지는 모든 이야기가 현실세계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면서 그 안에 비합리적 현상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한편, 캐롤Carol과 칼Carl은 『아동문학Children’s Literature』에서 판타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현대 민담 : 전승적 판타지로 명명하기도 한다. 즉 전래동화나 옛날이야기에 나타나는 공상성이 풍부한 판타지를 말한다. 공상의 사전적 의미는 실행할 수 없거나 실현될 수 없는 생각이라고 적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상성은 판타지 동화에서 납득할 만한 구성과 장치가 동반된 것을 말한다. 내용에서는 인물묘사가 거의 없거나 갑자기 결심하는 등의 빨리 변하는 플롯과 애매한 배경을 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마술 때문에 전통적인 이야기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 판타지가 거부반응 없이 수용 되는 까닭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처럼 주술적 언어로 독자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전승 판타지는 이야기의 구조상 전래동화와 현대동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다.     ② 몽환 판타지 :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꾸는 꿈을 도입한 판타지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여서 최근에는 창작과정에서 제외되는 경향이지만, 초기의 판타지동화 중에는 꿈을 도입한 경우가 많았다. 꿈은 일체의 관념이나 제도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사고하거나 그 사고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판타지동화에 빈번히 사용한다. 환상은 꿈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꿈을 환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꿈이 판타지 세계로 비상하고자 하면 상상력의 날개를 달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우의 판타지 : 동식물이나 무생물 등 비인격체에 인격을 부여하여 의인화한 판타지를 말한다. 동물들이 이성을 지니고, 말하고, 감성을 느끼는 등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물건이나 장난감 또는 인형 등의 무생물체가 사실적 인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다. 대상과 인간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 융합은 일단 원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어린이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모든 만물은 살아있다는 생각, 곧 물활론적 사고가 존재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이나 영적 존재를 인격화하는 데서 발생했거나, 비인간적 존재인 무생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격화하는 데서 발달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의인화된 동물, 장난감, 사물들도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모두 가능하며 독자들은 흥미를 갖게 된다. ④ 마법 판타지 : 요술이나 마술, 마법과 같은 신비한 힘이 도입된 판타지다. 마법이란 판타지 동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등장인물, 줄거리, 구성 속에 마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법에 관한 이야기들은 선과 악이 대결하는 싸움이 있으며 주로 유머와 익살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 판타지는 어린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판타지의 유형이다. 이런 유형은 현실을 통해서만 접근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현실을 뛰어넘은 과장되고 우스운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시각에서 나타나게 된 양식이다. 이는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린이들은 현실세계에서 부딪치게 되는 제약이 많기 때문에 이 제약을 무너뜨리려는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 욕구는 사회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심리가 있으므로 마법의 힘에 매력을 갖게 된다. 마법은 현실에서는 생겨나기 어렵지만 판타지의 세계에서     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⑤ 심리 판타지 : 등장인물의 의식세계에서 발현되는 공상의 세계는 물론 의식의 흐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심리판타지는 몽환판타지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꿈의 세계를 다루지 않고 현실적 의식세계를 다루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심리판타지는 본격동화운동이 일어난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이 현실세계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다양하게 행동을 전개해 가는 판타지 동화다. 동화가 가져다주는 풍부한 환상적 삶을 빼앗긴 어린이들은 대체로 마법이나 마약, 점과 같은 길을 통해 어른들 세계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욕구불만을 대리적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가장 어리고, 가장 힘이 없는 성격의 동화 속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좋은 판타지 동화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적 판타지는 대개 주인공들의 의식 속에 상상의 날개를 달게 하여 현실세계를 벗어나 환상의 세계를 유영하게 한 후 다시 현실세계로 안착하는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환상과 현실과의 자연스러운 넘나듦은 독자들에게 환상의 무한한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심리판타지는 소유하거나 이루고 싶은 둥장인물의 욕구가 상상이라는 의식세계에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⑥ 시적 판타지 : 시의 표현방법으로 이뤄진 판타지로 서정성이 뛰어나며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적인 문장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판타지라고는 할 수 없다. 동화의 스토리나 인물의 행동에 환상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가 실제적 관심이나 사실을 보고하는 말이라면 시어는 느낌이나 해석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는 비약, 리듬,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곧 시는 사실보다는 초월적인 것이요, 논리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언어 결합에 의한 이미지로 이뤄진다. 이처럼 시는 직접 일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의 표현 방법으로 이뤄진 판타지를 시적판타지라고 명명하는 경우도 있다. 판타지가 현실세계를 초월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창조의 세계라면, 시 또한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여 상상력으로 해석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판타지와 시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적판타지의 가장 큰 특징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상이 현실 같고, 현실이 환상 같아 그 구분이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시적 판타지 동화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설명이나 상황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⑦ 역사 판타지 : 역사 판타지는 타임 워프time warp판타지라고도 한다. 현재 주인공이 다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 이야기다. 두 시대간의 대조는 현대에 사는 주인공의 그 이전 시대의 관습에 대한 놀라움과 발견을 보여준다. 역사 판타지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역사소설에서처럼 역사적 배경을 사실처럼 전개시켜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작가가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과정에서 은유와 상징과 풍자를 불어넣어 창작한 판타지를 말한다. 그러나 시적판타지와 함께 은유와 상징을 투여하여 문학성을 높일 때 판타지로써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문학성이란 판타지 속에 내적 질서를 부여하여 사건을 현실감 있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⑧ 추구 판타지 : 탐색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모험 이야기다. 추구는 정의나 사랑 같은 고상한 목적이나 마술의 힘,숨겨진 보물을 찾는 등의 어떤 보상을 쫓는 것이다. 색채가 뚜렷한 추구 판타지는 하이 판타지에 속한다. 이러한 판타지에서는 가상세계의 사회나 역사, 가계, 지리적 위치, 인구, 종교, 관습과 전통 등을 자세히 그려낸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주로 선과 악의 투쟁이 중심이 된다. 대개 등장인물들은 신화나 전설에서 끌어온 것들이다. 주인공은 외부 악의 힘과 대항하고 내부적으로는 약해지려고 하는 유혹과 싸운다. 그래서 추구 판타지는 주로 주인공의 자기 발견과 개인적인 성장, 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⑨ SF(공상과학)와 과학 판타지 : 과학 판타지란 첨단 과학문명의 산물인 미래의 우주세계나 외계인이 등장하고, 컴퓨터, 로봇, 레이저, 지하도시, 해저도시 등을 소재로 하여 펼쳐지는 판타지로 SF를 포함하는 판타지를 말한다. SF는 과학적 사실과 원칙에 토대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여주는 상상문학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SF이야기의 요소들은 과학적인 가능성이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 배경이나 사건들이 과학적 개념이나 이미 알려진 기술의 범위에 토대를 두고 설정되기 때문에 SF에 나타난 인류와 우주의 미래에 대한 가설들은 독자들에게 그럴싸하고도 가능한 것 같     이 받아들여진다. SF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어린이가 살게 될 미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과학 판타지는 꼭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미지의 세계로 상상의 도약을 하기 위해 과학적인 설명이 덧붙여지는 유형이다.    결론적으로, 판타지란 현실 속에 비현실의 세계를 생생하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창조해주면서 전개시키는 조직체다. 그러므로 그 세계가 비현실이기는 하지만 논리와 질서가 서 있어야 하며, 깊은 사상이나 철학적 주제성과 함께 힘의 관계가 유지되면서 눈에 보이는 한 세계로써 창조되어야 한다.       3. 판타지 동화의 기준 상상력이 불쑥 던져준 착상을 내용으로 한 작품을 판타지 동화라고 할 수는 없다. 판타지란 현실 속에 비현실의 세계를 생생하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창조해주며 전개시키는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비현실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이면서 또한 눈에 보여야 하며 한 세계로서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확보를 위한 조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판타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한다. 오랜 세월동안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판타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그 실상을 증명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환상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하며, 이런 환상이야말로 현실을 더욱 새롭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② 판타지는 판타지만의 힘을 가져야 한다. 힘이 넘치는 판타지의 세계는 어린이의 삶을 건강하고 윤택하게 하며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자유를 만끽한다. 또한 현실의 세계를 뛰어넘어 그보다 더 빛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를 창조한다. ③ 이러한 세계 창조를 위해서 판타지는 마법과 같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가공의 판타지 세계에서 리얼리티 확보는 언어의 마법과 같은 힘 때문에 가능하다. 마법사가  외우는 주술력 같은 언어야말로 어린이를 판타지와 같은 세계로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 판타지는 환상 자체를 믿지 않고서는 진실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④ 판타지는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에서 펼쳐지며, 작품 안에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진 두 세계(1차적 세계와 2차적 세계)가 공존해야 하고, 작가가 창조한 다른 세계, 즉 2차적 세계에 대한 독자의 믿음을 강조한다. 성공적인 판타지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2차적인 세계가 내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세계 자체의 법칙성’보다는 그 곳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판타지가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합리하고 모순될수록 독특하고 멋진 판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얼마나 독특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세밀한 판타지의 법칙을 제시하는가, 독자는 얼마나 영리하게 그 법칙을 파악하고 따라 가는가에 판타지의 기본적인 생명력이 달려있는 것이다. 아울러, 판타지 동화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마법이다. 마법은 판타지 동화에서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② 다른 차원의 세계, 즉 제2의 세계다. 상당수의 판타지에서 마법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장소로써 특별한 지형이나 우주가 만들어지는데,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지배규칙에 의해 움직인다. ③ 선과 악의 대립이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신화의 주제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이고 그래서 현대 판타지는 신화라는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④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영웅의 여행담이다. 영웅의 여행은 항상 오래된 패턴을 따르고 그 패턴은 오늘날 판타지 동화의 구조와도 같다. ⑤ 작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인물의 유형이다. 판타지는 전설 속 인물 같은 유형이나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까지 포용하기 때문에 요정, 거인, 사악한 마녀, 도깨비, 흡혈귀, 마법사, 난장이를 비롯하여 독특한 인물유형이 판타지 동화의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⑥ 마법의 도구들이다. 이 도구들이란 마법의 망토, 칼, 빗자루, 지팡이, 가마솥, 옷장, 거울 등과 같은 것으로 마법의 힘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위의 6가지 요소들을 모두 지닐 경우 수준 높은 현대 판타지 동화가 될 수 있으며, 그 중 한 가지 요소만 지녀도 판타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으로 짜여있다. 즉,현실의 세계, 진리를 벌거벗겨 우리에게 내던지는 철학적인 문학이 아니라 진리, 불합리한 현실, 만족하지 못한 현실에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우리는 우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아무런 부담 없이 은연중에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판타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진리를 함께 담아낸다. 암시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간접적인 묘사의 형태다.     4. 판타지 속의 장소와 인물 1) 장소(다른 차원의 세계) ① 상상의 왕국이 등장하는 판타지 ② 이상한 세계를 보여주는 판타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배경으로 공존한다.(용궁, 하늘나라, 땅속나라 등) 예) 『오즈의 마법사』←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기묘한 세계.   2) 등장인물(특별하고 독특한 캐릭터) ①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동물들은 모두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활동하며 오히려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 『우화』, 『샬롯의 거미줄』 ②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한다. 이들은 대체로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들이다. 예) 『어린왕자』, 『요정 컴미』, 『아기공룡 둘리』 ③ 거인과 소인을 등장시켜 상대적인 크기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예) 『걸리버 여행기』, 『잭과 콩나무』 ④ 장난감이나 인형이 등장하여 사람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활동하며 어린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예) 『피노키오』, 『아기 곰 푸우』 ⑤ 기타 마법, 마법의 도구, 선악의 대결, 영웅담 등     5. 판타지 동화의 예 동화의 매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데 있다. 그 속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교감하고, 바람과 나무가 말을 하며 즐겁게 보낸다. 상상으로만 그리던 일이 마치 현실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예를 들어 미야자와 겐지의 『도토리와 들 고양이』, 『오츠벨과 코끼리』, 『첼로를 켜는 고슈』, 『수선월의 나흘』 등과 같은 동화를 읽노라면,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전혀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까지도 같은 입장에 서서 말을 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아무런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동화야말로 겐지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이야기 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겐지의 동화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동물과 풀과 나무 그리고 돌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으며, 언제나 머릿속에는 우주가 펼쳐지고, 별과 바람의 속삭임도 들려온다. 겐지는 소설을 쓰지 못해 시나 동화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의 필연적인 이유로 시와 동화를 쓴 것이다. 그에게는 동물도 식물도 산천도 분명 인간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대등한 의미를 갖는다. 거기서 그려지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명으로서의 운명이다. 겐지는 동화를 통해 인간세상을 풍자하고 고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생명과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말하려 한 것이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해리포터』도 훌륭한 판타지동화다. 조앤 롤링은 독자에게 환상이 현실과 비현실의 가교의 기능으로 현실의 내면을 보다 점진적으로 이해시키는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에게 환상 개념이란 방만한 공상이 아니라 동심을 지닌 독자가 체험하지 못한 세계를 적극적으로 경험시키는 유추적 능력이자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이며 이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동문학 역시 문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 있는 문학이라는 점, 동심을 지닌 독자로 자신의 꿈의 영역을 확대하여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문학 안에서의 상상력과 동일 개념으로 인식된다. 판타지는 독자에게 현실의 다양한 사고에 대한 불분명하거나 혼란스러운 현상을 선명한 질서와 조화의 틀로 부합되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정서를 가꾸어주고 또 현실을 바람직하게 이해시켜 주기위해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를 쓴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세계는 10대들의 텃밭인 학교와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묘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선량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교사의 괴롭힘, 아이들 사이의 묘한 경쟁과 질투심, 본능적으로 악에 저항해 가는 소년들의 정의감 등은 현실 세계의 원리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해리포터』의 한 특징으로 마법학교에서는 우편물을 부엉이가 전달하게 하고 펜과 양피지를 사용하여 모든 것을 옛날식으로 사용해 과학기술이 부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퀴디치 게임의 속도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속도를 가능하게 한 현대과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해리포터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현실세계의 가장 친숙한 특징인 속도감을 보여줌으로써 초현실세계와 현실세계가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유창근 / 시인·문학평론가. 저서 『문학을 보는 눈』, 『차세대문학의 이해』 , 『문학비평연구』, 『한국 현대시의 위상』 등 40여 권이 있으며 현재 (사)한국어문능력개발원 이사장 및 계간 「창조문학」 주간으로 있다.
