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http://www.zoglo.net/blog/cuijunshan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912 ]

712    로옹의 춘정 댓글:  조회:5111  추천:0  2016-02-06
                                      로옹의 춘정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오는 소리는 봄의 정취를 가진 사람만이 먼저 듣기마련이다. 옷자락 날리며 봄이 넘어오는 산언덕에 서면 여우도 눈물을 흘린다는 꽃샘철 바람의 예리한 톱날도 점점 무디여 간다는것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한껏 멀어져버린 하늘가에서 싸늘한 미소를 던지던 해님의 미소가 한결 온기를 머금었다.    계절의 달력장은 어김없이 절로 번져진다. 겨울의 절정속에서도 봄은 만물의 소생을 위한 축제를 차곡차곡 준비해 온것이다. 남녘으로부터 겨울과 교대식을 하기 위해 봄이 입나팔을 불며 척척 걸어온다. 병색이 깊어가는 겨울이 계절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늙어진 마음에 싱숭생숭이야 가당하랴만 어떤 즐거움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귀기울이면 겨우내 꿈을 키우던 백양나무의 속살깊은 줄기에서 가지들더러 움을 틔우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방불히 들리는듯 싶다. 이제 빈가지의 끝자락에서 꽃눈이 새록새록 솟아나오는것을 볼수 있을것이다. 젊은녀인들의 춘심이 열리고 행객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얇아지는것이 눈에 띄인다.    개울이나 강에서는 얼음이 쩍쩍 갈라지며 해빙기의 성에장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서 진달래꽃불이 타오르면 들녘에 민들레도 몰래몰래 봄단장을 서두르고있을것이다. 봄이 오는 대지에 춘색이 무르익어가고 있는것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메말랐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2월이 저믈면서 하루가 멀다 하게 낮이면 수은주가 영하 0도 주위를 맴돈다. 온난화로 지구가 더워진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온것이다. 나무가지에 눈을 틔우는 바람이 올해는 자별나게 분주하다. 봄 이 오고있거니 혹독한 겨울인들 오래 버틸소냐?    꽃샘바람 끝자락에서 먼저 꽃부터 피워올리고 다시 잎을 펴내는 연홍빛 진달래 동산에서 뒤늦게 피여난 개나리가 아지랑이를 불러낼때면 해묵은 수양버들도 머리를 풀어내린다. 봄날의 꽃비가 내리여 묵은 대지의 먼지를 말끔히 걸레질하는 멋이 좋고 손끝에 옮아든 풀향기에, 흘러가버린 추억에 가슴도 클클해진다. 퇴색해버린 인생의 낡은 페지를 슬슬 찢어서 바람에 날려보내면 더욱 감회로운 로옹의 서러움이여!    꽃망울이 산고를 앓다가 해살에 꽃이 피고 다시 지고나면 더구나 마음속에 봉오리진다. 그리움의 꽃도 얼핏 피였다가 속절없이 지여서인가 마냥 아쉽기만하다. 웃지 않는 청년은 악마요 웃지 않는 늙은이는 바보라고 하더라만 이렇게 차차 따스해지는 봄날이면 나는 웃음대신 눈물이 난다.    그리운것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것일진대 아쉬운것은 서서히 지워지는것,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분명 어딘가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언젠가는 그 수명을 다하고야 말것을 전제로 한 존재이기에 아쉬운것은 곧 가버릴 무정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이 리라. 이미 사라져버린것들을 뒤쫓아 사라질것들이 모든 로옹들의 서정과 풍경이라면 아쉬움과 그리움만 빼곡히 씌여지는 인생서가 아닐가싶다. 발빠르게 사라져간것들을 기록해보자고 이 봄도 시들해진 인생의 언덕에서 봄을 손짓해본다. 유감과 애석한 일화들로 점철된 로옹의 인생풍경들이 펼쳐지고 또 모여온다.    한창 시절엔 농군이였던 그때, 봄이면 습개논과 차질땅논을 동이땀으로 적셔가며 햇송아지와 싱갱이질 하던 나, 여름에는 불볕에 논물마저 끓던 논벌에서 제초기를 밀던 나, 가을에는 싣걱질로 분주하고 고개를 넘는 공량수레채에 매달려 황소를 헝헝 거리던 나, 겨울에는 모아산기슭을 누비며 나무등걸을 찾아헤매던 나… 아득히 흘러가서 까마득히 잊혀진 나날들이 내 삶의 궤적을 말해줄수는 없으니 추억으로 남는다    내 인생서에 풍경선과 일화들은 농토에서 엮어진것들이다. 그나마 어떤것들은 세월의 등에 업혀가버린후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진것은 젊음만이 아니다. 부젓가락으로 화로불을 뒤적이며 콩한줌을 볶아주던 늙으신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떴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기억들과 더불어 수명을 다한것이다.    자그마한 터밭에 호미날 긁적이시며 밭은 한번 묵이면 그냥 풀밭이 되는거라며 그렇게 악착하게 가꾸시던 모습이 이 봄에 더욱 그립다. 기껏해야 롱구장보다 조금 큰 터밭이건만 어머니는 허위허위 밭고랑을 내시고 고추랑 가지랑 심으시며 흐믓이 웃으시였다. 처음 줄칸을 쳐보는 애들처럼 삐뚤빼뚤 지은 고랑들에 당콩알도 뿌려놓고 종다래끼보다 낡은 흰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시던 어머니였다    살폿이 흙을 덮으며 나가는 가닥탑을 바지런히 뒤쫓으며 자귀를 밟던 뒤집에 명녀랑도 세월아 네월아 가는 언덕너머 파파늙은 로친네로 섰을것이니… 그토록 많은것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남아있는 내 삶은 얼마나 람루한가? 내 인생서의 안표지에 자화상은 그저 모양새가 구전하지 못한 모습일수밖에 없으니 그게 더 서럽다.    청춘은 인생의 봄, 봄은 청춘의 계절이라 하지만 고목봉춘이란 말도 있거니 할미꽃의 봄이기도 한것을 어이하리. 인생은 비록 저믈었지만 늙을줄 모르는 마음을 숫제 봄언덕에 세우둔채 추억에 사는 세대들의《춘정》을 누구들은 우습게 여길수도 있으리. 그러나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한다는것을 안다면 앞서간 사람들을 그렇게 비웃지는 못하리라.                                           봄이 가려하니 내랴 혼자서 말릴소냐                      다못핀 도리화를 어찌하고 가려는가                      아희야, 덜된 술 걸러라. 가는 봄 전송하리라.                              2008 년 2 월 29 일        
711    그대 얻기전에… 댓글:  조회:4309  추천:0  2016-02-06
                                 그대 얻기전에…            한사람이 망망한 사막을 벌써 이틀째나 걸었다. 갈증이 심해서 하늘 땅이 핑그르르 도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사나운 폭풍마저 휘몰아쳤다. 다행히 모래에 묻히지는 않았지만 그만 방향을 잃고말았다.    절망에 빠져 막연한 마음으로 허위적거릴 때 난데없이 저 멀리 오두막 한채가 눈에 안겨왔다. 허위단심 달리며 엎어지며 달려가 오두막안에 들어서니 해빛도 바람도 통하지 않는 어둠컴컴한 그속에 마른 나무가지들만 어수선하게 쌓여있었다.    그가 실망하여 주저앉는 순간 뜻밖에 나무가지에 덮혀있는 녹쓴 펌프가 눈에 띄였다. 희출망외라 얼른 다가가 펌프주둥이에 입을 대고 힘껏 빨았으나 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맥을 탁 버리며 주저앉는데 역시 나무가지속에 묻힌 물통 같은것이 눈에 확 안겨왔다. 부랴부랴 나무가지를 헤치고 물통을 쥐여드니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가 붙어있었는데 글이 적혀있었다.   《당신은 반드시 이 물을 펌프에 넣어야 물을 뽑아올릴수 있다. 그리고 부디 잊지 말라. 당신이 여기를 떠날 때 물통에 원래대로 물을 가득 채워놓을것을!》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무마개를 뽑았다. 아닌게 아니라 커다란 물통에는 맑은 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물을 다 마신다면 목이타서 죽지 않고 이 사지판을 무사히 벗어날수 있을것같았다. 그러지 않고 종이에 적힌대로 물을 펌프에 넣었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락자없이 죽고말것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였다.    종이에 적힌대로 물을 펌프에 넣는다는것은 이만저만한 모험이 아니였다. 그의 내심에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다. 목안은 더구나 타는듯했고 입술은 말라서 바작 바작 부서지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생사를 내건 오랜 내심투쟁끝에 자기를 이겨내고 드디어 물을 전혀 가망없어보이는 펌프에 몽땅 쏟아부었다. 그리고 조바심치며 뻔질나게 잣았더니 과연 기적같이 시원한 물이 콸콸 솟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환성이 터졌다. 물을 량껏 마시고난 그는 먼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넣고 자기 물통에도 물을 넘치게 받아 넣었다. 물통마개를 막으면서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친구야, 네 선택이 현명했어! 자신을 믿으면 좋은 일이 있기마련이야,) 궁지에 빠졌던 그는 사람은 무엇을 얻기전에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인생 철리를 가슴에 새기고 오두막을 나섰다. 생명수가 가득찬 물통을 가슴에 안은 그는 새로운 인생의 오아시스를 향해 힘있게 걸어갔다…    그렇다. 그 누군가의 비유처럼 인생은 가감승제이다. 소학교때 배운 가감승제는 둔재가 아니라면 누구나 거개 잘 터득하고있다. 하지만 인생의 가감승제는 1+ 1=2와 같은 간단한 해답이 나오는것이 아니여서 저저히 잘 풀어나갈수 있는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사건속에서 인생의 가감승제를 어떻게 풀것인가를 멋지게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이름도 혁혁한 인도의 간디였다. 한번은 그가 막 출발하는 렬차에 오르는 찰나에 그만 구두 한짝이 벗겨져서 철길가에 떨어졌다. 하지만 렬차가 이미 떠나기 시작해서 구두를 주을수 없었다.    동승한 사람들도 애석해 하는데 생각밖에도 간디가 얼른 나머지 한짝마저 벗어서 살며시 떨어뜨리는것이였다. 한 려객이 그의 거동이 리해되지 않아 리유를 물었다. 간디는 그렇게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하였다.   《가령 어떤 가난한 사람이 내 신발 한짝을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맹랑하게도 아무 쓸모없는 신이라고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이제 완정한 한컬레를 얻었 으니 당연히 기뻐할게 아닌가요?… 》    이 작은 일화가 그 승객은 물론 우리의 가슴에도 무엇인가 뭉클  와닿게 하지 않는가?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게서 덜어낸것이 다른 사람에겐 더하기로 돌아가고 내게로 더해진것이 또한 타인에게는 덜기가 되여진다는 인생 철리를 리성으로 터득한다는것은 결코 낡아버린 신을 버리는것 같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내것을 덜어내여 남에게 더해주거나 곱해 주라는 법은 없고 또 아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게서 덜어내여 남에게 줄때 그것은 눈에 보이는것일수도 있고 아니보이는것일수도 있다. 마음 한자락이라도 좋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족하다. 그 말 한마디가 언젠가는 굴리는 눈덩이처럼 더 커진것으로 내게로 돌아올수도 있지 않겠는가?    명예는 얻는것이요 인격은 주는데서 현연된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들 모두가 자기에게 명예와 금전과 권력같은것은 더해지거나 곱해지기만 바라고 또 그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 하면서 이런것들이 자기에게서 한쪼각이라도 덜어져 나갈가봐 말초신경까지 바싹 살린다.    그러다보니 물욕이 횡행하고 비리와 비정이 살판친다. 국고이건 남의 재부이건 될수록이면《덜어》내여 자기 흑사심에 끝없이 만족을 더해주려는 인간패류들이 곳곳에 득실거리고 인정세계는 사막화되였다. 하지만 그것을 말세의 풍조라고 개탄하면서도 내게서부터 찾지 않는것이 인간상정이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고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 법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요 함깨하는 인생이여니 사람마다 인생의 가감승제를 덕성으로 풀어나 간다면 리기와 알륵과 자아중심주의만이 휘몰아치는 우리네 인정의 사막에도 이르는 곳마다에 인애가 흐르는 오아시스가 여기저기서 어서오라 반겨주지 않을가?    아닌게 아니라 이 지구촌엔 그래도 자기가 번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자각하고 여러가지 자선사업에 루만금을 기부하는 인애로운 사람들이 있어 인정은 둥글어지고있다. 그들이말로 인생의 가감승제법을 깊이 터득한 고귀하고 후더운 지성인들이라 할것이요 그런 적성의 사람들이 있기에 지구촌에 그래도 사람사는 냄새 가 풍기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인생의 가감승제는 결코 수자로 풀어나가는것이 아니다. 아흔아홉섬 가진 놈이 한섬 가진자에게 백섬을 채우게 마저 달라고 하는 그런 탐욕자들은 소학교 가감승제를 누구보다 뛰여나게 잘 한다고  양양자득할지 모르겠으나 인생의 가감승제 에서는 영원한 락제생들이라 해야 하리라.                          2005 년 5 월 15 일        
710    (잡문) 민족의 쓰레기를 두고 댓글:  조회:4884  추천:2  2016-02-02
                       민족의 쓰레기를 두고                                       진 언         한 인간에 대해 가장 훼멸성적인 평가는 아마도 “너는 인간쓰레기다.”라는 말일것이다. 나아가서 민족의 패류라면 가히 “민족쓰레기”라고 락일찍을수 있다. 인간은 조국애, 민족애를 그 어떤 사랑보다 귀중히 여긴다. 한국에서 더없이 너절한 인간을 “양아치”라 하지만 인간쓰레기, 민족쓰레기라 하는것이 정설일듯싶다.    요즘 한국에 인간쓰레기, 민족쓰레기가 나타나서 (MB심판본부)가 " '일본 간자'로 보이는 이자를 공개 수배하고 응징에 나선다"고 발표하자 민중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고 민족적 지성인들이 지대한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신모란자가 공공연하게 "위 안부할머니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 며 "위안부는 새빨간 거짓말" 이라고 망발을 줴쳤기때문이다.    이 자는 자신의 블로그에“위안부소녀상을 철거해야 한다”라는 글에서“위안부 협상안을 늙은계집, 위안부 할망구들이 또 훼방을 놓고 있다” 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늙은 계집’‘위안부 할망구’로 부르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고 “늙은계집, 위안부할 망구들이 자신의 밥줄이 끊길까봐 난동과 떼를 쓰고 있다. 전 국민이 본질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나발불었다. 대가리에 물이 들어가 미치지 않고서는 못할 말이 아닌가?    또 이(리)용수할머니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맨 왼쪽이 이용수 위안부 할망구다. 늙은 계집, 미국의회에서 거짓증언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블로그에서 자신을 '친일파 서기석'이라 한 그는 “이또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 동상을 철거하라. 일본 35년 통치에 감사하라. 위안부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주장까지 하고있다. 아래에 이 자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자.    안중근 동상 철거, 대한민국 아픈 성찰    안중근 동상을 철거해야 하는 5가지 이유, 고종과 조선왕실의 흡혈귀들과 한 하늘아래 살수 없다. 너희가 죽거나 우리가   죽거나 양자택일뿐이다. 20세기초 송병준 이용구 등이 주축이 된 일진회 혁명가들의 신념이였다.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거대 한 우상같은 존재이다. 나는 안중근 동상을 철거하자고 감히 호소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안중근은 해방후 70여년간 지속된 반일쇠뇌교육의 상징이기때문이다 2. 안중근은 일본군이 침략군이 아니였다는 력사진실을 외면하였기때문이다. 3. 안중근은 고종을 암살하지 않고 반대로 조선을 구한 세계적 혁명가 이토 히로 부미를 암살했기때문이다. 4. 안중근동상은 35년 일본일본통치시기는 조선 2천년 역사에서 황금시기였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상징물이기때문이다. 5. 안중근 동상은 21세기 한국과 일본의 우호협력을 방해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소위 “안중근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안중근, 당신은 고종을 암살해야 했소. 안중근 당신이 고종을 살해했다면 당신은 진정한 역사의 영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나 또한 당신을 존중했을 것이요.    조선민족에게 큰 관심과 애정이 있었던 이토 이로부미라는 세계적 혁명영웅을 암살함으로써 당신이 역사에 큰 수치와 오명을 남겼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오    안중근, 당신에게 깊은 아쉬움이 남소.    이런 자의 사유방식과 론리대로 하자면 이 자의 에미가 길거리에서 개하고 붙어먹어 낳은 잡종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도 억울하지 않을게다. 이런 인간쓰레가 마치 강간해놓고 피해자가 행실이 나쁘다고 말하는 강간살인범 철면피한과 다름이 없다. 그 뻔뻔스러움의 낫짝은 싸룬(沙轮)으로 갈아도 닳지 않을 철면피중에도 구제불능의 후안무치가 아니겠는가? 참된 인간성과 도덕과 량심에는 국경이 없다.     미국의 녀성학교수가 지난해 12월 28일 위안부문제 관련 한일합의에 대해 그는 위안부문제란 1932-1945년 일본제국의 체계적계획과 조직에 의해 실행된 전쟁 범죄로서 그 피해자는 수십만명에 달한다고 지적한다. 뉴욕타임스(NYT)의 한일“성노예” 협상보도와 관련하여 “일본이 끌고간것은 성인들이 아니라 13~14세의 소녀들이였다”고 폭로했다. 연구에 따르면 이들중 40%는 자살을 택했으며 생존자의 비률은 25%에 불과하다. 나치스의 홀로코스트에 비견될만한 잔혹한 성착취의 전쟁범죄였다.    “위안부문제는 한국의 생존 46명 위안부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수십만 녀성들의 생명과 인권, 존엄과 명예가 달린 문제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이번 합의를 통해 위안부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함으로써 일본의 전쟁범죄를 추궁할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해 버렸다. 한국의 희생자가 제기한 세계의 중대한 인도적 문제를 한국정부가 덮어버린것이다.”라고 성토하고있다.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그가 세계적인 량심과 인류의 도덕감정으로 쓰레기보다 못한 악인들을 심판하고 있는것이다. 그는 “한국정부가 이처럼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편 이유를 미국의 아시아회귀정책에서 찾는다. 한국은 미국에의 맹종이라는 광기에 이끌려 수십만 여성들의 생명과 인권, 존엄과 명예가 달린 중차대한 인도적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막아버렸다는것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는 한마디로 말해 '광기(狂氣)로의 회귀'라는게 그의 결론이다.”라고 질타하고있다.    아닌게 아니라“일본국가가 20만명의 조선여성들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나라 녀성들을 상대로 감행한 성노예범죄는 국제적인 특대형 반인륜범죄로서 그 피해자들은 조선반도의 남쪽에만 아니라 북에도 있고 다른 아시아나라들과 유럽에도 있다.”바로 그래서 현일본정부는 만악의 과거를 덮어버리려고 꿍꿍이를 지속해 온것이다. 배달민족의 가장 굴욕적인 사건은 일본민족의 식민지노예가 된것이다. 36 년간 국권을 빼앗겨 유린당하던 삼천리강산을 되찾은 광복후 가장 먼저 해야 될 민족사적명 제는 바로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분자 처단이여 했다고 납함하고있다.      신모라는 민족쓰레기와 너무나 대조적인 의로운 젊은이들이 있다. 무능한 어른들을 보다 못한 대학생들이“소녀상 건드리 지마! 우리가 지킨다!”는 구호를 내걸고 애족으로 피끓는 열혈의 가슴으로 엄동의 추위를 녹이며 문제의“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일제식민지 자가 심어놓은 친일매국노들이 판을 치는 국토라도 불굴의 배달민족정신은 절멸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무리 쓰레기인간이라도 숨통이 붙어있으면 저 기특한 대학생들을 한번만 우러러보라. 꽃같은 청춘을 짓밟히다가 간 수많은 원혼들도 구천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릴것이다.    일본은 지금 불안하다. 그것이 일본의 정서이다. 아베가 꿈꾸는 세상은 일장기가 휘달리는 제국주의 부활이다. 그러한 백년숙적의 켠에 섰다고 희떠운 소리를 하는것은 력사쓰레기로 되겠다는 말과 같다. 오직 민족의 역적들, 민족쓰레기들만이 악취 나는 입으로 환호할것이지만 자신의 노예근성을 만천하에 알리는것이다. 치욕의 력사를 덮어버리려하는 민족, 더구나 잊어버리려 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손끝의 먼지가 한동이의 물을 흐린다고 한줌도 못되는 인간쓰레기들에 국외인이라도 격분하지 않을수 없다. 어떻게 갈리였든 백두산, 한라산에로 뻗은 민족정신속에 리념이 설자리가 없다. 배달민족의 군체에 먹칠히는 민족쓰레기들은 민족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자격마저 없으나 력사의 쓰레기로는 유취만년할것이다. 그런데 쓰레기더미도 골치거리지만 그에서 번성하는 구더기들이 더 우려되지 않는가?!                   2015, 12,26
