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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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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對象 無意味 自由 / 金 春 洙 댓글:  조회:1474  추천:0  2019-03-03
對象 ․ 無意味 ․ 自由                                  金 春 洙   * 이 글은 「韓國現代詩의 系譜」에 대한 註釋이다.       같은 서술적 이미지라 하더라도 寫生的 素朴性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를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미지와 對象은 거리가 없어진다. 이미지가 곧 對象 그것이 된다. 現代의 無意味詩는 對象을 놓친 대신 言語와 이미지를 實體로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19號 p. 10.      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은 시인은 항상 자기의 인상을 대상에 덮어씌움으로써 대상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모든 寫生畫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상파의 그림에서처럼 개성이 어떻게 다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대상은 현실의 대상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나무가 개로 둔갑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 그 대상은 조금씩 달라져 있다. (나무가 어둡게도 보이고 밝게도 보인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 구속이 긴장을 낳는다. 긴장이 몹시 팽팽해질 때 반 고흐의 풍경들이 된다. 그것들은 물론 風景(대상)이긴 하지만, 풍경 이상의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은 記號理論이나 意味論에서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어휘나 센텐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한 편의 詩作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편의 詩作品 속에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여러 곳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데가 한 군데도 없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에는 실지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더러 끼어 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라는 말의 차원을 전연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에는 반 고흐처럼 무엇인가 意味를 덮어씌울 그런 대상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대상이 없으니까 그만큼 구속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된다. 聯想의 쉬임없는 파동이 있을 분 그것을 통제할 힘은 아무 데도 없다. 비로소 우리는 현기증나는 자유와 만나게 된다.     言語가 詩를 쓰고 이미지가 詩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種의 放心狀態인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상태를 僞裝이라고 해야 한다. 詩作의 진정한 方法과 단순한 技巧의 차이는 이 방심상태(自由)와 그것의 僞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揭誌 p. 12.      대상이 없어졌으니까 그것과 씨름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있는 것은 汪洋한 자유와 대상이 없어졌다는 불안뿐이다. 시에는 원래 대상이 있어야 했다. 풍경이라도 좋고 사회라도 좋고 神이라도 좋다. 그것들로부터 어떤 구속을 받고 있어야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는 의미가 있게 된다. 의미가 없는데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에는 항상 이러한 의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 의문에 질려 있고, 그러고도 시를 쓰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를 위장할 수밖에는 없다. 기교가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이때의 기교는 심리적인 뜻의 그것이지 수사적인 뜻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위장이라고 하는 기교가 수사에도 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의 「C 短調 交響曲」을 들을 때 생기는 의문은, 그는 그의 자유를 어찌하여 이렇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그것이다. 시는 음악보다는 훨씬 방종하다는 증거를 그에게서 보곤 한다. 그에게도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의 음악은 너무나 음악이다. 음의 메커니즘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는 언어의 속성에 너무나 오래도록 길이 들어 있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한다. 