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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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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낯설게 하기 자체가 하이퍼텍스트 " 댓글:  조회:1442  추천:0  2019-03-15
낯설게 하기(하이퍼텍스트)와 분절  서설 지나 텅 빈다          오남구 창은 플라타너스 잎을 가만가만 비운다. 비우며 바람이 분다 가만가만 북서쪽에서 빌딩의 틈새로 소리가 흘러 조용한 흐름이 느껴져서 깊숙이 손 찔러서 넣은 주머니 속의 만져지는 감촉 매끄러운 동전 한 닢이 따뜻하다. 쨍그랑, 깡통에 한 닢의 소리 던져 넣는 손  비우며 바람이 분다 가만가만 서설이 지났다 첫 눈이라도 내릴까 올려다보는 빌딩 사이로 조각난 허공이 찬바람에 김을 불어 넣어 뿌옇다 깊숙이 손 찔러서 넣은 주머니 속의 움켜 쥔 빈손이 텅 빈다 비우며 바람이 분다 가만가만 플라타너스 잎이 툭 치고 조용히 흐른다 서론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이미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슈클로브스키가 주장한 용어, 예술은 경험적 감각을 새롭게 하는 것 "시의 효과는 언어를 삐딱하게, 어렵고 날카롭게 ,뒤틀린 것으로 만드는데 있다 " 문학성, 전경화, 문제점 을 차례로 풀어본다. 본론:"서설 지나 텅 빈다".작품을 통해 본 낯설게 하기 1)문학성: 문학을 언어의 특수한 예술 영역 지시적 언어로 본다면 . 이 작품은 화자가 충분히 언어를 손아귀에서 휘두르고 있으며 자유자제로 가지고 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분절, 행갈이 자체를 파괴하고 있음도 우리는 쉽게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전혀 말이 안 되는 듯 그러면서 하이퍼텍스트를 통해 문장 전체가 링크되고 있다고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가령 "뿌연 허공"이 지난 초겨울의 첫 눈을 떠오르게 하여(링크되어)두 마디가 그 마디 사이에는 상상하는 공간이 있고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면 과거 현재의 시점이 같이 있다. 이것을 하이퍼텍스트의 비선조적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전경화(foregrounding):티냐토프와 무카로브스키가 슈클로브스키의 낯설게 하기를 변용한 이론으로 작품은 여러 가지의 상호작용인데 그 가운데 지배적인 요소를 앞으로 내세워 체계화하는 것 (시에 따른 종속 관계의 재배치)이 작품에서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는 "서설 지나 텅 빈다"는 문장이 될 수 있겠다. "서설瑞雪"은 상서로운 눈으로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 지나 내리는 눈으로 경사스러운 길조의 눈으로도 봐도 무난할 것이다. 첫눈이 겨울의 시작 이라면 서설은 겨울이 끝나는 눈인 것이다. 즉 새로운 생성을 기다리는 구도자의 내면을 우리는 읽어 낼 수가 있다. 잎이 다 떨어진 플라타너스의 앙상한 가지에 서설이 내리고 봄을 준비하는 텅 빈 자리를 화자는 빌딩 사이로 난 조각난 허공(하늘을 )보면서 첫눈이라도 내릴까? 첫눈이 내리기를 바란다. (막내 딸 시집보내면서 쓴 작품 )무의식 적으로 화자는 지난겨울 아니 힘겹게 예까지 온(작품세계) 을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서설 지나 텅 빈다 " 이 한 문장이 전경화 되어 화자의 외로움 아니면 앞으로의 더 긴 고독한 여정을 말해 주고 있을지도……. 3)문제점: 감정적 요소의 경시(미학적 근거가 약함)가 자체를 다시 뒤집어 본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고 있는 화자는 솔직한 개인감정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전혀 낯설게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미학적 근거가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움켜 쥔 빈손이 텅 빈다 비우며 바람이 분다 가만가만 플라타너스 잎이 툭 치고 조용히 흐른다 마지막 세연에서 화자는 모든 것을 다 놔버린다. 손이 텅 비우고, 그 비운 손을 바람이 가만가만 불어 스쳐가고, 플라타나스 잎이 툭 치고 조용히 흐른다. 이 표현은 불교의 윤회설을 통해 절대자처럼 이 화자는 초월적인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는 구도자 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말하고 싶다. 결론 :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기만 한 날씨가 겨울을 다시 맞는 것 같은 뿌연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우울한 내면을 들어다보면서 그가 40여 년의 세월을 힘들게 걸어 온 여정을 함께 반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외면했던 그의 외로운 작품 활동 투쟁의 결과는 지금에서야 빛을 바라고 글 좀 쓴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앞에서 치세우고 뒤에서 짓밟고 닮아 가고자 하는 심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배반하고…….나는 그의 작품을 더 알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의 "낯설기 하기의 텍스트"를 빠져 나온다. 아니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서 그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봐야 겠다. 결론적으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 이 작품에 다 녹아들어 있지는 않지만 하이퍼텍스트 글쓰기 자체가 낯설게 하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조건이 성립 된다고 본다. 그의 작품을 다루면서 작품이나 그분에 대한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분의 앞날에 서광이 있기를 ……. 2 하이퍼텍스트 서론 : 무의미시 뒤집기, 즉 무의미 시는 화자의 관념이 내포해 있다. 본론 : 상대적 심상과 무의미시 1. 상대적 심상 1) allegory,`축자적 심상 가, 우언-(寓話) 즉 인격화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 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ㄱ. fable-교훈을 내포한 짧은 이야기, 꾸며낸 이야기(거짓말),전설, 설화, 신화 ㄴ. parable-비유 담, 비유,(성경말씀) ㄷ. allegory a.사전적 의미 allegory -비유 우언 법, 우의소설, 비유 담, 상징 b.실재로 쓰고 있는 allegory-,처럼 몇 십 만자, 혹은 몇 만자적인 긴 소설을 얘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교재 "시론" 166p에서 보여주고 있는 -조병화의 의자에서 보여주는 의자 이미지가 allegory(회화)적인 반면 단지 회화성을 만을 강조 했다면 오히려 fable의 더 가까운 해석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fable-산문 혹은 짧은 시가 체로써 아주 짧음과 정갈 함을 강조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위의 사전적 의미로써의 세 가지를 통틀어 우언이라는 공통적인 부분으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나 차이점으로 본다면 parable은 (종교)적인 특색을 가미하고 있기 때문에 allegory 또한 서로 다른 부분으로 해석함이고자 한다.    2)축자적 심상 축자적(묘사)―서술 하거나 그림, 서술-사물의 생각이나 차례를 쫓아 서술하는 것 allegory(회화)―그림, 그럼 조병화의 의자는 축자적이며,allegory 라는 공통된 부분 즉 "회화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그럼 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의자는  allegory 보다는 fable로 해석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2. 탈 관념으로 가기위한 무의미 시 와 하이퍼텍스트(접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전문 "그"의 이름을 불러 준 명명행위를 통해 '그'의미가 '꽃'으로 확립 되었다. 고 생각하는 관점은 1연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표현과 대비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면 사실 이러한 관점의 근거는 들뢰즈가 지시 작용이라 지칭한 전통적인 의미론 즉 실증주의적인 의미론을 따른 해석이 다고 [함종호]는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미 김춘수는 프랑스의 상징주의나 미국의 낭만주의로 부터 무의식의 세계를 모방해온 것이라고 본다면 김춘수의 작품세계를 초기 중기 말기로 봤을 때 '꽃'은 초기 시 세계와 중기 시 세계를 잇는 매개체 역할로 봐야 할 것이며 '꽃'이라는 대상물을 통해서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관념을 그대로 노출 시키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아직은 무의미 시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점을 밝히는 부분이다. 김춘수의 말대로 불손함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즉 완전한 의식이 없는 순수는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 볼 때 무의미 시로 가기는 아직도 길이 멀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접으면서 단국대학교 국어교육전공 유경진 석사논문에서는 를 전후로 전기 시와 후기 시로 나누고 있기도 하다 이전의 시들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들인데 반해이후의 시들은 관념과 의미가 배제된 무의미 시로 하이데거와 릴케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그 존재탐구 방식을 설명한 논의와 후기시의 경우 전기시가 존재론적 탐구를 통해 추구해온 의미를 해체한다고 보면서 전기 시는"존재탐구의 시"라고 비교적 일관된 평가가 내려지지만 후기시의 논의는 천차 만별이여서 다음 기회가 온다면 계속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여지를 남겨 두면서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또한 유강진은 (1959)을 끝으로 무의미 시 이전의 시가 청산되고 새로운 무의미 시로의 세계를 열기 위한 실험과 모색을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그 시가 바로 이라는 시 다. 나의 하나님 -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비,비,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 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 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러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남구吳南球의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비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상징화 시켜서 사진 찍듯 접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팔딱팔딱"이란 의성어만을 보더라도 생명이 느껴지고 싱싱한 생선이 살아 뛰는 모습이 그려 질 것이다. 