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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새시대 새시대사상으로 새 려정을 펼치겠다 댓글:  조회:2380  추천:0  2017-11-24
11월 13일 필자는 중국공산당 제 19차 당대표정신 전달로 팽이 매일 돌아치는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당지부서기(촌주임 겸)라철룡을 만나 대담하였다. “기층대표로 행운스럽게19차 전국당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자신감을 높히고 사업방향을 뚜렷히 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사명감과으로 초심을 명기하고 수남촌 건설을 위해 힘을 다 할 것입니다!” 아직도 흥분된 마음을 걷잡을수 없다며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 가요?”며 자신 있게 반문하는 라대표다. “순서가 따로 없이 경청하겠습니다.” 이하는 라철룡의 언보(言步)에 따른 채록이다. ㅡ 가슴이 제일 벅차던 시각은 기층당원으로 전 세계 세인들의 주목속에서 자신감에 넘치고 심근을 울리는 습근평총서기의 획기적인 보고를 한자리에서 청취 할 때, 변강 소수민족의 당원을 대표하여 새로운 당중앙위원을 선거(투표) 할 때(라철룡은 특별히 깊이 간직하고 항상 품고 다닌다는 대회에서 발급한 전문투표용 만년필을 손에 들고 투표시각을 회포), 대회가 끝난 후 습근평총서기가 또 세인들의 주목 속에서 강택민, 호금도 전임 당중앙 총서기와 당과 국가의 원로지도자들을 모시고 우리를 따뜻이 접견할 때였습니다.” ㅡ 농민당원대표로 제일 큰 “흥분제”와 “안심환”이 대회에서 처음 “향촌진흥전략”을 제기했고 “3농”문제의 해결을 당의 전반 사업의 으뜸위치에 올린것, 제2회 토지도급기한이 만료되면 동 기한을 또 30년을 연장한다는 것입니다. ㅡ제일 확고하고 신심이 있은것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가 륭성해야 국운이 흥하고 문화가 강해져야 민족이 강성해 진다. 문화에 대한 드높은 지신심, 문화의 번영과 흥성을 떠나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이루어 질수 없다”는 습근평총서기의 론설에 비춰 우리촌 당지부에서 제정한 “촌이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촌을 살찌운다.” “문화가 없는 촌은 미래가 없다”는 발전사로가 옳았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새 세대에 더 높이, 더 멀리 내다 보면서 습근평 중국특색사회주의 새 사상을 따라 수남촌 건설의 새로울 려정을 열겠습니다. ㅡ 대회기간에 성당위 책임동지들이 연변대표단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습니다. 장엄서기의 사업터 변동으로 연변대표단(3명)은 모두 조선족기층대표로 특히 모든 언행을 당과 조직에 책임져야 했습니다.   길림성 당위서기 파임초로가 라철룡과 함께19차 전국당대표대회 기념사진을 남겼다. 소수민족의 대표로 옷차림도 결코 개인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번에 한복을 세벌 가졌는데 개막식과 페막식 때 어느 옷을 입으면 좋겠는가를 파음초로서기와  장안순비서장한테  물어보면서 그분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나는 유모아로 길림성대표단 파음초로단장에게 “장엄서기의 사업변동으로 연변대표단이 ‘엄마 없는 대표단’이 되였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면에서 더 주의해야 할가를 지적해 주십시요”라고 하니 단장께서 “라대표가 형식을 버리고 구속이 없이 기층에 존재한 문제를 실제적으로잘 반영했다” “라대표의 발언이 향후의 사업에 참조가치가 크다”며 긍정하였습니다.류국중성장도 “눈여겨 연변대표단을 살폈는데 모두가 습근평동지의 대회보고를 열심히 학습하고 적극적으로 발언 했다”고 표양 하였습니다. 한번은 내가 혼자서 식사를 하는데 파음초로단장이 와서 나의 어깨를 도닥이며 생활에 불편이 없는가고 물었습니다. 또 한번은 나를 찾아와서 “지난 번에는 정장복장을 하지 않아 사진을 못 찍었는데 오늘 함께 사진을 찍읍시다”고 하기에 행복스러운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ㅡ 습근평동지는 “빈곤퇴치난관돌파전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빈곤구제와 함께 빈곤자에게 투지와 지혜를 부여해주는 데 모를 박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빈곤탈출은 “정신빈곤탈출”이 앞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옛날 부모들이 “속담에 가난 구제는 나라(나라님/임금)도 못한다”고 했다며 남의 가난을 돕기란 끝이 없는 일이니 자식들에게 가난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정신을 차리라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빈곤탈출사업은 한 사람의 사업이 아닌 공공사업이며 공동행위입니다. 빈곤에서 탈출하려면 앉아서 누가 도와줄 것만을 바라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여 힘을 합쳐 분투해야 합니다. ㅡ 습근평동지는 “현대화, 세계화, 미래지향적인 중국특색사회주의문화를 발전시켜 사회주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동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수남촌 입구에 "문화가 있는 마을에 미래가 있다"는 유표한 표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남촌의 살아있는 봉오동홍색전적지문화기지를 잘 건설하여 기층 당지부학습기지, 청소년애국교양기지로 할 것입니다. 나는 변강소수민족 집거촌이며 전국선진기층당조직(지부)인 수남촌당지부를 19차 당대표의 사명감으로 민족특색 있는 훌륭한 당지부로 건설하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ㅡ19차 당대회 보고는“부강, 민주, 문명, 조화로운 사회주의현대화강국”의 앞에 특히 “아름다움”을 규정어로 하였습니다. 이는 생태문명건설에 대한 당의 중시를 충분하게 증명합니다. 아름다운 중국, 아름다운 가원건설은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합니다.   수남촌은 물자원과 림자원이 풍부한 촌입니다. "청산록수가 바로 금산은산이다"는 리념을 확고하게 수립, 실천하여 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수남촌을 자손후대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줄 것입니다. ㅡ 모두어 말하면 나는 변강, 소수민족, 기층 당조직의 대표로서 책임이 중하고 사명이 간고합니다. 수남촌의 향후 변화의 여하는 19차 당대표정신의 시달과 체현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러 매체를 통하여 사회 각 분야의 지지와 적극적인 협력을 간절히 부탁합니다. 필자는 이 채록에 비춰 제목식으로 라대표를 소개한다. 수남촌은 ,  “전국선진기층당조직”, 중국전통매력촌, 등 영예로 최근에 년 방문관광객이 5천명을 웃돈다. 수남촌의 초속적인 릉곡지변(陵谷之变)은2010년 라철룡(49세)이 촌세대주를 떠멘 후부터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동네방네 로인들을 찾아 다니며 툰사, 촌사, 독립군의 발자취를 따라 주내외의 많은 곳을 탐방하였다. 일찍 촌 공청단지부서기, 민병련장을 지냈고 기업도 운영하고 외국을 나 들면서 식견을 넓히며 돈을 벌었다.  촌민위원회주임으로 선거 된 첫날 렬사비 앞에서 “선렬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 습니다. 선렬들의 뒤를 이어 기필코 수남촌을 잘살게 건설 할 것입니다”고 맹세했고 민족의 혼을 잊지 않고 혁명선구자들을 기리는 목적으로 마을의 한복판에 이 라는 커다란 석비를 세웠다. 외지사람들에게 양도했던 80헥타르의 밭을 몽땅 회수했고 남방서 해보식용균생산 항목을 유치해 전 성에서 규모가 제일 큰 식용균재배기지를 건설하여 촌효자기업으 로 부상시켰다. 하루에 낡은 집을28채씩 밀어버리는 기백으로 새농촌건설을 다그쳐2011년에 도문시51개 촌에서 새농촌건설속도가 제일 빠른 촌으로 경험을 소개했다.   2014년에 “봉오동반일전투86주년기념 ‘중국 조선족장기 수남초청’ 문화행사를 조직,  2015년에 한국 ”여천 홍범도장군순국 71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에 “봉오동전투전승현장대표”로 초청되여 추모식 추모사를 올렸다. 오기활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도문에서 서북쪽으로 7km쯤 떨어진 수남은 청정자원이 살아숨쉬는 조선족 집성촌이자, ‘봉오동전투’가 치러진 민족항쟁지로 유명한 곳이다. 한때는 인구류동과 같은 시대적 병페를 겪기도 했다. 허나 최근들어 마을재생에서 큰 성과를 거둬 화제로 대두되고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중심에는 마을을 위해 애면글면하는 파수군이 있다. “민속, 관광, 홍색근거지 건설을 접목하면서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미 이룬것보다 해야할 일이 더 많아요.”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라철룡(53세) 촌주임은 겸양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 마을 파수군 라철룡 촌장.   4개 자연툰으로 구성된 수남촌에는 현재 262호 가구가 거주하며 그중 조선족이 98%를 차지한다.   문화재생에서 부활의 '답' 찾다     타지생활에 이미 적응된 라촌장이였지만 고향인 수남촌이 해산위기에 처하면서 결연히 돌아왔다. 그를 맞아준것은 여느 마을들처럼 인구격감, 고령화 등 진통을 겪을대로 겪어, 허름한 초가집과 비포장 흙길로 어수선한 수남이였다.   그는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재생시키기 위한 비책으로 ‘마을 정체성 찾기’가 언급되였고 이는 ‘문화’로 귀결됐다. ‘마을에 문화가 있어야만 미래도 있다’는 리념이 제기된 초기에만 해도 촌민들 대다수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허나 마을면모가 개선되는 등 가시적 변화가 나타나면서 신뢰는 자연히 깊어졌다. 국가급 ‘전통마을’ 보호공정을 신청해 획득한 470만원 자금으로 ‘봉오동항일반일전적지’, ‘마을력사 전시청’, ‘민속마당’ 등 문화교육기지를 조성하는가 하면 루계로 980여만원을 투입해 도로보강, 농가개조, 배수구개조 등 인프라건설을 추진하고 민속문화광장을 건설했다.   알박기(钉子户) 가구들을 설득해 낡은 집 28채를 하루새에 철거하면서 국가로부터 ‘초가집 개조 보조금’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어렵게 마련된 마을 공지(空地)에는 옛 집터들이 년대별로 복원될 예정이다. “민속색채라 하면 한국의 ‘민속촌’을 표방하는게 대다수입니다. 우리 수남에서는 조선 함경북도 건축양식을 토대로 중국의 반지하양식을 결부했습니다.” 하여 한국의 울타리는 키를 넘는데 반해 수남의 담장은 훨씬 낮은 모습이다. 울타리너머로 주고받던 이웃 간의 정(情)도 그렇게 소환되고있다.   장례문화 보존을 위한 공간도 준비중이다. “부모가 돌아가면 가족끼리 모일 명분도 사라지는 요즘에, 우리민족의 전통상여문화가 복원된다면 혈연 간의 소통력이나 응집력도 돈독해질것으로 사료됩니다.”   효자산업으로 마을경제 활력 찾아     2010년만 해도 수남촌에는 ‘집체경제’ 시도가 전무했고 촌민들의 주머니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더이상 고립적인 자급자족식 농업이 통하지 않음을 인지한 라주임은 집체경제를 도모할 아이템으로 식용균 특색산업을 선택, 그 뒷심으로 ‘당지부+단지+기업+농가’ 모식을 제시했다. 그렇게 부지면적이 5만m²에 달하는 산업단지가 형성되였고 현재 52동 비닐하우스가 재배되고있다.   현재 수남촌에서는 20여가구가 민박집을, 4가구가 농가락을 운영하는데 해마다 국내외 관광객 5천여명을 수용하고있다.   잊지 말아야 할 '봉오동전투'     맑은 수면이 고고한 산자락을 비추는 곳- 봉오동저수지는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이 고요한 저수지는 민족 항일의 첫 총성이 울린 곳이기도 하다.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족독립운동대한북로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동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소속부대, 아라요시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이 맹격전에서 일본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하여 수남촌의 력사는 ‘봉오동전투’를 빼면 완전하지 않다.   고려툰(현재의 흥진툰)에는 1932년의 거주상황을 그대로 복원한 옛터가 있다. 전순철, 연희산(연형묵‘조선 정무원 전임 총리’ 부친) 등 세 지하공산당원들의 항일공작이 아찔하게 치러졌던 이 옛터는 후손들에겐 력사교육기지요, 수남인들에겐 중점보호대상이다. 라촌장은 세 항일투사의 력사를 실증하고자 후손들을 배동해 묘지답사를 진행했는데 이 노력은 6년 전을 시작점으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국선진기능당조직, 중국전통촌락, 길림성 ‘아름다운 향촌’ 등 영예를 이미 거머쥔 수남촌이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욕심도 많다.         “수남촌은 민속·홍색 정취가 농후해 이를 잘 활용한다면 관광마을로 충분히 자리잡을수 있습니다.”       이는 라주임의 꿈이자 수남의 꿈이다. 민속, 관광, 홍색근거지, 경제… 굵직굵직한 이 네개 단어는 절묘한 조합을 이루며 수남촌의 새 지평선을 열어가고있다.  
