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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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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기덕 시모음 3 ( 한국) 댓글:  조회:1747  추천:0  2019-12-21
해장하다       술이 덜 깬 날엔 해장을 한다. 뚝배기에 담겨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해장국이 몸속에서 뼈가 녹는 진실을 풀어낸다. 몽롱함을 깨우며 불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한때 푸르렀던 무청과 아삭한 콩나물들이 뒤섞여 회색빛 아침을 깨운다. 싱거운 삶의 시간을 새우젓으로 간 하며 뼈대만 남은 간밤의 생각들을 떠올린다. 하루 종일 불에 달궈지며 한 끼니 식사를 위해 뜨겁게 살았다. 가마솥에 통째로 삶아지며 끓어오르는 내장을 물로 다스렸다. 귀도 잘리고, 간도 썰어져서 한 생의 순대를 채우기 위해 나도 국밥으로 끓어올랐다. 파 마늘에 선지들을 가득 담고 임계점을 넘어야만 맛이 나는 비법을 깨닫는다. 누군가가 내 몸에 연기를 피우고 불을 질렀던 것은 깊은 맛을 내기 위함이었다. 매콤한 다대기를 넣고 휘휘 저으며 칼, 칼을 휘둘러 칼칼하게 맛을 더했던 뚝배기 속에 수저를 담가 열정을 퍼 올린다. 콩나물과 시래기 뒤엉킨 식물성의 생각들을 건져 먹는다. 뱃속에서 해장이 풀어질 때 간밤의 서릿발도 말끔히 풀린다. 얼었던 뼈들도 녹아내려 살이 되고 피가 된다. 불에 달구어질 때 해장국 뚝배기와 나의 전성시대다. 뜨겁게 열 받을 때마다 밥풀떼기 차갑게 식어버린 빈 뚝배기를 조문한다. [출처] 해장하다|작성자 김기덕   깃발이거나 플랜카드         몸 안에 것이 가끔씩 밖으로 내걸리는 것이 혀다. 입이 열리고 혀가 움직일 때 내면을 알 수 있다. 점막으로 덮여 미각과 저작을 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혀는 내면을 쓴 유일한 깃발이다. 아니 플랜카드다. 입이 열리고 나면 깃발이 펄럭이고 함성이 울린다. 플랜카드가 내걸린 벽엔 언어들이 춤춘다. 집집마다 혀가 내걸린 창문엔 저마다의 목소리와 의미들이 나부낀다. 창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에 빠진 집안의 내력은 알 수 없다. 무엇을 씹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얼굴, 입을 열고 혀를 내보일 때 우린 소통을 느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서로의 혀를 맞대지만 혀의 색깔이 왜 빨간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혀가 왜 그렇게 부드러운지에 대해도 나는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다. 색색으로 내걸린 플랜카드들이 유혹의 말을 흘린다. 코드를 찾은 사람들이 펄럭이고, 바람을 핥으며 내통한다. 단칼에 너를 밸 수도 있지. 혀 앞에선 늘 꼬리를 내보인다. 보이는 꼬리와 보이지 않는 꼬리 사이엔 원의 세계가 있다. 혀를 잘 놀려야 천국을 얻는 것이 아니라 혀가 꼬리를 물고 있어야 천국을 얻을 수 있지. 날마다 깃발들이 펄럭이고, 플랜카드가 나부끼는 창문에선 혀를 찾을 수가 없다. 붉게 물든 깃발들이 바람을 삼킨다. 몸 밖으로 나온 혀들이 서로를 피터지게 물어뜯는다. [출처] 깃발이거나 플랜카드|작성자 김기덕   튀김들은 바삭거린다         검은 솥에서 기름이 끓는다. 모든 튀김들은 지옥을 경험한 후에 탄생한다. 바삭바삭 입에서 부서지는 지옥의 맛은 감동적이다. 살면서 지옥을 맛볼 때 튀김이 된다. 질기거나 익지 않음으로 먹을 수 없는 관계는 닭이나 오징어만은 아니다. 튀겨진 살과의 접촉, 익혀진 관계의 바삭거림은 행복하다. 양념을 입었어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지 않은 이들이 서로 피하며 등을 돌린다. 강한 고통만이 순간에 뼈와 살을 익힌다. 하루의 검은 솥에서 기름이 끓고 지옥의 고통으로 튀겨질 때, 죽어도 죽지 않는다. 지글거리며 등 뒤집고 부상하는 순간의 깨달음을 얻는다. 허옇게 부풀며 스스로 가벼워질 때 기름불에서 건져진다. 불 속의 순간은 짧아도 변화의 쾌락은 긴, 지옥 불을 경험한 이에게선 바삭한 튀김 냄새가 난다. 끓는 기름의 고통을 경험한 이는 뼈와 가시를 내세우지 않는다. 비릿한 풋내기의 생살을 드러내지 않는 고소함. 푹 삶아지고 고아져서 완숙의 꿈으로 떠오를 수 있는, 죽음은 바삭한 열매다. [출처] 튀김들은 바삭거린다|작성자 김기덕   모래시계         모래 속에 박힌 해골 하나 입 벌리고 웃는다. 눈동자가 사라진 퀭한 구멍으로 나를 바라본다. 구멍 속엔 블랙홀이 담겨있고,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그가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찬란했던 빛깔들은 어둠이 되었다. 오뚝하던 콧대마저 사라진 구멍 속으로 사막의 모래바람만이 드나든다. 몸의 감각을 다 지우고 나면 남는 해골 하나, 풍화작용하며 모래가 되어간다. 태양빛 입술과 볼의 노을을 지우고, 밤을 닦아 하얗게 탈색해 간다. 모래 속에서 반 쯤 머리 들고 바라보는 세상에 미련이 남았는지 해골이 징상한 이빨로 웃는다. 사는 게 다 풍화작용이지. 감각 속에 울고 웃다가 무감각에 빠져드는 사막, 모래가 되다 만 해골 하나 사막에 누워 말이 없다. 모래가 모래가 되고, 모래가 다시 모래가 되어 미세입자가 되면 나는 누구와 만나 새로운 생명체가 될까. 분해와 결합의 반복을 이루며 살아가는 나와 해골은 하나의 시간 속에 있다. 사막 속에 누운 해골과 사막을 걷는 해골이 마주보고 웃는다. 거꾸로 선 내 몸에서 모래들이 쏟아진다. 시간의 반복, 내가 모래 속에 눕고 해골이 사막을 걷는다. [출처] 모래시계|작성자 김기덕   쓰레기 섬           버려진 이들이 태평양 한 가운데서 만났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흘러 다니다 바다에서 만나 섬이 되었다. 밟히고 차이며 품었던 독기를 숨겨 쓰레기의 영토를 세웠다. 상처투성이로 뚜껑이 열린 영혼들이 바다를 정복했다. 바다는 쓰레기의 식민지가 되고, 쓰레기들에게만 바다의 시민권이 주어졌다. 물고기들은 페트병의 살을 먹으며 군대로 키워졌고, 자살특공대원들은 뼈에서 살까지 플라스틱으로 세뇌되었다. 스티로폼의 명령에 물고기들은 수천 킬로를 헤엄쳐서 자살테러를 했다. 살을 나눠먹은 배신자들의 뱃속엔 비닐의 독 가루가 퍼지고, 사지가 뒤틀리는 죽음이 찾아왔다. 일회용 비닐봉지 하나 버려질 빼마다 쓰레기 나라의 인구는 늘어났다. 햇빛에 미세분말로 개체분열하며 불멸의 종족으로 무한번식 했다. 게릴라전을 준비해온 바다왕국엔 동원령이 내려지고, 밥상머리에서 바다와 안개전투가 시작되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물고기들로 평화는 깨져있었다. 하얀 소금으로 위장한 병사들도 맛을 내며 흥겨운 식탁을 점령해 갔다. [출처] 쓰레기섬|작성자 김기덕   틀의 유전       아버지는 나를 위해 틀을 만드셨다. 남들 보기에 좋아 보이는 틀은 숨통을 조였다. 다리를 접고, 팔을 오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틀이 나를 기형적으로 만들어갔다. 물처럼 살아야지. 벽돌공장의 진흙처럼 너도 반듯하게 자라야지. 하지만 아버지, 제겐 저만의 모양이 있어요. 둥글지도, 각지지도 않은 상상할 수 없는 도형이 있어요. 아들아, 그걸 꿈이라고 생각하며 복잡한 도형을 만들지만 결국은 거대한 프랙탈에 갇히는 거란다. 단순한 원을 그리고, 세모, 네모를 그리자, 남들처럼. 아버지는 날마다 틀을 만들고, 나는 날마다 틀을 부쉈다. 틀 안에서 자란 형제들은 사각형이 되고, 삼각형이 되어 인기 있게 팔려갔지만, 나는 아버지의 열매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가출하고, 바람이 되어 들판을 헤매다가 길가에 변종의 씨앗을 뿌렸다. 상상의 가지를 뻗고, 무수한 꿈의 이파리를 흔들며, 영원을 향한 프랙탈을 그렸다. 지상으로 도형 하나 그려갈 때마다 내면으로 깊어가던 뿌리들. 나는 구름을 걸치고, 호수를 들여다보며, 사색에 잠겨 빗변을 걸었다. 내가 완전한 바람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였다. 겨울이 되면 옷을 벗어야 하는 나목이었다. 또 다른 틀에 갇혀, 아들아 둥글게 자라 거라. 꽃을 피우면서 꽃 아닌 틀을 만들었다. 아버지보다 더 견고한 틀. 이런 지독한 아버지 같으니, 나는 틀을 깨뜨렸다. 네모, 세모의 아이들이 기어 나왔다.   [출처] 틀의 유전|작성자 김기덕   마지막 화살     주톳빛 광중(壙中)에 관을 내린다. 상·중·하의 세 흰 끈을 잡은 여섯 명의 친구들이 땅 아래 몸을 누인다. 관을 걷어내고 차디찬 땅에 내려놓아도 마포에 싸여진 몸은 말이 없다. 저승에서도 사용하라고 평소에 쓰던 명기를 주변에 묻고, 광(壙)에 흙을 채운다. 첫 삽을 뜬 상주의 흙이 주검 위에 투두둑 떨어진다. 동시에 자식들의 곡(哭)이 후드득 흔들리면서 천천히 한 사람이 땅 속으로 잠겨간다. 잘 생긴 얼굴 웃음 많던 이름이 말없이 지워져간다. 정해진 시간 지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는 한 생의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 살(殺)을 피해 등 돌린 사람들은 뒤돌아보지 말라 한다. 사라지면서 쏘는 마지막 화살에 명중되는 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떠나는 자는 마지막 화살을 쏜다. 가장 강렬하고 치명적인 기억을 남기고 간다. 마지막 살에 급소를 맞은 자는 따라서 죽음을 맞거나, 평생 흉터처럼 기억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아무에게도 추억을 남기지 않고 가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있었다. 화살을 피하고 싶다. 난 왜 어머니의 마지막 화살을 피하지 못했을까. 즉사의 명중은 피했지만,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나는 또 하관(下官)의 순간 누구의 가슴을 맞출 것인가. 사라지는 자는 말이 없는데, 마지막 쏜 마지막 화살은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있다. [출처] 마지막 화살|작성자 김기덕   철길 위의 하모니카       코스모스 피어있는 철길에 하모니카 소리 아다지오 완행열차로 지나고 바람은 들숨과 날숨으로 곡조를 만든다 차창으로 스치는 플라타너스 얼굴 내뿜는 한숨조차 단조의 연주가 되는 하모니카의 입맞춤은 악보 없는 레일 위의 선율로 흐르고 하고픈 말 다 하지 못해 도·미·솔·도 듣고 싶었던 말들이 귀를 열면 레·파·라·시·레 풀잎들도 말없이 하모니카 떨림으로 노래한다 철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지 하늘엔 뭉게구름 피어나고 기적소리 산허리를 돌아 끊겨진 철길 하모니카 이름은 구름 따라 떠가고 하모니카 구멍 속 눈물 담긴 화병에선 해마다 젖은 코스모스 꽃잎들이 피어난다 [출처] 철길 위의 하모니카|작성자 김기덕   핀셋을 든 여자     현미경 속의 불순물들을 핀셋이 집어낸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엔 은밀한 무리들이 살아있다. 손잡을 수 없다면 골라내야지. 살면서 만져서는 안 되는 부류들은 핀셋이 필요하다. 두 개의 금속을 붙여 만든 핀셋은 오므려지지 않는 탄성을 갖고 있다. 자기 고집이 강할수록 탄성은 강하고, 탄성이 강할수록 콕 집어 예리하게 집어낼 수 있다. 흑백의 하루에서 골라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내겐 더 뾰족한 핀셋이 필요해. 강하게 집어도 휘어지지 않을 탄성을 키우면서 뾰족한 감각을 세웠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거침없이 골라낸 주변엔 친구 하나 남지 않았다. 썩어서 골라내고, 덜 여물어서 집어내고, 벌레 먹어서 버렸다. 핀셋이 닿는 곳마다 상처를 남기며 뿌리들이 뽑혀나갔고, 고독은 늘어났다. 나중엔 핑계를 대서라도 억지로 괜찮은 놈들까지 콕, 콕 집어냈다. 손에 피를 묻히기 싫거나, 이물질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는 핀셋에게 청부살인을 시키기도 했다. 모두 다 어딜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주변을 집어낼수록 고독해졌다. 나는 내 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썩고 병든 주름 속에 벌레들이 가득했다. 어서 어서, 핀셋을, 사람들의 입엔 핀셋이 물려 있었다. 내 안의 이물질들을 집어낼수록 주변엔 좋은 이들로 채워졌다. 핀셋이 방에 콕 박힌 나를 들어 올렸다. [출처] 핀셋을 든 여자|작성자 김기덕   통증을 모르는 아이         통각의 보호막 속에 나는 물처럼 담겨있다. 비닐봉지에 담긴 물은 바늘이나 가시의 상처에도 쉽게 새버린다.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내용물이 쏟아져서 빈 껍질로 돌아간다. 나를 부풀게 하는 것은 아직 찢어진 막이 없기 때문이다. 살가죽이 물과 피와 정신을 감싸고 있는 줄만 알았지만, 새는 것을 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통각이 없다면 누가 언제 내게 칼을 던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미세한 누수나 작은 외부의 침입도 감지할 수 있는 통증의 피막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비닐 팩은 그저 물만 담고 있을 뿐, 예리한 칼이나 송곳의 침입을 막을 수 없지. 줄줄 물이 새서 쪼글쪼글해져도 비닐 팩은 소리 지를 수 없지.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은 가죽이나 괴로운 표정이 아니라 바늘 하나 침투할 수 없이 온 몸을 밀봉하고 있는 통증이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몸에 붙어 있을지라도 내가 아니고, 죽은 것이다. 굳은살이나 사마귀 같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나도 통각을 잃어갔다. 통증은 공감인데도 무관심으로 피하기만 했으므로.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넘어져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고관절에 금이 가도 망가져가는 나를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또 손가락 하나를 잘라 먹었다. 모두가 아픔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통증 없는 곳이 지옥이다. 두려움과 연약함을 깨우치기 위한 신의 선물이 내겐 없다. 덜렁거리는 무릎을 흔들며 논다. 집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는 아직 어린아이. 성숙한 이는 통증의 두려움을 안다. [출처] 통증을 모르는 아이|작성자 김기덕   마지막 보시     나귀에 망자를 싣고 천장으로 떠나는 길은 라마승과 천장사뿐이었다. 가족도 없이 떠나는 길은 외롭고 멀었다. 하늘이 맞닿은 천장터에 망자를 누이고 라마승이 주문을 외운다. 망자를 인도하는 독수리를 부르기 위해 향불을 피우고 종을 울린다. 뼈피리를 불며 덧없는 한 생의 바람을 보낸다. 이생에 미련이 남은 자에겐 독수리가 오지 않는 법. 인연을 끊고 환생을 꿈꿀 때만 독수리들은 날아온다. 아낌없이 제 몸을 보시하고 돌아가는 자를 위해 까맣게 허공을 덮는 하늘의 십자가들. 눈을 쪼고, 코를 쪼고, 입술을 찢으면서 한 세상 살아온 욕망을 뜯어먹는다. 감각은 사라지고 백골만 남아서 빈 마음이 되면 훨훨 저승까지 가리라. 독수리의 인도 따라서 껍데기를 벗고 날아오른 망자의 혼은 어디에서 다시 환생했을까. 독수리들이 떠나자 천장지엔 방울소리 잦아들고, 타던 향불도 꺼졌다. 가끔씩 하늘이 열리고 망자가 떠나는 천장터, 뼈를 씻는 비가 내렸다. [출처] 마지막 보시|작성자 김기덕   통         통을 옮기다가 넘어져 구르면서 나도 하나의 통임을 알았다. 숫자를 세며 머리통을 굴리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악, 소리가 먼저 울림통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몸통이 중력 작용으로 언덕 아래 굴러 떨어졌다. 통 안의 내장들이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았고, 허리와 다리통엔 상처가 났다. 서있는 통들은 견고히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 내면에 가득 내용물이 채워진 통일수록 흔들림이 없다. 두드려 보면 알 수 있는 깊은 내면의 무게. 꿈이 가득 채워진 통은 어떠한 바람에도 넘어지거나 구르지 않는다. 가벼운 통에서만 울리는 얄팍한 불만의 울림. 속이 빈 통들의 공명은 요란하다. 출렁 하고 넘어진 술꾼의 입에서 오물들이 쏟아진다. 누구나 통 안에 감추어진 내용물은 함부로 쏟지 말아야 하는 법. 수십 년 묵은 장일수록 함부로 뚜껑을 열지 않는다. 튼튼한 다리통에 힘을 주고, 허리통을 동여매어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내 안에 오랠수록 썩지 않는 내용물로 가득 채우고, 단 한 번 비밀의 뚜껑을 여는 순간, 아낌없이 주기 위해 함묵하리라. 숨통이 다하는 날까지. [출처] 통|작성자 김기덕   톱이 놓여진 시간       톱이 한 생명의 밑둥치를 자른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다 쓰러진 나무의 부러진 가지들이 진액을 흘린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엔 하얀 목질의 살점들이 묻어있다. 쩍 소리를 내며 쓰러지던 마지막 비명이 계곡에 메아리로 울렸다. 수십 년 다져온 삶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톱이 발등에 놓일 때 그 섬뜩한 기운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야금야금 내 살 속을 파고들 때 단단히 톱날을 붙들고 놓지 말았어야 했다. 잘 생겼다는 바람의 말 한 마디, 쓰윽. 꼭 필요한 데 쓰일 거라는 구름의 말 한 마디, 싸악. 쓱쓱 싹싹 뼈가 잘리는 줄 모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밑둥치 잘리는 줄 모르고 푸른 이파리 펄럭였다. 한 눈 파는 동안 발목에 섬뜩한 톱날이 놓인다. 춤추는 순간 옆구리에 날카로운 이빨들이 박힌다. 시계의 톱날들은 날카롭고 촘촘하다.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이빨들이 밑둥치를 물고 놓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강하고 튼튼하다고 생각한 곳에 톱날이 놓인다. 쓱쓱 싹싹 발목을 자르는 시간. 밤과 낮의 반복되고, 하얗게 발밑엔 회한의 톱밥들이 쌓인다. [출처] 톱이 놓여진 시간|작성자 김기덕   카멜레온의 이름들       구두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전자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5센티 숨겨진 깔창. 난 이미 가식적인 사람이란 걸 안다. 순수했던 내가 아니다. 치아를 교정했고, 머리염색을 하며, 숨겨진 옆구리의 살들을 감추고 산다. 성형미인을 보고 험담을 했고, 짙은 화장의 얼굴을 보고 비웃었다.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유리하게 변호할 때 카멜레온의 이름을 붙였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반칙과 트릭의 일상에서 나도 강자인양 주변에 맞는 보호색을 띠며 깃털을 세워 몸집을 부풀렸다. 거친 욕을 하며 광란의 질주를 하고, 추월과 끼어들기에 능해졌다. 들킨 자는 비판 되고, 들키지 않은 자는 용납되는 은폐의 숲에서 살아남기를 한다. 발가락의 뼈들이 휘었다. 목과 눈가에 칼자국이 남았다. 호스로 빨아들인 나의 지방덩어리들은 더 이상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과감히 나의 일부를 잘랐다. 일부의 공장은 폐쇄됐고, 발전소의 불들은 꺼졌어도 함몰된 젖가슴을 감추며 고상하게 살아간다. [출처] 카멜레온의 이름들|작성자 김기덕   고치 속은 따뜻하다                                                                      찜질방의 벌레집 같은 공간에 몸을 밀어 넣는다 온탕 냉탕을 오가며 사우나에서 땀을 뺐다 날아갈 것 같은 가벼움으로 나비를 꿈꿨다 방과 하늘이 통하는 구멍에서 육체의 한계를 느꼈다 거북의 등껍질을 벗은 사람들은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고 오락을 했다 낮선 얼굴들이 둘러앉아 계란이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잠을 청했다 코를 골아도 깨우지 않고 통로 복판에 큰대자로 누워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으면 다 똑같은 족속이지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동굴 속의 공간 따뜻하고 습한 기운에 세균들도 달라붙어 잠을 청한다 시간을 갉아먹다 찾은 인간도 한통속이 되어 벌거벗고 목욕하고 시원한 음료나 간식을 먹으며 꿈틀 돌아눕는다 세상에 피난처 하나쯤 있다는 게 좋은 거야 제 맘대로 뒹굴며 시간 때울 수 있는 벌레들의 자유, 한 잠 자고나면 찜질한 몸에선 날개가 돋고 나방들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날 테지 나방과 나비의 차이는 생각에 있었지 육체를 벗어나려는 나비 한 마리 언젠간 내 품을 찢고 날아가겠지 등이 가려운 사람들이 서로의 등짝을 밀어주다가 봄날의 방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 날개를 기다리는 시간, 고치 속은 참 따뜻하다 [출처] 고치 속은 따뜻하다|작성자 김기덕   장고                                                                     변죽만 두드리며 살아왔지.   울림통의 한복판에서 신명나게 장단을 맞춰 궁채 한 번 놀리지 못한 채, 세요고의 가는 허리 조이며 뼈를 깎아 살아 온 몸. 탕개에 걸린 목숨 줄만 팽팽히 당겨져 붉고 흰 조임줄에 묶여있었지. 낮과 밤의 채편과 북편을 두드려 덩 · 덕 · 쿵 · 더러러…. 명고수를 만나야 해. ‘덩’ 하고 가슴을 울리고, ‘덕 · 쿵’ 뼈마디를 울리며, ‘더러러’ 말초신경까지 뻗어가도록, 오른손 말가죽은 높은 음을 내고, 왼손 소가죽은 낮은 음을 내어 오동나무 붉은 가슴을 울려줄 운명을 만나야 해. 해와 달의 궁채를 들고 온 이가 피 묻은 십자가를 울린다. 털썩 주저앉아 자지러질 것 같은 울림의 만남.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에 가막쇠를 걸고 있는 조임줄을 당기며 하늘의 북소리를 울린다. 말씀을 씌운 방망이가 ‘쿵’, 쪼개진 우레 소리 ‘더러러’ 동서남북을 울리는 장고소리에 발을 맞춰. 비스듬히 어깨에다 장고를 둘러메고, 덩실덩실 춤추며 흥청흥청 놀다가도. 이웃들 부추겨 추임새 넣어주고, 빠른 장단 휘몰아쳐 신명나게 도약하며, 초로인생 흥을 돋워 장엄하게 끝맺으세. 덩 · 덕 · 쿵 · 더러러, 덩 · 덕 · 쿵 · 덩덕쿵.   좌뇌와 우뇌를 울리는 영혼의 소리 [출처] 장고|작성자 김기덕   빨강색 통신                                                                         빨간 몸통의 전화기를 사랑했다. 수화기를 들면 전해지는 하트의 언어들, 귓가에서 함박눈이 속삭였다. 일방적으로 받을 수만 있었던, 하늘의 음성들이 시작된 번호를 나는 알지 못한다. 누가 내게 하늘로 거는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있을까. 액정화면엔 발신자의 번호가 뜨지 않았지만 늘 세상엔 함박눈이 내렸다. 나는 가끔씩 전화선 복구를 위해 새벽이면 교회를 찾기도 했다. 강대상에 선 목사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하늘이 닿을 것 같은 긴 선을 늘였다. 나는 책을 덮었다 폈다 하며 ON/OFF 스위치를 작동했지만, 끊기는 전화 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기지국은 구름 속 어딘가에 있다고 사람들은 수런댔다. 하지만 전봇대가 세워진 방향은 늘 서산 너머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성경 속의 문장들을 다 이으면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지 나도 문장들을 꺼내 틈틈이 이어보았다. 페이지를 열어 다이얼을 돌려봐도 빨간 성경책에선 발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먹통이 된 전화기는 차갑게 식어있었고, 나는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언제쯤 하늘의 벨소리는 울릴까. 하늘엔 구름만 가득하고 아직 눈발은 내리지 않는데, 곧 겨울이 올 거라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출처] 빨강색 통신|작성자 김기덕   밝음 조명가게     밤이 찾아오고 밝음 조명가게에 불이 들어오면 또 다른 은하계가 열린다. 빛을 얻고 살아 숨 쉬는 기구들 모여 새로운 세상의 별을 꿈꾼다. 한 세상을 비추기 위한 생명들이 다양한 빛깔과 모양으로 태어났다. 길거리에 세워지고, 천장에 매달리고, 벽에 걸리고, 바닥에 매몰되어서도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빛을 발하리라. 자신의 빛깔과 온기를 품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주변을 위해 살아가는 이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안개등이 샹들리에를 시기하지 않고, 형광등이 백열등을 질투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남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는 등불들이 빛난다. 광원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 굴절, 투과시키면서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는 눈부신 얼굴들. 투광기는 건물의 벽이나 공항·경기장·분수를 비추고, 정원등은 정원을 비추고, 가로등은 길을 비추고, 특수효과를 위한 무대등은 눈과 구름, 불길을 만들며 무대를 비춘다. 아무리 작은 소형전구라 해도 그의 삶은 빛난다. 태양이 뜨기 전까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며 어두운 세상에 꿈과 희망을 나눈다. 겸허히 어둠을 물리치며 주어진 공간을 지키다가 태양빛을 품고서야 잠든다. 빛의 주인이 돌아오는 날 세상의 어둠은 사라지고 불빛들은 휴식을 얻으리라. 아침마다 가장 크고 광휘로운 십자가 앞에서 작은 십자가들이 무릎 꿇는 것을 보았다. [출처] 밝음 조명가게|작성자 김기덕   지퍼의 웃음                                                                   지퍼의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자 촘촘한 이빨들이 가지런히 웃는다. 첫 인연은 막음쇠에 발을 들이밀면서였다. 우린 두 개의 테이프 가닥으로 살다가 서로 이가 맞물려 인연을 이뤘다. 똑딱단추나 갈고리단추보다 견고히 뼈를 맞대고 살아. 함께 옷깃을 여미며 바람 한 점 새지 않게 문단속을 하지. 방심 하나에 이빨 하나 빠지고, 원활하던 슬라이드에도 장애가 와서 와이(Y)라는 물음이 많아지면 가지런히 웃어주던 미소는 사라지고 지퍼가 안의 지저분한 내용물이 보여. 벌어진 입으로 바람이 새며 급격히 서로의 결속은 무너지지. 헤픈 여자들 앞에선 함부로 지퍼를 내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벼운 입 앞에선 지퍼를 열지 말아야 했는데, 지퍼가 벌어지자 수치스러운 내장들이 쏟아졌지. 바느질 자리 촘촘히 꿰맨 실밥으로 굳게 입을 다문 지퍼들 단단히 이빨을 앙다물며 우린 사랑해야 해. 한 번 벌어지면 다물기 어렵고, 이 맞지 않은 채 진행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슬라이드의 길은 늘 처음이 중요하다. 이가 어긋나 옴짝달싹하지 않는다면 이별보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바람 부는 세상, 단단히 서로를 껴안을 때까지. 지퍼가 웃는 건 웃는 게 아냐. [출처] 지퍼의 웃음|작성자 김기덕   십자가 침술원             내 몸의 막힌 혈을 뚫기 위해 침술원을 찾았다. 허리에 찾아 온 통증과 하반신 저림이 잘못 된 나의 자세 때문이라고 의사가 일침을 놓았다. 장침이 뻐근하게 뼈 속까지 찔러왔다. 내 어릴 땐 회초리 드시던 어머니 말씀이 정체된 혈을 뚫어주었지. 비위가 약해 조그만 일에도 심사가 뒤틀리고 맥이 뛰지 않던 체증에 사관을 놓았다. 혈이 막히는 것은 생각이 막히는 것이란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래, 평소 나의 자세가 삐딱했었지. 음양의 기운을 다스리며, 변하고 순환하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통通하여 정심正心하지 못했다. 비딱해진 세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지 못했다. 막힌 혈을 뚫고 내 몸 안에 고인 옹종의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피침이 필요했다. 살을 째고 고름을 도려낼 칼의 침.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침뿌리 끝까지 찔러 넣어 혈을 뚫어야 한다. 간절한 기도가 봉침이 되어 허리에 꽂혔다. 끔찍하도록 다리 끝까지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고서야 깨달음이 전해졌다. 침침했던 눈이 밝아지며 침로針路가 보였다. [출처] 십자가 침술원|작성자 김기덕   충치         뼈를 갉아먹으며 벌레들이 이빨에 구멍을 뚫는다. 잠시 한눈 판 사이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와 집을 지었다. 설마 강철도 씹을 수 있는 단단한 뼈를 무너뜨릴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을 두드리며 밤마다 집요하게 내부로 파고드는 망치질을 느낀 후엔 이미 늦었다. 먹고 마시며 씹었던 쾌락의 침입자는 벌써 나의 한쪽 성벽을 허물고 있었다.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지면 방어할 수 없는 적들이 몰려올 것이다.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겠지만, 성벽이 무너지기까지는 조짐들이 있었다. 성을 지키는 일은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멀리 했어야 할 술과 사탕, 달콤한 언어들이 치석을 만들고 부패의 관습이 되었다. 안일한 피로감에 무시해버린 칫솔질이 엄청난 파문을 가져왔다. 벌레는 단순한 벌레로 끝나지 않았고, 망치질은 일회성 위협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마다 암벽을 뚫는 착암기의 진동에 골이 흔들리고 세상이 진동했다. 통증의 진앙이 퍼지며 발끝까지 아파왔다. 의사를 찾아야 해. 병든 뼈를 허물고 금을 녹여 새로운 뼈로 채워줄 의사를 만나야 해. 흰 날개옷의 천사가 입을 벌리고 구멍 뚫린 뼈 속에 정금 같은 말씀을 채운다. 어떤 벌레도 접근하지 못할 뼈있는 말씀이 내 안에 기둥을 세웠다.   [출처] 충치|작성자 김기덕   자르고 싶은 촉수들       흡반의 입술이 내 입을 덮쳤다. 끈적이며 달라붙은 입술이 입을 빨아들이며 머리와 몸통을 끌어당겼다. 어느 새 촉수들이 팔과 다리를 휘감고 빨판을 붙이고 있었다. 실낱같던 촉수들은 커져 동아줄 같았고, 고무줄처럼 조여 왔다. 그 사내는 촉각으로 나를 맛보았다. 감각의 세계가 해파리의 나른한 끈으로 풀리며 너풀거렸다. 포식의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손을 뻗었다. 어느새 수십 개의 빨판이 달린 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았다. 끈적이는 촉수들이 내 몸의 구멍들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며 흔드는 촉수에 몽롱한 눈꺼풀이 풀려갔다. 잘라내야지. 내 몸을 파고드는 파충류의 혓바닥들, 문어발의 끈적이는 뿌리들을. 길바닥엔 잘못 뻗은 촉수들이 나뒹굴고, 담벼락엔 함부로 놀린 혓바닥들이 달라붙어있었다. 날름거리는 촉수들을 피해 우린 아름다운 산호 밭을 살아왔다. 평화를 가장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촉수들의 뻘밭을 헤엄쳐왔다. 아니, 내겐 예리한 칼날이 있었지. “안 돼요.” 사정없이 붉고 긴 혀를 내밀어 칼을 휘둘렀다. 나를 빨아들이던 입술들이 소릴 지르며 하나둘 추락했다. 나무뿌릴 옥죄던 빨판들의 힘이 풀려 단두대에 섰다. 몽롱하게 끈적이던 물길이 투명해졌다. [출처] 자르고 싶은 촉수들|작성자 김기덕     악마의 빛깔 김 기 덕     커피의 분말엔 코피가 묻어 있다 흑인 소녀의 뼛가루 같은 열매를 얻기 위해 늘 멍이 들던 하늘에 2달러짜리 태양이 시들면 쓰디쓴 밤이 찾아왔다 매를 맞으며 지옥불에 볶아져서 태어난 악마의 빛깔 검은 뼛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영혼을 거른다 창가엔 밤의 앙금만이 쌓이고 한 스푼의 천사와 한 스푼의 악마와 두 스푼의 사랑으로 믹스된 내 몸에도 에스프레소의 피가 흐른다 한 개비 고독과 절망이 타다 남은 타르와 니코틴처럼 몸에 스미는 마성의 수액 초콜릿이라도 믹스할까 검은 네 속셈에 크림을 부어봐 하트가 그려지는지 아무리 백설탕을 넣어도 지워지지 않는 유혹의 빛깔이 독해질 땐 휘핑크림이라도 넣어야지 하늘에 담긴 어둠을 바람의 스푼이 휘젓고 가면 별들이 각설탕처럼 녹는다 달의 입술에서 생크림 빛이 흘러내려도 여전히 캄캄한 창밖 흑인 영가 소리를 내며 나뭇잎들은 떨고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가 물결의 파문으로 흔들린다 어둠을 마실수록 환해지는 불면의 밤 흑인 소녀의 영혼을 마신 혀끝으로 향기로운 악마의 잔상이 노을처럼 감긴다 [출처] 악마의 빛깔|작성자 김기덕   중심에 서면 김 기 덕   가위질 소리를 내며 시계가 시간을 자른다. 긴 가위가 한 바퀴 돌면 1분씩 잘려나가는 시계의 중심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고속주행 하는 고속도로 위에 바퀴들도 중심엔 속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깊은 중심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아. 중심을 잡지 않으면 디스크의 음악은 흐르지 않지. 부드러운 멜로디, 행복에 겨운 박자들도 중심에서 탄생하는 것. 돌고 도는 이 땅의 사계절, 매일 다른 365일도 중심의 힘이야. 중심에 서면 세상을 다 얻는데, 중심을 잡지 못하는 한 사내 포장마차에서 나와 비틀비틀 어디로 가는가. 시간의 중심에 서면 영원하고, 바퀴의 중심에 서면 흔들림이 없어. 바람의 중심은 늘 하나의 점. 중심이 되는 순간 태양도 나를 향해 돌고, 별들도 나를 향해 뜨지. 무수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은 십자가의 중심. 하나의 점 위에 서면 중심이 되지. 시계는 시간을 자르고, 자는 세상을 잰다 해도 중심은 언제나 영원한 제자리이다. [출처] 중심에 서면|작성자 김기덕   지문을 읽다 김 기 덕     출근지문인식기에 손가락을 대자 기계가 나를 읽는다. 죽어서도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상징마크가 내 몸에 숨겨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객사하거나, 전쟁터에서 이름 없이 죽거나, 영영 기억을 잃었을 때 나를 확인하기 위해 누가 내 몸에 지문을 새겨놓았는가. 손가락 끝의 살갗무늬, 방금 한 나의 행동들도 도어 록과 유리창, 주전자와 커피 잔, 내 손이 닿는 데마다 지문은 흔적을 남겼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온 나만의 물결무늬는 어느 바닷가 모래밭에서 새긴 파도의 흔적일까. 아니면 감자 심고, 고구마 캐던 어느 밭고랑의 무늬일까. 손가락 끝마다 새겨진 등고선은 내가 살면서 넘어야 할 험한 산일거야. 내 몸에 보물지도처럼 새겨진 지문을 찍으며 권리를 행사하고, 지문을 찍으며 출근을 확인한다. 아무도 나라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는 아침, 지문인식기만이 진짜 나임을 확인해준다. 너, 아직 잘 살아있었구나. [출처] 지문을 읽다|작성자 김기덕   지팡이 댄스 김 기 덕       지팡이를 든 신사가 경쾌한 스텝을 밟는다   정장의 날씬한 몸매가 빙글 돌며 지팡이를 흔들자 지팡이는 박자를 맞추는 스틱이 되었다가 빙그르 한 바퀴 더 돌면 적을 물리치는 칼이 되고 빙글빙글 돌면 펼쳐진 우산이 되었다   지팡이 하나면 두려울 것 없지 마법의 지팡이는 원 안에 혼령을 부르고 황홀은 생사를 결정하고 산신령의 지팡이는 연기 속에 순간이동을 했지 평생 함께 갈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구름이어도 좋을 역마살인데   가누기 힘든 몸의 다리가 되고 외로워 다정히 손잡아 주면서 미끄러운 언덕을 오를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의 뼈가 필요해 중절모를 벗어 들고 빙글 신사복의 앞단추를 풀고 빙그르르 장단을 맞추며 지팡이를 흔든다   모세의 지팡이는 광야에 구리뱀이 되고 예수의 지팡이는 세상에 십자가가 되었지   지팡이를 의지해 땅을 두드리며 지팡이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어 봐 중절모에 선글라스 신사가 빙글빙글 돈다 무대가 돌고 세상이 돌고 하늘이 돌다가 펄쩍 지팡이만 의지해 양발을 차고 오른 하늘   지팡이 끝에서 지구별이 돈다 [출처] 지팡이 댄스|작성자 김기덕  
9    김기덕 시모음 2 ( 한국) 댓글:  조회:2019  추천:0  2019-12-21