709    (칼럼) 욕이 나오는도다 댓글:  조회:4951  추천:2  2016-01-30
                                  욕이 나오는도다                                         진 언   ​  어제 새누리당 대표인 김무성이라는“거두”가 자국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해결, 해법으로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자 바람으로 정계는 물론 언론마당이 시끌해져 생각할줄 알고 시비깨나 캔다는 네티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시야비야, 왈가왈부하면서“황당하다”,“천박하다”고 힐난하는데 과연 황당함, 천박함 정도에 그치는 일인가? 이건 엄연히 량국간의 문제로 될 소지가 높은 망발이다.      이 거물의 발언은 외국 녀성(남성)이민의 문을 넓혀 저출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리해할수도 있지만 급하면 부처님다리를 안는다더니 궁여지책에 하책을 내놓는다는것이“조선족이라는 특정민족”을 거들어서 언론의 칼도마에 올랐는데 "국민이 가축이냐? 사람이 물건이냐" 등 비난이 쏟아지고있다. 조선족을“출산기계”로 취급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화제의 요해가 바로 그것이다.      “성문실화 앙급지어(城门失火, 殃及池鱼)”인가? 아니면 숭례문에 붙은 불을 두만강물을 길어다 끄려는 격인가? 내노라 하는 정치거두로서 자국내 저출산문제의 근원이 나변에 있는지도 모르는가? 여기도 그렇지만 저출산의 가장 큰 리유가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막대한 투자가 들어가는데 다자녀양육을 감당할수 없어서 스스로 선택한 가치판단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고 착상했다면 마니마니 곤란하다.      "조선족이 있어서 (이민) 문화쇼크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는데 동족애의 한계인가?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격으로 “나날이 심화되는 저출산 대책으로 매우 창의적인 방안을 내놓았다.”며 문화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 인구를 늘리자는것이라고 풍을 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나물에 그 밥으로서 경이롭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어처구니 없다. 조선족녀인들을 아이낞는 기계로 보느냐? 하고 터져나오는 대성질호를 잠시 눌러놓고 불가능성을 설명하자. 현재 조선족사회의 출산률은 한국보다 못지 않게 낮아서 정부차원에서 두자녀양육을 장려하는 형국이요  원래240만명 가량의 인구에서 47만여명은 이미 한국에 거주하고 있고 10여만명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살고있는데 산수계산을 해도 현유 중국조선족 자체가 한국의 인구증가에 큰 도움을 줄만한 여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코리안드림 등 외류바람에 중국조선족사회에 인구류실이 심각하여 정체성에 위협을 받고 있는데 “대거이주”를 운운하는것은 작정하고 철저히 “와해”시 키려는게 아닌가? 정말 그렇다면 이건 흉계이고 음모이며 우리 조선족사회권에서 절대 불가용납의 범죄이다. 원래 자기네 적대국에 사람을 기하급수적으로 탈출시키려 천방백계를 다하는 그 저의를 누가 모를가? 하지만 미안!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잠간,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쉽게 뽑아서 씹어댈수 있는 무우라도 임자가 있는 한 내키는대로 뽑을수는 없다. 그런데 중국조선족은 무우가 아니다. 엄연한 중국공민으로서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민족자치권을 가지고 주류민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있다. 그런데 중국정부에서 자국공민을 타국에서 제멋대로 빼내가도록 눈을 감고 있을가? 이는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로 비화할수 있다. 모르는가?     어떤 고명한 네티즌이 고견을 내놓아 가로사대“중국의 전통적 정책이 뭐냐하면, 자국민들을 주변국가로 대거 이주시켜서 그 지역의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인데, 중국이 가장 눈독들이고 있는 나라인 한국에, 중국인 조선 족을 대거 진출시킨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일이 된다.…” 라고 하셨다. 이건 그저 편견도 아니라 무지자만이 내뱉을수 있는 망언이다.       한국에 나가고 싶어하고 거기서 정착해 살려는 사람은 거진 다 자기 목적을 실현하였다. 여기 중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로임족으로 꽤 살맛나게 살고있는 사람들, 제밥벌이는 착실하게 하는 개체업자들도 한국에 나가 살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그런데“다산(多产”의 문을 연다고 엄연히 다른 나라(고국일지라도) 를 위해 아이낳아주러 한국으로 이주한단말인가. 이런 발상은 그저 김치국부터 먼저 마신다는 경솔이나 경박함도 아니다.     국내에 남아있는 중국조선족들중 거의다 자신을 중국공민으로 생각하며 한국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지만 다른나라 사람”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국가의식 자체”가 다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객관적이고 지성적이다. 결국, 김거물의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 출산율을 올리자”는 발상은 가로세로 들고 봐도 어불성설이다. "조선족이라면 아이를 많이 낳을것"이라는 발상자체가 자기네들보다 못사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을것이라는 허황한 궁리로서 대방의 분노를 자아 내고도 남을만큼의 심각한 발언이다. 아닌가?       먹고 살기도 팍팍해서, 애들을 키우기가 너무 힘에 부쳐서 않낳으려 하는 모양새 같은데 정치거두로서 가장 긴요한 문제를 모르니 온 국민이 다 삼겹살이랑 아무때나 마음껏 먹으면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기껏 짜낸 궁리가 “조선족 수입”이니 참으로 기특천만한 동량지재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국의 출산률울 높이자고 타국의 조선족을 대거 수입하자는 주장이“가임기녀성”들의 출산의 의욕의 부재에 있다고 여겨져서 나온것이면 너무 순진하다. 순진함은 아이들의 특성이다. 누군가의 말처럼“조선족 젊은녀성 수입해서 임신을 팍팍 시키자는...” 발상은 차기 미국대통령이 되려고 날치는 천하 사기군인 트럼프보다는 한차원 높으나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김대표씨가 동남아에서 돈을 들여 신부를 구해오기보다 차라리 조선족이 낫지 않겠느냐는 인식이라면  너무 야비하다. 아닌가? 아니면 왜 하필 조선족이냐? 한국을 더 살기 좋은 사회로 한단계 끌어올리려는 대신 현재 한국사회의 가난한 사람보다 더 아래계급을 새로이 만들려고 했다면 그 저의부터 타매를 청하는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이날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N포 세대라는 말로 상징되는 취업난, 결혼 포기 등의 구조적 문제와 워킹맘이 힘든 사회적 환경을 정확 히 인지하지 못한 여당 대표가 엉뚱한 말만 하고 있다”며 “특히 조선족 여성에 대한 발언은 모독일 뿐만아니라 ‘애낳는 기계’로 조선족 여성을 들이겠다는 것은 이민 정 책의 기본을 무시한 차별적 발언으로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질타했다.       김무성은 조선족을 무시하는건가? 자국만을 무시한건가? 아니면 량자를 싸잡아 무시한건가? 그의 발언의 무식함이 찬란하지만 그걸 반대하는 리유를 리유라고 들이대는 사람은 더욱 경탄스럽다. “조선족의 위험성은 김무성이가 누구보다 잘 알거다. 조선족 특히 오원춘 같은 사람을 잊은건가? ”,“조선족 연변애들 안마방 대딸방, 노래방으로 가는데 이런 애들하고 자손낳고 살라고?”하며 무척 도고한체 하는데 이미 만명도 넘게 조선족녀성과 결혼한 한국사람들은 어찌들 살고있는지?       흉악한 인간말종은 어디나 있다. 개별적인 흉악범의 일탈을 옹근 조선족에게 덮어씌워 마치 범죄군체인듯 매도하는 머리는 단순하다 못해 맹물이다. 정체와 개체를 구별못해 썩은 진대나무 몇토막을 보고 온 밀림이 다 썩었노라고 고아댄다면 대단히 똑똑한가? 이와달리 자국민을 기만하고 조선족을 비하하는 망언은 인종비하에 이어 조선족비하”, “아이낳는 수입 자판기인가”라고 질타하는 네티즌들도 있는데 랭철한 두뇌를 가진 이런 지성적인 사람들이 다수여야만 한국에 희망이 있다.       일언이페지하고, 아메바같은 단세포동물은 구조가 간단하지만 살아가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이 짧다하여 그 사람이 당장 어떻게 되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단세포동물처럼 살아가는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단세포동물이 될수 없다. 그러나 단세포동물과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죽었다 살아나도 단세포이기때문에,       아멘, 축복이 있을진저…                                                                        2016년 1월 30일                                
708    (잡문) 저들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댓글:  조회:4123  추천:0  2016-01-22
                         저들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진 언      과거를 돌아볼때는“무엇때문이였는가?”라는 물음을 앞세우게 되고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것인가?”하는 물음을 내세우게 된다. 미미한 개체라도 무언가를 본다는것, 그래서 무엇인가를 안다는것은 매우 슬프고 가슴이 벅차는  경험이다. 인간지혜는 극치에 이르러 고도문명을 이루었지만 문명개화의 첫발을 내디딘이래 스스로 만물의 령장으로 군림하여 가지가지 특기할만한 비극을 연출하고있다.    우리는 문명이 잘못되였다고 말해서는 안되지만 언제 한번이라도 절대의 선 (善) 앞에서 악을 선행시키지 않은 시기가 있었던가? 덜떨어진 인간, 연약함과는 반상적이게 오만한 인간, 책임질줄 모르고 자성할줄 모르는 인간은 기특하면서도 가증한 존재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수없이, 전쟁을 하고 피정복국의 민초들을 노예를 만들어 부를 창조하였다. 다른 종족을 공격, 살륙한 인간은 잔인 그 자체이다.    이러한 인간군에서도 악의 근원인 인종을 꼽으라면 우선 민주와 박애정신을 표방하고있는 미국인(죄다는 아니겠지만)을 꼽아야 할것이다. 미국력사에서 가장 반인류적이고 가장 참혹한 인간비극은 아메리카 토착민족인 인디안인들의 토지략탈과 비인간적도살로부터 시작되였다. 1800년대 중반부터는 아메리카대륙을 장악한 미국에의 해 대대적인 인디아인들에 대한 도살이 감행됐다.    이 도살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살아움직이는 전체 인디안을 전멸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1890년대에는 미국내에서 95%나 되는 인디안인이 학살되고 근근히 25만명이 살아남았다. 미국은 인디안인들이 보유했던 토지를 거의다 빼앗고 겨우 2.5 %의 척박한 토지만을 살아남은 5%의 인디안인들에게“인디안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주었다. 기실 허울좋은 보호구역은 미국식대동물원과 다를것없다.    마치 인류가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살던 동물들을 죽이고“천연기념물”로 지정해 감상하는것처럼 인디안인들은 “야만족”이라 불리는 동물에 불과했던것이다. 최종적으로“보호구역”에 수용(감금)된 인디안인들에게는 정신적통제와 때때로 육체적고문까지 하였고 이들 대다수는 렬악한 환경속에서 단백질결핍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인디언들은 동족학살의 피빛기억을 애써잊고“문명한 보호구역”안에서 길들여진 가축처럼 만족해하며 살아야 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력사가 잔악하지 않은적은 단한번도 없었지만 아메리카 토착원주민들에 대한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유럽제국주의와 이후 미제국주의에 의한 인디안인학살은 독일파시즘의 유태인학살보다도 수십배 끔찍하고 잔악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대도살에는 총과칼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됐으며 심지어는 병원균으로 전염병을 전파시켜 대량살상하는 방식도 감행하였다.    두번째 비극은 흑인노예장사로부터 시작되였다. 미국의 흑인노예력사를 감추고 미국력사를 론할나위조차 없다. 미국의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502년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히스파니올라호에 실려 미주대륙에 끌려왔고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 타운에 도착하면서 그들의 기나길고 끔찍한 악몽은 시작되였다. 그들은 두사람씩 쇠사슬에 묶여 닭장같은 좁은 공간에 갇하워 험난한 항해끝에 미국남부지방 대농장에 끌려와서 살인적인 강제노동과 반인륜적인 학대로 혹사당했다.    남북전쟁이전 그들이 노예주인에게 팔려가는 몸값은 노새한마리 값이였다.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시장에서 팔려갈 때 이빨이 튼튼한지 해머로 두드려 보면서 값을 흥정했다. 노예들은 백인들의 가축이나 다름없었던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작가 알렉스 헤이리가 쓴 장편소설《뿌리》에 너무 생동하게 묘사되여있는데 단순히 소설적힘으로서 세계를 진동시켰다기보다 그 참혹한 력사사실 자체였다.    미국의 큰 명절이라는“추수감사절”의 력사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도살한 백인들의 력사흔적이다. 소위“신성한” 날 그네들은 인디안인학살을 굉장하게 경축하기 위해 칠면조를 학살한단다. 학살된 원혼들이 아니라 침략자, 략탈자, 지배자, 탐욕자, 걸신들린자, 식민지략탈자, 도둑놈, 살인광이였던 선조들에 감사한다. 침략과 학살, 허위, 포장, 표방이 미국인원초의 인성이다. 《전쟁을 위한 기도》에서 자신이 성공 하고 승리하기를 소망하고 감사하는것은 상대방이 패배하고 죽기를 소망하고 감사하 는것과 같은것이라고 말한 마크 트웨인이야말로 인간량심의 대표자라 할것이다.    20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살인마의 오만한 횡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인간도살로 치부한 족속들은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지속적으로 피빚을 지고있다. 다른 민족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극도의 미국식오만성과 배타주의를 집요하게 추광하고있는것이다. 각국에서의 민족평등을 요란하게 떠벌리는 미국은 녕악스러운 선조들이 저지른 피의력사에 아닌보살하고있다. 그리고 외부인들도 원인은 묵살하고 현상에만 침흘리고있다. 이 얼마나 가증한 미국식오만이고 세인들의 지독한 편견인가?    중동에서의 이스라엘의 온갖 횡포무도에는 늘 눈감아주고 무슨 정당성을 뇌까린다. 2천여년동안 나라없이 떠돌아다니며 기시받고 학대받았던 유다의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저지르는 만행과 횡포무도는 어떻게 해석될것인가? 스스로“수난민족”이라던 그자들이 지금 과거의 콤플렉스때문에 팔레스티나인들에게 피비린 보복을 자행하고 있는것인가?    편견과 오만이란 얼마나 무서운 고질인가? 동양인들과는 직접적인 리해관계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티나는 락후고 이스라엘은 강대하기에 이스라엘의 대도살을 지지하는 괴이한 심리를 가지고있다. 량자간에 누가 더 좋은가 나쁜가 하는것은 조작성이 얼마든지 가능한 선전매체의 뉴스로는 역부족이다. 아랍인들은 우둔하다고 약하기 얻어맞을수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이 기탄없이 천도를 우롱하 고있는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일인들은 어떻게 돼먹은 민족들인가?    이런 중동깡패의 뒤에는 미국이 서있다. 미제야말로 원칙이요 평화요하고 나발불지만 약소국을 제마음대로 료리하면서 못살게 굴고 못살게 되면 민생이요 국제질서요 하며 남의 나라의 자원을 략탈하면서도“국제정의”를 지껄인다. 이 지구촌에 서 미국만이“옳고그름”을 판단할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편견이고 오만이 아니겠는가? 힘의론리, 강권의 악덕을 과시하는게 녕악하기 짝이없는 미국의 어제이고 오늘이고 래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이 부추기고있는 일본은 어떠했는가?    조선반도를 점령하고 기탄없이 자원을 략탈해 가고도 성차지 않아 중국대륙을 진공함으로써 도처에서 반인류죄를 감행하지 않았던가? 그자들의 조선민족말살정책은 잔악한 오만의 소치였고 소위 “3광정책”은 종족배타성의 광란이였다. 그자들의 남경대도살은 중국인을 한낱 물종으로 여기고 대화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놈들은 세균으로 학살하고 생매장하고 총검술교재로 삼고 강간등 악행을 밥먹듯이하고 피비린 오락으로 삼은 인간말종들이였다.    그 사람의 과거를 알면 오늘을 알고 그의 오늘을 알면 그의 미래를 예견할수 있다고 한다. 이 원리는 개체만이 아니라 국가,집단에도 적용된다. 승냥이는 결코 양으로 진화되지 않는다. 오늘날 일본정부의 군국주의부활의 광대극을 보라. 다시 준동하고있는 일본렬도의 이리떼를 세계 정의의 눈길들이 주시하고 있는가? 주시하던들 아메리카 사자를 앞세우고 다시 덮칠 기회를 노리는 이리떼들이 주춤하기나 할가? 지구는 돌고 광음은 많은것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리가 양으로는 변하지는 않는다.                                                   2013년 8월 15일
707    (잡문) 장하다도다. 그 먹는 입이여 댓글:  조회:4443  추천:0  2016-01-20
