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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 댓글:  조회:187  추천:0  2018-09-06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이은봉 정리           1. 머리말      유럽의 문예사조에서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술사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문학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아방가르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방가르드가 발전하는 데는 특히 라틴 문화권 사람들의 감수성이 옥토의 역할을 했다. 영미문학에서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구별하려는 의도도 별로 환영받고 있지 못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 두고자 하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아방가르드는 상대적으로 라틴계 문학에서 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레나토 포기올리의 지적대로라면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유희적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우상 파괴적인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주로 아방가르드가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이 유럽과 스페인 중남미에서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주로 프랑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아방가르드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위라는 뜻.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써 특히 남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타개해 가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던 20세기 초의 예술 운동, 즉 이탈리아의 미래파, 러시아의 구성주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등을 지칭해서 쓰인다. 예술 혁신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이 명칭이 쓰이지 않으나, 예술 영역에 따라서 전위미술, 전위음악 등으로 쓰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어떠한 몇몇 동일한 특성으로 쉽사리 정의내릴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서로 동질성을 찾기가 어려운 수많은 표현 방식과 문학 형태가 아방가르드의 이름 아래 모여 그것을 대표하며 그것의 의미를 분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自意나 他意에 의해 아방가르드에 포함되는 예술 사조는 40여개를 넘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적 특성이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현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있다. 아방가르드의 보편적인 특성인 ‘실험적인 예술의 전통과 관습’, ‘인습을 뛰어넘는 예술정신’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시대에 앞서고자 하는 창조적인 반항과 몸부림 등의 경우 문학작품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를 이러한 특징으로만 파악하면 그러한 오해는 일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가치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및 삶의 이해방식을 문학 일반이 지니고 있는 현상의 과도한 표현이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방가르드가 어느 특정한 예술 사조나 전통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 이상의 여러 예술 현상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파, 표현주의는 아방가르드 중에서도 가장 드러난 예술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입체파나 표현주의, 소용돌이파나 구성주의도 아방가르드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전 시대의 모더니즘과의 관계가 다른 예술운동만큼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고 있지는 않고 예술적 성과도 별로 크지 않아 아방가르드의 중심 현상으로 파악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아방가르드는 단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문학적 현상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사회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특성까지도 포함하는 주요한 사상의 흐름이었는데, 이는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작가들이 정치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1차 대전이 비참하게 終戰한 후에는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난 수많은 정치사상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대중들의 마음을 잡았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분출하기 시작한 이 무렵 이들 정치사상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의식을 거칠게 사로잡으며 역사에 온갖 사건을 연출한 바 있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다소 무궤도한 정신차원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아방가르드의 경우 처음부터 문학운동이나 예술운동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는 아니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군대의 용어로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특공대의 선봉, 곧 전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정치사상이나 사회혁명과 관련된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이처럼 정치개혁나 사회개혁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보편화되게 되었는데, 좀더 분명하게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미학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은 마르크스나 니체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대강 1845년 무렵에 와서이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드높게 비상함으로써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을 표현한다. 예술은 개척자이며 폭로자이다. 그런데 예술이 선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혹은 예술가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맨 처음 문학의 용어로 사용된 것은 빅토르 위고에 의해서다. 그러면서 샤를르 보들레르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용어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70년도에 들어서면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예술인들의 혁명적인 정신경향을 총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조금씩 의미가 확대되면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내포를 갖게 되고, 차츰 자신의 몸체를 형성해 온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들 기본적인 개념을 끌어안은 채 다양한 분야에서 당시의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들을 함유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형성해온 것이 아방가르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방가르드는 사상 및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갈등이 미만해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과거의 인습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구가 예술과 만나면서 나타난 일련의 반항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과거의 인습 및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우면서도 진정한 예술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삶과 예술의 영역에서 자유와 해방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문예운동이 다름 아닌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3. 아방가르드의 성격      1) 아방가르드는 개척정신과 선구자적인 자세를 지향한다.