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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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    부끄러운 인권타령 댓글:  조회:5527  추천:1  2015-11-01
                              부끄러운 인권타령                                       진 언       거짓기사가 많은 중에도 거짓같지 않은 기사를 읽고 말그대로 악연실색, 어의상실이 생긴다. “부끄러운 기록 ‘아동학대’ ,,,,7년간 학대로 숨진 어린이 263명”이란 제목으로 〖남한사회실상〗이라는 2015년 5월 4일자 뉴스가 있다.    “학대는 무참했다 : 7년간 학대로 숨진 어린이 263명, 별이 된 아이들 263명, 그 이름을 부른다. 이름하여 은율, 지후, 하랑, 나현, 채우, 승리, 건국, 그리고 사 랑…스무살도 아니되어 사라진 ‘우주’를 는 낱낱이 복원했다. 2008~2014년 학대로 숨진 263명이다. 한해 37명, 이 추세면 올해 또 한척의 세월호가 가라앉는 다…한해 평균 37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맞거나 버려지거나 성적학대를 받다 죽어가 고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학대로 숨진 아이들은 263명에 이른다.”     가해자가 확인된 107명을 기준으로 친모가 저지른 사건은 39건(36.4%), 친부는 32건(29.9%), 친부 또는 친모가 공범인 경우는 9건(8.4%)이었다. 교육기관 관계자, 아는 이웃 등에 희생된 수는 9명(8.4%)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한테 희생됐다. 가해자의 연령대는 열중 일곱(78%)이 20~30대다. 직업이 파악된 101건가운데 무직이 27명(26.7%), 일용직이 12명(11.9%)이었다. 미루어 보건대 경제적 곤궁 또한 아이의 죽음과 뗄 수 없는 이유로 보였다. 경제적 곤란함이 확인된 사례만도 35건에 이르렀다. ”     아이들을 학대하는“영웅”들이 이리도 많고서야 어찌 인권사회라 할수 있겠는가? 부모자식간에 인권존중으로부터 사회적인권이 형성된다. 가정이란 곧 사회를 이루는 세포이기때문이다. 상술한 기사들에서 폭로한 끔찍도 한 참사들에 비하면 저 유명한“장화홍련전”에 계모도 새끼무당의 푸닥거리에 불과하다. 사람이란 감정이 격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악인이 되고 악행이 저질러질수도 있다지만 부모자식사이에서도 비 인간적이 된다는것은 그저 불가사의한 문제가 아니다.     이붓에미라 전처딸에게는 모성이 생겨나지 않을세 녀성(女性)은 남아있을것이 아니냐? 데리고 들어온 제새끼가 귀한만큼 남의 새끼도 귀하다는것은 인권리론도 아닌 인성문제다. 개개인이 개개인의 생존권, 안전권을 존중해주는것이 인권이다. 요로코롬 잔인무도하고 참혹한 인권사각지대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타국의 인권에 로심초사하는양 한다는것은 너무 비린청으로 들린다.     호랑이도 제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거니와 다른 짐승들도 동류를 잡아먹지 않는다. 부모라면 너무 고와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기 자식들이건만 저리도 잔인무도하게 어린생명을 학대하는 현상은 우리들로 말하면 꿈에 생각해도 몸서리쳐질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소수인의 개인적일탈이라 할수도 있겠으나 한국의 어떤 지성인들이 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사각지대라고 자탄하고있다. 사실이 다 진실일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실은 진실이다.     인권이란 구체적인것이지 추상적인것이 아니다. 인권은 여론으로 정해지는 문제가 아니며 또 눈감고 야옹하는 식으로 적대국에만 존재하는것인듯 요란떠는것은 스스로도 웃음이 캭 나올만큼 자기기만이다. 내코가 석자인데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 할 건덕지가 있을손가? 한국이 전세계적으로 자살률 제1위라는데 국민인권을 수호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개체의 생명포기권 범람쯤은 되는걸가? 자살률이 10년이 넘도록 부동의 1위가되여도 어느 언론도 심각하게 보도하는 언론이 없다. 돌아봐도 돌아봐도 타국의 인권만 보여서 그렇게 인권타령에 목이 쉬는건가?     자기를 알면 총명하다 하고 남을 알면 지혜롭다고 했으니 자기도 좀 돌아보자. 2014년 국제 비정부인권기구인 앰네스티가 한국의 인권상황을 조사한 이래 최초로 인권이 후퇴되였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문제가 된 내용으로는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제한, 유례없이 렬악한 환경에 로출된 이주로동자 인권문제, 로동조합 활동을 제한, 집회,시위를 무력진압하는 국가에 대한 한국의 최루탄수출, 국가안보법의 람용, 련속부절하게 만연되는 군대내 가혹행위와 사망사고, 자살 등 군대내 인권문제도 지적 등 전반적 한국인권상황에 대하여 경고하였다고 한다.    “세계각국의 인권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 위원들이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우려의 입장을 표했다. 제네바에서 현지시간으로 22~23일 양일간 열린‘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 위원회 115차 세션에서 이같은 입장이 나왔다. 자유권위원들은 한국의 구체적인 인권침해 사례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변론권이 침해된 장경욱, 김인숙 변호사사건, 세월호 추모집회 때의 과도한 공권력사용, 북한 트위터를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한 박정근사건…”     가장 흉악한 범죄는 살인죄이고 가장 잔인한 범행은 살인행위이다. 이 살인행위를 대량으로 저지르는것이 전쟁이다. 집단생명권을 보장하는것이야말로 인권의 핵심범주가 아닌가? 일본주민들이 사는 도시에 원자폭탄을 두개나 투하하고 윁남주민들이 살고있는 밀림에 고엽제를 살포하여 생활터전을 깡그리 파괴하고 수많은 주민들을 죽게 하였으며 이루헤아릴수 없는 기형아를 낳게 하여 후대들에게까지 극악한 피해를 끼친 전쟁과 학살의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인권타령을 제일 요란하게 나발불면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고있다.     미국이 입에 바르고 있는 인권은 그럴듯한 명분이고 실리가 우선이다. 힘의 론리가 무소불위이고 만능이다. 례하여1996년 유엔총회에서 지하핵실험까지를 포함한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이 통과됐으나 최대 핵강국인 미국은 이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핵확산은 반대하지만 자기들만은 핵실험을 계속하겠다는것이다. 약소국들은 울며겨자먹기로 묵인할수밖에 없다.     미국의 양코씨들의 범세계적인 인권침해는 또 어떠하신가? 지상천국 미국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5천만명으로서 성인7명당 1명, 아이들 4명당 1명 구호용 식권신세란다. 미국교도소 수용자는 무려 250만명. 전세계 수용자의 1/4에 이른다. 인구 10 만명당 감옥에 743 명 집행유예, 가석방 7백5십만, 미국성인 99.1명당 1명 꼴로 수감돼 있는‘감옥국가’미국으로서 흑인 감옥인구의 39.4 % (인구13%), 미국내 재소자가 가장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주로, 15만명이상, 미국교도소에선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고 한다.(출처:아고라에서) 최근 10년사이에 총기사건으로 32만여명이 죽었다니 인권보장 잘되는건가?     중동을 생지옥으로 만든 자들이 바로 "인권옹호" 를 부르짖는 미국이 아닌가? 재미동포 칼럼니스트 리인숙선생의“미국과 한국의 인권타령 사기죄를 고발한다”에서 한국과 미국은  최근에  유엔 안팎에서 인권을 말할 자격도 없는 처지에서 조선의 인권을 운운한다고  비꼬면서 질타하고있다. “미국인들이 학살하고 죽이는 잔인함은 그 ISIS에 비교조차 할수 없다. IS가 '죄인' 이라해서 1명 2명 참수할 때, 미국은 한번 폭격에 수천,수만명 몸통을 갈기갈기 찢어죽인다. 미국의 잔인함은 중동에서만도 수십만 수백만을 죽였고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도 짓밟히는 사람들은 인권을 운운하지도 못한다. 인권을 달라고 항의해봤대야 소용없음을 비참한 현실이 잘 보여주고 있기때문이다. 인권은 입으로 웨쳐서 지켜지는가? 사이비인권주의자들의 반쪽짜리 인권론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인권을 유린하는 자들이 인권타령을 입에 걸고다니니 부끄러운 인권이 아닌가!                                 2015년 5월 5일 ㅡ2015년 10월 25일
671    (잡문) 리기를 다림질해 본다 댓글:  조회:4532  추천:0  2015-10-28
                                  리기를 다림질해 본다     리기란 자기 한몸의 리익만 꾀하는것이라고 해석하고있다. 그런가? 기실 리기란 중성언어로서 “선”을 의미하는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필연적으로“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리기는 모종의 경우 악을 야기시킬수도 있고 선함을 이끌어낼수도 있는바 만악의 원천이고 또한 만가지 선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리기는 력사성도 가지고있는바 인간이 동물성(獸性) 을 벗어버릴수 없는 한 항구성을 띠게 된다. 인간의 동물성이란 바로 타인의 리익을 해치는 그런 천성적인 심리성분이다.“개명한 리기주의는 물론 가장 숭고한 동기는 아니다.”(라쎌) 그러나 일체 리기를 타도하는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를 타도하는것이 된다.    리기란 곧 욕심과 통한다. 물욕도 색욕도 권세욕도 다 리기의 배속에서 나오거늘 리기를 등지고 산다는것은 골짜기가 없는 산를 찾는다는 말처럼 들리고 흐린 밤하늘 에서 별을 찾는다는 말로 들릴것이다. 흔히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호언장담을 듣게 되는데 사실 공백지표를 떼주며 선심을 쓰는것과 같다.    리기는 인간의 속성이자 본능이기도 하다. 만약 이런 본능이 없다면 인간은 물론 자멸하고말것이다. 그만큼 리기는 삶의 기둥이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 고달픔을 이겨내며 끈덕지게 자기 삶의 터밭을 매는것이다. 리기의 필연서과 합리성에서 인간이 왜 리기적인가 하는 해답이 나온다. 리기는 인간의 수요의 자연발 생적결과인것이다.    일컬어“투사비수(斗私批修)”라는 구호를 웨치며“대채평공”인지“대개평공”인지를 하던 시절, 침방울이 튕기도록“대공무사”를 웨치던 사람들이 밑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면서 음으로 양으로 제노릇을 하는것을 보고 그저 한숨만 내쉰적이 있었다. 그래도 볼부운 소리를 한마디 할세라 자신의 욕심부터 타매할만큼 각오가 높아있던 우리 농부들이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웃기는 력사의 롱담이였다고 자기 위안 을 할수밖에 없다.    세월이 돌고돌아 시대도 변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자기중심주의시대에서 활개치며 살게 되였다. 리기가 “큰길로 걸어가네”가 되고 가치취향, 가치척도가 리기에서 금 그어지게 되였다. 백성들도 그렇고 고관들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다. 리기가 없는 무릉도원으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고 리익을 탐하지 않는 성인군자도 없다.    사상사에서는 리기란 륜리학을 가리키고있다. 경제학각도에서는“자사자리”를 사회진보의 동력이라고 한다. 이는 금욕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반동이든 반역이든 사 실상 절대다수가 사람들의 행동의 동력은 자신의 리익에서 온다는 사실을 부인할수 없다. 인간에게 수요가 있을진대 리기 자체가 두려운것이 아니며 죄악도 아니다. 리기 자체에는 도덕성이 포함되여있지 않음에랴!    리기는 이중성을 띠고있다. 인가의 행위와 동기에서 타인에게도 리익되게 하고 자기에게도 리익되게 하는 합리적리기주의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면서까지 자기 리익만 꾀하는 악성적리기가 있다. 물론 합리적리기가 대공무사함에 반하여 숭고하다 고는 할수 없지만 허용될수 있다. 자기도 살고 남도 살아야 한다는 신조만 지킨다면 개체의 리기를 나무랄 리유가 없으며 인간이 타인의 리기을 해치는 동물성을 벗어버 릴수 없는 한 함구할수밖에 없다.    밭머리에 붉은기를 꽂아놓고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며 농사를 지을 때에는 시들하던 매개인의 잠재력이 도거리농사가 시작되자마자 폭발되여 2~3년만에 쌀독에 인심이 넘쳐나고 시장경제 활력을 불어넣어주며 가난모자를 벗어던지게 된 사실 은 확실히 력사적수수께끼가 아닐수 없다. 자기 밭에서 땀흘린만큼 거두고 거둔만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수 있다는데서 용솟음친 그 일욕심이 리기심의 효용이 아니겠는가?    하면서도 환득환실의 섭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난제를 내주었다. 이제 모든것이 상품화된 이 땅에 유가문화의 핵심인 “인, 의, 례, 성, 신”같은 처세준칙의 시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회문화는 자의가 아니게 괴이한 문화권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악성리기주의리론으로 머리를 무장하면서부터 이화되였던것이다.    간상배, 투기모리배가 판을 치고 가짜상품이 소비자들을 롱락하다가 드디어 가짜 약까지 내달아와서 사람의 목숨을 롱락한다. 지금은 근로치부란 하나의 아름다운 희 망사항으로 되였다. 물질생활이 꽃펴나지만 인정세계는 사막화가 되여지고 사회도덕과 량심은 미끄럼대에서 재주부리고 미풍량속은 곤두박질한다.    리기는 이미 사회준칙으로 되였고 더구나 악성리기주의가 일종 사회문화현상으로 부상되였다. 그러데 우스운것은 악한으로 보이기를 원하리만큼 악종인 악한 없듯 이 자신이 극단적리기주의자라고 자인하는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그리고 희극적인것은 렴결봉공을 표방하는 사람들속에서 군자연하는 인물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여북하면 방탄복을 입고 반부패를 권장하고 연단에서“렴결봉 공”을 호소하고 문을 나서자 곧 차디찬 쇠고랑을 차는 중국식유모아가 부단히 엮어 지고있겠는가?    리기가 탐욕으로 번지여 사회공해로, 불치의 사회병으로 되였다. 가진것이 남보다 더 많건만 늘 부족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병태심리가 아닐수 없다. 그 지경이 되면 자기 리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리익을 빼앗는것을 꺼리지 않게 된다. 혀를 날름거리 며 개구리를 노리는 독사의 그것과 악성리기는 벌써 다른 문제이다.    악성리기주의자들에게서는 보편적인 박애는커녕 인성고유의 동정심마저 바랄수 없다. 탐과오리들이 입에 바르고 다니는 량심이라든다 도덕이라든가 렴결봉공 같은 미사려구는 모두 사람들을 얼려넘기려는 수작이며 더욱 교묘하게 더욱 편리하게 타인과 국가의 재부를 편취하기 위한 연막탄일뿐이다. 바로 그런자들이 이 사회의 화근이 되고있다.    그런 패류들이 공공연하게 남의 리익을 편취하지 못하는것은 타인의 눈이 두렵고“닭도 훔치지 못하고 종아리만 부러지는”격이 될가봐 두려워 도덕과 법률에 얽매여 있는것인데 주인의 채찍이 무서워 굴종하는 당나귀와 다를바 없다.    인간은 어찌하여 이렇듯 극단적리기주의자로 전락되였는가? 리기는 인간의 개화와 물질문명으 산아이다. 현시대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문명의 기발아래 인간악이 살 판치는 근원도 바로 인간의 악성리기심의 작동이 아니겠는가? 사회상의 간상배, 투기 모리배들이나 탐관오리 따위들 같은 극단적리기주의자들의 인생철학에는 인간관계가 곧 승냥이와 승냥이의 관계와 같아서 오지 약육강식이라는 하나의 생존규칙이 있을뿐 이다.    혹자는 탐관들도 인간인데 그럴수 있으며 리기란 원래 환경에 의해 생성되기에 력사발전단계에 있을수 있는 현상이라고 말한다.사회비리와 부정부패를 낳는 악성리 기주의주의자들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것은 가재가 게편이라는 속담을 다시 음미해보게 한다.    탐관들의 끝없는 리욕은 그야말로 사람들을 경악케 한다. 2년전에 락마하여 응당한 징벌을 받은 중국은행 원부동사장 류금보란자는 공금을 8천만원이나 챙기고도 자기가 기르는 애완견을 치료한 부스럭돈마저 아까와 얼렁뚱땅 단위에서 결재받은 사실이 탄로나 동네집 수캐가 다리를 들고 껄껄 웃게 만든 일이 있다.이런 패류들의 리기심도 환경지배를 받았을가?    리욕이 횡행하는 오늘날 현실에서 무사심을 바라는것은 너무 사치한 요구이지만 이릭을 챙기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량심적인“리기주의자”가 되여야 사람다울것이다. 너는 나의 정당한 리익을 해치지 않고나도 너의 리익을 해치지 않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려면 무엇보다 모든 유리한 리기의 위치에 선“사회중견”들이 진정으로 렴결봉공하는 관료풍기가 형성되여야 할것이다.                            2006년 3월 20일
670    (잡문) 량심의 자술 댓글:  조회:4328  추천:0  2015-10-28
                                           량심의 자술      사람들이 나를 량심이라고 부르지요. 내 이름은 유래가 깊은데 맹자씨가 맨 처음 륜리적의미로 지어준것이랍니다. 나의 이미지는 글자 그대로 좋은 마음이지요. 후에 서방의 루쏘선생이 더욱 멋지게 풀이했지요.《매개인은 일종 정의감과 도덕원칙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여난다. 우리는 자타의 행위가 좋거나 나쁠때 이 내심의 원칙에 의거하게 되는바 그것이 곧 량심이다.》라고.   혹자는 나를 일러 탐욕과 등진 마음, 타인에게 베푸는 선심, 동정, 다른 사람을 따스하게 대하는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맹자씨는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량심을 개를 베여주었다고 한것이 아니라 도끼로 찍어버렸다고 표현하였는데 인간의 심령의 터밭에 무성해야 할 량심을 삼림에 비유하였던것이지요.    선조들의 계보는 알수 없으나 영국의 기독교학자 바톤의 견해에 의하면 인류가 진화되여 몸에 더부룩하던 털이 없어지고 엉뎅이에 꼬리가 없어지고 머리에 뽀족한 귀가 없어졌을 때 나ㅡ량심이란것이 산생되였다고 합디다. 나의 본질적특징은 판단이 아니라 감각이지요. 나는 인간의 리지에 반해 독립적입니다. 인간과 짐승의 분계선이 바로 나에게서 그어진다는것을 승인하고싶지 않다는 사람은 나서시오.    나ㅡ량심의 사멸은 곧 인성의 사멸입니다. 가령 누군가 나를 개에게 떼주었다면 개도 한참 그를 쳐다볼것입니다. 자기 근본인 인성마저 개에게 주었으니 함께 놀자고 할게 아닐가요? 육신의 소리는 진심이고 령혼의 소리는 량심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무릇 죄악을 꾀하거나 악행을 한 인간의 심리전제는 량심을 개에게 떼여주는것으로서 법률의 약속력에 얽매인다는것도 궁극적으로는 량심문제입니다.    나는 비록 인간의 심령에서 태여났지만 인성의 주요한 조성부분이 되였고 또한 인간심령의 공능으로도 되였죠. 인간의 육체는 릉지처참할수 있지만 나만은 소멸되지 않습니다.《량(良)》자에는 이중함의가 있어 시비와 선악에 소급되지만 출신, 지위나 교육등 후천적인소와 무관합니다. 나는 시대성도 계급성도 없습니다. 그 어떤 심오한 학문이든 배워낼수 있지만 나ㅡ량심은 배워서 되는것이 아니며 스승이 따로 없답니다. 인간문제 그 자체가 바로 나ㅡ량심문제이니까요.    혹자는 나를《량지》라고도 하는데《량심》에서는《량》이강조되고《량지》에서는《지가》 강조된것입니다. 그러나 량심은 지식과 무관합니다. 동서고금에 량심이 썩어버린 문인이 얼마였던가요? 금년 8월16일 중앙(焦点訪談)에 북경항공항천대학의 소위 교수라는 방굉빙(龐宏冰)등 패류들이 광서에서 학생모집할 때 학부형들에게서 10만원도 넘게 사기협잡했다는 추문이 방송되였습니다. 교육량심도 개에제 준거죠.    나ㅡ량심은 권귀와도 무관합니다. 언녕 지옥에 떨어진 성극걸이나 왕보삼따위들, 지금도 줄줄이 코꿰여나오는 고관대작들이 량심을 저버린 더러운 행각끝에 수갑을 찼거나 지옥에 굴러떨졌으니 말입니다. 지식이 없는 민초들이 오히려 량심이 맑을수 있고 권력자, 명인, 학자가 더구나 량심이 령점일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사람이 사람으로 되는 근본이고 핵이 된다고 하는것입니다.     이 시대는 리념과 사상관념과 가치기준을 반성하고 새롭게 평가해야 할 시대라고 하지요. 과거엔 질문마저 허용되지 않던《절대진리》도 비등하는 현시대의 충격력을 견뎌낼수 없게 되였습니다. 그 어떤 리념보다 량심문제가 더 실제 난제로 되였다는 말이고 량심문제는 현시대 가장 심각한 전인류적인 문제로 제기되고있다는 말이지요.    본인이 원하든 않든 나는 력래로 인간심령심처의 검찰관과 법관이 되였습니다. 그의 행위와 의념이 옳음과 착함에 부합될 때 나는 흔쾌히 윤허하고 마음을 밝게 해주지 요.        이를 두고 자기 량심에 물어 한점 부끄러움 없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것이 옳음과 착함에 어긋날 때 나의 견책을 받게 됩니다. 범죄자는 마음에 안정이 있을수 없다는 교리가 있더군요. 나ㅡ이 량심의 끈덕진 견책이말로 누구인가를 한평생 련옥에서 모대기게 한다는것을 모두 알고있으면서 왜 그냥 탐욕에 량심을 팔아먹을가요?    인간은 저마끔 얼굴이 다른것처럼 인심도 각이한법, 그러나 피부색이 희든 검든 누르든 모든 인종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의 공능은 일치합니다. 나는 인류의 내심에 에누리없는《시비률(是非律)로 되였죠. 나야말로 인간의 도덕관념의 최종적인 의거로 되기에 손색없습니다. 요즘 널리 제창되고있는《8영8치(八榮八恥)중 어느 하나 나와 련관되지 않은것이 있는가요?       심리와 지력장애자를 제외하고 극악무도한 범죄분자도 시비관념은 있고 범죄를 저지르면 꼭 죄값을 치러야 한다것쯤은 알고있습니다. 범죄후 벙어리 랭가슴앓듯이 속을 앓는 원인도 바로 나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속에 이른바《량심의 발견》과정이 있습니다. 일체 악인, 그이상 극악무도할수 없는 히틀러나 일제놈들, 21세기 세계헌 병사령, 전쟁광인 부시가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죄악을 기탄없이 저지르고도 적반 하장으로 나오면서 거짓말로 자기의 만행을 정당화하려는것도 바로 나ㅡ량심때문 입니다.    나ㅡ량심은 본의 아니게 악인들의 지옥이 되였습니다. 인간의 원초적비애이지요. 자고로 나의 질책에 못이겨 뉘우친자들도 있긴합니다. 또스또옙쓰끼의 유명한 장편 소설《죄와벌》에서 라스띠냐크이나 쉐익스피어의 비극에 나오는 맥베스같은 자들을 그 례로 들수 있겠죠. 그러나 현시대 자신의 범죄가 두려워 자살하는 자들이 흔한데 결코 나의 질책에 참회하고 육체의 훼멸로 속죄하는것이 아닙니다.    나ㅡ량심은 원래 공정하지만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주관적자아의 긍정이 되기도 합니다. 례하여 정직하고 정의감이 있는 한 사람이 그저 묵시할수 없는 자기 상급을 탐관오리라고 고발하였다면 한바가지에 퍼담을 패류들은 량심이 없다고 콩팔칠팔하죠. 이렇듯 나ㅡ량심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흔히 대립적이고 주관적이 됩니다. 하기에 현시대에 단순히 도덕정감으로 나를 품평하기는 너무나도 무력합니다.    만약 량심을 자대로 중국의 농민, 농촌, 농업문제를 인식하려 한다면 실제문제를 해결할수 없고 량심으로 실패한 중국의료개혁, 중국교육을 인식하려 하고 량심으로 중국의 실업문제를 인식하려 한다면 아무도움도 못됩니다. 나 량심의 약점은 결코  영원한 진리의 거울이 못된다는점입니다. 현시대에 와서 특히 아무 작용력도 없다는 해석이 되겠죠. 사치하고 떠들썩하고 눈부시고 세멘트기둥으로 꽉 들어찬 대도회에서 나ㅡ량심은 갈수록 더 시장을 잃고있다는것이 인간을 위해 행운일가요? 불행일가요?    나ㅡ량심에는 중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태산처럼 짓눌러 숨도 못쉬게 할수 있습니다. 다갚을수 없는 마음의 빚이라는 말도 이에서 비롯된것이고 력사의 공과 죄를 누가 가를것인가? 