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7월 2022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검색날짜 : 2022/07/11

전체 [ 3 ]

3    하이퍼시 (조명제) 댓글:  조회:473  추천:0  2022-07-11
■하이퍼 시   해 있을 동안 조 명 제   처서(處暑), 백로(白露) 지나자 해가 자꾸 자꾸 한 쪽 지름길로 간다. 대낮인데도 오동잎 같은 해 그늘이 길바닥에 내려앉는다. 짧아지는 해가 우수(憂愁)라는 단어처럼 슬픈 빛깔로 길 위의 모래에 깔린다. 해가 짧아져서 우수가 된다는 걸 까치가 깔긴 똥 보고 낄낄거리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매화꽃빛이 눈썹 끝에 와 매달리는데 어쩌구 문자 보낸 이후, 오래 소식 없는 송영희 시인에게 문득 다시 문자를 날려 본다. 어느새 가을빛이 발끝에 차이는 때 영월 깊은 산골 운학리의 농사는 잘 영글고 있으리. 밀꽃도 한창이리. 보내기 전 다시 읽어 보니, ‘메’자를 빠뜨려 먹어 ‘메밀꽃’이 ‘밀꽃’이 되어 버렸네. 밀꽃? 밀꽃! 밀꽃, 밀꽃 이 이쁜 말을 나는 왜 여직 시에 써 먹지 못했을까. 지상에 내리는 한 줌 햇빛이 금싸라기인기여! 산이 고가구빛으로 깊어지면 해 뜨기 무섭게 진다 한들 뉘 이상히 여기리. 농사에는 농사꾼이 박사예요. 이웃밭 할아버지가 메밀씨를 나눠 주며 심으랬지요. 서울 들락거리느라 한 열흘 늦게 씨 뿌렸지요. 할아버지는 마땅찮아 하셨지만, 뭐 열흘쯤 늦은들 어떠리 하였지요. 일요일, 열한시나 돼서야 부, 시, 시 일어난 아내가 거실로 나온다. 티브이의 티브이 보고 있던 남편과 아이들이 입 맞춘 듯 세 입 한 목소리로 말한다. “밥 줘!” 얼굴 넓적한 아내가 반사적으로 대꾸한다. “내 얼굴이 밥으로 보여!” 9월이 오고, 효석(孝石)표 소금을 뿌린 듯 할아버지네 메밀꽃이 환히 피었더랬지요. 보름밤 달빛 아래 누운 맨몸의 메밀밭은 황홀 그 자체였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어도 제발 해 길이만은 여름 같아라 한들 무슨 소용이리, 무슨 끝여름 홍천 비발디 파크의 오션월드!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네. 이집트식 이미지의 온갖 물놀이 기구 만들어 놓고 떼돈 벌고 있네. 옷 같잖은 끈수영복 입은 아가씨들 겨울을 어찌 할꼬. 땡볕 아래 뱀줄로 서서 서너 시간씩 기다려, 뒤틀리는 곡절(曲折)마다 아아아악아아아— 삼사십초 타는 몬스터 블라스터 Monster Blaster! 파도 수영장엔 파라오가 근엄하게 물 좋은 인어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인어들을 패대기치는 파도는 아무 때나 치지 않는다. 기다려야 한다. 잠시가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지나간 세월은 아무리 지루했어도 잠시가 되는데.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그 위엄 있는 고둥 나팔소리가 부드럽게 심금을 울리자 (아직 파도는 칠 생각을 않고 있는데) 아르르르르— 인어들이 먼저 목소리 기절을 한다. 우리 메밀밭의 꽃도 할아버지를 뒤따라 드디어 까르르르르— 한창으로 피어났더랬지요. 아, 이뻐! 근데 말이지요 선생님, 이게 웬 일? 우리 메밀꽃이 한창일 때, 밤은 다 찌그러든 눈썹달 하나를 띄워 놓는 게 아니겠어요! 조각달과 그믐 사이, 메밀밭 꼴이 어땠겠어요. 여자 속옷 6.25 동란 이래 최대 똥값 처분! 미호천변 옷가게 주인 백, 농사에는 농사꾼이 박사라니깐요! 바다 이야기 터지기 전에 죽어 버린 놈 누구야 엉 누구냐 말이다. 죽여 버린 놈이! 밀꽃 피던 봄에 밀밭 속으로 떠나간 긴머리(한 번 묶은)는 어느 하늘빛이 되었을까. 지중해의 푸른 문을 열고 솟아나오는 금발의 헬레나들이여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시간이 많지 않다.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     조 명 제   내 살아 있음의 기쁨이여! 이것이 끝물 사랑의 발설법이던가. 해질녘 캔맥주와 줄김밥 사 들고 루비콘보다 아름다운 강변으로 간다. 먼저 온 데이트족들이 자신들의 반짝이는 사랑 넓이만큼씩 풀밭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 알맞은 사랑만큼의 터를 꾸미고 풀잎 위에 앉는다. 날은 아직 훤한데, 저만치 제일 높은 빌딩 허리춤에서 반달이 희미한 얼굴로 삐져나온다. 빡! 캔을 따고 촉촉한 눈웃음 섞어 틱! 부딪치고, 부풀어 오른 사랑의 거품을 쭈욱 들이킨다. 식사와 안주, 하찮은 김밥이 이리 요긴할 줄이야! 저녁의 미풍을 타고 여기저기 어스름이 가등(街燈)을 켠다. 가을을 검색하자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고기가 당긴다. 겨울잠에 들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내 몸의 센서가 먼저 알고 일러 주는 것이리. 문화일보 1면 사진 기사가 가을을 전한다. 물두꺼비는 짝짓기 꼴로 동면에 들어 7개월을 지낸다고. 물두꺼비는 좋겠다. 너희들은 지겹지도 않니? 한 사람과 한 평생 산다는 거 지겹지도 않아? 한 5년이나 10년마다 결혼을 갱신해야 하잖겠니? 옥시토신의 유효 기한이 길어야 3년이라잖아! 풀잎 끝마다 멀리 도회의 오색 불빛이 이슬처럼 맺힌다. 맞댄 두 이마 아래의 키 작은 풀잎들이 거짓말처럼 고개를 꺾어 까-딱- 인사을 한다. 저들도 심상찮은 사랑의 공기를 느끼는가. “이 봐! 풀들도 우리 사랑에 경의를 표하는 걸!” “불륜인데두요?” 라고 그네는 말하지 않았다. “불륜의 사랑은 위대한 거야.” “하기사, 세계문학사의 모든 위대한 소설의 사랑은 다 불륜이라고 설파해 왔죠. 당신이 젤루 좋아하는 「닥터 지바고」도 그렇지만요.” 황운(黃雲)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 광덕사 가는 길은 참으로 호젓했다. 절 문을 지키는 늙은 시조(始祖) 호두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어뜨리고 회갈색의 빛나는 가지로 한 줌이 아까운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습작시마다 핀잔을 들은 시인 지망생 이쁜 코 미시 제자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절친한 미쓰 학우 앞에 대고 나 들으라는 듯, “시를 쓰려면 눈물의 뼈도 볼 수 있어야 한대 글쎄!” 한다. 아직 더러 잎 달린 젊은 호두나무숲을 지나 골짜기로 가는 오솔길 향긋한 가을 잡목들이 팔 뻗듯 가지들을 내밀어 시샘하듯 우리의 허리께를 치며 인사를 한다. “이 봐! 나뭇가지들이 우리의 사랑을 반기는 거!” 눈이 작아서 예쁜 여자가 대답한다. “거 참, 신기하네요!” 바빌론강 기슭 거기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리는 울었도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竪琴)을 걸어 놓고서* 밤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큰 눈의 그네는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 살아 있음의 슬픔이 기쁨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성경』의 「시편」137에서 인용.         목 화 꽃   조 명 제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의 설산고봉을 철새들이 넘는다. 기류를 타고 힘겹게 힘겹게 넘는 두루미떼 수만년 지층을 날아온 날개의 힘과 고공 기류의 긴장이 깨지면서 더러는 8000 미터의 벼랑 아래로 추,락,한,다. 목숨을 건 비행(飛行), 철새들은 내장에 센서 내비게이션을 달고 머나먼 행로를 따라 비행한다. 설악의 울산바위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그리스의 마테오르 그 벼랑 꼭대기의 수도원을 곡예하듯 도르레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검은 망토의 수도사들, 그들은 뼈를 갈아 끼우려고 그 아득한 높이의 가파른 벼랑을 오르는 것일까. 청량산(淸凉山)
2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끝) 댓글:  조회:560  추천:0  2022-07-11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끝)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1)   5. 상징주의 시인들   1. 보들레르와 교감     샤를르 보들레르(1821~1867)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재혼한 어머니와 독재적인 양아버지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문필가라는 직업을 단념시키기 위해 가족은 19세의 그를 강제로 상선에 태워, 그는 모리스Maurice 섬과 레위니옹Reunion 섬을 유랑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와 그는 댄디즘의 이상을 추구, 호화판 탐미생활에 빠져들고,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며 비참한 보헤미안 생활을 한다. 이때 흑백 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느 뒤발Jeanne Duval과의 악연을 맺었으며 이는 그가 관능적인 시를 쓰는 계기가 된다.   그는 1841년서부터 1857년에 발간될 의 시편들을 쓰기 시작한다. 1848년 혁명으로 신문에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는 문학 비평과 예술비평을 쓰기 시작하고, 1860년에는 이라는 산문시를 발행한다.    그러나 그의 은 발간되자마자 소송에 걸리고 6편의 시는 종교와 풍속을 해친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으며 삭제명령과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반신마비와 실어증 상태에서 46세에 사망한다.     은 시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다룬다. 거대한 건축물처럼 일관된 의도로 구성된 이 시집은 원죄의식에 의한 고뇌, 순수미의 추구와 하강과 타락의 취미, 죽음에 대한 의식 등의 심리가 순수하고 애로틱한 사랑과 복잡하게 섞여있다.   내밀한 정신성으로 일관된 은 근대시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며 현대를 열어주었다. 초판은 서시 외에 100편의 시를 수록하고 77편, 12편, 3편, 5편, 3편의 5부로 되어있다.   제목 자체가 악과 꽃을 결합시키며 모순어법을 택하고 있는 이 시집은 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상과 심연 사이에서, 쾌락과 추락의 유혹, 그리고 퇴폐와 증오와 고뇌 사이에서 보들레르의 내면이 겪는 모순의 아픔들을 그리고 있다. 삶이라는 커다란 악 속에서 자아는 모순되게도 삶의 황홀과 '지고의 아름다움'을 찾아 줄타기한다.   간단히 말해 이 시집 전체는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의 이원성의 드라마이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서구시에서 거의 최초로 심연, 즉 심층적 자아 속으로의 탐사를 시화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은 "보들레르의 삶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것이다"라고(Maynial, 1973:317). 그러나 처절한 분열과 갈등과 모순에 찬 그의 삶과 그의 시는 사실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    보들레르는 에드가 포우의 훌륭한 번역가로서, 그에게서 언어를 구조화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낭만과, 고답파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의 시는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의 무의식의 심충은 언제나 자신의 섬세한 분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언어의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와 추종 불가한 감각과 통찰력과 상상력과 미의식은 추상성과 관능성과 음악성을 통하여 혁명적으로 시의 지평을 열었다.       자연은 사원, 거기 살아있는 기둥들은     가끔씩 혼동된 말들을 쏟아낸다.     사람은 거기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가고     숲은 그를 친숙한 눈길로 물끄러미 보네.     밤처럼 빛처럼 광막하게,     칠흑 속에 깊게 하나 되어,     향기와 색깔과 소리는 어울려 퍼지네.       어린아이 살갗처럼 풋풋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가 있고,     - 또 썩고 짙고 강렬한 향기도 있어,       용연항,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사물들로 퍼져나가,     저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하네.                                  ()     상징주의 문학이론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 '교감(交感 corresponda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조응 또는 만물조응(萬物照應)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사실 만물 간의 조응에서 출발한다기보다는, 사물인식을 하는 주체인 인간이 여러 감각 간의 내밀한 경계를 허묾으로써 시작한다. 위의 시에서 "향기와 색깔과 소리는 어울려 퍼진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감각들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된 그 무엇이 확산된다는 말이다.    감각들 사이의 의도적인 혼동은 이어서 언어의 관습 허물기, 마침내 인식 대상이나 사물들 사이의 벽 허물기로 이어진다. 이 3단계는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이제 셋째 연에서 향기는 촉감과 소리와 색깔을 지니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공감각 작용을 통한 통합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 틀에 박힌 사물인식법과 감각을 바꿈으로서 가능하다. 기존의 이미지나 인식이나 감각의 형식은 이 시에는 이미 허물어져있다.   이러한 교감에는 어떤 가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이는 현실은 내면에 존재하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이상에 비하여 '거짓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징시는 이 가상을 허물고, 외면을 이루었던 원소들을 재조합하며 또 다른 차원이나 공간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의 시에 나타난 외적인 지지대, 즉 숲, 사원, 기둥 등은 이미 현실의 기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구조물이다. 사물들은 이미 눈에 보이는 사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표면 뒤에 자리하는 이상적 형태들의 상징들로서, 거대한 '상징의 숲'을 이루어낸다.   위의 시에 나탄난 감각을 다루는 보들레르의 새로운 방식은 사물에 대한 다른 상상체계를 열어주었다. 사물 인식에 있어서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라는 낭만주의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사실은 감각들을 분석하고 통합하고 변형하는 작업을 밀고 나간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의 뒤섞임 등, 감각들의 통합과 융해와 감각 차원의 다양화는 대상들의 세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와도 동시에 감응하여 이뤄진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주적 유추관계'를 파악하기에 이른다. 시인은 관객들의 수수께끼를 읽어내는 '해독자'가 딘다.   향기, 색채, 음향 등 여러 가지 감각 내용들이 등가관계를 이루도록 '수평적 교감'(Marchal, 1993:176)이, 즉 공감각이 이뤄질 때, 시인에게는 다른 공간이 열린다. 세계의 광대한 열림이란 다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개안(開眼)이 되는 것이다. 열린 감각의 새 차원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시인은 예언가처럼 사상(事象)의 뒷면을 읽어내고 우주를 해석해낸다.   삶은 이제 더욱 가까이 그 본질을 드러낸다. '혼동한 말들'은 울림과 깊이로 다가오며 그것을 이해하는 자는 '상징의 숲'을 자연스러이 가로질러 지나간다. 이 새롭게 형성된 공간은 존재감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친숙한 눈길'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는 감각 능력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상징의 새로운 공간에 '사람'이 익숙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감각 훈련을 통해 얻은 통찰력과 이해력이다. 시선의 힘에 의해 공간은 확장되고 축소된다. 무한한 확산도 가능하다. 현상적 외견 너머 기호와 상징으로 변한 초자연적 세계 - 감각을 지녔다는 것은 이미 그 통로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소통의 열쇠는 은유와 '아날로지(유추類推)' 속에 있다.   이제 사람은 우주와 "칠흑 속에 깊게 하나 되어" 있다. '칠흑 속에 하나'라는 것은 무의식의 심층까지도 통하는 통일이다. 시인은 하나의 작은 징조로 우주를 알아보게 된다. 이파리 하나로  우주만상을 알고 자연의 비밀스러운 흔적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삶을 내려다보며, 힘들이지 않고     말 없는 꽃들과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자여.                                                            ()     여러 감각들 간의 교감이라는 보들레르 시학의 독창적 양상이 두드러지는 시 에서, 시인은 색채와 후각을 음악과 언어와 결합시키는 정교한 모험을 시도한다.       이제 다가오네 줄기 위에 떨며     꽃송이마다 향로처럼 향기 내뿜는 시간이     소리와 향기들은 저녁 공기 속을 떠도나니     우울한 왈츠여 나른한 현기중이여!       꽃송이마다 향로처럼 향기 내뿜고     바이올린은 상심한 가슴인양 전율하네     우울한 왈츠여 나른한 현기증이여!     하늘은 커다란 제단 같아 슬프고 아름답네.       바이올린은 상심한 가슴인양 전율하네     넓고 검은 허무를 증오하는 다정한 마음이여!     하늘은 커다란 제단 같이 슬프고 아름답네.     해는 얼어붙는 제 피 속에 빠져죽었으니 ...       넓고 검은 허무를 증오하는 다정한 마음은     빛나던 과거의 잔해를 모두 거둬들이네!     해는 얼어붙은 제 피 속에 빠져 죽었으니...     내 속에 그대 추억 성체합처럼 빛나네!                                            ()   시인에게 오랜 동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정신적 연인 사바티 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 시에서, 그는 내면 차원보다 현실 차원에서 만물조응이라는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조화(調和)'란 '소리와 향기들이 섞여 떠돌면서 연상시키는 색체와 움직임과 형대들('제단', '성체합')의 마술이, 사랑에 대한 회한을 주문처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소리와 향기들이  떠돈다'는 것은 소리와 향기가 형태들과 색채로 연결되면서 빚어내는 환기술같은 것으로, 이 환기술은 사랑에 대한 회한과 연결된다.    '팡툼(pantoume)'은 보루네오 지방이나 말라카 반도의 토착적 양식으로 낭만주의자들이 이국적 색채와 지방색을 표현하기 위해 차용해서 쓰던 4행의 시구로 이뤄진 시형을 말한다. 시에서 각 연의 2, 4행은 다음연의 1, 3 행에서 반복되고, 다시 마지막 행은 시의 첫 행을 반복하며 시를 종결시키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 시는 팡툼을 엄격하게 따르지 않아 첫 행이 마지막 행에 나타나지 않으며, 그 변형이라 하겠다.   겉으로 보면 이 시는 소박한 정경 묘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석양, 꽃향기, 바이올린 소리 등의 몇 개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빛나던 과거의 잔해'와 마지막의 "내 속에 그대 추억 성체합(聖體盒)처럼 빛나네!" 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이 시는 시의 의미와 힘을 다 만들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리듬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독자는 시인의 내적 춤에 동참하게 된다. 이 시에서 반복적 기법은 여타의 움직임에는 무관한듯 시인이 자신의 태도를 견지하고 자족적인 움직임을 되풀이하게 하여, 생각의 원무(圓舞)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현기증이 의식을 독점한다. 계속되는 반복으로 의식은 비틀거리지만 쉬지 못한다. 소용돌이치며 도는 양식 때문에 주의력은 이리저리 교차하는 여러 움직임들에 이끌리고 어지러워져서 어디에 정착할지 헤맨다.   시의 마지막 행은, 계속 확장되며 피할 수 없는 어지러운 윤무를 벗어날 수 있도록, 전체의 중심을 잡아준다. '그대 추억'이라는 말로써 위의 모든 말들을 확인하고 정리하여 중심을 만든 후에, 같은 생각과 말들을 시 전체로 되풀이하며 확산시키는 효과다. 시적 자아는 잠시 스스로의 생각을 확인함으로써 쓰러지지 않고 원무를 다시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행들과 음악적 배치는 시의 본질적 테마를 시행 전체로 학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잃어버린 과거의 행복에 대한 인상을 후각, 청각, 시각을 복합하여 호소함은 자아는 이 세상에 잡혀있다는 상황을 스스로에게나 독자에게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절망의 현기증 나는 되풀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로잡힌 자의 날개'라는 생각은 시인 속에 항상 자의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으로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여행의 무심한 동행으로, 쓰디쓴 심연 위로     미끄러져가는 배를 따라가는 이 새를.                      (---)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와 같아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는다.      야유로 찬 땅 위에 그리하여 유배되나니,      거인의 두 날개는 걷지도 못하게 된다.                                  ()     현실에서 이상세계는 실현될 수 없고 시인은 '쓰디쓴 심연 위'를 줄타기한다. 조롱과 경멸 속에 세상과 유리되는 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분열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인공낙원'을 통하여 위안 받고자 한다,   그의 시는 에서 볼 수 있듯이 감각의 심층을 내보여주기도 하고, 에서처럼 정신의 불분명한 영역을 열어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에서는 현실의 불운을 시로 그린다. 시인은 또 현실과 자신에 대한 절망과 그 속에서의 희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내 청춘은 칠흑의 폭풍우,     여기 저기 빛나는 햇살 스쳐갔으나     천둥과 바람이 어찌나 휩쓸었느니     뜨락에는 몇 개 주홍빛 열매밖에 남지 않았네. (---)                                                        ()     그러나 그에게는 개인적 상징주의보다 초월적 상징주의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그의 시들은 초월적 국면을 강조하고 현실을 넘어서 이상세계를 통찰하려 시도한다. 사실 에서 그는 과거의 사랑에 대한 추억 뿐 아니라 잃어버린 천국을 비통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향수는 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있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집착은 찬란한 꿈이 되어 빛을 발하기도 한다. 그곳의 고요함과 화려함, 그곳의 맑은 하늘과 질서는 자주 그의 시에서 언급된다. 이상세계는 마치 살아있는 나라인 듯 그려진다.   시인은 이렇게 현실 너머 공간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전달하는 존재가 된다. 시인은 '모어'를, 즉 "말 없는 꽃들과 사물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나, 이 지상에 추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언어는 이 지상과 어울리지 않는 거추장스럽고 필요 없는 알바트로스의 날개처럼, 현실에서 무용하며 무상의 것이다. 그의 시집의 많은 부분은 이처럼 이상세계를 본 자의 희망과 절망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현실은 우울한 지옥과 푸른빛을 동시에 심연처럼 숨기고 있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2)   2. 베를렌, 회한의 선물   상징주의는 언어의 내용보다 '언어가 낳는 효과'를 중시하는 문학경향으로, 말을 의미 있게 연결시키기보다는 말이 빚어낼 수 있는 뉘앙스를 드러내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폴 베를렌(1844~1896)은 이라는 시에서 언어의 결, 즉 뉘앙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말의 사용에 음악의 특징을 도입하려 한다. 음악의 섬세한 환기술과 유연성을 시에 도입하여 시어의 해방을  노림으로써, 그는 상징주의 언어를 풍요롭고 새롭게 한다. 관념 속에 머무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지닌 언어로 빚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을,     그러기 위해서는 '홀수각'을 택하라.     더욱 모호하게 노래 속에 잘 녹아들며     짓누르거나 멈짓거리지 않는 홀수각을.       또 그대는 오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을 선택하려하지 말 것.     '미묘함'이 '선명함'에 뒤섞이는     회색 노래보다 더 귀한 것 없으니                (----)       왜냐면 우리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이다.     '색깔'이 아니라 오직 '뉘앙스'를!     오! 뉘앙스만이 오직 결합시킨다네.     꿈과 꿈을 , 플롯과 뿔피리를! (---)     음악의 리듬과 환기력과 조화의 힘은 언어와 결합하여 사물과 영혼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영혼의 상태'를 조성하고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홀수각의 언어와 '회색 노래'는 모호한 미결정의 영역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시는 정형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의 확산이 된다. 시인은 묘사와 인식의 기존틀을 지움으로써, 풍경을 극복하는 힘을 지니고자 하는 것이다.   베를렌과 더불어 상징주의자들은 시구의 해방을 위한 여러 실험들을 하게 된다. 홀수각의 시에 이어 시구의 다양한 '걸치기(enjambement)', 자유시, 구두점 없애기, 페이지 개념 바꾸기, 산문시 등, 그 시도는 다양한다. 그러나 베를렌은 '자유화시'에 대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운문의 틀을 깬 것은 아니어서, 전통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의 상징주의 작품처럼 난해하지 않았고 일반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그는 '이상'을 그려내는 능력에 있어 뛰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현재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다. 밀착이라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근본적으로 감정적인 시를 썼다 하겠다. 베를렌의 삶은 랭보와의 일화를 포함하여 저주와 비참함으로 점철되어있디.   베를렌의 알콜중독은 독주 압생트를 즐기면서 시작되었다. 그른 마틸드와의 만남을 계기로 의 시편을 쓰며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1870년, 17세의 마틸드와 결혼하였지만, 당시 17세였던 랭보가 여덟 편의 시를 베를렌에게 보내왔고 베를렌은 곧 그의 시에 매료되었다. 그는 랭보를 파리로 부르고, 둘의 관계는 모두의 의심을 받게 된다. 그들은 벨기에와 런던에 일시 정착하기도 하였으나, 다른 까닭으로 시를 찾던 두 사람은 방랑 끝에 충돌하기에 이른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베를렌은 랭보를 총으로 쏘고 체포된다. 그들의 만남은 18개월 만에 불화와 상처로 끝나고 베를렌은 벨기에의 몽스 감옥에 있게 된다.      라는 시가 씌어진 시기는 시인의 아내와 랭보 사이에서 이혼문제와 화해의 시도 등으로 흔들리고 있던 기간이었다. 이 시는 처음에는 '무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나, 라는 동명의 시집 속에서는 '잊혀진 아리에타'라는 제목으로 9편으로 된 연작시 중 첫 번째 시로 실려 있으며, 무제이다.                                                  들판에 부는 바람이                                                숨을 멎는다.                                                           - 파바르Favart                  그것은 나른한 도취,                그것은 사랑의 피로,                그것은 미풍의 애무에 일어나는                숲의 온 전율,                그것은 회색 가지들 쪽으로 퍼져가는,                작은 목소리들의 합창.                  오 가녀리고 무후한 살랑거림 소리!                그것은 속삭이며 소곤거린다.                그것은 물결치는 풀밭이                내뿜는 작은 외침소리 같아---                마치 굽은 물길 아래,                조약돌이 소리죽여 구르는 소리 같아.                  탄식소리 숨긴 채                바람에 젖는 이 영혼,                그건 바로 우리의 넋이지 않니?                나의 넋, 그래, 너의 넋이지 않니?                거기서 이 온화한 저녁 아주 나지막이                초라한 송가가 새어나오지 않니?     랭보의 의도적 착란과 광기, 환각에 사로잡힌 방랑과 일탈과는 달리, 베를렌은 내부의 멜로디를 향해 간다. 랭보의 공격적 주제 선택과는 달리, 그는 석양, 안개, 달, 비, 추억, 노래, 회한 등 소박한 것을 즐겨 소재로 택한다. 이 시는 대부분의 베를렌의 시처럼 여성적인 섬세함이 두드러지며, 시인이 말하는 " '미결정(미묘함)'이 '결정(선명함)'과 뒤섞이는 회색 노래"의 전형적 작품이다.    시간과 공간이 불투명한 풍경으로 펼쳐지지만 그것은 별개의 시공간이 아니라 자아가 행복해하거나 아파하는, 자아의 서정이 투영된 극히 주관적인 풍경이다. 결코 풍경은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영혼의 상태'를 대신 그려낸다. 미세한 소리들은 모두 숨죽여 영혼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들판이라는 공간 풍경 속에는 바람조차 숨죽이고, 넋은 귀 기울여 존재에 대한 해답을, 즉 자신에게 남아있는 길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풍경에서 아무 것도 사실은 완전히 죽은 것도 완전히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소리와 움직임은 하나가 되어,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가녀리고 초라하게 떨고 있다. 소리에 대한 묘사가 특징인 이 시는 거의 침묵을 강요당한 영혼에 대해 소리 죽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소리나 노래의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있다.   베를렌 시의 특징은 이렇게 회색 풍경 속에도 있고 회색의 노래 속에도 있다.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음악에 대해 생각하게 할뿐 아니라, 각각의 시어 또한 소리와 음악에 연결되어있다. 시인의 영혼의 상처는 그대로 소리의 풍경으로 전이된다. 이렇게 그의 시의 기본 요소는 소리라 하겠다. 마치 랭보에게 색깔이, 보들레르에게 향기 그러하듯이.   그가 '색깔이 아니라 오직 뉘앙스를'이라고 외쳤을 때의 뉘앙스란 색깔보다 소리의 뉘앙스이다. 랭보의 색깔과 그의 소리 사이에서 두 시인의 기질의 차이를 읽을 수 있겠다. 랭보와의 관계가 비극으로 끝난 뒤 베를렌은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의 시편들을 쓴다.       하늘은, 지붕 위로,     너무 푸르고, 너무 고요해!     나무는, 지붕 위로,     종려잎을 흔드네.          (---)       아니, 이런, 삶이란 저런 것,     단순하고 평온한 것을.     평화로운 웅성거림     도시에서 들려오네.       - 오 거기 있는 너, 넌 무얼 하였지,     한 없이 울어대며     말해 봐, 거기 있는 너, 넌 무얼 하였지,     너의 젊음을 가지고?            ( 1, 3, 4연)     뭉스에서 출감한 시인은 신앙을 엿보기도 하지만, 결국 여전히 폐인상태로 비참한 삶을 마감한다. 많은 사람들은 위의 시에서 종교적 신앙의 자취를 찾아내지만, 우리는 종교적 회한보다 오히려 가슴 치는 통한과 마주하게 된다.   시의 전반 3연들을 모두 마지막 4연에 대비시킴으로써 회한은 거의 오열이 된다. 1연의 나뭇가지의 고요한 흔들림, 여기에는 생략된 2연의 종소리, 3연의 웅성거림 소리는 모두 4연의 울음소리와 대비된다. 