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앞장서 문화적 전선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치 군대의 특공대처럼, 전위병처럼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실험은 단순한 이론의 제시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표현으로 새로운 정신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다. 이러한 면에 대한 군중들의 호기심과 비난이 아방가르드의 열정과 생명력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용기와 진취적인 기상으로 적군에 대항하는 특공대처럼 자신의 운명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전포고는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결국 저 자신에게까지도 공격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상 다른 아방가르드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방가르드의 생명력은 불완전한 데에서 솟아 나와 미지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형태와 내용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여기서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필연적인 모순과 시간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2) 아방가르드는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자신을 펼쳐 나간다.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Russel은 사회적 반목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사회적 반목이란 아방가르드 작가가 현대문화의 지배적인 심미적, 윤리적, 정신적 가치로부터 자의식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그러한 가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를 공격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미래파의 선언문에는 용기, 공격, 투쟁의 美 등이 언급되어 있고, 표현주의의 선언문에는 행동, 폭풍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텍스트를 통해서는 물론 작가의 행동이나 언어, 즉 욕설이나 빈정거림 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3) 아방가르드는 전통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어떤 것과도 타협을 거부한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출발은 지금까지의 예술적 전통을 거부하는데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과거의 추억이 간직되기를 원치 않았다. 인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 현상의 하나로 태어난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르네상스 이후 어떤 예술도 자연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견해에 대해 반발하지 못했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입장에 대한 반발은 모더니즘 혹은 그 이후의 예술에서나,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에 와서야 가능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원칙하에 40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온 예술의 흐름,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는 예술의 흐름을 인상주의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했다. 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자신의 특징을 자연의 재현에서 찾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때까지는 예술적 흐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과거 예술과의 단절을 촉진시켜왔던 셈이다. 결국 전통과 인습을 매장시키면서 동시에 예술적 근원을 추구해온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방가르드는 현대적 의식의 일차적인 모습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를 거부한다.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인 무소속, 고립, 계급 탈락, 방랑 등과도 과감히 단절을 강화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그렇다. 아방가르드는 그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단절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이는 기존의 모든 문학적 전통들과 사고방식을 조소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원한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하지만 단절을 통한 자기 고립이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아니다. 예술의 원형을 복구하려 했기 때문에 아방가르드의 단절은 흔히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던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단절의 논리가 실질적으로 가져온 것은 허무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허무의 정신은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도덕적 파괴를 감행하도록 했고, 결국은 분노로 삶을 바라보도록 하는 태도를 형성하도록 했다. 아방가르드가 삶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이해 한 것도 실제로는 여기서 기인한다. 아방가르드의 끊임없는 반항이 급기야는 도덕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 미학은 결국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허무주의로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데, 이는 아방가르드의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아방가르드는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 참여는 실패로 끝나지만 도덕적 반항을 바탕으로 하는 허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지속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의 의미가 상실되기 시작하면서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부정의 행위는 더욱 과격하게 바뀌어 가는데, 그에 비례해 파괴의 양상도 더욱 심해진다. 결국 부정의 행위와, 그에 따른 파괴의 양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허무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이러한 과정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모든 계급 및 가치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잿더미만을 남겨놓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완전한 파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의 소산이다. 다다이즘에 따르면 善, 惡, 美의 기준은 상대적 가치이거나 단순한 언어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느끼는 허무주의는 이내 절대적인 예술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절대적 예술, 곧 역사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해방한 예술, 바로 그러한 예술의 자유를 그리려고 한 것인데,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유토피아를 추구한 예술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 아방가르드가 원하고 있는 자유는 이미 상당 부분 실현되어 있는 것 아니냐며 되물은 바도 있다. 결국 예술의 자유라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 아방가르드는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부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이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 자체를 다시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을 생명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이미 열린 문을 부수고 있다는 비판은 아방가르드가 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기막힌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오히려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詩와 관련해 시를 위해 존재한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에는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詩를 재생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본질적으로 시의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데, 이는 현대에 들어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는 과거의 시가 지니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순수와 서정, 곧 상상력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는 사실 아방가르드에게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이다.      