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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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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주 괴인 자이로 박사 - 에드먼드 해밀턴 지음 댓글:  조회:49  추천:0  2021-03-20
우주 괴인 자이로 박사 Calling Captain Future   에드먼드 해밀턴 Edmond Hamilton 지음 에드먼드 해밀턴 1904년 미국에서 출생. 15세에 대학에 입학한 천재였으나 중퇴하고, SF를 쓰기 시작했음. 스페이스 오페라를 잘 썼다. "캡틴 퓨쳐" 시리즈, "달들의 왕", "허공의 유산", "백만 년 후의 세계" 등 380여 편이 있음.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원수, 박홍근/공학 박사 양옥룡 문학 박사 최인학/이학 박사 김희귀 전 교육감 김성묵   가까워지는 암흑성················ 4 캡틴 퓨쳐와 그의 동료·············· 16 변장의 명수··················· 27 서둘러라!··················· 37 진로를 태양으로················· 47 털북숭이 생물·················· 49 문어 인간···················· 65 커밋 호····················· 71 마법사····················· 76 움직이는 산··················· 91 캡틴을 죽여라················· 109 코발트···················· 120 흉계에 걸리다················· 136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148 캡틴과 자이로 박사··············· 160 암흑성을 추적하라··············· 173 자이로 박사의 정체··············· 180 다시 만날 수 있다··············· 189 등장 인물 캡틴 퓨쳐 : 이름은 커티스 뉴턴. 이 책의 주인공이다. 태양계 제 1의 과학자이며, 퓨쳐맨(미래인) 세 사람과 대활극을 벌인다. 사이먼 : 살아 있는 뇌만 있다. 캡틴 퓨쳐를 키우고, 그의 둘도 없는 상담역이다. 오토 :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캡틴 퓨쳐의 동료. 클라크 :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 역시 캡틴 퓨쳐의 동료. 케인 박사 : 금성 천문대의 천문학자. 존 랜들: 아름다운 여자 비밀 정보 부원. 커얼 로머 : 행성 지리학자, 명왕성 조사단의 단장. 레인 : 명왕성의 위성인 케르베로스의 형무소장 그림 : 명왕성의 위성인 케이론의 모피상. 에즈라 : 명왕성 행성 경찰의 사령   가까워지는 암흑성   행성 간 우주선 팰리스 호는, 지금 금성에서 지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항해 중이었다. 호화 여객선 팰리스 호의 살롱에서는 여느 때처럼 금성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고, 떠들어대기도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잠시 후에 불길한 그 사건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순식간에 불안 속으로 떨어뜨리리라고는 그 누구도 꿈에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파크스 통신사는 선교(항해 중 선장이 지휘하는 곳)의 텔레바이저(텔레비전 송신기) 앞에서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일등 운전사가 들어와서 통신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슬슬 지구의 제 4 우주항에 연락을 취해 줘. 우주선의 입항은 내일 오전 7시라고 말이야." 곧 스파크스 통신사는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넣었다. 텔레바이저의 스크린에 지구의 제 4우주항의 주임 관제관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임 관제관은 끄덕이고 말했다. "팰리스 호, 알았어. 제 4 우주항의 제 15도크로……" 주임 관제관의 모습이 희미해지며 떨린다고 생각되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이상한 사나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스파크스는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 이상한 사나이는 언뜻 보아도, 지구의 인간 같지가 않았다. 이마가 몹시 나와 있었으며, 검은 눈은 사람을 끌어당길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또 입고 있는 옷도 온통 검은 색깔이었다. 스파크스는 그 때 어쩐지 사나이가 슈퍼맨인 것처럼 여겨졌다. 사실, 그와 같이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사나이는 표정에 아무 변화도 없이 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이로 박사다. 나는 태양계의 모든 주민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다. 거대한 암흑성이 태양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암흑성과 태양은 충돌하여, 태양계의 생물은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 스파크스는 숨을 들이켰다. 암흑성이란 것은 타버린 항성, 죽은 태양을 말한다. 그 거대한 암흑성이 태양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은…… 자이로 박사라고 밝힌 사나이는, 그 암흑성의 위치를 엄숙하게 가리키고는 한층 소리를 높였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최후의 날'은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앞으로 수 주일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 나만이 그 충돌을 피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태양계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이로 박사의 이야기에 끌려 들어간 스파크스 통신사는 끄덕이고 말았다. "이런 위기가 다가오고 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보다도 이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내가 자유롭게 태양계의 모든 기계와 자재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쪽이 중요하다. 따라서 나와 내가 지휘하는 '최후의 날 자위단'에 그 동안만 태양계 정부의 모든 명령권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고 자이로 박사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서는 텔레바이저의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스파크스는 한동안 멍청해 있었다. 지금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큰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태양계 최후의 날을 피하지 않으면…… 그러자 제 4 우주항의 주임 관재관의 모습이 다시 텔레바이저에 나타났다. "이봐, 지금 보았겠지?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작자가 태양계의 모든 파장에 끼여들어 전 텔레바이저에 수신시켰어." 스파크스는 물었다. "대체 누구입니까? 보통 인간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그 사나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태양계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리석은 잠꼬대야. 곧 어떤 엉터리 같은 놈인가 알 수 있어." 주임 관제관은 내뱉듯이 말하고,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이어 텔레바이저의 위에 붙어 있는 버저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태양계 정부의 긴급 방송이다. 곧 태양계 정부의 보도관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 태양계의 여러분, 이제 막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나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문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그 사나이가 말한 위치에는 암흑성도 없으며, 또 아무런 변화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태양계 정부 보도관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스파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엉터리였군. 그러나 장난치고는 너무 지나치잖아." 그런데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장난이었던가 하고 안심했으며, 소문마저도 점차로 없어져 가고, 행성 경찰은 이 위험 인물인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려고 전 행성을 남김없이 찾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로 박사가 자기 스스로 태양계의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 대로, 어디에서도 그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박사가 방송에 사용한 전파가 전혀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발신했는지 조차도 확실히 알아 낼 수 없었다. 2주일이 지나도 자이로 박사의 그림자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행성 경찰은 그만 포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장난에 말려들기보다는 다른 할 일이 얼마든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럴 때, 또 자이로 박사가 텔레바이저에 끼어 들어왔던 것이다. "태양계 세계 사람들에게 구한다. 너희들은 나의 경고를 믿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보아라. 너희들의 소형 망원경으로도 이제는 암흑성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자네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다. 나의 말이 옳은지, 너희들 과학자들의 말이 옳은지를." 기분 나쁜 눈을 한 자이로 박사는 승리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두 번째의 경고를 믿고 개중에는 당장에 자기의 소형 전자 망원경으로 관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자이로 박사의 말대로, 거기에 암흑의 물체를 확인했다. 태양계 안에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이로 박사의 방송 후, 태양계 정부는 당황하여 취소를 위한 방송을 했다. "전 태양계의 여러분, 천문학자는 사수 자리의 방향에 확실히 어떤 종류의 암흑체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량을 거의 0에 가깝고,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암흑성은 자이로 박사라는 사람이 말한 대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런데도 우리의 천문학자는 처음에 그런 암흑성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어." "그렇다면, 암흑성이 태양을 향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 아닌가? 자이로 박사의 말투로는 태양계 최후의 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발표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천문학자가 두 번이나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로 위험은 없는 것일까 하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점점 날이 갈수록 자이로 박사의 경고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든 행성에서 자이로 박사가 말한 그 '최후의 날 자위단'에 참가하려고 했다. '자위단'은 모두 검은 원반의 마크를 소매에 붙이고, 우주정의 깃머리에도 그 마크를 붙였다. 그리고 태양계의 행성에서 행성으로 같은 동료들을 늘리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론 태양계 전부를 지배하는 힘을 자이로 박사에게 넘겨 주어 '최후의 날'을 막으러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 번째의 자이로 박사의 방송이 있은 지 일주일 가량 지났다. 개중에는 또 박사의 방송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면서,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켜고 줄곧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기대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보통 인간답지 않은 자이로 박사의 모습이 스크린 가득히 나타난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짖어대듯이 외쳤다. "태양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고한다. 너희들의 천문학자는 암흑성을 발견했으나 아무런 위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느냐? 나에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그렇게 말한 천문학자들은 가족을 데리고 어디론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대충돌이 일어난 뒤에 어딘가 살아 남을 행성으로 도망칠 작정인 것이다. 얼마나 비열한 놈들이냐. 놈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태양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란 걸 믿어야 한다." 온통 검정 옷을 입은 자이로 박사의 모습이 사라지자 곧 태양계 정부의 보도원이 텔레바이저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그 말소리조차 약했다. "전 태양계의 여러분, 천문학자 중 몇 사람은 가족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평상시의 성격으로 보아, 일부러 숨을 사람들은 아니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겁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수상한 사나이의 말을 신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위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용하지 말라고? 그리고 위험은 없다고? 천만에 아무도 이제는 정부의 말 같은 건 믿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고 말고. 위험을 피해 도망친 천문학자보다 자이로 박사의 말을 신용하는 것이 뭐가 우스우냐 말이야." "나는 이 때까지 정부의 발표를 신용해 왔어. 그러나 이제는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자이로 박사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 모두 정부로 밀려가서 자이로 박사의 말대로 정부의 명령권을 박사에게 주라고 요구하지." 태양계와 모든 행성에서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특히 태양계 정부의 수도 뉴욕은 대단했다. 정부의 빌딩 앞은 수많은 군중으로 꽉 차 있었다. "대통령과 평의회는 당장에 물러나라! 그리고 자이로 박사와 최후의 날 '자위단'에게 뒷일을 맡겨라." 사람들은 소리를 합하여 외쳤다. 그 소리에는 공포가 스며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시각각으로 태양계 최후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 카슈 대통령은 자기의 방에서 아래의 큰 파도처럼 웅성대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통령은 비서인 보넬에게 긴장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이상 더 소동이 번진다면 정부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이로 박사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놈이다." 비서인 보넬은 의아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고 나서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 자이로 박사가 다만 선동술만 뛰어났을까요? 그 사나이는 우리들의 천문학자들이 가장 큰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암흑성을 발견했으니까 말입니다." 카슈 대통령은 끄덕였다. "음, 그 점이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거야. 왜 그 사나이만이 암흑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아무튼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완력으로 빼앗으려고 한다. 정체 불명의 사나이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첫째로 가까워지고 있는 암흑성의 질량은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작은 것이고, 위험은 전혀 없으니까 말야." 그 때, 숨을 헐떡거리며 행성 경찰 장관 호크 앤더스가 들어왔다. "대통령, 이제 우리들의 힘으로는 밀려오는 군중을 막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행성인 관청에도 군중이 밀어닥쳐서 소동을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나가다간 일주일도 못 되어 태양계 정부는 자이로 박사의 손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카슈 대통령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어떤 경우에도 꼼짝하지 않는 앤더스 장관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꽤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다. 카슈 대통령은 물었다. "자이로 박사를 체포할 수는 없는가?" "죄송합니다. 전혀 종잡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럼 행방불명이 된 천문학자 존스와 게리머들은?" "그것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앤더스 장관은 죄송한 듯이 눈을 감았다. 카슈 대통령은 창문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보름달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태양계 정부의 위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나이가 단 한 사람 있다." 비서의 보넬이 문득 깨달은 것처럼 대통령을 보고 외쳤다. "캡틴 퓨쳐입니까?" "그렇다. 캡틴 퓨쳐와 퓨쳐맨이이라 불리우는 그 세 사람의 기묘한 동료들 말이다. 좋아, 북극에 텔레바이저로 지령하여 신호등에 불을 켜게 해라. 어서, 보넬!“ 30분 후, 북극의 얼어붙은 황야에 거대한 마그네슘의 불이 타올랐다. 그 신호야말로 우주의 어디엔가 있는 캡틴 퓨쳐와 그 한패인 퓨쳐맨에게 위기를 알리는 것이다. 그 불빛은 저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의 어디서나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캡틴 퓨쳐와 그의 동료   그 때, 캡틴 퓨쳐는 달세계의 치코 크레이터에 위치한 연구소에 있었다. 치코 크레이터의 화구 호수 같이 보이는 밑바닥에는 둥근 보석처럼 무엇인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캡틴 퓨쳐 연구소의 큰 창문이었다. 그 연구소는 태양계 최고의 천문 과학자에 어울리는 훌륭한 설비와 기계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계의 소음 속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실험을 시작할까요, 사이먼?" 그 소리는 몹시 맑았다. "좀더 기다려, 커티스" 대답한 목소리는 인간의 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목 쉰 금속이 삐걱거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무리도 아니다. 다른 한쪽 소리의 주인공, 사이먼 라이트는 살아 있는 뇌이니까. 즉 사이먼은 몸은 없고 그 대신 그 뇌를 죽지 않도록 특별한 네모진 투명한 상자에 넣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자에는 입 대신 스피커가, 눈 대신으로는 쑥 내민 파이프의 끝에 렌즈의 눈이, 또 귀 대신에는 마이크가 장치되어 있었다. 먼젓번의 맑은 목소리의 커티스 뉴턴은 어깨가 넓고 키가 2미터 가까이나 되는 늠름한 청년이었다. 약간 검은 얼굴과 시원한 그 눈은 얼핏 보기에도 커티스가 굉장한 천재임을 말하고 있었다. 커티스는 왼쪽 손에 큰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 반지의 9개의 보석은 초소형 원자력 발전기이며, 한가운데의 보석의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물론 그 한가운데의 보석은 태양을, 아홉 개의 보석은 태양계에 있는 아홉 개의 행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반지를 끼고 있는 인물이야말로 캡틴 퓨쳐인 것이다. 그 때 커티스와 사이먼은, 구리를 순수한 붕소로 변하게 하는 실험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되면, 천왕성까지 적은 양의 붕소를 가지러 갈 필요가 없어진다. 굉장한 발명인 것이다. 드디어 최후의 실험에 접어들려고 했을 때, 바위를 파서 만든 연구소의 한 구석에서 굉장히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나는 우릉우릉 하는 기계와 같은 큰 소리이며, 한쪽은 시익시익하는 목쉰 소리였다. 캡틴 퓨쳐는 얼굴을 들며 외쳤다. "클라크와 오토가 또 다툼을 시작했군! 왜 저 둘은 사이가 나쁘지, 클라크! 오토!“ 곧 연구실에 보통 인간과는 달라 보이는 클라크와 오토가 들어 왔다. 클라크는 키가 2미터 이상이나 되는 금속제의 로봇이다. 그의 굵은 두 팔에는 태양계 제일의 힘이 숨어있다. 오토는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어진 하얀 살결의 안드로이드 합성 인간이다.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머리카락이 없는 흰머리와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과는 달랐다, 그의 민첩성은 어떤 사람도 흉내 내지 못한다. 로봇인 클라크의 어깨에 곰과 비슷한 색다른 작은 회색의 동물이 착 달라 불어 있다. 달의 개다. 달의 개답게 호흡할 필요도 없고, 먹이인 광석을 강한 이빨로 썰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달의 개는 구리 조각을 열심히 씹고 있다. 캡틴 퓨쳐는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었어? 너희들은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쁘냐?" 오토는 화가 나서 미치려 했다. "그만두라고 했는데, 클라크란 놈이 어디서 이 달의 개 이이크를 주워 가지고 와서 기르니까 곤란합니다. 이이크란 놈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권총을 먹어치웠어요!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뭐든지 먹어치워요. 그래도 이놈을 버리려 하지 않아요." 로봇인 클라크는 굵은 금속의 팔로 이이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토란 놈은 인간이 아니므로, 우리들 인간이 애완 동물을 기르는 마음을 모릅니다." 오토는 점점 더 화가 나서 미쳤다. "인간이 아니라고? 나야말로 누가 보아도 인간 그 자체다. 너 같은 놈은 금속의 잡동사니 덩어리야, 그런 주제에 뭐라고!“ "금속 덩어리라고!“ 캡틴 퓨쳐는 당황하며, 그들의 가운데 끼여들어 둘을 떼어놓았다. "이젠 그만둬. 우리들은 동료가 아니냐." 그러자 살아 있는 뇌 사이먼 자이트가 말했다. "그렇다. 너희들은 언제나 어느 쪽이 인간이냐고 싸우는데, 그게 무슨 대수인가. 전에는 인간이었던 이 나를 보는 게 좋아. 인간다운 몸집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역시 너희들과 같은 퓨쳐의 하나가 아니냐. 그 점이 중요하지 않은가." 캡틴 퓨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먼, 오토, 클라크를 둘러보는 그 눈은 인정이 넘쳐 있었다. 사이먼의 말대로 그 세 사람이야말로 캡틴 퓨쳐와 함께 태양계의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큰 활약을 하고 있는 퓨쳐맨이었다, 그리고 또 이 퓨쳐맨 커티스 뉴턴을 훌륭한 청년으로 키운 팀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커티스 뉴턴의 아버지 로저 뉴턴 박사는 아내 엘레느와 함께 달세계에 이주했다. 벌써 51세기가 되자, 태양계 전체가 하나의 나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행성이나 위성에는 크고 작은 도시가 만들어져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만은 황폐한 그대로였다. 로저 커티스 박사가 그 달에 이주한 것은,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 박사 부처와 함께 달에 건너간 것은 친구인 지금의 살아 있는 뇌인 사이먼이었다. 사이먼은 유명한 과학자였는데, 불행하게도 병이 들어 죽을 직전이었다. 그 때 로저 뉴턴 박사가 사이먼의 뇌를 꺼내어, 특별한 상자에 넣어서 뇌만은 죽지 않게 했던 것이다. 로저들이 달에 이주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캡틴 퓨쳐인 커티스가 태어났다. 이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에서 로저와 사이먼은 우선 로봇인 클라크를 만들었다. 다음에는 안드로이드인 오토를 만들었다. 인간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 이상으로 성실한 인조 인간을 완성하는 것만 로저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로저의 발명품을 훔치려고 벼르던 악당이 결국 연구소를 습격하여 로저와 부인 엘레느를 죽인 것이다. 부인 엘레느는 숨을 거두기 전, 줄곧 짧게 괴로운 숨을 내쉬면서도 고아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된 커티스의 장래를 보아달라며 사이먼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악과 싸우는 늠름한 인간으로서 커티스로 키워 달라고 부탁하며 죽어갔다. 사이먼들은 열심히 커티스를 키웠다. 사이먼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과학 지식을 모조리 커티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마침내 커티스는 그들을 능가할 정도의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태양계 제일의 힘을 가진 로봇 클라크는 소년을 슈퍼맨 정도의 늠름한 몸으로 단련시켰다. 또 매우 재빠른 변장의 명수 오토는 소년에게 어떤 때라도 재빠른 솜씨로 뛰어나게 행동하게끔 훈련시켰던 것이다. 이리하여 태양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과 맞서 싸우는 늠름한 정의의 슈퍼 맨, 캡틴 퓨쳐가 태어났던 것이다. 이 캡틴 퓨쳐와 그에게 충실한 퓨쳐맨은 태양계 중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성능이 좋은 우주선 '커밋(Comet)'을 만들었다. 그리고 태양계 정부에 나쁜 일을 걸어오는 악당과 행성을 돌아다니며 싸우겠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처음 태양계 정부는 퓨쳐맨들의 요청을 반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차츰 퓨쳐맨의 활동이 훌륭한 데에 아주 반해, 잇달아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커티스는 이 충실한 세 사람을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하고, 또 의지하고 있었다. 커티스는 말했다. "너희들은 나에게 있어서 인간 이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싸움만 하다니……"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이먼이 갑자기 말했다. "신호다!" 사이먼의 렌즈 눈은 머리 위의 유리창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에 우주에 뜬 녹색의 지구가 보였다. 서둘러 다른 세 사람도 보았는데, 북극에 해당하는 하얀 곳에 한 점의 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캡틴 퓨쳐는 얼굴을 긴장시키고 말했다. "태양계 정부가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우리들을 부를 정도라면 굉장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곧 커밋에 오르자!" 이제는 시시한 싸움 같은 것은 어디엔가 날아가 버렸다.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이 말했다. "클라크, 나를 운반해 줘." 로봇 클라크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고, 달의 개 이이크를 한쪽 손에 들고서, 서둘러 캡틴 퓨쳐와 오토의 뒤를 따라갔다. 20분 후, 눈길을 끄는 이색적인 모양의 고속 우주선 커밋 호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시간 후, 커밋 호는 뉴욕의 강가에 있는 하얀 지붕 부근에 착륙하려고 했다. 보기 좋게 착륙한 커밋 호에서 옥상으로 나온 퓨쳐맨은 멀리 아래의 광장에서 대군중이 경찰들과 서로 뒤얽혀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캡틴 퓨쳐는 입술을 깨물며 들어갔다. "매우 절박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자, 빨리 가자!" 퓨쳐맨은 대통령의 방으로 급히 내려갔다. 안에 있던 카슈 대통령, 비서 보넬, 앨리어즈 행성 경찰 장관은 커티스와 퓨쳐맨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캡틴 퓨쳐가 와 주었으니, 이제는 안심이다." 하며 대통령은 큰소리로 외쳤다. 커티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빌딩 앞에 있는 대군중을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요?" "태양계 정부의 권력을 모두 자이로 박사와 그 일당에게 넘겨주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라네." "자이로 박사? 그 놈은 어떤 놈입니까?" 커티스가 묻자, 비서 보넬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이로 박사의 방송을 듣지 못했습니까! 암흑성과 충돌한다는…… 이제는 주민의 무려 90퍼센트 가량이 박사의 경고를 믿고 있답니다." 캡틴 퓨쳐가 말했다. "우리들은 계속 새로운 실험을 해 왔습니다. 그 암흑성이라는 게 뭡니까?" 여기서 대통령은 긴밀히 이제까지의 일을 빠르게 이야기했다. 캡틴은 중얼거렸다. "곧 사이먼과 내가 그 암흑성을 관측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선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지 않고서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선동한 비겁한 짓을 한 근본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 앤더스 장관은 절망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자이로 박사의 거처를 발견 못해 곤란을 당하고 있소. 그뿐 아니라 대통령이 설명한 것처럼 천문학자들이 잇달아 행방불명되고 있소. 1시간 가량 전에도 금성 천문대의 케인 박사가 행방불명되어 버렸다네." 그러자 캡틴이 말했다. "그 행방불명의 사건은 자이로 박사가 저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곧 금성으로 가서 실마리를 찾아봅시다." 그 때, 갑자기 텔레바이저의 버저가 울렸다. 앤더스 장관은 텔레바이저에 다가서면서 말했다. "금성으로부터 닥터의 연락이군. 케인 박사에게 붙어 놓았던 정보 부원으로부터의 보고일 거요." 하며 장관은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스크린 안에 검은 머리칼을 한 아주 귀여운 지구인 소녀가 나타났다. 캡틴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존 랜들!“ 존은 보기에는 귀여운 소녀지만, 가장 능숙한 비밀 정보원이다. 이전에 함께 일할 때 캡틴을 많이 도와 주었다. 저쪽은 캡틴을 알아 내고 외쳤다. "캡틴 퓨쳐! 그럼, 당신도 이 사건을 취급하고 있군요. 좋아요!“ 얼굴이 좀 창백해진 채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존은 그러고 나서 빠른 어투로 말했다. "나, 실마리를 잡았어요. 저는 지금 금성에 있지만, 켄스 케인 박사가 자위단에게 유괴되어 가는 것을 미행했어요. 우주선까지 따라갔더니, 놈들이 다음에는 화성의 천문학자인 가틀러를 유괴하겠다는 말을 듣고……" 여기까지 말한 존은 입을 다물더니, 그리고 나서 외쳤다. "누군가 여기 들어오려고 해요? 자위단의 놈들에게 눈치 채어……" 갑자기 존의 모습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곧이어 스크린은 캄캄해졌다. 캡틴은 외쳤다. "존! 존!" 사이먼이 말했다. "자위단은 존이 미행하고 잇는 것을 눈치챘어. 그리고 케인과 함께 유괴하려고 했어, 커티스."   변장의 명수   그 후, 이윽고 캡틴과 퓨쳐맨을 태운 커밋 호는 화성의 실티즈 시에 몰래 착륙하고 있었다. '최후의 날 자위단'이 유괴하려고 하는 가틀러는 실티즈 시의 천문 대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위단이 올 때 잠복하여 체포하려는 것이 캡틴의 계획이었다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은 의아스럽게 말했다. "놈들은, 자기들의 흉계를 존이 이쪽에 알려 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쪽으로 어슬렁거리며 올 리가 없지." "글쎄, 어떨까요? 존이 알려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어쩐지 아무튼 해 봅시다. 이쪽으로 올 때에는 존과 케인 박사를 인질로 데리고 올 테니까, 잘 되면 역전 홈런이 될 수 있지요." 캡틴이 이렇게 말하자, 로봇 클라크가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우리들의 힘으로 놈들을 체포합시다." 캡틴은 웃었다. "그런데 클라크, 이번에는 너와 사이먼이 커밋 호에 남아 있기로 했어." "그러면 오토와 둘이서? 왜 나는 안 됩니까?" 오토가 심술궂게 클라크의 말을 받아서 대답했다. "너 같은 잡동사니 로봇이 거리 한복판을 걸어다니면 당장에 적에게 눈치채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그 미치광이 애완견과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단, 그 미치광이 개가 내 기계라도 씹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우주 공간에 집어던질 테니까." 달의 개 이이크는 클라크의 팔에 안겨 눈을 뜨고는 이를 갈고 있었다. 달의 개는 대기도 소리도 없는 달세계에서 자랐기 때문에 텔레파시로 상대가 전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캡틴은 언쟁을 하고 있는 클라크와 오토를 무시하고 특별 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사이먼을 보고 말했다. "우리들이 나가 있는 동안에 암흑성에 관한 정밀한 관측을 해 보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해 두지. 그보다도 조심해서 가야 한다." 커밋 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구소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기계 말고도 마이크로 필름에 기록된 놀랄 만큼 많은 책이 비치되어 있다. 그 기록을 사용하고, 클라크를 조수로 하여 관측하면 어느 천문학자보다도 사이먼은 확실한 것을 붙잡을 것임에 틀림없다. 캡틴은 오토를 데리고 오싹할 만큼 싸늘한 화성의 밤 쪽으로 나갔다. 천문대는 실티즈 시의 저쪽 3킬로미터 앞에 있었다. 화성과 밤하늘에는 포보스와 데이모스의 두 개의 위성이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실티즈 시가 가까워졌다. 어느 화성의 도시도 그러하지만, 머리가 큰 빌딩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다. 시의 중심부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뭐라고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보니, 여기서도 자이로 박사에게 태양계를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캡틴은 무거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안 되겠는데. 빨리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여 그런 엉터리 방송을 그만두게 하지 않고서는." 캡틴과 오토는 이윽고 실티즈 천문대에 도착했다. 천문대는 거리 끝, 사막이 시작되는 근처에 있었다. 어둑어둑한 천문대 안에는 머리가 벗겨진 붉은 살결의 화성인이 홀로 천체 망원경 옆 책상에서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 화성인은 등 뒤에 몰래 다가선 캡틴과 오토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너희들은 뭐냐!“ 오토의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캡틴은 왼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끼고 있는 큰 반지를 보고 행성인은 외쳤다. "캡틴 퓨쳐!“ "그렇소. 당신은 가틀러 천문 대장이지요?" 화성인은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캡틴 퓨쳐가 여기에?" "자위단 놈들이 당신을 유괴하려고 합니다. 이제라도 올 것입니다." "뭐 , 뭐라고요!“ 가틀러는 공포에 떨었다. 캡틴은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나의 친구 오토가 당신을 대신할 테니까요." 하면서 오토 쪽을 되돌아보았다. "자아 오토, 이 사람으로 변장해라." 오토는 끄덕이자마자, 벌써 허리의 벨트에 붙어 있는 네모난 용기에서 변장용 기구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한 화학 기름을 머리며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 재빠른 솜씨는 과연 소문과 같았다. 오토의 새하얀 합성 피부는 화학 약품에 의해 부드럽게 되고, 부드럽게 되자 찰흙처럼 자유롭게 얼굴 모양을 변하게 할 수 있었다. 오토는 두 손을 사용하여, 우선 도요새의 발처럼 가느다랗고 긴 화성인의 발처럼 변하게 했다. 그리고 가슴을 넓히고, 맨 나중에 가틀러와 똑같은 얼굴로 만들어 냈다. 조각가처럼 훌륭한 솜씨였다. 이윽고 피부가 굳어지기 시작하자, 오토의 살결은 본래와 같은 탄력을 지니게 되었다. 자기와 꼭 닳은 화성인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고, 가틀러 천문 대장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오토는 말했다. "변장을 했습니다. 캡틴." 그 목소리도 가틀러와 똑같았다. 캡틴은 말했다. "가틀러 대장, 오늘밤은 오토가 당신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전을 위해 곧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가틀러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요. 아무튼 캡틴 퓨쳐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하고 가틀러가 천문대를 나가자, 캡틴은 오토에게 명령했다. "이 돔의 바로 밖에 놈들의 우주선이 착륙하면 몇 사람만 남겨놓고 이쪽으로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러면 되도록 떠들거나 반항을 하며 시간을 끌어 주게. 나는 그 틈에 우주선에 숨어 들어가서 존과 켄스 케인을 구출해 낼 테니까." "그건 안 됩니다. 캡틴, 위험해요. 행성 경찰엔 연락하는 편이 좋아요."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짓을 하게 되면 존 일행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내게 맡겨둬. 너는 망원경이 있는 곳에 가서 천문학자의 흉내를 내고 있으면 돼." "맡겨 주십시오. 여기 앉아 망원경을 기웃거리는 늙은이보다 내가 오히려 훨씬 행성의 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캡틴은 킥킥 웃으면서 천문대를 나와서는 뒤쪽 으슥한 곳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허리에서 프로톤 권총을 잡아 겨누고 있었다. 캡틴은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가 지평선에 모습을 감출 때 쯤, 머리 위의 별이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을 알았다. 화성의 올빼미라고 생각했지만, 곧 로켓 엔진의 희미한 떨림을 들을 수 있었다. (자위단의 우주선이 틀림없다. 왔다!) 우주선은 빙빙 돌면서 천문대를 향해 내려왔다. 불을 끄고 로켓 분사를 적게 하며 내려왔기 대문에 마치 검은 유령선 같았다. 우주선은 천문대 바로 가까이에 착륙했다. 그리고 우주선 한가운데 문이 활짝 열렸다고 생각되자마자, 10명 정도의 사람이 소리를 죽이며 잇달아 내려왔다. 그 중의 두 사람이 감시를 섰다. 차가운 별빛에 원자총이 반짝 빛났다. 나머지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천문대 쪽으로 걸어왔다. 보기에는 지구인 같았고, 회색의 옷의 어깨에는 자위단의 검은 둥근 마크가 붙어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캡틴은 합금으로 만든 벨트에서 둥글고 작은 기구를 꺼냈다. 그것은 주위의 빛을 굴절시키고,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기계로서, 캡틴이 한 발명 중에서도 훌륭한 것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10분 동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 동안에 존 일행을 구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캡틴이 그 기계를 머리 위에 꽂고 단추를 누르자,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그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천문대 쪽에서는 가틀러의 소리를 흉내내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는 되도록 시간을 끌려고 애쓰고 있는 중일 것이다. 완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동시에 캡틴 쪽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빛이 자기의 주위에 굴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캡틴은 주위의 모습을 모조리 눈에 익혀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은 육감으로 해 나가야 한다. 캡틴은 살짝 두 감시원의 사이를 빠져 나와 승강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하여 우주선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또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기다렸다. 여기까지는 모습을 감추어도 좋았으나, 지금부터 앞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서는 존을 찾아 낼 수 없다. 천문대 쪽은 오토가 말한 대로 큰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윽고 주위의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캡틴은 서둘러서 통로를 뱃머리 쪽으로 향했다. 존들은 반드시 뱃머리 쪽에 유괴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자위단의 한 사람이 선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상대는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캡틴을 지켜보다가, 곧 허리의 원자총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캡틴 쪽이 더 빨랐다. 이미 프로톤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상대는 깨끗이 뒤집어졌다. 죽지 않게 출력을 약하게 했기 때문에 정신을 잃기만 한 것이다. 조금 더 가자, 통로를 마주한 어떤 문의 빗장이 부서져 있었다. 캡틴은 얼른 알아차리고, 곧 그 빗장을 빼고는 문을 열어 보았다. 안은 어두웠으나 역시 두 사람이 갇혀 있었다. 한 사람은 지구인의 아가씨였다. 앉아서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몸집이 작은 금성인이었다. "존? 캡틴 박사! 자, 탈출합시다!“ 하고 캡틴은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캡틴을 알아본 존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 캡틴! 전 반드시 구출하러 오리라고……" "쉬이? 들리면 곤란해." 그러나 늦었다. 선 내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캡틴 퓨쳐가 숨어 들어온 모양이다!“ 쿵쿵, 자위단의 무리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그 절반을 쓰러뜨렸다. 남은 작자들은 천문대 쪽으로 큰소리를 질렀다. "캡틴 퓨쳐의 흉계다! 빨리 배로 돌아 오라!“ 캡틴은 재빠른 동작으로 남은 사나이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프로톤 권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 녀석이, 무섭게 인상이 나쁜 지구인으로 보이는 작은 사나이가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핑크 색의 덩어리를 캡틴을 향해 집어던졌다. 존이 비명을 올렸다. "로프 뱀! 캡틴, 조심해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핑크 색의 물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캡틴의 손발에 휘어 감겼고 굉장한 힘으로 조이기 시작했다. 다른 것들도 존과 케인의 몸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존이 말한 대로 그것은 로프 뱀이라고 불리는 토성의 뱀이었다. 악당들이 길들여 로프 대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놈에게 물리면 제아무리 캡틴이라 할지라도 어쩌지를 못한다. 그래도 캡틴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인상이 나쁜 작은 사나이는 우주선의 밖을 향해 외쳤다. "카라크, 빨리 돌아오라! 가틀러 대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곧 이륙한다!" 우주선의 로켓 엔진이 부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천문대에서 당황하여 뛰어나온 지휘자인 듯한 큰 사나이와 자위단은 급히 우주선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우주선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캡틴을 태운 그대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굉장한 기세로 뒤쫓아온 오토가 떠오르기 시작한 우주선의 아직 열어놓은 대로 있는 문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가장자리에 손을 걸었다. 오토는 안드로이드 였기 때문에 이런 도약을 할 수 있었다. 곧 한 패의 사람들이 몸을 구부렸기 때문에 로프 뱀에 묶인 그대로 캡틴은 외쳤다. "조심해!" 그러나 상대는 오토를 가틀러 천문 대장인 줄 알고 어떻게든 끌어올리려고 했다. 오토는 위에서 자기 손을 잡은 사나이와 흔들리는 선체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주선은 더욱 심하게 기울어서 오토와 자위단의 사나이는 우주선의 바깥 어둠 속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서둘러라!   "오토!“ 캡틴은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원망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대여섯 마리의 로프 뱀은 더한층 강하게 휘감겨들 뿐이다. 그 때, 그 인상이 나쁜 작은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 옆에는 아까부터 카라크라고 불리는 큰 사나이가 있다. 큰 사나이쪽은 우둔한 작자인 모양으로 작은 머리를 듬직한 몸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있었다. 작은 사나이는 캡틴의 몸을 발로 세차게 차며 비웃었다. "꼴 좀 봐라! 우리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자기가 걸리다니! 이 자가 캡틴 퓨쳐라고 하는 사나이인가?" 그러나 캡틴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작은 사나이를 쏘아보았다. "로지, 나는 널 알고 있다. 나쁜 지혜로서 유명한 화학자지. 너는 카라크에게 호르몬을 주사하여 거인으로 만들어 나쁜 일을 돕게 했었지. 5년 전에 체포되어, 카라크와 함께 명왕성의 위성에서 죄인을 보내는 케르베로스 별에 종신형으로 처박혔었지." 그러자 로지는 증오하듯이 말했다. "그래 너는 알고 있겠지. 나를 붙잡은 것은 너니까 말이야. 그 사례를 톡톡히 갚아야겠어, 캡틴 퓨쳐!" 하며 허리의 원자총을 천천히 뽑았다. 그 때, 자위단의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로지, 이놈을 죽여서는 안 된다. 자이로 박사의 명령을 잊어서는 안 돼." 그 사나이는 유독 살결이 희고, 얼굴 모양도 반반했다. 그러고 보니, 그 눈에는 표정이 없었다. 지구인 같지만, 과연 지구인인지 캡틴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로지는 투덜거리면서 권총을 도로 찼다. "내가 자이로 박사에게 연락해 보겠어. 박사도 이 사나이를 우주선 밖으로 내던지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존이 외쳤다. "모두 제가 잘못했어요! 그 때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곧 텔레바이저에 자이로 박사가 나타났다. 자이로 박사는 로지의 보고를 듣고, 캡틴을 향해 거칠게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멍청이야! 하필이면 이 위험에서 태양계를 구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나를 방해하려고 들다니!" 이미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캡틴은 그래도 비웃듯이 말했다. "그런 엉터리가 내게 통할 줄 아느냐? 만약에 정말 큰 위험이 다가와서 너만이 구할 수 있다면 그 힘을 정부에 제공하면 어때. 네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태양계를 지배하고 싶기 때문이다! 경고하건대 반드시 그 야망을 부셔 버릴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화를 냈다. "나에게 사로잡힌 네가 도리어 경고라고! 캡틴 퓨쳐, 건방지구나!“ 로지가 말했다. "곧 죽여 버립시다!“ "아니,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다른 놈들과 함께 기지까지 데리고 와야 한다. '원수의 집'이 그 놈의 마음에 들 것이다." "'원수의 집'에? 그건 좋군요." 로지는 의미 있게 빙그레 웃었다. 자이로 박사는 덧붙였다. "그러니 알겠지,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어쨌든 캡틴 퓨쳐는 탈주의 명인이니까 말야." "내게 걸린 놈은 아무도 도망치지 못해요." 로지가 가증오스러운 듯이 말하자, 자이로 박사는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로지가 명령했다. "이놈들 셋을 아까 넣었던 창고에 다시 처넣어라." 카라크는 가볍게 캡틴 퓨쳐를 들어 메었다. 카라크는 굉장한 장사였다. 다른 사나이들은 존과 케인을 들쳐 메었다. 세 사람을 창고에 처넣은 로지는, 캡틴이 허리에 차고 있는 합금제의 벨트와 프로톤 권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로지는 작은 기계를 꺼내어 그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부웅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때였다. 세 사람의 몸을 감고 있던 로프 뱀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프 뱀은 세 사람의 몸에서 멀어지더니 로지가 들고 있는 큰 자루로 기어 들어갔다. 재빠른 캡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동시에 입구의 문이 쿵 닫히고, 빗장이 내려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사나이 금성인 켄스 케인은 겨우 일어서며 성난 소리로 외쳤다. "정말 지독한 짓을 하는 놈들이군. 이 남극성 천문대에서 케페이드 성운의 발견자인 나를 마치 감자 자루처럼 취급하다니." 존이 말했다. "나 때문이어요.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이제 그런 말은 그만 됐어. 존은 놈들을 잡을 실마리를 찾아 내는 큰 공을 세웠으니까. 그보다도 나와 오토의 작전이 잘못됐어." "그러고 보니, 오토는 괜찮은지요?" "나도 그걸 걱정하고는 있지만, 오토니까…… 만약에 오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원수는 반드시 갚겠어." 하며 캡틴이 입술을 굳게 다물자 켄스 케인이 말했다. "그런데 이 방에서 어떻게 빠져 나가지요?" 그러자 캡틴은 빙그레 웃었다. "케인 박사, 나는 이보다 더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당했어요. 그러나 모두 뚫고 나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캡틴은 창 너머로 눈길을 보냈다. 타오르는 태양과 붉은 화성은 점점 뒤로 멀어져 갔다. "아마도 태양계의 끝을 향해 가는 모양이다. 이 진로라면, 앞에는 천왕성과 명왕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이로 박사의 기지는 그 어느 쪽에 있을 것이다." 존이 물었다. "저 자위단 학자들의 정체가 궁금해요. 로지와 카라크는 제외하고 정말 지구인일까요? 아까 놈들 중에 어느 놈의 손에 닿았을 때, 어쩐지 다른 것같이 느꼈어요." 캡틴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어쩌면…… 아니, 지금은 그보다도 탈출할 것을 생각해야 돼." 그러나 합금제의 벨트도 빼앗기고 없다. 거기에는 비밀 주머니가 있어서 지금까지 절대절명의 순간에 캡틴을 구해 낸 여러 가지 기구가 넣어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을 탈출하는 데는 복도로 나 있는 문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을 부셔버리면 앗 할 순간에 공기가 없어져서 죽고 만다. 그렇다고 밖에서 빗장을 지른 한 장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을 부수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캡틴은 끄덕이고 나서 제자리에 앉더니, 왼손의 큰 반지를 뽑았다. 그리고 주의 깊게 반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케인은 초조한 듯이 물었다. "대체 뭘 시도하는 거지요?" "이 반지 속에 작은 원자력 모터가 있어요. 그걸 꺼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작은 모터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요?" 캡틴은 빙그레 웃기만 하고, 아무 대꾸도 없이 분해를 계속했다. 이윽고 케인이 말했다. "겨우 목성의 궤도를 넘은 모양이오. 탈출 계획은 됐겠지요?" 캡틴은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다지 잘 되지는 않았지만 작은 원자 버너를 만들었습니다, 이놈은 몇 분 동안에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지만 이 문과 빗장 정도는 불태워 버립니다." 그래도 케인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문을 부순다고 해도 어떻게 도망치지요? 이 우주선을 빼앗을 작정인가요?" "적이 너무 많아요. 구명 보트를 훔쳐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텔레바이저로 퓨쳐맨과 연락을 취하여 커밋 호를 이리 오게 합시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 통로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 버너의 스위치를 넣었다. 작기는 했지만, 굉장한 불길이 금속의 문 가장자리를 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깊어갔다. 4~5분이 지나자, 에너지를 모조리 사용해 버렸는지 불길은 픽 하고 불꽃을 뿌리고 꺼졌다. 캡틴은 끄덕이고 나서, 살짝 문을 밀에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잘못 계산한 것일까. 바깥이 빗장을 덜 태운 것일까. "그릴 리가 없다." 캡틴은 문에 어깨를 대고 힘껏 밀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활짝 열렸다. 캡틴은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구명 보트는 뱃머리 가까운 곳 오른편에 있다. 우주선이 천문대 옆에 내려왔을 때 보았어. 자아, 가자." 세 사람은 뱃머리 쪽으로 나아갔다. 캡틴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무기 로커는 어딜까?…… 아, 역시 있구나. 나의 프로톤 권총과 합금제의 벨트가 걸려 있다." 캡틴은 기쁜 듯 로커로 가까이 갔다. 그 때, 존이 비명을 질렀다. "캡틴!" 뒤돌아보자, 자위단의 하나가 막다른 조종실에서 불쑥 통로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쪽을 알아차리고 권총을 뽑으려고 하지 않는가! 캡틴은 무서운 속도로 무기 로커까지 달렸다. 오토로부터 평상시에 훈련받은 것이다. 눈에조차 보이지 않을 속도로 벽에 걸린 프로톤 권총을 뽑자마자 돌아서며 자위단을 향해 발사했다. 즉각 상대는 정신을 잃고 털썩 쓰러졌다. "빨리!" 캡틴은 벨트를 허리에 매면서 오른쪽의 작은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도 뒤따랐다. 구명 보트로 통하는 둥근 문을 발견하자, 우선 존을 들여보냈다. 케인은 곧 뒤따르려다가 멈춰 서서 말했다. "저 방으로 되돌아가야 해. 연구 노트를 거기 두고 왔어!“ 하며 되돌아가려고 하자, 캡틴은 당황해 하며 그 팔을 불잡았다. "정신 나갔어요? 자아, 빨리 타요." "내게 명령하는 거요? 싫소. 그 노트를 찾아오겠소." 케인이 부득부득 주장하므로, 캡틴은 그 몸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입구의 둥근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나서 벽에 붙어 있는 렌치를 사용하여 우주선의 중간에 박혀 있는 볼트를 뽑기 시작했다. 최후의 볼트가 빠지자, 캡틴은 서둘러서 앞자리의 조종 장치 앞에 앉아 레버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작은 구명 보트는 소형 로켓 엔진을 분사하면서 조용히 우주선을 떠나갔다. 캡틴은 보트를 크게 돌리며 방향을 잡았다.   진로를 태양으로   존은 기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잘 되어 가다니, 캡틴?" 곧 케인이 화난 소리로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거요. 몇 주일 동안이나 걸려서 연구한 노트를 두고 오게 하다니! 나를 완력으로 끌어왔지요. 캡틴?" "조용히 해 줘요. 이쪽은 그 정도가 아니오. 놈들은 프로톤 권총에 기절해 있는 사나이를 곧 발견 할거요. 그러면 되돌아와 우리들을 추적할 것이 틀림없어요. 그 우주선에 추적되면 당장에 추격 당하고 말아요." 캡틴은 딱 잘라 말하고 나서, 엔진의 스로틀을 완전히 열었다. 그 때, 보트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캡틴은 약간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에테르 난류다. 이건 좋지 않은데." 존이 외쳤다. "캡틴, 놈들이 쫓아왔어요!" 뒤를 돌아보니, 무수한 별 사이로 아까의 우주선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캡틴은 끄덕이고 나서, 보트를 가로 세로 마구 비틀며 추적하는 자들을 혼란하게 했다. 그러나 적은 엄청난 속력이다. 존이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와요!" 그 때 보트는 맹렬한 에테르 난류 속에 돌입했는지 마구 뒤흔들렸다. 보트의 로켓 분사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더욱이 적은 바로 뒤에까지 다가오고 있다. 그 때 존이 또 외쳤다. "아니, 놈들이 되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적이 단념했어요!" "아니 단념한 게 아니야. 놈들은 우리들처럼 잡히지 않으려고 되돌아간 거야." 캡틴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존은 되물었다. "잡히지 않게라니요?" "그렇다. 우리들처럼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말야."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 존은 두려운 듯 떨면서 중얼거렸다. 지구의 사르갓소스 바다와 같이 이 에테르 난류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면, 어떤 우주선도 탈출한 예가 없다. 우주선의 무덤인 것이다. 작은 사나이 케인도 아까의 연구 노트가 어쩌고저쩌고 하던 원기는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멍청하게 캡틴 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털북숭이 생물   안드로이드 오토가 자위단의 한 사람과 우주선에서 굴러 떨어진 곳은 화성의 사막 위, 20미터 정도 되는 곳이었다. 어둠 속을 굉장한 기세로 떨어져 가면서, 오토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자기의 몸을 상대의 위에 가져가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하면, 지상에 충돌될 때 상대가 조금은 쿠션의 구실을 해 줄 것이었다. 민첩한 오토였다. 그야말로 팔은 순간에 그것을 해 냈는데, 지상에 충돌했을 때, 제아무리 오토라지만, 정신을 잃었을 정도였다.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오토는 적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상대는 즉사하였다. 그런데 그 시체를 본 오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일까?) 오토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체라고 쓰러져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 자기와 맞붙어 싸우던 사나이와는 비슷하지도 않은 전혀 틀린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짧은 털에 뒤덮여 있었고, 발은 뒤꿈치에서부터 앞쪽이 두 개로 갈라지고, 손도 손가락이 두 곳밖에 없다. 머리의 꼭대기는 평평하고, 눈꺼풀이 없는 검고 큰 두 개의 눈이 얼굴까지 빈틈없이 나 있는 흰털의 안쪽에서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이 생물은 가죽 벨트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붙어 있는 원통형의 기계는 충돌하였을 때, 가루가 되어 버렸다. (나는 추락 당시의 충격으로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아까는 틀림없이 지구인이었는데.)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이 없다. 멀리 사라져 가는 로켓 엔진 소리에 오토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오토는 이거 야단났구나 하는 난처함과 어떻게 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캡틴이 유괴를 당했단 말인가? 나와 함께 한 일이 실패를 하다니. 클라크 그 놈이 뭐라고 할지. 아무튼 곧 커밋 호로 되돌아가야 한다. ) 오토는 꽤 무거운 털북숭이 시체를 어깨에 들쳐 맸다. 살아 있는 뇌 사이먼에게 조언을 부탁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티즈 시로 가까이 가는 것을 피하여 멀리 돌아서 커밋 호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겨우 커밋 호에 되돌아와 보니, 그 중앙의 연구실에서는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이 로봇인 클라크와 함께 암흑성의 관측을 하고 있었다. 화성인으로 변장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사이먼도 클라크도 깜짝 놀란 듯이 오토를 보았다. 오토는 시체를 방바닥에 털썩 내던지고는 풀이 죽어 말했다. "나야, 오토.“ 사이먼이 곧 날카롭게 물었다. "캡틴은 어디 있나?" 오토는 말이 막혔다.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저…… 놈들에게…… 자위단 놈들에게 납치되었습니다." 하면서 간단하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고 있던 클라크는 광전관으로 된 큰 눈을 환하게 비치면서 미쳐 날뛰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는 편이 좋다고 말했잖아. 모든 게 너의 책임이다. 캡틴이 납치되는 것을 팔짱을 끼고 구경만 했구나?" 오토는 더 참을 수가 없어 큰 소리를 질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책임은 아니야. 나는 캡틴의 말대로 했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우리들의 캡틴을 납치되게 했나? 꼼짝할 수 없었던 일도 아니지 않은가!“ 사이먼도 차갑게 말했다. "조용히 해! 그런 걸 가지고 다투어 봤자 소용없어. 그보다도 그 우주선의 뒤를 쫓는 일이 급하다." 그러자 오토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풀이 죽어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우주선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놈의 시체를 짊어지고 왔어요. 무슨 실마리라도 되지 않을까요?" 하며 오토는 자신이 지구인과 함께 추락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괴상한 생물로 변한 경위를 설명했다. 사이먼은 렌즈 눈으로 그 시체를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 "이런 생물이 있다니?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더욱이 살아 있을 때 지구인으로 보였다는 것도 모르겠어. 오토, 자네가 놈과 맞붙었을 때도 놈을 지구인처럼 느꼈나?" 오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그렇지, 놈의 손을 잡았을 때, 몹시 털북숭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이놈은 어떤 방법으로 지구인처럼 보이도록 했던 거다." "그럼, 왜 놈이 죽자 지구인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놈의 벨트에 붙어 있는 장치가 틀림없이 지구인으로 보이게 하는 원인이었을 거야. 그것이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대로 되돌아 온 것이다." 사이먼이 이렇게 말하자 오토는 다시 머리를 갸우뚱했다. 지구인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기계 같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은 또 다시 시체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X선으로 조사해 보았다. 이윽고 사이먼은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구나! 이 생물은 명왕성이나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놈이다." 오토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명왕성이라고요? 이런 것이 명왕성에 살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사이먼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얼음으로 덮여 있는 명왕성은 아직 전부 탐험된 것은 아니지. 게다가 세 개의 위성과 전혀 알지 못 하는 곳이 있고. 더욱이 이 생물의 눈을 보아라. 저녁 무렵의 밝기 정도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털이 많고 뼈도 그다지 강한지 않다는 것은 기온이 낮고 천체의 크기가 중간 정도의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천체라면 명왕성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놈은 태양계 밖에서 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오토가 반박하자, 사이먼은 조금도 변함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어. 이 생물이 지닌 눈의 망막은 우리들의 태양이 내고 있는 자외선을 느끼는 것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니 말이야." 클라크가 외쳤다. "그럼, 캡틴은 명왕성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틀림없이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놈의 비밀 기지는 거기에 있어. 곧 출발합시다." 그러고서 5분 후, 클라크가 조종하는 커밋 호는 떠오르기 시작했다. 클라크는 도중에 레버를 앞으로 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커밋 호는 진짜 커밋 Comet '혜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것도 캡틴의 발명이다. 분사관에서 두터운 이온의 입자를 분출시켜, 그것이 선체를 싸고 길게 꼬리를 끈다. 얼른 보아서는 혜성같이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적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커밋 호는 위장을 한 그대로 굉장한 속도로 명왕성을 향해 계속 날아갔다. 그 동안에도 사이먼은 소형 망원경으로 암흑성의 관측을 계속했다. 오토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캡틴에게 큰일이 일어나고 있을 텐데, 이렇게 태평스럽게 암흑성의 관측만 계속하고 있다니요." 사이먼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왜 커티스를 걱정하지 않겠는가. 내 자식 같은 커티스가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지. 그러나 이 관측은 커티스가 자이로 박사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건 그렇겠지요. 캡틴이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말이지요." 오토가 비꼬자, 클라크가 옆에서 말했다. "캡틴이 죽음을 당하다니 말도 안 돼. 곧 발견하여 구조하겠어!“ "그렇다면, 오직 좋을까……" 오토는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앞쪽에 무엇인가 있다. 놈들의 우주선일지도 모른다!“ 사이먼과 클라크도 긴장하여 앞쪽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색다른 모양의 우주선이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사이먼이 말했다. "자위단의 우주선은 아니다. 진로가 틀린다." 클라크가 외쳤다. "이쪽으로 파고든다. 부딪칠 작정인가!“   우주선의 묘지   한편, 캡틴 퓨쳐들은 에테르 난류에 휩쓸려 점점 날려 갔다. 위험을 예측하고 방향을 바꾼 자위단의 우주선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캡틴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이다. 이 난류가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추적자를 속이려고 생각한 것이……" 존은 캡틴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말했다. "확실히 당신은 추적자를 보기 좋게 속였지 뭐여요. 사르갓소 바다에서라도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죠." 그러나 캡틴은 말했다. "존도 알고 있겠지. 이 에테르 난류는 모두 중앙의 소용돌이치는 데로 흐르고 있지. 이 흐름에 휩쓸리면, 무엇이나 거기로 빨려 들어가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거의 탈출을 못한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다시 한번 해 보자." 캡틴은 스로틀 레버를 크게 열었다. 그러나 에테르 난류에서 빠져 나가는 데는 너무나도 힘이 약했다. 캡틴은 엔진을 멈추었다. 중앙으로 흘러 들어가기까지 속력을 절약해 두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캡틴은 구명 보트의 앞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중앙으로 흘러 들어올 작정이었다. 그러면…… 그러나 캡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윽고 구명 보트는 이 때까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상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캡틴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주를 붙잡고 있어요." 두 사람은 당혹해 하며 지주를 붙잡았다. 그러나 다음의 흔들림은 더 심했다. 어느 쪽이 위인지 아래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을까. 갑자기 구명 보트가 저수지 속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케인이 창 밖을 보며 말했다. "에테르 난류에서 겨우 빠져 나온 것 같구나." 존도 기쁜 듯이 환성을 질렀다.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중심에 들어왔기 때문에 난류가 적어지고 조용할 뿐이다. 아무튼 소용이 없겠지만, 다시 한번 해 보자." 캡틴은 로켓을 분사하여 지금 온 쪽으로 뱃머리를 돌려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30초도 채 안 되어 뱃머리가 눈에 보이는 에테르 난류의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는 원래 장소로 튕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더 강한 에너지를 손에 넣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캡틴이 중얼거리자, 케인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손에 넣지요?" 캡틴은 조용히 창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있어." 그가 가리킨 저 멀리에는 무엇인가 큰 금속의 덩어리 같은 것이 보인다. 구명 보트가 그쪽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것은 여러 가지 모양을 한 우주선의 잔해나, 크고 작은 여러 운석이 모인 곳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존은 너무나 기분이 좋지 않아 두려운 듯 물었다. "저건 뭐여요." "이 사르갓소 바닥에 끌려들어온 우주선들이야. 여기서 탈출에 성공한 우주선은 하나도 없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태양계에서 건설된 여러 가지 우주선이 눈에 띄었다. 한 때는 행성에서 행성으로 많은 사람들을 운반한 호화선을 비롯하여 대형 화물선, 정찰 우주정 등이 조용히 놓여 있는 것이다. 희미한 태양 빛에 비쳐 푸르고 희게 빛나는 그 모양을 보자 끝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존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호흡에 필요한 공기를 모조리 써 버렸을 테니까." "그럼, 이 구명 보트의 공기 탱크가 텅 비게 되면 우리들도 죽는 거죠! 앞으로 겨우 이틀이나 견딜까요?" "그래서 저 우주선 속에서 이 보트에 적당한 원자력 엔진을 찾아 내 여기서 탈출하려고 생각했던 거야. 부서지지 않고 보존되었고, 여기에 맞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존은 몸을 떨었다. "저 죽음의 우주선 속에 들어가서 찾는 거여요?" "응, 존은 케인 대장과 함께 여기 남아 있어 줘." "아니, 저도 가겠어요." 그러나 케인이 말했다. "나는 여기 남겠어. 남아서 두고 온 노트에 기록한 것을 다시 생각해 내어 정리해 볼 작정이다." 그리하여 캡틴과 존은 우주복을 입고 좁은 에어록을 빠져 나와 밖으로 나왔다. 곧 벨트에서 소형의 추진기를 빼내어 추진을 시작했다. 작은 로켓은 두 사람을 천천히 가까이 있는 난파선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처음의 우주선은 화물선이었는데, 뱃머리 쪽은 마치 거인이 손으로 움켜쥐어 뭉그러뜨려 놓은 것처럼 우글쭈글해 져 있었다. "운석에 당했어. 너무 심해서 사용할 엔진은 찾아 낼 수 없어." 캡틴은 존에게 우주선의 무전기를 통해서 말했다. 다음의 우주선은 대형의 정기 여객선이었다. 우주선 안은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화성인, 금성인, 지구인을 비롯하여 태양계의 남녀의 시체가 겹치어 얼어붙은 채로 뒹굴고 있었다. 엔진실로 내려가 보았다. 원통형의 거대한 원자력 엔진은 아무 상처가 없었으나, 캡틴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너무 크다. 다른 걸 찾아보자." 그 다음의 우주선은 우주 해적에게 당한 모양으로 보기에도 참혹했다. 존은 몸서리치듯 말했다. "태양계에서 이러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캡틴이 말했다. "퍽 오래 전 이야기이다. 이 덩어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모두 구식의 우주선들뿐이다. 새로 난파된 우주선은 덩어리의 주위에 있을 것이 틀림없어. 그쪽으로 가 보자. 거기라면 새로운 타입의 사용할 수 있는 엔진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쪽으로 가려고 할 때, 존이 갑자기 안쪽의 덩어리를 가리켰다. "저건 뭘까?" 존이 가리킨 것은, 30미터 정도 길이의 회색 원통형의 물체였다. 아무래도 우주선처럼 보이진 않았다. 캡틴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뭘까? 아무리 봐도 이 태양계에서 만든 우주선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태양계 밖의 것일지도 모른다." 이 태양계 밖의 생물의 우주선이 여기까지 와서 난파되어 흘러왔다는 생각을 들자, 캡틴은 몹시 흥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좀 가까이 보자. 따라오겠어, 존?" 물론 존도 싫다고 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수수께끼의 원통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수수께끼의 원통의 저쪽에 다른 우주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우주선이라는 것은 몹시 작고 빈약했으며 구식 로켓 분사관이 몇 개나 나와 있는, 모양이 없는 것이었다. 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마치 원시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아요! 이런 걸로 우주 항해를 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러나 캡틴은 몸이 굳어져 가지고 말했다. "나는 짐작이 가는 게 있어. 저건……" 캡틴은 뱃머리 쪽을 돌아보며 끄덕였다. "역시 그렇구나. 파이오니아 3세 호다!“ "파이오니아 3세 호라고요? 그러면, 마크 칼의 우주선이 아닌가요. 처음으로 목성보다 앞쪽의 행성을 탐험한 마크 칼의 배가 여기에……" 캡틴은 거의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 마크 칼의 우주선이다. 마크는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처음으로 내린 사나이다. 다시 명왕성을 향하여 날아가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여기에 죽어 있다니?" 수수께끼의 우주선 탐험은 뒤로 미루고, 두 사람은 파이오니아 3세 호의 입구를 억지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옛날의 소형 우주선에는 겨우 여섯 명의 사나이 밖에 타지 않았으며, 여섯 사람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 우주의 개척자들은 자기들의 뒤를 이을 것을 믿고 여기서 죽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종실의 좌석에는 웅크리고 앉은 채 약간 검게 마른 사나이가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면의 유리 너머 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존이 말했다 "마크 칼이어요!“ 마크 칼의 얼굴은 역사책에도 나와 있을 뿐 아니라 동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여 잘못 볼 리는 없다. 캡틴은 그 용감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들도 마크 칼처럼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에 갇혀 있는 것이다. 캡틴은 힘주어 말했다. "마크 칼의 분함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도 나는 여기서 탈출하겠어."   문어 인간   캡틴은 말했다. "자아, 여길 나가서 에너지를 찾으러 가자. 그 전에 저 수수께끼의 원통을 좀 조사해 보자. 태양계 밖의 우주선을 조사할 기회는 또 없을 테니까 말야." 연구가로서의 캡틴은 이럴 때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문이나 창 같은 것은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존이 말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뭐 우리들의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요." "걱정할 건 없어. 안의 생물이 살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어디에 입구가 있는 것일까? 어떻게 문을 찾아 내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때였다. 마치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한 점이 점점 넓어지면서 지름 3미터 정도의 둥근 구멍이 우주선 중간에 뚫렸다. 캡틴의 눈이 빛났다. "이 문은 텔레파시의 작용을 한다! 내가 문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생각하자, 문이 열렸어! 이런 장치를 발명하다니, 어떤 생물일까! 자, 가자 존!" "무서워요!“ 존은 깜짝 놀라며, 캡틴의 뒤를 따라 마법의 구멍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빈틈없이 금속의 선반이 만들어져 그 하나 하나에 제비꽃 색깔의 램프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금속의 선반에 얼어붙어 누워 있는 기괴한 생물을 보았을 때, 존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리도 아니었다. 마치 문어와 인간의 혼혈아 같은 생물이다. 두터운 비늘에 덮이고, 딱딱하게 솟아 나온 것이 등뼈에 줄지어 있고, 네 개의 팔은 마치 솟아 나온 촉수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태양계의 생물은 아니다. 공기도 호흡하지 않는 것 같다. 겨우 선반에 하나하나 켜져 있는 제비꽃 색깔의 램프가 그 생물의 몸을 보존하는 모양이다. 벽에는 탱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캡틴은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모두 비어 있었고, 본래는 붉은 액체가 들어 있던 모양으로 그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피가 이 탱크 속에 들어 있었어! 틀림없이 이 생물의 먹이는 혈액인 것 같다. 그것이 없어졌으니까 말이야." 원통의 뱃머리 쪽에는 제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레버와 스위치 같은 것도 태양계와는 전혀 달랐다. 캡틴이 그쪽으로 가까이 가자, 갑자기 제어반의 여러 가지 색깔의 램프가 일제히 켜졌다. 그와 동시에 그 제어판에 가징 가까운 선반에 드러누웠던 두 사람의 문어 인간의 위에 있는 제비꽃 색깔의 램프가 꺼졌다. 그리고 그 두 외계인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캡틴은 순간 긴장하여 외쳤다. "알았다! 놈들은 먹이인 피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동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를 가진 생물이 우주선 안에 들어오면 탐지기가 움직이고, 지휘자인 두 사람을 눈뜨게 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 두 사람이 완전히 눈을 뜨면, 다른 제비꽃 색깔의 램프를 모두 끄고, 우리들의 피를 빨러 오는 것이다. 그 전에 제어판을 부숴 버려야……" 캡틴이 제어판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말했을 때, 존이 비명을 올렸다. "캡틴!" 캡틴이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비늘 투성이의 촉수에 몸을 잡히고 말았다. 문어 인간은 생각한 것보다 빨리 눈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한 개의 촉수가 캡틴의 무릎을, 한 개는 목, 그 밖의 두 개는 가슴에 엉겨 붙어 있다. 더 무서운 것은, 또 하나의 문어 인간이 제어판에 다가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동료들을 깨우려 하고 있는 거다. 존은 필사적으로 캡틴의 몸에 엉겨붙은 촉수를 떼려고 했다. 캡틴은 있는 힘을 다해서 허리의 프로톤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하여 그것을 뽑아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제어판에 네 개의 손을 내밀고 있는 문어 인간을 향하여 발사했다. 순식간에 문어 인간은 검게 그을리고 말았다. 캡틴을 붙잡고 있던 문어 인간은, 캡틴의 몸을 들어올려 바닥에 집어던지려고 했다. 캡틴은 들어올려진 채로 두 발을 발사했다. 문어 인간이 쓰러지는 것과 통시에 캡틴도 바닥 위에 던져지고 말았다. 캡틴은 재빨리 일어섰다. 그리고는 선반 위에 잠들고 있는 다른 문어 인간에게 날카롭게 눈길을 보냈다. 천만다행으로 제비꽃 색깔의 램프 아래에서, 문어 인간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잠들어 있었다. 캡틴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위험했어! 우리들이 들어온 것을 알린 탐지기는 지휘자 두 사람만 깨운 거다. 다른 것들을 깨우는 것은 지휘자의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피를 탐내는 생물은 우주의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주 공간의 추위도 진공도 문제가 안 되다니, 무서운 생물이다." 존은 몸을 떨었다. "피가 먹이라니, 징그러운 생물이군요. 어서 여기서 나가지요, 캡틴." 캡틴은 더 자세히 이 문어 인간이나, 문어 인간을 낳게 한 과학을 조사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어물어물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들어왔던 둥근 구멍으로 즉시 밖으로 나왔다. 소리도 없이, 그 구멍은 점점 닫혀져 갔다. 캡틴은 그 수수께끼의 우주선을 향해 중얼거렸다. "언젠가 또 여기 와서 조사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를 탈출하고 나서의 이야기지만." 캡틴은 될 수 있는 대로 난파선의 덩어리 가장자리에 있는 새로운 우주선을 찾았다. 그 일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어쩌면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원자력 엔진 10개를 찾아서 구명 보트로 끌고 갔다. 그리 하여 힘을 다하여 10개의 원자력 엔진을 우주선 뒤쪽의 동력부에 끌어넣었다. 하나 하나 조심하여 바닥에 장치했다. 존은 숨가쁘게 이 어려운 작업을 도왔다. 겨우 작업이 끝나자, 존은 기름으로 새까맣게 된 얼굴로 진지하게 캡틴에게 물었다. "이젠 정말 밖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글쎄, 잘 빠져 나갈 수 있을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공간에 튕겨 나가든지 어느 쪽이겠지. 아무튼 이 원자력 엔진이 견디어 기계들이 제멋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다른 방법은 없어. 자, 두 사람 모두 준비는 됐겠지요. 엔진을 발동시킵니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엔진의 스위치를 넣었다. 굉장한 소리가 작은 구명 보트를 압도했다. 그와 동시에 맹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당장에 우주선이 제각기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캡틴은 출력을 더욱 높였다. 그리고 더 이상 우주선이 지탱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 될 때, 캡틴은 분사관의 스로틀 레버를 열었다. 그 순간 세 사람은 굉장한 기세로 좌석에 눌렸다. 그와 동시에 구명 보트는 눈이 돌아갈 정도의 속력으로 앞으로 날아갔다. 난파선의 덩어리는 즉시로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윽고 에테르 난류가 소용돌이치는 벽에 부딪칠 예정이다. 캡틴은 굳은 얼굴로 스로틀 레버를 꽉 틀어쥐었다. 그 순간 에테르 난류의 벽은 구명 보트를 튕겨 보내려고 했다. "실패할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얻어맞은 로켓은 마구 부딪쳐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벽을 뚫었던 것이다. 몇 분 동안인가, 점점 약해지는 에테르 난류 속을 나아갔다. 갑자기 튕기는 것처럼 구명 보트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서, 무서운 기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캡틴은 얼른 뒤에 장치한 원자력 엔진의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당신은 저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를 탈출한 최초의 인간이에요!“ 캡틴은 침착하게 말했다. "목성 쪽으로 진로를 잡자. 그리고 퓨쳐맨을 불러, 자이로 박사를 추적해야 한다."   커밋 호   구명 보트는 하얗게 빛나는 목성을 향하여 계속 나아갔다. 앞쪽을 지켜보고 있던 캡틴이 갑자지 기쁜 소리를 질렀다. "앗, 퓨쳐맨이 왔다!“ 존도 케인도 얼른 캡틴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작은 혜성이 하나 가까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혜성이 하나 보일 뿐, 아무것도 없잖아요." 라고 케인이 말하자, 캡틴은 싱긋이 웃었다. "저게 무슨 이름의 혜성인지 알고 있나요?" 케인은 안타까운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혜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이런 궤도를 지나는 혜성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캡틴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건 혜성이 아니오. 커밋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입니다. 퓨쳐맨은 혜성처럼 위장을 해서 날고 있는 겁니다." 존이 물었다. "이 구명 보트에는 텔레바이저가 없는데요. 어떻게 우리들이 여기 있는 것을 알려 주나요?" "스토퍼를 걸어야겠어. 자, 그럼 붙잡고 있어요." 캡틴은 스로틀을 열었다. 구명 보트는 굉장한 기세로 커밋 호를 향하여 급강하하고 있었다. 클라크와 오토가 깨달은 것은 그 때였다. 그리고 캡틴은 서로 부딪칠 만할 곳에서 크게 손을 흔듦과, 동시에 뱃머리를 쑥 올려 층돌을 피했다. 캡틴은 말했다. "모두 알고 있었을 거야. 어쨌든 무엇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은 퓨쳐맨은 아니니까 말야." 그대로였다. 커밋 호는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리고 나서 이윽고 커밋 호와 구명 보트는 나란히 멈추어 섰던 것이다. 캡틴과 존과 케인은 우주복을 입고, 옆에 떠 있는 커밋 호에 옮겨 탔다. 로봇 클라크는 귀가 멀 것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 왔다. "캡틴! 무사했군요. 물론 나는 캡틴이 반드시 무사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만, 그 놈의 실수가 원인이지만 말이에요." 그 놈이라고 불린 안드로이드 오토는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떻게 탈출했습니까?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을 몇 명이나 해치웠습니까?" 캡틴은 웃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사람을 죽이지 않고 탈출하려니까 고생한 거야. 그보다도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를 빠져 나오는 것이 큰일이었어." 그 말을 들은 사이먼은 깜짝 놀란 것처럼, 렌즈의 눈을 캡틴 쪽으로 돌렸다. "사르갓소 바다라고! 용하게 빠져 나왔군." 그리하여 캡틴은 그 동안의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힘주어 말했다. "아무튼 자이로 박사를 한시바삐 퇴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2, 3일 되면 태양계에서 큰 소동이 일어난다. 나는 자이로 박사의 기지가 천왕성이나 명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이먼이 말했다. "커티스, 명왕성이야." 하며 털북숭이의 수상한 시체를 조사한 결과를 이야기 해 주었다. "좋아요. 곧 커밋 호를 출발시킵시다. 그래, 그 목표는 명왕성입니다!“ 캡틴이 말하자, 클라크는 기쁜 듯이 쿵쿵 크게 발소리를 울리면서 조종실로 들어갔다. 금성의 천문 대장 케인이 달했다. "나도 명왕성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요. 자이로 박사를 빨리 해치우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명왕성에 도착하면 곧 금성 행을 탈 수 있으니까요." 케인은 중얼거리며 불평을 했다. 그러는 동안 클라크는 이미 출발을 시켰다. 커밋 호는 굉장한 속력으로 명왕성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캡틴은 끄덕이며 사이먼 쪽을 보았다. "암흑성을 관측해 두었습니까?"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은 괴로운 듯 대답했다. "관측하기는 했으나, 그런데 전혀 알 수가 없어. 확실히 암흑성은 굉장히 크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그 크기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질량이 작다." "왜 그럴까요? 더 큰 관측기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응, 명왕성으로 가면 탈타로스 천문대의 기구를 빌려 다시 한번 조사해 볼 작정이야. 그러나 이 암흑성에 대해서만은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캡틴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 크기에 비해서 그렇게 작은 질량이라면 확실히 큰일입니다." 이윽고 커밋 호 안에서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퓨쳐맨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로 되어 있는 식사도, 존과 케인에게 있어서는 이제까지 경험한 일도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캡틴과 존과 케인 앞에는 진공 냉장실에서 꺼내온 식료로서 지구의 냉동 고기, 화성의 사막 사과, 목성의 우주 빵, 금성의 포도주가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밖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토는 화학 약품의 액체를 꿀꺽 마시면 끝난다. 사이먼은 몸이 없기 때문에 영양을 취할 필요도 없다. 소형 방사기에서 보내는 진동에 위해 피로를 제거하면 된다. 커밋 호를 자동 조종으로 전환시킨 클라크는 두터운 가슴에 붙어 있는 뚜껑을 열고, 구리로 된 작은 덩어리를 안에 넣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클라크는 뚜껑을 닫고서는 나머지 구리 조각을 달의 개 이이크에게 주었다. 이이크는 얼른 그 구리 조각을 먹어치우고는 만족스럽게 눈을 빛내고 있다. 존은 깜짝 놀라며 클라크에게 물었다. "이이크는 어떤 금속이라도 먹나요?" 클라크는 자기가 귀여워하고 있는 애완견이 존의 눈에 들었으므로 아주 기분이 종은 모양이었다. "어떤 금속이라도 먹어요. 나의 몸은 아주 단단한 금속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씹지 못하지만요. 좋아하는 것은 구리입니다. 그리고 금과 은도 좋아하지요." 그러자 오토가 밉살스럽게 끼어 들었다. "이놈은 나의 변장용의 은 튜브에는 정신이 없어요. 그 때문에……" 존은 금팔찌를 빼어서는 이이크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먹어." 클라크가 말했다. "이놈은 소리를 듣지 못해요. 그 대신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러면 알 수 있죠." 그래서 존이 클라크의 말대로 하자, 이이크는 기뻐하며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팔찌를 먹어치우고 난 이이크는, 갑자기 이상한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클라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금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이크는 병이 납니다." 오토가 말했다. "병이라고? 취한 게 아냐?"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이 달의 개 이이크는 후에 큰 공을 세우고 캡틴들을 구원하는데, 그 때는 누구 하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기묘한 식사가 끝나자, 캡틴은 금성에서 만들어진 줄이 스무 개가 되는 기타를 켜면서 창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존은 그 모습을 보며, 캡틴이 명왕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제부터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법사   커밋 호는 명왕성의 수도 탈타로스를 덮고 있는 큰 돔의 원형의 지붕으로 점점 가까이 갔다. 돔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우주항이 있다. 거기에는 지구의 황혼 정도의 불빛 속에서 등대가 빛나고 있었다. 돔의 저쪽에는 눈이 아플 정도의 설원이 펼쳐지고, 그 저쪽에는 등을 내놓은 산맥이 우뚝 솟아 있었다. 드디어 착륙이다. 추위도 더위도 모르는 클라크는 태연한 것 같지만, 추위가 가장 싫은 오토는 실망한 듯 바깥 경치를 보고 있었다. 존과 케인도 좁은 조정실에 들어와서는 걱정스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착륙하자 캡틴은 커밋 호의 문을 열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커밋 호 안으로 휙 들어 왔다. 캡틴이 말했다. "클라크를 데리고 가겠다. 너무 춥다. 다른 사람은 남아 주게 ." "어디로 가세요?" 하고 존이 물었다. "우선 먼저 행성 경찰 본부로 가서 상세하게 물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사이먼들이 돔의 서쪽 탈타로스 천문대에 가면 우리는 자이로 박사를 추적한다." 캡틴이 말하자, 존이 말했다. "그럼 나도 데리고 가 주세요. 여기 행성 경찰의 사령은 에즈라가 아니에요?. 기억하고 계시죠?" "기억하고 말고. 에즈라 아저씨가 있다면 존도 와라." 에즈라 가아니는 행성 경찰 중에서도 실력자이며, 캡틴과도 함께 일한 사이였다. 캡틴과 존과 그 수상한 시체를 짊어진 클라크는 극심하게 추운, 저녁처럼 어둑어둑한 명왕성에 내려섰다. 달의 개 이이크는 여전히 클라크의 목에 매달린 채였다. 명왕성의 하늘에는 하늘 끝 가까이에 가장 큰 위성인 케이론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나머지 두 개의 위성 케르베로스와 스틱스는 지평선 너머에서 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케이론에는 매우 질이 좋은 모피가 되는 짐승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의 사냥꾼들이 달려드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케르베로스는 유형 위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듯이 태양계의 흉악범이 갇혀 있는 형무소가 있다. 다만 스틱스는 표면이 모두 물로 덮여 있기 때문에, 거기에 착륙하거나 기지를 설치한 지구인은 하나도 없다. 세 사람은 이윽고 전자동에 의해 자동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을 빠져, 탈타로스 시의 돔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훈훈했고, 아토믹 램프가 주욱 열 지어 거리를 비치고 있었다. 다른 행성의 도시에 비하여 주민의 수는 적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지구인과 명왕성인 밖에는 없었다. 그 명왕성인은 지구인과 흡사하나, 그 큰 몸집과 얼굴까지 검은 털로 온통 덮여 있고 마치 두 개의 동굴처럼 뻥 뚫린 구멍 안쪽에 형광 빛을 던지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길다란 털에 덮여 있기 때문에 이 돔에서는 무덥고 괴로워서 명왕성인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래서 옛날부터의 명왕성의 가죽 조끼 앞을 넓게 열어 놓고 있다. 이윽고 행성 경찰의 표시가 붙어 있는 이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입구에 서 있는 경관이 불렀다. "잠깐만!“ 경관은 특히 클라크를 수상하게 지켜보았다. 캡틴은 손을 들어, 그 반지를 보여 주었다. 커밋 호에서 여기로 오는 동안에 원자력으로 수리해 놓은 것이다. "캡틴 퓨쳐!“ 반지를 본 경관은 깜짝 놀라며 큰소리를 질렀다. 안쪽에서 사령의 마크를 붙인 희끗희끗 머리가 센 사나이가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캡틴 퓨쳐! 그리고 클라크와 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에즈라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캡틴의 손을 잡았다. "자네가 온 걸 보니,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게 틀림없겠군." 에즈라가 이렇게 말하자 캡틴은 웃으면서 말했다. "에즈라 아저씨도 많이 늙었군요. 지금 대 사건이라고 하면 무엇인 줄로 생각되나요?" 에즈라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응…… 대 사건…… 설마 자이로 박사에 대한 건은 아니겠지." "그겁니다.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에즈라는 캡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캡틴의 눈에는 보통이 아닌 결의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 명왕성에 자이로 박사의 기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이 명왕성 근처에 놈의 기지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캡틴은 자위단의 하나가 죽는 즉시로 털북숭이의 생물로 변한 경위를 말해 주었다. "그 놈을 조사한 결과, 명왕성 근처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그 시체입니다." 클라크는 시체의 포장을 풀었다. 나이 많은 에즈라 사령은 그 흰털에 덮여 있는 생물을 열심히 조사했다. "나는 이런 놈을 여기서 본 일이 없어. 물론 명왕성의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하고 에즈라는 중얼거렸다. 캡틴은 물었다. "명왕성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누굽니까?" 에즈라는 생각하면서 말했다. "글쎄, 행성 지리학자로서 지금 명왕성 조사단의 단장을 하고 있는 커얼 로머가 가장 좋지. 로머는 지금 탈타로스에 있을 거야. 곧 부르지." 몇 분이 걸리지 않아서 커얼 로머가 왔다. 커얼 로머는 40세 정도의 지구인으로서, 보기에 학자다운 지적인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 기후가 극심한 명왕성을 조사했기 때문에 피부도 붉고 검게 단단해 보였다. 로머는 그 괴물의 시체를 조사하는 동안 점점 난처한 얼굴로 변해 갔다. "나는 이러한 생물이 명왕성에 있다는 말을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물로 움직이는 빙하의 저쪽 빙원은 아무도 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지성을 가진 생물이라면 우리들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캡틴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세 개의 위성에는 어떨까요?" "그거라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물에 덮여 있는 스틱스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유형 위성인 케르베로스의 대부분과 케이론의 많은 부분은 조사가 끝나지 않고 있으니까요. 케르베로스라면 형무소장 랜드르 레인, 케이론이라면 모피상의 빅터 그림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에즈라가 끼어 들었다. "그림도 레인도 지금 용무가 있어서 탈타로스에 와 있지. 좋아, 두 사람을 불러 보자." 캡틴은 끄덕였다. 그리고 형무소장인 레인에게는 그것과는 관계 없이 만나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탈주할 수 없다는 형무소에서 자위단에 참가하고 있는 로지와 카라크가 어떻게 빠져 나갔는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먼저 모피상의 그림이 왔다. 그림은 뚱뚱하고 간사스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캡틴은 한눈으로 싫은 작자라고 생각했다. 그림은 시체를 보더니 큰 소리를 질렀다. "바쁜 시간에 이렇게 왔는데. 이건 뭐야, 이런 건 케이론에 없는 것만은 확실해요. 게다가 명왕성 안에 있을 리가 없어요." 캡틴이 물었다. . "어떻게 그렇게 확실히 단언할 수 있소?" "할 수 있지요. 우리가 고용한 사냥꾼들은 어떤 조사단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곳까지 갔으니까 말이오." 로머가 반대했다. "그렇지만 자네의 부하들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곳도 있을 거야." 그림은 코웃음 쳤다. "그럼 당신들이 나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겁니까? 뭐 좋아요. 나는 바빠요. 이런 이상한 시체와 마주 서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림은 얼른 본부를 나가고 말았다. 다음으로 온 것은 케르베로스의 형무소장인 랜드르 레인이었다. 레인은 가장 흉악한 범인을 가두어 놓는 형무소의 소장이라고는 생각한 수 없을 만큼 신경질적이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나이였다. 레인은 말했다.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캡틴 퓨쳐. 우리 형무소에 많은 악당들을 보내 주셔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내가 보낸 놈들 중 둘은 거기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키 작은 동물학자인 로지, 또 한 사람은 키 큰 카라크입니다." 레인은 분명히 말했다. "로지와 카라크라면 몇 달 전에 탈주했습니다. 나의 형무소에서의 최초의 탈주자입니다.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아직 모릅니다." 캡틴은 그 이야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인은 괴물의 시체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생물이 케르베로스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 나는 형무소 외의 것은 자세히 모르지만, 간수들은 조사를 했으며 간수들로부터 이런 생물이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 캡틴은 레인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갈지는 않았다. 형무소장 레인이 돌아가자, 캡틴은 에즈라 사령에게 물었다. "이 시체를 명왕성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누가 없을까요?" 에즈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라면 안성맞춤인 놈이 이 건물 안에 있어. 사버라고 하는데, 어떤 용무로 빙원으로 갈 때 그 안내를 시키고 있지." 사버는 틀림없이 표준적인 명왕성인이었다. 뾰족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은 긴 털에 덮여 있었다. 형광을 내보내는 코고 둥근 눈은 로봇인 클라크를 무서운 듯이 바라보았다. 사버는 혀가 잘 돌지 않는 지구어로 말했다. "빙원으로 가는가?" "아니, 너는 이런 놈을 그 전에 본 일이 있는가?" 하면서 늙은 사령은 흰털에 덮여 있는 괴물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 때, 사버는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마법사다!“ 캡틴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너는, 이 생물을 그 전에 본 일이 있는가?" 그러니까 사버는 무서운 듯이 그 시체를 지쳐보면 말했다. "나, 전에 본 일 없어. 그러나 들은 일은 있어. 할아버지 킬리가 마법사에 대해 말했어." 캡틴은 명왕성의 말로 말을 걸었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 생물에 대해 말해 주었는가?" 캡틴이 명왕성의 말을 알고 있는 것을 알자, 사버는 줄줄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구인이 오기 전에는 마법사가 자주 나타났던 모양이야. 굉장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 킬리가 젊었을 때 말야. 그 놈들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은 모양이야." 캡틴은 열심히 물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그 마법사가 어디에서 왔다는 걸 이야기 해 주었는가?" "아니, 나도 묻지 않았지만." 캡틴은 실망했으나,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너의 할아버지 킬리는 아직 살아 있는가?" "그래, 모두와 함께 아이스 타운에." "그 아이스 타운이라는 건 어디에 있는가?" "움직이는 산이라든가 지옥의 바다라고 당신들이 말하는 얼음 바다의 북쪽이야." 캡틴은 에즈라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그 아이스 타운의 사버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에즈라가 말했다. "잠깐만! 움직이는 산 저쪽은, 지구인이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곳이야." "그래도 가겠습니다. 경찰의 가벼운 로켓을 빌려 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버를 길잡이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요." "그건 괜찮지만……" 에즈라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캡틴은 주저하지 않고 존, 클라크, 사버의 세 사람을 데리고 돔을 나가 급히 커밋 호로 갔다. 커밋 호에 들어가자, 캡틴은 사이먼에게 이제까지의 경위를 설명해 주고 나서 말했다. "나와 클라크는 이 사버의 안내를 받아, 이제부터 아이스 타운으로 향합니다." "신납니다! 역시 내가 따라가지 않고서는." 클라크가 환성을 올리자 캡틴은 꾸짖었다. "그 대신 이이크는 두고 가야 한다." "이이크 말입니까? 할 수 없지요. 오토에게 시중을 부탁할 수밖에." 그러자 혼자 남게 된 오토가 화를 터뜨렸다. "웃기지 마. 그 따위 놈의 시중을 들어 줄 수는 없어." 두 사람은 또 여느 때처럼 시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이먼이 꾸짖었다. "그만둬! 커티스, 그럼 우리들은 탈타로스의 천문대에 가서 암흑성의 관측이나 할까." "네, 존과 오토를 조수로 하여 암흑성의 정체를 규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알았어. 조심해서 갔다 와라." 그리고 나서 10분 후, 캡틴과 클라크와 사버는 우주 공항에서 날씬하고 가벼운 로켓에 올랐다. 곧바로 북쪽으로 향해 출발했다. 즉시로 거품 같은 모양을 한 탈타로스 시는 보이지 않았다. 빙원의 한가운데에는 꽤 너비가 넓은 급류가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사버가 말했다. "저것이 죽음의 강이야, 소금물이 흐르고 있지만. 저 흐름을 쫓아가면, 얼음 바다로 나가요." 캡틴이 끄덕이고, 전방에 솟아 있는 은빛의 산맥을 가리 켰다. "사버, 저게 움직이는 산인가?" 사버가 말했다. "우리들 아이스 타운 사람은 저걸 무거워한다. 몇 번이나 우리 종족의 거리나 마을을 멸망시켰으니까." 이윽고 움직이는 산이 가벼운 로켓의 바로 아래에 왔다. 이 움직이는 산이라는 것은 높이 3천 미터나 되는 얼음의 덩어리가 거의 남서의 방향을 천천히 움직여 가는 것이다. 지구의 빙하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고 속도도 몇 배 나 된다. 그 때, 클라크가 큰 소리를 질렀다. "캡틴, 위를?"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최후의 날 자위단'의 마크를 붙인, 검은 색깔의 우주선이 이쪽을 향해 급강하해서 오지 않는가! 캡틴은 이를 갈았다. "잠복하고 있었구나." 곧 경로켓을 옆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우주선의 원자 포가 불을 뿜고 있었다. 경로켓의 뒷 부분과 분사관이 날아갔다. 그리고 수백 미터 아래의 빙원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검은 색깔의 우주선은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급상승하여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사버가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제는 틀렸다! 경로켓이 움직이는 산이 오고있는 앞쪽을 향해 떨어졌다!“ 움직이는 산   최후의 그 순간까지 머리를 재빨리 움직여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캡틴이다. 사버가 어물거리고, 클라크가 밖으로 던져지지 않으려고 달라 불고 있는 동안에 로켓 몸체의 꼬리 쪽에 닿고 있었다. 분사관은 날아갔으나 이 로켓의 동력원인 원자력 엔진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 캡틴은 도중에서 끊어져 있는 출력 파이프를 재빨리 떼어냈다. 그리고 곧 조종석으로 되돌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의 행동이다. 클라크가 비명을 올렸다. "캡틴, 이제는 틀렸습니다!“ 로켓은 심하게 상하 좌우로 돌면서 어제 얼마 아니던 빙원에 충돌한다. 캡틴은 조절판을 힘주어 잡고 있다. 그리고 빙빙 돌면서 벌어져 가는 로켓 몸체의 꼬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다!“ 조절판을 활짝 열자, 원자력 엔진에서 굉장한 원자 불길이 아래로 향하여 뿜어 나왔다. 그 맹렬한 기세 때문에 하마터면 끝장이 날뻔한 로켓 몸체에 굉장한 브레이크가 걸렸다. 몸체는 빙글 돌았다. 그 때문에 브레이크의 효과는 없어졌으나, 낙하의 속도는 충분히 늦추어졌다. 그래도 굉장한 기세로 빙원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캡틴이 비틀거리며 곧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캡틴은 역시 비틀비틀 일어선 클라크와 사버에게 말했다. "자위단의 우주선은 이제 우리가 죽은 건으로 생각하고 안심하고 가버린 모양이다." 사버가 말했다. "이젠 정말 죽을 거다. 저것을!" 무엇인가 부딪치는 우박 같은 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가까이 온다. 캡틴은 외쳤다. "움직이는 산이다!“ 높이 3백 미터나 되는 얼음 산맥, 움직이는 산이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이다. 이제 몇백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1분 동안에 몇 미터의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인다. "도망쳐라! 뛰지 않으면 당한다!“ "그래봤자, 움직이는 산에서 도망칠 수는 없어!" 사버는 절망적인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달려가는 캡틴과 클라크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캡틴은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에도 달리면서 언제나의 습관대로, 왜 자위단에게 습격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자기가 명왕성에서 자이로 박사의 기지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 본부의 에즈라 사령, 그리고 행성 지리학자인 커얼 로머, 케르베로스의 형무소장인 랜드르 레인, 케이론의 모피상 빅터 그림 등 네 사람이다. 에즈라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 중에 자이로 박사가 있었던 것일까? 확실히 세 사람 모두 자이로 박사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런데 그 흰 털북숭이 생물이 인간으로 둔갑하고 있었던 것은? 그러므로 그 세 사람 중 누군가가 자이로 박사로 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클라크가 얼음산의 으르릉 으르릉거리는 소리 속에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얼음에게 잡히고 말아요!“ "더 빨리!“ 이윽고 사버가 외쳤다. "소용없어! 앞을 봐!“ 그대로였다. 달빛 속에서 가는 쪽을 보고 있던 캡틴은 당장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고 있는 쪽에는 죽음의 강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강기슭까지 이른 캡틴은 언뜻 보고도 강을 헤엄쳐서 건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은 소용돌이치며 굉장한 속도로 흐르고 있다. 사버는 이제 틀렸다고 단념한 모양이었다. "하느님의 뜻이다! 이제 이것으로 끝장이다!“ 캡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우리들에게 끝장은 없다! 클라크, 저기 있는 얼음 덩어리를 강속에 밀어 넣어 주게! 물에 뜨면 얼른 거기로 뛰어올라야 한다. 저 강의 속도라면 얼음산이 밀려오기 전에 강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거다!“ 그야말로 캡틴이었다. 어떤 곤란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그 순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캡틴의 말에 힘을 얻어 사버까지 강속에 절반을 내민 모양을 한 얼음덩이를 밀기 시작했다. 이런 때 발휘하는 클라크의 힘의 굉장함이란! 이윽고 천천히 얼음 덩어리는 물 쪽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뛰어올라라! 얼음 덩어리가 물에 뜨기 전에." 세 사람은 급히 미끌미끌 미끄러지는 얼음을 향하여 뛰어 올랐다. 캡틴과 사버가 우선 무사히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클라크는 좀 뒤늦게 오르는 바람에 얼음의 가장자리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캡틴은 얼른 클라크의 손을 꽉 잡으며 있는 힘을 다해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나서 캡틴은 두 사람에게 외쳤다. "얼음 위에 손을 걸 수 있게 구멍을 뚫어라." 사버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벌써 저렇게 가까워졌다. 우리가 하류로 도망치기 전에……" 캡틴은 격려했다. "위험하기는 하나 괜찮다!" 라고 말하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음의 산맥은 수십 미터 앞에까지 다가오고 있다. 세 사람은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치며 물보라를 올리고 있는 급류의 위를, 얼음 덩어리 위에 붙어 있다. 두터운 방한복을 입은 캡틴, 강철을 차갑게 달빛에 빛내고 있는 클라크, 털북숭이 사버의 세 사람은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는 얼음의 절벽은 불과 수십 미터까지 다가왔다. 얼음벽 위쪽에서는 끊임없이 얼음덩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좀더!" 급류는 마치 세 사람의 위기를 느꼈는지 한층 흐름을 빨리 했다. 그리고 얼음의 산맥이 강 속에 무너져 내리는 위험한 고비에서, 세 사람을 태운 얼음 덩어리는 얼음 산맥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갔다. 캡틴은 큰 소리를 질렀다. "살았다!" 뒤돌아보니, 얼음 산맥은 강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금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강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윽고 움직이는 산은 멀리 상류의 저쪽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흐름은 점점 빨라질 뿐이었고, 조금도 그 속도를 늦출 것 같지 않았다. 캡틴은 말했다. "이래 가지고선 얼음에서 내릴 수가 없겠는데." 그러자 사버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흐름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얼음의 바다에 나가기까지 더욱 빨라질 뿐이다." "뭐라고? 얼음의 바다라면 지옥의 바다를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랬었지, 죽음의 강은 지옥의 바다로 통한다고. 그 지옥의 바다 저쪽에 너희들의 일족이 살고 있지?" 캡틴이 말하자, 사버는 두려운 듯 말했다. "그건 그래. 그러나 이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이윽고, 앞쪽은 면도칼로 끊어 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폭포다! 단단히 잡아라!" 하나의 어려움이 지나니까 또 하나의 어려움, 또 하나의 어려움! 그러나 캡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자아, 간다. 저쪽은 바다인 모양이다." 폭포의 가장자리에서 흐름은 물보라를 올리고 있었다. 얼음 덩어리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다음,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빠른 기세로 떨어져 갔다. 필사적으로 겨우 손에 잡힐 만한 것에 달라붙은 세 사람은, 이윽고 얼음 덩어리의 흔들림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흠뻑 젖은 캡틴은 한숨을 쉬고 나서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얼음 덩어리는 달빛에 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았다!" 클라크가 외쳤다. 그러나 사버는 겁을 먹고 말했다. "빨리 기슭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돼. 이 바다에는 무서운 괴물이 우글거리고 있으니까." 세 사람은 노 대신 손으로 저었다. 물 속은 얼어붙을 듯이 차갑다. 얼음 덩어리는 천천히 기슭으로 가까이 같다. 캡틴은 이제 사버의 할아버지 킬리를 만난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차가운 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킬리를 만나면 마법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이로 박사의 기지는 반드시 거기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클라크는 손으로 노를 젓던 것을 멈추고 가리켰다. "저건, 캡틴?" 가리킨 쪽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바싹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잔물결이 있었다. 사버가 외쳤다. "비부르이다! 가장 크고 위험한 괴물이다!" 괴물은 갑자기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의 지구에 살고 있던 공룡 브론토 사우루스와 흡사한 놈으로 털로 뒤덮여 있었다. 뱀같이 긴 목 끝에 달려 있는 머리의 붉은 눈은 굉장히 빛나고 어금니를 내밀고 달려들었다. 어느 사이에 손에 들고 있던 캡틴의 프로톤 권총이 불을 뿜었다. 파랗고 하얀 빔은 물 아래쪽을 향해서 빠르게 달렸다. 비브르의 가죽에서 찍 소리가 나며 작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물론 비부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격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성난 비부르는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물을 헤치면서 돌진해 왔다. 사버가 비명을 올렸다. 저놈의 가죽은 너무 두꺼워 어떤 무기도 튕겨 보낸다. 캡틴은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겨누고 발사했다. 빛나고 있던 오른쪽 눈은 보기 좋게 날아갔다. 비부르는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물갈퀴가 붙은 앞발로 미친 것처럼 얼굴을 할퀴었다. 그 때, 사버가 외쳤다. "우리를 구하러 온다!“ 캡틴이 바라보자, 저 멀리에 횃불을 달아 올린 작은 배의 무리가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 이번에는 클라크가 외쳤다. "캡틴, 괴물이!“ 당황하며 뒤돌아보니, 비부르는 심한 아픔으로 미친 듯이 날뛰며 또 다시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캡틴은 얼른 비부르의 오른쪽 눈의 자리에 쾡 하니 뚫린 구멍을 향하여 발사했다. 적중되었다. 빔은 바로 비부르의 뇌에 닿았던 것이다. 비부르는 튕긴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가 앞으로 퍽 쓰러졌다. 그런데 그 때, 괴물의 굵은 앞발이 세 사람을 태운 얼음을 뒤집어엎었다. 세 사람은 얼어붙을 것 차가운 물 속에 던져지고 말았다. 물 속 깊이 들어간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케이스에 넣고, 필사적으로 물을 헤치며 수면 위에 얼굴을 내놓았다. 사버도 물을 헤치면서 다가오는 배 쪽으로 큰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강철로 된 클라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알았다.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배에서 털북숭이 손이 내밀어졌다. 캡틴과 사버는 배 위로 끌어올려졌다. 사버는 배에 타고 있는 키가 작고 퉁퉁한 사나이에게 빠른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리고 나서 캡틴을 보고 말했다. "이 사나이는 우리들 종족의 족장 고르르이다. 모두 고기를 잡으러 왔단다. 그러다가 비부르가 누군가를 습격하는 것을 알고 와 주었다." 고르르는 존경하는 얼굴로 말했다. "비부르를 퇴치하다니, 당신은 용감한 사람이다." 캡틴은 말했다. "한 사람이 가라앉았어. 구해야겠는데, 당신들의 힘을 빌리고 싶다." 사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벌써 죽고 말았어!“ 캡틴은 웃었다. "클라크는 죽지 않는다. 아무튼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닻줄을 빌려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죽 닻줄을 받아서, 그것을 두 줄로 함께 모았다. 몰려온 여섯 척의 구리로 만든 작은 배에 타고 있는 명왕성인들은 캡틴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르르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좋지 않은 바람이 불어온다. 오래 여기 있을 수 없다." "곧 된다. 이 정도면 밑바닥까지 닿을 거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보트에서 작은 원자력 램프를 꺼내어 로프 끝에 매달았다.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램프를 끝에 맨 그대로 천천히 물 속으로 내렸다. 바다 밑바닥에 있는 클라크는 이 램프를 발견하면 그리로 올 것이다. 한 동안 캡틴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버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눈보라를 만난다." 마침 그 때, 로프를 아래에서 당긴다. "됐다! 클라크가 로프를 붙잡았어. 도와 줘." 캡틴과 명왕성인은 로프를 당기기 시작했다. 상대는 클라크이다. 힘껏 로프를 당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20센티, 30센티 위로 끌어올렸다. 이윽고 클라크는 머리와 어깨를 바다 위에 드러냈다. 캡틴은 손을 내밀어 클라크를 배 위에 올려 주었다. 그 때 캡틴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클라크는 정말로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부가 몸을 장식한 것처럼, 해초를 가득 온 몸에 걸치고, 게다가 바다 밑의 진흙으로 온통 얼룩 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클라크는 한심한 모양이었다. 고르르는 곧 돛을 올리게 하고, 북동으로 진로를 잡았다. 캡틴의 흠뻑 젖은 옷은 차가운 바람을 맞아 빳빳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도 캡틴은 태연했다. 그 태연한 얼굴은 몇 번의 위기를 넘어온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고르르가 소리 높이 외쳤다. "쿠른의 항구다!“ 작은 배는 크게 돌아, 높이 솟은 곶을 스쳐 작은 포구로 들어갔다. 사버가 말했다. "바로 저기가 내 고향 쿠른 마을이야." 상륙한 캡틴과 클라크는 얼음 언덕의 아래를 돌아가듯 계속되는 길을 따라갔다. 이윽고 일행은 작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사버들의 아이스 타운이었다. 마을의 건물은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적당한 틀 속에 물을 넣으면 즉시로 얼기 때문에 집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 고르르는 캡틴과 클라크와 사버를 매우 큰 네모진 건물로 데리고 갔다. 고르르는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다. 당신들은 나의 귀중한 손님이므로 여기로 데리고 온 거다." 캡틴은 사버에게 속삭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너의 할아버지 킬리를 만나고 싶다." 그러자 사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여기 있을 거다. 고르르는 가족의 한 사람이야." 안내된 넓은 방도 모든 것이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의자 위에는 모피가 깔려 있었다. 방에는 열 명 정도의 남녀가 있었다. 고르르가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사버가 캡틴의 소매를 당겼다. 캡틴은 당기는 대로 방구석에 안내되어 갔다. "나의 할아버지 킬리다." 킬리는 비부르의 두터운 모피로 온몸을 덮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을 들고 힘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버입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는 지구인을 데리고 왔어요. 이 사람은 마법사에 대해 듣고 싶답니다." 킬리는 되물었다. "마법사라고? 그 놈들은 지구인들이 오는 바람에 벌써 숨어버리고 없어." 캡틴은 말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듣고 싶은 것은 그 마법사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입니까?" "아니야. 놈들은 이 근처에 살고 있는 건 아니야. 놈들은 날아다니는 배로 왔었어. 굉장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었단 말야. 상대를 착각하게도 하고, 아무튼 자기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 진짜 정체는 흰털이 나 있는 놈들이지만." 바로 그거라고 캡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옛날부터 자기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니, 굉장히 진보된 생물이다. 캡틴은 물었다. "그런데 대체 놈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놈들은 위성에서 온 거야. 하늘을 나는 배로 말야." "어느 위성입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세 개의 위성 중 어느 것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러면 어느 달일까? 물에 덮여 있는 스틱스를 제외하고, 케르베로스나 케이론의 어느 쪽이다. 캡틴이 또 물어 보았다. "그 외에 기억나는 것은 얹습니까? 킬리는 미안한 듯이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놈들이 우리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 뿐이야. 뭐라고 하더라, 옳지. 자기들 입에 맞는 코발트인가가 들어 있지 않다고 했어." 캡틴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코발트라고요? 그러면 놈들은 코발트염이 가득 포함되어 있는 천체에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그 괴물의 뼈는 굉장히 푸른 빛깔을 띠고 있었어. 그래, 코발트 때문임이 틀림없어." 캡틴은 뛰어오르고 싶도록 그 발견이 기뻤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냐 하면 케르베로스와 케이론의 두 개의 위성 중 코발트염이 가득 포함되어 있는 쪽을 확인하면 된다." 클라크가 옆에서 말했다. "그러나 모피상 그림도 형무소장 레인도 그런 생물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느 쪽인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 캡틴은 의미 있게 말했다. 곧 캡틴은 포켓 텔레바이저를 꺼내어 오토를 불러내었다. 캡틴은 오토가 나타나자 말했다. "유도 전파를 그리로 내보낼 테니 곧 커밋 호로 이리로 와. 우리들의 경로켓은 추락하고 말았어." "곧 가겠습니다!" 오토는 이렇게 대답하며, 아주 흥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일까? 오토의 태도가 이상한데." "이이크가 무사하면 좋겠는데요." 클라크도 자기 나름대로의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캡틴과 클라크는 명왕성인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식사가 끝나자 캡틴과 클라크는 눈보라치는 큰 거리로 나왔다. 이윽고 희미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커밋 호가 왔다. 커밋 호가 착륙하자 캡틴은 고르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클라크와 사버를 데리고 올라탔다. 오토가 조종석에서 뛰어왔다. 오토의 눈은 심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소리를 질렀다. "사이먼이, 사이먼이 자위단 놈들에게 납치되어 갔습니다." 그래! 그래서 텔레바이저로 호출했을 오토가 당황해 하였구나. "사이먼이 납치되었다고? 언제 일이냐?" "캡틴으로부터의 연락이 들어오기 좀 전입니다. 사이먼은 케인과 함께 천문대의 망원경으로 관측을 하고 있었고, 나와 존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묘한 슈우슈 하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모두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지요. 눈도 보이고 귀도 들려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었으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나이들이 나의 옆을 지나서 반사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군요. 얼떨결에 쓰러졌기 때문에 사나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이먼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으나, 확실히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모두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문틈으로 가스가 밖으로 새어 나갔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는 사이먼이 없어졌음을 알았습니다." "탈타로스 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전속력으로!“ 캡틴은 명령했다. 그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기를 아버지 대신 길러 준 사이먼이었다. 캡틴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 커밋 호는 남쪽으로 전속력으로 나아가고 있다.   캡틴을 죽여라   커밋 호는 탈타로스 시의 돔이 아니라 천문대의 바로 옆에 착륙했다. 돌아올 때의 비행은 겨우 수십 분이었다, 캡틴에게는 몇 시간이나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캡틴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사이먼! 살아 있어 주오." 커밋 호에서 뛰어 나가자, 캡틴은 사버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돌아가도 좋아. 덕분에 살았다." 그리고 천문대의 입구로 달려갔다. 안에서 존이 달려나왔다. 그 뒤로 에즈라 사령과 케인이 따라왔다. 존은 창백했다. 캡틴은 갑자기 물었다. "여기 들어온 것은 자이로 박사가 아니었소?" 그러자 금성의 천문 대장인 켄스 케인이 빠른 말로 대답했다. "그렇소. 틀림없이 자이로 박사다. 나는 바로 옆에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들을 수가 있었지. 놈들은 캡틴이 어느 정도의 자위단 일을 알고 있는지를 알려고 했던 것이오. 사이먼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살아 있는 뇌의 순환 펌프를 잠그겠다는 위협을 했소. 그래도 사이먼이 대답하지 않자, 데리고 가버렸지. 로지와 카라크도 함께였어." 