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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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진언씨수상록 36)(잡문) 금전=사랑? 댓글:  조회:5139  추천:0  2015-12-11
                                                          금전=사랑?                                                                진 언      《중경만보》에서 백만장자들이 공개구혼을 광고로 내였는데 12월 16일까지 신 청한 녀자들이 510명이고 면접을 본 녀자만도  232명에 달한다고 한다. 신청자들의 년령은 19시부터 44세어간이고 구성을 보면 교원, 의사, 등 다양한 직종의 미녀들이라고 한다. 이번 공개구혼에 나선 백만장자들은 48명인 자산이 저저 억원이 넘는데 나이는 공개하지 않고있다.      공개구혼의 취지는 “귀한 인재”를 고르기 위한것이라고 하는데 선발기준에는 녀자의 이미지, 재능, 지혜, 능력, 심리사태, 감정상태 등이 들어있다고 한다. 선발된 8명 미녀들은 이제 최종시험을 거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태공이 낚시질하니 원하는자는 물릴지어다”라는 식이여서 태공이 곧은 낚시를 하는데 나름의 목적이 있고 자연스러운 인생활동이듯이 공개구혼을 하는 자들도, 그에 구름처럼 모 여드는 미녀들도 다 자유적인 선택이니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로되 그에 대한 각자 소감을 피력하는것도 나름대로의 자유라 시비조가 아니라 소감식으로 엮어본다.     현시대만큼 감상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그만큼 참된 감정이 뒤전에 밀리고 허위적감정이 포장되여 있는 시대는 없었다. 지금 사람들은 정서가 아니라 감각속에서 버둥거리고있다. 따라서 정서도 허위가 되지 않을수 없다. 비록 거짓된 감정이 유혹적이 될수는 있어도 사랑으로는 되기 쉽지 않다. 개누깔사탕은 달착지근하지만 배를 불리는 빵이 되지 못한다. 당분을 과도하게 섭취하면 당뇨병이 온다고 한다. 이처럼 현시대에 벼락결혼이 류행되고 그보다 더 가급적으로 리혼가가 만연되는것이다.     오늘날 소위 사랑이라는 감정은 가장 적라라한 거짓이 되여버렸다. 그리하여 사랑이란것도 상품성을 짙게 띄게 되였다. 사랑의 천평에 금전을 분동으로 올려놓기에 돈만있으면 사랑의 문도 무난하게 열린다고 생각한다. 사랑도 사치한 소비로 전락된것이다. 사랑도 기분에 따른 선택인가? 정히 그렇다면 더 말할것이 없다. 그러나 할 말이 없어진다는것은 생각마저 없어졌다는것은 아니다.     사랑은 감정을 매개로 하는데 공방형이 삼신할미가 되였으니 고소비의 진행에 사랑의 감정도 정비례로 된다고 누가 장담할것인가? 돈이 무진장할세 지어먹은 감정도 무진할수 없지 않은가? 현대미녀들은 자기를 더 값나가게 맡길 남자가 흔치않다고 한다. 필경 부자는 소수이니까, 반대로 갑부들은 원하는 “사랑”을 돈으로 얼마든지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공개구혼이 광고되고 향기로운 미끼에 몰려드는 강물고기처럼 미녀들이 몰려드는것이다.      그네들은 현대사랑의 튼튼한 기초야말로 돈이기에 남자는 녀자의 육체와 더불어 사랑의 감정도 독차지할수 있다고 자신하고 녀자는 육체와 더불어 사랑도 바칠수 있다고 마음을 다진다. 정말 그럴가? 원래 사랑의 마음과 금전의 유혹에는 필연적인 련계성이 없는것이다. 그러나 하나로 묶인다는것고 하나로 융합된다는것은 벌써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누가 그런것까지 일일이 캐고든단 말인가?     자기의 진실한 정서를 돈에 맡겨서는 안된다는것을 몰라서가 아닐 때, 사연은 더욱 슬퍼진다. 물론 아직도 사랑과 금전사이에 등호를 치지 않고 참된 정서를 간직하고있는 미녀들에게는 일정한 계시가 되겠지만 돈의 만능에 혹해버린 미녀들은 이따위 설교에 코방귀를 뀔것이다. 돈=사랑이라는 이 신념은 이 시대의 슬로건이 되여졌다. 돈에 자기 감정을 맡기고싶으면 맡기라 하라. 어떠한 일에도 지망자가 있는법이니까.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고 자유이기도 한것이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전에 자기를 내맡기는것이 좋지 않다는것은 틀림이 없다. 돈이 그런 아름다운 동경을 짓밟아버릴것이다. 결혼은 감정의 매매가 아니라 인생의 실마리이다. 사랑은 결혼과 직결되고 결혼의 진정한 의미는 성애로 체현된다. 진실한 감정이 허위로 포장될 때 참된 성애란 없다. 성은 허위일수 없는 유일한것이다. 하긴 생명활동으로서의 성유희는 육체적감각에만 몰입될 때 어떤 만족감을 생성할수도 있겠다. 위조된 성활동은 요란할수 있되 나중에 자기 비애속에서 성에 대한 환상의 궁전이 무너질때가 있을것이다.      돈이 많은 남자라는 리유하나로 초면강산인데도 대뜸 절친해지하고 사랑의 바줄인 감정이 굵고 튼튼히 꼬이기전에 사랑극을 연출하고 자기의 정서를 조작하며 성으로써 남자를 사로잡을수 있으리라는 념원이 현시대 많은 미녀들의 추구이자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되고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공개구혼자들은 왜 자기들의 나이를 밝히지 않는가? 여기엔 구혼을 성사시키는데 필수적인 기술적인 문제가 작용했을것이다. 그들속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을수 있다. 가령 있다면 재산으로 자기의 성애를 표면적으로 아름다운 외투를 입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랑의 궁전에 이르는 꽃밭길이 아니며 청실홍실로 엮은 사랑의 금다리도 아니다. 그런것들은 분명 졸렬한 분식으로서 사람들의 눈과 남녀간의 감정적진실, 인생의 섭리를 은페할수 없다. 갑부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며 늙으면 다른 늙이들과 조금도 다를것이 없다. 욕념은 꿈틀거리지만 중추신경에는 구멍이 나고…늙은이면 다겪는 현실에 살게 된다. 돈많은 로부(老夫)에 대하여 말하면 젊은 안해(小妻)는 주위에서, 눈앞에서 날아다니며 앵앵거리는 작은 모기같을것이고…      고독한 로년과 허영에 들뜬 청춘이 만나면 세대의 감각, 세대차이의 관념 등 뛰여넘을수 없는 홍구계선이 있기마련이다. 그것을 아무리 고양하고 분식하여도 찬란 한것은 아니다. 그저 황혼의 잔광아래에서 담담한 슬픔을 씹으며 소유한 만족감으로 오히려 슬퍼지거나 막무가내한 슬픔으로 하여 오는 반상적인 기쁨일것이다.       갑부들이 미녀를 안해로 삼는것을 우아하게 표현한다면 재자가인의 만남이라고 가송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또 다른 형태의 애정은 아니다. 파란만장한 애정극에 미만한 대단원을 이루는 그런 사랑극도 아니다. 갑부들이 “오, 나의 천사여, 최후의 달콤한 선물이며 나의 쇠잔한 넋이 고목봉춘이 될수 있도록 엮어진 정서와 정감의 극치여라”하고 감격해서 환호해도 사랑의 진실한 의미에 달라질것은 없다.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할수 있다. 일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미칠수 없을만큼 기기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세상에는 개가 꼬리를 흔드는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격의 경우도 많다. 수많은 여러가지의, 경우에 따라서는 상반되는 욕망의 혼합물로 남을수도 있다. 인간은 밤과 낮에 현연되는 양자가 전혀 다른 동물이 아닐가? 애정비극에 대한 의미가 현시대에 와서 다른 형태로 형성되고있다. 구파파의 기사식사랑의 시대는 지나갔고 또 오늘도 그것을 숭상할 리유는 없고 플라톤식의 애정이라 있을수 없지만 인류의 가슴에서 생성되고 인류진화와 더불어 진화된 사랑의 원초적의미는 변할수 없다.      사랑이 정녕 성애로만 금그어진다면 동물성에의 환원이 될것이고 사랑이 금전을 시금석으로 한다면 사랑이란 의미도 달리 해석되여야 할것이다. 쉐익스피어가 몇백년전에 금전의 추구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하였는데 절대적진리라고 말할수는 없겠지만 력사적진실을 말하고있다. 가령 애정도 물질적부에 원천을 두고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가? 정답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정답에 흥심을 가지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정답은 묘연해지는것이 아니랴,                                                             2012년 12월 25일
691    자족의 노래 댓글:  조회:5026  추천:0  2015-12-10
                         자족의 노래                                 최 균 선      보통 흥겨우면 코노래가 나온다. 흥겹다는것은 모종 자족의 표현이다. 하지만 코노래는 정해진 곡이 따로 없다. 하기에 이 세상에 가장 엮기어렵고 부르기도 어려 운 노래가 있다면 아마도 자족의 노래가 아닐가싶다. 왜냐하면 자족은 욕망의 도달점 에서 오지만 때때로의 자족뿐 욕망의 문에 자물쇠를 잠글만큼 인간의 마음마당에는 자족의 계선이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만타령은 시끌벅적하나 자족의 노래는 없고 또 아무도 지어낼수 없다. 그래서 자족의 애원성이나 엮어보자는게다    인간의 욕망의 바다는 아롱다롱하고 호한한만큼 설레임이 멈춘적이 없다. 스스로 자족할줄 알아야 한다는 대도리를 모를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고 모든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것도 모래위에 쓰는 소녀의 사랑의 맹세같다는것을 잘 안다. 가진것이 별로 없는 사람일지라도 자족하면 질박하게 웃을수 있지만 만족이 끝없는 사람은 자족의 웃음이 새여나올 틈이 절대 없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가? 피다그라스는 욕망이란 심장에서 생긴다고 했고 테라크리크는 신장에서 생긴다고 했다. 허나 플라톤은 전자들의 말을 죄다 부정하고 욕망은 배꼽과 복막사이에서 온다고 선포했다. 그의 론단은 전세계를 진감시켰고 그 후 2천 년을 세계를 진감시켰다. 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느 말이 맞는가 하는것이  그리 요긴하지 않다. 요는 불만족은 욕망의 괴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100만년전에 원숭이였던 인류는 90만년이란 긴긴 세월을 거쳐 조잡한 도구를 만들줄 알았고 10만년후에야 불을 사용할줄 알았다. 1만년전에 인류는 밭에 곡식을 심어먹을줄 알았다. 화페를 만들어내면서부터 인간은 욕망을 살수 있게 되였으며 그 욕망을 나타내는 언어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욕망은 더 팽창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지혜가 생기면서 무궁한 욕망이 생겨났다는 해석이 되겠다. 그때로부터 인류는 자족 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였다.    판도라의 신비한 그 함뚜껑이 열리자 제일 먼저 뛰쳐나온것이 질병과 죽음이였다면 뒤미처 뛰여나온것이 욕망이란놈이였을가? 인간의 욕망은 쌍날검이고 사회진보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면서도 사회발전에 악성종류이다. 인간의 욕망이 있기에 참혹 한 전쟁의 재화가 끝난뒤의 길함과 통일이 있게 된것이고 생명의 번성과 화해가 있게 된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있기에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달에 오르고 사대양에 들어가 자라를 잡는것이다.    욕망이 있었기에 상전벽해가 있게 된것이고 력대의 영웅들도 욕망의 사막에서 버둥대다가 저녁연기처럼 사라진것이다. 다른 한방면으로 욕망이 있기에 끝없는 살륙의 초연이 가실새 없는것이고 남녀의 란륜과 음탕이 있게 된것이며 탐욕이 횡행하게 된것이다. 하나의 종결점은 모종의 한도이다. 그러나 누가 이 한도를 정할수 있는가? 뿌쉬낀의《어부와 금붕어》에서 그 로파가 바로 전형적인 실례로 된다.    이렇듯 욕망은 생존의 의의이고 최종목적은 그 욕망을 달성하는것으로서 인류의 발전사는 결국 용망의 확장사이다. 그 과정에 인간은 완전히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욕망은 다종다양하다. 례하면 권력욕, 명예욕, 금전욕, 구지욕, 애욕, 성욕, 식욕 등. 유일하게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을 무치하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은 욕망이다.    욕망은 우리들이 다오를수 없는 산밑에 서있는것과 같다. 머리를 들어 산정을 바라며 단숨에 오르고 싶어진다. 가령 제일봉에 올라다해도 다시 달을 따고싶고 해를 따고싶어진다. 겉에 드러난 풍경을 향수하면서도 그 산밑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하보 물에도 욕망이 손길을 뻗친다. 탐욕과 욕망은 인성이 추악하게 된 근원이 되였다.    아무튼 한번 뛰쳐나온 욕망이란 놈은 요술방망이 같은 유혹을 꼬리에 달고 무시로 사람을 꼬드기며 무한정 앞으로만 달려갔다. 욕망자체가 사회적문제로 될수 없지만 인간은 무제한한 욕망을 창조해내고 그것에 불만족하여 다른 욕망을 마중하느라고 혈안이 되여 광분하였다. 죽음보다도 굶주림보다도 무서운것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리는 탐욕이건만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욕망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될것을 만지지는 않았을가 하는 곤혹을 손과 함께 씻는것이 인간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을지라도 죽을때에는 빈손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설사 많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지라도 자식이 능히 그 재산을 지켜나간다는 보장이 없기에 또 걱정이다. 그래도 자손만대를 내리 물처럼 써도 모자라지 않게 더욱 더욱 많은 재산을 챙겨서 후대에게 물려주려고 아득바득이다.    인간의 사유기능은 원래 생계의 탐구용이었으나 오늘날에 탐욕의 하녀로 되였다. 꽃은 피였다가 지고 달은 만월로 웃다가 스러지기 마련이다. 복이있어 많은 재산을 주물다가도 일조에 거지가 될수도 있다. 사람이 정도로 살지 않고 부정축재하면 고대 광실에 금은보화 넘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거나 말거나 심보 한번 고약한 자들은 내노라 으시대며 살아간다. 어떤 자리든 배탈이 나더라도 차례진것은 물론 남의것도 앗아먹지 못해 냠냠거리는 무리들이 잘난 사람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스스로 자기처지에 만족할줄 알아야한다. 로자의 도덕경에 “완전히 이루어진것은 모자란듯하다. 그러나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완전히 가득찬것은 빈듯하다. 그러나 쓰임에는 끝이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얻음에서 완전함을 삼가하라는 뜻이다. 모든것은 마음의 자세에 달려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날마다 생활이 즐겁지만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항상 근심과 걱정에 싸여 지낸다. 그들에겐 행복지수가 미지수이기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추구는 인간상정이지만 지나치면 량지를 상실하고 후안무치해질수밖에 없다는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부유할때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면 덕망이 높고 권세를 등대고 겸손을 잃으면 패덕자로 남을것이다. 가진것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자기 처지에 자족하는 사람이 성자라면 늘 불만족의 피리를 부는 사람은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욕망은 하나의 문이다. 그문에 때때로 자족의 자물쇠를 잠글줄 안다면 코노래가 흥얼겨려질것이다. 복은 결코 빌어올수는 없다. 복은 받을 복이 있는 사람이 받는다. 자고로 정많고 어질고 인심이 후하면 못사는게 정상이 되였다. 개도 안먹는 량심을 앞세우고 불의와 등지면 생활이 팍팍기 마련이지만 안빈락도에 자족할줄 알기에 탐욕병에 시달리지 않았다.    일컬어 군자는 어찌하여 스스로에 족하며 일컬어 소인은 어찌하여 늘 자족하지 못하는가? 원래 가진것 넉넉하지 않으니 조금 얻어도 자족함에 남음이 있고 소인들은 그만하면 족하련만 만족에 기갈이 들었으니 언제나 부족타령이 나올수밖에 없으렸다. 분복에 따라 욕심부리면 족하지 않을리 없고 마음에 부족의 공간을 내놓고 살아가면 자족할 때가 언제리요.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애쓰면서 사는것보다도 더 훌륭한 삶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보다 나아지고 있음을 느끼는것보다도 더 큰 만족감은 없다. 내게 있는것으로 쓰면 부족하지 않을것이나 내마음밖에 있는것마저 모조리 죄다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면 어찌 능히 자족이 깃들랴, 한바가지 물로도 갈한 목을 추길수 있으나 금준미주로도 주지육림의 욕망을 잠재울수 없는법, 자족이 얻음에 있다기보다 느낌에 있지 아니하랴?! 우리는 언제면 자족을 안고 고요히 잠들수 있을가?                               2009년 6월 10 일 (2015년 9월6일 연변일보)
690    묻혀버린 고향의 논벌을 바라보며 댓글:  조회:4679  추천:0  2015-12-10
                    묻혀버린 고향의 논벌을 뱌라보며                                                                 최 균 선      벌초를 끝내자 술석잔붓고 깊은절을 하고 텅빈 하늘을 바라보니 쪼각구름이 시름없이 떠도는데 내상념도 자연좇아 쪼각무늬로 엮어진다. 해란강을 옆에끼고 평화롭게 누웠던 푸른논벌, 이맘때면 해마다 황금물결 파도치던 고향마을의 문전옥 답이 간데없고 산을 허물어 메운 훤한 공터만 허무를 안겨준다. 유신촌, 모아툰의 과수원, 논과 마을까지 팔려 개발구가 된다는 소문이 사실이였다. 과수원주인이라는 사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한족사내였다.    다른 사람들은 산중턱에 묘지를 다 처리했는데 이묘통지를 받지못했는가 물었다. 몇해 외지에 있다가 방금 돌아와서 모르노라고 했더니 이 과수원도 이미 팔렸으니 묘를 옮기는게 좋을것이라고 충고했다. 담배를 나누어 피우면서 좀 익숙해지니 살아 갈일이 망연하다고 하소연했다. 유신촌과농들이 시내에서 살게 됐지만 땅과 집터를 판돈에만 목을 매달게 되였으니 곰이 제발바닥을 핧기가 아닌가고 허구프게 웃었다.    도대체 경제발전에 무슨 리익을 가져주는 공정인가 물었더니 이런저런 소문들이 무성한데 도대체 어쩌자는건지 우리같은 농포들이야 알택이 있는가고 개탄했다. 하긴 나도 자세한 사정을 알수 없거니와 알았다한들 한낱 보통국민으로서 그저 고향의 논벌은 이렇게 매몰되거니 하는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조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새삶터에 괭이를 박아 100여년, 피땀으로 걸구어낸 문전옥답이 묻혀버린 현실, 물론 사들인 해당자들이나 세세대대로 뿌리박은 삶터를 팔아치우게 된 고향사람들이나 제나름대로의 리유와 경제타산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저 할말을 잃고 왼고개만 비탈리였다.    마을에 내려가 몇안되는 내또래들을 찾아 한담삼아 심중을 떠보았더니 한평생 등허리휘도록 농사지어봤자 요모양요꼴로 인생이 저물었는데 이제 더바랄것이 무어냐? 먹을알없는 농사일에 넌덜머리 나던차 백여만원씩 쥐고나니 꿈에도 생각못했던 갑부가 되였다고 웃음주머니를 흔들고있었다. 고향마을이 흘러가고 논과 밭이 영원히 사라진 사실에 실망했지만 무슨말을 더할수 있단말인가?    농민들로 말하면 그 백여만원이 목돈이겠지만 그 돈이 새끼를 치기전에 거진 날려가버릴게 뻔하고 어디에가 안치할것인지 구체적인 방안도 없단다. 돈은 있다가도 훌 날려가버리지만 농토는“아리바바의 동굴”은 아니여도 생계의 원천임에는 틀림 없는데 왜들 땅이 부담스러운 재산이 되였을가? 마을사람들이 급공근리에 매달리였다는 아쉬움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농촌시책이 좋아지는데 그리도 홀가 분하게 지페뭉치와 고향을 바꾸다니?    땅은 어디서든 위대하다. 아름다운 외투를 걸치지않고 그 색채도 지극히 평범하다. 그저 검지않으면 붉거나 누른색이다. 땅은 대공무사하여 일체 생명이 있는것도 생명이 없는것도 사심없이 품어주고 받은것을 몇십배로 되갚아준다. 해마다 갈아번지고 살찐 등허리가 여위도록 짜내여도 말없이 바치기만할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렇듯 땅은 이 세상의 위대한 어머니들의 젖가슴같은 생명의 품이다.    땅은 제품에 받아들인것이 무엇이든지 발아시키고 성장시키는 강한 실행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땅ㅡ흙만이 가질수 있는 미덕이다. 자고로 농민들이 순박했던것도 땅의 정기를 마시며 살아서였을가? 땅은 심은대로 거두려는 농부들의 소망을 무던히도 잘 받아주었다. 콩이든 감자이든 심는대로 받아들여 싹을 틔우고 여름내내 소리없이 키우는 자률성이 있는 땅, 지금은 콩크리트건물을 짓는것이 능사가 된 셈이다.    땅은 농민들에게 배고픔도 주었지만 배도 불리여준 락토요 하늘아래의 전부이고 으뜸이였으며 혼이고 숨결이였으며 삶과 생활의 가락이였다. 오로지 땅을 뚜지여 곡식을 심는일밖에 다른길이 없어서 분하고 원통한 일이 있어도, 페농이 되여도, 흙 묻은 손으로 땅을 치면서 땅꺼지는 한숨으로 고달픈 삶을 보듬던 그들에겐 땅이란 다름 아닌 정의 원천이요 한의 대상일수밖에 없었다.    땅은 강개하다. 땅은 인류문명의 요람이다. 인류가 공업을 모르기전에는 땅이 넓고 기름지면 그 위에 문화도 풍성해지고 땅이 좁고 거칠면 그위에 문화도 령락하였다. 루루천년, 넓고넓은 땅에서 내가 부칠땅 한뙈기도 없는 민초들이 뚜져먹을 땅을 얻기 위해 벌인 처절한 싸움이 력사의 장하에 격랑을 일구지 않았던가? 새세상을 찾으려고 이 땅에 피를 뿌린 수많은 열혈지사들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친 그 정신적인 동력도 내나라, 내땅을 가질수 있다는 그 한가지 불타는 념원이 아니였던가?!    그 시절, 비록 빈궁했지만 향촌에서만의 특색적인 풍경이 있었고 풋풋한 서정이 있었더랬다. 여름이면 울타리에 얽힌 열콩넝쿨에 오롱이조롱이 열콩이 달리여 생명의 신비로움과 무성하는 계절의 영화를 자랑하고 터밭에 마음껏 넝쿨을 뻗어 피워낸 호박꽃에는 꿀벌들이 생활의 단꿀을 빚었댔다. 가을이면 태양따라 웃는 해바라기들이 초병처럼 줄느런히 지켜선 그아래 가지나무는 커다란 종자를 몇개 달고 기죽어있는데 제철을 만난 고추는 크는족족 붉게 타며 미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향촌에서만 볼수 있는 풍경이요 서정시였다.    자그마한 터밭의 풍요로움을 가꾸려면 얼마나 많은 땀동이를 흘릴가 하는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는 땅의 의미를 알수 없다. 농사는 절대로 아무나 짓는것이 아니다. 농사는 손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정성으로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뿌린대로 거두는것이 농사일만은 아니겠지만 농부가 흘린 땀은 그처럼 순수하고 끈끈하다.    하건만 왜 고향사람들은 그런 땅을 잃고도 무거운 봇짐을 벗어던진듯 홀가분해 하며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도시에서 살지만 역지사지로 내가 지금 늙은농부로 고향에 남았더면 어찌 생각했을가?하고 자문해 보았다. 대답은 두루뭉실하되 내땀과 로력도 슴배여있던 고향땅이 묻혀버린것에 아쉬움만 그들먹한것 사실이였다.    지금 땅을 팔고 쾌재를 부르는 고향사람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합당할지 모르겠으나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땅이 있어야 고향이 있고 나라가 있고 민족도 있다. 이렇듯 소중한 땅을 빼앗겼을 때 리상화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하늘 우러러 개탄하였고 김소월은《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하고 피터지게 한숨을 쉬였으며 한용운은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가 없습니다"라고 슬퍼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에겐 이미 던져버린 정한인데 내사 혼자 구시렁거리니 흘러간 옛노래가락만 가슴을 울린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기름진 논과 밭을 팔아 목돈을 쥐였다고 시내살림을 차린 사람들의 그 심정의 음영을 곁에서야 다 알리있으랴만은 언젠가는 마을도 허물려야 한다는 사실에서 마음이 그렇게 개운하지는 못하리라. 고향땅을 잃는다는것은 부평초의 신세가 된다는 징표는 아닐것인가? 아직도 잡초우거진 논벌을 바라보니 곤혹스럽기만하다.                       2011년 9월 23일 (추석날) (2015년 9월 8일 흑룡강신문)