기우는 꽃   발을 내딛는 길마다 방사선의 금이 갔다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검은 빙판 위에서 꽃보다 먼저 꺾인 관절이 소리 없는 날개로 퍼덕거렸지 바람에 풀잎들이 머리칼로 휘날릴 때 눈빛만으로도 피어나는 꽃이 있었지 은행 한 잎의 미소에도 중심을 잃고 꽃잎은 이슬을 쏟아놓았어 어둠에 젖은 나뭇가지 사이로 별들이 커질수록 붉은 날개는 한 뼘씩 길어졌지 바람을 먹은 빙판이 억새꽃 뿌리를 드러내고 시계추처럼 흔들릴 때도 바위를 등에 지고 천년을 기다려준 산이 있었어 민들레 꽃씨, 깃털의 불꽃을 품고 바람 속으로 기울어져 간다. [출처] 중심잡기|작성자 김기덕   청소부     찢겨진 손들이 멱살을 잡는다.  비질에 껌처럼 달라붙는 아스팔트 위에 젖은 낙엽들   가지 끝에 매달린 잎을 떨어내기에는 몇 마디 입김으로 충분했다.    몽둥이와 쇠망치의 계절  된서리로 온 포클레인이 버마제비 발톱을 내려찍는다.  패전 복서처럼 쓰러진 붉은 담벼락들  사각의 링에서 몸을 떠는 무함마드 알리의 다음 상대는 누구인가.    길거리엔 포플러들이 하늘을 비질한다.  빗자루처럼 사형제가 등장하고  고층빌딩에선 히틀러가 사각 유리창을 닦는다.  세르비아 군인들이 무슬림 여자를 목욕시키던 붉은 창가  쓰레기들이 청소부마저 쓸어내는 비질로  길은 늙은 여자의 머리칼처럼 헝클어져 있다.    지우개는 문지를수록 때가 묻고  무심코 뱉은 언어가 압정으로 박힌다.  버려진 것들의 악취,  향기가 떠난 후 몸엔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기억을 다 지우고 흔들의자에 앉아계신 할머니는 언제쯤 부처가 되시는 걸까     기러기들 달의 연못으로 목욕 가는  밤하늘의 푸른 광장  눈처럼 날리는 새털구름을 후후 바람이 비질한다. [출처] 청소부|작성자 김기덕   유리의 본능   다리뼈가 살을 뚫고 나온 피 흘림 뒤에 유리는 나와 동족임을 알았지 속도계가 멈춘 철의 심장 조각난 유리 칼날이 젖은 내 바짓가랑이 속에도 꽂혀 있었어 손을 놓칠까봐 이 앙다문 웃음들 폭포로 무너지는 강물이 유리알처럼 내 몸 속을 흘렀지 조각난 물체들의 몸엔 왜 날카로운 이빨들이 날까 발길에 채이면 물방울마저 조각조각 눈물이 되는 돌아 선 등에 모로선 유리조각이 만져진다 거울 같은 수면 위에 누워 별 총총히 뜬 너의 창문이고 싶었던 내 안의 투명한 뼈들 풀잎이 돋아난 파란 유리창 너머 빗줄기에도 실금이 간다 [출처] 유리창|작성자 김기덕   투명인간    누군가 몰래 나의 방을 다녀갔다.  금언의 황금을 도굴한 흔적과 함께 검은 발자국들이 남았다.  바람의 불청객은 날개도 없이 건물을 건너뛰며 창가의 어둠처럼 방에 스며들었겠지.   빗자루를 탄 마녀들의 누리 사냥에  유명 탤런트가 살해되고, 몇몇 정치인의 옷이 벗겨지고  성업 중이던 업소가 폐쇄됐다.   어두운 영들의 빙의  도깨비감투 쓴 얼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젯밤에도 왕의 골짜기를 헤매던 그림자들이  투탕카멘의 황금가면과 황금마차를 훔쳤다.  밤의 두건을 쓰고 침실을 들여다보는 검은 망자가 창가에 먹물처럼 번진다.  돌팔매의 파문을 내며 도미노가 시작되고  사냥게임이 현실이 되는 정글 속에서  무색의 유리조각, 서로의 살을 베는 익명의 얼굴들로  쫒기는 하루가 첨탑 위에 서있다.  하트와 꽃다발과 편지와 별무리는 사라지고  뱀과 전갈과 돌멩이와 칼과 화살과 총알과 포탄으로 채워지는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 노려보는 한밤의 부엉이  흔들리는 수면 위로  투명망토를 걸친 달빛이 박쥐처럼 내려온다. [출처] 투명인간|작성자 김기덕   연리지목       소나무와 자귀나무가 살을 맞대고 산다. 눈비 오는 한 세월 서로를 껴안고 피와 살을 나누며 살아온 듯하나 실은 냉전 중이다.       자귀나무 연분홍 꽃을 피우고 가지를 흔들어도 소나무는 바늘 같은 잎을 찌르며 공중으로 뻗어간다. 이럴 거면 왜 합했느냐고 몸을 비틀고 소릴 질러도 상처만 깊어갈 뿐 관심이 없다.       안개 속에 눈 뜨는 휴일이면 아이의 손을 잡고 교회 가고 결혼식에 참석하여 행복한 듯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고 동창회에서 등을 다독이며 다정한 하루를 연출한다.       밤이면 각방 쓴지 5년, 혼자 지옥을 산다. 등 돌린 나무의 유령부부, 섹스리스의 삶이 가랑잎으로 바스라진다. 가끔씩 생활비청구서나 아이들 학원비가 적힌 낙엽 메시지가 소통의 전부다. 아이들 위해 자리만 지킬 뿐, 자정 지나 삐삐삐 현관문 잠금장치 열리는 외계인 소리에 한기를 몰고 오는 술 냄새의 역겨운 솔향 매달린 아이들은 자귀나무 차지인데, 소나무는 승승장구하며 하늘로 뻗어간다.       한 때 정장이 어울렸고, 곧고 푸른 성격이 좋았던 남자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과 자귀꽃 미소가 고왔던 여자       단 한 번만이라도 안아달라고 바람 속에 흐느낄 때 남자는 외면했고 휴식이 필요해 집에 돌아왔을 때 여자는 지네발 같은 잎을 펄럭였다.       옆구리에 박힌 쐐기를 자를 순 없다. 한 집의 불편한 동거 커풀룩을 입고 활보하는 연인들이 부러웠다. 잎사귀를 서걱거리며, 가지들 비벼대며 서로를 원망도 했다. 쓸리는 맨살이 아파 소리도 질렀다. 서로 가슴을 후벼 파며 밤새 삐걱대던 가지에서 흐르던 피, 피가 멈추자 딱지가 굳는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투명한 나무가 되었다. [출처] 연리지목|작성자 김기덕   분리수거    노인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병과 깡통과 박스를 고른다.  잡쓰레기들과 불태워지기 전 고철과 플라스틱을 분류한다.  쓸 놈들과 못 쓸 놈들,   몹쓸 놈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어른들은 늘 금을 그었지만  누구나 신상품으로 태어나 속 꽉 찬 시절이 있었다.  철학서와 잡지와 통속 소설들이 함께 꽂힌 서고에서   한 눈에 양서를 읽듯   예리한 눈금을 그어 돈이 되는 놈들만 고른다.  같기도 하고 안 같기도 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선과 악  천사이면서 악마인 얼굴을   둘로 나눌 천국과 지옥은 있는 걸까.  현의옹(懸衣翁)이 의령수 가지에 사자의 옷을 내걸고   연옥에선 때 묻고 속 빈 껍데기들도 녹아 알맹이가 된다지.  번뇌를 쫓아 성불한다고  불 속에서 해탈을 기다리는 페트병 스님들,  기의 흐름에 따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바람 같은 삶의 재생을 위해   빈 깡통이 찌그러진 깡통을 고르고   빈 박스가 물 젖은 박스를 품는다.   뚜껑 열린 병이나 옆구리 터진 봉지들이 토한 내용물들로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장   빈 병들이 빈 병을 알아보는 동병상련의  병과 깡통과 박스들이   껍데기만 남은 노인들을 줍는다.   *의령수: 『시왕경』에 나온 죄의 무게를 제는 나무 [출처] 분리수거|작성자 김기덕   누수     밤새 수도가 샌다. 헛바퀴만 도는 꼭지, 파이프를 타고 흘러온 강의 상류는 눈물샘이 되어 솟구친다. 차가운 물방울들은 지류를 따라 계곡을 흘러가고, 체온이 떨어진 숲에 낙엽이 진다. 통증처럼 이는 바람   부어오르는 십이지장의 벽, 천공 직전까지의 증상에도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장을 거쳐 대장의 배관을 타고 빠져나간 그림자들은 검은 바다를 떠다녔다. 오물과 섞여 부글거리는 물거품들   가스가 새고, 양분들이 빠져나간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입에서 폭언이 쏟아진다. 걸을 때마다 흘리는 요실금, 흐린 기억들을 바지에 지리며 젖어 사는 빗속은 작은 폭우에도 절벽이 무너져 내린다.   구멍 뚫린 방화벽에서 지폐가 쏟아진다. 탱크의 기름은 통에 나뉘어져 어둠 속으로 실려 간다. 썩은 나무 구멍을 두드리는 딱따구리들의 보이스 피싱, 한 순간 가지들이 부러지고   증기자동배출 콕이 고장 난 압력솥은 밥이 되지 않는다. 익기 위해 부글부글 끓이는 속앓이. 적당한 열과 압력을 위해 치밀한 밀봉이 필요해   입을 다물고 괄약근을 조여 아랫배를 끌어당긴다. 운동을 하고, 약을 먹고 눈물을 삼키며 밥을 채워 넣는 내 안의 방수. 팔등신의 미녀들이 활보하는 거리로 나는 고무공처럼 튀어 오른다. [출처] 누수|작성자 김기덕   물 위에 접시   거울 같은 연못이 하늘을 만난다. 연꽃 접시들은 물결에 몸을 싣고 구름으로 떠다닌다. 번개 같은 스침에도 천둥같이 울리는 인연 부딪는 접시들의 소용돌이가 태초의 침묵을 깨뜨리며 우주로 공명한다. 별의 목소리들은 빛이 되고 꽃이 되어 서로를 부른다. 은하수 꿈길을 가는 동그라미들 법당 처마 끝에서 풍경이 운다. 종탑 꼭대기 종소리가 비눗방울로 하늘을 덮는다. 빈 마음으로 만나는 접시들의 청아한 음성, 웅 웅 뼈 속을 울린다. 시간의 물길을 돌고 돌아 티 없이 만나는 접시의 얼굴 눈빛만 마주쳐도 “뗑”하고 가슴에 사무친다. [출처] 물 위에 접시|작성자 김기덕   배말뚝       배가 부른 대리석에 팔뚝만한 쇠사슬이 감겨 녹물을 흘린다. 밀물로 왔다 썰물로 빠져나간 배들 잡지 못한 선착장에서 비바람 휘몰아치던 격정의 밤을 잉태하고 끝과 끝이 만나 다시 돌아오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쇠사슬로 동여매도 물처럼 빠져나가 매어둘 수 있는 것은 바람의 흔적과 끈적거리며 매달리는 비린내뿐이라는 걸 안다. 부침하는 물살과 배반의 폭풍에 밀려온 난파선의 이야기를 뼈에 묻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구름도 보내고 갈매기도 보내고 뿌리로 남아 파도치며 안으로 멍들어 가는 바다를 닮아간다. [출처] 배말뚝|작성자 김기덕   맹수는 우리를 뛰어 넘을 뿐       우리 밥 먹으러 갈까? 우리라는 말이 울타리를 친다. 밥을 먹기보다 우리를 만들기 위해 만나는 우리.       숲에 가면 늑대가 많아 혼자 길을 가면 위험하지. 양들의 무리는 풀을 뜯다가도 해가 지면 서둘러 우리를 찾는다는데. 무리들과 어울려야 풀도 맛있게 뜯을 수 있다는 것을 붐비는 점심시간 혼자서 밥상을 차지해본 사람은 안다. 전쟁터 같은 식당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편안히 풀과 고기를 뜯기 위해선 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함께 가는 길은 당당하고 힘이 넘치지. 자살사이트에선 손잡고 함께 갈 우리를 구했어. 강한 척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던 시간은 우리 속에 있을 때였나 봐. 뿔로 들이받고 싸우던 양들은 우리를 벗어나는 순간 예기치 못할 위험에 몸을 떨었어. 한 평 반의 우리에 갇혀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짐승처럼 나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몸 하나 안온히 받아줄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루이비통을 사고 샤넬을 구한다. 명품으로 약점을 가린 발걸음들은 활기차다. 말뚝을 박고 가로막대를 얹은 끼리끼리의 어깨동무엔 가시철망이 엉켜있다. 명문대를 나온 그녀는 우리에서 내몰리지 않기 위해 밤새워 책을 읽고 논문을 쓴다. 들소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자들을 향해 방어막을 치듯 약자들은 고치를 짓고, 벽을 쌓고, 빌딩을 세우고, 등을 내보인다.       나는 가끔 우리 안에 들지 못한 호랑이를 본다. 강하기 때문에 혼자이고, 혼자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맹수는 우리를 뛰어넘을 뿐, 스스로 갇히지 않는다.   [출처] 우리|작성자 김기덕   슈거파탈   입 맞추기만 해도 솜사탕 여신은 눈물이 된다. 삼킬수록 목마른 생크림 입술 혀끝에 감기는 황홀감에 정신이 혼미하다.   이빨 하나 쯤 정표로 주어도 좋아. 풍선이 부풀고, 바람이 빠져나간 뼈들은 수수깡이 되어간다. 심장이 멈추도록 탐하고 싶은 꽃잎들 잎새를 애무하다 사라지는 한 방울 이슬이고 싶어.   페이스트슈크림이 눈보다 희게 웃는다. 마들렌에 취한 몽환의 눈빛으로 뭉게구름 슈플레가 드레스를 벗는다. 아트아슈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열매들 애플 타르트의 황홀한 감촉에 오, 오르가즘에 오르는 쇼콜라 퐁당   혼을 팔아 펌킨푸딩의 속살을 산다. 미소 속에 감춰진 환각제를 핥는다. 움켜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의 육체가 흐느적거린다.   여신은 구름이 되어 사라지고 옷깃을 적시는 백색 필로폰의 눈물 마리화나의 연기에 취해 네펜테스로 굴러 떨어진 몸이 초콜릿 시즙으로 녹는다.   죽음이 참 달다. [출처] 슈거파탈|작성자 김기덕   지구를 지켜라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로봇을 부른다. 지구를 지켜온 로봇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미래용사 볼트론 눈감으면 태양 저편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이젠 그만 일어나라 내게 외친다. 그 때마다 움츠러든 몸엔 무쇠팔 무쇠주먹이 생기고 캉타우의 철퇴가 들려지곤 했다. 남자가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세상에서 나의 삶을 로봇들이 대신 해왔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고 천둥 속에서, 번개 속에서 저들은 용기를 주었지만 늘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나는 피닉스킹이나 제트건담의 노랫소리를 듣고서야 분노를 삼키며 날개를 폈다. 강철얼굴에 맞서 우뢰매에서 킹 라이온으로 메칸더브이로 변신합체하며 맞서왔다.   밀리면 죽을 수밖에 없어 무적의 파워레인저가 되어야 했고 초강력 칼과 로켓을 장착해야 했다. 누구는 하이퍼 다간이 되었고, 누구는 에반게리온이 되었고, 누구는 영혼을 판 라젠카가 되었다.   미래 도시 지구를 지켜온 로봇들 땅을 뚫고 바다를 건너 하늘을 날았던 용사들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부르면 어디서든 발진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건물이 쓰러지던 도시 어둠에 맞서 싸우던 나도 한 시대의 트랜스포머였다. 우주 행성을 점령하려는 메카트론을 물리쳐 평화를 지켜온 지구의 용사들   그때 그 로봇들은 늙고 병들었는지 이젠 보이지 않는다. 영이도, 데일리도 더 이상 불러주지 않는 영웅들은 잊힌 캐릭터와 먼지 뒤집어 쓴 장난감이 되어 어느 진열대에서 호명을 기다리는 걸까.   눈물이 날 때 로봇을 불러봐. 그대의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철문이 열리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켓엔진을 타고 창공을 날아오를 거야. [출처] 지구를 지켜라|작성자 김기덕   코골이   물감처럼 어둠이 흘러내린 밤 그의 머리가 땅에 닿는 순간 광풍이 불고 영들이 몰려온다. 도깨비, 달걀귀신, 몽달귀신, 터귀신, 저승사자 콧구멍을 드나들며 굿판을 연다. 들이키는 꽹과리소리, 내뿜는 징소리 밀고 당기며 행차를 나간다. 산 넘고 물 건너 세링게티의 숲, 영역을 지키기 위한 사자의 포효가 울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갈기를 휘날리며 누의 목을 물었고 들소의 숨통을 끊었다. 콸콸 목구멍을 새어나와 초원을 흐르는 강물소리 아래층 여자는 밤새 세탁기를 돌린다고 쫓아올라오고 아무리 빨아도 희어지지 않는 빨랫감들이 목구멍 속에서 물소리와 섞여 돌아간다. 빙글빙글 몸을 돌린 회전의자에서 의사는 늘어진 목젖을 자르자고 한다. 악어 같은 목구멍에 매달린 종 한때는 학교종소리였고 바람결에 풍경소리였다고 여자는 배계를 의심하지만 고혈압 동맥경화가 지속되면서 뼈 속에 바람이 분다.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엘니뇨와 라니냐는 지역적 태풍과 홍수를 몰고 왔고 몸에선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잦아졌다. 밤마다 바람에 날아간 여자는 거실 소파에 나뒹굴었고, 아이들은 제 각각의 언덕으로 몸을 숨겼다. 송두리째 휘감아 오르는 용오름, 그는 밤마다 승천하는 걸까. 지각변동 하는 밤의 풍차돌리기가 일순 멈춘 무호흡의 폭풍전야 침묵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출처] 코골이|작성자 김기덕   끈 자르기   들판에서 순산한 어머니는 탯줄을 짚으로 묶고 이빨로 끊었단다.   삼신할미 손에 침 발라 정맥과 동맥의 탯줄을 꼬았다. 탯줄 속의 태극이 우주나무로 이어져 하늘과 땅이 하나이다가 홍수가 나고, 암흑의 동굴을 지나 태양이 뜨며 둘로 갈라졌다. 교미하던 뱀들이 잘려 대문에 내걸린 왼 방향 금줄. 하늘에선 옴파로스*가 떨어졌다.   산소 호흡기에 매달리다 아버지는 줄을 자르고 하늘로 갔지만, 바람 속에서 열매들은 안간힘으로 꼭지에 매달렸고, 배꼽이 허전한 나는 복희와 여와도의 그림 같은 DNA 구조에 집착했다.   한 다발의 볏짚을 잡고 새끼줄을 꼰다. 세 개의 줄을 모아 삼승 가닥을 만들고 구승을 만들어 이십칠근승 용줄을 만든다. 용을 잡고 노는 마을 사람들의 줄다리기, 용과의 한 판 씨름이 끝나면 줄을 조각내어 지붕에 얹고 달여 먹으며 아들을 빈다. 용줄이 똬리 튼 당산나무엔 별무리 같은 정자들이 꿈틀거렸다.   나는 아이의 탯줄도장을 꺼낸다. 상아 속에서 오그라든 탯줄을 잡고 백지 위에 도장을 찍는다. 피가 배어난 이름, 암호 같은 배꼽 속엔 내 전생의 미로가 열려 있다.   은하수 자궁 속의 별들은 자라고, 창가에 매달린 거미줄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옴파로스: 창조주가 세계의 중심을 잡기 위해 던졌다는 돌. [출처] 끈 자르기|작성자 김기덕   하이브리드 정원   스피커에서 사물놀이와 재즈가 몸을 섞는다.   순혈의 기둥에 우산살처럼 꽃피운 단일민족 혈통주의 식민지 지리상의 발견 농경사회 오지탐험 게르만 600만 학살, 하늘 가린 검은 파라솔을 접자 태양이 뜨고 구름들은 산을 넘어 빛과 흘레붙는다.   농촌총각과 서양처녀가 사는 전원주택엔 피자군만두에 된장소스스테이크와 라이밀*이 어울렸다.   텃밭에 토감*을 거두고 나면 무추*를 심었지 상추와 깻잎이 한 가지에 피는 세상이 오면 소통이 열릴 거라고.   크로스 오버하는 뜰에 나뭇가지들은 그늘을 만들고, 한 입 베어 문 과일향이 온 몸으로 퍼진다. 열매들로 나를 진단하며, 사랑 없이 사랑하며, 춤으로 노래하며, 숫자로 요리하며, 유행가로 불공하며, 역사를 악보로 연주하며, 철학으로 문학을 색칠하며, 뒤엉킨 가지와 잎들 속에서 라이거의 포효가 들린다.   기름과 전기가 만나 소리 없이 미끄러져 온 시간   할아버지는 유학자였고 할머니는 무당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되었지.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아침마다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이기도 했지. 제삿날엔 할아버지 따라 축문을 읽었고 일요일엔 교회에서 기도했지. 방학 땐 절에서 공부하며 불공드렸어. 할머니 돌아가신 날 방에선 예배드렸고 대청에선 불공드렸고 마당에선 제사지냈지. 방 마루 마당을 오가며 천당과 극락과 저승이 교미하는 걸 나는 본 걸까?    폭탄주에 컴퓨터와 TV와 오디오가 한 몸으로 춤추며 불러대는 트로트와 니나노의 클래식한 합창 속에서 비빔밥이 버무려져 참기름 향기가 진동한다.   * 라이밀: 쌀과 밀이 교배된 곡식 * 토감: 토마토와 감자가 함께 열리는 식물 * 무추: 무와 배추가 함께 자라는 식물 [출처] 하이브리드 정원|작성자 김기덕     그림자밟기   그림자에 쫓기는 남자가 빛 속을 뛴다. 광속의 추격자를 따돌리고 숨은 곳은 또 다른 그림자   보름달이 뜨면 동네 아이들은 골목에서 그림자밟기를 했다. 술래가 되어 뒤를 쫓던 흑백의 영상들이 컬러풀한 광케이블을 타고 전속력으로 쫓아온다.   벽에 사르트르의 손이 형상을 만든다. 새가 날아오르고, 개가 되어 짖다가 목을 세운 코브라가 사르트르의 손을 문다. 흰 벽에 번지는 검은 피   하나의 태양엔 하나의 그늘이 지고 천의 빛 속엔 천의 얼굴이 흔들린다. 빛의 각에 따라 나무처럼 자라는 색깔들 패션에 쫓긴 알몸들이 거리를 헤매고 헤어스타일에 머리채 잡힌 여인들은 횡단보도를 질질 끌려 다닌다.   구두에 짓밟힌 술래들이 또 다른 술래를 쫓는 그늘의 품에서 콩나물 같던 아이들이 흑백의 이모티콘을 먹으며 거인으로 자란다.   빛이 사라지는 밤 쥐눈처럼 말똥말똥한 별들만 땅에 내려와 그림자밟기 놀이를 한다. [출처] 그림자밟기|작성자 김기덕     물의 사진   호숫가에 사람들은 풍경 한 장씩 복사해 간다. 폴라로이드처럼 망막에서 인화되는 물의 필름 속엔 흐느낌의 주파수가 흐른다. 단풍잎들은 수면 위에 피 묻은 발자국을 찍고 백발의 시인은 돋보기 너머로 내둘러 쓴 자서전을 읽는다. 빛바랜 일기장들의 나들이 오늘이 복사되는 호수엔 둥근 거울이 떠있고 머리 푼 낮달이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달을 닮은 사내아이 하나 쯤 거뜬히 낳아줄 것 같던 그녀에게서 덜덜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빛의 칼에 잘린 얼굴이 흐름을 멈춘 미소 끝에 걸려 말려 올라가지 못한다. 반 쯤 새겨진 이름들은 백지 같은 밤을 까맣게 지새워야 하리라. 짝퉁들이 여류화가의 캔버스 위에서 옷을 벗는다. 발목이 빠지는 껍질들의 숲 물의 렌즈를 연 호숫가에서 나무들은 바람을 낳고 수면은 파랗게 멍든 허물을 벗는다. [출처] 물의 사진|작성자 김기덕   번지 점프                            김 기 덕   추락하는 몸엔 끈이 있다. 심연에 떨어졌다가도 솟구치는 용수철의 힘 부도 맞은 아버지와 낙엽 사이엔 상대성 끈이론이 작용한다.   버티던 줄을 놓아버린 여자는 아파트 옥상에서 화단으로 떨어졌고 화살들은 돌아올 수 없는 숲으로 날아갔다.   놓아버림과 매달림 사이에서 열매들은 방황한다.   성년의 통과의례처럼 추락하는 하루의 절벽, 꽃잎들도 비명을 지른다.   줄을 매는 하늘과 줄을 푸는 땅 사이에 비처럼 금을 긋는 유성들 별들은 날기 위해 벽을 넘어 사다리를 오른다.   먹이를 움켜쥐려 급 하강하는 독수리 낚시에 꿰어 요동하는 물고기 끈에 매달려 붕붕 울고 있는 요요   팽팽히 나를 잡은 끈들의 매듭은 굳게 손가락을 걸고 있다.   탯줄의 숨소리 흐르는 양수의 강물로 낙하하는 씨앗들 끈이 풀린다. [출처] 번지점프|작성자 김기덕     열림에 대해                              김 기 덕   꼭지가 비틀린 열매들의 웃음이 터진다. 엔진이 켜진 자동차는 부르르 몸을 떨고 등뼈에 꼬리만 남아 금은방 화석이 된 황금열쇠 수만 년 바위 문을 연 월척의 뼈대는 눈부시다. 해를 향해 채널을 고정한 텔레비전 집들의 안개 드라마에 나무들도 눈물샘을 열고 할머니 허리춤 같은 배, 치맛자락 흘러내리는 파도를 타고 아가미가 꿰인 생선들은 열쇠꾸러미처럼 흔들리며 온다. 잠을 퍼내는 바람의 손짓에 공명하는 휘파람소리 빈 항아리 속을 넘나들고 꽃밭을 나는 흰나비들 은색 실핀을 꽂는 능숙한 솜씨에 꽃들의 방이 털리는 아침 숫자들의 젖꽃판을 누르면 열리는 비밀의 문들 땅에서 가슴에서 우주로 길이 통한다.  [출처] 열림에 대해|작성자 김기덕   달력의 힘   화, 수, 목, 금, 토, 은하수 징검다리를 해와 달이 놓는다.  빛의 발자국마다 열리는 신비한 숫자들       번호 속엔 사계의 바람이 불고  눈과 비의 생애와, 풀과 꽃과 나무의 이력이 담겨있다.       그 중에 나를 닮은 숫자판를 열자  호랑이, 돼지, 소, 쥐가 그려진 한 아이의 출생지도가 드러난다.  손금 같은 길, 하지만 가야 할 능선은 백지 같은 안개로 가려져 있다.     호기심으로 나는 비밀의 방 2012를 들여다본다.  끊어진 마야의 달력, 지축이 기울어진 땅에선 지진과 해일이 일고  활화산의 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달력이 필요해.  숫자마다 시간을 엮는 재생의 뿌리들이 빼곡히 들어찬, 완전한 달력이.  나는 하나 둘 믿음의 숫자를 써내려갔고, 일일이 의미를 새기며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3을 열자 들판엔 꽃들이 피어났고, 7을 펼치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떠났고  9를 뜯어내자 숲속엔 낙엽이 휘날렸고, 12를 벽에 걸자 거리마다 함박눈이 내렸다.  해와 달의 번호판을 누르는 밀물과 썰물   달력의 숫자들이 만드는 회오리에 세상 빛들이 춤추고  밤과 낮의 채널이 바뀐다. [출처] 달력의 힘|작성자 김기덕   빛                      김 기 덕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려 등불을 켠다. 성냥불꽃 만큼 검은 문틈으로 밝은 세상이 비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처럼 지나는 표정들이 깜박인다. 연탄이나 장작의 체온이 그리운 길거리마다 내걸린 아크릴 이름들 영토를 지키기 위해 밤새 피를 흘린다.   이 밤을 견딜 만큼 나는 반딧불만한 빛이라도 있는가. 빛인 척 반짝이며 스테인리스와 유리들이 웃는다.   화살과 총탄과 질주의 무리들은 불꽃으로 박히기 위해 휘파람소리를 낸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 유성들은 밤새도록 머리 위로 성수를 뿌린다.   유리벽에 반사된 얼굴들이 야경 속에 파편처럼 흩어지고 흐물흐물 달의 살이 묻어난 골목길로 은 삼십을 받은 유다가 질질 어둠을 끌고온다.   태양이 오기까지 가로등에선 뚝뚝 목련 꽃잎이 떨어져 길에 쌓일거야. 하루살이들의 밤 가시관을 쓴 예수가 동녘의 구름을 쓸어낸다. [출처] 빛|작성자 김기덕   레드 와인                     김 기 덕   코르크를 뽑자 4백 년 전의 바람이 인다. 뚜껑이 열린 알라딘의 램프  햇빛 출렁이는 포도밭과 포도송이들 광장과 깃발과 군중들의 압축파일이 풀려 나온다. 오크통 속으로 쏟아진 눈알들 발굽에 짓밟혀 어둠에서 피 흘리던 얼굴들과 인두 같은 입을 맞춘다. 혀끝에서 감전되어 전신을 마비시키는 뇌향 굽고 뒤틀린 가지에 매달렸던 벙어리들이 두 손으로 바쳐 든 고풍의 병 속에서 나와 자유를 외친다. 시간의 눈금을 긋고 강물로 기다린 오늘 칼이 울리는 축배의 종소리에 나는 천상의 불을 훔친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단풍의 입술 속에서 불의 언어들이 쏟아진다.  루주가 묻어난 하늘 비틀거리며 루이 13세는 노을 속으로 떠나고 깃발과 함성과 징소리의 불길로 번진다. [출처] 레드 와인|작성자 김기덕   피자                                김 기 덕     돌풍에 금이 간 여자는 도우 위에 페파로니, 양파, 토마토, 올리브, 치즈를 얹고 날마다 오븐에 태양을 구웠다. 고구마피자, 포테이토피자, 치즈‧불고기피자, 구울수록 피자들은 유리처럼 조각이 났다. 아이들은 초승달 하나씩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며 보름달을 꿈꿨다. 곰팡이 핀 지하실에 해가 뜨고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자 아이들은 방 하나씩 차지했지만, 여자는 소스냄새를 풍기며 거실 소파에 피클처럼 쓰러져 쪽잠을 잤다. 아버지 생각이 나면 아이들은 조각난 그림 속의 숫자를 맞추며 치즈의 나른함 속에 녹아든 피망이나 버섯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고무줄처럼 늘어난 얼굴이 몇 가닥의 기억을 붙들고 끈적끈적 매달렸다. 볼우물이 수줍던 아이들은 개나리가 피자 반쪽을 찾아 집을 떠났고, 여자는 그림처럼 남아 미완의 퍼즐을 맞췄다. 보름달이 부풀고 수반에 꽃들이 차오르면 외출을 꿈 꿀 거야. 들판 가득 돌아온 계절과 빗방울 커지는 동그라미들,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오븐 속의 피자가 익어갔다. [출처] 피자|작성자 김기덕   임플란트   방풍림을 흔들며 치통처럼 바람이 불었다.   피고름이 고인 갯벌은 훅훅 입 냄새 풍기며 달려온 태풍에   아랫도리부터 허물어 졌어  파도에 물어뜯긴 모래언덕, 할아버지 수염처럼 늘어진   뿌리들은 허공을 향해 촉수를 흔들었지     쓰레기 매립지를 파고 박은 철 빔들   지반이 약한 탓에 건축 전문가는 조립식 건물을 권했지만   내겐 어떤 태풍도 견딜 반영구적 빌딩이 필요했지   꽃 같은 웃음을 보여주던 마른 대궁들을 뽑고  들뜬 땅을 다진 후 콘크리트 하여 세운 든든한 믿음의 뼈    아버지는 날마다 성현의 말씀 뼈마디에 새겨 곱씹으며 살라 했는데   고기토의 집, 상앗빛 말씀들을 갈고 닦지 못했다.  입에선 악취의 언어들이 쏟아지고   한 순간, 마른 풀잎들은 바람에 흩날리다 떨어졌지   뼈 속에 뼈를 심고서야 말씀의 뿌리들이 가슴에 사무친다  몸에 심겨진 206개의 뼈들이 다 진리였구나.     마을 입구 옹벽이 새 단장을 했다.   폐차들이 녹슬고   빗물과 함께 토사가 넘쳐나던 담벼락,   허물어진 골과 틈을 채워 성형을 했다.   꿈을 디자인한 타일들의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옹벽이 웃는다.   초특급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옹벽의 신념들  동네가 훤하다. [출처] 임플란트|작성자 김기덕   포토샵                                          김 기 덕     점과 주름을 문지르자 별들이 돋아난다. 칼이 지나는 자리마다 피어나는 꽃들, 다이어트 되지 않는 부위들을 자르고 지우며 바비인형들이 태어나는 상자 속에서 유체 이탈한 나를 수정한다.    명품 옷과 구두를 다운받고 다크서클을 가린 선글라스와 시간이 멈춘 다이아몬드 시계, 드라이플라워의 가슴장식, 흑백의 과거 위에 컬러페인트를 부어 구름이 사라지면 나는 새로운 아바타, 신의 합성품이 되지.     그녀는 잘나가는 탤런트의 눈을 오려왔다지. 다음엔 펄펄 끓는 심장을 잘라온댔어. 구름을 만들어 온 뱃살과 처진 엉덩이를 도려내고 이참에 신세대 몸매로 바꿔치기하면 누군가의 메모리에 저장되어 두고두고 컬러풀한 내일을 복사할 수 있을까.     세상은 불붙이면 타버릴 듯 메마른 나무들이 서있다. 동공 속에 별을 그려 넣으며 뼈를 추켜세워도 흐물흐물 무너져 검게 떨어지는 잎사귀들, 내장들. 죽고서야 전송되는 완성품을 위해 바람은 혼을 불러오고, 하나 둘 익숙했던 이름들이 오려진다.     셀 수 없는 클릭으로 계곡의 그늘과 상흔을 다 지운다 해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기억들, 별을 담은 요술 상자 속에서 태어나는 피그말리온의 조각품, 낮선 모습이 우주 밖으로 나를 전송한다.     새롭게 인화되고 싶어. [출처] 포토샵|작성자 김기덕   그물                                 한 달 만에 그는 거미줄에 걸린 파리로 발견되었다. 지하실 벽 옷걸이에 나일론 줄로 매여진 몸을 음습한 기운과 악취의 유령들만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줄을 타고 오르던 피라미드 빙벽, 올이 풀리자 믿었던 구석부터 무너지며 순식간에 추락했다. 안전망 하나 없는 절벽 아래 뒹굴다가 정착한 낙엽의 영토, 지하 무덤은 해가 뜨지 않았다. 익명의 무기를 든 악풀러의 베풀과 유러들의 승패가 갈리는 장에서 만랩이 되고 싶었다. 새들의 포위망은 좁혀졌고, 아바타는 코드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로그아웃.  몰리면 고스톱 판을 뒤엎듯 피시를 끄는 거야. 가상공간에서 심장이 깜박인다.     피라미드가 길거리마다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생매장 되었다. 사촌에 팔촌까지 끌어들여 꼰 실로 숨구멍 없는 집을 지었다. 누에는 집을 나오지 못하고 끝내 질식했다. 도미노로 무너진 건물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끈끈이들이 놀라 뛰쳐나온 사람들의 목을 졸랐다. 거리엔 통나무 나동그라지는 소리와 함께 태풍이 몰려 왔다. 하늘이 없어 날지 못한 스파이더맨은 손바닥의 거미줄을 제 목에 감고 몸을 날렸다.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진 몸, 벽에 달라붙어 단잠에 빠졌다. [출처] 그물|작성자 김기덕   방                       김 기 덕   책과 가구들은 문 밖으로 쫓겨났다. 액자가 떼어지자 얼굴 속에 얼룩이 선명히 드러났다. 전신거울의 뒷면에 살던 바퀴들과 빗물이 스며든 벽에 핀 검은 곰팡이들, 눈송이처럼 침대 밑을 굴러다니던 먼지를 치우고 칼로 반듯반듯 재단하는 봄 풀냄새 흠뻑 묻어나도록 풀질했다. 꼿꼿이 일어선 풀잎, 벽과 천장엔 꽃잎이 번지고 새들은 날아와 눈빛으로 노래했다. 작은 발소리에도 우우 공명하는 푸른 우주, 벌판엔 겨우내 살아남은 새싹들이 채워지고 하늘엔 강한 날개의 철새들이 날아다녔다. 에덴을 위해 빛바래고 상처 난 영혼들은 길거리에 버려져야 했다. 주인의 취향을 따라잡지 못한 아날로그TV와 성해 낀 냉장고, 지겹게 누러 붙던 밥솥도 고물상에 넘겨졌다. 아끼던 책들과 흠이 적은 장롱만 제자리를 찾았을 뿐, 최신형 벽걸이형TV나 노트북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낡은 책상들이 빠져나가고 명패가 바뀌며 활기가 도는 환절기 어둠의 문을 열고 샤워를 하면 이빨 부딪는 물소리에 바이러스들이 지워지며 낮선 바다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출처] 방|작성자 김기덕   데칼코마니                         김 기 덕   아이가 종이 위에 물감을 짠다. 빛바랜 나의  도화지는 천장에 떠있고 아이의 도화지는 백지로 깔려있다. 적‧청‧황‧흑의 물감들이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다고 아이가 깔깔거리며 동‧남의 끝을 잡고 북‧서의 경계를 맞대 반으로 접어 꾹꾹 눌렀다 편다.   대칭을 이룬 뇌 속엔 산과 강이 흐르고 땅과 바다가 하나로 합쳐져 아이의 꿈지도가 펼쳐졌다. 입을 맞추는 남녀의 얼굴, 엄마의 품속에서 나팔꽃 길을 타고 온 나비 한 마리 힘찬 날갯짓으로 날아오른다. 반평생 그려온 나의 산과 달과 구름들은 물그림자로 뜨고 너는 꽃과 나무와 열매의 중심에 내려앉는다.   시간의 모래알로 부서지는 물감들, 묵묵히 걸어 온 낙타의 발자국들도 모래바람에 지워지며 박제된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쉴 새 없이 꽃과 벌들은 만났다 헤어지고 날마다 접혔다 펴지며 풀어놓는 밤과 낮의 씨앗들이 아이 눈망울 같은 빛을 향해 날아오른다. 땅과 하늘 빼곡히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가는 점돌,알락, 팔랑 문양들   물감들이 눌리며 분출했던 화산을 접어 하늘에 날리자 소리는 사라지고 소용돌이만 허공을 맴돌다가 아이의 동공 속으로 사라진다. 오목렌즈 같은 호수엔 용암들이 잠기고,  풀과 꽃과 나무와 접속하던 나비 한 마리 훌쩍 내 어깨에 매달린다. [출처] 데칼코마니|작성자 김기덕   초점                                밤을 입은 드레스의 여인이 흑인 이빨 같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번개의 손놀림에 한 템포가 늦는 천둥소리. 수천의 눈과 귀의 빔이 쏘아진 피아노에서 소녀의 음계들이 타오른다. 도레미파 솔 솔 솔    어깨동무한 산과 섬들이 바다의 일출을 기다린다. 양수를 터트리고 나올 햇덩이, 수평선을 향해 숨을 멈춘다. 카운트 다운하는 폭발점. 용광로의 쇳물이 끓는다. 핏물이 번지며 솟는 새벽, 펄 펄 펄    이파리들 휘날리는 골목을 향해 눈뜨는 집들. 원무를 추는 수·금·지․화·목·토·천·해. 태양을 향해 돌고, 태양은 우주를 향해 돈다. 하늘 향해 모은 눈빛들이 반짝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시선이 머문 종이에 불이 붙는다. 눈빛만 닿아도 연기가 풀풀 날리는 빛의 응집. 그녀의 총에 맞아 쾡 하니 구멍 난 표적지의 그을린 탄착점에서 화약 냄새가 피어오른다. 아지랑이 몽롱한 나의 눈동자     구멍을 들여다본다. 홍채 속의 동공이 반짝인다. 암실에 떠오르는 별. 구멍들은 블랙홀이 되고 나는 머리부터 빨려들어 간다. [출처] 초점|작성자 김기덕   얼음 날개                     김 기 덕   수은주가 곤두박질치자 지퍼가 열린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갈가리 찢겨진 비닐하우스 난도당한 화초의 속살마다 피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고 추락한 날개의 깃털들은 팝콘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볼을 부비며 구름 풍선을 타고 오른 물방울들 결빙선을 따라 눈물이 되고 얼음이 되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관절들은 얼음과자처럼 쉽게 부러져 덜그럭거렸고 단절된 혈관의 마른 잎들은 기침 소리를 내며 얼음 나라로 굴러갔다. 15층 옥상에서 투신한 여학생의 차디찬 몸이 떨어진 곳은 왜 하필 국화꽃 만발했던 화단이었는지 길엔 꿀을 잃은 벌들이 떨어져 눕고 바다엔 엔진이 다한 비행기가 불꽃으로 산화했는지 차가운 눈망울로 쏟아진 빙점의 쓰라린 상처를 박하사탕처럼 밤은 오래오래 녹여 먹는다. 얼음유성들이 긴 꼬리를 끌며 매달리는 어둠 속에서 꽃향기의 마지막 기억을 품고 마른 대궁들이 쓰러진다. 추락하는 별의 얼음 날개 사선을 긋는 찰나의 빛들이 섬뜩 살을 벤다. [출처] 얼음 날개|작성자 김기덕   화장   주름을 지우고 눈썹을 그린다. 어둠이 내려앉은 다크써클, 분화구를 메운 대지엔 베이지 톤의 양광이 눈뜬다. 대리석으로 만져지는 표피의 한기, 찢겨진 상처 위에 파우더를 바르고 순간의 충격 속에서 하늘을 꿈 꾼 푸른 멍울에 무지개를 그린다. 잠의 수렁에 빠진 백설 공주의 핏물 든 독 사과가 검다. 한껏 폼을 잡으며 미소 짓던 순간의 사진들만 낙엽처럼 불길 속에 흩어진다. 구름을 지우는 하늘, 햇살 고운 색조화장에 과실마다 노을이 물들고 산들은 그림자를 지운 머리칼로 이마를 덮는다. 가재미눈을 감추는 아이 샤도우, 치켜 올라간 입 꼬리를 지우는 빨강 루주, 밤새 눈이 온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땅의 낮선 얼굴들, 거울은 늘 빛이 비치는 한 면만 보여주곤 했다. 파운데이션을 덧칠한 여인의 팬터마임은 끝났다. 어둠의 문을 열면 극명히 드러날 하늘과 땅, 마지막 화장을 고친 여인은 춤추는 불꽃과 함께 한 줌 바람의 잡티로 지워진다. 하늘엔 재가 날리고 관객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간다. 덕지덕지 간판으로 덧칠한 빌딩들도 하나둘 옷을 벗는다. [출처] 화장|작성자 김기덕   그대 안의 블랙홀                      창밖에 비가 내리면 나는 LP레코드를 튼다. 먼지 앉은 뚜껑을 열고 잊힌 얼굴 같은 판을 얹으면 그대 좋아하던 음악들이 바늘을 타고 떨리는 손길로 전해진다.   어둑한 방의 격자무늬 하늘엔 눈물방울 별들만 떨어진다. 핵융합이 끝난 별들은 급격한 중력현상으로 블랙홀이 되고 LP판의 검은 음악 속으로  분열되어 빨려드는 나의 우울증, 쳇바퀴 도는 구멍 속을 빠져나올 순 없는가.   목을 조이는 거미줄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밤마다 바다를 헤엄쳤다. 아웃토반을 달려도 여전히 제자리인 집과 얼굴들, 벽에 걸린 음화들이 잠깐 느슨한 감각에 탄력을 주었지만, 이내 절망의 구멍에 빠졌다. 천억 개의 은하계 중 지구별이 속한 은하계엔 천억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수백만 개의 블랙홀은 빛을 삼키며 남자들을 빨아들인다. 촉수를 흔드는 검은 실루엣의 Event Horizon 거리를 활보하는 블랙홀들은 가슴에 늙은 느티나무 옹이 하나씩 퀭하니 뚫려 있다.   초신성중력으로 다가온 블랙 아이라인 그대 눈동자는 언제쯤 비를 멈출는지. 나이테로 흐르는 삶의 궤적이 다하기까지 지글지글 흐르는 빗소리 LP레코드판이 비를 다 삼키고 나면 우린 상처를 잊고 다시 태양으로 뜰까? 그대 안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든 빛들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하늘엔 어머니의 양수가 은하수로 흐르는데. [출처] 그대 안의 블랙홀|작성자 김기덕   벽은 너머를 감추고 있다                        김 기 덕   가시철망을 두른 무기고의 담을 담쟁이덩굴이 페인트자국을 더듬어 오른다. 담들은 너머를 감추려하기에 볼 수가 없어 넘어가고픈 너머, 콘크리트 암벽의 옆구리에 철심을 박으며 녹슬지 않는 긴장을 찾아 벽을 넘는다. 우리가 꿈꾸는 너머엔 풀과 나무와 새들이 어우러져 노래하며 집을 짓지만, 언제나 뛰어넘는 너머엔 절벽과 웅덩이와 운무들로 가득했다. 톱니바퀴를 타고 오르는 시간의 벽이 보여주지 않는 너머로 사람들은 손을 모은다. 수억 광년을 뚫고 온 별빛이 아름다운 거라고 무르팍이 깨져 달려 온 파도가 푸른 거라고 네 안의 너머를 갖지 못해 시들지 못하는 담쟁이 촉수를 깨워 젖꼭지 같은 뇌관을 더듬는다. [출처] 벽은 너머를 감추고 있다|작성자 김기덕   아직 한여름이다   장마전선이 몰려온다. 기단의 지루한 대치에 뱃속은 하루 종일 부글거리고 뼈마디에 천둥이 인다.   검은 양복들이 난무하던 길거리 번개 사건이 인터넷 톱기사로 뜨기도 했지만 국지성 호우가 멈춘 거리엔 언제 그랬냐는 듯 건물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집안에는 아버지 대신 상복들이 밀려다녔고 장례식장으로 날벼락 같은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끼니때마다 들려오던 구름 부딪히는 소리 아내와의 말다툼도 하나로 섞이는 비의 화음인데 꽃이 떠난 뒤 우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구름이 날리는 하늘, 닦을수록 창이 흐려지는 오늘 하루도 일조량이 부족했다. 골목마다 곰팡이가 피고 지각 변동을 꿈꾸는 판들의 지진과 해일,   내 안의 용들이 한바탕 휘감고 장대비를 퍼 붓고 나면 왁자지껄 시장바닥처럼 풀들이 일어서겠지 검은 발자국 소리에 광장에는 한낮에도 해가 저문다. [출처] 아직 한여름이다|작성자 김기덕     거세에 대하여   파일을 지우자 또 다른 악성파일들이 떴고 휴지통엔 무의식의 상처들이 넘쳐흘렀다.   수퇘지들이 피 흘리며 비틀거리던 80년대 여름엔 예비군들은 훈련장 귀퉁이에서 유행처럼 정관수술을 했다.     성폭력 기사가 모니터를 능욕하면서 한 달 분의 욕망을 제거하는 주사가 짐승들에게 놓아졌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고 내시들은 궁형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잡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장의 분비물을 밀어내는 관장약 농글리세린 신진들도 조직을 치고 올라 보스를 흔들어 댔다. 사람들은 과일 속의 씨를 잘라내지만, 늘 제거된 것은 과육이었기에 도시는 스캔들로 들썩였고, 돼지고기는 노린내를 풍기며 몸엔 악성종양이 꽃을 피웠다.   땅을 파고 묻은 반코마이신 항생제, 비에 섞여 옴 몸으로 퍼진 후 나무들도 뿌리 뻗어 흙을 움켜잡았다. 자동제거 되는 바이러스파일들, 꿈의 조각모음이 시작됐지만, 서로의 방호벽은 높아만 갔다.   [출처] 거세에 대하여|작성자 김기덕   하이힐                 김 기 덕   나는 가끔씩 여자의 하이힐을 신는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몸을 숙인 자태에 발을 밀어 넣으면 G-스폿이 만져질 듯하다 무릎 나온 추리닝에 슬리퍼를 끌다가 문득 빈 자루 같은 몸을 추슬러 세운다 못을 박으며 못이 박히며 벼랑 위에 선 생고무 같은 엉덩이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아랫배를 끌어당기며 괄약근을 조여 자루들의 끈을 묶으면 감각은 깎아지른 언덕에서 하이힐을 신는다 발기한 근육의 종아리 날선 유리의 균형 감각이 발바닥을 찌른다 발레슈즈를 신은 백조들의 비상으로 정상의 바위 끝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장난감 나라일 뿐이다 하이힐을 신은 나는 나무처럼 자라고 하이힐을 벗은 여자의 종아리는 물먹은 스펀지가 된다 몸의 감각에 불을 댕기는 하이힐은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있는 고원으로 나를 실어간다 아슬아슬 줄을 타고 못을 뽑으며 못이 뽑히며 직선의 첨단을 또각또각 걸어가는 정점엔 유리처럼 투명한 빙벽의 추락이 보인다 [출처] 하이힐|작성자 김기덕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                        언어들은 대장간의 칼로 녹슬어 있다. 태양이 시간을 돌리는지 시간이 태양을 돌리는지 궁금하지 않은 나의 삶이 식상하다. 달의 짜여진 공식처럼 세상엔 그녀의 달거리와 한통속 아닌 것이 없다. 지구가 기울어져 한 쪽으로 도는 것과 나의 메시지가 물처럼 아래로만 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바람 따라 구름 흐르고, 그녀 따라 내 마음 흐르는 물리학의 법칙엔 예외가 없다. 먹고 마시는 몸의 기계적 활동은 건망증의 뇌가 지시하기 전 내장들이 먼저 아우성쳤기 때문이리라. 주기적인 사랑에 길들여지고 빡빡한 일정표가 나의 삶을 제 맘대로 살고 장기들은 때마다 지급되는 양분에 군말이 없다. 날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으며 중독되는 생각들 부활과 윤회의 소식이 또 다른 반복일 뿐, 새 것이 되지 못한 지 오래다. 쏟아진 우유가 다시 컵에 담기지 않는 고뇌하는 중년이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화살에 집 나간 나의 언어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태양이 뜨듯 사랑한다는 메시지의 처절한 진동 집요한 울림이 아침마다 그녀 몸에 녹슨 못을 박는다. [출처]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작성자 김기덕   이성의 초원                            삶은 이성의 뼈대 위에 세워져 있다. 반듯한 합리성에 윤리의 기둥을 세워 지은 사고의 집 속은 드라이플라워의 장식처럼 메말라 있다. 인류의 구원을 꿈꿨던 20세기 이성의 칼날엔 피가 묻어 있고, 사고의 벽돌로 쌓은 바벨탑은 더 이상 새 하늘을 보여 줄 수 없게 되었다.   사막의 삶에 영감은 생명력을 부여해 왔다. 이성이 지배해 온 것 같은 세상을 실은 영감이 지배해 왔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베토벤의 운명 속에서, 도공이 빚은 청자 속에서, 죽음을 초월한 선지사도들의 삶 속에서 영감이 충만한 기운을 느낀다. 초월적 세계의 신성한 불을 만진다.   영감이 없는 이성의 세계는 향기가 없는 꽃과 같다. 영혼이 사라진 육체와 같으며, 반복된 작업의 복사물이다. 반면 이성이 없는 영감은 녹아버린 아이스크림과 같다. 몽환이고 환상이며, 숲에 떨어진 나비의 허물이다. 영감만 있는 자는 정신분열자요, 귀신들린 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성의 초원 위에 영적 기운이 서릴 때 우린 새벽을 볼 수 있다. 이성만 있는 십자가는 심판의 형틀이었지만, 신령한 영적 능력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이성의 기름 위에 이글거리는 꿈의 열정, 성령의 불로 타오를 때 삶은 세상을 비추며 밝게 빛날 수 있으리라. [출처] 이성과 광기|작성자 김기덕   나는 타오르고 있다                              김 기 덕              나는 굴뚝을 보고 자랐다. 산꼭대기에 우뚝 선 굴뚝은 바지랑대처럼 하늘을 떠받쳤고, 심호흡으로 내뿜어진 연기들은 용을 만들고 새를 만들며 구름이 되었다. 방에 누워서도 산타가 굴뚝을 타고 온다는 말을 실감하곤 했지만, 쉴 새 없이 오르는 연기에 내 하늘 한 자락은 늘 검게 흐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골초였다. 집안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날에 식구들은 기침을 쿨룩거리며 쫓겨났다. 담배연기가 방안에 찰수록 집안은 어두워져갔고 구겨진 아버지의 미간에선 가끔씩 담을 헐어버릴 듯 천둥이 쳤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검은 눈물을 흘렸고, 하나 둘 자란 형제들은 구름으로 집을 떠났다.   15년 된 나의 아반테 고물 자동차는 아직 쌩쌩하다. 길거리에 매연을 내뿜으며 큰소리치는 그의 입에서 나온 침과 독설들이 거리를 더럽히고, 하늘과 내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 덜덜거리는 내 가슴 한 쪽은 늘 허전하다. 금과 은을 제련하듯 속도를 제련하는 연기들, 그 속도에 실려 나는 가끔 바람이 되었다.   내 몸의 세포들이 날마다 양분을 태워 구멍으로 내보낸다. 내 몸의 구멍마다 연기가 피어났고, 염분과 소량의 미네랄들은 산성비가 되었다. 힘든 노동의 대가가 불러온 사막화로 희미한 미소와 창백한 육질 속엔 중금속이 쌓여갔다. 태울수록 늘어나는 주름과 어두운 그림자, 잡티 같은 욕망들은 고스란히 앙갚음으로 땅에 떨어졌다.   