캡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이로란 놈, 사이먼에게 고문을 가하다니! 그 놈은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내가 타고 있는 경로켓에 기습을 하면서 자기는 여기 와서 사이먼을 납치한 거다." 그런데 캡틴은 여기서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고, 그리고 나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사이먼이 하던 암흑성의 관측을 중지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자이로에게 곤란한 일이 알려지게 되기 때문이었을까……" 켄스 케인이 말했다. "나는 왜 자이로 박사가 다시 한 번 나를 납치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놈은 당신을 납치하여, 태양계의 위기를 겁내서 어딘가에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도망쳤다고 생각한 당신이 여기에 나타났으며, 그래서 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놈들의 사정이 좋아진 까닭도 있습니다." 그리고 캡틴은 천문대 안을 자세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곧 캡틴의 날카로운 눈은 방바닥에 불어 있는 흰 진흙 같은 것을 발견했다. 캡틴은 에즈라에게 말했다. "이 가까운 곳에 이런 흰 초산염을 포함한 토지가 있습니까?" "들은 일이 없는데?" "그럼, 커밋 호에서 이것을 분석해 봅시다. 모두 함께 갑시다." 커밋 호의 작은 실험실에 들어가자 캡틴은 곧 그 초산염의 분석에 착수했다. 태양계 최고의 과학자 캡틴 퓨쳐의 솜씨는 훌륭했다. 이윽고 대형 전자 현미경에서 눈을 뗀 캡틴은 큰소리로 말했다. "역시 이 흰 초산염은 명왕성의 것이 아니라, 위성에서 운반해 온 것이다." 케인이 이상한 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알지요?" "이 땅 속에는 어떤 박테리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박테리아는 기온이 낮은 이 명왕성에서는 살 수 없어요. 좀 따스한 위성이라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에즈라씨, 레인과 그림과 그리고 행성 지리학자인 로머를 불러 주지 않겠습니까?" 에즈라의 눈이 반짝였다. "자이로 박사의 기지는 위성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좋아, 불러오겠어." 그리고서 에즈라는 곧 되돌아왔다. 데리고 온 것은 그야말로 학자다운 그 커얼 로머 혼자였다. 에즈라는 말했다. "내가 한 발짝 늦어서 레인은 케르베로스로 되돌아갔어. 그림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겠어." 캡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로머에게 초산염의 표본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런 것을 케르베로스나 케이론에서 본 일이 있습니까?" 로머는 의아한 듯이 말했다. "케르베로스의 형무소 근처에 있었다고 생각되요. 그러나 자신은 없습니다. 그 곳에는 불과 며칠밖에 머무르지 않았으니까요. 형무소장 레인이 케르베로스에 착륙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에즈라도 덧붙였다. "레인은 행성 경찰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아." 캡틴은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틀림없이 자이로 박사는 마법사가 지구인으로 보인 것처럼 누구인가로 변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누구인지? 캡틴은 이제까지 만난 인간, 지구인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캡틴은 모두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유형 위성인 케르베로스에 갔다 오겠습니다. 레인에게서 꼭 들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클라크와 오토는 나를 따라와. 존, 존은 여기 남아서 에즈라씨와 함께 그림의 거처를 찾아 주기를 바란다." "알았어요." 존은 끄덕였다. 그러자 금성인의 켄스 케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사이먼은 훌륭한 과학자다. 그 사나이를 구출하는데 나도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케인은 금성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한 말은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캡틴은 금성인 천문학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중요한 일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암흑성이 나타나서 주위의 항성의 위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관측해 주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하지요." 네 사람은 곧 커밋 호로 내려갔다. 그리고 케인은 또 천문대로, 존과 에즈라와 로머는 탈타로스 시의 돔을 향하여 굉장한 눈보라 속을 걷기 시작했다. 커밋 호는 조절판 레버를 완전히 열어놓고 급상승을 해 갔다. 그리고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우주 공간으로 나갔다. 쳐다보니 케르베로스가 흰 원반처럼 떠 있었다. 케이론과 스틱스는 명왕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커밋 호는 그 케르베로스를 향하여 전속력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조종석에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지켜보고 있는 캡틴에게 오토가 말을 걸었다. "당신은 레인이나 그림의 어느 쪽이 자이로 박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캡틴이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있으니까, 오토는 다시 계속했다. "레인임에 틀림없어요. 천문대의 진흙이 케르베로스의 것이라면." 클라크의 광전 눈도 분노로 기분 나쁠 정도로 불타고 있다. "레인이 정말로 사이먼에게 고문을 가하거나, 유괴한 것이 밝혀지면 이 내가 엄하게 사례를 해 주겠어!“ 오토가 되받았다. "내가 놈을 처치한 다음에 말기지." "뭐라고, 네 다음이라고? 사이먼이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은 너 때문이야. 저번에도 너는 형편없는 실수를 저지른 주제에." "뭐라고? 바보 로봇인 주제에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또 여느 때와 같은 시비가 시작되자,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캡틴이 꾸짖었다. "그만두지 못해? 그 따위 시비를 하고 있을 때는 아니잖아. 사이먼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태양계 전체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소동이다." 오토와 클라크는 입을 다물었다. 케르베로스는 점점 커져갔다. 캡틴은 그 전에도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다. 또 몇십 명의 악당을 이 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캡틴이 붙잡는 범인은 보통 범인이 아니었고, 종신형으로 모두 여기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이윽고 커밋 호는 형무소로부터 7, 8백 미터 되는 곳에 착륙했다. "클라크는 여기 남아서 커밋을 지켜다오." 라고 캡틴이 말하자, 당장 클라크는 불만을 드러냈다. "오토는 데리고 가면서 나를……" "아니, 오토도 곧 돌아온다. 어쨌든 커밋 호를 비워놓을 수는 없진 않느냔 말야." 이렇게 말하고서, 캡틴은 오토를 데리고 검게 치솟은 형무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몸에 붙어 있는 중력기를 벌써 조정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캡틴은 걸으면서 주위에 주의 깊게 눈을 돌리고 있었다. 형무소의 새까만 문 옆에 이르렀을 때, 희고 부드러운 바위를 찾아 냈다. 캡틴은 그 부드러운 초산염의 바위 조각을 주웠다. "탈타로스 천문대에서 본 것과 같다.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야!“ 캡틴은 또 주위를 살폈다. 눈에 띄는 생물이라고 하면, 바위 사이를 쪼르르 재빨리 달리는 조그마한 위성 도마뱀뿐이다. "오토, 저 위성 도마뱀 한 마리를 잡아서 커밋 호에 가지고 오너라." 오토는 입을 삐죽거렸다. "위성 도마뱀을 잡기 위해서 나를 데리고 왔나요?" "도마뱀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잡히지는 않아. 그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어." 오토를 남기고 형무소의 건물 옆에까지 오자, 눈이 부실만큼 밝은 서치라이트가 캡틴을 비추었다. 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라! 누구인가?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이다." 캡틴은 조용히 왼손을 들고 말했다. "캡틴 퓨쳐다. 형무소장 랜드르 레인을 만나러 왔다." "캡틴 퓨쳐라고?" 간수는 캡틴의 왼손에 끼고 있는 빛나는 반지를 보았는지 깜짝 놀라며 말투까지 달라졌다. 태양계 정부는 일체의 정부 기관에 캡틴 퓨쳐에게 협력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간수가 말했다. "곧 소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캡틴은 엄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다!“ 캡틴의 엄한 목소리에 눌린 간수는 곧 문을 열었다. 부웅 하는 원자력 모터의 소리와 함께 거대한 정문이 열렸다. 캡틴이 안으로 들어가자, 철컥 문이 닫혔다. 이렇게 되면 탈출 같은 건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캡틴은 간수의 안내로 소장실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랜드르 레인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캡틴 퓨쳐! 규칙을 지켜 주지 않으면……" 하고 매우 불안한 듯이 말한다. "규칙 같은 건 이럴 때는 별 도움이 안됩니다. 나는 자이로 박사의 뒤를 쫓아온 겁니다." 레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자이로 박사라고요? 설마 여기에 자위단의 기지가 있다는 건 아니겠지요?" "아직은 모르지만, 명왕성인은 당신에게도 보여드린 털북숭이 생물이 위성에서 날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케이론에 틀림없소. 간수들로 누구 한 사람 그런 생물은 본 일이 없다고 하니까요." 레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캡틴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간수에게 직접 물어 보고 싶은데요. 그런데 그 전에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소. 로지와 카라크는 어떻게 여기를 탈출했지요?" "그건, 어느 날 아침 탈출하여……" 캡틴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두 사람의 기록을 보여 주시오." "기록 말입니까?" 레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류를 넣어놓은 큰 캐비닛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수천 개의 금속제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그 각각의 가장자리에 정리 번호가 빛을 내고 있었다. 죄수의 번호였다. 죄수가 형무소에 있는 동안은 특수한 방사선으로 서류 케이스의 번호가 빛을 내는 장치로 되어 있는 것이다. 레인은 빛을 내지 않는 서류가 몇 장 있는 것을 깨달았다. "빛을 내지 않는 서류 번호의 죄수는 모두 탈주했나요?" 레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놈들이 형무소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탈주하면, 그 서류의 빛이 사라지면서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경계가 엄중한데, 어떻게 탈주했지요?" "네, 그것이 전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정부에 보고는 했겠지요?" 레인은 괴로운 듯이 말했다. "아니, 그렇게 되면 나는 목이 잘려요. 그래서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설마 당신이 보고하지는 않겠지요?" 캡틴은 어이가 없었다. 가장 위험한 악당을 놓치고도 자기의 파면이 걱정되어 정부에 알리지 않다니. "보고하고 말고요. 이젠 당신 같은 무책임한 사나이의 말을 신용할 수 없어요. 간수들을 불러 줘요. 그 사람들에게 물어 보겠어." 레인은 울상이 되며 가엾게 말했다. "할 수 없지요. 불러오지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레인이 나간 뒤, 캡틴은 다시 캐비닛 속의 서류를 조사해 보았다. 어느 것이나 이름난 악당이다. 그것이 몇 10명이나 한꺼번에 잇달아 모습을 감추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상하다. "이건 레인이 보고도 모른 척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악당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때 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캡틴은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죄수가 갇혀 있는 큰 건물에서 간수가 뛰어나오며, 큰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다.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간수의 뒤에서는 죄수 무리가 한꺼번에 몰아 닥치고 있었다. 손에는 간수에게서 빼앗았는지 원자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감시탑 위의 간수를 쓰러뜨렸다. 지휘자인 듯한 사나이가 외쳤다. "사무소다! 거기에 캡틴이 있다." 뒤따르던 죄수들이 일제히 외쳤다. "캡틴 퓨쳐를 죽여라!“ 캡틴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곧 깨달았다. 이 곳에는 캡틴이 불잡은 악당들이 수두룩히 있는 것이다. 캡틴이 온 것을 알려 주고 선동을 하면, 복수를 하려고 몰려올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구인, 화성인, 토성인, 또 그 외의 행성들의 악당들은 저마다 떠들어 대고 있었다. "캡틴 퓨쳐를 죽여라!“   코발트   캡틴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렌드르 레인의 짓이다!“ 캡틴은 곧 문을 잠그고, 창문의 금속제 셔터를 내렸다. 그리고 포켓 텔레바이저를 꺼내어 스위치를 넣었다. 오토와 클라크를 불러내려고 생각한 것이다. 두 사람이 구원을 와서 프로톤 권총을 사용하면…… 죄수들은 문을 두들기며, "얌전히 나와라, 캡틴 퓨쳐!" 커밋 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캡틴은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형무소의 건물을 모든 전파를 통하지 안도록 방사선으로 막아놓은 것이다. 정말 위급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캡틴은 여느 때처럼 냉정했다. 어떻게 여기를 빠져 나갈 방법은 없을까 하고 재빨리 생각했다. 벨트에 붙어 있는 기계를 사용하여 자기를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와락 이 방에 들이닥치면, 가령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눈치를 채지 않게 방에서 나갈 수는 없다. 죄수들은 원자총을 사용하여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제 몇 초의 여유도 없다. 이 같은 순간에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캡틴은 소장의 방안을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거기 한쪽 벽에는 두터운 금속의 문이 있고, 무기 창고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 무기 창고에는 총이나 탄환, 원자 폭탄까지도 있을 것이다. 캡틴은 그 문으로 달려갔다. 문은 원자 불꽃에도 끄덕하지 않는 아주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앞에는 수학자가 고안해 전 조합식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에는 네 가지 색깔로 구분된 20개의 단추가 붙어 있었다. 자물쇠를 열려면 색깔로 맞추는 것과 번호순으로 단추를 눌러야 한다. 단추로 짜 맞추는 데는 수백만 가지나 된다. 그 중에서 어떻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캡틴은 이 자물쇠를 만든 수학자보다도 수학에 정통하다. 캡틴은 벨트에서 작은 금속의 톱날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장으로 접어서 자물쇠를 가볍게 두들겼다. 캡틴은 귀를 기울이며 그 울려나오는 음향으로 재빨리 도형을 그렸다. 밖에서는 죄수들의 함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캡틴은 얼음 같은 냉정함을 지키며 잇달아 도형을 그리며 복잡한 계산을 계속했다. 드디어 뒤에서는 문의 일부가 깨지고 있었다. 지휘자인 듯한 사나이가 떠들어댄다. "드디어 맞췄다!“ 하며 캡틴은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짜 맞추기를 알아 낸 것이다. 캡틴은 재빨리 20개의 단추를 복잡한 순서로 눌렀다. 그 얼굴은 자신에 넘쳐 있었다. 일 초도 걸리지 않아 자물쇠는 철커덕 소리를 냈다. 캡틴은 힘을 주어 무기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 때 입구의 문이 부서지면서 피에 미친 죄수들이 흉악한 인상의 지구인에게 이끌려 와아 하고 들이 닥쳤다. 그런데 죄수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놀라며 그 자리에 말뚝처럼 멈춰서 버렸다. 무기 창고의 입구에 캡틴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캡틴의 프로톤 권총은 자기들의 가슴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기 창고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휘자인 듯한 그 흉악한 지구인은 마구 기쁜 함성을 질렀다. "끝내 하고 말았어! 저놈이 캡틴 퓨쳐다! 누구도 손대지 마! 내가 만족될 때까지 놈을 요리할 테니까." "놈을 해치워라!“ 죄수들은 그의 사기를 돋구어 주었다. 그러자 지휘자는 손에 원자총을 든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그쪽으로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지휘자는 떠들어댔다. "나를 기억하고 있나, 캡틴 퓨쳐!“ "물론이다. 내가 너를 처넣었으니까 알고 있고 말고, 너는 루카스다. 너는 무기를 목성인에게 몰래 팔아 돈을 끌어 모으고 싸움을 선동한 악당이지.“ 캡틴은 차디차게 말했다. 루카스는 비웃었다. "잘도 말해 주는구나.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 둘 말은 없는가?" 캡틴은 날카롭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가? 나는 무기 창고에 프로톤 권총을 겨누고 있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만약에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이 속에 있는 원자 폭탄이나 탄환에 명중한다. 그러면 이 형무소는 단번에 날아가 버린다." 루카스와 다른 죄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 마셨다. 루카스는 위세를 부렸다. "그,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을 하면, 너 역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캡틴은 싱긋 웃고 나서 말했다. "하고 말고. 너희들은 내가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대로였다. 태양계의 사람이라면 캡틴이 한다고 하면 틀림없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이다. 캡틴은 또 말했다. "너희들처럼 사람을 마구 죽이고 악당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놈들을 다시 풀어놓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한다. 내가 함께 죽는다고 해도 물론이다. 자아, 10초 이내에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 방아쇠를 당겨 버리겠다." 숨가쁜 싸움이었다. 그러자 한 죄수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덜커덕 방바닥에 내던졌다. 죄수들은 그를 따라 일제히 무기를 버렸다. 캡틴 스스로도 이 싸움이 성공할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다만 이 악당들을 다시 세상에 자유로이 풀어놓을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캡틴은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엄숙하게 말했다. "간수를 불러라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말해라." 완전히 기가 꺾인 죄수들은 캡틴이 말한 대로 얌전히 감방으로 끌려갔다. 캡틴 그제야 마음을 놓고 중얼거렸다. "허허. 자칫하면 어떻게 되는가 했지. 이번에는 레인의 차례다." 하며 캡틴은 레인을 찾으러 방을 나갔다. 레인은 큰 감방의 어두운 북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캡틴은 차갑게 말했다. "레인, 무슨 짓이냐? 죄수들을 선동하여 나를 해치우려 하다니. 너의 계획은 실패했다." 레인은 중얼거렸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죄수들이 제멋대로……" "변명해도 소용없다! 간수에게 물어 보면 당장에 안다. 그보다도 모든 걸 자백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좋다. 끝까지 숨기면, 이 형무소에 처넣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수들이 너를 어떻게 취급하리라고 생각하나?" 레인은 완전히 겁을 먹어버렸다. "자백하겠습니다. 내가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는 필요 없다. 다만 한 가지 듣고 싶은 일이 있다. 탈옥한 죄수들의 일인데, 네가 모든 것을 해 주었지?" "네…… 내가 밤에 몰래 했습니다. 위에는 케이론으로 싣고 갈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레인의 짓이었다. 더군다나 벌써 또 하나의 위성 케이론에 보냈다니, 수수께끼는 드디어 풀린 것만 같다. "그럼, 모피상의 그림한테로?" "그렇습니다. 그림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림은 사냥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곳으로는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수를 사냥꾼으로 석방해 주면, 대금을 준다고 했습니다." 레인은 겁을 먹은 채 이렇게 말하고 나서 변명조로 덧붙였다. "여기 가두어 놓는 것과 별로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놈들은 케이론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탈타로스 시나 어디에 모습을 나타내면, 곧 붙잡히게 되니까요." "그런 건 이유가 되지 않아. 어쨌든 그래서 로지나 카라크가 지금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캡틴은 간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간수장에게 척척 명령을 내렸다. "레인을 곧 체포해라. 새로운 소장이 올 때까지 자네가 소장 일을 맡아 보라." 그리고 간수들에게 질문했다. "자네들은 이 케르베로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그렇다면 이런 생물을 모르는가?" 캡틴은 흰털이 온 몸에 나 있는 기묘한 생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간수들은 다만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여기는 그런 생물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레인이 말한 것 중에서 그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고 여기 과연 없다고도 할 수는 없다. 캡틴은 실망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실마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캡틴은 서둘러서 커밋 호로 되돌아왔다. 오토와 클라크는 캡틴의 이야기를 듣고 마구 화를 냈다. 클라크는 강철의 주먹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캡틴을 죽이려 하다니! 곧 형무소로 가서 레인을 때려눕히지 않고서는 분이 안 풀려." "그럴 사이가 없어, 클라크. 그보다 오토, 위성 도마뱀을 잡았나?" "네. 당신이 그런 위험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위성 도마뱀을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도마뱀이 필요했습니까?" 캡틴은 자기가 발명한 분석 장치에 작은 도마뱀을 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도마뱀의 뼈에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던 거다." 오토는 외쳤다. "그랬습니까. 캡틴? 마법사의 뼈에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같은 행성에 사는 생물에도 당연히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분석 장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캡틴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대로다. 그러나 이 도마뱀에는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케르베로스에는 마법사가 없다는 뜻이지." 오토는 그래도 주장했다. "그러나 레인이 자이로 박사가 틀림없죠? 발자국의 흰 초산염이 증거가 아닙니까?"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레인이 자이로 박사가 아니라는 증거야. 그 정도는 여기 오기까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어." "이 오토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천문대에 있던 것은 우주복의 구두 자국이다. 가스를 마시지 않으려고 자이로 박사가 입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케르베로스는 대기가 있기 때문에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니까 자이로 박사가 일부러 입고 케르베로스에서 온 것처럼 한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그랬어요? 그럼 여기가 아니니까 놈들의 기지는 케이론이다." 오토가 말하자, 캡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게 될 것 같구나." "그렇다면 뻔하군요. 레인이 로지와 카라크를 넘겨 준 것은 그림이라고 하니까, 자이로 박사의 정체는 그림임에 분명하군요." "음, 지금쯤은 에즈라 아저씨와 존이 있는 곳을 찾아 냈을 거다. 곧 명왕성으로 되돌아가자." 이윽고 커밋 호는 새벽이 되어 오는 탈타로스 시의 돔의 바로 옆에 착륙했다 캡틴은 천문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에 가기 전에 케인을 만날 생각이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보자, 케인은 서둘러 다가왔다. 캡틴은 금성의 천문 대장 케인에게 초조하게 물었다. "부탁한 암흑성 주위에 있는 항성의 위치를 알아 냈습니까?" 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끝났지. 어느 항성도 이전 위치에서 변동이 없어요." 캡틴은 신음했다. "뭐라고요, 변동이 없다고요…… 그렇다는 건 그 암흑성은 이 때까지와는 달리……" 캡틴은 곧 탈타로스 시로 되돌아갔다. 가는 도중 캡틴이 너무도 깊이 생각에 잠겨 있으므로 클라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케인의 관측이 그렇게 중대했나요?" "아아, 엉뚱한 걸 이야기해 주었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캡틴이 행성 경찰 명왕성 본부에 가자, 에즈라 사령은 벌떡 일어서서 캡틴을 맞이했다. 에즈라는 그 동안 몹시 여위어 있었다. 캡틴은 물었다. "모피상 그림의 기지를 알았습니까?" "경관들이 모두 조사에 나섰으나 아직 몰라요. 케이론으로 돌아갔는지도 몰라. 그보다 캡틴, 큰일이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지리학자인 커얼 로머가 잡혀서 아마도 죽음을 당한 것 갈아요." 하며 에즈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로머는 그림의 거처를 찾아 냈다면서 텔레바이저로 연락해왔다. 그런데 그 보고 도중 스크린이 찢어지는 것 같은 섬광이 비치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그 후 그림의 뒤를 쫓고 있던 존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어리석은!“ 캡틴이 이렇게 외쳤을 때, 흥분한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등에는 몹시 당한 털북숭이 명왕성인을 메고 있었다. 캡틴은 그것을 보고, 다시 놀랐다. "사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사냥꾼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길을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서둘러서 캡틴은 사버의 옆으로 다가갔다. 사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했다. 캡틴은 심한 분노로 목소리조차 떨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 누구에게 당했어, 사버?" 사버는 형광의 눈을 멍청히 뜨고 중얼거렸다. "자이로 박사의…… 졸도. 그 놈…… 당신의 친구의…… 여자…… 붙잡고…… 나를 쏘았어…… 창고 속에…… 그 놈들…… 나 죽었어…… 하고 생각하…… 여자가 데리…… 갔어…… 그래도…… 나는…… 길에…… 기어 나왔어……" 바즈라가 외쳤다. "자이로란 놈, 사이먼에 이어 존을 유괴했던가! 그 창고에 쳐들어가서 수색을 해라!“ 캡틴도 에즈라를 뒤따르면서 클라크에게 명령했다. "사버를 치료해 주게, 클라크!“ 에즈라들을 태운 로켓 차는 사버가 발견된 근처의 창고로 달렸다. 경찰이 말했다. "여기입니다. 이 창고는 바로 얼마 전 그림의 회사가 빌린 것입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지구인인 듯한 시체가 하나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몹시 검게 그을린 사체였다. 캡틴은 곧 원자총에 당한 무참한 시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찾고 있는 듯 했으나 찾지 못한 모양이다. 에즈라가 말했다. "커얼 로머의 시체다. 그림을 알아 낸 것은 좋았으나, 그 때문에……" 캡틴은 주위를 조사한 끝에 바닥 위에 있는 비밀 문을 발견했다. 안으로 뛰어들어간 캡틴은 이윽고 되돌아왔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아래의 터널은 돔의 밖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젠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에즈라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러면 자이로란 놈, 사이먼과 존을 기지로 데리고 갔구나! 그림이 자이로라면, 그 기지는 케이론이 된다." 캡틴들은 서둘러서 경찰서로 되돌아왔다. 클라크는 명왕성인인 사버의 위에 엎드려 있다가 캡틴이 온 걸 알자, 한 마디 했다. "이젠 틀렸습니다." 사버는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캡틴을 지켜보며 숨가쁘게 중얼거렸다 "나…… 당신…… 좋아…… 지구인 중에서도……" 그리고서 사버는 눈을 감았다. 캡틴은 가슴 속에서 무언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꾹 누르며, 사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슬픔을 잊어버리려는 듯이 에즈라에게 물었다. "명왕성의 위성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어디에 가면 입수할 수 있나요?" "명왕성 조사단에 있을 거다. 단장인 로머는 이제는 없겠지만." 그 때였다. 텔레바이저로 연락하고 있던 경관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자이로 박사의 방송이 끼어 들어왔습니다!“ 캡틴들은 텔레바이저에 서둘러 다가갔다 스크린에는 온통 검은 색인 키 크고 기분 나쁜 자이로 박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자이로 박사는 노려보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태양계의 주민에게 고한다. 이것이 최후의 기회다. 은하 쪽으로 눈을 돌리고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다. 이제 암흑성은 바로 저기에 다가오고 있다. 이제 하루나 적어도 이틀 이상 늦으면, 나의 힘으로도 태양계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정부에 맡길 수는 없다.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서 정부의 모든 권한을 나에게 넘기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는 한, 태양계는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에즈라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저놈! 이렇게 되면 태양계의 사람들은 무서움에 미쳐버린다. 정부도 앞으로 24시간을 견딜지 어떨지……"   흉계에 걸리다   캡틴은 서둘러서 클라크와 오토를 데리고 명왕성 조사단의 사무소로 갔다. 이제는 어물어물할 수도 없다. 캡틴은 제 2의 위성 케이론에 대한 자료를 전부 빌려서 보았다. 기록에 커얼 로머는 두 번이나 홀로 케이론을 탐험한 적이 있다. 모피상 그림은 4, 5년 전 케이론 전부를 태양계 정부에서 빌리고는 맹수 콜렛을 잡아 그 값비싼 모피를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캡틴이 필요로 하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토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데서 시간을 보냅니까? 그 자이로 박사의 정체가 그림이라고 안 이상, 곧 케이론으로 쳐들어갑시다." 클라크도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사이먼이 어떤 변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캡틴 역시 사이먼의 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두는 것이 좋다. 자료들을 본래의 선반에 도로 놓기 신작했을 때, 밖은 몹시 시끄러웠다. "뭘까?" 캡틴이 말하자, 창가에 다가선 오토가 외쳤다. "명왕성 정부 빌딩 앞 공원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세 사람은 얼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저쪽 공원은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가 지구인들이었으나, 털북숭이 명왕성인이며 다른 행성인도 좀 섞여 있었다. 지휘자인 듯한 사나이가 외쳤다. "우리들은 즉시로 태양계 정부의 전권을 자이로 박사에게 넘기고, 이 태양계의 위기를 구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떠들어댔다. "그렇다!“ "찬성이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때를 놓친다." "지사를 끌어내어 와라! 그리하여 지사에게 정부가 전권을 자이로 박사에게 넘기라고 해야 한다." 군중은 정부 빌딩으로 몰려갔다. 에즈라 휘하의 다섯 명의 부하 경관이 그 군중 앞을 막아섰다. 에즈라는 침착한 태도로 외쳤다. "지사는 여기 있지 않다. 1천 6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에리시아 시에 가 있다." 지휘자인 사나이가 외쳤다. "그렇다면 명왕성 정부 빌딩을 점령하자. 그리고 자이로 박사에게 넘겨야 한다!“ 에즈라는 원자 권총을 손에 쥐고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있는 한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그 따위 자이로 박사의 엉터리 방송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정신들이 있는가." 사람들은 와아 떠들어댔다. "뭐가 엉터리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암흑성은 가까워 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버티고 서 있는 에즈라들을 대항해서 정부 빌딩을 점령할 만한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캡틴이 말했다. "에즈라에게 맡고 있으니 안심이다. 그보다 우리는 서둘러 커밋 호로 돌아가자." 돔 너머는 대낮인데도 검은 원반 모양을 한 암흑성이 똑똑히 보였다. 확실히 저것이 충돌하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자꾸 날마다 커 가는 암흑성을 다시 보았을 때, 자기의 그 생각이 정말로 정당한 것일까 하고 자신이 없어진다. 캡틴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것 이외에는 암흑성의 수수께끼를 풀 해답은 없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암흑성 주위의 항성의 위치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강력한 증거다.) 커밋 호에 되돌아오자, 캡틴은 명령을 내렸다. "케이론으로 직행이다." 조종석에 뛰어든 오토는 크게 기뻐했다. "재미있게 되었다!" 1시간 남짓하여, 케이론은 눈앞에 크게 다가왔다. 커밋 호는 그 주위를 크게 돌아서 낮 부분으로 나왔다. 고도를 3백 미터로 낮추어 아래의 동태를 살폈다. 황폐하기는 했으나, 생물은 살고 있었다. 케이론 사슴의 떼는 커밋 호의 폭음에 놀라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다리가 여섯이며, 회색을 띠고 있다. 사슴의 뒤에는 역시 여섯 개의 다리와 큰 어금니를 가진 생물이 있었다. "저건 위성의 멧돼지다. 콜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오토가 중얼거리자, 캡틴이 명령했다. "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커얼 로머의 지도에 의하면, 북극에서 150킬로미터 정도 남쪽에 그림의 모피 창고가 있을 것이다." 요트가 북서로 진로를 잡았을 때, 곧 클라크가 큰 소리를 질렀다. "콜렛이다!" 콜렛이라는 것은 지구의 로키산맥에 사는 회색곰과 흡사했다. 다만 케이론의 생물이 모두 그러하듯이 다리가 여섯 개이며, 맨 앞의 다리 두 개로 물건을 할퀴거나, 찢는 데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회색곰과 다른 것은 태양계에 널리 알려진 그 사나움이다. 콜렛은 큰 머리를 들고, 커밋 호를 향하여 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짖어댔다. 오토가 말했다. "저 정도니까 그림이 형무소의 죄수를 사냥꾼으로 고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보통 사냥꾼이라면 도망칠게 틀림없어." 이윽고 저 멀리에 나직한 집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그림의 창고다, 오토." 창고 근처에서 우주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착륙하자, 캡틴은 오토에게 명령했다. "나와 클라크가 들이닥치면 위성의 멧돼지를 잡아 줘. 나중에 코발트 검출 시험을 할 테니까." "이전에는 도마뱀이더니, 이번에는 멧돼지 사냥입니까?" 하고 오토가 중얼거렸다. 캡틴과 클라크는 담벽에 둘러싸인 그림의 기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이크는 클라크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공기는 엷었으나, 명왕성처럼 춥지는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캡틴과 클라크는 문을 지나 중앙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모피가 쌓여 있는 방에 들어갔다. 안에는 목성인이 하나, 화성인이 둘, 지구인이 셋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캡틴들이 들어가자. 당황하여 원자총을 뽑으려 했다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들이대면서 외쳤다. "총에서 손을 떼라!" 사나이들은 얼른 총을 놓았다. "클라크, 놈들의 총을 구부리고 치워라." 클라크는 즉시 아주 간단히 사냥용의 원자총을 한데 묶어 구부린 후 구석으로 치웠다. 캡틴은 엄하게 말했다. "그림은 어디 있나?" 지느러미 같은 팔을 가진 목성인은 캡틴이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캡틴 퓨쳐다!“ "그대로다. 그림은 어디 있나?" 라고 말하며, 캡틴은 노려보았다. "사장은…… 사장은…… 사무소에 있습니다. 이쪽, 이쪽입니다." 목성인은 캡틴과 클라크를 문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문을 열지 않고 소리쳤다. "사장, 캡틴 퓨쳐가 면회입니다." 캡틴과 클라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방은 시멘트의 벽으로 둘러싸이고, 천장에는 굵은 철봉이 끼워져 있었다. 캡틴은 얼른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문은 찰깍 하고 닫혔다. 이어 자물쇠 소리가 뒤에서 크게 울렸다. "큰일났다. 흉계에 걸려들었다! 클라크 부숴 버려라!" 클라크의 힘이라면 그런 문 같은 건 부수지 못할 것은 없다. 클라크가 이이크를 바닥에 내려놓고 문에 어깨를 갖다댔을 때, 그 이이크가 무엇에 놀랐는지 클라크의 어깨에 기어오르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캡틴은 긴장했다, "이이크가 뭔가 텔레파시로 위험을 느낀 모양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캡틴은 시멘트벽의 하나가 갑자기 스르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천천히 여섯 개의 다리가 달린 괴물이 이쪽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캡틴은 외쳤다. "콜렛이다! 놈들의 흉계는 이거였어!“ 이 콜렛은 다른 행성의 동물원에 팔려고 사로잡은 것임에 틀림없다. 콜렛은 거기에 인간과 로봇이 있는 것을 깨닫고는 멈춰 섰다. 그리고 건물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의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캡틴은 프로톤 권총의 출력을 최대로 하고 괴물을 향해 발사했다. 총은 틀림없이 콜렛의 옆구리에 명중되었다. 그런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성난 콜렛은 그 몸집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동작으로 캡틴에게 달려들어, 맨 앞쪽의 두 다리로 캡틴의 몸을 붙잡았다. 콜렛의 무서운 턱이 쩍 열리며, 뜨거운 숨이 훅 캡틴을 얼굴을 덮쳤다. 아아, 위급한 순간이다. 그러나 캡틴은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을 만큼 날쌔게 콜렛의 앞발을 피했다. 다만 캡틴의 옷소매는 콜렛의 발톱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캡틴은 한 번 더 프로톤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굉장히 큰 성난 소리를 내며 캡틴을 다시 습격했다. 그 때였다. 로봇 클라크가 콜렛의 뒤에서 달려 든 것은. 클라크는 튼튼한 팔로 상대의 굵은 목을 꽉 졸랐다. 클라크는 확실히 컸다. 그러나 콜렛에 비하면, 꽤 작아 보인다. 그를 뿌리치려고 몸을 비트는 콜렛에게 매달려, 클라크는 있는 힘을 다해 괴물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클라크가 콜렛에게 매달려 있으므로,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발사할 수 없었다. 이이크는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마루 바닥에 몸을 움츠리고 이를 덜덜 떨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클라크는 여전히 콜렛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콜렛은 버둥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다. 갑자기 뚝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거대한 털북숭이 콜렛은 뻗었다. 콜렛의 목이 부러진 것이다. 클라크의 눈은 붉게 빛나며 캡틴을 쳐다보았다. 캡틴도 클라크를 쳐다보았다. 말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부모를 잃은 아기 캡틴을 키울 때부터, 이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캡틴과 퓨쳐맨의 사이는 굳게 맺어 주고 있었다. 캡틴은 들어왔던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클라크에게 말했다. "끌을 가지고 이 문을 열어 보라고." 클라크는 가슴에 붙어 있는 작은 로커에서 몇 개의 날카로운 끌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의 손가락을 떼어 내고 끌을 붙였다. 기계 인간의 장점이다. 클라크는 문 둘레의 시멘트벽에다 당장 큰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기에 손을 넣어 문의 자물쇠를 벗겼다. 클라크가 말했다. "저놈들을 혼내 주겠어. 자아, 갑시다." 캡틴들은 서둘러 여섯 명의 사냥꾼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섯 명은 당황하여 도망치려고 했다. "서라!“ 캡틴은 도망쳐 가는 여섯 명의 머리를 향해 일부러 빗나가게 프로톤 권총을 한 발 발사했다. 즉시 여섯 명은 도망치려다가 말고, 떨면서 되돌아왔다. 캡틴은 자신을 흉계에 걸려들게 한 목성인을 노려보았다. "잘도 흉계를 꾸며 우리들을 죽이려 했구나. 누가 명령했지? 그림이냐?" 목성인은 움츠리며 말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우리들을 또 다시 체포하러 온 줄 생각했기 때문에…… 사장은 없습니다. 아직 명왕성에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캡틴은 다른 다섯 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말에는 거짓이 없는 듯 다섯 사람도 두려운 듯 캡틴을 보고 끄덕였다. 그래서 캡틴은 말했다. "형무소의 소장 레인의 도움을 받아 함께 탈옥한 놈들은 어디 있나?" "다른 사람들은 사냥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겁에 질려 있는 목성인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끄덕였다. 캡틴은 또 물었다. "너희들과 함께 로지와 카라크도 탈옥했지?" "네, 그러나 로지와 카라크는 여기 와서 곧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여기 왔을 때, 커얼 로머라는 학자가 조사를 위해서 여기 있었을 텐데. 알고 있나?" "로머 씨가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들이 발견되지 않도록 사장이 잘 해 주었습니다." 점점 수수께끼가 풀려갔다. 캡틴은 여섯 명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 곳을 떠나겠다. 보아 하니 우주선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겠지. 행성 경찰이 와서 너희들을 형무소에 되돌려보낼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한다." 하고 커밋 호로 돌아갔을 때, 오토는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오토의 앞에는 프로톤 권총으로 마비된 위성 사슴이 뒹굴고 있었다. 오토는 캡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매가 찢어져 있군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캡틴은 경위를 말해 주었다. 오토는 외쳤다. "그럼, 내가 위성 사슴을 쫓고 있는 동안에 클라크는 사람으로서는 낼 수 없는 힘으로 콜렛과 일 대 일로 싸우고 있었군요." 클라크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하다가, 오토가 잘해 주었다는 눈초리를 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캡틴은 얼른 위성 멧돼지를 대상으로 X선 스펙트럼 검사를 시작했다. 오토는 말했다. "그 놈의 뼈에 코발트가 가득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어요. 벌써 놈들의 소굴이 케이론 어디인가는 확실하니까요." 캡틴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검사를 끝내고 나자 큰 소리로 말했다. "이놈에게 코발트가 검출되지 않았어. 마법사가 케이론에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런 어리석은!“ 오토가 말하자, 클라크도 거들었다. "명왕성인의 킬리 아저씨가 명왕성의 위성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케르베로스가 아니었으니까 케이론입니다." 그러나 캡틴은 이미 둘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알겠어. 케르베로스에도 케이론에도 마법사는 살고 있지 않다. 허나 명왕성에는 위성이 세 개 있다." 오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설마 스틱스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거기는 물로 뒤덮여 있으니까, 생물이 살 수 없어요." 캡틴은 상관없이 말했다. "오토, 커밋 호를 상승시켜라! 그리고 스틱스로 향한다." "그, 그런 어리석은 일을!“ 요트가 말하자, 클라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캡틴의 명령을 따라라!“ 오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커밋 호를 출발시켰다. 커밋 호가 곧장 스틱스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동안 캡틴은 열심히 추리해 보았다. 아무튼 스틱스 외에 그 흰털의 괴수가 살고 있을 만한 곳은 없다. 그러는 동안 캡틴은 문득 어떤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로커에 가서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진 작은 장치를 가져왔다. 그것은 오토와 껴안은 채로 화성에 떨어진 그 흰털의 괴물이 벨트에 붙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구인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는 장치가 틀림없다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져 잘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장치는 무엇인가 특별한 역선을 방사하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캡틴은 그 찌부러진 기계를 커밋 호에 있는 여러 가지 측정기를 사용하여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본래 어떤 역선을 방사하고 있었는지를 캐내려고 했다. 그 동안에도 스틱스는 점점 커 갔다. 클라크는 이이크를 안고 앉아서는, 그 명왕성의 위성 스틱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토는 더욱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조절판 레버를 쥐고 있었다. 마침내 캡틴은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진 기계가 본래 방사하고 있던 역선을 탐지하는 소형의 장치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캡틴은 중얼거렸다. "이놈으로 나의 추리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캡틴이 옆으로 다가 갔을 때, 조종석에 있던 오토가 말했다. "스틱스에 가도 헛일입니다. 지금까지 착륙한 우주선은 한 척도 없으니까요. 북극에서 남극까지 물에 잠겨 있지요." 캡틴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걸 확인하려고 하는 거야." 커밋 호는 드디어 제 3의 위성 스틱스에 다가갔다. 물로 뒤덮여 있을 정도니까, 이 위성에 대기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커밋 호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대기가 쉬이쉬이 소리를 냈다. 이윽고 수백 미터 아래의 끝없는 녹색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흰 파도가 일렁였다. 오토는 화가 난 듯이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어딜 봐도 육지는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렇지만 곧 알게 돼."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조금 전에 만든 탐지 장치를 꺼냈다. 그리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장치에서 작고 붉은 광선이 흘러나왔다 캡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에는 강력한 역선이 작용하고 있다! 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 자이로 박사의 비밀 기지의 수수께끼가 말이야. 그리고 그 이상의 비밀도." "무슨 소릴 하고 있습니까, 캡틴?" 오토가 물었으나, 캡틴은 오토의 말을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캡틴은 지금 자기가 푼 수수께끼에서, 자이로 박사의 큰 음모를 파괴하러 가는 것이 과연 좋은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이먼을 구출해 내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캡틴은 결심했다. 캡틴은 결심하고 말했다. "오토, 바다에 박아라!“ 놀란 듯이 오토는 큰소리로 되물었다. "바다 속에라고요? 그런 짓을 하면 아무리 커밋 호라도 버티지 못합니다. 저 사나운 파도에 긁히거나 암초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언제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신용하지 못하게 되었어, 오토?" 캡틴은 웃으면서 그러나 엄숙하게 말했다. 오토는 입을 삐죽했다. "이, 나 말입니까? 캡틴이 하라고 하면 태양 속에라도 박아 넣을 나입니다요." 그러면서 오토는 조절판을 열고 심한 파도가 용솟음치는 바다를 향해 급강하시켰다. 커밋 호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큰 파도를 향해 돌진하자, 클라크도 걱정스러운 듯이 캡틴을 얼핏 쳐다보았다. 커밋 호는 휘익 바닷속으로 돌진해 갔다. 그 때였다. 놀랄 사이도 없이 주위의 바다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커밋 호는 넓고 넓은 수백 미터의 상공에서 육지를 향해 날고 있는 것이었다. 오토는 재빨리 육지에 박히지 않으려고 커밋 호를 수평으로 되돌렸다. 육지는 저 멀리 지평선까지 두텁고 거대한 백색의 밀림으로 빽빽이 덮여 있었다. 여우한테 홀린 것 같아 오토가 외쳤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건?" 클라크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바다는 대체 어딜 갔죠, 캡틴!“ 캡틴은 말했다. "바다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오토는 외쳤다. "그러나 캡틴 당신도 보지 않았어요!“ "우리들이 본 것은 착각이었어. 그 마법사가 자기의 모습을 지구인으로 보이게 한 것처럼, 어떤 역선을 사용하여 바다처럼 보이게 했던 거야." 클라크와 오토는 어이가 없어 멍해졌다. 그러자 캡틴이 설명 해 주었다. "나는 케이론과 케르베로스에 마법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여기 스틱스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스틱스는 바다로 덮여 있었어." 클라크와 오토는 끄덕였다. 캡틴은 계속했다. "명왕성의 킬리 할아버지는 그 흰 털북숭이 생물이 상대를 착각하게 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어. 또 오토도 지구인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그 흰털 북숭이의 생물이라는 것을 발견했지. 그래서 어쩌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바다가 있는 것처럼 이쪽을 착각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캡틴은 그 역선 탐지기를 두 사람에게 다시 보여 주었다. "나는 찌부러진 기계가 어떤 역선을 방사하고 있었는가를 조사해서, 대체로 그 가능성을 알아 내어. 그리고 그 역선을 알아 내는 탐지기를 서둘러서 만들었지. 그리고 여기 상공에서 스위치를 넣자, 아니다 다를까, 그 역선이 방사되고 있었던 거야. 역시 그 바다는 환상이었던 거야." 오토가 반론했다. "그러나 이 위성은 지구인이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바다로 덮여 있었어요." 캡틴은 끄덕였다. "그대로다. 그러나 킬리 할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나. 마법사들은 지구인이 와서부터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야. 마법사는 지구인이 왔기 때문에 자기들의 위성을 위장해 버린 거야." 오토와 클라크는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엷은 커튼과 같은 반투명의 것이 상공을 덮고 있었다. 오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서 모두 한 사람 남김없이 이 위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인가!“ 캡틴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니, 한 사람도 남김없이 라는 뜻은 아니야. 적어도 단 한 사람은 착각이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오토가 외쳤다. "그림이다! 그래, 자이로 박사로 둔갑하고 있는 그림이 틀림없다. 이제는 속지 않는다!“ 캡틴은 탐지기를 주의 깊게 보면서 재빨리 계산했다. 그리고 나서 오토에게, "조금 서쪽으로 진로를 돌려라. 역선이 방사되고 있는 근원은 그쪽 방향이다. 반드시 거기에 마법사의 도시와 자이로 박사의 비밀 기지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클라크가 물었다. "거기에 사이먼이 잡혀 있는 거죠?" 캡틴은 끄덕였다. 그리고 걱정되는 듯이 말했다. "무사히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이먼을 찾아 내어 구출하는 일이다. 고도를 최하로 내리고 속도를 늦추라." 30분 가량 가자, 산림 저쪽에 흰 돌로 된 많은 뾰족한 탑이 있는 것이 보였다. 뾰족탑 주위에는 가느다란 금속의 기둥이 모여 있고,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공이 붙어 흰 빛깔을 내고 있다. 캡틴은 말했다. "착륙해라! 너무 접근하면 위험하다." 커밋 호는 거대한 칡의 밀림 속에 착륙했다. 주위는 조용했다. 캡틴이 말했다. "자아, 저 부분을 정찰하자! 이런 장소니까 감시원을 남기지 않아도 되니까 모두 가자." 캡틴의 뒤를 오토와 클라크가 따랐다. 클라크의 어깨에는 이이크가 달라붙어 있었다. 오토는 클라크에게 불평을 했다. "사이먼을 구출하러 간다는데, 이런 중대한 시기에 달의 개를 데리고 가는 거냐, 너는?" 클라크는 변명을 했다. "이이크는 케이론에서 콜렛을 만나고 나서부터 좀 겁을 내고 있어. 그러니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리고 이이크는 절대로 방해는 안 돼." "방해가 안 된다고? 너 같은 금속 덩어리도 나에게는 방해가 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클라크가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 오토, 이이크가 남아서 커밋 호를 통째로 씹어버리면 곤란하잖아." 캡틴들은 흰 숲 속을 걷기 시작했다. 흰 숲은 머리 위의 3미터 정도나 솟아 있어 매우 기분이 나빴다. 때때로 털이 많은 작은 동물이 일행이 지나가는 길을 싹 가로질러 가기도 했다. 클라크의 어깨에 앉아 있는 이이크는 파란 가지를 물어뜯고는 씹기 시작했다. 클라크가 깜짝 놀라며 속삭였다. "이이크가 식물을 먹다니, 처음이야." 캡틴이 말했다. "그 가지에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야. 자, 가지가 부러진 데가 빛나고 있잖아. 이로써 마법사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솟아 있는 뾰족한 탑에 가까워짐에 따라 캡틴들은 주위를 경계하면서 나아갔다. 캡틴은 희미하게 흰빛을 내는 가느다란 금속의 기둥 위에 있는 공을 보고 말했다. "저것이 바로 이 위성이 바다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역선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요트가 속삭였다. "누군가가 있다!“ "풀 속에 숨어라!“ 캡틴은 흰 풀숲으로 뛰어들면서 말했다. 클라크와 오토도 뒤따랐다. 캡틴은 살짝 머리를 내놓고 발소리가 나는 쪽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10명 정도의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틀림없이 흰 털북숭이의 마법사였다. 그 마법사들은 역시 흰털에 덮인 지구의 캥거루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는 동물을 타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스틱스인에 틀림없다.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종족이다. 스틱스인의 안장에는 금속의 투망인 듯한 것이 있었다. 캡틴은 말했다. "사냥을 가는 것인가? 틀림없이 지금 타고 있는 것 같은 동물을 잡아서 길들일 거다." 스틱스인들은 세 사람 바로 앞을 지나 멀리 갔다. 캡틴들은 또 전진을 시작했다. 이윽고 칡나무 아래로 스틱스인의 도시가 똑똑히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 도시는 그다지 크지도 않고, 어디나 낡은 석조 건물뿐이다. 도시 사이를 흰 털북숭이 스틱스인이 오가고 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깡충깡충 뛰는 동물의 등에 타고 있었다. 캡틴은 허리의 벨트에 손을 붙은 채 각오한 듯이 말했다.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장치를 사용하여 저기 갔다 오겠어. 그리고 사이먼들을 구출해 올 테니까,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게." 오토가 반대했다. "그것으론 10분도 가지 못해요. 저기까지 절반도 못 가서 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걱정 마.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캡틴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클라크의 어깨에 앉아 있는 이이크가 무서운 듯이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텔레파시로 무엇인가 느낀 것이다. 캡틴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생물을 타고 있던 10여 명의 스틱스인들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틱스인이다, 조심해라!“ 캡틴은 이렇게 외치면서 얼른 프로톤 총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스틱스인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투망을 캡틴들을 향해 던졌다. 상대를 마비되도록만 하는 세기로 맞춘 프로톤 총을 사용하여, 캡틴은 즉시로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이미 투망이 공중에 크게 퍼지고 있었다. 투망은 캡틴과 클라크와 오토의 세 사람 위로 떨어져 내렸다. 더욱이 두 번째, 세 번째의 투망이 그 뒤를 이었다.   캡틴과 자이로 박사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었다. 오토가 화가 나서 외쳤다. "털북숭이놈들, 우리들을 물고기처럼 그물로서 잡으려 하다니! 그 물고기가 어떤 것인지 그물에서 나오면 알려 주겠어!“ 캡틴은 오토에게 말했다. "침착해, 오토. 이 그물은 아무리 해도 찢지 못해. 이중 삼중으로 씌어졌으니까. 기회를 기다리자. 반드시 올 거다." 이렇게 격려는 하지만, 캡틴은 이처럼 간단히 생포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클라크는 걱정이 되는 듯 말했다. "캡틴, 이이크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이크는 스틱스인이 나타나자 몸을 날려 숲 속으로 숨어버렸다. 오토가 노려보면서 내쏘았다. "이 판국에도 달의 개 이이크를 걱정하고 있는 거냐! 사이먼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가. 태양계 정부가 쓰러져 가고 있는 데도 걸핏하면 이이크, 이이크야!" 캡틴은 쓴웃음을 지으며, 클라크를 위로했다. "이이크는 잡힌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혼자로도 잘할 거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들보다 나은 형편이 아닌가." 스틱스인들은 강제로 캡틴들을 나직하고 튼튼한 건물의 둥근 방에 넣었다. 거기에는 예상한 대로 세 명의 사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세 명이라는 것은 물론 자이로 박사와 형무소를 탈주한 작은 사나이 로지, 큰 사나이 카라크였다. 캡틴들이 자이로 박사 앞에 끌려오자, 자이로 박사는 우선 스틱스인을 칭찬했다. "이놈들을 생포하다니, 큰 공을 세웠다. 잘 했다! 이놈들은 너희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이다. 자, 가도 좋아. 이제는 우리가 맡겠어" 스틱스인들은 방을 나갔다. 캡틴은 얼른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죽 늘어선 고라사이트제의 투명한 큰 케이스 속에 행방불명이 된 과학자들이 마치 냉동되어 있듯이 서 있는 것을 알았다. 케이스 중 하나에는 존도 있었다. 존은 캡틴 쪽으로 눈을 돌린 채로 굳어 있었다. 캡틴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케이스의 옆에 아직 살아 있는 뇌 사이먼도 있었다. 오토도 곧 알아차렸는지 소리쳤다. "사이먼, 놈들이 당신을 고문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러나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다만 그 렌즈의 눈은 의미 있게 발성 장치 쪽을 보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검은 옷을 입은 자이로 박사는 캡틴에게 크고 거만한 소리로 말했다. "겨우 마주볼 수 있게 되었구나, 캡틴 퓨쳐!“ 캡틴은 분노의 눈으로 노려보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마주볼 수 있게 될 것은 이게 처음은 아니야." "전에 만났을 때는 지금처럼 착각을 이용한 변장이나 목소리를 만들어 하지는 않았었지." 오토와 클라크, 그리고 로지와 카라크도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침을 삼키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쪽의 자이로 박사는 이제 태양계 정부를 탈취하려는 괴인이며, 저쪽의 캡틴 퓨쳐는 태양계를 몇 번이나 구원한 정의의 사나이다. 자이로 박사는 여전히 거만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너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어. 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작은 사나이 로지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지금도 안심해서는 안 되요. 이놈이 살아 있은 동안은 결코 안심할 수 없어요. 자,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해요!" 자이로 박사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건 안 돼! 스틱스인들은 우리들이 이미 사람을 둘이나 죽인 것을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있어. 더 이상 살인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로지, 걱정할 건 없잖아. 이놈들도 '원수의 집'의 진열품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캡틴은 비웃었다.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이런 시시한 진열품을 만드는 것으로 안심이 된다면 말이야. 명왕성의 탈타로스 천문대에서 오토들에게 사용한 가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는 짓이 과연 더럽고 비겁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어." 캡틴의 욕설에 자이로 박사는 화를 내며 대답했다. "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태양계 정부의 지도자가 되고도 충분한 사람이다. 지금이야말로 태양계의 주민은 나를 지도자로 해야 한다고 정부와 맞서고 있지 않은가. 암흑성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캡틴은 엄숙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집어치워. 그것이 허위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 자이로, 나는 암흑성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정체를 알고 있다니?" 자이로 박사는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캡틴은 침착하게 끄덕이며 말해 주었다. "알고 있었지. 암흑성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그것도 착각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자이로 박사는 크게 놀라며, 캡틴을 노려보았다. 로지는 더욱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에 죽여버리는 것이 좋다고 하잖아요. 이놈은 악마보다 더 눈치가 빠른 놈입니다. 우리들의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오토까지 큰소리를 질렀다. "정말입니까, 캡틴?" "정말이고 말고. 저렇게 크게 보이지만, 사실은 있지도 않은 거야. 태양계 밖에 우주선을 보내 몇 주일이나 걸려 천천히 돌아오게 한다. 그 우주선의 위에, 이 행성이 바다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장치를 싣고, 엄청나게 큰 암흑성이 가까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거야." 캡틴의 설명을 듣고 오토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래서 어느 천문학자도 그 암흑성의 질량을 계산했지만 제로에 가까웠던 거였군요." "그렇다. 어느 천문학자도 알지 못하고 말았지만, 나는 금성의 천문학자 캔스 케인에게 부탁하여, 암흑성 주위의 항성의 위치를 관측하게 했어. 왜냐 하면 그 암흑성에 정말 질량이 있다면 아인슈타인 박사의 학설처럼 그 옆을 지나는 빛은 좀 구부러질 테니까. 빛이 구부러지면 항성의 위치도 조금 변하게 되지. 그러나 관측 결과 케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짜 질량이 없는 것이 되고, 다만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추리를 하면 대답은 하나밖에 없어. 우주선에 장치를 실어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자이로 박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캡틴 퓨쳐, 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우수한 놈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의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암흑성이 있는 곳까지 가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공격하지 않았지?" 캡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이야말로 망설였던 일이다. "그렇게 하면 네게 잡혀 있는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이 위험하다. 그를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지." 자이로 박사는 비웃었다. "동료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의 위험조차 외면했는가. 자기 몸만 위험하게 한 것이 아니지.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암흑성으로 위장한 우주선은 점점 태양계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당황한 주민들은 나를 지배자로 내세우려 하고 있는 거다." 여기서 자이로 박사는 다시 비웃으며 계속했다. "내가 지배자가 되면 나는 단지 우주선을 태양계에서 멀리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태양계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지. 이 나의 착각을 일으키는 굉장한 힘을 이제부터라도 사용해 간다면 아무도 내게 반항하지 못한다." 캡틴은 경멸하듯 말했다. "너는 지금 그 착각을 일으키는 힘을 네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거짓말은 집어치워. 그 힘은 옛날 스틱스인이 발명한 것이지 않은가!" "그것까지 알고 있는가. 그래도 어떻게 착각을 일으키는지, 그 비밀은 알지 못하겠지." 캡틴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웃기지 마. 그건 사물에 반사되는 빛을 바꾸는 역선으로 일으킨다. 보통 인간이 상대방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 사람의 몸에 광선이 부딪쳐서 보통 반사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역선에 의하여, 인간의 몸에서의 반사 대신, 돌멩이로부터의 반사처럼 보이게 바꾸어 버리면 상대의 눈에는 인간이 아니라 돌멩이처럼 보이는 거다. 네가 그렇게 변장할 수 있는 것도, 스틱스인이 지구인으로 보인 것도, 이 위성이 바다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 것도, 모두 같은 이치다." "너야말로 캡틴 퓨쳐다!“ 드디어 자이로 박사도 손을 든 모양이다. 캡틴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다. 너는 어떻게 스틱스인을 한패로 해서 그 중요한 비밀을 캐냈는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보니 스틱스인은 자이로 박사가 두 사람이나 사람을 죽인 일을 불미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끌어 스틱스의 지배자를 만날 수 있다면 자이로 박사의 음모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알고 싶은가? 너는 사로잡힌 몸이다. 어차피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야기해 주지. 나는 이 위성에 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 이끌려 여기 왔다. 그리고 바다의 위장을 뚫고 보기 좋게 착륙했다. 그러나 곧 스틱스인에게 붙잡혔다. 스틱스인은 살인이나 전쟁을 몹시 싫어하는 종족이라 나를 귀중하게 취급해 주었어. 그들은 지구인에게 정복되어 식민지가 되지 않을까 해서, 바다에 덮여 있는 듯이 위장할 정도로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걸 이용하여 태양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했다. 지구인은 이 위장을 발견해 침략해 올 것이다. 그리고 스틱스인을 노예로 만들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위협했지. 그걸 피하려면 스틱스인은 친구인 내가 이 태양계의 지배자가 되는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게 했지. 그래서 놈들은 착각을 일으키는 비밀을 나에게 건네 주고, 우주선의 건조를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 밖의 일은 네가 상상한 대로다." 캡틴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척하면서 사실은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스틱스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에게 자이로의 흉계를 말해 줄 수 있다면. "이놈은 당신에게 이야기를 시켜 시간을 끌기만 합니다. 리모르 왕이 옵니다!“ 자이로 박사는 갑자기 긴장해서 말했다. "이놈을 리모르 왕과 이야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서둘러서 그라사이트 케이스에 넣어 버려라." 로지와 카라크는 움직이지 못하는 캡틴을 들어서는 줄지어 있는 케이스의 하나에다 간단하게 처넣어 버렸다. 캡틴은 케이스가 닫혀지자 몸부림쳤다. 그 때문에 투망이 매우 느슨해졌다.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씨익하며 가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찌르는 것 같은 냄새였다. 그리고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움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고 생각하자마자, 온 몸의 힘이 빠지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토도 같은 운명이 되어, 케이스 안에서 꼼짝 못하게 되어 있었다. 로지는 클라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로봇은 어떻게 합니까? 놈은 호흡을 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움직일 수 없게 할 수 있다. 이놈의 전기 신경 계통은 여기다." 하며 자이로 박사는 원자 권총을 들고, 클라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클라크의 목 아래를 겨누어 쏘았다. 즉시로 클라크의 광전 눈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 때, 보석을 박은 벨트를 한 키 큰 사나이가, 스틱스인 몇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아마 리모르 왕인 것 같았다. 리모르 왕은 그 광경을 보고는 서투른 지구어로 말했다. "또 포로인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나는 이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 우리들은 이 가스를 병의 치료에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점잖게 대답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계획이 성공하면 이놈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캡틴은 자이로 박사가 자기들을 자유롭게 놓아줄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모르 왕은 발끈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포로의 일만이 아니다. 당신은 지구인과 명왕성인을 마구 죽이고 있다. 우리들은 피를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종족이다. 나는 살인을 해서까지 당신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도 피를 흘리는 일은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이 이상은 절대로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 내 계획이 실패하면 더 많은 피가 흐르게 됩니다. 지구인은 노예로 쓸 적은 숫자만 남기고, 나머지 스틱스인을 하나 남기지 않고 죽일 것이니까요." 자이로 박사가 이렇게 말하자, 리모르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당신의 말은 틀리지 않겠지. 그러나 빨리 계획을 끝내길 바란다." "앞으로 5, 6시간 이내에 내가 태양계 정부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위성에 지구인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자 리모르 왕은 찌푸린 얼굴로 줄지어 있는 케이스를 언뜻 보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나갔다. 캡틴은 분했다. 리모르 왕과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자이로 박사의 음모를 즉시로 무너뜨리고, 스틱스인을 동료로 만들 수 있을텐데. 그 때, 로지가 텔레바이저가 있는 곳에서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박사! 화성의 뉴스 방송을 잡았습니다. 들어 주십시오." 스크린에 화성인 아나운서가 나타나서 매우 흥분한 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제 어느 행성에서도 육안으로 똑똑히 암흑성이 보입니다. 태양계 최후의 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정부를 자이로 박사에게 넘기라고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카슈 대통령은 만약 정부를 자이로 박사에게 넘겨도 이 위기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캡틴 퓨쳐가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고 있다, 캡틴 퓨쳐를 믿고 겁내지 말라는 현명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캡틴 퓨쳐의 이름을 꺼내도 사람들을 달랠 수는 없습니다. 금성과 수성의 행성 위원회는 자이로 박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안건에 찬성했습니다. 천왕성도 그것에 따를 것입니다. 몇 시간 후에는 다른 행성들도 찬성하게 될 것입니다."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끄며, 자이로 박사는 뽐내듯이 외쳤다. "드디어 나는 승리했다! 로지, 우주선을 준비해라. 착각 장치를 실은 우주선을 뒤쫓아 옮겨 타라. 만약에 모든 행성 위원회가 나를 대통령으로 할 것을 결정하면 암흑성의 진로를 조금씩 바꿔라. 그리고 내가 태양계의 위기를 구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다." 자이로 타사와 로지와 카라크는 캡틴 쪽을 비웃듯이 보고는 서둘러 집을 나갔다. 캡틴은 어쩔 수 없이 다만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우주선이 이륙하는 발사음이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자이로 박사가 출발한 것임에 틀림없다. 캡틴은 분했다. 자이로 박사의 음모가 계획대로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캡틴은 음모를 저지할 수 없는 것이다.   암흑성을 추적하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깥이 어두워진 것으로 보아, 몇 시간이 지난 것은 틀림없다. 캄캄해지기 전인데 우주선이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이로 박사를 그 암흑성에 보내고 되돌아온 것일 게다. 생각은 뻔한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으니. 꼭 지옥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카슈 대통령이 열심히 시간을 끌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것만 같다. 캡틴 퓨쳐가 어떻게 이 수수께끼를 풀어 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는…… 캡틴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악문다. 이제까지도 몇 번이나 절체 절명의 위기를 뚫고 나왔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떤 방법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 때였다. 캡틴은 문틈으로 무엇인가 작은 것이 두려워하며 엿보는 것을 깨달았다. 이이크다, 달의 개 이이크다! 이이크는 어쩌다 도망치기는 했어도 자기들의 뒤를 쫓아온 것임에 틀림없다. 이이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클라크를 보자, 기쁜 듯이 다가왔다. 그러나 클라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슬픈 듯이 클라크의 얼굴을 할퀴기 시작했다. 순간 캡틴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번득였다. 그렇다! 자기는 몸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생각하는 일, 기도하는 일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이크에게 텔레파시로 명령할 수 있다. 캡틴은 힘차게 눈을 감고 마음을 집중시켜, 이이크를 마음 속으로 불렀다. (이이크 이리 와라, 이리로.) 그러자 이이크는 갑자기 클라크의 얼굴을 할퀴는 것을 그만두고, 캡틴 쪽을 쳐다보았다. 잘 되었구나! 캡틴은 다시 텔레파시로 이이크에게 명령했다. (이이크, 이리로 와라!) 이이크는 천천히 캡틴이 들어가 있는 그라사이트의 케이스 쪽으로 걸어왔다. (이이크, 이 케이스의 밑을 씹어 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귀금속이 많이 들어있다. 맛있게 먹어 봐라!) 이이크는 순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라사이트의 케이스의 밑바닥에 코를 비볐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캡틴은 필사적으로 불렀다. (참 맛있다! 먹어 봐라.) 마침내 이이크는 뾰족한 입으로 씹기 시작했다. 끌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다. 간단히 씹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이이크는 문득 씹는 것을 그만두고 성난 것처럼 캡틴을 지켜보았다. 맛있다고 했는데, 조금도 그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캡틴은 초조하게 되풀이했다. (더 깊이 씹어 보아라. 그러면 가장 좋아하는 은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씹어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아무튼 해 보자는 듯 이이크는 다시 한번 씹어 보았다. 그와 동시에 씨익 하고 가스가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이크는 이렇게 맛이 없는 것은 처음이라는 듯 캡틴을 보았다. (됐다, 고맙다, 이이크!) 가스가 빠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캡틴은 다시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캡틴은 투망을 벗길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되었다. 곧 케이스의 문을 비틀어 열고 밖으로 나왔다. 캡틴은 곧 오토가 들어 있는 케이스에 다가가서 비틀어 열었다. 오토는 자유롭게 되자, 거칠게 중얼거렸다. "나는 영원히 이 속에 처넣어진 채로 있게 될 줄만 생각했어요. 이 원수는 꼭 갚겠어!“ 뒤이어 구출된 존은 울먹이면서 말했다. "오 캡틴, 당신이 반드시 구출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어요!" "존, 오토를 도와서 다른 사람들을 꺼내 주지 않겠어?"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자기는 살아 있는 뇌 사이먼에게 다가갔다. 몸을 굽히고 발성 장치를 수리했다. 곧 접속이 되었다. 사이먼은 말했다. "잘 했어, 커티스. 그러나 이제는 늦은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커밋 호로 쫓으면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 전에 클라크를 구출하지 않으면……" 캡틴은 곧 클라크의 목의 덮개를 벗기고 전기 신경 계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벨트에서 공구를 꺼내서 절단된 배선을 주의 깊게 이었다. 그 순간, 클라크와 광전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캡틴? 어떻게 케이스에서 나왔나요?" "이이크 덕택이야. 케이스를 씹도록 텔레파시로 부탁했지." 이이크는 벌써 클라크와 어깨에 기어올라가서 즐거운 듯이 촐랑대고 있었다. 클라크가 큰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라고? 좋아, 상으로 먹고 싶은 대로 은을 먹여 주겠어." 그 동안에도 오토와 존은 케이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꺼내어 자유롭게 해 주었다. 캡틴은 사이먼에게 말했다. "곧 출발하자, 암흑성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우주선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 때 오토가 외쳤다. "스틱스인들이 옵니다!“ "좋아. 곧바로 뛰어 커밋 호로 가자." 캡틴은 이렇게 말하며 자유롭게 된 천문학자들에게로 돌아섰다.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스틱스인은 당신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일이 성공하면 곧 돌아올 겁니다." 스틱스인의 한 사람이 입구에 나타났다. 케이스에서 사람들이 빠져 나온 것을 본 스틱스인은 놀라서 뒤돌아 소리쳤다. "박사, 죄수가 도망쳤어!“ 캡틴은 즉시로 출력을 가장 낮게 한 프로톤 권총을 쏘고는 클라크와 오토에게 외쳤다. "가자! 존, 너는 사이먼을 데리고 와!“ 존은 얼른 사이먼의 케이스를 들고 캡틴의 뒤를 쫓았다. 거리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서치라이트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 속을 털북숭이 스틱스인들이 와와 함성을 지르며 건물 쪽으로 몰려왔다. 캡틴은 외쳤다. "뚫고 나가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단, 권총의 출력은 최하로 내려라!" 캡틴과 오토는 상대방을 마비시킬 정도로 출력을 낮춘 권총을 사방팔방으로 발사하면서, 스틱스인 선두의 무리 속으로 돌진했다. 그 뒤에 사이먼을 안은 존, 그리고 후방은 클라크가 맡았다. 클라크의 목에는 이이크가 달라붙어 있다. 캡틴과 퓨쳐맨들은 점점 늘어나는 스틱스인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프로톤 권총을 발사했다. 그래도 뒤에서 계속 쫓아오는 스틱스인들이 있으면 클라크가 주먹으로 쳐서 쫓아버렸다. 겨우 커밋 호가 있는 흰 숲에 닿았다. 그렇게 거리를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스틱스인이 전쟁을 싫어하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캡틴들이 커밋 호에 도착하자, 발소리를 듣고 우주선 안에서 스틱스인 경비원 두 사람이 뛰어나왔다. 캡틴들은 즉시로 프로톤 권총으로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우주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조종석에 뛰어들자, 캡틴은 사이클로톤의 기동 스위치를 넣었다. "빨리 이륙해 줘요, 스틱스인들이 와요!“ 오토가 재촉했으나, 캡틴은 싱긋 웃고 나서 조절판 레버를 열었다. 커밋 호는 튕긴 듯이 상승을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로 반투명의 위장층을 단숨에 뚫고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스틱스의 표면에는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신 별의 한 가운데는 그 암흑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캡틴은 그 방향으로 진로를 정확하게 잡았다. "저 암흑성을 쫓아서 착각을 지워버리겠어! 태양계의 사람들에게 위기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거다." 하고 캡틴은 외쳤다. 자이로 박사의 정체   커밋 호는 대단한 작은 흰 점으로 되고 그 대신 환상의 암흑성은 점점 커 갔다. 존이 큰소리를 질렀다. "저것이 착각이라니, 아무리 보아도 진짜여요!" 캡틴은 싱긋 웃었다. "저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곧바로 돌진해 보이겠어." "괜찮겠지요?" 클라크가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캡틴은 마치 자폭이라도 하는 것처럼 암흑성을 향하여 스피드를 올렸다. 새까만 암흑성이 정면 가득히 앞을 막고 있었다. 검고 거친 표면이 눈앞에 다가왔다. 충돌한다! 존이 가느다란 비명을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커밋 호는 그 새까만 표면에 마구 부딪치며 뚫고 나갔던 것이다!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 역시 암흑성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다만 반투명의 층이 어디까지나 커밋 호를 감싸는 것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캡틴은 그 중심부에 반짝이는 금속 덩어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것이 착각을 일으키는 근원인 우주선이다! 자이로란 놈은 저기 있다." 커밋 호는 급상승하여, 그대고 상대의 우주선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오토, 프로톤 포 준비!“ 오토는 눈을 빛냈다. "우주 끝까지 날려버리겠어!“ "잠깐만, 스틱스인도 타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우주선 꼬리를 겨누어 움직이지 못하게만 해. 사격!" 급강하하여 가는 커밋 호에서 푸르고 하얀 광선이 휙 상대방 우주선의 꼬리를 습격했다. "명중!“ 요트가 손뼉을 쳤다. 꼬리의 분사관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적은 즉시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캡틴은 오토에게 명령했다. "우주복을 입어라! 저쪽에 옮겨간다. 클라크도 따라와라!“ 캡틴은 속력을 낮춘 상대의 우주선 뒤에 커밋 호를 바싹 붙였다. 속도를 같게 한 다음 자동 조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오토와 클라크를 데리고 에어록을 지나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재빨리 우주 유영을 하여 즉시 상대의 선체 한복판에 닿았다. "에어록의 문을 열어라. 클라크." 캡틴은 우주복의 무전기로 외쳤다. 클라크는 명왕성의 위성에서 보여 준 것처럼, 손가락 중 두 개를 드릴로 바꾸어 몇 초도 되지 않아 금속제의 선체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 손을 넣어 굉장히 센 힘으로 문을 비틀어 열었다. 캡틴 일행은 에어록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서 캡틴은 스위치를 밀어 안쪽의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클라크와 오토를 거느리고 우주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기다리고 있던 원자총의 빔이 캡틴 일행을 습격했다! 자이로 박사와 로지와 카라크가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의 뒤에는 5, 6명의 스틱스인이 몹시 떨면서 있었다.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실로 순간의 일이었다. 원자총의 빔이 번쩍하는 순간 클라크는 캡틴을 옆으로 밀쳐 버렸다. 원자 빔은 캡틴 대신 클라크에게 명중했다. 그러나 클라크의 강철 가슴에서 단지 불꽃만 일어났을 뿐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 캡틴은 이렇게 외치며 프로톤 권총을 발사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이놈아!“ 자이로 박사는 미친 듯이 외치면서 캡틴을 향해 비어 있는 원자총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너무나 날뛰는 통에 캡틴의 프로톤 권총의 빔은 자이로 박사의 몸을 스쳤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이로 박사가 엉망이 된 원자총을 흔들어대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잇던 프로톤 권총이 날아갔다. 이제 어쩔 수도 없었다. 캡틴은 재빠르게 자이로 박사에게 몸을 날리며 손으로 상대의 목을 졸랐다. 자이로 박사는 원자총으로 맹렬하게 캡틴의 머리를 계속 갈겼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캡틴은 손을 늦추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자기가 지게 되면 누가 태양계를 구할 것인가. 갑자기 자이로 박사의 미친 듯이 갈기는 힘이 약해졌다고 생각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맥없이 떨어져나갔다. 캡틴이 끝내 승리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로지는 오토의 프로톤 권총에 당하고, 키라크는 클라크에게 얻어맞아 쓰러져 있었다. 오토가 달려 왔다. "박사 놈은 죽었습니까?" 캡틴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죽었다. 죽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쪽이 죽게 될 뻔 했으니까." 상대가 아무리 지독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피를 싫어하는 캡틴은 얼굴을 돌렸다. 곧 마음을 가다듬고, 우주선 속을 둘러보았다. 캡틴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있는 것이다 떨고 있는 스틱스인들과 옆이 큰 원통형의 장치가 있었다. 캡틴은 스틱스인들에게 안심하라는 몸짓을 하며 가까이 갔다. "너희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곧 그 장치를 멈춰 주게. 지금 당장." 그것이야말로 환상의 암흑성을 만들어 내는 기계임이 틀림없다. 스틱스인들은 당황해 하며 장치인 레버의 스위치를 조작했다. 캡틴은 얼른 창 밖을 보았다. 그러자 순간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로 그 반투명한 것이 싹 사라져 버렸다. 캡틴은 자이로 박사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싸움을 끝낸 기쁨을 느끼며 말했다. "태양계의 사람들은 별안간 암흑성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당황하고 있을 거야." 거기에 우주복을 입은 존이 사이먼을 안고 들어왔다. 존은 그 착각을 일으키는 장치를 벨트에 단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이로 박사를 보기 위해 왔다. "자이로 박사는, 아니 그림은 죽었나요?" 캡틴은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음, 그런데 이 사나이는 모피상의 그림이 아니야." 오토가 외쳤다. "뭐라고요?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형무소장 레인도 아니고, 로머는 죽었으며, 남은 것은 그림만이 아닙니까?" 캡틴은 대답 대신 자이로 박사의 벨트에 있는 장치에 손을 가져가더니 스위치를 돌렸다. 그러자 지구인을 능가하는 자이로 박사는 일순에 사라지고, 거기에는 중년의 그야말로 학자다운 사나이가 쓰러져 있었다. 오토가 외쳤다. "이런 일이? 커얼 로머는 이미 죽었는데요!“ 캡틴은 더욱 우울한 듯이 대 답했다. "그래 로머다. 로머는 죽지 않았다. 저 검게 그을린 시체야말로 실은 빅터 그림이었던 것이다." 어이없어 하는 모두에게 캡틴은 다시 우울한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자이로 박사가 레인임을 입증했던 그 흰 흙의 발자국이 반대로 레인이 자이로 박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그 전에도 말했었지. 그러면 남는 것은 그림과 로머, 두 사람뿐이다. 나는 그 시체를 조사하러 갔을 때, 시체의 주위에 포켓 텔레바이저 같은 잔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로머는 텔레바이저로 연락하고 있을 때, 원자총인가 그 어떤 것으로 당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시체는 누군가? 로머가 아니라면, 필경 그림이 아닌가. 그래서 그 시체는 그림에 틀림없다고 추리했던 것이다." 존은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듣고 있었다. "왜 그림은 살해됐나요?" "아마 빌린 창고를 조사하는 동안 그 비밀 터널을 발견했을 거다. 그래서 거기가 자이로 박사의 비밀 거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로머는 그림을 죽이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기를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할 나쁜 흉계를 생각해 내었을 거야." 모두는 너무나도 훌륭한 캡틴의 추리에 탄복하고 말았다. 캡틴은 계속했다. "더욱이 로머는 명왕성의 위성을 탐험했기 때문에 그 흰 흙을 입수할 수도 있었고, 로지와 카라크를 졸개로 끌어넣을 수도 있었지. 아무튼 로머는 나쁜 짓에는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나이다." 존이 말했다. "이 악의 천재인 자의 음모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캡틴 당신이기 때문이어요!“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퓨쳐맨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난 어느 날 저녁의 일. 명왕성의 탈타로스시의 우주 공항에서는 막 커밋 호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캡틴과 퓨쳐맨은 에즈라 사령과 존과 금성의 천문 대장 켄스 케인과 작별 인사를 찬고 있었다. 캡틴은 말했다. "케인 씨, 왜 우리들과 함께 가지 않나요? 커밋 호의 스피드라면 그렇게 멀리 도는 것은 아닌데요." "그렇고 말고요. 나는 당신과 천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사이먼이 이렇게 말하자, 케인은 천만에 라는 듯한 이야기 투로 말했다. "나는 정기선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또 어떤 사건에 휩쓸려 들어갈지 모르는 걸요." 그래서 모두 크게 웃었다. 행성 경찰의 본부 명령으로 남게 된 존은 슬픈 듯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러나 새로운 위성과 스틱스인의 뒷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요." 캡틴은 끄덕였다. "그렇고 말고. 그 사람들은 지나치게 다른 종족과의 교류를 경계한다. 내가 한 달이나 여기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캡틴의 노력으로 겨우 스틱스인은 바다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위장을 풀고, 태양계의 일원이 될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오토와 클라크는 또 이이크의 일로 시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캡틴은 싱긋이 웃고 말했다. "지구에 되돌아가면, 사이먼과 둘이서 이 둘을 얌전히 있게 하는 방법을 실험하려고 생각하고 있어." 사이먼이 말했다. "캡틴, 이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네 ." 그러자 작별이 섭섭한 듯 존이 말했다. "끝내 작별이군요. 이것만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어요. 태양계 전체의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어요." 캡틴은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천만에, 나는 다만 모험이 즐거울 뿐이야. 그럼 안녕. 다시 우주의 어딘가에서 만나요!“ 에즈라 사령이 말했다. "또 큰 사건이 일어나면 싫어도 만나게 돼." 이윽고 커밋 호는 굉장한 분사를 남기고 마구 상승해갔다. 존은 커밋 호가 별의 바다 저쪽으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전송을 했다. 에즈라 사령은 위로하듯이 말했다. "캡틴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캡틴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캡틴도 말했듯이 이제 곧 만나게 되요." "그건 알고 있지만." 존도 역시 우주 개발 경쟁이 심해지는 지금, 캡틴을 필요로 하는 큰 사건이 계속 잇달아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건에 자기도 가담하게 되면, 또 캡틴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캡틴과 퓨쳐맨은 저 북극의 거대한 신호가 부르면 반드시 출동할 것이다. 힘있고 믿음직하게 태양계의 사람들을 위해서 출동하는 것이다. 그 때는……     우주괴인 자이로 박사 SF 세계명작 49   인 쇄      1977년 12월 10일 발 행      1977년 12월 15일 역 자      박홍근 조 판      이우 인쇄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이우 인쇄사 제 본      서문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화 (26) 1975, (25) 7981    
5    타임 머신 - H. G. 웰즈 H. G. Wells 지음 댓글:  조회:39  추천:0  2021-03-20
타임 머신 THE TIME MACHINE   H. G. 웰즈 H. G. Wells 지음     H. G. 웰즈 1866년 영국 태생, 베르느와 더불어 세계 SF계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투명 인간", "우주 전쟁 ", "달세계 최초의 사람"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 공학박사 최 인학 문학박사 양 옥룡/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책 머 리   여러분은 몇 년 전인 과거의 세계로 되돌아가서 어렸을 때의 자기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몇 천 년 혹은 몇 만년 후의 미래의 세계로 앞질러 가서 그 변화된 세계를 구경하기도 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미래거나 과거거나 가보고 싶은 시대로 시간을 초월해서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기한 일이 될까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온 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타임 머신을 발명하여 80만 년 후의 세계에 가본 시간 여행가가 거기에서 겪은 일을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 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SF 소설이라기보다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이야기라고 절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도 이 타임 머신을 타고 미래의 세계로 시간 여행을 출발해 봅시다.     타임 머신 믿겨지지 않는 일················· 5 다리를 저는 시간 여행가············· 23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34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 43 사라져 버린 타임 머신·············· 62 살며시 다가오는 몰록·············· 96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서············· 107 성냥과 장뇌·················· 119 타오르는 불·················· 132 열린 스핑크스의 받침대············· 144 괴물 게의 해변················· 151 위너가 준 하얀 꽃··············· 162 끝맺음···················· 170   베디안 심야의 사고·················· 174 미소녀···················· 181 우주인···················· 188   작품 해설··················· 198   등장 인물   시간 여행가 :타임 머신을 발명해 80만년 후의 세계를 여행한다. 그 곳은 놀랍게도 인간이 퇴화되어 있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여행을 떠난 것을 몹시 후회한다. 그 곳에서 위너라는 아가씨를 만나 현대로 데려 오려고 하였으나...... 그 후 또 시간 여행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위너 : 강에서 수영하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었을 때 시간 여행가에게 구조 받게 된다. 그 후 시간 여행가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 무슨 일이건 지속성 없는 미래인이면서도 끊임없이 시간 여행가에게 관심을 표시한다.     믿겨지지 않는 일   시간 여행가(우리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우리들에게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언제나 창백하기만 하던 그 얼굴에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난롯불은 벌겋게 달아 있었고 은으로 만든 백합꽃 모양의 촛대에서는 밝은 불빛이 유리 술잔의 거품을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의자는 그가 고안해서 만든 것으로, 그냥 앉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앉은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방안은 식사를 마친 뒤의 태평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거북한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안온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시간 여행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긴요한 점을 가리키면서 얘기를 꺼냈다. 우리들은 의자에 편히 앉은 채, 이 새로운 역설(우리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을 힘들여 말하고 있는 그 진지한 태도와 풍부한 지식에 감탄하고 있었다. "잘 들어주게. 이제부터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두세 가지 관념을 부정해 보일 테니 말일세. 예를 들면 기하학(도형의 성질 및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라는 것, 즉 자네들이 학교에서 배운 기하라는 건 틀린 생각 위에 이루어진 것이란 말일세.“ "이건 굉장히 큰 문제부터 시작하는군. 하고 따지기 잘 하는 붉은 머리털의 필비가 말했다. "어떤 일이든 나는 확실한 비유를 들지 않고 자네들에게 인정을 바라지는 않네. 내가 자네들에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일은 자네들도 이제 곧 이해하게 될 테니까. 자네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수학상의 선, 즉 다시 말하면 굵기가 없는 선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걸세. 자네들도 그렇게 배웠겠지? 이와 함께 수학적 평면이란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단지 추상으로 파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지.“ 심리학자가가 대꾸했다. "그리고 가로, 세로, 높이 밖에 없는 육면체란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그 말에는 반대하겠네." 하고 필비가 입을 열었다. "육면체는 존재할 수 있어. 그리고 실제로 있는 모든 물체는........" "대개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잠깐 기다리게. 순간적인 육면체란 것이 존재할 수 있겠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걸." 하고 필비는 말했다. "얼마의 시간 동안 존속하지 않는 육면체란 것이 실재로 존재하는가 말이네." 필비는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 여행가가 말을 이었다. "실존(현실전인 존재․실재)하는 물체는 모두 네 방향으로 넓이를 가지고 있네. 가로, 세로, 높이, 그리고 지속 시간이지. 그런데도 우리들의 육체의 본질적인 관점에서, 거기 관해선 이제 설명을 하겠지만, 우리들은 이 사실을 항상 잊고 있는 걸세. 사실은 네 개의 차원이 있는데 그 중 셋은 흔히 우리들이 공간의 세 평면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간이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세 차원과 시간의 차원 사이에 우리들은 자칫하면 있지도 않은 구별을 하려고 하지. 우리들의 의식은 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에 따라 한 방향으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야.“ 그건......?“ 젊은 친구가 램프 불에다 꺼진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그건......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넘기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 시간 여행가는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실은 이것이 제 4차원의 본래의 의미라는 거야. 세상에는 제 4차원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어. 4차원이란 시간을 다만 다른 각도에서 본 데 지나지 않지만 말일세. 시간과 공간의 세 차원과의 사이에는 우리들의 의식이 시간을 따라 옮겨간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일세. 그런데도 바보 같은 사람들은 이 관념에 대한 그릇된 생각 밖에는 알지를 못한단 말야. 그들이 이 제 4차원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듣지 못했어.“ 하고 이 지방의 시장이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네. 수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듯 이 공간은 세 가지 차원, 즉 가로, 세로, 높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가지고, 서로 직각으로 이어지는 세 평면에 의해 항상 한정되어 진다는 거야. 그런데 철학자들 중에는 왜 하필 세 평면만 생각하는가, 왜 이 세 직각과 관계 있는 또 하나의 방향을 생각해선 안 되는가 하고 반문해 온 사람이 있었네. 그리고 그들은 4차원 기하학이라는 걸 정립하려고까지 했었네. 뉴컴 교수(1835~1909. 미국의 천체 역학자)가 바로 한 달쯤 전에 뉴욕 수학 협회에서 여기에 대해서 연설을 했었네. 자네들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들은 두 차원 밖에 갖지 않은 평면 위에 삼 차원의 물체의 형태를 나타낼 수가 있네. 마찬가지로 3차원의 물체로서 4차원의 물체를 나타낼 수도 있다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원근법(멀고 가까움을 그림에 표현하는 방법)을 잘 이해 할 수 있다면 말이네, 알겠나?“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시장이 중얼거리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깊이 생각하는 듯, 마치 주문이라도 외는 것 같이 중얼중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흠, 알았네.“ 잠시 후 그는 그렇게 말하고 금방 변한 사람처럼 밝은 얼굴이 되었다. "알았으면 된 걸세. 사실 말이지, 나는 요새 한 동안 이 4차원 기하학에 대해 연구를 해 왔다네. 연구 결과에는 꽤 기묘한 것도 있어. 이를테면 여기 어떤 사나이의 여덟 살 때의 사진이 있다고 하세. 또 한 장은 15세 때의 것이고, 17세, 23세, 이렇게 여러 나이 때의 사진이 있네. 이 사진들은 모두가 말하자면 단면이고, 그 사나이의 한결 같이 변하지 않은 4차원적 존재를 3차원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네. 과학자는..." 시간 여행가는 지금 자기가 말한 것을 여러 사람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시간은 공간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있네. 여기에 통속적인 수학 도표가 있지. 기상도라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선은 기압계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걸세. 어제는 꽤 높았지만 밤이 되자 내려가고, 그러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올라 그 뒤로 서서히 여기까지 올라와 있네. 물론 수은은 일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공간의 어느 차원에서도 이런 선을 긋지는 않았어. 하지만 착실히 수은은 이런 선을 따라간 거야.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선이 시간의 차원에 따라 옮아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네.“ "그렇군.“ 의사가 난롯불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말했다. "정말 시간이 공간의 네 번째 차원에 불과한 것이라면 어째서 다른 것으로 여기게 됐으며 또 그렇게 생각해 왔을까? 게다가 우리들은 공간의 세 차원 중에서는 돌아다닐 수가 있는데 어째서 시간 속에서는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인가?" 이 말에 시간 여행가는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 "우리들이 자유로이 공간을 돌아다닌다는 건 확실한 것인가? 우리는 좌우로 혹은 앞뒤로 맘대로 갈 수가 있네.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해 왔지. 우리들이 두 차원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하세. 그러나 위아래로는 어떤가. 인력이 우리를 제한하고 있네." "그렇다고만 할 건 아니지.“ 하고 의사가 대꾸했다. "기구가 있어.“ "하지만, 기구가 발명되기까지는 인간은 순간적으로 뜀질을 하여 오르거나 뛰어내리는 일 밖엔 자유로이 상하로 운동을 하지 못했네." "아니야. 조금씩은 아래위로도 운동할 수 있었어." 의사가 말했다. "위로 오르기보다는 내리는 편이 쉽지. 훨씬 쉬워." "그렇지만 시간 속에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들은 현재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단 말이네." "여보게, 바로 그것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네. 그리고 온 지상 사람들이 잘못 생각해 온 점이지. 우리들은 항상 현재의 순간으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단 말이야. 우리와 정신은 물질적인 게 아니라서 차원도 갖지 않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정한 속도로 시간 차원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걸세, 만일 우리들의 생존이 지상 100킬로미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려가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시간 속을 내려가고 있는 걸세.“ "그런데, 곤란한 일은........" 하고 심리학자가 입을 열었다. "........공간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이게 되지만, 시간 속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단 말이야.“ "나의 대발명도 실은 거기서 생겨난 걸세. 그러나 시간 속을 맘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네. 가령 내가 사진을 특별히 생생하게 생각해 냈다고 하면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네. 말하자면 방심 상태가 되어 일순간 그 때로 되돌아가는 거야. 물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 곳에 멈추어 있을 수는 없지. 마치 야만인이나 동물이 땅 위에서 2미터 이상 위에 멈추어 있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문명인은 그 점에 있어 야만인보다는 훨씬 우수하네. 기구를 타고 인력을 이겨내고 올라갈 수가 있으니까 말이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시간 차원에 따라 정지를 하거나 속도를 빨리 하거나 되돌아오거나 반대 방향으로 여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야 아무리 해 봤댔자......" 하고 필비가 대꾸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하고 시간 여행가는 질문을 했다.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무슨 이치?“ 시간 여행가가 다그쳐 물었다. "말로는 검은 것을 흰 거라고 우길 수도 있지만, 나를 납득시키지는 못하네.“ 하고 필비가 대답했다. "그래도 머지 않아 자네는 내가 4차원의 기하학을 연구한 목적을 알게 될 걸세. 오래 전부터 나는 기계에 대해서 대단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 "시간 여행을 하는 기계 말입니까?" 하고 청년이 물었다. "운전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공간과 시간을 날아 어느 쪽으로라도 자유로이 여행을 하는 기계라네." 필비는 서슴지 않고 큰 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시간 여행가가 말했다. "나는 그걸 실험을 통해서 증명했어.“ "그건 역사가에게 아주 편리한 것이 되겠는데." 하고 심리학자가 말을 이었다. "과거로 여행을 해서, 이를테면 헤이스팅스의 전쟁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해롤드 2세의 앵글로색슨 군을 쳐부순 전쟁)의 기록이 정확한가 어떤가 확인을 하고 올 수가 있을 테니 말이네." "자네가 그런델 갔다가는 눈총을 받거나 푸대접을 받을 것이 뻔해.“ 하고 의사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들의 조상들은 엉뚱한 곳에서 온 사람에 대해서 그다지 관대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네.“ "호머와 플라톤의 입으로부터 직접 그리스말을 배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고 청년이 말했다. "그런 짓을 하다가는 자네는 학위 예비 시험에 낙제하기 알맞을 거네. 독일의 학자들이 그리스말을 개량해 버렸으니 말이지.“ "그리고 또 미래로도 갈 수 있지요.“ 청년이 또 말했다. "이런 건 어때? 돈을 몽땅 예금해 놓고 이자가 붙는 대로 두었다가 자기는 미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 말입니다.“ "거기가 만일 공산주의 사회라면 어떻게 되지?" 하고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로군.“ 하고 심리학자가 말했다. “그럴 걸세,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태까지 잠자코 있었던 거야!“ "실험을 통해서 증명을 했다고 했지? 자네는 그걸 증명해 보이겠다는 건가?" 하고 내가 소리쳤다. "실험이라고?“ 벌써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한 필비가 큰 소리로 물었다. "하여간 자네의 실험을 보여 주게. 결과는 뻔한 것이겠지만.“ 심리학자가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시간 여행가는 싱긋이 웃으며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가느다란 웃음을 띄우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방을 나갔다. 연구실로 통하는 긴 복도를 타닥타닥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뭘 만들었다는 걸까?" 심리학자가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괴상한 요술 같은 것이겠지.“ 의사가 대답했다. 필비는 노천 극장에서 구경한 요술쟁이의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아직 앞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시간 여행가가 돌아왔다. 그래서 필비의 모처럼의 얘기는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시간 여행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탁상시계 정도의 크기로 된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 세공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상아와 무언지 투명한 결정체(안정하여 일정한 형태를 이룬 물체)가 사용된 것이었다. 이제 여기서 미리 양해를 얻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이제부터 일어난 일은, 만일 그의 설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혀 설명할 길이 없는 일들이다. 그는 방 안 여기 저기에 놓여 있는 8각형의 작은 테이블 하나를 가져다가 난로 앞에 두 다리를 얻을 수 있도록 놓았다. 그리고는 그 테이블 위에 지금 말한 기계를 놓고 의자를 다가앉았다. 이 기계 외에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은 갓이 있는 소형 램프 뿐으로, 그 밝은 불빛이 이 모형을 환히 비춰 주고 있었다. 방에는 열 두 자루 가량의 양초가 있어서 두 개는 난로 위의 선반 위에 있는 놋쇠 촛대에 켜 있고, 몇 자루는 벽에 붙은 촛대에서 타고 있어서 방안은 환하게 밝았다. 나는 난로에 제일 가까운 안락 의자에 앉아서 그 의자를 시간 여행가와 난로 사이로 끌어갔다. 필비는 시간 여행가 뒤쪽에 앉아 그의 어깨너머로 넘겨다보고 있었다. 의사와 시장은 오른쪽에서 시간 여행가의 옆얼굴을 지켜보고, 심리학자는 왼쪽에서 보고 있었다. 청년은 심리학자 뒤에 서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주의해서 지켜보았다. 이런 데서라면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감쪽같이 한다고 해도 속임수를 쓸 순 없을 것 같았다. 시간 여행가는 우리들을 한 번 휘돌아 본 뒤에 다시 그 기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어떻게 하는 건가?" 하고 심리학자가 물었다. "이 작은 기계는......?" 시간 여행가는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기계 위에서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단지 모형에 지나지 않네. 기계에게 시간 속을 여행하게 하려는 것이 나의 계획이라네. 자네들도 눈치 챘겠지만 이 기계는 이상스럽게 비뚤어져 있고, 이 가로지른 막대 근처가 묘하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닌 것 같을 걸세."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 조그만 흰색 레버 (지렛대)가 있고 이쪽에도 하나 있네.“ 의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곱게 된 거로군." 하고 그는 말했다. "만드는데 2년이 걸렸다네." 시간 여행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모두들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자, 이제 자네들에게도 잘 알아 달라고 하는 거지만, 이 레버를 누르면 기계는 미래를 향해 날아가고, 이쪽 레버를 누르면 반대로 운동을 하네. 이 걸상은 시간 여행자가 앉는 자리야. 이제 내가 이 레버를 누르면 기계는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될 걸세. 미래 세계로 날아가서 사라져 버릴 걸세. 잘 보아주게. 테이블을 잘 보고 있어서 속임수 같은 게 아님을 잘 보아달란 말이네. 이 모형을 없애 버리고도 사기꾼으로 불리는 일이 있어선 난 못 견디게 되니까 말야.“ 한 1분쯤 시간이 흘렀다. 심리학자는 내게 말을 하려는 듯하더니 그만 두는 것 같았다. 시간 여행가가 레버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니야.“ 그는 별안간 말했다. "자네가 해 주게.“ 시간 여행가는 심리학자를 돌아보며 그의 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내밀라고 했다. 이리하여 타임 머신의 모형을 끝없는 여행의 길에 띄워 보낸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심리학자, 그 사람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레버가 도는 걸 보았다. 진정 속임수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휘익 바람이 일더니, 램프 불이 흔들거렸다. 난로 위 선반에 있는 촛불 하나가 꺼졌다. 작은 기계는 갑자기 돌기 시작하더니 희미해져서 1초 동안쯤 유령이나, 희미하게 빛나는 놋쇠와 상아의 소용돌이처럼 보이다가 휙 사라져 버렸다. 테이블 위에는 램프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한 1분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필비가 말했다. "정말 놀랬다!“ 심리학자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제 정신이 나자, 재빨리 테이블 밑을 들여다봤다. 그걸 보고 시간 여행가는 통쾌하게 웃었다. "그래 어떤가?“ 하고 그는 조금 전의 심리학자의 말투를 흉내내어 물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선반 위에 있는 담배 갑에서 파이프에 담배를 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제 정신으로 그 기계가 시간 여행을 떠났다고 믿고 있나?“ 의사가 말했다. "물론!“ 시간 여행가는 한 마디로 대답하고 허리를 굽혀 난롯불을 불쏘시개에 옮겨 붙였다. 그리고는 뒤돌아 서서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심리학자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심리학자는 침착한 것처럼 보이려고 담배를 집어들었으나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이려 했다. "그리고 저기엔 거의 다 완성이 된 진짜 기계가 있다네.“ 하며 시간 여행가는 연구실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완성이 되면 내가 직접 시간 여행을 떠날 작정이네. 자네는 아까 그 기계가 정말 미래를 향해 갔다고 생각하나?“ 하고 필비가 말했다. "그것이 미래인지 과거인지 확실한 것은 잘 모르지만.“ 잠시 후 심리학자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어디로 갔다면 과거로 간 게 틀림없을 거야." "어째서?“ 하고 시간 여행가가 물었다. "가령, 그것은 공간을 움직여 가지는 않는다고 하고, 만일 미래로 갔다고 한다면 아직 여기에야 할 것일세. 지금의 시간을 지나갈 것이니까." "그렇지만 만일 과거로 갔다고 하면 우리들이 그 방에 들어왔을 때에도 보였을 게 아닌가? 지난 목요일 날, 여기 왔을 때에는 물론이고 전전 주의 목요일에도, 그 전의 목요일에도!“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참 어려운 문제로군." 시장이 막연하게 말하며 시간 여행가를 바라보았다. 시간 여행가는, "조금도 어려울 건 없어.“하며 심리학자를 향해 말했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자네라면 설명이 되겠지. 그 기계는 식역 (어떤 의식 작용의 발생과 소실과의 경계) 아래의 표상이지. 알겠나? 희박하게 해서 나타낸 표상이란 말일세." "물론 그렇지.“ 하고 심리학자는 말하고 나서 우리들에게 대해서 보증이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심리학에서는 쉬운 문제야. 깜박 잊고 있었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로써 그저 역설(언뜻 보면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속에 일종의 진리를 품은 말)도 훌륭히 설명이 되네. 우리는 그 기계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거야. 돌아가고 있는 차바퀴의 바큇살이나 공중을 날아가는 탄환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만일 그 것이 우리보다 50배나 100라 해도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하면, 또 만일 우리가 1초 나아갈 동안에 1분이나 나아간다고 하면, 그 기계의 인상은 멈춰 있을 때의 인상의 50분의 1이나 100분의 1이 될 걸세. 지극히 명료한 일 아닌가!“ 그는 기계가 놓여 있던 공간에서 손을 저어 보이고는, "어때, 알겠는가?“ 하며 웃음을 지었다. 우리들은 자리에 앉은 데로 1분쯤 빈 테이블 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 여행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우리들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엔 꽤 당연한 것 같이 들리지만........" 하고 의사가 말했다. "내일까지 기다려 주게. 아침이 되어 올바른 생각이 되살아날 때까지 말이네.“ "진짜 타임 머신을 구경하겠나'?" 시간 여행가가 우리들을 보고 물었다. 그리고는 램프를 들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긴 복도를 지나 연구실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갔다. 나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흔들리는 램프 불빛에 그의 기묘하게 큰 머리의 그림자가 펄럭이고 있었던 것을. 우리들은 모두 여우에게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연구실에는 아까 우리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조그만 기계를 아주 커다랗게 확대해 놓은 것 같은 기계가 놓아져 있었다. 니켈과 상아의 부분품이 붙어 있고, 결정의 덩어리를 줄로 갈고 자르고 한 부분품도 있었다. 기계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지만 비틀어진 결정의 막대기가 몇 개 아직 덜 되어 몇 장의 도면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좀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 중의 한 개를 집어들었다. 석영인 듯 했다. "이보게 자네......?" 의사를 불렀다. "자네는 지금 제 정신인가? 아니면 이건도 트릭(속임수)인가?......하긴 크리스마스 때 자네가 보여 준 그 유령처럼 말이네.“ "이 기계를 타고........" 하며 시간 여행가는 램프 불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나는 시간을 여행할 작정이야. 알겠나? 세상에 나서 난 아직 이렇게까지 진심이 되 본 일은 없었네.“ 우리들은 누구나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의사의 어깨 너머로 필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한쪽 눈을 찔끔해 보였다.   다리를 저는 시간 여행가   그 때, 우리들은 누구나 타임 머신을 엉터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왜냐 하면 시간 여행가는 너무나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신용하기 어려운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진실한 것을 알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굽히거나 가리지도 않는 솔직함 뒤에는 무언지 우리들에게는 엉뚱한 계획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일 필비가 그 모험을 가리켜, 시간 여행가가 말한 대로의 말로 실행했다고 가정하면 우리들도 그렇게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비라면 곧 그는 동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 여행가에게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아무래도 쉽게 신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한 일이라면 당연하게 생각될 것 같은 일도 그가 하면 속임수 같이 보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너무 쉽게 해 내는 것은 사실 좀 생각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중에 창피를 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애들 방에 얇은 도자기를 놓아두는 것처럼 불안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다음 목요일까지 시간 여행에 대한 일은 되도록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으로는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면서도......시간 여행이란 사실 그럴 성싶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 혹시 가능하다면 대단한 혼란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 자신은 그 모형이 속임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금요일에 동식물 학회에서 의사와 만나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는 츄우반겐(독일의 지명)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본 일이 있다고 하며 촛불이 꺼진 점에 특히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속임수의 방법에 대해서는 그로서도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 금요일, 우리는 다시 리치먼드로 갔다. 나는 시간 여행가를 제일 잘 찾아가는 손님중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찾아 간 시간이 늦었으므로 벌써 4,5명의 손님이 객실에 모여 있었다. 의사가 한 손에 종이 조각을, 다른 한 손에 시계를 쥐고 난로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시간 여행가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벌써 일곱 시 반이야.“ 의사가 말했다. "저녁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 갔어?“ 하고 나는 물었다. "이제 왔군. 좀 이상한 일인 있네. 그 친군 부득이한 일이 있어 좀 늦는 모양이야. 이 종이 쪽지에 일곱 시까지 오지 않거든 저녁 식사를 시작하라고 적어놨네. 늦은 까닭은 와서 얘기하겠다는 거야.“ "음식 맛이 없어지겠는데.“ 하고 신문사의 편집장이 말했다. 이리해서 의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요전번 식사 때 와 있던 사람으로는 의사와 나 밖에는 심리학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 말에는 지금 말한 편집장 브랑크와 신문 기자와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내가 모르는 수염을 기른 조용한 내성적인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는 그날 밤 한 입도 열지 않았다. 