시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는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어떤 시는 언어의 속성을 전연 바꾸어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음색이나 의미의 그림자나 그것들이 암시하는 제 2의 자연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런 시도를 상징파의 유수한 시인들이 조금씩은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대상과 의미를 잃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면, 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 되려는 본능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제동을 걸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대상(現實 ․ 社會)으로부터 심한 拘束을 받고 있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遊戱의 氣分(放心狀態)이 되지 못하고 매우 긴장되어 있다. 그 긴장은 根本的으로는 道德的인 긴장이긴 하나 詩의 方法論的 긴장이 서려 있기도 하여.......                                                      --上揭誌, p. 14.     무엇이든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전연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그 불안과 함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외된다는 그 불안이 겹친다. 이러한 불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치관의 공백기에 생기는 불안이다. 회의를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이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때, 예민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성실하다고 한다면 이 허무 쪽으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다. 허무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돌린다. 나무가 있지만 없는 거나 같고, 사회가 있지만 그것도 없는 거나 같다. 물론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지의 나무와 실지의 사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즉 허무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 된다. 그 대신 그에게는 보다 넓은 시야가 갑자기 펼쳐진다. 이렇게 해서 는 탄생한다. 그는 바로 허무의 아들이다. 시인이 성실하다면 그는 그 자신 앞에 펼쳐진 허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개성의 가치관이 모두 편견이 되었으니 그는 그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뭔가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다른 또 하나의 편견이 되더라도 그가 참으로 성실하다면 허무는 언젠가는 초극되어져야 한다. 성실이야말로 허무가 되기도 하고, 허무에 대한 제동이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새로운 의미(對象), 아니 의미가 새로 소생하고 대상이 새로 소생할 것이다. 이 진실로 그때 나타난다.    여기서의 이란 칸트의 유희설과 근본적으로는 같을 것이지만, 약간 부연할 것이 있다. 노동의 여가에 사람은 그 남은 정력을 유희에 쏟는다고 칸트는 말하고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가 않을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여가가 없고, 남아있는 정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노동 그것을 유희로 만들어 버릴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노동이 그대로 유희라는 환상을 만들어 낼는지 모른다. 유희는 그 자체 하나의 해방(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희야말로 대상이 없는 유일한 인간적 행위가 아닌가? 유희에 대상이 끼어들 때, 그때 유희는 유희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국가의 명예라는 대상이 경주자의 자유를 구속한다. 국가의 명예가 경주자를 긴장케 한다. 그것이 바로 100미터 경주라는 것의 의미가 되겠지만, 우리는 그런 대상과 그런 의미로부터 자기를 구하고자 한다. 유희의 긍정적인 뜻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희를 끝내 감당할 만큼 우리는 용감하지도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투놀이에 돈이 끼여들고, 우리는 곧 돈의 구속을 받아 자유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유희의 경지를 또한 허무로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능력은 한정돼 있고, 구속을 자초해야만 안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유희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에 겁을 먹기도 한다. 