하는 거창한 질의도 이에서 나오게 되는것입니다.    나ㅡ량심에는 체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제거된 사람의 흑사심은 수백채의 집과 수만근의 금은, 온갖 재물을 삼킬수도 있습니다. 청조의 건륭시기 대탐관 화신을 비롯해 력대의 탐관오리들이 다 그 례가 되겠지요. 그 끝이 없다는 인간의 욕망도 결국 나ㅡ량심의 철저한 포기에서 펼쳐지는것입니다.    나ㅡ량심에는 색채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마음을 창백하게 할수도 있고 굴속같이 어둡게 할수도 있지요. 심통이 먹통같은 놈이라고 질타하는것은 내가 들어있어야 할 마음의 골방에 검은 탐욕이 들어있다는것을 가리키는것이지요.    나ㅡ량심은 사람나름에 따라 눅거리가 되기도 하고 무가지보가 되기도 합니다요. 그래서 한 사람의 생명가치를 더없이 숭고한 경지까지 높여줄수도 있고 한 사람의 령혼을 령점이하로 일락천장시킬수도 있습니다.    나ㅡ량심은 납함할줄 모르나 자명종과 같아서 죄악적념두나 죄악을 범한뒤의 마음이 진저리치도록 경종을 울려준답니다. 나, 량심의 소리는 애매할 때도 없고요 빗나갈 때도 없습니다.    나ㅡ량심에 견주어 부끄러움이 무거울수록 싸탄처럼 죄받은 령혼에 속하여 얼마나 많은 축복을 잃을지 모릅니다. 나를 버리면 바다길에서 배가 구멍났을 때처럼 안절부절 못할것입니다. 한사람이 늘 자신감있게 산다는것은 바로 나ㅡ량심에 부끄 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나ㅡ량심은 해시계와 같다고 할수 있지요. 해빛이 찬란한 날에는 사람들에게 몇시라는것을 정확히 알려줄수 있지만 해가 구름뒤에 숨거나 비오는 날이면 정확할수 없듯이 나ㅡ량심이 흐려지면 인생길 끝까지 방향을 모를것입니다. 그래서 선인들이 량심의 각성은 위대한 령혼의 각성이라고 가르친것이 아니겠습니까?     나ㅡ량심이 병들면 세계적인 현대명의들도 고칠수 없습니다. 줄곧 교육의 법보로 여겼던 사상교육과 도덕교화에 로심초사하기보다 나ㅡ량심을 개발하기만 못하다는 주장이 나오게된 원인도 여기에 있지요. 량심이 있어야 시비를 바르게 나누고 선과악,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 등을 잘 선별할수 있다는것을 아무도 부인못할것입니다.    나ㅡ량심앞에서는 변명이 필요없습니다. 나는 워낙 혀에 무형의 굴레를 씌우기를 좋아합니다. 나ㅡ량심은 흔히 침묵의 형식으로 말합니다. 나의 이웃에 도덕이 있는데 도덕을 상실한 개체생명은 아무 희망도 없으며 덕성이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으며 도덕의 상실속에서도 자각하지 못한 민족은 더구나 희망이 없는법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것은 아마 량심일것입니다. 한것은 아무도 자기에게 량심이 적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없기때문입니다. 세속의 설법대로 말한다면 량심이 완정한 선지선각자는 소수이고 량심을 개에게 베여주는 자들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있지요. 현시대는 회귀의 시대이죠? 인간본연의 회귀, 자유민주의 회귀, 문학본연의 회귀 등등, 그러나 나ㅡ량심의 회귀를 부르짖어야 할 이 시대라고 말하 고싶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우선 인간입니다. 인간이 되여지는 기본표지인 량심의 회귀가 없이는 허무하지요. 각업종들에서 저지르고 있는 허다한 비리들은 맑은 량심을 가진 사람들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미칠수 없습니다.    개혁개방후 온갖 사회페단들이 기탄없이 횡행하는것은 제도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국민본신의 량심상실문제인것입니다. 인간의 령혼은 갈수록 사막화되고 알칼리화되고 마귀화되고  인간의 행위는 더욱 야만화되고 잔인화되고 있는데 그런 자들에 대하여 자유니 민주니 인권이니 법치니 하는것을 요구한다면 절망을 안겨줄뿐이지요. 그렇게 철저히 사막화된 심령의 밭에서 과연 바람직한 아름다운것이 움터날수 있을가요???    나의 거룩한 주인들이여, 바라건대 당신들 매개인의 심령의 밭에 나ㅡ량심의 나무가 무성해지도록 회귀의 보습으로 사악과 허위와 사기와 협잡과 부정과 부패를 갈아엎으라, 이 세계는 너무 살벌해지고 너무 황페해지고 삭막해졌습니다. 구제불능 으로 타락해가는 인류에게 이제 더는《노아의 방주》가 없을것입니다!!                                                               2006. 8월 30 일    
669    (잡문) 큰 대자에 업혀보다 댓글:  조회:4467  추천:0  2015-10-28
                                 큰 대자에 업혀보다      큰 대(大)자를 언제 누가 만들었고 어찌하여 사람 인(人)의 우둠지를 가로질러놓 은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알수 없지만 아무튼 인류는 자고로 큰 대자를 좋아하였음이 틀림없다. 중국사람들이 자초에 한자를 만들때 상당히 자신감에 넘쳐있었다고 볼수 있다.  《3자경(三字经)》첫머리에《천생물,인최령(天生物,人最灵》라 하였는데 천지간의 생물지중에 인간이 가장 령험하니라는 뜻인듯싶다. 조선말에《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天地之间,万物之中,唯人最贵》도 인간은 만물지상에 군림한다는 자긍심이 넘치고있다. 이 시점에서 큰 대(大)는 인간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이 된다고 할수 있다.   사물의 크기와 작기는 대외사물에 대한 인류의 기본인식으로서 비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한자에서 보면 큰 대(大)는 사람이 두팔을 들고 정면에 서있는것같은 모양인데“人”은 이미 사람을 가리키는것이 되였고 대“大”자는 인간의 본능이 크다는것을 현시한다. 천“天”은 인(大)의 우에 있게 되였다. 그래서 하늘이 크고 땅이 크다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크다(天大地大人亦大)라는 말이 만들어진것이다.    그러나 대소는 상대적인것으로서 큰것이 있으면 필경 작은것이 있게 된다. 무엇을 작다고 하는가? 어떻게 작다는것을 아는가? 우리가 보는 우주를 크다고 할수 있는가? 인류는 아직 옹근 우주의 경계선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음에랴, 외재사물에서 계발을 받을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비교가 있어야 대소를 분별할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인식속에 큰것과 작은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수밖에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大) 는 기실 작은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반대로 작다(小)고 말하는것은 또 큰것을 가리키기도 하는것이다.대소는 사람에 다르고 곳에 따라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고 일에 따라 다를수밖에 없다.    선각자가 가로되《일화일세계, 일사일건신 (一花一世界,一沙一乾坤)》이라 하였으니 크고 작음인들 상대적이 아닐수 있겠는가? 큰것이라해서 무한히 클수는 없고 작은것이라해서 무한히 작을수도 없다.      우주간에 절대적으로 큰것이 없고 절대적으로 작은것도 없다. 먼저 참조물을 명확히 잡아야 한다.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상대물이다. 상대물 혹은 관찰점에서 무한이 크거나 무한히 작은것이 감지된다. 해나 달은 매우 크다. 그러나 우주밖에 관찰점을 잡았다면 해도 달도 작디 작다. 크다는것의 규준은 무엇일가? 아무도 확답 할수 없다,    사람들은 크면 클수록 강대하고 작을수록 약하다고 인식한다. 많을수록 좋다는 뜻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은 있지만 가령 대대익선(大大益善)이라 한다면 되게 웃기는 말이 될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작정 큰 대자를 좋아한다. 대소를 내세 우는것은 강약을 내세우는 심리이다. 스스로 작은것에 만족되지 않아서 무작정 큰 대자에 매달리는것이다.    큰거리, 작은 골목에 눈에 띄이는 약방마다 그저 약방이 아니라“××대약방” 이다. 들어가보면 단칸짜리 작은 약방도 있다. 약방은 무조건 대약방이라고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지…그리고 “××대세계”. “××대오락성 ”등등 큰 대자가 붙은 간판들이 많이 보이는데 큰 대자에 담긴 상업심리만은 잘 읽혀진다. 그래서 시야비야 할 생각은 없고 다만 큰 대자에 기탁되고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상태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볼뿐이다.    사실 스스로 큰것이 되고싶다해서 커지는것은 아니라는것은 자타가 잘 알고있다. 례하여 과거 일본은“대일본제국”이라고 자칭하였는데 물론 큰 대자에 경제대국, 군사대국, 문화대국이라는 뜻이 들어있겠지만도 국토가 광대한 나라가 되고싶다는 원초적욕망이 더 짙게 깔려있었다고 할수 있다. 악명높은“대동아공영권”이니 뭐니 하면서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여 명실상부한“대일본제국”의 야망을 이루려 광분했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그냥 섬나라로 남아있지 않던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떵떵거리던 대영제국도 역시 그랬다.    일제에게 먹히기전 조선조의 말대황제 고종도 나라의 강성을 념원하여 국호를《대한제국》이라 개칭하였지만 기실 달라진게 없었다. 제국이란 국제상 군사적,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하고 타국을 정복한 경력이 있는 나라라야 제국이라는 명칭에 부합되는것이다. 제국의 꿈이 일제의 군화에 의해 깨졌으니 력사의 롱담이라 할것이다.    산이 커야 그림자도 크다는 말이 있지만 허영심에서 매달리는 큰 대자는 실속이 없고 무의미하며 신빙성도 없다. 주먹만한 조약돌이 작은가? 개미에게는 그것이 큰 바위로 느껴져서 에돌아간다. 개구리가 제배가 큰것을 자랑을 하려고 황소와 내기를 하다가 배가죽이 터져죽었다는 우화를 만들어낸 인간들이건만 어찌하여 무작정 큰것에만 매달려 자기를 과시하려들가?    현대인들은 더구나 큰 대자에 매달리기 선호하여 언필칭 대자를 앞에 붙인다. 례컨대 과거에는 대명대방, 대비판, 대약진, 대운동 등 말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놀래 웠던가? 현재에는 대시각, 대조류, 대전망, 대사로, 대경쟁, 대검사 등 말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선전물에서는 이미 틀에박힌 관방어로 되여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어디에나 적용된다. 큰것이 때론 작아지고 작은것이 때론 크게 되는게 자연의 섭리인것이다. 일상적인 실례로 사람은 늙으면 키는 작아지고 유감은 커진다. 물욕이 작으면 쾌락이 커진다. 야심이 크면 자유는 상대적으로 작아 진다. 자아감각이 크면 클수록 자기를 아는 현명성은 작아진다. 작은 아이들의 말이 때론 크게 지혜로운 말이 될수 있다.                                     2008 년 1 월 24 일      
668    실화소설에 대한 천견 댓글:  조회:5985  추천:1  2015-10-25
                             실화소설에 대한 천견                                         편 저      실화소설이란 잘 알려진 실제인물을 다소간 허구적 인물로 위장하여 묘사하는 문학, 외적인것에 관심을 갖는 소설이라고 정의하고있다. 실화소설은 지금도 의론이 분분한“기실소설(纪实小说)”과 같다고 볼수 있다. 사실을 쓴다는 특징에서 본다거나 혹은 신문적인 서사립장에서“실체화”하여 사실을 쓰면서 정보가치 혹은 개인의 경력 혹은 경험에 착중해서“주체화”하고 사상감정가치를 체현할수 있기때문이다.   “기실문학”이라는 이 개념에 대해서도 중국에서 아직 딱부러지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문학실천속에서 널리 사용되고있다. 그러나 그 내함과 외연이 비교적 혼란하다는 평판이 있다. 그러나 기실소설이라는 새로운 쟝르가 류행되였고 사회상에서 여러 작품들에 대해 쟁의가 많아기지기 시작했다. 쟁론의 초점은 이런 문체의 작품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리해에 있다.    어학적으로 기실소설이란“기실”과“소설”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각자 특질을 고유하고 있으므로 진실성의 내함에 대하여 부동한 규정성을 생성시키고있다. 기실소설은 창과 방패의 모순을 한몸에 담고있다. 이른바“기실(纪实) ”이란 단어는 여러가지 문예사전에서도 전문 해석한것이 없다. 통상적으로 리해하기는 기실이란 사실을 쓴다는것으로서 실제생활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물과 사건을 여실하게 서술하고 묘사한다는것이다. 대체적으로 맞는 해석이라 할것이다.    기실소설은 사실재료를 장악한 기초상에서 개괄하고 제련하는 와중에 합리하게  예술적허구를 리용하여 엮어낸 소설이라 하는것이 합당할것같다. 이런 시점에서 기실소설 즉 실화소설도 역시 사실주의소설발전에서 자연적으로 파생된 한갈래로서 신문, 보고문학의 기초상에서 발전한것이다. 기실소설은 신문글, 법정기록, 당안문헌 등에 기초하여 조사연구하고 핵실한후 써내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문단에서는 기실소설을 일명 “보고소설”, “신문소설”, “신신문주의소설”,“비허구소설”, “반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창작원칙상 신문의 소설화, 소설의 신문화(新闻化)로서 일정하게 신문보도성을 구비한 소설로 거듭나게 된다.    기실소설은 인물, 이야기가 모두 생활속에 확실히 존재한 인물(가명을 쓴다해도) 로서 인물을 부각하고 이야기를 펼쳐감에서 소설적필법을 쓴다. 이를테면 인물의 심리활동도 묘사하고 인물지간의 대화도 구체적으로 쓰거나 시공을 교차시키는 수법 으로 사건의 진전을 쓰는 등등이다. 기실소설은 전통소설관념을 타파하고 자신의 선명한 미학특질을 체현시켜 광대한 독자들을 흡인하고있다.    례하면 상처문학이 성행하던 시기 “장일궁(张一弓)”의 소설“범인 리동종의 이야 기”, “사철생(史铁生)”의 소설 “할머니의 별들”,“량효성(梁晓声)”의 소설 “부친”, “장자룡(蒋子龙)”의 소설《연조비가(燕赵悲歌)》등이다. 기실소설의 열조가 형성된데는 력사와 문학에 원인이 있다. 즉 내심에로의 전환과 외향에로의 전환의 선택에서 기실소설은 통속성과 광활한 현실에 대한 관조로 소설적인 대화형식을 굳히게 된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본질로 말한다면 기실소설도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허구와 등질수 없다. 그리고 그 자체속에 난제와 결함, 위기를 배태하고 있기도하다.    쟝르적실험상에서 본다면 “변연화”였지만 사실을 서술하는 풍격을 과시하며 문학의 현대심미리상고 추구를 실천한다. 기실소설은 원래 전통적인소를 고유하고 있는바 세계기실문학조류의 영향아래 탄생한 새로운 문체로서 당대사회의 고도로된 정보화와 전지구적교류에 대한 념원과 참여의식이 날로 강화된 상황에서 기실소설은 진실것을 추구하는 현대미학정신을 대표하기도 한다. 소설창작에서 나타난 “피곤하여 기운이 없는 현상”과 독자들이 소설에 대하여 심미적“피로”를 느끼는 상황하에서 문학의 옥토를 꿰뚫고 생성하여 차차 독자적인 소설림을 이루어 독자들의 갈채를 받은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실화소설이 존재하지 못할 리유가 없으며 우리민족소설원림에 용납되지 못할 리유가 없게 된다. 작금에 소설창작에“연골증”경향이 바야흐로 심화되고 독자들도“심미피곤”을 느끼는 상황에서 또 다른 독특한 꽃으로 향기만방할수 있다. 기실소설도 총체적인 문학정신에서 출발하여 볼때 의연히 사실주의의 큰범주에 귀속되므로 실화소설도 일종 새로운 개방성과 포용성을 흡수하여 흡인력이 강한 쟝르가 못된다는 법이 없다. 문제는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이다.    기실소설처럼 실화소설도 전통적인 사실주의소설과도 다르고 현대주의 선봉파문학과도 달라서 능히 한 개체의 자아정감을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생존상태, 번뇌속에서의 강렬한 추구 등을 심미적으로 투시하여 유익한 계시를 줄수 있다. 기실소설이 현실생활을 원생적인 형태로 환원시켜 성근하게 현실과 대면하게 하여 인생을 직시하도록 한다면 실화소설도 마찬가지다.    기실소설속에 인물들이 세인들이 추측, 추리해 낼수 있는 어떤 력사적인 인물이 아니라도 생활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소인물들의 칠정륙욕과 미비한 생존상황에서의 희노애락을 묘사할수도 있다. 실화소설이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자체의 특성을 현시할수 있다고 여겨진다. 소설ㅡ하면 우리는 허구적인 이야기로 알고있는데 잘된 소 은 너무 신통해서 이야기가 실제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앞세우게 된다. “거짓말을 하라, 그러나 사림들이 믿도록 하라.”고 한 고리끼의 말처럼 소설은 순수 허구인데도 사실처럼 읽혀질때 그 소설은 성공작이라 할수 있다.    소설이 만약 실제인물의 이야기라면 사실성이 더 짙게 되므로 인물들이 실제 살아있는 느낌을 주고 독자는 그런 느낌을 경험하게 하는것이 실화소설의 특징이자 장 이라 할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소설을 엮었지만 독자들에게 들키고 마는데 작가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소설을 쓴다는건 허구소설보다 더 매력적일수 있다.    실화소설도 소설쟝르인만큼 에누리없이 소설의 3요소인 인물(인격), 행동(플롯), 배경이 구비되야 하는바 상술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긴밀히 융합되여야 소설적효과를 볼수 있다. 실재한 재미있고 의미로운 실화라해도 작가의 창작사상이나 생활감정, 심미가치에 의해 소설이 될수 있는 실화를 선택해야 바람직하다. 제재로 선택한 실화를 스토리(줄거리), 시점, 토운(어조) 배경(전형환경)에 의해 구성하면 소설이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도 일반소설처럼 결구(플롯)가 잘 째여져야 한다. 실화라해도 이야기에도 파란곡절이 있는만큼 주인공의 행동의 구조(플롯)가 목적의도적으로 행해지도록 해야 할것이다. 실화소설도 그저 이야기의 재구성에 그치지 말고 사건전개의 론리적인 면 즉 리얼리티(현실감, 진실감)와 련계시키고 나아가서 미적문제 즉 예술성을 나타내야 한다.    실화라도 소설화하는 복잡한 예술창작에는 진실이라고 하는 요소 이외에 미라는 요소도 없어서는 안된다. 이야기들을 구슬을 한줄에 꿰듯이 통일 혹은 정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건전개에 론리성과 리얼리티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 실화소설에서도 사건을 비약시키고 돌발적인 행동을 합리하시키기 위해서는 복선을 깔아둘수 있다.    어느 한 인물의 이야기라해도 사회, 혹은 여타 인물과의 갈등이 없을수 없으므로 실화소설의 플롯이 지나치게 획일화되어 이야기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실화소설에도 인물의 내심활동을 그린 심리주의소설, 분위기소설과 같은 요소들을 결합시 키면 리상적이다. 실화소설에서도①발단②분규③위기④절정의 4단계로 구성될수 있으며 ①발단 ②전개 ③정점 ④해결의 4단계로 짤수도 있다.    실화소설에서의 발단부분에서 이야기주인공을 소개하고 배경(전형환경)을 설정하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한다. 특히 인물들의 기본성격과 사건이 제시되여야 한다. 전개부분에서 사실(사건)이 복잡해지고 갈등과 분규를 일으키는 단계를 마련해 한다. 사건과 성격은 변화, 발전되고 분위기도 더 짙어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론리와 리얼리티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전개부분에서는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건이나 표현을 반복할수도 있는데 이런 의미있는 반복’을 패턴이라고 한다.    위기부분은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는 모멘트가 되여야 한다.  다시말하면 소설에서 크라이막스를 유발하는 전환의 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위기는 크라이막스 바로 앞에 설정되여 크라이막스를 가져오는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준것이다. 결말에서 주인공의 운명이 분명해져야 하고 성패가 결정되여 해결이 주어져야 한다. 물론 모든 소설이 다 이렇게 질서정연한 구조를 가질수 없듯이 실화소설도 마찬가지다.    한 인물의 이야기라지만 그 인물과 련관된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진 인생일화이므로 실화의 내용과 복잡성에 근거하여 단순구성, 혹은 복합구성을 꾀할수 있다. 이야기 진행이 단일하고 단순한것으로 한 사건의 진행이라면 단순구성이 적합하다. 례하여 모파쌍의 “목걸이가 단순구성법으로 된 소설이다. 허구가 아니라 한 인물 혹은 여타인물이 살아온 이야기라면 대체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순행법 이 타당할듯싶다. 이러한 플롯을 위해서는 체험적인 표현이 걸맞는다.    헤밀튼이“소설은 증류된 인생이다”라고 말했는데 실화소설은 생면부지이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익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력사와 상황의 테두리안에서 살수밖에 없는 인생은 복잡하고 다양할수밖에 없으므로 장편은 물론이요 단편실화소설의 경우일지라도 단순구성에 의해서 플롯을 진행시킬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두개 이상의 플롯을 진행시킬수 있으며 사건의 발전이 단순하지 않으면 역행법 등을 쓰는 복합구성을 도모해야 할것이다. 주요사건과 이에 련관되는 사건을 교차시키면서 혹은 동시에 이야기를 진행시킬수 있다. 사건이 련속해서 전개되는 구 성법을 쓸수도 있다, 인물이 평범한 개체, 소극적인 인물이라도 단순하거나 복잡하게 인과관계로 진행시킬수도 있지만 산만하게 사건을 전개하는 구성법도 가능하다.    플롯의 진행과정에서 사건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순서에 따라서 평면적으로 진행시킬수 있고 경우에 따라 이야기를 과거, 미래, 현재라든가, 현재, 미래, 과거로 배렬하는 평면으로 진행시킬수도 있다. 두가지 사건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기법을 사 용하여 평행적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수도 있다. 례하여 오 헨리의 “매치의 선물” 에서 이야기 진행은 평행적진행이라고 할수 있다.    실제인물의 인생담이라도 서두, 절정, 결말의 단계가 명확하게 하거나 사건을 전개시키다가 잠시 중단하고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교차적플롯을 쓸수도 있으며 서로 대조적인 인물들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할수 있다. 모파쌍이나 오헨리식으로 경의로운 결말을 맺을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불가예측이고 돌변하기에 가능한것이다.    물론 실화소설인만큼 전통적사실주의소설과는 다르게 서술자 혹은 작자의 시점을 감추고 객관적으로 관조해야 함은 당연하다. 실화소설인만큼 전통적사실주의소설에서처럼 일체를 리성적으로 관조하면서 생활보다 높고 이야기의 주인공보다 높은 시점에 서 서술할것이 아니라 작가는 생활과 인물에 대하여 리성 혹은 리념의 관조를 버려야 하고 서술자가 높이 서서 설교 혹은 훈계하는듯한 자태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전통적사실주의소설에서는 작가가 어디까지나 인류의 도사로 자처하면서 자기의 소설이 인간생활의 교과서로 되기를 기대하므로 작가들은 자기와 독자의 관계를 목사와 신도의 관계인양 설정하는게 관례였다. 하여 사실주의소설에서 이야기를 꾸며갈 때 어디까지나 대량의 비서사적화어를 끼워넣고 상징 혹은 은유의 수법으로 평론하 는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 내지는 정감취향을 현시하려 한다.    그러나 실화소설에서는 리성과 리념적인 관조가 불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이야기의 객관성과 진실성에는 매우 유조하지만 자칫하면 가치판단의 척도를 상실하고 정감의 천평에 분동을 잃기 쉽다. 