이 빗줄기는 칼날이 되어 날을 세워 수평 수직으로 마구 제멋대로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직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날 안에 시적 화자는 물론 보이는 모든 일상들이 빗길이 휘두르는 날 안에 똑 같이 갇혀있다. 결국 그 화자가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팔딱팔딱 수직으로 선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제풀에 겨워 결국은 부러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따끔한 꾸짖음을 느낄 수 있다. 늘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최고라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방방 뛰는 사람들 ,위세 당당한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러는 시인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소리 죽여 시인들의 의식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결론 두 작품을 통해서 무의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를 감상해 봤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단지 내 생각은 무의미시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로 가기위한 어떤 한 가교 역할을 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전혀 방향이 맞지 않거나 동떨어지지는 않고 공통된 부분을 통해서 업그레이드 된 시론이 하이퍼텍스트시라는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는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 길만을 고집하며 걸어온 그분들의 문학사적인 체면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시험적인 시작 활동에 있어 무수한 번뇌, 유혹, 모든 것을 뿌리치고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은 문학사적으로 대단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와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오남구의[부드러움의 단상]에서 빗줄기를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부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비가 갠 허공 속에서 조각난 무지개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화자의 이상은 아니 그의 외로운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칼날을 세울 만큼 그의 시 세계에 있어서는 강하고 꼿꼿한 분이지만 그의 심성은 제목이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정이 많은 분이란 걸 밝혀둔다. 인생은 결코 부질없다는 것을 빗줄기를 통해 말해 주고 싶었을까? 어려운 작업을 누군가는 계속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다 지쳐 힘들 때 오아시스 같은 시인을 만나길 기대하면서 급히 길을 빠져 나온다.   3 아방가르드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서론 일류역사의 발전과정을 서술하면서 근대에서 탈현대 아방가르드에서 포스트 모더니 즘까지를 서술, 분석 하면서 작품 분석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본론  1. 시대적 구분  1)근대 일반 적으로 고대, 중세와 더불어 역사 전개의 한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가. 넓은 의미의 근대를 18세기 후-르네상스의 (이성 중심)세계관에서 원인이 경제적(자본의), 정치적(민주주의)라는 과정 즉 근대화 과정 역시 마찬가지로 보고 있다. 나. 좁은 의미의 근대를 1920년 이후-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15-16세기에 싹터서,17-18세기의 성장과정 거친 후 ,19세기 산업 혁명 시대에 꽃 피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기 이후로 좁은 의미의 그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 넓은 의미의 근대만큼은 르네상스 15세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다)다른 견해로 보는 근대 ㄱ. 제1기-19세기 산업혁명에서 완성되는 시기(자유 시장 경제  자본주의) ㄴ. 제2기-19세기 말 독점 자본주의 국가 경영에서 비롯된 시기(제국주의 자본주의) ㄷ. 제3기-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1940년대부터)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술발전에     의 이루어진 시기(다국적 자본주의) 2)현대- 1930년 이후 (19세기말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3)탈현대-1980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오늘에 이르기 까지를 일컫는다. 2. 작품의 구분 (문예사조)  1) 아방가르드-아방가르드 운동이 넓게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에 토대하여 보들레르와 같은 세기말 사상을 계승한 반이성적, 해체적 예술 운동     2) 모더니즘- 고전주의적 세계관에 토대하여 흄의 철학을 계승한 이성적, 구조 지향적 예술 운동  가. 미국 모더니즘 란 (신학에서 이미 중세부터 시작 )한바 있으나 영미의 문예 이론가들이 20세기에 들어 그들의 특별한 문학 사조 흄(T.E.hulme)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이미지즘, 네오클래식(주지주의.NEO-classic)`을 가리킨다. 엄밀히 말하면 영미의 모더니즘은 유럽의 문학 사조와는 다른 것이다.   나.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아방가르드라 부르는 문학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즘),미래파, 표현주의 영미의 모더니즘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3) 포스트모더니즘-유럽의 아방가르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뒤늦게 미국으로 수입되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삶을 미학적으로 반영한 문예사조, 즉 미국 화된 아방가르드이기 때문이다.   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영미 모더니즘을 부정했다는 측면에선 -모더니즘을 부정했다는 논       리   나. 아방가르드를 계승했다는 측면에선 -영미 모더니즘을 계승했다는 논리가 성립 될 수       있다.   다. 우리 현대사회에서는 영미 문화적 패권주의자들의 논리를 좇아'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 아방가르드까지 포함 시켜 사용한 것은 잘못이다.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본다. ㄱ.모더니니스트 시인    해방 전-정지용, 김광균, 김기림    해방 후 -박인환, 김경린 ㄴ.아방가르드 시인    해방 전-이상, 임화, 고한용(삼사문학)    해방 후- 조향, 김수영(초기),김춘수, 김구용, 이승훈, 오규원 ㄷ.포스트모더니스트    1980-황지우, 박남철, 김영승, 장정일, 김혜순 자생적 포스트 모더니니스트    21세기-문덕수, 이승훈, 오남구 3.작품 분석 1) 탈 관념의‘디지탈리즘시’ 쓰기 " 병치은유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몸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 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가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吳南球의전문 짐승이 불을 키고, 빗소리가 몸속을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신경이 불을 키고 선미루나무가 있고. 짐승의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몇 칼로리 바람이 그리움 되어 미루나무 이파리를 흔든다고 문장 전체를 아주 멀리 병치 시켜서 말하고 있으므로 시적 묘미를 더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화자는 깊은 밤중에 혼자서 빗소리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갇혀 있는 몸속으로 빗소리가 흘러 짐승(이성)이 살아나 새파란 의식의 불을 키고 빗소리를 더 가까이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그 짐승은 때로 환하게 불을 키다가 캄캄한 암흑 속에서 몇 칼로리의 그리움 바람으로 살아나 미루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깜빡깜빡 하다가도 그의 의식을 뭔가가 깨우고 있는 것이다. 때로 지쳐 안위하고 싶다가도 차가운 빗물을 통해 의식은 끝까지 살아 저 깊은 내면으로 부터 알 수 그리움이 그의 여정을 여전히 밟아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리라. 미루나무가 비를 맞는 풍경과 바람에 이는 이파리들이 내 힘든 나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깝게 클로즈업되어 접사되고 있다. 결론 1.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미의 문화론자들이 '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 자신들의 문학 사조,즉 이미니즘, 네오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유럽 아방가르드까지도 포함시켜 부르기 시작,미국이 세계 중심국으로 부상하면서 그 울타리를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를 추종한 한국의 논자들까지 풀 수 없는 혼란의 개념 속에서 허우적이며 학계나 문단에서 '모더니즘'론이 끝없는 말장난과 공허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이른바'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도 후자가 전자를 계승하고 있다는 일면에서는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예컨대1950년대에 등장하여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의 1세대라 불리는'뉴욕파'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초현실주의를 수입한 화가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지양, 극복하고 그 대신 아방가르드를 계승한 문예사도들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모더니즘이란 단어 앞에 포스트란 접두사를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3. 국문학을 배우면서 혼란스러운 것은 이렇다 하는 정설, 즉 결론을 내려 주지 못한 부분에 참으로 혼란을 느낀다. 