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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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    (진언씨수상록 90)“새도래”를 떠올리며 댓글:  조회:6756  추천:0  2015-08-26
                   “새도래”를 떠올리며                                 야 조       지금은 어떤지 내가 농사군으로 살때까지만도 밉광스럽도록 경망한 사람을 “새도래”,“홀리떼기”,“핼래깨비”“당개보살”이라고 비난했는데 다가 웅숭깊지 못하거나 도무지 진득한 멋이라곤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어원이 어찌된 사투리인지 몰라도 잘만 통했다. 가볍고 방정맞게 야단을 피우는 말이나 행동을 이르는“호깝쓴다.”는 말보다 더 자극적이여서 그랬던지 모른다.      그때는 “새도래”라는 말이 사투리거니만 하고 썼는데 인터넷 어학사전에서 보니“새도래”가 “새퉁이”이의 방언으로서 밉살스럽거나 경망한짓. 또는 그런짓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며 우리 연변에서도 잘 써왔던“얄개”와 비슷한 뜻이란다. 우리는 야살스러운 짓을 일삼는자를 얄개디(둥이)라고 불렀지만,     아무튼 우리 농촌에서는 새도래나 당개보살이나 핼래깨비들을 지각이 든 사람이면 모두 꺼렸다. 정서와 기분에 잘 휘둘리는 인간인만큼 군자가 아닌이상 경박함과 경망스러움과 태생적으로 등질수는 없지만 명색이 ×찬 남자로서 체질적으로 새도래가 되거나 당개보살, 핼래깨비라면 심리불건자라 할것이요 성격상 불치의 결함이 있다고 할것이다. 헌데 당사자들은 자신이 어떤지 모르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새도래란 흔히 아낙네들에게 잘 붙이는 칭호였지만 간혹 남자들속에도 있다. 내가 왜 귀찮은 “새도래”들에 인상이 련련한가? 역시나 그당시 새도래들 못지 않게 사회상에서 따돌림받던 귀찮은 존재이다보니 공수높은 공정판같은데는 보내주지 않고 논물관리나 건조실 불때기나 과수원일같은 기술로동은 “미더운 후계자” 자격이 없어 못하다보니 하릴없이 오리무리에 꽁지빠진 수탉처럼 아낙네들을 묻어다니며 밭김을 매고 논김매기에 “선줄군”이 되여 새도래들과 남달리 도타와질수밖에 없었던것이다.     혼자 있을 때를 빼놓고 무작정 꿀먹은 벙어리상을 해도 새도래 아낙들의 상대가 되여질 때가 다반사였다. 례컨대 벼모철, 모상판에서 벼모를 뜨는 아낙네들의 궁둥이 뒤에 널린 모춤을 주섬주섬주어 지계에 담을때나 논김을 맬때면 계급의식이 탁월한 새도래들은 시간마다, 날마다, 해마다 말해야 한다는 계급투쟁 각오와 의기가 하늘을 찔렀는지“원쑤들은 복벽을 꿈꾼다.”느니 “계급투쟁 잊지 말자!”느니 하는 노래를 고창하며 좋으나 궂으나 나더러 특별청중이 되라는것이였다.         울며겨자먹기라도 “제밀헐”이였다. 그러나 내놓고 두덜거릴수 없었던지라 그저 못들은체 하거나 피하는것이 상책인데 피할수도 없어 고스란히 들으며 누가 “복벽의 꿈”을 꾼다는것인지 곤혹에 몰두할수밖에 없었더랬다. 하여 숫핼래깨비나 “암새도래”들이라 하면 지레 진저리쳐지면서 질색이 되였다.     그때 만약 “꼴깝을 떨다”라는 욕을 알았다하더라도 곤백번 외우면서 자아위안을 할수도 없었을게다. “꼴”은 얼굴을 말하지만 욕으로 쓰일 때는 병신같은 얼굴이란 뜻이고“깝”은 물건에 대한 값어치지만 병신같은 얼굴자랑하는 값어치이고 떤다는 몸을 떤다. 지랄병하는 사람이 몸을 떤다는 말로서 멀쩡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다 가는 모가지가 뎅겅 날아날 큰욕이라니 말이다.     먼훗날 꿈처럼 신세가 덜컥 바뀌고  마침내 도시에서 훈장질을 하면서 새도래들은 농촌에만 있는게 아니라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나 다 있음을 절감하게 되였다. 도시새도래들속에는 녀자새도래들에 못지 않은 남자새도래들도 많았다. 유식한 새도래 들은 만사통인체 하는데 시기질투가 특기이다. 남은 무조건 깔보려하면서 남의 말에 토를 잘 달고 어문이 전공이 아닌데도 과장법이 놀라우며 비약을 잘하고 같은 문제라도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하는데 달인들이다.     새도래들은 거짓말이 난당이다. 물론 자타를 포함하여 허다한 말들은 사실에 준하지 않고 제감정을 앞세우고 한다. 새도래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줄 모르고 제좋을대로 말하는 버릇도 무성하다. 거짓말이란 별게 아니다. 일구이언도 곧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했다가 곧 저렇게 말하고 가능하다고 하다가 제혀를 씹으며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방금 좋다고 말했다가 뒤번져 좋지않다고 하고 옳다고 말했다가 얼마후 틀렸다고 하면 곧 거짓말이다. 원체 심지가 뒤틀렸기에 그럴것이다.     자신의 리기심으로 인해 자기가 싫어하는 상대편에게 유익되는 말을 하지 않고 마냥 해치는 말을 해도 거짓말이다. 자기 리익에 좇아 혹은 제구미에 맞춰, 선호도에 준하여 말하는것도 거짓말이다. 제허물을 숫제 숨기고 좋은것만 말하고 자신에게 유익한것만 말하고 불리한것은 제좋게 꾸며대는것도 거짓말이다. 그네들은 많은 경우 고의적으로 사건의 절반을 남겨두고 말하지 않는다..     호들갑인지 새도래인지 소총명을 발휘하면서 양양자득한다면 참새 방아간 지나는격이 되기 십상이다. 녀자라해서 일언경천금이라 하는지 모르겠으나 사내를 상대해서“장부일언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사내라면 자신의 말에 책임져야 하므로 언행에 약속력을 선행시키면서 시종일관 근신하라고 경계하는 말일것이다. 새도래인지 새퉁이인지 어쨋건 인종치고는 말째들이요 그들을 위해서 불행이 아닐수 없다.     하긴 어른들속에만 새도랜지 핼래깨비들이 있는게 아니라 옛날 아이들속에도 드문히 있었다. 서로 척을 지고있는 아이를 두고 노상 호들갑을 떨어대는데는 그야말로 허구픈 웃음부터 나왔다. “어제 그새끼랑 말쌈했는데 찍소리 못하게 즉살멕여줬거든, 이제 쌈하면 저레 까디를 해치울 작정이야, 그래야 내 말이라면 썰썰 길테니깐…”     만약 딴 재미를 보고싶은 지꿎은 애가 있어 “아새끼, 핼래깨비같은게 너 그애를 이긴다구? 너 그애보다 더 쎄다면 몰라두…” 그러면 더구나 콩팔칠팔이다. “모르면 말하지 마라, ××가 내편 들어준댔어, 그새끼 어방이나 있겐? 내 형니미 뒤에서 어슬렁거리기만해도 근마새끼 찔 얼거든 헤헤헤…” 싸가지없는 약자의 호가호위였다.     개체 인간들속에 새도래나 핼래깨비들은 기특한대로 두루 어울려 살아가지만 만약 한 나라의 국정운영자가“핼래깨비”여서 호들갑을 잘 떤다거나 공공언론인들도 발라맞추기에 급급해서“예의 주시하거나”,“차차 두고봐야지”를 팽겨치고 사사건건 보살을 떤다면 곤란하다. “공적인 일에서 나를 생각지 말고 사적인 일에서는 감투를 생각하지 말라”는 전고가 있더라면 급공근리에 날뛰는데 그말이 무슨 대수랴!    하지만 호들갑은 어떤 문제를 설굴뿐 해결에 아무도움도 못된다. 새도래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분장하고 나서도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기때문이다. 큰일 작은 일마다에 유난히 떨어대는 호들갑이 민족의 렬근성이 되여졌다면, 말마따나 새도래가 어느 한 민족의 이미지가 되여졌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일생동안 받들면서 살만한 한마디 귀중한 말씀을 하여주십시요."라고 청들었다던가, 그러니 공자님이 "용서해라!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마라."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인생마당에서 수없이 많은 일에 모대기며 어려운 일이 많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 "용서"하는것이다.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마라. (己所不欲,勿施于人)" 는 우리 모두에 참조계로 되지 않을가?      자기 위주의 편향은 금물이다.“문제가 생기면 남의 잘못이다. 나는 문제가 없고 선량하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편향을 말한다. 자고로 리익쟁탈의 인간세상에 금을 그어놓은 정의란 없었다. 자신이 불리하면 같은 편끼리 찧고 까불리며 떡가루를 내고 제먹기 좋은 빈대떡을 빚으려 한다. 이는 새도래들의 특기의 일종이기도 하다.                                                                                  2015년 8월 25일                             
631    수자의 자탄 댓글:  조회:4347  추천:1  2015-08-25
수자의 자탄         누가 나를 낳았는지 알수없지만 아무튼 나의 부모는 위대하지요. 내가 잉태되여 태여나게 된것은 천지개벽을 일으킨 만고대업이 되였기때문입니다. 나는 태여나서  수천년 동안 인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문명사회에서 과학이 고대의 절대자보다 위대하고 전지전능하다고 하는것은 바로 수학이라는 질서때문이지요. 수자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라는 개념지요. 《하나》는 수자가 아니고 개념입니다.《하나》라는 가정으로부터 모든 수가 생겨났지만 하나는 결코 존재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수를 본래의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까지 미칠수 있었던 고대인도인들에 의해서 0(ZERO)가 착상되였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아라비아 수자라고 명명했지만 실제 나를 낳은것은 아라비아인이 아니라 인도인이랍니다.       고대인도인은 수자를 표시하는 1,2,3,4,5,6,7,8, 9, 0 열개 부호를 발명하였는데 오늘 사람들이 계산하는 수자의 기초였구요 이 “인도계수법(印度计数法)”이 9세기에 아라비아의 이본, 무싸라는 사람이 825년에 세상에 나온《대수학 (代数 学)》에 편입시키고 진일보 해석을 가하여 십진법으로 하여금 완정하게 하였답니다. 자초에 령은 가장 큰 수목이였을뿐만아니라 계산을 편리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수자가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구라파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내 학명은 아라비 아수자인것입니다.       수자는 우주라는 신이 낳은 아들신이며 그들이 모든 문명의 신비를 풀고 해결 하는 위대한 위치에 군림하였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사람이 창출해낸 나이지만 마침내 인류의 지배자로도 되였고 경우에 따라서 노복으로도 되였으니 영광일가요? 비애일가요? 수자화시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더구나 나를 등지고는 촌보난행입니다. 인생의 첫걸음부터 마지막까지 따라다니는것은 부모, 처자가 아니라 나ㅡ수자 이지요. 키, 체중, 호흡, 맥박, 심장박률, 시력, 로임, 상금, 은행저금, 그 어느것 하나 나와 련관되지 않은것이 있는가요? 본의는 아니였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압력을 가하는 거대한 력량으로 되여 인간 개개인을 업신여기게 되였습니다. 딱 1점이 모자라서 중점고중에 2만원이나 내야 하고 1점이 모자라 대학시험에 락방한 청춘들이 죽네사네 하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일러 메마르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합디마는 일단 구체적사물과 련계될때는 생동해지고 심사숙고를 자아내게 한답니다. 총명한 현대젊은들이 수자를 가지고 온갖 정보를 전달하고 재미있는 애정 단신도 만들어졌지요.  1314는 일생일세, 740은 너를 분통이 터져 죽게 하겠다. 596은 나는 간다. 456은 그래 나야, 7998은 갈테면 가렴, 53770은 나 널 키스하고싶어, 2010000은 너를 일만년을 사랑할거야, 51396은 나 한잠 잘래, 등등 이루다 손꼽을수 없지요.       수자의 학문은 오묘하기 그지없는데 바로 무한정한 가변성이지요. 만약 누군가에 게1이 크냐? 9 가 크냐 하고 묻는다면 단마디로 9가 크다고 할것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 꼭 맞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봉건사회에서 일품관은 구품관보다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러나 영예를 나타내는데 있어서는 1이 최고입니다다. 례컨대 운동경기 같은 데서 일등을 기리지요. 말하자면 때론 1이 더 크기도 하고 때론 9가 더 크기도 한것 입니다. 중국고대에는 9가 가장 큰 수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천공의 가장 높은 곳도 “9천(九天)”이라 하였지 “십천(十天)”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회의 비리와 불공정성을 가장 선명하게 비춰보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례를 든다면 산서성 하곡현은 국가빈곤현이여서 농민들의 년평균수입이 겨우 1000원 정도인데 한체례 현정협회에서 회의대표들에게 중화패담배 공급하는데만 60000만원 을 써버리고도 한 책임자는 이런 지출을 감당할 능력이 있다고 큰소리 쳤지요. 이 현에서 한차례 회의하는데 250000원이나 썼다지 뭡니까?       더구나 심사숙고를 자아내는 현상을 비춰볼가요.《중국통계년감》에 의하면 매년 농촌에서 뽑아내는 자금은 8000억원인데 매개 농민의 부담이 1000원이라는 설명이 됩니다. 이 8000 억원은 2003년 전국 재정지출의 1/3에 해당한답니다. 매년 매 인평균 2000원 남짓한 수잆을 얻는 농민들에 대해 말하면 어떤 결과를 말해 줄가요? 한편 매년 농촌을 위해 지출하는 돈은 1400억원 남짓하답니다.       2000년도 국민생산총액은 89404억원이였는데 매년 먹어치우고 고급차구매와 보양비, 출국고찰비로 소모되는 돈은 9000억원이나 된답니다. 희망공정에서 “1+1” 조  학행동표준에 놓고보면 한명의 중학생에게 보조할 돈이 200 원이고 소학생은 겨우 100원이면 된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200억원을 내지 못하고있지요. 2000년도 한해에 행정사치로 써버린 거액에 비하면 새발에 피라고 할것입니다. 수자를 통해서 사회의 비리를 읽을수 있습니다. 빙산일각을 보여주는 격이지만 이런 통계도 나와있습니다. 2000년 전국검찰기관에서 립안한 안건이 45113건이 였는데 범죄금액이 5만원 이상의 대안건만해도 18086건이였고 그중 100만원이상의 안건만해도 1335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중국과학원, 청화대학국정연구기구에서 제시 한데 의하면 20세기90년대후기 부패분자들이 조성한 경제손실과 소비자복리 손실 액은 평균 매년 9875억원 내지 12570 억원 사이였는데 GDP의 13.2% 내지는 16%를 차지한답니다.   2003년 검찰기관에서 조사한 탐오수뢰, 독직죄, 등 직무범죄안건만해도 무려 38025건이였는데 련루자가 41797명이였고 그중 탐오수뢰, 공금람용대안건이 16472건이였으며 현처급이상의 범죄자만도 2063명이랍니다. 행복은 평형예술을 수요하지만 과잉탐욕자들은 이런 상식적인 삶의 규칙마저 네미덜머리로 여기고 있더랍니다. 1989~2000년에 거금을 횡령하여 국외로 도망친 탐관들이 무려 7160여명이였 는데 사회과학원에서의 조사보고서는 1만여명으로서 금액이 8천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도주미수로 체포된 자가 1267명이고 죄가 두려워 자살한자가 2391명이며 심사기간 도주, 실종된 자가 411명이고 심사기간 자살한자가 205명이였답니다. 다른 국내보도는 국외도주자가 4천여명으로서 가지고 간 금액이 500억딸라고 한다. 한편 향향매체에서는 2003년까지만도 국외도주자가 8천여명으로서 금액이 그 얼마인지 알수 없다고 했다. 이 엄청난 수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항공모함 한척을 건조하는데 50억딸라가 든다고 한다. 5백억원이면 100만개의 희망소학교를 세울수 있고 3억명의 실학아동을 배움의 전당에 돌아오게 할수 있지요. 금년 상반년 상해시에서 탐오, 회뢰 등 직무범죄를 립안한것이 2백19건인데 그중에서 큰 안건이192건이고 중요한 안건이 56건이랍니다. 상반년 전상해시에서 비준을 받고 체포한 범죄혐의자가 12714명이인데 동기에 비해 12.9%가 상승한 셈이다. 기소한 사건은 9천 3건인데 련루된 피고는 13956명으 로서 동기에 비해 19.9%.와 22.7%이다. 그중 살인, 강탈, 납치 등 엄중한 폭력안건의 범죄혐의자가 2423명으로서 기소당한 자가 2272명이나 된다. 한알의 모래알에서 대천세계를 볼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는 현재 돌아가는 사회실태를 너무도 잘 알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수년천을 내리 일호차착도 없이 청렴하게 묵묵히 자기 사명을 다 해왔 습니다. 나는 가면구를 쓸줄 모릅니다. 나의 명성을 더럽힐수 없지요. 그러나 나는 많 은 경우 간능한 무리들에 의해 “거짓말”대왕이 되기도 합니다. 그네들의 더러운 정치목적에서 어용문화로 충당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인간 들이 위조하고 확대하고 분식하였는데 모두 인류가 핍박한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거인도 되고 난쟁이도 되여집니다. 그들이 나를 가지고 나름껏 장난치지만 결국 나의 놀림도 받게 될것이고 재난을 껴안게 될것입니다. 나를 가지고 노는자는 결국 자기가 자기를 가지고노는것과 같은것이니까요.       나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지배자이지만 구체적작동에 들어가서는 인류의 노복으로 되였습니다. 나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하면서 제멋대로 유희를 놀았지만 그것은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데는 남에게 알릴수 없는 딴 심보가 있었기때문입니다. 인류의 심사야말로 변덕스럽지요, 돈이나 재물을 갈취할 때는 많을수록 좋아하고 낯을 빛내려 할 때는 적은 수자로 기록을 돌파하려하니 말입니다.       수자화시대, 그것은 곧 나의 시대라는 말이 되겠지요. 인간은 나를 타락시키고 있으며 언젠가는 나를 철저히 훼멸시킬수도 있습니다. 나를 신용의 척도로 만들기도 하고 가장 믿을수 없는 롱간쟁이로 만들기도 합니다그려. 그러니 괴탄이 아니 나오고 감탄이 나오겠습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분명하고 정확하지 않는것은 설자리를 잃는다고 하지만 나, 수자의 운행궤적은 꼭 그런것만도 아닙니다그려.                                        2006 년 2 월 25 일