바로 이 점에서 실화소설창작의 난제가 제기되는것이다. 실화소설의 서술은 오직 은닉식, 결석식의 서술, “령도상태(零度状态)”의 서술밖에 할수 없는데 여기서 예술매력의 창출이 어려워지는것이다.    실화소설에서 서술자는 왕왕 단순한 방관자 혹은 기록원의 각색을 담당할수밖에 없으므로 전통소설의 서술자처럼 마음대로 이야기속 인물에 대하여 종종의 심리분석을 할수 없으며 객관적으로 평온하게 서술해야 하므로 해석, 설명, 의론, 서정 등 비서사적화어(非叙事话语)의 사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발전적인 시각에서 가담가담 의견을 내비칠수도 없다고 금을 그어놓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신사실주의소설에서처럼 흔히 자유롭게 간접적으로 자기의 경향 혹은 정감취향을 인물의 의식속에 은근슬쩍 섞어넣을수 있다.    전통적사실주의소설에서는 어느 정절, 세부가 모두 반드시 일정한 공능을 발휘하여 부동한 구실을 해야 하며 작가가 전지전능한 자태로 이야기정절을 취사선택할수 있고 인관관계의 고리를 이어가야 할 수요에서 정절발전을 조직하게 되여있지만 실화소설은 허구함에서 자유로울수 없으므로 정절의 발전이 많은 경우 수의성과 우연성으로 충만될수도 있고 이야기가 대다수 평면화 혹은 자질구레한 상태로 드러날수 있다.    생활이 원래 극적일수도 있지만 평범한 한 인간의 평범한 이야기일 경우 정절의 결구를 전통소설처럼 희극화할수 없는대신 서사방식을 생활화하도록 애써야 한다. 정절의 인과적론리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만큼 진실한 생활속에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서술하게 되므로 이야기가 곡절적이 못될수도 있다. 대신 생활의 세절의 진실성, 생동 성은 확보될수 있기에 실화소설에서는 “인생의 진실한 풍경”을 서술한다는 자체의 고유한 특점대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도 무방하다.    전통적사실주의소설의 가장 주요한 창작방법은 객관현실을 반영하는것이지만 반영하는 현실은 생활중의 부분적진실이며 반영되는것은 현실생활속의 중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신사실주의소설은 가장 평범한 소인물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가능한껏 사회배경하에 력사사건과 중대한 사회충돌을 희석시키지만 이면에서 실화소설은 곧이곧대로 답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사회적총화인 인간으로서 진공상태에서 생활할수 없으므로 력차의 경천동지할 정치적사건을 나몰라라 할수는 없기때문이다. 물론 이야기의 목적이 그런 정치사건을 다루는게 아니라 그런 인문환경에서 생활한 보통인간의 인생경력을 서술하는것이기에 시대적주제를 념두에 둘 필요가 없는것이 유리한 점이다. 달리말하면 전통소설에처럼 전형을 창조할 사명이 없이 비본질적인 인간 일반을 현시하면 사명을 다하는것이다.    무릇 문학예술은 미를 추구하기에“미감”을 수립하는 문학일수밖에 없는바 실화소설도 문학인만큼 이야기속에 인물형상에서 진, 선,미의 가치는 값매겨져야 마땅하다. 실화소설에 인물과 이야기내용에 따라 독자가“미적”인 감수를 못느낄수도 있다. 그래서 실화라는 전제가 붙는것이다. 생활자체는 예술보다 아름다울수 없고 부각된 소설인물이 아니기에 있는 그대로의 이런저런 인간상을 보는것으로도 족하다. 실화소설에서는 인물의 선악에 대한 륜리적판단은 독자에게 맡겨야 하므로 작자는 자기의 주관정서를 될수록 숨기고 독자가 자아판단할 공간을 충분히 남겨주어야 옳다.    모두어 말한다면 전통소설과 실화소설은 량자가 모두 현실을 반영하는 기본특징을 가지고있으나 사실주의소설은 진실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으므로 전형화의 방식으로 세계의 표상후에 본질을 승인한다. 따라서 개별로부터 일반화에 이르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실하게 묘사된 소설이라도 진실성이 자체로 희 석될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설은 알면서 기꺼이 속히우는 “거짓말”인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쓰인 실화소설은 진실한 생활정경을 소설에 옮김으로써 그속에서 력사의식과 철학의식을 발견할수도 있다. 그것은 소설에서 재현된 진실한 생활자체에서 발산되는것으로 독자들이 읽은후 자각적으로 사색하게 만든다. 아무튼 실화소설의 리론의 뿌리도 반드시 사실주의토양에 박혀있으므로 실화소설도 당당한 자태로 문학의 백화원에서 향기만방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2015년 9월 20일
667    (잡문)《도덕교과서》 부록 댓글:  조회:4870  추천:0  2015-10-21
                        《도덕교과서》 부록      일전에 모출판사에서《도덕교과서》를 내니 책뒤에 첨부할 부록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다. 수천수백종의 교과서가 있다는것은 알지만《도덕교과서》라니 이게 웬말인 가고 반신반의하다가 점잖게 사절했다.    내 자신이 원래 도덕수양이 높지 못하여 덕망과는 사돈에 팔촌도 못된 고리삭은 훈장인데 어찌 언감생심 교과서를 범하랴싶어서였다. 그런데도 기어이 써내라고해서 고쳐생각해 보았다. 기껏해야 부록이니 별로 압력도 받을것 없다고 여기고 떠오르는 잡념을 일필휘지하여 적으니 정정은 출판자에게 맡기려 한다.    각설, 유가의 도통에서 말하는 동방인격에는 “인, 의, 례, 지, 신”을 포괄시키고있다. 어진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줄 알고 의로운자는 바른 정기가 공평함을 이르고 례의가 있는자는 남을 례로 대하고 남을 축복할줄 알고 기릴줄아는 자이다. 지자란 곧 식견이 넓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를 이르는것이고 신의가 있는자란 성실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자고로 중국을 례의지국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월의 물레방아가 돌고돌아 3천년 흐르고 인간의 리기가 극성을 떨게 되자 인격은 더는 엄숙하지 않고 정의와 성실과 신의가 더는 사람으로 되는 신조로 되지 않게 되였다. 사기와 협잡과 허위와 가짜가 판을 치면서부터 인격의 타락이 점점 사회풍기로 되여진것이다.    지금 량지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현대인들의 머리속에는 다만 원시적인 욕구만이 있을뿐이다. 인격이 무너졌을뿐만아니라 인성도 쇠갈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감정은 선량이라든가 책임감 같은것과 점점 더 멀어지고 오히려 사악과 범죄와 손을 잡고있다. 리익을 위하여서는 육친도 가리지 않고 제명리를 위해서는 친구도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이다.    다른 사람이 불행과 고통에 몸부림쳐도 구경거리로 삼고있다. 남은것이란 오직 금전과 사욕뿐이다. 현실은 다만 금전과 사욕의 각축 마당으로 되였다. 좋은 사람이 오히려 괴물이 되여진 세상이다. 현실사회에는 이중인격의 소유자들이 점점 더 많아 지고있다. 이중성격으로 사회를 대하고 자기도 대하기에 사회책임감이란 없고 거짓말과 허풍치기로 세상과 대화한다. 제리익만 있으면 사회리익은 네미덜머리다.    도덕은 왜 이처럼 미끄럼타게 되였는가? 어떤 사람들은 원래 자기의 가치준칙이 있었지만 온갖 유혹에 못이겨 리성과 량지와 등졌다. 혀를 꼬브리고 있을지언정 참말 을 하려하려 하지 않으며 말을 해도 신신고 발바닥긁기같이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말이거나 붉은찰도깨비 여울건너는 소리같은 두리뭉실한 소리를 한다.    인성이 랭혹해졌는가? 도덕이 타락했는가? 이런 뉴스가 있다. 란주의 황하가에서 한청년이 자살하려고 하다가 사품치며 흐르는 누런 물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돌아서 기슭으로 나왔다. 잔뜩 호기심을 다독이며 지켜보고있던 한쌍의 남녀가 흥미있는 자살극이 그만 깨여지자 비아냥거렸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흉내를 내는거요? 정말 못난이군…》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여 갈갈이 찢어버리고는 물속에 풍덩 뛰여들었다. 자기 생명을 자살로 마치려는것은 물론 비겁한 행위이긴 하지만도 겨우 자살을 단념한 청년에게 잘 생각한 일이라고 고무하지는 못할망정 자극적인 말을 하여 기어이 죽음에로 인도한 청년남녀는 도덕이 타락했다기보다 숫제 도덕이란게 없는 저렬한 인간찌꺼기들이라고 해야 알맞을것이다.    역시 황하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타향에 와서 품팔이하던 한 소년이 부주의하여 물에 빠져 구원을 바랄때 강안에는 백여명의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나 생긴듯이 손짓발짓하며 고아대고있었다. 전문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값을 흥정하고있을 때 네사람의 시민이 몸을 솟구쳐 강물에 뛰여들어 소년을 구했다. 주위에 구경군들은 머저리짓을 했다고 쉬쉬하였다.    듣건대 대서북의 사람들은 원래 순박하고 선량하며 인심도 후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너도나도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미풍량속을 가지고있었다고 한다. 그런  란주인들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랭혹한 인간들이 되였던가? 하긴 이런 일은 단순히 란주에서만 발생하는것은 아니다.    이런 뉴스도 읽은 기억이 난다. 한 처녀가 높은 층집꼭대기에 서서 자살하려고 망서리고 있을 때 큰 길거리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있었다. 처녀가 이슥토록   뛰여내리지 않자 아래 구경군들속에서《빨리 뛰여내리라구, 어서 뛰여내려!하나, 둘, 셋!화이팅》하고 응원하는 알량한 인간들도 있었다.    이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장거들을 보면서 무엇을 사색하게 되는가? 인간이 선행을 하는가 악행을 하는가 하는것은 물론 천편일률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구해준 사람이 은인의 시체를 보면서도 랭담하게 돌아서고 경찰이 백주날강도와 박투하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해도 몇백명의 무리속에서 한 사람도 나서지 않는다.    주은 돈을 주인을 찾아 돌려주면 오히려 오해를 사기 십상이고 자살자가 나중에 구원되면 오히려 실망한 기색으로 수군거린다. 행정사법기관에서 공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현상…등등은 현대인들이 어쩌면 이렇듯 랭혹무정하게 변했는가를 자문하지 않을수 없으리라. 국민자질에 녹이 쓸고 구멍이 뚫린게 아닐지,    상품경제시대이고 물질선행의 시대여서 그럴수도 있다고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면 스스로 달통될가?《사회전변의 시기》라는 말로 사람들을 우롱하지 말아야 한다. 보편적인 도덕감의 상실과 정신신앙의 결핍은 이런 인간희비극을 비일비재로 재연시킬수 있을뿐이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비애이고 인간으로서의 수치가 아닐수 없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인간도덕률은 리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 칸트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영국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말처럼 감성에 기초해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주장하고있다. 륜리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도 덕의 올리막과 내리막질이라는 두개 관점이 대립되고있다. 쟁론상에서 현실중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있는 도덕규범의 결설과 착위문제에 대해서는 홀시되고있다.    신도가의 각도에서 말하면《도덕》이란 곧《도득(道得)》으로서 곧 사람들이 도에서 얻은 “획득”이고 덕은 인간들이 도를 추구하는 가운데서 산생된“심득”이라고 한다. 도는 어디에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도덕은 어디서나 곤두박질한다.    광의적의미에서의 도덕은 인류가 진선미를 추구하는 마음이고 협의적의미에서의 도덕은 주요하게 관념,의지 및 행위의 선악에 소급된다. 우리가 인간본성은 선하다고 정의를 내리는것은 사람이 자아와 기타 리익주체와 협조하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기때문이다. 이런 능력에는 본능과 자각 두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본능적인 선량을 말하고 후자는 자각적인 선량을 말한다.본능적으로 선량한 사람은 왕왕 《솔직한  사람》에 속하고 자각적으로 선량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자에 속한다. 이 시점에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선량함을 갖출수 없다. “악”이란 “선량”이라는 이런 능력의 결핍과 상실을 말하기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정도가 부동할뿐 자고로 사회상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량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면 선행은 일종의 능력이 된다. 《성악설》을 전제로 한다면 도덕은 이 본성적인 악에 대한 자각적인 억제이다. 이런 도덕은 서방종교식의 도덕으로서 도덕과 법률을 전제로 할 때 후천적배양을 근본으로 하는것이 아니기에 금욕주의에서 벗어날수 없다.    도덕과 욕망은 천성적으로 대립된다. 마치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것처럼 인류의 령혼과 육체의 융합을 불가능하게 한다. 도덕은 일종 심령의 억제능력이 되여질것이 아니라 심령의 자유적력량이 되여야 바람직하다. 인성악을 전제로 한다면 그 도덕은 필연적으로 타락할수밖에 없다.    생물학자들이 의의있는 실험을 했다. 수영하지 못하는 침팬지를 물에 빠뜨렸는데 다른 침팬지를 구했다. 벵골원숭이가 음식을 먹을 때 다른 원숭이에게 전기충격이 가하자 이 벵골원숭이는 며칠동안 굶었다. 생물학자들은 령장류의 이같은《착한》 행동이 바로 인간의 도덕률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고있다.     령장류학자 프랑드 왈 박사는 인간도덕률의 기원을 원숭이의 사회적행동에서 찾을수 있다고 제기했다. 그는 모든 사회적동물은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억제하거나 바꾸어야 했다며 원숭이와 침팬지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억제력이 바로 인간도덕률을 형성하는 원천이라고 했다.    하버드대학 진화생물학자 마크 하우저는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는것처럼 유전적으로 도덕률을 얻게 되는 메커니즘(기구, 기계장치)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간도덕률은 진화의 우연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며 동물행동에서 인간도덕률의 원천을 찾는것에 반대하는 진화생물학자도 있다.    어느 주장이 적격인지 알배는 없으나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도덕을 전부 상실한다면 그게 원숭이나 침팬지보다 나은게 무엇일가? 도덕은 생명의 발양이고 도덕은 생명의 귀속이다. 도덕의 본질은 영원히 자률이며 도덕의 본질은 생명동력계통이지 군체정합의 률조(律條)가 아니다.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선량한 인생을 살려는것은 량지가 있는 사람들의 추구라고 믿고있다. 특수경우에 어떤 태도를 선택할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먼저 자신의 량심에 물어야 하겠지만도.                              2007 년 7월 24 일  
666    (잡문) 천박을 평함 댓글:  조회:5161  추천:0  2015-10-21
                                             천박을 평함      근간에 갑자기 천박이란 말에 흥취가 생겼다. 천박이란게 뭔가? 이제껏 천박이란 천박함이겠거니 하고 천박하게 생각하고 굳이 의미를 새겨보지 못하던차에 모쪼록 사전을 펼쳐보니 해석하여 가로되 학문이나 생각이 얕음이라 하고 례로는 ~인격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인격도 천박하다고 말할수 있고 풍속도 천박하다고 말할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대번에《천박박사》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천박의 반의어가 연박이였는데 엣센스 (國語辭典)에는 없고 에서 아는것이 깊고 넓음이라 해석하였다. 아무튼 내가 사전식으로 뜻풀이를 하지 못하고 있었을뿐이지 중학생들쯤이면 그 의미를 쉽게 깨치고 있은 낱말임에는 틀림없는것같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천박이란 말이 매우 엄숙한 문제라는 천박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수신양성(修身养性)의 문제일뿐더러 나아가서 인간성정의 내함과 직접 관계되는것이기때문이다.    천박이라는 말의 의미가 또렷해지자 얼굴이 따스해났다. 천박이란 말이 잘못 내뱉아지면 한 사람의 향상과 교제에 가장 큰 장애로 되기십상이다. 천박은 자신에 대하여 쓰면 겸허를 뜻하는 말로서 별로 부담스럽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사하는 평판일 때 십상팔구가 업신여기고 비하함으로써 슬며시 자기를 과시하는 작동이라는것도 명기하게 되였다.    나는 원래 반평생 남아 밭갈고 김매던 농부였던지라 매우 천박하였다. 이 점을 스스로 명랑하게 자인하고 있기에 자고자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자신에 대한 해부에서는 부담없이 천박을 짓씹기는 해도 타인에 대해서는 절대 천박을 떠올리지 않는다. 내가 군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천박한데 누구를 천박하다고 일격을 가할 용기가 없을뿐이다. 황차 명문대학도 못나와 곳곳에서 천박함을 드러내는데야.     그래서 충동에 자기를  내맡기기를 잘했고 눈에 아니꼽고 마음에 거슬리면 성난 황소처럼 마구 떠받는 성미였다. 이것은 성격상 치명의 결함으로서 천박중에도 제일 천박함인줄 알고있다. 세상에 완인이 없는데 하믈며 나같은 천민임에랴, 하며 자기 위안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매양 처참했다. 충동후의 걸작은 예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총을 쥐여주는격이 되였던것이다.     모난돌 정을 맞고 대가리를 먼저 내민 새가 총을 맞는다는 속담이 있지만도 별로 모가 나지도 않고 남보다 삐여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과녁이 되여졌다. 이것은 성격상에서의 나의 천박함이다. 다른 천박성은 나의 아집과 집착에서 드러나고있다. 말하자면 구설수에 오를줄 예상하면서도 생각난대로 그냥 내갈기는 우직한 붓쟁이여서 긁어부스럼을 만들때가 푸술하였다. 그러나 신신고 발바닥을 긁거나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자아감각을 늘여놓기보다 가라지는 가라지고 개돌피는 개 피라고 직설해야 직성이 풀려하는 소인이다.    지식이 천박하다는것은 더 말할것 없고…하지만 세상에 모든 책을 다 읽고 죽은 사람이 없고 세상만사를 다 알고 사는 사람도 없다. 설혹 박사라해도 필경 육상모는 어떻게 기르고 논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등 농업상식은 나보다 못할수 있다는 그 상대성에서 평형감각을 찾으며 살아왔기에 지식의 천박함으로 물에 뛰여들어 자살할만큼 비장한 각오는 가지지 않았다. 모든것은 상대적이다. 조밭에는 가라지가 긴목을 빼들고 나불대고 논에는 벼돌피가 파르르 떨면서 아낙네들의 눈을 홀린다.      각설하고, 자신이 이렇게 천박투성이다보니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을 때가 많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천박함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눈여겨 보고 거울로 삼는것인데 그저 비춰보되 남을 천박하니 어쩌니 평판하는 일은 절대 삼가하였다. 내가 알고있는 어떤 사람들의 천박성은 어데서나 나서기를 좋아하고 혼자 박식한체하며 사람을 놀래울 말을 골라서 하려하고 벼르는데서 잘 알리였다.    피끗 보아 15촉인 전등은 해처럼 대지를 고루 비출수 없다. 눈부신 해빛에도 음달이 있음에랴, 그래도 태양의 눈치를 보며 자기를 빛내는 달이라도 된듯이 여긴다면 가소로운 사람이 아닐수 없다. 풀잎에 침이슬은 진주처럼 반짝이지만 구슬은 아니다. 세상에 무소부지하고 무불통지한 사람이 있던가? 언제나 일인자연 늘 일가견을 내놓는것으로 자신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절반쯤 찬 물통을 물이 골똑한 물통곁에 가져다 놓아도 조금도 달라질것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얽히고 서린 세상사가 돌아가는것을 자신은 다 꿰뚫어본듯이 남을 훈계하려든다. 이런 사람들의 천박은 허풍으로 귀납할수 있다. 심각해봐야 결국 천박으로 귀결되고…다음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본질을 해석하고  음풍영월하면서 인간철학을 천명하는듯이 설레발친다. 철학자연하는것은 제일 천박한 짓거리이다    지식상에서 천박하면 늦더라도 더 열심히 배우면 천박함의 껍질을 얼마간이라도 벗겨버릴수 있지만 품성상 굳어진 천박한 인격은 쉬이 해결되지 않는다. 게는 영원히 똑바로 걷게 할수 없다는 도리와 같다. 천박하다는 소리를 적게 들으려면 하늘밖에 하늘이 있고 산밖에 산이 있다는 전고를 좌우명으로 삼는것이 유효할것이다.     천박이란 평판이 지식면에 내려지는것이면 가방끈이 길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탄하는데 그칠수 있지만 인격면에서 천박하다고 금그어진다면 곧 인격력량문제에 소급될뿐만아니라 옹근 인격가치를 폄하하는것이 되므로 분명히 천박하더라도 맞대놓고 평판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사실 한두사람의 평판이 대방의 인격가치 전체를 저울질할수는 없으니 말이다.    언필칭 남을 천박하다고 자리매김하는것은 타인에 대한 평가에만 머무는것이 아니라 되돌아와 자기과시로 된다. 남이 우러러 볼만큼 지식이 연박하고 후덕하며 인격이 고상한 지자들은 남을 천박하다고 비아냥거리지 않는다. 그런 짓거리자체가 천박한 언동이라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지자의 덕성이 겸허에 있다면 문인의 풍도는 자중에 있다고 하리라. 특히 자기의 지식을 자대로 남을 천박하다고 자리매김해버리면 결국 자신도 천박함에 주저앉게 되여 오십보소백보가 되고 우렬을 가릴것없이 피장파장이 되고만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될것이다.                                              2008년  2 월  11일  
665    (잡문) 당신은 수치심을 아는가? 댓글:  조회:4472  추천:0  2015-10-21