5    시쓰기에 창의력 접목하기/ 박정원 댓글:  조회:1361  추천:0  2018-11-06
 시쓰기에 창의력 접목하기     가. 창의적인 아이디어         ○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 생각의 시각화       ○ 풍부한 생각       ○ 새로운 조합       ○ 관련성 찾는 노력       ○ 상황의 이면보기       ○ 다른 영역 살피기       ○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     나. "무엇을" 생각해야 되나를 "어떻게" 로 바꿔라.   스크랩 원문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4    [스크랩] 동시 창작론 / 유창근 댓글:  조회:1167  추천:0  2018-11-06
동시 창작론 유창근   1. 동시의 개념 동시란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로써 어른이 썼든 어린이가 썼든 동심을 바탕으로 생각이나 느낌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가장 함축성 있게 표현한 운문이다. 내용면에서는 동요와 흡사한 점이 있으나 형식면에서는 음악성이 떨어지고 그 표현이 훨씬 자유롭다. 즉, 내재율로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글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유경환은 ‘동시란 어린이도 읽을 수 있고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시문학의 한 장르’로써 우선 문학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동시인도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성을 갖추지 못한 동시가 남발됨으로써 동시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고, 아동문학이 푸대접을 받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시와 성인 시는 시라는 차원에서 동일한데 다만 동시는 ‘어린이도 대상 독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고, 성인 시는 ‘그 대상 독자에 어린이를 의식하지 않고 쓴 시’라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2. 동시의 종류 동시는 일반적으로 형식상 분류와 내용상 분류에 의해 여러 가지 양상으로 논의되어 오고 있으나 논자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형식상 분류 먼저 형식상 대략 다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자유동시 :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의 양식으로 1930년대부터 김영일·박목월 등에 의해 처음 시도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동요보다 훨씬 널리 창작되어 읽혀지고 있다. 당시 자유 시론의 주창자로서 우리나라 동시단에 신경지를 개척한 김영일의 시는 특히 단시적 간결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수양버들 / 봄바람에 / 머리 빗는다. / 언니 생각난다. ──김영일, 「수양버들」 전문 ② 산문동시 : 형식상으로 자유시에 속하면서도 산문적 서술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시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표현 양식은 산문적 형태를 취한 시이다. 살구나무 새순에 봄빛이 묻어 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파란 빛깔 집어 들고 마당가 한 귀퉁이에 우뚝 선 살구나무 ──노원호, 「살구나무 새순에」 일부 ③ 장동시 : 자유 동시처럼 매우 함축성이 있고, 상징 또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씌어지면서 그 시의 길이가 길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문시보다 산문성은 부족하나 작품의 길이가 산문시보다 비교적 긴 편이라는 점이 산문 동시와 장동시의 차이가 된다. ④ 동화시 : 동화시는 시이면서도 우선 형식면에서 양적으로 길고, 내용면에서는 동화처럼 어떤 사건의 전개나 이야기성이 있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새 집으로 이사 온 밤 비 오고, 바람 불고, 천둥하던 밤. 뒷산에 뒷산에 도깨비가 나와 우리 집 지붕에 돌팔매질 하던 밤. 덧문을 닫고, 이불을 쓰고, 엄마한테 붙어 앉어 덜덜 떨다가 잘랴고 잘랴고 마악 들어누면 또, 탕 탕 떼구루루…… 퉁!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래두 탕 탕 떼구루루……퉁! ──윤석중, 「도깨비 열두 형제」 일부 (2) 내용상 분류 내용상 분류는 일반적으로 다음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서정동시 : 본디 서정시는 노래 부를 수 있는 시이므로 음악성을 중요시하는 것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정감에 호소하는 개인적인 정감과 체험의 예각적 표출 형식을 취한다. 시의 소재나 내용이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과의 시적 감동을 주로 하여 형상화한 시이다. 눈밭에서 아이들이 / 햇살을 당긴다. / 언 손을 모아 / 소리를 모아// 모두모두 매달려 / 발을 구르면 / 겨울 해가 풍선처럼 / 끌려온단다. ──이상현, 「햇살」 전문 ② 생활동시 : 어린이의 실제 생활이 그대로 사실적인 표현에 의해 씌어진 시이다. 한 사람이 방에서 / 나오면서 하는 말이, / “어제보다 날이 좀 풀렸는데요.”// 한 사람이 밖에서 /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 “어제보다 훨씬 더 쌀쌀해졌는걸요.” ──윤석중, 「추위」 전문 ③ 관념동시 : 어떤 사물이나 그 사물을 통해 인식된 결과를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마음 속에서 다시 여과되고 걸러진 이미지를 위주로 형상화한 추상성이 강한 작품이다. 귤 / 한 개가 / 방을 가득 채운다. / 짜릿하고 향긋한 / 냄새로 / 물들이고// 양지 짝의 화안한 / 빛으로 /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 맛으로// 물들이고, 귤 / 한 개가 / 방보다 크다. ──박경용, 「귤 한 개」 전문 ④ 서사동시 : 서사시는 사건을 운문으로 읊는 장시이다.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행동을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한 사건과 이야기를 읊은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서사시의 대표작이고 밀턴의 『실락원』도 서사시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서사시에 속한다. 바다에 그물을 놓을 때나 당길 때 알기를 보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섬 하나 없는 동해바다 가운데에서 그물을 찾아내는 시루뫼 어부들은 언제나 큰 산을 바라보며 바라보며 살지, 시루뫼 어부들은 참말 용하기두 하지. ──김진광, 「시루뫼 마실 이야기」 일부 3. 동시창작 방법 첫째, 쓰고 싶은 동기를 잡아야 한다.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경우는 무슨 일로 인해서 마음이 크게 움직일 때인데, 그것은 반드시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만이 아니라,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의 슬픔일 수도 있고, 괴로운 일에서 오는 아픔이기도 하고, 또 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의 노여움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모두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내부로 들어오는데, 이와 같은 감각 체험을 통해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상상을 하고, 또 어떤 생각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기복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감수성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마음이 강퍅하거나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동시를 쓸 수 없다.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마음의 문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둘째,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스스로 마음에 느낀 바를 정직하게 써야 한다. 마음에 느끼고 어떤 움직임을 경험한다는 일은 감각 체험을 통해 심상에 비쳐진 것이 다시 형상화의 단계에 넘겨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 형상화의 표현이 바로 시의 표현이고 시를 쓰는 기법에 있어서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고 까다롭다. 이 형상화 과정에서 남의 것을 슬쩍 빌려 온다거나, 심상에 비쳐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꾸며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아름다운 말만 찾아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오직 진실 된 표현만이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의 느낌을 진실 되게, 소박하게 나타내도록 쓰는 일은 동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셋째, 일상용어 중에서 시어를 잘 찾아야 한다. 동시는 되도록 어린이들의 일상용어에서 시의 용어를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동시가 일차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독자로 하기 때문에 정서 순화에도 그 기능이 있지만, 자라는 어린이의 지능이나 언어 발달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효용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을 쓴다고 해서 혀 짧은 유아어를 흉내 내거나 말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엄마, 아빠, 해님, 달님, ~했어요, ~했습니다. 등의 언어를 즐겨 쓰고, 의태어나 의성어를 반복하여 쓴다고 동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어는 자기의 느낌이나 감동을 나타내는 데 가장 중요한 말, 가장 적당한 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시어를 선택하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동시이기 때문에 그저 쉬운 말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풍부한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써야 한다. 동시를 쓰기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삶이 겪어 낸 그 체험도 물론 작품의 바탕이 되지만, 그보다 상상적인 체험이 더 중요하다. 동시는 동심적 심상에 비쳐진 감각 체험의 재현이기 때문에 성인인 아동문학가들이 쓰는 동시에서 실제 동심 세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려면 어린이의 실제 생활에 파고 들어가 항상 그들을 관찰함으로써 상상적 체험을 얻어내야 한다. 처음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가급적 어려운 사상을 나타낸 동시를 쓰기보다는 가까운 생활 주변에서 동시의 소재를 찾아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동심의 눈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섯째, 교육적 효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인시와 달리 동시는 대상 독자 속에 어린이를 포함하기 때문에 교육성을 무시할 수 없다. 죽음이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든가, 비인간적인 행위나 비도덕적인 내용,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는 일, 순화되지 않은 언어 사용 등은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좀더 밝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시, 보람 있고 참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건전한 시를 써야 한다. 여섯째, 제목 붙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한 편의 동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제목을 보면 작품의 소재가 무엇이며, 어떤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시의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나서 시를 쓰고, 어떤 사람은 시를 다 써놓고 나서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여 고심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제목을 붙이는 시기가 다르기 마련이다. 다만 동시에 제목을 붙일 때는 되도록 쉽고 사물적인 것이 좋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곱째, 행과 연 가르기를 바르게 해야 한다. 산문동시는 형태 자체가 산문적이지만, 정형동시나 자유동시는 행과 연을 제대로 갈라놓아야 시인의 정감이 고르고 바르게 전달된다. 시인에 따라서 한 행의 길이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지만, 한 행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어린이들의 호흡에 무리가 간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아울러 한 연의 행수도 너무 많아 무리가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연 가르기를 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동시가 다 되었을 때는 다시 읽고, 고치고, 매만지고, 다듬어야 한다. 시어를 제대로 찾아 썼나, 제자리를 잡았나, 군더더기가 없나 등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깎고 다듬고 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요령이다. 4. 이미지 만들기 이미지란 시작품 속에 구성된 언어조직이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어떤 영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상은 우리 마음속에 나타나는 어떤 형태라는 점에서 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정신적Mental 이미지, 비유적Figurative 이미지, 상징적Symbolic 이미지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웰렉과 워렌Wellek & Warren의 분류와 비슷하게 정신적 이미지를 다시 시각적·청각적·후각적·미각적·촉각적·기관적·근육감각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1) 정신적 이미지 만들기 초가지붕 마루엔 / 밤낮 꽃 핀다. / 낮에는 화안히 / 호박꽃 피고 // 밤에는 소롯이 / 박꽃이 피고 / 호박꽃은 낮에 피니 / 해와 같이 붉은 꽃, // 박꽃은 밤에 피니 / 달과 같이 하얀 꽃, / 호박꽃 지며는 / 해와 같이 붉은 호박 // 박꽃이 지며는 / 달과 같이 하얀 박, /초가지붕 마루엔 / 해와 달이 열린다. ──김종상, 「박과 호박」 전문 호박꽃과 박꽃을 소재로 쓴 시이다. 호박꽃과 박꽃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고, 이 두 꽃들이 진 뒤의 상황까지 상상한 점, 호박과 박을 해와 달이라고 비유한 점 등이 이 시를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귀뚜라미 또르또르 / 섬돌 밑에서 / 귀뚜라미 또르또르 / 시렁 위에서 // 또록또록 눈이 밝아 / 책을 읽고 있으면 / 또르또르 / 또르또르 / 밤이 깊는다. ──임인수, 「가을 밤」 전문 이 시의 전체가 귀뚜라미의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처럼 청각적 이미지를 시에 끌어 들일 때 시의 분위기는 독자에게 훨씬 실감을 준다. 또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위의 시에서는 소리의 상징으로 리듬을 잘 살려 음악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새알은 / 간간하고 짭조름한 / 미역 냄새, / 바람 냄새. 산새 알은 / 달콤하고 향긋한 / 풀꽃 냄새, / 이슬 냄새. ──박목월, 「물새알 산새알」 3·4연 물새알 냄새와 산새알 냄새를 후각적 이미지로 형성하고 있다. 또한 같은 말이나 같은 음, 같은 짜임의 되풀이에 의하여 운율을 이루고 있는 시이다. 물새는 물새알을, 산새는 산새알을 나으며, 또 신기하게도 물새알에서는 물새가 태어나고 산새알에서는 산새가 태어난다는 생명의 엄숙한 법칙을 이 시는 아름다운 말과 리듬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다. 비는 달콤한 젖 / 눈은 솜이불 / 바람은 엄마 입김. 아! 우리는 / 자란다, 눈 속에서 / 바람 속에서. ──이원수, 「새눈의 얘기」 2연 비를 달콤한 젖에 비유하고 눈은 솜이불에, 바람은 엄마 입김에 각각 비유한 점이 훌륭하다. 특히 비를 달콤한 젖이라고 미각적 이미지를 빌어 표현했기 때문에 이 시는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첫 서리 내렸다 / 전기 줄에 / 아기 참새들 / 쫑쫑쫑 / 발이 시리대. // 첫 서리 내렸다 / 감나무에 / 홍시감이 / 빠알갛게 / 볼이 시리대. // 첫 서리는 겨울 소식 / 눈사람의 편지 / 세수할 때 / 울 아기 손이 시리대. ──송명호, 「첫서리」 전문 ‘발이 시리대’처럼 촉각적 이미지는 뜨겁다거나, 차겁다는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앗! 푸른 하늘이 / 숨을 쉬는 것일까? // 잠자리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 내뱉기도 하고! ──장만영, 「잠자리」 4연 마치 하늘이 숨을 쉬면서 잠자리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는 것처럼 느낀 지은이의 기관적 이미지 착상은 놀라울 정도이다. 기관적 이미지는 대체로 고동, 맥박, 호흡, 소화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따라서 흐느끼는, 할딱이는, 답답한, 숨이 차는 따위의 관형어에 조응한다. 2) 비유적 이미지 만들기 별을 보았다.// 깊은 밤 / 혼자 / 바라보는 별 하나,저 별은 / 하늘 아이들이 / 사는 집의// 쬐그만 / 초인종 / 문득 / 가만히 / 누르고 싶었다. ──이준관, 「별 하나」 전문 깊은 밤하늘에 보이는 별을 하늘나라 아이들이 사는 집의 초인종으로 비유한 점이 재미있다. 이 시에서 ‘별’은 ‘초인종’이라는 전혀 다른 낱말과 밀착되어 ‘별’과 ‘초인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써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하나의 사물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치환된 하나의 증거이다. 3) 상징적 이미지 만들기 아침과 같이 고요한 나라가 있었다. / 그 나라에는 한 그루의 커다란 꿈나무가 있었다. / 꿈나무는 5월이면 / 잎사귀 대신 주렁주렁 꿈을 피워놓는 나무다.// 이상한 꿈나무의 그림자는 / 저 먼 달 속까지 비치어 계수나무가 되었다. ──김요섭, 「꿈나무」 전문 이 시에서 ‘아침과 같이 고요한 나라’는 주지하는바 우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이고, ‘꿈나무’는 곧 ‘어린이’를 상징하는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상징은 전통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과 그리고 시의 문맥 중에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비둘기’가 ‘평화’를,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요, ‘하늘’이 자기만의 높은 이상의 세계라면 이는 후자에 속한다. 5. 창작상의 유의점 동시를 창작할 때는 다음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반드시 숙독해야 한다. ① 제재 : 어린이의 생각이나 동심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동시의 제재가 될 수 있다. ② 감정정리 : 제재를 동시로 쓰기 전에 표현과 구성 등을 깊이 생각하는 감정의 정리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주제가 성숙해지고 사고와 감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③ 이미지 : 어떤 정경을 그릴 때에는 그 이미지가 명확하게 떠오르도록 써야 한다. ④ 언어의 절약 : 시는 설명이 아닌 암시의 세계다. 되도록 짧은 말 속에 모든 의미가 간직되도록 해야 한다. ⑤ 행과 연의 구분 : 행과 연을 구분할 때에는 리듬의 단락을 짓기 위해서, 또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행과 연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⑥ 언어의 선택 : 언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도록 알맞고 시적인 언어를 가려 써야 한다. ⑦ 비유 : 동시에 직유나 은유를 쓰되 될 수 있으면 시인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고 싱싱한 비유를 골라 써야 한다. ⑧ 생동감 : 동시는 특별히 생동감이 넘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동감이란 어린이의 마음과 일치하거나 어린이의 부단한 행동성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⑨ 사상과 감정의 조화 : 동시는 표현에서 느낌으로 그리고 느낌에서 감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창작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통일 내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쓰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감정을 여러 각도로 어루만진 다음, 표현과 구성에 대한 정리를 하면서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이미지는 선명할 수 없다.     유창근 / 시인·문학평론가·교수. 저서 『문학을 보는 눈』, 『차세대문학의 이해』 , 『문학비평연구』, 『한국 현대시의 위상』 등 40여 권이 있으며 (사)한국어문능력개발원 이사장, 계간 「창조문학」 주간.   가져온 곳 :  카페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글쓴이 : 김명아| 원글보기      