                                     장하다도다. 그 먹는 입이여            자초에 입은 먹고 말하는 공능을 가졌지만 인간이 다정다감해지면서 입을 맞추고 빨고 핥는 등 다양한 공능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백사불구하고 먹는 공능만큼 큰 공능이 없다. 불편하기는 해도 말을 못한다 해서 죽지 않지만 일단 입이 먹는 공능을 못하면 죽음을 자초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입의 공능은 주요하게 먹는것이다. 특히 먹기위해 살아가는 식충들에게는 말이다.    일신 천냥에 눈이 팔백냥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명천지 밝은 세상을 보며 살려면 눈이 중요함을 뜻하는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말하면 입은 일신천냥에 구백구십냥이라 할수 있지 않을가? 자고로 죄는 엄하게 다스려졌다 지만 먹은 죄는 종지굽이라 했다. 먹기 위해 저지른 죄는 그만큼 가볍게 처리되여 왔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먹을거리가 잘 생기는 사람을 두고 식복이 있다고 하는데 모든 국민이 식복이 있다면 그보다 더 경사로운 일이 어데 있으랴만 인간의 식복을 무한히 연장시키면 목숨을 가진 다른 동물들에 끝없는 치명의 화가 되지 않을수 없다. 세계적으로 동물 보호법이란게 나오게 되기까지는 인간의 식복이 이 지구촌의 구석구석에 만연되여 동물의 훼멸적인 재난으로 되였기때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먹는 일만큼 급선무가 있겠는가? 아마도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제 머리를 만들고 숨쉬는 코와 보는 눈을 만들기전에 살아가야 할 수단으로서의 먹는 입을 먼저 만들지 않았을가 생각해 본다. 그러지 않고서야 두눈 딱 감고 금방 땅에 떨어진 아이도 젖꼭지만 물려주면 본능적으로 빨아대니 하느님이 점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듯 악착스럽게 빨수 있을것인가?    일언이페지 하고, 먹는 기능은 인간이 살아가는 으뜸가는 기술이라 하겠다. 아니, 먹는 일은 아주 문명스럽게 문화가 되였다. 손으로 움켜 먹느냐? 젓가락으로 먹느냐? 숟가락으로 먹느냐? 포크로 찍어먹느냐? 먹는 방식은 다르지만 아무리 백치라도 먹는 일만큼에는 지력차이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먹는데도 문명하고 점잖게 먹는것과 사흘굶은 범이 탐식하는듯이 우겨대는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표현은 일종 식문화이고 후자의 표현은 탐식심리로서 본능에서 온다.    식문화와 탐식심리가 혼합되여 먹는 정신을 형성하였는지 모르지만 중국은 자고로 먹는 대국이다. 5천년래 중국음식은 남녀가 모두 먹을줄 알고 즐겨먹고 잘 먹고 닥치는대로 먹은 보람찬 문화성과로서 온갖 방법을 대여 더 좋은것, 더 맛있는 먹거리를 장만했다. 그러다보니 천백종의 료리를 만들어냈고 먹는 방식도 천태만상이 되였다. 중국사람들의 입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말할수 있는바 확실히 세계를 놀래우고있다. 이는 국민 스스로 자호를 느끼고있다.    고대중국사람들을 특별히 창조성이 있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휘황찬란한 식문화사는 더구나 세상이 탄복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식문화에서 창신의식은 서로 뒤질세라 비등하여 나는것으로 비행기를 먹지 못하고 뛰는것으로 자동 차를 먹지 못할뿐 먹지 못할것이 없고 먹으면 소화시키지 못할것이 없다. 온세상이 눈이 휘둥그래서 중국사람들이 먹는 장관을 주목하고있다.    수천년래의 기아의 력사가 아마도 국인들로 하여금 특별히 먹는것을 바라고 먹고 싶어하고 만포식하고 탐식하는 현상을 조성한것이리라. 관원으로부터 로백성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권태를 느끼지 않는 일이 있는데 바로 소화공정이다. 그래서 배터지게 먹고 마시는데 열을 올리고있고 게다가 자기 돈지갑을 열지 않아도 되니 더구나 목숨을 내걸고 먹고 마신다. 아니면 배가 불러죽고 너무 마셔서 죽었다는 뉴스들이 거짓말처럼 드문히 보도되지 않을것이다.    먹기내기에서는 어느 선진국가 국민도 중국국민들에게 패하지 않을수 없다. 국민의 입이야말로 무서운것이다. 잡아먹지 말라고 하는것일수록 더먹고 버젓이 내놓고 먹을수 없으면 몰래 둘러앉아 먹는다. 진귀한 동물일수록 더 잡아먹고 절멸된 동물 이라면 더구나 먹지 못해 군침을 흘리고 냠냠거린다.    위가 불평을 부리고 홍문이 고장나도 상관없다. 얻기 힘든것일수록 더 잘 먹고 값이 비쌀수록 더 먹고싶어 하며 좋은것을 먹어야 인끔이 올라간듯이 여기고 비싸기만 하고 맛은 없어도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해 먹고… 먹는 일이 이 정도에 이르면 식문화가 아니라 다만 먹자는 심리뿐이라 해야 할것이다.    근년래 죄를 지은 탐관들의 장물을 수색하다가 현금과 금은장식품, 딸라외에도 고급술상자들도 발견된다고 한다. 그저 먹는 락밖에 없는 시골농부라면 그게 리해가 가는 일이겠지만 사회정영들이라는 관원들이 그렇게 한다는것은 유치하다고 해야 하리라. 외국에도 탐관들이 있지만 집에서 몇십병의 모태주따위들이 나오는것은 극히 드믈다고 한다.    그네들도 고급명주를 받았겠지만 다 마셔버리는것이다. 오직 수준이 없는 중국탐관들만이 그랑데가 각국의 금화, 은화를 한잎한잎 모아두는것처럼 한병한병 소중하게 간직해둘수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가가 있다더니 오직 탐오하기 위해 탐오수뢰하는 그런 탐관이 있다면 웃겨도 한참 웃기는 일이다. 하긴 그랑데는 돈을 쓰기 위해 번것이 아니라 벌기 위해, 모으기 위해 번것은 사실이지만도 말이다.    중국사람들의 먹는심리가 만약 그저 탐식에서 표현된다면 물질이 극도로 결핍하였고 정신이 극도로 낮았던 후유증이라고 리해할수 있다. 그러나 먹는 과정에 동물 학대성의 잔인성의 표현은 불가사의하다. 한마리 생선을 잡아내여 죽지 않게끔 배를 가르고 비늘을 없앤다음 펄펄 끓는 기름가마에 슬쩍 목욕시키고 다시 온갖 조미료로 화장을 시켜서 식탁에 올려놓는다. 그때까지도 물고기는 죽지 않고 눈알을 굴리고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한다. 그런 고기를 보고 서양마나님들은 감히 젓가락을 대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기겁하기커녕 희희락락해하고 손을 비벼대며 젓가락을 육박의 창끝인양 꼬나들고 단말마적으로 몸부림치는 고기를 향해 용감하게 돌진한다.    산원숭이의 두개골을 깨고 숟가락으로 뇌수를 퍼먹는 사람들의 피비린 향연에서 우리는 일종 흡혈자의 잠의식의 발설심리를 읽을수 있다. 또 한가지는 이제 곧 먹어치울 산고기를 벌겋게 단 철판우에 놓고 서서히 굽는것인데 그것이 속이 타서 입을 짝짝 벌리면 간장이나 기름을 먹이고 식초를 먹이여 다섯가지 향료맛이 온몸에 배게 한다고 한다. 그 경우엔 마지막 환절인 먹는공정이 요긴한것이 아니라  학대하는 그 긴긴 과정에서 느끼는 미식가들의 다시 없는 자극과 쾌감이 중요한것이다.    인간은 유사이전부터 동물을 잡아먹으며 동물보다 류다르게 고급적으로 진화되여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간혹 농부산품시장에서 잉태한 소, 개. 양들을 잡아 배속에서 꺼낸 새끼같은것을 버젓이 내놓고 파는것을 보면 위대한 식문화의 장거들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고 세상에 태여나보지도 못하고 배속에서 죽어야 했던 그 생명들을 축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축복하지 않고 무엇을 더 할수 있겠는가?    먹는 심리와 식문화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전자는 본능이고 본능은 선천적인것으로서 기인에 의해 결정된다. 후자는 수양으로서 후천적이고 교육받아서 천천히 형성된다. 일찍 선진시기에도 음식은 정신문명의 체현이라고 인식하였다. 하여 《부례지초, 식여음식(夫礼之初,始于饮食)》라는 고훈이 있게 되였다. 빛갈이 불성모양이여도 아니 먹고 냄새가 고약해도 아니 먹고 때가 아니면 아니 먹는다…는 공자의 말씀도 세상에 널리 와전되고있다.    입고 먹는데 만족하면 영욕을 안다(衣食足,知荣辱)고 하는데 먹는데 병태적심리를 가진 사람들은 이 명구를 영원히 알수 없을것이고 또 알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배부르니 평안감사 조카같이 보인다지 않는가?  하오나 오직 먹는 심리만 있고 먹는 문화가 없는 민족은 래일이 그리 명랑하지 못할줄로 안다.                                     2007 년 3 월 10 일    
706    (잡문) 《나라오락병》 댓글:  조회:3883  추천:0  2016-01-20
                                      《나라오락병》          마작놀이를 병이라고 하면 마작애호가들이 대뜸 심기불편해 하겠지만《마작병》이라는 이 병명은 일찍 호적선생이 지은것이다. 호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호적은 중국에서 그 이름이 혁혁했던 문학가, 사상가였다. 일찍 1927년 북경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진독수와 함께 백화문학을 제창하여 구두어문학의 현대 화에 진력하였다. 1948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마작(麻将)을 마작(麻雀)이라고도 하고 혹은 작패(雀牌)라고도 하는데 명조시기 마조 (马吊)라는 종이패쪽에서 연변된것으로서 그 력사가 아주 유구하다. 호적선생은 일찍 각 나라 국민의 특수한 애호를 보고 영국의《국희(나라오락)》는 판구 (板球ㅡ크리켓)이고 미국의《국희(国戏》는 야구이고 일본의《국희》는 씨름 (相扑) 이며 중국의《국희는 마작》이라고 했다.    호적선생은 아편, 팔고문, 종발이 중국의 3대 재난이지만 기실 마작을 덧붙여 4해가 있다고 하였다. 앞에 세가지 재난은 근대혁명을 거쳐 이미 력사의 흔적으로 되였지만 네번째 재난은 날따라 흥성하여 조금도 쇠락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통절하게 개탄했다고 한다.    그는 통계를 내보았는데 당시 전국에 매일 적어도 100만개의 마작판이 벌어지는데 매 탁자에서 여덟판을 논다고 할 때  매 하나의 탁자에서 소모되는 시간을 적게 쳐서 반시간으로 잡아도 400만 시간, 즉167만 날을 허송한다는 수자를 내왔다. 돈을 먹고 잃는것과 정력소모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연후에《내가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보았지만 진보를 추구하는 민족과 문명한 가정이 이렇게 시간을 페하고 일을 망치는것을 본적이 있었던가?》하고 자문했다고 전해지고있다.   호적선생이 외국에 류학할 때 마작이 해외에 류행되고있는것을 보았는데 수출품에서 정종으로서 구미와 일본에서 한때 아주 류행된 유희로 되였다. 구락부의 많지 않는 탁상마다에 모두 마작이 준비돼 있었고 서점가에도 마작연구에 대한 소책자들이 많이 진렬되여있었으며 미국에서는 마작연구회 따위의 전국성적인 조직까지 나와있어 많은 중국류학생들이 돈이 떨어지면 마작기능을 배워주고 돈을 벌었다고 한다.    호적선생은《아편전쟁이래 렬강들이 중국을 강탈하고 있을 때 국인들 모두가 원쑤를 갚는다고 별렀는데 누구도 서양을 정복하는 선봉대가 바로 136개의 마작장군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고 개탄한바 있다. 그런데 1927년 다시 서양 각국을 려행할 때 마작은 이미“시렁우에 골동품”이 되여버렸고 마작에 대해 묻는 사람이 희소다는것을 발견하였다.    호적선생은 내막을 알아본후《근로분투하는 민족은 절대 마장군에게 정복되지 않으며 마작은 오직 한탕주의에 물젖어 시간을 아끼지 않는 민족의 전리품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마장군은 활개치며 해외를 한바퀴 돌아다닌후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동방정신문명국가의 국수, 국희로 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호박사는 만약 거국적으로 마작에 미친다면 한개 민족으로서는 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마작의 전신인 마조가 명조때 널리 퍼져 사대부들이 온하루 온밤을 마조를 놀아서 본직을 망쳤다는것을 고증하였고 청나라사람 오위업도 명조의 멸망은 마조탓이라고 생각했다고 서술했다.    호적선생은《한시기 마작에“정복”되였던 외국인들은 크게 깨닫고 더는 마작의 노예로 되지 않고 다시 분발하고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중국사람들이 마작판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있는가? 남자들이 마작을 노는것은 소일하기 위해서이지만 녀자들은 마작놀이가 집일처럼 되였고 로친네들이 마작을 주무르는것은 후반생의 큰 사업으로 되였다. 마작치기는 언제 끝을 보게 될런지.》하고 개탄했다.    현대중국에는 사람들을 심사숙고하게 하는 이런저런 사회병들이 만연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국수병에 속하는 마작병이 가장 위태롭다고 말할수 있다. 현재 마작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해탈된 사람들이 있지만 극히 소수일뿐 마작병은 갈수록 각계각층의 남녀로소의 골수에까지 속속들이 파고들고있다.    연길의 골목골목에 총총히 들어앉은“로인활동실”이 그렇듯 활성화를 보이고 있는 사실에서만도 마작병의 여하를 예측할수 있거니와 거기에 수많은 자택들에서 벌리는 마작판까지 감안한다면 더구나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60ㅡ70년전에 전국에 100만개의 마작판이 벌려졌다면 지금 적어도 천만개는될것이다. 개혁개방의 춘풍이 이 삶의 현장에 여유로움을 실어오면서부터 13억 인구를 가진 대국의 장성안팎, 대강남북,  방방곡곡의 고즈넉하던 안방들에도《국수》의 기풍을 부흥시켰으니 마작의 중흥시대라 쾌재를 불러야 하리라.    마작은 서방에서 합작의 의미인 카드놀이ㅡ브리지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자사자리적이고 단독작전을 하기에 호혜합작을 강구하지 않는다. 자아본위로부터 처처에서 방비하고 다른 사람과 합작하지 않고 서로의 리익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주류문화는 아니지만 확실히 존재하고있는바 나라를 망치고 국인을 망치는 병태적 문화로서 이런 현상을 “마작병”이라고 이름한데는 리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마작을 중국에만 있을수 있는 국수(国粹)라고 하지만 기실 그것은 낡고 무거운 헌보따리이다. 마작은 하나의 마귀거울로서 마작군들의 성격, 인품, 수양과 심리상태를 비춰보인다. 마작은 그림자와 같은 유령으로서 때론 미칠듯 좋아하고 때론 고양이 락태상을 짓게 하면서 땅꺼지도록 탄식하게 한다. 마작이 지력경쟁인가? 그럴수도 있겠다. 마작을 노는 과정은 정보를 알아내고 인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라 한다. 마작판은 주관인소와 객관인소가 형성한 양성순환과 악성순환이 있기에 각 방면의 운명을 주재한다.    마작을 사유의 능력을 단련하는 체조라고도 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분명한것은 자오록한 담배연기속에서 장시간 한자세로 앉아 동일한 손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순환하는 초조한 심리불안과 긴장, 엇갈리는 희열과 일락천장하는 기분의 엇갈림속에서 소리없이 소모되는 정력과 심신의 쇠갈은 생명을 갈아먹는다는 그 사실이다.  진짜 생리상에서 만성자살을 예고하는 마작병이란게 있다고 한다. 의학적연구에 의하면 매 하나의 마작쪽에는 800여만개의 병독성미생물이 묻어있는데 대장간균, 금황색포도균, 련구균, 결핵균 등 각종 병독이 득실거린다는것이다. 그것을 수없이 주무르고 만지작거리고 그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고…그리고 또…그러나 마작에 한번 혹하면 세상없이 즐거운 오락으로 삼으면서 생활을 영위하고있다.    지성인들은《화합철학이 중국전통문화의 정화라면 마작문화는 문화지게미, 쓰레기이다. 전자는 수천년동안 계승되여 온것이라면 후자는 이 근년에 시장경제의 물결따라 범람한 력사의 침적물이다. 화합문화의 맑은 바람으로 마작문화의 먼지를 날려 버려야 한다. 중국전통문화의 주류로서의 화합철학은 마작병에도 량약이다.》라고 대성질호하고있다. 누군가 이렇게 읊고있다.                         총명한 이 땅에서는                              마작마저 쾌락이여라.                                    기민함을 증명하는듯                                            령혼을 비틀어버리네                       네모진 장성이연만                              투기의 심령을 가두지 못하네                                    국인들 모두 병든것 아니라면                                             나라가 병든것 분명하여라.                      라태와 투기가 낳은                              아, 마작이여, 너는                                      어제도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있느냐?                                              2007년 8 월 19 일
705    (교육칼럼) 이번엔 “비자루교사”라? 댓글:  조회:4600  추천:1  2016-01-19
                          이번엔 “비자루교사”라?                                        진 언         사람은 오래 살다보면 별 해괴한 참변도 다 보게 되는 법인가보다. 지난해“인분교수사건”으로 사람들을 경악케 하더니 이번엔 학생 여럿이 달려들어 비자루로 교사를 때린 사건이 터져 한국내에서 교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또 다시 높아지고있다. 얼핏 듣기만해도 불가사의한 “빚자루교사”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해 12월 23일 경기도 이천의 한 특성화고교에서 기간제 교사가 남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해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천시 A고교 1학년 교실에서 남학생 3명이 기간제 교사 B(39)씨를 폭행하고 같은반 학생들이 이를 촬영해 (소셜 네트워크서비스)에 게시하면서부터이다. 기간제교사 B씨는 수업출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선생님께 바자루를 휘두르고 욕설질했다.      비정한 사건뒤에 충격적인것은 폭행에 가담한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 교실에서 일어났으면 다른 학생들도 있었을텐데 아무도 만행을 말리지 않았다는것이다. 정의는 늘 지각하지만 결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기 스승이 모욕당하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어서 수수방관했다면 역시 가증스러운 넋들이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학생의 인권이 보호받을수록 교권이 추락한다면 이률배반인가? 망조가 든것인가?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학생,학부모 교권침해사건이 5년사이 2만6천여건에 달한다는것이다. “2011~2015년 교권침해 현황”에 따르면 이중에 폭력과 욕설이 1만6485건으로 전체 62%에 달했고 수업진행방해 5538건(21%), 기타 3165건(21%), 폭행 436건(2%) 순으로 나타났다.” 교권이나 학생보호권은 인권이 아닌가? 상술한 통계는 인권수호가 아주 잘되고 있다는 역설인가?       언발에 오줌누는식으로 문제가 생기면 법안만 만들고 문제아 딱지만 붙이면 해결될것이라는 소아병적인 진단은 벌써 재발을 심어놓고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고훈을 고집할 현시대가 아니지만 “사도존엄”이라는 관념이 희박해졌다해도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인간의 기본도의도 모르면 과시“似人不人 (그 모습은 사람과 같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이라 할것이다.       학교 징계위원회에서, 학폭위에서 심사를 하고 징계위원회에서 이 학생들에 대해서 자퇴를 시킬것이냐, 아니면 일정한 징계를 주고 학교를 다니게 할것이냐 의론이 분분한데 교사들은“교실에서 어떻게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했는데 퇴학을 안시키고 존치를 시킨다는 말이냐, 학교를 다니게 한단 말이냐”하고 분개하고있다        반대로 일부 외연에서는 “아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보내버리면 이 학생들은 어디를 가느냐, 반성의 기회를 주고 다시 학교를 다니게 하자”는 목소리도 높다고 한다. 속담에 내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따가운줄 안다고 국외인들이 셈평좋게 군자연하고 나서는데 대해 국내외를 막록하고 교원으로서는 거부감이 앞설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교권보호법”이 무난히 국회를 통과했단다. 국토가 다르더라도 다같은 교원으로서 박수를 보내고싶다. 그런데 교권보호법이 없어서 일어난 사건 일가? 교권보호법이 시행되면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만행이 근절되고 교원의 권리 를 보호받을수 있는가? 그저 몽둥이도 아니고 땅바닥을 쓰는 비자루에 얻어맞고 여지없이 추락된 교원사기와 자긍심을 회복해 제자사랑과 교육에 매진할수 있는가?       나도 앞당겨 학교에서 밀려난후 연길시내 사립학교들을 두세곳 전전하면서 스스로 비애를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여서 공연히 신경이 곤두선다. 그때 내가 맡은 반에 대부분 학생들이 부모가 외국에 돈벌이 나가면서 내팽겨친“락오자”들이였는데 공부하기 싫어서 초중을 졸업한후 거리를 떠돌다가 부모의 압박에 혹은 때늦은 후회심을 안고 출로를 찾으려고 모여온 아이들이였으니 가히 상상하고도 남을것이다.       조밭이 있으면 가라지가 있고 논에는 돌피가 있는 법이다. 오래동안 굴레벗은 망아지들이라 못되게 놀고 도무지 말이 들어가지 않는“구제불능아”들도 적지 않았다.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평생 정규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순돌이들의 왕이 되였는데 굴레벗은 망아지같은 어떤 애들을 보며 소귀에 해금타기나 아닌가? 내가 천여원 돈때문에 구차스럽게 놀지 않느냐? 하며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많았다.      《 론어(论语)》에"唯上智与下愚不移"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직 상등의 총명자와 하등의 우둔한 자는 성정을 개변시킬수 없다.”면서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가르칠수 없다고 했다. 공자님 말씀이야 틀릴수 있으랴마는 저저히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인생의 락을 누릴수 없고 아이보기가 울지 않는 아이만 볼수는 없다.       농부에게는 척박한 땅이이 없다는 말처럼 교원에게는 가르치지 못할 학생이 없다는 높은 교육정신을 구비해서 아니였다. “랑자회두 금불환(浪子回头金不换)이라고 하고 북데기속에도 알맹이가 있다고 걔중에는 머리좋은 아이들도 있었는데 새로이 앞날을 개척하겠다고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을 저버릴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량한 애라도 아버지, 할아버지같은 초빙교원들이 사람되라고 못살게 굴어도 그런 선생님을 때린다는 생각은 아마 죽었다가 깨나도 못했을것이다.      “사도존엄(师道尊严)”이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한시기 비판받았고 심지어 봉건사회에서의 사생관계의 잔여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교육실천은 그런 관점에 대해 다시 검토하게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학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슬로건의 내함이 부단히 확대되고 곡해되여“오직 불합격교원이 있지 불합격의 학생이란 없다. 학생은 영원히 정확하다. 학생은 바로 하느님이다”에로 치달아올랐다. 마침내는 “사도존엄”의 사생관계가“생도존엄(生道尊严)”으로 바뀌고말았다.     맞는가?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 이른것뿐이다. 사생관계는 응당 평등해야 한다는 관념은 오직 인격의 령역에 적용될수 있으며 인격평등을 가리킨것이다. 10여 년전 연길시내의 모중학교에서도 싸가지 없는 몇몇 불량학생들이 자기 학교의 교원을 때린 사건이 있었는데 교원들이 저저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였다.      “사도존엄”이란 결코 시대의 발전으로 하여 내버리는“쓰레기”가 아니다. 사도존엄이란 본래 교원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것을 가르키는 말로서 곧 교원이 우선 존중 받아야 전수하는 도리, 지식, 기능이 존중을 받을수 있다. 후에는 교원은 장엄하다는 의미로 인용되였다. 하긴 교직도 뛸데없는 일종 직업인것은 사실이다. 세상에 어떠한 직업이든지 본질상에서는 복무성을 고유하고있다. 그러나 부동한 직업에는 부동한 복무형식, 부동한 복무자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       교원으로 말할 때 학생을 존중하는것은 아주 필요한것이 아니라 필수적인바 학생을 위해 복무하는것은 역시 천직이다. 그러나 교원의 복무는 상업령역에서의 복무가 아니다. 교원의 복무는 학생들의 인생준비에 향도자로서의 복무이며 계발하고 인도하는 복무이다. “교육복무원”이라 해도“하느님인 학생”에 대해 필요한 약속과 관리가 요청된다. 그러나 이 경우, “사도존엄”이 무조건적이 아니라는것은 명기할 필요있다.      “비자루교사”로부터 학생이 교원을 ××같이 안다면 이는 교육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옛말에 매듭지은자가 그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에게 감히 비자루를 휘두를 때는 개잡은 포수같다가 징벌받게 되니 비겁하게 변명하는데 그 본인들을 위해서라도 마땅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 잘못을 덮어주는것이 관용이 아니다. 이젠 돼지굴짓고 내버린 돌같은 신세여서 별상관은 없지만 타산지석이라고 이국의 기괴한 풍조가 밀려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2016년 1월 6일
