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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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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댓글:  조회:1797  추천:0  2019-03-09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1 죽음을 향해 바삐바삐 진행되는 삶의 행진 속에서 하나의 웃음, 하나의 즐거움은 초월적 득도의 자세, 곧 풍류스러움이다. 우리의 멋 또한 버선코의 가벼운 오름세, 높은 파도의 가벼운 내림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2 살아 있음은 늘 살아 있을 것 같은, 늘 살아 있고 싶은 소망을 키운다. 이것은 삶이 지향하는 불멸에 대한 욕구이다    3 자유시, 자유시..... 그 자유시가 너를 구속할 때는 차라리 그 자유로부터도 떠나라.     4 자화상 / 안또니오 마차도   이게 제 얼굴, 이게 제 마음입니다 읽어보시지요 권태스러운 눈 몇낟, 목마른 입 하나 다른 거야 별거 아니지요 산다는 거 그저 그런 거 뻔히 아는 그런 거 놈팡이 짓이나 바람기 같은 별 중요할 것 없는,   조금은 미친 기, 조금은 시가 있는, 거기, 한방울의 우수의 포도주 주색잡기요 다 좋아하지요 하나도 안 좋아하든지 노름이요? 한번도 안했습니다 마시는 건 하지요, 어찌 내 고향 세비야를 배반하겠습니까,   작설차 다섯 여섯 잔 정도 여자요? 돈 후안이 아닌 바에야 그건 안되지요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난 모든 걸 너무 가볍게 사랑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몇가지 것들만을 민첩성 재치 멋 그리고 기발함 그런 것을 의지나 힘 위대성보다 좋아하지요 나의 풍류도 어렵게 어렵게 찾은 겁니다 차라리 고대 희랍식 순수한 뜻으로의 멋이나 투우사 같음을 사랑합니다 여리고 가녀린 달의 우수보다, 하나 햇살의 반짝임 하나, 마침맞은 웃음 하나를 사랑합니다 반은 집시 반은 빠리지앵 사람들 말이지요 몽마르뜨 마까레나 성모나 모두 숭앙합니다 그리고 무슨 이렇다 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나의 첫 소망은 멋진 깃대 꽂은 투우사가 되고 싶었어요   이미 늦었죠 세상 산다는 게 바쁘군요 하지만 제 웃음은 즐겁습니다 늘 바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5 인간이 신의 꿈이라면 인간은 신의 명령과 신의 꿈을 벗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다.   6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듯, 우리 또한 우리이기 위해서(우리가 단순한 그림자나 꿈이 아닌, 실체 혹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신이 꾸는 꿈의 산물이라면, 신 또한 인간이 꾸는 꿈의 산물이다.   7 "비밀은 가장 따스한 햇살에도 꽃피지 않는다" 꽃과 열매까지를 거부하는 은밀한 이름은 노자의 '무명(無名)'을 연상시킨다.   8 (전략) 그러나 그런 마술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망각이 살지 않는 곳에 행복이 오지 않듯, 하나의 죽은 목소리가 제풀에 꺼져갈 뿐 어느 바다도 하늘도 꽃도 여인도 없다 아무도 상처투성이의 장미를 계속 달고 다니는 하늘을, 여인을 보지 못했다 부질없는 입들 사이에 길을 잃은 사막 얼마나 견고한 침묵이 장미를 덮고 있는가 나는 모른다 어디에 진정한 생명이 있어 장미의 혼을 빼고 그녀를 시간으로부터 떨쳐놓을 수 있을지 어디에 장미의 불가능한 살결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그 서서한 수수께끼의 기호가 가능해질지, 변함없는 본질의 불꽃이.   - 리까르도 몰리나리   그렇다 영원과 절대, 사랑에 대한 꿈은 곧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집착이다.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이다. 거기에 시간의 횡포는 우리 눈앞에서 모든 꽃을 사위게 한다. 결국 '변함 없는 본질의 불꽃'으로 남을 수 있는 장미란 불가능하게 된다.     너는 대평원 속 젖은 계절의 달아나는 태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온다 세월의 차가운 이파리들 그 넓고 굳은 숲을 넘어 색깔도 희미해진 채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간직한다 말없는 말 하나로 풀잎 사이 소곤대는 발걸음이 권태를 덮는다 멀고 꺼져가는 향기가 머물러 피운 불길 너는 곧바고 몸을 추스리고 뼈 사이 부서진 주름투성이의 옷을 집는다 너를 스치고 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영혼과 깊 이를 요구하는가 그렇다 대기처럼 불길과 안개가 자욱한 너의 입속으로 내가 들어 가리니 너의 발걸음은 대양의 해일과 느린 하늘 그 마지막 숨결에 젖은 광휘 빨간 바다 기러기와 밤이 날다 깃들이는 남쪽의 꿈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 하늘 꽃핀 어둠 밑으로 돌아와 고뇌의 목소리로 부른다 그리움에 차서 산산히 부서진 채로.   망각이 비둘기처럼 커갈 때 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바람은 끝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울부짖고 하나의 경악처럼 굴뚝의 검은 목구멍으로 파고든다 안에 불이 탄다 서서히 그리고 문득 기습당한 고독감이 부서진 기둥 사이에서 서성인다 영혼은 읽어버린 따스함을 찾는다 닳고 닳은 옛 책들 속이나 지 상의  횡포 속으로 도망쳐온 발걸음 속에서 그토록 너를 사랑했기에, 오늘 과거도 아늑하고 세월의 차가움도 빗줄기도 따스하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본다 말없이 키만 우뚝 선 두려움 없이 나의 생각을 이들 불길에 데운다 혹시 이 밤 이 불을 지키며 내가 죽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오늘밤 나의 선조들의 마술스러운 미궁의 삶과 그 영원성을 반추하며 나 자신도 나의 주위에 텅빈 채 머물러 있는 실존의 하나일 것을 생 각하며   그리고 나는 나의 거칠고 스산해진 무거운 머리칼과 흩어져서 서성 대는 구름떼를 정성스레 매만진다 허무를 허무 속에 더욱 가두고 사랑도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기 그런 마음으로 너를 생각한다 꿈속에서 이윽고 동이 터오른다.   - 기까르도 몰리나리   기억도 아득한 네가 생각난다. 깨어진 기둥처럼 이미 잊혀진 사연들이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나는 나의 사랑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키만 큰 허깨비의 삶. 날이 갈수록 나는 더욱 춥고, 추억의 벽난로에 몸을 데운다. 책을 읽는다. 거기에도 나와 같은 애절한 사랑이 있음을 본다. 전신전화국 앞에서의 이별을 아파한다. 그와 똑같은 아픔과 절규가 나의 선조들의 아픔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나만의 고뇌인 줄 알았는데.   나의 나이는 인류의 나이이다. 구름의 나이이다. 이미 머리칼도 스산하고 구름 또한 평온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머리칼과 우주의 머리칼 혹은 구름을 정성스레 매만진다. 슬픔과 그리움을 졸업해서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거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는 없음을 안다. '욕심 버리고 사랑하기'의 마음일 때 동이 트는 것이 보인다. 세상은 나처럼 고뇌하고 또 조금은 웃는 모습으로 있구나!      - 스페인,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2   1 말라르메는 시란 이리저리 떠돌며 사라지려는 이미지들이 주는 암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대상에 이미지가 아니라 정의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을 점차적으로 예측해가는 데서 생기는 기쁨의 4분의 3을 없애는 일"이라고 말한다.   2 감동과 공감대의 형성이 시와 수수께끼의 다른 점이다. 시는 같은 수수께끼여도 감동이나 설득력을 가진 공감대를 형성한다.   3 상징주의 시는 대상에서 느낀 직접적 감각을 이미지로 전개한다. 시적 이미지란 우리의 일상언어나 문학관습에서 때묻지 않은 창조적 이미지이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수록 좋은 것이다. 그것은 처음엔 생소해서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곧 색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4 인상주의에서 대상은 고정된 색깔이나 모양이 없다. 하늘은 항상 푸른 게 아니라 빛에 따라 까맣게 보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노랗게 보일 수도 있다. 상징주의의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굴절되는 자연을 제시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런 굴절된 이미지, 그런 오목 볼록 거울의 희미한 이미지들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재미를 느낀다.    5 산다는 것은 내가 산산이 부서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 슬픔을 반추하듯 바다는 깊게 울부짖는다.   6 "주여, 용서하소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너무 사랑한 죄이옵니다"   6. 돌아오는 길은 모두가 슬픔   세르누다에게 바치는 시 -나의 가장 조용한 친구 민용태에게   아니면 차라리, 모든 것은 슬픔, 슬픔은 우리 속에 꼭꼭 지니고 다니는 재산, 지금 슬픈 것은 원래 슬펐던 것 백번을 되돌아와도 백번 우리의 슬픔에 꿈은 더욱 멀리라 돌아오는 길은 더욱 비어 있으리.     -중남미 시인 '에우헤니오 플로리뜨' 중에서        *   1 '자연스러운 화장'은 두 번의 거짓말이다. 첫째는 화장을 자연 그대로라고 속이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그 화장된 자연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한 점이다. 새로운 예술은 이 화장술의 영역이다. 시는 말의 놀이이다. 새로운 예술에서 예술가는 비로소 철학자, 도덕군자, 지성인의 말을 벗고 말의 연금술사 정도로 겸손해진다. 말과 '유리창'의 채색을 책임지는 기술자의 위치로 물러서는 것이다.   2 '아'의 연속이 갖는 수평감보다 "씨, 씨, 씨"가 갖는 강력한 수직의 솟아오름이 내 존재의 환희다. 더군다나 '씨' (si)는 스페인어에서 '아니다'가 아닌 '이다!'의 뜻이다. '예스!'다 생의 긍정적 환희의 소리가 이 이상 적합할 수 있겠는가. '씨, 씨, 씨'는 높게 솟구치는 존재의 소리며 바다의 말이다.   3 세상을 사는 일은 '야간비행'이거나 밤길을 걷는 것이다. 우연과 숙명이 겹치는 벽과 구토의 현장일 수 있다.  살아 있음, 여기 있음, 그 느낌은 또 얼마나 기적처럼 귀한 확신인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환희일 수 있다. 영원한 행복, 본질과 영혼은 이제 육체를 찾는다. 느낌을 찾는다. 육체와 시간 속에 영혼과 영원의 황홀함이 살아간다. 기옌은 선사(禪師)들처럼 색즉시공을 찾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변하는 현실 속에 나라는 실체가 숨을 쉬고 있음을 볼 뿐이다. 본질이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 생명의 욕구와 용기만큼 나는 분명히 있다. 대기는 은혜롭다. 깊다. 나는 알 수 없는 이 실존상황 속에 존재하는 전설!     4 시가 자연이나 현실을 투영한다는 전통 시학이나, 시가 시인의 감정이나 내적 체험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낭만주의적 영감론과는 반대로, 시는 자연과 상관없는 언어의 무늬라는 것이 기옌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대상이나 일상체험을 발견하려고 하는 독자는 자연히 그의 시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옌은 삶의 넓은 위상과 의미를 궁극적으로 파악하려는 지적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그의 시가 극도의 지적 성찰과 추상성을 띠게 된 연유가 있다.   5 에우헤니오 플로리뜨는  "희망은 인간이 마지막 버리는 병이다"라고 했다. 기옌은 우리 모두처럼 "하늘의 태양과의/ 언약이 있음"을 기억한다. 태양과의 약속이 가장 확실해지는 계절은 봄이다. 기옌은 다음의 연시에서 생의 환희에 이른다.   6 봄의 구원   오직 너의 벌거숭이 몸뚱어리에 꼭 달라붙어, 대기와 빛 사이 너는 순연한 원형   너는 있다! 아주 벌거숭이여서 아주 잇대어 있어서, 아주 단순해서 세상은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우화가 된다   주위로 하나씩 하나씩 일상의 사물들이 모양지어 나타난다 그리고 사물들은 기적이다 마술이 아닌   썩을 수도 용해될 수도 없는 태양의 행복 하나의 유리창을 통해 투명한 진실이 펼쳐진다   온 천지에 확실한 광휘가 펼쳐진다 보라 이 시간이 그 하늘로 행진하고 있음을.   7 기옌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달에 대한 무서운 비약 "오, 달이여, 수천의 4월이여!" 이런 구절에서 시어는 상식의 마지막 발판을 잃는다. '달'과 '수천의 4월' 사이에는 무의식에 가까운 유사성만 존재한다. 단순한 상징이기에는 너무나 감각적이고, 감각적이기에는 너무나 먼 비유이다.   8 살았기에 죽음까지 어여쁜 법열이여   나는 호르헤 기옌을 읽으며 가끔 우리의 김현승을 생각한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고 노래한 플라타너스의 시인은 나무와 새를 노래한 점에서 기옌과 비슷하다.     시계 12   난 말했다 모든 건 이제 충만 그것 플라타너스 하나 몸으로 떨었다 은빛 반짝이는 이파리들이 사랑으로 수런댔다 파란색은 잿빛이었다 사랑은 태양이었다 그러자 한낮 새 한 마리 바람 속에 노래를 태웠다 꽃은 너무도 놀랍게 자신의 바람 속에 노래로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가 큰 벼이삭들 사이 갑자기 노래로 자라오른 꽃 그게 나였다 모든 주위 속 그 순간 한 중심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 모든 건 완전했다 하나의 작은 신을 위하여 난 말했다 모든 건 완전 시계 12시!   여름 한낮, 12시의 절정감 생명의 절정 그 법열을 새가 노래한다. 꽃이 노래로 핀다. 파란색이 잿빛이 된다. 같은 색, 생명의 색깔, 깨달음에 가까운 이런 절정감은 이 시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생명감으로 충일한 절정의 환희를 기옌만큼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이름없는 얼굴이 되어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인간이다 아무 상관없는 나의 추상 어찌할 것인가 소리칠 것인가 다정하게 피로의 물결 속에 침묵 속에 변덕 없는 무명을 간직하고 너무 많이 아야기해서 말이 없는  말소리 하나를 세운다, 난 참 좋은 친구예요.   기옌은 사람과 자연이 하나임을 느낀다. 어쩌면 자연이나 동물이 더 인간적일 수 있음을 안다. 그는 말 앞에 선다. 풀밭에 갈기가 질질 끌리거나, 꿈적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귀를 조용하게 내린 말을 바라보다 그는 소리친다. "저기 있다, 말들이, 거의 초인간적 자태로."   생명의 시인은 죽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생을 구가하는 시인은 사실 그의 열락을 죽음 위에 세운다. 그 기쁨의 뿌리는 사실 죽음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확신은 어둠속에 뿌리를 둔다 / 번개가 어두울수록 그 빛은 더욱 나의 것 / 검은 어둠속에 하나의 장미까지 웬지 우뚝 선다."    - 중남미 시인 '호르헨 기옌' 중에서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3 1 앙드레  브르똥은 1924년 쉬르리얼리즘 선언을 발표한다. 그는 "심리적 자동필기법을 통하여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쉬르리얼리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쉬르리얼리스트의 임무는 무엇보다 "일체의 도덕적 미학적 편견을 떠나 이성의 작용으로 인한 모든 제약을 벗어난, 의식과 사고의 진솔한 기능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절대 사랑을 시도하지 말자   그날 밤 바다는 잠이 없었다 그 많은 파도들에게 이야기 이야기하다 지친 바다는 마침내 멀리 도망가 살기로 했다 누군가 바다의 쓰라린 색깔을 알아주는 그곳으로   잠도 없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밤 한가운데 다정하게 팔과 팔을 껴안고 있는 배들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망각의 옷을 입고 늘 창백한 몸뚱어리들   바다는 폭풍을 노래했다 어둠의 하늘 아래 그 어둠처럼, 별과 새를 잡아먹는 항상 원한 많은 그 어둠처럼 바다는 소리소리 치며 함성을 터뜨렸다   바다의 고함소리가 빛과 비와 추위를 가로질러 구름으로 올라간 도시들에게까지 들렸다 시엘로 세레노 콜로라도 글라시아르 델 인피에르노 그러나 모든 도시는  광고와 떨어진 별들뿐 흙덩이 손 위에 펼쳐진   바다는 도시를 기다리다 지쳤다 거기 바다의 사랑은 오직 하나의 알 수 없는 구실일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난날의 미소일 뿐   그리하여 바다는 다시 꿈을 거두어 서서히 되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아무 이야기도 모르는 세상이 끝나는 곳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벌거숭이 발로 유리알을 밟는 일, 또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태양을 바라보는 일 해변은 죽어가는 아이 하나하나를 위해 시간과 나날을 헤아린다 하나의 꽃이 핀다 하나의 탑이 허문다 모든 것은 마찬가지 나의 팔을 펼쳤다 비가 오지 않았다 유리를 밟았다 해가 없었다 달을 바라보았다 해변이 없었다 무슨 상관이랴 너의 운명은 일어서는 탑을 바라보는 일, 열리는 꽃을,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일, 그밖에 화투장을 잃어버린 화투처 럼 그냥 우두커니 서서.   모든 의미와 좌표를 잃어버린 허무감이 이 시의 분위기를 이룬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고 좌절이 있다. 태어난다 죽는다 모든 것은 매한가지로 삶의 모습일 뿐이다. 거기에는 물론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 실존의 냄새일 뿐.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그냥 살아 있기이다. 화투장이 모자란 화투를 들고 칠 수 없는 화투장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이다.     망각이 사는 곳   망각이 사는 곳 여명이 없는 황량한 정원에서 나는 오직 잡풀 사이 묻힌 하나의 돌의 기억으로 남을지라 그 돌 위에 바람만이 불면의 밤으로 달아나리니   수많은 세월의 품속에 하나의 육체를 가리키는 나의 이름 하나로 남을지라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내가 될지라   거기 그 커다란 지역에서는 사랑이 무서운 천사가 되어 그 날개를 나의 가슴에 이제 쇠창처럼 숨기지 않으리라 폭풍이 몰려와도 가볍게 아름다이 미소지으리라 거기 자기의 모습을 닮은 주인을 찾는 이 열망이 끝나는 곳 스스로의 인생을 남의 인생에게 맡기고 다른 눈들이 마주보는 수평선밖에는 바라볼 데가 없다 할지라도   거기서는 고통도 행복도 이젠 이름밖에 아무것도 없으리 하나의 기억 주위로 원형의 하늘과 땅   마침내 거기서는 나 자신 알 수도 없이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는 그리움의 안개가 되어 어린애 속살 같은 가벼운 그리움으로 남으리   저 너머, 그 먼 곳 망각이 사는 곳에서는.     세르누다의 사랑은 잊혀질 뿐 죽지 않는다. 사랑은 살아 있음의 색깔이다. 그리고 죽음은 또다른 피안이다. 세르누다는 "사랑은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죽는다, 그 고뇌도, 즐거움도. 그러나 사랑과 사랑에 대한 소망은 영원하다. 그 영원함은 오직 망각에 의해서만 무형으로 된다. 세르누다는 욕망이 아닌 사랑을 영원 속에서 꿈꾼다. 사람은 망각에서 와서 망각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아닌 데서 와서 내가 아닌 데로 간다. 시인은 그 길에 사랑이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내가 없는 곳, 내가 잊혀진 길에 사랑만 오롯이 꽃피어 있길 기원한다.        - 중남미 시인, 중에서     생명   종일 새 하나 가슴에 와 지저귄다 입맞춤의 세월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산다는 것 산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 입맞춤이거나 새거나 늦거나 빠르거나 영원히 오지 않거나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 아니면 산다는 것은 결국 남의 무릎 땅에서 헤엄치는 금발의 머리칼을 위한 황금배 하나 아픈 머리, 황금 관자놀이 그러나 곧 떨어질 햇덩이 하나 여기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지금 태어나는 파란 피의 갈대들 따스함이거나 생명이거나 너에 의지하고 서 있는 꿈 하나.     삶의 덧없음을 알아야  하루하루가 맛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죽는다.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또한 산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나는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늘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내가 죽는 소리는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이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남의 배를 타고 잠간 쉬었다 가는 뱃놀이의 즐거움이다. 내게 주어진 생명, 그 ‘햇덩이’는 저녁이 오기 전에 떨어질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모두 다 죽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할 때 사는 맛은 진하다. 산다는 것, 혹은 실존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딛고 잠깐 떠 있는 일이다.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살아 있음의 소중한 느낌을 맛본다. 삶은 유리잔보다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아주 하찮은 것에 놀란다. 사랑을 느끼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해!”처럼 영원을 저당잡히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     나는 운명이다   그렇다 어느 때보다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어찌하여 내가 너를 입맞추겠는가, 죽음이 바로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다만 산다는 것을 잠깐 잊는 것뿐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한 육체의 빛나는 한계를 안 보기 위하여 내 어찌 눈앞에 와 있는 어둠 앞에 눈을 감겠는가   나는 책 속의 진실을 읽고 싶지 않다, 그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물 처럼 올라온다 나는 그 거울을 포기한다 그 거울 속에는 산이 보이는 곳마다 벌거숭이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내 이마가 비친다 거기, 의미를 모르는 새들이 가로질러 날아가는   나는 강물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 않다 거기 색색의 물고기들 이 분홍빛 생명을 번뜩이며 안타까움의 한계인 물가를 돌진하는 모 습 강물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 일어난다 갈대 사이에 누워 있는 나는 그 기호들의 의미를 모른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먼지를 마시는 것을 거부한 다 그 고통스러운 흙덩어리가 하늘의 눈도 이해할 수 없는 기호처럼 굴러간다는 것을 알 때 나의 살덩이가 말하는 삶의 확실성을 나는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혓바닥을 들어 절규하지 않는다 위에서 부딪혀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혓바닥을 쏘아올리지 않는다 쏘아올려 광막한 하늘의 유리창을 깨고 그 하늘 뒤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내고 싶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 튼튼한 풀잎처럼 살고 싶다  북풍처럼 눈처럼 눈을 뜨고 있는 숯덩이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는 어리아이의 미래처럼 달이 모르는 짐승들의 감촉처럼   나는 음악이다 그 많은 머리칼 밑에 신비스럽게 날아가며 세상이 만드는 음악 날개에 피를 흘리며 억눌린 가슴속으로 죽으러 가는 순진무구한 새 하나   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운명이다 사랑을 아는 모든 반경이 모여드는 유일한 바다 모여와서 중심을 찾는 소용돌이쳐 소리소리 치며 완전한 장미처럼 원이 되어 출렁이는   나는 벌거숭이 바람을 향하여 갈기를 불태우는 말 한 마리 나는 스스로의 털과 갈기에 고문당하는 사자 무심한 강물을 두려워하는 사슴 밀림을 떠나는 당당한 호랑이 대낮에도 반짝이는 작은 풍뎅이   아무도 살아 있는 사람의 현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소리치는 화살들 사이 그 한중간에 서서 보이지 않을 게 없는 투명한 가슴을 내보이는 그러나 맑아도 밝아도 결코 유리창은 될 수 없는 삶 손을 대보라 피를 느낄 테니까.   - 중남미 시인 중에서  