아방가르드는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방가르드는 원형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깊이 있게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원상(原象)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의 인습과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의 모델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의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세계에서 심미적 절정을 이루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현실에 대해서는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비관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소간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에는 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미를 향한 강렬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5) 아방가르드는 미래 지향성을 갖는다.      아방가르드가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미래라는 말은 아방가르드의 선언문이나 작가들의 말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미래성 때문에 때로 폭동을 정당성하게 여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현재성, 곧 미래성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아직도 온갖 모욕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방가르드의 핵심 예술경향의 하나가 미래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성공은 먼 훗날에나 알 수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작가는 아예 자신의 성공 여부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작가는 영원히 산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의 아방가르드가 만드는 성공을 볼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내적 논리에 의해 작가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는 창조적 반항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더라도 말이다.      4. 유럽의 아방가르드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지성인들은 과거의 시대가 멀어져 갈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지적 유산과 전통이 전쟁으로 파멸버렸다는 것을통감한다. 이른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감지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다양한 작업에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던 것이 당대의 지성인들이다. 때마침 불거져 나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당시의 예술사상 일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인 모럴은 물론 기독교도적 가치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운 지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      문학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소재와 형식을 버리고 현대에 알맞는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이룩하려고 하는 모더니즘의 도전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보들레르에서 출발하는데, 아폴리네르에 이르러 형식과 내용면에서 적극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고 실험의 대상이 된다. 또한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글에서 “진실은 숭고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내재해 있으며, 驚異야말로 모든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해 그 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후에는 프랑스 미래파의 거장인 그 자신도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깊이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모든 예술계가 적극적으로 부응하는데, 1909년에는 마침내 이탈리아의 마리네티가 파리의 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미래파 운동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기계문명의 도래를 예고했는데, 이는 후에 새로운 시어 개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미래파는 인류의 미래와, 예술에 나타날 새로운 관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과거의 우상을 파괴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과 도서관을 부수자는 말조차 서슴지 않았으며, 갇혀 있던 예술을 일상적인 삶의 위치로 끌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미래파 시인들의 첫 시집의 이름이 『언어에게 자유를』이란 점도 그들의 이런 노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미래파 시인 중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앞장섰던 마야코프스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야 말로 이 시기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다다는 1916년 츄리히의 카바레 에 모인 젊은이들에 의해 출발되었다. 그런 뒤 초현실주의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1922년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해체를 선언하는 6년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크게 풍미했던 예술운동이었다. 다다의 의미는 매우 우연적이다. 다다라는 용어가 받아들여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다의 작가들은 다다의 무의미성이 정신의 소멸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의 붕괴라는 내적 의미를 갖는다고 믿었다.      다다는 무엇보다도 전쟁과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념과 논리에 대해 반발했다. 국가를 위한다는 논리로, 신을 위한다는 논리로 이루어진 전쟁의 비극과 파괴를 경험한 그들은 언어 및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문학과 예술은 물질세계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나타낼 뿐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도덕성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회의를 부르짖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18년에 이루어진 다다이즘의 선언에서는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다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우연과 직관에 의해서만 올바른 현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성과 필연은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다이스트들이다. 따라서 관습과 습속, 속박은 언제나 그들의 저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다다이즘의 주도자인 차라의 말이다.      나는 모든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든다. 가장 받아들일 만한 체제는 원칙적으로 말해 아무 체계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다다가 기존 예술의 역할을 혐오한 것은 그것이 제도화되어 있다고 믿었고 형식화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제도와 형식이 인간의 생생한 경험을 끊임없이 왜곡시킨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다이즘 운동은 표현의 직접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다이즘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정신을 함유할 수밖에 없다. 낡아빠진 기존의 표현방식에 대해 완전한 파괴를 추구하는 것이 다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쟝 뽈랑은 언어로부터 이처럼 범속하고 인습적인 형식 및 상투구를 완전히 제거하고,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함정을 피해 순수하고 신선하고 시원적인 영감에 호소하고 있는 이들 다다이스트, 즉 언어파괴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까지 부르기까지 했다. 