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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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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날짜 :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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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댓글:  조회:1339  추천:0  2019-03-17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에 정치적 과제를 부과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민중’과 ‘새로운 대지’의 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절대적 탈영토화’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가 구분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주체와 대상’은 사유의 빈곤한 근사치일 뿐이다. 사유는 영토(territory)와 대지(earth)의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이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대지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탈영토화의 운동들이다.(영토는 대지 위에서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탈영토화를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지가 영토의 운동들과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지가 특정한 역사적 규정들에 제약되지 않는 ‘순수 내재면’으로 이행할 때, 그리고 ‘무한한 디아그람적 운동들’을 포함하는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탈영토화는 ‘절대적’이 된다.  1) 내재면 위에서의 탈영토화는 (형식들, 기능들, 감응들의) 재영토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대지의 창조’에 입각해 재영토화를 정립한다.  2)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관계들에 관련해서 파악되고 작동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이란 사회와 역사의 초월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극복을 이끄는 개념이다.(베르그송의 지속과 비교)   ▶ 근현대 철학과 자본의 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철학들은 사회적-역사적 규정을 하나의 무한점(無限點)에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곤 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그 고유의 교환가치를 띤 ‘정신의 부드러운 상업행위’도 아니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대화’에 고유한 순수한(disinterested) 사교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토들 및 인구들(개체군들)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즉 소통, 교환, 합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 통념과 명제에 속하지 않는 ‘para-doxa’의 추구가 철학이며, 때문에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지향하는 철학은 늘 탈시대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토피아적이다. 즉 철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극점(極點)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문제는 단지 자아도취적일 뿐인 비판이나 강도론적 방법의 무능함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철학이 (절대적 탈영토화의 구축을 통해)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의 사건론에는 이런 물음이 깃들어 있다. 사건을 위해 산다는 것(“사건의 자식이 되라”)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현재에 관련되는 대목은 부끄러움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과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다음 물음을 야기시킨다: 내재면은 생명/삶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에 예속시키는가?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철학은 현재에의 저항(resistance to the present)이며, 따라서 철학은 끝없이 스스로를 초월해야 한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사유는 (개념의) 철학과 ‘현재의 환경=매트릭스(present milieu)’의 교차로에서 성립하며, 이것이 곧 정치철학 또는 정치적 철학이다. 철학의 사건은 역사의 선형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개념과는 관련이 없다. 철학은 오로지 그 (비물체적인, 잠재적인, 배아적인=싹트는, …) 사건의 개념을 가지고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the lived)’에 관계할 뿐이다. 사건을 사유함에 있어 철학은 현실의 삶의 모든 것을 탐사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변적 생기론이다. 장래의 사건은 현실의 사태를 엔트로피적 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생성/되기’와 ‘역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철학관이 함축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철학을 개념의 ‘자기조직적(autopoietic)’ 창조로 보는 것은 그것에 거짓된 독립성을 주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적 결정을 거부함으로써 들뢰즈는 사유의 사건과 철학의 과제들을 비결정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현대 사상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곤경들에서 벗어나 내재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 위에서 출몰하는 문제들은 사건과 역사적 현실성 및 경험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점에서 철학적 생성/되기는 역사적 규정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건과 사태는 존재의 전혀 다른 질서임을 강조한다. 혁명은 역사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서, 개념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역사의 연대기에 저장될 계기가 아니라 생성/되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성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와의 투쟁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사건은 역사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역사를 디디고서 발생하게 된다. 아도르노는 베르그송주의는 생명의 미분화적 물결 속에서 변증법적 소금이 씻겨 내려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즉 베르그송주의는 비합리적인 직접성의 컬트를 통해서 내재성의 자유와 역사적 현실의 사실성 사이의 이산(離散)=선언(選言)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새로운 베르그송주의는 아도르노의 이런 거친 비판을 논박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개념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생성/되기의 리듬과 함께 하는 개념들의 창조이다. ▶ 에릭 알리에즈는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함축하는 철학사적 의미를 칸트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흐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존재론적 일원론과 유물론을 제시한 점에서 찾는다. 베르그송주의는 존재를 ‘순수 긍정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내재성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방향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을 제공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실존의 양태와 삶의 가능성은 어떤 초월적 원리나 가치에도 독립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유일한 규준은 실존의 성격, 삶의 강화(intensification)이다.   
14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댓글:  조회:1290  추천:0  2019-03-17
▶ 그러나 『테스』를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가 리좀이, 탈주선이 되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테스는 짙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그 때에는 자연도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내부는 선별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영된 내부인 시점이 도래한다. 거기에서 테스는 모든 것들과 격리되어 야생 동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삶의 맥놀이’가 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도 없는 외딴 곳을 꿈꾼다. 그렇다면 테스가 알렉 더버빌을 죽이는 장면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테스의 한계를 뜻하는가, 아니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인으로 탄생하는 되기를 뜻하는가? 후자로 읽는 것은 하디를 배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을 그린 작가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되기의 블록’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들뢰즈/가타리에게 글쓰기란 되기이다. 그것은 재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선/삶의 선의 창조이다. 탈기표적, 탈주체적 창조, 얼굴 없는 창조.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어떤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되기이다. 회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면서 스스로를 그리기.” ▶ 베르그송의 전통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souvenir’와 ‘memory’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가지고서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아이-되기인 아이와의 블록을 통해서 쓴다.” 사건에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을 시원이나 기억으로 흡수시키는 대신 그것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사유와 감응의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런 글쓰기는 정치적 함축을 띤다. 즉 그것은 소수 문학이며 ‘도래할 민중의 씨앗들’을 뿌리는 작업이다. 소수 문학은 한 몰적 집단은 민족학도 아니고 사적 관심사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분자적 개체군들에 주목한다.  