13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시학 2 댓글:  조회:1313  추천:0  2019-03-09
뜨거운 추상의 시어들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우리의 시의 추상어 기피현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말에서 추상어는 모두가 한자말이다. 아니면 일본어에서 온 생경한 말이다. 일제로부터 우리말을 되찾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오랜 한자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란 반작용이 있기 때문에 쇄국주의적 우리말 선호풍조를 키워왔다.   우리말, 우리스러운 정서에 대한 열정은 한편으로 한국적 정서로는 우리 문학의 형이상학적 깊이를 잃게 하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언문'이나 '내방문학'으로, 민요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우리말은 주로 여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우리말이나 우리 문학어의 특징은 여성 특유의 한이나 정감을 표현하는 데는 뛰어날 수 있었지만 추상이나 관념을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는 생각과 감각이 하나 되어 이루어지는 미학이다. 어디까지가 우주만물에 대한 관조이고 어디까지가 감각이나 느낌의 형상화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말로 빠스의 시를 옮겨놓으면 시가 갖는 깊은 사고의 무늬가 그 현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나는 빠스의 이런 시학을 '맛있는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 한다.     너의 눈동자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여기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눈동자에 대한 감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첫 구절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러나 금방 눈물이 쏟아질 듯 물기어린 아름다움....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물(눈물)과 불(번개)의 역설적 만남이 시작된다. '너의 눈동자' 속에는 끝없는 역설이 산다. 말하는 고요, 침묵의 언어,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이들 이미지 속에서 너의 눈빛에 응축된 정열은 조용한 바다의 고요로 반짝이고 있다. 너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다.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이 시구는 속눈썹 켜지는 깨달음 같은 사랑에의 확신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면 장자의 우주관처럼 모든 사물들이 각각의 분계를 넘어 "잎사귀는 새가 되고" "나무의 어깨 위에선 (새 대신) 빛이 노래하는" 극도의 황홀이 있다.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눈에 뒤덮인 해변 속 샛별,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 하얀 눈빛의 파동과 파도 속에 자리한 반짝임. 시인은 마침내 너의 눈동자를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라고 부른다. 은유치고는 최고의 역설이다. 불이 어떻게 과일일 수 있는가. 그러나 너의 눈동자를 보면 그게 기적처럼 가능함을 본다. 먹을 수 있는 추상. 만질 수 있는 불. 맛있는 영원의 불길. 그래서 너의 눈빛은 '맛있는 거짓'이다.     너의 눈동자는 내게 영원한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속세의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이어도 믿고 싶은 '맛있는 거짓', 그것이 너의 눈동자다. 그렇다. 너의 눈동자를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보람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황홀한 것임을 안다. 너의 눈동자야말로 내가 이승에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승의 거울."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   그러나 동시에 너의 눈은 내가 영원할 수 없고 영원히 사랑할 수도 없음을 확인해주는, 생의 한계성을 절박히 느끼게 하는 "저승의 문"이다. 너의 눈은 죽도록 사랑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바다)속에 떠 있는 가벼움(맥박)이다. 나는 너의 눈동자를 보며 살아 있다는 실감을 경험한다. '깜박거리는 절대', 너의 눈동자에 취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소망한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함을 안다.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과 그 반짝임은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큰 목마름으로, 뼈로 알게 한다.   이 시의 해설이 이렇게 길어지게 된 것은 그만큼 응축된 추상들로 시가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명사 중에서 고유명사가 가장 구체적이다. 루쏘의 '언어의 시원'에 따르면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가 생긴다고 한다. 태초에 '나무'란 말은 한 잎사귀 많은 기둥을 일컫는 고유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닮은 많은 기둥들이 보이자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아는 '나무'라는 보통명사가 생겨났을 것이다. 보통명사를 아우르는 것이 '초목' '식물' 같은 총칭명사이고, 그 총칭명사를 넘어서 모두를 일컫는 말이 추상어이다. 즉, 형상 있음을 넘어선 형상 없음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 추상어이다. 그림에서 추상화가 가장 건조하고 알아보기 어렵듯이 시에서 추상어의 남발은 시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낯섦의 다른 표현일 뿐 인간의 구체적 느낌과 생각까지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집의 구체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실체성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이다. 그러므로 감동으로 육박해 오는 구체적 현실감은 이렇게 추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어떤 문학이건 종국에는 그 의미가 문제되는 법이다. 아무리 이미지성이 강한 시라도, 아무리 구체적 감각과 심상이 있는 시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엮어내는 의미의 무늬로 시와 시 아닌 것이 판가름된다. 무의미 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까를로스 보우소뇨도 '자동필기법'을 동원한 현대시의 가장 난해한 속성을 '상징화'라고 결론짓는다. 쉬르리얼리즘이 가진 극단의 불연속적 이미지도 결국은 '상징화'를 통한 의미 산출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은 그렇지 않다. 빠스의 추상어는 먼저 감탄사이다. 시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감탄사로 대치하고 있다. 언어와 시가 의미를 향한다면 빠스의 시는 그 의미와 추상에서 되올아오는 시다.      손끝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그 사랑과 감탄과 흥분이 빚어낸 절정감을 표현하는 추상어이다. 나의 손은 너의 존재를 손끝으로 하나하나 확인해간다.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너의 육체는 너의 육체가 아니다. 나의 손끝이 느끼는,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또다른 '벌거숭이 옷'이다. 나의 손은 너의 몸뚱어리 곳곳을 탐색한다. 너무도 신기하고 새롭다. 벗길수록 새로운 네 속의 그 많은 곳들, 물체들. 그러나 너는 지금 나의 손끝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네 육체가 가진 신비를 모른다. 그리고 너의 육체는 나의 손끝을 모른다. 나의 손끝이 너의 몸에서 느끼는 황홀은 너의 황홀이 아니라 나의 황홀이다. "나의 손은 /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추상어를 통한 이미지들   서구 르레상스 이후 오늘의 시는 절묘한 은유와 상징을 통해 오묘한 감정과 의미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어는 그 의미에서 감각과 느낌으로 되돌아와 이미지를 산출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보르헤스같이 가장 지것인 시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성인의 추상적인 언어로 더욱 정력적인 것을 진솔하게 선사한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들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 음절들   불그레산 너의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밤의 등뒤에서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리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모든 것은 잊혀진다. 모든 것은 밤을 향한다. 그러나 밤의 등뒤에서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횡포스러운 불빛들, 기억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의미 없는, 그러나 너무 확실한 입술들. 그것은 날밤의 번갯불 같은, 그러나 달콤한 '횡포의 불빛'이다. '불그레한 너의 머리칼'의 젖은 냄새와 한여름밤의 꿈도 잊었다. 그것은 이제 전설이다. 전설 속에서 솟아나는 꿈의 물살. 망각이나 허무로부터 "나는 살았노라!" 다시 일깨우는, 심지어 이 밤 눈물을 가능케 하는 이름없는 추억이여.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나는 하나도 증명할 수 없는 한 여인의 사랑에 아파하며, 주소 없는 아픔의 "눈먼 바다가 밀려와" 나의 온몸을 미친 듯 후려치는 비극 아닌 비극을 실감하다.        시를 향하여 -출발점들     말들, 몇 순간의 수확들, 아침인사와 저녁인사, 입구와 출구, 아무데에서 아무데로나 가는 복도의 입구에, 불타버린 언어의 나무 숯덩이에서 끌어낸 말들. 동물성 뱃속, 광물성 뱃속, 시간의 뱃속에서 끝없이 뒤치다, 출구를 발견하는 것 : 시. 나의 시선들이 부서지는 그 얼굴의 집념 폐허화된 풍경 앞에서, 미궁을 공략한 뒤, 다시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전선, 혹은 이마. 화산의 고뇌. 시대의 우상, 지휘자, 총수의 종이호랑이 상판때기의 인자함, '나'들, '너'들, '그'들, 거미줄을 짜는 사람들, 손톱으로 무장한 대명사들, 얼굴 없는 추상스러운 성인들, 그, 그리고 우리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람, 아무도 아닌, 누구도 아닌 그 사람. 아버지 하느님은 이 모든 우상들의 모습 속에서 복수를 당한다. 이 순간은 얼어붙는다, 응고된 백색이 눈을 흐린다, 대답이 없다 사라진다 빙빙 도는 물살들로 밀려난 북가죽 돌아오리라 환상의 탈을 벗긴다 만감한 한가운데 큰 못을 박는다 화산폭발을 자극한다 탯줄을 끊는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지른 범죄. 새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 말하기 위해 말하기, 절망적으로 소리를 끌어내기,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그 말을 받아적기, 까맣게 되기. 시간은 두 갈래로 열린다 : 죽음 앞에서 뛰어내리기.       위의 시 또한 파괴적이다. 시쓰기는 말 만들어내기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오가다 찌들리고 불타버린, 생명이 없는 단어들을 그러모은다. 이미 이들이 가진 의미는 시인이 찾는 소리가 아니다. 빠스는 이들 불모의 말들을 반짝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을 시라고 말한다.   시쓰기는 '사랑 행위이며 전쟁'이다. 빠스가 좋아하는 이런 표현은 멀리는 이딸리아의 뻬뜨라르까로부터 오지만 빠스에게는 시락이 된다. 그리 의 한 구정을 보자.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과 대치하는 행위입니다, 소음이라든지 도시, 문명, 나무 들....문학은 일종의 반칙행위요. 무엇보다도 일상언어 전달의 위반행위에 속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붕기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자세에서도 보여집니다. 작가는 항상 어떤 것에 맞서서, 많은 경우 어떤 것에 대항하여 글을 씁니다. 내가 이 '대항하여'라는 말을 쓴 것은, 꼭 어떤 것을 증오하여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항하는' 것도 사랑 행위일 수 있지요. 어떻든 시쓰기는 언어의 파괴행위입니다. 아니면 언어의 표피를 깨고, 언어의 내부로 파고드는 행위지요. 그래서 글쓰기는 싸움이나 사랑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이마는 전쟁터가 된다. '황폐화된 풍경' 앞에서 다시 말을 짜내는 불타는 이마. 시 속의 호랑이는 결국 종이호랑이이다. 니체 손에서 신은 죽었다. 신과 함께 인간도 죽었다. 인간과 함께 말도 죽었다. 따라서 시인이 만들어내는 말과 상징은 이제 절대성을 잃은 공허한 우상일 뿐이다.   빠스는 전통적 어머니, 즉 가족과 사회의 모태가 되었고 사회적 의미와 의사소통을 구축해온 성모는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두를 위해 저지른 범죄, 새로운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는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즐기고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가진 여신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지요. 현대가 육체의 반란을 겪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오늘날 가장 선호하는 가치로 현재성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발전주의 전진주의가 지향해온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란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육체의 반란이란 전진주의가 숨겨온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저항입니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최상의 가치로 저축이니, 노동, 부의 축적을 들었지요. 천국을 영원성에 두는 게 아니라 미래에 두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진주의는 (미래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나 종말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밖에요. 크리스천에게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에게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지요. 영원으로 가는 도약이지요. 힌두교인에게도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탈이지요. 그러나 미래를 믿고 선진조국의 건설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지요. 미래에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미래에 대한 꿈이나 전진주의를 무력화하니까요.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나는 죽거든요. 더군다나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도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육체의 반란이란 미래에 대한 반란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를 현재에 두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가능성까지를 내포한 시간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정복이 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지요. 옛날 종교들처럼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얼굴이 아닌, 그렇다고 현대처럼 위장된 얼굴도 아닌 모습 말이에요. 죽음을 삶의 중요한 핵심요소로 보아야지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에로티시즘은 육체의 시간으로 에로티시즘 속에서는 죽음이 침해나 자해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죽음의 모습이 다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나 또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죽음의 가능성 위에 말입니다."   빠스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서정주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란 시구가 생각난다. 그렇다. 지극한 사랑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사랑을 맹세할 때도 "죽음이 둘을 떼어놓을 때까지"란 표현을 쓴다. 서정주의 절구처럼 사랑하는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을 생각할 때 나는 눈이 부신 사랑의 절실함과 깨달음에 이른다. 삶은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햇살로 넘친다.   우리는 이제 빠스의 의 마지막 연의 뜻을 알 것 같다. 결국 시쓰기는 사랑의 행위이며, 죽음 앞에서 말의 도약을 위한 시도이다. 절망 속에서 소리를 끌어내고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이끌어내는 사랑의 행위가 시쓰기이다.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 광휘이면서 갈날 사랑으로 살아 있는 칼 이제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한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하나 나의 말 내 죽은 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은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 자유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   시인의 말은 정확하면서 항상 틀린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말이 아니라 상처난 말이다. 말을 찾는 작업은 늘 말의 잔인성과 공허에 맞부딪는다. 말은 항상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붓에 말을 맡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시인이 찾는 말은 하나의 말,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말이다. 그것은 성체용 빵 같은 구원의 빵이면서 죽음의 잿더미인 패러독스이다.      