시인의 모든 신경은 이 시에서도 소리에 집중되어있다. 1, 2, 3연의 억제된 리듬은 마지막 연의 파격으로, 강렬한 아픔으로 돌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에도 랭보의 것과 비교하면 대단하지 않다. 그에게는 랭보식의 대담함이나 공격성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나약하다 할 정도로 그의 시는 결 고운 비단 같다. 랭보가 자신의 일로 인하여 스스로 불타고 연소하는 형이라면, "베를렌의 것은 더 밀도 있고 관대하며 역광의 아름다움 같은 휘귀하고 미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랭세, 1984:158)   그는 랭보처럼 강한 자아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시어 하나 하나에서 '영혼의 상태'가 실려 있지 않은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시어들이 결합되어 빚어내는 풍경은 언제나 마음의 풍경이어서, 좀체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 못한다. 랭보처럼 풍경을 이끌거나, 보를레르처럼  풍경 속을 드나듦이 아니라, 풍경을 아파하는 것이다.       힘 잃은 여명은     들판으로 쏟아붓는다     지는 해의 우울을.     우울은     달콤한 노래로     내마음 흔들어     석양에 나를 잃다,     모래톱 위로 저물어가는     태양비처럼     이상한 꿈들,     진홍빛 유령들이     펼쳐진다, 쉬임 없이 (---)                       ()     그의 공간이란 두 시인들처럼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간이 아니고, 장식 있는 배경도 아니며, 자신을 고요히 쏟아붓는 공간인 것이다. 소리, 색, 미세한 떨림이나 움직임, 빛의 변화 --- 이 모두가 오직 하나만을 향하고 있다. 풍경 속에 자아는 반복되어 투사된다. 시각에 따라 변하는 태양빛에 따라 자아도 변한다. 페이르는 이런 베를렌을 '인상주의 시인'이라 하였으며(Peyre, 1976:60), 마르셀 레몽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베를렌은 그 자체가 송두리째 하나의 자연이다. 매우 섬세하고 복합적인 자연, 여라가지 영향들을 이용할 줄 알지만 즉각적으로 주어진 자연, 근원적이며 삶 그 자체에서 직접 자양을 섭취하는 독창성의 자연이다. (Raymond, 1983:31)     따라서 베를렌의 시는 상징주의의 다른 거성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난해성을 거의 띠지 않는다. 소박하고 꾸밈 없으며 친밀하고 서정적인 특성들은 그의 구어체 어조에서 가장 빛난다. 그는 많은 상징주의자들처럼 초월을 노래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초월적 상징주의가 결여되어있다는 점은 그이 시의 결함으로 볼 수 있다. 보를레르에게서 볼 수 있는 천국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결여는 그에게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사실 그의 개인적 상징주의의 특성이자 장점이라 할 것이다.   그의 명성은 시형의 완벽성이 아니라 가사 없는 노래의 더듬거리는 시들로 더해졌다. 독자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리듬의 근저에 있는 끝없이 상처 입는 영혼, 그것의 리듬 있는 넋두리였던 것이다. 모험이란 그에게 숭고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었으며, 문학은 사실은 그의 계획 밖의 것, "소위 문학이라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파격시와 그의 음악은 언어의 논리보다 내적 표현을 따르는 형식이었다. 그것은 어떤 유파의 논리에 머물지 않았다. 내면을 따라간 후에야 그의 이론이 있었다.        여전히 그리고 언제고 음악을!                 (--)      그대의 시는 운 좋은 모험이기를,      박하와 백리향을 꽃피워가며      아침 찬 바람 속에 퍼져가는 모험 ---      소위 문학이라는 것은 나머지 것이다.                                                 ()     베를렌이 "짓누르거나 멈칫거리지 않는홀수각"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운문을 형식의 제약들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이다. 언어의 무용한 중량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홀수각을 택하는 것이고, 종래의 문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를렌의 거부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어떤 몸짓이었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 상징주의에 기여한 공헌이며 프랑스 시를 자연스럽게 전통에서 해방시키는 길이었다. 그는 각운을 완전히 폐기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3)   3. 랭보와 '견자'의 길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1871년 베를렌의 초청을 받고 파리에 갔지만, 그들의 관계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랭보는 결국 1973년 브뤼셀에서 만취한 베를렌의 총에 맞게 된다.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로슈로 돌아온 랭보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산문시 을 쓴다. 그러나 베를렌과의 작별에 이어, 1875년경부터는 문학과 작별하며 네델란드, 자바, 북유럽, 독일, 이탈리아, 키프로스 등을 유랑한다.  상아밀매, 무기상, 모피상을 했으며, 이미 문학과는 절연한 것이었다. 1880년에는 일자리를 찾아 홍해의 모든 항구를 찾아다녔으며, 그 후에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교역에 종사한다. 1891년 관절염으로 프랑스로 돌아오며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변한 채 마르세유에서 37세로 사망한다.       나는 떠나갔네, 터진 주머니에 두 주먹 지르고     외투는 다 헤져 거의 보이지 않았어.     나는 하늘 아래를 갔지, 시의 여신이여!  나는 그대의 신도였다네.     오 랄라! 찬란한 사랑을 얼마나 꿈꾸었던지!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어.     - 꿈 꾸는 엄지동자처럼 나는 길목마다 시를     뿌려두었지. 숙소는 큰곰자리에 두었고.     - 내 별들은 하늘에서 부드럽게 사르락거렸어.       그래 나는 길 가에 앉아 별들의 소리에 귀 기울였지,     구월 그 아름다운 저녁에. 그때 이마에는     생명수 같은 이슬 방울들이 떨어졌어.       그 저녁, 나는 환상 같은 그림자에 싸여 운을 맞추며,     터진 신발 끈을 잡아당겼네     칠현금인양, 가슴 가까이 한쪽 발을 대고서!                                                ()     발을 칠현금에 비유하고 있다. 걸어가며 어미동자처럼, 에서처럼, 시를 길 어귀에 쏟아둔다. 칠현금 같은 발의 걸음마다가 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자주 회자되는 랭보의 시 중 하나로서, 이미 랭보의 분방한, 인습을 뛰어넘는 자유로움과 공격이 보인다. 베를렌 같은 조심스러움이나 약함은 찾아볼 수 없다. 베를렌이 그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고 하였듯이 거침없는 그의 행보와 꿈을 뒤를, 시는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풍경 속에 각인된 슬픔이라든가 풍경과의 갈등의 조짐은 없다. 이 방랑기는 1970년 말에 씌어졌는데, 랭보의 글쓰기는 16세가 되기 전인 1870년에 시작되어 1875년에 끝난다.   최초의 시를 발표하고 6개월도 되지 않은 1871년 5월에 랭보는 유명한 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프랑스 시를 '운을 지닌 산문'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의 시는 이처럼 반항으로 시작한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반항을 꿈꾼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옛날,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열고, 온갖 포도주들이 흘러내렸던 축제였다. 어느 저녁 나는 무릎 위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 그리고 그것은 쓰디쓰다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그것을 모욕해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 )     계속되어 이어지는 반어적 문장들과 속도는 시인의 저항과 파괴의 강도를 예측하게 한다. 그는 기존의 가치와 원칙들의 거부에서 출발하며 온갖 신성모욕과 잔혹과 거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반항은 맹목의 것은 아니었으며, 랭보는 부정의 끝에 하나의 해결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나는 타자(他者)다'라는 유명한 선언으로 제시된 해법이다. '이다'라는 불어 동사는 1인칭 'suis'가 아니라 3인칭 'est'라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시인은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뚫어볼 수 있는 '견자(見者)'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파괴를 통해 객관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파괴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시인은 모든 감각들의 오래고도 광범위하며 논리 있는 착란에 의하여 스스로 견자가 된다. 사랑과 고통과  광기의 모든 형태들. 그는 스스로 탐색하고, 자신 속에서 모든 독들을 다 소진시켜, 그 진수만을 간직한다. 이는 모든 신념과 모든 초인적 힘을 필요로 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형벌이다. (---) 왜냐면 그는 미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 1871. 5. 13.)     그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미지(未知)'란 보들레르나 말라르메도 추구하던 공통의 목적지로서, 정신과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엶으로써 도달 가능하다. 미지에 도달하는 것은 시인은 '잔의 영혼을 경작하여' '이미 풍요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영혼의 단련과 스스로에게 의도적인 형벌을 가함으로써, 즉 모든 감각들의 미리 계획되고 의도적인 착란에 의하여, 이미 이곳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감각과 내적 훈련을 통한 정신의 해방은 먼저 스스로 '불량소년'이 됨으로써, 즉 종교나 기존 사유체계등, 정신과 감각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주저 없는 파괴와 항거로써 가능하다. 질서와 그것의 구속, 기성의 행복과 사랑, 윤리, 종교, 요컨대 인간 정신의 그 어떤 산물이라도 내적 혁명의 대상이었다.       나에게. 나의 광기들에 가운데 하나에 대한 이야기.      나는 오래 전부터 가능한 모든 풍경들을 소유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고, 그림과 현대시의 명성은 하찮은 것이라 여겼다.                                                                                                                                             ()     반항과 거부에 의하여 인간은 변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를렌처럼 그 속으로 파묻히거나 사라지는 풍경이 아니다. 자아는 풍경을 소유하거나 버리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   파괴에는 이를 명령하는 논리가 우선된다. 견자가 되는 것은 의도적 광기와 감각과 정신의 훈련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중성적이고 몰아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나는 타자다'라는 말은 주관과 객관적 진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수 있도록 통일한 경지이며, 인식의 장애물들이 정신의 힘으로 극복된 상태를 말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다.   그래서 랭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 맞서는 코기토를 제안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on me pense'(1871년 5월, 에게)다. '사람들은 나를 생각한다'이거나 '나는 생각되어진다'이다. 이처럼 나는 타자다.   타자인 나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그 전개를 성찰한다. 이 몰아적 정신과 감각의 상태에서, 시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미래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랭보에게서 이 부분을 읽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자가 된다는 것은 시인이 되기 위한 단계지 견자가 시인은 아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 끝에 마치 무병(巫病)을 앓은 후처럼 견자, 즉 '최고의 현인'이 되지만 그것으로 시인은 아니다. 시인은 모음의 탄생을 체득한 자여야 한다. 랭보가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만들어내었다"라고 하며 "검은 A. 하얀 E, 붉은 L, 푸른 O, 초록 U"라고 하였을 때, 랭보가 꿈꾸는 것은 언어를 감각적으로 재현하겠다는 단순한 꿈이 아니다. 그는 새롭게 창안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빚어질 정신과 언어의 우주, 즉 새로운 창조에 대해 갈망하는 것이다.   시인은 따라서 '잠재된 탄생'을 연금술로써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언어는 '모든 감각에 적용될 수 있는 시어'이다. 이 '보편적 언어'를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연금술사의 소명이다.   랭보는 그러니까 자아의 문제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었던 베를렌을 만나러 가기 직전에 쓴 그의 비교적 초기의 작품 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개인적 모혐으로 시작하는 여행담이 환상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배로 의인화시킨 표류의 이야기나 꿈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시인이 그리는 천국에 대한 인상이기도 한 것이다. 랭보의 천국은 모험과 광기 후의 움직이는 공간이지, 보들레르식의 '평온과 호화 그리고 관능'의 도피적 공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랭보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 심연을 동시에 암시하기도 한다. 모험은 지속되지 못하고 단념 속에 다시 바다의 이면으로, 현실 속의 어두운 물로 돌아온다.       나는 항성 같은 군도를 보았네!  또 착란하는     하늘을 표류자에게 열어주는  섬들을 보았네.     - 네가 잠들고 유배되는 곳은 바닥 없는 그 밤들 속인가,     수많은 금빛 새들이여, 오 미래의 '기운'이여?       그러나 사실 나는 너무 울었다!  '새벽들'은 가슴 에인다.     모든 달은 잔인하고 모든 해는 가혹하다.     쓰라린 사랑은 내게 취할 듯한 무기력을 불어넣었다.     오 나의 용골이여 깨어져라! 바다로 가야겠다!       내가 유럽의 물을 원한다면 그것은     향기로운 저녁 무렵 웅크린 채     슬픔에 찬 아이가 오월 나비처럼 덧없는     배를 띄우는 검고 차가운 물웅덩이다.                                                            ()     랭보는 당시 바다를 본 적이 없었고 보드레르처럼 인생 경험에 대한 기억도 많지 않았다. 상상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이었다. 시인은 감각의 훈련으로 절망의 심연을 뚫어보는 능력에도 도달한다. 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 착란으로 스스로를 견자로 만든 것이다.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들'을 경험하여 흔히 감지되지 않는 '사물들의 언어'를  포착하는 초감각에 거의 도달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만들어내었다!  - 검은 A, 하얀 E, 붉은 I, 푸른 O, 초록 U.                                                                                                               (---)     그것은 처음에는 하나의 연구였다. 나는 침묵을, 밤들을 썼으며,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였다. 나는 현기증들을 고정시켰다.                                                                                                                 (---)     나는 단순한 환각에 익숙해졌다. 나는 공상 대신에 회교사원을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                                                                                                                      ()      모음들의 색깔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탄생, 즉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재현될 세계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세계란 침묵 뒤의 공간까지 아우르는 세계, 우주적 본질들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세계다. 이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언어는 모든 감각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새 언어에 의해서 착란은 질서로 안착된다.   그가 "나는 단순한 환각에 익숙해졌다. 나는 공장 대신에 회교사원을 보았다"라고 했을 때, 환각 만들기라는 행위는 거부하고 파괴하였던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부활시키는 능력이다.     시란 이제 부정이 아니라 초월을 위한 방법이다. 개인의 한계를 넘어 신비로운 도취 속에서 우주의 원초 속으로 환원되게 하는 말 - 이를 위하여 자아는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모험을 자청하였었다. 이 모두가 관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한 교란의 정도는 가히 파괴적이었고, 모험을 가능하게한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부정되었던 현실이 현실을 되찾는다. 현실이 '미지'가 된다. 랭보는 이 모든 실험을 불과 몇 년 사이에 해치웠으니, 그의 반항의 강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시인은 '불을 훔쳐온 자'라는 것은 '모든 감각에 적용되는 언어'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이 '보편적 언어' 또는 '우주적 언어'는 향기, 소리, 색채 등 모든 것을 융합하며,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된다. 영혼을 끄는 영혼의 언어를 갖고서, "영혼과 육체 속에 진실을 소유"()함, 시인은 '보편적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적 감각은 예언적 감각이 되고, 신비로운 발견의 수단이 되며, 무의식까지 탐사하는 정신의 섬세한 도구로 변한다.   비록 짧은 시간에 행해진 이 모든 시험들은 말라르메도 지적하였듯이 인내심의 결여를 보이는 듯하기도 하지만, 그의 모험의 크기는 사실 알 수 없는 또 다른 인내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의 일화까지 포함하여 그의 치열함과 그의 감각과 언어 조합력과 추진력은 아직도 신화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4)   4. 말라르메와 구도의 여정   말라르메(1842~1898)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의 재혼, 이어 여동생 마리아의 죽음 등, 가정적으로 이미 어려서 불행을 체험한 바 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메리 로랑Mery Laurent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이후의 삶은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여, 시인 스스로가 에서 '일화가 없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이다. '포우'를 더 잘 읽기 위해' 런던에 머문 적도 있지만, 평생을 지방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영어교사로 지냈다. 그 외에는 오직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죽기 2년 전 '시인들의 왕'으로 뽑힌 것, 그리고 파리의 아파트에서 문학모임 '화요회'를 가졌다는 것 외에는, 가난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정말 랭보식의 일화나 사회적 야망은 거의 없이 평온한 삶을 살았다. 퐁텐느블로 인근 발뱅의 시골집에서 삶을 조용히 마감한다.   그는 보들레르를 읽고 지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학적 삶의 결정적 계기를 맞는다. 고답파에서 언어 형태의 완벽성을 배웠고 에서는 자신의 내적 갈등과 비극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의 '창천(蒼天)', 즉 이상에 대한 꿈은 보들레르의 이상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도덕적이라기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의 시학은 본질적이며 관념적인 어떤 실체 찾기를 향하여 열려 있다.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의 시적 경험은 대개 모험이 주는 영감에서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시란 우연스런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삶의 우연과는 무관한 언어행위라고 말한다.   비록 '일화는 없었다' 하더라도, 시인의 삶은 여러 문학적 시도들로 가득 찼다. 말년의 라는 작품은 그의 모든 언어 실험들의 종합편이자 정수들을 모아놓은 걸작으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시언어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사망할 때까지 시인은 절대의 '책(Livre)'을 향하여 매진하였다.   그러나 "1868년과 1898년 사이에 쓴 몇 편의 시는 대단치 않은 것들이며 시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라는 것이 오랜 동안 말라르메를 보는 시각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시언어의 체계를 정립시킨 자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말라르메는 보들레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말라르메의 절대적 상징주의는 본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유래되어 나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말라르메의 절대 언어에 대한 탐구는 그의 문학을 '절대적 상징주의'라고 불리게 하였지만, 그 출발은 자아와 세계로 분리된 이원성의 인식에서부터다. 아래 실은 은 보를레르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꼽히는시이다.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any where out of the world!)"를 외쳤던 보들레르처럼, 그도 또한 도망치라고 외친다. 현실이 아닌 이국의 자연이 보들레르에게뿐 아니라 그에게도 계속 '여행 초대'를 하고 있었다.       오! 육체는 슬픈 것,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        달아나자! 저기로 달아나자! 새들은 알 수 없는 물거품과 하늘 사이     있음에 취해있음을 나는 느낀다!     아무 것도, 눈에 비치는 낯익은 정원도     바닷물에 젖어가는 이 마음을 붙들지 못하리     오 밤들이여! 백색이 지켜주는 빈 종이 위에     쏟아지는 램프의 고적한 빛도     아이에 젖 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겠다!     기선이여 돛을 흔들며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잔인한 희망들에 낙담하고도 '권태'는     손수건 흔드는 최후의 작별을 아직도 믿네! (---)    여기까지 보들레르의 시선과 그의 시선은 같은 곳을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권태'는 보들레르의 '우울'과 색깔이 다르다. 이미 백지에 대한 고뇌가 언급되고 있으며, 생략한 시 뒷 부분에 나오는 파선(破船)의 이미지는 말년의 의 장치로 다시 등장한다.    1864년 말경 그는 이상세계에 대한 꿈 속으로 단순히 도피할 수만은 없음을 깨닫는다. 현실을 대체할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논리를 갖는 것이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1864년과 1865년 사이에 그는 와 를 포함하는, 절대시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미 그때 시인은 '정신의 도구인 언어'를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라르메는 보들레르와 구분되는데, 와 다음의 를 비교해보면 두 시인이 얼마나 다르게 각자의 세계를 펼쳐갔는지 알게 된다.        순수하고 경쾌하며 아름다운 오늘은      이루지 못한 비상의 투명한 빙하가      서릿발 아래 서성이는 잊혀진 이 굳는 호수를      취한 날개짓으로 우리에게 찢어줄까!        옛날의 백조는 기억한다      불모의 겨울 권태가 번쩍였을 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노래하지 못한 까닭에 모습은      찬란하나 벗어나려 하여도 희망 없는 자가 바로 자신임을.        새는 온 목을 빼고 떨쳐버릴 것이다,      공간을 부정하나 공간이 안겨주는 이 하얀 번민을.      그러나 깃털이 묶여있는 땅에 대한 혐오는 떨치지 못한다.        자신의 순수 광휘가 이곳에 부여하는 유령이란 모습,      무용한 유형 중에 자신을 감싸는      모멸어린 차가운 꿈 속에서 굳어져 간다. '백조'는 (Cygne).     이 시는 말라르메 시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이며, 프랑스 시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는 시로 조사된 바 있다. 앞의 시에서 '백색의 방어'해주던 원고지는 이 시에서는 '하얀 번민'으로 나타난다. 하얀 번민이란 원고지를 마주하였을 때 시인이 느끼는 창조의 고뇌이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번뇌가 아니라, 자아의 위기, 글쓰기의 부정 등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번뇌다. 시인은 글쓰기의 문제를 시의 주제로 꾸준히 내세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번뇌를 시화(詩化)하겠다는 생각은 잃어버린 창조의 의미를 되찾겠다는 욕구에서 나온다. 이 꿈은 낡거나 늙지 않도록 빙하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 꿈에는 절망적인 모멸이 어려있다. 그것은 대중의 모멸이며 동시에 불모인 자신에 대한 모멸이다. 또한 현실 공간에 대한 모멸이며 글쓰기에 대한 모멸이다.   에서는 시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실, 다시 말해 시인의 현실에서의 무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에서는 '이곳'이라는 공간에 과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과 망설임이 지배한다. 공간의 무의미 때문에 번뇌가 이어진다. 공간은 삶의 공간이자 죽음이 공간이며, 여기에 글쓰기의 공간이 겹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긍정적인 반전을 숨기고 있다. 백조의 몸은 호수의 물과 마침내 함께 얼어붙어,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 빚어지게 된다. 목숨은 이렇게 아름다운 빙하로만 남아야 한다. 완전한 거울이란 개인이 사라져야 생성되는 것이다. 그때 진정한 언어가 탄생한다. 그리하여 최후의 노래는 최고의 노래가 된다.   시는 백조를 뜻하는 대문자의 'cygne'라는 단어로 끝난다. 백조는 '기호'를 뜻하는 불어 'signe'와 같이, 발음이 모두 /sin/이다. 이는 의도적인 것으로, 시인 자신이 언어의 존재론에 집착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인간의 기호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아래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로잡힌 날갯짓'이다. 그러나 백조의 모습으로 재현된 기호는 상징이자 노래다. 시인 자신이자 인간의 언어다.        오, 꿈꾸는 여인이여, 다할 길 없는 순수한       환희 속에 내가 빠져들 수 있도록,      나의 날개를 정묘한 거짓으로      그대 손 안에 간직하고 있어주오.        황혼의 서늘함이      부채질할 때마다 그대에게 밀려오고      그 사로잡힌 날개짓은      지평선을 살짝 밀어낸다.         현기증! 이제 공간은       큰 입맞춤처럼 전율한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면서 태어나려 몸부림치나,      공간은 분출하지도 진정되지도 않는다.        당신은 느끼는가 야생의 낙원이      또한 묻혀버린 웃음이      당신 입가에서 나의 전면적인      주름 밑바닥으로 스며들어버리는 것을!                  (----)       ()     시의 외적 동기는 부채질하는 단순한 움직임일 뿐이다. 이 시에는 신비나 애매한 장치 같은 것은 거의 없다. 부채질이 공간의 전율을 일으킨다는 것은 시인의 관찰이다. 부채질에 따라 지평선이 물러나거나 다가오며 공간이 전율하는 듯하지만, 이는 바람으로 사라질 뿐인 공간,  태어나지 못하고 분출하지도 솟아오르지도 못하는 공간이다. 현상과 내면에 대한 극사실적 형용이다.   부채질이라는 흔한 움직임 속에 지평선을 꿈꾸지만 그것은 곧 매몰되어 없어질 무의미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공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사실 공간에 전율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에 대한 헛된 소망이 전율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 모두 '사로잡힌 날개짓'이며 관념의 생성과 소멸의 되풀이다.   2연에서는 지평선을 상상하였다가 3연에서 이는 현실화될 수 없는 공간임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4연에서 낙원에 대한 가정을 거두어들였는데, 생략된 5연에서는 비상의 의지는 '하얀 도약'이었으며, 그것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한다.   움직임은 바람과 숨결의 미세한 움직임이며, 욕망이나 시선의 이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어떤 희망이, 입술 가장자리로 스미듯 사라지는 웃음처럼 사라질지라도, 순수한 낙원에 대한 가정은 정당하였다는 것이다. 가정임을 알고 있으므로 처음부터 '정묘한 거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5연에서는 다시 부채는 팔찌 옆에 접혀져 놓인다.   집요한 것은 공간 구성에 대한 의지다. 거짓된 희망에서 지평선으로, 빈 공간으로, 낙원으로, 다시 일상으로 이어지는 공간 양상 - 여기에 상징의 모두가 들어있다. 공간 자신은 태어나지 못하고 전율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시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치는 상징의 미학을 묘하게 숨긴다. 숨김의 미학은 상징의 맛이 두드러지게 한다.     말라르메는 이렇게 생각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언어의 효과'를 통해 그것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한다. 언어 외적인 것은 시에서 모두 베제시켜서 전적으로 '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하는 것이다. 비인칭 상태, 즉 자아를 지워 텅 빈 상태를 미리 마련해놓고 암시의 기법을 그 위에 사용함으로서, 언어 스스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인칭화 혹은 탈인성화란 고전주의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글 쓰는 주체의 지우기다. 이것을 그는 "시인의 화술적 사라짐"이라 한다. 앞에서 본 백조의 죽음은 시인의 죽음을 뜻한다. 