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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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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 / 전 원 범 댓글:  조회:996  추천:0  2019-01-27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 전 원 범     기존(旣存)의 의미(意味)를 벗어나서, 그리고 나와 사물(事物) 사이에 존재(存在)하는 일상(日常)의 벽(壁)을 부수고 나서, 존재(存在)의 리얼리티(reality)를 발견(發見)하는 작업(作業)이 곧 시(詩)를 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존(旣存 )의 통념(通念)을 해체(解體)하고 새롭게 사물(事物)을 명명(命名)하며 의미(意味)를 창조(創造)하게 된다.   나는 동시(童詩)야말로 시(詩)에서 가장 원초적(原初的) 발상(發想)의 감동(感動)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교(技巧)나 어떤 수사(修辭)나 긴 사설(辭說)보다는 사물(事物)이나 대상(對象)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독특(獨特)하면서도 원시적(原始的) 또는 순연(純然)의 특성(特性)을 동심(童心)으로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이 본질적(本質的) 감동요소(感動要素)이며 무엇이 주변적(周邊的)인 것인지를 늘 구별(區別)해 내고자 애를 쓴다.   동시(童詩)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이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發見)이어야 하고 동심(童心)을 통해서 획득(獲得)된 것이어야 한다. 1994. 가을호 '아동문학평론'에서    
7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 심 상 운(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1211  추천:0  2019-01-27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가져온 곳 :   카페 >토요시학회 | 글쓴이 : 김명| 원글보기     
6    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시문학>2014.3월호 시평 /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댓글:  조회:1093  추천:0  2019-01-27
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2014.3월호 시평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인은 익숙하게 보아오는 일상을 비틀어서 낯설게 보기도 하고, 평범한 체험이나 사상(事象)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변용(變容: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하여 전혀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각각의 시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이면과 본질을 보아내는 그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독자로 하여금 새로움과 경이에 눈 뜨게 한다. 그래서 시에는 독자적인 개성이 중요하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창작을 위해서 시인은 이미지를 변용시키고 비약적으로 결합하여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 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   말이 몽골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이리로 온다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바람소리와 더불어   지그재그로 달리는 네 개의 다리가 어지러운 곱하기 곱하기를 한다   앵글로 아랍은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름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염색을 하고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   할아버지의 몽골 초원이 그리워 긴 입을 들어 힝힝거리며           (중 략)   서울 아파트의 말매미가 한거번에 운다   말매미의 말은 우랄알타이지방의 거친 말이다                 -김규화 「말 ? 앵글로 아랍」부분    김규화 시인의 위의 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인 결합으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signifiant:記標)들 사이에서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동음이의(同音異義)인 시니피에(signifie:記意)들이 새로운 제 3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있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에서는 말-언어, 말-말(馬), 말-윷말, 말-마을, 말- 끝(末), 늙음 등 여러 가지의 동음이의어들이 중첩되어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혹은 각각 사용되어 ‘말’이라는 연상기법을 통해 여러 가지 변용된 이미지들을 비약적으로 결합시킨다. ㅁ, ㅏ, ㄹ 은 모두 유성음으로 그 발음만으로도 의성어나 의태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음성상징을 느끼게 한다.  그 중의 하나의 의미인 ‘말’에서 몽골초원과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연상되고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보이는 앵글로 ? 아랍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멋진 모습이 ‘염색’한 것이 되어 여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시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로 변용된다. 2연에서는 ‘할아버지의 몽골초원’을 그리워하는 말의, 몽골에서의 자유롭고 힘찬 나날의 삶이 묘사된다. 그러나 3연에 와서는 다시 ‘말’이라는 시니피앙과 결합되는 ‘말매미’가 등장하면서 시적 공간은 몽골초원에서 갑자기 시인의 사적 공간인 서울 아파트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매미들의 울음에서 ‘말(언어)’을 연상하고 그 말을 다시 ‘우랄 알타이지방의 거친 말’로 변용시킨다. 이 시는 얼핏 보아서는 이미지의 비약적 결합과 변용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앵글로 아랍에서 연상되는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거센 박차를 받아라’라는 역동성과 함께, 말매미의 ‘거친 말’까지 전체적으로 용감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친 말’에서 ‘서울’의 말(언어)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감정의 유로’에서 창작되던 낭만주의 시와는 다르게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말 사전’을 찾아가며, 여러 가지 지식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한다. 특히 다층구조를 기본으로 하이퍼링크로 창작되는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과 함께 더욱 치밀한 구조가 요구된다.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든다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KTX보다 빠른 속도로 풀리는 타임캡슐 어둠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줄장미 붉은 꽃송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쏟아내는 웃음소리 자지러진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술래는 잘 익은 꽈리의 가슴팍을 열어젖힌다 덩그런 태양이 붉다 한가득 입에 물고 햇덩이를 굴린다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 그대와 나 사이에 서면 바람은 구름에 안겨 고개를 넘고 구름은 바람에 업혀 사막을 건너간다 그런 날이면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흙탕물 묽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김예태 「사진을 보다」전문     김예태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행위를 ‘시간의 화석을 꺼내’드는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어서 그것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고 ‘타임캡슐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일어서는 것으로 묘사하여 이미지의 변용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사진을 보는’ 행위로 인해 시적 화자는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동무들과 민속전래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손에 손을 잡고 웃음소리 자지러지게 쏟아내는 아이들은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붉은 꽃송이들’로 빛나게 변용된다. 또한 잘 익은 ‘꽈리’를 ‘덩그런 태양’으로, ‘햇덩이’의 이미지로 변용시킴으로써 그 시절의 화자는 ‘햇덩이’를 입에 물고 굴릴 수 있는 태양의 친구가 된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개념으로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의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특별한 기회와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시인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순식간에 초월하여 자신이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시간 속에 자신을 데려다 놓는 마술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드는 이미지의 제시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이미지는 다시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를 화자에게 불러주고, 그곳에서는 삶을 건너는 힘에 겨운 고개도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도 구름에 안겨, 바람에 업혀 힘들이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도 라일락 향기가 나고 ‘흙탕물 붉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반짝이는 환희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처럼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과거와 현재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결합시키고 변용시켜 새롭고 환희로운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방죽의 물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을 때   첫 해의 열매를 큰 짚가마니에 담아 주시던 아버지   이듬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마니 속의 꿈을 끌고   수줍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기다림이 부풀리는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고운 잎사귀에서   첫 가을도 우주도 익기 시작했다   섬으로 가득 채워진 가을을 안았다   장대 끝에 꺾여 땅에 내려온   수많은 붉은 해를 누이며   가을의 투명한 창을                 -정숙자 「고욤나무」부분     정숙자 시인은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는 고욤나무 열매를 ‘태양의 빛을 가득 담은 작은 전구’라는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욤의 못생기고 작은 열매가 순식간에 환하게 빛을 내는 발광체처럼 우리 마음을 밝게 비춰주고 아울러 남루한 우리 삶도 밝게 비춰줄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해 준다.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시인은 독자의 마음을 밝고 희망차게 하기도 하고 어두운 수렁을 지나게 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는 다시 ‘가마니 속의 꿈’으로,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으로, 익어가는 우주로 무한한 변용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섬으로 가득찬’ 가을이 되어 화자의 품에 안긴 고욤은 다시 ‘수많은 붉은 해’가 되어, ‘가을의 투명한 창’이 되어 끝없이 꿈꾸게 하는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춰준다.     뛰어내리기 바쁘게   스스럼 없이 몸을 포갠다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일까      (중 략)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에   개들이 좋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연애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권숙월 「오랜 연애를 위하여」부분     권숙월 시인은 눈이 내려 쌓이고 그 위에 또 쌓이는 것을 보면서 ‘이루지 못한 연애’를 비로소 이루어 ‘한 몸 되는’ 것으로 ‘눈’의 이미지를 변용시킨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하여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이며 마침내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전부를 바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하나 밖에 모르’는 연애를 ‘이루지 못하는’ 자기 나라를 버리고 겁 없이 뛰어내려 몸을 포개는 사랑을 보면서 화자는 조금 더 더디 녹는, 오래 함께 몸 포개고 싶은 눈의 마음을 짐작해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를 헤아린다. 이처럼 한 번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놓아버리면 끝장이었다//   암벽이 그의 하늘이었던 것//   절친한 하늘//   무서운 하늘//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 쪽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벽에 매달려 있는 것//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눈 감고 눈 뜨고 하늘의 입술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수환 「지상시편 Ⅵ부」     안수환 시인은 삶에게 ‘암벽타기’라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아슬한 높이에 매달려  밤마다 암벽을 기어오르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이 우리네 ‘살이’라고 변용시켜 비유적으로 일러준다.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기어올라야 하는 암벽은 때로 우리에게 ‘절친한’ 가족이며 이웃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함의하는 ‘하늘’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무서운’ 칼날이기도 하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쪽을 내려다보니’ 에 이르면 시점의 차이를 일깨워준다. 반대의 시각, 제 3의 시각에서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는 시인만의 특권이며 시인만의 탁월한 변용능력이다. 이러한 반대의 시각에 의해 변용된 새로운 이미지가 태어나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깊이를 터득하게 된다. 비록 ‘암벽타기’같은 나날의 삶이지만 때로는 ‘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쩜 저리 여린 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박정원「사라진 우주」부분     박정원시인은 ‘막 깨어난 애기나비’를 하나의 ‘우주’라는 확장, 변용된 이미지로 제시한다. 애벌레 자체도 하나의 우주이지만, 그 애벌레의 우화(羽化)는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번데기의 어둠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어두운 터널을 믿음 하나로 거쳐 나와 비로소 탄생된 크나큰 우주인 ‘순한 고요’가 박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기는 절묘한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 세상’이 오다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을 ‘층층나무 이파리들’의 담담한 눈길을 통해 제시하는 이미지 등에서, ‘사라진 우주’에 대해 이 작품이 주는 안타까움과 충격이 더 큰 파장으로 확장된다. 他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생명존중의식과 측은지심이 담담한 묘사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처럼 이미지의 변용과, 변용된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의 묘미이다.   이미지의 변용은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눈은 끝없이 사물과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하며 ‘낯설게 하기’를 통해 파격적인 새 패러다임과 새 세계를 독자 앞에 제시해준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시인 이혜선의 문학서재 | 글쓴이 : 이혜선| 원글보기   
5    페미니즘 (feminism]) 댓글:  조회:1086  추천:0  2019-01-27
페미니즘 (feminism])        1. 개념 *페미니즘 (feminism):여성학, 여성주의-여성해방운동 ('여성'이라는 뜻의 라틴어 femina에서 유래)  남녀는 평등하며 본질적으로 가치가 동등하다는 이념. 여성 중심적이고 여성성 지향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여성 존중의식    *생물학적인 성(性)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지지하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여성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189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나 관점, 세계관이나 이념이기도 하다. 여성 억압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페미니즘은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이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더불어 발전했다. 1960년대부터 현대의 페미니즘을 지칭해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이 권리와 평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를 정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면, 여성해방운동은 억압과 해방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인용)    *여성주의(女性主義) 또는 여권주의(女權主義), 페미니즘(feminism)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정치적 움직임 그리고 도덕 철학을 포함하며 주로 여성의 경험에 대한 관심, 구체적으로 여성의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한다. 사회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은 성 불평등을 끝내고 여성의 권리와 이익 그리고 사회 이슈를 대중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학계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불평등과 여성의 사회적 인식•지위를 기술하는 것에 집중한다.  몇몇 여성주의 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위계질서, 기업과 정부, 그리고 모든 형태의 단체에 존재하는 질서가 탈중앙화 되고 극단적인 민주주의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그 어떠한 조직이라도 집중화되어 있다면 이는 남근중심적 가족 구조에 기반한 것이며 개혁하고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여성주의 학자들은 여성주의의 본질을 성과 젠더에 국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주의 정치적 활동가들은 주로 재생산 권리 (낙태를 결정할 권리, 낙태에 대한 법적 제한의 제거와 피임에 대한 접근, 가정의 폭력, 임산부 휴가), 동등한 임금, 성추행, 차별과 성폭력 등을 포함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연구하는 분야들은 가부장제, 편견, 성적 대상화와 억압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여성주의와 여성주의 이론의 주축은 스스로 모든 여성의 대표라 여기는 서양 백인 중산층 여성의 문제만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다양한 제 3세계 등의 여성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이 균질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그룹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였다. 새로운 조류를 타고 여성주의 운동가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출현하였으며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젠더/섹슈얼리티와 사회 정체성들, 이를테면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가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며 사회적 계급과 인종, 문화와 종교에 기반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운동으로 인식한다. 2006년 현재 수많은 여성주의 정당이 존재한다.(위키백과 인용)    2. 