630    보물을 론하다 댓글:  조회:4918  추천:0  2015-08-25
                                 보물을 론하다       곰팡이냄새가 나는 옛날이야기이다.     어느 하루 큰물이 진 강을 농민 대여섯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강 한복판에서 그만 배가 뒤번져지고말았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죽기내기로 헤염을 쳐 강을 건넜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은 열심히 헤염치는것 같은데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있었다.    동료들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헤염을 제일 잘 치던 자네가 오늘은 웬일인가?” 그러자 그 사람은 “허리에 많은 동전을 찼네. 너무 무거워서 마음같이 안되네그려.”고 대답했다. 동료들이 목숨이 중하지 까짓 돈이 중하냐며 던지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진작 기슭에 나가붙었지만 그는 그냥 강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동료들이 다시 소리소리 꾸짖었다.     “에끼, 당나귀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같으니라구, 목숨이 중하지 돈이 중한가? 어서 돈대를 버리고 헤염쳐 나오게!”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도리머리만 저었다. 돈을 던지기 싫었던것이다. 그에게는 돈이 목숨보다 중한 보물이였기때문이다. 결국 그 사람은 고기밥이 되고말았다. 그는 과연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걱정이 없다.”는 속담도 몰랐던가? 산목숨만 있으면 언젠가는 돈이 다시 생길수도 있고 벌수도 있는것이다. 변통성이 없다고 하기보다 너무나 모자라는 팔푼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는 고대의 우직한 사람이여서 그렇다 치더라도 문명개화했다는 현대인들속에 그 사람보다 별로 나을게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건질것, 건지지 말아야 할것을 가리지않고 그냥 탐욕의 늪에서 자맥질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단말인가? 대낮에 금점에 가서 무작정 금덩이를 쥐고 내뛰다가 잡혀서 자기 눈엔 금밖에 보이지 않더라고 대답했다는 옛날 제나라사람과 어스비슷한 민충이들이라할가?    이네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있다. 옥을 뢰물로 들고 온 사람에게 자기는 재물을 탐내지 않은것을 귀중한 보물로 여긴다며 당신이 보물로 여긴 옥돌과 바꿀수 없노라고 선자리로 돌려보냈다는 자한의 이야기는 세인이 다 아는 유명한 전고이다.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는 안된다고 금욕주의를 설교하는 선교사들마다 모두 청렴한지 알수 없지만 아무튼 신약성서에도 재물에 대한 탐욕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한것 을 보아서 금전이나 재물이 결코 제일 보물이 아니라는것을 다시 생각할수 있겠다.    보물은 각자의 성품과 인격력량에 따라 다르게 값이 매겨진다. 역시 옛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위나라 왕이 제나라 왕에게 귀국에는 어떤 국보가 있는가고 물었다. 제왕은 비록 나라는 작지만 직경이 한치나 되는 진주가 열개나 있는데 진주 하나면 전후로 수레 열두채를 비춘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    이에 위왕은 자기네 나라에도 국보가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국보란 나라의 동량지재들이였다. 이중에 단자라는 장군더러 남쪽성을 지키게 했더니 초나라사람들이 그로부터 감히 침노하지 못하게 되였고 변자라는 신하더러 고당성을 지키게 하였더니 조나라사람들이 감히 황하에서 고기도 못잡게 되였다. 그리고 검부라는 아전이 있어 서주를 지키게 하였더니 북쪽 연나라사람들이 7천여호나 귀화하려했고 종수라는 신하더러 도적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주어가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고했다.     이 네 신하야말로 그 광휘가 천리를 비췄다고 할것이니 어찌 열두대의 수레에 비길수 있으랴!그들은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중한 보물인 치국의 동량지재들인것이다. 이에 제나라왕이 부끄러워 어쩔줄 몰라한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한이나 양진, 량고협같은 사람도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국보이다. 얼마든지 제 안속을 챙길수도 있었건만 재물을 탐내지 않은 그들의 렴결봉공의식은 위왕의 네 국보들과 마찬가지로 보물인것이다. 이처럼 한개 나라의 진정한 국보는 곧 그 나라의 과학인재들이나 치국의 영재들인것이다. 쉐익스피어나 대문호 발자끄같은 사람들은 그저 국민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보물들이였다.     보물에 관한 다른 전고도 있다. 명조 건국초기, 마황후가 원나라 국고에 있던 재물을 서울로 옮긴다는 소리를 듣고 명태조 주원장에게 물었다.     “원조의 국고에 어떤 재물이 있더이까?”     “모두 금은보화라오.”     “그렇게 강대하던 원나라가 그 많은 보물을 어찌하여 지켜내지 못하게 되였을가요? 보아하니 금은재보가 진짜보물이 아니라 제왕이 곧 그 자신의 보배인것 같군요.”    이에 명태조는 성근하게 대답하였다.   “황후가 말하려는 뜻을 과인이 잘 알겠소. 말하자면 현인이라야 보물을 얻을수 있다는것이 아니겠소?”   “황상께서 옳게 말씀하였나이다. 사람을 두루 살펴보면 가세가 흥성할수록 교만하여 거드름을 부리는데 시운이 좋아지자 탐욕이 끝이 없고 향락을 누리려 하지요. 집안일이나 나라일이나 그 도리는 다를바 없다고 보여지나이다. 옛선비들이 금은옥기는 인심을 해치는 독약이라고 했는데 천만지당한 말이지요. 언제나 충고를 귀담아듣는 사람들이야말로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고 군신이 힘다해 강산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진귀한 제부라고 할것이옵니다. ”    이 이야기는진정 값을 매길수 없는 만년대계의 국보를 론한 교훈적인 전고이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보물이 많다. 몽떼 그리스또 백작섬의 동굴속에 있는 금은보화도 보물이지만 그래도 인재를 그 나라 국보라 해야겠다. 하건만 인류력사는 이런 국보들을 국보로 여기지 않고 홀대한 슬픈 기록을 너무도 많이 남겼다. 시행착오를 거듭해온 과거사라지만 어제를 거울로 삼아 장차라도 이런 산문화재들을 국보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전도가 없을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무렵 베를린을 점령한 미군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은행의 금고를 점유하는것이 아니라 독일의 과학기술인재들을 대량적으로 미국에 실어가는 일이였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야말로 진정한 국보를 값매길줄 아는 위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금은재부는 어디까지나 외적인것이요 오직 창조적능력의 소유자들만이 불후의 보물들이다. 그런 보물을 우러러 만세를 불러본다.                              2005년 1월 20일
629    신성한 비애 댓글:  조회:5176  추천:1  2015-08-20
                                            신성한 비애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혼부부 로보트와 마리아는 드디어 산정에 올랐다. 환희에 넘쳐 포옹할 때 비극이 발생했다. 로보트가 그만 발을 헛디디여 천길심연에로 굴러떨어지게 된것이다. 아찔한 순간, 마리아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직감했다. 그녀는 잠의식의 충동이였는지 본능적반응이였는지 얼결에 로보트으 웃옷을 꽉 물었다. 그녀의 가쯘한 이발이 육중한 남자의 온몸을 감당하고있었다. 그렇게 한시간도 넘게 버디였다. 다른 유람객들에 의해 로보트가 구조되였을 때 마리아의 입은 온통 피투성이로 되였다…    참으로 사랑이 낳은 기적이라 할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는 그후에 있었다. 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지자 프랑스사람들은 열광의 눈물에 젖어 시를 읊고 노래부르며 사랑의 힘을 찬미했다. 그러나 철두철미 과학주의자들인 독일사람들은 먼저 인간의 이발에 유관된 책을 뒤지며 녀성의 이발의 류형과 모양, 최고의 감당능력을 검토하여 이야기의 진실성을 확증한 다음에야 신문에 보도하기로 했다.    매일 거짓말을 몇마디씩 해야 심리평형을 잡는다는 미국사람들은 이 거짓말이 자기네 거짓말대회에서 몇등이나 하겠냐며 코웃음쳤다. 철저한 경제동물인 일본사람들은 사랑의 기적이 창조된 현장에서 자동차전시회를 벌릴 타산을 했다. 그리고 세계뉴스인물이 된 이 한쌍의 부부에게 증송할 도요다자동차도 마련하고 전시회에 참석해줄것을 요청하는 초청장부터 띄웠다.    워낙 대남자주의가 강한 영국사람들은 기적을 창조한 마리아를 반신반의하다가 어쨋거나 남자가 녀자에게서 구원을 받았다는것은 영광이 아니라며 로보트가 마리아를 구한것으로 바꾸어서야 여러 신문에 내보내였다.     그래도 제일 재미있는것은 중국사람들의 태도이다. (흥,그게 뭘 그리 대단하다구, 우리 중국에는 800년전에 벌써 목계영이 절벽이 걸린 양종보장수를 구한 기적이 있었는데…)하면서 언필칭(言必稱) 《외국에 있는것은 옛날에 우리에게 언녕 있었다(古已有之)》를 내들었다. 여기에 바로 전 국민적으로 심사숙고할 문제점이 있는것이다.     중국사람들은 재래로 월등감을 내세우기 좋아했다. 력대의 제왕들은 자기를《천자》로 자처하였고 일반 국민들도 곧잘 룡의 자손들로서 다른 종족들보다 신성하다는 선민의식에 젖어있는데 이런 자아신성관념은 마침내 과잉오기로 치달아올라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탈시대적인 렬근성으로까지 되여졌다.    이런 문화심리는 만사에서 세계제일을 추구하게 한다. 례컨대 당년에 공자님이 천하를 돌며 유세할제 미국이 있기나 했던가? 우리 선조들이 지남침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서양렬강들이 망망한 대양을 헤가르고 차이나ㅡ신주를 찾아오기나 했겠는가? 우리 선조들이 화약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찌 함포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굳게 봉쇄한 대청제국의 국문을 부실수 있었겠는가?가령 이런 식으로 월등의식을 내세우려 한다면 그야말로 신성한 비애가 아닐수 없다.    물론 자아신성의 밑천은 많다. 세계에서 뜻이 가장 심오한 문자도 한자이고 만리장성같이 거대한 원시적토목공정도 세계에 하나밖에 없다. 4대발명외에도 사상사에는 공자가 있고 시에는 리백과 두보가 있었으며 서법에는 왕희지가 있고 그림에는 오도자가 있다. 일식, 월식에 대한 기록이 세계적으로 가장 일찍하며 일행이라는 중의 자오선발견, 리시진의《본초강목》, 화타의 마취술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도자기는 7800년전에 구워냈고 태양에네르기의 리용기술도 3천년전에 개발했으며 산소의 발견도 가장 이르고 온도계의 발명도 유럽보다 1천6백년이나 앞섰으며 소리진동실험실은 세계상 첫번째 물리실험실이다. 빛의 발음도를 개변, 조절하는 구리등은 기원2백60년전에 있었으며 회전의자도 유럽보다 1300년이나 앞서 만들었고 지페도 가장 일찍 발행했으며 시계도 최초로 발명하였다고 한다. 석유의 발견과 명칭도 가장 일찍하며 최초의 열력기계도 제일 먼저 만들었고 지구자력의 발견도 유럽보다 400년 앞섰으며 점천포(钻天炮)는 세계의 첫로케트전신이라 한다.    그러고보면 고대중국은 세계첨단기술을 언녕 장악한 명실상부한 과학기술강국이였다. 그런데 그후의 염황자손들은 모두 무엇하러 갔는가? 부처님의 발아래 대국을 높이 베고 잠들어버렸는가? 인생고해를 건너서 래세의 극락으로 가느라고 그동안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단말인가?     교훈인들 어찌 없으랴, 시대는 이미 산업혁명의 문턱을 훌쩍 넘어섰는데도 자희할미는 진시황의 아방궁이 탐나서 해군경비로 원명을 지어놓고 만세불의 향락을 꿈꾸었다. 이런 수구주의와 과대망상증은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중국근대사의 성질을 규정해놓았던것이다.《진나라 달이 한나라때 밝다(秦時明月漢時光)》라는 말이 이를 대비해 만들어진것 인지 모르겠다.    하긴 외국사람들도 고대중국의 발명창조에 탄복한다. 동시에 그 창조발명이 몇천년이 지난후에도 그냥 원시상태를 유지하고있다고 비웃고도 있다. 낡은터에서 이밥먹던 소리가 한두번은 구수할세 너무나 고아대면 오히려 무위무능을 드러내는것이 아닐가싶다.    옛성취에 도취된 자아신성이 마침내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되고 세계공용어가 영어대신 한어로 바뀌며 중국의 유교사상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며 세계중심도 서방에서 중국으로 옮겨진다고 예견하는 정도에까지 치달아올랐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량지가 있고 랭철한 사고력을 가진 보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런 경박한 사람들의 자기기만적인 자아도취를 세기말적인 잠꼬대라고 가차없이 질타하고있다. 이런 과대팽창의식의 발로는 현대국민의식에 대한 절묘한 주석(注釋)이 라고 비평하기도 한다.    진부한 관념상에서는 유구한 력사가 일종의 자랑일수도 있으나 현대시점에서는 전진의 길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영원히 굳어진 과거를 자꾸 짜봤대야 다 파먹은 김치독처럼 시큼털털한 냄새밖에 더 날가? 흘러간 물이 물방아를 돌릴수는 없다. 어제는 필경 오늘이 아니며 우리 새 중국은 옛타령을 부르며 걸을 시간이 없다.    과거에 대한 자아도취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불만족이 개인에게나 국가발전에나 보다 유익한 사유방식이며 보다 현대인다운 자세가 될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유구한 력사는 획시대적이고 거족적인 발걸음에 반하여 현대화의 큰 강을 건너는데 이미 짐이 되였다. 세계적조류는 급류를 이루고 파도는 날이 갈수록 세차다. 그만큼 우리는 가급적으로 자아신성의 보따리를 풀어헤치고 버릴것은 버려야지 그냥 지고간다면 물에 넘어진 총명한 나귀등의 솜처럼 점점 더 무거워질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젊어서 범을 잡았다는 옛날 할아버지네처럼 옛날의 호기를내들지 말아야 한다. 오늘이 여의치 못한 사람일수록 늘 왕금년 이밥이 들어갔던 여윈 배를 내밀려 한다. 평범한 사람일수록 자기를 내세우려 안달하고 용속자일수록 명인들과가까이하기 좋아하는 법이다.     사람은 감자가 아니다. 뿌리에 매달려 클것이 아니라 뿌리가 공급하는 자양분을 먹으며 가지에 주렁진 열매로 향기를 풍겨야 바람직하다. 그냥 조상이라는 옛뿌리에 매달려 고루한 동방식체면을 세우려 한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없을것이요 스스로 자아신성에 도취되여있다면 그보다 더 신성한 비애는 없으리라.                                2004년 12월 10일
628    세상보기 댓글:  조회:5368  추천:1  2015-08-20