13    제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댓글:  조회:1152  추천:0  2019-03-17
▶ 『천의 고원』에서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은 탈기관체 개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학적 함축이 깃든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알(卵)로서, 이것은 강도=0의 순수 잠재성이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자아가 자신의 되기를 실험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탈기관체가 층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탈기관체는 층화와 함께 있다. 탈기관체에의 추구는 기원에로의 되돌아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조건의 자발적 변이일 뿐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적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변이시켜 가는 것 또한 탈기관체를 통해서이다. 탈기관체는 탈아적(脫我的) 알(卵)이다. 그것은 타자성(alterity)의 장소이다. 그것은 창조적 첩화의 장소이다. 탈기관체는 ‘intense germen’(강도적 유아幼芽)이다. 그러나 이는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성/되기의 잠재성을 가리킨다. 기계적 이질생성과 리좀적 배치들에는 이런 생성/되기들이 항상 함축되어 있다. ▶ 일직선적인 계보학적 기억들로부터 창조적 되기로의 이런 이행을 예시하기 위해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 家의 테스』를 생각해 보자. 테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는 비관주의적 소설이다. 여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식질’의 또 하나의 예이며, 하디는 철저한 다윈주의에 입각해 테스나 주드 같은 부적응자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도태되는가를 그린다. 주인공들은 “잔혹한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떨어뜨린 감정(emotion)의 무게에 눌려” 신음한다. 모이라와 하마르치아는 본능과 유전형질(inheritance)로 바뀐다. 테스는 여섯 명의 데비필드 아이들을 보면서 맬서스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도안의 결과들일 뿐이다. 노도처럼 닥쳐오는 산업사회라는 객관적 환경, (에인젤 클레어를 실망하게 했던) 도덕적-문화적 환경 또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다.    ▶ 로렌스는 하디와 다른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 로렌스에게 생명이란 잉여이며 넘침이다. 약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약동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에게 생명은 탄력적인(elastic) 것이고 불연속적인(discontinuous) 것이다.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들이 언제나 같은 결론으로 치닫는다고 본다. 자연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압살. 로렌스는 이 점에서 근대의 비극에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도 볼 수 있는 위반(transgression)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렇다) 하디의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법(칙)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에서 사랑은 늘 법(칙)과 그것이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의해 으깨어진다고 본다. 기억이 있을 뿐 생성/되기는 없다. DNA를 물신화(物神化)하는 도킨스의 생각도 바이스만-하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12    제11강 동물-되기 댓글:  조회:1134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층화와 공재면/탈기관체가 밀고 당기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생명체는 층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비인간적 되기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 이는 곧 생명체를 본질=종을 넘어 개체군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개체군으로 통계처리를 할 수 없는 ‘분자’의 차원에서 봄을 뜻한다. 의식적인 동물-되기는 인간에게서만 성립하지만, 자연세계에서도 동물-되기는 성립한다. 말벌의 양란-되기와 양란의 말벌-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란 (tropical orchid)     ▶ 행동학적 접근에서 신체는 기관들과 기능들, 종과 유로 규정되기보다는 ‘감응(感應)’(스피노자의 ‘affectus’)하는 신체는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 감응하고 스스로의 특이성들과 강도들의 장, 즉 ‘氣’를 변화시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이다. 감응하는 신체의 감각은 식별 불가능 또는 규정 불가능의 지대(地帶)를 통과한다. 한 개별화된 배치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물의 능동적/수동적 감응들에 대한 윅스퀼의 논의는 스피노자와 연결될 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진드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관계, 정도, 그리고 속도의 리듬이다. ▶ 동물-되기는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융적인 시도가 아니라 차라리 층화가 더욱더 무너지고 공재면이 두드러질 미래를 염두에 둔 논의이다. 동물-되기는 인간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대립한다. 동물-되기는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의 문제이다. 꼬마 한스와 말의 관계는 주관적 몽상의 관계가 아니다. 동물-되기의 감응은 실재적인(real) 것이다. 분자-되기는 종과 유라는 몰적 질서를 일탈한다. ▶ 표상/재현은 인간적 형식과 질서를 절대시하는 문화주의와 도덕주의를 은폐하고 있다. 동물-되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표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즉 신체를 기관들과 기능들의 질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첩화에 있어 동물의 왕국은 강도와 근접성(진동들과 운동들)의 지대들에 의해 정의되는 탈기관체로 화한다. 여기에서 꼬마와 동물은 ‘주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배치들에서의 ‘사건들’로 화한다. 배치들은 환경과 얽혀 있다. 시공간적 관계들은 사물의 술어들이 아니라 배치들 또는 복수성들의 차원들이다. 동물들은 공생적 복합체들에 들어가 활동한다.(포식 동물의 시공간)   ▶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 즉 개체화하는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라이프니츠의 ‘완전 개념’과 비교) ‘이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을 깨는 무수한 ‘entities’들이다. 그것은 분자들/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리라는 경도적 관계들과 감응을 주고받는 위도적 능력들에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어떤 개체이다. 주체들은 이 속도의 경도들과 감응의 위도들의 카르토그라피 내의 개체군들로서 존재한다. 