제 1의 물결 페미니즘 비평: 울프와 드 보봐르     * 아리스토텔레스: 여성은 어떤 특질들의 결핍으로 여성이 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여자란 불완전한 남자    *페미니즘의 발생배경: 18세기말, 19세기초의 유럽은 신분제적 장애가 제거되는 과정에 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농노의 권리를 박탈하였던 법적 장애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고,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의 직업을 선택하고 장래를 결정하고, 재산을 보유할 수 있는 기회도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지위 면에서 농노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었던 여성들도 당연히 이러한 변화를 자신들에게까지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19세기초까지 여성들은 선거권•피선거권은 물론이고 공직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정치단체 가입이나 집회참여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전통적인 제약이 페미니즘 사상의 태동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산업화가 수반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페미니즘의 대두를 도왔는데, 우선 가족제도의 변화, 즉 여성이 가사노동과 생산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던 가내 생산적 대가족제도가 소가족제도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에서 축출, 가정으로 밀폐되었던 중산층 여성의 반발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요인은 계급구조의 변화이다. 시민계급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개인의 능력이 강조되었고 상업, 산업, 행정 분야에서 전문화가 진척되었다. 이것은 전문교육을 받을 기회가 허용되지 않던 중산층 여성의 지위를 급속히 하락시켰다. 페미니즘의 첫 함성이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터져나온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제 1의 물결 이전시기의 페미니즘 비평은 그 자체가 독립된 이론적인 담론이라기보다는 ‘제 1의 물결’ 관심사들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1) 버지니아 울프(1882-1941:영국))  페미니즘 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두 텍스트 출간-『자기만의 방』(1929)『3기니』(1938) 울프는 남성들과 비교하여 여성들의 물질적인 불이익에 주로 관심을 두었는데, 전자의 텍스트는 여성의 문학적 생산의 역사와 사회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후자는 남성의 권력과 직업들(법, 교육, 의학 등)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저서에서 울프는 육아 수당에 대한 요구와 이혼법 개정에서부터 여성대학과 여성신문에 대한 제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페미니즘 기획의 작성에 기여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여성의 글쓰기는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여성의 경험을 탐구해야지, 남성의 경험과 관련된 여성의 경험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성별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서 도전받을 수 있고 변형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페미니즘에 공헌하였다.  페미니즘 비평에 있어서도 여성작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검토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문학적 야망을 가로막는 사회적 경제적 방해물들에 항상 직면했었다고 믿었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받은 제한된 교육( 오빠들과 달리 그녀는 그리스어 교육을 받지 못했다)을 의식했다.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분석에 사회학적인 차원을 포함시킨 최초의 비평가-제 2의 물결 페미니즘으로 이어짐) * 여성 작가들에 대한 에세이『여성을 위한 직업』: 자신의 직업이 두 가지 면에서 방해받고 있다고 본다. 첫째, 여성다움에 대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속과 규제를 받는다고 보고 둘째, 여성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금기가 그녀로 하여금 “ ‘그녀’자신의 육체로서의 경험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여자는 심리적으로 남자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성의 경험에 대한 글쓰기의 시도는 여성의 구속된 삶을 묘사하는 언어학적인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여자들이 마침내 남자들과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획득했을 때에 여성들이 예술적 재능을 자유롭게 개발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2) 시몬느 드 보봐르(1908-1986) 제 1의 물결 페미니즘이 제2의 물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물.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일생의 동반자이며, 낙태 지지 및 여권운동가이며 이라는 신문과 페미니즘 이론잡지인 의 창립자.  20세기 사상을 논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인물이다. 근대 서구 페미니즘의 ‘성서’라 할 [제2의 성](1949)의 저자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 운동을 사르트르와 함께 이끈 프랑스 전후 지식인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 여성의 강력한 지적 역할 모델’이라고 불릴 만큼 보봐르가 페미니즘 사상에 미친 영향은 깊고도 넓다. 한때 그의 여성주의는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후배 여성 연구자들에게 무수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뤼스 이리가레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여성주의도 나올 수 없었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제 2의 성』(1949): 현대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명확하게 획립한 막대한 영향력의 저서. 여성은 남성과 한 쪽으로 지우친 관계를 맺도록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남성은 즉자(the One)이고 여성은 대 타자(the Other)이다. 남성의 우위는 순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를 확보했다. 즉 ‘입법자 신부 철학자 작가 과학자는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가 하늘의 뜻이며 지상에서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써’왔고, 버지니아 울프식으로 여성을 ‘대타자’로 가정하는 것이 여성 자신들에 의해서 보다 더 내면화되고 있다. 보봐르의 저서는 주의 깊제 성(sex)과 성별(gender)을 구별하고 사회적 및 자연적 기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본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지는 것이다....이 피조물을 만드는 것은 대체로 문명이다....다른 누군가의 개입만이 개인을 하나의 로 확립시킬 수 있다.” 그 ‘다른 누군가’의 (남성적)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생물학 심리학 재생산 경제학 등에 관한 해석의 체계들이다. ‘여성임’과 ‘한 여성’으로서 구성됨을 결정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보봐르는 만약 여성들이 그들의 대상화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가부장제의 몰락을 단정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제 1의 물결 페미니스트들과 같이 그녀는 생물학적인 차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며, 여성성을 불신하고 있다.    2. 제 2의 물결 페미니즘 비평 1)시작: 제 2의 물결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비평은 1960년대 중반과 후반의 여성해방운동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1963년 베티 프리단의『여성의 신비』의 출판으로 시작됨( 백인, 이성애자, 직업 없이 집안에 갇혀있는 중산층의 미국여성들의 절망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페미니즘을 실질적으로, 처음으로 국가적인 논란거리로 만들었음) 2)주된 강조점: 제 1의 물결의 투쟁을 계속 공유하면서  재생산의 정치학, 여성들의 경험. 성적 차이, 그리고 억압의 한 형태이면서 동시에 찬양해야 할 것인 ‘성욕’으로 옮겨져 강조되었다. 이러한 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에 생물학, 경험, 담론, 무의식, 사회적 경제적 상황 등 다섯 가지 주안점이 포함되어 논의되었다.  ① 생물학을 근본 적인 것으로 다루며 사회화를 경시하는 논의는 주로 여성들을 ‘그들의 자리에’ 두려는 남성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여성은 단지 자궁에 지나지 않는다(옛 라틴 속담)’-여성의 육체는 여성의 운명이라는 관점-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부여된 성역할을 문제시하는 모든 시도들은 자연적 질서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이 된다. ②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열등성이라기보다는 우월성의 근원으로 찬양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삶과 예술에 있어서 긍정적인 여성적 가치들의 근원으로 여성의 특수한 경험(배란 생리 출산)을 주장(여성들만이 그러한 특수한 경험을 겪어왔기 때문에 그들만이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된다. 더 나아가 여성의 경험은 다른 인식적 정서적 삶을 포함하고 있다. 즉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지 않으며,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다른 사고와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영향력 있는 글쓰기에는, 성적 차이에 대한 문학적 재현에 중점을 둔 일레인 쇼월터의 작업이 있다.) ③세번째 주안점인 담론: 데일 스펜더의『남성이 만든 언어』-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언어에 의해 억압받아왔다고 보는 견해. 푸코는 ‘무엇이 진실한 것인가는 누가 담론을 지배하는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함. 담론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여성을 남성적 ’진리‘ 내부에 감금시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성작가들이 별개의 ’여성적인 담론‘을 창조하기보다는 언어에 대한 남성의 지배에 대하여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 견해: 여성사회언어학자인 로빈 라코프- 여성의 언어가 유약성과 불확실성의 패턴을 지니고 있으며 ‘사소한 것 경박한 것 진지하지 않은 것’에 초점을 두고 있고, 개인적인 정서적 반응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언어는 열등하다고 믿고 있다. 남성적인 발언이 더 강하므로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평등을 획득하려고 하는 여성들은 남성적 발언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성이 세뇌되어왔기 때문에 강한 남성과 연약한 여성의 전형이 생산되었다고 보았다.  *④무의식: 라캉과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힘입음.     *그 외에 제 2의 물결 페미니즘을 지배하고 있는 특정한 주제들: 저메인 그리어의 대중적인 저서『여자 내시』, 사회주의에 대한 비평적 재평가(쉴라 로우보텀), 정신분석학(줄리엣 미첼), 케이트 밀레트와 아드리안 리치의 급진적(레즈비언) 페미니즘 등에서는 가부장제, 여성에 대한 정치적 조직의 부절절성, 여성의 차이에 대한 찬양 등의 주제가 제2의 물결을 지배하였다.    *영미 페미니즘 비평: 일레인 쇼월터의 『여성중심 비평』이 선봉이 되는, 경험적인 접근방법 여성의 글쓰기의 특수성과 여성작가들의 전통의 회복, 여성 자신의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등을 집중적으로 다룸 *프랑스 페미니즘 비평: 줄리아 크리스테바, 엘렌 씨이주, 루스 이리가레 등의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작 가(여성)의 ‘성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글쓰기를 강조한다.  - 이러한 두 갈래의 구분이 1960년대 후반 이래의 비평이론에 있어서 두 개의 주도적이고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미국의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은 시민권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다른 저항운동들로부터 그 원동력을 얻고 있으며 케이트 밀레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이러한 입장에 있다. 1969년에 처음 출판된『성의 정치학』은 그 시기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남성 문화에 대한 맹렬하면서도 낙관적이고 포괄적이고 재치 있으면서도 불경스러운 파괴작업으로 기억되는 그 시대의 한 기념비가 된다. 역사 문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 불평등만큼 이데올로기적인 주입 역시 여성 억압의 원인이 된다고 밀레트는 주장했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거나 여성을 열등한 남성으로 다루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시민적 및 가정적 생활에 있어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하나의 정치적인 제도’로 보아 강력한 비판을 하고 있다.  *밀레트는 사회과학으로부터 성과 성별의 중요한 구별-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지만 성별은 문화적으로 획득된 성적 정체성을 일컫는 심리학적인 개념이라는 구별을 도입하여, 문화적으로 학습된 ‘여성적 속성들’(수동성 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과학자들을 공격했다.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이러한 태도를 영속시켜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배와 종속이라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관계 속에서 이러한 성역할들을 실행하는 것을 ‘성의 정치학’이라 불렀다. * 『성의 정치학』은 남성주의적인 역사적, 사회적 및 문학적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선구자격이며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형성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밀레트는 ‘문학’을 하나의 근원으로 특권화 함으로써 글쓰기, 문학연구, 비평을 특히 페미니즘에 적합한 영역으로 확립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D.H.로렌스, 헨리 밀러, 노만 메일러, wid 주네의 소설에서 성적 묘사에 스며들어 있는 남성적 지배를 강조하였다 *비판: 다른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그녀가 남성작가들만 선택한 것은 너무 비전형적이며 소설에 있어서 상상력의 전복적인 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문학: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을 다시 생각하기」에서 코라 카플란은 밀레트가 ‘이데올로기를 모든 계층의 남성들이 여성을 구타하는데 사용하는 보편적인 남근 곤봉(penile club)’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하고, 밀레트의 많은 소설분석의 조야함과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다.    4)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특히 영국에서 제2의 물결의 강력한 분하의 하나였던 페미니즘의 갈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기본과제는 성별과 경제의 복잡한 관계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분석을 여성의 물질적 경제적 억압의 역사로까지 확장시키고, 특히 가족과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의 성적 분업에 의해서 어떻게 구성되며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여성 억압이 개인들의 의도적 행위들의 결과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 구조들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줄리엣 미첼의 「여성: 가장 긴 혁명(1966)」은, 가부장제가 여성의 재생산적인 기능과의 관계 속에서 미치는 구조적 통제를 역사화하는 선구적인 시도였고, 쉴라 로우보텀은 『여성의 의식, 남성의 세계』에서, 노동계급 여성들은 일터와 가정에서 노동의 성적 분업으로 인한 이중 억압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과 마르크스주의 역사 편찬은 주로 개인적인 경험의 영역, 특히 여성문화의 영역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 다양한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현재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영미와 프랑스 페미니즘사이의 ‘논쟁’의 압도적인 영향 때문에, 그 선명한 입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5) 일레인 쇼월터: 여성중심 비평 트릴 모이의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영미 페미니즘 비평’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이라는 두 가지 주요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영미비평은 이론적으로 소박하거나 이론화 자체를 거부하는 한편, 프랑스 비평은 이론적으로 자의식적이며 세련되어 있다고 본다. * 주요 영미 비평가들은 미국인들이다. 제2의 물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비평가는 일레인 쇼월터이고 그녀의 『그들만의 문학(1977)』은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여기서 쇼월터는 역사로부터 숨겨져 있던 여성 작가들의 문학사를 개관하고, 그들의 물질주의적, 심리적 및 이데올로기적 결정 요인들의 개요를 보여주는 역사를 생산하고, ‘페미니즘 비판’과 ‘여성중심 비평가’들을 격상시키고 있다. 쇼월터의 책이 시도하고 있는 바는 브론테 자매 이후 영국 여성소설가들을 여성의 경험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여성의 글쓰기와 남성의 글쓰기 사이에는 심오한 ‘차이’가 있으며, 하나의 전체적인 글쓰기 전통이 남성 비평가들에 의해 무시되어 왔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여성 전통의 잃어버린 대륙이 영문학의 바다로부터 아틀란타 섬처럼 솟아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전통을 세 단계로 나눈다. ① 여성적 단계: 여성작가들로 하여금 여전히 귀부인이기를 요구하는 주도적인 남성적 심미적 척도를 모방하고 내면화하는 단계 ② 페미니즘적 단계: 남성적 가치에 ‘저항하고’ 아마존적 이상향과 여성 참정권론자 동지애를 ‘옹호하는’ 급진적 페미니즘 작가들을 포함하는 단계 ③ 여성의 단계(1920년 이후): 이전 단계들의 특징을 물려받아 ‘자아발견’의 단계, 특히 여성의 글쓰기와 여성의 경험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단계 ( 그에 의하면 레베카 웨스트, 캐서린 맨스필드, 도로시 리차드슨은 가장 중요한 초기 ‘여성의’ 소설가들이다)    6) 프랑스 페미니즘: 크리스테바, 씨이주, 이리가레 제 2의 물결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분파가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여성을 남성에 대한 ‘대타자’로 인식한 것에서 유래하여, 계급 및 인종과 함께 ‘성욕’은 사람들의 집단 사이의 ‘차이’-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을 지배, 억압할 수 있도록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작된 차이들-를 조직하는 이분법적인 대립(남성/여성, 흑인/백인)으로 취급된다. 특히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전통적인 성적 차이의 전형들의 파괴를 강구함에 있어서, 그러한 전형들이 만들어지는 영역인 동시에 특히 ‘여성의 언어’ 속에 묘사될 수 있는 해방적인 성적 차이의 증거로 언어에 관심을 집중해왔다. 문학은 이러한 것이 인식되고 통용될 수 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담론이다.  * 프랑스 페미니즘은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의 프로이트에 대한 재작업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고, 지금까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공유해온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했다.  라캉 이전에 프로이트의 이론은 특히 미국에서 미숙한 생물학적인 단계로 환원되어 있었다. 남자의 성기를 본 여아는 남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 여아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규정하여 ‘남근 선망(penis envy)’을 불가피하게 겪는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근선망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며 그들의 ‘거세 콤플렉스’의 원인이 되며,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권리가 있는 긍정적인 성으로 보기보다는 ‘결핍된 남자들’로 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팰러스 중심적(phallocentric)’ 이라 칭하고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지배를 논할 때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줄리엣 미첼은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1975)에서 ‘정신분석학은 가부장제 사회를 옹호하는 추천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하나의 분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프로이트를 변호했다. 