따라서 이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에서의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다는 그 표현에서 언어의 연상 작용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이나 언어의 구문도 거부한다. 미래파의 영향을 받아 부사나 형용사를 되도록 쓰지 않으며, 구두점을 찍지 않고, 단어의 의미보다는 소리나 억양, 리듬 등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아폴리네르는 상형시 즉, 글자를 어떤 의미를 띤 형태로 배열하는 그림처럼 된 시(구체시)를 고안하기도 했으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를 읽는 동시시(영대시)를 주창하기도 했다.      다다가 인정하는 가치는 개인의 자발성에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진 것으로 인해 예술도 진정한 창조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발성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 각양각색의 예술적 실험을 했지만 따로 자신들 내부에서 이론적인 통일성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면이나 기교의 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유한 원칙도 없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하여 다다는 예술론과 창작활동 사이에서 모순점을 안고 있었으며, 떠들썩한 활동에 비해 창작의 면에서는 별다른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다다는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도 20세기의 예술의 진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해주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다이즘이 미래파에서 비롯되었다면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창시했다는 사실에도 잘 나타난다. 다다이즘의 자기부정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속박 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이성의 횡포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을 석방시키고자 한 예술운동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예술운동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11월, 앙드레 브르통이 을 발표하면서 개막되었다. 이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적인 경험과 무의식 속의 경험을 일치시켜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 합리적인 세계와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러한 예술관은 무엇보다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강조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낭만주의나 상징주의는 예술의 목적의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무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자동기술이다. 자동기술은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순식간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을 가리킨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을 재빨리 받아쓰는 것이 자동기술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자동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동기술은 말이다. ‘욕망’이 되는 말이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욕망에 몸을 맡기는 말이다.”      자동기술은 작가가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작가의 미학적 기준이 발동하게 된다는 점과, 의식을 잠재우게 되는 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자동기술에는 인위적인 면이 강하다.      자동기술법은 최면술과의 혼동으로 인한 오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절대적인 자동기술은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그것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또한 객관적이고 외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과연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ㄷ면 진정한 표현은 침묵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예술에서 침묵과 같은 지적인 자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초현실주의에서의 자동기술은 이처럼 모순적이다.      다다이즘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도 구체적인 창작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했다고 해야 옳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는 운동의 산물인 작품이 직접적인 예술적 성과와 가치를 획득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징주의 운동 말기에 이르면서 문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점과, 삶으로부터 단절되면서 문학이 갖게 되는 不毛性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도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스페인의 아방가르드      스페인의 아방가르드는 루벤 다리오(Ruben Dario)에 의해 모더니시모(modernismo)가 수입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한다. 그러한 과정에 스페인에서는 다시 새로운 문학 운동에 대한 열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물결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는데, 이 물결이 스페인라고 그냥 지나갈 리는 없었다.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이 있고 나서 스페인에도 아방가르드가 소개되었고, 그 이후 스페인식 아방가르드 운동인 울트라이스모가 모더니즘 운동의 뒤를 이어 중요한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울트라이스모는 모더니즘의 호화스러운 수사법과 이야기 스타일, 감상주의, 음악성 등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주의의 테마와 같은 현대문명의 산물들을 소재로 하여 비유와 이미지에 의거하는 시적 표현 방식을 추구한다.      초기에 아방가르드의 물결을 수용하고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구이레르모 데 토레)(Guillermo de Torre), 고메즈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와 게라르도 디에고(Gerardo Diego)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 문명 속에서 테마를 추구하고, 은유적 곡예(acrobacia metaforica)를 위해 감정적, 일화적 요소를 배재한다.      이들 중에서 특히 고메스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는 초기 서반아 아방가르드의 개척자적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는 간단한 형태의 유모적인 은유가 눈에 띄는 ‘그레게리아’라는 형태의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라면 “사물이 스스로 외치는 소리”이다. 그의 시작법은 사물이 가끔씩 보여주는 숨겨진 의미나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이러한 그의 ‘그레게리아’는 심각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단순함과 현실의 파괴를 기반으로 한 장난스러운 문학이었다.      울트라이즘이 시들고 나서 Vicente Huidobro(빈센트 후이도브로)의 창조주의(Creacionismo)를 표방한 Gerardo Diego(게라르도 디에고)는 뒷날 과거 공고라의 시풍은 물론 초현실주의의 시풍까지 받아들여 자신의 시를 현대적으로 승화시켰다. 디에고의 창조주의에 따르면 시는 자연이나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언어의 창조이다. 그의 기발한 이미지는 아방가르드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는 27세대의 복고주의의 시어 개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창조주의는 지금까지 시에서는 절대적인 법칙처럼 여겨져 오던 자연이나 인간의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방은 가장 인간적인 본능이며 쾌락이다. 당시까지 모든 예술은 이 모방에서 자신의 시작점을 찾고 있었다. 창조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을 탈피하려고 했다. 이제 디에고(Diego)부터는 말이 시를 쓰는 시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창조주의의 원조인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의 시학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디에고(Diego)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창조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표현방법일 뿐이다. 