자연은 집단적 배치들로 존재하며 이는 ‘탈주체적 개체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속도들과 역능들/감응들을 통해 진화한다.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몰적 구성체는 분자적 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되기는 언제나 몰적 외연을 포함한다. 정신분석학은 되기들을 하나의 콤플렉스에, 몰적 규정의 콤플렉스(오이디푸스, 거세)로 환원시킨다.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의 여러 늑대들을 하나 즉 아버지로 환원시킨 것이 그 예이다.  ▶ 분열분석 또는 리좀학의 목적은 인종, 혈족, 종, 유 등과 같은 몰적 구분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 덩어리진 현상들의 선험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미시물리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별개가 아님을 말한다. 이 차원에서는 열역학조차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배치는 통계학이 무너지는 탈주선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생성은 분열생성(schizogenesis)이며, 횡단적 소통, 포함적 선언들(inclusive disjunctions), 다성적(多聲的) 연언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통한 생성이다.  ▶ 몰적 구성체들은 분자적 힘들의 통합이자 총체화이다. 분자적 무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결핍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 파악된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은 분자적 복수성의 적극적 산포가 아니라 (신경증이나 거세 유형들에서 볼 수 있는) 거시적 규정성들의 주체들만을 다룬다. 욕망을 결핍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특정한 목적, 목표, 의도에 연관시킨다. 이로써 욕망은 생산의 실제 과정에서 유리되어 표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1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댓글:  조회:1159  추천:0  2019-03-17
▶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로렌츠나 틴버겐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본능이 학습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해 왔다. 예컨대 ‘반사(reflex)’ 같은 개념은 중추신경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자극-반응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로렌츠는 본능적 행동은 해부학적 구조만큼이나 항상적이고 고정적이라고 말한다. 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본능적 복잡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렌츠나 틴버겐은 이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종, 유, 나아가 문(phylum)까지도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행동학은 행동의 패턴을 행위의 강도 조절, 시간 조절, 속도 조절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Thorpe, Merleau-Ponty) 더 중요한 것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를 벗어나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둘러싼 게으른 논쟁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항목이 환경적으로 안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동물들의 적응(adaptation) 자체가 학습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강조되고 있다.(McFarland) 가변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다. 관계는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자기를 완벽하게 안다 가정해도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행동학은 이런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모든 영토는 다른 종들의 영토들을 포괄하거나 가로질러 간다. 로렌츠가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영토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토성이 공격성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을 따라, 이런 구도에서의 자연을 음악적으로 파악한다. 즉 자연에 대한 선율적인, 다성음악적인, 대위법적인 파악이다. 새들의 노래, 거미의 집짓기, 연체동물(예컨대 소라)의 껍질, 진드기 등이 그 예이다. 연체동물의 죽음은 소라게의 거주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목적론적 자연 개념에서 선율적 자연 개념으로의 이행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자연의 기예(技藝)와 인간의 기예는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연체동물의 껍질과 게 사이에는 대위법적 관계가 성립하며, 여기에서 성립하는 되기에는 기능적인 요소들(성, 생식, 출산, 양육 등)만이 아니라 ‘sensibilia’도 포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이 창조적 양태를 ‘art=기예’라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분석을 더 밀고 나아가, 동물-되기는 적응의 대상들(traits)의 선별만이 아니라 물리-화학적 강도들과 근접성의 영역들(zones of proximity)의 작용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퓔룸적 혈통들을 가로지르며, 따라서 생명은 음악적인 ‘생성/되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본능과 학습을 둘러싼 논의가 아니라 ‘공재성(consistance)’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재성에 주목했을 때 리좀적 배치를 탐구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을 중심들과 활동(activation) 사이의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모형화할 수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행동적 기계학(machinique)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천적인 것은 탈코드화되고 획득된 것은 영토화된다. 행동에서 배치로. 어떤 국소적 작용도 다른 것들과 얽혀 있고(coordinated) 중심적 주체가 없이 거대한 결과가 현실화된다/동시화된다. 여왕개미는 없다. 이는 곧 창발성(emergence)의 논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뇌들, 신체들, 분자들, 세계들(이들 모두는 서로의 영토들과 겹치면서 존재한다)을 포괄하는 ‘산포된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을 통해 행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우프만이 강조했던 자기촉매작용은 하나의 유기체 내에서가 아니라 배치들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탄생도 특정한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산포의 결과일 뿐이다. 지연된 발생(예컨대 幼生生殖), 기관들의 특별한 탈영토화(예컨대 손과 발), 그리고 특히 환경의 상관적인 탈영토화(숲에서 초원으로). ‘잃어버린 고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배치의 변환인 것이다.