유희는 우리에게 영원한 실낙원이기 때문에 이 오욕의 땅위에서의 유희(허무)는 초극되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영역을 사람이 침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韓國의 現代詩가 50年代 이래로 비로소 詩에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비교적 자유에 점근해 간 경우가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자유를 僞裝해서라도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어하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上揭誌, p. 14.     李箱의 시를 보면 내던진 듯한 방심상태에서 씌어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분명히 치밀한 계산 아래 씌어지고 있는 것도 있다. 유희 ․ 선택 ․ 방심상태 등의 낱말들은 방법론적으로는 자동기술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자동기술이란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무의식이란 전연 감추어진 세계고, 그것이 어떻게든 말로써 기록되는 이상은 의식의 힘을 입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이 밝혀 준 상식이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고자 하는 정신분석학 자체의 그동안의 성과에도 의심을 품을 수가 있긴 하지만) 우선 이 상식에 따라 말을 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자동기술이란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李箱을 드는 것은 이 땅에서는 그래도 그가 처음으로 시를 하나의 유희로서 써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는 그 점에서다. 그의 소설 「날개」에는 라는 대상을 놓친 가 그녀가 없는 그녀의 방에서 휴지를 돋보기 광선으로 태운다든가, 화장품 냄새를 맡는다든가, 벽에 걸린 치마를 보고 그녀의 肢體를 연상하다든가 하는 따위 장면이 나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것을 대상행위라고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 그러니까 대상행위도 있을 수가 없다. 대상을 놓친 가 그냥 그러고 있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는 그에게 부닥쳐 온 자유에 압도되고 있을 뿐이다. 李箱의 시의 어느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李箱과 같은 시기에 동인들이 시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창작심리가 어느 정도로 李箱을 닮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李箱은 다행히도 소설과 수필, 특히 그의 활동을 통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창작심리의 비밀을 보여 주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고 한다. 시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혁명을 위한 시(또는 藝術)를 수단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자 냉철한 사람들은 그것(초현실주의)을 하나의 교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으로서는 초현실주의와는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시의 입장으로서만 초현실주의자가 된 시인이 세계의 도처에서 생겨난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리하여 자동기술이 하나의 기교로서 유행을 보게 된다. 30年代 이래로 한국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詩 지상주의적 초현실주의자들을 낳게 했다고 보아진다. 시를 위하여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읽히게 했고, 특히 기교의 새로운 방면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僞裝된 自由인 것만은 틀림없다.     
2    에즈라 파운드 Ezar Pound / 이일환 譯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9-03-03
  에즈라 파운드 Ezar Pound / 이일환 譯   * 이 글은 Poetry 誌(1913년)에 “Imagisme”으로 발표되고 T. S. Eliot가 편집한 Literary Essays of Ezra Pound(London, 1954)에 “A Retrospect”란 제목으로 수록한 것을 초역한 것이다.     이미지스트가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라는 용어를 우리가 이 말을 쓸 때 그들과 전적으로 같은 의미로 쓸 수는 없겠지만, 하트와 같은 보다 새로운 심리학자들이 쓴 기술적인 의미로 썼다.   그러한 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모든 얘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운문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즉시로 필요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모세처럼 부정문으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   우선, 플린트씨에 의해 기록된 세가지 규칙들(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룰 것. 이미지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절대적으로 쓰지 말 것. 연속되는 음악적 문구로 리듬 창조.)