                                  세상보기      세상을 눈으로 본다지만 그 진속은 지성과 량지로 읽는다고 해야 할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속을 꿰뚫어보는 눈은 저저의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 되겠다. 따라서 함께 하는 세상속에 자기가 보는 부동한 세상이 있을뿐이요 자기 시야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로 될것이다.    세상은 하나의 거울이다. 그속에서 사람은 자기 모습만 보는것이 아니라 인생현장의 천태만상도 보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은 각각일수밖에 없다. 랭혹한 사상가에게는 세상이 희극무대로 보일것이고 투기모리배의 눈에는 세상이 부정축재의 도박장으로 보일것이며 자족한자의 눈에는 세상이 희망의 터전으로 보일것이다.    어떻게 세상을 보든 아무것도 탐내지 않을 때, 사물을 보는 눈이 순수  관조의 경지에 이를때라야 비로소 사물의 핵이 보이고 아름다움이 열리기 시작할것이다. 그 러나 시종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것과 같을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암흑속에서 깨여있고 어떤 사람은 광명속에서 잠들어있다고 한다. 사실 눈을 뜨고있다고 해서 다가 세상을 보는것이 아니요 눈이 밝다해서 세상속을 바르게 보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해서 볼것을 다 보았다고 할수도 없다. 세상은 내가 보는것만큼만 보인다. 세상은 내가 보는대로 있기때문이다.    사회를 투시하고 파악하는것은 전문 정치인이나 철학가들이 할 일이긴 하겠지만 내 인생을 나름대로 충실히 하고 바르게 가꾸기 위해서라도 저마다 세상을 보는 혜안을 하나씩 가지고있다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것이다. 허허바다에서 배를 목적지로 향하게 하는것은 배에 타고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선장 자신이다.   오늘 이 사회에 넘치는 불신과 랭담, 증오와 모략, 사기와 협잡, 절도와 살인, 폭력과 방화, 마약밀수와 인신매매 등의 사회페단들과 인간악에 가슴이 섬뜩해지고 권력과 부와 명예 같은 외적인 가치추구를 위해서 기탄없이 남을 암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힘없는 주먹이 불끈 쥐여진다. 살기가 많이 좋아지고있건만 사람들의 심성은 날로, 갈수록 리기적이 되여지고 악랄해지고 퇴페해지고 있는것이다.    이렇듯 사리사욕과 힘의 론리가 지배하기에 인정세계는 끊임없는 갈등과 암투로 삭막해지고 가진자의 오만과 가지지 못한 약자들의 한이 어우러져서 살풍경이 이루어지는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고있는 이 세상이 너무나 많은 부정으로 반죽되여있는것을 보고 실망할 때가 있다. 부정은 세상 구석구석 깊이 파고들어가 있으며 밝은 사회를 가꾸어가는 길을 엉망으로 만들고있다. 그래서 때로는 부정을 성토하기보다  묵인하고 타협하는편이 훨씬 명지하지 않을가 하는 회의를 가지게도 된다.    인간은 본질상에서 우연과 황당속에서 그리고 지극히 완미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고있다는것, 인간의 본질 또한 완전완미함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라는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그러나 인긴이 어쩌면 이토록 악착하고 부패해질수 있을가? 선견지명이 있는 인의지사들이 “인간은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류문명의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는것은 결코 식후한담이 아니며 “기나라사람의 하늘 근심”은 더구나 아니다.     모순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부조화가 곧 조화라 하지만 범코등의 돈마저 떼여먹는 놈이 여유롭게 살고 평생 구슬땀을 흘리며 량심과 도덕을 지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무능력자로 치부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유태처세술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 초불을 가지고있으려니 생각하고 어두운 방안에 들어갔더니 한사람도 초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사람마다 초불 을 밝힌다면 방안은 대낮처럼 밝으련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초는 아끼면서 남이 광명을 선물해줄것을 바란다. 현시대 우리 주위에도 자기의 편견과 무지로 어두운 세상에서 그런대로 살지언정 진리의 빛 발에 눈을 뜨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어느 수필가의 글에서 본 구절이다.     “보고싶은것만 보는것은 유아의식이고 보이는것만큼 보는것은 청소년의식이며 보지 않으면 안되는것을 보는것은 어른의 의식이다.”     이 말에 나름대로 한마디 부언한다면 보이지 않는것을 보아내고 현실적으로 투시 하는것은 작가의식이라고 해야겠다.     현실의 어떤 현상도 관심박이라는 자세로 상아탐속에서 자아감각의 뇌까림에 만족해하는것이 이른바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이며 자아해탈일가? 그런 무관심이 달관 (达观)으로 통하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초연을 가장한다면 그보다 더 싱거운 일이 없을것이다. 그것은 분명 명철보신, 무책임한 현실도피인것이다.    하긴 지금 무슨 작가적사명이 어떻고 할 계제는 아니지만 그저 두루춘풍이 되지 말고 좋은것은 좋다하고 나쁜것은 나쁘다고 자기의사를 분명하게 문자화하고 현실화 하는것이 붓대를 잡은 문인의 사명은 아니더라도 량지쯤은 되지 않을가싶다.    망원경으로 내다보면 “헉, 모든것이 잘되여가는군!참 좋은 풍경선이야, 그런데 미중부족이랄가…”하는 식으로 혼자 여기저기 감탄표만 찍는 송가에는 헛움음이 나지 않을수 없다.    구렁이도 담넘어갈 때 기와장을 깨는 일이 있다는데 딱 부러지게 큰소리는 지르지 못할망정 알쏭달쏭하게 도깨비 여울건너가는 소리를 하는것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송가시대는 이미 력사의 뒤안길에 락엽으로 떨어져 마르고있다. 뜨거운 심장들을 동동 띄우던 영광의 송가시대가 우리에게 남겨놓은것은 과연 무엇일가? 허무함과 자아풍자밖에 더 있던가?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는 결코 진실에 대한 회피가 아니다. 눈을 반짝 뜨고 물결따라 떠내려가며 량안의 풍경에 환성을 올리는 사람의 자태는 장관일수도 있겠지만 강물의 세기는 영원히 알수 없다. 오직 강물을 거슬러 헤염치는 사람만이 강물의 세기를 알수 있는 법이다.세상 구석구석을 파보며 느끼는대로 한소리 하면서 세상과 대화하하는것이 문인의 당당한 처사가 아니며 생명의 보람찬 연소가 아닐가싶다.     보지 않으면 안될것을 보며 보이지 않는것을 보아내며 내가 사는 세상의 창문을 열어가자!                              2005년 3월 2일
627    (교육에세이) 매질을 론함 댓글:  조회:5150  추천:0  2015-08-19
(교육에세이)                        매질을 론함                                              진 언        “교육(敎敎)이란 단어의 ”글자의 구성에서“敎(교)”는 매를 가지고 아이를 길들인다는 뜻이고 ‘育(육)’은 갓난아이를 살찌게 한다는 뜻으로 기른다는 의미라고 풀이하는데  유태인들은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리는것이 교육의 지혜라고 한다던가? 그러면서 아이를 때리려면 구두끈으로 때리라는 속담도 만들었단다. 아이를 때려도 치명적으로, 인명사고까지 나도록 때리지 말라는 상징적의미이겠지만도 묻잡건대 화가 동해서 리성을 잃었을 때 매질의 경중을 합당하게 조절할수 있는가? “구두끈이나 실오리”를 찾을만큼 리성사유를 할 계제라면 아시당초 매를 들지 말아야 할것이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손도 입이나 눈처럼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도구”라고 생각한다. 세인이 다아는 지혜로운 족속들의 지혜라고 치자. 그런데 손은 실제로 육체적고통을 주기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크므로 매질은 마음을 순간적으로 고쳐주는데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 신체적고통을 주는것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는가,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비인지…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지혜의 근원인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부위에 매질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단다. 주저하지 않는 당당한 리유가 있더라 도되돌아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즉 매로써 제새끼를 다스리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언필칭 개정하라는것이겠지, 그러고나서 스스로 자문해봐해야 지혜롭다.    아픈 매로 다스린 혁혁한 결과는 마음으로 우러나서 하는 순종인가? 지혜로운 “교육도구”에서 비롯된 탄복인가? 아파서,두려워서 한 굴종은 아닌가? 굴종은 백프로 자신의 마음에 닿지 않은 심리자세이다. 아이를 때리려거든 실오리로 때리라는 우리 말 속담은 한수 앞선 지혜가 아닌가? 어쨌거나 궁극적으로 자가당착이다. 미친년 달래캐는데 작은것 굵은것을 가리며 캘것인가? 우답도 없는 우문이다.    아이를 때려도 성나는대로 아무데서나 때리지 말고 집에 데리고 와서 때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 참 침착하고 지혜롭다 할지라도 웃기는 참을성이요 서푼어치도 안가는 지혜라 하겠다. 마냥 응석을 받아주며 방임하는것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것일뿐아니라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교육의 가치실현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것임은 두말할것없다.그러나 매질이 곧 가장 합목적인 가치실현이 아니다.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자녀들의 잘못을“사랑의 매”로 다스린다는 사람들의 좌표는 비애이다.“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29장 15절)”를 계률로 삼고 자녀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려 들지 말라.    하긴 때리게 된 동기, 목적이 부동함에 따라 다를수도 있다. 성나서 때리고 위협을 주려고 때리고 위세를 부리느라 때리고 심심해서도 때리며 노예를 다루는 그런 악종들처럼 아이들을 다루려는것이 아니라고 해명할것은 뻔하다.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지혜까지도 얻을수 있음을 강조한 말들로 리해하고 그렇게 실천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지자들이다. 미움이 아닌 사랑의 매!얼마나 듣기좋은 말인가? 그런데 맞고난 다음의 감각은 가려울가? 아플가? 가렵게 하려고 매를 드는 단순하고 맹랑스러운 자는 없을것인데 그러면 소위 그 사랑의 무게는 어떻게 저울질하는가?    자녀를 매를 때리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육체적고통을 주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으므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심한 매질은 피하라는 뜻으로 구두끈을 찾는단다. 구두끈으로 때리면 “매질”이라는 개념에 대한 복습쯤 되는가? 맞는 아이가 태연스레“때려도 제발 아프게는 때리지 마세요.” “오냐, 알았으니 벌벌 떨지마라”라고 하면서 매질한다면 그보다 더 코가 비뚤어질 넌센쓰가 세상에 없을것이다. 위대한 부모님이로고. 그 효과는 아주 질감이 난다고? 어떤 지자가 가로사대 신념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을 때리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매질이 자녀들에게 육체적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례외이겠지만 잘못을 저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수단일때는 결코 야만적이라 할수 없다. 구두끈이나 실오리는 자동공제가 필요없지만 무릇 맞으면 필경 아플수밖에 없는 매질도구에 자동공제기라도 설치하고 매를 드는것일가?    사용하는 시기와 정도를 분별할줄만 안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싶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 매를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를 맞는 자녀들도 부모의 손길에서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게 될것이다. 선험적인가? 자신이 피부로 체험한 교훈인가? 알쏭달쏭한 언동이 기특하다. 묻거니와 자식을 때리는 감정이 사사로운것이 아니고 공공의 의무를 집행하는것인가? 얼토당토한 생각을 그럴듯하게 역설할때는 자신이 매질로 단맛을 보았거나 보고있다는것을 반증한다.    한편 부모로서 자녀들을 교육, 훈계하는 리유는 무엇일까? 거두절미하고, 그것은 년장자이고 권위자이고 교육자라는 신념때문이리라. 어떤 상황에 처하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있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키는것을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매질을 포함한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옳게 가르치려고 노력할것이다. 이것은 부모된 자의 기본자세이니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지신의 신념에 자신감을 갖추지 못했다면 언감생심 자식을 훈계, 교육할 념두도 못낼것이다. 자녀들만큼은 신념있는 확고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줄것을 기대한 다는것은 공통된것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교육방식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면 진리성적인가? 기담괴론은 아닌가? 나는 무지해서 알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매를 선호하는 지자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것이다. 감화는 어디까지나 백프로 자률에서 오는것이지 강압적인 타률에서 얻어지는것이 아님을 모른다면 누구를 훈계하려 들지도 말고 소위“사랑의 매질”할 리유도, 자격도 버리라. 말을 잘 안듣는다고, 교훈을 새겨두지 못하고 또 잘못을 범한다고, 공부에 열심하지 않는다고, 성적이 올라가지 못하다고 때리면 결과는 뻔한것, 뭐냐? 아이에게 폭력을 가르친거나 다름없다는것은 일반상식이 아니던가?    매앞에서 벌벌 떨면서 거짓말과 비겁함이 신장된다. 힘이 약해 어른들에게 굴복해도 매질은 체질화된다. 매질교육에 체질화된 자가 부모가 된다면 그 자신도 빛나는 전통을 자기 자식에게 전수하려고 시도때도 없이 노력할것이다. 아닌가?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은법이라면 과연 아니라는 답변을 할수 있을가?    동물을 매로 길들이는것은 동물과 대화가 통하지 않기때문이다. 말 잘들으면 먹이를 많이 주는것으로 장려하고 뜻대로 되여주지 않으면 매를 드는것은 막무가내라 하지만 본성적인 길들이기론 결코 고명한 수단이 못된다. 매를 이기는 장수가 없다고 한다. 자률보다 타률에 길들여진 사람은 노예나 식민지지배를 받아서 인권, 존엄, 개성을 잃은 슬픈 국민의 답습일뿐이다. 그런 ××같은 가치관이 전반사회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그런 국민은 불쌍한 사람들이며 그런 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이다.    아이들을 매로 공부시키거나 육체적학대로 죄를 승인받는것은 지랄중에 제일 지랄맞을 지랄이다. 소를 물가로 끌고갈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게 할수는 없다. 소를 다루어본 사람이면 다 겪은 경험이다. 매를 맞아서 정신차리고 참사람이 되였다는 허접들은 매질을 즐기는 자들이 스스로 엮어대는 허접이다. 부모의 권위를 내든 매질은 아무리 그럴듯한 리유를 대도 무능하고 비겁한 작동 그 자체일뿐이다. 매질이 즉효를 보기때문이라고? 천만의 말씀, 즉효가 곧 완치이던가?    허접한 군상들이 매를 선호하지만 매의 효과란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다. 타율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자율적통제를 못하는것은 물이 도랑에 이르면 자연 흐르는 도리와 같고같다. 매질당한후 자률적이 되여 가치관과 인식을 바꾸기보다 아픈 매를 회피하 고자하는 순응이 전부이기때문이다. 매질, 공포에 의한 순응은 진정한 순응이 아니라 굴종이다. 인간이 타자의 강압에 굴종할 때 그의 인격은 이미 영영 죽었다.    아이를 사람만든답시고 걸핏하면 쥐여패는 자격미달의 부모나 선생나부랭이들이 있다면 권고하건대 제마음같이 해주지 않는 제 부모형제들을 두들겨패보라. 그러면 무지하나 물리적으로는“강자”라 칭송할만하다. 임의대로, 내키는대로 매를 드는 자는 당면에서는 혁혁한 강자인듯 하겠으나 영원한 강자가 누구누구던가?    역지사지로 자신이 얻어맞을 때에야 강약의 변증법에 절통해 할것인가? 인생은 무상해서 때리고 맞아댐은 일희일비일가? 얻어맞기만 하는 약자의 운명적인 조우라고 하더라도 천하지만물의 순환의 법칙으로 볼 때 자타의 조우로, 비애로 될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개잡은 포수마냥 손짓발짓하며 그리 으시댈가?    매질은 곧 인간생명에 대한 학대이다. 목적의도, 정도여하는 다르겠지만도, 범죄혐의자를 심문하는것이 직업인 자들중 소기한바를 얻어내기 위해“막부득해서”시종 고문한다는 리유아닌 리유를 대며 비인권적인 야만행위를 정상화하고 있지만 그것을 특정된 업적을 위한 본능이라고, 무능한자들의 궁여지책이라고 생각하고 한눈 감아둘세 워낙 체질적으로 피해자의 비명을 멜로디처럼 들으며 아파서 몸부림치는것에서  생명학대의 쾌감을 느끼는 악귀들도 부지기수인 인간세상이요 그렇게 수천년을 내리  남을 다스려온 고급령장동물씨들의 빛나는 력사이다.    말이 난김에 장을 빈다고 한층 심입하여 가정폭력을 말해보자. 폭력이 집단적이 될때는“테러”라고 이름짓고 개인적으로 하는 야만행위는 그저 폭력이라 하는지 나로서는 구별이 되지 않지만…인간사회에 만연되여있는 가정폭력을 일상화하는 근원은“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속담에 근거를 두었는지 흔히 마누라에 대한 폭력도 칼로 물베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가정폭력은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것은 안해와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사회의 산물이다. "못된 안해는 때려서라도 길들여야 한다." "아이는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 "남편이 화가 나면 손찌검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것은 너절한 심통이요 비뚤어져도 형편없이 비뚤어진 인격이다.    명태와 안해는 두드려패야 한다는 썩어문드러진 전통관념을 계률이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국민은 골치거리요 가정폭력이 성행하는 나라는 늘어날 느지를 못하는 나라이다. 술기운에 그랬다고? 그것은 자신이 징벌을 면하려고 하는 비겁한 핑게일뿐이다. 보통 가정폭력은 가난한 집안에서 많다고 생각하지만 현시대에는 직종, 교육정도, 사회지위와 상관없다. 대저, 몹쓸 인간은 몹쓸 인간이기때문이다.     하긴 강자의 행세를 하느라고 아비규환하는 아이를 보고 동물적쾌감을 만끽하며 매질하는 부모가 세상에 없겠지만 적어도 강자의, 권위자의 위세에서 오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참 멋대가리없는 자들이다. 매질로 생명학대를 일삼는 자들은 저승에서도 저주를 맞을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라며 매질하며 제일교육이라고 여기는 부모들은 무엇을 받아야 마땅할가? 매질에 맛들이다가 되돌려 받을지어라!                                   2015년 6월 7일