고혈압으로 대동맥이 파열한 친구를 화장했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생긴 굴뚝에선 붉은 연기가 뿜어졌고, 너무 빨리 태워버린 젊음은 45년 3개월의 불꽃을 남기고 재가 되었다. 화장장의 굴뚝에선 또 다른 굴뚝들을 태웠고, 굴뚝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랐다. 굴뚝으로 와서 굴뚝으로 사라지기까지, 나는 한창 타오르고 있다. [출처] 나는 타오르고 있다|작성자 김기덕     퍼즐놀이                      김 기 덕   모자이크에 누워 모자이크 속에 빠진다. 타일조각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완성된 돌고래 위에서 내가 조립된다. 아이와 맞추던 로봇 태권V 퍼즐은 이 빠진 한 조각에서 균열이 시작되다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그물망 같은 재건축 단지에 살면서도 사소한 이유로 금이 가는 이웃들, 얼굴 본 지 오래인 내 인맥들은 견고할까. 조각조각 희망을 끼워넣으며 가족들은 제 몸에 맞는 무늬를 고르지만 목소리 큰 아내 곁에서 무능한 남편은 늘 모자이크 처리된다. 땅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세력을 맞추고 하늘엔 완성된 은하의 별들이 총총히 채워지는데 빈 구석이 많아 나는 평생 성경 속의 구절들을 꿰맞춰왔다. 예수와 붓다와 공자와 소크라테스, 하지만 미완인 나의 퍼즐엔 아버지가 없다. 찢겨진 불경들이 빠져나간 빈자리에서 실금이 간다. 촘촘히 짜인 밑그림들은 하나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고 이를 악문다. 아슬아슬한 나의 해부도 모자이크의 법칙을 벗어난 돌고래는 이미 죽어있고 그림들은 시간 밖으로 줄줄이 풀려난다.  [출처] 퍼즐놀이|작성자 김기덕     입술의 상징                                   김 기 덕(공도)       우리 몸에서 입술처럼 특별한 곳도 없을 것이다. 피부로 덮인 몸 전체에서 입술만이 속살이 돌출되어 생긴 곳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심장의 돌출부’라고 표현했다. 두근두근 가슴 뛰듯 입술엔 심장의 기운이 살아있다. 입을 맞추면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입술은 몸의 문이다. 몸은 세상이요, 음식물은 세상만물이다. 세상에 오는 것들은 형상을 입고 오지만, 나가는 것들은 영혼의 언어들이다. 우리도 하나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화이다. 자신을 부수고 갈아 사랑의 양분이 될 때 다시 말씀의 모양으로 하늘문에 다다를 수 있다.   입술엔 태양이 떠있다. 희망의 아침과, 절망의 저녁이 맞물려 있다. 삶은 이 두 입술을 벌려 백옥같이 미소 짓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휘파람이며 만남과 이별의 사랑노래이다. 입술을 꼭 깨물고 생각에 잠겨보라. 순간 가슴 속에서 정열의 태양이 떠오르리라.   입술은 독주고, 꽃뱀이고, 네펜테스이면서 동시에 꽃잎이고, 심장이고, 불이다. 가롯 유다의 입술엔 죽음이 담겨 있었고, 옥합을 깬 마리아의 입술엔 부활이 담겨 있었다. 찬송과 기도와 절제가 있는 입술, 그 아름다운 집에서 말씀인 하나님이 사신다. [출처] 입술의 상징|작성자 김기덕   마블링                            김 기 덕   거리엔 섞이지 못한 피들이 둥둥 떠다녔다. 기름들은 스크럼을 짰고 띠를 형성하고 질주한 길거리마다 붉은 꽃이 피어났다. 연약한 풀뿌리들의 봄 혁명, 하늘을 복사하는 양동이 물 위로 안개 낀 골목을 비추는 거울과 같이 떠다니는 고뇌들 도로마다 넘쳐나는 물감들로 메커니즘의 반항아들은 시내로 잠식하며 흘러들었다. 세상을 휘젓는 막대기 같은 바람과 함께 격동하는 젊음의 무늬들은 피로 엉기어 갔다. 아침을 기다리며 샘물같이 살아온 이파리들도   물 아닌 삶을 밀어냈다. 검은 영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밀려다니는 바다 흰옷의 달빛이 머릴 풀고 혼을 건진다. 차마 떠나지 못해 끈적이며 매달리는 붉고 푸른 영혼들 시즙은 수의에 한을 그린다. 백지 위로 나타난 넋의 기하학적 무늬 응결된 정신의 문양은 물결로 요동치고 있었다. 살아 있어 처절한 혼의 불꽃을 태우며 한 겹 한 겹 벗겨진 물의 껍질들이 꿈틀꿈틀 생살을 파고들어 새기는 문신 울컥, 치밀어 오른 각혈이 무지개로 흘러내린다. [출처] 마블링|작성자 김기덕   몸에 그린 동그라미 ​ 은행잎 카시미론 이불에서 연인들이 입을 맞춘다. 엄마는 아이를 손짓하고 아이는 발목까지 빠지는 노랑물감 속을 뒤뚱거리며 걷는다. 가을을 붓질하는 은행나무 옆에서 내 한쪽 가슴이 물든다. ​ ䷭ 지풍승地風升, 바람이 땅 위로 자라서 올라간다. ​ 징코민 한 알이 몸속에 바람을 풀어놓는다. 으슬으슬 몸살이 날 것 같다. 차단된 벽속에서 그리움 탓인지 잎들의 떨림소리가 들린다. 나를 압축캡슐로 너에게 보낼 수 있다면 너의 혈관을 뚫어줄 수 있을까? ䷑ 산풍고山風蠱, 산 아래 바람이 부니 일이 생긴다. 황금이 쌓인 은행들, 현금지급기 앞에 서면 돈세는 소리가 바람소리로 들린다. 바람에 스쳐가는 얼굴들. 발아를 꿈꾸는 은행의 정자들과 자루 속의 동전들과 묶였던 지폐들과 이별의 메시지들이 흩날린다. ​ ䷩ 풍뇌익風雷益, 파종하여 봄바람이 이니 만물이 풍성하다. ​ 썩는 냄새 훅훅 입김에 불려온다. 거리엔 곰팡이들이 피어나고, 뱃속에선 용연향이 익는다. 알맹이를 감싸는 썩음의 껍질. 구린내가 빗어내는 향기로운 과당을 위해 몸이 썩어간다. 뼈를 감싸고 살이 문드러진다. ​ ䷌ 천화동인天火同人, 하늘 아래 태양이 비추듯이 모두가 만나 함께한다. ​ 여인은 재가 되어 뿌려지고 뿌리만 남았다. 뼈를 타고 온 몸으로 전율하는 뿌리, 몸속엔 나무가 산다. 세모, 네모, 각진 잎들을 떨구며 둥글게 다짐하는 동그라미. 그녀의 얼굴은 해마다 커진다. [출처] 몸에 그린 동그라미|작성자 김기덕   인두화                       김 기 덕   연탄불에 달군 인두가 흰 목질에 달을 그린다. 비명소리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상처들은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눈 위에 찍는 구두 발자국 뜨겁게 흘린 검은 눈물들이 몸에 문신을 새긴다. 남자는 여자의 볼에 화인을 찍고 여자는 뜨거운 채찍을 피 흘리며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불탄 흔적이 박힌 사람들은 두고두고 재가 된 상처를 쓰다듬는다. 옆구리를 핥으며 독을 내뿜는 붉은 혀의 뱀들이 비늘을 말아 올리며 제 살 깎는 대패질의 꽃판 위에서 달마가 되고 예수가 되고 사막의 능선을 넘던 낙타의 무리들도 빙벽의 등고선을 오르던 설인들도 화석으로 박힌 나신의 등걸, 달빛 뽀얀 속살에 떨어진 마른 꽃잎들을 별로 새겨 넣는 뼈 마디마디 향불처럼 목향이 낮은 숨소리로 피어오른다. [출처] 인두화|작성자 김기덕  
8    김기덕 시모음 1( 한국) 댓글:  조회:1759  추천:0  2019-12-21
가을의 환상 교향곡       마법의 성 구름옥탑에 4옥타브 공주가 창백한 달로 갇혀있다. 기러기 그림자만 독수리 날개처럼 창가에 머물다 간다. 달을 구하기 위해 흰 턱시도의 별 테너가 피아노 건반 3옥타브 G선의 나선 계단을 오른다. 고음의 절벽에서 미끄러진 오페라 왕자들이 추락한다. 입술에 한 방울만 적셔도 저주가 풀릴 이슬이 쏟아진 숲에서 첼로도 호른도 몽환 속에서 길을 잃고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바람만이 낙엽의 악보를 켠다. 부를수록 멀어지는 파란 하늘의 창문 틈으로 파리하게 시든 그믐달이 누웠다. [출처] 가을의 환상교향곡|작성자 김기덕     달빛 처방전                                                                          김기덕                                 고양이의 눈에서 어둠을 먹고 초승달이 떠올라. 잠 못 이루는 것은 달이 커졌기 때문이야. 상자 속에 눈들은 빛을 싫어해. 달이 가늘어지면 쿨쿨 잠만 자지. 나른해진 몸은 아무리 튀어 오르려 해도 바닥에 눕게 돼. 목을 쓰다듬고 발바닥을 간질여도 생각들은 털 속에 숨으려고만 해.   상자 안의 고양이는 날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지. 밀폐될수록 달은 커지고, 발톱들은 날을 새우지. 이파리 사각거리는 소리에도 창가에 커다란 귀를 매달게 돼. 유리창으로 웅크린 고양이들이 노려봐. 똑, 똑, 똑, 핏방울이 떨어지는 초침소리가 들려.   언제부턴가 달은 악마들의 출구란 걸 알았지.   달이 차면 알약들을 몸에 묻고 시체놀이를 하지. 눈꺼풀을 밟고 잠이 올까봐 눈가에 까만 아이라인을 칠하지. 하지만 입 맞추는 밤은 늘 죽어 있어. 매니큐어로 지워버린 달은 한나절이 지나면 또 다시 떠오르곤 해. 눈 속에 까만 달은 저리도 매력적인데.   달빛 고인 침대 시트는 돌돌 말아 세탁기에 넣었어. 시계 위에 누워 아무리 바늘을 돌려도 제자리인 상자 속. 고양이 울음의 스위치를 끄는 거야. 손톱을 물어뜯어도 지지 않는 달. 손가락 하나 씩 잘라지는 쪽잠이어도 좋아. 피 묻은 자판을 두드려 방안 가득 검은 활자를 채우면 죽음처럼 찾아오는.   고양이의 눈 속에서 달이 지는 한낮. [출처] 달빛 처방전|작성자 김기덕     빛 ​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려 등불을 켠다. 성냥불꽃 만큼 밝은 세상이 비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처럼 지나는 표정들이 깜박인다. 연탄이나 장작의 체온이 그리운 길거리마다 내걸린 아크릴 이름들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가로등은 밤새 피를 흘린다. 이 밤을 견딜 만큼 나는 반딧불만한 빛이라도 있는가. 빛인 척 반짝이며 스테인리스와 유리들이 웃는다. 화살과 총탄과 질주의 무리들은 불꽃으로 박히기 위해 휘파람소리를 낸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유성들은 밤새도록 머리 위에 성수를 뿌린다. 유리벽에 반사된 얼굴들은 야경 속에 파편처럼 흩어지고 흐물흐물 달의 살이 묻어난 골목길로 은 삼십을 받은 유다가 질질 어둠을 끌고 온다. 태양이 오기까진 뚝뚝 떨어진 목련이 어두운 길을 밝힐 거야. 하루살이들의 밤 가시관을 쓴 예수가 동녘의 구름을 쓴다. [출처] 빛|작성자 김기덕   만원의 이력서   나랏말싸미 듕궉에 달아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피를 받아 한국은행 일월오봉도에서 태어났다. 차원이 다른 홀로그램의 족보를 새기고, 등과 가슴에 용 문신으로 가문의 인장을 찍었다. 뼈 속에 쓴 일만만의 설법, 진짜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가슴에 품고 보현산 천문대 혼천의에서 우주를 꿈꿨다. 비스듬히 기운 각도에도 언뜻 비치는 성골의 요판잠상은 평범한 신분이 아닌 듯했다. 신출귀몰한 바람소리를 내며 한국은행 출신의 빳빳한 칼라들은 은빛 어깨띠를 두르고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동안 두툼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다가 블랙박스에서 몇몇 구름 속을 오간 후, 할머니 전대에 떨어진 뒤에야 알았다. 도가니탕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동그라미들의 무게감을. 노래방 아줌마의 젖가슴에 꽂혀 마이크를 잡다가, 도박판에 던져진 누런 배춧잎들과 함께 고리를 뜯다가, 창녀의 손에 침 발라 비벼지며 닳고 닳은 얼굴들을 봤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순간 황홀하게 만났던 육체들이 구겨진 채로 몸을 뒤집는다. 너덜너덜 뭉개진 몸에서 구린내가 난다. 지하도에서 떨고 있던 여인에게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UFO를 닮은 자선냄비 안에서 천상의 종소리를 듣는다. 산동네 양은냄비를 끓이는 할머니를 위해 마지막 연탄을 사랑해야지. 몸을 내어주고 얻는 최후의 어둠. 덜컹, 철문이 열린다. [출처] 만원의 이력서|작성자 김기덕   악마의 중독 김 기 덕     염소가 검은 상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열어보였지. 젖이 범람한 젖꼭지에서 쓰디쓴 강이 흘렀어. 어둠 속에 뿔은 왕관처럼 반짝였고 이마에 새겨진 펜타 그램에선 게이의 웃음이 새어나왔어. 박쥐의 은빛 날개를 퍼덕이며 펼친 오른손에 선명했던 못자국 중지와 약지를 벌린 각인에 혀를 끼우고 왼손에 들었던 횃불로 바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메케하게 피어난 악성 루머들 사람들은 스스로 검은 상자에 매달린 중독성의 쇠사슬을 목에 걸었지. 자동조절 되지 않는 나의 몸에서도 고열이 일었어. 통증으로 웅크린 배를 독수리의 발톱이 휘젓자 거친 호흡으로 들썩이던 종잇장은 찢겨져 쏟아진 폐를 독수리가 인공호흡기처럼 입에 물고 숲을 흡입했어. 노을이 빠져나간 얼굴에서 금세 어둠이 흘러나와 달의 내장을 꺼낸 굴뚝이 목에다 뱀처럼 구름을 두르고 방안을 노려봤지. 구멍 난 튜브 속에선 지독한 황사와 매연, 미세먼지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의 목구멍에서도 뱀의 혓바닥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랐어. 독수리가 홀연히 날아간 후에야 검은 상자 위에 염소가 목의 쇠사슬을 풀었지만, 손바닥을 뒤집는 타로카드 15번 재가 된 사람들은 안개처럼 공중에 떠다녔지. 한 방울 눈물과 백색연기로.     [출처] 악마의 중독(미래시학, 과천문학)|작성자 김기덕     가위가 오린 풍경 김기덕   하늘을 오린 가위들이 황사로 날아왔다. 찢어진 헝겊조각처럼 펄럭이는 내 봄날의 모래바람   가위질할 수 없는 밤과 아침 사이로 빠져든 도시는 사막에 잠기고 낙타로 깨어난 차들은 느릿느릿 사구를 넘었다.   죽은 태양을 파묻은 땅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비릿한 악취를 풍겼지. 스펀지 같은 폐에 꽂힌 바늘들은 찢긴 상처를 꿰매지 못해 수풀로 짠 바람을 밀어 넣어도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찢어버리고 싶은 하루의 졸린 책장을 오리면 태양은 다시 떠오를까. 꽃과 아이들, 이슬방울 영롱한 아침과 가위를 부서뜨릴 바위덩어리. 가위! 바위! 보!   간밤에 내 몸을 짓눌렀던 검은 가위는 어디부터 나를 오려내고 싶었을까. 담배연기 찌든 폐, 이미지를 상실한 뇌 황사로 뿌연 내 가슴 한 귀퉁이도 오려내고 싶었겠지만, 난 공포감으로 상영 중인 가위 꿈의 필름을 소리 내어 잘라냈어.   비단 폭처럼 찢어진 어둠 속에서 보았지 잠든 여인의 눈부신 속살, 등 돌린 창가에서 그믐달이 새벽을 꿈꾸고 있는 것을. 아침이 동녘부터 야금야금 오려져 능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어.   흐린 유리창을 오리면 무지개가 뜨던 오늘밤 머리맡엔 어머니가 쓰시던 가위 하나 놓고 자야겠다. [출처] 가위|작성자 김기덕     절벽에 선 나무 김 기 덕   바다로 향한 불빛들이 강물로 흘러갔다.   뼈만 남은 어깨엔 눈과 비와 바람을 채색한  누더기뿐.   바람의 난간에 선 맨발 실금 하나 사이로 생존과 파멸이 공존하고 있었다. 뜬구름 접어서 종이비행기로 날려준 바람 줄을 나는 놓지 못하는 걸까.   힘줄이 불거진 발은 평생 수직의 길을 걸어왔다. 담쟁이 더듬거리던 길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못 박혀 직각의 모서리를 걸었다.   날개 접은 풍문들이 벼랑 끝으로 낙엽들을 몰아갔을 때   달은 지프라이터에 갇혀 초승달로 사그라지고 별의 눈동자들은 담배 불빛 깜박이던 옥상에 올라 마지막 어둠을 태웠다.   절벽에 매달려서야 창틀의 위대함을 알았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유리창을 껴안고 절벽에 매달려 본 적이 있던가. 내 몸 하나도 붙들지 못했던 옹벽   바위를 껴안던 뿌리가 뽑혀 내 척추로 이식되던 밤 신경줄마다 흐르고 있는 이빨들의 강을 보았지.   이를 앙다문 뼈들이 절벽에 매달린  ​절규.  [출처] 절벽에 선 나무(문학메카 2015. 9)|작성자 김기덕     사막의 연인(戀人) (문학메카 2015. 9)​   아담과 이브가 바람뿐인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퇴색된 열두 개의 생명나무 불꽃은 일 년 열두 달 검은 장미로 피어났어.   생크림을 핥는 뱀의 혓바닥 위로 노을이 지고 꽃잎이 떨어졌지.   선악을 알기 전의 남녀는 누드였단다. 서로를 알고 난 후부터 아무리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몸에서 솟는 붉은 가시들   녹색의 초원이 놓인 탁자 위로 에스프레소가 쏟아져 황무지가 펼쳐진다. 사막을 오가던 말들이 선인장이 되어 모래 속에 뿌리박고 피보다 진한 꽃을 피운다.   아담과 이브가 살던 동산엔 열두 개의 태양과 열두 개의 달이 뜨고, 보라색 옷을 입은 천사가 양팔저울에 해와 달의 열매들을 달았지.   구름이 치마끈을 풀고 능선에 앉아 엉덩이를 흔들면 산은 잔이 되고, 잔엔 옥수로 가득했던 눈물을 안 후,   다시 누드로 돌아갈 수 없는 아담과 이브가 라이브 카페의 난간에 앉아 마시는 치사량의 검은 유혹. 피 묻은 입술이 머그잔을 타고 흘러내린다.   카펫 위엔 엉겅퀴가 자라고, 독버섯이 피어났지. 구둣발에 짓밟힌 뱀들이 서로의 몸을 말며 물어뜯는 아담과 하와의 발뒤꿈치. [출처] 연인|작성자 김기덕     철탑 속의 황제                                        김 기 덕 ​ 카페나 호주머니 낡은 가방 그 어디에도 황제는 있지 황홀을 든 태양의 눈동자가 물결 위를 지날 때마다 갈대들이 허리를 꺾던 강가  갑옷 속에 감추어진 발톱이 물결을 할퀴며 건져 올린 안개의 거리는 마차소리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  괴목의 뿔을 매단 절벽, 죽음의 부리만이 서로를 쪼아댔지 피로 번진 노을이 암투의 커튼을 드리운 하늘가 욕망이 치솟는 곳은 어디든 마천루였어  달의 보주를 차지하기 위해 밤마다 강물 위로 별들은 폭죽처럼 쏟아졌지  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 왕관이 흘러 정박한 곳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독수리는 늘 땅으로 추락했어  바위들이 송곳처럼 삐져나온 안개 속 철탑의 도시엔 뿔 달린 머리들만 문마다 내걸렸지 ​아기의 울음이 헤롯의 칼과 창과 방패를 삼킨 후 스카이라운지나 전광판, 갤러리, 그 어디에도 황제는 없어 대관식을 마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로 떠나고 성난 군중들만 남은 광장에 붉은​ 십자가 [출처] 황제의 비밀|작성자 김기덕     권태기의 화학반응 김 기 덕   유기물과 무기물의 화학기호들로 결합된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H2O를 마시며 CO2의 언어를 내뿜는다.   시냅스가 전달한 한 남자의 페르몬 물질로 첫눈에 반해버린 신경세포들의 발작적 흥분이 죽어도 좋을 환각을 몰고 왔다. 뼈와 심장의 얼음까지도 다 녹일 수 있는 순수 가용성의 용매가 되고 싶어.   초고온으로 발생한 마이크로파가 플라즈마를 일으키는 자기장 속에서 한평생 서로를 밝히는 오로라가 되기로 했지. 외로움의 전자를 버리며 금속으로 만나든, 그리움의 전자를 얻으며 비금속으로 만나든, 서로의 이온결합을 만들며 분해되지 않는 화합물을 꿈꿨어.   혹서와 한파를 지나며 서로 다른 비등점과 빙점을 확인해온 시간 속의 유리벽은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유기물을 분해하고 흡수하여 가스로 방출하는 일상의 기계적인 실습에서 흥미로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의무감으로 서로의 용액을 섞으며 무관심의 밀도를 잰다. ​ ​더 이상 흥분 호르몬이 발생하지 않는 비환유의 뇌 속으로 연결된 소통의 회로들은 막다른 골목처럼 좁아져 갔다. 가슴 떨렸던 반응들이 멈추고 몽환의 기체들이 날아간 비커 속에 유리조각처럼 남은 추억의 불순물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굳어진 몸처럼 검은 구멍에서 뿜어진 독설로 흡열반응, 발열반응이 멈춘 무의식의 몸이 식어간다. [출처] 권태기의 화학반응(미래시학, 과천문학)|작성자 김기덕   상자 속의 수평선     무쇠상자 안의 슈뢰딩거 고양이는 관찰을 통해서만 살아있다. 원자가 방사능을 방출하는 순간, 망치가 독가스 용기를 깨뜨리도록 고안된 상자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는 오십 대 오십. 어느 시점에서 고양이가 죽는 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다. 고양이는 발견을 통해서 죽는다. 고양이의 죽음은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다볼 때 결정된다. 관찰자가 상자를 들여다볼 때 고양이가 죽어있다면 그는 고양이를 죽인 것이다.          핵이 붕괴하는 순간 분기점이 생기고,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분리되어 평행 우주를 만든다. 관찰되지 않는 나와 관찰되는 당신과의 사이엔 물과 기름의 길이 있다.  당신은 나의 의식속에 살고, 나는 당신의 무의식속에 산다.        관찰되지 않는 태양은 영원하다. 나의 죽음이 발견되지 않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사랑은 확인되지 않기에 영원하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바람과 공기는 존재한다. 귀신과 영혼과 망령과 풍문들이 떠나지 않는 세계는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다. 무쇠상자 안의 고양이를 관찰하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영원히 산다.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관찰되지 않는다. [출처] 상자 속의 수평선|작성자 김기덕   0과의 만남           음식을 비운 접시처럼 달은 어둠을 비우고서야 보름달이 되었다. 무소유의 달 대웅전 불당의 부처 얼굴이 달처럼 환했던 것도 어둠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속이 빈 시간의 굴렁쇠가 오늘도 태양의 길을 따라 굴러간다. 음과 양의 물줄기가 합쳐지며 동맥과 정맥의 피돌기를 시작한다.      0이 더해진 숫자와 사물은 백지 위에 그리움이 되었다. 0을 뺀 숫자와 사물은 욕심을 오려낸 허공이 되었다. 0을 곱한 숫자와 사물은 나무속에 천년의 나이테를 채워도 0이 되는 하나일 뿐. 0을 나눈 숫자와 사물은 물결이 번지며 사라져가는 파문이었다.      마음을 비웠다고 못 박은 0 하나 잘난 척 나설수록 십의 배수로 가치가 떨어졌다. 0.1, 0.01, 0.001…… 마음을 비우고 못을 뺀 0 하나 뒤에서 따를수록 십의 배수로 가치가 상승했다. 10, 100, 1000……     0의 얼굴을  닮은 무중력의 비행체가 새처럼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0과 0 사이의 무한 공간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0을 그리며 사라져간다.  웜홀과 블랙홀을 지나서 미래의 공간 속으로 달려가는 靈 0과 0이 손을 잡는다. ∞의 세상이 손끝에서 만난다.  [출처] 0과의 만남|작성자 김기덕   오늘의 날씨       눈부신 태양은 매일 뜨지 않는다. 구름 옷 입고 출근하는 날씨의 하루는 비이거나 눈 천둥소리에 풀들은 고개를 움츠렸다. 회오리에 추풍낙엽의 증권들 핏빛으로 물드는 창문 사무실마다 썰물이 빠져나가고 사막의 도시엔 한 생의 발자국을 묻는 모래바람이 불었다. 안개 속을 잠행하며 자리를 지켜오던 김씨, 이씨, 박씨도 보이지 않는다. 면도날 같은 날씨의 예상이 일기예보를 빗겨간다. 계절이 공존하던 객장엔 수축하는 시간의 지층이 쌓이고 동전만한 우박이 사선을 긋는다. 내려치는 번개에 후줄근히 등줄기가 젖는다. 쾌청을 꿈꾸는 실내와 구름 낀 실외와의 기온 차에 유리창엔 날마다 성에가 꼈다. 기쁨과 슬픔의 기상도가 교차하는 스크린 삼한사온을 오가던 엘리베이터의 로프마저 끈긴 수은주의 하강에 구겨진 날씨의 하루는 눈보라였다. 몸을 웅크린 노씨, 나씨, 남씨의 하루도 눈사태였다. 영원한 겨울은 없는 법, 영원한 여름을 꿈꾸지 않는다. 내일 먼 바다의 파고는 높음 강풍이 불수록 깃발들의 심장이 펄럭인다. [출처] 오늘의 날씨|작성자 김기덕   달의 기원   달이 커지며 그녀의 가슴도 부풀었다. 늑대가 울고 광기가 차오르는 밤. 스톤렌지의 돌들은 그녀의 월경주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여자는 무엇으로 태어나는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분리가 있은 후 남자의 가슴엔 태평양이 생겼다. 조석간만의 애증이 출렁이며 눈물바다를 남겨주었지만, 왜 여자는 남자 주변에서 공전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도 진공은 아니다. 주변의 매개물인 미소행성체들과의 만남 속에 이루어진 브레이킹, 오 부킹.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달은 주변의 바람들을 다 삼켰을까. 아니, 달은 지구의 관심으로 융합, 팽창하며 태어난 거야. 태양계의 행성들처럼 주변을 배회하며 한 마디의 말이나 표정까지 몸에 돌로 다져 넣었던 거야. 어느 날 내 허블망원경에 포착된 여드름투성이 얼굴. 내 안에 뜨기까지 충돌했던 파편들 치솟아 뭉쳐진 애증의 달. 서로 부딪칠 때마다 노아의 홍수가 일고 여호수아의 태양이 떴다구. 아니, 아니 달은 지구를 위해 설계된 신의 못질일 뿐, 일식과 월식의 관계를 만들며 서로 입 맞추고 그늘이 되는 필요충분관계야. 늘 한 면만 보여주는 그녀의 뒷모습이 나는 그립다. 어느 곳도 중력의 차이는 없다고 나를 향해서만 무게중심이 쏠려있다.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달.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태양을 보여주지 못했다. 쿵, 떨어진 로켓에 달의 가슴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출처] 달의 기원|작성자 김기덕   골프   十八界의 홀을 정복하기 위해 108구멍에 염주를 굴린다. 버디와 보기를 오가다 파로 끝나는 중생의 라운드 스코어는 나이 같은 숫자에 불과했다. 임펙트한 퍼팅보다는 비워야 할 루틴이 많았던 시간 롱 드라이브 아이언 샷으로 꿈의 깃발에 어프로치해 보지만 페어웨이보다는 러프와 벙커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죽음의 연못에 잠겨버린 순간들조차 또 다른 세상의 여정임을 알려주며 숲과 나무와 구름의 갤러리들이 손을 흔든다. 바람을 읽고 잔디의 굴곡을 재며 웃음으로 도반이 돼 주었던 캐디 리봇을 남기고 떠난 인연들을 일일이 손으로 덮어주며 이 세상 다녀간 그린 위에서 나의 흔적을 지운다. 잔기침마저 태풍이 되는 숲 속의 나비효과에도 핸디캡을 극복하고 흔들림 없이 스윙을 해야 해 깨달음의 이글을 날리며 홀인원했던 무아경의 돈오돈수 물과 불을 다스리는 가부좌를 틀고 우주를 굴린다. [출처] 골프|작성자 김기덕   먼지 보고서   먼지별에 가득 찬 먼지들 서로 껴안고 몰려다닌다. 바람의 미세 혼령들 한통속으로 몸을 드나들며 구름을 일으킨다. 성층권까지 치솟는 분노의 화산재 변심한 애인의 모래바람 꽃 입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거울 같은 세상을 지운다. 불을 피우고, 물을 뒤집어쓰며 풀풀 먼지만 피우다가 연기로 사라지는 미세먼지들 벽을 통과해 내 몸속에 둥지 틀고 기침을 한다. 어젯밤 꿈으로 분해된 초미세먼지의 빙의 아 무서워, 현실의 악몽들은 중금속으로 살던 입자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나를 깨운다. 분해결합하며 공간 이동한 에어로졸들은 또 거미가 되고 세균이 되겠지. 진드기나 박테리아들과 한 이불 덮으며 구름방울, 빗방울로 살다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질 내 안의 미립자들 쥐며느리나 개미들처럼 껴안지 못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책상 위에 쌓인 중금속들이 비둘기로 날아간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꽃가루들이 자동차가 되어 달린다. 나는 몇 억만 년 전에 피어난 소금방울이고 화산재였나. 석면가루의 말들이 진폐증을 일으킨다. 메트로놈의 파장이 엔진을 돌린다. 먼지로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들의 소리 없는 퍼덕임 굴절과 산란을 만들며 노을처럼 흩어진다. 반짝이는 먼지들로 가득한 은하계에 바람이 인다. 나뭇잎마다 수북이 쌓이는 빛. [출처] 먼지 보고서|작성자 김기덕     황금비의 비밀   170센티미터의 아빠와 105센티미터의 딸이 손잡고 화랑을 걷는다. 현의 길이 1:2의 8도 화음, 2:3의 5도 화음, 3:4의 4도 화음이 섞이며 라파미, 미파라의 선율이 흐른다. 다섯 개의 꼭지점과 다섯 개의 면을 가진 피라미드가 별을 가리킨다. 살바도르 달리의 최후의 만찬장엔 고개 속인 제자들이 영의 양식을 먹고 있었다. 여신 아테나 파르테노스를 숭배한 파르테논 신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풀처럼 기둥에 기대어 5분지2 바퀴마다 난 잎들을 세며 얼마나 햇빛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파보나치의 수처럼 커지는 내가 무서워. 내 안에서 앵무조개 같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태풍이 되든가 나선은하가 되든가 같은 비율에 갇히는 게 싫어. 몸의 중심인 배꼽에 컴퍼스를 대고 영향력의 한계를 그려보았다. 손끝과 발끝에서 만난 원이 알파와 오메가를 그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길이를 수직으로 긋고 뻗은 양팔의 길이를 가로로 그으니 정사각형의 땅이 생겼다. 다빈치의 아름다운 드로윙 속에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인 내가 최초의 인체 골격으로 서있었다. 몬드리안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티브이를 보고 담배갑을 매만졌다. 창문 안에 가득했던 책들은 액자가 되어 벽에 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을 간직한 피아노에서 피타고라스 원리인 직각삼각형의 파랑이 인다. 점점 커지는 소프라노의 하이 톤. 수학자인 신은 놀라운 비율의 분할을 숨겼고, 나는 바로 선 펜타그램과 거꾸로 선 펜타그램 사이에서 방황했다. 누가 동그라미와 세모와 네모 사이에서 프렉탈을 그리나. 시간의 원근법은 늘 하나의 꼭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출처] 황금비의 비밀(시문학)|작성자 김기덕   물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물이 흐르는 냇가에선 엔진소리가 난다. 울컥 눈물로 가동되는 물의 모터 눈물 마르지 않는 나무엔 물기둥들이 수직으로 오른다. 수십 층의 벽을 타고 오르는 물의 동력으로 콘크리트 건물은 살아있다. 직립하는 내 몸의 벽을 타고 오르는 바퀴들의 힘으로 나의 하루도 굴러간다.     몸에 시동을 거는 정액의 힘 들이켠 한 잔의 물이 온 몸에 바퀴를 굴린다. 계절의 바퀴 윤회의 바퀴 죽음과 부활의 바퀴를 굴리며 물이 흐른다. 파도들이 쓸려간 갯벌 위에 남겨진 타이어 자국들 기하학의 무늬 속엔 생명들이 가득하다.     엔진이 꺼진 바퀴들은 계곡을 미끄러져 폭포로 추락했다. 동력이 멈춘 물들의 하향곡선 바퀴가 정지한 호수엔 시간의 기어들이 녹슬어 갔다.     태풍이 몰려온다. 파도가 몸을 말며 굴러온다. 눈물의 엔진을 달고 지상에서 영원까지 무지개가 굴러간다. 대지의 자궁에서 바퀴를 굴리며 나오는 꽃들 ​ 만조로 차오른 달이 외발 자전거를 밟으며 하늘을 건넌다. [출처] 물에는 바퀴가 달려있다.|작성자 김기덕   불의 기억   부싯돌 속에서 태어난 씨앗들은 별처럼 반짝거렸지. ​ 마른 쑥잎에서 실연기로 성장해 바람결에 눈을 뜬 아이들은 석유나 나무나 양초 위에서 붉은 혓바닥을 놀렸지. ​ 태풍의 풍문을 들으며​ 자란 불새들은 몸을 웅크리고 담배와 폭죽과 수류탄 속에 잠들어 있었어.   성냥골의 뇌관을 건드리던 불장난으로 단 한 번 불꽃이고 싶던 봉오리들도 재가 될 운명의 껍질 속에 몸을 숨겨왔지. ​ 태양을 삼킨 잎들은 불꽃을 토하려 물을 뽑아 올리는데 단 한마디 기도이기 위해 침묵해온 향불 흐려질수록 태풍의 고요와 심해의 어둠이 감싸온 심장이 꿈틀거렸지. ​ 가시덤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몸속에서 타오르지만 않았다면, 불이 빚어서 혼이 된 흙이 도자기처럼 끌어안고 싶었던 죄의 불 ​ 성화는 분수처럼 뻗쳐올랐어. ​ 악을 담금질하며 녹슨 뼈를 연마하는 연금술사의 손이 풀무로 지나는 계절, 껍질이 깨진 은행에서 천년 동안 줄기와 가지들이 폭발하고​ 아기의 입술에선 태초의 말씀이 울음을 터트리는데 ​ 재가 되기 전 마지막 바람의 입술을 기다리는 ​숯 [출처] 불의 집(과천문학)|작성자 김기덕   가로등                           김 기 덕     달항아리에서 물이 넘친다. 화석이 된 어둠의 뼈를 녹이며 빛의 웅덩이를 만든다. 눈과 귀와 코와 입술이 떨어져나간 달의 얼굴에서 백설탕이 쏟아진다. 골탄의 검은 발바닥에 감각은 사라지고 별빛 물의 언어들만 밟힌다. 굽이굽이 책장을 넘겨 강으로 흘러온 푸른 경전 속의 활자들이 천 길 물줄기로 추락하다가 영겁의 불로 활활 송전탑을 가로질러와 철골에 혼불을 밝혔다. 수백 만 볼트 물의 혼령들이 유방을 열고 밤새 쓰레기와 도둑고양이와 부서진 자전거를 적신다 해도 젖지 않는 유리창 안의 풍경들 병아리를 품은 날개의 온도로 떨어지는 깃털들이 는개같이 내려 골목 가득 물안개를 피워도 좋아 아무리 비워도 샘솟는 달항아리의 물이 밤새도록 길 위에 넘친다. [출처] 가로등(2015. 스토리문학)|작성자 김기덕    중간숙주     불뱀이닷! 광야에서 불타던 뱀이 종아리에서 꿈틀거린다. 물벼룩에 감염되어 내장에서 자라던 메디나의 뱀들이 수포를 일으키며 발뒤꿈치를 물어뜯는다. 물속에 알을 낳기 위한 저들의 뜻을 위해. 불에 덴 이빨자국을 물에 담그라하는 메디나충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물에서 짝짓기하기 위해 유인한 곤충들을 자살시키는 연가시의 지상명령은 계속된다. 위장에 암거하던 헬리코박터들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라한다. 요충들이 항문을 긁던 손으로 이웃을 위해 떡을 떼라한다. 노란 끈 같은 촌충이 알 밴 몸을 끊어내며 입맛을 돋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내 안에 존재들의 입덧 때문. 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항아리 모양의 편충들이 빈 그릇을 채우라 한다. 주걱을 닮은 디스토마가 밥을 푸라한다. 살을 뚫고 다니던 스파르가눔이 환청을 들려주며 밤마다 꿈꾸게 한다. 간흡충, 폐흡충, 선모충들의 비위를 맞추며 나는 식단표를 고른다. 바이러스, 세균들의 눈치를 살피며 외출을 준비한다. 그녀와 공생관계가 깨지면서 내 의식에 뿌리박은 애증의 빨판들. 머릿니나 빈대처럼 집요하게 잠의 뼈를 갉아먹는다. 내 몸의 주인이 된 에이리언이 장기 어딘가에서 나를 조종하는지도 몰라. 가끔씩 전해지는 외계의 텔레파시. [출처] 중간숙주|작성자 김기덕     통증은 말한다   편두통이 머리에 못질을 한다. 망치를 든 귀신을 쫒기 위해선 연기처럼 빠져나갈 틈이 필요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아무리 울어도 통증은 눈물에 녹지 않았다. 벌레를 잡기 위해 쪼아대는 딱따구리 약을 먹으며 플라시보 효과를 꿈꿨다. 몽환의 잠속에서 꽃의 원초적 뿌리를 캐보았지만 경련의 시작과 끝은 알 수가 없었다. 우울과 불안의 늪에서 물풀 같은 말초신경들이 손을 흔들었다. 물결무늬의 고통이 썰물과 밀물로 오가는 골짜기는 깨달음이 클수록 깊어졌다. 살아있음의 은유, 몸이 주는 메시지를 나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라오콘의 형상에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얼굴에서 읽을 수 없었던 통각신호기의 적색등이 깜박였다. 눈을 감아야 해. 귀를 막고 통증이 없는 낙원을 찾아야 해. 소리를 잃어버린 나환자들이 촛농처럼 녹아내린 손을 흔든다. 에테르 기체를 마신 사람들이 표백된 얼굴로 무덤에 누워있다. 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뚫고, 피부를 낚싯바늘로 꿰며 통각의 소리를 듣는다. 고통이 무거울수록 위로를 얻는 뼈의 외침을 듣는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 영혼은 몸을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연금술사의 망치소리. 십자가에 못 박는 소리가 내 몸 안에서 천국 문을 두드린다. [출처] 통증은 말한다|작성자 김기덕   동양화 보는 법   동양화가 집안에 들어왔다. 그림 현실이고 현실이 그림인 풍경 속엔 계절과 상관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퍼즐처럼 이를 맞춰 그려진 사물들, 참새와 까치가 입을 모아 기쁨을 노래했다. 70년 된 고양이가 수천 년 묵은 바위 위에서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수탉이 울어대는 공명의 울림, 백로들은 하나의 길로만 날아갔다. 부유한 집안에선 모란이 피고, 석류가 익으면 포도, 박 넝쿨 뻗으며 자손들이 자랐다. 누구에게나 피라미 시절은 있었다. 학업을 마치고 꽃을 피워 부평초 같은 타향살이엔 원추리 어머니가 그리웠다. 장미꽃 청춘이 가고 붉게 복숭아는 익어갔다. 맨드라미, 닭 벼슬 같은 불을 꿈꾸며 일품의 두루미가 파도를 바라본다. 작은 잉어를 건진 후 큰 잉어를 건지는 과거시험, 장원급제한 오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대궐은 하나였기에 두 개일 수 없는 배반의 쏘가리들이 탁본된 벽 속에서 퍼덕였다. 관아에서 귀뚜라미들은 갈대로 게를 묶은 임금의 음식을 먹었다. 금옥만당에 금붕어들이 놀고 여러 신선들은 늙지 않는 색비름을 따고 있었다. 근검절약 속에 피어난 연꽃들, 마음을 비운 연뿌리들이 한 줄기 형제애로 통했다. 바다새우와의 해로偕老, 구리그릇에 평안을 담아 국화꽃 핀 뜨락에서 유유자적한다. 갈대와 기러기들도 춤추며 노안老安을 즐긴다. 게들은 바르게 걸어보지만 늘 반항적이었다. 팔랑팔랑 나비가 흰 사슴 뿔 위에 앉아 팔순을 축복한다. 난초 같은 자식들, 죽순 같은 손자들 바위와 대나무 우거진 숲에서 축수한다. 군자의 인품이 가득한 매‧난‧국‧죽의 꽃향기. 냇가에 앉은 노인이 빈 마음으로 발을 씻는다. 벽이 동양화이고 동양화가 벽인 창문을 연다. 새롭게 펼쳐지는 산수화. 호리병박, 포도가 열리고 소나무 등걸에 기대어 달이 산을 올려다본다. [출처] 동양화 보는 법|작성자 김기덕     원시 다이어트       숲이 나뭇잎을 털어낸다. 해독을 위해 토해내는 붉고 노란 빛깔들, 최소한의 식단을 위해 꽃은 피우지 않기로 했다. 원 푸드에 길들여진 포도알을 씹는다. 미더덕처럼 터지는 배반의 껍질들, 풍선으로 부풀려진 세포마다 침을 꽂고 비파나무 같은 효소를 심었다. 지방흡입용 호스를 타고 빠져나가는 바람에 내장들이 쪼그라든다. 산화되지 못한 불꽃들이 물이 되어 흐른다. 위절제술은 이제 뿌리부터 행해질 거야. 식욕억제제를 먹으며 한겨울을 버텨야 해.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구토하는 나뭇잎들의 얼굴이 붉다. 거리마다 부는 구조조정 바람 때문일까. 가지치기할 때도 아닌데 꼬마 인형들이 오른팔을 분질러 뽑는다. 이삿짐을 싼 방은 곧 얼음동굴이 될 것이다. 겨울왕국에 눈이 쌓이고, 일만 년 쯤 빙하기가 찾아온다 해도 상대성이론의 시간이라면 버티기엔 하루나 이틀로 충분해. 말라깽이 모델이 활보하던 쇼룸에 불이 꺼지고 성형외과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요요현상의 함박눈들을 쏟아낸 하늘이 구름을 마구 집어 삼킨다. 거식증에 걸린 위벽이 딱딱하게 굳어진 땅에 빈혈로 쓰러진 하얀 풀잎들 좀 봐. 굶어죽은 혼백들이 나풀거려. 골다공증이 찾아온 내 골반뼈를 인수분해하며 빈 마음의 방정식을 푼다. 부질없는 공식들을 꿰맞추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 복잡한 선들을 지우고 단순화된 도형을 세운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의 압축파일들은 지금 즉시 천국으로 보내고 싶어. 참선하고 고해성사하던 나무들이 뼈만 남아 도장을 새기는 길거리에서 바다가 고무줄놀이를 한다. 해안선을 따라 복식호흡하는 아스팔트 위에 섬들. 구석기의 식탁을 차리면 나는 원시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겨울마다 계절은 허리띠를 조이고 밥을 굶는다. 실반지처럼 가늘어진 허리, 비틀거리며 초승달이 검은 스테이지를 밟는다. [출처] 원시 다이어트|작성자 김기덕     살풀이       생의 반쪽들이 갈고리에 걸려 물구나무를 섰다. 0을 가리키는 기울기의 눈금엔 잘려진 시간의 핏물이 고여 있었다.       칼을 맞고 일어서는 냉동의 살들 해체되는 의미 속엔 뼈도 눈물도 없었다. 세월의 등살에 새겨진 물결무늬마다 하루가 풍랑이고 폭풍이었던 여정이 끝났다.       푸른 도장을 받기 위해 문자와 글자들의 건초더미를 되씹던 언어의 사체에서 한 근의 채끝살을 바르기 위해 살아서 고뇌 중인데, 죽은 자의 칼이 산자의 살을 바른다. 광란의 바람이 이는 ㄱㄴㄷㄹ       소가 환전된 금고를 열면 목쉰 쇠방울소리가 울렸지       벌판에서 울부짖던 메아리들만 뼈 속을 맴돌았다. 난도질 할수록 부드러운 칼의 속삭임, 현란한 혀의 놀림에 상처는 깊었다. 무덤 속 벌레들의 섬뜩한 미소 같은 하늘을 품고 되새김질해 온 말씀들이 일어나 칼춤을 춘다. 헝겊처럼 얇게 썰어지며 리듬을 탄다.       해의 시즙이 묻어나는 언덕 위로 밤새 뚝, 뚝 떨어진 달의 꽃무늬들 이글거리는 불꽃 속으로 눈송이들이 몸을 던진다. [출처] 살풀이|작성자 김기덕     길 잃은 방       입에서 언어들이 부글거린다. 찌그러진 냄비의 얼굴 라면가닥 같은 생각의 통로들이 끊겨있다. 창문에 오려붙인 구름에서 유아기의 옹알들이 떨어진다. 배수관을 타고 오른 벌거벗은 냄새들만 쿨룩거리며 기침을 토한다. 산에 막혀 길을 잃은 아들이 흐느낀다. 바다에 갇혀 섬이 된 어머니가 깔깔거린다. 막혀서야 차오른 강물의 정은 마그마처럼 뜨겁다고 광야마다 구리뱀의 눈물이 흐른다. 댐을 넘어선 물이 오열하며 낙차 큰 절규로 발전을 시작하면 차단된 기억의 방에도 전기가 들어올까. 소통 없는 수위를 다스리며 강물은 누워 바람의 젖을 물리는데 빛을 만드는 저항의 필라멘트처럼 뼈에 박힌 다이오드들만 부루치 같은 내 심장을 밝힌다. 아스피린의 냇물이 마르며 툭, 길이 끊어진 숲의 어둠에 갇힌 어린 아이가 뇌혈관처럼 펼쳐진 가지들의 푸른빛을 풀어 털실로 짠 방에서 무덤처럼 열리는 내세를 본다. [출처] 길 잃은 방|작성자 김기덕     바람의 영양제 김 기 덕       파도의 혓바닥이 태양을 삼킨다. 밤의 목구멍을 넘어 아침의 능선에서 꽃씨를 뿌리는 햇살, 파랗게 열린 길 위로 바람이 인다.       비타민은 채소의 언어였다. 순식물성의 말속엔 엽록소가 담겨있었다. 신진대사를 부르던 언어들은 뱀처럼 꿈틀거렸고, 한 알의 씨앗은 산과 바다를 풀어놓았다. 심해를 헤엄치는 상어 떼들, 근육질로 영그는 산비탈에 씨알들. 한 계절의 농익은 얼굴들이 토마토를 심는다.       바람은 계절 내내 나무들의 유방에 볼을 부비고, 이파리를 흔들며 젖을 물렸다. 햇살 밴 과실의 유두를 빨면 꿀물이 쏟아지던 하늘.       