12    언어학자는 은유를 어떻게 보는가 댓글:  조회:1553  추천:0  2019-03-09
언어학자는 은유를 어떻게 보는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촘스키는 언어의 심층 구조를 밝히는 데 온힘을 쏟은 언어학자로 평가받는다. 현대 언어학에 가히 혁명적 영향을 끼쳤다고 일컫는 (1965)에서 그는 이른바 의 관점에서 은유를 설명한다.     선택 제약이란 한 어휘 항목이 다른 어휘 항목과 결합하는 방식을 규정짓는 규칙을 말한다. 한 문장에서 명사는 통사 자질을 가지고 있는 반면 동사나 형용사는 명사와의 관계에 따른 선택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주어는 아무 낱말이나 술어로 삼을 수 없고 오직 여러 낱말 가운데에서 특정한 낱말만을 술어로 선택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는 통사 규칙을 위반한 문장이다. 라든지 라고 말하면 몰라도 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라는 무생물 주어는 는 정감을 나타내는 동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사 규칙은 주어와 동사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형용사와 명사, 부사와 동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가령 이라든다 라는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좀스키의 선택 제약을 위반한 본보기로 라는 문장을 한 예로 든다. 추상적 관념에는 색깔이 없기 때문에 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관념의 색이 푸르다고 해놓고서 이라는 말로 관념이라는 명사를 꾸미게 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는 표현도 걸맞지 않기에 마찬가지이다. 잠은 추상적 관념은 할 수 없고 오직 생물체만이 할 수 있는 생리 현상이다. 관념이 잠을 잔다는 표현도 모자라 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나 라는 부사는 몰라도 라는 부사는 는 행위를 꾸며 주는 수식어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좀스키가 말하는 선택 제약을 좀더 쉽게 이해하는 데에는 김수영의 맨 마지막 작품 은 아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절대 권력의 억압 아래 고통받고 절망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의 민중을 노래하여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고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작품에서 한낱 풀에 지나지 않는 식물이 사람처럼 행동하여 선택 제약을 어긴다. 동물도 아닌데 풀이 자리에 눕고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것도 고 말한다. 눕고 일어나는 행동도 이상한데 풀은 웃고 웃기까지 한다. 비록 생물체라고는 하지만 풀이 울고 웃는다는 것은 정상적 언어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논리성에 따라 문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촘스키의 입장에서 보면 김수영의 작품은 선택 제약을 어긴다. 한 낱말이 문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테두리를 벗어남으로써 통사 규칙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풀은 생물과 식물이라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 반면, 눕거나 일어난다는 동사는 동작과 상하 운동과 동물에만 적용된다 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한편 통사론뿐만 아니라 화용론도 은유 이론에서 한몫을 톡톡히 맡는다. 화용론자 H. 폴 그라이스는 대화 격률(格律) 이론에서 은유를 언급한다. 이제는 이 분야에서 고전이 되다시피한 논문에서 종래의 기호학적 모델과는 전혀 다른 추론적 의사 소통 모델을 제안한다. 모든 의사 소통을 메시지를 기호화하고 그 기호를 해독하는 것으로 보는 기호학적 모델에서와는 달리, 추론적 모델에서 의사 소통은 어디까지나 추론적 증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정상적인 의사 소통이 가능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그라이스는 라고 부른다. 이 원칙에 따르면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대화의 목적과 방향에 걸맞은 방식으로 담화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라이스는 협조의 원리를 크게 1) 양의 격률 2) 질의 격률 3) 관계의 격률 4) 방법의 격률의 네 가지로 나눈다. 양의 격률은 정보의 양과 관련한 것으로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의 목적에 꼭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을 제공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주거나 이와는 반대로 필요한 것보다 적게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짓는다. 질의 격률은 대화에서 절대로 그릇되다고 믿고 있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된 것만을 말할 것을 규정짓는다. 또한 적절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적합성과  연관성을 강조하는 관계의 격률은 오직 대화와 직접 관련된 것만을 말하도록 규정한다.  마지막으로 방법의 격률에서는 무엇보다도 명료성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모호하거나 애매한 말을 피하고 간결성과 논리적 질서를 추구하려고 한다.   그라이스는 은유가 협조의 원리 가운데에서 질의 격률을 어긴 것으로 본다.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어떤 것에 빗대어 말하는 은유는 진실된 것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라이스의 관점에서 보면 김수영처럼 나 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진실된 것만을 말하도록 규정짓는 질의 격률을 조롱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은유는 질의 격률을 조롱할 뿐더러 양태의 격률을 조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촘스키에서나 그라이스에게서나 은유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언어 규칙에서 벗어난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은유가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면서도 그들은 지나치게 통사 규칙이나 의사 소통의 원칙에 얽매여 있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들의 언어 이론은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점에서 언어학자들은 문학가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가들은 은유를 정상 언어에서 일탈한 비정상적 언어나 정상 언어에 기생하는 부차적 언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은유야말로 정상 언어요 언어의 규칙에 맞는 언어라고 주장한다.   적합성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은 와 이다. 이 두 개념은 말하자면 적합성 이론의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지붕과 같다. 최적의 적합성을 얻는 데에는 어느 진술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보다는 경제적이냐 비경제적이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적합성의 원칙은 최소의 노력이나 자재로써 최대의 효과를 노리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경제 원칙과 비슷하다.        - 김동욱 지음, 중에서
11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댓글:  조회:1358  추천:0  2019-03-09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엘리엇이 그의 이라는 논문에서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가 이 논문에서 말하는 것을 보기로 하자.   시인이 어떤 점으로든지 특출하거나 흥미를 끄는 것은, 그의 개인적 정서, 다시 말하면 그의 생활의 어떤 특수한 사건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서 때문이 아니다. 어느 시인 그 사람만이 가진 특수한 정서는 단순하고 생격하고 멋없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고, 시를 쓰는 데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사실상 졸렬한 시인은 흔히 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무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의식적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런 오류로 말미암아 그 시인은 으로 된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에서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에서의 도피이다. 그러나 물론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라야 개성과 정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이창배 12-13)   같은 논문에서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순간에 좀더 가치 있는 것에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예술가의 발전은 계속적인 자기 희생이며, 지속적인 개성의 멸절이다.   이러한 개성의 소멸 과정과 이것이 역사 의식과 맺는 관계를 정의하는 일이 이제 남아 있다. 여기서 엘리엇이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전통은 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개성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조하는 바는 이 같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개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전통은 따라서 개성이라는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타자로서의 무의식인 셈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개인 차원의 개성을 죽이고 집단 무의식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롤랑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사라지는 중립적이고 복합적이며 비스듬한 공간이다. [글쓰기는 또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몸을 위시하여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다. [중략] 말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언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략] 내가 아니라 언어이며, "내"가 아니라 언어만이 움직이고 "행위"하는 곳에 다다르는 것이다. [중략]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작가란 결코 글쓰는 행위 이상이 아니다. 이는 라는 말하는 행위 이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언어는 만을 알 뿐 [개인으로서의]의 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술 자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이 텅 빈 주체는 언어에게 만으로 족할 뿐이다.   물론 엘리엇과 바르트는 각기 다른 문맥에서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이 둘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즉, 엘리엇이 작가란 자신의 개성이 아닌 전통이라는 집단 무의식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닌 주체로서의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대신에 정체성이 멸절하는 곳에 이르는 일이 곧 글쓰기라는 바르트의 주장과 일치한다.   작품은 (서점에서, [도서관의] 도서 목록에서 그리고 시험준비를 위한 지정 필독서 목록에서)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전개 과정이며,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또는 이러한 규칙을 어기면서) 말하다. 작품은 우리 손안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언어로만 담아 낼 수 있으며, 담론의 움직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담론을 의미화의 사슬로 바꿔 말한다면, 우리는 텍스트가 작가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되거나 종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반대로 무한한 기의의 지연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암유(allusion)하며, 또한 다른 텍스트들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하는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기호들은 단지 떠 다니는 기표들일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시의 저자는 엘리엇도 그리고 파운드도 아니며 또한 이 둘을 합친 것도 아니다. 이 시에는 무수한 인용과 암유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시의 저자(이제 우리는 저자 대신에 글쓰기의 주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는 엘리엇과 파운드 말고도 이 시에 인용되고 암유된 성경을 비롯한 무수한 동서양의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들이다. 이 시는 단지 이 같은 주체들의 정체성이 소멸된 자리에 타자로 남아 있는 집단 무의식이며, 이 집단 무의식은 곧 언어인 셈이다. 그러나 누가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완전히 답해진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언어라면 이 같은 언어는 또한 글쓰기의 주체의 참여뿐만 아니라 또한 글읽기의 추제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언어가 우리 모두의 참여를 요구하는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쓰기가 글읽기를 전제로 한 것이며, "텍스트가 하나의 생산적 활동에서만 경험되는 것"이라면 [황무지]의 글쓰기의 주체는 위에서 말한 모두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엇, 파운드, 인용되고 암유된 모든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 및 집단 무의식과 이 시를 읽는 독자들 모두를 이 텍스트의 글쓰기의 주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이 시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의 동포여, 나의 형제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또한 독자도 포함함을 엘리엇 자신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은 이 시 텍스트의 공간을 이처럼 활짝 열린 글쓰기의 공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넓은 의미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무수한 텍스트 사이의 연계가 가능한 넓고 넓은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의 반란은 이제까지 무의식을 억압하던 의식을 여지없이 전복시켜 의식을 단지 "한 무더기의 깨어진 성상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같이 붕괴된 의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글쓰기의 주체로서의 독자와 다른 텍스트들의 집단 무의식을 복원시킨 셈이다. [중략]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이 같은 욕망은 단지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욕구와 욕구가 채워진 후에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머지를 지칭한다. 이 같은 나머지로서의 욕망은 결핍의 존재(want-to-be)로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을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중략] "욕망하기"는 곧 "욕망하기를 원하지 않기"라는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욕망의 억압을 습관화한 현대인의 특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가정을 전복시키고 그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기억의 일관성을 교란시키며, 그와 언어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따라서 상징질서로서의 언어를 위기로 몰아 이를 전복시키는 것은 타자로서의 무의식이며, 이 같은 무의식은 구심점이 없는 조각난 텍스트들의 집합인 셈이다.      *이정호 (서울대학교 출판부) : 제4장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151쪽~  
10    T. S. 엘리엇 비평의 대화적 상상력 댓글:  조회:1305  추천:0  2019-03-09
시론을 '시작' 하며 또는 용의 머리(龍頭) : 소위 '포스트' 시대에 교활한 엘리엇 '되' 살리기  또는 '새로' 읽기 또는 '다시' 좋아하는 법 배우기 중에서.       엘리엇은 좋은 의미에서 '교활한' 야누스이다. 여기서 '교활한'이란 말은 다면체적 엘리엇에게서 우리는 그의 한 면만을 보고자 고집하게 때문에 생기는 그의 알 수 없는 다른 면에 대해 의혹/의심하는 우리 자신의 '불평'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담장에 걸터 앉아 언제나 양쪽을 바라보는 포월(匍越)하는 니체의 '초인'이다. 엘리엇은 미국 '남부인'으로 태어나 동부의 최고 대학을 다닌 '동부인'이 되었으며,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와 문학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갈등과 대화의식은 그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강한 방랑자, 유목민으로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고 ('철학'과 '문학'의 보이지 않는 대화이던가?) 시의 습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서양 철학은 물론 동양 철학(특히 인도 철학)에도 심취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이미 정신적 지적 유목민이었다.   엘리엇은 위대한 이민자였다. 미국에서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스스로 지적 정신적 망명자가 되었으며, 스스로를 급진적으로 '타자화' 하였다. 그는 약속되었던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 자리를 의연히 떨쳐버리고 I.A. 리차드가 제시하였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 영문학과의 자리도 거절하고 치열한 세속적 삶의 싸움터인 런던의 야시장 바닥에 자신을 내던졌다.   엘리엇이란 작가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시대적 '산물'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의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작가로서 키워져 버린(만들어진)-자신의 의지에 반(反)하여-분열되 버린 자기 시대 속에서의 실존적 지식인이었다(이는 초기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나 [황무지]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시의 '심적' 자아는 초기 산문에서 '공적' 자아로 나타난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뒤얽힘과 갈등은 [푸루프록의 사랑노래]에 실존적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화구조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기의 '시'와 '산문'의 갈등구조는 자신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또 다른 양상인가? '시'에서는 엄청난 형식파괴를 통한 실험 그리고 [황무지]의 경우에서처럼 시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의 예상치 못한 병치와 접합으로 새로운 충격과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하는 바흐친의 눈으로 보자    그의 [도스토예프스키의]의 생각은 어디에서든지 목소리들, 반(半)목소리들,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몸짓이라는 미로를 통해 나아간다. 그는 다른 추상적인 입장을 토대로 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결코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어떤 지시적인 원칙에 따라 생각을 서로 연결하지 않으며 여러 견해들을 병치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 자신의 견해를 구축한다.   같은 맥락에서 엘리엇 자신은 병렬적 상상력과 중층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터너와 미들턴의 시행을 보면, 언어의 끊임없는 작은 변모가 일어나고, 어휘들은 끊임없이 새롭고도 갑작스러운 결합 속에서 병치되고, 의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들과 중첩된다. 이것은 감각의 아주 높은 단계로의 발전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결코 필적할 수 없었던 영어라는 언어의 발전-을 증명하는 예이다. 그리고 정말로 체프먼, 웹스터, 터너, 단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는 지성이 즉각적으로 감각과 닿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감각은 어휘가 되었고 어휘는 감각이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지성과 감성이 손쉽게 교류하는 대화관계에 있고 감각과 어휘 사이에 자연스럽게 환유적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의 이러한 대화적 중첩적 특징들은 산문에서는 문체나 내용적인 엄청난 절제와 통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의 엘리엇에게 분명 시는 산문의 알터 에고(alter ego)였다. 어느 것이 진정한 엘리엇인가? 왜 이와 같은 긴장관계를 만드는가? 분열증은 시에서 토해 내고 다시 산문에서 편집증적으로 추스린 것은 엘리엇 특유의 담론전략이었던가? 분열증인가? 편집증인가? 그러나 엘리엇 자신의 자신의 시와 산문과의 상호보완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비평에서 가장 정확한 의견들을 주장하는 반면 나의 운문에서는 그 의견들을 파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개의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중적 역할을 가진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수치감도 느끼지 않는다. [...] 산문에서는 사색이 이상과 합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반면 시작(詩作)에서 우리는 단지 실제만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는 다른 시뿐 아니라 산문으로부터도 배울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산문과 시 사이의 상호관계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처럼 문학에서 생명력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주위의 끔찍한 현실 -서구 문명의 몰락과 와해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절대적 진선미를 추구하려던 자신은 이미 산산이 파편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이 통합하고자 했던 (서구 중심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중략   엘리엇 자신도 그 어느 비평도 후세에 계속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문학비평도 후세대를 위해서 그것이 자체로 계속 유용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본질적 가치를 계속 가지지 않는다면 호기심 이상의 감성을 자극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 비평의 일부가 이러한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진다면, 우리는 만일 우리가 또한 그 작가와 그의 첫번째 독자들의 입장 속에 우리 자신들을 집어 넣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 그 가치를 그만큼 더 정확하게 향유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무엘] 존슨과 콜리지의 비평을 공부한다면 틀림없이 커다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대화적 비평의 대가들인 존슨과 콜리지를 보고 엘리엇이 끊임없이 배웠듯이 우리는 엘리엇의 의식구조[대화구조]에 우리 자신을 새로 끼워 넣어 다시 읽고 새로 써서 그의 비평의 가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보자. 다시 말해 알튀세적인 '징후적 읽기'를 통해 엘리엇을 우리 시대에 다시 보이게 만들자. 이러한 시도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9    스페인 시인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고독과 고독의 대화 댓글:  조회:1602  추천:0  2019-03-09