626    문을 여닫으며 댓글:  조회:5405  추천:0  2015-08-16
                                                                문을 여닫으며        문을 언제 누가 제일 처음 만들었을가? 아무튼 인류의 진화와 함께 해온것만은 분명하다. 문은 닫자고 만들었을가? 열자고 만들었을가?무시로 여닫는 문이니 그 목적, 계선을 나누기는 어려우리라.     문을 모르고 살던 초창기, 인류가 동굴을 나와 지은 초막의 거적문으로부터 성곽의 철대문을 거쳐 지엄한 궁문에 이르기까지다시 현대건축물이 자동문, 회전문, 도적 방지문 등 류류별별의 문에 이르는 연변과정은 인류문화발전사의 표징이 아닐수 없다     문은 집집의 “경계”로서 자신의 령토완정을 보장받을수도 있는 도구이다. 문은 사람이 드나들게도 하고 사람의 통행을 막기도 한다. 문이 있으매 도적을 말리고 문이 있으매 불청객을 사절할수도 있다.     무릇 어떤 문이든 그것의 상징성과 오묘한 비밀은 은밀성에 있다. 문이 없는 집을 상상할수 있을가? 집이면 벽이 있고 벽이 있으면 문이 있기 마련이니 문이 없는 집은 출구가 없는 담장과 같다.닫지 않으면 열 일도 없고 열지 않으면 닫을 일도 없을테지만 처음엔 맹수의 침입을 막고저 했을것이고 후에는 불청객이나도적 등 외계인의 무단출입을 방지하고저 불가결의 건축구조물로 창안되였을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빈번한 거동은 문을 여닫는것이 되였고 거기에 삶의 전부의 내함이 곁들어있게 되였다. 일단 집문을닫으며 자기를 가두는것이 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이루함과 동시에 모종의 안도감을 가지게 된다. 문은 은밀한 회피의 상징으로서마음이 평화와 고요속에 숨을수 있다.그러나 사람은 한곳에 가두어놓고 기르는 가축이 아니다.그래서 문은 또 열게 되여있다.     사람은 7정6욕이 있기에 문이 닫힌 “독립왕국”을 갈망하기도 하고 문을 열고 나가 대동세계를 갈망하기도 한다.그래서 제 집문이 따로 있고 공동의 문이 따로 있게 된것이다. 문을 열고 나서면 사회와의 합류를 의미한다. 집문을 나설 때나 집문에 들어설 때가 만남의 희열과 리별의 표현일수 있다. 자기 집 문이 아니 어떤 낯선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신비한 감각이 동반되는데 미지의 정취를 용납하고 새로운 환경속에 자신을 맡기는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종의 감지와 번쇄한 의식의 형식이 되기도 한다.     문을 하나의 거울이라 할수 있다. 수많은 정경속에 인생과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한바 생활중의 매 하나의 이야기는 문의 참여와 견증이기도 하다. 문은 인생희비극중의 없지 못할 도구이다, 인생려정에서 무수히 여닫은 문으로 상징되는 많은 사실앞에서 인간은 어쩔수 없음을 의미하다. 무릇 우리는 희망의 손길로 문을 열고 실망의 심정으로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그렇듯 어떤 문이든지 열고 들어가고 닫으며 나오는것은 일종 생명의 표현이다. 문이 닫기는것은 일종의 구속일수도 있고 열리면 자유를 의미할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문안에는 기다림이 있고 문밖에는 리별이 있으며 문안에는 평화와 안정이 있고 문밖에는 위험이 있게도 된다. 현대 유리문은 근본적으로 문이 아니다. 문의 근본적의의는 내부에 숨겨져있는 사물을 감추는데 있는바 사람들의 마음에 현념이 생기게 한다. 문을 여는것과 닫는것은 생명흐름의 한부분이다.     현대에는 건축물을 통털어 집이라고 하는데 가옥(屋)과 실(室)로 나눈다. 량자는 병존하지만 그 용도가 다르거니와 사람들에게 주는 감정색채도 다르다. 옛가옥을 두 고 옛날에는 초옥이요 양옥이요 하였다. “실”이란 공공성을 가진 건축물로서 이를테면 교실, 사무실, 도서실, 실험실 같은것을 가리킨다. 가옥은 개체성을 띠고 “실”은 공공성을 가지고있다.     도시의 사무원으로 말하면 낮에는 “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옥”에서 생활하는바 퇴직까지의 한생을 “옥”에서 나가 “실”에 들어가고 “실”에서 나와 “옥”으로 돌아오는 순환반복이라 압축할수 있다. 당신은 집안에서는 세대주(안해)일수 있고 아들(딸)일수 있으나 “실”의 문안에서는 학생이나 일반직원이나 령도일수 있다. 그러니 인생의 절 반은 “옥”문에서 보내고 절반은 “실”문안에서 보낸다고 할수 있는데 두 집안에서의 각색과 명칭을 합치면 일생의 명문과 함량이 있게 된다. 바꾸어말하면 사람의 일생은 어디로 가든 문과 이어져있다는 말이 되겠다.     문이 열릴 때가 시작일수 있고 끝장일수도 있으며 닫길 때도 시작일수 있고 끝장 일수도 있다. 이를테면 감옥문안에 들어선 당신은 굴종과 굴욕감을 수반한 령어의 생활을 시작해야 하고 자유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러나 석방되는 날 등뒤에서 닫기는 육중한 감옥문소리는 자유의 종소리일수 있다.     대천세계에 중생들이 천층만층이듯이 문도 형형색색에 천층만층이다. 옛날에는 문에서 귀천이 체현되였다. 부하고 귀한자의 저택문은 귀문, 궐문이라 했고 구차하고 문벌이 없는 가문의 집 문은 한문(寒)이라 했다.     그 모든 문중에서 가장 신비하고 가장 열기 어려운 문은 아마도 인간의 마음의 문이라 해야 할것이다. 마음의 문은 진정으로만 열수 있다. 마음의 문이 영원히 닫기 면 관용에로 통하는 다른 출구가 없다. 현대주택은 갈수록 창문이 많아지고 현대양장 은 될수록 로출시키는데로 나가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문에는 점점 더 경계의 자물쇠가 걸리낟. 절실한 얘기는 아에 부담스러워 충이불문(充耳不闻)하고 돌아가는 화제를 보아가면 적당하게 말하고 편리하게 둘러댄다.     더없이 매그러워진 마음들에 깔깔한 모래를 채워서 천정에 매달고있는 현시대, 인간은 언제면 진솔한 정으로 대화의 문을 무시로 열수 있을가? 초병이 지키며 외인 의 출입을 금지하는 현대판관문을 비롯해서 함부로 들어설수 없는 문들이 너무 많은 오늘이다. 저마다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질 그날을 기대해본다.                             2007년 2월 5일  
625    바람꽃은 피고지는가? 댓글:  조회:4576  추천:0  2015-08-16
                   바람꽃은 피고지는가?         바람이 분다. 대지의 언 꿈을 녹이며 기다림에 지친 묵은 대지에 새움을 틔워주 는 바람이 분다. 꽃샘바람이 분다.     바람이야 좀 좋은가? 움트는 대지에 초목을 부르는 따스한 봄바람은 즐거움이요 한여름 나무그늘아래에서 하늘대는 한오리 청풍은 반가움이요 오곡향기 싣고 재넘어 불어오는 금풍도 그대로 환희로움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바람이란 바로 사회상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류형의 회오리바람이다. 이 지구촌에 무풍지대가 어데있으랴만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새 없다고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특정된 인문환경탓인지 건국후 반세기가 넘도록 이 땅에 바람이 잘 새없었다.     이런 시대풍에 이루어진 풍경선을 다시 들여다보면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을수 없고 지금도 한창 불고있는 이런저런 바람들을 피부로 느끼노라면 공연히 먹을알도 없는 “우환의식”이 우습게 나를 흔들어놓는다.     수탉이 울자 천하가 밝아서 세기적숭망대로 땅의 새 주인이 된 농민들이 한창 복된 살림에 재미나 할 때 모스크바에서 불어온 집단화열풍에 호조조요, 고급사요, 하 다가 드디어 급수가 훌쩍 높아진 선풍을 타고 인민공사가 보급되였다. 잇달아 대약진 바람에 실려 공산주의대문에 훌쩍 들어선듯싶던 일이 어제런듯하다. 천군만마가 일제히 울부짖으며 일사천리로 내달릴 때 그 기세는 그야말로 동풍이 서풍을 압도할듯싶었다. 더구나 반가운 백가쟁명, 백화만발의 아주 좋은 형세하에 모두가 맹진하리라 윽별렀다.     사상적이단자를 잡아내는 “반우파”흑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국민의 투지는 더욱 앙양되였고 전민이 떨쳐나선 강철제련풍에 벽돌이란 벽돌은 죄다 날아올라 용광로로 치솟고 심경세작열풍에 밭에 널리느니 곡식단이요 밟히느니 싯누런 낟알이였다.      공동식당바람에 집집의 가마에 거미줄이 얽힐 지경이였고 학생들의 학업도 황페해졌다. 하건만 국민의 인심속에는 과장풍이 시대풍조로 되였다. 무당고산열풍과 꾀꼴새 노래하고 제비가 춤추는 요순시절을 찬양하는 민가열풍이 대지를 후끈 달구었고 결국 인재를 앞세운 고난의 년대를 불러왔지만 공산주의가 눈앞이라고 얼마나 가슴이 뻐근해 했는지 몰랐다.     이 글을 쓰노라니 초중2학년 때 칠판에 그림을 그리고 계산하며 쌍당 27만근을 문제없이 낼수 있다고 위성을 쏘아올리던 한 “영웅”의 얼굴이 선연히 떠오른다. 언젠가 고향 룡산촌에 갔다가 길가에서 그 얼굴을 알아볼수 있었는데 영광의 년대를 회고하면서 대약진바람에 영영 날려가버지 않은것이 다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가 하는 궁금증이 앞서서 인사마저 깜빡 잊었다.     거국적으로 참새 멸종바람은 또 얼만 기세찼고 농,림,목,어업생산대고조속에 자 연자원인들 얼마나 파괴되고 망가졌던가? 열여덟살  나던 그해 처음 고동하목재판에 갔던 일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때만도 고동하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아 원시림이 울울창창했었다. 나는 대자연의 위대함에 탄복하였고 지리선생님이 중국은 세계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하다고 하던 말을 실감있게 되새겨보았다.      장장 10년간을 휘몰아쳐 문화의 터전은 물론 국민경제를 붕괴의 변두리에로 몰아넣은 “대혁명”피바람보다 황당하고 훼멸성적인 바람은 더 없을것이다. “충성무”바람에, 소근장을 따라배우기 열풍에 밭은 범이 새끼를 치게 되였고 호두산에서 불어온 열풍에 휘날리는 “대채기발”아래 평지옥토가 다락전이 되고 수많은 호수가 메워지고 초원이 기경되여 반세기를 넘지 않아서 대자연의 보복을 당하게 되였으니 말이다.      그뒤에도 바람꽃은 장성안팎 대강남북의 하늘땅에 피고 스러지고 다시 피고 다시 스러지고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정(市井)은 바람꽃천지였다. 지금은 웃음거리 삼아 담소하지만 소위 맨발의사들이 “만병통치약”이라고 고아대니까 서슬을 달여서 먹는 바람이 일던 시절에 무엇이 좋다하면 무작적 바람따라 달려가는 풍조는 오늘도 변합이 없다.    아침마다 랭수를 한고뿌씩 마시면 내장이 말끔히 청소된다고 해서 한때 기를 쓰고 물배를 채우는 바람이 일었고 닭의 생피가 좋다하니 서로 다투어 닭모가지를 비틀어 피를 받아마시던 바람도 있었다. 군자란바람은 또 얼마나 민심을 뜨겁게 달구었던가? 국민 모두가 문명해져서 다투어 가꾸다보니 내지에서는 한통의 군자란값이 최고로 만원까지 되였단다.     시대는 도약을 하고 국민들은 많이 문명해졌다. 그래서 주역과 별별 기공바람이 다 일더니 급기야 허황하기 그지없는 법륜공바람까지 몰아와서 수많은 국민들의 머리를 혼란시키고 헤아릴수 없이 많은 황당극을 연출해냈다.      우리 연변에서는 해리서인지 물쥐인지를 키우는 바람이 일다가 결국은 사기군의 배만 불려주고말았고 분한김에 되는대로 놓아버린 해리서들이 들쥐대오에 가담하여 과원에 서식하면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들의 생존권내에 일고 잦을줄 모르는 열풍이 이루어놓은 인문풍경은 그야말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가관이라 해야겠다.     마침내 쇄국의 국문이 열리면서 개방의 춘풍이 불어와 고목봉춘의 기꺼운 경상을 펼치였다. 벌에는 오곡이 우거져 풍양가 우렁차고 산언덕에 과일향기 풍기여 살맛이 나는 태평성대가 시작되였다. 하건만 또 다른 바람이 일었다.      상품경제물결이 금방 일기시작하자 “가방공사”세우기 바람이 곳곳에 일고 뒤이어 하해(下海)하는 바람이 격랑을 일구면서 인심을 뒤흔들었다. 한편 바람따라 돛을 올려 크게 치부한 사람들이 많은것도 사실이다. 되거리장사에 돈가방이 불룩해진 벼락부자들도있고 자동차밀수바람에 한몫 단단히 쥔 총아들도 무수히 많다.      대강남북, 장성안팎에 불어친 유흥바람에 그 어디보다 멋진 경관을 이룬 곳은 우리 변강산촌이라 해야겠다. 큰거리 작은 골목마다에 나이트클럽, 가라오케이가 서더 니 뒤이어 노래방, 다방, 사우나, 오락성 등으로 도시는 별유선경을 이루었다.     하여 마을마다 도시진출바람이 일었다. 피로 지키고 땀으로 걸군 가원을 휩쓸어 버린 몹쓸 바람은 어지간히 생기고 약삭빠른 농촌처녀들을 네거리로, 뒤골목으로 휘 몰아 넣다가 급기야 산해관 너머로 날려보내기 시작했다.이미 5만도 더 넘는 처녀들 이 국경너머로 바다건너로 영영 날아갔다고 한다. 리향바람이 남긴것이란 농촌총각들 의 결혼난이라는 20세기 비극뿐이다.      말만 들어도 쓴 웃음이 나오는 섭외혼인 바람에 얼마나 많은 녀자들이 배반의 길 을 걸으며 가정파탄의 비극을 연출해냈고 얼마나많은 “타락한 세대”들을 낳았는가? 물론 한족들도 리향하여 막벌이를 하지만 우리처럼 뿌리박은 터를 남에게 내주며 부평초처럼삶을 영위하지 않는다.     여느 민족보다 우리 민족의 생존권내에서 바람꽃이 아찔하게 일고있는데는 크게 두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열광, 둘째는 급공근리(急功近利)관념이다. 열광에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맹동하다보니 떠들썩한 기관을 이루는것이다.     급공근리(急功近利)를 마구 행한데서 조성된 악성순환은 결코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지나고 보면 많은 경우 산비는 아니오고 바람만 루대에 가득찬 경상이 된다. 그리고 세차게 타오르는것같던 공리의 불길도 헛불길이여서 인차 꺼져버리기가 일쑤이다. 혹자는 이런 경상을 개혁개방시대의 세 풍경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즐기고 자호감을 가지기엔 뿌리채 흔들리는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과 스스로 자초하는 궁경이라는 생각이 앞서지고 망연함이 시선을 흐리우고있다. 어 떠한 바람이였든 돌이켜보면 일진광풍인 경우가 많았다. 남들은 동서남북풍에 가원이 흔들리않는데 우리 조선민족은 왜 그렇게도 바람기를 잘 타는지…     오, 언제면 바람꽃이 멎을것인가?                             2006년 4월 15일      
624    (진언씨수상록 89) 사과라니? 웬 말씀을… 댓글:  조회:6033  추천:3  2015-08-14
                                           사과라니? 웬 말씀을…                                                                                             진 언       악명높은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이 중국측과 강제로역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합의했다는 소식이 나돌자 한국내에서 불만소리가 높아지고있다. 미쓰비시가 조사비용 2억엔을 들여 행방불명된 징용자와 유족을 찾고 별도로 1억엔을 출자해 사죄기념비를 세울 예정이라는 말도 있다. 한편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전쟁포로들에게도 미군피해자들에게 한것처럼 똑같이 사과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당시 인간이하의 고역에 시달린 조선인들에 대한 피해보상이나 사과란 언급도 되지 않았다. 유독 한국만이 무시당한 판국이다. 한국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법적인 문제가 다르다나? 한국과 중국피해자들이 국적에 따라 목숨값이 달라질수 있다는것은 한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과 멸시가 아닌가?    수십년을 내리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면서 손해배상을 요구했는데 최근 아베 신조나 일부 각료들과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면뻔하지 않은가? 일본침략자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간이나 자원을 략탈당하고 망국노로 도탄속에서 처참하게 당하였는데도 일본이 좋다고 하는 친일파후손들과 또는 지지하는 또라이들이 득시글거리니 사죄받을 계제가 되기나 하겠는가? 이런 사이비한 현황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를 주문하는것은 일본인들을 잘 모르기때문에 하는 발상인지 모르겠다.     자초에 일본은 수많은 령주국가로서 각 령주들이 정복전쟁을 벌리였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새 령주에게 무조건 복종하는것이 례의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약육강식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승자에게 복종하는것을 당연지사로 여겨왔던것이다. 그런 관념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냥 지켜지고있다.     례를 들면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였을 때였다. 일본을 패망시킨 미국인들이 가장 놀란것은 죽기살기로 반항하리라 믿었던 일본인들이 일본천황이 항복선언을 하자 일제히 미군을 환영하면서 맥아더를 일본의 영웅으로까지 추대하기에 이른것이다. 원쑤의 나라인 미국에 “앗사리(あっさり)”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멕아더는 매우 흡족했으면서도 내심 놀라웠다고 후날 자신의 곤혹을 토설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쟁에서 지면 승자에게 철저하게 굴복하고 복종하는것은 일본국의 오랜 관습이였다. 그래서 과거 자신들이 조선을 강제병탐하자 조선인들이 목숨걸고 항쟁하 는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만약 조선사람들이 일본을 점령하게 된다면 일본인들은  승자에게 굴복하고 복종할것이다. 그러니 이런 못돼먹은 족속들에게 사과를 바라는것은 하늘에 삿대질이다. 철저하게 승부에 승복하지 싸움에서 진놈들에게 사과따위는 하지 않는 무사도정신으로 굳어진 소위 불패의 대화족이기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량심”적인 사과와 배상은 도저히 기대할수가 없다. 비도 아니오고 우뢰소리만 높았듯이 그동안 목이 쉬도록 “사과타령”을 불러왔지만 만약 일본이 사과한다면 일본국이 한국에 백기를 드는것과 진배없다. 