바람이 빠져나간 골다골증의 땅들은 황무지로 변해갔다. 끼니때마다 밥을 떠 넣으며 양분을 채워도 무의식의 토양에서 나무들은 고사목이 되어갔다. 랩을 씌우고 비닐 포장한 안개의 날들. “새로운 태양이 필요해” 바람의 알갱이들이 플라스틱 병에서 달그락거렸다. 하늘 사방에 매인 구름의 묵시록.       바람의 말씀은 미네랄이 되었다. 식이섬유의 알약을 삼킨 뿌리마다 풀냄새가 났다. 컹컹 짖어대는 어둠속에서 뼈의 백색분말들은 눈물로 녹아들었다.       가시만 남은 입으로 어머니의 젖을 빤다. 독으로 박힌 파편들이 뼈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고래들이 뛰는 맥을 짚어 노을을 넣고 숲의 바람으로 빗어낸 캡슐. 목구멍으로 넘기자 초신성이 타오른다. 온 몸으로 번지는 붉은 파도. 입에서 나온 말들이 딸기밭에 불콰하다.       태풍이 몰려온다. 가득 수액을 실은 바퀴를 밀고와 후드득 뿌리마다 바늘을 꽂는다. 새파랗게 일어서는 핏줄. [출처] 바람의 영양제|작성자 김기덕     블랙박스         젖은 그림들이 판화처럼 찍힌다. 네거티브 필름으로 현상되는 암실의 풍경, 검은 동공이 하늘을 열고 X-ray 눈으로 뼛속까지 어둠을 찍는다. 구름의 눈, 바람의 셔터, 물의 렌즈들, 보지 않는 것은 신의 눈뿐이다. 잎사귀들 엿듣는 밤을 헤드라이트 불빛이 순간복사한다. 번개처럼 스쳤다 사라지는 허상들, 가드레일을 넘어 뜨겁게 키스한 차들처럼 내겐 사랑할수록 파편들로 가득해진다. 중앙선을 넘나드는 철제 심장으로 횡단보도를 간통하며 깜박깜박 영상을 찍는 신호등을 무시하며 살았다. 천수보살 관음상의 풀과 나무들, 순간도 놓치지 않는 별들의 기록은 누구에게로 흘러갈까. 유성의 속달 메신저가 사라진다. 하늘의 이름으로 이웃들을 손가락질하다 도시의 십자가 무덤에 누워 내시경을 하고 MRI를 한 후, 내겐 영혼이 없음을 들켜버렸다. 뉴런을 타고 가는 도파민의 검은 웃음을 흘리며 항히스타민제를 먹은 벌레들이 머릿속을 찍어댄다. 어젯밤에 뱉은 나의 말들이 뛰어다니며 검은 발자국을 남기는 마룻바닥, 피사체 속의 어린아이가 웃는다. 눈부신 거울은 렌즈에 잡히지 않는데 벽에 못 하나 나를 꼬나본다 [출처] 블랙박스|작성자 김기덕   꿈꾸는 금연     남자가 여자를 빨아들인다. 흰 종아리부터 불꽃이 일며 머리카락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혼미하게 타다만 이파리들이 누렇게 얼룩지며 머릿속에 달라붙는다. 너 없인 못살아. 필터 같은 입술을 부비며 걸었던 손가락 사이에서 백색가루들이 흩어진다. 솟구치는 검은 타르의 배반은 갑 속의 누구를 선택해도 마찬가지. 치아를 부딪치며 혀를 핥아도 다 태워지지 않는 건 늘 자신이었을까.     빨아들인 독사과 향의 혼, 아무리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바람을 토해내며 소유할 수 없는 구름으로 보낸다. 남은 것은 니코틴의 채취와 거친 호흡의 파동뿐. 물에 젖은 우울의 습도에 다시 태울 수 없는 육체들이 사라져간다. 안개, 그리고 눈물.     남자를 흡입한 여자의 입술 사이에서 안개꽃들이 흔들린다. 붉은 루주의 도취, 검은 손톱에 파인 배꼽에서 불꽃으로 피가 흐른다. 수축되었던 뱃속으로 막소주 같은 기억들이 차오르며 손과 발이 떨어져 나간다. 몽상의 도넛들이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다 주고 싶어도 섞일 수 없는 뜨거운 폭풍들이 휭 하니 빠져나간 저녁. 몽롱이 피어오르는 순간의 미학으로 또 하나의 석양이 저문다.     구둣발에 비벼지는 불꽃 심장. 침을 뱉고 돌아서는 빙석의 뒷모습은 언제나 절벽이었다. 두려움으로 담배를 꺼낸다. 두려움으로 불을 붙인다. 매번 시작하는 마지막 사랑은 늘 첫사랑으로 끝났다. 날마다 최후의 담배를 쥐며 파르르 떠는 손. 다시 원점에 서있다. [출처] 꿈꾸는 금연|작성자 김기덕   달리의 꽃      달걀 속에서 꽃들이 부화한다. 초콜릿처럼 녹아내린 시간 위에 알들이 깨지며 시침이 검은 잎을 피운다.폭탄같이 웅크렸던 꽃봉오리가 남자의 몸에서 폭죽으로 터진 후 시작된 검은 우주의 빅뱅, 하늘엔 거위 알 같은 별들이 눈을 떴다. 동굴의 문이 열리며 열꽃을 피우던 여드름투성이 얼굴이 스친다. 풀어헤친 머리칼에서 풀 비린내가 번진다. 술병 마개가 빠진 안개의 숲, 팝콘처럼 터진 잎을 물고 배꽃 웃음이 쏟아진 곳에서 나의 뿌리를 찾는다. 어둠이 내려 푹푹 발이 빠지던 늪에서 연꽃처럼 개화를 꿈꿨었다. 창밖엔 천둥소리로 흙탕물이 흘러갔고 계절은 지독한 거름 내를 풍기며 썩어갔다. 늑골의 유정에서 불꽃을 길어 올리는 창세기. 몸 안의 용연향이 풀어지며 배꼽에서 꽃들이 부화한다. 흐물흐물 시계들이 녹는 사막의 땅으로 향수병이 넘어진다 [출처] 달리의 꽃|작성자 김기덕     종이비행기       소녀의 팔은 접혀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밴 붉은 꽃물로 온통 꽃밭인 화단엔 깃발처럼 스커트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의 손에서 놓인 구름은 비가 되었고 꽃들은 시들기 시작했다. 줄기를 놓친 지상의 나뭇잎들은 절벽으로 떨어졌고, 할딱이는 심장들은 비에 젖어 상처가 아물어 갔다. 연서처럼 안개가 피어오르며 나뭇가지마다 그리운 나라의 엽서가 매달릴 때면 초록 글씨들은 꽃이 되고 열매가 되었다. 노을을 접어 날리는 언덕 위로 빨간 우체통 안의 석류 알 같은 얼굴들이 흩날린다. 밀랍으로 붙인 하루하루가 이카로스 날개처럼 떨어진다. 몸을 흔드는 꽃잎들. 하강기류에 휘말린 엔진들은 정지하고, 강철 심장의 새들마저 둥지로 비상하지 못한 채 깃털로 흩어진다. 탯줄을 자른 눈송이들은 땅에 닿자마자 불꽃 눈물로 태어난다.     종이비행기 소녀의 팔은 접혀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밴 붉은 꽃물로 온통 꽃밭인 화단엔 깃발처럼 스커트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의 손에서 놓인 순간 구름은 비가 되었고 꽃들은 시들기 시작했다.   손을 놓친 지상의 나뭇잎들은 절벽으로 떨어졌고 할딱이는 심장들 위로 비가 내려 상처들이 아물어 갔다.   연서처럼 안개가 피어오르며 나뭇가지마다 그리운 나라의 엽서가 매달릴 때면 초록 글씨들은 꽃이 되고 열매가 되었었지.   노을을 접어 날리는 언덕엔 빨간 우체통 안의 석류 알 같은 얼굴들이 흩날린다.   밀랍으로 붙인 계절의 이카로스 날개들이 떨어진다. 꽃잎들이 몸을 흔든다.   하강기류에 휘말린 엔진의 정지 박동이 멈춘 강철 심장의 프로펠러 새들도 둥지로 비상하지 못한 채 깃털로 흩어진다.   탯줄을 자른 눈송이들은 땅에 닿자마자 불꽃같은 눈물이 되었다. [출처] 종이비행기|작성자 김기덕     시소의 법칙   빛과 어둠이 시소를 타는 놀이터에서 나는 땅으로 기울고 아이는 하늘로 기운다.  모래알 같은 언어의 지층을 뛰며 타이어의 탄력에 별이 되고 달이 되다가도 산의 무게에 아이는 차가운 철재 손잡이에 매달려 지구 끝에서 대롱거렸다. 기울어진 평균대 위에 발이 흔들리고 창이 가려진 하늘엔 천칭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팔이 부러진 병신 저울들이 춤추는 세상에 가로놓인 절벽, 입구까지 엉덩이를 들이 민 바위들로 기우뚱 마을이 기울고 사람들은 거꾸로 길에 매달려 거미줄 같은 집으로 종종걸음 친다.  철봉 위에 무중력 아이가 삐걱거리는 관절소리를 들으며 철탑으로 성장한다. 시간의 파도타기에  낙엽이 되어가는 나 방향이 바뀐 바람에 꽃잎들이 떨어진다. 일어섰던 풀들이 일제히 쓰러진다.  서로의 무게를 양보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늘 사다리를 타는 계절의 메트로놈 소리에 해와 달이 널뛰기 하는 골목 3옥타브 C 쯤의 가을이 내 어깨 위로 ♭ 된다. [출처] 시소의 법칙|작성자 김기덕   달의 암자   죽 그릇 속에 담긴 핏기 없는 얼굴들 흰 밥알로 풀어져 형광등 하늘을 비춘다.   사발에 새겨진 竹竹竹   竹音이 들린다.   숟가락을 뜨지 못하고 풀어진 눈동자들 희멀건 밥풀이 목구멍에 달라붙는다.   화장실 변기에 엎드려 토해본 후 알았다. 몸 안의 죽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역겹던 가스와 마그마   활화산 같은 암자엔 죽 쑤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릇을 비우는 게지. 暗, 癌, 庵   粥飮을 맛본다.   막걸리 푸고 길바닥에 게풀어져 오장육부 게워낸 보름달 창가에 빈 사발만 남았다. [출처] 달의 암자|작성자 김기덕   휴대폰 하나님       가게에서 별을 샀다. 별 속에 길을 내고 빛을 밝혀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여호와는 지구별의 하나님 나는 검은 별의 하나님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패턴인식으로 문을 연 세상엔 상징들로 가득했다. 집집마다 태양이 뜨고 손끝에서 사물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터치패드의 새로운 인사가 시작되었다.   E.T의 손끝에서 만나는 별들의 교신   지하철은 신들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행성에 문자를 보내고 메시지를 날리며 계시를 입력했다. 서로의 중력을 확인하며 다운로드한 복음들이 가득한 행성 목마른 영혼들이 게임을 즐겼다. 전쟁을 즐겨온 신들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피조물로 전락한 자폐아들은 땅을 피로 물들이고도 스위치를 끄지 못했다.   신이 된 별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우주로 뻗어간다. 기계와 인간이 접속하여 응시하는 하늘의 창 은하의 별들이 뜨고 상형문자들이 흘러간다.   한시도 하늘을 보지 않으면 불안한 중독 아이들은 매일 접신 중이다. [출처] 휴대폰 하나님|작성자 김기덕   단풍나무 별     별이 쏟아진 언덕엔 심장들이 할딱이며 피를 흘렸다. 새의 부르튼 발자국들은 길을 잃고 밤이 늦도록 단풍나무 아래를 서성였다. 숭숭 구멍 뚫린 날개를 접은 거울 속의 빛바랜 눈빛들 풍선처럼 부푼 달빛에 산산조각 난 옷자락들은 새털처럼 흩어지고 눈동자는 땅에 묻히어 해가 떠도 하늘은 검은 가면이었다. 중력에 끌려 행성이 된 남자만 풀어헤친 밤의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유성우의 칼날에 바람의 편지들이 풀잎처럼 허공에 찢겨질 때 노을이 묻힌 무덤가에서 흐느끼던 실루엣의 그림자 별이 지고서야 단풍나무 별 하나 가슴에 품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며 푸른 시트가 걷히는 언덕 파란 약병에서 쏟아지는 붉은 알약들 뼈만 남은 단풍나무는 흰 달빛에 실려 가고 비처럼 내리던 빛들이 검은 입속에서 초록빛으로 피어났다. [출처] 단풍나무 별|작성자 김기덕   비 개인 아침       옥상 위에 지렁이들이 물음표를 그린다. 승천하던 용들이 떨어져 지렁이가 된 건 아닐까. 간밤의 천둥 번개가 수상했다.       하늘엔 비룡이 살고 바다엔 해룡이 살고 성경엔 리워야단이 산다는데 땅에는 토룡이 산다.       여의주 같은 이슬을 물고 어둠 속에서 흙을 삼켜 빛을 토해낸다. 기꺼이 제 몸을 두더지나 뱀에게 내어주고 어혈을 풀어주면서 토막이 나서까지 생명을 낚는 낚시 밥이 된다.       밟힌다 해도 꿈틀 돌아누우며 온 몸으로 참아내는 묵언수행의 민초들 헌신의 용상에 올라 예수로 부활하고 석가로 환생한다.       흰 스티로폼 상자에 흙을 채워 하늘빛으로 상추와 깻잎을 가꾸신 어머니 품 같은 옥상에서       승천도 마다하고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목숨이 다해 전하는 상징의 기호들 동그라미를 그린다. 알파와 오메가를 그린다. 세상과 하늘과 내가 하나 되는 한일자를 쓴다. [출처] 비 개인 아침|작성자 김기덕   달의 항해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銀絲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반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면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 손 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겨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출처] 달의 항해|작성자 김기덕   날마다 선택된다    바람 속에서 춤추던 4g의 고무공들이   빛을 뚫고 세상에 나온 0.1초의 순간, 운명은 결정되었다.  비너스의 몸에서 나온 60억분의 일의 확률로 나는  아프리카 오지가 아닌,  가난과 굶주림의 전장이 아닌  대한민국,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과천에 산다.  당첨번호는 62, 10, 2, 8  권천성, 수천성, 귀천성, 예천성의 별들이 반짝이고  날마다 다이아몬드 태양이 떠오른다.  상금으로 받은 재산과 아이들, 최고의 행운은 그녀의 과녁을 맞힌 화살이었다.  황금 달과 지폐다발을 세는 바람  평생 쓰고도 남을 물과 공기 속에서 나는 또 다른 화살을 쏜다.  서울역 근처 와이티엔 빌딩 앞 명당에서 로또를 사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녹번동 은평구청 사거리   편의점 바이더 웨이에서 즉석 행운을 긁는다.  시간의 통 속엔 64궤의 공들이 돌아가고 384의 효들이 춤춘다.  지금 내가 뽑은 공은 33번째   천산돈(天山遯), 세상을 피해 잠시 몸을 숨겨야 한다.  백 번째 여자에게서 태어난 우레가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대는 밤  벼락 맞을 확률에 돈을 걸고  돼지나 불타는 집이나 물난리 꿈을 꾸진 않았어도  회차와 당첨금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린 이미 꽃이 된 구름을 따고, 눈물이 된 강을 마시고  백지 같은 땅을 구겼다 폈다하며 날마다 복권(福權)을 누린다.  비너스의 문이 열리는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 빗방울 하나에도 환성과 탄식이 교차한다. [출처] 복권|작성자 김기덕  
7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댓글:  조회:2219  추천:0  2019-12-21
출처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by 김용식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 문학은그 자체로 진공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 - 작품 - 독자'의 구도 속에서 '현실 세계'에 역동적으로구체화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문학의 참된 의미는 작자, 독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어디에다 중점을 두고 문학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관점이 나온다. 현실세계   ∥ 작가 〓 작품 〓 독자   표현론적 관점(생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작가의 체험, 사상, 감정의 반영물이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 능력의 소산이다. ⑵ 특징 ♠ 작품이 작자와 맺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관점 ♠ 문학 작품은 작가의 표현욕구가 드러난 대상이기에 작가의모든 것을 작품에 연관시켜 해석하려 함. ♠'작가론(作家論)'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님. ⑶ 방법 ♠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연구 ♠ 작가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연구 ― 성장환경, 가계, 학력, 교우관계, 취미, 사상, 병력 등의 조사. ♠ 작가의 심리 상태에 대한 연구 ⑷ 장 · 단점 ♠ 장점 : 작가의 개인적인 능력과 천재성을 중시함. ♠ 단점 : 의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작가가 표현하고자의도한 것과 그것이 실제로 표현된 결과인 작품이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 반영론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⑵ 특징 ♠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품과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임. ♠ 실제로 인간의 삶은 현실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으므로, 작품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할 수 있다. ♠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맺고 있는 관련성에촛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방법임. ⑶ 방법 ♠ 작품이 대상으로 삼은 현실 세계에 대해 연구한다. ♠ 작품에 반영된 세계와 대상 세계를 비교 검토한다. ♠ 작품이 대상 세계의 진실한 모습과 전형적 모습을 반영했는지검토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문학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출발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문학 작품에대한 이해가 삶의 현실, 시대 및 역사에 대한 이해로 확대될수 있게 한다. ♠ 단점 : 이 방법이 지나치면 작품을 작품으로서가 아니라실제 사실들의 조립체 또는 역사적 자료로 보게되는 단점이 있음. 효용론적 관점(수용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은 독자에게 미적 쾌감, 교훈, 감동 등의효과를 주기 위해 창작한 것이다. ⑵ 특징 ♠ 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 ♠ 능동적 참여자로서의 독자의 역할을 강조함.(독자가 작품을수용함으로써 의미가 구현된다는 점, 즉작품 해석이 수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점 등을 제시함) ♠ 작품의 가치를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어느 정도 주었느냐에따라 평가하려는 관점이다. ⑶ 방법 ♠ 독자의 감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품의 어떤면에서 촉발되는가를 검토한다. ♠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과 정신 등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도입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독자가 능동적인 주체가 되며, 일반 독자들이 쉽게실천할 수 있는 관점이다. ♠ 단점 : 독자의 주관적 느낌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는오류에 빠질 염려가 있음. 절대주의적 관점(구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고도의 형상적 언어로 조직된자율적인 체계이다. ⑵ 특징 ♠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작품밖에 없으며, 작품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함. ♠ 작품을 그 자체로 독립된 자족적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생각함. ♠ 작품을 작가나 시대, 환경으로부터 독립시켜 이해한다. ♠ 언어 표현의 방식과 작품의 내적인 짜임새를 중시함. ⑶ 방법 ♠ 작품의 언어적 구조를 중시한다. ♠ 문학의 언어가 지니는 특징 및 언어의 이미지, 비유, 상징등에 주목한다. ♠ 작품을 유기적 존재로 본다. 특히, 시에 있어서 시어와시어 사이, 행과 행, 연과 전체 작품의 상관 관계, 운율과 의미와의 관계 등을 분석적으로 이해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언어에 민감한 시의 분석에 뛰어난 성과를 보임. ♠ 단점 :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좁힐 수 있으며, 문학이궁극적으로는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고려하지 않는다. 종합주의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작품의 총체적이고도 통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위해서는 표현론적, 반영론적, 효용론적, 절대주의적관점을 통합하여 연구해야 한다. ⑵ 특징 ♠ 작품을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작품의 부분적의미만을 볼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함. ♠ 작품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총체적으로이해하려면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것이다. ⑶ 방법 ♠ 네 가지 관점을 통합한다. ♠ 네 가지 관점을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유기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 출처 : http://www.woorimal.net/ [출처] [공유]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작성자 옥토끼  
6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끝 댓글:  조회:764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3-1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1) 홍문표   1. 문학의 길, 인간의 길   이 거대한 우주, 이 영원한 우주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야 무신론자라면 인간이란 지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의 하나로 자연환경 속에서 어떤 단백질 인자가 무수히 많은 진화와 변이를 거쳐 고등생물로 진화한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생명체들 중에 왜 인간만이 모든 만물을 대자적으로 사고하고 의식하는 존재가 되어 만물의 영장이 되었을까. 그것도 특별한 진화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현생 인류의 전 단계는 무엇인가, 원숭이인가, 침팬지인가. 만일 원숭이나 침팬지가 인류의 전 단계라면 왜 아직도 원숭이와 침팬지가 현존하는가, 그들은 아직 진화가 덜 된 것들인가. 이렇게 진화론과 창조론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진화론으로 볼 것인가. 창조론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인간의 존재이유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지금도 저 열대의 밀림에서 서식하는 침팬지가 우리 할아버지가 되고 인간이 더 진화하면 우리도 하늘을 나는 조류가 된다는 논리가 되는데, 만일 그런 논리에 동의한다면 우리 인간은 아직도 진화과정에 있는 동물의 하나일 뿐이며 그러기에 인간의 존엄이나 영혼의 소중함이 무시되는 유물론의 메마른 인생관만 남게 된다. 그러나 모든 생명들이 각각의 유전자와 각각의 생존질서를 가지고 탄생한 것이라면 여기엔 조물주의 창조적 계획과 목적을 생각해야 하고, 특히 모든 생명체들 중에 유독 인류만이 최고의 의식적 존재이며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이 지구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왜 우리 인간은 수백만 생명체 중에서 의식이 있고, 정신이 있고, 영혼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졌을까. 그냥 우연히 운 좋게 진화되어 만들어진 존재라면 우리도 개나 돼지처럼 잠시 세상에서 약육강식의 본능으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지만 모든 만물을 판단하고 경영하고, 지배할 수 있는 신의 속성을 가지고 창조된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면 영장으로서의 역할, 사고하고, 모방하고, 창조하고, 변형할 수 있는 지적 존재로서의 역할, 그 존재 이유와 삶의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사유와 행동이 요구된다. 그리고 창조적인 인간, 영장으로서의 인간, 영적존재로서의 인간, 로고스(loges)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면 마땅히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그 해답을 모색할 것이며, 그러한 존재 인식의 바탕에서 독특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 것이고, 문학도 해야 할 것이고 역사를 창조하고 기록해 가야 할 것이다. ​ 만물의 영장을 자인 한다면 인간의 첫 번째 작업은 마땅히 인간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인간의 연원, 인간의 출발, 인간의 탄생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출발지가 없다면 과정도 없고 종착지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성이니 정체성이니 하는 모든 존재들의 실체는 어떤 원인과 결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한다. 의식이 없는 목석이나 동물들은 이런 문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만은 정신과 영혼과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존재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상의 모든 민족들의 그 연원이나 탄생에 대한 생각들을 보면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히브리민족들은 야웨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고, 인간도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히브리와 대조를 이루는 인본주의 그리스 민족도 제우스 신으로부터 인류가 탄생되었고 로마에서는 주피터, 중국에서는 삼황이. 인도에서는 브라만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환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더러는 신화니 비과학이니 허구니 하지만 한국인에게 천손 사상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이고 정신이고, 믿음이고, 그러기에 그것은 진실이다. 이처럼 모든 인류의 출발은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목석이나 짐승과는 전혀 다른 정신과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다. 정말 신의 형상을 입은 영적인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의 기원을 자연이나 아메바나 침팬지에서 찾을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류의 출발은 이처럼 하늘로부터 천손으로, 로고스로, 신령한 존재로 시작했는데 인류의 역사과정과 현재는 매우 비관적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입고 창조된 인간이 득죄하여 실락원의 저주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지상의 형극을 걷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비관적 인생관은 기독교의 교리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그렇다. 불교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느 것도 고정적인 것이 없고 그러기에 실상도 없는 것인데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가변적인 사바세계에 집착하여 허망한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현실주의적인 공자의 유교적 사고에서도 도(道)가 상실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독백을 하게 된다. 이점에 대하여 혹자는 또 이들을 종교적 망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 그렇다면 가장 냉철한 이성적 사유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놀랍게도 철학자들도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 키엘케고르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안한 존재라 했다. 순진무구한 경우는 그 무지가 불안한 것이고, 삶은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의 불안이 있고, 득죄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형별, 그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했다. 인간이 불안한 존재이기에 결국 절망적인 존재라는 인식은 무신론의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목석이나 동물과 달리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하는 대자적 존재인 바 그래서 오히려 인간들은 늘 결핍을 느끼게 되고 걸신들린 아귀처럼 그 결핍을 채우고자 몸부림치는데 문제는 아무리 결핍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도 밑 빠진 항아리는 채울 수가 없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허무를 세계내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도 유한한 지상의 소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상황의 존재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프로이드는 인간을 욕망의 존재라 하였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욕구불만과 갈등을 느끼게 되는데 욕구를 채우면 또 다른 욕구가 분출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란 만족과 불만의 악순환을 거듭하는 불만의 존재라 하였다. ​ 그렇다면 문학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그동안 문학에 대한 정의를 보면 문학이란 인간의 사상 감정을 미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며 이를 통해 교훈과 쾌락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공통된 문학관이었다. 말하자면 감동적인 문학형식을 통해 기쁨도 주고 깨달음도 준다는 것이 과거의 문학관이다. 왜 인간에게 교훈과 쾌락이 필요했을까 그것을 역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인간이 무지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인간이 완전하고 행복했다면 교훈과 쾌락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문학에 대한 정의나 목적이 그러한 위안이나 교훈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문제해결의 문학, 치유의 문학, 구원의 문학이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왜 현대에 와서는 치유와 구원을 문학의 기능과 역할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인간이 과거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와 갈등에 빠져 있고, 중병에 걸려 있고, 죽을 지경의 절망에 있거나 뭔가를 상실했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이다. ​ 이처럼 인간은 신적인 형상을 입고, 탄생한 그 화려한 출발과는 다르게 그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종교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이나 모두가 자아의 상실, 주체와 타자의 분리, 또는 본질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과 좌절, 그 허무와 불안을 인간의 실상, 즉 실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영혼을 가진 인간의 당면 문제가 되고 문학의 과제가 되고 그러기에 종교나 문학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인간의 존재이유가 되고 문학의 존재이유가 되고 최고의 가치가 되고 최고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 물에 빠진 자, 잃어버린 자, 정상이 아닌 자, 얽매인 자, 배고픈 자, 그래서 마침내 고독과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된 자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물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며,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결핍을 채우는 것이다. 이를 포괄적으로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종교나 문학이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구원이 그 핵심이 된다. 그런데 종교가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학에도 구원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변별성이 있는가. 그리고 문학에서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창작하고 있는 내 작품들이 또는 우리들의 작품들이 정말 구원에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유행 따라 물결 따라 덩달아 춤이나 추는 맹목의 손짓인가 스스로의 문학에 질문하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문학적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 그렇다면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에는 어떤 과정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는데 이에 대하여 일찍이 키엘케고르는 구원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한 바가 있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 그것인데 이는 인류가 추구하는 예술, 도덕, 종교와 관련한 문화적 구원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이성을 통한 인간 구원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는 점에서 문학적 구원을 검토해보고자 하는 본 주제와 밀접한 것으로 사료되기에 이를 함께 검토하면서, 정말 문학을 하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과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도 문학적 구원이란 주제에 동참할 것인가 그 길을 물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 2. 미적 실존과 감성의 문학 ​ 키엘케고르는 그의 저서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인간만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인간은 불안에서 피할 수도,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절망이다. 그래서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하고 슬픈 존재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면 이를 극복 해야할 책임과 사명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근원적인 불안과 절망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고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 구원이란 결국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불가능과 가능, 구속과 자유, 죽음과 영생, 인간과 하나님, 지상과 천상이 분리된 단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상태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그러한 일치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인간이고 실존이고 근원적인 불안과 고독인 이유다. 따라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 그 원죄의 천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지만 불행하게도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력이 아닌, 타력, 어떤 절대자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신이 인간에게로 다가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이성적인 역설이기 때문에 과학과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인간들로서는 그러한 기적을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 시도 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가 미적 실존의 단계다. ​ 인간이 불안과 절망의 상태에서 시도할 수 있는 첫 단계는 미적 실존 또는 감성적 실존의 방식이다. 이는 가장 기초적이고 직접적이며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생활태도다. 사실 개개인의 현존재에 대한 출발점은 직접성이나 감성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미적 실존의 생활은 오직 그날 그날의 현실적인 생활에 만족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얻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든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 체험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고통 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활방식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감성과 관능에 따른 만족이나 향수의 입장에 서는 것이 미적 실존이며, 또한 심미적 실존의 인간관이다. 비근한 예이지만 인간이 불안할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술에 취하거나 심지어는 마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자극을 통해 이를 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더욱 악화 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보다 고상하게 승화시키는 방법으로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을 통한 초월의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미적 실존의 생활은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만을 주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향락과 쾌락을 추구할 뿐이다. 키엘케고르는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미적 실존의 결과는 언제나 무라고 하였으며 그러기에 미적인 생활에서는 아무것도 얻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감각적인 탐미를 통하여 현실을 도피하려 하지만 결국은 우수와 불안, 그리고 권태로 끝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실존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쾌락의 윤작(rotation of crops)을 되풀이 한다. 쾌락의 윤작이란 끝없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는 것, 즉 심미적으로나 또는 감각적으로 항상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전환 없이는 신선한 자극이 없고, 신선한 자극 없이는 그 생활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악순환이다. 이는 술이 술을 부르고, 죄가 죄를 부르고, 미가 또 다른 미를 부르는 탐미적이고 악마적인 것이기도 하다. ​ 이러한 탐미적 실존의 대표적인 인물이 돈 판이다. 그는 수많은 여성을 단지 감성적 쾌락으로만 사랑할 뿐이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부터 육체의 자유를 선언했을지라도 돈 판은 계속 불안에 쫓긴다. 아무리 새로운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쾌락의 순간이 끝 날 때마다 불안과 우수 그리고 권태는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탐미적 결과는 마침내 죽음을 수반한다. 