689    (진언씨수상록35) (잡문) 진언(眞言)의 진의(真意) 댓글:  조회:5414  추천:0  2015-12-10
                        진언(眞言)의 진의(真意)                                      진언        진언(真言ㅡ曼怛罗)《불학대사전 佛学大词典 》의 해석에 따르면 그 기원이 원래 사유의 도구를 표시하는것으로서 즉 문자, 언어라는 의미를 가지는, 특히 신, 귀신에게 하는 신성한 어구라고 한다. 범어(梵语mantra)를 음역하여 (만달라(曼达罗)、만다라 (曼荼罗)라고 하며 또 “타라니(陀罗尼)、주(咒)、명(明)、신주(神咒)、밀언(密言)、밀어(密语)、밀호(密号)라고 한다. 즉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언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진언”의 함의에서 “명(明)”은 학문, 지식이라는 뜻이며 “타라니(陀罗尼)는 말하는 자의 진언을 지칭하기도 한단다.    한국의《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해석도 대동소이하다. 진언(眞言)이란 단어의 사전풀이는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불교의 비밀스러운 주문이다. 부처와 보살의 서원이나 덕, 그 별명이나 가르침을 간직한 비밀의 어구”를 뜻한다. 진언은 부처님 재세시 인도에서 쓰이던 고대언어인 범어(梵语ㅡvidya 산스크 리트어)를 한자로 음차 한것으로서 한국,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진언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읽고 쓰고있다. 진언속에는 공덕을 쌓고 업장(업장 [業障] 뜻 불도의 수행과 선행을 막는 세가지 장애중의 하나)을 소멸시킬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때문이란다.    일반인에게 알려져있는 대표적진언은《관세음보살 본심미묘육자대명완진언》은“옴마니 반메홈”이라 한다. 이 진언은 모든 불보살의 본래의 마음을 담고있는 최상의 진언으로 여겨진다. 생활속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진언중의 대표적인것은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리수리 사바하”로서《천수경》의 첫구절인 이 진언은 거짓말,남을 탓하는 말 등 입으로 지은 모든 업을 소멸시키는 진언이다. 알게 모르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참회하는 참회진언은“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이다.      생활속에서 진언을 늘 간직하고 외우면 기억력이 좋아지고 항상 보리심(菩提心) 에서 떠나지 않게 되여 온갖 집착을 없앨수 있으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게 될뿐아니라 업장소멸의 공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진언수행은 온갖 재난, 즉 화재, 수재, 관재, 도적, 질병, 횡사, 흉작, 웨침 등 여덟가지 재난을 비롯한 온갖 악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수 있는 공덕이 생긴다고 한다. 물론 진언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 방편중의 하나이므로 재난방지를 위해서만 진언을 하는것은 불교교도로서 바른 진언 수행자의 모습이 아닐것이다. 진언을 온 마음을 집중해 순간의 처한 상황에 외워 지송(祗送)한다면 반드시 밝은 공덕을 체험할수 있을것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말도 믿기 힘든 세상을 살고있다. 입을 열어 무수히 많은 말들을 하지만  진실과 자비가 살아있는 그런 말들을 듣기는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의 말도 역시 진실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말은 아가가 말을 갓번질 때 “어엄ㅡ마”라는 그 말뿐일것이다.    세계력사상 가장 명군으로 일컫는 솔로몬왕의“죽음과 삶은 혀의 힘안에 있다”는 말처럼 말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뿐만아니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충격을 남길수도 있다. 이러한 충격적인 말을 개인적으로 상대하여 말하기보다 사회를 대하여 말할 때는 더욱 값진것이리라. "진실만큼 아름다운것은 없고, 진실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니콜라 부알로”참으로 말하기는 어렵지 않되 참말하기란 쉽지 않도다.    옛날에는 진언한 군자들이 더러 있었다. 춘추후기 진나라에 주사(周舍)라는 대신을 례로 들수 있다. 주사는 진나라에 실권을 장악한 조간자 (赵简子)의 수하에 있었는데 직간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그가 죽은후 조간자는 늘 앙앙불락해 있었는데 수하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고 전전긍긍하며 물으니《천마리의 양가죽은 한마리 여우의 겨드랑이가죽보다 못하고 일천사람이‘예예’ 하기보다 한사대부의 감히 말하고 감히 시비하는것보다 못하다. (千羊之皮,不如一狐之掖:千人之诺诺,不如一士之鄂鄂)》고했다. 그 말속에 주사를 그리는 절절한 마음이 내비친것이다.《권68(상군렬전)》   배달민족의 수난사에서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임진왜란은 원래 그렇게 앉아서 처참하게 당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기 수년전에 일본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조선왕조는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었다. 귀국뒤 정사 황윤길은 그 당시 임금인 선조에게 “도요도미의 눈빛이 유달리 빛을 발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의 화가 있을것”이라고 상주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도요도미 히데요시란 인물은 족히 두려워할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김성일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무능한 선조는 참된 말은 귀밖으로 흘리고 오히려 거짓된 말을 새겨듣고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왜군에 칠년이나 아름다운 강산을 유린당하고 백성들이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런 피의 교훈을 새기지 못하고 궁정에서 왕권투쟁이나 하고 녀인들 치마폭에 싸여 파벌투쟁에만 혈안이 되여있다가 몇백년을 내리“임진년원쑤”를 갚는다고 별러온 일본에 마침내는 일컬어“한일합방”으로 36년간 식민지로 되였다.    평범한 얘기같지만 고차원의 진언을 한 간디의 이야기가 있다. 얘기의 골자는 이러하다. 인도의 한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간디선생을 찾아왔다. 사탕을 너무 많이 먹는 아이가 념려되였던 어머니는 간디가 아이에게 사탕을 먹여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꾸짖어줄것을 청탁했다. 그러나 간디는 한달후에 오면 해답해 주겠다고 했다. 한달후 다시 애를  데리고 왔으나 똑같은 말을 했다. 다시 한달후에 아이를 데리고 간디를 찾았다. 그러자 간디는 비로서 아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얘야, 사탕을 많이 먹지말아라 어머니께서 걱정하시잖니. 그리고 사탕을 너무 먹게되면 이발도 다 상하지 않겠니?" 그러자 아이는 사탕을 먹지않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옆에 있던 그애 어머니는 너무도 평범한 말씀에 실망했다. "선생님, 그 말씀 하시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그러자 간디는 말한다. “사실 저도 사탕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제가 사탕을  끊는데 두달이 걸렸어요.”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것은 말하지 않는 간디, 그래서 위인이 되였고 그의 말에는 아름다운 힘이 있다.    자고로 진실된 말은 비판적인 말에 있다. 그런데“모든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이고, 절대권력은 더욱 절대적으로 타락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거나 위정자의 “부정부패는 상수원의 오염이기도 하며 한 국가의 삶의 터전의 오염이기도 한것이다.”라거나 “비판의 자유가없는 사회는 정지된 사회이며  결코 리상적인 사회일수는 없다.”와 같은 진실된 비판을 누가 감히 할수 있는가?    각설하고, 내가 “진언”이라는 이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단어의 진의를 초독하고서 언감생심 불교의 최상의 진언을 탐낸것이 아니고 진실된 참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싶다는것, 그리고 자기의 모든 잘못을 참회한다는것을 지향하여서이지 언감생심 진언을 한다고 해서 어물쩍 가로챈 필명은 아니였다. 그러니 내가 이“진언”을 욕심내듯이 다른 사람들도 공유할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진언이라 아이디를 단것을 보며 나는 과연 말을 한다면 진짜 진언할수 있는가를 반성해보면 심히 면괴해진다.    나는 공중에 내비친 진언이라는 필명보다 실속은 자신에 대한 좌우명으로 삼고있다. 나는 부처님을 묵묵히 바라보기는 좋아하지만 불교신도는 아니며“만약 온갖 종류의 공덕을 갖추려고한다면 관세음보살의 백련화수 진언을 외우도록 하라는 ‘옴바아라 미라야 사바하’” 같은 알둥말둥한 불어를 터득할수도 없다. 다만 오직“참ㅡ真”자를 마음에 아로새기고 될수록이면 행하려 할뿐이다.                                    2012년 5월 10일
688    (잡문) 허영의 시장 댓글:  조회:4659  추천:0  2015-12-03
                                      허영의 시장      인간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반드시 심리만족도 짓씹으며 살아야 할 지혜로운 동물로 진화되했기때문이다. 그 심리만족에서 핵심적내용이 곧 허영심이다. 허영심은 인간정신과 더불어 진화하여 심리상의 최대약점으로 되였고 마침내 베여버릴수 없고 무시해버릴수도 없는《정신맹장》이 되였다    허영심이 일종 정신적자아표현이지만 등급사회가 낳은 기형적심리이다. 허영심의 가장 뚜렷한 표현은 자기과시인데 곧 이화된 심리로서 그 실질은 비틀어진 자존심이다. 습관상의 욕망은 자연욕망을 초월하는 법이다. 흔히 인간의 욕망중에서 성욕이 가장 막무가내한것이라 하지만 필경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허영욕은 퇴직할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가장 속수무책인 욕망이 곧 허영욕이다,    고금중외에 허영욕의 계관자는 아마 안데르쎈의 동화《임금의 새옷》에서 나오는 그 벌거벗은 임금님일것이다. 중국에서 허영이란 개념을 가장 일찌기 사용한 사람은 류종원이였는데《농부되여 신의를 지키니 즐겁거니와 총애를 받으려는것은 참으로 허영이니라 (为农信 可乐,为宠真虚荣》라고 읊었다. 옛사람들도 허영심을 우습게 보고 꺼린것이 틀림없다.    허영심을 향상과 진보에 필요한 동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허영심 나름이다. 영예와 허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허영욕은 자아팽창욕으로서 어떻게 분장하든 비정상심리의 괴태이다. 따라서 허영에 매달려 자아를 완성하려는 사람은 바람따라 정처없이 떠도는 쪼각구름같은 존재가 되고만다.       백사에 체면을 내세우는것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중국사람들의 민족심리로서 제뺨을 때려 붓게 하고는 살찐체하는 무료한 사람들이 많았던것이다. 문설주에 고기덩이를 매달아놓고 밖에 나갈때마다 입술에 돼지기름을 발라 번지르르하게 하고는 때마다 고기로 배를 불리는것처럼 했다는 흰둥이의 옛말도 중국에서 전해지고있다.    허영심을 일종 악행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일체 악행은 모두 허영심에서 야기되며 그것은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베르그송이 말했던지 확실히 욕망이 만악의 근원이라면 허영욕은 온갖 비극의 요람이다. 영국의 저명한 작가 쌔커리의《허영의 시장》을 허위와 기만, 사기와 협잡이 판치는 자본주의사회의 축영이라고 하는데 돈이 곧 인격력량이 되여진 현시대에도 오가잡탕의 허영의 시장이 도처에 흥성하고있다.    한때 몇백원 팔면 소위《명인사전》에 오를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명인》이 되여 어깨를 높이고다니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 허영은 거짓말 제조공장이다. 돈만 팔면 명패대학의 졸업증도 가지고 내노라 하는 사람도 있고 돈주고 사온《명예교수》의 명함장을 태연스레 내드는 사람도 있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은 대들보와 기둥을 바꾸는 기량을 가지고있는데 명리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그 근원은 극도의 허영심과 병태적공리주의에 있다. 누군가 미친사람이 아니라면 허영심을 제외한 모든 어리석음은 치료받을수 있다고 했지만 현시대에는 허영심이 불치의 의난잡증으로 되였다.    일전에 장춘시의 어느 회사에 다닌다는 한 처녀가 자가용을 갖추려고 자기의 장기를 팔겠다는 인터넷광고를 내였다. 차를 모는데만 영향이 없다면 어느 기관이든 선뜻이 팔겠다는것이였다. 허영심은 이렇듯 청춘과 생명을 내걸고 울지도 웃지도 못할 비극을 연출하니 인간의 황당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고중공부를 한 사람들은 모파쌍의 유명한 소설《목걸이》이에 주인공 로와젤 부인을 기억할것이다. 그녀를 소자산계급녀성들의 전형이라고 해석해왔다, 자산계급 사회에서만이 돈이 인간관계의 전부이고 허영심은 자산계급들에게만 있는듯이 우리를 오도해왔다. 마띨드의 생활상추구는 아름다운 동경이고 념원이였지 그저 허영심만은 아니였다. 하루밤 허영의 만족을 위해 청춘을 밀어넣은 로와젤부인의 참회가 얼마나 눈물겨웠을가? 그는 자기 비극을 성실과 근면, 피땀으로 종말지었지만…    제멋대로의 허영이 굶주린 자존심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허영심은 다시 헤여나올길 없는 불행의 심연임에는 틀림없다. 아무튼 개체의 허영욕은 그가 가질탓에 있으므로 그때문에 고배를 마시든 침중한 대가를 지불하든 다 자업자득이라 당사자가 잘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문제는 공권력으로 개인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관장(官场)허영심이다. 그런 허영욕은 이미 현시대 우리 사회에 일대 공해로 되였는바 그 피해가 그저 침중한 정도가 아니라 조화사회 건설에 불협화음을 내고있는 민생문제와 직결되여있다.    국가급빈곤현인 감숙성 영정현은 개별적 향진의 빈곤면이 70%에 달하는데 당지의 고명한 어른들이 황페해질대로 황페해진 도로량켠의 농가의 궁상을 덮어감추기 위해 20여키로 넘는 문화담장이란것을 쌓았다. 명목은 그럴듯하게《문화담장》이라고  하였지만 당지 주민들은이 담장을《수치를 감추는 담장》이라고 풍자하고있다.    송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던가? 또 어느 빈곤현에서 이른바“성씨문화절”을 고안해내고 40여리나 되는 소위“영빈대도” 를 닦았는데 점용한 경지면적이 4000여무였다. 큰길 량옆에는 수십메터 넓이의 록화대를 만들었는데 명화와 귀중한 나무를 심느라고 거금을 쓰고 그외 1.495억원을 들여서 태한릉묘를 수건하고 3000 만원을 들여 광장을 닦았다    한개 진의 정부청사를 천안문성루와 비슷하게 건조하였다면 엉덩이의 위엄을 떨쳐보려는 허영심의 광란이 아닌가?《형상공정》이라는 부패현상은 중국에서 관리를 다스리는데서의 하나의 악성종류라고 한다.    관원들이 거금을 퍼부어 대대적으로 형상공정을 벌려 존귀함을 과시하고 물이 흐린김에 고기를 잡듯이 그 와중에 사욕을 채우며 금의옥식하고 부화사치한 생활을 하면서 크게 떠벌려대고 끝없이 규모가 크고 사치한 회의와 새록새록 잡다한 의식 들을 창안해 낸다.    이런 허영심을 앞세운 형상공정으로 납세인들의 땀에 절어든 돈을 탕진하는 허영심은 사회공해가 아닐수 없다. 해당부문의 규정을 어기고 고급차를 사는것도 허영의 발작이고 각종 회의에서나 의식에서 얼굴을 빛내려 하는것도 과시성부패이다.    이런 21세기 아라비안나이트가 있다. 안휘성호주시 원시위서기 리흥민은 자기가 영광스럽게 서기보좌에 등극한것을 기념하여 200만원을 끌어모아 소위《열병식》을 거행하였는데 전시에 계엄령을 내려 교통을 두절시키고 학교에서 수업을 중단하게 한후 일신상의 대사를 장중하게 치렀다.    자신은 전총서기님처럼 무개자동차에 올라 숭업하게 대렬을 지어선 사법계통의 직원들과 민경들,토지국, 세무국, 공상국간부, 중소학색들에게 멋지게 손을 내흔들며 한껏 목을 빼들고《퉁즈먼호!퉁즈먼 씬쿠라》라고 소리치면서《써우장호!써우장 씬쿠라》하는 열렬한 환호속에 양양자득해 하였다고 한다. 허영심이 극치에 달한 그를 두고 할말이 무엇이랴, 이런 형상부패의 심리근원은 역시 허영심이다.      중국특색을 가진 관장허영욕의 사회적심리근원은 어디서 시작되였고 어디로 흘러갈것인가? 개별적인 관리군체속에 아주 위험한 통병이 있는데 항간에서는 그 병을《관료성치매증》이라고 한다. 이 통병은 관장상의 허영심에서 기인된것이다. 관장허 영심의 핵심은《관》에 대한 극도의 추구와 숭배로서 이런 허영심이 일단 만족을 얻으면 개별적관원들은 자기의 지력상수에 착각을 가지게 되는바 벼슬마당에서의 득의가 곧 자기 지혜와 실력을 증명한다고 오산해도 한참 오산하고있다.    “관료치매증”의 일부 불건강한 증상으로는 자아도취, 자아팽창으로서 응당히 질머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벼슬한후의 부속품으로 생각한다. 쇼펜하우엘이《관위는 순전하게 일종 약정된 가치이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근근히 한벌의 허위의 외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내려는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말 모두가 이 명언을 좌우명으로 삼은게 틀림없는것 같다.    허영의 시장은 우리 문단에도 번창해지고있다. 어디에 문인이 있으면 어디에 오만과 편견이 흥행한다. 오만의 본질은 우월감의 과시로서 결과적으로는 허영심의 작간이다. 사실이 보여주다싶이 허영심만 강한 사람은 거개 실속없다. 문인이 허영심 에만 매달리면 문학이 없고 진정한 문학이 있으면 허영심이 없다. 문학은 자고로 진리를 선양하고 신장시켜왔다. 진리는 언제나 적라라한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세상과 대화하는 사상의 투사들이다. 고금중외의 대가들의  명예나 영예는 스스로 따라온것이지 낚아온것이 아니였다. 암투와 롱간질로 차지한 직위와 명예가 잠시 세인들의 눈길을 끌지는 모르지만 허무맹랑한것이다. 력사상 어용문인의 계관을 쓴 자들은 모두 화려한 허영의 외투를 입기 좋아하는 자들이였다.    당나귀가 담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기전까지는 자기가 사슴이라고 생각했다는 A. 기터먼의 명구가 있다. 참으로 허영심이 고질로 된 사람은 당나귀이다. 한 사람이 영욕을 잘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데서 우직한가 지혜로운가를 보아낼수 있다                                        2007 년 5 월 20 일    
687    (잡문) 하느님은 왜 웃을가? 댓글:  조회:4479  추천:0  2015-12-03