그러니 치악스러운 일본의 기득권자들이 과연 굴욕에 가까운 사과를 할것인가?      일본의 후쿠시마현 지방에는 “안되는것은 안되는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받아들일수 없는 요구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말 이다. 독일은 사죄를 하는데 왜 일본은 못하느냐는 소리는 의미가 없다. 일본은 독일과 다르고 “한국”은 2차대전 승전국이 아니다. 반세기나 지난일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무얼 얻어 낼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 나라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일본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으로 입막음을 하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은 끝났다고 공공연히 공언했다. 일본은 사죄명목의 5억딸라의 무상차관과 함께 깊은 유감과 애도의 뜻을 표시했고 한국정부의 동의하에 한일과거사 관계는 일단락지었다는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까지 사죄하고 배상해야 만족하냐며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라고 생각한다.      하긴 인류력사상 타민족, 타국에 대한 어느 강자가 충심으로부터 사과한 사례가 없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딸리아,화란…그 어떤 서구렬강도 과거 식민통치를 하며 저지른 비인간적인 죄행들에 대하여 진정 참회하고 사과한적이 없다. 중국침략이나, 남경대학살, 악명높은 “731부대” 의 마루다 사건에 대하여 사과는 고사하고 사실 자체를 인정한적 조차도 없다.      중국이나 동남아 각국으로 말하면 사과할 나라가 일본인데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그에 앞서 미국의 사과도 받아내야 순리다. 말하자면 악명높은 "가츠라-태프트밀약" 인데 미국은 필리핀을 가지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가진다고 합의한 밀약으로서 바로 미국이조선땅을 일본에 넘긴 력사사건이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던 “대한제국”을 일본이 삼키도록 획책한 사실에 대해 미국의 공식사과가 있어야 한다.      미국 부르킹스연구소 그레고리 헨더슨박사가 “한반도분단” 은 미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전에 미국무부 차관보가 적반하장으로 “한일중 삼국은 과거사를 덮으라”고 뻔뻔하게 말했는데 력사바로세우기 차원과 “자주국가”로서 미국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해야 체면이 설게 아닌가?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이나 근로봉사대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는것은 뉘기 정권이든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거니와 불공대천의 원쑤들에게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들이다. 7월 25일에  일본의 우익지 산케이신문이 위안부문제를 거론하며 일본만 비난하는것은 부당하다는 칼럼을 25일 실었는데 일본만 비난하는것은 그녀들을 성노예라고 하는것이요 인격모멸이니 뭐니하면서 부당하고부조리한 처사라 개나발불었다.     이런 판에 내심상 “한일관계”가 파탄날가봐 전전긍긍하면서 곡조가 단일하지 않은 사과타령을 부르는것은 한낱 정치쇼에 그칠 활률이 높다. 유사이래 힘의 론리가 지배해 온 이 지구촌에서 우리 민족이 일본의 사죄가 아닌 사과라도 받아 내려면 엄청 강해져서 대화족들을 굴복시키는 길밖에 없다. 그래야 “すまない”를 복창시키든 “罪を許すこと”를 외우게 할수 있다. 한국의 한 모모한인물이 "한국 국민의 (좋지 않은 대일) 민족감정을 잠재우려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면 다 해결된다"고 희떱게 말하였는데 그의 력사인식이 얼마나 천진한가?      아닌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가 14일 발표한 전후 70년 담화에서 전쟁에 대해 “과거형”으로 사죄를 언급하는데 그쳤다. 또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명시적 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후 세대에 사죄할 숙명을 지워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아베는 일본의 패전70년을 하루 앞둔 14일  기자회견에서 랑독한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해왔다"고 밝혔다.……     일본은 거의 죽다가 살아난 승냥이다. 그런데 속타산이 있는 미국이 부추겨주어 이젠 동맹국미명으로 다시 조선반도에 군화발을 디밀게 된 판인데 사과라니? 아베의 입에서 “パーカ! 죠센징!”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듯,      소위 영원한 벗이 없고 영원한 적이 없다는 현대국제관계학 규칙이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피빚청산도 없이 공존하는것만도 이만저만인데 “한일이 미래를 향해 갈 역사적기회"라고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판이니 사과인지 돌배인지가 동동 물건너간게 아니겠는가?!                                          2015년 7월 23일 ㅡ 8월 14일   뒤늦은 부록:                                  아베 "위안부 사과 편지, 털끝만큼도 생각안해"   국회답변서 "한일 합의내용 밖의것" 일축 뉴스1 | 장용석기자 | 입력 2016.10.03.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는 3일 최근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자신이 '사과' 편지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는데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지지통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이날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 오가와 준야 (小川淳也) 민진당 의원의 관련 질의에 사과편지 발송은 "(한일간) 합의 내용 밖의 것"이라며 이같이 답했다. 이에 앞서 한국외교부는 최근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인 '화해·치유재단'과 일본 시민단체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의 모임'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아베 총리 명 의의 사과편지 발송 문제가 거론되자, 지난달 29일 "일본측이 위안부 피해자들 마음의 상처를 달래는 추가적인 감성적 조치를 취해줄것을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작년 12월 한일위안부합의 당시 '화해·치유재단'에 출연키로 한 10억엔(약 109억원)이 지난달 31일 재단측에 송금됨에 따라 "양국 합의에 따른 일본측의 책임은 완수"된것으로 보고있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합의 당시 한국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 이전·철거 문제와 관련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점을 들어 이에 대한 한국 측의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아베 총리도 이날 국회 답변에서 "(한일) 합의 내용을 양국이 성실히 이행해가는게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하 략)
623    [수필] 려행의 의미소 댓글:  조회:5362  추천:0  2015-08-14
       려행이란 일정기간 동안 볼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다른 나라에 가는 일이라는데 참으로 려행이란 숭고한 미학적조우인가? 여유로운 인생에 소일거리인가? 려행할 생활적여유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보다 중요한것은 경제적여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보충으로서 려행지보다 려행 자체를 즐기는것이다. 괴테가 말했듯이 하늘은 어디를 가나 푸르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세계일주 려행을 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보통 려행하면 관광과 련계시키고 관광지라면 려행로선에 도달점을 떠올리게 되지만 관광과 려행의 의미는 어감의 차이만큼 다르다. 문헌에 따르면 관광(观光)은《주역》관괘(观卦)의 “왕의 손님으로 후한 례우를 받아 그 나라의 빛나는 문물을 살핀다.(觀國之光移用賓于王)”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관광은 즐기고자 하는 준비된 마음으로 타지방의 명승지를 찾아 산천경개나 풍물을 즐기는것이고 려행은 밖으로 떠나가되 철저히 자신의 내면을 충실하게 하는것으로 자신이 매몰되는 일이다.     산천경개와 력사유적지와 풍물을 흔상하며 대자연의 위대함과 인류문명의 흔적들에 탄복하게 되고 그 많은것을 제눈으로 만끽한다고 느낄 때 자기의 삶이 더 의미로워질것이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색안경을 벗고 객관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기의 인생자세를 다시 가다듬어볼수도 있다면 여북 좋으랴!     로자는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다 알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수 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만큼 덜 알게 된다. 하기에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훤하고 억지로 하는 일이 없어도 모든것을 이룬다고 하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넓은 세계를 편답하지 못한 사람은 많이 돌아다닌 사람보다 편견이 더 많을수 있는데 려행은 선입견과 편견을 실제적으로 풀어줄수 있다.     려행에 관한 명구들이 많다. 아우구스 티누스는 세계를 한권의 책이라 할 때 려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책을 한페지밖에 읽지 않은것이 된다고 하였고 사무엘 존슨은 려행에서 지식을 얻어 돌아오고싶다면 떠날 때 지식을 몸에 지니고 가야 한다고 하였으며 토마스 폴러는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려행한다고 하였다.     진정한 려행의 의미는 삶에 인생경험을 보태고 생활내용을 가미하는데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단순히 구경을 위한 목적보다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을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려행은 배움의 또 다른 실천이라고 정의할수 있겠다.     멀고 가까운 려행길에서 자기의 인생궤적과 세계관을 돌이켜보고 성찰하며 자기 본연에로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두고온 곳으로 돌아온다. 이렇듯 려행은 의미로운 생명운동이다.    누군가 려행자를 다섯개 등급으로 나누었다. 남에게 관찰당하는 려행자는 최저로서 려행의 대상이지만 장님이다. 다음은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려행자들이다. 세번째 등급은 관찰한 결과를 체험하는 려행자이다. 그보다 한단계 더 높은 려행자는 체험한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려행자이다. 최고수준의 려행자들은 관찰, 체험하고 습득한뒤 문장을 써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려행기작가들이다. “들을라니 그곳에 볼거리가 많다기에…”, “많은 사람들이 갔다와서 자랑하길래…”, “살만하니 좀 돌아다니며 돈도 쓸겸…” 하는 관념으로 려행을 떠난 사람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사람들이며 려행경험이 많지 않거나 없는 부류이다.    속담에 개 바위돌에 갔다온격이라는 말이 있다. 당나귀가 만리타향을 돌고돌아도 말이 되여서 돌아올리 없다는 명언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국내의 명산대천, 명승고적은 물론 오대주를 편답하고 돌아와도 역시 원래의 그들이다. 어째서 그럴가? 옛사람이 말했듯이 만리길에 만개의 명소를 만난다는것이 아니다. 진정한 려행의 의미는 삶에 활력을 보충했는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아무나 손쉽게 찍을수 있는 사진을 남기는것만으로는 려행의 의미소를 체현하지 못한다.     단순히 구경을 위한 관광보다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을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얻었는가를 글로 고착시켜야 값지다. 경제적으로 소비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치창조가 되여야 과시 명실상부한 려행가라 하겠다. 려행은 호기심의 만족이 아니며 더구나 자기과시를 위한 과소비일수는 없기때문이다.     명승유적지에 제 이름자를 새기거나 락서하거나 바라올라가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는 비문명적인 행위로 질타를 받고있는 중국려행객들로 말하면 려행의 의미도 모르고 감각을 찾아 돈냄새만 피우는 작동이라 할것이다. 이런 깨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곳을 돌아다니고 아무리 많은 사진을 찍었다 해도 그저 눈요기만 한 사람들이다.     더 슬픈 일은 날로 높아가는 관광입장료에 리성적인 소비의식으로 대비하지 못하는것이다. 말하자면 많은 돈을 팔면서 자기를 과시하려는 내심의 암투도 있다는 말이다. 많은 려행자들의 비애는 진정한 려행이란 무엇인지 속에 새겨진바가 없고 어째서 려행을 떠났는가 하는 목적성이 없이 그저 보기 위해, 자기 눈복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건 려행목적이 아니라 소일목적이라 해야 할것이다.     려행길은 인생의 려정에서 사잇길이라고 할수도 있다. 사람도 다섯등급의 려행자처럼 나누어볼수 있다. 최하급의 려행자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며 최상급의 려행자는 습득한 지혜를 능동적으로 인생에 운용하는 사람들이다. 가파로운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 사람은 정상의 희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오히려 아스라한 산봉우리를 쳐다보며 지레 주저앉는 사람이 더 많을수 있다.     갔노라, 보았노라, 즐겼노라 말하기보다 느꼈노라. 배웠노라, 명기했노라가 더 보람있지 않을가? 바꾸어 말하면 한번, 또 한번의 려행에서 어떤 지적이고 정서적인 변화를 가져왔는가이다. 그저 방황하듯 돌아다니며 자극을 찾고 희열을 느끼는것도 심신에 유익하겠지만 진정한 려행의 의미소는 새로운 배경에 포즈를 취하고 서보았다는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새로운 시야를 열었다는 그것에 있으리라…                                         연변일보  8월 14일자  
622    우리들이 만드는 굴레 댓글:  조회:5176  추천:0  2015-08-12