이러한 죽음, 즉 인성의 사라짐에 의해 언어의 기능이 진정 생성되는 것이다.   탈인성화는 또 한편 내면의 '공(空)'을 만들어내면서, 백지상태 위에 정신 스스로가 펼쳐지게 한다.         나는 끔찍한 한 해를 보낸 참이다. 나의 '생각'은 생각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순수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결과 이 오랜 번민 중에 나의 존재가 겪었던 모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행히도 나는 완전히 죽었다. (---)       다시 말해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제 비인칭이 되었다는 것, 나는 네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나였던 것을 통하여 스스로를 보고 스스로 발전해가는, 정신의 '우주'가 지니는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1867. 5.14:Barbier, 1977,341)     이상이라는 문제를 마주하였을 때 시인은 먼저 세계 저편에는 '무'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상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결코 버릴 수 없었으므로 그는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즉 이상세계는 '허무' 뒤에 있다. '무' 안에 무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의 전환은 불교와 헤겔의 도움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먼저 현실의 모든 '거짓된 외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대상과 자신을, 다시 말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자발적으로 비운다. 그 텅 빈 '무' 위에 새로운 긍정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나는 완전히 죽어, 몰아상태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답파의 엄정한 중립주의에 도움을 받은 것이기 하지만, 고답파의 객관성과도 다른 것이다. 몰아의 '공' 상태에서 정신과 우주는 자연스럽게 다시 펼쳐진다. 나는 그 전개를 바라보는 하나의 보는 '능력', 즉 시선이다. 시선은 매개체일 뿐, 인칭이 없다.    시인이 이 편지를 쓰고 몇 년 후인 1871년, 랭보는 '나는 타자이다'라고 말한다. 두 시인 모두 주체의 위기에 대해 설파한다. 그런데 이 위기는 '미리 계획된' 것이다. 위기를 전개시키는 방법은 달랐을지라도 상징주의의 이상은 이처럼 의도적 위기와 자아의 정화 후에야만 진정 구축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상징과 상징체계란 모든 것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수 있고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스스로를 비우는 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이처럼 새로운 세계의 구축을 겨냥한다. 그리하여 거미줄처럼 사물들의 관계 요소들이 섬세히 그물망을 이루도록 관계의 구조물을 구축하는 것, 혹은 레이스처럼 논리의 실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 - 이처럼 탄탄한 체계들만이 무한한 확산력을 지닐 수 있다. 보들레르의 은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사물들로 퍼져나가는" 확산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확산을 위하여 랭보에게는 광기와 착란이 필요하였다. 말라르메는 확산을 위하여 감각을 우선 안으로 응축시킨다. 사물에 대한 말들은 겉으로는 모두 지워진다. 아래의 시에서도 주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죽었거나 몰아상태일 것이다. 이 시는 1868년에 '자신에 관한 우화적 소네트'라는 제목을 쓴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정하다가 20년이 지난 1887년에야 무제로 출판한다. 완전히 상징들로만 이루어졌으며, 상징주의의 난해성을 대표하는 시로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주석이 가해졌던 시이다.         그의 맑은 손톱들은 자신의 줄마노를 아주 높이 바치고,       이 자정에 고뇌가 횃대를 떠받치고 있다       골호(骨壺)가 받아들이지 않는       '불사조'에 타버린 저녁의 꿈 몇을          빈 방, 제기단 위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소리 울리는 공허의 폐기된 장식품은,        ('허무'가 자랑하는 유일한 이 물건을 갖고서 '주인'은        '삼도천'에 물을 길으러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텅 빈 북쪽 유리창 가까이,        물의 요정과 싸우며 불을 내던지는        아마 일각수 장식을 따라, 금빛이 죽어가고 있다.        요정은 벗겨진 채, 죽은 자로 거울 속에 있다        거울 테두리가 감싸고 있는 망각 속에        섬광의 북두칠성이 그렇게 빨리 고정되고 있지만,        ()     이 시에서도 여전히 공간 창조의 고뇌가 문제되고 있다. 여기서는 빈 방과 선반 하나, 그리고 열린 창문의 덧창밖에 없는, 그야말로 텅 빔의 미학적 풍경 자체다.  주인은 삼도천(三途川)에 물 길으러 갔으므로, 그가 실제로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거울 테두리에는 금빛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빛도 모두 스러져가고 있다. '불사조에 타버린 꿈 몇'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인이 작품 모두를 불태웠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소리'를 가리키는 "소리 울리는 공허의 폐기된 장식품"이란, 악기이자 글 쓰는 도구이다. 삼도천에 이 악기를 가지고 갔다는 부분에서 오르페우스가 그려진다.  서양의 시에서 이처럼 비어있음만을 주제로 삼고 그것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하려한 작품은 많지 않다. 극도의 텅 빔이 시 전체를 지배하지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열린 북쪽의 덧창을 통해 보일 북두칠성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어떤 희망을 시사한다. 그것은 어떤 조화로운 탄생일 것이다. 이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시는 말라르메식 오르페우스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옛날에 사람들이 '대작'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을 때기 위하여 자기 집 가재도구와 지붕 서까래를 불태웠듯이, 모든 허욕과 모든 만족감을 던져버릴 용의를 가지고 연금술사와도 같은 인내심으로, 언제나 다른 것을 꿈꾸고 시도했습니다. 어떠한 대작일지? 말하기 어렵군요. 간단히 말해 여러 편으로 된 한 권의 책, 아무리 경탄스러울지라도 우연히 부딪치는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건축적 구성이며 미리 계획된, 책이랄 수 있는 책 말입니다. 나아가 나는 '책(Livre)'이라고 하겠습니다.       (---)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설명, 이야말로 시인의 단 하나 의무이자 더할 나위 없는 문학 작업입니다. 왜냐면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까지도 비인칭적인 동시에  생생할 '책'의 리듬 자체는 이 꿈의 방정식, 혹은 '오드'와 병행하기 때문입니다.                          (, 베를렌에게, 1885년: 말라르메, 1974, 662~66)     오르페우스는 말라르메의 꿈이었다. 오르페우스의 업은 노래하는 것이다. 꿈의 방정식은 오드라고 한다.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설명"이 꿈의 방정식의 '해(解)'인 것이다. 해는 대문자의 '책(Livre)'이다. '오드'를 통하여 '책'에 도달한다.  그는 "결국 세상은 아름다운 한 권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Huret, 1984:80) 말한다. 시인의 꿈은 이토록 소박한 것이었지만 정말 소박한 것은 아니었다. 대지에 대해 설명하겠다는 꿈은 절대의 책을 완성하겠다는 크나큰 야심이다. '책'은 그에게 언어와 정신과 삶이 어우러져 용해된, 인식론적이고 존재적인 어떤 총체, 어떤 '하나'였다. 시인에게 세상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보들레르가 교감이라는 사물 인식법으로 새로운 문학을 열어 낭만주의와 고답파를 버리게 하였다면, 말라르메는 그를 계승하면서 언어형식의 또 다른 혁명을 낳는다. 그 결과의 하나가 라는 시다. 시인은 절대의 책을 가정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페이지라는 형식을 버린다. 대신에 펼쳐지는 책의 (우좌가 아니라) 좌우 페이지를 합쳐서 한 '장'이라고 한다. 이 하얀 화폭 위에는 오직 하늘과 바닷물밖에 그려져 있지 않다. 보들레르가 초대받고 싶어하였던 여행을 그는 거의 마지막 시도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실현시키고 있다. 그곳에는 미학과 철학과 음악과 문자가 하나가 되어 있다.   베르나르는 를 '시와 산문의 종함'으로 보고 있다. (Bernard, 1988:311)       (---) 는 산문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와 산문을 나누는 칸막이를 깨고 '통합' 예술의 시도에 상응하는 총합의 양식을 발견하기 위해 당시 시인들이 시도하였던 언어 탐구들에 대한 의미 있는  증언이다(Bernard, 1988:328).      에서,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까지도 비인칭적인 동시에 생생할 '책' 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가 어쩌면 실험에 그칠지 몰라도, 우선은 절대의 책으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사고의 질서이자 우주의 질서이며 언어의 질서이다. 인간의 말을 통하여 우주의 신비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자 속의 신비'를 구현하려는 이 다중의 언어 프로젝트를 통하여, 시인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두텁게 싸여진 상징체계를 생의 마지막으로 완성한다.  언어를 완성하려는 그의 의지는 언어에 모든 것을 바치고 '일화가 없는' 삶을 선택하게 하였다. 시인의 단 하나 의무란 이 땅에 대한 오르페우스식 설명일 뿐으로, 삶의 '일화'는 모두 그속으로 묻히면 되었던 것이다. 발뱅의 시골집에서 후두경련으로 사망하는 시간에까지 그는 아름다운 '책'에 대한 설명을 놓지 않았다. 언어에 몸을 맡긴 그의 이 모든 여정은 사제의 삶에 근접하였다. 여기서 '시라는 종교', 그리고 '언어의 사제'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19세기 후반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가장 진정한 상징주의자"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Peyre, 1976:37), 과작(寡作)의 실패한 시인이라는 평이 1950년대까지도 주류였다. 과작은 그가 나태하거나 황폐하여서가 아니라, 상징의 완전한 체계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한계였다. 얼핏 보아도 동양적 성찰에 많이 닿아있는 말라르메의 공간학은 발레리의 것과 색채와 향기가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의 여정과 가닿는 길은 달랐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5)   5. 발레리와 지중해의 명증   폴 발레리(1871~1945)는 지중해에서 태어나고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1890년대 초부터 시를 발표한다. 이 시기의 시는 후에 (1920년)으로 발행한다. 그러나 발레리는 1892년, '제노바의 밤'이라고 불리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위기를 겪고 시를 포기한다. 그는 1894년부터 말라르메의 화요회에 참석하며, 시는 쓰지 않고 철학과 수학, 과학 등에 매혹되면서, 과학적 정신과 예술적 정신의 결합의 상징이었던 다 빈치에 대한 글( 1895년)과 1896년)을 발표한다. 1896년, 오래 글쓰기를 중단하게할 두 번째의 위기를 겪은 후에 발레리는 시로 돌아온다. 기나긴 침묵은 를 발표함으로써 깨어진다. 그는 1912년 앙드레 지드와 갈리마르사의 강력한 권유에 의하여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하였고, 5년 뒤인 1917년 발표된 는 시인에게 확실히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사이의 침묵의 20년은 개인 비서로 일하면서 삶을 이어갔다.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에 몰두할 때 그는 시인은 건축가가 사원을 짓듯이 시작업으로 시를 건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는 영감이 아니라 '구성(composition)'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포우의 훌륭한 번역자 보들레르와 말라르메를 따른 것이다. 20세기 시에 고전적 원칙을 복원히켰다는 평을 듣는 그는 수학적 정밀함과 우연을 배제하는 명확성과 객관성과 순수함을 갖춘 시를 쓰고자 하였다. 그의 지적이고 심미적인 시는 건축의 견고성과 음악성과 순수한 시적 이미지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는 또 뛰어난 성찰력으로 학들과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된다.   발레리는 1945년 사망하여 고향 세트Sete의 해변의 묘지에 묻힌다. 그가 1917년과 1922년 사이에 쓴 시집 속에 발표된 가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꼽힌다.     발레리는 제노바에 체류 중 번개 치는 어느 '하얀 밤'에 여럿으로 분열된 자아를 체험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감수성과 이성, 육체와 영혼, 무의식과 명철성 사이로 갈라진 심연을 보게 된다. 이 위기 이후 발레리는 지적이고 엄격한 사유를 막는다고 하며 예술활동을 중단한다. 영감이나 정념 등을 버리고 지적 활동과 내적 성찰 속에 침잠하였던 오랜 내성기간을 지낸 후에야 발레리는 심연에서 돌아온다. 그는 조금씩 시를 쓰는 즐거움과 감각적인 현실세계가 주는 새로운 충격을 받아들인다.    발레리는 인간은 감각과 현실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지적 자아는 감각적 자아를 밖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안의 모든 시는 감각 세계와 지적 세계 사이에서 시적 세계를 전개시키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자아를 보여준다.       알갱이들이 과일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여,     나는 자신의 발견들로 파열한     지고의 이마들을 보는 듯하다!       너희가 견뎌온 햇볕들이 비록,     오 반쯤 벌어진 석류들이,     자존으로 다져진 너희로 하여금     루비의 간막이들를 부수게 하였더라도,       또 껍질의 메마른 금빛이 비록     어떤 힘의 요구를 따라     과즙이 빨간 보석들을 터뜨린다 하더라도,       이 빛나는 파열은     옛날의 내 영혼에게     자신의 은밀한 구조를 그리워하게 한다                                                          ()     말라르메의 부채 연작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징주의 시는 공허한 이상세계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시어는 막연한 암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질긴 관찰이 있은 뒤, 바로 그것에 의해서야 그 위에 상징체계를 축조할 수 있다. 그 탄탄한 구조를 읽어내려면 독자들은 축조과정을 따라가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상징의 묘(妙)는 여기에 있으며 해독의 어려움도 여기에 있다. 위의 시도 사물에 대한 자세한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구체성 없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듯이 석류 알갱이의 벌어짐을 천천히 묘사한다.   그러나 시의 1연에서는 '지고의 이마들'이 언급되고 마지막 연은 '은밀한 구조'라는 단어로 끝남으로써 시인의 의도가 드러난다. 금빛 껍질의 루비빛 파열 등은 객관적 묘사일 뿐 아니라, 그의 성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발레리는 에서 다양한 지식들의 관계와 우주체계를 과학적으로, 즉 최상의 정신력으로 파악한 다 빈치를 모범으로 그리며, 우연으로 찬 외적세계의 논리를 거부한다. 또한 내면 의식을 탐구하여 인간정신의 법칙을 발견하고자한 테스트씨라는 가상의 인물처럼, 스스로 의식을 주도할 수 있는 강력한 지력을 갖고자 하였다. 테스트씨는 감각적 인식을 부인하고 자의식과 지적 인식만을 인정하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이러한 측면은 발레리의 사상과 작품 속에서 이원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남아있게 된다. 다 빈치와 테스트씨가 '자기 사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지적 훈련의 표상들이라면, 와 에서는 이 극단성은 화해를 향한다.     는 발레리의 와 함께 시인의 내면 성찰을 시화한 작품이다. 어느 섬에서 여명에 눈을 뜬 파르크는 방금 꾼 악몽을 계기로 자신의 내면과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순수와 관능 사이의 갈등을 회상하며 살아보려 하지만 또 다시 광란에 빠져들게 된 파르크는 죽으려 하나 죽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하며, 영혼의 각성에 전율하게 된다.    많은 이미지들과 풍부한 상징의 망, 음악성, 관능의 제시와 그 극복 등은 이 시를 최고의 상징시의 하나로 불리게 하며 독자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의 파르크는 운명의 세 여신 중 막내로 탄생의 신 클로토Clotho를 가리키는데, 생명의 실을 짜는 것이 임무다.   다음은 이 시의 시작으로, 젊은 파르크가 한밤에 깨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한밤에 일어나니 모든 삶이 다시 살아나서 자아에게 말을 하고" 있다.       거기 누가 울고 있는가, 단지 바람이 아니라면 이 시간에     혼자서, 지고의 금강석들과 함께?... 아니 누가 울고 있는가     이토록 나의 가까이서 내가 울려는 순간에?     여기서 화자나 화자가 들여다보는 대상 모두 나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두 개의 자아로 분리되어 있다. 울고 있는 것은 바람과 금강석들, 그리고 나이다. 관찰자인 나는 막 울려고 하는 순간이지만 울지 않고 울고 있는 자연과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의식으로 깨어나 이렇게 자아와 주변을 분석하려 한다.   관찰자인 자아의 눈뜸은 뱀에게 물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의의식과 욕정의 상징인 뱀에게 물림으로 인하여 파르크의 관능적 자아아 성찰적 자아는 동시에 인식된다. 또 하나의 나는 '명철한 정신'으로서, 이들에 대한 관찰이다.       물 굽이치듯 나는 나를 보는 나를 보고 있었고, 시선에서     시선으로 내 깊은 숲들을 금빛으로 칠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나를 막 문 뱀을 쫓아가고 있었다.       욕망들이 이 무슨 꿈틀거림인가, 뱀의 기는 모습이란!... 내 탐욕에서     빠져나오는 보석들의 이 무슨 혼란,     또한 명철에 대한 이 무슨 어두운 갈증!                                                     ()     관능적 자아에 가까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자아'와 성찰적 자아, 이를 지켜보는 자아 사이에서 자아의 갈등과 분열은 극에 달한다. 그리하여 화자인 나는 "나를 보는 나를 보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말라르메의 앞서 본 편지에서 "나의 '생각'은 생각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었다"라는 부분을 상기시킨다. 발레리는 그 자아를 더욱 분석한다.   말라르메가 금욕적 자세로 '공(空)'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아의 분열을 체험하였다면, 발레리의 분열은 관능적 자아의 문제가 전면화되어 더욱 미묘하다. '의식하는 의식'은 자아를 점점 의식의 심연으로 밀어넣고, 그리하여 나는 "오 위험하게도 그의 시선의 포로가 될 뻔하였다!"라고 외친다. 의식의 깨어남과 분열의 고통은 마침내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사라진 나의 시선이 보고 있는 바를 안다.     검은 내 한쪽 눈은 지옥의 거소로 난 문턱이니!     나는 생각한다, 시간들은 산들바람에 내맡기고     영혼은 쓰디쓴 관목 숲에서 돌아오지 않은 채 (---)     죽음은 그러나 실제 죽음이 아니라 허구적인 죽음으로, 파르크가 새벽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었을 때, 모든 것은 존재론적 고뇌였음이 밝은 빛 속에서 밝혀진다.       (---) 내가 옷 벗은 채, 두려움 없이     이 바닷가에 와서, 치솟는 거품 들이마시고     드넓고 웃음 띤 쓰라림을 눈으로 마신다면,     가장 생생한 대기 속에, 존재는 바람을 마주한다면 (---)                                                                ()     자아가 죽음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삶의 의지를 되찾는 이 풍경은 에서 "바람이 인다! --- 살아보아야 한다!" 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삶을 초월한 논리적 결론이, 비록 우연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삶의 의지를 이기지는 않는다는 것이 시인의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파르크의 유혹과 망설임은 시인의 자아 부정과 자아를 되찾는 과정의 번뇌를 표현한 것이다. 자아는 이제 지적 탐구와 고뇌를 극복하고, 변화로운 감각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각성을 따르고자 한다.   다양하고 시간적인 현상과 안정적이고 비시간적인 상태 사이에서 흔들림도 시인의 사고의 두 축에 기인한다. '타고난 시인'(레몽, 1984:200)이었으므로 '지적 유혹과 감성적 자질' 사이에서 줄타기할 수밖 없었던 발레리에게는, 이처럼 이원적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의 화두로 제시되었다.   발레리의 시간의 이원성에 대한 생각은 무한에 대한 관조의 세계로 다시 재현된다. 1920년  발표된 는 그의 고향 세트의 바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은 일생 중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끌어다 쓴 최초의 시"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하였던 맑고 고요한 감각을 명상 속에서 회상한다.       비둘기들이 걷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은     펄럭인다 소나무 사이에서 무덤 사이에서     엄정한 자, 정오는 거기 불로써 빚어낸다     바다를, 언제고 새로 시작해있는 바다를!     오 생각 하나에 따른 보상이여,     신들의 평온을 오래 관조하는 시선이여!     여기서 비둘기는 바다에 떠있는 삼각돛을 말한다. 그러니까 지붕은 평화로운 바다를 지칭한다. 이 시에서 내적 리듬은 에서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전체적으로 더 자연스럽고 구속을 버렸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시인의 사유의 발전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순수 자아'의 힘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공허 속에서 본질과 영원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오, 나만을 위하여, 나 자신에게만, 나 자신 속에서,     마음 곁에서, 시의 원천에서,     공허와 순수 사건 사이에서,     나는 나의 내면의 위대함이 메아리치기를 기다린다     항상 앞날에 다가오는 공동(空洞)이 영혼 속에 울리게 하는,     쓰라리고 어둡고 소리 울리는 저수조여!     그럼에도 바다 앞에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시인은 거부할 수 없이 변화를 인정한다. 인식의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던 시인은 고향의 해변 묘지를  배경으로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리듬이 살아남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는 시인의 인성이 가장 많이 드러난 시라는 평을 받았다.       아름다운 하늘이여, 진실된 하늘이여, 변화하는 나를 보라!     그토록 대단한 자존 끝에, 이상하나 힘에 찬,     그토록 대단한 무위의 끝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나를 맡긴다 (---)     가 변화와 불변 사이, 추상과 구상 사이로 찢겨진 자아의 이원성의 드라마라면, 이 시는 드라마의 완결편이라 할 정도로 상대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파르크도 구체적 현실을 수용하고 삶의 의지를 인정하려 하였지만, 자아는 쉽게 변화를 수용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유사한 장면이지만 수용이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아니다, 아니다!... 일어서라! 계속되는 시대 속에!     부숴라,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틀을!     마셔라,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바다에서 뿜어나오는 서늘함이     내게 나의 혼을 돌려준다...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로 달려가, 거기서 생생하게 솟아오르자!                             (---)     바람이 인다!... 살아보아야 한다!     광막한 대기는 나의 책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파도는 가루로 부서져 바위 위에 용솟음치려 하네!     눈부시게 하얘진 책장들이여 날아가라!     부숴라, 파도여! 기쁨을 되찾은 물로써 부숴버려라!     비둘기들이 모이 쪼던 그 고요한 지붕을!                                                      ()     앞에서 글쓰기 불면의 진리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변화와 현실을 수용하는 글쓰기를 인정한다. 여기 책은 열었다가 다시 닫힌다. 책장들은 날아간다. 현실을 버리는 글쓰기는 없는 것이다. 무한은 현실을 포용하고 펼쳐질 것이다.  생각의 변화는 시의 첫 연에 등장하였던 비둘기에 대한 묘사로도 드러난다. 비둘기는 이제 명상의 평화를 깨는 속된 호기심을 가리킨다고 한다. 비둘기든 돛이든 사실 무의미하며, 생각을 흔들 수 없다. 시가 비둘기에서 시작하여 비둘기로 끝난다는 사실은 닫힘을 말하는 것 같지만, 폐쇄를 넘어선 자존감을 마침내는 보여주는 것이다. 바다의 불안한 고요가 아니라 이제 파도와 마주할 힘을 자아는 되찾는다.  간단히 말해 파르크는 바다 앞에서 격리나 해방이나를 가슴 에리도록 번뇌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묘지와 바다를 앞에 두고 해방의 여지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다. 젊은 파르크는 인생의 매혹을 알게 되어 거기에 굴복하는 과정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고, 는 영구불변에 매혹되었다가 이에 저항을 느끼는 과정을 기록한다. 결국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순수와 절대에 대하여 시인이 오랜 시간 쌓아왔던 물음이 에서 어느 정도 답에 도달하는 것이다.  와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택하면서, 시인은 바다의 정화력과 포용력, 재생력을 미리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격리된 상태 속에 도피하고자 하는 파르크의 자의식적 태도는 말라르메의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격리보다 중요한 것은 돌아와 자신의 동질성을 되찾는 일이며,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두에 시인이 다음 같은 핀다로스의 일 절을 소개하는 까닭이다. "오 나의 영혼이여, 영원불멸을 꿈 꾸지 말고, 다만 가능성의 영역을 다 소진시켜라."     말라르메와 같은 곳에서 출발하였지만 두 사람은 이처럼 다른 곳에 도달한다. 발레리의 시가 발레리의 사상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들 시를 비교해보면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사물과 관념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추상화 단계에 거의 도달하였다면, 그리하여 고유한 상징체계를 축조하는 변함 없는 장인의 인내를 보였다면, 발레리는 다소 다른 양상이라는 것이다. 발레리는 사물에 가까이 있고 싶어한 시인이었다. 그는 사물의 매혹을, 그 구체적 힘을 이길 수 없었고 이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말라르메가 더 관념적 시인이라 하겠다. 상징주의의 완성에 그가 더 가까이 있는 이유다. 발레리는 새로운 시 형식을 연 "개척자는 아니었다(레몽, 1984:216)"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6)   6.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1. 상징주의와 음악     음악이 없이는 상징주의 문학의 지금과 같은 형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상징주의 문인들은 언어가 빚어낸 경계들을 지우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것은 감각을 정화시키고 인식이 구획지어지고 이성적인 틀을 버리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일이었다. 자연히 예술 영역들 사이의 간막이를 허무는 일에도 주력하였다. 경계들을 넘어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상징체계를 조성하는 계획은 언어만으로 충족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음악을 필요로 하였다.   상징주의가 낭만주의의 막연하고 과도한 감성의 표출에 반기를 들어, 우연에 지배되는 영감이니 모호한 서정주의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은 비록 고답파에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답파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주의는 형식을 위한 형식이 아니라, 범우주로까지 확산될 수 있는 상징 논리를 영혼의 각성 위에 쌓아가고자 하였다. 그것을 위한 언어의 정화와 확산은 상징주의자들에게 주어진 기본적 소명이었다.   언어의 정화란 왜곡되고 마비되어 기능을 상실한 언어를 '모어' 상태로 되돌려놓는 일이었다. 그것은 언어의 근원, 즉 노래와 음악이 분리되지 않았던 때의 본래의 언어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원천의 언어에 도달하기 위하여 언어의 모험가들이 성운처럼 떠오르게 되었고, 상징주의자들은 음악을 천착하였던 것이다.   보를레르는 모어와 수수께끼의 상형문자를 되찾고자 하였다. 베를렌은 음악이라는 기법을 통하여 언어의 확산을 기도하였다. 랭보의 모험은 결국 주술적 언어를 포착하는데 바쳐진 것이었다. 말라르메는 기존의 구문 구성법을 바꾸면서까지 언어의 순수 리듬을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구문법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난해성이 있게 된다.    음악은 시원(始原)의 언어, 즉 무한한 확산력을 가진 언어를 되찾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암시와 모호성이라는 상징언어의 기법이 꽃 피는데 음악은 가장 큰 몫을 하였다. 음악이 상징주의 언어와 소통할 여지가 넓었다는 것은 음악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물질적 경향을 훨씬 덜 띠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문학의 차원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음악과 상징주의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상징주의 문학은 이어서 음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라벨Ravel은 말라르메가 에서 보여준 탈인성화 이론을 자신의 음악 속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음악가는 거울 속으로 스스로 사라지는 것, 그것이 그의 피아노 조곡 이 도달하려 한 목표였다.   이제 우리는 상징주의 확립과 확산이라는 두 차원에 더욱 크게 기여한 음악가들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상징주의 언어의 확립에 도움이 된 바그너와 음악에서 상징주의에 근접하였던 드뷔시가 그들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1813~1883)가 사망한지 2년 후인 1885년 2월에 에두아르 뒤자르댕 등은 을 창간한다. 