시간 여행가가 자리에 없는데 대해서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다. 나는 농담 삼아 시간 여행을 떠난 게 아닌가 하고 말했다. 편집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 달라고 했다. 심리학자가 자진해서, 전 주일 여기서 본 일들을 서투른 말솜씨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쯤 얘기가 진행됐을 때 도어를 밖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나는 도어를 향해 앉아 있어서 맨 먼저 그걸 알았다. "여, 이제 왔군.“하고 내가 소리쳤다. 도어가 더 열리더니 시간 여행가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놀란 소리를 쳤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의사도 알아보고 소리쳤다.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도어 쪽을 돌아다보았다. 시간 여행가는 아주 형편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웃옷은 먼지와 흙투성이가 되 있었고 소매는 초록색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그 전보다 더 흰머리가 많아 보였다. 먼지와 흙이 묻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흰머리가 많아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빛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턱에는 갈색의 상처가 있었다. 게다가 얼굴은 심한 고통을 받고 온 사람처럼 홀쭉하게 야위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잠깐 도어에서 등불이 눈에 부신 듯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다리를 다친 부랑자처럼 절뚝거렸다. 우리들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며 먼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괴로운 듯 테이블 쪽으로 가서 포도주 잔에 손을 내밀었다. 편집장이 샴페인을 따라 그에게 밀어 주었다. 그 술을 마시자 얼마간 기운이 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얼 하고 왔는가?" 하고 의사가 물었다. 시간 여행가는 그 소리를 못들은 듯, “자, 식사를 계속하게." 그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하고, "이젠 괜찮아.“하고는 더 달라는 듯이 잔을 내밀었다. 편집장이 또 따랐다. 그는 이번에도 단번에 죽 들이켰다. "맛 좋다.“ 그의 눈은 맑아지고 볼에도 희미하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들의 얼굴을 죽 둘러보고 만족한 듯이 가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하고 아늑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할 말을 하나하나 찾는 듯이 느릿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네. 그리고 나서 얘기를 하지. 그 닭고기를 조금 남겨 놔주게. 고기에 굶주렸어.“ 그는 오래간만에 찾아 온 편집장 쪽을 보고, "잘 있었는가?“ 하고 인사를 했다. 편집장이 곧바로 질문을 시작하려 했다. "이제 곧 얘기할 거야.“하고 시간 여행가는, "아직 좀 이상해. 하지만 곧 좋아질 거야." 하고 말하고는 술잔을 놓고 이층으로 통하는 도어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그가 다리를 절고 있는 데도 그의 발이 타박타박 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는 그의 발을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다 낡아빠진 양말 밖에는 아무 것도 신고 있지 않았다. 도어가 그의 뒤에서 닫혔다. 나는 그를 뒤따라 가보려고 했으나 그가 지나친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성미인 것을 생각했다. 나는 1분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유명한 과학자의 별난 행동'이라고 지껄이는 편집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항상 버릇으로 신문 기사의 제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불빛 밝은 저녁 식사의 테이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체 어떤 일을 하고 온 걸까요?" 하고 신문 기자는 물었다. "풋내기 거지 흉내라도 내고 왔다는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나는 심리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나는 아픈 듯이 다리를 절며 2층으로 올라가는 시간 여행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 밖에는 아무도 그가 절뚝거리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놀라움에서 맨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의사였다. 그는 초인종을 눌러 - 시간 여행가는 식사 때 하인이 옆에 있는 걸 싫어했었다 - 따뜻한 요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제야 편집장은 중얼중얼하며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말없는 사나이도 같이 따라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식사가 다시 시작됐다. 잠시 동안은 모든 사람의 얘기가 시간 여행가에 대한 것으로만 오갔다. 편집장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우리들의 친구는 수입이 적다해서 거지 노릇을 하여 생활에 보태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네부카드넷 쟈르왕(기원전 605(?)~562(?). 바빌론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태인을 포로로 했음) 같은 데가 있다는 건가?“ 하고 말했다. "이건 타임 머신과 관계가 있는 것 같군.“ 내가 이렇게 말하고 며칠 전 모임에서 심리학자가 한 말을 얘기했다. 새로 온 손님들은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편집장은 희롱조로 말했다. "시간 여행이란 뭔가? 아무리 역사 속을 굴러 다녔다 해도 흙먼지 투성이가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는 이런 익살이 맘에 든 듯, "미래 세계에는 양복 솔도 없는가 보군."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신문 기자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고 편집장과 한 통속이 되어 무조건 농담으로 돌렸다. 그들은 둘 다 새로운 형의 저널리스트(언론인)로 아주 명랑하고 남을 깔보는 데가 있었다. "내일 모래, 본사 특파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문 기자가 지껄이기 시작했을 때 시간 여행가가 돌아왔다. 그 전처럼 야회복으로 갈아입고 피로해진 얼굴 이외에는 아까 나를 놀라게 한 모습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편집장이 농담조로 말했다. "이 친구들의 말이 자네는 내주 중까지 여행을 하고 왔다면서? 꼬마 노두즈버리 (1847~1929. 당시의 영국 수상)가 어떻게 하고 있던가 말해 주지 안겠나? 얼마를 내면 되겠나?“ 시간여행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위해 남겨 놓은 좌석에 앉았다. 그는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내 양고기는 어디 있나?" 하로 그는 감격한 듯이 말했다. "다시금 고기에 포크를 대게 되다니 참 다행한 일이야.“ "얘기는?" 편집장이 큰 소리로 물었다. "얘기 같은 건 그만 두어라." 하고 시간 여행가는 말했다. "우선 뭘 먹어서, 배가 부르기까지는 한 마디도 안 한다. 어, 고맙네. 소금도 좀." "한 마디만 해 주게. 자넨 시간 여행을 하고 왔는가?" 내가 물었다. "음" 시간 여행가는 입에 가득 요리를 넣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편집장이, "자네의 이야기 1행에 1실링씩 지불하겠네." 하고 농담을 했다. 시간 여행가는 빈 술잔을 말없는 사나이 쪽으로 내밀고 손톱으로 쳐서 달가닥 소리를 냈다. 말없는 사나이는 시간 여행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좌중은 흥이 깨져 버렸다. 나는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자꾸 목구멍에서 나오려는 걸 참고 있었는데, 그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시간 여행가는 먹는데 열중하여 한참 입으로 고기를 밀어 넣기에 바빴다. 의사는 담배를 피며 가는 눈으로 시간 여행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는 사나이는 아까 전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자꾸만 샴페인만 따라서는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드디어 시간 여행가는 빈 접시를 앞으로 내밀고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실례했네.“ 하고 그는 말했다.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네, 정말 지독한 꼴을 당했어.“ 그는 담배를 손에 들고 불을 붙였다. "우리, 휴게실로 가지 않겠나? 지저분한 그릇들을 앞에 놓고 앉아서 하기엔 너무나 얘기가 길어.“ 그리고는 나가는 길에 벨을 누르고, 일동을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벌써 프랑크와 대시와 초즈에게도 타임 머신에 대한 얘기를 해 줬는가?" 그는 안락 의자에 앉으면서 새로운 손님들의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얘기였겠지." 하고 편집장이 먼저 대답했다. "오늘밤은 토론은 질색이다. 자네들에게 얘기해 주는 건 좋지만 토론은 싫단 말일세." 하고 시간 여행가는 말을 계속했다. "자네들이 원한다면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겠네. 그렇지만 쓸데없는 말참견은 말아주게. 나는 굉장히 얘기하고 싶네. 이 얘기는 정녕 거짓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네. 하지만 이건 사실이야, 어디서 어디까지도. 나는 4시에 연구실에 있었네. 그리고 그로부터......8일이 지났어. 일찍이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8일간이었어. 나는 이젠 녹초가 됐다. 그렇지만 이 얘기를 자네들에게 다해버릴 때까지는 도저히 잠을 잘 수는 없어. 침대에는 얘기가 끝난 후에 가기로 하겠네. 얘기에 방해는 말아 주게. 알겠나?" "알겠네, 방해할 까닭이 없지." 하고 편집장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모아 달했다. "염려 말게.“ 여기서 시간 여행가는 앞으로 말하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의자에 기대앉아서 피곤한 사람 모양으로 말하고 있었으나 곧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얘기를 쓰면서 나는 그 멋지고 훌륭한 것을 나타내기에는 펜과 잉크의 힘이 모자람을, 더욱이 나 자신의 표현력이 모자람을 절실히 느꼈다. 여러분은 주의 깊게 읽어 주리라 믿지만, 조그만 램프 불빛 속에 떠오른, 창백한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그 목소리의 가락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얘기에 따라 변하는 그의 표정을 알 수도 없었다. 우리들 듣는 사람들은 대개 불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있었다. 휴게실에는 촛불이 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램프 불빛을 받고 있는 것은 신문 기자의 얼굴과 말없는 사나이의 무릎에서 아래쪽 다리뿐이었다. 우리들은 처음에는 때때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지만 조금 후부터는 시간 여행가의 얼굴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지난 주 목요일, 나는 자네들 몇 사람에게 타임 머신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연구실에 놓아둔, 아직 미완성의 실물을 보여 주었다. 그건 지금도 거기 있다네. 한 번 여행을 하고 왔기 때문에 조금 고장이 났지만, 상아 막대기가 하나 부러지고 놋쇠로 된 손잡이도 하나 구부러져 버렸네. 그밖에 다른 것은 괜찮네. 나는 그걸 금요일까지 완성할 계획이었지. 그런데 금요일이 되어 조립이 거의 끝나고 나서 보니, 니켈 막대기 하나가 꼭 3센티미터 짧은 걸 발견했지. 그래, 그걸 다시 고쳐 만들다보니 타임 머신이 완성된 것은 겨우 오늘 아침이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타임 머신이 작동을 시작한 것은 오늘 아침 열 시였다. 나는 최후의 점검을 하고, 다시 한 번 모든 나사못을 조사하고 각 부분에 조금씩 기름을 치고 나서 드디어 의자에 올라앉았다. 그 때의 나의 기분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 이제부터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의 기분과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한 손으로 발진 레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정지 레버를 잡았다. 먼저 발진 레버를 누르고 거의 동시에 정지 레버를 눌렀다. 머리가 어찔어찔한 것이 꼭 높은 데서 떨어져 내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구실은 그냥 그대로였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지금 그 느낌은 기분 탓이었을까? 나는 퍼뜩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건 열 시나 열 시 1분 조금 지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벌써 3시 반 가까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발진 레버를 다시 한 번 눌렀다. 연구실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져 왔다. 가정부 와젯이 들어와서 뜰 쪽으로 난 도어로 향해 걸어갔는데 나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방을 가로질러 가려면 1분쯤 걸릴 텐데 마치 로켓처럼 휙 날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레버를 최대한으로 눌렀다. 마치 램프 불을 불어 끈 것처럼 깜깜한 밤이 되었다. 앗! 하는 사이에 아침이 되었다. 연구실은 희미하게 안개가 낀 것 같이 보였고 그 때부터 점점 더 희미해져 버렸다. 이내 밤이 되어 사방이 어두워지고 그리고는 다시 낮이 되고, 또 밤이 되고 낮이 되고......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지. 내 귀에는 웅웅 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고 이상하게 답답한 혼란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시간 여행을 할 때의 그 기묘한 느낌을 도저히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몹시 역겨운 기분이었다. 제트 코스터를 타고 머리를 쳐 박힐 듯이 달릴 때의 느낌과 꼭 같았다. 나는 당장에라도 무엇과 충돌해서 산산조각이 되지나 않나 하는 불안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 밤과 낮이 바뀌어지는 것이 빨라졌다. 흐릿하게 보이던 연구실도 드디어 사라져 버리고 태양이 휘익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1분 동안마다 보였는데 그 1분 1분이 하루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연구실이 부서져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이미 무섭게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걸음이 느린 달팽이까지도 굉장한 속도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에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밝은 빛과 어둡고 깜깜한 빛이 잇달아 바뀌므로 눈이 몹시 아팠다. 그 토막토막 지나가는 어둠 속에 달이 빙글빙글 맴을 돌며 초생달에서 보름달로 변해 가는 것이 보이고 별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 아련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다시 속도가 더해짐에 따라 휙 휙 바뀌던 밤과 낮이 한데 뒤섞여 한 줄로 이어져 회색이 되었다. 하늘은 새벽 하늘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색으로 변했다. 태양은 하나의 띠가 되어 공간에 밝은 아치를 그리고, 달은 가늘게 흔들리는 것처럼 되었다. 별은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따금 푸른 하늘에 밝은 테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주위는 안개가 낀 것같이 희미할 뿐이었다. 나는 아직 이 집이 서 있는 언덕 중턱에 있으므로 언덕 꼭대기가 회색으로 부옇게 머리 위에 보였다. 나무들은 마치 김을 뿜어내듯이 자라서 갈색과 초록으로 번갈아 색깔이 바뀌어지며 계속 성장하여 가지를 뻗고 떨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큰 건물이 쑤욱 나타났다가는 꿈처럼 사라져가기도 했다. 지구의 표면이 온통 달라져 버린 것 같이 생각되었다. 내 눈앞에서 녹아 흘러가는 것이었다. 속도계 다이얼의 작은 바늘이 점점 더 도는 속도가 빨라져갔다. 이윽고 태양의 띠는 1분 정도로 하지에서 동지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 것은 타임 머신의 속도가 1분간에 1년 이상을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분마다 흰 눈이 땅을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금방 봄의 밝은 초록색으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출발한 때의 그 역겨운 기분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몹시 들뜬 것 같은 기분으로 변해져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계가 흔들리는 그 이상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리는 완전히 혼란해 있었으므로 그런 것쯤은 조금도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발광 상태로 미래를 향해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사고력이 없어졌는지 기계를 정지시킬까, 아니면 언제까지 계속 진행시킬까 하는 생각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리는 최초로 느끼게 된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종의 호기심과     공포감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기어코 이 두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되어 버렸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 눈앞을 달려가는 이 희미하고 붙잡을 길 없는 세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떨까? 인류는 어떤 정도로 훌륭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일까? 내 주위에는 크고 멋진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현재의 어느 건물보다도 훨씬 더 컸지만, 마치 희미한 빛과 안개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언덕은 풍부한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것은 겨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 머리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구는 대단히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기계를 정지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나와 기계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는 무슨 다른 물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내 몸은 말하자면 희박해져서 방해물 사이를 바람과 같이 지나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를 정지시키게 되면 사정은 달라져서 내 몸의 분자는 도중에 있는 방해물의 분자와 충돌하게 된다. 내 원자는 방해물의 원자와 충돌해 큰 화학반응, 아마도 굉장한 폭발을 일으켜 내 몸도 기계도 모든 차원으로부터 미래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다. 여기 대해서는 이 기계를 만들고 있을 때에도 여러 차례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걸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나이라면 마땅히 맞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위험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엔 그 위험이 내 앞에 닥쳐온 것이다. 그러니까 전에 생각한 것처럼 태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것이 전혀 첫 경험이었다. 더구나 기계는 기분 나쁜 흔들림을 하기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도 했다. 특히 언제까지나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나의 신경은 아주 이상해졌다. 나는 타임 머신을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홧김에 도리어 당장 정지시켜 보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급히 정지 레버를 와락 잡아 당겼다. 그러자, 기계는 심하게 돌기 시작하고 나는 휙 공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귀에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 동안 실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우박이 섞인 비가 한참 내 주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나둥그러져 있는 타임 머신을 앞에 두고 보드라운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아직도 회색으로 보였지만 그 듣기 싫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사방을 둘러 봤다. 그 곳은 철쭉꽃이 울타리처럼 무성한 정원 안의 조그마한 잔디밭 같았다. 연보라와 자줏빛 꽃이 우박을 맞아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우박은 되튕겨 오르기도 하고 춤추듯이 뛰기도 하면서 타임 머신 위에 쏟아져 땅 위에 연기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금새 흠뻑 젖어 있었다. "훌륭한 대접이로군.“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오랜 세월을 두고 너를 만나러 왔는데도.........." 이윽고 나는 바보처럼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거대한 석상이 철쭉꽃 주위의 소나기 빗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의 내 기분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네. 커튼 모양으로 내리고 있던 우박이 좀 엷어짐에 따라 흰 석상이 또렷이 보여졌다. 무척 큰 것으로, 옆에 있는 은빛 자작나무가 그 어깨 근처까지 밖에 닿지 않았다. 이 석상은 흰 대리석으로 되 있었고, 날개를 가진 스핑크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날개는 양쪽 겨드랑이에 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날아오르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석상 받침대는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고 두껍게 녹이 나 있었다. 그 석상의 얼굴은 나를 향하여 보이지 않는 눈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석상은 비바람에 많이 상해서 중한 병에라도 걸린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석상을 바라보았다. 석상은 우박 섞인 비가 세게 오다 가늘게 오다 하는데 따라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났다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드디어 나는 잠깐 석상에서 눈길을 돌렸다. 우박 비의 커튼이 엷어져서 하늘은 해가 나타날 듯이 밝아져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여행의 무모함을 깊이 느꼈다. 이 우박의 장막이 완전히 걷히고 나면 도대체 어떤 것이 나타날 것인가? 인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만일 아주 잔인하게 변해 버렸다면......? 만약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비인간적이고 난폭하고 게다가 무섭게 힘이 센 것으로 변해 버렸다면......? 아니 그들이 나를 볼 때 옛 세상의 야만적인 동물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무섭고 기분 나쁜 것으로 여겨져서 당장 죽이려고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박비가 그침에 따라 다른 큰 건물들의 뒤편 난간과 둥근 기둥이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숲에 뒤덮인 언덕의 비탈도 훤히 나타났다. 나는 더럭 겁이 나서 미친 사람처럼 타임 머신으로 달려가 무작정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이 때 햇볕이 비구름 사이로 비쳐 왔다. 회색 우박은 쫓겨나서 유령의 긴 옷자락처럼 사라져 갔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여름 하늘의 진한 푸르름 속에 엷은 갈색 구름 송이가 빙빙 돌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주위의 큰 건물은 아까 비에 젖어서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우박들이 쌓여 있는 곳은 한결 희게 보였다. 나는 미지의 세계에 알몸뚱이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솔개에게 붙잡힐지도 몰라 겁에 질린 채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작은 새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를 악물고는, 손과 발로 힘껏 타임 머신을 끝어 일으키려고 했다. 한사코 힘을 쓴 덕택에 타임 머신을 제대로 일으킬 수 있었으나 그 바람에 나는 턱을 기계에 긁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나는 한 손을 좌석에 걸치고 또 한 손으로는 레버를 잡고 헐떡거리며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 되고 나니 다시 용기가 났다. 나는 좀더 주의 깊게 대담히 이 머나먼 미래의 세계를 둘러보았다. 가까운 건물 위의 둥근 창으로부터 사치스런 엷은 옷을 입은 한 떼의 사람들이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는 듯 이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 때, 내게로 가까이 오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흰 스핑크스 옆 수풀을 헤치며 달려오는 사람의 머리와 어깨가 보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와 타임 머신이 놓여 있는 작은 잔디밭으로 바로 이어져 있는 오솔길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건 멀쩡하게 생긴 인간(아마 1미터 20센티미터 가량의 키였을 것이다.)으로 자줏빛 옷을 입고 팔목에 가죽띠를 하고 있었다. 발에는 샌들인지 가죽 구두(어떤 쪽인지 알 수 없었다.)를 신고 있었다. 다리를 무릎까지 내놓고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알았지만, 이 곳은 아주 따뜻한 기후였던 것이다. 그 사나이는 몹시 우아했지만 여간 약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어슴푸레하게 홍조를 띤 얼굴은 꼭 폐결핵 환자를 연상시켰다. 흔히 말하는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를 보고 나는 갑자기 자신이 생겼다. 나는 타임 머신에서 손을 떼었다.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   다음 순간 나는 이 미래 세계의 연약한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는 똑바로 이쪽으로 다가와서 내 눈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태도에는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 데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나는 뜻밖의 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라온 다른 두 사람을 돌아다보고 극히 달콤하고 부드럽고 묘한 말로 얘기를 걸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여 와서 어느덧 내 주위는 여덟 명인가 열 명인가 되는 날씬한 사람들로 조그만 무리를 이루었다.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갑자기 내 목소리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사납고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귀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서 조금 망설이다가 내 손을 만졌다. 다른 사람들도 보드랍고 작은 손으로 내 등과 어깨를 만지는 걸 깨달았다. 내가 실제로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경계해야 할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이 작고 귀여운 인간의 모습에는 나를 안심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고상한 부드러움과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함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너무도 연약해 보였기 때문에 한 열 명쯤이 떼를 지어 덤벼든다고 해도 볼링의 공을 던지듯 내던져 버릴 수 있을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이 조그만 연분홍색 손으로 타임 머신을 만지려 했을 때에는 황급히 안 된다는 몸짓을 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시기를 놓치지 않은 동안에 지금까지 잊고 있던 위험을 깨달았다. 그래서 타임 머신의 칸막이 기둥 너머로 팥을 내밀어 조그마한 발진 레버를 뽑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서 그들과 얘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좀더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인형 같은 귀여움 속에도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걸 알아내었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은 목과 턱에서 싹둑 잘려져 있었다. 얼굴에는 잔털 하나 나지 않았고 귀는 몹시도 작았다. 입도 작은 데 새빨갛고 얇은 입술을 하고 있었다. 조그만 턱은 끝이 뾰족했다. 눈은 크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건 나의 편리한 대로의 말일지는 모르지만, 마땅히 나에게 대해서 좀더 가져 주어도 좋을 관심을 조금도 가져 주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나와 얘기를 하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고, 다만 내 주위에 서서 미소를 짓거나 자기들끼리 비둘기 울음소리 같은 달콤한 소리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이쪽에서 먼저 얘기를 걸어 보기로 했다. 나는 우선 타임 머신과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어떻게 시간을 표시할까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해를 가리켰다. 그러자 곧 흰색에 자줏빛 무늬의 옷을 입은, 유달리 귀여운 조그만 사나이가 내 몸짓을 흉내내고, 더구나 놀라운 것은 뇌성 소리의 흉내까지 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몸짓의 뜻은 잘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상당히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녀석들은 혹시 바보가 아닐까 하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는 자네들에게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겠지? 알겠는가? 나는 전부터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80만 3천 년 전인가 그 후의 인간은 지식이나 예술이나, 그 밖의 모든 일에 우리들보다 훨씬 앞서 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그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내게 질문을 했는데 그건 다섯 살 짜리 어린애 정도의 지능도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즉 당신은 뇌운(우레 구름)을 타고 태양으로부터 왔는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실히 이 사람들은 바보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의복과 허약해 보이는 체격과 날씬한 얼굴 모습으로 어쩐지 그런 것 같다고 느끼고 있던 일이지만 나는 상당히 실망했다. 한동안은 내가 타임 머신을 만든 것도 헛일이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해를 가리키며 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진짜와 똑같은 우렛소리를 흉내내어 보였다. 그들은 한두 걸음 물러서서 절을 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내가 처음 보는 이상한 꽃으로 엮은 꽃 목걸이를 가지고 웃으면서 다가와서 그걸 내 목에 걸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귀여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조금 후, 그들은 여기저기 뛰어 돌아다니며 꽃을 꺾어 가지고는 웃으며 내게 던져서 드디어 나는 꽃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꽃들은 사실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을 두고 진화된 것이리라. 이윽고 그들 중 누가 나를 가까운 건물로 데리고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고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흰 대리석의 스핑크스 옆을 지나, 이미 무너져 가는 큰 석조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이 스핑크스는 아까부터 마냥 찬웃음을 지으며 나의 놀라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 미래의 인간이란 것은 굉장히 진실하고 지적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서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큰문이 있는 그 건물은 굉장히 큰 것이었다. 작은 이들의 무리는 점점 불어나고, 커다란 그 시꺼먼 출입문은 기분 나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나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땅은 아름다운 수풀과 꽃들이 뒤섞여 있는 황폐한 들로, 긴 세월을 두고 돌아보지 않았는 데도 잡초가 나지 않은 정원 같은 느낌이었다. 길다란 이삭 모양을 한 흰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게 보였으나 그 양초 같은 꽃잎의 지름은 30센티미터는 충분히 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아주 야생인 것같이 여러 관목의 수풀 사이에 피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나 그 때는 그리 자세히 조사해 보진 못했다. 타임 머신은 철쭉꽃으로 에워싸인 잔디밭에 내버려 둔 채로 였다. 입구의 아치에는 정교한 조각을 해 놓았다. 지나면서 흘깃 보니 고대 페니키아의 무늬 같이 느껴졌지만, 자세히 관찰한 건 아니다. 몹시 깎이고 풍화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결 선명한 빛깔의 옷을 입은 몇 사람이 입구에서 나를 맞아 주며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9세기 풍의 검은 옷을 입고 꽃 목걸이를 한 나의 모습은 아주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내 곁에는 밝고 고상한 빛깔의 옷들을 입고 하얗게 빛나는 손발을 가진 인간들의 소용돌이였다. 그들의 음악과 같은 소리로 웃고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큰문은 갈색 커튼이 쳐진 큰 홀로 통해 있었다. 천장은 어둠침침했고 창에는 곳곳에 색유리가 끼워 있었는데, 유리가 깨진 곳으로부터 부드러운 광선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마룻바닥은 무언지 굉장히 단단한 흰 금속의 커다란 덩어리 (나무가 아닌)로 되어 있는데 상당히 닳아 패여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밟고 다닌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특히 왕래가 잦은 곳은 깊은 홈이 푹 파여 있었다. 홀 안쪽을 향하여 직각으로 갈아서 만든 돌로 된 많은 테이블이 줄을 지어 있었다. 바닥에서 30센티 가량의 높이로 그 위에는 많은 과일이 차려져 있었다. 그 중의 몇은 엄청나게 크게 성장한 일종의 산딸기와 오렌지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일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는 많은 방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그 방석에 앉으며 내게도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들은 예의 같은 건 돌보지 않고 손으로 과일을 먹고 껍질과 속은 테이블 옆에 뚫어져 있는 둥그런 구멍에 내던졌다. 나도 즐거이 그들이 하는 대로 흉내를 냈다. 몹시 목이 말랐고 시장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나는 과일을 먹으면서 가끔 홀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건물의 완전히 황폐해진 모습이었다. 색유리에 무늬나 그림이 그려진 판유리를 끼인 창은 여기저기 부서져 있고, 홀 안쪽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내게서 가까운 대리석 테이블은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극도로 사치하고 아름다웠다. 넓은 홀 안에는 약 2, 3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대개 내 곁에 아주 가까이 앉아서 조그만 눈을 반짝이며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종류의 보드랍고 튼튼해 보이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 더 말해둔다면, 그들의 식사는 과일뿐이었다. 이 머나먼 미래의 인간들은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던 것이었다. 그들과 같이 있는 동안, 나는 약간은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일로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소나 말이나 양이나 개는 모두 먼 옛날의 공룡처럼 멸망하고 없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일들은 맛이 매우 좋았다. 특히 내가 거기 있을 동안, 한창 나오는 과일은 삼각형의 껍질 속에 들어 있는 과일이었는데 뛰어나게 맛이 좋아, 나는 그걸 주식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 한 동안 나는 이러한 처음 보는 과일과 꽃을 대할 때마다 이상하게만 여겨졌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시장하던 걸 잊게 되자,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익혀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이야말로 먹는 일 다음으로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말을 익히는 데는 과일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과일 하나를 집어들고 자꾸 무얼 묻는 것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몸짓을 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쪽이 생각을 전하는 일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아무리 애를 쓰며 손짓 발짓을 해도 상대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하거나 자꾸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한 금발의 사나이가 내 기분을 짐작했는지 무슨 이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오랫동안 서로 주고받고, 또 무언지 계속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그들의 미묘한 말을 흉내내어 보이자 신이 나서 좋아하며 재미있어 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배우는 기분으로 기를 써서 배웠다. 드디어 적어도 20개쯤의 물건 이름을 익힐 수가 있었다. '저것' '이것'이란 말들도 배웠으며 '먹는다'는 말까지도 알아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일이어서, 이 작은 인간들은 내가 묻는 일에 곧 싫증을 내어, 질문을 하려 들면 피해 가버리고 하므로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마음이 내킬 때마다 조금씩 배우기로 했다. 사실 나는 그들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배우기는 어렵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게으로고 싫증을 잘 내는 사람들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이 작은 이들에 대해 묘한 걸 깨달았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그 어떤 일에나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곧잘 어린애들처럼 소리치며 내 곁에 달려와서 내가 하는 것을 구경하려 하지만 곧 싫증을 내어 다른 장난감을 찾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식사와 회화의 첫 과정이 끝났을 때, 처음에 나를 에워싼 사람들은 내 곁에는 거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으나 이것 역시 묘한 일이지만, 나도 이 작은 이들의 일을 그다지 관심이 가지지 않게 되어갔다. 배가 부르게 되자 나는 입구의 문을 나와 밝은 햇볕 아래를 거닐었다. 걷는 중에도 새로운 작은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여러 차례 내 뒤를 따라와서 얘기를 하고 웃고 했다. 그리고 내게 정다운 태도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곧 나를 버려 두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큰 홀에서 나왔을 때는 밖은 벌써 조용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저녁 해의 따스한 볕이 근방 일대를 비쳐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물체가 모두 내 머리를 혼란케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나온 그 큰 건물은 강을 옆에 낀 넓은 골짜기의 비탈에 서 있었다. 이 강은 템즈 강 같았는데, 현재의 위치에서 1킬로미터쯤 이동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2킬로미터쯤 이어진 저편 등성이 꼭대기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거기서 라면 시기 80만 2천 7백 1년의 지구의 모습을 조금 넓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80만 2천 7백 1년이라는 것은 타임 머신의 작은 다이얼이 가리키고 있는 날짜인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주의 깊게 근처의 광경을 살펴보았다. 어찌하여 미래의 세계는 이렇게까지 황폐해 버렸는가를 설명해 줄 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한 것이었다. 이 곳은 정말 몹시 황폐해진 세계였다. 예를 들면, 언덕의 조금 올라간 곳에 화강암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서 그걸 알루미늄 덩어리로 이어 붙인 곳이 있어, 깎은 듯이 선 돌 벽이 커다란 미로와 같이 되어 있었다. 여기 저기에 무너진 곳이 있고, 그런 곳에는 아주 아름다운 탑 모양을 한 식물이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그 잎의 둘레는 갈색이었고, 가시는 전혀 나 있지를 않았다. 그 돌의 벽들은 정녕 큰 건물의 잔해에 틀림이 없었지만, 무엇에 쓰려고 지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뒷날 내가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장소였고, 그것은 다시 이상한 일로 연결되어 갔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잠시 쉬고 있던 높은 곳에서 나는 얼른 어떤 일이 생각나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느 곳에도 작은 집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채로 지은 집도, 어쩌면 가족이란 것도 다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푸른 나무들이 서 있는 사이로 여러 곳에 궁전과 같은 건물이 서 있는데도 주택이나 별장 같은 집은 전혀 볼 수 없었다. 19세기의 영국의 풍경으로는 그런 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었는데도.......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와 함께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내 뒤에 따라온 5,6명의 작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일을 깨달았다. 그들은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하나같이 상냥하며 수염 없는 얼굴로 여자 같은 통통한 손과 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걸 눈치 채지 못한 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여기서는 무엇이나 다 이상한 일 뿐이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겨우 확실한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주는 의복과, 체격과 태도는 미래의 인간들에게서는 다 같은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조금 작게 해 놓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래 세계의 사람들은 한가하고 아무 걱정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아무리 닮았다 해도 조금도 불편할 게 없으리라. 남자의 강함이나 여자의 상냥함이나 가족 제도나 직업의 다양성 같은 것은 육체적인 힘이 큰 역할을 하는 시대에서만 필요한 것이었다. 인구가 많아서 균형이 잡혀 있는 세계에서는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폭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전혀 없어지고 자손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가정이라는 것은 그다지 필요가 없으리라. 아니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기르기 위해 남성과 여성이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할 필요성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 말한 일들은 우리들 세계에서도 이미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미래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완성되어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러나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그 때 내가 생각한 일이고 뒤에 가서 사실과 얼마나 다른가를 깨닫게 되었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는 예쁘장한 작은 건물이 있는 걸 발견했다. 둥근 지붕이 있는 우물 같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문득, 아직도 우물 같은 게 있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 꼭대기까지에는 큰 건물이 없었다. 나의 다리 힘은 그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강했으므로 얼마 후 비로소 나 혼자 있게 되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기운이 나고 모험적인 기분이 되어 언덕 꼭대기를 향해 계속 해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노란 금속으로 된 걸상이 있었다. 그것들은 군데군데 상해서 빨갛게 녹이 나 있었고, 반쯤은 보드라운 이끼에 덮여 있었다. 나는 거기 걸터앉아서 지금 저녁 햇볕을 받으며 긴 하루를 끝내려 하고 있는 이 미래의 세계를 저 멀리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것은 일찍이 본 일이 없는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태양은 벌써 지평선 아래로 잠겨, 서쪽 하늘은 금빛으로 불타오르고, 거기 몇 줄의 보라색과 붉은 색의 선이 수평으로 뻗어 있었다. 눈 아래로는 템즈 강이 빛이 나는 강철의 띠처럼 길게 놓여 있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푸른 수풀 사이에는 큰 궁전 같은 건물이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어떤 것은 아주 황폐해져 있었지만 그 중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있었다. 거칠어진 정원 곳곳에 커다란 석상이 있었고, 이곳 저곳에 둥근 지붕과 뾰족탑 같은 것이 우뚝 서 있었다. 울타리도 없고 농토의 소유권을 알게 해 주는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 근방이 모두 정원이었던 것이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까지에 보아온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날 저녁에 내가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이건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사실을 반쯤이거나, 사실의 한 면 밖에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 나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맞부닥친 것이다. 붉은 저녁 해는 인류가 멸망해 가고 있는 시대에 와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해 주었다. 지금 우리들이 열성으로 해나가는 노력의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힘이란 것은 필요에서 생기는 것이며, 안정된 생활은 힘의 필요를 없게 만든다. 생활 상태를 좋게 하려는 노력은 인류의 생활을 훨씬 더 안정된 것으로 하려는 문명의 활동이 착착 진행되어 그 절정에 이른 것이다. 자연을 이기려고 투쟁한 인류는 차례차례 승리를 거두어 왔다. 현재에서는 하나의 꿈이라 생각되는 일이 확실한 계획으로 옮겨져서 드디어 달성된 것이다. 그 성과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들인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위생 시설과 농업은 아직 초보 단계인 것이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질병의 극히 적은 일부와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금씩 쉬지 않고 그 활동을 넓혀 가고 있다. 현대의 농업과 원예는 곳곳에서 어떤 종류의 잡초를 전멸시키고 20여 종류의 유용 식물을 길러내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식물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식물 자체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이다. 우리들은 우리 맘에 드는 식물과 동물은 극소수이지만 선택하여 기르는 방법으로 차차 개량해 가고 있다. 맛좋은 복숭아라든가, 씨 없는 포도라든가, 보다 아름답고 큰 꽃이라든가, 보다 더 쓸모 있는 소라든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은 목표가 분명하지 정해져 있지 않은 데다가 그 지식도 충분하지 못한 관계로 아주 손쉽게 해 내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연은 소심하고 서투른 인간이 하는 일에는 그리 쉽게 응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일도 훨씬 나아지고 훌륭하게 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때로는 길을 돌아가는 것 같은 결과가 된다손 치더라도 대체로 자연의 진행 과정인 것이다. 인류는 영리해져서 교양을 쌓고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정복이라는 방향으로 점점 급속하게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동물과 식물의 균형을 주의 깊게 잘 조정해서 우리들 인간의 필요에 적합하도록 해 놓을 것이다. 이 미래 세계에서는 이 조정이 완수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에. 공중에는 단 한 마리의 모기도 없게 되고, 땅 위에는 한 포기의 잡초나 버섯도 없어졌다. 어디로 가나 과일과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 차서 아름다운 나비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상적인 제초제나 살충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지. 질병도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나는 거기 있을 동안 한 번도 유행병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또 얘기하게 되리라 생각하지만 노화 현상이라는 것도 거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향상이라는 것도 훌륭히 성취되어 있었다. 인류는 훌륭한 건물 속에 살며 좋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분쟁은, 사회적 분쟁이나 경제적인 분쟁도, 완전히 없어졌다. 상점이나 광고나 교총이라는 것 따위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러했기에 그 아름다운 저녁놀의 하늘 밑에서 내가 여기가 바로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었다. 어려운 인구 증가의 문제도 해결됐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렇듯이, 경우가 달라지자, 그 변화에 대해서 적응성이라는 것이 생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생물학이 잘못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의 지혜와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은 곤궁한 생활에서 빠져 나오려는 투쟁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는 활동적이고 힘과 지혜가 있는 자는 살아 남을 것이고, 약한 자는 멸망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는 자들이 협력하여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가족 제도와 그로 인해 생기는 갖가지 일, 즉 치열한 투쟁과 자손에 대한 유전자 어버이들의 자기 희생의 정신 등은, 어린것들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할 것인가! 나는 이 미래 세계의 인간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지능의 낮음, 크고 많은 폐허 등을 보고 있는 동안에 이것은 자연이 완전히 정복된 결과라고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전쟁 다음에는 평화가 오는 것이다. 인류는 과거에는 강하고 영리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남김 없이 다 써서 자기들의 생활 환경의 개선을 꾀했다. 그리하여 지금 그 개선된 환경에 알맞은 것으로 인간이 변화된 것이다. 안전하게 마음이 편하고 안정된 환경에서는 지금 우리들의 힘으로 되어 있는 정력도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도 전에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어떤 종류의 성격이나 기질과 욕망은 자칫하면 실패의 원인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육체적인 용기라든가 투쟁심이라든가 하는 것은 문명인에게는 별로 소용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장애물로까지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적당하게 균형이 잡혀 안정이 된 사회에서는 힘이란 것은 지적인 것이거나 육체적인 것이거나 모두 필요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미래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전쟁과 폭력의 위험이라 무서운 짐승의 습격을 받을 걱정이 없어졌을 것이다. 또 강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소모성 질병도 없어지고, 애써 일하는 일도 없어진 것 같았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약한 자라고 하는 사람도 강한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한 자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강한 자보다 훨씬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한 자는 그 힘을 쓸 곳이 없는 정력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본 저 굉장히 아름다운 건물은 욕망과 정력을 가지고 있는 최후의 인간이 세워 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정력은 인류가 그들의 환경과 완전히 조화된 후로는 이미 필요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저 건물들은 인류에게 최후의 평화가 찾아왔을 때의 승리의 기념비인 것이다. 이것이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필요하게 되어버렸을 것이며, 그것은 우선 예술과 쾌락으로 쏟아지다가 드디어는 무기력과 퇴폐가 닥쳐오게 된 것이리라. 예술에의 의욕도 나중에는 없어져 버릴 것이다. 내가 본 미래 세계에서도 그것은 벌써 거의 없어져 버렸다. 자기 자신을 꽃으로 장식하는 일, 태양 광선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일, 이런 것 정도가 예술적인 마음의 흔적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것조차도 앞으로는 희박해져서 꽉 찬 상태의 무기력 속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괴로움이나 가난이라는 숫돌로서 끊임없이 갈아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고맙지 않은 숫돌 같은 건 이미 사라져 버린 것 같이 생각되었다. 차차 짙어오는 어두음 속에 서서 나는 이런 뒤늦게 얻은 해석으로 미래 세계의 문제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 날씬한 인간의 수수께끼도 모두 풀렸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미래 세계의 인간은,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는 일에 성공한 것이리라. 아니, 지나치게 성공한 것이리라, 그 때문에, 그들의 인구는 필요 이상으로 줄어져 버린 것이리라. 사람이 살기 않는 건물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극히 단순했지만 이치에 정확하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잘못된 이론이란 것이 대개 이런 것이긴 하지만.   사라져 버린 타임 머신   그 곳에 서서 인류의 완전한 승리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런 빛깔의 둥근 달이 은빛이 넘치고 있는 북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아래쪽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밝은 빛깔의 옷을 입은 작은 이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부엉이가 소리도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밤의 찬 기운에 몸을 떨었다. 나는 언덕을 내려가서 잠잘 곳을 찾기로 했다. 나는 낮에 따라갔던 건물을 찾으려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 허연 스핑크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달빛이 밝아옴에 따라 뚜렷해졌다. 그것과 맞서 있는 자작나무도 보였다. 철쭉꽃의 수풀이 희푸른 달빛 속에 검게 보이고 그 자그마한 잔디밭도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나는 억지로 나 자신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저건 아까 그 잔디밭이 아니야!“ 그리나 그건 아까 그 잔디밭이었다. 왜냐하면 허물어져 가는 스핑크스의 얼굴이 그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알았을 때, 나의 기분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겠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임 머신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 느닷없이 채찍으로 얼굴을 후려쳐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나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그 괴상한 미래세계에 혼자 남아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전신이 쓰리고 아픈 것 같았다. 꽈악 목을 졸리어 숨이 막혀버리는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공포에 떨며 정신없이 언덕을 뛰어갔다. 한 번 앞으로 고꾸라져서 얼굴을 찢겼다. 그러나 피 같은 걸 닦을 겨를도 없이 금방 일어나 또 달음박질을 해 내려갔다. 뜨뜻한 피가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나는 달리면서 계속 이렇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놈들은 조금 움직여 봤을 뿐일 거야. 거치적거리지 않게 풀숲 속에 넣어 두었을 뿐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따위의 일시적인 위안의 말이 얼마나 바보스런 것이라는 걸 깨닫고 타임 머신은 벌써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숨이 차서 괴로웠다. 언덕 꼭대기에서 작은 잔디밭까지는 3킬로미터는 충분히 되는데 나는 그걸 10분 정도 밖에 안 걸려 뛰어 내려 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미 젊지도 않은 이 내가 말일세. 나는 달리면서 타임 머신을 내버려두고 태만했던 나의 바보 같은 짓을 소리를 내어 욕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숨이 찼다. 큰 소리로 외쳤지만 대답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 세계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잔디밭에까지 와 보고, 내가 가장 두려워 한 일이 현실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타임 머신은 깨끗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검은 수풀에 둘러싸인 빈 잔디밭을 보고 있으려니까 내 몸뚱이는 싸늘해지면서 갑자기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 한 구석에 숨겨놓은 거나 아닐까 하고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다가 우뚝 멈춰 서서는 머리칼을 움켜쥐고 잡아뜯기도 했다. 내 머리 위쪽에는 청동 받침대에 앉은 스핑크스가 달빛을 받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나의 허둥대는 꼴을 보고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해 보려 했다. 어쩌면, 작은 이들은 나를 위해 타임 머신을 어떤 곳에 보관해 둔 것인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체력과 지능에서 볼 때 도저히 그런 일은 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염려한 것은, 그 작은 이들은 내가 전혀 짐작하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나의 발명품을 어느 곳에 운반하여 숨겨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안심해도 좋을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그것과 똑같은 기계를 발명한 사람이 없는 한, 타임 머신을 시간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발진 레버를 뽑아 놓은 이상, 나중에 그 구조를 설명하겠지만 그 누구도 그 기계를 시간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계는 공간적으로 움직여져 숨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다 숨겼단 말인가? 나는 아마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렸을 것이다. 스핑크스의 주위의 수풀 속을 마구 휘젓고 돌아다녔는데 그 때 무엇인지 작고 희끄무레한 것이 뛰어나온 것을 기억한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그건 작은 노루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나는 그날 밤늦도록 주먹을 휘두르며 수풀을 헤치며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손가락 끝에서 피가 나고 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괴로움을 못 이겨 울고 부르짖으며, 커다란 대리석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큰 건물 안은 어둠과 고요뿐, 사람의 자취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울퉁불퉁한 마룻바닥에 걸려, 공작석 테이블에 부딪혀 하마터면 정강이를 깰 뻔했다. 성냥을 그어 먼지투성이의 커튼을 젖히며 걸어갔다. 커튼 저편 쪽도 널따란 홀이었다. 그 곳에는 쿠션(푹신푹신한 방석)이 가득 깔려 있었고, 20명 가량의 작은 이들이 자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다시 찾아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투덜대며 성냥을 그어 들고 조용하기 만한 어둠 속으로부터 불쑥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성냥 같은 건 이미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타임 머신은 어디 있나?" 나는 화난 어린애 모양 소리치며 작은 이들을 잡아 흔들어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됐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대부분은 몹시 겁난 얼굴들을 했다. 내 주위에 모인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퍼뜩 생각이 났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공포심을 크게 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하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낮에 본 그들의 거동에서 생각해도 그들은 이미 내게서 두려움 같은 것은 갖지 않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곧 성냥을 내던지고 길목에 서 있던 한 작은 이 하나를 밀어 넘어뜨리면서, 넓은 식당을 마구 뛰어 달빛 속으로 뛰쳐나왔다. 작은 이들의 놀라 떠드는 소리와 작은 발로 왔다갔다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타임 머신이 없어지다니,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혼자 떨어져 나와,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한 마리의 별난 동물로 남아있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신과 운명을 저주하면서 미친 듯이 이곳 저곳을 헤매어 다녔을 것이다. 기나긴 절망의 밤이 깊어감에 따라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나는 타임 머신이 숨겨져 있을 만한 곳은 남기지 않고 들여다보고, 달빛을 받고 있는 폐허 속을 더듬으며 돌아다녔고, 어둠 속에서 무언지 모를 짐승 같은 것을 건드리기도 했다. 드디어 나는 스핑크스 곁에서 땅에 엎어져 뭐라고 표현할 수 얹는 처참한 기분으로 울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엄청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에는 아침이었다. 두세 마리의 참새가 잔디밭, 내 손이 닿을 만한 곳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상쾌하게 맑은 아침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도 불안하고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지, 애써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간신히 지금까지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간밤의 어리석고 발광적인 행동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에게 타일렀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나는 내 게 말했다. "설령 타임 머신이 정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일은 침착하게 참고 견디는 일이다. 저들의 거동을 살피고 어떤 방법으로 타임 머신을 감추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그리고 재료와 도구를 구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다시 또 한 대의 타임 머신을 만들어 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라도 해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절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그 곳은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계였다. 그러다가 문득 단지 타임 머신은 어딘 가로 옮겨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침착하고 끈기 있게 참으면서 그 숨겨 둔 장소를 알아내어 완력으로써, 아니면 어떻게 속여서라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어디 몸을 씻을 곳이 없나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피로하여 몸이 굳어지고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주 쾌청한 아침이어서 나도 상쾌한 기분이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미 미쳐 날뛰며 돌아다닐 기운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다시 타임 머신을 찾기 시작했지만 어젯밤엔 어째서 그렇게까지 사납게 날뛰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작은 잔디밭 주위의 땅을 세밀히 조사해 봤다. 그리고 지나가는 작은 이들을 붙들고 손짓 발짓으로 어떻게든 기계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들에게 나의 몸짓의 의미가 전달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자는 멍하니 서 있기만 하고 어떤 자는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웃기만 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웃는 얼굴을 힘껏 때려 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들을 때리다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지만, 공포심과 분노로 혼란에 빠져 있는 나의 마음은 자칫하면 격해져서 사납게 굴려고 하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잔디밭이 훨씬 더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잔디밭에 한 줄로 곧게 홈이 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스핑크스의 받침대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뒤집혀진 타임 머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내가 남긴 발자국과의 바로 중간 지점이었다. 다른 곳으로 타임 머신을 움직여간 듯한 자취가 있었고, 작은 이들이 내었으리라 여겨지는 작고 긴 발자국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스핑크스의 받침대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받침대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청동의 큰 덩어리가 아니고 양쪽에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청동 판을 붙인 것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 청동 판을 두들겨 보았다. 받침대의 속은 텅 빈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청동 판을 조사해 보니, 판과 테두리가 빠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손잡이나 열쇠 구멍은 없었지만, 만일 이 판이 문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안 쪽에서 열리도록 되어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로써 한 가지는 명백해졌다. 타임 머신이 이 받침대 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 속으로 옮겨 넣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주홍색 옷을 입은 두 작은 이의 머리가 수풀을 뚫고 꽃이 활짝 피어있는 능금나무 밑을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들 쪽을 향해 이리 오라는 뜻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나는 청동의 받침대를 손가락질하며 그것을 열고 싶다는 것을 손짓과 몸짓으로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나의 손짓을 보자 그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적당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굉장히 고상한 아가씨가 심히 쌍스런 몸짓을 보았을 때에 나타내는 그런 태도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지독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가 버렸다. 나는 다음에 온 흰옷을 입은 상냥한 얼굴의 작은 이에게도 지금 한 것과 같은 몸짓을 해 보였다. 결과는 꼭 같았다. 그걸 보자 웬일인지 나 자신도 부끄러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타임 머신을 찾고 싶어서 또 한 번 그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아까 그 두 사람처럼 이 사람도 가버리려 하므로, 나는 왈칵 화가 났다. 큰 걸음으로 뒤쫓아가 그의 멱살을 잡고 스핑크스 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두려움과 미움의 표정을 보고 나는 황급히 그를 놓아주고 말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주먹으로 청동 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누군가가 킥킥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나는 강에서 제법 큰돌을 주워 왔다. 그것으로 청동 판에의 소용돌이 무늬가 망가지고 녹이 푸석푸석 벗겨질 때까지 계속 두들겨 댔다. 작은 이들은 내가 무서운 기세로 쾅쾅 두들기고 있는걸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능히 들었을 터인데, 단 한 사람도 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언덕에서 한 떼의 작은 이들이 가만히 이쪽을 살펴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느덧 몸에 열이 나고 피로해져 물러나 앉아서 가만히 받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급한 나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유럽 사람인 내게는 너무 오래 지켜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한 문제를 가지고 몇 해나 걸려 연구하는 일은 가능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24시간을 그냥 보내는 건 도저히 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후에 나는 일어나 다시 언덕 쪽을 향해 무턱대고 수풀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참는 거다.“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타임 머신을 찾고 싶으면 스핑크스는 가만히 두어야 한다. 그놈들이 정말로 타임 머신을 빼앗아 갈 생각이었다면 청동의 받침대를 부셔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빼앗아 갈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부탁하면 곧 돌려 줄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알 수 없는 것뿐인 곳에서 이런 수수께끼를 풀려고 해 봤댔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 일만 하고 있다가는 끝내는 미치고 말지도 모른다. 우선 이 세계를 잘 관찰하여 놈들이 하는 짓을 배워야겠다. 그러나 섣불리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지. 그리고 언젠가는 타임 머신을 되찾을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갑자기 내자신의 처지가 우스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미래의 세계에 가보려고 몇 년을 두고 괴로운 연구를 계속해 왔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거기서 도망쳐 나가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여태껏 아무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복잡하고 무서운 함정에다 밀어 넣은 것이었다. 모두 나 때문이지만 이젠 다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소리 내어 어허허허 웃어댔다. 전처럼 바로 그 큰 궁전 같은 건물에 들어가니, 작은 이들이 어쩐지 나를 슬슬 피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내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청동 받침대를 쾅쾅 두들겼던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그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런 것에 모른 체 시치미를 떼며, 그들을 쫓아다니는 짓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을 했다. 그렇게 한 덕분에 한 이틀 후에는 모든 것이 전과 같이 되었다. 나는 되도록 빨리 작은 이들의 말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한편, 여기 저기를 조사해 보러 돌아다녔다. 나는 자세한 것을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아주 간단한 말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맡은 거의 명사와 동사만으로 되어 있었다. 추상 명사가 있기는 해도 극히 적고, 형용사는 거의 없었다. 문장도 대체로 간단해서 보통 두 세 개의 낱말로 되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극히 간단한 일 외에는 그들과 얘기를 곧 나눌 수가 있었다. 나는 타임 머신과 스핑크스 받침대의 수수께끼는 가급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좀더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 일도 알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네들도 알겠지만, 무엇인가 나를 불잡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는 맨 처음 도착한 곳에서 4,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는 가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템즈 강 유역과 같이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느 언덕에 올라가 보아도 템즈 강 유역에 있는 것과 같은 훌륭한 건물들이 많이 보였고, 그 건물들은 재료와 형태도 여러 가지로 달랐다. 또 비슷비슷한 울창한 상록수의 숲과 꽃을 활짝 피운 나무들과 고사리들도 보였다. 곳곳에 강물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흐르고 강 건너 쪽은 땅은 차츰 높아져서 푸르게 물결치는 언덕을 이루고, 그 끝은 조용한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가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 나는 이상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몇 개의 둥근 우물 같이 생긴 것인데 아주 깊은 것처럼 생각됐다. 그 중 하나는 처음 이 언덕에 올라왔을 때 지나간 오솔길 가에 있었다. 다른 우물들과 같이, 이 우물의 테두리도 묘한 무늬가 새겨진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조그마한 둥근 지붕이 비가 들지 않도록 덮여 있었다. 나는 이런 우물가에 걸터앉아서 깜깜한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으나 물의 반사는 보이지 않았다. 성냥불을 켜 보아도 불빛의 반사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우물에서나 비슷한 소리가 들려 왔다. 큰 엔진이 돌고 있는 것 같은 덜덜덜덜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성냥불의 흔들림에서 공기가 쉬지 않고 그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걸 알았다. 더욱이, 조그마한 종이쪽을 던졌더니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휙하고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잠시 후, 나는 이 우물이 언덕 여기 저기에 서 있는 높은 탑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탑의 꼭대기에는 더운 날 햇볕에 쬐인 바닷가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기의 흔들거림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을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나는 이 땅 밑에 큰 환기 장치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작은 이들의 위생 설비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전혀 엉뚱한 추측에 불과했다. 여기서 말해 두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나는 이 미래세계에 있는 동안, 하수도라든가 교통 기관이라든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연 알 길이 없었다. 이 날까지 내가 읽어 본 유토피아 이야기나 미래의 이야기 중에는 건물과 공공 시설 등에 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나처럼 실제로 그런 곳에 간 사람에게는 좀처럼 알기 어려운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런던에 온 중앙 아프리카의 흑인이 제나라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런던에 대한 얘기를 한다고 하자. 과연 뭐라고 설명할까? 그는 철도 회사에 대해서, 사회 운동에 대해서, 전신 전화에 대해서 운송 회사에 대해서, 우편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물론 우리들은 그 흑인 사나이에게 그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해 주었다고 해서, 설령 그 사나이에게는 이해가 갔다고 하더라도 런던에 와 본 일이 없는 그의 친구들이 어느 만큼 이해를 하겠는가! 게다가 현재의 흑인과 백인과의 거리에 비교한다면, 나와 이 미래 세계의 인간과의 거리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이다. 나는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자동 장치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알 수 없었다. 가령 시체를 매장하는 문제인데, 화장장과 무덤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아직 내가 탐험하지 못한 어느 곳에 묘지와 화장터가 있으려니 했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 모로 깊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만족스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궁리하고 있는 중에 또 한 가지 더욱 이상한 문제에 부닥쳤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노인이나 병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앞에서 인류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결과 퇴화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무슨 납득이 갈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여기서 나를 곤란하게 한 문제를 몇 가지 열거해 보기로 하겠다. 내가 이미 조사해 본 몇 개의 큰 건물은 주택과 대식당과 침실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기계와 연장 같은 따위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 사람들은 고운 의복을 입고 있는 것이 그 의복은 때에 따라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들이 신고 있는 샌들도 장식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 금속제로 꽤 애써 만든 것이었다. 이런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 작은 이들에게서는 그런 걸 만들고 있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게도 없고 상점도 없다. 그렇다고 딴 곳에서 가져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며, 강에서 헤엄을 치며, 장난 삼아 서로 사랑을 하기도 하며, 과일을 따먹으며, 잠자는 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활이 가능할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또 타임 머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흰 스핑크스의 받침대 속에다 옮겨 놓은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것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물이 없는 우물과 공기가 일렁거리고 있는 탑도 그렇다. 무언가 하나의 실마리가 걸려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어떻게 말해야 좋을 것인가? 가령 이곳에 돌에 새겨진 글이 있다고 하자. 매우 쉬운 영어로 씌어져 있으나 그 가운데 전혀 알 수 없는 말과 문자가 섞여 있다는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도착한 지 사흘만에 내 눈에 비친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란 것은...... 그날 나는 한 친구, 아니 친구 비슷한 사람이 생겼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나는 몇 사람의 작은 이들이 강의 얕은 데서 목욕을 하고 있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 한가운데는 물살이 세었다. 그렇지만 얼마쯤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물살쯤은 전혀 문제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말하면 그 작은 이들의 체력이 얼마나 약한지를 자네들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눈앞에서 물에 빠져 애처롭게 울며 소리치고 치는 사람을 보고도 누구 하나 구해 주려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알자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고 강 아래쪽으로 달려가서 가엾은 여자 작은 이를 붙잡아 무사히 육지에 끌어 올려 주었다. 손발을 잠시 주물러 주자, 그 여자는 곧 숨을 쉬고 깨어났다. 나는 그 여자가 완전히 기운을 차린 걸 본 다음, 그 곳을 떠나왔다. 나는 벌써 전적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으므로 그 여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건 오전 중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탐험에서 돌아와 늘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할 때, 그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반가운 듯 소리치며 다가오더니 커다란 꽃다발을 내게 주었다. 그건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이 꽃다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아마 내가 혼자 몸으로 외로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쨌든 나는 이 선물에 대해서 정성껏 감사의 뜻을 나타내 보였다. 잠시 후, 우리는 돌로 지은 조그마한 정자에 앉아서 얘기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사실 둘은 서로 웃어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의 귀여움은 꼭 어린애의 귀여움과 같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서로 꽃을 주고받으며, 또 그녀는 내 손에 키스를 해 주었다. 나도 같이 그녀의 손에 키스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위너'라는 것을 겨우 알았다. 무슨 뜻의 이름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꼭 들어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녀와 나의 기묘한 우정의 시초였다. 그건 1주일간 계속되다가 끝났지만, 거기 대해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겠다. 그녀는 정말이지 꼭 어린애 같았다. 언제나 내 곁에 있고 싶어하여 내가 가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 오려고 했다. 그리고 가끔 탐험에도 따라 왔다가 도중에서 지쳐버리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두고 탐험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애처롭게 나를 부르고 있었으나 나로서는 탐험을 중지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런 작은 이와 연애 놀이를 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곳에까지 온 건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타일렀다. 그러긴 했지만 내게서 혼자 떨어지자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어서 미친 듯이 나를 끌어 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때의 기분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 성가시기도 했다. 그건 어쨌든, 그녀는 내게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내 곁에 따라다니는 것은 어린애 같은 애정에서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그녀를 내버려두고 탐험을 지속한 일은 그녀를 크게 슬프게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나중에야 느끼게 될 일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도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퍽 좋아한 모양으로, 그걸 서투른 표정으로 알러 주었지만 그저 그랬을 뿐이고, 나는 작은 인형 같은 그녀가 있는 흰 스핑크스 곁으로 돌아오면, 마치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었다. 나는 언덕을 넘어 돌아올 때면 곧 흰색과 금빛의 옷을 입은 그녀의 조그만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미래의 세계에도 아직 공포심이란 것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안 것도 그녀에게서였다. 그녀는 해가 있을 동안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우스울 정도로 믿고 있었다. 예를 든다면, 나는 갑자기 어이없는 말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무서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방긋이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둠이나 그늘이나 검은 것을 무서워했다. 어둠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너무도 지나치게 무서워하기에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주의 깊게 관찰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깨달았다. 작은 이들은 어두워지면 큰집에 모여 함께 잔다는 것이었다. 불을 들지 않고 거기에 들어가면 그들은 무서워하며 큰 소동을 벌였다. 어두워지기만 하면 밖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집안에서도 혼자 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말 바보였다. 그들이 왜 무서워하는가를 알려고 하지 않고 위너가 싫어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떨어져 나와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었다. 위너는 매우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대한 애정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된 후로는 다섯 밤을, 마지막의 하룻밤까지도 내 팔을 베고 잤던 것이었다. 아니, 위너 이야기로 그만 얘기가 딴 길로 흘러 버린 것 같다. 이전 그녀를 구조해 준 전날 밤의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나는 새벽에 잠이 깨어 눈을 떴다. 불안스런 밤이라 몹시 흉한 꿈을 꾼 것이었다. 내가 물에 빠졌는데 말미잘의 물렁물렁한 더듬이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징그러워 얼른 눈을 떴다. 이 때 무언지 회색의 것이 황급히 방에서 튀어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자려고 했으나 안정이 안 되고 무언가 불안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어두컴컴한 회색의 시간이었고,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것이 그 빛깔은 알 수 없어도 형태만은 또렷했다. 그런데도 그 회색의 것은 진짜의 것이 아니라고만 생각되었다. 나는 일어나 큰 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곳을 지나 궁전 앞 포석(돌로 만든 길) 위로 나왔다. 잠을 설쳤지만 그런 대로 해 돋는 광경이나 구경하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달은 이미 지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과 새벽의 희푸른 빛이 어우러져서 어쩐지 무시무시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풀들은 시꺼멓게 보이고, 땅은 회색, 하늘은 음산하게 흐려 있었다. 나는 언덕 위에 유령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덕 비탈에 시선을 보내자 세 개의 흰 그림자가 몇 번이나 보였다. 흰 원숭이 같은 꼴을 한 것이 꽤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두어 번 보였다. 한 번은 무너진 건물 옆을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셋이 무언지 꺼먼 물건을 운반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뒤로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수풀 속으로 사라졌을 것 같았다. 뭐니뭐니 해도 아직 밝지 않은 때였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날 아침 일찍 느꼈던 불안하고 섬뜩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나는 그 유령 같아 보인 것도 그런 기분 아래서 허깨비를 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쪽 하늘이 밝아져서 아침 햇빛이 비치자 사방에 다시금 싱싱한 빛깔이 되살아났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허연 것은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것은 어둠침침한 곳에서 사는 생물인 모양이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그랜트 앨런(18BB~1899;영국의 작가, 과학 해설자)의 그 괴이한 학설을 생각하고 우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각 시대가 유령을 남긴다고 하며 나중에는 온 세계가 유령으로 가득 차 버릴 것이라고 했다. 이 설에 따르면, 그로부터 80만 년이나 지났으니 이곳에는 무수한 유령이 있음직도 하다. 한꺼번에 네 사람의 유령을 보았다 해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오전 중, 그냥 계속해서 아까 그 그림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위너를 구조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령 생각은 완전히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나는 그 유령이 내가 미친 듯이 타임 머신을 찾으러 돌아다닐 때 나를 놀라게 한 그 허연 동물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랬지만 유령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느니보다 위너를 생각하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유령들은 더욱더 나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미 말한 걸로 생각하지만, 이 미래 세계의 기후는 우리들의 세계보다 훨씬 따뜻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태양이 더 뜨거워진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지구가 더 태양에 가까이 간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태양은 앞으로 점점 식어 가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하고들 있다. 다윈 2세(유명한 생물학자 다윈의 둘째 아들 천문학자)의 이론 같은 걸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유성은 최후에 가서는 하나 하나 그들의 어미별로 돌아간다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태양은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어쩌면 태양에 가까이 있던 유성들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운명의 길을 밟아간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미래 세계의 태양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태양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몹시도 더운 아침, 여기 와서 나흘째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더위와 햇볕을 피하려고 내가 먹고 자고 하는 큰 우물 가까이 있는 커다란 폐허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쌓아 놓은 돌무더기 사이로 기어 올라가자니까 좁은 복도가 나왔다. 끝과 양쪽 창은 무너져 내린 돌덩이들로 막아 놓고 있었다. 이제까지 바깥 밝은 곳에 있던 나는 처음엔 너무나 어두운 걸 느꼈다. 손을 저어 더듬으며 들어갔다. 밝은 데 있던 내 눈이 앞을 잘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연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밖의 햇볕을 막아 번쩍번쩍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나운 짐승을 무서워한 태고의 본능적인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빤히 그 빛나는 눈을 쏘아보았다. 무섭다고 해서 무턱대고 달아나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퍼뜩 나는 여기서는 인간은 지극히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리고 또 어둠을 이상하게도 무서워하고 있는 걸 생각했다. 나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러 봤다. 바른 데로 말하면 내 목소리는 낮게 됐었을 것이고 또 떨렸을 것이다. 손을 내밀자 무언지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 순간 빛나는 눈은 휙 옆으로 비켜나고 무언지 허연 것이 내 옆을 지나 도망쳐 갔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묘하게 작은 원숭이 같은 것이 괴상한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뒤쪽 햇볕이 쬐는 곳을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돌무더기에 부딪쳐 잠시 망설이더니 곧 옆으로 빠져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돌무더기 밑의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물론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둔한 흰 빛깔을 하고 있었고, 회색이 섞인 붉고 큰 눈을 하고, 머리에서부터 등에 걸쳐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있는 걸 알았다. 그러나, 너무나 빨리 달아났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네 발로 달려간 것인지, 아니면 팔을 아래로 낮게 내려뜨리고 달려간 것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나는 한 숨 돌리고 나서 그 놈의 뒤를 쫓아 둘째 돌무더기 사이로 들어가 보았다.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깜깜한 어둠 속에, 전에 말한, 그 둥근 우물 같은 것이 있는 걸 알았다. 그것은 쌓아진 돌기둥으로 반쯤 덮여 숨겨져 있었다. 나는 퍼뜩, 저 생물은 이 우물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성냥을 그어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조그만 회색 생물이 도망쳐 들어가며 커다란 눈을 빛내어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오싹했다. 꼭 인간의 모습을 한 거미 같았다. 그놈은 우물을 기어내려 갔다.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지만, 우물의 안쪽에는 쇠붙이로 된 손과 발을 받칠 것이 많이 박혀 있어서 마치 사닥다리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냥개비의 불이 손가락을 뜨겁게 했으므로 나는 성냥불을 내버렸다. 그것은 떨어져 내려가는 도중에 꺼져버렸다. 다시 한 번 성냥을 켰을 때는 이미 그 작은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우물 언저리에 앉아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 본 것이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차차 생각을 정리 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세계의 인간은 한 종류뿐만이 아니라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닐까? 지상 세계에 있는 그 우아한 작은 이들만이 우리들의 자손은 아니었다. 아까 내 곁을 스쳐 지나간 그 창백하고 보기 흉한 밤의 생물도 우리들의 자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나는 공기가 아른거리고 있던 탑과 지하의 환기 설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여우같고 원숭이 같기도 한 인간은, 이 미래 세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빈둥빈둥 할 일없이 살고 있는 지상 세계의 아름다운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 우물 속에는 대체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나는 우물가에 걸터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그 무엇이나 무서워할 건 없다.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내려가 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내려가 보자고 생각하니 어쩐지 무서웠다. 아직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지상의 세계의 아름다운 두 사람이 희롱을 하면서 햇빛 속을 달려와서 그늘진 곳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여자를 쫓아오면서 꽃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들은, 넘어져 있는 집 기둥에 손을 걸치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우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그 우물을 가리키며 그들의 말로서 물어 보려고 하자, 두 사람은 점점 더 난처하다는 표정을 하고 얼굴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성냥에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재미있어 하라고 성냥을 두세 번 켜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물에 대해서 물어 보려고 했지만 역시 허사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거기에 내버려두고 위너에게로 돌아가 그녀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때, 내 생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생각하거나 느낀 일과는 다른 새로운 생각이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이런 우물과 환기탑과 유령 등의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물론 청동 판의 의미와 타임 머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직은 극히 막연한 것이긴 했지만, 내 머리를 괴롭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새로운 생각이란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즉, 이 제2의 종류에 속하는 인간은 틀림없이 지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특히 세 가지 일로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이 좀처럼 지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우선 오랜 지하 생활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사는 동물에는 흔히 그런 것이 있었다. 예를 든다면 켄터키 주(미국 중동부에 있는 주)에 있는 동굴 속의 흰 물고기 같은 것. 그리고 그 빛을 잘 반사하는 커다란 눈, 그것은 밤에 나다니는 동물에 공통된 특징이다. 올빼미와 고양이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양 광선이 비치는 곳에서는 몹시 허둥대고 어두운 그늘을 향해 부리나케 도망쳐 가는 일, 그리고 밝은 곳에서는 묘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일, 이건 모두 그들의 눈에 있는 망막이 빛에 몹시 민감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 발 밑에는 커다란 터널이 수없이 파져 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곳이 이 지하 인종의 거주지인 것이다. 언덕 비탈의 환기탑과 우물은, 사실 강 양쪽의 골짜기를 제외하면 그것은 곳곳마다 있었다. 이 터널의 그물이 얼마나 널리 펼쳐져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인공의 지하 세계에서는 지상의 인간들이 안락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생각은 극히 정당한 것으로 느껴졌으므로 나는 곧 그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어째서 인류가 둘로 갈라지게 됐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는 벌써 자네들에게도 대충 전달이 되겠지만, 나는 곧 그것이 전혀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우선 우리들 시대의 일에서부터 생각해 나가면 모든 일은 명료해지리라 생각했다. 현재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차이는 일시적, 사회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점점 광범하게 되어 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러한 사고 방법은 자네들에게는 무척 바보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에도 그러한 징조는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지하의 공간을 여러 가지 목적에 이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런던의 지하철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전차도 있고 지하도도 있으며 지하의 공장이나 레스토랑도 있는데 그런 것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반드시 이런 경향이 점점 심해져서 드디어는 푸른 하늘 아래서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깊고, 점점 넓고 크게 되어 가는 지하의 공장으로 들어간 인간은 거기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되고 결국엔......! 현재에도 이스트 엔드(런던의 빈민의 거리)의 노동자들은 지상의 자연으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 인공적인 장소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한편, 부유한 자들에게는 배타적인 경향이 있어서, 이건 그들의 교육이 점점 높아져 가난한 사람들과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진 결과일 테지만, 땅의 대부분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독차지하려 들고 있다. 이를테면 런던 주변의 아름다운 토지의 반쯤은 아마도 일반 사람에게는 드나들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부유한 자들은 점점 교육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더욱더 세련된 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과의 괴리는 한층 더 커지고,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뒤바뀌거나 서로 결혼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점점 더 없어져 간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러한 결혼이 이따금 행해져서 인류가 딱 둘로 갈라지는 걸 겨우 막고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드디어 지상에는 가진 자들만이 살며 쾌락과 아름다음을 추구하고, 지하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며 그들의 노동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해 가는 것이다. 지하에 들어간 자들은 필시 동굴 속의 환기료를,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을 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그걸 내지 않으면 굶어 죽게 하거나 질식시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소질이 없는 자와 반항적인 자는 죽여 버릴 것이다. 결국 이러한 두 개의 계급 관계는 영구적인 것이 되어 살아 남은 자들은 지하 생활에 익숙해져서, 지상의 인간이 행복하듯이, 그들도 또한 그들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니까 지상의 인간이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지하의 인간들이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내가 꿈꾸고 있던 인류의 위대한 승리한 것은 이런 형태의 것은 아니었다. 이 곳에 있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 같은, 도덕 교육의 승리라든가, 전체적인 협력의 승리라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목격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완성된 과학과 현재의 생산 제도를 합리적으로 밀고 나간 제도에 의해 지켜진 진짜 귀족 계급이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로 변한, 같은 인간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그 때 내가 생각한 이론이었다. 나에게는 유토피아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편리한 해설자는 없었다. 나의 설명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올바른 사고 방식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비로소 달성된, 균형이 잡힌 문명은 벌써 전성 시대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쇠퇴기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지상 세계의 인간은 너무나 완전하기 지나치도록 보장되었기 때문에 점차 퇴화해서 체격이나 체력이나 지적 능력 등이 모두 약해져 버렸다. 그건 이미 확실하게 나타나 보였다. 지하세계의 인간에 대해서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몰록' (곁들여서 말해 두지만, 지하의 인간은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은 '엘로이' (이것이 저 아름다운 지상 인간의 이름이다)보다 훨씬 크게 변화했을 것으로 생각됐다. 아직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왜 몰록은 나의 타임 머신을 훔쳐 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타임 머신을 훔쳐 간 건 그들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엘로이가 이 세계의 지배자라면 왜 나를 위해 빼앗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그렇게도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위너에게도 지하 세계에 대하여 물어보았지만, 역시 실망했을 뿐이다. 처음에 그녀는 나의 질문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체 했다. 다음에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위너는 그런 건 말을 하기조차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무섭게 다그쳐 묻자 그만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내가 미래 세계에서 본, 내가 흘린 눈물은 별도로 하고, 단 하나의 눈물이었다. 위너의 눈물을 보고, 나는 그 이상 몰록에 대해 묻는 것을 그만 두고 어떻게든 위너의 눈에서 현재 인간의 잔재인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생각했다. 내가 성냥을 그어 보이자, 위니는 곧 생글생글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즐거운 듯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살며시 다가오는 몰록   자네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새로운 단서를 잡아 거기에 의해서 타임 머신의 행방을 찾으려 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나서였다. 그 창백한 인간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꽁무니를 빼고 싶어지기만 했다. 그놈들은 구더기나 박물관에 있는 알코올에 담긴 표본처럼 하얗게 빛이 바랜 색깔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만지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내가 꽁무니를 뺀 것은 아마 엘로이들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그들이 몰록을 싫어하는 기분을 조금은 알게 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다음 날 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몸이 조금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도 없으면서 한두 번 굉장히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달빛을 받고 작은 이들이 자고 있는 큰 홀(그날 밤은 위너도 그들과 같이 있었다)에 간만에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 있는 걸 보고서야 마음이 놓여진 게 생각난다. 그때 문득 생각난 일이지만, 앞으로 2, 3일이 지나면 달은 4분의 1로 기울어져 어두운 밤이 계속된다. 그렇게 되면 저 지하의 허연 여우 원숭이 같은 누추한 생물들이 옛날 사람을 해치는 짐승을 대신하여 새로운 짐승으로 더욱 많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 그 이틀동안 나는 자기의 임무를 게을리 한 사람 같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타임 머신을 되찾으려면 용감하게 지하로 들어가서 그들의 비밀을 캐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비밀에 맞서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친구가 있었다면 물론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외로운 혼자였다. 캄캄한 우물을 내려가는 것만 해도 내 마음은 벌써 기가 죽는 것이었다. 이 기분은 도저히 자네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뒤쪽이 몹시도 불안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초조와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이제까지 보다 더 먼 곳까지 탐험을 떠났던 것이다. 동서쪽, 현재 '쿰드'라 불리고 있는 지금의 언덕 지대를 걸어가면, 멀리 저편, 지금의 번스테드 쪽에 초록색 큰 건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건 이제까지 보아온 건물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궁전과 어떤 폐허보다도 컸다. 건물의 정면은 동양풍으로 되어 있었고, 표면은 엷은 초록색으로 광채가 났다. 어떤 종류의 중국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청록색이었다. 외관이 다른 것은 사용 목적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나는 그 안에 들어가서 조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꽤 시간이 늦은 것 같았다. 그 곳까지 가는데 꽤 긴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피로해 있었다. 그래서 탐험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되돌아와서 작은 위너의 환영과 포옹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어제 내가 그 청자의 궁전을 탐험해 보고자 한 것은 자기의 기분을 속이기 위한 까닭이었음을 또렷이 알았다. 무서운 지하 탐험을 하루라도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더 어물거리고 있을 게 아니라 곧 지하로 내려가 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화강암과 알루미늄의 폐허에 가까이 있는 우물을 향해 출발했다. 위너도 잰걸음으로 따라왔다. 그녀는 즐거운 듯 내 옆을 춤추듯 걸으며 우물까지 왔는데, 내가 우물가에서 아래를 들여다보자,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위너, 안녕!“ 하고 내가 그녀를 안아 올려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땅에 내려놓고 우물 벽을 더듬어 발 디딜 곳을 찾았다. 나는 아주 빨리 그걸 찾았지만 사실을 말하면 용기가 없어질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위너가 놀라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슬픈 소리로 나를 부르며 다가와서 작은 손으로 나를 끌어 당겼다. 그녀가 반대를 했기에 도리어 들어 갈 용기가 난 것도 같았다. 나는 약간 난폭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끝내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가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위너의 수심에 싸인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건들건들 흔들리는 디딤쇠를 꽉 붙들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물의 깊이는 대충 200미터가 돼 보였다. 나는 그 깊이를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됐다. 내려가는 데는 벽에서 비쭉비쭉 나와 있는 쇠끝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나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사람의 몸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라 곧 피로해지고 몸이 굳어져 왔다. 아니, 피로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쇠끝 하나가 나의 몸무게로 해서 갑자기 휘어져 하마터면 깜깜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릴 뻔했던 것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한 손으로 매달려 있었는데 이때부터는 쉬지 않고 내려가야 했다. 이윽고 팔과 등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되도록 빨리 디딤쇠를 갈아 잡으며 내려갔다. 퍼뜩 위를 쳐다보니 우물 구멍이 조그마한 푸른 원반 같이 보이고 그 속에 별이 하나 보였다. 위너의 머리가 동그랗게 내밀고 있는 것도 보였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덜덜덜 하는 기계 소리가 점점 커져서 기분이 나빠졌다. 머리 위의 조그만 원반 밖에는 어디나 모두 깊은 어둠이었다. 조금 있다 다시 한 번 쳐다보았을 때엔 위너의 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이 불안스런 기분이었다. 그냥 도로 올라가서 지하의 세계에 관한 일 같은 것은 잊어버리기로 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냥 내려가고 있었다. 드디어 30센티미터쯤 오른쪽 벽에서 옆으로 뚫린 조그만 구멍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얼른 기어 들어가 보니 그것은 수평으로 된 좁은 터널의 입구였다. 누워서 쉴 수가 있는 곳이었다. 아주 제때에 발견된 셈이었다. 팔은 아프고 어깨는 떨리어 이제라도 떨어지지 않나 하고 진땀이 나던 참이었다. 게다가 어디를 봐도 깜깜한 암흑이어서 눈이 이상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으로 공기를 끌어들이는 기계의 덜덜거리는 소리가 땅 속을 울리고 있었다. 얼마 동안 그곳에 누워 있었는지 모르지만 흐느적거리는 손이 내 얼굴에 닿아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 벌떡 일어나 앉자 성냥갑을 꺼내어 급히 불을 켰다. 그 불빛으로 내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허연 생물 셋이 황급히 달아나는 게 보였다. 언젠가 지상의 폐허에서 본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의 눈은 별나게 크고 민감했다. 꼭 바다 깊은 데 있는 물고기의 눈처럼 빛을 반사하는 것이었다.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나를 잘도 알아본 모양이었다. 성냥불만 없었다면 나 같은 건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좀더 자세히 관찰하려고 성냥을 긋기가 바쁘게 쏜살같이 도망쳐 어두운 바위 뒤나 터널 속에 숨더니 거기서 기분 나쁜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지상 세계의 말과는 다른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탐험을 중단하고 도망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터널 속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니 기계 소리는 점점 커져 왔다. 이윽고 터널이 넓어지더니 넓은 곳에 이르렀다. 성냥 한 개피를 그어 보니 천장이 둥글게 된 큰 동굴에 와 있었다. 어두운 동굴은 성냥불이 비춰지지도 않는 저 앞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기야 성냥 한 개피가 타고 있을 동안에 본 것이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도 그리 확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커다란 기계 같은 것이 어둠 속에 높다랗게 서 있는데 그 그림자 속에 희미한 유령 같은 몰록들이 성냥불 빛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은 공기가 탁해서 후덥지근하고 피비린내 같은 것이 코에 스며들어 왔다. 중앙에서 좀 떨어진 곳에 흰 금속의 조그마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고기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면 몰록들은 육식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 커다란 붉은 고깃덩어리를 보면 상당히 큰 동물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런 동물이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냄새, 정체 모를 커다란 고깃덩어리, 어둠 속에 숨어서 가만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내게로 공격해 오려고 노려보고 있는 흉물스런 몰록인들. 성냥개비가 다 타서 땅바닥에 떨어져 어둠 속에 조그만 붉은 점이 되어 굴렀다. 나는 시간 여행에 나서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허술한 장비 밖에 하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를 했다. 타임 머신에 올라 출발할 때, 나는 어리석게도 미래 세계의 인간은 모든 점에 있어 현재의 우리들보다 훨씬 진보되어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나는 무기도 약품도 담배도 준비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아주 담배가 피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성냥까지도 준비하지 않고 온 것이다. 카메라를 가져 왔더라면 지하 세계를 찍어 뒷날 천천히 조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실제는 하늘이 준 무기, 내 손과 발과 이빨만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건 그 무기들과 네 개비의 성냥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기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건 무서웠다. 더구나 성냥불이 꺼지기 전의 그 작은 불빛으로 이미 성냥도 거의 동이 난 걸 알았다. 그 때까지 성냥을 아낄 필요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거의 반 갑이나 되는 성냥을 지상 세계의 인간들을 즐겁게 해 주느라고 써 버렸던 것이었다. 불이란 그들에게는 참으로 진귀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성냥은 단 네 개비뿐이었다. 어둠 속에 서 있으려니까 손이 하나 내 손을 건드리고 앙상한 손가락이 내 얼굴 위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 주위에는 그 흉한 몰록들이 몰려와 있어서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성냥갑이 가만히 빠져나가게 당겨지는 것 같았고, 몇 개의 손이 뒤에서 내 옷을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에게 신체 검사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짓을 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이 어둠 속에서 돌연 알고도 남을 만큼 깨달아졌던 것이었다. 나는 되도록 큰 소리로 야단을 쳐봤다. 그러자 그들은 휙 달아났다. 그리고도 곧 다시 슬슬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층 더 대담해져서 내 옷을 잡고 저희들끼리 괴상한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와들와들 떨면서 또 한 번 소릴 쳤다. 그 소리는 외치는 소리에 가까웠다. 이번 소리에는 그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도리어 괴상한 웃음소리를 지르면서 내게 덤벼들었다. 정말이지 나는 겁이 더럭 났다. 나는 또 한 개비의 성냥을 그어서 그 불빛을 이용해서 도망을 칠 생각을 했다. 성냥을 그어, 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꺼내 거기에다 불을 붙여 좁은 터널 쪽으로 도망쳐 갔다. 그러나, 터널에 들어섰을 때, 종이의 불은 꺼져 버렸다. 어둠 속을 몰록들이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비 쏟아지는 소리로 뒤쫓아오는 걸 알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는 몇이나 되는 손아귀에 붙들렸다. 틀림없이 그들은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 한 개비의 성냥을 그어 깜짝 놀라는 그들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들이 얼마나 추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자네들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턱이 없는 창백한 얼굴과, 눈꺼풀이 없고 분홍색이 곁들인 커다란 회색의 눈. 그리고 눈이 부시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의 그 얼굴이란......! 그러나 멈춰 서서 그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 뛰었고 두 개비의 성냥이 다 타 버리자, 세 개비 째의 성냥을 그었다. 그것이 거의 다 탔을 때 간신히 터널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거기서 턱 드러누웠다. 아래서 들려오는 커다란 펌프 소리에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옆으로 팔을 뻗어 발 디딤쇠를 찾았으나 그때 뒤에서 다리를 붙잡혀 와락 뒤로 끌어당겨졌다. 나는 마지막 성냥을 그었다. 그러나, 그건 금방 꺼져 버렸다. 그래도 내 손은 디딤쇠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힘차게 다리로 걷어차서 몰록들의 손을 떼어버리고는, 그들이 눈을 끔벅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빨리빨리 우물 벽을 올라갔다. 그런데도 단 한 녀석, 나를 한참 동안 따라오는 놈이 있어 하마터면 구두를 빼앗길 뻔했다. 어디까지 기어올라가도 한이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 7미터 정도 남았을 때, 심한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디딤쇠에 매달려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후의 2, 3미터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싸움이었다. 몇 번이나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드디어 우물가를 넘어서서 비틀거리며 폐허를 빠져 나와 밝은 태양 광선 속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나는 앞으로 픽 쓰러졌다. 흙 냄새가 실로 시원하게 느껴졌다. 위너가 내 손과 귀에 키스를 하고, 다른 엘로이들의 목소리가 들린 걸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는 실신을 해서 한동안 정신없이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서   그런데 나의 처지는 전보다 훨씬 나빠진 것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밤이 되면 타임 머신을 잃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낮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도망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곤 했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이번의 탐험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타임 머신은 작은 이들이 단순히 어린애 같은 장난으로 감춰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혹시 무언가 정체를 모를 힘에 의해서 숨겨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방법만 알게 되면 도로 찾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몰록이라는 보기 싫은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냉혹하고 무서운 인간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전에는 굴속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굴에 대한 일과 거기서 나오는 일만 생각했었다. 