     우리들이 만드는 굴레        인류는 일찍 부자유속에서 자유를 찾아내는 지혜를 터득했지만 동시에 자유가운 데서 부자유도 만들어왔다. 말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지각이 들면서 온갖 심령의 굴레 를 쓰기 시작했다는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객관상에서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데 인간의 원초적비애가 있다.     우리는 흔히 육체의 구속을 부자유라고 생각하며 참지 못한다. 기실 심령의 자유가 행동의 자유 못지 않게 요긴한데도 말이다. 아무도 자기를 묶지 않았건만 그냥 속 박감을 느끼면서 해탈을 바랄 때 그것을 실현시켜줄 사람은 자기외에 아무도 없다.      스스로 해탈법도를 찾아내기 시작했다면 자아완성에로의 매진을 의미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복역수가 지리한 옥살이에 진저리를 치다가 자기를 감형하는 방법을 모색했는데 유익한 일을 하면서 시간앞에 달리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외국어를 자습하기 시작했다. 일심불란으로 외국어를 학습한 그는 만기석방될 때 60 여만자나 되는 번역고까지 가지고 나왔다. 그는 스스로를 감형시켰을뿐만아니라 심령의 굴레를 벗어버린것이다. 그야말로 마음은 자기 왕국이요 의지는 자기의 법률이 라고나할가? 그렇다, 나를 최후로 정복할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자기뿐이다.     우리는 감옥의 높은 담장만이 인신자유를 빼앗는것으로 여긴다. 기실 가장 무서운 감옥에는 높은 담장과 철조망이 없다. 전하는데 의하면 지난날 영국식민주의자들 이 인도농촌에서 도적을 잡을 때 한놈을 잡으면 땅에 원을 그려놓고 그안에 있게 하다가 도적을 다 잡은 다음 함께 끌고 갔다고 한다. 이른바 “동그라미감옥”인것이다.     이 세상에 감옥에 갇힌 사람은 어쨋든 소수이다. 보다 많은 절대 대부분의 사람 들이 몸은 비록 자유롭지만 스스로 정신적굴레를 만들어 쓰고 살아간다. 스스로 자기를 속박하는것만큼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더 있을가?     자기에 대한 무지가 첫번째 굴레가 된다. 자기를 인식한다는것은 근원적으로 심령의 해방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기를 아는것 임상으로 총명할수 없다. 하지만 자기 감각팽창증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를 속박하는 굴레라는것을 모르고있다. 이런 자아도취자들은 쉽사리 자아중심주의에 빠져들어 안하무인이 되고 고립무원하게 된다.     반대로 자비감도 심령의 굴레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기둥인 신념을 잃다보니 바깥세상을 두려워하면서 부딪쳐보려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들 자신을 속박하 고있는 굴레야말로 신념의 결핍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자기의 신념을 벽에 걸어두어서는 안된다. 자기절로 운명의 계하수가 되여 종신형을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이라 해야 할것이다.     자기 직업에 대한 염오와 권태도 심령의 굴레가 된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을 얻었을 때 이미 보상을 받은것으로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업, 하기 싫은 일은 그 자신의 굴레이지만 감옥으로서 형기가 얼마나 길지 자신도 잘 모른다. 어떤 일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지만 누군가가 꼭 하게 되여있다. 그것이 곧 책임감이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든 지망자가 있는 법이다.     마음에 없는 일터라도 마음을 바꾸어서 감옥에서 외국어를 학습한 그 사람처럼 자기 직업을 외국어학습처럼 간주한다면 자기를 감형하는것이 되고 심령의 굴레를 벗 어버린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것이다.     자기비판정신도 하나의 정신적굴레이다. 사람들은 왕왕 남의 단점을 비추는 거울은 앞에 걸고 자기를 비추는 거울은 등뒤에 감추고 다니면서 불평만 부린다. 이를테면 중국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탓하면서도 “불필요한” 그 많은 사람들속에서 자기는 숫제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 우스운 사유방식을가지고있다.     로신의 소설 “아홉근할머니”에 나오는 아홉근할머니처럼 한 세대, 한 세대 점점 못해간다고 말세타령을 하면서도 자기만은 례외인듯이 자족하고있다. 우리는 따지고 보면 남보다 독특한데가 한가지도 없는 사람들이 흔히 양양자득해서 누구보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다니는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무엇보다 자기비판의 무기로 자신을 해 부할 담략과 진솔함이 있어야 자기 속박에서 재빨리 해탈될수 있는것이다.     절망도 하나의 질긴 굴레가 된다. 유사이래 없었던 개혁개방속에서 얻은 사람과 상승한 사람도 많지만 그와 반대로 잃은 사람, 나떨어진 사람들이 더 많다. 후자들은 기술과 지식, 능력경쟁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는 현실에 아연실색해하며 우울한 기분, 슬픈 마음, 운명의 불공평한 장난에 억울해하면서 자신을 절망의 변두리에 내몰아 인생을 아끼고 즐겨야 할 마음의 여유를 빼앗겨버렸다. 절망속에 자기를 가두는것은 너무나 비겁하고 나약한 인생자세이다.     질투심도 자기 속박의 굴레이다. 인간의 “7정”에는 투기가 없다. 그러나 투기는 인류의 진화와 동보하여 오다가 궁극에는 일종 심령의 암증으로 되여버렸다. 투기에 서 기(忌)의 뜻은 마음이 이미 꽉 찼기에 누구를 용납할수 없다는것이다. 투기병의 근원은 저능, 혹은 무능에 있는바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못함을 느낄때 자기도 모 르게 발작한다.     질투가 친혈육을 죽인 참극이 있다. 청조 옹정년간에 백태관은 이름난 팔대검객 가운데 한 사람이였다. 그는 강호를 떠돌다가 떠난지 8-9년이 되여서야 고향으로 돌 아오게 되였다. 마을밖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그는 8-9세쯤 되여보이는 한 어린애가 무예를 닦고있는것을 보게 되였는데 그 솜씨가 비범하였다. 백태관은 저도 모르게 연 신 찬탄하며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문득 이 아이가 장차 크면 틀림없이 자기를 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오리 질투의 검은 불길이 가슴속으로부터 타오르는것을 말려낼수 없었다.     그는 아이에게 시비를 걸어가지고 무예를 비겼다. 아이는 필경 어린지라 백태관의 적수가 못되였다. 백태관의 칼에 맞아 거의 죽게 된 아이는 마지막숨을 거두기전에 백태관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나쁜놈, 이제 우리 아버지 백태관이 돌아오면 꼭 복수해줄거다!어디 두고봐,”이렇듯 모든 인간희비극은 질투에서 연출되였고 오늘도 의연히 연출되고있다.     투기병에 걸리면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 아파나듯”이 남이 잘되면 공연히 심사가 꼬여서 자꾸 헐뜯고싶어진다. 그래서 남의 성과가 자신에 대한 차을수 없는 속박으로 느껴지면서 스스로 내린 금고형에 시달리게 된다. 자고로 질투에는 휴일도 퇴직도 없다. 우리 모두가 질투라는 자아감옥에 무기징역수로 남아있게 된것이 아마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허영심도 무서운 굴레이다. 허영심은 조물주의 자만이라고 하지만 사람에게는 심령의 굴레이다. 허영심은 명예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량심은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 허영심은 현대사회의 첫째가는 악덕이다. 모파쌍의 단편소설 “목걸이”를 읽은 사람들은 하루밤, 허영심의 만족을 위해 결국은 인생의 황금시절 10년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로와젤부인-마띨드를 잊지 않고있을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자산계급사상 의 일종인 허영심의 대가라고 분석해왔지만 기실 허영에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허장성세하는 자는 속이 텅 빈 심리불구자로서 허영심은 그의 어리석은 정도와 등호를 이룰뿐이다.     넘치는 부가 주는 희열감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허영이다. “그대의 재물이 있는 곳에 그대의 마음이 얽매여있노라.” 그 재물을 부라고만 생각하면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심령의 굴레를 쓰고 있는가를 모른다. 그리고 돈없는 려행자는 강도앞에서도 노래를 부를수 있다는 말의 함의를 영원히 깨닫지 못한다. 사람은 우선 필요성을 느끼고 유용성을 찾고 그다음에 편안함을 바라고 그후에 쾌락으로 재미를 보고 그때로부터 사치에 방탕해지고 결국엔 미쳐서 자기 신세를 철저히 망친다.     인생에서 누구나 모면할수 없는 또 하나의 심령의 굴레는 도덕과 량심이라는 굴레이다. 이는 인간사회에 매개인에게 어디까지나 필요한 굴레이다. 사람마다 도덕과 량심의 약속력을 무시하고 한껏 방종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도덕 은 갈수록 미끄럼질에 신나있고 사람은 자기 량심을 개에게 떼주여주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속세의 행복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다가 싫증난 사람이 만약 지쳐버린 손을 자기 량심에 얹는다면 어떤 감수가 있을가? 그것은 그만이 알 일이다.    상술한 그 모든 굴레들은 무서운 힘으로 사람의 심려을 속박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해탈할 방도가 없는 치명적인 굴레는 그래도 탐욕심이라 해야겠다. 량심과 도덕앞에서 탐욕이 배를 내밀고 그게 얼마나 값이 가느냐고 코웃음치며 무작정 따라오라 고 꼬드기고있기때문이다. 탐욕에서 “욕(欲)”자는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깊은 낭떠러 지라는 의미로 만들어진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설령 글자의 함의가 그렇제 않더라도 여하튼 탐욕스러운자의 인생은 욕망으로 시작되여 철창속에서 종말짓는다는것을 력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탐욕스러운자는 무엇이나 다 제손에 넣으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엇이나 다 잃어버리고만다. 언제나 열려있는 탐욕의 미궁에로 들어가는 탐욕자의 통행증은 탐욕이고 그들의 묘지명도 탐욕이다. 그래서인지 전 지구적으로 늘 넘쳐나는 감옥이 바로 탐욕이라는 “감옥”이다.하건만 들어가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 지고있는 추세이다. 일단 탐욕의 굴레를 쓰게 되면 재물을 삼킬수록 소금을 삼킨 미친놈처럼 갈증이 나하고 넋도 마음도 새까많게 타들어간다. 죽어서도 넋은 안정을 못찾는다. 단떼의 “신곡”에서 묘사된 련옥에서 화형의 징벌을 받기때문이다.     라태도 자기를 속박하는 때묻은 굴레가 된다. 실패자의 열사람중 아홉사람은 절반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거나 지나치게 휴식한 게으름뱅이라는것을 력사가 증명한다. 라태는 어디서나 우리의 손발을 묶어놓을뿐만아니라 사유마저 묶어놓는다. 자유경쟁의 현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사색의 령역에서라도 로동자가 되여야 하는데 라태한자는 그것마저 싫어한다. 한 사람의 사유가 라태라는 바줄에 묶이우면 그의 인생은 그로서 엉망진창이 되고말것이다.     상술한 이런저런 심령의 굴레에서 끝끝내 해탈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긍정코 행복할수 없다. 온갖 형벌중에서 가자 무자비한 형벌은 자기 마음의 재판소에서 받는 형벌이다.     우리 모두 자기가 만든 굴레에 매여있지나 않는지 생각해보자.     나부터 심령의 감옥에서 무기수로 있는것이 아닌지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2007년 5월 15일
621    “인생은 미완성작”을 내면서 댓글:  조회:5289  추천:0  2015-08-10
       “인생은 미완성작”을 내면서        길을 가면서 꽃을 꺾는 사람은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이다. 날은 저물어 갈길이 바쁜 나그네에게는 어둡기전에 마지막 주막에 닿으려는 일념밖에 없다. 그저 끝없이 가기만 할수 있을가? 언젠가는 되돌아와야 하는 나그네의 길이다.     문학의 길에서 더구나 행선지가 없이 걷기만 하다가 개탄으로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 너무나 허무한 일이다. 마치 여기저기 그냥 삽질만 하다가 물한방울 구경못한채 주저앉아 불운을 한탄하는것처럼 말이다. 나는 인생의 첫아침에 문학의 길을 떠났다. 길량식도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으면서도 “남들이 장보러 간다니까 섶지고 나서는 격” 으로 덩둘해서 떠나버린 문학의 길이다.     려행길은 탄탄해진 길을 따라 갈수 있지만 문학의 길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비탈 을 톺아오를수밖에 없다. 또한 문학의 길은 혼자 걸어야 하는 외로운 길이다. 멋모르 고 이 길에 오른 첫걸음부터 열정으로 달군 꿈을 홰불로 삼고 차마 버리지 못한 아집 을 지팽이로 사유가 닿을수 있는 공간이면 다 길처럼 여기고 헤덤볐다.    영예의 계관이 기약된것도 아닌데 스스로 허둥대던 문학의 길, 사상과 상상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좋아서 떠난 길에 숙명적으로 귀속되고말았다. 누군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길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필경 대답이 궁할것이다. “갈래갈래 갈린 길이 로마로 통한다”지만 내가 걷는 문학의 길에는 종착지가 없다. 될수록이면 생길 만 골라서 가야만 그나마 얻는 소감이 남다를것이니까,    안내하는 사람도 없다. 손잡아 이끌어줄 사람도 없다. 그만큼 싱거운 모험이며 갈수록 험난한 길이다. 그러나 갈수록 마음은 넓어져 나름대로의 보람과 애환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게 가고 가다가 유감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돌아 걸으니 향기만방하던 꽃들은 어느 약빠른 사람들이 다 꺾어가고 내가 꺾을수 있는것이란 엉성한 잡초들뿐 이였다. 마음을 열지 못하고 가다가 돌아온 길이여서 잡초만 무성한것이지 모르겠다.     처음 나는 시혼에 넋을 빼앗겨 인생길을 반나마 걷다가 허무함을 절감해서 돌아섰다. 그래서 아무나 꺾을수 있다는 수필이라는 상록수 가지들에 마음이 동해버렸다. 수필을 쓰는 일이란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을 열어 그 열린 마음이 만들어내는 감 정을 문자화시키는것이다. 헌데 나의 많은 수필들에서는 그것이 잘되지 못하고있다. 그래서 감정이 빠진 지식의 라렬이 되고 누구나 아는 일반적인 사항을 지저분하게 늘어놓고있다. 잠간이라도 보지 못하면 미칠것만 같은 사랑의 마음이 뜨거운 감동을 낳는 글이 되는것처럼 수필쓰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작용이 중요하다. 그런 마음의 작용을 중시할 때 비로소 읽는이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좋은 수필이 창작 될수 있는것이다.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간혹 장사가 잘 안되여도 미봉책으로 다른 항업에 손을 대는 경우가 있다. 내가 수필창작에서 단맛을 못보고 일컬어 “잡문”에 언감생심 접근을 한것도 이 경우라 해야 하겠다.     잡문이란 무엇인가?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나 여러가지 리론서들에서의 개념도 의연히 확정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고있다.     필자의 잡문졸고가 나름대로 이름지은 “잡문”으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몰골이나마 얼추 갖추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역시 나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잡문의 문학성을 살리는 수단인 언어예술을 강구하려고 애쓰면서 형상성과 서정, 두개 방면에서 노력을 해보았을뿐이다. 훌륭한 잡문이라면 형상성은 그 기지로움으로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바 곧 풍자성과 유모아 색채가 다분히 풍겨야 할것이다.    잡문은 소잡문과 대잡문으로 나누는데 대잡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체적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소잡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리미질해준다. 대잡문을 풍성한 식탁이라고 한다면 소잡문은 한잔의 독한 술과 같다고 해야겠다. 만약 잡문이 세상도는 인심에 아무런 유익한 점도 주지 못한다면 비수, 투창의 구실을 상실한것이다.     지금 로신이 살던 시대와 다르지만 로신의 담략과 견식과 량지와 대화방식이 의연히 수요되고 그의 정신과 어투가 수요된다. 그는 고도의 리성사유와 합리하고 정당한 사변성을 전개한 사상가였다. 잡문은 력대로 비판적이였고 심미적이였는바 눅거리 찬가와는 인연이 없다. 잡문은 암흑과 허위에 대해 추호도 타협하지 않으며 어용성은 더구나 용납되지 않는다.     잡문은 여론감독자로, 사상지향의 인도자로, 시대의 강음으로 되여야 한다. 이는 시대가 잡문에 부여한 숙명이라고 해야겠다. 그러한 잡문의 숙명을 알면서도 잡문다운 잡문이 되지 못했으니 잡문사촌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서문을 마치려 한다.     끝으로 필자가 어설프나마 문집을 낼수 있게끔 후원해주신 고마운분들과《장백산》잡지사의 성원과 지지, 그리고 이 책을 출판하느라 로심초사하신 연변인민 출판사의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2008년 3월 12일                                                 차례                                                                  세상보기   우리들이 만드는 굴레 바람꽃은 피고 지는가? 문을 여닫으며 세상보기 신성한 비애 보물을 론한다. 수자의 자탄 그리고 또 다른것 력사의 “화석”에 새긴 감회 잊으라 기억하라! 모아산에 묻어둔 잡념들 회의학서문 약속력을 상실한 시대 로백성과 “부모관” 카멜레온의 웅변 권력잡설 정치건달 모기를 읊노라 “모자” 의덕을 말하다 염라국탐방기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남년혼합계산식 사랑도 기술이다 결혼을 말하다 현대호색부                                                 인격의 안팎 1. 당신은 수치심을 아는가? 2. 천박을 평함 3. 《도덕교과서》부록 4. 큰 “대자”에 업혀보다. 5. 량심의 자술 6. 리기를 다림질하다. 7. 말! 말! 말! 8. 불평의 저의(底意) 9. 생각하기와 말하기 10. 생명과 도의 11. 엉덩이사유 12. 욕망과잉시대의 절경 13. 욕설의 철학 14. 귀천을 저울질해보다 15. 하느님은 왜 웃을가 16. 허영의 시장 17. 인격의 안팎 18. 소인을 알아보다 19. 성실을 내버린 뒤 20. 미소하는 삶 21. 아첨학개요 22. 얼굴을 읽어보다. 23. 친구라는 친구                                                             살며 느끼며 생각하며 1. 나라 “오락병” 2. 장하도다, 입이여! 3. 그대 얻기전에 4. 기아약 5. 소의 유촉 6. 나비의 질문 7. 노새의 길 8. 로옹의 춘정 9. 두엄마 10. 민들레만가 11. 보는 가을, 느끼는 가을 12. 살며 느끼며 생각하며 13. 석양에 태운 상념 14. 지각한 사랑 15. 그 손! 16. 인생의 고개고개에 17. 인생은 미완성작 18. 고요함에 부쳐 19. 고향의 산에서 20. 마음과 터밭을 매다                                                     문인의 오기와 골기   학문의 곤혹 명인과 량지 문인의 오기와 골기 “문화”의 범람과 문화폭력 붓은 누구를 위해 달리나? 슬픈 궤적 “나는 무엇인가? ” 문화의 실총과 총애의 문화 문학과 땀  문학언어공능풍격 나에게서 수필이란?  