3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 권경아 댓글:  조회:1405  추천:0  2018-11-06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권경아   1. 현대시와 해체     새로움은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주는 미학의 한 범주이다. 한국현대시사에서 1980년대는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전통시 형태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기존문법을 해체하는 양상이 새롭게 등장한다. 1980년대는 모순된 근대성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다. 해체시는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촉발되어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미학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의 해체시는 1990년대를 들어서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심의 부재라는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절대 주체로 인식되던 주체가 소멸되고, 이로 인해 텍스트 내적, 외적으로 해체의 양상이 보다 폭 넓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1980년대의 해체시에 나타나는 과격한 실험을 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은 수정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의 새로움은 아방가르드적 요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도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할 때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것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배경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할 때 ‘해체’의 진정한 실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와 90년대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해체의 양상이 이 두 시기에 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해체가 근대성에 대한 저항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 주로 시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 이와 달리 1990년대는 해체에 대한 폭 넒은 이해를 통해 시각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시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의 해체가 근대성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미학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1990년대의 해체는 사회, 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2. 1980년대 시와 아방가르드 미학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모순된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양상이 극렬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써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억압된 체제의 구조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해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80년대적 억압에 대한 반응으로, 형식을 해체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는 경계 해체의 전략을 구사하며 등장한다. 해체시는 정치적 전략으로 형식을 파괴하고 장르를 해체하는 반미학의 원리로,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해체시는아방가르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1) 여기서 아방가르드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20세기 초기에 나타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세계에 유행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의미한다.2)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차이를 보이면서도 중요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며 기존의 전통에 대한 단절을 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모더니즘이 미적 자율성에 근거한 과도한 형식주의라는 것은 아방가르드와 변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실제 생활에서 유리되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제도로서의 예술을 부정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려는,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모더니즘보다 한결 급진적일 뿐 아니라 더욱 독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역사적·사회적 개념인 모더니티의 발전단계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3)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80년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 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의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근대성의 누적된 모순이 극점에 이르는 시기였다. 구모룡에 의하면 80년대는 이중의 부정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으로 파시즘의 억압에 대한 부정을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 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4)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할 때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억압적 시대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이 단순히 형식파괴만을 노리는 것이 아닌 억압된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변별된다. 즉 예술 형식과 사회적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을 부정하고 있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예술 형식과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으로 드러난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를 구모룡이 ‘환멸의 자식’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해체시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식은 형태 파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기존의 시 양식을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파편화를 그대로 보여주며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이고있다. 해체시는 기존의 서정시 양식을 전면적으로 해체한다. 해체시가 서정시 양식을 파괴하는 것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시 양식에 대한 해체를 감행하는 외적 요인과, 서정시의 언어와 문법으로는 억압적 체제에 대응할 수 없다는 내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 오규원, 「우리 시대의 純粹詩」 부분,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이 시대는 ‘진리란’, ‘믿음이란’과 같은 말을 점잖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이와 같이 말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16세기나 17세기였다면 이 말은 인간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시대인 현실에서는 ‘하품’이 날 정도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이 시대는 모순된 현실을 그대로 보전하여지키려는 보수주의의 시대이다. 보수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되든 안 되든’ 해체해야 한다.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든지 하는 허위의 말들을 벗겨내야 하는 것이다. 해체시가 기존의 서정시 양식이 억압의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서정시 양식의 파괴를 시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80년대의 해체시는 시각적 형태를 강조한다. 도형, 기호 등의 차용, 내용 없는 시 혹은 제목 없는 시, 그리고 활자 배열에 따른 효과를 이용한 시 등은 인쇄효과를 통해 시각적 형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내용보다 형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서정시 양식의 문장 구조를 파괴하는 형태 파괴 수법이라 할 수 있다. 황지우의 無等은 내용자체가 산이 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다     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황지우, 「無等」 전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이 시는 일종의 상형시의 형태로 그림으로 시를 구성한다. 산 정상으로부터 묘사된 모습은 ‘절망, 분노, 죽음, 피투성이’ 등과 같이 어둡고, 격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산이다. 그러나 대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온화하고, 넉넉하고, 따뜻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대지는 모성을 상징한다. 뾰족한 정상이 절망과 분노, 숨가쁜 현실을 표상하고 있다면, 넓은 대지는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 현실과 꿈, 그 모든 격정을 감싸주는 평등을 표상하고 있다. 이러한 격정적인 산의 이미지와 넉넉한 대지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상징적 의미는 산의 형태에 따라 변화되고 있다. 산 정상으로부터 대지에 가까이 갈수록 대지의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변화되는 이미지를 산의 형태에 따라 배열시킴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삼각형이라는 형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시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인다. 결국 산의 형태에 따라 삼각형으로 시를 배열하고 있는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의 시들에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단순히 시 형태를 파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초기의 해체시는 기사, 벽보, TV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삶을 시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며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83. 4. 1.~지: 83. 5. 31.   - 황지우, 「벽1」 전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위의 시는 예비군 편성과 훈련 기피자를 대상으로 자진 신고기간을 알리는 벽보의 내용을 옮겨 놓고 있다. 이 벽보 내용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벽보가 말하는 기피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행여 내가 그 대상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자진해서 무언가를 신고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 일제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는 나를 불안하게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과의 불신을 조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기피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나도록 나는 불안하다.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가 불안하고,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사회가 불안한 것이다. 1980년대는 영상매체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신문이나 벽보가 인간의 삶에 가깝게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이제 매체는 인간의 삶에 밀착되어 그 힘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해체시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린 TV나 CF의 내용까지도 차용하기 이른다. 김정란의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는 “어디 갔었어, 전화해도 없대”라는 TV의 유행어를 이용하여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를 차용하고 있는 장정일의 시 산 위에서 내려온 바보(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광고의 유혹을 그리고 있다. 또한 박남철은 텔레비전I과 텔레비전Ⅱ(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직사각형의 도형만을 그리고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직사각형만을 그려놓음으로 시인은 독자에게 이에 대한 무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텔레비전은 아무 의미도 없는 빈 상자일뿐일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일 수도 있으며, 텔레비전에 얽힌 독자들의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무수히 많은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열린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 퍼킨스는 1950년대 이후에 나타난 영미시의 새로운 특성으로 자발성, 개성, 자연성, 개방성 등 네 가지를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의 해체시가 개방성이란 특성과 연관된다. 개방성이란 신비평의 원리가 강조하는 폐쇄적 형식에 대한 미적 부정을 일컫는 말로 탈구성을 강조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문학/비문학의 경계 해체, 작품/독자 경계 해체 그리고 패러디 등은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개방 형식의 지향은 곧 포스트모더니즘시의 특성이 되는데 80년대 해체시의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 이후에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3. 1990년대 시와 포스트모더니즘     90년대 이후의 현대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의 아방가르드적 요소는 90년대 전후의 사회·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아래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아방가르드는 주변을 둘러싼 문화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이라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방가르드 미학이 가진 자기파괴적인 자살이라는 내적모순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완성된 것에 걸맞기보다는 준비단계에 걸맞는 것’5)으로써 상징적으로 파괴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아방가르드는 그 자신의 일관성의 감각에 의해 자살로 추동된다. 칼리니스쿠는 이러한 특징을 ‘미학적인 죽음 애호증(thanatophilia)’으로 설명하고 있다.6) 80년대 우리의 해체시 또한 역사화 과정을 겪는다. 해체시가 보여주던 극단적인 형태 파괴와 현실물을 차용한 콜라주 기법은 복제와 재생산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지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기법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전위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것이다. 8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적 해체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으로 해체적 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90년대를 전후로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을 일부 수용하고 일부는 단절을 꾀하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도권 예술로 흡수된 아방가르드 운동의 계승이며 논리적 발전이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초기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초기 해체시가 신문기사, 만화, 사진, 벽보, 광고, 그 밖의 인쇄물 등을 콜라주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다면, 90년대 이후의 시들에서는 기존의 시들을 대상으로 함은 물론 자기시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적인 메타시가 나타나고, 비문학 텍스트마저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장르혼합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미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아방가르드의 미학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와 라캉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동일성에 근거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더 이상의 권위는 없다. 