이쪽으로 생각하면 그럴듯하고 저쪽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맞는 것 같고 논문을 읽어 가면서도 어떤 사람들 것을 참고 해야 하나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공통적인 부분도 있지만 모든 논문이 그 앞사람들의 책을 참고하고 본인의 생각을 가미 한 거라 혼란스러움만 더 초래 할 뿐이다. *참고문헌 -오세영 외 지음 [한국현대 詩 사]민음사 *          오남구[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 4 즉물환타지 Ⅰ서론 융의 원형-인간의 정신 의식 속에 내재한 원형 적인 시적화자를 끄집어내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Ⅱ 본론 1.Shadow-무의식적인 자아의 어둡고 열등한 측면 악마적인 것을 얘기한다. 2. Soul (1) anima-남성의 무의식 내에 존재하는 여성적 측면 (2) animus -특히 여성의 억압된 남성적인 특성(적의, 악의, 악감, 적개심) 3 Persona-인간의 외적 인격이 외부세계와 맺은 자아양상(이성의 능력) 문학 작품의 내레이터(반드시 저자와 동일일 필요는 없다) 즉 가면 해넘이의 부신 해 하나가 서해의 수 천 수 만 물고기 떼의 물속에 빠지자 선명한 분계선을 긋는다. 일시에 선 아래 꿈의 물고기 떼가 눈에다 수 천 수 만 환희 불을 켜고서 동으로 동으로 흐른다. 선 위에서는 다만 파르르르......,화사한 물고기 떼의 노을 지느러미가 떨고 있다.       -오남구吳南球의 전문 오남구는 수평선은 의식의 분계선으로서 직관하는 시점이다. 해가지고 나서 동해로 향하는 물고기 떼는 판타지이며, 독자에게 사진을 찍듯이 염사 하여 내면의식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판타지는 시각에 의에 인식한 사물의 영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맹인은 촉각에 의해서, 처음부터 빛을 보지 못한 사람과 빛을 보았던 사람이 서로 달랐다고 말하며 죽은 사람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꿈을 꾸게 되면 빛을 보지 목한 맹인은'캄캄한 허공' 빛을 본 사람은 '하얀 허공'속에서 서로에 대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손으로 잡으려고 한다고 그의 시집에서 말하고 있다. 꼭 즉물환타지라 일컫지 않는 시라 할지라도 모든 시에는 Persona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탈 관념화된 시는 더 그렇겠고 객관적 대상물을 통한 시는 모두 가면 또 다른 자아를 노래한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시적 화자를 넘어가는 해 A 로 본다면 이 물고기 떼를 독자 혹은 사람들로 본다. 그 분계선은 중립을 지키는 A'해로 보고 싶다. 그 많은 독자 혹은 인간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는 모습은 눈에다 불을 키고 수 천 수만의 물고기 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봤을 때 그 물고기 떼들은 다만 선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을 뿐이다. 시적 화자처럼 중립적이지도 ,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것이지도 못한다고 본다.   Ⅲ 결론 분명한 것은 감히 누구도 쉽게 쳐다 볼 수 없는 그의 시세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면 되는 것이다. 라고 나 또한 감히 건방을 떨어본다. 그는 여러 시세계를 넘나들며 실험하고, 아파하고, 고통 받고, 상처받으며 오늘에 이르러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수제자 이었음을 아는 이는 알고모르는 이는 모른다. 그의 책 "꽃의 문답법" 에 보면 서정주 시인과의 재미 난 얘기가 실려 있다.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 강조 하고 싶은 부분은 모든 시가 또 다른 Persona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싶다. 넓게는 어떤 시인이던 Shadow, Soul(anima, animus) 이런 심상들을 내포한 작품들을 다 가지고 있으며 쓰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 작품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과 공간을 매 꾸어 본다. 5 패러디  Ⅰ 서론 시의 구성 원리를 리듬, 심상, 비유, 상징, 인유, 패러디로 봤을 때, 패러디는 맨 마지막에 시의 묘미를 한층 살려주는 인유와 혈연관계에 놓인 문학 장치라 본다.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시의 매력과 원리, 정의를 제시해 보기로 한다.  Ⅱ 본론 1. 패러디의 원리(원전) 환한 대낮 활활 옷을 벗고 뛴다. 키 큰 내가 뛴다. 키 작은 내가 뛴다. 적당한 내가 뛴다. 어우러졌다가 일렬로 서서 뛴다. 푸른 밀밭       -오남구吳南球전문 1)모방(인유) 이 화자는 밀밭을 인유하고 있다. 키가 작은 밀과 키가 큰 밀이 있다. 또 표준의 키를 가지고 밀이 있다. 그들과 결코 어울리지 못한 것 같지만 그들과 화자는 나란히 어우러져 더불어 크고 있는 것이다. 2)비판, 골계(모순) 이 화자는 키가 제일 작은 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표준인 밀과 키큰 밀에 결코 뒤지지 않는 당당하고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 일렬로 뛰고 있는 것이다.     3)변용(창조) 환한 대낮 그것도 활활 옷을 벗고 뛰는 모습에서 이 시의 최상의 부분으로 본다. 그는 결코 음습한 곳이 아닌 환한 대 낮에도 옷을 벗고 뛸 수 있는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연코 그는 실력 면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는 면을  읽어 낼 수가 있다. 결론 부분에서 더 얘기를 하기로 한다. 2. 정의 1)인유와 혈연관계 2)Parodia:다른 것에 반대 입장에서 불려 진 노래  Parodi :모방하는 것, 모방하는 가수 3)적대감과 친밀감을 동시에 지님 4)모방과 변용이 패러디의 기본 개념 5)고유한 문체를 저급하게 주제에 적용 6)풍자적 목적을 위한 채용 7)골계적인 것, 희극적인 것의 강조 *을 보면 원초적인 '나'가 생명력의 본질이 발동하여 통제와 질서로 부터 일탈하려는 무의식의 '질주'가 일어난다. 이 질주는 감정의 정화로써 관념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탈 관념된 알몸이 막 달리는 본질이다. 화자의 유년기는 아버지로 부터 '-하지마라' '-하라'하고 나 스스로를 통제하고 길들이고 있었다. 내 속에 성장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회 관념으로 자리한 '나의 아버지'는 순수 본질의 아버지와 함께 1975년에 쓴 은 질주하는 성장기의 이런 잠재한 의식이 그대로 나타난다. '적당한'내면의 질서가 '일렬로 서서 뛴다'. 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오남구吳南球                     3. 시의 매력 앞에 보여주는 정의 여러 가지 내용들은 시를 한층 돋보이게 혹은 잘 못 사용하면 저급 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몇 가지들은 시의 활력과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의매력이 숨어 있기도 한다고 본다.    Ⅲ 결론 : 이 화자는 전문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가장 키가 작은 밀에 속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화자에게 누가 되겠지만 외형적으로는 아주 외소하고 볼품없는 모습이다. 이 분의 작품으로 3학점 3학년 전공과목임에도 굳이 이분을 끝까지 고수 하는데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다. 이 화자를 만난 것은 학기 초에 들어가기 직전 이었다. 원고 청탁을 했었고 우연찮게 나와 절친한 분이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함께 하는 자리에서 별거 아니라고 내미는 시집을 받고, 또 범우사에서 출간한 "이상의 디지털리즘"이라는 이론 집을 받고나서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 시피 읽고 또 읽고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 하는 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이론 집을 읽고 난 이후에 그의 시집 라는 시집을 대하고 보니 탁 무릎은 칠 수 밖에 없는 감탄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아 바로 이거 구나, 바로 이 분이구나 하는 나의 시에 대한 부끄러움과 절실함이 움트기 시작했다. 여태 내가 찾던 그런 시었으며 절로 재미가 나서 글이 쓰고 싶어져 미칠 지경이었다. 시간은 내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틈을 주지 않았고 글 또한 만만찮은 그분 눈에 찰 리가 만무했다. 단지 희미한 희망의 실가 닥 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아마도 그분은 기억하시지 못 하겠지만 기초가 탄탄하고 정시인은 오히려 서정적인 시 보다는 모던한 시가 더 어울리는 분입니다. 그 말끝을 놓칠 수 없는지라 틈만 나면 열심히 그분의 시론을 읽고 시를 읽고 나름대로 여기까지 오면서 감히 그분에게 도전이라면 한없이 건방진 거고 그 분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 분의 시를 대하면서 우습게도 속된말로 신문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잘 나간다는 분들의 시가 넋두리란 생각에 싱겁기까지 했다. 처음에 그분을 전혀 모르고 있을 때 내게 4년여 전에 인터넷상에서 내 글을 보고 프러포즈를 했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았고 자신감과 함께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왜 선생님은 세상 밖으로 나오시지 않느냐고 동석한 시인이 말했지만 본래 시인이란 숨어서 글만 쓰는 거라는 말과 함께 정시인도 그러려면 아예 시 쓰기를 집어 치우라는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걸을라치면 내 어깨정도 밖에는 안 차는 그런 분이었지만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넓은 마음과 아버지 같은 다정다감한 마음 씀씀이와 다르게 그의 시 세계는 아주 매섭고 이성적인 번뜩임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게 파닥인다. 감히 그 분 앞에서 시라는 표현을 쓰지도 못 한다. 작은 밀(A) 큰 밀 (A')표준의 밀(C)라고 볼 때, 가장 큰 밀을 훨씬 웃자란 밀이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고 그들과 더불어 일렬로 서서 뛰는 그분의 심상에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얼마 남지 않는 학기지만 끝까지 이분의 작품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내 마음이 그렇게 시켜서도 아니고 그 분과 또 다른 친분이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여태 방황하던 나이 시세계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차 하는 말이지만 아주 작은 씨앗에 불과한 얄팍한 내 지식이 그분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늘 부족하고 배우는 입장임으로 많은 도움을 요 하면서 이만 내 생각을 접는다.          6   어조와 화자 Ⅰ 서론 시적 장치에 있어서 어느 한 쪽 만으로 치우쳐 그 작품을 감상하고 논하기 보다는 개괄적인 감상과 비평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시해 본다. Ⅱ 본론: 어조와 화자 1)담화 양식으로서의 시 2)개성과 태도 3)풍자 4)어조창조와 시적 장치 5)어조와 시의 양식 이처럼 여러 단계를 통해서 우리는 시를 감상하고 평 할 수 있는 시적 장치'가 있다면 어느 한쪽만으로 치우쳐 그 작품을 감상하고 논하는 것 보다는 개괄적인 감상과 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본다. 