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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날짜 :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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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詩를 잃어버린 아이들 /권정생 댓글:  조회:113  추천:0  2019-09-20
시詩를 잃어버린 아이들 권정생 (1937∼2007 아동문학가) 옥이네가 살던 절안골 외딴 곳에는 고만고만한 초가집이 네 집이 있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논밭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 때 묻지 않고 착하게 살았다. 감자밥 보리밥이 그다지 싫지 않고 뭣이나 맛이 있고 따뜻했다. 옥이네 삼촌 내외만 빼놓고는 모두 삼대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었다. 닭들이 울타리를 넘나들며 봄에는 어미닭이 병아리를 까서 데리고 다니고 개들이 텃밭을 뛰어다니고, 송아지도 함께 장난치며 다녔다. 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들이 집 뒤꼍에서 무성히 자라고 맛있는 과일을 달아주었다. 십 리길이 넘는 장터에 장이 서면 아버지들은 올망졸망 장거리를 짊어지고 갔다. 해질녘이면 외딴집 아이들은 산모롱이까지 아버지 마중을 가서 갖가지 사온 물건들을 받아들고 깡충깡충 달려왔다. 이날 저녁은 모든 집에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나고 저녁상 앞에서 아버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얘기에 정신이 팔린다. 호롱불 밑에서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는 저절로 정신이 홈빡 빠지게 마련이다. 날라리 약장수 이야기, 동동구리무 분장수 이야기, 야바위꾼 이야기, 장터에서 일어나는 얘기는 밤이 깊도록 들어도 재미가 있다. 봄이면 온산에 진달래꽃이 피고 여름엔 산나리꽃이 피었다. 이쪽저쪽 골짜기에 흐르는 물은 깨끗해서 그냥 퍼마시고 미역도 감았다. 가재도 잡고 버들치도 잡고 쟁개미도 잡았다. 가을엔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열리고 여름엔 눈이 내리고 노루랑 토끼들이 집 마당까지 먹을 것을 찾아 내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옛날얘기를 들려주고 움 속에 묻어둔 배추뿌리도 깎아먹고 날무도 깎아먹었다. 좀 가난하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외딴집 마을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이 절안골 외딴집들이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그곳 아이들 말대로 하면 “대통령 아버지가 전깃불도 넣어주고 텔레비전도 넣어준댔어요.” 이렇게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외딴집 아이들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에 국민 학교만 마친 채 도회지의 공장으로 뿔뿔이 떠났다. 개울 건너편으로 자동차 길이 뚫리고 못골 옆에 난 데서 온 사람이 목장을 만들었다. 옥이네 삼촌도 도회지로 떠나고 탄광 갔던 인수네 아버지는 폐암으로 죽고 할머니만 남았다. 조용하던 골짜기가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 꿈같은 행복을 약속했던 대통령들도 모두 가짜로 드러났다. 군사정권은 농촌을 이렇게 망가뜨렸다. 지금은 절안골 외딴집 네 집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신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주변 논밭들이 높은 값에 팔려나가자 근방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객지로 떠났다. 수정처럼 깨끗하던 골짝 물은 구정물로 바뀌어 지고 버들치도 쟁개미도 가재도 모두 사라졌다. 이용가치가 없는 골짜기 따비밭이나 다락논들은 가꾸는 사람이 없어 쑥대밭이 되었다. 베틀가나 물레노래를 부르며 길쌈을 하던 할머니도 없고 논매기 노래와 밭매기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던 할아버지 아저씨도 없다. 장날이면 술 취한 장꾼을 골탕 먹인다는 톳제비(도깨비)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외딴집 아이들은 뿔뿔이 헤어져 어디서 어느 기업체 사장님 밑에서 공장노동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더러는 원하지도 않는 어둔 뒷골목에서 타락해버린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 아버지가 약속했던 꿈같은 행복은 이렇게 절안골 아이들의 운명을 바꿔버렸다. 농촌에 아이들이 없어 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쨌든 타의든 자의든 젊은이는 농촌을 마다하고 떠나갔고 아이들도 끌려갔다. 왜 이래야만 되는 걸까? 오래 전에 여름 뒷산에 뻐꾸기도 울지 않고 꾀꼬리 소리도 듣기 어려워졌다. 산에는 새가 날아오지 않고 강물엔 물고기가 없고 아이들이 없는 농촌은 죽은 농촌이 되었다. 노인들만 남아서도시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균제, 제초제—제초제가 아니라 살균제—를 뿌려 가꾼 쌀과 고추와 양파와 온갖 채소를 만들어낸다.