창조의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낸다거나 혹은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디에고는 창조주의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에도 능숙하기 때문에 전통시와 아방가르드를 적절히 조화해 극도의 상징적 미를 창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방가르드와 그 자신의 경험을 합쳐 독특한 詩世界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름으로 독립된 채 스페인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초현실주의의 경우 독자적으로 스페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방가르드라는 분위기 전체에 묻혀 들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스페인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도 없다.      아방가르드(특히 초현실주의)의 시작법은 로르카(Lorca)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그 반발로서 순수시(Poesia pura)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의 하이꾸에 대한 모방을 포함한 아방가르드의 표현기법은 스페인의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져 시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이는 나아가 극단적인 비논리, 비이성의 시학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기까지 했다.   5.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논할 때 첫 번째 주인공으로 거론해야 할 시인은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이다. 그는 창조주의(Creacionismo)의 선구자이며, 그의 창조주의는 전 스페인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창조이며,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모방론적인 시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시인이여, 어찌하여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 장미를 꽃 피우라.      이보다 더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 시론을 나타내는 말은 찾아 보기는 어렵다. 창조주의 시론에 따르면 시인은 자연을 흉내 내지 않고 작은 신이 되어 시 속에서 창조하는 자유를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시는 자연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연과는 상관이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창조주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감흥의 재료가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도 결국 주관적인 재창조의 결과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창조되어진 것이거니와, 시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창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창조주의 시학은 다다와 같은 완전한 파괴주의 문학경향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학의 재건에 더 치중한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노 브룰은 아방가르드의 가장 극단적인 개혁의 하나인 글자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글자시는 의미체계의 최소단위인 단어를 파괴해 시인의 독자적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그 고유의 언어로 이루어진 시를 말한다. 한 나라의 국어는 시인의 영감을 표현하는데 언제나 최후의 장벽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글자시다. 이것이 마리아노 브룰에게 수용되어 당시 아방가르드의 한 줄기를 이어갔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이후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띈다. 네루다의『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 절망의 노래』는 중남미 초현실주의의 최고봉을 이룬 시집이다. 그의 시 쓰기는 먼저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후에 수정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유럽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자동기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시작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무의식에는 불연속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네루다(Neruda) 이후 중남미의 초현실주의는 옥따비오 빠스에게로 넘어가는데, 옥따비오 빠스는 네루다와는 달리 프랑스 초현실주의에 직접 영향을 받아 시에 새로운 현실을 담아낸다.   6. 맺는말      아방가르드가 전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준 영향은 그렇게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어권 내에도 아방가르드가 수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에 수입된 아방가르드는 각기 독특한 형태로 각색되면서 시인과 문화권에 따라 크게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 작가는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은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실제로는 스페인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시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것에 불과한 듯싶기도 하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한 다음 스페인이나 중남미 작가들은 기존의 유럽의 반항아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일반, 그리고 유럽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성격과 표현방법을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히 기술을 하지 못했다.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각각의 詩人에 대한 기술이, 특히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시인에 대한 기술이 충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도 여기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이 가장 첨단적으로 실험되었던 것이 아방가르드 시대이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에 대한 공부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 오늘 여기서 아방가르드에 대해 탐구하는 가장 주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현암사, 1992), pp.131- 180. 민용태, 『서중남미 명시 사냥』, 《현대시학》 5-10월호 (1993). 민용태, 『서중남미 문학론- 제 3의 문학의 현장에서』(전예원, 1989), pp.291-325. 박 철, 『스페인 文學史』(삼영서관, 1989), pp.239-306. 신현숙, 『초현실주의』(동아출판사, 1992), pp.15-18, pp.61-66, pp.75-107.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ㆍ염무웅 共譯,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 - 現代篇』(創作과批評社, 1992), pp.227-240. 아드리안 마리노, 「아방가르드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외국문학》 제1호(1984., 장선영, 『西班牙 라틴아메리카 文學史’』(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87), pp.165-170. [출처]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작성자 옥토끼