이미 바그너는 프랑스에서 활발히 연주되고 있었고 상징주의자들 일부는 그에게 종교에 가까운 존경을 표하였다. 그에게서 부각되는 점은 음악 자체보다 사상이었다. 그는 정신예술과 상징예술의 선구자이자 거의 '종교의 창시자'(Marchal, 1988:171)였다.   그리하여 창간호에 상징주의 선언에 유사한 글이 실리는 등, 은 상징주의 운동에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중 하나가 된다. 1886년 1월 8일 자에는 바그너에게 바친 여덟 편의 시가 실린다. 그들은 말라르메, 베를넨. 르네 길, 스튜어트 메릴, 뒤자르댕 등 모두 상징주의자들이었다. 이 모두는 "상징주의의 공식적 등장을 준비하는"(Marchal, 1993:47)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바그너를 상징주의자들에게 소개하여 상징주의 운동의 촉매가 되게 하였던 보다 앞선 선구자가 있다. 그는 바로 프랑스에서 '바그너주의'의 창시자 중 하나로 꼽히는 상징주의 시인 빌리에 드 릴라당이다. 릴라당은 당시 프랑스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바그너를 1860년(혹은 1861년)에 처음 듣게 된다. 작곡과 성악, 피아노에 능했던 그는 바그너가 프랑스에 알려지기 전에 직접 연주하거나 노래 부름으로써 그를 프랑스 문인 등, 소수그룹에 알려왔다.  카튈르 망데스, 쥐디트 고티에, 릴라당은 1869년 상징주의자들의 메카가 될 바이로이트로의 여행을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헤겔에 경도(傾倒)되었던 릴라당은 바그너와 직접 만나 그에게 헤겔의 철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상징주의 운동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던 독일 철학자는 헤겔보다 쇼펜하우어였다. 릴라당은 바그너의 중개로 상징주의자들에게 쇼펜하우어를 소개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Raitt, 1986:131)   등 릴라당의 극작품은 바그너의 면모와 개혁 모델을 담으면서 극작품의 개혁에 앞장서게 된다. 상징주의자들 사이에 바그너를 유포시킴으로써 릴라당은 상징주의 극을 예감하게 하였는데, 그가 도입하고자 한 것은 바그너극의 신화적 요소 외에도, 구성방식과 음악성과 주제와 감정이었다. 그에게 바그너는 (Marchal, 1988:190).   바그너의 음악과 에술에 대한 개념이 상징주의 미학 발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은 누구나 인정한다. 바그너는 당시 상징주의자들의 요구에 여러 면에서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답해줄 수 있었던 것은 구성과 문체 차원 외에도, 정신적 예술과 예술철학에 대한 갈증, 통합예술과 비교미학과 폭 넓은 형태의 연극에 대한 요구 등이었다.   바그너가 예술 분야들의 결합이라는 이상을 주장한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음악과 연극을 문학에서 통합하려는 말라르메의 시도, 그리고 신화와 종교의 근원에서 문학을 되찾으려는 그의 시도에 바그너는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순수하고 비밀스러운 것'(Marchal, 1988:179), 다시 말해 근원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하는 종교와 신비의 기능이었다. 그것은 윈시 예술에 가까운 본원적 예술에 대한 암시였다.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예술 장르 간의 결합이라는 꿈은 프랑스에서 결실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과 신화와 연극의 결합은 민중에게 민중의 근원을 되찾고 무의식 속에 집단의 동질성을 깨닫게하는 것이었다. 그 동질성으로 언젠가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도래할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요컨대 연극은 집단 무의식의 바탕 위에 잃어버린 신화의 힘을 부활시키는 것, 예술을 종교적 예찬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 바그너의 극은 '신화적 상징주의'의 모델을 시인들에게 주입하였다. 바그너와 더불어 신화는 상징예술의 자연스런 지지대가 되었다 (Marchal, 1993:98).     바그너는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식 모델을 재생시키려하면서도 민족신화를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말라르메 같은 시인이 보기에는 그에게는 인류에 대한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성찰의 면모가 부족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말라르메가 말하는 연극의 음악적 혁신이란 바그너식 모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적 연극에 대한 말라르메식 모델이었다(Marchal, 1988:175). 말라르메는 바그너에 대하여, "모든 것은 원초적 흐름 속에 다시 젖어든다. 그러나 그 원천까지 가닿지는 못한다"(말라르메, 1974:544)라고 평한다.   그럼에도 그의 절대의 '책'이라는 개념 속에 극에 대한 개념이 녹아있는 것은, 바그너의 이상적 연극개념과 상상력이 영향을 끼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절대의 '책'이라는 개념에는 정신적 연극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자리한다.   그 외에 바그너의 음악이 상징주의, 특히 후기 상징주의 운동에 끼친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종교적 계시와 그 구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절대적 사랑 등, 그의 신화적 주제들은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하였다. 화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자신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내었다. 음악을 사랑하였던  르동은 바그너늘 다룬 판화들을 제작하였다.   클로드 드뷔시   이론적 성향이 강한 말라르메는 미술보다 연극과 음악에 대한 의견을 더 많이 내놓았다. 말라르메가 주재한 화요회에는 그에 열광한 젊은 문학가, 화가, 음악가들이 몰려들었다. 거기에서 그는 언어 탐구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며 20년 연하인 드뷔시(1862~1918)와도 깊은 교우를 맺었고, 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때부터 드뷔시도 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 시에 곡을 붙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가 노래의 가사와 '서정적 산문들'을 썼다는 일화는 언어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과의 관계, 시와 산문, 음악과 문학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 글쓰기의 목적은 상징주의의 순환적인 글쓰기에, 모든 형식적인 절차에서 해방된 인상주의를 대립시키고자한 것이었다. 그는 시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간의 피할 수 없는 갈등에서 멜로디를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가사를 쓰면, 즉 더 유연성이 있는 산문을 쓰면, 노래의 멜로디의 굴곡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멜로디를 음악화했을 때 소절의 유연성과 갑작스런 비약, 그리고 느릿한 주문 효과들은 이미 드뷔시 특유의 것이었으나, 가사들은 여전히 상징주의에 대한 과도한 경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순환구조, 데카당적인 매력, 신조어, 다소 인위적인 표현의 우회 등이었다.   말라르메는 화요회에서 자신의 극시 속에 잠재해있는 유머와 풍자와 감각적인 생명력에 대해서 드뷔시에게 피력한다. 이 시에 곡을 붙인 으로 드뷔시는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세련된 울림과 몽환적 분위기, 아름다운 화음 등이 일찌기 이처럼 완벽한 현악 반주 속에 플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변덕스럽고 난해한 멜로디는 성숙한 드뷔시 작품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하여 드뷔시는 음악에서의 '무언가를 바꾸었고,' 새로운 운율과 새로운 미를 창조한다. 이러한 일은 바그너의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상징주의자들과 교유하고 있을 초기 무렵에 드뷔시는 바그너의 취향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바그너가 물려준 소리의 유산을 확대하면서 뛰어넘은 것이다. 리듬의 섬세함, 멜로디의 움직임, 장단조 특성의 폐지, 화음의 자유로운 확신과 연속, 분위기를 빚어내는 재능 등은 미적 감각을 새롭게 하고 감수성과 셈세함을 증대시킨 것이었다.   드뷔시는 말라르메의 그 외의 시 몇 편, 베를렌과 그외 시인들의 시 등, 많은 상징주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보들레르와 릴라당에서 영감을 받아 와 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을 자신 속에서 융해시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려는 그의 특이한 시도는 말년에까지 계속된다. 그 결과 그의 2집으로 된 는 피아노 문학을 완성하였다는 평을 얻게 된다. 음악으로 맺은 암시의 시학의 결실을 이제 역으로 드뷔시가 수용하는 것이다.   드뷔시가 에서 애용했던 침묵기법 또한 암시의 미학을 음악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바그너풍의 음악을 원하던 드뷔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상징주의 극 를 보고 감명 받아 오페라로 작곡한 것이다(1902). 이 상징주의 극은 "포레, 쉔베르크, 시벨리우스 등 다양한 음악가에게 영향을"(Marchal, 1993:59) 주었다.   과 외에도, 드뷔시의 , , 1, 2집, 피에르 루이스의 시를 작곡한 가곡집 등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드뷔시의 음악은 모호하게 암시하는 효과를 위하여 다채롭고 난해한 표현들로 가득 차있다. "나의 음악은 (---)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것과, 어떤 풍경이나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 이 두 가지 목적만을 갖는다"(타임, 1993:69)라고 드뷔시는 말한다.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비 내리는 정원', '안개', '달빛' 등, 그의 작품제목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물 흐르는 듯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영혼의 상태를 재현하는 베를렌풍의 풍경들, 해석을 요구하는 난해한 이미지 들의 이어짐, 또한 이미지들 속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다시 다른 이미지들로 넘나들기 - 이러한 드뷔시의 요소들은 상징주의를 음악의 차원에 도입한 것이었다. 음악에서는 드뷔시의 작품들을 상징주의라고 흔히 칭하지는 않지만, 문학에서는 이러한 상징주의를 '애매한 상징주의' 또는 '제3의 상징주의'(Marchal, 1993:6) 등으로 수식한다.   일반적으로 음악의 '인상주의'는 190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상주의 음악은 풍부하고 섬세한 음색, 자유로운 형식적 구성, 분명치 않아 보이는 선율과 리듬의 윤곽, 세분화되고 인상적으로 연결된 선율, 그리고 전통적 조성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 회화의 인상주의적 특징과 유사하게, 선율이나 화성의 흐름이 유동적인 형식인 드뷔시의 음악은 인상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이 '인상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벼운 피상성과 일상성을 싫어하기도 하였거니와, 자신이 회화의 인상주의를 음악에 모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음악은 항상 외적 인상을 내적인 표현으로 변환시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가는 "낮이나 밤, 하늘과 땅의 매혹을 알아보고, 그 분위기를 깨울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고, 이 모두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보았다. 인상주의 미학의 한계점인 피상성의 재현을 피하려함으로써 그의 음악은 상징주의의 모험에 근접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문학을 매춘이라고 하였고 랭보는 사기라고 하였다. 드뷔시가 "음악은 거짓 중 가장 아름다운 거짓"이라고 하였을 때, 우리는 '문학은 영광스러운 거짓'이라는 말라르메의 유명한 화두를 읽게 된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7)   2. 상징주의와 미술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인상주의가 약 1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던 이유는 빛과 색채가 변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차이 때문이었다. 빛과 색채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상주의자들도 깨닫는다. 르레상스 이래 이어졌던 사실주의의 추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음이 확고해졌던 그즈음에, 영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상징으로 예술을 전달하려는 욕구와 꿈과 환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갔다. 그리고 꿈과 상징과 성의 중요성에 대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발견이 발표되었다.   모레아스의 상징주의 선언이 있었던 1886년, 베르나르와 앙크탱이라는 두 화가는 "사상이 회화 기법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상주의를 포기한다"(타임, 1993:83)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1880년대 후반의 반예술 운동을 위한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시각을 통한 분석보다는 감정의 경험에 근거한 예술을 추구했으며, 그림의 주제를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에서 찾았다(타임, 1993:83).     그리하여 고갱과 고흐 등은 상징주의를 예술의 아방가르드로 부상시킨다. 이러한 1880년대 후반의 반(反)예술 운동은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실감과 물질세계와의 구조적 충돌 속에서, 두 세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한 것이다. 상징주의화가들은 부르주아의 물신주의와 대중주의에 혐오를 느끼고 그들의 관습이 예술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시작된 기계적 삶에서 해방되고자 하여, 감정과 욕망과 꿈과 신화를 표현하였다. 인상주의의 한계인 일상성과 피상적 재현을 버리고, 정신세계와 감정을 시각화하였다.   보들레르에게 향기, 소리, 색채는 영혼의 상태까지 전달하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재현되는 환기력 있는 시각 예술은 그에게 내재적 관념과 본질적 실재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따라 상징주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모방주의에서 해방되어, 색채, 선, 형태로써 내적인 아름다움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집트, 원시미술, 중세, 근동, 민족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다양성과 직관과 감각을 추구하였다. 원시미술에는 본능, 무의식, 꿈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었다. 미술은 이렇게 비물질적 세계와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며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섰고, 탐미적으로 흐르거나 '데카당'하게 되었다.   한편 상징주의 문학운동은 스스로를 정당화시켜줄 화가들을 찾게 되었는데, 위스망스는 모로와 르동을 발견하여 이들을 1884년에 발표한 자신의 소설 에 몇 페이지씩 언급한다. 모로는 상징주의를 풍요하게 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여 상징주의 문학의 확립에 기여한다. 르동은 상징주의 이론을 미술에 실현시켜 상징주의 미술의 전형을 만들었고, 그의 작품은 다시 상징주의 문학에 전파되어 문학에서 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귀스타프 모로   모로(12826~1989)는 1856년부터 4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원시 화가들과 고대의 예술, 모자이크와 비잔틴의 에나멜화에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그림은 괴이함과 환상성 등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880년경 유행한 신비로운 동양문화에 대한 동경의 결과, 사람들은 불화(佛畵)와 이탈리아 미술이 결합된 것 같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는 그의 그림에 열광한다.    그는 그림의 기초를 문학, 철학, 고고학, 신지학 등에 두어 신화와 소설에서 주제를 얻었다. 데카당스 문인들은 그의 정교한 그림에서 전설, 신화, 복잡한 상징, 팽창적인 배경과 색조 등을 읽어내고 경탄해 마지 않는다."인도신전의 이미지에서 잔혹하고 엄숙하며 남녀양성으로 보일 만큼 모호하게 그려진 여성들과 지나치게 화려한 실내장식들은 세기말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장티,2002:59) 문예화가라고도 할 수 있는 모로의 그림에 문인들은 매료되어 그것을 시화하거나 소설로 옮겼다.    그러나 모로는 자신이 문예화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며, 미술의 본질과 의미에 대헤 다음처럼 한다.          물질의 외피와 피상적인 육체미 밑을 흐르는 영혼의, 정신의, 마음의, 그리고 상상의 움직임을 반영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인류가 느끼는 이들 신성한 욕구에 응답하는 저 미술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가? 이것은 신의 언어다. (---) 나는 선과, 당초무늬(아라베스크) 등 조형예술에 허용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상을 환기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이 나의 목적이었다(루사-스미스, 1990:68-71)     모로는 여러 가지 조형수단을 통하여 상징과 암시의 예술을 지향한 것이다.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을 그림을 통하여 느끼게 하고자 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 느끼는 것을 믿고 그것으로 특유의 내면 풍경을 창조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풍경이 환기시키는 꿈과 환상이었다. 그의 인물들이 환기시키는 생각들은 개인의 내적인 섬광들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그의 환상은 단순한 환상의 재현이 아니라 치밀한 생각과 계획의 결과였다는 점에서도 상징주의적이었다. 르동은 "모로는 생각들의 비약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형식을 다듬어내는 작가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의 나아감을 놀라운 이성으로써 인도한다(르동, 1961:65)"라고 말하고 있다.    모로는 말라르메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상징주의 시운동과 관련되며 상징주의 운동에 중요한 몫을 하였다. 그는 "위대한 신비는 그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자연 전체는 이상과 신성함으로 채워져 모든 것이 변형된다."(루시-스미스, 1900:71)라고 하며, 보다 높은 세계를 향한 고양(高揚)을 꿈꾸었고, 그 실현을 위하여 상징주의자들처럼 정교한 계획을 따라 작품을 완성하였다.  사물을 변형시키는 힘과 상상을 촉발시키는 그의 놀라운 능력은 문학을 또 다른 길로 안내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였다. 후에 그가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망각에서 불러낸다. 등에서 그가 형상화해내었던 무의식의 세계에 초현실주의자 브르통은 크게 매료된다. 그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였으며 20세기 회화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과 기독교와 유대주의와 비교주의를 교묘히 융합하고, 몽상의 동물들과 모세, 프로메테우스, 양성의 존재 등으로 다양한 꿈들을 전한다. 인간의 내적 감각에 대한 절대적 감수성과 문학적 소양으로 상상력을 촉발시켰던 모로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졸라는 모로의 상징주의에 대해 다음처럼 요약한다.         모로는 사실주의에 대한 증오로 독창성을 찾고자하는 예술가가 빠질 수 있는 최고도의 기상천외함을 가장 놀랍게 드러낸다. (---) 현대의 자연주의는, 자연을 연구하려는 예술의 노력은 분명 반작용을 초래할 터이었고 이상주의적 예술가들을 산출하게 되어있었다. 상상력 영역에서의 이 역행적인 움직임은 귀스타트 모로에게서 아주 흥미로운 특질을 지니게 된다. (--) 그는 낭만적  정열과 안이한 배색을 경멸하였고 그림자와 빛의 대비로 화폭을 뒤덮기 위해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려 눈을 현혹시키는 붓의 뒤엉킴 따위를 경멸하였다. 그게 아니었다. 구스타브 모로는 상징주의에 헌신한 것이다. 그는 수수께끼 놀이들로 이루어진 조각그림들을 그렸고 태초의 원초적인 형태들을 다시 찾아내었으며 (---) 그의 꿈들은 더 기교적이고 복잡하며 수수께끼 같다 (---) ()     모로의 상징주의에 대한 헌신은 자연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자연주의자 졸라 자신도 그 반작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로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면서 상징주의를 풍부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기말의 에술과 데카당스의 한 지침이 되었고, 초현실주의를 촉발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 이처럼 모로는 많은 사조들의 중심되는 경계선 위에 서서, 다양한 예술 사조의 프리즘 역할을 하였다.   오딜롱 르동   르동(1840~1916)은 1879년 석판화집 연작으로 화단에 데뷔하는데, 위스망스는 자기 소설에서 주인공이 숭배하는 예술가로 르동을 그린다. 르동은 1885년 위스망스의 소개로 말라르메와 알게 되어 급속히 친해졌으며, 시인의 사망 때까지 오랜 기간 교유한다.     말라르메는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라고 한 바 있다. 르동은 인상주의를 강하게 부정하였으며, 그의 목판화와 석판화는 암시적 기법을 충실히 실현하게 된다.   그는 "나의 데생들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아무 것도 결정짓지 않는다. 그것들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미결정의 모호한 세계 속에 있게 한다."(르동, 1961:27-28)라고 말한다.    말라르메는 르동에게, 화가는 시인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나 화가의 상상력과 시인의 환상은 결국 같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음악 애호가였던 르동은 상징주의자들이 문학에서 음악을 사용하였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미술에 음악을 사용하여 상상적인 것들에 논리를 부여하였다.   그의 미학은 그리하여 "시각의 미학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미학에"(장티, 2002:53) 가까워지게 된다. 그는 말한다.          암시적 예술은 음악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속에 더 자유롭게, 빛나게, 전적으로 존재한다(르동, 1961:26).     암시적 기법은 음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는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은 현실이 아니라 신비이기를, 혼의 상태와 생각을 자유로이 반영하는 것이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르동은 자신의 판화들을 유례 없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의 판화들은 다양한 장면들이 덧입혀져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표현되어있다. 이미지 안에 이미지가 내포되므로, 신비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감상자의 의식과 무의식의 움직임을 촉발한다. 그것은 암시의 미학을 철저히 따른 결과였다.    암시의 미학을 따르는 예술작품은 적극적인 감상을 요구한다. 르동의 감상에 있어서는 감상자의 해석이, 따라서 그의 내면의식이 아주 중요하다. 감상자들은 찬탄하거나 보는 것만으로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화가는 말한다.         (---) 감상자의 정신 속에 파생된 효과는 그를 허구세계로 이끌어준다. 이 허구세계의 의미는 감상자의 감수성과 모든 것을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그의 상상 능력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진다(르동, 1961:27)     이러한 생각은 예술의 수용 문제를 문학에서 다루고자 하였던 말라르메의 시도를 떠올린다. 말라르메는 또한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사물을 '보는 법'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강조하였고, 이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서로 통하였을 것이다. 르동은 "본다는 것은 사물들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것이다"(르동, 1961:48, 62)라고 하였다.   그의 그림들이 감상자들에게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가 지니고 있던 신비에 대한 감각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상징주의 문학에서와 유사한 차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르동이 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상징주의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평자도 있을 정도였다. 모리스 드니도 지적했듯이 르동이 영혼의 상태나 감정의 깊이, 내면적인 비전을 일러주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상징주의 문학에서 신비를 표현하는 방식을 더욱 상상력 쪽으로 밀고 나아간다. 그는 사물에 대한 표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신비까지를 감상자에게 촉발하고자 하여, 모호성을 극대화시킨다. 그에게 신비란 그림 속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비란 관찰자의 '마음상태'에 따라 형성될 어떤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상상력은 조형적 실현 차원을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나의 독자성은 보이는 것의 논리를 보이지 않는 것에 가능한 한 적용시켜, 있음직한 것의 법칙을 따라 있음직하지 않은 존재들을 인간처럼 살아있게 만드는 데 있다"(르동, 1961:28)라는 그의 유명한 주장은, 그를 초현실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수긍하게 한다.   르동의 조형적 실현은 무의식의 심연에까지 가닿는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도 그는 초현실성과 잘 연결된다. 그러나 그의 환상과 몽환의 세계는 뿌리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뿌리는 면밀히 관찰된 현실에 있다. 자연의 대상을 섬세히 포착한 후에 상상적인 것의 재현이 스스로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의 예술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따라서 예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가시적 세계의 경이를 향하여 눈을 뜨고 예술에 임하였으며, 또 그것은 누가 무어라 하였건, 자연적인 것과 삶의 법칙에 순응하겠다는 지속적인 관심에 의한 것이었다(르동, 1961:9)     자연과 삶의 법칙에 순응하며 예술을 통하여 우주적 상징으로 나아가는 것은 르동의 자연스런 여정이었다. 그는 " '부호(Code)'는 그것이 우주적 의식의 진지한 표현이 될 때 복음서를 대신할 수 있을 것"(르동, 1961:26)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상징주의 문인들의 궁극적 지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부분이다.   신비와 불안과 환상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그의 그림들은 자주 문학화 되었다. 또한 르동은 '에드가 포우에게' 라는 제목으로. 이 시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6점으로 된 판화집을 발행하고(1882년), 바그너를 다룬 판화를 여러 점 제작하기도 한다. 말라르메에게는 석판화집 을 헌정하고, 의 판화를 제작한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8)   3. 상징주의와 연극   상징주의 극 상징주의 소설에 비교했을 때, 상징주의 극은 상징주의의 면모를 상대적으로 더욱 화려하게 구현하였다. 상징주의 극은 바그너와 말라르메 없이는 생각할 수 없도록 그들의 기여가 크다. 말라르메는 연극의 모든 장치를 배제하고 순수 한 이상주의 무대 위로 옮겨놓는 것이다. 이러한, '극 자체의 부정' 혹은 '문학적 반연극(反演劇)'(Marchal, 1993:125)은 1890년 이후의 연극에 대단히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90년에는 릴라당의 유작 이 공연된다. 이 극은 상징주의, 이상주의, 바그너 등, 모든 기법을 동원한다. 나아가 일부 상징주의 극은 공감각을 무대에서 시험하기도 한다. "라는 극에서는 공연장에 향수가 뿌려지기도 한다 (Marchal,1993:127).      말라르메의 이상주의 연극 미학은 이러한 과도한 시도를 거부하였다. 무대장치는 순수 허구를 그려내려는 목적만을 지녔다. 즉 색깔과 선들에 의한 유추적 효과만을 노려, 무대는 배경과 몇 개의 유동적인 휘장들로 되어있었을 뿐이다.   메테를링크의 는 정신적 연극과 시적 연극을 보여주었다. 여기서는 가스를 나오게하거나 조명의 기술 등을 도입함으로써 물질적 배경들을 부정하였다. 배경은 없거나 있어도 암시적인 것이었다. 극단적인 절제로써 진실주의나 자연주의에 반대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무대는 거의 부호들로 이뤄내고자 하였다. 즉 책의 형태를 닮아가려한 것이다.   폴 클로델의 연극은 상징주의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통적 상징주의는 아니었다. 그는 시를 해방시켜서 시적 연극을  펼쳐내고자 하였다. 거기서 그는 내적 탐색을 보여주거나 종교적 신비를 드러내려 하였다.    종합예술   바그너는 통합 예술작품의 시대가 점차 도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통합적 작품이란 그리스 연극을 모델로 연극과 음악을 결합시켜 하나로 통일된 작품이다.     각각의 예술은 자신의 힘의 한계에 도달하자마자 인접한 예술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 각 예술 속에 깃들어있는 이러한 특이한 성향, (---) 그것을 나는 음악과 시의 관계 속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 이렇게 개별적인 모든 예술들을 포용하며, 그들은 또 각자 개별적으로 완성되게 하면서 그 예술들이 전체를 결합하는 예술작품은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제시하려 애썼다(, 1860: Marchal, 1993:159).     에술의 통합을 계획한다는 것은 연극과 음악이 분리되지 않았던 원시 시절의 예술형식을 되찾겠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후에 의 공저자가 되는 에두아르 쉬레는 미래의 예술에 대해 예측한다(1875년). '책, 바카스, 리라'라는 제하의 글에서 그는 다음 같이 말한다. 태초의 세 자매인 시, 춤, 음악은 함께 태어났지만 오늘 날에는 분열되었다. 새로운 결합이 이룩된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확실한 기호가 될 것이고, 그 속에서는 육체, 영혼, 생각이 조화되며 스스로를 되찾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마지막 통합의 수단이자 목표로, "책은 우리 시대의 주된 목표이자 변별 기호가 되지 않았는가? 