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죽을 날짜를 세면서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농촌이다. 아이들은 시인이라는데 그 아이들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게 하는 슬픈 현실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 때문인가. 아이들이 시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아이들을 시인이 되게 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이다.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새소리를 듣고 흰 구름을 보고, 별을 바라보며, 그리고 짐승들과 벌레들과 어울려 땀 흘리는 고통을 배우고 따뜻한 생명들과 살을 비비는 삶이 있어야 한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과 여름날의 소낙비와 무지개와 지루한 장마 비도 알아야 한다.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도 배우고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내도 체험해야 한다. 시인은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삭막하다 못해 살벌해져 가는 오늘날의 도시환경은 ‘죽은 시인의 사회’ 그대로다. 일회용품을 찍어내는 기계처럼 아이들도 그 기계가 되기도 하고 일회용 싸구려 상품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 가서 똑같은 선생님께 똑 같은 방법으로 공부를 하고 똑같은 텔레비전에 똑같은 쇼를 구경하면서 크는 아이들은, 개성도 없고 하나같이 똑같다. 시를 익히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렇게 죽은 인간으로 키워져 사고력도 행동도 획일적으로 되어버린다. 행여나 다른 아이와 다르게 될까봐 오히려 불안한 지경이다. 앞집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면 우리집 아이도 배워야 하고, 옆집 아이가 태권도를 하면 우리 아이도 태권도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에게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콘크리트로 된 똑 같은 집에 살며 친구보다 기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덩치만 크고 가슴은 그야말로 옹졸하기 그지없다. 가까운 친구를 사랑하기보다 경쟁의 대상으로 만들어 평생 적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무슨 시심(詩心)을 키울 수 있겠는가. 자연에서 격리당한 아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시인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구태여 몇 줄의 노래를 읊어내는 시인만이 시인이 아니다. 농촌의 농부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그들은 생명을 만드는 온갖 것을 몸과 마음을 쏟아 부어 키워내기 때문이다. 씨 한 톨 심어놓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미닭이 알을 품고 병아리가 깨기를 기다리는 마음, 보리 이삭이 패고 그 이삭이 알이 영글어 누렇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 이런 마음만이 건강하고 힘찬 시를 낳을 수 있다. 자연스런 것은 결국 자연 속에서 살아야만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만드는 것은 어쨌거나 만든 것이며 인위라는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기계에서 해방시키고 콘크리트 벽속에서 풀려나야 된다. 흙냄새 거름냄새 풀냄새를 맡게 하고 새들과 짐승들과 얘기를 하도록 하자. 괭이질을 하고 지게를 지며 땀 흘리는 농군이 되게 하자. 그래서 시인으로 살게 하자. 똑같은 것을 흉내만 내는 인간이 되어 일생을 시체로 살게 버려두는 건 죄악이다.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아이들을 시인으로 키우고 생명 가진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살충제, 살균제, 살초제 같은 농약을 버리고, 두엄을 만들고 김을 매고 지게를 지는 튼튼한 농사꾼으로 크면, 강물도 살아나고 들판도 살아날 것이다. 물고기가 살고 새들도 날아오고 온갖 벌레들이 살아나면 도덕도 함께 살아난다. 도시의 물질문명과 기계 문명은 영혼을 망가뜨리고 온 몸뚱이의 기능마저 퇴화시킨다. 도시 아이들은 좌변기 말고는 똥도 못 눈다. 뜀박질은커녕 재대로 십 리길도 걷지 못한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온갖 일을 기계에다 의존 않고는 못하는 게 지금 도시 사람들이지 않는가. 손으로 옷에 단추 하나 못 달면서 어머니 노릇한다는 건 말이 아니다. 어머니는 아기의 옷을 손수 만들어 입히는 일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기워준 옷을 입고 자란 아이는 사물을 보는 눈에 사랑이 담기기 마련이다. 기계적인 감각에서 손의 감각과 대자연의 감각으로 뻗어나가면 결국 하늘을 발견하고 그 속에 아이도 하늘이 된다. 