                              당신은 수치심을 아는가?        고대희랍의 3대비극시인의 한사람인 에우리피데스는 수치라는게 있는가? 생각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크 트웬은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혹은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하였다. 물론 생명자체에는 부끄러움이 필요없다. 부끄러움이 숨결이 되는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기에 동물과 구별되는것이 아니랴!    한국텔레비화면에서 덜미를 잡힌 범죄혐의자들이 거개 웃옷으로 골을 감싸거나 사타구니에 구겨박고 무엇이라 변명하는 모습들을 볼 때 족제비에게도 낯짝이 있다더니 속담 그른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면서 허구픈 웃음이 새여나 오는것을 말릴수 없다. 저들도 공중들앞에서 낯반대기를 드러내는것이 체면깎이는 일이라고 여기는 모양일가? 저절로 왼고개가 탈린다.    이른바 체면을 깎지 않으려는것은 손바닥만한 낯짝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심리반응이다. 천하에 악착한 죄범들에게 부끄러움이란게 남아있다는것은 사이비한 일이 아닐수 없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원래 량심도 없다 그런데 저들이 낯짝을 가리는것은 수치심이 있다는 표현이자 곧 량심이 있다는 암시가 되는것이 아닌가?    부끄러움이란 항상 타방을 의식함으로써 감각되는 자아의식으로서 부끄러워 한다는것은 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스스로 부끄러워 한다는것은 아무도 없는 숲속에 홀로앉아도 몰래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의식, 그런 감각이다. 이런 의식, 이런 감각이 그 사람의 말과 행위와 몸짓에 제약의 고삐가 되여져 수시로 절제를 촉구한다. 바로 그것이 인간미이고 덕이며 인격을 윤택하게 하는 습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것은 량심의 작동인것이고 량심은 곧바로 그 자신의 도덕궁전의 금빛기둥이다. 흉악범들이 살인하고 입실강간하고 어린애마저 랍치, 살해할 때 량심은 이미 개를 베여준 다음일것이다. 어둠속에서 야차같이 끔찍한 행위 를 저지를 때는 수치심이 무엇인지 아랑곳않던 천하 악한들이 렌즈앞에서는 더러운 낯짝을 가리우니 그야야말로 인간들만이 창출할수 있는 회색유모아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그런 가증스러운 작태(作态)를 허용하는것은 치죄만할뿐 인권은 존중한다는것인지 아니면 돌아온 인간본성인 잘난 수치심을 보호해주는 인도주의인지 알수 없으나 남의 제상에 배놔라 감놔라 할수는 없고하니 일축해버리고…    수치심은 인류문명의 첫표지로서 야만인으로부터 부단히 개화하고 진보하는 과정에 자애와 자중의식이 더욱 돌출해지면서 심령의 깊은 골짜기에 몰래 피여난 한떨기 아름다운 문명의 꽃이라 할수 있고 조물주가 인간에게만 하사한 첫선물이라 할수 있다.    금과를 훔쳐먹은 이브가 자기의 라체에서 느낀 첫수치심은 성적인 수치심이였지만 그 시각부터 인류문명의 진전과 더불어 수치심의 내용이 세분화되고 그 함의도 더욱 오묘해졌다. 수치심은 그렇게 자손만대에 유전되여 일종 불가마멸의 천성으로 되였던것이다.    사람은 어릴 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혹 무안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부끄러움이 선행하면서 얼굴에 막무가내한 홍조를 피워준다. 그것을 우리는“부끄러운빛 ”이라 칭한다. 부끄러운 빛은 일종 심령미이다. 도덕감정상의 이런 부끄러운 빛은 적어도 기편이나 분식, 허장성세나 아부심리, 교활성이나 표리 부동… 등등의 렬근성보다는 비할바없이 고귀한 심리품질이다.     대저 한 사람이 영욕을 안다는것은 사악과 옳은것에 밝다는것이고 수치를 안다는것은 인간의 미덕을 간직하고 있다는 표징으로서  인간의 미덕에서 가장 가치있는 내핵이다. 가령 한 사람이 완전히 렴치를 잃었다면 못하는 짓이 없을것이고 가질것 못가질것 가리지 않고 횡령하려들것이다. 그래서 수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자를 철면피한이라거나 파렴치한라고 하는것이다.    고대중국의 사상가인 순자는 일찍 제자들에게《수치를 모르면 사람으로 될수 없느니라》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마을어른들이 누가 잘못하고서도 그냥 뻔뻔스럽게 나오면《에끼눔,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눔이 사람새끼 될가부냐? 》하고 꾸짖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어섯눈을 뜨게 되고 차차 시비계선이 똑똑해지면 영욕관념이 강해진다. 이를테면 시험성적이 발표되였을 때 남보다 많이 낮다거나 혹은 지각하여 주밋거리며 교실에 들어설 때나 무슨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에게 공개비평을 받을 때나 저도 모르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게 되는것이다. 환언하면 사람은 지각이 들수록  영욕관념도 그에 정비례된다는 말이다.    수치심이라는 이 심령의 꽃은 많이는 각자 마음밭의 비옥도에 달린것같다. 이 세상에서 후안무치의 지경에 이른 인간만큼  슬프고 가련해보이는 인간은 없으리라. 수치감은 한 개체생명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전 민족의 시비관념, 선악관념, 미와 추에 대한 관념 등의 종합적심리품질의 체현이다. 그래서 국치(国耻)에는 매개 국민 마다 절치부심하는것이다.    한 사람이 수치감을 느낀다는것은 바로 일종의 자아승화로서 일종의 진실하고 순박한 정감의 굴절반사이며 옳바른 시비관념과 선량한 심리상태의 자연적인 로출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한 사람의 령혼과 품격을 투시할수 있는한 부분이라고 하는것 이다.    모종 경우 부끄러운 일을 한 자에게 수치감을 안기는것은 사회가 그 개인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징벌이다. 그에게 수치심을 알게 하고 통절히 후회하게 하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자기 성찰을 하게하고 자책속에서 보다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도록 하는데 있다.    수치심은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심리에나 손바닥만한 얼굴을 가리우는 본능적인 거동에 있는것이 아니라 맑은 량심에 근원을 두고있다. 만약 한 사람이 수치심마저 깡그리 말아먹었다면, 얼굴 한번 붉히지도, 가슴 한번 두근거리지도 않고 기탄없이 살인, 강탈, 도적질 등 죄악을 저지를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이런 패류들은 마음이 이미 죽은것이다. 인간에게서 마음이 죽는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건만 당사자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만군중앞에서 공개재판을 할 때 어떤 범죄자들이 무슨 장한 일을 해서 공중앞에 나선듯 대가리를 잔뜩 쳐들고있는 아닌꼴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런자들은 벌써 인간이기를 단념한 쓰레기들이라 쓰디쓴 랭소나 던지면 그만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간의 원초적비애를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하다면 사회정영의 외투를 걸치고 음으로 양으로 사리사욕만 채우는 허울좋은 위정자들은 도대체 수치심을 알가? 물론이다. 다만 려산진면모가 드러나 재판정에 나섰을 때에야 비로소 고귀하신 체면이 가려워서 고개를 떨굴뿐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수치심을 찾은것이 아니라 역시 끝까지 사심에서 나온 자기보호의식이다.    수치심은 륜리와 도덕에 직결된 인간심사이다. 이 사회에서 어떤자들이 수치를 모르는가? 엉터리선서를 하고 엉터리로 한자리 차지하고 엉터리로 부정축재를 하는 자들이다. 현시대 이런 허위적인간들이 부지기수인것은 체제와 법제관리에 틈서리 탓이기도 하겠지만 태생병처럼 본래 수치심이 결여하거나 수치심이란 심리품질을 숫제 지니지 않기로 체념해버리고 탐욕의 탁류속에서 올챙이 까나듯 무지 많이도 까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흔히 법정에서나 기자들의 채방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반성하는것이 아니라 무슨 사상개조를 잘 하지 않아서라거니 자산계급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거니 법을 잘 몰랐기때문이라거니 하는것이 공통어인데 그 기량이 유치하고 가소롭기 그지 없다. 중국에서 자산계급씨를 말린지 언젠데 누구에게서 언제 어떻게 나쁜 영향을 받았다는것인가? 차라리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내핵이고 량심의 표현인 수치심이란 진정 어떤것인가를 몰랐다거나 아예 수치심을 내버렸다고 하는것이 오히려 사개가 맞는 말일것이다.     도덕률의 시점에서 보면 모든 부도덕한 행위들은 모두 근원이 곧 수치심의 사멸이나 결핍에 있는것이다. 법률의 징계가 무서워 자기를 단속한다는것은 너무나 비량심적이고 저속한 심리품질이다. 7정 6욕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찌 유혹앞에 흔들리지 않으랴만 진실한 사람은 영원한 치욕의 기둥에 못박히지 않으려고 도덕적량심과 자률정신을 기둥으로 마음의 대청을 떠받들고 나가기에 무너지지 않고있는것이다.    자고로 식(食)에 수치가 없고 성(性)에 수치가 없고 금전에 수치가 없다고 하더니 그말이 딱 들어맞는것같다. 이를테면 녀자들의  수치심은 남자들보다 더 뿌리깊은 천성이요 일종의 미덕이건만 육체교역장에서 제노라하는 매음녀들은 첫시작부터 수치심을 시궁창에 던져버리고 나선것이다. 돈냄새에 취하여 수치심을 브래지어로 덮어놓고 생명부지의 남자앞에서 라체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녀자라면 이미 녀자이기를 그만둔 구제불능의 생령들이 아니겠는가?    브라질 원산인 미모사(mimaosi)라는 한해살이 풀이 있는데 살짝 건드려도 보드라운 잎이 닫히며 아래로 늘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부끄럼을 잘 타는 소녀같아서 우리 말로 함수초라 부른다. 함수초가 다치면 인차 잎과 가지가 늘어지는것은 기실 바람과 모래 등 외계의 침습과 파괴를 피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수치심을 헌발싸개처럼 내던지고 있는 녀자들은 함수초를 한번 건드려볼 필요가 있다. 리성도 사유도 없는 한갖 한해살이 풀의 그 미쁜 본능을 한번 흔상해 보는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테니까. 아주 부끄러움을 외면한 녀자라면 이미 악녀가 되였다는 것이다.     세상엔 또 “수사조(羞死鸟)”라는 아주 재미있는 새도 있다고 한다. 전하는바에는 높은산 깊은숲속에서 서식하는데 일반적으로  온종일《수사료(羞死了) 수사료…》라는 새울음소리만 들을수 있을뿐 그 모습은 좀해서는 볼수 없단다. 사람들이 깊이 잠든후에야 살며시 접근하는데 사람의 몸에 융화될줄도 알고 령혼에 스며들줄도 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황공해서 대가리를 푹 떨구고 삽시에 붉은 빛이 물결치듯 온몸에 퍼지는데 일단 대가리를 떨구면 다시 쳐들지 못한단다. 너무 부끄러워 죽어버린것이다.    미물도 수치심에 죽는다는데 민중앞에 용납못할 죄를 짓고도 제손바닥만한 낯짝때문에《수치》를 느끼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얄망궂은 새의 죽음은 얼마나 감동적일가? 사람이 수치심을 안다는것은 자각과 진보의 향도가 생긴것이고 수치심을 잃었다는것은 타락의 징표이며 만악을 감행하겠다는 무언의 선언이기도 한것이다.    시인 윤동주의“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다. 사람이 한생을 살면서 어찌 한점 부끄럼없는 완미한 삶을 살수 있으랴만 뒤에서는 남에게 알릴수 없는 짓거리들을 하고도 연단에서는 렴결봉공을 거론하면서 낯간지러운줄 모르고 아닌보살하는 그런 허위만은 없어야 할것이요 최저로 자기 량심에는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올곧게 실천해 나갈수 있는 담보인 자률만은 있어야 할것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수치심을 앞세우고 그 모든 유혹과 대결한다면 기로에 적게 빠질것이고 후회없는 사람다운 인생을 여유롭게 영위하련만…어렵도다. 늘 수치심을 의식하며 자률정신을 기둥으로 자중한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2005. 8. 18 일    
664    (진언수상록 83)마른 하늘에 적어보다 댓글:  조회:5231  추천:1  2015-10-21
                        마른 하늘에 적어보다                                        진 언      예전엔 미처 몰랐다. 비오는 날이 반가운 날이 되는 세월이 될줄을, 아닌게 아니라 모내기철 모아산아래 고향친구가 와서 하는 말이 드넓은 세전이벌에서 논물이 없어 모내기를 시작하지 못해 큰일 났다고 개탄했다. 나도 쌀밥을 먹고 사는 인간으 로서 함께 빈걱정을 짓씹었더랬다. 세월이 갈수록 강수량이 종잡을길 없어지자 홍수져서 난리난곳도 있고 왕가물에, 페농에, 식수대란에 아우성이 높다.    지구촌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다른 쪽에서는 홍수로 야단법석이라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왜 인간의 생존조건이 점절 더 렬악해지는가? 물이 태부족하여 나타나는 현상(가뭄)과 물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현상(홍수)에서 일컬어 자연을 정복한다고 허장성세하던 인간들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물문제는 무소불위의 인류에게 불가항력의 도전이 아닌가?    못되면 하늘탓을 한다고 예측할길없는 가뭄, 홍수는 역시 기후변화탓이다. 원래 자연상태의 지구는 완벽에 가까울만큼 자률적인 물조절 시스템을 갖추고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순환을 변형시켰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것인가? 올해는 정말 봄과 가을가뭄이 예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그 정도가 훨씬 심각해질것이라고 예측하고있다.    우리 연변땅과 조선반도만도 아니고 이른바 지구촌“락토”라는 미국도 지금 캘리포니아 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산불이 빈번해지고 농산물작황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있는 형국이다. 세계적으로 가뭄이 심해지는 현상은 엘리뇨 현상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여기와 멀지 않은 조선반도에서도 가뭄대란이 일어나고있다.   “예수복된교회”라는 카페에서 보도하는바에 의하면 “극심한 가뭄으로 한국의 방방곡곡이 타들어 가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위세에 가려있지만 가뭄피해는 재앙수준으로 악화하고 있다. 농작물이 말라죽거나 먹을 물조차 부족한 곳이 속출하고 있다. 채소값은 폭등해 서민 밥상을 위협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확산되는 가운데 강원과 충북 등 중부권과 강화도를 비롯한 일부 도서 지역은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1월1일부 터 이달 14일까지 서울, 경기와 강원도의 누적 강수량은 평년 같은 기간의 절반 수 준이다. 특히 강원지역 강수량(5월 1∼6월14일 기준)은 160.8㎜로 평년의 48%밖 에 안된다. 저수율도 43.1%로 평년의 64.7% 보다 크게 낮고 봄가뭄이 들었던 작년의 50.8%보다도 훨씬 적은 수준이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물마름 현상을 보이는 논도 늘고 있다. 소양강댐과 연계 운영되는 충주댐 상황도 심각하다.…”    하늘은 공정하다. 하늘은 지구촌 미운곳을 모르고 미워서 비를 내려주지 않는 그런 리념놀음을 모른다. 그런데도 미국의 “존스 홉킨즈 한미연구소”인지 하는 곳에 얄팍한 양씨들은 눈감고 야옹하는 식으로 조선반도에서“남쪽은 단비인데 북은 지독한 가뭄이 들었다고, 왜서일가?”하며 미련하기 짝이 없는 우문까지 던지고있다. 하다면 지난해 년말 서부지구 특히 캘리포니아주의 폭풍우, 홍수, 산사태는 대자연의 축복이였던가?    한국에서 왕가물이 들어 논밭이 다 타들어간다고 아우성치는것을 비가 아니와서 좋다고 환호하는 소리로 오역하고있는지 하나만 알려하고 둘은 모르려는 작태가 기특하다. 한국에서도 2012년들어 너무 가물어서 충남 예산과 당진의 농업용수를 감당하는 둘레가 40㎞에 달하는 가장 큰 예당저수지가 바닥이 들어나서 풀밭이 된것은 모르는듯이 외면하고있으니 말이다. 우주에서 밤이면 지역별 전등불빛은 가려낸다면서 대낮에 그리큰 풀밭도 보아내지 못했단 말인지…하늘은 얼룩을 모르고 누구를 “왕따” 시킬줄 모르는데 하늘로 제좋도록 편짜기를 하려고드니 우습지 않냐?    공자 가라사대“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하는 말도 리치에 맞지 않게 되고 말이 리치에 맞지 않으면 하는 일이 당연히 이룩되지 못한다.( 名不正则言不顺,言不顺则事不成)”고 하였다. 정명사상은 주로 명실(名實) 관계에 대한 정치, 륜리적개념이다. 구체적으로 명의 의미에 따라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로 사물의 실상에 대응하는 이름으로 본다. 정명은 사물의 실제와 그 명을 일치시키고 인간의 내면적인 덕에 대응하는 명분의 의미로 보기에 인간의 덕과 그 명분을 일치시킨것이다.    각설, 사람사는 곳이라면 비내리고 아니내리고를 두고 쪽을 가른다는것은 속창머리가 넘 더러운 인간들이다. 농사짓고사는 사람들이면 그 심정이 똑같을것이니 말이다. 황차 겨레인데 “너네는 가무냐?  우린 땅을 말리우는중이다.”라는 식으로 씨벌 인다면 어디 사람의 심통이겠는가? 적대방의 국토만 한재가 들었다고 대서특필하는게 악어의 눈물인가? 아니면 고양이 쥐 생각인가?    눈을 들어 멀리 풍물을 좀 내다보라. 세계 이상기후라는 말이 금시초문은 아닐것이다. 이상기후는 좁다란 조선반도의 문제만이 아니지 않는가? 하늘아래에서는 인류일반이 작고 취약한 생령일뿐이다. 스웨덴은 현재 홍수주의보가 내릴만큼 많은 비가 내리고 있고 영국 또한 폭풍과 홍수로 고생을 하고, 어디 가뭄뿐이던가?중국남부, 타이, 필리핀은 홍수와 태풍피해로 심각하였다.    폭염은 또 어떠한가? 벨기에의 경우에는 폭염으로 인해서 500명 이상이 사망을 했으며 유럽전역이 2013년 폭염으로 고생했고 러시아 또한 폭염에 가뭄 그리고 산불 로인해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를 했다. 캐나다와 미국남부 또한 폭염으로 체감온도가 40도 이상을 상회해서 많은 사망자와 피해가 났다! 칠레에서는 가뭄과 산불로 허덕이고 아르헨띠나와 브라질의 경우에는 폭염과 열사병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속출! 전 세계적으로 폭염과의 전쟁이 심각하다고 하다! 폭염은 때때로 내려주는 비가 말려주는데 인류가 자초한 지구온난화는 한국식으로 표현한다면“아몰랑”이다.    한파도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한파와 폭설로 몸살을 겪고 동남아 국가인 라오스와 필리핀도  령하권의 온도와 이상한파로 인해 동남아답지 않은 기관을 이루었다. 그런데 복받은 독일인가, 북반구 국가들이 한파로 고생하는것과는 다르게 독일은 이상기온으로 기온이 상승해서 더운 겨울을 보내고있다는 사실! 인간이 자초한 세계 이상기후가 인류에게 다양한 선물보따리를 안기는게다.    우리 선조들은“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였다. 농업의 기본정신은 인간의 생명, 인간사회의 근본질서,원천을 유지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개념이다. 농업은 농업만을 뜻하지 않는다. 농업은 인간사회의 기초적산업이다. 부단히 새로운 활력을 만드는 유일한 인간근업이 되여야 하며 또 그렇게 될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다면 쌀밥을 먹고 사는 인간들로서 다같은 마음을 가져야 사람답지 않을것인가? 하늘이 하는 일을 리념적으로 해석하려고 드는것만큼 어리석은 인간이 또 있을가?                                              비를 내리소서 하늘이시여 비를 내리소서                                              석달열흘 왕가물엔 련사흘 줄비를 내리여                                              거북등같이 갈라터진 논밭이 흠씬 젖도록                                              농부님네 마르고탄 가슴에 생명수 주소서                                              비나니 하늘님 유정타면 장마비 멈추소서                                              홍수라 수재가 덮치면 속수무책인 인간들                                              노아의 방주도 없는 지구촌이니 천만부디                                              하늘아래 살아가는 민초들 마음 헤아리소                                                               2015년 6월 20일
663    현대호색부 댓글:  조회:4847  추천:0  2015-10-12
                                       현대호색부        언제부터였던지 항간에 풍류, 색정행위의 대명사로 “색갈”이란 말이  통용되고 있 는데  그리 맞는 표현이 아니다. 《색》은 다의어로서 우선은 빛으로서 색채, 광택, 꼴태, 춘색이요, 추색이요 하듯이 경치를 말하고 다음 낯, 용모를 말하여 십분 고우면 자색이 있다한다. 그 다음 색, 녀색을 뜻하며 그외 갈래, 종류를 가리키기도 하고 낯이 변할 때 기색이 변하다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색갈”은《색골(色骨)》로 표 현되여야 호색군을 이르는 말이 된다.    각설하고, 소위 “색갈”의 세속적의미의 근거를 “호색”에는 오도된 력사 유래가 있다. 전국시기 굴원의 제자였던 송옥이가 《등도자호색부 (登徒子好 色賦)》 를 쓰면서부터 “호색”이 곧 음욕, 음탕의 동의어로 와전되였다고 한다. 송옥이는 등도자 가 천하에 밉상인 자기 안해에게 수두룩한 아이들을 낳게 만들었다는 그 한가지 리유만으 로 “호색자”라고 대성질호한것이다. 기실 등도자는 성기갈자 아니면 음욕과다증에 걸렸을뿐 진정한 “호색자”가 아닌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호색”이란 문자그대로 훌륭한 색이고 곧 아름다운 녀색이 아니던가? 《금병매》에 나오는 서문경도 미색에 빠져 음탕 하게 놀아댄 봉건시대의 대류망 일 뿐이지 결코 명실상부한 “호색가”로는 자격미달이 다. 왜? 해답은 아래에서 자명해진다.    호색이란 말은 론어에서 가장 일찍 나왔는데 군자가 미덕을 좋아하는것은 호색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호색은 미모의 녀자를 의미한다. 호색에서 호와 색을 분별하여 해석할수 있다. 호“好”는 좋아하다이고 움직여 씀인데 《호(好)》란 결코 분별없이 노는것이 아니고 미친짓이 아니며 더구나 병태적음욕이 아니다. 옛군자들은 분촌있고 색을 범하지만 음탕하지 않았다. 도를 넘으면 곧 음란이 된다. 호색은 인류의 영원한 화제이고 압살할수 없는 추구이다.     력대제왕들이 삼궁륙원(三宫六院)을 두고도 성차지 않아 수천의 궁녀들 을  가둬둔것은 호색이 아니라 음탕이다. 어느 정도의 미모여야 미색이라 할수 있을가? 언필칭 서시, 초선, 양귀비 등 고대미녀들은 고기도 물속에 숨고 기러기도 날다가 떠 러질만큼의 화용월태를 가졌다고 하는데 옛날에나 얼굴만 미색인것이 아니라 그 정신, 정감세계도 아름다워야 과히 미색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대자연은 원래 인간에게 생육의 본능과 더불어 성쾌락까지 하사하였다. “성”이생명단계의  지탱점이 되였다는것은 인류에게는 행운이다. 그후 인간의 원시적성욕은개화와  더불어 정욕으로 진화했고 다시 “정”을 “욕”에서 분리시키려 시도했다.  이는 또한 반가운 인류문명 징표였다. 그런데 인간이 대자연의 강개함과 은총을 기편하고 생육의 본능을 순수 육체적향락으로 전화시킴으로서 동물중에서 가장 재미스러운 완미한 생리향락기계로 되였다. 동시에 인간비극도 시작되였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정”이 승화되여 “사랑”이란 간지러운  말로 성욕,  성행위를 분식하였지만 막무가내하게도 “욕”은 의연히 동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일찍 “애”에서 “정”이 생성되고 그 “정”은 되돌아와서 원욕을 승화시킨다는 애정륜리학까지 창출되였고 고금의 도덕가들이《“욕”을 금하면 덕이니라》하고 설교하면서 금욕을 권장했지만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하였고 각종 법규와 사회도덕으로 성을 제약하려 시도했지만 정신이 육체를 떠날수 없듯이 정신도 원욕을 배제하지 못하였다.       인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자기를 학대하였지만 성에 대한 방종은 급기야 성해방에 이르렀으니 비애라할가? 기쁨이라할가? 신비한 자연경관이 하느님이 창조한 제일의 풍경이라면 미모의 녀인들은 제2풍경선이라 할것이다. 