14    '더 높이 서서 더 멀리 내다 보게 되였습니다!' 댓글:  조회:4319  추천:1  2016-07-08
“전국선진기층당조직”ㅡ 수남촌 당지부서기 라철룡인터뷰 7월 5일, 필자는 “중국공산당 창건 95주년 경축대회”에 참가하여 “전국선진기층당조직”의 칭호를 받고 돌아온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당지부서기 라철룡을 이터뷰하였다. “아직도 감격의 심정을 걷잡을 수 없습니다, 무엇부터 말했으면 좋을 가요?”  “습근평총서기가 ‘ 오늘날 세계에서 그 어느 정당,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이 자신감으로 차넘치는가를 말하라면 중국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족이 자신할 리유가 제일 충분하다’고 힘있게 말할 때 당의 전투보루인 당지부서기의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영예롭고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금부터 더 높이 올라서서 더 멀리 내다보면서 당과 인민이 맡겨준 임무를 훌륭히 완성하는 것으로 당의 믿음에 보답 할 것입니다” 아무튼 라철룡은 “순서가 없이…”,  “…이런 말은 쓰지 말며”, “수남촌의 자랑이다”,“… …”를 엇바꾸면서 웃음에 부탁까지 덫칠하면서 자신감으로 넘친 언보(言步)를  바로 하며 필자한테 마음대로  물어 보란다. 중국공산당 창건 95주년 경축대회에서 문; 북경행사는? 답: 중국공산당 창건 95주년 경축문예만회, 당 창건95주년경축대회, 천안문성루 관람, 모주석유용 첨앙, 국가박물관참관으로 이어졌다. 문: 가장 깊은 감수는? 답: 이번의 경축대회는 나라에서 매년 마다하는 로동모범표창대회와는 달리 10년에 한번 조직하는 경축대회로 각급 당조직에서 기층당간부에 베푼 관심과 배례로 감동을 크게 먹었다. 도문시당위 책임자들은 내가 북경으로 갈 때나 돌아올 때에 나를 승용차로 친히 장춘공항까지 바래다 주고 마중을 나왔다. 길림성당위에서 조직한 경축대회에서 나한테 표창장을 발급하던 장엄서기가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으니 도문시 수남촌에서 왔다니 그렇게도 기뻐하며 다시 한번 나의 손을 굳게 잡고 힘있게 흔들면서 고무격려를 하였다. 북경 활동에서 승용차, 좌석, 호텔, 음식상… 의 1호는 거의 모두 내 차례였다. 안내자가 남 먼저 수남촌을 부를 때마다 나는 날개가 달린 듯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나한테 몸에 어떤 병이 있는가를 자세히 묻고 안내원과 의무일군을 배치하였다. 대회장에 들어 가니 아무런 주의사항이나 제한이 없었다. 하여 우리는 마음대로 다니며 구경을 하고 마음대로 다니며 사진을 찍게 하였다. 문: 농촌농민으로 긴장감이 없었는가? 답: 나의 뒤심이 수남촌, 조선민족,조국변강있데 무엇이 두렵고 어째서 긴장해 하겠는가? 나는 당당했다. 내가 만약 농장주나 기타 개인신분이라면 나를 어떻게 표현 할 것인가로 하여 수십 번, 수백 번을 련습을 했겠지만 내가 수남촌당지부를 대표하여 촌에서 해낸 일, 조선민족이 하는 일,조국변강인민들이 하는 일을 말하는데 당당하지 못할 아무런 리유가 없었다. 단 내가 이런 신분으로 하여 나의 한 몸을 잘 지켜야 한다는 준비로 모든 행사 때 번마다 우리 민족복장을 입고 날씨가 아무리 덥더라도 한번도 옷을 벗지 않았다. 나는 수남촌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번 행사를 위챗에 올렸더니 매일 100여명의 위챗벗들이 축하의 메시지를 올렸다. 만약 내가 개인신분이였다면 불가능햇을 것이다. 수남촌의 경사 문: 민족복장은 조직에서  제공했는가? 답; 아니다. 이번 행사을 위해 미루부터 수남촌연출복을 챙겼다. 우리의 연출복은 당기, 국기의 붉은색과 노란색이여서 이번 경축행사에 참 잘 어울렸다.  내가 아름담고 품위 있는 우리 민족의 복장을 입은데서 많은 기자들의 눈도장에 찍혀 주요취재대상으로 선택되였다. 문: 기자들의 취재에 긴장하지 않았는지? 답: 이미 선에서도말 했지만 긴장 할 리유가 없었다. 단 내가 한어수준이 낮고 치아가 치료중이여서 발음이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걱정은 했다. 내가 긴장해 하지 않고 웃으면서 당당하게 대응하니 기자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들어 주었다.천안문성루에서 신화사 기자들이 7, 8가지를 화제로 질문을 하는데 나는 “촌에서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촌을 살 찌운다”는 주제로 우리가 한 일, 지금 하고 있는 전통민속, 관광, 홍색근거지건설에 관한 일,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세계의 흐름에 접목시키면서 답한데서 기자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문: 여러가지 질문에 보희(報喜)만이 아닌 보우(報憂)도 했는가? 답: 나는 수장들이나 기자들의 물음에 “찬송가”도 부르고 “고충가”도 불렀다. 례하면 신화사기자들의 물음에 지금 우리 촌에 빈곤당원들이 많다는것, 촌사업의 제일 큰 문제가 촌민들의 빈곤탈출이라고 밝히면서 이번에 많은 본보기와 전형적인 사적을 배웠다면서, 앞으로의 사업에 방향과 신심을 확고히 했다고 답했다. 문: 이 번 기회의 가장 큰 수확은? 답: 첫째는 우리들의 사업사로가 정확함을 확신했고 사업방향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우리의 사로는 민족의 넋을 살려 전통민속, 관광, 홍색근거지건설을 중심으로 한 수남촌문화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촌에서 민족의 넋과 문화산업을 운운하니 비웃음도 많고 애로도 많았다. 나는 습근평총서기의 중요한 연설을 듣고 우리의 사로가 정확했음을 확신하게 되였다. 둘째는 이번 기회에 한가지 항목의 투자유치를 기본상 성공한 것이다. 문: 당지부서기와 촌민주임을 겸한 촌관(村官)으로 자기를 지키는 자세는? 답: ”인민을 마음속의 최고위치에 놓고 일심정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근본적 취지를 견지하며 인민들이 옹호하는지, 찬성하는지, 기뻐하는지, 허락하는지를 모든 사업의 득실을 가늠하는 근본적 표준으로 삼아  우리 당이 끊임없는 힘의 원천을 지니게 해야 한다”는 습근평총서기의 교시를 향후 사업의 라침판으로 하고 이런 자세로  자기를 지키고 보전 하련다. 첫째는 첫 취임 때 혁명렬사비 앞에서 맹세 한 “선렬들의 피는 헛되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수남촌을 변화시켜 촌민들을 잘살게 하는것으로 희생된 혁명선렬들게 보답하겠습니다!”를 잊지 않고 매일매일을 나의 최초인 날과 최후의 날로 여기고 시종 초심을 잊지 않고 처음처럼 일하겠다. 둘째;는 물욕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으로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청렴한 촌관이 되겠습니다.촌사업을 위하여 대외무역으로 벌었던 수십만원의 사비를 이미 지출하였는데 나는 돈주머니를 풀 때부터 돌려 받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부동심을 가지면 련꽃마냥 진탕속에서 살아도 절대 오염되지 않는다. 셋째는 상생(相生), 공존공생(共存共生)을 원칙으로 촌민을 사랑하는 청백리(淸白吏)로 되련다.이런 마음 가짐으로“수남촌골격”을 튼실히 하여 후세 사람들게 이어 줄 “계주봉” 마련에 열성을 다할 것이다. 인터뷰는 빈번한 손전화로 하여 차려놓은 밥상까지 멀리하고 요행 마무리를 했다.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은 자기 보전이다 필자는 라철룡서기의 초심, 부동심, 청백리 “3총사”가 수남촌당지부를 “전국선진기층당조직”으로 부상시킨 정신력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강한 장수에게 약한 병사가 없다”니 말이다. 오기활  
13    凤梧水库 댓글:  조회:4114  추천:0  2015-03-20