10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댓글:  조회:1178  추천:0  2019-03-17
▶ 지능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이해를 추구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폰 윅스퀼이 거론된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 모두 윅스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윅스퀼 (1864~1944) 독일의 동물학자, 비교심리학자 인간이 아닌 동물을 중심으로 동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동물과 그 동물이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기능환(機能環)'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은 다시 넓은 자연 속에서 그 종(種 )의 독특한 환경 세계를 주체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환경세계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환경 세계론은 새로운 생물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행동학자인 로렌츠나 틴버겐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클라크 같은 사람도 마음을 ‘a leaky organ’으로 규정하면서 행동주체(agent)의 표상주의적 개념화들을 벗어난 심신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에 따르면 지능은 상이한 물질적 공재(共在)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능은 행동의 다각도의 측면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며, 행동은 개체들을 관통하는 복잡한 물질적 체계들(배치들) 및 계통적 혈통들과 유기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리좀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진화는 되기의 블록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제 ‘행동학(ethology)’은 행동주체의 ‘behaviour’에 대한 관한 담론에서 배치들의 운동에 대한 담론이 된다.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9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댓글:  조회:1218  추천:0  2019-03-17
※ 지금까지 배운 내용 복습 ▶ ‘기계적 이질생성(machinic heterogenesis)’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조직화 이론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이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서도 수용되지만(이 이론은 ‘센트럴 도그마’로 대변되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진화의 ‘기계적’ 성격과 관련된다. ▶ ‘횡단적 소통’은 진화에서의 계통수들(genealogical trees)을 뒤섞는다. 물론 이 뒤섞임의 개념은 계통수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뒤섞임까지 포함한 전체적 지형도를 볼 필요가 있다. 계통적 계열들은 그보다 근본적인 기계적 퓔룸을 전제한다. 기계적 퓔룸은 여러 계통들을 낳지만 동시에 물질적 힘들의 횡단적 움직임들을 통해 새로운 생성들을 낳는다. 계통수들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진행되며, 친자관계/分岐(filiations)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들은 새로운 결연들(alliances)을 통해 진행된다. 생성의 선은 특정한 매듭들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중간(middle)’만이 있다. 이 중간을 통해서 생명은 ‘운동의 절대 속도’를 향유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이(entre=in-between)’ 개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이는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생성의 장이다. 카오스를 통해서 개체들의 코스모스가 생성한다. 이러한 생성이 도태압을 무너뜨린다. 물론 도태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태압은 그것에 대응하는/응답하는 유기체들의 활동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곧 행동학적 배치들(ethological assemblages)을 함축하고 있다. ▶ 기계적 배치들에의 주목은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자기조직화와의 비교를 통해 계방계들로서의 생명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 개념은 생명체란 자기차이성(自己差異性)을 보여주는 존재임을 잘 설명해 준다. 이는 곧 생명체가 계방계임을 말해 준다. 자기조직적 유기체 즉 ‘기계’(= 신체)의 기능은 그것의 특수한 유전적 구조 또는 조성(composition)으로 환원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이다. 자기조직적 존재들은 스스로의 조직화와 경계들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들은 “조직화를 통해 닫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자기조직적 존재들의 진화는 차이들의 와류에서 계속 메타동일성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로 이해된다.(이케다 기요히코) 그런 동일성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해체(disintegr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조직화 이론은 자기동일성을 지키려는 개체들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진화 전체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삶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된다. ▶ 기계적 진화는 이질생성들을 종합하며 또 ‘공재(共在=consistency)’의 형성을 포함한다. 기계적 배치들은 포텐셜 장들과 잠재적 요소들을 통해서 場을 만들어나가며, 종과 유의 구조를 넘어 기술적-존재론적 문턱들을 가로지른다. 자기조직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장 위에서이다. 이것은 기계적 자기조직화를 기계적 이질생성으로 봄을 뜻하며, 자기조직화라는 모델에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한 비평형 개념을 도입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타자성(alterity)은 보다 넓은 경지에서는 창조적 진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는 배치들의 행동학과 관련된다.  
8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댓글:  조회:1202  추천:0  2019-03-17
▶ 들뢰즈 사유의 구도는 결국 고대의 본질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에 대립한다. 또 철학을 언어철학이나 사회철학, … 등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들과도 대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지만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 자연과학과의 연관성, 예술과의 연관성, 종합적-횡단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 ▶ 창조적 첩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를 일체의 목적론적 함축을 배제하고서 사유하고자 한다. 발생의 정도, 복잡성에 입각한 위계를 비롯해 일체의 일방향적 사고는 배제된다. 횡단적 소통에 의한 ‘괴물들’의 탄생, 분자적 층위에서의 탈영토화, 퓔룸이라는 물질적 바탕에서의 새로운 존재들의 생성이 사유된다.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가능케 한다. 리좀의 개념. 베르그송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진화의 방향성조차 거부된다. 창조적 첩화는 ‘동물-되기’와도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인간의 의식적 되기의 맥락과 생명철학적 맥락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동물-되기는 횡단적 소통을 통한 창조적 첩화를 뜻하며, 횡단적 소통은 또한 ‘되기의 블록’, ‘생성의 블록’과 관련된다.  첩화는 퇴행이 아니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퇴행은 창조적 첩화와는 대극적인 사유이다.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분화(differenciation)가 아니라 블록들의 생성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볼 때, 또 결정론적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이 볼 때 리좀적 생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완화된 결정론자들의 경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법칙의 복잡성이나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훨씬 급진적이며, 실증적 연구들의 통해 이런 대립이 해결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의 가설을 받쳐 주는 요소들 중 하나는 진화에서의 전염성, 유행성 변화이다. 이는 리좀적 방식의 진화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며,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조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루스=바이러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질적인 존재들(인간, 동물, 박테리아, 비루스, 분자, 미세기관들, …) 사이에서의 전염과 유행은 분명 진화를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도킨스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전자 결정론과 다위니즘을 견지한다. 캠피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도킨스의 ‘extended phenotype’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은 매걸리스가 『세포 진화에서의 공생』에서 전개한 논의와 매우 가깝다. 진화에서 도태의 역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화에서의 진정 새로운 변화는 상이한 퓔룸들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합병, 연합을 통해서이다. 합병과 연합을 통해서 유전자 자체에서의 큰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유전자에 입각한 일방향적 인과나 유전자를 항구적인 동일성으로 보려는 생각들은 거부된다. 더 나아가 개체군의 사유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 이하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중층결정.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개방계적 연구방식(open systems approach)’을 선취하고 있다 하겠다.  