그것이야말로 이제 모든 것을 표상하고 흡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바그너와 쉬레의 글에서 나타나는 통합예술의 모습은 말라르메의 예술론 이해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의 통합예술은 의도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극시 과 를 쓸 때, 그는 극에 대한 야심은 덮어두고 몇몇 장면들에 대한 초안으로 만족하려 하였다. 그러나 극은 그 본질적 특성상 결국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거의 종교에 닿아있는 현상으로 시인에게 다가오고, 시인은 극시의 완성에 전념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연극 미학은 신화에 기초하며, 또 그는 고전주의의 근원에서 자신의 꿈을 되찾고자 한다. 그 꿈은 쉬레의 글에서 나타난 생각과 많은 부분 유사하다. 고전주의는 넓은 의미의 고전주의였으며, 따라서 그는 바그너에 만족하지 않았다. 바그너의 통합예술은 태초의 근원의 언어에 가닿지 못하는 것으로 시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그는 바그너가 그리스 신화가 아니라 게르만 신화의 영웅들, 즉 죽은 인물들에서 동기를 찾는 점이 불만이었다.   비인칭 극   말라르메의 극에 대한 개념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를 넘어선다. 소품과 장치들로 가득 찬 사실적, 전통적 무대를 그는 거부한다. 무대는 장치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무대가 '중성적 공간'이 되어야 관객의 정신이 자유롭게 투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중성적 공간에서 추상적 인물의 전형을 그려내고자 한다. 따라서 영웅주의적인 바그너극과 통속극을 거부한다. 그것들의 일상적 틀은 환기적이고 암시적인 효과를 죽이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비인칭 극'을 지향한 것이다. 무대 장식을 없앤 중성적 공간에는 본질만이 재현된다. 그는 을 모델로 삼는다. 거기서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하는 본질적 문제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연출과 모든 조역들과 단역들이 사라지고 주인공의 환영들만 등장하는 극으로 을 읽는다. 이 모노드라마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정신의 극이다. 그러므로 을 제외하고는 어떤 연극도 시인의 생각에 맞지 않았다.   일부 상징주의자들은 말라르메의 생각을 따라 연출의 힘보다는 텍스트에 무게를 두고자 하여, "읽혀지는 희곡이 상연되는 연극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배우들의 역할은 "종종 내레이터 정도로 축소되었고, 꼭두각시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장티,2002:96-97). 이상주의 극에 대한 이러한 경도는 결국은 극에 대한 거부, 즉 반연극이었다.   극의 물질성을 확실하게 덮어주는 장르는 바로 발레였다. 발레는 모든 장치를 버린 것으로, 말라르메는 그것을 '육체의 글쓰기'라고 하였다. 발레는 백지와 같이 중성인 무대 위에서 행해지는 '간결한 글쓰기'였다.    연극을 정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무언극(mimique)'이었다. 무언극은 순수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성의 공간과 무명의 배우를 결합시킨 '최소의 연극' 이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9)   4. '책'과 문자예술   [그것이]                    수라면 별에서 나온                                   그것이 존재한다면                               빈사의 산란스러운 환시와는 다르게                           그것이 시작한다면 멈춘다면                   부정되었을 때 솟아나오며 나타났을 때 폐쇄되나                                         마침내                                 휘귀하게 퍼트려진 어떤 과잉에 대해                                                       그것이 밝혀진다면                                              하나일지라도 합이 자명함을                                       그것이 비춰준다면     [그것은]                                                    우연     말라르메는 24페이지로 된 라는 시에서 여러 실험을 행하는데, 그 중 하나는 페이지의 개념을 깨고 있다는 점이다. 페이지를 '장(feuillet)'의 개념으로 대치시키면서,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이어지는 글쓰기를 한다. 여기에 여덟 가지 다른 활자를 배치한다. 배치는 가장 큰 캔버스가 된다. 위의 시는 아무 부분이나 옮겨본 것이다(좌우 페이지 상단 부분)   이 시, 혹은 극시는 파선의 풍경만을 보여준다. 난파선의 선장은 절망의 상황에서 주사위를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햄릿처럼 망설인다는 이야기며, 그밖에 아무런 행동도 이뤄지지 않는다. '시와 산문 종합'(Bernard, 1988:311)이라고도 하는 이 시에서, 활자들은 감각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 명상의 깊이에 따라, 음악의 강약이 표기되듯 크기와 배치가 달라진다. 시행들도 생각과 함께 움직이며, 때로 이탤릭체로 때로 로만체로 변한다.   잔잔한 물결이 흐르듯 작은 글자들로 어느 정도 규칙성을 띠던 시행들은 홀연 사라지고 백지 위에 커다란 단어 하나만 남기기도 한다. 단어의 주변은 커다란 침묵이다. 크고 작은 글자들은 문자의 심포니를 만들어내지만 난파 뒤에 계속되는 정적과 침묵 또한 말을 한다. 한 페이지가 완전한 공백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장마다 시구 주변으로 여백이 둘러싼다. 행간에도 다양하게 여백들이 배치되어, 클로델의 말대로 '여백에 의한 생각의 분리법'(Bernard, 1988:319)을 보여준다. 침몰이라는 절망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활자들은 페이지 밑바닥에 파선 조각처럼 침전된 모습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치밀한 계산 하에 사용된 여백의 기법과 다양한 행간두기 등은 시집 전체가 가장 정교하고 창조적인 건축물, 혹은 하나의 미술작품이나 악보집으로 빚어지게 한다. 아폴리네르의 은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다. 누보로망에서의 여백두기도 이 방식을 따른 것이다. 해석은 아직 많은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서구 문학사상 가장 혁명적이며 난해한 문법이다.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하리라"라는 시의 대명제는 가장 굵은 글씨로 시집의 처음과 끝 장 모두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그 주변으로 부속 문장들이 나무의 잔가지처럼, 물결무늬처럼, 거미줄이나 레이스처럼, 악보의 음표처럼 종속된다. 대명제 주변으로 산재한 각각의 문장들은 연계되어 통합적 역동성을 보여주고, 때로 침묵을 때로 폭풍을 그린다.   이 시의 중요함은 시가 닫힌 채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도 있다. 시집의 12장은 펼쳤다 닫혔다 할 수 있는 부채를 상기시키는 구조이다. 대명제가 시집 전체를 가장 큰 문자들로 관통한 후, 시의 마지막에는 작은 문자로 "모든 생각은 주사위 던지기를 말한다"라는 문장이 이전의 시행 전부을 요약한다.   시집 전체는 이렇게 단 두 개 문장으로 이뤄지며, 시집은 닫힌다. 그러나 마치 보들레르가 에서 마지막 행을 통하여 순환구조를 만들어내었듯이, 마지막 문장을 통하여 시는 순환구조를 이뤄낸다.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책도 결코 닫힐 수가 없다. 생각은 다시 계속되는 것이며, 따라서 시에서 구두점은 사라진다. 언어는 확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렇게 지니게 된다. 닫아도 그 속에 바람의 가능성은 언제나 지니고 있는 쥘부채와 같다.   '책'과 극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권의 '책'에 도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랭보가 자청한 모험은 태초의 모어가 지닌 환기력을 확보하기 위한 가파른 재난이었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여정을  생각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언어는 마지막에야 '책'과 극에 도달한다. 우연이 아닌 언어의 순수역학을 따르는 책, 대문자의 책(Livre)이다.   시인은 이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책'을 꿈꾸었다. '책'을 꿈꾸었다. '책'이라는 의미의 불어는 대문자로 쓰이던 성서를 뜻하기도 한다. 시인은 '책'이라는 '대작(大作)을 구워내는 가마에 불을 때기 위하여 '연금술사처럼 인내하며', 모든 삶의 노력을 경주하였다고 베를렌에게 고백한다. '책'은 관념상의 책이 아니었다. 성서도 존재하는 책이듯이.  '대작'이라는 꿈은 완전한 언어에 대한 꿈으로서, 언어 연금술을 전제한다. 불어로 '대작'이라는 말은 비천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의 화금석(化金石)을 의미하기도 한다. 는 많은 점에서 화금석에 닿아있다. 화금석의 탄생에 의하여 진정한 모어가 우주에 확산될 수 있기를 시인은 꿈 꾸었던 것이다.     '책'의 계획은 '책'의 읽기 계획까지 포함한다. 시인은 시 낭독회에 대하여서도 대단히 특이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책'은 고정되게 제본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낱장의 페이지들로 되어있다. 낭독자는 책을 낱장별로 따로 읽으며, 낭독한 후에 묶거나 정리함에 넣으면 또 다른 책이 된다. 낱장들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된다. 책장들의 무한한 조합을 가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이렇게 쓰기와 인쇄에 그치지 않고 읽기까지 포함하는 커다란 계획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글은 쓴 자의 차원을 넘어선다. 쓰기는 더 이상 닫힌 공간에서 자족하지 않는다. 읽기의 확대이자 독자의 공간의 확대 - 이제 수용의 문제가 주요 이슈로 대두된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극의 요소를 '책'에 도입하고자 한다. 시, 음악, 미술, 춤 등 여러 예술 범주들을 융합해낼 수 있는 극처럼, 진정한 시언어는 여러 범주들이 교감과 통합을 이뤄내며 원시예술처럼 무대 위에 펼쳐져야 한다. 시의 낭독회는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 세월 분업화로 고착된 분열의 예술이 아니라 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분열된 바벨의 언어가 아니라 제례(祭禮)와 예술의 통합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읽기는 이제 정신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해내는 작업이 된다. 시적 공간이 재창조되는 작업인 읽기 - 읽기는 내면화된 극이다. 쓰기에서 읽기로 나아가는 것은, 내면의 시를 극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일이다. 읽기는 하나의 의식(儀式)이 된다. '책'은 그리하여 '정신의 도구'이자 '정신적 연극의 장소'로 완성된다. 여기에 시인이 말하는 '문자 속의 신비'가 빚어지는 것이다.      언어는 더 이상 자족적이지 않게 된다. 독자에 대한 의식이 전환되고 그 몫은 무한 확대된다. 독자는 이제 나 야유하는 자가 아니다. 독자는 참여자가 된다. 무한한 교감이 약속된다. 시인은 저주당하거나 추방당한 자가 아니다. 진정 시인은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끝)   7.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의 핵심과 주변을 탐사하고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 꽃과 열매는 어떠하였는지, 개화와 결실 후의 역풍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시들어갔는지, 열매 맺음이 문학과 예술이라는 드넓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시든 후에도 열매에 열매를 이어주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상징주의의 큰 길과 소로들을 따라 가보았다.     우리는 상징주의 시의 계보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조로의 전이 양상, 즉 데카당스에서 초현실주의, 현대시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상징주의의 맥락을 살펴보았는데, 상징주의 문학의 구체적 양상은 무엇보다 시 분야에 서 두드러졌다. 상징주의 시에서는 우선 자유화시, 자유시, 새로운 활자배치법, 구두점의 제거, 페이지 개념의 변모 등, 다양한 시 형식의  실험에 주목하게 된다. 그 실험은 시와 산문의 통합이라 할 수 있는 산문시, 장르 간의 경계 넘기, 통합예술 등 여러 형식의 발명들로도 이어졌다. 이처럼 시를 기존의 기능과 형식에서 최대한 해방시키고자 하여, 오늘날의 시의 모습이 있게 한 것은 상징주의의 가장 현대적인 기여의 하나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의 해방과 동의어였다.   상징주의는 다양한 예술 방법의 도입과 철학의 영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이토록 풍부하게 확충시켜갔지만, 상징주의에 고유한 언어의 완성은 무엇보다 교감, 암시, 상징 등의 방법을 통한 감각과 시선의 해방에서 출발한다.    우선 보들레르의 교감 이론은 상징주의 시학을 주도하면서, 향후 시인들의 사물 읽기에 획기적인 전기를 제공하였다. 랭보의 자유로운 상상과 감각과 환상의 힘은 현대시를 향한 우상파괴적 시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지옥으로의 하강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의 심연은 또 다른 오르페우스를 그려내었다. 그의 화려하고 고통에 찬 하강의 그늘에는, 저주와 자학 속에 완성되는 베를렌의 겸손한 선율이 있었으며, 감각과 음악과 언어의 융해와 교감이 있었다. 말라르메는 언어와 사물과 상징과 신비 등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섬세히 시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감각과 언어의 재정립을 통한 이러한 길찾기들에 비하여 발레리의 길은 조금 달랐다. 그는 말라르메의 언어철학을 토대로 순수시를 더 밀고 나아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빚어진 관념시를 제시한다. 상징 시인들의 구도의 여정들을 발레리는 지중해적 명증의 시학으로 다시 빚어냄으로써 서구 상징주의의 골격은 완성된다. 랭보의 우상파괴, 발레리의 순수시 등으로 현대시의 세계는 더욱 열리게 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이처럼 자신의 방법 자체를 끝없이 넘어서려 하였다. 그리하여 음악은 상징주의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으며 미술은 그 확산에 기여하였고, 상징주의는 다시 음악과 미술로 구현된다. 또한 상징주의자들은 특정 예술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징주의의 추구는 그러나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추구였다. 말라르메는 언어의 완성을 절대의 '책'에서 보여주려 하였다. 거기서는 문자와 그림과 음악과 철학이 절묘하게 만난다. 그것은 통합언어를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문자예술은 그림문자를 지향하였고 활자법의 혁명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외양의 순수시로 자족하지 않고 일탈과 변모를 통하여 형식의 새로운 열림을 꿈 꾸는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통합예술이고자 하였다.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창조이면서 동시에 예술 스스로의 초월이고자 하였다. 랭보의 파괴가 재창조를 빠르게 그려내려 하였다면, 말라르메는 거기서 인내심의 부족을 읽어내었다. 그가 이끈 시형식의 혁명은 현대의 시와 산문들 속에 다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의미와 색채가 어떠하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의 언어의 풍경이다. 사람은 '상징의 숲'을 걸어가고 숲은 친숙한 눈길로 그것을 지켜본다. 인간은 언제나 상징을 필요로 하고 빚어내며, 상징은 또 해독되기를 기다린다. 상징주의는 그러므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 늦게는 중반까지 성행하였던 일시적 조류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상징주의는 역사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부정할 수 없도록 존재하는 문학의 태도로서 언제나 의미 있다. 상징은 비록 여러 겹으로 두터워져도,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기만 하면 많은 것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주의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효용적 의미에서의 상징주의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적어도 표현의 한 기술이라는 측면에서도 상징주의는 살아있다.   상징주의에 대한 부정론은 상징주의의 발생 속에 배태되었던 것이다. 현실과 관념 사이에서 관념을 현실화한다는 문제는 시작부터 수용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더구나 관념의 외적 형식에 무의미하게 집착할 때, 마침내는 무용한 언어놀이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 의미이든, 상징주의는 내용상 그리고 형식상 이미 대중과  유리라는 전제조건 하에 출발한 것이었다.   상징주의 선언을 기점으로 전개되었던 협의의 상징주의는 시작한 불과 몇 년 만에 끝나버린 운동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에 대한 위선적 조작에 이를 수 있는 허구적 행위로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 언어 혁명의 맥을 놓치지 않고 따라 가보면, 상징주의는 끝없이 스스로를 부정, 수정, 완성시켜가려한 언어 행위였고. 상징주의가 보여주었던 형식의 실험은 오늘날의 문학 행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현실과 이상, 현실과 초현실 간의 대립 속에 오히려 안주하려 하였던 행위로 상징주의를 읽는다면 그것은 상징주의를 다 읽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안주가 지속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통합의 언어로 나아가고자 하면서도 상징주의는 그 의도 자체로 인하여 오히려 시인과 대중과의 유리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는 이미 상징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기(唾棄)한 것은 허위로 끝난 상징주의였다 하겠다. 진정한 상징주의는 언어의 혁명 혹은 점진적 수정행위와 더불어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 발레리의 말대로 상징주의는 어떤 한 '유파'가 아닌 것이다.   상징주의는 또 모레아스의 에서와 같이 같은 소문자의 상징주의와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저긴 상징주의, 후기 상징주의 등, 여러 분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한 상징주의는 이러한 분류를 넘어서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예술 분야와 통합되기도 하면서 확대될 수 있었고, 있어야 하였다. 모든 상징주의는 빨리 오건 늦게 오건 다시 대해에서 합류하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퇴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믿음이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해온 것은 언어통합의 욕구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분업의 양상이었던  언어의 장르들을 넘어설 언어가 요구되어왔던 것이다. 상징주의가 대통합을 궁극에 그리는 것은 분화된 바벨의 언어를 극복하려는 의지에서였다. 우리는 대문자의 '책'에서 언어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읽을 수 있었다. 상징주의가 남긴 긍정적 몫의 하나이다.   상징주의는 그 진행과정의 필연적으로 반동적 움직임들, 그리고 감각과 언어의 유희 속에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내재적 오류들과 부딪히기도 하였다. 의미 없는 신비 추구, 현실에서의 변화와 변혁의 욕구를 거의 도외시한 비현실적인 세계 속의 침잠(沈潛), 지시적 메시지들에 대한 지나친 경도 등은 상징주의 스스로를 이미 새로운 글쓰기를 막는 낡은 굴레로 전환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형식주의를 버리고, 순수성이나 모호성이 아니라, 생활의 본연과 실상으로 돌아오고자 한 문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상징주의의 원래 추구하였던 목표는 허구적 조작에 의한 상징의 창조가 아니었다. 베를렌든 말라르메도 발레리도 모로도 르동도 모두 대상에 대한, 그리고 대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보았다. 그들 스스로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하였으며, 관찰 과정은 작품들 속에 섬세히 구현되었다.   더불어 기억할 것은 신비나 통합예술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더라도 상징주의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탐구라는 사실이다. 고대의 언어, 즉 인간 본연의 언어를 찾는 일이다. 춤과 노래와 재례의식이 분리되지 않았던 태고(太古)의 하늘, 그 언어를 지표로 한다. 바로 그런 까닭에 상징주의는 문학에서의 어떤 변형의 기술로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말라르메가 "아름다움이 꽃 피는 이전의 하늘"을 그리며, 문제는 "변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Mallarme, 1974:880)이라고 말하였듯이, 상징주의에서의 언어탐구는 어너의 변형이 아니라 언어의 창안이고자 하였다.   그 탐구는 한 마디로 모성언어로 회귀하려는 언어의 지향성이다. 언어와 음악이, 제레와 축제가 하나이며, 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원하지 않았던, 상징이 꽃 피던 시간, 그것에 대한 믿음과 향수 - 이들이 상징주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주술적 언어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언어 주변을 떠돌고 있으므로  시 언어는 상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불어로 전개되었으나 코스모폴리탄적인 운동"(Richaed, 1978:395)인 것이다.   큰 의미에서 상징주의는 사조를 넘어선다. 잊지 말 것은 상징주의의 언어 화해와 대통합의 작업은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 마음에 따라, 겉과 속의 모습을 달리하며 상징주의는 언제고 전개될 것이며, 인간의 상징 또한 영속할 것이다. 인간의 상징은 과거나 미래의 현상이나 희망이나 절망과는 거리를 둔 채, 빠르게 느리게, 섬세하게 때로 거칠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거대한 페르소나를 바꾸고 또 굴러갈 것이다.  / 연세대학교 출판부​
1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 10) 댓글:  조회:550  추천:0  2022-07-11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   김경란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서 말라르메의 시간의 시학과 공간의 시학을 연구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프랑스 파리 7대학교에서 말라르메의 '무'의 추구 와 글쓰기의 문제를 연구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 서문     상징주의란 무엇인가?   막연히 우리는 상징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접하게 된다.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며, 또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주의라는 말은 이제 지나가버린 사조를 기술하고 정리할 때 쓰는 한갓 하나의 용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상징주의라는 말은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라는 용어처럼 오래 전에 문학개념 사전에 확고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고전주의, 낭만주의만큼이나 보편적인 존재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상징주의는 역사적으로 폐기되었음에도 부정할 수 없도록 존재하는 문학의 어떤 양식이자 도도한 흐름이기도 하다. 좁은 의미에서 상징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표현의 한 방법을 지칭하기도 한다. 상징주의 문학운동이 전개되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사실주의적 태도에 반대되는 태도를 지칭할 때도 이 용어는 유효하다. 더 중요한 점은, 상징주의가 큰 흐름을 이루든 아니든 적어도 하나의 문학적 태도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징주의라는 흐름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지, 또 어떻게 남아있게 되는지를 알고자 한다.   어떠한 사조든 그것은 발생 자체 속에 이미 자신의 한계를 지니고서 출발한다. 상징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상징주의는 어떠한 연유로, 어떠한 양식으로 살아있기도 하는가. 그것은 현금의 문학의 양상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그것이 존재한다면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쩌면 출발에 앞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상징주의라는 소멸된 조류가 살아있는 조류와 연결되는 것은 '상징'이라는 문학의 어떤 , 가장 작을 수도 커질 수도 있는 이 영원한 도구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사물과 언어를, 현실과 생각을 잇는 매개인 상징은 단순한 의사소통 차원을 넘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징주의가 상징에 대한 어떠한 태도와 필연에서 싹 텄는지, 그것은 어떠한 언어체계에 도달하는지, 자라고 꽃 피는 과정이, 열매가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작용을 하였고 할 것인지를 알아보려 한다. 그러나 여기는 상징 이론이나 의사소통 이론을 다루는 장소가 아니며, 문학의 작은 기법으로서의 상징주의를 다루는 장소도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겠다.     여러 문학 사조들 중에서 '상징주의'는 정의 영역이 넓고 모호하며 영향 범위 또한 아주 넓은 사조이다. 그것이 문학 전반과 예술의 다른 장르에 미치는 상호관계들은 쉽게 개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독자들을 위하여 상징주의가 충분히 설명된 경우가 많지는 않아 보인다.   상징주의는 19세기 중반 이후, "고답파(高踏派)와 자연주의의 문학적 유물론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사조라고 정의 내려지기도 한다. 이는 형식적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상징주의의 내용상의 특징은 무엇보다 언어 자체에 대한 자세와 상징에 대한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즉 상징주의란 문자 그대로의 사상(事象)들 너머의 또 다른 현실을 언어로써 환기시키고, 언어를 통하여 그들의 세계를 완성하려 한 태도라 하겠다.   '상징'의 개념 또한 대단히 모호하고 그 영역이 넓다. 상징은 단순히 기호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신화를 지칭하기조차 하는 등, 언어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과 연관되기까지 한다. 따라서 상징 자체를 정의내릴 때, 그것은 우선 언어학적 정의와 문학적 정의로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후자에 관심을 두면서 상징주의의 여러 현실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우리는 상징주의 태동에서 출발하여 상징주의의 막다른 점까지, 전체적인 움직임들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다양한 양상들을 항목별로 정리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여러 용어들의 전문적 세부로 들어가기보다는, 다양한 상징주의의 영역들을 독자들에게 평이하게 요약하여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낭만주의, 고답파 등을 배경으로 하고 데카당스, 초현실주의, 현대시, 누보로망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상징주의 운동의 궤적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아울러 이 움직임과 문학 내적이고 외적인 여러 요소와의 관계들을 다양한 차원에서 소개하는 식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상징주의가 포용하는 예술의 다른 영역들, 즉 상징주의의 영향 범주를 따라 가보려 한다. 문학과 다른 예술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주의는 그것 자체로 결코 닫혀 있으려 하지 않았던 사조였기 때문이다. 궁극에는 예술과 예술과의 경계를 넘고 예술 스스로의 초월을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화가와 음악가와 문인들의 일화들은 그러므로 상징주의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모습들을 드러내준다. 상징주의의 눈에 띄는 특징은 문인들이 다른 예술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기를 시도했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춤은 상징주의 언어에 비유되었으며, 상징주의 문학은 가장 완성된 모습을 극 형식을 빌려 구현하고자 하였다. 상징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예술들을 통합한 예술에 언어를 통하여 도달하려 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언어에 대한 여러 실험과 활자배치술의 혁명에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의 오늘날의 시와 산문에 있어서 가장 첨단적인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은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시각으로 상징주의의 면모에 조심스레 가닿고자 한다. 상징주의를 낳은 정신은 결국 어떠한 것이었나, 또 그것은 어떻게 하나의 미학으로 완성되었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이러한 질문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징주의 문학사를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향과 한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문학이 어떻게 위기를 맞이하며, 또 그 위기를 넘어서 것인지를 상징주의라는 척도를 통하여 가늠하고자 한다. 문학이 도달하는 딜레마와 동시에 문학이 제시하는 희망을 따라 가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의견의 수동적 종합보다는, 미숙하다 하여도 우리의 고유한 시선에 도달하고자 한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2)   2. 상징주의의 정의   1. 상징의 어원과 의미   상징이란   '상징(symbole)'이란 말은 희랍어 'sumibolon'에서 나온 말로, 희랍어에서 '상징'은 둘로 나눠진 물건이나, 부호나 표지를 의미한다. 어떤 두 사람이  하나의 물건을 나누어 가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각자 나눠가졌던 두 반쪽은 신표(信標)로서, 그들의 친밀관계를 증명해줄 수 있다. 상징은 이렇게 증표의 기능을 한 것이다. 상징은 그 밖에 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건이나 담보를 확인하는 데 쓰이는 모든 것, 아테네의 판관들이 법정으로 들어설 때 제출하던 출석증, 두 사람 간의 계약이나 두 부로 만들어진 영수증 등을 뜻하였다.    