620    (시조산책 100보) 71-100보 댓글:  조회:5241  추천:0  2015-08-04
                         1. 마음이 비정한데 운수소관 무엇이며                                   부모에 불효하고 奉神한들 무삼하리                                           형제간 불화하다면 벗사귐도 无益일다                         2. 거동이 단정해야 독서해도 유익하고                                   일처리 온당해야 총명함도 빛나거늘                                          오기에 유아독존은 박학해도 용재여라                         3. 富하려 불인하고 만금인들 복이되며                                   원기를 상했는데 백약인들 유효하랴                                          시운이 불허하는데 구하던들 얻을손가                         4. 벗따라 벗을 따라 강남간다 하더라만                                   감각이 감각따라 방종하니 기관일세                                           아서라 감각을 좇아 망탕주의 허망갈라                         5. 류방에 패한 패왕 오강가에 자결할제                                   성격에 따른 운명 개탄한들 무삼하리                                           실패한 비극영웅들 눈물짖고 기리노라                         6. 제새끼 키울때는 살림살이 팍팍해서                                   못다한 자식사랑 앙금으로 굳었기에                                           손군에 봉창한다는 할배님들 일희일비                         7. 위정자 원칙없고 일도않고 축재하고                                    량지잃고 향락하고 인격팔아 학위얻고                                            과학도 인성뒤엎고 돈벌이에 미쳐돌고                         8. 진실이 뒤로 밀린 현시대의 풍경속에                                   위선이 쥐여짜니 기편기만 거짓말뿐                                           두어라 다 취했는데 깨와본들 무삼하리                                          9. 세상과 시비마라 내좋으면 그만인걸                                   내편은 똥이라도 된장되고 떡이되고                                           이얼령 비얼령인걸 어찌 상기 모르나냐                         10 한알의 밀종자가 그대로면 밀알일뿐                                    죽어서 싹틔우면 열매맺아 주렁지리                                            아희야 희생이 없는 결실이란 없느니라                                                  1. 도고한 정법서기 청렴청관 웨치면서                                  수십채 집챙기고 곳마다에 작은꿀벌                                                                   향락에 질탕이다가 수갑차니 멋스럽네                        2. 돈나고 사람낳냐 사람나고 돈이났지                                  환장도 지랄환장 돈방석에 엎어지니                                          가련타 부나비처럼 제죽을줄 모르난가                        3. 말없이 모든것을 품어주고 꽃피우고                                  밟히고 다져지고 파헤쳐도 말없는 땅                                          아마도 최겸손자는 땅이런가 하노라                        4. 내낳은 새끼라도 피조물이 아닌것을                                  부모는 주물하듯 욕심대로 만들려네                                          마옵서 자립정신이 참인재를 키우나니                        5. 가진자 잃을세라 현상유지 최상이요                                  가진게 없는자는 혁신하기 바라나니                                         소득의 불균형으로 시시비비 시끌하다                        6. 채농들 순박성도 어젯날의 얘기여라                                   량심에 돈때올라 먹거리로 사기치니                                           무엇도 마음을 놓고 먹지못할 작금일세                        7.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먼저 치부하매                                  농부의 근로치부 공리공담 될수밖에                                          자리가 돈을 버나니 빈익빈이 될수밖에                        8. 사신은 공정하고 염라왕은 엄혹해서                                  청관은 천당가라 탐관악패 지옥가라                                          지옥에 가기싫거든 음덕쌓고 살거이지                        9. 죽음은 다같아도 사후처리 별개여라                                  평민의 소지품은 꿈사납다 불태우고                                          위인의 사사건건은 유물이라 경매하네                       10. 남잡이 제잡이라 도는세상 말해주네                                    제똥은 덮어두고 남의방귀 휘젖다가                                            진면모 드러나서야 너무했다 후회막급                            1. 돈벌어 신나는데 돈을파니 아쉽잖냐                                   한족은 减价啦요 조선족들 多少钱나                                           판매자 역빠르신가 소비자가 폼나는가                         2. 옛날엔 장사군을 천민이라 깔봤건만                                   량반이 따로있나 돈많으면 멍첨진데                                           보이소 떵떵거리는 장사군들 돋보이제                         3. 身老에 心不老라 마음만은 의구해서                                   륙십이 청춘되는 좋은세월 산다만은                                           눈치가 앞장서는데 체면 또한 발목잡네                         4. 락조는 피같은데 이 마음은 재빛인다                                   섭리라 생로병사 야속한들 엇디호리                                           앞길이 멀지 않으니 쉬염쉬염 가리로다                         5. 비오나 눈이오나 교문밖에 득달하는                                   할매들 할애비들 눈비맞아 백발되오                                           손군들 뒤바라지가 천륜지락 되능긴가                         6. 물가에 굼니노니 신발젖기 어려운가                                  모두가 취했는데 혼자깨면 용납불가                                          청관은 그 뉘시이며 군자님은 누구신가                         7. 추야에 창문열고 어둠속에 좌선하니                                   명상이 성찰불러 고독감을 쫓는고녀                                           진실한 제모습 보며 혼자서도 한숨짓다                         8. 모략이 지모라면 음모궤계 사악일다                                    어찌들 생겼으면 음모술수 이골텃냐                                            저리도 음특하구야 사회정영 맞능기가                         9. 사람이 개 물어야 뉴스되는 신문시대                                   조작한 보도라면 쓰레기라 눈꼴신데                                           저마을 글쟁이들은 호들갑에 신들렸나                        10. 시비가 없는 세상 왈가왈부 부질없다                                     못본체 못들은체 벙어린체 바보인체                                             시끌한 인생극장에 명철보신 하고보쟈
619    (시조산책100보) 51-70보 댓글:  조회:6274  추천:0  2015-07-29
                     1.     마가을 단풍드니 산봉마다 뜨거워라                                    서리지 경고장에 혈서태워 항명하냐                                          푸르러 여린잎새에 붉은피가 흘렀음에                        2.     거리도 차차차차 골목에도 차차차차                                    도로변 인행도가 주차장이 되여지니                                          보행군 요리조리로 술래잡이 애모쁘네                       3.     자동차 바글바글 뒤죽박죽 얽혀지니                                    큰거리 네거리에 교통체증 우심하다                                          속도를 자랑하더니 서리맞은 매미런가                                              4.     붉은등 푸른등이 정지행보 알리건만                                   질주의 광란인가 차행렬에 정신아찔                                         저보오 파파할머니 걱정안고 바장이네                       5.     상기도 보행한들 창피할일 있으리오                                   어마님 주신발로 두루천하 밟노매라                                         속도가 비웃는대도 유유자적 좋기만해                                              6.     구설수 난당이라 눈덩이로 굴러가도                                    해명은 설상가상 변명조차 부질없다                                          입방아 찧어보라지 제혀씹고 마는것을                       7.    고향을 묻지마오 조국안에 있다잖소                                  조국이 무어인가 세계속에 나라입죠                                         크나큰 세계라해도 우주속에 한구석이                       8.   진실을 말하려나 허허실실 뉘알긴가                                 진실을 지킨다고 입가볍게 발설마라                                       진실이 진실 아닌걸 고아대서 무삼하리                       9.   명예야 좋다만은 스러지는 무지개발                                  악명도 명성이면 그것마저 좋을텐가                                        사람이 이름이 나면 가지많은 나무되리                                  10.    시계만 고장나냐 량심도 고장난다                                  시계가 틀려지면 급무를 망치지만                                         량지가 망가지고야 이룰것이 무어던고                            1. 오해가 지뢰라면 편견이란 무지런가                                  진리와 소원한 길 편견이라 하였거늘                                        오만에 편견을 더해 무지랭이 되리로다                                                2. 혀밑에 칼숨기고 여론몰이 달인들아                                  방귀뀌면 똥을쌌다 호들갑에 달달떨며                                        아니면 말고라는식 남한언론 가관일세                          3. 입으로 말을하면 우자라 하여있고                                  머리로 말을 하면 현자라 일러왔고                                         마음의 소리를 하면 진언이라 하였니라                          4. 오만의 큰그릇은 속이 텅텅 비여있고                                  겸허의 작은그릇 지혜가득 차있나니                                        저보아 가라지들만 고개빳빳 멋스럽다                          5. 생각후 말을 하면 신중함을 이름이요                                  생각하고 말않으면 현인군자 되리로다                                        우자만 생각없이도 횡설수설 침튕기지                          6. 개들과 싸우지마 싸워서 지고말면                                  개보다 못한놈요 비겨도 개같은놈                                        이기면 개보다 나은 개같은놈 되리로다                          7. 좋은옷 떨쳐입고 날좀보소 나대느니                                   내좋은 옷이던가 남을 위한 치장인가                                         내인생 내가 사는데 눈치살이 웬말인고                          8. 남자는 가리우고 멋을 내려 옷입지만                                  작금의 녀인네들 벗기위해 입는고녀                                         아서라 운무산속에 진풍경이 있더니라                          9. 버려야 얻는다고 선인들이 일렀지만                                  비우자 작심한들 쉬 비워질 욕심인가                                        초탈이 환골탈태냐 입가볍게 호언마라                       10. 흙탕서 싸우나니 니전투구 꼴불견이                                  당파간 다툼질은 무엇에랑 비길건가                                                    제눈에 들보 못보고 제구린줄 몰라하네          
618    명상이중주 댓글:  조회:4930  추천:0  2015-07-29
                              명상이중주                                  최 균 선      더불어 사는 세상, 그러나 가끔은 홀로이고 싶을때가 있을게다. 홀로의 대명사는 외로움이고 고독의 그림자이다. 고독감만큼 썰렁한 정서도 없을게다. 그러나 적막속 에 일종 초탈의 계기가 있다. 적막속에 고독은 그래서 또 성결하다고 한다. 절반은 현실이요 절반은 신화일진대 역시 량자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기다운 자기 를 찾는 소중한 공간이 된다고 생각해보자.    고독함을 싫어하는 까닭은 일종 소외감때문이리라. 그러나 제좋아서 홀로이고 싶을때는 소외당한것이 아니라 청정함을 즐기는 일로서 밖에서 누릴수 없는 자유자재감도 함께 깃든다. 진실한 자기를 찾기어려운 인생현장에서 제모습으로 돌아도록 안내해준다. 어두운 방안에 조용히 앉아 창문열고 먼 하늘에 별들을 보며 하염없이 앉아보라. 저도 모르게 명상의 깊은 골령에 들어서게 될것이다.    적막의 첫손님이 고독이다. 고독속에 명상이 기다린다. 명상은 묵상 그 자체일뿐 무엇을 완벽하게 실현하는것은 아니다. 명상은 자기 자신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에 끝이 없지만 명상의 과정에 심령세계는 자기가 살고있는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고있다. 하여 시종 꿈틀거리기만 하는 욕망을 잠간씩 다독여줄수 있다. 가진것이 별로 없어도, 이루어낸것이 별로 없어도 그만큼의 마음의 빈자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누구나 자신의 령혼에 대한 곤혹을 가지고있다. 그 곤혹을 명상이 풀어줄수 있다. 내가 지금 옳게 하고있는가? 방향은 제대로 잡혔는가? 또는 너무 빨리 뛰거나 너무 뛰떨어지고 있지 않는가? 보다 현명해질수는 없을가? 등 이러한 통찰행위가 명상의 흐름이다. 그래서 명상은 일종 정신호흡이라 할수 있다. 다만 호흡운동으로가 아니라 정신적 신진대사로써 삶의 활동력을 다시 얻게 한다.    무릇 심오함은 내면에 있다. 명상속에 시공간은 실재하지만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명상은 내부지향성으로서 고독을 통해서만 자기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명상속에서 자신을 대하려면 심기가 불편할수 있다. 진실로의 자신의 모습이 마냥 보기좋을수가 없기때문이다. 혼자일 때 난삽하고 먼지 투성이임을 부끄럽게 바라보게 되고 그만큼 령혼은 궁색해진다.    하지만 명상속에서 방종하던 감정은 절제된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또 한번 자신을 탈피할수 있다. 명상속에 새 이미지가 부각되면 그 상태는 명상의 가작이다. 이렇듯 명상이란 자아존재의 권능이다. 그것을 때때로 활용하면 심리체조가 된다. 그래서 고독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마운 시각일수도 있다는것이다.    고독의 그림자는 진실로의 자기이다. 자기와의 대담에는 고독만이 제격이다. 명상은 정신활동이지만 불러들이는것이 아니라 찾아드는것이다. 고독의 저너머 명상 세계가 다가올 때 명상은 성찰을 부른다. 현재에 직면한것, 그 순간에 마음에 떠오르는것, 그것이 마음의 흐름이다. 그만큼 고독속에서 지혜로 가는 길이 열릴수 있다. 왜냐하면 고독은 보다 심오한 세계로 안내하기때문이다    명상은 그렇게 심령의 산책을 하면서 자기 마음에 지성의 존재를 새기는 일이다. 그 새김속에서 은페하고 분식되였던것들을 마음밖에 들어내놓고 진실이 해부하도록 하라. 그때 본래의 자기 모습에서 멀어지면 자신감은 한층 줄어든다. 홀로의 명상은 결국 세속의 삶에서 자신을 정신적으로 구원하는 길이라 하겠다.    명상에 잠긴 사람에게 진실한 소망이란 명상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것이다. 그만큼 명상은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일로서 생명의 의미, 인생의 의미, 인간고의 의미를 음미하게 하여 삶의 진실에 대해 진일보 깊이 깨닫게 된다. 지식과 인식은 마음밭에 관개하는 일종의 사고의 흐름이다. 고독속에서 명상한다는것은 자기 에 대한 지성과 애정을 쏟는 일이이기도 하다.    그러니 명상은 두절된 자아의 고립적행위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리해하려는 숭고한 지적행위요 마음의 골방에 홀로 앉아있는 고독은 결코 소외감과 별개일수밖에 없다. 속세에서 벗어난 자신의 고립적행위를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명상에 빠지면 다시한번자기 완성의 최고경지에 들어서는 일이 아닐가싶다.    