                                하느님은 왜 웃을가?      인류가 만물의 령장이라고 자칭한것은 유일하게 사유할줄 아는 동물이기때문이다. 맑스는 한 죄수의 범죄적념두도 천당에 기적보다 위대하다고 했고 엥겔스도 사유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송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인간의 전부의 존엄이 사상에 있는데《인간이 사색하면 하느님이 웃는다.(미란 콘드라)》고했다.    하느님이 왜 웃을가? 미란 콘드라는《인간이 사색하면 사색할수록 진리가 멀어지고 인간이 사색하면 사색할수록 인간의 사상은 더욱 멀어진다. 인간은 종래로 상상중의 자기와 같지않기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있다.    그의 회색유모아가 처음에는 알쏭달쏭하였는데 차차 나이가 들면서 두루 읽은 책이 많아지고 세상물정에 눈을 뜨면서부터 그 의미를 조금씪 터득하게 되였다.    사색은 사상을 낳는다. 인간의 사색은 심각해야만 되는것이 아니며 진리도 마냥 심오하고 복잡한것만이 아니다. 간단함이 없으면 복잡함이 없고 개체가 없으면 군체가 있을수 없는 도리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상은 인간의 교오이고 행복이며 또한 인간의 일종의 고통이기도 하다. 사상이 있다는것은 곧 독립사고력과 자유적사상을 가리키는바 흔히 사상자에게는 지기가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적고통은 아름답다. 사상은 신성하고 사상은 불멸한다. 그러면 착오적이거나 반동적인 사상도 아름다운가? 이는 사상의 과정과 사상의 결과인 별개의 문제이다. 과정이 없는 결과란 없다. 정확하든지 착오든지 사상과정의 결과인것이다. 이렇듯 사상의 존엄은 결코 정확성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오직 독립적이고 자유적사상이 있어야만 인류는 교오할수 있다.    인류의 진화와 발전은 사상의 자유에 출발점을 두고있기때문이다. 진리란 때론 매우 간단하고 명백할수 있다. 로신선생의《추우면 솜옷을 입고 배고프면 먹을것을 다툰다.》말은 진리이지만도 잘 사는집 애들은 돈이 없어 학교못가는 가난한 집애 들의 비애가 얼마나 애간장을 끓이는지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수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 일단 사고하면 하느님을 웃긴다고 한다. 생명운동의 방식도 간단하고 저마끔이다. 돼지는 주둥이로 앞만 뚜지고 닭은 발로 뒤를 파헤친다. 사는 방식이 제마끔인것이다. 개구리는 모기를 잡아먹고 뱀은 개구리를 삼키고 독수리는 그 뱀을 물고 날아오르고 독수리는 또 …?    허나 동서고금에 사고하기 즐기고 그 사상이 심각한 선각자들은 결과가 명랑하지 못했다. 400여년전 이딸리아의 철학가 브루노는 범신론을 리용하는 형식으로 유물주의를 선양하였다. 이 천재적인“이단자”는 종교법정에서  판결받고 8년간 옥살이하다가 마침내 화형당하고말았다. 이런 비극을 보고 하느님은 웃었을것이다.  역풍을 일으키는자는 미욱할진저…    중국에는 경세지언이 많다. 강산을 탈취하는데는 인재와 장수에 의거하고 향수는 노예에 의거한다거나 태평천하는 장수가 열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등등. 소위 태평성세를 이룩한 제왕들이 숭상한것은 예리한 검이지 잘 사색하는 머리가 아니였다. 그들의 머리속엔《새를 다잡으면 좋은 활을 벽에 걸고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가마에 앉힌다.》는 잠규칙뿐이였거니 어찌 사색할줄 아는 머리를 용납하겠는가?    어제의  유물론자가 래일이면 유심론자가 되고 방금은 무슨 구조주의더니 뒤이어  탈구조주의가 되는 종잡을수 없는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누구에게 사상이 있으면 감옥이 아니면 목이 날아나기가 십상이였다. 몽매했던 봉건시대는 더 말할것 없고 민주화가 선양된지도 수백년이 넘은 현대에도 독립사상은 위험천만한것이다.    사상이 이단이면 혈전만리 생사를 함께하며 고락을 나눈 전우라도 가차없이 몰아내고 처단한다. 40여년전 려산회의에서 진정서를 올린 팽덕회가 바로 남다르게 사색하고 사색한 그대로 말한탓으로 파직당하고 마침내 비명횡사하지 않았던가? 이는 엄연한 잠규칙이였다. 그런데도 대바른 성미대로 이 진부한 규률을 믿지 않고 자기의 사상을 내놓았으니 하느님의 웃음이 얼마나 서글펐을가?    문화광란의 시대에 드물게 독립적사색을 한 장지신은 진정한 공산당원의 량지와 랭정한 사색을 하여 결국 후두를 잘리고 혀까지 잘리우는 극형을 당했으니 하느님은 인간세계의 황당함에 그만 눈물을 머금고 웃었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흑한 하늘에 찬란한 별이 되기에 손색없었다.    이렇듯 동녘에 서광같고 눈부신 저녁노을같은 선각자들이 중국에 한둘이 아니다. 리구련이라는 처녀나 농민 우라극 등은 보통백성이였지만 사유령역에서의 선각자들이였는데 결국 진실과 진리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였다.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는 데도《유일성분론》에 언감 반기를 내들었으니《죽어마땅하지 않은가?!》하지만 강권이 곧 진리가 되는것을 보고 하느님이 그번엔 말없이 돌아앉지 않을수 없었으리라.    개혁개방후《사상해방》이란 말이 류행어처럼 사람들의 입에 늘 올랐는데 사상해방이 왜 새삼스레 고창되는가? 사상이란 원래 하늘을 나는 천마처럼 자유자재가 아니였던가?《사상을 해방하자》는 구호자체가 사상이 종래로 갇혀있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자유사상은 력대로 억눌려왔으며 홍수나 맹수처럼 여겨졌다.     진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진리는 가장 무정하면서도 또한 가장 공정하기도 한 력사의 고험을 거치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때 진리가 이때에 와서 가능하게 오유로 될수 있고 이때의 오유가 그때에 가서는 진리로 될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적사상에는 마땅히 어떠한 전제(前提)도 없어야 하거니와 죄도 없어야 한다. 인류의 원죄는 통치자가 자기 사상을 절대진리로 내세우고 강박적으로 남에게 주입시킨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사는 피어린 사상사였으며 언론죄, 로선죄, 문자옥의 력사였다. 사상이 원래 자유분방한 자체속성을 상실당하고있었기에 사상을 해방하자는 구호가 터져나온것이다.    이는 경사스럽지만 캐고보면 슬픈 일이다. 사상이 오래 동안 무형의 사슬에 얽매여 있었기에 구호는 멀리 울려퍼졌지만 경화된 사상은 그냥《갑》속에서 잠자고있었다는 설명이 되기때문이다. 시비곡직을 민중의 사상자유에 맡겨 사색하게 하고 일을  해결하게 하는것은 돈도 들지 않는 좋은 일이건만 어찌하여 그렇게 금구가 되여졌는가? 한시기“백화제방”도 두계급간의 쟁론이였다고 하는게 실제적일것이다. 사상이 현실과 처져있어 사회가 더 전진할수 없게 되자 사상해방을 호소한것이 아닐가?    사상은 인류의 일종의 재부이고 국민의 품질이며 일종 정신력량이다. 한 민족이 책임적인 심리자세로 자기 민족을 사고하고 고난을 겪은 사상가에 대해 기념할줄 모른다면 그 민족의 생명력은 왕성기에 도달하기 어렵다. 민중이 사고하지 않는것은 정부의 복이라는 히틀러의 유명한 경구가 있지만 밝은 사회건설의 법보는 일체를 사상계에 기탁하는것이다.    만약 현실이 사상에 선행한다면 장님이 빔중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깊은 호수에로 돌입하는것처럼 침중한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건국후 30년을 줄곧 들볶아댄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지식이 상품화된 시대, 사상도 상품이 될수 있다. 사상은 마땅히 사상령역에서 마음대로 팔고살수 있어야 한다. 누구의 사상이 좋으면 누구의 사상이 잘 팔리도록, 당년 맑스주의가 흡인력이 강했기에 전세계적으로 넓은 시장을 개척하였고 인류력사의 새편장을 엮은 강대한 정신력량으로 되였던것이 아닌가?    력래의 중국사상사를 보면 림시성《공용》이 많았는바 남산에 말을 놓아먹이고 총칼은 창고에 넣어둔격이 되였다. 인민군중이 어떤 사상을 사야하는가를 감독하면서 마음에 들어하건말건 억지로 도매한 력사시대가 적지 않았다.    기실 사상은 해방하자고 웨쳐서 해방되는것이 아니며 이제껏 가두어놓은 사람이 풀어놓으면 해방이 되는것이 아니다. 오래동안 초롱속에 갇힌 새는 자유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아가려하지 않는다. 사상해방은 누구의 의지와 명령으로 곧 해방이 되는것이  아니다.    사상을 정치수요로 해방하자면 해방되는가? 그것은 사상해방이 아니라 사상소풍이나 사상체조일수 있다. 따스한 봄날에 백화가 다투어 피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사상해방은 체제의 보증, 법률의 보증이 수요된다. 그렇지 않으면 한줄기 바람에 불과하다. 그리고 명절을 쇠는것처럼 며칠 떠들썩하게 될뿐이다.      진리를 철갑속에 가두어둔다 하여도 찬란한 빛발을 막을수 없다. 하지만 사상이 일존(一尊)으로 정하여졌을 때 사유는 순복공구로 전락되기 마련이며 유심주의와 미신사상이 깊이 뿌리박힐수밖에 없다.    국민들에게 진정 결핍한것은 바로 인간의 생명권리와 인격존엄, 인신자유 등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존엄과 그것에 대한 수호이다. 국민의 인성의 마멸과 결핍은 이중적인바 정신적인것과 생존공간상의 물질적수요이다. 물질상 억압은 왕왕 공포적이나 정신억압은 오히려 명랑한 얼굴로  떠오른다. 따라서 공민의 사상자유의식은 력래로 희박해져 있었던것이다.    지성의 작가 위국정은 쓰고있다. 사회의 투영이라는 현대문학을 보아도 그렇다. 시가에는 더는 북도(北島)식의 격정과 지혜가 없다. 소설에는 녀인들의 육체에 대한 자애와 미련과 자아확대광의 뇌까림으로 넘쳐나있고 산문은 먹고 마시고 즐긴 일기로 변해버렸다. 진정 독립적인 사상을 가진 군체는 흐린날 하늘에 별을 보기 보다 더 어렵다.    진정한 사상가들은 자기의 머리로 사색하고 손에 잡은 붓대로 혼탁한 사회의 개바닥을 밝히려고 량지를 신장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일정한 상식을 알려주고 공민의 리성과 권리의식을 불러일으키려 모지름쓴다. 공민의 지혜를 불러일으키는 위태로운 길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명철보신하여 바람따라 돛을 달지 않는다. 인중승천 이라는 절대적인 사상을 무시하고 자기의 인구리론을 고집하여 령어의 몸이 되였던 마인초선생의 조우는 인구과잉의 결과를 두고 다시 심사숙고를 자아내지 않는가?    프랑스의 철학가 파스칼의《사상록》에서《인간의 전부의 존엄은 사상에 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유약한 갈대이지만 사상이 있기에 고귀함과 존엄과 위대함을 현시할수 있다.》고했다. 인류의 위대한 진보는《사상의 자유에 원천을 두고있다.》머리는 단두대에서 사색을 멈추게 되였지만 사상은 광활한 대지에 확산되여 한알의 종자마냥 뿌리를 박고 싹을 틔운다.    인간들은 동물원의 범에게 자유를 주어 야성훈련을 시킨다지만 제한되여 있고 훈련도 사전에 준비된 씨나리오대로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의 민주란 사상의 자유를 의미한다. 요란스레“민주화”를 팔고다니는 자유의 국토라는 미국에서도 자기 권력과 지배에 그늘지우는 “사상화(思想花”)는 피여나지 못하고있다.  충실한 신도들이 하는 짓거리에 하느님은 웃어도 가만히 웃을것이 아니라《껄껄》소리내여 웃어야 하리라.    고난과 참담한 인생에 직면하여 림리한 선혈을 투시하려면 오직 사상의 홰불밖에 없다. 사상만이 우리를 더욱 존엄을 가지고 살게 할수 있으며 오직 사상만이 우리들이《사람이 있다면 마음은 죽지 않는다.》는것을 표현할수 있게 한다.    사상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는 마지막 정토이다. 만약 100사람 가운데서 하나의 머리만 사색하여야 한다면 나머지 아흔아홉개의 머리는 존재할 리유가 없게 된다. 과감히 사색하고 비장하게 사색하는 머리를 바친 선각자들의 명복을 오늘 다시 빌면서 이 인류사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만큼 선홍색으로 피고 스러진 사상의 꽃이 만방에 만개할 그날이 언제일가 기원해 본다.                                                     2006. 2. 18  
686    (잡문) 귀천을 저울질해보다 댓글:  조회:4798  추천:0  2015-12-03
                         귀천을 저울질해 본다        이 몇년래 돈깨나 모은 사람들은 마치 특제포장의 위생종이를 좋아하는것처럼“귀족”이라는 명칭을 좋아한다. 그래서 번화도시 곳곳에“귀족”이라는 글자가 나붙고있다. 《귀족학교》,《귀족구락부》,《귀족하령영》등이 나오다가 최고의 걸작으로《귀족변소》라는것까지 세우고 처처에서 귀족을 내흔들고있다.    사실“귀족”이란 말은 곰팡이 낀 력사적개념으로서 문화골동품에 지나지 않는다. 귀족이란 뭐냐? 옛이름대로 해석한다면 권귀가족을 말한다. 중국으로 말하면 고대의 황친국척이나 중앙, 지방의 대호족들이 귀족계층을 이루었더랬다.    영어에서 귀족이란 말의 어원은 라틴문으로서 원래는 “걸출”하다거나 “우수” 하다는 뜻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라틴어에서는 귀족이란 단어에“우둔하다”, “ 평범하 고 용속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한다. 귀족이라는 희랍어의“우수하다”는 의미가 라틴어에《우둔하다》에서 연변되여나온 말이라 한다. 현대귀족 편집광들에게는 해석이 아주 실망스러울것이지만.    어째서 귀족이라 하는가? 전통관념에서의 귀족은 매우 고귀한 혈통과 비상히 점잖은 거동과 범속하지 않는 기질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그것을 썩 믿지 않았다. 진승이 밭김을 매며《왕후장상에 씨종자가 따로 있는가?》라고 호언 장담했다고 한다. 별로 먹물을 먹어보지 못한 일개 농부도 귀족은 선천적인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귀족의 기원은 구라파황실 및 각 왕조가 공로가 혁혁한 자에게 내린 칭호였다. 국왕이 봉한것은 오직 귀족혈통이고 력사가 부각한것은 귀족정신이다. 따라서 귀족은 의연히 력사적인 개념일뿐이다. 그러나 력사적으로 고찰하면 진정한 귀족정신에는 사회적책임이 융화되여 있었으며 진정한 귀족생활은 우선 문화선택이였다.    귀족이 되려면 세월의 루적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서양에서는 귀족 하나를 배양하자면 3대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 생긴것이다. 이 족군속에는 고층차적이고 군체적인 정제성이 고유되여있다. 한 서방철학가는 재부를 가지고 있다해서 귀족이 된것이 아니다. 귀족이 되는데는 3대를 거친 환골탈태가 수요된다》고 하였다.    3대에 걸친 귀족화과정을 말한다면 제일대는 재부를 축적하는것인데 기본상에서 추악과 잔혹성을 리용한다. 맑스가 말한것처럼 자본의 원시적축적은 모두 더러운것이였다. 원시재부축적계단에는 어떠한 족군이든지 사상관념은 비슷하였다. 영국귀족들의 발족사를 보면 거개 해적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미국의 귀족은 착취였다. 그들은 모두 자기리익과 가족리익, 국가의 리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시행과정을 겪어왔는바 원시재부의 축적이 일정한 정도에 이른후 비로소 생존압력이 상응하게 가벼워지면서 귀족문화관념이 싹트기 시작했던것이다.    옛날 구라파의 전통귀족들은 어릴때부터 비상히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심미적인생태도와 고상한 생활태도를 전수받았을뿐만아니라 근검치가의 성격과 능력을 배양하였다. 두손은 돈을 주무를줄알뿐 아무 일도 할줄 모르는 무능력한 중국식귀족자제와는 그 의미가 근본 달랐다.     진정한 귀족은 우선 일종 귀족정신을 갖추어야 했는바 허리굽혀 사회를 위하고 민중을 위해 책임을 이어받는것이다. 그만큼 귀족은 풍부한 인문내함을 가진 일종 표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관념이였고 일종 력사적문화전통이였다. 귀족은 지위와 칭호였을뿐만아니라 사회행위준칙과 가치표준으로서 곧《귀족정신》이였다.    귀족정신의 첫째 특징은 기사정신으로서 용감하고 광명정대하였으며 녀성을 존중하던데로부터 약지세력에까지 동정하여 불의와 맞서싸우는데에 이르렀다.    초연이 자욱한 영화장면이다. 한 영국군소교가 평민들에게 총을 쏘려는 병사에게 웨쳤다.   《총을 쏘지 말라, 병사들, 우리는 영국군대이지 강도가 아니다. 부녀와 아동들을 살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상교님, 지금은 전쟁시기입니다.》한병사가 불복인듯 대꾸했다.     《전쟁은 군인들지간의 싸움이다.》소교가 엄정하게 강조했다.    그는 네가 죽고 내가 사는 전쟁이였지만 규칙을 지키려하였던것이다. 영화의 정절이 증실하다싶이 그는 영국귀족의 후예였던것이다. 귀족정신의 두번째 특징은 강렬한 주인의식과 사회책임감이다. 귀족정신에서 사회책임의 주요원소는 평민의식으로서 약세군체에 대한 동정과 관심이였다.    귀족이란 단순히 재부의 개념이 아닌것으로서 즉 재부의 다소가 귀족의 주체표준이 아니고 일종 생활방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것이다. 생활방식은 단지 귀족문화의 일종 표현현상이다. 귀족은 풍족한 재부의 기초상에서 일종 비교적 특수한 생활방식의 표현아래 일종 고층차적인 인생문화가치관념이 인도하는 일종 인생상태이다.    귀족기질을《박과 능(博与能)》으로 개괄한다. 박이란 박학, 박애의 박이며 능이란 곧 능력을 말한다. 만약 귀족이 다만 선량함을 접수하고 악을 배척한다면 귀족칭호는 근근히 꽃병에 꽃이 되고만다. 꽃병은 사람들이 흔상할수 있고 일정한 시간 그 자리에 놓일수 있다. 그러나 꽃병은 자체로 꽃을 피워낼수 없거니와 시종 박살나기 십상인 상태이다. 진정한 귀족은 마땅히 사회문화와 정신의 명맥으로서 력사조대사이에 항구적이여야 한다.    중세기 구라파귀족들은 모두 진정한 군자들로서 정직하고 사욕에 눈이 어둡지 않았으며 두려움을 모르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이 있었다. 말하자면 권력과 영예만 아니라 량지와 호협한 풍골이 있었다. 스스로 귀족으로 자처하는 신귀족이나 구귀족의 후예들이 이런 기질과 정신을 구비하고 있는가?    현대 신귀족들은 영원히 구귀족들의 고귀한 혈통을 구비할수 없을것이다. 우리들 이 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일하지 않고도 재부를 차지하며 향락할줄밖에 모르는 부패한 형상들이지만 현대리성적관념으로 사고하면 귀족은 부패한것이 아니라 숭고함이라는 결론을 얻어낼수 있다.    귀족들에게 돈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진정한 귀족은 돈을 아주 멸시한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귀족과 구귀족간의 뚜렷한 차이일것이다. 구귀족들은 갑작부자로 된 상인들과 관리인. 무슨 경영주같은 사람들을 아주 경멸하였다.    재부와 소비표준으로 흥량할 때 잘사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으로 나누어질뿐 귀족이란 없다. 귀족기질이란 생활상에서의 품위이며 문화와 선택과 가치에 대한 리해이다. 한사람이 귀족인가 아닌가는 그가 무엇을 먹는가 하는것으로 가늠되는것이 아니다. 마치 그가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것이 아니라 어떤말을 하고 어떤 행동거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것과 같다.    흔히 중국사람들의 개념속에는 권세가 있고 돈이 있으면 귀하다고 여기고 권세가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을 천하다고 한다. 그런가? 이것은 일종 세속적인 표상에 불과한 관념이다. 현대중국의 갑부들에서 나온“신귀족”들의 귀족특징은 지능이나 품질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생활방식이다. 례컨대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 무슨 패인가, 무슨 시계를 찼는가, 명패옷을 입었는가, 사냥을 즐기는가 하는 따위들이다.    물론 귀족은 일종 생활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중국식 호화사치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한상에 수천원씩 하는 소화공정이나 설비가 호화스럽고 학비가 높은 귀족학교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귀족은 스스로 자처해서 귀족이 되는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배양해 산생된것이 아니며 단기간내에 일약 획득하는것이 아니다. 지금 억만갑부들이 생성되였는데 돈은 모았지만 인생목표를 상실하고 자아훼멸에로 나간 사람도 적지 않다.   《세상에 일체 영화부귀는 모두 일종 허무한 표상》이라는 불교의 교리가 있다. 사실 세상만물은 상대적이고 인생일사도 상대적이다. 귀천은 그저 표상과 형식에 있지 않다. 우리 여기서는 직업에 귀천이 나뉘여져 있고 빈부에 금이 그어져있는것이 사실이나 그것이 결코 귀천의 척도가 될수는 없다.    당신이 자그마한 과장자리를 차지하고 과원들앞에서 떵떵거리다가도 처장앞에서 그렇게 당당할수 있는가? 비천한듯 가련상을 짓지 않으면 자리를 보존하기 어렵다는것을 잘 알고있다. 그럼 처장은 고귀하기만한가? 그도 청장앞에서는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굽석거리기만 할것이다. 태도가 지극히 공경스럽지 않으면 그 후과는 알고도 남음이 있으니 말이다.    청장은 그냥 그렇게 고귀한체 할수 있는가? 역시 성장앞에서는 그저《예예 !》 해야 할것이다. 불원이면 언젠가 작은 신을 던져줄것이다. 감히 신지 않을수 있을것인가? 시골무당이 대무당앞에 나선것처럼 될것이다. 성장우에는 또 올려다보이는 권위자가 있다. 하다면 한나라 정상이 가장 존귀하겠지만 세계정상들의 모임에서도 제일인자연할수 있는가?    성장과 총통가운데 누가 더 존귀할가? 물론 다 고귀하다고 할수 있다. 아니, 꼭 그런것만도 아니다. 만약 당신과 상급이 함께 물에 빠졌을 때 당신의 친척이나 친우들이 누구를 먼저 건지려할것인가? 당연히 당신을 건져낼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친인들과 친우들의 심목속에는 당신이 더없이 소중하고 존귀하기때문이다.    현대에는 인성이 적은대신 주인앞에서 꼬리를 젖는 개들의 그것같은 성정이 많은 비속한 무리들이 없는가? 제노라고 으시대다가도 일단 계하수가 되여 징치당하게 된 탐관,악관들이 사색이 되여 후회인지 참회인지를 하는 꼴을 두고 누가 존귀하기 그지없던 나으리들이라 하겠는가?    인간은 다 같다고 하는것은 생명이 동류에 속한다는것을 가리킨다. 인간이면 다 같을수 없다는것은 생활방식과 생활관념 및 그로부터 산생된 생명가치의 구별을 일러 하는 말이다. 중국력사에서 기의를 일으켜 자기가 제왕이 된후 선대제왕들의 황금마 차가 어째서 뒤번져졌는가를 알면서도 그냥 그 길로 내달린 제왕이 몇몇이던가? 가장 전형적인 대표는 리자성이였다. 명조는 뒤엎었으나 그는 겨우 23일간의 황제생활을 하고 력사의 롱담처럼 전복되였던것이다.     재부는 한사람을 새롭게 부각할수 있지만 역시 그를 훼멸시킬수도 있다. 일컬어 귀족학교라는 곳에서 지금처럼 사치와 안일만 아는 무위도식자들을 배양할것이 아니라 국제적시야에서 흥량되는 현대사회정영들이 육성되여야 명실공히 귀족학교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한사람이 무엇을 자랑하기 좋아하거나 조소하는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수 있지만 기실 여기서 우둔함과 저속함외에는 무엇을 더 보아낼수 없다, 가령 누구들인가 할애비나 애비들이 누리던 특권을 누린다면 그것으로  만족할것이지 혈통적인양 고귀한체 하는것은 꾸레미를 쓴 혈통이 없는 노새를 웃길 일이다.                               2007년 6 월 36 일
685    (진언수상록 34) (잡문) 심리평형지남 댓글:  조회:5539  추천:0  2015-12-02
