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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혜선-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시문학>2014.3월호 <이달의 문제작> 댓글:  조회:1346  추천:0  2019-03-10
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2014.3월호 시평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인은 익숙하게 보아오는 일상을 비틀어서 낯설게 보기도 하고, 평범한 체험이나 사상(事象)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변용(變容: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하여 전혀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각각의 시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이면과 본질을 보아내는 그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독자로 하여금 새로움과 경이에 눈 뜨게 한다. 그래서 시에는 독자적인 개성이 중요하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창작을 위해서 시인은 이미지를 변용시키고 비약적으로 결합하여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 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   말이 몽골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이리로 온다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바람소리와 더불어   지그재그로 달리는 네 개의 다리가 어지러운 곱하기 곱하기를 한다   앵글로 아랍은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름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염색을 하고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   할아버지의 몽골 초원이 그리워 긴 입을 들어 힝힝거리며           (중 략)   서울 아파트의 말매미가 한거번에 운다   말매미의 말은 우랄알타이지방의 거친 말이다                 -김규화 「말 • 앵글로 아랍」부분      김규화 시인의 위의 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인 결합으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signifiant:記標)들 사이에서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동음이의(同音異義)인 시니피에(signifie:記意)들이 새로운 제 3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있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에서는 말-언어, 말-말(馬), 말-윷말, 말-마을, 말- 끝(末), 늙음 등 여러 가지의 동음이의어들이 중첩되어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혹은 각각 사용되어 ‘말’이라는 연상기법을 통해 여러 가지 변용된 이미지들을 비약적으로 결합시킨다. ㅁ, ㅏ, ㄹ 은 모두 유성음으로 그 발음만으로도 의성어나 의태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음성상징을 느끼게 한다. 그 중의 하나의 의미인 ‘말’에서 몽골초원과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연상되고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보이는 앵글로 • 아랍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멋진 모습이 ‘염색’한 것이 되어 여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시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로 변용된다. 2연에서는 ‘할아버지의 몽골초원’을 그리워하는 말의, 몽골에서의 자유롭고 힘찬 나날의 삶이 묘사된다. 그러나 3연에 와서는 다시 ‘말’이라는 시니피앙과 결합되는 ‘말매미’가 등장하면서 시적 공간은 몽골초원에서 갑자기 시인의 사적 공간인 서울 아파트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매미들의 울음에서 ‘말(언어)’을 연상하고 그 말을 다시 ‘우랄 알타이지방의 거친 말’로 변용시킨다. 이 시는 얼핏 보아서는 이미지의 비약적 결합과 변용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앵글로 아랍에서 연상되는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거센 박차를 받아라’라는 역동성과 함께, 말매미의 ‘거친 말’까지 전체적으로 용감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친 말’에서 ‘서울’의 말(언어)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감정의 유로’에서 창작되던 낭만주의 시와는 다르게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말 사전’을 찾아가며, 여러 가지 지식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한다. 특히 다층구조를 기본으로 하이퍼링크로 창작되는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과 함께 더욱 치밀한 구조가 요구된다.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든다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KTX보다 빠른 속도로 풀리는 타임캡슐 어둠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줄장미 붉은 꽃송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쏟아내는 웃음소리 자지러진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술래는 잘 익은 꽈리의 가슴팍을 열어젖힌다 덩그런 태양이 붉다 한가득 입에 물고 햇덩이를 굴린다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 그대와 나 사이에 서면 바람은 구름에 안겨 고개를 넘고 구름은 바람에 업혀 사막을 건너간다 그런 날이면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흙탕물 묽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김예태 「사진을 보다」전문       김예태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행위를 ‘시간의 화석을 꺼내’드는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어서 그것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고 ‘타임캡슐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일어서는 것으로 묘사하여 이미지의 변용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사진을 보는’ 행위로 인해 시적 화자는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동무들과 민속전래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손에 손을 잡고 웃음소리 자지러지게 쏟아내는 아이들은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붉은 꽃송이들’로 빛나게 변용된다. 또한 잘 익은 ‘꽈리’를 ‘덩그런 태양’으로, ‘햇덩이’의 이미지로 변용시킴으로써 그 시절의 화자는 ‘햇덩이’를 입에 물고 굴릴 수 있는 태양의 친구가 된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개념으로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의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특별한 기회와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시인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순식간에 초월하여 자신이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시간 속에 자신을 데려다 놓는 마술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드는 이미지의 제시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이미지는 다시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를 화자에게 불러주고, 그곳에서는 삶을 건너는 힘에 겨운 고개도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도 구름에 안겨, 바람에 업혀 힘들이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도 라일락 향기가 나고 ‘흙탕물 붉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반짝이는 환희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처럼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과거와 현재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결합시키고 변용시켜 새롭고 환희로운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방죽의 물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을 때   첫 해의 열매를 큰 짚가마니에 담아 주시던 아버지   이듬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마니 속의 꿈을 끌고   수줍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기다림이 부풀리는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고운 잎사귀에서   첫 가을도 우주도 익기 시작했다     섬으로 가득 채워진 가을을 안았다   장대 끝에 꺾여 땅에 내려온   수많은 붉은 해를 누이며   가을의 투명한 창을                 -정숙자 「고욤나무」부분       정숙자 시인은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는 고욤나무 열매를 ‘태양의 빛을 가득 담은 작은 전구’라는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욤의 못생기고 작은 열매가 순식간에 환하게 빛을 내는 발광체처럼 우리 마음을 밝게 비춰주고 아울러 남루한 우리 삶도 밝게 비춰줄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해 준다.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시인은 독자의 마음을 밝고 희망차게 하기도 하고 어두운 수렁을 지나게 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는 다시 ‘가마니 속의 꿈’으로,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으로, 익어가는 우주로 무한한 변용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섬으로 가득찬’ 가을이 되어 화자의 품에 안긴 고욤은 다시 ‘수많은 붉은 해’가 되어, ‘가을의 투명한 창’이 되어 끝없이 꿈꾸게 하는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춰준다.       뛰어내리기 바쁘게   스스럼 없이 몸을 포갠다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일까      (중 략)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에   개들이 좋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연애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권숙월 「오랜 연애를 위하여」부분       권숙월 시인은 눈이 내려 쌓이고 그 위에 또 쌓이는 것을 보면서 ‘이루지 못한 연애’를 비로소 이루어 ‘한 몸 되는’ 것으로 ‘눈’의 이미지를 변용시킨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하여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이며 마침내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전부를 바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하나 밖에 모르’는 연애를 ‘이루지 못하는’ 자기 나라를 버리고 겁 없이 뛰어내려 몸을 포개는 사랑을 보면서 화자는 조금 더 더디 녹는, 오래 함께 몸 포개고 싶은 눈의 마음을 짐작해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를 헤아린다. 이처럼 한 번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놓아버리면 끝장이었다//   암벽이 그의 하늘이었던 것//   절친한 하늘//   무서운 하늘//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 쪽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벽에 매달려 있는 것//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눈 감고 눈 뜨고 하늘의 입술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수환 「지상시편 Ⅵ부」       안수환 시인은 삶에게 ‘암벽타기’라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아슬한 높이에 매달려  밤마다 암벽을 기어오르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이 우리네 ‘살이’라고 변용시켜 비유적으로 일러준다.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기어올라야 하는 암벽은 때로 우리에게 ‘절친한’ 가족이며 이웃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함의하는 ‘하늘’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무서운’ 칼날이기도 하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쪽을 내려다보니’ 에 이르면 시점의 차이를 일깨워준다. 반대의 시각, 제 3의 시각에서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는 시인만의 특권이며 시인만의 탁월한 변용능력이다. 이러한 반대의 시각에 의해 변용된 새로운 이미지가 태어나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깊이를 터득하게 된다. 비록 ‘암벽타기’같은 나날의 삶이지만 때로는 ‘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쩜 저리 여린 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박정원「사라진 우주」부분       박정원시인은 ‘막 깨어난 애기나비’를 하나의 ‘우주’라는 확장, 변용된 이미지로 제시한다. 애벌레 자체도 하나의 우주이지만, 그 애벌레의 우화(羽化)는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번데기의 어둠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어두운 터널을 믿음 하나로 거쳐 나와 비로소 탄생된 크나큰 우주인 ‘순한 고요’가 박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기는 절묘한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 세상’이 오다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을 ‘층층나무 이파리들’의 담담한 눈길을 통해 제시하는 이미지 등에서, ‘사라진 우주’에 대해 이 작품이 주는 안타까움과 충격이 더 큰 파장으로 확장된다. 他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생명존중의식과 측은지심이 담담한 묘사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처럼 이미지의 변용과, 변용된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의 묘미이다.   이미지의 변용은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눈은 끝없이 사물과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하며 ‘낯설게 하기’를 통해 파격적인 새 패러다임과 새 세계를 독자 앞에 제시해준다.
12    언어 너머에서 일렁이는 시(詩)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댓글:  조회:1541  추천:0  2019-03-10
옥타비오 파스는 언어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 창작의 비밀을 찾는다. 시는 언어로 언어 너머를 표현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28쪽) 언어는 어떻게 언어를 넘어서는 것일까?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다. 이미지는 감각과 어울린다. 감각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물의 감각을 가리킨다. 시인은 사물이 내보이는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무모한 일을 벌이는 존재이다.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언어는 사물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낼 수 없다. 사물에 언어를 붙이면 사물은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린다. 언어란 인간의 약속 체계일 뿐이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사물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작(詩作)은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29)라고 주장한다. 시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땅을 벗어난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만 머물러 있으면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시인은 이 땅을 넘어서는 모험에 나섬으로써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물의 본질을 엿보는 존재가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시인은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내딛는 ‘치명적 도약’을 거쳐야 한다. 일상적인 자아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시인이 탄생한다. 치명적 도약을 거친 시인은 사물을 보는 시선부터 일반인과 다르다.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보고,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듣는다. 시인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창조자인 것이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 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94쪽) 일상 언어와 시 언어의 차이는 리듬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언어는 리듬으로 표현된다. 언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마다 독특한 리듬이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리듬이 있고, 돌에게는 돌의 리듬이 있다. 당연히 꽃의 리듬이 있고, 비의 리듬이 있다. 시인은 저마다의 사물들이 내보이는 이러한 리듬을 시 언어로 구현한다. 지은이가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물의 리듬을 시인은 아날로지(analogy)로 표현한다. 이육사의 「광야」에는 “가난한 노래의 씨”라는 시구가 나온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내놓는다. 가난한 노래의 씨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씨’의 리듬과 이어져 있다. 땅속에 심은 씨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이육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을 ‘씨’라는 사물에 실어(아날로지)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성하고 있는 셈이다. 개념으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시인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미지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다. 아날로지에 근거한 이미지는 사물과 사물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131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정확히 이 지점에 걸려 있다. ‘불가능한 그럴듯함’은 시에 나오는 아날로지를 제대로 설명한다. 언어로 언어를 넘어서는 비결은 무엇보다 불가능한 것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능력에 있다. 시인은 사물을 단정하지 않는다. 사물은 다양한 길로 뻗어나갈 개연성을 그 속에 함유하고 있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수없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시인은 안에서도 사물을 보고, 밖에서도 사물을 본다. 위에서도 사물을 보고, 밑에서도 사물을 보며, 옆에서도 사물을 본다. 사방팔방에서 보는 사물들은 사방팔방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들을 내보인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즉,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146쪽)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쪽) 긴장을 하지 않는 시인은 사물이 순간에 내보이는 본질과 맞닥뜨릴 수 없다. 사물이 언제나 제 본질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직관이 뛰어난 시인만이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직관은 순간을 직접 보는 것이다. 순간은 찰나이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듣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이성 너머에 있다. 지은이는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라고 주장한다. 사물을 직관하는 시인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고, 의미하지 않음에서 의미를 본다. 언어를 들고 벼랑 끝에 선 시인을 상상해 보라. 한 발이라도 내디디면 시인은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벼랑 아래는 말 그대로 저승이다. 극도로 긴장된 이 순간에 시인은 눈을 감고 침묵하면서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뗀다. 앞서 말한 ‘치명적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육사가 말한 “가난한 노래의 씨”가 이 세상에 새 생명을 퍼뜨리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좋다. 지은이는 이러한 세계를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장소로 표현한다.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곳에서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중력은 존재들을 얽매는 힘이 아닌가. 중력을 잃는 존재는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깃털은 바람을 따른다.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로 가고, 저리 불면 저리로 간다. 비어 있는 듯 꽉 차 있고, 꽉 차 있는 듯 비어 있는 존재가 깃털이 된 시인이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중력이 사라진 세계에 선과 악이 있을 리 없다. 중력에 얽매인 세계는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지만,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깃털은 중심도 주변도 없는 세계를 한없이 날아다닌다. 지은이는 중력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인간은 비로소 신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치명적 도약을 이룬 시인은 언어 너머를 보는 언어를 들고 이러한 세계와 마주한다. 인간이면서 신인 존재, 둘이면서 하나인 시인의 모습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181쪽)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187쪽) 치명적 도약은 존재의 본성을 바꾼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거쳐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 존재는 지은이의 주장처럼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근원적인 본성으로 돌아간 사람은 문명으로 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 사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잃었다. 풍요로운 문명을 만끽한 결과 사물과 하나가 되는 신성을 상실한 것이다. 치명적 도약을 통해 신성을 획득한 시인은 이리 보면 두 세계에 발을 디딘 경계 속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 사이를 자유로이 거닌다. 이성으로 비이성을 재단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상황을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는 가능성을 연다. 그 가능성은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삶이나 철학이 말하는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고 포함하는 삶이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존재이다. 시적 이율배반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충만하게 실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204쪽)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하나의 목소리로 사물을 재단하지 않는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이 내보이는 소리들을 온몸으로 받아 그 이미지들을 여러 목소리로 내보낸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이어지고, 그 이미지는 다시 또 다른 이미지와 이어진다. 말이 말을 낳는 세상에서 시인은 풍부한 이미지로 그 말들을 꾸민다. 일상 언어를 넘어서는 시 언어는 이렇게 일상 언어보다 더욱 풍부한 언어로 거듭난다. 지은이는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236쪽)고 분명히 밝힌다. 시적 가능성은 치명적 도약을 통해서만 펼쳐질 수 있다. 치명적 도약은 ‘나’로부터 벗어나 타자로 가는 길을 연다.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시학은 무엇보다 ‘나’라는 중심성을 내려놓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1    색채에 의한 관념의 극복과 순수의 회복/신규호 댓글:  조회:1296  추천:0  2019-03-10
색채에 의한 관념의 극복과 순수의 회복   서평 - 심상운 시집 『녹색 전율』                                                                       신 규 호       1.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심상운 시인은 2006년에 『디지털시의 이해』(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발표한 이래, 하이퍼시의 이론서인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2010년 5월)를 간행하는 등, 새로운 시론을 개척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가 이번에 간행한 시집 『녹색 전율』은 이러한 그의 하이퍼시 창작 결과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두 7부로 구분된 이 시집은 서문(시인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이퍼 시 55편과 일반 서정시 61편 등, 총 116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3부까지는 하이퍼 시이고, 4부부터 7부까지는 일반 서정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심상운 시인이 근자에 와서 특별히 추구하고 있는 하이퍼 시 55편에 주목하면서 평설을 쓰고자 한다.   하이퍼 시를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면, 심상운 시인이 대상을 인지하는 방법 가운데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것은 시집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색채 단어’(이하 색채어라 칭함)를 빈번히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심상운 시인의 시적 감수성이 대상의 일차적 시각 체험인 색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의 표제(녹색 전율)도 수긍이 가지만, 다수의 작품에 골고루 등장하고 있는 여러 색채어의 출현이 그 점을 확인해 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동물은 시각적으로 물체의 색을 분간하는 기능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지만, 똑같은 색채인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물은 적색 색맹인 경우도 있고, 모든 색을 초록 아니면 회색 등의 단색으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과 똑같이 색채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색채-존재’의 관계와 관련된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란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색, 즉 존재는 눈으로 인지된 대로의 모습이 아니요, 따라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참 존재가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원근법만 보아도 색, 즉 존재의 모습은 거리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므로, 물체의 참모습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 언어에 의한 형이상적 관념이 탄생한다. 그러기에 관념을 기피하는 시인에게 언어 이전의 순수색채는 사물의 아르케(Arche)를 찾는 기본이 되는 것이므로, 알 수 없는 그 구극에서 색채에 감각적으로 ‘전율’하게 되고, 일단 유아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생명체의 색인 녹색에 전율하는 심 시인의 정서는 따라서 관념적 진술이 아닌, 언어 이전의 느낌이라 하겠다. 언어적 관념 이전의 색채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의 첫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색채도 각기 관념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 바, 국기의 색깔처럼 경우에 따라 색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빨간 색은 정열, 사랑, 혁명이나 피를, 파란 색은 하늘, 영원, 이념, 이상, 동심(童心)이나 꿈을, 검은 색은 대지, 모성, 회의, 어둠, 죽음, 절망을, 흰 색은 순결, 순수, 무염(無染), 무구(無垢), 백치, 무저항, 항복을, 초록은 생명, 안전, 평화, 식물을 흔히 상징한다. 하지만, 문학(시)과 예술 작품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색채, 또는 색채어가 이런 관념적 의미를 제거한 채 사용될 경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 순수 감정의 개성적 선택이므로, 색채어가 지니고 있는 기존의 관념이 제거된 특별한 정서 자체를 표현할 뿐이다. 상징적 의미가 제거된 색채감각은 기존의 어떤 관념도 개입이 안 된 동심적 순수성 그 자체일 뿐이다. 심상운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색채어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므로, 의미를 제거한 비(非)관념적 색채어의 세계인 그의 작품이 난해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시를 실험하는 심 시인이 색채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기존의 관념적 표현을 외면하고 대상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관념이 개입되는 기존의 비유법을 버리고 순수 색채어로 그만의 독특한 하이퍼적 이미지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이미지를 본의와 유의에 의한 전통적 비유의 방법이 아닌, 원관념을 포함한 모든 의미가 제거된 단순한 색채어로 표현하다 보니, 작품 자체가 자연히 관념과 거리가 먼 동심의 세계를 닮게 된다. 심 시인의 시가 마치 어린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과 같이 언어 이전의 순수성을 지니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나 음악이 아닌 언어를 도구로 삼는 시 창작에 있어서, 기존의 언어적 의미나 관념을 완벽하게 지워 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색채어를 이용하여 언어가 지닌 관념을 적극적으로 기피하려는 심상운의 시에서도 작품 속에 내재하는 최소한의 의미는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여, 필자는 심 시인의 난해한 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다뤄 보고자 하는 본고에서 작품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작품이 지닌 최소한의 의미를 찾아 서술해 보려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미리 밝힌다. 2. ‘헤드라이트’의 한 줄기 빛에 의해 어둠에 묻힌 사물들이 얼핏 그 색채-존재를 드러내는 충격적 느낌을 심상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포실한 흙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드러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속에 숨어 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뜩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작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 시 「헤드라이트」 전문 시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는 어둠과 빛(헤드라이트)의 극명한 대조가 전제된 가운데, 흰색과 검정색, 핏빛, 꽃빛, 장밋빛, 청색, 불빛(번개) 등의 천연색들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영상적 하모니를 이룬다. ‘환한’, ‘사파이어 눈’, ‘희뜩희뜩’ 등도 역시 색채를 강하게 떠올려 주기는 마찬가지다. ‘포실포실한’, ‘부르르 떠는’, ‘축축한’, ‘뭉클뭉클’과 같은 촉감적 감각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 등의 후각적 표현도 등장하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며 이끌고 있는 것은 색감적 표현이다. 어떤 관념도 배제된 채, 오직 색채를 중심으로 오감(五感)에 의해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특색이 있다. 먼저, 이 작품이 지닌 구조적 비밀을 알아본다. 우선 거시적으로 보면, 이 시는 의식의 흐름에 따른 연상법에 의해 수직적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전체를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의식의 흐름을 살펴보면, 전반부의 이미지 군은 ‘감자 캐기-> 놀라는 흙덩이들-> 난폭한 손가락에 떠는 흙의 속살->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 피 냄새를 묻히고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우주의 피가 묻어 있는 어둠-> 우주의 꽃빛 파일’로 이어지고, 후반부의 또 다른 이미지군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난 그녀->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 비 오는 밤-> 번개 속을 통과하는 검정고양이의 청색 사파이어 눈->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 검정고양이를 찾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나->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피하는 밤’으로 이어진다. 첫 이미지 군과 다음 이미지 군 사이를 ‘피’가 연결해 주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작품 전체의 이미지들이 의식의 흐름 수법에 의해 단순히 수직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각 그룹의 이미지들을 미시적으로 세분해 보면, ‘감자 캐기 / 놀라는 흙덩이 / 탯줄 끈킨 어둠 / 피 냄새를 묻힌 손가락 /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 우주의 피가 묻어 있는 어둠? / 우주의 꽃빛 파일,’과 같이 상호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수평적 구조의 이미지들, 곧 하이퍼적 리좀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구조는 둘째 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수직적 연상 이미지와 수평적 리좀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진 하이브리드적 다시점의 이미지 군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 때문에 이 시는 마치 잘 깎인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는,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주면서 다양한 인상을 준다. 다시 그 의미를 찾아서 보편적으로 서술해 보면, 심시인은 밭에서 감자를 캐는 순간의 체험을 의식의 흐름에 의한 수직적 연상법과 수평적 다선 이미지들을 입체적으로 동시에 구사함으로써, 새롭게 재창조된 입체적인 제2의 초월적 비유를 이룬다는 것이다. 감자밭 흙속에 ‘난폭한’ 손가락을 넣는 순간, 먼저 ‘화들짝 놀라며 부르르 떠는 흙덩이’를 만난다. 캄캄한 땅속에 감자라는 생명체를 잉태하고 있는 흙의 의인화를 통하여 땅과 생명체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깨닫게 한다. 어떤 종교적 이념이나 철학적인 관념적 표현보다도 생명체를 낳아 기르는 땅의 모성이라는 제2의 초월적 의미(관념)를 하이퍼적 감각으로 일깨워 준다. ‘흙-어둠’과 ‘감자-빛(햇살)’이 떠올리는 ‘무(없음, 죽음)’과 ‘유(있음, 생명)’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이 햇살 속으로 드러나는 순간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손가락에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어둠이 흙속으로 파고 든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는 관념적 회의(?)가 진술된다. 이 부분에서도 끝까지 회의함으로써 갑자기 개입하려는 관념을 기피하려는 의도를 엿보인다. ‘비릿한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이라는 대목 역시 뛰어난 제2의 하이퍼적 비유이다. 앞에서 식물적 생명의 상징인 ‘피’가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동물적 ‘피’로 전환된다. 곧 ‘헌혈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여인’ 이야기와, ‘번개 속을 통과하는 검정고양이’, 그리고 승용차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놀라며 몸을 피한다’는 다이나믹한 시각적 이미지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색감에 의해 동적 세계의 공포를 드러낸다. 앞부분이 정적인 식물적 지하의 세계라면, 이 후반부는 지상의 다이나믹한 동물적 세계다. 밭(지하)에서 감자를 캐는 단순한 체험에서 우주와 생명체의 근원(피)을, 뒤이어 20대의 여인과 검정고양이, 그리고 승용차에 의한 지상세계의 동적 이미지에서 동물적 피의 세계를 다룸으로써, 입체적 구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색채어에 의한, 색채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시는 생명의 근원인 식물적 이미지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는 지상의 동물적 살육의 현장까지 강하게 떠올려 주면서, 매우 다양한 초월적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결국, 이 작품은 ‘하이퍼시는 전통적 비유를 뛰어넘어 입체적으로 초월 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다이나믹한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문덕수, 하이퍼시 개관, 한국하이퍼시클럽, P209. 참조)는 하이퍼시의 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켜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 소리가 묻어 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 시 「뱀과 그녀」 전문 시인은 화랑에서 뱀들의 그림을 감상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입체적 체험을 한다. 아마도 얼마 전에 작고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뱀을 머리에 얹고 있는 여인)을 보고 촉발된 강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목도 제목이지만,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이라는 구절로 이 시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 중에도 뱀과 여인을 결합한 작품이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일단, 배경이 화랑이라는 점에서 시각적으로 현란한 색채를 떠올려 준다. ‘미명의 어둠’과 ‘아침 햇빛’, ‘거울에 반사된 빛’, ‘빛A 빛B 빛C’ 등의 색채가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마치 헤드라이트처럼 어둠을 걷어 내면서 비치기 시작하는 아침 햇빛에 서서히 물체들의 모습(빛, 색채)이 드러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빛(색채)으로 상기시켜 준다. 온통 갖가지 빛들로 채워진 화랑이 햇빛으로 환하게 드러나면서 눈부시게 하는 작품이다. 이 시 역시 그 구조가 전통적 비유법과 거리가 먼 하이퍼적인 작품이다. 시상의 전개가 의식의 흐름인 수직적 연상법과 함께 각 이미지들이 리좀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이미지의 집합 구조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형식을 보면, 제1연은 ‘그림 속의 뱀-> 풀밭을 떠나온 뱀-> 아스팔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그 위를 달리는 화물차들-> 햇빛에 번쩍거리는 뱀’과 같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수직적 구조를 이루면서 욕망과 문명에 얽힌 온갖 상념을 떠올려 준다. 제2연에서는 ‘침대 위 30cm 로 줄어든 ‘나’-> 새벽에 ‘넌 누구니?’ 질문하는 옷걸이-> 밤사이에 뱀이 된 나’로 전개되면서, 뱀처럼 팔과 다리가 없어진 채 몸통만 남은 지난 밤 ‘나’의 모습이 욕망 덩어리(뱀)였음을 암시한다.제3연에서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아침의 햇빛-> 다시 팔과 다리가 생기면서 커지는 몸-> 거울에 반사되는 빛들(빛 A, 빛 B, 빛 C......) -> 구름의 살 향기’-> 자동차의 경적-> 전화 벨소리가 되는 빛’으로 전개된다. 지난 밤 침대 위의 육욕에서 벗어나 아침을 맞았지만 또 다른 욕망(빛A의 관념, 빛B의 현실, 빛C의 생활)이 햇빛에 드러나는 삶의 아이러니를 다양한 빛들로 표출함으로써 환상적인 수직적 구조를 이룬다.제4연은 결구로,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대는 허공’으로 이어지면서 역시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수직적 구조가 된다.이 시의 수평적 구조도 앞의 작품(헤드라이트)과 같이 의식의 흐름에 의한 이미지들과 함께 ‘그림 속 뱀/아스팔트/달리는 화물차/번쩍이는 햇빛//침대 위/팔다리가 없어진 나/넌 누구니? 묻는 옷걸이/밤 사이 뱀이 된 나?//나를 일으키는 아침 햇빛/팔다리가 생기고 몸이 커지는 나/사방으로 뻗어가는 빛/A, B, C의 여러 빛들//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대는 허공’ 등으로 이미지들이 각기 단절된 채 수평적 리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다음으로, 이 작품의 각 연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본다. 제1연에서 심 시인은 그림에서 촉발된 또 다른 환상을 떠올린다. 즉, ‘뱀들은 풀밭을 떠나 화물차들이 달리는 금간 아스팔트 위에 서로 엉켜 고무락거리면서 햇빛에 번쩍거린다.’ 즉, 원초적 세계인 ‘풀밭’을 떠나 ‘금간 아스팔트(도시문명)’의 한가운데에 ‘바들거리며 고물고물하는 뱀들’의 형상을 통해 현대인이 구차하게 살아가는 문명 속의 욕망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본디 뱀은 그 형상이 남근과 닮음으로써, 성적 리비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리비도 덩어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대는 징그러운 형상이 상기되는 이 구절은 뱀이 떠올려 주는 흉측한 현대문명적 악의 모습이다. 