1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댓글:  조회:199  추천:0  2018-09-06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                                     민 용 태(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고려대 명예교수)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는 초현실주의 시에 드리워진 말라르메나 렝보, 르뜨레아몽의 영향을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자동 필기법(Automatism)”이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주의 시인들의 갈고 닦아진 시어를 증오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히 빈상징주의자들이다. 초현실주의의 신은 절대 자유였다. 앙드레 브르똥은 말한다: “자유라는 어휘만이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전부이다. 이 어휘만이 안류의 낡은 영광주의를 무한히 유지하는 데 적합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휘만이 나의 유일하고 절당한 갈증에 답변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그 숱한 불명예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가 또한 우리에게 상속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의 자유를 지독하게 악용해서는 안 될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상상력을 노예 상태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소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조잡하게 불리는 명칭과 관계될 때 조차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정당성을 죄다 도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고, 상상력이 그 가공할 금기 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으며, 그리고 기만당할 두려움 없이 내 자신을 방임할 수 있는 곳 역시 이 상상력 속이다(더 이상 기만당할 수도 없겠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의 잘대적 정신의 자유에 대한 집념은 마침내 문학까지도 거부하게 만든다. 제1 선언에 이어, “1925년 1월 7일의 선언”은 더욱 단호하다. “첫째, 우리는 문학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에 따리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이용할 수는 있다. 둘째, 초현실주의는 새롭고 편리한 표현 수단도 아니며 시의 형이상학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수단이다.(이하 생략)” 즉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상상의 자유를 최대로 확장시켜,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까지를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쉬르레알리즘은 문학 뿐만 아니라 회화, 기타 모든 시각 예술을 비롯 모든 인간 해방 운동에 혁명의 기치를 든다. 그들의 해방운동적 성향은 마침내 엘뤼아르, 아라공,브르똥 등이 연 이어 공산당에 가입하는 정치적 색체까지 띠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실천이라는 변증법적 진실에 직접 참여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자유 해방 정신의 확장 과정에서 비롯된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리라. 초현실주의 이런 혁명적 성향은 일체의 전통과의 단절을 부르짖었던 “전위문학(1916-1923)”고도 일맥 상통한다. 쉬르레알리즘이 트리스탄 자라의 “다아이즘”에서 나왔다는 이론도 그래서 타당성이 있는 것. 아방 가르드 예술은 많은 경우 재래의 모습 예술 형식과 사상을 일체 거부하는, 매우 낙천적인 파괴주의였다. 이들은 일체의 형식의 파괴를 앞세웠던만큼 장난끼와 유모어로 가득찬 예술운동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별다른 시학도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전위예술의 해방 정신을 “자동필기법”이라는 시학으로 대치한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는 그러나 전위예술만큼 낙천적이지는 못 했다.억압된 본능의 해방을 위해 쓰여지던 “자동필기법”은 구겨지고 문드러진 잠재의식의 혼란스러운 표출이었던만큼 때로는 지극히 어둡고 염세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든 초현실주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창작의 산실로 초대하면서, 혼란과 우연을 그의 텍스트 속에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브르똥과 수뽀가 함 께 펴낸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에서 그들은 최초로 자동 필기법을 실험하는데, “꿈과 불면의 중간 상태에서 시적인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번 백지 위에 우연히 떨어진 말은 그대로 필연이 된다. 그것은 마치 “유리창에 부딪힌 말”처럼 더러는 투명하고 더러는 흩어져 사라진다. 이들 불가사의한 낱말들, 쇠붙이들이 서로 끌고 당기며 이룩하는 연상의 자장(磁場)이 바로 시라는 것.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의식의 눈에는, 우선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프로이트 같은 의사나 상상력이 자유로운 독자의 눈에는 또 의미가 보여지고, 때로는 황홀한 꿈의 체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말라르메나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법을 거부한 것은 힘들여 연상을 다듬고 짜 맞추는 그 인위적 과정이 위선이라는 것. 그것은 시작 과정에서 시인 자신들조차 자유롭지 못한 억압이니 행위라는 데 있다. 이미 말했듯, 초현실주의는 좋은 시 좋은 문학 만들기보다는 일종의 해탈을 위한 정신 수양에 있었만큼, 그 작업 행위 자체까지 정신 해방 연습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시적 영감이란 천재적 재능이 있는 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을 가장 자유롭게 끌어낼 수 있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어떤 시인의 천재성이나 개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을 표출하는 건강한 집단시(集團詩)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맛있는 시체 놀이(Exquisite 이다. 여러 가지인데, 첫번째 사람이 명사 하나를 쓰고 그 종이를 접는다. 다음 사람이 형용사, 또 다음 사람이 형용사...이런 식으로 앞 사람의 말을 모르고 써 나가면 하나의 부조리하고 신선한 시구나 정의(?)가 태어난다는 것. 또 다른 방법은 한 시인이 시 한 연을 쓰고 덮고, 다음 시인이 그 끝줄이나 맨 앞줄을 보고 다시 한 연을 쓰고....이런 식으로 여럿이 한 시를 만들어가는 놀이. 말하자면 하나의 시인이 작위적으로 뜻이나 연상이 통하는 이미지들을 엮어가는 것보다는, 놀이에 참여한 각 시인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우연히 떠오르는 말들을 적어감으로서, 이들 무작위한 시어들이 만들어가는 의미의 무늬들을 감상하는 재미를 즐기자는 것. 이런 놀이는 마치 우리의 선인들이 포석정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연작 시 놀이를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여기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더러 신선한 태어나는 기적을 맛보았다는 점. 그래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맛있는 시체가 새로운 와인을 마시리!” 하고 놀이를 즐겼다 한다. 물론 쉬르레알리즘의 이런 자동필기법은 실제로 상투적 시어와 참신하지 못한 시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들이 의식적으로 시 만들기에 쏟는 억압적 노력과 상황에서 해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린슨은 일본의 렝가(連歌)를 모방하여, 1971년 빠리 어느 호텔에서, 또 다시 “맛있는 시체 놀이”와 같은 연작시를 시도한다. 각각 스페인어, 이딸이아어, 불어, 영어로 씌여진 시는 우리 동양시가 기대한 만큼 기(氣)의 통일성이나 현묘성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시창작의 개인적 작위성을 누그려Em렸다는 점에서는 기억할만한 사건이었다. 이제 우리는 초현실주의 전개 역사나 인간정신 해방 운동의 성패(成敗)에 대해서보다는 쉬르레알리즘 시학의 수사학적 측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예술 운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현대시에 엄청난 시어의 개혁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서반아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카를로스 보우쇼뇨는 그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라는 책에서 초현실주의가 시표현의 새로운 상징의 문을 열었음을 상세히 파헤치고 있다. 형식주의 문학론이나 구조주의 시학은 시대적으로 아방가르드 문학의 봉기와 초현실주의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형식주의 발아 시기가 볼쉐비키 혁명 전후 1916년경이고, 그 때가 또한 구조주의의 원조 페르디난드 소쉬의 “일반 언어학 강론”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창작문학이나 언어 이론, 문학 이론의 일치점은 현상학적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언어가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다. 형식주의가 문학은 사상이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그 문학성이 달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해방은 그가 쓰는 언어의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언어의 중요성의 인식에서 일치한다. 이미 언급한 쟝 꼬앙의 “시어 구조”론이나 보우소뇨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 등의 이론은 형식주의와 함께 구조주의적 시어 분석이 뛰어나다. 구조주의 시학의 공헌은 문학어, 시어가 일반 산문어와는 다른 “반산문” 혹은 “일탈(desviación)” 현상이며, 그 저항 이유는 뜻하지 아니한 연상을 통한 숨겨진 일치점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데 있다. 