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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2466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5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2048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4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④ 댓글:  조회:2398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의 종묘제례악 왜곡론은 기성 국악계에 난데없는 날벼락이었지만 그들의 카르텔은 공고했다. 이왕직 아악부 출신인 성경린은 ‘전통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말했다. “전통이라는 것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으로 고악보의 것을 그대로 복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전통의 맥은 끊어진 것이다“ (성경린이 글로 쓴 것인데 어법도 안 맞는다)  그의 말을 서양 클래식에 비유해보자. 베토벤의 이 있는데 수백 종의 악보가 같은 표기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선율은 같은데 리듬이 전혀 다른 악보가 발견되었고 악기편성도 축소된 형태였다고 치자. 그리고 그 변형된 악보대로 을 연주한 일단의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배운 베토벤의 을 진짜라고 한다. 왜? 전통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복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전통이 아니다. 이런 황당한 전통론은  남선생의 기습에 당황한 기성 국악계에 빛과 소금이 되었다. 남선생은 2003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0여 편의 논문을 썼지만 단 한 편의 반박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이 맥없이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기성 국악계의 문제가 한 둘이 아닌데  어느 하나를 인정하면 나머지도 우르르 쏟아질 테니 그들로서는 크나큰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교활하게 논쟁을 피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가끔씩 ‘전통론’을 방패삼아 얘기하면 되었다. 그들은 각 대학교 국악과의 권위 있는 교수였고 실기를 하는 학생들은 그들만큼의 이론적 소양이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용렬하게 된 데에는  슬픈 한국음악의 역사가 있었다.    
3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③ 댓글:  조회:2162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은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하여 종묘제례악이 위조라는 걸 주장했다. 그런데 국악계의 반응이 이상했다. 제대로 된 논문을 써서 반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사적인 대화를 통해 모멸감을 주거나 학술대회에서는 말꼬리 잡기를 하며 논지를 흐리기 바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종묘제례악이 위조였다는  남선생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까지 가세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고  분위기는 종묘제례악의 왜곡을 인정하는 쪽으로 흘렀다. 국립국악원은 남선생의 논문게재를 불허하는 등 가리기에만 급급하다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2005년 서울 국립국악원에서는 이채로운 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는 남선생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국립국악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바로 조선후기 고악보인 에 나오는 종묘제례악과  이왕직 아악부 악보를 계승한 현행 종묘제례악을 한 무대에 올려 청중들에게 비교,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 국립국악원의 속셈이었다. 연주되지 않은 지 100년 넘는 음악과  100년 동안 연주되어온 음악을 비교하다니 남선생의 패배가 확실한 듯 했다. 청중들은 국악학자, 국악실기인,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었다.  그런데 연주회가 끝나고 청중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500년 동안 유지되던 본래의 악기편성을 갖추고 규칙적인 장고 장단에 맞추어 가사단락마다 박이 오는 의 종묘제례악은  현행 종묘제례악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듣기에 편하고 아름다웠다. 고악보의 종묘제례악을 듣고 난 청중들은  왜 이렇게 좋은 음악을 이제야 연주하느냐고 했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복원된 종묘제례악을 찬양하는 글이 폭주했다. 꼼수를 부린 국립국악원의 완벽한 패배였다. 이 문제는 이렇게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았다.
2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② 댓글:  조회:2145  추천:0  2018-11-25
2003년 남상숙 선생은 종묘제례악이  일제강점기 위조된 가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의 단초가 된 악보가 있었으니 다. 는 종묘제례악의 변질을 기록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악보다. 조선시대 악보 중에서 이외의 어떤 악보에서도  이와 같은 종묘제례악 장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선생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는 조선왕조의 관찬악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조작된 악보라는 것이다. 는 19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를 위조하려다보니 그보다 100년 전에 쓰여진 의 영산회상부분도 위조했음을 밝혀내었다. 남선생은 서예학자를 대동해 서체 감정을 받고 종이 연대측정법까지 동원해 이를 밝혀내었다. 그 결과 역시 일제 강점기에 일부 악보를 위조하여 합본한 것임을 밝혔다. 요약해보면 18세기 정조 때의 악보인 의 일부(영산회상)를 위조하여 18세기에 이미 음악의 장단 변화가 시작된 것처럼 꾸몄고 19세기 말에 만들어진(거짓말이었다) 에서 종묘제례악을 1자1음식으로 바꾸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6대강구조(세조때 정간보 기입시  3·2·3·3·2·3 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되었다)를 해체하여 4구로 된 음악으로 만들었다. 선율은 세종 때 그대로인데 장단만 변했다. 이렇게 되면 그 음악은 불구가 되는 것이다. 의 이러한 장단변질은  일제강점기 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진실을 말하자면  일제는 종묘제례악 같은 수준 높고 장엄한 음악이 그대로 전승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 박과 절주가 무너진  절름발이 종묘제례악을 만들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는 악보를 만들어 마치 조선왕조의 장악원에서 편찬한 관찬악보인 양 꾸몄다. 조선시대 관찬악보에 편찬시기가 기록된 악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에는 편찬시기가 다섯 번이나 기록되었다. 제발 19세기 악보라는 걸 믿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1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① 댓글:  조회:2199  추천:1  2018-11-25
이제부터 연재하는 글은 남원농악 이수자인 김정헌박사의 것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의 치욕의 역사와 그 극복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련한 것이오니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종묘 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노래·무용의 총칭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현행 종묘제례악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학생이었던  김기수의 악보를 모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고 김기수의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악보를 모본으로 만든 것이다. 김기수는 1939년 최초의 국악창작곡이자  최초의 친일국악곡인 을 작곡했다. 해방 이후에는 국립국악원 예술사, 서울대 국악과 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국립국악원장,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로 현행 종묘제례악은 이 사람의 의중대로 전수된 것이다. 종묘제례악은 정대업11곡 보태평11곡으로 구성되었다. 단순한 악기 연주가 아니라 악,가,무의 종합예술이다. 세종이 종묘제례악을 당악(중국음악)으로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인 향악으로 만든 이유는 우리 나라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음악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행 종묘제례악은 그 장단이 이상하다. 연주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규칙적인 리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패턴 불규칙형’ 장단이라고 명명했다. ‘무패턴’이라는 건 장고의 패턴,  즉 쌍(덩),편(따),고(쿵),요(더러러러)의 타법이  일정하게 정해진 패턴이 없다는 말이며 ‘불규칙’이라는 건 박자구조가 들쭉날쭉하여 몇 박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무슨 이런 거지같은 음악이 다 있을까? 원시인들도 이런 음악 안 할 거다. 우리가 종묘제례악을 들으면서 불편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장단이 무패턴 불규칙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원래 세종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조선전기의 악보인 , 조선후기의 악보인 등에 실린 종묘제례악은 모두 그 장단이 규칙형 장단이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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