704    (잡문)“계획”의 비애 댓글:  조회:4099  추천:1  2016-01-12
                                           “계획”의 비애                                                최 균 선      일년지계는 재어춘(一年之计在於春)이요 일일지계는 아침에 달렸으니 전망성과 계획성이 없이 어떠한 사업이든 성과를 운운할수 없다. 만사는 2분법으로 나누어 보아야 하고 환득환실의 각도에서 문제를 투시해야 한다면“계획”이란것이 워낙은 인류의 진화와 물질재부창조에 더없이 유익한것이다.    그래서 계획경제시대도 그 나름의 우점이 있다고 긍정해야 할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어온다면 계획경제는 전시체제에 최적이였다는것이다. 소유의 거민이 표제로 공급받지 않았다면 간상배, 투기모리분자들이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는것이였다. 지금같이 투기모리가 창궐한 상황에 비하면 확실히 우점이였다고 수긍하게 된다.    두번째로 계획경제는 가난하고 말끔하던 나라를 현대국가로 이끈 작용을 하였다고 한다. 과정이 없는 결과가 있을수 없다는 시점에서는 맞는 론단이다. 다음 지금같은 시장경제는 귀환(反馈)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시장기제는 자원배치문제를 해결 하였고 공유경제의 효률을 제고시켰다는 등등, 아무튼 계획경제시대는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영광스럽게 완성하였고 휘황한 성취를 거두었다고 할수 있다.    개괄해 말하면 계획경제시대에 대하여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해야 할것은 당연하다. 무조건 먹칠할수도 없고 한마디로 부정할수도 없다.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둘이 하나로 합해지는 철학원리나 혹은 성공적인 수술이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데 졸문은 경제문제의 시대적추이같은 거창한 문제를 다루려는 취지가 아니라 외곡되고 오도된 계획에 대한 관념에서 진행된 일부 시행착오에 대해 말하려는것이다.    사실상 계획이 한때 많은 방면에서 오도되였다. 계획경제시대 농민들은 일년내내 등이 휘도록 농사지어도 그냥 식량난에 허덕이다보니 계획소비방법들이 많이도 고안되였더랬다. 황당한 시대에는 괴상한 창조자들이 많이 나오는법이다. 어떤 사람이 시래기로 쌈을 싸먹으면 배가 인차 부르고 오래 꺼지지 않는다고 했고 밥이든 죽이든 젓가락으로 먹으면 후르륵!소리와 함께 공기까지 들어가서 인차 배부르게 된단다.    그리고 앉아서 먹으면 배가 처지면서 많이 먹게 되므로 서서 먹는게 좋다고 하는 등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거국적인 절약방법들을 많이도 창조발명했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은 천방야담을 듣는것처럼 허구프게 웃을것이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때먹기를 비롯해서 천방백계로 굼때우려 하였고 집집에 량식절약공약 따위를 붙여놓고 아무리 귀한 손님이래도 축객령을 내렸다.    그때 계획성이란 곧 먹고 입고 쓰는 모든것의 절약 그 자체였다. 가난이 영광이고 잘먹고 잘사는것이“자산계급의 생활방식”으로서 수치라는 황당시대 시행착오는 국민을 오도하면서 가난한《사회주의》에 모든것을 기탁하게 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계획성을 절제와만 련계시키는 사유모식에 굳어져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야말로 계획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례컨대 지난세기 70년대말부터 실시된 계획생육을 보자. 기하급수적으로 증장하는 인구대국으로 놓고 볼때 총체적으로 생육을 제한하는것이 기본국책이긴 하지만 우리 조선족으로 말하면 그저 줄이고 못낳게 하는것이 곧 계획생육이 아니였음을 지금와서 가슴치며 통탄하게 된다.    그 어느 소수민족보다 이른바 계획생육에 급선봉이 되여 90년도에 가장 낮은 출생률을 공제하여 현대인구재생산률에 진입했다고 홍보하였는데 행정상에서는 임무완성하고 정치상에서 실적을 쌓은것이 되였는지는 몰라도 력사적시행착오를 범했다 는것을 자인해야 할것이다. 조선민족은 인구증장에서 계속 하강선을 긋고있어 이제 50년 후에는 19만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예측이 나오고있다. 이는 민족의 존재여부와 관계되는 이른바의 계획의 비운이 아닐수 없다.    인구의 자질제고도 인구의 결구, 량질화도, 인구의 지역경제도, 사회자원환경의 조화적발전도 일정한 량의 보장이 없으면 다 공리공담이 된다는것은 상식이다. 계획성이란 의식적으로 유지되는 부단한 균형을 의미한다. 첫시작부터 무조건 줄이고 제한하는데만 열심하다보니 인구의 자연생장률과 자연사망률의 비례를 고려하지 않았고 미시적각도에서 발생할수 있는 돌발적인 인구류실을 예상하지 못한 근시안적인《계획》이야말로 얼마나 유치한 작법이였던가?     지금와서 아이를 둘을 낳으면 우대를 한다고 하는데 력사적시점에서 잘못된것을 변상적으로 반성하는 때늦은 미봉책이다. 배는 이미 떠나서 산굽이를 돌아갔다. 다시 불러올수 있는가? 물론 조선족인구가 거의 마이나스성장을 기록하게 된 원인이 단지 계획생육에만 국한된것은 아니지만 첫시작부터 인구증장의 경영에서 곁길로 빠져버렸던것이다. 물이 새기시작한 배는 갈아앉게 생겨먹었다. 거기에 등을 디밀고 안깐힘 쓰는것은 대책이 아니라 무모한 욕망일뿐이다.    우리 민족의 인구감소의 현황에서 비애를 느끼지 않을수 있는가? 지금 5십대 후반의 사람들로 말하면《재수없는 세대》라 할수 있다. 한창 잔뼈가 크고 굳어갈 때 이른바《3년재해시기》였고 한창 지식을 배워야 할 때《문화대혁명》을 맞이하여 열 화속의 소년시절을 보냈고 학교를 대충 나와서 일자리를 얻고 인생을 시작하려니까 일컬어《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바람에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에 내려갔다.    지각한 사랑이지만 인륜지락을 마음껏 누리려고 하니 그만 하나만 낳으면 영광이고 둘을 낳으면 수치라고 호소하는 바람에 하나만 낳고말았다. 자식을 거의 키우고 일하며 사는 영광을 만끽하려는 때 공장, 기업들에서 기구를 간소화한다는 시책에 따라 일터를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사람은 자리에서 내려 (下岗)와야 했다. 하여 력사교과서에서만 기억했던 실업자가 되였다, 다만 사회주의 시대에 첫실업자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된것이 다를뿐 그 실속은 한가지다.    한 사람의 퇴직은 늙었다는것을 의미하고 늙었다는것은 빈까치둥지를 지키는것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만 낳았기에 두 젊은이가 네늙은이를 부양하게 되였다. 다행이 자식이 신변에서 사업하면 그래도 효성을 받을수 있지만 모두 외지에 가있다면 네 늙은이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되여 꿩구워먹은 자리를 퀭하니 바라봐야 할 신세로 된다. 이것은 한시대가 낳은 후유증이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돈이 많은가 적은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늙은 다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혹시 병상에 눕게 되면 호리할 사람도 없고 위문오는 사람도 없이 창밖만 처연히 바라보게 될뿐이다. 이런 처경은 거의 모든 늙은이들이 부딪친 공동한 문제일것이다. 역시 주도한《계획》이 맺어준 쓰디쓴 열매인것이다.    노상 지각하는 경험선생이 펼쳐드는 교훈서는 예이제 후회, 사회청심환같은 대책으로 엮여져있다. 먹을것도 입을것도 땔것도 계획경제의 속박에서 계량되여야 했던 그시절에 신물이 나지만 계획일반을 부정하는것이 아니다. 치국책에서든 개인의 의식주행에서든 무계획은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비판적어경에서“망탕지휘”라든가 “학비를 냈던셈”,“눈감고 발더듬이로 강을 건너기”같은 개념이 류행되고있는데 파헤치고 보면 결국 무계획성이 낳은 대작들인것이다.    공급과잉현상도 그렇다. 즉흥적인 산업발전에 의하여 지하자원개발도 무계획적이여서 자원의 고갈을 예기하고있다. 이 시점에서 계획은 영원히 필요하고 잘 세워야 하는 생존구도이기도 하다. 무계획생산은 망탕생산과 다름없다. 계획경제시대로 돌아 갈수 없지만 계획성은 만사에 우선하는것이여야 하리라.                                2006 년 4 월 15 일
703    (잡문) 친구라는 친구 댓글:  조회:4725  추천:0  2016-01-09
                                   친구라는 친구        지금은《사랑》이라는 말과 같이 가장 흔하게 굴러다는 말이 친구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를 찾는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로신선생이 일찍 구추백선생에게 준 족자에《인생에 하나의 지기를 얻으면 만족하여라.》라고 썼듯이 하나의 지기를 얻는다는것은 더없이 소중한 행복이 아닐수 없다.       그러기에 력대의 문인들의 붓끝에서 우의에 대한 찬미시가 많이도 씌여졌고 우정에 관한 미사려구도 무지 많다. 우정! 우정은 엄동설한의 숯불, 오뉴월 염천의 우거진 그늘, 급류우에 놓인 징검돌, 안개낀 바다우에 등대, 보이지 않는 맑은 공기, 잡을 길없는 양광…       우정은 만천하에 널려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없기도 하다. 맑스와 엥겔스의 서한집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우정의 사시가 엮어졌고 두보의《꿈에 리백을 그리다.》는 시에서 창해보다 호한한 우정을 읽을수 있으며 류비, 관운장, 장비의 《도원결의》에서 영웅호한들의 의기와 의협심의 귀감을 새길수 있다. 이러한 우정이야말로 세계적이고 력사적인 우의인것이다.       예로부터 파멸의 골짜기, 오해의 실금, 중상의 암전, 암해의 비수, 공간의 저애, 시간의 흐름의 망각…이 모두는 인간심령의 꽃이 받아내기 어려운 시련이였다. 그러나 혈연보다 더 친밀한 우의는 리간을 도발하는 음산한 바람, 천재인화(天灾人祸)의 고난, 빈곤의 차디찬 서리, 음모궤계의 짙은 안개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 았으며 소원해지지 않고 지심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줄기차게 흘렀다.       하지만 이런 우정은 리기적이고 용속한 무리들은 영원히 미치지 못할 고상한 정조이다. 특히 모든것이 상품화된 현시대에는 금전에다 술과 고기를 곱한 적과 같은 우정을 흔히 보게 된다. 술친구, 도박친구, 마작친구가 거개 이 류에 속하는바 자기가 파묻고도 자기가 밟을수도 있는 지뢰이기도 하며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친구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친구란 무어냐? 참된 우정은 어디에 있는가? 친구는 복합개념이기도하다. 그만큼 친구의 의미는 여러가지 친구의 종류도 여러가지이다. 누군가 친구는 크게 세가지 류형이 있다고 했다. 빵과 같은 친구는 항상 필요하다. 약과 같은 친구가 있는데 때론 필요한 친구이다. 그러나 병균과 같은 친구도 있다. 이런 친구는 피해야 한다. 개를 친하면 벼룩밖에 옮을게 없으니까,       그래서 구라파의 어느 명인이 우의의 나무에도 잘라버릴 가지가 있다고 한 금과옥조(金科玉条)를 친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좌표로 삼을만도 하리라. 어진자가 어진자를 알아보고 지혜로운자 지혜로운자를 알아본다지만 재래로 성숙한 사람, 지성적인 현자들은 벗을 허투로 사귀지 않고 많이 사귀지도 않았다.       우의란 해빛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맑은 날에만 나타난다는 리언도 있다. 역시 다른 측면에서의 우의에 대한 정의라 할수 있는바 환난지우(患难之友) 라는 말도 이에서 나온 말이다. 삼척동자도 다 알고있는 이쏘프의《두 친구와 곰》이라는 우화가 이를 설명해준다.       어찌 생각하면 친구란 인생길에서 하나의 사치품에 불과한것이라 할수 있다. 친구가 있다해서 자기에게 무엇이 더 많아지는것은 아니다. 하긴 친구가 없다면 사는것이 사람같지 않을것이요 정으로 얽히고 서린 이 인간세상에서 스스로 소외도여버린 가련한 존재이지만도 말이다. 이는 벌써 별개의 문제이니 일언이페지하고…       곰곰히 따지고 보면 우정은 어디까지나 주요하게 감각이지 실용이 아닌것이다. 왜냐하면 우정은 물질적인 사랑이 아니며 어떤 리익을 위해 맺어지는 전투동맹이 아니다. 아리바바의 보물동굴처럼《들깨!문열어,》하고 한번 소리치면 열리고 열리 면 금은보화가 쏟아져나오는 그런 보배굴이 아니란 말이다. 어떤 곤난이 있으면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하고 대자대비한 관음보살도 아니다. 우정은 성격과 취미가 공통한데서 맺어지는 동맹이기때문이다.       늙은 개와 늙은 안해와 금전만이 가장 미더운 친구가 되여진 이 각박한 인정세계에서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미더운것이 친구이지만 반대로 가장 가장 미덥지 못하고 위험한것도 친구일수 있다. 당신은 믿어지지 않는가? 우리는 많은 소설과 영화들에서 이런 슬픈 우정의 악과를 절감하게 되지 않는가? 비록 예술실제이지만 생활이 예술을 낳기에 우리는 소설에서 생활을 읽고 영화에서 생활을 보는것이다.       병은 언제나 눈섭에서 떨어지듯이 재화도 언제나 자기 신변에서 발생한다. 죽은 사람을 왜 좋다고 하는가? 죽은 사람은 자기와 다툴수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춰올리고 내 주위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을 욕한다. 바로 그 산사람들속에 내 친구도 있는것이다.       사람들은 낯모를 사람이 잘되는것은 윤허하지만 신변에 사람이 잘되는것을 보아주지 못한다. 이게 우리 현대문명인의 특점이라면 특점일것이다. 예로부터 황제를 질투하지 않고 가까운 이웃들이나 친구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는 심리바탕도 다 그것이다. 벗이란 먼 산에서 한번 웨쳐부르면 미구에 화답하는 메아리라고나 할가? 그 메아리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들으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긍정할수 있을뿐이다. 이런 심리가 바로 벗을 찾는 리유라면 리유일것이다. 아무튼 벗이란 하느님보다 더 실제적이고 소중하다. 하느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줄 모르니까.       련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좁아지고 우정을 나누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넓어진다. 사해의 친구를 널리 사귀기 좋아하는 호한의 기품이 있을지라도 그대여, 부디 철새와 같은 벗은 찾지 말고 만들지 마시라. 철새는 날이 차가와지면 절로 알아차리고 날아가버린다.       벗을 꿀발린 빵떡처럼 전부 핥아먹으려 해서도 안된다. 성실의 옥토에서만 진실한 우정의 상록수가 자란다. 벗의 따가운 충고를 받아들일 아량이 없다면 아예 친구를 사귀지 말라. 정신방면에의 대립을 용인할수 있는 우정이라야 참된 우정인것이다.       혹시 친구에게서 당할지도 모를 재난을 상상해보라. 자고로 적이 앞에서 쏘는 화살보다 친구가 뒤에서 날리는 암전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서로 미쳐서 날뛰던 10년 동란시기에 나는 친구의 의미를 눈물을 머금고 가슴치며 읽었다. 그때 받은 상처에 딱지가 두껍게 앉았지만 지금도 다치기만하면 그냥 피고름이 나온다.       옷은 새것이 좋고 벗은 옛벗이 좋다는 쉐익스피어의 말을 지금 젊은이들이 다 알고있지는 못하리라. 벗을 찾는 길은 멀지 않다. 그러나 그 길은 해가 비추는 큰길이 아니라 멀고 험한 밤길일수도 있다. 참된 인격은 어둠속에 있으니까.                                  2004 년  4 월 6 일
702    (수필) 얼굴을 읽어본다 댓글:  조회:4788  추천:0  2016-01-09
                                  얼굴을 읽어본다.      인간의 얼굴은 신의 걸작이라고 누가 말했던지 미를 사랑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용모는 확실히 중요하다. 그만큼 자기의 얼굴에 대해서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것이다. 특히 미모가 반재산이고 말없는 추천장인 녀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흔히 젊은이들은 자기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수 있는 자기의 표면인상에 아주 류의하기에 자기의 용모문제에 민감하다. 명성보다 용모가 더 실용적이라고 확신하기때문이다. 정신세계와는 별개로 오로지 용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허영심에서 나온 과시욕이라는것을 외면하고 말이다.    하지만 생김새는 어떤 일을 하는데 방해지 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같은 만고의 철학자가 실은 추남이였다. 세기적인 위인들도 모두 천생 용모를 잘 쓰고 나지 않았다는것을 력사가 증명하고있다.    명성에 대해 마음을 쓰느것에 비하여 용모에 대해 마음을 쓰는것은 허영이다. 명성에 비하면 용모란 한사람의 진실한 가치와 더욱 거리가 멀기때문이다. 공자가 겉이자 속이니라고 말했지만 잘 생긴 용모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것을 절실히 체험 하고있다..    얼굴에서 이마는 마음의 정문이요 눈은 령혼의 창문이요 바른 코날은 지적이고 의지적이기도 하다. 아무도 눈빛을 감출수 없지만 껍질을 보고 과일속을 추측하듯이 타고난 얼굴을 절대적으로 믿을수 없다는것을 세인들은 잘 알고있다.    표정은 내심세계의 화랑이며 심령세계의 풍운조화의 표현이다. 눈, 코, 입, 턱 등 그 모든것들의 뒤에는 우리가 표정이라 부르는 그 무엇이 있는것이다. 마음이 공허한 사람이 혜지로 빛나는 눈길을 지어낼수 없고 바보는 죽었다 살아나도 우아하고 의미심장한 표정같은것을 지을수 없다.    한사람의 습관된 심령상태와 행위방식에 어디까지나 자기도 의식못하는 표정이 따른다. 이런 표정이 무수히 반복되면 얼굴에 새겨지게 된다고 한다. 쇼펜하우엘은 한 사람의 외모는 내심을 보여주는 도화(图画)로서 그의 개성특징을 제시한다고 하였다.    세상엔 생긴대로 노는 사람도 있고 노는대로 얼굴이 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긴것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노는 사람도 무지 많다. 정직하고 착해보이는 얼굴은 많은것을 감싸주기도 하지만 양가죽을 쓴 승냥이같은 남자들이 많듯이 미모의 요정도 많은 인간세상이다.    현대 정형수술이 류행되면서 한 얼굴을 다른 얼굴로 변모시키기는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약은 바꾸지 않고 약탕관만 바꾼격이다. 정형수술로 아름다워지기는 쉬워도 진정 아름답게 보이기는 쉬운일이 아니다. 현대과학기술로 인조미는 살리겠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정신빈곤증은 과연 무엇으로 치유해야 할가?    내심세계의 아름다움은 과시욕으로 인한 갈증이 아니며 길게 자래운 빨간, 연분홍, 핑크색의 손톱도 아니며 유혹의 미끼도 아니며 저속한 령혼의 자아도취도 아니다. 내심세계의 미란 순결한 정조의 꽃이 만발한 정신가원이고 세월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 향기이다.    사람들은 버릇처럼 거울앞에서 자기를 비춰본다. 사람은 거울을 보지 않고서는 자기 얼굴을 볼수 없으며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조차 할수 없거니와 자기 얼굴에 대한 표상도 가질수 없다.    거울보기에는 학문이 있다. 거울은 다른 사람의 눈을 대신한다. 