                                   심리평형지남                                            진 언      불공평이 공평이고 불평등이 평등이며 무질서가 질서로 묵인되는 이 시대, 언제, 어디서나 뜻하지 않게 심리실조가 오기십상인 현실속에서 개체의 힘으로는 사회불평 등을 제거할수 없으므로 스스로 심리평형을 찾는 묘책을 강구해야 번거로운 삶의 의욕이 속절없이 스러지지 않을수 있다.    어떻게 심리평형을 유지할것인가에 대해 심리학각도에서는 여러가지로 제시하고있다. 이를테면 흉금을 넓게 가지고 속달해야 한다던가, 마음은 선량하고 성실해야 한다든가, 겸양하고 용인하는 심리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든가 심리경계는 안정하고 초 탈해야 한다든가, 마음을 기쁘게 가지고 유쾌해야 한다든가 등등이 있는데 도리는 분 명하지만 결국 리론에서 리론에 그치고 몸에 병만 생기지 않으면 아플 일이 없을것이라는 싱거운 “묘방”이요 요란하기만 한 설교이다.    심령약방문으로 아직 신통한것이 없을줄로 안다. 하지만 자기능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수 없는 목적을 내세우지 말라. 능히 90점에 도달할수 있더라도 목표는 80점으로 내세워 초과달성함으로서 자재감과 자족감을 느낄 공간을 남겨두라. 사람과 사 람 사이의 차별을 승인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닥달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 랭철하고 옳바르게 대해야 한다. 매 사람의 관점 에는 어디까지나 리해득실이 끼여있기때문에 공조란 얻기 어렵기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나쁘다고 인식하더라도 당신이 정말 나쁘다는것이 증명되는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의 인식은 근근히 하나의 거울일뿐 비치는 그 모습이 다 확실한 자신의 모습일수는 없다. 자신심은 삶의 동력이다.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관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라. 상술한 설파는 위에 묘책보다 그래도 더 실용적이고 실천가능한 조언들이다. 딱부러지게 리론적으로 천술한것은 없지만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심리평형을 찾는 묘책이 있듯싶다.    현시대 불평형심리의 산생에서 가장 근원적인것은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에서 생기는 심리락차일진대 돈이 없는 문화인들은 돈은 많지만 문화수준은 별로인 갑부들을“돈밖에 남은것이 없는 정신가난뱅이라”라고 여기면서 안빈락도를 내세울수 있다. 그와 반대로 문화인은 못되나 돈이 많은 사람은 가난한 문화인앞에서“돈이야말로 제일가는 화페문화가 아니냐?”하고 양양자득하며 내심으로 문화인을 좀이 먹은 책뒤주쯤으로 깔보면 된다.    이런 비틀린 오기로써 문화콤플렉스를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속과 겉은 달라 책은 뚜껑만 보아도 지겨워하지만 자기 사무실 바람벽에 커다란 책장을 들여놓고 국내외 명저들이나 전문서들을 가득 꽂아두거나 명화나 서예작품들을 여기저기 걸어놓아 문화냄새를 풍기며 취미가 우아한체 분식하기 좋아한다.    덕재가 겸비하나 불운하여 한자리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벼슬은 했으나 덕재가 부족한 사람을 내심 깔보며 사무한신의 자적함으로 자신의 기울어진 심리천평을 바로 잡으려 한다. 반대로 벼슬한자리 가졌으나 재능은 보잘것없는 사람은 재능은 있으나 미관말직 한자리도 못가진 사람에게서 미묘한 심리락차를 느끼면서 재능이 있다한들 비단옷입고 야행하는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코웃음친다. 일단 기회가 오면 상관의 틀거지를 차리며 구멍난 심리를 깁는다. “진리”와“급별”이 정비례되는 판국에서 네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한들 찍소리나 하겠느냐고 위세를 피우는 심리방어이다.    량심을 개를 베준 사람들은 량심이 올곧은 사람을 조소하기 좋아한다. 지금같은 세월에 량심이 몇푼이나 되며 량심이 돈을 벌어주느냐며 비웃음으로 량심이 빈자리를 메우려든다. 량심을 지키는 사람은 량심없는 사람이 득세하여 떵떵거리는것을 보며 분통을 터뜨리지만 감히 맛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개돼지보다 못한것이 죽어도 장송곡을 불러줄 사람도 없을것이라고 저주할뿐이다.    미모는 타고나지 못했지만 현숙하고 덕이 있는 녀자들은 거의 흉금이 넓어서 미색을 자본으로 뽐내고 다니는 녀자들을 흘기며 지금은 곱다고 우쭐렁대지만 열흘 붉은꽃이 없으니 50이 넘어서도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할줄 아는냐고 왼새끼를 꼬며 마음을 느슨하게 가진다. 고기와 웅장을 다 가질수는 없지않으냐 ?    머리가 좋고 궁리가 잘 돌지만 뒤심이 없는 사람은 머리도 둔하고 꾀도 없으면서 뒤심이 든든한 사람을 은근히 개탄하며 요강에 꽃을 꽂은들 누가 꽃병으로 보아줄것이냐며 마음의 주름살을 펴본다. 궁리는 꽉 막혔지만 배경이 든든한 사람은 궁리는 좋으나 배경을 만들지 못한 사람을 리해하지 못한다. 매일 쥐처럼 굴을 파느라 아득바득하지만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것이 없는것에 도무지 달통되여하지 않는다.    환상은 풍부하지만 아무 실적도 쌓지 못한 사람은 실적은 있으나 환상이 없는 사람을 너무 바쁘게 산다고 여긴다. 마치 우마처럼 살면서 실적을 쌓았던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기는 로심초사하지 않아도 좋은 일만 생기는데 인생을 저렇게 살구서 야 무슨 멋이란 말인가? 하고 가련하게 여긴다. 실적은 쌓았으나 환상적이 아닌 사람은 환상은 잘하나 아무 실적도 없는 사람을 신경이 좀 잘못된 사람이라고 왼눈으로도 안본다. 미몽을 아무리 많이 꾼다한들 환상이 밥을 먹여준단말인가? 아름다운 래일이라도 영원히 속이 빈 환희일수밖에 없다고 예언한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수단이 없는 사람은 수단은 좋으나 애심이 없는 사람을 가장 미워한다. 좋은 일은 혼자 차지하려 하면서도 좋은 일은 한가지도 하지 않으니 언젠가 자업자득하고 자승자박이 되지 않는가 두고 보라고 저주한다. 수단은 있으나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수단이 없는 사람을 우습게 본다. 사랑하는 마음이고 뭐고 현실은 현실이요 싸구려“입비석”으로 무엇을 바꾸어올수 있단말인가? 하며 살줄 모른다고 잔뜩 업신여긴다.    의력은 있으나 기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기회는 잘 만나지만 의력이 없는 사람을 무위무능한 자라고 락인찍어 버린다. 좋은 기회라도 생각밖에 악과를 초래할지 누가 알랴며 자신을 위로한다. 기회는 있으나 의력이 부족한 사람은 의력이 있으나 기회를 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은근히 조소한다. 일이 이루어지고 않지는것은 하늘에 달렸거늘 소힘줄같은 의력으로 천신만고하며 실속있게 일하는 품성은 기특하지만 행운이야말로 더 실용적이고 값진것이 아닌가?하고 기고만장해서 시뚝해 한다.    이 세계가 훼멸되지 않고 인종이 멸종되지 않는 한 사람과 사람사이에 고저를 비기고 좋고 나쁨을 비교하는 심리는 영원히 존재할것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ㅡ고관 대작이나 포의한사나, 대부옹이나 새끼부자나 물욕을 벗어날수 없기에 언제 어디서나 득실의 수판알을 튕기며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천방백계를 다하지만 정말 안될때에는 역시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자기를 위안할수밖에 없다.    아Q는 죽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세세대대로 전해져서 심리평형을 유지하는데 커다란 분동으로 되고있다. 기실 돈이 없고 권리없는 민초들로 말하면 격세유전의 유명한“아Q식 정신승리법”으로라도 평형을 잡을길없는 심리를 보듬지 못한다면 지레 복창이 터져서 수명감수할것이니 참으로 가공할만한 인문정신이라 하겠다. 외바 줄타기가 어렵지만 비교심리의 외바줄에서 평형감각을 찾기도 되우 어려운 일이다.                                2012년 5월 28일
684    (진언수상록 33)남에게 업혀달리기의 후유증 댓글:  조회:5345  추천:0  2015-11-27
                                                  남에게 업혀달리기의 후유증                                                    ㅡ 《한국개황》경제부분 특강 ㅡ                                                       (청도빈해학원 동방어계) 최 균 선 (편)       한국은 1960년 초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한국경제는 8.15해방후 자주적발전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경제를 재건하는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말하자면 남북전쟁후 한국경제의 재건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부터 본격화되였다. 50년대 한국경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미국경제원조에 대한 의존이였다. 한국경제의 비약적 발전은 소위 제3공화국부터 시작되였다.     마침내 이른바 한강기적을 낳아“아세아의 네마리룡”으로 부상되였다.1962년에 국민소득 87딸라부터 2007년에 이르러서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딸라를 돌파할것 으로 추정되였다. 한국의 일인당국민소득 2만딸라 시대는 경제성장에 힘입은것이기도 하지만 원화환률하락도 한몫하였다.     한국경제발전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험으로 외자도입을 들수 있다. 한국경제의 도약은 외국의 직접투자에 의거한것이 아니라 외채에 의거하여 실현한것이다. 물론 한국경제 성장에서 큰 기여를 한 뛰여난 인적자원을 간과할수 없다. 이 모든 괄목할만한 성과와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원초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발전하였는데 여타의 조건을 제쳐놓고 말하면 한국경제는 대외의존도가 지나쳤다는것이다. 1995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너지수입 의존도는 97% 에 달하였다. 물론 한국은 지형학적으로 산업발달의 기초가 되는 석탄, 석유 등 동력자원과 철광석, 구리, 등의 광물자원이 한정되여 있는 객관적약점을 가지고 있기에 날고뛰는 재간이 없다고 할수도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경제발전이 남에게 업혀달리기를 한 격이라는것이다.     얼음은 하루아침에 언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경제가 불황에 처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리유는 서구자본주의의 일반적형태와 달리 특이한 구조적문제에서부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대미의존도ㅡ폭넓은 개념으로 대외의존성이다. 이명박정권이 출범해서 더욱 줄기차게 주장하는 외자유치도 남의등에 업혀 끝까지 달려보자는 소신의 발로라고 할수 있다.     과연 외국자본이 한국경제의 구세주인가? 아니면 한국경제를 대미, 대외의존에 빠뜨리는 트로이의 목마인가? 한국경제는 그 출발부터 전적으로 미국의 잉여군수품과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원조물품에 경제명맥을 의탁하였는바 대미의존성은 시작부터 매우 심각하였다. 왜 이렇게 말할수 있는가?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 수립이후, 미국의 원조는 15년간 지속되였다. 이 기간 미국의 각종 군수품, 미국의 농산물 투 하로 한국농업이 붕괴되는 등 원조에 의한 한국경제는 여러 부분에서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미국이 던져주는“원조”는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아니라 한국의 기본산업이었던 농업생산 기반마저 철저히 붕괴시켰을뿐이다.     박정희시대 미국의 잉여자본을 유상으로 원조받은데 근거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고 70년대에는 환경오염으로 서구사회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던 제철, 섬유, 화학 등의 사양산업을 끌어들여 한국경제를 미국의 하청경제로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한국농업까지 붕괴되어 한국의 식량까지 미국이 좌우지하게 되였던것을 알만한 경제학자들은 다 알고있다. 1980년대가 되도록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이 투하된 결과 한국경제는 량적으로 팽창하여 산업국대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허나 미국경제도 1970 -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번영을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70년대 석유파동, 베트남전의 패배에 이어 80년대 레이건정부의 과도한 군비지출은 미국내 신규투자를 감소시켜 리자률을 올리게 되고 미국의 딸라가치가 계속 하강하면서 무역적자를 야기한것이다. 이런 상황은 곧 한국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감기를 앓는다는 말이 처처에서 사실로 나나타게 되였던것이다.      원래 한국의 주요산업은 외국의 원료, 자금, 기술과 시장에 의해 발전한것이기에 외부경제흐름에 따라 출렁이지 않을수 없었다. 1973년과 1978 ㅡ1979년에 발생한 오일쇼크(石油冲击)는 한국경제와 사회생활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였으나 한국의 대 외의존도는 의연히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1995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 에너지수입의 존도는 97%에 달하였다. 이는 단순히 수자적통계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서민들이 느끼는 한국경제의 체감온도는 늘 불온정한바 금융, 외환위기이후 중산층이 감소되고 사회적을《빈익빈,부익부》현상이 점점 심각해게 나타나서 력래 정객들이 서민경제요 민생문제요하는 거창한 개념들을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니게 된것이다. 지금 한창 된감기를 앓다가 몸져누울지도 모르는 한국경제상황은 더욱 서민들에게 생계의 어려움을 안겨줄것이다. 휘청휘청 걸어도, 여드레 팔십리 황소걸음을 걸어도 독자적으로 걸어야 하는 주체경제리념이 중요성이 확증된것이다.      물론 경제학자나 기업가들이 모르지 않듯이 한국은 대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수 없는 원초적인 치명의 약점을 고유하고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산업발달의  기초가 되는 석탄, 석유, 등의 동력자원과 철광석, 구리 등 광물자원이 한정되여있다. 그래서 자원을 효률적으로 자원절약형 산업을 발달시키려고 안깐힘을 쓰지만 원천이 빈약한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여 많이는 남에게 업혀달릴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쨋거나 어떤 사유에서든 남에게 너무 오래 업혀있으면 다리가 저려들것이고 그렇게 커간 아이는 구루병환자처럼 될것이다. 업혀가는 동안은 호사스럽겠지만 그렇게 굳어지면 인생길은 더 복잡해지는 경우가 있다. 미국경제에 “지진”이나 “폭풍”에 비유될 정도의 위기가 닥친다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가. 두말할것도없이 엄청난 폭풍이 한국에도 몰아닥칠수 있다. 그 가운데 닐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의 “콜로수스: 미국제국의 성쇠”는 미국경제에 닥칠수 있는 위기를 력사학적인 관점에서 다각도로 접근방법을 제시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있다.     미국이 20세기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사실상의 “제국”이면서도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는 미국의 쇠락가능성을 여러관점에서 분석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경제적위기의 형태로 나타날것이라고 예측한다. "모래성이 단한알의 모래가 추가되면서 무너지듯이 미국의 재정위기는 그렇게 닥칠것이다.…"지정학적으로 한국경제는 한 미자유무역협정(FTA)을 계기로 미국경제 의존도가 더욱 커질것이다.     퍼거슨교수의 위기론을 황당한 논리로 치부해버리거나“위기보험”을 들어두는것은 선택의 문제다. 이른바“국부유출”현상은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그 규모도 늘어날수밖에 없다. 개방만이 살길이라며 극단적인 대외의존 경제가 되여버린데 따른 참담한 결과다. 한국은 자원마저도 없어 경제의 명맥을 남의 손에 맡겨놓은 처지다. 경제의 극단적인 대외의존 수출로 번돈이 나라밖으로 다시 빠져나가고 있다는것이다. 항아리가 깨져 물이 줄줄 새고있는데 항아리가 차오르지 않는다며 물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갔는지, 물이 얼마나 부어지고 있는지만 따지는 형국이다.     자립적경제토대마련이야말로 미래발전의 지렛대이다. 과거로부터 현시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수출로 살아왔으므로 한국경제는 세계추세가 그러하듯 미국경제에 종속적인 성향이 짙다. 주변렬강들 사이에서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경제발전리념을 주축으로 할 때만이 지정학적위치로 보나 한국인의 국민성이나 두뇌로 보면 경제강국 의 미래지향적인 확보가 가능하다.                                    2009년 4 월 20일 (빈해학원에서)
683    (진언씨수상록 32 ) 색채의 의미 댓글:  조회:5029  추천:0  2015-11-24
                                     색채의 의미                                          최균선       동양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음양오행사상(阴阳五行思想)은 우주를 형성하는 원리이자 질서의 원리로 인식되고으며 우리 민족의 모든것에 영향을 주었다는게 정설이다. 이는 무(巫)와 풍수(风水) 등의 론리적근거가 되기때문이다. 음양(阴阳)이라는것은 생성원리의 근본이며 존재질서의 상징관념으로 리해되고있다.    이 오행(五行)으로 물질과 계절, 정신, 신체 등의 모든것을 풀이하였다. 또 오행에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있어 우주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법과 질서를 나타내며 동양사상의 맥(脈)을 이루는 원리다. 이런 우주관념은 색채의식에도 체현되였는데 고대중국에서는 물론 우리 민족들도 음양5행설에 의해 색채를 정색(正色)과 간색(间色)으로 나누고 적(赤), 황(黄),청(青), 백 白),흑(黑)을 정색이라 칭하였다. 전통색의 근본이 된다고 할수 있는 “오방정색”의 다섯 가지색상과 간색, 잡색의 생성원리를 “음양오행”의 원리로 풀이하고있다.     색채의식에는 색채에 대한 인식의식과 표현의식이 포괄되여있다. 색채인식의식이란 상대적인 대비의식, 밝음의 대비의식 순도대비의식 및 랭온대비의식을 가리키는바 객관성을 고유하고있다. 부동한 색채는 보는사람에게 부동한 심리감수를 줄수 있다. 유심주의관념으로 획분된 색채설에는 존귀, 비천, 정통,비정통의 상징적의미가 부여되였고 그에 따라 복장제도에서도 색채의 상징적의미가 체현되였다. 이를테면 황색은 제왕지색이라하고 백색은 평민지색으로 정하였다. 상하유서(上下有序),존귀비천(尊贵卑贱)따위의 등급제도의 표시로, 권력과 지위의 상징으로 되였다.     색채에는 자체의 성격이 있다. 선명한 빨간색은 사람들에게 열정과 적극적이며 향상적인 정감반응을 주는 동시에 위험하다는 심리반응도 주는바 서방에서는 홍색이 왕왕 두려움과 류혈과 련관시킨다. 따스한 감을 주는 색채는 금색으로서 태양과 창조성의 색채이다. 황금색은 환락과 부유함과 영광과 음악적인 정감의의를 가진 색채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누른색은 쇠락을 련상시키기도 한다.록색은 “탄성이 있는 색채”로서 한방면으로는 생명, 청춘, 성장과 건강을 상징하는바 사람들에게 아늑하고 편안한 감을 주며 다른 한방면으로는 자칫 투기와 탐욕적인 정감의의를 시사한다. 람색은 리지의 색채로 간주되며 일종 청신함과 명석함, 합 목성을 상징하는바 람색을 보면 넓고 크고 심원하며 평온하고 랭정해지는 느낌을 안겨준다. 자색은 붉은색과 람색이 조합된 색채로서 왕왕 신비감과 환각을 련상시키며 때로는 고귀하고 부유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조성되여 광택과 밝음도가 결여한 색채이다. 따라서 색조가 음침하고 어슴프레한 느낌을 주기에 언제나 흐리고 비오는 날씨와 재수없는 날들과 련계시키며 무취미. 해나른한 느낌을 준다. 종색은 대지의 색깔로서 토지, 비옥함, 관후함과 련계시킨다. 회색에 비하여 비교적 따스한 감을 주는 색조이다.    검은색은 캄캄한 밤처럼 일종 공포감과 억압적인 정감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흔히 사망, 침중함, 위엄성 등을 상징한다. 흰색은 실제상 강화를 거친 “무색채”로서 순결함과 정결함을 상징하면서도 창백함은 또한 력량결핍, 허약함을 상징하기도한다. 보다싶이 색채는 총체적으로 따스함과 차거움, 밝음과 어두움을 의미하고있다.     5색중에서“빨강”은 순수하고 고유한 우리 민족의 색이름이며 삼원색중의 하나이고 전통적으로 전해내려오는 오정색(正色)중의 하나이다. “빨강”은 설문해자(说文解字)에서 남방색이라 하였고 적(赤)땅과 불꽃을 가리키는 말로서 땅위의 불꽃이 후대에 이르러 불꽃으로 도치된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색채가 리념의 상징으로 부연되면서부터 빨간색을 싫어하는 경향들이 생겨났다. 사회주의권에서는 붉은색이 혁명을 상징하고 백색은 반동, 투항을 의미한다. 옛날 쏘련에서 혁명군을 홍군이라고 칭하고 반대세력의 군대를 백파군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옛날부터 공산주의자들은 눈이 빨갛고 공산공처하고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악선전을 해왔는데 기실 그렇게 선전한 자들이 먼저 코가 삐뚤어지게 웃었을것이다.     우습게도 일본에서는 경쟁관계에 있지 않는 당사자끼리 겨루는 경기를 대범하게 홍백전 (紅白戰)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붉을 홍자가 싫어서 청백전(靑白戰)이라 부른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증권거래소에서 오르내리는 주가를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구분하는 현상을 두고 국민들이 무의식적으로 붉은색을 선호하게 되여 공산주의가 침투할 위험이 높다고 걱정한 “우국지사”도 있었다고 한다.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붉은악마”가 활약할 때 한 기독교극본주의단체에서 이른바“화이트엔젤”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여 웃음거리가 된적도 있었댔다. 가령 색갈콤플렉스로 손바닥만한 땅안에 온통《빨강》천지라면 누가 노랭인가?색채의 의미에 깜깜인가? 아니면 현대인들치고 코열고 살면서도 답답한 사유자들인가? 황차 옛날부터 오색에서 빨강색은 전통색이라 일러왔는데 지금와서 전통색도 무작정 부정하니 제혀를 씹기인가?     생각이 바뀌면 모든것이 변한다는 말이 있던데 맞는지는 모르겠고, 결국은 마음, 의식에 따라 색채에서 받는 감수는 달라지는것은 사실일것같다. 결국 의식문제이다. 아마도 인간의 리성적판단의 지배를 받는 령역이 의식이라면 마음이란 유전적으로 각인되여진 무의식세계라 할가, 집단적형태로 나타나는 무의식은 각 나라, 각이한 민족에게서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다. 그것은 아주 좋지 못한 징표이다.     동전의 량면과 같은 마음과 의식일진대 이 령역에서 마음이 보조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마음의 령역에서 의식이 부차적이 되는지 제쳐두고 색채에 대한 각이한 반응은 심리적일수도 있고 의식적인 판단일수도 있다고 가정한다면 색채의 의미는 우습게 비탈려져 각 리익집단의 손익이 기준이 될듯싶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것은 세계정치권에서 색깔은 정체성을 상징시키려하고 리념적동질감을 확인시켜 지지자들을 규합해내기도 하고 정치적피아(彼我)를 식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는것이다.     특정한 상징을 지닌 색깔하나로 정치적메시지를 더 효율적으로 전달할수도 있다는 발상은 얼마나 기발한가, 동유럽과 중동지역의 민중혁명이“색깔”을 통해 정치적 결집효과를 시도하였댔다. 색채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색깔자체라면 빨강색 불감증은 가변적인가? 지금 현상적으로 보건대 색채관념이 바로 인지되는듯싶다. 그렇게 질겁하고 질색이던 빨강색옷이 한 당파의 통일복이 되더니 빨간색채의 옷이 류행이다.     목적성의 관념이란 참 무섭다. 아무리 비유적표현이라도 “빨강이”를 옛날 보편적으로 코범벅이를 해가지고 다니던 아이들이 손등으로 쓱 문질러 좌우볼타귀에 쳐바르던식으로 아무데나 붙이는것은 3류유모아도 아니다. 적대적이고 마음에 안들고 잘못된것, 불만스러운 현상, 사람을 마치 부르기좋은 개똥녀이름처럼 네편에도 내편에도 붙이고 저사람에게도 이 사람에게도 붙이니 도무지 색채의식이 없는건가,     통천하에 빨강색의 사물이 지천이다. 세상에 홍인종들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빨강”으로 적대적인 사상분자를 비유하는 말일지라도 좀 사리에 맞아야 웃든지 공감하든지 할게 아닌가? 그렇게 관념이 경직되였다면 혈관속에서 흐르는 피도 람색인종의 푸른피로 바꿔넣어야 하지않을가?“빨강”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색채이다. 알고모르고간에 집체무의식적으로 된장인지 고추장인지를 불문하고 덩둘해서 입에 바르는것은 지각이 있는 사람으로서의 언행이 못된다.                                     2007 년  11월 12 일 초고, 2013년 11월 12일 정리