제2연에서는 화랑에서 돌아온 날 밤 침대 위에서의 일을 회상한다. 서정적 자아(‘나’)가 뱀이 되었던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 밤사이에 ‘나’는 뱀이 되어(?) ‘넌 누구니? 하고 자신에게 질문한다. 1연에서의 집단적 욕망이 2연에 와서 개인적 욕망으로 치환됨으로써, 악에 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때 몸이 30cm로 줄어들고 팔다리가 없어졌다는 의식적 진술이다. 즉, ‘팔다리가 없는 뱀’의 형상(욕망덩어리)만 남은 스스로의 모습을 옷걸이가 내려다보며 ‘너는 누구니?’ 질문하는 대목인 바, 이는 인간 본능의 원초적 본질에 관한 궁극적 질문이다. 제3연에서는 육체적 욕망(밤,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햇살 가득한 현실로 돌아온 서정적 자아인 ‘나’는 인간의 몸(이성?)을 회복하고 재생된 현실의 세계인 빛들(빛A, 빛B, 빛C....) 속에 던져진다. 그 빛(색채)들은 인간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상상하는 구름의 향기(꿈과 이상)나 자동차 경적(도시 문명적 현실), 또는 전화 벨(생활)로 구체화 되어 거기 매몰된다는 의미이다. 제4연에서는 그녀가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간다’가 아니라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로 (주관적 서술을 피하고) 객관적 진술로 표현한다. 인간인 그녀가 뱀과 함께 들어간다고 하는 ‘빛의 향기’란 무엇인가. 동원되고 있는 온갖 빛은 개별적 사물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향기’와 결합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물들마다 지니고 있는 의미망을 거느리는 현실적 관념(매혹하는 향기)을 떠올려 주기 때문이다. 그 관념 속으로 그녀는 뱀들과 함께 다시 들어가 함몰되고 만다는, 속악한 삶의 되풀이를 상기하게 한다. 결국, 창밖 허공에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온갖 관념들)이 혀를 날름거리며(욕망을 유혹하며)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다양한 내용을 관념적 진술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다만 빛(색채)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 이미지의 집합체로 상기시켜 주는 하이브리드적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가 품고 있는 비밀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뱀의 등장이 그렇다. 뱀이란 무엇인가? 뱀이 떠올려 주는 전통적 상징을 전제 할 때, 이 시는 의미심장함을 지닌다. 성서적으로 뱀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이브)를 타락시킨 원흉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게 유혹함으로써 인간에게 원죄를 심어 준 장본인이다. 뱀(남근)은 먼저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임신)시키고,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다시 타락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경자 화백의 작품에도 남성이 아닌 ‘여인’이 머리에 뱀을 이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수컷)을 유혹하는 것은 여성(암컷)이다. 범박하게 말해서 수컷(아담)은 영원히 암컷(하와)에게 유혹을 당하는 괴로운 존재일 뿐이다. 성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이 작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뱀과 그녀」라는 제목이 그 이유가 된다고 하겠다. 인류의 원죄인 ‘선악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선악과’라는 달콤한 열매는 문명사적으로 볼 때 다름 아닌 ‘언어’를 상징한다. 직립한 인간만이 발음해서 사용할 줄 아는 ‘언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 ‘이것과 저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는 ‘분별지’(사물을 분별하게 하는 능력)를 갖게 함으로써, 상호간에 의사를 소통시켜 정보(지식)를 교환하거나 충돌하게 하고, 그것을 축적하고 전파해서 편리한 문명과 고급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도 하지만, 또한 언어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지닌 것과 같은 원초적 삶의 단순한 지혜(단순한 욕망)가 타락되어, 다른 동물과 달리 엄청난 욕망으로 인한 갈등으로 전쟁과 살육과 시기와 모함, 싸움 등, 온갖 죄악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디 인간(아담과 하와)이 살았던 천국(에덴동산)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이전, 즉 ‘언어’ 사용 이전인 인류의 원초적 자연상태를 의미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성서적 상징을 떠나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직립한 동물인 인간의 두개골 형태(90도의 안면각)를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구강 속에 분절음(자음과 모음)인 언어를 발음할 수 있게 잘 발달된 조음기관(입술, 치아, 잇몸, 혀, 입천장, 목구멍)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여타의 동물들(안면각이 45도)은 찌그러진 구강 안에 인간과 같이 발달한 조음기관을 갖고 있지 못해서 목청을 울려 나오는 모음을 조음하여 자음을 발음할 수 없어서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분절음(언어)을 발음하지 못한다. 언어 사용이 인간의 뛰어난 능력(언어의 순기능)이지만, 반면 언어의 역기능(죄악의 양산) 때문에 인간만 에덴(언어 이전의 세계)에서 쫓겨났고, 결국 엄청난 고통과 질곡 속에 비극적 존재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뱀을 소재로 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시인으로 하여금 선과 악이 갈등하는 인간의 근원적 모순을 상상하게 하고, 그것을 의식의 흐름과 리좀의 복합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 시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전문 제목에서부터 ‘검은 자전거, 파란 비닐봉지, 노랑 풍선, 빨간 모자’의 검은 색, 파란 색, 노란색, 빨간색 등이 시선을 끄는 이 작품은, 첫째 연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는 아이들의 동영상을 제외하면 우체통이 있는 도시의 골목, 한여름의 적막한 풍경화다. 정적 분위기가 한 폭의 정물화처럼 펼쳐지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을 뿐,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이 지나가 버린 다음의 고요가 제시되고 있다.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을 느끼게 하는 이 구절은 사물들의 색채가 적막 속의 공포를 느끼게 할 뿐, 다른 어떤 의미도 상기하기 어렵다. 8월의 태양에 가슴을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이 무의미한 정물화의 마지막 풍경으로 제시되어 있다. 1차적으로 보면 역시 의식의 흐름 수법에 의해 수직적 이미지 군으로 이루어진 환상적 풍경화라고 하겠다. 먼저 그 수직적 구조를 살펴본다.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 햇빛에 반짝이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는 아이들->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번쩍이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 // 종일 번쩍이는 플라스틱 지붕->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 청계천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나->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0의 감각에 집중해 보라-> 하늘로 떠가는 자신을 느껴라-> 노랑 풍선이 되어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보일 거다 // 8월의 풀밭-> 빨간 모자의 벌거숭이 아이들이 모여 노란 나팔을 불고-> 아이들이 파란 페인트통을 굴리며 놀고 있다고?->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 꿈의 식탁에 빨간 꽃잎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다고?->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왜 시인은 한여름 도시 골목에 펼쳐져 있는 사물들의 눈부신 색채에 주목하고 있는가. 을지로와 여의도 쪽을 0이 된 몸으로 날아다니는 환상에 빠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아이들이 등장하는 동영상 한 폭과 같은 이 작품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한 폭의 정적 풍경화가 제시된 1연을 이어받아, 2연에서는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된다. ‘하루 종일 번쩍거리는 파란 지붕’이 떠올리는 온갖 관념적 권위와 위엄은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곧, 그 환상은 배경인 을지로 상공에 날아가는 반투명의 비닐봉지(상품 꾸러미?)처럼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억압된 욕망의 해소?)이다. 번쩍이는 지붕(권위, 권력?)의 모습에 눈을 감고 환상 속에 공중으로 떠오르며 몸무게를 줄이면 0이 된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무엇을 지워버리는 꿈을 꾸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번쩍거리는 파란 지붕 그 자체이다. 뿐만 아니라, 1연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검은 자전거(노동?)의 주인이 나타나 노랑 풍선이 되어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라니, 이것은 또 무엇인가. ‘여의도 쪽 상공(권위)’이 0이 될 거라는 부분에서 지독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파란 지붕이 떠올리는 허공의 이미지, 즉 초월적 권위와 여의도 쪽의 가식적 행위의 대조가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란 지붕 등, 번쩍이는 사물들의 풍경에 눈을 감고 몸무게가 0이 되는 환상을 체험하라고 권고하는 마지막 부분은 경구를 이루면서 다음에 발가벗은 아이들(순수, 동심)로 나타난다. 제3연에서는 1연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간 아이들이 발가숭이가 되어 다시 등장해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놀고 있다. 역시 ‘물장구치고, 아이스크림처럼 달디단 빨간 꽃잎 요리를 먹으며, 한여름 낮잠의 신비함을 맛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환상일 따름이다. 아이들이 부는 ‘노란 나팔’은 검은 자전거 주인의 노랑 풍선과 연결되고, 아이들이 굴리는 ‘파란 페인트 통’은 ‘파란 지붕’과 연관되지만, 아이들의 동심도 곧 회의로 나타난다. 그래서 ‘뱀(욕망)과 놀고 있다고요?’, ‘신비한 맛이라고요?’처럼 결국 허망한 환상으로 치환되고 만다는 몇 개의 장면으로 채색된다.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의 색채와 함께 ‘을지로’와 ‘여의도’라는 특정 공간이 제시된 상황에서 다선적 환상으로 희미하지만 현실적 의미를 떠올려 준다. (여러 색채들이 하늘 또는 을지로나 여의도와 관계가 있음을 간파할 때, 검은 자전거-노동자, 어둠, 절망; 파란 지붕-국회, 권위, 권력; 빨간 오토바이, 빨간 모자-열정, 순수; 노랑 풍선-시민, 데모대; 을지로-일상 공간, 현실; 여의도-국회, 정치권력; 아이들-순수한 시민; 꿈의 식탁-미래 생활 등으로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사회 현상에 관한 컨시트적 다양한 심리가 환상적으로 표현된 작품으로, 현실과 매우 밀접한 의미를 지닌 일종의 풍자시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억압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풍자적 환상이 지배하는 작품으로, 역시 다선적 이미지 군으로 복잡하게 짜여진 하이퍼시이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 시 「오토바이가 달린다」 전문 이 시는 ‘달린다’는 동사가 여러 시상을 각각 이끌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제1연은 ‘달리는 푸른 오토바이-> 푸른 (오토바이) 소리-> 무너진 건물-> 피 흘리는 시신들-> (시신이 덮여 있는) 바그다드의 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이란 단순한 수직적 구조를 이룬다. 뒤이어 2연과 3연, 4연, 5연 모두 같은 수직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각 연과 연은 상호 단절된 다시점의 이미지로서, 작품 전체를 볼 때 수평적 구조를 이루어 결과적으로 거시적 리좀을 형성한다. 심 시인의 하이퍼시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인 연과 연이 리좀을 이루는 한 사례라 하겠다. 다음으로, 작품의 의미를 찾아 서술해 본다. 연이어 등장하는 푸른 오토바이, 빨간 오토바이, 하얀 오토바이, 노란 오토바이들이 각 연을 마치 오토바이 무리가 떼 지어 달리는 영화의 장면처럼 동적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하는 현장감과 함께 극적 반전 및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 첫 연의 푸른 오토바이는 ‘푸른 소리를 뿌리며’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의 파괴된 거리를 달린다. 오토바이의 (요란한) ‘푸른 소리’와 시신이 흘린 ‘붉은 피’의 청각과 시각의 극적 대조로 충격을 느끼게 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된 바그다드의 끔찍한 실상을 부각시킨다. 참상이니 비극이니 하는 어떤 관념적 서술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오직 푸른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색채감과 함께 달리는 ‘푸른 오토바이’의 요란한 푸른 소리(폭발음)가 위기적 상황을 고조시킬 뿐이다. 제2연에서 빨간 오토바이는 1연의 푸른 오토바이와 달리, 지극히 평화로운 장면을 이끌며 달린다. 1연과 2연은 서로 단절된 이미지로,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리고’,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오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1연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공존이란 현대사의 끔찍한 아이러니를 제시해 준다. 제3연에서는 장면이 다시 바뀌어 ‘하얀 오토바이’가 등장한다. 오토바이의 하얀 색과 토마토 즙의 붉은 색이 대조되고, 붉은 토마토 즙을 몸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도시를 떼 지어 달린다. 토마토를 트럭에 싣고 나와 서로 던지면서 축제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의 광적인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바,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과 평화라는 무의미한 놀이의 부조화를 깨닫게 한다. 제4연에서는 노란 오토바이가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이어 5연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는 오토바이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마지막 행에서는 ‘그’가 등장하여 손에서 리모콘을 놓아 버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상과 같이, ‘달린다’는 동사가 이끄는 여러 장면들로 제시된 이 작품은, 마지막 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적 자아인 ‘그’가 리모콘을 손에 들고 TV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바꿔가며 보고 있다는 일견 단순한 내용이다. 바그다드의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장면과 평화로운 해변 풍경, (스페인의) 광적인 토마토 축제 등이, 각각 단절된 채 아무 의미 없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인이 어떤 관념적 서술도 없이, TV 화면에 나타나는 현대의 복잡한 시대상을 냉철하게 제시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아무 선입견도 없이 제시된 장면들에서 독자는 비극적 세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심리를 읽을 수 있으며, 어떤 관념어의 개입도 없이 냉철한 시선으로 비극적 시대상의 아이러니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 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 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갑게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 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의 숲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시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전문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 시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 전문 위의 두 작품은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메멘토모리’란 말이 있듯이, 비록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는 경구이다. 죽음을 다루는 시가 많지만, 대부분 죽음에 관한 일반적 관념 때문에 죽음에 관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평범한 진술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앞의 시는 40대 한 남성의 죽음(병사)을, 뒤의 시는 철길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단독자인 ‘그’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40대의 남성은 검붉은 색인 미라의 목관으로, ‘그’는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 두 사람 다 ‘검은 색’의 세계로 가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검은 색은 죽음이나 저승을 상징한다. 두 사람의 죽음이 모두 ‘검은 색’의 세계로 갔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40대 남자의 죽음은 생전에 비록 찬 밥덩이를 꺼내 데워 먹으며 산 가난한 가장이지만, 뒤의 ‘그’는 단독자다. 40대는 병원 응급실에서 가족이 울며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철길에서 홀로 기차에 치어 급사했다. 가장인 40대의 죽음은 검붉은 미라로 연결되고, 단독자로 비명횡사한 ‘그’는 ‘눈물 없는’ 세계로 갔다. 시인은 두 사내의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니, 가정을 가지고 병을 앓다가 병원에서 정상적 환경에서 죽어간 전자를 ‘검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이란 제목으로, 가족도 없고 홀홀단신 홀로 살다 간 후자를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둘기’란 제목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곧, 두 가지 삶에 대한 시인의 생사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죽음이지만, 망자가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삶의 차이가 죽음의 차이로 치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절차에 따라 가정을 갖추고 정해진 순리대로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서 검붉은 얼굴의 미라로 지상에 묻혀 흔적을 남기는 삶과, 생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를 두루 거쳐보지 못한 채 갑자기 떠나간 죽음 중에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사관의 대조인 것이다. 같은 죽음이지만, 40대의 남자는 ‘밥의 살을 나무젓가락으로 찔러보면서 웃으며,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는 반면,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난 단독자인 ‘그’에게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자는 땅에 묻히고, 후자는 파란 하늘로 갔다는 차이에서 시인은 차라리 후자의 홀가분한 죽음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3. 심상운 시인의 작품에서 색채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심 시인의 작품에서 또 하나 다른 특징을 지적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작품 대부분이 어린이의 동심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동심으로 바라보는 사물들은 의미(관념) 이전의 색채 인식이 우선될 것이며, 작품이 의미와 거리가 먼 색채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그 이미지가 결국 동심의 세계와 같이 된 것이다. 대상에서 관념을 무화시키려다 보니, 무의미한 색채어를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이고, 한편 사물에서 관념을 배제한 채 색채로 덧입히다보니, 기성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담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 시 「파란색 기차」 전문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이 작품도 심상운 시인의 시적 특징 중 하나인 ‘관념 이전의 순수(동심)의 세계’를 입증해 준다. 독자를 동심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이 시는 사물을 대하는 어린이의 일차적 느낌이나 마음 상태는 어떠할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심리는 어떻게 움직일까, 하고 상상하게 해 준다. 역시, 파란색 기차, 노란 불, 허연 거품, 초록별, 무지갯빛, 검은 물개, 5월의 햇빛 등의 색채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어린이 놀이공원의 풍경을 단순히 묘사한 것처럼 보이나, 시행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단, 파란색 기차를 타고 허공(하늘)을 날아가는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를 보며 시인은 갖가지 환상을 떠올린다. 여름밤에 노란 불을 켜고 여러 나라를 거쳐 은하수로 가는 그림 같은 꿈이 그려진 그림 속 아이들과, 환상의 세계 밖인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현실과 환상이란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후반부에서, “나는 먼 은하수로 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고 하면서, ‘나’는 그림 속 하늘로 가지 않고 차라리 놀이동산에서 파란 기차를 탄다고 말한다.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허황된 별나라 여행을 하는 젊은 화가들’이 되기보다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싶다는 심리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의 그림으로 들어가는(지도하는) 화가를 바라보면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는 지상 놀이의 풍경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아이들 나라인 놀이공원의 두 가지 꿈을 동시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과 같이, 심상운 시인 대부분의 작품이 감상자에게 동심의 세계로 다가오는 까닭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작에서 심 시인이 힘써 의도하는 관념의 극복이 초래한 결과라고 본다. 관념으로 때 묻은 언어에서 그 관념을 지우기 위해 순수 색채어를 동원하다 보면 실제로 관념(의미)이 사라지게 되고, 자연히 관념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과 같은 환상에 몰입되게 마련이다. 순수한 동심의 표현은, 역으로 일상적 관념에 길들여진 독자들을 동화적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줌으로써, 때 묻은 관념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심 시인의 무의식적인 욕구를 읽을 수 있다. 이상으로,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지와, 그 억압된 욕구의 무의식적 해소라는 심리적 기제를 다양한 색채어에 의해 표현한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를 살펴보았다. 관념이 제거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심리가 결과적으로 동심과 같은 순수한 시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며, 그 세계가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라는 것이 이 글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그 밖에, 본고에서 살펴보지 못한 일반 서정시 61편도 변함없이 ‘관념 지우기’를 위주로 창작되었고, 역시 색채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하이퍼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10    하이퍼시, 어디까지인가 / 16인의 좌담- 댓글:  조회:1270  추천:0  2019-03-10
하이퍼시, 어디까지인가                              16인의 좌담-「시문학」2011년 1월호 발표       주제: 하이퍼시의 특성과 가능성 사회: 심상운 기록: 이선 날짜: 2010년 11월 19일, 오후 3시 장소: 미스터 브라운 찻집 (시문학사 근처) 참석한 사람들: 문덕수, 김규화, 심상운, 신규호, 유승우, 최진연, 정연덕, 안광태, 송시월, 이솔, 손해일, 조명제, 김기덕, 위상진, 이선,   Ⅰ. 하이퍼 시를 쓰면서 느낀 시적 감각과 일반 시와의 차이점     심상운: 에서 기획한 특집은 2009년 11월호부터 2010년1월호까 4회에 걸쳐 82편이 발표되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확산 하이퍼 시에 참여한 시인들이 모였습니다. 하이퍼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하여 하이퍼시의 정착과 미래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격려 말씀을 듣도록하겠습니다. (그때 유승우 시인이 들어옴) 문덕수: 저는 시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열이 오르는 그런 사람입니다.(모두 웃음) 나중 에 시간이 되면 제가 하이퍼 시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상운: 유승우 시인 오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이 토론을 위해서 설문을 작성해서 E-mail 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먼저 하이퍼시를 쓰면서 느낀 시적 감각과 일반시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구 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더 좋겠습니다. 먼저 말문을 열 분 말해주세요. (주위를 둘러보며) 조명제: 하이퍼시의 감각에 대해서 제가 잠깐 말씀드리면 소리의 울림을 가지고 시를 쓸 때, 과거의 시들은 소리가 배경으로만 작용하였지만,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울림과 소리 가 그냥 시의 배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고, 시적정보를 새롭게 촉발해 나갑니다. 즉 시를 입체화시키지 않느냐 하는 관점에서 생각했어요. 이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시와 하이퍼시가 어떻게 다른지 위선환의「바위」와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를 읽고 일반시와 하이퍼시의 감각의 차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百日이 지나고 지나면서 보았다 거기에 계셨다 그 해가 지나고 지나면서 보았다 거기에 계셨다 몇 해가 지나고 지나면서 보았다 거기에 계셨다 여러 해가 지 나고는 햇수를 잊었다 허겁지겁 찾아뵈니 아직 거기 계셨다 벼랑같은 몸으로 깎아질러 계셨다 발바닥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려놓고 허리뼈를 곧추세운 앉 음새 그대로 거죽이 헐고 광대뼈가 부스러지는 큰 바 위 몸으로 들어앉아 계셨다 큰절 받고 잔기침하며 앉 음새를 고치시는 때, 한번 더 당겨 얹는 두 무릎에서 우두둑, 힘줄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 위선환, 「바위」 전문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김규화, 「한강을 읽다」 전문   위의 시 위선환의「바위」와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와 하이퍼시를 비 교하기 위하여 예제로 든 것입니다. 위선환의 시가‘바위’를 대상으로 한 아버지에 대한 비유의 시라면 김규화의 시는 ‘한강’을 대상으로 한 어머니에 대한 시입니다. 위선환의 시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주제 중심으로 내부로 심층적으로 파고듭니다. 그러나 김규 화의 시는 외부로 확산적으로 흘러가며 확장됩니다.「바위」는‘주제’중심의 ‘대상’을 중 심으로 한 ‘의미화’시며 「한강을 읽다」는 ‘사물 중심의 풍경화 기법’의 시입니다.「바 위」가 ‘정지된 그림’이라면 한강을 읽다」는 ‘움직이는 그림’입니다. 운동성을 획득하고 장면전환을 합니다.「바위」의 구조는 고정적이며 답답하게 독자를 설득하려 하려한다면 「한강을 읽다」는 풍경화 기법으로 시원하게 확장적으로‘보여주기’합니다. 하이퍼시는 확 실히 차별화 되는데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운동성을 줍니다. 정지된 풍경화가 아니라, ‘움직이는 풍경화’입니다. 움직이는 그림은 새로운 감각과 생동감을 줍니다. 또 한 「한강을 읽다」는 ‘시점’을 거꾸로 하여 변화를 줍니다. ‘이젤을 거꾸로 세워’ 한강 이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무생물인 ‘한강’이라는 사물에 행동과 의식을 넣습니다. 상상 력의 확장은 하이퍼시의 특징입니다. 심상운: 이선 시인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하이퍼시와 일반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거 같습니다. 다른 분 준비해 온 것 발표 부탁드립니다. 송시월 시인 준비 잘 해오셨나요. 송시월: 준비는 잘 못했어요. 편집을 하다보니까 아무것도 생각을 못했어요. 일반시에 비해서 하이퍼시는 링크되어 사방으로 건너뛰는 리좀 구조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에 주로 언어 감각으로 씁니다. 이것은 간단한 제 하이퍼시 쓰는 방법입니다. 심상운: 김기덕 시인 말씀해 주십시오. 김기덕: 저는 하이퍼시에 대해서 이해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존 시 쓰기에서의 변화를 위해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그 주변의 어떤 것을 대치시켜 가지고 다 른 이미지로 확산해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 쓸까 하는데, 시를 써보면 잘 안돼서 제가 제 스스로 많이 보완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오늘 많이 배우려 합니다. 김규화: 저도 일반시와 하이퍼시의 다른 점은 시적 감각이라고 했지만, 우선 일반시는 선조 적, 선형적이고 시간의 순서대로 원인결과가 있고 순리대로 나가는 데, 하이퍼시는 원인 과 결과를 다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독자와 소통이 어렵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 조상으로 통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심상운: 비선형적이고 다양하지만 무언가 통일된 것이 있어야 소통이 될 수가 있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럼 신규호 선생님… 신규호: 내가 쓰는 시에 대해서 구태의연한 것을 느꼈어요. 관념적인 것을 벗어날 수 없고, 감정적인 것을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책도 읽고 하이퍼시에 참여해 보자 생각했어요. 일차적으로 하이퍼시를 어떻게 써야 될지 잘 모르지만 내 시가 변해지는 걸 느꼈어요. 거 기서 잘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해 보니까 역시 나이가 먹어 그런지 자꾸 관 념이 들어가요. 그걸 완전히 벗어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걸 일반시와 비교한다면 어 쨌든 시적 리듬이라는 것은 있어야 되는데 리듬을 살리기가 어렵고 산문적이 되기 쉽고… 그래서 어쨌든 하이퍼시도 시니까 정서적인 감흥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게 어려워요. 산 만해지기 쉽고. 시의 흐름이. 그게 고민이예요. 어떻게 하면 하이퍼적인 느낌을 살리면서 도 기존관념을 벗어나 시적 정서를 살릴 수 있을까? 초점이 기존관념이 아닌, 고정관념이 아닌 어떤 정서적인 초점이 작품 속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심상운: 최진현 시인 최진연: 제가 언젠가 에 발표를 했습니다만 심상운 시인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를 정독하고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하이퍼시를 연구하고 그쪽으로 쓰다보니까 과거 내가 쓰던 시가 하이퍼시가 아니었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링크라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다 상관성이 없는 이미지의 집합, 주제는 가상이죠. 거기 다양한 선이 집중해 있는, 초점이 거기 포커스 맞춰가지고 통일성은 없이, 잘 영상언어로 얽어놓는 컴퍼지션(com·po·si·tion)이지요. 저는 처음부터 그런 시를 많이 써왔어요. 젊어서부터. 내가 조금만 적응하면 하이퍼시를 쓸 수 있겠구나 했어요. 두 번째는 아까 신규호 시인이 얘기를 했지만은 시에서 관념을 제거한다는 거, 그 속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녹여낼 수 있는 거, 그거 제가 제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시적 특성을 살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녹여 넣을 수 있겠는가 하는 거지요. 송시월: 최진현 시인의 옛날 시 「그래픽」이 하이퍼 적인 시였어요. 최진연: 네,「그래픽 1」이 그렇습니다. 위상진: 하이퍼시를 말할 때 의식과 인식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요. 그 다음 긴장감을 유 지한다는 거예요. 같은 음식도 담는 그릇에 따라서 인식과 의식이 달라지듯이 하이퍼를 하나의 그릇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릇에 따라서 소스와 다른 부수적인 것이 달라져요. 자 유로운 시공간에 자신을 내던질 수가 있었어요. 소재는 오히려 일반시보다 잡기가 용이한 데 비해 뜬금없는 시공간을 흐를 우려가 있기에 ‘이음 쇼트’(공백을 채우면서 다른 시공 간으로 이동하는 작업)를 장치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시각과 청각에 전달되도록 쓰려고 했어요. 이미지들의 연속성, 링크로 인해 귀착 지점의 예상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어요. 서정적인 부분을 배제하다 보니 심정적 무드가 닿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두고 지나치는 느낌이었어요. 또 한 가지는 시점과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가령 생화를 일반시라 한다면 하이퍼시는 드라이플라워 기법으로 표현을 하지만 생화 같은 느낌이랄 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법적인 요소를 얘기를 한다면 몽타주, 쇼트-시작점, 화자 와 독자와의 시점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내가 담고자 하는 화면을 프레임에 서 따내는 부분의 차이를 일반시와의 차이점이라고 여기며 제 나름대로 써왔어요. 손해일: 나는 하이퍼시에 대해 오남구 시인에게 많은 얘기를 듣고 현대시에서 논의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에 월평을 쓰게 되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면서 하이퍼 시의 개념을 정리했어요. 내 시도 읽기 싫고 남의 시도 읽기 싫고 식상하여져서, 하이퍼 시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중복이 될지 모르겠는데 첫째는 하이퍼시는 크게 말 하면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가 가능하다는 것. 두 번째는 언어만 가지고 시는 제한성이 있 는데 창작기법 면에서 그냥 무한대로 확장이 되는 기분,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어요. 하이퍼시 3편을 썼는데 기존시와 하이퍼시가 뭐가 다르냐? 그 거에 대해서 혼란이 오는데 비선 조적이다, 몽타주 기법이다, 구성이다, 관념적으로는 안 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시화하기에 는 상당히 어려웠다고 말씀드립니다. 김규화: 전에 전에(최진연 시인의 발언을 지칭하는 것 같음) 알고 보니 하이퍼시를 많 이 썼다고 말씀하셨는데, 하이퍼시와 일반시와 다른 점이 없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 나 중요한 점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일반시는 원인과 결과가 자연스럽게 선조적으로 선형적으로 나가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걸 파괴해버립니다. 파괴하니까 가상현실, 공상, 상상이 들어가게 돼요. 원인과 결과가 무너져서 가상현실에 들어가게 돼요. 그게 하이퍼 시와 일반시와 다른 점이예요. 하이퍼시도 일반시도 상상력이 들어가고, 엉뚱한 이미지를 결합해서 시를 만들지만...... 심상운: 안광태 시인 말씀해 주시지요. 안광태: 할 말 없습니다. 최진연: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픽」이라는 연작시를 쓸 때를 생각하면 하이퍼시 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그래픽」은 컴퓨터의 도형, 영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많이 구상하여 써서 선명한 영상이미지로 조립을 했어요. 연과 연은 연관성이 전혀 없어요. 한 행 한 행, 연 단위도 연과 연 사이의 획일성이라든지 통일성이 없어요. 문 선생님이 말하는 집합적 결합 요소가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상운: 안광태 시인 말씀 안 하실래요? 한 마디는 해야지… 안광태: 흠, 제가 하이퍼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문 선생님과 몇 분이 점심을 먹으면서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잠재의식이 흘러갈 때 시공간을 초월한다. 지금 생각과 옛날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 그것을 시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영어로는 유비쿼터스(u·biq·ui·tous)라고 말하는데, 하이퍼시가 상당히 그것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았어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미지가 그냥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어떤 연관성이 있으니까 일어나는 거거든요. 잠재의식에서 그것이 연결고리로 연결될 때, 하이퍼시가 된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습니다. 심상운: 이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보통 일반시는 주제를 지향하는 시라고 하면 하 이퍼시는 이미지를 지향하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그렇게 나누어집니다. 주제는 관념 입니다. 관념을 가지고 선관념후사물(先觀念後事物)의 시를 쓰는 사람들을 일반시인이라 고 말하면 됩니다. 하이퍼시는 관념보다 사물, 사물로만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이미지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이야기하는 시를 하이퍼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림도 움직이는 그림과 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이 있듯이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서 움직이는 이미지 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아까 안광태 시인이 무의식 공간의 개념을 말했는데 맞습니다. 자 유로운 상상이 하이퍼시의 중심입니다. 심상운: 일반시와 하이퍼 시와 차이점에 대해 부산의 김금아 시인이 보내온 글을 읽겠습니다. “일반시는 주제 의식이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다듬어 사용합니다. 함축적이고 리드미컬한 언어라는 형식 속에 주제와 정서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퍼시는 특별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적 언어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언어의 교합과 배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나 이미지가 시의 정서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반시는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압축하는 편이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공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변화되어 가는 자유로운 시적 공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시적 의미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일반시로 묘사한다면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의 현실적인 장면을 그리겠지만, 하이퍼시로 묘사한다면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의 끝에 매달린 소망과 간절함을 새로운 생명의 싹트는 병아리가 부화되는 장면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시는 대체로 쉽게 다가오고 공감대도 가까이 나눌 수가 있는 반면 하이퍼시는 조금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연덕: 저 한 마디 해도 되겠어요? 심상운: 말씀하세요. 정연덕: 하이퍼시에 들어가면 픽션이 가장 많이 떠오르고 픽션이 작품이 됩니다. 탈구조적인 모습이 나오고, 구조가 깨지는 거죠. 하이퍼시가 잘 발전을 하면 공동작업이 가능하다고 해요. 작품을 올려놓으면 작품을 자유스럽게 독자가 읽고 다른 픽션을 넣습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자유스러워지는 걸 느낍니다. 심상운: 초현실주의의 ‘아시체 놀이’가 그와 유사한 언어행위입니다. 더 말씀하실 분.... 조명제: 하이퍼시의 여러 이론적 특징을 제 체험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면 아까도 말씀 나왔습니다만, 비선형적이다. 비논리적이라는 것, 다시점, 복수시점은 옛날 시에서도 나왔습니다. 제 경우에는 다양성입니다.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경우, 사물을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비선형적인 다양성이라든가 복수시점, 다시점, 아주 이질적인 대상이나 어떤 스토리가 한 작품 속에서 링크, 또는 점핑해가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김규화 선생님 말처럼 산만할 수 있는데 마지막에는 리좀이라는 것을 잘 사용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이퍼시 발표된 것을 한참 읽다보면 상당수가 뭔가 공허해진다는 걸 느낍니다. 공허해지면서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걸 느낍니다. 공허함에서 벗어나려면 장면 장면들은 좀더 치밀한 묘사를 하여 구체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묘사를 좀 더 구체화시키면 리얼리티는 독자가 스스로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이선: 저는 환타지성과 운동성을 하이퍼시의 요소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에 운동감이 많은데, 그것은 사물에 의식을 넣은 것 같아요. 적은 동사를 써서, 문덕수 선생님의「탁자가 있는 풍경」에서도 무생물인 사물에 의식을 넣어서 상황적 분위기를 표현했어요. 최소한의 동사를 사용했는데, ‘신사의 등’이 ‘유리컵을 노려보고’, ‘재떨이가 발딱발딱’ 숨을 쉽니다. 사물성에 의식을 넣음으로써, 운동성과 환타지성을 주어 신선한 감각을 준다고 봅니다.   2. 