스페인 시인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고독과 고독의 대화 민 용 태   오늘 스페인 시는 어느때보다도 다양하고 풍성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바야흐로 스페인의 시의 르네상스가 오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은 그 반대다. 다양하다는 말은 그렇게 두드러진 목소리가 없다는 말이고, 풍성하다는 말은 시의 대중성보다는 내적인 깊이가 좋아졌다는 말이 된다. 문학의 시장가치는 떨어진 반면 형이상학적 깊이나 내적 진솔성이 신비주의에 가까울만큼 돈독해졌다는 뜻이다.   오늘 스페인 문학이나 시를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여러가지 시도들이 창작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스페인 내란 이후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스페인 현대시는 이데올로기적 좌우 갈등구조에서 시적 체험의 내부화로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전후 스페인 시는 기독교적 종교시, 르네상스 시대의 목가적 서정시가 유행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 시 풍조는 소위 “사회참여시” 혹은 “사회시(la poesía sicial)"가 주류를 이루었다.   스페인 전쟁은 프랑코파와 공화당파의 전쟁이었으니까, 프랑코가 승리하고 난 뒤에는 마르크스주의나 민주파가 맥을 못추었다. “프랑코 만세!”를 외치는 극우파의 세상이었으니까. 그런 시인들은 시잡지 “가르실라소(Garcilaso)를 중심으로 16세기 스페인 제국과 황금세기의 문학의 부활을 꿈꾸었다. 프랑코가 16,17세기의 스페인 황금세기(Siglo de oro)를 꿈꾸며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스페인을 재건하겠다고 큰소리쳤으니까. 거기에 발을 맞춰, 그 황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르실라소의 사랑시, 목가시를 모방한 소네트나 신비주의적 시를 흉내냈다.겉으로 보면 사회 정치 도피적 시들로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프랑코 아부파들이라고 좌파들은 꼬집었고, 정확이 말하면 호세 가르시아 니에또(José García Nieto)가 주동이 된 이들 극우파 시인들은 복고주의 서정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스페인 시단에 등단한 것도 1970년도 “마차도 시인 형제 문학상(Certámen poético de los hermanos Machado)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우화(Fábula)“라는 시로 시상을 준 심사위원은 좌파라고 할수 있는 레오뽈도 데 루이스(Leopoldo de Luis)시인이었고, 잡지에 내 시를 소개하고 나를 키워준 시인은 금방 말한 우파 시인 가르시아 니에또였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시인은 다름 아닌 레오뽈도 시인의 아들인 것. 어떻게 보면 우루띠아 시인과 나는 같은 한 분을 詩의 아버지로 섬긴 자식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사실 우루띠아 시인은 1991년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발명(Invención del enigma)”으로 시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니까, 나이 40이 넘어 늦둥이로 詩作에 손을 댄 셈이다. 그 동안 기호학이나 문학교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마드리드에 있는 “까를로스 3세 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1996년 “항해 허가증으로 준 늑대 대가리(Cabeza de lobo para un pasavante), 2000년에 ”미지의 발음(Una pronunciación desconocida)” 에 이어 오늘 소개하는 “바다, 혹은 사기(詐欺)(El mar o la impostura)”로 유명한 “14회 하이메 힐 데 비에드마 시상 (XIV Premio de poesía Jaime Gil de Biedma)을 수상한다. 2004년 출간된 이 시집은 벌써 3판에 들어갈 정도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시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디 오딧세이”의 율리시즈의 모험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르띠아에게 산다는 것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죽음과 고통의 상징이라면 산다는 것은 죽음 위에 떠 있는 위대한 물거품이거나 부질없는 영광 혹은 사기 당하기이다. 율리시즈 같은 위대한 영웅의 항해도 인생도 결국 사라져가는 울부짖음의 기억이나 우울증을 위한 밑밥들이었을 뿐. 다만 거기 유일한 희망은 그 속에서 노래와 말의 금광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가 죽음의 잿더미 속 곰팡이에서 다시 태어난 불사조임을 고백한다. 거울에서 나를 보면 나에게는 주검 냄새가 난다 나는 끝없이 내 속에 침몰하며 죽어가고 있었기에.   새벽의 꽃이며, 네가 나와 함께 왔었지. 그리고 강가 사원의 기둥들 앞에서 나에게 해질 무렵의 색깔을 보여주었지. 나는 오직 그것을 피로 보았지. 최소한도 너는 나에게 활을 당기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나는 이따까로 돌아왔다.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평상 일과로 돌아왔다. 나를 씻어주고 향를 뿌려준다. 깨끗한 까운을 걸치고 다닌다. 동이 트면 업무로 생긴 일들을 해결하러 나간다.   밤이 되어 눈을 감을 때 사랑스런 페네로페가 나를 껴안을 때 나는 여자들의 얼굴을 본다, 허우적거리는 남자들의 긴 팔을 본다 파도 속에 죽어가며 작별하는 몸짓들을 본다, 이마에 불타는 눈먼 눈길들.   "나는 노래와 말의 광맥을 찾기를 갈망한다“   우루띠아의 인생은 여행한다는 것. 그것이 율리시즈와 같은 항해여도 모험이어도 여행은 여행이고 여수(旅愁)가 남는다. 그러나 여행이나 여수는 그 자체로서는 체험일 뿐 무명이고 무가치이고 금방 사라진다. 그 삶과 여행이 쓰여졌을 때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게 되는 것. 시인은 논술조에 가까운 서시에서, “나는 오직 동사라는 말일 뿐” 이라고 말한다.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유태인 “레비 사촌”의 기록적인 말에서 영감을 찾는다. 그는 말한다: “안나 프랑크라는 한 소녀의 기록이 그녀처럼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욱 우리를 감동 시킨다. 어쩌면 그게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거나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우리 모두는 계속 숨쉬고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   이 말은 기호학적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고 시인은 말한다. 소녀 안나는 그녀의 일기를 통해서 인간의 사악함의 기호가 되었다. 안나는 그 고통을 글로 씀으로서 인간의 사악함과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안나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안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없었다면 그녀를 고통에 빠뜨린 사회의 불의나 고통은 인간에게 고발되지 않았을 것. 따라서 시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소름끼치지만(이 “소름끼치다”는 나의 표현이 맞다), 오직 쓴다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종국에 남는 것은 오직 쓴 글 뿐이다. 글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루띠아의 “바다,혹은 사기”라는 시집에서는 인생과 여행, 글쓰기가 모두 동의어이다. 거의 이야기투로 쓰여진 이 시집은 모험가, 영웅 율리시즈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똑같은 평범한 생할인의 우울과 무의미가 무체색으로 그려진다. 우울한 것은 우리 모두 행복하기 위해 싸웠고, 행복하고 싶었고, 지금도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말하듯 우리는 인생이라는 우연의 사고 많은 길에 내던져진 소경들이다. 우리 인생은 알 수 없는 일들이다. 오랜 세월 기다림 끝에 돌아온 율리시즈를 맞은 페네로페는 말한다:   “나는 행복해야 해, 내가 잘 아는 이 모르는 사람이 내게 왔으니까.”   우루띠아의 “시의 진리”는 삶의 씁쓸함을 깊은 맛으로 반추한다. “율리시즈처럼 아름다운 여행을 한 자는 행복할지어다 / 로마에 가서 로마를 찾았고,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으니까”라는 아이러니한 말을 자꾸 반복한다. 돈 끼호떼 속에 나오는 산초도 자기 이름이 책 속에 나온 것을 보고 신기해 한다. 또한 행복해 한다. 그러나 율리시즈나 영웅들, 아니면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인생의 결사대인 모든 우리들의 좌절된 꿈과 불안과 공포 쓰라림들, 그것이 행복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진실들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끝났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시, 한 권의 노래집. 우리의 율리시즈는 서사시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은 “자기 자신의 책의 책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이따까임을 / 모르고 있었으니까.” “율리시즈는 어두운 방에 있다 피부에 윤기가 없고 머리칼이 백발이다. 그러나 누가 저것을 알았던가? 누가 그의 인생을 묘사했던가? 그리고 율리시즈는 무엇을 아는가? 그가 한 것은 오직 우울과 우수의 여행이었을 뿐.”   호르헤 우루띠아는 오늘 스페인 시의 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동서의 문학과 시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외국문학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까.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의사 감정 소통 부재(incomunicación), 기계화 속에서의 인간 소외, 고독과 우울, 시 쓰기에서 있어서 문학적 텍스트와 나의 실존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현대시의 화두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진솔한 내면 세계 속에서의 대화.  밤새 누구에겐가 썼던 편지를 아침이면 다 태워버리듯이, 시 쓰기는 구태어 읽어주는 사람을 위한 거라기보다는 자기와 자기의 대화, 그런 위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의 내면과의 진솔한 대화가 오늘 우루띠아의 시다.   사실 요즘 세계화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모든 지구를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수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밥만 잘 먹으면 사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내 속의 그 인간은 더욱 왕따 당하고 그러나 왕따 당하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자유일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명상하고 생각하고, 자신과의 대화를 즐기는 즐거움이 오늘 시인의 낙樂이 아닐까.   1 시인의 역사 / 호르헤 우루띠아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 떠나지 않았던 그 집으로. 절름발이가 다 된 불쌍한 신천옹, 새가 다 알 듯이 모든 새의 비상의 둘레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먼저 꿈의 불룩한 내부의 오목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본 뒤 꿈꾸며 꿈의 길을 왔다.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온통 살과 눈길, 촉감과 애무가 되어 돌아 온 것. 영웅주의와 결별했다. 그리고 비상의 신천옹은 그냥 나비가 되었다. 그는 말로부터 침묵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씩 죽어간다, 다 부서지고 사라져 살아날 때까지.   2 역사학   다시 한 번 추억을 거리를 밟는다 현재를 찾는 자의 따스한 정성으로. 모퉁이들, 빛들을 찾는다 멀어져간 목소리의 메아리, 그 컵에 남은 진홍빛 입술 자국, 쓰레기통 속 구겨진 종이들을.   세월과 함께 쌓여 갈 실낱 같은 사랑 하나 기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마침내 모든 쓰레기로 시 하나를 만들기로 한다 잃어버린 모든 시간을 되찾기 위해.   3 정복자   너의 몸을 만졌다, 몸은 자라나고 있었다. 너의 몸을 만졌다, 몸은 미끌어지듯 빠져나갔다, 서서히 그의 손가락 사이를, 절대 굴하지 않는 손에 쥐려고 하는 물의 저항처럼 물의 밑바닥과 비밀은 끝내 잡히지 않는다. 물의 칼은 물고기 몸이 되어 그의 피를 말렸다.   그렇게 빠져나가던 그 먼 너의 물을 뚫고, 액체로 에워싸인 너의 몸에 다달았다. 너의 손을 너에게 놓고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소유란 아무런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4 호텔 방   누가 문을 노크했다. 잠에 취해, 벌거숭이로 침대에 있는 그를 급습했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닌 채로, 빠져들었다 그 손의 부드러운 추억 속으로, 그 입술의 따스한 구름 속으로, 그 눈의 물끼 젖은 파닥거림 속으로.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불분명하던 것이 이제 분명해진다. 시가 벌떡 일어나 우뚝 선다. 그리고 문턱에 서니 여명 저 너머로, 한한 대낮.   문을 연다는 것은 참 쉬웠다! 열쇠를 돌리고 손잡이를 돌리고, 그 전에 옷은 반쯤 입고 (시가 새벽의 벌거숭이 모습을 다 드러낸다는 것은 절대 좋은 게 아니다)     5 외부   길을 밟는다. 부질없이 바라본다는 것이 결코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오직 상처만이 여명을 알게 하리라. 손이 더 안다. 너의 살결이 안다 확실한 두 가슴의 둥그런 부피 입술의 한계, 등에 와 닿는 불타는 듯한 손가락들의 깊은 자국들.   보지 않고 안다. 하지만 보려고 한다, 눈먼 사람의 포옹 밖에는 다른 눈길이 없다, 안개가 방향을 잃게 한 뱃고동 소리.   네가 한 말 하나, 아니면 침묵 하나. 피는 달콤하게 그의 셔츠를 적신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 혈관이 하나 터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맑은 풍경이 있다, 하나의 평원: 노란 선이 지지 않는 해를 향하여 꼬불꼬불 기어간다, 자유롭게, 아주 자유롭게.  
8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댓글:  조회:1349  추천:1  2019-03-09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데리다(J. Derrida)는 ‘쓰기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쓰기도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소위 ‘차연’(differance)이라는 말로 데리다는 종래의 ‘논리 중심주의’에 반기를 든다. 데리다는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의 뿌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리 중심적 사고에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소리는 영혼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말을 들으면 진실을 알 수 있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쓰기는 말을 받아적는 부차적 행위로 생각되었다. 여기에서 인류는 말하고 쓰는 행위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믿는 논리 중심주의를 전통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차연’이란 말로 이들 전통에 반발하면서, 쓰기나 말하기는 항상 어떤 현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동시에 표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나의 지금 느낌을 표현한 ‘춥다’라는 말은 이미 추웠던 느낌의 대치물일 뿐인 것이다. 동시에 내가 느꼈던 ‘춥다 !’는 느낌의 질이나 양을 ‘춥다 !’는 말이 대변하지 못한다. 말과 느낌 사이만 해도 이토록 시간적 차이(지연)와 질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 문화는 언어를 통하여 다르게 구현되어왔다. 그러나 데리다나 라깡(Jacques Lacan)에 와서 그 언어라는 것이 어떤 본질이나 대소망(라깡의 ‘Phallus’)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음이 이야기된다.   이들 해체주의의 사고는 보르헤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많은 사고는 보르헤스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이다. 모든 시인들처럼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책이나 시가 나의 마음이나 느낌을 포착함과 동시에 처음 그대로 투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 속의 나의 느낌이란 것도 남의 느낌, 시의 언어의 느낌, 남의 시를 읽어 아는 느낌일 수 있다. 나의 시 속의 나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시를 쓸 때는 이미 지나간 느낌일 뿐이어서 시나 글은 나의 살아 있음의 어느 호흡도, 세포의 움직임도,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음도 체크하지 못한다. 나의 시에 그런 살아있음의 현실감이 잡힌다면 그건 실감나는 현실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언어는 관습의 산물이고 문학, 철학 또한 이런 관습의 소산이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나의 사고이기 이전에 관습의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구약성서의 말을 시학으로 구현한 ‘해체주의 시인’이 바로 보르헤스다. 대부분의 시는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시 속에 다시 한번 ‘그’다. 즉 ‘타인’ (elotro)이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다 말고 묻는다. “그 둘 중의 누가 이 시를 쓰고 있는가 / 그 복수의 나, 아니면 단 하나의 그림자?/ 말이 무슨 상관이랴, 내게 오는 이 말이, / 결국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저주.....” 그 ‘복수의 나’는 역사 속에서 나처럼 인생을 살았고 그 삶을 책으로 남긴,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그 책을 읽고 내 가슴을 움직인, 그 많은 지나간 삶 또는 앞으로 올 삶들을 점지해 가는 단수가 아닌 여러 사람의 나다. 그러나 이들 나를 이루고 있는 삶이나 문화의 흔적들은 모두가 허상 즉 ‘하나의 그림자’임에서 일치한다. 신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책을 읽었고 읽어가고 있는 중생들은 그 알 수 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저주받은 영토도 동시에 지금 나의 삶이 숨쉬고 있는 은혜의 터다. 바벨탑 이전의 언어, 신의 언어는 우리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미로이며 미궁이다. 그러나 그 부서지고 흐트러진 형상 속에 또한 참 삶의 모습이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   청동으로 새긴 6각운의 시 수천개의 길고 긴 시구 맨 처음에 그리스 시인은 기원한다 그 어려운 뮤즈, 혹은 신비한 불꽃에게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할 힘을 달라고, 호메로스는 알고 있었다, 타인이 –어떤 커다란 신이- 우리의 어두운 작업을 사나운 불빛으로 상처내고 있음을; 몇 세기가 지난 뒤 성서는 말하리라, 성령은 마음내키는 대로 불어닥친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정한 신은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밀턴에게는 사방에 어두운 벽을, 세르반떼스에게는 추방과 무명의 아픔을, 세속의 시간의 기억 속, 영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뿐, 그 찌꺼기만 우리 것.   그렇다. 불멸의 작품은 이름모를 신의 뜻이다. 이름을 모름은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은 오히려 부재의 모습으로 지금 나의 인생과 나의 시의 됨됨에 참여하고 있다. “무정한 신은 /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이해할 수 없는 우연과 고난과 불멸의 영광을 말이다. 롱기누스(Longinus)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함을 시쓰기의 방편으로 제시하면서, 고전 속에는 뮤즈로부터 받은 혼이 숨쉬고 있다는 소리를 한다. 그 혼은 글을 읽는 독자를 매혹하고 또다른 시를 쓰게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감론을 재해석한 롱기누스의 창조적 모방론은 보르헤스에게도 통한다. (중략)   보르헤스는 말라르메와 함께 ‘말이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전통 속의 말일 수밖에 없다. 즉 나의 말이 아니라 남의 말, 남들의 말이다. 따라서 나의 시는 ‘다른 사람’ 즉 남이 쓴다. 그것은 나의 시 앞에서 나의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의 시가 내 것이 아니듯이 남의 시도 남의 것이 아니다. 다 똑같이 ‘어둠의 자식들’이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말을 쓰지만 같은 냄새, 같은 체험, 같은 뜻으로 쓸 수는 없다. 이 시를 쓰는 나는 내 시 앞에서 타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를 읽으면서 내 시로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내 시의 작가가 아니라는 말과 내 시의 시인이라는 말은 똑같은 소리, ‘똑같은 사람’의 어두운 발성일 뿐이다.   그러나 내 시가 남의 시인 것은 그것이 특히 독자들의 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일단 쓰고 나면 나는 내 시의 하나의 독자일 뿐이다. 나의 시는 독자의 시다. 내 시를 쓰는 나도 내 시앞에서 타인이며, 내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를 읽는 독자도 타인이다. 내 시는 타인의 시다. 모든 타인의 시는 동시에 나의 시다. 모두 똑같은 사람의 시다.(중략)   보르헤스는 영감을 믿는 시인인 점에서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영감의 자유를 믿지 않는 숙명론자인 점에서 비극적 감성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다. 아니면 안또니오 마차도처럼 나그네 삶의 ‘우수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시가 그의 생명도 삶도 그 어느 것도 대변하거나 살릴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시를 믿지 않는다. 그는 시 없는, 책 없는 인생을 믿지 읺는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지 않는 인생, 아니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무명의 삶의 위대성에 각별한 애착을 갖는다.     사화집의 한 무명시인에게   지상에 오직 너만의 것이었던, 우주가 오직 너만을 위해 존재했던, 그 고통과 행복으로 짠 비단, 그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은 어디 있는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강물의 나날들 그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너는 이제 사화집 목차 속의 한 이 름.   신들은 남들에게 끝없는 영광을 내렸다. 비문이며 공적문이며 기념비며 정확한 역사가들까지; 자네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희미한 친구여 어느 하오에 두견새 울음을 들었다는 사실.   어둠의 수선화 사이, 자네의 희미한 그림자는 신들이 너에게만 깍쟁이었다고 하겠지. 하지만 세월은 하찮은 빈곤의 그물 같은 거지,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보다 더욱 훌륭한 결론이 있을 수 있을까 ?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들이 녹슬지 않는 영광의 빛을 던졌지, 마음의 내장을 비추고 그 균열을 하나하나 들추어낼 수 있는, 그러나 그 영광 또한 그토록 경애하는 장미를 끝내 송두리째 으스러뜨리고 말게 하는.... 자네에게만은 신들이 비교적 자비로웠던걸세.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보르헤스는 백과사전 출신, 도서관 출신 시인이면서 반독서주의자다. 고전처럼 유명시인의 시처럼 많이 읽히는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신의 일이다. 시의 영광과 패배는 타인의 일이다. 신들이나 타인의 장난은 알 수가 없듯이 더러 시인은 성공하고 실패한다. 그렇다고 시를 살지 않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오늘 독자에게 영광을 얻지 못한 시와 시인은 내일과 신에게서 더욱 영원한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딸로 깔비노(Italo Calvino) 말처럼 독자는 미래를 안다. 시는 독자의 것이며 신의 것, 망각의 것이다.   보르헤스는 ‘무명시인’ 혹은 ‘작은 시인‘ (Poeta Menor)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아래의 시는 위 시의 해석이 된다.   종착점은 망각 나는 조금 빨리 도착했을 뿐   위 두 시에서 보르헤스는 시와 시인의 길은 어차피 파멸과 망각을 향해 있음을 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그 유명한 에서 “죽음은 시와 시인을 잡아간다”라고 했던 것을 아르헨띠나 시인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어느 영광도 장미도 부서지고 으깨어지는 숙명일밖에, 그래서 차라리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가 오히려 먼저 도착한 미명의 영광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미리 영광이니 명예를 주지 않은 ‘무명시인’에게는 신이 오히려 떨리는 슬픔, 무너지는 아픔을 면제해주는 자비를 베푼 게 아닌가.   보르헤스는 노자의 ‘무명(無名)’을 배운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유달리 무명시인, 작은 시인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진다. 무명시인은 시와 시인이 가야 할 길에 미리 와 있는, 그 망각의 강가에 미리 도착해 무상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는 득도의 맛을 풍긴다. 득도의 경지이기에는 아직 서글픔과 우수가 얼룩지는 라틴계의 핏기가 있지만....“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그렇다.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서 듣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두견새 울음에서 황홀감을 느낀다. 그의 또다른 무명시인에 관한 시를 보자.   1899년 어느 무명시인에게   하루의 가장자리쯤,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서글픈 시간을 위해 시를 남긴다는 것, 황금빛 반짝임과 희미한 그림자의 아픈 날짜에 너의 이름표를 단다는 것, 그것이 네가 원했던 것. 하루가 기울고 있을 때, 또 얼마나 열심히 그 이상한 시구를 쓰고 다듬고 했었을까 ! 우주가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여기 이상한 푸르름이 존재했음을 알리려는 그 이상한 시구 ! 네 뜻이 성공했는지, 심지어 나는 네가 실제 존재했는지조차도 나는 모른다, 세월 속의 희미한 이름의 힘아, 하지만 나 또한 홀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망각에게 세월 속에서 너의 가벼운 그림자를 다시 찾아오도록 부탁한다, 땅거미가 지는 순간에, 이 지친 나의 안타까운 말벗이라도 되어주도록.   보르헤스는 시가 황금 월계관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곧 망각을 향하여 가는 길임을 안다. 다만 땅거미가 질 무렵의 푸르름, 그 작은 위안을 위해 시가 있다고 믿는다. 영원한 것은 무명에 가까운 작아짐의 형태에서만 또렷해진다. 그것은 세월 속에 너도 나도 살아 있었음의 더러는 슬프고 더러는 행복했었음의 마지막 증표다.     시학   세월과 물로 된 강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시간은 또다른 강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강물처럼 사라져갈 것을 알며 얼굴들 또한 강물처럼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눈을 뜨고 본다는 것도 또 하나의 꿈임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꿈꾸는 꿈,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밤마다 꿈이라고 부르는 그런 죽음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며   하루의 한 해 속에 사람의 나이와 세월들의 상징을 읽으며, 세월이 앗아간 인생의 아픔을 음악으로, 소음으로, 상징으로 바꾸어가는 일.   죽음 속에 꿈을 보고, 석양에 하나의 슬픈 황금을 보는 일, 이것이 시 영원한 가난의 되풀이: 시는 여명처럼 석양처럼 늘 되돌아온다.   이따금 하오가 되면 거울 한가운데서 한 얼굴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예술은 바로 그런 거울 같은 거,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밝혀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율리시스는 그 위대한 업적에도 지치고 지쳐, 고향 이타카에 돌아와 마을을 바라보며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초라하고 파란 마을을 보며....예술은 위대하지 않다: 이타카 마을, 그 파란 영원.   또한 그것은 끝없는 강물 같다 흘러가고 남고.... 만물은 흘러간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정거울: 모든 것은 다 똑같다 그리고 다르다, 끝없는 강물처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 구태여 헤라클레이토스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서가 세월의 흐름을 알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율리시스나 보르헤스나 우리는 똑같다. 보르헤스 앞에서 낭만주의의 독창성은 갈 길이 없다. 강물은 흘러가지만 강은 길게 누워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시인들이 흘러가고 흘러오지만 도서관은 여기도 저기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지금 여기 살지만 죽은 사람들을 읽고 또 나의 죽음을 창조한다. 거울 속에 비춰보는 나는 나지만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같은 인간이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때때로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나의 인생 ! 나의 공적 ! 나의 시 !’ 그러나 목소리를 낮춰라. 모든 것은 부서지게 되어 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파란 이타카 고향 마을, 그 파란 영원에서 다시 만나리라. 시는 그 가난과 파란 언저리에 돋는 풀이다. 보르헤스의 시의 주제는 거의 모두 지나간 다른 작품, 다른 시인들에 관한 것들이다. 똑같은 작품에 보르헤스의 숨결과 보르헤스의 덧입힌 되읽기, 되쓰기, 풀어쓰기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는 하나도 새로운 것을 쓴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고 또 죽어갈 사람들에게 읽힌다.   지금 내 시를 읽고 있는 분에게   당신은 무적이다,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법칙을, 먼지의 확실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당신의 시간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거울 속 세월의 무상함의 상징 그 강물의 시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읽지 못할 대리석 비문, 거기, 당신의 날짜와 도시 그리고 기록이 이미 적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시간의 꿈들. 견고한 청동도 정교한 황금도 없다. 우주는 당신처럼 변덕쟁이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것. 그림자여, 당신이 가는 곳은 당신을 기다리는 또하나의 어둠, 거기 어둠이 숙명처럼 당신의 여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라, 어떤 형태로든 당신 또한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민용태 (1995년, 창비) p218 ~ 229    