겨울의 눈보라와 여름 비바람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인간만이 마음이 따뜻한 시인이 될 수 있다. ([중학생을 위한 산문 50선] 엮은이 김 훈 ‧ 안도현) |작법공부|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 절안골 사람들은 가난하였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하게 살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두 번째 부분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후 절안골 사람들은 어떻게 황폐화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세 번째 부분은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독자는 굳이 작가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안골 사람들이 어떻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가를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주고, 새마을운동 이후 황폐한 절안골 사람 이야기도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눈에 선한 이야기로 들려주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너무도 절절한 이야기로 보여주고 들려주기 때문에 독자가 작가의 논리에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감동 먹기 때문이다. 논리적 전개를 아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정생 작가의 작법을 보라. 논리로 논리를 펴지 않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아이들이 없는 농촌은 죽은 농촌이 되었다.” 혹은 “왜 이래야만 되는 걸까?”라는 질문 형의 문장, “조용하던 골짜기가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 꿈같은 행복을 약속했던 대통령들도 모두 가짜로 드러났다. 군사정권은 농촌을 이렇게 망가뜨렸다.” 같은 작가의 불같은 분노가 타오르는 문장을 섞어 넣고 다시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는 작법의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이 조연현 교수가 말한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 되는 현대수필에세이’의 이다. 이태동 교수는 “훌륭한 수필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쉽게 그리고 많은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⑩남다른 통찰력으로써 생生의 이면이나 자연 가운데 숨어 있는 도덕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때만 글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작품이야 말로 ‘생生의 이면이나 자연 가운데 숨어 있는 도덕적 진실을 발견’하는 작법의 작품이 아닌가. 필자가 사는 동네는 80년대 식 다가구 3층 벽돌집들이 아직 남아 있는 변두리 동네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얼굴 맞대고는 차마 할 수 없는 갖가지 저주들이 씌어져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3대가 망한다.’는 문구도 본 일이 있다. 그런 모양들을 10년 넘게 보면서 ‘이 민족은 쓰레기 치울 방법조차 생각해 낼 줄 모르는 구나!’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백 년 동안 ‘신변잡기’ 비난을 들어오고 있는 수필계 지도자들이야 말로 ‘쓰레기(신변잡기) 하나 치울 방법조차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 나라 수필계 지도자들이 피천득의 대신 권정생 작가의 같은 작품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진즉에 ‘신변잡기’에서 벗어날 방법도 찾아내었을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특별히 똑똑하게 태어나는 아이 가 있다는 말이 잘못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이 수많은 과학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사회 전반에 뛰어난 여성들이 진출하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소설문단만 해도 젊은 여성작가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젊은 여성 소설가들은 타고나서 소설작가가 되었고 3천 5백여 수필가들은 그렇지 않아서 ‘신변잡기’ 작가가 되었는가? 아니다. 잘못된 선택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을 선택하면 ‘신변잡기’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다.  
2    갇힌 사자獅子의 눈동자 /정현종 댓글:  조회:109  추천:0  2019-09-20