682    (잡문) 욕망과잉시대의 절경 댓글:  조회:4772  추천:0  2015-11-18
                      욕망과잉시대의 절경      싸하라사막에 사서(沙鼠) 라는 쥐들이 있는데 해마다 가뭄철에 먹을 풀뿌리를 저장하느라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동분서주한다. 그 근로함이말로 동물왕국에서  손꼽는《로력모범》이라 해도 될것이다.    그런데 불가사의한것은 풀뿌리도 충분히 저장되고 가믐철도 언녕 지나갔는데도 그냥 쉴새없이 물어들인다는것이다. 기실 사서들이 가뭄철에 먹어야 할 실제식량은 고작해야 두세키로그람인데 열키로이상이나 물어들이고서야 그만둔다고 한다.    그렇게 과잉저장된 풀뿌리는 대부분 썩어서 먹을수 없게 되고 다시 굴밖으로 날라내는 청리작업을 해야한다. 사서들은 세세대대로 그렇게 끝없는 무효로동을 하며 서식하는데 이런 불필요한 초심현상은 유전인소 탓으로서 이미 본능이 되여버렸다. 사서들의 이런 특징때문에 흰쥐대신 실험용으로 하려고 시도해 보았는데 일단 가두어놓기만 하면 며칠 살지 못하고 하나하나 죽어버렸다. 비록 령어의 몸이 되였 지만“풍의족식”하며 향락을 누리는데도 어찌하여 한결같이 견뎌내지 못할가?    연구에 의하면 조상대대 계승발양되던 그 근면성을 발휘할수 없는 불행한 처지에 빠지다보니 체질적으로 안절부절하다가 마침내 죽는길밖에 없었던것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생존위협이 존재하지 않건만 유전적인 잠의식때문에 본능을 억제한다. 심리학 각도에서 말하면 자아심리 위기감때문에 절명하는것이다.    사서들의 이런 생명현상에서 인간의 삶의 현장을 련상하게 된다. 현대인들속에는 사서처럼 자족을 모르고 자꾸자꾸 물어들이는 사람들이 없는가? 있어도 엄청 많고 날이 갈수록 번성하고있다. 사서들의 무효로동은 본능이지만 인간의 그것은 별개의 문제로서 곧 탐욕이라 이름한다.    인간에게 어찌하여 욕망이 있게 되였는가? 인간도 일종 생명이다. 생명의 본질은 생존과 연속성이다. 욕망은 생존과 연속의 필요조건이고 생명의 본질속성이다. 내용과 정도상에서 정당한 욕망은 인류발전의 동력이다. 이런 시점에서 인간이면 다 갖는 욕망을 비난할수는 없지만 탐욕은 벌써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로자가 말했듯이《남 는쪽에서 덜어서 모자라는쪽에 보태는 자연의 도를》를 엄청 벗어나서 네것도 내것이요 내것도 내것이고싶은 욕심이다.    탐욕자들은 과유불급(过犹不及)이란 말의 뜻을 모르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초에 욕심“욕”이라는 한자를 창제할 때 골 곡(谷)자에 부족할 흠(欠)자를 붙이고 그아래 마음심을 받쳐놓아서 골을 다 채워도 오히려 마음에 성차지 않아한다는 뜻을 가지게 한 욕심 욕(慾)은 곧 인간의 본성을 한글자로 함축한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다종다야한만큼 희노(喜怒)가 무상하므로 과잉욕망은 우리들을 죄악의 심연에로 이끌 수 있다. 범죄의 목적지가 바로 착오적인 욕망이기때문이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외성인이 지구를 고찰하고 보고서를 올렸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는데 원숭이라 부르는 동물은 과일을 먹기좋아하고 먹고는 놀고 놀고는 먹었다. 사자라고 부르는 동물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기 좋아하는데 포식한후에는 느러지게 잔다. 또 사람이라 부르는 동물들이 있었는데 돈이라 부르는 꽃종이를 좋아하여 목숨까지 디밀만큼 미쳐있었다…    비록 환상얘기지만 참으로 지구촌의 상황을 유모아적으로 그려내지 않았는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기실 그리 많은것이 수요되지 않는다. 고도로 발전한 물질문명시대 무절제한 구매욕과 고소비욕은 인간의 탐욕의 체현이지 필수품에 대한 수요가 아닌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희랍의 녀신들에게는 옷장이 없었으며 스타킹이란것을 신지않았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녀신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더없이 숭고했다.    풍조는 소비와 등호로 되지 않는다. 류행을 따라 새록새록 고급옷을 사들여서 자기의 풍채를 과시하려 하거나2평방의 침대면 달콤한 잠을 자기에 충분하건만 넓은 호화주택도 성차지 않아서 별장을 사고 자가용을 욕심낸다. 그리고 끝없는 욕망을 달성하려고 마침내 흑사심이 되여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욕망의 바다에 뛰여들고 죽을판살판 그렇게 자맥질하다가 종당에는 비명에 빈손으로 저승길에 오른다.    왜 탐욕이 다른 누구들보다 오사모를 쓴 위군자들을 그렇듯 바싹 따르는지 나로서는 알수 없지만 앉으나서나 탐욕의 주머니를 가득 채울생각에 가슴태우고 비몽 사몽간에 비리의 손을 잡고 웃는 그런 탐욕의식은 싸하라사막의 사서들의 생존규칙 과도 본질적으로 틀리고 대비도 안되는 렬등의식으로서 사서들보다 더 가소롭고 불쌍 하다고 해야하리라.    하건만 우리 주위에는 행복한《사서》들이 날로 번성해가고있다. 말하자면 먹고입는 문제에 로심초사할 필요가 없는 복받은《왕벌》들이나 끝없는 탐욕심에 눈이 빨개진 족속들은 자기 가족의 미만한 앞날을 위해 최대의 잠력을 발굴하느라고 보귀한 생명을 혹사하고있다.    큰거리에서 허둥대는 쥐의 신세인 탐욕자들이야 더 이를데 있을가? 아닌게아니라 우울증, 공연한 긴장감, 그리고 해소할길 없는 근심걱정으로 여러가지 심리질병과 육체질환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냥 사서처럼 초심한다면 풍족한 래일까지 버텨갈수 없을것이다. 그냥 당긴채 놓아둔 활은 언젠가 부러지고만다.    서방의 한 철학자가 말하고있다.《탐욕의 꿈은 신앙의 근육을 찢어발길수 있고 감지의 오성을 마비시켜 미래전경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다만 눈앞에 실혜만 보이게 한다.》고. 많은 사실들이 보여주다싶이 그렇게 우러르는 재물신을 탐욕이란놈이 거꾸 러뜨리고있다는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유모아인가?    누구에겐들 오늘 사는 목숨이 소중하지 않을가? 그러지 않아도 래일을 위해 오늘 죽어가는 목숨인데 물욕부족증에 열불나서 탐욕이 탐욕을 마중하고 불만족이 불만족을 뒤쫓으니 살맛이 얼마나 별다르겠는가? 뭐든지 자꾸자꾸 가지려는 그 자체가 예고된 파멸을 기록하는것이다. 삶의 질을 명목으로 부정축재를 한다면 사치와 랑비를 조장하고 그 자신의 삶의 마당에 자멸의 시한폭탄을 묻어두는것이다.    남보다 머리 잘돌고 재간좋아서 갑부가 된 사람들이 옥황전을 짓고산들 누가 뭐라하랴만 문제는 능력과 지식에 정비례 되지 않는게 번연한데도 남들보다 왕창 넘쳐나게 떼복을 누리고있는 비정한 현실이요 그것이 화해사회건설에 나날히 더 강한 불협화음을 조장하는 화근이라는것이다.    민초들도 저마다 하잘것없는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아글타글하지만 참으로 쾌락한가? 문명한 우리는 늘 힘들다고 너무 지쳐서 살고픈 마음이 없다고 한다. 현대 박래품언어를 흉내낸다면 콤플렉스가 갈수록 가심화되여서 번뇌를 느끼는 바람에 살아갈수록 심리질병이 가심화되고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현재보다 나아질 래일을 바라고 그 한가닥 소망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것이 또한 매인간의 생명존재의 리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래일에 닥칠 일을 내다볼수 있는가? 구름의 집이 어데있고 바람은 왜 불다가 잠자는지 알수 없듯이 십년후에 세상일이 어떻게 돌변할지 누가 알수 있으랴! 황차 죄는 지은데로 가고 공은 닦은데로 가는 인생의 유희규칙이 있음에랴!    옛사람이 이르되《탐(贪)은 불과 같으니 저지하지 않으면 료원의 불길로 될것이요 욕(慾)은 물과 같으니 막지않으면 하늘에 사무칠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탐욕은 이미 미쳐도 단단히 미쳐있다. 공룡의 탐욕은 먹이를 위한 생존본능에 그쳤지만 종내 절멸되고말았다. 사서의 초심현상은 본능적생명운동이지만 리성을 가진 인간은 결국 자멸을 자초하는 문명을 쌓아왔고 또 쌓아가고 있는것이다.    아아, 바다가 창망한가? 욕망의 바다가 창망한가!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동물인 인간은 바로 탐욕때문에 마귀와 신의 각축전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의 천사가 인간의 욕망을 본능으로 회귀시킬 때에 인류에게는 밝은 래일이 있을수 있다.                                                                      2007년 4 월 26일        
681    (잡문) "엉덩이사유" 댓글:  조회:4281  추천:0  2015-11-18
                            "엉덩이사유"       인간이 엉덩이로 사유한다면 소학생들도《힝》하고 코웃음쳐버릴게다. 그러나 언론계에는 엉덩이가 머리를 결정한다는 말이 나돈지 오래다. 처음엔 생경스럽긴 하지만 곰곰히 생각하면 철학성이 다분한 말이다. 이 시점에서 엉덩이가 머리를 결정 한다는것인즉 엉덩이로 사유한다고 승화시켜도 무방할것 같다.     엉덩이가 머리를 결정한다는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사이비한 인생현장을 두루 기웃거리면 엉뎅이로 사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것을 확신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게 우직한 사람들이 아니라 총명하다고 떵떵거리는 사회중견들인데는 그만 실소를 금할수 없을게다. 엉덩이를 머리로 사용하는 사람은 락타와 같은 자이고 그런줄 모르고 하냥 젠체하는것은 슬픈 존재가 아닐수 없다.     엉덩이는 조물주가 깔고앉으라고 만들어준것으로서 관습상 고귀한 부위가 아니다. 하지만 인류문명사를 돌이켜보면 머리보다 엉덩이가 더 존귀하였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자고로 특정된 국정하에서는 매우 많은 경우 확실히 엉덩이가 머리를 결정할것이 수요되였기때문이다.     엉덩이사유의 걸작을 례로 들자면 많고 많다. 조고의《지록위마(指鹿??)》라는 악독한 롱간술에 맞장구치지 않을수 없었던 권신들이 그때 그 자리에서 과연 머리가 엉덩이를 지배했겠는가? 엉덩이가가 머리를 지배했겠는가? 결국 엉덩이가 차지하고 앉은 고관자리와 모가지를 지키려고 엉덩이사유를 하고만것이다.     그 경우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감히 한다면 그 후과가 불보듯 뻔했기때문이다. 엉덩이로 사유하는것이 머리를 보존하는 만전지책이였던것이다.《홍루몽》에 가우촌 의 호로묘에서의 엉터리판결도 엉덩이사유를 하였던것이니 그런《호로묘의 판결》을 내리는 엉덩이사유를 하는 판관들이 지금인들 없으랴,     이렇듯 생리학각도에서 말하면 대뇌가 전신을 지휘하지만 사회학각도에서 말하면 엉뎅이가 머리를 지배하게 되였다. 사실상 권좌를 차지한것은 존귀한 머리가 아니라 비천한 엉덩이다. 간단한 3단론법으 론증할수 있다. 대전제: 권좌를 차지하는것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일이다. 소전제: 엉뎅이가 권좌를 차지한다. 결론: 고로 엉뎅이가 가장 중요하고 위대하다.     력사가 보여주다싶이 어떤 수단으로 천하를 얻었든간에 결국은 엉뎅이를 앉히는 문제였다. 대청제국의 자희할매가 치국의 도리를 장악해서 천하를 쥐락펴락했는가? 태후라는 그 자리에 비릿한 엉뎅이를 깔고 앉아 엉덩이사유를 하였기에 대청제국을 묵사발로 만들어버린 천추의 업적을 남겼던것이다.    얼마나 잘나고 빛나는 얼굴이든간에 결국 엉덩이를 당하지 못했다. 한갖 공을 잘 가지고 논 무뢰배 고구가 그 여윈 궁둥이를 태위의 보좌에 붙이게 되였을 때 그의 두뇌에 비전이라도 왔을것인가? 보좌도 앉으면 임자라고 그 엉뎅이가 놓인 자리에 걸맞는 궁리를 짜내려고 애썼을것이다. 그러나 개입에서 상아가 나오랴!     엉덩이사유의 저 넘어엔 실패이다. 명조를 뒤엎은 리자성도 고궁에 틀고앉아서 엉덩이사유를 하였기에 참패하였고 태평천하를 편다던 홍수전도 일장춘몽같은 황제보좌에서 엉덩이사유부터 시작했기에 내홍을 면할수 없었고 결구 자멸하고 만것이다. 하건만 력대의 권력자들은 제얼굴이 잘나서 만백성이 굽신거리는가 여기였다. 엉덩이를 붙인 자리를 잃으면 존안도 체면이란것도 삼수갑산 개꿈이 되는데도 말이다. 혼군이란 기실 머리로 할 사유를 엉덩이로 하였기에 제엉덩이가 놓인 자리를 지키지 못한 무능력자를 의미하기도 하는것이다.     문명해졌다는 현사회에도 엉덩이사유는 관원의 개인주의, 특수화, 눈먼 망탕지휘, 독선 등으로 표현되고있다. 엉덩이사유란 한편 특정된 위치에서 안계, 판단력, 가치 취향 등이 결정된다는 의미도 가진다. 사유의 지도자는 엉덩이고 머리로 해야 할 사유를 엉뎅이가 시키고있다. 특히는 관료들속에 엉덩이사유를 하는 기재들이 많다.     일컬어"관본위"인즉"엉덩이본위"이고 "립장문제"란것도 곧"엉덩이를 앉힌 문제"인것이다. 관건적인것은 엉덩이의 방위와 감지로서 엉덩이를 가지고 누가 더 총명하고 누가 더 고귀한가를 가늠할수 없다.     사람의 엉덩이는 귀천이 따로 없다. 하찮던 엉덩이라도 어떤 자리에 앉으면 어떤 립장이 결정되는바 그 자리에 앉으면 걸맞는 사유를 할것이다. 엉덩이가 머리를 지배한다면 황당한 일이지만 웃고나서 우리는 슬픈 사색을 하지 않을수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관원의 엉덩이의 질료도 실상은 보통인들과 어상반하지만 존귀비천이 나누어져있다. 정국급간부는 40 ㅡ50만원짜리 《오디A6》에 앉을수 있고 처급간부는 대개 20만원좌우의《쌍타나》에 앉을수 있다는 등의 잠규칙은 중국 관본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부패척결문제도 기실 엉덩이척결문제이다. 백성들은 절치부심하지만 엉덩이가 귀해진 사람들은 마땅히 얻을것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부패라고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사유모식이 그냥 엉덩이사유이니 그럴수밖에 더 있으랴!《엉덩이사유》는 집권제도 의 산물로서 탐관오리들의 권력금전화, 매관매직도 회뢰 등 온갖 비리한 행각들은 리성사유가 아니라 엉덩이사유의 산물이다.     이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엉덩이사유의 걸작이 있다. 광동성의 한 녀고관이 퇴직 10년후에 엉덩이가 워낙 깨끗하지 못하였다는게 드러났다. 열세살 어린나이에 혁명에 참가하였을 때는 제또래들보다 사유가 남다르고 명철했을테지만 엉덩이가 놓이는 자리가 부단히 변함에 따라 역시 엉덩이사유자로 전락했을것이다.     그러기 계하수가 되자 피고석에서 벌떡 일어나 법관앞에 털썩 무릅꿇고 자신은 앞날이 많지 않은 로구로 다병하니 당과 나라에 공헌한 자신의 정상을 봐서라도 주원하여 한편 치료하면서 한편 심사받도록 특혜를 베풀어달라고 빌었다.《이렇게 무릎을 꿇고 사정합니다.)하며 울고불고할 때 리성사유를 하였겠는가? 엉덩이사유를 하였겠는가? 그의 머리가 고귀한가? 엉덩이가 더 고귀한가?     망탕지휘를 해서 경제상손실을 빚어내고도 학비를 냈다고 넉살좋게 말하는것도 엉덩이사유의 걸작이다. 문외한이 전문분야에서 손짓발짓 할 때 엉덩이사유이외에 더 발휘될것이 무었이랴, 엉덩이사유의 기제는 역시 체제에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기술분야를 지도하도록 엉덩이를 배치하는 그 간부등용제도가 비리한것이다.     지식인들속에도 엉덩이사유를 하는 인재들이 많다. 끝을 모르고 하늘로 치솟는 집값으로 하여 민심이 술렁거리고 국민경제발전에 발목을 잡은 페단으로 되였는데도 부동산재벌들의 비위를 맞추어 시장경제발전규률에 맞는다느니 아직도 더 올라도 로임족의 수입이 백배, 2백배로 상승하였기에 얼마든지 구매할수 있다느니 망발하는 그 많은 어용학자들도 기실 리성사유를 한것이 아니라 엉덩이사유를 하고있다.     "엉덩이사유"는 비록 용속하지만 재래로 실용적이였다. 벼슬마당에서는 머리로 사유하면 오히려 사달이 생기는 판이다. 엉덩이를 위해 숫제 리성사유를 접어버리고 아첨하고 회뢰하고 비정을 감싸고 돌아야지 불원이면 고귀한 엉덩이도 볼장을 다 본다. 탐관들의 행위철학은 엉덩이가 머리를 지배하는 실리주의철학으로서 리익으로 권리를 공제하며 권력으로 사욕을 채운다.     소위"부모관"의 옳바른 리성사유라면 나라의 걱정을 걱정하고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복의식이 앞서야 한다. 지난 두가지 회의에서 한대표는 사상상에서 인민군중을 주인으로 모시고 감정상에서 친인으로 여기며 사업상에서 인민의 노복이라는 사유방식을 가져야 리성사유를 하는 관리라고 말할수 있다고 토설하였다.     엉뎅이로 사고하는 관리가 많은 나라는 봉건적전제사상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락후할수밖에 없고 민주사회건설이 뒤처지지 않을수 없다. 한개 사회에 엉뎅이가 머리를 결정하는 유희가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볼장을 다 본 사회라고 단언한다면 너무 민감한 문제를 왈가왈부하는지 모르겠다.     황차 호랑이의 엉덩이는 만질수 없다는 속담이 있음에랴. 관리의 엉덩이를 평백성으로서 누가 감히 건드린다면 대역부도한 일이겠으나 "사유"할줄 아는 그런 비상한 엉뎅이들을 한번 뜨끔하게 쏘아주어서 충격을 받게 할《등에》가 요청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2007년 7월 23일
680    (잡문) 생명과 도의 댓글:  조회:4386  추천:0  2015-11-18