데리다는 차연 이론으로 형이상학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동일성을 부정하며 진리의 불확정성, 결정불가능성을 증명한다. 이러한 차연 이론은 텍스트에까지 적용되어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닌 다른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관계일 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주체 또한 절대 주체가 아닌 차연의 결과일 뿐이다. 주체는 ‘과정 중의 주체’일 뿐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기표로 인식된다. 통합체로 오인되고 있는 주체의 의미는 무의식적 욕망으로 포착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는 우리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 뉴미디어 사회로 서서히 진입하는 시기이다. 문화에 있어 기술복제에 의한 문화나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복제와 재생산은 낭만주의 이래로 강조되어 온 주체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던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집 밖으로 걸어나온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나무 그늘에 앉아 날아가는 나비를 본다.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들판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나비들이 흩어질 때 마네킹을 든 남자 언덕 너머에서 걸어온다. 노래를 부르며,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옆을 지나간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고 마네킹을 든 남자 기침을 한다. 바구니를 든 여자 들판 너머에서 걸어온다. 검은 머리칼이 긴 그 여자, 두 남자 옆을 지나가며 흔들리는 들꽃과 흩어지는 나비떼를 본다. 들판 너머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검은 옷의여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바구니를 든 여자를 스쳐 지나간다. 들판과 언덕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해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의 집 옆을 지나간다. 바구니를 들고 지나간 여자 어느새 들판을 넘어가 검은 색 파이프 오르간을 커다랗게 연주한다. 검은 머리칼의 여자와 마네킹을 든 남자 팔짱을 끼고 언덕을 넘어간다. 혼자 남은 수염이 지저분한 사람 천천히 일어나 어두운 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들판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 그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풍경들이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들판과 언덕이 사라지고 그 사람의 쓸쓸한 집도 그사람의 길고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 김참, 「지워지다」 전문,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이 시에서 각 인물들은 서로를 지나치며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마네킹을 든 남자’가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 곁을 지나감으로써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마네킹을 든 남자’가 아닌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되고, ‘마네킹을 든 남자’는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아닌 ‘마네킹을 든 남자’가 되는 것이다.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주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 외부, 곧 ‘마네킹을 든 남자’에 의해서라는 것은 주체 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타자에 의해 인식되던 주체는 ‘바구니를 든 여자’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나타남으로써 존재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바구니를 든 여자’와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서로를 지나침으로 다른 타자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시되며 ‘타자’라는 인식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존재를 확인하던 주체는 타인들의 존재가 미끄러지며 존재 인식이 지연됨에 따라 주체의 존재마저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주체 외부에서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체 소외 그리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멀어지고 마는 주체 소외는 주체 소멸로 이어진다. 결국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천천히 지워지기시작’한다. 그와 함께 ‘들판’, ‘언덕’, ‘집’ 그리고 그의 ‘비명소리’ 등 그에게 인식되던 ‘풍경’ 또한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자기 동일적 주체의 소멸은 텍스트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며 확정되지 않는다. 의미마저 소멸된 후 남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의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법칙인 것이다. 90년대 현대시에 언어유희,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혼란, 시니피앙만이 나열되는 시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차연의 결과로 절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주체는 상대적 개념이 된다. ‘나’의 존재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만 일시적으로 파악될 뿐인 것이다. 여기서 ‘나’와 ‘너’와 관계 또한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닌 사회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주체는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언어는 단일한 시니피에를 지시하지 못하고 시니피앙에 의해 끊 임없이 미끄러지므로 언어는 곧,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받는 시니피앙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저 황폐한 정원에서 인류가 언제 이 지상으로 옮겨와 살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말을 씹을 때 희미한 풀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말은 먹고 싶은 욕망의 대용이었을 것이다 말은 이제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구조 속에서!)     - 송찬호, 「옆에서 본 저 달은」 부분,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언어를 구사함과 동시에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는 억압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 남겨진 억압이 무의식적 욕망으로 환원된다. 이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실현불가능을 의미한다. 말을 하는 것으로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욕망으로 남겨져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만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므로 욕망이 쌓여가더라도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말은 ‘욕망의 대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이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도 언어적으로 형성되고 언어적 규칙에 따라 표출된다. 욕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듯이, ‘욕망의 대용’인 말은 바로 언어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주체와 의미의 소멸과 더불어 텍스트의 자율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하나의 텍스트는 자신만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는 결정불가능성이라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90년대의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가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한 탈장르화나 장르혼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르혼합은 시, 소설, 희곡과 시나리오 등 같은 문학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화, TV, CF등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에 의한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문화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로 떠오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물론 90년대를 들어서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삶과 예술의 경계 해체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텍스트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준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벽보, 기사, 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일상의 삶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이것은 90년의 시가 소설, 희곡, 시나리오, 영화, TV, 광고 등의 장르 형식을 시의 양식에 도입하는 장르혼합 뿐만이 아니라, 시라는 텍스트 자신마저 불확정성으로 인식하고 시 자체를 대상으로 자율성을 해체하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를 시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90년대 시들의 텍스트 자율성 해체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텍스트의 개방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90년대의 시들은 기존의 시 장르에 대한 인식을 해체한다. 그 동안 문학은 현실에 대한 관념, 상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는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가 소멸함에 따라 현실마저도 사라지기에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문학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하기보다 텍스트 그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90년대에 시라는 텍스트 자체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가 부각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타시는 시 자체를 글쓰기 대상으로 하는 자기반영적인 시로 정의할수 있다. 여기에는 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시, 시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인론시, 시쓰기의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시, 그리고 다른 시 텍스트와의 관계성이 드러난 메타텍스트시가 포함된다. 메타시는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반성적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7)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시인들의 관심이 되어 오다가 시론시, 시인론시 등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되는 메타시의 유형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이다.8) 장정일의 시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시인의 시 쓰는 과정이 그대로 시로 표현되고 있다. 시를 썼다가 지우고 또 다시 쓰는 등 시인이 시를 쓰면서 거치게 되는 많은 습작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작 과정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메타시의 전형이 된다. 장정일은 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시집에서 해체시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정일이 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집들은 80년대 후반에 출판되어 80년대적 해체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시는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과 경계를 허무는 장르혼합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참의 미로여행, 성미정의 동화 연작은 소설의 양식을 시에 도입하고 있으며 장정일은 잔혹한 실내극과 자동차에서 희곡과 시나리오 형식을 실험하며 장르혼합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문학과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 발전에 의한 영상매체의 발달로 영화, TV, 광고, 대중음악 등이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중심의 부재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대중문화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영향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TV, 광고 등에서 일부를 취하여 시에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 이러한 대중문화에서 얻은 시적 상상력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영화 감독 지망생 영규는 지난번에 산 8밀리 무비 카메라가 쓸모 없어지는 바람에 그걸 팔러 외출한다 매일 똥을 싸고 요강에 지저분한 꽁초 따위를 넣는 병든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영규는 집 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방학 때지만 매일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충무로 중부경찰서 부근의 카메라 가게로 가보았지만 무비 카메라는 취급을 안 한다고 하여 가격이라도 알아보러 옛날에 자주 다니던 청계천 8가 황학동의 장물 시장에 가기로 맘을 먹은 영규는 황학동 시장에 도착하고 적지 않이 놀라는데 옛날과 완전 딴판으로 서울에 스며든 동남아 네팔 파키스탄 러시아 계통의 수많은 외국인들이 떼지어 물건을 사러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층 사람들의 동물 냄새나는 활기에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영규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데…(p. 76에 계속)     - 성기완, 「볼 만한 티브이 프로 1」 전문,       쇼핑 갔다 오십니까?   TV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들어서며 인간의 삶에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TV는 이제 인간의 삶에 그대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성기완은 연작시 형태로 4편의 시를 쓰고 있다. 영규라는 인물의 평범한 일상이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 끝 부분에 이르면 (p.76에 계속)이라는 말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말에 시집을 넘겨 76페이지를 읽게 되고 다시 97, 123페이지를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방영되는 TV드라마의 형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다가 (p. 76에 계속)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기심에 다시 그 페이지를 찾는다. 한번 시청하게 되면 눈을 떼지 못하는 드라마의 중독성이 시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는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일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며 새로움을 추구하고,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미학으로 나타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경계 해체는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로 들어서며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우리시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논리적 발전인 동시에 비판적 반작용으로서 나타난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시켜 상호텍스트성과 탈장르화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이 보여주던 현실의 파편화, 사물화 현상과 그로 인한 주체의 소외에 대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이어받아 주체의 해체, 탈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파편화된 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원래 특공대의 ‘전위’나 ‘선봉’ 또는 ‘첨병’을 가리키는 군대 용어에서 비롯되어 프랑스 혁명 이후 정치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쓰이다가 본래의 군사적 의미는 사라지고 정치적 사상이나 사회 사상에서 보이는 급진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 개혁가들이나 사회주의자들, 급진적 저널리스들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심미적 아방가르드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하나의 예술적 관념으로 과거를 거부하고 새로움 추구하는 모든 새로운 유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된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1992, pp. 133-138. 2)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다다이즘과 초기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이탈리아의 미래파나 독일의 표현주의를 지칭한다. - 페터 뷔르거, 『前衛藝術의 새로운 이해』, 심설당, 1986, p. 24. 3) 김욱동 4) 구모룡, 「억압된 타자들의 목소리」, 『현대시사상』, 1995, 가을호. , 위의 책, p. 143. 5) A. 하우저, 『예술의 사회학』, 한길사, 1983, p. 370. 6) 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3, p. 151~155. 7) 고현철, 「메타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현대시의 쟁점과 시각」, 전망, 1998, p. 32. 8) 80년대 후반, 오규원은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서 「詩人 久甫氏의 一日」연작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시론시를 선 보이고 있다. 박상배는 시집 『모자 속의 詩들』(1988)에서 IV장에 14편의 시론시를 선보이기 시작하여 『잠언집』(1994)에서도 「풀잎頌」연작으로 14편의 시론시를 쓰고 있다. 이승훈 또한 박상배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메타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밝은 방』)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시인론와, 시론시, 시작 과정이 드러나는 시 등 이승훈은 메타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권경아 2003년 『시와 세계』 등단. 현 : 한양대 강사. 『시현실』, 『리토피아』 편집위원.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  