따라서 심미적 실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쾌락의 생활은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은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정신 또는 영적인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심미적 관심의 대표적 문화양식이 바로 문학예술이다. 특히 문학의 경우 낭만주의나 예술주의 또는 실험적인 형식주의들은 모두 감각이나 정서를 통한 미적 실존의 구체적인 표현행위가 된다. 그런데 우리 문학사에서 보더라도 불안 심리가 극도로 고조되었던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보면 국권상실과 자아상실이라는 이중의 불안에서 이를 벗어나고자 찾은 곳은 오히려 어둡고 축축한 현실 도피적인 공간이었다. ​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없는 -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 이상화 「말세의 희탄」에서 ​ 이러한 병적인 감성의 시는 이상화뿐만 아니라 당시 황석우의 「태양의 침묵」, 홍사용의 「눈물의 왕」, 오상순의 「허무혼의 선언」, 박영희의 「일광으로 짠 병실」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이 절망과 불안의 심리를 벗어나기 위하여 모색한 탐미적 정서는 오히려 더욱 병적 정서에 침잠하는 퇴행적 자학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조와 퇴행이 일시적인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비판에 부닥치게 된다. ​ 미적 실존의 허구는 예술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 에서도 볼 수 있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나 「광화사」같은 소설을 보면「광염소나타」에서는 미적 욕망과 이상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주인공인 천재음악가가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하여 방화와 살인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광화사」에서는 주인공 화가가 눈먼 소녀를 범하고 죽이는 사건으로 미를 창조한다는 내용인데 모두가 미를 추구하지만 결과는 영혼의 공허함과 황폐함을 보일 뿐이다. ​ 한편 문학에서 미적인 관심은 특히 형식 창조라는 관점에서 끝없는 모색을 실험하고 있는데 새로운 형식의 실험, 낯설게 만들기, 기존 형식의 해체와 창조 등의 구호를 내걸고 도전하는 모든 형식주의들이 그것이다. 최근에 볼 수 있는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모더니즘, 이미지즘, 포멀리즘, 해체시, 메타시, 키치시, 하이퍼시 등 시대마다 새로운 구호를 내걸고 도전하는 실험시들의 반란은 모두 새로운 형식의 도전이며 미적 감성의 욕망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미적 탐구들이 분명 일시적으로는 정서적 충격이나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영원한 행복감이나 영혼까지 구원을 보장하는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예컨대, 이상의 「오감도」가 당대 현실에서 정서적 미학적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부정과 해체라는 돌발적인 용기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오감도가 인간의 영혼까지 구제하는 영원한 깃발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춘수의 무의미 시 가령 「눈물」같은 시가 독자들에게 일시적인 당혹감을 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식 실험의 시들이 불안과 절망과 상실감의 현대인을 구제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해체시나 하이퍼시도 그렇다. 그것이 시적인 미학의 탐구는 분명하지만 그래서 일시적으로 신선한 감성의 충격을 주고는 있지만 그러한 당혹감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시적 감동이나 충동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또는 영혼의 구원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홍문표 시 창작 강의 노트 53-2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2) ​ 홍문표 ​ 3. 윤리적 실존과 이성의 문학 ​ 그래서 지쳐버린 미적 실존 즉 감성적인 문학은 드디어 자신의 생활이 외면적, 육체적, 감각적, 개인적, 쾌락의 노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참된 자기의 모습을 찾기 위한 엄숙한 자각과 결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감성적인 것에서 이성적인 것으로 미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실존으로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실존의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실존을 미적 실존의 모순성을 의식하고 양심의 입장에 서는 실존이라고 했다. 즉 윤리적 실존의 인간은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 시간과 영원과의 대립에서 유래하는 자기모순의 사실에 직면하여 불안이나 절망을 회피함 없이, 그것을 사실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통합하려고 결의하는 실존의 모습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은 모순된 현실에 직면하여 엄숙한 양심을 가지고 보편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유한성인 자기 속에 실현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자각하여 그것을 결단하는 실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실존의 생활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같은 윤리적 실존의 생활태도에는 항상 양심과 엄숙 그리고 사회적 의무만이 요구된다. 양심의 입장에 서서 자기의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윤리적 실존은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미적 실존을 영위하는 자들을, 꿀을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이동해 가는 나비에 비할 수 있다면 윤리적 실존을 영위하는 자들은 자신의 임무에 절대 충직한 꿀벌에 비할 수 있다고 했다. ​ 이들은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미적 실존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표명하게 된다. 미적 실존에서는 결혼을 연애의 무덤으로 간주하므로 그것을 회피하고 계속 새로운 사랑을 찾아 유랑하는 반면 윤리적 실존은 결혼을 신이 제정한 성스러운 제도로 확신하고 평생토록 일편단심 충절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이른 자들은 어디까지나 칸트가 말했던 실천 이성의 지상명령, 즉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그 어떤 형편에서도 내적 균형을 잃지 않고 합리적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조와 정직, 성실과 충절을 그 무엇보다 중시한다. ​ 그러나 윤리적 실존에서도 인간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 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도덕률마저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유한성, 즉 자기 자신이 너무 무력하며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윤리적이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가 바라다보는 도덕적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현실의 자기가 너무나 추악하고 불순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키엘케고르에 의하면 윤리적 실존은 이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이 거짓된 진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윤리적 행동과 수고는 자기도취, 자기 신격화의 거짓된 진지성으로 끝나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자기를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 속에서는 아무리 성자 같은 구도자라 할지라도 불안과 절망이 깃들어 있으며, 자기의 내면성에 깃든 불안과 부자유를 아무리 윤리적으로 포장해도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 문학에서도 감성의 문학이 윤리적인 문학으로 전환하였는데 그것은 먼저 중세 문학이나 고전주의 문학에서 볼 수 있다. 중세에는 금욕주의적인 종교와 철학이 역사를 주도하면서 문학의 주제는 권선징악이라는 율법적인 윤리가 주도하게 되었다. 감성은 늘 죄악시되었고, 윤리와 도덕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 설은 관념이나, 이성 또는 도덕이나 철학이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그렇다. 특히 중국의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라하여 문학에 사특한 요소를 배제하고 오직 문학이란 도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했다. 이러한 도덕주의, 윤리주의 환경에서는 문학도 인간도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감성의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 근대 낭만주의였지만 지나친 감정의 과잉과 비현실적 이상의 추구는 다시 이성의 회복, 현실의 회복, 진실의 회복이란 사실주의 문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는 환상적인 미래보다 당장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는 이성의 윤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 1920년대 이 땅에서 제기된 리얼리즘의 양심은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의 인식이었다.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모두 뒈져버려라!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라고 했다. 최서해도 「기아와 살육」에서 “모두 죽어라! 이놈의 세상을 부수라! 복마전 같은 이놈의 세상을 부수라, 모두 죽어라!” 이러한 개인적 분노는 마침내 집단적 분노로 발전한다. 원래 양심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고 집단적인 공동체적 삶의 율법이다. 그래서 이성과 양심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실주의는 개인적인 저항에서 집단적인 저항, 계급적인 저항으로 발전한다. 이 땅에 계급적 정의와 양심이 등장한 것은 1925년대부터다. 그러나 계급주의 윤리는 결과적으로 조국 분단과 동족 상생의 비극적 역사에 기여했고, 아직도 민족 분열과 대립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그토록 빈궁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내세운 리얼리즘의 진보적 윤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빈부의 문제나, 사회적 모순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소란한 북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1960연대 이후 참여문학이나 민중문학의 그 치열했던 양심과 정의와 민주화와 평등의 윤리도 소리만 요란했을 뿐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불신과 갈등만 커져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인간 사회란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윤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만큼 도덕적으로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데서 미적 실존은 물론 윤리적 실존의 절망이 있는 것이다. ​ 4. 종교적 실존과 인간의 구원 ​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과 절망, 유한한 인생의 한계성에 대한 절망과 좌절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래서 감성적 실존, 즉 미적 실존에 투신해 보지만 감성은 더욱 감성을 요구하고, 쾌락은 더욱 쾌락을 요구하고. 미적인 창조적 욕망은 더욱 미적인 욕망을 요구하는 악순환 속에서 절망은 더욱 깊어만 간다. 우리는 감성적이고 미적인 문학을 통하여 낭만주의, 예술주의, 형식주의,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해체시, 낯설음의 시학, 메타시, 아방가르드, 무의미 시, 하이퍼 시 등 무수히 많은 미적 상상력을 탐닉하였지만 영혼은 여전히 공허할 뿐이며 돌아보면 그저 자아도취라는 허구의 환상에서 맴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집단, 주관보다는 객관, 감성보다는 이성, 환상보다는 현실에서 진리와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윤리와 도덕을 앞세워 투쟁을 하였다. 리얼리즘, 내추럴리즘, 공리주의, 계몽주의, 반영론, 컴뮤니즘, 소시얼리얼리즘, 민족주의, 민중주의, 계급주의, 역사주의라는 갖가지 진실과 정의와 평등과 총체성의 수식어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흔들며 가열차게 윤리적 투쟁을 전개했지만 여기서도 분열과 대립과 갈등만 더욱 조장되었을 뿐 현실은 여전히 모순과 대립의 이전투구가 있을 뿐이다. ​ 그렇다면 미적 실존이나 감성적 문학, 윤리적 실존이나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문학, 형식이냐 내용이냐, 순수냐 참여냐 하는 이원론적 흑백논리 등 불완전하고 유한한 이들 인간의 휴머니즘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구원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구원이나 영원한 행복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밖의 존재, 인간보다는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만이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전지전능한 신 앞에 참회하고 자비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키엘케고르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전능한 존재이고 무한한 존재이고, 그러면서도 우주만물을 창조한 존재이고, 지금도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정말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존재가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성이나 가능성은 오직 초월자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무한성과 가능성을 믿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인간의 유한성과 불가능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종교요, 그것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 휠라이트는 인간의 사고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수평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 사고다. 수평적 사고란 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 사고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이나 감성을 앞세운 모든 인본주의적 문명이 바로 수평적 사고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이성은 마침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헤겔은 말했지만 우주의 시작과 끝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수평적 사고로는 측정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도 그렇다. 그런데도 불가사의한 우주는 여전히 건재하고, 죽음의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를 엄습한다. 그러니 우주의 시간이나 공간, 사후의 시간이나 공간은 영원히 초월의 영역이고 신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 영역과 신성의 영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속의 영역은 감성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이지만 원천적으로 불완전한 영역이기에 결국은 불안하고 허무하며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하고 죽어야 하는 원죄의 공간이다. 그러나 신성의 공간은 모든 것이 가능한 무한한 공간이다. 신성의 공간은 죽음이니, 절망이니 하는 세속적 사고의 영역을 벗어난 절대 자유와 행복이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사고의 뒤뜰에는 천국이 있고, 낙원이 있고 극락이 있게 된다. 따라서 세속의 영혼들은 바로 이러한 신성의 세계로 가는 것이 절체절명의 소망이 된다. 그러나 수평적 사고의 원죄에 갇혀 있는 세속의 인간들로서는 신이 거처하는 신성의 세계로 갈 수 없는 단절이 있다. 그렇다면 이 단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수평적 사고가 아니라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사고만이 가능한 것이다. ​ 그런데 수직적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상승의 방법이다. 따라서 종교에는 인간이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는 종교와 절대자가 인간에게 다가와 역사하고 구속하는 종교가 있게 된다. 고행과 참선과 명상과 수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교이고 신이 하강하여 인간에게 섭리한다는 종교는 기독교가 그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인위적인 종교를 보자. 키엘케고르는 이러한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생활의 연장 위에 있는 실존으로 보며 자기 스스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닿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인위적인 종교라고 했다. 이것은 신적인 것들이 모든 인간에게 현존하며,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종교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실존은 윤리적 척도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에게 두고 있다. 윤리적인 실존이 보편성 가운데 자기 자신을 세우려 하는 반면 종교적 실존은 자신이 신의 요구에 합당한 실존이 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자기 자신을 멀리한 채 신이 보시기에 합당한 실존이 되고자 무한한 정열로 변혁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출처] 누구를 만나든 ------------티벳트 명상시|작성자 스타 ​ 이러한 종교적 실존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살아갈 뿐, 지상적인 쾌락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왜냐하면 유한성에 마음을 두게 되면 절대적인 신과의 관계는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유한성에 속하는 것을 얻으려 하자마자 무한성을 향한 추구는 정지되고, 유한성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 티벳 사원의 길가에서는 오늘도 맨땅을 수년간 엎드려 절하며 오르는 신심을 본다. 오체투지의 고행이다. 양 팔꿈치, 양 무릎을 땅에 대고 절하며 몇 번이고 수 천리 언덕길을 기어간다. 갠지스 강가에는 지금도 평생을 명상하는 수도자들이 있다. 더러는 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도 있다. 모두가 자신을 포기하고 신의 경지, 초월의 경지를 향한 고행의 행진이다. 그런데 키엘케고르는 인위적인 종교가 내면적 변혁 말고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이 절대적 목적을 위하여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실존을 그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위적인 상향적 종교는 절대적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은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전 실존을 걸고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정립된 정신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 이상 죄의 침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이미 들어와 있는 원죄에 대하여는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인간의 힘으로 신적 경지에 이르는 상향적 초월의 종교로는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절대 타자인 천상의 신, 절대자가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방식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말한다. 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종교의 경우 신의 영역 즉 신성(神聖)의 존재는 단지 인간이 상상하는 가공의 영역이 아니라 신성이 세속에 직접 현현됨으로 인간은 그 신성을 경험하게 된다. 엘리아데는 이 신성의 현현을 성현(hierophany)이라고 불렀다. 신성은 루돌프 오토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비와 공포와 매력이 신성에 접했을 때에 인간 쪽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렇듯 신성은 절대 타자로서 체험되는 종교적 실재다. ​ 성경의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였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성이 인자(人子)로 온 성현의 대표적 예인데 이를 기독교에서는 육화(incarnation)라고 한다. 이러한 성현은 물론 수평적 사고로는 인식할 수 없는 역설적 사건이다. 신이 인간이 되고 신성이 사물에 접신된다는 것은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성현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우리들 인간들의 삶 속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 사실 신이 하늘에서 하강한다는 신앙이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건은 우리의 오성, 우리의 과학,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계선 밖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로는 부조리한 것이며 그 무엇으로 증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역설을 시인하지 않는 한 진정한 구원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이란 유한자가 영원자를 통해서만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신에게로 다가간다거나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진정한 구원의 종교는 신이 하강한 종교만이 그 정당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과학적 논리,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이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를 믿는 데는 오직 이성과 감성의 인간적인 집착을 내어던지는 결단이 요구됨을 지적하였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결론은 감성적 실존이나 이성적 실존, 미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으로는 결코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하며, 종교적 실존으로 비약해야 하는데 종교적 실존이라 해도 인위적인 종교가 아니라 절대 타자인 신으로부터 내려받는 은총의 종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홍문표 시 창작 강의 노트 53-3 ​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3) ​ 홍문표 ​ 5. 구원의 문학과 영성의 문학 ​ 이처럼 인간적인 감성적 사고나 이성적 사고, 미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에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러기에 겸손히 신적인 세계, 초월적인 힘, 절대자의 능력과 자비를 통하여 보다 높고 넓은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수직적 사고 또는 그러한 신앙적 인식 태도를 우리는 영성(sprituality)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영성은 세속을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를 인정한다. 또한 인간이란 결코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영역 이상의 초감각적 초이성적 품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보다 깊은 가치들과 의미들을 찾아 명상하고 기도하며 소통한다. 바로 세속의 삶, 일상의 삶, 외적인 삶에서 내적인 삶, 내적인 생명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결코 특정한 인간에게만 부여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영성이 있다. 신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절박할 때는 누구나 신을 찾는다. 영성이 있다는 증거다. ​ 영성의 경지에서야 세속적인 자아는 더 큰 실재와 소통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더 커다란 자아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진정한 깨달음 또는 거듭남이라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세속의 진부한 집착에서 벗어나 분열된 너와 내가 하나 되고 자연과 우주와도 합일되며 마침내 신성의 영역(divine realm)과 합일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을 법열이니 충만함이니 엑스타시라고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진정한 자유요, 해방이요 구원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사물을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서 보게 되고, 예언과 계시의 신성한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데 문학이 이러한 경지에서 쓰여지게 될 때 영성의 문학이 된다. 따라서 영성의 문학은 궁극적인 실재, 즉 절대자가 있고, 초월이 있고, 속세의 집착을 벗어난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우주 자연과의 합일이 있고, 신성(神性)의 놀라운 예언이 있다. ​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사에서 오늘도 수없이 쏟아지는 문학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지금 어찌 살고 있으며 어떤 문학을 쓰고 있는가. 문학은 감성이고 예술이고 창조라 하여 이미지와 메타포와 리듬과, 구성과, 문체와, 형식의 미적인 실험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학은 이성과 양심과 자유라 하여 총체성과, 계급과, 빈부와 민주화와 반영과 비판과 투쟁과 혁명과 리얼리즘과 이데올로기의 깃발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이집트에서 사백 년이나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모세가 그의 민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네 아비에게 물으라”였다. 역사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말이다. 개화기 이후 신문학의 역사도 이제 백 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시인 작가들이 한국 문학이라는 영봉을 향하여 오르다 갔고, 지금도 수많은 문인들의 행렬이 문학의 등성을 타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이름 없이 갔고, 더러는 한동안 반짝이다가 역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의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빛나는 예언이 되고 감동이 되고 구원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몇몇 작품도 있다. 어떤 작품들인가, 이들은 놀랍게도 한결같이 영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일백 년 문학사를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감동을 주고, 영향을 주고 깨우침을 주고 있는 시들을 보자. 1920년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의 「산유화」를 들 수 있다. 이 시대 대부분 시인들이 낭만주의니 감상주의니 하면서 불안과 좌절의 정서를 어둠과, 동굴과 죽음으로 노래하던 병적인 분위기에서, 또는 암울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투쟁을 선언하던 리얼리즘과 계급주의의 치열한 분위기에서 한용운은 이들 양극화의 세속을 뛰어넘어 오히려 부재한 절대자 님을 향해 통곡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강한 영성을 보여 주고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비록 님과의 상실이 있지만 그래도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그 지극한 신앙에 민족적인 위로가 있고 구원이 있다. 김소월은 자연을 절대화하는 영성을 보여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여름 없이 꽃이 피네” ​ 1930년대 서정주의 그 많은 시중에서 그래도 생명력이 있는 시는 「국화 옆에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바로 수직적인 불교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서시」도 그렇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의 시는 하나님에 대한 부끄러움과 참회의 영성이 있어 지금까지 애송하게 된다. 이육사의 「광야」 한 구절이 생각난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는 유학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진 매우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암담한 현실을 초극하고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절대성을 긍정하는 영성의 시를 써서 계속 감동을 준다. 1940년대 조지훈의 「승무」도 그렇다. 그의 시가 단순히 춤사위나 보여주는 미적 표현이었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거기엔 현실을 초극하려는 불심의 지극한 영성이 있다. 1950년대 김춘수는 많은 미적 실험 시를 썼다. 무의미 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남은 시는 무의미 시가 아니라「꽃」이다. 존재성에 대한 깊은 성찰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김수영은 현실 비판의 많은 시를 썼다. 시대적 양심과 정의의 시들이다. 그러나 김수영을 기억하게 만든 시는 그러한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시가 아니라 「풀」이다. 민초를 절대화한 영성의 시만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 이는 세계적인 몇몇 소설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괴테는 젊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이미 약혼한 여인을 짝사랑하다 마침내 자살한다는 대중소설이다. 한 여인에 대한 집착, 이것을 사랑의 극치로 미화하는 미적 실존, 소위 탐미적 낭만주의는 결국 자기 파멸로 끝이 난다. 미적 실존의 한계다. 그런데 그의 「파우스트」는 세계적인 고전이 되고 있다. 어째서일까.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윤리적 실존의 대표적 인물이다. 노년에 이르러 허무함만 느끼고 있을 때 젊음과 여인의 유혹을 받는다. 미적 실존의 욕망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결국 그의 영혼을 구한 것은 윤리나 미가 아니라 천상의 음악이었다. 톨스토이에게도 「안나까레리나」가 있다. 부부생활에 실증을 느낀 안나가 다른 남자와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여의치 못하자 결국 자살한다는 대중소설이다. 미적 실존의 절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부활」은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다. 어째서일까.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이성과 양심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회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브스키의 「죄와 벌」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는 양심과 정의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윤리적 실존의 표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무익한 노파를 죽이고도 떳떳했다. 그러나 그의 참회는 신을 믿으면서도 몸을 팔아야 하는 소냐를 통해 이루어진다. 종교적 실존에 구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성의 작품이다. ​ 이처럼 소설에서도 인간적인 욕망과 이성, 미와 양심과 정의에 집착한 「젊은 벨텔의 슬픔」이나 「안나까레리나」나 「죄와 벌」의 라스코리니코프는 마침내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만일 거기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쾌락이나 정당성의 환상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신을 의지하고, 신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파우스트」나 「부활」이나 「죄와 벌」의 참회에 영원함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다. ​ 영성의 문학에는 절대적 가치가 있고, 초월이 있고, 신이 있고, 종교가 있고 영원한 구원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에서는 일상의 감성이나 이성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벗어나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세계에 대한 감동과 깨달음을 만나게 되고, 소통하게 되고, 그리하여 함께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렇다고 이들 영성의 작품들이 감성과 이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지금까지 감동과 깨달음과 예언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이들의 작품들은 모두가 문학성에 충실하면서도 신성이 있고, 초월자의 섭리가 있고, 자유가 있다. ​ 문학의 기본은 문학성이고, 시의 기본은 시성이다. 따라서 영성의 문학이라 하여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나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시의 경우 메타퍼와 리듬과 관념에 충실하면서 그 위에 영성이 있어야 한다. 소설도 그렇다. 리얼리즘이니 현실의 반영이니 하여 세상에 칼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소설 문학 형식에 더하여 영성이 있어야 한다. ​ 이는 오늘날 작품을 쓰는 모든 문인들이 경청해야 할 부분이다. 문학은 예술이라 하여 미학적 기교에만 집착하는 형식주의나, 문학은 내용이라 하여 윤리적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는 역사주의는 문학사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인기와 관심은 있었겠지만 영구히 행복한 문학은 아니었다. 모두가 유행가 가사처럼 시대마다 반짝이다 사라진 것들이다. 지금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무의미 시, 해체 시는 어디 있는가, 계급문학, 민족 문학, 참여문학, 민중문학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낭만주의 리얼리즘, 형식주의 역사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또 어디 있는가. 깃발을 흔들 때마다 그것만이 진리인 줄 알고 박수를 쳤던 우리들의 어리석음, 유한한 인간들의 무상한 시행착오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 그렇다면 이제 인생도 문학도 철이 들 때가 되었다. 깨달을 때가 되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그 험난한 세월 속에서 그래도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희망을 주고 보다 높고 깊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문학성에 충실하면서도 초월적인 세계와 소통하는 영성의 문학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신문학 일백 년 우리는 형식이냐 내용이냐, 순수냐 참여냐, 감성이냐 이성이냐, 낭만주의냐 사실주의냐, 보수냐 진보냐, 그 흑백의 양극화 논리에 모두들 매달려 상처뿐인 진창 놀이를 반복해 왔다. ​ 이제는 유한한 인간의 감성과 이성,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만으로는 결코 영원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인간 존재의 실상을 분명히 알고 그 양극화의 허망한 미로와 갈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유한한 인간의 실존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거대한 우주와 자연 속에서 초월자의 섭리와 사랑을 느끼며 지상의 절망과 불안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영성의 문학에서 우리들 문학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 영혼을 지닌 인간이 가야 할 길이며 문학자의 소명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시적인 구원이 아니라, 일시적인 놀라움이 아니라 영원한 놀라움과 영원한 구원이 약속되는 영성의 삶, 영성의 문학으로 비약하는 기적이 있어야 하겠다.