그녀의 이러한 변호는 재클린 로즈와 쇼샤나 펠만의 작업과 더불어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① 줄리아 크리스테바: 불가리아 출생, 기호학자 소설가 정신분석가 문학비평가 페미니스트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의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학과 언어이론을 결합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크리스테바는 해방적인 에너지의 억압되지 않은 그리고 비억압적인 유동을 여성을 대표하여 주장하였다.(그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거부하였다) 그는 두 개의 이원적인 남녀라는 성, 두 개의 대립된 성별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을 거부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여 모순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위계질서를 재평가하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여성이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노선에 따르면 소수의 특권 받은 여성만이 자신의 위치를 옮겨갈 수 있을 뿐 억압적인 구조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같음’을 강조하는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무비판적 전도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2세대 여성주의자들은 "권력과 언어, 의미 등에 남녀 각자가 맺는 관계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명백하게 하(Kristeva)”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성차별적인 구조 그 자체에 저항하며 남성/여성, 이성/감정, 문명/자연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시원적 여성’이라는 힘을 강조하면서 역시 성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논리로 나아가거나, 모성을 신화화하고 여성들에게 욕망의 승화, 금욕을 요구함으로써 마조히즘적인 여성주의로 치달아갔다. 여성성을 온화함, 조화, 평화로움 등으로 환원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입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1세대의 ‘같음’의 여성주의, 2세대의 ‘다름’의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타자는 나에게 낯선 악도 아니고 외부의 희생양, 즉 또 다른 성, 계급, 인종이나 국가 등이 아니’며, ‘나는 ‘공격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고, 동일자이자 타자이고, 자기동일적 존재이자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모성’을 강조한다.     ②엘렌 씨이주: ‘여성적 글쓰기’라고 그녀 자신이 부르는 담론에서 여성성의 긍정적인 재현을 주장하는 창조적인 작가이자 철학가이다. 에세이 「메두사의 웃음」(1976)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글쓰기에 그들의 ‘육체들’을 던져넣기를 요구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유명한 선언서이다. ‘너 자신을 써라. 너의 육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직 그 때만이 무의식의 광대한 자원들이 솟구쳐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쏟아져나오는 여성의 무의식과 상상력에 대하여 황홀경 속에서 쓰고 있다. 그녀는 또한 ‘여성적 글쓰기’를 아이와 어머니 육체와의 언어 이전 상태의 유토피아적인 합일 속에서 차이가 폐지되는 라캉의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인 ‘상상계’와 연관시키고 있다. *데리다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간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차연(differance)개념을 만들었다. 씨이주는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을 글쓰기에 적용하면서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대조하였다. 여성적 글쓰기는 단순히 새로운 글쓰기 양태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규범들의 변형을 위한 선행적 움직임이고, 전복적 사고를 위한 도약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인 바로 그 변화의 가능성이다.’ 그는 여성적 글쓰기를 개발함으로써 ‘남성은 자아, 여성은 타자’라는 서구세계의 사고방식, 말하는 방식, 그리고 행동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③루스 이리가레: 이리가레의 목적은, 글쓰기는 물론 심리치료를 통하여 프로이트와 라깡의 사고를 포함하는 남성적인 철학적 사고로부터 여성적인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라깡과 마친가지로 그녀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서로 대조시키지만, 라깡과 달리 상상계 내부에 남성의 상상과 여성의 상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리가레는 현재 우리가 상상계나 여성의 성적 욕망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남성의 관점에서 본 것임을 지적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여성은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남성적 여성성’ 다시 말해 팰러스적 여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여성은 ‘여성적 여성성’ 즉 여성이 보는 여성성이다. 그는 반사경 이론을 통하여 남성이 여성을 볼 때 그들은 여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반사물 또는 영상들과 초상들을 본다고 하였다. 때문에 가부장적 사고의 구조 안에서는 여성적 여성성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다른 여성의 반사경(1974)』) 그녀는 가부장적인 억압이 여성의 성욕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과 관련된 부정적인 구성의 유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근선망’의 개념은, 여성을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남근을 결핍한 대타자로 보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은 남성의 부정적인 거울이미지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남성들은 시각지향적인 반면에 여성들은 촉각을 통해 쾌락을 찾는다. 그러므로 여성의 글쓰기는 유동성 및 촉각과 연관되며 그 결과 ‘그녀의 문체’는 확고히 확정된 모든 형태들, 숫자들, 생각들, 개념들을 거부하고 폭발시킨다.-여성들의 ‘차이’에 대한 찬양만이 여성들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의 재현을 파열시킬 수 있다.    *이러한 비평들은 포스트구조주의적 개념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비평들은 ‘여성’을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글쓰기효과’로 보았다. 또한 이 비평들은 작가의 통제나 비평적 통제를 벗어나 텍스트의 자유 유희를 장려하며 반인본주의적이고 비사실주의적이고 비본질주의적이며, 사실상 정치적 문화적 및 비평적 해체의 잠재적인 형태를 대변한다. 특별히 문학 연구의 관점에 있어서, 이 비평들은 문학의 정전을 재평가하고 재형성하며 일원론적이거나 보편적으로 채택된 이론체계를 거부하며 담론 실행의 모든 영역을 공공연히 정치화시킨다.    * 이 글은 라만 셀던⦁피터 위도우슨⦁피터 부르커 지음, 정정호⦁윤지관⦁정문영⦁여건중 옮김『현대문학 이론 개관』의 「6. 페미니즘 이론」을 요약⦁정리한 것에 사전과 기타참고서적을 참고로 보충한 글임.     *참고    여성비정규직의 수는 급속히 늘어가는데 공식적 통계는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직장의 여성은 출산과 육아의 이유로 정리해고 1순위가 되고 있고,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맞벌이 가정은 일반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자녀 교육은 여성에게 집중되어지고 있으며, 여성의 정치 진출은 여성할당제라는 매우 좁은 문만을 만들어 놓았을 뿐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형식적인 여성정책이 이루어지나 실질적 도움이 체화되지 않는 시대에서 여성해방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문학사의 페미니즘  현 단계의 페미니즘은 보통 196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당시 여러 정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은 자유와 평등의 수사를 구사하던 남성 동료들이 여전히 남녀를 차별하는 틀에 박힌 가정들에 기초하여 여성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실망했다. 선언문을 작성한 것은 남성들이었다. 여성들은 자주 차나 끓이는 사람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다. 또 혁명을 주동했던 남성들은 연좌농성에 참여할 사람들을 조직할 때 여성들을 그곳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모순된 행동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60년대 후반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어적, 시각적 이미지들에 똑같이 대항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정치적 실천 속에서 그들 스스로를 재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여성운동이 학문적으로 연구되고 확산된 것은 이처럼 기존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남성적 사유, 즉 이성이나 합리성, 보편성에 도전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의 본격적인 페미니즘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이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각 대학에 여성학강좌가 개설되는 등의 이론적 움직임과 때를 같이하는데, 이와 더불어 1980년대 후반 고조되었던 사회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무성해지고, 각계의 다양한 집단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입장을 주장하는 다원적 논리가 등장한 시대적 분위기 역시 페미니즘의 활발한 전개에 주요한 조건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여성작가들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본격적인 페미니즘은, 과거 남성중심 이데올로기 하에서 우아함과 고상함이라는 규범 속에 갇혀있던 여성성의 신화를 그들이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서 진정한 여성성을 탐색하려는 자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시도이다. 치밀한 자기인식 하에 현 사회의 가부장적 습속과 문제점들을 고발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당당한 하나의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기를 추구하는 다양한 양상의 페미니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작가가 문학작품을 통해 감추었던 말을 한다는 것은 문학이 페미니즘을 논의하는 유효한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80년대 이전 시기까지의 대다수 여성 시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를 보여준 반면, 고정희, 문정희, 김혜순은 여성의 성 정체성을 바탕으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면서 각각의 방식으로 내면의 자의식을 표출하였다. 그동안 주변화되고 타자화되어온 '여성'이 제자리를 되찾고 여성만의 글쓰기를 통해 기존의 억압적이고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해체하고자 한다.(김현미 경희대 석사학위논문)2010-국회도서관        여 자    임 성숙(1933∼ )    너 위대한 모순이여    저주받은 산고의 곤욕을 축복으로 들어 올리는 거룩한 제기여    너 아름다운 모반이여    사막에 장미를 피워내는 기적의 흙이여    하늘 아래 엎드린 땅이여    쓴 잔을 비워내고 젖이 샘솟는 신비의 잔이여                이불을 꿰매며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야 한다. 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을 바늘을     찌른다.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한국전래동화 속의 착한 엄마들처럼 참, 아니,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평생 변함 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이 험한 세상 엄마마저, 엄마마저..... 난 어떻게.....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도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주어야 하오, 이 험한 세상 당신마저, 당신마저..... 난 어떻게.....    여자는 액자가 되어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액자 속의 가훈(家訓)처럼 평화롭고 의젓하게, 여자는 조용히 넋을 팔아 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도배되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액자 하나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웃는 것인가 우는 것인가, 그녀의 미소는 용서인가 배신인가. 난 알 수 없지만 난 그녀의 그림자 망사옷 같은 검은 가슴 속에서 무서운 화산의 힘을 두근두근 느낄 수 있지,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될 수 없는 박제될 수 없는 마녀의 부엌 같은 뜨거운 화산이 그녀의 미소를 영원한 무서움으로 낯설게 만들고 있는데,    그녀는 애매하다, 성녀와 마녀 사이 엄마만으로도 아내만으로도 표구될 수 없는, 정복될 수 없는, 저 영원한 회오리의 명화는, 여인에게 사랑은 벌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여인은 사랑을 통해 여신이 되도록 벌받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 영원을 표구하면서 세상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늠름하게 서 있지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 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음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 소리 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가져온 곳 :   카페 >한국시문학아카데미 | 글쓴이 : 시문학아카데미| 원글보기     
4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 문덕수 댓글:  조회:1242  추천:0  2019-01-27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 관계를 연결하여 완성한 시다       문덕수    [1] 가끔 하이퍼시란 무엇이냐고 묻는 시인들이 의외에도 많습니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 중에도 그렇게 묻는 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우나,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룹니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말에 ‘비근’(卑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상하거나 웅승깊지 아니하고 주변에 가깝게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이퍼시는 비근한 사물을 묘사하여 A단위를 먼저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즉 ‘이성’(理性)이나 ‘정의’나 ‘선(善)’이나 하는 말이 아니라, 즉 관념이 아닌, 우리 주변에 가깝고 낮은 모든 사물들(집, 부엌, 그릇, 호미, 쟁기, 나무, 펜, 그릇, 종이 등)을 가지고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입니다. 영어에 ‘아우트리치’(outreach)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을 뻗는다”는 뜻입니다만 동시에 팔을 뻗은 범위 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곧 비근한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팔을 뻗어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비근한 사물입니다. 즉 하이퍼시란 ‘아우트리치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탈관념 사물과 상상 이미지가 연결된 구조의 시라는 것이 제일 정확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이퍼시를 쓰기 위해 칸트나 사르트르 같은 위대한 철학적 저서를 읽기 위해 인공위성을 탈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나 맹자나 불교학자인 용수(龍樹, Nagrjuna, 150~250)의 저서인
3    사물로써 시를 쓰자 / 문 덕 수 댓글:  조회:1265  추천:0  2019-01-27
사물로써 시를 쓰자       문 덕 수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오늘 나는 평소에 생각하고 말해 온 시에 관한 나의 소신의 한 토막을 존경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까 하여, 이러한 기회를 나에게까지 주신 신규호 학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는 그 동안 시인 여러분들께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시에 관한 나의 소신과 직․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말을 한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나의 소신에서 나온 말들이었음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 동안 기회 있을 때 반 관념주의(“탈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얼마 전에 작고한 오진현 시인이 ‘탈관념’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사물시, 형식주의, 사물, 기호시, 하이퍼시, 의식적 방법 등 여러 가지 개념을 써 왔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나의 시론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만, 이러한 다양한 말들 때문에 도리어 혼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나는 가장 쉬운 말로 나의 시쓰기의 원점이라 할까, 출발점이랄까, 즉 스타트 라인을 말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우리 나라의 고승이신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철 스님은 불교와 관련해서 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우리 시의 원점으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철스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현대시의 원점’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너무도 당연한 말씀 같아서 더 이상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돌은 돌이요, 나무는 나무다”, “꽃은 꽃이요, 흙은 흙이다”― 이렇게 바꾸어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산을 보고 산으로 보지 않고 시를 쓰고, 꽃을 보고 꽃으로 시를 쓰지 않은 시인이 있을까요. 의외에도 많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의외에도 많습니다. 나도 초기에는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나무」라는 시를 썼는데 처음 3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3.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4.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돌히 사유한다 5. -문덕수, 「생각하는 나무」에서    나무가 먼길을 간다든지, 가다가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고 표현한 것은, 나무를 의인화하고, 나무를 멀리 여행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무를 나무로 보고,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고 표현한 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김소월(1902~1934)의 「萬里城」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6. 밤마다 밤마다 7. 온 하룻밤! 8. 쌓았다 헐었다 9. 긴 萬里城 10. -김소월, 「萬里城」 전문    이 시는 ‘만리성’을 읊은 것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잠들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不眠)상태를 읊은 것입니다. 