2    [스크랩]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댓글:  조회:1498  추천:0  2018-11-06
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현대문학』 05년 1월호)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창작과 비평』 04년 겨울호) *조용미, 「도룡뇽 수를 놓다」(『문예중앙』 04년 겨울호) *정진영, 「이상한 상자」(『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작가세계』 04년 겨울호)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시작』 04년 겨울호) *이길원, 「개 4 ―항변」(『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Ⅰ. 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파악할 때 효용론적 관점은 성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의 여부와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 독자에게 미친 영향은 다시 ‘교시적 측면’과 ‘쾌락적 측면’으로 분류된다.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아놀드(M.Arnold)의 진술이나,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시는 흥을 일으키고, 인정을 살피게 하며, 무리 짓게 하고, 원망하게 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많은 이름을 알게도 한다” 라는 구절은 모두 시의 교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문학의 본질은 ‘미’의 추구에 있으며, 이때의 ‘미’는 세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윤리 도덕과는 일차적으로 단절된 비목적적 차원의 체험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보다 앞서 예술활동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숭고한 지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무목적의 목적성’을 주장하였던 칸트의 견해는 시의 쾌락적 기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의 기능을 구체화하는 방법에 있다. 필자는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로 대별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진술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쾌감을 제공해주거나 반성을 통한 신생(新生)의 의지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에 출간된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선별하였다. Ⅱ. 시인이 자신이 정서를 구체화할 때 대상과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시인이 시적 화자가 되어 직접 진술하는 방식을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대상을 이미지로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에 의존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가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또는 “시는 사실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발화방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가능한 한 진술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보기로 하자.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새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 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면 아래로 반쯤 몸을 숨긴 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리의 긴장된 모습은 둘째 연까지 지속된다. 견고한 긴장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 물을 차고 비상하여 하늘로 퍼지는 셋째 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좁혀오며 점차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가 비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도는 조밀해진다. 그래서 독자 역시 점차 숨이 막혀온다. 끝 부분에 이르면 결빙된 얼음이 깨져나가는 듯한 숨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수면 위로 드러난 오리의 형체는 비록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고 있다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림과 동시에 비상하는 오리처럼 격발(擊發) 직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우리 삶을 응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어떠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작품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낡은 의미로 덧칠하여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오독(誤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만하 시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은 진술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직 정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의미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행간과 행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약해오는 시적 기법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일촉측발과도 같은 긴장감,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 울타리 싸리 역시 변한 것은 아니다. 더 붉어 보였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내가 퇴락해갈 뿐.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러한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천천히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인식한 사실을 작품 어느 곳에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자신이 인식하기까지의 치열함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가슴 시린 숙연함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는 동안 자신의 정의(情意)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부터 생성되는 서늘한 자장(磁場)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허만하 시인과 최하림 시인의 작품은 진술보다는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한, 그도 아니면 몇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거듭 읽다보면 묘사 뒤에 숨겨져 있는 많은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좋은 시로 평가되는 것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는 모두 다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별의 정한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좋은 시로 평가받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의도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의미가 여실하게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일관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비유와 대비 등과 같은 시적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슬쩍 흘려놓는다. 다음에 인용한 두 편은 묘사에 의존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키거나 시적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응축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지율(知律), 계율을 안다 거짓되고 그릇되게 행함을 막는 율법을 안다는 이 말, 참으로 무서운 말 아닌가 내가 아는 한 비구니의 법명이 지율이다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은 천성산(千聖山) 아래 내원사에서 조용히 수도하며 지냈던 눈매가 그윽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 그가 깊은 산 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살리려고 생명을 내놓았다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 한다는데 산정에 펼쳐진 늦가을 화엄벌은 흰 눈이 덮인 듯 억새의 물결로 장엄해 관통 터널 공사도 도롱뇽 소송도 다 잊고 사람들 탄성을 지른다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롱뇽이 산다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꼬리치레도롱뇽은 겨울잠에 들었나 화엄늪의 화엄세계가 바로 너의 우주인데 팔색조야 황조롱이야 청딱따구리야 삼광조야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지율(知律), 어둑해져가는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롱뇽 수를 놓고 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뭇생명을 살리려 하고 있다 ―조용미, 「도롱뇽 수를 놓다」 경부고속철 노선이 천성산을 관통하는 것에 반대하여 석 달 넘게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지율 스님에 시인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하고 있다. 모두가 격의 없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곧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 화엄이 깨지는 것은 우리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천성산 아래 속세는 어떠한가? 억새의 물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탄성을 지른다. 이들 속세의 사람과 한낱 도룡뇽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지율 스님은 명백하게 대비된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우리의 천박함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뭇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룡뇽 수를 놓고 있을 지율 스님의 거룩함을 대비시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필자가 위 작품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법 때문이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내 안에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바느질함이 열렸다 사개 물려놓은 한쪽 귀퉁이가 밤새 울컥이며 삐걱거리더니 그 닫혀 있던 뚜껑이 털썩, 한숨 내려놓듯 열린 것이다 가득 붉은빛이다 내 안에서 들썩이던 바람을 꾹꾹 눌러 박음질 해둔 붉은 솔기들이 보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촘촘히 박혀 망설임으로 새겨진 무늬들 그 붉은 날들을 내 안 깊숙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재워 두었던 밤들 어쩌자고 그대로 넣어두려 했던 것일까 나를 비집고 나온 솔기들이 저렇듯 곱고 생생한데 아직 그대로 있는 마음 이제는 열어 두기로 한다 ―정진영, 「이상한 상자」 시를 읽고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나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왜 나는 할말이 없었겠는가. 망설이다 고작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침묵은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상처로 남아있다. 상처를 달래며 보낸 밤들 그 끝에서 결국 상처는 곪아터지듯 내 가슴에서 붉은 빛으로 터져나왔다. 막상 터져나오자 곱고 생생하다. 하여 이제는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앞에 인용했던 조용미 시인은 ‘지율’과 ‘사람’ 그리고 정진영 시인은 ‘바느질 함’과 ‘비집고 나온 솔기’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어를 대립시켜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묘사와 진술을 혼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율 스님의 단식과 바느질함으로부터 비집고 나온 솔기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함축을 통해 숨겨놓은 사실을 찾아가며 시인과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두 작품은 바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묘사에 의존하는 ‘보여주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시인이 직접 시적 화자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도를 진술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새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와 말간 내 두 손바닥을 대비시켜 삶에 대하여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위의 시는 주지하듯 묘사보다는 시인의 심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슬링 선수와 자신의 대비는 지속되는데, 작품 중반부와 후반부에 이르면 귀가 짓뭉개지도록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레슬링 선수의 비애와 내 것 아닌 다른 사람의 절망에는 귀기울여 본 적 없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다짐이 울림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열한 반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이 강건한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천명 넘어서면 먼 강 아스라한 적벽의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때 있을 것이다. 억새밭 거기 상처투성이 아픈 급물살들이 풀어놓은 여울 곳에 이름없는 시인의 불우한 노래 한 편 홀로 숨어살 수 있어서 어진 농부 가난한 땅으로 돌아가 착한 시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이나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부끄러울 때 많이 있다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 장차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남한강 건너 논밭 바라보는 그의 눈 바로 보지 못하는 나 또한 대죄인인 것이다. 시를 써서 세상을 속인 죄 얼마나 큰줄 아냐고 저 강물이 나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 홍일선 시인의 창작 모티프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의 삶이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농촌과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변 사람이 하나 둘씩 떠나도 자신만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경희씨가 정작 근심하는 것은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다 자신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다. 그래서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그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을 바로 알리고, 때로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을 감당하여야 할 책무를 지닌 시를,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를 향하여 강물은 세상을 속인 죄가 고향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이경희씨의 근심보다 더 큰 죄라고 호통치고 있다. 박후기 시인의 작품과 홍일선 시인의 두 작품 모두 묘사보다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본질이 함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길고 긴 여운이라고 한정한다면, 두 작품은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결연한 의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지도 제 잘못은 압니다 제가 화분을 쓰러뜨리자 주인님은 신문지 말아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지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 후 화분 근처에선 발걸음도 무거웠지요 제가 어디 화분을 그곳에 둔 주인님을 탓하더이까 귀 닫고 남의 탓이라 하지도 않지요 개 주제인 제가 보기에도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이길원, 「개 4 ―항변」 작품의 화자는 ‘개’이다. ‘개’가 ‘인간’인 주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물인 개조차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작품 전체가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인의 말하고자 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인화(擬人化)된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박후기, 홍일선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종결하고 있다. 