그런데 자연경관은 누구나가  아무 구애없이 흔상할수 있지만 제2풍경선을 흔상함에서는 시점이 달라져야 하고 또 마음가짐도 달라져야 했다.    하지만 고운 꽃을 보면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꺾으려는 본성처럼 미인을 만나면불문곡직하고 침대에 안아올려 육욕의 향연부터 련상하는 웅성들의 그 발설욕과 공격성이 문제가 되였다. 미색을 불가침범의 관상용 아름다운 꽃송이로 간주하고 눈으로 마음으로 흔상하면 만족되지 않는게 웅성의 본성이랄가? 그래서 이른바 애정세계에는 더는  목가적인 애정시가 읊어지지 않고 강압과 정복의 개선가만이 높이 울려퍼지게 된것이다. 진정 꽃을 좋아하고 꽃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애화가(愛花家)들은 꽃이 상할세라 아끼면서 마구 꺾고 버리는 비속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 도리로 진정한 호색가가 된다는건 마구 웅성을 휘둘러대는 그런문제가 아니다. 아래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쯤 되면 진짜 호색한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서양소설《마콜의 미소》에 주인공인 마콜이야말로 진정한 호색가라고 평판을 받고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전장에 나간 마콜은 한차례 전투에서 적군에게 사로잡힐 궁지에 빠졌는데 막부득이 시체들속에 끼여누워 숫제 죽은체하였다. 전장을 수습하던 적군병사들이 그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여러가지로 일으켜세우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였다. 할수없이 채찍으로후려갈기기도  하고 날창으로 쿡쿡 찔러놓았지만 마콜의《시체》로서의 자세는 종시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때 마침 미모의 녀군의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였다. 그러자 마콜은 제6감각으로 느꼈던지 사색이 되여있던 얼굴에 느닷없는 밝은 미소가 피여올랐다.그 미소는치명적인것이였다. 결국 그  한번의 미소로 마콜은 목숨을 잃고말았다. 그러나 그 미소야말로 미에 대한 본능적인 찬사였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심령의 광환이였다고 할수있을것이다. 그리하여 구라파사람들은 마콜의 미소를 준공성(准共性)미소라고 칭송했다.    영웅호색이란 말에도 일반 무뢰한이나 방탕아들은 포괄되지 않는다. 기실 성행위를 좋아한다해서 모두 영웅일리가 만무하다.이 녀자, 저 녀자들에게 발설하는데 출중한 패류들의 입에서 “사랑”이란 말이 곧잘 나오기도 하겠지만  그건 길거리 구멍가게에서 파는 눅거리껌을 씹다가 뱉아버리는 그런 일상의짓거리와 같다. 누가 껌을질겅거리기 좋아한다해서 껌전문가가 되는게 아니지 않는가?     관내의 한 관리가 120명의 고정 “정부”를 숨겨두고도 성차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녀자면 닥치는대로 롱락하였는데 스스로그 수를 헤아릴수 없다고 자백하였다. 아마  서문경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스승으로 모실지 알수 없지만도 아무튼 호색가는 아니고  그저 발정난 씨수퇘지에 불가할뿐이다.     흔히 웅성이 도를 넘어 비도덕적이면 “수욕”이니 무엇이니 하는데 따지고 보면 역시  한참 잘못된  비유이다. 짐승은 생육본능을 아무데서나 꺼리낌없이 행사하지만 인간들처럼 놀음삼아 “성”을 희롱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혼외련자를 멋지게도 “정부”라고  칭한다. 로무시장의 막벌이군들의 입에서도 걸려나오는 정부라는 이 개념은 오도되고 있고 그 본색적의미를 변색시키고있다.    중세기의  기사시대에 《정부》의 이야기에는 확실히 아름다운 사랑의 쏘나타가 많았다. 지금은 돈다발만 내흔들면 얻을수 있는게 소위 “정부”이지만 진짜 정부에는 그런 비속한 의미가 들어있은게 아니였다. 육체도 감정도 사랑도 그리고 그 모든것이상품화 된 현시 흔해빠진 “정부”라는것은 거개 몰래 사통하는 남자, 몰래 사통하는 녀자라는 차원에서 쓰이고 있는데 차라리 “전부(錢婦, 錢夫)”라고하는것이 아마 더 실제적일것이다.    호색이 나쁜가? 나쁠리 없다. 좋은 색상은 눈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현란한 꽃들이 눈뿌리를 뺀다해서 꽃의 잘못은 없다. 아름다운 꽃밭을 마구 휘 젖고다니는자는 결코 “호색자”가 아니다.     아무튼 호색이란 이 말은 남자들이 발명한것으로서 웅성들의 특허이자 원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저층의미는 녀성용품의 은형소비자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대로 녀자들속에도 남색을 좋아하는 호색녀들이 많다. 녀자들도 얼굴이 잘 생긴 남자들을 좋아하는 천성이 있다. 그래서 중국에는《요조숙녀 군자호구 (窈窕淑女,君子好逑)》라는 경구가 있게 된것인지 모르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색에도 좋고 나쁨이 있다. 색은 결코 옷차림에서 취하게 되는것도 아니고 사랑스러워야 비로소 호색의 의미를 띠게 된다. 색이 좋아서 사랑스럽다는것은 결코 도덕적설교가 아니다. 색에는 좋고나쁨이 있을뿐만아니라 높고 낮음도 있다. 호색은 서로 더불어서 새로운 호색도(好色图)이루게 되는데 부디 근시가 되지 말아야 하거니와 원시가 되여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기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자기 가까이에 있다.    세상이 넓고 사람도 천층만층 구만층이라 호색도 많고 바로 그런 호색이 있기에 세계는 그렇듯 아름답고 호색에 좋은점이 많기에 생활도 그처럼 아름다운것이다. 모든 웅성이 진정한 호색자가 되여지는 때이면 지구촌에 성문화가 문화다워질 때일것이다.                          2006 년 3 월 5 일  
662    결혼을 말하다 댓글:  조회:4407  추천:0  2015-10-12
                                     결혼을 말하다      언제부터인가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이 류행되였다. 결혼이 련애과정의 졸업일수는 있으나 그것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재출발이다. 결호는 불타던 감정의 새로운 화합반응이라 할수 있다.    처음에 우연한 만남이 되여 련애라는 가속운동을 했다면 결혼은 속도가 고른 등 속운동으로서 필연적인것이다. 결혼은 인간의 가장 복잡하고 위대한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것이다. 낮은소리로 사랑을 속삭이던 녀자는 에덴동산에서 위대한 모성애의 옹호자로 되였음을 떳떳이 선포하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초심하던 남자는 위대한 아버지의 제1후보로 되였음을 선포한다.     두사람은 백두폭포처럼 사랑을 찧어내며 백하수의 급물살을 타고 사랑의 바다를 향해 줄기차게 흐를수 있다. 바닥을 알수 없이 깊고 맑고 철철 넘치는 사랑의 천지에서 남자는 익사하기 직전까지 마음껏 자맥질할 권리가 주어진다. 녀자에게는 정감의 보물고를 열어가는 금열쇠가 쥐여진다.    또 다른 시점에서 결혼은 층집을 오르는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승강기를 타고 오르고 어떤 사람은 걸어서 오른다. 첫눈에 정이 들었거나 처음 만나서 감전되여 결 혼까지 이른것은 승강기를 탄것과 같은데 이들은 왕왕 구름을 타고 안개를 헤치며 재 빨리 어느 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그동안 중력중심을 상실하고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승강기가 고장나서 내리지도 더 오르지도 못하게 될 때 후회막급하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상규에 따라 한걸음에 한층계씩 오른다. 걸음이 온당하기에 비록 랑만이 적고 힘들기는 하여도 자유로움은 만끽할수 있다. 자유자재로 더 올라갈수 도 있고 자기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층한층 내려올수도 있다. 그러나 허공에 달린듯한 아찔함도 없고 승강기안에서의 랑만도 없다.    정과 애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인격의 우렬을 표징한다. 결혼은서 양식으로 교회당에서 신부를 향하여 “네, 원해요.”하고 말한다음 서로 결혼반지를 끼워주는것만이 아니라 금옥보다 더 귀중한 승낙과 책임인것이다. 무릇 그 반지가 몇 k 혹은 몇십k이든 그것의 진정한 무게는 당신이 일생동안에 감당해야 할 부하인것이다.    결혼은 드라마와 같아서 그 생명력은 부단히 새로운 화면, 새로운 대화를 하는데서 과시된다. 결혼의 매력은 부부가 자신을 새롭게 부상시키고 충실하게 하며 게으름없이 윤색하여 대방에게 신선감을 주는데서 나타난다. 결혼의 주요목적은 함께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수많은 무언의 대화와 소통에 힘입어 생활을 달착지근하게 영위해가려는데 있다.    모종 의미에서 결혼은 인생행로에서의 달리기경주라고 할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고속으로 겨우 100메터를 달리고 주저앉을수도 있는것이며 어떤 사람은 줄기차게 장거리를 뛸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마라손식으로 전반 경주로를 달릴수 있다. 머리를 돌려 자기가 달려온 로정을 바라볼 때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를 달린 감수는 필연코 다를것이다.    결혼전에는 우주를 단 한사람의 공간으로 줄이고 그 한사람을 신으로까지 확대하였지만 밀월이 끝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자기가 달려가야 할 종점을 모르는 달리기에 망연자실할수도 있다.    결혼은 서정시로 시작되였지만 미구에 산문으로 엮어갈수밖에 없으며 때론 황당파극이 연출될 때도 있을것이다. 결혼생활은 바로 인생의 또 다른 교실이다. 안해(남 편)은 무보수의 교원이다. 하기에 늘 대방에게 자상스럽고 친절하라고 요구할수 없으며 생활에서 부단히 제기되는 의난문제를 짜증내지 않고 가르쳐달라고 바랄수도 없다    결혼생활이 주요수업내용이 되는 인생교실에는 행복보다 불행이 더 자주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인생수업에서 가장 어려운 수업은 결혼생활수업이 되는것이다. 자기 인생수업만큼은 스승이 따로 없다. 자기 인생을 대체할 스승은 이 세상에서 태여나지 않았기때문이다.    인생학교에서는 련습도 허용되지 않는다. 결혼생활은 향락만 있는게 아니다. 아주 무거운 생활의 보따리도 걸머져야 한다. 인생을 극장이라고도 하고 유희라고도 하지만 누가 정말 결혼생활을 유희로 여긴다면 그는 기필코 인생이 실패할것이며 영원히 생활의 노예가 될것이다.    인생은 체험하고 느끼고 생활의 잠규칙을 가급적으로 파악해야 할 과제를 제기하고있다. 결혼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영위하라고 내준 행복의 가원이지만 자칫 무덤으로 될수도 있다. 세상에는 탄탄대로만 있는것이 아니듯이 결혼생활에 쾌락과 웃음만 있을수는 없다. 진창도 있고 벼랑길도 있고 낭떠러지도 있을수 있지만 역시 행복의 항구로 통하는 두 사람만의 길이다.    결혼생활의 매 한페지마다를 충실하게 채워간다면 두 사람은 자기 생명의 보람을 도처에서 맛볼것이다. 결혼은 몇번이고 할수 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은 그렇게 매양 조화로울수 없다.“장마다 망둥이 나오랴!”는 속담도 있고 “갈수록 심산”이란 말도 있듯이 리혼서를 소개신떼듯이 한다고 해서 매번 행복이 약속된다고 볼수 없다.    리지는 결혼생활에서의 검찰관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미궁을 꿰뚫어볼수 없다면 각이한 성정들이 쏟아내는 알륵과 충돌의 흙사태를 막아내지 못할것이다. 현재의 그 복됨을 알고 그 복됨을 잘 지켜가시라. 화속에서 복을 보아낼줄 아는가 모르는가에서 지혜로운가 우직한가를 보아낼수 있다.    정신생활에서 정신적결합의 중요성이 자각의식이 되여진것은 결혼관념이 명확해진 다음의 절차이지만 조화의 표징은 서로간의 리해와 관용이다. 감정위기가 결혼에서 역행적고험이라면 관용과 아량은 순행적인 고험이다. 남녀가 일심동체로 되여 영 위해가는 생활은 과거의 달콤한 추억에 관심이 없다. 자기 마음의 공허에서 자칫 영화의 지난날을 불러올수 있기때문이다.    우리는 오색찬란함속에서 옳고그름을 곧잘 혼동하며 눈부신 유혹속에서 진실과 허위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가기쉽다. 두쌍의 눈과 눈이 마주보지만 마음이 멀어진다면 리별의 정거장에서 손을 저을지 모른다. 홀로 살면 세월도 쉬이 늙는 법이거늘 보금자리를 스스로 마스지 말고 부디 잘 보듬으시라.    결혼은 피아노연주와 같아서 열손가락을 전부 동원해야 아름다운 악장을 연주할수 있다. 함께 연주하는 생활의 주선률에 서로 마음의 귀를 기울이라. 언젠가 인생의 저문 고개마루에 석양이 불타올 때면 지나간 악장들이 그리워지고 지각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절실히 느끼게 될것이다.                              2007년 11월 2일
661    사랑도 기술이다 댓글:  조회:4487  추천:0  2015-10-12
                                            사랑도 기술이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은 사랑의 홍수가 범람하는 시대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정영들의 전당이라는 대학교정이 현대아담들과 이브들의 공공연한 에덴동산이 된것은 물론이고 초고중생들도 소위 이성“친구”가 없으면 축에 들지 못한다 하고 심지어 소학교애숭이들마저 친구니 뭐니하고 짝짝꿍치고 다니니 말이다.    남녀의 애정이 인류감정의 극치여서인가? 현대인생마당은 곧 애정극장이고 인생학은 곧 애정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사랑이 있기에 인간세상은 천국이 된것이다. 사랑이 없는 상아의 광한궁을 누가 가려할것인가?그렇듯 애정은 인생현장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구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롬은《사랑의 기술》이라는 자기 저서에서 사랑은 천부적능력이여서 우리가 느끼는대로 행동하면서 사랑을 실천할수 있다는 안이한 해답을 하기엔 현대사회와 인간 자체가 너무 복잡하고 미묘하다고 쓰면서 사랑을 하는데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랑자체에 모호성이 있고 림기응변성이 있으니 무슨 원리따위나 공식이 있을수 있으랴만 사랑에 학문이 있는것만은 분명하다. 사람을 현혹케 하는 사랑왕국에는 필연보다 우연이 다분하다. 한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게 되였다면 천생연분이라기보다 우연적인 만남이다. 따라서 정애의 표현방식도 각이하기 마련이다.    애정심리학에서는 애정은 명확히 리유를 말할수 없는 일종 호감으로부터 발효한다고 서술하고있다. 그 호감이 신속하고 뜨겁게 발효할 때 심혼이 사로잡히지만 시작과 달리 호감이 명백한 리유로 차겁게 굳어질 때  애정극에 더는 극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애정사전에《첫눈에 정이 들다.(一見钟情)》라는 말이 있는데 많은 남녀간 사랑의 기적이 첫눈길에서 시작된것은 사실이고 정감발전의 론리대로 보아도 첫눈에 튕긴 사랑의 불꽃이 대뜸 정염으로 타오를수 있다. 그것은 처녀총각의 심령에서 진행되는 한차례 심리고속운동이다. 그런 돌발적인 심리활동은 강렬한 내심충동의 표현으로서 흔히 귀맛좋게 숙명이라고들 말한다.    그래서 자고로 문인들의 붓끝에서 찬미되여왔고 리상화되기까지했다. 례컨대 로미오와 쥴리에트의 첫눈에 든 정으로부터 고전적애정비극이 엮어졌고 그로부터 사랑의 전형은 언제나 비극에서 출현된다는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상 첫눈에는 애정대상을 발견했을뿐이지 마음의 깊은 곳에서 사랑을 격발시켰다고 단정할수 없다. 영국 런던대학의 바텔스교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는 자기공명 영상(MRI)으로 하여 비판적사고를 멈춘다고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본의 아니게 바보가 되고 눈이 멀게 된다고 한다. 사랑에 눈먼 련인들은 십중팔구 비판적사고력이 정지되여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사실 뜨거운 사랑의 도가니에 빠진 련인들에겐 비판적투시력이 금물이다. 모처럼 만난 자기《백마왕자(서시)》를 의심한다는것은 제심장을 의심하는것과 같기때문이다. 사랑으로 모든것을 극복할수 있다는 무모함도 이로부터 비롯되는것이다. 기실 첫눈에 든 사랑에 미쳐도 그 격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갑짝사랑 영리별이라는 말이나 서둘러 결혼하면 천천히 후회한다는 말이나 다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가령 애정학공식을 세워야 한다면 일반적으로 추구식과 만나는 공식을 세울수 있는데 젊은이들은 흔히 추구식이나 만나는식은 간략해 버리고 해답에만 매달리기 일쑤이다. 만나는식을 잘 계산하지 않으면 답이 령으로 될수 있는데도 말이다. 추구의 꽃마차를 질주하더라도 필요한 거리를 보존해야지 초고속으로 달리기만 한다면 꼭 사고를 칠수 있다. 남자들은 흔히 녀자를 바라볼 때 가슴이 울렁이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녀자들은 그것이 자기 매력의 결과라고 긍지를 가지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생활은 책에 쓴것처럼 늘 아름답기만 한것이 아니다. 현실은《나》의 맹목적사랑이 대방에게 비선의적으로 리용당하는 슬픈 사연들이 너무도 많다는것을 증명하고있다. 원래부터 제동장치가 없는 사랑의 꽃마차를 경우에 따라 리성으로 제동할  필요가 있는것이 바로 이때문이다. 한걸음이 평생의 한이 되기십상이다. 이런 시점에서 서로 사랑이 아니였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을 때 끝낼수 있도록 리혼법이 만들어진것은 참으로 일대 진보이고 민주라 해야 할것이다.    자기가 세운 애정계산식을 다 풀어본다음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지만 사랑은 확실히 인생학의 정수이다. 경험이 보여주다싶이 눈에서 생긴 사랑은 거개 눈에서 죽어버리거나 결말이 없는 산문시로 되여졌다. 누구나 사랑에 쉽게 눈멀수 있다는 부끄러운 약점을 인정하는것이 사랑의 급행렬차가 탈선하지 않고 미로에 들어서지 않을수 있는 신호등이 될수 있으며 예방책이 될수 있다.    첫눈에 정는 원인을 굳이 캔다면 그들 매개인의 개성특질, 또는 반응의 민감성과 속도 등 문제에 소급된다. 두사람의 기질특점의 무언중의 물리적반응일수 있다는 설명이 되겠다. 그러나 또 많은 경우 무심히 웃는 꽃의 웃음이 그대를 상사병에 걸리게 할수도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질적으로 볼때 일반적으로 점액질의 사람은 우정으로부터 점차 애정에로 발전하는바 그런 류형의 사람들에게서는 번개식사랑의 기적이 드물게 이루어진다. 애정심리학각도에서 본다면 첫눈에 정이 드는 사람들은 십상팔구 기질적으로 쉽게 노하거나 기뻐하는 다혈질들로서 일단 리상적이라고 인지되면 즉시 강렬한 반응을 보인다.    애정감수는 여러가지 부동한 인소로 구성되여 있다. 이를테면 첫눈에 정이 들게 된 주요감각은 촉각이나 후각이 아니라 시각, 청각감수이다. 시각은 현실세계를 감지하는 주요형식으로서 시각형상은 사람의 모종 의식을 격동시키고 사유평가를 인기 시키며 애정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호감 혹은 그 반대인 락인을 찍어준다.    상대방의 용모에 대한 시각감지는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대방의 용모특징에서 심리적인것, 즉 보이지 않는 품질을 보아내고 심지어 문화정도, 직업, 등도 판단한다는것은 용이하하지 않다. 눈에서 생긴 호감은 실제상 자기 내심리상의 현실적반영인것이다. 이런 심리리상은 먼저 의식중에 형성되여 있은것으로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구체적형상의 모식이 되는것이다.    인생을 유희이라지만 애정은 결코 유희가 아니다. 진실한 정감은 마치 치약처럼 꽉 짜면 나오는 그런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사랑은 모종의 의무감을 전제로 한 숭고한 련맹이다. 시공간은 이 련맹의 견고성을 고험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세월의 고험은 사랑의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참사랑의 시금석으로 된다.    참사랑은 신비의 안개 낀 리성과 비리성의 오솔길에서의 인내를 앞세운 만유라고 할수 있다. 금과를 따먹을 생각에 조급하다면 에덴동산에 오르는것은 위험한 유희다. 사랑의 비탈길은 천천히 오르게 되여 있지만 증오의 내리받이는 단숨에 뛰여내리기 마련이다. 점유로써 곧 끝나버린 애정은 불에 날아드는 부나비의 정사와도 또 다른 주제의 비극이다. 첫사랑의 달콤하기만 한것이 아니라 심령의 탐색으로서 또 다른 자기를 찾는 기회인것이 좋다.    쥬피터의 화살은 자고로 조용히 날아갔고 수집음은 고전적인 사랑의 순결함의 표지였다. 사랑에 빠지면 선녀도 천국을 잊는다고 했다. 자발적이고 신비로운  사랑의 매력은 많은 젊은이들을 아무 인연도 없고 까닭도 모르면서 모험적으로 정염의 도가니속에 뛰여들게 한다. 그건 단순한 욕정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첫눈에 든 정은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여 생활의 비바람속에서 상록수로 자라나기 어렵다.    흔히 랑만으로 시작된 초련을 한수의 서정시라 한다. 그러나 진실한 서정시는 진실한 심장들에서만 씌여질수 있다. 두눈에는 얼굴을, 마음에는 이름을, 가슴속에는 아쉬움을, 이것이 사랑노트의 마지막 페지이다.    결혼생활은 산문으로 씌여진다. 그러나 그 산문의 주제가 바뀌거나 생활소재가 산만해지면 잡담으로 끝나고만다. 첫눈에 곧 잘 정드는 련인들이여, 밀월은 한달이면 끝나지만 인생은 한달에 끝나지 않는다. 밀월의 단꿀은 단숨에 마셔버릴수 있지만 사랑의 상록수는 아픔으로 크고 그만큼 열매도 평생을 두고 익는다.    거꾸로 피라미트를 쌓을수 있는가? 세월의 유혹의 침습에도 끄떡없는 사랑탑은 진실한 두마음우에만 쌓을수 있다. 세상엔 안개속에 려산을 보는격으로  남자를 보는 처녀들이  있는가하면 남자를 자기곁에 잡아두기 위해 자기를 아끼지 않는 처녀들이 많은데 가석하게도 남자들에게 상반신과 하반신을 관리하는 두뇌가 각각이라는것을 모른다. 상반신을 지배하는 두뇌는 리성으로 애정을 관리하고 하반신을 지배하는 두뇌는 정욕의 분출을 지휘한다.    지금은 애정홍수가 범람하는 시대일뿐더러 사랑의 위기시대라고 할수도 있다. 혹자는 위장결혼시대, 즉흥부부시대이라고도 말한다. 돈냄새 피우면서 조강지처도 헌신짝 벗어던진다. 상품경제시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혼인, 사랑은 일종의 교역이다. 하느님이 생리상에서 아담과 이브의 호상 수요를 안배하였다면 현시대 남자는 녀자의 가장 큰 소비품이자 고객이고 반대로 녀자도 남자의 최대의 소비품이자 고객이다. 매개 청춘남녀는 애정을 제조하는 기업체이다. 교역의 내용은 대방의 성제공, 물질과 금전, 권력과 명성, 용모와 재능 등등이다.    타락한 사랑의 늪에서 감각을 찾고 편리를 건져내는 현대중국인들에게는 하나의 귀감이 되지 않을수 없는 진실한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어느 집에서 집수리를 하려고 벽을 뜯었다. 그런데 벽사이에 꼬리가 못에 박혀 갇힌 족제비 한마리를 발견했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일이였다. 곰곰히 돌이켜 보니 십년전에 집을 지을 때 가련한 족제비가 공교롭게도 사경에 처하게 된것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족제비가 그렇게 십년을 살아온것이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그 비밀이 절로 밝혀졌다. 주인이 생각에 잠 겨있는데 어데선가 입에 무엇을 가득 문 족제비 한마리가 벽으로 기여올랐다. 주인은 가슴이 뭉클해났다. 한낱 미물의 본능적 행위일수도 있지만 감동없이는 볼수 없는 생명의 찬가가 아니랴,    긴긴 세월을 하루같이 먹을것을 날라다 준 다른 한 족제비가 너무나 위대했다. 못에 박힌 족제비가 반려인지 어미인지, 형제자매인인가 하는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값치를수 없는 생사불변의 헌시적인 사랑, 인간들도 미치기 어려운 서사시가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10년 세월을 하루같이 끈끈하게 엮어졌다는 그것이다. 그 족제비야 말로 무엇이 진지한 사랑인가? 감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사실로 해석하지 않는가?    사랑은 대가를 치르고 얻을수 없고 만들어지는것도 아니다. 오직 소망할수 있을 뿐이다. 따뜻한 사랑은 두 가슴으로 쓸수 있고 황홀한 사랑의 사랑의 무지개는 두 육체가 하나로 융합될 때 그려지고 결말없는 사랑의 장시는 두 령혼이 하나로 얽혔을 때만이 엮어지게 된다!                                                                       2006년 7월 23일