2015-03-19图们宣传     水是生命之源、生产之要、生态之基,联合国确定2015“世界水日”的宣传主题是“水与可持续发展”,我国纪念2015年“世界水日”和“中国水周”活动的宣传主题为“节约水资源,保障水安全”。“世界水日”和“中国水周”临近,让我们一起来共同了解一下我们图们的水源地。     地处图们市城西北12公里处,有一座雄伟壮观的水库,这就是图们市水源地、风景浏览地——凤梧水库。     凤梧水库建在两个山的中间,从东北方凤梧洞沟里流来的水在这里汇聚成湖,湖水清冽碧透,山水相映,风景格外秀丽。登山俯视,平静的湖水如明镜,似碧玉,镶嵌在峡谷之中。远望绿色绵亘的山岭郁郁葱葱。这里可谓山美水秀,所以每当春夏之季,到这来旅游的人络绎不绝。    
12    '수남촌 전통마을보호와 발전연구토론회' 석현진서 댓글:  조회:3616  추천:1  2015-01-30
'수남촌 전통마을보호와 발전연구토론회'가 석현진에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1월28일 10시15분    조회:261 중국 전통마을인 (이하 연초회로 략함)가1월 25일 도문시석현진에서 소집되였다.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은 지난해에 국가도시농촌주택건설부, 문화부, 문물국, 재정부, 국토자원부, 농업부, 관광국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제3기 중국전통마을 명부에 (994개)오른 마을로 이 명부에 오른 조선족마을은 전국적에서 도문시월청진 백룡촌과 도문시 석현진수남촌뿐이다. 에서 길림성건설청, 길림성규획설계원의 해당책임자가 전통마을보호관련정책과 전통마을보호규획편제요구를 설명하였다. 길림성주택거설청촌진처(村鎭處)안굉처장은 조선족전통마을을 개발하고 보호하고 리용하는 사업의 중요성에 비춰 수남촌에서 1896년부터 1936년 사이에 존재하였던 고촌락(일명 청개지) 복구사업을 생태화에 립각하여 기초를 잘 닦고 착실하게 규획할것을 요구, 길림성도시농촌규획설게원 신시흥소장이 새농촌건설과 전통건축보호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잘 처리해야 함을 언급하면서 력사문화는 보호를 위주로 하고 전통문화는 가이 발전시키고 발양시킬수 있다며 전통마을의 보호 및 발전에서 로일대들의 전통문화지식과 전통공예를 충분히 발굴할것을 요구하였다. 에서 림창춘(원연변박물관관장), 리성비(연변민간 문예가협회 주석),김철수(원연변박물관 민족사교수), 림금화(연변대학건축학계교수)등 전문가들이 150년 수남촌의 력사에서 중국조선족의 월강(이민)문화, 상업문화,술문화,교통문화,홍색문화를 종합적으로 볼수있고 특히조선의 함경북도를 기초로 한 건축문화는 남북조선에서도 볼수 없는 자지방의 특색을 갖고 있다며 수남촌에서 민속촌건설이 아닌 150년전의 고촌락(古村落)을 제자리에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이민력사에 매우 중요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에서 도문시정부 상무부시장 로작맹이 중국전통마을 보호발전사업은 정부의 주도역할, 촌의 주체역할, 전무가들의 지도역할, 각부문의 협조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수남촌을 길림성의 본보기촌으로 건설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표시하였다 이날 를 전후하여 회의 참가자들이 수남촌의 자연마을인 토성리와 흥진마을(원고려툰)을 답사하였다. 길림신문 오기활기자
11    매력촌-수남촌 댓글:  조회:15305  추천:2  2015-01-22
10    한국서 수남촌 홍보에 나선 촌주임 댓글:  조회:2719  추천:0  2015-01-20
한국 여천 홍범도장군 순국 71돐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올리는 라철룡   10월 29일,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촌민들은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한국 여천 홍범도장군 순국 71돐 추모식에 참가하는 기회를 빌어 수남촌을 홍보한 라철룡촌주임을 환영하는 축하파티를 열었다. 수남촌은 조선북로독군부의 근거지이고 조선북로독군부 최진동부장의 거주지이자 1920년 6월 7일 봉오동반일전투 전승현장지이기도 하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장군의 유격전술과 최진동부장의 물자지원, 안무 국민군의 헌신적인 협조로 이루어낸 조선반일독립전쟁 사상 길이 빛나는 첫 반일전투이다. 라철룡은 어려서부터 옛말과 력사이야기에 심취되여 동네방네 로인들과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봉오동전투와 동네 력사를 조사하면서 민간력사학자의 꿈을 품고있었다. 지난 6월 수남촌에서는 봉오동반일전투 86주년을 기념하며 홍범도, 최진동 등 반일명장들의 업적을 기리는 문화행사로 《중국 조선장기 수남촌 초청 한마당》을 조직하였다. 2005년에 창립된 한국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위원회는 최근에 우리 민족의 유구한 지역력사와 혁명렬사들의 혼을 지키고 이어가는 수남촌의 현황을 알고 《여천 홍범도장군 순국 71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에 라철룡촌주임을 초청하고 추모사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10월 4일 라철룡은 《봉오동반일전투전적지》기념비 답사일행을 안내하다 왼쪽 하퇴골이 절골되는 불행을 안게 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철룡은 수남촌을 홍보하기 위해 10월 24일 한국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에서 있은 홍범도장군 추모식에 참가했다. 라철룡은 《수남촌은 조선북로독군부의 근거지일뿐아니라 최진동장군의 거주지이며 항일투쟁력사에 찬연히 빛나는 봉오동전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어린시절부터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선렬들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봉오동전투에 대한 력사를 알리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수남촌의 한복판에는 조선어로 된 이라고 쓴 커다란 석비가 있습니다. 석비는 4년전에 저희가 촌주임으로 선거된후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혁명선렬들의 정신을 마을의 정신으로 살리기 위해 세운것입니다》고 했다. 라철룡은 《혁명선렬들의 숭고한 뜻을 후대에 길이 알리고저 수남촌에 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를 비롯한 항일투쟁기념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이 자리를 함께 하신 모든분들이 힘을 합쳐 우리 민족의 자랑찬 력사와 문화를 지키는 일에 함께 할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며 앞으로의 타산을 말했다. 라철룡이 돌아오는 날 정금자할머니를 비롯한 촌민들은 한국에서 수남촌을 홍보한 라촌주임에게 생화를 안겨준다며 자발적으로 모금하는 등 온 수남촌이 떠들썩했다. 한편 연변로과학가협회 김한덕고급농예사는 수남촌을 홍색촌으로 부상시켜야 한다면서 자기가 개발하는 모든 상품을 《봉오》표로 한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오기활 기자 길림신문 2014-11-04
9    중국 봉오동과 한국 봉좌마을 '결혼식' 중국 도문서 댓글:  조회:3545  추천:0  2014-12-29