간단히 말해 상징이란 서로 인식할 수 있는 부호에 근거하는 약속과 관련된 것이다. 상징에서는 이처럼 언제나 인식이 문제가 된다. 나아가 상징은 유추적 상응관계에 의거하여 다른 것을 표상하는 그 무엇이면서,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구체적 부호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왕홀(王笏)'은 '왕권'의 상징이다. 우리는 보이는 물건인 왕홀에서 보이지 않는 왕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상징은 하나의 물건이나 대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같은 하나의 이미지"(Aquien, 1993:290~291)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상징은 환유나 제유, 은유 등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울은 정의를, 월계관은 명예를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의 상징은 대상의 한 가지 특성만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힘이나 아름다움이나 고결함 등, 여러 특성들의 상징이기도 하다"(Morier, 1981:1080).   상징은 또한 하나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상징은 "유추관계나 관습에 근거하여 또 다른 실체를 표상하는 어떤 실체나 개념이나 대상이나 인물, 혹은 어떤 이야기를 가리키기도 한다."(Benoist, 1985:124)   사전에서는 '상징'은 "대상의 주요 특질들 중 어느 한쪽 특질을 의미하기 위해 선택된 구체적 대상"으로 "그 구체적 대상은 언제나 특질들의 총체에 속하며, 그 대상은 무한한 의미 내포력을 갖는다."(Morier, 1981:1080)라고 단순히 정의 내리기도 한다.   상징의 특성   상징이라는 약속의 기호는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징의 영역은 다양하며 무한할 수 있다. 상징의 환기력(喚起力)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징은 자의적 기호와는 판이한 차원의 언어이며, 다양한 정신적 현상을 그리는 언어이게 된다.    상징은 근래에 그러나 오랜 동안, 주로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조명되어져왔다. 하나의 언어기호를 이루는 양면, 즉 기표(記標 씨니피앙signifiant)와 기표(記意 씨니피에signifie')는 단절된 상태로 존재 가능하고 인간이 단절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모순되게도 기표와 기의가 합치되는 부호를 갈망한다. 이는 인간 본능에 속한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 속에 투영하려 한다. 문학에서의 상징은 기표와 기의로 나눠진 기호가 그 단절관계를 지워 없애고자할 때 필요한 것이다. 의미와 기능상 언어학에서의 상징과 다른 차원의 것이다.   상징이 가능하고 필요한 까닭은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체계로 이루어진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인간의 인식 체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구의 결과인 것이다. 카시러Ernst Cassirer는 상징주의는 "언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다"(Auroux, 1990:2519)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기호와 상징이라는, 언어를 대하는 두 가지 다른 태도에 대해 요약한다.             소쉬르Saussure의 개념에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무연적(無緣的 immotive)이지만 필연적인 것이다. 반면 상징은 두 기호 사이의 결합이며, 기호들 간의 관계는 유연적(有緣的motive)이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Auroux, 1990:2515).     소쉬르의 개념에서 기호는 기호를 이루는 양면의 결합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상징 언어는 기호의 차원을 넘어선다. 어떤 기호 내부의 결합이 아니라 기호들 사이의 결합과 결집인 것이다. 문학에서 상징은 기의와 기표의 동질성을 전제한다. '유연성'은 '동질성'이라는 전제 하에 있게 된다. 그 전제 하에 '조직적 역동성'이 생겨난다. 상징관계는 기호 자체의 자의성 차원이 아니라 정신의 필요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이다.    상징은 요컨대 정신의 구조 위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징언어는 동일한 대상의 여러 특질을 하나의 관점에서 한 단어로 결집시키고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언어는 따라서 정신의 길이며, 가장 짧은 길이 된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표현하려 할 때 상징은 가장 직접적 수단이 된다. 아무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 개념의 길은 우회적이고 힘들지만 "상징은 바로 들어맞는 기호"(Gouriant, 1991:682).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 자동으로 연결된다. 상징은 "무한의 의미 내포력"을 지닐 수 있다. 상징은 정신의 언어인 것이다.    그 결과 상징 속에는 커다란 개념이 존재하게 된다. 그 의미는 상징 뒤에 숨어있으므로 사람들은 가려진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궁금하여 그것을 찾아 나선다. 상징은 사람들을 현상으로부터 생각의 다른 단계로 끌어올리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즉 상징체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최고의 인식체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3)   2. 상징주의의 의미     "상징주의(symbolisme)' 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들이 있지만 문예사조로서의 상징주의란 '고답파(高踏派)'와 자연주의의 유물론적 태도에 대하여 정신주의적이고 관념적인 반동으로 발생한, 문학과 예술의 어떤 특별한 움직임을 말한다.   '고답파(또는 파르나스 le Parnasse)'는 낭만주의 특유의 서정주의와 모호한 동경, 언어와 감정의 과잉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문학의 한 경향으로서, 객관주의와 언어의 엄정성과 완벽한 형식미에 집착하며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웠다. 19세기 후반 소설에서 사실주의의 추구와 일면 유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던 고답파는 초기에는 현실에서 주제를 찾았으나 고대 그리스 문명과 인도 등, 다른 곳으로 점차 시선을 돌리게 된다. '파르나스'라는 명칭은 카튈르 망데스, 알퐁소 르메르 등이 1866년, 18712년, 1876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편집, 출판한 동인지 에서 얻은 것이다.1)    고답파의 시운동은 운율의 실험과 소네트의 부흥 등, 언어 형식의 폭을 넓히기도 하였지만, 객관성과 기교의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서 마침내는 텅 비고 굳은 형식과 정신성의 부재만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상징주의는 이에 대한 거부로서 존재하게된 것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에 대한 철저한 추구라는 측면에서는 파르나스를 계승하지만, 시어에 대한 전체적 태도를 혁신하려 하였다. 상징주의는 형식을 위한 형식을 넘어 서서, 시어의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려 한 것이다. 나아가 시언어를 절대적 언어의 경지로 끌어올리려 하였다는 점에서 상징주의는 파르나스와 또 다른 정신성을 보여주었다.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의 모호한 서정주의를 반대하여 고답파의 일면을 계승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객관성 추구에로만 지나치게 기울어있는 점을 수긍하지 못한다. 그것의 생명 없음에 대해 반기를 든 상징주의는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유사한 이유로써 반대한다. 상징주의자들에게 언어란 사실적 묘사나 객관적 기술이나 지시기능을 넘어서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것, 인간의 본질과 관념을 표상하고 넓은 정신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였다. 언어는 더 먼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어 자체에 집착하였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와 다르며 파르나스와는 같은 방향이었지만, 언어에 대한 철학과 지향에 있어서는 크게 달랐다.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운동은 일반적으로 1857년 샤를르 보들레르의 의 출간으로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또는 20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확산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느 말라르메. 폴 발레리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밖에도 파리의 카페와 카바레에 진을 치고 보헤미안 문인 생활을 한 자 들이 있었고, 그들은 '쥐티스트'(냉소주의자), '쥬망푸티스트'(오불관언파),2) 동물들처럼 텁수룩하다는 뜻으로 '털복숭이파'3) 등, 이상한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그들 문인, 예술가, 반(反)부르주아들은 비관주의와 반순응주의적 태도로 현실을 조롱하고 시를 숭배하며, 신비주의 취미에 빠져든다.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여 '테카당(decadent퇴페주의자)'이라고 통칭되었던 그들은 예술을 물질주의로부터 행방시키고, 전통의 도덕적 굴레를 벗어나려 하였다. 모든 것의 부정의 외쳤던 다다이스트(dadaist)4)들의 태도를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퇴폐주의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평론지 (1886~1889)의 편집장 아나톨 바쥐Anatole Baju는 시를 잡지에 싣는다면 그것은 다만 독자에게 "시의 신들의 무기력과 신들의 체제 붕괴를 보여주기 위한 것"(Richard, 1968:24)이라 선언한다. 바쥐는 '퇴폐'라는 말을 자신의 활동의 표지로 삼아, "우리는 '퇴폐주의자들'이다. 우리 잡지에는 퇴폐의 모든 뉘앙스들이 표현된다. 형식의 퇴폐, 관념의 퇴폐가 순수 퇴폐에 이르도록까지"(Richard, 1968:24)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조어와 동시에 고풍의 어법, 방언, 통소거에 집착하고 예외적인 것, 미묘한 것, 특이한 것과 신비주의 등을 추구하여 기교에 치우친 경향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글쓰기와 예술 방식은 '퇴페주의 양식'(style decadence)이라고 형용되기도 한다. '데카당스'의 의미는 확대되어 '세기말(fin du siecle)'과 유사한 뜻으로도 쓰이게 된다.5)   부정적 외양만이 '퇴폐주의'의 진면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조롱으로 '퇴폐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지만, 진지한 의미로서의 퇴폐주의는 중요한 사조였고, 이 흐름 속에 상징주의가 배태되어 있었다. 퇴폐주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자연주의는 정신성이 결여된 '예술의 민주적 타락'(Richard, 1968:34)에 지나지 않는 것, 또는 바쥐의 표현대로라면 '산업적 문학'(Richard, 1968:34)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흐름은 상징주의라는 더 큰 발전적 흐름으로 합류한다. 퇴폐주의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파'라는 이름이 제시된 것이다. 사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이들 퇴페주의자에 훨씬 앞서서, 퇴페주의의 출발에는 보들레르가 있었다. 또한 베를렌은 퇴폐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랭보와 말라르메, 위스망스도 넓은 의미에서 그 일원으로 꼽힌다   요컨대 퇴폐주의라는 용어에는 단순한 모욕 차원의 지칭과 상징주의의 '예비적 단계'(Richard, 1968:8)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당스와 상징주의는 확실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징주의는 이 모든 퇴폐주의 양식과 시도들을 통합하게 되고 심화, 발전시킨다.     '상징파'라는 명칭은 장 모레아스Jean Moreas가 1886년 9월 18일 지에 '상징주의 선언'을 함으로써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우두머리를 자처하였다. 이 상징주의는 좁은 의미의 상징주의, 소문자의 상징주의이며, 기껏해야 약 15년 내외의 활동기간을 가졌을 뿐이다. 상징주의자들의 탐구영역과 활동기간은 사실은 아주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상징주의'라는 깃발 아래 전개되었던 상징주의의 전성기는 이들 '상징파'만이 점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유파에는 시인들이 다양하고 수가 많았지만 상징주의가 평가 받고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은 이들 군소 상징주의가 아니라, 보들레르에서 말라르메에 이르는 전기 상징주의 시인들이 구축한 상징주의다. 사실 상징주의를 구획 짓기가 아주 애매할 정도로, 자칭 상징주의자들을 전후하여 4반세기 이전서부터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이 대단한 성과들을 이룩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단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상징주의'라는 용어가 없었다. 이들이 상징주의자들이라고 일찍이 불리지 못하였던 것은 상징주의 초창기에는 미학이 확립되지 못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징주의의 '신호탄'격인 보들레르의 은 고답파의 거장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iter에게 헌정되었고, 말라르메는 라는 고답파 동인지를 통하여 데뷔하는 등, 당시의 상징주의 시인들은 고답파 시인들과 시단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모레아스가 주창한 미시적 개념의 상징주의와 대조되는 거시적 상징주의6)는 가리키는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니 적어도 보들레르에서 시작하여 말라르메, 베를넨, 랭보에게서 그 정점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를 칭하거나, 아니면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시적 현대성을 간편히 칭하여 일컫는 말일 수도 있다."(Marchal, 1993:5)     미시적 상징주의와 거시적 상징주의 외에 제3의 상징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1880년과 1914년 사이에 자연주의와는 별도로, 문학뿐 아니라 미술과 음악 작품에서 본질을 포용하려는 이상주의적 시대 분위기를 말한다.7) 빌리에 드 릴라당, 마르셀 프루스트, 폴 고갱, 오귀스트 로댕, 오딜롱 르동, 귀스타브 모로, 리하르느 바그너, 클로드 드뷔시 등이 이들 범주에 속한다(Marchal, 1993:5-6).   이러한 다양한 상징주의의  정의와 개념 때문에 어떤 평자는 다음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소문자로 쓰면 '상징주의'라는 단어는 상당히 폭 넓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그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면, 그 어떤 형태의 표현 방법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비평의 어휘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려면 반드시 그 한계가 좁혀져야 한다.(체드윅, 1983:1)     그밖에 불어에서 '상징주의'라는 말은 문예사조만을 가리키지 않고 더 일반적인 단어로도 사용된다. 이때 상징주의란 예술작품은 인간의 생각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상징의 차원을 구분하는 말로 '상징계'나 '상징성'이라는 말도 있다. 해의 '상징계'라고 하면 해가 암시하는 상징적 관계들과 해석 가능한 영역들을 폭넓게 내포한다. 반면 해의 '상징성'이란 어떤 한 보편적 특성을 겨냥하여 영역이 한정적이다.   1) '파르나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의 신 아폴론과 시의 신 뮤즈가 살았다고 하는, 아폴론 신전이 있는 파르나소스山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2) '쥐티스트(zutiste)'란 1883년 샤를르 크로Charles Cros가 사용한 단어. 체념과 분노와 무관심을 뜻하는 '쥣(zut 이런, 제기랄!)' 이라는 감탄사를 앞세우고 크로 주변에 모인 시인들을 말함. '쥬만푸티스트', 또는 '쥬망피쉬스트' 란 '난 개이치 않아' 라고 무관심을 표현하는 자들. 3) 퇴폐주의자들은 진보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였다. 바쥐는 진보의 결과 20세기에는 텁수룩하거나 수염 기른 자들은 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털복숭이란 그러므로 문명 세례를 받지 않은 자유인과, 그들의 진보에 반대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4) 1차 세계대전부터 전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반문명적인 예술문화 운동, 기존의 가치관과 도덕과 미학과 전통을 일체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5) 일반적으로 '세기말'은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1890년대 유럽에 퍼진 정신의 퇴폐주의' 라고 정의된다. 회의주의, 유물주의, 비관주의, 신비주의, 현실 도피 등의 여러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는 또한 낭만주의의 유물로 1850년대 문학에서부터 이미 표현되었던 태도로서, 현실은 환영이며 관습이나 진보 등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단정한 태도이다. 6) 마르샬의 용어임. 1993 참조 7) 이라한 분류와는 일치하지 않으나, 상징주의를 3단계로 나눠보는 또 다른 견해가 있다. 1850년경부터 1880년경까지를 전기 상징주의, 1880년경부터 1900년경까지를 상징주의 전성기, 1900년경 이후를 후기 상징주의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김기봉. 2000. 56~57)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4)   3. 상징주의 운동      '위대한 선구자'라고 불리는 보들레르가 1857년을 기점으로 열어놓은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문학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전개된다.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는 보들레르를 계승하면서도 각자의 개성과 감각으로 상징주의의 또 다른 문들을 열어놓는다. 보들레르 시 과 베를렌의 시 (1882)은 상징주의 운동의 기본 강령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뚜렷하게 시대를 구분지울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문학선언이나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상징주의는 19세기 말까지 펼쳐지고 20세기에 와서 쇠퇴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쇠퇴는 사조로서의 상징주의에 한한다. 사실 상징주의는 이후에 소멸한 것이 아니라 20세기에 와서 개인의 상징주의는 더욱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폴 발레리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프루스트는 (1913-1927) 라는 '의식의 흐름' 수법의 내면소설을 통하여 상징주의 소설을 완성시켰으며, 발레리는 상징주의의 정신과 언어를 더욱 발전시켜서 '순수시'라는 양식으로 완성시킨다.그의 와 은 1917년과 1922년에 출판된다.   대체적으로 상징주의는 19세기 말에 끝난다고 개관하지만 사실은 세기를 넘어서도 계승되고 변모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개화하였던 것이다. 이는 문학사에서 연대기적 분류가 무의미해지게 하는 면모이다. 이렇게 상징주의에는 사조사(思潮史)보다는 개인의 어법(語法)이 더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19세기에서 20세기에까지 펼쳐졌던 대시인들의 활동을 보면, 협의의 상징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19세기의 문예사조를 개관할 때,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나타나게 된 낭만주의가 19세기 전반을, 19세기 중반의 약 30여 년은 사실주의와 고답파가,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30여 년을 주도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또한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적이지 않다.        "19세기 중반에는 시단을 주도해왔던 (---) 고답파 시인과 보들레르, 베를렌느 등 후에 상징주의의 거성으로 칭송되는 한 잡지에 시를 같이 발표하는 등 문학적 이념의 갈등이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상징주의의 성립기에는 그 확고한 이론과 미학이 정립되지 못한 채 고답파와 시단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김기봉, 200:54)     사실주의적인 고답파 시는 현실과 세계의 구체적 아름다움의 실현을 목표로 하면서 객관세계를 완벽하게 형상화하는 일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상징주의라는 일종의 반동을 불러왔다. 그러나 고답파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외침으로서, 즉 예술 이외의 것은 모두 예술에서 배제시키려고 함으로써, 초연하고 명상적인 새로운 예술의 토대를 동시에 마련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예술가들, 즉 상징주의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상징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를 매우 조심스러워하였다. 르네 길Rene' Ghil처럼 유파를 형성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를 거절하였다.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는 특정한 유파나 소위 말하는 상징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특정 유파로 통칭되는 것을 혐오하였다. 말라르메는 "나는 유파들을 혐오한다.  또한 이와 유사한 그 모든 것을"(Mallame', 1974:869)이라고도 하였거니와, 1890년대에 젊은 작가 그룹이 '상징주의' 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했을 때에, 보들레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하였고, 랭보는 파리의 작가 그룹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랑을 끝맺는 중이었다. 말라르메와 베를넨은 각자의 작품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을 많은 부분 완성해놓은 상태였다.     이들 '위대한 상징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소 상징주의자들'은 1880~1890년 사이 상징주의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상징주의'라는 표지를 확실하게 수용한다. 이러한 수용의 배경에는 실증주의와 반실증주의, 유물론과 정신주의, 그리고 정치와 역사 등의 대립적 요인들이 있었다.   1870년대 말에 1880년대 상반기, 즉 에밀 졸라의 (1877)과 (1885)이 출간되는 시기에는 자연주의가 전성기에 달했다. 당시는 또 위스망스의 (1884)가 반자연주의의 교과서로 널리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졸라의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맞서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이 정신적 소설이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8)   1870년 보불전쟁이 있기까지 프랑스를 지배해온 사상은 사회주의, 실증주의, 과학만능 사상이었다. 1789년의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정치적 역사적 격변을 체험하면서 발전시킨 진보적 사상들은, 경제발전과 유토피아가 건설 가능하다는 낙관론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강한 페시미즘이 정신을 피폐화시켜가기 시작하였다. 전쟁에서 참패한 후 프랑스 사회에는 현실에서 이상향을 제시해주리라 여겨졌던 사회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론이 주도하게된 것이다. 이상을 현세에서는 구현할 수 없다는 한계가, 다시 말해 기존 가치의 붕괴와 텅빈 공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870년대의 패배는 군사적 패배 뿐만 아니라 문명의 종말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의 "자연과학의 진보는 인문과학의 진보와 결합되었다"(Marchal,1993:37). 생물학, 고생물학, 고고학, 문헌학의 발전은 글쓰기의 진실과 가톨릭의 교조주의와 실증적 사고를 시험대 위에 놓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여기에 가세한다. 1877년에 번역되기 시작한 그의 페시미즘은 많은 작가들에게 비극적 관념을 심어주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라는 그 유명한 아포리즘은 "반자연주의적 반동의 철학적 근거"(Marchal,1993:38)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치체계의 붕괴에서 오는 정신적 공황은 극단적 회의론, 퇴폐론, 그리고 유미론(唯美論)을 낳았다.   이러한 정신적 무정부 상태와 가치붕괴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체계와 문학이념을 제시하고자한 것이 상징주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본질상 이미 반현세적인 태도를 지니고 관념적 이상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8) 마르샬, 위의 책. p.34 참조   4. 상징주의 선언     모레아스는 파리에 결집하였던 다양한 문학적 보헤미안들, 퇴폐주의자들을 '상징파'라고 명명하였다. 이 명칭은 그가 1886년 지에 을 발표함으로써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 선언에 의하여 미시적 상징주의 운동이 결집되었던 것이다. 퇴폐주의를 비난하는 지의 기사에 응답하면서 모레아스는 1885년에 이미 '퇴폐주의자'라는 칭호를 훨씬 환기적인 용어인 '상징주의자'로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에서 상징주의자는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며, 교훈성이나 웅변술, 진실주의를 거부하였고, 시란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하고 유추와 상징을 통하여 '관념(idee)'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낭만주의는 반항이라는 소란스런 경종들을 모두 다 울린 후에, 영광과 전투의 나날들을 다 보낸 후에, 자기 힘과 영광을 잃어버리고, 영웅적이었던 참신함을 포기하였으며, 회의적이고 상식만으로 가득 찬 채, 마침내 길들어져버린 것이다. 또한 낭만주의는 고답파들의 명예로우나 인색한 시도 속에서도 허위로운 재생을 꿈꾸었지만, 유년기에 무너져버린 군주처럼 이제 마침내 스스로의 몸을 자연주의에다 위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자연주의는 시류에 아첨하는 몇몇 소설가의 무미건조함에 맞서는, 정당하나 또 오도된 항의라고밖에는 진실로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예술선언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술에서의 창조적 정신이 보여주는 현재의 경향을 온당히 지칭할 수 있는 유일한 명칭으로 상징주의라는 명칭을 이미 제  안한 바 있다. (----)       교훈과 과장된 묘사와 허위의 감수성과 객관적 묘사에 맞서는 적이라 자처하면서, 상징주의 시는 '관념'을 어떤 감각적 형식으로 빚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전적으로 관념을 표현하는 일을 하면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Marchal,1993:135-137에서 재인용).     모레아스는 낭만주의와 고답파와 자연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상징주의의 길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거짓 감수성과 교훈성과 과장된 수사에 대한 거부, 객관적 묘사라는 것에 대한 거부이면서, 자연주의의 무의미에 대한 반동이라고 그는 설파한다.   동시에 그는 상징주의는 언어의 창조성과 진정한 감수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상징주의 시는 '관념'을 어떤 감각적 형식으로 빚어내고자 한다"라는 그의 말은 상징주의의 언어와 철학, 또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차원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상징주의는 틀에 박힌 언어와 형식에서 자유를 찾고자 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감각이 지시하는 언어에서 길을 찾는다. 또 한편 상징주의는 현실의 거짓된 외양과 감각적 현상들을 관념에 대립시키면서, 현상에 존재이유를 부여하는 본원적 관념을 암시한다. 감각적 형식을 다시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거부의 근저에는 이렇게 플라톤적 관념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연주의와 고답파의 문학적 물질론에 대한 관념적 반동으로, '상징'을 결집의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이 '엄밀한 의미의' 상징주의, 협의의 상징주의는 그러나 겨우 10년 너머 지속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박학자들의 호기심이나 끌 정도의 의미일 뿐"(Marchal,1993:5)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 문학운동은 큰 수확 없이 끝났다.   '상징주의 파라독스'란 상징주의 운동이 자신의 공식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소멸되어버린 것을 말한다.(Forest, 1989:117). 이 상징주의는 직접 상징주의 선언을 하였던 모레아스 자신이 1891년 '로마파'를 창시하면서 분열되기 시작한다. 로마파는 고전주의 정신의 장점을 재발견하고 고대 로마의 제도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신고전파로 분류되었다. 모레아스의 이러한 '요란한 상징주의'를 베를렌은 이미 상징주의(symbolisme)가   아니라   '심벌즈   때리기(cymbalisme)'(Marchal,1993:6)이라고 평해놓았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5)   3. 상징주의의 방법   1. 상징주의 정신   이상주의, 정신주의   1891년 말라르메는 상징의 신비란 "영혼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기 위하여 조금씩 어떤 대상을 환기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한 대상을 선택하여 일련의 해석 과정을 거쳐 영혼의 어떤 상태를 이끌어내는 데에"(Mallarme, 1974:869)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글자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빚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함은 정신주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지향을 요약하는 말이다. 상징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에 대한 항의인 것이다. 물질주의는 졸라의 자연주의나 고답파적 사실주의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에 반대하며 반불질주의와 반자연주의로, 즉 관념과 이상이라는 정신 우선주의로 기울었다.    자연이라는 개념도 상징주의에서는 정신적 조화의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었다. 