세 시인이 보여준 각오와 다짐이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삼백 편에 일관하는 정신을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란 무엇인가? 세속의 욕망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의미한다. 시를 읽는 행위를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교시적 기능은 성립된다. 박후기, 홍일선, 이길원 세 시인의 작품은 시가 교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Ⅲ. 감기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안정하고 휴식하는 일 이외에는 특효약이 없다. 마음으로부터 온화한 정서를 생성시켜 주는 한편 세속의 잡다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 또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는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찰과 다짐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보여주는 시이거나 말하는 시이거나 작품을 감기가 주는 경고로 인식한다면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지 않을까. 겨울이 쓰러지는 끝자락을 보았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경계 허물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주경림 (시인) *유자효, 「새」(『시와사상』 04년 겨울호) *박승미, 「마음 心 둘」(『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황상순, 「흔적 1」(『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성우, 「접시」(『현대시학』 05년 1월호) *이영식, 「이별연습」(『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1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3차원이란 지구상에서 전후, 좌우, 위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동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3차원의 세계에 몸을 두지만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4차원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의 현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권해서든 시인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라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 편의 시는 그 공간에서 하나의 우주와 맞먹게 되어 시인이 먼지 한 톨을 들어도 우주가 몽땅 따라 들리며 티끌 한 개를 놓아도 우주가 모조리 함께 놓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는 시를 따라 자연과 독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일체 경계가 없어 죽음과 삶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희노애락의 감정의 소통이 자유로운 시의 세계를 엿보기는 즐겁지만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과 꿈의 부조리가 만만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상상력의 변주를 더욱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을 엿보기로 한다. 2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 「새」 유자효 시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본 닭의 화석에서 그는 죽음이나 절망, 슬픔처럼 어두운 모습이 아닌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다. 뜨겁게 잿빛이 된 돌멩이 하나에서 그 사랑의 유효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새」에서 어미의 사랑은 목숨을 초월해 화석이라는 형태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은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어미와 새끼들은 한 몸으로 오롯이 작은 불덩이가 되어 행복한(?) 산화를 했다. 그들 또한 화산재를 뒤집어쓴 인간 화석과 함께 ‘최후의 폼페이인’인 셈이다. 유자효 시인은 섣불리 연민을 표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동영상의 화면을 보여주듯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언어를 조종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인의 연출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소심 한 촉이 꽃을 피웠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 그 모습이 여름내 더위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달래 주더니 지는 모습이 어찌 그리 다소곳한지 한 잎 또 한 잎 꽃이 질 때마다 차마 그 꽃잎 주워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다 지고 난 다음 조용히 다가가 보니 떨어진 그대로 마음 심 자가 분명했다 그 마음을 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 내리기로 했다. ―박승미, 「마음 心 둘」 「마음 心 둘」에서 시인은 조용히 꽃을 피워낸 소심 한 촉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한 소심 한 촉의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을 보고 있다. 수란치마는 궁중 나인들이 예식때 입던 수놓은 치마로 그 화려함 때문에 소심 한 촉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수란치마를 가지런히 펴 놓고 앉았을 때의 모습은 입고 서 있을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입체적인 모습이 평면으로 깔리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주위의 분위기까지 우아하게 고양시킨다. 소심 한 촉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가야금 가락의 맑고 청아한 음색의 청각적인 효과가 그대로 ‘조용히’라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또한 다 지고 난 꽃잎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음 심(心)자를 얻는다. 악보가 없었던 과거에 가야금을 배울 때는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했듯이 떨어진 꽃잎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기로 한다. ‘그 마음’인 소심 한 촉은 이제 ‘이 마음속’인 시인에게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심장의 모양을 본땄다는 표의문자인 한자어 마음 心자가 펼쳐 보여주는 시적 변용은 따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해준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새들이 모여 파드득 파드득 잎을 피우는 집 먼 데 있는 새도 몇 번의 날개짓이면 금새 날아드는 집 집 없는 새도 지나가다 얼핏 깃드는 집 그 집 앞에서 누군가 발을 멈추고 쭈빗쭈빗 귓문을 연다 그의 꼬불랑한 귓속 길이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다 어떤 새소리 한가락 파릇하니 새잎을 틔운다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 째구르르 깃털을 편다 입술이 벙긋 열리고 실핏줄이 팔딱 뛰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올라앉는 높은 음의 가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는 낮은 음의 가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대로 옮겨앉는 마음의 가지 아아아 파릇하니 파릇한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 그리움이라는 새들이 한참 지저귀다 뚝! 그치기도 하는 집 파릇하니 파란 나무집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 이나명 시인은 사소한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시적 대상에게 시끄럽거나 과장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미세한 것들에서부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 의미를 새롭게 엮어 보여줌으로써 잠시 분잡한 현실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준다. 「파릇하니 파란 집」 역시 나무와 새, 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을 한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그 집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이 먼저 귓문을 열어 깊숙하고 은밀한 마음 속 길을 꺼내는 것이다. 새소리같은 아름다운 새잎을 그 집의 나뭇가지에 내밀하게 틔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인 것이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마구 피워내고 싶은 잎사귀, 즉 ‘그리움’으로 마구 지저귀고 싶은 언어의 잎사귀인 것이다.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이라는 심정적인 표현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한 켠마다 남아 있는 그 모든 ‘그리움의 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나명 시인은 감각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청각과 시각을 골고루 자극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흔적 1」 황상순 시인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주검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흰 페인트의 윤곽을 지켜본다.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내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서 ‘탈피’라는 화두를 넌지시 끄집어낸다. 시인의 응시는 목숨을 빼앗아간 비극적인 장소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적으로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라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 실재와 부재 사이에 ‘탈피’를 끼워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고층빌딩에서 반사된 ‘날을 세운 빛들이” 사내의 비상을 재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거리 횡단보도나 유리창 가득한 빌딩들은 전형적인 현대도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판에 박힌듯 숨막히는 공간일 수 있다. 이미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내(혹은 여자)는 숨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이 자의적인 것이든 타의적인 것이든, 죽음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에 남겨진 흔적은 고통스러웠던 육체의 핏자국뿐이다. 그의 영혼은 ‘비에 젖은 옷’처럼 남루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탈피’란 허물을 벗는 일, 또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워짐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을까 라며, 자유롭고 일탈된 사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들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차량’ 위에 일렁거리는 환상을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접시가 깨진다 하나 둘 쏟아지기 시작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치며 깨지고 무릎을 치며 깨진다 밥알 퉁기며 깨지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며 깨진다 속 깊이 쌓여 있던 접시들이 와그르르,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깨진다 어휴 놀래라, 귀를 막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신나게 깨진다 엉덩이 들었다놓으며 경쾌하게 깨진다 키득키득 입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깨지는 접시! 침 튀기며 나온 접시들이 손뼉을 치며 깨지고 어쩜 좋아, 발을 구르며 깨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야 후련한 접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 ―박성우, 「접시」 한 편의 시를 잘 읽어서 시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어떤 관념이나 의미없이 ‘접시가 깨진다’의 문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가 될 때까지 말과 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미지의 변주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접시’를 통해 박성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진다. 접시가 깨진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 행위로 기존의 틀이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탈의 욕망에서 오는 야릇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입속에서 나와 쉴새없이 깨지는 접시!”에 이르면 접시가 시적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눈치채게 된다. 접시는 시인의 말도 되고 마음도 되는지라 결국 자신의 내면의 그 어떤 것을 털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지금 있는 기존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위(?)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비웠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치며/ 무릎을 치며/ 밥알을 퉁기며/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발을 구르”는 접시들. 아무튼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접시 깨지는 소리의 소란함을 통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발산 작용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중랑천 둔치 노부부 한 쌍 자전거와 한판 벌이고 계시다 할미는 페달 위에 안다리걸기를 시도하고 삼천리호 외궁둥이 샅바를 잡은 할배는 엉중겅중 두꺼비씨름 중이시다 뒤에서 밀면 몇 바퀴 구르다가, 기우뚱 곧추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질 듯, 비틀 그렇게 밀고 넘어지고 에돌아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 돌아보면 풋꿈인 듯 눈에 밟혀오는데 아이들 MTB자전거는 꼬리 물고 내달린다 목 길게 빼고 구경하던 해바라기 할배 등뒤에서 고개 꺾고 하품할 때쯤 웅크렸던 할미의 어깨가 펴지고 은빛 바큇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할배가 슬며시 꽁지를 놓은 줄도 모른 채 차르르― 자전거도로 위로 날아가는 할미새 이제 되었네그려, 혼자라도 넘어지지 말고 싱싱 나가시게 서툰 씨름판 곁에 맘 졸이던 호박덩굴 이파리 세워 갈채를 보내는데 샅바 놓으시고 뒷짐진 할배의 빈손 그늘, 너무 깊다. ―이영식, 「이별연습」 평생 해로한 부부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영식 시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심리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고 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이지만 이제 둘 중 누군가는 혼자 남아 자전거 타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평생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 타기가 서툴다. 뒤에서 밀어줘도 기우뚱거리고 곧추세워 놓아도 비틀거린다.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전거와 의 싸움에서 쉽게 삽바를 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꺼비 씨름처럼 굼뜨고 하품이 날 지경이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홀로 탈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마침내 웅크렸던 할머니의 어깨가 펴지고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이제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싱싱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된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별연습’이 끝났음을 알고 샅바를 놓는다.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빈손이 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깊다.” 이영식 시인은 이미 「낮달」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낸 바 있듯이 「이별연습」에서도 노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아마 허장성세(虛張聲勢) 없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천착해내는 시인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3 유자효 시인은 최후의 폼페이인이 된 「새」의 화석에서 2천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어미의 사랑이라는 보석을 찾아냈고, 박승미 시인의 「마음 心 둘」에서는 표의문자인 ‘心’자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서정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나명 시인은 독특한 감성으로 새소리와 새잎이 피어나는 「파릇하니 파란 집」 한 채를 선사했다. 「흔적 1」에서 황상순 시인이 주검이라는 탈피를 통해 비상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깨뜨리기라는 파괴 행위를 통해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식 시인은 노부부의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이별연습」으로 죽음과 삶의 깊은 그늘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평생을 견지한 시작(詩作) 태도로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않겠다는 ‘어불영인 수사불휴’(語不營人 雖死不休)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스크랩 원문 : 빛고운 창가      