660    (진언수상록 99) 난해원 민족(难解冤民族)의 비극 댓글:  조회:4829  추천:0  2015-10-11
                       난해원 민족(难解冤民族)의 비극                                          진 언      해원상생(解冤相生)이란 인간관의 중심원리로서 해원이란 곧 포용에 이르는것을 말한다. 해원(解冤)이란 지향을 개인대 개인의 인간관계 차원을 넘어서 범민족적으로 확장한다면 생기지 말았어야 할 원한을 풀고 단합의 광장에서 손에 손잡고 찬란했던 단군정신을 신장시키는것이다. 환언한다면 초미의 문제는 동족간에 생기지 말아야 했던 묵은 원한도 다독여 느슨하게 하고 상생의 환경을 조성해가는 일이다.    우리 배달족의 력사는 삼국의 장기간 상쟁의 비극을 연출한 피의 력사였으며 고려왕조를 배반한 리성계가 리씨조선을 세웠지만 500년동안 줄창 이웃 명조, 청조의 부용국으로 자족하면서 사대주의에 민족정신이 마멸된 력사이고 그것이 빌미가 되여 마침내는 36년간 일제놈들의 식민국으로 전락된 력사이다.    그러다가 피어린 항쟁끝에 어두운 밤이 찢겨지고 광복의 새 아침을 맞았지만 역시 외세에 의해 허리가 동강난후 동족상쟁의 비극을 엮으면서 그 원한이 쌓이고 쌓이여 폭발직전에 이르게 되였으니 누가 옳으며 누가 누구를 탓할수 있으랴, 해원의 시대는 언제 오며 누구에 의해 열릴것인가? 호시탐탐하는 외세? 비린 사대주의?    아니다, 언제건, 어디에서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실을 어길수가 없다. 아무도 두쪽이 난 민족성을 되찾아주지 않는다. 기왕에 막무가내로 맺혀진 원한이라도 상생(相生)을 도모하여 풀어버려야 공멸을 피면할수 있다. 아무리 평화통일을 고창해도 우선 해원이 없는 상생은 있을수 없거니와 민족융합이란 공리공담이 될뿐이다.    그런데 “다음”의 뉴스들이나 댓글란을 일별하면 사분오렬되여 있는 민족심리를 여실히 읽을수 있다. 리념, 체제탓이던가? 100년숙적인 일본국보다 동족에 더 이를 갈며 미워하고 헐뜯고 비아냥거리며 잡을공론에 민족성마저 구중천에 날려보낸 “이인 (异人)”제씨들을 보나니 안쓰러운지? 곤혹스러운지? 촌부라서 잘 모르겠다.    인류사 상하5천년, 살륙의 전란이 그칠새없어 천하가 피비린 원한으로 가득차게 되였다. 지역적, 인종적으로는 백인종에 대한 흑인종, 황인종의 원한이 그 버금일것이고 더 세분하면 한 지구촌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옥신각신, 티각태각해온 민족간의 원한이 세번째로 될것인데 우리 민족적처럼 동족간에 원한을 갈며 으르렁거리는 민족이 이 지구촌 어느곳에 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동족에 대한 원한의 근원은 무엇일가? 누가 한마디로 해석하여 만인의 공통된 심리를 까밝힐수 있을것인가? 언필칭 비난부터 쏟아대는 작자들을 가늠해보면 맥도 모르고 침통부터 빼드는 어덩덩들이 대부분인것같다. 체제대결70년에 굳어진 무조건 악감정인가? 정글법칙이 진행형인 민족지림에서 배달민족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책략이 공동운명체에로의 통합이 아닌가? 이것은 도리도 아닌 일반상식이다.    리념적협력이란 어불성설이요 불가능한 구상이지만 실리적인 시점에서 기능주의적접근은 가능한바 그 가능성을 열어가는 첫대문이 동족간의 해원(解怨)이다. 민족융합은 말에서 이룩되는게 아니라 가슴을 열고 살을 맛대여야 이룩된다. 원한에 사무 쳐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동족을 제압하려는 착상은 신라를 답습하는것인가?    서로 으르렁거리면“어옹”들만 다리를 들고 웃을것이다. 기득권과 자존심을 내세우고 서로 대립된다면 황새와 조개의 운명을 면할수 없다. 이는 필연적이다. 상생할때만 진정한 평화를 론할수 있다. 삼천리강산이 철조망으로 동강나면서 하나의 민족간에 원한이 쌓여가고 궁극적으로 민족이질화를 가속화시켰다. 인류의 평화는 인간상호간, 국가,민족간, 계급,계층간, 인종간 등 모두 원한을 풀고 상생해야 달성된다는 원리에 구구한 설명이 필요할가? 설명이 없던들 누가 반기를 들것인가?    민족통일에 필요한 요소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화해,협력, 해묵은 원한의 해소, 이질화심화의 극복이 있다. 화해의 무드가 부족한 상태에서 힘의 론리로 대화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성사될수 없다. 외세가 민족통합을 저애해도 리념적사고를 뛰여 넘어 민족정신을 앞세워야 희망이 있는 민족으로 거듭날수 있다는것은 철같은 진리이다.  뼈는 부러져도 살은 이어져있다. 하건만 우리 배달족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고 혈맥마저 끊기여 마침내 동족애마저 소실되였으니 비애가 아닌가?    형제간 싸움에 이웃집 나그네가 와서 조해할수는 있지만 외세에 힘입어 호가호위 하는것은 정말 웃기는 작태이다. 자기를 지배하던 침략민족과는 손잡을지언정 동족간에는 불구대천이라는 리념은 그야말로 사이비 그 이상이 아닌가? 상호의존이 알륵의 첫해결책이라면 동족의 상호의존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국가주의보다 민족주의가 우선이 되는게 현실적이고 실리적이 아니겠는가? 남북간의 기능주의적 미래를 위해하는게 바람직하다면서 대결의 강경립장이 우선이라고 말한다면 겉과 속이 그렇게 다르고 자가당착이 아닐수 없다. 해원상생의 상호리해, 상호존중, 상부상조를 실현해야만 입버릇처럼 말하는 평화통일이 가능할뿐이다.    반만년의 뿌리깊은 동족의 혈연을 전제로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요소의 소통과 협력이 하나의 기능적요소가 되여질 때 무엇을 론해도 론하라. 이른바 해원상생이 현실주의에서 접근하지 못하고서야 상호신뢰 구축이 공리공담이 아니될리 없다. 해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갖잖게 업신여기는 거들먹거림을 버리고 상호리해가 필수적인데 국민일반심리가 원한의 곬만 깊이 파고있으니 비극의 민족이 아니될수 없다.    오래동안 갈린 민족이라도 상호리해는 서로의 처지와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럽게 받아들이는게 첫째이다. 남북이 70년간 반목과 쟁투를 해온 조건에서 해원상생의 상호리해라는 덕목이 작정하고 미워하는 악덕으로 바뀌였으니 통탄할 일이 아니랴, 상대방을 무시하고 적대시하려고 작심했다면 입간지러운 말을 늘여놓지 말라.    평화롭게 공생하려면 상대방에게 척을 짓지 말라는것이 해원의 원리다. 상대방이 싫어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먼저 싫어할 일이면서도 마냥 자극하기에만 열중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렬근성의 한가지이다. 해원상생의“상생”이라는 덕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것은 남을 잘되게 하라”는 덕목이다. 그러나 깊은 내막을 알수도 없는 같은 백성으로 내뱉는 말마디마다 선의적이 아니니 융합에 희망이 있기나 한가?    좋은 일엔 남이요 궂은 일엔 형제간이라는 말이 있다. 마땅히 협력해야 할 상대를 주적으로 삼고 외세까지 등에 없고 압살하려는 작태는 세상을 웃기고있다. 대립과 반목에 핏대를 세우고 상대방을 비방하며 적대적으로 대하는 한 통일론은 탁상공론도 아닌 황통이다. 남북의 민초들부터 민족적 동질감을 기초로 해원하고 상생을 지향할 때 소통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이 허물리고 대망의 통일광장이 열릴게 아닌가?    해원상생은 남북분단의 한이 서린 불행의 력사를 종식시키고 민족통합으로 우리 민족의 활로를 열어가야 이 지구촌에 영존할것이다. 물론 미래변수가 많은 통일공정에서 우선은 인과관계를 잘 규명하고 변화, 발전의 시점에서 화해무드를 조성해야 하는데 어찌된 심사인지 그냥 왼새끼만 꼬고있으니 참으로 잘들났다고 해야 하나?   “ 원쑤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여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라는 해원의 리념이 좋은데 실천적으로는 묘망하다. 그런데 대결에만 악바리니 상호리해와 상호존중으로 상부상조를 론할 계제조차 마련될것인가? 남북의 리념, 사회,문화적인 갈등으로 인한 불통은 원(冤)이 쌓이고 맺혀 동족이면서도 날이 갈수록 이질화에로 치닫고있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기 위해 먼저 악감정을 앞세운 선입견부터 털어버려야 한다. 불원이면 상호불신밖에 커질게 없다. 남북간의 기류가 갈수록 렬악해지니 과시 난해원 민족(难解冤民族)이 아니며 비극이 아닌고?                                 2015년 8월 21일
659    (칼럼) 력사는 력사인것을 댓글:  조회:4424  추천:0  2015-10-10
                                 력사는 력사인것을…                                          진 언      력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일체력사는 당대사”라는 이딸리아 철학가 크로체의 유명한 명제가 있는데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여기서“당대”란 단순히 시간개념이 아니라 다분히는 하나의 사상개념이라 한다. 즉 크로체 자신이 표명한것처럼“당대”란 력사를 서술할 때 나타나는 일종 사고상태라는것이다.    이런 사고는 의심할바없이 사상적현실화와 력사화를 의미할것인바 사상을 거친 력사화과정에 나타나는 력사학자들의 주관리념일수밖에 없다. 일설로 사상과 력사의 합일이라던가, “력사는 결코 죽은것에 관한 력사가 아니라 생활에 관한 력사”라는 제기법도 있다. 그러나 “당대사”라는 력사에 대하여 사학자들이 절대적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특히 집권자들이 마치 자기의 리상과 포부에 근거하여 력사를 기술해도 되는것처럼 인식한다면 무모함이다.    어찌생각하면 력사는 진상과 가상을 포괄하고 있는데 량자가 모두 력사의 일부분으로서 당시의 력사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는 모두 력사로서 력사의 진상만 비로소 력사인것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력사를 기어이 두가지로 나누어야 한다면 과거에 발생했던 사실과 문자 혹은 기타 부호로 쓴것 혹은 제작해낸 력사이고 그것은 다시 영광스러운 력사와 수치러운 력사로 나뉜다.    사실로서의 력사란, 가장 현명한 재판관인 세월님의 필기장으로서 시공속에 영원히 굳어진 존재물이다. “력사가 력사인것은…”신화도 아니고 동화도 아닌 피와 땀과 생명활동으로 찍은 인간들의 발자국으로서 철길의 침목들 사이에 자갈돌들처럼 좋도록 고루고 덜어내고 보탤수 없는 편단들로 정체를 이루고있고 세월의 갈피갈피에 새겨져서 주관욕망으로 드틸수 없는 진실로 굳어져 있기때문이다.    “력사는 력사이기에”력사적정의감이 있는 사람들이 력사를 존중하라고 납함하는것이다. 력사는 자고로 그랬던것처럼 진실된것으로만 존재가치가 있고 그래서 후대들에게 거울로서의 효용성과 선험적인 지식가치가 있다. 원칙상에서 말하면 력사는 롱단되여서는 안되지만 권력이 롱단된 국가라면 자연히 력사도 롱단될수밖에 없다. 몇천년래 새로운 권력중심은 구권력중심의 권력롱단과 력사롱단을 타파하고 새로운 권력롱단과 력사롱단을 형성하였다. 력사가 정의라는 말은 여기서 무색해진다. 력사학가로서 사상의 미명아래 력사를 서술하는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결코 력사자체가 력사학가들에게 자기의 근본적요구를 제출하지 않는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근거없는 아전인수식의 서술은 불허한다. 후대들이 요구하는 력사는 력사사건에 생동한 체험이 체현되여있고 의미와 사건도 새롭게 제련해낸것이지 제구미대로 조작해낸 “력사”가 아니다. 크로체는 편년사를“가짜력사”로 간주하였다.    특히 명기할것은 력사서술에서 주관성은 결코 개인정감의 주관성이 아니며  력사학자의 애증과 원한을 성토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사상상의 일치성을 가져오기 위한것이며 이런 일치성은 나아가서 력사내용의 일치성을 실현하기에 가치로운것이다. “일체 력사는 모두 당대사”라는 명제에 또 다른 오해가 생길수 있는데 설사 력사가 당대사라하더라도 력사학가가 자기의 권리를 리용하거나 혹은 어용학자로 충당되여 현실수요에 따라 력사를 편찬하려들수 있다는것이다. 소위 현실수요라면 정치적인것으로서 례컨대 애국주의, 혹은 어느 개인의 목적 즉 다른 사람을 설복하기 위하여 전문 자기에게 유리한 관점을 인용하기, 이미 사실로 공인된 력사사실을 루락하거나 삭제하고 수요대로 첨가하는 작태 등을 가리킨다.    크로체는 이런 두가지 력사를 분별하여“실용성력사”와“수사학적력사”라고 명명하였다.“실용력사(기실 력사가 아님)”조작이 일종 실제활동으로 될 때 기필코 사회적비난을 면치못하게 된다. 이른바 실용성력사에서는 취할점이 전혀없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력사에 도덕교육이라는 계관을 씌워놓고 고찰하는것은 력사에 대한 통찰력이 없다는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런 공능 혹은 목적은 모두 외재적력사이기때문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물을진대 력사란 과연 진실한것인가? 만약 크로체의“일체력사는 당대사이다”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력사의 진실성을 보증할 방법이 없게 된다. 비록 크로체가 어떠한 실용목적으로“가위로 오려내고 풀로 붙이는식”의 력사연구를 반대하였지만“당대사”자체가 력사의 객관성을 보증할수 없게 된다. 이는 확실히 곤혹이다. 물론 불가지론자들처럼 력사의 진실성을 의심할수는 없지만도,    크로체는 단순히 사실자체에서 력사발전의 원인과 방법을 찾는것을 부인하였을뿐만아니라 관념적인 론리로 력사의 론리를 대체하는것도 반대하였다. 력사는 흘러 갔다고 할수도 있고 앞으로 나간다고 할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력사는 순수 객관적지 식에 굳어진것은 아니다. 부동한 력사시대, 부동한 문화배경, 부동한 계급리념과 부동한 력사관에 따라 동일한 력사사건, 력사인물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 분분하기 마련인데 소위 력사시각이란 곧 력사를 자기 구미에 맞게 요리하려는 욕념이다.    그만큼 력사서란 한번 써놓으면 성경처럼 불변의 교조로 될수 없기에 력사인식은 부단히 심화되고 부단히 발전하므로 잘못된 기록, 서술을 수정할것이 수요되는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력사교과서는 력사소설책이 아니다. 누가 가히 력사학가들의 결론이 맞는다고 확신할수 있는가? 무릇 어떤 민족, 어떤 국가이든 력사를 존중하는것은 자기를 존중하는것이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것이며 자기들의 선조를 존중하는것이다. 어떤 력사사실들은“존귀자”에게 불리하면 분식하거나 아예 고쳐쓰는데 력사의 실제 년대에 가까울수록 뚜렷하게 드러난다는것은 참 의미로운 일이다.    한 민족, 한 나라의 력사기억은 해당국가의 국민의 기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력사기억의 구성은 주요하게 력사교육으로 완성된다. 하기에 력사교과서로 인기된 어떠한 쟁의이든 필연적으로 국민의 보편적인 기억의 밑뿌리를 흔들게 된다. 그러므로 력사교과서는 국가의 의식형태의 시험장이 되여서는 안될뿐더러 오히려 진상의 시금석이 되여야 바람직하다. 결국 자신에 대한 력사적기편이 되기때문이다.    력사가 길고길든, 력사시실이 많든, 얼마나 많은 수난을 겪었든간에, 그리고 심적으로 용납할수 없든 선택성적인 망각, 선택성적인 외곡, 선택성적인 수개를 해놓고 기억하고 싶은것만 기록하려는것은 력사도피이다. 진실한 력사는 서술의 진실만이 아 니라 재료의 선택에서 력사의 추악한 면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전방위적이고 정확한 력사기술은 한 민족이 구비해야 할 리성 의 체현이다. 진정한 력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재적인것으로서 사상발전을 거쳐 자연스럽게 사상가치와 목적에 도달한 력사인것이다. 이런 사상적 발전이 바로 력사의 발전으로서 어떠한 외재적인 부가물이 가첨된 사상적목적과 가치가 아니다. 권력자가 력사책은 고 칠수는 있지만 력사는 고칠수 없는 노릇이다.   “력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속에 살아있는 과거다. (콜링우드) 그래선가? 한국 의 어떤 교수씨가 좌경화가 어쩌구 하면서 국정화교과서를 써야 나라를 살린다고 하더라면 어떤 목적하에 거짓과 아집으로 자기를 기만하는것이고 나아가서 후대들을 우롱하는것이다. 사학은 기지의 력사사실에서 인간의 존재론적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이지 력사세탁이 아니다. 자아기편만큼 우둔한 짓거리가 또 있겠는가? 지금 일본 등 나라들 에서 바로“실용성력사”에 열중하면서 그런 악순환을 자초하고있다.  소위 대화족의 행태처럼 자기 력사를 직시할줄 모르는 민족은 영원히 희망이 없다.                                           2013년 12월 18일
658    (진언씨 수상록 95) 가능성에 넘 사활을 걸지마쇼 댓글:  조회:4784  추천:0  2015-10-05
                                        가능성에 넘 사활을 걸지마쇼                                                      진 언      가능성이란 무어냐? 일이 이루어지거나 실현될수 있음, 또는 어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임의의 한 해답이 그 문제에서 가정하고있는 여러가지 제약조건을 만족하는지의 여부를 나타내는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가능성과 현실성은 객관적합법칙적 발전과정의 중요한 측면의 하나를 표현하는 유물변증법의 범주이다.    무릇 새것은 처음에는 가능성으로서만 나타난다. 가능성이란 사물 및 현상의 발 에 있어서 그것들이 아직 현실성으로 되지 못하고 다만 발전의 가능한 경향으로서만 존재하는 그러한 상태, 그러한 단계를 말하는것이다. 현실성이란 이미 실현된 가능성이다. 형식적인 공허한 가능성을 실제적인 가능성과 구별하여야 한다. 형식적인 가능성의 견지에서는 “모든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것이 현실적이지는 않다.    형식적 즉 추상적가능성은 그것을 필연적으로 현실성으로 전화하게 하는 실제적인 구체적 제조건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그러한 가능성이다. 어떤 조건하에서는 추상적가능성인것도 다른 조건하에서는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될수 있다. 따라서 실제적 가능성은 형식적 가능성과는 달라서 그것이 실현될 객관적기초가 있고 또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즉 현실성으로 전화되는 그러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능성과 현실성을 엄격히 구별할줄 알아야 하고 그만큼 가능성이 곧 현실성인듯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가능성이 현실성이 아니듯이 필연성보다 우연성의 인소가 더 다분하다. 변증유물론은 자연 및 사회에서 지배하는것은 우연성이 아니라 필연성이라는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객관적세계에 있어서 모든 본질적인것은 필연성에 의하여, 즉 객관적발전법칙에 의하여 야기된다는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낮과 밤이 교체되는것, 한 유기체의 종이 다른 유기체의 종으로 진화되는것 등등, 이러한 모든것은 객관적필연성,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법칙에 의하여 일어난다.    변증유물론은 제현상 및 과정의 본질자체에 근거를 가지고있는것, 사물간의 내적련관 및 관계로부터 흘러나오는것으로서 그 기본특징에 있어서 달리는 될수 없는 그러한것을 필연성으로 리해한다. 따라서 필연성의 객관성적성격, 즉 자연 및 사회에 있어서 필연성이 인간의 의식이나 념원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그것들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는것을 인정한다.    이와 동시에 우연성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성을 그 자체가 아니라 부차적인 원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것으로서 이렇게도 진행될수 있고 저렇게도 진행될수 있고 존재할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수도 있는 그러한것을 우연성으로 리해한다. 례하면 한알의 종자가 알맞는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싹터서 자라난다. 그러나 발아하지 못할수도 있고 움이 텄다해도 우박을 맞거나 하면 끝까지 성숙하지 못할수도 있다. 우박은 우연성이다. 우박이 없다면 식물이 무난하게 성숙할것은 필연적이다.    물론 우연성도 역시 객관성격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우연성의 객관적성격을 부인하고 그것을 원인모를 현상에다 귀착시킨다면 커다란 오유를 범하게 된다. 사람은 앞일을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기에 많은 경우 이런저런 추상 혹은 예측을 하게 되고 하다 하다가 자칫 억측을 하는수도 있다.    인간의 본질이 실질상 현실성과 가능성의 통일이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분명하게 정의되고 있는것은 인간의 가능성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라고도 한다. 례하여 인간은 본래부터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도 의연히 가능성이지 현실성은 아니다. 이런 상식도 모르고 누구네들처럼 대방이 잘못되기만 바라다보니 맨날 무엇이 어찌될 가능성이 어떻구 하면서 혼자 찧고 까불어대면 되우 싱겁다.    허황한 욕망에 조급증이 불붙어 마냥 “이럴 가능성이 있다. 저럴 가능성이 있다”는 방정은 가능성판단이 아니라 희망사항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것이다. “그럴같다. 그럴것이라 생각된다”는식의 억측은 결코 가능성판단에 전제조건 일수 없으므로 맥도 모르고 침통부터 빼들기이다. 가능성판단이 객관성을 몰각한다면 하늘에 장대겨눔 질이다. 그런데도 적대감을 앞세워 허구헌날 “급변사태니 붕괴”니 하면서 오뉴월에 쇠불알이 뚝 떨어져 다 먹게나 된듯이 입맛부터 다시면 천하 바보스럽다.     형이상학자들은 우연성과 필연성을 서로 배제하는 개념으로 보는데 변증유물론에서는 필연성과 우연성은 서로 련관되여있으며 우연성은 다만 필연성의 보충 또는 발 현형태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우연성의 배후에는 언제나 자연 및 사회에 있어서의 발전행정을 규정하는 필연성이 숨어있는데 과학은 이 필연성을 발견하며 인식한다.    인식은 그것이 자연 및 사회의 제현상을 그 필연성에서 인식하는 때에라야만 과학적인것으로 될수 있다. 인식은 우연성에 기초할수는 없다. 우연성은 과학의 적이다. 가능성이란 말을 쓰기 좋아하고 가능성판단을 하기 좋아한다면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전화시키는데 필요한 제조건중에서는 객관적발전법칙에 대한 지식에 립각한 인간의 합목적활동이 거대한 역할을 논다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가능성원리도 모르고 무작정 가능성만 추리하려 한다면 헛다리를 짚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것이다.    매사에 제좋은 궁리로, 자신이 바라는대로 허접한 가능성만 찾다보면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기 십상이고 상상력으로도 미달이면 환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필연의 왕국에는 가능성이 많을지 모르지만 우연의 왕국에는 필연이란 없다. 누구네들처럼 남이 하려는 일을 사사건건 앞질러 예측하고싶으면 필연성과 현실성의 관계랑 잘 알고 예측하든 점을 치든 해야 헛나발이 되지 않을수 있다.    만약 어떤어떤 가능성에 사활을 걸었다면 일반 론리학상식쯤은 가지고있어야 적게 오판할것이다. 말하자면 가언적판단같은것을 말이다. 가언적판단에서“가언적”이라는 말은 “가설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갖는데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타당한 조건부로 옳바른 가설에 기초한다는 의미를 취한다. 주지하다싶이 가언적판단에는 조건판단 또는 제약판단과 순수 가언적판 두가지 종류가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더 크다던가? 그놈의“가능성타령”에 목이쉬다가 헛다리짚게 되면 닭쫓던 개 울쳐다보는격도 아니다. 나무밑에서 토끼가 부딪쳐 죽기를 기다리는 우직한 농부얘기는 우연히 일어난 일을 경험처럼, 혹은 필연처럼 믿다가 결국 일년농사를 망쳤다는 교훈을 주는것이다. 다른 하나는 착실하게 일하려 하지 않고 의외의 수확을 얻고자하는 허황된 생각에 일침을 가한것이다.    농부는 가능성철학이 아니라 이른바 기대가능성에 혼신을 매달아버린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믿는다는것은 우직하기 짝이 없다는것을 의미 한다. 가능성판단에 흥취가 짙더라도 넘겨짚기로 숨은 야망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억측이다. 가능성 자체는 막연함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있는 상황과 외부적조건 그리고 자신이 할수 있는 력량에 대한 총체적검증을 바탕으로 가능성판단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피상적 현상에 두눈이 멀면 추상에 매달리게 될뿐이다. 어떤 돌팔이의사가“당신은 죽을 병만 들지 않으면 장수할 가능성이 있소.”라고 한다면 그보다 머절스러운 진단이 더 있을가? 옛날 농촌에서는 이렇쿵 저렇쿵 시러베같은 소리를 잘 줴치면 “에라잇, 그놈의 가능타령 그만 집어쳐라, 죽지 않으면 살소리를 뉘긴들 못할락꼬? ”하고 죽박을 주었더랬다.                                              2015년 10월 3일         