말을 바꾸면, 마야코프스키를 비롯한 미래주의 시에 관심을 둔 형식주의의 발견처럼, 문학어는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일상어에 대하여 일부러 “낯설게 하기(singularization)” 언어인 것이 밝혀진다. 구조주의는 그 “낯설게 하기”가 다의미(polisemia) 산출의 방편이었던 것을 지적한다.즉 정서적, 영상적, 관념적 다의미를 지향하는 문학어는 일상어의 관습성, 논리성을 파괴하는 것을 항상 전제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카를로스 보우쇼뇨의 이론에 따르면 초현실주의 시는 시어의 사용에 있어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상징주의의 시에 비해 엄청난 시어 성격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전래의 시어나 상징주의 시가 구문이나 언어의 관습성에 있어서 “까만 하늘”같은 표현처럼 맞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자동차의 코”같은 표현처럼 상당하지 않는 부분에 “코”를 갖다 붙이는 이상한 표현을 일삼았다면, 초현실주의 시어는 “관계없음(inconexión)”, “구문 상으로는 일치하나 내용상 관계 없음”, “제멋대로의 표현(autonomía)”이 성행한다고 말한다. 초현실주의 시의 이런 반언어적 시어 구조는 그러나 연상 의미에 있어서 “선험적 일치점(ecuaciones preconscientes)”을 야기시키거나,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상상을 자극한다는 것. 초현실주의로부터 시어는 일상어의 이해와는 달리, 우연하게 떨어진 시어라할지라도 그 당위성을 가지며, 독자는 그 당위성의 바탕 위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 필연성을 요구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잘 번지는 창호지 위에 떨어진 붓 자국처럼, 그 점이 무슨 점, 무슨 강, 무슨 호랑이의 모습으로 번져갈 줄은 모르지만, 일단 떨어진 붓 자국의 무늬는 절대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자유라는 것. 보우쇼뇨는 몇 번이고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시인 비센떼 알레익산드레의 다음 두 구절을 예로 든다. 1. “나의 목 휘감지 말아요, 밤이 온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2. “너의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거야, 폭풍이 퍼렇게 멍이 드는 동안” 1의 경우는 그래도 연상이 가능하다. 목을 휘감으면 눈이 가려질게고, 그러면 나는 밤미아라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논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가린다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여기서의 알레익산드레의 독특한 사랑관, 사랑은 파괴요 죽음이라는 엄청난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 것. 2의 경우는 정말 부조리 그것이다. 이 시인의 시를 이해하려면, 우주의 현상이 시인의 내적 갈등에 지배된다는 새로운 기상 원칙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폭풍”은 원칙 없이 “너의 심장”의 어떤 고뇌스러운 현장이 되어야 한다. 심장이 어떻게 “입으로 튀어”나올 수 있느냐는 다음 문제이다. 이쯤 되면 시어사용은 그야말로 자유자제다. 나는 문득 이 태백의 “...나 술 취했으니 잘라네./ 생각나면 내일 거문고 들고 다시 오게나”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초현실주의 시법은 표면상 이처럼 무책임하면서 자유롭다. 예술혼이 도학(道學)의 경지처럼 극도의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통하는 언어이다. 역사상 초현실주의는 “사랑과 시와 자유가 동시에 추구되는” 현실적 혁명을 시도했다. 그것은 역사상 실패한 운동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초현실주의는 동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여물어졌다고 본다. 그것은 옥따비오 빠스의 일본 시나 당시에 대한 심취, 그리고 특히 탄트리즘과 노장사상, 역경에의 탐익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장자의 “소요유”의 경지에서처럼 의식이 우주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초현실주의는 또다른 차원의 커다란 자유를 느낀다.       현대 문예 사조에 있어서 동서양의 교류     동양의 20 세기 문예 사조는 서양의 영향 하에서 생겨난다. 일본의 근대 문학이 그렇고 중국의 “백화문학”이 그렇다. 또한 우리의 “신체시(新體詩)”도 서구의 낭만주의 상징주의의 영향 하에서 싹튼다. 실제로 동양의 오늘 문학은 서양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재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각각의 언어적 속성에 크게 지배 받는 것인만큼, 동양이 서양 문학 형식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국의 언어나 전통에 의하여 재각색된 형태들이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동양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나 소설, 연극의 원형들은 동양 전통의 계승 측면보다는 서양의 그것의 모방성이 두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늘 시를 쓴다면 누구나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소설을 쓴다면 사실주의적 기법을 생각하는 것도 모두 서양에서 온 사고들이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본에는 하이꾸(俳句)가 쓰여 지고 우리 문학에도 시조가 살아있다. 또한 문학 내용의 측면으로 살펴보아도 노장(老莊)이나 불교적 관조가 두드러진 것이 동양 문학들이다. 더구나 동양인적 섬세한 감수성과 심미주의에서 잉태된 많은 시나 소설들이 반드시 서양 문학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대상이나 소재도 모두 각 나라의 정서나 문화 환경에서 잉태된 독창성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사고 자체가 다분히 서양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가 “동서 문예 사조”를 이야기하면서 서양 문예 사조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은 비로 이 때문이다. 즉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한 통념이나 작법들이 대부분 서양 전통에 말미암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사고가 그 본거지에서 어떤 당위성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를 정확히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우리 동양에 이와 비슷한 전통의 뿌리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었던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했던 것. 이제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현대 문학 사조를 대별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현대 문학이 바로 이것들을 모방하며 자라왔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 문학을 모르고 오늘 동양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양 현대시의 일반적 형식인 자유시는 서양의 “상징주의”의 산물이며, 그 또한 시적 언어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형시에서처럼 시행을 음성적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자를 때와 자유시에서처럼 자유롭게 자르고 붙일 때의 차이는 크다. 자유시에서의 시행 바꾸기는 왜 꼭 거기에서 시행을 옮기는가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또 필요하다. 한국시가 서양의 자유시 형식을 본따고 자라오면서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양의 상징주의가 만든 자유 시 형식의 그 엄청난 혁명성이다. 그 때까지 서양시는 시(versus)라고 하면 곧 정형시를 일컬었다. “versus”의 어원 자체가 “되돌아온다”는 리듬의 뜻에서 발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상징주의는 시어나 시행의 모호성과 다의미 산출을 욕심냈다. 서양 시에서 종래의 시행(정형시행)은 소리 단위의 제약을 받은 의미 단위였다. 예를 들어 11 음절이면 무조건 10음절에 리듬의 축(axis rítmico)을 둔 각운(脚韻,rima,)을 필요로 했다. 10 음절부터 11,12 음절 안에 시행(verso,verse)은 끝난다. 그러다 보니, 소리의 제약에 따라 이따금 문장이 한 시행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다른 시행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런 “넘어가기”를 수사법적 용어로 “뛰어넘기(encabalgamiento)”라고 하며, 이런 경우 시행을 뛰어넘은 한 문장으로서의 의미와 주어진 시행 그대로의 단독 의미라는 두 의미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뛰어넘기” 수사법은 정형시에서는 흔히 음절 맞추기적 필요성에서 생긴 결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절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시에 와서는 시행 바꾸기가 그 때 그때마다 “왜?”라는 의미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자유시는 시행이 산문의 문장(oración,sentence)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장은 시행과 달리 하나의 소리 단위, 하나의 의미 단위이다. 