결연서에 서명하는 박룡해(왼쪽)대표와 라철룡촌장   봉황으로 인연을 맺은 중국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원 봉오동촌)과 한국 경상북도 포항시 봉좌마을간의 이 지난 12월 20일 수남촌에서 진행되였다. 라철룡촌장(수남촌)과 박룡해(봉좌마을)대표리사가 서명한 결연서는 는 내용이 담겨있다. 뜻 깊은 이 을 맞게 된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봉황이 내려앉았다고 하여 봉좌(鳳座)산이라 이름을 단 봉좌산기슭에 자리잡은 봉좌마을은 지난세기 70년대 한국 농촌의 발전을 주도한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로 박정희정부가  을 기본정신으로 국가발전은 촉진하기  위하여 추진한 범 국민적, 범국가적 새마을 운동의 근거지이다. 오동나무가 무성하여 봉황이 깃들었다고 하여 새봉(鳳)자에 오동나무 오(梧)자를 붙여 봉오동이라 불린 원 봉오동촌(현 수남촌)은 중국 땅에서 조선(한국)독립군이 처음 반일의 총소리를 울린 의 전적지이며 연변의 , 국가에서 명명한 이다. 한국에서 수남촌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0월 24일 한국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여천 홍범도장군 순국 71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에서 라철룡촌장을 봉오동전투 전승현장을 지키고 있는 지역대표로 초청하여 추모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한국서 십수년간 봉좌마을의 새마을 운동을 리더하던 대구과학대학교 김석종장은 올해에 중국에 왔다가 중국땅에 봉황과 인연이 있는 마을을 찾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도문의 봉오동을 발견하고 여천홍범도장군순국71주기 추모식을 계기로 수남촌의 력사와 현황을 더욱 잘 알게 되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기뻐하던 김총장은 봉좌마을과 봉오동의 을 목적으로 지난 11월 17일에 십수년간 수집하고 정리 편집한 봉좌마을 자료와 새마을운동 영상재료를 가지고 수남촌에 와서 촌민들게 전수하면서 한. 중 두나라 봉황의 청혼과 오동나무접목을 청구하였다. 김석종총장과 연변과기대 곽승지교수(한국인)의 몇 달간의 꾸준한 노력과 수남촌의 협력으로 이날 중.한 봉황의 식이 있게까지 되였다. 이날 식은 수남촌의 부녀연출대의 경쾌한 온돌연출로 막을 내렸다. 이날 식에 먼저 한국 봉좌마을에서 온 임원들이 봉오동빈일전적지기념비, 수남촌을 소개하는 도편전람을 돌아보았다. 오기활 기자
8    图们白龙村、水南村入选第三批中国传统村落 댓글:  조회:3227  추천:0  2014-12-18
【文化图们】我市白龙村、水南村入选第三批中国传统村落 2014-12-08 图们宣传   日前,经传统保护村落发展专家委员会评审认定,国家财政部等多个部门联合公布第三批中国传统村落名录,我市的月晴镇白龙村、石岘镇水南村榜上有名。   省文联副主席曹保明(左一)在市委书记金基德(右一)陪同下调研我市传统村落保护工作   传统村落承载着中华传统文化的精华,是农耕文明不可再生的文化遗产。中共图们市委宣传部、图们市文联,结合我市深入挖掘和弘扬“图们江文化”工作,努力推动传统村落保护工作,切实推进传承村落健康向上的乡风民俗,保护村落优秀的传统文化工作进程,积极做好“中国传统村落”申报工作。年初以来,多次邀请传统保护村落发展专家、省文联副主席曹保明来图进行实地考察、指导传统村落保护和申报工作,会同省文联相关专家学者对申报村屯进行传统文化的普查建档与整理编辑等工作,成功完成了申报工作。这次公布的第三批994个传统落村中,我省共有4个村落跻身其中,而我市就独占两元。   中国传统村落名录既是对村落历史文化价值的认定,也是一个保护名单。据了解,未来3年,中央财政将投入超过100亿元,编制保护发展规划,探索修复,保护文化遗产,从而推动传统村落保护。 月晴镇白龙村 (图2~8)     石岘镇水南村(图 9~14)   도문 선전부 제공  
7    초모정자 댓글:  조회:2597  추천:0  2014-12-11
초모정자는 해발 556메터를 헤아리는 산인데 민간에서는 이 산이 초모자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초모정자(草帽頂子)라고 부른다. 우리 독립군부대와 항일의 피어린 이야기가 서려있는 초모정자, 봉오골 북쪽가 산등성이를 따라 이 초모정자쪽으로 움직이는 일행은 신나기만 했다. 송이님이 '항일빨찌산이 왜놈치러 간다'고 소리를 높이니 일행은 진짜배기 항일빨찌산과 진배 없다. 항일전가와 씩씩한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노래 속에 도취된 이들은 뿌리님, 수정님, 송이님 등이었다. 어느덧 초모정자 정상과 이어진 북쪽가 산능선이다. 일행은 산능선 송전탑 밑에서 잠간 다리쉼을 하고는 정상과의 돌파전을 벌리었다. 오불꼬불 오솔길이 정상으로 이어진데다가 완만한 경사지대어서 그다지 힘에 부치지가 않았다. 정상중턱에 오르니 벌써부터 사방이 발아래 펼쳐진다. 선뜻 시선에 잡혀오는 것은 초모정자 서남쪽 산야이다. 봉오저수지와 북쪽 석현일대를 가늠할 때 그 안쪽에 끼인 산들은 남으로 흐르는 가야하와 봉오저수지에 쌓여 반원모양의 거대한 섬으로 안겨드는데 그사이 산들은 동서로 두 갈래 산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남쪽의 산야 또한 가관이다. 이 지대는 도문의 북쪽—후안산 골인데 전일 산악회 일행이 올랐던 고려령과 북쪽으로 후안산골짜기가 한눈에 보인다. 봉오골과 후안산골사이에 동서로 앉은 산이 가로 막히여 후안산골은 도중에 동북쪽으로 곬을 사리여 봉오동 상촌쪽으로 이어간다. 후안산골은 남봉오동이라고 부를 때 봉오골을 북봉오동으로 부르니 후안산골과 봉오골은 명실공히 산 하나를 사이두고 하나로 이어진 통합체가 아닐 수 없다. 4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시선 속에 발아래 펼쳐지는 것이 좋았다. 목장님, 심진님과 더불어 선참 초모정자 정상에 오르니 기분이 한결 좋았다. 봉오골치기—그젯날 봉오동전투의 역사현장이 동쪽 저 멀리에서 시야에 밟혀오면서 20여 리 동서 봉오골 전체가 바로 가까이서 보이는 듯하다. 어언 몇 해만이더냐, 봉오동전적지를 답사할 때가 1991년이니 옹근 15년이 흘렀다는 말이 된다. 15년 세월이 흐른 후 초모정자 정상에서 다시 봉오동상촌을 굽어보니 정녕 꿈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저런 치기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지휘한 우리 독립군부대들이 1920년 6월 7일, 유인 속에 든 일제침략자 100여 명을 일거에 쓰러눕혔으니 그날의 그 멸적의 함성이 귀전에 들리는 듯싶다. 또, 봉오동 상촌이 삼개골이기도 하여 북으로 뻗으며 왕청현 소왕청근거지의 마반산과 이어진 북쪽골이며 저 멀리 마반산, 산너머 석현 쪽으로 이어진 서쪽골짜기, 동쪽으로 산너머 훈춘 쪽으로 빠지는 비파골이 연이어 안겨든다. 봉오동과 그 일대가 발아래 환히 보이는, 초모정자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기꺼운 정경이다. 역사 속에 빠져 버린 심진님과 필자는 기분이 둥둥 떠서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하나둘 전부가 정상에 올랐다. 나중에 수정님이 정상에 다가섰는데 요즘 연일 도서들을 점고한다는 이 연변도서관일군은 얼굴에 피로가 그대로 비껴올랐다. 때는 오전 11시 반으로서 봉오동 어구에서 정상까지 옹근 두 시간을 걸은 뒤었다. 잇따라 정상부에서의 간소한 간식모임이 펼쳐지고 목장님, 송이님, 필자는 목장님이 지닌 약주를 굽을 냈다. 이 같이 기분 좋은 날에 술 한잔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일행이 정상에서 휴식할 때 필자와 심진님은 정상 동쪽가에 솟은 바위봉우리에 올라 주위를 다시 일별했다. 봉오동 상촌과 상촌서 뻗은 삼개골을 다시다시 확인하노라니 그리도 기쁠 수가 없다. 바위로 치솟은 좁은 공간을 따라 20~30미터를 나아가는 기분도 좋았다. 정상에서의 반 시간이 잠깐 사이에 흘러갔다. 일행이 남쪽의 후안산골 쪽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후 필자는 봉오골 20여리와 봉오동 상촌 전투현장, 후안산과 고려봉을 두고 간단한 소개를 올리여 봉오골과 초모정자, 이곳 일대는 항일의 이야기 비껴담은 유서 깊은 고장임을 환기시키었다. 그리곤 유유히 초모정자산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정오 12시 시점. 생각 밖으로 서북쪽 석현까지 산길이 이어진데서 석현의 동쪽구간까지 이르는데 4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봉오동어구에서 초모정자까지, 초모정자에서 석현까지 산행길을 잡으니 봉오동과 그 주변일대의 역사와 지리가 서서히 드러났다. 근 세 시간에 걸치는 산행, 초모정자에 올라 봉오골 굽어보는 시각시각은 빨리도 흘러갔다.    