7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댓글:  조회:1256  추천:0  2019-03-09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말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말들은 항상 인 동시에 을 말한다. 사고는 단념하지 않고 줄곧 말의 사용을 강요하며, 한번 또 한번 자신의 법칙에 따르도록 한다. 반면에 언어활동은 한번 또 한번 반항하면서 구문론과 사전학에 의해 구축된 제방들을 파괴한다. 어휘학과 문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으로 판결받은 활동이다. 거기에서 마치 정적인 존재인 것 같은 문법은 언어가 소리들의 결합이며, 소리들은 보다 단순한 단위 곧 언어세포를 구성한다고 단언한다. (중략)   언어활동은 의미있는 단위, 곧 구절들에 의한 하나의 우주인 셈이다. 이러한 단언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문법적인 분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가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 아이들은 단어들을 고립시킬 수 없다. 문법의 습득이 구절을 단어들로 나누고, 단어를 음절과 문자로 분리하도록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단어에 대한 자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구절에 대해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의미개념들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글을 쓰기 때문에 하나의 구절이 여러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겨우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이와 동일한 경향이 나타난다. (중략)   시는 언어활동 및 언어세포로서의 구절과 동일한 복합적이며 분리할 수 없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모든 시는 자신에 대해 닫혀진 총체로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한 구절이거나 여러 구절들의 결합이다. 시인은 토막토막 잘린 어휘가 아닌 치밀하고 분리시킬 수 없는 단위들 안에서 표현한다. 시의 세포, 곧 가장 간단한 핵은 시구이다. 하지만 산문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구절의 단위, 즉 구절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고 언어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의미나 의미있는 지시가 아니라 리듬이다. (중략) 어느 누구도 말의 마술적 힘에 대한 신념을 뽑아 버릴 수 없다.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언어활동 앞에서의 보류는 지적인 활동이다. 단지 어떤 순간에서만 우리는 단어들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언어활동 앞에서의 신뢰는 인간의 자발적이며 원초적인 활동으로서 사물은 스스로의 이름인 것이다. 단어의 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신앙에 관한 회상이다. 자연이 활기를 띠고 있을 때 각각의 물체는 자신의 삶을 지니고 있으며, 객관적인 세계의 이중적 존재인 단어들 역시 활기에 가득 차 있다. 언어학은 우주와 같은 존재로서 부르고 대답하는 세계 곧 밀물과 썰물, 결함과 분리, 흡기와 호기의 세계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다른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두는 상응한다. 말은 살아 있는 존재, 천체와 초목들을 주재하는 것과 유사한 리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의 결합이다.   자동필기를 실행해 본 모든 사람들은 – 이런 시도가 가능한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활동의 기묘하게 빛나는 연합을 알고 있다. 초혼과 소리침. 앙드레 브르통은 고 말한다. 그리고 알폰소 레예스 같은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언어에 대한 스스로의 지배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는 시인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이런 문학적 증거들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꿈, 정신착란, 최면과 기타 의식의 이완상태는 구절의 분출을 도와준다. 이미지의 강물에 이끌리며 우리는 순수한 존재의 언저리를 문지르고 합일의 상태, 우리 존재와 세계 존재의 마지막 결합을 추정한다. 조수를 막아내는 방파제일 수 없을 때 의식은 동요한다. 그리고 곧바로 모든 것이 최후의 한 이미지에서 흘러나온다. 하나의 벽이 우리의 통행을 중단시키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중략)   모든 구두현상의 심층부에는 하나의 리듬이 있다. 단어는 몇몇 리듬원칙에 따라서 결합되고 분리된다. 만일 언어활동이 하나의 은밀한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절들과 말에 의한 연상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이라면, 이러한 리듬의 재생은 우리에게 단어에 대한 힘을 줄 것이다. 언어활동의 원동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끌어당기고 밀치는 동일한 세력들을 이용함으로써 말에 의한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끌어 준다. (중략)   시 작용은 주문, 요술 및 그 밖의 다른 마술행위들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인의 자세는 마술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중략)   마술사에게 있어 신들은 가설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달래주고 사랑해야 하는 실재도 아니며, 유혹하여 극복하거나 조롱해야 할 세력이다. 마술은 위험하고 불경스런 기획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인간능력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마술사는 홀로 신들과 마주보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고독에 뿌리박고 있으며, 거의 항상 무위로 끝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의 자존심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실상 발산되지 않은 모든 마술 – 이것은 선물, 박애로 변형되지 않은 것이다 – 은 자신을 부수고 결국에는 창조자(마술사)를 부숴 버리게 된다. (중략)   마술사는 우주적인 힘과의 상호소통, 하나의 힘을 지닌 예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 그 둘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마술은 삶의 우애 – 동일한 흐름이 우주를 거닌다 –를 긍정하고 인간의 우애를 부정한다. 현대시의 어떤 창작물은 이와 동일한 긴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마도 말라르메의 작품이 최상의 예가 될 것이다. 단어들은 결코 자신 보다 더 많이 실은 완전한 상태일 수 없으므로 교배한 덕분에 검게 되어 버린 열대꽃처럼 거의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각각의 단어는 현란하기만 한데 이것이 단어의 명백함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를 시원하게 아니면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광물적인 명백함이다. 아주 높은 지점에서 벌이는 언어활동은 연극에서 내화(耐火)와 같은 존재가 될 만하다. 말라르메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오직 무대에서만 진정한 형상화가 완전히 소멸되거나 완성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는 우리에게 극적 시도인 다양한 시 단편들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고 몽상적인 극에 대한 고찰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보통의 시어가 없는 연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활동을 이루고 있는 긴장은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그의 신화는 박애적이지 않다. 즉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지튀르인 것이다.   그의 명백함은 결국 자신을 불태워 없앤다. 화살은 표적이 의문투성이인 우리의 고유한 이미지일 때 그것을 쏜 사람을 향해 되돌아온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술적 이중성 –하나의 우주로 생각되는 작품- 이라 할 언어활동을 창조하려는 시도에 있다기보다는 특히 이러한 언어활동을 연극, 인간과의 대화로 변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자각에서 형성된다. 만약 작품이 연극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빈 페이지에서 흘러나오게 될 또 다른 선택권은 없다. 마술행위는 자기 살해로 변질된다. 언어활동의 마술적인 경로를 따라서 프랑스 시인은 침묵에 이른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침묵은 하나의 말을 포함하고 있다. 소르 후아나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싶던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이다. 인간의 침묵은 하나의 무언이다. 따라서 그건 말없는 가운데의 상호소통이며 잠재되어 있는 의미이다. 말라르메의 침묵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무(無)를 말한다. 그것은 침묵 이전의 침묵이다. (중략)   시는 요술이나 주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도요법과 점술방식과 같이 시인은 언어의 은밀한 힘을 눈뜨게 한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활동을 매혹시킨다. 또는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중략)   모든 리듬은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이다. 그래서 리듬은 전적으로 내용물에 대한 실속 없는 측정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 하나의 감각인 것이다. 리듬은 측정이 아닌 원초적인 시간이다. (중략)   우리 존재는 시간이며, 우리가 지나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시간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리듬은 시계 달력과는 상반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곧 시간은 추상적인 측정이 되기를 중단하고, 구체적이며 하나의 방향을 갖춘 존재로 되돌아간다. 끊임없는 분출, 보다 더 저쪽으로의 영원한 전진, 시간은 영속적인 발산이다. 시간의 본질은 와 이러한 에 대한 부정이다. 시간은 역설적인 방식에 의한 의미를 긍정하며, 역설적인 의미처럼 그 자신을 줄곧 부정하는 하나의 의미 –보다 더 저쪽으로 가는 것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있다-를 지니고 있다. 시간은 파괴이며, 파괴되는 순간에 반복되지만 각각의 반복은 하나의 변화인 것이다. 항상 동일한 것인 동시에 동일한 것의 부정이다. (중략)   시인에게서 나온 단어들이 말하는 것은 이미 그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을 지칭한다. 좀더 부언하면 단어들은 줄기에서 나온 꽃처럼 자연스럽게 리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리듬과 시어 사이의 관계는 무용과 음악적인 율동 사이를 주재하는 관계와 다르지 않다. 리듬을 무용의 울려퍼지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무용 또한 리듬의 육체적인 해석이 아니다. 모든 무용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무용이다. (중략)   리듬은 이미지, 의미이며 삶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자발적인 태도로서 우리에게서 벗어나 있지 않다. 곧 리듬은 우리를 표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리듬은 구체적인 세상사이며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이다. 단테가 인지하고, 별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은 사랑이라 불린다. 노자와 장자는 상대적인 대립요소들의 산물인 다른 리듬 소리를 듣는다. 헤라클레투스는 리듬을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리듬은 동시에, 각각의 독특한 내용물을 다른 것에서 증발시킴이 없이 단일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이미지, 곧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세속적인 달력은 우리에게 과거든지 미래든지간에 하나의 현재, 하나의 총체적인 실재 속에서 모든 시간을 포옹하는 원초적인 시간으로의 통행문을 닫아 놓고 있다. 신화적 날짜는 우리에게 과거를 미래와 결합시키는 현재를 추측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신화는 자신의 총체 속에 인간의 삶을 포함한다. 리듬을 통하여 전형적인 과거, 곧 현재로 구현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재적인 미래로서의 과거를 실제화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만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없다. (중략)   존재라는 의미에서 볼 때 시는 모방에 의한 하나의 재생으로 이는 말에 대한 가장 오래된 뿌리- 원형, 신화들 – 내에서 시인이 전형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서정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도 미래로서의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 –어린 아이들, 원시인들 요컨대 모든 인간이 더욱 심원하고 본래의 성향에서 고삐를 놓을 때처럼-이 직업적인 모방가라고 단언하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이런 모방은 원초적인 창조로서 시간들의 원점과 인간 각자의 밑바탕에 있는 어떤 것, 시간 자체 및 우리와 합일되고 모두에 대해서도 또한 유일하며 독특한 존재인 어떤 것에 대한 초혼, 재생, 재창조이다. 시의 리듬은 현재인 동시에 미래인 과거, 곧 우리들 자신에 대한 실제화이다. 시구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시간이며 영속적으로 재창조되는 리듬, 원초적인 시간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재생, 반복되는 죽음과 새로운 재생인 것이다. 산문에서 의미 또는 의미화에 의해 주어지는 구절 단위는 시에서 리듬을 통하여 획득된다. 그러므로 시적인 연관성은 산문과는 다른 질서를 지닌 존재라야 한다. 리듬을 갖춘 구절은 우리에게 그 의미에 관해 살펴보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시구의 의미 있는 단위가 어떻게 얻어지는지를 연구하기 전에 운문과 산문 사이의 관계를 좀더 가까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옥따비오 빠스 (1990, 民音社; 옮긴이- 김현창) 中  
6    유협,「문심조룡」중에서 댓글:  조회:944  추천:0  2019-03-09
유협,「문심조룡」중에서   유협은 유가적인 문학관에 입각하여 을 저술하였다. 유가(儒) 불가(佛) 도가(道) 사상의 조화를 꾀하던 당시의 사조를 고려해볼 때, 유협이 불가와 도가의 사유방식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문(文)에 비중을 두고 심(心)의 활동을 논의한 문심조룡의 내용은 인류의 문화와 언어문자의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유가의 문학관을 골격으로 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서술체계면에서는 불가의 인명학(因明學)(일종의 논리학)의 영향을 받았고, 사유방식에 있어서는 도가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논의를 기본으로 하는 본말(本末)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절에서 고적들을 정리하는 소외된 지식인의 신분으로 유협은 중국고대문학 이론을 집대성한 문심조룡을 완성한다. 유협은 스스로 지은 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길은 막막했다. 어떻게 하면 이 저술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당시 유명한 문인인 심약(沈約)을 떠올린다. 그러나 심약은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족이라서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유협은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을 짊어지고 심약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로 변에서 그를 기다렸다. 심약이 외출할 때 책을 파는 행상인으로 위장하여 문심조룡을 그에게 바쳤다. 심약은 문심조룡을 읽고 "문학의 이치를 깊이 터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심조룡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502년경)   42~43쪽.   문채(文采: 감지가 가능한 사물의 형상, 소리, 빛깔 등)의 효용은 대단하다. 그것이 천지와 더불어 생겨난 것은 어째서인가? 하늘은 검은 빛과 땅의 누런 빛이 섞여 있고 땅은 모지고 하늘은 둥글게 형체가 나뉘어 있다. 해와 달은 고리모양의 옥을 겹쳐 놓은 듯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산과 내는 그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땅의 모습을 널리 장식하고 있으니, 이것이 자연적인 이치에 따라 본래적으로 형성된 천지자연의 문채인 것이다. 위로는 해와 달과 별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아래로는 산천이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음을 살필 수 있으니, 이에 따라 높고 낮은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우주를 통솔하는 두 가지 요소(二元: 天 地)가 생기게 된 것이다. 단지 사람만이 여기에 천지와 나란히 참여하여 마음과 정신을 모았으니 이 셋을 '삼재(三才: 天, 地, 人)' 라고 부른다.   사람은 천지만물의 정화며 천지의 핵심이다. 마음에 느낌이 생기면 언어로 확립되고 언어가 확립되면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이다. 널리 만물을 살펴보면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다. 용과 봉황은 그림같은 아름다운 무늬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범이나 표범도 아름다운 문채로 자태를 이루고 있다. 구름과 놀의 오묘한 빛깔은 그림 그리는 사람의 능란한 색상을 능가하고 꽃으로 장식된 풀과 나무는 비단 짜는 사람의 솜씨를 기다릴 것이 없다(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러한 것들이 어찌 외부에거 가한 장식이겠는가.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숲 속의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면 조화롭기가 피리와 거문고의 곡조 같고, 냇물이 바윗돌에 부딪혀 이루어지는 울림은 옥경쇠와 종고소리와 같은 화음을 이룬다. 즉 형체가 확립되면 형체에 따른 아름다운 무늬가 이루어지고 소리가 나면 조화로운 음이 이루어진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사물도 풍부한 외적인 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심정을 지닌 인간이 어찌 문채가 없겠는가.  69~70쪽.   작품 전체의 구조적인 질서와 예술기교 유협은 편에서 "반드시 나타내려는 사상과 감정으로 정신을 삼고, 글에 인용될 내용들을 골격으로 삼으며, 미적인 언어문자 표현을 피부로 삼고, 성률을 소리로 삼는다. 그런 연후에 채색을 베풀듯 문장의 수사를 다듬고, 조화로운 운율의 아름다움을 도모하여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려서 체제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적절한 형식표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이상적인 문예작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품의 구조적인 질서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무수한 생각들을 일치되게 정리하여 여러 가지 논리가 번잡하게 섞여 있어도 의미가 뒤집히는 착오가 없고, 갖가지 말을 늘어놓아도 실이 꼬인 것 같은 어지러움은 없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무들이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것처럼 명확하게도 하고, 해가 지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함축적이게도 하여, 수미가 긴밀하면서도 표리가 일체화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문장의 이치를 총괄하고 시작과 끝을 통일시키며, 어떤 것을 쓰고 말 것인지에 대해 확정하고, 문장의 각 부분을 통합시키고 작품 전체를 종합하여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산만하지 않게 하는 '부회(附會)'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문장을 통괄하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면 의미가 혼란스럽게 되고, 내용의 맥락이 통하지 않으면 작품이 반신불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131~132쪽.   작품의 감화력(風) 먼저 풍에 관해 보자면 편에서 유협은 '풍(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경'에는 육의가 있는데 '풍'이 그 첫머리를 차지한다. 풍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 및 기질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절실하게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을 잘 이해하는 작가는 감정을 분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풍'이 요구되는 것은 사람의 형체 안에는 기운(생명력)이 있어야 함과 같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기질이 예리하고 명쾌하면 작품의 '풍'도 뚜렷해지는 것이다. 작품에 나타난 사고가 원활하지 못하고 삭막하여 기운(생명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작품에 '풍'이 없다는 증거다. (중략) 종합적으로 말해서 '기'는 작가의 생명력으로부터 발산되어 작품에 생명력과 기세를 불어넣게 되므로 작품의 '풍'과 '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기'를 떠나서는 작품의 '풍'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풍'은 작가의 의기(意氣)와 격정이 작품으로 외면화한 것이며, 이로부터 말미암는 작품의 독창성과 강렬한 감동력까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풍'은 개성적인 풍격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요건인 작가의 내면적인 특질이 작품을 통해 이상적으로 표현될 때 나타나는 창작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풍'은 감정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문예작품이 구비해야 할 요건이 되는 것이다. 152~154쪽.   중국문학 전공자가 보는 의 중요성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상 시공의 차이를 지닌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의 문학현상에 적용이 가능한 다량의 보편적인 문학관점과 이론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 필자가 문심조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중국 고대문학의 구체적인 현상 및 전개와 변화의 상황을 문학이라는 각도에 초점을 맞추어 이처럼 체계적으로 전달해준 책은 없다는 점도 필자가 문심조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서 은 역사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가치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므로 중국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물론 문학의 본질을 고찰하는 데도 매우 유용한 서적이다.  177쪽.   문예의 핵심 -감정과 언어문자 표현 분이나 눈썹그리개는 얼굴을 꾸미는 것이나 예쁜 눈과 입의 모습은 고운 자태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화려한 수식으로 말을 꾸미지만 수식의 화려함은 타고난 감정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은 수식의 경선이며 언어문자의 표현은 마음의 이치를 나타내는 위선이니, 경선이 바로 잡힌 후에야 위선이 이루어지며 마음의 이치가 정해진 후에야 언어문자의 표현이 유창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미적인 언어문자의 표현을 이루는 근본인 것이다. 221쪽.   작가 수양론 이런 까닭에 문학적인 구상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는 고요하고 빈 마음의 상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 학문을 쌓아서 지식의 보물을 모으고 이치를 헤아려서 재기를 풍부하게 하고, 이전 것들을 연구하여 환히 알도록 힘쓰고, 생각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좇아 말을 질서 있게 배열한다. 그런 다음에 오묘한 도리를 깨닫는 주체인 마음으로 하여금 성률(리듬감)에 따라 문자를 선택하게 하고 독특한 견해를 지닌 장인처럼 구상 속의 형상인 의상(意象)을 따라 창작을 진행시킨다. 이것이 문학적인 구상을 다루는 으뜸가는 방법이며 작품 기획의 중요한 단서라 하겠다. 마음의 생각과 언어는 정신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뜻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면 이치가 명백해지고 감정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면 정신이 피곤해지고 기운이 쇠해지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타고난 감정의 법칙인 것이다. 239~240쪽.  