7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I 댓글:  조회:1101  추천:0  2019-03-17
▶ 공재면으로서의 자연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은 퀴비에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무너뜨린다. 기관과 기능, 구조와 발생 유형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속도와 강도에 기반하는 자연의 보편적인 면(面)을 발견했다. 조직화의 도안(조직면)은 무한히 유연한 추상기계로 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내재면이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면(일의면)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이며, 장횡거의 태허(太虛)이다. 이 개념을 통해 개체화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전개체적-비인칭적 잠재성의 세계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계에서의 비정상적 결연, 창조적 첩화, 횡단적 소통들이 사유될 수 있다. * 태허(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 공존면: 현실화된 존재들의 공존 / 공재면: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공존. ▲ 일자성과 일의성의 차이 ▲ 장자의 제동(齊同)의 의미 ▲ 공재면 자체의 생성 (베르그송적 차이를 사유하기) ▲ 차이와 동일성  
6    제5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Ⅱ 댓글:  조회:1199  추천:0  2019-03-17
▶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5    제4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I 댓글:  조회:1218  추천:0  2019-03-17
▶ 베르그송은 두 종류의 복수성(multiplicite)을 구분: ①수적, 공간적, 현실적 복수성과 ②질적, 시간적, 잠재적 복수성. → 이 구분은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질적 복수성을 ‘다양체’로 부를 수 있다. 전통 사유가 일자와 다자의 조각그림-오려-맞추기의 사유(樹木型 사유)를 펼쳤다면, 베르그송-들뢰즈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하는 다양체이다. ▶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1) 들뢰즈에게는 베르그송적인 급진적인 연속주의는 함축되지 않는다. 2) 들뢰즈에게는 물체와 생명체의 날카로운 구분보다는 이들이 함께 형성하는 배치가 문제가 된다. 3) ‘진화’의 뉘앙스가 훨씬 복잡하게 된다. (리좀, ‘산종(散種)’, ‘창조적 첩화’.) 4) 베르그송: 氣가 물질성과 생명성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들뢰즈: 氣가 리좀 상태로 탈주하는 방향과 층화되고 석화되는 방향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4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댓글:  조회:1283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는 분자 수준과 단백질 수준을 내용과 표현으로 파악.  ▲ 내용으로부터 표현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 일방향적 설명(환원주의),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 ‘번역’이 아니라 코드의 잉여가치.  ▲ 다윈주의는 대수(大數) 개념에 입각한 통계적 덩어리들을 다루는 몰적 사유.  ▲ ‘비정상적인’ 동물-되기들.  ▲ 탈영토화 개념이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 (탈주선의 일차성도 상기.) 이로써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다. ▲ ‘진화’라는 개념의 뉘앙스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것.  ▲ 단지 이행, 다리 놓기, 턴넬 뚫기가 있음. creative involution! 퇴행도 점진도 아닌 되기가 있을 뿐.   ▶ 들뢰즈와 가타리는 층화(stratification)의 세 양태로서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를 든다. 유기체화로부터의 탈주는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지적했듯이 그 부분들은 그것들이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 극소의 자율성만을 가진다. 지구라는 탈기관체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을 나른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또한 층화가 발생한다. 층들의 체계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강도들과 특이성들을 ‘포획’한다. 유기체적 층화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체(corps)’를 ‘유기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기층에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유기체와 탈기관체 사이에서의 ‘윤리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유래한 탈기관체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로 흡수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탈기관체는 내재적 장이다. 그것은 강도들을 산출하고 분배하는 ‘욕망’(의 장)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달리 말해 유기체들이 탈기관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와 함께 있으며 늘 일정한 과정 속에 있다. 탈기관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탈기관체는 한 유기체의 구성에 포함되어 있는 접힘들, 침전들, 엉김들의 발생의 터가 되는 ‘초저속의(얼음 같은) 실재’를 구성한다. 그에 비해 유기체는 이 체 위에 존재하는, 그것에 형식들, 기능들, 위계적 조직화들, 초월성들을 주는/부과하는 층(stratum)을 구성한다. 그러나 유기체와 탈기관체가 불연속적 타자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1) 탈기관체는 층들 속에서 작동하기도 하고 또 탈층화된 공재면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층으로 간주되는 유기체에 (기관들의 견고한 조직화에 대립하는) 탈기관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기체의 층에 속하는 그것[유기체]의 탈기관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유기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기체를 힘들, 강도들, 지속들의 보다 넓은 장 속에 위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 장 안에서 탈유기적 생명과 층화된 생명의 끝없는 상추(相推)가 계속된다. 베르그송 및 기학과 비교. 2) 탈기관체들의 ‘되기’는 ‘이것-임’/특이성을 통한 개체화, 그리고 영도(零度)에서 시작하는 강도들의 산출을 포함한다. 이는 구분되는 계통들을 가로지르는 횡단성(橫斷性)을 낳는다.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유기체 개념은 위계화되고 초월화된 조직화로 이해된 유기체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 층위 또는 리좀적 층위를 선험적 장으로 제시함으로써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얽히는 카오스모스의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탈기관체 개념은 자연철학만이 아니라 윤리학적 함축을 띠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신체=‘기계’에는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신체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것, 다른 신체들과의 좋은 만남을 이루는 것, 새로운 변양과 감응을 시도하는 것, 의미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기학을 함께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친 탈층화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들을 낳기도 한다. 강도 높은 신체가 되는 것, 유기체로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3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댓글:  조회:1220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은 ‘creative involution’이다. 이 개념은 들뢰즈/가타리를 다윈뿐만 아니라 베르그송과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이끈다.(『스피노자와 실천철학』에서 「스피노자와 우리」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이제 인간의 ‘진화’가 논의된다면 자연 및 생명체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보다 기계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환경’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의 개념이 중요하다. 