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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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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179  추천:1  2020-10-13
     수필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                                                                                                                  회령 래일은 중추절 ㅡ 한가위 ㅡ 농력(달력 월력 음력) 팔월 열닷새 ㅡ 추석명절이다. 옛날부터 이날을 우리 조선사람들은 큰 명절로 잘 쇠였다. 그것은, 이맘때쯤이면 그해 농사일이 기본상에서 끝나고 작황도 기본상에서 결정이 나고 이른봄부터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 온 농부들이 시름놓고 한쉼을 푹 쉴수있는 고비(시간대)기 때문이다. 천하지대본인 농사에서 이제 앞에 남은것은 가을과 타작뿐인데, 그해세월이 순풍세우였고 이제 앞으로도 천재지변만 없으면 올해 농사는 순리로 끝나는거다. 가을일도 무척 힘든일이긴 하지만 수확의 기쁨은 농부들만이 즐기는 락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추석전후의 한고비를, 대개 농력8월을 어슬렁8월 혹은 건들8월이라고 한다. 가을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농부들은 호미며 보습을 씻어 걸어놓은후 슬슬 땔나무를 하고 선기슴(기음. 밭의 큰풀뽑기)을 하기도 하고 약초며 버섯이며 머루 다래 사냥도 한다. 바를 들일 피겻(피나무껍질)을 장만하기도 하고 보치(봇나무ㅡ짜작나무껍질.시관을 매장할때 관위와 주변을 둘러싸는데 주로 쓴다.)를 벗겨오기도 한다. 사실은 어슬렁8월이요 건들8월이요 하지만 농부의 일손은 그냥 있다. 참으로 무한한 농부의 일생이다… 조상님들께옵서 달이 횅창 밝은 8월15일을 추석명절로 결정한것이 언제고 또 왜서인지, 황제페하의 독단이신지 아니면 정치국상무위원회 집체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나라때에 벌써 한집식구들이 단란히 모여앉아 월병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고 하니 추석은 퍽 오래 된 민속절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중국에서는 나라적으로 추석을 법적공휴일로 정하고 중화민족(56개 민족으로 구성되였음.)들이 추석을 더욱 잘 쇠고있다. 그런데, 쇠는 형식에서는 구성원 민족들마다 특점이 있다. 성묘는 다 하는 중차대한 행사이지만 즐기는 형식은 부동한 점이 많다. 긴단히 살펴봐도 한족들은 지금도 월병을 민법통칙마냥 지키며 꼭 먹는데, 안 먹겠다고 떼질쓰는 개구쟁이 한테도 기어이 한쪼각이라도 주둥이에 먹이고야 만다. 그래야 둥굴둥굴 잘 굴러나가고 집식구들이 흩어지는 일이 없이 단란히 뭉쳐 잘 산다고 믿는다. 그리고 달구경을 한다. 우리조선족은 형식이 꽤 많다. 농촌마을을 들여다 보면 재밋게, 알뜰히 추석을 쇠는것이 보인다. 힘든 농사일로 땀에 절어 시큼하고 누린내 나는, 흙물 풀물이 잔뜩 든 헌옷을 벗어팽개치고 깨끗히 때밀이를 한후 입쌀풀을 먹여 다린 흰바지 흰저고리를 쉬원히 입는다. 명절음식으로는 식량사정이 되는 집들에서는 곰물밴새(송편)를 하고 대부분 집들에서는 떡같은건 별로 못하고 소고기국에 이팝을 어쩌다가 맛있게 먹었다. 그것은 추석이면 소를 잡아먹는 풍습에 따라 마을추렴으로 몇달간 풀살을 잘올린 소를 잡기에 소고기맛을 보게되는 것이다. 인구당 석량중이 돌아가게되면 한칼 잘먹는 셈이되였다. 아이식구가 많은 집들에서는 분배몫이 많아 흐믓해 하였지만 아이가 없거나 한, 둘뿐인 집들에서는 찌뿌둥 해 하였다. 하지만, 아이가 많은 집들에서 한편으로 미안해 하면 “좋은걸 만나면 아이들이 더 먹는다.”고 하며 대범히 넘어갔다. “4청”과 “문혁”기간에는 자본주의 꼬리를 잘라버리는 투쟁과 수정주의와 사심을 뽑아버리는 투쟁을 점점 더 심도있게 진행하다보니 쇠고기는 물론이고 추석바심으로 먹던 올벼농사도 걷어치웠다. 웬간한 명절은 타파해 버리고 “네가지 낡은것”(破4舊즉 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은 짓부셔 버렸다. 푸짐하게 먹을 형편도 아니건먼 근검소박을 해야한다고 웨쳤다. 아침후에는 성묘를 간다. 성묘때문에 추석이 생겼다고 사람들은 믿다싶히 하였다. 멀리서 하루 혹은 이삼일 품을 들여서라도 성묘를 했다. 나의 큰외삼촌은 궁둥이에 낫자루를 차고 피겻노끈망태기에 고구마술 한병, 입쌀구비(구운기름떡) 석장, 삶은닭알 세알, 마른명테 한개를 넣어 메고는 온하루 성묘를 다니였다. 