5    이정문<세계문학사조의 흐름> 댓글:  조회:1361  추천:0  2019-03-09
세계문학사조의 흐름     (1) 고대 서양 문학   서양의 고대 문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합리적· 심미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 문학에서 시작한다. 그리스 문학의 주된 양식은 서사시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대표적이다. 한편 기원전 7세기경에는 서정시가 발달하여 사포(Sappho)와 같은 여류 시인이 나왔다. 또한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연극이 크게 흥행하여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 작가가 활동하였고, 희극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시사 문제를 제재로 인간과 사회를 풍자, 비판하며 이름을 떨쳤다.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던 로마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라는 과업에 몰두하여 심미적이며 사색적인 분야에 탐닉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현실적 성격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대표적 작가로는 생동적인 서민풍의 희극을 많이 남긴 플라우투스(T.M. Plautus:BC254-BC184), 민족적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쓴 로마 제일의 시인 베르길리우스(M.P. Vergilius:BC70-19), 아름다운 「서정시집」을 쓴 호라티우스(F.Q. Horatius:BC65-BC8) 등이 있다.   (2) 대표작가 및 작품   ① 그리스 신화 신화는 고대인의 민간 신앙을 근원으로 하는 작가 불명의 전승적인 이야기로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최초의 문학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자연계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해석하며 나름대로 인간관과 우주관을 정립하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일찌기 신이라는 상징을 만들어 그들 사이에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신들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리스 신화를 특별히 중요시하는 이유는 서양의 문화, 문학, 미술이 여기에 근거하는 바가 크며 내용적으로 인간 존재의 근저에까지 깊이 파고들며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② 고대 그리스의 작가 · 호메로스(Homeros:기원전 8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작가로 알려졌다. 이들은 구술 낭송을 위한 작품으로 여기에는 각 장면에 적합한 상투적인 문구와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빌려 온 흔적이 드러난다. · 소포클레스(Sophokles:BC486?~404)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그는 비극의 전승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를 가장 이상에 가까운 비극 시인으로 꼽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왕`,  `아이아스` 등이 있다. · 아이스킬로스(Aischylos:BC525~456)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일찍부터 연극 경연에 참가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오레스티아`, `페르시아 사람들`,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다. ·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484~406)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주요 작품으로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 `박쿠스의 신녀(信女)` 등이 있다. ·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BC445?~485?) 그리스 최대의 희극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 `구름`, `여자들의 평화`, `개구리` 등이 있다.   ③ 베어울프(Beowulf) 고대 영국 문학의 최대 걸작이다.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부로 구성된 줄거리에서, 제1부는 국왕의 조카인 베어울프가 궁전을 밤마다 습격하는 그렌델이라는 악귀와 그 어미를 죽이는 이야기이다. 제2부는 50년 이상 세월이 지나 왕위에 오른 베어울프가 나라를 괴롭히는 용을 물리치지만 용의 독기 때문에 전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소재를 바탕으로 무인 사회 영웅들의 이상적 상을 그려 보여 준다.   ④ 힐데브란트의 노래(Das Hildebrandslied) 독일어로 된 최고(最古)의 영웅 서사시이다. 800년경 수도원의 승려가 글씨 연습을 위해 기도서에 적어 놓아 후세에 전해지지만, 시의 제작은 이보다 100여 년 전의 일로 추산된다. 동코트 족의 장군인 힐데브란트는 고국을 떠났다가 3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부대는 국경에서 수비대와 대치하게 되고, 결투에 앞서 젊은 수비 대장이 30년 전에 남기고 간 그의 유일한 혈육임을 알게 된다. 놀라움과 기쁨 속에 힐데브란트는 순금 팔찌를 증거물로 보이며 부친임을 알리지만, 부친이 이미 전사한 것으로 아는 젊은 대장은 정정당당히 결투할 것을 요구한다. 대치한 양군에서도 두 영웅의 결투를 바라는 심리도 있어 할 수 없이 힐데브란트는 단장의 심정으로 아들과 결투를 한다. 필사(筆寫)는 여기에서 중단되어 있지만, 전설로 전하는 다른 자료에서는 힐데브란트가 유일한 혈육을 죽인다. ⑤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서 작가는 알려져 있지 많다. 778년 샤를마뉴 대제의 에스파냐 침공군이 돌아오는 길에 계곡에 잠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을 받아 후미 부대가 전멸한 역사적 사실을 작품화한 것이다. 여기서 롤랑은 후미 부대의 대장으로서 이교도 군에 대한 승리야말로 참다운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위급을 알리는 뿔피리를 분다. 그러자 대제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와 적군을 물리치고 후미 부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이다. 투철한 십자군 정신, 봉건적 주종의 충성심, 조국애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⑥ 길가메시(Gilgamesh) 바빌로니아 수메르 지방의 서사시로서 대략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길가메시는 여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반신반인의 인물로서 위압적인 폭군이다. 그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서 삶의 허무를 목격하고 영생의 길을 터득하기 위해 죽지 않는 인간 우트나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 나선다. 길가메시는 먼 여행 후 그를 만나지만 “나도 영생의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기에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하지만 그 아내가 젊어지는 신비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 길가메시는 그 곳에서 약초를 얻어 귀향길에 오른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지친 길가메시가 시원한 물을 만나 목욕하는 사이 물 속에서 나온 뱀이 그 약초를 먹어 버리는 바람에, 그는 인생의 깨달음(생·노·병·사)만 얻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⑦ 마하바라타(Mahabharata) 산스크리트로 쓴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이다. 기원전 약 15세기경에 인도 북부의 어느 호전적 종족이 치른 전쟁에 대한 전설에 근거하여 쓰여졌다. 내용은 판두 왕국이 크리시나와 판차라스 왕국의 도움으로 쿠루 왕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승리의 이야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하바라타`는 인간들의 진실한 삶이 지닌 충만성을 보여 주고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들을 선명하게 묘사하여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이 서사시는 인도의 문화, 종교와 윤리 등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었다.     (1) 특징   중세는 보편 종교의 출현과 공동 문어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문학이 귀족층의 상층 문학과 일반 평민들의 하층 문학으로 이원화된 것이 눈에 띈다. 상층 문학은 유럽의 라틴어, 동양의 한자, 인도의 산스크리트와 같은 그 문명권의 공동 문어에 의해 주로 창작되어 기록 문학으로 전해진다. 반면에 하층 문학은 개별 민족 및 지방의 토착어에 의한 구비 문학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상층 문학이 공동 문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초월한 보편적 미의식을 향유한 반면에, 하층 문학은 각 지역의 풍토와 생활을 토착어로 표현하는 향토적 성격이 강하였다.   (2) 중세 성직자 문학과 기사 문학   중세에는 봉건적 규범이 유럽인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것은 기독교 이념이었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도 성직자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진다. 성직자 문학은 공동 문어를 사용하며 속세를 초월하는 이상 추구를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지역 특유적인 인간의 심리나 삶의 태도를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영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문학과 대비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기사 문학이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세상의 여러 문물을 접한 기사 계급들은 세속적인 문제들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였다. 기사 문학은 영웅 서사시, 기사도 이야기, 서정시 등으로 나뉘는데, 게르만 영웅 전설을 집대성한 `니벨룽겐의 노래` 영국의 `아서왕 이야기` 등은 모두 영웅적인 기사들의 용맹과 무훈을 노래한 것들이다. 한편 중세에는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독일의 민네징거와 같은 음유 시인들이 등장하여 귀부인에게 바치는 기사들의 정신적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세 유럽의 문학은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도 세속적인 삶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3) 주요작품     ① 니벨룽겐(Nibelungen)의 노래 중세 독일 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영웅 서사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대체로 1200년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내용은 5, 6세기 민족 이동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부에서는 멜로빙거 왕조의 피비린내 나는 집안 싸움, 제2부에서는 아틸라가 거느리는 훈족과 부르군트족과의 싸움, 아틸라가 죽은 뒤 훈족 내부에서 전개되는 왕자들 사이의 투쟁이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이교도적인 분위기와 게르만인들의 숙명적 세계관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기사풍의 요소와 궁중 문화적 요소가 함께 가미되어 있다. ② 신곡(神曲) 단테(A. Dante:1265~1321)의 작품으로 중세 말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우주관과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중세 문학적 전통의 절정을 이룬다. 형식은 전체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나뉘고 각 부는 또 33개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 자신이 등장 인물이 되어 처음에는 베르길리우스를, 다음에는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피안의 세계를 편력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되고 드디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삼위일체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 ③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중세 영국의 최대 작가인 초서(G. Chaucer:1340~1400)의 대표작으로서 이야기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데카메론`이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캔터베리에 순례하러 가는 29명의 사람이 어느 여관에 함께 묵게 되는데, 각자 다른 신분과 직업을 가진 이들은 지루함을 덜기 위해 교대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서론에 이들의 직업과 성격을 미리 밝히고 각자의 특성에 부합하는 얘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야기 내용과 이야기하는 사람 사이에 연관성이 형성된다. 각각의 이야기 사이에는 사회자인 여관 주인의 비평과 사회의 말이 들어가기도 하고, 청중의 감상이 튀어나오기도 하며, 심지어 얘기를 방해하여 서로 다투거나 초서 자신이 등장하여 하나의 역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풍부한 해학과 날카롭고 넓은 통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 근대 문학의 특성   시대 구분으로서의 근대는 문예 부흥에서 시작한다. 문예 부흥은 중세 이후 억눌려 왔던 인간성을 다시 회복시킴으로써 개인적 특성을 존중하는 풍토를 낳는다. 근대에 개성적이며 수준 높은 문학 예술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온 원인도 이러한 개인적 존재에 대한 신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근대를 형성한 동력으로는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 활자의 발명, 시민 계급의 대두와 상업의 발달, 민족적 고유성에 대한 관심 등을 꼽을 수 있다. 근대는 국가 단위로 공동체적 유대감을 나누는 민족주의의 시대이다. 즉 중세적 보편성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결속력이 더욱 부각된다. 근대로 오면서 세계 문학의 개념이 형성된 것도 민족 단위로의 분화를 순화하려는 하나의 이념적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 세계 문학은 지방성과 민족성을 토대로 형성된 이념으로서, 실제로는 개별 민족 단위의 물리적 연결을 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근대 문학은 지역성과 민족성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란 개인의 탁월한 재능이 낳은 현상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개인적 특성은 국민적 특성과 연결되고 다시 보편적 의미로 확산되기 때문에, 근대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민족적 우수성을 넘어 세계 보편적 가치로 승격된다.     (2) 근대 문학과 사조   근대 서양 문학은 사조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편리하다. 작가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또 인간의 삶과 시대를 이해하는 관점에 유사성이 확산되면서, 시대별로 문학 작품들에 유형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조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하나의 공통적인 흐름으로 존재하는 문학적 경향을 말한다. 사조를 유형화하는 데 작용하는 요소들로는 이성과 감성의 작용 범위, 현실과 작품의 관계, 환상의 개입 정도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시대적 조류인 사조로부터 동떨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문학이 근본적으로 작가의 개성에 의해 창조된 개인적 사실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시대 사조를 받아들여 창작의 동력으로 삼기는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문학이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게 한다. 창작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사조는 작가의 창의력에 의해 작품 속에 용해되기 때문에, 사조는 개성을 자극하고 개성이 모여 사조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주요 문학 사조       ① 고전주의   ⓐ 개념: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이 지니고 있던 조화, 균정(均整), 명석함을 본받고자 하는 경향을 두루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17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문학의 흐름을 일컫는다. ⓑ 배경:감각이나 감성에 의한 인식을 의심하고 이성을 통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 데카르트의 철학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절대 군주제 하에서 질서와 안정으로 회귀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심취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 특징 -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것보다는 사회적 보편성을 지닌 것이나 도덕적으로 전범이 될 만한 것을 중시한다. - 내용과 형식이 조화되는 질서와 균형미를 추구한다. - 완벽한 구성이 필요한 비극을 최상의 장르로 간주한다. ⓓ 대표 작가 소개 - 코르네유(1606~1684):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르 시드`, `오라스` 등이 있다. - 몰리에르(1622~1673):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수전노`, `인간 혐오`, `여인 학교` 등이 있다. - 라신(1639~1699):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페드르`, `아탈리` 등이 있다. - 포프(1688~1744):영국의 시인. 주요 작품으로 `머리카락 훔치기`, `인간론`, `던시어드` 등이 있다. - 스위프트(1667~1745):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작가. 대표작으로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 `통(桶) 이야기` 등이 있다. - 괴테(1749~1832):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 `파우스트` 등이 있다. - 실러(1759~1805):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발렌슈타인`, `빌헬름 텔` 등이 있다.   ② 낭만주의   ⓐ 개념: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 사조로서 고전주의의 균형미와 도덕성 추구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 배경:고전주의는 문학적 법칙에 의거하여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는데, 시민 사회가 정착된 이후 차츰 해방된 개인 정신이 보편적 법칙성을 대체하여 간다. 또한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낭만주의 인간관의 기초가 된다.   ⓒ 특징 - 주지적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주정적 태도를 취한다. -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며 멀리 있는 것, 이국적인 것, 신비로운 것에 동경을 표시한다. - 천재적 독창성을 문학 창작의 주된 에너지로 여긴다. - 반항 정신 및 이상주의적 경향을 지닌다.   ⓓ 대표 작가 소개 - 괴테와 실러:괴테와 실러가 젊은 시절에 심취한 스트룸 운드 드랑은 낭만주의의 전초가 된다. 대표작으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실러의 `군도`가 있다. - 샤토브리앙(1768~1848):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르네`, `아탈리` 등의 소설이 있다. - 위고(1802~1885):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에르나니`, `노트르담의 꼽추` 등의 소설과, 시집인 「정관 시집」이 있다. - 워즈워스(1770~1850):영국의 시인. 대표적 시집으로 「서정 가요집」, 「서곡」, 「소요편」 등이 있다. - 콜리지(1772~1834):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대표작으로 `늙은 수부(水夫)의 노래`, `문학적 자전(自傳)`, `쿠블라 칸` 등이 있다. - 바이런(1788~1824):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맨프레드`, `돈 주앙`, `판결의 환상` 등이 있다. - 키츠(1795~1821):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엔디미온`, `히페리온` 등이 있다.   ③ 사실주의 ⓐ 개념:현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그려내려고 하는 문예 사조를 일컫는다.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문학 흐름을 지칭한다.   ⓑ 배경: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공상에 의존하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묘사 방법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근대 합리주의 및 실증주의, 공리주의, 다윈의 진화론 등이 철학적 배경을 이룬다. ⓒ 특징 - 주관적 태도를 자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 인간과 더불어 주변 세계까지도 묘사의 대상으로 삼아 현실의 온전한 재현을 추구한다. -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부정적 면이 있으면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삶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중시한다.   ⓓ 대표 작가 소개 - 발자크(1799~1850):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등이 있다. - 스탕달(1783~1842):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연애론`, `적과 흑`, `파르므의 승원` 등이 있다. - 플로베르(1821~1880):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보바리 부인`, `살람보`, `감정 교육` 등이 있다. - 디킨스(1812~1870):영국의 작가. 대표작으로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쓸쓸한 집`, `두 도시의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이 있다. - G.엘리엇(1819~1890):영국의 여류 작가. 대표작으로 `플로스 강의 수차(水車)`, `미들 마치` 등이 있다. - 고골리(1809~-1852):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외투`, `검찰관`, `죽은 농노` 등이 있다. - 톨스토이(1828~1910):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테리나`, `부활`, `바보 이반의 이야기` 등이 있다. -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죄와 벌`,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등이 있다.   ④ 자연주의 ⓐ 개념:사실주의를 더욱 극단화하여 인간의 생태를 자연 현상으로 보며 작가도 자연 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문학을 창작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 배경:과학적 실험을 하는 태도로 작품을 묘사해야 한다는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 인간의 행동과 운명은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환경 결정론 등이 배경을 이룬다. ⓒ 특징 -작품 속의 인간은, 자연 현상의 일부로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의해 강력하게 지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며 전체적으로 어둡고 염세적이다. -내면적으로는 빈약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다. ⓓ 대표 작가 소개 -졸라(1840~1902):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목로 주점`, `나나`, `제르미날` 등이 있다. -하우프트만(1862~1946):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대표작으로 `해뜨기 전`, `방직공들`, `한넬레의 승천` 등이 있다. -드라이저(1871~1945):미국의 작가. 대표작으로 `아메리카의 비극`, `시스터 캐리` 등이 있다.   ⑤ 상징주의 ⓐ 개념: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과 그 경향을 일컫는다. ⓑ 배경:제국주의의 태동, 사회적 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위기감과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이상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 특징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의 시적 정착을 목표로 한다. -자아를 구속하는 객관적 규범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징의 방법을 통해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한다. -현실 세계를 초월적 정신 세계의 상징으로 보고 문학을 통해 여기에 접근하려 한다. -개별적인 것 하나 하나가 소우주적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 대표 작가 소개 -보들레르(1821~1867):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악의 꽃`, `파리의 우수` 등이 있다. -말라르메(1842~1898):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주사위 던지기`, `목신(牧神)의 오후` 등이 있다. -베를렌(1844~1896):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말 없는 연가`, `예지(叡智)` 등이 있다. -랭보(1854~1891):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 `레 일루미나시옹` 등이 있다. -릴케(1875~1926):오스트리아의 시인. 대표작으로 `말테의 수기`, `가을날의 기도` 등이 있다. -시몬즈(1865~1945):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프랑스의 상징주의 문학을 영국에 소개한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파의 운동」이라는 평론집이 있다.   ⑥ 초현실주의 ⓐ 개념: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20세기의 문예 사조이다. ⓑ 배경: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한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이 중요한 배경을 형성한다.   ⓒ 특징 -이지(理智)의 논리를 배격하고 잠재 의식이 상상에 의해 위대한 작품을 낳는다고 간주한다. -초현실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보다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간주한다. -무의식, 성, 꿈, 욕망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 대표 작가 소개 -브르통(1896~1970):프랑스의 시인. 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창자이며 이론가이다. 대표작으로 `나자` 등이 있다. -엘뤼아르(1895~1952):프랑스의 시인. 대표 시집으로 「의무와 불안」, 「그치지 않는 노래」 등이 있다.   ⑦ 모더니즘 ⓐ개념:1920년대에 일어난 근대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예술 사조, 좁은 의미로는 영· 미의 이미지즘이나 주지주의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실험적인 문학 운동, 즉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총칭하기도 한다. ⓑ특징 -도시 문명 및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을 기본 축으로 한다. -전통적 문학 수법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문학을 통해 새로운 문명 의식의 확산을 추구한다. ⓒ 대표 작가 소개 -T.S. 엘리엇(1888~1965):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황무지`, `4편의 사중주` 등이 있다. -흄(1883~1917):영국의 비평가이며 시인. 이미지즘 시운동의 선구자로서 E. 파운드, T.S. 엘리엇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론집으로 「성찰」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근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근대의 특징은 합리성과 이성을 중시하며, 과학 지상주의를 가지고 세계의 체계화와 총체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 도전 받기 시작한다. 반이성의 맥락에서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를 규탄하고, 정전을 타파하며 스스로 미학적 대중주의로 내세우는 철학적· 문학적 경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매끄러운 논리가 해체되고 실체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내용도 극도로 불안정한 무질서의 세계를 그리는 초현실주의로 바뀐다. 독자 참여 소설의 경향을 띠기도 한다. 어떤 실험 작가는 아예 소설을 언어의 각종 시험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문장을 토막내기도 하고 질문지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하고, 진지한 내용과 하찮은 내용을 대비시켜 놓기도 하여 게임을 하는 듯한 즐거움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혼돈과 대적하는 길은 혼돈 그 자체가 되는 것, 아니 더 나아가 더 깊은 혼돈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는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콜롬비아의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를 들 수 있다. 마르케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은 1967년 아르헨티나에서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 오다가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기도 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으로`와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을 꼽을 수 있다.  