만리성이라고 하는 사물의 모습은 조금도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만리성이라는 객관적 사물을 객관적으로 표현해도 될 텐데, 그리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하자면 ‘불면(不眠)의 그리움’이라는 자기의 정서를 읊은 것입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에 「진달래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는 시입니다.    11. 나 보기가 역겨워 12. 가실 때에는 13.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14.  15. 寧邊에 藥山 16. 진달래꽃 17.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18. -김소월, 「진달래꽃」에서    이 시도 제목은 「진달래꽃」이지만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이별의 정서’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萬里城」이건 「진달래꽃」이건 모두 인간사나 인간의 정서를 읊은 사실을 알게 되고, 이러한 시를 ‘인생주의’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시에서 인생이나 인간을 뺄 수 없습니다. 인생주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진리이고 진실한 삶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주의 시의 목표는 인생의 진리나 진실이 무엇이냐고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인생주의 시는 시와 진리의 일치를 가장 높은 목표로 삼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시인은 모두 인생주의 시인입니다. 인생주의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가는 김소월 다음 세대의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최고의 시인으로서 서정주(1915~2000)를 들 수 있습니다.    19.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 20.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21.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22.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23. -서정주, 「부활」에서    이 시에서도 ‘수나’라고 하는 연인인 인간이 등장합니다. 이 시가 표현한 ‘그리움’이라는 정서도 인간의 정서입니다. 즉 인생주의 시입니다. 김소월이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가는 길」)의 그 ‘그리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서시」)의 ‘부끄럼’이라는 윤동주의 정서도 김소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또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밤새 울었다”(「문둥이」)입니다. 이 시는 ‘문둥이’를 읊은 시이지만, 문둥이로 태어난 천형의 운명적 슬픔보다는 문둥이를 빌어 그 ‘울음’을 더 중시한 시로 보입니다. 즉 “꽃처럼 붉은 울음”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에서 기쁨이나 슬픔과 눈물은 중요한 소재이긴 하나,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울었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앞으로의 시에서는 이러한 인생적 눈물은 좀 참고 바위나 쇠덩어리처럼 견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돌과 6.25 언젠가 북한산성에서 산행한 일행 앞에서, 내가 돌멩이 한 개를 주워들고, “이 돌멩이에 무슨 사회주의가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민족주의와 계급주의가 있느냐”, “무슨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느냐, 단단한 이 돌멩이는 단지 돌멩이일 따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철 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말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이 “돌멩이”에 관한 시인의 상반된 태도를 우리는 김윤성과 전봉건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봉건의 「돌 50」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24. 돌은 25. 얼굴이 없다 26. 그래서 돌은 먹빛이다 27. 모래밭에 엎드려 묻힌 어둠의 먹빛이다 28. 아무튼 그 돌을 파내어 뒤집어라 29. 그러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30. 만에 하나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만 31. 얼굴 없는 돌의 얼굴과 문득  32. 꿈처럼 그렇게 마주칠 때가 있다 33. -전봉건, 「돌 50」에서    이 시에서 전봉건은 분명히 돌은 “어둠의 먹빛”이라 하면서 그 얼굴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돌의 얼굴이라고 한 말은 “돌 그 자체”, “돌이라고 하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봉건은 “먹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1724~1804)도 사물 자체(Ding an sich, thing in itself)는 알 수 없고, 우리는 다만 사물 자체의 겉(현상)만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의 현상도 잘 못 보고 있습니다. 햇빛, 어둠, 거리, 기분 등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나의 건물인데, 아주 멀리서 보면 거의 안 보이거나 조그마한 하나의 ‘점’으로 보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그 건물의 형태가 좀 뚜렷이 드러나지만, 그것도 보이는 쪽인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흐리거나 밤이면 더 안 보입니다. 이와같이 사물의 현상 그 자체도 잘 볼 수 없습니다. 이러니 더구나 사물의 참된 모습 그 사물의 진정한 모양과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시인은 그 사물 자체의 참된 모습 찾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사물의 참된 모습을 찾는 일은 진리나 진실이나 정의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전봉건은 「돌1」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4. 나는 봄눈 녹는 35. 나루터 찬물 속에서 36. 삭은 뼈처럼 하얀 37. 돌 하나를 건져냈다 38. 날개 뼈 같은 그런 모양이었다 39. -전봉건, 「돌1」    나루터의 찬물 속에서 전봉건이 건져올린 ‘돌’은 날아가는 새가 떨어져 죽은 그 날개 뼈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6.25 때 전사한 K라는 친구의 촉루, 또는 심지어 ‘석정’(石鼎)이라는 스님의 얼굴도 발견합니다. 여기서 전봉건 같은 모더니스트도 돌에서 돌을 보지 않고 그가 경험한 어떤 사건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마 전봉건에게는 이것이 돌의 참된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돌에서 스님을 보고, 6.25 때 전사한 전사자를 보는 것은, 돌에서 돌을 본 것이 아니라 돌에서 그것이 환기하는 역사나 종교나 정치 같은 다른 ‘관념’을 본 것입니다. 돌은 역사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며 기타 다른 관념도 아닌, 그저 돌일 뿐인데, 돌을 돌로서 안 본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예수로 안 보고, 부처님을 부처로 안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엔 김윤성(1925~ )의 경우를 봅시다. 산에서 돌 한 개를 주워 집에 갖다 놓았는데 아들, 손녀 등의 반응이 각기 다릅니다.    40. 산에 있는 돌 하나를 내 집으로 옮겨놓았다…… 41.  42. “이게 뭐야?” 43. 딸애는 의아한 뜻으로 묻고 44. 아들은 다짜고짜 주먹으로 딱! 쳐보고는 손이 아파 상을 찌푸리고 45. 아내는 무해무득한 것을 대할 때 늘 하는 식으로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린다 46. -김윤성, 「돌Ⅳ」에서    ‘아내’의 태도가 제일 안 좋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돌’을 보고 ‘이게 뭐냐’고 묻는 태도는 시인, 철학자 모두에게 공통된 생각입니다. 김윤성의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라는 작품에서, ‘돌’을 두고 손녀와 둘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손녀가 작자에게 묻습니다.    47. “왜 이래, 이 돌” 48. “뭐가” 49. “이 돌 말이야” 50. “그 돌이 어때서” 51. “아이, 아니 이 돌” 52. 어린 손녀는 마침내 짜증을 낸다 53. -김윤성,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에서    매우 재미 있는 장면입니다. 손녀의 ‘짜증’은 돌이 무엇인가를 볼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사나이답게 주먹을 쥐고 돌을 다짜고짜로 딱 쳐보고 손이 아파 상을 찌푸립니다. 손녀의 ‘짜증’이나 아들이 손이 아파 ‘찌푸리는 상’은 돌의 본질을 모르는 데서 오는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손녀의 경우는 돌과의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짜증’을 냈지만, 아들은 돌과의 감각적 접촉 뒤에 ‘상을 찌푸린 것’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여기서 공통적인 태도 이상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돌을 어디까지나 ‘타자’(他者)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 둘째 객관적 태도로 돌을 보거나 돌과 접촉하고 있다는 점, 즉 객관주의입니다. 사물을 나와 같은 생각, 같은 느낌, 같은 감정을 지닌, 동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이러한 ‘객관주의’는, 우리 시인이 지녀야 할 앞으로의 태도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전봉건보다 더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은 돌을 주먹으로 쳐보고는, 돌이 단단하고 뭔가 저항하는 힘이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 저항력은 돌이 다른 존재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힘입니다. 영국에 존 로크(1632~1704)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사물의 고성(固性, solidity)을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사물에는 다른 사물의 침입을 막는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자의 ‘고’(固)라는 글자는 바깥 둘레(口)를 싸 막아서 엄중하게 이를 고수(固守)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견고(堅固)해야만 구안(久安)이 있고 고유, 고정이 가능합니다. 아들이 돌을 치자 아파서 상을 찌푸린 것도 바로 돌이 가진 저항력의 반응입니다.(불교에서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은 사물의 2차 성질로 봅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성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즉물이시(卽物而詩) 앞에서 나는 (1)인생주의 태도에서 벗어난 (2)객관주의 태도(혹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다 초월하여)로, (3)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고, (4)사물에다 먼저(어디까지나 ‘먼저’입니다) 역사나 종교나 국가나 도덕이나 그러한 관념과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물을 보는 일에서 인생주의나 여러 가지 관념에서 벗어나면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경지가 있을까 하고 의문으로 여기는 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물을 사물로서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나딴에는 쉽게 말씀드린다고 애를 썼습니다만,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한국시는 사물에서 사물을 안 보고, 그 사물이 환기하는 다른 관념(역사, 종교, 국가, 도덕 등등)을 보고, 그 관념을 그 사물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십자가를 십자가로 보고, 산사(山寺)의 종소리의 참뜻을 듣지 못하고 그 겉만 보거나 그 겉소리만 듣고 그것이 그 사물의 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물을 사물로 보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여러분들도 나와 뜻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만, 각자 생각이 있으니까 그 생각에 따라가도 상관 없습니다. 사물을 사물로 보자는 것은 사물(사물은 인간과 관념을 초월한 그 자체의 독자적 세계입니다.)로 시를 쓰자는 주장입니다. ‘관념’으로 시를 쓰지 말고 사물로써 시를 쓰자는 것입니다. 나는
2    글쓰기 요리법 / 로사리오 페레(Rosario Ferré) /박 병 규 옮김 댓글:  조회:1164  추천:0  2019-01-27
  글쓰기 요리법 로사리오 페레(Rosario Ferré)/박 병 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가 음식을 만들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텐데. ― 소르 후아나     I 프라이팬에서 불길로 들어가는 방법           오랜 세월에 걸쳐 여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썼다. 에밀리 브론테는 열정의 혁명적 특성을 보여주려고 글을 썼고, 버지니아 울프는 죽음의 공포, 광기의 공포를 이겨내려고 글을 썼으며, 조안 디디온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히려고 글을 썼다. 그리고 클라리세 리스펙토르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유를 알려고 글을 썼다. 내 경우, 글은 건설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의지의 표현이자, 성장가능성과 변화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 글자 한 글자 구축하기 위해 글을 쓴다. 또한 비존재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려고 글을 쓴다. 이런 의미에서, 모어(母語)라는 말이 최근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모국어라는 말의 의미는 약 이천년 전 요한이라는 유대인 작가도 분명하게 인식한 것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로 요한복음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도 요한은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였다. 그리고 후대의 신학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창조의 원리로서 말씀이란 문학적 의미였다. 요한이 말씀에 부여한 이 의미를 나는 언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말에 부여하고 싶다. 부어(父語)는 자동사일 수도 있고 타동사일 수도 있으며, 현재나 과거나 미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어(母語)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모어를 신뢰하면, 모어는 우리들만의 길을 개척하자고 틀림없이 손을 내밀 것이다.         사실, 나는 말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말 덕분이다. 따라서 말을 아주 신뢰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신뢰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인생이란 게 거친 바람 앞에 나부끼는 부조리극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말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내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돌려주었다. 이러한 건설적 필요성은 사랑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자신을 재창조하고, 세계를 재창조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게 영원하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글을 쓴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내 의지 속에는 파괴적인 의지도 있다. 내 자신을 멸절시키고, 세계를 멸절시키려는 의도이다. 말은 본성적으로 모르는 게 없다. 낡고 부패한 것을 일소하고, 새로운 것을 세울 때를 안다. 내가 이 세상의 부패와 관계하면 말은 나를 향해 칼을 겨눈다. 나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깊은 실망감 때문에 글을 쓴다. 이러한 실망감에서 삶을 재창조할 필요성이 움트며, 현실을 한결 인간적이고 살만한 곳,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토피아적 인간과 세상으로 대체할 필요성이 싹튼다.         이러한 파괴적인 의지는 내가 느끼는 증오의 필요성, 복수의 필요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는 현실에 복수하고 내 자신에 복수하려고 글을 쓴다. 나에게 그토록 상처를 주고, 나를 그토록 유혹한 것을 영원히 보존하려고 글을 쓴다. 상처만이, 깊은 모욕만이(이 말은 결국 내가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 내 가슴에 인간적 표현의 힘을 창출할지도 모른다.         이제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의지를 내 작품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처음으로 단편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타자기 앞에 앉은 날, 글을 써서 집을 얻고, 연간 500파운드 남짓한 돈으로 독립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혼녀였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아무튼 그때는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자신의 지적, 정신적 공간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완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느 순간에 내 자신을 등져버리게 된 것이다. 통념에 따라 아내로서 의무를 다하려고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었다.          아무튼 항상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안온한 삶, 즉 위험도 없지만 그렇다고 책임도 없는 그런 삶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가정의 품안에서 살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내 손으로 지식을 얻고, 예술을 하고, 모험을 하고, 위험을 맛보고 싶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얘기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은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삶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인생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기쁨과 공포의 공모자로 만든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종말로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삶을 모르는 죽음,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한 죽음과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죽음은 너무 무자비하고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은 얘기로는, 순수한 사람들, 살아보지 않고 죽은 사람들, 자신의 행동으로 아무런 손익계산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은 림보로 간다. 천국은 선인의 몫이고, 지옥은 악인의 몫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림보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만이 있다. 우리들은 어떻게 림보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랫동안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단편을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서 첫발을 떼어놓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한편으로 흥분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가 죽었다. 마치 내가 태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림보의 문을 빠끔히 열고 바깥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목소리가 거짓이라면, 내 의지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동안의 희생은 헛고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되뇌었다. 착한 부인과 가정주부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내차버렸으니 프라이팬에서 불속으로 뛰어든 꼴이었다.          당시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복음의 전도사나 마찬가지였다. 두 작가에게서 글 잘 쓰는 법을 배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적어도 졸필을 면하는 방법은 배우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두 작가의 책을 모두 읽었다. 건강한 사람이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보약을 먹듯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 예전의 여성작가들과 동시대의 많은 여성작가들을 죽게 만든 나쁜 병에 걸리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독서가 여성작가로서 갓 출발한 나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손은 아직도 불 위에 올려놓은 프라이팬을 잡던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공격적으로 펜을 휘두르는 손이 아니었다. 