굳이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읽은 다는 건 물론 독자의 몫이라 탓 할 것은 아니지만 배우는 입장에서 내 소신을 밝힐 뿐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어조 부분에서 그것도  전문을 통해 풍자만을 설명하고자 한다.     461120-10675**오진현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시로 살아 있음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경 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 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이 켜진다. 2002년 12월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돈뭉치를 하늘에서 뿌린다. 파 란 만 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한 노구 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전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 쾅! 쾅! 맥박이 가슴 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 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88번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 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하는 신호, -5번 출 구,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 게가 경운동88번지로 간다.             -오남구吳南球 전문 개인적, 역사적, 민족적 심장이었던 상징적인 곳으로 나는 거의30 년 동안을 88번지를 향해가며 보고 느꼈다.깜박이며 바뀌어 가는데, 30여 년 전의 세월이 간단히 압축 표현된다. 시인의 시점은 민족 영욕의 역사를 보는 시점이다. 그 이름이 깜박이며 바뀌는 것은 지각없는 민족의식 때문이다. 천도교의 이름이 사라지고 아랍문화원의 이름이 표기되는 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큰 문제이다. 침략 당하고 있는 민족의 상징이다. 오남구의 -이상의 디지털리즘- 중에서 이 시를 1.2.3연으로 봤을 때 1연에서 이 시인은 경운동88번지가 어떠한 장소였는지 보여 주고 있으며, 경운동88번지로 향해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팔순의 노구를 통해 문득 30여 년 전의 시간을 만난다. 1978년을 만난다. 그는 역사적인 굴욕을 보게 된다. 그 굴욕 앞에서 2002년 12월 24일 밤,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목사가 돈뭉치를 하늘에서 뿌린다. 파란 만 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모습을 풍자하고 있으며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연에서 다시 깜박이가 켜지면서 '복제인간 아기탄생' 즉 시인의 진짜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30여년을 걸었던 경운동88번지의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단하게 이 현실이 싫어서 도망쳐 버리고 싶다가도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익숙한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시간동안 몸이 떨리고, 맥박이 가슴을 치며 숨이 가빠짐을 느낀다. 탈출구를 찾음과 동시에 쏴-바람을 통해서 혼미해졌던 정신에 다시 신호등이 들어 온 것이다. 신호등이 들어 왔음에도 화자는 머뭇거린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긴 하되 시련의 점멸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는 화자의 귀향은 돌아오는 그 자리가 어쩐지 꺼림칙하고 화자가 안식할 수 있는 예전의 천도교의 이름이 사라지고 이국적인 즉 침략을 일삼든 민족의 상징인 아랍문화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Ⅲ 결론 여기서 분명하게 이 화자는 지금의 경제 식민지, 문화식민지, 종교 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는 아득한 현실 앞에서 다시 한 번 머뭇거렸던 것이다. 이 아이러니하고 풍자적인 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각성하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넓게는 자아와 또 다른 자아와의 담화가 들어있기도 하고 독백이 들어 있기도 하고 시인의 개성이 들어 나있기도 하고 시적 장치에서 보여주는 논리적 가치와 심리적 가치도 함께 드러나 있기도 하다. 단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제각기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아이러니와 풍자 쪽으로 이글을 바라봄으로써 더욱 시적 가치와 매력을 느끼고 나온다.          7   어조와 화자 중에서 퍼소나 서론 : 퍼소나의 다섯 가지 분류와 그에 따른 "화자의 두 가지 주체"를 대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본론 1. 퍼소나 1)개성론과 몰개성론 2)시점 선택 3)시점의 유형(체험시, 배역시, 논증시) 4)객체와 자기풍자 5)화자의 두 가지 주체 (1)화자는 기호에 지나지 않음 (2)포스트 모더니즘의 시각 외진 등산길도 호젓이 걸어 보았고요. 땅굴이며 기지촌 색시 굴이며......들여다보고 또 보고 와서는 ,한강변을 거닐어 보고 두 주먹으로 눈물만 훔치고 또 시골로 가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찾아 냉이도 캐어보고 전봉준이 집도 가보고, 또 보고 끝내는 여치에게 찾아가고 골방 같은 데까지 누구 얼굴을 찾아 보았지요. 나는 5호라는 기호 위를 날아갑니다. 누구 이 얼굴 아십니까           -.1 이 시에 앞서 시詩는 어떠한 것이란 말인가? 빠져 어느 다방에 쪼그려 앉아 성냥개비 다섯 개를 가지고 망수()의 기호를 탁자위에 만들어보고 이 다섯 개의 성냥개비를 쓸어 모아 뿌렸다. 그리고 중얼 거린다. 열 번 백 번, 수 천 번을 뿌렷을 때에 이런 비슷한 모양도 저절로 나타 날 게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모양이 뿌려질 게야. 기상천외한 수많은 가치 있는 모양도 뿌리칠 게야. 우리는 이 모양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겠어 그는 여기서 '시의 발견'시를 쓰는 것만이 아닌 '발견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못을 박는다. 이 발견은 곧 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제시함과 동시에 영감을 얻어 디지털리즘에서 사진 찍듯이 시를 찍는다.                                                 -오남구의 이상의 디지털리즘 중에서- -.1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본인 스스로가 독자가 되어 또 다른 자아에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외지고 호젓한 등산로 길을 통해서 화자는 혼자 쓸쓸히 외길만을 위해 걸어 온 길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으며 질펀한 기지촌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 기지촌은 잘 난 시인 들이 득실거리는 현 글 판을 풍자 하고 있기도 하다. 함축적인 시인과 화자가 구별 되거나 일치 할 수도 있는 부분을 보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자 역시 시인은 많은데 "시다운 시"가 없는 글 판을 질퍽질벅 함께 걸어도 보고 들여다보고 와서는 한강변을 거닐며 두 눈을 훔치기도 한다. 하지만 한강역시 역시 오염됨을 인식한 그는 사계절이 뚜렷한 아직은 깨끗한 시골을 찾아 냉이도 캐어보고 전봉준도 만나보고 골방 같은 데서 즉 화자의 또 다른 자아를 찾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 이 시적 화자는 만족하지 못하고 공간을 훨훨 날아 있는 3차원 아니 그 이상의 세계를 찾아 5호라는 기호를 달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시란 기호에 불과 한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 포스트모더니즘 시 쓰기 맥로한, 델리다를 이어 '하이퍼텍스트'까지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본론에서 말하고 있는 퍼소나의 조건을 모두 함축하고도 남은 작품이라 하겠다. 앞전에도 말했듯이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양상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 인의 많은 제자들은 그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최근에 잘 나가는 시인들은 모두 이 분의 제자 인 것으로 안다.  그러면서 시인은 외로운 것이다. 진정 이분만이 느끼는 제자가 없어서 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쩜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우렁을 까먹다가 칵 씹히는 게 있어 보니 그 새끼가 벌써 그 우렁 안에서 집을 짓고 살아보지도 못 하고 함께 잡혀서 가족이 몰살당한 그 상황을 봤다. 어쩜 이 시인은 모던 시 쪽에 있어서는 어미 우렁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랑은 내리사랑은 해도치사랑은 어렵다고 한다.  얄팍한 내 지식이 정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만 내 생각을 접는다.     8. 미적 거리 거리와 표현 기법 Ⅰ서론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서열화 시키는 걸 좋아한다. 인간-샘물-무기 물 무기물-샘물-인간 역이든 순차적이든 몇 가지 방법을 제시 해 보기로 한다. Ⅱ본론 1. 서열의 역전 2. 소외기법 3. 구조와 반구조 4. 환유 시와 비 유기적 형식 5. 불확실성과 새로운 서사 구조 1    시장 정육점 갈고리에 생고기와 나란히 걸린 가죽, 가족?    *  
2    [스크랩] [시문학 2011.9월호]詩文學신인상/ 김이교,심우기,고현석 댓글:  조회:2154  추천:0  2019-03-15