6    “제1회전국조선족장기포럼” 도문서 댓글:  조회:2119  추천:0  2014-12-05
국가민위, 국가체육총국 관련자 출석 료녕팀 단체 2등, 개인3등 쟁취   “제1회 조선족장기포럼 및 장기대회”가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에서 있었다. 행사에는 국가민위, 국가체육총국, 연변주체육총국, 도문시 관련 책임자들과 료녕성, 흑룡강성, 연변 등지의 12개 대표팀 선수들 도합 100여명이 참가했다. 행사는 연변주체육총국이 주최하고 중국조선장기련합회(주비회)와 도문시 문광신국(文廣新局)이 주관했으며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이 후원했다.   이번 행사는 국내 조선족장기력사상 격이 가장 높은 대회로 국가민위, 국가채육총국 관련 책임자들이 직접 개막식에 참가하고 연변주 및 도문시정부 관련기관에서 고도의 중시를 돌려 조선족장기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지도를 보여주었다.    또 사상 처음으로 조선족장기 관련 포럼을 진행하여 조선족장기의 력사를 돌이켜보고 현존하는 문제들을 짚어보았으며 미래비전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포럼에서는 특히 북경지역과 조선족의 대이동으로 새로운 조선족집거지로 떠오르고있는 청도, 상해, 광주 등 지역에서 아직 조선족장기가 활성화되지 못하고있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활성화방안을 모색했다.   수남촌 문화광장에서 진행된 장기대회에서는 치렬한 격전끝에 연변3부락구락부, 료녕대표팀, 룡정대표팀이 각각 단체 1, 2, 3등을 했고 김광명(연길), 안룡일(룡정), 박광파(료녕) 등이 각각 개인 1, 2, 3등을 쟁취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수남촌에서는 2만원짜리 연변황소를 잡고 촌민 전체가 후근사업에 떨쳐나섰으며 15만원어치의 후원을 했다. 개막식에는 도문시예술단의 축하공연이 있었고 페막식에서는 연변가무단의 공연이 진행되였으며 행사기간 저녁마다 문화광장에서 우등불야회가 개최되였다. 또 경기에 앞서 도문지역 력사문물들을 돌아보는 관광코스도 마련되여 참가자들의 심신을 흐뭇하게 했다.    이번 행사는 3가지 특징을 보여주었다. 첫째, 그동안 정부의 외면을 받고 세간의 기시를 받던 우리 민속장기가 정부차원의 확실한 중시와 지지를 쟁취했다. 둘째, 처음으로 민속장기 관련 포럼을 개최하여 조선족장기의 맥을 짚어보았다. 셋째, 민속장기시합에 민속공연, 관광, 우등불놀이, 전통음식 등 문화요소를 가미하여 민족문화색채가 보다 농후했다.     중국조선장기련합회(주비회) 정건화회장은 “우리 민속장기를 사랑하는 장기인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민속문화의 발전을 중시하는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수남촌 촌장을 비롯한 촌민들의 지지가 이번 대회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면서 조선족장기발전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다졌다.    수남촌 라철룡(49)촌장은 “조선족장기는 씨름, 그네, 널뛰기 등 여러가지 민속운동 가운데서 유일하게 평소에도 진행되는 민속놀이”라면서 “이같은 행사를 계속 후원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조선족장기는 길림성무형문화재로 등재되였으며 료녕성에서는 심양시무형문화재 등재를 신청한 상태다. 료녕신문 김룡호기자
5    수남촌이 만든 문화, 문화가 살찌운 수남촌 댓글:  조회:2487  추천:1  2014-12-01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문화촌건설로 《수남꿈》 키운다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은 수남을 몸체로 토성리, 신선툰, 흥진툰(지난 60년대 고려툰) 등 네개 툰이 합쳐진 행정촌이다. 2011년 수남촌은 도문시 51개 촌에서 새농촌건설년속(年速)이 제일 빠른 촌으로 경험이 전 시에 소개되였다. 수남촌의 초속적인 릉곡지변(陵谷之变)은 올해 49세인 라철룡이 2010년에 촌세대주를 떠멘후부터다. 라철룡은 《변해야 산다》, 《마음먹고 하면 된다》를 좌우명으로 《새 농민이 새농촌을 건설한다》는 개척형리더(지도자)로, 《되면 한다》는 팔로워(따르는자)들의 튼실한 뒤받침에 4년간에 주거문화, 환경문화, 조경(造景)문화, 문체문화, 선동문화 등등의 복합적이고 대중적인 문화건설로 수남촌을 살지우며 릉곡지변의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23일-24일 이틀간 기자는 수남촌 라철룡촌민위원회주임과 김진섭(65)당지부서기를 인터뷰하였다. 라철룡은 수남의 어제, 오늘, 래일 순으로 4년간의 사업과 앞으로 해내야 할 《수남꿈》의 설계도를 펼쳐보였다. 《수남의 어제는 자랑찹니다》 수남촌은 민족항쟁의 터전으로 반일의 기발이 펄럭이던 곳이다. 수남촌은 봉오동전투의 최진동(일명 최명록) 부장의 본거지고 군무도독부의 근거지며 홍범도, 오중화 등 항일투사들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찍힌 곳이다. 수남촌의 40여명 혁명투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해남도까지 주름잡으며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1927년 4월 오중화(吳仲和)는 남봉오동(지금의 흥진)에 도문지구의 첫 공산주의단체(조선공산당지부)를 설립, 1930년 7월에 남봉오동의 8명 조선족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고려툰지부를 설립하였다. 조선의 연형묵총리도 소시때에 수남(고려툰)에서 지냈다. 수남촌에는 일찍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있어 문화교육이 발전되였으며 도문시시민들의 음료수의 수원도 수남이여서 수남은 사람 좋고 풍치  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높다 《그래서 수남의 어제는 자랑찹니다.》 수남의 어제를 그리며 자긍하는 라철룡촌주임의 벅찬 말이다. 《수남의 오늘은 에 처했었습니다》 나라의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은 수남의 문전옥토를 더는 농사짓는 땅으로 버텨내지 못하게 했다. 연변변전소, 도문–석현도로확장, 도문경제개발구, 길림–훈춘고속철도 등 나라와 지방의 경제건설발전은 대면적의 수남땅을 징용하다 보니 지금 농민들에게 겨우 남은 땅이란 인당 수백평도 안되는 메마른 한전과 밀려난 자투리수전뿐이다. 수남촌은 2005년까지만 해도 경작지가 200헥타르, 4개 자연툰, 8개의 촌민소조, 403세대에 1205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원주민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 지금은 200여세대에 7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수남은 원주민들의 대량적인 천출로 그 자리를 메운 외지민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마을은 너절한 쓰레기무지와 썩은 악취로 꼴불견이였다 《땅의 주인이 농민인데 그래 땅이 없는 농민이 무슨 신세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취임식에서 수남의 오늘이 에 처했다고 말했습니다.》 《수남의 래일은 밝기만 합니다》 한 리더의 리더십(지도자의 능력)은 팔로워(따르는 사람, 팬)가 호흡을 같이하며 함께 달릴 때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완성된다. 수남촌의 실천이 이를 증명한다. 수남촌의 초속적인 변화발전과 문화촌건설은 10여년간 외국나들이와 도시생활을 하던 라철룡이 촌세대주를 맡은후 《하면 된다》며 귀향하여 집터를 수남에 잡은 때부터 시작하여 당년의 도문시모범대장 김진섭이 18년간 도시생활을 하다가 귀향하여 당지부서기를 맡으면서 촌민들이 더더욱 신심을 얻고 《되면 한다》며 뒤따른데서, 게다가 당지부서기와 촌민위원회주임이 모두 《독서삼매》로 불리는 문화인이기때문이라고 필자는 진맥한다. 항상 독서를 즐기는 라철룡촌주임 아래는 라철룡이 말하는 《예술작품》이다. -4년간에 주거환경을 철저히 개변시켰다. 80여호 문화주택을 새로 짓고 50대의 태양에네르기가로등을 설치하였다. -세멘트촌도를 7킬로메터 닦고 악취가 풍기던 물도랑을 깨끗하게 쳐냈다. 길 량옆에 화단을 만들고 마을을 공원처럼 꾸몄다. -6000여그루의 관상용나무를 마을곳곳에 심고 하루건너 길청소를, 일주일에 한번씩 마을대청소를 견지했다. 공원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수남촌 마을정경 -아름답고 다채로운 풍경화와 《문화가 있는 촌 미래가 온다》, 《새농민, 새농촌, 새마을, 새생활》, 《수남아, 한생을 너와 함께 살리라》, 《정다운 내 고향 울긋불긋 꽃피는 고향 수남엔 언제나 동년의 꿈이 묻혀있단다》 등등의 여러가지 다정다감하고 선동력이 있는 아름다운 글귀로 마을을 장식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깨끗하고 거뜬하게 《샤워》시켰다. -주식제(股分制)촌급경제로 전 성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시장전망이 좋은 강원식용균기지, 연변해보식용균전업합작사, 블랙초코베리(黑果)와 60헥타르에 관상나무묘포장을 새로 꾸렸다. 차수버섯판매정황을 알아보는 라철룡주임과 김진섭서기(오른쪽) 김서기와 라주임의 머리속에는 앞으로의 사로 (思路)와 당금 해야 할 일들로 꽉 차있었다. -관개용수, 공업용수, 관광양어를 대상한 풍치가 아름다운 저수공사(이미 착공)를 적극 추진한다. -룡두산을 시작으로 룡두산–초모정자–봉오동 관광등산코스와 룡두산–고려툰 문화유적관광체험코스 및 영사마을(影攝)건설을 추진한다. ... 총적으로 《수남을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있는 관광촌, 민속촌, 휴가촌, 체험촌, 문화촌으로 건설한다》는 라주임과 김서기를 따라 현지답사를 하던 필자는 그만 자동차바퀴고장으로 오르던 산길을 멈췄다. 문화촌건설은 수남촌을 이렇게 살지웠다 -외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는 다시 안 간다. 2년 사이에 귀향한 원주민이 20여명, 15세대가 새집을 지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나서기에 마을에 전형인물이 따로 없다. 문화광장에 채색벽돌을 펼 때 남들은 기술자를 청해 했다는데 수남은 남녀로소 50여명이 동원되여 돈을 안 썼다. 일이 끝나자 세명의 로인들이 지쳐서 자리에 눕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의 인품이 후해지고 마을에 도적이 없어졌다.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서로서로 나누는 후한 촌인심 서로간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서로간 나눠먹는데 곁집에 집주인이 없으면 음식보자기를 문고리에 걸어놓거나 문앞에 놓고간다. 그리고 도적이 없다보니 문을 잠그던 습관이 없어졌다. -올해의 인당 수입을 지난해의 8000원에서(외국로무수입을 포함) 만원 이상으로 내다본다. 광주에서 사업하는 허성춘(수남촌의 원주민)이 올봄에 고향에 와보고 감동된 나머지 《수남》이라는 글자를 박은 모자와 운동복, 북춤복, 무용복을 선물하였다. -도문시민정국에서 촌문화회관의 내부장식을 담당한외 로인주간돌봄중심의 명목으로 랭장고, 전기밥가마, 옷장, 사발, 접시 등 가정용기와 북 20개, 새장구 4개, 북춤옷 20벌, 남녀한복 30벌을 기증하였다. -지금 촌에는 문구협회, 서법협회 등 협회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수남촌문구팀이 진은 물론 시대회에서 1, 2 등을 따냈다. -당지부활동이 활발하다. 수남촌에 상주당원이 15명(예비당원 2명), 입당청원서를 당지부에 바친 당학습열성자가 3명으로 늘어났다. -올해에 수남촌이 길림성새농촌건설시범촌, 길림성문화청, 연길담배공장, 시당위조직, 리경호주장의 련계촌으로 되였다. ... 수남촌 촌민들의 흥겨운 문화생활 사업노하우가 무엇인가는 물음에 라철룡촌주임이 별것이 따로 없다며 부언했다. -촌사업에 비밀이 없고 모든 일은 집체로 토론하고 토론결의와 집행정황을 제때에 보관서류로 작성하니 촌민들이 믿음으로 합심하여 잘 따라준다. -해당 부문에서 투자하는 자금으로 그 자금의 곱절이상 되는 일을 해내니 상급부문의 부축신심을 가해준다. 실례로 정자를 지을 때 주정협에서 3만원을 투자했는데 촌에서 8만원 이상에 달하는 일을 해 투자돈을 빛나게 했다. 《촌민들의 믿음과 상급의 신임에서 바쁜줄도 모르고 뛰고 또 뛰지요!》 수남촌이야말로 삶의 숨결이 싱싱한 수남촌이다. 수남촌에 문화로 촌을 살을 지우는 《하면 된다》는 개척형 리더와 《되면 한다》는 열정적 팔로워가 있기에 수남촌의 래일은 더욱 휘황할것이다. 사진 글/ 오기활기자 2013-3-27