시몬이나 버지니아는 여성작가들의 성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아주 가혹하게 비판했다. 시몬의 견해로, 여성작가들은 전통적인 주제, 이를테면 자신의 존재를 한정시켜버린 관습과 교육을 고발하거나 사랑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왔다. 이런 주제로 자신을 국한시켜버리는 것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역량을 적절하게 내면화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시몬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 문학, 철학은 새로운 자유, 즉 개별 창조자의 자유 위에 세상을 세우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야망을 성취하려면 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위상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시몬의 견해에 따르면, 여성은 문학에서 건설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내면적인 현실에서는 건설적일 필요가 없으며 외적인 현실, 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서 건설적이어야 했다. 시몬이 보기에 직관, 비이성적인 힘과의 접촉, 감성적인 능력은 매우 중요한 재능이지만, 어느 면으로 보면 부차적인 재능이었다. 세계의 작동원리, 즉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의 질서는 직관과 감성이 아니라 이성과 지식의 빛에 비추어 결정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앞으로 여성은 이러한 테마를 문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버지니아는 객관성과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버지니아는 여성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게 객관성과 거리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여성 작가들 가운데 오직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만 예외로 인정했다. 두 작가만이 셰익스피어처럼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글을 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버지니아는 “자신의 성(性)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강조하거나, 비록 정당하고 할지라도 대의를 무시하거나 의식적으로 여자 입장에서 말하는 것은 여성작가에게 치명적이다.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여성작가들의 책에는 일탈과 왜곡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되면 건전한 판단력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반쯤 미쳐서 글을 쓰는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이는 자기 운명과 전쟁을 하는 것이니, 모순과 좌절 속에서 요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버지니아가 보기에, 여성문학은 파괴적이거나 격분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작품처럼 조화롭고 투명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선택한 주제는 세계였고, 문체는 완벽하게 중성적이고 차분한 언어였다. 시몬과 버지니아의 이러저러한 충고를 따라서 주제의 핍진성이 잘 드러나도록 매진하면 될 것 같았다. 이제 이야기의 단초를 찾는 일만 남았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에 수많은 창이 있다고 했는데, 이 중에서 나만의 창을 찾아서 주제 속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나는 역사적인 일화를 선택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사탕수수 단작경제에 기초한 농업사회에서 도시화된 산업사회로 변화가 우리나라 부르주아에게 의미하는 바와 관계있는 일화 말이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그러한 변화는 기존 가치의 상실을 야기했다. 토지로부터 이탈이 있었고, 착취에 기초한 가부장적 행동양식은(때때로 이러한 가부장적 행동양식은 기독교적인 자선과 윤리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이제는 미국에서 유래한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법칙으로 대체되었다) 잊혀졌으며, 지방에 전문직 계급이 등장하면서 예전 지배계급 즉 사탕수수 농장주 중심의 과두세력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설정에 따라 선택한 일화는 어느 모로 보나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건설적이라거나 파괴적이라는 쓸데없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도 없었고, 신물 나는 여성작가 논쟁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이야기의 배경을 선택한 나는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손가락 밑에서는 로마자 26글자가 웅장한 악기의 음표처럼 언제든지 튀어오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텅 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료도 많이 준비하고, 그렇게 이야깃거리도 많았건만,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 정도면 초보자라도 단편 정도가 아니라 소설 10권을 쓰고도 남을 분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쉽지 않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필요하다면 밤을 새울 각오도 했다. 그리고 익기만 기다리면 첫 단편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집중만 하면 언젠가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겠지. 그런데 날아 밝아오기 시작했다. 서재 창문이 자줏빛으로 물들었을 때는 타자기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진 재떨이는 전사자의 납골함 같았고, 식어빠진 커피잔은 쓸데없이 포위한 도시의 성곽 같았다. 그렇게 처참한 밤을 보내고 나자, 단편을 쓰고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물겨운 교훈은 얻은 게 다행이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곤경에 처하기 마련이며, 내가 창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소설을 애호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야기는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평소에 나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그게 문학인 줄도 모른다는 데 놀란다. 그와 유사한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어느 날 오후, 숙모 집에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          숙모는 식탁머리에 앉아서 찻잔에 꿀을 넣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20세기 초엽 멀리 떨어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여주인공은 숙모의 먼 친척으로 인형을 만들 때 꿀로 속을 채웠다. 그 여자는 남편의 희생물이었다. 술주정뱅이에 머리가 좀 모자란 남편은 부인의 재산을 탕진하고 막 나중에는 집에서 쫓아내더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숙모 집안사람들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친척여자에게 집과 식량을 대주었다. 형편이 넉넉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사탕수수 농장은 몰락 직전이었다. 이렇게 뒤를 돌봐주자 친척여자는 보답으로 꿀을 채운 인형을 만들어 숙모집안 여자아이들에게 주었다.          친척여자는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아직 젊고 아름다웠는데 그만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가 까닭 없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인근 마을 의사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의사는 첫눈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치유불가능한 병이라고 허위진단을 내렸다. 그 돌팔이 같은 의사가 이상한 고약을 다리에 붙이는 바람에 친척여자는 불구자가 되어 한평생을 의자에 앉아 살아야했다. 이런 치료를 받은 동안 친척여자는 수중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의사에게 다 털렸다. 의사의 행동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는 내 심금을 울렸다. 날강도 같은 의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20년 동안 착취를 당하면서도 체념하고 살아간 그 여자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숙모에게 들은 나머지 이야기는 여기서 되풀이 하지 않으련다. 내 첫 작품 「막내인형」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숙모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또 숙모는 순진하게도 이미 사라진 사탕수수 농장 시절을 찬양했으나, 농장의 일꾼들은 영양실조로 죽어 나가는데 농장주 딸들은 꿀이 든 인형을 가지고 노는 그 시절이 좋았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다. 대충 들은 그 이야기에 내가 채워야 할 부분이 있었다. 한 계급의 몰락과 다른 계급의 대두, 가족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가치체계의 변모, 이기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관에서 유래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사취(詐取)가 그것이었다.         드디어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날 오후, 서재에 틀어박혀 내 눈앞에서 타닥거리는 도화선의 불꽃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쉬지 않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탈고하고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작품 전체를 읽어봤다. 객관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이었고, 여성작가 논란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난 작품이었다. 그때 내 우려가 모두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두 번씩이나 착취당한 저 여자가 내 작품을 차지하고 앉아 비극적이고 완고한 베스타 여신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었다. 주제는 내가 기획했듯이 역사적이고 사회정치적인 맥락에 잘 부합하였으며, 사랑과 불만과 복수까지도―그래, 이런 것도 알아야 했는데― 잘 드러내고 있었다. 피멍이 든 가슴을 안고 사탕수수밭을 내려다보면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저 여자의 모습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때까지 굳게 닫혀 있던 내 이야기의 창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그 여자였다.         나는 시몬을 배신했다. 여자의 내적 현실을 다룬 작품을 또 썼기 때문이다. 버지니아도 배신했다. 분노에 이끌려 단편을 창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품을 쓰레기통에 던지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시몬과 버지니아 견해에 비추어보면, 나는 형편없는 글을 쓰는 여성작가와 다를 바가 없었고, 그 작품은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물증이었으므로 없애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내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막내 인형」을 쓴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단편을 쓴지라, 이제는 그날 배운 교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시몬 보부아르나 버지니아 울프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단편(또는 시나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나 그 밖의 사람들 조언을 따르고자 하는데, 그 결과는 대부분 상상력과 언어의 마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를테면, 사전에 외적 현실을 구상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주제를 궁리하더라도 내적 현실을 먼저 구성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또 중성적이고 조화롭고 거리감을 둔 문체를 구사하려고 하더라도 우선 내적 현실을 파괴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작가가 작중인물을 묘사할 때도 항상 자기 자신을,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모습을 묘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존재에게 그 어떤 장점이나 단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내 인형」의 친척여자와 나를 동일시할 때, 다음 두 과정을 거쳤다. 한편으로는, 그 여자의 불행을 통해서 내 자신의 불행을 재구성하는 한편, 무엇이 그녀의 약점과 잘못(수동적인 태도, 안주하는 마음, 끔찍한 체념)인가를 깨닫고 내 이름으로 그 여자를 파괴했다. 그래서 그녀를 구하는 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작품에서 여주인공들은 훨씬 용감하고 훨씬 자유로워졌으며, 훨씬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아마도 「막내 인형」의 잿더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그 여자의 환멸 때문에 나는 프라이팬에서 문학의 불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II 불길 속에서 몇 가지를 건져내는 방법           지금까지 첫 작품을 어떻게 썼는지 얘기했으므로 이제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첫 창작에서 오늘 내가 어떤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지 얘기하려고 한다. 문학은 모순적인 예술, 어쩌면 가장 모순적인 예술일 것이다. 문학은 한편으로는 창작에 온 정열과 지식과 특히 의지를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예술이기도 하다. 작가가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작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문학은 풍성해진다. 그리고 작가가 느끼는 만족감의 원천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내 경우, 이러한 만족감은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와 즐거움의 의지이다.          첫 번째 의지(이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로 대체하겠다는 것으로 작품 주제와 관계가 있다)는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후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여성작가의 글쓰기 논쟁에서 또 나와 관계가 있는 사회정치적 문제에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작품을 쓸 때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작품을 마치고 나서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글을 쓰기 전에는 이러저러한 대의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불가능했다. 이러저러한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신조에 집착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러나 창조적 언어는 거세게 불어나는 강물과 같았다. 강안(江岸)으로 밀려드는 물살은 충성심과 신념을 붙잡아버리며, 작가는 진실에 휩쓸려간다.         내 세계관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회가 여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며, 사생활이나 공생활에서 여성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투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 가운데 여기에서는 여성문학의 외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몇 달 전, 후안 라몬 히메네스 백주년 기념 만찬회에서 백발이 희끗희끗한 유명한 비평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음식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작품을 언급했다. 그 사람은 짓궂은 웃음을 띠고,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한쪽 눈을 찡끗하더니 저의가 있는 어조로 물었다. 내가 외설적인 단편을 썼다고 하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번 읽어보게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순간에는 젊잖게 나무랄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희끗희끗한 머리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으로는 희끗희끗한 게 아니라 초록색 같기도 하다. 아무튼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비평가들 사이에 내 작품은 『오양의 이야기』의 예술적 모사라는 소문이 도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물론 그 저명한 비평가에게 내 작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이 조금 누그러지자 여성문학에서 외설의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다짐했다. 그 초로의 비평가는 문학을 마치 남성적이고 사적인 영지라도 되는 듯이 여기는 노골적인 성차별 비평가의 전형이라고 확신이 섰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들은 거의 멸종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일을 잊기로 하고, 이번 기회에 외설의 문제를 천착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여성문학의 외설을 다룬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현재 여성문학을 다룬 대부분의 비평은 여성이 쓴 것으로, 이들은 마르크스, 프로이드, 성 혁명 등 매우 다양한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룬다. 다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여성비평가들은 ―예를 들어, 산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메리 엘런 모어즈의 『여성 문인』, 패트리샤 메이어 스팩스의 『여성의 상상력』, 에리카 종의 다양한 글―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즉, 폭력, 분노, 상황 부적응은 오랜 세월 동안 여성문학을 가능하게 만든 에너지원이었다는 것이다. 17세기 래드클리프의 고딕소설로 시작해서 브론테 자매의 소설과 매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조지 엘리어트의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을 거쳐 진 리스, 이디스 워튼,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이르기까지(『델러웨이 부인』은 사회적 안주인의 냉엄한 생활에 대한 승화된 해석, 시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이러니와 비판적인 시각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여성문학의 특징은 공격적이고 고발적인 언어였다. 모두들 분노하고 반항했다. 물론 다른 여성작가들에 비해서 좀더 아이러니하고, 좀더 현명한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비평가들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현대 문학에서 외설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여성문학에서 성적으로 금지된 언어의 사용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폭력적 경향의 필연적인 귀결인데도 불구하고 외설이라는 주제를 다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성작가들이 그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33년 미국에서 『율리시즈』의 외설 논쟁이 막을 내린 이후 출판된 소설 가운데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한 작가로는 아이리스 머독, 도리스 레싱, 카슨 맥컬러스가 있다. 이 작가들은 처음으로 ‘fuck’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했다. 한편, 에리카 종은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저속한 어휘를 구사했기 때문에 유명세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페미니즘 문학을 다룬 고상하고 수준 높은 비평은 이에 대해서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외설의 사회학적 정치학적 함의까지 고려하여 깊이 천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를 꺼낸 목적은 다름 아니라 작가로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일예였다. 