   ■ 2011년『詩文學』9월호 신인우수상       안개-넬라판타지아 (외 2편)                  김이교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뿌연 안개 피어오르고 번쩍이던 빌딩의 유리창이 서서히 지워지고 유리창 속에서 움직이던 얼굴들이 지워지고 그들이 쏟아낸 소리가 지워진다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큰꽃으아리 연보라 꽃잎과 꽃잎 사이 깊은 골짜기에 안개가 모여들고 춘천 시가지에 떼 지어 돌아다니는 안개는 중도와 공지천 오래전에 먹은 소양호 동강 갠지스강 다뉴브강의 푸른 입김을 게워낸다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큰꽃으아리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허벅지를 핥아내리는 뜨거운 입김 으아리 으아리 축축한 신음이 흐르고   거리에 등불이 내걸리기 시작한다.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는 수도 없이 떠오르는 ···· 흐린 불빛들   안개 속 깜박이는 UFO의 불빛에 사격을 하는 병사들   트윗~ 트윗~ 트위터들이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며 놀고 있다       이명     아침부터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다 좌르르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내려앉은 지반으로 하숫물이 쏟아진다 왼쪽 귀가 소리들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냉장고로 세탁기로 전류 흐르는 소리 빨래 삶는 소리   그 여자는 가끔씩 실로폰 소리를 듣는다 도미쏠 쏠시레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소리가 방안 가득 커피 향을 풀어 놓자 왼쪽 귀가 슬그머니 숲을 끌고 온다 숲에는 바람이 불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어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뭇잎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하는 날에는 끼룩끼룩 갈매기 울고 파도 소리 멀리 타이티 섬까지 떠내려간다 꽃과 나비로 장식한 춤추는 해변의 여인이 고갱의 손을 맞잡는다 고갱의 어깨엔 버석거리는 해바라기와 고흐의 귀가 말벌처럼 달라붙어 있다   119를 불러 말벌집을 뜯어낸 뒤에 까맣게 태웠던 기억이 굴뚝처럼 솟아오른다 굴뚝을 타고 붕붕붕 말벌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왼쪽 귀가 다시 119를 부른다 삐뽀삐뽀 사이렌이 울리고 사이렌 소리를 피해 까무룩 잠이 들면 밤새 샤워기에 물이 흐르고 김이 오르는 물기둥 아래서 몸을 씻는 여인, 여인의 실루엣   넉 장의 꽃잎을 활짝 펼쳐놓은 병실 꽃잎 한 장이 떨어진 고흐의 귀를 들고 젖은 머리를 빗는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각 또는 아침햇살     때때로 아침햇살과 서먹한 사이가 된다 바동대며 뒤따라가는데 저희들끼리 수군대면서 먼저 가버린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에서는 자글자글 웃음을 쏟으며 가고 옷자락 걸리는 덤불숲에서는 덤불들 속살을 간질이며 간다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거리에서 서성거리면 간혹 처진 아이들을 데리러오는 또 다른 햇살이 있다   대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까딱까딱 조는 날에는 햇살이 나뭇가지를 세워들고 단잠을 깨우러 온다   어느새 모퉁이가 닳아버린 내 하루 햇살이 몸을 안아 일으켜 마디마디 소독을 한다 금가룹니다 은가룹니다   거울처럼 난반사되어 걸음걸음 눈이 부시다       --------------------------------------------   결빙 (외 2편)                  심우기     맑았던 물이 얼어 물속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의 눈물도 단단한 결정으로 굳어버릴 때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서로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단단해진 뼈만 쓰다듬는다 쿨렁거리는 피와 살이 눈물을 만든다 집 나간 사람 집 지키는 사람 혼자 노는 아이   서로의 길 가고 있을 때 결국 혼자라고 말끝 하나에도 자갈을 물리는   실금의 그것은 무엇?   달그락거리는 자물쇠 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 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     종소리     그느드 르므브 스으 하고 어느 산사의 종소리 ㅡ로만 퍼져 나가면 멀리 각과 변으로 서 있던 산들이 느슨한 180도 한 선분으로 눕는 밤 그 선 위의 모든 것을 까만 물감으로 북북 칠하며 산 하나를 넘고 또 산 하나를 넘는 지치키 티피히이 하고 어느 도심 속 종소리 l로만 쨍그랑거리면 벽을 넘고 집 하나를 타고 넘어 이제는 커다란 빌딩도 훌쩍 넘어 널찍한 광장까지 이르러서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깡충깡충 건너가는 몸이 걸친 옷 조각 실 오르라기 한 올 한 올 풀어져 소리를 타고 ‘ㅡ'와 ’l'로 부서져 뼈와 피로 도로를 넘고 길을 건너 이명으로 울리는 종소리 조그만 가슴 속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사방팔방 그지느치드키 으 이 뎅 뎅 응하고 쨍그랑 댕그랑거리며 텅 빈 속을 알 수 없는 낮은 소리로 어느새 꽉 채우고 여운으로 터져나오는------ l l l       괄호     꽃술 속의 괄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괄호 계곡과 산을 잇는 괄호 건너갈 수 없는 강폭을 메우는 괄호 코와 가슴 사이의 괄호 하늘의 푸른 선 하나를 끌어 와 벌린 대지와 하늘 사이의 환한 괄호 괄호 안엔 돼지가 산다 도시 비둘기가 구구대며 둥지를 튼다 나비가 날개에서 꽃가루를 괄호 안에 털어내고 배 밑창이 간지러운 꿀벌들이 괄호와 괄호 사이를 날고 딱딱한 돌덩이 암흑이 미세물질 잔뜩 묻힌 괄호 괄호 안에서 내가 방긋 웃고 괄호 속에서 꽃들이 튀어나온다   --------------------------------- ---------------   색깔 있는 날 (외 2편)                  고현석     하얀 섬광이 번쩍이더니 밤하늘이 유리같이 갈라지고 깨진 몸에서 먹물이 쏟아진다.   먼지 쌓인 전구가 안무 낀 태양이 되어 부연 빛을 발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무지개를 잘라 입은 사람들이 해변을 뒹굴고 쪽빛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 방안으로 밀려오려한다.   어항 속 빨간 금붕어가 허우적거릴 때 붉은 색이 물에 번진다.   그가 불을 끄고 들꽃 같은 누비이불을 뒤집어쓴다.   검은 시간이 되었다. 혼자만의 세상이다.       가로등이 된 남자     늦은 밤 버스 정류장에 낡은 코드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남자가 무겁게 서 있다.   불황이 겨울바람보다 싸늘하게 사람들을 스치며 어둠만큼 짙게 도시에 번져간다.   그의 질환처럼 구겨진 휴지가 발밑을 어지럽게 맴돌고 이지러진 그믐달이 비스듬히 엿보고 있다. 한 남자가 희미한 가로등 되어 서 있다.   이미 떠난지도 모르는 막차를 잃어버린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다.       돌지 않는 물레     항아리가 되려고 배가 불룩하고 커다란 술독 닮은 남자와 사기그릇처럼 희고 호리병 같은 여자가 얼싸안고 빙글빙글 춤을 춘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마치 돌아가는 물레 위 잘 빚어진 도자기가 되어 간다.   내가 돌지 않는 물레에 고립이 되어 일그러진 도자기 되어 비스듬히 서 있다.   막걸리사발을 연거푸 들이켠다. 멈추었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고 내가 허공을 안는다.   ---------------------------------------------------------------   ■ 2011년 9월신인상 심사기        신인들의 경향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단서가 되는 것이 텍스트 속의 시각변화視角變化다. 주지적 경향의 시나 일반 서정시의 시각이 대부분 주체의 내부에서 바깥을 보는 것이었는데, 신인들의 텍스트는 그 반대로 바깥에서 주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경향은 텍스트 속에서 주체의 의식과 관념(영탄, 해석, 판단, 설득 등)을 최소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무의식無意識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시각과 연결된다. 따라서 주체 중심의 논리적인 관념의 텍스트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변화를 보여준다. 주체(시인)의 무의식이 텍스트의 표면을 형성하는 경향이 주류主流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 신인 우수작품상에 선정된 김이교 심우기 고현석의 시편들은 그런 점에서 신선한 개성을 풍긴다.     김이교의「안개-넬라 판타지아」는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동일한 시간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고 움직이는 판타지(fantasy)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판타지는 주체의 관념을 무화無化 시키면서 자유로운 가상현실의 문을 열어준다. 그 속에는 현실적인 어떤 욕망이 잠재한 것 같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이미지뿐이라는데 주목된다.「이명」에서도 ‘굴착기 소리’ ‘실로폰 소리’ ‘파도 소리’ ‘사이렌 소리’ 등에서 파생되는 상상과 소리가 다양한 현상現象의 세계를 감각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의 배후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하이퍼(hyper)의 감각적 영역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현실이 배제된 감각적 향락에 빠지는 위험성도 감지하게 된다. 이에 비해 「지각 또는 아침햇살」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어릴 적 햇살의 기억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밝고 가볍고 감각적인 동심의 이미지가 시선을 끈다. 그러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듯한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이 부족함이 자신의 내면을 겸손한 자세로 더 진지하게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환원되리라고 생각된다. 더 분발하고 낮은 자세로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바란다.     심우기의 시편들은 개성적인 기법이 흥미를 끈다. 그것은 그의 시작 태도가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결빙」은 고독한 내면의식의 코드를 몇 개의 이미지로 나열하면서, 끝내 자신의 내면을 열어보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심리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달그럭거리는 자물쇠/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시인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도 투영되어 있어서 진정성을 진하게 한다.「종소리」는 기표(시니피앙)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어떤 관념의 세계에서 해방된 소리만의 감각적 이미지가 매우 참신하고 개성적이다. 지성의 반대편에 위치한 이런 감각현상感覺現象은 현대시의 기호성과 연결된다는데 의미가 있다.「괄호」는 독자들을 기의(시니피에)의 세계 속으로 유인한다. 숨은 의미 찾기가 이 시의 키포인트인 것 같다. 괄호가 의미하는 것을 독자들이 나름대로 추적해서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괄호에는 독자참여의 공간이 들어있다. 그래서 독자와 소통하는 현대시의 형태를 생각하게 한다. 