퓔룸은 연속적 변이(정도의 사유, 베르그송주의)의 바탕/주체로서 특이성을 실어 나른다. 퓔룸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自然이 통합된다. 퓔룸은 디아그람과 쌍을 이루어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추상기계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면 배치가 된다.(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메카닉들은 인간-주체의 발명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배치로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메카닉에 흡수된 비관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메카닉, 그리고 동식물들 등이 함께 형성하는 기계적 배치가 문제될 뿐이다. 아울러 언표적 배치가 함께 고려되면서 문화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진다.   ‘공재면’, ‘내재면’은 카오스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섬들 아래에 또는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장, 구조-섬들이 거기에서 개별화되어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기(氣)가 공재면, 내재면이다. 태허(太虛)에 해당한다. 氣, 太虛는 또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실체=자연=신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가 보다 구체적인 여러 층차들에서 적용될 때 ‘탈기관체’ 개념이 성립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다윈, 바이스만,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한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유기체보다 그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는 ‘생식질’(바이스만)에 중점을 두고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몽동으로 대변되는) 개체화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구조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탈주체주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각의 한 급진화인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유전이나 진화는 생물학에서보다는 더 복잡하고 넓은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현재 주류 이론인 신다윈주의, 유전학, 분자생물학을 흡수하지만 그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바이스만의 생물학과 더불어 복잡성 이론 및 자기조직화 이론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서 복잡성 이론은 물리학적 맥락보다는 생물학적 맥락을 가리킨다. ‘complexity’는 글자 구성 그대로 “함께-접혀-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의 이론이다. 자연도태의 주인공은 환경이고 생명체는 도태/생존의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와 환경은 연속적이며, 생명체는 개방계(open system)을 구성한다. 생명체는 단지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응답하는(repliquer) 것이다.(베르그송)  굿윈의 말처럼 생명체는 단순한 내적(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또 캠피스의 말처럼 적응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체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과정과 산물들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이런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렐라에 따르면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 종화’와 ‘공결정(codetermination)’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보다 발달한 생명체일수록 이런 연계성의 복잡성도 커진다. 이 생각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모노에게도 이런 생각은 나타나 있다. ‘도태압(淘汰壓=selective pressures)’은 유사한 생태권들(ecological niches) 내에서 살아가는 상이한 유기체들 사이에서의 종적(種的) 상호작용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체는 이 과정에서 ‘선별적인’ 역할을 하며, 유기체가 더 발달될수록 자율성은 점점 더 커진다.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기계’와 ‘메카닉’을 구분하며, 모든 기계들을 내재면에 놓고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부는 단지 선별된 외부이며, 외부는 단지 투영된 내부일 뿐이다.” 이는 윅스켈과 메를로-퐁티를 거쳐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생각이다(메를로-퐁티와 들뢰즈/가타리의 차이도 음미). 그리고 생명체의 자율성은 배치와 탈영토화에 관련해 이해되며 자기조직화도 이런 개념틀 속에서 이해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로부터 오늘날의 자기조직화 이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통일성, 안정성, 동일성의 개념은 비판된다(그러나 이케다가 강조하는 동일성의 역할도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유전자 결정론과 대립한다. 최근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이상 물질적 구조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다듬어 왔다. 유기체의 생명은 비선형적인 피드백 공정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자기조직계들(autopoietic systems)의 창발성(創發性)으로 이해된다. 유기체들은 자기조직 및 자기조절(self-regulation) 능력을 가진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분자들의 활동, 유전자들의 활동, 형태발생적 맥락 등은 단순한 연역관계를 맺지 않는다. 로버트 로젠은 바이스만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체세포와 유기체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란 형태발생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복잡계들의 창발적 현상이다. 진화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명 없이 진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체들은 단지 진화 과정의 매듭들인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활동이 진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2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댓글:  조회:1410  추천:0  2019-03-17
▶ 이 강의는 『천의 고원』 중 「변신」 장을 생명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이해하려는 강의이다. 피어슨의 저작(Pearson, Germinal Life, Routledge, 1999)을 따라 강의할 것이다. 마누엘 데란다의 저작(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 Virtual Philosophy, Continuum, 2002)이 들뢰즈 사유의 자연과학적 이해/확장에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저작들(Brian Massi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 Schizophrenia, MIT Press, 1992; Parables for the Virtual, Duke Uni. Press, 2002) 또한 뛰어나다.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生成する生命』도 들뢰즈를 기초적인 원천으로 삼고 있다. ▶ 변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베르그송,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다.  개별화된 존재들, 개체들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 그러나 카오스는 단순한 암흑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개체들이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로 돌아가는 근원적 氣, 太虛와도 같은 것이다. 이를 ‘공재면(plan de consistance)’이라 부른다. 