하이퍼시의 독자 수용문제(소통)와 그 해결 방법   심상운: 하이퍼시를 쓸 때 느끼는 독특한 감각과 일반 시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은 하이퍼시의 독자수용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겠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이퍼시의 소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해일: 소통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이퍼시에 대해 거부감도 있고 이해를 못하는 점도 있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 하이퍼라는 개념하고 탈관념이라는 개념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해요. 이상(李箱)의 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 기법으로는 새롭다하는데 별로 감동이 없고, 재미가 없어요. 시가 새로우면서도, 감동을 주고, 재미라는 요소를 집어넣어야 될 것 같아요. 디지털적 기법은, 감정이나 정서 중심이 아니고 표현기법으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 걸 사용하기 때문에 정서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하이퍼라는 개념을 알면서도 헷갈려요. 감동을 주든지, 재미를 주어야 독자가 읽죠. 재미가 없으면 안 읽어요. 어디까지가 관념이고 어디까지가 관념이 아닌 지. 독자에게 다가가려면 감동과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심상운: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서사적(敍事的)으로 길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 대해서 소견을 말해주세요. 손해일: 디지털적인 걸 넣으면 산만해지고 길어집니다. 관념하고 개념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서 옵니다. 하이퍼시는 새로운 것은 눈에 띄는데 감동이나 정서가 문젭니다. 기법에서 재미가 들어가지 않으면... 요즘 젊은이들은 어록적인 거나 재미 때문에 읽지요. 그런 걸 통해서 좀… 심상운: 그러니까 서사성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말씀이군요. 이선: 저는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요, 가령 소주병들을 모아놓고 사진 찍고, 철새 떼가 집단으로 죽어 있는 사진을 찍고, 쓰레기더미가 산더미처럼 막 몰려온 낙동강 하류를 사진을 찍어서 보여줄 때, 그걸 보고 사람들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이해하잖아요? 드라이하게 상황제시를 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이퍼시도 어떤 상황을 따와서 충격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조금 오버해서 보여준다고 할까요?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가 드라이하기만 한가? 라고 묻습니다. 아니다, 죽은 새떼를 보고 살벌해서 충격을 받지만 반대적인 심리적 변화가 있잖아요? 마음이 아프고, 물도 살려야겠다, 산수도 살려야겠다고 강한 결심을 하게 하죠. 일반시들이 말로 설명하면서 웅변하고 설득하려고 한다면 하이퍼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화면을 보여주고 ‘네가 느껴라’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어요. 드라이 한 것도 소통이 됩니다. 다만 디자인과 기법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야지, 산만하게 흩어놓아서 뭔 소린지도 모르면 문제가 됩니다. 샤갈기법으로 덩어리로 이미지를 그렸느냐, 몬드리안 기법으로 면으로 나눴느냐, 선이면 선, 면이면 면 선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반추상도 아니고, 추상화도 아니고, 뭔 말인지도 모르게 섞어놓으면 안 됩니다. 시스템의 변화가 하이퍼시의 핵심입니다. 안광태: 하이퍼시의 문제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시는 소설에 비해서 간결성이 중요하거든요. 시는 간결성이 중요한데 메타포라든지…하이퍼시는 간결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손 시인은 재미를 가미해서 극복하면 어떠하냐고 했는데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송시월: 소통의 문제는 시가 되었느냐, 시가 안 되었느냐가 문제예요. 난해한 시도 시를 따라 가면 소통이 돼요. 서사적 구조를 이미지로 선명하게 갖다만 놓으면 링크될 요인이 들이 있어요. 링크될 요인들이 정서로 흘러가면 하나의 시가 될 수 있어요. 심상운: 송시월 시인은 ‘시의 완성도’가 소통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송시월: 그렇지요. 이선: 그런데 송시월 시인이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시를 쓰면서 관념적인 주제의식을 깔고 그림을 그리느냐, 무의미성으로 가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시월: 언어에는 관념이 반드시 따르는데, 새로운 관념을 발견하는 것이 탈관념입니다. 심상운: 신규호 선생님 말씀해 주시지요. 신규호: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쓰려고 하다보니까 자연히 산문적인 문장이 되더라고요. 산문적 문장으로 흐르면 관념이 들어가고, 설명이 들어가고 그래서 다시점으로 전개를 했는데도, 하이퍼시라고 하긴 뭔가 석연치 않아요. 연과 연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연 하나를 볼 때는 뭔가 서사적인 것이 깔려있고… 연과 연을 단절시키면서 공통적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연과 연을 공통으로 연결하면 소통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러면서 썼어요. 소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문제인데.... 정연덕: 소통을 자꾸 생각하면 오히려 더 소통이 안 돼요. 하이퍼시는 상하, 좌우로 왔다갔다합니다. 서양 사람이 쓴 글을 보니까 이렇게 썼어요. 시가 안 되면 거꾸로 읽어라, 그래도 안 되면 중간허리부터 잘라 읽어라. 뭐 그런 말도 있는데… 소통을 자꾸 생각하면 글이 안 돼요, 뭔가 자기 나름대로 쓰면 되는데..... 유승우: 저도 얘기해도 돼요? 순전히 들으러 왔었는데. 제일 먼저 이선 시인이 하이퍼시와 일반시의 차이점을 얘기하시면서 위선환 시와 김규화 시의 차이점을 얘기했는데 그걸 읽으면서 ‘아 요런 것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요 근래 와서 심상운 시인의 시론집을 다시 읽어봤어요. 구태의연한 시를 나도 벗어나야지. 나도 새로운 시를 써보고 싶어서 관심을 가지고 온 건데,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 그게 동적인 거거든요? 나는 김규화 시인의 「한강을 읽다」를 보면 그래요. 현대적인 것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시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걸 느끼는데… 아파트라든지 현대적인 이미지들이 있어요. 솔직히 얘기해서 김규화 시인의 「한강을 읽다」를 읽으면서 난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읽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위선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아 이사람 시 재미있게 썼다’ 생각했어요. 아까 안 시인이 잠재의식 얘기를 했는데, 시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을 쓴 것이 시’다. 인간을 얘기할 때 빙산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에즈라 파운드는 콤플렉스’라고 얘기했거든요? 콤플렉스는 사실, ‘잡동사니’거든요? 잡동사니는 ‘기억의 창고’에서 의식이 사라질 때 나타나거든요? 의식이 사라질 때…의식이 사라지는 건 언제 사라지냐? 어떤 충격을 받을 때인데, 논리적인 것이 사라지고 생명 자체로 팍 튀어나오는 것. 무의식이 튀어나오면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논리적으로 볼 때는 전부 낯선 거예요. 하이퍼시에서 낯선 것 때문에 독자와의 거리를 생각하는데, 옛날 소월(素月) 적에도 시 안 읽는 사람은 안 읽어요. 요즘 손자가 보는 만화를 봤어요. 이해가 안 되던데요? 그런데 아이는 빨리 이해해요. 현대 하이퍼시는 아예 리얼리티가 없이 아무렇게나 꾸며놓은 것 말고, 시만 되면, 이미지만 만들어지면, 이미지 자체가 시적인 논리를 따라서 리얼리티만 유지한다면 볼 사람은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11월호 하이퍼시를 읽으면서 내가 쓰는 시도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시는 관념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해가 잘 되더라구요. 신규호 시인의 시가 이해가 빠르던데 같은 세대라서 그런가 봐요. 김규화 시인, 이솔 시인도. 나는 그렇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탈관념한 게 더 팍팍 올 수 있거든요. 저는 하는 일은 해 나가 보자, 시인은 사명에 살거든요. 시는 사명이거든요. 그러니까 하이퍼시도 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김규화: 한 마디 할까요? 저는 소통문제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이퍼시를 우리들만 좋다고 하면 뭐합니까? 많은 시인들이 인정해 주고 한국 시문학의 역사에도 남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이퍼시는 비선형적이고, 공간도 자유롭고, 원인과 결과가 부서지니까 소통이 안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는 통합적 구조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이퍼시의 구조는 등산용 반찬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원래 네모난 프레임이 있어요. 거기에 자잘한 반찬통 네 개가 들어 있어요. 반찬통 이름이 ‘모듈반찬통’이예요. 이선: 와, 딱 들어맞네요. 일동: (놀라서) 모듈 반찬통… 김규화: 아, 정말 하이퍼시를 이렇게 써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반찬통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역할을 못해요. 그러나 한 개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4개가 다 있어야 비로소 역할을 다해요. 이런 게 하이퍼시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선: 저는 참 이상한 생각을 가져요. 11월호에 발표된 시를 보면서 왜 하이퍼시 발표인데 하이퍼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심상운: 소통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이선: 소통에 대한 얘기예요. 그 이유가 뭔가 생각을 했어요. 심상운 시인의 시는 이해가 잘 돼요. 심상운의 시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정해요. 다른 사람 시는 자기 생각을 자꾸 넣으려고 하는데, 방법이 서투니까 소통이 안 돼요. 제가 하이퍼 시를 보여주니까 어떤 시인이 “이선 시인 시는 젊은 독자층을 겨냥한 건데, 나이든 세대가 이런 시 읽겠어? 즐겁게 살아. 이런 시 쓰면 무덤까지 외롭게 혼자 가겠다”고 했어요. 하이퍼시를 거부하는 일반 시인들과 소통하면서 하이퍼시를 쓸 방법은 무엇일까? 제 시 「귓속말하기」는 소통되는 의미를 제공하되, ‘시스템을 바꾸자’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연에 ( ―귓속말로)라는 말을 통일적으로 넣어서 을 그렸어요. 단어는 이미 의미라는 관념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융의 무의식적 집단의식처럼. 그래서 ‘디자인’을 바꾸었어요. 또 제목을 「( )호와 ( ) 사이에」라고 하여 ( )라는 기호를 써봤어요. 또한 괄호라는 개념을 여러 개념으로 상상하여 써서 괄호의 개념을 확장하면서 무의미화시켰어요. 세상을 향한 소통과 하이퍼시의 차별화를 병행하는 게 힘들더군요. 우리가 단어를 버리지 않는 한 관념을 버리기는 어려운데, 소통을 하려면 꼭 ‘무의미’만 추구해야 하나 거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조명제: 김춘수 시인은 시를 써서 먼저 아내에게 보여준대요. 아내가 아는 척하면 버린대요. 쉽게 상대방이 이해하면 그건 자기 시로선 실패라고 했대요., 문제는 아까 송시월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난해시’가 문제가 아니라, ‘애매시’가 문제입니다. 난해시는 시적 논리를 타고 들어가면 해석이 가능한데 애매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거든요. 심상운: 김금아 시인이 E-mail로 보낸 독자수용문제에 대한 의견을 읽겠습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시도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존재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독자와 소통을 하기 위해 쓰인 시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이퍼시는 독자와의 소통을 고려하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 표현하고 존재해야 할 하나의 언어적, 시적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도 내 시를 읽고 이해해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이퍼시가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외면당하면서 혼자만의 세계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하이퍼시라는 이름으로 앞뒤 없이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마구 늘어놓는 창작으로 자기만족에 빠지기보다는 지극히 치밀하게 계산되고 보정된 언어로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를 창출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작품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혹은 현시점이 어디인지, 어떤 색깔인지 어떤 온도인지 등 가장 초보적이고도 핵심적인 이미지를 충분히 얻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하이퍼시인들의 책무이자 기쁨이겠지요.” 심상운: 제 의견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에서 독자수용, 즉 소통의 문제는 하이퍼시만의 문제가 아니고 현대시 전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소통의 문제를 지나치게 중시하게 되면 시의 예술성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예술성에는 난해성이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객관화’와 ‘의식의 내면화’가 선명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소통문제에서는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모자이크)을 통해서 현실공간에서 해방된 제2, 제3의 가상현실의 공간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일반시와 같은 기준으로 논의할 수 없는 것이 하이퍼시의 소통문제입니다. 독자들도 하이퍼시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시를 읽어야 합니다. 손해일: 소통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 그걸 오해하면 안 되고? 독자들이 워낙 모르고 오해하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기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이퍼의 핵심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고 방법을 찾자는 거지요. 심상운: 그렇게 하다가 하이퍼시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우리가 소통, 소통하는데……누구한테 하이퍼시 읽어보라고 했더니 소통 다 된대요. 어려운 거 없대요, 이선: 선생님,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요. 저희가 광고를 해야 된다는 것이예요. 하이퍼 라는 이름을 자꾸 인터넷에 올려야 돼요. 하이퍼라는 이름을 알리는 광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연덕: 대한민국 사람은 다 알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에서 하는 하이퍼시 운동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들 끼리 하이퍼시 쓰기도 하고. 도대체 뭘 가지고 하이퍼시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뭐라고 평론도 하고 하여튼 잘 되고 있어요. 심상운: 관심은 있는데 접근하는데 두려워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이선: 하이퍼시를 의식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하이퍼적인 시를 쓰는 걸 볼 때 저 절로 긴장이 됩니다. 최진연: 쌍방간에 소통이 안 되면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림 전시회에 여러분이 많이 가봤을 겁니다. 추상화를 보면서 누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잖아요? 추상화를 보면 많이 이해를 하잖아요? 하이퍼시는 감각적인 소통에서 그쳐야 돼요. 거기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감각적인 소통을 하면 돼요. 감각적인 소통을 하면서도 뭔가 여기 있구나 하는 게 나는 사상성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시를 쓰면서 삼각형을 그려요.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하나는 ‘음악성’, 하나는 ‘회화성’, 하나는 ‘사상성’을 넣어야 돼요. 나는 그 중간지점의 가장 좋은 것을 쓰려고 해요. 어디 억매이면 시를 못 써요. 심상운: 또 말씀하실 분은? 위상진: 저희가 이렇게 모여서 하이퍼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이 처음인데요. 유승우 교수님도 오늘 관심이 있어서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서로 물들여지고 무의식적으로 잦아들고 스며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독자이면서도 화자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쓴 시를 다른 사람들도 보지 않습니까? 자꾸 스며들어서. 오늘 이 자리가 하이퍼시의 출발점이 될 것 같네요. 그래서 하이퍼시의 소통문제는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심상운: 하이퍼시 운동은 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컴퓨터에 들어가면 하이퍼시에 대한 질문이 뜨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고, 그렇게 퍼져나가고 있어요. 문제는 학문적으로 시학(詩學)을 연구하는 대학 강단에까지 올라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3. 에 발표된 하이퍼시에 대한 소감   심상운: 에 발표된 하이퍼시에 대한 소감을 듣겠습니다. 이솔 시인이 준비를 많이 해오신 거 같습니다. 이솔: 우리가 시적 감각을 말할 때 뛰어나다/ 새롭다/ 참신하다 등등으로 말할 때가 많은데요, 시적 감각은 시의 갈래를 떠나서 시 쓰기의 기본이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하이퍼시의 시적감각은 하이퍼적이어야 하며 한 마디로 새롭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이퍼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색채감각인데요, 11월호에 발표된 하이퍼시 중에서 색채를 시적감각으로 한 시를 보면, 송시월「초록거울」과 이선의「빨강 스펙트럼」, 강영은의 「노란집」, 고종목의「땡볕 한 장」, 이솔의「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등이 있습니다. 「초록거울」은 녹색스프링노트, 떡갈 나뭇잎 거울에서 활활 타는 햇살, 빗방울의 전주곡, 거울 속에서 초록으로 팔랑거리는 난로 초록거울의 시적 감각을 생동감 있는 색채로 나타내고 있고, 이선의「빨강 스펙트럼」에서는 노랑, 빨강, 보랏빛 그림자, 붉은 립스틱, 립글로스, 하얀 이빨, 노랑불빛 등으로 현란한 색채를 통한 감각을 보여줍니다. 강영은의 「노란집」에서는 고흐의 그림을 통해 해바라기, 노랗게 불타는 태양, 햇볕에 그을린 여자의 젖통, 아를의 들판을 통해 고흐의 단면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고종목도「땡볕 한 장」에서 8월 한낮에 파란신호등, 빨간 관광버스, 깜박깜박 등을 통해 뜨거운 한낮의 색채감을 보여주고, 이솔은 「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에서 흙빛의 촉촉한 검정빛, 알다발 속에서 나를 보는 까만 눈, 인도 델리 짐꾼의 검은 눈, 그러나 터질듯 미끈거리는 생명의 빛을 시적감각으로 보여 주고자 합니다. 김규화는 청각적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잘 보여줍니다.「계곡 물소리」는 북한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쉬면서 시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라는 얘기를 하다가 지하철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이어지는 물소리를 감각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ㄹ’에 빠져 둑에서 흘러흘러 홍제천에 빠지는 나비. ‘ㄹ’을 안고 한강까지 누워서 흐르는, 시 전체가 흘러가는 ‘ㄹ’로 이어지는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김규화는 ‘소리’를 자유연상 하여 ‘매미소리, 개구리 울음소리, 계곡물소리’로 감각적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심상운: 색채 이미지와 소리의 감각적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좋습니다.   4. 하이퍼시의 일반론에 대하여   가. 링크, 리좀, 몽타주, 가상현실(공상, 상상) 등   심상운: 링크, 몽타주, 가상현실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더 보충할 거 있으면 말 씀해 주세요. 김규화: ‘링크로 연결된 리좀을 몽타주 기법으로 구성한 가상현실을 시로 쓰면 하이퍼시다. ’라고 정리하면 되네요. 심상운: 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합니다. 링크를 하기 위해서는 연결편집기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이퍼시에서도 링크는 이미지(장면)와 이미지(장면)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합니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은 상상 속에서 연결편집기를 가동하여 이미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하이퍼시를 쓸 때, 상상 또는 공상 속에서 이 연결편집기를 활발하게 작용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링크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것이라면, 완전히 다른 별개의 장면으로 넘어가는 클릭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위상진: 시점 내지는 관점의 차이라고 봐요. 틀을 탈피해서 다른 사물에 접목시키는 작업인데요. 가령, 생화를 드라이플라워 기법으로 표현하되, 생화로 표현하는 느낌이랄까. 표현기법으로 몽타주(시간과 공간), 쇼트(시의 시작) 시점(화자. 독자의 시점)을 달리 해야 한다고 봐요. 프레임(화면)의 범위를 어떻게 따내느냐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해요. 링크, 몽타주, 가상현실, 이건 인식의 세계에서 나오는 기법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환각상태, 착시, 저는 여기에다 데꼬빠쥬, 장면분할, 꼴라쥬를 더하고 싶다고 말씀드립니다. 색채만이 하이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뭘 가져와도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되는 기법을 생각합니다. 심상운: 더 말할 분이 없으면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시론「디지털시의 이해」를 쓰면서 컴퓨터의 모듈(module)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은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하려 할 때, 독자적 기능을 가지는 여러 개의 모듈로 나뉘는 방법입니다. 하나의 독립적이고 수평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듈은 리좀과 유사합니다. 리좀과 리좀이 결합하는 틀을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해일: 하이퍼시를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마트폰 이론을 다 알 필요는 없거든요. 그냥 쓰면 되지요. 기법적인 것은 쉽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론이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하이퍼시란 이름으로 세 편밖에 못 썼는데 어지간한 시는 이거 하이퍼시가 아니잖아? 이거 기존시하고 뭐가 달라? 되묻게 됩니다. 심상운: 제가 링크, 리좀, 몽타주 등 하이퍼시의 기법을 토론의 설문에 넣은 것은 시를 쓰면서 이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충실하면 좋은 하이퍼시가 나오지 않을까 해섭니다. 손해일: 내가 얼마 전에 인사동에 이일남 영상전시회를 가봤는데, 영상이 막 쪼개지고, 다 해체가 돼 가지고 단어 하나까지 다 분해되고, 다시 묶어서 영상을 만들고 합니다. 영상 플러스 집합 그런 시가 하이퍼시인 거 같습니다. 심상운: 앞으로 그런 시가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몽타주는 영화에서 주제와 연관된 필름을 모아 하나의 연속물로 결합시키는 편집기술을 뜻합니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 슈타인이 만든 이란 영화에서는 노동자들이 기병대들에 의해서 쓰러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이 소가 도살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주제를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한 몽타주 기법입니다. 그의 몽타주 이론은 ‘충돌의 집합’으로 요약됩니다. 이론의 초점은 개별적인 장면들을 극적으로 충돌시킴으로써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을 유도하여 새로운 관념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하이퍼시에서도 이미지 표현의 방법으로 몽타주 기법이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 하이퍼시에 도입이 되면 감동과 재미가 없다는 등의 얘기는 안 나올 겁니다. 그러나 시를 쓸 때, 하이퍼시에 육화(肉化)해서 집어넣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연덕: 화장실 다녀오느라 못 들었는데요. 리좀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해 봤는데, 리좀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서 제기된 새로운 책 혹은 질서에 대한 모델입니다. 많은 이론가들은 리좀 부분이 들어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책 『천개의 고원』자체를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적인 인쇄물로 제시하기도합니다. 그는 리좀을 구성하는 원칙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연결접속의 원리, 2, 다질성의 원리는 시스템의 어느 부분이든 지 다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구성요소가 서로 연결 될 수 있는 횡적구조이며, 상부구조에서 하위구조에 이르는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다양체의 원리는 대상 안에서 주축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연결을 늘리면 늘릴수록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된다.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늘어난 것들이 리좀으로 만들어진 구성체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연결 지점이 아니라 그 사이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4는 탈기표 작용적인 단절의 원리입니다. 어떤 곳에 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는 이론입니다. 5,6은 지도제작과 전사의 원리입니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 접속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요약하면,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조직화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라는 것입니다. 이선: 와, 자세하네요. 최진연: 교보에 가보면 책이 있어요. 그 책만 하나 사보면 돼요.   나. 하이퍼시에서 관념의 문제   심상운: 관념은 사물과 대립되는 개념의 언어입니다. 관념은 사물이 만들어주는 의식주의 실제생활이나 오감의 감각과는 차원이 다른 사유에 속하는 정신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시에서 관념시와 사물시로 분리하기도 하지만 사물과 관념은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결합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사물은 기표(記票시니피앙)의 역할을 관념은 기의(記意시니피에)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이퍼시가 순수한 기표에 시의 기반을 둘 때, 기의는 자유로워지고 확대됩니다. 관념의 제로지대에서 새로 태어난 관념은 하이퍼시가 지향하는 언어예술에서 신선한 정신이 됩니다. 그것이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관념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조명제: 언어는 언어자체가 이미 이미지와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념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관념 자체를 추구하는 시가 문제가 됩니다. 오히려 ‘무의미’라든가 ‘무관념’ ‘탈관념’을 형상화해내기 위해서는 관념은 불가피하게 수용되는 것입니다 무관념으로 시를 쓰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관념 단어 자체를 가지고 시를 쓰는 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소설을 허구의 세계라고 하는데,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 허구를 보여주는 겁니다. 손해일: 하이퍼시는 관념을 빼고 쓴다더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의미를 집어넣으면 관념이라서 혼동이 온다고 일반 독자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거지요. 우리 자체도 관념을 굳이 왜 빼려고 하는지, 관념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지 말자고요. 관념이 안 들어가니깐…빼니깐, 확산이 잘 안되고, 관념을 조금 줄여보자고 하면 의식작용이 되고, 로보트가 쓰면 관념이 안 들어갈 거예요. 감지단계, 인지단계, 인식단계, 여기까지는 탈관념이고, 여기서부터는 관념이다 하니까 일반 독자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겁니다. (모두 웃음) 심상운: 다음 말씀하실 분 최진연: 내 생각에 그래요. 관념이 사물 속에 녹아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아까 문 선생님 말씀하셨듯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관념을 사물화시키는 거죠.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가 명징성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거예요. 객관적 사물에 관념을 사물화, 관념을 노출시키지 않고 절제해서 인지단계에서 멈추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단계에서 사물화(事物化)하는 거예요. 안광태: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관념을 사물 속에 넣는 것이지 관념을 완전히 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규화: 언어 자체가 다 관념이예요. 천사와 악마 구별할 필요가 없어요. 하이퍼시에는 가상현실이 중요해요. 가상현실에서는 관념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저는 가상현실의 하이퍼시에서 굳이 관념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연덕: 탈관념 문제가 그렇게 용이하고 쉽지는 않다는 것이죠. 김규화: 아, 그렇죠.   5. 하이퍼시의 가능성   심상운: 하이퍼시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해 주십시오. 신규호: 하이퍼시는 실험 시지만, 각자 나름대로 개성이 있게 기법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험시는 일반 시보다는 낯설고 거부감이 듭니다. 예술은 실험입니다. 한번 해볼 만한 것입니다. 시대가 정보화, 다매체 시대로 바뀌면서 새로운 시를 추구합니다. 하이퍼시 운동은 의미가 있으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 운동의 모험을 수반하지만 기법개발을 해야 합니다. 하이퍼시는 선적(禪的)인 것과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선문답(禪問答) 같아요. 언어의 한계성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 선명한 시가 기대됩니다. 최진연: 소주를 마시고, 조그만 방에서 무의식 상태로 비몽사몽간에 쓰는 게 시 잖아요? 보들레르도 그랬다고 해요. 무의식 속에서 이미지(그래픽 이미지)를 구성하는 거지요. 저는 젊을 때 시를 그렇게 썼어요.(모두 웃음) 유승우: 술은 의식을 없앱니다. 단어자체가 의미와 소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를 뺄 수는 없어요.『노자(老子) 』3장에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면 추악한 것이 있다고 했어요. 선하다고 생각하고 선하게 보면 악이 있다고 했어요. 없음의 자리, 기성의 것을 제거하고 하이퍼의 길은 감각적으로 가야 합니다. 신규호: 언어로 하는 언어 지우기라고 봐요. 최진연: 의식상태가 아닌 감성의 세계, 무의식은 컨트롤이 안 되죠. 감성통제하면 이성이 떠 오르니까. 심상운: 다음은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에 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6. 마무리 시평     문덕수: 이런 생각을 해 봐요. 레이아스(稀土類 Rare earth)가 없으면 전자산업이 망해요. 중국이 이를 일본에게 안 팔겠다고 해서 일본이 항복을 했잖아요. 중국은 세계의 40%를 가지고 있어요. 삼성, LG도 레아아스가 없으면 전자제품을 못 만들어요. 일본이 중국에 항복하고 선장을 석방해서 지금 일본이 난리가 났잖아요? 원자번호 56-71번인데, 이 레아아스 같은 존재들이 금요포럼에 있어요. 11월호에 발표된 시를 보면 시인들 중에 레아아스 같은 몇몇 시인들이 있어요. 두 번째 말할 건 광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평론가나 시인들이 다 조명을 못해줘요. 각자가 자기 시의 비법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신문이나 다른 문예지에 알리고 선전해야 합니다. 하이퍼시의 리좀, 몽타주, 링크, 모듈에 대해서 비법을 공개할 게요. 이름은 말 안할게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모두 웃음) 이 시가 제일 잘 써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밤에 잠이 안와서 시를 읽다가 보니까. 나중에 다른 사람들 것도 차례차례 하나씩 소개할 생각이예요. 1연을 볼게요.   의사가 목 안으로 스텐 막대를 밀어 넣었을 때, 비는 내리고 푸른 곰팡이는 벽으로 번지고   이 시의 비밀을 풀면 하이퍼시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연에는 안과 밖이라고 하는 2개의 공간이 생깁니다. 안과 밖. 내부와 외부. 앞의 리좀, 뒤의 리좀. 병원 진찰실 안에서 나는 진료를 받고 있고,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어요. 이 장면은 별개의 사건이어서 의미상으로 전혀 연결이 안 됩니다. 인과관계가 없어요. 하이퍼시의 한 가지 기법입니다. 2연을 봅시다.   사람들은 물고기 우산을 쓰고 유령 같은 어둠은 침침한 바퀴소리를 접었다 펼쳤다   자기와 자기 바깥. 내부와 외부를 말하고 있지요? 3연을 보죠.   지하철 스크린 도어 앞에서 나는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처럼 늘어졌다   1, 2, 3연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가 연결-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 뒷부분은 필요 없어요. 버려요. 전혀 관계없는 두 개의 이미지. 서론, 본론, 결론과는 다른 통합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비밀장치, 비법개발을 가진 레아아스의 시인들은 자존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김규화: 앞으로 자기 시작법을 공개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문덕수: 요즘 잠이 안 와서 시를 읽는데 시를 이야기 하면 흥분해서 열이 막 올라요. 내가 얼굴이 벌개지고 열이 올라와요. (모두 웃음) 내가 흥분해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상운: 오늘 열심히 토론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준비도 잘 해오시고요. 나머지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회식자리에서 또 하기로 하고 이것으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9    [스크랩] 문학용어 바로 알기 댓글:  조회:1431  추천:0  2019-03-10
문학용어 바로 알기 *가면극(假面劇) :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 정교한 형식을 지닌 궁정 오락으로서 시극 음악 무용 화려한 의상 무대 장관으로 구성. *가전 (假傳) : 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체로 서술한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로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으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다. *가전체 문학(假傳體 文學) :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 일명 의인 전기체.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켜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가전 혹은 의인 전기로 불림. *갈래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장르.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가정 소설 (家庭小說) : 구소설의 내용적 분류의 하나 소재는 가정 생활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그린 소설 *각색(脚色) : 연극 용어 소설이나 논픽션 등 어떤 원작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한 대본으로 바꿔 쓰는 것을 말함 *갈등(葛藤) : 희곡이나 소설 등에서 의지적인 두 성격의 대립 관계를 뜻한다. 인물과 인물 인물과 환경 사이의 갈등을 외적 갈등이라 하고 한 인물 내부의 대립적 욕구로 인한 갈등을 내적 갈등이라고 한다. *감상주의(感傷主義) : 어떤 원칙을 주장하는 뜻에서 주의가 아니고 감정 과정의 의미에서 주의이다. 슬픔이나 기쁨 등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러한 정서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데서 생긴다. *감정이입(感情移入) :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집어넣어 대신 나타내는 표현 기법 상의 하나,.시에서 많이 쓰인다.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을 이르는 말. 엘리어트가 처음 말함. *경향 문학(傾向文學) : 순수 문학이 아닌 의식적으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계급적인 것을 취급하여 대중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계몽하고 유도하자는 목적 아래 쓰이는 작품 교훈시나 프로 문학이 속함 *계급주의(階級主義)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곧KARF가 주창 실천하려 했던 문학 사상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에 의한 계급 혁명을 선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주의 이념 *계몽주의(啓蒙主義) : 서양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왕성했던 사조로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다. 계몽주의 문학은 작가가 교사 선각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합리성에 호소하여 가르치려 하는 일종의 교훈주의 문학이다. *고전주의(古典主義) :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미를 전범으로 하여 17.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경향 개성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면 일반 미를 지향한다. *구비문학(口碑文學) : 문자로 정착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문학이다 말로 되었고 구연되며 공동작이며 민중적 민족적인 것이 특징이다.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교술시(敎述時) :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 설명하여 알리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 *구조(構造) : 내부 요소들이 짜임 또는 그러한 짜임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 작품의 전체 *구조주의(構造主義) : 문학 작품을 작품 속의 여러 요소들의 상호 관계로서 조직된 구조로 보는 연구 방법론 이 사상은 프랑스의 언어 학 이론에서 나왔다. *기록 문학(記錄 文學) : 보고 문학이라고도 함 현실에 일어나 사건의 진전이나 사물의 상태를 충실히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 문학 작품 *기지(機智) : 지적인 것이며 언어적 표현에 의존한다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압축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 *기호학(記號學) : 문학 작품을 하나의 기호 체계로 보고 이를 분석하는 문학 연구의 한 방법 작품의 언어 분석을 통한 문화 요서의 분석 문체론적 접근 의미론에 따른 분석 등을 행한다.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 고려 가요에서 남녀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그린 노래를 조선 시대 한학자들이 업신여겨 일컫던 말 *낭만주의(浪漫主義) :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유행한 문예사조의 하나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것으로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풍만해 감정 표출을 특징으로 한다. *내재율(內在律) : 자유시나 산문시에서처럼 문장 안에 미묘한 음악적 요소로 잠재되어 있는 운율 외형률과 대조가 된다. *내적 독백(內的獨白) : 20세기 심리 소설의 한 서술 방법으로 인물의 심리 적 독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외적 사건을 그리는 기교 *내포(內包) : 사전적 의미가 작품 구조 내에서 새롭게 이루어 내는 의미 함축적 의미 *농민 소설(農民小說) :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민의 문제점을 파헤친 소설 *다다이즘 : 1차 세계대전 중 나타난 전위적 예술 운동에 대해 시인 트리스탄 짜라가 붙인 이름 전쟁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합리적 기술 문명을 부정하여 일체의 제약을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과격한 실험주의적 경향 뒤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다의성(多義性) :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암시적으로 여러 갈래의 의미를 드러내는 문학 언어의 한 특성. *다큐멘터리 : 허구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전개에 따라 구성된 기록 문학에서는 기록 문학을 뜻한다. *대단원(大團圓) : 연극에서 갈등이 해소되어 결말을 짓는 마지막 장면 결말 파국 *대본(臺本) : 연극이나 영화의 기본이 되는 각본 *대유법(代喩法) : 어떤 유사성을 가진 사물을 통하여 그와 관련되는 다른 사물을 가리키거나 부분으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도록 하는 비유법 제유법과 환유법으로 나눈다. *대중 소설(大衆小說) : 일반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흥미 위주의 소설 연애 소설 과학소설 추리 소설 등이 있음 *대하 소설(大河小說) : 사회적 변화와 인간의 변모를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하는 소설 장구한 기간에 걸친 집단과 개인의 갈등과 대결을 막대한 분량으로 전개시키는 소설 *데카당스 : 퇴폐주의 19세기말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에서 유럽 각 국에 퍼져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예술 경향으로 뒤에 상징주의로 발전하였다. *독백(獨白) : 일인극 단독 대사 배우가 마음속의 생각을 관객에게 알리려고 상대자 없이 혼자 말함 모놀로그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 : 러시아 혁명 후 혁명의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심정적으로 는 동조하는 작가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카프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에 동조한 유진오 이효석 채만식 등을 말한다. *로망스 : 원래는 로마 말의 방언으로 쓴 하찮은 글이란 뜻 그후 환상적 무용담 연애담 또는 무용 연애 담을 뜻하게 되었다. 