1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강희안 댓글:  조회:1561  추천:0  2018-11-06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애지문학회 사화집, 『날개가 필요하다』(종려나무, 2009)에 대하여 강희안 1. 혼질적 기호의 파장을 찾아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변하지 않고 본질적이며 사회적인 언어 체계를 랑그, 혼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언어 체계를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e, 시니피에)의 관계를 지녔다는 특징을 지닌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란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사회에서 공인된 언어를 말한다. 즉 이 말은 여러 가지 상황에도 절대 변화하지 않고 언어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본질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이와는 상대적인 관점의 파롤은 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지칭한다. 랑그와 파롤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로 설명할 수 있는데, 낱말들의 음성을 나타내는 기표와 낱말들의 개별적인 뜻을 나타내는 기의의 결합으로 개개의 낱말들이 자의적인 차이를 나타낸다는 말과 동일하다. 언어학에서 자의적이라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우연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에서는 상상력을 통해 누가 그 간극을 다변화하는가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라는 매체의 특성이 기존의 언어 관념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정서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애지문학회에서 낸 사화집의 시편들은 서로 유사한 랑그로써 세계와 언어의 자의식을 각기 다른 파롤의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어 이채롭다. 2. 개인적 랑그, 사회 파열의 자의식 랑그와 파롤의 개념을 처음 창안한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밖에 없다고 단정했는데, 그것은 파롤이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공적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창적인 개성을 강조하는 시적 언어인 경우에는 파롤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과 의미 구성체인 시니피에의 개념을 착안한다. 언어는 표층적인 음운 구조와 그 이면의 의미 구조를 동시에 지니며, 이 두 구조는 불가분의 행복한 결합 관계라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 이론에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보탠 자크 라캉은 기호 표지인 시니피앙이 단순한 음성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을 배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 이 본질인 시니피에를 견인한다는 이론이다. 라캉의 언어철학은 현대 시인들의 언어 의식과 세계 인식에 강력한 파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념은 이 글에서 다루는 애지문학회 시인들에게서도 주류를 형성할 만큼 강력한 인자로 작동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그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다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병력을 컴퓨터 자판에 두드리면 네모 번듯한 운세가 슬픈 바코드로 떠오른다 아무 이유 없이 궁합이 맞지 않듯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전봇대의 전단지처럼 생사의 모호한 경계를 사람들이 참새처럼 몸을 떨고 있다 수만 볼트의 전깃줄에 꿈적도 하지 않는 참새 한 마리, 발바닥이 간지러운지 끊임없이 발 바꾸기를 한다 벼랑 끝에서 당당한 맨발은 없다 오늘도 그는 시한부 선고 중이다 ― 김연종, 「돌팔이 의사 생존법」 전문 김연종은 근작시에서도 보여지듯 능청을 떨면서 세태를 꼬집는 알레고리를 자유자재롭게 구사하는 시인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임상체험에서 얻은 시적 모티프를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알레고리화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인용시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작품으로서 자본을 위해서 목숨값을 흥정하는 의사의 권력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돌팔이 의사’(기표)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기의)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병자들의 유약한 특성을 이용하여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는 기표를 통해 권력의 위악성이란 어처구니없는 기의를 드러낸다. 나아가 그가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비상동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삶의 이율배반적 허위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권력에 방기된 병약한 인간들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기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 갔을까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 한 개로 압축된 목,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 두 눈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뱉어지는 눈곱 같은 질문 두 귀로 밀려와서 하나의 입으로 쏟아지는 귀지 같은 상념 두 코로 달려들어 하나의 입으로 들어오는 꼬딱지 같은 먹이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다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다 ― 김혁분, 「구멍에 대한 담론」 부분 김혁분은 풍요로운 이미지보다는 사유 쪽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 장기를 지닌 시인이다. 인용시에서도 사람의 ‘입’이라는 구멍에 대한 사유의 기표가 ‘항문’이라는 기의로 환치되는 구조적 역설을 보여준다. 시의 화자는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한 개로 압축된 목”을 제시하면서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라는 전제를 내세운다. “두 눈”이나 “두 귀”, “두 코”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배출하는 일이란 “질문”이나 “상념”이나 “먹이”라는 기의를 얻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기실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이어지는/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로 요약된다는 전언이리라. 따라서 화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며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입으로는 향기로운 척하지만 뒤가 구린 인간의 생,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후끈한 염문”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독설”로써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인간들의 비애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부분이다. 따라서 인용시는 하나의 ‘입’이란 기표는 결국 ‘항문’의 기의와 동일하다는 역설적인 감각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정위된다. 새벽잠이 점점 없어져 갈 때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항문의 괄약근만은 아니다 아래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면야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은근슬쩍 뒤처리도 염려 없으니 불안함 한 덩이쯤 탈 없으나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 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 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 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입의 괄약근이다 ― 박현, 「괄약근에 대하여」 부분 박현의 시는 젊은 시인답게 현대적인 다양한 소재를 차용하여 도발적인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로 ‘악어가방’을 통한 문명비판, 자본주의적인 위악성 풍자, 나아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도저한 언어의 저돌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용시 「괄약근에 대하여」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편에 속한다. 여기서의 ‘괄약근’(기표)은 ‘입’(기의)과 동일화의 범주로 포섭하여 무리 없이 형상화한다. 항문의 괄약근으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거나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불안함 한 덩이쯤”은 별 문제 없겠다고 단언한다. 곧이어 화자는 그 다음 연에서 기표를 뒤집는 아이러니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입의 괄약근”이라는 실존적인 진실의 발견이다. 따라서 화자는 ‘항문의 괄약근’이란 기표와는 다르게 ‘입’이란 기표는 “힘주어 꼭 다물지 않으”면 “빠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미늘”로 남아 “염치 모르는 생채기”(기의)를 남긴다는 쓰디쓴 전언을 남긴다. 마지막 연의 “견뎌 낸 시간이/치욕이 되지 않기 위해선/괄약근 관리에 힘쓸 일”이란 진술이 설득력을 배가하는 이유도 바로 그 까닭이다. 허, 그란디그란디 이 말은 꼭 해야쓰겄소 쌀 무시 달걀 마늘 밀가리 동동주 되야지괴기값, 게다가 우마차비(費)에 동네 또랑에서 멱 감는 돈꺼정 나라에서 직접 관리허겄다고 했담서요 와따매 요것은, 항꾸네 생산해서 항꾸네 나눠 묵자 식(式) 이데올로기를 가진, 저 웃녘 추운 나라 어떤 독재자가 실패허고 확 조져분 이론이여라 전하, 통촉허씨요야 이바구 끌텅을 파다본께, 동네 의원(醫院) 갈 때 나라에서 주는 보조비부텀 주택청 토지청 파발청 저수지청 등등 나라에서 운영허는 각종 청(廳), 말 안 듣는 신문청 방송청을 돈 많은 상단(商團)으로 팔아분다는 전하의 야리꾸리헌 경제구상꺼정, 헐 말쌈이 오살나게 많아분디 오늘은 진짜로 그만허것소 나도 목구녕이 포도청이요, 말은 요로코롬 촉새거치 했지만 공마당에 촛불 쓰로 갈라, 포대기채 걷어 가불까 싶은께 데불고가지 못허고 하루씩 돌아감시롱 각시 대신 애새끼 볼라, 눈구녕 뛩그랗게 까제낀 욱엣놈 눈치 살필라, 허벌나게 바뿌요야 금메, 하루하루가 살강 욱에 요년허니 영거져 있는 밥그럭 신세당께요 ― 양해열, 「옹색지(壅塞誌)」 부분 양해열의 시는 80년대 김지하의 「五賊」이란 시를 방불케 하는 풍자의 구조(기표)로서 시대의 환부(기의)를 통렬하게 짚어내는 특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전통적 형태로써 현대적 리얼리즘 시의 계보를 잇고 있어 주목할 만한 신인이다. 그의 걸쭉한 입담은 가히 판소리를 차용한 김지하의 담시(譚詩)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의 시는 재치를 앞세워 불합리한 세태의 문제를 해학적 어조로써 꼬집어 낸다. 남도 사투리의 자유자재로운 운용은 결국 서민들의 애환을 담지하는 특장을 지니는 바 시의 질박한 서민들의 애환을 자연스럽게 표백하는 특질까지 함유한다. 권력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거대 리얼리즘이 퇴조하는 우리 시단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긴요한 신인을 얻었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현실에 산재한 불합리한 모순의 문제를 질박한 남도사투리의 어조로써 유장하게 끌고 나간다. 인용 부분은 현 이명박 정부가 자가당착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 즉 공영화와 민영화 문제가 뒤바뀐 현실에 대해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능청스런 해학을 동반하고 있어 흥미롭게 다가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육덕진 그의 입담(기표)에 잘근잘근 씹히는 권력의 허구(기의)를 목도하는 쾌감에 동참한 듯하다. 낚시에 걸린 학꽁치가 날고 있다 팔 할이 시퍼런 멍 자국이다 살 속에 탱탱한 가시 박아 넣느라고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 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을 냉큼 업어 달아나는 파도, 서로 기대본 적 없는 파도의 등을 낮달이 등(燈) 되어 준다. ― 윤영숙, 「파도, 등 푸른」 부분 윤영숙은 서슬 푸른 독기의 기표로써 시의 이미지의 파장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이를 다시 기의로 응집해 내는 저력이 돋보인다. 예를 들면 생명의 힘이란 정서를 “수액 당겨 꽃 피워내는 아귀 같은 힘”(「아이리스 벽화」)이라거나 “물관의 중심이 비틀려 옹이 박혔을 것”(「겹 겹」)이라는 언표로 일갈하는 대목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시의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갈기 휘날리며 밀어붙이던 파도에도/뼈가 있고, 등이 있어 뛰고/휘어지고 굽다가 거꾸러”진다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나아가 “아버지가 골진 등짝으로 나를 키웠듯/파도는 거꾸러지는 등의 힘으로/등 푸른 생선을 키우고/등대 허리 꼿꼿이 잡아 세”운다고 은유화하고 있다. 더구나 ‘학꽁치’의 이미지를 빌려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에 박힌 푸른 멍의 이미지를 초점화하면서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고 부연한다. 나아가 시의 화자는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 파도의 등”과 “낮달이 등(燈)”을 pun의 고리로 엮어 동일화하기 위한 은유 전략이리라. 인용시는 ‘파도의 등’(기표1)에서 출발하여 ‘아버지의 등’(기표2), ‘학꽁치의 등’(기표3), 그리고 ‘낮달의 등(燈)’(기표4)으로 이어지면서 둥근 중심을 세워 고통과 맞서는 도약의 에너지(기의)를 분출하고 있는 환유적인 고리가 예사롭지 않다. 휴일 봄날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한다 잔돈에 커피까지 대접하며 전표함에 두었는데 퇴근시간 다 되어 뱀 한 마리 튀어 나왔다 어디에 있었나? 저 뱀 모두들 놀라 손사래를 치는데 전표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뱀이 대가리 들고 내게 오더니 마치 내 잘못을 질책이라도 하듯 뒤통수를 깨물었다 아차, 내 수기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발버둥치는 나, 툭툭 터지는 봄꽃들 얼른 지갑을 털어 대납했음에도 오랜 시간 물고 늘어지던 긴 그림자 ― 이광구, 「뱀」 부분 이광구의 시에는 소소한 일상에서 겪는 삶의 비애가 잔잔한 수채화 물감 번지듯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근작 시편들에서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그는 섬세하고도 따뜻한 마음결을 지닌 시인이 분명하다.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뱀’이라는 기표를 실제의 뱀과는 무관하게 삶의 어떤 ‘비가시적인 힘’의 상징으로 차용하여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드러낸다. 화자는 “휴일 봄날”에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하다가 퇴근 무렵이 되어서 “뱀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고 진술한다. 그 뱀은 양심이어도 좋고, 상사의 의심에 어린 눈초리여도 좋고 그 무엇이어도 무방한 상징이다. 그만큼 ‘뱀’이라는 기표는 우리의 도처에 산재하는 권력이어도 좋고, 자본에 휩쓸리는 소시민들의 일상이라는 기의여도 상관없다. 그만큼 상징의 장력이 크다는 것은 시의 파롤의 힘을 배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따뜻한 시가 갈수록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 귀에 그 구멍을 대고 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 활자도 지워지고 얼굴도 지워졌다 드디어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었다 똥의 말을 말없이 받아주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 ― 정준영, 「주름」 부분 정준영의 시는 현미경적 관찰을 토대로 하여 일상의 소재를 아주 감각적으로 새롭게 재구하는 특질을 내보이고 있다. 인용시에서도 그러한 그의 역량이 충분하게 발휘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힌다. 사소한 일상에서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시의 명제에 충실한 시편들이다. 예를 들어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귀에 그 구멍을 대고/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라는 구절에서도 그의 섬세한 상상적 감수성의 역량이 여실히 발현되어 있다. “활자도 지워지고/얼굴도 지워”져야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는 종이의 기표를 통해 그와는 너무도 먼 간극에 있는 인간이 늙는다는 것의 궁극이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기의를 꺼내들고 있다. 환언하면 화자가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랑그)는 것이 부드러운 영혼(파롤)을 얻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가편이라 여겨진다. 힘 빼기 연습이다 네트 가까이에 떨어지는 공을 되받아 쳐야 되는 그 순간 모았던 힘을 건듯 놓기 위한 몇 겹의 쇠사슬로 서로를 동여매고도 믿기지 않아 발 동동 굴렀던 내, 사랑도 그랬다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을 힘껏 공을 멀리 보내거나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 몸에 새기는 중이다 ― 조영심, 「헤어핀 레슨」 부분 조영심은 은유와 상징을 표현 기제로 삼으면서도 자재롭게 인간사의 진실을 크로즈업해 내는 특질을 지닌 시인이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그는 배드민턴 기술 중의 하나인 ‘헤어핀 레슨’이란 특성을 통해 사랑의 역설을 드러낸다. ‘강한 것(기표)은 약한 것보다 못하다(기의)’라는 이 공식은 이 시를 지배하는 조건인 바 인간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의 화자는 “머리핀을 꽂는 이 손놀림의 작전”은 “허허실실(虛虛實實)”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여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화자는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몸에 새기는 중”인 것이다. 기존의 고정 관념을 뒤집는 역설은 무엇보다도 기표와 기의의 거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더구나 기존의 이성의 법칙이란 결국 감성의 법칙과는 상대적 관점을 유지한다는 사실의 환기에 기여하는 기제로 차용한 것이다. 그의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필력이 더더욱 날개를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생면부지의 꽃과 ‘꽃’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분명 질펀한 교합이었으리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 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 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으리 망설임의 그림자 부산했으리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 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 저 욕정의 이모티콘들 ― 최명률, 「오래된 소통」 부분 최명률의 시는 격정적인 언어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중심인데, 인용시는 그 틈서리에서 약간은 비껴서 있는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기표와 기의가 동일한 언표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냥 ‘꽃’과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을 분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은 ‘조화’(造花)라는 기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화로 상정된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저 욕정의 이모티콘들”이라고 비판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작적인 문명적인 인터넷 기호(기의)를 통해 아주 감각적인 꽃의 이미지(기표)를 현상해 내고 있어 흥미를 유발한다. 3. 