                                 생명과 도의       사연은 고리끼로부터 시작된다.      1920년대 로동개조범 마르자꼬브란 사람이 쏠로위쯔섬의 로동개조소에서 탈옥하여 영국에 도망쳐간후《지옥의 섬에서》라는 책을 출판하여 전 구라파대륙을 들썽해 놓았다.      이 악영향을 없애기 위하여 쏘련정부에서는 정치상에서 믿음직하고 국제상에서 성망이 높은 고리끼를 쏠로위쯔도에 보내여 탐방한후 자기가 보고 들은 사실대로 글을 써서 그 비루한 국외의 위조서를 반박하려고 하였다.      1926년 6월 20일 국가보안국관원의 배동하에 고리끼가 그 유명한《지옥의 섬》에 고찰을 왔다. 그때 섬은 이미 일신변모한 뒤여서 살풍경스러운 경상이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나무를 떠다옮기고 길에 모래를 폈으며 범인들의 숙소에 새 이부자리를 펴놓고 화분이랑 가져다놓아 정말 문명한 생활을 하는듯이 보였다. 행색이 더없이 람루한 범인들은 한데 모이게 하여 쭈크리고 앉게 하고 방수포로 덮어놓았는데 마치 한무지의 쓰레게더미같아 보였다.     그러나 관찰력이 예민한 고리끼는 언녕 진상을 보아냈다. 장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신문을 보는 범인들을 살펴보니 모두 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고있었다. 그들은 이 섬에 일체가 꾸며놓은것이라는것을 암시하기 위해 이렇게 한것이였다. 고리끼는 아무말없이 다가가 그들이 들고있는 신문을 바로 잡아주었다. 이때 열네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소리쳤다. 《고리끼. 내가 당신에게 진상을 알려주겠습니다.》     고리끼는 수종들을 물리치고 그 소년과 한시간반이나 담화하였다. 그가 소년곁에서 물러날 때 얼굴은 눈물범벅으로 되여있었다…      여기까지 읽은 우리는 레닌이《무산계급예술의 가장 걸출한 대표》라고 칭송한 이 위대한 작가가 반드시 진실을 밝힐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을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정반대였다. 쏘련과 구라파의 중요한 신문들들에서 고리끼의 탐방록을 게재 했는데 글에서 고리끼는 《매와 해연의 명의로 선고하는바 쏠로위쯔섬으로 인민들을 놀래우 려한것은 전혀 무근거하며 죄인들의 생활은 아주 만족스러웠다.》는 구절이 있었다.      고리끼자신도 자기의 글이 신문에 나갈쯤해서《해연의 노래》의 작자에게 진상을 알려준 소년이 총살되였다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 진실을 말한 그 남자아이는 죽었으나 고리끼는 살았다. 그러나 그가 먹으로 쓴 거짓말은 자기의 량지에 먹칠하였다. 뜬명성은 왕왕 사람들을 심사숙고하게 한다. 그 이후 고리끼가 어떤 심정으로 세상을 대하고 사람들을 대하였을가? 그것은 오직 그 본인만이 알수 있는 일이다.      모르긴 해도 고리끼가 지옥의 섬을 탐방하고 보고를 쓰기전에 사상상에서 치렬한 모순투쟁이 있었을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채방할 때 말타고 꽃구경하는식으로 대충 살펴보고 그곳 관원들의 보고를 청취하는것으로 사명을 완성하였을것이다. 그리고 범인들이 거꾸로 읽는 신문을 바로잡아주지 않았을것이고 남자아이의 말을 들은후 얼굴이 눈물로 얼룩지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고리끼는 결국 굴복하고말았던것이다.      가령 그가 진상을 진상대로 보도했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그 솔직하고 굴강한 남자아이의 뒤를 따라 비명횡사하였을것이다. 도의와 생명을 두고 한 선택에서 고리끼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런 선택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할것인가?     세인들이 잘 알고있는 이야기를 더 례를 들어보자. 한 초부가 다리를 건널때 도끼를 물에 떨구었다. 어쩔줄몰라 쩔쩔 맬때 물속에서 신선이 금도끼와 은도끼, 쇠도 끼를 들고나와 어느것이 자기것인가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초부는 금도끼, 은도끼 를 알은체 하지 않고 쇠도끼를 자기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재물을 탐내지 않는 초부의 성실성을 찬미할것이다. 이야기의 숨은 주제도 바로 그것이였다.      그런데 숙언중이라는 만화대사는 이야기의 결말을 고쳐놓았다. 신선이 금도끼나 은도끼를 들고 나온것이 아니라 머리에 쇠도끼를 박고 물우에 솟아올라서 대성질호하였다. 《이 도끼가 누구의것인가?》초부는 혼비백산하여 전전긍긍하면서《저 저의 도끼가 아니올시다.》하고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리익과 도의 가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사람들은 도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도의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도의를 선택하고 생명을 버릴사람은 극히 적을것이다. 그때 초부가 무치하다고 견책할수 있을것인가? 누구나 자기 신상에 불똥이 튀지 않을경우 정의를 운운하기는 쉬우며 자기의 생명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지 않는 한도에서는 용사인양 자기 동가슴을 툭툭 칠수 있다. 일단 자기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면 용사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것이다. 고리끼의 비애는 중외고금의 모든 문인들의 비애인것이다.      건국후 어떤 운동전에서든, 폭풍취우에서든 조어대에 안정하게 앉아있어서 넘어 가지 않는 로옹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중외에 덕망이 높았던 곽말약선생이다.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시국을 잘 따른데 있다. 례하여 위대한 향도자가 리백을 좋아하고 두보를 싫어하는것을 알고《리백과 두보》라는 대작을 써내여 리백을 한껏 춰올리고 두보를 여지없이 깎아내렸다.     이 사실을 두고 비렬하고 무치하다고 질책할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문학거목인 곽선생은 만년에 패필을 쓴 무치한 문인이다. 그런데 위치를 바꾸어서 생각해 볼 때 그런 력사시대에 비렬하지 않고 무치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수 있었 겠는가? 물론 모든 문인이 다 곽말약과 같은것은 아니였다. 로사는 진리를 위해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물에 뛰여들어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의 시체를 물에서 건져낼 그때까지도 도고한 로사선생은 꼿꼿이 선채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꿋꿋이 선 대가는 무엇인가? 생명이였다.     빈천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위무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극히 적었다. 이는 인성의 약점이다. 이런 인성의 약점은 참으로 대성인이 아니면 극복할수 없다. 그런데 대성인들 어찌한단 말인가? 대성인 공부자도“군자는 넘어지려는 담장앞에 서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공자도 생명을 가지고 만용을 부리지 말라고 한것이다.     우리는 생명과 도의중에서 어느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무도 명랑하고 통쾌한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아니 그런가?                                   2008년 2 월 22 일      
679    (진언수상록31)문명과 몽매 댓글:  조회:4939  추천:0  2015-11-13
                                  문명과 몽매                                          진 언      문명과 몽매란 물과 불처럼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불가분리적이여서 시비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화제이기도 하다. 인류는 문명을 창조하였기에 이 지구촌에 종횡무진하고 좌충우돌하는 절대적지배자로 군림하였으며 문명을 찬미하여 자기 자신을 자화자찬한다. 지혜의 대가는 모순이다. 이것은 인류가 인류에 대한 헷갈린 롱담이다.      이 지구덩이에는 억조창생이 살지만 모든것이 내것이라고 집착하고 욕심부리는 물종은 오직 인류뿐이다. 자연의 품에서 살면서도 략탈밖에 모르는것이 또한 인간이다. 자연의 립장에서 보면 인간은 차라리 없기만도 못한 백해무익한 동물일것이다. 자연을 파괴한 사필귀정이건만 자연재해라 칭하고 극도의 리기로 다른 생명까지 멸종시키고 있으니 하느님이 두번째 노아방주를 제시하기는 백번도 틀린 이 시점이다.    기실 문명과 몽매지간에는 이것이 아니면 곧 저것이듯이 뚜렷한 계선이 있는듯 하지만 인류의 자신에 대한 렴치없는 찬가속에는 명확하게 말할수 없는 가설이 담겨있다. 만약 이 가설이 성립된다면 인류는 부단히 자기 령지를 확장하고 부단히 암흑을 전승하고 지구를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것이지만 문명과 몽매사이에 분명한 계선을 그을수 없게 되기도 한다. 한것은 문명이 구체적인 인류활동이 될 때 순수의 광명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광명과 암흑의 혼합체가 되기때문이다.    문명의 원천을 거슬러올라가면 완전히 광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문명이 이 세계를 비추기시작해서 시작된 부락간의 전쟁도 원시문명의 산물이였다. 동일물종간의 전쟁은 자연과의 박투보다 더욱 잔혹하고 훼멸성적인 문명활동이였다. 인류는 이미 고통과 죽음을 제조한“예술가”로 둔갑하여 포로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목을 자르고 각을 뜯는 등 못살게 굴며 동류를 소멸하는 살륙의 예술을 장악하였다.    노예제의 탄생은 이런 예술발전에 질적비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날따라 풍부해지고 다양해진 무기가 이를 증명하였다. 이 지구촌에서 인간보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혹독하고 잔인하게 동종을 학대하고 소멸하는 동물은 없다. 상상의 극치에 이른 온갖 형구와 형벌방법은 두말할것없이 인류문명의 중요한 조성부분으로 부상하였다. 허나 그네들의 지혜의 결정품에는 우매한 목적이 담겨있다. 따라서 그것을 사용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문명인이면서도 야만인의 각색을 연출함으로써 자학적동물이 되였다.    문명한 인류는 허다한 면에서 지혜의 증장과 더불어 날따라 몽매에로 나아갔다. 20세기는 인류문명사상에서 가장 문명해진 세기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문명하다는 20세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벌여놓고 수천만 인명을 앗아가는 “문명”의 기적을 창조했다. 동류를 살해하는 수단도 최고급이여서 독가스로 집단학살하고 원자탄으로 한꺼번에 수십만을 학살하는 기술을 고안, 창조해냈다.    소위 황군제씨들은 남경대학살에서 사람의 머리를 총창에 꿰들고 사진을 찍는 끔찍한 인간상을 세상에 과시하였고 생체실험도 서슴치 않았다. 인류는 20세기에 철저히 자멸의 낭떠러지로 용왕매진하였다. 인류로 말하면 가장 문명한 단계에 가장 우매한 우매와 가장 위험한 위험도 감행했고 지금도 시일야 진행하고있다.    정체성으로 볼 때 문명의 자연적발전과정에서 비할바없이 휘황한 성취를 거두었지만 문명이 정체적으로 광명만으로 도배질된것이 아니다. 모든 문명의 형식이 죄다 그러하였다. 공업문명은 인류의 문명사이래 가장 고차원적인 문명의 형식이다. 이런 공업문명은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해냈고 빠른 교통수단, 보다 나은 생활조건을 마련 하는 동시에 전례없은 생태파괴와 재난을 동시다발적으로 자초하고있다.    스스로 자기 가원을 망태기로 만든 장거는 극단적인 몽매한 행위결과라고 말해도 실언이 아닐것이다. 공업문명, 고기술의 표면적인 번영창성속에 극단에로 치달아오른 몽매의 론리가 잉태되여 있었다. 이러한 몽매의 론리의 부추김하에 이미 세기말적인 재난에 림박한줄도 모르고(외면한?) 더욱 미친듯이 지하자원에 대해“3광정책”을 다 그치고있으며 그도 성차지 않아 해저속에 자원에 마저 손을 뻗쳤으며 땅과 바다속에 일체생물을 “물종청소”를 하는데 열을 올리며 무지경의 호화사치한 소비정책을 실시하며 개발이라는 기치아래 절주빠른 광란적인 디스코를 추고있다.    악의 대명사격인 싸탄도 인류의 그 많은 재난은 신성의 명의하에 진행된다고 말할수 있게 되였다. 인류의 문명찬가란 문명과 몽매라는 두개 음부의 변주곡이며 힘이 승패를 겨루는 격투기이다. 싸탄의 흑색유혹이 있기에 인류를 구제하려는 하느님의 의의가 체현될수 있다고 해야 할가? 싸탄의 악이 있으므로 해서 세계는 풍부하고 다채롭게 변화하고 매 생명개체로 하여금 피와 살이 있게 되였다고 해야 하는가?    력사발전은 평탄할수 없고 인생극장에 다만 희극만 있다고 말할수는 없다. 근대서방의 많은 학자들이 악의 의의를 강조하였고 심지어 혹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승냥이와 승냥이관계와 같아서 인애란 없다고 한다. 인애를 상실했다는것은 원시공동 체성원들 앞에서도 면괴할 일이다. 인류의 파괴성을 문명건설의 기점으로 삼는다면 실제상 그 론리는 인류자신의 야만성과 우매성을 긍정하는것과 같다.    가공할만한 공업문명이 탄생해서 짧디짧은 기간에 인류는 지구상의 대부분 물종을 소멸해버렸으며 자연계를 돌이킬수 없는 지경에로 몰아넣었는바 청청 맑은 하늘을 잃어버렸고 맑고 푸른 바다와 강물을 상실했으며 화해로운 대지를 엉망진창으로 아니,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지구ㅡ어머니는 인제 불치의 의난잡증에 걸린 로약한 늙은이가 되였다. 그래도 지구인들은 새끼비탈거미들처럼 모체를 파먹으며 살쪄간다.    문명이란 공상적인것을 현실화하고 무형의것을 유형화하며 유효한 가치를 보편화한다. 공업문명의 고효률적인 만가동은 되돌아와서 자기의 가원을 훼멸시키는 작업에 만가동을 걸고 고효률을 추구하는 유모아를 빚고있다. 그냥 이대로라면 멀지않은 장래에 인류는 소위 문명과 몽매의 관계를 해명할 기회마저 없어질것이다. 인류의 물질문화생활의 다채로움과 풍부함은 자기의 가원을 훼멸시킨 대가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쾌거인가? 얼마나 행복한 풍경인가? 얼마나 눈물겨운 자아풍자인가?    대저 한다리가 너무 길면 한다리는 짧은법이다. 인류의 문명과 몽매의 변증관계 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속에 몽매가 가져주는 인류의 희비극적인 잠대사가 엮어지고 있는것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문명은 영원히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닐수 있다. 고양이는 고기를 먹기좋아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헤염을 칠줄 모른다. 고기는 지렁이를 먹기좋아한다. 그러나 고기는 뭍에 오를줄 모른다. 조물주는 너에게 수없이 많은 유혹을 던져주었지만 그만큼 쉽게 얻을수 없도록 하였던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문명행위에 대한 반성은 문명발전을 위한 가장 문명한 표지이다. 문명에 대한 문명한 비판과 성찰은 문명이 자신을 비추는 밝은 빛으로 되여 문명속에 숨겨진 몽매성을 소멸해줄것이다. 지구는 영원히 돌고 돌겠지만 인류가 영원히 이 지구에 앉아 하루에 10만8천리를 갈수 있을지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    바다속에 고기는 말했다.“네가 내 눈에서 눈물을 보아내지 못하는것은 내가 물속에 있기때문이”라고, 인류는 문명속에서 저지른 몽매함의 비애를 모른다. 물론 위대하고 성스러운 인류문명의 정체적인 발전을 부정할 뜻은 없다. 다만 인류는 늦었 지만 랭철하게 반성해야 하고 소잃고 외양간고치는 식이라도 대안마련에 착수해야 한다는 사회공론을 여기서 재차 중계방송하는 차원에서 횡설수설할뿐이다.                                    2011년 6월 30
678    진언수상록 82) (잡문) 력사의식을 상실한 악과 댓글:  조회:5531  추천:0  2015-11-11
                      력사의식을 상실한 악과                                     진 언      력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미래가 있을수 없다는 말이 있다. 타민족에게 흡수되거나 세계화속에 분해되거나 소멸될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례를 지나간 인류력사속에서 얼마든지 확인할수 있다. 한 민족의 흥망은 력사의식에서 비롯된다. 허나 력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아무리 잘 살고 강하다 할지라도 한때의 가물거리는 촛불과 같고 력사의 장하에 일엽편주같이 조만간에 격랑속에 침몰될것이다.    오늘날 세계 선진국들도 기득권자들의 수요에 따라 자신들의 력사를 재조명하고 발굴하면서 외곡, 조작하고있다. 례컨대 일본이 영구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심어놓은 식민지사관은 력사의식과 주권의 자주능력을 잃게 하고 심지어 뿌리를 모르는 세대들을 육성하고있으며 친일파후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뿌리깊은 노예근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집체무의식이 날로 우심화되고있다.      남에서는 일제식민지지배와 광복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민족정기와 민족자존을 바로 세운적이 없었다. 하여 세기를 넘을지 모르는 분단의 현실에도 배부름에 안주하는 자들과 서구문명 특히 미국의 퇴폐적인 풍조, 무질서한 방종과 악순환적인 현대판사대주의 의식과 종속적인 력사관, 세계화를 표방하는 자들이 민족융합을 거부하고 심지어 한사코 력사를 부정하며 파렴치한 궤변을 팔아먹고있다. 그런 자들은 배달족의 후손이기를 거부하거나 구중천에 날려버린 반민족적인 패류들이다.    건국의 력사가 200여년밖에 안되는 미국도 력사를 깊이 다루고 미국의 국가리념을 최고의 통치리념으로 삼고있다고 한다. 하여 각급 학교의 교과목에도 력사과목을 중요시하고 일등국민의 우월성을 주입하고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백인우월주의가 안받침되여있다. 그런데 배달민족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민족적자각과 슬기로운 지혜로 반만년 찬란한 력사를 바로 세우려고 할대신 일제가 씌워준 굴레를 고맙게 생각하면서 한사코 벗어버리려 하지 않는 인간들이 득세하고있다.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진대 사대주의에 얼이 빠진 리씨조선조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풍전등화의 명나라에 매달려 신흥제국 청태종과 맞서싸우다 대패해 끝없이 수모를 당했다. 그결과 삼전도의 삼배구고두 (三拜 九叩頭))의 만고의 치욕을 남기였다.    이제는 친일종속자들의 노예근성의 집착에 의해 지속되고있다. 그러하니 력사를 잘못알고 있는 후손들의 력사정신이 흐리고 민족의 통일을 반대하는 반력사적, 반민 족적인 괴물들이 번성하는것이다. 이는 력사정신과 력사의식의 부재에서 온 악과이다. 게다가 허리가 두동강난 분단의 아픔은 뒤로 하고 트집을 잡고 헐뜯으며 니전투구의 꼴사나움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지구촌을 웃기고있다.    저주받을 란신적자들은 리념과 편견, 극단적리기주의 깃발을 휘두르며 날뛰고 이에 추종하는 언론들이 붙는불에 기름을 붓는 작태를 부리고있다. 그들은 대아(大我) 를 버리고 소아(小我)병에 집착하여 기득권 지키기에 제정신이 아니다. 누구를 탓하 랴. 아베 노부유키의 재수없는 예언대로 노예적근성을 버리지 못한 업보와 악과가 아니겠는가? 일제가 36년간 노예화한 정책의 받침대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기시성적으로 호칭한 “죠센징”들의 소아병에 걸린“조선정신”이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촉탁직 관료였던 무라야마 지준이란자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과 관련해서 조선인의 문화와 사상 즉 조선정신을 조사하여 조선인의 정신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악랄한 정책을 고안해냈다. 하여 1925년 “치안보호법”이라는것을 만들어내고 정치, 사회단체들에 대하여 세밀한 부분까지 모든 동향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조선의 민간신앙과 풍속(놀이문화까지도), 사상, 종교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의 민족정신을 뿌리채 뽑아내여 일본민족으로 동화시키려 광분했다.    일본의 마야타 세츠코교수의 진술에 의하면 일제는 마지막까지도 조선인을 신뢰하지 않았는바 례를 들어 조선인이 제손가락을 베여 일본천황페하에게 충성하겠다고 혈서를 써도 그런 과장된 표현에 오히려 경계심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조선인의 총이 일본을 겨누는가, 적을 겨누는가 하는 문제상에서 마지막까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고발하고있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시키여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하려 천방배계를 다했던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한다. 최근 반복적으로 고창되고있는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과 우익세력들의 망언과 력사교과서 외곡문제는 21세기 군국주의일본의 부활의 전주곡이라해도 실언이 아닐것이다. 우리 조선민족의 력사와 문화, 철학, 정신, 민 속 등을 후대들이 바르게 알게 하는것은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지켜야 할 민족정신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초미의 과제로 나서고있다.     2015년(을미년) 8월 29일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합한“경술국치”가 105주년이 되는 날이며 1945년(을유)년으로부터 광복 70년을 맞는 해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배한것을 현재의 일본정부도 그때의 일이 합법적이였고 정당하였다고 억지를 부리며 동에도 닿지 않는 궤변을 늘여놓고있다.    더우기 근현대사에서 저들이 저지른 만행을 시인하기는커녕 부정하고있는 판국이다. 식민통치시기 조선인민에 대한 가해자인 일본의 현위정자와 극우세력들은 력사외곡과 우경화를 로골화하던차 바야흐로 신국국주의 부활을 예시하고있다. 이 시점 에서 아베 노부유키의“예언”을 재인용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은 서로 리간질하며 노예적삶을 살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 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 키는 다시 돌아온다.”고, 비록 당나발로 치부해야 하겠지만 지금 조짐이 심상치 않다.    1945년에 무조건 투항한 일본은 지금 현재도 미국에 종속된 위성국가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있는 실정이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력사적과오에서 얻은 교훈의 의무와 사명을 아직도 리행하지 못하고“대화민족우월의식”에 사로잡혀있다. 요즈음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 야망과 준동을 반대하는 일본국민들이 많지만 말이다.    과거 백여년에 걸쳐 무능한 통치계층과 용속한 정치인들의 돌이킬수 없는 과오로 36년간 일본식민지지배의 치욕스러운 력사를 남기였지만 광복이후에도 몰지각하고 리기적인 정치인들로 인해, 동족상쟁의 비극을 연출하였고 순박하고 량순했던 남북의 백성들이 상호간에 불공대천의 주적으로 적대시하며 이를 갈고있는 분단민족으로 남아있게 되였다. 개가 다리를 들고 오줌싸듯 실실거릴것은 일본국이다.    고대희랍에는“교양이 없는 서민은 남을 비난하고 대인(철학자)은 진리를 론한다.”는 격언이 있다. 론어에도 “군자구제기 소인구제인(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라고 씌여있는데 군자는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아보고 소인은 책임을 타인에게서 찾는다는 말이다. 과거의 원쑤와 어깨동무를 할지언정 리념이 다른 동족들에게는 이를 빡빡 갈고있으니 대관절 무엇이 탓이던가? 기득권자들이 호가호위하다보니 배달족의 정신이  동강나고 그리고 칼도마위에 고기같은 민족으로 남은 탓이 아니겠가?                                              2015년 8월 2일
677    진언련시조 ( 11) 댓글:  조회:5589  추천:1  2015-11-07