로망이라는 말이 유럽 대륙에서 소설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리얼리즘 : 사실주의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응하는 유파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에 대하여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충실히 묘사하려고 하는 예술 상의 한 경향. *매너리즘 : 예술 창작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가 생기와 신선미를 잃는 일 *멜로드라마 : 연애를 주제로 하며 우연에 따른 변화와 호화스러움이 있고 그 내용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흥미 중심의 대중극 *모더니즘 : 철학 미술 문학 등에서 전통주의에 대립하여 주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바였나 주관적이 예술 경향의 총칭 시에 있어서는 1910년이래 영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함께 말한다. *모티프 : 일정한 소재가 예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고 통일감을 주는 중요 단위를 말한다. 이것은 한 작가 한 시대 나아가 한 갈래에 반복되어 나타날 수 도 있다. 몽타주 따로따로 촬영된 화면을 효과적으로 떼어 붙여서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영화나 사진 편집의 한 수법 *묘사(描寫) : 어떤 대상을 객관적 구체적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나타내는 일 *문체(文體) : 작자의 독특한 사상이나 개성이 문자의 어구에 나타나 이루어 내는 전체의 특색 *문학 사회학(文學 社會學) : 미를 이해하는 감각과 경험 미적인 것을 수용하고 산출하는 정신 태도에 작용하는 의식 *미학(美學) : 예술에 있어서의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 *민담(民譚) : 말로 전승되는 길지 않는 동화 야담 일화 우화 전설 신화 등을 총칭하는 말 *민속극(民俗劇) : 민간 전승의 연극 가장한 배우가 집약적인 행위로 이루어진 사건을 대화와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극 가면극 인형극 이 있다. *민요(民謠) : 민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민중의 생활 감정을 소박하게 반영시킨 노래 반어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나타내는 수사학의 일종 *방백(傍白) : 연극에서 관객에게는 들리나 무대 위의 상대방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을 약속하고 말하는 대사 *배경(背景) : 작품에서 어떤 사건의 원인이 되거나 공간으로서 작용하는 구체적 풍경 분위기 시대성 등의 요소 *번안(飜案) 외국 작품에서 원작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등을 자기 나리에 맞게 바꾸어 고침 *보조 관념(補助觀念) : 어떤 다른 생각을 나타내는 매개로 쓰이는 사물이나 생각 비둘기 가 평화를 나타낼 때 비둘기는 보조 관념 평화는 원관념 *부조리(不條理) : 문학 베케트나 카뮈의 작품이 그것으로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 인간 사이의 의사 소통의 불가능함 인간 의지의 전적인 무력함 인간의 근본적인 야수성 물질성 비생명성 요컨대 인간의 부조리를 아이러니컬하게 나타내는 문학을 말한다 특히 부조리극은 내용만이 아니라 극 구성 자체가 부조리하다. *비극(悲劇) : 희곡의 한 종류 결말이 비장미가 느껴지도록 꾸밈 희극과 대립된다. 비교문학 다른 나라끼리의 문학을 비교하여 상호간의 영향 관계를 과학적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전체적인 문학의 특징을 밝히는 학문 *비유(比喩) : 하나의 사상이나 사건을 설명할 때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 직유 함유 은유 인유 등이 있음 *비평(批評) : 예술 자체에 대한 또는 개개의 작품에 대해서 꾀한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의 가치평가 *사실주의(寫實主義) :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립하여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예술의 경향 또는 인간의 본질을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보는 세계관 *산문시(散文詩) : 일정한 운율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로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시 산문 정신 운문의 외형적 규범 및 낭만주의적인 시적 감각을 배제하고 사회적 현실주의에 의하여 파악된 현실을 순전한 사문으로써 표현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 *삼일치 법칙(三一致法則) : 17세기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이 주창한 연극 이론으로 시간 장소 행동의 세 가지가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 *상징(象徵) : 한 사물 자체로서 다른 관념을 나타내는 일 즉 보조 관념만으로 원관념을 나타내는 일 *상징주의(象徵主義) :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 상의 경향 내면적이고 신비적인 세계를 상징으로써 암시하려고 했다. *서사시(敍事詩) : 민족적이거나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 또는 전설과 영웅의 사적 등을 이야기 중심으로 꾸며 놓은 시 *서사체(敍事體) : 어떤 사건이나 사실 전달을 위주로 서술해 나가는 문체 *서술자(敍述者) :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 *서정시(敍情詩) : 서사시 극시와 달리 주관적이며 관조적인 수법으로 자기 감정을 운율로서 나타내는 시의 한 갈래 *서정적 자아(抒情的自我) :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보통 시인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인이 시적 표현 효과를 위해 허구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시적 자아라고도 한다, *서정주의(抒情主義) : 시 소설 등에서 작자의 주관적 체험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 경향 주로 사람 죽음 자연 등을 제재로 내적 감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리리시즘 *소재(素材) : 예술 창작 상의 요소가 되는 재료 곧 자연물 환경 인물의 행동 감정 같은 것 *수사학(修辭學) : 역사 전설 도덕 철학 등의 산문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적 기능만을 활용하여 짓는 시 *스토리 : 소설 희곡 영화 등의 내용상의 줄거리 이야기 *시점(視點) : 소설에서 서술자가 사건을 서술해 나가는 시각 4가지로 나뉘는 데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이다 *시튜에이션 : 상황 어떤 인물이 처한 정세를 가리킨 것으로 연극 소설 영화 등에서 결정적 장면을 말함 *시학(詩學) : 시에 대한 조직적 체계적 이론으로 시의 본질과 분류, 형식과 기교, 효용, 그 밖에 다른 예술과의 관계, 시의 기원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엽까지의 유럽 문학 사조를 가리킨다 신고전주의는 사람의 불 완전성을 강조하고 고전 문학에서 발견한 자연의 보편서 조화 균형 합리성을 더욱 철저히 방법적으로 따르기를 주장하였다. *신비평(新批評) : 1930년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문예비평으로 작품을 독립된 자율적 산물로 보고 작품의 언어 기능을 세세히 분석 설명하고자 하는 비평 태도 *신파극(新派劇) : 신파 연극의 준말 재래의 전통적인 창극의 테두리를 벗어나 현대의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 등을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 개화기로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다. *신화(神話) : 구전되는 신들의 이야기 한 집단이나 민족의 기원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 민족이 살아 남기 위한 투쟁 지도 이념 삶과 죽음 인간의 미래 등 한 민족 내지 인류 전체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 것 *실존주의(實存主義) : 실제로 존재하는 체험적 개인의 상황 자체가 중요하며 개인의 실존은 비합리적이라는 입장 실존주의 문학은 인간 존재를 그 근원적 부조리성에서 추구하는 것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앙가주망도 여기에서 나왔다. *실험 소설(實驗小說) : 작자의 상상적 행위를 떠나서 작자 자신이 관찰 실험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구성하는 소설 자연주의 작가인 프랑스의 에밀 졸라가 주장하였다. *심리 소설(心理小說) : 인간의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소설 평면적인 심리뿐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 파고드는 초현실주의 작품까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심리주의 비평(心理主義批評) : 비평 양식이 한 갈래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자의 심리를 재구성하던가 정신 분석학의 원리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던가 하는 비평 *심볼 : 상징 인간이나 사물 추상적인 사고를 그 연상에 의해 표현하는 것 심상(心像) : 이미지 *아이러니 : 반어법, 수사학에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말의 표면상 의미 뒤에 숨어 그와의 반대의 뜻을 대조적으로 비치는 표현 형식 *악한 소설(惡漢小說) : 악한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16세기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 서 스페인 어로 악한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알레고리 : 흔히 풍유 또는 우유라고도 함 표면적으로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항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 구조를 가진 작품 *앙가주망 : 사회 참여 현실 참여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주창하였다. *애매성(曖昧性) : 신비평의 용어 함축적 의미의 언어가 사용되는 시에서 상식적인 의미 이외에 풍부한 암시성을 수반하거나 동시에 둘 이상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융통성 복합적 의미 풍부한 의미라는 뜻으로서 난해서과는 구별된다. *어조(語調) :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물과 독자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말의 가락 *에피소드 : 이야기나 소설 등의 본 줄거리에 딸려 부분적으로 끼어 넣는 이야기 삽화 *에필로그 : 시 소설 연극 등의 종결부 프롤로그와 대립 *역사 소설(歷史小說) : 역사상의 사실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 대개 교훈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역사주의(歷史主義) :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과 사상과 문학적 전통과 관습 등의 포괄적인 문맥 속의 적절한 자리에 되돌려 놓여져야만 그 의미와 본질이 밝혀진다는 이론적 주장 *역사주의 비평(歷史主義批評) : 비평 양식의 한 갈래 작가가 처해 있던 역사적 환경을 근거로 실증적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비평 *역설(逆說) :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은 표현이나 사실은 그 속에 진리를 품은 말 패러독스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은 오직 미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주장으로 유미주의자들이 내세운 구호에서 비롯되었으며 미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함 *오버랩 : 영화에서 어떤 화면 위에 다른 화면이 겹쳐지는 것으로 시간 경과에 대한 생략의 의미로 쓰인다. 약화 *용명(溶明) : 화면이 차차 밝아 옴 한 장면이 시작할 때 쓴다. *용암(溶暗) : 화면이 차차 어두어짐 한 장면이 끝날 때 쓴다. *외연(外延) : 한 낱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 지시적 의미라고도 하며 내포와 대립된다 우화(寓話) : 인간의 정화를 인간 이외의 동물, 신 또는 사물들 사이에 생기는 일로 꾸며서 말하는 짧은 이야기로서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 *우화 소설(寓話小說) : 인격화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운율(韻律) : 시의 음악적 요서 같은 소리의 반복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운이라 하고 말의 고저 장단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율이라고 한다. *원관념(元觀念) : 어떤 말을 통하여 달리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 생각 보조 관념과 대립 *원형(原形) : 근본적인 형식으로 그것으로 부터 많은 실제적 개체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프레이저의 인류학과 융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문학 비평에 이 방법이 원용되어졌다. 인간의 원초적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되어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유전되며 그것이 문학에서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입장 *위트 : 기지 사물을 신속하고 지적인 예지로 인식하여 다른 사람이 기쁘게 즐길 수 있도록 교묘하고 기발하게 표현하는 능력 *유미주의(唯美主義) : 탐미주의라고도 함 미를 최고의 것으로 보고 여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로서 문학 예술의 목적을 도덕이나 실용성에서 분리시켜 미 자체를 추구하는 것 *율격(律格) : 율, 즉 말의 고저 장단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음악적 격식은유처럼 같이 등 연결어가 없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결합시켜 나타내는 비유법의 하나 A는 B이다 A의B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음보(音步) : 시의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어절로서의 최소 단위 *음성 상징(音聲象徵) : 시적 표현에서 음성 자체가 감각적으로 떠올리는 표현 가치를 이른다. 의미 작용 의미 작용 문학 작품의 내적 구조 관계를 통해 자율적으로 의미를 산출해 내는 일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의미 *의식(意識)의 흐름 : 인간의 잠재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하는 문학상의 수법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이 기법으로 쓰여진 유명한 작품이며 이상의 날개도 이런 유의 작품에 속한다. *이미지 : 오관을 통한 육체적 지각 작용에 의해 마음속에 재생된 여러 감각적 현상 심상 영상 이미지즘 : 일차 대전 말기 영미의 시인들이 사물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써 명확한 심상을 제시하고자 창도한 문학 운동으로 이미지의 색채와 율동을 중시하고 적확한 용어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려고 했음 *인본주의(人本主義)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에 따라 다름으로 휴머니즘의 내포적 의미를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인상주의(印象主義) : 회화나 조각에 있어 자연에 대한 순간적인 시각적 인상을 중시하고 여러 가지 기교로 인상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주의와 그 작가들 *자기화(自己化) : 문학 작품 통해 얻어지는 여러 가치를 자기 변화의 동기로 삼는 일 *자연주의(自然主義) :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문예사조로 진화론 물질의 기계적 결정론 실증주의 등의 사상을 배경으로 일어났으며 생물학적 사회환경적 지배하에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자연 과학자와 같은 눈으로 분석 관찰하고 검토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유시(自由詩) : 전통적인 정형적 리듬을 벗어나 자유로운 리듬의 가락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의 현대시 *자율성(自律性) : 문학 작품이 그 자체의 내적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는 특성 *장르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갈래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전기(傳記) : 괴이한 내용으로 엮은 문학 작품 *전기 문학(傳記文學) : 개인 생애의 행적 을 주제로 한 문학 *전설(傳說) : 실재하는 장소 시대 인물을 구체적 내용으로 하는 설화로서 지방의 구체물에 결부되어 토착성 고정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전원 문학(田園文學) : 전원을 무대로 한 문학 궁정이나 문명 사회의 유폐를 통탄하는 심정에서 목자의 생활을 찬미하여 노래한 시 *정화 작용(淨化作用)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울적한 공포에 질린 감정을 해소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카타르시스 *주지주의(主知主義) : 종래의 주정주의에 대립하여 감각과 정서보다 지성을 중시하는 창작 태도와 경향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 성했다. *지문(地文) : 희곡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등을 지시하여 서술한 글 +지시적 의미(指示的意味) : 사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의미 *직관(直觀) : 판단 추리 등의 사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작용 직유처럼 같이 등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해 주는 말에 의해 나타내는 비유법 *참여 문학(參與文學) : 문학의 현실 참여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경향의 문학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1960년대 이후 제기됨 *창극(唱劇) : 민속 악극의 하나 배역을 나누어 판소리를 연창하는 극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 쉬르리얼리즘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1920년대에 다다이즘에 이어 프로이트의 심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성의 미학 도덕과는 관계없이 내적 생활의 충동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초점(焦點) : 주의에 상상적인 작품의 제재가 집중된 중심 초점은 한 작품 속에서 순간 순간 이동 될 수 도 있고 지속적으로 고정 될 수도 있음 *추체험(追體驗) : 작품을 읽으며 자신을 작품 속의 인물과 같은 입장에서 그 작품 세계를 행동하고 경험하는 것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공포와 연민을 통해 감정을 해방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캐릭터 :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혹은 인물의 성격 *커팅 : 영화에서 하나의 장면을 잘라 다음 장면으로 변환 접속하는 것으로 각 장면의 전환을 뜻한다. *콩트 : 장편 소설 혹은 엽편소설이라고도 함 프랑스에서 발달함 200자 원고지 20-30매 이내의 미니 소설로 기지와 풍자로써 인생의 어떤 측면을 경묘하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임 *클라이맥스 : 전개 부분이 확대 또는 상승되는 부분 정점 소설에서의 갈등이 가장 심화되는 부분을 말함 *테마 : 작품 속에 나타난 중심 사상이며 작품 속에 구현되어진 의미여 제재에 대한 해석이다. 창작 과정으로 보아서는 동기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음 주제 *텍스트 : 주석 번역 서문 및 부록에 대한 본문 원문 원전을 말한다. *패관 문학(稗官文學) : 설화 문학 패관이 채집한 가설 항담에 패관의 창의와 윤색이 가미되어 일종의 문학 형태를 갖추게 된 문학 *패러디 : 어느 작가나 시인의 내용 문체 운율 등을 모방하여 풍자적으로 꾸민 작품 *폭풍노도(暴風怒濤) : 1770-1780년 무럽에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적 문학 운동 합리적인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격력한 감정과 개성을 존중했다. *표현주의(表現主義) :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특히 연극 분야에서 성행했다 작가 개인의 강력한 주관적 표현을 내세운다. *풍유법(諷諭法) : 본래의 뜻을 감추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이상의 깊은 내용이나 뜻을 짐작하게 하며 흔히 교훈적인 수사법 알레고리 *풍자(諷刺) : 인간의 약점 사회의 부조리 비논리 같은 것을 조소적으로 표현하는 수법 *프로 문학 : 프롤레타리아 문학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을 강조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반영하는 문학 맑스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문학 우리 나라에서는 1925년 결성된 카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플롯 : 소설 희곡 각본 등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줄거리 또는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을 하나로 얽어 짜는 일과 그 수법 *피가레스크 소설 : 악한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소설로 악한 소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서 스페인 어의 악한(picaro) 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함축적 의미(含蓄的意味) : 문학 작품에 있어서 내부 구조를 통해 드러내는 의미 지시적 의미의 반대되는 뜻으로 쓰인다. *해학(諧謔) :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며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인간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이나 실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극복하게 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다. *허구 소설(虛構小說) : 희곡 등에서와 같이 실제로는 없으나 있을 법한 사건을 작자의 상상력으로 꾸며내는 일 소설 작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픽션 *형식주의(形式主義) :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 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를 분석 평가하는 문학론 구체적으로는 러시아 형식주의를 지칭하며 신비평은 여기서 나왔다. *휴머니즘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심적 태도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띤다. 인도주의 *희극(喜劇) : 연극의 한 갈래로 웃음을 자아내며 행복한 종말을 낳게 하는 형태로서 개인의 교양과 속해 있는 사회 습관 전통에 따라 다양한 면을 갖고 있음. * 자료출처 ; 한국문학도서관 출처 : 문학용어 바로 알기 | 글쓴이 : ♣ 심향 여현옥♣ | 원글보기
8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0) 댓글:  조회:1155  추천:0  2019-03-10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0)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로버트 로웰(Rovert Lowell)      숲에서    라일락의 가열(加熱)이 목장위에 무거웠다, 숲에는 드높이, 대사원(大寺院)의 뾰죽한, 새김눈    을 붙인 궁릉(穹稜)이 보이었다 골격(骨格)이 몸체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 모든 것이 그들의 것, 그리고 그들의 손가락 속    에 든 나글나글한 밀랍(蜜蠟)이었다.   그와 같은 꿈, - 그대는 잠자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잠을 갈망하고 있는 그대를    꿈꾸고 있을 뿐이다, 어떤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잠을 갈망    하고 있는 것을 - 두 개의 검은 태양이 그의 속눈썹을 태운    다.   일광(日光)이 흘러나와서, 무지갯빛의 집게벌레    의 밀물에 썰다. 잠자리의 운모(雲母)가 그의 뺨 위를 핑 하고    날다. 숲은 지나치게 세심한 번쩍임으로 충만되    어 있다 - 시계제작자(時計製作者)의 핀세트 밑에 있는 지침반(指針盤).   그는 바로 수자(數字)가 똑딱거리기까지 잔 것    같았다, 짙은 호박색 천공(天空) 속에, 그들은 치밀하게 시험(試驗)을 한 시계들을 일    으켜 세우고, 바꾸어 끼우고, 가열(加熱) 때문에 그것들은 소프    라노 가수의 머리카락에 맞추어 조절시    켰다.   그들은 그것들을 이곳저곳에 바꾸어 놓고    서, 차륜(車輪)을 베어 내었다. 낮이 푸른 시계면(時計面) 위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그늘을 쫓아 버리고, 진공(眞空)을  뚫었    다 - 이들은 수직(垂直)으로 굴착(掘鑿)한 돛대이었다.   고대(古代)의 행복이 그것들을 넘어서 스쳐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잠이 숲을 질식(窒息)시키는 듯하다, 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 위에 만가(挽歌)는 없    고 - 이 두개의 지침(指針)이 할 수 있는 전부가 기    껏 잠인 것같이 생각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참새 언덕   물이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대    의 고무 젖꼭지에 붙은 나의 입. 항시(恒時)는 아니다. 여름의 샘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오래 가지 않는, 우리들이 밟아 올리는 발    의 먼지와, 카지노의 한밤중의 전망석(展望席)의 색소니청색(靑色) 속에서 울려나오는    이어지는 앙콜 소리.   파도가 별들에게 악수를 하지 않게 될 때, 나는 연대(年代)에 대한 것을 들었다 - 그의    비만한 지저귐을! 만약에 그들이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그    것을 의심한다. 목장에는 얼굴이 없고, 연못에는 심장(心臟)이 없고, 소나무 사이에는    신(神)이 없다.   그대의 영혼을 광란(狂亂)케 하라. 오늘로 하    여금 그대의 입에서 거품을 뿜게 하라. 지금은 세계의 정오(正午)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한 눈을 가지고 있는가? 보라, 개념(槪念)이 표백(漂白)된 휴한지(休閑地)에서 거품을    흘린다, 전나무 솔방울, 딱다구리, 구름, 솔잎,    서기(暑氣).   여기에서 도시의 손수레길이 그친다. 좀 더 멀리 가면, 그대는 솔나무 껍질을    벗기는 데 견디지 않으면 아니 된다. 손    수레의 굴대가 떨어져 나와 있다. 좀 더 멀리 가면, 일요일이다. 나뭇가지    들은 피크닉의 모닥불 때문에 비틀려    늘어져 있다. 그대의 젖바침 속에서 술레잡기하는 일.   이다 라고    숲은 말한다, 대낮의 강렬한 빛과 성령강림계절(聖靈降臨季節)과 산보(散步)    를 뒤섞으면서, 모든 것이 체카베리장의자(長椅子)와 함께 계획되    고, 개간지(開墾地)의 영감(靈感)을 받고 있다. 얼룩진 구름이 시골 아낙네의 집옷 모양으    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 늘어져 있다.                                            (모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술꾼   사나이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다 - 그밖    에 아무 일도 할 게 없는 것이다. 다섯 병째 비운 위스키병을 정신없이    개울 속에 내동댕이쳐 봐도, 병마개의 밑둥까지 핥    아서는 시멘트 방죽 위에다 팽개쳐 보아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몽툭한 해장 전의 담배 꽁초들이 침대 옆의 탁자 위의 정곡(正鵠)을 태우고 있고, 욕조 안의 염기(塩基) 셀싸수(水)로 된 샴페인의 커다란 플라스틱 컵이 하나.   수십리 깊이의 대양(大洋), 헐떡거리는 결백(潔白)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육체나, 고래의 온    정(溫情) 있는 지방(脂肪)에서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가시 돋친 낚시바늘이 푹푹 쑤시는 듯이    아프고, 낚시줄은 바짝 당겨져 있다.   그가 연인(憐人)들을 찾으려 할 때, 그들의 이    름은 들창 위에서 뿌옇게 흐려지고, 그의 광란한 눈에는 다만 유리로 된 하늘    밖에는 안 보인다. 그의 절망은 함석 물통 안의 몸푸(크기)와 물의 함석빛을 하고 있다.   마치 물이 죽은 금속(金屬)에 밀착하고 있듯이 이때껏 그녀(절망)는 그에게 밀착하고 있    었다.   그는 달력 위에 잉크로 표를 해 놓은 그    녀(절망)의 약속을 바라다본다. 고발장 목록. 까맣게 손때 묻은 전화번호책 속의 번호    들. 수많은 크고작은 화살표들.   그녀(절망)의 부재는 증기처럼 쉿쉿거리    는 소리를 내고, 도관(導管, 파이프)는 노래를 부른다--- 부식된 금속이지만 어찌 되었던 작용은    하고 있다. 그는 철(鐵)로 된 폐장(肺腸)으로 코를 골면서.   에덴동산의 완전하고 어마어마한 속임    수로부터 해방을 탄원하는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뱀의 매력 있게 갈라진 쉿쉿거리는 노래소리는 아예 들려오지 않    는다.   쥐덫 속의 치즈는 오그라지고, 우유는 옥수수 깍지 낀 사발 속에서 응    어리져 가고, 동전 몇푼과 쓰던 은색 면도날이 자동차 열쇠 옆에서 반짝거리기고 있다.   그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바    깥 도로에는, 주차장의 교통위반을 점검하려고 두 명의 기마경찰이 4월의 봄비 속으로    나타난다 - 그들의 방수복은 노란 것이 개나리꽃 같    다.   (김수영 번역)      에왈드스씨(氏)와 거미   건초가 광 속으로 삐걱거리면서 오는 늦은 8월의 곰팡이가 슬은 날에 나무에서 나무로 헤엄 치면서, 공중을 헤치고 행진하는 거미를 보았다.    그러나 바람이 서쪽으로 부는 곳에서는, 혹투성이의 11월이 거미를 하    늘의 유령이 있는 쪽으로 날라가게 하    는 곳에서는, 그들은 다만 그들의 안일    만을 목적으로 하고 갑자기 동쪽으로 새벽과 바다를 향해서    버둥거리면서 죽는다.   우리들은 위대한 신(神)의 손아귀 속에서 무    엇이 될 것인가? 그대의 피 속에서 후두둑후두둑 소리를    내는 불과    부실(不實)에 대비해서 전투진영 속에    가시밭과 가시덤불을 아무리 세워 놓아    도    소용이 없었다, 억센 가시는 자라면서 길이 들어 화염(火焰)을 방지하기에는 아무 역할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대의    상처는 그대의 치유(治癒)를 넘어선 병(病)에 대항해서 그대가 싸우는 지    게 되어 있는 승부(勝負)를 보고 말한다. 손(手)은 어떻게 강하게 될 것인가? 심    장(心臟)은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지극히 작은 사물, 지극히 작은 벌레, 또는 모래시계의 문양이 장식된 거미가,    호랑이를 죽일 수 있다고들 한다.    사자(死者)가 그의 석경을 들고 네 개의 바람    에게       그의 권위의 냄새와 섬광(閃光)을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사람이 거    미를 붙잡고 있듯이, 그대를 지옥의 함정에 잡아 놓고 있는 신(神)    이 그대의 영혼을 파괴하고 좌절시켜서 쫓아낸다면 좋다. 윈사습지(濕地) 위에서   조그마한 소년이었을 때, 나는거미가 사    나운 불의 창자 속으로 내던져져서 죽는 것을 보    았다.    거기에는 이미 몸부림은 없고, 다리를    딛고    일어나서 날으려는 욕망도 없다 -    그들은 다리를 쫙 펴고는 죽는다. 이것이 죄인의 최후의 피난처다, 그렇다, 온 몸이 불투성이가 되어, 아파    하는 그놈이 벽돌 위에서 짹 하고 울 때, 열(熱) 위에서    전력(全力)을 다 하는 힘도 전폐(全廢)된 의지를 북돋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가 그 영혼의 침하(沈下)를 측정할 수    있겠는가? 조시아 호레이여, 바람의 풀무가 그대    의 민감한 내장을    석탄불 위에다 부채질하는 벽돌가마에다    그대 자신이 내던져졌다고 상상하여      보라! 1분이 지났다고 해서 10, 10조분(兆分). 그러    나 불꽃은 무한이며 영원하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어 가지고 그것을 아는 것. 이것이 검    은 창(窓) 죽음이다.   (김수영 번역)      무지개가 끝나는 곳   하늘이 푸르지는 않고, 결코 희게, 내려    앉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 석판(石板) 의의 도깨비불에다    두개골을 입히고, 기아(飢餓)에 여윈 뼈와 가죽만이 사냥개가 박새와 땅까치를 잡아 뜯는 보스톤으로. 가시나무는 그의 희생자를 기다리고 오늘밤에는 벌레가 아라래트의 발까지 고목(枯木)을 파 먹을 것이다. 낫가리군, 시간과 죽음, 투구를 쓴 메뚜기는, 호흡의 나무 위를    움직이고 있다, 야생의 망은자(忘恩者)인 올리브 나무와 그 뿌리는   시들어졌고, 호초그릇, 빈정대는 무지개    가, 찰스강(江)을 건너가게 하는 곳으로 겨울은    움직이고 그의 시들은 대지의 리(哩)의 척도(尺度) 나는 그 척도 속에서 나의 도시를 보았    고, 재단(裁斷)의 저울접시는 오르락 내리락. 죽은 이파리의 퇴적(堆積)은 대기를 까맣게 태우고 - 또한 나는 계시의 이 도표 위의 붉은 화살표다. 모든 비둘기는 몸이 팔리    었다. 교회당의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리는 마왕기(魔王期), 무지개의 묘비명에 붙은 그의 손    잡이를 옮긴다. 보스톤에서는 뱀이 추위에 휘파람을 분다. 희생자는 제단의 계단 위로 올라가서 노    래를 부른다. 높은 제단에는 황금과 아름다운 천. 나는 무릎을 꿇고 날개는    나의 빰을 친다. 예수의 비둘기는 지금 그대에게 유랑(流浪)이라    는, 지혜 이외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일    어서서, 살아 가라, 비둘기는 올리브 나무가지를 먹으라고 가    지고 왔다.   (김수영 번역)           숲에서    라일락의 가열(加熱)이 목장위에 무거웠다, 숲에는 드높이, 대사원(大寺院)의 뾰죽한, 새김눈    을 붙인 궁릉(穹稜)이 보이었다 골격(骨格)이 몸체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 모든 것이 그들의 것, 그리고 그들의 손가락 속    에 든 나글나글한 밀랍(蜜蠟)이었다.   그와 같은 꿈, - 그대는 잠자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잠을 갈망하고 있는 그대를    꿈꾸고 있을 뿐이다, 어떤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잠을 갈망    하고 있는 것을 - 두 개의 검은 태양이 그의 속눈썹을 태운    다.   일광(日光)이 흘러나와서, 무지갯빛의 집게벌레    의 밀물에 썰다. 잠자리의 운모(雲母)가 그의 뺨 위를 핑 하고    날다. 숲은 지나치게 세심한 번쩍임으로 충만되    어 있다 - 시계제작자(時計製作者)의 핀세트 밑에 있는 지침반(指針盤).   그는 바로 수자(數字)가 똑딱거리기까지 잔 것    같았다, 짙은 호박색 천공(天空) 속에, 그들은 치밀하게 시험(試驗)을 한 시계들을 일    으켜 세우고, 바꾸어 끼우고, 가열(加熱) 때문에 그것들은 소프    라노 가수의 머리카락에 맞추어 조절시    켰다.   그들은 그것들을 이곳저곳에 바꾸어 놓고    서, 차륜(車輪)을 베어 내었다. 낮이 푸른 시계면(時計面) 위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그늘을 쫓아 버리고, 진공(眞空)을  뚫었    다 - 이들은 수직(垂直)으로 굴착(掘鑿)한 돛대이었다.   고대(古代)의 행복이 그것들을 넘어서 스쳐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잠이 숲을 질식(窒息)시키는 듯하다, 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 위에 만가(挽歌)는 없    고 - 이 두개의 지침(指針)이 할 수 있는 전부가 기    껏 잠인 것같이 생각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참새 언덕   물이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대    의 고무 젖꼭지에 붙은 나의 입. 항시(恒時)는 아니다. 여름의 샘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오래 가지 않는, 우리들이 밟아 올리는 발    의 먼지와, 카지노의 한밤중의 전망석(展望席)의 색소니청색(靑色) 속에서 울려나오는    이어지는 앙콜 소리.   파도가 별들에게 악수를 하지 않게 될 때, 나는 연대(年代)에 대한 것을 들었다 - 그의    비만한 지저귐을! 만약에 그들이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그    것을 의심한다. 목장에는 얼굴이 없고, 연못에는 심장(心臟)이 없고, 소나무 사이에는    신(神)이 없다.   그대의 영혼을 광란(狂亂)케 하라. 오늘로 하    여금 그대의 입에서 거품을 뿜게 하라. 지금은 세계의 정오(正午)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한 눈을 가지고 있는가? 보라, 개념(槪念)이 표백(漂白)된 휴한지(休閑地)에서 거품을    흘린다, 전나무 솔방울, 딱다구리, 구름, 솔잎,    서기(暑氣).   여기에서 도시의 손수레길이 그친다. 좀 더 멀리 가면, 그대는 솔나무 껍질을    벗기는 데 견디지 않으면 아니 된다. 손    수레의 굴대가 떨어져 나와 있다. 좀 더 멀리 가면, 일요일이다. 나뭇가지    들은 피크닉의 모닥불 때문에 비틀려    늘어져 있다. 그대의 젖바침 속에서 술레잡기하는 일.   이다 라고    숲은 말한다, 대낮의 강렬한 빛과 성령강림계절(聖靈降臨季節)과 산보(散步)    를 뒤섞으면서, 모든 것이 체카베리장의자(長椅子)와 함께 계획되    고, 개간지(開墾地)의 영감(靈感)을 받고 있다. 얼룩진 구름이 시골 아낙네의 집옷 모양으    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 늘어져 있다.                                            (모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술꾼   사나이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다 - 그밖    에 아무 일도 할 게 없는 것이다. 다섯 병째 비운 위스키병을 정신없이    개울 속에 내동댕이쳐 봐도, 병마개의 밑둥까지 핥    아서는 시멘트 방죽 위에다 팽개쳐 보아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몽툭한 해장 전의 담배 꽁초들이 침대 옆의 탁자 위의 정곡(正鵠)을 태우고 있고, 욕조 안의 염기(塩基) 셀싸수(水)로 된 샴페인의 커다란 플라스틱 컵이 하나.   수십리 깊이의 대양(大洋), 헐떡거리는 결백(潔白)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육체나, 고래의 온    정(溫情) 있는 지방(脂肪)에서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가시 돋친 낚시바늘이 푹푹 쑤시는 듯이    아프고, 낚시줄은 바짝 당겨져 있다.   그가 연인(憐人)들을 찾으려 할 때, 그들의 이    름은 들창 위에서 뿌옇게 흐려지고, 그의 광란한 눈에는 다만 유리로 된 하늘    밖에는 안 보인다. 그의 절망은 함석 물통 안의 몸푸(크기)와 물의 함석빛을 하고 있다.   마치 물이 죽은 금속(金屬)에 밀착하고 있듯이 이때껏 그녀(절망)는 그에게 밀착하고 있    었다.   그는 달력 위에 잉크로 표를 해 놓은 그    녀(절망)의 약속을 바라다본다. 고발장 목록. 까맣게 손때 묻은 전화번호책 속의 번호    들. 수많은 크고작은 화살표들.   그녀(절망)의 부재는 증기처럼 쉿쉿거리    는 소리를 내고, 도관(導管, 파이프)는 노래를 부른다--- 부식된 금속이지만 어찌 되었던 작용은    하고 있다. 그는 철(鐵)로 된 폐장(肺腸)으로 코를 골면서.   에덴동산의 완전하고 어마어마한 속임    수로부터 해방을 탄원하는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뱀의 매력 있게 갈라진 쉿쉿거리는 노래소리는 아예 들려오지 않    는다.   쥐덫 속의 치즈는 오그라지고, 우유는 옥수수 깍지 낀 사발 속에서 응    어리져 가고, 동전 몇푼과 쓰던 은색 면도날이 자동차 열쇠 옆에서 반짝거리기고 있다.   그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바    깥 도로에는, 주차장의 교통위반을 점검하려고 두 명의 기마경찰이 4월의 봄비 속으로    나타난다 - 그들의 방수복은 노란 것이 개나리꽃 같    다.   (김수영 번역)      에왈드스씨(氏)와 거미   건초가 광 속으로 삐걱거리면서 오는 늦은 8월의 곰팡이가 슬은 날에 나무에서 나무로 헤엄 치면서, 공중을 헤치고 행진하는 거미를 보았다.    그러나 바람이 서쪽으로 부는 곳에서는, 혹투성이의 11월이 거미를 하    늘의 유령이 있는 쪽으로 날라가게 하    는 곳에서는, 그들은 다만 그들의 안일    만을 목적으로 하고 갑자기 동쪽으로 새벽과 바다를 향해서    버둥거리면서 죽는다.   우리들은 위대한 신(神)의 손아귀 속에서 무    엇이 될 것인가? 그대의 피 속에서 후두둑후두둑 소리를    내는 불과    부실(不實)에 대비해서 전투진영 속에    가시밭과 가시덤불을 아무리 세워 놓아    도    소용이 없었다, 억센 가시는 자라면서 길이 들어 화염(火焰)을 방지하기에는 아무 역할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대의    상처는 그대의 치유(治癒)를 넘어선 병(病)에 대항해서 그대가 싸우는 지    게 되어 있는 승부(勝負)를 보고 말한다. 손(手)은 어떻게 강하게 될 것인가? 심    장(心臟)은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지극히 작은 사물, 지극히 작은 벌레, 또는 모래시계의 문양이 장식된 거미가,    호랑이를 죽일 수 있다고들 한다.    사자(死者)가 그의 석경을 들고 네 개의 바람    에게       그의 권위의 냄새와 섬광(閃光)을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사람이 거    미를 붙잡고 있듯이, 그대를 지옥의 함정에 잡아 놓고 있는 신(神)    이 그대의 영혼을 파괴하고 좌절시켜서 쫓아낸다면 좋다. 윈사습지(濕地) 위에서   조그마한 소년이었을 때, 나는거미가 사    나운 불의 창자 속으로 내던져져서 죽는 것을 보    았다.    거기에는 이미 몸부림은 없고, 다리를    딛고    일어나서 날으려는 욕망도 없다 -    그들은 다리를 쫙 펴고는 죽는다. 이것이 죄인의 최후의 피난처다, 그렇다, 온 몸이 불투성이가 되어, 아파    하는 그놈이 벽돌 위에서 짹 하고 울 때, 열(熱) 위에서    전력(全力)을 다 하는 힘도 전폐(全廢)된 의지를 북돋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가 그 영혼의 침하(沈下)를 측정할 수    있겠는가? 조시아 호레이여, 바람의 풀무가 그대    의 민감한 내장을    석탄불 위에다 부채질하는 벽돌가마에다    그대 자신이 내던져졌다고 상상하여      보라! 1분이 지났다고 해서 10, 10조분(兆分). 그러    나 불꽃은 무한이며 영원하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어 가지고 그것을 아는 것. 이것이 검    은 창(窓) 죽음이다.   (김수영 번역)      무지개가 끝나는 곳   하늘이 푸르지는 않고, 결코 희게, 내려    앉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 석판(石板) 의의 도깨비불에다    두개골을 입히고, 기아(飢餓)에 여윈 뼈와 가죽만이 사냥개가 박새와 땅까치를 잡아 뜯는 보스톤으로. 가시나무는 그의 희생자를 기다리고 오늘밤에는 벌레가 아라래트의 발까지 고목(枯木)을 파 먹을 것이다. 낫가리군, 시간과 죽음, 투구를 쓴 메뚜기는, 호흡의 나무 위를    움직이고 있다, 야생의 망은자(忘恩者)인 올리브 나무와 그 뿌리는   시들어졌고, 호초그릇, 빈정대는 무지개    가, 찰스강(江)을 건너가게 하는 곳으로 겨울은    움직이고 그의 시들은 대지의 리(哩)의 척도(尺度) 나는 그 척도 속에서 나의 도시를 보았    고, 재단(裁斷)의 저울접시는 오르락 내리락. 죽은 이파리의 퇴적(堆積)은 대기를 까맣게 태우고 - 또한 나는 계시의 이 도표 위의 붉은 화살표다. 모든 비둘기는 몸이 팔리    었다. 교회당의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리는 마왕기(魔王期), 무지개의 묘비명에 붙은 그의 손    잡이를 옮긴다. 보스톤에서는 뱀이 추위에 휘파람을 분다. 희생자는 제단의 계단 위로 올라가서 노    래를 부른다. 높은 제단에는 황금과 아름다운 천. 나는 무릎을 꿇고 날개는    나의 빰을 친다. 예수의 비둘기는 지금 그대에게 유랑(流浪)이라    는, 지혜 이외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일    어서서, 살아 가라, 비둘기는 올리브 나무가지를 먹으라고 가    지고 왔다.   (김수영 번역)   로버트 로웰 (Robert Trail Spence Lowell Jr.(1017.3.1~1977.9.12) 미국 시인. 그의 시는 어둡고 엄격한 윤리적 진지성과 강하고 풍부한 리듬이 뛰어나다. 시집: , 등 수상: 퓰리처상(1946) 전미국 도서상(1959)