따라서 개체화되어 있는 차원을 근거로 하는 사유들은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는 피상적이다. “배경(ground)을 일깨우고 형태[피겨]를 와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 죄(sin)는 없다.”(『차이와 반복』) 그러나 피상적 차원이 소홀히 되는 것은 아니다. ‘superficial’의 차원, 즉 표면의 차원은 깊이의 차원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차이와 반복』이 잠재성과 강도 개념을 중심으로 한 깊이의 철학이라면, 『의미의 논리』는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표면의 철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베르그송적 구도를 띤다. 형상들은 물질-생명의 운동에서 파생하는, 그것도 우발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우주의 근본 주재자가 된다. 전개체적-비인칭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서 ‘존재론’(전통적 의미)을 생각할 때 ‘이것(haecceitas)’에 관한 둔스 스코투스의 생각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기존의 존재론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존재들(entities)을 우리 시야에 펼쳐 주는 존재론. 이 존재론은 또한 ‘이것들’의 잠재적 장으로서의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를 설정하게 만든다. (공재면은 궁극적 탈기관체이다)    개체화된 존재들 ― ‘기계들’(이 말에는 스토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부터 현대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 사이에서는 한편으로 영토화/탈영토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감응(affectus)에서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로부터 갖가지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행동학(ethology)을 구상한다.  
1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리즘의 詩 / 심상운(시인, 문학평론) 댓글:  조회:1099  추천:0  2019-03-17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리즘의 詩     심상운(시인, 문학평론)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주지주의)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풍성한 암시와 반짝이는 상상의 언어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잃어버렸던 신화를 되돌려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중세의 허풍장이기사騎士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다. 모더니즘도 우리들의 시에 언어의 꿈을 담아주었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약 시인들이 현실과 역사의 진보에만 매달려서 싸웠다면 시인들은 전사戰史에 기록될 수 있는 영웅은 되었을지 몰라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日帝에 침탈당한 국권상실시대에 일제에 직접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1930년대 이육사李陸史의 시편들 속에서 발견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아름다운 만남이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絶頂」전문   이 시의 끝 구절 에서 강철+무지개가 던져주는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의 경이로운 상상과 암시는 지금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더니즘의 이미지, 즉물적卽物的 감각이 우리의 현대시에 수놓은 금싸라기 같은 수사의 미학을 귀중한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시인과 독자들을 자연발생적인 시들의 고식적인 감상感傷과 영탄성詠嘆性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딱딱한 관념어의 굴레에서 시를 해방시켰다는 공적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한 개 벽돌이나 되겠다. 이 살덩이를 흙가루로 빻고 썩기 전에 이 피로 곱게 물들여 1천도의 시뻘건 불 속에서 다시 벽돌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 백 층이나 삼백 층의 빌딩이 되거나 반월형半月形 의 만리장성이 되거나 원수의 포탄이 우박처럼 박혀도 끄덕도 않는........ 구름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단단한 벽돌이나 되겠다. --문덕수의「벽돌」전문      이 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과 , 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또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또 사물어事物語의 쓰임이 이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자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80년대의 사나운 현실 속에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모더니즘 언어의 바른 자세와 당당함이다. 이 시의 앞부분 는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신과 함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시 속에서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예술)과 리얼리즘(현실)의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더 이상 넓게 확산되지 못 했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들이 현실의 뒤쪽으로 물러서서 스스로 존재영역의 범위를 축소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면에서 더 검토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모더니즘 시가 안고 있는 언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신뢰(언어주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지나친 신뢰는 시작과정詩作過程에서 시인의 관심을 현실(사실)보다 시인의 고정관념과 언어에 치중하게 하였으며, 비유, 상징, 이미지 등의 언어의 조직을 시의 궁극인 양 내세워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의 시라고까지 명명命名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건강한 긴장감과 조화를 깨뜨리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나 환상과 상징을 잃어버린 극단적인 언어주의 시로 변질되면서 모더니즘 시의 한계가 노정露呈된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압축하면 모더니즘 시의 극단적 언어주의는 모더니즘 시의 함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과 꿈을 담은 시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병든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을 치유하고 개혁해야하는 당위성의 원천이 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의 시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인의 순수한 정서에 의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는 시인의 수공업적인 언어 작업에(의식적 방법) 의해서 시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 수공업적인 언어작업은 어떤 관념을 중심에 두고 환상적 이미지와 감각을 중시하면서 시인의 감정까지 감각적인 언어로 만들어 지성(의도성과 논리성)이 시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시의 기법으로 발전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서정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기법에 익숙하고 그것을 정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시인은 아주 엄밀하고 냉랭하게 계산된 논리적인 비유, 상징의 언어(관념, 고정관념)를 시의 중심에 넣고 감정까지도 객관화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하면서 시를 제작한다. 