어긋난 파롤, 자아 교응의 불문율 소쉬르가 주장한 랑그가 실제적으로 시에 표현된 언어라고 한다면 파롤은 텍스트 생산자인 시인의 무의식층에 자리한 시의식에 비유된다. 그러니까 매번 다르게 문맥적인 구조에 의해 굴절되는 언어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랑그란 머릿속에 저장된 말, 즉 관습적으로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한한 사회적 언어를 말한다면, 파롤은 실제로 쓰이는 말로서 무한하며 개별성을 지닌다는 특질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이라는 잉여의 부분을 내장하기 때문에 창조적이므로 시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이다. 한문에서의 ‘어’(語, 랑그)가 “이인상어일어(二人相語曰語)”라고 하여 유한한 사회적 언어로서의 소언(小言)이라면, ‘언’(言, 파롤)은 “자언일언(自言曰言)”이라고 해서 개인의 언어를 지칭한다. 무한한 개인적 언어로서의 대어(大言)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 두 가지 계열층을 형성한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기표’로 표현되지만 이차적으로는 시인의 특수한 언어 구조에 의해 재창조된 ‘또 다른 기의’가 내장되기 마련이다. 거개의 시인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것을 다시 조화롭게 동일성의 원리로써 포섭한다. 이는 전통적인 시 형식의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인데, 애지문학회 시인들 중에서 서정시의 기본 원리에 충실한 시편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쉿,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 소리 ― 강서완, 「그믐」 부분 강서완의 시는 이미지로 말하는 방식을 터득한 방법론으로서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넓혀 놓는다. ‘그믐밤’의 특성을 의인화하여 시각의 이미지를 청각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감각적인 이미지 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의 원래 기의는 가족 중에 늦게 귀가한 가장이 식구들이 깰까봐 조심해서 들어오는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의미한다.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또한 조심스레 문을 닫는 상황을 암시한다. 나아가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는 나뭇잎 소리의 특성을 생동감 있게 활용하여 자기 전에 몸을 씻는 행위를 연상하게 해준다.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는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고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에서는 그림자가 포개지는 성적 메타포를 끌어들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소리”라는 생명의 격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시각적 현상을 묘사하지 않고 청각적 이미지로 들려주기 때문에 더 생동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강서완 시인만의 개성적 자질이다. 따라서 2부분에서 “눈 감지 마라//눈 감으면 어둠이다”라는 평범한 표현이 ‘달’이라는 생명의 원형성과 맞물리면서 싱그러운 생명 감각으로 전이되는 경이감을 맛볼 수 있다. 오늘따라 밭이 호미를 튕겨내며 까탈을 부리고 있다 햇살이 짐승의 발톱처럼 파고드는 오후 군대만 생각하면 오줌을 누고 싶다는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가 아!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 같아 등에 멍에를 얹고 나서면 들판이 부스스 일어서고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빛 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지던 아버지 풀을 매고 돌아서 보니 이랑이 하얗게 말라 간다 감자 너머 고추 너머 고구마 너머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 굵고 거친 씨앗들을 촘촘히 넣어본다 ― 김종옥, 「멍에고랑」 부분 김종옥 시인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을 아주 재치 있게 시로 버무려 낼 줄 아는 섬세한 미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용시도 그러한 감각이 돋보이는 시에 속한다. 화자가 밝힌 ‘멍에고랑’이란 “자갈들이 불거져 있”고 “곡식보다 풀이 더 성”하다가는 “나무들이 느닷없이 들어서”는 곳이다. 시의 화자는 ‘멍에고랑’의 기표에서 출발하여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란 기표와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라는 기의를 결합한다. ‘아이’에게 ‘군대’란 잊히지 않은 “빨갛게 익은 목덜미”의 기표라면 ‘소’의 ‘목덜미’는 멍에로 인해 털이 다 빠진 기의에 속하는 셈이다. 나아가 화자는 소에게 ‘멍에’를 얹는 ‘아버지’에게는 자식이라는 멍에의 기의가 얹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더구나 화자는 하얗게 말라가는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라는 의문점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아이’와 ‘소’의 기표가 ‘아버지’의 등에 짊어진 기의, 즉 ‘자식’이란 멍에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고리가 연쇄되어 있다. 이 같은 투사의 축을 전제로 화자는 척박한 ‘멍에고랑’에는 “굵고 거친 씨앗들”이 제격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이끌어 내는 특질을 선보인다.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 김지유, 「모란꽃살문」 부분 김지유의 시는 알레고리보다는 싱그러운 서정 감각이 돋보이는 시적 체질을 지닌 듯하다. 「들숨으로 오는 저녁」의 비극적 세계인식에 초점을 두는 시보다 인용시 같은 서정적 시편들이 그의 시적 자질을 보증한다. 인용시는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기표)을 통해 “봄이 오”는 상황(기의)을 예민한 서정의 결로써 포착해낸다. 예를 들어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깊은 잠을 털어내면/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라는 구절에서 감수성 예민한 화자의 언어 감촉이 체감된다. 나아가 화자가 “달그락 달그락/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리는 감성의 결이 결국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는 상황으로 전이하는 감각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따라서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오는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지그시 웃”는 장면으로까지 포착해 내는 섬세한 상상력의 운용도 돋보인다. 다시 말해서 ‘모란꽃살문’이란 기표에서 출발하여 ‘햇봄의 햇살’과 화자인 ‘나’, 그리고 ‘옛사람’의 이미지가 하나의 조화로운 기의로 엮어내고 있는 방식이 유연하다. 밤 한 시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 벚꽃처럼 나부낀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 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 花― 그 남자의 입김이다 이럴 수가 나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단 말인가 빈자리 가득 술내 펄펄하니 방금 내렸나 보다 어디로 떠났을까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 삼십 년이 팔짱을 낀다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 강정이, 「크리스마스 이브」 전문 강정이의 시에는 생의 연륜에 걸맞게 생을 긍정적이면서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넉넉한 시선이 감지된다. 시의 화자가 밤 한 시에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기표)를 맡는다. 그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의 날이었다고 발화하면서 과거의 그와의 인연(기의)을 떠올린다.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가 “花―”하며 꽃향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 “그 남자의 입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다는 간극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직 사랑을 시작도 못했는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전언이다. 그는 화자에게 “텅 빈 바닷가 검게 웅크린/물수리 같던 남자”였고, “먼 하늘 바라볼 땐 지바고 같던 남자”였으며, “라라의 머플러를 선물하던 남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화자의 기표는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고 그라는 기의는 부재한 지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화자가 사는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에 그와 헤어진 “삼십 년이 팔짱”을 끼는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花―”하며 꽃잎으로 달려온다. 다시 말해서 기의와 기표가 어긋나면서 겹치는 슬프도록 황홀한 지점인 것이다.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듯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 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김정원, 「풍」 부분 김정원의 시는 ‘8’자 라는 pun(말우롱)의 효과를 활용하여 긍정적인 기호의 자질과 부정적인 기호의 자질을 병치하여 어머니의 팔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의 화자는 공교롭게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레가 치고/태풍이 불고/화산이 폭발하고/낡은 우뇌관이 동파하자/가지가 단박에 망가졌다”고 어머니의 풍 맞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기표의 반대편에서는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는 부정적 상황과 은근슬쩍 겹쳐 놓는다. 여기가 바로 기의와 기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때 어머니는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것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머니는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더러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운에 싸인 운명적 현존을 직감한다. 화자는 여기서 ‘8자’의 구획을 통해 늘 이율배반적으로 현존하는 인간의 운명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나무꽃 사랑이 있습니다. 별자리를 닮은 비밀입니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 대나무꽃의 향기입니다. 당신의 향기입니다. 대나무꽃이 피는 날 당신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 김원재, 「대나무꽃 사랑」 전문 상기 인용시는 스님의 시답게 아주 평이한 기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화자가 현시하는 기의는 자못 그윽한 깊이가 있다. 시적 화자는 첫 연에서 “대나무꽃 사랑이 있”(기표)다는 전제로 마지막 연의 “대나무꽃이 피는 날/당신과 만나기를 기원”(기의)한다는 미래지향적 언술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꽃 사랑’은 “별자리를 닮은 비밀”과 역학관계를 맺으면서 우주적 진실과 조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대나무꽃의 향기”이자 “당신의 향기”이고, “비가 내리는 숲길은/대나무꽃의 눈물”이자 “당신의 눈물”이다. 나아가 “눈이 숨 쉬는 꽃길은/대나무꽃의 꽃잎”이자 “당신의 꽃잎”이고, “달이 수줍은 숲길은/대나무꽃의 미소”이자 “당신의 미소”라는 상동성을 바탕으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세계를 현현해낸다. 그런 ‘자아’(대나무꽃)라는 기표가 ‘타자’(당신)라는 기의와 한 몸으로 동화될 때가 “대나무꽃이 피는 날”이자 “당신과 만나”는 날이라는 간극 없는 행복한 세계의 구현체, 즉 자타불이라는 미래지향적 낙원의식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다인실 병실에서는 아무도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환자도 보호자도 가끔 커튼을 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막 들어온 신참이다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 아플 때 순수해지는 어느 순간, 환한 믿음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병실에서는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내는 오, 오랜만에 우리 식구들 모였구나 ― 김현식, 「순수」 전문 김현식의 시는 광포한 세상에 내던져진 병약한 이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비애의 페이소스가 짙게 깔려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죽음의 문제라든가 배고픔 등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배면에 죽음의 그림자(기표)보다는 그것을 끌어안는 연민의 정서(기의)가 아름답게 무늬지어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화자가 경영하는 “다인실 병실”에서는 여기에서는 “신참”을 제외하면 누구나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진폐증에 걸린 “늙수그레한 아저씨”라든가 그의 “소박한 아내” 등은 자기의 문제보다도 타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폐암 환자는 제 잘못을 시인하면서 얇은 미소를 짓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라는 잠언적인 경구를 이끌어내는 특장을 선보인다. 이것은 “아플 때 순수해지”지고,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낼 때만이 타자조차 “우리 식구들”로 여길 수 있다는 화자의 따뜻하면서도 순수한 믿음이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인식이다. 나무들은 알고 있다. 생이 끝날 때까지,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물고기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때는 또 얼마나 몸부림을 쳐야 하는지도. 그것이 나무들이 잎을 피워 그 느낌 알 때까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다. 포기하지 않고 산상구어(山上求魚)를 하는 저들은 결코 얕잡아봐선 안 된다.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 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 ― 최용훈, 「나무學―연목구어(緣木求魚)」 부분 최용훈의 시에는 ‘나무’란 기표를 중심으로 인간사의 잠언적 경구나 보편적인 우주의 질서를 현현하는 기의가 주류를 이루는 시편들이다. 인용시도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고사성어(랑그)를 활용하여 생명의 질서(파롤)로 의미를 확장하는 기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의 ‘나뭇잎’이란 기표는 ‘물고기’란 기의와 동일화되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몸부림이나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매재로 차용된다. 나아가 “나무들이 잎을 피워/그 느낌 알 때까지/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라고 단언하는 소인은 마지막 연에 화두처럼 던져져 있다. 즉 화자에 의하면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라는 모든 생명체의 생태학적 형질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오묘한 자연사 진리의 발견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다채로운 언어의 무늬 바야흐로 시대는 문명의 첨단을 구가하며 실제 현실보다도 더 강력한 허구적 이미지가 압도하는 후기산업사회의 길목으로 접어든 지 오래되었다. 현대 시인들은 그간 텍스트의 객체에서 주체로 부상한 독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된 셈이다. 새로운 문화의 향유층인 젊은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과 세계관, 언어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따라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감수성으로 시적 비전을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가 난제로 등장하였다.―이번 사화집을 읽으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전반적인 추세로 볼 때 애지문학회 시인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그만그만한 스케일로 완성도 위주의 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각기 조금씩 상이한 목소리로써 아름다운, 혹은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특성이 과연 기존의 관습적인 형식이나 관념에서 자유로웠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깊이 고민하고 숙고해 봐야 할 대목이라 여겨진다. 후기산업사회의 환경의 특징에 주목해 볼 때, 오늘날의 독자들은 원하는 문화 정보를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나가기도 하는 역동성을 겸비한 존재다. 시인들이 교조적인 자세로 일방적인 관념을 표백하는 시적 메커니즘은 더 이상 효용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 현대시의 현주소인 셈이다. 고객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오가면서 서로 소통하고 문화의 중심 마니아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언어 관념을 비틀면서 전통적인 문화의 틀에 균열을 가하기도 하거나, 시대 도착적인 문화적 관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이제 시인이 아닌 독자가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시인들의 텍스트에 간섭을 하는 후기산업사회인 것이다.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기호에 맞는 도전적인 상상력을 창출해 나갈 때 시대감각에 걸맞는 유니크한 시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로 돌변했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눈길로 애지문학회 시인들을 바라보며 신인에 걸맞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파격에 이르는 시를 기대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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