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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난 룡》 (길림신문)
2014년01월14일   조회:4021   추천:0   작성자: 吴仲涥中医诊所
세계우수전문가인재》 -오중순의사의 성공스토리
요즘 필자는《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곧 잘한다. 그도 그럴것이 필자는 근 30년간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특히는《연변일보》 도문 주재기자로 활약하면서 여러 의사들을 보도했어도《전국 백가지 명특색문진부》,《세계우수전문가인재》,《공화국공모인물》의 주인공인 오중순(도문시 위생협회 제1문진부)에 대한 보도는 한번도 한적 없었으니 말이다.

확실히《등잔밑이 어두웠다》

지금까지 오중순은 병원, 의사, 약광고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치렬한 경쟁년대에 한번의 광고도 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필자가 오중순을 취재하게 된 계기는 지난 11월 7일 51년만에 조직한 소학교동창모임이다. 모임에서 저마다 반주임(허은금)선생님에게 올리는 인사말과 자아소개때 최금선이《나에 대한 소개보다도 저기 오중순이라는 대단한 인물임을 소개합니다》라고 하기에 돌아와서 오중순 인터뷰를 하게 되였다.

불타는 구지욕

소학교때 오중순은 학습성적이 그저 그랬다. 그때만도 공반중학교입학이 제한된데서 오중순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민반중학인 농업중학교를 다녔다.

오중순이 의학공부를 하게된데는 병에 시달리는 어머님과 소학교때 리질병에 걸려 고생했던 과거사가 계기로 되였단다.

지난세기 60년대 전례없던《문화혁명》시기에 해방후 줄곧 촌 당지부서기를 지낸 아버지가《주자파》로 투쟁을 받자 사회활동자격을 빼앗긴 오중순은 자기의 속궁리대로 용하다는 중의(한시우)를 찾아가 중의를 배웠고 마을에 해방군이 주둔하자 밤마다 군의사를 찾아가서 자기 몸에 침을 놓으며 침술을 익혔다.

그후 수의로 지낸 외삼촌의 계발로 대대(촌)수의를 맡았고 또 당년에 대대에서 명의(손정덕)를 초빙하고 대대병원을 꾸릴때 오중순이 약제사로 발탁되였다.

배움의 갈증을 느끼던 오중순에게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이였다. 그는 간병치료에 소문이 높은 한시우와 손정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밤낮이 따로 없이 의서를 베끼고 처방을 암기하고 또 목단강에 용한 중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위병치료를 배웠고 15리길을 밤낮으로 오가며 도문《침술왕》 김상수한테서 9개월이나 침술을 배워냈다.

오중순의 구지욕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974년에 입당하고 홍광향병원, 도문시위생진수학교 건강교육소에 사업터를 옮기며 선후하여 연길현려명농업대학, 연변의학원, 장춘중의중약연구소 등 학부에 추천되여 한눈 팔지 않고 배움의 한길에서 열과 성을 다 했다.

그는 중서약외에도 안마, 침, 기공, 서술료법(舒術疗法), 팔괴상수료법(八卦象數疗法) 등 종합료법으로 여러가지 의난병을 기적같이 치료한데서 환자들로부터《마법사》라 불리고있단다. 서술료법과 팔괴상수료법은 그가 60대후 북경과 청도에 찾아가 배워낸 의술이다.

많은 신염환자들로부터《오선생비방》이라 구전(口傳)되여 내려온 신염치료비방도 그가 1957년 12월 10일에 사촌형님이 연길명의한테서 전수받은 비방이라고 한다.

오중순을 후계자로 점찍은 로중의(한시우)는 90고령에 자기의 비방을 16절지에 일곱장이나 친필로 정리해 오중순에게 넘겨주었다.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

오중순은 최근 10년간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가 최고급의학학술교류회에 6번 참가했고 대만, 윁남, 주해에서 열린 국제의학학술교류대회에 3번 참가하였다.

오중순이 쓴《만성편도체염치료경험》,《이음전가감치료만성광증(狂症)경험》,<<황담형간경화복수치료체득》 등 6편 론문이 세계문인예술연구중심과 중국과학기술연구교류중심에서 추천한 국가급론문(중화중서의결합잡지)에 발표되였다.

<<세계우수전문가인재》로

공든탑이 무너지랴?

사람들은 오중순을《개천에서 난 룡이다》고 칭송한다.

지난 40여년간 오중순은《용한 의사》라는 이름 하나로 동북 3성은 물론 북경, 상해, 광서, 심수, 미국, 일본, 조선, 한국에서 찾아온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많은 기적과 전설들을 만들어냈다.

필자는 그중 몇가지 병례를 독자들게 소개한다.

2000년 연변대학부속공장의 오모는 간암종합증에 페수종까지 와서 장춘중의병원으로부터《열흘을 못넘긴다》는 사망신고를 받고 돌아와서 후사처리를 하던중 요행을 바라며 오중순을 찾았다.

큰병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시체》를 놓고 오중순도 신심이 없었다, 허나 단 한가지, 자기를 찾아왔다는 믿음 하나에 감동을 먹고 1%의 희망에 100%의 노력을 가했더니 환자의 수명을 8년을 연장, 환자는 사망직전까지 음향사를 운영하며 생활자립을 하였다.