을 절대적 신조 ---어느 것도 절대적 신조로 생각하지 말라--- 로서가 아니라, 오랜 동안의 숙고의 결과 --비록 어떤 다른 이의 숙고였다 해도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로서 고려해 보도록 하라.   그들 자신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이들의 비평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희랍 시인들과 극작가들의 실제 글과 이들의 운율을 설명하기 위해 조작된 그리이스-- 로마어 문법학자들의 이론과의 사이에 균열을 생각해 보라.      언어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추상과 구체를 뒤섞은 꼴이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이 언제나 적절한 상징이라는 것을 작가가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하려 들지 말라. 당신의 時作을 행의 길이로 쪼갬으로써 당신이 훌륭한 산문의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기술의 모든 난점들을 피하려 할 때, 지각있는 독자들이 속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 전문가가 싫증내는 것을 내일 대중이 싫증낼 것이다.   시 예술이 음악 예술보다 조금이라도 단순하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평범한 피아노 선생이 음악 예술에 쏟는 정도의 노력을 운문 예술에 쏟음 없이 전문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아라. 그러나 그 빛을 공공연히 시인하거나 아니면 숨기려고 노력하거나 할 정도의 예의는 보일 것.    이란 말을 당신이 어쩌다 존경하게 된 어떤 한 두 시인의 특정한 장식적 어휘를 훔쳐 써먹는 것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한 터어키 종군기자가 언덕, 아니면 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의 특파 기사에 그런 식의 글을 써갈기는 것을 최근 직접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 것.     리듬과 각운     시인 후보자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워보라. 그런데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외국어로 된 글들을 보라 ---예컨대, 색슨 말의 매력, 헤브리디즈 열도 민요들, 단테의 시, 그리고 운율과 어휘를 구별해 낼 수만 있다면, 세익스피어의 서정시들, 그리고 괴테의 서정시들을 音價, 장단 음절, 강약 음절, 모음과 자음 등으로 냉정하게 해보해 보도록 하라.   시가 그 음악에 의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음악에 의지할 경우엔 그 음악은 전문가를 기쁘게 해줄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신출내기는 모운, 두운, 즉각적 각운, 지연 각운, 단음 각운, 다음 각운 등을 알아야 한다. 마치 음악가가 화음과 대위법과 그 밖의 모든 세세한 기술들을 알아야 하듯이. 비록 예술가가 이것을 거의 필요치 않는다 해도, 이것들을 위해 쏟는 시간도 많다 할 수 없다.    산문에 넣기에는 너무 둔한 것이기 때문에 운문에는 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 사람에게 맡겨라.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화가가 당신보다 훨씬 잘 경치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세익스피어가 이라고 말할 때, 그는 화가가 제시하는 못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의 이 행위에는 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나타내려 한다.   새로운 비누를 선전하기 위한 광고대행업자의 방법보다는 과학자의 방법을 고려하라.   과학자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위대한 과학자로 불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발견된 것을 배움으로써 시작한다. 그는 거기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라는데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자신의 초기 습작 결과를 칭찬하기를 기대치 않는다. 시의 신입생들은 불행하게도 확고히 알아볼 수 있는 교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 것이 무어 놀랄 만하랴?   당신의 글을 분리된 약강격으로 쪼개지 말 것. 각 행이 말미에서 뚝 그치는 일이 없이 하며, 다음 행을 매번 고양시켜 시작할 것, 확연한 긴 休止를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다음 행의 시작을 리듬 물결이 올라갈 때를 택하라.   간단히 말해 당신의 예술에서 음악과 정확히 같은 양상을 다룰 때는 음악가처럼, 훌륭한 음악가처럼 처신하라. 같은 법칙들이 지배하는 것이며, 그 이외의 다른 것에 당신이 묶이지 않는다.   당연하겠지만, 당신의 리듬의 구조가 당신의 어휘들의 형태 그 자연적 음, 그 의미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行尾와 休止 때문에 모든 종류의 나쁜 행 멈춤에 희생이 되면서도, 그 형태, 음, 의미들에 영향을 끼칠 만큼 강력한 리듬 구조를 처음에 당신이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음악가는 오케스트라의 음도와 음량에 의지할 수 있다. 당신은 그렇지 못하다. 화음이라는 용어는 시에 잘못 적용되었다. 그것은 상이한 음도의 동시 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운문에서는 듣는 이의 귀에 남아 다소간 저음의 오르간 소리처럼 들리는 일종의 잔여음이 있다. 