                              진언련시조 ( 11)                                   력사, 학문, 책   1.  력사란 기록인가 세월속에 굳은 화석         가공하고 분식하는 실용력사 쓰지마라            력사를 고쳐쓴다면 사마천에 빚지리라   2.  력사란 쓰는자의 입김서린 웃음거울         죽어간 승자마다 새겨넣은 긴 묘지명            분식된 기록 그대로 믿을자가 누구일고   3.  선혈로 기록된걸 먹물갈아 덧칠하며         史家라 자칭하니 사마천이 웃으리라           인류의 대살륙사를 모르는이 뉘시던가   4.  반도의 좁은땅도 성계에겐 족했던가         녀인네 치마바람 골육상잔 추겼으니            오백년 리조비사에 니전투구 피비리다    5.  왕조가 뒤바뀌면 고쳐쓰는 사서여늘          영웅이 그 뉘시며 적자충신 그 누구냐             두어라 시비와 성패 식후한담 같은것을                               학문   6.  학문이 무어드냐? 인간을 알기로다         학덕이 무엇이냐? 타자에 사랑이다             학문의 최고경지는 인간세상 투시하기   7.  운용의 현장에서 거듭나는 학문인데         교조의 골목에서 자결하면 애석해라            학식이 넘쳐나던들 공을기가 되여서야   8.  공자왈 맹자왈로 도고하던 학자님아         어전에 엎드리니 소원성취 이뤘는가            선비는 대바른 골기 지조되야 고귀합지   9.  고독을 마다하면 학자되기 다글렀제           비상한 새사상이 철학자를 낳으매로            성현들 안빈락도에 자족하며 살았더라      10. 학문에 담쌓으면 까막눈이 될것이요          학문에 맹종하면 고리삭은 샌님되리             높으신 학자님들은 운용으로 거듭났네   11. 스스로 허심하면 학벌로 편달하고         텅빈속 흰둥이들 학벌자랑 침튕기네            이보소 허명무실을 自嘲함이 어떠하오   12. 아희야 식자와 학자는 다르니라          비상한 기억력이 식자를 만들때에               사상과 철학이 있어 학자가 되노매라   13. 지식은 기성된것 재능은 미완성품          학식은 익혀가고 지혜난 쌓음이니             운용의 준마를 달려 学고봉에 이르거라   14. 지식이 열말인들 글뒤주면 뭐하느냐          책짐을 지고가는 당나귀는 귀자랑뿐                실천이 재능을 낳고 경험령감 지혜주네   15. 자슥아 그러다가 쇠궁디를 두드릴라          아부님 신측이야 그른데가 있으리만             청운이 따로 있는데 임나끔 이루리까   16. 지식이 낳는것은 지혜가 아니여라         얼마간 배웠다는 표지밖에 더되리오            재능은 운용에 있어 그 이상의 지혜란다   17. 지식은 끝이없다 미지의 대안이라          탐구의 금빛날개 상상력이 요긴하다             지혜가 피는 과원에 재능 또한 주렁지리   18. 지식은 무게없고 광채 또한 없다마는          识者의 계관이란 영광으로 엮었기에             사람들 실속보다도 현란함에 혹하더라   19. 출세문 두드리는 벽돌인즉 학문인데         아는게 죄가되면 일락천장 여반장이            무식이 상팔자라니 금과옥조 따로없네   20. 공자왈 몰라해도 밥줄이야 끊기랴만         소경이 길가던듯 세상속을 모르나니            인생을 풍미함에는 지식꽃이 으뜸이라   21. 무식이 상팔자란 옛말씀이 그르랴만         무지한 인생이면 심지없는 등불같제            아서라 무지랭이의 식자우환 헛소리니                          22. 봉사님 앞못보니 막대기로 헤쳐가고         귀멀어 젠벽이면 눈치보며 살지마는            무지자 인생행로는 살아평생 밤길되리   23. 배부른 돼지는 긴긴 낮꿈 잘꾸지만         식탁에 오를 꿈은 꿈속에도 못꾸나니            배고픈 소크라테스란 그래서 생긴말이   24. 지식의 창고를 다채우고 닫아두면            나다닌 바보보다 나을게 없느니라               모르냐 범진 공을기 글뒤주로 썩은것을   25. 无用한 지식이란 하늘아래 없지만은         쓸모가 없어지면 지식이길 그만둔것            아는게 힘라는것을 처처에서 절감하리                               책   26. 옥답도 갈아엎고 씨뿌려야 수확하듯         운용을 모른다면 밭갈이로 그치는격            많은책 읽어노라고 장담하긴 이르니라   27. 스승이 따로있냐 군서가 良师인데          해빛과 같은것을 등지고서 어찌사냐             무식은 무지한자의 묘지명이 되리로다   28. 독서를 싫어하고 인생일사 어띠호리          지식의 상록수에 사는기술 맺히나니             시작이 따로 있더냐 끝이나고 시작인듸   29. 볶은콩 골라먹듯 책읽기도 골라하고           읽었다 말을 말고 알았노라 말하거라            독서란 인생읽기니 그 오묘함을 깨치야제    30. 옛것을 알고서야 새것인줄 알것이매           오래면 전통이라 나무리는 슨상님들              알괘라 (溫故而知新 可以为师) 금언임을
676    (잡문) 생각하기와 말하기 댓글:  조회:4631  추천:0  2015-11-04
                                  생각하기와 말하기                             인간의 말은 그의 인생과 같다. 말은 행동의 거울이다. 말은 행동보다 더 긴 생명을 가진다. 인류가 말을 할줄 알게 된것은 문명개화의 길에서 더구나 금상첨화가 아닐수 없다. 자초에는 사람들의 단순한 의사전달을 목적으로 생각한것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을것이다.    말이 없는 인생은 상상할수도 없다. 어떤 말을 하며 사는가는 그 사람의 인생내용으로 되여진다. 그러나 인간은 차차 문명개화하면서 말속에 말을 숨기고 말에 말을 얹거나 빙빙 에둘러 말하는 등 기량을 터득하게 되였다. 사람이라면 말을 하며 살아 야 하고 말을 할 때에는 해야지만 말로 롱간질을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백유경(百喩经)”이라는 옛글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한 부부가 떡 세개를 구웠는데 마지막 한개를 누가 먹어야 하는가를 두고 내기를 하였다. 즉 누가 마지막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먹을수 있다는 조건이였다. 도박이 시작되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도적이 들었다. 도적은 처음엔 사람이 앉아있는지라 망설이다가 아무 반응도 없는지라 차츰 담이 커졌다. 도적은 집안의 값이 갈만한 물건들을 챙겨가지고 나가려다가 녀자가 십분 자색을 가지고있는지라 음심이 솟구쳤다.    하여 녀자에게 다가와 손발을 놀리기시작했다. 녀자는 더는 참지못하고 소리쳤다.    “너는 죽은 사람이냐? 눈앞에서 제녀편네를 희롱해도 관계하지 않을작정이냐? 이 뒈질놈아!”     녀편네가 발악하며 고함질렀지만 남편이란자는    “네가 졌다. 이 떡은 내가 먹게 됐다. 히히히… ”하고 바보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이건 우화이다. 말 한마디에 천근이 오르내린더더니 말 한마디에 떡한개가 오르내리는 문제라서 함구무언을 도박의 조건으로 삼았다는 그 자체에 의의가 있지 않은가? 문명개화시대에 하나의 떡을 먹으려고 침묵할 사람은 없다. 이런 경우에는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라는 속담이 어울릴듯싶다.    머리는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며 말하게 한다. 하지만 생각한것이 그렇게 완미하고 적극적이고 선진적인것이라도 입을 통하여 말하지 않거나 혹은 글로 써내여 표달하지 않고는 아무쓸모가 없다. “벙어리속은 낳은 에미도 모른다”는 속담이 바로 말의 중요성을 제시한것이 아닐가?    그러나 인간이 차차 역어지면서 생각하기와 말하기는 점점 협조적이 되지 못하고 생각 따로, 말 따로 해야 할 경우가 비일비재이니 정말 인류의 원초적비애라 아니할 수 없다. 생각하기와 말하기가 그렇게 다를수밖에 없다는 막무가내함을 보여준 전고 로는 또 진조의 간신 조고의 “지록위마(指鹿为马)”를 들수 있을것이다.     제위를 차지할 야심을 가진 조고가 대신들이 자기 위세에 얼마나 굴종하는가를 시탐하기 위해 황제 호해앞에 사슴을 끌어다놓고 말이라고 하면서 대신들더러 진가를 가리라고 했다. 결국 사슴이라고 이실직고한 대신들은 처형되고 량지를 꿍져박고 말 이라고 말한 대신은 승직하였으며 명철보신하여 입을 다문 대신들은 목숨을 건졌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머리와 입은 본의 아니게 불협조적일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속담에 “말은 바른대로 하고 큰고기는 내앞에 놓아라”고 하였지만 어찌 그냥 말로 은공을 갚고 천냥빚을 갚을 절창만 내놓을수 있으랴!    사슴인가 말인가는 아주 간단한 사유를 하면 되지만 보이는대로 사슴이라고 할가, 량심을 속이고 말이라고 할가? 하는 문제는 치렬한 내심투쟁을 거쳐야 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한 대신들의 그 올곧고 대바른 성미는 길이 찬양할바 이고 사슴을 말이라고 한자들은 더없이 가증스럽지만 정작 자기가 그 경우에 놓이면 침묵을 지키는것을 상책으로 여길 사람이 많을것이다.    생활속의 많은 현상들은 그렇게 “지록위마”처럼 쉽게 판단할수 없다는것을 모두 느끼고있다. 중국에는 쓸데없이 일에 참견말라는 처헤철학의 정수가 류전되고 있다. 말하자면 형편을 봐가며 입에 자물쇠를 잠그고 수수방관하는것을 명지한 처사로 인정 하는것이다. 실용가치가 있는 처세술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백사에 자기와 리해관계가 없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명철보신하면 만사대길인가? 꼭 그런것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독일신교의 마틴 니모라목의 비문에 독일나치스들의 대도살에 대한 한단락의 글이 새겨져있는데 전인 류적인 심사숙고를 자아낸다.    “처음 그들이 공회인사들을 도살할 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공회인사가 아니였기때문이다. 후에 그들이 공산당원들을 학살할 때도 역시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였기때문이다. 다음 그들이 유태인을 학살할 때도 나는 침묵을 하였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였기때문이다. 계속하여 천주교도들을 학살할 때도 의연히 침묵을 지켰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였기때문이다. 마지막에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할 때는 이미 아무 사람도 나를 위해 말해줄수 없었다. 말할수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 모조리 죽여버렸기때문이다. ”     독일목사의 비문에 새겨진 참회에서 우리는 금이라고 일컬어지는 침묵도 경우에 따라서는 만전지책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중국에는 “적게 말하는것이 제일 좋다”거나 “시비거리가 생기면 입을 다물고 충돌을 피하라.”거나 “둥글둥글하고 매끄러워야 한다.”는 벼슬지남이 있다. 항간에도 “입은 재화의 문이라 사람을 만나 말을 삼가하고 마음을 다 주지말라”거나 “나라일은 입에 담지도 말라.”는 등 금과옥률이 있다. 이런 명철보신술이 몇천년이나 내려오다 보니 이른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는것이 불문률로 된듯하다.    우리는 선인들이 남겨놓은 이런 금언들에 담긴 생존의 지혜와 인생철리를 승인하지 않을수 없으며 제입 건사에 십분 신경을 쓰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력사적으로 빚 어진 피와 눈물의 비극속에서 총화해낸것들이기때문이다.“말잘하고 징역가랴.”하는 속담이 있지만 말한마디에 목이 날아나고 옥고를 겪고 멸문지화를 당한 사실이 얼마였던가!     목을 내대고 참말을 한 지사들도 있지만 극히 소수이다. 하여 중국의 몇천년 전 제사회에서 사람들은 감히 노할수는 있어도 감히 말할수는 없었던것이다. 그때는 차집이나 술집벽에 “국사를 론하지말라”는 고시가 나붙어있었다고 한다. 대신은 황제에게, 노복은 주인에게, 안해는 남편에게, 제자는 스승에게 그저 “예예”하고 무조건 순종하는 길밖에 없었다.     말한다는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일종 욕망이다. 로백성의 금욕은 황제의 종욕을 야기시는법이다. 분명 허튼소리이지만 황제가 말한것은 다가 “현명하옵니다.”라고 개여올려야 하였다. 말은 마음의 소리라라고 하지만 언제 마음의 소리를 다하고 살수 있었던가? 그러다보니 말하는자는 힘들어지고 듣는자는 정신을 가다듬어 말속의 말을 더듬어내야 하고 말밖의 말을 터득해야 했다. 총명한 사람들은 말을 들을 때 그 소리만을 듣는다고 하여 로련하고 수양이 있는 사람은 소홀하게 말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고대인들에게 신체언어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표정관리예술은 잘 알고있었을것이다. 그래서 기뻐도 내색을 내지말고 노해도 안색을 흐리지 말라고 하였다. 쏟아내는 말이 마음과 같을수 없고 표정도 마음과 동보할수는 없다. 그럴때면 될수록 자기 마 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넘겨짚지도 못하게 해야 실수 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비단 자기 입을 주의해야 할뿐만아니라 시시로 남의 말밥에 오르지 않도록 근신해야 한다. 남을 해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사탕알을 입에 넣어 잠시 말문을 막듯이 대방에게 듣기좋은 말만 하여 자신에게 해로운 말을 할 마음을 어루만져놓거나 극단적으로서 약자선손이라는 말처럼 말처럼 먼저 대방에게 높은 모자를 씌워주고 아주 공손한듯이 가장하는것도 은신술의 하나이다.    인간관계는 책에 씌여진것처럼 그렇게 조화롭지 못하다. 말잘하는 소진, 장의라도 이 복잡다단한 인간사이를 조화롭게만 할수 없을것이다. 말을 많이 한다해서 말을 잘하는것이 아니며 청산류수라 해서 말을 잘 한다고 할수 없다. 말은 하기 쉽기도 하 고 어렵기도하다. 특히 늘 참말을 한다는것은 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크게 나누어 세가지 말을 하며 살게 된다. 첫째는 여러사람앞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말인데 참말도 있고 거짓말도 있다. 이런 말은 사회언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일상에서 사사로히 하는 말로서 역시 진가가 뒤섞있다. 그것은 마음의 문 을 활짝 열어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셋째로 마음의 골방에 챙겨져있지만 감히 쏟아 내지 못하는 말로서 가능하게 죽을때까지 마음의 골방에서 혼자 잠자야 할것이다.     어떤 종류의 말을 하든 참말은 자유의 메아리이다. 그러나 흔히“충언역이(忠言逆耳)”라고 자고로 용납되지 않았다. 참말이 잘 용납되지 않는것은 참말이 진정 진 귀하고 진귀한것인만큼 더구나 수요되기때문이다. 참된 말이란 진리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며 정확하기만 한것이 아니다.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어떻게 말하는것이 바로 참말이다.     옛글에 이르되(桃李无言下自成蹊)고했다.“물이 깊으면 고기가 절로 모여 든다”는 말도 있다. 늘 참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참된 마음을 가지고 덕을 쌓으며 살아가는것만큼 보람있는 인생이 어디 또 있으랴만 그게 잘안되니 사람들이 개탄하는것이리라.                                   2007년 10월 18일   
675    (잡문) 불평의 저의 (底意) 댓글:  조회:4331  추천:0  2015-11-04
                                 불평의 저의 (底意)                                 E. 버크는 말한다. 자기기 살고있는 시대에 불평부리고 현재의 권력자들에 대해 수군거리고 과거를 탄식하며 미래에 터무니없는 기대를 걸어보는것 등은 거의 모든 인류가 가지는 공통한 성질이라고. 불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나 모를리 없겠지 만 문제는 불평의 진정한 저의에 대해 어떻게 리성사고를 하는가이다. 버크의 말처럼 불평은 인류사회에 줄곧 존재해온 일종 심리현상으로서 인간의 수요가 만족될수 없듯이 두절될수 없다. 가까운 근심이 사라지면 먼 근심이 생기듯 저급적불평이 해소되면 고급적불평이 생겨나고 고급적불평이 해결되면 초고급의 불평 이 봄싹처럼 돋아나기 마련이다.    불평을 격정이라 할수 있다. 만약 생활속에 격정이 없다면 세계는 한가을 락엽이 지는 수림과 같아서 우울과 싸늘한 기운만 사람을 오싹하게 할것이며 해빛은 더는 따스하지 않고 나비는 더는 고운 날개짓에 신명나지 않을것이다.    세상사는 산수식처럼 쉽게 풀리는것이 아니다. 내가 금방  따뜻이 입고 배부르게 먹는 문제를 해결했는데 어떤 사람은 등허리와 배꼽을 내놓고 다니고 음식의 량보다 질과 환경을 강구하고 있어 불평이고 벼르고 별러서 양복한벌을 갖추었는데 거리엔 편할대로 입는 간편한 옷차림이 류행되고있어 불평이고 저녁에 무엇을 해먹을가 몰라서 불평이고 자가용을 몰고 나갔는데 길이 막혀 불평이고…그 모든 잡다한 개인불평은 주정뱅이의 손에 술병과 같고 도박군의 손에 패쪽과 같은것이다.    재위시기엔 다른 사람의 불평불만을 온역처럼 여기던 이들이 일단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 불평전업호가 되여진다. 물러나도 해당 대우를 받는데 만족해야 하련만 벼슬하고나서 남에없는 큰 손해나 본듯이 불평만만(不平滿滿)이다. 이런 심태는 일종 심리질병이다. 관본위사상이 골수에 스며들었기에 관직의 관성에 의해 심리평형을 잡지 못하는것이다. 한마디로 상실한 자기 권력에 대한 애도의 방식일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 일반을 협애한 심리발설이라느니 이루지 못한 자기 욕망에 대한 개탄이나 질투심이라고 아니꼽게 보기도 한다. 미안함, 불평에는 그 가치함량과 대소와 유형무형의 구별이 있음. 모든 웃음이 기쁨의 표현이고 모든 눈물이 꼭 고통과 비애의 표달이고 모든 박수가 환영을 표달이라고 말할수 없듯이 모든 불평이 결코 자사자리에서 분출하는것이 아니다.    하찮은 불평 한두마디때문에 어마어마한 사회불만죄로 몰리여 곤욕을 치러야했던 살벌한 시대가 있었다. 속에서 불평이 부글거렸지만 쏟아내지 못하고 마음을 깨끗이 가진체 욕망을 절제하며 안빈락도를 표방한것은 봉페된 환경때문이고 정치기후가 용납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세상은 마침내 밝아졌다. 개혁개방의 화월춘풍과 더불어 국민의 생활이 꽃펴나고 정치, 생활면에서 고층차, 다양화에로 나가면서 전례없었던 높은 차원의 참여의식과 주체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사회언론환경이 느슨해지면서 특정된 범위내에서는 못할 말이 없게 되였다. 감히 불평을 토할수 있는 사회가 되였다는것은 국민들의 행복이 아닐수 없는바 그것은 자기 인격가치에 대한 긍정과 추구의 결과이며 민주정치가 한걸음 진보한 결과이다.    민생살리기에서 왜 조화로운 사회건설이 으뜸가는 국책이 되였을가? 불평은 비공식적이지만 일종 사교활동이다. 불평에는 이중성이 있다. 한 방면으로 사회에 대한 대다수 군중의 사상, 의지, 건의, 견해 등이 반영되여있고 한 방면으로 순수 개인의 리해득실에서 출발하여 상하좌우에 침방울을 튕기며 터치는 불평으로서 후자는 일종 심리질병이기에 숫제 론할 가치가 없다.     요즘 항간에 즉흥적묘어, 민요, 회색유모아가 널리 와전되고있는데 사회안정과 리성사유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있다. 본질상에서 말하면 그것은 사회불평으로서 대중리익의 일종 표현방식이며 합리한 추구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회군체의 불평에 불문곡직하고 눈을 흘기지 말아야 한다.    불평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다. 개혁개방의 심화와 민주정치건설, 인민대중의 문화소질이 제고됨에 따라 불평은 갈수록 건설적이 되고있다. 비는 지붕에서 새지만 방안에서 안다. 개혁개방의 성과에 환호하지만 사회상에 문제가 많아지면서 자연적으로 불평이 무성하게 되였다.    인민이 준 권리로 사리를 도모하는 관리들의 비리, 부정부패, 집법의 불공정, 강도, 도둑의 성행, 가짜저질상품, 부녀아동을 매매하는 귀축같은 만행, 도박과 매음, 마약판매, 악세력의 횡행과 등에 대한 불평은 배고픈 아이가 젖달라고 울어대는것처럼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평은 절대 두절시킬수 없다. 강물은 막을수 있어도 백성의 입은 막기 어렵다는 교훈적이 전고가 있지 아니한가? 불평을 야기시키는 사회상의 일체 비정함을 먼저 다스리면 백성의 불평불만은 먼산에 적설이 봄볕에 녹듯이 슬며시 사그라질것이다. 불평 모두가 한몽둥에 때려치울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정서의 발로가 아니므로 덮어놓고 반감을 가질 필요까지 없다. 리성분석을 해야 한다. 대중적불평의 산생에는 필연적인소와 우연적인소가 있다.    현재 날로 심화, 개선되는 민주정치가 대중이  불평을 토로하는것을 묵인하고있다. 곤두박질하는 사회공덕, 직업도덕, 인륜도덕, 사회변혁에 뒤따른 실업, 취업난, 환경오염, 황당하리만치 치솟는 주택가격 등에 실망한 민심들에서 불평불만이 무시로 터져나오게 된것은 가을이 오면 락엽이 흩날리는 섭리와 같다.    관료주의,형식주의가 사회불평을 조장한다. 령도의 사업작풍과 착오적결책, 권력의 부문화, 부문의 리익화, 리익의 규격화 등등에 대한 불평 등이 이에 속한다. 불평에는 이런저런 사적인 페단도 있지만 공익도 있다. 사회기제의 시점에서 본다면 불평은 충돌을 해결하는《안전피스톤》의 역할을 한다. 령도의 각도에서 군중의 불평정서가 보귀한 일종《경보기》라고 생각해야 명지할것이다.    불평은 밑바닥인생을 사는《약세력군체》들속에서 많이 나오기에 자연적으로 일정한 규모화효응을 가지고있다. 그들은 국민들중에서 쉽게 모욕당하고 손해보는 피해의식을 가진 군체이다. 사회불평은 이런 자아피해의식에서 기원된 그들의 격동된 정서의 분출이며 막무내한 곤혹과 신음의 농축이다.    자기 일신상에 관한 불평이 아니라 공익적인 시각에서 그 모든 비리를 두고 자기 견해를 말하는 페부지언은 자기 울타리안에서의 게두덜거림보다 영향력이 크다. 그것이 자아위안이든 상징적이든 남에게 알릴수 없는 악의가 아닐진대 지각이 있는 사회성원들의 우국우민정신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가?    물론 불평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긴 한숨에 눈물훔치노니 백성의 간난질고를 슬퍼하노라》,《하늘이 무상함이니 백성들이 무슨 죄련고?》라고 내쏟은 굴원의 불평은 천고절창이 되였고 류아자선생에게《불평에 너무 애를 끊이지 말고 눈들어 멀리 풍물을 보시라.》라고 화답한 모택동의 칠언절구는 력사기록이다.    예로부터 문인은 언어의 거장이고 행동의 난쟁이라고 하지만《부자집에 술과 고기가 썩어나고 길가엔 얼어죽은 시체가 딩구네》라고 개탄한 두보의 시는 사회암흑에 대한 문인식의 불평이였다. 이렇듯 우아하고 교육가치가 있는 불평은 대시인이나 대문호들만이 할수 있는바 로신의 투창,비수도 기실 불평불만속에서 벼려진것이다.    만사대길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평에 아니꼬운 눈길을 던지면서 무료하고 소용없는 말썽꾼질이라고 무시할수도 있다. 제 배부르니 종더러 저녁밥을 짓지말라는 속담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일가? 