갇힌 사자獅子의 눈동자 정현종 (시인) 지금으로부터 한3년 전 일이다.(라는 말은 좀 우스운 감이 있으나 그냥 쓰기로 한다.) 하기는 말이 3년이지, 지난 3년을 정확히(!) 말하라고 한다면 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는 말이 정확하다니! 이건 필경 필자가 역사의식이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저 신화적인 역사의식! 그러고 보면 실제 역사는 역사적이 아닌데 역사의식만 항상 역사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나마,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역사의식도 실지 역사가 허용되지 않으면 뜨내기나 다름없게 된다. 하기는 이 경우 뜨내기도 상팔자일 법하다. 얘기가 잠깐 빗나갔는데, 하여간 3년 전쯤 나는 어떤 농원의 사자우리에 가서 사자와 눈싸움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사자우리 속으로 통로를 만들어 철책을 사이에 두고 사자들을 볼 수 있도록 해놓은 데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는 잘 설명 할 수 없는 충동에 따라, 사자와 눈을 맞춰보고 싶어져서, 얼굴을 철책에 바싹 대고 사자를 불렀다. 사자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 두 앞다리를 들어 올려 철책을 턱 집고 직립(直立)해서는 나의 얼굴을 바싹 마주 댔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 느낌은 사자가 나를 아주 맛있게 바라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 서로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갇혀있는 사자의 눈동자 속에서 아프리카의 밀림과 초원을 보았다. 다시 말하면 사자의 고향이며 살아야 할 곳인 밀림과 초원의 파노라마를 보았다. 그 광활한 밀림과 초원의 전개는 아주 선명했으며, 그래서 갇혀 있는 그의 눈동자는 그다지도 깊고 머나멀게 넓었다. 나는, 갇힌 맹수를 보면 늘 그렇듯이, 깊고 광활한 슬픔과도 같은 연민을 느꼈다. 그날 아마 사자도 내 눈 속에서, 내가 그의 눈 속에서 본 것과 똑 같은 광경을 보았음직하다. 사자의 눈동자는 다름 아니라 내 마음의 거울이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사실 사람은 여러 가지에 갇혀서 산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흔히 자신을 가두는 우리가 된다. 우리는 마음 안팎의 여러 가지에 스스로 가두며 또 서로를 가두려고 한다. 그래서 장 그르니예라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인간들은 남이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만물 중에서 오로지 나는 새에 대해 거의 열등감을 느끼는 심리적 동기도 위의 문맥과 상관이 있을 법하다. 그리고 앞에서 갇힌 사자의 눈동자 얘기를 했지만, 또한 를 생각해 본다.(1981) (정현종 –삶과 詩에 관한 에세이 [생명의 황홀]) |작법 공부| 정현종 시인, 나에게 이 너무도 유명한 시인은,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틀림없이 든든하게 잠그고 나온 내 마음의 아랫도리 지퍼가 열렸다고 느닷없이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시인이다. 이 짧은 한 편의 산문을 읽으며 필자는 똑 같은 경기를 느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산문이 아니고 詩작품이다. 그날 아마 사자도 내 눈 속에서, 내가 그의 눈 속에서 본 것과 똑 같은 광경을 보았음직하다. 사자의 눈동자는 다름 아니라 내 마음의 거울이었을 테니까. 서두문장에서 라는 표현과 는 표현에 대한 시인의 언어에 관한 걱정은 무엇을 말 해 주는가? 시인은 말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일상어는 말이 아닌 말도 무수히 사용한다. 그러나 詩에는 ‘말이 아닌 말의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산문의 기반은 일상어에 있다. 시인은 지금 운문이 아닌 산문을 쓰면서 산문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언어의 비언어성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종결어 ‘또한 를 생각해 본다.’가 서두와 연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약에 정현종 시인이 사자의 눈 속에서 아프리카 초원만 발견하고 말았다면, -그래도 ‘隨筆’보다는 훨씬 창조적인 글이었겠지만- 시적 창조 글까지는 못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의 창조’ 곧 가 빠졌을 테니까. (죄송하다. 대 시인의 글을 ‘신변잡기’에 비하다니!) 이 짧은 한 편의 산문이 운문으로 쓸 것을 산문으로 형상화한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의 창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사실은 사람은 여러 가지에 갇혀서 산다.” 이하의 문장이 아닐까? 시인은 우리에 갇혀 사는 자사의 눈 속에서 ‘여러 가지에 갇혀’ 사는 인간의 열린 지퍼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붓 가는 대로 隨筆’이 만약에 사자의 눈 속에서 아프리카라도 발견하는 글을 썼다면 처음부터 ‘신변잡기’ 혹평까지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여러 가지에 갇혀’ 사는 지퍼 속까지 발견 할 줄 아는 문학이 되었다면 오늘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완전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가 되었겠는가?