5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5 댓글:  조회:747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1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1) ​ 홍문표 ​ 1. 시인의 꿈, 시의 꿈 ​ (1). 박완서의 「시인의 꿈」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헐리고 궁전 같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거지같은 생활에서 궁전 같은 도시문명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궁전 같은 아파트촌 구석에 아직도 어느 노인이 사는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그걸 보고 놀라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걸 철거해야 한다고 시청에 진정도 하고 반상회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다. 아니 곧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다시 그 판자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그림책이 있어 열어보니 거기엔 수많은 곤충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이로운 것만 쓸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시가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면서 다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어를 수집하러 다니는데 요즘 말은 모두 욕심을 위한 말뿐이어서 시어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를 쓰려면 욕심이 없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 여기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욕심으로 때 묻지 않은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과 욕망으로 때 묻지 않는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두 제정신이 나간 이 황무지 같은 삶이 아니라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동이 있는 삶,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는 삶, 그것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고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아닐까. ​ (2). 워즈워드의 「무지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말을 들으니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생각난다. ​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려서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하기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가 타고난 그대로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 시인 워즈워드의 꿈은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마음, 그 감정, 그 순수함이 어려서나 커서나 늙어서나 한결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울렁거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울렁거림이 없는 시인, 울렁거림이 없는 독자, 울렁거림이 없는 시, 울렁거림이 없는 세상, 거기엔 시인도 죽고, 시도 죽고, 세상도 죽은 것이라는 것이 바로 워즈워드의 시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싶은 좋은 시란 울렁거림의 시가 아닐까. 울렁거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다. 충격이다. 호기심이다. 깨달음이다. 깨어남이다. 기쁨이고 반가움이고 충만함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 2.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가. ​ (1). 좋은 시의 구별은 우선 주관적인 평가의 문제다. 좋은 시란 평가적 용어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망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를 누가 비판할 경우엔 누가 감히 내 시를 평가할 것인가 내 시는 내가 잘 안다 라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땀 흘려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물에 부딪친다. 그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고, 그 사물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평가는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려면 그 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만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저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다. 거기다가 과거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있고 미래에 대한 삶의 욕망도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떤 사물의 가치는 각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삶의 총체적인 인식이 된다. 이 때 나와 그 대상의 관계인식이 보다 긍정적인 때는 좋은 것으로 부정적일 때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 따라서 한편의 시를 보고 좋은 시라고 인식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경험과 지식과 소망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나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문학비평에서 개인의 주관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는 비평을 인상비평, 또는 주관비평이니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2). 그러나 문학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이나 드라마라고 하는 이 문학의 장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서 즐겨온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룰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제도와 관습을 갖고 있다. 제사에는 제례가 있고, 결혼에는 혼례가 있고, 공놀이에는 경기규칙이 있다. 특히 공놀이에는 축구도 있고 야구도 있는데 같은 공놀이이지만 저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를 상상력과 결합하여 즐기는 문학놀이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자 놀이이기는 하지만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룰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어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그 선수가 정해진 규칙, 즉 룰 안에서 공놀이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도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수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선수들보다 공놀이를 잘 하는 경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좋은 문학, 좋은 시를 말하는 것은 첫째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다른 시인 다른 작품보다 개성 있게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좋은 시이냐 나쁜 시이냐 하는 작품의 평가는 개인적 지식과 경험과 욕구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사적 제도와 관습이라는 객관적 룰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3). 문학 평가의 네 가지 관점 그런데 문학을 인간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축구나 야구의 제도는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문학에서 제도와 관습이란 민족마다 시대마다 보는 관점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옷 같은 사람은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한마디로 오류의 역사라고 지적한 바다 있다. 사실 문학이란 수치로 재기 어려운 사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분명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 시는 소설과 다르고, 소설은 드라마와 다르고,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같은 시라고 해도 작품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째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지를 구별해 보는 것이 비평이고 시학이고 시를 보다 잘 쓰려는 시인들의 관심이 된다. ​ 작품에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품 감상이라고 하고 그 느낌이 왜 다른지를 구별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잣대가 있어야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는 애당초 물건과 달리 여러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 문학을 보는 잣대가 다양한 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단지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도 있고, 그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도 있고, 또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을 보는 데는 적어도 작품자체의 입장,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작품의 재료에 관한 입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사를 보면 작품 작가 독자 재료라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방론·표현론·효용론·존재론이란 관점의 잣대가 되어 저마다 평가해 왔으며 좋은 작품에 대한 입장도 이 네가지 관점에 따라 다름을 볼 수가 있다 ​ 모방론이란 문학이 아무리 날고뛰는 창작이라 해도 결국은 자연이나 인생이나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단지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문학의 질서를 배우고 사회를 소재로 하여 문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회의 반영이니 인생의 거울이니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표현론의 입장은 문학이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감정이나 욕망이나 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을 촛불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를 실용성, 또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를 실용론 또는 효용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문학작품의 외적 조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작품 그 자체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반영이니 표현이니 실용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작품이라는 구조 안에 수용되는 것이기에 문학의 가치평가는 작품 그 자체에 한해야한다는 존재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 (4). 네 가지 문학관에서도 좋은 시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기 관점은 단지 이론이나 관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은 작품 그렇지 않은 작품의 구별이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방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문학은 현실을 잘 반영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이는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이런 시를 좋은 시로 추천한 경우가 있다. ​ 자식이 진정한 자식이 되는 길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지상의 모든 자식의 의무는 부모를 이기는 것 부모를 이겨라 낡은 세대를 이겨라 조금은 가슴 아프게 조금은 배반 스럽게 - 박노해 「부모를 이겨라」에서 ​ 이 시는 젊은이들이 부모와 과거를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라는 교훈적인 시다. 그러나 부모를 낡은 세대로 규정하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시를 상상과 창조의 미학으로 본다면 이 시는 행갈이만 있을 뿐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 있다고 모두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신경림의 「갈대」를 추천한 경우가 더 많다.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의 「갈대」 ​ 이 시에서 갈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갈대 같은 농민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울고 있는 갈대와 온몸이 흔들리는 갈대를 통하여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극적인 존재의 자각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시지만 앞의 박노해의 시와는 시적인 감동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같은 잣대의 시에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시의 경우도 그렇다. 다음 두 시를 보자.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의 「행복」 ​ 이 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로 추천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이기적인 세상, 이기적인 사랑으로 만연된 현실에 어르신 말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발」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이라는 데서 그 권위가 플러스되어 더욱 좋은 작품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같아서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는 아니다. 같은 사랑의 시 일지라도 다음의 시는 느낌이 다르다.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유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도 하늘에도 네가 있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도 하늘에도 내 안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유치환의 「행복」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계인식과는 많은 편차가 있다. 유치환의 화자와 연인 간에는 매일 편지를 보내는 관계이고, 연연한 진홍 빛 양귀비꽃의 관계이고 사랑을 주는 시혜(施惠)적인 관계다. 그러나 유시환의 화자와 연인간의 관계는 물에 하늘에 내 안에 가득찬 관계다. ​ 그들의 관계성을 각각 결론으로 말하는 대목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이고 훈계적인 고백이다. 그런데 유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그대와 내가 한 몸으로 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 크기에 늘 결핍을 느낀다는 패러독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시환의 작품은 내 안에 있는 이가 반드시 연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내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의 성찰을 가능하게도 한다. ​ 물론 유치환의 시 세계를 「행복」이란 작품 하나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비교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간의 차이는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행복」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도 편차가 크다.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 이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와 고독을 깃발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 애수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하여 독자들을 아득한 허공에서 울렁거리게 한다. 앞의 「행복」이란 작품에서 느끼는 떨림과는 전혀 강도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감동은 많은 편차를 보인다. ​ 이상에서 보듯이 같은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와 신경림의 「갈대」라는 작품을 비교할 때 신경림의 「갈대」가 보다 감동이 있고 충격이 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유치환의 「행복」과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비록 유치환이 문학사적으로 훨씬 비중 있는 시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의 시적 담론은 유시환의 것이 훨씬 간절하고 적극적이라는 데서 보다 좋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말하자면 같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느냐에 따라서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는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유치환의 경우 「행복」과 「깃발」은 확연히 느낌과 떨림에 차이가 있다. 물론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환의 「행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감동과 떨림이 시인의 꿈, 시의 꿈이라고 할 때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좀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그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우리는 시 몇 편 쓰고 시집 몇 권 냈다는 것으로 누가 내 작품을 평가할 것인가 라든지 작품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오만한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들 간에 이처럼 상대적 우위에 있게 되는 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비밀을 터득하여 보다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는 좋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시인이 되자는 것이다.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1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1) ​ 홍문표 ​ 1. 시인의 꿈, 시의 꿈 ​ (1). 박완서의 「시인의 꿈」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헐리고 궁전 같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거지같은 생활에서 궁전 같은 도시문명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궁전 같은 아파트촌 구석에 아직도 어느 노인이 사는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그걸 보고 놀라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걸 철거해야 한다고 시청에 진정도 하고 반상회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다. 아니 곧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다시 그 판자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그림책이 있어 열어보니 거기엔 수많은 곤충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이로운 것만 쓸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시가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면서 다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어를 수집하러 다니는데 요즘 말은 모두 욕심을 위한 말뿐이어서 시어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를 쓰려면 욕심이 없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 여기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욕심으로 때 묻지 않은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과 욕망으로 때 묻지 않는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두 제정신이 나간 이 황무지 같은 삶이 아니라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동이 있는 삶,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는 삶, 그것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고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아닐까. ​ (2). 워즈워드의 「무지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말을 들으니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생각난다. ​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려서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하기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가 타고난 그대로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 시인 워즈워드의 꿈은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마음, 그 감정, 그 순수함이 어려서나 커서나 늙어서나 한결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울렁거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울렁거림이 없는 시인, 울렁거림이 없는 독자, 울렁거림이 없는 시, 울렁거림이 없는 세상, 거기엔 시인도 죽고, 시도 죽고, 세상도 죽은 것이라는 것이 바로 워즈워드의 시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싶은 좋은 시란 울렁거림의 시가 아닐까. 울렁거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다. 충격이다. 호기심이다. 깨달음이다. 깨어남이다. 기쁨이고 반가움이고 충만함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 2.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가. ​ (1). 좋은 시의 구별은 우선 주관적인 평가의 문제다. 좋은 시란 평가적 용어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망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를 누가 비판할 경우엔 누가 감히 내 시를 평가할 것인가 내 시는 내가 잘 안다 라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땀 흘려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물에 부딪친다. 그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고, 그 사물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평가는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려면 그 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만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저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다. 거기다가 과거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있고 미래에 대한 삶의 욕망도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떤 사물의 가치는 각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삶의 총체적인 인식이 된다. 이 때 나와 그 대상의 관계인식이 보다 긍정적인 때는 좋은 것으로 부정적일 때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 따라서 한편의 시를 보고 좋은 시라고 인식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경험과 지식과 소망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나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문학비평에서 개인의 주관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는 비평을 인상비평, 또는 주관비평이니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2). 그러나 문학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이나 드라마라고 하는 이 문학의 장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서 즐겨온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룰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제도와 관습을 갖고 있다. 제사에는 제례가 있고, 결혼에는 혼례가 있고, 공놀이에는 경기규칙이 있다. 특히 공놀이에는 축구도 있고 야구도 있는데 같은 공놀이이지만 저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를 상상력과 결합하여 즐기는 문학놀이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자 놀이이기는 하지만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룰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어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그 선수가 정해진 규칙, 즉 룰 안에서 공놀이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도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수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선수들보다 공놀이를 잘 하는 경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좋은 문학, 좋은 시를 말하는 것은 첫째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다른 시인 다른 작품보다 개성 있게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좋은 시이냐 나쁜 시이냐 하는 작품의 평가는 개인적 지식과 경험과 욕구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사적 제도와 관습이라는 객관적 룰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3). 문학 평가의 네 가지 관점 그런데 문학을 인간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축구나 야구의 제도는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문학에서 제도와 관습이란 민족마다 시대마다 보는 관점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옷 같은 사람은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한마디로 오류의 역사라고 지적한 바다 있다. 사실 문학이란 수치로 재기 어려운 사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분명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 시는 소설과 다르고, 소설은 드라마와 다르고,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같은 시라고 해도 작품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째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지를 구별해 보는 것이 비평이고 시학이고 시를 보다 잘 쓰려는 시인들의 관심이 된다. ​ 작품에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품 감상이라고 하고 그 느낌이 왜 다른지를 구별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잣대가 있어야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는 애당초 물건과 달리 여러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 문학을 보는 잣대가 다양한 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단지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도 있고, 그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도 있고, 또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을 보는 데는 적어도 작품자체의 입장,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작품의 재료에 관한 입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사를 보면 작품 작가 독자 재료라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방론·표현론·효용론·존재론이란 관점의 잣대가 되어 저마다 평가해 왔으며 좋은 작품에 대한 입장도 이 네가지 관점에 따라 다름을 볼 수가 있다 ​ 모방론이란 문학이 아무리 날고뛰는 창작이라 해도 결국은 자연이나 인생이나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단지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문학의 질서를 배우고 사회를 소재로 하여 문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회의 반영이니 인생의 거울이니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표현론의 입장은 문학이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감정이나 욕망이나 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을 촛불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를 실용성, 또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를 실용론 또는 효용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문학작품의 외적 조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작품 그 자체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반영이니 표현이니 실용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작품이라는 구조 안에 수용되는 것이기에 문학의 가치평가는 작품 그 자체에 한해야한다는 존재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 (4). 네 가지 문학관에서도 좋은 시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기 관점은 단지 이론이나 관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은 작품 그렇지 않은 작품의 구별이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방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문학은 현실을 잘 반영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이는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이런 시를 좋은 시로 추천한 경우가 있다. ​ 자식이 진정한 자식이 되는 길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지상의 모든 자식의 의무는 부모를 이기는 것 부모를 이겨라 낡은 세대를 이겨라 조금은 가슴 아프게 조금은 배반 스럽게 - 박노해 「부모를 이겨라」에서 ​ 이 시는 젊은이들이 부모와 과거를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라는 교훈적인 시다. 그러나 부모를 낡은 세대로 규정하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시를 상상과 창조의 미학으로 본다면 이 시는 행갈이만 있을 뿐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 있다고 모두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신경림의 「갈대」를 추천한 경우가 더 많다.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의 「갈대」 ​ 이 시에서 갈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갈대 같은 농민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울고 있는 갈대와 온몸이 흔들리는 갈대를 통하여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극적인 존재의 자각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시지만 앞의 박노해의 시와는 시적인 감동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같은 잣대의 시에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시의 경우도 그렇다. 다음 두 시를 보자.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의 「행복」 ​ 이 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로 추천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이기적인 세상, 이기적인 사랑으로 만연된 현실에 어르신 말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발」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이라는 데서 그 권위가 플러스되어 더욱 좋은 작품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같아서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는 아니다. 같은 사랑의 시 일지라도 다음의 시는 느낌이 다르다.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유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도 하늘에도 네가 있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도 하늘에도 내 안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유치환의 「행복」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계인식과는 많은 편차가 있다. 유치환의 화자와 연인 간에는 매일 편지를 보내는 관계이고, 연연한 진홍 빛 양귀비꽃의 관계이고 사랑을 주는 시혜(施惠)적인 관계다. 그러나 유시환의 화자와 연인간의 관계는 물에 하늘에 내 안에 가득찬 관계다. ​ 그들의 관계성을 각각 결론으로 말하는 대목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이고 훈계적인 고백이다. 그런데 유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그대와 내가 한 몸으로 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 크기에 늘 결핍을 느낀다는 패러독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시환의 작품은 내 안에 있는 이가 반드시 연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내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의 성찰을 가능하게도 한다. ​ 물론 유치환의 시 세계를 「행복」이란 작품 하나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비교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간의 차이는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행복」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도 편차가 크다.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 이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와 고독을 깃발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 애수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하여 독자들을 아득한 허공에서 울렁거리게 한다. 앞의 「행복」이란 작품에서 느끼는 떨림과는 전혀 강도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감동은 많은 편차를 보인다. ​ 이상에서 보듯이 같은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와 신경림의 「갈대」라는 작품을 비교할 때 신경림의 「갈대」가 보다 감동이 있고 충격이 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유치환의 「행복」과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비록 유치환이 문학사적으로 훨씬 비중 있는 시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의 시적 담론은 유시환의 것이 훨씬 간절하고 적극적이라는 데서 보다 좋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말하자면 같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느냐에 따라서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는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유치환의 경우 「행복」과 「깃발」은 확연히 느낌과 떨림에 차이가 있다. 물론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환의 「행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감동과 떨림이 시인의 꿈, 시의 꿈이라고 할 때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좀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그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우리는 시 몇 편 쓰고 시집 몇 권 냈다는 것으로 누가 내 작품을 평가할 것인가 라든지 작품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오만한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들 간에 이처럼 상대적 우위에 있게 되는 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비밀을 터득하여 보다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는 좋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시인이 되자는 것이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2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2) ​ 홍문표 ​ 3. 좋은 시는 시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하다 ​ (1). 제도와 관습은 문화적 룰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인 좋은 작품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앞서 같은 공놀이라도 축구와 배구는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축구와 배구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우선 공에 차이가 있다. 경기장의 크기도 다르다. 선수 숫자도 다르다. 경기 방법도 다르다. 다시 말하면 축구와 배구는 경기규칙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와 소설은 엄연히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 어떤 차이가 시와 소설을 구별하게 하는가. 그것은 축구와 배구가 경기규칙이 다른 것처럼 시와 소설도 언어의 표현규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 물론 시와 소설의 규칙은 어느 날 몇 사람이 모여서 정한 운동규칙과는 다르다. 그러나 시와 소설과 드라마도 인류의 오랜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문화로 정착된 제도와 관습이 있고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 이는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알고 이를 창작에 잘 적용하는 것이다. ​ 축구는 축구규칙을 잘 아는 선수들이 직접 경기장에서 그 규칙의 범위 안에서 상대방과 대결하는 놀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시적 규칙, 시적 장르의 제도와 관습을 충분히 익혀서 작품을 창작하고 이를 독자들과 시적인 소통을 하는 언어놀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가장 기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적인 제도와 관습, 말하자면 시가 소설과 다른 규칙을 올바르게 숙지하는 일이다. 운동경기에서 규칙을 어긴 반칙선수는 관중의 비난을 받고 심판의 제제를 받는다. 문학에도 완장을 한 심판은 없지만 독자라는 심판관이 있고 비평가란 심판관이 있고, 문학사라는 심판관이 있다. 따라서 시인은 또는 문인은 자기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룰을 확실히 습득하는 일에 충실해야 하고 이 기본적인 룰을 지키고서야 좋은 시를 논의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를 모르고 멋대로 시랍시고 써대며 시인행세를 하려는 오늘의 많은 시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들을 시의 기초가 덜된 시인, 시가 뭔지를 모르는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 (2). 시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와 관습은 무엇인가. ​ 그렇다면 시가 소설이나 드라마와 다른 가장 근본적인 제도와 관습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시를 시답게 하는 기본 규칙은 무엇인가. 이 말은 이 요소들이 빠지면 시의 기본적인 속성이 상실된다는 말이기도 한데 시를 시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필자는 리듬(rhythm) 메타포(metaphor) 코노테이션(connotation)이라고 말하겠다. ​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모든 언어의 의미는 기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밤과 밥의 의미가 왜 다른지를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밤’과 ‘밥’은 ‘바’에 ‘ㅂ’받침인가 ‘ㅁ’받침인가 하는 음운의 차이에서 올 뿐이다. 따라서 시가 소설과 다른 점은 시는 소설보다 리듬이 보다 강조되고 보다 메타포가 강조되고 보다 코노테이션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소설과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경우 이 세 요소 중 어느 한 요소가 미흡하면 좋은 시의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시를 위해서는 이 세 요소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겠다. ​ (3). 시는 첫째로 리듬이다 ​ ⓵. 리듬은 음성만의 율동이 아니다. 시의 기본 룰은 첫째로 리듬이다. 리듬(rhythm)의 의미는 율동(律動)이다. 이 말은 규칙적인 동작이란 뜻이다. 따라서 리듬은 소리의 일정한 규칙만이 아니다. 우리는 주로 리듬을 음악의 요소로만 배워왔고 고대시가의 경우 운문(verse, 韻文), 율격(metre, 律格), 음수율, 음보율 등으로 작시법을 말하고 있기에 리듬이라면 음악의 요소나 소리의 일정한 규칙으로 알고 있고, 시에서 리듬이라면 당연히 음성적인 규칙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러한 선입관을 버려야 시의 진실을 체득할 수 있다. ​ ⓶. 리듬은 지상적인 인식의 단위다. 규칙적인 동작의 인식, 모든 것을 나누어 보고 같은 것끼리 모아보고 마디를 나누어 보는 것은 인간의 감성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사물의 변별성과 의미의 차이와 가치를 구별한다. 천상엔 영원한 시간 · 영원한 공간 · 영원한 감성만 있기에 길고 짧음, 시작과 끝의 변별성이 없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존재는 처음과 끝이 있고, 전체와 부분이 있고, 모든 전체는 부분과 마디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 ⓷. 모든 생명체는 리듬이 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호흡과 맥박의 리듬이 있고, 탄생, 성장, 죽음이란 성장의 리듬이 있다. 인간의 경우 유아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한다. 시간의 경우도 과거 · 현재 · 미래, 역사의 경우는 고대, 근대, 현대라는 마디의 리듬이 있다. 따라서 리듬이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변화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에도 리듬이 있다. 해달 별들은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우주 질서를 유지한다. 따라서 문학, 특히 시가 생명력을 갖는 것도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 ⓸. 뿐만 아니라 리듬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문학의 생명은 감동이다 그런데 감동이란 변화와 반복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자극의 길이, 강도, 성질에 따라 반응도 다르다. 따라서 리듬은 슬픔 · 기쁨 · 놀라움 등 인간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그 조절의 대표적 양식이 음악이고 시다. 음악은 소리의 리듬으로 감정을 조절한다. 시도 다양한 리듬을 통해 감정을 조절한다. 그러나 감정의 조절은 소리뿐만 아니라 색깔, 냄새, 일정한 동작과 의미 있는 언어의 반복으로도 가능하다. ​ ⓹. 시의 리듬 만들기 ​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 ​ 난초도 거문고도 백자항아리도 버리고 장서도 가족들도 꽃밭도 버리고 ​ 바다만 앞에 있는 바다만 뒤에 있는 바다만 옆에 있는 바다 망망한 가운데 심해선 저쪽 일렁이는 파도 위를 알몸 누워 간다. ​ 가슴에는 다만 하늘 가슴에는 다만 태양 ​ 갖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알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보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 처음 혼자 홀로인 혼자만의 나 순간이 그 영원 영원이 그 순간으로 출렁거리는 ​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 동해 파도 한가운데 바다로 간다. - 박두진「바다로 간다」 ​ ​ 행과 연의 반복 – 이시를 보면 전체를 6연 19행으로 나누어 전체적인 리듬을 조성하고 있다. 문장의 반복 – 인용한 시를 보면 우선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라는 문장이 처음과 끝에 반복된다. 구절의 반복 – 동일한 어구나 어절을 반복하는 경우다. 앞에 인용한 「바다로 간다」 에서 보면 이러한 방식이 두드러진다. 어휘의 반복- 인용한 시에서 ‘바다’라는 명사가 7회나 반복된다. 뿐만아니라 ‘간다’, ‘있는’, ‘버리고’, ‘싶던’, ‘아무것도’ 등의 낱말들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조사의 반복-조사의 경우 ‘도’ ‘는’ ‘만’ ‘에’ ‘로’ 등이 많고 어미의 경우 ‘ㄴ다’ ‘고’ 등이 있어 음악적 흥취를 고조시키고 있다. ​ ⓺. 의미의 반복 리듬이란 소리의 일정한 반복만이 아니다. 행동의 일정한 반복, 사고의 일정한 반복, 빛의 일정한 반복도 리듬이다. 모든 움직임의 규칙적인 반복이란 뜻이다. 따라서 현대시의 리듬, 현대시의 내재율을 이해하는 길은 반드시 시에 나타난 음성적 규칙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반복, 의미의 반복, 정서의 반복도 모두 시의 리듬이다. ​ 님은 갔습니다(a1)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a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지고 갔습니다.(a3)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b1)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습니다.(b2)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 다.(b3) - 한용운「님의 침묵」에서 ​ 위의 (a1) (a2) (a3)는 님과 이별 ‘갔습니다’의 의미상 반복 리듬이다. (b1)(b2)(b3)는 님의 부재에 대한 심정의 반복리듬이다. ​ ⓻. 이미지의 반복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a1) 비밀한 울음.(a2) ​ 한 번 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 흘림(a3) ​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의 위에 떨궈진 ​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a4) - 박두진「꽃」에서 ​ ​ 이미지(a1) (a2) (a3) (a4)는 모든 이미지의 반복리듬이다. ​ ​ 시는 이처럼 크게는 행갈이나 연 갈이를 통해서 구절이나 어휘나 심지어는 의미나 이미지들까지도 반복적인 구성을 통해서 강렬하고 적극적인 감정을 들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시인과 독자 간에 떨림을 공유한다. 물론 산문도 리듬이 있다. 그러나 산문의 리듬은 완만하여 그것이 감각적으로 직접 작용하지 못한다. 최근 시의 산문화 현상을 거론하는데 이는 산문과 다른 시의 제도와 관습이라는 원칙에서는 벗어나는 일이다. 시조 5백년사에 정형적인 평시조와 이를 이탈하는 엇시조, 사설시조, 즉 시조의 산문화현상이 있었는데 좋은 시로 성공하지 못했다. 감동적인 떨림이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라면 시의 리듬이야말로 시의 존재성, 시의 변별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핵심적인 규칙이다. ​ (4). 시는 둘째로 메타포다. ​ ⓵. 메타포의 바른 이해 시가 산문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변별성을 첫째는 리듬이라고 했다. 그다음 시를 시답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메타포다. 메타포(metaphor)란 meta 초월, 벗어남(over, beyond)의 뜻과, phor 이동한다(carring)뜻의 합성어다. 기존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동시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메타포를 수사법의 하나로 해석하면서 오해가 시작 된다. 수사법(修辭法, rhetoric)이란 말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다. 원래 그리스의 수사학은 말을 꾸미고 변론하는 정치꾼이나 철인들의 화법이었다. 그래서 시에서 메타포라면 사물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란 오해를 하게 된다. 더욱 웃기는 일은 비유어를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이라 하여 메타포를 시의 보조적 기능으로 오해하게 하는데 이것도 메타포를 왜곡하는 것이다. ​ ② 감추인 것의 드러냄 메타포의 본질은 첫째로 은유(隱 – 숨을 은 喩 – 깨달을 유)가 말하듯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기존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멸의 고전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마 13:34―35) ​ 비유의 본질은 감추인 것들을 드러냄에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 이다. 직유도 비유다. 그러나 직유는 수사적 요소가 있다. “꽃처럼 예쁜 그녀”, 여기서 꽃처럼은 다분히 수사적이다. 따라서 비유의 참뜻은 꾸밈이 아니라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表現, express)이고, 볼 수 없는 신이 인간에게 어떤 게시물을 통하여 보여주는 현현(顯現, epiphany, theophany)의 놀라운 신통력이다.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박두진의 「꽃」에서 ​ 박두진은 일상적인 꽃에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흘림, 엇갈림의 핏방울이란 이미지를 발견하여 꽃의 감추인 내면을 보여준다. ​ ③ 변화와 확장과 창조 메타포의 본질은 둘째로 트롭(trope)에 있다. 그 어원은 전환(turn)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유를 전이(transform)라고 한 것과 같다. 시를 포에트리(poetry) 라고 하는데 이는 만들다. 창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메타포는 사물, 의미 등 모든 기존 개념을 전환하고 바꾸는 것, 재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창조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전봉건의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 ​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엄원태,「물방울 무덤들」전문 ​ ④ 상호충돌과 낯설음 은유의 보다 근본적인 속성은 본래의 사물과 변경된 메타포의 사물이 대치나 전이를 통하여 두 사물 간에 낯설은 충돌, 각각의 존재들이 부딪쳐 낯설게 작용하는 구조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 곧 긴장의 원리로 보고 시의 경우도 이러한 투쟁의 원리가 은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투쟁이나 긴장은 두 사물의 유사성이나 친밀성보다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비 친숙의 관계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메타포도 리듬처럼 감동과 떨림의 메카니즘이다. ​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 김종삼 「나의 본적」 ​ ⑤ 육화와 화해와 구원의 시학 메타포의 최대 사건은 하나님이 인자로, 불가시의 존재가 가시적 존재로 육화(Incarnation)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회복 된 화해가 이루어 졌고 이로써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를 데오 메타포(Theo Metaphor) 신적 메타포, 우주적 메타포라고 말하고 싶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 앞서 시에서 꽃을 피 흘림, 본적을 마른 잎으로 메타포 했을 때 이를 드러냄 전환 충돌로 설명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분열된, 이질적인, 두 사물이 동격이 되고 하나가 되어 화해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구원이다, 그런데 육화라는 신의 데오 메타포는 단지 문자로만 들어내고 전환하고 충돌하는 언어적, 시적 립 서비스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 실물로 나타나 메타포를 현실화 했다는 데서 시적 구원과 종교적 구원의 편차가 있다. 그렇지만 메타포가 구원을 모색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에서 메타포의 참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 (5). 시는 셋째로 코노테이션이다 시를 시답게 하는 세 번째 룰은 코노테이이션(connotation)이다. 코노테이션이란 내포 또는 함축이라는 뜻이다. 언어는 사상과 감정의 전달수단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언어라도 과학적 용법으로 쓰여 지는 기능과 문학 특히 시로 쓰여 지는 언어의 기능과 의미가 다르게 작용한다.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두 기능을 외연(denotation)과 내포(connotation)로 설명한다, 외연은 언어가 지닌 사전적인 의미를 말하고, 내포는 그 언어가 풍기는 분위기, 다양성, 암시력, 연상과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뜻한다. 물의 외연적 의미는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수분이지만 시에서 물의 기능은 시의 문맥에 따라 생명, 탄생, 정화, 죽음, 이별, 마음 등 무수히 다양한 의미로 변신한다. 그러기에 리처즈는 시적 언어의 특성은 정서적이요, 내포적으로 사용된 모든 언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반대로 기술과 해명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의 특성은 지시적이요 객관적이요 말과 사물이 1:1의 관계다. ​ 이와 같이 시적인 언어는 내포적이어야 하고 함축적이어야 한다. 소설의 언어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기에 객관적인 언어의 사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어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외연적 의미 외에 묵시와 연상과 상징과 여운과 분위기를 수반하는 내포적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촌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에서 ​ 이 시에서도 시어가 갖는 다의적 내포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눈’은 외연적으로는 겨울의 눈이지만 내포적으로는 추위 · 괴로운 세상 · 시인 자신의 고독감일 수 있다. 매화향기 · 가난한 노래 · 백마 · 초인 · 광야 등도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보다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인’이란 말은 사전을 통해 보면 인간적인 것을 극복한 천재나 영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초인은 애국자 · 민족 · 시인 · 해방 · 미래 · 영광 · 권위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이처럼 지금까지 인류가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소설이나 희곡과 달리 기본적으로 시는 리듬도 있어야 하고 메타포가 있어야 하고 외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포적이고 함축적 의미인 코노테이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의 근본적인 룰이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이러한 기본 조건들을 충실히 갖추고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불문율이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3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3) ​ 홍문표 ​ 4.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시학 ​ (1). 스타플레이어와 보다 좋은 시 ​ 모든 운동경기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특히 축구경기를 보면서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것은 우선 선수가 경기규칙을 잘 지키는 경우라고 했다. 그래서 경기규칙에 따른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경기하는 태도를 페어플레이(fair play)라고 한다. 따라서 페어플레이어는 경기에 대한 기본 규칙을 철저히 인지하고 이를 경기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이다.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시의 경우 시는 시적인 리듬과 메타포와 코노테이션을 충분히 알고 이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면 일단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으로 간주할만하다. 그런데 축구 경기를 보게 되면 규칙을 잘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싸울 뿐만 아니라 규칙을 잘 지키면서도 또한 다른 선수보다 재빠르고 날렵하게 정말 신기에 가까울 만큼 볼을 잘 다루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꼴 문을 가르는 돋보이는 선수를 본다. 이 때 우리는 열광적인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그를 스타플레이어(star player)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시단에서도 기본적인 시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시인보다 월등하게 감동이 오고 충격이 오는 작품을 쓰는 시인이 있다면 이는 분명 스타 시인이 아닐 수 없다. ​ 작품에 분명 리듬도 있고, 메타포도 있고, 의미의 코노테이션도 있는데 어째서 작품마다 감동이 다르고 떨림이 다른 것인지, 따라서 시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시는 모두 좋은 시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처럼 보다 감동적인 시는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똑같은 재료로 음식을 했는데도 음식 맛이 다르고 그 중에서도 더 맛이 있는 음식이 있는데 그 비밀은 또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좋은 시 위에 더 좋은 시의 해법이 있는 것이다. ​ 언어학자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랑그라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빠롤이라는 언어다. 랑그(langue)는 언어활동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룰의 언어이다. 반면 빠롤(parole)은 그 규칙을 바탕으로 하되 현장에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능력으로 개성 있게 드러내는 언어다.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바로 보편적인 룰, 시의 경우 제도와 관습이라는 장르적 룰이다. 이처럼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대화현장에서는 같은 규칙의 말이라도 억양 태도 단어 구사 등이 달라 반응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공통의 룰인 랑그에도 충실하지만 실제 사람들과 소통하는 현장에서 그때그때 개성을 발휘하여 설득력 있게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 문학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공통적인 장르적 룰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 창작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같은 소재 같은 주제라도 보다 뛰어나게 표현해 낸다면 이는 좋은 작품에서 보다 좋은 작품으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이처럼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되는 비밀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다 놀라운 상상력이나 보다 뛰어난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포괄적으로 말하여 필자는 보다 창조적인 시 즉 창조 시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이 창조 시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 장르의 기본적인 제도와 관습이 리듬 · 메타포 · 코노테이션인 만큼 보다 좋은 시의 조건은 보다 창조적인 리듬 ·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 보다 창조적인 코노테이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2).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리듬 ​ 앞서 시인의 꿈을 울렁거림이라 했다. 울렁거림은 놀라울 때, 충격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시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자 하는데 있다. 그런데 일상을 벗어나려면 변화를 위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 잔잔한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돌팔매질이 있어야 파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파동은 지속적일 때 보다 효과가 있다. 시에 있어서 리듬이란 바로 잔잔한 호수에 돌팔매질이고 그 돌팔매질의 강도와 지속성에 따라 물결도 다르게 반응한다. 좋은 시와 보다 좋은 시의 논의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 과거에는 시의 리듬을 엄격하게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충실 한 시를 좋은 시라 했다. 그 당시로서는 시의 리듬규칙을 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다보니 익숙해져서 충격도 약해지고 떨림도 약해졌다. 첫사랑은 정말 떨림이 대단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황홀했던 떨림이 무뎌진다. 우리에겐 계속 떨림이 필요하다. 떨림이야말로 삶의 변화와 개혁과 활력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적인 리듬 규칙을 깨고 새로운 리듬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현대 자유시의 리듬 정신이다. 그렇다면 자유시의 리듬은 언제나 고정적인 것을 거부한다. 고정적이고 기계적인 것은 고인 물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창조적 리듬이 시의 기본조건으로 제기되는 이유가 있다. 시의 존재이유가 독자에게 떨림과 충격을 주어 변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떨림이 더욱 신선하고 강도가 있고,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것이 되도록 계속 창조정신을 발휘해야한다. ​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 ​ 그대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곤하던 목너머 마슬로 가는 나지막한 이 오솔길 ​ 인기척 혼자내고 가는 항가새꽃 핀, 이 길 서벌 「뒤 늦게 캔 느낌」 ​ 수백 년 간 헌법처럼 지켜온 3장 6구의 시조리듬이 서벌에 이르면서 고정적인 리듬을 탈피하고 보다 창조적인 시조의 리듬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랑그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개성 있는 빠롤의 창조적 모험을 통해 충격과 떨림을 신선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철시조와 같은 3행시를 아직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떨림의 강도나 신선도에 분명 차이를 느끼게 한다.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꽃의 시듬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새로이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 ​ 김동명의 「내마음은」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의 다양한 반복리듬을 시도하고 있어 좋은 시이기도 하지만 너무 기계적이고 규칙적이어서 노랫말이 되었다. 각 연이 2행으로 고정 되어 있고 시어 구성도 일정한 틀에 맞춘 느낌이어서 개성 있는 리듬의 창조성이 약하다. 반면 김현승의 「눈물」은 행과 연과 시어들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떨림이 신선하다. 개성적인 리듬의 창조가 보다 떨림이 좋은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3).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 시어에 메타포는 시가 산문과 달리 보이지 않는 세계의 드려냄이고 기존의 존재 의미를 변형하거나 새롭게 창조한다는 데서 변별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시를 시이게 하는 열쇠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시의 문학성 · 시의 예술성 · 보다 좋은 시의 논거는 바로 얼마나 시가 창조적으로 메타포를 구사했느냐에 있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 시조 ​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박두진「하늘」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 먼 볕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꽃」 ​ 같은 시조라도 앞의 정철의 시조와 황진이의 시조는 리듬은 동일한데 너무나 시적 떨림이 다르다. 무엇 때문일까, 창조적 메타포의 문제다. 황진이의 시조에는 밤의 허리, 춘풍 이불, 굽이굽이 펴리라는 뛰어난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조 중 황진이의 시조가 가장 애송되는 것은 바로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 같은 박두신의 시이지만 「하늘」과 「꽃」은 충격과 떨림이 다르다. 「하늘」도 “하늘이 내게로 온다” “나는 하늘을 마신다”에서 하늘에 대한 시인의 메타포가 좋은 시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 하늘은 호수처럼 푸른 하늘이고 향기로운 하늘이어서 하늘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드러내거나 새롭게 변형하여 독자에게 다가오는 은유적 충격이나 떨림이 약하다. 다만 하늘과 동화되는 자연 친화의 일반적 주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꽃」은 꽃의 상투적인 인식을 벗어나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흘림”, “엇갈림의 핏방울”, 등의 다양한 메타포를 통하여 꽃의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롭게 드려내고 새롭게 변형하여 충격과 떨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가 구사되어 보다 좋은 시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략- ​ 5. 그렇다면 결국 좋은 시란 무엇인가. 좋은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동과 떨림으로 다가오는 시다. 그래서 시인은 저마다 떨림의 시를 꿈꾼다. 물론 저마다 최선을 다해서 쓴 창작인데 좋은 시니 떨림이니 하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가 하는 비판도 있고 보는 관점에서 다르다는 이론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떨림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그 떨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 그렇다면 그 떨림의 차이의 비밀, 즉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축구나 배구에도 룰이 있듯이 시와 소설도 각기 다른 제도와 관습이 있는 만큼 그 제도와 관습을 기본적으로 익히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시를 시답게 하는 핵심적인 제도와 관습, 그 기본적인 룰은 리듬, 메타포, 코노테이션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인은 이 기본적인 룰을 충분히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기본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보다 좋은 시를 쓰려면 보다 창조적인 리듬,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보다 창조적 코노테이션이 요구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기본 룰에 더하여 끊임없이 개성적인 창조적 리듬, 창조적 메타포, 창조적 코노테이션을 위하여 노력하는 창조시학의 스타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논의해본 창조시학의 골자다. 그렇다면 아직 스타 시인도 아니고 보다 좋은 시로 각광받지 못하는 오늘의 대다수 시인들은 시인도 아니고 시도 아니란 말인가. 이 점에 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다시 정리한다. ​ 첫째, 내가, 좋으면 좋은 시다. 요즘 같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 따라서 남들이 뭐라든 내가 좋고 내가 만족스러우면 좋은 시다. 그러한 작업 속에서도 자신에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 둘째, 그러나 남들도 좋아하면 더 좋은 시다. 시는 우선 내가 좋아야 쓴다. 그런데 남들까지 좋아한다면 나도 시적으로 구원받고 남도 구원할 수 있었으니 마땅히 더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셋째, 나도 좋고 남들도 좋을 뿐만 아니라 읽을수록 새롭고, 읽을수록 떨림이 있고 읽을수록 깨달음이 있는 시는 더더욱 좋은 시다. 시는 일시적인 유행가가 아니다. 일시적으로 유명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더더욱 좋은 시는 언제나 살아있고 떨림이 있어야한다. ​ 넷째,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좋아 하는 시는 명시(名詩)다. 시간과 공간과 인종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 누구나 좋아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명시다. 다섯째, 하나님까지 좋아하면 성시(聖詩,Theo Poetry)다. 인간들끼리만 좋아하는 시가 아니라 신들도 좋아할 수 있는 영적인 시, 천상의 시, 신령한 영역까지 떨림일 수 있는 시야 말로 인간적인 정서적 구원을 넘어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신령한 시가 될 것이다.  