4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댓글:  조회:1185  추천:0  2019-03-09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옥따비오 빠스 (멕시코, 1914~) 옥따비오 빠스와 보르헤스를 읽지 않는 한 한국 시는 여전히 세계의 시와 거리가 있다. 물론 외국문학을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란 독자가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진대 많은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우리 문학을 키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 여러 나라 시인과 독자들이 감탄하고 모방하는 빠스의 시는 1990년 노벨문학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표를 달고 우리 땅에 도착했어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소개하고 설명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나의 번역과 소개의 미흡함도 한 이유이겠으나, 감상적이고 사회적인 시를 주로 보아온 우리에게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가진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 낯설게 보인 것도 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르헤스나 빠스를 이해하려면 우선 낭만주의의 위선을 벗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내가 쓴 시 속의 ‘사랑’이 내가 실제로 겪은 사랑과 똑같아야 한다는 편견이다. 아니면, 나는 내가 느낀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와 싸운다는 식의 변명이다. 시속의 ‘나’는 어차피 글자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다. 그것이 아무리 나의 느낌이나 나의 모습에 가깝다 할지라도 나 자신은 아니다. 확실한 것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구태여 불교의 ‘만물무상(萬物無常)’이나 플라톤의 “현실세계는 가상이다(즉 이데아의 모방이다)”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문득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램프가 정말 여기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이 램프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를 의심해본다. 나의 눈은 나의 눈을 직접 본 일이 없다. 항상 거울을 통하거나 무엇에 비추어서 본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말들 하지만(“Seeing is believing"), 실제 본다는 것만큼 불확실한 건 없다. 그 보는 주체인 눈이란 존재가 불확실할 뿐,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살아 있다“라는 믿음만은, 증명할 수 없어도 물러설 수 없는 존재의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기보다 확실해야만 하는 실존의 보루이다.    철학은 시가 아니다. 사고나 관조의 깊이가 곧 시는 아니다. 삶에 대한 느낌과 영혼의 파동을 넘어 존재의 불확실성, 그 가벼움에 대한 관조가 오히려 진정한 시취로 육박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보르헤스나 옥따비오 빠스를 만난다. 말과 시인 참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에서 선불교는 “말을 세우지 말라”를 가장 큰 가르침으로 삼는다. 사물의 실상을 깨우치는 데에는 앞생각과 뒷생각을 버리라는 말이다. 참모습을 그 순간 그 실상으로 포착하려 하지 않고, 말이나 생각이 앞서고 뒤서면 우리 손에 남는 것은 항상 빈 껍질이다. 그러나 말을 떠나 사물의 실상을 포착할 수 있는가. 사물의 참모습과 등가치이며 동시적인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선승의 대답은 “무!”이다. 한 수도승이 참선 끝에 갑작스러운 깨달음(돈오)에 이르렀다. 다른 스님이 그 깨달음을 배우려고 그 수도승에게 물었다. “스님, 깨달음의 경지가 어떻습니까?” 무상과 차별과 허상이 얼룩진 세상을 차고 올라, 가까스로 절벽 위 참의 풀뿌리 하나를 물고 있는 수도승이 어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말이 많아진 것은 선불교에 대한 그의 지식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이나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그는 동양철학이나 동양종교에 조예가 깊다. 특히 탄드라 불교나 선불교에 심취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의 하이꾸를 품격 높은 문학장르로 발전시킨 17세기의 선승 마쯔오 바쇼오의 시와 여행기 을 1957년에 에이끼찌 하야시야와 함께 스페인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던 그는 여러 면에서 동양시와 불교정신에 정통한 시인이다. 빠스 스스로 바쇼오의 하이꾸와 선불교를 설명하기도 했다. 낭만주의가 말로서의 표현 불가능성을 가장 강조한 문학이었다고 한다면, 말라르메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시는 ‘주사위놀이’하듯 말에 시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겸손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말이 시를 쓴다”라고 한 말라르메의 말은 유명하다. 낭만주의는 나만의 내적 체험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절절한 느낌을 표현할 때 말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현대시는 시인의 존재 이유인 말에 인간과 시인의 숙명을 맡긴다. 노발리스(Novalis)의 "사람은 이미지다“는 가장 현대시적 인식을 제시한 말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의 이 말은 ”사람은 말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말은 모든 의미체계의 모델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또한 시각적 말일 수밖에 없다. 소위 무의미한 말, 무의미의 시로부터 시인은 다시 새로운 길,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선다. 나의 느낌을 표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백지 위에 나의 말이 뛰노는 것을 가장 겸손하고 성실하게 지켜보는 눈을 키운다. 여기에 옥따비오 빠스가 있다. 시인의 숙명 말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말들 속에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그러다가 어느 입술에 감도는 대기이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빠스의 이 시를 옮기고 나니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말이 생각난다.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이미 영원불멸의 ‘빛’은 기대할 수 없다. 시인의 숙명은 말을 통하여 살아나고 말을 통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쓰는 말, 혹은 시인이 읊조리는 시는 공기다. 빈 공간, 빈 공간의 바람, 그 바람의 무늬, 바람은 더러 모양을 짓지만 그러나 다시 보면 형상이 없는 바람이다. 나의 말, 시의 말 또한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시를 쓰면서 나의 살아 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고 싶다. 그러나 이미 적고 보면 그것은 과거이다. 그때 그 순간의 나의 생명성, 생기, 느낌과는 상관이 없는 이상한 흔적일 뿐이다. 결국 공허한 흔적, 겉껍질만 남는 게 시인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말들, 이 공허한 흔적들, 그 빈 공간 속의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내가 나를 버리고 바람이 되는 날, 그 바람은 때로는 예쁜 소녀의 입술에 감도는 대기가 될 수도 있겠지. 내 시를 외우고 다니는 예쁜 소녀의 숨결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헛된 나의 희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 우주 속에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무형의 힘을 더한다. "빛도 스스로 빛 속에 사라지나니."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 고드름 글로 일으킨 기둥 글자 글자마다 하나씩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은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말의 정확한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가 길을 잃는 곳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 - 말하지 않은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인지도 몰라   외침 한마디 사위어간 통 속 -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한다 앞뒤를 생각한다 마음은 마음아프고 미친 마음 때문에 -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빠스의 시를 읽으려면 말을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말을 쓰다보면(쉬르리얼리즘의 '자동필기법'에 따라 아무렇게나 써보면) 말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의미가 꿈틀거린다. 아무렇게나 아무 말을 써놓아도 가만히 있는 말은 없다. 의미를 가지고 눈앞에 육박한다. 아니면 "이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묻는다.   말은 나 이전이다. 혹은 나 이후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나와는 상관없다. 돌이다. 돌이니까 '돌 고드름'이나 될까. 내가 쓴 말은 나의 영혼을 전달하지 못한다. 내가 쓴 말은 쓸데없는 의미로 메아리치다가 제풀에 얼어붙는다. 나의 영혼이란 것도 모를 일, 그냥 하얗다. 나는 말을 한다. 영혼을 표현하려는 절규......나는 칼날처럼 말을 벼린다. 그러나 그런 말도 사람의 귀에 이르면 사라질 뿐이다.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즉, 나의 영혼을 전달하기는커녕 말 스스로의 연결도 당위성이 없다. 오직 소리와 소리의 속삭임 속에서 말라르메가 말하듯 이상한 '교감'만을 암시할 뿐인 것이다. "곰녀는 곰보" "마음은 마음아픔"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세상은 어지러운 의성어의 안개.   "다른 천체에서는 / '천체'를 무어라 할까?" 그렇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 세상의 관습에 의하여 부단히 그렇게 불린 것에 불과하다. 우주가 있는데 좁은 지상에서 관습의 언어로, 논리로, 이미지로 일부러 '돌 고드름'을 세워 뜻을 이룸은 또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불립문자(不立文字)나 화두 같은 빠스의 진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재판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이 글은 누구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빠스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아파하지 않는다. 붓이 글을 쓰고, 말이 글을 쓴다. 이 붓도 이 말도 이 글도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또 씌어진 이 글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쓰는 열정은 있다. 배도 의미도 들어올 수 없는 항만이 있다. 세상을 반영할 글도 말도 없다. 차라리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빠스는 '나'라는 존재가 복수임을 안다.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관습....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나에 참여하고 있다. 보르헤스 또한 "나는 복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쓰기는 알 수 없는 자신과 또 알 수 없는 자신의 재판관, 이 모두가 뜨겁게 참여하여 열심히 열심히 사라져가는, 스스로를 잃어가는 작업이다. 막상 씌어진 시는 이들  열심스러운 작업의 거뭇거뭇한 잿더미이고 나와는 전연 다른 생의 주검들이다. 그러나 그 허물이나 잿더미 속을 후비다가 혹시 손끝을 태우는 불씨가 있거든, 거기에 내가 살고 있음을 알라.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3    문심조룡(文心雕龍) 2 댓글:  조회:858  추천:0  2019-03-09
문심조룡(文心雕龍) 2     작품의 이상적인 스타일(풍격) 연출을 위한 객관적인 요건     풍(風)에 관한 서술 시경에는 육의가 있는데 풍이 그 첫머리를 차지한다. 풍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 및 기질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절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을 잘 이해하는 작가는 감정을 분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풍이 요구되는 것은 사람의 형체안에는 기운이 있어야 함과 같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기질이 예리하고 명쾌하면 작품의 품도 뚜렷해지는 것이다. 작품에 나타난 사고가 원활하지 못하고 삭막하여 기운이 결려되어 있다면 이는 작품에 풍이 없다는 증거이다.  -   생명력의 중요성 위문제 조비는 "문장은 작가의 재기를 문장구성의 주된 요인으로 삼아 이루어지는데 재기의 뚜렷함이나 불분명함은 타고난 바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억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융에 대해 "타소난 재기가 지극히 훌륭하다" 라고 평론하였고, 서간에 대해서는 "때때로 제(齊)나라의 완만한 기질(개성)이 보인다" 라고 하였으며, 유정에 대해서는 "빼어난 재기를 지니고 있다" 라고 하였다.   유정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용은 아주 뛰어나다. 그는 비범한 재기를 지니고 있어서 그 문장의 개성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는 모두 타고만 기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유정은 "문장 체제의 기세에는 분명히 강약이 있다. 만일 하고자 하는 말을 이미 다했는데도 여전히 기세가 남아 있다면, 이는 천하제일의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보통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유정이 말한 것은 대부분 문자의 기세의 의미도 포함한다. 그런데 문장이란 기세에 죄우되며 강건과 부드러운 것이 있어서, 반드시 장대한 말이나 의기가 강개한 경우가 아니어도 역시 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골(骨)에 관한 서술 신중히 언어문자를 활용하여 배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골을 중시해야 한다. 작품의 골을 이루는 데 숙달된 작가는 언어의 선택을 적절하고 허술함이 없이 할 수 있다. 작품의 언어문자 표현에 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람의 형체에 그것을 지탱하는 뼈대가 있어야 함과 같다. 작품의 언어문자 표현에 짜임새사 이루어지고 계통이 서면 작품의 골이 완성되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이 빈약하고 수식이 과도하여 번잡하고 체계가 없다면 이는 작품의 골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다.   -                                                                                                 화려한 꿩이 갖가지 색들의 깃털을 두루 갖추고 있으나 백보밖에 날지 못하는 것은 살은 쪘으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매가 아름다운 깃털을 잦추지는 못했으나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것은 골격이 강건하고 그 기운이 맹렬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재능과 역량도 이와 유사하다. 만일 풍과 골이 있으나 문채가 없다면 문학의 영역에 야생조류들만 있는 것과 같을 것이고, 문채는 있으나 풍과 골이 없다면 문학의 숲에서 도망 다니는 꿩과 같을 것이다. 오직 빛나는 문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높이 날아오를 수 있어야 문장에서 봉황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화려한 수사가 풍부하다 해도 작품에 풍과 골이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화려한 수사도 힘을 잃고 운율의 아름다움도 무력해진다.     -   그러므로 작품을 구상하고 작품의 구조를 정돈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기를 충실해야 하며 표현이 강건하면서도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작품은 참신한 면모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 작품에서의 풍과 골의 작용은 새의 날개에 비유될 수 있다.   글의 짜임이 서로 뒤바뀔 수 없을 만큼 적절하고 운율이 확실한 조화를 이루어 막힘이 없는 것은 풍골의 힘이다. 사마상여가 지은 는 위기가 구름을 타고 노니는 듯하다고 일컬어지며 문채 또한 풍부하여 문장의 모범이 되었는데 이는 그 작품이 주는 감동의 힘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옛날에 반욱의 은 경전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었는데, 무수한 문인들이 그 작품을 보고 붓을 거둔 것은 그 작품의 표현력(骨力)이 지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   빛나는 소리는 높이 울리고 그 큰 감화력은 멀리까지 미치게 된다. 높은 뜻과 뚜렷한 언어문자 표현으로 그 장엄한 호령을 울려 퍼지게 한다.  -   내용은 반드시 명백해야 하고 논리는 정확해야 하며, 그 기세는 왕성해야 하고 언어문자 표현은 단호해야 한다. 이것이 격문을 짓는 요점이다.   -   그러므로 직책의 임무는 마치 매가 새들을 공격하는 것과도 같으니 그러한 기세를 연마하여 붓끝에서는 감화의 바람도 일어나고 종이 위에는 서리가 맺힐 정도로 싸늘함이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권력과 신분의 강압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세가 문장 가운데 흐르도록 해야 하며 선을 저버리고 악을 좇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임하지 않는 고리가 문장의 밖까지 진동하게 해야 한다. 붓은 칼날보다 예리하고 먹은 진한 독술을 머금은 듯하다.  -     이상적인 감상법과 감상의 즐거움   독자 감상활동의 과정 문장을 짓는 사람은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글로써 나타내며 문장을 보는 이는 문장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의 세계로 돌아간다. 마치 적은 물줄기를 거쳐 물의 근원에 이르듯 비록 감추어진 작가의 의도라도 이런 경로를 통해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작가의 얼굴을 보지는 못해도 그의 글을 통해서 그 마음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독자의 식견과 관조 어찌 이미 이루어진 작품이 이해하기 힘들 만큼 깊은 것이겠는가? 우리의 식견과 관조가 얕은 것이 걱정이다. 뜻이 산이나 물에 있으면 거문고로 그 감정을 표현한다. 하물며 사람의 감정이 붓끝에 실려 형상화되면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때문에 마음이 이치를 헤아리는 것은 눈으로 형체를 빛추는 것에 비유된다. 밝은 눈으로 보면 형체가 구분되지 않음이 없고 예민한 마음으로 살피면 이해되지 않는 이치가 없다.   독자 반응의주관성과 다양성 강개한 사람은 격앙된 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마음이 넓고 온전한 사람은 세밀하고 함축적인 작품을 보고 기뻐하며, 천박한 화려함을 선호하는 사람은 기려한 글을 대하여 마음이 설레고,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괴이한 것을 듣게 되면 놀라워한다.                                                                                                         -   작품 이해의 어려움 문장변화의 이치는 다함이 없으니 이러한 변화를 알아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된다. 빛나는 옥이 때로는 돌과 혼동되기도 하고 푸른빛의 작은 돌이 때로는 옥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정밀한 사람의 글은 요약적이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의 글도 역시 간략하다. 박식한 사람의 글은 풍족하지만 번잡한 사람의 글도 잡다하다. 논리적인 사람의 글은 명철하지만 천박한 사람의 글도 노골적이다. 심오한 사람의 글은 은밀한 데가 있지만 괴이한 사람의 글도 역시 왜곡되어 감추어진 듯하다.               -   독자의 편벽된 기호 사람들의 미에 대한 기호는 편벽되어 있어서 전면적인 감상력을 갖추지 못한다. 자기의 기호에 맞으면 감탄하고 읊조리지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보기를 멈추고 방치해버린다. 각자 편벽된 이해력을 가지고 만 갈래로 변하는 문학을 헤아리려 한다. 이것은 이른바 동쪽을 향하여 바라보면 서쪽 담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지양해야 할 감상태도 문학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비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문학작품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독자를 만난다는 것도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품을 이해하는 독자를 만난다는 것은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예로부터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이들은 동시대의 것은 천시하고 옛 것을 생각했다. 이것은 말하는 바 항상 목전의 것은 믿지 않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다. 옛날 한비자의 이 처음 나오고 사마상여의 가 처음 지어졌을 때 진시황과 한 무제는 그들과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사람임이 드러나자 한비자는 옥에 갇히고 사마상여는 냉대를 받았다. 어찌 동시대인을 천시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반고와 부의는 문장을 짓는 데 있어 실력이 비슷했지만 반고는 부의를 조소하여 이르기를, "붓을 잡으면 스스로 쉴 줄을 모른다"고 했다. 진사왕이 문학적인 재기를 논한 글에서도 공장을 심히 배격하고 경례하는 글의 윤색을 청한 것을 계기로 그의 글이 아름다운 말이라고 감탄했고, 계서는 남의 글을 비판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괴변가인 전파와 비교되었으니 조식의 평가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문제 조비가 문인들 간에 서로 경시한다고 한 것은 헛된 말이 아닌 것이다.   군경은 말재주가 있다고 여기고 문장을 잘못 논하여 말하길, "사마천이 저작을 할 때 동방삭에게 의논을 하였다"고 하였다. 때문에 환담 같은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비웃었다. 그는 사실 지식이 없는 미천한 사람으로 경솔히 말하여 비난을 받았다. 하물며 문인이 망령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놓고 볼 때 영명한 식견을 가지고도 옛것만을 귀히 여기고 동시대의 것을 천시한 대표자로는 진시황과 한무제를 들 수 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올리고 남을 경멸한 대표자는 반고와 진사왕 조식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문학에 별로 재간이 없으면서 거짓된 것에 미혹되어 진실을 왜곡시킨 대표자는 노호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저작의 말로가 간장 항아리의 덮개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 고인의 말이 지나친 탄식만은 아니다.                                                                     -   독자의 예술소양 천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알게 되고 천개의 칼을 본 후에야 명검을 알게 된다. 때문에 편견 없는 감상법을 위해서는 우선 많은 작품을 보아야 한다. 높은 산을 보고 나면 작은 언덕의 형체를 알게 되고 큰 바다를 보고 나면 도랑의 물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을 감상할 때 그 비중을 다루는 면에서 사심을 넣지 말고 애증에 편벽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저울처럼 공평하게 이치를 평가할 수 있고 거울처럼 맑게 작품의 표현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가치를 가늠하기 위해 살펴야 할 것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여섯 가지의 관찰점을 수립해야 한다. 첫째 작품의 주제와 체제의 일치 여부를 살핀다. 둘째 어휘사용의 적절성을 살핀다. 셋째 작품에 나타난 전통의 계승과 변혁의 문제를 살핀다. 넷째 새로움의 추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핀다. 다섯째 전고나 성어의 사용이 적절한가 살핀다. 여섯째 사용된 어휘의 성률이 조화로운지를 살핀다. 이러한 방법이 취해지면 작품의 우열은 드러나게 된다.   감상의 즐거움 오직 깊은 식견에 의해서 작품의 심오함을 관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문학작품에서 심적인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봄 누대의 놀이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음악이나 음식이나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난은 나라 안에서 가장 향기가 좋은 꽃이지만 그 묘한 향기가 사람의 몸에 베어들때 비로소 향기를 떨친다. 문학서적도 또한  나라의 꽃이지만 그 풍성함이 잘 음미될 때만 아름다움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바르게 감상하고 비평하고픈 사람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문학창작의 기교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사용하는 시기를 교묘하게 포착하면 작품의 뜻과 감정의 여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작품 어휘의 기세가 함께 모여든다. 눈으로 보면 비단에 수가 놓여 있는 듯하고 귀로 들으면 관현악을 듣는 듯 하며 이를 음미하면 풍부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이를 감상하노라면 꽃향기가 나는 듯하다.     출처: 문심조룡, 2005 지은이/ 김민나 펴낸이/ 심만수 펴낸곳/ 살림출판사 * 채란타이핑