앞으로 이런 덕목들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짝이는 재치의 세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단순한 언어놀이’에 머물지 않으려면 자기 시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시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깊이 있는 성찰과 확고한 의지를 요망하게 된다. 개성의 성취를 기대하면서 겸손히 공부하는 자세를 당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고현석의「색깔 있는 날」에는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영상감각이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외부(객관적)의 시각으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쉽게 경험하는 문명현상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그 속에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존재 모습을 넣어서 한 컷의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부각된다. 그와 함께 텔레비전 속의 ‘쪽빛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방안으로 밀려오려 한다.’는 생동하는 사물성의 감각이 개성적인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가로등이 된 남자」에서는 현대도시인 중에서 불황 속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남자의 모습이 희미한 가로등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이미지화 되어 있다. 어떤 관념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적 태도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존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서 사물시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런 기법은「돌지 않는 물레」에서 ‘멈추었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고 /내가 허공을 안는다.’라는 주체와 객체의 융합을 통한 정서의 율동을 보여준다. 그 율동 속에는 무의식 속 주체의 욕망이 들어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접근이 단편적이고 소극적인 것 같다. 이런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할 때 규모가 크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끝까지 경합하다 선외選外로 밀려난 김귀란, 김경옥, 현자의 도전적인 분발을 기대한다. 김귀란의「투명인간」의 발상의 신선함과 명료한 언어, 김경옥의「다시 청사포」의 서정성과 세련된 언어 감각, 현자의「어느 봄날의 기억」의 고향풍속 사생 등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재도전의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이번 수상자들이 ‘재도전의 결실’을 얻었다는 점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심사위원: 문덕수· 신규호· 심상운)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 글쓴이 : 박정원 | 원글보기
1    [스크랩] 라깡적 정신분석 시각에서 본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 댓글:  조회:1391  추천:0  2019-03-15
 라깡적 정신분석 시각에서 본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는 문학의 구성과정에서 작가의 정신적 작용과 창조적 상상력이 상호적으로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유대가 깊은 관계이다. 프로이트는 ‘창조적 글쓰기와 백일몽’이라는 글에서 작품의 기본재료가 되는 작가의 백일몽은 바로 그의 소망충족의 욕구와 직결되며, 작품의 플롯과 다양한 문체는 작가의 원초적인 소망을 변경시키고 다양한 형태로 우회하여 접근함으로써, 작가나 독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대할 때 수반되는 긴장감이나 수치심 등을 피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형태로부터 즐거움을 얻게 하는 일종의 ‘전희’(forepleasure)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작가는 이 전희를 통해 독자들을 자신의 더 핵심적인 심층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정신분석적 맥락에서 문학의 장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형태로 설명되었다. 사실세계보다 환상을 다루는 로망스의 형식은 좀더 작가의 원초적이고 유아기적 환상 혹은 꿈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장르로 인식되었고, 반면에 소설의 형식, 특히 사실주의 소설은 로망스와 달리 환상보다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거나 작중인물들의 망상의 비이성적 요소들을 파헤치려는 의도를 가졌다하여서, 다소 정신분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서, 패트릭 브랜트링거는 조지 엘리어트 같은 사실주의 작가가 “자아의 망상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우리 삶을 형성하는 실질적 힘들에 대해 우리가 맹인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점 . . . 인간의 고통과 기쁨을 형성하는 그 세세한 과정들의 어두움을 꿰뚫으려는 강력한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브랜트링거는 이런 일반적 인식을 그대로 수용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 두 개의 장르가 서로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것을 다루는 문학형태가 사실주의 보다 더 핵심적 진리를 다룰 수 있고, 사실주의 소설에서 보이는 현실 혹은 인물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대한 욕망은 “환상에 대해 느낀 공포를 누그러뜨리려는 욕망”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무의식을 해방하려는” 로망스 혹은 “자기-분석적”인 소설 장르에 관계없이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정신분석은 각 작품의 정신적 경향들을 특징짓는데 유용하다고 보았다.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다루는”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학비평가로서 갖추어야할 기본자세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 불릴 정도로 인간의 진정한 진리추구에 필수적인 무의식이라는 도구를 발견한 프로이트의 혁명적 직관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망각되어졌을 때, 문학은 정신분석이 그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동적이고 비창조적인 영역으로 전락하고, 문학이 과학을 초월하여 미리 예견해준 소중한 지혜들의 출구를 막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점에서 현대 문학비평가의 당면한 과제는 도구적 이성 즉 규범적 자아의 양성에 몰입한 비창조적이고 비직관적인 자아심리학에 대항하여, 무의식의 발견자로서의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외치며, 정신분석을 재정립한 라깡의 정신분석적 개념과 그의 문학비평을 살펴보고, 그의 정신분석적 시각이 열게 해줄 문학의 새로운 지평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비평의 역사      정신분석적 비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함으로써 문학이 제2의 자리에서 정신분석의 개념을 증명해주던 도구로 전락하였던 초기1 단계를 쇼쇼나 펠만은 “응용 정신분석applied psychoanalysis”라 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런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대안으로,  펠만은 정신분석과 문학이 서로 어느 하나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루implication”된 상태임을 지적하면서, 문학은 정신분석에 의해 더 잘 이해될 수 있고, 정신분석도 문학적 기제로 구성되어있어서, 그것을 이해할 때 더 진정한 이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정신분석과 문학의 상보적 관계 내지 동등한 관계를 강조하던 정신분석의 두 번째 단계는 그 대칭성에서 엿보이듯이, 무의식적 영역을 다루고 파악해내는 문학 및 정신분석 둘 다의 속성을 지나치게 균형적인 모델로 만들어버린 한계를 가진다. 이런 한계를 보충하는 제 3번째 단계는 라깡의 이론이 사회의 구조인 언어 및 법 체계에 인간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을 인식한 초기 단계의 이론을 극복하고, 인간의 “욕동drive”과 그것이 속한 영역인 “실재계”를 강조하던 단계와 일치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의 정신분석 비평은 이런 라깡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여, 하나의 기호로 존재하는 문학의 의미를 정신분석에 의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론도 문학처럼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 실재계와 사라지는 동시에 맞닿은 문학의 기호들이 어떻게 더 풍부하게 발굴되지 않은 주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현현시키는가를 언급함으로써, 무의식을 다루는 문학을 진정으로 살리고 또 사이버화되어가고 상품문화와 예술에 제도화되어가는 인간의 의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가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우선, 정신분석의 첫 번째 단계의 양상을 살펴보자. 프로이트는 문학이 그 구성과정에서 정신적 과정과 직결됨을 보여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신분석 논문에서 문학의 기본기제인 은유를 통해 여러 환자들의 꿈이나 증상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 중 도라라는 여성의 증상을 설명하면서, 도라의 손지갑을 여성의 성기로 그리고 도라의 어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진주귀걸이를 남성의 ‘정액’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정신적 기억들이 옛 기억들과 접합하여 기억된다는 정신적 작용을 시냇물이 흘러갈 때 옛 마른 수로위로 먼저 흘러들어간다는 은유적 비유법을 써서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트는 남성들이 소변으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욕망이 불의 심지가 남성의 팰러스를 상징하므로 남성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문명적 욕망이라고 설명함에 있어서도 문학의 기본기제인 상징을 이용해 정신적 상황을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상징과 은유를 즐겨 사용하는 문학적 소양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핵심적 개념인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도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프스 왕》)에 기초를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를 논하거나  E. T. A. 