1    본능대로만 써도 ‘신변잡기’는 면한다 /이관희 댓글:  조회:109  추천:0  2019-09-20
본능대로만 써도 ‘신변잡기’는 면한다 이관희   저녁 먹는 자리였다. 낙지볶음이 먹음직스럽다. 수저를 들기 전에, “소주 한 잔 할까…….” 했더니 일행 중 한 사람이, “선생님도 술 생각나실 때가 있으세요?” 그런다. “글쎄, 나도 뜻밖이네. 그러니까 이 현상이 무슨 의미냐……,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소주 생각이 났다……. 그래 요놈이 범인이었던 거야. 요 먹음직스러운 낙지볶음. 술꾼 쳐놓고 요놈 앞에서 소주 한 잔 유혹에 안 넘어갈 자 있는가? 술꾼이 아닌 나도 소주 생각이 나는데……. 이게 바로 작법인 게야.” “선생님 또 18번 나오시네요.” 그래서 좌중이 한바탕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간 호 지상 작법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예작법은 본능에서 시작된다. 을 보면 [저것]이 생각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본능이다. 저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전혀 천재적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다 가지고 있는 에 근거한 이론이다. 모방론뿐만 아니다. 문학개론서를 펼치면 첫 페이지에 나오는 것이 문학 발생설이다. 모방(模倣)본능설, 유희(遊戲)본능설, 흡인(吸引)본능설, 자기표현본능설 등 이 네 가지 기본 문학발생설 모두가 에 근거한다. 오늘 이 짧은 에서 다른 것은 다 옆으로 밀쳐두고 딱 한마디만 기억하도록 하자. 는 말이다. 문학 발생설이 모두 본능에 근거한다는 것은 ‘본능이 곧 작법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 해 준다. 본능 : ①생물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동작이나 운동 ②동물이 후천적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외부의 변화에 따라서 나타내는 통일적인 심신의 반응형식(에센스국어사전) 이 낱말의 뜻에서 작법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후천적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라는 말이다. 내가 지난 14년 동안 조사하고 실제 맞부딪치며 경험한 수필가들은 불행하게도 공부를 할 기회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수필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아무 글이나 한 편 써 가지고 돈 백만 원만 들고 가면 신인 당선작으로 발표해 주었으니 문학을 學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수필가가 만약에 자신의 본능만이라도 일깨운다면 ‘신변잡기’는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 국어사전의 낱말 뜻이다. 다시 한 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국어사전을 들여다보자. “후천적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라고 했다. 수필계 지도자들이 아무리 문학공부를 안 한 신인장사 장사꾼들이라 해도 그 밑에서 수필공부를 한 수필가가 본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후천적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도 적어도 ‘신변잡기’는 안 쓰게 된다는 뜻 아닌가? 금호에 작품이 게재된 이정록 시인의 어머니, 함민복 시인의 어머니, 이어령 교수의 어머니……, 이분들을 필자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정록 시인은 어머니 말을 그대로 詩로 썼다고 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모른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견물생심이 무슨 뜻인가?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물건 을 보면 가지고 싶다 [저것] 생각이 난다】 이것이 바로 작법인 것이다. 수필가들도 [입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수필가들도 을 보면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수필가들도 금은방 [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수필가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멋진 옷을 보면 입고 싶고, 멋진 핸드백을 보면 사고 싶고, 다이야반지를 보면 끼고 싶다면, 진정으로 그런 ‘견물생심’이 저절로 생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라는 소재를 보고 [저것]이라는 다른 생각이 안 날 수 있는가? 더 이상 수필교실 선생이 가르쳐 준 일 없다고 하지 말라. 더 이상 문학이 어렵다는 말도 하지 말라. 예술창작의 기본은 을 가지고 [저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본능대로만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는 그날 술 마실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저녁식사를 할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을 보자 저절로 [소주] 생각이 났던 것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의 본능에 의한 것이다. 바로【이라는 ‘낙지볶음’을 보자 [저것]이라는 ‘소주’】생각이 났던 것이다. 바로 창작에세이의 대표적 기본 작법인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 가 되지 않는가.(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가 될 수도 있다.) 隨筆이 망한 까닭은 처음부터 만 썼기 때문이다. ‘낙지볶음은 낙지볶음이다.’ ‘낙지볶음은 낙지볶음이다.’ ‘낙지볶음은 낙지볶음이다.’ 백날 라고 써도 문학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중얼거리면 ‘저 사람 미쳤나보다’ 한다. 실제로 만 썼더니 ‘신변잡기’라고 하지 않는가! ‘낙지볶음은 소주다’라고 써야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이것이 문학이고 예술이다. 만 쓰는 것은 문학(창작)도 아니고, 예술(창조)도 아니다. 에서 [저것]을 발견하여 그 [저것]을 써야 비로소 문학도 되고 예술도 된다. 그런데 에서 [저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능만 발동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 같은 본능설이 최초의 문학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인 것이다. 필자가 작법강의를 시작한 첫 시간부터 모든 예술의 기본 작법은【을 [저것]으로 발견】하는 데에 있다고 한 말은 무슨 굉장한 이론 연구 결과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의 본능론일 뿐이다. 작법 : 소재 ‘낙지볶음’ ➜ 작품 [저것] ‘소주’ 본능대로만 써도 ‘신변잡기’는 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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