657    남녀혼합계산식 댓글:  조회:5329  추천:0  2015-10-01
                             남녀혼합계산식       세계는 남성들의것이며 또한 녀성들의것이다. 그러나 표면상에서 남성들의것일뿐 실질상에서는 녀성들의것이다. 녀성은 천성적으로 거대한 흡인력을 가진 자석이다.     하느님이 아담을 내고 이브를 만들 때 웅성의 전제와 횡포를 념려해서 아담의 갈 비뼈로 만들었다고 한다. 웅성은 잃어버린 자기뼈를 찾으려고 녀성을 탐하게 되였고 녀성이 웅성의 품을 떠날수 없는것은 자기가 태여난 품에 돌아가려 하기때문이란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의 수자를 센다는 서양격언이 바로 이에서 기인된것이리라.     어찌 되였든간에 아담과 이브가 불가분리의 생명체로 이 세상에 존재하였기에 아담은 생활의 동력을 얻고 이브는 생기를 얻게 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남녀사이에 종말이 없는 애정희비극이 엮어지게 된것이다.     남자에게 진정 수요되는것은 대자연과 녀자이다. 그외의 부귀공명따위는 사치품에 불과하다. 20대전의 청년들은 성에 대한 동경속에서 진화된다고 한다. 자초에 웅성만 생겨나 방황했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을가? 분명 존재하지 못했을것이다.     현대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차츰 대자연을 떠나게 하고있다. 녀성은 웅성들과 대자연사이에 남은 최후의 뉴대이고 그만큼 녀인세계 자체가 또 다른 하나의 자연경 관을 이룬다.하여 남녀의 애정방정식은 숙명적으로 더하기로 되여졌다. 한자에서 남(男)자는 밭에서 힘을 쓴다는 뜻으로서 7획이고 녀(女)자는 3획이다. 두글자를 합 하면 10획인데 십전십미(十全十美)가 된다는 뜻을 시사하고있다. 좋을 호(好)자도 남녀가 더불어야 좋다는 의미로 조합된것이라 한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를 내시고 평등하게 이성지합을 즐기며 길이 번성하기를 기원한 하느님의 축복은 모계사회가 끝남과 동시에 마침표를 찍고 웅성들이 녀인들의 인생비극을 만들어낸 악랄한 흉수로 되여버렸다. 웅성은 보다 동물적인바 혹자는 흉맹 한 메돼지이기도 하고 혹자는 악독한 안경사이기도 하며 혹자는 코끼리이기도 하고 사처에 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쥐들이기도 하다.     녀성은 식물에 속한다. 혹자는 달빛아래 암자색의 꽃송이이고 혹자는 해빛아래 생기로 충만된 영춘화이고 혹자는 미끈한 참대이고 혹자는 생명력이 극히 왕성한 선 인장이기도 하다. 동물적인 웅성은 각자 구미에 따라 육식도 하고 초식도 하고 잡식 도 한다. 그래서 염색체가 그렇게 판이해졌을수도 있다. 웅성의 염색체는 XY이고 녀 성의 성염색체는 XX로서 체질상, 기질상, 심리상에서 엄연히 구별된다.     따라서 인생현장에서 담당하는 각색도 다르게 되였고 이률배반현상이 영존하게 되였다. 성서의 저자가 남자였기에 뱀이 이브를 유혹했다고 썼는지는 모르지만 유혹 당한것은 확실히 이브였다. 그리고 금과를 아담에게 먹임으로써 동범이 되게 하였다. 이브가 없었다면 원죄는 아담의 자기행위로 단죄되였을것이다. 이브가 먼저 금과를 따먹었기에 후세에 재화의 근원이라고 락인찍혔을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인생고가 시작되면서 진실에 먼저 눈을뜬이는 아담이였다. 그때로부터 아담의 후예들은 진실에 잘 놀라고 이브의 후예들은 환상속에 살게 되였는지 모른다. 아담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고역속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을 익혔고 이브는 해산의 진통속에서 아담을 이끄는 본능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녀자는 남자에 의해 순화되였고 남자는 녀자에 의해 완성되여갔다. 바꾸어 말하면 녀자는 작 지만 거대한 인력을 가진 천연자석이였고 남자는 그를 따르는 쇠붙이였다.     흔히 성공한 남자의 뒤에 현숙한 녀인이 서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녀인이 꼭 그 남자의 안해일수는 없다. 많은 경우 그 남자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맹모삼천(孟母三迁)지교”에 나오는 맹자의 어머니나 떡장사를 해서 아들을 공부시킨 한석봉의 어 머니, 그리고 률곡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이를 실증하고도 남는다.     누군가 남녀성염색체에 근거하여 방정식을 세웠다. 남자는 염색체가XY이므로 2원1차방정식인데 해는 여러개이고 녀자의 염색체는 XX이므로 1원2차방정식을 세 울수 있는바 해는 확정적이고 많아야 두개라고 하였다. 기발하고 유모아적인 해법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남녀생활에 근거하여 혼합식을 세우려고 한다.     남자들은 선천성기질때문에 거개 불확실한 미래에 살면서 명예의 쪽배에 오르기 좋아하고 그런 형이상학적충동이 생명의 가원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있다. 녀자들은 감정의 배에 잘 오르지만 많은 면에서 남자들보다 확실하며 생명의 가원을 찾아헤매지 않는다. 녀자들 자신이 곧 생명가원이고 땅이고 꽃이고 풀이고 강물이고 밥짓는 연기이기때문이다.     그러나 남녀의 애정심리는 다르다. 나자의 사랑은 근근히 자아실현을 위한것으로 서 인생교과서의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자기 녀자가 아무리 매력이 있어도 다 른 모든 여성의 아름다움을 배척하지 않는다. 이런 심리가 남자들이 방탕하게 되는 근원이며 남자들속에 많은“수캐”들이 나타나는 근원이다.     훌륭한 녀자들에게는 사랑이 인생 자체이기에 그처럼 자아희생적이다. 녀자들의 사랑은 파괴로 시작되 아픔으로 여문다.주재자 제우스가 이브에게 줄수 있는것의 하 나가 바로 헌신이였기때문이다. 하기에 녀자들은 자기르 배반한 남자라도 아픈 추억 속에서 아름다왔던 사연들만 간직하며 자기가 속했던 사랑의 기둥을 맴돌면서 어떻게 심어진 씨앗이든 변함없는 모성애로 키우려한다. 눈물로 씻어 속으로 삭이는것으로써 용서하는것이다. 이는 숙명적불행이면서도 웅성이 영원히 미칠수 없는 고귀한 품성이 기도 하다.     체질상에서 남자들이 가스미 녀자들보다 넓지만 가슴이 넓은만큼 모든 남자들이 흉금도 넓은것이 아니다. 보통 가정에서 녀자가 유명해졌다면 남자는 곧 경계한다. 남자들은 잊는것으로 자기를 배반한 용서한다지만 속으로는 복수를 벼르며 저주한다. 그리하여 사랑때문에 빚어진 피의 비극은 거개 남자들에게 의해 저질러진다. 그것을 멋지게 사나이로 분노라고 이름하고있다.     남녀가 어울려 수놓가는 애정세계에서 서로 성애를 추구하면서 번식을 완성하는 것은 인류의 일대 진보이다. 인간세상은 사랑이 있기에 제우스의 알프스산정과 비길 수 있다고 한다. 허나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방식은 그렇게도 다르다. 녀자들은 많 은 녀자들의 선망을 받는 남자를 얻는것이 사랑의 쟁탈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이지만 남자는 아무도 사랑한적이 없는 순수한 녀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남녀의 성애에 공동하게 배타성이 고유되여있지만 남자의 소유욕이 배척하는것은 동성의 정적이지 다른 이성이 아니다.     남자들은 사랑을 고백할 때 머리로 지어낸 말을 한다. 녀자를 낚기 위해 자기의 불행사를 미끼로 던지는것이 상투적이다. 하지만 아무 미끼나 덮치는 붕어처럼 녀자 들은 곧잘 받아문다. 녀자들 고유의 동정심이 그렇게 시키는것이다. 흔히 중년남자를 사랑하게 된 소녀들으 탈선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요란한 사랑의 맹세는 남자들의 전매품이라 할수 있다. 바다를 기울이고 산을 옮겨오는 그런 맹세는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즉흥연설이다. 그런 즉흥연설의 첫장에 그녀를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겠다고 쓰지만 부록에는 꼭 자기를 위해 희생하라는 계약서가 씌여있다.     그런데도 충실한 청중인 녀자는 아주 숙연한 마음으로 듣고 감동되여 한평생 사랑하겠다는 말이 확답이 아닌줄 알면서도 눈물이 글썽해져 남자의 가슴에 사랑산을 옮겨놓고 사랑의 바다를 끌어들이려 한다. 그렇게 녀자는 남자를 착각의 챔피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남자는 맹세를 구중천에 날려보내고 녀자를 불만의 메가폰으로 만든다. 그래서 녀자들에게 남자를 보려면 망원경으로 보라고 충고하는것이다.     남자의 사랑은 진공형이라지만 표상적일뿐 본질이 아니다. 한것은 남자는 급기야 녀자의 포로가 되여버리기때문이다. 성애에서 웅성은 어린애같이 어리궂고 녀자는 어 머니다운 마음으로 그 지꿎은 응석을 받아들이며 행복감을 느낀다. 바로 그때문에 침 대우에서는 영웅도 없고 황제도 없이 보통의 웅성만이 뒹군다. 웅성의 정애는 반복형이고 과정보다 결과에 집념하기에 전부의 사랑이 침상우에서만 완성되는것처럼 자긍하면서 폭포같이 정욕을 쏟아내며 전률한다.     녀자들의 사랑은 남자들과 반대로 점층환상형으로서 과정에 신경쓰며 호수같이 아늑하며 연연한 정으로 애욕을 만족시킨다. 미묘한 감정세계에서 예감의 능수들인 녀자들은 웅성의 횡포한 욕정을 자성으로 다스리면서 피정복의 보상을 몇곱절 받아낸 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많은것을 참아내고 희생할 각오도 한다.     남자는 주는 본능이, 녀자는 받는 본능이 있다. 남자의 사랑은 주는것에 정비례 하고 녀자의 사랑은 받는것에 정비례된다. 남자는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을 더 주려하 지만 녀자는 자기가 받는만큼 사랑을 내주면서도 일면 웅성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 도 담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전적덕성을 기진 녀성들에게만 있을수 있는 전통미덕이다.     현대물질문명은 사랑의 고전적의미를 철저히 색바래지게 하였다. 현시대 남자들 이 녀자를 볼 때 먼저 가슴을 본다면 녀자들은 남자의 돈주머니의 두께를 가늠한다. 웅성의 정욕의 근원은 미색에 있고 녀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심리원천은 남자의 지갑속에 있다해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돈없는 남자는 파먹을것 없는 김치독이라는 숙어가 만들어진것이 아닐가?     현시대는 “사랑”의 전성기이다. 허지만 남자들이 쉽게 내뱉는 “사랑해!”는 “현재”라는 속마음에 국한되여있고 녀자들의 “사랑해요!”라는 말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이라는 조건부가 붙어있다. 현대아담들의 배반은 무절제한 애욕에서 시작되고 현대이브들의 배반은 무한정한 물욕에서 비롯된다.     현대이브들은 고전미를 우습게 여기며 갈수록 로출에 열을 올리고있다. 기실 유방으로 섹시함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긍지를 느끼는 녀자라면 정복당하고싶다는 변상적인 자아표백이다. 류행을 즐기는 아씨들은 주동적이고 다양한 직각과 정없는 열정의 가열기술을 닦는데 재간을 보이며 그것이 한밑천이 되여진다.     지금은 찾아보기가 퍽 힘들지만 수치심으로 베일을 쓴 녀자는 아직 정복당하지 않았다는 성스러운 표징이다. 녀자들의 진정한 매력은 예나 지금이나 수집음속에서 발산된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활짝 걷히면 녀자의 신비성이 바닥이 난다는것을 모르 는 녀자들이 시대풍조에 급진적이다.     우스운것은 현대아담들이 전통적인 웅성미에 흥미를 잃고 이브를 딞지 못해 점점 녀성화추세로 나가고있는것이다. 녀자를 흉내내는 남자는 남자를 흉내내는 녀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불구자들이다. 문명시대에 오히려 녀자에 의해 원시인이 되는 남자가 갈수록 많아지고 남자에 의해 마녀가 되여진 녀자가 갈수록 많아지고있다.     재래로 녀자를 물이라고 했다. 남자의 본질은 마른 흙으로서 물로 이겨야 무슨 형상이든지 빚을수 있다. 하지만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물렁팥죽 같은 진흙이 되면 아무것도 빚어낼수 없다. 이 시점에서 남자의 절반은 녀자라고 한다.남자는 녀자 를 떠나면 왕정한 남자가 될수 없지만 녀자는 남자를 떠나도 완미한 녀인으로 남는다. 원래 질이 괜찮은 흙이지만 물이 과분하게 스며들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맹탕이 되고만 웅성들이 너무 많다.     지금은 서문경이 혀를 내두를 남자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남자들은 녀자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돈으로 말아서 침대에 던지려한다. 그렇게 되면 십상팔구 돈을 쓰게 되고 돈이 없으면 흑사심이 튀여나와 사욕을 채우라고 꼬드긴다. 나중에 감방 입장권을 떼여주거나 심하면 저승사자에게 추천한다. 타락한 현대이브들에게 녹아난 탐관오리들이 거개 이런 내막을 잘 알고있다.     남자들이 차차 그것에 놀라움과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것은 녀자들에 대한 료해가 점점 깊어졌다는 표명이 아니라 감각과 관습에 의해 오히려 더구나 무디여졌다는것이 실증될뿐이다. 남자들은 일단 녀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녀자를 잘 아는듯하지만 기실 아는것이 너무 적다. 남자들의 가장 명지한 태도는 이제라도 녀자들에 대해 대해 너무 몰랐다고 시인하고 자기가 첫녀자와 접촉했을 때의 그 신성하고 신비하던 감각을 소중히 간직하는것이다.     남자는 태양, 녀자는 달, 이 세상에 가령 남자가 없다면 모든 영욕이 없을것이며 녀자가 없다면 인간사회에 생기와 따스함이 없을것이다. 남자는 관악기로서 끝까지 아름다운 소야곡을 부르면 훌륭한 남편이고 녀자는 현악기로서 일생에 한번도 줄이 끊어지지 않으면 현처량모이다. 이로써 남녀가 함께 풀어야 할 혼합계산식의 성립조건이 얼추 갖추어진것 같다.                                   2008년 1월 10일  
656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댓글:  조회:1989  추천:0  2015-10-01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본심리교정쎈터에서 일류의 수준으로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본쎈터는 목전 수많은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전화가 각종 위법란기, 범죄의 내적요인이 되고있는 국내현황에 립각하고 인민들의 절박한 수요에 의해 새로 설립한 쎈터입니다.    본쎈터는 특히 경제발전과 빈부차이를 축소하는 길에 걸림돌이 되고 막무가내한 사회공해로 되고있는 부정부패에 절치부심하는 민심을 감안하여 개발한 시스템으로서 해당자들의 심리를 교정하여 인민의 공복다운 렴결봉공형관리로 새롭게 부상시키기 위해 심리청결을 하는것을  취지로 합니다.      심리자문실에서 예비교정을 해드림니다. 례컨대 당신은 권좌에 오르기 바쁘게 심통이 먹통이 되였다는것을 자각하고있는가? 관리로서 어디에서나 떳떳이 나설만큼 도덕표준이 도달했다고 느끼고있는가? 권력을 쥐였을 때 한몫 크게 챙기지 못해 종일 안절부절하지 않는가? 당신은 자기가 《인민공복》이라는것을 자각하고 백성을 위해 복을 창조한다고 자긍하는가?…만일 상술한 큰 문제상에서 명랑하게 대답할수 없다면 혼자 골머리를 앓지 말고 심리교정쎈테에 등록하기를 권고하는바입니다.    본쎈터는 인민대중의 직속자선단체이지만 세계에 둘도없는 심리교정쎈터로서 교정사들도 세계적으로 덕망있는 전문가들입니다. 사람을 구하는것이 최종 목표이므 로 교정내용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교정방식도 독특합니다. 본쎈터는 전 사회에 낯을 돌려 복합형, 청렴형인재로 재생하도록 하기 위해 대상에 따라 각양하게 교정해드리며 다종다양한 국제교정술도 인입하였습니다.    본쎈터에서는 봉페식교정을 하는바 교정대상자들의 실제에 근거하여 반을 편성하는데 유치원에서 소반, 중반, 대반에《면양반》,《토끼반》,《비둘기반》등이 있듯이 본쎈터에서도《홍군반》,《로팔로반》,《허운봉반》,《초유록반》등 력사의의가 있는 명칭으로 반을 편성합니다.    본쎈터는 개발정신이 독특하고 심리교정내용이 다양다종합니다. 주요한 심리교정 대상자들은 탐관오리들입니다. 탐관이란 물욕에 눈이 어두워 미련해진 사람으로서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로심초사하는것이 가장 특징적입니다. 거개 머리가 단순하여 요행심리에 매달리다가 결국 석류치마밑에서 들통나서 일패도지하는 비정한 인간들의 악성리기심, 등치고 간빼먹는 투기심리 등 심리교정의 종류가 각양각색입니다.      성별, 년령, 직업, 급별 등을 불문합니다. 그러나 곧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위기심리에서 충족한 후반생을 마련하려고 억지로 욕심을 채우는59세 현상, 기대치 는 높은데 장애에 부딪쳤을 때 그 한발작이 천고의 한이 될줄을 모르고 물이 흐린김 에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39세현상과 같이 두개 난관을 넘을수 없다고 자각한 사람은 특별대상자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알아주는 청관들은 일체 사절하는바 그 이상 좋은 심리상태란 존재하지 않기때문입니다.    허다한 탐관오리들이 《39세》,《59세》이 두개의 난관을 넘지 못하는데 인간의 체력, 지력, 기억력은 년령과 직접 관계되지만 탐욕심만은 년령과 무관하므로 이 두개 년령단계에서 심리교정이 초미의 문제로 나선다는것을 특히 주명해두는바 입니다.     당전 이런 년령단계의 비정한 당정관리들의 비뚠심리를 교정하고 지도하여 건강하고 청렴한 관리심리구조를 가지게 하는것은 민중들의 숙망일뿐만아니라 바로 당과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계되는 준엄한 과제이기에 심리교정에 들어간후 육체상, 정서상 상대적으로 부담이 과중하다는것을 미리 통보하는바입니다.    본쎈터에서는 탐욕척결교정, 렴결봉공교정, 영욕 8 종교정, 변태심리교정, 도덕 순결화교정, 징계형교정 등 20개의 전업교정부와 13개의 박사학위, 25개의 석사학위, 관리심리교정박사후 과정도 있으니 선택공간도 충분합니다.    탐욕척결교정에서는 교정방침이 특이한바 재실천속에서 자기가 가져야 할 바른 심리자세를 련마하게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이기도 한 사리사욕을 초월하여 극도의 탐욕성을 가진 인재들이 몰려들수 있기에 특별히 초빙한 선행탐욕자들을 반면 형상의 모델로 삼아 실천적으로 심리교정을 합니다. 음모술수, 아첨, 리간도발, 회유 책 등 온갖 악질적인 심리는 제일 좋은 교정실에서 집중교정을 받게 합니다.     렴결봉공교정은 인민의 공복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심리자질부터 의식하는것인데 본쎈터의 운영취지가 철두철미 렴결봉공정신을 구비하도록 하는것이므로 본인은 물론 교정사가 관리로서의 심리자질이 형성되였다고 인정될까지 반복형교정도 해드립니다. 교정은 사욕심리교정합본의 내용에 따라 진행됩니다,    렴결봉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저지능자는 먼저 예과교정에서 기본심리을 갖추게 하고 다음 자원원칙하에 본격교정에 들어갑니다. 렴결과 봉공은 우리 말에 있는 말이지만 렴결봉공은 한어식단어조합으로서 렴결이란 청렴하고 결백하다고 해석할수 있고 봉공이란 나라와 사회를 위해 힘써 일함이라고 해석할수 있습니다. 이 면에서 교정받고 일심불란으로 도덕수양을 닦으면 우선 본인에게 좋고 가족에게 좋으며 일신 영달에도 안전계수를 높여주니 용의자가 많을것으로 예정하고있습니다.    영욕8종교정은 최근년간에 개발한 교정술로서 이 교정의 내용은 이미 전 국가적인 국민도덕교화로 보급 되여있기에 상대적으로 강압적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녕 수치심이 무엇이고 진정한 영예심리가 무엇인지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은 별책에 등기합니다. 본쎈터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기에 모든것이 무상으로 운영됩니다.    본쎈터에 들어서면 다음 같은 글자를 정하게 쓴 액틀이 안겨올것입니다. 이 교정부가 본 쎈터의 핵심부이기때문입니다. 이 액틀에 쓰인 글을 10분간에 암송하지 못하 면 본인이 아무리 간곡하게 심리교정을 요구해도 완곡하게 사절합니다.    《8대영광과 8대수치》    1.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것은 영예이고 조국에 해를 끼치는것은 수치다.    2.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것은 영예이고 국민을 배신하는것은 수치다.    3. 과학을 숭상하는것은 영예이고 우매하고 무지한것은 수치다.    4. 근면성실하게 일하는것은 영예이고 편한것만 찾고 일하기 싫어하는것은 수치 다.    5. 단결해 서로 돕는것은 영예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자기리익만 좇는것은 수치다.    6. 성실하게 신의를 지키는것은 영예이고 리익을 좇아 의를 저버리는것은 수치 다.    7. 법과 규율을 지키는것은 영예이고 법을 어기고 규률을 혼란하게 하는것은 수치다.    8. 어려움을 참으며 분발하는것은 영예이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것은 수치 다.     이 교훈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였다는것을 잘 알고 있을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관리들을 포함한 국민전체의 정신재무장운동인것입니다. 본쎈터에서 심리교정을 마치면《영욕관》의 세기적의의를 명기하게 될것이고 새로운 리상형관리로 거듭날수 있다는것을 담보합니다. 본쎈터의 교정학자들은 《8영8치》를 눈에 넣고 귀에 넣고 머리에 넣고 가슴에 넣고있기에 외착없이 잘 교정해주고 그 기초상에서 실천에 옮겨 검증받는데 모를 박고있습니다.                 본쎈터주소: 현대시 인민로 사회구역1호빌딩                                               2008 년 1 월 20      
655    염라국탐방실록 댓글:  조회:4514  추천:0  2015-10-01