각운은 즐거움을 주려면 약간의 놀라움의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 기묘하거나 별날 필요는 없으나, 각운을 쓸 때는 잘 써야만 한다.   『시의 기술』에서 빌드락과 뒤아멜이 각운에 행한 설명을 더 참조하라. 당신의 시에서 독자의 상상적 눈에 인상을 남긴 부분은 외국어로 번역되더라도 손상되는 것이 없으나, 귀에 호소한 부분은 원문으로 대하는 자들에게만 다가갈 수 있다.   밀턴의 수사학과 비교해 볼 때의 단테의 확고한 표현을 숙고해 보라. 너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둔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많이 워즈워드를 읽어라.   내 말의 요지를 알고자 한다면, 사포, 카를루스, 비용, 제대로 시상에 잠겼을 때의 하이네, 너무 굳어 있지 않을 때의 고티에를 읽어보라. 만약 그 나라 말들을 모른다면, 유유자적한 초서를 찾아나서라. 훌륭한 산문은 해가 안 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씀으로서 얻어지는 좋은 교훈이 있다.   만약 원문을 다시 써보려 했을 때 그것이 거린다면, 번역도 좋은 훈련이 된다. 번역하려는 시의 의미는 거릴 수 없다.   조직적 형태를 쓰고자 한다면,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삽입시키고자 하지 말 것이며, 나머지 진공들을 감상적인 글로 채울 것.    하나의 감각 기관의 지각을 다른 감각 기관의 지각의 관점에서 정의하려 함으로써 혼란을 야기시키지 말 것. 이는 통상 단지 너무나 게을러서 정확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을 때 생기는 결과일 뿐이다. 이 말에는 아마 예외들이 있겠지만.    처음의 세 가지 금기사항들이 지금까지 표준이라거나 고전이라고 받아들여져 온, 모든 나쁜 시의 십분의 구를 쫓아버린 것이며, 당신을 작품생산의 여러 범죄로부터 막아줄 것이다.   뒤아멜씨와 빌드락씨는 그들의 조그만 책, 『시의 기술에 관한 노트』의 말미에서 말하기를, . 그러나 미국인인 경우엔 적어도 그것은 당연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 당당한 대륙에서 태어나겠는가?  
1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7) 댓글:  조회:1344  추천:0  2019-03-03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7)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댈모아 슈왈츠(Delmore Schwartz)       다섯번째 해의 발레에     갈매기들이 잠자는 고장이나 그들이 날      고 있는 고장은   다른 왕래(往來)의 고장이다. 나는   (그들이 몸을 적시고 선회를 하고 깨끗하      게 미끄럼을 타는 것이 보이는)   낚시터의 포구를 의욕의 힘을 약하게 하      고,   나의 눈은 그래서는 아니 되지만 (그것들      은 밤새도록 조용히   가로등 모양으로 타고 있어서, 무엇이든      지 나타나는 것은 나한테 알려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들이 명목(暝目)1)하는 고장이라고 생각      하고 있지만,   그러나 갈매기들과, 오래 된 연기(演技)의 연출      인,   그들이 날개를 가지고 천천히 장난질을      하고, 그러다가는   별안간 기운을 모아 가지고, 상하(上下)로,   내습(來襲)의 아라베스크를 그리는 데서 오는,      엄격한 형태와 색갈(色褐) 속에서 살아나는,   그들이 잠자고 있는 고장의 상상을   알아내는 최상의 피난처는, 내가 다섯 살       때,   순사(巡査)를 겁을 내면서, 구슬프고 날씨 찬,   겨울 저녁에, 스케이트를 지쳤을 때의, 사      상(思想)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러한 우아(優雅)는 알 수 있을 만큼 철이 난,   지극히 과묵한, 나의 황당무계한 의지(意志)이      었다.      1)명목(暝目): 1. 눈을 감음. 2. 편안한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김수영 번역)         플라토의 동굴의,       벌거벗은 침상에서     천천히 벽 위로 미끄러지는 헤드라이트에      반사된,   플라토의 동굴의, 벌거벗은 침상에서,   목수들은 그늘진 창 밑에서 마치질을 하      였다,   바람은 밤새도록 창에 친 휘장을 들먹거      렸고,   트럭의 대열은, 여늬 때와 다름없이,   화물에 덮개를 씌우고, 삐걱거리면서, 언      덕 위를 낑낑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천정은 다시 밝아지고, 경사진 도표(圖表)는 천      천히 앞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우유배달부의 지나가는   소리, 계단 위를 올라가는 소리, 병이 딸그      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담배불을 붙이      고,   창 가로 걸어갔다. 돌로 된 거리는   그 속에 건물이 서 있는 정적과,   가로등의 불침번과 말(馬)의 인내력을 과      시(誇示)하였다.   겨울 하늘의 말쑥한 수부(首府)1)는   나로 하여금 후갈(涸渴)2)된 눈으로 침대로 되돌      아가게 하였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에서 서먹한 기분이      자라났다. 늘어진   감광막(感光膜)이 회색빛이 되었다. 흔들리는 짐      마차, 말굽소리의 폭포가   멀리서 들리더니,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가까이 들렸다.   자동차가 출발을 하면서, 기침을 하였      다. 부드럽게 공기를   녹이는, 아침은 해중(海中)으로부터 반이 덮여      진 의자(椅子)를   올리고, 석경3) 을 밝게 하고, 화장대와   하얀 벽을 눈에 뜨이게 하였다.   새가 시험적으로 울었다. 짹짹거렸다. 