그랬지만 지금의 나는 덫에 채인 짐승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라도 적이 다가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두려워한 적은, 자네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초생달 밤의 어두움이었다. 언젠가 위너는 이 어두운 밤에 대해서 얘기해 준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어떤 뜻인지 몰랐었다. 그리나 이제는 차차 나에게 가까이 오는 어두운 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짐작해서 알 수가 있었다. 달은 벌써 기울기 시작하여 밤마다 어두운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 지상의 작은 이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몰록들이 어두운 초생달 밤에 어떤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일까? 나는 두 번째로 세운 가설도 전혀 틀린 것이었다는 걸 제법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찍이 지상 세계의 인간들은 풍족한 귀족 계급이었다. 몰록들은 이들에게 기계와 같이 부려지는 하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이미 그 옛날에 변해져서 인류가 진화한 결과 생겨난 이 두 인종은 아주 새로운 관계에 옮아가려 하고 있었거나 이미 옮아가 버린 것이었다. 엘로이들은 카를링 왕조(751~987년의 프랑스의 왕조)의 왕들처럼 오직 아름다운 겉치레만의 것이 되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아직까지 지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몰록들이 오랫동안 지하 생활을 계속해 온 결과 밝은 지상 생활에 견디지 못하게 된 탓이리라. 나의 상상으로는, 몰록들은 엘로이들을 길러 주고 있었지만 그건 아마 그들이 엘로이의 하인이었을 시대의 낡은 습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걸 마치, 말이 앞발로 땅을 파헤치듯이, 인간이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죽이며 즐기듯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래 된 습관이란 것은 소용이 없어졌는데도 좀처럼 인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낡은 질서의 한 부분이 무너진 것은 확실했다. 복수의 여신은 지금 급속히 엘로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 옛날, 몇 천 세대 전 옛날, 인류는 자기들의 형제인 인간을 안락한 생황과 태양 아래 밝은 곳으로부터 추방했다. 지금 그 형제들이 되돌아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서...... 엘로이들은 이제 새삼 옛날의 교훈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금 '두려움'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불현듯, 그 지하에서 본 고깃덩어리가 생각났다. 왜 그런 것이 생각났는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니고 갑자기 생각난 것이었다. 나는 그 고기의 모양을 생각해 내려 했다. 무엇인가를 닮은 걸 본 일이 있는 것 같았으나 그 때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엘로이들이 신비적인 공포에 대해서 전연 무력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현대인이다. 벌써 공포에 의해 인간이 무력해지거나, 신비에 의해서 겁을 내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인류의 전성기인 현대의 인간인 것이다. 적어도 나는 자기 스스로 나를 지킬 작정이다. 나는 주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무기와, 안심하고 잘 수 있는 편한 보루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로 했다. 그 보루를 발판으로 하면 나도 이 기묘한 세계에 충분히 대항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밤마다 어떤 괴물이 습격해 올지 모른다해서 온통 잃어버렸던 자신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놈들에 대해서 안전한 잠자리를 발견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잠을 잘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놈들은 나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를 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 졌다. 그 날 오후 나는 템즈 강 유역을 거닐며 찾아보았는데 몰록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여겨지는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 우물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기어오르기를 잘하기 때문에 어떤 건물이나 높은 나무라도 간단히 올라올 것이 뻔했다. 그 때, 저 청자 궁전의 높은 뾰족탑과 번쩍번쩍 빛나는 벽이 퍼뜩 생각났다. 그래서 저녁나절, 나는 위니를 어깨에 올려 앉히고 남서쪽을 향해 언덕을 올라갔다. 거기서는 12,3킬로미터 가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석실은 3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였다. 처음 그 궁전을 본 것은 안개 낀 오후였다. 그런 때에는 실제보다 가까이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쪽 구두 뒤축이 떨어져 나가서 못이 발바닥을 찔러 이 구두는 집에 있을 때 신던 것으로 헌 구두인 만큼 발이 편한 것이었다. 나는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궁전이 보이는 데까지 갔을 때 해는 이미 지고, 길게 보이는 건물 그림자가 엷은 황색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위너는 내 어깨에 올라앉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내려달라고 하여 내 옆에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때때로 여기 저기 뛰어가서 꽃을 꺾어 나의 호주머니에 꽂아주곤 했다. 위너는 언제나 내 호주머니를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드디어 그걸 색다른 꽃병으로 삼아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호주머니를 꽃병이라 생각하고 사용한 것이었다. 오! 생각난다. 내 웃옷을 갈아입을 때 알았지만........ 시간 여행자는 이야기를 멈추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말없이 두 송이의 시들은 꽃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엄청나게 큰 하얀 꽃으로 당아욱 꽃을 닳은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황혼의 적막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언덕 꼭대기를 넘어 윔블던(런던 남쪽 교외의 도시) 쪽으로 나아갔다. 위너는 피곤해서 회색 석조 건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멀리 보이는 청자 전의 뾰족탑을 가리키면서 우리는 무서운 것을 피하기 위해 저기로 가는 것이라고 알려 주려고 애를 썼다. 해 지기 전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그 적막을 자네들은 아는가? 나뭇잎을 흔드는 살랑 바람조차 날개를 접어 버린다. 저녁의 그 고요한 가운데는 언제나 무언가 내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것이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어 끝없이 넓고, 멀리 해가 잠겨 들어간 곳 근처에는 한 줄 두 줄 옆으로 길게 뻗힌 구름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저녁만은 내 마음의 설레임 속에 공포감이 섞여 있는 것을 느낀다. 점점 어두워지는 적막 속에서 나의 감각은 묘하게도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땅 아래 지하의 동굴까지가 몸에 느껴져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몰록들이 개미 떼처럼 우왕좌왕하면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땅바닥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흥분하면서, 몰록은 내가 그들의 주거지에 들어간 것을 선전 포고로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그 놈들은 무엇 때문에 내 타임 머신을 가져갔단 말인가! 우리는 적막한 그 속을 걷고 있었다. 먼 하늘의 푸른색도 사라지고,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땅은 어둠에 묻히고 나무들이 시꺼멓게 보이기 시작했다. 위너의 공포와 피로는 심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안고 얘기를 걸어 위로해 주었다. 이윽고 근처가 더욱 어두워지자 그녀는 내 목에 두 팔을 감더니, 눈을 감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긴 언덕을 내려가 골짜기로 나왔다. 그 곳은 더욱 어두워서 하마터면 개울에 굴러 떨어질 뻔했다. 나는 개울을 건너 반대쪽 골짜기의 비탈을 올라가 잠들어 있는 집들과 머리가 떨어져 버린 폰(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은 사람, 반은 양의 모습을 한 신) 같은 조각의 옆을 지나쳤다. 이 근방에도 아카시아가 무성하게 나 있었다. 이제까지는 몰록을 만나지 않았지만 밤은 아직 초저녁이고 달이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 되기까지에는 아직 멀었다. 다음 언덕 위에 이르자 울창해 보이는 숲이 앞쪽에 시꺼멓게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숲을 보고 나는 망설였다. 숲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끝없이 넓은 숲이었다. 나는 갑자기 피로를 느끼고, 특히 발이 몹시 아팠다. 걸음을 멈춘 다음 위너를 가만히 어깨에서 내려 들고 잔디 위에 앉았다. 청자 궁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울창한 숲 속을 기웃거리며 무엇이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무성한 나무들이 가지를 서로 얽고 있는 그 아래에서는 별조차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위험이란 걸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령 위험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나무에 부딪치기 쉬울 것 같았다. 나는 낮의 흥분으로 몹시 피로해 있었다. 그래서 위험한 곳에 들어가기를 단념하고, 그날 밥은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서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위너는 잠이 깊게 들어 있었다. 나는 정성껏 그녀를 내 웃옷으로 싸 덮어 주고 그 곁에 앉아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언덕 중턱은 조용하고 인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가끔 어두운 숲 속에는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있다는 기분을 주었다. 잘 개인 날씨라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 된 별자리는 아주 하늘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별의 움직임은, 인간이 백 번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을 정도로 극히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 극히 작은 변화가 이미 오래 전에 별자리의 모양을 눈에 서툴게 바꿔 놓은 것이었다. 그래도 은하수만은 별들을 훅하고 불어 성글어진 것 같은 옛날 그대로였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처음 보는 굉장히 많은 별이 있었다. 붉은 색으로 빛났다. 그것은 전체 푸른빛으로 빛나는 시리우스별보다 훨씬 큰 별이었다. 반짝거리는 빛의 집 같은 별들 가운데 하나의 밝은 별이 마치 옛날의 친구 얼굴같이 상냥하고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 별을 보고 있는 중에, 나 자신의 근심은 물론 지상의 모든 문제들이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 별과의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와, 미지의 과거로 유유히 움직여 가는 그 운동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구의 극(남극-북극)이라는 커다란 세차 운동(넘어지려는 팽이의 축이 그리는 일주형의 운동)에 대한 것도 생각해 봤다.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 조촐한 회전 운동은 단 40회 밖에 하지 않았다. 그 얼마 안 되는 회전 운동 사이에 모든 인간의 활동이, 전통이, 복잡한 조직이, 국가가, 문학이, 포부가, 아니 옛날 사람들의 기억까지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자기들의 훌륭한 조상의 일도 잊어버린 저 연약한 인간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허여스름한 인간이었다. 나는 이 두 인종 사이에 있는 커다란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내가 본 그 고깃덩어리가 무엇이었던가를 확실히 깨닫게 되자 갑자기 온 몸이 떨렸다. 나는 내 곁에 잠들어 있는 작은 위너를 들여다보았다. 별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희고, 별 같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곧 그 무서운 생각을 머리에서 떨어 버렸다. 긴 밤 동안, 나는 되도록 몰록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별자리 가운데서 옛날 별자리의 흔적을 찾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늘은 맑아서 안개 같은 구름이 한두 송이 떠 있을 뿐이었다. 필시 나는 가끔 졸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불침번을 하고 있는 중에 얼굴 없는 화재의 반사와도 같이 동쪽 하늘이 희끄므레 해지더니 야위고 두 끝인 뾰족하고 푸르스름한 달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뒤쫓는 듯 새벽이 다가왔다. 하늘은 처음엔 희뿌옇다가 이내 따스한 분홍색으로 변해 갔다. 몰록은 우리들 가까이 오지 않았다. 사실 그 날 밤은 그 언덕에서 한 마리의 몰록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이 되어 자신이 생기니까 간밤에 그렇게도 무서워한 일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나는 일어나서 보았다. 뒤축이 떨어져 나간 구두를 신고 있는 쪽 발은 복사뼈가 있는 데가 부어서 발뒤꿈치가 아팠다. 그래서 다시 풀밭에 앉아 구두를 벗어 던져 버렸다. 위너를 깨워 일으켜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에는 시꺼멓고 무섭게 보이던 곳이 지금은 짙푸른 나무들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우리는 과일을 따서 시장한 배를 채웠다. 조금 후, 우리는 다른 엘로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마치 밤 같은 건 없다는 듯이 밝은 햇볕 속에서 웃고 춤추고 있었다. 나는 또 그 고깃덩어리를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는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이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인류라고 하는 큰 강물의 물이 거의 다 말라 버리고 조금 남은 찌꺼기라는 생각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오랜 옛날 인류가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몰록들은 식량이 부족하게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은 아마 쥐 같은 해로운 동물을 잡아먹으며 목숨을 이어갔을 것이다. 현재에도 인간은 옛날에 비해 훨씬 음식을 가려먹는 일이 없게 되었다. 원숭이와 비교해 봐도 훨씬 그런 것이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습성은 이 미래의 사람답지 않은 인류의 자손에까지 와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냉정히 생각해 보려고 했다. 요컨대 몰록들은 3, 4천년 전 우리들의 조상들인 식인종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인연이 먼 자들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상태를 슬퍼할 만한 지성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뭐 구태여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엘로이들은 살찐 소에 불과한 것이요, 거미들 같은 몰록들에 의해서 길러져서 그들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위너는 내 곁에서 세상 모르고 춤추고 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건 인간의 방종에 대한 엄한 벌이라 생각하고 오싹오싹 스며드는 두려움에서 한시 바삐 피해 나가고 싶어졌다. 인간은 딴 인간을 부려먹음으로 해서 편하고 즐겁게 살아 왔다. 그리고 그건 운명이니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 왔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운명이 반대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멸망해 가는 귀족 계급인 엘로이들을 멸시해 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들의 지능이 저하했다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은 인간과 같았기 때문에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포와 퇴화에 관해서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다. 우선 첫째로 생각한 것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쇠붙이와 돌로 어떻게 해서든 무기를 만드는 일이 있다. 이건 당장에라도 하지 않아선 안 될 일이라 생각되었다. 다음은 불을 가지는 방법이었다. 횃불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몰록에 대해서는 이보다 효과 있는 무기가 없다. 그리고 허언 스핑크스의 받침대인 철제 문을 여는 도구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이 큰 쇠뭉치였다. 그 문을 열고 눈부신 횃불을 들고 들어가 타임 머신을 발견하여 이곳으로부터 도망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몰록들로서는 타임 머신을 그리 먼 곳까지 운반할 힘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위너를 현대로 데려 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피난처가 될 것 같은 저 청자 궁전을 향해 걸어갔다.   성냥과 장뇌   우리가 청자 궁전 바로 옆에까지 간 것은 오정 가까운 때였다. 거기엔 사람이 사는 것 같은 기미는 없고 무너진 곳이 많았다. 창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남아있을 뿐이고, 녹이 슨 금속 창문 가에서는 벗겨진 커다란 녹색 타일이 떨어져 있었다. 건물은 낮은 풀 언덕에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동북 끝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현재의 윈드워스나 바타시로 생각되는 근처에 강물이 휘어져 굽어 들어 간 곳이 매우 깊은 것을 본 것이다. 나는 퍼뜩, 그 생각은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바다의 생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궁전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걸 짓는데 사용한 재료는 도자기였는데, 표면에 무언지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위너 보고 읽어보라고 하다가, 위너의 머리에는 글자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실제 이상으로 지금 사람들과 같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그녀의 애정이 아주 인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 문 안쪽에는, 그 문은 부서져서 열린 그대로 였는데, 보통 홀이 아니고 많은 창문으로 햇볕이 잘 비쳐 드는 긴 진열실로 되어 있었다. 나는 데번의 박물관을 생각했다. 타일을 깐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였고, 죽 늘어놓은 진열품 위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다. 홀 한복판에는 이상하게 무시무시한 물건이 서 있었는데 그건 거대한 동물의 해골의 아랫부분 같았다. 구부러진 발로 보아 금룡(중생대에 번영했던 공룡의 일종)과 마찬가지로 이미 멸망해 버린 동물의 뼈란 걸 알았다. 두개골과 윗부분은 두꺼운 먼지를 쓴 채 그 옆에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 지붕이 새어 빗물을 맞아서인지 그 뼈는 허물어져 있었다. 진열실 안쪽에는 검룡(중생대에 번영했던 공룡의 일종)의 거대한 뼈가 놓여 있었다. 내가 이 곳을 박물관이라 생각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홀 옆쪽에는 기울어진 선반 같은 것이 있었는데 두꺼운 먼지를 털고 보니 현대의 진열대였다. 그리나 그 속의 물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진열대는 밀폐되어 기체가 통하지 못하게 되 있었음이 확실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확실히 현대보다 얼마 뒤에 세워진 박물관의 폐허였다. 그리고 이곳은 고생물 실로 예전에는 훌륭한 화석의 표본들이 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막을 길이 없는 부식의 자취를 어느 표본에서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박테리아와 곰팡이가 전멸하고 없으므로 썩는 힘은 옛날의 1퍼센트 정도로 약해져서 부식의 속도도 느렸을 것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보물들에는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저기에 진귀한 화석들이 부서졌거나, 갈대로 만든 실로 붙들려 매여 있거나 하는 것을 보면 작은 이들이 손을 댄 것 같았다. 또 어느 곳에는 진열대까지 이동되어 있었다. 몰록의 짓이리라 생각되기도 했다. 그 곳은 참으로 고요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기 때문에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위너는 진열대를 보고 놀고 있다가 내게로 다가와서, 가만히 내 손을 잡고 곁에 서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 인류가 현명했던 시대의 기념품에 너무나 놀라 그것을 이용할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타임 머신에 대한 것조차 잠시 머리에서 멀어져 버렸던 것이다. 건물의 크기에서 보아, 이 청자 궁전에는 고대 생물실 외에도 여러 개의 방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역사실과 아니 도서실도 있을지 모른다. 그건 나에게 있어, 적어도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는, 고대 지질학의 다 부서진 진열품 따위보다 훨씬 흥미 있는 것이었다. 조사해 본 결과 또 하나 작은 진열실이 첫째 방과 직각으로 붙어 있음을 알았다. 그곳은 광물실인 듯, 나는 유황 덩어리에서 화약을 만들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초석이나 초산칼륨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필시 오랜 옛날에 녹아 없어진 것이리라. 그래도 유황을 잊어버릴 수 없어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진열실에 있던 물건은 내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나는 광물학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서 첫째 방과 평행으로 가고 있는 몹시 망가진 복도를 걸어봤다. 그곳은 동식물학의 진열실로 되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 진열품도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되어 있었다. 동물의 박제 표본의 흔적인 듯한 쭈그러진 검은 것이 세 개, 전에는 알코올이 들었을 것 같은 병 속의 말라빠진 미라, 부서져서 갈색 먼지 같이 되어버린 식물 등 그런 것뿐이었다. 조금 후 우리들은 굉장히 큰 진열실로 들어갔다. 이 방은 몹시 채광이 나빴고 마룻바닥은 내가 들어선 곳에서부터 서서히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천장 여기저기에 허연 공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는데, 대개가 금이 갔거나 깨진 것들이었다. 이 방은 인공적으로 조명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나는 얼마쯤 생기가 났다. 그건 내가 서 있는 양쪽에는 커다란 기계가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몹시 녹이 슬었고 부서져 있었지만 그 중에는 아직 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몇 있었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기계에는 홀딱 빠지는 터라 잠시 돌아다니며 관찰을 하기로 했다. 대개의 기계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고 도대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 몰록들을 공격하는데 소용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위너가 내 곁에 바싹 다가왔다. 너무도 갑자기 그라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았다. 만일 위너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방바닥이 기울어져 있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방바닥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박물관이 언덕 비탈을 파고 거기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들어간 방의 한쪽 끝은 완전히 땅 위에 나와 있어서 조금 밖에 안 되는 좁은 창문으로 밖의 광선이 숨어 들어왔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면이 높아져서 창문을 막고, 끝에서는 창문 위쪽에서 약간의 광선이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그 기계들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갔는데 너무나 기계에 정신을 빼앗겨 차차 광선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위너가 몹시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비로소 그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방의 차일 안쪽은 캄캄했다. 나는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지는 조금 적었고, 먼지의 표면이 일정하지 않았다. 다시 그 안쪽 어두운 곳을 보니, 먼지 위에 조그만 발자국이 많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나는 이제라도 몰록들이 오지 않을까 불안해졌다. 기계 같은 걸 관찰한답시고 엉뚱하게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후도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무기도, 숨을 곳도, 불을 일으킬 만한 것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방구석 쪽 어둠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전에 우물 밑에서 들은 것 같은 괴상한 소리였다. 나는 위너의 손을 붙잡았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나서, 그녀를 그 곳에 남겨 놓고 어떤 기계 있는 데로 갔다. 그 기계에는 철도 신호소에 있는 지렛대 같은 레버가 쑥 내밀어져 있었다. 나는 기계로 기어올라가 두 손으로 그걸 잡고 힘껏 옆으로 잡아당겼다. 중앙 통로에 혼자 내버려진 위너는 돌연 울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레버는 1분간쯤 잡아당기니까 툭 부러졌다. 몰록의 머리통은 간단히 깨뜨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묵직한 쇠뭉치를 들고 위너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정말 그놈들을 죽여주고 싶었다. 제 자손을 죽이다니, 꽤도 야만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놈들에게 대해서 인간답게 대해 주라고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러나, 위너를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게다가 그놈들을 죽이면 타임 머신을 부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므로 방 안쪽에 있는 몰록을 죽이러 가는 일은 그만 두기로 했다. 한 손에 레버를 들고, 한 팔에는 위너를 안고 그 방을 나와 다른 큰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처음 봤을 때는 누더기 같이 날은 군기가 걸린 군대의 교회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방 양편에 걸려 있는 갈색 누더기 같아 보인 것은 썩어 가는 책의 잔해였던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흩어져서 글자는 전부 다 문드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곳곳에 뒤틀린 종이와 부서진 철사들이 남아 있어서, 이 갈색의 누더기 같은 것은 옛날엔 책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만약 내가 문학자였더라면, 그것들에서 문학적 야심의 허무함을 통감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슴 깊이 느낀 것은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이 헛되이 쓰여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썩은 종이의 산더미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그 때 내가 생각한 것은 런던 왕립 학회 회보와 거기에 실은 광학에 관한 나의 열 일곱 건의 논문에 관한 일이었다. 그 다음엔 넓은 계단을 올라가 응용 과학실이었을 것 같은 곳으로 갔다. 나는 여기서 무엇이든지 소용될 물건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고 크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천장 한쪽 구석이 무너져 내린 외에는 이 진열실은 제법 본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부서지지 않은 진열대를 남김없이 들여다보며 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 밀폐된 진열대에서 한 통의 성냥을 발견했다. 가슴이 마구 떨었다. 성냥을 꺼내 그어 보았다. 성냥은 완전히 쓸 수 있었다. 나는 위너를 향해, "춤을 추자.“ 라고 그녀가 하는 말로 소리쳤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무서운 적을 상대하여 싸울 무기가 간신히 손에 들어 온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그 황폐해진 박물관의 두텁고 보드라운 먼지의 융단 위에서 위너를 크게 즐겁게 해 주었다. 나는 되도록 명랑하게 휘파람을 불며 아주 재미있게 일종의 혼합 댄스를 추어 보였다. 그건 일부분은 고상한 왈츠 컨트리 댄스이고, 일부분은 스키핑 스텝 (나는 연미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잘 출 수가 없었지만), 일부분은 즉흥적인 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하여도 이 한 통의 성냥이 그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에 무사히 남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정말 다행한 일이었지만...... 더구나 정말 이상한 것은 내가 훨씬 더 뜻하지 않은 물건을 발견한 일이다. 뜻밖에도 그것은 장뇌 (색이 없고 반투명의 광택이 있으며 특이한 향기가 나는 물질로 화약이나 방충제 등의 제조에 쓰임)였다. 그건 밀봉된 병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걸 파라핀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병을 깨어 보았다. 그런데 틀림없는 장뇌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모든 것이 썩어버린 가운데서, 이 휘발성 물질만이 아마도 몇 천 세기 동안 보존되어 온 것이었다. 나는 장뇌를 내던져 버리려다가, 퍼뜩 장뇌는 잘 타며 탈 때는 밝은 불꽃을 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장뇌는 훌륭히 양초의 구실을 할 것이다. 그래 나는 그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저 청동의 쇠문을 깨뜨리는데 쓰일 만한 화약이나 도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까지에 가장 소용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저 쇠몽둥이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용기를 얻어 그 진열실을 나온 것이었다. 그 기나긴 오후의 일을 남김없이 다 얘기할 수는 없다. 내가 조사하며 돌아다닌 곳을 차례대로 생각해 내기에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정도니까. 나는 여러 가지 무기를 놓은 녹슨 진열대가 줄지어 있는 긴 진열실의 일을 기억하고있다. 거기서 나는 쇠몽둥이 대신 도끼나 칼을 가질까 하고 한동안 망설였었다. 두 가지 다 가질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청동의 문을 비틀어 열기에는 쇠몽둥이가 편리할 것 같았다. 거기에는 많은 총과 권총도 있었다. 대개 녹이 잔뜩 슬어 있었지만, 그 중에는 별난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조금도 녹이 슬지 않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옛날에는 화약도 있었겠지만 완전히 썩어 먼지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방 한 구석이 꺼멓게 그을려 부서져 있는 것은 아마 표본 중에 어떤 것이 폭발을 한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다른 방에는 인형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폴리네시아, 멕시코, 그리스, 페니키아 등 내가 알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인형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고 있을 수가 없어 특별히 맘에 드는 남아메리카 원산의 활석(곱돌)으로 만들어진 괴물의 코에다 내 이름을 새겨 넣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자 나의 흥미는 식어져 갔다. 그래도 진열실에서 진열실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 두지 못했다. 그곳은 모두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었으며 어떤 곳은 무너져 내려앉아 있었다. 진열품 중에는 녹으로만 남은 것과 이탄(탄화의 정도가 낮은 석탄)의 산더미로 돼 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어느 정도의 본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 나는 주석 광산의 모형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진열대 속에 두 개의 다이너마이트가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버럭 소리쳤다. "있었다. 있었어!“ 그리고는 반가운 마음으로 상자를 깨뜨렸다. 그러나,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옆에 있는 작은 진열실을 선택해서 거기서 시험을 해 보기로 작정했다. 이 때처럼 낙심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5분, 10분, 15분........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이너마이트는 모형이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가짜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스핑크스나 청동의 쇠문도 날려버렸을 것이 틀림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타임 머신을 발견할 기회도, 이건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무엇이나 다 날려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 뒤였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박물관 속의 조그만 가운데 뜰로 갔다. 그곳은 잔디밭으로 되어 있었고 세 그루의 과일나무가 서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과일을 따서 배를 채웠다. 차차 밤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몰록들이 가까이 오지 못할 곳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몰록들을 방어하기에 제일 좋은 무기, 즉 성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일 불꽃이 필요하다면 호주머니 속에 장뇌가 들어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넓은 장소에서 불을 피우면서 밤을 새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타임 머신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거기 필요한 연장으로서 나는 지금 쇠몽둥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됨에 따라 저 청동 문짝을 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그 문을 억지로 열기를 삼가고 있었다. 문짝 안 쪽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짝은 그리 튼튼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쇠몽둥이도 아주 소용없는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타오르는 불   우리는 아직 해가 지평선 위에 남아 있을 즈음에 박물관을 나왔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핑크스가 있는 곳에 도착 할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 어둡기 전에 어젯밤에 길이 막혀 머물렀던 숲을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나의 계획은 그날 밤 안에 되도록 멀리 가서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빛에 의지해서 하룻밤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걸어가면서도 눈에 띄는 작은 가지와 마른풀들을 주워 모았다. 이내 내 팔에는 그런 것들이 한아름이나 되었다. 이런 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걸음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느렸다. 게다가 위니는 피로에 지쳐 있었다. 물론 나도 졸려 못 견딜 지경이었다. 아직 숲에 닿기도 전에 이미 밤이 되었다. 숲에서 가까운 덤불로 뒤덮인 언덕 위에 이르자, 위너는 캄캄한 숲을 무서워하여 도무지 걸으려고 하질 않았다. 나도 위험이 임박해 있음을 느꼈다. 다른 때 같으면 더 나아가지 않았을 것인데도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게 되었다. 나는 하룻밤과 이틀 동안 전혀 잠을 자지 못했다. 열이 나고 마음이 초조했다. 졸음이 엄습해 오는 것과 잠이 들면 몰록들이 습격해 온다는 것을 걱정했다. 어름어름하고 있는 동안에 뒤쪽의 컴컴한 달빛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셋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들 주위에는 덤불과 키가 큰 풀이 나 있을 뿐이었다. 놈이 살그머니 다가오는 날에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나의 계산으로는 숲의 너비는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숲을 빠져나가 아무 것도 나 있지 않은 언덕 중턱에 이르기만 하면 좀 더 안전하게 숨을 곳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성냥과 장뇌로 길을 비추면서 숲을 빠져나갈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러나, 성냥불을 켜들고 가려면 땔나무들은 가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것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때 문득 이 나무에 불을 붙여 뒤쪽에 있는 몰록들을 놀라게 해 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방법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나, 그 때는 우리들의 나아갈 길을 지키기에는 아주 적합한 방법으로 여겨졌었다. 자네들은 모르겠지, 그러나 인류가 살지 않는 온화한 기후의 땅에서는 불꽃이란 것은 정말 희귀한 것이었다. 태양과 열은 물건을 태울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지는 일은 거의 없다. 하기야 열대 지방에서는 이슬방울이 볼록 렌즈체 구실을 해서 태양의 빛을 모아 불이 일어나는 일이 가끔 있는 모양이며, 벼락이 떨어져서 물건을 태우는 일은 있어도 그것으로 불이 번져 타는 일은 좀처럼 없다. 식물이 썩어서 그 발효열로 뜨는 일은 때때로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불이 붙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미래 세계에는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전부 잊어버리고 있었다. 위너에게는 땔감의 나무더미를 핥고 있는 붉은 불꽃의 혓바닥은 정말 처음 보는 이상한 것이었다. 위너는 불꽃 옆으로 달려가서 그걸 손으로 만져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필시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위너를 붙잡아 발버둥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녀를 안고 앞쪽 숲 속으로 기운차게 걸어 들어갔다. 모닥불의 불빛은 한동안 우리의 앞길을 비쳐 주었다. 얼마 후 뒤돌아보니 얹히어 있는 나뭇가지 틈으로 아까 그 모닥불이 근처 숲에 옮아 붙어 나가는 게 보였다. 그 불은 반원을 그리며 언덕의 풀을 태우고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불을 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아갈 쪽의 시커먼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근처는 캄캄했다. 위너는 내게 꼭 매달려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까 나무에 부딪치지 않고 걸어 갈 수가 있었다. 머리 위에는 캄캄한 어둠이 뒤덮여 있었으나 곳곳에 틈이 있어 거기로 검푸른 먼 밤하늘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 팔에는 위너를 안았고, 한 손에는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으므로 성냥을 그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발아래서 잔가지가 꺾이는 소리와 머리 위를 불어 가는 은은한 바람 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때 주위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냥 걸어가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소리는 점점 또렷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전에 지하 세계에서 들은 것 같은 기묘한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 왔다. 확실히 몇 사람의 몰록이 숨어 있다가 나를 습격하려고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과연 1분쯤 지나자 어떤 놈이 내 웃옷을 잡아당기며 팔을 스쳤다. 위너는 무섭게 몸을 떨며 입을 꼭 다물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때야말로 성냥을 그을 때였다. 그러나 성냥을 꺼내려면 위너를 내려놓아야 했다. 나는 위너를 땅에 내려 두고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런 사이에 내 무릎 근처의 어둠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위너는 도무지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몰록들은 그 기묘한 비둘기 울음소리 같은 꾸꾸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드럽고 작은 손이 내 웃옷과 잔등에 기어올라와서 목을 건드렸다. 이때서야 비로소 나는 성냥을 그어 착하고 불을 켰다. 나는 성냥불을 들고 내둘렀다. 몰록들의 허연 등어리가 나무 숲 속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장뇌덩이를 꺼내어 성냥이 꺼지려 할 때 곧 이것에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나서 위너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내 다리를 끌어 잡은 채 땅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허리를 굽혀 위너를 들여다봤다. 위너는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 듯이 보였다. 나는 장뇌덩이에 불을 붙여 땅바닥에 내던졌다. 장뇌는 활활 타오르면서 마침내 몰록들과 어둠을 쫓아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위너를 안아 올렸다. 주위의 숲은 많은 몰록들의 떠드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위너는 그만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어깨에 올려 앉히고 일으켜서 걸어 가려고 했는데 이때 갑자기 무서운 일이 생각났다. 성냥을 긋고 위너를 도와주고 하는 동안에 나는 몇 번이나 몸의 방향이 변해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건지 전혀 방향을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다시 청자 궁전 쪽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서 진땀이 솟아 나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빨리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숙을 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나는 풀숲에 있는 나무 그루에 아직도 꼼짝 못하고 있는 위너를 기대 앉혀 놓았다. 그리고는 장뇌의 덩이가 다 타 없어지기 전에 빠른 몸짓으로 나뭇가지와 마른 잎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몰록의 눈들이 붉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장뇌의 불은 깜빡거리다간 꺼져 버렸다. 나는 성냥을 그었다. 그 순간 위너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던 두 사람의 몰록이 놀라 물러났다. 한 사람은 불빛이 눈이 부시어 똑바로 내게로 달려든다. 나는 주먹으로 그놈을 후려갈겼다. 머리뼈가 으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놈은 죽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나는 또 한 덩이의 장뇌에 불을 붙이고는 모닥불을 지필 나뭇가지를 모았다. 그때는 순간 머리 위에 있는 나무가 말라죽은 나무란 걸 알았다.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와서부터 약 1주일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그 나무는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낙엽과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그만두고 그 나무에 올라가서 가지를 꺾기 시작했다. 이제는 숲 속에 매운 연기를 올리며 모닥불이 활활 타서 장뇌덩이는 태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나는 쇠몽둥이 옆에 쓰러져 있는 위너에게 다가가서, 어떻게든 그분의 맘을 돌리게 하려 했으나 위너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지 어떤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때 모닥불 연기가 우리 쪽으로 불어와서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더구나 근처에는 온통 장뇌의 증기가 꽉 차 있었다. 모닥불은 앞으로 한 시간 가량 나무를 넣지 않아도 견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지친 뒤라 온몸이 나른해져서 주저앉았다. 숲 속은 무언지 모르게 졸음을 부르는 것 같은 은은한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사방은 캄캄한데 몰록들의 손이 나를 휘어잡고 있었다. 나는 놈들의 끈적끈적한 듯한 손가락을 뿌리치고 호주머니 속의 성냥을 찾았다. 성냥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몰록들은 다시 와서 나를 휘어잡았다. 그제야 나는 어째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깨달았다. 내가 졸고 있는 틈에 모닥불이 꺼져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숲 속에는 나무 타는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목과 머리카락과 어깨를 붙잡혀 당장이라도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 흐물흐물한 생물들에게 붙잡혀 있다는 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나쁘고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커다란 거미줄에 걸려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드디어 기운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조그마한 이빨이 목덜미를 물어뜯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엎치락뒤치락하여 이리저리 굴렀다. 그런 사이에 내 손이 쇠몽둥이에 닿았다. 그 순간 갑자기 기운이 솟아올랐다. 나는 발버둥치며 일어나서 그 쥐새끼 같은 몰록들을 뿌리쳐 버렸다. 그리고는 쇠몽둥이를 바로잡고 그 놈들의 머리가 있음직한 곳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살과 피가 퍽퍽 터지는 것이 느껴지더니 내 몸은 자유로워졌다. 격렬한 싸움 끝에 흔히 느껴지는 그 기묘한 기백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나는 이미 내 목숨이나 위너의 목숨도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 그렇게 될 바엔 놈들의 몸뚱이로 그 값을 치르게 해 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큰 나무를 뒤로하고 서서 쇠몽둥이를 내둘렀다. 숲 속엔 어디에나 그 놈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소리는 흥분된 나머지 한결 더 높아지고 뛰어다니는 소리도 한층 더 빨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놈도 내 팔이 닿는 곳으로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나는 어둠 속을 쏘아보며 서 있어야 했다. 이 때 갑자기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놈들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다면?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캄캄하던 어둠의 세상이 갑자기 밝아온 것이었다. 내 근처에 있던 몰록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 근처에 있던 세 사람의 몰록이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몰록들이 도망을 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흐르는 물처럼 내 뒤에서 앞쪽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몰록들의 잔등이가 허옇게 보이지 않고 벌겋게 보였다. 어리둥절해서 보고 있으려니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이 아닌 불똥들이 날아가다가는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였다. 숲 속에 나무 타는 냄새가 가득 차고 아까 까지 들리던 졸음겨운 소리가 굉장히 큰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몰록이 왜 도망치고 있는지 그제야 그 까닭을 알았다. 나는 의지하고 있던 나무에서 앞으로 나와 뒤돌아보았다.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불타고 있는 숲의 불길이 보였다. 우리가 맨 처음 보았던 모닥불이 산불로 번져 우리를 뒤쫓아 온 것이었다. 나는 그 불빛으로 위너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생나무 타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나는 침착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쇠몽둥이에를 쥐고 몰록들을 뒤쫓아갔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달음박질이었다. 한 번은 들고 가는 불이 꺼져 가는 걸 보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몰록들을 피해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좀 환히 트인 빈 땅에 이르렀다. 그 때 한 녀석의 몰록이 비틀거리며 내 곁으로 와서 나를 스쳐 지나더니 곧바로 불 속으로 달려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참으로 흉한 광경을 보아야 했다. 그것은 이 미래 세계에 와서 본 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광경이었다. 불길은 점점 건너편 숲에도 옮아가서 벌써 노란 색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빈터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언덕 중턱에 3, 4십 명과 몰록들이 있었다. 그들은 밝은 불빛과 열에 눈이 부시어 갈팡질팡 헤매다 서로 부딪쳐 넘어지며 야단법석을 치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그들의 눈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된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면 엉겁결에 쇠몽둥이로 후려쳤었다. 한 녀석을 죽였고 여러 녀석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시뻘건 하늘을 뒤로 아가위나무 덤불 밑을 손으로 더듬으며 헤매고 있는 한 몰록의 모습을 보고, 그의 신음 소리를 들으니 그들이 이 불로 해서 꼼짝할 수 없게 된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후려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때때로 내가 있는 데로 비틀거리면서 오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비켜 주곤 했다. 산불이 약간 수그러진다. 나는 놈들이 나를 알아보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걱정이 됐다. 그래서 미리 녀석들을 몇 명쯤 때려 눕혀 줄까 하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불이 다시 되살아 올라 활활 탔으므로 나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꾸욱 눌렀다. 나는 몰록들을 피하여 언덕 둘레를 돌아다니며 위너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위너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언덕 꼭대기에 주저앉아 그 장님 같은 기묘한 몰록의 무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손으로 더듬으며 우왕좌왕 하다가 불이 가까이 다가오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소용돌이치며 치솟는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고 그 벌겋게 물든 하늘 사이사이로 마치 딴 세상같이 멀리 작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서너 명의 몰록이 허우적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주먹으로 갈겨 주며 쫓아버렸다. 그날 밤 동안, 나는 이건 꿈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꿈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어도 보고 큰 소리를 질러도 보았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쳐보기도 하고 또 앉았다 섰다 해 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돌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비비며 제발 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빌기도 했다. 나는 세 번이나 몰록들이 괴로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았다. 그러나, 드디어 간신히 기세가 죽어 가는 불길 위에도, 흘러가는 검은 연기 뒤에도, 희어졌다 검었다 하는 나무 위에도, 얼마 남지 않은 몰록들의 어리둥절히는 모습 위에도, 그리고 완전히 지친 나에게도 아침의 환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위너를 찾아 다녀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끝내 찾을 수가 얹었다. 몰록들은 그녀의 자그마한 몸뚱이를 납치해 가다가 숲 속에 버리고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위너가 몰록들의 먹이가 된다는 그 무서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내 근방에 있는 그 아무런 힘도 없는 괴물들을 몰살시켜 버리려는 충동이 일어났지만 끝내 참아 버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언덕은 숲 속의 작은 섬처럼 솟아 있었다. 꼭대기에서는 연기를 통해 청자 궁전이 보였다. 이것으로 허연 스핑크스가 있는 곳의 방향도 짐작이 갔다. 근처가 더 밝아지자, 나는 풀로 발을 싸매고 절뚝거리며 아직 연기를 내고 있는 잿더미와 부서져 타고 있는 시꺼매진 나무들을 밟으며 타임 머신이 숨겨져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절뚝거리고 있었고 또 몹시 피로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여운 위너의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위너를 잃어버린 일은 최대의 불행이라 생각되었다. 지금 이 방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위너를 잃은 슬픔도 꿈속처럼 느껴지지만, 그 날 아침 나는 다시 외로운, 완전히 외로운 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밝은 아침 하늘 아래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던 잿더미를 헤치며 걷고 있는 중에 나는 갑자기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내 바지 주머니에는 아직 몇 개비의 성냥이 어질러져 있었다. 성냥갑이 없어질 때 갑에서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열린 스핑크스의 받침대   아침 여덟 시에서 아홉 시쯤 나는 그 누런 쇠 걸상이 있는 곳으로 왔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한 저녁에 나는 여기서 사방을 둘러봤던 것이다. 그 때의 나의 조급한 결단을 생각하고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의 풍경은 그 때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짙은 초록의 덤불도, 훌륭한 궁전도, 장대한 폐허도, 푸른 양쪽 언덕 사이로 흐르고 있는 은빛 강물도 모두 그날 그때 그대로였다. 수목 사이로 수려한 의복을 걸친 미래인들이 여기저기에 오가고 있었다. 내가 위너를 구해 준 그 곳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걸 보자 나는 다시금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지하 세계로 통한 굴을 덮고 있는 둥근 지붕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이제 와서는 저 지상 세계의 인간들의 즐거운 생활, 그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를 또렷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즐거워 보였다. 마치 들판에서 놀고 있는 양처럼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양처럼 적을 알지도 못하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준비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죽을 때도 바로 양과 같았다. 나는 인간의 지혜가 그려 놓은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던가를 슬프게 생각했다. 인간은 바로 자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인간은 즐겁고 여유 있는 생활을 찾아 열심히 노력해 왔다. 영원히 안정된 평화의 세계라는 걸 목표로 해서 노력한 결과 드디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한 번은 인류의 생명과 재산이 거의 완전하게 지켜진 때가 정녕 있었을 것이다. 부자는 그의 재물과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었고, 노동자는 생활과 일이 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세계에서는 실업 문제나 사회 문제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평온한 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지혜의 힘은 환경의 변화와 위험과 곤란에 의해 높아진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만 우리는 곧잘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환경과 조화된 동물은 기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습관과 본능으로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는 동안은 지혜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또 변화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곤란과 위험에 둘러싸여 있는 동물만이 필요에 의해 자연 지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본 바에는 이렇게 지상 세계의 인간은 무기력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지하 세계는 오로지 기계적인 생산의 장소로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도 영구히는 계속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하 세계로 가는 식량 공급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되지 않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몇 천 년 동안이나 잊고 있던 굶주림이 다시 지하 세계에 찾아온 것이다. 지하의 인간들은 기계를 맡고 있었다. 이 기계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습관 만으로서는 움직일 수 없고 얼마간의 지혜를 필요로 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인간적인 성질로서는 어느 지상인 보다도 뒤떨어졌지만 독창력에 있어서는 지상인 보다 우월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다른 고기가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자,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금해져 오던 것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서기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에서 본 그 끔찍한 일을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었기에 자네들에게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이 며칠 동안의 피로와 흥분과 불안으로 해서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고, 게다가 가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거기 앉아서 그 조촐한 풍경과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너무나 고단해서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꾸뻑꾸뻑 졸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 한숨 자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잔디밭에 누워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가 지기 바로 조금 전에 나는 눈을 떴다. 이젠 선잠을 자다가 몰록들에게 붙들릴 염려는 없었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언덕을 내려 흰 스핑크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 손은 쇠몽둥이를 들고 또 한 손은 호주머니 속의 성냥개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 있었다. 스핑크스 근처로 가 보니 청동 문짝이 열려 있는 것이었다. 문짝은 아래 쪽 수채 속에까지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볼까 어쩔까 망설이며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속에는 조그만 방이 있었고, 그 구석 좀 높은 곳에 타임 머신이 놓여져 있었다. 내 호주머니 속에는 타임 머신을 동작시키는 조그만 레버가 들어 있었다. 나는 흰 스핑크스를 점령해 버리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깨끗이 열려 있는 것이었다. 나는 쇠몽둥이를 내던졌다. 그걸 써 보지 못한 것이 약간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구를 향해 몸을 굽히다가 퍼뜩 이번에야말로 몰록들의 속셈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청동 문틀을 넘어 타임 머신 쪽으로 들어갔다. 타임 머신은 놀랍게도 정성껏 기름을 치고 걸레질을 잘 해 놓은 상태였다. 어쩌면 몰록들이 이 기계의 용도를 알려고 일부러 분해를 해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타임 머신을 조사해 보았다. 내가 고안해서 만든 기계에 오랜만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이 때, 혹시나 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청동 문짝이 갑자기 슬슬 올라오더니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 버린 것이었다. 완전히 캄캄해졌다. 나는 결국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적어도 몰록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몰록들이 킥킥 웃으며 모여드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성냥을 그으려 했다. 아까는 레버를 기계에 꽂아 아무 미련 없이 귀신이 사라지듯 사라져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하찮은 일을 잊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성냥은 곽이 없이는 불을 일으킬 수 없는 그런 성냥이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네들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그 조그만 괴물들은 벌써 내 곁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녀석이 내 몸을 건드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레버를 휘둘러 그 놈들을 후려치면서 타임 머신의 좌석에 올라앉으려 했다. 또 다른 손 하나가 계속하여 나를 휘어잡았다. 나는 끈질기게 레버를 뺏으려고 하는 그들의 손을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한 손으로 레버를 꽂을 구멍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레버 한 개를 뺏길 뻔했다. 레버가 내 손에서 떨어지려 했을 때 나는 내 머리로 어둠 속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상대의 두개골이 우지직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렀다. 이리하여 나는 가까스로 레버를 되찾은 것이었다. 이 최후의 싸움은 숲 속에서의 싸움보다도 훨씬 치열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나는 레버를 제자리에 꽂고 쓱 잡아당겼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그 앞에서 어둠이 사라져 갔다. 이렇게 하여 나는 다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회색 빛의 소용돌이 속에 맴돌아 들어간 것이었다.   괴물 게의 해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타임 머신의 여행은 구역질과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좌석에 똑바로 앉지 못하여 비뚤어진 불안정한 자세였다. 얼마 정도의 동안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마구 흔들리는 기계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디를 향해 날아가는 것인지도 몰랐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이얼을 보니 놀라운 일이었다. 엉뚱한 곳에 와 있었던 것이었다. 제 1의 다이얼은 1일 단위의 눈금이다. 제 2의 다이얼은 1000일 단위, 제 3의 다이얼은 100만 일 단위, 제 4의 다이얼은 10억 일 단위의 눈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과거를 향해 레버를 끌어당겨야 할 것을 미래를 향해 당겨 버린 것이다. 다이얼을 보았을 때 벌써 1000일 단위의 바늘이 시계의 초침 같은 속도로 빙빙 돌아가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 중에는 사방의 광경은 기묘하게 변해 왔다. 번쩍번쩍 흔들리고 있던 빛이 점점 어두워져 왔다. 그런데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는데도, 나는 낮과 밤의 교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타임 머신의 속도가 느려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낮과 밤의 교대는 아주 또렷해져 갔다. 나는 처음 그것을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낮과 밤의 속도는 점점 느려져서, 태양이 하늘을 건너가는 속도도 늦어졌다. 그리고 나중엔 낮과 밤이 한 번 바뀌는데 몇 세기나 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지구는 으스름한 빛 속에 휩싸여 버렸다. 이 으스름한 빛은 때로 희미한 어둠과 하늘을 지나가는 혜성의 빛으로 지워지는 정도였다. 태양을 나타내고 있던 빛의 띠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태양은 지지 않게 되어 다만 서쪽 하늘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할뿐이었다. 그리고 전보다 크고 붉은 색이 짙어져 갔다. 달이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별들이 도는 속도도 점점 느려져서 이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빛의 점처럼 되어 버렸다. 드디어 그 새빨간, 엄청나게 큰 태양도 내가 타임 머신을 정지시킬 직전에는 수평선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게 됐다. 그건 둔한 열을 가진 거대한 돔 같이 되어, 가끔 약간 꺼져 가는 것처럼 껌벅거렸다. 어쩌다 한 번 태양은 다시 환히 밝아지더니 곧 다시 둔한 붉은 색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다 내렸다 하는 속도가 느려진데서 인력의 활동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구는 이미 태양에게 한쪽 면만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재 달이 지구에게 언제나 같은 면만 향해 있듯이........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타임 머신을 정지시키려 했다. 요전에는 갑자기 정지시키다가 머리부터 냅다 내던져졌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다이얼의 바늘이 움직이는 정도가 점점 느려져서 이윽고 1000만 단위의 바늘은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1일 단위의 바늘의 움직임도 상당히 느껴져서 나는 얼떨떨하던 기분에서 많이 회복되었다. 속도가 더욱 떨어지더니 이윽고 황폐한 바닷가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극히 조용히 타임 머신을 정지시키고 좌석에 앉은 채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이미 푸르지 않았다. 북동쪽은 잉크 빛처럼 검고 그 속에 푸르스름한 별이 깜박거리지도 않고 빛나고 있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진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별도 보이지 않았으나 남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붉은 빛깔이 더 짙어져서 불타는 것처럼 보였는데, 거기 커다란 태양이 지평선에 일부분 잠긴 채 빨간 모습으로 멈춰 있었다. 근처의 바위들은 몹시 야단스런 홍색인데 거기서 처음에 눈에 뜨인 생물은 짙은 녹색의 식물이었다. 그것들은 남동쪽을 향한 바위의 불쑥 내민 곳에 빽빽이 들어 붙어 있었다. 그 초록색은 숲에 있는 이끼와 동굴 속의 지의초처럼 짙은 녹색이었다. 이곳에 나 있는 것들은 일 년 내내 어둠침침한 곳에서 사는 식물이었던 것이다. 타임 머신은 바닷가의 평평한 비탈에 서 있었다. 바다는 남동쪽을 향해 넓어지고 음산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밝고 선명한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해변을 씻어 주는 물결도 없었고, 바다는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다만 평온한 숨결 같은 약한 물결이 바다를 부풀게 해서 이 영원의 바다가 아직은 겨우 살아 있음을 알게 해 줄 뿐이었다. 가끔 파도가 쳐 오는 해안선을 따라 두꺼운 소금기 층이 져 있었는데 그것이 하늘의 빨간빛을 반사하여 연분홍색으로 보였다. 나는 머리가 무겁고 호흡도 많이 틀려진 걸 느꼈다. 그 느낌에서 나는 언젠가 산에 올라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공기 중의 산소가 현재보다 희박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폐하고 비탈진 땅 저편 하늘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엄청나게 큰 흰나비 같이 생긴 것이 옆으로 날개를 나울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얕은 산그늘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 소리는 몹시도 기분 나쁜 것이어서 나는 오싹해지며 몸이 떨렸다. 그리고는 좌석에 꼭 달라붙었다. 다시 한 번 사방을 들러보니 바로 옆에 이제까지는 불은 바위덩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뭉그적뭉그적 이쪽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게 모양을 한 괴물이었다. 상상이 되는가? 이 테이블보다 커다란 게란 것이 말일세. 그 놈은 많은 다리를 굼실굼실 움직이며, 커다란 가위를 흔들며, 마차를 모는 마부의 채찍같이 길다란 더듬이를 움직여 주위를 더듬으며 쇠붙이 같은 얼굴 양쪽에 쑥 튀어나온 눈으로 물끄러미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등에는 주름이 잡혀 보기 흉한 흑이 가득 붙었고, 곳곳에 연둣빛 어린 딱지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다. 복잡하게 생긴 입 근처에는 많은 촉수가 나 있어서, 게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흔들 거리며 근처를 더듬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내가 있는 곳으로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노란 눈으로 보고 있을 때 나는 파리라도 앉은 듯 내 볼이 근질근질하는 걸 느꼈다. 나는 손으로 쓸어 보았으나 금시 또 근지러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귓불까지 근질거렸다. 나는 철썩 근지러운 곳을 쳤다. 그러나 무슨 실같은 것이 손에 닿았으나 미끈거리면서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내 바로 뒤에 또 한 마리의 괴물 게가 있었다. 그놈의 더듬이를 내가 만진 것이었다. 나는 심술스럽게 툭 튀어나온 눈을 껌뻑이며 무얼 먹고 싶은 듯이 입을 벌름거리며 물풀이 붙은 커다란 가위를 쳐들고 내게 덤벼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곧 레버를 잡고 타임 머신을 한 발쯤 앞으로 나아가게 해서 이 괴물들에게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나는 역시 같은 그 바닷가에 있었다. 기계가 정지하자 바로 또 괴물의 게들이 보였다. 어둠침침한 속에 짙은 초록빛 이끼 사이로 수십 마리의 괴물 게들이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세계의 극도로 황폐해진 모습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동쪽의 붉은 하늘과 북쪽의 검은 하늘, 죽은 것 같은 바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바위투성이의 해변, 돌 거죽에 독기가 있어 보이는 초록색 이끼, 숨을 쉬기도 괴로운 엷은 공기 등이 모두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도록 무서운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나는 다시 100년 정도 앞으로 타임 머신을 나아가게 했다. 그 곳도 역시 새빨간 태양이 얼마쯤 더 크고 또 흐리멍덩해 보였다. 죽은 듯한 바다도, 싸늘한 공기도 모두 한가지였다. 초록색 이끼와 붉은 바위틈에는 역시 기분 나쁜 게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커다란 초생달 같은 창백한 곡선이 보였다. 나는 1,000년 가량씩 타임 머신을 정지시켜 가며, 지구의 불가사의한 운명에 이끌려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서 태양이 점점 커지고 점점 흐릿해져 가는 것과, 오래된 지구의 생물들이 차차 사라져 가는 것을 넋을 잃고 관찰하고 있었다. 드디어 3천만 년 이상 앞의 세계까지 가자 커다란 태양은 어두운 하늘의 10분의 1 가까이 뒤덮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타임 머신을 정지시켰다. 거기서는 우글우글 하는 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붉은 빛깔의 바닷가에는 탁한 녹색의 돌 거죽에 난 식물 외에는 살아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듯했다. 여기 저기에 허연 것들이 보였다. 지독한 추위가 엄습해 오고 때때로 눈이 내렸다. 북동쪽을 보니 어두운 하늘의 별빛 아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파도처럼 높았다 낮았다 하는 언덕 위는 연분홍색이 짙은 하얀 색이었다. 바닷가는 얼음이 얼어붙었고 바다 가운데는 얼음덩이들이 떠 있었다. 그러나, 바다의 대부분은 영구히 지지 않는 저녁 햇볕을 받아 새빨갛게 물들어 아직 얼지 않은 채로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생물이 혹시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불안하기만 해서 타임 머신에 올라앉은 채로 잠시도 좌석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에도 하늘에도 바다에도 움직이는 거라곤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오직 바위에 달라붙은 초록색의 미끌미끌한 것이 아직 완전히 생명이 멸망해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바다에는 모래톱이 나타나 있었다. 썰물 때였던 것이다. 거기서 무언지 검은 것이 떨고 있는 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그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본 것은 내 눈의 착각이고, 저 검은 것은 보통 바위였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늘의 빛은 매우 밝고 별도 깜빡거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 때 돌연 태양의 서쪽 둥근 테에 변화가 생긴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점점 퍼져 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 검은 그림자가 점점 태양을 덮어 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일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달이나 수성이 태양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처음에는 달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나, 아무리 봐도 지구보다 안쪽의 혹성이 지구 바로 앞을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동쪽으로부터 찬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고, 눈발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내렸다. 바닷가에서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생명 없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세상은 깊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그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막,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의 목소리도, 염소 우는소리도, 새 소리도,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도, 우리 인간 생활의 배경이 되어 있는 그런 소리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어두움이 짙어 갈수록 펑펑 쏟아지는 눈은 한층 더 심하게 내려, 내 눈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추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드디어 먼 언덕의 눈으로 하얀 꼭대기도 하나하나 어둠 속에 파묻혀 들어가 버렸다. 조용하던 바람이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일식의 중심부의 검은 그림자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눈이 보이는 거라고는 희고 푸른 별들 뿐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빛을 잃고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하늘도 새까맣다. 이 넓고 큰 암흑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숨을 쉴 때마다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픔에 나는 완전히 맥을 못 추게 되고 말았다. 전신이 파들파들 떨리고 심한 구역질이 났다. 이윽고 다시 태양의 가장자리가 하늘에 걸린 구부러진 새빨간 활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기분을 진정 시키려고 타임 머신에서 내려섰다. 머리가 어찔어찔해서 이대로 라면 돌아가는 여행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어찔어찔했지만 나는 그대로 서서 참고 있는데, 다시 모래톱에서 붉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무언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둥그런 축구공 만한 크기였다. 아니 좀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 놈은 몇 개의 촉수를 늘어뜨리곤, 마치 피와 같이 빨갛게 출렁이는 바다를 뒤로 하여 때때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정신을 잃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도 먼데서, 그리고 이렇게 무서운 어두컴컴한 데서 쓰러지는 날에는 모든 것이 그만 이라 생각하고 가물거리기 시작한 정신을 잡아, 흔들듯이 비틀거리며 타임 머신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이렇게 해서 나는 돌아온 걸세. 나는 오랫동안 타임 머신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을 거야. 낮과 밤이 다시 또 눈이 핑핑 돌만큼 빠른 속도로 뒤바뀌고 있었네. 태양은 점점 금빛으로 되어갔고, 하늘도 파래졌고, 호흡도 훨씬 편해졌지. 다이얼의 바늘은 빙글빙글 역회전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다시금 희미한 건물의 그림자가 보였다. 멸망하기 시작한 인류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었지만 그것도 또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00만 일 단위의 다이얼 바늘이 제로(0)를 가리켰을 때 나는 스피드를 떨어뜨렸다. 눈에 익을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1천 일 단위의 다이얼 바늘이 제로에 돌아와 낮과 밤의 교대가 차차 느리게 되었다. 이윽고 연구실의 바랜 벽이 보였다. 나는 서서히 타임 머신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찮은 일이지만, 나는 묘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앞에서 얘기했다고 생각하지만 출발 때의 일이었다. 타임 머신의 속도가 아직 그리 올라가지 않았을 때 와젯 부인이 방을 건너 질러 갔었는데 그것이 마치 로켓이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게 보였다. 내가 돌아왔을 때도 그녀는 또 연구실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녀의 동작이 전번과는 정반대로 보였다. 막다른 쪽의 도어가 열리고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연구실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앞에 들어왔던 도어로 뒷걸음을 해서 나가는 것이었다. 그 조금 전에 금방 하인 힐리어를 본 것 같았는데 그의 모습은 번개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타임 머신을 정지시키고 그립던 연구실을 둘러봤다. 가구나 장치들이 출발할 때와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비실비실 하며 기계에서 내려와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몇 분 동안 나는 심하게 떨었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그 동안 여기서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타임 머신은 이 연구실 남동쪽 구석에서 출발했었다. 그것이 지금은 서북쪽 벽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두 곳의 거리는 내가 미래 세계에 도착했을 때 그 조그만 잔디밭과 몰록이 타임 머신을 옮겨다 둔 흰 스핑크스의 받침대 사이의 거리와 꼭 같은 것이다. 내 머리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이윽고 나는 일어나 다리를 절뚝거리며 복도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발뒤꿈치가 아프고 몸이 몹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문 옆 테이블에 펠펜 신문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날짜를 보니 오늘이고, 시계를 보니 그럭저럭 여덟 시였다. 자네들 목소리가 들리고,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너무도 기분이 나쁘고 피로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엄청나게 맛난 고기 냄새가 흘러 왔다. 그래서 문을 열고 자네들한테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의 일은 자네들도 알고 있는 그대로다. 나는 몸을 씻고 식사를 마친 다음, 지금 이렇게 자네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 걸세.   위너가 준 하얀 꽃   그는 여기서 한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아직 얘기는 도저히 자네들에게는 믿어지지가 않을 걸세. 나 자신도 오늘 밤 이렇게 반가운 자네들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런 이상한 모험담을 들려주고 있지만 이게 도대체 사실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 할 수 없으니 말일세.“ 그는 의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자네에게 꼭 믿어 주길 바래서가 아니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예언이라 생각해도 좋고. 연구실 안에서 꿈을 꾼 거란 말을 들어도 좋네.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이런 얘기를 생각해 냈다고 해도 상관없네. 내가 이 얘기를 정말이라고 하는 건 얘기의 흥미를 돋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그런데 만들어 낸 얘기라고 할 때 자네들은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파이프를 집어들고, 언제나처럼 난로를 탁탁 쳤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의자가 삐걱거리더니 융단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나는 시간 여행가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얘기를 듣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어둠침침한 쪽에 앉아 있었고 난로의 불빛이 그들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의사는 이 집주인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 듯했다. 편집장은 벌써 여섯 개째의 여송연 담배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문 기자는 회중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편집장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자네가 소설가가 아닌 게 정말 유감스럽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시간 여행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군!" "글쎄........“ "그럴 줄 알았네." 시간 여행가는 우리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성냥은 어디 있나?" 하고 물었다. 성냥을 그어 파이프를 뻐끔뻐끔하면서 그는 말했다. "사실이지,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시들은 흰 꽃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하다가 파이프를 쥔 손을 젖혀 손가락 관절의 반쯤 아물어 가고 있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의사가 일어나 램프 불 앞으로 다가가서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별난 암술인데 ......"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리학자가 몸을 내밀고 팔을 뻗쳐 꽃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 때 신문 기자가, "이런 야단났군. 벌써 1시 15분 전이야. 집엔 어떻게 가지?“ 하고 걱정을 했다. "역에까지만 가면 합승 마차가 얼마든지 있네." 하고 심리학자가 말했다. "별난 꽃이야. 무슨 종류의 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이걸 내가 가져도 괜찮겠나?" 하고 시간 여행가를 바라보았다. "그건 곤란해.“ 시간 여행가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의사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정말 어디서 꺾어온 건가7" 시간 여행가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마치 자기 머리 속에서 도망칠 것 같은 생각을 못 나가게 막으려는 것 같았다. "이 꽃은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여행할 때 위너가 내 포켓에 꽂아 준 것이네." 하고 그는 말한 다음 방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이게 모두 꿈이라니 그럴 수가 있는가? 이 방도, 자네들도, 언제와도 다르지 않은 이 분위기도 나는 다 잘 기억하고 있네. 나는 타임 머신을 만들지 않았던가 ? 그리고 그 모형도. 그걸 모두 꿈이라고 한단 말인가? 인생을 꿈이라고들 하지. 때로는 아주 불행한 꿈이라고. 그렇지만 꿈이라고 하더라도 성실하지 않은 꿈이라면 나는 견디어 낼 수 없어.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 머리가 잘못 되어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런 꿈을 꾸었을까? 나는 타임 머신을 가보고 와야겠어. 만일 그게 정말로 저 방에 있다고 하면........" 그는 서둘러 램프를 들고 붉은 불꽃을 너울거리며 복도로 나갔다. 우리도 그를 따라 나갔다. 가물거리는 램프 불빛 속에 타임 머신은 확실히 앉아 있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모습을 한 채...... 그것은 놋쇠와 흑단(늘푸른 큰키나무로 재목이 굵고 치밀하며 아름다운 광택이 나는 검은 빛깔로 고급가구 기구, 악기 등의 재로)과 상아와 반투명으로 빛나는 석영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딱딱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난간을 만져 보았다. 상아 부분에는 갈색으로 흐려진 얼룩이 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풀과 이끼가 묻어 있었다. 난간 하나는 휘어져 있었다. 시간 여행가는 램프를 긴 의자 위에 올려놓고 휘어진 난간을 어루만졌다. "이걸 보니 알겠어. 내가 말한 건 정말이었네. 이런 추운 곳에 자네들을 끌고 와서 미안하네." 그는 다시 램프를 집어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휴게실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까지 나와 우리들을 배웅하며 편집장이 코트를 입는 걸 도와주었다. 의사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네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로해 있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껄껄 웃었다. 나는 그가 현관 도어를 열고 큰 소리로 잘 가라고 인사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편집장과 같이 마차를 탔다. 편집장은 그 얘기를 허풍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얘기 내용은 참으로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의 말하는 어조는 정말로 진실 되고 당연한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그에게서 들은 얘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한 번 시간 여행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다음 날 그는 연구실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집안 사람들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터이라 연구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동안 타임 머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내밀어 레버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땅딸막하고 퍽도 완강하게 보인 기계가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민감함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어릴 때 흔히 알지 못하는 것에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된다고 주의 받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복도를 걸어 되돌아 나왔다. 휴게실에서 시간 여행가를 만났다. 그는 어디 외출을 하려는 참이었다. 어깨에 소형 카메라를 메고 다른 편 어깨에는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조그만 배낭을 매고 있다. 그는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악수 대신 팔꿈치를 내밀었다. "몹시도 바쁘다네. 저 기계 덕분에........" 하며 그는 말했다. "하지만 농담 아니었던가? 정말 또 시간 여행을 할 작정인가?“ 하고 내가 물었다. "정말이고 말고. 정말 여행을 떠날 걸세." 그는 똑바로 내 눈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방안을 둘러보았다. "30분 가량 기다려 주겠는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왜 왔는지 나는 알고 있네. 마침 잘 와주었어. 저기 잡지가 있어. 그런 거나 보면서 점심 시간까지만 기다려 주면 이번에야 정말 모든 것을 증명해 보여 주겠네. 잠시 동안 자네를 혼자 있게 해야겠는데 괜찮겠나?“ 나는 좋다고 했지만 그 때는 그가 말한 뜻을 잘 알지 못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걸어갔다. 연구실 도어가 꽝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빼들었다. 대체 그는 점심시간까지 무얼 하겠다는 것일까? 그 때 퍼뜩 어떤 광고에 눈길이 가자 나는 두 시에 출판업자 리처드슨과 만날 약속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일어서서 이 사정을 시간 여행가에게 알려 주려고 복도를 나왔다. 연구실의 도어에 손을 댔을 때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갑자기 끊어지는가 했을 때 철컥 하는 소리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도어를 열었을 때, 나는 무서운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었다. 방안에서 유리창이 깨져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간 여행가는 보이지 않았다. 검정과 놋쇠 빛깔의 것이 뱅뱅 돌고 있는 속에 의미하게 유령 같은 사람의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게 한순간 보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의 그림자는 투명체여서 그 뒤에 있는 의자와 의자 위에 놓여 있는 도면까지도 환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유령 같은 사람의 그림자는 내가 눈을 비볐을 때는 사라져 버렸다. 타임 머신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연구실 저편 구석은 휑하니 비어 날아오른 먼지가 내려앉고 있을 뿐이었다. 천장의 채광창의 유리 한 장이 공기의 소용돌이로 깨진 것 같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무언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알았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는 미처 깨닫지를 못했다. 멍하니 서 있노라니까 뜰로 통하는 도어가 열리고 하인이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윽고 나는 정신을 차려 그에게 물었다. "주인은 그 쪽으로 나가셨는가?“ "아뇨. 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주인님이 여기 계신가 하고........" 이로서 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리처드슨과의 약속을 어기기로 하고 이곳에서 시간 여행가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더 겉 다른 얘기를 들려주겠지. 표본이나 사진도 찍어올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평생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 여행가가 모습을 감춘 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지만 그 날 이후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끝맺음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는 돌아올까? 과거의 세계에 가서 구석기 (백만 년 전부터 2만 5천 년 전까지) 시대의 피에 굶주린 털북숭이의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버리지나 않았을까? 백악기 (약 1억 4천만 년 전부터 7천만 년 전까지)의 바닷속 깊이 빠져 버린 거나 아닐까? 저 쥐라기 (1억 8천만 년 전부터 1억 3천 5백만 년 전까지)의 거대한 파충류의 괴물인, 기괴한 도마뱀들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버린 거나 아닐까? 아니면, 또 지금도, 지금이란 말을 써도 좋다면, 공룡이 기어다니는 쥐라기의 산호초 위라든가, 황폐한 소금 호숫가를 헤매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전번 여행보다 훨씬 가까운 미래 세계로 갔을까? 인간이 아직 인간으로 살아 있고, 우리 시대에서는 아직 수수께끼로 되어 있으며 골치 아픈 문제로 되어 있는 일도 모두 해결되어 인류의 전성기라 할 시대로 갔을까? 나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현대와 같이 불충분한 경험과 단편적인 이론이 서로 아무런 조화도 이루지 못한 시대를 아무래도 인류의 전성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물론 나 개인의 생각이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타임 머신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지만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문명이 된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요, 그것은 얼마 안 가서 무너져 그걸 만든 사람들을 깔아뭉개 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살아 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게 있어 미래는 검은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그의 말에서 극히 작은 한 분야를 알았을 뿐이며, 미래의 세계는 넓고 또 넓은 것이다. 내 곁에는 지금도 그 두 송이의 별스런 하얀 꽃이 있어서 나를 위로해 주고 있다. 이미 시들어서 갈색으로 퇴색해져 이제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아도, 인류의 지혜와 힘이 멸망해 버린다해도 이것이야말로 감사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까지나 인간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는 걸 밝혀 주는 유일한 긍지인 것이다.   끝       베디안   크리스 네빌 Kris Nevile 지음     심야의 사고   어두운 밤하늘에 하얀 것이 번쩍거리기 시작하였다. 눈은 소리도 없이 사뿐사뿐 내려 숲도 들도 절벽도 언덕도 그리고 그 사이로 꾸불꾸불하게 뻗친 도로를 엷고 하얀 천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눈에 푹 덮인 도로에는 개 한 마리도 없었다.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그 조용한 밤에 문득 가냘픈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둠 속 저쪽 먼 곳에서 두 개의 노란 색 눈이 번쩍이었다. 엔진 소리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들렸고, 노란 눈은 헤드라이트였다. 도로의 반대쪽 편에서 한 대의 승용차가 눈을 휘날리며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승용차는 대단히 급한 모양이었다. 체인을 감지 않은 타이어가 푹 싹인 눈 위를 미끄러져 가며 커브를 지나갈 때마다 도로에서 튕겨나갈 것 같이 미끄러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엔진은 삐거덕거리고 타이어는 비명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는 한없이 내리고 있는 눈에 반사되어 미친 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승용차에는 한 쌍의 남녀가 타고 있었다. 여자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갓난애를 안고 있었다. 추워서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심한 승용차의 진동 때문인지 갓난애는 계속 울고 있었다. "여보! 좀 천천히 달리세요. 위험해요." 젊은 여자가 운전하고 있는 사나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서둘지 않으면 늦어진다.“ 남자는 핸들을 꽉 진 채 앞만 계속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자동차를 이렇게 눈 속에서 속력을 내시니........" "알고 있어. 그러나 만약 출발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이런 곳에 남겨진다면 당신도 싫겠지?“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또 한바탕 우는 어린애를 흔들면서, "그래, 그래! 울지마. 아가." 하고 달랬다. 바로 그때였다. "아차!“ 남자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맹렬한 속도를 계속 줄이지 않고 급커브를 돌던 순간, 헤드라이트와 이미 눈앞에 바싹 나타난 커다란 트럭의 모습을 비친다. 남자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필사적으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트럭은 가까스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브레이크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타이어는 눈 위를 스키처럼 쭉 미끄러졌다. "여보!" 여자는 어린애를 힘껏 가슴에 안으면서 소리쳤다. 그 때 승용차는 이미 비스듬히 쓰려져 가면서 도로 바깥쪽으로 미끄러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모퉁이로 굴렀다. 그대로 두 번 굴러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승용차는 이미 비틀리고 움푹 들어가고 찌그러지고 형편없이 부서졌다. 부서지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끝나자 사방은 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 졌다. 그 때,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부서진 승용차의 바로 옆의 풀밭에서 가냘프게 들려왔다. 그 승용차를 간신히 스쳐간 트럭은 곧 멈췄다. 트럭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승용차는 이미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큰일났다.!" "도저히 살수가 없겠군요!" 운전사와 조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절벽을 내려가 무참하게 부서진 승용차 옆으로 갔다. 조수가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아무도 없잖아?" 조수는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뭐라고? 그럴 리가........" 운전사도 깜짝 놀랐다. 형편없이 부서진 승용차 속에는 분명히 있어야 할 사람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거기에는 회색의 먼지 같은 것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떨어지는 동안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았을까요?" "정말 이상한 일이다 !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혹시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 아닐까 해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푹 쌓인 눈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물론 튕겨 나간 시체의 흔적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흡사 유령이 운전한 것 같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갑자기 긴장했다. 어디선가 가냘픈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다!“ 조수가 외치고 풀밭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갓난애가 홀로 눈 위에서 울고 있었다. 조수가 살며시 안아들었다. 갓난애는 계집애였으며 왼팔이 부러졌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가엾어라. 이 팔은 평생 낫지 않겠는데........" 갓난애를 진찰한 병원의 의사가 말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부상으로 살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군. 그런 사고에서........" "기적이라고 하면 ......?“ 운전사가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이 애의 부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짜기에라도 떨어지고 맡았겠지. 이런 사건에는 간혹 상상도 못할 먼 곳으로 튕겨 나가는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경찰에서도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심한 치료와 간호의 덕택으로 갓난애는 얼마 안 가서 상처가 다 나았다. "불쌍하게도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간호원들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귀여우니 틀림없이 곧 새 어머니가 생기게 될 테지 " 그리고 그 말은 얼마 안 가서 사실이 되었다. 사람이 아주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가 병원에 찾아왔다. "아, 귀엽고 예쁜 아이!“ 여자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갓난애를 살며시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오늘부터 넌 내 딸이 되는 거야. 지금부터 너를 베디안이라고 부르겠다.“ "좋은 이름이군요.“ 의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남자가 의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로 이 애의 부모가 돌아가셨을까요? 우리들이 이 애를 기르고 있는데 문득 나타나지는 않을까요?“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살아 있더라도 되돌려 달라고는 할 수 없죠." "되돌려 주다니요? 제 딸인데요?“ 어머니가 된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갓난애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고 말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해도 자기 딸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야." 아버지가 된 남자가 말했다. "곤란한 것은 베디안의 생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의사가 말을 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의 생일은 오늘입니다. 우리들의 딸이 된 날이 이 애의 탄생일, 그것이 좋겠지요?"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의사가 찬성하자 중년 부부는 즐겁게 웃었다.   미소녀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베디안은 병 한 번 앓지 않고 잘 자랐다. 서너 살에는 길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귀엽게 생겼다. 그러나, 사고 때 다친 왼쪽 팔만은 아무래도 완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라지도 않고 굳은 채로 있었다. 베디안을 사랑하는 양부모는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진찰을 받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양부모들은 언짢게 생각했으나 베디안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손재주가 놀라울 정도였었다. 세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우거진 숲과 맑은 물, 푸른 하늘에 둥둥 떠 흐르는 흰 구름, 태양이 내려 쪼이는 더운 여름날의 풍경,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 부슬부슬 내리는 비 등 베디안의 그림 속에서는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저 아이는 그림의 천재이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훌륭한 화가가 될 것입니다.“ 하고 어느 날 미술 선생이 교무실에서 사이가 좋은 음악 선생에게 말했다. 그러자 음악 선생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입을 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베디안은 음악에 천재입니다. 부자유스러운 손으로 바이올린을 가지고 상급생보다 어려운 연습곡을 훌륭하게 켜는 것을 보셨죠? 나는 전에 베디안이 켜는 것을 듣고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지요. 너무 깨끗하고 황홀해서........그러한 기분이 든 적은 별로 없었어요." 음악 선생의 눈은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나, 베디안의 재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수학, 역사, 물상, 생물 등 모든 과목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이상한 아이어요. 그 아이는 한 번 외우면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애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를 가르치면 거기에 관계 있는 것은 즉시로 이해하고 말지요. 하나를 듣고 열 가지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아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끔 그 아이가 무서울 때가 있어요.“ 또 한 선생이 말했다. "나는 우리 학교의 학생 중에서 베디안에게 장난을 거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렇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로 얼굴을 처다 보았다. "나는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군요.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조금 불량한 남학생이 베디안의 손에 대해서 욕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베디안은 잠자코 그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어요. 그러자, 남학생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어요. 그 때의 베디안의 눈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군요. 깊은 바다같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아름답고도 매서운 눈이었지요.“ 그 선생은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베디안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숙사 제도의 여자 고등 학교에 입학하자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베디안은 아름답고 성적도 우수하고 특히 새로 배우기 시작한 배구를 썩 잘 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어쩐지 베디안의 행동은 전처럼 활발하거나 명랑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을 한다든지 잡담을 하는 일도 점점 없어져 갔다. 혼자 살며시 기숙사를 빠져 나와 사람이 없는 빌딩 옥상에 서서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를까?) 베디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의문과 싸워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모두 무의미하고 시시하게만 느껴질까?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들이 하등 동물인 개나 고양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베디안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턴지 모르게 부풀어올라 드디어 가슴속에 꽉 차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딴 사람이 옆에 있기만 하여도 일종의 고통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필요 이상으로 친한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사람들과 나와는 어딘가 모르게 틀리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였다) 그것은 살을 깎는 듯한 고독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 단 혼자이고,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만한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슬퍼지고 몸이 점점 식어서 굳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림은? 음악은? 배구는?) 베디안은 어딘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그림이나 음악이나 배구도 쫓아가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엄마?“ 문득 베디안의 차갑게 식은 마음의 한 모퉁이에서 따뜻한 것이 흘러 나왔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이 그녀에게 미소를 던져 주고 있었다. "아빠!“ 환상 속의 아버지가 살며시 어머니 곁으로 와서 똑같은 미소로 그녀를 지켜본다. "베디안, 집으로 돌아온." "돌아가겠어요" "나는 꼭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베디안은 방학 때까지 기다렸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참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 주일간의 방학이 오자 베디안은 기차를 타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초인종의 버튼을 누르는 베디안의 손이 조금 떨렸다. 거실에는 아버지만 혼자 계셨다. "베디안, 잘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환상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어디 계셔요?" "아........ 병원에. 베디안, 엄마가 조금 몸이 불편한 모양인데 별로 대단한지는 않다. 곧 나을 거다.“ 베디안이 바다같이 깊어 보이는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자 아버지는 얼굴을 돌렸다. "아빠........ 가르쳐 주셔요."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무래도 너에게 숨길 수가 없구나. 네 눈은 너무나 날카롭군.“ "심하신 가요?“ "그렇다.“ "무슨 병이어요?“ "숨길 수 없구나. 베디안, 엄마는 위암이다. 그것도 사방으로 퍼져서 이미 늦었다. 이제 한 달 정도 밖에는........" "왜,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베디안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는 자기 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너도 아무 것도 모른 체 하여라, 보통 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엄마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엄마를 그대로 행복한 채 죽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베디안은 아버지의 엄한 말씀에는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아빠, 그렇게 하겠어요."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생각보다는 건강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그 얼굴에서 손끝에까지 나타나 있었다. 일 주일 동안의 방학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베디안은 방학을 더 연장시키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거라. 베디안, 우리들은 언제든지 또 만날 수가 있잖아.“ 베디안은 하는 수 없이 학교로 되돌아왔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엄마가 죽는다면 나도 죽고 싶다!) 하고 베디안은 생각했다. 기숙사로 되돌아온 지 삼 일째의 저녁 무렵 친구가 베디안에게 , "누군가가 교문에서 너를 보자고 하더라." 라고 알려 주었다. 교문 앞으로 가자 어떤 처음 보는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양복을 입은 청년이 저녁 노을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을 보자 베디안은 자기도 모르게 섬뜩했다. "베디안이죠?“ "네.“ "나는 시르라고 합니다. 알겠죠?" 놀랄 일이었다. 베디안은 알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시르였다. 단지 시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와요." 베디안의 몸은 열병 환자처럼 떨리고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청년이 말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문 모퉁이에 스포츠 카가 한 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자동차는 곧 달리기 시작하였다. 자동차가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베디안은 몰랐다. 귓전을 쌩쌩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는 바람이 사라지자 차는 교외의 어떤 큰 집 안에 들어가서 정지했다. 집은 빈집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방의 문을 열자 거기에 한 노인이 책상을 향해서 앉아 있었다. 노인은 베디안을 보고 나더니 시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그 아이다.) 베디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라." 베디안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의 일부분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지금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마음으로서 이야기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라니......!“ 말을 하다가 말고 베디안은 말을 멈추었다. 자기 자신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알았겠지? 베디안, 너도 우리와 똑같이 이 지구의 인간이 아니다." 노인은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우주인   노인의 생각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이 베디안의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우리들은 여기서부터 수천 광년의 우주 저쪽 은하의 핵 항성계에 존재하는 아미오별에서 온 우주인이다. 지구인과는 달라서 이미 수억 년의 역사와 문명을 가진 고등 종족이지. 우리들의 문명은 절정에 달했고 모든 악한 것은 소멸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종족은 자유롭게 우주의 모든 곳까지 여행하여 수많은 혹성들의 생물을 연구하고 있단다." 노인의 생각은 계속 전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지구 햇수로 17년 전 우리들은 이 지구에 왔었다. 너는 그 때 아직 갓난애였지. 양친과 같이 왔었단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할 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구의 자동차에 서투르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 양친이 돌아가셨단다." 베디안의 마음은 놀람으로 가득 찼다. "우리들 아미오별 사람은 죽으면 신체의 분자의 변화가 일어나 육체는 소멸해 버리고 약간의 섬유질의 먼지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구인은 아무 것도 모르지. 우리들은 너도 그 사고로 소멸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개월 전 네가 살아 남아서 지구인으로 성장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우리들이 너를 찾으러 오게 된 것이란다.“ 노인의 사고파가 중단되었다. 엄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쓸쓸했었죠? 베디안, 오랫동안 다른 종족 안에서 홀로 살아왔으니........ 그것은 우리보다 지능이 높은 종족 같으면 괜찮지요, 모습은 별다름 없어도 정신적으로 고독하게 발달된 종족도 있는데 이 지구 인종과 같이 모습도 정신도 다같이 보기 싫고, 더욱이 자기의 신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종족은 거의 없지요." 시르의 사고파가 날아 왔다. 베디안은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 시르 역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쯤도 모르겠어요? 물론 우리들의 이 모습은 지구인의 모습을 빌린 것이죠. 다른 혹성을 여행 할 때에는 그 혹성의 생물의 모습을 빌리는 것이지요. 자, 똑똑히 보셔요." 사고파가 중단된 순간부터 시르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몸의 색채가 희미해지더니 투명하게 되고 무지개 같은 오색의 빛에 싸이더니 돌연 거대한 나비가 되어 날기 시작했다. "정신의 고도 집중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신체의 분자 배열을 변경하고 재편성시켜서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죠.“ 나비가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곧 고양이로 변하더니, 그 고양이가 한 걸음 발을 옮기자 개로 되고, 그것이 희미하게 되더니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시르로 되돌아왔다. "베디안도 할 수가 있지요. 우선 그 팔을 스스로 고치는 것이어요.“ 베디안은 주저했다. "주저하지 말아라. 너에게는 능력이 있다. 정신을 통일하여 '팔아 나아라'라고 생각해라. 그렇다. 그대로 생각을 계속해라. 그러면 팔의 뼈와 근육의 세포가 바뀌어져서 새로운 팔이 살아 나오는 것이다. 봐라, 나았다?“ 베디안은 팔을 보았다. 완쾌되었다. 좌우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팔! 정말 팔은 완쾌된 것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지? 베디안, 너는 분명히 아미오별 사람이다. 우리들과 같이 돌아가야지.“ 베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쓸쓸하게 느꼈던 모든 원인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미오별 사람인 자신과 지구인과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지요.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아무튼 나의 고향이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나의 동포뿐이니까요. 데리고 가주셔요. 아미오, 나의 고향에!“ 베디안의 가슴 속 깊이에서 사고파가 용솟음쳤다. "그러면 결정되었다. 곧 출발하자. 저쪽 바다에 우리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다.“ 베디안은 조금 망설였다. "아빠와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요...." "그것은 안 된다.“ 노인은 책망하는 말투였다. "지구인에게 우리들의 존재를 알려서는 안 된다." "뵙기만 하고 가도 안 되나요?" "안 된다.“ "17년 동안이나 나를 키워 주신 분이어요. 나를 사랑하고 계셔요. 그리고 나도........" "사랑이라?“ 노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지나면 너 역시 그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가 기르는 개에게나 고양이에게 대하는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와 그들과는 그 정도로 틀린다.“ 베디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알았다. 이제 그 얘긴 그만 두자." 노인은 일어섰다. 시르도 일어섰다. 베디안도 따라 일어섰다. 헬리콥터와 흡사한 은색의 비행차는 저녁 노을이 짙은 해상을 소리도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베디안은 좌석 옆과 창문에 뺨을 대고 멀어져 가는 육지를 보고 있었다. 17년 동안의 추억들이 등같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문득 어떤 일을 생각해 내자 베디안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그녀는 조종석에 앉아 있는 시르에게 사고파를 보냈다. "시르, 우리들의 별에도 그림이 있나요?" "그림?“ "사람이나 바다나 산이나 꽃 같은 것을 그리는 것 말이어요.“ "그런 것은 없지요." "왜 없나요?“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음악은?“ "왜 인공의 음악을 듣지요? 대우주가, 별의 빛이, 암모니아와 메탄가스의 화학 변화 같은 자연이 음악을 들려주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 말고요. 시르, 자기 자신이 악기를 들고 켜면서 ........" "시시해요. 베디안은 17년 동안 지구의 하등 생물의 습관이 몸에 밴 모양이군요. 고쳐야 해요." 시르의 사고파가 서슴없이 말했다. 베디안은 아직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아무런 추억도 없는 곳으로 가는구나! 다 죽어 가는 엄마와 쓸쓸히 계시는 아빠를 뒤에 두고........) 베디안의 머리 안에서는 문득 사고파가 혼란해졌다. 머리가 뒤흔들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베디안, 어디가 아프냐?"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 때, "보인다! 우주선이다!“ 하고 시르가 말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은색의 거대한 해파리와 같은 우주선은 주의해서 잘 보지 않으면 쉽게 눈이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시르와 노인은 자기들을 아미오별로 운반해 줄 우주선을 기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한 순간 두 사람은 베디안에 대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나에게는 엄마의 위암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엄마를 죽음에서 구해낼 힘이 있다.) 그 순간에 베디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적어도 2일만이라도 나는........) 창밖에는 여러 마리의 갈매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차는 우주선의 갑판에 살며시 앉았다. 베디안은 작지만 아담한 둥근 창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잠시 동안 여기에 있거라." 노인과 시르는 베디안을 혼자 남겨두고 나갔다. 우주선은 출발 준비로 바빴다. 베디안은 둥근 창문 가까이 갔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바다에 어둠이 덮였을 때 출발 준비가 끝났다. 노인은 베디안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왔다. 방안을 획 돌아본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베디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어딜 갔지?“ 노인은 그 때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둥근 창으로 바다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리고 파도치는 넓은 바다와 밝은 밤하늘의 일부가 보였다. 어느 사이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나와서 끝없이 넓은 바다를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 파도 위를 한 마리의 큰 갈매기가 비스듬히 날아가고 있었다. 아직 나는데 익숙하지 못한지 큰 날개의 움직임이 서툴러서 잘못하면 균형을 잃고 바다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 때 목을 쑤욱 내밀고 힘을 내서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파도치는 수평선 저쪽의 육지를 향해서 힘껏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곳, 그림과 음악과 추억이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베디안의 모습이었다.   끝       작품 해설   미래를 예언하는 이야기   허버트 조지 웰즈(H. G. WELLS)는 1866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상인이었는데 생활이 넉넉한 편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는 7세 때 발목을 다쳐서 오랫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을 때 그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동기가 되어 독서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상업 학교에 입학하여 항상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11세 때 아버지가 불구자가 되는 바람에 14세 때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직장을 얻어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학교에 나가 생물학을 가리키기도 하고 과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27세 때 폐결핵에 걸려 오랫동안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써서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해서 작가로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은 아직 SF의 초창기이라서 작가도 거의 없었으며, 프랑스의 베르느(1828~1901)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웰즈가 풍부한 과학 지식을 토대로 하여 최초로 시간 여행을 과학적으로 쓴 것이 바로 이 타임 머신입니다. 1805년에 단행본으로 발행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일약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모로 박사의 섬」, 「투명 인간」, 「우주 전쟁」, 「달 세계 최초의 사람」 등을 발표하여 SF작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에 와서는 웰즈는 베르느와 함께 세계 SF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타임 머신을 발명하여 80만 년 후의 세계에 가본 시간 여행가가 거기에서 겪은 일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사회 문명 비판가, 역사가로서의 식견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어서 일종의 SF 소설이라기보다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이야기라고 절찬을 받고 있습니다. '베르느의 작품은 실천의 가능성이 있는 발명과 발견을 작품 속에 써서 독자의 흥미를 끌고 있지만, 나의 작품의 발명과 발견은 공상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라고 웰즈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작품은 현실 가능성이 없는 것을 가능하도록 생각하게 하고 독자들이 읽는데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에 말려 들어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임 머신은 80여년 전에 쓰인 작품인데 현재까지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운명에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기계에 의존하게 되어 인류의 퇴화가 시작되어 80만 년 후의 세계에서는 체력도 지식도, 아니 인간성 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시간 여행가는 그 세계에서 물에 빠진 소녀를 구출하여 그 소녀로부터 인간다운 사랑을 받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인류가 변해도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장래에 큰 관심을 가진 웰즈는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과 교육과 종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여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또, 세계 평화를 기원하여 「지적 국제 연맹」을 제창하여 글과 강연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1920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세계 문화사 대계」는 이러한 뜻을 내용으로 해서 쓴 책입니다. 그 외 「생명의 과학」, 「인류의 노동과 부와 행복」등 웰즈의 작품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 영국 최대의 문화인인 문호라고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세계의 현실적 움직임을 보고 차츰 비관적이 되어 제 2 차 세계 대전의 원자 폭탄 사용을 알고 완전히 실망한 채 1946년 80세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   '베디안' 작가 크리스 네빌(Kris Nevile)은 1925년에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 입대하여 각처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근무하며 합성 수지를 연구하였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였는데 그 작품은 초인 과학을 다루는 것이 많았습니다. 주로 단편을 즐겨 썼으며 약 50여 편 정도 발표했습니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도 회사에 계속 근무하고, 고분자 물질의 연구를 계속하며 수술에 사용할 플라스틱 재료를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합성 수지에 대한 전문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1966년 회사를 퇴직하고 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빌의 소설에는 현재의 과학보다 많이 진보된 초인 과학의 기술과 현재의 과학 지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서는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이 설치는 것이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도 역시 인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 웰즈 Herbert George Wells 지음 외 5편 묶음 댓글:  조회:58  추천:1  2021-03-20