7    한국하이퍼시클럽 시집 -하이퍼시 댓글:  조회:1420  추천:0  2019-03-10
2012-02 하이퍼시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함(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즘)을 형성한다. 다시점의 이이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김규화.심상운-편집자 발간사 中 일부 발췌 page 5-6]     발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구현방법을 읽어보고서야 책에 수록된 시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이브리드. 링크. 네트워크. 敍事. 초월. 變換. 이중구조. 연출자’ 하이퍼시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추려내 본 낱말들이다. 무척이나 초현대적인 단어라는 느낌이다. 문학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뉘앙스가 더 많이 풍긴다고 해도 틀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 특히 敍事라는 낱말에 머릿속이 명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동안 왜 하이퍼시는 길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의 운율보다는 자칫 산문적인 느낌으로 읽히는 시를 읽으면서 줄곧 풀지 못 했던 문제였다. 초월의 이미지도 따라가기엔 너무 보폭이 크고 넓어서 영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9가지의 하이퍼시 구현방법을 읽고 나니 비로소 내 문제의 답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다. 아무튼, 나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알아보려는 착한 학생의 마음으로 하이퍼시의 문 앞에 서 보았다.   내가 하이퍼(hyper)시를 처음 만난 건 월간 시문학을 통해서이다. 매달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 시론을 읽으며 하이퍼 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배움이 부족해서일까 하이퍼시는 여전히 내겐 너무 어렵다.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들이 작품집 ‘하이퍼시’를 출간했다. 하이퍼시에 대해 궁금해 했던 참이라 반가운 시집이다. 물론, 이미 시문학에 게재되어 만나본 시도 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집을 읽는 재미 이외에도 새로운 시를 공부하기 위한 텍스트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잘 익은 부사를 깍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에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 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갂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全文 page95]     눈을 뜨고 잠을 자다 소복한 여인처럼 시장골목 여기/저기 종종 걸음으로 넘쳐나 돌아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죽이고 엎어져 있다 왜들 그러냐고 묻지 마라/ 입을 다물고 산자락에 꽃뱀처럼 똬리를 틀다 거리에 춤/추다 어디에서 숨바꼭질을 하는지 누구 가슴에 숨어 울/다 잠들다 작은 소리로 징징거리다 기우뚱거리며 실룩거리다 늪에 빠져 이내 조용하다 채송화 봉선화 벌겋게/피었다 흘러내리다 주막집 끝자락에 연분홍 바람 한줌/매달다. [정연덕-유월의 낮달 全文 page164]   시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든 시를 매개로 한 시인과 시를 읽는 독자와의 교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시를 읽는 독자와 모두 일치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해독불가의 암호 문자가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시인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단 어떤 매체로든 독자와의 만남을 의도한다면 독자에 대한 배려 또한 시작과정에서 어느 만큼은 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때 입에서 꽃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네/ 그런 사람의 가슴에는 꽃밭이 있지/ 당신도 그런 하늘이었으면 좋겠네/ 저기 푸른 물고기가 뛰노네/ 만지면 붉은 잎맥이 전달되는 꽃이 있네/ 꽃의 눈에는 연못이 있지/ 그 연못이 해를 들어올리네/ 초인종 소리 느리게 떨어지는 저녁/ 가시연이 하늘을 떠다니네/ 바람에 턱을 괴고 있던 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멀스멀 일어나 꽃이 되네// [김은자-꽃과 물고기 정물 全文 page71]     시 공부를 위해서 시를 많이 읽는 편이지만 시는 텍스트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공부를 위한 시 읽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로서의 시 읽기로 끝이 나서 난감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시란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독자로서의 나는 시를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시는 얼핏 불친절한 시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하이퍼시가 가지는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니 하이퍼시가 의외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는 아래로 내리고 바람은 누워서 불어 비와 바람이 마주치는 비바람소리에//숲속의 새들은 날개를 접고 풀슾을 헤치며 놀던 아이들도 발걸음 줄이며 함께 내리는 소리가// 어울려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Z Z Z? // 손가락으로 밀며 보는 스마트폰 안에서는 킬힐 신고 춤추는 잡가에 판소리에// 건물 옥상에서 나오는 울음 타는 소리, 초가집 구들장 무너지는 소리// 없이 고양이가 쥐를 잡는다는 소식, 소리소문없이 나는 소리 [김규화-소리에 링크하기 全文 page32]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꽃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 全文 page119]     사전을 찾아보아도 hyper라는 말의 의미는 참 어렵다.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컴퓨터 용어로서의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의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이해하려 했었다.(hyper-컴퓨터 용어. in nonsequential manner 비순차적으로 연결된// hypertext-정보란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연결시키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비순차적으로 기억된, 데이터의 텍스트) ‘낯설게 하기’로 설명 하는 ‘은유’와 ‘하이퍼’의 차이점을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즈음의 문학잡지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뭔가를 주장한다. 어떤 문학잡지는 ‘정신’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잡지는 ‘탈관념’을 부르짖기도 하고 ‘순수’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지만도 않은 문학잡지들의 주장 속에서 ‘하이퍼시’는 근래의 문학잡지들이 표방한다고 하는 그 주장 또는 지향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하이퍼시가 지닌 색체는 일단 범접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론을 요약해보면, 하이퍼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조금 더 명료해지고 텍스트로서의 하이퍼를 비로소 시의 하이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hyper)라는 말은 과도(過渡)한, 과다(過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3차원보다 더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연결어입니다. 사전에 hyperpoetry라는 말은 보이지 않으나, hyperacid(위산과다증), hyperactivity(극단적으로 활동적인), hyperacute(아주 과민한, 초과민한) 등의 용어가 보입니다. hyperpoerty라는 말은 미국의 브라운대학 교수인 P.란도의 저서 [하이퍼텍스트 3.0]에서 보입니다. 처음엔 하이커텍스트를 발견하였으나 뒤에 하이퍼시(hyperpoetry)를 발견하여 이 말로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저쪽 너머의,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고, 문학작품 특히 시의 경우엔 하이퍼적인 것이 도입되어 비로소 시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덕수-하이퍼시 개관 中page193-page194)   지난 며칠. 갑자기 착한 학생이 되어선 나름대로 열심히 하이퍼시에 대한 공부를 했다. 과월호 시문학을 꺼내놓고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이 책 ‘하이퍼시’에 실린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았다. ‘디지털리즘’에 소개되었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하이퍼시’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엔 다소 시간이 걸릴는지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대로라면 하이퍼시는 매우 고급스러운 시의 한 표현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하이퍼 시의 가능성/신진 * 조명제 대담 댓글:  조회:1219  추천:0  2019-03-10
이 글은 월간 2009년 3월호에 발표된 '하이퍼 시의 가능성'을 주제로 한 신진(시인) 조명제(시인,문학평론가)의 대담에서 중요부분을 발췌한 글입니다.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진단하고 전망하는 대담형식의 이 글은 중요한 이슈가 담긴 글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이퍼 시의 가능성                                                                 신진/ 조명제 대담 ------------------------------------------------------- 오늘날 우리는 TV, 컴퓨터, 휴대폰 등 ‘기호’(記號, sign)의 세계에 살고 있고, 시단에서는 기호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하이퍼 시’ 동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이퍼 시’는 ‘기호의 모더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방면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두 시인의 지상대담을 마련해 봅니다. 조명제(趙明濟, 1946~ ) 시인은 『시문학』 출신(1985)으로 중앙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후진을 지도하면서 시집 『고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까지』(1988, 재판 2002), 논저 『한국 현대시의 정신논리』(2002) 등이 있습니다. 모더니즘 시쓰기는 물론이요, 한국시의 미래적 가능성에 대한 깊은 연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신진(辛進, 1949~ ) 시인은 동아대학교 문과대 교수로서 『목적(木笛)이 있는 풍경』(1978), 『장난감 마을의 연가』(1981), 『멀리뛰기』(1986), 『강』(1994) 등의 시집과 논저가 있습니다. 특히 『멀리뛰기』와 『강』은 삶의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물의 감각적 모더니티는 현대시의 좌표를 시사하는 문제시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과학적 기호의 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퍼 시’에 대하여 두 분의 지상대화를 통하여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편집자 ------------------------------------------------------- 1) 신진 /조명제의 연구 성과, 시적 경향 등은 위의 편집자 주로 대체하고  생략함. 2). 시쓰기 운동은 그 본령이 ‘동인지 운동’에 있고, 동인지 운동은 ‘에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콜이 없는 동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이퍼 시’ 운동 동인(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은 그 취지가 당찬 것 같으나 1)‘하이퍼텍스트’라는 방법적·기호의 공통성, 2)그들의 시쓰기가 현대과학 특히 컴퓨터가 입력 데이터를 이진법적 인공언어로 처리하는 보다 복잡한 네크워크를 작성해 그 방법과 연결되어 있고, 3)기존 텍스트의 시간적·선조적(線條的) 구문(構文)의 맥락을 어떻게든 벗어나거나 극복해 보려는 기호적 노력이 있는 점, 4)기타 등등이 발견됩니다. 이들의 동인지 운동을 어떻게 보는지요? 그 인상이나 느낀 바, 장래성, 특히 그 가능성 등에 대하여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신 진 :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첨단 기술의 발전에 따르는 공상과학 영화와 디지털 TV,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 24시간 컴퓨터를 통해 문을 여는 시장들과 게임, 사이버 섹스 등 하이퍼 액티비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가상공간의 경험이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오면서 사람들의 사고도 바뀌었고, 거리마다 사이버 인간의 원조들이 활개를 치는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기를 맞은 것입니다. 모두가 아는 거짓이나 거짓 이미지를 사용하는 하이퍼 이미지 광고가 판을 치고 사실을 알리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이미지 광고, 예컨대 요즘 TV의 ‘생 쇼’시리즈, 휴대폰의 장식물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는 질서 지키기 공익광고 따위의 하이퍼 영상들. 영상들 외에도 평범한 30세 청년이 경제대통령 미네르바로 둔갑하기도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 연예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흑인 헤어스타일이나 노란 머리의 백인 스타일 등의 하이퍼 정체성이 현실에 다가와 있습니다. 가상 공간의 경험이 모든 개념과 경계를 무너뜨리는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그동안 믿어오던 국가, 경제, 사회 등의 개념과 가족을 비롯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과 윤리적 가치관, 실재와 거짓, 인간과 기계, 개인과 집단의 의미까지 부정되고 변하게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사실을 숨기고, 완벽하게 거짓을 꾸며내는 시대, 거짓말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시인의 하이퍼텍스트 시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시대에 부응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는 1965년 넬슨(Nelson)이 책, 필름, 연설 등의 선형구성과는 대조적인 비선형구조로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용어라고 합니다. 사회학자이기도 하면서 사이버스페이스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관해 철학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프랑스의 피에르 레비(Piwrre Revy,1956-)는 하이퍼 세계가 결코 허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창조적 미래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가상성을 통해 현실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이퍼텍스트란 네트워크라는 환경 속에서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다양하고 이질적 요소들이 공존상태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에 복제, 축소, 확대는 물론 변형과 갱신도 일어납니다. 이는 이질적이며 복수적인 동시에 유동적 접속이라는 관계를 이룹니다. 이는 새로운 문화 환경, 새로운 문화의 생태계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인터넷 문화 속에서 소위 댓글이라는 형식이 계속적인 접속을 통해 끊임없는 변형을 일으키며 변화무쌍한 이슈로 번져가는 현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 시 동인들은 그동안 몇 가지 동인 결성의 취지와 논리를 설명해왔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하이퍼 시란 하이퍼텍스트 시를 줄여 부르는 말이며, 하이퍼텍스트는 기존 텍스트의 선형성(線形性), 인과성, 고정성, 중심성, 관념성, 단선성 등에 대해 비선형, 비인과, 비고정,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 상대적인 속성을 가진, 하이퍼링크가 만드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세계입니다. 고정된 의미의 세계를 벗어나 무목적의 넓은 공간에서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라 합니다. 물론 이들 논리는 컴퓨터상의 하이퍼텍스트를 종이 위의 시로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라 하겠습니다. 이미지의 병치와 링크, 통사법의 해체와 해사체 글쓰기, 의식과 무의식의 자동적 교합을 주장하는 이들의 작시법에는 분명 컴퓨터상의 하이퍼텍스트를 지면(紙面) 위의 하이퍼 시로 생산하려는 의지와 지혜가 배어 있습니다. 미래적 시 쓰기와도 깊이 관련되는 문제여서 동인 외의 시인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하는 도전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솔직히 턴다면 아직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아 보입니다. 동인들 외에도 문덕수님까지 가세, 정치한 논리를 가다듬고 있습니다만 새로운 종이 하이퍼 시와 시법을 내놓기란 지난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심상운 시인은 작년 한국현대시협 여름 세미나의 주제발표문을 작년 『시문학』 10월호에 수정 재발표하면서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 9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중 1).이미지의 집합적 구현(하이브리드의 구현)은 다다이즘의 콜라주와 몽타주,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에 2).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과 5). 상상 또는 공상으로 시영역 확대, 7).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음, 8).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 등은 역시 앞에 든 것들 외에도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이나 자동기술법의 원리와 변별되기 어렵습니다. 3).다시점 이미지를 만드는 캐릭터 연출, 4).가상현실의 보여주기 위한 서사 양식 활용, 9).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 제작 등의 작시법 등은 입체파와 미래파 다다이즘의 동시시, 초현실주의의 ‘우아한 시체놀이’, 그리고 장르의 넘나듦이 예사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하이퍼 시 동인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시단의 중심축 하나가 된 해체시, 미래시, 환상시 시인들 사이에는 일반화 되다시피 한 시작법과의 변별성을 더 뚜렷이 해야 문학적 에콜을 바탕으로 결성된 동인이라는 명분에 값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이퍼 시가 하이퍼텍스트로서의 특성을 보다 선명히 실천할 때라야 하이퍼 시의 미래적 가능성은 담보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조명제 : 2008년은 우리 문단사에서 ‘하이퍼 시 동인’의 결성이라는 점이 특기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용어의 선점 면에서, 그리고 그 실천적 운동 면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문단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고, 문예지 또한 수백 종을 헤아리게 된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예지가 실제로 출신 그룹의 동인지 구실을 하게 되면서, 문단 전체의 동향과 현장문학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려는 소수의 문인이나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문인들은 시야가 아주 좁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하이퍼 시 운동에 대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문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이퍼 시 운동과 동인 활동은 디지털문명 시대를 앞서 가고 있는 첨병의식의 한 결과적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 쓰기 운동이 에콜을 구심점으로 한 동인지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합니다. 에콜로 뭉쳐진 동인 활동은 색깔의 선명성, 결집력, 개성과 인간성 등에 있어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법입니다. 오남구와 심상운 두 시인이 외롭게 디지털리즘 시 운동에서 하이퍼 시 운동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비유적 표현법이 하이퍼미디어 시대인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으로 하여 하이퍼 시 운동은 실제적, 조직적 결집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하이퍼 시 동인’ 활동은 확실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동인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의 3인이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일으켜 온 본격적인 하이퍼 시 운동은 그 선언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초석 위에 동인들이 얼마나 특성 있는 작품과 체계적 담론으로 전개해 가느냐, 그리고 에콜에 부합하면서 일정한 수준과 개성적 경향을 가진 멤버를 어느 정도로 확보하느냐 등에 그 장래성이나 가능성이 달려 있다고 해야겠지요.   3. 하이퍼 시 동인들의 작품을 읽어 보시고 그 특성, 공통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그 메리트(merit)를 말씀해 주세요.   신 진 : 포스트구조주의자로 잘 알려진 보드리야르는 그의 시뮬라시옹 이론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가상 현실의 사회’라 진단했습니다. 일종의 코드와 기호로 이루어진 ‘근거 없는 실재’가 실재를 대치하기도 하고 조종하기도 하는 ‘시뮬라시옹 ’사회, 즉, 근거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와 정보가 사람들도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는 사회입니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전으로 대중들은 허구의 늪에 빠지게 되고, 공동으로 제작한 시뮬라시옹을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하이퍼시는 원칙적으로 허구를 제시하되 그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전제와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양식이며 이 논리의 골격은 리좀(rhizome)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쉬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관성이란 뜻으로 쓴 리좀은 원래 식물학적인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땅속으로 뻗어나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시작도 끝도 아니고, 언제나 중간에 있으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차원과 접속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연관성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재생하는 반계보학적 네트워크입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2차원의 종이텍스트를 언제나 유동적인 4차원의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한다는 하이퍼 시 동인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심상운 시인의 시를 한 편 들겠습니다.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심상운 「녹색전율」전문      인과(因果)의 틀을 벗어나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상호 연계되면서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7월 아침의 비와 6월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투,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씹는 방울토마토,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심상운이 “이미지들을 동시적으로 공존하게 하거나 나열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며 열린 코드로 무한한 상상력(환상ㆍ공상)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했듯이 버추얼(virtual) 세계라고도 일컫는 가상이미지들의 세계요, 자유연상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동적 영상들의 리좀이라 할 것입니다. 오남구 시인의 시도 한 편 들어봅시다.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 불그스레 실눈을 뜬 쪽달이 베갯잇 속으로 미끄러진다. 베갯잇의 조각보에 꿈오라기 오락가락 청-백-적-흑-황 지금 신행 온 딸아이가 베고 있다. 꾸륵 꾸륵 흑두루미가 철원하늘을 날아간다. 오르르∼ 신부가 떠는 입춘에 나뭇가지에서 오락가락 햇살 따뜻한 에너지가 스민다. 꿈틀 꿈틀 망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가렵다. 거울 속에 팝콘 같이 흰 철쭉 꽃망울이 터진다.                                            ―오남구 「입춘詩」전문   서두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에서부터 표준 어법을 이탈하고 있고, 한 마디의 서술 없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연결함으로써 입춘의 추상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길이에 비해 움직임이 큰 동사와 형용사, ‘오락가락, 꾸륵 꾸륵, 오르르∼, 꿈틀 꿈틀’ 등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특히 오남구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동인들도 동적 이미지와 색채어를 비롯한 시각적 이미지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지만 특히 그가 색채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그것도 이 시의 경우, 오행ㆍ오방위색인 ‘청-백-적-흑-황’ 등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주역을 비롯한 동양사상, 동학 운동에 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된다 하겠습니다.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동인 3인의 하이퍼 시는 공히 기존의 문장에서 낱말, 문장, 문단과 같은 구성단위의 전후 관계를 바꾸기도 하고, 고의로 통사적 맥락을 끊어 의식적, 전의식적인 이미지들이나 정보들을 동시 공존하게 합니다. 또 역사적, 사회적인 삶보다는 추상적 심미적 차원에서 집중하며 엘리트적 미의식과 세련된 언어감각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입니다. 시각적 감각어, 특히 색채 감각어와 언어의 청각적ㆍ음악적 영상을 실감나게 구사하는 공통점도 갖습니다. 이들은 의성어 의태어를 즐겨 쓰는 미래파적 역동주의와 기계주의, 입체파 시의 동시공존법, 다다이즘 시의 무의미시법,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과 자동기술의 작시법,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 해체와 인유적 패러디 등과 유사한 시법을 내세우고 실제 적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산 산행 소재를 즐겨 쓰고 있는 것은 이들의 결속력과 집중력을 입증하는 공통 분모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심상운 시인은 석기시대, 돌칼 가는 소리, 석탄난로, 광부들의 입김, 신생대, 말울음소리, 벌판의 망아지와 초록벌판, 탄광지대 등등 원시주의적인 취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고, 김규화 시인은 상대적으로 보다 현대적이고 글로벌한 버추얼 이미지들을 병치하면서, 언어의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특징을 갖기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이퍼 시 동인들은 현대시의 공간에 실감 있는 당대적 체험과 시어 계발의 틀을 만들고, 나아가 미래적 세계를 전망하게 합니다. 더 구체화 할 경우 시문학의 독자층 확대에도 일익을 담당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존재의 확장을 성취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오랫동안 귀감이 될 만한 시를 써온 세 시인이 회갑을 넘어 새로 시작한 하이퍼 시는 세련된 감수성과 구성, 논리적 설득력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 하이퍼 시가 독자들이 새로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고 하이퍼 정체성을 확인할 만큼 새로운 실감을 주는 데는 미흡하게 생각된다는 점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그 위에 2000년대 들어서기 바쁘게 시 평단과 학계의 일각에서는 지난 세기 전위 취향의 시들에 대한 비판과 깊은 우려를 서슴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시켜두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실험적 경향의 시는 1930년대에 이상(李箱)이라는 특별한 아방가르드가 나온 후, 1950, 60년대의 과격 모더니즘 시인들이 이를 계승했고, 1980년대의 황지우, 박남철 등의 실험을 끝으로 실험성과 새로움의 위의가 거의 상실되고, 언어의 유사 실험성은 젊은 시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왜곡과 언어생활의 타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걱정과 경고도 따랐습니다. 미래적 메리트가 있는 작업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하이퍼 공간에의 궤도 진입 단계에 있는 하이퍼 시동인들은 이러한 사정과 시단의 각별한 관심을 어깨 무겁게 짐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조명제 : 지난해 봄 하이퍼시 3인의 동인 결성 이후,금년 『시문학』 1월호까지 세 번에 걸쳐 개인별 5편씩 종합 15편씩의 하이퍼시가 발표되었습니다.그 15편씩을 읽어 보면 각자의 개성이나 특성이 좀더 뚜렷이 드러나는 면이 있습니다. 먼저, 김규화 시인은 다양한 방법적 실험을 해 보입니다. 특히 「햇빛과 단풍」 「거인들」 「과학적 이유 세 가지」 「달팽이와의 대화」 「매미소리」 「숨바꼭질」같은 작품들을 함께 놓고 보면 그 형식적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햇빛과 단풍」의 경우 무색인 햇빛이 가을 나뭇잎에 닿아 노랑,빨강의 금빛 단풍잎이 되는 풍경을 관찰, 사유하는 데서 비롯된 시상이 의식의 흐름과 자유연상을 통해 동양과 서양, 현재와 과거(추억) 사이의 시공을 자유로이 넘나듦을 보여줍니다. 햇빛을 받아 불타는 듯 붉은 단풍은 일순에 머나먼 갠지스강가 노천 화장터의 불꽃으로 하이퍼 링크되고, 허공의 햇살을 받아 종일 금빛 영혼을 태우며 타들어가는 시체의 단풍빛 불꽃은 어느새 열여덟 소녀적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몰래 숨어 본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마릴린 몬로의 웃음소리로 링크되지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에서, 입을 약간 (섹시하게)벌린 몬로가 금빛 머리칼을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 영화의 황홀한 장면으로 점핑되는 연결고리는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라는 단풍 읽기에서 얻은 시구입니다. ‘햇빛과 단풍’에서 촉발된 하이퍼적 상상력은 비논리적 비선형적 링크로 이렇듯 시공을 초월한 작품적 구조를 보인 것이지요. 「거인들」은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연쇄고리식 행갈이의 파격을 통해 불연속의 연속을 강화하고 있고,대화체로 구성된 「과학적 이유 세 가지」는 ‘아시체 놀이’처럼 행간의 연결이 무시되어 있지만, 홀수행은 홀수행끼리 짝수행은 짝수행끼리 의미 맥락이 연결되게 깍지끼듯 직조된 특성을 보입니다. 그 사이에 선문답 같은 대화의 내용, 즉 다이어트와 관련된 광고 문구가 제시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의 땅 티베트의 라싸로, 다시 그 곳 해발 5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가난한 영혼의 경전을 외는 사람들로 건너뛰어 집합적 결합의 네트워크를 완성합니다. 「달팽이와의 대화」는 교통 신호를 기다리고 건너는 사이 달팽이를 기른다는 아이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극히 흥미롭고 사실적인 대화에서 관념을 찾아 볼 수 없을뿐만 아니라, 마치 교통신호처럼 하나의 기호가 되고 캐릭터가 되어 아이는 저만치 ‘달팽이 길’로 사라집니다. 기호와 캐릭터는 전자 하이퍼 시대의 대표적 상징임을 환기시킨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숨바꼭질」은 내용단락에 따라 산행의 과정과, 산꾼들 풍경 대 추억의 고향마을을 치차처럼 엇물리게 구성하여 시상의 건너뛰기와 이어가기를 숨바꼭질시킨 것이지요.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미륵 미륵 미륵,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사정한다//염소에게서 배웠나,매해해 얌얌 염소/입술을 뾰죽이 내밀어/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매 하는 미,매미이이이를//플랫폼에 혼자 두고 가는 기차가/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맴맴맴 매애애/매앵매앵 앵앵앵/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의 「매미소리」 전문   「매미소리」의 방법적 특질은 화자가 강의를 듣고 나오면서 ‘미륵론’의 환청처럼 들리는 매미소리와 그 울음의 유사성으로 하여 연상되는 염소 울음소리, 심지어 기차를 놓친 과거 어느날 떠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 맹랑한 매미소리로 환치 혼융된 감각적 변용에 있어 보입니다. ‘미륵’과 ‘매미’는 ‘미’라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의에는 유사성이 전연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강의의 잔상효과와 ‘미륵’/‘매미’ 두 말이 지닌 기표의 유사성만으로 그 관련성을 맺어 줍니다. 매미소리는 매미의 언어로서 어떤 의미신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카랑한 울음소리의 기표만 들릴 뿐이지요. 우리가 노승의 독경소리를 들을 때 그 의미는 전연 알지 못하면서도 그 유려한 독경소리 자체에 매료되어 열복(悅福)을 느끼는 절대 순수의 순간처럼 매미소리의 시니피앙 속으로 빠져들어 추억과 환상의 절대적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언어(기호)의 의미(관념)가 깡그리 증발(배제)되고 울림(리듬)만이 남는 경지, 그것은 김춘수 시인이 봉착했던 시의 마지막 경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김규화 시인은 여러 가지 하이퍼적 방법 실험을 해 보이고 있습니다. 심상운 시인은 의식과 무의식, 자유연상의 방법과 그림 이미지를 통한 보여주기의 기법을 주된 특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상과 공상의 과감한 투여로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동양과 서양, 고산과 바다 등 모든 영역을 뛰어넘고 넘나듭니다. 특히 그러한 방법으로 기호론적 ‘이미지’의 생성 과정과 이미지의 추상적 정체를 주로 미확인 비행물체인 UFO와 중첩시켜 암시하고 있지요. 그의 시는 하이퍼시의 생성과 특성에 관한 자신의 지론을 함축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바람소리」를 보면, ‘바람소리-말 울음소리-알타이 초원(말의 고장)-기억의 시간-갇혀 있는 시간-해방 공간-바람소리-파랑, 초록, 빨강, 하양 빛-들어가 살 수 없는 집(사이버 공간?)-노란 개나리꽃’으로 자유연상에 의한 링크로 가지치기와 건너뛰기를 실현하여 집합적 결합의 이미지를 완성해 보입니다. 「북한산 레몬 향기」 「이미지 여행」「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사각형 스크린」 등 여러 작품이 그와 같은 방법의 범주에 듭니다.   아침 TV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빨갛게 부풀기 시작하고/나는 1,2,3,4…숫자에서 벗어난 그녀의 시간이 접시 위 생선토막에 빨간 소스로 뿌려지는 상상을 한다.//(낳자마자 자식을 버린 어미를 어찌 어미라고 할 수 있단 말이야!)/드라마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그녀는 생선을 구우며 눈물을 흘린다.//그때 40대 여자의 가슴에서 뭉클 솟구쳐 나온 듯한 한 뭉치의 희끄무레한 연기가 주방의 작은 창문으로 빠져나가고//(파란 신호등 앞에서/서로 반대 방향으로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머니와 딸) ―심상운의 「아침 드라마」 전반부   심상운 시인의 또 다른 하이퍼적 시상의 특성으로는 작품의 중간에 불연속적으로 핸드폰의 소리샘 소리가 끼어들거나, 인용시에서 보듯 TV 드라마의 장면들이 편집, 링크되는 경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TV의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화자 혹은 동석인들의 식행위(붉은 과일을 먹는다든가 그와 유사한 이미지의 식사)를 중첩시키며 의식, 무의식의 연상작용에 따라 건너뛰기나 가지치기를 이어가는 방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시 인용시를 볼까요. 아침 8시나 저녁 8시무렵은 못 말릴 한국 아줌마들의 TV 드라마 시청 시간대지요. 텍스트 속의 ‘그녀’는 아침 식사를 위한 요리를 하며 현실 상황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연속 드라마에 몰입합니다. 드라마는 점점 고조되고, 사이사이에 드라마의 대사나 등장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삽입됩니다. 화자는 TV 드라마에 깊이 빨려들며 요리하는 ‘그녀’의 시간들을 구체적인 상황으로 전위시키는 상상도 합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채널을 바꾸었는지 다음 장면은 기상 예보가 방송되는데, 오전의 짙은 안개가 걷히고 내리던 비도 그치며 날씨가 점점 맑아지겠다는 그 기상 예보는, 리모컨 하나로 손바닥 뒤집듯 채널을 바꿈과 같이, 비현실에서 현실(TV 드라마의 가상공간에서 현실공간으로)로 순간 전환시키는 징검다리 구실을 하지요. 질질 끌며 하루하루 지연되는 TV 드라마의 오늘 하루분이 끝나자 대도시의 아침 시간은 그제서야 일제히 환각에서 깨어난 듯, 각자의 감정 색깔로 보았던 드라마의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심상운 시인은 TV가 보여 주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장면과 일상현실을 대비 또는 중첩시킨다든지, 핸드폰 속의 음성 서비스를 편입시켜 디지털문명 시대의 가상과 현실을 포착해 하이퍼적 시세계를 펼치기도 합니다. 오남구 시인은 특히 언어의 감각, 말의 기지,(어휘 중심의) 계기적 이미지 연상,극적 상황 포착, 기호나 부호의 대상화, 대상의 캐릭터화 등에 탁월한 하이퍼시를 보여 줍니다. 그의 매끄러운 언어 구사는 시를 속도감 있게 만들지요. 「입춘시詩」를 보면, 입춘절에 신행와서 곤히 잠자는 딸이 꿈길을 오가며 베고 있는 베개의 고운 베갯모 자수 그림과 텅 빈 새벽하늘에 뜬 조각달의 풍경이 하나로 미끄러집니다. 말하자면 몽환적 꿈속 일처럼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제의 ‘차이와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인 것이지요. 그리하여 순간 포착의 하이퍼적 상상은 베갯모의 흑두루미가 철원 하늘을 날아가고, 입춘 무렵의 한기를 느끼듯 아직 미숙한 시집살이에 오르르 떨고 있지만 곧 새살림을 봄꽃처럼 피워갈 신부마냥 한기 속 따뜻한 햇살을 받아 나뭇가지들의 망울이 부풀고 마침내 흰 철쭉꽃 망울이 터지는 시간으로 연상적 링크를 수행합니다. 「사과」라는 시는 끝말잇기처럼 하나의 어휘를 매개로 연신 어의 반전을 거듭하며 시상을 증폭시켜간 작품입니다. 또 「약수터」는 약수터라는 공간을 무대로 약수를 뜨러 온 인물들을 그 인상착의의 특징을 캣취해 ‘낡은 골프 모자,굵은 테 안경, 빨간 딸기코 노인,반백의 꽁지머리’로 캐릭터화 하여 하이퍼시의 기호론적 특성을 십분 살리고 있지요. 그리고, 늘 나오던 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나누는 노인들의 간결하고 담담한 대화와 행위는 마치 한 토막의 깔끔한 상황극을 연상시킵니다. 금년 『시문학』 1월호에는 오남구 시인의 투병생활과 병상일기를 풀어 낸, 가슴 저려오는 작품들을 보게 되어, 병마와 힘겨운 고투를 벌이고 있는 그에 대한 안타움이 여간 큰 게 아닙니다. 「요만큼의 희망」「IB 폴대」 「부호 그리고 벌레」가 바로 그 병상시(病床詩)들인데요, 여전히 오남구의 재기는 살아 번뜩입니다.   꿈같다. 진통제를 맞는다. 띵 머리가 아프다. 갑자기 창을 통해 날아든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눈앞에서 퍼덕거린다. 눈 아래 길들이 꿈틀꿈틀 벌레다. 나무로 기어올라가기도 하고, 무수한 벌레들이 꿈틀대는 부호다. 돌아보는 길, 내가 걸어온 길, 무수한 부호들이 날아서 꿈틀거린다.//저 부호를 누가 읽어낼까, 하이퍼 시인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나는 부호의 벌레.                                                                    ―오남구의 「부호 그리고 벌레」 전문   병든 시적 화자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현실이 현실로 보이지 않는 비현실의 환상을 만납니다. 현실의 일상적 질서로부터 이탈된 그의 몸과 마음은 진통제를 맞으며 고통스런 꿈속을 헤맵니다. 갑자기 병실의 창을 통해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퍼덕거리는 불길한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가운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진통제 주사와 기력의 소진은 우울하고 아픈 몽환으로 시달리게 합니다. 병상 밖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길’들이 병균(벌레)에 시달리는 환자의 눈에는 모두 꿈틀거리는 ‘벌레’로 보입니다. 나무로 기어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그 벌레들은 어느새 몽환적인 환자의 의식을 타고 ‘부호’로 다시 은유화됩니다. 쓸쓸히 돌아보는 그의 인생길이 또한 판독할 수 없는 부호의 무리가 되어 꿈틀거립니다. 고뇌에 찬 자신만의 인생길을 그 누가 읽어낼 수 있게습니까. 기호와 캐릭터의 시적 형상에 매진해 온 시인은 화자와 작가의 경계도 허물고 ‘나는 부호의 벌레’라고 규정합니다. 누구든 한 사람의 일생은 결국 해독할 수 없는 한 점, 하나의 부호나 암호가 아닐까요?(오남구 시인의 쾌차를 빕니다). 하이퍼미디어의 특성에 바탕을 둔 하이퍼시는 디지털문명 시대의 새로운 시쓰기의 한 경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 시 동인들의 시는 그 개별성과 함께, 인과적 논리성이나 선조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 형태를 구축하며,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를 공통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인들은 기호의 체계에 집중하여 기의적 관념을 벗어 던지고 사물의 순수 이미지와 감각적 기표의 분산을 즐깁니다. 그들은 또, 그들만의 무기는 아니지만,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공간을 자유로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기도 하고 병치하여 기계론적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합니다. 동인들의 이러한 공통적 노력과 장점이 보다 진전되어, 왠지 하이퍼시의 상당수는 감동이 없다라는 일부 문인들의 지적을 잠재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4. 