2    문심조룡(文心雕龍) 1 댓글:  조회:1058  추천:0  2019-03-09
문심조룡(文心雕龍) 1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활용     문예창작에 있어서 언어문자는 작가 내면의 감정이나 사고를 구체화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언어문자가 문예언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감상이 가능한 작품의 표현구조를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문예작품이 창작되어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감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문자로 작가 내면의 정서 및 사상을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표현과정을 통해 달성되는 미적 효과는 문예 매개체인 언어문자를 예술적으로 활요안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편에서 "예로부터 문장이란 아름답게 다듬어 꾸미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다" 라고 말함으로써 문예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유협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편에서 작가의 문예구상 및 표현의 과정을 논의할 때 삼(麻)을 베틀에서 공들여 제작하면 뚜렷한 문채를 지니는 삼베가 되는 것을 비유로 들어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가공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에 의하면 유협이 말하는 '조욕'이라는 단어는 편에서 말하는 "언어문자를 수식하여 글을 완성한다"는 '건언수가(建言修辭)'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에서 말하는 '조욕'이라는 자체가 본래 지니고 있는 미적인 속성을 예술적으로 활용하여 문예언어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문자의 속성: 형(形) 음(音) 의(義)   어떤 방식으로 언어문자를 구성해야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예언어를 다듬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바로 에서 말하는 '조욕'의 문제-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활용론으로 직결된다. 문예의 형식미를 창출해내는 방법과 기교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문자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유협음 언어문자의 분질적인 특성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물론 유협이 파악하고 있는 언어문자는 중국의 한자를 말한다.   편에서 양웅의 말을 인용하여 언어는 마음의 소리며 문자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하였다. 편에서는 언어라는 것은 문장 구성의 관건이며 정서와 사상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기구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편에서는 마음은 음성이 되어 언어로 나타나고 언어는 다시 문자가 되어 형체를 드러낸다. 글을 읊조릴 때는 궁(宮) 상(商)등의 음률(音律)이 이어지고 눈으로 글을 대할 때는 자형(自形)으로 문자표현의 효과 여부가 귀결된다. 그러므로 언어문자의 소리와 형상이 적절하고도 뚜렷하게 드러나면 먹의 문채가 약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협은 언어와 문자의 다른 점도 인정하고 있다. 즉 문자는 시각에 호소하는 부호이므로 '마음의 그림(心畵)'이라고 하였고, 언어는 청각에 호소하는 소리이므로 '마음의 소리(心聲)'라고 하였다. 유협이 의 전편을 통해 논의 하고 있는 '문(文: 운문)과 '필(筆: 산문)은 선진시대 이후의 서면(書面) 언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협이 언어와 문자를 구별하여 논하는 목적은 중국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상적인 아름다움과 음성적인 아름다움의 속성을 돌출시키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언어문자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작가의 감정과 사고를 담은 마음을 표현하는데 있다. 언어문자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문자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드러내는(表意)' 속성 때문이다. 유협은 언어문자의 형상과 소리의 미적 속성과 더불어 의미를 드러매는 표의의 속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편에서 중국문자의 변화과정을 논의할 때 문자의 훈고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문자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흥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다르게 쓰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편에서 말하는 형문(形文), 성문(聲文), 정문(情文)은 중국의 언어문자의 속성인 형, 음, 의를 기본으로 하여 발전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한자의 형, 음, 의의 미적 속성을 최대로 발휘한 변려문이 극성했던 남조의 제나라와 양나라 시기에 살았으므로 중국 언어문자의 미적 속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방법과 기교까지 탐구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협은 문예창작에 있어서 형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네 가지 표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상한 글자를 피한다, 연이어져 나오는 동일한 변의 글자를 생략한다, 중복을 조절한다, 단순한 글자와 복잡한 글자를 조화롭게 배치한다.   독자가 글을 읽을 때 매우 드물게 보는 글자나 이해하기 힘든 글자를 대하게 되면 "스승이 없이는 그 단어를 해석할 수 없고, 박한한 자가 아니면 그 논리를 종합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편에서도 "구절이 청신하고 빼어나려면 문자를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상한 글자의 사용은 문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자체의 괴이함으로 작품 전체적인 화면을 망쳐버림으로꺼 시각적인 미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유협은 "글자를 엮어 한 편의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상한 것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작품의 구절 속에 동일한 변방의 글자가 계속해서 출현하면 화면을 지루하고 단조롭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므로 이 역시 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예언어에 있어서 '조화로운 리듬'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리듬(운율)형식의 중요성도 설명하고 있다. 즉 "옥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낭랑한 소리"와 같은 청각적인 미감을 통해 작품의 '여운의 미'와 '감동' 을 이끌어내는 '조화로운 리듬'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숲 속의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면 조화롭기가 거문고의 곡조와 같고, 냇물이 바윗돌에 부딪혀 이루어지는 울림은 옥경쇠와 종고소리와 같은 화음을 이루는 것" 처럼 "소리가 나면 조화로운 음률을 이루는 것" 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았다.  신사편에서도 "읊조리는 가운데 주옥과 같은 소리가 나온다"고 말하고 있으며, 편에서도 "글을 읊조릴 때는 궁, 상 등의 음률이 이어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 전체의 구조적인 질서와 예술기교   유협은 편에서 "반드시 나타내려는 사상과 감정으로 정신을 삼고, 글에 인용될 내용들을 골격으로 삼으며, 미적인 언어문자 표현을 피부로 삼고, 성률을 소리로 삼는다. 그런 연후에 채색을 베풀듯 문장의 수사를 다듬고, 조화로운 운율의 아름다움을 도모하여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려서 체제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적절한 형식표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이상적인 문예작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품의 구조적인 질서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들이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것처럼 명확하게도 하고, 해가 지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함축적이기게도 하여, 수미가 긴밀하면서도 표리가 일체화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문장의 이치를 총괄하고 시작과 끝을 통일시키며, 어떤 것을 쓰고 말 것인지에 대해 확정하고, 문장의 각 부분을 통합시키고 작품 전체를 종합하여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산만하지 않게 하는 '부회' 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문장을 통괄하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면 의미가 혼란스럽게 되고, 내용의 맥락이 통하지 않으면 작품이 반신불수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구조의 전체적인 미적 효과를 위해 부분적으로 잘된 부분을 희생시킬 줄 아는 것이 바로 창작상의 기본 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을 저작한 주관적인 동기와 목적 저작을 통해 정신생명의 불후를 추구(천고에 이름을 드날리고자 한 유협)   우주는 매우 넓으며 일반인과 인재가 두루 섞여 있다. 많은 사람중에서 뛰어날 수 있는 길은 지혜와 슬기뿐이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사람의 생명도 오래 계속되지 못한다. 명성과 업적을 남기는 길은 창작뿐이다. 사람의 용모는 천지를 본보기로 했고 천부적인 품성은 오행의 움직임을 따랐으며 눈과 귀는 해와 달을 닮았고 목소리와 호흡은 바람에 비유된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된 것은 그 심령 때문이다. 신체는 초목과 같이 약하나 명성은 금석보다 견고하다. 그러므로 군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덕을 세우고 말을 남기려는 것이 어찌 변론을 즐겨서겠는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일곱 살 때 비단 같은 채색구름을 보고 올라가 그것을 따는 꿈을 꾸었다. 삼십이 넘은 어느 날 밤에는 붉은 칠을 한 예기를 들고 공자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잠을 깨고는 무척 기뻐했다. 위대한 성인을 만나기란 어려운 것인데 이 하찮은 자의 꿈에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인류 역사상 공자처럼 위대한 인물은 없는 것이다.                                                                                                    -   인생은 유한하지만 지혜만은 무한하다. 만물의 현상을 따르기는 어려우나 본성에 의지한다면 용이하다. 홀로 산수에 거하면서 문학의 의의를 곰곰이 생각한다. 문장이 과연 마음을 싣는 것이라면 나의 마음도 기탁할 곳을 얻으리라.                                                                                                    -   참으로 신묘하다. 타고난 지성을 지닌 성인은 만물의 깊고 밝은 이치를 주관한다. 깊은 이치를 문장으로 표현하고 탁월한 재기는 문장의 아름다운 언어표현을 이룬다. 하늘에 달려 있는 해와 달처럼 밝게 현상을 관찰하니 그 언어표현은 산과 바다만큼이나 풍부하다. 육체는 백 년이 되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그 마음은 천 년이 지나도록 남는다.                                                                                                     -   대중들은 무리지어 살면서 복잡한 가운데 개성이 드러나지 못할까 걱정하고 군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름과 덕망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꺼린다. 오직 재기가 뛰어난 사람만이 빛나는 문장을 남기어 그 이름을 드날리고 해와 달처럼 뚜렷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아! 그 자신과 그가 처했던 시대와는 위배되었으나 그 뜻은 만물의 이치와 더불어 펼쳐졌으니, 그 마음은 만고에 드러나고 그 품은 뜻은 천년이 넘도록 전해지리라. 금이나 돌이 썩는다 해도 그 명성이 사라지겠는다.                                                                                                     -   문장의 용도란 경전의 작용을 측면에서 보좌하는 것이며 다섯 종류의 예의법칙은 그 힘으로 완성되고 여섯 부분의 행정기구도 그것에 의해서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인시대로부터 멀어져가면서 문학의 체제가 흐트러지고 작가들은 신기함을 즐기며 실속 없이 들뜬 표현을 귀히 여기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자연적인 장식을 갖추고 있는 새의 날개에다 물감을 칠하고 가죽 띠나 수건에다 무늬를 수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 본질에서 더욱 벗어나 문자언어의 오용이 심해진 것이다. 상서에서 말을 논할 때는 요점 파악을 귀하게 여겼고 공자가 교훈을 펼 때는 이단의 학설을 미워했다. 상서의 말과 공자의 교훈이 내용은 달라도 그들 내용의 요점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동기에서 붓을 들고 먹을 갈아서 문장을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       사람은 본래 일곱 가지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외계의 사물에 감응이 발생하게 되는데 감응이 있게 되면 그 마음의 뜻을 읊조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인류 문화의 기원은 태극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신비한 이치에 대한 깊은 통찰은 중의 괘상(卦象)을 가지고 최초로 삼는다. 복희가 먼저 팔괘를 그리고 공자가 끝으로 십익을 저술했다. 그 중에 건괘와 곤괘는 공자가 특별히 문언이라 이름 하여 해석했다. 즉 언어에 나타난 아름다운 수식은 천지의 핵심인 사람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새의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든 창힐의 문자가 노끈 매듭에 의한 의사전달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문자이 존재가 마침내 분명해졌다.                                                                                                      -      출처: 문심조룡, 2005 지은이/ 김민나 펴낸이/ 심만수 펴낸곳/ 살림출판사 * 채란타이핑   
1    <문심조룡> 깊이 읽기 댓글:  조회:958  추천:0  2019-03-09
깊이 읽기     작가의 문예구상과 상상력    문심조룡에서는 성인이 경전을 탄생시킨 '마음의 작용(用心)' 을 문예창작을 위한 심적인 활동의 표준양식으로 삼고, '신사론(神思論)' 이라는 문예구상론을 통해 더욱 심도있게 작가의 창작을 위한 '마음의 작용'을 다루고 있다.   외부 사물에 대한 감동과 표현 욕구의 발생   문심조룡에 의하면 문예창작활동은 작가가 외부 사물에 대해 미감을 경험하고 - '감(感)',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 욕구가 일어나는 것- '흥(興)' 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작충동은 작가와 외부 사물간이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편에서 "감정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면 사물에 의해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협은 창작을 위한 미적 체험이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작가가 미를 감상하는 능력과 미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적체험을 위한 최적의 마음상태   유협은 편에서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의 상태(虛靜)"과 '집중력' 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가 미를 감상하는 능력과 미적 체험을 위한 최적의 마음상태를 구비하고 있다고 하여도 창작충동을 촉발하는 객관적인 사물을 떠나서는 미적 체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적 체험의 진행과정   그렇다면 작가의 외부 사물에 대한 미적 체험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유협은 편의 "감정이 무언가를 선물하듯 사물에게로 향하면 사물은 이에 답하는 듯이 감흥을 선사한다" 는 구절을 통해 작가와 사물간의 상호작용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작가의 외부 사물에 대한 미적 체험은 '반응' 이 아닌 '감응' 이라는 의미이다. 문심조룡에 의하면 작가에게 감응을 일으키는 대상은 주로 계절에 따라 자연경관의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하는 '물색(物色)' 임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을 동반한 문예구상과 과정   문예창작을 위한 심적인 활동은 작가가 언어문자로 예술형상을 창조하기 위해 진행하는 사유 활동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창조를 위한 상상활동이 필수적이다. 작가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의 사물에 감응하게 되고, 이로부터 사물에 대한 인상과 감정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인상과 감정이 그것을 예술화하는 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창작활동에서 상상력이란 창조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근원이다.   상상 사유의 특징   편의 첫 단락에서 " 옛 사람이 이르기를 ' 몸은 강이나 바닷가에 있어도 마음은 높은 궁궐에 있다' 고 했는데 이것이 상상력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협은 문예구상에 있어서 상상력의 범위는 참으로 요원하기 때문에 조용히 생각을 모으면 천 년의 세월도 접할 수 있고 천천히 얼굴을 움직이면 만 리를 내다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글을 읊조리는 가운데 주옥같은 소리가 나오며 생각을 모으는 가운데 눈앞에는 바람과 구름의 변화 많은 모습이 펼펴지기도 하는데 이 모든 현상들이 바로 상상력이 극에 달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청각적인 미감은 외부의 사물을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상상활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과 청각의 미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편에서 유협은 문예 상상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작가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음향에 대한 미감을 '내청(內聽)' 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외부의 음향을 귀로 직접 듣는 '외청(外聽)' 과 구별하고 있다. 음향에 대한 감각을 내외로 구분하는 이치에 근거하여 본다면 상상 속에서 전개되는 형상에 대한 미감은 '내시(內視)'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활동의 원인인 외부 사물에 대한 감동과 연상은 모두 작가의 감성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예적인 상상을 유도하는 조관적인 조건 - 작가의 사고와 기질   지(志)는 작가의 사상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고, 기(氣)는 작가의 개성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志)는 작가마다 각기 다름 개성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는 작가의 개성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마다 각기 다른 개성적인 기질이 밖으로 표현되면 재기(才氣)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개성적인 기질은 그 안에 재능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志)와 기(氣)는 본질적으로 작가가 문예 상상활동을 통해 창조해내는 문예형상의 개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편에서 유협은 "기질이 사고에 열매를 맺게 하고 사고는 언어표현을 결정짓는다" 고 말하고 있다. 신(마음: 神)은 작가의 문예창작활동의 핵심이며, 문예형상을 창조하는 근원이다. 그러나 그 활동은 반드시 작가의 사상의식과 재능의 발휘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기(志氣)' 가 '신(神:마음)' 을 통솔하는 관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문예적인 상상활동에 있어서의 영감의 문제   양기(養氣) 편에서도 "문예구상에는 예리함과 둔함이 있고 영감이 도래하는 시기에는 통할 때와 막힐 때가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문예구상의 트임과 막힘 속도의 느림과 빠름은 영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영감이란 문예구상을 진행하는 가운데 돌연히 나타나는 독창적인 사고의 흐름을 말한다. 영감으로부터 촉발된 사고의 흐름이 창작으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상상을 포함한 문예구상 활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영감은 신사(神思)와 동일한 개념은 아닌 것이다. 영감은 예술구상을 진행하는 가운데 우연히 출현하여 신사 활동을 원할하게 해주는 사고의 특수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물색 편에서 "사물에는 한결같은 모습이 있으나 사고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깊은 표현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깊게 생각할수록 하고자 하는 표현과 더욱 멀어지기만 할 때도 있다" 면서 왕래가 일정치 않은 영감의 내재적인 규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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