하늘의 공포     이 은 교훈․전기․문학․모험․탐험․괴담․추리 등 각 분야에 걸쳐 소년소녀들에게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5   기적이 일어났다················· 9 이상한 힘···················· 12 지옥으로 꺼져라················· 15 뉘우침····················· 20 내 탓이다···················· 27 모든 것이 전과 같이··············· 30     하늘의 공포·················· 34   피묻은 수첩··················· 38 암스트롱의 수기················· 40     작은 거인··················· 50   이상한 발자국·················· 53 콘크리트 속의 그림자·············· 56 사람이냐 유령이냐················ 60 나타난 괴상한 인간··············· 63 지하 사람이다!················· 66 지하에서의 싸움················· 69 인간의 시체를 표본으로?············· 73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78     벽 속의 아프리카··············· 83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86 고장이 났을까?················· 90 겁주는 말투··················· 95 피묻은 스카프·················· 99 덤벼드는 사자················· 103     우주 스파이·················· 112   우주 전쟁··················· 115 너를 체포한다················· 118 이제 살았다.················· 124 외톨박이··················· 127 새튼 숲 속으로················· 131 나는 과연 누구냐················ 135     우주에서 온 거머리·············· 143   괭이날을 녹이는 바위·············· 146 자라나는 바위················· 149 배탈나게 만드는 작전·············· 153 원자 폭탄 공격················· 158 지구가 깨져도················· 160 꾀어내기 작전················· 164 태양이 잡아먹힌다··············· 168 우주 속의 불꽃················· 172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Men Like Gods   웰즈 Herbert George Wells 지음   인간은 옛부터, 자연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대해 늘 마음이 끌려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적이 가장 동경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인데, 옛 전설이나 신화 등에서,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신기한 힘이 있어서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든지, 산 한복판을 둘로 딱 가르고 그 속을 지나다닌다든지, 혹은 '먹을 것이 나와라'하면 맛있는 음식물이 나온다든지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 이것은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체념할 수 없는 인간의 오랜 염원인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해서 과학 소설이나 공상 소설에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여러 가지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실현시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쓴 는 19세기 때의 미국의 기계 기사가 6세기 때의 영국의 아더왕의 궁전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근대 과학의 지식을 응용하여 당시 아더왕 궁전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대마술사 멀린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를 노리는 적을 무찌르고, 영국인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6세기 때의 옛날 영국인들은 그것이 모두 신통한 마술이요, 기술인 것처럼 여겨왔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과학 기술이 한층 더 발달하게 될 미래의 사회에서는 현대인의 눈으로는 기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일도 예사로운 일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과학소설의 시조로 불리는 H. G. 웰즈도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빛과 굴절률을 바꾸어 유리처럼 투명하게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 동물의 몸 구조를 바꾸어 인간처럼 말을 할 줄 아는 동물 인간을 만들어 내는 , 인간의 운동 신경의 속도를 다른 인간의 눈에는 띄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빠르게 하는 등은 모두 이러한 과학적 방법으로 기적을 나타내 보려는 아이디어에서 씌어진 과학 소설입니다. 이 도 웰즈가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과학과 옛날부터의 기적 - 이 두 가지가 교묘히 잘 이용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포저린게이 청년이 어째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었느냐, 어떻게 하여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느냐 하는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야기 가운데는 지구 물리학에 관한 지식이 빈틈없이 응용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이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 조건의 한 가지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지상에서 쓰이는 시간은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하면 자연적으로 멈춰지게 됩니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을 별안간 딱 멈추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적이 일어났다   롱 드래곤 주점은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흥청거렸다. 수많은 사람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활쏘기 게임장의 담당 점원인 청년 포저린게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미슈라는 친구하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말을 했댔자…" 하고 비미슈는 포저린게이를 깔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흘겨보며 말했다. "기적 같은 것이 어찌 일어날 까닭이 있겠나?" "그야 쉽게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한번 일어났다 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나. 아무튼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 어떤 특별할 힘을 가진 특별한 인물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니까 말야." "이것 봐, 그따위 소릴 했댔자…" 하고 비미슈는 반박했다. "일어날 턱이 없는 기적을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렇다고만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어, 기적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당장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포저린게이는 좀 흥분된 표정이 되더니 술집 한 모퉁이에서 타오르고 있는 램프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예를 들어, 저 램프가 보통 때라면 거꾸로 서서 그대로 탈 수 야 없지 않겠어. 그렇지, 비미슈?"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그런데 이 자리에 특별한 힘을 지닌 인간이 있어서, 이렇게 한다면 말이다." 포저린게이는 일어나더니, 손을 램프 쪽으로 쭉 뻗었다. "먼저 정신을 집중시켜, '거꾸로 서서 타거라' 하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 에잇!" 포저린게이는 손을 뻗친 채 갑자기 외치며 램프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램프는 별안간 공중에서 거꾸로 서더니 불꽃이 밑으로 향한 채 조용히 타고 있지 않은가. 램프 곁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 달아났다. 다른 사람들도 멍하니 입만 딱 벌린 채 램프를 지켜보며 슬슬 뒤로 물러섰다. 1초, 2초, 3초, … 여전히 램프는 거꾸로 선 채 타고 있었다. 포저린게이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숨이 가빠지고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턱이 없지." 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램프는 별안간 확 타오르더니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램프는 산산조각이 나고 석유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다행히도 불이 꺼졌으므로 불은 나지 않았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모두 쑥덕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것 참… 우리 눈이 어떻게 된 거야?"l "그럼, 그럼, 눈의 착각이야." "아냐, 틀림없이 요술일걸. 포저린게이가 요술을 부려서 우리를 홀린 거야." 포저린게이는 깜짝 놀라 '그런 일이 없어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멸시하는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는 바람에 그만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이것 봐, 장난도 분수가 있지, 위험한 짓을 어쩌자고 함부로 하는 거야?" 비미슈가 책망을 했다. "참, 괘씸한 녀석이군." "얼른 썩 꺼지지 못해." 주위의 술꾼들이 떠들어댔다. 포저린게이는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책망이 쏟아져 나온 데다가 뜻밖의 일이라 정신이 엇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술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이상한 힘   포저린게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자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아까 롱 드래곤 주점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장난 삼아 한 짓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때,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램프를 보고 '거꾸로 서서 타거라.' 하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포저린게이는 다시 한 번 더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안에 켜 두었던 촛불에 손가락을 들이대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공중에 떠올라라!" 그러자 촛불은 공중에 스르르 떴다. "앗!" 포저린게이가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큰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촛불은 방바닥에 툭 떨어져 꺼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 동안 캄캄한 방안에서 몸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역시 엄청난 일이 생기는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촛불에 불을 켤 생각으로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성냥이 없었다. "아, 성냥이 있었으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순간, 포저린게이의 손에는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성냥갑이 날아 들어왔다. 기적은 또 일어났다. 포저린게이는 다시 한번 더 실험해 보았다. 그는 양초를 꽂아 세우고 말했다. "불아, 켜 져라!" 그랬더니 양초에 불이 확 켜지는 게 아닌가. "이것 참, 신통하구나." 포저린게이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젠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인물 -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컵에 물을 담기게 하고, 뱀이 나타나게 했다가 물러가게도 하고, 또 종이쪽지를 공중에 띄워 보고 - 이것이 모두 뜻대로 잘 되어 그는 만족해했다. 그 때는 벌써 밤 1시가 좀 지났다. (너무 늦게 자다가는 내일의 일에 지장이 생긴다. 이젠 자야지.) 포저린게이는 옷을 벗으면서 또 가슴 설레는 일을 생각해냈다. "나를 침대에 뉘어라." 그러자 그는 침대 속에 드러누워졌다. "보들보들한 새 잠옷을 꺼내어 내게 입혀다오." 이번에도 명령대로 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명령했다. "기적이여, 이번에는 나를 푹 자게 하라. 그리고 내일 아침 7시에 일어나게 하라." 이렇게 말하자마자 포저린게이는 벌써 쿨쿨 자고 있었다.   지옥으로 꺼져라   다음날 아침 포저린게이는 7시 정각에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어제 저녁 일이 모두 꿈이 아닐까 하고 여겨졌다. 그래서 시험삼아, "햄에그를 다오." 하고 말해 보았다. 그러자 식탁 위에는 방금 구운 듯한 맛있는 햄에그가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과연 꿈은 아니었다. 포저린게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 직장으로 나갔다. 아침 활쏘기 게임장 일은 꽤 바빴다. 청소다 뭐다 하며 모조리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기적의 힘으로 청소도 정리도 눈 깜짝할 동안에 끝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거야말로 통쾌하구나." 포저린게이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기적의 힘을 쓰는 데는 주의해야 할 것이 많았다. 무심코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날에는, 또 엊저녁의 술자리에서처럼 '나쁜 장난'이라 야단맞을 염려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써먹을 만큼 익숙하지도 못했다. 가령 자전거를 타는 데도 자꾸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탈 수 없듯이, 기적은 자전거 타기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저린게이 청년은 근무를 마치자 인적이 없는 가스 공장 뒤로 가서, 거기서 기적 연습을 실컷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는 언제나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다 장미꽃을 피워 보기로 했다. 시험을 해 보자 지팡이에는 당장 아름다운 장미꽃이 방실방실 피어나서 주위는 온통 달콤한 꽃향기로 가득 찼다. 그 때, 뒤쪽에서 어떤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장미꽃이 만발한 지팡이를 들키는 날에는 또 곤란한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는 얼른 '먼저대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돌아가!" 하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지팡이는 무서운 힘으로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이쿠, 이게 뭐야!" 하고 성난 고함 소리가 뒤쪽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찔레덩굴을 던진 놈이 ! 아이쿠, 무릎이야!" 포저린게이는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랬더니, 이 근처를 순찰하던 낯익은 경찰관이 아닌가. 경찰관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턱수염을 쓸면서 포저린게이를 노려보았다. "오라, 너는 엊저녁 롱 드래곤 주점에서 장난을 쳐서 램프를 부순 녀석이 아냐?" "예, 예에… 참으로 죄송합니다." 포저린게이는 어떻다고 변명할 길이 없어서 어물어물 사과했다. "또 오늘 저녁만 해도 이런 컴컴한 곳에 숨어서 남한테 찔레덩굴을 집어던지다니 대관절 어째서 넌 그런 장난만 골라 가며 하는 거냐?" "그것은 에에… 이거 야단났군." "어서 말 좀 해 보라고." "즉, 에에… 저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 기적을 일으킨다고? 턱없는 소리 작작 해. 너는 경찰관을 찔레덩굴로 때렸단 말이다. 그런 엉터리 수작이 통할 줄 아니? 어쨌든 파출소까지 가자." 이 말을 듣자, 포저린게이는 약이 바짝 올랐다. "이 멍텅구리 같은! 엉터리인지 아닌지 본때를 보여 주마. 너 같은 건 당장 지옥으로 썩 꺼져!" 이렇게 말한 순간, 포저린게이 청년은 눈을 부릅떴다. 방금 까지도 턱 버티고 큰소리치던 경찰관의 모습이 싹 꺼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는 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으나, 경찰관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뉘우침   그 이튿날 아침 신문에, 그 경찰관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큼 크게 보도되었다. 순찰중의 경찰관이 행방불명이 되었으므로 경찰에서는 발을 헛디뎌 템즈 강에라도 빠져 죽은 것이나 아닐까 하며 배와 잠수부를 동원해서 강물에서 시체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포저린게이는 그만 기가 탁 죽고 말았다. (그 경찰관은 지금쯤 어찌되었을까. 내가 지옥으로 가라고 소리쳤을 순간 싹없어지고 말았으니, 역시 지옥으로 갔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만일에 저 세상에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나같이 죄지은 자도 반드시 지옥으로 가겠지. 그리하여 악마들에게 시달려 고통을 받겠지…) 포저린게이는 일요일 밤, 가까운 교회로 갔다. 빼빼 마르고 휘청거릴 만큼 키가 큰 메딕 목사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좀처럼 교회에 오지 않던 포저린게이가 끝까지 설교를 귀담아들었을 뿐 아니라, 꼭 상의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재에 마주앉자, 포저린게이는 대뜸 말을 꺼냈다. "목사님, 실은 저는 참회를 하러 왔습니다." "호오, 무슨 일이기에?" "실은 제가… 어제 .경찰관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것 같아요. 저, 신문에서 행방불명이라 떠들썩한 그 경찰관 말씀입니다." "뭐라고?" 메딕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어 주시진 않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저한테는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거든요." "그런 시시한 소린 그만두게. 난 바쁜 몸이니 어서 돌아가 줘." 메딕 목사는 화를 벌컥 내며 일어섰다. 포저린게이는 당황하여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좋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당장 기적을 일으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비꽃 화분이 되어라!" 담뱃갑은 어느 사이에 화분으로 변했다. 메딕 목사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거 참 놀랍군. 자넨 마술사였군 그래. 대관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거지?" "마술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되는 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자, 보십시오. 금붕어 항아리가 되어라!" 제비꽃 화분은 금시 금붕어 항아리로 변했다. 포저린게이는 그것을 또 비둘기로 바꾸고, 또 토끼로 바꾸자,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또 담뱃갑으로 되돌려 놓았다. 메딕 목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포저린게이의 기적을 넋잃고 보고 있었다. "자, 이만 하면 아시겠죠, 목사님?" "응… 직접 내 눈으로 보았으니, 참말로 믿을 수밖에." 포저린게이는 그 롱 드래곤 주점에서 비미슈하고 벌였던 논쟁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그는 메딕 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응… 그것 참 어려운 문제로군.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었으니까." 메딕 목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저린게이는 크게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장시간을 지껄여댄 데다가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배를 쫄쫄 곯았던 까닭에 기운도 쪽 빠져 있었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메딕 목사는 그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요리사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는 데다가 매우 게으 름뱅이였기 때문에 음식은 아주 맛없고 먹어 볼 것 없는 빈약한 것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의 기적의 힘으로 맛있는 걸 좀 상에 올려놓을까요?" 포저린게이가 말하자 목사는 매우 기뻐하며, "그러면 나는 먹음직스럽게 두꺼운 비프스테이크하고, 샐러드와 계란 요리, 그리고 맛있는 포도주가 좋겠군." 주문한 요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식탁 위에 가득히 차려졌다. 포저린게이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기적의 힘으로 주문하고는 두 사람은 사이좋은 친구처럼 마시고 먹었다. 목사는 술기운이 얼큰히 돌고 배가 부르자, 아까까지의 걱정이 싹 달아났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옳지, 내가 왜 미처 이런 생각을 못했던고. 여보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네." 메딕 목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목사님?" "자네는 기적의 힘으로 경찰관을 지옥에 보냈잖나. 하지만 역시 기적의 힘으로 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으로 죄 값은 치러지는 거라네."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포저린게이가 물었다. "그거야 뻔하지 뭔가. 마음씨가 나쁜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만든다든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든지 하는 일이지."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 그럼 어떤 사람의 마음을 고쳐 주어야 하는지, 또 도와야 하는지를 일일이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럼, 그럼. 가르쳐 주고 말고. 이 맛있는 포도주를 한 병만 더 마시고 곧 출발하도록 하세." 두 사람은 하늘이라도 날 듯한 유쾌한 기분이 되어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겨우 일어섰을 때는 벌써 한밤중이었다. 밤거리에는 주정꾼들이 술에 잔뜩 취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메딕 목사는 곧 포저린게이한테 명령했다. "저 주정뱅이들을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해 줘." "예, 알았습니다." 포저린게이가 한쪽 손을 살짝 흔들고 입 속으로 뭐라 중얼중얼하자, 주정뱅이들은 한꺼번에 술이 다 깨어버렸다. 그리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동안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나, 이윽고 맥없이 슬슬 집으론 돌아갔다. "옳거니, 됐어. 그런 식으로 하면 돼." 메딕 목사는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두 사람은 한길로 나섰다. 거리에는 사람과 마차가 붐볐으나, 길이 나쁜데다 좁은 탓으로 혼잡을 빚고 있었다. "이번엔 저 도로다. 저것을 훌륭한 도로로 싹 바꿔 놔 봐." 포저린게이가 도로를 바라보여 입속말로 두세 마디 중얼중얼하자, 도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쭉 곧고 넓고 깨끗한 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금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새로운 기적을 자꾸자꾸 일으키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더러운 개천을 물고기가 노는 깨끗한 내로 바꿔 놓았다. 방금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낡아빠진 다리를 튼튼한 새 다리로 바꿔 놓고, 질퍽질퍽한 늪지의 물을 말려 버리는가 하면, 허물어진 선창가를 깨끗이 수리하기도 했다. 거기까지 해 나갔을 때, 교회의 종소리가 3시를 알려 주었다. 포저린게이는 갑자 놀라, "아, 벌써 새벽 3시가 되었군. 이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지." "무슨 소릴, 아직 시작일 뿐이 아닌가?" 기적의 힘에 홀딱 정신이 빠진 메딕 목사는 꾸짖듯이 말했다. "아침까지는 이 동네를 완전히 새마을로 만들어 놓아야 하네." "하지만 저는 직장에 나가야 하고, 또 너무 늦게 돌아가면 하숙집 아주머니가…" "그런 일엔 더 신경 쓸 것 없어요." 메딕 목사는 어째서 그런 것도 모를까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그 기적의 힘으로 시간을 딱 멈추게 하면 되잖나, 이 사람아! 그러면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아침이 오지 않도록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군요… 하지만 어떡하면 시간이 멈추나요?" "간단한 일이지 뭐." 메딕 목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구상에 아침이 되고 밤이 되는 건 무슨 까닭인가. 지구가 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지구의 회전을 멈추게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렇군요. 목사님은 과연 머리가 좋으시네요."' 포저린게이는 두 발을 딱 벌리고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구야, 멈춰라!"   내 탓이다   다음 순간, 포저린게이는 무서운 속력으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메딕 목사도, 옆에 서 있던 마차도, 길을 가던 들개도, 나무도, 돌도… 무엇무엇 할 것 없이 송두리째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고 만 것이다. 한순간 포저린게이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것이 라 여겼다. "기적이여, 나를 안전하게 땅에 내려 놓아다오." 이렇게 외치자마자, 그는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버린 빌딩의 옥상에 사뿐 내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관절 어찌된 영문일까. 동네는 마치 무서운 폭격을 당한 것처럼 형편없는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빌딩은 무너지고, 목조 건물은 그 자리에 폭삭 내려앉고, 지붕이나 가로수가 날아가 버리고, 온 하늘에는 벽돌과 돌과 나무와 인간과 소와 말과 돼지… 그밖에도 수많은 것들이 날고 있었다. 우르르 우르르륵. 지옥 세계의 밑구멍이 빠져 버린 것처럼 무서운 태풍이 휘몰아치고, 눈알이 터져 달아날 듯이 번갯불이 번쩍번쩍 빛나고, 천지를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이건 어찌된 거야. 이 폭풍우는 여간한 폭풍우가 아니다.) 포저린게이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철근에 매달리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밤하늘에는 희푸른 달빛만 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혹시나, 이 폭풍우도 내 탓이 아닐까?) 포저린게이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으려고. 나는 지구야, 멈춰라 했을 뿐이지, 폭풍우야 불어라, 지진아 일어나거라 란 말은 한 기억이 없는데…) 그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가만 있자. 나는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 지구를 멈추게 했거든. 지구는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딱 멈추게 했으니, 즉…) 포저린게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만일에 맹렬한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마차를 갑자기 세우면,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좌석에서 쏟아져 내려 달아나게 된다. 그 탄력이 더 강하면 마차 밖으로 탁 튀어나갈지도 모른다. 만일에 그 마차가 지구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 지구가 별안간 멈추어 버린다면 - 물론 지구상에 있는 것은 모조리 대포의 탄환보다 빠른 속도로 공중으로 쏟아질 것은 뻔한 일이다. 도시도 마을도 빌딩도 집도 다리도 인간도… 세계 속의 모든 것이 그 탄력에 의해 부수어지고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의 기적의 힘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참으로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 경찰관을 지옥으로 보낸 죄 값을 치르기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아아, 나는 세계를 멸망시켰다. 살인자다…) 포저린게이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때 문득, 바다 쪽을 바라본 그는 무서운 광경에 정신이 쏠렸다. 해일이었다. 바다도 역시 기적의 힘으로 뒤흔들려 하늘을 뒤덮는 듯한 무서운 물벼락이 이리로 휘몰아쳐 오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전과 같이   포저린게이는 필사적으로 그 파멸을 막으려 하였다. "그만 멈춰라! 제발 좀 가라 앉아다오!" 그는 밀어닥치는 물벼락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기적도 해일한테는 이기지 못하는지 여전히 자꾸자꾸 몰아닥쳐 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보고,"바람아, 그쳐라!" 하며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외쳤다. 그러나 바람은 그의 말을 불어 날려 버리듯이 한층 더 세게 불어닥칠 뿐이었다. "폭풍우여, 가라앉아라. 번개야, 그만 꺼져 버려라!" 그는 두 손 모아 비는 마음으로 외쳐댔다. 하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사그라져 버렸던지, 아니면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런지… 포저린게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맸다. (차라리 처음부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자꾸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려가 버리지 않으려고 철근을 꼭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막 눈앞에 밀어닥친 해일을 지켜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기적이여, 기적이여, 잘 들어 다오! 이제 간절히 바라노니, 나한테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거둬 가다오. 나로 하여금 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해다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정성껏 빌었다. "기적이여, 이젠 그만해다오. 아무 일도 없었던 옛날로 날 돌아가게 해 다오. 나로 하여금 롱 드래곤 주점에서 처음 기적을 일으켰던 그 전 상태로 돌아가게 해 다오!" 포저린게이는 눈을 감았다. "자, 제발 부탁합니다!" 그 순간, 바람 기운이 싹 떨어진 느낌이 들고 주위가 캄캄해졌다. 무서운 소리가 딱 그치고 고요가 온 세계를 둘러쌌다. (아아… 역시 안 되는구나. 끝내 세계의 끝장이 날 판이구나.)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퍼뜩 눈을 떴다. 거기는 다름 아닌 롱 드래곤 주점이 아닌가. 주위에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낯익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웃고 성내고 이야기하고 흥청거렸다. 그 외 앞에는 친구 비미슈가 맥주 잔을 들고, 남을 깔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저린게이 청년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왜냐 하면, 모든 일이 기적이 일어나던 전으로 되돌아와 버렸기 때문에, 그도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이것 봐, 그 따위 소릴 했댔자…." 하고 비미슈가 말했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날 까닭이 있겠나?" "그야 쉽사리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한번 일어났다 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나." 포저린게이는 어쩐지 언제 어느 곳에서 똑같은 말씨름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무튼 기적을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저 램프가 보통 때라면 거꾸로 서서 그대로 탈 수야 없지 않겠어, 그렇지? 하지만 기적의 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때, 램프가 별안간 공중으로 떠오르고 거꾸로 되더니, 조용히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늘의 공포 The Horror of the Heights   코난 도일 Arthur Conan Doyle 지음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이라는 것에 대해 보통 다른 감정을 품어 왔습니다. 하늘은 신비스럽게만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늘은 푸르고 맑고 조용하게 보이다가도, 금새 시꺼먼 먹구름이 몰려와 호우(豪雨)를 퍼붓기도 하고, 바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서운 폭풍우를 휘몰아쳐 땅 위를 휩쓸고, 홍수를 일으켜 집이나 논밭을 떠내려가게 합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뒤흔드는 천둥과 벼락 소리나 어둠 속에서 불칼처럼 휘둘러대는 번갯불은 옛날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하고 겁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는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진 것 - 여러 신들과 초자연의 괴물과 악마들이 산다고 여겼습니다. 번개는 번개의 신이 던지는 불덩이요, 폭풍은 바람의 신이 일으키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러한 미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바람은 태양으로 따뜻해진 대기의 이동이고 비는 공중으로 증발했던 수증기가 식어서 물방울이 된 것이고, 또 천둥은 정전기의 부딪침이라는 원리를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도 인간은 하늘에 대한 공포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2백 년 전, 즉 1784년 프랑스의 몽골리에 형제가 만든 기구가 처음으로 인간을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 기구는 점점 발달되어 자꾸자꾸 더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1840년에는 7천 미터까지, 1860년대에는 1만 1천 미터 높이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도 높은 하늘에 올라가면 공기가 적어진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못했던 까닭에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높은 하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인류 사상 처음으로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의 일이었는데, 그 때부터 한동안은 겨우 고도 1백 미터쯤 되는 낮은 하늘을 흔들흔들 날았습니다. 이 소설이 씌어진 1910년은 아직 비행기가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러한 공상이 떠올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물론 지금은 대개의 제트 여객기는 1만 미터의 높은 하늘을 날고, 2만 미터, 3만 미터 가량까지 올라가는 것으로는 군용기나 실험기 같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과학의 눈부신 발전상을 실감케 하는 소설이라 하겠습니다. 코난 도일(1859~1930)은 괴기소설의 아버지라 할 만큼 너무나 유명합니다. 명탐정 셜록 홈즈를 비롯해서 수많은 괴기소설 중에는 문학사에 영원히 남는 걸작이 많습니다. 또, 과학 소설과 공포 소설도 많이 썼습니다. 가장 유명한 과학 소설은 와 , 그리고 공포 소설로는 이 책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피묻은 수첩   세상에는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이라든지, 꾸민 이야기라든지, 혹은 단순한 생각의 잘못이라든지 넘겨버릴 수 없는 사건이 있는 법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와 같이 세상에서도 드문 괴상한 사건의 하나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의 9월 15일, 켄트 주 위지엄 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때, 자유롭게 수첩장을 끼었다 빼었다 할 수 있게 만든 낮선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데서부터였다. 수첩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꽉 차 있었지만 농부는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표지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크, 혹시나 끔찍한 살인 사건의 증거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농부는 그 수첩을 곧 마을 이장한테 가져갔다. 이장은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고, 그 너무나 괴상한 내용에 깜짝 놀라, 전부터 잘 아는 런던 대학 교수한테 보냈다. 그 대학 교수도 크게 놀랐다. 그래서, "이것은 전문가한테 보여야지." 하고, 런던 항공 협회에 넘겼다. 런던 항공 협회의 사람들은 그 수첩을 한 번 보고 나더니 매우 흥분했다. 수첩은 앞쪽 두 페이지와, 마지막 한 페이지가 없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에서 누구의 것인지 당장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난해 9월 14일, 혼자서 고공 기록에 도전했다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영국 항공계의 명조종사 조이스 암스트롱의 최후의 수기였던 것이다. 암스트롱은 영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큰 부자였다. 특히 기계에 관해서 자세하여 특허를 몇 가지나 딴 발명가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유명했던 것은 그가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디바이지스 시 근처에 있는 그의 전용 비행장에는 자가용 비행기가 네 대나 있었고, 한해 동안에 1백 50회나 하늘을 날아 여러 가지의 비행 기록을 세웠다. 요즘, 그는 특히 고공 비행에 세계 기록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비행기를 주문하는 등 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비참한 사건이 하나 생겼다. 영국 공군의 조종사로, 암스트롱에 버금가는 적수 마틀 중위가 1만 미터의 고공(高空)에 도전했다가 원인 불명의 사고로 추락되어 무참히 죽었던 것이다. 중위의 시체는 비행기의 잔해와 함께 발견되었으나 머리 부분이 송두리째 없었다. 암스트롱은 이 사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틀 중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1만 미터 이상의 고공 신기록을 세워 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10일, 1만 2천 3백 90미터라는 눈부신 고공 기록을 거뜬히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암스트롱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날로부터 불과 나흘만에 다시 고공 기록에 도전하였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수첩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과, 행방불명의 진상을 밝혀 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상이란 참으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다. 당신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에 적은 수기를 읽고 스스로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암스트롱의 수기   (이 수기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앞의 두 페이지와 뒤의 한 페이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중간에서 시작해서 중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주의해서 읽을 것.)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명히 고공 기록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사고도 일어나기 쉬우므로, 그로 말미암아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조종사가 몇이나 생겼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죽는 모양이며 추락하는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2~3년 전에 죽은 프랑스의 베리아 비행사와, 또 그 다음에 죽은 영국의 박스터 비행사의 경우는 비행기의 잔해가 발견되었을 뿐 끝내 비행사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박스터의 경우에는 마침 그 밑을 비행하고 있던 다른 비행사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잡힌 것처럼 자꾸자꾸 올라가는 박스터를 보았다지만 비행기는 도저히 그런 수직 상승을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또, 올해에 들어서 코나 비행사는 간신히 비행장까지 돌아오기는 했어도, 조종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심장마비라 했지만, 코나 비행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의 세 배나 건강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느냐 그는 죽기 직전, '아,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거듭 말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이번에는 마틀 중위의 비극이다. 마틀 중위의 시체는 머리가 없어졌다.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떨어져 달아났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파편도 남기지 않고 없어진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의 비행복에 흥건히 묻어 있던 기름이다. 그것은 비행기에 사용되는 어떤 기름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름은 대관절 어디서 묻었단 말인가? 1만 미터 이상의 높은 하늘은 아직도 전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이다. 어쩌면 거기에는 고공 밀림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들이 아직도 모르는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틀 중위도 코나도 박스터도 그 괴물의 습격을 받은 것은 아닐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수수께끼를 풀고야 말겠다. 나는 그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9월 10일 아침 9시 반이 좀 지나자 나는 나의 애기인 최신식 베로나 단발기로 떠올랐다. 친구들에게는 고공의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엽총과 노루잡이용 총알 한 다스를 잊지 않았다. 그밖에도 물론 고공용 산소 호흡기나 방한용 털스웨터, 방한복에 방한모, 방한화 등 추위를 막기 위한 완전 장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베로나 기는 상쾌하게 날았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정점 고도를 높여 갔다. 1천 미터쯤 올라갔을 무렵, 강한 천둥과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나 비구름 층을 뚫고 올라가자, 곧 비는 그치고 주위는 매우 잠잠해졌다. 10시경, 3천 미터의 고도까지 도달했다. 그 뒤로는 매우 순조로와 구름 봉우리를 자꾸자꾸 뛰어넘어 어느 사이에 4천 미터, 5천 미터로 상승해 가고 있었다. 그 무렵에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베로나 기의 나사못이란 나사못은 모조리 삐걱거려 방금이라도 날개가 떨어져 달아나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한참 동안은 바람을 업고 날면서 고도를 높여 갔다. 7천 미터에 도달하자 방향을 바꾸어 월트샤 지방의 상공을 향해 날았다. 마틀 중위 비행기가 조난 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나는 이 근처에도 고공 밀림이 있으리라고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고 에어포켓에 빠지기도 하여 언제 공중 분해 될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지경이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낙하산의 끈을 늦추고 언제라도 금방 뛰어내릴 수가 있도록 했다. 이 때부터 종종 구역질이 나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공기가 적어지고 산소가 부족하게 된 탓이었다. 그래서 산소 호흡기를 달았더니 금방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1시 반, 애기는 드디어 1만 미터를 넘었다. 나는 세계의 왕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저 멀리 땅 위를 내려다보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베로나 기의 기능은 아직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도를 높여 갔다. 고공 밀림이 만일 있다고 하면 이 근처에서 위쪽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1만 2천 미터쯤 올라가니, 그보다 더 올라가기는 매우 곤란해졌다. 공기가 너무 모자라서 비행기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무렵부터 엔진의 기능이 떨어지며 기침을 하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만 3천 미터 근처까지 상승했을 때, 나는 마침내 단념하고 말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상으로는 더 올라가지 않는데다가 가솔린이 앞으로 한 시간 분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고도를 유지하면서 쌍안경으로 주위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주위에는 은빛으로 곱게 빛나는 구름 덩어리가 흩어져 있을 뿐 그밖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기수를 돌려 내려가려고 했다. 그 때였다. 비행기 앞에 화환 같은 모양을 한 이상한 구름이 태양 광선을 받아 번쩍 번쩍 빛을 내고, 빙글빙글 돌면서 나타난 것이다. 비킬 사이도 없었으므로 비행기는 그 속을 뚫고 들어갔다. 베로나 기는 별로 다른 일없이 그 속을 지나갔으나, 그 때 나는 뿌연 기름 같은 물질이 비행기의 창과 날개에 묻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수증기도 안개도 아닌, 어떤 매우 작은 미생물의 덩어리 - 바닷물의 플랑크톤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무서운 괴물을 보았다. 그 괴물은 의사당의 둥근 지붕보다도 훨씬 더 큰 인경(鱗莖)처럼 생긴 괴물 - 하늘을 나는 해파리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쨌든 이상한 괴물이었다. 몸뚱이 전체가 분홍빛이고 가느다란 초록색줄 무늬가 여러 줄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두 개의 긴 초록색 촉수가 늘어져 있었다. 그 하늘을 나는 해파리는 규칙적으로 숨을 쉬면서 천천히 너울너울 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생물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비행기를 선회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그 일대에 모여 있는 몇십, 몇백, 아니 몇천이나 되는 하늘을 나는 해파리의 큰 무리 속에 뛰어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하늘의 생물은 해파리뿐만이 아니었다. 넘실넘실하며 기나긴 바다뱀과 똑같이 생긴 것이 있는가 하면 기구처럼 둥근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명주처럼 엷고 투명하며 햇빛에 반사되어 일곱 가지 무지개 빛으로 번쩍이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저 아득한 상공에서 또 다른 괴상한 생물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몸 전체가 보랏빛을 띠고 있고, 한가운데에는 눈과 비슷한 검은 원반이 두 개, 희고 딱딱한 듯한 부리처럼 생긴 툭 튀어나온 것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내 비행기를 발견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덮쳐 왔다. 나는 바짝 속도를 내었다. 그 괴상한 매같이 생긴 공중 동물의 속력은 비행기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행기를 따라와 나란히 날더니, 몸 아래쪽에서 여러 개의 긴 촉수들을 쫙 뻗쳤다. 한 촉수가 열기로 뜨거운 엔진에 닿았다. 데인 탓일까. 촉수가 치직 소리를 내며 움츠려졌다. 또 한 개는 프로펠러에 닿자마자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베로나 기의 기수를 급히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촉수는 또다시 무서운 속력으로 쫓아왔다. 그래서 뒤쪽에서 좌석 안으로 뚫고 들어와서는 내 몸을 휘감았다. 놀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나는 좌석에서 끌려나갈 뻔했다. 그래서 얼른 엽총을 집어들자 두 방을 연거푸 쏘았다. 그 중 한 방이 공중에 뜨는 구실을 하는 듯한 주머니 같은 것에 명중되자 그 속의 기체가 피익 하고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괴물은 갑자기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나는 이 때다 하고 전속력으로 급강하를 계속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고공 밀림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행장에 돌아오자 나는 친구들에게 고공 비행의 신기록을 세웠다고만 말했다. 공중 생물에 관한 이야기만은 도무지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 괴물들의 사진을 찍어 와야지. 그래서 그 사실을 온 세계에 대해 발표해야지.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다시 한번 더 저 고공 밀림을 향해 출발할 작정이다.   수기는 여기서 끝났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틀림없이 비행기 안에서 적었으리라 여겨지는, 흔들린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1만 2천 미터. 이제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가망이 없다. 놈들이 세 방향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아아, 이젠 끝장이다…   이것이 조이스 암스트롱의 최후였던 것이다. 작은 거인 The Microscopic Giants   에른스트 Paul F. Ernst 지음       과학 소설에는,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침략자가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합니다. 화성인이나 목성인, 그러고 토성인과 같이, 태양계 외의 행성에서 온 인간인 경우도 있습니다. 태양계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별이나 성운(星雲)의 우주인일 때도 있습니다. 또 바다에서 기어올라온 괴상한 짐승일 경우도 있고, 태고의 공룡이 부활되어 기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침략자는 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대지 밑에서 사는 지하 인간입니다. 지구 위의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2백만 년에서 3백만 년 전 원숭이 종류가 점점 진화되어, 마침내 호모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인종, 즉 인간)로서 독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방면으로 진출하여 갖가지의 인종과 민족으로 갈라지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동물의 왕자로 군림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모르는 인류의 한 종족이 아득한 옛날에 땅 밑에 파고 들어가서 생활을 하기 시작하지나 않았을까요? 수백만 년 전 인류나 원숭이의 아득히 오랜 선조가 겨우 나무 위 생활을 버리고 땅 위로 내려왔을 무렵, 그대로 동굴이나 지하 굴속에서 살게 되자, 차츰 지하 생활에 익숙해져 진화된 인류가 생기지나 않았을까요? 만일 이러한 인류가 있다고 하면 - 그 인종은 점차 지하의 높은 압력이나 열에 견딜 수 있도록 몸이 진화되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지하 사람들은 땅 표면에서 수천 미터 되는 깊은 지하를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고 거기에 지하 도시를 만들어 독특한 문명을 발전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과학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인류는 지금까지 갈 수 없었던 지하 세계에도 진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릴이라든지, 굴착기 같은 땅을 파는 기술이 발전되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광물이나 석유를 찾기도 하면서 지구의 내부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핵무기 실험을 지하에서 한다든지, 바다 밑을 볼링하여 연구한다든지, 지하 도시를 계획하는 등 여러 가지의 일들이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지하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지하 사람들에게 대한 도전이 아닐까요? 즉, 지하 사람들은 우리들 땅 위에서 사는 인류를 위험한 적, 악질적인 침략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나 아닐까요? 그러한 일이 만의 일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공상 과학 공포 소설의 작자 폴 에른스트는 1930년대에 미국에서 활약하던 사람인데, 이 작품은 지하에 관한 것의 걸작으로서, 여러 명작집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발자국   그 괴상한 사건이 생긴 것은 상당히 오래 전, 그러니까 지난 번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사건 서류는 어디론지 뿔뿔이 흩어져 없어지고, 신문이나 라디오에도 발표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을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한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구리였다. 그 무렵 세계는 온통 구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구리는 전선이나 탄환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온 세계의 구리 광산에서는 온갖 힘을 다해서 구리를 캐내고 있었다. 나하고 친구인 광산 기사 벨몬트가 일하고 있던 곳도 그러한 광산 중의 하나였다. 다만, 우리들의 구리 광산은 다른 곳과는 좀 달랐다. 그것은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갱도가 있는 광산이었던 것이다. 보통의 구리 광산의 갱도의 깊이는 기껏해야 5~6백 미터 가량이었다. 가장 깊은 갱도라 해도 2친 미터 가량밖에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둘이 일하고 있던 휴베리올 구리 광산의 갱도는 무려 1만 3천 미터나 되는 엄청난 깊이였다. 더구나 우리는 보다 더 순수한 구리의 광맥을 찾기 위해, 지하 깊이 자꾸자꾸 파내려 갔다. 그래서 그 사건이 생긴 날, 우리들은 1만 3천 2백 미터의 깊이까지 파내려 갔던 것이다. 거기에는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던 아주 멋진 구리 광맥이 있었다. "만세, 드디어 찾았다!" 우리들은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 날뛰었다. 그리고 당장에 수평 갱도를 팔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할 일 때문에 한 발 먼저 땅 위로 올라왔고, 벨몬트가 남아서 광부들을 지휘하여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나한테, 벨몬트가 눈을 유난히 빛내며 다가왔다. "프레이터, 굉장한 것을 보았어!" 그는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뭔데 그래. 대관절 무얼 보았다는 거야?" 나는 되물었다. "기가 막히는 발견일세. 곧 국립 박물관에 전화를 해야겠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무선 전화 앞에 자리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대관절 뭘 가지고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매머드의 뼈나 공룡의 화석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발자국이야. 화석으로 된 인간의 발자국이란 말일세." "그럴리가?" 나는 엉겁결에 큰 소리를 질렀다 그 까닭은 1만 3천 미터 깊이의 지층은 1백만 년 이상 전의 것으로, 인류의 조상도 아직 이 세상에 없었던 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몬트는 자신 있듯이, "하지만 분명히 있는 데야 도리가 없지 않겠나. 저 바위 위에 남아 있는 자국은 틀림없이 인류의 가장 오랜 조상의 발자국이야," 벨몬트는 갑자기 소리를 낮추었다. "더구나, 놀랄 만한 사실이 있어. 그 발자국은 신을 신은 발자국이란 말이야."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세히 보고 말하라고. 그건 틀림없이 광부의 발자국일 테니. 아니, 이 사람아, 정신나간 소리 작작해. 그런 걸 국립 박물관의 전문가에게까지 보이며 수선을 떨다간 웃음거리밖에 안 돼요." 그러나 벨몬트는 웃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가 않대도. 그 발자국은 난쟁이나 어린이만큼 작은걸. 기껏해야 60센티미터 가량밖에 안 되는 키를 가진 인간의 것이란 말일세." "그럼, 광부 중의 누군가가 장난을 쳤겠지 뭐." "그렇지가 않대도 그래. 내 말 좀 똑똑히 들어보라고. 거기는 아주 단단한 바위 층이어서, 여간해선 지워지지도 않아요, 아무리, 누가 그런 힘든 장난을 치려고." "도대체 그건 어디에 있는가?" "수평 갱도의 막다른 곳이야. 왜 그 바위 층의 갈라진 틈새가 있지 않던가. 우리가 콘크리트를 들이붓던 곳 말일세, 바로 그 근처야."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 콘크리트는 내가 감독해서 광부한테 시킨 거야. 그 때는 아무 것도 없었어." "그렇게 고집을 부릴 테면, 어디 한번 자네가 직접 가보고 오란 말이야. 그것이 가장 확실할 테니. 자, 그럼, 나도 같이 갈게." . 그리하여 우리들은 함께 갱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콘크리트 속의 그림자   이윽, 우리는 갱도 속을 천천히 내려가는 상자 모양의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공기 압력이 바뀌게 되므로 너무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간신히 수평 갱도의 막다른 곳까지 왔을 때, 우리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이 지하 세계에는 기압이 높은 관계로 숨이 찼던 것이다. 아무리 송풍 장치를 돌려봐도 온도는 40도 가까운 무더위가 되는 곳이다. "여기야." 콘크리트 벽 바로 앞까지 왔을 때, 벨몬트가 발 밑의 땅을 가리켰다. 나는 거기를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그 바위 표면에 길이 10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발자국이 열두어 개나 나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발자국은 마치 보드라운 모래밭을 밟았을 때 나는 것처럼 2~3센티미터쯤 패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분명히 신발 밑바닥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에 찬물이 끼얹은 것처럼 오싹함을 느꼈다. 벨몬트가 말한 것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1백만 년이나 전에, 이런 지하에 신발을 신은 인간이 걸어다녔다니, 그런 턱없는 일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 때, 문득 콘크리트 벽을 바라본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콘크리트 표면이 희게 흐린 듯이 뿌옇게 빛나며 마치 반투명 유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콘크리트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더니, 그 안쪽에서 빛의 무늬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몸뚱이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해 볼 겨를조차 없이 후딱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찌는 듯이 덥고 숨막히는 데다가, 이런 이상한 발자국을 보았으니, 눈 앞에 환상이 나타났던 게지.> 그러나 벨몬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자, 이젠 알겠지. 바로 국립 박물관에 전화를 걸러가세." "잠깐만!" 나는 그 때 또 하나의 이상한 사실을 목격했다. 발자국은 앞을 향해 대여섯 개, 뒤를 향해 대여섯 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콘크리트 벽안에서 나와, 주위를 잠깐 살펴보고는 다시 콘크리트 벽 안으로 돌아 들어간 듯이 보였다. "앗!" 갑자기 벨몬트가 외치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자국에 눈을 가까이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래?" "아까 내가 확인했을 때는 발자국이 열두 개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새 자국이 네 개나 더 나 있는걸." 우리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이 꼿꼿이 선 채 그 발자국을 들여다보았다. 새 발자국이 나 있다는 것은, 곧 벨몬트가 사무실에 올라간 동안에 그 어떤 것이 이 근처를 돌아다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숨이 칵칵 막히도록 무더운 갱도 안에서 우리는 숨소리를 죽인 채 꼼짝 못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사람이냐 유령이냐   "프레이터 씨!" 별안간 부르는 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광부 조장 카슨 노인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것이었다. "프레이터 씨, 아무래도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광부들이 일하기 싫다고들 합니다." "왜요?" "다름 아니라, 광부 하나가 유령을 보았다는 바람에… 그래서 다른 광부들도 기분이 나쁘다면서 작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유령을요?" "예, 이 콘크리트 벽 안에 사람이 있더래요." 나하고 벨몬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카슨 노인은 목을 움츠렸다. "정말 턱없는 소리지 뭡니까. 그 인간이란 것은 키가 50센티미터나 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난쟁이래요. 콘크리트 속에서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나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콘크리트를 통해서 보였다는 겁니다." 카슨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그따위 턱없는 소린 아예 믿지 않지만, 광부들은 미신을 좋아하거든요. 아무튼 이처럼 깊은 곳까지 파내려 온 것은 처음 아니겠어요. 산신령님이 성을 벌컥 내며 나타났느니 뭐니 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겨드랑이 밑에는 식은땀이 흠뻑 배었다. "알았어요. 그 광부를 좀 데리고 와 주시오." 카슨 노인은 곧 그 광부를 데리고 왔다. 당당한 체격에 다부지게 보이는 늙은 광부로, 여간한 일을 가지고는 함부로 떠들어댈 만한 겁쟁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주름진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일을 그만두겠소, 기사님. 그런 기분 나쁜 것이 있는 곳에선 일할 수 없어요." "좀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없겠어요?" "벽 속에 번쩍번쩍하는 난쟁이가 있었어요." "그럴리가! 당신은 옛날에 난 이 발자국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니오?" 벨몬트가 옆에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렇지가 않아요. 이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걸요." 광부는 이렇게 말한 다음 발 밑을 가리키며, "이 발자국은 옛날 것이 아니란 말이오. 바로 두 시간쯤 전에 그 번쩍이는 난쟁이들이 낸 거요. 알겠어요, 기사님 들?" 우리 두 사람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 광부는 어쨌든 그만두겠다면서 돌아가 버렸다. "에잇, 참, 별꼴 다 보는군." 벨몬트가 내뱉듯이 말했다. "참으로 미신쟁이들만 모였군 그래. 콘크리트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생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 라고…" 나는 아까 내 눈으로 본 것을 벨몬트한테 말하려 했지만 비웃음만 살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자, 그럼 어쩐다?" "이걸 그대로 두었다간 광부들 사이에 그 터무니없는 헛소문이 퍼져서 모두 일을 팽개칠 거다. 그런 말은 얼토당토않은 착각이라는 걸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돼." 하고 벨몬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튼 나도 그 괴물의 정체를 가려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나는 카슨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밤에는 광부들을 철수시켜 주시오. 오늘밤은 우리가 이 갱도를 감시할 테니." "그럽시다." 카슨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나타난 괴상한 인간   우리는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서, 손전등과 물통 따위의 장비를 갖추어 갱도로 다시 돌아왔다. 만일을 위해서 둘 다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왔다. 인기척이 없는 갱도 속은 그야말로 기분이 나빴다. 갱도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 소리가 괴물의 울음 소리처럼 들려왔다. 우리 두 사람은 바로 그 발자국이 나 있는 갱도의 막다른 곳인 콘크리트 벽 앞에 앉았다. 벌써 한밤중이었지만, 전등불이 환히 비쳐서 그 근처는 대낮같이 밝았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느닷없이 벨몬트가 몸을 움찔하더니, "이크, 저것 봐!" 하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권총에 손을 갖다 대며 그 쪽을 보았다. 콘크리트의 한가운데가 희미하게 빛나며, 안에서 빛의 무늬 같은 것이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마음 탓이라 여기고 손으로 눈을 닦았다. 그래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두께 3미터나 되는 콘크리트의 가장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 덩어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마치 콘크리트 속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점점 이쪽을 향해서 번져 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 내 정신이 돌지나 않았나 의심했다. 그러나 벨몬트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은 심한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속의 빛나는 그 괴물은 차차 뚜렷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겨우 60센티미터 가량이나 될까말까. 그렇지만 흔히 서커스 따위에 나오는, 머리만 크고 손발이 몽땅한 꼴사나운 난쟁이는 아니었다. 비록 몸은 작지만 그런 대로 쭉 빠진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과학 영화라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 난쟁이는 마치 물 속이나 강한 바람결을 헤치고 오는 것처럼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리고 다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야무지게 땅바닥에 내디디며 반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한 가벼운 몸짓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바닷물 속에서 잠수부가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난쟁이가 걸어오면서 헤치고 있는 것은 물론 물도 바람도 아니다. 그 딱딱한 콘크리트인 것이다. 즉, 난쟁이는 콘크리트 속을 마치 물이나 공기 속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 뒤에는 마치 물 속을 헤엄칠 때 생기는 물거품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몸 전체가 희미하게 빛났다. "앗, 저. 얼굴…" 벨몬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도 그것을 느꼈다. 난쟁이는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들보다 훨씬 더 다듬어진 멋진 얼굴이었다. 쪽 곧게 뻗은 오똑한 코, 잘생긴 입, 총명하게 보이는 맑고 큼직한 눈매 - 분명히 우리 인간과 같은,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발달된 고등 생물인 것 같았다.   지하 사람이다!   우리는 몸을 떨었다. 분명, 저것은 지하에서 태어나서 지하에서 자라난 지하 세계의 인간임에 틀림없다.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1백만 년이나 2백만 년 전에 유인원 무리에서 갈라져 독립되었다고 생물학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보다 훨씬 전에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져 따로따로 진화된 것이리라. 인류의 대부분은 지상 생활의 나무 위나 풀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하 생활자는 땅 속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몇만 년, 몇십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지하의 인류, 다시 말해서 지하 사람들은 점점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것은 보통과 같은 동굴이 아니라, 지하 몇 십 킬로미터나 되는 지각의 갈라진 틈새였을 것이다. 그런데 땅 속 깊은 세계에는 기압이 높고 열도 높다. 그래서 기나긴 세월 동안 지하 사람의 몸은 환경에 적응되어 차차 단단하게 변화되어 갔다. 마침내 지하 사람들의 몸 세포를 이루고 있는 분자의 구조까지도 변화되고 만 것이다. 콘크리트가 단단한 것은 콘크리트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콘크리트보다 훨씬 더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이 있다고 하면 그 생물은 콘크리트 속을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듯이, 또 인간이 공기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듯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 난쟁이는 어느 사이에 다가와 콘크리트 벽 표면까지는 겨우 수 센티미터만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둘이었다. 지하 사람들은 우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난쟁이는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제트기의 비행사가 입는 비행복과 비슷했다. "오호라, 저것들이 살고 있는 곳은 여기보다 훨씬 더 깊은 땅 속일 거야. 그래서 여기는 마치 우리들의 높은 하늘과 마찬가지로 기압이 낮은 곳이 되겠지. 그러니 저것은 비행복이란 말일세." 나는 벨몬트한테 귀뜸해 주었다. "만일에 이 추측이 맞는다면 저것들이 왜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벨몬트가 의문을 나타냈다. "아마, 우리들이 이 갱도를 파고 있는 소리를 듣고 조사하러 온 거겠지." 그때, 벨몬트가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고 몸을 움츠렸다. "어이… 저 뒤에도 또 있어." 그것은 나한테도 보였다. 콘크리트의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또 이상한 빛의 덩어리 두 개가 표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나타났던 두 난쟁이 옆에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 봐 ! 놈들은 우릴 적으로 여기고 있어. 저 눈초리는 마치 맹수라도 노려보는 것 같군 그래." 벨몬트가 목구멍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지하 사람의 눈에는 적의와 살기가 등등했고, 기분 나쁜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만일에 물고기에게 인간과 똑같은 지혜가 있어서 인간을 미워한다면, 틀림없이 저런 눈초리로 노려보겠지.) 차갑고도 험상궂고 무서운 그 눈초리…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놈들은 우리를 적이라 여기고 있어. 여기는 놈들의 나라이고, 우리는 그들의 나라를 쳐들어간 침입자라는 거겠지.) 나는 마음속에서 외쳤다.   지하에서의 싸움   "이크! 온다!" 벨몬트는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한 난쟁이가 별안간 불쑥 두 손을 내밀었다. 콘크리트 속에서 밖으로 두 팔이 불쑥 나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도 하다. 콘크리트에는 아무 자국도 나지 않았다. 부서진 조각마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얼른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쟁이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몸뚱이가 콘크리트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다른 세 사람도 얼른 따라나오더니 콘크리트 벽 앞에서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 뒤에는 구멍 같은 것이 하나도 생기지 않으니 어찌된 일일까. (역시 내 짐작이 들어맞는구나. 이것들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의 밀도가 높은 탓으로 보통의 물질 속을 꿰뚫고 다닐 수가 있구나.) 이론적으로는 알겠지만 실제로 눈 앞에 두고 보는 것과 이론과는 또 차이가 있는 법이다. 우리들은 너무나 무서운 광경을 눈 앞에 두고, 그저 멍하니 난쟁이들의 거동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난쟁이들은 일렬 횡대로 늘어선 채, 천천히 우리를 보고 다가 공격선을 죄었다. 벨몬트가 권총을 빼들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쏘지 않고 내 얼굴을 힐끗 보았다. 상대편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쏠 기분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하 사람은 넷 다 우리의 무릎께밖에 오지 않았으므로 쏜다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네 난쟁이는 약 2미터 앞까지 오더니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듯이 치켜들고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하나가 은빛으로 번쩍이는 옷 속에 손을 찔러 넣더니 가는 철사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이 무기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 고약한 것이!" 별안간 벨몬트가 큰 소리를 치더니 그 난쟁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갱내에 메아리쳤다. 총알은 영락없이 난쟁이의 가슴에 명중했다. 나는 난쟁이의 가슴이 펑 뚫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난쟁이는 마치 모기한테 물린 것만큼도 느끼지 않는 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었다. 놀란 티도 나타내지 않은 채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우리를 쏘아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처럼 무서운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도 권총을 빼들자 다른 난쟁이를 겨누어 갈겨댔다. 탕 타탕! 벼락같은 총소리가 서너 번 갱도 안에 울렸다. 그러나 자욱한 연기와 화약 냄새 속에서, 네 난쟁이들은 총알에 맞았어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제기랄 것! 총알이 놈들의 몸을 뚫고 지나가 버리는군." 벨몬트가 비명 섞인 소리로 외쳤다. 과연 뒤쪽의 콘크리트에 총알 맞은 자리가 대여섯 군데나 있었다. 그렇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지하 사람들이 총알을 맞았다기보다 그들이 총알 속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만큼 지하 사람들의 몸의 물질은 단단한 것이었다. 못같이 생긴 무기를 가진 난쟁이가 또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뒤의 세 사람도 따랐다. 우리는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 때, 나는 또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난쟁이들이 발을 내디디면 그 단단한 바위 위에도 마치 진흙 위를 걷듯이 움푹움푹 패이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저 수수께끼의 발자국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지하 사람의 체중이 너무 무거운 관계로, 바위 속에 움푹 패어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의 상대가 그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를 새삼 느꼈다. 굉장히 단단한 물질로 되어 있는 난쟁이들은 총알이나 다른 무기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어린이만큼 작은 난쟁이 몸에는 불도저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 때 선두에 섰던 난쟁이가 가지고 있던 못 같이 생긴 무기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불꽃이 확 튀었다. "앗!" 벨몬트가 무서워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툭하고 둔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내가 얼른 그를 부축하려고 달려들었을 때, 그의 오른쪽 가슴은 벌써 떨어져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아마 얻어맞는 순간에 벌써 숨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난쟁이가 쥐고 있던 그 작은 무기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보자, 나는 눈이 뒤집힐 듯한 분함을 느꼈다. 나는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권총으로 그 무기를 가진 난쟁이한테 바싹 들이대고 힘껏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총성이 잇따라 울려 퍼지고, 총알은 모두 난쟁이의 몸을 빠져나가 뒷벽에 맞았다. 난쟁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내 권총의 총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못 같은 무기를 번쩍 들었다. 빨간 불꽃이 확 튀었다., "아이쿠!" 내 자신의 비명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 내 오른쪽 손은 권총을 꼭 쥔 채, 손목에서 잘려나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시체를 표본으로?   그렇지만, 그 때의 나는 적개심과 분노의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나는 중상에도 굴하지 않고 난쟁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선두의 난쟁이를 힘껏 걷어찼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공격법은 없었다. 총알이 듣지 않는 상대에게 육탄전으로 달려들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발은 상대편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 순간, 뼛속까지 저려오는 심한 아픔을 느끼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난쟁이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놈한테 꼼짝없이 죽는구나…) 나는 정신이 멀어지는 것 같은 심한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흐려지는 눈을 가까스로 부릅뜨고 상대편을 노려보았다. 난쟁이들은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을 띠더니 등을 홱 돌렸다. 그리고 벨몬트의 시체를 들어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외 세 배나 되는 벨몬트의 몸을 한 손으로 30센티미터 가량이나 달랑 들어올렸다. 난쟁이들은 벨몬트의 시체를 들고 콘크리트 벽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벨몬트의 시체를 지하 세계로 가지고 갈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대로 두지는 않을 테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자, 간신히 엉금엉금 기면서 벨몬트의 시체를 끌어당기려 했다. 지하 사람 하나가 그것을 눈치채고 그의 작은 손으로 내 허벅지를 꾹 찔렀다.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지하 사람의 손이 나의 허벅지 속에 푹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놈은 손에 아무 반응이 없자, 몸의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그 힘으로 지하 사람의 팔은 어깨까지 내 다리에 푹 박히고 말았다. 기절할 만큼 아팠다. 지하 사람은 곧 팔을 뺐다. 그런데도 내 바지에는 구멍이 나 있지도 않았으며,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콘크리트의 경우와 똑같았다. 그 난쟁이는 동료들한테 갔다. 그리고 급히 서둘자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 때 알았지만, 지하 사람들은 매우 숨결이 가빠 보였다. 엷은 기압 속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호흡이 답답해진 모양이었다. 세 지하 사람들이 벨몬트의 시체를 옆으로 들고 나란히 콘크리트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하나는 뒤따랐다. 네 사람의 몸은 천천히 콘크리트 벽 속으로 녹아 들어가듯이 사려져 갔다. 그런데 또 기묘한 일이 생겼다. 그놈들의 몸뚱이는 모두 콘크리트 벽 속에 들어가 버렸지만, 벨몬트의 몸만은 콘크리트 벽에 딱 붙어 버린 것처럼 밖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하 사람은 콘크리트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지만 콘크리트보다 훨씬 밀도가 낮은 인간의 몸은 스며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서로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벨몬트의 시체를 콘크리트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벨몬트의 시체를 콘크리트의 벽에 달라붙을 따름이다. 네 난쟁이는 점점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처럼 입을 빠끔빠끔 벌리며 괴로운 듯이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저놈들을 뭣 때문에 저렇게도 벨몬트의 시체를 탐내는 것일까?)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옳지… 저 지하 사람들은 지하 세계의 생물학자인지 뭔지 아무튼 과학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비경(秘境)을 탐험해서 신기한 동물이나 곤충을 표본으로 채취하여 가져가듯이 벨몬트의 시체를 이 땅 위의 표본으로서 가지고 돌아가 연구하려는 것이구나…) 풀이 죽고 만 내 마음에, 또다시 불길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벨몬트의 시체에 기어가자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기묘한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콘크리트 속에서는 네 난쟁이가 벨몬트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밖에서는 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벨몬트의 시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는 사이에 난쟁이들은 더 참고 견딜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한 난쟁이가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크게 입을 벌리더니, 벨몬트한테서 손을 떼고 비틀비틀하면서 콘크리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또 한 난쟁이가 어떤 뜻 모를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먼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갱도 속에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위에는 광부 조장인 카슨 노인을 비롯해서 여러 광부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모여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콘크리트 벽에서 2미터 가량 떨어진 바위 위에 뉘어져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는 직경 2미터 가량의 큰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 아래에는 걸레처럼 무참히 찢긴 벨몬트의 시체가 가로놓여 있었다. 지하 사람들도 마침내 벨몬트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을 단념하고 만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일어나, 벨몬트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려 했다. "프레이터 씨, 벨몬트 씨는 벌써 죽어 버렸어요. 당신도 얼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처의 출혈이 심하니까요." 카슨 노인이 나를 붙들었다. "내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놈들이 내 친구를 죽였어요. 마치 벌레를 짓이겨 죽이듯이 비참하게 말이오. 원수를 갚아야지." 나는 붙들려드는 광부들을 밀어젖히고는 마구 울부짖었다. 너무나 무서운 꼴을 당하여 정신이 좀 이상해지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광부들은 나를 억지로 붙들어 수직갱도까지 날라다가 엘리베이터에 싣고, 땅 위로 데리고 갔다. 나는 곧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건졌다. 오른쪽 손목 끝이 달아나고 왼쪽 다리와 오른쪽 허벅다리가 삐었다는 진단이었으나 치료가 잘 되었기 때문에 한 달도 채 못 되어 완전히 나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있은 지 한 주일 가량 지나, 상처가 좀 아물기 시작하고 겨우 걸음을 옮겨 놓을 만큼 되자 나는 살그머니 병원을 빠져 나와, 또 다시 그 갱도에 몰래 들어갔다. 그래서 광부들이 한 때 자리를 비우는 휴식시간을 틈타 가장 구석진 사건 현장의 그 갱도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폭약을 장치하여 가지고 갱도를 폭파해 버렸던 것이다. 갱도는 중간에서 완전히 막혀 버리고, 그 구리 광산은 쓸모 없게 되고 말았다. 당연히 나는 군사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뜻밖에도 무죄로 끝났다. 너무 일에 열중했던 나머지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나는 재판 때, 모든 사람들에게 지하 사람의 무서운 모습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갱도를 폭파한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지하 사람들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지하 세계에 난쟁이가 있다는 것과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더 미친 사람으로 여기니 기막히는 노릇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벨몬트도 그놈들이 죽였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지하에 사는 인류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 콘크리트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생물이 어디 있어. 그런 것을 참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린 증거야.)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벨몬트의 죽음은 결국 원인을 모르는 폭발 사고 탓이라고 했다. 재판소의 무죄판결을 언도 받음과 동시에 나는 정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뒤부터는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께 맹세코 말하거니와, 이제까지의 내 말에는 털끝만큼의 허풍도 없다. 그 작은 거인들은 지금도 저 지하 세계에서 활개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최근의 내 걱정거리는 그 괴물들이 앞으로 한층 더 과학 기술을 발달시켜 다시 땅 위 세계를 탐험하고, 땅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어쩌면 지금 당장에라도, 땅 위에 그 괴기한 모습을 불쑥 내밀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체험했던 그 사건 후, 벌써 몇 십 년이 훨씬 지나갔다. 지금쯤은 벌써 그들의 연구나 조사가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땅 위 세계를 향해 행동을 일으키기 시작할 무렵인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땅 위에 나타난다면? 지금의 인류의 병기로는 절대로 그들한테 이길 수 없다. 지금 아무리 큰 어느 나라의 로켓포나 대포도 그 작은 지하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지하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이 무서운 무기 - 아마 열선총(熱線銃)일 것이다 - 가 있지 않은가. 그 무기로 공격받는 날에는 어떤 제트기나 어떤 탱크도 영락없이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속절없이 그 작은 거인들한테 정복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아… 그들이 땅 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때가 언제일까? 한 해 뒤냐, 한 달 뒤냐. 아니, 내일일지도… 오늘일지도 모른다. 벽 속의 아프리카 The Veldt   브래드베리 Ray Bradbury 지음       세상은 기계 문명의 발달에 따라 차차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겨우 몇십 년 전에 비교해 보아도 지금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만큼 편리하고 살기 좋고 즐거운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고 비행기가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 된 것도 겨우 7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자동차를 타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온 세계의 하늘에는 비행기의 항로가 그물처럼 얽혀 있습니다. 곧 완성될 에스에스티(SST ; 초음속 여객기)는 한국에서 미국까지 세 시간 남짓이면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로켓․우주선․텔레비전․전자 계산기 등의 전자공업 기술의 발달은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재 과학 기술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이 지난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세계로 변해 있겠지요. 이러한 흐름을 따라 인간의 생활 방식도 크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전자 두뇌나 텔레비전이나 자동식 기계나 재료나 그 밖의 모든 물질 문명의 발달도, 인간이 사는 집도 놀랄 만큼 바뀔 것입니다. 집의 문도 지금의 사무실의 문처럼 모두 자동식으로 바뀔 것이고, 조명 같은 것도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도 어두워지거나 하면 필요할 적마다 자동적으로 켜지게 될 것입니다. 전기 냉장고․전기 세탁기․냉온방 장치․전자 조리기 등도 훨씬 더 발달하여, 전자 두뇌에 프로그램을 넣어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척척 서비스하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미래의 집은 거기에 사는 인간을 저절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게 해 주며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게 해 주는 로봇 하우스로 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테니 참으로 편리하고도 편할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와 같은 편리하고도 편한 생활에만 기대고 지내야 옳을까요. 그런 생활로 말미암아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하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인간의 마음이 기계에 의해 좀 먹히는 일은 없을까요? 이 소설은 그러한 두려운 문젯거리를 우리한테 깨우쳐 줄 것입니다. 레이 브래드베리(1920~)는 지금 미국의 과학 소설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가로서 유명합니다. 브래드베리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를 소재로 하여 , 등 뛰어난 과학 소설을 많이 써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그날 밤에도 피터와 웬디는 저녁 식사 때를 놓치고 말았다. 따끈따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저녁 요리가 자동 조리기에서 식탁 위에 옮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매우 우울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얘들은 또 어린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가 보군." 하들리 씨가 말을 꺼냈다. "그런가 봐요. 그것에 정신이 팔려 식사 시간마저 잊었나 보죠." "그거 참, 성가신 애들인데." "그래요." 하들리 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서 살짝 들여다보아야지." "저도 갈께요. 식사를 온장고에 넣어 둬요." 리디어 부인이 말하자 식탁 근처에서, "예, 알았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고, 식탁 한복판이 푹 껴지더니 요리 그릇을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 부부는 식당을 나왔다. 자동문이 열렸다가 닫혀지자, 복도에는 자동적으로 전깃불이 환하게 켜졌다. 전깃불은 두 사람이 걸어감에 따라 자동적으로 앞쪽에서 켜졌다가, 그들이 지나가자 꺼졌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로봇 하우스인 것이다. 이 집은 옷을 입는 데서부터 식사 준비, 설거지, 아기 돌보기, 어린이의 놀이상대, 어른의 상담역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안 되는 것이라고는 없는 기막히게 편리하고 살기 좋은 집인 것이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어린이방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 안에 전깃불이 확 켜지더니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거기에는 아프리카의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싱그러운 푸른 초원. 저 먼 곳에는 울창한 밀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위의 파란 하늘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향긋한 식물 냄새를 풍기는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선지 영양이 제 자리 걸음치는 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푸드득 새가 활개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였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매 한 마리가 쏜살같이 하늘로 치솟았다. "불길한 새." "그렇지, 콘도르로군. 시체를 뜯어먹는 놈이오." 리디어 부인이 밀림의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사자가 있네요. 뭔지 잡아먹고 있는 것 같아요. 콘도르가 먹이를 가로채기 위해 노리고 있어요." 남편과 아내는 식은땀이 흠뻑 배어 나왔다. 때마침 큰 나무 뒤에서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사자는 두 사람을 보자,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그 큰 머리를 바싹 낮추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확 드러내더니 별안간 그 사자는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이크, 큰일났어요!" 리디어 부인은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남편의 손을 잡자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쾅 닫고 복도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숨을 헐떡였다. "당신도 참 바보로군. 저건 입체 영화란 말이오. 저 사자며 초원이며 독수리도 모두 저 방의 벽과 천장에 있는 환상장치에서 비춰진 것인데, 뭘 그러오. 저 싱싱한 나무 냄새며 자연의 소리만 하더라도, 인공 장치에서 나온다는 것쯤 잘 알 텐데. 내 원." 하들리 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리디어 부인은 웃지 않았다. "물론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너무나 실물과 똑같으니 그만…" 하들리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이들은 대관절 어딜 갔을까. 방 안에는 없잖소." "아마 친구네 집에 놀러 갔겠죠 뭐." 리디어 부인은 더 말하려다 말고 하들리 씨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에는 걱정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고장이 났을까?   리디어 부인은 식당으로 돌아오자 말했다. "여보, 저 환상 장치는 우리 아이들이 머리 속에 무엇인가 생각하면, 그것을 얼른 느끼고는 생각한 그대로를 입체영화로 만들어서 비쳐 주는 거겠죠?" "그럼, 그럼." "그럼 어째서 아이들이 없는데도, 아프리카의 초원 풍경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요?" "그런 일은 가끔 있어요.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꺼 버렸는데도, 한참 동안 끄기 전의 상이 그대로 스크린에 남아 있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아마, 피터와 웬디는 방금 아까까지도 그 방에 있었을 거요. 그래서 그 영상이 남아 있었을 거요." "그럴까요…" "암, 그렇고말고. 내 말이 틀림없다니까." "저는… 저 방의 환상 장치가 고장난 것이 아닐까하고 여겼는걸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만일에 고장이 났다면, 당장에 컴퓨터에 그 사실이 나타날 테니까, 우리가 당장 알 수 있지." "그야 그럴 테지만 만일에 그 장치마저 고장이 났다면?" "그럴 리가 없소. 그건 지나친 생각이오." "그랬으면 좋으련만…" 하들리 씨는 아직도 불안해하는 리디어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먹다 만 요리 접시에 나이프와 포크를 걸쳐놓고 일어섰다. "그렇다면 다시 가서 보고 오겠소. 이젠 아프리카의 풍경도 지워졌을 테지." 하들리 씨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어린이 방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이 방에 가까이 가자, 방안에서 어렴풋이 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하들리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자 거기에는 적도와 아프리카 초원이 펼쳐 있고 - 불과 5~6미터 앞에서 아까 그 사자가 쭈그리고 앉아 먹이를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사자의 입가에는 피가 새빨갛게 묻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나는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사자는 하들리 씨를 보자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험상궂게 으르렁댔다. 하들리 씨는 문을 열어놓은 채 성큼성큼 방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자는 눈을 까뒤집고 힐끗 그를 노려보았다. "썩 꺼져 버려!" 사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들리 씨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머리 속에 그렸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초원과 사자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이봐, 이 방아 듣거라! 알라딘의 요술램프라고 했는데도 모르겠느냐?" 하들리 씨는 화를 버럭 내면서 꾸짖었다. 그런데도 풍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좋다. '오즈의 마법사'도 '돌리틀 선생과 동물들'이라도 뭐든지 좋으니 아프리카하고 바꿔 놓아라." 그러나 아프리카의 풍경은 여전히 펼쳐지고 있었다. 사자는 하들리 씨를 경계해 가며 먹이를 우물우물 먹고 있다. 하들리 씨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급히 방을 뛰쳐나오자 부리나케 식당으로 돌아왔다. '저 아이들 방이 좀 이상하군." 하들리 씨는 내뱉듯이 말했다. "전혀 말을 듣지 않는군 그래." "아직 그 아프리카죠?" 리디어 부인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나…" "혹시라니, 대관절 무슨 뜻이오?" "아이들이 늘 아프리카나 사자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환상 장치에 버릇이 생긴 것이나 아닌지." "설마!" "그렇지가 않다면, 피터가 장치에다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겠군요." "응,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고서야 아프리카가 없어지지 않을 까닭이 없지." 리디어 부인은 하들리 씨를 쳐다보았다. "여보, 2~3일 동안만 아이들 방을 잠가 두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 놓으면, 피터 남매가 야단날 거요. 지난 달이었던가, 그 장난쳤던 벌로 아이들 방을 두세 시간 잠갔더니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소." "바로 그 점이어요. 피터나 웬디도, 어린이 방이 없어서는 못 견딜 것처럼구니 큰 일이군요. 마치 이 로봇 하우스의 마력에 사로잡힌 것만 같아요. 이래서는 아이들한테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여보." 리디어 부인은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여보, 차라리 이 집을 꼭 잠가 두고 2~3일 동안 여행이나 다녀오도록 합시다. 하이킹도 좋고요. 로봇이며 자동식 기계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생활이 하고 싶어졌어요." "정말이오, 여보? 요리나 청소도 당신이 손수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게 힘들걸. 지치고 말 거요." "그래도 좋아요. 너무나 기계에만 맡기는 일에 그만 싫증이 나요. 또 불안하고요. 제 손으로 뭐든지 하고 싶어요.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시키는 게 좋을 거고요." 하들리 씨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아내 말이 옳을지 몰랐다.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자연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기계만 믿다가 보니, 인간이 하는 일이란 너무도 없다. (그러고 보니, 나나 아내도 요즘 좀 불안해지고 있는 것 같군.) 하들리 씨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돌아왔어요, 아빠, 엄마." 힘찬 목소리가 들리며, 웬디와 피터가 식당에 들어섰다. "로봇 헬리콥터로 잠깐 공중 산책을 하고 왔어요." 하고 피터가 말했다. "식사에 늦어서 미안해요, 엄마." 웬디가 귀여운 보조개를 한쪽 볼에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피터, 너는 어린이 방의 환상 장치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하들리 씨가 커피를 마시면서 넌지시 물었다. "손을 대다니요, 아빠!" "어린이 방에는 늘 아프리카만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피터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없어요, 아빠. 우리가 나갈 때는 아프리카를 깨끗이 지워 버렸는데요." "거짓말해선 못 써요. 아빠는 아까 엄마하고 똑똑히 보고 왔는걸." 피터는 웬디를 돌아보았다. "웬디, 좀 가보고 오렴." "안 가도 돼." 하들리 씨가 말렸지만 벌서 늦었다. 웬디는 제비처럼 날쌔게 식당에서 뛰어나갔다. "그렇다면 어디, 나도 한번 더 확인해 보고 오마." 하들리 씨가 걸상에서 일어서자, 리디어 부인도 피터와 함께 따라 나섰다. 결국 모두가 한 번 더 어린이 방으로 가 보게 되었다. 모두 가 보니 어린이 방의 문이 열어 젖혀진 채, 방 안에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푸른 숲으로 가득 차 있는 풍경이 보였다. 깨끗한 냇물이 졸졸 흐르고, 산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나비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들꽃 위를 펄렁펄렁 맴돌고 있었다. 아프리카 초원과 사자는 아무 데도 없었다. "저것 보셔요, 제 말이 맞잖아요." 하고 피터가 말했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하들리 씨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어린이 방의 문을 잠갔다. "아빠, 문을 잠그면 어떻게 해요?" 피터가 항의하듯이 말했다. "오늘밤은 그만 자도록 해라." "하지만…" "자라는데도 못 알아듣겠니?" 하들리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끔하게 말했다. 그렇게 꾸짖은 것은 이주 오랜만이었다. 피터와 웬디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겁주는 말투   그날, 하들리 씨 부부는 밤이 이슥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보, 역시 그건 웬디가 한 짓일까요? 리디어 부인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물론이지. 아마 피터하고 짰을 거요. 그래서 우리가 가기 전에 어린이 방의 풍경을 싹 바꿔놓은 게지."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그 아이들은 어째서 그런 거짓 말을 했을까요?" "아프리카를 무척 좋아하는 탓이겠지, 그리고 저 방 때문이지. 저 방을 저희들 멋대로 해 두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든지,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예사로 알게 되어 버렸지." 하들리 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요." "저 방을 잠가 둡시다. 그리고 당신 말대로 여행이나 떠납시다. 그것도 2~3일이 아니라 한 달쯤 말이오. 그래서 자연의 공기를 마시면 로봇 하우스에서 들었던 나쁜 버릇도 고쳐지겠지." "과연 고쳐질까요? 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제 버릇으로 돌아가고 말 것 아니어요?" "만일 그렇게 되면… 이 집을 팔아 버립시다. 실은 아이들을 위해서 일부러 지은 집이긴 하지만… 결국 너무나 편리한 기계에만 모든 것을 맡긴 것이 잘못이었어." 하고, 하들리 씨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로봇학자 친구한테 저 방을 좀 조사해 봐 달랄까?"   이튿날 아침 식사 때, 하들리 씨는 피터와 웬디한테 여행 계획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피터는 깜짝 놀란 듯이 식사를 멈추고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방도 잠가 버리나요?" "그렇단다. 그래서, 좀더 자연 속의 생활을 하자꾸나. 참 재미있을 거다." "아이 참 아빠도, 전 싫어요." 웬디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구두끈도 자기 손으로 매어야 하나요? 이를 닦는 일도, 머리를 감는 일, 목욕을 하는 것 등 모두 자기 손으로 해야 하나요? 그런 건 싫어요, 전." "아냐, 때로는 그것도 좋단다." "귀찮은 일이어요. 아빠, 지난 번 아빠가 자동 그림 그리기 기계를 없애 버리실 땐 정말 실망했어요." "그건, 네가 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아녀요, 싫어요. 기계가 손보다 훨씬 더 잘 그려 주는데 뭘 그러세요, 아빠." "닥쳐!" 하들리 씨는 다시 화를 발끈 내고 말았다. 피터는 말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웬디도 눈물을 머금었다. 한참 동안 모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피터가 식사를 마치고 접시를 오물 처리기에 밀어 넣으면서 느닷없이 말했다. "아빠, 여행은 언제 떠나요?" "지금 생각 중이란다."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끄고 말이죠?" "그렇게 해야겠구나." "그것만은 그만뒀으면 해요." 피터는 넌지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 나쁜 말투로 들렸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쳐다보았다. (피터가 왠지 우리한테 겁을 주는 것 같구나.) 리디어 부인은 이런 생각이 들자, 새삼스럽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피터하고 웬디는 밖으로 놀러 나갔다.   피묻은 스카프   친구인 로봇 공학자는 그날 오후가 좀 지나서 찾아왔다. 피터와 웬디는 또 헬리콥터를 타고 어디론지 놀러가 버리고 없었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로봇 공학자를 어린이 방으로 안내했다. 열쇠를 꽂고 방문을 열자, 또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자는 숲가에서 입에 새빨간 피를 묻히고 열심히 먹이를 뜯어먹고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응, 정말 이건 좋지 않군.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지?" "한 달쯤 되었을 걸세." "이거 안 되겠는걸. 이 따위 방은 당장에라도 부셔 버려야겠는걸. 그러지 않았다가는 피터 남매가 영영 단념할 수 없게 되지. 그것도 하루라도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면 절대로 단념하지 못하게 된다네." "그다지도 심한가…" 하들리 씨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당신네들이 잘못했어. 당신들 부모가 말일세." 로봇 공학자는 하들리 씨 부부를 힐끗 바라보며 비꼬았다. "당신들은 아이들을 너무나 응석받이로 만들었단 말일세. 무엇이든지 좋을 대로만 내버려 둔 거로군. 더구나 부모가 돌봐 주지 않고 기계한테 그 일을 전부 맡겼으니 기계는 뭐든지 원대로 들어주고 언제나 놀이 상대로 되어 주었지. 결국, 이 어린이 방은 피터 남매에겐 아빠나 엄마의 대신 역할을 한 거란 말일세. 이대로 두었다가는 저 아이들은 어떤 인간이 될지 몰라요." "아직 늦지 않았을까요?" 리디어 부인은 조심조심 물었다. 머리 속에는 아침 식사 때, 피터가 배짱 좋게 은근히 겁주던 말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봇 공학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도 늦진 않아요. 다만 그걸 위해서는 이 방을 그대로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이 방의 스위치를 꺼 버리고, 곧 여행을 떠나세요. 그리고 돌아오시는 대로 저한테 아이들을 데리고 오십시오."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이 방을 없애 버린다는 건 너무 충격이 심하지 않을까?" "그런 소릴 하고 있을 때가 못 되니 그리 알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사자가 세 사람을 쳐다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으나, 곧 로봇 공학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거 너무나 감쪽같이 잘 되어 있어서 나까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걸. 자, 나갑시다." "참 잘 꾸몄다고 생각하셔요?" 하고, 리디어 부인이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저는 때때로 저것이 잘못되어…" 부인은 이렇게 말하다 말고 망설였다. "잘못되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로봇 공학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짜 사자가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리야!" "하지만… 환상 장치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엔? 그렇지 않고 누군가 어떤 이상한 장치라도 해놓는다면." "가령 아무리 손재주를 부린다 해도 환상이 진짜의 것으로 바뀔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 환상 장치는 너무나 잘 되어 있어. 로봇 하우스로서는 최고급이거든. 이만큼 훌륭한 전자 두뇌는 의지를 가질 수가 있을 거야. 그래서 의지를 가진 것은 - 죽기를 싫어할 테니." "자넨 대관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로봇 공학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하들리 씨의 표정을 살폈다. "말하자면… 저 어린이 방은 스위치가 꺼지기를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거야. 전자 두뇌한테는 스위치가 끊긴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니까." "아니, 이 사람아! 자네마저 노이로제에 걸린 모양이군. 아니, 그럼, 이 어린이 방이 스위치 끊기는 것이 싫어서 자네들한테 무슨 짓을 한다는 건가?" "… 혹시, 아이들을 살살 꾀어서…"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하들리 씨는 아차 하고 말을 뚝 끊었다. 발 밑에 무슨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매우 구겨져서 짜부라진 헌 지갑이었다. 큰 짐승이 마구 물어뜯은 이빨 자국 같은 것이 나 있었다. "앗!" 리디어 부인이 별안간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 로봇 공학자가 리디어 부인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 쪽을 보고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스카프였다. 스카프에는 피와 - 그리고 사자의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두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건?" "제 스카프예요." 리디어 부인은 굳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들리 씨는 터벅터벅 문 앞에 있는 스위치 판으로 다가가더니 스위치를 확 꺼 버렸다.   덤벼드는 사자   피터와 웬디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들리 씨는 집 안의 전자 장치 스위치를 모조리 끄고 난 다음이었다. 전자 시계․전자 레인지․전자 난방기․자동 구두닦이․구두끈 매는 기계․자동 목욕탕․청소 로봇․마사지 로봇 등 - 모든 것이 스위치가 끊기는 바람에 멈춰 버렸다. "아빠, 왜 그러세요! 그건 안 돼요, 안 돼!" 피터는 비명 지르듯이 투정을 부렸다. "어린이 방도 죽어 버렸군요. 우리들의 어린이 방을 그만 죽여 놨네요." 웬디도 히스테리를 일으켜 울부짖었다. "얌전하게 있어. 이렇게 떠드는 게 아니야!" 하들리 씨는 큰 소리로 두 아이를 꾸짖었으나, 남매는 미친 듯이 날뛰고 떠들고 할 따름이었다. 피터는 앞에 닥치는 대로 손으로 집어던지고, 발로 걷어차고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웬디는 엉엉 울면서 발버둥쳤다. "여보, 잠깐만이라도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좀 넣어 줍시다. 아주 잠깐만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나 봐요." 리디어 부인이 흐느껴 우는 웬디를 꼭 껴안아 주면서 말했다. "아니, 그건 안 돼요! 이젠 절대로 스위치를 안 넣을 거요. 그리고 이 집도 오늘이 마지막이오. 로봇 하우스 따위에선 두 번 다시 살지 않을 거야.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역시 좋아." 하들리 씨는 엄숙히 말했다. 피터와 웬디는 한층 더 소리를 떠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했다. "아빠는 싫어! 아빠는 죽어 버려!" 피터가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었다. "엄마도 그래, 엄마도 이젠 필요 없어!" 웬디도 리디어 부인의 품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울부짖었다. 두 부부는 서로 눈짓을 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피터와 웬디도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디어 부인은 하들리 씨한테 말했다. "여보, 나도 부탁해요. 한 번만 더,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넣어 주세요. - 얘, 피터야, 그렇지? 1분만이야. 그걸로 그 방과 작별하는 거야. 알겠니, 그럼 되겠지?" "응… 그럴께요. 좋아요." 하들리 씨는 웬디를 보았다. 웬디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이 가득히 괸 눈으로 하들리 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들리 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래, 알았다. 단 1분만이야. 너희 둘 다 알겠지?" "1분이면 돼요!" 두 아이는 입을 모아 대답했다. 하들리 씨는 스위치 판 열쇠를 꺼내어 리디어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1분이 지나거든 얼른 나와서 옷을 갈아입어라. 그리고 헬리콥터로 비행장엘 가는 거다, 알겠느냐?" "예, 알았어요, 아빠." 두 남매는 이제 기분이 좋아져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리디어 부인의 손을 잡고 어린이 방으로 갔다. 하들리 씨는 그 동안에 2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거기에 리디어 부인이 올라왔다. "아이들은?" "1분이 지나면 꼭 끄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맡겨놓고 왔어요. 나도 좀 갈아입어야 할 게 아니여요. 아이구 온통 집이 떠나갈 듯이 야단법석을 떨더니만 그만하고 그쳤으니 원." "그렇지. 앞으로 5분 남짓 있으면 이런 도깨비 같은 집과는 영영 작별하고 좀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지." 두 부부는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그 때 아래층에서 아이들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엄마. 이것 보셔요! 어서 와 주셔요!" 그 소리는 어쩐지 매우 절박하고도 당황한 것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리디어 부인은 안색이 싹 바뀌어, 아래층으로 통하는 공기 파이프 안에 뛰어들어갔다. 하들리 씨도 뒤따랐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 방에 내려섰다. 방문은 열려진 채였다. 방안에는 눈부신 태양과 푸른 초원과 밀림, 그리고 사자가 있었다. 그러나 피터와 웬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자는 고개를 낮추고 두 부부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문이 꽝 닫혀 버렸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당황하여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어라!" 하들리 씨가 손잡이를 잡고 찰칵찰칵 돌리고,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여보, 어떻게 된 거여요?" "밖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오. 얘, 피터.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 벌써 출발 시간이야. 어서 이 문을 열어라!" 하들리 씨는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싫어요, 아빠. 문을 열면 이 방의 스위치를 끄려고 그러시죠? 그러면 우리 로봇 하우스는 죽어 버리는 걸요." 피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피터. 너는 나쁜 아이구나. 벌을 줄 테다!" 하들리 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나쁜 아이여요." 피터가 대답했다. "실은 이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엄마도 우리의 기분을 몰라주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자한테 아빠의 헌 지갑과 엄마의 스카프를 던져 줘서 냄새를 익히게 했는걸요. 이제 당장 그 사자가 아빠와 엄마의 냄새를 맡고 덤벼들 거여요. 그러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 아무래도 좀 이상해진 모양이구나." "아이쿠, 여보, 저 사자가!" 리디어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얼른 뒤를 돌아보았더니, 어느 사이에 벌써 사자가 -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앞과 좌우 세 방향에서 슬슬 죄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내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목을 골골거리며 천천히 한발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마저 똑똑히 들렸다. "저건 영화일 뿐이야. 그렇게 겁낼 건 없어요!" 하들리 씨는 아내의 몸을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리디어 부인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하들리 씨도 속으로는 겁이 났다. 사자가 덤벼들었다. 그 앞발이 무서운 힘으로 하들리 씨의 몸을 때려눕혔다. 또 한 마리가 리디어 부인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두 사람은 비명을 울렸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피터와 웬디는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속에 있었다. 초원 속에서 번쩍 번쩍 빛나는 햇볕을 쬐며 엎드려 있으니까 땀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저만큼 떨어질 밀림 어귀에 사자 세 마리가 먹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위를 먹이를 가로채려고 콘도르가 빙빙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피터! 우리는 나쁜 아이들일까?" 웬디가 문득 화환을 만들고 있던 손을 멈추고 피터에게 물었다. 피터는 누이동생을 돌아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지는 모르지만… 할 수 없지. 웬디, 쓸쓸하니?" "응, 약간." "하지만 우리에겐 로봇 하우스가 있잖니? 어린이 방엔 아프리카도 있어. 그러니 아빠랑 엄마는 싹 잊어버리도록 하자." "그래. 곧 잊혀지겠지 뭐." 두 남매는 빙긋 웃으며 또다시 먼 곳에 있는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들도 이제 싸움을 그치고 사이좋게 먹이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우주 스파이 Imposter   필립 K. 딕 Philip K. Dick 지음       과학 소설 중에는 웰즈 시대부터 뛰어난 침략을 그린 소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소설은 '이것은 소설이다. 꾸며낸 이야기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 속에 끌려 들어가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맛보게 되고, 또 자기 신변에도 그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마음을 졸이는 그러한 것이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뜻에서, 웰즈의 은 우리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 들이닥치는 침략을 실감나고 생생하게 상상시켜 주는 최초의 걸작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미국의 어느 방송국이 이 소설은 라디오 드라마로 하며 방송했을 때, 그것을 청취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줄 알고 큰 소동을 벌였던 일이 있습니다. 