조화를 언어의 세계 속에 구현하는 것, 즉 시 속에 내적이고 우주적인 질서를 다시 빚어냄으로써, 언어와 자아와 우주가 하나로 포용되는 상태, 그것이 상징주의의 이상이었다. 고답파의 무관심에 가까운 '무심' 자체는 상징주의에서는 무용한 것이었다. 내적 상태에 몰두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원 너머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초월을 위하여 '탈인성화(d'epersonnaliser)가 요구되었으므로 낭만주의와도 구별된다.       낭만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자아에 두고서 그 자아의 본질을 감성과 심정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고, 상징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인간까지를 포괄하는 우주 자신에게로 환원시키고 그 우주의 본질를 감각과 이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김기봉, 2000:113)     이상이라는 것은 막연하 동경이 아니었으며, 감각이나 감정 속의 안주가 아니라 스스로를 우주적 질서 속에 합일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와 달랐다. 더구나 자연주의에서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었다.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자연주의 담론이 제시하는 생경하고 거친 현실로 축소될 수는 없다는"(Marchal, 1993:8) 저항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징은 현실의 것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절망적인 현실 '저 넘어'의 현실을 환기하는 것이 상징의 중요한 존재의미였다.       이제 현실의 것은 적이 되고, 철학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저 너머 세상은 모두 기꺼이 수용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이기 때문이다.(Marchal, 1993:8).     상징주의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동반하고 필요로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와 헤겔과 니체의 철학은 상징주의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외에도, 기존의 진리에 의문을 표시하고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만들려 하였다는 태도 자체에서도 상징주의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와 아울러 신비와 신비주의는 상징주의 미학의 이상적 모습이자 '가장 세련된 형태'로서 '유행 현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문학은 영혼, 정신, 이데아, 본질이란 개념에 집착한다. 또한 자연주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경하고 과장된 현실보다는신화와 전설에서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문학의 자율성   자연주의에서처럼 문학과 과학이 접목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주의는 언어 외적인 모든 범주를 떨쳐내고자 한다. 이는 고답파의 예술지상주의를 계승한 측면이다. 언어는 스스로 자율성을 확보하기에 주력한다. 문학과 언어 자체를 되찾고자 한다. 샤를르 모리스는 1891년 상징주의의 차별성을 다음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문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생리학이나 지리학이나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문학에 어떤 특이한 혼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구가 가져다주는 혼동이다. (---) 사람들은 도덕이 도덕론자를 유인했던 논리적 결론을 시인들에게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란 '아름다움' 외에 다른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Huret, 1984:94).      도구와 목적의 혼동이 자연주의의 부정적인 면의 원인이 되었거나 그것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율성과 미적 독립을 위하여 문학 외적인 목표는 모두 문학에서 배제해야 한다. 문학은 언어 자체만으로써 내적인 긴밀한 구성을, 즉 건축물처럼 '미리 계획된' 구성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은 원래 에드가 알렌 포우Edgar Allan Poe를 계승한 보들레르의 지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말라르메로, 발레리로, 다시 이어진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존재의 근거를 지닌다. 아름다움은 진실되거나 선한 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신념은 고답파에 이어 상징주의가 문학에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다. 이미 도래한 문학의 상징주의 시대에, 문학이 시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는 문학이 이제 모순되게도 절대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은 자비로 출간되었고, 스스로에게 비상업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말라르메는 말한다.       어쩌면 팔리면 안 될 것을 거래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팔리지도 않을 때에는.                                                                                     ( : Mallarme, 1974:378)     팔리지 않는 문학이란 다시 말해 정신의 목적에 봉사하기를 희망하는 문학이었다. 어떤 목적이나 종속을 거부하였던 문학, 다시 말해 대중과의 유리(遊離)라는 위험까지 자청하였던 문학은 1857년 이후 세기말까지 "이상과 절대에 목마른, 대부분은 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거의 신앙을 대신"(Marchal. 1993:10)해주고자 하였다. '문학의 사제' '문학이라는 종교'라는 수식어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나온 말이다.   비교주의, 난해성   사실주의 시대에 소설은 대량 인쇄권을 얻어 거대한 대중이라는 문학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내밀한 시 속에서 "정신의 마지막 피난처를 찾았으며, 입문자들만이 다가갈 수 있는 비교주의(秘敎主義)의 성역을 찾고자"하였다(Marchal. 1993:10). 비교주의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은 종교의 태도를 말하므로, 상징주의는 일종의 정신적 귀족주의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문인들이 신비주의의 결사에 가입했다는 연구와 자료들이 있다. 상징주의 주변에 탄생한 데카당스도 반(反)대중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일종의 '선민의식'(Marchal. 1993:10)을 지니고 비교주의에 탐닉하여 새로운 시 언어에 대한 탐색에 나선다. 그들은 고대어를 차용하거나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며, 신문이나 연재소설의 일상어와 구별되는 순수한 언어의 탐구에 전념한다. 기존의 구문 구성법을 해체하거나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도 등으로도 이어지는 이러한 자세는 상징주의 문학에 필연적으로 난해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논리적 근거 하에 시작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난해함은 그들에게는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난해성은 "독자의 준비 부족이나, 시인의 준비 부족에서 온다"(Mallarme, 1974:869)고 상징주의자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문 구성법과 단어 선택 등의 난해함, 거기에 더해지는 상징 자체의 난해함, 반대중주의, 비교주의, 이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새로운 상아탑이었고, 결국 비난과 오해를 동반하며 상징주의 쇠퇴의 중요 요인이 되기까지 이른다.   이러한 언어추구의 양상 외에도 우리는 보들레르의 댄디즘과 에서 상징주의가 일반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댄디즘(dandysme)'은 19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일종의 문학적 태도로서, 타협하지 않는 예외적 삶의 양식을 통해 사회적 권위를 얻으려는 태도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보들레르는 댄디즘과 나르시즘을 연관지어 보았다. 그에게 댄디즘은 "정신주의와 국가주의에 닿아있는" 것으로, 영혼의 초월적이고 순수한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알코올과 아시슈(haschisch 인도 삼에서 뽑은 마약)라는 인위적 방법으로 실현된 창조의 상태인 '인공낙원'을 그가 그리는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통한다. 그것은 시적 창조의 원동력인 상상력의 인공 공간을 버리는 일이어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갔다.     이러한 자세는 귀족주의보다는 고립주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탐색과 난해성, 비교주의 등은 예술과 정신의 독자성 추구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질주의와 이성론과 엄정한 객관적 묘사나 무감동에 맞서서 정신의 '불확실한 영역' '미지의 영역' '불확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굳어버린 토대를 지우고 정신의 자율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상징세계는 그리하여 냉엄한 질서에 맞서서 유동성과 환상이 빚어낼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존 예술에 대한 부정은 그러므로 생성과 삶을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환상은 환상을 위한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상징주의의 이상은 일탈이나 격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 현실, 현상, 사실의 세계를 끊임없이 초월항 '영혼의 상태'와 이상, 관념,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징주의가 설혹 현실과 사실의 세계를 떠나고 벗어날지는 모르되, 현상의 세계 자체까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징주의는 (---) 반드시 현상을 통해서 관념과 현상 그것에 여일하게 실려서 현상 및 존재와 관념 및 본질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결합 내지 통일을 이루기를 꿈꾼다(김기봉, 2000:110~111)      상징주의가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내재성과 독자성은 이렇듯 고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조화를 위한 것이었고, 궁극적 통합을 향해있었다. 통합이란 현상에서 출발하여, 현상과 이상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초월이란 허황한 구름잡기도, 세상 모두를 버리는 일도 아니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6)   2. 상징주의 미학     상징주의는 그러므로 도피 자체를 위한 이상 추구가 아니었다.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의 대안으로 이상과 절대적 관념과 형이상학을 미학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 즉 '지고의 미'를 표현하고 창조하는 것이 상징주의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 결과 "모든 인식 대상은 하나의 상징 현상이요 상징적 존재"(김기봉, 2003:32)이게 된다. 즉 현상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징계로서, 그것이 감추고 있는 본질적 실체에 다가서는 것이 상징주의 철학의 요체였다.    말라르메에 의하면 대상들의 현재의 외양 자체는 진실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현상은 관념을 표방하고 있거나 함축하고서 그것을 끝없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이 세계는 상징들이 거대한 덩어리, 상징의 숲으로서,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고 읽고 그것을 체험한다. 현상은 끊임 없는 해독을 요구하는 본질의 전언자(傳言者)인 것이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현상에 대한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에게는 상징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관념'이 예술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철학이나 사상에 머물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주의는 언어 자체의 미학이었다. 일반 언어가 아니라 환기력 있는 언어의 추구였다. 문학은 사실적 산문을 넘어서서 상징적, 함축적, 암시적일 수 있는 힘, 즉 순수한 환기력을 빚어내고 간직하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언어의 이러한 힘을 위하여 상징주의는 언어에서 굳어버린 관습을 지우고자 한다. 굳어진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이러한 언어탐구의 과정을 시인들은 "연금술"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언어의 금과 은을 만드는 방법이었으며, 하나의 의식(儀式)이었다. 현자의 돌이나 지모(地母)나 절대의 언어는 동일한 신성성(神聖性)을 목표로 하였다.    상징의 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감각의 정화작업과 동시에 언어의 정화가 요구되었다. 본질적 관념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언어의 새로운 사용법이, 그 세계의 자연스런 유로(流露)를 위해서는 암시의 기법이, 암시를 위해서는 음악의 기법이 필요하였다.   교감   새로운 질서의 공감을 빚어내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감각의 정비가 필요하다. 감수성을 신선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낡은 감각들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부정, 즉 어떤 논리적 필요와 근거 하에 기존의 감각체계를 뒤흔들고 지우는 행위를 랭보는 "모든 감각들의 오래고도 광범위하며 논리 있는 착란:(폴 드무니에게 보낸 편지)" 이라고 설파한다.   이는 감각의 틀을 단순히 새 것으로 바꾸자는 차원이 아니었다. 랭보는 스승이었던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인은 착란에 의하여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인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세계를 촉지하고, 그곳에로 나아가야 한다. 낡은 시선으로는 볼 수 없고 예언자의 통찰력을 가져야한다고 하였다.   이 '보는 힘', 즉 정신의 참되고 아름다운 새 질서를 완성하는 능력의 소유자를 랭보는 '견자(見者)라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감각의 오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착란을 통하여 견자가 되는 것, - 이는 마치 무병(無病)을 앓고 난 뒤에 신통력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견자 -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제어력를 벗어나고 자신을 버린 상태에 도달한다. 이때 그는 "나는 타자(他者)"라고 말한다. 나는 죽은 것이다. 말을 하는 자는 나의 넋이 아니라 다른 자의 넋이다.   이토록 무의식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가 만나고자 하였던 감각과 인식의 또 다른 차원을 보들레르는 일찍이 랭보보다 앞서, 이란 시에서 열어주었다. 랭보가 말하는 '모든 감각들의 착란'이란 보들레르에게서는 감각과 감각의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청각과 시각이 통합되는 것,9) 즉 '색깔 있는 청각' 등으로, 감각이 섞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변하여 또 다른 '영혼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감각과 정신의 해방되어 맞는 낯선 상태, 즉 '미지(未知)'에 대한 추구를 말해준다. 그곳의 '가장 새로운, 보장된 높은 자유"(Mallarme, 1974:3632)를 위하여 무구(無垢)한 감각과 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감수성과 시선의 혁명이 없으면 언어는 세계를 창조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증상," 다시 말해 '공감각(共感覺)'은 요컨대 질서를 다시 빚어내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이다. 이 교감(交感)은 감각과 감각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의 세계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섞인다. 그리하여 자아조차 버린다. 나는 나를 벗어나 나를 바라본다. 자아가 아니라 타자 - 자아인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이 발현하는 것에 동참"한다고 랭보는 말한다. (). 자아의 바깥에서 자아의 발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행복한 격리에 대해 말라르메 또한 말한다. "나는 이제 비인칭(impersonnel)이 되었다." "네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우주적 합일을 향하여 가는"하나의 능력일 뿐이다"라고(). 논리와 언어의 우주적 합일을 위하여 그는 개인의 감성을 버리고자 한다. 그것을 시인은 '탈성인화'라고 한다. 일체의 감성적 여건으로부터 비인칭화 됨으로써 거짓된 감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현상의 모순을 극복할 논리를 수용한다.   말라르메와 랭보는 결국 같은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탈인성화나 자아의 의도적 위기를 통하여 그들은 정신과 언어의 격을 바꾸고자 하였다.     암시와 모호성  '암시(suggestion)'의 기법은 문학,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상징주의의 모든 작품에서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상징주의자들은 대상을 묘사할 때 객관적인 언어로 윤곽 있게 선명하게 그리는 일은 대상을 죽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말라르메는 "오직 암시만 있어야 한다"(Mallarme, 1974:869)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명시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일이다. 시의 기쁨이란 조금씩 점쳐보는 데 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조금씩 점쳐본다는, 상징이 주는 기쁨의 여지는 지시적 언어로써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꿈이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대상에 대한 관념을 예감하며 대상의 양상들을 따라가는 것이 언어가 주는 기쁨이다. 대상을 '통째로 취한다'는 것은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존 언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모든 생성을 전적으로 막는 일이다.       고답파 시인들은 사물들을 통째로 취하여서 그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신비감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쁨이란 조금씩 풀어 나가는데 있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신비야말로 상징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비가 없으면 생성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신비야말로 생성의 영역이다. 사물을 명명하는 것은 상징의 목적에 반하는 일, 즉 신비로운 상상작용이나 유추작용, 환기작용을 막는 일이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꿈과 언어가 주는 기쁨을 가로막는다.    베를렌이 음악이 그려내는 모호한 영역에 집착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음악에서의 '뉘앙스'를 시에 이식시키고자 한다, 베를렌의 모호함에 대한 추구는 랭보의 '감각들의 논리 있는 착란'이 겨냥하는 바와도 통한다. 모두 다 대상에 대한 굳어있는 의식 지우기에서 출발하여, 열린 감각과 질서를 향하겠다는 의지를 따른다. '회색 노래'란 서정적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지향이었다.      또 그대는 오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을 선택하려하지 말 것.    '미묘함'이 '선명함'에 뒤섞이는    회색 노래보다 더 귀한 것 없으니.      그것은 너울 뒤의 아름다운 두 눈,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빛,    미지근한 가을 하늘에    밝은 별들의 푸른 뒤엉킴이어라!      왜냐면 우리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 (---)                                                   ()     암시기법은 그 특성상 미술에 손쉽고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미술에서 암시는 신비와 거의 동의어였다. 암시의 기법은 신비의 해석이라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도록 감상자를 더 쉽게 청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상상과 무의식이 개입되는 감상 - 이로써 감상자는 적극적인 해석자가 된다.       르동은 암시적인 기법이란 사유를 자극하면서, 그것이 조명하고 예찬하려는 꿈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숭고한 조형 요소들을 결합시켜 빛을 발산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모호란 형식들을 통해 '감상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장티, 2002:92-93).      암시는 그러므로 단순한 하나의 기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 표현기법에, 그리고 사실주의의 허상에 맞서는 일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태양광선 아래 사물을 새롭게 보았던 방식과도 어쩌면 상통한다. 빛이 인상주의자들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상징주의자들은 암시의 기법에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감각과 언어의 쇄신과 병행하는 것, 새로운 사물읽기와 같이 가는 것이었다. 암시법은 다르게 보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부터 상징주의는 한 마디로 다르게 보는 법이었다.       (---) 새로운 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상징주의자들 덕이다. 인상주의가 회화를 재현의 틀에서 분리시킴으로써 현대회화를 고안해내었듯이, 언어를 상징기법에 우위를 두면서 동시에, 말을 부호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 완전한 권리를 가졌으며 향후로 확고부동해질 어떤 예술, 즉 시의 -화가에게 색채 같고 음악가에게 소리 같은 - 특수 재료로 만들면서, 우리에게 다르게 읽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상징주의이다(Marchal, 1993:30).     인상주의 회화에서 빛의 발견과 같은 의미를 지닐 정도로,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발견은 서술이나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암시와 상징을 통해 제시하는 방법이었다. 단지 정확하거나 사실적인 기술 또한 함축적이거나 웅변적이기만한 기눙에 머물러서는 이제 시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지지어와 지시대상과의 자의적 관계를 넘어서서 본질을 향하고 다른 우주를 창조해내야 한다. 창조가 이뤄지는 때에야말로 '문자 속의 신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 순수한 '허구'가 실현되며, 글쓰기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본적으로 세계라고 하는 상징현상을 해독해내는 '번역자'이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특이한 상징적 기능을 지닌 언어를 빚어내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김기봉, 2000:40). 시인의 소명이란 상징을 읽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본질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음악   베를렌이 이라는 시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음악은 상징주의 시의 바탕을 만드는데 언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말라르메는 "음악에서 우리 자신을 되찾아오는 것"이 문학이라는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음악은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소리 등, 음악의 기초 재료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마치 기악편성이나 교향악과 같은 것이다.   이 밖에도 음악은 상징주의 언어에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음악은 암시의 기법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의 신비를 빚어내는 일에 조력자 역할을 한다. 또한 음악은 시에 유연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 움직임을 주도하기도 한다.   음악은 나아가 마치 글쓰기의 직접적 도구나 재료인 것처럼 사용된다. 말라르메의 작품 에는 문자들이 악보의 음표들인 듯 배열되어 있다. 소리의 강약처럼 문자들이 크게 작게, 여러 다른 활자들로써 다채롭게 배치된다. 음악에서 휴지나 중지가 있듯이 백지와 여백이 텍스트 전체를 주도하기도 한다. 그가 를 악보처럼 생각하고 썼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새롭게 창조될 상징들의 조화로운 세계, 즉 언어가 빚어낼 '새로운 환경'을 위해 이처럼 음악의 도입은 필수적이다. 상징주의 시에서처럼 철저히 음악을 사용한 문학은 없다. 음악에 문학을 근접 또는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상징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음악을 이라는 시에 이미 차용하고 있다. 라는 시는 언어와 음악과 춤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융해를 보여준다. 이들은 단지 언어의 기교 차원만이 아니라 시의 원론에 음악을 사용하였고, 음악의 구체적인 사용법들을 보여준다. 음악의 모방 차원을 이미 넘어, 말라르메는 '시는 더할 나위 없는 음악'이라고까지 하였다.   음악을 더욱 현실적으로 언어에 적용한 예는 베를렌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를렌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고 음악을!"이라고 에서 외쳤다. 그는 음악을 시 속에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거창한 야망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사용은 소박하지만 능란한다. 리듬의 도입은 그의 시에서 아주 자연스러워서 음악과 시의 리듬은 구별할 수 없도록 거의 하나가 되어있다. 이것이 그의 서정시를 완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그의 시에서는 언어와 감정과 음악이 완전히는 분리되지 않는다.   9) 흔히 말라르메의 이라는 시에 나오는 '푸른 알제뤼스(삼종기도) 종소리' 같은 예를 들기도 한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7)   3. 상징주의의 언어     말라르메가 "시를 만드는 것은 생각들이 아니다. 그것은 말들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라고 르동에게 설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은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나, 여기서 시인은 문학에서 문학 외적인 것을 분리하고, 상징주의는 결국 언어탐구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언어는 마침내 그것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언어가 살아있는 것은 대부분의 언어는 죽은 언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학어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말라르메는 언어를 두 개의 층위로 구분한다.       우리 시대의 떨쳐버릴 수 없는 욕구 중 하나는 한편으로는 날 것 혹은 직접적인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상태로, 마치 서로 다른 기능을 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의 이중적 상태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 Mallarme, 1974:368)     직접적 언어나 날 것의 언어라는 말은 자연적 언어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 우리들이 사용하는 관습에 젖은 일상어를 말한다. 일상어가 혁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언어를 '분리시킨다'는 말을 쓰고 있다. 언어를 '불완전한 언어들'과 완전한 언어로 구분한다.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언어, 즉 보들레르가 말하는 '모어母語'를 빚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언어는 날 것이며 언어 연금술의 대상이다. 두 언어는 기능이 다르다.       서술하거나 가르치기거나 묘사하는 것까지도 괜찮다. 더구나 사람의 생각을 주고 받으려면 말없이 타인의 손에서 동전 한 잎을 가져가거나 건네주는 것으로 어쩌면 각자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언어의 이러한 일차적 사용법은 보편적인 '보고'의 임무를 맡고 있으며, 현대에 씌어진 글의 종류들은 문학만 제외하고 모두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     문학어는 일상어와는 다른 이차적 언어이다. 일차적 기능과 그것이 전달해주는 허위의 현상들은 지워야만 언어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본질에 대해 암시할 수 있다.   '순수개념'이라는 말은 '관념' 혹은 '이상'이라고 번역된 '이데(idee)'10)와 많은 경우 동이어로 쓰이는데, 다음 글에서는 기존의 생각으로 굳어지지 않고 본원적 진실에 가까운 개념이나 생각을 말한다. 그 '순수 개념'의 유로流露를 희망하여 이차적 언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율하면서 거의 사라져가는 자연의 한 현상을 말의 작용에 의하여 옮겨놓는다는 기적은 대체 어디에 소용되는 것인가. 눈 앞에서의 구체적 환기라는 제약을 넘어서, 순수개념이 거기서 유로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한 송이 꽃!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의 목소리가 꽃의 어떠한 윤곽도 다 지워내버리는 망각의 저 밖에서, 내가 알고 있던 꽃받침보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서, 모든 꽃다발이 부재하는 꽃이, 꽃에 대한 그윽한 생각 자체가 음악처럼 솟아오른다.                                                                                                               ()     기존의 생각과 언어는 모두 지워버린 상태인 빈 마음 위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 새로이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 이차적 언어의 기능이다.