4    수남촌 빈집 두고 새 정책 출범 댓글:  조회:2498  추천:2  2014-11-25
수남촌 빈집 두고 새 정책 출범   지금 인구의 대류동으로 인해 많은 농촌마을에 주인이 없이 방치된 빈집들이 많다. 특히 나라의 새농촌건설지원혜택으로 많은 리향민들이 자기의 고향마을에 새집을 지어놓고도 돌아오지 않은데서 새집들이 수풀속에 처량하게 서있다. 이는 농촌형상을 흐리운다.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도 례외가 아니다. 수남촌에서는 지난해 11월에 《수남촌 가옥매매, 가옥임대, 집기지사용권에 관한 규정》(12조)을 내놓은 토대우에서 1년간의 전면 조사와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올해에 세가지 《결정》제정하여 지난해의 《12조규정》을 완벽화하였다.. 첫째,당의 새농촌건설의 우대정책으로 새집을 짓고 지금까지 4,5년간 주인이 없는  빈집들을 국가의 주택건설지원자금외 개인이 지출한 건축자금의 곱절가격으로 촌에서 사들인다. 촌에서는 사들인 집을 수남촌에 와서 수남촌건설에 적극 동참하고 기여하려는 사람들에게 양도, 임대한다. 둘째, 2, 3년사이에 돌아올수 없을 경우 집주인은 매년 2000원씩 관리비를 촌에 납부하여야 한다. 이 항목으로 수금한 금액을 촌에서 전문 빈집관리에 통일적으로 사용한다. 셋째, 촌에서는 빈집들을 10년을 기한으로 임대할수 있다. 임대한 집들을 촌에서 투자하여 통일적으로 장식한후 외지 사람들에게 《별장》으로 임대할수 있다. 지금 수남촌에는 상기 범위에 해당되는 집들이 20여채가 있는데 촌에서는 《규정》과 《결정》에 따라 지난 9월에 촌건설을 도우려는 외지의 고급농예사 1명을 수남촌에 입주시켰다. 그리고 현재 입주하려는 대상에 대해서는 고찰중이다. 석현진 김휘진장은 수남촌의 사업회보를 청취한후 《촌에서 별장주택(생태체험)을 제공하면 진정부에서 매 주택마다에 비닐박막하우스를 무상으로 건설해주겠다.》고 표하였다. 방치된 빈집들을 관리리용하는 수남촌의 작법을 새농촌건설의 일환과 새로운 발상으로 추전하니 기타 촌들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길림신문/ 오기활  
3    봉오동반일전투전적지 - 수남촌 자랑 대잔치 댓글:  조회:2534  추천:1  2014-11-20
봉오동반일전투전적지 -  수남촌 자랑 대잔치 1, 여천홍범도장군 순국 71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올리는 라철룡   10월 29일,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촌민들은 자발적인 모금으로 한국 여천 홍범도장군순국 71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라철룡촌장을 환영하는 축하파티를 마련하였다.   째진 구두를 신고 서울에 간 사나이 수남촌은 대한북로독군부의 본거지(근거지), 대한북로독군부 최진동부장의 거주지, 1920년 6월 7일 봉오동반일전투 전승현장지이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장군의 유격전술과 최진동부장의 물자지원, 안무 국민군의 헌신적인 협조로 뭉쳐서 이루어낸 대한(조선)반일독립전쟁사상 길이 빛나는 첫 반일전투다. 라철룡은 어려서부터 옛말과 력사이야기에 심취되여 동네방네의 로인들과 지정인(知情人)들을 찾아 다니며 봉오동전투와 동네력사를 조사하면서 민간력사학자의 꿈을 품고 지금까지 지정인들을 찾아 다니며 보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다.   지난 6월 수남촌에서는 봉오동반일전투 86주년을 기념하며 홍범도, 최진동 등 반일명장들의 업적을 기리는 문화행사로 “중국 조선장기 수남촌초청한마당”을 조직하였다. 2005년에 창립된 한국 (사단법법인)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최근에 우리 민족의 유구한 지역력사와 혁명렬사들의 혼을 지키고 이어가는 수남촌의 현황을 알고 (10월 24일-27일)에 지금까지 봉오동전투 전승현장을 튼튼히 지키고 있는 라철룡촌장을 초청하고 그에게 봉오동전투전승현장대표한 추모사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  10월 4일 라철룡은 기념비를 답사하는 일행을 안내하다가 왼쪽 하퇴골(下腿骨)이 두 곳이나 절골된 불행을 당하였다. 불시에 닥친 사고로 하여 촌민들은 라촌장의 서울회의 참가 여부를 걱정하였다. 허나 워낙 주장을 세우면 포기할줄 모르는 라촌장은 수남을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인 서울행을 포기할수가 없었다. 촌의 홍보를 위해 길림신문사 연변지사에 청탁하여 떠나는 날 아침 8시까지 3일간 사이에 라는 표지의 근사한 수남촌카다록을 챙기면서 말이다.  왼쪽발이 둥둥 부은 탓으로 신을 신을 신을수 없자 새로산 가죽구두를 가위로 째서 넓혀서 겨우내 신고 쌍짚팡이를 짚고 외다리 걸음으로 길을 떠났다. 파격적인 박수갈채 이번 회의 조직측에서는 라철룡촌장에게 처음에는 23분간의 축사를, 다시 5분간의 추모사로 부탁하였다. 라철룡은 알심들여 준비한 발언고를 촌민위원회에서 엄숙히 심열, 통과하였다. 10월 24일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강당에서 올린 라철룡의  추모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ㅡ 홍범도장군 순직 71주년을 맞아 홍범도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당 추모식에서 수남촌 촌민을 대표한 추모의 말씀을 올리게 되여 가슴벅찬 감회를 느낌니다.  봉오동반일전투기념비를 찾은 한국 강원도대관령원로대표들     - 수남촌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조선)북로독군부의 근거지일 뿐 아니라 이 부대를 이끈 최진동장군의 거주지이며 항일투쟁력사에 찬연히 빛나는 봉오동대첩의 현장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마을의 로인들로부터 봉오동전투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선렬들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봉오동전퉁에 대한 력사를 알리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 우리는 탁상공론을 하지 않습니다. 수남의 한 복판에는 조선어(한글)로 “넋”이라고 쓴 커다란 석비가 있습니다. 이 석비는 4년 전 제가 촌장으로 선거된후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혁명선렬들의 정신을 마을의 정신으로 살리기 위해 세운것입니다. 우리는 선렬들의 혁명정신을 받들기 위해 “중국 조선족력사, 문화 발굴, 계승추진위원회”를 설립하 고 갖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사업의 하나가 수남촌에 여천 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를 비롯한 반일 및 항일투쟁기념관을 건립하는것입니다. - 기념관건립을 준비하던중 서울에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여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는 진정 기뻤습니다… 홍범도장군께서느 “왜놈을 물리치는 군대는 다 우리 편이다”고 늘 말씀하였다고 하는데 현 시점에서 홍범도장군의 넋을 기리며 그 정신을 받들려는 일은 수남촌이든 서울이든, 그리고 어디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념관을 건립하는 리유의 첫째는 혁명선렬들의 숭고한 뜻을 후대에 길이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봉오동전투의 현장인 수남촌이 앞장서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입니다.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는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대신하여 지켜주지 않습니다… - 인생수양서 “채근담”에는 “물고기는 물을 얻어 헤염을 치지만 물을 잊고 있으며 새는 바람을 타고 날지만 바람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경구가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가 있은지  86년이 지난 지금 후대들은 책 속에서만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뿐 목숨을 바쳐 반일, 항일에 나섰던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선렬들의 존재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갑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는 혁명선렬들의 넋을 다시 살려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_ 저의 부모님은 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업을 잘하려면 끊고 쪼개고 가르고 자를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감사하며 붙이고 합하고 뭉쳐야 한다.”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이 힘을 합해 우리 민족의 자랑찬 력사와 문화를 지키고 바로 세우는 일에 함께 할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발언이 끝나자 200여명의 참석자들의 열정에 차 넘치는 박수갈채가 터졌다. 