아무튼 만포식자의 입에서 주리고 종된자의 노래가 절대 흘러나올수 없음은 분명하다.    불평소리 없는 진공상태속의 사회가 있을수 없다. 정녕 그렇게 되여진다면 로신선생의 대성질호처럼《침묵속에 폭발하지 않으면 침묵속에서 멸망하리라》는 경지에 이를것이다. 사람들이 불평을 참지 못하는것은 사회와 개인 사이에 불조화적인 병태가 존재하고있기때문이다. 불평은 그 자체가 사회병근을 개변하려는 원동력이다.    불평을 부릴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사상이 있는 사람으로서 불문곡직하고 대방이 듣지도 않는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인쇄된 바다지도에 불만족한 콜롬부스가 없었 다면 대양저쪽의 대륙이 발견될수 없었을것이며 신성한《성경》의 창세기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불만이 없었다면 우주의 기관(奇观)과 비밀이 밝혀지지 못했을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에 불만이 없었다면 청출어람이 되지 못했을것이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기에 불평분자의 창신정신이 격발된것이다. 과학은 불만족속에서 금구를 깨뜨렸고 사상은 불만속에서 혜안을 뜨게 된다. 새 세계를 개척하려는 불평과 불만이 있었기에 선구자들이 있게 된것이고 불만과 불평을 품은 무산자들을 동원하여 쳘혈의 대오를 묶어세울수 있은것이 아니랴!      불평은 인간의 정감을 동반한다. 불평이 불만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불만이 곧 용납할수 없는 이단사상이고 대역부도한 배반이라고 누가 단정할수 있는가? 만약 한 사람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든지 못본체하며 자기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불평이 없을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생활의 격정도 포기한것이 된다.    한알의 씨앗이 만약 어둡고 침침한 땅속을 꺼린다면 어찌 광명을 바라고 땅우로 용솟을수 있겠는가? 산간의 벽계수가 협착한 골짜기를 나무린다면 어찌 창해의 넓은 품에 안길수 있겟는가? 지성인들의 적지 않은 불평은 합리성을 가진다. 지구촌의 온실효응으로부터 자원의 고갈, 인구의 팽창으로부터 생태환경의 파괴와 오염 등등에 이르기까지 불만이 없을수 없다.    물론 불평의 대가가 얼마나 침중했던가를 우리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골방에 잠자고있던 번민과 울적함이 일단 불평으로 터져나오면 막아낼길이 없다. 시내물이 모여 대하가 되듯 사회,민심의 동향으로 굽이치게 된다. 조선민족의 장거였던《3.1운동》때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시골의 골목길에서 한 촌부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되였다. 일본경찰: 누가 시켜서 만세를 불렀는가? 농부: 아무도 시킨사람이 없소. 일볼경찰: 시킨사람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만세를 불렀어? 농부: 닭이 새벽에 홰치며 우는것도 그럼 누가 시켜서 운답니까? …    일본경찰은 말문이 막혔다. 밭이나 갈고 김매는 일개 농부도 닭에게도 웨침이 있다면서 떳떳이 자기 웨침을 정당화하였다. 얼핏 들으면 황당한 얘기같지만 사회상에서 리성사고를 한다는 문화인들이 심사숙고할 일이 아니겠는가?    바라건대는 당신에게 사상이 있다면 불평을 토로하라. 빙산속에 서느러움이 있고 그속에 한송이 설련화가 기다릴수도 있다. 사막은 황막하다, 우리가 한마리 견실한 사막의 배ㅡ락타가 되여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을 태워줄수는 없을가?                                     2007 년 3 월 15 일                       
674    (잡문) 말! 말!! 말!!! 댓글:  조회:4052  추천:0  2015-11-04
                                    말! 말!! 말!!!        불의 발명이 인류진화의 첫봉화라면 언어ㅡ 말은 인류문명의 첫들창을 열어제낀 리기(利器)라고 할수 있으리라.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태여나 언어로 호흡하며 문화생활을 영위해간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창제되였지만 되돌아와 인간은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고도 할수 있다.    언어는 문화창조의 원동력이다. 개체생명으로 말하면 언어는 사고를 낳고 언어를 통하여 사고함으로써 문화인으로 완성되여간다. 언어는 인간의식의 지적면, 인지적 기능뿐만아니라 정서적느낌과 리성적인 생각을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있으며 그 문 맥적의미와 정서적의미로 말미암아 특이한 빛을 현실에 뿌리여 그 현실을 밝혀준다.     인간은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감각적인상의 끝없는 파도의 넘실거림을 언어속에 간직되여있는 형식과 범주 등을 통해서 하나하나 구별해볼수 있다.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는대로 현실을 인식한다. 현실은 또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그 일정한 구조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말이 많은가 적 은가, 참말을 더 잘하는가 거짓말을 더 잘하는가가 구별되고있다.     20세기 90년대초 체코슬로바키아의 언어학가 칼. 마네크와 미국의 행위학가가 련합하여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년령상에서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것은 6ㅡ12살 어린이들로서 매일 1만 4천자이고 버금으로 35세좌우의 가정부녀들로서 매일 1만 2천6백자이며 말이 제일 적은것은 17ㅡ20세의 남자애들로서 8천7백자라고 한다.    직업상에서 본다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줄을 세운다면 장로, 목사, 고고학가. 병졸, 작가, 변호사, 도서관리원, 경찰, 판매일군, 교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학자들은 실제상 입과 엉덩이로 사업하는 령도층의 관료들을 말을 많이하며 사는 사람들의 광영방에서 빼놓지 말아야 했었다.        각설하고, 사람은 누구나 크게 세가지 말을 한다. 첫째는 공중앞에서 하는 말인데 례컨대 이름이 좀 나면 텔레비연설을 한다거나 신문지상에 언론을 발표하는것으로서 참말도 있고 거짓말도 있다. 둘째로 사적으로 하는 말인데 역시 진가가 섞여있다. 그중에는 성이나서 하는 말도 있는데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은 쏟힌 물처럼 그렇게 없어지고만다. 셋째로 마음속에 말로서 이런 말은 어떤것은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도 배속에 넣고 토해내지 않을수도 있다.    밑바닥인생을 사는 민초들도 두얼굴을 가지고 세상과 대화하는데 계하수가 된 탐관오리들은 더구나 이 세가지 언어를 쓰는데 능란하다. 그들은 크고작은 회의때마 다 주석대에서 마이크를 마주하고 첫번째 류형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례컨대 《우리는 뛸데없는 인민의 공복입니다. 우리는 개인리익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렴정건설을 대대적으로 틀어쥐여 부패분자들이 설자리를 없애야 합니다. 》등등. 그러나 어떤 사람이 두툼한 돈봉투를 슬며시 남겨놓고 공손히 나간다음이면 눈이 가슴츠레해져서 손가락에 침을 튕겨가며 돈을 헤여보는 경우가 일쑤이다. 그리고 중이 념불하듯 뇌까린다.《허, 30만원이라 그 친구가 사리를 아는군…섭섭하게 대해서야 안되지…》라고 하는 말은 마음속에 말로서 한평생 배속에 잠재워둔다.    그러다가 풍운이 여의치 않아 검찰관이나 상급앞에 모셔지면 흔히 이렇게들 말할것이다.《상급과 당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사상개조를 늦추고 자산계급 생활방식에 물젖다보니 금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인생관과 세계관, 혹은  가치관개조에 힘쓰지 않은탓입디다.》이런 말은 말의 임자들이 세상에 공개하기를 바라므로 역시 공중앞에서 하는 말이다.     참말은 정직한 사람도 하고 심술이 바틀어진 사람들도 한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더 교묘하게 한다. 참말을 한다는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말하는 주체에 한하여 하는 평가로소 듣는 객체에게는 꼭 좋은 일은 아니다. 말한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삼가하라고 하지만 현실은 말한 사람은 죄가 되고 듣는 사람도 죄를 씌우기 위해 꼬리를 잡기 일쑤이다. 그만큼 참말은 많은 인간을 훼멸시켰다.    참말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설교하고 정확한 말만 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것을 그대로 말하는것이건만 뒤끝은 종래로 명랑하지 못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말은 자기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속심을 숨기기 위해 한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감추기 위해 말하는 사람은 분명 심지가 바른 사람일수 없다. 말은 말로 해석되는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석되기때문이다. 어떤 생물학가는 우리 인류가 그처럼 큰 대뇌를 가진 동물로 진화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인류가 거짓말능력을 제고하고 반대로 참말과 거짓말을 식별능력을 제고 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이 점을 가장 잘 증명한것은 국제적수준에서 부시를 비롯한 백악관의 야심가들을 첫손에 꼽아야 할것이다. 그들은 이라크를 침략하기 위해 국제적거짓말을 도합 935번이나 하였다는것이 근간에 세계에 공개되였다.    이렇듯 인간들은 사적인 거짓말을 미워하면서도 국제외교상에서는 거짓말을 밥먹듯한다. 이는 일종으 진화인가? 아니면 퇴화인가? 거짓말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데는 참말보다 선수를 친다. 사람마다 내심세계에 층층의 방선을 칠때 우리가 그처럼 추구하는 가장 보귀한것ㅡ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참말이야말로 자유의 첫웨침이자 자유의 표징이 아니랴, 이는 확실히 아이러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것은 언론의 자유이다. 우리들이 저저히 마음의 문을 열고 자유(방송)을 할수 있다면 우리들의 심령은 참으로 진정한 자유, 대자유를 얻게 되는때이다. 중국의 량심이라는 파금선생은 참말을 한다는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참말을 한다는것은 실제상 가장 어렵고 갈수록 더 어려운 생명 운동으로 되여지고있다. 참말이 잘 용납되지 않기에 참말은 그렇듯 희귀하고 절박하게 수요되는것이다.    사회, 력사적책임감으로부터 감히 참말을 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천진해서도 아니였고 맹랑해서도 아니였다. 그들은 세속을 초월하여 비리를 질타하는 담량과 식견과 지혜를 구비한 선도자들이였다. 참말은 력 래로 꽃다발과 웃음으로 영접받은적이 없었지만 그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말이 가지는 영광이 색바래지지는 않았다.    텅빈소리, 틀에박힌 말, 거짓말이 참말을 짓누르고 득세하는 현실이라지만 그래도 인류사에 남는것은 화려한 미사려구, 황당하고 무치한 거짓말이 아니라 소박하고 진솔하며 귀에 거슬리지만 가시낀 장미꽃처럼 향기풍기는 참말이리라. 진실한 말은 침방울을 튕기지 않고 빨래줄처럼 늘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 말했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가 중요하다. 아무튼 어떤 종류의 말이든 일단 내뱉으면 엎지른 물과 같다. 그래서 평백성은 물론이요 일인천하에 만인지상의 위정자는 더구나 입이 무거워야 하는것이다. 발목을 접질리면 발목에 국한되지만 말은 자칫 목숨에 관여되는 경우가 많다. 길고 무서운 진실을 말하려 하는가? 그러면 철창속에 들어앉을 차비를 하고 입을 열라.                                    2008 년 1 월 2일      
673    사막아닌 사막지대 댓글:  조회:4525  추천:0  2015-11-02
                                     사막아닌 사막지대                                             최 균 선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시간이 층층이 새겨진 사막의 적막, 그 열렬한 고독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에의 충동이 샘솟는 고행자가 있다. 물한줄기 찾을수 없는 사멸의 사막끝을 생명에의 의지를 등에지고 락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고있다고 상상해보자. 사람냄새가 점점 희박한 현대에서 삶의 의지 혹은 정신적높이의 한계점을 볼수 있을것이다. 생명의 책에는 희망으로 점철된 서언과 조잡한 본문뿐만아니라 정신경계의 의미까지도 씌여져있다.    고립무원한 고비사막도 두렵거니와 인파속에서 인정의 사막화를 읽는다는것은 그보다 못지 않게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사막화되여 가는 인정세계의 풍경선들에 놀라움을 금치못하게 된다. 도덕이 생명의 존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정도 로 타락했을 때 이런 사회는 극히 위험한 지경에 놓일것은 자명하다.    매체들에서는 인정세계에서 벌어지는 참사들을 드문히 보도하고 있어 국인들을 개탄하게 한다. 중경만보(重慶晩報) 에 실린 뉴스다. 2000년 10월 30일 새벽, 중경 윈양(云陽)현 삼성(三星)의 타강(沱江)가에서 “장운(長運)1호” 가 파선되어 물에 빠진 사람들이 차가운 강물에서 발버둥치며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약 10척의 소형 거룻배 선장들은 물에 빠진 사람들은 본척만척하고 물위에 떠있는 “돈뭉치”를 건지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몇명의 선주들은 웃으며“당신들 배밑에서 잘 쉬세요.”라고 빈정거렸다고 하니 상상할수도 없는 인심의 타락인가 아니면 고갈인가?    강남시보(江南時報)에도 이런 뉴스가 실린적이 있다. 2001년 10월 24일 저녁 무렵, 광저우시 백녕(白雲)구 석정(石井)진 석풍로(石豊路)에서, 3살난 귀주 녀자아이 람평평(藍萍萍)이 보도위에 뚜껑이 없이 열려있던 우물안으로 떨어졌는데 아이의 엄마와 큰이모가 땅에 주저앉아 구경꾼들에게, 노점상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도움을 청했다. 대략 30명이 주변에서 구경했지만 누구도 아이를 구하려 하지 않았거니와 한사람도 아이엄마에게 핸드폰을 빌려주거나 그녀를 도와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10여분 후에, 아이아버지가 황급히 달려와서 물속에서 아이를 구했지만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중국신문망 2002년 7월5일 실린 뉴스도 있다. 2003년 12월 20일 새벽, 주해시 향주(香州) “군석(滚石)”의 사고 (士高)홀에서 강간사건이 발생했다. 8명의 남자가 현장에 있던 200여명 앞에서 한 녀자를 소파위에 눕히고 륜간을 했다. “기차의 침대차에서 광서사람 한명이 3명의 녀자를 련속해 강간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   “하얼빈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장면: 살인마가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였는데, 그 주변에서 수백명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중국청년보)( 2002년 7월 15일부)“한 소녀를 희롱하려던 범죄자가 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소녀를 칼로 8번 찔러대는데도 20여 명의 구경꾼들은 누구하나 나서지 않았다” 2002년 5월 17일) 이렇게 몸서리치게 무서운 사건들은 빙산일각에 불과한것이다.    세계문명고국으로, 자랑을 떨치던 례의지국이 어찌하여 이처럼 인정이 사막화 지경에 이르렀을가? 어떤 사람은“무관심”이 우리 사회가 암말기상태에 처한 특징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눈앞에 닥친 문화위기를 분명히 느낄수 있을것이나 본능적으로 자신을 자기 보호막안으로 몰아넣고 명철보신과 무사안일에 습관화되였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 우의, 사랑이 없어졌다.    도덕의 대가는 측량할수 없는것이기때문에 이처럼 도덕성이 파괴된 인심의 변화는 미래 중국사회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주 큰 어려움을 줄것이다. 모든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자기 보호만 하려고 하는 사회가 바로 가장 위험한 사회이다. 법률은 단지 개체의 범죄행각만 처벌할수 있을뿐이지만 도덕은 사회의 모든 행위들을 규제할 수 있다. 신뢰, 량심이 없어진 사회가 된다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    인간애는 삭막한 현실에 처방하는 가장 강력한 강장제이다.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게 하는것은 서로에게 따스한 가슴을 열어주고 바라는것 없이 꺼내주는 인간애이다. 인간이 견뎌야 할 모든 시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도 바로 인간애이다. 어떤 인간관계에서이든 주도권은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쥐게 되여있다.    착한 사람은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의 창고에서 악한것을 내놓는다. 자신의 참다운 인간에에 린색하지 않다면 그가 가는곳마다 인정의 오아시스가 발견될것이다. 돼지는 하늘을 쳐다볼줄 모른다. 넘어져서야 비로 소 맑은 하늘을 쳐다볼수 있다. 인정이 메말라서 랭혹해진 사람은 도움의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죽었다 깨나도 모른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 의욕이 있어도 행동에 옮기기 어려운것이 사람일진대 하물며 당초에 그럴 의욕도 없음이랴! 가능, 불가능의 수판알만 튕기고서야 어디서 의로운 피가 끓을것이며 용기가 생길것이냐. 돈의 과시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뭇령혼을 사로잡는것은 미덕이다. 사회가 일단 인정미를 잃게 된다면 90퍼센트의 진실한것, 90퍼센트의 선량한것, 90퍼센트의 아름다운것을 잃게 된다. 그밖에 우리게 남을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랭혹이 아니겠는가?    진실이란 황금이다. 그리고 황금은 어느 자리에 갖다 놓아도 황금이다. 인정미 야말로 인성의 황금이 아니며 마음밭에 깊숙히 숨겨진 도덕의 금광이 아니랴, 인간이 되는 방법은 많지만 가장 확실한것은 인간애의 표출이다. 물론 도덕은 정신상태이지  미덕 그 자체는 아니다. 누구나 사랑으로 대할수는 없지만 등은 돌리지 말아야 하며 더구나 랭소를 던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리기주의와 사회성부족이지만 상술한 사건들에서 당사자들은 물론 방관시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협동심과 봉사정신이다. 사람들은 남의 도움은 잘 바라지만 자신은 남에게 적덕하기를 꺼린다. 자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기만 바랄 필요도 남을 도와주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이 달라지는것이 없으나 정의를 신장한다면 당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사람들 의 심목속에 새겨지는는 법이다.    내가 할수 없는 일을 남에게 권장하는것은 얄궂기는 하다. 그리고 어떤일에 부닥쳐 의분은 끓지만 감히 나서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 자기의 정당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며 우리를 뒷걸음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두려 움은 포악한 자들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두려움을 주도록 그자들을 종용한것이다.    사회비리와 횡포무도는 우리 모두의 쓸데없는 일에 삐치지 않는다는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내가 불행에 처했을 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랄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며 헛된 욕망일뿐이다. 내가 뒤로 물러서는데 누가 앞에 나서겠는가? 패덕과 악행이 란무하는 이 현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이 세상에 얼굴에 랭혹과 악의의 도장을 찍고 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위군자의 얼굴에 도배질한 선량을 심심찮게 보고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정의의 신장을 방해하고 정의의 신장이 법적으로 보장되여 있는것도 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자신이 정의의 수호자는 못될지언정 남의 불행을 구경거리로 여기는자는 인성을 발바닥에 밟고다니는 인간이다. 강압, 폭행, 무관심, 이런 온갖 다양한 사회인소들이 존재하는 한 그것들은 단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화해사회란 공담일뿐이다.   오늘날 공민들이 가장 관심하는 사회문제는 “부패”이고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도덕문제는 바로“신임”이다. 인간사회에 불의에 맞서는 정의감이 전혀 부재한다면 가도가도 절망만이 기다리는 고비사막보다 더 공포스러운 인문환경이 될것이다.                                     200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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