1998년이라 생각된다. 도문시 부시장으로부터 시인대 주임직을 지내던 김통일이 요추반탈출, 증생, 협착 등 종합증으로 와상불기(臥床不起)하였다.

때는 그가 도문시 제3소학교건축자금유치로 대표단을 이끌고 출국을 준비하던중이였다.

국경절 며칠전인 어느날 저녁에 도문위생국 리한명국장이 오중순을 찾아와서 김통일주임의 왕진을 청했다. 큰 병원에서 치료했다는 시 인대주임이라 오중순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직접 상급어른의 간청이라 별수없이 응해야만 했다.

환자는 침상에 누워 머리조차 돌리지 못했다. 곁에서 시 위생국 당위서기, 시 인대간부(2명), 그리고 한국손님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간병하고있었다.

엄엄한 어른들을 마중한 오중순은 가까스로 심리를 조절하며 침구, 안마, 기공 등등 재간을 다 피웠다.

<<가능합니까?》

<<일주일이면 됩니다…》

출국일정을 짜놓고 단장의 호전만을 기대하는 그들의 시도 때도 없는 물음에 오중순이 화답했다.

<<당신이 큰소리를 치는것이 아니요?》

리국장의 반문이다.

과연 기적이 나타났다. 글쎄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환자가 일어나 앉을줄이야! 의사와 환자를 번갈아보는 사람들의 눈은 그야말로 동전잎이 되였다. 환자는 3일부터 걷기 시작하여 4일부터는 의사왕진이 미안하다며 자체로 찾아와 치료를 받더니 7일부터 완전히 생활을 자립하였다.

2003년 일이다. 도문시위생국 마지생국장이 뇌경색병으로 도문시철도병원에 입원했다. 어느날 저녁 마국장의 사위가 오중순을 찾아와 장인이 오선생을 찾는단다. 이번에도 난감이였다. 식물인이 된 상급지도자의 치료를 맡기도 겁나고 거부하기도 난감했다. 울며겨자먹기로 따라갈수밖에 없었다.

오중순의 치료를 받은 마국장은 한달만에 말을 했고 46일간부터는 걸어다니며 생활을 자립하였다.

지금은 가정일을 전담한다는 마국장은 때때로 오중순을 외우면서 그가 아니면 자기가 언녕 하늘나라사람이 되였다고 한다.

지난 12월 18일 기자가 또다시《오중순진료소》를 찾았을 때 오중순이 12월 2일에 심양에서 보내왔다는 금기를 내보였다.

이 금기는 오중순이 왕진비도 안받고 한달간의 왕진을 다니며 죽어가는 동생(리계덕, 도문)을 구해냈다고 무순석유화공연구원에서 의사를 지냈다는 리계덕의 누님(리계련, 73세)이 감사의 글을 박아 보내온 금기였다..

더 말해서 무엇하랴?

오중순이 불가능하다는 20여명의 불임녀성을 치료해 끝내 임신했다는 이야기, 자기 약을 4첩 먹고《죽는다》던 간병환자가 살아났다는, 자신마저 지금까지 믿기 어렵다는 기적같은 치료이야기들. 오중순은 오늘도《모를 일이다》며 자부한다.

2002년 세계문인예술연구중심과 중국과학기술연구교류중심에서는 오중순을《세계우수전문가인재》로 평선하였다.

하고 싶은 말

12월 18일, 기자는 이런 질문으로 오중순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문: 40여년간 제일 잊혀지지 않는 일은?

답: 1974년에 농약중독에 걸린 11살난 아이가 죽은 일이다. 그때 오대증료법을 하고나서 소수례에 싣고 도문병원을 가다보니 시간연장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만도 의료시설과 교통수단이 말째였다.

문: 지금도 안타까운 일들은?

답: 환자들이 의사의 충고를 듣지 않는것이다.

문: 그래도 제일 자랑을 할만한 병치료는?

답: 소화계통질병이다.

문: 지키는 신조는?

답:《의사는 심의(心医)가 되여야 한다》다.

의사는 병이 아닌 병자를 치료한다. 즉 사람을 치료한다는 말이다. 의사는 환자의 마음을 리해해 주고 함께 아파하는 심의여야 한다.《사랑받는 세포는 암도 이긴다》는 말이 있다.

오중순은 성공한 의사다. 성공은 사랑하는 자만이 얻을수 있다. 성공은 생명에 감사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얻을수 있다. 그것도 내 생명만이 아닌 모든 존재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말이다.

오중순은 사회에서 얻은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의사였다.

생활의 역경으로 시달는 불우이웃에 대한 지속적인 도움, 고향건설과 주변환경건설에 대한 기여, 때때로 되는 고향마을 사람들에 대한 베품.

오중순을 만난 환자는 복있는 환자다

필자는 우수한 우리 민족에 대한 홍보와 책임을 다 못한 기자의 실직감, 그리고 늦게나마 사회에 대한 책임감으로 신문이나 광고에서 만날수 없던 오중순의 전화번호(04333639973, 13844328331)를 감히 글에 올린다. 단 늦게나마 우리에게 자긍심을 부여해준《세계전문가우수인재》를 사회에 알리려는 책임감에서 말이다.

/오기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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