아무튼 그날 연회에서 저명한 비평가가 나를 가리켜 외설문학의 옹호자라고 했을 때까지도, 나는 어떤 목적으로 작품에서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했는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현대 여성비평이 이 난처한 주제를 끈덕지게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내 의도는 바로 칼끝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여성들에게 휘둘러온 성적 굴욕과 낯 뜨거운 모욕이라는 칼끝으로 사회를 겨누고, 수용할 수 없는 낡은 편견을 겨누는 것이었다.          외설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굴복시키고 비하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여성을 구출하는 데 이중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단편 「여자들이 남자들을 사랑할 때」나 「네 곁에서 천국으로」 같은 작품에서 외설적인 언어는 여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불의 앞에서 작중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나를 포르노 작가로 간주해도 상관없다. 이로써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내 의지가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에 나는 만족한다.         그러나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의지와 마찬가지로, 양면을 지니고 있다. 이 양면은 제3의 필요성 때문에 떼어낼 수가 없다. 동전 옆면에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이 제3의 필요성란 바로 즐거움의 의지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텍스트의 몸에 대한 앎이며, 동시에 지적인 앎이다. 오직 즐거움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특수한 것―일반적인 것의 경험―의 증언을 우리 역사와 우리 시간에 대한 증언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네루다가 잘 알고 있었듯이(네루다에게는 점잖은 말도, 비속한 말도, 위선적인 말도 없었다. 오로지 사랑받는 말만 있었다) 즐거움을 통해서 몸의 피부에서 ‘피부’라는 단어를 용해시킬 때, 이러한 텍스트의 몸에 형태를 부여할 수가 있다.         남여작가와 말 간의 백열하는 즐거움은 한 번의 시도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욕망은 저기 있는데, 즐거움은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 말의 베일에 들어붙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간다. 말의 간극 사이에 매달려 있다가 손끝만 대도 미모사처럼 오므라든다. 처음에는 말이 작가의 요구를 외면하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므로, 작가는 앞이 깜깜한 절망 속에서 억지로 말을 깎고 끌어내리고 사랑하고 함부로 다루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말은 점점 온기를 회복하고 움직이고 숨을 쉬고,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맥박이 뛰고, 마침내 작가의 욕망을, 지겹도록 끈질긴 작가의 요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때 말은 폭군이 되어 작가의 생각과 음절을 지배하고, 밤낮없이 작가의 시간을 독차지하고 앉아 자기를 내팽개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하여 말 속에서 잠을 깰 정도가 되고, 말 또한 직감을 갖게 되면 육화에 이른다. 텍스트의 몸에 대한 앎이라는 신비는 마침내 즐거움의 의지 안에 있게 되며, 작가는 이러한 의지로 다른 의지, 즉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나 세계를 구축하고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앎은, 내 생각에 텍스트의 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지적인 앎이다. 이는 텍스트의 욕망이 나를 백열상태에 이르도록 채근한 결과이다. 모든 남녀작가들은, 모든 예술가들은 육감을 통해서 작업을 해오던 몸이 언제 결정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지 알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도달하면, 단 한 마디의 말(단 하나의 선線이나 해설)이라도 더하게 되면 작가와 작품 사이에 사랑스러운 씨름의 결과로 생겨난 미의 상태, 미의 불꽃은 즉시 꺼져버리게 된다. 그런 순간은 항상 경이롭고 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순간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를 제빵공이 언제 반죽이 다 되었는지를 아는 신비한 순간과 비교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텍스트의 몸을 통해서 피가 한 방울씩 흐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단편을 끝냈을 때 이러한 앎이 내게 주는 만족감은 문학의 불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III 불길을 지피는 방법           이제 모든 문학의 불길을 지피는 데 필요한 저 신비한 연료, 상상력이라는 연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련다. 이 문제를 얘기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가끔 상상력의 존재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한 회의주의 때문이고, 둘째 문학 전공자와 일반인들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까운 지인들에게나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은, 어떻게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폰세(내가 태어난 곳이다)의 유명한 포주 ‘이사벨 라 네그라’에 대해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과 상상적 현실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이 무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질문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를테면, 매리 셸리가 제네바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다가 키가 10피트나 되는 괴물을 정말로 만났을까하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어렸을 때 『프랑켄슈타인』을 읽었고, 메리 셸리는 이미 백년도 더 전에 죽은 탓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허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순진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많은 비평가들이 ‘이사벨 라 네그라’하고 안면이 있느냐, 그 여자가 운영하는 사창가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이렇게 넌지시 물어오면 도리 없이 내 얼굴은 빨개진다) 물을 때는 상상력에 대한 인식부재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비평은 작가의 생애 연구를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철면피하게 자전적 요소를 이야기에 삽입했다는 끈덕진 믿음은 이러한 우려가 사실이라고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생애 연구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작가의 생애가 어떤 식으로든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에도 말이다. 아무튼 작품은 일단 탈고하고 나면 절대적인 독립성을 획득한다. 그 후 작품이 작가와 관계를 맺을 때는 작가의 삶에 크고 작은 의미를 지닐 경우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작품 해설은 오늘날 남성문학 연구에서도 흔하지만, 여성 문학의 연구에서는 더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자면, 버지니아 울프나 브론테 자매의 생애를 다룬 최근 저작물의 분량은 이 작가들의 소설 전집을 능가한다. 여성작가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관심의 근원은 여성의 상상력이 남성보다 못하며, 작품 또한 남성작가와 비교할 때 잡다한 일상사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상상력의 존재에 대한 인식 부재는 근본 원인은 사회에 있다. 상상력이 함축하는 바는 유희, 기존의 것에 대한 경시, 현존 질서보다 상위에 있는 가능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감성이다. 이 때문에 상상력은(문학작품처럼) 항상 전복적이다. 옥타비오 파스도 말했지만, 현대 정신에는 끔찍할 정도로 천박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실생활에서는 갖가지 무가치한 거짓말과 갖가지 무가치한 현실”을 용인하면서도 정작 허구는 배격한다. 이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항상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문학을 주로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교육기관에서는 수천가지 방법론으로 작품을 분석한다. 구조주의, 사회학, 문체론, 기호학 등이 그 예이다. 작품 구석구석을 뒤적거려 분석을 끝내고 나면, 작품은 산산이 쪼개져 형태소와 의미소의 구름만이 우리 주변을 떠다니게 된다. 마치 문학작품이 시계라도 되는 듯이 와셔와 너트 같은 부품들을 분해하여 메커니즘을 밝혀내려고 하는데, 이는 시계의 작동원리보다는 시간 표시 방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문학교육은 오로지 비평가의 관점만 용인된다. 전문가가 되어야, 문학의 분해자가 되어야 품위도 있고 보람도 있는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작가가 된다는 것, 변화가능성과 논다는 것, 상상력과 논다는 것은 전복적인 작업일 뿐, 품위도 보람도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우리 교육기관에서 문학창작과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작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생활을 하려면 부업을 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쓰기를(문학비평이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마술적인 일이다. 그러나 매우 특수한 일이기도 하다. 주문에도 비법이 있으며, 주술사는 필요에 따라 주술의 정확한 양을 재어 말의 그릇에 넣는다. 단편이나 소설이나 시를 쓰는 방법,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방법은 비평가들이 고대 콥트인의 컵에서 건져놓았다. 그러나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작가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          문학 연구자가 우리 대학에서 배워야하는 첫 번째 교훈은 상상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모든 문학의 불길을 지피는 가장 강력한 연료라는 점이다. 작가는 상상력을 통해서 작품의 주요한 채석장인 경험, 자전적 경험을 예술로 변형시킨다.     IV 음식에서 진정한 지혜를 성취하는 방법           이제는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냄비 밑바닥에서 뱅뱅 돌고 있던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테마는 오늘날 가장 뜨겁게 끓어오고 있는 주제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이 주제를 여러분 식탁에 올려놓기가 두려웠다. 어쨌거나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게 존재할까? 남성문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여성 문학이라는 게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여성문학은 버지니아 울프가 바랐던 것처럼 감정과 감각에 기초를 둔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문학일까, 아니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바랐던 것처럼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문학,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에서 영감을 얻는 문학일까? 오늘날 우리 여성작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여성가치를 옹호해야만 하고, 조화롭고 시적이고 세련되고 외설적인 데가 없는 문학을 창작해야만 할까, 아니면 현대적인 의미의 여성가치를 옹호하여 전투적이고, 고발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실적이고 또 외설적이기까지 한 문학을 창작해야 할까? 우리는 코딜리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맥베드 부인이 되어야 할까? 도로테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메데아가 되어야 할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글은 항상 여성적이었다고, 여성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용어를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얘기했다. 버지니아의 이론은 여러 가지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여성작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잘 써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 기법에 통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소네트는 14행으로 구성되며 규정된 음절과 운율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중성이다. 여성적이지도 않고 남성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여자도 남자처럼 완벽한 소네트를 쓸 자격이 있다. 릴케가 말했듯이, 완벽한 소설이 되려면 무한한 인내심으로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려야 한다. 이런 일에도 성은 관계가 없다. 남자가 완벽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여자라고 못 쓸 까닭이 없다. 그러나 여자가 글을 잘 쓰려면 남자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일곱 번 고쳐 썼으나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를 14번이나 고쳐 썼다. 여자이기 때문에 플로베르보다 두 배나 더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비평이 두 배나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말에서는 이단의 냄새,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음식 만드는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 글은 어쨌거나 글쓰기 요리법이다. 내가 주부에서 작가로 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와 요리를 종종 혼동한다. 사실 글쓰기와 요리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일치할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여성의 글쓰기는 남성의 글쓰기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의 본성과 상이한 여성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험에서 찾는 것이다. 만일 여성의 본성이나 남성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예술 작품의 창작에서 여성과 남성의 능력이 다르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남성과 여성의 능력은 동일하다. 이러한 능력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불변의 여성 본질, 성에 의해서 영원히 정의된 여성의 정신은 여성 문체의 불변성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이러한 문체는 과거와 현재 여성들이 쓴 작품의 연구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언어와 작품 구조의 특징이라고 한다. 오늘날 그와 관련된 이론이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측면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논리적이며, 구성 또한 면밀하고 찬란하다는 점에서 열정적이고 신비하고 악마적인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과 정반대된다. 오스틴과 브론테의 소설은 열린구조와 편린구조와 심리적인 미묘함을 천착하고 있는 리스펙토르나 엘레나 가로의 현대 여성작가의 소설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만약 문체가 남성이라면, 문체는 여성이기도 하다. 문체는 근본적으로 남녀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문학과 여성문학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집착하는 주제이다. 우리 여자들은 과거에는 정치적 과학적 모험적 세계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오늘날 이런 상황은 변했다. 우리 문학은 종종 우리 몸과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 한정된다. 우리 여자들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먹여주며, 생존의 문제까지 걱정해준다. 자연이 우리 여자들에게 부여한 이러한 운명은 역동성에 걸림돌이 되고, 감정적 필요성과 직업적 필요성을 조화시키려고 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신비한 힘과 접촉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여성 문학은 과거에는 남성 문학보다 훨씬 더 내적 경험을 천착했다. 역사, 사회, 정치와 그다지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여성문학은 남성문학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었다. 종종 금지된 영역, 비합리적인 사건, 광기, 사랑, 죽음과 관련된 영역으로 잠수했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우리 사회에서 그런 영역은 존재자체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위험해진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다. 여자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섬세하고 참을성 있게 수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남성의 경험과 마찬가지도, 어느 정도는 변할 수 있다. 더 풍부해지고 확장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 글쓰기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은 오늘날에는 비본질적이고 무용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여성작가들이 열린 구조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닫힌 구조를 사용하는지,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 머리로 쓰는지 아니면 가슴으로 쓰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머니들에게, 초창기 여성작가들에게 배운 기본적인 교훈을 적용시켜 불에 달구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 글쓰기의 비밀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비법처럼 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로지 재료를 조합하는 지혜에 달려 있다.◇     옮긴이 주 1) 출처: Rosario Ferré, "La cocina de la escritura." Sitio a Eros. México: Joaquín Mortiz, 1980, 13-33. 2)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Sor Juana Inés de la Cruz, 1648-1695): 스페인 식민시대의 멕시코 여성 시인. 최초의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조안 디디언(Joan Didion, 1934):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소설로는 『강물아 흘러라』(1963),『화이트 앨범』(1979)이 있다.  4) 클라리세 리스펙토르(Clarisse Lispector, 1920-1977): 우크라이나 태생의 브라질 작가. 언어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천착함으로써 현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야성(野性)의 마음에 다가서서』(1944), 『가족의 유대』(1960), 『어둠 속의 사과』(1961), 『살아 있는 물』(1973) 등이 있다.  5) 림보는 가톨릭교회에서 천국이나 연옥 또는 연옥 그 어느 곳에도 가지 않은 죽은 자들의 거처 혹은 그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6) “초록색 같다”는 말은 음탕하다는 뜻이다. 7) 에리카 종(Erica Jong, 1942- ): 미국의 작가이자 교수. 1973년에 출판한 첫 소설 『날기가 무서워』 (Fear of Flying)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대담할 정도로 솔직하고 다루고 있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8) 진 리스(Jean Rhys, 1890-1979): 카리브 해에 위치한 영연방 도미니카에서 출생. 대표작은 1966년에 출판한 『드넓은 사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 9)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1937): 미국 소설가. 소설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 1920)로 1921년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0) 도로테아(Dorotea):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선량한 여성. 11) 엘레나 가로(Elena Garro, 1920-1998): 멕시코 소설가. 작품으로는 소설 『미래의 기억』(Los recuerdos del porvenir, 1963) 등이 있다.    