박수에 뒤따른 사회자의 설명이다.  “추모식에서 박수는 실례입니다만 오늘 멀리서 오신 라촌장님의 말씀이 마디마다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여서 여러분들이 즉흥의 박수를 쳤으니 파격적으로 리해를 합니다.” 촌민모금으로 마련한 환영파티 촌장환영파티는 정금자(65)할머니가 조직한것이다. 정금자할머니는 촌장이 서울로 떠나는 날자를 미리부터 마음에 기억한다는 것이 그만 날자를 오낀데서 촌장이 떠난후에 이틑날에 촌장네 집에 왔다가 나이를 원망하였다.  (갈 때 못 했으면 올 때 해야지!) 어떻게 촌장을 환영할것인가만을 궁리하던 정금자할머니는 촌의 녀성무용대를 선두로, 촌회계(   200원) 등 개개인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푸짐한 술상은 물론 생화까지 마련하고 온 동네를 청했다. 수남촌 촌가(수남촌 노래)를 열창하기 위하여 외지에 있는 촌가수 최연옥까지.   12시 반,  촌장을 마중간 리병춘의 승용차가 마을에 도착하자 정금자할머니는 촌민들의 열렬한 박수소리속에서 촌장에게 생화묶음을 안겨주고도 성차지 않아 환영파티의 첫순서로 촌장에게 생화를 드리는것으로 시작하였다.  또 다시 생화를 받아 안은 촌장의 감회다.  파티는 풍수를 안아온 농민들이 하늘땅에 감사를 올리는 추수감사절의 기분이다. 추수감사절의 가장 근사하고 숭고한 것은 감사해야 할 모든것에 감사할수있는 공식적인 기회라는 것이다.  6개의 술상마다에서 수남자랑,촌장자랑, 정책자랑과 감사...로 떠들석 하는데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지를 도저히 구분할수 없었다. 지난 9월에 주로과학가협회에서 조직한 에서 전주 1200여개의 촌에서 생태화, 산업화, 규모화, 옛마을 복구, 민족넋 등 새농촌건설을 수남촌을 점으로 하고 전면을 추진하자는 견해를 일치했다는 김진섭서기의 말에 인생 3막을 생명소(효소)로 시작하겠다며 지난 9월에 수남촌에 입주한 로과학가협회 김한덕(72) 고급농예사가 수남촌을 홍색촌으로 부상시켜야 한다면서 자기가 개발하는 모든 상품을 표로 한다고 선포했다. 유서깊은 봉오동의 맑은물이 흘거선가 앞벌에는 황금파도 뒤산에느 과일풍년 이웃사이 화목하고 남녀로소 한맘되여 지상락원 가꿔자며 행복을 노래하네 헤루화 좋구 좋네 어화둥둥 좋구좋다 꽃피는 하얀마을 우리네 수남촌 술상이 끝나기도 전에 울려퍼지는 수남촌가소리에 흥을 못이겨  춤노래로 들썽이는 녀성들로 하여 남정들이 별수없이 아쉬운 술상을 물려야 했다.    ... ... ... 라촌장의 한국행차는 수남을 크게 홍보하였다.   라촌장의 서울약속으로 31일에 한국 평창동기올림픽올림픽현장인 강원도 대관령면원로대표일행이 주기업가협회 박경식회장의 안내하에 수남 봉오동반일전적지기념비를 답사하고 수남촌의 건설에 평창이 도움을 줄것을 약속하였다. 오기활기자 조글로미디어 /2014년 11월 5일자
2    새 농민이 새로운 특색농촌 건설한다 댓글:  조회:2144  추천:1  2014-11-19
인터넷에서 여러가지 정보를 찾아내는 라철룡주임   《하면 된다》는 리더 《되면 한다》는 팔로워 수남촌을 릉곡지변시켰다 작년 도문시 농촌사업총화대회에서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이 도문 51개 촌에서 2년간 새농촌건설속도(年速)가 제일 빠른 촌으로 평가되여 수남촌 라철령주임이 경험소개를 하였다. 수남촌의 초속 릉곡지변(陵谷之变)은 올해 48살인 라철룡이 촌 세대주 직무를 떠멘후부터다. 라철룡은 2010년 촌민위원회 기바꿈 선거에서 8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촌민위원회주임으로 당선되였다. 준비된 리더 수남에서 나서 자란 라철룡은 촌 공청단지부서기, 민병련장을 지냈고 남먼저 기업도 운영하고 로씨야와 조선 나들이를 하면서 식견도 넓히고 돈도 벌었다. 라철룡에게는 언녕부터 남다른 꿈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툰사, 촌사 조사에 흥취를 갖고 동네방네서 알만하다는 로인들을 찾아다니며 수남, 토성리, 신선, 고려(지금의 흥진) 등 4툰(지금의 수남촌)의 지리, 정치, 력사, 문화를 조사정리하였다. 그는 봉오동전투에 투입된 반일부대의 병력, 배치는 물론 일본군의 병력, 추격대장 야스가와 소좌까지 조사해냈고 독립군의 발자취를 따라 봉오동 십자구, 왕청현 대감자,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와룡의 천수동, 어랑촌까지 답사하며 고향의 년혁을 거슬러 파고들며 고향애의 푸른 꿈을 맘속으로 키웠다. 《하면 된다》는 개척형 리더 촌 세대주로 된 라철룡은 《변해야 산다》 《하면 된다》를 좌우명으로 하고 《새로운 농민이 새로운 특색농촌을 건설한다》는 리념 하나로 개척형리더(지도자)가 되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했다. 그는 주임선거때 경쟁대상을 사업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파벌성과는 담을 쌓고 촌민속에 심입하여 속심을 나누면서 촌 발전전망을 펼쳐보였으며 촌민들을 똘똘 뭉쳤을뿐만아니라 새 사유, 새 관념으로 사업스타트를 뗐다. 우선 촌민들에게 자기에 대한 믿음을 주고저 도문에 있던 집을 처리하고 수남촌에 새 집을 짓고 이사해왔다. 촌 렬사비앞에서 《선렬들의 피는 헛되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수남촌을 변화시켜 촌민들을 잘살게 하는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고 맹세하였다. 수남촌은 2005년까지만 해도 경작지면적이 200헥타르, 4개 자연툰, 8개의 촌민소조, 403세대에 1205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몇해전에 논이 경제개발구로 징용되고 원주민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간데서 지금은 호수가 208세대에 인구도 720명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원주민의 이동으로 그 자리를 메운 외지민들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마을은 너절한 쓰레기무지와 악취로 스산했다. 2년 남짓한 동안에 라철룡은 남들이 엄두도 못 내던 굵직한 일들을 기적같이 해냈다. 남방으로부터 해보식용균생산항목을 유치해 비닐하우스 식용균재배면적이 10헥타르에 달하는 전 성에서 제일 큰 식용균재배기지를 건설하였다. 해보식용균의 년간 생산액은 500만원 이상에 달할것으로 전망되고있다. 또 조선에서 블랙초코베리(黑豆)묘목을 인입해 지난날 메돼지피해로 전전긍긍하던 50헥타르 황무지에 블랙초코베리생산기지를 건립하였다. 블랙초코베리의 년간생산액은 300만원에 달할것으로 전망된다. 이외에도 해당 부문과 합작해 60헥타르나 되는 촌 묘포장을 건설하였다. 해당 부문의 자금지지와 자기의 인맥관계를 리용해 7킬로메터의 흑길을 콩크리트길로 탈바꿈시켰고 악취가 풍기던 물도랑을 새로 수건하고 길 량옆에 화단을 만들고 마을곳곳에 6000여그루의 관상용나무를 심었다. 50채의 벽돌기와집도 새로 지었다. 초가집개조는 기술일군을 제외한 모든 로력을 당지 로력을 채용한데서 초가집개조에서 농민들이 적어서 수백원, 최고로 6000여원의 수입을 올렸다. 남이 없는 적절한 비책으로 외지사람들에게 양도했던 80헥타르의 밭을 몽땅 회수해 촌민들의 기쁨은 물론 상급 해당 부문의 감탄을 자아냈다. 초가집을 개조하면 국가에서 농민들에게 주는 보조금을 한푼이라도 더 챙기기 위하여 농민들이 새집에 이사를 하고도 낡은 집을 허물지 않고 버티던 28채의 헌집들을 하루사이에 과단히 밀어버리고 집집이 다니며 내심하게 설득시킨테서 농민들도 탄복하고 상급도 감복시켰다. 각종 제도를 엄격하고도 확실하게 제정, 집행하였다. 정기적인 촌민대표(21명)회의를 소집해 대사를 결정하고 촌민대표회의 결정은 촌주임, 회계, 부녀주임이 저마다 기록하고는 지장을 찍고 사진으로 보관서류를 남겼다. 10명이상 대표들이 결정한 일은 무조건 그대로 집행하였다. 촌재테크(理財)소조, 촌민감독소조를 건립하여 상호 감독조직사업을 정규화했다. 《누가 처음부터 착오를 지려 하겠는가? 일을 오래 하다보면 교오가 생기고 욕심이 생긴다. 그러니까 엄격한 감독제도로 미연에 착오를 방지해야 한다.》 《사업에서 경쟁대상이 있어야 위기감이 생겨 배우기에 노력한다》 이렇게 말하는 라철룡은 자아감독, 자아발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단다. 《되면 한다》는 팔로워 한 리더의 리더십(지도자의 능력)은 팔로워(따르는 사람, 팬)가 호흡을 같이하며 함께 달릴 때 이뤄지는 《예술작품》이다 리더가 아무리 탁월하고 리더십이 고수라고 해도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 제때에 따라주지 않으면 그 리더는 무용하다. 수남촌의 실천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 12일 기자가 수남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남촌 로인들이 자발적으로 한집에 모여서 기자를 꼭 만나 라촌장을 자랑하겠다고 학수고대했단다.  늦게 도착한 기자는 수남촌독보조 리금순회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1974년에 수남에 시집와서 한뉘 부녀대장을 지냈다는 리금순회장은 《가사(家事)도 국사(國事)다》고 화두를 떼더니 이렇게 라철룡을 평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고 겁까지 났습니다. 그가 몇년사이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겨우 4표 차로 선거된 그에게 조장직도 안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내보니깐 자사자리가 없고 하겠다는 일은 꼭 해내니깐 점점 다른 눈으로 높이 보게 됩데다.》 《그는 일을 시킬 때 명령을 하는것이 아니라 제가 나서 솔선적으로 합니다. 로인들을 동원하여 경상적으로 아침전 마을청소를 하는데 라촌장은 도문에서 올라와 4시부터 일을 했습니다.》 《촌에 돈이 없으니 자기 돈은 물론 한국에서 벌어온 누이의 돈까지 촌의 일에 씁니다. 종종 우리 상점에 와서 꾸기도 하면서…》 《그가 된다는 일을 우리는 무조건 따릅니다. 우리 촌을 좋게 건설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 그를 봐서라도 로인들이 어찌 집에 앉아만 있겠습니까? 로인들은 자기 집에 반반한 음식이 나지면 라촌장을 대접하지 못해 안달아합니다.》 리금순회장의 자랑은 그칠줄 몰랐다. 수남촌의 어제(웃 사진)와 변모된 오늘(아래 사진) 고향의 변모는 외지로 떠난 원주민들의 귀향열을 올려주었다. 지난해에 이미 5세대 원주민이 귀향, 올해만도 20~30세대가 귀향하려고 준비하고있다. 팔로워의 코기러기 리금순은 사업의 고초도 실토하였다. 《지금은 어느 촌이나 로인들이 골간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자고 해도 앞잡이(돈)가 없어서 문젭니다.》 《상급에서는 마을에 청년들이 없어서 5.4절도 못 쇠는데 민병련장앞으로는 로임을 보내지만 로인간부들의 명목으로는 일전 한푼도 없습다. 마을의 모든 일은 로인들이 하는데…》 《지금 촌에 청년들이 없어서 로인협회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리금순회장의 말에 라철룡이《확실히 문제다》며 부언했다. 《수남촌은 여러가지 우세가 많습니다. 초모정자산, 항일전적지, 도문의 첫 당지부가 성립된 툰(지금의 흥진툰)이 수남촌에 있고 항일투사 홍범도, 최진동, 오중하도 수남에서 활동했으며 조선의 연형묵총리도 수남에서 나왔습니다. 비행사도 2명이나 나왔습니다.》 이는 룡두산미화에 한창 신경쓰는 라철룡이 향후 사업에 신심 벅차서 하는 말이다. 《하면 된다》는 개척형 리더와 《되면 한다》는 열정적 팔로워가 있기에 수남촌의 래일은 더욱 휘황할것이다. 사진 글 / 길림신문 오기활기자 2012년4월19일