4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4 댓글:  조회:754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1-1 일상의 시학과 메타포의 시학(1) ​ 홍문표 ​ 1. 들어가면서 (1) 몇 개의 이야기 ​ 개그;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 지식 중심 서열중심 개미와 베짱이, - 실용중심주의 풀라톤의 시인 추방설 - 내용중심주의 크라인 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 웰튼고교 키팅선생 토드 연극희망 부모 의사희망 자살 키팅 퇴출 학생들 오 캡틴 환송 –지식 실용중심 비판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인간 인공부화장 생산 매일 해피드럭, 존 부모의 자궁으로 탄생 반문명인 보호 구역 동물원 원숭이 취급, 죽으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다 술이다 시다 - 기술 진보 과학 중심 비판 별주부전, 용왕중병 토끼 간, 별주부 토생원 유혹 간이냐 용궁이냐- 물신주의 비판 ​ (2) 세상과 시인 세상은 객관적인 것, 합리적인 것, 물질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전통적인 것, 상식적인 것, 바로 일상적인 것들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 이를 달리는 세속적이니 통속적이니 현실적이니 함, 이러한 세상에서 시인의 존재감, 시의 본질 시의 목적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라신느의 “숨은신”, 신이 숨어 있는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모순된 현실에 타협하는 길, 현실과 대결하는 길, 현실을 도피하는 길, 현실을 초극하는 길, 시인의 길 – 현실을 뛰 넘는 것, 새 하늘 새 땅을 선취하는 것, 바로 현실을 초극하는 길,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시학의 원리가 웰렉과 워렌이 말한 “시는 리듬과 메타포다” metaphore(meta=over, phore=carryng) 넘다와 옮기다, 뛰어넘다, 초극하다, 따라서 시에서 모든 뛰어넘기의 논리가 바로 메타포의 시학이다. ​ 2. 뛰어넘기(메타포) 시학 정리 (1) 객관에서 주관으로 ㉠ 국화 : 명. 식물. 엉거시과에 속하는 식물. 줄기는 나무질화 하며 잎은 대개가 깊이 찢어지고 품종이 다양함. 대국. 중국. 소국으로 나눠지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하국. 추국. 동국으로 나누기도 함. - 현문사 「한국어 대사전」에서 ​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국화 옆에서」에서 ​ ㉠의 문장 :국화에 대한 객관적, 사전적, 학술적 서술, 국화의 생태, 종류, 특징들을 객관적으로 인식, 그러나 생명력 감동이 없는 문장 ㉡의 문장 : 국화에 대한 시인 자신의 주관적 견해, 비과학적 서술, 국화꽃과 소쩍새, 국화와 누님, 과학적으로 전혀 무관, 그런데 생명력, 감동, 풍요로움이 있음 객관적 세계 인식에서는 인간과 물질, 정서와 사상, 사물과 사물 모두가 개별화 고립화 되어 있다. 여기에 객관적 세계의 소외가 있고, 고독이란 비극이 있다. 따라서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뛰어 넘기는 바로 소외와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식이다. ​ (2) 이성에서 감성으로 ​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성(logos)과 감성(pathos)을 공유한 존재다. 그런데도 문명사는 이성, 지혜, 지식, 합리성, 과학성의 우월성만을 강조, 이성만능주의, “아는 것이 힘이다” 감성적 기능을 경시 최근의 뇌과학- 좌뇌-이성적 기능, 우뇌-감성적 기능. 두뇌의 좌측을 상한 사람은 이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우측을 상한 사람은 감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좌뇌를 상하면 수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뇌를 상하면 눈물이나 웃음을 모르는 목석같은 인간이 된다. ​ 최근의 천재교육- 우뇌를 키워라, 지능지수(IQ)보다 감성지수(EQ)를 높이는 것 신은 우리에게 좌뇌와 우뇌를 균형있게 개발하여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삶을 향유하도록 축복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좌뇌만 개발하여 이성적 사고, 이성의 문화에만 치중한 정신의 반신불수, 불구자의 삶을 살게 된다. 하버마스의 도구적 이성과 이성의 타락 - 지식, 기술, 이권만을 중시하는 이성중심주의가 인간의 물질적, 기술적, 지적, 권력 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적 이성으로만 수행되어질 때, 세상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으로 타락됨. 여기에 현대인의 비극이 있음. 오늘의 진짜 대도는 지식 기술이 우세한 고학력 계층의 정치 경제범, 여기에 이성을 뛰어넘어 감성의 메타포를 모색해야하는 당위가 있음 ​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얼굴이 보인다. 내게로 불 밝혀 가야 하는 땅이 보인다. 세상을 다 받아들고도 비어 있는 손 잠들지 못하는 나라 산맥이 일어서고 골짜기가 깊다. 강물이 꿈을 꾼다. 바다가 깨어 있다. 미래의 내 음성이 들리는 곳 손바닥 깊이 들어가면 고요하다. 이 고요한 길속에 길이 엇갈려져 끝이 없다. 혼돈과 창조의 거센 바람소리 우주의 숨소리 밤하늘 별의 운행이 화안히 비친다. - 이성선「손의 명상」에서 ​ (3) 추상적에서 구체적으로 감정은 섬세하고 예민한 것이어서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감정은 가장 주관적이며 개별적인 것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실 주관적이란 말은 사물을 공통된 것으로 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특성을 구별하여 보는 것이며 이는 개별적인 존재성을 살리는 시적 리얼리티이기도 하다.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라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 김수영 「사랑」에서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 김소월 「금잔디」 ​ (4) 과학적 진실에서 시적 진실로 ​ 시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이라면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 과학적 진리에 대한 우상- 과학만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에 이성중심의 인간들은 과학에만 진리가 있다는 우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과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진리와 패러다임- 최근에는 같은 과학이라도 관점이나 구성방식, 해석과정에 따라 그 진실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쿤은 어떤 사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전체적 관점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하였다. 가장 분명한 예로 물리학에서는 전기를 파장(波長)으로 보지만 화학에서는 미립자(微粒子)로 보는 것이다. 즉 어떤 패러다임이냐에 따라 과학에서조차 진실은 천의 얼굴을 갖게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패러다임조차 애당초 존재한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체계라는 것이다. ​ 시적 진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진리에 대한 겸허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즉 과학적 진실은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것이고, 종교적 진실은 종교적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며, 시적 진실은 시적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진실만이 진실이 아니라 종교적 진실도, 시적 진실도 각각 그들 나름의 진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 (5) 약물치료에서 시 치료로 ​ 일상을 뛰어넘는 문학의 최대 기능은 망과 정서의 해방감. 행복감, 만족감, 충만함을 주는 것인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catharsise)라고 했다. 인간은 어떠한 자극을 받는가에 따라 신체의 각 기관이 다양하게 반응하고 이에 따라 슬픔, 기쁨, 웃음, 노여움, 두려움, 놀라움, 그리움, 사랑스러움 등의 정서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시끄러운 소리는 불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는 소화기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짜증스런 기분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경쾌한 리듬은 소화기능을 돕고, 즐겁고 유쾌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바로 좋은 시는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 카타르시스는 바로 스트레스 해소, 정신 정서 심리적 힐링, 동시에 육체적 건강에 지대한 효과 - 시 치료, 문학치료 예술치료(대체의학)의 근거가 됨 ​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거나 양지바른 산자락에 앉아 시나 몇 줄 쓰고 싶다. ​ 청청한 하늘 바라보면서 새털구름 한 자락 잘라 백두산에는 바늘꽃 심고 한라산에는 미나리아재비 밤에는 초롱한 별빛을 세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나 부르고 싶다. ​ 가지는 꺾이어도 좋다. 허리는 부러져도 좋다. 잎들이 떨어져 너에게 짓밟혀도 좋다. ​ 봄이면 속살이 돋고 여름이면 또 꽃이 피는 것을 꺾어지면 어떠리 부러지면 어떠리 짓밟히면 어떠리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1-2 일상의 시학과 메타포의 시학(2) ​ 홍문표 ​ (6) 현실에서 상상으로 시, 또는 문학 그리고 예술은 어떤 존재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telling)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방법으로 감동하게 하는 세계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구체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구체적이란 어떤 존재를 감각적으로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showing) 방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예술의 행위는 바로 어떤 생각이나 심정을 구체적인 어떤 사물이나 사건으로 예를 들어 보여 주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여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사물을 이미지(image)라 하고 이러한 사고를 상상(imagination)이라 한다. ​ 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 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꺼야 ​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주는데 ​ 나무들에게도 정말은 눈이 있을 꺼야 ​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표현-“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 주는데” - 일상의 시학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표현-“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 거야” “나무들에게도 눈이 있을 거야” -메타포 시학, 이처럼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이 없다면 미래도 없고, 초월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삶의 확장도 없다. 그것은 시만이 아니라 인생도 그렇다. ​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 전봉건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 ​ (7) 낯익음에서 낯설음으로 ① 낯익음의 언어 ​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쉬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 반복적으로,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공식적인 언어는 이해는 있으나 감동이 없다. 바닷가의 파도소리, 친숙화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되었을 때 조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탈언어화 상태가 된다. 지각적인 의식의 언어가 생략될 때 남는 것은 기호뿐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호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이고 산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 존재하는 삶이란 이미 창조적 인간이 아니고 기계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비인간화의 무의미한 세계일뿐이다. ​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낯익음의 일상의 시 ​ ② 낯설음의 언어 시어의 참 기능 - 따라서 예술가가 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일상과 습관과 안일과 매너리즘의 권태다. 대상을 습관적인 문맥에서 뜯어내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함께 묶음으로써 시인은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기계적 반응(stock response)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texture)을 뛰어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바로 일상적인 낯익음의 용법의 일상적인 시학을 을 배제하고 보다 낯선 뛰어넘음의 메타포 시학 통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자유이고 해방이다. ​ 당신은 짐승, 별, 내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 됩니다 당신의 살갗 밑으로 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 이성복 「당신은 짐승, 별」 ​ (8) 워킹(walking)에서 땐싱(dancing)으로 ​ 시인 발레리는 산문과 시를 구분하면서 산문은 도보(walking)요 시는 무보(dancing)라고 했다. 도보 즉 걷기는 사건이나 행동의 시작이 있고 중간 과정이 있고 마침이 있다. 그러나 무보 즉 춤추기는 제자리에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시가 리듬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에 반복적인 리듬이나 메타포가 없다면 그것은 일상의 시학 ​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고 너는 내 욕망의 무지개가 되어 내 손에 가득한 장미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육질의 껍질을 벗고 날마다 비상하는 오월이 되어 육자배기로 돌아가는 자유가 되어 현재로 자족하는 서정시가 되어 아스라이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홍문표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 (9) 인접성에서 등가성으로 시인들이 시어를 선택하여 산문과 다른 낯설음을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야콥슨은 등가성(equivalence)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그는 시의 언어는 등가성의 규칙에 따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시어를 투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반 산문은 등가성의 원리를 선택의 축으로 하지만 결합의 경우는 접촉성에 의한다는 것이다. ​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의 「외인촌」에서 ​ 1) 일상어법       접촉성       접촉성                                   저       식사       한다     나 는 +     밥   을 +   먹는다     소인       끼니       때운다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2) 시의 어법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폭포     흐르는   퍼런   징소리     분수 처럼+ 흩어지는 + 푸른 + 종소리     빗물     뿌려지는   시퍼런   새소리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 산문의 문장은 낱말과 낱말이 인접성에 의하여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이고 시의 문장은 낱말들이 등가성에 의하여 은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다. 따라서 웰렉이 현대시는 은유(metaphor)다 라고 한 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시의 원리가 리듬이라는 것도 사실은 등가성의 원리에 있다. 어휘반복, 구절반복, 이미지반복, 의미 반복 등 모든 반복의 규칙은 바로 등가성의 원리와 일치하는 논리다. 시는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계열축의 언어를 선택의 축으로 하여 결합해 가는 언술이고, 산문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환유적 접촉으로 결합해 가는 언술이다. ​ (10) 분열에서 통합으로 메타포란 meta-over와 phore-carrying, 기존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기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옮긴다는 말이 또 다른 분열과 혼란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시에서 메타포의 본질은 분열에서 통힙이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 “인생은 나그네길”,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그대는 보름달” 등에서 마음과 호수, 인생과 나그네, 하나님과 목자, 그대와 보름달은 서로를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동일시하여 분열된 상태를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 과학적 사고는 사물을 분석하고 구별하여 너와 나를 분리하는 것이고 문명어 또한 모든 사물을 기호화, 상징화하여 모든 존재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상실되고. 주체와 타자의 분리,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조장했다. 메타포는 이처럼 신과 인간과 자연이 분열되고 소외된 정신적 절망에서 너와 나 주체와 타자의 화해와 통합을 통한 에덴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지상의 종교다.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어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 박두진의 「꽃」에서 ​ (11)통합에서 구원으로 ​ 메타포는 분열에서 통합이라고 했다. 이성과 과학은 세상을 분열시키지만 시의 상상과 메타포는 분열된 것들을 감성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다. 통합은 대결이 아니라 화해요 사랑이다. 그런데 분열된 것을 통합한다는 시정신은 좋으나 솔직히 “내 마음은 호수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등의 논리가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된다. 마음과 호수가 동일할 수 없으며, 죽음이 바위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상상과 메타포가 시적 방법이라 해도 이성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휠라이트는 시를 역설(paradox)이라했다. 여기서도 prra는 ‘넘어서다’이고 doxa는 ‘이견, 다르다’는 뜻이다. 시는 현실을 넘어선 다른 의견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것, 거기에 시적 구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파라독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설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기독교적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학에서도 상상이니 메타포니 하는 사실을 뛰어넘는 이 모든 역설들을 단지 기교로 볼 것인가. 그것은 분열에서 통합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러한 통합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단계에 이를 때, 진정 시적으로 구원된 경지라 하겠다. ​ 시인은 시를 왜 쓰는가. 취미인가, 심심풀이인가, 말장난인가, 분열된 세계를 사랑과 열정으로 통합하여 화해된 세상 모두가 하나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메타포의 시학은 바로 그러한 세상을 꿈꾸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지상의 종교다.  
3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3 댓글:  조회:714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9 생태주의와 생태시 ​ 홍문표 ​ (1) 21세기와 에코토피아 ① 21세기의 환상 정보통신의 혁명 - 앨빈토플러의 제3의 물결(농업-산업-정보) 지구촌시대. 디지털시대. 하이 퍼리얼리즘. 싸이버리즘 생명공학의 혁명 - 생명연장, 생명체조작, 헉슬리의「Brave new world」 신중심주의 - 인간중심주의 - 물신주의 - 과학신주의 ​ ② 자연파괴와 종말론 환경오염 - 지구온난화, 천재지변, 쓰나미 현상 생태계 파괴 - 우주, 생명, 인간, 유기적 관계, 먹이사슬 관계, 생존질서파괴 유전공학 - 생명 체계변화, 난치병, 괴물, 변종의 재앙 ​ ③ 인간중심주의의 허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 인간. 생명체 모두 피조물-자연 인간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담의 원죄 - 선악과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 의 계율)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 인간의 영원한 유혹) 아담의 후예들 -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헤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인간중심주의 - 이성중심주의 - 인간우월주의 인간 - 만물의 영장 자연. 생물 - 하등한 것. 파괴의 대상. 인간 욕망의 대상. 자연파괴 정당화. 과학기술의 발달 - 자연파괴 가속화. 농업시대 - 산업화. 자본주의. 공장공업, 대량생산. 대 량소비, 자본. 재화 돈 중심의 물신시대. 인간상품화. ​ ④ 휴머니즘 - 인간중심주의 - 이성중심주의 모든 사물의 가치화 계량화 모든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 플라톤 - 본질과 비본질. 진리와 비진리. 인간의 서열화 공자 - 도와 비도. 군자와 소인. 인간의 서열화. ​ ⑤ 플라톤과 공자와 이성중심주의 그들은 이성적 가치기준을 정하여 본질과 비본질, 도덕과 부도덕, 문명과 야만, 선과 악 등 이분법적 사고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서열주의는 귀족과 평민, 양반과 상놈,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 등 계급주의를 정당화했고 마침내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전쟁이나 계급투쟁을 위한 피의 숙청,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운 나치즘의 유태인 학살 등 민족주의, 제국주의, 계급주의,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파괴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 ⑥ 인간중심적 디스토피아에서 생태시의 에코토피아로 이처럼 인간 우월주의, 이성중심주의가 가져온 기술문명과 물신주의가 자연환경과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고 인간 생존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디스토피아(distopia)의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생태문제를 인식하고 모든 생명체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자생력을 회복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공존 공영하는 생태회복의 낙원(ecotopia)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것이 21세기 비평의 최대 화두일 뿐만 아니라 생태시(ecolyric)의 목표가 된다. ​ (2) 생태시의 형성 ① 생태시의 의미 생태시(ecolyric)라는 명칭은 헤켈이 제시한 생태학(ecology)과 서정시(lyric)의 합성어다. 생태학이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시가 사물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생태시는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관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된다. ​ ② 생태학과 생태시 생태학이란 특정한 유기체와 주변환경 간의 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생태학적 인식구조와 생명존중의 철학,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 환경보호 운동의 여러 이념이 생태시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형성한다. 생태시는 이 같은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에 근거하여 인간, 동물, 식물이 생태계의 변화에 어떠한 반응과 변화를 나타내는가를 사실적인 언어로 재생해내는 현대시의 한 장르이다. ​ ③ 기존의 시, 인간중심의 시 지금까지 시라고 할 때 공통된 조건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음악적인 언어, 상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시의 주체가 철저히 인간이라는데 있다. 인간의 사상, 인간의 감정만을 유일한 시의 주제로, 시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비록 사물이나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일지라도 이것은 인간의 사상을 자연에 투사하거나 동화하여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냈을 뿐이다. 따라서 자연은 다만 타자이고 수단일 뿐이고 주체나 목적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 ④ 생태시의 특징 생태시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사실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시이며 환경파괴의 사회적 원인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의 비판의식과 개혁의지를 일깨우려는 목적성을 가진 시다. 그리하여 생태시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모든 생명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생명체뿐만 아니라 자연환경까지도 인간과 유기적 공동체임을 인정하고 생명과 우주의 유기적 질서를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여기에 상생주의(相生主義, win-win theory)라는 21세기 철학이 있다. ​ ⑤ 생태주의와 환경주의 생태주의는 환경주의와 다르다. 환경주의자들은 자연 파괴의 문제를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견지한다. 그들은 인간의 생활공간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조성하기 위해서라면 주변의 자연환경을 충분히 가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끝내 인간중심주의다. 따라서 생태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차등의식, 소유의식을 갖는 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자연과 대등한 관계, 공존의 관계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의식 개혁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생태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평등을 내세우는 인간중심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자연과 우주 모두가 평등한 생태학적 민주주의, 절대의 민주주의다. ​ (1) 독일 중심의 생태시 ① 생태시 운동의 출발 ​ 생태시 운동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 독일어권에서 1950년대 태동기를 지나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살포 등 환경오염. 각국의 핵무기 개발 등에서 반전 반핵 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녹색당. 그린피스가 가동되고 1970년대는 독일의 경우 환경정화노력이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운동이 시로 구체화되어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가 제작된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시인 92명이 쓴 206편의 생태시 앤솔로지 ​ ②「시조새의 꿈」 - 파충류와 인간이 공존했던 생태학적 에코토피아 ​ 오랜 세월동안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수천 년 동안 늪처럼 이끼처럼 웃음을 머금고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예감하는 나, - 발터 헤레러의 「시조새의 꿈」에서 ​ ③ 물, 공기, 대지의 오염 ​ 우리는 대지의 살점을 도려내고 대지의 피부로부터 털을 깎듯 숲을 베어 냅니다. 더구나 구멍 숭숭한 상처 속에 아스팔트를 메꾸어 숨통을 틀어막지요 ​ 어느새 우리는 대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인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강도가 되어 밤낮 구별 없이 대지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 엘케외르트겐의 「대지」에서 ​ ④ 산업화, 도시화, 기술문명, 물신주의 ​ 우리 모두 마음껏 즐겨보자 우리는 쾌락의 칼로 하늘의 내장을 도려내 버렸다 천사들은 이미 노래를 멈추었으니 뮤직박스를 틀어라 광란의 재즈로 발을 뜨겁게 달구어라 - 다그마르 닉의 「증명」에서 ​ ⑤ 지구 멸망의 묵시록 ​ 어제 우리는 마지막 남은 늑대들을 쏘아 죽였다 이제 들판은 영영 정복된 셈이다 사과나무도 잔디도 우리의 것이 되었고, 세상은 온통 정원으로 변해가 된다 - 한스 위르겐 하이제의 「징후」에서 (2) 미국의 생태시 ① 미국생태시의 형성 미국에서 생태학과 문학의 관계는 19세기 미국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에머슨과 소로우로 거슬러 갈 수 있지만 네이쳐 라이팅(Nature Writing)이라는 독자적인 장르명으로 생태학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시가 씌어진 것은 197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나 머윈(W.S Merwin), 시어도어 레스키(Theodore Roethke), 에이드리엔 리치(Adrienne Rich) 의 시들이 생태학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② 게리스나이더의 「거북이 섬」 해변가에 위치한 유레카. 핵발전소, 쌓아 논 목재더미. 타지 사람이 주인인 제재소들. 나무들이 잘려나간 산둥성이의 그루터기. 바다 안개 언저리에 서 있는 유레카. 여기 사는 사람은 누구도 이 마을을 다스릴 힘이 없다. - 게리 스나이더의 「유레카에서의 예술인들 모임」에서 ​ (3) 생태시의 두 유형 ① 고발적, 사실적, 르뽀적 생태시 ​ 1952년 런던 상공에 하얗게 피어오른 구름떼가 불과 일주일 만에 성인 4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 그 구름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스모그 이것은 스모그(연기)와 포그(안개)를 합쳐놓은 이름이다 (화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산화황과 질산이 결합된 물질로서 햇빛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흔히 광화학 스모그라고도 한다) - 한스 크리스토프 부흐의 「시 아닌 글」에서 ​ ② 은유, 상징 등을 사용한 세련된 문학형식의 생태시 ​ 새의 몸뚱이는 풍만하다 뼈들은 바닷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피에 젖은 감람 잎사귀들이 앞으로 앞으로 흘러가는데 깃털들이 흘러가고 물고기들은 날아가며 나는 목이 마르다 - 에리히 프리트 「홍수」에서 ​ (1) 생태주의와 동양사상 ① 불교와 생태주의 ​ 불교에서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초목조수에 깃들인다는 전주설(轉住說)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과 자연이 적대관계가 아니라는 생명사상이고 특히 자타불이(自他不二) 라는 아트만(Atman)사상도 생태주의와 관계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성불(成佛)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적 요소가 있다. ​ ② 노장사상과 생태주의 노장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 만물일체(萬物一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일체 인위적인 사고와 행동, 공자적 태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생태주의와 일치하나 적극적인 친자연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허무를 강조한 소극적인 생태주의라고 할 수 있다. ​ (2) 한국생태시의 형성 ① 과거 한국의 시와 생태 과거 한국시는 생태학적 관심보다 자연에 대한 관심, 향가에서 주술성, 고려가요에서 보는 현실 도피처로서의 자연, 조선조에서 보는 불변성에 대한 도덕적 가치, 서경적 자연, 현대 서정시들이 보이고 있는 심미적 자연, 모더니즘 시가 보여주는 탈 개성적 자연들이다. ​ ② 생태시의 확인 우리 문학사에서 생태문제가 거론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다. 사회단체로 환경보호단체들이 있었고 정부에 환경청이 생긴 것도 역시 이 시기에 이르러서다. 생태주의 비평으로는 신동춘, 최병현, 손유성, 이동승, 박이문, 송용구, 김욱동, 문덕수, 홍문표 「한국생태시의 과제」(1991)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 고진하와 이경호가 엮은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가 출간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연대의식이 가시화되었다. 그밖에도 김지하의 「중심의 괴로움」 신진의 「강」 강남주의 「흐르지 못하는 강」 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 고진하의 「우주배꼽」 정현종의 「한꽃송이」 문정희의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송용구의 「풀피리 소리보다 향기로운」 홍문표의 「지상의 연가」 「나비야청산가자」 등이 있다. ​ (3) 한국 생태시의 유형 ① 환경파괴 실상을 르뽀 형식으로 고발한 작품 ​ 그날 그 도시에 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수돗물을 마신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게 설사와 구토 피부병을 시작했고 임신중인 산모들이 태아를 유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 김용락의 「대구의 페놀수돗물」에서 ​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사옵니다. 낮은 땅의 뜻만 땅에서 창궐하고 이사옵니다. 동맥경화에 걸린 샛강과 폐암에 걸리고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공장들 피가 맑아야 한다는 동의보감은 휴지가 되고 있사옵니다. 자외선이 쏟아지는 하늘 구멍을 향해 사람들은 대패질을 계속합니다. - 강남주의 「비행기에서 보는 세상」에서 ​ ② 생태파괴로 인한 종말, 묵시록의 언어 ​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자면 흘러내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 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 최승호 「공장지대」 일부 ​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이 일어날 때의 시간인데도 산의 그늘만이 길게 뻗쳐 있다 햇빛이 해골의 눈 속을 통과하여 바람이 불고 오늘은 눈이 내린다 지구는 혼자 외로이 겨울을 빠져나가면서 공중에 떠 있을 분 인류는 모두 어디에 갔는가 - 고형렬의 「지구묘」에서 ​ ③ 생태주의 먹이사슬의 문화. 생물 평등주의 그 마지막 희망 ​ 똥보면 베먹고 싶어 새벽 샘물 샘 뒤 언덕 위 산죽닢 스쳐 오는 바람을 마셔 동트는 분홍 산봉우리 흰 안개구름 마셔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 먹고 싶어 내 몸이 곧 흙이어설 게야 흙이 똥을 마다 안함 오곡이 장차 가득가득히 익어 끝내는 열매 열리게 될 터이어설게야 똥 속에 배시시 애린이 웃어설 게야 꼭 그럴 게야 - 김지하의 「똥」에서 ​ 올해도 꾀꼬리는 날아왔다 마음 놓인다. 꾀꼬리야, (걱정 많은 생명계의 균형의 숨은 움직임을 번개처럼 알리니) 네 소리의 품속에 안기고 또 안긴다. 네 소리의 경전에 비하면 다른 경전들은 많이 불순하다. 번개처럼 귀밝히며 또한 천지를 환히 관통하는 이 세상 제일 밝은 광음(光音), 새소리! ​ 아, 올봄도 꾀꼬리는 날아왔다. 1991년 5월 7일 오전 9시 43분. - 정현종의 「한」에서 ​ 우리집 아이들은 딸기를 먹을 때마다 신을 느낀다고 한다 ​ 태양의 속살 사이사이 깨알같은 별을 박아 놓으시고 혀 속에 넣으면 오호! 하고 비명을 지를 만큼 상큼하게 스며드는 아름다움 잇새에 별이 씹히는 재미 문정희의 「딸기를 먹으며」에서 ​ 늘 푸른 강물이듯이 나는 당신의 목덜미를 잡고 당신은 내 외로움의 등줄기를 잡고 할딱거리는 대낮의 정사처럼 엉클어지는 운명이게 하소서 바다는 강물의 발목을 잡고 강물은 청산의 겨드랑을 잡고 해적선 노예들의 족쇄처럼 화인 맞은 엉덩이의 문신처럼 나는 당신의 폭력이 되고 당신은 나의 눈물이 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 훠이훠이 날아가는 서역 구만리 홍문표의 「늘푸른 강물이듯이19」에서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0 페미니즘과 여성시 ​ 홍문표 ​ (1) 페미니즘 운동 ① 아담과 이브 지상의 역사는 누가 쓰기 시작한 것일까. 아담일까. 이브일까.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었겠지만 에덴에서 득죄하고 추방되는 인간사의 주체는 단연코 이브였다. 어느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원시시대는 여인이 중심인 모계사회였다. 그만큼 당초의 여성은 강한 존재였다. 그러나 농경사회 이후 노동력이 생계의 수단이 되면서 또한 자본과 화폐가 모든 가치와 삶의 중심이 되면서 차츰 남성의 역할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이제 남성 중심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는 철저히 여성을 차별화하고 복종하게 하고 지배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문화다. ​ ② 분노한 이브 사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는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하였다. 그만큼 공평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는 오랜 동안 남성중심으로 왜곡되어 왔다. 최근 여성들이 이러한 불평등의 역사에 반기를 들었다. 남성중심의 역사를 바로잡고 여성을 여성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feminism)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문학이나 페미니즘 시는 여성의 제값 찾기를 위한 모든 활동이다. ​ ③ 경계허물기 시대의 전략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그리고 생태주의가 제기되면서 본격화된다. 이들 논리의 핵심은 기존의 모더니즘이 이성중심주의, 언어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남녀차별이 있고 서열이 있고 계급이 있고 불평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지금까지의 서구문화는 이성=합리=남성=진리, 감성=불합리=여성=비진리라는 등식의 가부장제, 남근중심주의였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사고체계의 해체를 주장했다. ​ ④ 여성비하의 논리 밀레트(K. Millet)는 『성의 정치학』에서 남녀문제를 기본적으로 성(性)의 권력투쟁으로 파악한다. 남자들이 그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고 여성들을 영원히 복종시키기 위해 거짓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그것을 진리로 제도화시킴으로써 여성들을 억압하고 속박해 왔으며 거기에 세뇌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이데올로기 속에 안주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제도가 가부장제(partriarchy)이고 대표적인 이데올로기가 바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라고 보았다. ​ 한편 남녀의 문제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보봐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을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라서 여성의 집단적 자각만이 이 불평등한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엘만(M.Ellmann)은 여성에 관한 사고에서 미국문학에 나타난 상투적인 여성의 속성을 보면, 무정형성, 수동성, 불안성, 제한성, 실용성, 순결성, 물질주의, 정신주의, 비합리성, 순종선, 반항성 등 11가지 유형이라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천사와 마녀라는 이원화된 이미지로 구분될 수 있다. 집안의 천사는 현모양처형 여성으로, 가사노동과 육아에 속박되어 가정의 평화를 위한 순종적인 여성형이고 마녀형은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주체적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고안한 모든 악의 조력자로서 여성형이다. ​ ⑤ 최근 여성문학의 과제 최근 여성의 문제나 여성의 글쓰기의 문제를 보면 여성의 역사와 여성 문학사의 재구성, 문학적 정전의 문제, 여성과 대중문화, 사회가 구성하는 성(gender) 개념과 생물학적 결정주의, 양성(androgyny)개념, 동성애 문학, 성적으로 읽기, 여성적 글쓰기의 본질과 이 글쓰기를 생산하는 조건, 성차별, 여성적 언어의 특수성과 이런 언어의 존재 여부, 가부장적 언어의 전복 문제, 주체성과 성적 정체성의 구성, 여성적 인식론의 가능성 등이다. 여기서 페미니즘 문학으로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여성으로서 글읽기, 여성적 글쓰기, 성차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 (2) 전통적인 여성시 양상-복종 애원 남성중심 ① 백제시대의 정읍사 달하 노피곰 도다샤 달이여 높이 좀 돋으시어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아! 멀리 좀 비치옵소서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 져재 녀러신고요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긔야 즌 대랄 드대욜세라 아! 진 곳을 디딜까 두려워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든 놓고 오십시오 ​ 어긔야 내 가논 대 졈그랄셰라 아! 내 님 가는 그 길 저물가 두려워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 출전 : 악학궤범, 백제시대 어느 행상의 아내, 행상을 떠난 남편의 무사 귀환 염원. ​ ④ 고려시대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날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증즐가 대평성대 ​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나더라 어찌 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증즐가 대평성대 ​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붙잡아 두고 싶지만 선하면 아니 올셰라 서운하면 오지 않을까 두려워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증즐가 대평성대 ​ 셜온님 보내압노니 나난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 나난 가자마자 다시 오소서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증즐가 대평성대 ​ 임과의 이별의 정한 기 - 원망적 애소 , 승 - 애소의 고조, 전 - 전제와 체념, 결-기도자적 애소. ​ ⑤ 조선조의 여류 시조들 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春風니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 ​ 임이 가신후 소식이 頓絶하니 窓밖에 櫻桃花가 몇 번이나 피였는고 밤마다 燈下에 홀로 앉아 눈물겨워 하노라 - 송대춘 ​ (1)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의미 ① 남성의 영원한 타자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은 영원한 타자다. 남성은 자기의 주체를 확립하려 할 때 그 주체를 한정하고 부정하는 타자가 필요했고, 따라서 여성은 비본질적인 타자가 되었다. 타자로서의 여성은 언제나 종속적이고 부차적이고 부정적이다. ​ ②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이분법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욕망이라고 보고 특히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남성 - 지팡이, 양산, 막대기, 나무, 모자, 칼, 창, 총, 수도꼭지, 연필, 넥타이, 뱀, 열쇠, 산, 하늘 등 여성 - 구멍, 웅덩이, 동굴, 항아리, 병, 트렁크, 상자, 방, 호주머니, 배, 종이, 책, 테이블, 달팽이, 조개, 교회, 사원, 숲, 사과, 복숭아, 구두, 마당, 셔츠, 물, 바다 등 융은 인간의 정신 내면에는 남성의 경우는 아니마 (anima), 여성의 경우는 아니무스 (animus)라는 심리적 원형을 지닌다고 했다. 아니마의 원형은 남성의 정신에 있어서 여성적 측면이며, 아니무스의 원형은 여성의 정신에 있어서 남성적인 측면이다. 아니마(anima) - 남성의 여성적 측면, 영원한 여성상, 처녀, 여신, 천사, 마녀, 악마, 거지, 창부, 친구, 악녀, 베아트리체, 헬렌, 이브, 춘향, 심청, 소, 고양이, 호랑이, 뱀, 동굴, 몽상, 꿈, 언어, 이상적 자아, 밤, 휴식, 평화, 부드러움, 선 아니무스(animus) - 여성의 남성적 소망, 명배우, 권투선수, 정치가, 지도자, 이상적 남성, 독수리, 황소, 사자, 창, 탑, 현실, 역동성, 낮, 염려, 야심, 동물, 능동, 분열, 합리적 추상적 사고, 국가, 사회. ​ ③ 신성과 타부로서 여성 그러나 여성을 타자로 해도 끝내 자연현상은 여성을 신성시하고 타부시한다. 이는 모든 생명들이 대지와 물에서 탄생하고 여성으로부터 종족이 탄생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생명은 대지로 돌아간다. 이는 여성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지는 탄생과 죽음이 있고 여성도 탄생과 죽음이 있다. 어머니인 대지는 그 뱃속에 그녀의 아이들의 유골을 내포한다. 인간 운명의 실(系)을 쥐고 있는 것은 여성인 것이다. 전설 속에 죽음의 모습이 여성의 얼굴로 되어 있고, 죽음 자체의 주재가 여성의 소관임은 흔히 쓰이는 「운명의 여신」 이라는 말이 뒷받침해 줄 것이다. ​ ④ 마녀재판과 처녀귀신 서양에서는 모든 불행이나 잘못된 일에는 늘 마녀나 마귀할멈 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7-8세기에는 이단이나 이상한 짓을 하는 여인을 잡아 처형했다. 동양에는 처녀 귀신이 귀신 중에도 가강 무서운 귀신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속설도 모두 남성중심주의가 낳은 것들이다. ​ (2) 남성의 여성지향적인 시 ① 여성 편향의 시 이상의 논거에서 볼 때 남성의 영웅적인 모습, 또는 독재성을 드러낼 때는 여성성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독재자나 영웅들은 여성을 제외한다. 그러나 남성이 또는 남성적인 사회가 죽음이나 탄생의 생사문제, 극단적인 선과 악의 문제. 민족, 집단, 사회가 이념적인 것을 지향할 때 감성적인 삶을 지향할 때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남성은 모성이나 여성을 지향하게 된다. 이브의 원죄를 저주한 남성의 역사는 마리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찾게 된다.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특히 일제하에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여성적 편향(female-complex)라고 한다. ​ ② 모성지향적인 시(mather- complex) 나는 王이로소이다 나는 王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 아들 나는 王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十王殿에서도 쪼끼어난 눈물의 王이로소이다. ​ 「맨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럿케 어머니서 물으시면은 「맨처음으로 어머니 받은 것은 사랑이엇지오만은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겟나이다 다른것도 많지오만… -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5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축축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니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신석정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 ③ 님 지향의 시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緣연分분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平평生생애 願원하요데 한데 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삼 일로 외오 두고 글이난고. 엊그제 님을 뫼셔 廣광寒한殿뎐의 올낫더니 그 더대 엇디하야 下하界계예 나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킈연디 三삼年년이라. 臙연脂지粉분 잇내마난 눌 위하야 고이 할고. 마음의 매친 실음 疊첩疊첩이 싸혀 이셔, 짓나니 한숨이오, 디나니 눈물이라. - 정철 「사미인곡」에서 ​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첨에 이별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하였읍니까 다른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하였읍니까 ​ 나는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한 줄로 압니다 만나고 이별이 없는 것은 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별하고 만나지 않은 것은 님이 아니라 길가는 사람입니다. - 한용운 「최초의 님」 ​ ④ 누이 지향(sister-complex) 의 시 ​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바져나와 바닷가에서자. ​ 비로소 가슴울렁이고 눈에 눈물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 비늘을 닮아야하리. 천하에 많은 할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 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박재삼 「밤바다」 ​ ⑤ 여성화자의 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그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덜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1) 개화기에서 1960년대까지 ① 이 시대 여성문학 개관 개화기 문학에서 여성문제가 거론된 것은 1900년 이해조의 「자유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부인들이 모여 남성에게서 억압받는 여성의 인권문제를 질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성의 문제가 시로 거론된 흔적은 찾기 어렵다. 1920년대에 김명순, 김원주, 나혜석 등 여성문인이 등장하는데 많은 에피소드만 있고 작품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930년대는 김오남, 노천명, 모윤숙, 백국희, 장정심 등이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여성 시인들이다. 그 중에서는 단연 모윤숙과 노천명이 돋보인다. 모윤숙이 기교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자유분방한 정열을 표출하는 시인이었다면, 노천명은 단아하고 명상적이며 회화적인 절제된 정서를 표현하는 시인이었다. 이 두 여성 시인들의 대조적인 시 세계를 후대에 와서도 여성 문학의 두 흐름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 광복, 좌우 대립, 6.25와 산업화 초기 단계를 거치는 동안 매우 두터운 여성 문인층이 형성되었다. 이때 활발한 활동을 보인 여성 시인들로는 이영도, 조애실, 이영희, 노영란, 홍윤숙, 김남조, 허영자, 김지향, 김하림, 김여정, 임성숙, 김윤희 등을 꼽을 수 있다. 많은 문예지들과 일간지의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한 이들 여성 문인들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말까지 이른바 여류문학의 전성기 동안 질적 양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시에 대하여 평자들은 ‘과거지향적’이며 ‘단조로운 방법으로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으며 ‘정서적인 긴장감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② 이 시대 여성시 애정 모티브 임이 부르시면 달려 가지요. 금띠로 장식한 치마가 없어도 진주로 꿰맨 목도리가 없어도 임이 오라시면 나는 가지요. ​ 임이 살라시면 사오리다. 먹을 것 메말라 창고가 비었어도 빚덤이로 옘집 채찍 맞으면서도 임이 살라시면 나는 살아요. ​ 죽음으로 갚을 길이 있다면 죽지요. 빈손으로 임의 앞을 지나다니요. 내 임의 원이라면 이 생명을 아끼오리. 이 심장의 온 피를 다 빼어 바치리다. ​ 무엔들 사양하리, 무엔들 안 바치리. 창백한 수족에 힘 나실 일이라면 파리한 임의 손을 버리고 가다니요. 힘 잃은 그 무릎을 버리고 가다니요. - 모윤숙 「이 생명을」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 ​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 「사슴」 ​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 김남조 「너에게」 ​ (2) 1970년대 이후 여성시 ① 이 시대 여성시 개관 1970년대 민중문학의 열기를 거쳐 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시, 90년대의 생태주의, 사이버리즘의 문화현상은 그동안 모더니즘이 고집해온 모든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이러한 세계의 변화는 여성의 경우 여성해방은 물론 여성의 정체성 찾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 70년대에 등장한 강은교의 사색적 허무주의, 그리고 김승희의 파괴적 내면주의는 고정희의 씩씩한 민중적 상상력과 짝을 이루고 있으며, 그녀들의 가열한 내면세계와 시대정신은 80년대의 최승자에 이르면 가장 치열한 종합을 이룬다. 이어 등장한 김혜순의 블랙유머를 기조로 한 경쾌한 악마주의는 성숙한 모성적 인식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황인숙은 아주 독특한 감각적 시세계를 그려 보인다. 90년대 시단의 한 징후로 보이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를 볼 수 있으며, 이선영,이진명 등의 한국 여성시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시인들을 한 줄에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원칙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들이 개인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 그녀들은 특히 남성들에 의하여 「여성적」이라고 여겨져 왔던 시문법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여성이 되기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이다. ​ ② 페미니즘 시대의 여성시 보기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허허벌판에 누워/ 깨끗한 남자를 기다린다.// 불꽃이 울면서 짐승같이/ 젖무덤 속으로 기어든다.// 나무들은 간지러워/ 푸른 소리를 지르고// 드디어 그 남자가/ 길을 무찔러오는 소리// 부끄러운 머리채를 이끌며/ 내가 어둠과 함께 도망친다.// 바람 지나가면/ 날개가 크게 걸리는/ 거미줄을 타고/ 얼굴 모르는 신과 만난다.// 뱀과 미친 깃털이/ 낄낄거리며 흩어진다.// 모든 것을 용납하는/ 그 야수의 무덤 속으로/ 나는 바삐 숨는다. - 문정희 「떠오르는 방」 ​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을 낳았기 때문에 국토분단 장벽보다 먼저 민족분단 장벽보다 먼저 남녀분단 장벽허물 일이 급선무 - 고정희 「여성해방출사표」에서 ​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어떤 마법의 한 마디를 이 타들어 가는 갈색 육체 위에서 간직할 수 있을까. 푸른 공작새를 위한 어떤 먹이. 어떤 황홀한 불의 최면 상태가 형태도 없이 떠가는 이 피의 방주를 다시 완전케 할 것인가 어떤 주문의 모차르트 어떤 장미의 원소. 어떤 태양의 기억이? - 김승희, 「어떤 흑연빛 시간의 오이디프스」 ​ 나의 눈 코 이 어깨 허리 다리 발 심장 신장 대장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이 모두가 한번은 버려져야 할 것들이다 낡아가는 것들. 종종 고장이 나고 마침내 수명이 다하는 것들과 함게 살아간다 그 어느 해 가을과 또 다른 해의 가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례로 그랬듯 버려질 엄마 아버지 남편 그리고 나 버려지기 전까지는 손발 닳도록 살아간다 - 이선영, 「버려진 냉장고」 ​ 조용하여라. 한낮의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만상이 흘러가고 만상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 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해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 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양식을 이야기 하리라. 만상이 흘러가고 만상이 흘러가고 - 이진명, 「청담(淸談)」  