1    데페이즈망 시창작 기법의 활용 방안 / 김관식 댓글:  조회:1531  추천:0  2019-01-27
◇시창작론◇    데페이즈망 시창작 기법의 활용 방안 / 김관식    1.       프롤로그    데페이즈망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예술기법 중의 하나이다. 1917년 프랑스 작 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 창안된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는 이후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 주의의 뿌리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에 의해 꿈과 무의식 세계가 주요 관심사 로 등장했고, 그에 의해초현실주의라는 낱말이 정의되기도 했는데, 문학에서는 『초현실주 의 선언』에서 브르통은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사람이 입으로 말 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사고의 참된 움직임이 표현된다. 사고는 이성 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기록 된다.”라고 초현실주의를 용어가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초현실주의 문예사조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황폐화를 배경으로 이성과인습을 반대하 고 문명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해방과 혁명을 촉진하기 위한 문예사조로 합리주의 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잠재의식의 세계를 추구하고 표현의 혁신을 꾀한 전위적 문예사조로 쉬르레알리즘이라고 일컬어 왔다.  초현실주의의 방법으로 유머, 신비, 꿈, 광기, 초현실적 오브제, 진기한 송장그리고 자동기 술법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기법은 자동기술법이다. 자동기술법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작가가 외부 세계와 분리된 상태에서 발견되는 사고의 형체를 가능한 빨리 표현하려는 방식 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조각난 이미지들을 조합하는데서 데페이 즈망 기법의 시초가 되었고, 자동기술법을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즉흥적인 조합이었던 자동기술과는 다르게 주도면밀한 사실주 의로 환각적인 장면을 창조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 데페이즈망으로 발전되었는데 초현실주의는 엄밀하게 사실적 초현주의와 추상적 초현실주의로 대별된다면, 사실적 초현실주의에서 데페이즈망으로 발전 되고, 추상적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과 관련을 맺는다고 보겠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현대 에 들어서까지 회화, 사진,그래픽 디자인, 건축 등 디자인 전 분야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의 많은 영역에서 데페이즈망 기법이 모티브로 쓰이고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의 주요한 표현 방법은 주로 비관습적 은유에 의존한다. 데페이즈망 기법 은 관습적인 은유에서 벗어나 비관습적인 은유를 통해 잠재의식 속 의미를 형성하고 이미지 를 합성하여 수용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 이하윤, 임화에 의해 소개되었고, 이상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억압 된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 해방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형상화하는 시가 창작되었다. 그 후 초현실주의 이론을 실천한 조향 시인에 의해,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이봉래, 김구용, 김차영, 고석규, 김영태, 성찬경 등의 많은 시인드의 시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오늘날도 꾸준히 부분적으로 초현실주의 표현의 여러기법들에 의 해 시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초현실주의 기법 중의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의 활용을 위해 데페이즈망 기법에 대 한 이해를 돕기위한 개념과 적용, 중국 초현실주의 시로 볼 수 있는 있는 奇幻詩를 대표하는 이하 시인의 사례, 우리나라의 이상, 조향, 성찬경, 김춘수의 적용 사례를소개하기로 한다.    2. 데페이즈망 기법의 개념   1)      데페이즈망의 의의    데페이즈망이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표현방법 중의 하나이다 .데페이즈망은 ‘데페이즈’라 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프랑스어로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또는 ‘다른 생활환경에 두 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본 원리는 “일상적의미와 이탈과 새로운, 혹은 낯선 의미와 느낌의 환기”이다. 데페이즈망은프랑스어로 본래 전치(轉置), 전위법으로 번역되는데, “낯설음”, “낯선 느낌”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에서의 데페이즈망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에서 표현하는것처럼 사물이 나 외계대상에 대해 아주 치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화면에서 의 느낌은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아니라 마술 같은 기이하고 이상하며 환상적인, 현실에 없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페이즈망은 물체나 영상을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나 배경, 분위기에서 떼어내어 전혀 그 사물의 속성과는 관련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배치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 적인 충격을 주고 서로 관련 없는 두 가지이상의 사물에 본원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인간의 마음속 깊이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문학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주장되어온 “낯설기하기”와 유사한 기법이나 문학이 언어 표현상 낯설게 하는 반면 데페이즈망은초현실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적인 기법이나 문학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장르별로 방법을 달 리하여 낯설게 하는데, 시에서는 시어와 일상어의 대립으로, 소설에서 이야기와 플롯 사이의 대립으로 장르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즉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규칙을 드러내는 방법으 로 낯설게 하며,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여 주위를 환기시킴으로써 동화된지각을 방해하고 사물과 세계를 생생하게 지각하도록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인 “낯설게 하기”와 유사하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로트레아몽의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장편 산문시로 격렬한 반 역사상과 악마적인 잔학성을 가진 59편의 에피소드로 된 작품인데, 일관성 있는 주제가 없고 난해한 시구로 철학적 성찰을 노래하며, 자동기술법으로 현실과 환상의식과 무의식의 아름 다운 융합의 문체로 된 시)의 유명한 구절 “재봉틀과 양산(洋傘)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 다운“은데페이즈망 기법의 예로 들 수 있다.  현실에서는 아주 거리가 먼 재봉틀과 우산이 제자리가 아닌 해부대 위에 있다는 것은 일상 적으로 있어야 될 곳의 사물을 우연한 곳이나 의외의 장소에옮겨 놓음으로써 당황하게 하고, 거기서 놀라움과 신비성을 갖게 하는 것이데페이즈망 표현기법의 주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 다. 서로 이전에 어떠한 관계도 없었던 오브제의 결합으로 심리적 충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 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데페이즈망의 부조리성을설명하 였다.  데페이즈망의 기법을 알렉센드리아는 여섯 가지로 분류에 했다.  첫째, 세부의 확대다. 예) 거대한 사과, 방안을 가득 채운 장미  둘째, 보충적인 사물의 결합이다. 예) 입과 새, 입과 나무, 산과 독수리  셋째, 무생물의 생물화다. 예) 발가락을 가진 구두, 유리방을 가진 옷  넷째, 신비스러운 개방. 예) 의외의 광경 쪽으로 열리는 문  다섯째, 생물의 믈질적 변형. 예)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 해변의 바위를 나는새 여섯째, 해부학적 경이. 예) 팔목이 여자 얼굴로 된 손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 나무, 사과, 유리잔,구두 등 일상 적 사물을 ‘낯설게’함으로써 그의 특유의 초현실적 효과를 얻어냈다. 마그리트는 작품에서 신 비감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친근하고 평범한 사물들의 결합이 좀 더 적절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경험한 이미지가 전혀 다르게 변했을 때 느끼는 심리적 충격과 대상의 물리적 구조가 어긋날 때 느끼는 기이한 혼란이 새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평소 이국했던 사물들의 위치를 전환시켜 엉뚱한 다른요소들과 결합시키거나, 사물과 말 사이의 엉뚱한 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의식과 무의식이 융합되는, 분화하기 이 전의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을 즐겨 표현해 왔던 마그리트에게는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이 매우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그리트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무의식적인 꿈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데페이즈망이라는 의식적인수법을 사용한 것 이 아니며, 현실 세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조리성이나 신비, 경이로움 등을 환기시키기 위 해 데페이즈망 표현기법이 사용되었다.  수지 개블릭은 그녀의 저서 『르네 마그리트』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사물에 대한 탐구 방 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➀ 고립 : 오브제를 고유의 영역 밖으로 옮겨 기대되는 역할로부터 벗어나게하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것.  ➁ 변형 : 어떤 한 측면의 변화 또는 정한 오브제와 정상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속성의 배제 이다. 사물이 가진 가장 중요한 성질가운데 하나를 바꾸는것.  ➂ 이중 이미지 : 시각적인 말장난의 형태로 새 모양의 산이나 배 모양의 바다가 그것이다.  ➃ 크기의 변화 : 위치 또는 물질을 통한 당혹스러움의 창조.  ➄ 합성 : 두 개의 익숙한 오브제가 결합되어 제3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오브제의 산출 이다. 가령 물고기의 상체에 사람의 하체를 결합.  ➅ 무중력 표현 : 친숙한 대상물들의 결합을 통한 당혹스러움의 창출.  ➆ 역설 : 지적인 반명제의 방법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안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것.  ➇ 개념적 양극성 : 밖의 풍경과 안의 풍경처럼 두 상황을 단일 관점에서 관찰하는 이미지 의 해석.    데페이즈망의 시에 적용    형태 데페이즈망의 기법에 시에 적용된 경우는 알렉산드리아나 수지개블릭의 분류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이 가능하나 주요로 시에서 활용되는 대표적인 형태는 형태의 변형, 이질적 결 합, 공간의 혼란 등 세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➀ 형태의 변형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회화에서 형태를 전혀 이질적인 모습으로 변형하거나기존 물체를 왜 곡하고 과장시켜 작품세계를 표현한다. 형태의 변형은 대상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물이 가 지고 있는 일상적인 크기에 변형을 주거나혹은 사물의 형태나 재질을 다른 대상물로 대체하 여 이질감을 지닌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형태의 변형은 일상 적으로보이는 것, 실재하고 있는 대상의 모양이나 생김새를 왜곡시켜 표현함으로써 관습적 인 사고와 경험을 파괴한다. 이는 일반적인 대상의 외적형태를 변화시켜 부조화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시각적 경험을 확장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시에서는 언어의 유희적인 기 법, 다중의 의미의 활용, 유사이미지를 변형하여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여 은유, 상징하여 표 현하는 방법 등다양한 형태 변형을 시창작 방법에 적용한다. 성찬경의 「프리」에서 “純粹 한波動”→“파동의 溫床 위에/주렁주렁 맛있는 열매”→ “이마아. fancy. 그리고 환타” 등 의 변형과 시제의 「프리즘」의 글자를 변형하여 프리즘의 형태로「프리」이라 붙였다거 나 프리즘의 연속적인 이미지로 “이마아”, 그리고 영어의 형태로 변형하여 “fancy”, 다시 프 리즘의 형태로 변형 시킨 “환타” 으로형태의 변형을 시도했다.    ➁ 이질적 결합  이질적 결합 방법은 사물끼리의 결합, 인간과 동물, 또는 생물과 사물 결합등 연관성 없는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을 결합시킴으로써 일반적인 대상의 속성을 변화시켜서 전혀 다른 대상 과 상황을 창조해내는 방법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나열하거나 조합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 어진 이질적 이미지의 결합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동시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대 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관습적 경험으로 얻어진 상식에 의지하며 이러한 고정관념이 뒤집 히게 될 때 관람자는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충격과 혼란을 느낀다.이질적인 대상들을 화해시 키고, 기존 형태의 것들을 혼합하여 새로운 것을창조하는 과정은 상상 속의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 낸다. 이질적인 결합을 적용한 사례를 들면 조향의 「바다의 층계」를 들 수 있다. “―여보세 요!”하고 부르고는 “, , 에 피는 들국화”로 전혀 이 질적인 사물의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다.    ➂ 공간의 혼란  공간의 혼란 방법은 이미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초현실적인 상황이나 배경을 만들 어내는 방법이다. 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상황을 하나로표현하면 시각적으로 혼란을 일으 키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착시현상을 노린 방법이다. 공간의 모호한 경계는 대상의 정체성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해석을 가져와 기존인식의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공간의 혼란은 대상들을 이중적인 상황으로 나타내고 서로의 의미를 중첩하거나 혼합하여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 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에서 현실 공간에서 영혼의 공간으로 넘나드는 중국 당나라 시인 李賀의 「 蘇小小墓 」는 공간의 혼란 방법을 적용한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춘수의 「처용단장 1의3」에서 “호주의 선교사 집”과 “바다”라는 공간의 혼란이 야기되는 사례에서 이러한 창작기법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용사례-중국 당나라 이하의 시    이하의 시는 생생한 표현, 이상한 어투, 두드러진 병렬, 종종 망령이나 기괴한 생물, 요괴, 초자연 현상이 그린 초현실주의적인 환상시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색채감이 풍부 한 예리한 감각적 시 창작방법으로 일관하였고,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즐겨 유귀(幽 鬼)를 다루기 때문에 ‘유귀의재주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이 시 한편을 소개해보기로 한 다.    