자유시가 산문의 문장의 법칙을 시행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면서, 말하자면 시인의 마음대로 시행을 바꿀 수 있게 만들면서, 이제는 “왜 여기에서 시행을 바꾸는가?”라는 질문에 시시각각 대답해야 하는 의미 요구를 받게 되었던 것. 따라서 많은 의미 산출을 욕심내던 상징주의가 자유시를 도입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행 바꾸기 형식조차도 정형시의 의미 외적인 외재율보다는 또다른 의미 산출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한 문장은 한 소리 단위면서 동시에 한 의미 단위이다. 이제 시는 이런 산문의 문장적 성격을 시구 나누기에 도입함으로서, 자유시의 한 시구는 이제 반드시 하나의 의미 단위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 받게 된 것. 자유시 형식이 우리 시에서도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시나 시조가 모두 정형시였으니까. 그러나 우리 신체시는 중국의 백화문학처럼 우선 문학의 문어체, 한문시, 한문체에 대한 구어체로 쓰기에 더욱 열중했다. 김안서나 소월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은 구어체로 신시를 쓰면서 그 율격의 문제를 민요에서 따오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차차 자유시체로 우리 시가 정착해간다. 말하자면, 시 리듬 자체의 벽혁의 혁명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새로운 시형식, 말하듯이 놀해하듯이 자유롭게 쓰기라는 이상한 “신체시”가 생긴 것. 여기에서 우리 시는 민요조로 쓰느냐, 아무렇게 자유시로 쓰느냐에 대한 고민의 순간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왜 꼭 이 시를 자유시로 써야 하느냐 하는 고민조차도 우리 시인들에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는 상징주의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장치인 시형식의 묘(妙)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음(音) 상징의 묘(妙) 또한 우리 시에는 그다지 오묘한 것들이 드믈다. 그 이유인 즉, 우리는 서구 상징주의의 다의미 창출의 고뇌와 형이상학적 깊이보다는, 이와 너무 다르게 우리 시의 시표현이 흔히 안이한 감정주의적 서정성에 머문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상 서양의 상징주의는 동양의 예술이나 시를 많이 모방하려 애썼다. 내가 “서양 문학 속의 동양”에서 자세히 연구하고 있듯이, 호꾸사이 그림의 여백(餘白)의 아름다움이나 동양시의 여운(餘韻), 하이꾸의 의미성 등은 서구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학자에 따라서는 자유시가 동양시 형식의 모방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것은 라프까디오 헌이나 로띠 같은 동양을 서구에 소개한 작가들이 쓴 동양시의 자유로운 번역이나 서정적 글들이 새로운 시표현의 가능성을 여는데 기여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유 약우의 “중국의 문학 이론”은 동서가 비슷한 문학 이론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늘 이야기한다. 그는 중국의 심미주의 이론을 열거하고,“...서구에도 비슷한 것이 많다”는 식으로 개관한다. 그는 특히 에즈라 파운드의 “시각시(Phaopoea)”, “음악시(Melopoeia)”, “언어시(Logopoeia)”가 유협(劉勰)의 세 가지 무늬들 “형문(形文)”, “성문(聲文)”, “정문(情文)”과 비슷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이 추상적으로 미(美)를 논의하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오스카 와일드의 심미주의처럼 부도덕성까지 아름다움으로 간주한 경우는 중국 문학에 없었다고 못 박는다. 나는 동양시의 서정성이 다분히 서양의 후기 낭만주의적 감성하고 일치한다고 본다. 감정의 내적 성찰이나 암시성이 동양시에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성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동양시가 더욱 탁월한 것은 상징주의 시가 개척한 동감각(synaesthesia)의 시적 활용이다. 이미 에즈라 파운드가 중국시의 이미지즘을 격찬했듯이, 실제로 동양시, 특히 당시(唐詩))에는 뛰어난 이미지의 활용이 보인다. 정 상홍은 “중국의 시론과 화론 1--산수시와 산수화”라는 글에서 왕유의 시에 대한 소식(蘇軾)의 평을 인용한다. “왕유의 시를 맛보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즉 저 유명한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전통은 왕유뿐만 아니라 모든 동양시에 뿌리가 된다. 같은 글이 인용한 왕유의 “산중(山中)”이란 시를 보자.   “형계엔 흰 돌이 드러나 있고 날씨 차거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   위 시에는 엄청난 공감각이 높은 시취를 자아낸다. 먼저 “날씨 차가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는 붉은 색,즉 따뜻한 색과 차가운 날씨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촉각적 “차가움”과 시각적 “붉은 단풍”이 공감각(촉각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멋진 공감각 활용은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空翠濕人衣)”이라는 절구다. 파란 색깔이 어찌 옷을 적시랴. 이를 강조하기 위해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이라는 시구까지 달고 있다. 이런 표현이야 말로 공감각을 사용한 훌륭한 인상주의 그림이 아닌가. 우리는 상징주의와 인상주의가 상당히 혼동된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바꾸면, 동양시의 이런 인상주의 전통은 서구 상징주의가 그토록 탐내던 자연 속의 사물 사이의 교감을 이루어내는 장치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향 받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바로 동양 예술의 이런 영상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심취했던 것. 나는 동양시의 영상미가 서구의 상징주의처럼 심오한 형이상학적 시취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안다. 그것은 동양시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배, 거기에 직감(直感)을 존중하는 진솔성이 서양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동양시는 시도(詩道)를 추구하는 반면에, 서양시는 끝까지 상징적 의미 추구의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양 시인의 자연의 오묘성에 심취하여 삶의 향기를 이루어내려는 풍류정신이 앞서는 반면에, 서양은 신과 우주의 궁극적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열념이 시작에 있어서까지 앞서고 있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있어 모호성이란 결국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기대감의 확대이지, 천인(天人)합일이나 자연 속의 무아(無我)지경, 혹은 깨달음을 향한 열망은 아니었다. 동양 시인이 끝까지 시어나 말에 크게 무게를 주기보다는, 오하려 마음의 기(氣)나 풍경과의 합일에 마음을 쏟았다면, 서양 시인들은 마지막까지 말의 탐구, 시어의 표현 가능성의 확대에 더욱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 뜻에서 시인의 잠재의식의 해방까지 꿈꾸었던 초현실주의 또한 자연 중심, 풍경중심적 시학아라기보다는 인간중심의 해탈운동이었다. 자기를 버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불교나 노장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반(反)이성적 이성운동이었을 뿐이다. 동양이 서양에 배울 것이 있다면 시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보다 투철한 개척 정신이다. 서양은 17 세기 바로크 문학에서부터 “인공적인 것이 아름답다(공고라)”는 것을 발견하고 문학하기에 있어서 말과 수사학을 최대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어쩌면 해체주의의 주장처럼 어차피 진리나 자연을 원 모습, 원가(原價) 그대로 표현할 언어는 없다는 확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말을 바꾸면,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자연을 모방한다는 가능성을 벌써부터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말의 놀이 속에서 빛과 아름다움의 무늬를 산출하는 재미를 맛보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서양은 동양에서 언행일치(言行一致),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적 이상에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행동과 삶을 그대로 구현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거기에 중용(中庸)에서 주장하는 성(誠)이 촉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자연에 대한 성실한 사랑으로 언어를 빚을 때, 시인의 성실성에 흠이 없을 때, 인간은 성인스러운 절묘한 언어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이 최소한도 동양 시인의 믿음이다. [출처]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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