호프만의 작품(《모래인간The Sand-Man》)을 논의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신분석비평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문학적 성향과 비평적 실천은 초기 정신분석비평가들이 문학을 대하는데 모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초기 정신분석비평은 프로이트처럼 문학작품에서 주로 상징을 읽어내고 그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예를 들어, 초기 정신분석비평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권총 혹은 뾰족한 탑들을 남성의 성기인 팰러스로, 집 혹은 동굴 등을 여성의 성기라는 단순한 상징으로 읽거나, 조금 복잡한 차원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지 못하는 햄릿의 우유부단함을 오이디프스적 콤플렉스로 설명하여서, 햄릿이 어머니를 소유한 삼촌, 클로디어스와 동일시하여 그가 누리는 것을 원하는,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펠만은 이런 첫단계 정신분석비평의 예로 조셉 우드 크러치Joseph Wood Krutch와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의 애드가 알렌 포우의 비평을 들었다. 펠만은 크러치가 포우의 상상적 직관력은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의 작품이 그의 병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마리 보나파르트의 포우의 분석은 그녀의 《도난당한 편지》의 논의에서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되찾아주는 것을 어머니의 잃어버린 페니스를 다시찾아주기rephallicization로 해석하는 것에서 보여지듯이, 적어도 그의 작품이 담지하는 시적 영감과 직관들을 풍부한 프로이트적 개념들(벽나로를 어머니의 자궁으로, 벽난로 중앙의 편지통을 달고 있는 매듭을 여성의 음핵으로) 상징적으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지만, 그녀 역시 그의 작품을 정신분석의 개념들을 증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펠만은 보나파르트도 역시 “포우의 작품을 그의 신경증의 재창조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 . 포우의 텍스트가 표현하는 병리적 경향들은 정상적 사람들이 어렸을 때 더욱 성공적으로 단순히 억압하였던,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본능들과 욕동”들의 과장된 모습들“이라고 봄으로써, 문학작품을 ”임상적 진단clinical diagnosis"의 접근으로 처리한다고 비난하였다. 펠만은 보나파르트의 문학에 대한 임상적 접근의 예로 포우를 ‘시체애호가necrophilist'로, 보들레르를 ’공공연한 가학자declared sadist'로 보는 그녀의 시각과, 보들레르가 포우를 존경하고 그의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발견한 것, 즉 “시체애호증과 가학증의 관계”는 오로지 본능이론에 의해서만 밝혀진다고 본 점을 들고 있다.    펠만은 과연 “시가 임상적으로 진단될 수 있을까?”에 의문을 품고, 작가의 무의식적인 성적 환상들만 다루고, 작가의 탁월한 의식적 예술, 즉 그의 시적 기술과 의식적인 예술적 통제력을 전적으로 배제한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비평의 한계를 라깡이 극복하였다고 보았다. 펠만은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에 대한 라깡의 정신분석적 비평과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다섯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하였다. 첫 번째 특징은 라깡의 읽기는 ‘차이성difference’의 해석이었고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읽기는 ‘동일성identity’의 해석이었다는 점이다. 라깡이 이 소설에서 읽어낸 반복은 편지라는 하나의 기표가 여왕, 장관 그리고 듀팽의 세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차이성의 연쇄고리를 형성하여서, 이 연쇄고리는 편지가 누구의 손에 떨어지든지에 관계없이 편지가 상징하는 기표를 주변으로 결정되는 구조적 차이 때문에 의미를 형성해 간다고 읽었다. 반면에 보나파르트는 충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포우의 가학적 시체애호적 욕망이라는 같은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보았다.    라깡과 보나파르트의 읽기 사이의 그 두 번 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은 기표의 분석이고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기의의 분석이라는 점이다. 다시말해 라깡의 분석은 편지를 하나의 기표로 보고 이 기표의 텍스트 상의 움직임을 간파하여서 이것이 전치되어가는 구조적 관계를 밝혀내는 것에 주력하였다면,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이 편지 자체의 숨겨진 내용을 읽어내려는 분석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펠만이 지적한 세 번 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이 텍스트적인 분석인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작가의 전기에 입각한 접근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네 번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이 분석가와 작가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분석가가 환자로서의 작가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 텍스트 속에서 일상적인 논리를 뛰어넘어서 문제를 풀어나간 듀팽이라는 시인적 인물로서의 작가에 관심을 두는 분석이었던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포우라는 시인이 병자로, 그리고 비평가는 의사로 존재하는 주인과 하인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펠만은 라깡의 읽기는 전통적인 정신분석비평, 즉 “응용 정신분석”을 전복하는 대안적 읽기임을 주장하였다.   두 정신분석비평의 읽기의 다섯 번 째 특징은 보나파르트의 분석이 정신분석이론의 ‘적용application'이었다면, 라깡의 읽기는  바로 정신분석비평이 문학 안에 ‘연루’ 되는 읽기라는 점이다. 펠만은 라깡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포우를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우의 텍스트가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과 문학은 서로 안에서 ‘상호연루interimplication’되었음을 주장하였다. 펠만은 라깡의 정신분석이 문학에 대해 기여한 바는 그의 “학파”의 새로운 ‘도그마’에 있다기 보다 해석가의 중요한 자질인 독창성과 직관을 통해 어떻게 정신분석이 문학에 연루되는지를 보여준 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펠만이 전통적인 정신분석비평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한 이런 ‘연루’의 정신분석비평도 두 확고한 영역을 연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해석가의 ‘직관의 모험’을 예찬하였다는 점과 두 영역의 대칭적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의 접근방법으로서는 다소 도식적이고 제한적인 방법이며, 무의식의 차원을 다루기 보다 표층의 의식적 영역을 직관적으로 연결하는 고도의 의식적 차원에 기초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또다른 형태의 제한적이고 의식적인 정신분석적 비평을 극복하는 것은 펠만이 제시한 것과 달리 라깡의 정신분석적 ’도그마‘(이론) 그 자체의 힘으로 가능하다.       라깡의 정신분석적 개념에 의한 새로운 정신분석 비평      라깡의 이론의 발전이 초기의 상상계 강조시기, 중기의 상징계 강조시기 그리고 말기으 실재계 강조시기로 나뉘어졌듯이, 쥴리아 라인하드 립튼과 케네드 라인하드는 정신분석을 ‘상상계적 적용’, ‘상징계적 연루’, 그리고 ‘실재계적 외/친밀성extimacy’의 단계로 나우었다.  앞서 언급한 두 단계의 정신분석비평의 역사도 바로 프로이트이론의 일방적 적용으로 문학에서 이미지나 작가 및 작중인물의 성격분석을 중심으로 정신분석의 개념을 증명하는 상상계적 적용단계와 펠만의 분석처럼, 첫 단계의 나르시스적인 일방적 적용의 실수를 교정하고 정신분석과 문학의 쌍방적 연루과정을 강조하던 시기는 상징계적 단계의 정신분석비평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라깡의 《도난당한 편지》의 분석도 1955년 4월에 상징계를 강조하던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서 펠만이 강조하였듯이, 정신분석이 문학과 상호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계적 정신분석비평이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상징계적 포우 읽기는 후기구조주의자 쟈끄 데리다에 의해 비난된 바 있다. 데리다는 라깡이 자신의 이론인 상징계의 역할과 기표, 무의식을 ‘잃어버린 편지’로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문학을 자신의 이론을 위해 사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문학자체의 요소인 화자를 배제하여 화자가 마치 듀팽인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주체의 이중적 분리성을 무시함으로써 및 의미의 산종성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라깡의 정신분석비평의 한계는 그의 이론이 점점 실재계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극복되고, 명실공히 문학을 정신분석의 ‘원인cause' 즉 ‘욕망의 대상object a'으로 간주하고 실재계와 결합함으로써, 문학의 의미를 확장하였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펠만의 정신분석과 문학의 ’연루‘와 다를 바 없이 보이지만, 라깡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 명확히 규정될 수 없지만, 그것이 실재계와 상징계의 빗겨간 소실점vanishing point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임을 생각할 때 이 오해는 사라진다. 다시말해 ‘원인’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은 지금까지처럼 그 의미가 명확히 규명되어져야하는 기표로 쓰여진 상징계만의 차원이 아니라, 실재계도 담고 있어서 그 모호함과 비결정성으로 인해 더 많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문학은 실재계가 상징계의 차원에서 드러내지지 못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의 해골처럼 ‘일그러진 형상anamorphosis’으로 표출되며, 상징계와의 빗겨난 만남으로 인해 생긴 ‘얼룩stain’이다. 