거울을 마주서서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것이다. 즉 거울에 비춰보는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속에 비칠 자기 인상을 념려해서이다.    녀자들에게는 미가 생명가치실현의 전부의 내용이고 인생의 일종 환락이 된다. 그래서 녀자의 일생 반려는 거울이다. 남자는 느낌으로 늙지만 녀자는 거울앞에서 늙는다는 말이 여기서 생긴것이리라.    언제부터인가 섹시함이 현대녀인들의 미의 기본함량으로 되였다. 하여 성감미는 녀인들에게 영원한 도전, 목표, 숙망, 유혹으로 되여 서로 뒤질세라 성감포장에 열을 올리고있다. 득죄할 말일수도 있으나 성감미의 과시는 기실 자기 애인을 위한것만이 아니라 보다는 다른 이성들이 탄복하게 하고싶어 매력과 유혹력을 전부 발동하는 녀성 특유의 행위이라 할것이다.    기실 녀자들의 성감미추구는 절반은 깨여있고 절반은 꿈속에서 꼼지락거린다고 해야 하리라. 지나친 로출이 오히려 웅성의 흥분도를 하락시킨다는것을 모를수도 있다. 모호미와 신비성을 등지고 도를 넘어선 로출욕을 과시하는 녀자의 몸가짐은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악령의 원시적인 야한 모습이라면 망발일가?    개방시대여서인지 일컬어 섹시함이 전례없이 성행고있는데 권고는 아닐지라도 성감유희는 위험한 유희이다. 녀자들의 성비극을 쓰는 씨나리오작가는 못된 웅성들만이 아니라 곧 바로 성감미에 도취된 그녀들 자신이다。 정애마저 팔고사는 금전만능 시대 미모가 한 녀자의 자발적인 돈나무가 되여진다면 그것은 실로 미의 비애이다.    현시대 녀인들의 미는 타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지자의 요람이라던 대학가에 흔해빠진것이 매음녀이고 그것이 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선다. 이런 시점에서 현대녀성미의 타락을 웅성들이 조작한것이라고 말한 다면 어페이다.    생선이 있는곳에 쉬파리가 모여든다. 쉬파리는 틈이 전혀 없는 세멘트박닥에 알을 쓿지 않는다. 현대중국남자들의 성감폭탄 구매열이 천지가 뒤번질만큼 기세찬것은 웅성의 타락과 변태라고만 말할수 있을가? 성결해야 할 미가 뒤골목 인육시장에서 값싸게 팔리고있다는 폭언으로 새김해도 된다.    용모보다 더더욱 긴요한것은 덕행이라는 해묵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녀자들이 몇이나 될가? 사람의 외모에서 진정으로 흡인력을 가지는것은 지혜, 교양, 풍모, 개성 등 심리품질이라는 전통설교를 코웃음쳐버릴것이다.    사람은 사십이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링컨의 유명한 명구가 있다. 이 금언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 얼굴을 가꾸는데 신경을  쓰라는것도 아니고 생긴대로 논다는것도 아니다. 사람의 얼굴은 그가 노는대로 생긴다는 말이다.    성년인들에 대한 평가는 얼굴보다 그 사람의 정신적 내함에 많이 의거하게 된다. 명지한 사람들은 세월의 무정함에 자기를 내맡기고 심리조절을 하는것을 배워가면서 얼굴에 얽힌 허영심을 극복한다. 생선과 미모를 오래 보관하지 못하듯이 미모도 지켜낼수 없다.      꽃은 무슨 일로 피여 쉬이 지고/ 풀은 어이 푸르난듯 누르난고? 바람새 세찬 무정세월의 언덕에 어이 열흘 붉은 꽃이 만개하여 자랑 떨치랴, 용모의 내용이 변하면 용모에 대한 감각도 가치관도 변하는 법이요 미의 천평이 허영심에 기울면 인생도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바라건대 미모여, 부디《아차!》실수하지 마시라.                            2006. 4 월 20 일
701    (소품문)작가를 말하다 댓글:  조회:5227  추천:1  2016-01-04
                                작가를 말하다                                      진 언       작가란 무어냐? 문헌재료에 의하면 오늘날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되여있는 작가란 자초에는 가무를 관리하는 치가(治家)의 의미였다. 이 말이 서책에 수록된 첫사례는《삼국지, 양희전(三国志·杨戏传)》인데“请为明公作家譬之”;《晋书·食货志》载:“(汉)桓帝不能作家,曾无私蓄。”이였다. 여기서 3국시기로부터 진(晋)때까지는“작가”란 “치가”를 가리키였다는것을 설명하고있다. 한조의 항제는 등극하기 이전까지 청빈한 생활을 하였기에 치가에 재산을 모을줄 잘 모르다보니 축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기재에 따르면“작가”란 개념이 지금의 뜻으로 쓰인것은 당조때부터였다. 북송의 리방찬(李防撰)의《태평광기(太平广记)》에“唐宰相王好与人作碑志,有送润毫(酬金)者,误叩左丞王维门,维曰:‘大作家在那边。’”라고 기재되여있다. 바로 당송시기에 문학예술상에서 성과가 탁월한자를“작가”라고 호칭한 유래이다. 이는 성당(盛唐时) 시기에 선출해낸 “작가”들로는 섬서(秦) 산서(晋)인들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작가라는 이 단어가 연변된 과정을 본다면 작가와“작자(作者)”의 구별점은 이룩한 성취와 가지고있는 자력(资历)에서 비롯된것이다. 무릇 저작이 있으면 모두“작자”라고 칭할수 있으나 꼭 작가인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미 일정하게 명망을 가진 작자로서 문학계에서 확실히 공인해야 한다.     창작하는 전문 분야에 따라 구분하는 소설가, 산문가, 시인, 극작가, 문학리론가, 문학평론가 등을 통털어 작가라고 부른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문학가라는 호칭도 있는데 상술한 쟝르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일정한 수량과 가치있는 작품집을 발표하고 일정하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단어의 뜻풀이식 해석은 이만 접고, 문학적으로, 상징적으로 말할 때 작가란 과연 무슨 사람일가? 응당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현실을 꿈처럼 묘사하여 사람들더러 읽게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현실”이란 곧 작가가 작품에서 반영하려는 취지이다. 여기서“꿈”이란 작가의 문필의 결과 즉 작품이 가지는 미학가치이다.    작가는 무엇때문에 한사코 창작에 열정을 불태우는가?두말할것없이 사람들, 특히 지성적인 독자들에게 읽혀지게 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작가는 늘 독자의 마음을 앞세우고 창작의 길을 떠나야 한다. 물론 작자의 마음은 하나로 융합되여야 할 전제를 가진다. 비유하건대 찢어진 두 마음이 부딪쳤을 때 량자가 하나로 엉켜서 완미한 마음으로 될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명백한것은 작가의 마음은 진지해야 한다는것이다.    흔히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을 써내면 문인이라고 할수는 있되 엄밀하게 말해 그 모두를 작가라고 부를수는 없다.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대렬에 오른다면 다행이지만 그중에는 죽고나서 이름을 날리는 작가도 있다. 례를 들어 카프카는 죽을때까지 보험국에서 일을 했지만 작가소리는 재대로 듣지 못했다. 죽고나서 그나마 20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글의 발견되어 대문호소리를 듣게 되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또 어떤가? 그녀가 죽은후 서랍장에 차곡차곡 챙겨져 있던 약 2천여수의 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녀를 시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것은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아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라는것이다. 마치 로동벌이 꿀을 빚는 일과 같다고할가,    운이 좋아 당대에 작가로서 대접을 받을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때까지 아무도 자신의 글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런것에 신경을 앞세우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작가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엄밀하게 말해 그런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글쟁이에 불과하다.     오늘날 문학이 열광적이던 독자들에게서 소외당하여 침체상태에 빠진것은 치렬한 작가정신의 부재에서 기인된것이라고 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난해할수록 좋은 시라고 주장하며 자기네끼리 북치고 장구치니 독자들에게서 소외당하지 않을리없다. 문학의 호황기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니와 회생하기도 막연하게 되였다.    사람들이 가끔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많은 작품을 써내다니 참 글재간이 좋으시네요”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피상적으로 알고하는 말이다. 창조적인 글을 단순히 문장을 잘 엮는 재간으로 쓸수 있을가? 하긴 기준도 명백하지 않은 글재간도 있어야 하지만 단순히“글재간”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것이 시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간에 문학작품은 철두철미 인간사상의 예술화활동, 생명연소의 산물이기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초행길이다. 갈래갈래 인생길에 어떤이는 작가의 길을 선택한다. 인생길도 기구하지만 작가의 길은 더구나 파란만장할수밖에 없다. 일체 인생고에서 얻은 체험은 창작의 믿거름이 된다는것은 다 아는 상식이다. 작가의 인생길은 남다른 바탕색을 가지게 된다. 그 바탕색의 기본색은 창작이다.    작가의 인생려정과 수련은 짓밟힐수 없다. 불행이 작가를 낳고 분노가 시인은 낳는다는 말이 널리 인용되고 있듯이 처음부터 복속에서 작가로 성장한 사람보다 고난의 려정을 걸으며 대작가로 성장한 사람들이 더 많다. 례하면 쎄르반떼스나 스탕달, 고리끼같은 대문호들의 작가의 길은 공통한 숙명인듯 다 저곡에서 시작되였다.    진정한 작가는 아는것이 많아야 할뿐더러 보통사람들보다 독특한 작가적정신이 수립되여 있어야 한다. 물론 작가정신이란 단순개념이 아니라 범주이다. 말하자면 작가정신에 포괄된 내함이 다종다양하고 다층차적이라는것이다. 작가정신은 작가의 본 령이면서도 작가적자질의 핵심이다. 조금 추상적인 표현일지 모르나 문학을 목숨처럼 여기는 치렬한 작가적태도와 작가의식, 그리고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작가가 창작외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으면 기본품성을 잃고만다. 서구의 해묵은 문학사조들을 새조류마냥 받들어 모시고 가급적으로 완벽하게 닮아보려는 작가들, 곰팡이낀 문인상경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끼리끼리 패거리를 뭇고 작가적인 지조나 포옹력이 부재하여 명예, 리익을 기준으로 처사하는 작가들…이런 작가들은 현실과 독자들의 취향에 관심이 없다. 그런만큼 독자들도 이런 작가에 랭담하다.    작가, 시인이 왜 그런것들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것이 이들의 공통된 가치판이다. 그런 세속적인 사상에서 가슴을 울리고 납함이 나올수 없다. 련속 써내는 작품들이 한낱 세속적인 급공근리에 매달린것이라면 이른바 글재주로 만들어진것이여서 너무 심심해서 책장을 뒤적이는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되여질뿐이다. 만약 조류와 경향에 영합하여 작가정신이 굴절될 때 그것은 순수 문학을 위한 문학이 된다.    사람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만 살수 없다는 말처럼 작가는 자아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창작에 몰입하지만 독자를 등지고는 아무것도 성사되지 못한다. 독자와의 대화를 예상하기에 창작에 열중할 때엔 고독을 모른다. 작가의 심령은 시종일관 거짓되지 않아야 한다. 교묘한 거짓말로 타방을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은 속일수 없다. 한부의 소설에서 가장 주요한것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설속에 사상이다.       여기서 “사상”이란 철학책에서 론술한 사상이 아니라 생활에 대한 작가의 감수와 사고, 견해이다. 많은 경우 작가는 독자에게“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준다. 그러면서 문학은 생명의 직각이며 생명과 생활이 마주쳤을 때 터져나오는 첫개탄이라고 자답하기도 한다. 보통사람의 탄식은 한숨을 토하는것에 그치지만 작가의 공공적인 탄식은 사상을 연소키는 생명의 소모이기도 하다.                                                     2015년 7월 30일 수개  
700    (펌글) 2016년 눈물의 바다,전국민이 봐야!!!!!!!!!!!| 댓글:  조회:12741  추천:0  2016-01-01
 [스크랩] ★★★★★★★2016년 눈물의 바다,전국민이 봐야!!!!!!!!!!!|아고라 극장 색즉시공공즉시색 | | 조회 621 |추천 14 | 2016.01.01. 17:27 http://cafe.daum.net/sisa-1/eNYC/1559    제2차세계 대전 당시 중국 운남성 송산 산악지대로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들 이토 다카시 -저서 3권 중에서.... 운남성 송산(미얀마 근처)에서 마쓰야마 부대가 대패후 퇴각하면서 살해한 위안부 시신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강제 연행으로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중략…..)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등에 일본도 자국이 남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1923년 함경북도 경흥 출생)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후퇴하면서 위안부 막사에 수류탄을 던져넣어 집단 폭살시킨 일본군 이경생(李京生,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 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일본 왕을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룻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그리고 임신..아직 쓸만한데 하며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1920년 함경남도 풍산 출생) 중국인 위안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군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도주후 잡혀서 물고문,바늘 달린 몽둥이 고문,문신고문후 살해 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여성들의 입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 몸에 새겨졌고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살해된후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그때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일본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료출처 - by 엉슝맘 on 2012-08-21 in 시시콜콜 잡다구리              
699    (교육칼럼) 자녀교육의 보리고개 댓글:  조회:5840  추천:3  2015-12-27
                               자녀교육의 보리고개                                         진 언       교육학은 아이들의 최적의 교육시기는 6ㅡ9세이전으로서 기본상 일생의 학습과 행위습관이 결정되며 12-15세는 고정되는 시기로 잡고있다. 만약 12세 이전에 량호한 학습 행위와 습관을 양성하고 본년령단계에 고착되면 기본상 일생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쓰고있다. 말하자면 아이가 15세이전에 바람직한 개성과 학습행위 습관을 양성하였다면 한평생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것이다.     동시에 만약 전기(소학계단)에 바르게 양성되지 못하고 이 년령단계 혹은 마지막 수정단계를 놓치면 나중에 아무리 개진하려 애를 써도 별로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아이의 적성에 걸맞게 인도하여 심신상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인도하면서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해야지 어른의 욕망대로 주물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소학교 3학년때까지만도 앉으라면 앉고 공부하라면 공부하던 손자놈이 12세가 되니 알게 모르게 변하는것을 보고 놀랐다. 드디어 자녀교육의 첫보리고개-역반현상이 나타난것이다. 옛말에 무릎아래 자식이라고 했다. 사춘기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는 이 년령단계는 아이의 일생을 결정하는 전환시기라 자못 신경이 곤두서는 때이다.       생리적, 심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역반현상에 뾰족한 교육방법이 있을것인가? 더구나 전국을 석권하고있는 응시교육이 아이들의 봉페식계통을 헝클어놓고 인간의 기본심리와 정감수요에 위배되게 각종 강제적수단으로 학생들을 학습하도록 핍박하기에 상황은 더욱 꼬일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가급적으로 유형무형의 반항의식이 증강되는것은 확실히 일거에 풀어낼수 없는 난제이다.     물론 아이에 따라 반항방식이 다르긴 하다. 어떤 아이는 개인에너지가 풍부하고 사유가 활약적이며 개성 또한 강하여 무엇이나 과감히 해제끼는 기질이므로 여타의 애들보다 더 일찍 반항이 시작된다. 2분법으로 생각하면 될성부른 싹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우리의 교육체제속에서 이런 아이들이“문제아”로 되여 교원의 눈에 나면서 도태되기 시작하기에 나중에 십상팔구 사회실패자로 전락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한것은 이런 애들이 외국의 천부교육계획체계속에서 공부한다면 가장 중시받는 학생이 되고 가장 우수한 교원을 배치하여 전문적으로 배양하는데 커서는 동량지재들이 되거나 사회정영들이 된다는것이다. 이는 심사숙고를 자아내지 않을수 없다. 물론 절간마다 자체의 법규가 있기에 그에 따라해야 하겠지만 횡적으로 비교해보면 교육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현대적이 못되지 않는가싶다.     우리의 귀여운 애들, 순돌이들은“순복도구”로 양성되여 왕왕 너무 소심하고 무슨 일에서나 주저하는“겁쟁이”들로 될수밖에 없다. 이 점은 불면 날가 쥐면 꺼질가 금지옥엽으로 키운 손자에게서 날로 나날이 절감하게 된다. 하긴 조부모들이 키 우는 아이들에게서 생기는 통병이지만 스스로 성찰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순돌이던 아이가 자아의식에 눈을 뜨게 되고 그에 수반하여 신체와 심리상에서 훌쩍 커버린후 반항기에 들어서면 어찌될것인가 하는 우려심이 앞선다. 물론 로파심이라 할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강압을 시행한다면 돌밑에서 억눌려있다가 끝끝내 삐여져 나온 콩싹처럼 비뚤어질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호미난방인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아성취욕이 있다. 즉 누구나 자기의 인생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산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살고 일하고 아이들은 부모와 선생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고있다. 이는 심리학상식에 어긋난다. 공부시키는 부모나 공부하는 아이들이나 늘 전전긍긍하게 되니 고달플수밖에 없다. “어디에 압박이 있으면 어디에 반항이 있다.”고 했듯이 아이를 무작정 억누르면 아이의 심지는 더구나 뒤탈린다.     소학교단계에서는 학부모나 교원은 절대적권위요 강자로 군림하기에 약세군체인 아이들은 비교적 은페적인 저항을 시도한다. 례하면 학습에서“소극적태만”을 부리는 등, 그래서 거의 모든 부모들이 아이가 총명하고 무엇이나 다 아는데 느린게 탈이라고, 숙제도 질질 끌면서 하고 얼른 해치울수 있는 일도 재낄손이 없다고 걱정한다.      그렇지만은 않다. 기실 아이들의 천성은 십중팔구가 조급정서로 넘치고 모험적이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제놀음에는 우리 말로“느렁채”가 있는가? 없다. 아주 적극적이고 기민하다. 그러다가도 공부소리가 나오면 김빠진 자전거바퀴처럼 잘 굴러가지 않는게 문제다. 이런 현상을 나도 손자에게서 각일각 확인하고있다.      아이들의 심리와 개성발전에서도 12세후부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것은 세상에 어섯눈을 뜨고 생리상에서 점차 성숙되고 아는게 차차 많아지면서 어른들에게 도전할수 있는 기초를 구비하였기때문이다. 원래 품행도 좋고 공부도 잘하던 아이라도 12세후에는 역전할수 있다는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역전향하는 방식에는 자아강박관념이라는게 있는데 아이들속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소년들은 보통 어버이가 생각하는것보다 3년 빨리 어른이 되였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2년뒤에 어른이 되는데도 말이다. 그처럼 조기에 사춘기를 맞으면 독립의욕이 더 강해져서 부모와 권위에 반항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성장했다는것을 과시하려든다. 일반적으로 소학교단계에“압박”을 받은 아일수록 중학교시기에“반역”하기 쉽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방황하는 마음을 컴류터나 스마트폰에 매달고 유희를 놀거나 게임에 심취되고 미구에 중독된다. 나의 손자가 12살을 먹으면서부터 이런 증세가 보였다. 수십일간의 여름방학 날마다 컴퓨터에 매달려 제정신이 아니다. 강압수단을 쓰면 오히려 왜지밭으로 갈가봐 주말마다 태권도관 다녀오고 하루건너 수영장에 끌고가면서 겨우 말려내지만 이제 중학생이 되면 더 우심해질수 있다.     자아강박관념으로 반항하는 아이들에 대해 막무가내이지만 더욱 두려운것은 다른 류형의“반항아”들이다. 그런 애들은 12세후 한평생 간직해야 할 전통적인 가치관념을 돌연적으로 버리고 새롭고 남다른 생활방식을 추구하려 들기때문이다. 즉 유별나게 옷탐을 하고 녀자애들 경우 머리꾸밈새에 신경을 쓰고 놀음방식상에서 괴이한 성향을 보이는 등등으로 부모들의 생활가치관에 대항한다.     물질생활이 날로 풍족해진 현시대 아이들에게 가장 주입하기 어려운 품성은 근검소박이다. 나는 손자에게 외모는 단정하게 가꾸어야 하지만 어릴때부터“멋따개”가 되면 훌륭한 사람이 못된다고 훈계하면서 옷도 생기면 생기는대로 입게 하고 신도 웬간하면 내손으로 수리해서 신을수 있을 때까지 신게 한다. 아이에게 요구는 높일수는 있지만 강요하고 억압한다면 역반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무조건적 순종은 가장 소중한 자신심을 꺾어놓는것이고 그러면 약자의 비애를 너무 일찌기 느낄수 있다.     열두살, 교육의 보리고개를 어떻게 무난히 넘길것인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희망이 없는 사람은 돈에 미친 사람이고 가장 비참한 인생은 가지지 말아야 할 돈을 나쁜 수단으로 챙기다가 일생을 망치는것이라고 귀에 못박히도록 훈계한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놓아두는 푼돈을 욕심내지 않는다. 저절로 먹을것을 사고 결산하는것도 사회실천이기도 하지만 너무 일찍 돈쓰는 재미를 맛보게 할 필요가 없다.     부모는 자식이라는“양”의 방목군이 아니라 심령의 수호자가 되여야 한다. 아이들의 자유적성장은 사회정의자로 되여지는 초석이고 창신력개발의 전제조건이며 한생의 필수적조건이다. 억압을 느끼지 않고 자라난 아이라야 진실한 인생과 인간군, 사회에 애심을 가지고 옳바르게 림할수 있다.                                  2015년 8월 15일                 