이 때 시인은 현실(현장)에서 벗어나서 시라는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배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에서 시인의 자기 노출은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 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의자, 작은 방, 개미, 염소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 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 30년 전부터 어디론지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훈 「오토바이」 전문   이러한 시들은 비록 시인의 관념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과 독자들이 갈구하는 낯설음, 새로운 기법의 언어, 경쾌한 감각의 현대성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 등의 언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존재의 탐구에만 전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환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모더니즘 시의 원형인 것처럼 독자들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생동하는 시의 실체는 언어(관념)의 감옥 속에 갇혀버리고 시인의 언어유희가 독자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의 Ⅳ」에서     나 는 통념적인 의미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개척한 의미단절의 언어세계다. 그것은 '있음/없음'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놓은 “또 다른 언어세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춘수의 시에서) 후속 시행에 의한 선행 시행의 차단”(문덕수 「인식의 혁명」에서)은 시의 의미를 무화無化시켜서 시를 응고된 틀에 갇히게 한다. 이런 무의미의 시는 내재적인 모순에 의해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언어에 염증을 느끼고 절망하고 탈출하는 이유를 만든다. 그래서 그것은 모더니즘 시의 한계로 드러나는 지나친 현실 외면(도피), 시의 관념화(도식화, 논리화), 의미의 단절, 단순 이미지의 나열, 언어유희(무의미)에 대한 성찰의 근거가 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극단적인 모더니즘(언어주의) 시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현실(현장)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향기 나는 생명체를 모셔놓은 언어의 집이라는 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한 것이다. 따라서 시에서 관념이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의 마음과 영혼(생명)이라는 것. 그 마음과 영혼은 시인의 환상과 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만약 관념에 의해서 영혼이 만들어진다면 그 영혼은 가짜의 영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언어예술로서의 시보다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더 본래적인 시에 가깝게 인식되는 것이다.   비오는 날 묵밭에 소를 먹이고 있으면 어디서 깊은 소리가 들리네.   온 天地가 共同墓地같은데  오동나무만  저승의 길잡이처럼 서 있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푹 빠졌을까. 안개사이로 인업이 꼭 걸어올 것만 같네.   喪輿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 곳엔 이상한 불빛이 서려 있었네. --이성교「비오는 날(1)」 전문   자연발생적인 서정은 시인의 언어조직만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런 서정의 시에는 이성(지성)보다 감성이 주류를 이루어서 때로는 원시적인 야성의 감성이 시의 생명력을 키워내는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관념과 비유, 상징을 떨쳐버리고 직관의 눈으로 직접 대상과 만나자는(의식→대상→이미지) 디지털리즘의 시 운동은(오진현) 시의 현장성과 내재적인 생명성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와 연결된다. 그것은 디지털리즘의 시가 극단적인 모더니즘의 시(관념의 시, 언어유희의 시)보다 시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이성(지성)보다는 감각(감성)이 시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북한산 비가 오락가락, 찜통 더위 속 , 땀을 흘리고 확 터진 능선에 올랐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 얇은 구름이 그림이다. 주저앉아 상상하며 가슴쯤 산의 옷을 벗기면서, 이렇게 시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 시인이한다. 나는 내색을 못하고 하고 이성理性을 말했다. 그 때 지나가는 등산객이 했다. 멍! 모두 몽둥이로 한 대씩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날 산행은 흰수염을 휘날리고 아슬히 바윗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희죽이 웃으며, 리모콘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비밀한 얇은 비단을 밀어 올리고, --오남구「산행」전문    이 시는 때 묻은 감각과 지식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맑은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관념도 미리 들어가 있지 않은 탈관념의 빈 마음은 새로운 감각이 모여드는 맑은 못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감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디지털시대의 시인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쉬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면서 움직이는 자기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초논리超論理, 비논리非論理)의 눈이 언어 카메라로 찍어내는 디지털 감각(염사念寫, 접사接寫)의 이미지 시와 어떤 관념을 솟대같이 중심에 세워놓고 언어의 조직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모더니즘의 이미지 시의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 짓게 한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밤비」전문    오진현의 디지털리즘의 실험시에 전류처럼 흐르는 알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 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리즘의 시는 또 문명적 사고(객관적이며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 대립되는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구체적 사고)에 맥이 닿는다.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는 구체적이고 주술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신화적 사고라고 한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 이런 면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 디지털리즘의 시는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가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미지와 감각도 포함하는 매우 인간적인 직관과 감성에 의해서 탄생하는 탈관념의 새로운 감각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사실, 생명,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중시하는 21세기적인 감수성(디지털 감각)과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는 야성적 감각이 만나서 순수 직관의 이미지(탈관념, 시공간 초월), 즉 신화적인 언어 표상(image)으로 탄생되는 시라고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뛰어넘는 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적인 면에서 볼 때, 과학적 사고(문명)와 야생의 사고(문명이전)의 융합이다. 그러나 디지털리즘의 시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과 언어의 수사修辭에 의해서 제작되는 모더니즘의 시에 비해서 시의 일반화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탈관념의 의식이 전제가 되고 이제까지 사용된 익숙해진 언어(비유, 상징)로부터 벗어나서 때 묻지 않은 원초적 언어와 디지털 감각(염사, 접사)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 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리즘 시의 “새로운 신화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도정이 예상된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처에서 새로운 변화(IT, DNA 등)의 구름을 계속 몰아오고 있어서 시인들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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