언어 기호가 가진 종이 위에서의 정보(시) 처리 방법, 다시 말하면 1)언어가 현실의 사물이나 대상과 떨어져 있는 점, 즉 사이버스페이스적 특성, 2)기존의 모든 언어텍스트의 구문이 갖는 맥락은 선조적·시간적인 일방통행인데, 하이퍼의 경우에는 센텐스의 어떤 부분(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에서든 가지처럼 갈라내어 거기서 다시 새로운 센텐스의 맥락을 만들 수 있는 맥락의 분산(分散) 등의 특징이 가능한데, 이러한 하이퍼적인 시가 가능할까요?   신 진 : 공상과학 소설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뉴로맨서」(1984)의 작가 윌리엄 깁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사이버스페이스’란 말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와 인터넷 속의 인공적 풍경을 가리킵니다. TV, 컴퓨터 등에 의한 사이버스페이스는 우리의 감각을 확장, 다중감각(Multi-sense)을 경험하게 하며,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게 하며 실체가 없는 이탈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사실이 허구보다 낯설기도 하며, 거짓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실재의 삶으로 경험하게 하는 ‘가상의 실재’의 세계입니다. 실재와 가상이 공존하는 가상의 경험은 가상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확장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여 자아를 확장시키게 됩니다. 영화 「로보캅」, 「토탈리콜」, 「제5원소」, 「매트릭스」 등이 보여주고 이끌고 가는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센텐스의 특정 부분을 갈라내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가는 ‘분산적 맥락’이란 그러한 가상의 실재를 리좀(rhizome)과 같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통해 연출하기 위한, 종이 하이퍼 시의 주요 방법론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한 문장 속의 언어 단위를 가지가 파생하는 식으로 이어지면서 종합되는 하나의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입니다. 컴퓨터 화면의 그림이나 밑줄부분을 선택하여 마우스를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나타나는, 즉 다른 텍스트를 분산해서 연결해 주는 하이퍼 링크적 기능을 살리기 위한 방법입니다. 여기서 김규화 시인의 하이퍼시를 한 편 들어보겠습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 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사정한다 염소에게서나 배웠나, 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매 하는 미, 매미이이이를 플랫품에 혼자 두고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밍 잉잉잉 ―김규화 「매미소리」전문   ‘미륵 강의-마당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미륵 미륵 미륵 사정(射精?)’ 등 음운론적 분산과 ‘매미소리-염소소리-기차소리’, ‘미륵- 마당- 미루나무- 매미- 맴맴’ 등 음성적 자질들의 분산과 비약적 연결이 텍스트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가상은 실재화 하고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공간들의 병치와 공존 현상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말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양적 사상의 흐름을 원래 주체도 객체도 정해진 길도 없는 유목민적 사유의 전형, 즉 리좀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다양성으로 이원론적 나무의 사유를 극복하여 다원론은 곧 일원론이라는 데까지 접근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이 모두가 동등한 주체로서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합니다. 그리하여 형성되는 관계가 ‘비질서의 접속’과 ‘상호연관성’ 속에 하나가 되는 글로벌적 환경을 발생시킵니다. 하지만 문맥의 분산과 재영토화를 통한 자유로운 네트워크 생태의 구축은 이상의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 시에서부터 그 예를 찾을 수 있고, 김춘수 시인은 이와 유사한 방법을 시창작상 비법으로 간직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김춘수는 1960년 경 정지용의 시 「향수」를 분석하면서 시작에 있어서의 우연성과 몽타주 수법, 그리고 ‘이을고리(環)’를 강조한 바 있는데, 이미지나 정보의 병치에 무슨 인과론적 의미가 있는 듯 연결시키는, 그의 무의미 시 창작비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연은 영화의 한 컷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cut와 cut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런대로 그들은 우연이 필연이 될려면 여기 montage가 있어야 한다. cut와 cut를 montage하여 이을 고리(環)는 전혀이다. 열쇠는 이것이 잡고 있는 셈이다. (더 진보된 형태에 있어서는 이것이 필요없을 것인데 거기까지는 미달이다.)...시의 효과는 전혀 montage의 솜씨에 달렸다.(김춘수 『한국현대시형태론』, 해동문화사, 1969, 63면) 김춘수는 이와 같이 단절된 이미지 사이의 이을고리를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라는 「향수」의 드러난 이을고리보다 자신은 더 진보된, 세련된 솜씨를 갖추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미지 정보들의 연결이 바로 그 비법(?)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많은 시들은 후렴구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세련된 링크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안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몽타주, 콜라주의 구조적 혼란을 극복하는 기능을 할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론적 네트워크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의 세련된 연결고리의 우리나라 원천은 다름 아닌 이상(李箱)의 시들에 있습니다.(신진, 「한국현대시의 전위의 맥락 검토」, 『한국시학연구』 22호,252-254면. ) 아무튼 사이버 스페이스적 속성을 종이 위에 구현하기 위해 맥락 분산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이해되는 발상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버 스페이스적 특성뿐 아니라 60년대 김춘수의 말마따나 전의식의 흐름을 좇는다든지, 현실ㆍ상상ㆍ환상ㆍ공상의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다른 시에서도 드물지 않게 쓰여 왔습니다. 동인 중 한 분이 대표적인 비하이퍼 시의 예로 거론한 바 있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각 연은 ‘한송이의 국화꽃-한송이의 국화꽃-누님같이 생긴 꽃-노오란 네 꽃잎’으로 분산, 연결되는 축과 ‘소쩍새의 울음-천둥의 울음-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졸임-불면의 밤’ 으로 병치, 공존하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라 할 것입니다. 하이퍼 시는 이 점도 유념해서 분산적 맥락을 위시한 하이퍼 시 제작 방법들을 보다 하이퍼텍스트답게 개량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명제 : 이를테면, ‘새’는 ‘새’가 아니지요. 즉 ‘새’는 ‘새’라는 언어기호일 뿐 새(사물)가 아니지요. 체계의 체계로 설명되는 문학 언어 이전에 언어기호 자체가 이미 사물(대상)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오그덴과 리처즈의 구도를 좀 수정해서 말하면 말(언어기호)과 대상과 연상(이미지)의 삼각구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언어기호의 형식과 내용 사이에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자의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말합니다. 언어의 자의성은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제약받게 되지만, 그 때에도 개별적 언어의 자의적 특성은 사회성에 의해 완전히 제약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꽃’이 라고 언술하면 기호와 대상이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사회성에 의해 약속, 공인된 기호가 언어라고 하지만 기표와 기의 또한 일치하지 않습니다. ‘꽃’이라는 기호 자체가 추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청자는 꽃 중에도 각자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꽃을 그리게 되겠지요.그런 점에서 기호는 차이의 체계요 관계의 체계인 것이지요. 류현주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시는 언어가 만드는 회로라고 하고, “읽는 사람마다 같은 시어에서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언어와 그 언어가 나타내는 의미의 고정성이 분리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같은 언어에 대해 여러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하이퍼 텍스트 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문학 언어와 문학 텍스트의 동일한 해석이란 불가능합니다. 언어의 문화적 역사성까지 고려하면 언어의 개인별 정서적 특성은 더욱 차이가 커지고, 국제적으로는 언어의 정서적 차이 때문에 문학 텍스트의 온전한 번역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따라서 컴퓨터상의 전자 언어기호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서 처리되는 정보(시) 역시 원천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적 특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하이퍼 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성이 문맥의 선조성이나 논리성, 혹은 단선구조로부터 탈피하는 것인 만큼, 센텐스의 가지치기나 건너뛰기 같은 방식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실천되어 왔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하이퍼 시 동인들의 실험적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일찍이 격렬한 자기 파괴적 실험을 감행했던 이상이나 조향의 시들에서도 발견됩니다. 특히 김춘수의 경우 그의 「처용단장」 제3·4부에서 하이퍼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춘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논리적 순차성의 파괴와 통사적 해체를 실험해 보이고 있는데, 「처용단장」 제3부의 「36」, 제4부의 「14」는 그 좋은 한 예입니다. 내적 필연성이 없이 열거되다시피 연결된 어휘들이나 문장들, 그리고 연결고리가 무시된 연과 연 사이의 폭력적 연결로 말미암아 이 작품들은 시니피앙의 미끄러짐만이 두드러집니다. 기존 현실이나 세계와의 단절로서, 소통 구조의 근본인 통사의 해체는 곧 현실 너머의 마이너스 현실을 떠올려 주지요. 김춘수 시인이 만년에 직면한 과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바로 이 마이너스의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뒤섞이고 융합된 김춘수의 「처용단장」 제3·4부는 여러 면에서 요즘 집중 논의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 시와 하이퍼 모더니즘론의 한 전거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나 리좀(rhizome) 형태 및 다선구조로 그 특성이 설명되는 종이 하이퍼 시의 실제를 보인 점에서도 김춘수 시인은 끝나지 않은 아방가르드의 선구적인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무지」를 비롯한 T.S.엘리엇의 작품에서 이미 하이퍼시의 여러 특성들이 실현되어 있고요,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 같은 80년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더러 시도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발표한 저의 「황사일기」 「봄편지」(세계 최초의 하이퍼 작품이 발표된 1987년과 일치하네요)는 구체적인 한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5. 만약 하이퍼 시의 운동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이 도입되어야 하겠습니까?   신 진 : 하이퍼 시운동은 우리 현대시를 보다 당대 문화적 가치에 가깝게 서게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속의 가치가 인정된다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어린 시 지망자도 찾기 어렵고, 읽는 독자사회도 붕괴되다시피 한 시단의 현실 타개책을 제공해줄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인들의 희망대로 전자 하이퍼텍스트가 종이 위의 시로 실현되어 자아의 확장을 가져 올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동인들과 문덕수 선생님은 이 준비작업을 마치고 항해를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에게는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만 두어 가지 단견으로 답을 대신해보겠습니다. 2000년대의 우리 시 평론가 중 일군은 언어적 실험성이 갖는 파괴행위의 창조적 위력은 일회적인 것이고 이상 이후의 시인들은 더 이상 언어 파괴와 해체를 통한 극적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다른 창조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퍼시 동인들이 문맥의 파괴와 분산에 못지않게, 연결, 비약적 연결 등을 강조하고 있는 데서 저는 앞에 든 것과 같은 우려들을 불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읽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형태적 새로움 외에 내용적 새로움을 추구해나갈 가능성을 읽는 것입니다. 독자와 함께 가상의 실재를 즐기고 함께 인간성의 확장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려면 함께 공유할 내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수가 상수 훈수하고 달아나는 심정으로 드릴 수 있는 답안도 그런 것입니다. 저는 서사성의 과감한 도입과 현실성, 서정성을 심화,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서사 양식의 대폭적인 차용입니다. 디지털 미디어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에 비해 훨씬 통합적이고 통섭적입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우연성, 해체성, 특수성, 환상성을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상호교류와 초언어적 보편구조를 갖습니다. 작가는 편집자로, 독자는 행위자로, 쓰기와 읽기는 놀이행위로 치환됩니다. 시인의 특수성, 시론가의 논리가 그대로 독자에게 강요될 수도 없습니다. 독자의 참여와 놀이를 보장할 수 있으려면 만화나 영화, 컴퓨터 게임 따위에서 보이는 서사양식을 과감하게 차용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식 논리와 시 작법은 시인의 놀이터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독자들의 놀이터로는 부적합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이 부분적이고 말초적인 언어기법에 의해 연결되기보다는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서사성, 그것도 흥미진진하고 긴 형태나, 짧더라도 촌철 살인의 위트와 기발함이 번뜩이는 서사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현실성(reality)과 서정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현대 시사(詩史)에 있어, 그 동안의 아방가르드들은 예술적ㆍ표현적 방향으로 치우치는 취약점을 보여왔습니다. 원래 서구의 아방가르들은 공산주의적 열망, 무정부주의적 이상 등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자동화된 전통이라거나 타성 등 저항의 적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어느정도는 공감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전위 시인들은 현실도피적인 입장에서 통사적 문맥 파괴 놀이를 하거나 이국문화 따르기에나 열중하다보니 자기들끼리의 잔치만 즐기는 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군의 후배 시인들이 그 뒤를 따랐던 데는 정치적인 안정이 보장되는 데다, 흉내 내면서 만들어내기도 쉬웠고, 더군다나 이름 내기도 쉽고 했던 이유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어쨌거나 독자들은 그것들을 마음에 새겨두거나 즐기지는 않았습니다. 독자에게 놀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시는 당대적 현실감감이 탁월하거나 개별성과 보편성을 통합적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는 서정의 깊이를 갖춘 것들이었습니다. 당대적 인간미-통합적 서정은 시로서의 당위이자 독자와의 주요 소통로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관적인 감정표현만이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고는 금물입니다. 공통의 절박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어떤 신성함과의 관계 속에서 감동적으로 구현되는, 구체적이고 진정 어린 서정의 세계를 굴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터넷 속의 하이퍼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쓰는 사람들의 인성을 즉흥적 도발적 비선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비판적 시각에서 이에 상응하는 시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라고 한 김규화 시인의 하이퍼 동인 참여동기(시문학 08년, 4월호,15-6쪽)의 ‘비판적 시각’은 음미할 만한 대목이 된다 하겠습니다.   조명제 : 글쎄요, 어디까지나 저의 단견을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원래 하이퍼텍스트는 첨단 디지털문명을 배경으로 한 컴퓨터상의 전자 텍스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라는 매체는, 500년 전통의 물질적인 매체인 종이 인쇄물(책)에서 온라인상의 전자 텍스트로의 이동에 따른 문학의 급격한 변화를 불가피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용어들이 생겨나 혼란스럽기도 했으나, 현재 가장 주목받는 디지털문학 형태가 하이퍼문학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하이퍼문학은 컴퓨터 매체의 사이버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이 본령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요즘 펼치고 있는 하이퍼문학 운동이나 담론의 중심은 ‘종이 하이퍼 텍스트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을 그 태생으로 한다는 점으로도 그렇지만, 하이퍼텍스트 이론가들은 종이 하이퍼문학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위에 쓰는 시의 사이버스페이스적 특성, 곧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 라는 것의 논리적 동인(動因)을 체계적으로 확립, 소책자를 제작하여 문학인과 대중에게 확실히 인지시키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합니다. 동시에 하이퍼 시집을 발간하여 문단(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이퍼텍스트 문학 이론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활로를 발전적으로 모색해 보는 방안도 생각해 봄직 하겠습니다.   6. 이상(李箱)이나 조향(趙鄕)의 시를 하이퍼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신 진 : 이상이나 조향의 시, 그리고 문덕수의 시 등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선구적인 면모를 읽는 것은 그동안 동인들도 논해온 바이기도 하고 이는 또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이들뿐 아니라 「처용단장」의 김춘수, 「전화이야기」의 김수영은 물론, 「하여지향」의 송욱, 김지하의 담시 「오적」과 대설 「남」, 그리고 황지우, 박남철 외 젊은 해체시인들, 환상시 시인들에게서도 하이퍼시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시는 원천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이전의, 상상력이란 사이버스페이스를 가진 문화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시는 전자 기계에 못지않는 강력한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실재를 제공해왔고, 이는 일반 독자들의 창의력까지 신장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할 것입니다. 특히, 신화적 상상력, 현실 전복의 전위성, 초현실주의의 무의식, 그리고 중심해체와 패러디의 세계는 이미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유희와 도전이 춤추는 가상의 공간으로 인간 사회의 리얼리티와 정체성을 확장시켜왔다 할 것입니다. 그만큼 하이퍼시의 실현을 위한 자료는 무진장인 셈이라 할 것입니다.   조명제 : 이상이나 조향의 시를 그대로, 오늘날 컴퓨터 매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하이퍼시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기본적 특성을 비선형성과 다선형성으로 볼 때, 이들의 시는 분명 하이퍼시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하이퍼시는, 과거의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포멀리즘, 큐비즘이나 콜라주, 모자이크 기법 등의 종합판이라는 생각이 들거니와, 이상과 조향의 시는 적어도 그 어떤 부분을 선행 실험해 보인 셈이지요. 외국의 경우 T. S. 엘리엇의 「황무지」는 복수시점이나 콜라주 기법 등 훨씬 더 하이퍼적 특성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편이지요.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저자 류현주 교수는 21세기에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문학혁명(하이퍼문학)의 조짐은 근대소설의 발생기인 18세기부터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18세기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탄 센티 (Tristan shanty)』부터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에 나타난 당시의 새로운 기법, 곧 선형성 탈피의 서사방식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큐비즘 예술을 포함시킬 수 있겠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상과 조향의 시는 이미 하이퍼적 특성들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7. 현재 앞이 꽉 막힌 것 같은 시단에서 길을 열고 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신 진 : 산업화, 상업화에 이어 바야흐로 전자 미디어가 주도하는 하이퍼 모더니즘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시의 진로가 불투명하고, 시단의 앞길이 막힌 듯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의 역사를 통해 진, 선, 미 등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창출해 온 시의 위의가 더 소중스럽고, 그 발전의 토양이 되는 시단의 생태 회복은 간절해진다 할 것입니다. 시단의 새로운 진로를 열어줄 방안 모색을 위한 자리는 10여 년 전에 경향 각지에서 빈번하게 가져졌습니다. 그동안 정부 또는 자치단체 쪽에 요구해온 사항들은 그래도 많은 부분 시행 시스템을 갖추고 있거나, 시행되고 있습니다만 시단 내부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까운 시단 내부의 병인(病因)부터 찾아 반성하고, 혁신하는 일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가 독자를 잃게 되고, 시 지망생을 잃게 된 데에는 문학권력들이 저질러온 병폐들, 예를 들어 시인 등단의 남발과 학연, 지연(誌緣), 인연에 의한 섹트주의, 안이한 서정이나 일방적인 현실문제 의식, 자폐증적인 언어유희 등에 그 내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를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업적 이익이나 명리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문학 권력들과 수많은 유령(?) 협회는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원인들을 제공해 왔습니다, 시인들이 시적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적인 취향이 달라도 ‘좋은 시’는 존중할 줄 아는 풍토, 시인이기 전에 애정 어린 독자로서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인의 숫자가 훨씬 줄어들거나 동호인 그룹을 따로 움직이게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흑백 논리나 이도 저도 아닌 혼돈은 둘 다 비시적인 독선입니다. 바른 방향을 외면하고 문화 해석의 독선을 지속하는 관행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온 정치 권위주의가 초래한 함정이라 할 것입니다. 문예지 중 상당수는 문화 콘텐츠를 실현하는 문화 기획사로의 전환도 생각해 봄직 합니다. 요즈음 본격화 되고 있는 하이퍼시, 디카시, 공연시, 음악시 등을 전문화 하기도 하고, 통섭적인 콘텐츠를 계발하기도 한다면, 어느 정도는 오늘의 독자를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역할도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실행에 옮기기가 요원한 일일 것 같습니다. 사심 없는 실천이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명제 :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단의 문제라기보다 시문학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젊은세대의 생장 배경이나 생활문화가 되어 버린 영상 중심의 멀티미디어 시대에 시(문학)의 권위와 영향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현대판 만능 지팡이로 불리는 다기능 핸드폰의 무한 진화, 컴퓨터의 지적 변신, 다용도 TV의 보편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영상(영화) 산업의 다국적 기업화 등등 영상정보 미디어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문학의 위축과 소외현상을 가져온 중대 요인의 하나라고 봅니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문화적 지배는 ‘시의 시대’ 대신 ‘대중가요’의 시대, ‘희곡 문학’ 대신 ‘TV 드라마’의 시대, 그리고 스포츠와 댄스의 시대를 촉발시켰습니다.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 문학은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게도 되지만, 흔히 상업주의적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대중문화에 편승한 상업주의 문학이나 인기 영합주의적 문학운동은, 마르쿠제의 지적처럼 문학이 문학으로부터 소외되는 문학의 역승화 현상을 낳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문학과 과학의 융합으로 잉태된 보물’(류현주, 『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 2000, p. 20.)이라고도 하는데, 디지털문학이든 하이퍼문학이든 그것은 최첨단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매체의 산물이지요. 하이퍼문학이 컴퓨터 매체의 특성을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오랫동안 매체의 한계 때문에 발휘되지 못했던 문학의 미학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과는 별개의 문제로, 디지털문학이나 하이퍼문학은 용어상 디지털 문명 및 대중 추수적(追隨的) 문학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과학사상의 발달과 문학적 상상력 및 기법의 발전 관계는 인류의 역사가 잘 증명해 주는 터이지만, 문학은 대체로 과학문명(기술과학),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문명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요는 하이퍼시를 포함한 현대시가 기술문명의 추수나 대중 추수적 경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의 저자로 우리 나라에도 두어 번 다녀간 적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대가인 장 보드리야르는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를 ‘시뮬라시옹의 시대’ 라고 규정하고,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실재로부터 모방된 이미지 혹은 기호가 다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거듭된 과정을 통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며, 마침내는 원본이나 실재와는 무관한 상태의 가상현실을 구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재가 실재 아닌 실재인 파생실재로 전환된 시뮬라크르(simulacres)의 사회에서는 현실이 그 때 창작된 가상을 모방하게 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이미지 폭력’이 결국 현실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확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차피 21세기의 현대인은 좋든 싫든 멀티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와 기호, 곧 시뮬라크르 라는 파생실재(가상현실) 속에서 무의식 무관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의 물신적 우상과 마찬가지로 그 유일한 타개책이란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하이퍼시나 요즘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사물시의 논리와 창작에도 중요한 참고가 될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제 시를, 기술적 진보와 대중매체에 의해 한정 없이 확산되고 있는 대중가요나 스포츠, 영화나 TV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 양식과 동렬에 놓고 허탈해 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통속적 시뮬라크르에 의해 사람들의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시문학이 사회적으로 그런 대중문화를 압도하거나 우위에 놓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시는 고급문화의 창출로 대중문화와 차별화 하면서,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는 이미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대중의 무의식을 일깨울 인자(因子)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신진/조명제 상호 비평 생략)
5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초월주의> 댓글:  조회:2228  추천:0  2019-03-10
초월주의   미대륙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 중의 하나는 초월주의다. 그것은 제한된 학파를 넘어서, 하나의 개혁운동을 형성했다. 작가들, 농장지기, 수공업자, 상인, 기혼 및 미혼여성들도 참여했다. 그 정신운동은 1836년부터 약 25년 동안 꽃을 피웠다. 근거지는 뉴잉글랜드의 콩코드 시였다. 그것은 18세기의 이성주의, 로크의 심리학, 유니테리언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정통 청교도주의의 계승자인 유니테리언교는 유일신교라는 이름 그대로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예수가 행한 기적들의 역사적 진실은 인정했다.    초월주의의 근원은 다양하다. 힌두교의 범신론, 신플라톤주의, 페르시아의 신비가들, 스베덴보라(스웨덴의 성서학자이자 과학자로 서구 신비주의의 정상으로 평가된다.)의 신지학神知學(보통의 신앙이나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하여 알게 되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 독일 관념론, 콜리지(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사회비평가. 문학평론가로 특히 이름이 높다.) 와 역사학자 칼라일의 저작물 등이 그것이다. 또한 청교도의 윤리적 관심을 계승했다. 신은 선민들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빛을 비추어준다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가르쳤다. 스베덴보리와 유대 카발라주의(중세 유대교 신비주의)는, 외부세계는 정신계의 반영이라고 믿었다. 이런 사상들이 콩코드의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주에 내재하는 신의 속성이라는 개념이 아마도 그 중심이론을 이룰 것이다. 초월주의 시인 에머슨은 소우주, 즉 축소세계가 아닌 존재는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영혼은 세계의 영혼과 일치한다. 물리법칙은 도덕법칙과 맞물린다. 만일 각각의 영혼마다 신이 계시다면, 외부의 모든 권위는 무의미해진다. 한 사람 산 사람마다 내면 깊은 곳에 깃든 비밀스런 신성이면 족하다. 에머슨과 소로는 이런 초월주의 운동의 가장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 이 초월주의의 영향은 롱펠로, 멜빌과 휘트먼에까지 미쳤다.    우리가 살펴볼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은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이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개신교 목사였다. 그도 선조가 걸어간 길을 따랐고, 1829년 안수를 받고는 유니테리언 교회에 부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결혼했다. 1832년 그는 아내와 형제들의 죽음에서 촉발된 정신적 위기 끝에 목사직을 버렸다. "형식적 종교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얼마후 첫 영국 여행을 떠났다. 그는 영국에서 워즈워스, 급진파 시인 랜더, 콜리지, 그리고 칼라일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특히 칼라일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간형이었다. 에머슨은 일관되게 노예제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칼라일은 지지자였다.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온 뒤, 에머슨은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덕분에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게 되었다. 강연장은 사람들로 꽉 찼다.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니체는 편지를 보내오길, 자신은 에머슨이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져서 감히 칭송을 삼간다고 했다. 왜냐면, 니체의 입장에서는 에머슨을 칭송하는 것이 곧 자기를 칭송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행을 제외하곤 에머슨은 줄곧 콩코드에 머물렀다. 그는 1853년 재혼했고, 1882년 4월 27일에 죽었다.   논리는 어느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으며, 진실은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상대를 감복시킨다고 에머슨은 말했다. 이런 그의 신념은 그의 글이 논리적 일관성 대신 단상의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지혜가 깃든 인상적인 문장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기에, 앞의 글 또는 뒤의 글과 연결되지 않는게 많다. 그의 전기 작가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연성을 하거나 에세이를 쓸 때 그는 단상들을 메모했는데, 막상 그 순서는 우연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초월주의에 관한 우리들의 탐색도 그런 단상적 성격을 띨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인들의 무위로 이끈 범신론이 에머슨에게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촉구하는 근거라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의 중심에 신성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힘이 나게 되는가 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야 한다." 그의 정신에 깃든 자비심은 놀랍다. 1845년에 행한 여섯 강연들의 제목을 보라. , ,, , , , 열두 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의 시집이다. 에머슨은 위대한 지성의 시인이었다.   그는 포를, 약간 경멸조로, '수다쟁이'라 부르며 경원시했다. 그의 시 (유럽의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에머슨을 포함한 초월주의자들 역시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를 읽어보자.   만일 붉은 살해자가 자기가 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피살자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나의 미묘한 길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지나가고 돌아온다.   내게는 먼 것과 잊혀진 것이 가까이 있다. 그들과 햇볕은 동일하다. 사라진 신들이 나타나고, 수치와 명예는 같은 것이다.      나를 도외시하는 자들은 오산이다. 만일 내게서 도망치면 나는 날개이다. 나는 의심하는 자이고, 내가 의심이다. 나는 브라만이 노래하는 찬가이다.   강한 신들이 내 집을 동경하고, 일곱 성스러운 자들도 헛되이 동경한다. 그러나 너, 선을 사랑하는 겸허한 자여 나를 찾고, 하늘에는 등을 돌려라.      자연주의 작가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역사와 동양과 인디언들의 생태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장시간의 계약직에 얽매이는 대신 자급자족의 독자적인 생활을 선호했다. 직접 배와 울타리를 만들었고, 측량기사이기도 했다. 에머슨의 집에서 2년을 살았는데, 그와 외모도 흡사하게 닮아갔다. 1845년, 그는 월든의 인적 드문 호숫가의 통나무집에 은거했다. 거기서 그는 고전을 읽고, 글을 쓰고,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며 살았다. 그는 고독을 즐겼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들이 깨뜨린 침묵보다 더 나은 교훈을 내게 주지 못했다." 그 어떤 전기도 에머슨의 다음의 간명한 언급보다 그를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처럼 탈속적인 삶을 산 사람은 보기 어렵다. 직업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투표도 하지 않았고, 납세를 거부했으며, 육식을 하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또한 자연주의자였기에 덫을 놓지도 않았고, 총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색욕, 색욕, 명예욕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소시민의 경박한 행복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서른 권이 넘는다. 가장 유명한 책은 1854년에 출판된 이다. 마르크스의 이 나온 후인 1849년, 소로는 을 발표했다. 이 책은 간디의 사상과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서두에 말하길, 최고의 정부는 가급적 통치하지 않는 정부로서, 간섭이 적을수록 좋은 정부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직업 군대와 상설 정부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미국민의 자연스런 발전을 정부가 오히려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가 받아들인 유일한 의무는 매순간 양심이 명하는 바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법률보다는 자연법에 복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신문을 읽는 것도 의미 없는 짓인데, 왜냐하면 화재나 범죄 소식은 하나만 읽어도 나머지는 모두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건들을 낱낱이 죄다 알려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언젠가 토끼 사냥개 한 마리, 털복숭이 말 한 마리, 멧비둘기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찾고 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곤 한다. 개 짖는 소리를 들은 사람, 말 달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 멧비둘기가 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 걱정을 마치 자기 일처럼 나누어주었다."   마치 동양의 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 같은 이런 글에서 소로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무정부주의 역사가들은 흔히 소로의 이름을 빠뜨린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생 동안 일관되게 간직한 그의 신념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좀 잊혀진 감이 드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살아생전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시인이었다. 그는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 어문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정신활동은 지칠 줄을 몰랐다. 영어로 스페인의 중세 시인 호르헤 만리케(15세기 스페인의 시인, 이 세상의 무상함을 통렬하게 읊은 "아버지의 죽음에 부치는 노래"는 스페인의 시 중에서도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스웨덴의 시인 에사야스 텡네르, 프로방스와 독일의 음유시인들, 앵글로색슨 무명시인들의 시를 번역했으며, 스노리 스툴루손의 의 일부를 시로 지었다. 남북전쟁의 불안한 나날을 지내며 스스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착수한 의 번역은 최고의 영역본으로 꼽힌다. 특히 상세한 주석에는 그의 지적 호기심이 잘 나타나 있다. 1847년에는 육운각의 장시 를 발표했다. 또한 핀란드 서사시 칼레발리 풍으로 백인들의 도래를 예감하는 인디언들을 노래한 도 출판했다. 를 비롯해 에 수록된 수많은 시들은 동시대인들의 애정과 존경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에도 여러 시선집에 실려 있다. 지금도 다시 읽어보면, 단지 마지막 손질만 더하면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헨리 팀로드(1828-1867)는 초월주의와는 동떨어져서 남부의 희망, 승리, 부침과 최후의 패배를 노래했다. 그는 뉴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독일 출신 제본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부 동맹군 편에 서서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했지만, 패결핵 때문에 군인으로 입신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접어야 했다. 그의 시에는 열정이 넘치고, 고전적인 형식에 대한 감각이 엿보인다. 그는 38세에 죽었다.      타이핑, 채란
4    보르헤스 <하버드대 강의> 댓글:  조회:1425  추천:0  2019-03-10