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지시하고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매개체인 시어들이 대상을 환기시키고 유추하게 함으로써 마음 속의 이미지를 독자가 깨닫게하는 것이다.       발음된 말은 그 말의 주위를 진공 상태로 만들고, 감각세계에서 온 일체의 비전을 제거하며, 그리하여    (---) 순수하고 외롭고 성스러울 만큼 무용한 관념 그 자체를 환기할 수 있는 위력을 보유하게 된다(레몽, 1983:36)     이러한 힘에 비해 직접적 언어는 소통의 관습적인 도구로만 쓰인다. 동전을 조용히 타인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기능일 뿐이다. 의사전달에 쓰이는 언어는 일단 의미가 이해되고나면 공허한 것으로, 실질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반면 본질적 혹은 본원적 언어는 영혼을 감동시키고 영혼 속에서 몽상들의 생성을 유발시킨다. 그것은 이제 언어 이상의 하나의 '존재', 즉 유기체다. 다시 말해 언어에 의하여 솟아나는 이미지, 소리, 색채, 울림, 그리고 '은밀한 친화력'(레몽, 1983:36)이 결합된 어떤 생성이라고 하겠다.   말라르메의 말대로, "언어는 생명을 내포하고 있는 유기체에 가까워짐으로써 모음과 이중모음 속에 일종의 살과 같은 것을 드러낸다." 언어의 '살' 즉 실질을 지닌 살아있는 언어라는 존재는 상징들의 더 큰 '관계망'을 만듦으로써, 나아가 태초의 질서를 복원시키는 힘까지 갖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언어의 진정한 효용성이다. 이 효용성은 거의 마법에 가까운 힘이다. 언어의 이러한 신비란 신비주의가 아니라 언어에 최대의 '효율성'이 주어지는 양상을 말한다.   순수와 긴장에 의하여 빚어지는 언어의 이 압도적인 힘은 거의 본질을 발현시키는 신비로운 가능성이다. 직접적 언어인 일차 언어는 현실의 언어, 기능언어인 데 비하여, 이 본원적 언어는 우리 삶에 새로운 유동성과 자유를 부여하는 언어이다. "타락되고 모양이 일그러진 것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환원시키고 원초적인 무죄의 상태로 복원"(레몽, 1983:37)시키기 위해 존재하여야 하는 이 언어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용한 무상의 언어이다.     이런 종류의 시학에 있어서 난해성은 불가결한 요소임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난해성과 신비주의 경향을 띠며 상징주의 시인들이 대중과 유리된 것은 글자 그대로의 귀족주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상징주의 언어가 갖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었다. 그 속성은 나아가 이제 시 언어와 산문 언어를 차별화하기에 이른다. 시와 산문은 형태상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산문을 논하는 것처럼 시를 논할 수 없도록, 시 개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마침내 열리게 된다.     발레리는 에서 시와 산문을 구분하여, 산문은 걷기처럼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이지만, 시는 춤을 추는 것처럼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며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시는 목적에 산문은 수단에 가깝다. 시의 대상은 분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드러난 목표는 오히려 사물에 대한 스쳐가는 듯한 인상이나 기억일 수 있다.       산문과 마찬가지로 걷기는 하나의 확실한 대상을 노립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하나의 행위이고, 우리는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     춤,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분명 이것도 어떤 행위들의 체계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자신 속에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춤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대상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하나의 관념적 대상, 하나의 상태, 하나의 황홀, 꽃에 대한 하나의 환영, 삶의 하나의 극한, 하나의 미소 -- 텅 빈 공간에다 그것을 갈구하던 자의 얼굴 위에 마침내 솟아오르는 미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라르메가 언어를 관습적 언어와 본원적 언어로 구분하였듯이, 발레리는 산문언어와 시언어로 구분하면서, 상징언어의 속성에 대해 설명한다. 실용언어와는 달리 시언어를 표현하고 해독하는 것은 내적 감수성이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와 본질과 생성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와 산문은 그러니까 우리의 신체와 신경의 유기체 속에서 결합되고 해체되는 어떤 결합관계들과 연상관계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     나의 의도, 나의 욕구, 나의 명령, 나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방금 내게 소용되었던 언어, 제 의무를 다한 이 언어는 도달하자마자 사라집니다. (---)     반대로 시작품은 살았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그것은 잿더미에서 재생하도록, 그리하여 좀 전의 자신으로 끝없이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산문언어는 언어의 목적지에 닿는 순간 효용이 다하지만, 시언어는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본질 속에 끝없이 재생한다.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언어는 이렇게 실질을 지니게 된다.   '관념(이데)'의 특질은 일상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부분을 전체로, 이미지를 현실로" 보이도록, 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의 힘을 빌려 빚어내도록 하는 것이 상징의 기능이다. 이것이 바로 시언어이다. 시언어는 현실적 교환이나 지시가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가 목적이다. 그러나 실용언어는 근본 속성상 바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시언어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생하는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시인들의 꿈이다. 말라르메는 그것을 '불사조에 타버린 꿈'이라 하였다. 그 언어는 클로델 Paul Claudel의 말대로 '앎의 상태'를 넘어서 '기쁨'의 차원을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상징의 숲'은 일상어의 초월을 통하여 창조되는 언어의 신세계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관습적 언어를 정신의 필요에 의해서 영혼의 상태를 그려낼 수 있도록 거의 비의적인 방법으로 정화하는 일, 그것 때문에 언어의 난해성이 있게되는 것이다. 본질로 환원된 언어를 통하여 언어와 정신의 어떤 통합에 도달하는 것 - 그 일을 랭보는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 은 연금술에 의한 신비로운 언어의 탄생을 그린 것이다.   10) 관념으로 번역되는 '이데'는 대체적으로 대문자로 쓰이는데, 원래 시적 관념, 내적 관념, 형이상학적 관념 등을 가리키며, 그 범위가 '상징' 만큼이나 넓다 (Marchal, 1993:174 참고)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8)   4. 상징주의의 전개   1. 상징주의의 계보   자유시, 산문시, 순수시   상징주의는 19세기 중엽에서 말까지 성행하였고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그 성숙한 성과를 보여주었던 문예사조로서,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의한 반동이며, 이성이나 추론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감정을 파악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직관들과 사고의 표현을 목표로 하여, 기존 문학형식에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그 혁신은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본질언어에 대한 탐색은 시언어, 즉 상징언어에 대한 추구였다. 그리하여 상징주의는 위고Victor Hugo의 낭만주의에서 고답파에 이르렀던 프랑스 당대의 시 전반에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이 새 바람은 자유시와 순수시를 낳게 된다. 관념적이던 상징주의자들이 공략한 것은 시, 그중에서도 자유시 부분이었다.   베를렌은 자연스럽게 전통 시구의 갱신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자유화시' 또는 과격시는 각운에 대한 전통적 규율에서 해방된 시를 뜻하지만, 정형시의 전통적 율격을 더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유시(vers libre)' 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랭보는 베를렌의 (1874)보다 앞서, (1873) 등의 시에서 베를렌과 유사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베를렌의 자유화시는 자유시의 초석이 되었으나, 각운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하였다. 시를 외형적 율격에서 진정으로 해방시켜 자유시, 곧 오늘날 현대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상징주의의 가장 현대적인 기여의 하나다.      자유시는 음절 계산을 넘어선 시로서, 생각, 호흡, 음악성의 요구에 따라 시가 흐르는 대로, 때로 완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까지 변조되는 시이다. 시를 해방시킨 것은 상징주의이다(Marchal, 1993:177).    1886년 7월에는 귀스타브 칸Gustave Kahn이 자유시의 창안자로 나선다. 베르트랑 마르샬은 쥘 라포르그의 원고를 친구 칸이 발표시기를 늦추어 한 달 뒤인 8월에 발표함으로써, 그 우선권을 탈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Marchal, 1993:52).11) 라포르그는 두 달 뒤 마약과 폐결핵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마르샬 이전에 이미 리샤르는 칸은 오히려 시의 '절(storphe)'을 시의 가장 핵심적 기본단위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면서, 칸이 자유시의 창안자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였다(Richard, 1978:380). 모리에 등은 일반론대로 칸을 그 창안자로 기술하였다(Morier, 1981:1168).   이제 시의 리듬은 기존의 정형에서 많은 변모를 보인다. 상징주의 자유시는 "의미 있으며, 소리 들리는 부호이자, 영혼의 움직임의 상징들인 리듬들을 채택하고자 하였다"(Morier, 1981:1168). 그것은 '언어의 공식적 리듬'에 비하여, 정신의 '새로운 모험'(말라르메)을 가능하게 하여, 시의 형태를 놀랍도록 변모시켰다.    자유시는 칸과, 언어의 음악성과 순수시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고 '악기파'의 제창자 르네 길Rene Ghil 같은 시인 등을 중심으로 더욱 발전한다.    상징주의 시는 자유시에서 더욱 나아갔고 그 결과 산문과 유사한 형태의 시가 널리 퍼지게 된다. 보들레르, 로트레아몽, 랭보, 말라르메 등은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1807~1841)이 시작한 산문시를 더욱 발전시킨다.     너무 엄격한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하였던 산문시는 대체적으로 베르트랑이 죽은 다음 해인 1842년 간행된 그의 가 시작한 것으로 본다. 보들레르는 베르트랑에서 영감을 받아 산문형식을 빌려 '소산문시'를 발표함으로써(1855~1867) (사후에 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된다), 상징시의 또 다른 문을 열어주었다.    산문시는 "자유시가 나타난 뒤 사라지게 될 한 전위적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 언어를 창조하려는 노력"(Bernard, 1988:771)의 일환이었다. 또한 산문시는 표현의 무한한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인간의 내적 자유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르로 부각되었다.    산문시의 시도는 그리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현대 시인들의 광범위한 시도로 끝없이 계속되게 된다. 베르나르의 8백 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저서의 결론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와 반항의 장르인 산문시는 (---) 시형식을 갱신하려는 하나의 단순한 시도 이상이다. 정신의 욕구, 즉 인간이 운명에 대해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싸움에서의 한 양식이었다.(1988:773)     산문시의 가장 큰 성과는 이렇게 시를 해방시켰다는 데 있다. 상징주의 시는 이렇게 언어의 외적 형식의 소박으로부터의 자유, 즉 언어의 해방과 동의어였다. 동시에 내면이 해방의 동의어로서, 시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동시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확고히 각인시켜주었다. 향후 프랑스 시는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뉘게 되며, 상징주의는 자유시와 같다는 생각이 당대인들의 머리에 확고히 새겨졌다.     음악의 특질들을 시에 수용하고자 하였던 '순수시'는 프랑스 상징주의가 빚어낸 것이다. 이것은 원래는 "산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시의 이상을 정의 내리는"(Marchal, 1993:175) 말이었다.  이야기나 서술, 개념적 사고 등, 시의 요소 이외의 것들은 모두 시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던  이 순수시는 말라르메로부터 시작된 생각으로, 음악적 암시의 순수한 효과를 중시하였다. 순수시는 극단적으로는 "언어이긴 하지만, 감각적 언어 혹은 음악적 언어였다"(Marchal, 1993:176). 이러한 상징주의의 순수시는 일체의 사회적, 현실적 관심을 떠나서 서정의 세계만을 대상으로 하고자 하는 넓은 의미의 순수시와는 구별된다.   말라르메의 생각을 '순수시'라는 말로 제시한 시인은 발레리였다. 그는 고도의 지적 세계를 이미지와 감정의 결정체로 조화롭게 빚어냄으로써, 순수시의 영역을 더욱 확충시킨다.   자유시와 산문시와 순수시의 확립에서 볼 수 있듯이, 상징주의는 이전의 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겠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이미 부여하고 출발한 것이다. 문학은 전위적이 되었고 다양한 유파와 문학선언이 이어졌다.   상징주의의 계보   상징주의 운동에는 세 스승, 즉 감정의 탁월한 양식을 빚어내었던 베를렌, 감각 인식의 새 지평을 연 랭보, 지성의 언어관을 구축한 말라르메가 확고하게 자리한다. 각기 다른 성향을 낳았던 상징주의의 거대한 움직임들의 정점에는, 감각과 시형식과 상징술과 사상의 위대한 선구 보들레르가 있었다. 그의 은 서구 현대시를 낳은 가장 거대한 뿌리였다.   베를렌은 음악적으로 완벽한 순수 서정시를 썼으며 그 감정적인 어두운 면, 원죄의식 등은 데카당스로 이어진다. 주술과 환각으로까지 이끄는 랭보의 언어와 감각은, 환상적 시세계를 개척하였으며, 초현실주의를 열어주었다.   말라르메의 언어의 정화와 형식의 혁신 작업은 상징주의 이념의 체계화의 결과였다. 말라르메의 순수시와 절대시의 체계는 19세기에 그치지 않는다. 발레리는 그의 업을 확실히 계승하여 20세기 최고의 상징시이자 지성시의 탑을 쌓는다. 말라르메는 소네트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또한 전통을 넘어서는 활자법을 개발하여 시행이 해체된 시를 창안하였고, 오늘날의 다양해진 활자배치술을 미리 시사하였다.    상징주의는 세기를 넘어서도 훌륭한, 개인적인 개화들을 보여주었다. 발레리와 더불어 20세기 대표적 시인의 하나인 폴 크로델, 상문에 있어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드레 지드도 사징주의 범주에 들어간다.   협의의 상징주의, 또는 미시적 상징주의는 약 15년 내외에 걸친 활동으로 1890년경이 전성기였다. 장 모레아스, 트리스탕 코르비에르, 귀스타브 칸, 쥘 라포르그, 알베르 사맹, 프랑시스 잠, 에두아르 뒤자르뎅, 르네 길, 조르주 로당바크, 에밀 베르아랑, 아리 드 레니에, 프랑시스 빌레-그리펭, 사를르 모릿, 르미 드 구르몽, 등 많은 시인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상징주의 선구자들의 창조적 혁신은 구스타브 칸의 자유시와 르레 길의 '악기파'의 창시로 다시 꽃핀다. 그러나 이 짧았던 상징주의는 문학적 기여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보들레르의 시적 혁명, 말라르메의 이론적 체계화, 원죄의식의 베를렌, 감수성의 랭보 - 이 선구자들의 새로운 문학에 비하여 협의의 상징주의는 결국 이에 필적할 만 영향력 있는 대시인은 낳지 못한 것이다.   그밖에 후기 시에 깃든 병적인 악몽의 세계에 빠진 로트레아몽이 있다. 일명 이지도르 뒤카스의 (1868년, 1869년)는 '파괴적 아이러니'(Marchal, 1993:23)와 비현실적 내용과 형식의 독창성이 결합된 장편의 미완 산문시로, 후에초현실주의로 부활한다.   11) 참고로, 1886년은 상징주의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가 된다. 모레아스의 랭보의 과 르네 길의 발간 외에도 칸과 라포르그의 자유시의 원년이었고, 쇼펜하우어의 가 불역된 해이기도 하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9)   4. 상징주의의 전개   2. 상징주의의 반향   상징주의의 다른 장르   말라르메는 위스망스의 소설 에서 세련되고 완벽하며 압도적인 시인으로 소개되었으며, 젊은 문학가 예술가들은 그를 정신적 사표로 삼았다. 파리의 로마로(路)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는 화요일마다 소박한 문학 모임이 열렸는데, 여기서는 시와 문학뿐 아니라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베를렌, 지드, 발레리, 클로델, 피에르 루이스, 프루스트, 구르몽, 레니에, 모리스 바레스 등의 많은 프랑스 문인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널리 알려져서 오스카 와일드 등도 참석한다. 그 외 르동, 고갱, 로댕, 드가,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드뷔시 등, 현대 프랑스의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줄을 잇게 된다. 이 모임은 예술의 여러 분야에 상징주의의 새로운 미학을 전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화요회의 영향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렵 여러 나라에까지 미쳤다.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은 현실 너머 세계의 창조에 몰두한다. 상징주의는 극도 이상주의에 몰두하여, 1865년경 말라르메는 운문극 혹은 극시 와 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들은 현실을 떠난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였다.   또한 18세기 마지막 4반기에 바그너의 영향은 프랑스 연극에서 사실주의를 버리고 시적 언어로 신비주의를 그리도록 하였다. 1885년 의 창간은 이미 행사하고 있던 바그너의 영향력을 더욱 크게 하였다. 빌리에 드 릴라당, 모리스 메테를링크, 폴 크로델이 그 가장 활발한 성과를 보여주었다.12)   상징주의의 출발과 본령은 무엇보다 시에 있었다. 그러나 시에서 보여주었던 이상과 관념과 절대에 대한 추구는 다른 장르들에도 영향을 주었고 특이한 양상으로 완성되면서 상징주의의 영역을 더욱 확충시켰다.   이상주의는 소설에서도 부족하지 않았다. 릴라당의 소설들이 손꼽힌다. 몰락한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유창한 콩트 작가로서 주로 물질주의에 맞서 정신적인 절대의 세계를 동경하는 이야기들을 썼다. 그의 영향으로 많은 상징주의자들은 외부 세계의 현실에 등을 돌리고 절대적 이상주의라는 고통스런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모험은 '절대적 페시미즘'에 도달하였고 다수의 상징주의자들도 같은 길을 갔다(Rait, 1986, 261~262).  위스망스의 (1884)는 주인공 데 제생트라는 귀족이 퇴폐적 미학을 추구하며 외부와 단절한 채 삶보다 예술에 빠져 다양한 실험을 행한다는 이야기로, 보들레르가 그렸던 이국적이고 인공적인 세계를 탐미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이 긴 독백형식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미적 쾌락 속에서 고통의 출구를 찾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연적 대하소설 를 썼는데(1913~1927), 여기서 그는 이상을 찾아 의식의 심층을 탐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문학청년인 나, 마르셀이 기술해가는 7편으로 된 1인칭 고백형식의 소설이다. 이 대하소설은 그러나 기존의 서사적 소설이 아니다. 서사적이라면 자아의 내면에 대한 서사라 하겠다. 이 소설은 어떤 이야기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소설이 탄생하는가에 대한 내적 이력을 탐사한 소설이다.   마들렌느를 먹는다. 그러면 유년의 어떤 추운 겨울, 홍차에 곁들여 먹던 조가비 모양의 이 작은 과자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일리에에서 보낸 유년기가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순화되고 결정(結晶)이 되어 살아난다. 홍차와 마들렌느가 촉매가 되어 자아는 무의식의 심층 탐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태양계의 조직처럼 화자의 의식이 태양인"(Marchal, 1993:121)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화자의 시선에 의해 세계가 재구성되지만 여기서의 세상은 내면화된 세상이다.   말라르메가 에서 꽃다발의 부재와 더불어 언급하였던 언어의 환기적이고 암시적인 기능은 이제 프루스트에게 와서 표층의식 저 멀리, 그리고 사실주의적 현상 너머로, 또 다른 하나의 현실을 광범위하게 그리는 데에 쓰이는 것이다. 이제 자아는 사실주의 공간이 아니라 '되찾은 시간'의 새로운 매혹에 빠져든다.   이처럼 프루스트의 는 "19세기의 세계 중심적 소설을 다시 통합하여"(Marchal, 1993:121), 자아 중심의 상징주의 소설의 전형을 창조하며 동시에 성숙시켰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상징주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보들레르가 시작한 의식의 심층탐사를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더욱 천착하여 무의식의 영역을 탐사함으로써, 이미 상징주의를 넘어섰다고 평가 받는다.   상징주의의 전이   이상이 상징주의의 횡적인 반향의 양상이라면, 우리는 또 문예사조의 전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초현실주의를 낳게 한 상징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일찍이 보들레르가 에서 시도하였으며 로트레아몽과 랭보가 추구하였던 환상, 그리고 베를렌의 퇴폐주의(데카당스)는 초현실주의의 초석을 놓게 된다.   현실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상징주의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 너머의 새로운 조화의 공간을 창조하려 하였다. 이에 비해 1900년경부터 시작되었던 '초현실주의'는 보들레르의 로트레아몽, 그리고 랭보의 환각적이고 주술적인 언어에서 시사 받고 현실의 배후로, 현실과 의식의 밑바닥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둘 다 모두 의식의 다른 곳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은 출발이다. 그러나 앙드레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 있어서 상징주의와 다르다.       즉 목적보다는 수단에 강세를 두고, 이렇게 해서 달성된 초현실의 본질보다는 비합리적인 수단의 사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또 음악보다 회화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체드윜, 1981:65)     초현실주의는 초현실만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을 꿰뚫어 배후의 현실 속으로도 향하였고, 반면 상징주의는 초현실을 향하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 상징주의는 순수 조형적 구성이라는 차원에서도 주요 역할을 한다. 상징주의는 '세기말'과 '아르누보(Art nouveau)'가 복합되어 널리 파급된다. 글자 그대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는 전통과 단절하려는 의지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는 의지에 의해서 상징주의와 같은 궤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미학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유사한 예술운동으로, 아르누보는 1893년에서 1905년까지 주도되었으며, 기존의 역사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근대 세계에 맞는 새로운 양식 창조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르누보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진정한 생명체로서의 주거환경이라는 유기적인 개념 차원에서 구조와 장식 간의 구분을" 없애고자 하였다(장티, 2002:9).   상징주의 활동은 산문에서는 제임스 조이스 뿐 아니라13) 슈테판 게오르게에게 직접 영향을 끼쳤으며, 라이너 마리아 릴게의 시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파울 첼란,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기욤 아폴리네르, 프랑시스 퐁주, 자크 루보, 레몽 크노, 이브 본느프와, 미셀 드기 등, 현대의 무수한 작가들에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2) 제드윜, 1983, p.62 참조 13) David Hayman, 1956을 참고할 것.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0)   3. 상징주의의 퇴조     이상과 관념을 지향한다는 것은 정신의 갈망에 대한 현실의 충족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결핍감을 줄 때 더 성행하는 현상이다. 가치체계의 흔들림은 그러나 가치의 위기를 잠재울 수 있을 현실적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세기말병'이라는 병리현상도 물 밑으로 가라앉고 경제적 안정이 찾아옴으로써 이상과 본질이라는 두 명제의 문제도 사람들의 뇌리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파나마 사건, 모로코 사건, 식민지를 얻기 위한 열강들의 각축 등, 세기 말과 초의 역사적이고 격동적인 사건들은 사람들을  또 다른 혼란과 위기의 와중으로 밀어넣었다.   상징주의는 현실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생래적인 특성상 현실 변화들에 초연하려는 의지를 중시하고, 실제로 초월을 꿈꾸었다. 역사의 격동기에도 초연히 유지되는 상징주의 상아탑은 현실 감각의 결여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말라르메는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 대한 활발한 참여나 견해 표명이 부족하다고 지금도 비난받는다.     관념주의, 순수에 대한 집착, 언어 자체의 모호성, 언어의 지시대상의 모호성, 유희로까지 전락하였다는 비판을 동반하였던 현학 취미, '신조어에 대한 집착과 체계적 난해성'(Richard, 1978:393), 그리고 합리적 정신으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일부 상징주의자들의 비교술(秘敎術)과 신비주의에 대한 집착은 상징주의가 시대착오로 전락하게 하였다.   신비주의, 이상주의, 암시적 기법, 교감, 언어와 문학의 절대화, 난해성, 선민의식 등은 상징주의의 고유한 세계를 열었고 광범위한 문학 공간의 구축과 내용과 형식의 혁신에 기여하였지만, 바로 그 특성들로 인하여 상징주의는 대중과 시대의 요구에서 유리된다.   더구나 상징주의가 대중을 외면하고 작은 잡단의 변두리 속에서 칩거하며 그들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하고 있었을 때, 자연주의 소설들은 대량 출판의 시대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적 삶과 단순성과 명확성을 멀리하였으며, 현실의 다양한 욕구들을 수용할 수 없었던 상징주의는 쇠퇴를, 적어도 수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대륙적 합리주의라는 그릇은 상징주의를 한 없이 담아둘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모호하고 난해한 영역에 대한 집착, 즉 "명석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전통적인 정신을 여유 있게 포괄하지 못한 상징주의의 그 반(反)정통성"(김기봉, 2000:53)으로 인하여, 상징주의의 쇠퇴는 미리 예정된 것이었다. 상징주의로서도 마침내 시대를 수용하지 못하였으며, 또 프랑스라는 공간도 상징주의를 결국 거부한 것이었다.   암시와 상징을 통한 모호한 영역의 환기, 그리고 비교주의와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것, 이들 모두는 상징주의가 벗어나고자 하였던 낭만주의의 성향에 오히려 가까운 것이었다. 상징주의가 향후에도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시의 가장 모호하고도 보편적인 영역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막연하고 구체적이지 못한 언어와 관념의 유희는 더 이상 주류일 수가 없었다.       기실 상징주의는 시를 통해서 순수하고 고도한 정신의 수정 같이 아름답고 별처럼 고결한 영혼 가꾸기라는  관념적인 유희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김기봉, 2000:53)     클로텔은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필요에 의하여, 가톨릭적 상징주의에 여전히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는 1892년 '제노바의 밤'이라는 위기를 겪고, 문학을 '처단'하였다고 하며, 시 쓰기를 포기하게 된다. '자아'의 문제에 몰두하며 그는 20년이 넘는 동안 침묵에 빠진다. 앙드레 지드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에 몰두한다. 프루스트는 문학의 변모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들 대부분은 상징주의의 유업을 이어받고 있거나 변모시키거나 장차 발레리처럼 더욱 완성시키게 된다.   이에 반하여, 상징주의의 용도페기를 선언한 다양한 조류들이 상징주의의 뒤를 잇게 된다. 상징주의를 선언했던 모레아스는 현실과 관념 사이의 "전이전 현상에만 관심을 갖는 상징주의는 죽었다"고 하며, 1891년 '로마파' 선언문을 지에 게재함으로써 스스로 신고전주의로 복귀함을 알렸다.   '본연주의', '전일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선언 등으로, 문학계도 역사적 격동의 현장에 동참한다.   본연주의는 19세기 말, 고답파와 상징주의에 반기를 들어 연금술적인 언어 만들기와 추상화를 거부하며, 자연의 단순성과 풍요를 구가하려 하였던 예술과 문학의 주장이다. 그것은 꿈과 관념보다는 일상과 세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였다. 1897년에 있었던 모리스 르 블롱의 본연주의 선언보다는, 앙드레 지드의 이나 아나 드 노아이유와 프랑시스 잠에게서 그 취지가 더 잘 표명되었다.   쥘르 로맹은 1905년 전일주의를 제창하여, 집단의 초개인적 일체감을 중시하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전일주의는 공동체적 생활에서 체험하는 집단의식과 감정의 진실성을 내세웠다.   이탈리판 입체파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미래주의'는 1909년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으로 표명된 것으로서, 속도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형태의 미로서 내세웠다. 기계의 위력으로 출현한 새로운 세계를 환영하고, 움직임과 시간의 본질을 추구하여 과거에 대한 모든 집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다이즘'은 모든 것을 부정하며, 기존의 사회적, 도덕적 속박에서 해방된 개인의 진정한 근원을 찾고자 하였다. 1913년에서 1922년 사이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일어났던, 일체의 현실을 부정하는 반문명이고 반(反)합리적이었던 예술문화 운동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