1    가다ㅡ수남편 댓글:  조회:2188  추천:0  2014-11-19
수남촌 동쪽벌   1 1985년 출판된 연변지명록을 펼쳐보면 연변지역에서 촌명이 물수(水)자로 시작된 촌이 대충 세여보아도 23개나 된다. 그중에는 수남촌, 수북촌, 수동촌, 수서촌… 아주 가관이다. 말하자면 물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구색을 맞추고있는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옛날 로인들은 일반적으로 한어직역인 수(水)보다 우리 고유어인 물을 사용하여 물남이란 고유어와 “물람”(남)이란 토착어를 잘 사용한것이다. 수남촌- 어느 촌인들 력사의 흔적이 희미하련만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은 민족항쟁의 터전으로 전적지 봉오동이 소재하여 반일의 기가 펄럭이는 곳이다. 더우기 봉오동전투의 부장인 최진동(일명 최명록)이 본거지이고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여서 선인들의 발자취가 선연하게 찍힌 곳이다. 수남촌은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7킬로메터쯤 상거해있는곳이라 연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수남촌 리병춘서기 (48세, 당지부서기 3년차)가 촌사무실에서 우리를 맞았다. 지난 세기 60년대초에 흑룡강성 벌리현에서 이사왔다는 리병춘서기는 수남촌이 고향이라도 과언이 아니라면서 여태껏 수남촌을 떠나본적이 없는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도문시경제개발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수남촌은 도문에서 석현, 왕청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고장으로 전 촌 경작지면적이 200헥타르, 그중에서 수전이 35헥타르, 4개의 자연촌, 8개의 촌민소조, 총호수가 207호, 인구가 654명으로 알뜰한 조선족 집성촌이였다. 수남촌의 특징은 교통이 편리하고 도문시개발구와 이웃으로 되면서 토지징용에서 혜택을 받았다. 촌동쪽편에 봉오동저수지가 있고 촌행정구역내에 연변범서방비닐유한회사도 자리잡고있고 려행, 레저, 미식, 숙박을 경영하는 시설이 다섯집이나 된다. 2 수남촌은 현재 4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고있는데 이는 력사적인 취락취명의 연장으로 남아내려온것이다. 토성리, 신선툰, 고려툰, 수남 이 네개의 자연촌으로 형성되여 오늘의 수남으로 통칭된것이다. 위만주국이 서기전까지 봉오동계곡에는 하촌, 상촌, 마촌, 태촌, 박촌, 조촌 강촌 같은 10여개의 올망졸망한 촌들이 자리잡았지만 1930년대초에 일본사람들의 강제적인 이주로 이른바 안전촌, 집단부락으로 되면서 연변지역 여타의 촌처럼 오늘의 군집촌으로 형성되였다. 지금도 수남촌 서구밖에는 일본사람들이 세운 자위단보초막자리가 남아있다. 여느 집인가 개바자를 둘러막고 풋마늘을 심어 흔적이 없었지만 촌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를 감시할수 있는 위치라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그리고 봉오동저수지도 하촌, 상촌… 같은 여러개의 자연부락흔적들을 수물시켜 그 흔적을 깡그리 지웠다. 현재 고려툰, 신선툰을 합쳐서 흥진이라 칭하지만 수남촌사람들은 지금도 습관적으로 고성리, 신선툰, 고려툰이라고 명토를 박아서 부른다. 수남촌에는 지금도 위만주국경찰서 건물이 있다. 비가 샌다고 지붕만은 새롭게 기와를 얹었을뿐 건축양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적으로 수남촌은 기자의 외가가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봉꼴” (봉오동)이란 투박한 촌명을 익히고 살았고 7살무렵 지금의 도문시경제개발구가 자리잡은 곳에서 10여리를 걸어서 “봉꼴” 외가편으로 걸어가면서 어머니의 만류도 무릅쓰고 물이 줄어든 내가에서 물고를 잡던 기억이 그들먹하게 남아있다.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으면 7살짜리에게 잡힐가 생각하면 그무렵엔 이 내가에 물고기가 많았던건 사실이다. 저녁무렵 외가에서 전기불이 없어서 어둑한 석유등장불밑에서 풋옥수수와 가지를 쪄먹던 일, 쑥단으로 대충 막아 만들었던 뒤간, 그때까지 아직 어렸던 사촌이모가 부엌에서 부지깽이로 장난치면서 두덜거리던 기억, 외가 어른들이 늦은 밤중까지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봉오동전투, 최명록 (최진동)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던 기억들을 생생하게 회생하고있어 봉오동이라면 낯선 고장도 아니다. 더우기 최진동은 기자와 동성동본으로서 어깨를 살구고 “량반의 뿌리요, 관방에서 벼슬했소” 등등 자기 선조의 업적을 은근히 들먹거리던 옛날 최명록은 우리 진산최씨가문에서 가장 큰 인물로 상징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3 리병철서기는 도문시선전부와 석현진정부의 통지를 받고 수남촌력사에 빠삭한분을 모셨다고 했다. 리서기와 여러말을 주고받고있을라니 촌사무실로 가방을 멘 40대 초반의 젊은이가 들어섰다. 리서기가 자기가 청한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럴리가…반신반의했다. 여직껏 취재를 하면서 모두가 년륜이 지긋한 로인들을 대상으로 취재해봤지만 로인들을 제치고 젊은이를 소개한다니 미심쩍었다. 하지만 몇마디 대화로 지인을 만났다는 포만감이 들었다. 라철룡이라 부르고 올해로 44살인 라선생은 알뜰한 수남촌태생으로서 현재는 도문시내에서 살고있다고 했다. 봉오동전투에 투입된 반일부대의 병력과 배치는 물론 일군의 병력, 추격대장 야스가와 소좌까지 얼음우에 박밀듯 알고있었다. 게다가 독립군의 발자취를 따라서 봉오동 상류 십자구, 왕청현 대감자, 화룡현 청산리 배운평, 와룡의 천수동 어랑촌까지 답사했다니 그저 경악할뿐이다. 인간력사에 특별한 흥취가 있어서 어려서부터 고향의 연혁을 거슬러 여러모로 파고들면서 무한한 재미를 느낀다는 라선생은 고향에 대한 책을 저술하자고 그러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답을 피하고 그저 시무룩이 웃을뿐이였다. 그러면서 최진동의 무덤이 있다는 토성리언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몇그루의 백양나무가 서있고 벽돌공장으로 된 이곳에는 최진동의 묘자리가 있었다고 소개했고 최진동은 고성리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수남촌의 취락취명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수남촌(물남)으로 취명될시 현재 북쪽산기슭을 감돌아흐르는 봉오동벽계수가 마을언덕밑을 감돌아흘렀고 그 언덕에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서 수남(물남)이란 부락명이 나오면서 오늘의 수남촌으로 되였다고 했다. 봉오동이란 북봉오동을 통칭하는데 수남촌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뻗어간 깊은 계곡을 통털어 일컫는다. 여기에는 10여개의 자연촌락이 있었고 수백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화전밭을 일구면서 살았다. 1920년 6월 7일 세인들이 다 아는 전투가 여기에서 터졌고 우리들은 이 전투를 봉오동전투 혹은 봉오동저격전이라고도 부르고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소개를 이미 지상에 반복적으로 나갔다는 사안을 감안해서 여기에서 상세한 소개를 피한다. 단 조선인반일부대가 일제와 맞서 처음으로 치른 최초의 전투였다 점 그리고 최진동장군의 군무도독부군,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안무장군의 대한국민회가 련합하여 중국연변땅에서 처음으로 치른 저격전이였다는 점을 부각하고싶을뿐이다. 수남촌의 력사는 최진동이란 인물의 력사를 배제하면 완전한 력사가 될수 없다. 1910년대초부터 최진동은 봉오골 전체를(수남) 매입하고 수남촌을 중심으로 석현, 대감자, 곡수, 도문, 남양툰 등지의 외각 땅도 매입하여 완전한 무력항쟁의 근거지기초를 닦아 놓았다. 라철룡의 말에 의하면 최진동이 봉오골로 들어오기전 이 일대에는 조선 함흥에서 온 원씨네, 강씨네, 김씨네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화전밭을 일구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옛말듣기와 력사이야기에 심취되였던 라철룡은 밤마다 마을로인들을 찾아가서 수남촌의 과거지사를 들었다고 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차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싶은 학자가 되는 꿈도 키웠다고 했다. 4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수남촌은 403호, 총인구가 1205명이라 했다 하지만 불과 몇년사이에 호수가 207호로 감소되고 인구가 654명으로 무려 절반으로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연변 여타의 농촌처럼 수남촌에도 산업화가 구가하는 긍정적인 혜택과 “악재”를 동시에 맞았다. 농업로력의 “로령화,” 시골인구의 “공성화”…이에 따르는 피페화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방책이 유효하게 발효하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농촌을 지켜선 사람들에게는 시대적인 “과정”이거나 숙명적으로 대할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농촌인구의 절감은 반드시 피페화로만 볼수도 없다. 오히려 토지의 집중과 규모경영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수 있고 국가적으로 권장하는 규모영농을 실현할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수남촌에서는 도문시경제개발구와 이웃으로 나란히 지내는 우점을 살려 농민살림집구역을 건설할 구상도 하고있고 촌기초시설도 잘 다지고있는 상황이다. 수남촌에는 지금도 민족의 혼, 항쟁의 기가 살아있고 그 혼과 기를 이어받은 후세들이 아름다운 삶을 영위해가고있다. 그래서 오늘의 수남 촌과 래일의 수남촌은 항시 “여기 려명은 고요” 할것이다. 수남촌은 창성 할것이다. 글/사진 연변일보 최국철기자/2008년 07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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