  1. 시라는 수수께끼   그는 시를 '마신다' 고 표현한다. 인간과 우주 앞에서 느낀 당혹감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고 고백한다. 시의 실체는 열정과 즐거움이다.   2. 모든 단어는 잠자는 은유   눈과 별, 시간과 강, 여자와 꿏, 인생과 꿈, 죽음과 잠, 전투와 불 은유의 변형은 무한하다.   3. 이야기하기   이야기 하는 것과 시를 읊는 것이 합쳐지기, 를 즉 이야기의 즐거움에 시의 기품이 추가되기를 소망. 소설이 무너지고 있다. 보르헤스는 시인의 어원이 원래 만드는 사람을 뜻했기에 다시 그런 역할을 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만들다는 의미는 이야기를 지어내 읊다는 뜻이다.   4. 시의 번역   번역은 반역이다 라는 인구에 회자되는 이탈리아 경구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변역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직역의 기원이 성경의 번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쓴 텍스트를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직역 덕분에 사람들은 모국어와 다른 묘사 방법을 배우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고 믿는다.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역사적 상황보다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5. 사고思考와 시   이론에 의해 정의된 문학론 보다는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은 문학 그 자체를 추구한다. 그는 말이 가진 마법의 힘을 설명하고, 중요한 것은 문체의 정교함이 아니라 시가 살았느냐 죽어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저는 제 자신을 본질적으로 독자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감지하듯이 저는 감히 글을 써왔습니다만, 제가 읽었던 것이 제가 썼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읽지만, 누구든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기 때문입니다.   시가 정체를 드러낸 결정적인 순간의 중요성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어떤 생각과 씨름해 왔습니다. 그 생각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수천 수만의 순간들과 날(日) 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을 단 한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問道夕死可矣)"를  떠올리는 말이다. 그 결정적 순간이 심지어 한 인간의 이미지까지도 결정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하는 순간이 그를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배신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든 것과 같이. 그 순간을 겪으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키츠가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어느 한마리 새의 노래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새소리라고 느끼면서 영원을 맛보았다는 그 시 이야기는 보르헤스의 산문과 시 곳곳에서 인용된다. 핵심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즉 문인으로서의 소명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저의 인생에서 중심적인 사실은, 언어의 존재 및 그 언어를 시로 짜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그 사건이 일어난 아버지의 서재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십분 이해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문학 인생은 그 순간의 자기 복제와 재생인지 모른다. 보르헤스 문학의 비밀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물론 그를 글쟁이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외면의 형식이고, 내면적인 내용은 초월(꿈)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영매靈媒 로서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제가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 저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성이 작가의 작품과 많은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문학의 죄악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자의식적(self- conscious)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상황들에 대해 잊습니다. 저는 꿈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평론가들에게 감사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거창한 철학적 의미보다는 소박한 꿈을 나누는 일반 독자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스름 황혼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유대인의 손은 렌즈를 몇 번이고 윤을 내고 있다. 저물어 가는 오후는 두렵고 춥다. (모든 오후는 저물어갈 때 그렇게 마련이다.) 게토의 변두리에서 창백해져가는 히아신스 빛 공기와 그 손은 그 말 없는 이에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명백한 미로를 꿈꾸고 있었다. 다른 거울의 꿈속에 비춰진 꿈의 반영에 불과한 명성과 처녀들의 두려운 사랑도 그를 흔들지 못했다. 은유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힘들게 수정을 갈고 있다. 모두 자신의 별들인 ,조물주'의 무한 지도地圖를.   보르헤스의 시 '스피노자'   1969년에 보르헤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을 동경했었다. 이때도 중남미 좌파 지식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보르헤스를 비판했다. 어쨌든 이제는 국제적으로 보르헤스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어, 어딜 가나 그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구루(정신적 스승)' 의 대접을 받았다.   꿈의 책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삶의 책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위의 단편이 그 점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년이 깊어가며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보르헤스 역시 이 삶이란 꿈에서 그만 깨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나 가끔 악몽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란 걸 알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하는 것처럼, 보르헤스도 인생 자체가 하나의 일장춘몽이란 걸 인식하고 언제라도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면서 이 고해苦海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3    현대시의 고전, 옥따비아 빠스 댓글:  조회:1305  추천:0  2019-03-10
현대시의 고전, 옥따비아 빠스   초현실주의와 동양문학   옥따비오 빠스는 현대시의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초현실주의가 사실상 중요한 시인을 산출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서양시 일반에 미친 역할은 너무나도 큰 것이다. 일차대전 이후 전위문학의 물결에서 하나의 종합 명제로 나타난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은 앙드레 브르똥을 비롯한 몇 명의 정치광신자들을 산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의 전위 문학운동이 다다이즘이나 미래주의, 창조주의, 울트라이즘, 이미지즘을 비롯 어떤 정치 및 사회 위기의식을 도외시하고는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프로이드의 과 함께 서구문학 전통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때를 틈타 동양문학은 서구문인들의 마음과 글에 주요한 자양분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3년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의 정의는 퍽 흥미있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이미지한 한순간의 지적이며 정서적인 일종의 종합체를 제시하는 것이다....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갑자기 순간적으로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종합적인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해방된 듯한 그런 순간적인 느낌. 갑자기 우리 자신이 한순간에 부쩍 자라버린 것 같은 느낌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 말한다.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에 대한 이런 설명은 우리에게 흡사 불교의 선(禪)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선이 그토록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하는 일본의 하이꾸 시인 바쇼는 '일생에 서너 편의 하이꾸를 쓰면 시인이고 열편을 쓴 자는 대가'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파운드는 윗 설명의 끝에 이렇게 역설한다.   '일생에 커다란 책들을 많이 쓰는 것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또한 1916년 막스 자콥은 '300페이지나 되는 뻬기Peguy의 에바Eva보다는 일본의 석 줄 시가 나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한다. 이상 앞뒤 없이 인용한 말들이 별다른 증거가 된다기보다는 그 당시부터 이들 권위문학가들이 얼마만큼 동양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짤막한 예라고 하겠다.   중략   언어해방과 비논리성의 가치   빠스의 초기 작품, 를 보면 신낭만주의와 앙가쥬망 사이에서 바장이는 일련의 시들과 함께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소위 형이상학적인 작품이 흔히 눈에 띈다. 그러나 그가 쉬얼리얼리즘과 접촉이 있던 순간으로부터 그의 시는 언어의 해방과 비논리성의 시적인 가치의 재발견 등 새로운 국면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독수리 혹은 태양' (1949~1950)이나 장시(長詩) '태양의 돌'(1957)에는 아즈텍 문명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초현실주의 수법이 시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   예를 들어 '태양의 돌'의 일절을 옮겨보자.   아무 일도 없다. 다만 태양의 눈짓 하나, 거의 움직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되돌아서지 않는다. 죽은 자는 죽음 속에 응고되어 이젠 다시 죽을 수가 없다. 그대로 그 몸짓 그대로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 속에서, 그 죽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그들 일생의 조상. 항상 그대로 있다는 것은 이제 영원히 뜻이 없다. 순간 순간이 지나가도 이제 그것은 영원히 뜻이 없다. 어느 유령이, 왕이 너의 맥박을 지배한다. 너의 마지막 몸짓을 지킨다. 너의 그 두꺼운 탈은 시시로 변하는 너의 얼굴 위에 씌워져 있다. 우리는 어떤 남의, 우리가 살지 않는, 어쩌면 우리와 상관 없는 어떤 삶의 기념물일 뿐.  (488행부터 503행까지)    시간과 영원과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면 우리가 죽은 후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아 있는 지금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하나의 우주의 맥박일 뿐 지금의 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념비 같은 것을 시인은 상상한다.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이 시에서 자아에 대한 사고는 짙은 관념의 세계이면서 어떤 인간 실존의 절박한 현실, 즉 타인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자아의 모습을 긴박감 속에 고조시키고 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뛰쳐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내가 없으면 남들도 없는 남들은 내게 완전한 실존감을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없다. 항상 우리가 있을 뿐이다. 삶이란 어떤 남의 것, 항상 저 멀리, 아주 멀리 너를 떠나서, 나를 떠나서, 항상 지평선 같은 것 우리에게서 삶을 빼앗고 우리를 남이 되도록 만드는 우리에게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주고 또 그것을 낡게 닳아지게 하는 그 런 것. 뭔가 되고 싶은 갈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양식이여. (515행으로부터 524행까지)   공기는 공기가 아니다 팔도 손도 없이 목을 조른다 여명은 커튼을 찢는다 도시 부서진 언어 무더기 -의 일절   항상 우수에 젖은 그의 언어는 동시에 깊은 사념을 깔고 있다. 다음은 시인의 역사 앞에서의 사색을 들어 보자.   나의 역사, 그건 하나의 과오의 역사인가? 역사는 과오다 진리는 저것 날짜를 넘어서 보다 그 이름들 가까이, 역사가 미워하는 그 이름들 진리는 역사가 없는 시간의 밑바닥이다 무게가 없는 순간의 그 무게.     중국시와 일본시의 모방   1944년 빠스의 의 한 구절은 전위시인 따블라다의 ‘하이꾸’를 모방한 것이 분명하다.   시계가 나의 가슴을 갉아 먹고 있다. 독수리는 아니다. 생쥐다.   그러나 빠스는 그후 이미지 사용법을 보다 비약시켜서 완전히 서구적인 것으로 둔갑시킨다. 가령 ‘대낮’이라는 속에 나온 싯귀를 보자.   빛은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시간은 分으로 비어간다 공중에 머물은 새 한 마리. 뜰의 나무들 파란 불길 마지막 불이 타면서 튀는 소리가 풀섶에 들린다. 끈질긴 곤충들.   이상의 이미지들은 관념어를 쓴다든가 지나치게 먼 비유를 끌어온 점에서 동양시의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빠스는 동양시의 병치법 내지 대조법에서 이미지의 비약에 자신을 갖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는 접근만 시켜 놓으면 서로 끌어당기는 자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 페이지에 떨어진 섬 혼돈의 바다 속. (.......) 헝겊 한 조각에 유령이 나타나는 곳. 몸과 몸을 맞대고: 행동이 된 사념 사랑하는 자는 믿는다: 가득한 그림 복수의 단수의 남의 그림 빈 이것이 스스로의 모습 속에 숨쉰다: 복구한 공간 -에서   1971년 빠스가 출판한 연가(聯歌)식 연작시 방법은 일본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4인의 합작시였다. 옥타비오 빠스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에도아르도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 린슨이 1969년 파리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즉흥적으로 소네트처럼 각각 한 연씩 써내려간다. 언어는 물론 각자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이런 시작 방식에서 ‘언어는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보다 더욱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고 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동양에서 옛날처럼 신기한 것을 발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와 다른 세계상을 알아보자는 것이요, 동양이 하나의 거울이 아니라 또 다른 인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창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빠스가 동양문학에서 찾고 있었던 그 다른 점이란 우리가 빠스의 문학을 대비하면서 느끼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2    보르헤스와 카발라 댓글:  조회:1854  추천:0  2019-03-10
보르헤스와 카발라   민원정 지음     보르헤스는 카발라를 종교적 의미에서가 아닌 해석학적 글쓰기의 이론으로 받아들였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신은 말을 자신의 역사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말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말이 처음에는 어떤 소리였을 것이고, 그 다음에 문자가 생겼을 것이라고 역사적인 순서로 생각한다. 그러나 카발라주의자들은 이와는 반대로 문자가 먼저 생겼을 거라고 추측한다.   머리글   1. 연구의 목적 및 문제제기   보르헤스에게 있어 카발라의 핵심은 세상은 단순히 상징체계이고,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보르헤스가 카발라에서 취하고자 한 바는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오독을 통한 글쓰기, 즉 고전을 모방하고, 이미 쓰인 것의 다시 쓰기, 혹은 다시 해석하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증명하고자 함이 이 논문의 의도이다. 12   "카발라는 글쓰기의 이론이며 글쓰기와 말하기 사이의 명백한 구별을 거부하는 글쓰기 이론이며 심지어는 존재와 부재에 대한 인간적 구별마저도 거부한다." ㅡ헤럴드 블룸 14   카발라적 이미지 15 ; 우주는 한 권이 책이다. 우주 안의 각각의 자연적/정신적 현상은 의미를 갖고 있다. 세상은 거대한 알파벳이다. 육체적 현실, 역사적 사실, 인간이 창조한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메시지의 음절이다. 우리는 제한 없는 의미의 회로망에 둘러싸여 있다. 15   부스트로페돈boustrophedon 15 ; 알파벳을 두 체계로 나누고 텍스트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가는 치환읽기 15,17   알레프el aleph 19 ; 알레프는 모든 책을 포함하고 있고, 이미 쓰인 책들뿐만 아니라, 쓰일, 더 나아가 상상 속에 쓰일 수 있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들까지도 포함한다. 20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카발라는 모든 세상이 단순한 기호체계이며, 우주를 포함한 모든 세상은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카발라의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숨겨진 의미를 찾도록 만드는 데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는 고전을 모방하는 창조적 행위이며 이미 쓰인 것을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것이라 할 것이다. 21   모든 문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왔다는 카발라처럼 실제로 보르헤스는 새로운 문학을 쓰는 것은 예전의 문학을 다시 읽는 것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소재의 고갈로 전지전능한 작가로서의 지위가 퇴위당했다는 것은 카발라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카발라와, 카발라적 글쓰기를 시도한 보르헤스에 따르면 우리의 글쓰기는 신의 글쓰기를 모방하는 것이다. 22   2. 연구동기 및 방법   노드롭 프라이의 문학관 23 - 아스토텔레스적 심미적 문학관; 문학을 작품으로 본다. 문학관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은 카타르시스 - 롱기노스적 문학관; 문학을 과정으로 본다. 문학관의 중심개념은 망아 또는 몰입인데, 이는 독자와 시, 그리고 때로는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시인, 이 모두가 일체가 되는 것    카발라와 오독에 대한 고찰   1. 카발라의 시작   서양철학은 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글'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명해 왔다는 점에서 '음성중심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또 모든 사상, 언어, 그리고 경험의 토대로서 작용할 궁극적인 '로고스'.'현존','본질','진리','실재'에 대한 믿음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로고스중심적'이라고 하겠다. 28   형이상학 29 ; 선성불가침의 토대, 제일원인, 또는 절대적인 기원들을 가정하며 다른 모든 의미의 체계가 그것에 의존해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사유체계 ㅡ데리다가 정의한 '형이상학' , 마단 시럽   ;논리적인 생각으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추론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로고스중심주의'의 맹점이며 이를 벗어나 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서구지성들의 움직임이라면, 보르헤스는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가였다. 29   보르헤스의 표준적인 포맷은 5~10페이지 정도의 단순하고 압축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이야기들에서 보르헤스는 완벽하게 상상된 새로운 세계, 우리의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현실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32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인간성은 오직 반대되고 도전적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용기나 의지로서의 믿음은 오직 의심 그리고 반대되는 것과 만날 때에만 존재할 것이다. ;만약 세상의 의미가 명확하다면 우리는 생각하거나 우리의 고유한 의미를 창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4   엔 소프 40 ;엔 소프, 곧 무한한 일자가 되는 것이 카발라의 궁극적 실재    보르헤스는 성경을 서양 미학의 기초로 그리고 서양 문학의 근본적인 텍스트 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성경을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 칭한다. 41   비르겔리우스는 옛 작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고전의 모방으로서의 텍스트를 의미하며 끝없는 재창조를 통하여 탄생되는 상호텍스트성을 의미한다. ㅡ버나드 쇼 44   2. 신비주의 흐름 속에서의 카발라   보편적인 신비주의는 없으며 힌두, 불교, 회교,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그 외의 각각의 신비적 체계와 개인만이 있을 뿐 ㅡ게르숌 숄렘 50   카발라의 뿌리는 메르카바 신비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영지주의gnosticism과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51   보르헤스의 작품은 언제나 이중적 대칭구조로 전개되지만, 결론은 유일한 저자는 성령이고, 독창적 작품은 성경 하나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57   카발라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개념 57 - 아인소프ayin-sof; 아인소프를 이해하면 신성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요, - 세피로트 sefiroth; 세피로트 체계를 이해하면 인반적인 존재의 의미를 이애하게 될 것이라 한다.   신화의 주요 테마 62 - 무한자 - 초월적 합일 - 대대의 분리 - 대대의 합일   정의 불가능한 무한자에 대한 개념은 그 안에 이중성 또는 다중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63   3.보르헤스와 카발라   보르헤스가 취한 카발라의 아이디어 64 ; 그 아이디어라는 것은 모든 세상은 단순히 상징체계이고, 별들을 포함하여 모든 세상은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카발라의 텍스트는 독자의 협력을 구하고, 문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아니라, 대신 숨겨진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독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글스기는 고전을 모방하고, 이미 쓰인 것의 다시 쓰기, 혹은 다시 해석하기를 의미한다. 보르헤스는 자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썼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하나의 문학은 그것이 읽히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하였다.    1) 오독   '모든 독서는 오독' 86   ;힐리스 밀러는 모든 문학 텍스트가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다양한 의미들의 끝없는 유희이며 비종결적 속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에 기초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독서는 오독'이라는 그 툭유의 이론을 주장   텍스트의 즐거움 ㅡ롤랑 바르트 89   -쾌감 ;텍스트의 일반적인 쾌감이란,단순하고 명백한 표면적 의미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독서하는 동안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상호 연관이라든가, 메아리라든가, 또는 지시사항를 발견하게 되는데, 순수하고도 연속적인 텍스트의 흐름에 이렇게 끼어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쾌감이란 두 개의 표면 사이 '합일(틈,잘못,약점)'에서도 비롯된다.   -희열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문화적,심리적 관습을 불안하게 하며 언어에 대한 그의 관계에 위기를 가져다준다."    카프카 ㅡ데리다에 의해 반복 98 ;쓰는 것은 말하는 것과 다르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며,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다르다.   차연 100 ;'차이지움'이라는 공간개념에 '연기'라는 시간개념을 합쳐 차이와 연기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현재 차이 지워진 것은 다음 순간 자리부꿈을 일으킨다. 따라서 차연은 온갖 차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해석의 이질성이란 독자가 아무렇게나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해석들이 똑같이 좋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능력 있는 독자가 꿰뚫어 보는 정확한 통찰도 있고 어딘가에서 보편적인 의견의 일치도 불 수 있다. 다만 꼭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듯 의미가 하나라는 것이 잘못이다. 가장 좋은 비평은 그 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평이다. ㅡ밀러의 해체비평 101   독자에게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 글쓰기와 책 읽기에 내재된 윤리성이다. 102   솔로몬은 말한다. "지구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ㅡ베이컨 108   망각, 그리고 반복은 보르헤스의 오독의 글쓰기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110   2) 상호 텍스트성   카발라주의자들은 작가는 그의 책의 절대적인 창조자는 될지 모르나 그것의 절대적인 독자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115   상호텍스트성 ㅡ바흐친의 '대화주의 이론'   전재   -첫째, 모든 작가는 텍스트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기에 앞서 먼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독자가 어느 한 텍스트를 읽을 때 그는 이제까지 그가 읽은 모든 텍스트들을 총동원하게 된다.   저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 보다는 발견자라는 겁니다. ㅡ보르헤스 119   '비평이 종족 작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국 독자의 오독이 새로운 글쓰기를 창조해 낸다는 말이 아닌가. 11   ㅡ윌리엄 H. 개스 121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ㅡ에드워드 사이드 122   3) 메타픽션   메타픽션은 픽션의 픽션이다. 즉 이미 쓰인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127   메타언어 128 ; 덴마크의 언어학자 루이스 옐름슬레브, ; 이 세계에 존재해 잇는 비언어적인 사건이나 상황 또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신 또 다른 언어를 지시하는 언어 ; 메타언어는 다른 기호체걔를 그 대상으로 삼는 기호체계를 말한다.   4) 창조적 비평 또는 비평의 창조성   비평은 ㅡ포스트구조주의자들 131   보르헤스에게 있어 아무도 문학의 독창성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작가들은 다소간의 시대정신의 충실한 기록자이며 기존 원형들의  해석자이자 주석자이다. 132   카발라주의자들의 반복, 특히 문학작품에 있어서의 반복은 성령으로 쓰인 성경만이 독창성를 갖는 작품이고, 이후에 쓰인 작품들은 모두가 성경을 모방한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반복이고, 보르헤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135   5) 상징   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독창적인 시인과 모방적인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단순히 전자가 후자보다 더 철저히 모방적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또한 성경이 유일한 책이라는 카발라적 관점에서 보면 독창적인 시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136   우주는 신의 글쓰기미여 자연은 성스런 책이라면, 기호로 이루어진 신의 글쓰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오독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오독을 통하여 독자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144  
1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댓글:  조회:1290  추천:0  2019-03-10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1. 시인으로서의 성숙 과정(1914 - 1943) (1) 시인의 혈통과 성장 배경 1930년대 말경의 멕시코 문단에는 『작업실』(Taller)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부터 문학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수성과 새로운 자세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들의 활동은 멕시코 문학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과 전 세대의 작가들을 구별짓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근대 역사의 부침 속에서 시적 작업의 위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시란 역사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역사에 종속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문학적 창조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흐름에 등을 돌린 채 유유자적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문학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단순한 결과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옹호한 것은 참여시도 아니고 순수시도 아닌 새로운 시, 즉 좁은 개념적 도식을 깬 풍요로운 개념의 시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시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발견이었으며, 그러한 작업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20세기 들어와 시작된 전세계적인 전위주의 운동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사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찾고자 한 젊은 작가들의 시도를 옥타비오 파스는 「수사학」(Retórica)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새로운 감수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이후 적어도 반세기 동안 멕시코의 문단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작업이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와 스페인에서 활동하는 같은 세대의 시인들과의 교감 속에서 수행된 이러한 작업은 라틴아메리카의 시가 근대시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 1914년 3월 31일 멕시코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는 여러 세대 전에 멕시코에 정착한 크리오요(criollo. 중남미에서 탄생한 스페인 출신)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가문의 딸이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탁월한 지식인이자 자유 공제 조합원이었던 할아버지 이레네오 파스(1836 - 1924)는 멕시코의 역사적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멕시코를 침공한 나폴레옹 3세의 군대와의 전투에 대령의 계급으로 참전했으며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진영에 참가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훗날 디아스의 전기를 집필했고 여러 권의 역사 소설과 향토색 짙은 소설, 희곡 작품과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파스가 일찍부터 스페인 작가들(갈도스,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알라르콘, 공고라, 케베도 등)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친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었던 많은 책들 덕분이었다. 친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들의 작품들도 있었고 프랑스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작품도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숙모(“잠에 취한 듯한 처녀, 나의 숙모는/ 눈감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벽 너머 내면을 응시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에게 배운 프랑스어는 그가 프랑스 문화와 문학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하여 멕시코 사람들의 문학과 사유에 강하고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가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파스는 「상호 영감」(Mutuas inspiraciones)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말했다. 나는 프랑스화된 멕시코의 중산 계층의 집에서 태어났다. 1910년경에는 많은 중산 계층의 사람들이 프랑스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화 되다'(afrancesamiento)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과장되게 프랑스 사람들을 흉내내다’라는 뜻이거나 지난 세기에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이 말은 더 넓고, 더 고상하고,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화된 사람’이라는 말이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말부터였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19세기말경에는 미학적 의미가 첨가되어 플로베르와 에밀 졸라를 숭배하는 상징주의를 의미했으며, 루벤 다리오가 말했던 것처럼, 빅톨 위고를 읽고 용기를 얻거나 베를렌를 읽고 모호해지는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금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리아노 아수엘라와 마르띤 루이스 구스만의 사실주의, 알폰소 레예스와 훌리오 토리의 산문, 타블라다와 곤살로 마르티네스, 로페스 벨라르데와 비야우루티아, 고로스티사와 토레스 보데의 시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언급한다. 그들은―그들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밀스럽게 프랑스 문학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파스의 아버지 옥타비오 파스 솔로르사노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활동적인 정치부 기자였다.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에 참여하였다. 급변하는 혁명의 와중에서 미국에 망명하여 사파타와 남부 해방군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그는 멕시코의 농지 개혁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망명에서 돌아와서는 농민당(El Partido Nacional Agrarista)을 창당했다. 농민들의 입장을 열렬하게 옹호했고 사파타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던 그는 1934년 기차에 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1974년에 쓴 회고적 장시 「선명한 과거」(Pasado en claro)에서 파스는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늘 술기운에 사로잡힌 채 구토와 갈증에 괴로워했던 나의 아버지는 불꽃처럼 살다갔다. 어느 날 오후 파리 떼와 먼지로 뒤덮힌 기차역의 침목과 레일 사이를 돌아다니며 우리는 아버지의 흩어진 몸뚱이를 주웠다.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 죽은 자들의 희미한 나라인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서서히 몰락하는 집안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이름 없는 폐허 속에서 자라난 잡초였다(이다). 아버지가 남부의 사파타 진영에 합류하자 어린 파스와 그의 어머니는 미스꼬악(지금은 멕시코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멕시코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커다란 집에서 살았다. 기울어 가는 가세, 대대로 전해지는 매우 강한 지적인 분위기, 죽은 조상들의 초상화와 책이 가득한 오래된 할아버지의 집 등이 파스의 유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집안의 넓은 정원은 훗날 신화적인 이미지로 변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다. 끌라우디오 이삭이 감독한 영화 《나무들의 언어》(El lenguaje de los árboles)에서 파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느꼈던 시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멕시코 시 교외에 있던 낡고 커다란 할아버지의 집이 떠오른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책과 나무는 많았다. 집안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돌보지 않아서 밀림 같아 보였던 매우 오래된 정원에는 커다란 나무들―물푸레나무들과 소나무들―과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무화과 나무였다. 무화과나무는 세월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을에서부터 6개월 동안은 해골처럼 검게 시들어 있다가 다시 푸르러졌다. 열매 역시 신비로웠다. 무화과는 열매가 곧 꽃이고 꽃이 곧 열매다. 검은 껍질 속에는 빨간 꽃이 감춰져 있다. 나는 무화과를 먹는 것이 태양을 먹는 것과 같고 어둠을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촌들, 친구들과 같이 정원에서 놀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무화과나무에 기어올라 무성한 잎새에 숨어 하늘을 항해하고 탐험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무화과나무는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지만 내가 걸터앉아 있던 가지가 마치 범선의 돛대인 것처럼 수평선과 구름을 향해 항해했고, 시간을 탐험하였다. 무화과나무 위의 놀이는 영웅의 행위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방 나의 운명은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자의 관조적인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의 운명은 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는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릴 적에 시인인 호메로스가 되고 싶은 지 아니면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되고 싶은 지를 물었다. 알렉산더는 “그 질문은 나에게 나팔이 되고 싶은 지 아니면 나팔이 찬양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지를 묻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영웅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호메로스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단지 시가 영웅의 행위와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만을 찬양하는 나팔이라고 믿지 않았다. 시는 인간의 불행과 불운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 옥타비오 파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지적인 유산과 사회적 열정을 이어받아 청소년 시절부터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에 민감했고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파스는 1976년에 발표된 시집 『회귀』(Vuelta)에 실려 있는 시편「산 일데폰소 야곡」(Nocturno de San Ildefonso)에서 당시의 사회적 열정을 회상하고 때로는 순수한 열정이 폭력화되기도 하는 변질의 과정을 회고했다. 산 일데폰소는 17세기에 예수회의 수도원이었던 곳으로 나중에 국립 고등학교의 건물로 변했고 파스는 1931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다.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파스의 열정은 또 다른 통로를 통하여 성숙되어 갔다.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은 때로는 일치하기도 했고, 때로는 평행선을 긋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전 세대의 가장 중요한 선배 시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시인이었던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호세 고로스티사 그리고 철학자였던 사무엘 라모스가 파스의 선생님들이었다. 또한 헤라르도 디에고가 편집한 훌륭한 시선집을 통하여 스페인 시를 알게 되었으며, 호르헤 쿠에스타의 시선집을 통해서는 멕시코 시를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었다.  파스가 몇 명의 동료들과 잡지 《난간》(Barandal, 1931 - 1932)를 창간하고 편집한 것이 바로 이 당시였다. 이 잡지를 통하여 문학적 전위주의를 소개했으며 자신의 첫 번째 평론인 「예술가의 윤리」(Ética del artista)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파스는 예술이 갖는 역사적이고 증언적인 가치를 언급했고, 《난간》이 폐간되고 새롭게 창간된 《멕시코 문학일지》(Cuadernos del Valle de México, 1933 - 1934)에서는 ‘순수시’를 뛰어넘는 시의 사회적 역할을 쟁점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가 그 당시에 발표한 첫 시집 『야생의 달』(Luna silvestre, 1933)은 정치와 역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신상의 문제를 표현한 시로 평가되어 동료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1934년 멕시코를 방문한 스페인 시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의 만남도 파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대중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을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의 강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장면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계시였다. 