                     염라국탐방실록           아직 퍼렇게 살아서 지옥얘기를 한다는것은 너무나 격에 맞지 않는줄 알면서도 상념이 자꾸 음계쪽으로 흐르는것을 어쩔수 없다. 단떼의《지옥편》을 다시 읽으면서 잡생각이 무성해져서일가 ? 나는 세상에 공덕을 쌓은것이 없으니 천당에 가기는 만번 틀린 일이고 연옥쯤에라도 가면 다행일테인데 음으로 양으로 그리도 많은 죄를 짓고 저승길 앞당긴 악인들의 넋이 어찌 고통받는지 궁금해진다.     나는 환상의 조랑말을 타고 지옥입구에 들어선다. 거기엔 살아서 너무 게을렀던 자들이 벌과 말파리에 쏘여 알몸으로 뛰여 다니고있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연충이 기여다며 그들의 상처에서 흐른 피와 눈에서 흐른 눈물을 빨아먹고 있었다. 탄식과 울음소리와 비통한 웨침소리가 별도 없는 하늘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눈꼽만치도 동정심이 솟지 않았다.    다만 단떼의 안내를 맡았던 베르길리우스가 한 말이 들리는듯싶었다. 저들의 어두운생활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으므로 그밖의것이라면 어떤 운명이라도 부러워한 다고, 나는 안해가 외국에서 벌어보낸 돈으로 게으른 신사질하며 살다가 너무 편안 해서 죽은 배달족의 사내들이 있을수도 있겠다는 싱거운 생각을 남기고 돌아섰다.    다음은 제1옥 림보(Limbo)라는 곳이다. 단떼가 영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령혼과 공덕이 훌륭하여 존경받던 철인들과 시인들의 령혼이 있는곳이라고 했다. 내가 대철인들이나 명시인들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지나치면서 아프리카나 다른 지구들의 아이들이 기아선상에서 헤메다가 죽어서 이곳에 오지나 않았는지 해서 마음이 쓰이였다. 그리고 야차같은 이스라엘놈들의 무차별 폭격에 처참하게 죽은 레바논의 아이들이나 팔레스티나 아이들도 있겠지 하면서 차마 발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애욕의 죄를 범한 령혼들이 지옥의 폭풍에 시달리고있다는 제 2옥을 지나면서 일별하니 살아서 육욕의 향연에 제노라 했겠지만 너무나 너절한 넋들이여서 재판관 미노스가 죄를 가려내 형을 판정하여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어도 왼눈 한번 팔고싶지 않아서 얼른 외면해버렸다.     저주받고 차겁고 무거운 영원한 비가 내리는 3옥, 탐욕의 죄를 범한 사람들의 령혼이 새로운 가책으로 고통받는다는 곳이다. 다음은 제4옥이였는데 돈을 웬만큼 벌었다고 황금연이나 벌리고 몇십백만금을 퍼주고 묘지를 만들었다는 중국특색의 랑비자들이나 고리오나 뿔류쉬낀 같은 린색한들이 벌을 받고있었다. 이런 자들은 가슴으로 무거운 짐을 밀면서 끊임없이 빙빙 돌아다였다. 인간의 허무한 추구와 최후 운명에 대해 너무나 잘 말해주고있었다.    제5옥에서는 화를 지나치게 많이 내는 자들의 령혼이 스틱스강의 흙탕물속에서 벌을 받고 있다자만 별로 흥심이 없었다. 상급앞에서는 허리뼈가 부러지기나 한듯이 굽신거리다가도 하급들에게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우리 거기의 관료배들이 생각나서 쓰거운 웃음이 나올뿐이였다    소위 이단자들이 불에 그을린 묘안에서 벌을 받고있다는 제6옥도 스쳐지났다. 단떼는 착실한 신자여서 여기가 감명깊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별로였다. 타오르는 불길속에서《지구는 의연히 돌것이다.》라고 납함한 브루노같은 이단자나 장개석 국민당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구추백이나 채화삼, 방지민 같은 선각자들을 뵙고싶었지만 언감생심인듯싶어 욕심을 접었다.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원혼이 된 팽덕회장군이나 류소기님, 장지신이나 우라극 같은 《이단자》들은 꼭 배알하고 싶어도 눈물 한동이 쏟고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면 어쩌랴 싶기도 하고 이번에 모쪼록 탐방하려는 상대자들이 아니기에 아쉬워도 자리를 슬며시 뜨고 말았다.    제7옥은 이웃에 대한 폭력, 자신에 대한 폭력, 하느님에 대한 폭력으로 인해 죄를 지은 령혼들이 벌을 받고있다는 곳이였다. 인간세상엔 폭력으로 자기 한생을 장식한 인간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력대의 그 모든 극악한 형리들, 회자수들, 살인자, 강도들이야 지옥불에 타죽든 껍질을 벗기든 내가 아랑곳할것 없다. 다만 이라크에서 만행을 저지른 악마미국병졸이나 그짓을 알고도 모르는체 자전거나 타고 휘파람이나 불면서 군자연한 부시같은 국제폭력배들은 어째 앞당겨 끌어오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 나서 한참 바장이다가 떠났다.      제8옥에는 유혹자, 아첨꾼, 고성죄인 점성술가, 마술가, 탐관오리, 사기군, 화페위조자, 위선자, 도둑, 사기군집정관, 모략가, 불화와 분렬의 씨를 뿌린자, 등 사기와 기만으로 죄를 지은 령혼들이 벌을 받고있었는데 바위구멍속에 거꾸로 처박혀 서로 부딪치면서 불안, 오뇌의 한탄이 넘치고있엇다. 놀랍게도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 목과 턱이 몸통위에서 반대로 달려있었다.    제8옥 의 제5구렁에는 탐관오리들이 끓는 력청(沥青)속에 잠겨있고 갈퀴로 무장한 악마에게 감시받고 있었다. 죄인들은 력청속에 잠겼으나 이내 머리부터 다시 떠올랐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낯짝들마다 제딴에 군자연한 웃음을 띠려고 애썼으나 살았을 때 주석단에서 저런 너저분한 웃음을 게바르고 백성을 미혹시켰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속이 메스꺼웏다. 그러자 다리밑에 있던 마귀들이《여기서는 성스러운 얼굴》도 소용없다고 흉악하게 호령질했다. 나는 악귀들도 몸서리쳐졌지만 악관들이 역겨워서 돌아서서 허구픈 웃음을 씹었다.    제9원에는 친족을 배반한 령혼들, 조국과 자기 당을 배반한 자들, 배은망덕한 령혼들이 네개의 령역으로 구분된 코키토스의 얼음속에 갇혀있다, 지옥의 한가운데 지옥의 마왕인 루치페르가 있었는데 그는 세개의 입에 유다, 브루투스, 카시우스를 물고있었다. 여기서는 사랑과 권능, 지혜에 대응되는 증오, 무력, 무지를 표상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물건짝들을 알고싶지 않아도 붉은 당기앞에세 맹세한 자들이 개도  안먹는 그 돈때문에 배반자의 말로를 걸을수 있다는것이 너무도 불가사의했다.    내친김에 련옥이나 들려보고 싶었지만 연줄이 닿지 않아서 곧추 염라대왕전 으로  향했다. 염라전대문가에서 작은 귀신이 두눈을 딱 부릅뜨고 막아나섰다.《이런놈 보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귀신도 아닌 잡놈이 기신기신 기여드는거여?》소졸이라지만 역시 아귀는 아귀여서 등곬이 선뜩했지만 물러설수는 없었다. 내가 특별취재차로 온 탐방기자이라고 하니 마지못해 안에 전갈해주었다.    내가 주저주저하며 염라대왕이 군림하고있을법한 대궐을 찾아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염라전에서 어전회의가 열리고있었다. 특별취재를 왔노라고 크게 아룄더니 염라왕이 히쭉웃고는 자기 옆자리를 내주었다. 이승에서는 녕악하고 차디찬 마왕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몹시 놀랐다.  《마침 잘 왔다. 양계에서 한번도 여기 음계의 소식을 전하려고 찾아온 이승인이 없었는데 네놈은 꽤나 담대한 자이구나. 늬들 인간촌에서는 염라대왕에게로 가는 길에 로소가 따로 없다고 한다지. 맞는 말이다. 오면서 보았겠지? 신주대지에 인구가 하도 많아서 잡아오는 탐관오리들만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있지. 세계각국에서 오는 자들은 아직 보지 못했겠지만, 이 몇년래 어찌나 바쁜지 련휴일제를 실시해놓고도 나 이 대왕도 제대로 휴식해보지 못하고 있구나, 으허허허…》    보아하니 염라왕이 18장관들의 확대회를 소집하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심사와 처리문제를 회보받을 작정인듯 하였다. 염라대왕이 나직하게 알려주었다.《요 근년래 중국에 탐관오리들이 갈수록 늘고있어 그것들을 처치하는 일이 얼마나 번중해졌는지 모른다. 할수없이 여기 지부(地府)에서도 이승처럼 편제를 확대하고 판관들을 대거 초빙하였다. 이제 들어보면 알것이다.》   《여봐라, 어전회의를 시작하도록 하라. 오늘 정황회보를 하되 누구들처럼 틀에 박힌 빈말이나 거짓말, 큰소리를 줴치지 말고 근엄하게 하도록 하라.》    염라대왕의 호령은 추상같았다. 나는 얼른 가지고 간 소형록음기를 틀어놓았다. 아마 새로 부임한듯한 판관이 회보를 시작하였다.   《예ㅡ에 이번 어전회의는 제때에 열린 매우 중요한 회의올시다. 지부령도에서 친히 틀어쥐는데 대해 소관은 적극 지지하는바입니다. 본론에 들어가렵니다. 몇해전 이 염라전에 줄을 지어 대령한 탐관오리들로 말하면 과급이 많고 처급들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례하여 귀주의 염건굉이나 광동의 왕충, 하남의 중화같은 몇몇 물건짝들 이지요. 잠간, 제가 차물을 한모금 마시고요, 헴,헴…    그런데 요근년에는 과급, 처급들이 줄쳐서 들어왔고 청급인물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은 많고 일손은 적어서 거의 매일 초과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쓸데없는 빈소리고 관료작풍이라는거야. 실제문제를 말하거라.》   《예ㅡ황공하옵니다. 에, 말하자면 전 한계단에 과급이하 탐관오리들은 기본상 다 징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처급이상 탐관들 특별히는 청급이나 성급탐관들의 안건이 워낙 복잡하고 많아서 아직 처리하지 못하고있습니다. 대왕께서 몸소 결재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그게 어떤 자들인지 일일히 거명하도록 하라.》   《예ㅡ성, 부장급으로 한 성장의 천년 로임에 해당하는 4000만원을 후무린 성극걸이나 루만금을 탕진한 호장청따위들이지요. 청급으로 림국제, 리승룡이라든가 원화밀수사건에 걸려든 한무리 탐관 등, 기지부수입니다. 립공속죄하느라 자기 패당 을 물어먹은 검은세력두목들도 있습니다. 례하여 광동성상업검찰국 당조서기 리군이나 진황도시재정국장 희향오따위들이 넌출을 당기니 감자가 묻어나온것처럼 들통이 난놈들입니다.》   《오냐, 알겠다. 오늘 회보회의는 이만하고 아래에 상술한 현안들에 대한 처리 원칙을 말하겠다. 처급이상 탐관악관들은 중벌로 호되게 다스려라. 백성의 세금으로 배불리고 향락하면서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오수뢰하고 또 정부를 감춰두고 축첩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해친 못된자들이니 끓는 기름가마에 앉혔다가 칼산에 오르게 하라.   탐관들속에서 장물을 즉시 국고에 바치고 립공속죄표현이 뚜렷한 자들은 혹형을 가하지 말고 련옥에 보내여라. 그리고 우수한 자를 선발해서 작은 귀신으로 쓸수도 있다. 겸하여 말하거니와 지금은 음계나 양계나 정토가 없게 되였다. 아마도 이승에 서 잡혀온 자들이 나쁜 물을 먹인것같은데 여기 지부에서도 반부패력도를 가강하여 렴정건설을 잘 틀어쥐여야 하겠다. 늬들속에서 어느 놈이 감히 부패분자들의 꾀임에 빠져서 수뢰하고 탐오하는 현상이 발견되면 껍질을 벗기고 기름가마에 앉힐것이니 알고 서둘러라. 알겠느냐?》    십팔라한들과 소졸들이 일제히 엎드려 칙지를 받들어 모시였다.  《예ㅡ어느 존전이라고 일호차착인들 있으리까. 대왕마마의 금과옥조를 률법으로 삼아 절대절대 렴결봉공하오리다. 전하!그러하오나 이 근년에 탐관들이 무리지 어 잡히는 바람에 일은 많고 일손이 딸려 정히 고달프나이다. 양계에서는 할일 없는 관리들에도 로임을 부단히 올려주는데 우리 지부에서도 대우를 높여주시옵소.》   《음ㅡ듣고보니 근사한 의견들이다. 이승에서 로임을 크게 올려 관리들의 탐욕을 무마하고 청렴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알고있다. 그게 워낙 우스운 짓거리이지만 우리도 한번 시험해보도록 하자. 황차 새천년도 벌써 몇해 지났으니 개혁을 할때도 된것같다. 재정부장은 듣거라. 십팔장관들은 곱배로 올려주고 8만 소졸들에게도 적당히 대우를 해주라.    그리고 여기 일이 점점 더 분망해질것인즉 래년엔 기구개혁을 해야겠다. 편제를 두배로 늘이되 로동자, 농민출신으로 죽은자들속에서 판관들을 더 초빙하고 어중이 떠중이 잡놈들속에서도 쓸만한 놈들이 있거든 소졸로 충당할수 있다. 에ㅡ또 비록 천국에 있고 나이가 너무 많긴 하지만 포공어른을 모셔다가 고문으로 앉힐터인즉 그의 법치태도를 잘 모색해 배우도록 하라.》     말을 마친 염라왕은 나에게 얼굴을 돌리며 당부했다.   《경계가 달라서 접대할 방법이 없으니 그리 알고 돌아거라. 너도 보았겠지만 여기서는 늬들처럼 형상수립이니 뭐니 하면서 아래위가 짜고들어 죄행을 덮어감추거 나 자리를 옮겨놓아 뒤길을 마련해주고 큰문제는 작게 하고 작은 문제는 없애버리는 작법이 용허되지 않느니라. 탐방을 왔으면 음간의 소식을 대천세계에 진실하게 보도하도록 하여라. 본대로 들은대로, 있은 사실 그대로 쓰란말이다.    구로씨아의 문호 고리끼가 지옥같은 어느 섬도의 수용소를 탐방하고 인도주의가 제대로 관철되는 곳이고 죄수들의 락원이라고  보도하여 작가적인생에 패필을 쓴것을 너도 들어서 잘 알것이다. 그랬다간 장차 너를 18층지옥에 처넣을것이다. 붓쟁이가 량심을 버리면 제아무리 미사려구를 늘여놓아도 결국 당나발에 불과한것이니라.》    내가 꼭 당부를 저버리지 않을것이라고 미처 대답하기전에 염라대왕은 안개같이 사라져버렸다. 볼일을 다보았으니 구태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곳에 더 머물을 마음이 없었다.    염라전을 나서 다시 이승의 본연에로 돌아와 보니 나는 그냥 강기슭 백양나무 아래에 있었다. 조락을 알리는 가을엽서인가 병든 나무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처연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밤하늘을 쳐다보니 멀리 별이 총총한데 천상에 있다는 극치의 절경이 보고싶었다. 지옥을 거쳐왔으니 스스로 천국을 꿈꾸는것이리라.                                       2006년 9월 2 일  
654    (진언수상록 93)래일은 아직 오지 않았니라 댓글:  조회:4697  추천:0  2015-09-29
                      래일은 아직 오지 않았니라                                        진 언      래일이 언제냐? 아이가 명창한다.“한밤자고 나면 래일이지요.”그래 맞다. 오늘을 기준으로 다음에 오는 날이 래일이다. 래일의 본질은 바야흐로 존재할수 있지만 아직 존재로 되지 못한 그 부분의 시간이다. 무한정 엇바뀌는 래일, 스멀거리며 밝아오는 려명처럼 보이는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것도 아닌것이 바로 래일인가,    그런데 졸문에서의 래일은 미래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로 쓴다. 생각이란 바로 정신체험의 표현이므로 래일에 대한 생각은 래일 자체에서는 기원될수 없다. 미래란 유형의 현실이 아니므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속에만 있다. 일상으로 보면 오늘이 어제같고 래일도 오늘같은 나날이지만 래일에는 래일의 태양이 솟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연구한다 해도 생각에 국한될뿐 미래자체가 아니다.    대저, 세상사란 불가예측이거늘 뉘라서 계획대로 래일을 영위할수 있으며 계획서 두루말이처럼 펼쳐지는 인생을 살것인가? 밤이면 꿈속에서는 천갈래 길을 질주해도 낮이면 한갈래길에서 오고간다. 래일이 보다 나을수도 있고 오늘보다 더 역경일수도 있다. 래일이 보다 나을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기다리지만 래일 어찌될지도 모르니 발생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진행형처럼 상상하는것은 시간과 정력랑비이다.    추구가 인간의 본성이지만 래일을 두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듯 점치고 억측을 하느라 골머리를 짜낼 하등의 필요가 없다. 정답은 래일에 닥치고 보라는것이다. 래일 우뢰가 울면 들을수밖에 없는것이요 비오면 우산을 찾을수밖에 없는 취약한 인간이다. 래일 생뚱같이 벌어질 일에 어찌어찌 해야 한다고 수선피워봐야 호들갑일뿐이다. 예언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미래의 허무성의 각도에서 말하면 미래란 근본적으로 없다. 미래란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는가? 흔히 미래를 실체로 가정하고 토론하지만 미래란 바로 실제적으로 일이 발생한 그 시간대이므로 미래란 실제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눈으로 볼수 없지만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생각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지선각(先知先觉)과 이른바 미래을 준비한다는 헛개비들을 믿게 하는것이다.    기실 미래가 우리에게 내주는 지식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래일에 대해 확신할수 있는것은 오늘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것이다. 산은 옛산이요 강물은 그냥 흐르고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돌변할수 있을뿐 사물의 변화는 진행 형이지만 그렇듯 완만하다. 때가 돼야 천천히 다가오는 미래처럼 말이다.    과거와 미래는 련속성을 가지고있는데 첫째로 존재의 련속성 즉 시간의 추이에 따른 사물의 변화성이다. 두번째로 변화의 련속성이다. 모종 사물에 변화가 시작되였 더라도 일정한 시간 지속되면서 또 다른 련속성으로 체현된다. 우리가 일단 일종의 지속적변화 혹은 추세를 확인하였을 때 가히 장래 어느 한 때 거대한 변화를 예상할수는 있다. 례하여 이 몇십년래 중국의 관광산업이 신속하게 발전했으니 20년후에는 지금보다 려행객들이 더 많다고 단정하는 등, 그런데 이것은 상식문제이다.    셋째로 모식의 련속성이다. 수많은 변화는 모종 모식에 붓쫓는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비슷한 모식의 변화가 다시 발생하는것이다. 옛사람들이 태양의 하늘에서의 운행궤적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를 련계시켜 관찰하여 계절의 변화를 추출해냈다.    네번째로 관계의 련속성이다. 변화의 근원은 앞에 조건 혹은 원인으로서 이러한 관계는 잘 변하지 않는다. 이런 련계성을 확인하고 특정조건에 부합될 때 우리는 가히 어떤 사건의 발생을 예측할수도 있다. 만약 현실세계에 이런 기본원리의 련속성이 없다면, 만약 우리들이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면 철저히 망연자실해질수밖에 없다.    우리가 방금 흘려보낸 시간은 영원히 과거에 귀속되고 다음에 올 시간도 의연히 미래속에 잠재해 있다. 하기에 작금에 여하하든 지속기(持续期)란 없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과거로부터 미래를 맞게 된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세계에서 존재해 본적이 없는 다른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는것이다. 아무튼 기지의 존재와 변화, 모식과 인과관계의 련속성이 미래세계의 상황에 대해 생각할수 있는 기초를 제공할뿐이다.    불확실한 미래라는 제기법은 공연한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신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미래의 불확실성때문에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과는 별개로 인생이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러한 불확실성때문에 선인들이 모두 무기력했거나 미래를 두려워했다면 고도의 물질문명의 현재의 세상이 없었을것이다. 불확실하더라도 리상을 가지고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엮어나가야 한다는 지향과 래일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에서 래일이란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다. 래일에 발생할수 있는 일은 래일에만 알수 있다. 그런데도 미루어 예측인지 추측인지 한다는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애써도 예측할수 없는데 전문이란 미명을 앞세우고 남의 일을 두고 이렇쿵 저렇쿵 하는것은 기실 할일 없는 시러베들의 탁상공론이다.    례컨대 장차 벌어짐즉한 사건에 대해 관측을 낳았다고 하더라만 관측이란게 기상, 천문 등의 자연현상을 관찰하여 그 움직임을 측정함인데 보이지 않은 현상을 관측한다는 말이 아닌가? 너무 억지를 쓰려니 무형의 현상도 관측되는가? 알아도 병, 몰라도 병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아는게 병이라는것은 과거에만 적용되는 말로서 미래지 향적이 아니다. 미래에 대비하라는 말을 잘 쓰지만 어떻게 대비한단 말인가? 100% 확실한 정보란 없다. 그리고 그건 정보이지 현실이 아니므로 전혀 필요없다.    근일에 서울의 어떤 교수씨가 “통일후 행정체제구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를 열고 아직 오지도 않은 래일, 발생할지도 미정인 허상을 내놓고 시왈비왈 열을 올리였는데 탁상공 론전문가라 그런가? 설계도는 건축물이 아니며 동경은 현실이 아니다. 항간에는 다해놓은 기장밥도 먹어야 먹은것으로 된다는 말이 있다.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으려는 생각은 갸륵하지만 어디 번번이 있는 일인가?     미래는 언제나 시간의 편이지 인간의 주관욕망의 편이 아니다. 래일 하려는 일에 어떤 준비같은것은 필요하다. 례하여 탐험가들이 모지방으로 탐험을 떠나기전 당지 상황에 비추어 가능하게 일어날수 있는 돌연적인 변화를 예상하고 주밀하고 주도하게 준비하는것은 기본자세이다. 그러나 이런 준비는 국내외의 어떤 정치형세의 변화에 미리 대비한다는 허무한 궁리와는 전혀 딴 문제이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음지와 양지가 언제든지 바뀔수 있는것처럼 세계정국도 필경 불확정적이다. 상황에 따라 주동이던 자도 피동이 될수도 있다. 풍운조화란 인간이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신비하다. 명색이 전문가라면서 호들갑떠는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않다. 래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상상도 건덕지가 없으면 바라는대로 억측을 해댄다. 억측을 하는데는 높은 지상수가 수요되지 않지만 리성사유는 필수적이다. 환상가는 기특한 면이 있겠지만 망상가는 도무지 귀한데가 없다.    손에 땀을 쥐고 걱정해도 발생할 일은 기어코 발생할것이요 반대로 원쑤의 이웃집에 재난이 덮치라고 비난수해도 발생하지 않을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욕심만으로 환상을 현실로 만들수는 없다. 현실적기반도 없이 망상에 매달려 혼자 흥분해도 결국 참대나무로 물긷기(竹藍子打水一場空)와 같다. 그런데 왜들 그런 허황한 환상에 매달릴가? 매양 제멋에 아전인수하지 말고 순리대로 도는 세상사를 두고봐야지!                                         2015년 9월 12일
653    항일투사 추모시조(5수) 댓글:  조회:4928  추천:0  2015-09-26
                                 항일투사 추모시조                                                   골골이 봉이마다 록음청청 짙푸른데                         열혈의 투사들은 어디바루 숨쉬는고                         세월은 무정하다만 충혼들은 유정쿠나                          세월은 아득해도 련산련봉 의구허다                         민족의 불사조들 영생하여 부르난닷                         망각은 운무같아도 추모의정 영원하리                           쏘베트 구정부라 귀틀집은 헐망해도                         반일의 구국봉화 어두운밤 찢었으리                         토벌에 기한속에도 불타오른 일편단심                           반토굴 피폭공장 손마선은 없다만은                         밤새워  군복짓던 그녀들의 숨결높네                         巾帼의 녀영웅들을 눈물겨워 기리노라                           로옹들 세웠다는 반일투사 기념비에                         꽃다발 두묶음이 향기풍겨 반기는데                         술석잔 부어올리고 곤백번을 절하구퍼                                                                       (2015년 9월16일 소왕청반일투쟁유적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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