퍽이나!      현혹(眩惑)해서, 여전히 잠에   젖어서, 정답게, 배고프고 춥게, 그처럼,      그처럼,   오 인간, 무지한 밤, 이른 아침의 진통,   다시 또 다시   시작하는 것의 신비.                            대역사가 금지되어 있                             는 동안에.     1) 수부(首府) : 수도(首都) 2) 후갈: ? 아마 고갈(枯渴)? 3) 석경: 거울   (김수영 번역)        나하고 같이 가는                   무거운 곰                육체의 증인                   화이트헤드     그의 얼굴에 더러운 유점(油點)1)을 짓는 여러가      지 꿀인,   나하고 같이 가는 무거운 곰,   무재주하게 이곳저곳으로 쾅쾅거리며 걸      어다니는,   모든 장소의 중심적인 중량(重量),   과자(菓子)와 노기(怒氣)와 잠을 사랑하는   배고파 쩔쩔매는 잡다한 놈,   모든 것을 혼잡스럽게 만드는, 미치광이      잡역부는   건물 위로 올라가고, 축구를 하고,   증오에 찬 도시에서 그의 형제를 주먹으      로 갈긴다.     나의 옆에서 숨을 쉬는, 그 무거운 동물,   나하고 같이 자는 그 무거운 곰은,   잠 속에서도 사당(砂糖)의 세계 때문에 고함을      지른다,   - 야회복을 입고, 바지를 부풀게 하고,   제가 제일인 듯이 활보하는 허식은 겁을      집어먹고,   자기의 떨고 있는 고깃덩어리가 드디어는      아무것도   겁을 내게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몸      을 떤다.   나하고 같이 가는 그 도망칠 수 없는 동      물은,   검은 자궁이 간직한 이래로 나를 따라다      녔고,   나의 몸짓을 왜곡시켜 가면서, 내가 움직      이는 곳마다 움직이고 있고,   하나의 희화(戱畵), 하나의 부어오른 그림자,   정신의 동기(動機)의 어리석은 익살배우는,   그 자신의 암흑(暗黑)에 당황하면서도 또 용감      히 대향(對向)한다,   불투명하고 너무나도 가깝고, 나의 사유      물이면서도, 미지의 것인,   배와 뼈의 내밀한 생명은,   그를 떼어놓고 가까운 곳에 그녀와 함      께만 내가 가고 싶은   지극히 사랑하는 애인을 껴안으려고 손을     뻗치고는,   한 마디만 하면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나의 의도를 밝힐 수가 있는데도,   투박스럽게 그녀의 몸에다 손을 댄다,   비틀거리면서, 허덕거리면서, 먹을 것을      입에 넣은   근심으로 해서 나를 함께 끌고는 낑낑거      리며 간다.   자기와 똑같은 수억만의 곰들 사이로,   도처에서 벌어지는 식욕의 격투(格鬪) 사이로.                                                                            1)유점: 얼룩   (김수영 번역)       결론(結論)              1957년 9월 1일     1     고민이 시계침을 세울 때 시간은 얼마나      더디 움직이나,   터져나오는 수탉의 시끄러운 함성은   새벽 하늘 밑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무료      한가,   지금 고통이 똑딱거리며 움직이고,   지금 일체와 無가 탄생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나는 기다린다, 고통이 있어야 탄생      을 볼 수 있다는 것을.     2     심취(心醉)의 불길이 사위어지자   열렬한 상태의 사랑이 노출하는   값진 모피복은 오만(傲慢)의 불길이 되어   사랑이 공포를 주고 오만이 두려움을 갖      게 한 사람들한테서 배반을 당하기 때      문에.   그것으로서 우리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영상(影像)1)들을   어린 시절이 준비를 하던 얼마만큼 그때      에 재미가 있던,   오만은 사랑이 아니고 오만은 오로지 오만      일 따름이며   드디어는 오만은 살아 있는 죽음이거나      살아 있는 죽음으로 되고   그러면 그것이 제아무리 배신을 하거나      부실하게 하여도, 제아무리 반역을 하      여도 소용이 없고,   모든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리고      모든 서원(誓願)이,   절대적인 찬미, 모두가 주시하고 찬미를      추구하여도 소용이 없고,   또 일찌기 있어 본 일이 없는 명성을 추      구하여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이 명성은 지금도 밀매음굴(密賣淫窟)로 도망      을 치고는, 오만과 시세(時勢)가 유혹하며   사랑이 무시하는 다른 매춘부들과 함께      숨어 버린다.                                                                      1) 영상(影像): 영정(影幀) :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그림 족자.     3     이것은 심장과 심장이 성숙하여 가고, 성숙      해 있고, 난숙(爛熟)하고, 썩어문드러져 버린   모든 것을 인식하고 또 잊어버리고 나서,      사랑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일이   망각되어 왔는가를 너무나 재빨리, 너      무나도 훨씬 재빨리, 알게 되고 나서,   우리들을 갈라 놓는 죽음 전에 오는 조그      만한 죽음들을 알게 되고 나서 오랜 뒤      에야 알게 된 것이다,   밤이 전부이거나, 혹은 밤이 대낮을 두고      노상 알려지기까지는   아무것도 드디어는 부후(腐朽)2)를 넘어서 無에로      통과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2) 부후(腐朽): 썩음.     (김수영 번역)         시(詩)                -캐스틴 핸론 양에게     , 하고 조그      만한 소녀가 노래하였다.       (김수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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