698    (잡문) 아첨학 개요 댓글:  조회:4220  추천:0  2015-12-25
                                아첨학 개요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것이 사는 기술이라고 하였는데 그 기술속에 아첨술이라는 미묘하고 실용적인 처세술이 들어있다.    아첨이라는 말은 한어에《拍马屁(말엉뎅이를 다독여주다.》라는 말과 맞먹는다. 기마수가 말을 타기전에 궁둥이를 다독여주는것은 일종 예술로서 말이 순순히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나 이런 동작은 위험성을 자초하고있다. 말은 원래 궁둥이를 다독여주면 좋아하는 버릇이 있고 명마는 더구나 그런 취미가 있다지만 말의 궁둥이는 그만큼 가장 민감한 부위기도 하여서 무턱대고 다독여줄것이 아니라 그 말의 성깔과 특성, 수요를 잘 알아야 한다. 아니면 자칫 뒤발질에 코가 박산날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말궁둥이를 다독여주는 예술속에 담긴 그 의미가 차차 아첨하다. 비위를 맞추다. 알랑거리다의 뜻으로 파생되여 오늘날까지 널리 쓰이게 되였다. 말궁둥이를 다독여주는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가장 좋은 윤활제로 되기때문이였을것이다.    동방의 성인 공자는 세속에 대한 아첨은 덕에 대한 도둑질이라 하였고 구라파의 대지성인 키케로는 아첨은 악덕의 시녀라고 질타했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아첨이란 일종의 악덕으로 치부되였다는것을 가히 알수 있다.    그런데 그 가증한 악덕이 지금은 시대의 풍속이 되였다. 복잡다단하고 까다로운 인간사회를 당신에게 적응시킬수는 없으므로 당신이 스스로 사회에 적응할수밖에 없기때문일것이다. 이 시점에서 아첨, 아부를 별로의 인생경지에 이르는 신묘하고 그 효용성이 기꺼운 학문이라고 이르는것이다.     그러나 아첨이란 스스로도 얼굴이 붉어질 작태이므로 이 기술을 배움에서 가장 요긴한것은 얼굴을 가리지 않는것이다. 즉 후안무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상품경제 시대에 리익을 위해서라면 량심마저 개에게 베여줄라니 손바닥만한 얼굴을 가리울 필요가 무엇인가? 그때 그때 간지러웠던 얼굴이 가배로 빛날것이니 말이다.    자고로 아첨술은 권문을 여는 만능열쇠였고 일세영달의 길에서 지름길이였기에 청운에 뜻을 두었거나 미관말직이 성차지 않아서 일취월장하려는 이들에겐 무엇보다 일심불란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될 제일 학문이고 첨단기술이다.    그러므로 천성적으로 성미가 올곧거나 강직한 사람은 아첨술을 배우려는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한다. 대저 성품이 도고한 사람은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도 직언하는게 상례라서 달착지근하고 얄망궂고 가살러운 말을 잘 엮어나가지 못하기때문이다.    량지가 있는 사람이면 다 아첨쟁이에 절치부심하지만 숨가쁜 인생마당을 매끄럽게 헤쳐나가려면 아첨을 등질수 없거니와 경우에 따라 다다소소히 아첨하지 않을수 없게 되여먹은 인간세상이여서 아첨기가 전혀없는 사람은 덕재가 겸비하여도 남이 밑에서 황소처럼 고분고분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사는게 본성에 맞을것이다.    아첨은 인간의 렬근성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학문이라는것이다. 아첨이라면 절로 량미간이 찌프려지지만 엄연히 사회수요에 의해 산생된 현학임에는 틀림없다. 벼락벼슬을 하는데는 여러가지 묘책이 있으나 아첨술이 으뜸이다. 미인을 바치거나 회뢰를 한다거나 충성을 맹세한다거나 다 아첨학에서 나온 실행이 아니겠는가?    물론 아첨술은 상층계층의 전매품이 아니라 전 인류의것으로서 천민이라 하여도 누구에게나 아첨할 권리가 있고 또 아무도 박탈하려 하지 않는 유일하게 공평분배된 권리이다. 하지만 해가 뜨면 밭에 나가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와 저녁을 에때우고 잠자리에 드는 농부들에게는 아첨술이 별로 대수로운것이 아니다.    우로 부모님께 효성함에 아첨이 가당치 않은것이요 부부간에 아첨이란 비린내가 나는 짓거리요 마음대로 부릴수 있는 자식들이라 하여도 아첨을 바란다는것은 싱겁기 짝이없는 흰둥이의 작동이니까 말이다.    한편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사는 치세자들로 말할진대 아첨술은 실로 적자생존의 제일기술일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절로 떨어지는 구운떡이란 없고 무료만찬이란 이 세상에 없으니 설사 아첨하고 싶지 않더라도 생활을 떠날수 없는 생존과 관계되는 학문이므로 잘 터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첨술은 오래된 인생기술이다. 자고로 패덕자의 이야기도 적지 않지만 기특하기 짝이없는 아첨쟁이 이야기는 더구나 많다. 중국에서는 아첨술이 진조의 간신이고 악종인 조고의《지록위마(指鹿为马)》로부터 시작되였고 가장 전형적인 아첨심리의 실례이다. 재래로 아첨술은 미인계보다 훨씬 효능적인 책략이였다.    아첨의 현대성은 리익의 공개화에서 충분히 표현된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후안무치한적이 없을것이다. 드러내놓고 아첨한다는것은 눈총을 받을 일이지만 곁사람이 난처할정도인데 본인은 조금도 부끄러운줄 모른다면 전통적인 아첨술에 대한 일대 도전이고 창신정신의 걸작이 아닐수 없다.    아첨쟁이의 성정은 공인되다싶이 철두철미 개다리근성이다. 아첨술이 류행된다는 자체가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이다. 가령 인민의“공복”들마다 초유록이나 공번삼같은 충의지사들이라면 아첨쟁이들이 다 기갈이 나서 죽을것이다. 그러나 너무 락심천만할 필요는 없다. 여기 아첨술의 정수가 마련되여 있다.    아첨술의 첫기교는 무턱대고 과찬하는것이다. 로망이 난 늙은이도 칭찬해주면 입귀가 흘러내린다고 칭찬앞에 담담할 현자가 세상에 별로 없다. 칭찬만큼 사람을 어깨힘  살리게 하는 령단묘약이 더 있을가? 그래서 사람을 칭찬해주면 그 인격이 알린다고 하는것이다. 팥으로 메주를 쓴다해도 아주 영명한 결책이라고 절찬하는 수준에 이르면 만사대길이라 베개를 높이 베고 청운의 꿈을 꾸어도 된다.    그와 반대로 상급의 뒤구녕을 둘추지 말아야 한다. 중국봉건군주들속에 평지돌출의 백성출신이나 무뢰배출신이 적지 않은데 례컨대 한고조 류방이나 명태조 주원장이나 그런 패류들이였다. 그런 묘리도 모르는 주원장의 짜개바지 친구가 위엄이 천하를 떨치게 된 로친구의 축축한 뒤구녕을 들쑤셔놓아서 그만 목을 잘리였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아첨술의 진수는 바로 침바른 거짓말을 개여올리는것이다.    민초들은 아첨하지 않는다 해서 굶어죽을 일 없으니까 어른님들을 경이원지하면 되는것이다. 아첨받는 자가 일시 양양자득해 하는것만 보지 말라. 많은 경우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소경이 눈먼 말을 타면 어두운 밤에 깊은 수렁에 빠지기 마련이라는 전고처럼 말이다.    아첨술은 단지 상층인들이 더 높은 벼슬을 바라서거나 돈을 벌기위해서만 아니고 더욱 안전하게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시대는 휘발유가 없으면 자동차를 한바퀴도 굴릴수 없는것처럼 아첨을 앞세우지 않고는 촌보난행의 딱한 경우에 늘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아첨술을 선호하는것은 명지하지 못하다. 지자가 천번 심려하여도 한번 실수할때가 있다지 않는가, 력대로 박학다재하고 덕망이 높은 지자들속에 왜 은둔자가 많았을가? “죽림칠현”도 좋고 도연명도 좋고 소식도 그렇고. 굴원도, 백거이도…미중부족이랄가 지자들도 아첨술을 터득하지 못했던것이어늘.    청고는 아첨과 수화상극처럼 인연이 없는 두개의  명사이다. 청고함을 숭상하는 사람은 십중팔구가 독서인이고 뜻을 이루지 못한 재자들이다. 그들이 실의하게 된  주요원인은  나를 따르면 흥하고 나를 거역하면 망한다는 정계의 영원한 잠규칙을 잘 운용하지 않은탓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첨의 류행복을 입을줄 아는 사람은 행운의 마차를 타게 되여있다. 이는 처세학에서 상식문제이다.    아첨술은 사회적산물이긴 하나 필경은 인성의 약점이고 비굴성이다. 눈웃음 살살 치는 자는 겉보기에 푸접좋아 보이지만 철두철미 위군자이다. 이런 자들은 갈비뼈가 없어 이리저리 번져지면서 동쪽에서 한사람을 올리추고 서쪽에서 다른 한사람의 주위를 맴도는 응성충이고 카멜레온들이다.    아첨하는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턱찌끼를 얻어먹으려는데 있다. 남의 궁둥이를 좇아다니며 턱밑에서 맴도는것은 그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면 간에 가붙고 쓸개에 가붙는 경지에 이른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번성하고있는데 고대봉건사회와 하나도 다를것 없다.     발자끄는《아첨은 종래로 위대한 령혼에서 나온적이 없다. 아첨은 소인배들의 기량으로서 그들은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한껏 왜소하게 만들어 그들이 붙좇는 인물의 생활핵심속으로 기여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특수한 사회환경으로 말하면 외국의 토양보다 더 비옥하다. 중국봉건사회의 력사가 길고 실천도 2천년동안이나 해왔고 전제성도 서방국가들보다 더없이 잔혹했기때문이다.중국사람들의 아첨술에는 선진국공민들이 탄복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하긴 누구나 왕앞에 나서면 두려움에서 자연히 공경이 아닌 아양이 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사람의 말을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 말을 하라고 하였을것이다.    각설하고, 우리 평민백성들도 늑대가 개처럼 보이듯 아첨쟁이가 절친한 친구처럼 보인다는 격언이나 험담꾼은 한동아리라는 격언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첨이 달콤한 독술이라도 당신이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을것이지만.    아첨을 밥상받듯이 받는 이들에게 영광의 꽃다발을 안기자!하면서도 아첨술에 능하고 아첨에 이골이 튼 이들에게 충고하거니와 “아첨하는 자의 목구멍은 열려진 무덤”이라는 영국소설가 스티븐슨의 금언을 선물로 드리자.                                 2007년 7 월 15  
697    (잡문) 미소하는 삶을 댓글:  조회:4296  추천:0  2015-12-25
                                            미소하는 삶을      인간의 얼굴이 조물주의 걸작이라면 거기에 풍부한 표정까지 부여한것은 완벽함을 추구한것이리라. 유일하게 표정을 바꿀줄 아는 동물인 인간의 표정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표정은 바로 미소이다.    쉘리는 미소는 인간애의 상징이고 어느 철인은 미소는 세계의 공동어라고 했다. 세계 어디에 가든 성실하고 밝은 미소를 짓는다면 손짓 발짓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 해기때문이다. 맹수에게도 미소짓고 다가서면 적대감을 해소시킨다고 한다.    미소는 상대방에게 우의적이고 친절한 감정을 전하고 싶을 때 얼굴에 피여나는 웃음꽃이다. 늙고 병들고 사막화되여가는 인간사회에서 웃음꽃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해주는 꽃이 있으랴!    손해볼것도 밑질것도 없는 미소로 행복과 건강을 얻을수 있다고 한다. 웃음은 단순히 좋은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힘들다고 찡그린 얼굴로 세상과 마주한다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가? 성난 얼굴, 미소띤 얼굴…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듯이 행동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사람은 웃을수 없다.    웃음을 선택했을 때 왜 행복해질수 있고 삶이 재미있게 되는것일가? 그 해답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이츠하크 프리드박사가 해답하고있다. 그는 인간의 두뇌에서 웃음보를 발견하고 이 웃음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생각을 하면 웃게 된다고 알고있지만 실험결과 일단 웃고나면 신바람 나고 재미있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더 많다고 피력하고있다.    웃음을 선택하는 순간 머리속이 긍정이고 재미있는 생각으로 넘친다는것을 증명한것이다. 노상 웃음과 등질때 부정적인 울화의 늪에 빠지기십상이다. 웃음은 이렇게 부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3~4만가지 생각을 긍정적면으로 변화시키며 기쁜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하는것이다. 그래서 웃음은 선택의 문제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고 일종 의무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의 죄는 용서할지라도 인간의 신경계통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어느 목사의 설교가 있었던가, 신경이 너무 민감하여 자주 흐트러지면서 벌컬벌컥 화를 내면 심신 건강에 해롭다는 말일게다.    한생을 미소만 질질 흘리며 살아갈만큼 모든것이 넉넉하여 자족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고 한번도 밝게 미소짓지 못할만큼 불행하고 가난하여 자비감으로 한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없을것이다. 자아미소는 심령의 정화제이다. 미소를 잃은 사람은 엄중한 생명질환에 걸린 표징이라고 한다. 미소를 잃은 사람은 아무리 재부와 명예, 지위를 가지고있다고 해도 그의 생명이 병들어있는게 틀림없다.        인간관계에서 최적의 투자가 미소이지만 돈이 들지 않는다. 일전 한푼도 들이지 않고 미소할수 있는것은 인간만이 발산할수 있는 마음의 빛이기때이다.그런데 어찌하여 현대도시인들은 점점 미소에 린색하게 되였을가? 웃는 표정이란 보통 표정이다. 그러나 날로 풍요로와지고 번창해지는  도시사회에 점점 결핍한것은 서로 미소로 대하자고 선전을 해야 할만큼 결여되여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서러워 말라, 노여워말아,/ 울적한 날을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돌아오리니// 마음은 항상 슬픈것이여니 / 모든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 지나간 일은 그리우니라.    미소로써 비애의 구름을 쫓아버리라. 그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지 말게 하라. 얼굴과 락하산은 펼쳐야 산다. 이렇게 호소하고 싶다가도 랭정하게 현실을 살펴보면 미소를 잃은 사람들만 탓할게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소짓고 사는 인생이 한갖 희망사항에 불과한것이라고 생각되여 한발 물러서지 않을수 없다.    결코 즐거운 한평샏도 슬픈 한평생도 있을수 없다. 날마다 자고 깨면 밝게 웃으며 반겨주는 저 아침해처럼 늘 웃으며 살면 좋은줄 누가 모르랴만 어째 나는 스스로의 웃음에 이렇게까지 린색해졌을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초로같은 인생에 기쁨의 눈물도 있고 슬픔의 눈물도 있게 된것이여늘. 투명한 인간으로 살려는 사람과 기억의 보따리를 그냥 부등켜안고 인생의 고개길을 톺아오르는 사람은 언제나 인간세상이 슬픈 풍경으로 안겨올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까닭이 없는 무덤이 어데 있으며 까닭없는 미움인들 어데서 생기랴!    남은 여생이나마 늘 미소하는 삶을 살고싶다.                                 2007년 7 월 18 일
696    시와 시어의 예술미 댓글:  조회:4621  추천:1  2015-12-19