화성인의 우주선이 프린스턴 시 교외에 착륙하고, 그 안에서 큰 문어처럼 생긴 괴물 화성인이 나타나 초록빛을 내는 열선(熱線)을 가지고 사람이나 집, 다리, 마을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모조리 태워 버리고, 무서운 독가스를 뿜어내면서 뉴욕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 이것이 실황 방송인 것처럼 전국에 방송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참으로 화성인이 쳐들어왔다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와 '사람 살려요'하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뉴욕에서 피난 가는 사람도 있고, 경찰서로 몰려가 방독면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는 등, 순식간에 뉴욕의 온 시내는 온통 전쟁의 공포 속에 휘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소동에 말려든 것은 일반 시민만은 일반 시민만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도, 휴가 중이던 장병들에게는 '즉시 귀대하라'는 긴급 명령이 전달되고, 출동 준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동이 가라앉기까지는 몇 시간이나 걸렸는데, 그 다음날 신문에는, 그 사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과학 소설에 익숙해진 현대에는 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요. 그 뒤로 우주인의 지구 침략 이야기는 많이 쐬어졌고, 그 침략 방법도 차차 복잡 교묘하게 되어 왔습니다. 즉, 언뜻 보기에는 지구인인지 침략해 온 우주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꾸며 쳐들어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만일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혹시나 우주인이 아닐까 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이 소설을 쓴 필립 K. 딕은 지금 미국에서 활약 중인 유명한 공상 과학소설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특히 서스펜스가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넘치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 전쟁   그날 아침, 스펜스 올햄 기사는 아침 식사를 들면서 아내한테 말했다. "머지 않아 반드시 휴가를 얻어내겠소." "하지만 그러다가 그 계획은 어떡하고요?"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 "잠깐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건 괜찮아요. 어쨌든 좀 쉬어야겠어. 벌서 10년이 나 쉴새 없이 꼬박 일해 왔거든. 휴가를 얻거든, 우리 한번 새튼 숲 속으로 가서 캠프를 합시다." "새튼 숲?" 하고 아내는 설거지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는 이틀인가 사홀 전에 불타고 말았잖아요. 거 왜 무엇인지 번쩍 빛을 내더니 산불이 났다는…" "아니, 새튼 숲이 불타다니? 대관절 그 원인이 뭔데?" "잘 모르겠어요."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야. 모두 전쟁밖에 생각지 않으니 원." "전쟁 이외의 무엇을 생각할 겨를이나 있겠어요." 아내는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올햄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아내의 말이 맞았다. 10년 전, 알파 켄타우리별(星)의 우주 함대가 별안간 지구를 쳐들어왔었다. 지구 방위군은 필사적으로 대항해 싸웠으나, 켄타우리 별 사람들의 워낙 뛰어난 우주선 앞에는, 형편없이 박살나고 알았던 것이다. 우주 함대는 지구의 각 도시를 습격하여 마구 때려부수었다. 그래서 지구는 파멸 직전까지 몰렸다. 때마침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적의 우주선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방공 스크린을 발명했다. 이 스크린은 그 무서운 힘을 떨치던 우주인의 열선이나 미사일도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는 강력한 것이었다. 스크린은 처음에 주요 도시와 기지 위에 쳐졌으나 머지 않아 지구를 완전히 뒤덮게 되었다. 켄타우리 별 사람은 달리 손을 쓰지 못해 당황했다. 거기에다 지구 방위군은 총반격을 가해 적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그 뒤로 우주 전쟁은 이겼다졌다 해가며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켄타우리 별 군(軍)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구의 방공 스크린을 돌파하려 했으나, 그것만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그 반면에 지구군도 바깥 우주에 가서 켄타우리 우주 함대와 싸우기만 하면 언제나 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쪽은 서로 상대편의 동정을 살피다가 기회만 있으면 기습 공격을 가하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구 쪽에서도 그 동안 아무 일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구상의 우수한 과학자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켄타우리 별 군대를 쳐부술 새 무기 발명에 온갖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올햄 기사의 '계획'도 그 중의 한 가지였던 것이다 그의 계획은 머지 않아 곧 완성될 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완성되는 날에는… 그 얄미운 침략자를 철저히 물리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낼 수가 있을 것이다. 올햄 기사는 식탁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그 계획을 하루빨리 완성시켜, 휴가를 얻어 푹 좀 쉬었으면…" 그는 양복 저고리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들자 현관으로 나왔다. 연구소로 출근시켜 줄 쾌속(快速) 에어카가 맞으러 오게 되어 있었다. "여보, 에어카가 왔어요." 아내가 말했다. 아침해가 찬란히 빛나는 동쪽 하늘에서, 지금 딱정벌레처럼 생긴 소형 쾌속 에어카가, 그 검은 차체 룰 번쩍이면서 이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에어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관 앞에 소리 없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종석의 문이 열리고, 친구인 넬슨 기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자, 다녀오리다." 올햄은 아내한테 인사말을 남기고 에어카에 올랐다.   너를 체포한다   올햄이 자리에 올라앉자, 쾌속 에어카는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전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좌석에는 또 한 사람의 낯선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올햄은 넬슨한테 말을 건넸다. "어떤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나?" "별로." 넬슨이 대답했다. "켄타우리 별 군대가 소행성대에서 소규모의 공격을 가해 왔어. 우리편에서 소행성 하나를 잃기는 했지만 적에게도 손해를 주었어." "우리들의 '계획'이 완성되면, 아주 단단히 혼을 내어 주겠지만… 글쎄, 언제쯤 완성될까?" "과학자가 그처럼 마음이 약해서는 안 될 텐데." 느닷없이 옆에 앉았던 낯선 사나이가 말했다. 넬슨이 소개했다. "이쪽은 피터즈 소령이야." "안녕하셔요. 연구소에서는 뵌 적이 없군요." "나는 연구소 사람이 아닙니다." 피터즈 소령은 움푹하고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넬슨한테 힐끔 눈짓을 했다. 올햄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쾌속 에어카는 지금 황폐해진 무인 사막 위를 전속력으로 날고 있었다. "난 보안국에서 왔소." "예? 연구소에 적이라도 몰래 들어왔단 말이오?" 올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보안국은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눈을 번쩍이며 켄타우리 별 군대의 스파이를 막아내는 일을 맡고 있는 기관이었다. "실은 그런 일로 당신을 만나러 온 거요. 올햄 기사." 올햄은 당황했다. "그건 또 왜요?" "당신을 켄타우리 별의 스파이로 체포하기 위해서죠. 이자를 체포해, 넬슨!" 이렇게 말한 순간 넬슨이 뒤로 획 돌아앉으며 올햄의 옆구리에 광선총을 들이댔다. 올햄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입만 딱 벌린 채 친구를 노려보았다. 넬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죽여 버릴까요? 당장 해치우는 것이 좋을 겁니다. 뒤로 미루다간 위험할 테니까요." 넬슨은 피터즈에게 쉰 목소리로 빨리 지껄였다. 올햄은 더욱 더 놀라서 친구의 얼굴을 치켜보았다. "대관절… 대관절, 이게 무슨 짓인가? 어째서 나를 죽이려는 건가?" 피터즈 소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에어카 안에 장치된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켰다. 스크린에는 낯익은 보안국장의 얼굴이 비쳤다. "무사히 체포했습니다. 국장님, 바로 이 사나이입니다." 피터즈가 보고하자, 보안국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을 하던가?" "아닙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순순히 차에 탔습니다." "응 그래, 거기가 어딘가?" "지금 막 방공 스크린을 벗어나는 중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구는 안전합니다. 국장님." "음, 수고가 많네. 그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달로 가 주게. 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겠나?" "염려 마십시오, 국장님. 제가 얻은 정보로는 그것이 일어나려면, 일종의 암호가 필요합니다." "달에는 미리 연락을 해 두겠네. 그럼 잘 부탁해." 보안국장의 얼굴이 사라졌다. 올햄은 또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구는 벌써 아득히 멀어져, 아메리카 대륙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해치우는 게 어떨까요?" 하고, 넬슨이 또 물었다. "기다리게. 두세 가지 질문을 해야겠어." 피터즈 소령은 올햄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지금 달을 향해 가고 있다. 한 시간 뒤에는 달 뒷면의 바다 위에 착륙한다. 착륙함과 동시에 거기에 대기중인 방위군 대원에게 자네를 넘겨 준다. 대원은 자네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토막토막 잘라서 사방에 흩뜨려 버린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냐? 까닭도 없이 함부로 죽이겠다니!" 올햄은 호통을 쳤다. "물론 그 까닭을 말해 주지. 2~3일 전, 켄타우리 별 군대의 우주선 한 대가 방공스크린을 돌파하여 지구에 침입했어. 그 우주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스파이 로봇을 지구상에 내려놓았어. 그 로봇은 어떤 인간을 죽이고는 감쪽같이 그 인간으로 둔갑해 버렸어." 피터즈 소령은 올햄을 힐끗 거들떠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로봇의 몸 속에는, 유(U) 폭탄이 장치되어 있지. 그것은 아주 모양이 작지만, 도시 하나쯤은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야. 그 폭탄은 암호만 맞으면 언제든지 폭발하게끔 되어 있는 모양이야." "그것이 바로 나란 말인가?" 하고, 올햄은 간담이 서늘해져 물었다. "그런 엉터리 수작을!" "로봇은 죽인 인간으로 감쪽같이 둔갑할 수가 있거든. 얼굴 생김새, 기억, 모습할 것 없이 송두리째 죽인 인간과 똑같게 되어 버릴 수가 있지. 그래서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가려 낼 수가 없을 만큼 완전히 똑같단 말이야." 피터즈 소령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래서 수상하다고 여긴 것이 자네란 말이다. 적은 자네의 연구가 완성의 문턱에까지 도달된 걸 알고서 자네를 죽이고, 가짜 자네를 우리 연구소에 잠입시켜 연구소를 몽땅 날려보낼 흉계를 꾸민 거야.""나는 가짜가 아니야! 진짜 스펜스 올햄이야!" 올햄은 뱃속에서 짜내는 듯한 큰 소리로 내질렀다. "자네는 사흘 전, 새튼 숲으로 산책하러 갔었지. 그 때 진짜 자네는 죽음을 당하고, 지금의 자네와 같은 가짜로 변한 거다." "그런 일은 없어." 올햄은 넬슨을 돌아보았다. "로봇은 올햄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단 한가지, 그 몸 속에 장치된 U폭탄을 제외하고 말이야." 피터즈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달이 눈 앞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해." 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살았다.   에어카는 달 표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구릉이 끝없이 퍼져 있었다. 올햄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살아날까.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오해를 풀어 버릴 수가 있을까.) "착륙 준비." 피터즈 소령이 말했다. 한 구릉 기슭에 건물이 보였다. 거기에 지구 방위군의 폭탄 처리반이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몇 분 이내에 그는 죽는 것이다. 폭탄 처리반은 그를 해부하고, 토막토막 잘라 버린다 - 그리고 비로소 폭탄이 들어 있지 않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네라면 내가 진짠지 가짠지 잘 알 것 아니냐. 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야. 벌써 20년이나 사귀어온 친한 친구가 아닌가?" "가까이 오지 마! 쏠 테야!" 넬슨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광선총을 한층 더 바싹 들이댔다. "잘 들어보라고. 우리가 대학 2학년 때, 데이트했던 아가씨를 알고 있겠지. 그리고 3학년 때, 교수한테서 레포트로 칭찬 받았던 일도 말이야." "닥쳐! 그 이상 더 지껄이지 마. 네놈은 로봇이야. 올햄을 죽인 살인 로봇이란 말이야!" 넬슨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내뱉듯이 외쳤다. "아니야, 난 분명히 올햄이야. 너무나 억울하고 엉뚱한 착각을 해선 안 돼. 그 로봇은 나하고 마주친 적이 없어. 우주선이 추락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잖아?" 그는 자기 몸을 어루만졌다. "나를 지구로 데려가서 조사해 줘. 엑스(X)선으로 검사한다든지, 심리테스트를 한다든지… 아 참 그렇군. 새튼의 숲을 뒤져 보면 추락된 우주선 안에 로봇이 있을 거야." 피터즈가 가로맡았다. "이 로봇은 자기가 진짜 올햄이라고 여기고 있군."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에어카는 천천히 착륙했다. 겨우 두세 번 튀어 올랐으나 곧 사뿐히 내려앉고 엔진이 멎었다. 먼저 피터즈가 우주복을 입었다. 넬슨을 그 사이에도 올햄 옆구리에 광선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피터즈가 우주복을 입고 나자, 광선총을 받아들고, 다음에 넬슨이 우주복을 입었다. "이자를 어떻게 할까요, 우주복을 입힐까요?" 넬슨이 묻자, 피터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로봇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처리반이 왔어. 문을 열어라." "잠깐! 기다려" 하고, 올햄이 외쳤다. "그 문을 열면, 나는 숨이 막혀 죽는다. 기압이 낮아서 피가 끓어 죽어 버린다" 넬슨은 약간 주저했다. "부탁이야, 넬슨, 그 문만 열면 나는 당장에 죽고 만다. 죽고 난 뒤에 내가 진짜 올햄으로 밝혀졌댔자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어서 문을 열어!" 피터즈가 냉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넬슨의 손이 문의 손잡이에 닿은 채 뻣뻣해졌다. 그 순간, 올햄은 번개처럼 어떤 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일부러 태연히 좌석에 기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열어도 좋아. 자네 말대로 나에게는 공기가 필요 없어." 그는 이런 말을 하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자네들이 얼마나 빨리 달아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달아나?" 피터즈 소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들의 목숨은 앞으로 15초야. 방금 나는 기폭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어." "하지만 암호는…" "그건 거짓 선전이야. 자네들은 잘못된 정보를 얻었던 거다. 앞으로 14초."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후닥닥 문을 열고 앞을 다투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 안의 공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듯이 진공 속으로 새어 나갔다. 올햄은 재빨리 몸을 날려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자동 기압 장치가 움직이고 새 공기가 나와, 엷어진 공기를 메워 주었다. 올햄은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이다.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두 사나이는 다른 사나이들한테 무어라 소리치며 걸음아 살려라 달아나고 있었다. 처리반 대원들도 덩달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작전은 생각대로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올햄은 조종석에 앉아 다이얼을 돌렸다. 에어카는 사뿐 공중에 떠올랐다. 달 표면에서는 사나이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지 뭔가." 올햄은 혼잣말을 지껄이며 에어카를 지구 쪽으로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외톨박이   1시간 뒤, 올햄은 지구의 대기권에 다시 돌입했다. 그리고 미국의 자기 집 근처 1킬로미터 떨어진 산 속에 착륙했다. 그는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넣고, 자기 집 번호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스펜스! 당신 어디 계셨어요? 대관절 무슨 일이 생겼어요?" "지금 뭐라 말할 순 없어. 연구소에 가서, 첸바렌 박사를 집으로 모시고 와 줘요. X선의 기계와 심리 테스트 장치 등 모두 가지고 오도록 일러 줘요." "하지만…" "내 말대로 해 줘요, 메어리. 밤이 되거든 살짝 집엘 갈 테니. 누구 연락이 없었소?" "아뇨, 아무도 없었어요. 왜요?" "아냐, 그저 물어 본 거요. 나한테서 연락이 있었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돼요. 첸바렌 박사에겐 내가 위험한 병에 걸려 있다든지 해서 적당히 말해요. 알겠소?"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올햄은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껐다. 그는 산 속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럭저럭 밤의 어둠이 사방에 내리 깔릴 무렵, 에어카를 나와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이 밝게 비친 창문 하나만 보였다. 서재의 불빛이었다. 그는 울타리 밑에 몸을 바싹 붙이고 집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집 안은 고요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첸바렌 박사는 벌써 와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는 첸바렌 박사한테 자기가 진짜 스펜스 올햄 기사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박사한테 신체 검사를 받아서, 그 결과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첸바렌 박사는 연구소에서도 가장 존경받고 있는 유명한 의사다. 그의 말이라면 모두 믿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금살금 현관으로 다가갔다. 집 안은 역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기분 나쁘리만큼 너무 조용한걸.) 그는 발길을 멈췄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보안국 녀석들이 냄새를 맡고 집 안에서 나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만 확인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현관문 앞에 가서 벨을 눌렀다. 벨이 집 안에서 울렸다. 집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내였다.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자기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자코 뛰어나와 울타리 옆 나무 그늘에 얼른 몸을 숨겼다. 아내를 밀어뜨리고 두세 명의 보안국원이 뛰어나오며 광선총을 쏘아댔다. 담이 갈라지고 나무 울타리가 타올랐다. 올햄은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어 산 쪽으로 도망쳤다. 별안간 근처 일대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하늘과 땅에서 조명등이 한꺼번에 그 주위를 비쳤기 때문이었다. 올햄은 나무 그늘에서 나무 그늘로, 재빠르게 건너뛰면서 산으로 치달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에어카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미처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제 그는 이 세계에서 자기편이라곤 아무도 없다. 친구 넬슨은 다짜고짜 그를 쏘아 죽이려 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아내의 얼굴은 분명히 그를 로봇으로 여기고 있는 표정이 아니던가. 올햄은 뛰고 또 뛰어 달아났다.   새튼 숲 속으로   올햄은 아까 에어카를 세워 놓았던 장소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나무 그늘 사이로 에어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올햄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멈칫 서 버렸다. 에어카 옆에는 낯익은 피터즈 소령의 모습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령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광선총이 꽉 들려져 있었다. "올햄, 어서 나와라! 자네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느닷없이 피터즈 소령의 우렁찬 목소리가 밤 공기를 뒤흔들었다. 올햄은 깜짝 놀라 냉큼 몸을 엎드렸다. 이젠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피터즈 소령은 올햄에게 겁을 주어 꾀어내기 위해 마이크를 써서 함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듣거라, 올햄, 자네는 독 안에 든 쥐란 말이야. 이 근처는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다." 피터즈 소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네는 아직껏 자기 자신이 로봇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모양이야. 그렇지만 자네는 로봇이야. 이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서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 몰래 숨어 들어온 폭탄 로봇이란 말이다. 자네가 어떤 암호를 말하는 순간, 둘레 10킬로미터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증발해 버리는 거야." 올햄은 주위를 살폈다. 보안국원이 포위망을 점점 죄어 들어오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었다. "자네가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갈 테다. 이 근처는 개미 한 마리 얼씬 못 하게 경비되고 있어." 올햄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터즈 소령의 말이 맞기도 하다. 운이 억세게 좋아야 밤 동안만은 붙들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아침이 되면 영락없이 붙잡히고 만다. 그래서 광선총 한 방으로 이 세상은 하직이다. 그건 이미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살 길이 남아 있을까? 있다. 꼭 한 가지 남아 있다. 있고 말고. 그것은 켄타우리별의 우주선이 부서진 잔해를 찾아내는 일이다. 피터즈 소령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켄타우리 별의 로봇이 자기로 둔갑한 것이라 믿고 있는 점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럴 턱이 없다는 것을 올햄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로봇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절대로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켄타우리 별의 우주선은 이 근처에서 착륙에 실패하고 추락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 그 속에 로봇의 잔해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 우주선과 로봇의 잔해를 찾아내어 피터즈들에게 보여 준다고 하면, 아무리 미련한 녀석들일지라도 오해를 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뉘우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그 우주선의 잔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에 그는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우주선은 땅에 떨어져서 타 버렸다. 그래서 아내 메어리가 오늘 아침, 2~3일 전에 새튼 숲이 불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번갯불처럼 번쩍 빛나더니 별안간 폭발한 것처럼 타올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새튼 숲이 틀림없다. 우주선은 새튼의 숲에 떨어져서 숲을 불바다로 만들었겠지. 거기에 가기만 하면 자기가 진짜 스펜스 올햄 기사라는 걸 증명할 수가 있겠지.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용기와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주위를 살피면서 새튼 숲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튼 숲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는 과연 누구냐   아침이 밝았다. 올햄은 새튼 숲 속으로 갔다. 우주선이 떨어진 곳은 바로 이 근처일 테지. 이 숲은 소년시절부터 곧잘 놀러오던 곳이어서,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숲 깊숙한 곳에는 불쑥 솟아나 있는 산봉우리가 있다. 아마 우주선은 그 봉우리를 피하다가 그만 충돌되어 떨어졌겠지. 그의 상상은 들어맞았다. 그는 얼마동안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자 숯덩이처럼 타다 남은 나무 재 속에 어지럽게 헝클어진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올햄은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것은 틀림없는 우주선의 - 그것도 지구의 것이 아닌, 바늘 모양처럼 생긴 우주선의 잔해였던 것이다. (이 잔해 속에 로봇의 잔해도 있을 거야.)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미처 찾아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보안국원들이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총을 겨눈 대열이 이쪽으로 밀어닥치는 것을 보았다. 선두에서 피터즈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어떤 결심을 하고 나자, 피터즈 앞에 천천히 걸어나가며 양손을 들고 소리쳤다. "피터즈 소령, 나야!" 피터즈는 주춤하고 서더니 광선총을 겨누었다. "쏘지 말아요!" 올햄은 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 줘! 내 뒤를 보라고. 켄타우리 별의 우주선의 잔해가 있어." 주위에서 보안국원들이 일제히 뛰어나와서 그를 둘러쌌다. "부탁이야, 아직 쏘지 말아 줘! 나는 놈들의 우주선이 틀림없이 여기에 추락했을 것을 알고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야. 피터즈, 좀 조사해 봐 주게. 로봇의 잔해가 반드시 있을 거야." 올햄은 필사적으로 빨리 지껄였다. 피터즈는 망설였다. 그 때 보안국원 하나가, 우주선의 잔해 밑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소령님! 이 밑에 무엇이 있습니다." "그거야!" 올햄은 펄쩍 뛰면서 외쳤다. "놈을 쏘아라! 아무도 안 쏘면 내가 쏠 테야!" 누군가 소리쳤다. 넬슨이었다. "쏘지 마. 내가 책임자다. 내 명령이 내릴 때까지는 아무도 쏘아선 안 돼." 피터즈가 돌아보며 명령했다. "얼른 쏘지 않으면 안 돼요. 놈은 올햄을 죽였어. 언제 우리를 죽일지 몰라요, 만일 폭탄이 폭발하면…" "시끄러워!" 피터즈 소령은 넬슨을 꾸짖고 부하에게 일렀다. "거길 파헤쳐 봐." 부하들은 겁먹은 얼굴로 조심조심 금속 파편을 치우고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올햄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에 로봇이 완전히 재로 되어 버려서 흔적도 없다면…)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자, 식은땀이 확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모처럼의 기회도 헛되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피터즈 소령님, 제발 저자를 쏘게 해 주시오. 우리가 죽기 전에요." 넬슨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 때, 부하 두 사람이 일어섰다. "소령님! 이건 틀림없이 켄타우리 별의 바늘형 우주선의 잔해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인간의 몸뚱이 같은 것이 파묻혀 있습니다." "어디, 그럼. 내가 좀 보겠다." 피터즈 소령은 비탈을 타고 부하가 작업하는 곳에 뛰어내려갔다. 올햄과 다른 대원들도 뒤를 따랐다. 과연 구부러지고 뒤틀린 인간의 모습 비슷한 것이 반쯤 흙에 파묻혀 넘어졌다. 입을 딱 벌리고 눈은 유리처럼 동그랗게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라기보다는 로봇 같았다. 피터즈 소령이 올햄을 돌아보았다. "믿어지진 않지만… 자네는 거짓말 않겠지?" 올햄은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소가 자연히 터져 나왔다. "믿어지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야. 이처럼 꼭 닮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놈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린걸."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안국원이 파낸 그 소름끼치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폭탄도 발견되겠지. 만일 폭탄이 암호에 의해서 폭발하는 것이라면 이 놈은 벌써 죽어 버렸으니 이젠 안심이란 말이야."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올햄 기사, 당신에겐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 당신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어요. 실은 당신이 그토록 재치 있게 달아나 주지 않았던들, 지금쯤은 우리가 당신을 죽이고 말았을 거요." "이젠 다 지난 일인 걸요 뭘."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는 내 기분이 풀리지 않소. 오라, 당신이 휴가를 얻을 수 있도록 내가 주선해 드리겠소. 한 달쯤 마음껏 푹 쉬고 오도록 하시오." "고맙소. 하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집에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오." 그 때, 시체를 뒤적이고 있던 국원 하나가 가슴팍을 가리키며, "여기에 폭탄 같은 것의 한쪽 끝이 보입니다." 하고 보고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가슴에 뚫린 큰 상처 안에 금속성의 번쩍이는 물건이 보였다. 그러자, 그 때까지 묵묵히 있던 넬슨이 갑자기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가슴팍에 손을 대려고 했다. "다치면 안 돼. 아직 위험할지도 몰라. 뒷일은 폭발물 처리반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야." 올햄이 주의시켰다. 그런데도 넬슨은 거기에 손을 집어넣 어 그 금속성 물건을 확 잡아 뽑았다. "그만두라니까!" 올햄이 소리쳤다. 넬슨은 얼른 일어섰다. 넬슨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서 종이처럼 핏기가 싹 가셨다. "이걸… 이걸 좀 보라고." 그는 피에 젖은 그 금속성의 물건을 불쑥 올햄 앞에 내밀었다. "앗! 이, 이건 켄타우리 별 사람이 쓰는 칼이다." 올햄은 자기도 모르게 입 속에서 중얼댔다. 그것은 분명히 켄타우리 별 사람이 언제든지 몸에 지니고 있는 가늘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것이 올햄을, 내 친구를 죽인 거다. 네가 죽인 거야. 죽여서 우주선 곁에 파묻어 둔 게 틀림없어…" 넬슨은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넬슨과 그 나이프를 번갈아 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자네는 로봇이야." 넬슨이 올햄의 눈 속으로 파고 들어갈 듯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올햄은 몸을 떨었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니까!" 그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 뭉게뭉게 연기처럼 피어올라왔다. "그렇지만 만일에… 만일에, 이 시체가 진짜의 나라고 하면, 이 나는 바로 로봇…" 올햄은 그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이,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는 그 말이 바로 암호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멀리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우주에서 온 거머리 The Leech   셰클리 Robert Sheckley 지음       지구의 인류에게 멸망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것은 우주인의 침략 뿐만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위기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태양을 예로 들어봅시다. 태양이 없어진다고 하면, 그 열과 빛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흘도 못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고마운 태양이 도리어 인류를 죽이는 무서운 적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태양의 열이 지금보다 1할만큼 더 높아진다고 하면 지구는 당장에 뜨거운 사막이 되어 버리고 생물은 도저히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할쯤이 더 높아진다면 지구의 표면 기온은 1백도가 되어 숲이나 들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불바다가 될 겁니다. 더구나 그 높은 온도로 말미암아서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자꾸자꾸 녹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바다의 수위가 높아져 서해안 지방이나 평야에는 바닷물이 밀어닥쳐 순식간에 바다의 일부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뉴욕이나 런던이나 부산도 바다 밑에 잠겨 버릴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온 세계에 무서운 집중호우가 쏟아질 것입니다. 높은 온도 때문에, 바다에서 활발히 증발된 많은 수증기가 비구름이 되어 큰비가 계속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강이란 강은 큰 홍수가 나서 도시나 농촌 할 것이 모두 떠내려가겠지요. 그리고 또 만일에 태양이 좀더 뜨거워지고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큰 폭발을 일으킨다면 우리 지구는 물론 화성이나 금성, 그 밖의 행성도 그 여파를 받아서 한꺼번에 증발해 버릴 것입니다. 또 반대로 태양이 지금보다 더 식는다고 하면, 지구상에는 아득한 옛날에 몇 번이나 있었던 큰 빙하가 생기고, 문명 세계는 모두 두꺼운 얼음 밑에 깔리고 말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일어날지 모르는 자연의 큰 재해를 생각해 보면 끝이 없습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있는 작은 행성과 충돌할지도 모르고, 수성이 부딪쳐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지구상에서 인류가 평화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너무나 믿고 있다가는 이 소설처럼 엉뚱한 일에 휘말려들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을 쓴 로버트 셰클리는 미국에서 비교적 젊은 층의 작가이지만, 미처 남이 생각지도 못했던 색다른 과학 소설을 곧잘 써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셰클리의 소설은 매우 우습고 익살맞지만, 그 익살 가운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등의 작품이 유명합니다. 괭이날을 녹이는 바위   "교수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마이클즈 교수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건 사람은 마이클즈 교수의 별장지기 코나즈였다. "좀 쉬셔야 할 텐데, 제가 성가시게 구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만, 참으로 이상한 것을 발견했으니 꼭 좀 봐 주십시오." 코나즈는 조심조심 말했다. 마이클즈 교수가 쉬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말을 시키든지 전화를 바꿔 주든지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클즈 교수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인류학자이자, 물리학자요, 화학자이다. 언제든지 가을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회에 참석하며, 책을 쓰는 등 매우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 동안에는 이 뉴욕 주(州)의 시골 별장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다만 낮잠과 독서와 낚시, 그리고 등산을 하면서 한가로이 지낸다. 코나즈는 주인 마이클즈 교수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말했다. "예, 교수님. 꼭 좀 일어나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듣고 계십니까?" 마이클즈 교수는 겨우 실눈을 떴다. "응, 듣고 말고. 코나즈. 대관절 어떻게 생긴 우주인을 보았다는 거야?" "우, 우주인이라뇨?" 코나즈는 깜짝 놀란 듯이 되물었다. 교수는 아직도 졸음이 오는 듯한 목소리로, "에, 초록색을 한 화성인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코나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바위 조각으로밖엔 보이질 않습니다만…" 이번에는 마이클즈 교수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코나즈를 다시 보았다. "자네는 대수롭지도 않은 바위 조각을 발견했다면서, 나의 낮잠 시감을 망치려는 거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도 이런 사소한 일로 성가시게 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그 바위 조각 같은 놈이 저의 괭이 날을 5센티미터나 녹여 버렸기에 그만…" 코나즈는 변명을 늘어놓듯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말하였다. "괭이 날을 5센티미터나 녹여 버렸다…" 마이클즈 교수는 앵무새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코나즈가 내민 괭이 날을 보았다. 과연 코나즈 말대로 괭이 날이 움푹 패어 들어가 있었다. "약간 닿았을 뿐인데 이처럼 망가졌습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아무 말도 없이 긴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신을 신었다. "그걸 좀 보여다오." "예, 이쪽입니다." 코나즈는 교수를 마당으로 안내했다. 마당에는 깨끗한 잔디가 깔려 있고, 그 앞쪽에는 길이 나 있었다. 길 옆 1미터 가량 되는 곳에 도랑이 있는데, 그 안에는 트럭의 타이어 만한 긴 타원 꼴의 평평한 바위 하나가 도랑을 막고 있었다. 그 표면은 아름다운 얼룩 무늬로 덮여 있었다. "저것을 들어내려고 괭이로 움직였더니, 아, 글세 괭이 날 이 녹아 버리지 않겠습니까?" 코나즈가 말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쭈그리고 앉아, 안경을 콧등을 밀어 올리고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별로 다른 점이 없는 바위였지만, 마이클즈 교수는 시험삼아 코나즈의 괭이를 바위에 대보았다. 그랬더니 쇠로 된 날이 2~3센티미터나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이클즈 교수는 괭이 날과 바위를 번갈아 보았다. 바위는 열을 뿜고 있지 않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도 마치 2~3천 도나 되는 뜨거운 용광로처럼 쇠를 녹여 버리는 것이 아닌가? 교수는 시험삼아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그 바위에 뿌려 보았다. 그러자 흙은 바위 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 버려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 교수는 좀 큼직한 돌을 얹어놓았다. 돌은 마치 난로 위에 얹어놓은 얼음덩이처럼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교수님, 참 이상한 바위죠?" 마이클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것이로군." "대관절 이건 뭘까요?" "보통 바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마치… 뭐랄까, 거머리 갈군 그래. 거머리는 피를 빨지만, 이 바위는 흙이나 괭이 날이나 돌을 빨아먹는군." 마이클즈 교수는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중얼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 대학에 전화를 걸어서, 광물학 교수와 생물학 교수한테 급히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 유명한 마이클 교수도 그 바위 거머리가 그토록 큰 문제를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자라나는 바위   이튿날 아침, 마이클즈 교수가 마당에 나가 보았더니, 그 바위는 지름 2미터 반이나 되어 있었다. 또 그 다음날에는 5미터 반이나 될 만큼 커져서, 마침내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길은 사람이나 차가 지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보안관이 달려 왔다. "마이클즈 교수님, 야단났군요. 이 바위는…" "그렇소, 보안관. 이 놈을 녹여 버리기 위해서 지금 산(酸)을 구하는 중이지만, 좀 힘들군요." 마이클즈 교수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잠시라도 이 길이 막히면 곤란해요. 차가 지나갈 수 없고, 첫째 이 도로는 군에서 사용 중이니까요." "미안하오, 보안관. 나도 손을 써 보았지만 별 도리가 없으니…" "그럼, 제가 한번 해 보죠." 보안관은 차에서 쇠막대를 가져와 그 바위 밑에 찔러 넣어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쇠막대가 바위에 닿는 순간 반쯤 녹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보안관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가스등과 큰 망치를 꺼내고, 먼저 가스 불로 그 바위의 가장자리를 15분 가량 열을 가한 뒤에 큰 망치를 휘둘러 힘껏 내리쳤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깨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리라 여겼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망치의 머리가 달아났을 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군용 트럭 대열이 들이닥쳤다. 맨 앞의 지프차가 바위 앞에 멈춰서고, 대령의 계급장을 단 키 큰 군인이 내렸다. "길을 막아서는 안 돼요. 얼른 치워 주시오." "우리들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요." 마이클즈 교수는 지금까지의 일을 간단히 대령한테 설명했다. 그러나 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미 육군 군용차의 통행을 막아서는 안 돼요." 대령은 지프차 운전병에게 명령했다. "이 바위를 타넘고 가도록 해!" 운전병은 엔진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바위를 향해 지프차를 몰았다. 그러나 차가 바위 위에 올라간 순간, 딱 멈춰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대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관절 어찌된 거지?" 대령은 짜증을 냈다. "대령, 지프차가 녹기 시작했어요. 어서 내리지 않으면 위험해요." 마이클즈 교수가 옆에서 주의시켰다. 대령은 지프차 밑을 내려다보자, 타이어가 반쯤 녹아 없어진 것을 알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그리고 황급히 땅 위로 뛰어내렸다. 운전병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지프차는 마치 난로 위의 얼음 덩어리처럼 녹아 버렸다. 타이어가 녹고, 차체가 녹고 -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무선 안테나도 마침내 녹아 없어져 버렸다. 대령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았다. 그래서 부관인 중위한테 명령했다. "얼른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너라!" "대령… 그런 것도 다 헛일일 겁니다." 마이클즈가 옆에서 말했으나 대령은 막무가내였다. "미국 육군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이윽고 중위가 다이너마이트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쌓았다. "모두 멀찌감치 물러가!" 대령은 싸움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듯이 가슴을 딱 펴고 의젓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다이너마이트는 쌓이는 족족 녹아 내렸다. 그러나 재빨리 갖다 쌓았으므로 그런 대로 쌓여 갔다. "기관총 발사 준비!" 대령의 명령이 날카롭게 떨어졌다. 기관총이 마이클즈 교수 댁 마당에 장치되고, 두 병사가 제자리에 앉았다. 마이클즈 교수들은 멀리 떨어져서 형편을 살폈다. "발사! 탕, 탕, 탕탕탕! 기관총구에서 불이 내뿜어졌다. 다음 순간, 쾅, 쾅, 쾅! 땅이 꺼질 듯한 폭음과 함께 번쩍 하는 섬광과 불기둥이 일시에 일고, 검은 연기가 그 바위를 뒤덮었다. 그리고 폭풍이 마이클즈 교수들의 머리 위를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까짓 것, 이제야 날아가 버렸을 테지." 대령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사라지고 나자, 대령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바위는 날아가 버리기는커녕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바위는 분명히 배 가량이나 더 커져서 덩그러니 솟아 있지 않은가. 마이클즈 교수는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배탈나게 만드는 작전   그로부터 한 주일이 지난 뒤, 마이클즈 교수는 언덕 위에 올라가 그의 별장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살아 있는 바위는 이제 지름이 수백 미터나 되는 작은 동산만큼이나 커져서, 그 가장자리가 별장의 현관에 닿아 이제 막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현관 기둥이 부러지고 지붕이 바위 위에 무너졌다. "별장이여, 안녕." 마이클즈 교수는 혼자 중얼거렸다. 10년 동안이나 매년 여름 시원하게 보내던 그 고마운 별장과 이런 야릇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 때 장교 하나가 마이클즈 교수 뒤로 가까이 걸어왔다. "교수님, 오도넬 장군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고개만 끄덕이고, 장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닥치는 대로 녹이고 삼키며 자꾸만 커 가는 괴물 바위의 주위 5백 미터 밖에는 철조망이 빙 둘러쳐져 있었고, 군대가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신문기자나 구경꾼들을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장교는 교수를 막사로 안내했다. 막사 안에는 코밑 수염을 기르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장한 군인이 책상을 향해 앉아 있었다. "마이클즈 교수님이시죠? 난 오도넬 중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도넬 중장은 교수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좋으시다면 우리 사단의 고문으로 모셨으면 하는데 의향이 어떠신지요. 이 괴상한 살아 있는 바위를 발견하신 분이 바로 교수님 아닙니까!" "기꺼이 돕도록 힘써 보지요. 하지만 나는 인류학자입니다. 그러니 이 바위에 관해서 잘 알 만한 전문가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아닐까요?" "바로 그 점입니다. 교수님." 오도넬 장군은 찌푸린 얼굴을 더욱 찡그리며 말하였다. "나는 늘 과학에는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군대는 과학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도저히 전쟁에 이길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고스란히 다 듣다가는 아무 일도 되지 않을 때가 많겠죠. 아무튼 과학자는 색다른 연구 재료가 생기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언제까지나 붙들고 있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나의 임무는 단 1분이라도 더 빨리 저 괴물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물론 나도 그럴 작정이고, 또 부숴 버릴 자신도 있어요.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어요!" 오도넬 장군은 흥분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리 간단히 처리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이해력이 뒤지는 학생을 가르치듯이 끈기 있게 차근차근 말했다. 장군의 태도는 조용해졌다. "그렇겠죠. 그럼 어째서 간단히 처리될 수 없는지를 좀 설명해 주십시오. 나한테는 아무래도 그 점이 이해가 안 가니까요." "그럼 설명해 드리죠." 마이클즈 교수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것은 이 지구상의 것이 아닌 - 어떤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에서 생겨난, 에너지 생물이라 할 만한 특별한 생물인 겁니다." "그 까닭은?" "즉, 이 생물은 물질을 에너지의 형태로 바꿔서 흡수하여, 몸 안에서 다시 물질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괭이 날이나 지프차나 흙이나, 혹은 내 별장을 녹여서 삼켜 버린 것은 그 때문이죠." "호, 그렇군요." "또 이 생물은 에너지를 그대로 빨아들여서. 자기의 몸의 일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키든지, 기관총 탄환에 맞으면 맞을수록 그것은 고스란히 에너지로서 저 생물에 흡수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강력한 무기로 공격해 보면 어떨까요? 나는 방금 이 언덕 저쪽에 중포부대를 배치해 놓았지요. 2백 밀리 야전 중포의 일제 사격을 퍼붓는다면…" 마이클즈 교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장군께서는 내 말을 잘 이해 못 하시는군요. 아시겠어요? 저 생물은 말하자면 먹보 거머리 같은 거란 말입니다. 저 우주에서 온 거머리에게는 에너지가 아주 맛있는 먹이가 되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 병기를 써 보았자, 모조리 빨아먹고 마는 겁니다." "그것 참 고약하군. 그까짓 거머리가!" 장군은 짜증스러운 듯이 내뱉었다. "그래서 나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모두 서로 협력해서 잘 연구해 보면, 그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게 아닙니까." "그런 일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오도넬 장군은 엄숙한 표정이 되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교수께서 그 우주 거머리에게는 에너지가 먹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예, 그랬지요." "우리들도 음식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잖아요?" "예, 그런데요…" "바로 그겁니다!" 오도넬 장군은 또 한번 주먹으로 책상을 탁 쳤다. "지금부터 중포대에 명령해서, 그 에너지를 싫증이 날 만큼 잔뜩 먹여 줍시다. 그래서 배탈이 나게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 놈을 죽일 수가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마이클즈. 교수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장군은 제멋대로 교수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과연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나의 작전에 과학적인 이론을 뒷받침해 주어 나에게 자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장군은 마이클즈 교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섰다. "자, 나갑시다. 우리가 저 우주 거머리한테 인간 힘의 위대함을 보여 주기로 합시다!"   원자 폭탄 공격   그러나 그 중포부대의 포격은 참으로 엉뚱한 결과로 끝나 버렸다. 언덕 밑에 늘어선 10문의 2백 밀리 중포가 포격을 시작하자, 그 우주 거머리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잇따라 명중되는 포탄의 폭발로, 우주 거머리의 몸뚱이는 반쯤 파묻히고, 그 무시무시한 괴물도 죽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엉뚱한 착각이었다. 우주 거머리는 별안간 지름 3킬로미터나 되게 자란 몸뚱이를 번쩍 일으켜, 흔들흔들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중포 진지를 천천히 덮치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군인들은 대포고 탄약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그러나 67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사자도 - 물론 한 사람 남김없이 우주 거머리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오도넬 장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했다. 그리고 곧 워싱턴의 연합 참모본부에 원자탄이나 수소 폭탄을 사용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렵에는 대통령도 이 문제를 놓고 매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장 원폭이나 수폭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과학자단을 현지로 급히 보냈다. 물리학자․화학자․생물학자, 그 밖의 몇 십 명이나 되는 과학자가 현지로 달려와서 여러 가지로 조사하며 연일 회의를 열고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은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토론은 1주일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우주 거머리는 주위의 땅을 갉아 삼키며 자꾸자꾸 커 가기만 했다. 덩치가 워낙 커서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았다. 열흘이 되자, 우주 거머리는 지름이 10킬로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로 변했다. 그런데 좀 다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주 거머리의 성장은 차차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 많은 에너지를 얼마든지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흙을 녹여서는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영양분이 모자랐던 것이다. 14일째가 되자 우주 거머리는 지름 12킬로미터로 커졌으나 영양 부족이 뚜렷이 나타나고, 차차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2~3일만 그대로 둔다면 도리어 부피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름째 되는 날, 마침내 과학자단은 원자 폭탄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은 오도넬 장군에게 즉시 원자 폭탄을 사용할 것을 허가했다. 오도넬 장군은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미사일 기지에서, 원폭 미사일을 발사했다. 최초의 원폭 미사일이 우주 거머리의 배에 명중하여 버섯 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때, 그 때까지만 해도 에너지가 부족해서 지쳐 있던 우주 거머리는 그 굉장한 원폭 에너지를 잔뜩 빨아먹고 숨을 되돌렸다. 잇따라 네 개의 원폭 미사일이 명중되자 하늘에서 정찰을 했다. 정찰기에 타고 있던 비행사는 한동안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우주 거머리는 불과 수 시간 동안에 지름 1백 20킬로미터를 넘는 무서운 속도로 커져서 산과 골짜기를 타넘고 마을과 도시를 집어삼키며 자꾸자꾸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구가 깨져도   "내가 뭐랍디까!" 회의장 책상을 탕탕 치면서 오도넬 장군은 흥분을 참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원자 폭탄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을 때, 당장 허가해 줬던들 이런 꼴이 되고 말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을 늘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으니, 이 지경이 된 것 아닙니까." 오도넬 장군은 책상에 둘러앉아 있는 과학자들과 다른 군인들을 독기어린 눈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에야말로 간섭을 받지 않겠단 말입니다. 이번에 나는 당장 수소 폭탄 1백 개의 사용 허가를 얻을 작정입니다." "저런 터무니없는!" 과학자 한 사람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수폭을 그렇게 쓰다가는, 대기 중에 방사능이 퍼져서 온 세계가 전멸해 버려요!" "어디 그뿐이겠소, 지각(땅껍질)이 갈라지고, 지구가 두 조각이 날지도 몰라요!" 또 한 과학자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오도넬 장군을 그 과학자들을 업신여기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쟁이라는 건 항상 모든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겁내지 않고 용감하게 위험을 물리치는 자에게 승리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젠 아무 의견도 필요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께 허가를 얻을 수 있도록 찬성해 주겠지요?" 오도넬 장군은 눈을 부라렸다. 마이클즈 교수는 회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과학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젠 오도넬 장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주 거머리는 지금도 한 시간에 4미터 이상이나 자꾸만 커져 가고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한 달만에 뉴욕 주 전체를 삼킬 것이고, 반 년 만에는 북아메리카를… 그리고 1년이 못 되어 전지구를 통째로 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수폭을 그런 식으로 함부로 썼다가는 비록 우주 거머리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지구상에는 방사능이 퍼져서 인류는 원자병 때문에 죽어 버릴 것이다. 혹은 땅껍질에 구멍이 펑 뚫리고, 지진과 홍수로 지구상은 형편없이 파괴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어느 쪽을 택해야 옳을지 아무도 모르게 되 고 말았다. (우주 거머리는 지금도 갈증이 난 듯이 얼마든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면, 뛰어오르거나 파고 들어가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있다. 그런 성질을 교묘히 이용해서, 저 우주 거머리를 지구 밖으로 용케 쫓아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이클즈 교수는 골똘히 생각했다. (수소 폭탄의 에너지는 우주 거머리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그것은 우주 거머리에게는, 아주 맛있는 먹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수소 폭탄을 미끼삼아 우주 거머리를 꾀어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오도넬 장군은 책상 위에 장치된 대통령 전용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면 여러분, 이대로 결정된 걸로 알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소 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찬성한 겁니다. 대통령 각하께 이렇게 전화를 드려도 이의가 없겠죠?" "잠깐만, 장군." 마이클즈 교수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젠 더 기다릴 수가 없어요." 장군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다이얼을 돌리려 했으나, 마이클즈 교수는 그의 손을 잡고 말렸다. "잠깐만, 좋은 수가 있어요, 장군. 수소 폭탄을 폭발시키지 않더라도, 우주 거머리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그게 정말입니까?" 오도넬 장군은 의심스런 얼굴로 마이클즈 교수를 바라보았다. "이건 틀림없을 겁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런 방법입니다…"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꾀어내기 작전   그로부터 한참 뒤에, 오도넬 장군과 마이클즈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군인과 과학자단은 우주 기지의 컨트롤 센터에 모였다. 마이클즈 교수의 계획은 벌써 일찌감치 이 컨트롤 센터의 컴퓨터에 넣어져서, 많은 기사와 장병들이 분주하게 연락을 취하고 또 계산을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장군님," 컨트롤 센터의 기지 사령관이 장군에게 보고했다. "우주선은 10개 분의 수소폭탄을 싣고 발사대에 대기 중입니다. 명령대로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습니다." "좋아." 장군은 힐끗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 나서 눈짓으로 알렸다. "저쪽 준비도 다 됐겠지?" "예, 절대로 빈틈없이 해놓았습니다." "수고했네, 사정관." 오도넬 장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니터 텔레비전을 켜 주게. 앞으로 30초 이내에 우주선을 발사시킨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넓은 컨트롤 센터의 벽 정면에 장치된 큰 텔레비전 스크린이 밝게 비쳤다. 그 스크린에는 우주 기지 저쪽 편에 우뚝 솟은 발사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뚜렷이 보였다. 발사대에는 태양계 탐험용의 대형 우주선이 당당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카운트다운 개시 30초 전, 25초 전, 20초 전, …"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컨트롤 센터 안에서는 본격적으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잘 될까?" 한 과학자가 나직이 소곤거렸다. "잘 될 거야." 마이클즈 교수가 역시 긴장된 나머지 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의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이제 지구는 영원히 마지막이야." "15초 전, 10초 전, …" "저 우주선은 무인 조종인가 보지. 원거리 조종으로 용케 놈을 꾀어낼 수 있을까?" 또 한 사람의 다른 과학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건, 염려 마셔요. 저희들한테 맡겨 주십시오." 기지 사령관이 자신 있는 듯이 말했다. "9-8-7-6-5-4-3-2-1-0!"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우주선은 꼬리에서 굉장히 거센 흰 불꽃을 내뿜으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하늘 한구석으로 사라져 가 버렸다. 스크린의 화면이 확 바뀌어 우주 공간을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의 모습이 비쳐졌다. 우주 정거장에서 중계되어 오는 것이었다. 우주선은 어느 사이에 우주 거머리가 누워 있는 뉴욕 주의 산맥 지대 상공으로 날아왔다. 그래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 선회가 시작되었을 때, 지상에서는 거대한 바위산 같은 것이 천천히 하늘로 떠올라 가고 있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지상에서 계속 자라고 있던 우주 거머리였다. "제대로 되어 가는군! 저놈은 방사성 물질의 꾐에 빠져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군 그래." 과학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이제부터가 문제야. 실패해선 안 돼!" 장군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컴퓨터의 단추를 눌렀다 껐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스크린 속의 우주선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더니, 지구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우주 거머리가 그 뒤를 따라갔다. 우주선은 우주 거머리가 간신히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점점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우주 거머리도 차차 지구로부터 멀어져 갔다. "야, 계획이 성공했다! 놈은 우주 공간으로 꾀어 나가고 있군!" 누군가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마이클즈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태양이 잡아먹힌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모든 사람들은 스크린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은 어떤가?" 하고 오도넬 장군이 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무인 우주선과 우주 거머리는 지금 수성의 궤도를 지나서 똑바로 태양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됐구나!" 장군은 버릇처럼 되어 있는 깨진 종소리 같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우주 거머리는 태양에 충돌하여 녹아 버리겠구나." "예 , 그렇습니다." 기지 사령관이 대답했다. "속도는 계산보다는 다소 느린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사흘하고도 10시간 30분만에는 태양 속에 뛰어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만사는 그것으로 골나게 됩니다." "그것 참, 잘 되어 가는군." 오도넬 장군은 과학자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러분, 축배를 듭시다." 병사들이 유리컵과 술을 가지고 왔다. 모든 사람 앞에 술잔이 놓이고 술이 가득히 따라지자, 장군은 몸을 뒤로 젖혀 의젓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들은 일치 단결하여 저 우주에서 온 괴물을 물리쳤습니다. 여기 계시는 마이클즈 교수님을 비롯해서 여러분이 협력해 주신 덕분에, 미국 육군은 다시금,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통령 각하께 약속드린 대로 저 괴물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장군은 잔을 높이 들었다. 모두 따라서 잔을 들었다. 그러나 술잔을 옆에 밀어 놓고, 책상 위에서 무슨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이클즈 교수였다. "마이클즈 교수님, 어떻게 된 겁니까? 함께 건배하시지 않겠습니까?" 장군이 재촉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새파래졌다. "이거 큰일났어요." "뭐가 큰일인가요?" "속도가 너무 늦어요." "하지만, 다소 속도가 늦더라도 결국은 태양에…"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다면 그 놈이 태양 에너지를 빨아들여 자꾸자꾸 커져서, 태양에 도착할 무렵에는, 태양과 거의 같은 정도의 크기로 되어 태양을 잡아먹고 말게 됩니다." 일동은 입을 딱 벌리고 마이클즈 교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다음 순간 한 과학자가 소리쳤다. "우주선의 진로를 바꾸면 어떨까요? 태양을 빗나가게 해서, 태양계 밖으로 꾀어내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우주 괴물을 파괴하지는 못하잖아요…" 오도넬 장군이 입을 뾰족 내밀며 말했다. "아니, 파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장군님.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면, 우주 거머리는 점점 에너지를 잃어서 짜부라들게 되지요." 하고, 마이클즈 교수가 옆에서 설명을 보탰다. "그래서, 맨 처음에 내 별장 마당에 떨어졌을 때처럼 아주 작은 바윗돌만큼 되어 버리지요. 그렇게 되면, 우주 거머리도 완전히 해를 끼치지 않게 되죠. 어쨌든 지금 당장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우주 거머리의 에너지는 점점 커져서 뒤에 가서는 진로를 바꿀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오도넬 장군은 이런 설명을 듣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불만스러운 듯이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난 듯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지 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좋아, 그럼 진로를 바꾸도록 하게!" 장군의 명령이 전해지자, 컴퓨터로 전파 신호를 무인 우주선에 보냈다. 무인 우주선은 즉시 진로를 바꿨다. 우주 거머리는 잠깐 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똑바로 앞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뜨겁고도 맛있는 에너지 덩어리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도 까마득한 먼 곳에 있었다. 그것에 비해서 방사성 물질의 맛있는 에너지는 바로 앞을 내달리고 있다. 우주 거머리는 역시 먼 곳의 먹이보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가까운 먹이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우주선 뒤를 따랐다. 그 때, 스크린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스크린의 화면 위에서, 작게 빛나는 점 한 개와, 크게 빛나는 점 한 개가 지금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했군…" "그렇지만, 이젠 안심인걸. 머지않아 저놈은 태양계를 벗어나게 돼. 그렇게 되면 자꾸자꾸 에너지를 잃게 되고 아무 해가 없는 바윗돌로 되고 마는 거야." 모든 사람의 얼굴에 겨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다시 축배를 듭시다. " 이번에는 마이클즈 교수도 기꺼이 축배를 높이 치켜들었다.   우주 속의 불꽃   세계는 이 뉴스를 듣고, 축제 기분으로 들떴다. 세계 모든 곳의 도시나 농촌, 관공서, 회사, 가정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합니다!"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지구의 평화를 흐뭇하게 여겼다. 세계 각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날마다, 시간마다, 우주 거머리의 행방을 뒤쫓으며 소식을 전했다. 우주 거머리는 시시각각으로 지구에서, 그리고 태양계에서 멀어져 갔다. 그럭저럭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1주일이 지났다. 우주 거머리는 이제 벌써 태양계를 벗어나 아득히 먼 별들이 총총한 끝없는 우주 공간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열흘째 되는 날, 마이클즈 교수는 오도넬 장군의 부름을 받아 또 다시 우주 기지로 갔다. 컨트롤 센터로 갔더니, 장군은 싱글벙글하면서 교수를 맞았다."야아, 마이클즈 교수님, 참 잘 오셨습니다." "무슨 용건이 라도…" "예, 꼭 좀 봐 주셔야 할 것이 있어서요." 장군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켜게 했다. 화면에는 작은 점 두 개만이 외로이 비쳐져 있었다. 우주 거머리는 이제 완전히 짜부라들어서 우주선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되어 있었다. "거리도 벌써 5백억 킬로미터 이상이나 됩니다. 교수님, 이젠 안심할 수 있겠죠?" 마이클즈 교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터져 나왔다. 장군은 아직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젠 절대 안전합니다.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별안간 컴퓨터 담당자 쪽을 보았다. "이제 됐어. 아까 내 명령대로 해." 컴퓨터 담당 기사가 얼른 대답을 하더니 계기반의 단추를 조작했다. 그러자 스크린에 비쳤던 점 두 개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좁아지기 시작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깜짝 놀랐다. "장군, 이거 왜 그러시오?" "나는 저 우주 거머리를 반드시 파괴해 버리겠다고 대통령 각하께 약속을 했소. 나는 여태까지 절대로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러니 나는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겁니다. 우주선에 실어 둔 수소 폭탄은 우주 거머리와 부딪침과 동시에 폭발하겠죠. 그래서 우주 거머리 놈을 아주 박살을 내버릴 작정이오!" "아, 안 되요, 장군." 마이클즈 교수는 크게 외쳤다. 그러나 때는 벌써 늦었다. 마침 그 순간, 두 개의 점은 딱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눈 앞을 캄캄하게 만드는 큰 폭발이 스크린을 가득히 메운 것이다. "야, 성공이다!" 오도넬 장군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외쳤다. "나는 미국 군인답게 드디어 약속은 지켰소. 저 괘씸한 우주 거머리를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소!" 텔레비전 스크린은 곧 어두워졌다. 폭발이 끝난 것이다. 스크린에는 이제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교수님. 이젠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겠죠?" "그래, 맞았소.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소." 마이클즈 교수는 음산하고 컴컴한 지옥 밑바닥에서 나는 소리처럼 대답했다.   태양계를 멀리 떨어진 캄캄하고 차디찬 우주 공간에서 몇 만, 몇 십만이나 되는 작은 조각들로 부서진 우주 거머리는 무서운 속도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지금은 보통과 같은 작은 돌멩이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중의 몇천, 몇만 개는 태양 가까이로 날아간다. 가까이 갈수록 태양 에너지를 빨아들이고는 자꾸만 커져 가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마이클즈 교수의 별장 마당에 떨어진 것만큼의 크기로 자라서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단, 이번에는 한 개뿐만 아니라, 몇천, 몇만 개가 떼를 지어서…  
3    태양계 요새 - 돌레짤 지음 / 이 인석 옮김 댓글:  조회:51  추천:0  2021-03-20
태양계 요새   돌레짤 지음 / 이 인석 옮김   ◇편집 위원 ◇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인학 공학 박사 양 옥룡/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토성의 테를 산책하다 ·············· 4 대장의 이야기·················· 17 방문객····················· 24 륀크스 호에서의 파티·············· 29 크라무의 비밀·················· 34 정찰선 스틱스 호 출발·············· 39 태양계를 떠나서················· 44 유령선····················· 52 별 서로간의 이야기··············· 58 다시 유령선으로················· 68 되살아나는 과거················· 75 결 정······················ 80 토우레 출발··················· 87 참사의 진상··················· 91 메도우서의 수수께끼··············· 98 암흑의 세계·················· 105 운명과의 경주················· 111 뜻밖에!···················· 116 비임, 잘 있거라················ 118   작품 해설··················· 126   책머리에   언젠가는 우리 인류는 대우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선 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계를 개발시키겠지요. 달을 비롯하여 화성과 금성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도시가 점차로 건설될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일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먼 장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첫발은 이미 디디고 섰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모두 미래의 것입니다. 토성보다 먼 바깥 우주를 탐색하러 간 우주선이 잇달아 불가사의한 사건을 만나자, 태양계 정부는 안의 우주를 한 개의 요새로 만들어 거기에서 지키고 있게 합니다. 토성 가까운 전진 기지에 있던 청년들은 그렇게 지키고만 있으니 지루해서, 드디어는 탐험의 길로 출발합니다. 자, 여러분도 같이 끝없는 우주 여행에 눈길을 돌려보시기를……   토성의 테를 산책하다   "아아――"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그는 젊은 전파 천문학자 돌 큐르비. 지구에서 14억 3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하품이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루하니까 하품이 날 수밖에. 태양계의 어디를 가도 이렇게 지루해서야 일할 맛이 없는데." "그래. 꼭 요새 안에서 사는 기분이야. 그러나 태양계 최고 위원회에서 결정한 일이니까 하는 수 없지." 라고 대답한 사람은 사이가 좋은 페트 프리튼, 광학 천문학자이다. "정말이야. 유령에 싸여 있는 요새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 높은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이 세 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게르트 비디히라고 하는 환경 공학 엔지니어이다. "견딜 수가 없어. 토성의 궤도 이상 벗어나서도 안 된다고 하잖아. 그 내부의 지름이 30억 킬로미터는 되지. 그러나 은하계의 크기에 비하면 하나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아." "최고 위원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 모험 정신이 없으니까 따분해서 못 견디겠군. 우리가 그만한 기술을 못 가지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어때, 다음 근무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 토성의 테까지 산책이나 해 볼까? 기분 전환으로 말이야" "좋고 말고!" 큐르비의 의견에 모두 소리 높여 찬성을 했다.   그들은 토성의 제 2위성 엥게라도스에 있는, 태양계 요새 기지의 대원들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구에서 14억 3천만 킬로미터로서, 우주선으로 3개월이나 걸리는 곳이다. 목성, 소행성 케레스. 그리고 화성의 궤도를 사람이 없는 중계 스테이션이 돌고 있기 때문에 무선이면 지구와의 연락은 곧 할 수가 있다. 곧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주이므로 빨라도 1시간 15분이다. 인류는 너무나도 빨리 태양계를 개발해 왔다. 달과 화성, 그리고 금성에서 사는 사람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도 지금은 어른이 되어 훌륭하게 일하고 있다. 사람끼리의 전쟁은 이미 옛날 이야기로 되고 말았다. 게다가 배우기 쉬운 언어가 만들어지고, 태양계의 어디를 가든 그 언어로 얘기 할 수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최고 위원회는 토성의 궤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토성의 제 2위성 엥게라도스는 토성에서 23만 8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돌고 있다. 지름이 5백 킬로미터이므로 달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태양계 행성의 위성 중에서는 큰 편이다. 태양에서 굉장히 멀기 때문에, 몹시 춥다. 그래서 기지는 지하 100 미터에 있다. 물론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큐르비, 프리튼, 비디히 세 사람 사령실로!" 라는 소리가 갑자기 스피커에서 울려왔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들을 마주 앉았다. "뢴트겐 대장이야. 대체 무슨 일이지? 지금은" 하고 비디히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 알렉스 페드로프의 명령이다. 뢴트겐은 그의 별명으로서, 부하의 비밀 이야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천리안이라도 가진 것은 아니고, 집회실에 정밀한 마이크를 비밀리에 장치해 놓았던 것이다. 비겁하게 보일지 모르나, 여기는 우주에 떨어진 작은 섬이다. 이런 곳의 대장이 된 사람은 부하의 기분을 하나에서 열까지 세밀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페드로프 대장은 세 사람을 쳐다보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수고한다. 너희들의 휴식은 아직 8시간 남아 있다. 그때까지 무엇을 할거야? 말해 봐, 아니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야." "잠깐 토성의 테에 소풍이라도 할까 하고요. 괜찮겠습니까?" 돌 큐르비가 대표로 대답했다 "괜찮고 말고.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때로는 기분 전환을 시킬 필요가 있지. 여기의 상황은 지루하니까.“ 하며 대장은 빙긋이 웃었다. 세 사람은 좀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동행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생겨서 기뻤다. 대장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달의 태생은 나 혼자 뿐이야. 사람은 대체로 고향의 별 환경에 따라가지. 달에는 공기가 없다. 즉 멀리까지 잘 보인다. 그러므로 달에서 태어난 사람은 특별히 눈이 좋아. 하하하……" 그러자 비디히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곤란하군요. 금성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곳은 항상 두꺼운 구름에 싸여 있으니까, 시야가 매우 나쁘지요." "그 반면 금성인들은 몸 주위의 것을 잘 관찰하지. 자네가 환경 공학을 선택한 것이 그 때문인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어떨까요?" 하고 물은 사람은 큐르비이다. "자네가 태어난 지구는, 태양계에 흩어져 있는 인류에게 생명의 샘이라고 해도 좋다. 너의 전문인 전파 천문학도 지구에서 가장 진보되어 있다. 그리고 프리튼은 화성 태생의 광학 천문학자이다. 이 두 개의 천문학이 형제인 것처럼, 지구와 화성과도 형제지간이다. 더욱이 자네 고향은 아이슬란드였었지. 즉 너는 바이킹의 자손이 되는 셈이다. 네가 남달리 모험을 좋아하는 것도 까닭이 있는 거다. 콜럼버스 보다 5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레이프의 이야기,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건설한 에이릭의 이야기…… 어렸을 때 열심히 읽었다." 큐르비는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아버지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그런 배로 북해의 심한 파도를 헤치고 건너간 것은, 지금의 무선과 레이더가 있는 우주선으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나는 것보다 더욱 용기 있는 일이었을 것이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 시간이 가니까 출발 준비다. 테의 바깥쪽까지 10만 킬로미터지. 정찰정 게본 호로 간다. 화학 연료를 사용해서, 초속 10 킬로미터로 하면 얼마나 걸리나?" 프리튼이 재빨리 노트에 계산했다. "16분 40초입니다." "좋아. 그럼 그 동안 날아가는 거리는?" "5 천 킬로미터." "됐어. 그럼 나머지 9만 5천 킬로미터에는……" "9천 5백 초 걸립니다. 즉……" "2시간 30분이면 되겠지. 좋아, 7시간이면 돌아 올 수 있어." 정찰정은 공처럼 둥근 모양인데, 앞뒤에 사람이 타는 방과 동력실이 붙어 있다. 화학 연료라고 하지만, 옛날의 로켓처럼 요란한 소리나 연기를 뿜어내지 않는다. 조금도 추진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소리 없이 나아가게 한다. 엥게라도스의 작은 중력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가속이 되면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훈련으로 단련되어 있다. 언제 보아도 토성은 훌륭하다. 캄캄한 우주 공간에 당당하게 떠 있다. 게본 호는 적도를 향해서 똑바로 토성에 가까이 갔으므로, 옆에서 본 테는 붉은 줄이 되어 큰 별을 둘로 갈라놓고 있다. 먼 태양의 빛을 받아서 테는 토성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윽고 정찰정은 가장 바깥쪽의 테 가까이로 갔다. 토성의 테는 3개로 되어 있는데, 모두 같은 중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유영 준비!" 네 사람은 에어 록으로 들어가서 우주복을 입었다. 온도 조절, 공기 공급, 무선 연락, 소형 추진 장치…… 모두 이상없다. 게본 호는 속도를 테의 공전 속도에 맞추었다. 이 속도라면 14 시간에 토성을 한 바퀴 돈다. 이상한 경치였다. 눈앞에 바위벽이 우뚝우뚝 서 있다. 헤아릴 수 없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고, 토성의 주위를 돌고 있다. 만일 지구의 달이 폭발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두에 선다. 간격 1킬로미터로 따라와라. 전망이 좋을 성싶은 바위 위에 내리자." 대장이 앞서고, 그 뒤로 모두 우주 공간으로 뛰어 나갔다. 조그만 로켓을 잘 조종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건 굉장한, 굉장한 모험이다." 비디히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큐르비가 받아서 말했다. "뭘, 대단치 않아. 좀더 신나는 모험을 하고 싶다구!" 무선으로 하는 말이므로 물론 대장에게도 들린다 "가만, 가만. 급히 서두르면 안 돼. 생각한 것보다 실제로 부딪쳐 보면 그다지 즐겁지는 않을 거야, 알겠니? 저기 큰 바위에 내린다" 네 사람은 무수히 깔린 바위 위에 서서히 미끄러져 내렸다. 바위의 흩어져 있는 모습은 불가사의한 힘으로 지탱되어, 오랜 옛날부터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따금 바위와 바위의 틈 사이에서 저쪽의 공간이 바라다 보인다. 목적지에 착륙했다. 잘못 움직이면 그 반동으로 뛰어올라 갈 것 같다. 프리튼은 열심히 사방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대장님 이상합니다. 테의 저쪽 끝을 보니 먼 쪽이 높아져 있는 것 같아요" "네가 말한 대로다. 알겠나, 천체는 모두 공이다. 둥글다. 그 지면이 평평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아. 그러나 이 테의 표면은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지만, 태양계에서 유일한 완전한 평면을 가진 천체이다. 그래서 평면에 익숙지 않은 눈으로는 오히려 먼 쪽이 높아 보이는 거지." 테의 안쪽에 갈 시간은 없었다. 거기에는 가스가 있고, 정찰정의 조종도 어렵다. 바위가 별똥별로 되어, 메탄과 암모니아의 토성 대기 중에서 타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대장님, 아직 토성에 내린 사람은 없죠?" 하고 프리튼이 또 다시 물었다. "아직 없지. 대기권에 들어가면 캄캄해진다는 것 밖에 알고 있지 않다. 레이더는 말을 듣지 않는다. 자,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간다. 한 번 더 잘 봐 두라." 이때였다. 그들의 리시버에 기지의 대장 대리로부터 긴급 통신이 들어온 것은, "이쪽은 오우엔, 대장에게 전함. 게본 호 중계로 연락하십시오." 우주복에 장치된 무전기로는 10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기지까지는 닿지 않는다. "이쪽은 페드로프, 현재 게본 호에 되돌아가는 중이다. 무슨 일이야?" "목성과 토성 궤도 중간에서 접근 중인 물체를 레이더가 포착했습니다!" "알았다. 곧 가겠다. 경보를 내라. 다른 기지에도 곧 연락을." 오우엔은 당황하지 않고 명령을 실행했다. 연락이라고 하지만 전자 계산기, 발신기, 안테나 등을 조정하는 것이라 복잡한 일이었다. 게본 호에 도착해서, 큐르비는 우주복을 벗으며 말했다. "기지에 있었으면 좋을 뻔했어. 내 전파 망원경으로 포착할 수 있는 건데!"   대장의 이야기   "전속력으로 기지로 직행!" 위성 엥게라도스와 공전 속도 쪽이 테의 공전 속도보다 늦어, 기지까지는 아까보다 훨씬 뒤지고 있다 얼마 지나자, 대장이 세 사람을 옆으로 불렀다. "이 기회에 얘기해 둘 것이 있다. 우리가 같이 일하는 데 중요한 일이다. 너희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들 만족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실은 그렇습니다." 큐르비는 무엇이든 숨겨두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 기분은 잘 안다. 너희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이나 큰곰자리의 M18번 별에 가고 싶겠지, 새로운 우주를 발견하고도 싶을 거다. 우리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 별의 세계를 모르니까 말이다." "정말 굉장하겠지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너희들은 최고 위원회가 우주 파일럿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가 있다. 옛날의 은하계 탐험대에 대해서 공포하지 않은 일들이 있다." "예? 처음 듣는 소린데요." 프리튼이 놀라며 말했다. "가르쳐 주십시오, 대장님." "좋아. 너희들은 화성의 우주 대학에서 페르크세 작전의 일을 들어보았는가?" "예, 헤르메스 이야기도요." "그래 무한한 은하계 우주를 찾으러 나섰던 우주선 헤르메스 호는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 달에 자매선 하세르 호가 해왕성의 위성인 트리톤에서 헤르메스 호의 잔해를 발견했다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어떤 별의 생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세르 호와 또 1척의 배가 재차 태양계를 떠나려 했으나, 이상한 우주선을 만나 되돌아오고 말았지. 너희들이 아는 것은 이 정도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최고 위원회는 함부로 그 사실을 공포해서 일반 시민들에게 불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탐험 대원들에게도 굳게 입을 다물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수한 우주 요원이다. 기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여기서 얘기하마." 이때,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쪽은 오우엔." "말하라.“ "물체는 타원 궤도로 접근 중. 천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쪽에서 불러 보아도 응답이 없습니다." "알았다." 대장은 스위치를 끄고, 다시 세 사람을 향했다. "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사실은 그 괴 우주선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것도 헤르메스 호의 항법사 코튼 비임이- 그는 무선으로 태양계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연락해 왔다. 물론 괴선에 타고 있는 생물의 명령이었지. 아무래도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 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듣고 있었다. "괴선의 선체 불빛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하는 것을 하세르 호의 통신사가 눈치챘다. 무심코 보고 있던 중 문득 생각이 났지. 그 옛날에 사용하던 모르스 신호 같았다. 곧 노트에 받아 적고 해독해 본 거다. " "그들은, 인류에게 ‘위험하다. 그것은……’ 거기에서 그쳤다. 계속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또 짧게 세 번 불이 켜지고 그뿐이었다. 무슨 일일까?…… SOS(구조 신호)였다." "그러면 비임 외에도 사람이?" 하고 비디히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그렇다. 괴선의 생물이 모르스 신호를 알 까닭이 없으니까." "SOS라면 왜 구조하러 안 갔나요?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요." 프리튼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러나 제군들, 그건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광속으로 날아가는 우주선 내에서는 시간 가는 것이 많이 늦어진다고 하잖아요. 그게 사실이라면 비임 들도 그만큼 덜 늙었을 게 아닙니까. 아직 늦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고 큐르비도 흥분하면서 말했다. "태양계 최고 위원회는 그런 것들을 모두 생각한 다음에……" "아무 손도 못 썼다는 말이지요." "기다려 보라고. 결론은 그렇게 간단히 내릴 수 없는 거야. 빛의 신호도 어쩌면 함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짜 곤란에 빠져 있을 겁니다. 최후의 희망을 모르스 신호에 의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괴선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찾아보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높은 사람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너무 조심을 하기 때문에." 하고 비디히도 지지 않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침착성이 없어. 아무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기습에 대비하는 조치를 했지.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먼 물체라도 탐지할 수 있다. 헤르메스 호와 같은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토성의 궤도에는 자꾸자꾸 기지가 건설되고, 정찰정은 명왕성까지 날아다닌다. 여기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자 큐르비가 정색을 하며 질문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괴선의 선단이 나타나면 우리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려운 질문이다. 실은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상대편이 어떻게 나올지도 전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즉 우리들의 행동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체 모를 유령에게 둘러싸인 채 요새에 처박혀 있는 셈이군요.“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어. 인류가 처음으로 다른 고등 생물과 만날지도 모르는 거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큐르비는 불만스러웠다.   방문객   엥게라도스 기지로 돌아온 대장은 곧 오우엔에게 그 뒤의 상황을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진로도 같고, 응답도 없습니다." "안테나 개의 반응은?" "린다, 라일라, 메도우서 3마리 모두 아무 일 없이 순합니다." "그래, 그럼 괜찮겠지……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한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없거든 무장 정찰선 스틱스 호에 준비를 해라."   여기서 안테나 개의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동물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지진 같은 것도 미리 알아차리고,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 등이다. 특히 개가 그런 점에서 뛰어났다. 동물 심리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그 능력의 정체를 잡을 수가 없었다. 훈련을 시키면 그에 따라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밖에 모른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아주 옛날의 인간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페르크세 작전 때에도 헤르메스 호의 잔해를 발견하는 데 안테나 개가 큰 공을 세웠다. 그 힘은 우주 공간에 있어서 더욱 강하게 되는 모양이다. 마치 무슨 특별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안테나 개라고 부르고 있다. 말하자면 걸어다니는 위험 탐지기이다. 다만 말을 못하기 때문에 위험의 종류까지는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어느 전진 기지에나 안테나 개가 배치되어 있다. 엥게라도스에 있는 세 마리는 모두 암컷인데, 조상은 셰퍼드이다. 물론 대원들과는 잘 사귀고 있다. 대장이 집회실로 가자, 졸고 있던 세 마리는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왔다. "이상한 느낌은 없었니?" 그러자 대답 대신에 세 마리는 멍멍 짖었다. "그래, 그래. 너희들을 믿고 있다." 그때, 스피커가 울렸다. "대장님, 사령실로!" 페드로프는 곧 사령실로 갔다. 오우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물체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음, 그렇지 않아도 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뭐지?" "손님입니다. 곧 뮤리우스 제독이 전함 륀크스 호로 임시 시찰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잘 되었군.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해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야." 긴장했던 마음이 일시에 풀어지고 말았다. 륀크스 호가 도착할 때까지 기지에서는 며칠 간 환영 준비에 바빴다. 이윽고 륀크스 호는 엥게라도스의 궤도에 들어서고, 천천히 착륙하기 시작했다. 엥게라도스의 중력이 약하므로 역분사도 조금만 하면 되었다. 기지의 입구에서 기밀 식의 통로가 죽 뻗으며 전함 에어 록에 갖다댔으므로, 손님들은 우주복을 벗지 않고도 기지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기지의 24명은 집회실에서 손님을 맞았다. 뮤리우스 제독은 우주항법의 대가이다. 그밖에도 우주에 있는 인류의 지위에 대한 여러 가지 훌륭한 책을 써내어, 태양계 중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24명은 제독으로부터 한 사람씩 다정한 악수를 받고 륀크스 호에서 큰 파티를 열었다 이윽고 뮤리우스 제독은 페드로프 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사령실로 들어갔다. "페드로프 군, 자네가 취한 조치는 만점이야. 륀크스 호를 발견하는 것도 빨랐다. 연락 방법도 좋았다. 자네 쪽의 무장 정찰선이 마중 오면 미안해서 가만히 오려고 했었지." 페드로프는 정해진 대로의 보고를 마치고, 젊은 대원들의 불만과 토성의 테까지 산책한 일들을 얘기했다. "제독님, 페르크세 작전 이후 그 우주인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지금쯤은 그들이 오지 않을까요? 저도 부하들과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자 뮤리우스 제독이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걸. 우리들은 결국 인간의 시간, 지구의 시간으로 사물을 생각하고 말지. 그러나 이 태양계 안에서도 시간이란 것은 일정하지 않다. 알겠나, 명왕성에서의 1년은 지구에서의 250년에 해당한다. 수십 년 전 우리와 스쳐 지나간 우주인은 전혀 다른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까, 그 수십 년이 길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뿐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주의 깊게 행동하며, 설사 헛수고일지라도 젊은이들에게는 공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미래를 짊어질 사람은 그들이니까." "그렇습니다. 저의 부하들은 정말 훌륭한 녀석들뿐입니다. 무서움을 모르고 의무감에 충실하며, 머리도 좋고 모험 정신에 불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것만은 참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륀크스 호에서의 파티   륀크스 호의 큰 홀에는 100명이나 들어갈 정도로 넓다. 천장이 낮은 이외에는 우주선 안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승무원과 기지 요원들 중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사람만 빼고는 모두 모였다. 화성식으로 맛을 낸 금성의 물고기, 야채는 달의 인공 채소밭에서 키운 것, 그리고 지구의 새는 요새 태양계에서 유행하는 방식으로 요리되었다. 고기는 륀크스 호의 그늘에 걸어놓았으므로, 저온과 우주선으로 인하여 굉장히 맛이 있었다. 안테나 개들에게도 그 맛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세 마리는 모두 테이블 밑을 끙끙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정말 즐겁습니다. 이런 파티는……" 하고 큐르비는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남자는 륀크스 호의 전파 천문학자이다. 벌써부터 큐르비와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는 어딘지 이상한 남자였다. 곁에 있던 페트 프리튼은 아까부터 자세히 보고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왠지 기분이 나빠져 간다. 첫째,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청년 같기도 하고 노인같아도 보인다. 아무튼 머리는 검으며 윤기가 흐르고, 피부는 번질번질하고 그을러 있다. 말을 하는 데에도 기묘한 습관이 있다. 더욱이 지금의 젊은이에게는 맞지 않은 단어와 말솜씨이다. "저 사람, 이름이 뭡니까?" 하고 프리튼은 옆에 있는 청년에게 물어 보았다. 건장하고 큰 남자인데, 얼굴은 매우 순하게 보였다. 라크 심슨이라고 하는데, 지구 태생으로서 화성에서 수학을, 달에서 컴퓨터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아아- 저 사람 말인가요? 우리는 그를 "요술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무에 관한 일 이외는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몹시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지요. 그러나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제독에게는 신용을 얻고 있지요. 말하자면 전파 천문학자로서는 대단하지요, 안드로메다 성운에서의 신호라도 잡아서 해독할 수 있다더군요." "예에, 어디 태생인가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제독은 혹시 모르지만.“ "물어 본 일은 없나요?" 왠지 프리튼은 열심히 묻는다. "물론 물어 보았지만, 우물쭈물하고 싫은 얼굴을 하길래, 그 후로는 물어 보지 않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군요. 나의 친구인 큐르비와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잖아요" "정말입니다. 이상한 일도 있군요.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얘기를 하다니." 프리튼은 이 사람 좋은 청년 심슨에게서 많은 얘기를 잘 들었다. 륀크스 호가 달의 메스딩거 A 화구를 출발했을 때, 이 요술쟁이는 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의 전파 천문학자가 어떤 사고로 화성에 내리고, 그 대신으로 탄 사람이 이 남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화성 출신도 아니다. 이름도 크라무라는 것밖에 모른다…… "아무튼 이상해요. 안테나 개가 그를 주시하고 몰래 지키고 있어요.“ 어느 사이에 프리튼은 심슨과 친해졌다 "음, 그러나 짖지는 않군요. 위험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아요.“ 크라무와 큐르비는 여전히 이야기에 열중해 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크라무 쪽이고, 큐르비는 이따금 질문을 할 정도이다. 눈을 빛내며 듣고 있다. "요술쟁이 선생,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 파티가 끝나고 모두 기지로 돌아갔지만, 큐르비만은 언제까지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크라무의 비밀   다음날. 프리튼과 큐르비는 근무를 마치고 기지의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베란다 앞에는 지구의 풀과 나무를 고생해 가며 심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귀한 풍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큐르비, 크라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대단한 인물이야.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마치 방사선을 내뿜는 것 같아." "과연 요술쟁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그러나 나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뭘 말이야? 그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알맞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계획과 용기를 지니고 있어. 그것이면 됐잖아, 과학적 지식도 풍부해." "그래도 모두 그를 피하고 있어. 안테나 개도……" "뭐? 그건 너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나의 친구이니까 크라무에게 들은 것을 얘기해 주겠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야." "……?" "그는 전파 천문학에서는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그가 최근에 어떤 발견을 했었다. 그것을 나에게만 얘기해 주었다." "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겠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현재하고 있는 일이 더욱 지루하게 여겨졌다." "어서 말을 해 보라고. 모험 이야기인가?" "아니, 암시 정도였지만……" "점점 이상하게 말을 돌리는군." "좋아. 특별한 비밀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 크라무도 용감한 친구에게는 얘기해도 괜찮다고 그러더군. 그러나 너무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은 곤란해. 알겠나?" "알만해. 그러면 맹세를 할까요?“ 우스갯소리로 대꾸해 보려고 했으나, 말이 그럴 듯하게 나오지 않는다. 큐르비는 프리튼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는 전파 신호를 잡았어. 발신의 근원은 우주선인 모양이야. 물론 인간의 것은 아니지. 그러나 몹시 흩어져 있어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아마 SOS 같다고 말했다." "뭐? SOS…… 요전의 대장도 그런 말을 했잖아." "그렇지. 어쩌면 아직 인간이 우주인에게 붙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음, 그런데 크라무는 왜 제독에게 그 얘기를 안 하지?" "그것도 물어 보았다." "뭐라고 그러던?" "설사 보고를 해도 조사 허가를 얻을 수가 없대. 오히려 반대로 더욱 조심만 하게 된다는 거야." "하긴 그래. 하지만 SOS라면 구원을 바라고 있는 거다." "아니, 크라무는 SOS가 꼭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거야. 100퍼센트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야." "그게 사실이라면 뭔가 있는 거다. 그것뿐인가, 그가 얘기한 것이?" "나더러 페드로프에게 부탁해서, 뮤리우스와 조사 비행 허가를 얻어 보면 어떠냐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자료를 제공해 주겠다는 거야." "그도 간다고 했나?" "그 말은 안 했어. 그러나 청년으로서는 훌륭한 일거리라고 그러더군." "흠, 그럼 자기는 젊지 않다는 얘긴가?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이야기는 이게 전부인가?" "중요한 것은……" "음, 아무튼 심각한 문제다. 잘 생각해 보자구. 나는 지금부터 근무해야 돼. 자, 또 만나." 하고 프리튼은 큐르비의 손을 잡고는, 헤엄치듯 복도를 사라져 갔다.   정찰선 스틱스 호 출발   대우주 전함 륀크스 호의 사정실. 뮤리우스 제독과 페드로프 대장은, 큐르비와 프리튼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인 채 조용히 듣고 있다. "꼭 가고 싶은가? 너의 보고는 매우 흥미가 있다만, 사실 같지가 않다." 라고 말하는 대장의 목소리도 엄숙하다. 큐르비는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조사해 보아도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보고하러 온 것입니다." 하고 보고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큐르비는 카시오페이아자리의 전파별 A의 전파에, 또 하나의 다른 전파가 겹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섭계에 의하면, 발신 근원이 카시오페이아자리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별이거나, 아니면 인공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전파 근원도 극히 희미하고, 언제 재어 보아도 거리의 변동이 거의 없다는 거다. 프리튼도 망원경으로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입니다. 이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조사대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프리튼도 큐르비에 거들었다. "그러나 스틱스 호로 되겠는가? 아냐, 그 전에 전문가 크라무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어떤가?" 뮤리우스 제독은 아주 신중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두 젊은이가 원하는 바였다. "예, 좋습니다. 그 사람도 동행해 주었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곧 크라무가 들어왔다. 그러자 방안의 분위기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다. 제독의 말이 끝나자, 크라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틀림없다니 큐르비 군의 솜씨는 대단하군요." 그런데 카시오페이아자리 A별의 이름을 들었을 때, 크라무의 눈이 빛나는 것을 프리튼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페드로프 대장은 마음을 결정한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확실하겠지요? 그러나 저 정찰선으로써 간다는 것은 어떨까요?" 크라무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 같으면 곧 출발시키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카시오페이아자리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훨씬 앞에 있는 태양계의 근처까지면 좋습니다. 내가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크라무씨, 같이 갑시다!" 돌연 프리튼이 정면으로 부탁했다. 크라무는 순간 어리둥절한 것 같았으나, 곧 침착을 되찾고 핑계 대듯 말하는 것이 동행을 안 할 눈치였다. 그러나 뮤리우스 제독은 조사 비행 허가를 내 주고, 페드로프 대장도 협력을 부탁하자 크라무도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게 되었다. 륀크스 호에서는 또 한 사람, 프리튼과 친하게 된 심슨이 항법사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엥게라도스 기지에서는 큐르비, 프리튼, 그리고 비디히도 참가한다. 환경 공학과 동력을 책임진다. 거기에 안테나 개중 메도우서도 참가한다. 그래서 다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개로 짜여졌다. "언제 출발할 것인가?" 하고 페드로프 대장이 물었다. "12시간 후!" "좋아, 스틱스 호의 준비는 끝나 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는 거다. 부디 조심해 다오. 제독과 내가 책임을 지고 허가를 내어 준 것이니까, 잊지 말기를……" "정찰선의 무기는 아주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쪽에서 먼저 쏘지 말라. 탐험대의 대장으로 큐르비를 임명한다. 임무가 무겁다. 그러나 무선으로 연락이 될 때까지는 나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알았습니다, 대장님!" 12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드디어 출발 시간은 다가왔다. 페드로프 대장은 잠깐 큐르비를 방으로 불러서, "극비"라고 표시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페르크세 작전의 자세한 보고서였다. "잘 읽어 두라. 쓰일 때가 있을 거다. 돌아오거든 도로 나에게 가져와라. 자, 너의 바이킹의 피가 끓어오르는 일이다. 그러나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럼 행운을 빌겠다!" 큐르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장의 손을 힘주어 잡고서는 방에서 나왔다.   태양계를 떠나서   소형 우주선 스틱스 호는 이미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크라무의 지시대로 이상한 목표를 향해서, 어두운 공간을 일직선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크라무 선생은 왜 저렇게 찬바람이 휙휙 돌지? 방이 따로 갈라져서 정말 다행이다." "비디히도 그렇게 생각하나? 큐르비, 확실히 크라무는 기묘한 인물이야.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야. 메도우서 역시 그 사람 옆에는 절대로 안가잖아." 가고 프리튼은 좀 뽐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그러다가 말겠지. 그런데 지금은 기지에 있을 때보다 더 지루하군. 그저 날고 있을 뿐이니 말야." "무슨 배부른 소리야. 광자의 날개로 우주를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재밌어. 조금만 더 참아 보시지요." 하고 비디히는 신난다는 듯 말했다. 이때, 항법실에서 키가 큰 심슨이 들어왔다. 갑자기 방이 좁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침 잘 왔어, 심슨." 하며 비디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넨다. "우라늄 1그램이 완전 분열하면 얼마만한 에너지가 되지? 옛날 시험볼 때 암기했었는데 잊어먹고 말았어." "10조 킬로 파운드 미터이지." "지구 중력으로 말인가?" "그렇다네." 비디히는 노트에 계산을 하더니 이윽고, "정말 놀랐는데! 그럼 우라늄 1그램에서 1천 파운드(약 0.5톤)의 무기를 100억 킬로미터나 들어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지구의 중력으로 계산해서 말야. 100억 킬로미터라면 태양에서 토성까지의 7배나 된다." "연료로서 부피가 없어 이상적이지. 이것도 핵분열을 완전히 제거되도록 한 덕택이다. 이 정찰선은 많은 우라늄을 싣고 있다. 속력을 내려고만 하면 광속이라도 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속력이 형편없지 뭐야." 큐르비는 약간 비꼬듯이 말하고, 크라무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저 크라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페르크세 작전에 관계가 있는 것 같다구. 그 괴선의 이야기 있잖아. 크라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프리튼이 받아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그는 왜 오는 것을 꺼렸을까? 우리들만 보내려 한 것은 기지의 인원을 줄이려고? 그렇다면 그 목적은? 아무래도 이상해……" 모두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들을 쳐다보았다. 무거운 공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심슨이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크라무가 문제의 우주인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이상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자, 추측만 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좀 쉬자구, 어떤 일이 일어나면 통지해 주겠다." 혼자 남은 큐르비는 엥게라도스 기지와 연락을 취했다. 무엇인가 마음에 집히는 것이라도 있는 모양 같았다. 아직 전파는 겨우 닿고 있었다. 왕복에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큐르비는 불을 끄고, 바깥을 보는 텔레비전의 위치를 켰다. 태양은 이미 조그만 빛의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구 같은 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조차 없다. 방안의 공기는 상쾌했다. 비디히의 수고로 스위치를 켜면, 그리운 냄새가 방안을 가득 차게 한다. 지구의 전나무 냄새, 갓 내린 눈의 냄새, 화성의 사막 냄새, 금성의 바다 냄새 등이…… 큐르비는 달콤한 기분에 젖어 눈을 감았다…… 나는 우주의 바이킹이다. 그 옛날의 선조는 큰 바다 저쪽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 우리들이 발견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눈을 뜨고 스위치를 바꾸어 켰다. 스크린에 안드로메다 성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때, 발 옆에 있던 메도우서가 벌벌 떨고 있다. 큐르비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돌아보았다. 크라무였다. 소리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큐르비는 문득 크라무라는 이름에 대해서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슬란드의 옛 전설에 힘센 양치기가 있었다. 그는 괴물과 싸워서 그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어 유령이 되어 사방을 설치고 다녔다. 그 이름이 바로 크라무였다. 어쩐지 등이 서늘해져 왔다. 거기에 차가운 목소리가 이렇게 물었다. "진로는 바로 잡고 있나요, 에다다우리 별에?" "네, 틀림없습니다. 목표는 아직 멀었나요?"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의 경험과 추측이 틀림없다면, 아마 여러분은 머지않아 어떤 체험을 하게 될 거요. 그것은 악몽 같을지도 모릅니다. 태양계와 항성의 세계 중간에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생각 못할 일이 있지요.“ "그게 무엇이지요?" "설명은 뒤에 하지요. 지금은 레이더로 사방을 샅샅이 살펴보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발견되면 곧 나를 불러 주시오……" 말을 끝마친 크라무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때, 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왔다. 페드로프 대장으로부터였다. 조금 전에 부탁한 사진을 찾았으니 지금 전송하겠다는 거다. 전송 수상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츰 모양을 이루어 가는 사진, 큐르비는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사진은 명랑해 보이는 한 청년의 얼굴로 뚜렷이 나타났다. (음, 그렇구나, 이젠 틀림없어.) 큐르비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얼굴 표정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났다. 큐르비는 얼른 사진을 감추었다. 들어온 사람은 프리튼이었다. "아무래도 잠이 안 오잖아. 그래서 왔어. 뭐 별다른 일은 없나?" "곧 있겠지 뭐." 큐르비의 대답은 간단했다.   유령선   큐르비는 레이더의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레이더란 것은 빛 대신에 전파를 사용한 탐조등과 같은 것이다. 전파가 저 먼 곳까지의 공간을 어김없이 찾는다. 문득 큐르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스크린에 빛의 점 같은 것이 비치고 있지 않은가! 혜성인가? 거리를 재어 본다. 30분이면 닿을 만한 곳이다. 곧 프리튼을 불렀다. "찾은 것 같다! 너의 망원경으로 조사해 줘." 프리튼은 스위치를 켜고, 돔(반구형의 지붕)에서 고성능의 반사 망원경을 꺼졌다. 이와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조그만 물체를 잡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프리튼은 잘 해냈다. "음, 천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주선이나 다른 무엇이다. 무선으로 연락해 보자." "좋아, 대답이 없을 때는 경보를 울려라." 아니나 다를까 대답이 없다. 경보 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모두 집합했다. 크라무는 이상하게도 흥분하고 있다. "찾았나요?" "그렇습니다." 큐르비는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무선 연락은? 그 대답은?" "아니, 없었지요. 없다는 것은 저쪽에 무선 장치가 없거나, 아니면……" 그러자 크라무가 돌연 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소." "이야기해 주시지요." 하고 큐르비가 조용히 말했다. "저 물체, 아니 우주선에는 틀림없이 무선 장치가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소. 대답이 없는 까닭은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임에 분명합니다……" 이때, 심슨이 연락해 왔다. "감속 준비!" 정찰선 스틱스 호에 브레이크를 거는 거다. 그때는 인간의 신체에 무서운 중력을 받으므로, 특별히 마련한 방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터져서 죽고 마는 것이다. 그 고통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만든 약도 발명되었다. 숨막히는 30분간이 지나고, 스틱스 호는 이상한 물체의 바로 옆에 조용히 멈추었다. 크라무의 얼굴에는 생기가 났다. 큐르비를 보고 말했다. "저쪽 물체에 타 봅시다. 위험은 없어요." "좋습니다 나와 심슨이 같이 가겠소. 프리튼과 비디히는 여기 남아 있어 주게." 괴선은 둥근 모양이었다. 지름은 60미터쯤 되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물건이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데 무엇에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큐르비는 심슨을 보고 말했다. "어때, ‘물체’라든지 ‘우주선’이라고 하면 불편하니 이 괴선을 ‘토우레’라고 부르기로 하지. 지구의 고대인이 북쪽 끝의 바다라고 생각했던 전설의 섬 이름이다." "좋아, 적어도 존재하고 있는 것에는 이름이 있어야지. 우리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인가? 어려운 문자 쓰는 건 질색이다. 자, 토우레의 비밀을 알아보러 가자." 세 사람은 헬멧을 쓰고, 에어 록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공기가 쏴아 흘러내린다. 우주복 점검 - 이상 없음. 무선 장치 - 이상 없음. 바깥쪽의 문을 열고, 우주 공간을 헤엄쳐 나갔다. "야아, 이건 우주선이라기보다는 우주 스테이션 같다." 하고 큐르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크라무가 가장 앞서서 괴선 토우레에 붙어 섰다. 그는 무엇인가 찾고 있는 듯 했는데, 아마 발견한 모양이다. 스위치나 다른 무엇을 누른 것일까? 평평한 표면에 뻐끔한 구멍이 열렸다. 반구형의 구멍이다. 그곳으로 세 사람이 들어가자 반구는 빙 돌았다. 과연 잘 고안한 에어 록이다. "메도우서는 어떻게 하고 있나?" 큐르비는 무선으로 스틱스 호에 남아 있는 프리튼에게 물었다. "얌전해." 큐르비는 일단 안심했다. 메도우서는 신용할 수 있다. 좁은 반구의 방에는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크라무는 벽에 붙어 있는 계기를 보자, 살며시 헬멧을 벗었다. 소리는 없다. 방안의 기압은 우주복의 기압과 같았다. 공기로 호흡할 수가 있다. "안심해요. 우주복을 벗읍시다." 눈앞에 둥그렇게 입구가 열렸다. 그것을 지나니 복도가 나타났다. 크라무가 맨 앞에 서고, 세 사람은 달려갔다. 문이 있었다. 초록색의 램프가 켜져 있는데, 그것은 안의 기압이 정상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크라무는 문을 와락 열면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곧 두 사람도 안을 보고 놀랐다. 보통 사람의 방이었다. 벽 쪽에 2개의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책상과 의자도 있다. 이상한 것은 중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온도도 꼭 알맞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알았어. 대답이 없었던 것은 모두가 여기를 빠져나간 때문일 거요." 하고 크라무는 천천히 말했다. "크라무씨!" 큐르비는 상대방의 이름을 힘주어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사하기 전에 꼭 설명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일단 스틱스 호로 되돌아가서 들어볼까요?" "하지만……" 반대하려던 크라무는 덩치 큰 사나이 심슨이 노려보았으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별 서로간의 이야기   정찰선의 좁은 선실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메도우서까지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들으려는 듯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과연 크라무의 비밀은? 실로 이상한 이야기가, 태양계를 멀리 떠나 있는 이 어두운 공간에서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고 있다. 큐르비는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계기판을 꽉 잡고 있었다. 이윽고 크라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놀라셨겠지요. 저 우주 스테이션-토우레였습니까- 의 모습을 내가 자세히 알기 때문에. 지구에서 나고 태양계를 개척한 인류 이외에도, 우주에는 진화된 생물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중 두 개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왜 우리들도……?" 하고 심슨이 입을 열었다. "조금 기다려 주시오. 그렇게 단번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사건이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나 크게 펼쳐져 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페르크세 작전의 일,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에서 혜르메스 호의 잔해가 발견된 일, 하세르 호가 이상한 괴선과 만났다는 일 등을 말입니다." 그러자 큐르비가 대표해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도, 빛을 사용한 SOS 신호의 일도." "그렇습니까? 그러면 말하기가 수월하군요. 사실은 우리들은 그 우주선의 생물에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스테이션도 그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지금, 뭔가 모두 꿈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이야기해 주십시오. 모두 다 같은 인간이 아닙니까? 괴로운 추억은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나와 당신들의 사이에는 깊고 깊은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에는 이상한 체험이 쌓여 있습니다. 나로서도 잘 모르겠어요. 자신이 인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떤지, 인간에서도 저 우주인들 사이에서도 동료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크라무 당신은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현실에 돌아와 있는 겁니다. 륀크스 호의 한 사람이지요. 전파 천문학과 우주항법의 일인자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모험을 시켜 주지 않았습니까? 그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은 잘 모를 겁니다. 왜 내가 륀크스 호에 탔는가? 어째서 이상한 SOS의 일을 이야기했는가? 만약 이 토우레에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서 크라무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후회하는 것처럼……. 큐르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상할 수는 있겠지요. 죄다 이야기하시지요. 고통스럽겠지만 그러면 우리의 동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크라무는 눈을 감았다.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하십시오. 당신은 코튼 비임이죠. 원래는 헤르메스 호의 항법사였고요." 순간 크라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큐르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큐르비가 손에 들고 있는 사진을 보자,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윽고 다소 침착해진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젊은 시절의 사진입니다. 제 1차 탐험대의 한 사람이었죠. 트리톤에서 조난 당한 헤르메스 호의 승무원이지요. 옛날 동료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자, 서둘러야죠. 빨리 토우레로 다시 가서 조사를!" 이상하게도 크라무, 아니 코튼 비임은 점점 변해갔다. 사람다워진 것이다. 그 기괴한 어두운 그림자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아니, 우선 설명을 해 주십시오.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우선 얘기하지요, 그때, 최초의 은하계 탐험선 헤르메스 호는 출발 후 무사히 날아가고 있었어요. 트리톤에 도착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뜻하지 않은 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번갯불처럼 그것이 어두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공격을 당했나요? 레이더에 관측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심슨이 물었다. "공격?…… 그렇게 말할 수는 없죠. 이쪽에서는 손도 써보지 못했어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우리들은 그냥 멍청하게 있었을 뿐이었소. 그야 우리들 역시 우리 같은 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막연히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만날 줄이야." "대체 그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심슨의 눈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지금 이야기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토우레 속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때 말하지요. 아무튼 우리들은 그야말로 간단하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헤르메스 호를 완전히 분해하여 갔지요. 아, 연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과는 생각하는 방법도, 행동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아직 잡혀 있나요? 