어느해 추석땐가 내가 한번 외삼촌에게 로(증조)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에는 이젠 다니지 않아도 되지않는가고 말을 했다가 눈알이 쑥 빠지게 줄욕을 먹은일이 있다. 그것은, 외삼촌의 로할아버지, 로할머니 산소는 알미대산골치기(막바지)에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는 갈매골 중구품(중간쯤)에 있었는데 두곳은 남북으로 30여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이 너무 힘들어 해서 생각느라 걱정한것이 싱거운 짓거리로 돼서 줄욕을 벌어 얻어먹은 것이다. 그날, 외삼촌은 “조상을 모르는 새끼는 개새끼다!”하고 힘있게 론단을 내리고는 잠이들었다. 50도고구마술을 한병이나 다 마여가면서 힘든일을 하고나니 술기운도 올라오고 무척 지치기도 했든것이다. 그때가 외삼촌의 년세가 예순몇이였는데, 그의 두 아들은 갈매골까지는 따라가고 알미대는 나와 외삼촌이 성묘를 갔다. 두 아들녀석들은 아직은 어리여서, 그리고 마을청년들의 놀음을 구경하라고 외삼촌은 너그러운 배려를 베풀었든 것이다. 그때는 우리마을이 공사(향)에서는 제일 큰 대 부락으로 3개 생산대였다. 추석이면 남청장년들은 개인장끼로 씨름을 하고 처녀와 각시, 아주머니들은 그네를 시합했다. 또 남녀 배구 시합도 했다. 축구도 하고는 싶었지만 마당이 없어서 하지못하고 해마다 아쉬워 했다. 그네는 마을 복판에 있는 한구루의 큰 느티나무가 신통히도 남쪽으로 한줄기 굵은가지를 반공중에 뻗친것이, 거기에 굵은 바줄을 걸면 해마다 천연그네터가 되였다. 그런데, 배구는 로소불문 남녀가 다 구경할수 있었지만 씨름은 남자들만, 그네는 녀자들만 구경했다. 남자들이 그네를 구경하면, 그리고 녀자들이 씨름을 구경하면 작풍이 단정치 못한 “음특한 놈”이라고 내 놓고 욕했다. 우리 남자애또래들이 입을 짝 벌이고 야! 야! 경탄을 하면서 그네뛰는걸 정신없이 구경을 하면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요놈새끼덜이 저리로 바라가! 가서 씨름구경이나 해라.” 하면서 쫓았다. 녀자애들은 씨름구경을 하나도 하지않았다. 혹시 씨름판에 와서 멍해 서 있으면 “저리 가 놀아라. 응? 너도 이담 커서 씽! 씽! 그네를 뛔야지?”하며 얼려 보냈다. 개혁개방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봉건례교가 엄하게 살아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보다싶히 성해방인지 개방인지한것이 무척 되였다. 이 현상에 대해서 학자들이 갑론을박, 콩팥칡팥 매일 싸움질을 한다지만… 달은 제멋대로 가고있다. “사회에는 처녀가 희귀하고 부과장이상은 다 정부가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가면 낯이 깍기고 정부끼리 가면 자랑스럽다고 한다.”는 말까지도 있다. 지금은 성이 동물세계로 되였다는 험담까지도 있다. 추석은 개혁개방전까지는 주로 농촌에서 쇠는 소박한 민속절이 였다. 지금은 사회가 도시화를 하면서 시가지에서 오히려 더욱 굉장히, 요란스레 추석을 쇤다. 추석에서 가장 중차대한 행사인 성묘를 보면 농촌과 완연 다르다. 나는 한식과 추석이면 부모님 산소 성묘로 해마다 고향마을을 다녀오는데, 명절을 쇠는 풍습에 변화가 없었다. 코로난지 그놈안지 때문에 금년에는 애들은 그만두고 우리량주만 출동을 했다. 자가용은 내가 굴릴줄을 모르다 보니 택시를 썼는데, 편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꽤 되는것 같은데, 살펴보면 도시에서 하는 성묘는 농촌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고장에서 화장을 법으로 결정한후, 농촌에서 사는 상주는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도시사람들은 간편해서 좋은데, 그 성묘형식도 점점 더 깜찍하게 간편하게 변화발전해 간다. 우선, 부보님의 골회를 납골당에 맡기고 해마다 “려관비”를 내면 대사필이다. 가토며 벌초를 할것이 없고 산소가 상할가봐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의 아버지가 밭머리에 있는 형님분의 산소때문에 늘 시름놓지못하며 근심하던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밭갈이거나 후치질을 하는 사람이 데퉁스러운 사람이면 다다소소 산소를 후벼파거나 긁어놓기도 하고 소가 짓밟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산소를 자주 돌보군 했는데, 어느해는 산소가 험하게 파손이 되여 후치질을 한 사람을 찿아가서 “야, 이 쌍눔의 새끼! 상세난 사람의 산소를 이렇게 괄시허는 법이 어데있니?! 