그 당시의 우리는 모두 좌익이었지만 그 때부터 나는 나중에 ‘참여시’라고 이름이 붙여진 정치적 시에 대해 어떤 불신감을 느꼈다.” 알베르티는 약관 20세의 젊은 파스의 시를 읽고 즉각적으로 파스의 시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아니라고 지적했지만 언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파스의 시도가 ‘혁명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인정했다.  1937년 23살이 되었을 때 파스는 학업(멕시코 국립대학교 법학부)을 포기하고 집과 멕시코 시를 떠나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유카탄 지방에 노동자와 농민의 아이들을 위한 진보적인 학교를 세웠다.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관능성은 도시의 근대적 삶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파스는 시편 「돌과 꽃 사이에서」(Entre la piedra y la flor)에서 이러한 대조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시 속에서 원주민 농민들의 질박하고 제의적인 삶과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추상적 체계로 대변되고 있다. 돌과 꽃 사이에서, 대지의 냉혹한 황량함과 선인장에 피는 경이로운 꽃 사이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옥타비오 파스가 중요시했던 것은 정치적 해석을 넘어서는 인간의 심오한 진리, 즉 끝없이 생성하는 생명력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확연하게 드러낸 것은 스페인 내란을 계기로 쓴 시 「아무 일도 없을거야!」(¡No pasarán!, 1936)였다. 시집의 판매로 얻어진 수익금은 멕시코에 있던 “스페인 인민전선”을 위해서 쓰여졌다. 옥타비오 파스는 1937년에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인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를 출간한다. 첫 번째 시집인 『야생의 달』에서처럼 이 시집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이었고 이것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파스에게 언어는 욕망의 발산이고, 육체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1937년 6월에 파스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문화를 지키기 위한 제2차 반파시스트 작가들의 국제회의”에 그의 스승인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함께 멕시코 대표로 초청된다. 그들을 초청한 것은 회의의 조직위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 파블로 네루다였다. 알베르티는 파스를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네루다는 파스가 보낸 두 번째 시집 『인간의 뿌리』를 읽고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파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페인 여행은 파스에게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의 면에서 모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 세계의 작가들은 문화를 지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작가들이 옹호한 문화는 현존하는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서 태동시켜야할 새로운 문화였으며, 그들이 생각한 새로운 사회란 바로 소련이었다. 또한 공산당에 가입한 작가들은 소련의 미학적 논리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참여 문학’에 동조했다. 그러나 파스는 그들의 배타적인 사유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예가 이 회의에서 다루어진 앙드레 지드에 관한 사안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일년 전에 자신이 직접 보았던 소련의 실상을 폭로했고 소련을 새로운 사회로 보지 않았다. 소련을 옹호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지드의 행동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했다. 파스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대단히 고압적으로 지드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중남미 대표단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여러 번에 걸쳐 비공식적으로 지드의 책과 그의 행동, 그를 징계할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모든 중남미 대표들이 서명한 징계문을 서류로 작성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모두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자리에서 카를로스 페이세르는 앙드레 지드가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옹호했다. 최종 투표에서 페이세르와 나는 기권표를 던졌다. 그러나 징계문은 끝내 작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 오후에 열린 공식 회의에서 호세 베르가민이 격렬하게 지드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지드에 대한 징계문을 작성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에서 표현한 이미지와 동떨어진 스페인의 현실은 파스에게 한가지 신념을 심어주었다. 즉 이 세계에는 싸워서 지켜야 할 대의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곧장 다음과 같은 화두로 변했다. ‘어떻게 하면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시, 순수만을 고집하지 않는 시를 쓸 것인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시대의 미학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를 쓸 것인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것이 『작업실』을 중심으로 활동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문제의식이었다.  그 당시 잡지 《현대》(Contemporáneos)를 중심으로 활동한 전 세대의 시인들은 폴 발레리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강령을 쫓아 완고하게 순수시를 고집하고 있었다. 파스는 선배 시인들이 추구한 예술적 가치와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모방하려는 의지는 인정했지만, 그들의 시에는 혁명에 대한 희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지의 시인들이 멕시코 혁명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폭력이 인간의 삶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파스는 자신의 글 「전전날」(Antevíspera)에서 다음과 적었다. 전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전 세대와 비교하여 젊은 세대의 역사 의식이 더욱 강렬했고, 더 명철하지는 않았지만 더 깊고 총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영혼을 상실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답되어져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은 우리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옥타비오 파스는 시와 역사를 화해시키는 두 가지 시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저항의 원리를 표현과 일치시키려는 초현실주의의 시도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전통의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전통의 복원을 꾀한 엘리엇과 파운드의 독특한 해결책이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파스에게 삶의 비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을 시사해주었다. 비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실존 속에서 총체적 관점을 획득하는 일이다. 시와 역사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 방식으로 주어질 뿐 결코 하나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파스에게 시와 역사의 행복한 결합은 현실의 이중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드러남과 숨음의 변주를 통찰하는 것과 같았다. 드러남이 역사적 실존이라면 숨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바로 예술적 비전이다. 순수 예술과 정치적 혁명을 등거리에서 견제하는 삶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한 파스의 열망은 역사적 실존 속에서 심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84년에 방송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역사가 바로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 유한하고, 죽음을 향해 가며, 사랑하고, 태어나며,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운명 그 자체가 갈등하는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20세기의 도시적 삶에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운명이다. 나는 그것을 선배들의 시에서 발견하지 못했고,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운명이었다. 새로운 시에 대한 성찰은 1943년에 잡지 《탕자》(El Hijo Pródigo)에 발표한 글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시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인 이 글에서 파스는 근대 시인의 운명, 즉 시인이란 사회 안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글쓰기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인의 도전은 “유욕(有慾)과 무욕(無慾)의 경계를 성찰하고, 경험과 표현을 일치시키며, 행위와 (행위를 표상하는) 언어를 하나되게 하는” 엄격한 진정성에 이르는 것이다.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파스는 1943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얻어 멕시코를 떠난다. 2년 동안의 미국 생활과 이후의 유럽에서의 외교관 생활로 파스는 10년 동안 조국 멕시코에 돌아오지 못한다. 2. 새로운 시작(1944 - 1958) (1) 새로운 세계에서의 통과 의례      미국에서의 체류는 파스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징적 탈주였고 통과의례였으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에 도착한 나그네의 주의를 끈 것은 모호하지만 강렬한 ‘멕시코적’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근무하면서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를 쓰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장식하기를 좋아하고, 무심한 듯 으스대며, 태만하고, 열정적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멕시코 사람들의 분위기가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대기를 떠돌고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분위기가 다른 세계, 즉 정확성과 효율성 위에 세워진 미국 세계의 분위기와 혼합되지도 못하고 섞이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딱히 존재한다고도 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바깥에서 나와 나의 조국 멕시코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는 타인을 어슴푸레하게 보았다.”      버클리에 체류하는 동안 파스는 휘트먼, 예이츠, 블레이크, 파운드, 월러스 스티븐스, 카를로스 윌리엄스, 커밍스, 엘리엇의 시를 탐독하고 근대시에 대한 지평을 넓히게 된다. 특히 엘리엇의 시는 젊은 파스에게 과거는 현재 속에 있고 근대성과 전통이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시에는 그전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징병」(Conscriptos U.S.A.)이라는 시편에는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와 전통적인 시적 이미지들이 교차된다. ―우리는 감옥에 갇혔지. 나는 결국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어. 곧 이어서 찬 물 세례를 받았지. 우리는 덜덜 떨면서 옷을 벗었어. 한참 후에야 담요를 받았지. (가을 강가의 나무들은 물 잔등에 누런 잎사귀를 떨구었다. 태양은 너울거리는 강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달 후에 그녀를 만났어. 우선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엔 춤추러갔지. 술도 몇 잔 마셨어.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지... (태양, 사막의 붉은 바위들 그리고 관능적인 방울. 뱀들. 차갑게 식은 용암 위의 사랑...)      파스가 미국에 체류하던 1945년 8월 멕시코 시인 호세 후안 타블라다가 뉴욕에서 타계한다. 파스는 컬럼비아 대학의 요청으로 그때까지 멕시코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타블라다의 작품을 연구하게 되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파스는 동양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타블라다에 관한 평론의 끝부분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블라다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고향을 버리고 나쁜 문학적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덕분에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말로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2) 무르익은 과일      1945년 파스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외무부에서 일하게 되고 호세 고로스티사의 추천으로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임명된다. 파스는,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분위기였던 것처럼, 유럽이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불사조처럼 솟아올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럽은 카뮈, 브르통, 사르트르, 루세, 아롱, 메를로-퐁티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유럽의 미래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투적인 논쟁의 분규 속에서 파스는 그리스 출신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파리에 망명하고 있던 코스타스(1925-1981)를 만난다. 코스타스는, 루시엥 골드만이 파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확실하게 유럽의 미래를 본 높이 솟은 망루였다.” 명석하고 해박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코스타스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실과 집단 수용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예술, 현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코스타스와의 만남을 통해 파스는 상상적 열정은 냉철한 이성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나는 서른 살이었다, 아메리카 출신이었고, 전후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의 알을 찾고 있었다, 너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너의 고향은 저항이었고 감옥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떠들썩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우리는 만났다, 2월의 추위와 궁핍함을 녹이던 작은 모닥불의 열정, 우리는 사파타와 그가 타던 말에 대해서, 데메테르의 갑옷, 검은 돌, 암말의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잔잔한 너의 웃음이 우리의 대화 소리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감쌌다, 불에 탄 조국의 언덕을 무리 지어 올라가는 희고 검은 양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코스타스, 나는 차가운 잿더미로 변한 유럽에서 부활의 알을 발견하지 못했다. 피에 젖은 잔인한 키메라의 발치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너의 화해의 웃음이었다.        파리에서 파스는 멕시코에서 만났던 벵자멩 페레를 다시 만났고 그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나누었던 친교에 대해서 파스는 『교류』(Corriente alterna)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마치 브르통과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글을 쓰는 적이 많다; 나는 그에게 묻고 대답하고, 그와 때로는 의견이 일치하고 때로는 의견을 달리했으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시의 유파나 시를 쓰는 기법이 아니었다. 그에게 초현실주의는 천박한 우리 시대에 시적 열정을 점화시키는 비밀스러운 초점이었고, 감수성이 일으키는 저항이었으며, 예술과 에로티시즘과 도덕이 갖는 본래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고, 정치학이었다. 한마디로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생명의 모험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자신의 시에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자동기술법은 부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파스는 자신의 시를 성숙시켜 나가게 되고 1949년 시집 『언어 밑의 자유』(Libertad bajo palabra)를 출간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독의 미로』를, 그 다음 해인 1951년에는 그의 중요한 산문시 『독수리 혹은 태양?』(¿Águila o sol?)을 출간한다.      비판적 전위주의의 요구에 따라 과거에 썼던 시편들을 다시 손질해 묶은 『언어 밑의 자유』에서 파스는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당시 중남미의 다른 시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50년대 초반에 파스와 함께 중남미에 현대시의 장을 연 호세 레사마 리마, 엔리케 몰리나, 니카노르 파라, 알바로 무티스, 곤살로 로하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글쓰기에 대한 자세였다. 2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탐험하는 것이었다. 시인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땅은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은 안쪽과 바깥쪽이 합류하는 지점, 즉 언어의 지대였다. 시인들을 사로잡는 것은 미학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젊은 시인들에게 언어는 운명이면서 선택이었다. 언어는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것이고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밑의 자유』라는 시집의 제목이 말하듯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극중 인물의 자유는 운명이 완수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반대로 파스에게는 자유는 필연의 가면이다. 마찬가지로 시가 추구하는 자유는 언어라는 제한적 형태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시는 조건부 자유인 인간의 실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독의 미로』는 시를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방법을 사회에 적용한 구체적인 결과물이었다. 파스는 『고독의 미로』에서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20세기에 멕시코인이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이 시대에 멕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고독이란 다분히 멕시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을 가리키지만, 파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독이란 모든 인간, 모든 국가에 공통된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가 정교하게 분석하는 멕시코인들의 일상적 제의(祭儀)는 역사적 시간들을 동시적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파스에게 민족의 정체성이란 불변적이고 실체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인과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판적 상상력의 수행을 통해서 은밀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현실을 밝혀내는 파스의 작업이 곧바로 도덕적 비판을 요구하는 정치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귀향      1952년 옥타비오 파스는 파리를 떠나 멕시코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약 일년 동안 그는 뉴델리와 도쿄에 머물렀다. 타블라다가 소개한 하이쿠를 통해 엿보았던 동양에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격정의 계절』(La estación violenta)에는 이 기간에 쓰여진 시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편들에서는 『독수리 혹은 태양?』에서 해체되기 시작한 시인의 자아가 더욱 극적으로 타자와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출구는 없는가?」(¿No hay salida?)라는 시편을 보자. 이 순간이 바로 나다, 나는 갑자기 나를 벗어났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나는 여기 있다, 내 발치에 던져진 채로,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본다.      1955년 일본인 친구 에이키치 하야시야의 도움으로 바쇼의 『오쿠의 오솔길(奧の細道)』을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파스에게 동양은 단지 미학적 차원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사는 다른 방식, 세계와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일본의 전통에서 배운 것은 집중(敬)이라는 개념과 미완성 혹은 불완전이라는 개념이었다. 사물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것,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것... 최소한의 요소로 강렬한 시적 효과를 가져오는 일본 시는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스페인 시의 전통과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일본 시는 하나의 시행에 엄청난 의미의 다양성을 응축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본 시는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외교관직을 수행하며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파스는 외국의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의 작가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 등 적극적 활동을 벌인다. 1956년에는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와의 연속선상에서 시의 본성에 대해 논구한 시론서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를 출간한다. 파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빌려온 이미지인 활과 리라를 사용하여 인간은 생물학적 몸을 갖는 존재이며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몸 바깥으로 퉁겨져 나가려는 형이상학적 힘과의 균형 속에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파스가 다시 강조하는 것은 시는 역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곧 역사라는 사실이며,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을 채우는 역설적 경험이 바로 시라는 사실이다. 즉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갈등이 역사를 창조한다.” 파스의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 1974)과 『타자의 목소리. 시와 세기말』(La otra voz. Poesía y fin de siglo, 1990)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된다.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것을 계기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활과 리라』 2판(1967)에는 초판의 에필로그 대신에 「회전하는 기호들」(Los signos en rotación)이 실렸다. 시에 대한 새로운 선언문의 성격을 띠는 이 글에서 파스는 시의 최상의 임무는 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언어와 시적 경험을 비판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듬해에 출간된 『교류』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 혹은 또 다른 어떤 실체가 혹은 외적 현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언어가 차지하고 있다. 시는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이 지시하는 것은 또 다른 말이다. 시의 의미가 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 즉 말이 가리키는 지시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저희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명확해진다.      시가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은 언어 속에 자폐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은 드러나고 숨는 이중적 방식으로만 주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드러나면서 동시에 숨는 현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은 곧 언어이며 언어가 곧 현실이다. 이 때문에 시의 의미는 시 안에 있으며 시의 최종적인 의미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타자(성)를(을) 발견하는 것이다. 타자는 자아와 한 몸을 이루며 그 몸이 바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인間이 시間과 공間의 짜임으로서의 현실, 즉 비밀스럽고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발견하기 위한 탐색의 결과이다. 인간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관계(間)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통하여 시와 혁명, 시와 사회의 문제를 재검증한다. 그에게 시와 혁명의 임무는 현실 너머의 초월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생성하는 현실의 인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의 원인(숨음)과 결과(드러남)는 일체적인 진여(眞如)의 양면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현실의 숨은 의미를 탐색한다는 구실 하에 저질러지는 모든 위선과 억압에 대한 파스의 비판 작업은 자연스럽게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된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훨씬 이전에 근대성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격정의 계절』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태양의 돌』(Piedra de sol)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새로운 격정의 계절(1959 - 1998) (1) 구조주의와 동양 사상과의 만남      1959년 파스는 멕시코를 떠나 다시 파리로 간다. 이미 멕시코에서부터 새로운 전위주의 운동에 대한 징후를 감지하고 있던 파스는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직감한다. 유럽의 문화계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구조주의라는 변화의 열기는 ‘모든 것이 언어’라는 생각에 직결되어 있었으며 ‘구조’와 ‘기호’라는 용어가 핵심적인 말로 등장했다. 구조주의는 파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는 이후 그가 출간한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활과 리라』 2판에 새롭게 첨가된 에필로그의 제목이 「회전하는 기호들」이고, 두 개의 기호―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사이의 상관 관계를 통해 분석한 문명 비평서의 제목은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69)이다. 육체적 기호(el signo cuerpo)와 비육체적 기호(el signo no-cuerpo)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신과 육체라는 실체적 개념을 피하기 위해 파스가 고안한 개념이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큰 무리 없이 대비시킬 수 있는 개념은 음,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1967년에서 1972년 사이에 쓰여진 글을 모은 책의 제목은 『기호와 갈겨쓰기』(El signo y el garabato, 1973)이며, 훌리안 마리아스가 파스의 글을 선집하여 출간한 책의 제목은 『기호들의 연극/투명성』(Teatro de signos / Transparencia, 1974)으로 붙여졌다.      이 시기에 파스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은 그가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된 것이었다.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쓴 시를 모은 『동쪽 기슭(Ladera Este)』의 작품들은 에로티시즘의 시학으로 평가되던 파스의 시학에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인간의 특성을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더불어 ‘타자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 파스에게 에로티시즘은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인도는 그에게 새로운 지혜를 가르쳐준다. 어딘가를 향해 길을 떠난 시인은 불현듯 길 자체가 목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나를 신성으로 데려가거나 신성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다. 에로티시즘은 상상력으로 변한 섹슈얼리티이고, 사랑은 한 사람의 인격체를 선택하는 에로틱한 상상력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 세계의 실재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인도가 내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지혜는 세계는 실재하지만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나무도 항상 동일한 나무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우주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이 되었다.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우주’라는 말은 생명이 하나의 과정임을 뜻한다. 존재는 불변이 아니고 지속이기 때문에 생명은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깨지기 쉬운 위태로운 실존을 노래한다. 시편「헤랏에서 느낀 행복」(Felicidad en Herat)에서 파스는 이러한 실존의 모습을 “유한한 생명의 완전함”이라고 노래했다. 이것은 그가 일본 시에서 배운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생각과 일치한다. 자아가 허상이며 존재가 환색(幻色)이라는 깨달음은 곧바로 “말의 본질은 관계”라는 것을 파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불교의 인식론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사유를 비교한 책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에서 파스는 “말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실재화하는 암호이다. 모든 말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을 생산하며, 모든 말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관계이다. 관계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붙들어 맨다. 그래서 언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파괴하며 죽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는 변증법의 왕국이다”라고 말한다.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여러 가지 실험적 형태의 시로 나타났다. 두루마리 형태의 시 『백지』(Blanco), 공간적 실험과 조합의 기술을 보여주는 『시각적 음반』(Discos visuales),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램과 타블라다의 구체시를 계승한 『공간시』(Topoemas)등이 그것이다.      인도에서의 생활은 파스에게 가장 창조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가 엘레나 가로와 이혼하고 마리 조 트라미니를 만나 결혼한 것도 인도에서였다. 그러나 이 행복한 시기는 1968년 10월 끝나게 된다. 틀랄텔롤코 광장에서 벌어진 학생들에 대한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파스는 외교관직을 사임했기 때문이다. (2) 행동과 역사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국제적인 언론을 통해 멕시코 정부를 비판한 파스의 행동은 그에게 또 다른 격정의 계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다시 멕시코에 돌아온 이후 그는 여론의 한복판에서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후아레스와 포르피리오를 이야기했고 아르헨티나의 용병과 쿠바의 탈주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술잔을 기울이며 아버지는 나에게 사파타와 판초 비야를 이야기했고 소토 이 가마와 플로레스 마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다. 나는 누구에 대해 말해야 할까?      그의 식탁에서는 화약 냄새 대신 잉크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벌인 문화적 투쟁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투쟁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멕시코의 문화적 현실을 변화시켰다. 그는 학생 운동과 틀랄텔롤코 광장의 학살, 민주주의의 부재와 정치적 대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1970년 출판된 『추신』(Posdata)은 그 첫 번째 결과물로서 『고독의 미로』의 후속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문화적 투쟁은 “비판적 상상력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정치에 관한 옥타비오 파스의 견해는 중남미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때로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추신』은 10년 뒤인 1979년에 『자선가의 얼굴을 한 식인귀』(El ogro filantrópico)라는 두툼한 책이 되어 출판되었다.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전체주의와 에로티시즘을 폭넓게 다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스는 지식인과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은 비판적 소수 의견임을 주장했다.      멕시코 국내 문제에서 시야를 넓혀 국제 정치, 미국의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와 소련의 관료주의적 체계의 위기,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를 다룬 글들은 『흐린 날』(Tiempo nublado, 1983)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필요한 것은 유능한 정치인이 아니라 명철한 비판 의식이라고 말하는 파스는 정치에 관한 모든 글에서 지식인이 비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이익단체에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파스는 70년대 초부터 잡지 『다원』(Plural, 1971 - 1976)과 『회귀』(Vuelta, 1976 - 1999)를 주간하며 70-80년대 격정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멕시코와 중남미의 환부(患部)를 드러내는 파스의 비판은 대내외적으로 억압받는 중남미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혁명적 시도들과 마찰을 빚었다. 예를 들어, 소련의 전체주의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혁명의 장애물이 되는 반동적 사유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의 공범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시간은 파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흑백 논리에 지배된 비난은 쉽사리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가지 단서가 전제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아니고 인간끼리의 유대감이 빚어낸 승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뿐이다.” 결국, 파스가 의도했던 것은 비판이란 좌냐 우냐 하는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제도와 이념에 의해서 억압받고 은폐된 현실을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이었다. (3) “내 거처는 나의 말, 대기는 나의 무덤”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에 대한 30여권의 파스의 평론집과 시는 서로 길항하는 영역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자력장을 형성한다. 자력장의 한극에 정치가 있다면 또 다른 극에는 시가 있다. 정치가 의도하는 것이 시간이 만드는 온갖 우연성을 가로질러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시는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허약한 실존을 노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연(當然)을 주장한다면 시는 ‘본래 그러하다’는 본연(本然)을 드러낸다. 정치가 진보적인 직선적 시간을 웅변한다면 시는 순환과 회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격정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파스의 많은 시는 회귀를 노래한다. 회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즉 시가 말하는 진실은 이탈에서 회귀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만물병작, 오이관복(萬物竝作, 吾以觀復)/ 부물운운, 각복귀기근(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노자 16장)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역사의 직선적 방향을 무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파스는 「산 일데폰소 야곡」에서 돌아감을 이렇게 풀어쓴다. 시는, 역사와 진리 사이에 놓여진 다리일 뿐, 역사를 향한 길도, 진리를 향한 길도 아니다. 시는 움직임 속에서 정적을, 정적 속에서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역사는 길이다. 그 길은 방향이 없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간다, 진실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사랑은 비어 있음으로 가능하다.      역사가 방향 없는 길이라는 말은 역사의 다(多)방향성을 뜻한다. 이것은 자연의 다인다과(多因多果)의 방향성을 일인일과(一因一果)의 방향성으로 강제하는 역사의 독단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파스는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시에서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구조주의를 거쳐 동양적 사유와 접하면서 파스에게 구체화된 존재에 대한 개념과 부합한다. 즉 존재는 비어 있고(虛), 비어 있음은 존재의 무한한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집 『회귀』와 『선명한 과거』에는 이런 시적 사유의 행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파스에게 역사란 자아를 비우는 시험의 장소이다. 역사는 모든 인칭 대명사가 사라질 때 완성된다고 그는 말한다. 존재가 자기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不自生) 때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의미를 갖고,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인간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성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순간이다.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나와 타자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회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시학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시즘과 합류한다. 오랜 침묵 끝에 1987년 출간된 마지막 시집 『내면의 나무』(Arbol adentro, 1987)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시편 「믿음의 편지」(Carta de creencia)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시간 속의 우연들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그에게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몫의 영원이었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영예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1990)한 뒤에도 끊임없이 글을 썼던 그가 여든의 나이에 『이중 불꽃. 사랑과 에로티시즘』(La llama doble. Amor y erotismo, 1993)을 쓴 것은 평생동안 지켜온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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