끊임없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은 각자 따로 떨어져나가려는 실재계와 상징계 그리고 상상계를 함께 묶어주는 일종의 ‘쌩똠므sinthome'('징후’의 라깡적 개념)이기도 하다. 라깡은 1975-76년 그의 세미나를 《쌩똠므》라는 제목으로 제임스 조이스 논의를 위해 진행했다. 라깡에 의하면, 조이스의 ‘현현epiphany’(어떤 대상이나 주체의 속성 혹은 무의식적인 어떤 것이 이 한 순간 강렬하게 느껴지거나 폭로되어지는 느낌)이나 《피네간의 경야》같은 작품은 바로 실재계의 ‘쥬이상스’가 상징계를 침범한 것과 같은 ‘생똠므’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깡의 포우읽기 같은 상징계적 정신분석비평이 이런 실재계적 정신분석비평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그의 《햄릿》비평에서 엿보인다. 이 비평은 라깡의 포우비평이 보여준 이론중심적 경직성을 벗어나서 ‘욕망의 대상’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햄릿의 욕망을 잘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실재계적 비평이 되기 까지에는 미흡하다. 이런 비평은 라깡의 ‘두번째 죽음’, ‘두 죽음 사이in-between the deaths’, 죽음충동death drive, '외/친밀성extimité‘, '그 것das ding', '칸트와 사드’ 등 여러 개념들이 사용하여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및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의 인물들을 비평할 때 가능해졌다. 《욕망과 해석》이라는 세미나(VI)에서 행해진 햄릿 비평은 다소 상징계적 법과 그것에 의해 표출되지 못한 실재계의 잔존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라깡은 이 연극을 제 2의 《오이디프스 왕》이라고 불렀으며, 일종의 오이디프스적 드라마로서 (아버지 살해의) 범죄와 질서의 관계를 비극적 차원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비평과 더불어, 라깡은 햄릿 비평에서 욕망과 강박신경증의 구조적 관계를 상술하였다. 라깡은 인간이 소유하기 불가능한 ‘팰러스’ 내지 쥬이상스를 욕망하면서, 유일하게 그것의 잔존물로 남겨진 ‘욕망의 대상’을 통해 이 ‘팰러스의 상실’, 즉 ‘존재(실재계)의 구멍hole in the real'을 애도한다고 보았으며, 햄릿의 욕망은 바로 타자의 욕망으로서, 타자(어머니 혹은 무의식)가 욕망하는 팰러스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impossible desire’ 때문에 햄릿의 ‘강박 신경증obsessional neurosis’이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연극에서 햄릿이 ‘욕망의 대상’인 오필리아에 대해 감정을 정립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욕망의 대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런 맥락에서 그녀의 이름을 ‘오 팰러스oh phallos’로 연상시켰다. 또한 햄릿이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연기하는 것도 이전의 비평처럼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삼촌을 통해 획득하려는 욕망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팰러스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쥴리아 라인하드 립튼과 케네드 라인하드가 《햄릿》을 상징계적으로, 《리어》를 실재계적으로 보았듯이, 슬라보 지젝도 라깡의 후기 정신분석 비평이 실재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립튼과 라인하드는 햄릿의 주체를 욕망의 주체로,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의 주인공을 욕동의 주체로 보았다. 지젝도 라깡의 이론이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욕망의 주체에서 실재계의 욕동drive을 중심으로 이론이 전개된다고 보았다. 특히 모든 욕동의 근본인 죽음의 욕동은 실재계를 가장 잘 대변해줄주는 개념으로 라깡의 여러 복잡한 개념의 핵심이 된다. 특히 라깡이 안티고네와 눈 먼채로 콜로노스를 떠도는 오이디프스를 아름답고 숭엄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의 욕동은 중요한 개념이다. 라깡은 이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두 죽음 사이’의 언캐니한 세계라고 말한다. 이 ‘두 죽음 사이’의 세계는 생물학적 죽음도 초월하여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과 관련된 세계이다. ‘두 번째 죽음’은 일명 죽음의 욕동으로서, 상징계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햄릿이 기도하는 삼촌을 죽였다면, 그 삼촌은 육체적 죽음을 겪은 것이지만, 햄릿은 그런 죽음에 만족하지 않고 기도로 인해 삶의 흔적도 남길 수 도 없게 의미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도 완전히 죽는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번째 죽음’은 리어왕이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처럼 자신의 운명(Ate: 상징계적 차원)을 피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육체적 죽음에 매인 자들이 아니라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처해서 그 운명을 초월하고 무(無)화시키는(두 번째 죽음)도 감행하는 진정한 욕동의 주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두 죽음 사이’에 사는 것이며 상징계와 맞닿으며 빗겨나간 실재계의 핵인 ‘사물’을 맴도는 숭고한 차원의 주체이다. 이 ‘두 죽음 사이’의 세계는 리비도적 라멜라lamella처럼 무정형적인 영원히 죽지 않는 차원의 세계이다.   립튼과 라인하드가 새로운 정신분석비평으로 제시한 욕동의 주체를 읽어내는 비평은 바로 이 ‘두 죽음 사이’의 숭고한 인물들, 바로 운명과 상징계적 의무를 초월함으로써 고통을 지불하면서도 윤리적으로 실재계적 차원에 충실했던 인물들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죽음의 욕동을 두 가지의 모델로 제시하여서, 고통을 치르더라도, 즉 쾌락원칙을 넘어서‘죽지 않는’ 리비도적 쥬이상스에 충실한 죽음의 욕동이 있는 반면에, ‘즐기라’는 쥬이상스의 본질적이다 못해 윤리적이라고 까지 설명된 “쾌락의 어리석은 수퍼에고적 죽음의 욕동”을 극복하고 자신의 ‘환상을 거슬르게traversing the fantasy“ 만드는 죽음의 충동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칸트와 사드‘라는 논문에서 사드처럼 일상적인 차원에서 악이라고 할 정도로 가혹한 일이지만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는 것, 즉 ’쥬이상스에 대한 의지‘를 윤리적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법, 윤리는 우리가 우리의 상황이나 개인적 열망(칸트에서 병리적인 것)에 따라 취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족되기를 원하는 초자아의 욕망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과 욕망은 서로 반대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실체로서 윤리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의 윤리학은 욕망에 따르는 것, 즉 욕망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지젝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주체들처럼 ‘전체주의적인’ 쥬이상스에 대한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서 치료의 목적인 ‘자신의 [상상계적] 욕망을 극복하고’, 윤리적일 정도로 거스를 수 없는 [실재계의] 욕망을, 즉 더욱 과격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 “씰리쎄Scilicet: 너는 해도 된다You are allowed to”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사드에 대한 언급은 쥬이상스의 의지를 자유로이 구가한 사드를 윤리적으로 예찬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라깡은 사드가 지나치게 사디즘의 테크니크를 과시하는 잘못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라깡은 고통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즐기려는 욕망의 목소리에 충실하는 쥴리에뜨 같은 사드의 가학적 행위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윤리적인 숭엄한 인물로 승화된 반면, 사드는 사형선고를 면하기 위해 그의 범죄를 변명하는 비윤리적 주체로 전락한 것을 지적하였다. 라깡은 이런 사드가 결국에는 절대적인 욕망 그 자체에 순응하기 보다 여성들의 ‘남근선망’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해결책으로 ‘구부러진 바늘’curved needle', 즉 페니스 그것도 ‘큰 것’을 제시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였다. 라깡은 이런 사드의 한계로 인해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사드가 언어가 사용되는 ‘우리의 세계에서, 깨어있는 상태로, 자연의 가슴으로 다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게 했을’ 그런 종류의 무감각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 “진정으로 욕망에 대한 글로서, 거기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라깡의 실재계를 강조하는 이론은 문학이 일종의 현실의 세계라는 가상과 더불어 반드시 실재계에 속한 존재의 핵, 즉 ‘사물’ 주위를 맴도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더 이상 일상적인 기표만이 아니라, ‘사물’주위를 맴도는 침묵과 비문법적, ‘외/친밀성’의 언어로 구성되어야한다. 이런 라깡적 의미에서 문학은 다른 담론과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일관적으로 연결된 데서 오는 읽기의 쾌락을 주지는 않지만, 사물’ 주위를 맴돌음으로써, 어떤 몇 개의 의미로 한정되게 전달되는 언어활동이 아니라, 좀더 실재계와 상징계가 그리고 독자의 상상계가 어우려져서 얻게되는 쥬이상스, 즉 그 자체도 작가의 이 세 영역의 어우려진 매듭인 ‘쌩똠므’의 문학만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독자의 실재계에 속한 ‘사물’을 자극하는 모호한 ‘일그러진 형상’, 얼룩, 오브제 아, 즉 또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된며, 이러한 실재계와 조우하려는 라깡적 문학 비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창작품이고 ‘얼룩’이 되어 독자에 의해 더 풍부한 의미로 대체되어지는 결과를 유발하게 된다.   출처 : Lacanian | 글쓴이 : 해넘이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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