그들의 별로 갔습니까?" "아니, 그들의 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들 중에 나만을 되돌려 보내 주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선에도, 레이더의 전파에도 반사하지 않는 우주선으로 남태평양의 포나페이 섬에 내려 주었습니다.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신분을 감춘 채 저 우주 공항에서 근무했죠. 그리고 드디어는 륀크스 호에 타게 된 것입니다." "되돌려 보내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솔직하게 말하지요. 인간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우주선에 대한 전문가를……" 그러자 심슨이 놀라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생물의 기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요?" "그들의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기술입니다." 하고 코튼 비임은 말했다. 큐르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데서 기술을 빌려와서?" "그렇습니다. 우주 진출에는 우리들 쪽이 더 적합하지요." "그건 모르지요. 우리의 선조가 바이킹의 배로 아메리카에 상륙했을 때, 인디언과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지요. 그때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상대였지만 아무튼 인간끼리. 그러나 우주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잠깐 비임 씨……" 하며 심슨이 또 입을 열었다. "비임씨, 당신 혼자 토우레를 떠나 지구로 되돌아올 때, 헤르메스 호의 선원들은 무사했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10명이 부족했었지요. 나를 지구에 보내 준 것은 인간을 데리고 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우주인으로부터 최면술 같은 것에 걸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잔인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그들은 우리들과는 전연 다릅니다. 개미와 사람과는 다르지요. 사람은 개미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우주인과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10명이 부족하게 되었지요?" 라고 묻는 큐르비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이상한 이야기일 겁니다. 10명은 그들의 과학적 탐구심에 희생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렇다고 모르모트의 대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하여튼 나는 그런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기를 꺼려한 것도 보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올 생각에서였죠. 그러나 무리하게 거절하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온 것이지요." 하고 코튼 비임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토우레가 온통 비어 있는 것을 안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아아, 이제는 안심이다 하는 기분입니다." 라는 비임의 얼굴은 한층 젊어진 것 같아 보였다. 놀랍게도 안테나 개 메도우서도, 아까부터 얌전하게 그의 발 밑에서 자고 있었다.   다시 유령선으로   이번에는 전원이 토우레의 조사에 나섰다. 모두는 비임이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 데리고 온 메도우서도 이젠 예사로웠다. 토우레는 미지의 생물이 태양계에 대한 감시용으로 사용한 우주 스테이션인 동시에, 광속에 가까운 속력을 낼 수 있는 우주선이라고 한다. "비임씨, 조종할 수 있나요?" 하고 심슨이 물었다. 모두 비임에게 마음을 놓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파괴되지 않았으면 5명으로 가동할 수 있지요." "야아, 가동시켜 보면 재미있겠어요." "그런데 비임씨의 동료들은 대체 어디에 갔을까요? 우주인도 있었겠죠?" 하고 프리튼이 물으면서, 토우레의 에어 록 안에서 헬멧을 벗는다. "우선 그걸 조사하는 겁니다." 다섯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중력을 똑똑히 느낄 수 있다. 큐르비가 물었다. "인공 중력을 만들어 놓은 건가요?" "아니, 그건 아직…… 그 대신 토우레의 중심부에 무거운, 즉 밀도가 대단히 큰 물체가 넣어져 있지요. 그 기술 방법은 간단합니다. 중력이 큰 편이 좋으면 중심부 쪽으로 가면 되지요." "과연 배울 것이 많은 것 같군." 이윽고 비임은 네 사람을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인간이 거주하는 구역은 끝납니다." 살펴보니 안쪽 벽의 한 면은 투명하게 되어 있고, 그 바깥쪽은…… "마치 수족관 같다!" 하고 비디히가 문득 소리를 쳤다. "그대로입니다. 저쪽은 물입니다." "물?" 모두는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지구의 것과 거의 같은 진짜 물입니다." "토우레에 물의 재생 장치는 없었나요?" 라고 묻는 큐르비도 믿을 수 언다는 얼굴이다. "있지요. 그러나 그 물은 사람용이 아닙니다." "그 우주인이 이 많은 물을 마시나요?" 그러자 비임은 흰 이를 보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사실은 저기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이 뜻밖의 말에 누구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심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설마……?" "물에서 산다고 해서 반드시 물고기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불행히도 헤르메스 호에는 생물학자가 타고 있지 않았으므로 잘은 모르겠지만, 물고기는 아니겠지요. 사람보다는 조금 작았습니다. 보기에는 오징어 비슷했습니다. 몸통은 밋밋하고, 촉수는 4개, 그 끝에는 물건을 잡는 손톱이 있었죠." 큐르비는 커다란 물통의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하고 비임은 옆의 좁은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잠수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천천히 물통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서 이상한 것을 끌어안고 되돌아왔다. "이것은 잠수복의 반대지요. 그들이 물을 나오게 할 때 사용하는, 그렇지요 잠공복이지요. 물 밖에서는 지느러미 같은 것으로 걷습니다. 어정어정, 참 지구의 물고기들도 지느러미로 지면을 걷는 것이 있었지요. 큐르비씨, 그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어떻습니까? 그쪽이 편리하겠지요." "그렇군요. 노지러스 인은 어떨까요? 문어의 것입니다만.“ "좋아요,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에도 어질러진 흔적이 없으니, 외부에서 습격을 당했다고는 할 수가 없군요. 어떻게 된 거지? 헤르메스 호의 동료가 어딘가에 연락을 남겨 놓았을 텐데. 자. 토우레의 안을 찾아봅시다." 곧 둥그런 사령실을 발견했다. 정밀한 기계와 알 수 없는 것들이 꽉 차 있었다. 큐르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이것도 노지러스 인이 만든 것인가요? 물 속에서?" "그것에 대해서 나도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동료들과 여러 가지로 의논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모르겠더군요." "하하, 지금 중요한 것은 토우레에 아무도 없는 이유입니다." 하며 심슨이 이렇게 물었다. "비임씨, 토우레는 구명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 점점 이상해집니다." 그러면서 사방을 찾고 있던 중, 비임이 옛날의 거실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해 전다. 「자세한 정보는 기록실의 제 3호 테이프 레코더에 있다. 」 라고 쐬어 있었다. 기록실은 인간들이 노지러스 인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 가지 학문상의 조사와 연구 결과를 정리시켜 놓은 방이다. 천문학, 우주항법에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다. 비임은 곧 제 3호 테이프 레코더에 스위치를 넣었다. 똑똑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쪽은 렌 가이, 이쪽은 렌 가이. 원래 헤르메스 호의 의사……」 다섯 사람은 기록실에 앉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되살아나는 과거   「……훗날 인간이 이 스테이션을 찾아올지 모른다. 그때를 위해서 이 테이프에 우리들의 운명을 녹음해 둔다. 지금 우리들은 20명이다. 과거에 불행한 사고로 10명을 잃었다. 이제 우리들은 스테이션을 떠난다. 날짜를 남기고 싶으나, 지구의 시간에 대해서 알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 문득 생각이 나므로, 여기에서 본 현재의, 태양계의 사진을 찍어 놓았다. 이것을 분석해 보라.」 소리가 그치며 테이프 레코더가 열리더니, 1장의 필름이 툭 떨어졌다. 비임은 그것을 주워 빛에 대어 보았다. "보십시오. 행성입니다. 수성은 보이지 않아요. 너무 멀지요. 자, 이것은 금성……" "앗, 지구다!" "화성도 있다!" 사진의 분석은 뒤로 미루고, 또 테이프 레코더에 스위치를 넣었다 「스테이션을 떠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들 밖에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테이션의 주인인 생물은 전멸하고 말았다. 정체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여 손댈 방법이 없었다. 지구의 시간으로 쳐서 3일만에 물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은 이미 없었다. 우선 환자는 기력을 잃고, 그리고 마비가 되어 죽었다. 시체는 곧 녹고 말았으므로, 연구의 표본으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그대로 우주 공간에 장사지냈다. 나는 의사이다. 물론 병의 근원을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모든 시체에는 어떤 바이러스가 있음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것이 죽게 한 범인인지는 확실치 않다. 실험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생물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해롭지 않은 바이러스가 보인다. 그것이 우주선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위험하게 변형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로서는 언제 이와 비슷한 병에 걸릴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안 되기를 원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여기를 찾아온 사람들은 우리가 이 스테이션을 떠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리라. 이것을 그대로 조종하여 태양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스테이션의 동력이 고장나서 우리로서는 고칠 수가 없었다. 즉 여기에 있으면서 구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가, 그 두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의논한 끝에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정했다. 헤르메스 호의 오하라 선장 등 10명이 사망한 것은, 이럴 때 실로 큰 손실이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우수한 엔지니어였으므로. 그러나 대우주를 고향집처럼 삼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통신사와 광물학자는 엔지니어로, 물리학자는 연료 기사로, 의사는 항법사가 되었다. 다행히 모두가 지구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므로, 어느 정도는 맡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 즉 우리들은 스테이션의 수리 공장에서 모든 자재를 동원하여, 20명이 탈 수 있는 소형 우주선을 만들고, 헤르메스 2세 호라고 명명했다. 성능은 대단히 좋았다. 무선도 있다. 레이더도 있다. 동력은 광자 로켓이다. 우주인의 배를 만날 걱정은 없을 것이다. 트리톤에서 우리를 습격하여, 이 별 사이의 우주를 사방으로 끌고 다니면서 이 스테이션으로 데리고 온 배 이외에는 한 척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 한 척도 1년 안에는 여기를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태양계로 가지 않을 것이다. 이 근처에서 전파를 내는 암흑 성운을 발견했으니, 첫째 그것을 먼저 조사하고 싶다. 성운에 대한 자료는 제4호 테이프 레코더에 녹음해 놓았다. 우리들은 지구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것으로 우리들의 인사로 대신하겠다. 우리는 결코 옛 고향인 행성을 잊은 일은 없다. 지구여, 태양계여, 평화롭게 지내기를. 지금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의 이름을 말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없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코튼 비임은 여기서 스위치를 끄고 말았다. "이제 됐습니다. 이름을 들어본들 소용없어요." 슬픈 듯한 목소리였다. "렌 가이들이 스테이션을 떠나고 나서 노지러스 인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고 심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잠깐이라도 왔다면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이라도 올지 모른다. 그렇잖나, 큐르비?" 라고 말하는 프리튼은 걱정인 모양이다. "그렇지. 대책을 세워야 할거야. 비임씨, 당신의 의견은?" "우선 가이들이 언제 여기서 나갔는지, 그걸 알 필요가 있어요." "좋습니다. 스틱스 호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곧 빨리!"   결 정   문제의 사진은 스틱스 호의 전자 계산기에 넣어서, 심슨과 프리튼이 분석하기로 했다. 결과를 알 때까지는 2, 3시간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큐르비가 조용히 말했다. "어쩌다 정말 무서운 모험이 되었어."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고 말하는 비디히는 기쁜 모양이다. "노지러스 인의 우주선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하고 문득 비임이 물었다. "스틱스 호는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야 알고 있지요. 큐르비씨, 그러나 그건 좀 곤란하지요. 우선 무기가 말을 들을는지 모릅니다. 거기에다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나요.“ "그렇지요. 그러나 아무튼 혜르메스 1세 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상대는 무기를 사용했나요? 만약 당신들도 무장이 되어 있었다면 저항했을까요? 똑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으니 까요." 비임은 한참 동안 큐르비를 쳐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물론 되풀이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후, 우리들도 노지러스 인도 충분히 경험을 쌓고 있지요, 그리고 내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들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헤르메스 1세 호는 군사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후에야 그렇다고 생각한 일이지만,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생물간에는 그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지러스 인은 어떤 것과 만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이 달랐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때 그들의 우주선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것이 착륙할 2, 3분 전이었고……" "기밀 문서에 의하면, 레이더도 듣지 않았다던데요." "그래요. 그들은 스위치 하나로 레이더 파를 흡수시키고 말았지요.“ "그러면 상대는 실력 행사를 안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자 어째서 모두가 붙잡혔습니까? 헤르메스 호도 파괴되고 말입니다." "붙들린 것은 우리들의 호기심 때문입니다. 눈앞에는 먼 태양의 빛이 둔탁하게 비치는 이상한 형태의 우주선이 있었지요. 에어 록이 열리더니 무서운 우주복을 입은 것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정어정 걸어서 돌아다니더군요. 무섭지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한 번 안을 조사해 보려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마비성 가스에 당하고 말았지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왕성은 먼 저쪽에 있었답니다." "아니, 나 같으면 그것들을 한꺼번에......" 하고 비디히가 억울해 했다. "지금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그러나 그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설사 그들을 처치했다해도, 우리로서는 배의 조종을 모르지요." "잠깐만, 물어볼 게 있어요." 하고 큐르비가 말을 막았다.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그 우주선에 공기가 있었다는 것이 말입니다. 노지러스 인은 물 속에서......" "그것이 문제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모르고 있습니다.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그들의 별에 대한 것도 모릅니다. 아마 거의 물의 별이라고는 생각되지만." "물 속에서 우주선을 만들다니,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높은 열을 내는 장치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라고 말하는 비디히는 엔지니어이다. "그렇지. 그 우주선은 말야, 그들의 작품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손에 넣었을까?" "알겠니? 20세기의 중엽부터 지구나 어딘가의 우주선이 불시착하여, 기계는 무사했는데 승무원이 다 죽고 말았다고 한다면?" "그럴지도 몰라. 그러면 인간은 좀더 빨리 우주에 내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고 큐르비는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배 안에 공기가 있었다는 것도 그럴 듯하게 생각되는군요. 배를 만든 것은 우리와 비슷한 생물이었겠지요." "이왕 만나려면 그쪽이 더 좋았을 텐데. 오징어의 친척은 아무래도……" 하고 비디히는 겁이 난다는 듯 목을 움츠렸다. "허허, 노지러스 인도 아마 똑같은 소리를 할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들은 우리들의 손을 빌리기를 원하고 있으니. 어쩌면 하늘에서 우주선을 만든 것이 우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들과 최초로 의사를 통한 사람이 나니까요." "잠깐, 손을 빌리자는 것은?" "노지러스 인은 물에서 나오면 운동이 매우 느립니다. 우리들의 몇 분의 일도 못하지요. 그렇다고 조종 장치를 물에 담가 놓고 있을 수는 없고……" "오하라 선장들은 어떻게 돼서……" 하고 큐르비가 물었을 때, 심슨과 프리튼이 달려왔다. "알았어, 85일 전이다!" 비임은 눈에 활기 띄며 말했다. "아직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하지요. 임시로 끼워 맞춘 우주선이니까요! 자, 토우레를 고칩시다. 조종은 내가 해 보지요." "그러나 아무 말도 없이 빌리려니까 꺼림칙하군요. 옳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여기에 연락을 남겨 놓고 노지러스 인에게 맡겨 둡시다. 비임씨, 부탁합니다." "좋아요, 큐르비. 그러는 것이 놓겠습니다. 아무튼 그들도 헤르메스 호를 부쉈으니, 그렇게 해도 좋겠지요." "노지러스 인은 헤르메스 호의 승무원을 태양계에 되돌려 보낼 생각은 없었던가요?" 하고 프리튼이 물었다.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실행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너무 아까워서였겠지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천사가 아닌 이상, 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자, 페드로프 대장에게 일단 보고를 하고 추적 개시다. 아마 대장의 대답은 기다릴 수 없을 거다."   토우레 출발   솜씨 있는 비임과 비디히다. 결사적으로 일한 끝에, 기어이 토우레를 고쳤다. 비디히는 그 엔진에 완전히 감탄을 하고 말았다. "훌륭하다. 이 무거운 물체의 연료로서는 최고일 것이다. 합성시켜 만든 것일까?" 그러자 천문학자인 프리튼이 설명했다. "아니, 백색 왜성의 것이야. 이러한 별은 전부터 알고 있지. 무섭게 밀도가 단단하다. 단 1 입방 센티가 지구상에서는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물질도 되어 있다. 옛날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었지. 보기에는 아주 작지만 덥고, 파르스름한 빛을 띤다. 표면적은 작지만, 빛을 내도 에너지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이런 별은 수소 원자를 다 쓰고, 중성자만으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게 밀도가 단단한 거다." "아아, 그런 물질이라? 조금 얻었으면 좋겠어." "시리우스의 반성(질량이 작은 별)이 그것이야. 시리우스는 항성으로서는 여기서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이 좋아. 중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말야. 우주선 같은 것도 형편없이 찌부러지고 말 것이다. 표면 온도만 해도 1 만 도는 될 거야." "음, 그래.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 항성의 에너지가 수소를 헬륨으로 바꿔서 나오는 것은 알고 있다. 핵융합 반응…… 굉장한 수폭이라고 말하겠지. 그러나 수소 원자를 다 쓰고 만 별이 폭발하는 것은 어째서이지?" "내부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야. 수소 원자가 다 없어지고 만 뒤의 뽀얗게 작은 별, 즉 백색 왜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음, 어쨌든 좋아, 편리한 원료가 있어서 말야. 중성자 엔진은 광자 엔진보다 융통성이 있어. 선체가 전기를 띠지도 않는다. 고속을 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큰 배는 좋군, 기분만 내키면 수영도 할 수 있다. 천문대도 훌륭해. 멋지게 일할 수 있어." 거기에 다른 세 사람이 달려왔다. "이봐, 기뻐하라구. 헤르메스 2 세 호와 연락이 됐어. 저쪽의 전력이 약해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별일은 없다는 거야. 이쪽 통신은 틀림없이 전해졌다." 비임이 노지러스 인의 식료를 사용하여 훌륭한 음식을 만들었다. 식탁보도 새로운 것이다. 태양계로부터 55광년 떨어진 곳에서 유쾌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맛있었다. 죄다 수산물이었으나, 실로 여러 가지 맛이 나서 즐거웠다. "노지러스 인은 물만 마시고 있는 줄 알았는데, 비임씨?" 하고 비디히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그들은 놀라더군요. 자, 인류와 노지러스인의 번영을 위하여 건배!" 출발에 앞서 모두는 천문대에 모여서 그리운 태양에 작별의 인사를 보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태양은 어느 별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잘 있어요, 태양이여." 하고 프리튼은 엄숙하게 말했다. "그 옛날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의 나라 밖에 있는데도, 아직 당신의 빛은 우리들을 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잘 있어요, 태양이여, 다시 만날 날까지!" 금성에서 태어나 태양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은 비디히도, 점차 유쾌한 기분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참사의 진상   비임은 어쩐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렌 가이로부터의 대답은?" 큐르비가 대답했다.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우리들과 만나기 위해 속력을 늦추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갑자기 만든 우주선이라 걱정이 되는군요. 도착하면 토우레로 갈아타는 게 좋겠어요." "그렇습니다. 가이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의사님이지 항법사는 아니지요. 우주 비행의 조종사는 모두 죽고 말았으니까요." 심슨이 입을 열었다. "그럼 헤르메스 2 세 호는 어째서 곧바로 태양계로 되돌아오지 않지요?" "우주의 인간들은 그 있잖아요. 호기심과 연구심이 실로 끝이 없다는 것을." "좋습니다. 이쪽도 그때까지 토우레를 철저히 조사해 보는 겁니다." 노지러스 인의 자료실을 조사해 보았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우주 항해의 기록을, 일종의 비디오 테이프에 기록해 두고 있었다. 비임은 기술에 대해서는 육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노지러스 인과 오랫동안 같이 생각한 까닭에, 얼마 안 되어서 그 사용 방법을 알아냈다. 재생 방법이 이루어진 순간, 그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이것은 그 사고의 기록이다!" 모두 곧 모였다. 노지러스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의 스위치는 끄고, 화면의 영상만을 남겨 두었다. 사건을 직접 목격한 비임이 해설을 한다. "노지러스 인은 어느 때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물체는 약 1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토우레와 평행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운석?" 하고 프리튼이 물었다. "아니오. 몰랐는데 거기에 이상야릇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 보십시오. 자주 발화 신호 같은 것이 번쩍 번쩍 빛나는 것이 있지요.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하여튼 노지러스 인은 조사대를 내 보내기로 했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말입니다. 노지러스 인으로는 움직임이 느려서 아무래도 무리였죠. 대원은 오하라 선장 외 10명. 어찌 된 까닭인지 토우레에는 구명정이 없었으므로 모두 우주복을 입고 출발했습니다. 결국 우리들도, 노지러스 인도 우주의 신비라는 것을 너무나 얕잡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10명이 에어 록에서 차례 차례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토우레의 서치라이트도 100킬로 앞까지는 닿지 않습니다. 대원들의 소형 로켓의 섬광도 곧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후의 모습이었습니다." 큐르비들은 숨을 죽였다. 먼 과거가 되살아난 것이다. "보십시오, 오하라 선장의 목소리입니다. ‘물체는 접근 중, 검은 윤곽이 보인다. 이상하다.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부딪히면 큰일이다. 브레이크를 걸어라!’ 대원은 브레이크를 걸었지요. 그 순간……" 그러더니 비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은 스크린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연, 물체의 근처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강렬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서 또 한 차례 오하라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분사 빨리! 아아――" 그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불기둥으로 변했다. 불기둥은 모두 10개 일어나고, 이윽고 스크린은 깜깜해 졌다.   한참 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비임이 침묵을 깨뜨렸다. "이것이 오하라 선장들의 최후입니다.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심슨이 물었다. "전 우주가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우주의 신비의 한 구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반물질입니까?" 라는 큐르비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며 비임은 말을 계속했다. "반물질이었습니다. 반양자(양자의 반대물로 양자와 접촉하면 서로 파괴되는데, 우주를 파괴하는 힘이 있다고 함), 반중성자 등으로 되어 있는 물질이죠. 처음부터 그것을 알아차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 빛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정말이군요. 태양계에서 날아온 우주진이 부딪쳐서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충돌하여 파괴되면서 빛이 된다……" 하고 프리튼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직 반물질 등은 이론으로 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거든요. 겨우 미립자 가속 실험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였죠. 그것으로 만들어진 아주 작은 반물질이라도 백만 분의 1초만에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튼 무서운 체험이었습니다. 귀중한 체험이었죠. 동료 10명의 목숨과 바꾼 것이었으니까요." 큐르비는 어두운 얼굴로, "10명의 육체는 빛이 되고 말았다. 그 빛은 지금도, 아니 언제까지나 넓은 우주 속에서 점점 퍼져나가고 있으리라. 영원히 퍼져가고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몹시 이상한 기분이 되는군." 하고 조용히 말했다   메도우서의 수수께끼   "이봐, 반물질을 찾았니?" 하고 비디히가 손을 들고 물었다. 천체 관측 돔에서 내려온 프리튼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 없어, 그런데 섭섭하게도 말야. 왜 하필 그런 반물질 같은 것인 이 우주에 뛰어 들어온 것일까?" "아마 반물질의 우주가 있었던 모양이지. 그것이 보통의 우주와 부딪쳐서 없어진 그 나머지인지도 모르지." 거기에 심슨이 끼여들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입자와 부딪쳐서, 대량의 반물질이 빛으로 다 변하지 않은 모양이야. 모두 꺼지지 않은 모양이지?" "음, 우주진이 아주 적은 곳을 헤매고 있다던가……" 이때, 큐르비의 발 옆에 누워 있던 메도우서가 갑자기 끙끙거렸다. "왜 그러니?" "노지러스 인이라도 왔나?" 큐르비는 메도우서를 데리고 사령실로 들어갔다. 하나 하나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공기 정화 장치, 공기 순환 장치, 온도 조절 장치, 방사선 방어 장치…… 모두 이상없다. 그러나 메도우서는 조용히 있지 않았다. 항법실의 문을 발로 끌어당긴다. "들어가고 싶니?" 개는 그렇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좋아. 말을 못하니 화가 나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만큼 기술을 진보시킨 인간들도 너희들의 이야기를 모르니 할 수 없잖니." 항법실로 들어가자, 메도우서는 얌전해졌다. 자동 조정 장치를 본 순간, 큐르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곧 모두를 불러들였다. "뭐니, 왜 그래?" "보라고, 진로를 벗어나고 있다!" 과연 그러했다.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메도우서는 알았던 모양이야. 조종 장치에도 동력에도 이상은 없다. 그럼 어떻게 된 까닭일까?" "바깥의 영향일 것이다." 하고 프리튼이 얼른 대답했다. 비임이 그 말에 덧붙였다. "우선 생각되는 것은 천체의 중력입니다. 굉장히 큰 것입니다. 레이더에는?" 레이더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한데. 공간의 구조가 달라졌나?" "그럴 리는 없잖은가?" 문득 프리튼이 명안을 생각해 냈다. 전자 계산기로 진로의 근처에 있어야 할 천체의 크기와 방향을 조사하려는 거다. 메도우서는 얌전히 있다. 지금 같아서는 위험은 없는 것 같다. 이윽고 심슨이 넘어질 듯이 달려왔다. 흥분하고 있었다. "Wx33, Zr47 공역이다. 레이더를 그쪽으로 돌려라, 빨리!" 모두의 눈은 스크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앗, 저거다!" "돌진해 온다, 무서운 힘으로!" "아니, 이쪽이 끌려 들어가고 있다. 비임, 역분사를 부탁합니다!" 하고 누군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 위급한 때에도 비임은 침착했다. 입술에는 옅은 미소까지 어려 있다. 젊은이는 모험을 찾아서 덤벼들지만, 실제로 위험과 맞부딪치면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거다…… 그런 미소 같았다. 역분사가 시작되자 갑자기 몸이 몹시 무거워졌다. 언제 끝날지 모를 것 같은, 그런 긴 시간이 흘렀다. 속도는 조금씩조금씩 줄어들었다. 살아난 것이다. 토우레의 동력이 괴상한 별의 중력을 이겨낸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메도우서의 덕택이다. 얼떨떨한데……" 하며 프리튼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모두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되돌아왔다. "도대체 그게 뭐였지?" "음, 계산기로 알아낸 중력은 대단했다. 그러니 거리를 알 수 없으므로 별의 질량도 모르겠어. 가령 3백만 킬로미터 앞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태양보다 훨씬 클 거다."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크다면 보일 것이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여기는 어두운 우주니까." "그러나 태양만큼 크다면, 빛을 내지 않아도 먼 별의 빛을 몇 개인가는 받고 있을 게 아닌가?" 하고 프리튼은 반신반의했다. 그러자 심슨이 자료를 가져왔다. "레이더로 거리를 알았어. 2백 33만 1천 4백 킬로미터." "뭐라구? 지구와 달까지의 거리의 단 6배가 아닌가. 이거야말로 태양계의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할 대 발견이다." "그렇다." 하고 심슨은 이렇게 말했다. "질량은 태양과 같으나, 지구보다 작은 별이다. 전파를 내지 않으므로, 가까이 갈 때까지 알 수 없다." 프리튼이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그렇다면 사멸한 백색 왜성이다. 밀도는 지구의 30만 배쯤 된다." "원통하군. 착륙해서 표본을 가져올 수 없으니 말야!" 비디히가 이렇게 말하자, 비임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비디히, 저 별의 표면에서 당신의 체중이 어느 정도 되리라고 생각하나요? 알겠어요, 태양의 표면에는 지구에서의 무게가 29배나 되요. 그런데 태양과 그 별의 질량은 같아요. 그러나 태양의 반지름이 69만 5천 킬로미터에 비해, 그 별은 불과 5천 킬로미터 남짓해요. 말하자면 그 별에 내렸을 때, 태양의 표면보다 중력의 중심이 139배 가까이 되는 겁니다. 중력은 139의 제곱이니까, 1만 9천 3백 21 배지요. 지구상의 경우와 비교하면, 거기에 또 89배를 하는 거지요. 즉 56만 3백 9배가되는 겁니다. 당신은 지구에서 몇 킬로그램이었지요?" "80 킬로였죠" "그렇다면 그 별에서의 당신 몸무게는…… 놀라지 마시오, 4만 4천 8백 23톤 7백 20 킬로그램이 되는 거요." 모두 어이없이 웃었지만, 그 숫자가 가진 의미를 알고서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윽고 심슨이 말했다. "이름을 붙여 놓자구. 폴리페스모가 어떨까? 그리스 신화 중의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지. 아무튼 이 별도 옛날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었다. 행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찾아볼까요, 비임?" "그래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폴리페스모 가까이는 있지 않을 겁니다. 태양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수성도 태양에서 6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철저하게 찾아봅시다. 어떻게든 해보는 겁니다."   암흑의 세계   위험한 항성, 폴리페스모는 날이 갈수록 멀어져가고 있다. 어느 날, 비임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물체 발견, 제 3 레이더 스크린의 방향에!" 발사된 레이더의 전파는 스크린에 똑똑히 빛의 점을 만들고 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러나 광학 망원경으로도, 전파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가까워져서야 겨우 대체적인 형태를 알게 되었다. 프리튼이 자료를 가지고 왔다. "지름 7천 2백 킬로미터. 내가 태어난 화성보다 조금 작다. 폴리페스모부터의 거리는 3억 킬로미터. 태양, 화성간보다 조금 멀다. 착륙해 보자." "아니, 우선 물질을 조사해 봐야지요. 오하라 선장의 예도 있으니까." 라고 말하는 비임은 언제나 신중하다. "좋습니다. 섬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해서 손해볼 것은 없어. 로켓 존데(기상관측용의 기구)를 쏘아보자. 곧 준비하겠다. 만약 그 별이 반물질로 되어 있으면 흰 빛, 보통의 물질이면 붉은 빛이 보일 거다."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심슨은 이 음산한 별을 케르베로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개의 이름이다. 이윽고 로켓은 행성까지 날아갔다. 목표의 별은 눈앞을 거의 가리고 있다. 하늘에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커다란 구멍 같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인광을 내고 있다. 몇 분이 지나갔다. 붉은 빛이 번쩍 나타나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괜찮다, 위성 궤도로!" 토우레는 케르베로스 상공 8백 킬로미터의 궤도에 들어섰다. 탐험 대원은 큐르비, 프리튼, 비임 3명으로 정해졌다. 심슨과 비디히는 토우레에 남게 되어 기분이 언짢았다. 스틱스 호를 보트 대신으로 사용하여 무사히 착륙했다. 서치라이트로 사방을 비쳐 보았으나, 어느 곳도 바위뿐 아무것도 없다. 스틱스 호는 다시 날아올라, 대기도 없는 사멸된 행성 케르베로스의 상공을 낮게 날며 돌아보았다. 로켓의 불꽃으로 땅 표면의 모습은 대체로 알 수가 있다. 한참 날아갔을 때, 언덕이 보였다. 여러 군데 땅이 갈라져 갔다. "됐다, 여기에 착륙하는 거다." 우주복을 입은 채 세 사람은 주의하면서 지면에 내렸다. 프리튼은 땅이 갈라진 바닥 밑을 들여다보았다. 큐르비는 조심하라고 무선으로 말했다. 가이거 계수관이 울리고 있다. 방사능이 있다는 증거이다. "괜찮아, 큐르비. 생물이 있었지는 않은 것 같다." "어때, 슬슬 되돌아갈까?" 하고 큐르비가 말했을 때, 프리튼이 갑자기 외쳤다. "앗, 빛이!" 두 사람은 달려갔다. 땅이 갈라진 옆에는 가이거 계수관의 소리가 높이 울렸다. 과연 빛이었다. 약하기는 하나, 분명히 인광이었다. 땅의 갈라진 벽을 따라, 깊은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땅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방사선 금속의 광맥이겠지. 조사해 볼까?" "좋아." "진짜 광맥일까요? 그렇다면 너무 곧은데요." 이럴 때의 비임의 육감은 놀랄 만큼 날카로워진다. 이 빛의 줄기를 1킬로미터쯤 따라가니, 줄기는 땅 표면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반대쪽에서도 같은 빛의 줄기가 올라와서, 거기서 마주치고 있다. 곁으로 가서 조사하던 프리튼이 또 큰 소리로 외쳤다. "보라, 보라구!" 프리튼의 라이트가 비치고 있는 것은 인공의 것이었다. 빛의 줄기가 마주친 데에 굴뚝이 있고, 거기에 사다리가 달려 있지 않은가! 큐르비가 그것을 잡고 선뜻 내려가려고 하는데, 비임이 말렸다. "큐르비, 프리튼, 이것은 인간용이 아니오. 간격이 대단히 넓어요. 거인이 아니면 내려갈 수 없어요. 더욱이 방사능도 강하고, 그 곁에는 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의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뮤리우스 제독으로 하여금 태양계 최고 위원회에 부탁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군요. 대규모의 탐험대를 조직하도록 부탁하는 겁니다. 선뜻 물러설 줄 아는 용기도 중요한 것이지요." "뭐라고요? 여기까지 와서 말입니까!" 하고 프리튼은 발로 땅을 차며 원통한 듯 말했다 "로프를 사용해서 내려갈 수 없을까?" "이봐 프리튼, 비임씨의 말이 옳다. 무턱대고 할 수는 없쟎아. 지금은 제대로의 장비조차 없어. 이것보다 헤르메스 2세 호의 구조가 더 중요해." 큐르비는 대장이다. 그래서 비임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단지 연구하기 위해서 사다리의 재료를 좀 깎아 두었다. 깎는 도구가 없어서 가까이의 단단한 돌을 사용했다. "석기 시대 같군." 하며 큐르비는 웃었다 비임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가장 무리 없는 방법이 가장 신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지요." 토우레에 되돌아와서도 그들 사이에는 의논이 여러 가지였다. "땅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케르베로스라는 이름이 점점 알맞아 가는데……" "지하에 생물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 "어쩌면 별의 내부는 아직 따스할지도 모른다." "진짜 상태를 알고 싶구나." 이때, 비임이 입을 열었다. "나의 의견은 좀 다릅니다. 빛과 줄기는 상공에서 잘 보일 것입니다. 표지 같은 것이나 아닐는지. 그 별에 고등 생물이 살고 있다고는 아무래도 생각 안 돼요. 그렇잖으면 어떤 우주선을 위한 보급 기지 같기도 하구요. 연료나 식량 말입니다. 그것으로서는 알맞은 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 염려가 우선 없습니다. 우리들이 발견한 것도 실로 우연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노지러스 인의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무 소리를 들은 일이 없으니까." 심슨이 탄복하며 말했다. "과연 자네들이 안 내려가길 잘했어. 어떤 도난 방지 장치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운명과의 경주   토우레가 헤르메스 호를 뒤쫓는 진로로 되돌아오자, 얼마간은 아무 일이 없었다. 토우레의 거주실에서 심슨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눈을 돌려, 옆에 있는 비임에게 물어 보았다. "비임씨, 당신은 대체 몇 살입니까?" "반갑지 않은 질문인데…… 그럼, 내가 되묻겠는데 얼마나 되어 보이지? 그 헤르메스 호의 일을 모른다고 치고 말야." "에…… 많아도 45세. 오히려 시간과는 관계없어요……" "그 말대로 시간과 관계가 없다고 할까. 나는 노지러스 인과 함께 광속으로 우주를 나는 동안, 시간을 잊고 말았어요. 지난번에 지구에 되돌아가서 그 해를 알았을 때 실로 놀랐어요. 내가 태어난 해는……" 하고 비임은 심슨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심슨의 얼굴은 갑자기 굳어지며, 눈을 있는 대로 떴다. "그렇다면…… 70세!" 비임은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메스 2세 호는 양로원이지. 그때만 해도 대원 중에서는 내가 제일 젊었었는데……" "그러나 비임씨…… 비임씨는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아요." "그것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아무든 시간의 팽창이라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도 학자들의 이론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지요. 그러나 제대로 증명되어 있지는 않아요. 우리들의 입장도 그러해요. 시간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시계와 달력으로서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엥게라도스 기지를 출발할 때, 시계를 맞춰 놓고 그때부터 계속 지구 시간에 의하고 있지요? 거기에 계속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고 있고요. 태양계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확실히 우리들의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이지요." "적어도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예컨대 지구상에서는 1년이면 시드는 풀도 우주 스테이션에서 재배하면 몇 년 동안 싱싱하게 푸를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시간 팽창의 예 중 하나지요."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가이들도 암흑 성운의 탐험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되돌아온답니다. 제발 무사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거듭했는데, 이런 불행한 사고로 죽는다면 분하고 분한 일입니다." "정말이다. 임시로 끼워 맞춘 우주선이니까 더욱 안타깝다." 하고 비디히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려면 14일 걸립니다. 그러나 어쨌든 급히 서둘러 봅시다." 비임은 힘주어 말했다. 혜르메스 2세 호는 점점 상태가 나빠져 갔다. 토우레도 전속력을 다 내어 계속 날고 있지만, 우주는 넓고도 넓다. 큐르비가 무전실에서 되돌아왔다. "산소 예비 탱크, 이제 1개밖에 안 남았대! 탄산가스가 심할 텐데……" "제발 참고 견디어 줬으면……" 라는 비임의 목소리는 차라리 기도에 가까웠다. "가이는 의사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지." 헤르메스 2세 호에서의 통신은 5일째 끊겨 있었다. 화학 처리로 탄산가스를 해가 없도록 할 수는 있으나, 산소가 자꾸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졸린다…… 하고 말해 올 뿐. 토우레는 운명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순간에 부닥쳤다. 8일째 되는 날 이상한 일이 있었다. 메도우서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듯이 짖었다. 모두는 소름이 끼쳤다. "가이 박사들은 죽은 것일까?" "설마 죽을 리가…… 다른 위험에 부닥쳤겠지." 레이더로 사방을 수색해 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다. 이윽고 메도우서도 잠잠해졌다.   뜻밖에!   "보인다!" 레이더 스크린에 조그만 빛의 점이 나타났다. 다섯 사람은 숨을 죽였다. 이번에는 비임, 심슨, 그리고 의학에 소질이 있는 프리튼이 구원하러 가기로 되어 있다. 늦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토우레에 비하면, 꼬마 헤르메스 2세 호는 마치 아이들 장난감 같았다. 세 사람은 우주복을 입고, 에어 록으로 달려갔다.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남은 두 사람은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저쪽에 심슨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없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다! 온통 비어있다." "그럴 리가?" "정말이야. 아무리 찾아보아도……" 곧 비임과 프리튼도 나왔다. 세 사람은 모두 토우레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비임의 손엔 한 장의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렌 가이의 편지가 있었어. 큐르비, 읽어 주지 않겠어요?"   비임, 잘 있거라   큐르비는 소리를 내어 읽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헤르메스 2세 호를 떠난다.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안심하길. 조금만 잘못했어도 위태로울 뻔했다.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구조는 뜻하지 않던 곳에서 왔다. 당신들이 노지러스 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생물의 우주선이, 돌연 옆에 갖다댄 것이다. 곧 사정을 알고 우리들을 수용해 주었다. 지금은 아무 이상이 없다. 당신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옛 고향을 잊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들은 다른 세계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지구에 되돌아간다 해도 오히려 당황할 뿐이다. 우리들의 운명의 길은 노지러스 인에게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들은 지금 우리들의 생명의 은인도 된다. 우리들은 그들의 곁에 남기로 결심했다. 노지러스 인들은 우리를 그들의 별로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다. 언젠가는 또 다시 인간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우리들은 이 대우주에 생겨난 2개의 문화를 연결하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우주의 고등 생물에는 탐구심이 강했다. 우리들도 그 탐구심 때문에 노지러스 인에 붙잡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분하고 슬펐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인간과 노지러스 인과는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서로의 이익이 되는 길이다. 바로 지금부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그들에게 토우레와 거기에 타고 있던 노지러스 인의 운명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들은 당신들에게 토우레를 양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하지. 토우레는 아직도 바이러스로 더럽혀져 있으니까." 하고 심슨이 불쑥 말했다. 가이 박사의 편지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노지러스 인이 태양계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별과 더불어 이 태양계를 지키려 하고 있다. 양쪽 인류가 다시 만나는 날은 언제일까? 그건 그들도 모른다. 부디 토우레로 뒤따라오지는 마시라. 이것은 그들의 희망이다……」   꽤 오랫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코튼 비임이 얼굴을 들었다. "큐르비, 당신은 토우레의 선장입니다. 노지러스의 우주선과 연락해도 괜찮을까요?" "목적은요?" "나중에 얘기하겠소 부탁이오!" 큐르비는 한동안 생각하고 나서, "좋습니다!" 라고 말하자, 비임은 무전실로 사라졌다. 얼마 안 되어 되돌아온 그의 눈에는 굳은 결의가 번쩍이고 있었다. "비디히, 당신은 환경 엔지니어입니다. 헤르메스 2세 호를 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부탁하오. 그리고 큐르비 대장, 여기서 작별을 고하고 싶습니다. 지금 노지러스 인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헤르메스 2세 호를 타고 그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거기가 바로 내가 돌아갈 장소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토우레에 스틱스 호를 싣고 태양계로 돌아가 주십시오. 무선이 말을 들으면 뮤리우스 제독과 페드로프 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만, 여기서는 너무나 멀군요. 양해하십시오. 20 명의 동료……" "알았습니다, 비임씨.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힘이 미치는 데까지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안 계셨더라면 이런 훌륭한 모험도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고 큐르비는 비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친구로서 지냅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거든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태양계 요새의 벽을 천천히 닦고 계십시오, 라고." 네 사람은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헤어짐의 고통은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비임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측 돔에서 네 사람은 비임이 탄 작은 우주선이 별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윽고 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메도우서가 짖은 것은, 레이더 전파 흡입 장치를 달고 있는 노지러스 인의 우주선이 바로 옆을 지나갔을 때였던 거야. 알았어." "그렇다. 자, 보고할 것이 산더미 같다. 모두 자기 자리로 갈 것. 엔진 전속력! 태양계로 진로를!" 하고 큐르비가 호령하자, 제각기 자기의 위치로 흩어져 갔다.       작품 해설   우주의 신비   인류가 정말 우주에 진출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의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큐르비 등이 체험하는 수많은 사건은 공상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다소 낯선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 몇 개를 간단히 설명하고, 우주의 신비를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전파 천문학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발달한 레이더 기술을 응용하여 전혀 새로운 천문학이 탄생했습니다. 별에서 오는 빛이 아니고, 전파를 잡아서 연구하는 전파 천문학. 이것은 하늘이 맑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그 덕택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별이 우주에는 꽉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보통의 망원경을 사용하는 광학 천문학과 서로 힘을 합해, 우주의 신비를 풀어 나갈 것입니다.   백색 왜성   희고 작은 별입니다. 시리우스의 반성은 반지름이 지구의 2배인데, 문제는 놀랍게도 질량이 태양과 거의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 별의 형태가 성냥갑 만한 것이라도 무게는 1톤이나 됩니다. 그것은 그 별을 형성하고 있는 물질의 원자핵과 원자핵이 매우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대우주는 이러한 별에서 발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반물질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작고 작은 태양계 우주와 같은 것으로서, 1억을 줄지어도 겨우 1mm쯤 될 정도입니다. 태양에 해당되는 플러스(+)의 전기를 띠고 있는 양성자와, 전기를 띠지 않은 것이 중성자, 이들이 원자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둘레를 행성처럼 돌고 있는 것이 마이너스(-)의 전기를 띤 전자입니다. 그런데 원자핵 파괴 장치 기계 안에서 마이너스 전하를 가진 "반양성자"를 만들었습니다. 만듦과 동시에 사라지고 맙니다만, 이러한 "반물질" 만으로 이루어진 우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전기성이 모두가 반대입니다. 중성자와 같은 전기성이 없는 소립자는 자기의 성질이 반대로 됩니다. 반물질의 세계에 사는 생물도 같아서, 우리들은 절대로 반물질 세계의 생물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서로 악수라도 한다면 무서운 폭발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 우주의 별과 반물질의 별이 충돌하여 폭발하면 재도 가스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감마선이 방출될 뿐입니다.   광속과 시간   빛의 속도와 맞서는 속력으로 몇 년인가 우주를 날고 온 파일럿이 그리운 지구에 돌아와 보니, 동생이 자기보다 더 늙어 있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거리라는 것으로 생각해 볼까요. 어떤 배가 500킬로미터 항해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이 거리는 지구상의 한 점에서 본 것이고, 지구 그 자체의 자전과 공전을 계산에 넣는다면 그 배가 실제로 이동한 공간의 거리는 전연 틀리는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거리, 속도, 시간이란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것입니다. 로켓이 빛의 99%에 달하는 속도로 날면 거기에서의 1년은 지구상에서의 7년에 해당되고, 속도를 99.99%올리면 실로 70년에 해당되게 됩니다. 파일럿의 속력은 그 영향을 받아서 느려질 것입니다. 제트기가 음속을 돌파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광자 로켓이 광속의 벽과 겨누기에는 더욱 큰 일이겠지요. 원자의 저항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은하계의 우주 공간에는 1입방 센티미터에 1개의 수소 원자가 있습니다. 광속의 3분의 1로 날아도 1초간에 180억의 양성자와 전자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견고하게 만들지 않으면 우주선은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작자 돌레짤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SF작가인데, 비인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에서 1945년까지 비인 방송국에서 과학 담당의 기획을 맡아보았습니다. 또 1949년까지는 비인 천문대에서 연구를 하고, 오스트리아 우주 과학 협회 사무장도 지낸 바 있습니다. 정확한 과학 지식과 따뜻한 휴머니즘이 넘쳐흐르는, 소년을 위한 건강하고 즐거운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태양계 요새 SF세계명작 20   인 쇄      1975년 10월 5일 발 행      1975년 10월 10일 역 자      이 인석 제 판      명립 정판사 오프셋     장원 정판사 인 쇄      일신사 제 본      양지실업(주)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 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1975. 2. 26. 제 2-213호       전화 (26) 1975, (26) 1970    
2    황혼의 타임 머신 - 강 민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댓글:  조회:34  추천:0  2021-03-20
황혼의 타임 머신   강 민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 SF작가 협회 편   강 민 o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수료 o 월간 「학원」 편집장 o 월간 「주부 생활」 편집국장 o 현대시인, 문인 협회, 팬클럽 한국 본부 회원 o 한국SF작가 협회 회원 o 현 금성 출판사 편집국장   ■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원수․박홍근 / 문학 박사 최인학 공학 박사 양옥룡 / 이학 박사 김희규 전 교육감 김성목 표지 그림 신동우 / 속 그림 최충훈   이상한 통···················· 4 여기는 어디냐?················· 11 주문국과 솔본국················· 16 철민, 두령(頭領)이 되다············ 29 잊어버린 숙제·················· 36 강미화 선생 납치되다!·············· 43 든든한 구원대(救援隊)············· 49 황솔을 사로잡다················· 55 그림자 없는 적(敵)··············· 62 솔본국의 패배·················· 68 도둑맞은 타임머신················ 80 중대한 회의··················· 83 솔본국의 솔솔이················· 87 허실음양(虛實陰陽)의 싸움··········· 93 솔본의 화공(火攻)··············· 101 두 사람의 솔솔이················ 113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라!············ 119 주스와 스테레오················ 126 강적(强敵), 왕호룡·············· 133 심야(深夜)의 활극··············· 141 온(溫) 솔솔이의 소원············· 149 솔솔아, 용서해라!··············· 155 연(鳶)과 로켓················· 165 드디어 결전(決戰)··············· 174 최후의 비책(秘策)··············· 181 슬픈 승리!·················· 187   ■ 작품 해설·················· 194   이상한 통   저녁 노을이 비낀 서울의 거리는 벌써 건물의 그림자며 전신주와 그늘이 길게 뻗쳐 있었다. 쉴 새 없이 줄을 잇는 자동차의 행렬도 허둥지둥 클랙슨 소리를 울리고, 시장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의 발걸음도 바빠져 갔다. 아직도 훤한 하늘에 이미 네온사인이 깜빡이기 시작하며 얼마 후에 다가올 밤을 맞이하듯이 화사한 인공(人工)의 무지개를 그려 내고 있었다. "철민아, 너 저기 건널목 곁에 있는 고물상에 가 본 일 있니?" 용재가 물었다. "아니, 없어. 고물상이라면 옛날 골동품 항아리나 불상(佛像) 따위를 팔고 있는 곳 말이지. 넌 그런 곳에 무슨 흥미가 있니?" "아냐, 그게 아냐! 그 고물상에는 말이야, 망가진 텔레비전 부속품이랑 전기 청소기의 모터 같은 걸 팔고 있어. 조금만 고치면 쓸만한 걸 말이야." "허, 그래." 철민과 용재는 중학교 2학년생, 같은 학급의 친구였다.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둘이 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친한 친구 사이다. "야, 철민아, 우리 잠깐 거기 좀 가 보자. 응, 재미있는 것들이 많단 말이야." 철민의 마음은 용재의 말에 완전히 이끌려 버렸다. "그래 좋아 가 보자. 그렇지만 그걸 보면 곧 돌아가야 해. 너무 늦으면 집에서 혼나." "알았어. 나도 그렇게 오래 있을 순 없으니까." 두 사람은 당장 눈을 반짝거리며 급한 걸음을 옮겼다. 고물상은 건널목 곁의 상점들이 늘어선 한 모퉁이에 있었는데,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철민은 벌써부터 이 가게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안에 들어와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곰팡내가 나고 먼지가 수북히 쌓인 가게 안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가게의 천장에는 불그스레한 백열등(白熱燈)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용재는 익숙한 듯이 주루루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한 구석에 쌓인 쇠붙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과연 그것은 용재의 말대로 내장(內臟)을 드러낸 텔레비전이며 전기 청소기 따위의 잡다한 기계류의 더미였다. "철민아, 이 텔레비전, 여기만 고치면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 넌 참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지." "허, 이 모터면 아이들 하나쯤은 태우고 달리는 전차도 만들 수 있겠는 걸." 두 사람은 완전히 열중해 버렸다. "철민아, 난 지금 신문 배달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돈을 모으면 이 모터하고 저기 저 소형 변압기(變壓器) 망가진 걸 사려고 해." "그래." 그러는 동안에 철민은 숱한 먼지투성이의 기계류 속에 무슨 부속품인지 알 수 없는 묘하게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조그맣게 정돈된 무슨 장치가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직경이 10센티미터 가량의 둥근 통으로서 전에는 완전히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커버를 끼웠던 볼트의 구멍만이 남아서 그 내부의 매우 복잡한 배선(配線)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용재야, 이게 뭘까?" "어디 봐." 용재는 얼굴을 맞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 "모르겠는데, 굉장히 배선이 복잡하구나. 그보다 이쪽에 있는 이 핸드 토키 좀 봐." 용재는 아마 그 기계에는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철민은 그 기묘한 기계가 괜히 마음에 들었다. 똑같이 망가진 기계라도 모터나 전기 청소기보다는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가 더 공상(空想)을 자극한다. 마침내, 철민은 가게의 구석 자리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이 고물상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이 기계는 뭐예요?" 주인은 신문에서 눈을 떼고, 그 기계를 흘깃 보고는 다시 철민을 보고 말했다. "아, 그것 말이지. 나도 뭔지 잘 모르겠다. 한 반년쯤 전에 다른 기계하고 같이 사들였는데, 어디다 쓰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구나. 그래서 어떻든 거기 놓아 두었는데, 넌 그게 뭔지 알겠니?" "나도 모르니까 물었죠. 아저씨, 이것 얼마예요?" 주인은 신문을 놓고, 새삼스럽게 그 묘한 기계를 살펴보았다. "글쎄, 한 500원 받을까?" "500원이요? 너무 비싸요." 주인은, 다시는 철민이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철민아, 철민아, 이제 가자. 너무 늦었어. 집에 가면 혼날 거야." 용재가 서둘러댔다. 철민은 용재의 뒤를 따라 고물상에서 나오면서 다시 한번 돌아다보았다. "500원……." 그 기계에 그 값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그 때 철민은 그 기계가 무척 갖고 싶었다. 언젠가 낡은 자명종 시계를 수리했을 때의 그 흥분이 온몸에 생생하게 소생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아, 난 그 기계를 고쳐 볼 테야. 어디에 쓰는 건지 연구해야지." "그만 둬, 그 따위 것에 공연히 헛수고하지마. 그보다 그 텔레비전을 수리하는 편이 돈벌이가 될 거야." 용재는 아무래도 텔레비전을 수리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아……" 철민이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이동생 솔솔이가 뛰어나왔다. 솔솔이는 초등학교 6학년생. 철민에게는 매우 다정한 동생이지만, 때로는 엉뚱한 적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다. "오빠, 용재 오빠하고 건널목 곁에 있는 고물상에 들어갔었지. 난 다 알았어." "시끄러워. 잠깐 기계를 보고 왔을 뿐이야." "나 엄마한테 일러 줘야지." "요게!" 철민이가 주먹을 쥐고 한 걸음 다가서는데, "엄마, 엄마 오빠가……." 하며 솔솔이가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뭐냐, 철민아! 넌 어디에서 놀다가 이제야 오고서 큰 소리냐!" 어머니의 음성이 철민이를 덮쳤다. 철민은 고개를 움츠리고 제 공부방으로 후퇴했다. "그 기계, 500원 이랬지……" 이 달의 용돈은 이제 거의 다 써 버리고 100원 가량밖에 안 남았다. 생각하면 점점 더 갖고 싶어져서 도저히 내달까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저 저금통을 부수자. 저 속에는 아마 300원쯤은 들어 있을 거야." 그 저금통은 은행에서 얻어 온 것인데 여태까지 학용품을 사고 남은 잔돈을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민이가 여름 방학에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해수욕장에 가기 위한 비용의 일부로 쓰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철민은 괴로웠다. 여태까지 쓰고 싶은 것을 참고 모아온 것을 여기서 부숴 버리고 꺼내기는 좀 억울하지만, 결국 유혹에 지고 말았다. 철민은 일어나 책상 위에서 저금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힘껏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다. 덜컥! 깨진 저금통 조각과 숱한 동전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철민은 열심히 세기 시작했다. '어라, 420원이나 되는데, 됐어 됐어!" 철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는 많은 동전을 주머니에 털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현관으로 나왔다. "어머니, 나 잠깐 문방구점에 좀 갔다 오겠어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기 전에 벌써 철민은 밖으로 뛰어 나오고 있었다. 고물상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손님도 없었다. 철민은 아까 본 기계 앞에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었다. 대부분의 기구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철민은 기뻤다. 복잡하면 할수록 연구해 볼만한 보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한 자명종 시계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저씨, 이것 주세요. 500원이라고 하셨죠. 자요." "뭘 하려고 그러니, 그런 걸……." "어디에 쓰는 건지 연구해 보겠어요." "허, 그래. 알면 나한테도 가르쳐 주려무나. 뭔지 모르는 걸 팔면 어쩐지 마음에 걸리니까." "아, 그러죠." 기묘한 둥근 통은 철민의 수중에서 싸늘한 금속의 살갗을 하고 있었다. 철민은 걸으면서, 마음은 그것을 분해할 때의 스릴에 가득 차 있었다. 나사못이며 핀을 하나씩 풀어낼 때마다 번호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분해해 간다. 그리고, 완전히 분해되었을 때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어느 틈엔지 철민은 가로등 불빛이 그리는 밝은 원 속에 서서 손에 든 둥근 통을 열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통 밑바닥에 조그만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손에 들고 걷고 있는 사이에 진동으로 거기가 차츰 느슨해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철민은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그것을 잡고 힘껏 돌렸다. "빠져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손잡이는 텔레비전의 다이얼을 돌리듯 좌우로 자유롭게 회전시킬 수가 있었다. "이걸 돌리면……." 철민은 그것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렸다. 갑자기 둥근 통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찌잉 하고 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둥근 통의 내부에서라기보다 어딘가가 철민을 에워싼 공간의 한 부분이 세차게 찢어지는 듯한 심한 울림이었다. 철민의 눈앞에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여기는 어디냐?   많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드높게 들리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몸 곁을 아슬아슬하게 짐수레에 가득히 살림살이를 실은 사람들이 달려 지나갔다. "왜 그럴까, 저 사람들은." 철민은 머리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심히 허둥대는 사람들…… 그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어럽쇼!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쓰러져 있을까." 거기는 수풀에 에워싸인 조그만 마을의 변두리였다. 반쯤 잡초에 뒤덮인 밭이 마을의 뒤켠 수풀 저쪽에 펼쳐진 들판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의 일부에 불이 나고 있었다. 붉은 불길은 수풀의 상공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긴 어딜까? 그리고 난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철민이 여태까지 전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길도 방향도 모르겠는데, 대체 여기는 서울일까?" 철민의 가슴에 시커먼 불안이 솟아올랐다. "그렇지! 난 고물상에서 그 둥근 통을 사오는 길이었지." 허둥지둥 둘레를 살펴보니, 그것은 방금 쓰러져 있던 곁에 떨어져 있었다. 철민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자기의 신상에 큰 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예감이 철민의 가슴을 숨막히도록 조여들었다. 우선 저기 불타는 마을로 가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아, 내가 혹시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려서……." 그것은 실로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소동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집이 불타서 쓰러지는 소리하며, 남녀의 비명,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폭풍처럼 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 때 왼쪽의 숲 속에서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저마다 손에는 곡괭이며 죽창(竹槍) 따위를 들고 있다. 철민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붉은 불빛 속에 철민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은 우르르 뒤로 물러나 손에 든 무기를 겨누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엇인가 소리쳤다. 철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들을 항해 도리어 소리쳐 물었다. "왜 그러죠, 모두들. 그리고 여긴 어디죠? 가르쳐 줘요." 집이 다 탄 모양으로 둘레가 한 순간 밝아졌다. 그 불빛 속에서 철민은 정말 깜짝 놀라도록 제 눈을 의심했다. "뭐, 뭐예요! 그 모양은……." 그들 속에서 특히 몸집이 건장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게 취하고 무시무시한 살기(殺氣)를 풍기며 철민을 살폈다. "네 놈도 솔본국 놈이냐?" 철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솔본국?" "네 놈도 솔본국의 한패지. 잘 걸렸다 이놈. 남의 마을을 불사르고 네 놈들은 성할 것 같으냐! 덤벼라, 이놈!"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솔본국이니 마을을 불살랐다느니, 난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보다 불을 끄는 게 어때요." "음, 이 나쁜 놈!" 사나이는 죽창을 꼬나 쥐자 철민을 향해 총알처럼 덤벼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철민은 위기 일발에서 겨우 몸을 피했다. 정통으로 맞으면 틀림없이 몸을 다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으나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체육 시간을 좋아하고 운동 신경도 남달리 예민한 철민이었으므로 그 정도의 죽창 공격쯤은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왜 이래요. 그만 둬요!" 철민은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그 사나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공격을 피했을 때, 철민의 가슴에는 심한 노여움이 치솟았다. 순간,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어 야구 투수가 던지는 식의 강속구(强速球)로 상대방의 미간을 노려 던졌다. 사나이는 이마를 싸쥐며 땅 위에 뒹굴었다. 그 손에서 죽창이 날았다. "보았죠! 대답하지 않으면, 저 사람처럼 되는 거예요. 빨리 대답해요. 빨리, 여긴 어디죠?" 그들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철민은 돌을 주워 들었다.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이 부근은 주문국의 XX마을이라고 합죠." "주문국의 XX마을?" "예." "무슨 구(區)냔 말예요." "무슨 구라니 무슨 소립네까?" "이봐요, 여긴 서울이 아네요!" "서울요? 글쎄요 들어본 일이 없는뎁쇼." "그만둬요! 이젠 됐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이상한 상투를 틀고 있는 거예요?" "상투? 아, 이것 말입죠. 왜라니 그저……." 철민의 가슴은 차츰 크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서 머리 속이 불타는 것 같았다.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필사적으로, '침착해라, 침착해!' 하고 외치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이를 악물어 겨우 참았다. 꿈이냐, 생시냐! 아니, 꿈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미쳤단 말인가? 아니다. 결코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민은 어지럽게 밀려오는 심한 현기증 속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난 아무래도 옛날로 잘못 들어온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아니, 틀림없다. 아, 이 일을 어쩐담,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담?' 절망이 철민의 온몸을 휘감았다. "아! 솔본국 놈들이다. 솔본국 놈들이 왔다!" 사나이들은 금방 허둥대기 시작했다. 철민이가 보니까 마을 저쪽에서 짙은 갈색 옷을 입은 기묘한 차림의 사나이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철민이가 서 있는 것을 보더니, 그들은 날카로운 칼을 거꾸로 쥐고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회오리바람처럼 달려들겠지. 철민은 저도 모르게 떨어져 있는 죽창을 집어 들고는 몸을 낮게 굽히고 죽창을 겨누었다. "음, 내가 이런 데서 죽을 줄 알구." 수풀이 환하게 타올랐다.   주문국과 솔본국   정면의 사나이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왔다. 철민은 저도 모르게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 사나이는 나는 새처럼 대지를 박찼다. 긴칼이 타오르는 불꽃에 붉게 빛났다. 일순 철민의 죽창이 원을 그리며 세차게 움직였다. 사나이가 용수철처럼 멋진 폼으로 뛰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손쉽게 죽창의 한 끝으로 툭 밀어 쓰러뜨렸다. 갈색 옷의 사나이들은 썰물처럼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심한 불꽃이 철민이들이 있는 위로 새빨간 눈보라처럼 떨어져 왔다. "앗 뜨거!" 철민은 떨어지는 불꽃을 죽창으로 털었다. 그 틈을 노렸는지,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철민의 얼굴을 겨냥해서 날아왔다. "에잇!" 철민은 재빨리 죽창 끝으로 그것을 쳐버렸다. 그런데 하나, 또 하나……. 그것은 총알처럼 울리며 날아왔으나 첫번째 것을 쳐내고 나자, 나중은 편했다. 딱! 딱! 딱! 철민의 발치에 맑은 금속음을 내면서 그것은 떨어졌다. 그것은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표창이었다. 철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 이것 큰일났구나. 아마 이놈들은 옛날의 무사(武士)거나 산적 패거리인 모양이다. 그림에서 본 것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고, 저 표창만 해도 굉장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데서 이런 기묘한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철민의 눈은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빛났다. "에잇……." 죽창을 꼬나 쥐자, 철민은 맹렬한 기세로 달렸다. 가까이에 있던 한 놈의 몸 어딘가에 죽창이 예리한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다. 철민은 죽창을 마구 휘둘러 댔다. "물러나라! 물러나!" 어디선가 누가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발맞추듯 갈색 옷의 사나이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자리에는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 둘이 길게 뻗어 있었다. 철민은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이미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몹시 지쳐 있었다. 화재가 난 곳의 불길은 낮게 땅 위를 기고 있다. 그 붉은 빛 속에 몇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달려왔다. 그 뒤에서 곡괭이며 낫을 든 사나이들이 조금 뒤떨어져 겁먹은 얼굴로 어슬렁어슬렁 따라 오고 있다. 선두에 선 몇 사람은 바지 가랑이를 추켜 올리고 긴 칼자루를 잡은 채 철민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수상한 놈, 순순히 말을 들어라!" 말투로 보아, 그들은 아마 치안(治安)을 담당한 무사들인 것 같았다. "도대체 왜들 이래요? 그리고 지금 몇 시쯤 됐죠?" 무사들은 철민의 말에 흠칫 놀란 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심한 놀라움을 온 몸에 띄우며 돌부처처럼 몸이 굳어졌다. 그제야 그들은 철민의 학생복이며 부수수한 머리 따위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어떤 놈이냐? 어디서 왔지?" 무사의 음성은 들떠서, 말끝은 우습도록 떨리고 있었다. "난 돌아가고 싶어요. 여긴 어디죠?" 그들이 그 길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철민은 속으로 비는 듯한 심정으로 물었다. 겸손하게 굴면 어쩌면 철민을 도와 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내 이름은 철민이고 서울 ○○동 157번지에 살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불식간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그 곳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갑자기 철민의 가슴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솟아올랐다. '아, 괜히 잠자코 집을 빠져 나왔구나. 저금통을 부수고……. 어머니.' 철민의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음식물의 냄새가 나던 부엌 옆방의 일체가 갑자기 환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큰일났구나.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쯤 집에서는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이제 곧 저녁 식사시간이거든.' '아버지, 어머니, 솔솔아!' 철민은 속으로 절규했다. "이봐, 잠자코 있으면 알 수가 없잖아. 빨리 대답해 봐." 다급한 음성이 귓전에서 들렸다. 철민은 흠칫 놀라며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찔하던 철민의 고독감은 당장 현실로 되돌아 왔다. 무사들은 온몸에 살기(殺氣)를 띄우고 철민을 포위했다. "저어, 나리,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는뎁쇼." 무사들 뒤에 있던 사나이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낫을 든 중늙은이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어떤 무사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음, 음, 그래. 그러면 저기에 쓰러져 있는 솔본국 놈들은 저 소년이 쓰러뜨렸단 말이지. 음, 그러면 우리편인지도 모르겠군. 어떻든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잠깐만……." 그 무사는 방금이라도 덤빌 듯한 동료들을 말리듯이 두 손을 좌우로 펴고, "잠깐만, 지금 좀 묘한 얘기를 들었오. 저 소년은 아마 우리편인 모양이오." "뭐라고? 저 소년이? 그럼 솔본국 놈이 아니란 말씀이오." 무사들은 갑자기 생기가 나며, 기분 나쁜 듯이 뒤로 물러섰다. "저 옷차림이라든지, 지금 솔본국 놈들을 쓰러뜨린 재주로 보아 이건 확실히 보통 소년이 아닐 것이오. 그러니 이 문제는 차라리 사또께 여쭈어 보도록 합시다" 한 무사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탄 자리에서 약한 불길이 일었다. 거기에 물을 퍼붓고 다니는 사나이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검게 떠올라 보였다. 솔본국 무사들에게 습격을 받은 이들의 집 내부에서는 뒤치다꺼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타다 남은 관가(官家)의 사랑채에서 철민은 사또라는 사나이와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난 이 고을 사또 정형룡인데, 아까의 활약은 굉장하셨소. 어떻든 이름 있는 분이겠소만, 지장이 없으면 성함을 알고 싶소." "철민, 서울에 있는 △△중학교의 2학년생입니다." "△△중학교? 허허허, 그건 무슨 중앙의 암행어사의 조직인가요?" "암행어사 조직이요? 아닙니다." "상당히 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건 무슨 제복(制服)이오?" "참 말귀도 못 알아들으시네요." "……?" "어떻든 좋습니다. 그 보다 사또! 이 소동은 대체 무슨 일이죠?" 철민은 점점 귀찮아졌다. 이런 곳에서 돌대가리 무사들을 상대로 일일이 대답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차츰 분노로 변했다. "이봐요. 사또, 아까의 그 소동은 어찌된 일이냔 말입니다." 철민은 분노 끝에 그렇게 고자세로 윽박 질렀다. 사또의 얼굴에 별안간 두려움의 빛이 나타났다. 혹시나 중앙에서 내려온 암행어사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가는 후일에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다. 상부에 무슨 보고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소년은 나이는 어리지만 굉장히 지체가 높은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또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자,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약간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아, 그 문제에 대해선 전일에 상세한 보고를 상부에 올렸습니다만……. 여하간 솔본국 놈들은 조직적이고 기세도 당당해서 이쪽에서도 몰아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또는 우선 말씨부터가 공손히 달라졌다. "솔본국 사람들이 어째서 침입해 오느냐 말입니다." "전일에 상부에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상부에 보고한 건 알았으니까, 이제 나한테 설명해 달란 말예요." 그러면서 철민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예, 죄송합니다." 사또는 정말 걱정스러웠는지 몸이 굳어져, "그게 좀 묘한 문제 때문입니다그려. 원래 우리 주문국과 솔본국은 한 나라였는데, 어느 땐가 두 왕자가 태어나서 당시의 왕께서는 나라를 둘로 갈라 두 왕자에게 계승케 했죠. 그래서 이후 이 두 나라는 좋은 형제 국으로 몇백 년을 이어 내려오다가 근래에 와서 주문국에 흉년이 들어, 변방의 백성들이 작당해서 솔본국에 몰려들어가 농산물을 훔쳐 오기가 일쑤여서 우리 주문국에서도 그 행패를 자율적으로 단속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솔본국에서는 앙심을 품고 조직적인 게릴라를 투입해서 우리 나라의 변방 마을을 불사르고 인명을 살상(殺傷)하게 되었소이다." "허, 그래요. 남의 나라의 곡식을 훔쳐오는 주문국 사람들도 나쁘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솔본국도 나쁘군요." "말씀대로 입니다." 그러면서 사또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철민을 상부에서 내려온 암행어사쯤으로 알고 있는데, 주문국과 솔본국의 관계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철민은 그것을 재빨리 눈치챘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그래,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또는 고개를 숙이고, "예, 그래서 상부의 지원을 받아 유능한 무사 20여 명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만, 워낙 솔본국 게릴라들의 기세가 강해서 도저히 물리칠 길이 없소이다." "물리칠 길이 없다니, 사또께서는 그렇게 멍청하니 있을 게 아니라, 무슨 방법을 생각해야 될게 아닙니까?" "예, 예……." 사또는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때, 이웃 방의 장지문이 슬며시 열리며 한 무사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어사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이 아닌지요. 방금 아랫사람들이 가지고 왔습니다만……." 그들은 철민을 이미 중앙에서 내려온 암행어사로 단정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기묘한 둥근 통이었다. "아, 그건 내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철민은 두 손으로 둥근 통을 받았다. 그것을 본 사또는 바로 이 때라는 듯이, "그럼, 이제 야식(夜食)이라도 드시고 편히 쉬시지요." 하며 허둥지둥 방에서 나갔다. 철민은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서 멍하니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다. 솔본국이니 주문국이니, 정말 엉뚱한 곳에 휘말려든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면 어찌하나…… 아버지, 어머니도 못 만나고, 솔솔이며 용재, 그 밖의 다정한 친구들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 빠져 버렸을까. 아아, 그 때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옛날로 날아올 만한 무엇인가 특별한 짓을 나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철민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그 건널목의 고물상 앞거리 가로등의 둥근 불빛 밑에서 나는 이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둥근 통의 밑바닥에 달린 손잡이가 느슨해진 것을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날 듯한 기대(期待)가 충격처럼 철민의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혹시! 아, 제발 그래다오! 철민은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둥근 통을 뒤집어 보니, 손잡이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정신 없이 그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둥근 통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찡하게 울렸다. 그것은 둥근 통의 내부에서라기보다 철민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의 일부분이 세차게 찢기는 듯한 격심한 울림이었다. 철민의 눈앞에서 모든 빛이 사라져 갔다. …… 커다란 덤프 트럭이 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철민은 맥이 쭉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돌아온 것을 기뻐하기 전에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뒤 같았다. "왜 그러니? 어디 몸이라도 아프냐?" 지나가던 사람이 철민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철민은 둥근 통을 들고 일어섰다. 벌써 시간은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자, "철민아! 너 여태까지 어디 갔다 왔니? 저녁도 안 먹고……." 평소엔 상냥한 할머니도 지금은 무서운 눈으로 철민을 노려보았다. 철민은 변명하는 것도 잊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너 저금통을 부수고 돈을 꺼내 갔었구나. 그 돈을 쓸 때는 어머니하고 상의한 다음에 쓰기로 하구서. 무얼 했니?" "이거예요. 묘한 기계가 있어서……." "아무리 묘한 기계가 있더라도 저녁 식사도 안하고 잠자코 가는 법이 어디 있니!" 솔솔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오빠, 저금통을 깨뜨렸으면 나한테 꾼 돈 갚아야 될 게 아냐." 철민은 한껏 무서운 얼굴로 솔솔이를 노려보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들고나서도 철민은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오늘의 그 기묘한 경험이 아직도 온 몸에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첫째, 그 둥근 통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옛날로 가 버렸다. 그리고 왼쪽으로 다시 돌렸더니 이 곳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어쩌면 언젠가 책에서 읽은 타임 머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분해해서 내부를 조사하느니 조그만 더 그대로 두고 다시 써 보자. 둘째, 나는 솔본국 무사들과 싸웠다. 무사들이란 굉장한 무술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스포츠를 했고, 또 영양분이 풍부한 것을 실컷 먹고 있다. 이쪽이 체력도 있고 운동 신경도 더 발달해 있는 셈이다. 그 놈들의 표창보다 학교의 야구부에 있는 이태현 군의 속구(速球)가 오히려 더 빠른 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태현 군의 투구를 가끔 홈런을 날리지 않는가. "그렇지!" 철민은 벌떡 일어났다, 집 안은 모두 잠들어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전등을 켜고 벗어 두었던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긴 끈을 끄집어내어 둥근 통을 묶어 가지고 목에 걸었다. 손전등과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또 책상 서랍에서 딱총 알을 움켜서 종이에 싼 후 이것도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으로 나왔으나, 신발을 신으려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양말을 둘 껴 신었다. "이제 됐다!" 둥근 통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약간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결단을 내려 오른쪽으로 돌렸다. 다시 무엇인가 찌잉 하고 찢어지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며 희미하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을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철민은 허리까지 닿는 풀숲 속에 서 있었다. 아까 왔던 마을 뒤켠에 있는 들판인 것 같았다. 철민은 풀밭을 헤치면서 조용히 마을로 다가갔다. 불타버린 집의 기둥이 기분 나쁘게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집을 지나 철민은 마을로 들어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유령의 거리 같잖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희미하게 공기가 움직였다. 그것은 발자국과는 다르다, 인간의 호흡에 의해 흩어지는 공기의 흐름 같았다. "누군가 숨어 있구나!" 철민은 걸음을 멈추고 땅 위에 몸을 낮게 웅크렸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에게 발견되지 않고 이쪽은 어두운 밤하늘에 상대방을 비쳐 볼 수가 있는 것이다. 20미터 가량 전방의 한 그루 나무 밑에 한 사나이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바짓단을 동여매고 등에 칼을 메고 있다. "이놈은 솔본국 놈일까, 아니면 주문국의 무사일까?" 이윽고, 그 사나이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민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지점을 향해 발소리를 죽여 가면서 접근해 가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잘 보이도록 철민도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쉿!" 말이 되지 않는 기합 소리가 튀어나오며 그 사나이의 오른손에서 무엇인가가 날았다. 쨍그렁! 쨍그렁!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발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핫하하!! 네까짓 주문국 놈들한테 잡힐 줄 아냐,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표창에라도 얻어맞은 듯한 주문국 사람의 신음 소리가 낮게 들렸다. 철민은 그늘 속에서 뛰쳐나갔다. 솔본국 무사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전등을 내밀고 재빨리 켰다 껐다 했다. 그 빛을 받고 갈색의 옷을 입은 사나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어때, 눈이 부시지? 이것이 유명한 광선 눈가리개다!" 철민은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며 그를 놀려댔다. 뒤켠 지붕 위에서 소리없이 또 하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음, 이 괘씸한 놈!" 그 그림자는 괴물처럼 두 손을 벌려 철민의 머리 위로 바람을 일으키며 떨어져 왔다.   철민, 두령(頭領)이 되다   순간, 철민이 옆으로 몸을 피하며 손에서 무엇인가를 뿌린 것과 그 뿌려진 것 위로 검은 그림자가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탕! 탕! 탕탕-! 무서운 폭음이 어둠을 찢었다. 검은 그림자는 그 폭음 한 가운데서 정신 없이 손발을 휘젓고 있었다. "음, 내가 실수를 하다니……." 어금니를 악문 신음 소리가 들렸다. "핫하하, 딱총 폭탄 위로 떨어지다니, 바보 같은 녀석!" 어디선가 철민의 드높은 비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고막이 터지고 기력과 함께 방향 감각을 잃고 허둥지둥 달아나려던 솔본국의 무사는 경비하던 주문국 사람들에게 당장 붙들려 버렸다. "아, 정말 훌륭하셨오, 어떠한 무술인지 모르지만 정말 귀신이 곡할만한 활약이었소이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중앙 당국에 대한 체면상, 언제까지나 진압을 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사또의 목이 잘릴 위험도 있다. "사또!" "예!" 철민은 눈쌀을 찌푸리고 사또를 흘겨보았다. 체격이 좋은 철민 쪽이 15센티 가량이나 키가 컸다. 그렇지 않아도 사또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다. "솔본국 놈들이 둘이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주문국 쪽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이렇게 경비가 소홀해서야 쓰겠습니까?" "진정 면목이 없소이다. 하지만 우리편 무사들도……" "아니, 그래 가지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난 약간 환멸을 느꼈습니다." 사또는 몸둘 바를 모르고 움찔움찔했다. "참 그렇게 하지…… 이봐요 사또, 내가 주문국의 무사들에게 신식 무술을 가르쳐 주기로 하죠." 여태까지 책에서 읽은 여러 개의 무용담이며, 갖가지 무술이 철민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신식 무술이 과학적이어야만 되는 것이죠. 즉, 합리적이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 예, 예……." 사또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철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님은 젊었을 적에 당시 한학자(漢學者)로서는 상당히 유명했던 박한수(朴漢洙) 선생에게서 희귀하도록 학문을 쌓고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 이 기묘한 소년의 말을 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또는 내심 당황함과 동시에 등줄기에 오한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알겠죠, 사또?" "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올시다." 사또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이미 이 지경에 이르면 안다 모른다가 문제가 아니다. 그저 면접 시험을 받는 학생처럼 겁이 났다. "자기 혼자서만 공을 독점할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여러 사람에게 협력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죠." "예, 예."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면 어디에 숨어야 하는가, 무엇을 이용하면 좋은가, 자기가 벌레나 작은 동물이 된 기분으로 생각해 봐야 되는 거죠. 이것은 즉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오. 알았죠, 사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철민의 말투에는 어느덧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반말기가 섞였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곧 주문국의 무사들을 부르시오." "예!" 경비하는 무사 몇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이 마을 중앙의 광장으로 모였다. 모두들 깊은 호기심과 다소의 두려움을 품고 모닥불에 비치는 철민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당신들의 대장은 누구요?" 철민의 말에 호응하여 한 사나이가 일어났다. 몸집이 작은 사나이였지만 바위 덩어리처럼 탄탄한 체격이었다. "주문국의 땅벌이라고 합니다." "땅벌? 이상한 이름도 있군." "죄송합니다." 원래는 무사로서의 점잖은 이름이 있겠지만, 그들은 주문국 연방 경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비밀 조직의 요원인 관계로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로 죄송할 것은 없소. 그런데 땅벌 대장, 여러 가지 가르칠 일이 많지만, 우선 당신들이 입고 있는 옷, 그것은 말이오. 이건 도리어 좋지 않소. 밤에 활동하는 데는 짙은 그린 색이거나 초콜릿색이 좋은 법이오." 그러자 땅벌 대장은 긴장하여 반문했다. "그 뭡니까…… 그린 색이라든가 초콜릿색은 대체 어떤 색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짙은 녹색이거나 갈색에 가까운 붉은 빛을 말하는 것이오. 밤이라고 해도 그 옷 빛깔처럼 주위가 새까매지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도리어 더 눈에 띄기 쉬운 거요. 밤의 어둠 속에서는 짙은 녹색 같은 것이 어둠에 흡수되어 눈에 덜 띄게 되는 것이오." "예, 예!" "당장 옷 빛깔을 바꾸시오. 그리고 야간에는 절대로 칼을 빼지 마시오. 별빛을 받아 반사하니까 자기가 있는 곳을 알리는 셈이 되는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적을 쓰러뜨리죠?" "적을 쓰러뜨릴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적에게 쓰러지지 않을 생각을 해야 하오. 아무래도 칼을 빼야 할 때는 칼집 채 빼시오." "으음,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분의 말씀은 모두 우리 주문국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비전(秘傳)속에 있는 것이오. 철민 선생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소이다. 아까 보이신 솜씨라든가, 그저 탄복할 뿐이외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우리들의 두령이 되시어 우리를 이끌어 주실 의사는 없으신지?" "이끌어 달라면, 즉 명령해 달라 이 말씀인가요? 좋습니다." 철민이도 이제는 자유로이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속이 편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땅벌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우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좋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두령으로서 너희들을 지휘한다. 땅벌 다음의 간부들은 이름을 대라!" "철새랑입니다." "매미랑입니다." "돌쇠랑입니다." "저는 수풀랑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괴상한 이름의 네 사나이가 공손히 절을 했다. 그 사나이들은 모두들 굉장한 전투력을 지닌 육체의 소유자였다. 철민을 에워싸고 있는 10여 명의 주문국 무사들 속에 아까부터 줄곧 무엇인가 집념이 가득한 눈초리로 철민을 지켜보는 한 사나이가 있는 것을 이 때 철민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면 4사람이 한 조가 되어 분대를 만든다. 이 4사람은 절대 흩어져서는 안되며 늘 함께 행동한다. 그리고 땅벌랑 지금 경비에 나서고 있는 사람까지 합쳐서 모두 몇 사람이 되오?" "모두 17명입니다." "좋소, 그럼 4개 분대를 만들 수 있겠군. 4분대의 분대장 철새랑, B분대는 매미랑, 알았나. C분대는 수풀랑, D분대는 돌쇠랑이 맡는다. 땅벌랑은 내 부관(副官)이다!" "예이!" "D분대는 이 곳에 남아 예비대(豫備隊)가 된다. A․B․C 각 분대는 마을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을 지켜라." "두령, 그러면 남쪽은 어떻게 합니까?" "남쪽은 비워 둬라. 그곳으로 솔본국 놈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적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고요?" "들여놓지 않고는 언제까지나 승패가 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보다는 일부러 틈을 주어 마을로 들어오게 한 후에 독 안에 든 쥐 꼴로 만들어 대번에 처치해 버리는 것이다." 땅벌랑은 이 대담한 전술에 완전히 넋이 나가 그저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그와 함께 점점 더 철민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깊어진 것 같다. "땅벌랑, 사또에게 전달해서 마을 남쪽에 개인호를 파게 하시오." "개인호라면……?" "정말 바보 같은 친구로군.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참호 말이오. 그곳에 사또의 부하를 한 사람씩 숨겨두는 거요." "알았습니다." 땅벌은 그림자처럼 달려갔다. 잠시 동안 마을 남쪽의 나무들 사이에서 비밀히 작업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그것도 끝났는지 으슥한 밤의 고요가 물 속처럼 둘레를 에워쌌다. "오지 않는군요." 어둠 속에서 땅벌랑의 말이 들렸다. "아무리 솔본국 놈들이라도 밤낮으로 침입해 오지는 않겠지." 철민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하품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면, 평소 같으면 지금쯤은 벌써 잠자리에 들 있을 시간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돌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궁둥이가 아팠다. "두령, 내가 일어나 있을 테니까 저리 가서 한잠 주무시지요." 땅벌랑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 그럴까." 철민은 일어나서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한 번 잠이 오면 견딜 수가 없다. 철민의 지금 소망은 그저 잠자리에 드는 일 뿐이다. 이제는 주물국도 솔본국도 통 생각이 없었다.   잊어버린 숙제   "철민아, 철민아,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학교에 늦는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아침에 늑장을 부리다니……. 쯧쯧!" 어머니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크, 야단났구나!" 철민은 벌떡 일어나 던져 두었던 바지를 꿰어 입고 웃옷을 걸쳤다. 베갯맡의 시계는 이미 8시 20분을 지나 있었다. 앞으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 속에 던져 넣자 현관을 뛰쳐나갔다. "철민아! 너 어젯밤에 그렇게 늦게까지 어디 갔다 왔니? 그 말을 하기 전에는 학교에 못 간다." 어머니의 화난 음성이 배후에서 철민의 등줄기를 찔렀다. 이어서 더욱 두려운 제 2 탄이 날아왔다. "철민이 너 요즘 통 공부를 하지 않더구나. 웬일이냐?" 평소에는 말이 없는 아버지까지도 꾸중을 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철민은 문득 발을 멈췄다. 어제 밤이라니? 늦게까지? 일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철민의 마음 속에서 작열했다. "아차!" 그랬었구나. 그 때 나는 잠에 못 이겨 잠자리에 들 작정으로 집에 돌아와 버린 것이다. 땅벌 녀석이 저리로 가서 자라는 바람에 그만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주문국 사람들은? 그 후, 솔본국 놈들이 침입해 오지나 않았는지. 철민은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몸이 굳어졌다. "철민아, 어서 대답해 봐. 어젯밤엔 아버지랑 솔솔이까지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어제 어딜 갔다 왔느냐 말이야?" 안에서 아버지의 무거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아,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면 못 써!" 이제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당할 판이다. 철민은 가방을 옆에 끼자, 아무 소리도 없이 바람처럼 현관에서 달려나갔다. 어떻든 학교에 늦어서는 안 된다. 주문국 사람들과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지만 학교에 늦으면 방과후에 청소 당번을 해야 한다. 그리고 클래스의 결의로 금주엔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클래스 위원인 민식이놈은 까다롭단 말이야.' 철민의 클래스에서는 아침 조회 전에 위원이 지각한 사람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어디 두고 보자!" 철민은 달리면서 중얼거렸다. 솔본국 무사의 얼굴과 출석부 조사 위원의 모습이 불꽃처럼 교차되었다. 철민이 숨을 헐떡거리며 교실로 뛰어드는 것과 담임 선생인 강미화 선생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민식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연필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철민아, 너 겨우 시간에 대어 왔구나." 여느 때의 철민이라면 여기서 한 마디 하겠지만 오늘 아침엔 그대로 제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첫째 시간은 수학……. 수학은 좋아하는 학과 중의 하나였다.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겨우 문제를 풀었을 때의 기쁨은 크다. 그런데도 성적이 더 오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시험이 되면 다소 당황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담임이며 이 학교의 유일한 여선생인 강미화 선생 담당이다. 달걀형의 얼굴로 머리를 한데 묶어 치켜올리고 있다. 강미화 선생은 교과서를 집어 들자, 물방울 같이 시원한 눈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57페이지의 응용 문제는 숙제였다. 그러면 누가 나와서 흑판에 쓰도록, 누가 좋을까 응, 철민군." 철민의 등줄기에 뜨거운 소름이 끼쳐 내렸다. '큰일났구나! 숙제를 깜빡 잊었구나.' 온몸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제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곧 그 고물상에 달려가고 그 후, 주문국과 솔본국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고, 또……. "왜 그러니? 철민이 너 숙제 안 해 왔구나." 철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잊고 왔습니다." 강미화 선생은 천만 뜻밖이라는 듯이 눈쌀을 찌푸리고, 철민을 흘겨보았다. 철민이 수학 숙제를 잊고 오다니, 여태까지 없는 일이었다. "잊고 왔다니 왜, 무슨 일이 있었니?" 담임 선생이 아니라면 그저 주의만 듣고 말 것을 담임 선생인 경우에는 클래스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지도에까지 주의가 미치므로 생도로서도 우물쭈물 넘길 수가 없다. 철민은 궁지에 몰려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을 의식했다. "깜박 잊어 먹었습니다." "어제는 집에 가서 한 번도 가방을 열지 않았구나. 가방을 열고, 수학 교과서나 노트를 보면 자연히 숙제가 있는 걸 알 텐데……." "죄송합니다." 사실 선생님 말씀대로였다. 찍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논리 정연한 말씀만 하시니까 여선생은 질색이란 말이야. 철민은 어물어물 자리에 앉았다. 강미화 선생은 철민이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한 모양, 다른 학생들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는 모두 방정식을 이용해서 식을 만드는 거예요." 철민은 어느 사이엔가 문제를 푸는 데에 열중했다. 그 때, 문득 철민의 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멀리서 차츰 힘을 잃어 가며 철민의 귀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일까, 저건." 철민은 연필을 든 손을 멈추고, 그 소리 없는 소리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차츰 분명한 의미를 이루며 철민의 귀에 들려왔다. '……두령!…… 두령!……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구원해 주십시오.' 철민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저 소리는 땅벌의 소리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철민의 그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일제히 철민을 쳐다보았다. "뭐예요, 철민군!" 강미화 선생이 창가에서 그렇게 주의했다. '…… 두령, 솔본국 놈들의 새벽 공격에 아군은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화술(火術)에 걸려 마을은 불타고…… 이제는 우리도 마지막입니다…… 두령……' 땅벌의 음성은 처절하게 들려온다. 그것은 필사적인 힘으로 두령으로 모시는 철민을 찾아 외치고 있었다. 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땅벌랑, 이제 곧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라.'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치자 철민은 일어났다.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에 던져 넣자, 그것을 끼고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 집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집으로 가다니? 왜?" "저어,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럽니다. 부탁입니다." 철민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벌써 교실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어이가 없어 가만히 보고 있던 강미화 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만 기다려, 철민아 너 그 태도가 뭐냐?" 그 소리를 뒤로 흘려버리며 철민은 가방 속에서 그 둥근 통을 꺼냈다. "참 그렇지!" 복도 구석에 있는 붉은 소화기(消火器)를 옆에 끼고 둥근 통의 손잡이를 힘을 주어 돌렸다. 철민의 뒤를 쫓아온 강미화 선생이 철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철민군, 이리 와요, 교실로." 강미화 선생은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철민은 일순 망설였다. '…… 두령, 두령께서 계시면 이렇게 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억울하오, 억울하오…….' "조금만 더 참아 다오, 땅벌! 위험해요, 선생님. 오시면 안 돼요. 이제 곧 간다." 세 가지의 소리를 한꺼번에 하면서 그 소리가 아직 사라지기도 전에 주위는 갑자기 불바다로 변했다. 검은 연기가 낮게 땅을 기고, 열풍 속에 칼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미화 선생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철민은 소리쳤다. "나다! 내가 돌아왔다. 땅벌, 땅벌랑은 어디에 있소?" 그 소리를 향해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면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아왔다. 다시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철민은 강미화 선생을 부축이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강미화 선생 납치되다!   타오르는 불꽃은 잉잉거리며 무서운 소리를 내고 소용돌이쳤다. 어디를 보아도 둘레는 온통 불바다였다. 커다란 불똥이 눈보라처럼 온 몸에 떨어져 왔다. 머리며 옷, 눈썹까지도 따끔따끔 불똥에 타들었다. 뜨거움도 아픔도 문제가 아니었다. 철민은 윗도리를 벗어 김 미화 선생의 머리를 덮어 주었다. 정신이 나간 듯, 발걸음이 비틀거리는 강미화 선생을 얼싸안듯이 지키며 철민은 달렸다. 겨우 불바다를 벗어나, 불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나무 그늘로 철민은 굴러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오시면 안 된다는데도……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꼭 선생님은 무사히 모셔다 드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선생님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철민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아이 무서워. 이 불길은?…… 여기는 어디냐?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일까?" 강미화 선생은 얼굴을 들고 공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학교의 복도에서 별안간 이 무서운 불바다와 칼싸움의 복판으로 끌려와, 아마 정신이 혼미해진 모양이다. 눈은 초점을 잃고 시선이 허공을 헤매었다. 철민은 강미화 선생의 어깨를 힘껏 뒤흔들었다. "정신차려요, 선생님. 난 솔본국 놈들을 무찌르러 저리로 가야 해요. 곧 돌아올 테니까, 선생님은 여기서 움직이면 안돼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강미화 선생은 흐릿한 눈으로 철민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철민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이제 곧 간다. 땅벌!" 철민은 소화기(消火器)를 꽉 끌어안았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자, 몸을 굽히고 총알처럼 다시 불바다로 달려갔다. "땅벌, 땅벌! 땅벌랑은 어디 있소?" 그러는 철민의 등에 번쩍 번갯불 같이 창이 날아 왔다. 순간, 철민은 그것을 피부 어느 곳에 느끼며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굽혔다. 그리고는 어깨 끝을 스치며 날아가는 창을 왼손을 뻗쳐 꽉 움켜쥐었다. "덤벼라! 솔본국 놈들!" 그 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철민 앞을 막아섰다. "좋아! 목숨이 필요 없는 모양이군." 철민은 창 끝을 곧장 뻗고 한쪽 발을 축(軸)으로 해서 빙그르르 돌았다. 긴 창칼 끝에 철컥철컥하는 충격이 왔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고, 우르르 물러나는 발자국 소리가 겹쳤다. 철민은 짐승처럼 등을 굽히고 소리도 없이 달렸다.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땅벌, 땅벌랑은 어디 있소?" 솔본국의 정예 무사들이 대세를 회복하고 철민의 뒤를 쫓으려 했을 때는, 그 소리는 이미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을 흐르는 불똥은 마치 급류(急流) 같았다. 철민은 주의 깊게 불길이 흐르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음, 마을 북쪽이로군." 철민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달렸다. 불길로 이루어진 듯한 숲 사이를 왼쪽으로 돌자, 거기 철민이 구하는 것이 있었다. "빌어먹을, 저따위 것!" 철민은 끼고 있던 소화기의 마개를 뺐다. 콕을 비틀자 소화제(消火劑)의 분말이 안개처럼 뿜어 나갔다. 그 안개가 뿌려지자, 그토록 맹렬한 불길도 갑자기 가라앉으며 흰 연기로 변해 낮게 땅을 기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던 불똥도 대번에 검은 그을음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소화기를 몸 앞에 내밀고 철민은 돌격 태세로 들어갔다. 불바다는 순식간에 타다 남은 기둥이며 판자 벽으로 변하고, 검은 연기는 흰 연기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철민의 몸에 무엇인가 따끔따끔한 것이 부딪쳐 왔다.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에 철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소화제는 짙은 안개가 되어 둘레의 모든 것을 에워쌌다. "으음, 이거 안 되겠다. 모두들 후퇴하라!" 그 소리를 향해 철민은 창을 던졌다. 철민은 창던지기에도 자신이 있었다. 도시 대항 시합에도 선수로 뽑혀 출장한 적이 있었다. 역시 명중했는지 어떤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둘레가 조용해졌다. 철민의 눈앞에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바람개비가 장치되어 있었다. 나무 뼈대에 두껍게 종이를 바른 날개가 여섯 장, 그것을 회전시키는 긴 나무와 몇 개의 핸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날개차(車)의 둘레에는 쌀겨가 드높이 쌓여 있었다. 그 쌀겨에서는 기름 냄새가 강하게 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기름을 뿌린 쌀겨에 불을 붙여,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켜 날린 거로군. 솔본국 놈들, 제법인데 ……." 솔본국 무사들의 화공술(火攻術)은 정말 놀랄만 했다. 솔본국 무사들이 후퇴한 것을 알고 달아났던 마을 사람들이 줄을 이어 슬슬 돌아왔다. "아! 땅벌랑, 이게 어찌된 일이오?" 광장 구석에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 땅벌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숨도 겨우 쉬고 있었다. 그래도 달려온 철민의 모습을 보더니, 핏기 없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아, 두령, 무사하셨군요. 두령이 안 계시는 동안에 이 꼴이 되었소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요 땅벌랑, 내가 잘못했소. 내가 없는 바람에 여러분에게 이런 폐를 입혔구려." 땅벌은 철민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두령, 고맙소. 그저 이 땅벌은 기쁠 뿐이외다." 이 우직한 중년의 무사는 자기들이 두령으로 모시는 인물에게서 친밀한 위로의 말을 듣고 그저 감격하고 있었다. 그 소박한 표현에 철민도 감격했다. "이봐요, 땅벌랑! 기운을 차려서 빨리 나아야 돼요. 내가 나중에 약과 몸보신(補身)이 될 음식을 갖다 드리겠소." 땅벌은 깊은 존경과 감사의 눈으로 철민을 바라보았다.   "각 분대 집합! 부상자는 그대로." 철민의 구령에 모여든 주문국의 무사들은 모두 형편없는 몰골들이었다. 옷은 불에 타고, 피가 얼굴이며 팔뚝에 말라붙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톱니처럼 날이 빠진 긴칼을 지팡이 삼아 짚고 허덕이고 있었다. 이편의 손해는 뜻밖에 컸다. 살아 남은 사람은, 돌쇠랑, 매미랑, 그리고 험악한 눈초리의 고참 무사가 한 사람, 게다가 견습 정도의 젊은 사나이, 그 네 사람만이 겨우 부상을 입지 않아, 다음 싸움에 힘이 될 수 있는 정도였다. 땅벌랑과 철새랑은 중상(重傷)을 입고 있었다. 결국 17명의 주문국 무사들 중, 단 하룻밤의 싸움으로 반 이상이 전사를 하고 있었다. 마을의 반 이상의 집이 불타고, 사또의 집도 불이 붙어 모조리 재로 변했다. 이것은 명확히 솔본국의 승리였다. 철민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물었다. 그때, 철민은 중대한 일을 잊고 있음을 알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차, 강미화 선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철민은 헐레벌떡 강미화 선생을 숨겨 둔 나무 그늘로 달려갔다. 그 곳에 강미화 선생은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어디 가셨어요. 어서 나오세요." 철민의 부름 소리는 덧없이 산울림을 부를 뿐이었다 "저건 뭘까? 종이 조각 같은데……."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나무 등걸에 못 박혀 있었다. 철민의 눈길은 그 종이 조각으로 흡수되었다.   「여기 있던 여인을 빌려 가오 - 인질금(人質金) 1천냥은 비싸지 않을 것이오. 내일 달이 뜨는 시간에 받도록 해 주시오. 깊이 생각하시길 바라오. 청솔」   먹빛도 선명한 그 글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하게 하고 싸늘한 느낌으로 철민의 눈길에 뛰어들고 있었다. 내일 밤, 달이 뜨는 시간에 1천냥과 강미화 선생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 당했다, 당했어…… 빌어먹을…… 내가 졌구나, 졌어!" 철민은 머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나무 그늘에 숨겨 두었던 강미화 선생이 발견되어 인질(人質)로 납치 당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아, 그때 역시 다시 한 번 돌아가 강미화 선생님을 학교로 돌려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1천냥의 인질금을 어디서 구한담. 여기 사또나 주문국 무사들은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을 리 없고……' 존경하는 강미화 선생이, 증오할 솔본국 놈들의 손에 납치된 이상 철민도 이제는 필사적이었다. 여태까지의 전쟁놀이 같은 기분으로는 여간해서 솔본국 놈들의 손에서 강미화 선생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 기운을 잃지 마세요. 꼭 내가 구원해 드릴게요." 철민은 목청껏 소리쳤다. 그것은 한 마리의 이리가 강적을 만나, 전투 개시를 선고하는 울부짖음 같았다.   든든한 구원대(救援隊)   철민은 네 사람의 주문국 무사에게 마을의 사수(死守)를 명령했다. 사건의 중대성 때문에 사또를 비롯하여 모두들 묵묵히 철민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불쌍한 것은 사또였다. 철민의 불쾌한 표정이 모조리 자기의 탓인 양, 조그만 몸집을 더욱 쭈그리고 철민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 편의 인원은 갑자기 줄어버렸다.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기 위해 솔본국 무사들의 본거지로 침입해간다 해도 나 혼자서는 좀 기가 죽는다. 땅벌랑이라도 몸이 성하면 좋겠는데, 현재로서는 무리이고, 이걸 어쩔까?' 철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학교 친구들의 응원을 바라면 되겠다. 용재 -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 남웅 - 힘이 세고 유도부의 선수다. 말이 없는 텁텁한 성격인데 신뢰할 수 있다. 종운 - 몸집은 클래스에서 제일 작지만 민첩하고 내 충실한 부하니까 함께 데리고 오자.' 철민의 가슴속에서 계획이 정리되었다. 철민은 자기가 없는 동안의 자세한 지시를 하기 위해 매미랑을 불렀다. 매미랑은 당장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매미랑! 내가 없는 동안은 매미랑이 책임자가 되어 주시오. 한시도 방심하지 말고 잘 해 주시오. 알았죠. 우리는 꼭 이길 것이오. 솔본국 놈들을 혼을 내 주는 거요." "알았습니다!" "좋소, 가시오!" 매미랑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철민은 목에 걸고 있는 둥근 통의 손잡이를 돌렸다. 철민은 노는 시간을 이용하여 세 친구를 교정으로 불러 냈다. "왜 그러니, 철민아. 강미화 선생님하고 같이 없어져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어." "강미화 선생님은 그때부터 교원실에도 안 오셨대. 국어 선생님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시더군,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철민은 음성을 낮추어 "그 강미화 선생님 때문에 그러는데 말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줘. 사실은……." 놀라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은 무리다. 철민의 이야기에 세 사람은 완전히 놀라버렸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그들도 강미화 선생이 솔본국 무사들에게 납치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낯빛이 변했다. 그리고 다시 철민이 세 사람에게 응원을 청하자 당장 흥분해서 철민을 둘러쌌다. "야, 굉장하구나 철민아! 네가 그러니까 주문국 무사들의 두령이 됐단 말이지?…… 좋아, 난 꼭 데리고 가 줘." "철민아, 그래, 언제 가는 거니? 지금 당장 가도 좋아." "아냐, 잠깐만 기다려. 지금 곧 세 사람이 갑자기 조퇴하면 학교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학교가 파한 다음에 우리 집으로 와 줘. 오늘밤엔 우리 집에 모여서 공부하는 걸로 하면 될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 이제 나도 무사가 되는 셈이지. 에헴! 팔이 운다 울어…… 자 들어봐." "바보 같은 소리 마, 종운아, 너 그건 윗도리의 소매가 흔들리는 소리야." "그림 부탁한다. 준비는 내가 해 둘게." 세 사람은 교실로, 철민은 울타리 사이를 빠져 밖으로 나갔다. 철민은 몰래 자기 방문을 열고 뒤꼍으로 해서 제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철민은 벽장에서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테이프 레코더, 자명종 시계, 확대경, 물통, 야구용의 스파이크, 알코올 램프, 펜치, 드라이버, 그밖에 손에 닿는 대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은 송아지만큼이나 부풀어올랐다. 거기에다 로프를 걸어 등에 지고 일어서니까, 그 무게로 다리가 비틀거렸다. 겨우 문을 빠져 나와 한 걸음 한 걸음 바깥 길로 나왔다. 약방에서 상처에 바르는 약과 붕대 뭉치를 사고, 계란과 우유를 사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웃 잡화상에서 작은 병에 든 위스키를 하나 샀다. 큰 것을 사고 싶었으나 이미 돈이 모자랐다. 위스키 병을 들고 가게를 나섰을 때, 철민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봐, 학생! 어딜 가는 거지? 오늘은 학교 쉬는 날인가가." 무거운 몸을 겨우 돌이켜 뒤돌아다보니 순찰 중인 경찰관 한 사람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철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학생은 위스키를 산 것 같은데. 그건 설마 학생이 마시는 건 아니겠지?" "아, 이거요. 이건 땅벌랑에게 줄 거예요." "땅벌랑? 그건 누구지?" "주문국의 무사예요. 내 부하죠." "주문국의 무사? 네 부하?" "아, 그래요. 땅벌은 지금 중상을 입고 있어요. 솔본국 놈들한테 당했거든요. 좀 멍청한 데가 있지만, 좋은 사람이죠." 경찰관의 표정은 차츰 더 험악해졌다. 그 눈에 노여운 빛이 떠오르며 철민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잠깐 저기 파출소까지 좀 가서 그 가방 속을 보여 다오." "싫어요." "뭐! 싫다고." 경찰관의 굵은 팔이 쑥 뻗쳐 왔다. 순간, 철민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뒤에 남은 경찰관은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부끄러운 듯한 얼굴이 되어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후, 위스키를 마시게 했더니 땅벌랑은 훨씬 기운이 났다. 특히 위스키가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땅벌랑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위스키에 입맛을 다시며 좋아하던 땅벌도 우유와 계란을 먹을 때는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였다. 그러나 철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싫다고도 할 수 없다. 눈을 감고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철민이 잇달아 가방에서 꺼내는 여러 가지 기구는, 땅벌랑을 비롯한 주문국 무사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철민은 자명종 시계의 태엽을 감고 바늘을 맞췄다.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벨 소리에 돌쇠랑은 반사적으로 품안에 품고 있는 단검을 빼어 들어, 여러 사람의 웃음을 샀다. 오후 세시. 철민은 다시 자기 집 문 앞에 나타났다. 10분쯤 기다리니까 용재를 비롯한 세 사람이 흥분한 얼굴로 나타났다. 철민은 그 세 사람에게 자기 소매를 잡게 하고, 그대로 땅벌랑들이 있는 마을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작전 회의가 열렸다. 주문국 무사들은 우측, 용재들은 좌측, 중앙에 철민과 땅벌랑, 그 아래쪽에 사또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또, 솔본국 놈들의 본거지는 어디입니까?" 사또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한내 마을의 청명사(淸明寺)라는 절이 솔본국 청솔의 본거지라고 합니다." "음, 한내 마을이란…… 야 용재야, 지금의 한강 건너에 있는 어떤 마을인 모양이지." "아마 그럴 거야. 허지만 지금은 청명사라는 절이 없어." "그러면 사또, 그 솔본국 놈들 본거지의 수비 현황은?" 사또를 대신해서 돌쇠랑이 앞으로 나왔다. "아뢰옵니다. 그 본거지를 지키는 솔본국 놈들의 수는 18명, 철통진이라는 비법을 가지고 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기껏해야 함정이나 파놓고, 화약이나 뭘 묻어 두었겠지." "예,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그 진을 깨뜨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알았오. 오늘밤 그것을 깨뜨리겠소. 용재하고 남웅이, 종운이, 그리고 돌쇠랑은 나를 따라 오도록. 매미랑은 땅벌랑을 도와 이 곳을 지키시오, 알았죠?" "예!" 이 때, 철민의 등뒤에서 땅벌랑이 희미하게 몸을 움직였다. 돌아다본 철민의 눈에 무서운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어진 땅벌랑의 눈이 천장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요, 땅벌랑?" 