幽蘭露 무덤가 난초에 맺힌 이슬  如啼眼 눈물어린 그대 눈망울  無物結同心 사랑의 마음을 맺어줄 정표도 없는데  煙花不堪剪 안개처럼 가녀린 꽃 꺾을 수조차 없네  草如茵 풀밭은 깔개  松如蓋 소나무는 포장  風爲裳 바람은 나부끼는 그대의 옷자락  水爲佩 물소리는 그대의 찰랑거리는 패옥 소리  油壁車 기름 먹인 화려한 수레  夕相待 저녁 무렵 그대를 기다리네  冷翠燭 차가운 도깨비불  勞光彩 광채를 더하고  西陵下 서릉의 무덤 가에는  風吹雨 비바람만 불어온다  -李賀 「 蘇小小墓 」    *결동심(結同心) : 고대 중국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증표로 비단띠를허리에 두르 던 것.  *촉(燭): 원뜻은 촛불, 등불. 여기서는서 도깨비불.  *소소소(蘇小小) :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 남조 齊나라의 유명한 기생    이 시는 이하가 18세에 지은 시로 이미 죽은 영혼을 현재로 불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세계의 “소소소”의 묘를 매개로 하여 그녀를 현실 세계로 불러냈는데, 1-8구는 현실 공간에서의 자 연물에 소소소의 혼이 서려 있는 영매물로대체하였다. 때문에 난초가 눈물을 머금고 흐느끼 고, 풀과 소나무, 바람, 물은 소소소의 옷과 장식물로 시적 대상에 감정이입의 단계보다 진일 보한 역동적인 진술로 전설을 과거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까지 연장선 에서 이어져 오는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실과 환상적인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 롭게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보인다.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용사례-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인 이상, 조향, 성찬경의시    1)      이상의 적용 사례    우리나라에서 초현실주의 대표시인으로는 이상과 조향, 성찬경을 들을 수있는데, 이들의 시를 한 편씩 소개해보기로 한다.  이상은 일제강점기의 억압된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 해방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형 상화하는 시를 창작했는데, 그는 절망적인 세상을 유머로 바꾸어 놓고자 했고, 또한 우연의 기법인 데페이즈망과 자동기술법을 이용함으로써 일상적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초현실주의 세계를 지향하고자 했다.  이상의 아방가르드 경향의 초현실주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오감도」는 전체적으로 긴 장·불안·갈등·싸움·공포·죽음·반전 등 자의식 과잉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그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고, 특히 「오감도 제1호」는 사람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오감도」-시제일호(詩第一號) 전문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는 15편 연작시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서 연재하였는데, 독자들의 항의 투서가 빗발치면서 30회 연재를 목표로 한 것을15회안에 연재를 중단하였다. 시제부터 새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것과 같은 상태의 도면을 “조감도(鳥瞰圖)”라 하는데, 여기서 “새 조(鳥)”의한 획을 빼서 “까마귀 오(烏)”로 바꾸어 쓴 것으로 불안·공포·죽 음 등의 자의식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인 현실이나 대상 없이 새 롭게 만든 시어를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2)      조향의 적용 사례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론 창작방법으로 삼아서 일관되게 초현실주의 시를 실천한 시인 조향의 데페이즈망 기법의 대표적인 시는 「바다의 層階」를 손꼽을 수 있다.   --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受話機)  여인(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 전문    이 시는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시어들의 결합하여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 놓아 결국에는 사물의 현실적인 존재와 합리적인 관계를 해체시켜버렸다. 또한 자유연상적 인 의식의 흐름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진술한 시 「가을과 少女의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다.    하이얀 洋館포오취에  소박한 의자가 하나 앉아 있다.    소녀는 의자 위에서 지치어 버려  낙엽빛 팡세를 사린다  나비처럼 가느닿게 숨쉬는 슬픔과 함께……    바람이 오면  빨간 담장이 잎 잎새마디가 흐느낀다  영혼들의 한숨의 코오러쓰!    詩集의 쪽빛 타이틀에는  化石이 된 뉴우드가 뒤척이고,    사내는 해쓱한 테류우젼인 양  카아텐을 비꼬아 쥐면서  납덩이로 가라앉은 바다의 빛을 핥는다    먼 기억의 스크링처럼  그리워지는 황혼이  少女의 살결에 배어들 무렵  가을은 大理石의 체온을 기르고 있었다.  -조향의 「가을과 少女의 노래」 전문    조향은 1950년대의 초현실주의의 수용 및 전개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해왔는데, 초기 낭만주의적 초현실적인 서정시를 써왔다. 후기에서도 초현실주의시를 꾸준히 연속적으로 실 천하여왔는데, 주로 감각적 낭만성을 지향하는 시를 썼다. 그는 허무의식의 극복을 위한 방법 으로 새로운 리듬과 이미지 창조하는 것을 시인의 역할로 여기고, 시어 자체가 이미지로 사용 되는새로운 시의 세계를 실험한 ‘씨네 포엠’의 창작방법, 단어의 반복, 의미 없는문장의 나 열, 활자의 변주를 통한 ‘언어유희’ 창작 방법, 시어를 형태적으로살리려는 시도로 ‘시어’를 ‘사물’처럼 이용하기 위한 ‘포말리즘’의 창작 방법을적용한 형태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시는 낭만주의 경향을 고수하면서도 초현실주의 무의식의 세계를 지향하며 회화성이 강한 낭만적 서정시로 흰색이주조를 이루는 긍정적인 허무주의 색채가 강한 이미지즘의 시이나 비현실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냈다.    3)      성찬경의 적용 사례    조향이 초현실주의 시의 전반적인 근본사상을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고 기법의 차원에서 수 용에 머물 기는 했으나 형식적인 면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는 데에 그성과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이봉래, 김구용, 김차 영, 고석규, 김영태 등의시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가 광범위하게 확신되어 나타났다. 초 현실주의 경향의 시를 쓴 성찬경의 「프리」을 예로 들어보겠다.    음향과 빛깔과 아마 향기마저도  實은 그들이 어디 있더냐. 암흑 속엔  純粹한 波動뿐이다.  靈感이라지만 그것도 정말은  순수한 파동. 그 파동의 溫床 위에  주렁주렁 맛있는 열매는  오히려 이마아. fancy. 그리고 환타.  果汁엔 투명한 觀念이 스며  혀끝에 끈끈한가 살펴보라.  준엄한 탐험가. 태고의 무덤을 파헤치고  해골을 태양 아래 널어 말리는 메스.  千의 데스마스크를 찍어낸 손톱이여.  사로잡은 魅惑은 다이아몬드의 망치로  티끌이 뻐개져서 다시 티끌 되도록 바수어라.  그 바람에 튀는 별똥별을랑 心臟의 기름삼고  아직 화릉거리는 혼백엔 부채질하라.  회색의 室內에서 무수한 톱니바퀴가  두르르 올바르게 번개처럼 회전하면  그 機關은 물고기와 蓮꽃과  煙氣와 피아노. 아르뻬지오와  에메랄드와 刹那와 낙타. 바늘구멍과 永遠과  를 서로 혼인시키는 魔術열매의 온상.  그럴 무렵엔 리를 惱殺하는 미소를 띄우고  옆모습만 보이며 잡힐 듯이 다가서는  오, 뮤우./ 자양 많은 乳液은  내 오로지 그대 위해 바치리라.  리라를 타며 스러질 듯 아리따운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면 不可思議한 轉換이. 다섯 개의 나의 窓엔 스테인드글라스가 박히고  넘나드는 파동은 눈부시게 치장되어  꽃은 빛깔과 향기를 귀뚜라민 노래를  나빈 춤을 세계는 饗宴을 다시들 찾는다.   ―성찬경의 「프리」 전문    이 시는 음향과 빛깔과 향기의 교응을 노래한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의시를 환기시 킨다. 서로 아무런 필연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의 병치는 사실상지적으로 엄밀하게 계산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프리」에서 성찬경은 기독교와 불교를 ‘물고기’와 ‘蓮꽃’의 상징으로, 소멸하는 것과 영원한 것을 ‘煙氣’와 ‘에메랄드’의 상징으로 나타낸 뒤 이들을 병치시켜 놓았 다. ‘찰나’와 ‘영원’, ‘낙타’와 ‘바늘구멍’, ‘피아노’와 ‘아르뻬지오’ 역시 대립 항을 형성하고 있는데, 성찬경은 이들을 무질서하게 배열했다. 이처럼 성찬경은 이들 대립 항들을 ‘婚姻’시켰 는데, 우리나라의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新興文藝, 특히다다이즘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1924년 고한용이 조선 문단에소개한 다다이즘은 일본의 쓰지 준이나 다카하시 신 기치의 기질적인 반항이나 奇行이 중심을 이룬 것이었다. 이상의 「거울」에서 강한 자의식 의 강화로 식민지 현실의 제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근대 주체 사이의분열이라 는 주제로부터 초현실주의 시가 본격화되었고, 1934년 이시우,신백수, 한천 등ㅇ의 『三四 文學』 동인들에 의해 1920년대 다다이스트들이문제삼아왔던 스타일의 문제에 천착하고 문 단의 헤게모니에 접근하고자하여 현실의 추상화로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과 멀어졌는데, 이 는 이후 조직된 1940년대 만주에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한 이수형, 신동철 등의 《시현실》동인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실》 동인들은 주로 여성의 육체에 탐닉함으로써정치․사회적 으로 나아갈 길이 杜塞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하는 등 한국의 초현실주의는 개인적 美意 識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전후 초현실주의 대표시인은 조향을 손꼽을 수 있고, 김구용, 성찬경, 서정주 시인들도 일 부 초현실주의 시를 썼으나 현실적인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무한한 상 상력의 세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현대의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시창작 방법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시인들의 수가 적고, 그들 활동이 미미하여 하나의 주요 흐 름으로정착하지 못했으나 오늘날까지 현대시인들이 시창작에서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무한 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시 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4)      김춘수의 적용 사례    김춘수 시인을 잘 알다시피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투했 던 시인이자 시이론가였는데, 그가 제시한 ‘무의미시’는 우리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 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존재의 탐구, 대상의 즉물적 제시, 현실의 실감을 허무의지로 승화 시켰던 점에서 당대는 물론한국 문학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의 장편 연작시 집 『처용단장』은 초현실주의적인 데페이즈망 기법 등 다양한 시창작 기법을 적용한 시인 이다. 그의 시 「처용단장 1의3」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廻廊)의 벽(壁)에 걸린 청동시계(靑銅時計)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 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 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의 숭어 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에 들곤 하였다.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주(主)님 생일(生日)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김춘수의 「처용단장 1의3」 전문    위 시는 처용설화의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린 시로 유년 시절에 호주 선교사에 집에서 겪 었던 체험과 분위기를 중심으로 진술한 시이다. 각 문장과 장면은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는 것 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장면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전체 시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 기로 유년기의 추억으로자리 잡은 바다를 대상화시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데, 이미지 들이 병치되어 낯선 의미를 새롭게 태어나는데, 이는 시인의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이미지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다는 숭어새끼를 품고 있는 모성 본능적인 모습을 보이며, 모성으로 표현된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는 다르게 평화롭다. 이러한 지점에서 화자는 밤이주는 공포의 이미지와 잠을 자는 평화로운 행위를 병치시켜는 데페이즈망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이상에서 우리나라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물론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를 일부창작한 시인들 에 의해 데페이즈망 기법은 시창작 방법으로 다양하게 적용되어왔다. 앞으로 복잡한 현대의 물질문명의 흐름과 4차 산업 시대에서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인이 자유롭게 몽환적인 꿈을 꿀 수 있는 현실 밖의 이색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시창작 방법이 바로 데페이즈망의 기법이라고 볼 때 이 기법의 적용은 심리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에 가장 적 합한 창작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데페이즈망 기법을 이용하면,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 용해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즐거움과 흥미를 느낄 수 있고, 비현실적인 세계 를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구축 할 수 있다는점에서 시창작 방법에 적용하면 새로운 시를 창출할 수 무한한 가능성으로작용 하리라 기대된다. 데페이즈망기법은 중국 당나라의 奇幻詩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초현실 적이며 주지적인 환상시를 쓴 대표적인 시인으로 왕유와 이백, 두보와 함께 중국의 “당시사 걸”로 평가받는 이하의 시에서 데페이즈망기법과 동일한 초현실주의적인 시창작 방법을 추 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도 奇幻的인 문학양식은 많이 적용해 왔었고, 전통시가에서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용한 시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으 로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하여 좋은 시가 많이 창출되었으면 하는바램과 함께 풍성한 시단 이 되기를 기대한다.    ※ 참고 문헌 ※  1. 게일, 오진경 역, 『다다와 초현실주의』, 한길아트. 2001.  2. 박희진, 「認識과 讚美」, 『영혼의 눈 육체의 눈』, 고려원, 1986.  3. 이하, 『이하시선집』, 문자향, 2003.  4. 이상, 『이상시집』, 고려문화사, 1994.  5. 조향, 『조향전집1』, 열음사, 1994.  6. 성찬경, 『!火刑遁走田』, 정음사, 1966. 7. 김춘수, 『처용단장』, 미학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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