                               시와 시어의 예술미                                          진 언      대저, 시라하면 주로 그 형식적측면을 가리켜 문학장르로서의 시작품을 떠올리고 그 작품이 주는 예술적감동의 내적인 시적정감 및 시적요소를 론의하게 된다.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통합된 언어의 메아리, 리듬, 조화 등의 음악적(청각적) 요소와 언어에 의한 이미지, 회화적(시각적) 요소에 의해서 독자의 감각이나 감정 또는 그 상상력에 작용하며 깊은 감명이나 고양된 존재감을 제공하는 예술가치가 곧 시의 가치이다.    앨런 포의 "시란 미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는 말이나 아놀드의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이라는 말이나 폴 발레리의 "시는 절규, 눈물, 애무, 키스, 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명하고자 하는것, 또 물체가 그 외견상의 생명이나 가상된 의지로써 표명하고자 하는 그런것, 또는 그런것을 절주있는 언어로 표현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라고 내린 정의는 정당하면서도 보편성을 가진다. 이러한 시이므로 그 감화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데는 불가피적으로 언어의 선택, 시행배렬, 구성이 요구된다.    폴 발레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전자를 무용에, 후자를 보행에 비유했다. 산문은 보행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명확한 하나의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을 향한 하나의 행동이므로 그 대상에 도달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비해 시는 무용과 마찬가지로 행위의 한 체계이기는 하나 오히려 그 행위 자체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정의하고있다. 즉 시는 무용과 마찬가지로 어딘가를 목표로 삼고 나아가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황홀한 상태, 생명의 충일감을 목적으로 하는것이라는 뜻이다.    언어적요소의 기능에는 발신에 초점을 두는 정서적기능, 수신에 초점을 두는 사역적기능, 관련된 상황에 초점을 두는 지시적기능, 전언자체에 초점을 두는 시적기능, 접촉에 초점을 두는 친교적기능, 신호체계에 초점을 두는 메타언어(다른 언어를 기술 하거나 분석하는데 쓰는 언어)적기능으로 나누어 고찰된다. 시적언어란 시에만 국한된 언어가 아니라 일상인의 어법과 다른 시인의 어법을 의미할뿐이다.    싸르트르에 따르면 산문작가는 도구로서의 언어를 사용하며 시인은 사물로서 언어를 사용한다. 발레리가 도구로서의 언어는 보행이고 사물로서의 언어는 무용에 해당한다고 했듯이 후자에선 비실제적효용성 즉 심미성이 강조되는바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인이 창조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의미인 그러한 세계이다. 즉 어떤 객관적상관물을 지시하는게 아니라 시인의 애증, 분노, 고뇌, 기쁨, 비판 등을 그대로 담아낸 세계이다. 그 세계에 시인의 령혼이 살아숨쉰다.    시어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론의대상이 된것은 워즈워즈의《서정민요집》재판서문에서이다. 워즈워즈는 시의 언어는 과연 본질적으로 산문의 언어와 다른것인가? 라고 질의하였다. 시에는 반드시 시에만 쓰일수 있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개념이 그로부터 거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정서를 전달할수 있는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다는 주장이 제기된것이다. 그런데 코울리지에 의하여 오유로 인정되여 자기의 저서《문학평전》에서 많은 편폭을 들여 교정하려 시도했다.    소쉬르가 해명했듯이 모든 언어기호는 소리심성과 개념으로 나뉘여진다. 량자는 어떤 필연성은 없지만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로 존재한다. 전자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지각되며 후자는 감각으로는 지각할수 없는 언어기호의 요소 즉 비물질적인 의 미에 해당한다. 무카졸브스끼는 전자를 소리요소, 후자를 의미요소로 명명하였다. 언어의 비물질성인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언어가 노리는것은 시가 표현하는 내용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언어 그 자체가 야기하는 미적쾌락이다.    특히 시적언어의 예술적특성은 언어의 미적기능에서 비롯된다. 시는 하나의 새 구조이며 시적구조는 모종 특정된 심미적효과를 이루는 양식이다. 시어는 시라는 구조속에서 혹은 유기적통일된 체계속에서 심상, 상징, 운률, 수사 등 수법들과 긴밀하 게 조화되면서 비로소 시어가 된다. 하다면 시적언어의 특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무카졸브스끼는 시어의 특성을 총체적언어체계속에서의 위치중심으로 해명한다. 한마디로 시적언어의 특성은 미적기능을 지향한다는 말로 요약하는데 결코 실제적 내용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포용의 원리를 따라 운행된다는 설명이 된다.     말하자면 시인은 의도의 통일성에 지배되는 총체적어법을 사용하며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작품이 재현하는 보다높은 질서로서의 어법속에 포섭되며 객관적현실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시속에서 독자들의 리해력에 힘입어 류추되고 독자들의 의지는 하나의 실존경험이 된다. 이를테면 시인이란 언제나 집단의 일부이기에 현실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궁극적으로 집단적가치체계와 어떤 형태로든 조화되여야 함은 자명하다. 그런 조화속에서만 시는 전체사회가 창조하는 세계적인식의 방법에 영향준다.    시적언어의 본질은 정서적언어, 곧 화자의 감정적표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야꼽슨의 견해처럼 모든 시는 감탄사로 환원되여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리해하면 근사할것이다. 시적언어와 정서적언어는 시의 경우, 론리적언어와는 다른 공통점을 가 지고있기때문이다. 주정시든, 주지시든, 시적언어의 구조는 력동적구조로 되여진다. 무카졸브에게서도 시적언어의 구조는 소리양상과 의미양상으로 되고있다. 시는 읽어서 좋은것만 아니라 읊어서 좋은것이라는 결론이 지어진다.    이는 시어의 애매성에서 비롯되는 사유능력의 고험이라 할수 있다. 시어의 애매성에 앞서 애매성은 언어학적견지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언어의 애매성에는 음성적애매성, 문법적애매성, 어휘적애매성에서 규명된다. 현대시에서 리해력문제가 제기되게 한 요인은 어휘조합의 애매함 혹은 모호성이다. 이 시점에서 현대시해석의 원리란 전문리론이 등장하였다. 말하자면 의미해석이다.    시를 산문적으로 풀어서 말할수 없는 원인은 시의 의미의 독특성때문이다. 재래로 사람들은 운문의 감미로움을 규칙적인 언어조합 내지는 배렬에서 비롯되는 음악성에서 느끼려했다. 물론 이는 전통시에 한한것이다. 그러나 현대적관점에서는 가장 훌륭한 운문들은 대체로 불규칙성에 있다고 여긴다. 하여 운문이 률격적류형에 일치되여야 한다는 전통관념이 시를 바람직하게 읽는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시의 리듬이 체현하는 불규칙성을 지나치게 무시함으로써 시를 기계적으로 읽게 하고 따라서 어떤 률격의 형태와 조화되지 않은 시에 대해 생경함을 느끼게 하며 전통적인 흔상기준으로는 옳게 파악하며 읽을수 없게 만든다. 사실 시의 문체의 주요한 비밀은 형식과 의미의 밀접한 상호협동에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이란 명제는 아무리 격진적인 현대파라도 부인하지 못할만큼 불가피하며 시를 지음에서 자연스러운 불문률이 되고있다.    기실 형태가 가장 요긴한것이 아닌것으로서 시형식에 하나의 방편일뿐이다. 시의 운률이 시적의미에 의존하지 않지만 시적의미의 예술적전달에는 백번도 더 유익하다. 그런데 현대시에서는 곧잘 잊혀지는듯싶다. 여기서 시에 대한 평범한 반응문제가 나선다. 몽롱시에서 시의 의미라는 천속에서 날줄이나 씨줄을 찾기 힘겨우며 더구나 그것으로 이미지를 감상하려는 발상은 불가능하며 무모한 작업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낯설게 한 시라해도 시적언어에 고유한 사물성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현대시에서도 사물과 언어사이의 문제이기때문이다. 이는 시와 신념문제 혹은 진지성의 문제를 형성시킨다. 전통시나 현대시냐를 정서적측면과 지성적측면에서 갈라볼수 있지만 시에서 중요한것은 사상이 독자들의 감정과 태동에 야기하는 효과성에 있다는것은 량자가 공인하는바의 인소이다. 량자 모두에 시적신념은 지적, 정서적신념의 혼합물이여야 발휘되는 예술적마력이 어떤 시적경지에 이르기때문이다.    전통시이든 현대시이든 진정 훌륭한 한수의 시는 자률적인 정신세계이다. 그만큼 독자에게는 하나의 해석의 지평으로 다가온다. 해석의 지평선에 독자가 알려고 하는 일체의것이 들어있을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들어있지 않을수도 있다. 현대시는 전통시보다 독자가 시를 임의대로 해석할수 있는 공간을 더 넓게 제공한다. 그러나 시인의 립장에서는 자기 시에서 내적인 수미일관성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가 상호배반적이고 혼란된 요소들을 내포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단일하고 지배적인 장치속에 종속시키는게 바람직하다는것이다. 시는 수미일관성의 세계이기때문이다.    워즈워즈는“고요속에 회상되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류출”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 시점에서 본다면 시가 독자들에게 미적희열을 주는것은 독자가 아는것을 례증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독자가 모르는것을 새롭게 조명하기때문인가? 전자는 현실을 그림처럼 재현한 세계요 후자는 탐구를 남겨둔 미지의 세계이다. 이면에서 전통시는 상상력이 아니라 규칙과 원리에 얽매인 교묘한 글재주에 의해 그려진 정서세계이며 더 나아가서 말하면 어디까지나 시인의 감정이나 정조의 세계라고 말할수 있다.    쉘리는 독자를 보이지 않는 음악의 멜로디에 매혹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어둠속에 앉아 향기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고독을 즐기기 위하여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워즈워즈는 시인이 시인들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고 인류를 위해서 쓴다고했다. 그 리유는 시가 가치로운 목적을 지향하기때문이였다. 일컬어 자발성의 시론, 독백의 시론, 자아표현의 시론을 모두 시를 정서의 표현이라는 관점속에 포괄시켜 시를 각이하게 론의하고 있지만 시는 시인의 내면적정서를 표현한다는 견해로 합의된다.    현대시만이 아니라 전통시에서도 언어와 사물이 뒤범벅이 될 때, 언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언어가 되는 이중적인 동일화가 일어난다. 이때 사물을 인간주체의 의식이 어찌할수 없고 도리어 인간의 의식주체가 사물의 힘에 올라탐으로써 성립되는 것처럼 언어 역시 인간주체의 의식에 의한것이 아니라 되돌아와 인간의 의식주체가 언어의 힘에 의해 구성된다고 한다. 그럴때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것이 아니라 시적상 관물이 말하고 흐느끼고 분노하고 몸부림치는것로 된다.    시에는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이미지가 사용되면서 공감각적 이미지로 발전한다. 시적언어는 이미지 자체로 변함으로써 더 의미롭다. 주정시인은 사물의 미적양태에 도취되지만 주지시인은 시적대상에서 시작하는 말의 조합에 도취된다. 그런데 이런 도취가 어디까지 진실이며 어디까지 정서이고 사상경지인가? 이게 난제이다.    거듭 인용하거니와 벨린쓰기는 말하고있다. “위대한 시인은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일반에 대하여, 인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시인의 슬픔에서 자신의 슬픔을 알게 되며 그의 정신에서 자기 정신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에게서 시인뿐만아니라 인간 즉 인류의 견지에서 본 자기 형제를 본다.”라고, 일체 전통을 부정하는 현대시이든“고루한”경물시이든 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으로 통하는 예술작업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우리 인생에도 공통분모가 없을수 없다. 내가 살아가고있는 인생과 엇비슷한 삶을 살아가기에 공통분모를 가질수밖에 없다.    주지시든, 주정시이든 자신도 무엇을 쓰는지 알수 없고 독자는 더구나 모르게 하기 위하여 시를 쓰지는 않을것이다. 다만 전통과 달리 직설이 아니고 빙빙 에두르고 파내고 추단하는 재미로 쓸수는 있을지라도 시인의 제1상상력은 유한한 정신이 무한한 자아속에서 이루는 영원한 창조행위로서 시의 직접적인 목적도 진리의 전달 혹은 쾌락의 전달로서 그 사명을 알심들여 선택한 시어들이 완성한다. 그로써 시어의 예술성도 체현된다. 그로써 시의 사명이 빛나게 완수된다.                                    2014년 2월 10일
695    (잡문) 성실을 내버린뒤 댓글:  조회:4875  추천:0  2015-12-17
                                    성실을 내버린뒤        한 젊은이가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오래동안 주유천하 하였다. 그는 이미 《건강》, 《미모》, 《금전》,《영예》,《재능과학식》,《기민》,《성실》등 일곱개의 보배를 넣은 상자를 가지고있었다. 하루는 고험의 강의 한 나루터에 이르렀다. 나루배가 떠나기전까지만도 잠풍한 날씨였는데 강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강풍이 일며 격랑이 이는 바람에 배가 당장 뒤집혀질듯했다. 예상치못했던 상황에서 다급해난 배사공이 젊은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배는 작고 짐은 너무 많으니 상자하나를 던져야 배가 평형을 찾을것같소.》    그러나 젊은이는 어느 배낭도 던지기 아쉬워 망설이였다. 배사공이 다시 재촉했다.   《빨리 던지시오. 버리는것이 있으면 얻는것이 있게 되고 얻으면 잃는것이 있게 되는법이요. 천하를 주유했다는 사람이 이런 섭리도 모른단말이요? 자, 얼른이요, 좌우간 살아남아야 행복을 얻든지 떼복을 캐든지 할거아니요?》    배사공의 재촉이 성화같은지라 젊은이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이 상자 저 상자를 가늠해보아도 어느 하나도 버릴수 없었다. 파도는 각일각 사납게 덮쳐들고 배는 삐걱거렸다. 젊은이는 용단을 내렸다. 지금같은 자기 중심주의시대에 성실을 지키는것이 그래도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하여 마침내《성실》을 넣은 상자를 홱 내던져버렸다. 배는 무사히 강안에 대였다.    어찌보면 유치한 우화같지만 재심숙고해보면 이야기속에 심중한 시대적난제가 담겨있다. 또 그만큼 개방사유가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 성실이 내버려진후 사산사 람을 세워놓고 눈빼먹을 세상이 되였다는것을 론증할도 있고 정처없이 떠내려가는 《성실》을 누군가 건져서 경매에 붙였다는 이야기도 쓸수 있으며 물에 빠졌다가 구원된《성실》을 채방한 기자의 취재담을 쓸수도 있다.    먼저《성실》경매를 골자로 써보자.…성실을 경매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사람들은《흥, 지금 세월에 성실이 몇푼이나 된다구?》하면서 별로 흥심이 없어했다. 하지만 호기심을 안고 하나둘 모인 사람들만으로도 경매장은 시끌벅적했다. 자고로 어떠한 일에도 지망자가 있는 법이다. 옛날《승냥이가 왔어요.》하고 소리쳐서 동네사람들을 세번이나 속이며 재미를 보다가 나중에는 정말 승냥이가 와서 물어갔다는 저 유명한《소양관 (小羊馆)》이 어찌 살아남았는지 경매장에 나타나서 더구나 이채를 돋구었다.   투기모리로 한몫 챙기는 세월에 졸부는 되였지만 도처에서 사람대접을 못받게 되여서야 내버렸던 성실이 소중함을 깨닫고 허위단심 만리길을 달려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20만원에 성실을 사겠다고 첫코를 떼자 돈냄새를 피우기 좋아하는 부자들이 뒤질세라 앞다투어 높은 값을 불렀다. 경매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거개 소양관과 같이 투기모리배, 벼락부자나 직권을 악용하여 사욕을 채운 크고 작은 탐 관오리들이였다. 성실을 헌신짝처럼 내버린후 사람들이 쓴외보듯하는것이 질색이여 서 성실을 사서라도 수장해야겠다고 고쳐생각했다며 저희들끼리 쑥덕거렸다.    성실의 값이 모들뜀을 했지만 구경왔던 성실한 사람들은 이런 불성실한 사람들이 성실을 사간다고 해서 제구실을 할것인가? 하고 걱정했다. 네가 높은 값을 부르는데 내가 외편이 부족해서 못부랴 해서 값은 점점 치달아올랐고 승벽심에서라도 기어이 사고야만다고 윽윽하는 바람에 경매가 끝을 볼것같지 못했다.    경매집행자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탁상을 세괃게 탁탁 두드려댔다.   《신사숙녀여러분!부자님네들,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 경매의 목적은 성실을 팔기위한데 있은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빌어서 성실에 대한 민의를 탐지하려는것이 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짐작하셨겠지만 성실은 사유물로 될수 없는 전 사회의 보귀한 재부입니다. 또한 도저히 값매길수 없는 전 인류적인 대물림보배입니다. 제가 거짓말은 했지만 아름다운 거짓말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미안합니다. 오늘 경매는 이로써 마치려합니다. 돌아가면서 심사숙고해보시기 바랍니다. 》    경매중지가 선포되자 그저 허영심때문에 고아대던 사람들속에 실락감도 있었지만 다행이라고 은근히 쾌재를 부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그랬다. 성실은 모든 사람의 인격력량의 핵인것이다. 핵이 없는 인간이 인간일수 있는가? 참으로 성실이 전 사회적인것이 못된다면 인간사회는 더 운행될수도 없는 일이였다. 성실은 인류의 진화와 함께 진화했지만 중국의 성실은 20세기 60 년대, 70년대에 가장 원기왕성했다가 상품경제의 홍수가 신주대지를 휩쓸면서 차차 병들기시작했고 사회와 시대의 천덕꾸러기가 되여버렸다.    아무도 성실이 무엇인가를 모르지 않는다. 다만 성실이 부자가 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것만 앞세우다보니 성실을 잃은자는 더 이상 잃을것이 없다는것을 잊어버렸다. 성실의 자매인 신의를 버리면 노오란샤쯔입은 멋쟁이라해도 빈육체를 끌고다니는 헛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한 지성적인 사회병리학자가 넋에서 성실과 신의가 빠져나간 사람들을 확진하려고 떨쳐나섰다. 그는 불성실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을 왕진한후 진단보고서를 내놓았는데 대번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다.                           불성실성 진단보고서    시진: 불성실환자의 얼굴은 거개 내장에는 큰 병이 없지만 낯가죽이 유별나게 두꺼워서 스스로 얼굴붉히는 본능을 잃고있었다. 속검고 눈빛이 순박할리 있으랴만 저저히 눈동자가 혼탁했는데 교활한 빛은 넘쳐나고 남의 눈치보기나 리해득실에는 출중하게 계산이 밝아서 검은자위의 움직임이 유별났다.    코대는 누구보다 높아서 후각이 무척 발달했음직도 했지만 도덕꽃냄새는 전혀 무감각한 반면 벼슬냄새와 청운에 풍기는 온갖 리해득실만은 잘 맡아냈다. 혀바닥은 진수성찬에 마비되여 령활성을 잃었고 언어표달에 장애를 받고있었지만 거짓말을 할 때는 청산류수였다. 허지만 참말을 할때에는 성대가 파괴된듯 목소리가 석쉼하고 엮어대는 말이 두리뭉실한데다가 발음도 붉은찰도깨비 밤여울을 건너는 소리처럼 명랑 하지 못하였다.    맥진: 맥을 짚어보면 온당하지 못했다.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긴자가 절대 대부분 이였던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사기치고 허풍떨고나면 맥박이 너무 빨리 뛰였을테고 성사된후 두둑히 챙기고나서는 잔뜩 긴장했던 마음의 탕개가 확 풀리면서 맥박이 급작스레 갈아앉았을것이니 말이다. 이는 심리진단과도 딱 맞아떨어졌다.    전면검사: 심장이 구새통같이 검어지고 담이 잔뜩 부어난데다가 간장이 알콜에 절어있었다. 사람의 기를 받쳐주는 기둥인 척추도 염증이 심해서 허리를 펴지못하고 늘 머리를 조아리는 자태였다. 그리고 돈과 미색에 오금을 쓰지 못하다보니 사지는 멀쩡한듯 했으나 운신이 말째였다. 거기에 정신타락증까지 겹치여서 정신이 불진상태였고 탐욕이 암세포처럼 혈관, 피부속 어디나 확산되여 있었다.    혈액을 검사해 보면 선홍색이 아니라 암홍색으로 변색한게 보편적이였다. 혈액성분으로 기질을 분석하면 재능형도 있고 미모형도 있고 사고형도 있었지만 유독 성실과 신의가 쇠갈되여 있었다. 성실과 신의를 방출하는 세포와 혈소판이 죄다 파괴되여 있었던것이다. 정밀의기로 유전자를 측정해보니 불성실한 사람들은 마치 한어미 배속에서 나온 종자들처럼 유전자가 아주 기형적이였다.    피부색, 머리색갈, 혈형을 불문하고 성실과 신의대신 기만과 얼렁뚱땅 꾸며대기를 일삼는자들은 오두미(五斗米)에도 혈안이 되여 량심과 지조를 팔기 십상팔구였고 사소한 리득을 위해서 친구도 웃음속에 칼로 암해할수 있었으며 속과 겉이 다르게 행동하면서도 얼굴 한번 붉어지지 않는 철면피한 독종들이였다.    종합분석: 성실성은 선량과도 형제간으로서 성실하지 않고 선량할수 없는 일이다. 악인의 성실은 선하지 않으면 반대로 악성적이다. 그의 불성실이 오히려 선량함으로 기편할수 있다. 소인의 성실은 성실하지 않기만 못하다. 선량한 사람도 지혜에서는 국한성이 있으므로 성실을 국한성이 있는 주체를 최종적평가표준으로 잡을수 없다. 성실에는 선량성이 동보하므로 가짜성실이 탐욕의 수단이 된다면 저주받을 일이다.    성실과 신의는 한 개체생명의 품질문제이지만 사회적존재로서의 그자가 끼치는 영향은 악성순환이 되여진다. 2007년 9 월 27일부《법제일보》에 의하면 신용의 결여로 매년 재정상에서 손실액은 5천억원이나 되는데 십몇년래 금융. 은행업의 대부 금손실액만도 4만억원이나 된다. 성실성의 결여가 일종의 국민성으로 된다면 사회적 피해가 이렇듯 경악할지경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도덕은 무형의 력량이며 신의는 영구자본이다. 성실과 신의가 지켜지는 건전한 사회에 수요되는것은 청관들과 공정한 법제, 공민의 공평한 생존환경과 량호한 사회 문명과 정신가치체계이다. 성실과 신의문제는 단지 돈을 꾸고 돈을 갚는 간단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사회가치체계의 문제이다.    당전 탐욕을 부리지 않는 관리가 거의 없을지경에 이르렀다. 수백, 수천만원을 챙기여 징벌받는자들이 련속부절이지만 용왕매진하는 추세이다. 관원들은 권력으로 치부하고 상인들은 부정수단으로 폭리를 챙긴다. 하여 평민백성들도 따라배워 성실을 가볍게 내버린다. 성실하면 만사에 손해라는 유희규칙을 절실히 체험하였기때문이다. 모두가 취했는데 누가 홀로 깨여있기를 원할것인가?    신의위기는 인간관계에 먹장구름을 드리웠을뿐만아니라 나라의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에도 지대한 반면영향을 일으키고있다. 국민들의 관념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해도 근근히 벌려놓은것에 불과하다. 사회도덕이 없다면 사회안 정과 화해도 있을수 없다. 도덕이 무시되거나 뒤엎어진다면 공민들이 어찌 아름다운 희망을 지팽이로 삼고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갈수 있으랴,.    지금 민심속에 부자를 미워하는 비틀어진 심사가 있다고 하는데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기시한다고 말하는것이 더 실제적일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비분은 높은 층집이 없어서도 아니고 자가용이 없어서도 아니며 첩을 두지 못해서도 아니고 은행에 얼마간의 저금이 없어서도 아니다. 현사회에서 가장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십상팔구가 말한대로 하지 않는 혼관들과 갑부는 되였으나 어질지 못한 경리나 비법소득으로 부귀를 누리는 자본가들이다.    이들을 취제할수 있는것은 도덕법정이 아니라 엄정한 법률이다. 법률은 집행상 평등해야 하지 사람에 따라 달라서는 안된다. 다만 무권리하고 돈없는 백성을 상대한 법이라면 그것은 법률이 아니라 법률이라는 외투를 쓴 행정명령에 불과하다. 사기와 협잡, 투기모리는 나라의 성벽을 밑으로부터 허무는 악행이다. 국민의 성실과 신의만이 밝고 조화로운 사회건설의 주추돌이 될수 있다. 이는 상식문제이지만,    치료방안: 진단이 있고 처방이 없다면 하나마나한 진단이고 비실용적인 보고서이지만 성실과 신의를 치료한다는 의사는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근근히 치료방안이나 건의를 내놓을수밖에 없다. 백혈병에 걸리면 피를 바꿔야 한다는데 불성실한자들도 우선 혈청치료를 해야 하는데 혈관속에 인문패《혈장》을 주입하면 좋을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성실하지 못한 갑부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가장 좋기는 량심을 바꾸어넣는 수술인데 지금까지 한번도 성공한 실례가 없으니 헛소리라고 비웃줄로 안다. 성실과 신의를 완전히 내팽겨친 사람은 구제불능으로서 련옥에 보내서 곤욕을 치를 일만 남았지만 조금이라도 성실성이 남아있는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량심이 있을곳에 있는가를 만져보고 징조가 상서롭지 못하면 녀자들이 브래지어를 착용하듯 선량도덕으로 특제한 가슴띠개를 차고다니는것이 좋을듯싶다,    성실상실병은 어제 오늘 발견된것이 아니고 중국특색의 병만은 아니여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다 생기고있다. 또한 전염성이 강하므로 자기보존의 본능을 생명보존에서만 발휘하지 말고 성실성과 신의의 보존에서도 잘 발휘하여야만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 존재할 리유를 가질수 있을것이다.                              2007 년 4 월 10 일   