2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12 댓글:  조회:761  추천:0  2019-12-21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47 ​ 시와 사회 시대 역사 ​ 홍문표 ​ (1) 문학과 사회 ​ 문학과 사회의 관계는 운명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은 개별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지만 태어나고 보면 가족이 있고 시대가 있고 국가가 있고 사회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사회라는 집단 속에 태어나 그 사회와의 관계를 맺고 살다 가는 사회적 존재다. 그러기에 문학적 상상력도 시대 역사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바다 속에 있는 한 문학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주제를 배제할 수 없다. 거기엔 사회적 언어가 있고 문화가 있고 정치. 경제 등 다양한 공동체의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날드는 문학은 사회적 표현이라고 했고 테느는 문학을 종족, 시대, 환경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연극은 인생의 거울이니 소설은 시대의 반영이니 하는 말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 (2) 삶의 두 세계 - 문학의 두 세계 ①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 그런데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니 문학을 사회의 거울이니 하는 논리만 고집하면 개인적 존재 개체적 존재로서의 삶이나 독자적인 문학성 등이 무시 된다. 따라서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나 존재가치를 논할 경우 크게 구분되는 것이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고자 하는 가치관에서는 문학도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독자성을 강조하게 되지만 인간의 가치를 더불어 사는 삶,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삶을 최대한 내세우고자 하는 인생관에서는 윤리적인 문학, 공리적인 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늘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 하는 이 이분법적 세계관의 굴레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 ② 상반된 두 세계의 길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유물론과 유신론, 정치나 경제에서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 갖가지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갈등하고 투쟁하는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된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헤겔의 말처럼 정반합의 변증법적 통합이니 발전이니 진보니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어느 한쪽만을 절대 진리나 가치로 하여 다른 쪽을 적대시하고 무참히 파괴하는 피의 역사를 만든다는 데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③ 문학의 두 갈래길 문학사에서도 이 두 세계는 개인적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을 만들었고 개인적인 문학이냐 사회적인 문학이냐로 끈질긴 논쟁의 역사를 만들었다. 교훈론과 쾌락론이 그 출발이다. 그 뒤 사회적 상상력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모방론, 반영론, 목적론, 계몽주의, 계급주의, 사회정의, 휴머니즘, 공리주의, 역사주의, 진실성 등 갖가지 사회적 세계관의 문학론을 만들어 깃발을 흔들었고 개인적 상상력은 본질주의 존재론, 모더니즘, 순수문학, 무목적의 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 심미주의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형식주의 등 개인적 세계관의 문학론을 만들어 또다른 깃발을 흔들었다. ​ ④ 상생과 상호보완으로 사회적인 시의 이해 최근 우리문학사에서도 내용이냐 형식이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순수냐 참여냐 진보냐 보수냐의 대립에서 갈등해왔고 문학단체 마저 양분되어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글로벌 시대로 전환하면서, 경계 허물기 시대,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종언, 다양성, 상호보완, 상생의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개인적인 상상력의 시와 사회적 상상력의 시는 대립보다 다양성 상호보완이란 측면에서 보아야하며 그러한 입장에서 사회의식의 시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3) 사회적 상상력의 다양한 문학 ①사실주의 문학과 이데올로기 문학 ​ 문학이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거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역사주의 문학론이나 사회학적 문학론은 그렇게 보았다. 그리하여 사회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사실주의(realism)라고 했다. 그런데 역사나 사회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 가는 공동체적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엔 삶의 목적과 윤리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한 당위의 논리를 진실이니 정의니 가치니 하는 것으로 이념화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이데올로기(ideologie)는 넓은 의미로 세계관, 가치관, 사상, 기본적 사고 방식이지만 행동지향적인 신념 체계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고전문학의 공통된 주제는 권선징악이다. 근대사상의 주제는 자유와 평등이다. 여기에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고 계급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다. 자유와 평등의 해석과 실천의 차이가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 ②변혁의 수단으로서 문학 그런데 문학의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 나머지 문학이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고 변혁을 도모하는 수단이라는 논리로 발전할 경우, 이는 상상의 문학이나 감성의 문학이 아니라 무기로서의 문학, 칼로서의 문학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반영론과 당위론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는 당연히 그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극단의 논리에서는 문학의 예술성이니 독자성이니 하는 것들은 유보 될 수밖에 없다. 로마의 호라티우스가 문학이란 쓰디쓴 철학을 약탕기에 달콤한 꿈을 바르는 것, 즉 문학당의설(文學糖衣說)을 주장한 것이나 도를 전하는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았던 유가들의 문학관이나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에 복무하는 문학을 말한 것들은 모두가 사회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1920년대 프로문학론에서 박영희는 “문예의 전목적은 작품을 선전 삐라화 하는데 있다”라고 했고 1950년대 김일성의 교시에는 문학이란 “인민들의 수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예리한 무기가 되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 ③ 우리에 관한 다양한 문학 문학의 사회적 관심은 윤리나 정치적 목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몽문학, 종교문학, 민족문학, 대중문학, 도시문학, 농촌문학, 노동자 문학, 민중문학, 계급문학, 생태문학, 여성문학, 사이버문학 등 나 아닌 우리에 관한 것이면 그 어느 것도 사회적 소재가 되고 주제가 된다. ​ ④한국 현대문학사와 사회적 상상력 개화기에는 개화계몽을 위한 계몽문학, 일제하에서는 항일민족주의문학, 계급주의를 수용하면서는 프로문학, 해방 공간기에는 좌익문학 우익문학, 1960년대는 참여문학, 1970년대에는 농민문학, 민중문학, 1980년대에는 노동문학, 통일문학 1990년대에는 생태주의 문학, 페미니즘문학 등 시대마다 우리, 민족, 역사,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문학으로 시로 드러내었다. 특히 북한의 경우는 광복이후 현재까지 줄곧 일관된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이나 주체사상문학의 전체주의적 당위를 위한 수단으로 문학이 봉사되고 있는 것이다. ​ (4) 고대시와 재도지기(載道之器) ① 고대시가의 서정성 우리의 시사에서 고대시가의 확인은 고조선의 「공무도하가」 고구려의 「황조가」 백제시대의 「정읍사」 신라시대의 향가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가시리」 「청산별곡」등을 볼 때 오히려 서정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 펄펄나는 저 꾀꼬리여 암수가 서로 정답구나 나의 외로움을 생각하니,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오. 고구려 유리왕 ‘황조가’   ​ ② 재도지기의 시 그런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서정적 전통을 볼 수도 있으나 치국이념이 유교적이어서 충효 등 교화적인 시가들이 많다. 이 시대 문학관은 공자의 사무사(思無邪) 주자학의 문학이란 도를 싣는 그릇 즉 재도지기(載道之器), 도덕적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 정철 ​ (5) 개화 계몽기의 교화시 ① 풍속개량과 교화 개화기 박은식은 「서사건국지」서문에서 소설이란 풍속계급과 교화정도에 관계가 심한 것이라 했다. 윤상현은 「천희당시화」에서 시는 국민언어의 정화라 하면서 건강한 시정신을 요구했다. ​ 잠을 깨세 잠을 깨서 사 천년이 꿈속이라 만국이 회동하여 사해가 일가로다. ​ 구구세절 다 버리고 상하동심 동덕하세 남의 부강 불어말고 근본 없이 회빈하랴 - 개화기 가사에서 ​ (6) 계급주의 이념시 ① 카프의 시단 1925년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FP)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계급주의 시를 쓰게 된다. 계급주의란 사회를 유산자인 브르조아와 무산자인 프롤레타리아로 구별하고 이러한 계급모순을 타파한 무산자 중심의 평등사회를 실현한다는 이념으로 시는 계급혁명이란 목적을 위하여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 ② 임화, 권환 의 경우 ​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에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안었에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잇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 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 - 임화 「우리오빠와 화로」에서 ​ ××과 끝까지 싸우게 하는 그대를 우리는 다만 한 광부 우리들의 좋은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다만 침착하고 세상일 잘 알고 정다운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다만 한 좋은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 그러다가 인제야 알았다 그대를 ×들의 손에 뺏기고 난 인제야 그대를 다른 많은 용감한 동무들과 같이 ××× 에 끌려 보내고 난 뒤 한달 된 인제야 알았다 그대도 우리의 가장 미더운 지도자의 한 사람 땅 밑을 파고 다니는 숨은 지도자 조선의 ××의 한 사람인 줄을 - 권환 「그대」에서 ​ (7) 항일 민족시인 ① 일제하 시인의 선택 일제 36년간 일본의 총독과 일본의 헌병, 순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인의 선택은 일제에 굴복하거나 회피하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제하에 형무소를 드나들며 항거한 몇몇 시인들이 있다. 항일민족 시인이란 작품으로만 항일 정신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항일하고 작품으로 항일한 시인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삶은 늘 영어에 있었고 그들의 목숨도 무사하지 못했다. ​ ③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 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 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④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 내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깝치지 : 재촉하지 , 지심 : 기음 ​ ⑤ 이육사의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 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⑥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2) 식민지 시대 궁핍한 현실증언 ① 오장환의 「북방의 길」 눈 덮힌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 ② 이용악의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 - 중략 - ​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짓두광주리 : 반짓고리, 갓주지이야기 : 무서운이야기. 글거리 = 그루터기.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8 광복 이후 사회적 역사적 상상력의 시 홍문표 ​ (1) 광복의 감격과 좌우익의 시 ① 광복의 감격과 좌우익의 다른 목소리 1945년 광복은 전 민족적 감격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16일 과거 프로문학에 참가했던 좌익 문인들은 조선문학건설 본부를 만들고 민족진영의 우익은 1946년 전 조선 문필가 협회를 만들었다. 또한 우익에서는 「해방기념시집」 좌익에서는 「연간조선시집」을 만들어 각각 광복의 감격을 표현했다. ​ ② 해방기념시집과 우익의 시 ​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어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 사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 환희 트이는 이마 위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 조지훈 「산상의 노래」 ​ ③ 연간 조선 시집과 좌익의 시 ​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 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임화 「깃발을 내리자」 ​ (2) 한국전쟁과 초토의 시 ① 동족상쟁의 비극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쟁,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5백만이 넘는 국민이 죽었거나 부상당했다. 골짝마다 시산시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국권을 상실한지 36년 겨우 찾은 광복이지만 조국은 동강나고 사상이 무엇인지, 그 이데올로기는 동족애도 부모형제도 없었다. ​ 적의 콩볶는 듯한 속성 음향을랑 남기고 ​ 뽀뿌라 가로수에 낙렬(落裂)하는 칠십오밀리의 순발탄(瞬發彈) ​ 백오 고지를 점령한 우군이 적 소굴을 소탕하는 화염방사기의 불기찬 광채 그리고 불똥이 만무(滿舞)하여 훤히 비치는 서대문지구의 거리 거리와 큰 집 작은 집들 - 이영순의 「연희고지」에서 ​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荒廢한 風景이 무엇 때문의 犧牲인가를... ​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姿態대로 머리만 남아 잇는 軍馬의 屍體 ​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傀儡軍 戰士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生靈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多富院 ​ 진실로 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잊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安息이 있느냐 -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 (3) 4.19혁명과 시의 응전력 ① 4.19 정신 광복 후 국민이 열망하던 민주화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독재, 6.25전쟁, 3.15 부정선거로 왜곡되었다. 이에 학생들의 거국적인 의거는 죽음을 무릅쓰고 경무대를 향했다. 200여명의 희생이 있고서야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대통령이 하야하고 내각제 정부가 들어섰다. 학생들에 의한 민주화의 쟁취다. ​ ② 혁명과 시의 응전력 ​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이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 불로 외쳐 뿜는 / 우리들의 피 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는 못 막는/ 우리들의 피 대열에 흩을 수가 없다./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민족. 내가 살던 조국이여./ 우리들의 젊음 들./ 불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 내린// 악으로 불순으로 죄악으로 숨어내린/ 그 면면한. 우리들의 속의 썩은 것을 씻쳐내는,/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사뤄,/ 젊음이여! 정한 피여! 새 세대여!// 너희들 이미 일어선 게 아니냐/ 분노한 게 아니냐?/ 내달린 게 아니냐?/ 절규한 게 아니냐?/ 피 흘린 게 아니냐?/ 죽어간 게 아니냐?// ​ - 박두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에서 (4) 역사적 현실의식과 참여시 ① 실존주의와 현실참여 전후의 허무에서 실존주의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신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경우다.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갖고 현실에 참여(engagement)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현실참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정치적. 역사적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 했고 까뮈는 작품으로만 참여하는 것이라 했다. 한국은 6.25와 4.19를 거친 역사의식과 민주화 의식을 토대로 사르트르적인 논리를 내세워 문학의 현실참여를 실천하게 된다. ​ ② 신동엽의 반전 반외세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③ 김수영의 자유의 절규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은」 ​ ④ 이성부의 「전라도」 ​ 노인은 삽으로 榮山江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가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랑을 혼자서 퍼올린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 불을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 -이성부의 「전라도7」에서 ​ (5) 1970년대 민중시 ① 참여에서 민중으로 50년대의 한국시가 한국전쟁의 충격과 파장에서 전개되었듯이, 60년대의 시는 4.19의 파장과 영향권에서 형성되어 상황과 응전이라는 현실 참여적 경향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것이 70년대에 들어서는 유신 체제라는 통치체제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부정적 현실과 역사에 대한 강한 비판적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른바 민중문학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대표적 시인들로 김지하, 신경림, 고은, 조태일, 이성부, 정희성, 김명수, 이동순, 문병란, 김중태, 양성우, 이시영, 김창완, 김용범, 최하림 등을 지적할 수 있다. ​ ① 김지하의 현실 풍자 ​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 「오적」에서 ​ ② 신경림의 소외된 농민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리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농무」 ​ (6) 1980년대 민중시 ①고은의 통일시 ​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아라 저 끝에서 길이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 가야 한다 한평생의 길 오가는 겨레 속에 내가 살아 있다 남북 삼천리 모든 길 나는 가야 한다 기필코 하나인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 고은의 「길」에서 ​ ② 박노해의 노동자의 노래 ​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 박노해의 「하늘」에서 ​ (7) 문민정부 시대의 노래 ①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째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 이성부 「우리앞이 모두 길이다」  
1    구조주의와 기호학/테렌스 호옥스 댓글:  조회:1255  추천:0  2019-12-21
구조주의와 기호학 테렌스 호옥스   (서울시신아사, 1984년)   비꼬(vico)는 이탈리아의 법률가인데 (1725년) 그 당시에는 관심을끌지 못했던 기념비적작품. 비꼬의 연구는 … 영원히 계속되는 구조화의 과정이 인간정신에 대해서 지니는 마취적인 속박을 풀어버리는 최초의 근대적 시도의 하나로 손꼽힌다.17   진정 변별적이고 영원한 인간특성은, 라는 능력안에서 식별해 볼수 있는데 , 그것은 신화를 창조하며 또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필요성인것으로 나타난다… 시적예지라는 재능은 그러니까 구조주의 재능이라고할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에 성격을 부여하는 원리이기에, 인간이다 라는것은 구조주의자이다 라는것과 같다는 주장이다.17   삐아제(piaget) 삐아재는 구조를 전체성의 개념, 변환의 개념, 자기조적의 개념 등 세가지 개념으로 생각했다. 전체적이라는것은 내적인 결합체를 의미한다. 변환적이라는것은 정적이 아니다. … 구조는 변환의 절차를 행할수 있어야 한다. …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구조로서, 갖가지의 기본문장을 광범위하게 다양한 새로운 발화로  변환시킬수 있는터이나, 한편으로는 그 변환을 언어자신의 고유한 구조안에 머물러있게 한다. 자기조절적이란 변환수단을 유효한것이 되게 하기위하여 제자신을 넘어서는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변환은 그 변환을 수행하는 고유의 법칙을 유지하고 보장하도록 작용하며 다른 체계가 련관되지 않게 그 체계를 봉인하도록 작용한다. 개라는 낱말은 언어구조안에 존재하여 기능하고 있으며, 네개의 발을 가진짖는 피조물이 실재한다는것과는 관계가 없다.19   구조주의-세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방식   사물의 참된 본성은 사물 그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그리고 지각하는 사물들 간에서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것이다. 20   구조주의자의 생각의 궁극적인 원천은, 항구적인 구조, 즉 개개인의 행위, 지각, 자세가 그 안에서 조화되고 그것들의 최종적인 성질이 그로부터 이끌어내지는 구조라고 할수 있겠다… 인간본성의 그 측면에 , 즉 언어에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여 있다.21   언어학과 인류학 – 소쉬르( Saussure) 스위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이다.22   두개의 기본적차원에서… 즉 랑그라는 측면과 빠롤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24   빠롤은 물우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다.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 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자체는 모순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것이다.25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있는 물리적인 나무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 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 현실에의 보증할만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나무라는 낱말이 땅우에서 자라고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물체를 의미하는것은, 그 언어의 구조가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이미지시키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31   레비스트로스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언어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며,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사회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다.42   어떠한 경우에서든 ,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것은 그 현상자체의 어떠한 본래적인 양상도 아니고, 현상들간에서의 관계이다 라는것이 , 구조주의 (그리고 음운론)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44   문학에 관해서 말하면, 이것은 먼저 단순한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가 막연한 형식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는것을 의미한다.79   러시아 포르마리즘.(formalism)1920- 1930.Boris  Eichenbum, Vtor Shklobisky, Roman Yakobson,  Bris Tomasjevsky, Juri Tynyanov언어학자나 문학사가들. 모스크바언어학회와 뻬드로그라드 시적언어연구회.   초기의 포르마리즘(1920-30년대 쏘련형식주의)은 상징주의 및 실용될수 있는 코무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형식에 대한 상징주의자적 관심을 기본원리로 해서 구축되였었다. 즉 자립적이고 자기표현적이며, 언어외적 리듬, 연상, 암시를 리용해서 언어를 보통의 일상적인 의미 영력을 넘어서까지, 늘려나갈수 있는것으로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관심에서, 비평의 경우에도 문학적인 언어를 작동시키는 기술에 열심히 주목하게 되고, 또 이 기술들을 일상적인 언어의 양식mode과 구별해서, 그 특성을 규정하려는 관심이 생겨났었다.81   Shkrovsky는 ‘예술은 언재나 인생으로부터는 자유이고, 그것의 색갈은 도시의 성책위에 펄럭이는 깃발의 색갈을 결코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특히 문학이,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있다면, 문학의 학술적연구나 비평은 마땅히 애매함이 없이 분명하게 확정된 고유의 자동영력을 가지고 있는 통일된 지적활동이라야 할것이다. ‘예술형식은 , 예술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skrovsky의 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일반원칙에 따른다면, 위에 말한 그 령역은,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문학인가라는것에, 즉 언어예술전반에서의 특유한 성질에 밀접하게 연관되여 있다. 스크로브스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이란, 작품을 될수있는대로 예술적인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 따라 특수한 기법으로 창작되여진 작품을 말한다.를 용인하는것은 야콥슨의 결론인’문학연구의 대상은 , 문학의 총체가 아니고, 문학성, 즉 작품을  문학자품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를 역시 용인하는것이 된다….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작품자체의 내부에서, 즉 시인에서가 아니고  시의 내부에서 발견될수 있다는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사용된 언어의 독특한 용법에 깃들어있어야 한다83….   포르마리스트들은 전의적, 언어, 은유, 상징. 시각의영상 등은 시의 필요조건인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의 특징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분석에서의 그들의 흥미는 이미지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미지가 적용되는 용법에 있는것이리라.84   일탈은 포르마리즘의 중심적관심사…일상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문학언어는 일탈을 발생시킬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탈이기 때문이다… 장치, 기법은 문학예술의 근간이 되며, 문학의 모든 요소가 그곳으로 향해서 조직되고있는 기본적요소가 된다.그리고 그 요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85 시적술화는 … 단순한 실용성이나 지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정보의 전달이나 언어를 넘어서 저쪽에 있는 지식의 체계화에도 관여하지 아니 한다. 시적언어는 용이주도하리만큼 자기의식 적이며 자기각성적이다. 그것은 자체내에 포함되여 있는 메시지이기를 떠나서, 두드러지게 매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특색을 지니고있으며, 또 제자신의 언어적특질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고있다. 그 결과 시에 사용 되는 낱말들은 , 단순히 사상전달의 신분을 지니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율적인 구체적 실체 인것이다.86   시는 낱말과 의미를 분리시키기보다는 , 오히러 –놀라운 일이 겠으나- 낱말이 취하게되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런 점에서 시는 또 다시 보통의 언어활동의 정도를 한층 더 높인다… 낱말의 시적용법에 의하여 애매성은 낱말의 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옮겨가는 낱말이 낱말의 구조사의 역활이 전환되 여진다.87   에술작품은 모방(내용을 지니고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형식의 완전한 우월이라는 관념을 대치시키는 일이기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되여지는 문학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문학다운 것이다. 즉 다른 실체를 지각해볼수 있는 창문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것이다. 내용이란 문학형식의 한 기능에 불과하며, 형식을 넘어서서 혹은 형식을 통해서 감지될수 있거나 , 형식과 분리될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실은 작품이 내용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일뿐인 것이다. 사실인즉 작품은 스스로의 발생, 스스로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고있을 따름이다.91   예술이라는 과정의 생명력은 , 행동안에서 볼수있는 그것의 수법에 의존한다는것이 포르마리즘의 중심명제이다. 그리고 장치를 노풀시킴으로써, 자신이 집필할 때 의지하고있는 비친숙화의 기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학예술가는 모든 장치들중에서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장치에 접근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술을 작동케 하는 과정에 은밀히 통해있는 일탈감각인것이다.95   변혁은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기거나 혹은 그 부산물로서가 아니고, 내적요구에 의하여 재촉되고 추진되여서, 자기개성 적이고 자기 페쇄적인 문체나 장르의 연속을 펼치는 일이라고 볼수있는것이다. … 참신한 형식이나 문체는 낡은것에 반역하 는데서 출현하는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의 반대명제로가 아니고, 영속성이 있는 요소들을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 한에서이다. 이것 역시 일탈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의한것이 일상적인것이 되면 다른것으로 바뀌여질 필요가 생긴다.98   패로디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왜냐하면 패로디는 언제나 다른 문학작품을 배경으로 삼고, 그것의 수법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떠나기때문이다….페물이 되여버린 수법은, 내버려지는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아니 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반복되여…재차지각이 가능해진다.98   문학은 자신을 개신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의 경계선을 다시 긋곤한다…. 모든 에술은 연속성안에 있다는것, 고등예술은 자신을 갱신키 위하여 그 연속성의 범위내에서 경계선을 정기 적으로 옮기고 있다는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불변인것은 문학 항시 나타내어야 하는 문학다움의 감각이라는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든 문학을 규정하고있는것은 그것의 구조적역활 즉 그 시대의 비문학과의 대립인것이다. 99   유럽의 구조언어학   언어가 정보전달에 사용될 경우에는 인식적 혹은 지시적 기능에서 작동하고, 말하는 자나 글쓴 자의 기분이나 태도를 나타내기에 사용될 때는 표현적 혹은 정감적 기능을볼수있고… 언어가 …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사용되여진다   …체코의 언어학자 얀 무카로브스끼가 말하는것처럼, 이러한 전경화 현실화라는 행위는 중요하다. 시적언어는 코뮤니게이션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고, 표현행위 즉 언어행위 그자체를 전면에 내놓기위해서 사용 되고있다.103   야콥슨jakobson   은유—어떤유사점, 상합적, 공시적, 수직적, 직유. 초현실주의 , 능기생성, 시전경화,  해석불가 환유—인접성, 련합적, 통시적, 수평적, 제유, 입체파. 능기결합, 산문전경화,  해석거부   은유와 환유는 의 비유인것이다. ‘그차는 딱정벌레처럼 전진해 갔다’와 같은 은유에서는 ,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자동차의 그것에 등가인것으로서 제시되여있고, ‘백악관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한다’ 라는 환유에서는 , 어떤 특정의 건물이 합중국의 대통령에게 등가인것으로 제시되여있다.105   소쉬르의 개념을 적용하면 은유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질상 상합적이여서 언어의 수직관계가 리용되는데 , 환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성질상 연합적이여서 언어의 수평의 관계가 리용된다. 106   인접성위에 유사성이 들게 놓이므로서, 시는 완전히 상징적이고 다양하고 다의적인 본질을 부여받게 된다. 108   시는 보통언어를 그냥 장식하는것이 아니고 , 별개종류의 언어를 구축하는것임을 의미한다. 시적이라는것은 수사상의 장식으로 술화를 보완하는것이 아니고 , 술화와 그구성요소 모두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이다…. 시적이라는것이 경합해서 존재하는 다른 어떠한 기능들보다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아졌을 때, 시가 생기게 되는것뿐이다… 그래서 시적기능은 언어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고 다만 그중에서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기능인것뿐이다. 112   사실주의시는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현대시는 해석을 요구하면서 해석불가능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말)   의미는 그 특징상 전의할뿐만 아니라 , 전의될수가 있고 또 전의되여야 한다.116   만일 코뮤니케이션이 메시지 그자체에게로 지향하고 있다면, 이 때는 시적 혹은 미적기능이 우세해진다고 말할수 있다… 언어의 시적기능은 … 기호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촉진시킨다. 그 결과 능기와 소기, 기호와 대상간에서의 어떠한 관계라도 자연스럽다 거나 분명하다고보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부숴뜨리리게 된다.118   양식은 자기 지지적이며, 그 양식이 바로 주제인것이다. …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형식과 내용을 재통합하는데 소용되며, 또 본성을 유효토록 하기위해서 작품을 메시지의 용기가 아니라, 그 본성을 유효하도록 하기위해서 자신의 령역을 넘어서는 지시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조절적이고, 결국에는 자기존중적인  본질적통일체로 제시 하는데 소용되는것이다. 결국 작품은 Piaget의  말을 빌면, 하나의 구조인것이다.119   구조주의는 그자체가 언어학적 모델에서 발전했었는데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인 문학에서 그 모델과의 유사성 이상의것을 가진 대상을 발견하고 있다. 양자는 동질이다라는것이다.120   그레마스 A.J.Greimas   우리는 차이를 지각하고 , 그지각의 덕택으로 , 세상은 우리앞에 서 우리의 목적에 맞도록 형상을 취하게 된다121   행위의 내용은 노상 변하고 , 행위자도 바뀐다. 그러나 언술광경은 항상 동일하다. 121   또도로프TzvetanT0d0rop   문법이 어째서 보편적이냐 하면, 그것이 우주에 관한 정보를 모든 언어들에게 알려주고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마는, 그것이 우주자체의 구조와 일치하기때문이기도 하다.132   대담한 개인적창의력이라는 이름에서 낡은 체계를 파괴한다는 의미일것이다. 136   구조주의의 최대의 특색은, 바로 형식을 내용이 되게 하는 일종의 변환작업에 있는것같다… 즉 문학작품은 언어에 관한것이며 , 언어사용 그자체의 과정을 가장 본질적인주제로 삼고 있는것이다.137   형식이 곧 내용이다라는것을 자명한것으로 보고 있기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같다고 보는 낭만파후기의 생각을 시인하 는것이다. 141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서 모든 언어에 생래적으로 깃들여있는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그것이다. 문학의 술화의 본질은 언어를 넘어서가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문학의 존재이유는 없을것이다.) 문학이란, 언어가 자살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흉기와 같은것이다.147   바르트   인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있는것을 변경하고 재구축하는것이다. 148   글쓰기는 결코 코뮤니케이션의 도구도 아니고 , 말할 의도만이 통해가는 열려있는 통로도 아니다. 정밀이니 명료니 하는것과 같은 초역사적인 보편적문체의 양식이나 조건도, 이데올로 기적으로 무구명료함이이란 순수하게 수사학상의 속성이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시대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언어특성은 아니다. …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분류해내지 못하는것은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일체의 인간경험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과 합치되도록 고쳐서 그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것으로 승격시켜 나간다.151   이들 꼬드는 --우리가 인정하든말든—의미를 변경시키기도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생성하는 작용을 하는데 , 그 방법은 무구하다 거나 자유롭다고 하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바깥 어디엔가에 있는 객관적인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것에, 언어자체가 제자신의 중개적이며 형성적인 패턴을 부과할 때의 복잡한 방법에 많이 닮아있다. 그 결과, 적절히 분석되였을 경우의 텍스트가 드러내게 되는것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토도로브가 말하는 뚜렷한 일종의 다양성이다.153   다수성과 애매성은 문학의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보는 생각이라든가, 의미들 상호간에서 신중히 유발되여진 긴장에서 언어의 본성에 관한 많은것이 밝혀질수 있다.155   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가공하고 창조하기위해서 고안해낸 여러꼬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이란 , 어느 의미에서는, 꼬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는 꼬드의 중류장치일런지도 모든다. 문학은 독자에게 꼬드를 상기시키고, 그 꼬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그에게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비평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무슨 도구인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전달해주는 차량, 행동의 수단, 언어의 의복인양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156   저작자의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능기에 주목해야 한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능기를 넘어서서 능기가 암시하는 소기에게로 옮겨가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굴복해서는 안될것이다.158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서 예정된 현실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 언어자체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저작자와 더불어 자신의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위험은 있으나 상쾌한 작업에 독자를 끌어 넣는가… 독자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행진하는데 작가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춤을 춘다.160   쾌락의 텍스트란것은… 향락의 텍스트는 결락감(缺落感) 을 안겨주는것인데, 독자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심리적가정과 그의 취미, 가치관, 기억 등의 일관성을 (어쩌면 따분하리만큼) 불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독자와 언어와의 곤계에 위기를 가져온다.162   능기를 분석하는 꼬드   1.     해석학적꼬드; 설화적인 꼬드, 수수께끼를 구성해 풀어가는 꼬드. 2.     의미소 또는 능기의 꼬드; 의미의 깜박임 반시적꼬드-伴示 3.     상징적꼬드; 群化나 윤곽구축, 대조(2,3은 분별이 불투명) 4.     행동꼬드(프로아이젝트); 연속적사실. 5.     문화적꼬드(대상지시적꼬드); 격언적, 집합적.   예술은 다같이 주어진 자료, 주어진 능기 (즉 텍스트, 화음의 연계)에서 파생된다고는해도, 그것들에서 주어져있지 않는 새로운 현실, 새로운 능기를 창조하고, 또 창의와 미라는 량면에서 본래의것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예술은, 소기의 예술이 아니고 능기의 예술이겠는데 진실로 현대적 이라고 말할수 있다. 170   관계 그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것이지, 관계를 넘어서서 지향되고 있는 어떠한 현실의 세계도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의미의 작용은 언어의 어떤 레벨에서 딴 레벨로의 ,한 언어에서 딴 언어로의 이동에 불과하며, 또 의미란것도 그러한 꼬드전환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71   장미다발은 능기이고 정열은 소기이다. 183   대시작용이라는것은 보통으로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말해지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일이고, 반시(伴示)작용은 말해지고 있는 것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다. 선행되고있는 능기— 소기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호가 , 더높은 단계의 기호의 능기로 되는경우에, 반시작용이 생겨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첫째 세계는 대시작용의 차원이고 둘째는 … 반시작용의 차원이 되는것이다. 187-188   청각적기호는… 시간을 리용하고 …공간적기호는 공간을 점하고... 청각적이고 시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상 상징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에 있어서 도상(图象)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능기는 고도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애매성을 나타내고있다. … 기호론적으로 말하면 애매성은 꼬드의 규칙을 어기는 양식이 라고 규정되여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말씨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다 라는 야콤슨말에…200   파괴성은 –Umberto Eco (a) 상이한 레벨의 많은 메시들은 애매성을 지니고 조직화 된다  (b) 애매성은 정확한 설계에 따른다  (c) 어떠한 메시지에 있어서도 , 거기에 들어있는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은 다같이, 다른 모든 메시지에서의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에 대하여 맥락상의 압력을 느낀다 (d) 한체계의 규칙이 한 메시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있는 방식은 다른 체계의 규칙이 자신의 메시지에 의하여 깨뜨려지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 생겨나온것은 미적개인어 예술작품에 독특한 특수 언어인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대시를 새로운 반시로 부단히 전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질서—즉 확립되는 순간에 자기 확립된 의미의 레벨을 넘어서 끝없이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적메시지가 의미작용을 부단히 행하는 다차원의 체계이기에 , 의미작용이 한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이행하고 있어서 그것의 대시가 일종의 무한 급수적인 양상에서 반시로 된다는것인 듯하다. 그 결과로서, 미적메시지에 대한 최종적인 꼬드풀이나 글읽기에는 켤코 도달하지 못하는 터이다. 왜냐하면 애매성의 하나하나가, 다른 레벨들에서  더욱 많은 같은 계통의 규칙위 반을 생성시키고 , 또 예술작품이 어떤 점에서든 말하고있다고 생각되는것을 벗겨버리거나 다시 조립하거나 하도록 노상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200-201   다양성- 애매성-규칙위반-장식바꾸기-다차원-다의미   독자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글쓰기나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다르게 세계를 보게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예술도현실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처하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인것이다.202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술작품이란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이란 견해다. 이러한 예술가는 , 말과 이미지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의 건너편에 있는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류형의 예술가는 번역가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또 하나의 태도는, 예술이란 독립해서 존재하고있는것들로 성립되는 세계이다하는 견해다. 말, 그리고 말들과의 관계, 사고, 그리고  사고들의 비꼬임, 그것 들의 분산, 이러한것들이 예술의 내용인것이다. 예술이란것은 , 창문에 비해질수 있다손치더라도 .대강 그려진 창문에 불과 하다.204   책이라는것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하는것으로 보이는것은 , 현실의 물리적세계가 아니고 , 다른 차원으로 환원된 세계이다. 205   글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글이 만든다.(201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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