망할눔이 새끼! 니눔새끼 이제 바로 뒈지나 봐라!”하며 말끝마다 눔새끼를 붙혀가며 된줄욕을 퍼부우며 싸우기까지 했다. 데퉁박이는 제가 지은죄가 있기에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부지런히 파손을 손질하는 것으로 립공속죄를 하며 사과를 표시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한식을 기다려 면례(이장)를 했다 도시사람들의 성묘에서 제사인사법이 지금은 대체로 네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골회함을 가져다가 고인의 띠를 찿아 모시기도 하고 영정사진만 모시기도 하며 제사소물을 푸짐하게 진설하고 인사를 한후 음복을 하게 한다. 조금지난후 골회함을 들어다가 납골당에 모시면 성묘는 끝났다. 공동묘지에서 거액의 돈으로 집을(묘자리) 가진 고인의 성묘도 앞과 같다. 두번째 형식은 꽃 한송이를 살랑 들고가서 납골당 골회함 곁에 놓고 경례를 하고 성묘가 끝나는 것이다. 간단명료하고 수월해서 이 형식이 점점 더 선호를 받는다고 한다. 그다음 또 한가지형식으로는 골회를 어데다 가만히(들키면 큰코를 친다.)매장을 했거나 강물에 뿌린 경우인데, 그 장소로 가서 제례인사를 하는것이다. 이 형식은 점점 더 소실되여 간다고 한다. 네번째로는 저녘후 대거리 십자가든 소골목 십자가든 자기에게 편한곳으로 가서 종이돈을 마음내키는 대로 태우는 것이다. 이 성묘형식이 지금 대단한 인기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소방, 위생, 등 부문에서 두통이 나 한다고 한다. 이상의 네가지형식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고인에게 구구절절, 간절한, 충심으로부터의 부탁이 둥덩산보다도 더 높고, 크고, 많다는것이다. 부탁에는 수백가지 조목들이 있는데, 귀납해 보면 딱 한가지다. 즉 “잘 되게 하여 주소서!”이다. 병이 떨어지게 하여 주소서, 아이가 대학에 가게 하여 주소서, 남편의 바람을 막아 주소서… 도둑놈이 쉬가 잘붙게 하여 주소서, 부정부패서기, 시장이 모가지가 무사하게 하여 주소서… 별 희한한게 다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풍속과 습관은 변하며 그 내용물에 따라 적절한 형식이 있게 되는데 그것인즉 곧 풍속과 습관의 주류형식이 된다. 내용과 형식이 맞지않으면   “형식주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것은 싫어하며 반대한다. 일반적으로 풍속 습관에서의 “형식주의”는 제창할건 아니지만 큰 위해를 끼치는건 아니다. 그러나 령도의 “형식주의”는 민생을 해치고 나라를 망친다. 대약진후기에 우리마을 어느생산대에서는 생산대 대장과 대대서기가 짜고들어 대장은 입당을 하기위하여, 서기는 선진인물이 되기위하여 알곡산량을 잔뜩 불어대고 수확고의 대부분을 여량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그래서 대장과 서기는 정말로 소원성취를 하였다. 하지만 그 생산대의 사원들은 밭갈이철부터 반소량(통강냉이, 강냉이가루, 수수쌀 등 잡곡을 량잠으로부터 꿔다 먹는것. 갚을때는 정곡으로 갚는다.)을 먹으며 생고생을 했다. 어느곳에서는 시장은 반대를 하는데 서기가 우겨대서 련거퍼 몇년을 몇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그야말로 말그대로 열심히, 굉장히 축제를 하였다. 축제를 미끼로 “초상인자"(招商引資)를 한다고 서기씨는 우겨댔지만 번마다 공돈을 팔며 밑지는 짓거리로 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내놓고 수천만원의 돈이 아깝다는둥 먹는놈은 배가 터지게 잘 처먹었을 것이라는둥… 말이 많았다. 축제는 몇년후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쯤에서 이 엉뚱한 “형식주의”가 사라져서 민분은 가라앉아 다행이라 하겠으나 다음의 “형식주의”는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다. 어느곳에서 “홍수방어전승리기념비”를 굉장히 크게 만들었는데, 홍수때 이곳 령도가 3ㅡ4일 달아다니며 고생한건 사실이다. 그러나 홍수는 다행히도 선인들이 이름한자 남기지 않고, 기념으로 돌 한개 새우지 않고 만들어 놓은 제방에 막혀 물러갔다. 그런 번연한 사실을 기념비는 이번에 각급령도들이 잘 해서 홍수를 끝내 물리쳤다고 기념문을 만들어 기념비에 새겨 넣었다. 각급령도를 내걸고 기실은 자기의 공덕비를 새운것이다. 이런 황당한 “형식주의”는 왜서 발생했는가… 어떻게 수습해야 할것인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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