694    (잡문) 소인을 알아본다 댓글:  조회:4432  추천:0  2015-12-17
                              소인을 알아본다        선철들은 사람무리는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한시외전(韓詩外 傳)6권》》에는《인, 의, 례, 지, 순, 선 (无仁义礼智顺 善之心,谓之小人)이 없는 자를 소인이라 하니라.》하였다.    이른바 소인이란 소인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소인이란 인격이 비속하고 품질이 악렬하여 겉다르고 속다른 인격상의 난쟁이를 가리킨다. 품격이 고상하고 정직한 사람을 군자라고 일컫는다면 소인이란 인격이 저렬하고 품성이 악랄하여 후안무치하며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형상적 으로 부르는 칭호이다.    력사시점에서 소인이란 낡투거나 아예 죽은 단어라고 할수 있으나 오히려 특정된 함의를 가진 단어로 되여 행위가 비렬한 자들을 가리키였다. 례컨대 웃음속에 칼을 품고있거나 허장성세하고 롱간을 잘 부리며 은혜를 원쑤로 갚고 암해를 직업으로 삼거나 간에 가붙고 쓸개에 가붙거나 아첨질을 잘하는 자, 나발불기를 잘하는 자들을 통칭하여 소인이라 한다.    차지한 회전의자와는 무관하게 각양각색의 소인들이 있다. 얼굴에 소인이라 새겨있지는 않지만 언동을 보면 대개 알수 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제 키를 높이기 좋아하고 충언은 아예 들을줄 모르고 칭송에 귀밝다. 겉으로 보면 위세당당한듯 하나 속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입술이 류달리 달콤하고 득의하면 혼자 잘난체 거들먹거린다.    소인무리는 권력자들의 눈에는 하나의 풍경선이다. 소인들은 권세를  추종하기 좋아하는데 마치 똥을 본 파리떼 같고 썩은 물고기에 개미무리같다. 그런자들은 다른 사람의 권세에 업혀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만약 당신이 한자락 권력을 잡았다면 뒤미처 각양각색의 소인들이 명주바지에 닥싸리 매달리듯 매달릴것이다.    이런 자들은 백사에 무능한 자들이나 벼슬하는데는 남다른 기량이 있다. 흔히  벼슬자리 찾아 동분서주하는데 뛰는 관리라한다. 그들의 좌우명은 “생명은 운동에 있고 벼슬은 활동”에 있다는 원리를 너무도 잘 터득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맡은 바의 일을 황소처럼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면서 천리마인듯 으시댄다. 아무 실적도 없지만 벼슬마당에서는 승승장구의 기세이다.    일단 한자리 하면 더 높이 바라오르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데 제일 법보가   기편하는것이다. 떠들썩하게 형식을 피워 상급의 주목을 끌며 간계를 부려 착실하게 일한것처럼 꾸미여 거짓보고를 올리는 능수들이다. 장밤 마작쪽을 주무르느라 눈에 피가 지고도 밤새워 문건을 보고 재료를 쓴듯이 능청부린다.    오직 승급할수만 있다면 하늘을 제것이라고 나발불기도 꺼리지 않는다. 웃기는 일이지만 이런 소인배들이 승강기식벼슬을 한다. 바람따라 돛을 달고 상급의 희노 애락에 가락을 맞춰 북치고 장단치면서 하급에게는 벼슬자리를 약속하는 간교한 술책 으로 인심을 얻는다.   소인은 허구의 능수이다. 자기를 장식하는 상상력은 시인을 초과한다. 소인은 심리학가이다. 눈과 귀는 사면팔방에 미치고 손익을 잘 따지고 웃음속에 칼을 품고 미사려구를 엮으며 특히 상급의 기색에서 심사를 가늠하며 듣그러운 소리를 하여 신임을 산다.   소인은 등덩쿨과 같은 성격의 소유지이다. 남의 위세에 달라붙어 잘 바라오르고 남을 해치는데는 끈덕지여서 끝을 보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소인은 모략가이다. 신성의 외투를 걸치고 귀신놀음을 논다. 소인은 인류가 낳은 괴태이다. 물론 소수 이긴 하지만 그 영향력은 심대하다.    소인은 권세의 파생물로서 어디에 권세가 있으면 생선에 쉬파리 모여들듯이 그 주위엔 소인들이 모여들기마련이였다. 그만큼 권세가들의 눈앞에는 소인들이 하나의 외면할수 없는 풍경선이였고 그저 사랑스럽게만 여겨졌을것이다.     그러나 권세에 아부하며 충성을 다지는 소인들에게는 절대 영원한 충성이 없다. 그들은 이 산에서 저산을 바라보며 바람따라 돛을 다는 능갈친 인간들이다.    그처럼 소인들은 백이면 백이 철저한 실용주의자들로서 입으로는 우의와 강호의 의기를 걸고다니지만 싹 마셔버린 꿀병이라고 느끼면 아무 미련없이 친구를 배반하고 자기리익에 어긋날때는 뒤에서 공격하고 비방하는데 앞장서기 십상이다. 예로부터 군 자는 소인과 다투어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내려오고있는데 사람마다 소인배라고 절치부심하면서도 십분 경계하는것이 관례이다. 량산호걸 림충이 고구에게 당한 사실을 보아도 가히 알만하지 않는가?    소인들은 저저히 심리학가들이고 담장을 따라 잘도 바라오르는 넝쿨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며 모략가들이다. 그들은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져넣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강을 건너고 다리를 허물어버리는 배은망덕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소인들은 아름다운것을 발견하고 때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민감할수 있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름다운 사물을 가늠하면서 눈빛이 혹은 붉어지고 혹은 파래지며 때로는 눈길을 박기도 하고 눈길을 피하기도 한다. 오직 그것을 망가놓고싶은 마음을 참을수 없을 때 남에게 알릴수 없는 교역의 분동으로 리용한다.    소인들은 아름다운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소인도 아름다운것을 발견하고 때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민감할수 있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눈을 가늘께 뜨고 아름다운 사물을 가늠하면서 눈빛이 혹은 붉어지고 혹은 파래지며 때로 눈길을 박기도 하고 때론 눈길을 피하기도 한다. 오직 그것을 망가놓고싶은 마음을 참을수 없을 때 남에게 알릴수 없는 교역의 분동으로 리용한다.    소인들은 권력을 보아서는 안된다. 무릇 어떤 정황하에서든지 소인의 주의력은 언제나 빙빙에둘러서라도 권력의 천평에 다가든다. 다른 사람들이 볼바엔 근본상 통할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들은 쥐가 바람벽을 뚫듯이 뚫고들어간다. 소인을 소인이 되는것은 인품과 인격상에서이다.    소인들은 시끄러움을 꺼리지 않는다. 시끄러움을 마다하면 소인이 될수 없다. 소인은 시끄러움속에서 일을 찾아낸다. 소인들은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일을 망가지게 할수 있다는것을 잘알고 있기에 시끄러움을 두려하지 않는다.    소인들은 자기를 위한 일처리에서는 효률이 높은데 일이 성사되기만 추구하기에 규범따위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양으로 음으로 눈가리는 수법을 잘 장악하고 있어 덮어감추기에 귀신같은며 일을 처리함에서 거의 막힐것이 없다. 마치 물뱀처럼 령활하여 사정을 신속하게 파악한다. 그들은 권력자의 입검의 아픔을 곧잘 알아내고 그들의 구미를 맞추어내여 삽시간에 일을 해결해치운다. 뒤심이 있기에 일 효률이 더욱 높아질것은 당연하다.       홰불을 켜들고 공공연히 강탈하는 강도나 살인하면서도 눈한번 깜짝하지 않는 회자수들은 악인이지 소인은 아니다. 소인들은 그러 담량이 없기에 시종 엄페하거나 피한다. 소인들은 꼭 류언비어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소인들은 여우가 범의 위풍을 빌어 위세를 부리듯이 권력자의 손으로 자기를 보호하려 하는바 언제나 아주 그럴듯하게《적정》을 회보한다. 소인의 천부는 거짓말과 요언을 아주 합리하게 조합하는데서 발휘된다.     군자는 자기 성찰에 밝지만 소인은 타인과의 비교에 령민하다. 그러나 륙도삼략을 품을만한 흉금이 없고 아주 세심하지만 원견이 없기에 국세를 공제할수 없다. 하기에 하나하나의 악과를 제조해내지만 악과들이 모이고 쌓여 결국 어떤 참혹한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소인세계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모식이 아니며 하나의 차원도 아니다. 자고로 인격상《난쟁이》는 아무리 고관대작을 한다더라도 역시 소인으로 치부되였다. 모두어 말하면 소인은 사람이 응당 갖추어야 할 인격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 지구촌에 소인들이 소수이겠지만 그들의 에너지와 그들이 남을 해꼬지 잘 하는 기량을 소홀히 볼일이 아니다. 력래의 봉건통치자들이 충량지재를 경원시하고 소인들을 중용하였기에 정사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참사가 적지 않았다. 산에 가면 뱀을 주의해야 하듯이 등치고 간을 빼먹을 세상에서는 더욱 소인배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것이다.                                         2005 년 4 월 23 일  
693    (잡문) 인격의 안팎 댓글:  조회:4740  추천:0  2015-12-17
                                 인격의 안팎                                        인격이란 지적, 정감적, 의지적 및 육체적측면을 총괄하는 전체적인 통일체로서 그 사람의 인간적인 품격이다. 신에게는 신격이 있고 사람에게는 인격이란게 있다. 그래서 인간을 개체라기보다 인격이라고 말하는것이다. 맑스선생은 인격의 본질은 수염이나 혈액, 추상적인 육체의 본성이 아니라 사람의 사회특질이라고 하였다.    인격정신소질의 핵심은 자아의식이다. 인격은 평등하다. 하지만 인간의 품격에는 우질과 저질의 차이가 있다. 한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의 고매한 인격속에서 나와야 가치가 주어진다. 사람마다 얻으려고 골몰하는 재부나 명예, 학식 등에도 인격인소가 포함됨으로써 비로소 가치가 주어지게 된다.    흔히 일종의 맹세형식으로《내 인격으로 담보한단말이오》하고 말한다. 인격으로 담보할지라도 그 인격이 참되지 않은 행위는 비천하고 무가치하다. 그것이 풍부한 재부를 등대고 으시대든 연박한 학식에 기대든 상관없이 참된 인격이 아니면 뜬 구 름과 같은것이다. 인격은 후천적이기는 해도 하루아침에 얻을수 있는것도 아니요 많이 배웠다고해서 몸에 슴배는것도 아니다. 오직 거짓없는 인성과 도덕적노력으로 갈고 닦아야 얻어진다.    사람이 육체상 병이 든다는것은 불행한 조우이지만 심령에 병든것만큼 불행한것은 없다. 그것은 인격의 병을 의미한다. 일체 가상과 허위는 의식에서 온다. 의식은 자아의 능동성이다. 사람들의 착각은 자아기편과 본분을 잃은데서 인기된다. 개체화 된 상태는 선행을 위하든지 악행을 위하든지 생존을 위하여 점점 중요해지고 있으나 개체화의 목적은 참인격의 높이에 이르지 못한다. 오로지 리해득실에서 출발한 욕망에 국한되여 있기때문이다.    인간은 실제상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의 삶에 충실할 때라야만 자기 자신으로 순수하게 존재할수 있다. 사람마다 숙명적으로 자기에게 걸맞는 그릇을 가지고 태여났다. 그리고 그 그릇에 담을만한 자기 몫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그릇이야 어떠하든 가득채우고 넘쳐나게 채우려고 전전긍긍한다. 자기 그릇에 따라 채워지는것에 만족하며 사는것이 바른 삶이고 자기를 안으로 성찰해야 참된 삶이련만 분복에 없는 인격을 분식하고 과장하여 과시하려 한다.    생명의 술잔이 저마끔 다른만큼 부어지는 생활의 술도 각양각색일수밖에 없으며 색갈도 각이할수밖에 없다. 누가 나의 삶을 살아주는가? 오로지 내가 나의 삶을 살 아갈뿐이다. 일생에서 가장 해내기 어렵고 더구나 완성불가능한 작업이 어떻게 참된 인격적인 인간이 되는가 하는 일이다. 내가 나의 인격을 평가해준다. 그게 인격의 참모습이다.    누구에게나 생명은 보귀하다. 밑바닥인생을 사는 민초들이라도 그 생명속에는 아직 채굴되지 않는 금을 가지고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격속에 금처럼 반짝이는 빛을 가지고있는것이다. 인격을 함양한다는것은 바로 자기에게 고유한 그 빛을 발굴하는 과정이다. 한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은 내 몸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인간본연의 의식, 자기 몸안에 자각성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서로 가진것을 비교하고 사치와 향락의 질량을 비교하며 허황한 명예를 비교하며 자기를 괴롭히고 남의 인격을 짓밟으려 한다. 소금역할도 제대로 못하면서 금덩이처럼 빛을 발산하려는 얄팍한 사람들로 넘쳐나고있다. 물욕이 횡행하는만큼 불신이 사회고질로 된 시대이다. 사람들은 도무지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으면 랑패보기때문이다. 의리도, 명분도, 질서도 실종의 위기를 맞고있다. 이것은 사회를 불신과 부패로 몰아가는 심각한 병페이다.    이러다보니 성실한 사람은 바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남의 등을 디디고 올라섰겄만 자기능력인양 으시대는 세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가진자가 큰소리치는 기막힌 물질만능의 사회구조속에서 모두가 병들어있다. 인간들 사이에 알륵과 쟁투는 원시시대처럼 먹을것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나누어가지는 문제, 더 많이 가지려고 탐욕에서 생긴다고 할수도 있다.    이렇게 더 가지려는 마음이 인간사회에 악순환을 형성하였고 그 잠규칙에 따라 사회가 운행되고있다. 경우야 어떻든 우선 내가 먼저 가지고 많이 가지려는 생각만 앞세우고 살기에 자신이 손해를 보는것에는 도저히 참지 못한다. 자기 존재의 정체는 바로 진실과 성실과 나눔에 있다.    나는 왜 많이 가진자들처럼 떵떵거리며 살수 없는가? 무슨 리유로 저 사람들은 저리도 잘 사는가? 라는 비교를 앞세우면 고통스러울것은 당연하다. 못가지고 사는데 익숙하게 되면 웬만한 손해에는 콩팔칠팔하지 않고 대방에 리롭게 하려는 아량을 얼마간이라도 가지고 살수 있다. 인격이 없는 인생은 부실하게 시공된 건물에서 사는것과 같다.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어느 하루아침 붕괴될수도 있다.    사람은 저저히 자기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인생의 지평선을 향해 허위허위 걸어가게 되여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로 된다. 보이지 않는것을 볼수 있는 마음과 여유가 없이 보이는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은 무위무능의 인생이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양상이 인간다운 삶인가? 지금 나는 참사람답게 살고있는가? 그리고 나답게 세상을 살며 사람들과 마주하는가? 무엇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해답하면서 자기 인격을 함양해야 한다.    누구나 남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지만 나중엔 역시 공수래공수거인 인생마당인데 남이 사는대로 따라가려 아득바득하며 살다보면 자기의 삶을 어디로 향하도록 해야 가장 가치있고 진실한 삶이 될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중인격자가 된다. 이중인격이란 의식의 통일이 분렬되여 전혀 련락이 없는 이중의 의식세계를 가진 변태적심리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이중인격자가 된다는것은 확실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이중인격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흔히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을 제쳐버리고 노상 중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환경이면 쉽게 형성될수 있다. 이를테면 오래동안 권력의 틈서리에서 일하면서 그 들에게 인정받아야 살아남게 될것이고 그렇게 살아남으려면 눈치를 살피며 죽어 지내야 할것이고 되돌아와 이런 환경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울분이 쌓이게 되고 차차 본의 아니게  인중인격이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이중인격자들은 자기 안에서 결핍한 주체성과 빈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이 가배로 팽창하며 도처에서 용을 쓴다. 결핍증이 심하면 심할수록 만족에 더욱 집착하기때문이다. 마치 갈증을 말리려고 바다물을 퍼마시는 형국이다. 이는 무한한 인간의 욕망과 추구를 잘 대변하는 말이다.    이중인격자는 과대망상증에 쉽게 걸린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보다 더 큰 권력을 잡으면 성공에 이은 독선은 망상으로 이어질수 있다. 정신과학적으로 말해 망상환자는 심리상 내적변화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타인에게는 뚝심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속은 취약하여 외부의 물리적개입에 의해 쉽게 무너질수 있다.    이중인격자에게 존재하는 문제는 또 지나친 자기확신이다.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성공만 해온 사람으로 인식하며 그에 걸맞은 자기 확신을 갖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남을 믿지 못하고 아주 작은 사안까지 의심하고 질투하는 바람에 랑패보기가 십상이다.    이중인격자의 감정과 성취감도 오묘한 문제이다. 살다보면 자기감정이 곧 현실인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현실을 인식하는데 객관적 사실보다는 자신의 주관적판단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말로서 사람에 따라 이 증세가 심할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금전이 뒤받침하기에 어떤 일을 밀고나갈수 있지만 사실 개인적력량은 흔히 보잘것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보직에서 물러나 일반인이 되여버리면 누구 보다 무기력해지고 인격상 찌그러지는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심리관성에 의해 자기의 위치를 착각하기 쉬우며 채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되여졌건만 자각하지 못한다. 정신의학에 인간은 지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정서적인 깨달음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라고 규정한 리론도 있다. 성취감이 개인적으로 뿌듯함과 강렬한 희열을 주는것은 사실이지만 심리적 행복감과는 조금 다르다. 평생 객관적성취의 희열을 안고 살아왔고 그런 환경에만 익숙해진 사람은 흔히 이런 오묘한 도리를 모르고 산다.    인간은 누구나 이중적성격인소를 다다소소히 가지고있다. 그것은 거짓말도 참말처럼 해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 증명된다. 개체의 거짓말의 심리는 허영심에 근원을 두고있다. 거짓말과 참말은 개인관계에서 리해득실에 의해 보편화되고 정치적으로는 권력관계에 의해 구조화된 가치론적문제이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우리 사회가 각종 증명서류를 요구하는것은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는 전제를 내세우기때문이다. 물론 전부의 리유는 아니지만도 말이다.    각설하고, 두려운것은 일반 국민들의 이중인격인소가 아니라 루추하고 사악한 이중인격이 이 시대의 정상적인 사회현상이 된것이다. 진정 착하고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는 단일인격자들이 처처에서 벽에 코를 부딪치고 심지어 이 사회에 용납되지 않는것이 두려운 일이다. 이는 한두사람의 고충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충이리라.                                                             2008년 1 월 25 일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