철민의 음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좌악 하고 여러 개의 표창이 날아왔다. 여러 사람이 일제히 벽 쪽으로 몸을 피하는 것과, 천장의 복판이 뚫리며 검은 옷차림의 사나이들이 뛰어내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검은 옷차림의 사나이들을 향해 남웅과 종운의 손에서 벌써 두 줄의 로프가 뱀처럼 뻗어 공간을 날았다.   황솔을 사로잡다   "조심해라! 솔본국 놈들의 습격이다!" 종운이는 흘깃 철민을 돌아다보며 싱긋 웃었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바람처럼 마룻바닥 위에 내려선 채, 어떤 사람은 한쪽 발로 서고, 어떤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어떤 사람은 한쪽 무릎을 꿇어, 마치 기묘한 무용이 중단된 듯한 자세로 기분 나쁘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한 순간의 동(動)에서 정(靜)으로, 얼음장같은 싸늘한 긴장 속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렀다. 남웅과 종운의 손에서 뻗어 나간 로프는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늘어나 솔본국 무사 두 사람의 팔과 다리를 얽어매고 있었다. 돌쇠랑과 매미랑도 긴칼을 반쯤 뺀 채 아직 공격 자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눈에 들어가도 눈 한번 깜짝일 수가 없다. 한 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그것이 최후였다. '음, 이놈들은 굉장한데 여태까지의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구나, 그들도 드디어 주력(主力) 부대를 내보낸 모양이다.' 철민의 온몸의 근육은 처절한 싸움의 예감에 떨렸다. "덤벼라, 솔본국 놈들!" 현기증이 날 듯한 긴장감 속에서 철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얼음장같은 고요는 한 모퉁이에서 무너졌다. "제기랄…… 이게 뭐야. 무사들이란 좀더 근사한 줄 알았더니 천장에서 내려와 한쪽 발로 서 있기나 하구. 이건 꼭 사기 아냐?" "정말이야! 저것 좀 봐. 종운아, 저 친구는 꼭 WC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모양이야." 정말 이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여러 사람의 바늘 끝 같은 마음의 날카로운 밸런스를 깨뜨렸다. "후후후, 아하하하……." 남웅과 종운의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뜻하지 않은 이 웃음소리에 솔본국 무사들은 몹시 동요했다. "왜, 왜 웃느냐!" 선두에 섰던 무사가 부르짖듯이 외쳤다. "어럽쇼, 이봐 남웅아, 이 사람 괜히 화를 내는데…… 우리들이 웃는 게 들린 모양이지." 이런 종운의 빈정거림에 마침내 분노가 터진 그 무사는 견디다 못해 별안간 몸을 날려 종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쌩! 하고 칼이 울렸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알은 칼날의 움직임보다도 빨리 종운은 옆으로 날았다. 그 손에 잡혀 있는 로프에 팔이 잡힌 무사는, 이런 종운의 재빠른 동작 때문에 빈틈을 찔려 크게 비틀거렸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동작보다 먼저 종운의 작은 몸집이 총알처럼 그의 등에 부딪쳤다. 뒤이어 남웅이 차례였다. 그리고 돌쇠랑과 매미랑이 거의 동시에 마룻바닥을 박찼다. 마지막으로 정현룡 사또가 칼을 빼들고 이 난투(亂鬪)에 끼어 들었다. 불의에 습격해 온 솔본국 무사들의 처음에 우월했던 상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들은 덤벼드는 종운이들을 막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로프를 끊으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종운과 남웅이 재빠르게 움직이므로 거기에 따라 마룻바닥 위를 질질 끌려 다닐 뿐이었다. "에잇!" 남웅의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은 복장의 무사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벽의 흙이 우르르 떨어졌다. 유도부 주장 남웅의 특기인 업어치기가 들어맞은 것이다. 뒤이어 2, 3인의 무사가 그 남웅을 둘러싸고 필살의 기세로 틈을 노린다. 철민은 눈을 화경 같이 흡뜨고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철민의 오른쪽에 용재, 왼쪽에 땅벌랑이 빈틈없이 몸을 가누고 있었다. "야앗!" 깨지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조그만 표창이 공기를 가르며 철민의 얼굴로 날아왔다. 철민의 움직이는 것보다도 먼저 용재의 오른손이 재빨리 번득였다. 쨍! 맑은 쇳소리가 세 사람의 귓전을 울렸다. 표창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비켜 나갔다. 용재의 손에서 던져진 드라이버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뚜르르 굴렀다 "용재야, 굉장하구나, 드라이버를 표창 대신 쓰다니……" "뭘 이쯤 가지고. 난 드라이버를 늘 갖고 다니거든." 용재는 약간 면구스러운 듯이 학생복 저고리 밑을 들춰 보였다. 그 허리에 드라이버며 스패너 등을 꽂은 폭넓은 벨트가 감겨 있었다. 역시 밥 먹기보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용재다웠다. 순간적인 위기에 임해서도 늘 쓰던 드라이버에 자동적으로 손길이 갔던 모양이었다. "으음, 듣기보다 더욱 굉장한 놈들이구나……" 검은 옷을 입은 솔본국 무사 중의 한 명이 두 손을 벌리고 접근해 왔다. 두려움도 없이 세 사람의 상대와 싸우려는 자신만만한 투지(鬪志)가 온몸에 넘쳐 있었다. 땅벌랑이 부상한 몸의 아픔을 견디면서 칼을 들었다. "후후후, 그 상처로는 좀 무리일 걸" 그렇게 비웃는 그 솔본국 부사의 양쪽 손에는 날카로운 표창이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땅벌랑, 당신은 비켜서 보고 계시오. 이봐, 솔본국 친구, 뭐라는 누군지 이름이나 대 보시지." "음, 저 세상으로 가는 선물로 듣고 싶다면 들려 주지, 나는 솔본국 청솔의 동생 황솔이다. 보지 못하던 무사가 주문국 사또 집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보려고 왔다." "강미화 선생을 납치해 간 것도 네 놈이냐?" "강미화 선생? 아, 그 여자 말이로군. 그건 내가 아니다. 나의 형 청솔의 부하가 한 짓이다. 여자 따위를 유괴하는 것은 내 취미에 맞지 않아." "음, 그렇군. 그럼 황솔, 너는 돌아가서 네 형에게 전해라. 내일 달이 뜨는 시간까지 강미화 선생과 보상금 1천냥을 함께 가지고 오라고 말이다. 만약 가지고 오지 않을 때는 너희들은 한 놈도 남김 없이 여기서 죽을 줄 알아라." 철민이 침착하고 묘하게 가라앉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 말 뒤에 숨은 철민의 굳은 결의와 기백에 황솔은 묵묵히 불꽃같은 눈동자를 태우며 철민을 노려보았다. 한 순간, 황솔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두 개의 표창은 번개처럼 철민의 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두 개의 날카로운 표창은 철민의 바로 눈 앞 공중에 멎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황솔의 눈에 그것이 보였는지 어떤지 황솔은 바람을 가르며 철민 위로 덮쳐 내려왔다. 예기치 않았던 공격 차례의 차질이 황솔의 얼굴에서 핏기를 앗아갔다. 두 개의 표창은 정확히 적을 쓰러뜨렸어야 했으며, 쓰러진 그 위에 덮쳐내려 마지막 한 수를 찌르는 이 방법에 황솔은 여태까지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므로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황솔의 눈에 철민의 싱긋 웃는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허공에 멎어 있는 표창에 손을 뻗치려다 그대로 털썩 마루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나려다 몸이 통 말을 듣지 않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무엇인가 무척 협소한 곳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두 명의 적이 로프로 자기를 묶으려는 것을 알고 황솔은 필사적으로 날뛰었으나, 팔굽이 말을 안 들어 칼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처음으로 그의 마음 속에 무서운 공포심이 일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우욱! 악마냐, 귀신이냐! 이 괴이한 기술은……." 황솔은 좁은 공간에 갇혀, 그 위로부터 로프로 빙글빙글 묶여서 붙들린 물고기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어떠냐, 황솔, 이것이 유명한 무술 극치(極致) 투명옥(透明獄)의 비법이다." 철민과 용재는 얼굴을 마주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투명한 비닐의 테이프 크로스를 쳐놓은 줄은 아무리 솔본국 무사라도 알 수가 없었겠지." 손으로 던진 표창으로 탄력성이 강한 비닐을 꿰뚫기는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힘든 일이다. 그래도 황솔이 던진 표창은 그것을 반쯤 꿰뚫고 떨어지지도 않은 채, 꽂혀 있었으니 오히려 그 무서운 위력에 탄복할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허공을 날아 덮쳐오는 황솔의 밑에다 철민과 용재는 활짝 펴서 달아 매놓은 비닐의 테이블 크로스 밑자락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 황솔이라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황솔의 체중으로 쳐 놓은 끈은 끊어지고, 동시에 두 사람은 날 뛰는 황솔의 몸에 비닐을 뒤집어 씌워 로프로 빙글빙글 묶어 버렸다. 종운과 남웅도 그들의 상대를 완전히 사로잡아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돌쇠랑과 매미랑, 그리고 사또는 황솔을 사로잡은 두 사람의 솜씨에 경탄함과 동시에 약간 두려워진 모양이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철민 선생 및 용재 선생, 도대체 이건 무슨 마술인지요? 황솔이라면, 그의 형 청솔에 못잖은 뛰어난 무사요. 여태까지 그의 손에 쓰러진 우리 주문국 무사가 숱했는데, 그것을 이렇게 쉽사리 사로잡다니…… 나는 어쩐지 여러분이 두려워집니다 그려." "하하하…… 사또, 요 정도를 가지고 놀라실 건 없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선 비닐 보자기로 물건을 싸는 따위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가 있거든요." "그렇소이까.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군요." "그래요…… 그럼 여러분 잠깐만……" 여덟 사람은 일제히 철민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림자 없는 적(敵)   잡목이 우거진 숲이 완전한 구릉 지대(丘陵地帶)를 이룬 사이를 뚫고, 몇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종일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시냇물은 모두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서면, 바로 눈 밑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하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그 흐름의 아득한 저쪽에는 굽이진 산들의 모습이 보이고, 들판의 복판을 곧장 더듬어 온 큰길에서 왼쪽으로 갈린 사잇길이 한강의 갯벌을 따라 이윽고 한내 마을로 다가온다. 잡목 숲으로 에워싸인 성황당(城隍堂) 앞에서 그 길은 좌우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면 태자당(太子堂)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원불사(圓佛寺)로 가는 길이다. 그 오른쪽 길을 약 백여 미터쯤 간 왼쪽의 언덕 꼭대기에 청명사(淸明寺)가 있었다. 대낮에도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 아래서 보면, 이 절이 예전에는 상당히 격이 높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문(山門)의 구조, 대웅전의 지붕, 이끼 낀 앞뜰 등 그 어느 하나만 보아도 모두 유서 깊은 고찰(古刹)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짙은 어둠 속에서 보면, 특히 그것이 주위의 소나무 숲이 윙윙거리며 바람이 부는 밤 같은 때는 버림받은 지 오래고 사는 것이라고는 마물이나 귀신 밖에 없는 폐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 청명사의 무너진 흰 벽을 푸른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소나무 숲의 높은 가지는 희미하게 바람 소리를 내고,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밤의 어두운 장막을 헤치고 전해 왔다. 그 대웅전 안에서 깜박깜박 조그만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촛대의 흔들리는 불빛을 옆얼굴에 받으면서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솔본국 무사들의 대장 청솔이었다. 나이는 30여 세 가량, 잘잘 윤이 흐르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깎아낸 듯한 얼굴의 선(線)이 뛰어난 의지와 단련의 비범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온 몸을 먹장 같은 검은 옷으로 두르고 짧은 표창 띠를 허리에 차고 있다. 청솔 앞에 꿇어 엎드려 있는 몇 사람은 이들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이 바보 같은 놈들아, 내 아우이자 너희들에게는 부대장(部隊長)인 황솔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도망쳐 왔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대장. 우리가 그대로 도망쳐 온 것은 아닙니다. 일전부터 주문국 놈들에게 가담한 불가사의한 무사, 그는 풍문에 듣는 바대로 무서운 무술의 소유자여서 황솔 님까지도 쉽사리 사로잡는 형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올시다. 그것을 대장에게 전해드리려고 우리는 혈로(血路)를 뚫고 겨우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음, 그래 그 무사의 무술이란 어떤 것이냐?" "혼전(混戰) 중이라 확실히 볼 수는 없었으나, 무엇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광주리 같은 것으로 황솔님을 사로잡은 것 같았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주리?" 청솔은 굵은 눈을 모아 눈살을 찌푸리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다. 이번만은 용서한다. 모두들 물러가 쉬거라." "예…… 예……" 무사들은 마룻바닥에 허리가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 범선만은 남아라." 한 사람의 늙은 무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범선, 다음에 우리가 취할 길은 무엇인가?" 늙은 무사는 잠시동안 생각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보아 온 모든 기억을 이 늙은 무사는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예, 그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를 상대로 싸움을 오래 끌어서는 이쪽이 불리합니다. 우리 솔본의 비법, 아지랑이 진법(陣法)을 사용하여 일거에 섬멸해 버림이 어떠하올지?" "음, 그도 그렇군. 허지만 아지랑이 진법은 한 번 쓰면 두 번 다시는 쓸 수 없는 비법 중의 비법. 범선, 충분히 생각하여 보오. 명령을 기다리시오." "알았소이다." 늙은 무사 범선은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얌전하게 인질금 1천냥을 낼지 어떨지.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때에야말로 비법 아지랑이 진법을 써서 모조리 섬멸해 버릴 테다. 후후……" 청솔은 일그러진 얼굴로 혼자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때였다. 청솔의 귀에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서 끊임없는 고역에 시달리는 죽은 사람의 신음 소리가 전파되어 오는 듯, 조용한 대웅전의 심야의 공기를 희미하게 뒤흔들었다. "누구냐!" 신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범선, 악귀!" 청솔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부하를 불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무사가 청솔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음, 저 소리가 들리느냐?" 범선과 악귀는 그러는 청솔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였다. 순간, 그들은 동시에 재빨리 몸을 날려 청솔의 좌우에 웅크리고 앉았다. 역시 대장의 측근에 있는 이 솔본국 무사의 정예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이상한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 형님, 형님…… 아, 괴로워…… 숨이 막혀요…… 살려 주시오. 살려…… 으음, 지옥의 고역이라도 이토록……." 신음 소리가 무시무시한 비명으로 변하여 청솔의 귀를 때렸다. "대장, 저것은 황솔님의 목소리……." "황솔님, 지금 어느 곳에 계시오……?" "으음, 저건 분명히 황솔의 음성. 둘이서 가 보시오." 범선의 몸은 새처럼 친정을 향해 높이 뛰었다. 악귀는 단숨에 마룻바닥을 제치고 사라져 갔다. 청솔은 긴칼의 손잡이를 잡고 주의 깊게 둘레의 어둠을 지켜보았다. "…… 형님…… 살려 주시오. 빨리 와서 내 생명을 끊어주시오…… 그것이 차라리 내게 내리는 자비요…… 아, 죽여라! 죽여다오!" 그 소리는 높게 낮게 청솔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대장! 천장에도 지붕에도 아무도 없소이다." 범선이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마루에 내려섰다. "대장! 마루 밑에는 경천환 이하 세 사람의 우리 동료가 숨어 있을 뿐이외다." 악귀가 마룻바닥으로 난 구멍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쳤다. "범선과 악귀는 다시 구석구석까지 찾아보아라. 황솔 기다려 다오. 이제 곧 가서 살려 줄 테다." 청솔은 입술을 깨물며 웅얼거렸다. 중상(重傷)을 입고 신음하는 황솔의 몸을 이것 보라는 듯이 부근에 내버리고 간 적의 행동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철통진에 의해 엄중히 수비되고 있는 이 청명사의 대웅전에 어떻게 접근해 왔을까. 청솔은 이를 갈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품 속에서 피리를 꺼내들고 날카롭게 불었다. "…… 으윽…… 아, 괴롭다. 아앗!…… 숨이 막힌다……." 황솔의 비통한 신음 소리는 대웅전에 모인 솔본국 무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너희들에게도 저 황솔의 신음 소리가 들리겠지! 가라! 가서 황솔을 구해라!" 30명의 무사들은 소리도 없이 흩어졌다. 솔본국의 패배   "이상한데요, 대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보면 소리는 어느 틈엔지 뒤로 돌아가 있어요. 왼쪽에서 들린다고 생각하면 실은 오른쪽에서 들리기도 하고, 아무래도 신음 소리의 소재를 알 수가 없소이다." 악귀는 자못 분한 듯이 그 음성이 떨렸다. "대장! 이 절 안에는 수상한 자의 그림자 하나 없소이다. 그런데도 황솔님의 신음 소리는 그치질 않는군요. 이게 대체 어찌된 사연인지……." 범선은 깊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내가 아직 젊었을 적에 어떤 지방 성 밑에서 환술(幻術)이라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소. 안남이라든가 어디서 왔다는 이국(異國)의 마술사였는데, 그가 이와 같이 여기 저기에서 소리가 나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있었소이다. 대장! 제가 생각건대 이것은 그 환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주문국 놈들에게 가담한 사나이들은 이국의 마술쟁이가 아닐는지 모르겠소. 옷차림이라든가 또 그 말씨라든가, 아무래도 이국적인 냄새가 짙소이다." "으음, 환술이라……." "…… 형덜, 솔본국의 동지들이여…… 그들은 정녕…… 천마(天魔)요, 이건 분명히 천마의 짓이요…… 아앗!" 청솔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불쑥 일어났다. 그 얼굴은 비장한 결의에 넘쳐 있었다. "듣거라! 이제부터……." 늘어선 부하들을 향해 무엇인가 말하려던 청솔의 분노한 소리를 지우듯, 그 보다 높이 대웅전을 뒤흔든 함성이 있었다. "핫하하하하! 청솔, 어떠냐? 이제 무서워졌겠지. 그렇지만 아직 멀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맛을 보여 줄 테다. 자, 뒤를 보아라!" 일순, 물 속처럼 두려운 침묵이 생겼다. 그토록 담대한 청솔도, 정예임을 자랑하는 솔본국의 무사들도 자기들의 뒤를 돌아다볼 용기를 잃었다.   "윽!" "으, 으음!" 뱃속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부르짖음이 무사들의 입에서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오, 황솔님!" "아, 저건!" 보라! 대웅전의 판자 벽에 환영처럼 몽롱하게 떠오른 것은 사로잡힌 짐승처럼 꿈틀거리는 한 사람의 그림자였다. 무슨 빛인지, 엷은 노랑 빛이 희미하게 벽이며 마루를 비치고 그 빛 속에서 꽁꽁 묶인 그 사람의 그림자는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 아, 괴롭다. 눈이 안 보인다…… 음, 비, 빌어먹을……." 그 사람의 그림자는 황솔이었다. 그의 온몸을 둘러싸고 흰 연기가 안개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사들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이 절의 안팎을 빈틈없이 수색하여 수상한 자가 없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황솔의 모습이 이와 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사의한 것을 믿지 않는 그들의 이성(理性)이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대장!" "아, 이것은 황솔님의 원한 어린 망령의 소치인가!" "무서운 일이다!" 역전의 용사인 악귀며 범선마저도 입술이 파래져 떨고있었다. "…… 나무아미타불…… 황솔님, 부디 성불(成佛)해 주시오." 경천환이 신음하듯 말하며 한 손을 쳐들고 허리를 숙였다. 그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청솔이 마룻장을 울리며 불쑥 일어섰다. "여러분, 모두 정신을 똑똑히 차리시오." 그 소리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오른손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재빨리 움직이자, 표창이 유성처럼 황솔의 모습을 향해 날았다. 철썩, 철썩, 철썩! 판자 벽을 꿰뚫는 표창 소리가 갑자기 그 때까지 넋을 잃고 있던 솔본국 무사들을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에잇!" "야앗!" 그들은 괴상한 기합 소리를 지르며, 새까만 회오리바람이 되어 황솔의 모습이 보이는 판자 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두둥실 하고 황솔의 모습이 무게가 없는 것인 양 휘날렸다. 노랑 색의 조용한 빛이 별안간 눈부신 빛으로 변하더니 일순 어둠이 닥쳐왔다. 허공에 뿌옇게 불이 타오르며 순식간에 불길이 판자 문에서 천장으로 치솟았다. 그 불꽃 속에서 등을 구부리고 달리는 2, 3명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에잇!" 악귀는 품속의 단도를 잡아 낮게 던진다. 달리는 사람 중의 하나가 뒤돌아다보며 무엇인가 소리친 것 같았다. 흰 이빨이 악귀를 비웃는 듯 반짝 빛났다.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아왔다. 악귀는 몸을 날려 위태롭게 피했다. 앞으로 뛰어나온 솔본국 무사의 한 사람이 배를 움켜잡고 웅크리고 앉았다. 부웅! 불길은 순식간에 대웅전을 에워싸고 번져 갔다. 어디에 적이 있는지, 누가 자기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채, 그저 발소리와 외침 소리만이 둘레에 가득 차 있었다. 범선은 대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걱정이 되었으나, 어둠과 불길 속에서 싸움 중에서 대장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셈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굉장히 몸이 가벼운 인물이 범선에게로 달려왔다. "누, 누구냐?" 피할 사이도 없이 범선은 더럭 박치기를 당하고 비틀거렸다. 이 늙은 무사는 여태까지 겪은 몇십 번의 싸움에서 한 번도 적의 손을 제 몸에 닿게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자랑인 범선은, "아뿔싸!" 하고 외쳤다. 몸을 바로잡을 사이도 없이 그 인물은 범선의 허리에 발을 걸고 어깨를 발판으로 하여 날쌔게 천장으로 뛰어 올랐다. "앗! 이놈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범선이 칼을 치켜올리는 것보다 일순 먼저, 불타는 재목이 천장에서 떨어져 왔다. 범선은 옆으로 몸을 날려 겨우 피했다.   어느 사이엔지 싸움은 대웅전 앞의 경내로 옮겨져 있었다. 대웅전의 타오르는 불길은 높이 높이 하늘을 그을렸다. 이 청명사를 에워싼 깊은 소나무 숲은 불길에 휩싸이고 때마침 불기 시작한 열풍에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솔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바늘로 찌르는 듯이 눈이 아프고 끊이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가슴 속까지 바싹 말라붙어 청솔은 쉴 새 없이 목을 움켜쥐었다. "분하구나!" "대장, 당장은 적에게 승리를 양보하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천환도 한 손으로 눈을 연신 문지르며 청솔을 재촉했다. "청솔, 어디로 달아나느냐?" 갑자기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그것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경천환은 긴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불길에 맨 눈은 적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으나 칼 솜씨로는 솔본국 무사 중에 당하는 자가 없다는 경천환의 필살의 일격은 정확히 소리친 적의 허리를 옆으로 치고 있었다. 짜악! "으윽!" 경천환은 팔의 근육이 마비되어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뜨렸다. 두 동강이가 난 대나무 통이 허공을 날았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그건 마디를 뚫은 대나무 통이란 말이야. 그걸 입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거든. 대나무 통 끝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내가 거기 있을 까닭이 없지." "비, 비겁하다!" "뭐가 비겁하단 말이냐. 자, 이거나 받아라." "앗, 뜨거!" 경천환은 정신 없이 몸에 얽혀 온 불꽃의 끈을 떼어버렸다. 끈은 흰 연기와 오렌지 빛 불길을 뿜으면서 찌그르르 오므라들었다. 경천환은 눈과 코를 감싸 쥐고 뒹굴었다. "우웃, 괴롭다. 숨이 막힌다." 그러는 경천환을 등뒤에 내버려두고 청솔은 연기 속을 뚫고 달렸다. 어깨 너머로 돌아다본 그의 눈에 입과 코를 하얀 천으로 가린 몸집이 작은 적이 경천환의 몸을 뛰어넘고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맛이 어때, 괴롭지. 필름이 타는 연기를 마셨으니 어련하실라구." …… 필름. 필름이란 무엇일까. 이 냄새면 그 황솔의 괴로움도 당연하다. 목숨을 끊는 것이 자비라고 외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달리면서 청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토록 심한 패전(敗戰)은 난생 처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청명사의 언덕은 이제 모조리 불길에 싸여 있었다. 깊은 소나무 숲 잡목 숲도 윙윙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은 불길을 몰아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먼 부락에서 종소리 가 울렸다. 청솔은 소나무 숲에 에워싸인 웅덩이의 풀숲 속에 몸을 눕혔다. 북쪽 하늘이 새빨갛게 불타고 있다. 눈이 타는 듯 아팠다. 시냇물을 떠서 눈을 식혔다. 목구멍의 아픔은 그럭저럭 가라앉았으나 그래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목구멍 속이 쥐어뜯듯이 아팠다. "아, 대장. 이곳에 계셨군요. 범선이올시다." 바삭바삭 풀잎을 헤치며 범선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이 어서 악귀가, "면목이 없소이다, 대장. 모두 우리가 모자라는 탓입니다." "알았다. 승부는 이제부터야. 우선 푹 쉬도록 해." 청솔도 이름 있는 솔본국 무사들의 대장이니 만큼 이제 부하를 문책하는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쪽 하늘은 점점 더 붉게 빛났다. 아마 청명사의 언덕 전체가 심한 산불에 휩싸인 모양이었다. 둘씩 셋씩 모여드는 부하에게 악귀가 점호를 하기 시작했다. "뱀 밭의 진평." "예!" "높마을의 외눈." "예!" "유천사의 선랑." "예, 여기 있습니다." "천왕봉의 길선." 대답이 없었다. "길선! 길선은 없나?" 악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름은 불러도 대답이 없는 자가 속출했다. "34명 중, 여기에 모인 자는 겨우 13명이란 말이지, 이게 어찌된 셈인가." "하지만 악귀, 이 곳을 피하여 다른 곳에 숨어 있는 자도 있겠지." 청솔은 가라앉아 있는 여러 사람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평소부터 만일 청명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에는 이 소나무 숲 속에 있는 웅덩이를 집합 장소로 하기로 정해 놓았으나, 적에게 미행 당해 이 곳을 발견당할 위험이 있을 때는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달아날 경우도 있다. 청솔은 여전히 아픈 눈을 크게 뜨고 주위의 어둠을 살폈다. "조용해라, 누군가 이리로 오고 있다!" 높마을의 외눈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낮게 소리쳤다. 희미하게 풀잎 스치는 소리가 밤 공기를 가르며 전해져 온다. "음,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청솔의 온몸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소름이 끼쳤다. 상처를 입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지금 적의 습격을 받는다면 아무리 용감한 솔본국 무사라도 전멸할 것이 뻔하다. 그래도 모두 몸을 일으켜 최후의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다가오는 자의 호흡 소리까지 들릴까 생각할 정도로 풀잎 스치는 소리는 다가왔다. "이미 이렇게 된 바에야 함께 죽을 각오로 한 놈이라도 더 쓰러뜨려라. 과연 솔본국 무사들의 최후다웠다는 말을 듣도록. 알았나!" 여러 사람은 소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오, 대장, 여기 계셨군요. 여러분, 나요. 경천환이요. 잘못 표창 따위를 던지진 마시오." 수풀 저쪽에서 목쉰 소리가 날아왔다. "오, 경천환. 적인 줄만 알았네." 여러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신들 좀 차리시오.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호미족(虎尾足)을 썼지 않소. 그걸 모를 정도로 여러분은 정신이 나갔단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솔본국 무사들은 모두 각자 독특한 걸음을 고안하고 있다. 그에 의해 어둠 속에서의 싸움이나 정찰 같은 때, 잘못해서 있을 동지들끼리의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지금 경천환이 사용한 보행법은 속보(速報)로 세 걸음 전진하다가 거기서 4분의 1호흡 정도로 정지하고 다시 속보로 세 걸음 전진하는 식의 걸음이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듯이 발끝으로 가볍게 걷기 때문에 경천환은 스스로 그것을 호미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대장, 무사하셨군요, 여러분도……." 경천환은 떠메고 온 커다란 부대 자루를 털썩 땅 위에 던졌다.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경천환, 그것은 무엇이냐?" "대장. 이것이 우리 수중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항상 99%의 승리를 거두고 있는 셈이요." 경천환은 큰 소리를 치며 부대 자루를 풀러 거꾸로 들었다. 털썩 굴러 떨어진 것은 새끼줄로 꽁꽁 묶인 강미화 선생이었다. 흩어진 머리가 땅 위에 길게 늘어졌다. "오, 이건, 경천환 잘했다. 잘했어. 이 인질(人質)은 적의 방화로 타죽은 줄만 알았는데……." "예, 저도 일단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이대로 적에게 빼앗겨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격하는 적을 피해 대웅전으로 숨어 들어가 떠메고 왔소이다." "잘했다! 우선 누워서 쉬도록." 청솔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 경천환의 공을 치하했다. 높마을의 외눈이 긴 칼을 옆에 끼고 청솔에게로 다가왔다. "대장, 증오의 대상인 적군의 여자, 이 여자를 토막내어 적에게 보내 줍시다." 채 대답도 듣지 않고 그는 긴칼을 번쩍 빼어 들었다. 으음! 하고 강미화 선생은 괴로운 듯이 낮게 신음했다. 청솔이 말했다. "바보 같은 놈. 닥쳐라! 인질에다 상처를 입혀서는 흥정이 안 된다. 사지가 멀쩡해야만 천금의 가치가 있는 법이지. 숨통을 끊는 것은 흥정이 안 됐을 때 해도 늦지 않다" 악귀가 험악한 눈으로 높마을의 외눈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외눈. 이 인질을 떠메어 온 것은 경천환이란 말이야. 네가 뭔데 칼을 빼들고 야단이냐." 외눈은 분한 듯이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그만 둬라. 집안 싸움은 안 해야지, 그보다 먼저 다음 계략을 짜기로 하자." 여러 사람은 어둠 속에서 청솔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경천환은 뱀 밭의 진평 외에 한 사람을 데리고 인질을 원불사 옮겨라." "뭐라고요? 대장, 원불사라면 적의 본거지 바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좋은 것이다. 적은 이 한내 마을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배후에다 인질을 숨기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곳은 적중에 있어서 진퇴가 극히 편리하다. 경천환, 빨리 가라!" "예! 그럼 대장님께서는?" "음, 이제부터 세발못(洗髮池) 근처의 송천사(松天寺)로 자리를 옮긴다." "알았습니다. 그럼 먼저 갑니다." 경천환은 급히 강미화 선생을 짐처럼 푸댓자루에 집어넣었다. "진평, 이것을 메어라, 그리고 도리환, 네가 따라 와라." 새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둑맞은 타임머신   "아, 누가 또 온 모양이야. 음, 석청사의 희죽이로군."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악귀가 일동을 돌아보며 낮게 소리쳤다. "뭐, 희죽이라고……." 이윽고, 한 사람의 복면을 한 무사가 웅덩이로 뛰어 들어왔다. "여러분, 오래간만이오. 오, 대장께서도……." "웬일인가, 희죽이?" 뛰어 들어온 무사는 땀에 범벅이 된 복면을 재빨리 벗었다. 나타난 얼굴은 놀랍게도 주문국 무사의 한 사람이었다. 철민이 처음 마을의 뜨락에서 땅벌랑이며 철새랑, 매미랑 등의 주문국 무사의 간부들과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있던 10여 명의 주문국 무사들 속에 섞여 날카로운 눈초리로 철민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그 사나이였다. "이거 정말 주문국 놈 행세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 대장, 그놈들은 정말 기묘한 놈들이오. 도대체 어느 곳의 어떤 놈들인지 통 짐작도 할 수가 없소이다." "혹시 이국(異國)의 요술쟁이가 아니냐?" "글쎄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죽이, 청명사의 대웅전에 황솔의 모습이 나타났었는데, 그건 무슨 요술이냐?" "애, 저도 잘은 모르겠소이다만, 뭔가 얇은 비단에다……음, 뭐라던가…… 매, 매직 잉, 잉크라든가…… 어떻든 그런 것으로 황솔님의 모습을 그려 가지고 그것을 뒤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막대기로 비치더군요." "으음, 그러면 그 소리는?" "예, 그것도 뭐라던가요. 테프, 테프레코다라든가, 아니 테이프 레코, 레코더라든가 하는 것인데, 엘레키라는 것을 쓰는 것 같더군요. 그 조그만 상자는 사람의 음성을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말을 꺼내 쓸 수 있는 도구였소이다." "그 도구에다 황솔의 신음 소리를 담았다가 대웅전 어느 곳에 장치를 한 것이로군."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사방이 열리는 상자를 만들어 거기다 그 상자를 넣고 교대로 상자의 옆을 열면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느 때는 좌측에서, 어느 때는 우측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이 달라진다구요." "으음 그랬었군! 어쩐지 황솔의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 통 그 장소를 알 수가 없었거든." 그 때, 악귀가 나섰다. "그 필름이란 뭐지?" "글쎄 모르겠소. 그런데 그 물건에 불을 붙이면 냄새가 어떻게나 고약한지 아무리 단련된 무사라도 정신을 잃을 정도요." "그것으로 황솔님을 괴롭힌 모양이군."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운 상대였다.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마술을 쓰는 놈들임이 분명했다. "아, 그리고 대장 그들의 두령인 듯한 사나이가 늘 옆에 끼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무척 귀한 것인 모양이오. 자, 이것이요." 희죽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철민의 둥근 통, 즉 타임머신이었다. "뭐냐? 이게……." "뭔지 모르지만, 무척 소중한 것인 모양입니다. 이것을 오늘밤은 사또 녀석한테 맡기고 갔더군요. 사또 녀석이 안방 벽장에 몰래 넣어 둔 것을 슬쩍 훔쳐왔소이다." 범선이 그것을 받아들고 이리 저리 뒤적거렸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듯, 악귀에게 넘겼다. "희죽이 수고했다. 조금 더 주문국 놈들 사이에 끼어 첩자(스파이) 노릇을 해 다오. 악귀, 그 뭔지 모르는 것은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려라. 폭발이라도 하면 큰 일이다." 청솔은 그 기묘한 둥근 통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악귀는 당장 단도를 빼어 들고 발 밑에다 30센티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타임머신을 묻었다. 그리고는 발을 굴러 굳히고 위에다 풀을 덮었다. "이것을 묻은 장소는 잊어라. 이것이 적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이것을 빼앗은 것만으로도 우리의 승리다." 청솔이 어금니를 악문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러면 세발못 북쪽에 있는 송천사로 가자." 청솔은 얼음장같은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이것으로 싸움은 피장파장이다. 두고 봐라." 어두운 벌판의 밤에 바람 소리만이 윙윙거리며 나뭇가지를 울리고 있었다.   중대한 회의   새벽녘의 상쾌한 바람이 잡목 숲이며 불타 버린 사또의 집터 위를 불며 지나갔다. 그 저쪽의 동녘 하늘은 벌써 새벽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한내 마을 청명사의 습격을 마친 철민의 일행은 한 덩어리가 되어 돌아왔다. 본거지를 지키고 있던 땅벌랑과 매미랑이 그림자처럼 나와 일동을 맞이했다. 그들은 뛰어난 무사답게 마중 인사 따위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 어디서 적군이 엿듣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일 뿐이다. 도리어 거창하게 등불을 들고 달려온 것은 이 곳 사또인 정현룡의 부하들이었다. "아, 정말 훌륭한 활약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청명사의 불길이 잘 보이더군요." "자, 피곤하실 텐데 우선 차라도 한잔 드시죠." "이젠 솔본국 놈들도 두 번 다시 이 마을에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정말 경하할 일입니다." 시끄럽도록 저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다. "어, 사또께서……." 부하들이 앞에서 다가오는 인물에게 재빨리 길을 비킨다. 등불에 비친 얼굴은 이 곳의 사또인 정현룡이다.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허리를 굽히는 부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철민 앞에 우뚝 서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엇인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깊이 사죄하는 듯 무릎까지 손을 늘어뜨렸다. 철민의 얼굴에 심한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철민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용재와 남웅이 철민의 돌연한 변화에 근심스레 물었다. 철민은 그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몸이 굳어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철민아, 철민아!" 그러자 비로소 그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철민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아냐. 아무 것도 아냐!" 철민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맥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재도, 남웅도, 종운도, 또 땅벌랑도 의아스러운 눈길을 그러는 철민에게 쏟고 있었다. 단지 사또 한 사람만이 풀이 죽어 힘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사또의 집터 한 모퉁이에 급히 지은 판잣집이 임시로 사또의 집무소가 되어 있었다. 철민은 쉴 사이도 없이 당장 용재, 남웅, 종운, 그리고 땅벌랑을 데리고 그 판잣집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중대한 회의인 듯 돌쇠랑과 매미랑이 직접 경비를 맡았다. 게다가 또 그 바깥쪽을 젊은 무사와 또 한 사람, 그 문제의 희죽이가 사또의 부하들과 함께 멀찌감치 에워싸며 배치돼 있었다. 정현룡 사또는 저쪽의 커다란 나무 밑에 기운 없이 서 있었다. 회의는 길었다. 벌써 밤이 새어 농가의 추녀에서는 아침을 짓는 연기가 어렴풋이 흐르기 시작했다. 회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판잣집 속에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토론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낮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음, 야단났군." "이대로 있다간 큰일이야, 철민아!" 낮으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돌쇠랑과 매미랑, 사또의 부하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엇인가 큰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철민들이 인질로 잡힌 강미화 선생을 되찾지 못한 점과 돌아와서 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전황(戰況)은 매우 불리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돌쇠랑이며 매미랑, 사또의 부하들의 표정은 차츰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까닭은 오적 정현룡 사또만이 알고 있다. 사또는 몇 번이나 자결(自決)하여 철민에게 사죄하려 했으나, 그것도 너무나 무책임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회의가 끝나기를 식은땀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까닭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희죽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경비에 임하면서 속으로는 그 둥근 통을 빼앗은 것이 적에게 예상 이상의 타격을 준 듯한 결과에 혼자 만족하고 있었다. 이처럼 반 이상 전의(戰意)를 상실한 적이 다음엔 어떤 작전으로 나올지, 이번엔 그것을 청솔 대장에게 보고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임무였다. 그 후에도 한참이나 되어서야 철민 일행은 판자 집에서 나왔다. "모두들 수고했소. 그럼 감시하는 사람만 남고, 다른 사람은 쉬도록 하시오." 철민의 음성은 공허하게 울렸다.   솔본국의 솔솔이   나무숲의 큰 가지가 겹겹이 우거진 골짜기 밑에 송천사가 있었다. 북쪽으로부터는 비석향(碑石鄕), 남쪽으로부터는 천석향에 이어진 구릉(丘陵)이 세발못 끝에서 하나로 이어져 높은 벼랑을 이루고 있다. 그 벼랑에서 스며 나온 물이 몇 줄기의 조그만 폭포가 되어 벼랑의 골짜기로 떨어져간다. 그 골짜기에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물보라를 맞는 듯, 송천사의 나지막한 초가 지붕이 있었다. 둘레에는 심한 빗소리 같은 물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가만히 마루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솔본국의 청솔이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듯, 나뭇가지가 버석버석 울렸다. 문득 범선이 목을 길게 늘여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장, 발자국 소리가……. 암만 해도 우리편 사람 같은데……." 범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악귀도 칼을 들고 눈쌀을 모았다. 바람 속에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명 있는 모양이다. 비로소 청솔의 눈이 떠졌다. "대장, 어디 계십니까. 5인의 철갑대(鐵甲隊)가 왔소이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로 잘못 들을 정도의 낮은 소리가 청솔의 귀에 들려왔다. "뭐라구! 5인의 철갑대라고?" "오, 이건 정말 믿음직한 분들이 나타나셨군." 범선과 악귀도 진심으로 기쁜 듯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대장, 오래간만입니다. 흐름별입니다. 범선, 악귀, 두 분께서도 안녕하시니 반갑습니다." 쳐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큰 사나이가 청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악귀, 등불이라도 켜라. 절간에 등불이 켜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겠지." 청솔의 말을 좇아 조그만 등불이 켜졌다. 침침한 오렌지색 불빛이 절간 앞의 풀잎에 움직였다. "흐름별, 이 곳의 상황은 대충 알겠지만, 자세한 것은 범 선에게 들어라." 키가 큰 사나이는 고개를 숙였다. 청솔은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인물들에게 차례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음, 평길, 육장, 원태, 그리고 청목이로군. 잘 왔다." 청솔도 이 뜻밖의 구원대를 얻어 역시 기쁜 모양이었다. "부하를 10여 명 데리고 왔으니, 수하에 넣어 주십시오." 다섯 사람의 뒤에 검은 옷의 이름 없는 무사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대장, 실은……." 흐름별이 약간 곤란한 일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뭔가?" 그 때, 갑자기 엎드려 있는 무사들 뒤에서 맑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비켜라!" 철썩! 가느다란 대나무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리며 엎드려 있던 사나이들 중의 하나가 윽! 하고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나이들이 재빨리 양쪽으로 길을 비켰다. 그 움직임에 동조하듯 철갑대의 다섯 사람도 순식간에 좌우로 비켜섰다. 등불의 불빛 속에 나타난 것은 아직 나이 어린 한 사람의 무사였다. 흔들리는 불빛을 받고 커다란 눈동자가 물에 젖은 듯 빛났다. "오라버니, 제가 왔어요." 소년 같은 얼굴이 웃으면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머리 뒤에서 묶어 등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윤기 있게 빛났다. "솔솔이!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청솔은 얼굴을 찡그렸다. "오라버니, 집의 아버지께서도 걱정하시길래 내가 가서 도와 드리겠다고 했더니 몹시 화를 내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철갑대 다섯 분의 뒤를 쫓아 뛰쳐나왔죠." 청솔은 씁쓰름한 얼굴이었다. "솔솔아, 너는 앞으로 온(溫)씨 댁을 이을 귀한 몸이다. 이 오라비를 생각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너는 이미 우리의 한 패가 아니다. 자중(自重)해야지." 솔본국 온(溫)씨 집안의 솔솔이. 실은 솔본국 무사들 가운데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별세한 그녀의 아버지, 검은솔이 그녀를 거친 자기들의 생활 속에 묻히게 하는 것을 아낀 나머지, 솔본국의 명문(名門) 온씨 집안의 양녀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까 솔솔이가 청솔에게 말한 아버지란 이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솔솔이는 무술에 있어서는 오라비인 청솔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가끔 이웃집의 애지중지하는 화초를 남몰래 꺾어버리고, 혹은 근처의 염색 집에서 잘 염색해 놓은 천에다 딴 무늬를 그려 넣어 솔솔이에 대한 원망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원래가 명분가의 딸이고, 또 그 예쁘장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녀의 그런 장난을 용서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었다. "솔솔아, 너 이제 몇 살이지?" "열세 살이에요, 왜요?" "열세 살쯤 되면……." "오라버니! 꾸중 소리는 이제 듣기 싫어요. 그보다 이렇게 비좁은 골짜기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솔솔이는 초승달 같은 눈썹을 치뜨고 악귀며 범선을 노려보았다. 검은 옷이 도리어 솔솔이를 가련하게 보이고 있었다. 소녀의 취미에 맞게 화려하게 장식한 가늘고 긴칼이 아름답게 빛났다. "높은 곳,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진퇴에 유리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전법인 줄 아는데, 이와 같이 손바닥 같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은 이미 겁에 질린 증거예요. 범선, 악귀, 너희들 같은 인물이 그래 오라버니 곁에 있으면서 이 꼴이 뭐냐!" 두 사람의 무사는 찍 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솔솔아, 말이 좀 지나친 것 같다. 이번의 적은 도저히 솔본, 주문의 무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서운 놈들이다. 나 청솔도 이제는 시종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을 솔솔이는 귀가 없는 듯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오라버니, 백가구(白可口)의 강호에게 대포를 8문 만들게 했어요. 초약(硝藥)도 많이 있죠, 이 밤이 새기 전에 적의 본거지를 격파해 버립시다." "뭐? 대포라고. 그건 또 굉장한 것을 가지고 왔구나. 헌데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어떠냐, 너희들 의견은?" 범선과 악귀, 그리고 철갑대의 다섯 명까지도 놀라는 눈으로 솔솔이를 보았다. 솔솔이라면 그 정도의 것은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래, 그 대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미륵불이 있는 경내(境內)에 이미 도착해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 누구든 심부름을 보내 주세요." "좋다. 그럼 일을 시작하는 셈치고, 철갑대 다섯 사람이 부하들을 데리고 그 대포를 운반해 오도록." "예!" 흐름별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른다. "오라버니, 대포만 가지고는 재미가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청솔은 누이동생이 다가오자, 눈매에 웃음 빛이 떠올랐다. 역시 이 누이동생이 귀여운 모양이다. 솔솔이는 청솔의 귀에 입을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음, 과연 좋은 생각이군. 그럼 어디 한 번 해 볼까…… 범선, 악귀, 이리로……." 범선과 악귀에게 손짓했다. 범선은 품 속에서 지도를 꺼내 네 사람 앞에 펴놓았다. "이 소나무가 두 그루 있는 곳에서 밭으로 빠지는 사잇길에 폭약을 묻어 적의 퇴로(退路)를 막고, 사또 집 뒤를 흐르는 시냇물에 기름을 흘리는 거요. 그리고 철갑대의 부하들에게 조총을 주어 이 곳에 숨어 있게 하고, 우리는……" 솔솔이의 작전은, 청솔이와 범선, 악귀까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것이었다. '음, 과연 돌아가신 검은솔님이 아들이었다면…… 하고 한탄하신 심정도 알만 하군.' 범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대포가 도착했다. 대포라고는 해도 요즘의 야포(野砲)나 중포(重砲)와는 종류가 다르다. 포신의 내부만 1센티미터 정도의 두툼한 청동(靑銅)의 통. 그 외부를 석면(石綿) 같은 것으로 싸고, 주위를 구리철사로 꽉 조인 후, 또 외부를 두꺼운 참나무 판으로 싼 위를 다시 철사로 빽빽이 동여매고 있다. 구경(口徑) 15센티 정도의 요즘으로 치명적 박격포 같은 것이다. 그것을 2문씩 말에 싣고, 따로 탄약을 실은 마차가 한 대, 흐름별이 지휘하여 벼랑 위에 늘어놓았다. "집합!" 청솔이 긴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드디어 총공격의 때는 왔다.   허실음양(虛實陰陽)의 싸움   "희죽이, 희죽이는 없나. 두령께서 부르시네." 땅벌랑이 판잣집 앞에서 소리쳤다. "예, 여기 있습니다." 희죽이는 속으로 아찔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판잣집 앞에선 철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희죽이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철민의 음성은 침통했다. "잘 들어, 이제부터 곧 솔본국의 청솔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이렇게 전해라. 이쪽에서 사로잡고 있는 황솔을 곧 돌려 보낸다. 돈 천냥도 보내겠다. 이쪽엔 그저 강미화 선생을 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또 희죽이, 이건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만약 허락해 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솔본국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해라." "두령, 그럼 우리는 솔본국에 항복한단 말인가요?" "음, 이렇게 된 바에야 하는 수 없는 일이지. 사실은 말이야, 희죽이 아주 소중한 것이 없어져 버렸단 말이야. 아마 틀림없이 솔본국 무사들이 훔쳐 갔을 거야. 우리로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니까, 이쯤 된 바에야 차라리 싸움을 그만 두고 그 소중한 것을 돌려 달랄 수밖에 없어. 그래서 청솔에게 상의를 해 보자는 거지." 희죽이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 그거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럼 곧 다녀오겠습니다." 희죽이는 꾸벅 절을 하자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철민은 재빨리 종운에게 눈짓을 했다. 종운은 자기도 그것을 눈짓으로 받고 남몰래 그 자리를 떴다. "땅벌랑, 부탁하겠소." 땅벌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돌쇠랑을 데리고 잡목 숲 사이로 사라졌다. 판잣집 안에서는 탕탕, 덜컹덜컹 하고 무엇인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마을에 있던 주문국 무사 드디어 항복하다!」 이 통보는 솔본국 무사들을 진심으로 기뻐 날뛰게 했다. 악귀며 범선에게 있어서는, 승리의 직접적인 원인이 희죽이의 활약에 있다는 데에 불만이 있었으나, 그래도 솔본국이 이겼다는 사실은 기쁘다.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무술을 가진 놈들이 이렇게 쉽사리 손을 들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희죽이의 설명을 들어 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청솔은 일시 작전을 중지하고 곧 회의를 열었다. 청솔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항복해 오는 그 놈들을 이쪽 편에 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청솔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일동을 둘러보았다. 그 때 솔솔이가 앞으로 나왔다. 솔솔이의 눈은 곧장 희죽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죽이, 너 이 앞으로 나와라!" 희죽이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모두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라는데…… 빨리 나와!" 솔솔이는 긴칼을 쑥 뽑았다. 새벽녘이 가까운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등불이 당장 꺼질 것처럼 깜박였다. 그 빛 속에서 솔솔이가 빼어 든 칼이 무지개를 그었다. 그 칼끝이 불쑥 희죽이의 두 눈 사이를 겨누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이건, 이, 이건……." 희죽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적미적 물러났다. 악귀도 범선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자기에게 칼이 겨누어진 듯한 심한 공포를 느꼈다. 솔솔이의 온몸에는 섣불리 말을 걸 수 없는 싸늘한 살기 (殺氣)가 넘쳐 있었다. "희죽이! 네 임무는 적의 한 사람이 되어 오랫동안 적중에 숨어 그 비밀을 캐어내는 첩자가 아니냐! 그 첩자인 네가 그렇게 쉽사리 속아넘어가다니! 이 바보 같은 놈!" 솔솔이의 음성은 늘어선 무사들의 가슴을 예리하게 꿰뚫었다. 희죽이의 얼굴은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두 손을 얼굴 앞에서 내저었다.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솔솔이님, 제가 속아넘어가다니요. 이 희죽이 그렇게 천치 바보는 아닙니다." "그래." 솔솔이는 엷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흔들리는 불빛을 받아 깜짝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럼 묻겠는데 희죽이, 싸움의 승패에 관련이 있을 정도로 소중한 물건을 가령 한 때나마 남의 손에 넘겨 주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 그것은……." "더구나 솔본국의 뛰어난 무사조차도 당하기 힘든 무술의 소유자가 무엇 때문에 사또 따위에게 그 물건을 맡겼겠는가, 희죽이!" "그, 그것은 설마 제가 저희들 편에 잠입해 들어가 있는 줄은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사또가 그 물건을 벽장에 숨겨 두는 것을 봤다고 했겠다. 그것이 바로 제 편에 잠입한 적을 찾아 내기 위해 꾸민 함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말이지." 희죽이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솔솔이님, 사또가 남몰래 벽장 속에 숨기는 사실이야말로 그것이 진짜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함정도 꾸미는 것이다. 진실로 소중한 물건을 맡은 것이라면 왜 너 같은 자의 눈에 띄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잠자코 품 속에 넣어 두면 아무도 모를 텐데…… 그것도 일부러 알도록 한 사실이 애당초 이상하지 않는가." 솔솔이의 말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청솔이 썩 앞으로 나섰다. "아, 알았다. 솔솔아, 양(陽)의 뒤에는 음(陰), 음의 뒤에는 양이 있다. 적의 뒤의 또 뒤를 친다. 이것이 무술의 극치다. 희죽이! 솔솔이의 말을 잘 알아들었겠지?" "오라버니, 그것만이 아니에요. 아마 틀림없이 희죽이는 뒤를 밟혔을 거예요……." "뭐라고! 뒤를 밟혔다고." "항복하겠다는 적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마음의 여유는 반드시 틈을 보였을 터, 이러한 자를 미행하기란 용이한 일, 미행하는 자가 있음도 희죽이는 몰랐겠지." "으음, 과연 적이지만 훌륭한 술책이로군." "오라버니, 항복한 척하고 기뻐하는 적의 허를 치는 것은 이 또한 전법의 묘(妙). 잘 알아 두세요." "에잇, 쌍!" 청솔은 긴칼을 뽑아 들고 희죽이에게 덤벼들려 했다. 솔솔이의 왼손이 재빨리 움직여 청솔의 팔굽을 잡았다. "오라버니, 지금 희죽이를 베면 일이 더욱 어긋납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적에게 속은 척하는 거예요." 솔솔이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시원했다. "뭐라구, 속은 척하라고?" "적이 꾸민 함정에 쉽게 빠진 척하고 그 적의 방심한 틈을 거꾸로 치는 거예요. 적은 항복한 척하고 우리는 적이 항복한 것을 기뻐하는 척하고. 오라버니, 허실음양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음, 알았다. 솔솔아, 그럼 이 희죽이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희죽이는 다시 적진으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기뻐한 나머지 모두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보고를 시키면 어떨까요?" 청솔은 몇 번이나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솔은 희죽이 쪽으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앉아라! 희죽이, 솔솔이가 지금 말한 대로다. 급히 돌아가 사또에게 적당히 보고해라. 앞으로는 세심한 주의를 해서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여느 때 같으면 당장 목을 쳐죽이겠지만, 이번만은 용서한다. 알았지!" "예, 예이" 희죽이는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빨리 가라!" 엎드려 있던 희죽이는 일어나 몸을 굽히자 총알처럼 어둠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 때, 희죽이가 달려간 방향과는 반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귀에는 도저히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소리였으나, 여기 있는 무사들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범선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그 밑을 기어들듯 악귀의 몸이 뛰어 날았다. 범선의 손을 떠난 표창은 쌔앵! 소리를 내며, 방금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난 무성한 숲을 해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악귀는 손에 든 칼로 등촛대를 가르고 있었다. 순간, 암흑 속에서 솔본국의 무사들은 숨을 죽였다. 새벽녘에 가까운 바람만이 우수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어디에선가 부엉이가 울었다. 그대로 약 30분쯤 흘렀을까. 첫 동작을 보인 것은 흐름별이었다. "에잇! 달아난 것 같군. 분명히 적의 정찰병이었는데……."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소생했다. "오라버니, 그 정찰병은 희죽이의 뒤를 쫓아 왔을 거예요. 정말 실수했어요. 살려 보내는 것이 아닌데……." "이것으로 우리측 계획도 새었단 말이로군." 청솔이 신음했다. 솔솔이가 그 청솔의 신음을 막았다. "오라버니, 계획이 새었다고 해도,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그래요, 지금부터 당장 공격해 들어갑시다." "하지만, 솔솔아, 우리측 계획이 새었다면 적의 방비도 그만큼 단단할 게 아니냐." 이쯤 되니까 청솔은 무척 신중했다. "오라버니, 왜 그리 겁이 많아졌어요? 화공술(火攻術)에는 밤낮이 없는 법, 가령 계획이 새었다고 하더라도 대포를 막을 방비는 그렇게 쉽지 않은 거예요. 적이나 우리나 계획이 새어버린 지금엔 그저 강공(强攻)할 도리 밖에 없어요.' 확실히 전력을 다해 부딪친다면, 대포며 총을 가지고 있는 솔본국 측이 유리하다. 게다가 지뢰화(地雷火)며 불을 놓기 위한 기름도 풍부하다. 청솔은 재빨리 머리 속에서 그렇게 판단했다,. "듣거라! 이제부터 아까 세운 전법에 따라 사또의 집을 공격한다. 대포를 쏘고, 달아나는 적은 총으로 쏘아라. 항복한 적은 그 자리에서 베어 버려라. 집, 나무, 밭 따위에 오로지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라. 한 명이라도 놓치지 말아. 대포는 흐름별이 지휘한다. 총은 악귀와 대원 3명. 범선은 정면으로 돌격하라. 평길, 육장, 청목은 지뢰화를 매설하라. 원태는 후진(後陣)이 된다. 그럼, 출발!" 여러 사람은 한 무리가 되어, 사당 앞의 어둠 속에서 달려나갔다. 무사들은 모두 밤눈이 밝다. 이 빈틈 없이 무성한 숲 속의 나뭇가지며 작지만 흐름이 급한 골짜기의 냇물, 그리고 험한 벼랑을 기어오르고 뛰어넘으며 순식간에 웅덩이를 에워 싼 언덕 위로 뛰어나왔다. 나무 그늘 밑에 조용히 몇 마리의 말이 매어져 있었다. 그 등에는 이미 분해된 대포며 총, 탄약, 지뢰화 등   솔본의 화공(火攻)   철민의 부대가 본거지를 삼고 있는 곳은, 주문국의 XX마을의 북서쪽 호두리에 가까운 세발못 근처, 원불사를 우측에 바라보며, 이윽고 미륵불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지는 부근이었다. 이 곳은 어쩐지 대나무 숲이 무성해 있었다. 이 대나무 숲을 빠져 나오면, 길은 아래로 내려와 웅덩이가 되고, 세발못으로 흐르는 폭 2미터 정도의 시냇물이 있어서, 그 양쪽은 널찍한 습지(濕地)인데, 억새풀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은 그 대나무 숲을 등에 지고, 잡목 숲에 에워싸여 있었다. 조용히 취락을 이루고 있었다. 거듭되는 솔본국의 습격으로 마을의 집은 반 이상이나 불타 버리고, 잡목 숲도 거의 해골 같은 모습으로 검게 그을린 가지를 뻗치고 있을 뿐이었다. 청솔이 앞을 보자 그 곳에 보따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말고삐를 잡고, 백가구의 강호에 가서 따라온 잡졸(雜卒)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탄약을 나르거나 화승(火繩)의 불을 지키는 졸개로 끌려 나온 것이었다. "자, 출발이다." 청솔은 그들을 재촉했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수송대를 가운데에 넣고 원진(圓陣)을 만들고는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흐름별이 이끄는 대포 부대는 몰래 대나무 숲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당장 화약을 장전하고 탄알을 밀어 넣은 다음, 화승을 짧게 잘라 포격 준비를 완료했다. 그리고 평길, 육장, 청목의 세 사람은 무거운 지뢰화를 짊어지고 소리도 없이 마을 서쪽으로 달려갔다. 총을 든 악귀는 부하들을 데리고 마을의 왼편쪽으로 이동했다. 또 철갑대의 부하 두 사람은 기름이 든 커다란 통을 지렛대로 짊어지고 마을 뒤로 숨어 들어갔다. 동쪽 하늘은 점차 밝아져 갔다. 어디선가 닭이 울고 있었다. 쏟아지는 벌레 소리가 시끄러웠다. 얼마 후, 지뢰화를 매설한 평길 일행이 돌아왔다. 청솔은 솔솔이를 거느리고 마을이 잘 보이는 곳으로 나섰다. 원태가 뒤를 따랐다. "대장, 지뢰화 8개, 분명히 묻고 왔습니다." 평길이 땅에 엎드려 조용히 보고했다. "알았다. 그럼, 세 사람은 범선을 따르라." "옛!" 청솔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날카롭게 불었다. 공격의 신호였다. 그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쾅?" 천지가 진동하는 대포 소리가 울렸다. "피잉!" 여러 발의 포탄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마을을 향해 날았다. 환하게 보라 빛 불기둥이 일었다. 그 빛 속에 박살이 난 지붕이며 기둥이 높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콰, 콰앙!" 두 번째의 일제 사격이었다. 강호의 부하들은 과연 훌륭한 솜씨였다. 이 선제(先制) 포격을 거의 속사(速射)에 가까운 속도로 발사시키는 것이었다. 집의 파편이 불꽃을 끌며 다른 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맹렬한 불길이 일었다. 붉은 불길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뛰쳐나왔다. "탕! 탕! 탕!" 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붉은 불빛 속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세 번째의 포격은 마을 중앙에 불기둥과 먼지를 일으켰다. 집이 천천히 기울면서 지붕이 무너지듯 불길 속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청솔의 일행은 보이지 않는 어떤 목표물을 겨누어 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활을 겨누고 뛰쳐나온 사나이가 화살을 쥔 채 허무하게 총알 밥이 되었다. 뒤를 이어 한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달렸으나, 그도 채 5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어떤 집에서 한 농부가 길다란 막대기를 겨드랑이에 끼고 벌떡, 그는 당장 정신이 나간 듯, 엉금엉금 기어서 나온 집으로 다시 달아나 버렸다. 다음 순간, 그 집에 포탄이 떨어졌다. 집은 산산이 흩어져 휘날렸다. 마을 뒤켠에서 새빨간 불길이 높이높이 치솟았다. 뿌린 기름에다 불을 지른 모양이다. 불길은 검은 연기를 동반하고 윙윙 대나무 숲을 훑어 나갔다. "앗핫하하……. 어떠냐? 솔본의 솜씨가……." 청솔이 붉은 빛으로 검붉게 물든 얼굴을 쳐들고 귀신처럼 웃었다. 그 순간, 우르르, 쾅! 대지를 흔들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일었다. "오, 지뢰화가 터졌다. 주문국 놈들 이제는 마지막이다. 달아날 테면 달아나 봐라. 샛길에는 지뢰화가 기다리고 있을 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방, 지뢰화가 폭발했다. 청솔은 두 번째 휘파람을 날카롭게 불었다. "야아!" 범선은 뛰어 일어나 긴 칼을 번쩍 뽑아 들었다. "나를 따르라!" 아까부터 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네 사람은 회오리바람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불타는 마을로 쇄도해 들어갔다. 청솔의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대포는 일제히 포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흐름별도 대포 곁을 떠나, 그의 장기인 긴 창을 겨누고 마을로 쳐들어갔다. 악귀도 역시 총알을 잰 총을 옆에 끼고, 세 사람의 부하를 이끌어 마을로 달려갔다. 마을은 불바다였다. 불타 떨어지는 집들의 불똥이 소나기처럼 솔본국 무사들 위로 떨어져 왔다. "음, 비,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새파란 얼굴로 울부짖으며 덤벼드는 사또의 부하를 범선은 단칼에 베어버렸다. 악귀는 필사적으로 덤비는 주문국 무사의 칼을 피하며 얼른 총을 겨누어 쏘았다. 정면에서 악귀의 머리 위를 치려던 적은 칼을 치켜든 채, 피할 사이도 없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흐름별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한 집의 판자 문을 냅다 걷어찼다. 그 판자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은 그림자를 향해, 그는 번개처럼 창 끝을 내밀었다. 죽창을 든 농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흐름별은 품에서 폭약을 꺼내 집 안으로 던졌다. 순간, 환하게 불길이 소용돌이쳤다.   "솔솔아, 이만 하면 싸움의 결말도 다 난 것 같구나. 적군의 반은 대포 밥이 되고, 그밖에는 총알과 범선 일행의 칼에 쓰러진 모양이다. 마을 뒤의 대나무 숲이 저처럼 불바다가 되어서는 달아나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솔솔이는 아까부터 무엇인가 불안한 표정으로 마을의 불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 가만히 청솔의 음성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이상해 죽겠어요. 적의 응수가 너무 빈약하군요." 솔솔이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다. "응수라구? 내가 지금 말하지 않았니. 대포알을 먹고 대 부분 나가떨어졌다고." "아니에요, 오라버니! 이 정도의 공격을 받고 패배한 푼수치고는 너무 혼란이 없어요. 게다가 지뢰화가 폭발한 것도 겨우 둘 뿐. 나머지 사람이 모두 저 불 속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으음!" "오라버니, 이것은 역시 희죽이를 뒤쫓아온 적의 정찰병이 우리의 화공 계획을 엿들었다고 봐야겠어요. 적의 수비 는 대단하다고 봐야 돼요." 그 때, 문득 솔솔이가 배후의 어둠을 돌아다보았다. "오라버니! 저게 뭘까요?" 그 소리는 긴장에 얼마간 떨리고 있었다. "대장, 뭔가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부하 중의 하나가 억누른 음성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오라버니, 저건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에요." 우지직하고 작은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다가오고, 붉은 빛 속에 불쑥 무섭게 큰 물건이 모습을 나타냈다. 부르릉, 탕탕탕……. 여태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무서운 폭음이 공기를 뒤흔들며 다가왔다. 그것은 풀과 나무를 밀어내며 서 있는 청솔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옆에 서 있던 원태가 칼을 빼들고 덤벼들었으나, 금방 공처럼 튕겨 땅 위로 나뒹굴었다. "오라버니, 빨리 피해요!" 솔솔이는 청솔을 밀어내고 몸을 굽혀 필사적으로 달렸다. 청솔은 정신을 차리자 솔솔이의 뒤를 좇아 달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셈인가. 저것은 마물(魔物)인가 아니면 짐승인가?'   "어딜 달아나느냐, 청솔!" 철민은 핸들을 굳게 쥐고 소리쳤다. 어제 하루 종일 여럿이서 판잣집에 틀어박혀 회의를 계속하는 척하고 사실은 몰래 현대에서 가져온 2대의 모터사이클, 그것을 하루종일 걸려 두터운 판자와 이것도 함께 가져온 플라스틱 판으로 엄중히 장갑(裝甲)을 한 장갑차였다. "청솔, 이젠 달아나도 소용없다!" 철민은 강렬한 라이트를 달아나는 청솔의 등에 비쳤다. 그 순간, 철민은 라이트의 불빛을 막아 선 솔솔이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음, 뭐야, 계집애 아냐!" 철민은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땅벌랑, 뒤를 부탁하오!" 뒷좌석의 땅벌랑의 소리를 등에 흘리며 철민은 측면의 도어를 밀며 몸을 날렸다. "덤벼라! 솔본국의 비겁한 놈들!" 철민은 박쥐처럼 손발을 펴고 달려들었다. 맨손으로 덤비는 철민을 향해 솔솔이는 크게 칼을 휘둘렀다. 긴칼이 무지개를 그으며 철민의 정면을 향해 날았다. "얏!" 철민은 몸을 웅크려 솔솔이의 칼날을 허공에 흘렸다. 소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서운 검술이었다. '아차!' 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까짓 소녀 하나쯤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뜻밖의 강적이었다. 무엇이든 무기가 있어야겠는데…… 철민은 조금씩 다가오는 솔솔이의 살기를 온 몸에 받으면서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치의 어둠은 나무토막 하나 찾아 내기 힘들었다. "자, 솔본국 온(溫) 솔솔이의 칼을 받아 봐라!" 쨍쨍한 소리가 철민의 귓전을 때렸다. "뭐, 온 솔솔이라고! 건방지다! 난 서울 △△중학교의 철민이야. 자, 덤벼라!" 이제는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철민은 주먹을 낮게 겨누고 솔솔이의 공격을 기다렸다. '아, 짧은 막대기라도 하나 있으면…….' 솔솔이가 문득 웃은 것 같았다. 철민은 반사적으로 2미터쯤 뒤로 뛰어 물러났다. 그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솔솔이는 벌써 총알처럼 달려 들어왔다. 아무 곳도 다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만큼 솔솔이의 공격은 빨랐다. 철민의 몸을 피하는 것도 또 바람처럼 기민했다. 쫓겨가는 솔본국 무사들의 절망적인 외침이며 칼 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솔솔이도 차츰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자기의 칼을 피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가령 첫번째는 어떻게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계속하여 그것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이 눈앞의 이 작은 소년은 몇 번이나 공격을 가해도 그 때마다 날쌔게 좌로 우로 피하며 칼끝을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솔솔이는 풀썩 뒤로 몸을 날리자, 칼 끝을 곧장 하늘로 향해 겨누었다. 필살의 기합이 온몸에 넘쳐 있었다. 철민은 순간, 아, 예쁜 소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 뜻밖의 여유를 철민에게 주었다. 철민의 오른발은 이 때 떨어져 있던 한 자루의 막대기를 가볍게 밟았다. '됐다!' 일순 솔솔이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철민은 순간적으로 몸을 굽혀 막대기를 오른손에 갑자기 그대로의 자세로 중천을 향해 치올렸다. 백은(白銀)의 칼날과 석자(약 1미터) 길이의 막대기가 열 십자로 교차했다. 얼굴을 맞대고 선다고 보였던 두 사람은 동시에 좌우로 뛰어 몸을 피했다. 솔솔이는 차츰 승세(勝勢)가 사라져 감을 느꼈다. 맨손일 때도 칠 수 없던 적은, 이제는 충분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이렇게 민첩한 인간이 있다는 것이 솔솔이에게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철민은 겨우 손에 넣은 막대기를 중단(中段)으로 겨누었다. 길이도 무게도 딱 알맞았다. "자, 덤벼 봐! 왜 무서워졌나?" 솔솔이는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큰 소리 말아. 네가 덤벼 봐라!" "솔솔이라고 했겠다. 우리 집 솔솔이하고 마찬가지로 어차피 너도 건방지고 울보겠지. 자! 솔솔아, 때려 줄까?" 철민은 문득, 이 솔본국의 소녀 무사가 제 여동생 솔솔이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소리쳤다. 솔솔이는 평소 집에서는 건방진 소리를 곧잘 하여 철민이 하는 짓을 곧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는 미운 계집애다. 음, 오늘이야말로 혼을 내줘야지! 철민은 별안간 엉뚱한 곳에서 투지를 불태웠다. 그 소리를 들은 온(溫) 솔솔이는 놀랐다, 결사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서 건방지다느니, 울보라느니 때려 주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솔솔이는 문득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순간 맹렬히 돌입해 온 철민의 타격을 채 피하지 못해 솔솔이는 크게 비틀거렸다. 그 왼쪽의 어깨에 딱! 하는 무거운 타격이 왔다. 솔솔이는 벌렁 땅 위에 쓰러져 굴렀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솔솔이는 머리 속에서 언뜻 생각했다. 바람을 가르며 막대기가 떨어져 왔다. 이번에는 팔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팔은 마비되고 솔솔이는 다시 땅 위에 굴렀다. 솔솔이는 분노로 눈앞이 아물아물했다. 이런 치욕적인 처사를 여태까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솔본국의 온(溫) 솔솔이가 그래 막대기로 얻어맞고 땅 위에 구르다니! 솔솔이는 뛰어 일어나자마자 단도를 재빨리 빼어 들었다. 그것을 양손에 들자, 몸을 굽혀 적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앗, 위험하다!' 철민은 몸을 비켜 옆구리에 아슬아슬하게 단도의 공격을 피했다. 철민은 손에 든 막대기를 내어 던지자. 흐르는 솔솔이의 오른쪽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목덜미를 잡는다. 순간, 솔솔이 수도(手刀)가 철민이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그 왼손을 다시 쳐 올렸다. 솔솔이의 달콤한 냄새가 스르르 철민의 얼굴을 에워쌌다. '우엑, 냄새야!' 철민은 저도 모르게 힘을 늦췄다. 순간, 솔솔이의 몸은 매끄럽게 철민의 손을 빠져 등뒤로 돌았다. 단도의 날카로운 칼끝이 철민의 등뒤에서 엄습해 왔다. '앗, 위험!' 철민은 그 손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꽉 꼈다. 위기였다. 솔솔이가 단도를 또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면, 철민은 등 뒤를 찔리고 말았을 것이다. 잡고 있는 오른손을 놓고 달아날까? 철민은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이겼다!' 솔솔이는 적의 난조(亂調)를 느끼고 필살의 순간을 엿보았다. 적이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자기의 오른손을 놓은 순간 단도를 날린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 날 것이다. 철민을 솔솔이의 그런 심중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잡고 있는 오른손에 그 마음의 움직임이 분명히 전달되어 온다. 오른손을 놓고 뛰어 물러나는 몇십 분의 1초가 진짜 죽는 순간이었다. 적은 당연히 자유로워진 오른손의 단도를 날려 오겠지. '이래선 안 되겠다!' 철민의 왼손은 재빨리 움직여 주머니 속의 타임머신을 잡았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이 방법밖에 없었다. 솔솔이의 오른팔을 겨드랑이에 낀 채 부자유한 오른손의 손 끝으로 둥근 통의 손잡이를 찾는다. 그것을 본 솔솔이의 낯빛이 달라졌다. "앗, 그것은 희죽이가 훔쳐 온……." "바보 같은 소리 마! 그건 가짜야." "역시……." 솔솔이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 순간, 철민의 움직임을 솔솔이는 적의 허점으로 보았다. 솔솔이는 힘껏 몸을 비틀자 재빨리 허리에서 칼집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이런 경우 강력한 무기다. 솔솔이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자 철민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철민은 뒤로부터의 공격에 숨을 죽이고 손끝에 있는 힘을 다했다. 째앵-.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겹쳐 쓰러졌다.   두 사람의 솔솔이   밤은 완전히 새었으나, 거리에는 아직 인적이 없었고, 철길의 건널목 차단기(遮斷機)는 열린 채로 있었다. 그 저쪽에 있는 △△역의 텅 빈 개찰구가 을씨년스럽게 넓어 보였다. 그 인적 없는 도로에 철민과 솔솔이는 양쪽으로 동시에 훌쩍 뛰며 갈라섰다. 솔솔이는 현기증이라도 일어났는지 두어 번 고개를 흔들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지? 이제 못 당하겠다는 걸 알았겠지." 철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 소리에 솔솔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기 둘레에 일어난 이변(異變)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칼집을 떨어뜨린 듯, 오른손의 짧은 단도만이 아침 햇빛 속에 싸늘하게 빛났다. "에잇!" 솔솔이는 낮게 소리치자 핏발이 선 눈으로 철민을 노려보며 그림자처럼 달려들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너 죽고 나 죽자." "농담 말아!" 철민은 날쌔게 몸을 피했다. 여기까지 와서 같이 죽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다. 솔솔이는 약이 올라 입술을 악물고 뒤로 물러서는 철민을 뒤쫓았다. 가로수를 몇 번이나 누비며 철민은 자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로 달렸다. 큰 길에서 싸우다가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뒤가 귀찮기 때문이다. 철민의 집에서는 슬슬 여동생 솔솔이가 잠에서 깨어 일어날 시간이다. 철민은 이웃집 앞에 멎어 있는 자동차의 지붕을 딛고 훌쩍 자기 집 뜰로 뛰어내렸다. "멈춰라!" 솔솔이는 곧장 달려가자마자 철문을 뛰어 넘었다. 철민은 현관 옆을 돌아 자기 방 창 밑으로 갔다. 방에는 야구 배트며 기타 적당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창문으로 들어가려다 철민은 아차 하고 실망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아마 안으로부터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솔솔이는 일어났을까?' 철민은 뜰의 나무 사이를 누비며 달렸다. "멈춰라! 어딜 달아나려고!" 솔솔이의 음성이 아침의 조용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레이스의 커튼 저쪽에 솔솔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한 달음에 솔솔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나, 오빠! 어디 갔다 왔지? 학교도 빼먹고!" 솔솔이는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소리쳤다. "여기 있었구나!" 창 밖에서 들여다보며 솔본국의 온(溫) 솔솔이가 소리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방안으로 일진 바람처럼 뛰어들어 왔다. "어머나, 이 여잔 누구지?" "에잇!" "얏!" 세 가지 각기 다른 외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철민, 온 솔솔이, 그리고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삼각형의 정점이 되어 마주 섰다. "뭐야, 이 여잔 남의 집에 신을 신은 채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니……. 너 불량 소녀구나?" 여동생 솔솔이는 금방 눈을 곤두세우고 소리쳤다. 하얀 얼굴은 화가 나서 붉게 물들었다. 온 솔솔이는 이 때 처음으로 시선을 철민에게서 솔솔이에게로 옮겼다. 그 얼굴에 격심한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철민을 쫓고 있을 때의 결사적인 투지(鬪志)는 급속히 사라지며 심한 혼란이 마음 속에 동요를 일으켰다. "아, 이, 이건……." "온 솔솔이, 잘 봐라. 이건 꿈도 아니고 환영(幻影)도 아니란 말이야." 철민의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솔솔이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손에서 단도가 떨어져 둔탁한 금속성을 냈다. "오빠, 이 여잔 대체 누구지? 오빠 친구야?" "친구? 말도 말아, 솔본국 제일의 검객(劍客) 온 솔솔이야." "온 솔솔이?"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길을 모았다. "내가 졌다! 어떤 요술인지는 몰라도 진정 이것은 기상천외의 수다. 자, 내 목을 쳐라!" 온 솔솔이는 무너지듯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길고 검은 머리가 방바닥에 늘어졌다. "이봐, 얼굴을 들고 사방을 잘 살펴봐." 그 말에 온(溫) 솔솔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길을 들었다. 그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 이상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 빨리 내 목을 쳐서 승리를 거둬라." "이봐, 여기는 말이야, 여태까지 네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 300년이나 지난 시대란 말이야. 알겠어? 여긴 현대의 서울이란 말이야." 온 솔솔이는 차근차근 철민을 훑어보고,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를 살펴보고 방 안에 놓인 피아노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차츰 그녀의 머리 속에 못 박히고 있었다. "저 분은 역시 그대와 같은 무사인가요?…… 정말 아름다운 옷을 입고 계시군요." 아직 네글리제(잠옷) 바람인 솔솔이는 입을 딱 벌렸다. "오빠, 이 여자, 돈 것 아냐?" 솔솔이는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빙그르르 돌렸다. "아냐, 그렇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 실은 300년 전인 옛날의 세계에서 갑자기 이리로 왔기 때문에 놀라고 있는 거야." "300년 전?…… 또 오빠의 허풍이 시작됐구나." 온 솔솔이는 힘없는 모습으로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에게로 다가갔다. "이봐요. 난 이미 패배한 몸.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하는 수 없지만, 그대의 오라버니는 너무도 엄격하신 분. 이렇게 된 바에야 그대의 손으로 내 목을 쳐주시오." 솔솔이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온 솔솔이의 너무나 진지한 표정에 겨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안 모양이었다. 솔솔이는 언뜻 철민의 얼굴을 보더니 단호히 말했다. "좋아,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가르쳐 주지. 오빠! 이 방에서 나가 줘." "야, 너 괜찮겠니? 그 여자는 굉장한 여자란 말이야. 솔본국 제일의 검객이란 말이야." "솔본국의 검객인지 뭔지 모르지만, 어떻든 우선 옷을 갈아입어야 될 게 아냐. 이것 봐, 온통 먼지투성이잖아. 오빠, 레이디가 옷을 갈아입는데 거기 그렇게 서 있을 작정이야. 빨리 나가 줘." 철민은 하는 수 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솔솔이의 방에서 뛰어 나왔다. 그리고 자기 방 도어를 열고 들어가 미리부터 생각해 놓은 물건을 몇 개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 소란통에 아버지며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솔솔아,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철민의 소리에 도어 저쪽에서 솔솔이의 음성이 돌아왔다. "오빠가 작은 집에 갔는지도 모른다고 엊저녁에 거기 가셨어. 늦게 될 테니까 거기서 주무시겠다고……." 철민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정말 재수가 좋은 날이다. 그러면 온(溫) 솔솔이에 대해 귀찮게 추궁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철민은 부엌으로 가서 수돗물을 틀어 입에 대고 실컷 마셨다. 엊저녁부터의 싸움으로 몸은 무척 피곤하지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철민은 세숫대야 앞에 서서 슬쩍 둥근 통의 손잡이를 돌려 홀연히 사라졌다.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라!   원불사로 가는 길을 두 대의 모터사이클이 아침 바람을 가르며 돌진하고 있었다. "땅벌랑!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일거에 강미화 선생을 탈환해야 돼요." "용재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우리에게 이로울 때는 없을 거예요." 두 사람은 탄환처럼 원불사의 산문(山門)으로 이어진 잡목 숲 속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장갑(裝甲)을 풀어버린 모터사이클은 엔진 소리도 경쾌하게 냇물의 다리를 뛰어넘어 원불사의 나무 울타리를 돌파하고 경내로 달려들어갔다. 푸른 이끼로 깊이 덮인 넓은 경내에는 인적이 없었다. 정면의 석가당을 향해 질풍처럼 달린다. 빵빵! 용재가 힘껏 경적을 울렸다. 석가당의 문이 열리며 새 사나이가 달려나왔다. 세 사람 모두 이 처음 보는 괴상한 탈 것에 깜짝 놀랐다. "어엇! 이게 뭐냐? 말이냐, 소냐?" "이 무서운 소리는?" 그러나 역시 경천환은 놀라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 땅벌, 기묘한 짐승을 타고 왔구나!" 경천환은 긴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 경천환을 향해 두 대와 모터사이클이 빙그르 바퀴를 돌렸다. 뱀 밭의 진평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공포에서 폭약(爆藥)을 높이 들었다. 용재의 손에서 한 줄의 로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뻗어 나갔다. 높은 나무 가지를 뒤흔들며 아침 바람이 불며 지나갔다. 이슬이 우르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모터사이클의 시트를 적시고 빼어든 칼날 위로 흩어져 내렸다. 진평의 손에서 날아간 폭약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폭발하는 것과 용재의 손에서 번갯불처럼 뻗친 로프가 경천환의 오른쪽 팔에 얽히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됐다! 달려라." 배기관(排氣管)의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용재가 외쳤다. 경천환은 모터사이클에 끌려 흙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져 갔다. "음, 아앗!" 어떻게 해서든지 오른쪽 팔에 얽힌 로프를 끊어 버리려 했으나, 용재는 점점 더 스피드를 올렸다. 원불사의 넓은 경내를 크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땅벌랑은 폭약의 연기를 일순간에 돌파하자, 멈칫하니 서 있는 진평을 향해 돌진했다. "아앗!" 허둥지둥 몸을 피하는 진평에게 유성처럼 표창이 날았다. "맛이 어떠냐!" 용재는 모터사이클을 세웠다. 경천환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기절해 있었다. "됐다. 강미화 선생을 찾아라!" 두 사람은 날쌔게 모터사이클에서 뛰어내렸다. 단숨에 층계를 뛰어 올라가자 안의 판자 문을 밀어 열었다. "앗, 강미화 선생님!" 안쪽 구석진 기둥 밑에 강미화 선생이 나 뒹굴어 있었다. 땅벌랑이 강미화 선생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이젠 살았어요." "어머나, 넌 용재가 아니냐! 너까지 여기에……? 얘, 제발 좀 가르쳐 다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강미화 선생의 음성은 불안과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그, 그건 선생님, 저, 철민이가 가지고 있는 타, 타임머신 때문이에요." "타임머신?" "네, 그래요. 지금 우리는 솔본국의 무사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을 사로잡아 갔던 놈들이 바로 그놈들입니다." 강미화 선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망적으로 쪼그려 앉았다. 정말 무리도 아니다. 타임머신이니 솔본국의 무사들과의 싸움이니……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강미화 선생에게 믿어질 것인가. "용재님, 어떻든 여기서는 우선 물러갔다가 나중에 천천히 설명을 드리시죠." 땅벌랑이 뒤에서 가만히 속삭였다. "하긴 그렇군. 선생님, 자, 우리 본거지로 돌아가요." "난 이제 싫다. 이렇게 무서운 곳, 돌아가고 싶어." 강미화 선생은 당장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는 선생님을 두 사람은 양쪽에서 부축하여 데리고 나왔다. "용재하고 철민이는 무서운 사람들이로구나. 난 돌아가겠어." 용재는 매우 난처해져서 땅벌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땅벌랑은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끄떡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이 용재님이나 우리들의 두령 철민님께서는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이 수라장(修羅場)도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오니 굽어 살피십시오." 땅벌랑의 성실성 있는 설명에 강미화 선생도 문득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똑똑한 걸음걸이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가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경내를 훑어 본 땅벌랑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아차! 용재님, 경천환 녀석이 달아났습니다그려." "음, 아침 이슬을 맞고 숨을 돌이킨 모양이군…… 아, 그러고 보니 진평도 사라졌구나." 아까 땅벌랑과의 결전 끝에 표창 세 개를 맞고 땅에 쓰러져 있던 진평의 모습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경천환이 진평을 구원해 가지고 달아났는지 혹은 상처를 입은 진평이 경천환을 끌어 일으켜 자취를 감추었는지. 어떻든 이것은 가공할만한 체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아야 했을 텐데……." 땅벌랑이 중얼거렸다. "닥쳐요. 목숨을 끊어 놓다니 야만인이나 할 소리예요." 강미화 선생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것도 우리들의 규율이니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아가씨라니, 나 말인가요?" 강미화 선생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이 사람은 주문국 제일의 무사로서 땅벌랑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을 아마 대갓집의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용재야, 너희들은 도대체……." 용재는 머리를 에워싸고 옆으로 달아났다. "잠깐만 참으십시오, 아가씨. 꾸지람은 나중에 이 땅벌이 받을 터이오니, 우선 이 모, 터모터가 아니고…… 저어……." "모터사이클이오." "아, 참, 그 사이클 말입니다. 이걸 타십시오. 이 수레는 말이 끄는 것이 아니라, 엘레키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정말 귀중한 것이외다. 그렇죠, 아가씨." "땅벌랑, 선생님은 모터사이클 같은 것 다 알고 계셔요." 땅벌랑은 금방 면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렇겠습지요. 워낙 고귀한 신분이시니……."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도 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빙긋 웃었다. "용재야, 이 분을 놀리면 안 돼. 그럼 가요, 땅벌랑!" 강미화 선생에게 이 중년의 소박한 무사가 지니는 인정이 따뜻이 전달되어 왔다. 사정은 아직 잘 알 수 없으나, 자기를 위로하고 기운을 내게 해 주려는 진심이 고마웠던 것이다. 강미화 선생을 뒷자리에 태운 땅벌랑의 모터사이클을 선두로 두 대의 차는 폭음도 드높게 원불사의 경내를 빠져 나왔다. 강미화 선생을 맞이하여 철민네의 진지는 오랜만에 승리의 웃음을 되찾았다. 돌쇠랑, 매미랑이 마을의 부녀자를 지휘하여 잔치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 옷매무새를 고치자 그럭저럭 평소의 명랑하고 아름답고 약간은 엄격한 강미화 선생의 본 모습이 되돌아 왔다. 그 무렵이 되자, 돌쇠랑을 선두로 마을의 여자들이 숱한 음식을 올려놓은 상을 들고 들어왔다. 철민을 비롯하여 용재, 남웅, 땅벌랑, 사또 등, 중요 인물들이 강미화 선생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여러 사람의 입으로부터 여태까지의 경과가 보고되었다. 강미화 선생은 수저를 드는 것도 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으나 차츰 그 표정이 달라졌다. "철민아, 그 타임머신은 나중에 구경하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선생님, 저는 이 땅벌랑이며 사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솔본국 무사들을 무찌르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아니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어른들이 걱정하실 텐데……." "예,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이 상태를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다 끝난 다음, 현대로 돌아가서 설명할 작정입니다." 강미화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민아, 온(溫) 솔솔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용재가 말했다. 철민은 온 솔솔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앗, 그러면 좋겠군. 선생님, 저희 집에 가서 제 동생과 온 솔솔이가 둘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아주시지 않겠어요? 동생이 잘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은 되지만요." "그것도 좋겠구나. 그럼 누가 나하고 같이 가 주겠니?" "그럼, 남웅아, 네가 갔다 오려무나." 그리고 계속 작전 회의가 열렸다. 이래서 싸움은 이제 엇비슷하게 되었다. 아니, 온 솔솔이가 적의 전력(戰力)에서 빠졌으니까, 5.5 대 4.5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앞으로의 적의 동정을 살펴 거기 따라서 이 편의 작전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매미랑의 제안으로 다시 주문국 무사 10여 명을 보충하여 전력을 높이기로 했다. 그 심부름을 위해 젊은 무사가 즉석에서 출발했다. 응원 부대가 오면 그가 그 중의 몇 사람을 지휘하도록 맡기겠다는 언약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떠난 것이다. 철민은 필요한 물품을 자세히 메모하여 남웅에게 맡겼다. 사또는 마침내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여, 이 마을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럼 남웅아, 넌 먼저 출발해라. 선생님, 학교 일은 잘 부탁합니다." 철민은 주머니에서 타임머신을 꺼내어 그 끈을 남웅의 목에 걸어 주었다.   주스와 스테레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溫) 솔솔이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세수를 시키고 머리에 묻은 먼지며 흙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허리에까지 닿는 긴 머리를 둘둘 말아 올려 핀으로 집었다. 그리고 제 옷장에서 그녀에게 맞을 만한 옷을 찾아 바꿔 입혔다. 온 솔솔이는 완전히 인형처럼 솔솔이의 말을 쫓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마음을 턱 내맡기고 있었다. "자, 이 겨울 좀 봐요." 솔솔이는 커다란 삼면경(三面鏡)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엷은 갈색 스커트에 라이트 블루의 심플한 디자인의 블라우스가 볕에 그을려 거무칙칙해진 온 솔솔이를 소년처럼 경쾌하게 보이고 있었다. 말아 올린 머리칼 몇 올이 갸름한 목덜미에 늘어져 있었다. 솔솔이는 제 마음에 드는 밝은 초록 색 손수건으로 말아 올린 머리를 매어 주었다. "어머나, 넌 정말 예쁘구나." 솔솔이는 감탄했다.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온 솔솔이는, 그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긴칼을 휘두르며 투지 만만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인물 같았다. 그 날씬한 모습은 마치 암사슴처럼 민첩하고 들에 핀 꽃처럼 우아했다. "아뇨, 저 같은 거야 뭐…… 아가씨야말로……." 온 솔솔이는 수줍은 듯이 눈을 숙였다. "레코드 안 들을래요? 나, 레코드 많이 가지고 있어요." 솔솔이는 올 여름에 졸라서 산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넣었다. "난 리키 넬슨을 좋아해요. 약간 어른스런 기분도 있거든요, 난……." 온(溫) 솔솔이는 스테레오와 솔솔이가 손에 든 레코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온 솔솔이의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심한 놀라움 뒤에는 불가사의한 즐거움이 솟았다. "우리 춤 춰요." 솔솔이는 손가락을 울리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어렴풋이 배운 남국의 리듬이 하얀 솔솔이의 얼굴을 빛나게 했다. 온 솔솔이도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솔솔이의 스텝을 흉내내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생긋 웃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친구인 듯,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미소지으며 눈길을 주고받았다. "주스 마시겠어요?" 솔솔이는 부엌의 전기 냉장고에서 주스 병을 들고 왔다. 어머니에게 발각되면 야단을 맞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창문에 달린 쇠붙이에 마개를 끼고 오른손 팔굽으로 탁 친다. 마개가 빠지고 주스가 넘쳐흐르는 것을 재빨리 왼손으로 병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계집애가 건방지게…….' 철민의 그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솔솔이는 목을 움츠리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온 솔솔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병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열어 줄께." 솔솔이는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병마개를 땄다. "솔솔아, 솔솔아!" 현관 쪽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네!" 솔솔이는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그 뒤를 온 솔솔이가 따랐다. "아, 강 선생님." 거기 서 있는 사람은 강미화 선생이었다. 그 뒤에 남웅이 서 있었다. "솔솔아, 괜찮니?" "네? 뭐 가요?" "아, 친구가 와 있구나!"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선생님, 소개합니다. 이 친구는 온(溫) 솔솔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분은 강미화 선생님이에요." "온 솔솔이?" "뭐라고! 온 솔솔이!" 제일 뒤의 말은 남웅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날쌔게 몸을 날려 2미터나 뒤로 물러서 유도의 자세를 취했다. "나하고 제일 친한 친구에요. 선생님하고 남웅 오빠도 올라오세요." 온 솔솔이와 강미화 선생은 여태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서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온 솔솔이는 얼른 복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속임수도 전법(戰法)인 이상, 용서는 빌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솔솔이는 당황해서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이봐요, 여기서는 그런 것 다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인사는 하지 말아요." 강미화 선생은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한참 있다가 이 아름다운 소녀가 그 무시무시했던 솔본국의 온 솔솔이라는 것을 알자, 그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아갔다. "괜찮아요……. 여기서는 적도 없고 우리편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복, 아가씨에게 정말 잘 어울리네요. 아주 멋있어요." 두 사람은 온 솔솔이를 부축하듯 양쪽에서 밀며 방으로 들어갔다. "허어, 저 소녀가 온 솔솔이란 말이지. 정말 예뻐졌는 데…… 그리고 솔솔이하고 친구가 되었다니 정말 놀랍단 말이야." 남웅은 중얼중얼 혼자 중얼거렸다. 남웅의 눈에는 마치 번데기에서 마름다운 나비로 변한 듯한, 멋진 온 솔솔이의 변신(變身)이 아로새겨졌다. "흠, 알 수 없는 일이야." 방에서는 강미화 선생과 온 솔솔이가 몸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강미화 선생은 상냥한 언니처럼 온 솔솔이에게 지금이 그 때로부터 300년이나 지난 후의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이상한 기계에 의해 청솔이며 솔솔이네의 시대와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현대에는 칼이며 창을 휘둘러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없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온 솔솔이는 멍하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강미화 선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강미화 선생의 몸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 그녀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이 솔본국의 소녀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여러 가지 일을 상기시켰다. "선생님은 꼭 제 어머니나 언니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요……. 어머님은 안 계시나요?" "제 어머니는 아직 제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대요." 온 솔솔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는 의지할 데 없는 소녀의 고독과 슬픔을 담고 깊은 호수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그랬군요.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님이나 언니가 돼 줄께요. 그리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죠. 수예며 춤, 노래, 또 그림도……." 강미화 선생은 빗을 손에 들고 온 솔솔이의 머리를 잘 빗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스커트에 조그만 얼룩을 지으며 번졌다. "선생님, 저 식사 준비를 하고 오겠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팔 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섰다. "남웅 오빠, 뭘 멍청하니 보고 있는 거예요, 빨리 도와 줘요." 남웅은 얼떨떨해서 뛰어 일어났다. "나, 난 철민이하고……" "남웅 오빠는 오빠 말이면 뭐든지 다 들으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단 말이죠." 솔솔이의 눈썹이 곤두섰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이 더욱 커진 것 같았다. "아, 알았어, 알았어." 남웅은 솔솔이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웅 오빠는 그 쌀을 씻어요." 그러더니 곧, 솔솔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강적(强敵), 왕호룡   "남웅이 자식 뭘 여태까지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철민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웅에게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마을의 삼면에는 이미 견고한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흙 가마를 겹쳐 쌓고, 날카롭게 깎은 대나무 창을 주욱 꽂아 놓아, 이제는 어지간한 무사라도 이것을 타넘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개방해 놓은 한쪽에는 몇 겹으로 조그만 호(壕)를 파서 산병선(散兵線)으로 삼았다. 그 무렵, 이 마을로 이어진 숲 속의 길을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달려오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흰옷에 흰 장갑, 흰 쇠붙이를 머리에 끼고, 직경 20센티미터나 되는 쇳덩어리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윽고 마을 서쪽에 나타났다. 잠시 동안 사방을 살피고 있더니, 두 발을 웅크리고 박쥐처럼 하늘을 날았다. 대번에 바리케이드를 뛰어 넘는다. 높이 5미터나 되는 이 견고한 바리케이드도 이 괴상한 사나이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와라, 철민! 나는 솔본국 무사들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왕호룡(王虎龍)이다. 나와라, 철민! 내 그 모가지를 잘라 주마." 위잉 하고 공기를 뒤흔들며 쇳덩어리가 돌기 시작했다. 무서운 힘이었다. 이것을 보고 철민도 낯빛이 변했다. "어엇, 이건 굉장한 녀석이 나타났는데……." 종운이 머리 꼭대기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철민아, 조심해! 이놈은 좀 무시무시하다." "으음, 왕호룡 녀석, 기어이 나타났구나." 땅벌랑이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그림자처럼 철민이 곁으로 다가섰다. 위잉, 위잉 하고 공기를 가르며 돌아가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지켜보며, 빠른 말씨로, "두령, 저 놈은 솔본국에서도 일급의 무사입니다. 여태까지 저 놈의 손에 쓰러진 주문국 무사가 20여 명이나 됩니다. 언젠가는 우리 눈앞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두령,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땅벌랑은 결사적인 표정으로 긴칼을 잡았다. "자, 어떻게 된 거야. 뭘 꾸물거리고 있어. 하나 둘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보지." 왕호룡은 강철같은 빛깔의 얼굴을 씰룩거리며 크게 입을 벌렸다. 위잉! 쉬익! 쇳덩어리와 청동의 쇠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소용돌이치는 웅성거림 속에서 누구나 그 거대한 쇳덩어리가 자기를 향해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철민도 용재도 종운도 모두 일제히 저도 모르게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핫핫하하! 어때. 자, 간다!" 왕호룡은 바른손에 쥔 쇠사슬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철민은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뭐래도 이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다. 모조리 흰 것으로 차린 모습이라든지 쳐다볼 정도로 큰 키라든지, 보통 어른의 두 배는 됨직한 넓은 어깨 폭, 게다가 사나운 짐승처럼 잔인하게 빛나는 두 눈 등, 모두가 무시무시한 박력에 차 있었다. "자, 간다! 받아라!" 왕호룡은 마치 아이들을 놀리듯 외치며 무엇인지 경을 가는 것처럼 광장 중앙으로 나왔다. 누가 던졌는지 표창이 쇳덩어리에 맞아 흰 섬광을 그리며 빗나갔다. "하하하,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아. 표창 따위를 던지다니……." 철민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음, 이놈이 사람을 뭘로 알고……." 그러나 화가 치민 다고 섣불리 뛰어나갔다가는 그야말로 적의 책략에 말려들게 된다. "철민이란 어떤 녀석이냐? 제일 먼저 처치해 주지, 나와라, 나와!" "쏴라!" 사또가 외쳤다. 2~3명의 부하가 우르르 활을 들고 달려 나왔다. 화살을 활줄에 대고 겨누는 동안, "이얏!" 하는 왕호룡의 부르짖음과 함께 쇠사슬이 쉬익 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뻗었다. 쇳덩어리는 활을 겨눈 사또의 부하들을 돌덩이처럼 날려버렸다. 부러진 활과 화살이 높게 날아 올랐다. "이건 보통 놈이 아닌데……. 솔본국 놈들 반격의 시간을 얻으려고 굉장한 녀석을 파견했군." 용재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좋아, 해치우자. 내 말을 잘 들어. 저 놈은 분명히 굉장한 장사지만,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저렇게 언제까지나 저런 것을 휘둘러 댈 수는 없을 거야. 손발의 움직임이 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우리 넷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거야. 그래서 상대편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해." "알았어, 철민아. 저 쇳덩어리를 피하는 것은 배구에서 하는 회전 리시브의 요령으로 하자." "오케이! 자, 그럼……." 철민과 용재, 종운, 그리고 땅벌랑의 네 사람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흠, 이놈들 봐라!" 왕호룡은 쇠사슬을 짧게 끌어당기자, 다시 유유히 휘둘러 대기 시작한다. 철민들의 공격 태세를 보고, 사또의 부하들은 뒤로 일제히 물러나 멀찌감치에서 요소 요소를 굳게 지켰다. "자, 간다." 정면으로 돌아간 철민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쇳덩어리가 번개처럼 날았다. 일순, "영차!" 철민은 날래게 몸을 날려 쇳덩어리 밑을 빠져 나왔다. 공처럼 굴러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탕! 땅을 울리며 쇳덩어리가 땅바닥을 때렸다. 그 순간, 그것은 벌써 쉬익 소리를 내며 왕호룡의 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숨 쉴 사이도 없이 쇳덩어리는 그대로 왕호룡의 뒤에 낮게 도사린 용재를 향해 날았다. "영차!" 용재도 빙그르르 몸을 굴렸다. 탕! 용재의 뒤, 정확히 2미터쯤 되는 곳에 쇳덩어리가 낙하했다. "잘한다, 용재야!" "음. 요 자식들아!" 왕호룡은 온통 분노가 치받쳤다. 날아오는 쇳덩어리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거나 옆으로 피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짓이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쇳덩어리는 뒤로 물러서면 그 다리에 부딪힌다. 왕호룡의 그 낙하 각도를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잇! 얏! 위잉!" 유성처럼 쇳덩어리가 엄습해왔다. 이마 바로 앞, 1미터까지 다가왔을 때, 철민은 순간적으로 용수철처럼 앞으로 몸을 굴렸다. 타앙! 쉬익! 땅이 울리고 당겨지는 쇠사슬의 울림소리. 몸을 굴린 철민의 머리 위를 쇳덩어리가 돌아간다. 벌떡 일어나는 철민. 그것이 거의 동시였다. 왕호룡은 차츰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쇳덩어리 쪽으로 몸을 던져 피하는 적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번 회전 리시브를 할 적마다 네 사람은 조금씩 왕호룡 쪽으로 다가갔다. '음, 뒤로 물러서면 좋을 텐데, 이놈들, 앞으로 몸을 던지다니!' 왕호룡은 속으로 으스스 두려움이 생겼다. 적(敵)들의 가벼운 몸놀림도 칭찬할만 하거니와, 바람보다도 빠르다고 자랑하던 자기 쇳덩어리의 움직임을 이토록 정확하게 간파하는 능력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어떠냐, 왕호룡! 힘만 가지고는 안 된단 말이야. 빠른 동작을 간파할 수 있는 육감이 필요한 거야." 철민이 외쳤다. "암, 그렇고 말고. 넌 아무래도 트레이닝이 부족한 것 같아. 좀더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하란 말이야." 종운이 약을 올렸다. "에잇!" 쇠사슬의 길이는 이미 10미터도 채 못되도록 줄어들고 있었다. 무거운 쇳덩어리를 자유롭게 돌리기 위해서는 이미 쇠사슬의 길이가 너무 짧아지고 있었다 왕호룡은 민첩한 네 마리의 늑대에게 에워싸인 거대한 곰처럼 바야흐로 완전히 움직임을 봉쇄 당하고 있었다. 다음 번의 쇳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을 피하는 순간이 네 사람이 일제히 돌격 태세로 들어가는 때였다. 회전 리시브의 자세 그대로 단번에 굴러 왕호룡의 다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광장은 일순, 죽음처럼 조용해지고 쇳덩어리의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드높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왕호룡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이얏!" 왕호룡은 그 큰 키를 둘로 꺾어 날쌔게 몸을 굽히고 두 손이 쇠사슬을 쥐자 지상 1미터 쇳덩어리는 낮게 도사린 이 사람의 하반신을 쓸듯 먼지를 일구며 원을 그렸다. 재빨리 철민이 뛰었다. 멋진 공중 회전이다. 무릎을 안아 쥐고 몸을 웅크리자 그 모습은 이미 훌쩍 훌쩍 몸을 날려 공중에서 돌았다. 필사적인 공격을 교묘하게 피신 당한 왕호룡은 네 사람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갑자기 쇠사슬을 집어던지고 바람처럼 달렸다.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땅을 울리며 네 사람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앗, 저 놈이 달아난다." 그런데 달아났다고 생각한 왕호룡은 단숨에 20미터쯤 달리더니 그 기운으로 풀쩍 몸을 날려 전방의 민가(民家)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럽쇼, 저놈은 틀림없이 높이뛰기의 올림픽 대표 선수나 되겠는데……" "종운아! 지금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용재가 종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때, 여기까진 못 오겠지?" "뭐라고? 좋아, 이번에야말로 화살 맛을 보여 주지." "잠깐만, 철민아 이놈, 이걸 좀 봐라!" 왕호룡은 품속에서 네모진 종이 뭉치를 꺼냈다. "봐라, 이건 지뢰탄(地雷彈)이다. 이제 한 놈도 남김 없이 죽여 주마." 왕호룡은 증오에 찬 표정으로 흰 이를 드러내자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자, 먹어라! 한 놈도 남지 말고 저승으로 가라!" 지붕 위에 있는 왕호룡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조리 풀잎처럼 파랗게 질렸다. "으음!"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철민도 속수무책이었다. 머리 위로부터 지뢰탄 세례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왕호룡은 결정적인 승리의 쾌감에 취해 빙그레 웃었다. 그 때, 종운이 흘낏 태양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번쩍! 지붕 위에서 강렬한 광선의 작렬이 눈에 띄었다. "으앗!" 왕호룡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그 큰 몸집이 비틀거리며 훌쩍 몸이 공중에 떴다. 그리고 급경사의 지붕 위를 뚜르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엎드려라!" 철민의 외침 소리에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종운의 손에서 떨어진 손거울이 저만치 떨어졌다. 탕탕! 처절한 폭음 소리가 나며 초가 지붕이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핫핫하, 왕호룡 녀석 드디어 자폭(自爆)했구나." 무럭무럭 이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모두들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심야(深夜)의 활극   강미화 선생은 학교에 다녀온다면서 솔솔이의 집을 나섰다. 남웅도 철민에게 부탁 받은 물건을 갖춰야겠다면서 바쁘게 뛰어 나갔다. 갑자기 조용해진 집 안에서 온 솔솔이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다시 마주 대하고 앉았다. "이봐요, 미스 온(溫), 이젠 다시 돌아갈 생각 말고 그냥 우리 집에서 살아요.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내 부탁해 볼께요." 온 솔솔이는 문득 슬픈 듯이 고개를 숙였다. "솔솔 아가씨, 그렇지만 난 솔본국의 여인, 댁의 부모님은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미스 온. 혹시 오빠가 시끄럽게 굴지는 모르지만……" "오라버니라면, 그 철민 도령을 말씀하시는지요?" 솔솔이는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철-민-도-령! 철민 도령이라고요! 아, 그래요. 개구쟁이 오빠 말이에요." "그런 말하시면 안 돼요. 철민 도령은 훌륭한 분, 좋은 오라버니를 두어서 아가씨는 행복하시겠어요." "하긴 그래요. 가끔 짓궂은 데도 있지만, 사실은 좋은 오빠예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미소지었다. 온 솔솔이의 가슴에 이때 그 철민의 생기 발랄한 얼굴이 뜨거운 숨결이 되어 스며 들어왔다. 온 솔솔이는 가능하면 정말 이 집의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아름다운 의상, 여태까지 본적도 없는 숱한 진귀하고 예쁘장한 소녀의 소지품, 삼면경(三面鏡)이며 텔레비전, 스테레오 등에 솔솔이의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또 철민의 모습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온 솔솔이는 어쩐지 찌잉! 하고 마음 속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현관 쪽에서 갑자기 신발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미스 온, 잠깐만 여기 들어가 있어요. 이유는 나중에 얘기할게요." "여기에요?" "그래요, 그래요. 빨리 이 벽장 속에 들어가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급히 온 솔솔이를 벽장 속에 감췄다. 그리고 허둥지둥 여기 저기를 깨끗이 치웠다. 온 솔솔이에게 보이고 있던 앨범이며 학교의 사진, 제 취미로 모으고 있던 우표철, 평소 아끼고 있는 아름다운 자수의 손수건 등을 정리해서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솔솔아, 아무 일 없었니? 그리고 철민이는 돌아왔니? 암만해도 이상하다. 대체 어딜 갔을까? 작은댁에도 가 있질 않더라." 어머니의 음성이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수고들 하셨어요." 솔솔이는 안정되지 않은 가슴을 달래며 현관으로 나갔다. "솔솔아, 철민에게서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철민은 여태까지 곧잘 시내의 친척집에 가서 묵고 오는 버릇이 있었다. "아뇨, 아무 연락도 없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여보, 이건 필경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경찰에 수색원을 내는 게 어떨까요?" 어머니가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글쎄…… 허지만 철민이하고 한 반인 용재며 남웅, 종운이 세 아이도 함께 자취를 감춘 걸 보니 이건 아마 네 아이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렇다면 철민이가 무슨 사고가 나서 병원에 가 있을 리도 없고……." 솔솔이는 멈칫멈칫 입을 열었다. "저어, 아버지, 오빠는 절대 안심이에요, 절대……" "절대 안심이라니, 네가 어떻게 아니?" "글쎄 안심해도 좋다니까요." 어머니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아버지의 찻잔에 차를 따르다 말고, "솔솔이, 너 철민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구나? 너 철민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아니, 아니에요. 난 몰라요." "솔솔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오빠가 있는 곳을 알면 말해라!" 아버지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솔솔이는 벌떡 일어나서 제 방으로 달아났다. 온(溫) 솔솔이는 벽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하고 엄마는 지금 기분이 대단히 나빠요. 그래서 얼른 도망쳐 왔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벽장문을 빠끔히 열고 온 솔솔이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되시는 철민 도령하며 아가씨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군요. 정말 부러워요." 벽장 속에서 옹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온 솔솔이는 즐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드신 것을 보고, 솔솔이는 제 방문을 잠갔다. 그러고 나서야 살며시 벽장문을 열고 온 솔솔이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미안해요, 좁은 곳에 가둬 놓아서. 이젠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잠드셨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인제 침대에 누워서 얘기해요." 철민이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를 위해 장롱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네글리제를 꺼냈다. "미스 온은 이걸 입어요. 베개는 뭘로 할까……" 그러다가 여행용 공기 베개를 꺼내 바람을 넣었다. 온 솔솔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 전에 얼굴을 씻는 것은 미용상 꼭 필요하지만, 지금 세수를 하러 갔다간 엄마한테 들킬지도 모르니까 이 콜드크림을 써요." 이런 일은 말괄량이 솔솔이의 특기 중의 하나다. 아름다운 병에 든 크림에 온 솔솔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그것을 거즈로 닦아 주었다. 온 솔솔이는 언니의 시중을 받는 여동생처럼 얌전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벽시계가 두 번 울렸다. 방안에는 두 사람의 솔솔이의 숨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부엌 유리창에 검게 비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장갑을 낀 손에 쥔 잭나이프로 교묘히 유리창을 따 열었다. 어둠 속에서 사나이는 무서운 눈초리로 둘레를 살폈다. 바닥이 두터운 농구화는 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를 죽였다. 부엌에서 복도로 그림자처럼 몸을 옮겨갔다. 장갑을 낀 손이 조용히 조용히 미닫이를 밀어 연다. 딸깍! 하고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의외로 크게 울렸다. "누구냐!" 솔솔이 아버지의 음성이 어둠을 뚫고 들렸다. 사나이는 혀를 찼다. "조용해라! 목숨이 아깝거든……." 사나이는 낮게 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팍 손전등을 켰다. 그 빛 속에서 잭나이프가 번쩍 빛났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도둑이야!" "닥쳐!" 세 사람의 몸뚱이가 한데 뭉쳐 뒹굴었다. 손전등의 빛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졌다. "솔솔아, 솔솔아! 빨리 112로 전화를 걸어라! 도둑이다." "시끄럽다!" 그 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잭나이프보다도 빠르게 질풍처럼 뛰어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윽! 으윽!"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함부로 잭나이프를 휘둘렀다. 뛰어든 사람은 그 칼날 밑을 빠져 사나이의 가슴팍을 쳤다. "윽, 아얏!" "에잇!"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딱하고 울리더니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빨리 전기를 켜요!" 아버지는 겨우 전등을 찾아 켰다. 눈부신 전깃불 밑에 서 있는 것은, "어머나, 너, 넌 누구냐?" "소, 솔솔이는?" 온 솔솔이는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었다. "솔솔이라고 부르시기에……" 그 발치에 도둑놈은 맥없이 뻗어 있었다. 방문 앞에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역시 풀이 죽어 서 있었다. "솔솔이 친구냐?" "네, 네가 이 도둑놈을……." 철민의 부모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온 솔솔이는 방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얌전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를 드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솔본국 청솔의 여동생 온(溫) 솔솔이입니다……." "어머나!"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한 달음에 온 솔솔이에게 달려와 허둥지둥 그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 얘는 나하고 한 반에 있는 온 솔솔이에요. 나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오라고 했어요. 얘 우린 저리로 가자."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몸을 껴안듯 하고 방밖으로 밀어내었다. "얘는 호신술(護身術)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도둑 따위는 간단히……" 어쩌고 떠들어대면서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등을 밀고 복도로 나왔다. 그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문득 제 정신이 든 듯,, "다시 한 번 인사를 해야겠구나……. 솔솔아, 솔솔아!" "네, 지금 가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에게 제 방엔 들어가 있으라고 눈짓을 한 다음, 곧 부모님의 방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방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온 솔솔이가 어느 틈엔지 문지방 너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 아냐, 아니에요. 솔솔이라고 불렀지만 미스 온이 아니라 나를 부른 거예요. 자, 저리로 가 있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온 솔솔이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 내었다. "얘, 얘, 솔솔아!" "네, 네, 곧 가겠습니다." 또 온 솔솔이가 대답했다. 솔솔이는 당황해서 그 입을 가로막았다. "네 알았어요. 화장실에 다녀와서 곧 갈게요. 아버지, 인 사는 안 하셔도 괜찮아요. 자, 빨리 가요. 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도 머리의 회전이 빠르고 말솜씨가 좋아, 오빠인 철민을 능가할 정도의 솔솔이지만 오늘밤엔 더욱 말솜씨가 좋다. 게다가 어쩐지 어물어물하는 행동이 수상하다. 아버지가 솔솔이의 뒤를 쫓아 복도로 나가려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백차(白車)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의 부모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진홍빛 섬광등(閃光燈)이 밤의 어둠을 뚫고 백차가 멎었다. 긴장한 얼굴의 경찰관이 민첩하게 달려 들어왔다.   온(溫) 솔솔이의 소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지만 정말 놀랐는데요. 이 집에는 여자 호걸이 있는 모양이에요. 일주일이나 걸려서 이 집의 동정을 살펴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경찰관에 의해 숨을 돌이킨 도둑놈은 수갑을 차고 맥없이 일어섰다. "이 도둑놈을 잡은 분을 좀 만나 뵈어야겠는데요……." 경찰관이 말했다. 아버지 뒤에 서 있던 솔솔이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제 친구예요. 온 솔솔이라고 해요. 호신술을 하거든요. 지금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그냥 좀 놓아 두셨으면 좋겠어요." 솔솔이의 순진한 하얀 얼굴에 진홍빛 섬광등이 비쳤다. "그래요. 그럼 이름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경찰관은 주머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름? 온 솔솔이에요. 학교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학교는 저어……" "너하고 한 반이라면서……" 곁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괜한 소릴 하신단 말이야!"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속으로 눈을 흘겼다. "네, ○○○여중이요." "혹시 경찰에서 학교 문의를 하면 어떡할까." 「여학생 도둑을 잡다!」 어쩌고 신문에라도 나면 어떡할까? 온 솔솔이가 ○○○여자 중학교에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