명상에 목적성이 있을수는 없다. 명상의 깊은 골짜기는 리욕이 멈춘곳에서 시작 된다. 의식주행으로 아득바득하는 번거로운 일상에서는 난삽한 꿈이 노그라질수 있을뿐 어쩌면 명상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수도 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누구나 어떤 목적지를 찾아 동분서주한다. 분망한 그 모습이 인간의 삶의 내함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이것은 심오한 진리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만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질뿐이다. 이것은 더욱 심오한 진리이다. 명상의 내함은 자기의 두뇌속에서 생각의 이미지를 조립하는 정신작업도 아니며 령혼이라든가 자아의 실재라든가 생명활동의 동향을 엄정하게 심판하는것도 아니다.    명상속에서는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명상의 결과는 다만 자기에 대한 한차례 랭철한 인식과정이다. 자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란 의식의 새 이미지이다. 고독속에서만 찾을수 있는 그 주체성이 자기 마음의 등불이며 또한 진정한 정신자유이다. 그런 정신적자유는 자신의 령혼을 일정하게 만족시킨다. 그래서 홀로의 풍경선이 매력적이기도 한것이 아니랴,     그러나 명상은 어떤 진리를 규명하지 않는다. 명상이란 성찰한다는것, 그것에 솔직하게 대함이다. 진실한 자기 모습을 있는대로 투시하고 가늠하는 일이다. 삶의 일체성, 그것을 자인하는것으로만도 만족이다. 자신의 진실을 점검하느라면 생각이 온통 과거나 미래로만 가득차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현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기때문이다. 이것을 명상의 빈구석이라 이름할수 있다.    고독속에 명상은 자기만의 철학을 피력하는 일이다. 혼자 불투명한 생활의  진실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일이다. 명상은 진정한 존재만 남기고 나의것이 아닌 다른것을 려과시킨다. 명상은 모든것을 태워버린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랭철한 리성으로 채워간다. 자아속에 일어나는 고통들이 어떤것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욕심, 불만, 분노, 질투 등에 대한 해결책은 자기속에 있다. 그 해결자가 홀로의 명상이다.    명상이란 흔히 자아부정에 빠지게 할수도 있으나 명상의 진실은 분발된 정신력임에는 틀림없다. 때때로 홀로앉기를 해보시라. 그리고 명상에 잠겨보시라. 당신의 명상이 진지하다면 그속에 새로운 감수와 새로운 의미가 새겨질것이다. 명상은 놀라운 지혜는 몰라도 현명함을 내줄것이며 그럼으로써 홀로이기가 하나의 자아수련임을 깨닫게 할것이다. 리성이 퇴각하면 감정적충동이 판을 치고 일마다 엉망이 된다.    혼자이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 집착하지 않고 누구를 억압하려고 하지 않는다. 홀로만으로도 당당한 자기 존재의 리유를 밝힐수 있다. 홀로일때, 내심의 심처에 파고들어 자신을 만나도록 하라. 내면의 깊은곳에 불안을 안정시키는 마술사가 기다린다. 자신의 소중한 안식터가 홀로의 정경속에 있음을 알게 될것이다.    일찍부터 홀로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불행과 소외감을 소처럼 새김질하면서 새날의 힘을 벼릴것이다. 고독을 다룰줄 아는 지자는 타인의 홀로의 공간을 선물할줄도 안다. 그래서 고독속에 명상은 고마운 내 손님이요 고요함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게 하는 무언의 수업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명상이중주에 취해본다.                                    2011년 3 월 5 일                                         2015년 5월 8일 (연변일보)
617    (시조산책100보) 31ㅡ50보 댓글:  조회:5418  추천:0  2015-07-22
                            1. 사는게 시름이요 하직하면 해탈이라                                  적덕한 인생이면 죽어서도 기리리라                                  인생에 남은 흔적이 인상밖에 더없거늘                              2. 착하면 연약하고 성실하면 바보인가                                 독해야 장부이고 음흉하면 지모인가                                 리기가 판을 치나니 흑백전도 관례더라                              3. 사람은 사람이라 못할일이 없지만도                                사람이 사람일래 아니할일 따로있다                                사람아 즘생같고도 인간이라 나대느냐                              4. 어릴때 추상같고 하늘같던 부모더니                                이몸이 부모되니 자식앞에 무골충이                                로소가 전도된 세상 곤혹이라 하오리                             5. 허리를 쭉 펴시라 마음마저 굽으리라                                동가슴 부풀리면 의기또한 성하리라                                못나도 내인생이요 잘나도 내인생이                             6. 래일이 언제냐고 자고나면 래일인데                               어제가 오늘같고 이 하루도 어제같아                               오늘도 내눈앞에서 락옆으로 지는도다                             7. 부자가 대단한가 자족함이 부자인데                               탐욕은 모르더라 비우는게 자족인줄                               가난중 가난뱅이는 사심가득 기갈든자                             8. 비교란 야비하야 시기질투 불러오네                               백사에 비기오면 실락감만 득달하리                               못나도 제 잘난멋에 사는인생 좋으니라                             9. 도고히 높이떳다 너무그리 납뜨지마                               배구공 띄웠다가 깎는솜씨 못보았냐                              추락엔 날개도 없고 비행 또한 아니거늘                          10. 백꽃이 곱다한들 잡풀처럼 끈질기랴                               베여도 매버려도 줄기차서 성화로다                              우리네 민초인생도 저와같이 하여이고                                1. 비상식 상식되여 보란듯이 활개치고                         량심이 비량심에 기가죽는 비정세상                         리득만 살판치나니 병든사회 아니런가                        2. 사람이 늙어지면 혼자서도 허무해서                         절로절로 버릇인양 이왕지사 짓쫗는가                         인생을 두번 산다는 추억이란 맹랑허이                        3.여기도 집집집 저기도 집집집집                            논벌에 아빠트 채마밭에 사무청사                            빈집들 지천이건만 건축거품 부글대네                        4. 중추라 하늘높고 바람조차 시원하다                          세전벌 금파만경 그냥봐도 배부른듯                          좋구나 농부의 소원 풍작밖에 더있을고                        5. 모아산 고개길에 굽이굽이 소나무숲                          산좋아 절로절로 세월속에 우거졌노                          애솔림 어제같은데 나는 벌써 호호백발                                                  6. 벼슬도 좋다만은 일패도지 례상사라                          념불엔 마음없고 제밥에만 정신팔면                          빙빙글 도는 의자에 뉘앉을지 어찌알랴                            7. 관아는 지엄해도 경이원지 평백성도                          북치고 신고하매 판관님이 나셨는데                           지금은 복무기관에 무상출입 불허이네                            8. 모여서 의론함을 회의라고 하였으되                          열변에 청중들은 졸음병만 청하다가                          동의요 거수를 하고 박수치면 散会여라                                                9. 콧대를 세우던들 하늘을 찌를소냐                           이마아래 있는것을 어이그리 솟구느냐                           스스로 몸을 낮추면 인끔절로 오르니라                       10. 싫어도 가야할길 때가되면 떠나가는                            귀인네 민초네도 염라전엔 동격이니                            살아서 악한짓 말고 음덕으로 살아가쟈                        
616    김룡운 (발문) 《구실을 말하다》를 읽고서 댓글:  조회:6057  추천:1  2015-07-19
                          《구실을 말하다》를 읽고서                                          김 룡 운         글짓기를 숙명으로 여기고 인생의 허허바다에서 문학이라는 쪽배에 앉아 미지의 피안을 향해 힘겹게 노젓는 문인이 어찌 한둘이랴만 문학행위를 가치실현의 필수적인 수단으로, 부조리한 인생과의 대결로, 시대와 사회, 민중이 하사한 소명(召命)으로 받들고 글을 쓰는 문인은 그리 흔치 않은줄로 안다.     그 흔치않은 사람들중에 최균선씨가 서있다. 글짓기를 자아와 남의 구원을 위한 어쩔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그 득실을 가늠할수 없는 묘연한 작업에 혼신을 깡그리 태우고있는 최균선씨가 60세가 넘어 노을빛이 찬연한 고개마루에 올라서서 《구실을 말하다》라는 작품집을 내놓았다. 여직껏 쓴 소설과 평론도 적지 앉지만 우선 잡문과 수필로 세상과 통성명을 한것같다.    본인은 “늦바람에 ‘곱새’를 벗긴다지만 여태껏 이렇다할 명문장 한편 써내지 못한 자격지심을 들고” “인생의 저문언덕에서 허위단심 거두어보니 잡곡무지만 올망졸망 어수선하다”면서 자못 겸양의 자세로 나오지만 최균선씨는 명실공히 “늦바람”으로 “곱새”를 벗기고있다. 그리고 벗겨도 멋스레 벗기고있으며 쭉정이가 아니라 알찬 농사를 짓고있다.     《구실을 말하다》.도대체 최균선씨는 무슨 구실을 쓰려는가? 필자가 보건대 그 구실은 핑게로서의 구실이 아니라 인간을 구제하려는 도리로서의 구실이며 세상을 밝 히려는 진리로서의 구실이며 량심이 있는 문인이 해야 할 직분과 사명감으로서의 구실이다.     최균선씨는 도리와 진리, 직분과 사명감을 자료로 자기 특유의 사상의 집《구실을 말하다》를 지어놓았다. 그 집은 헐망한 집이 아니라 산뜻하고 아담한 집이며 문 패가 희미하게 걸려있는 집이 아니라 번듯하고 환하게 걸려있는 집이며 손님들이 들날날락하는 집이다.     최균선씨의 인생궤적을 추적해보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신작로가 아니라 파란만장한 오솔길이며 여럿이 함께 하는 행군이 아니라 외로운 고행길이다. 필자가 최균선씨를 처음 만난곳은 도문이였다. 그때 그는 도문시5중에서 훈장노릇을 하고있었다. 부인이 두부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있는 형편이였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삶의 압력에 주눅이 들지않고 열심히 글짓기를 하는 그가 무등 돋보였다.     그때 필자도 사는 멋이 여의치않아 동분서주하던 때였고 역시 한창 문학을 한답시고 붓대를 끄적거리던 때라 비록 초면이였지만 서로 의기상투하여 눅거리소주를 마시며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인생이며 문학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다보니 시간이 흐르는줄을 몰랐다. 이야기중에서 나는 그가 천부적인 문학적재질도 재질이려니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살아오면서도 수많은 고금중외의 서적들을 독파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몇번의 대면을 거쳐 나는 그의 사람됨됨이며 연박함이며 인생경력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게 되였다. 그는 결코 행운아가 아니였다. 농민, 소학교원, 중학교교원, 사범학교교원, 한마디로 분필가루를 먹으면서 작가로 된 사람이였다. 어쩌면 그의 구불구불한 인생그라프가 그로 하여금 골기가 있고 량심이 있고 정의를 주장하며 민초들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로 되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오늘은 늦바람으로 “곱새”를 벗기면서 당당한 작가로 자리굳힘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또한 이 시대의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최균선씨는 천성적으로 착하다. 고르다는 균(均)자와 착하다는 선(善)자인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는 모든 인간들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골고루 착한 마음으로 대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에는 명확한 슬로건이 있다. 이 세상을 졍직하고 진실하게 제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회와 시대를 위해 유익하고 가치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만을 전제로 한다. 그는 온갖 부정부패, 비리현상, 구겨지고 더러워진 령혼 등에 대해서는 절대로 선을 베풀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선(善)은 인간다운 인간을 위한 선이며 그것을 리탈한 모든것에 대해서는 선이 아니라 증오의 분노로 대한다. 여기에 최균선씨작품의 중요한 뜻이 있다.     한 사람의 성장환경은 그의 문학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온돌쟁이, 나무군, 두부장수, 서당훈장으로서의 삶이 최서해를 반항의 문학,항쟁의 문학의 길로 나아가게 했듯이말이다. 최하층에서 붓을 들고 일어선 사람이기에 최균선의 글에는 어쩔수없이 인격존엄, 인격력량, 생명가치 등이 관통되여있는것이다.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식 내지 문학적인식은 자연스럽게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며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한때 우리 문학을 충격하던 현대파문학의 물결에 맹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리얼리즘에 경도하게 되였다.     최균선씨는 성격이 곧고 허위를 모르며 아유구용(啊谀苟容)같은것은 더구나 질색한다.     력사에 길이 남는것은 글이지 벼슬이 아니다. 최균선씨의 작품이 진솔하고 깨끗한것은 벼슬이나 영예같은것을 초개처럼 여기고 인성의 참된 가치와 시대의 비희고락을 그대로 파헤치고있기때문이다. 그것으로써 인간과 력사에 충실하기때문이다.     작품집《구실을 말하다》를 사상내용상으로 고찰하면 아래와 같은 몇가지로 귀납 할수 있다.    첫째, 민족얼의 고창이다. 작품집에서 민족얼을 고수하고 민족얼을 제창하는 내용이 하나의 중요한 구실로 나서고있다. 그 얼은 흔히 민족어와 맥을 함께 하고있다. 물론 이런 내용을 다룬 글들에는 감성적인 표출이 좀 과분하고 리성적인 절제가 소홀하다는감이 없지는 않지만 민족이 지성인으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완성하고있다는것만은 의심할바없다.     작자는 우리의 민족어를 산곡간에 돌돌 흐르는 청계수처럼 맑고 잔잔하고 때로는 천지의 폭포처럼 가슴을 쾅쾅 울려주고 때로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푹 찌르는 말, 백의결에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로 여울치는 말이라고 긍지높이 말하고있으며 그러므로 한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최후는 민족얼을 잃는것이라고 경고하며 민족문화전통의 계주봉이 우리 시대에 와서 놀쓸게 하지 말자고 웨치고있다. 그러나 작자는 선지선각의 자세로 남에게만 웨치는것이 아니라 그 간절한 호소에는 자신의 참회와 반성의 성분도 다분하다. 강마른 호소가 아니라 다정함과 허심함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가까와진다.    둘째, 강렬한 사회참여의식이다. 이는 최균선문학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의 적지 않은 잡문이나 수필들이 자아의 작은 울타리속에서 맴돌다가 결국은 소아(小我)에만 머무르고 대아(大我)에로 승화되지 못하는데 반해 최균선의 글들은 대부분 자아의 울타리에서 초탈하여 군체와 사회, 력사와 현실을 암흑면에 필봉을 돌리며 흔히 그것은 예리한 비판과 폭로를 동반한다. 다시 말하면 암흑에 대한  폭로와 비판, 항쟁이 핵심으로 되고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나니다. 그가 평소에 가장 선망했던 문학이 바로 날카로운 비수의 문학, 로신의 문학이였으니까.     작자의 고백을 례문으로 옮겨본다.    《로신의 문학은 썩어문드러진 사회에 대한 해부도, 비수였고 발자끄의 문학은 랑만적구성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크나큰 거울이였다. 체호브의 문학은 눈물겨운 유모아였고 최서해의 문학은 그 자체가 항쟁이였다.》     이 말은 작자의 고백이자 곧 내심의 발로일것이다. 이러한 문학적지향이 바탕으로 되기때문에 그의 글들은 은은한 정보다 거칠은 목소리가 더 많으며 싱그러운 향기보다는 폭풍우전야의 암울한 구름같은 어두운 사색이 더 많다.     잡문《도적의 도의 및 부패》에서는 허위적인 문명이 인간의 심령에 갈수록 탐욕을 불어넣어 죄악이 더욱 창궐해지는 시대의 병페를 고발하고있으며 높은 자리에 앉아 렴결봉공을 부르짖는 이른바 문명하고 합법적인《도적》들을 규탄하고있다.《편안이 행복이냐》에서는 우리 겨레들에게 존재하는 현대병ㅡ 향수위기, 향락의 긴박감, 근거리공리적경쟁을 질타하고있으며《성의 곤혹》에서는 지페로 바꾼 비게덩이의 사랑, 정조를 헌양말 버리듯하는 광란의 시대의 사랑의 위기를 채찍질하고있다. 그리고 《선택의 곤혹》에서는 상품경제시대 공리주의 실혜가 어떻게 순결무구한 농촌처녀들을 롱락하고 타락시키며 화페토템의 에네르기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성인의 시각의 로 피력하고있다.     비판을 다룬 글중에서 가장 유모아적이고 아이러니컬한것은《구실을 말하다》에 있다.《자고로 소가죽이 다 썩었는데 윤기나는 털이 있었던가》썩은 소가죽, 이 아이러니컬하고 유모아적인 평범한 입말에서 최균선의 문학작품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쳐든다. 이외《인성과 야성》,《제 잘난멋》,《광고심리학》,《유혹을 씹어본다.》, 《문화의 우환》등 이 작품집의 거의 70%에 달하는 글들이 비판성이 짙은 참여의식의 내용들이다.     셋째, 철리성이 짙다. 누구나 다아는 사실이지만 무릇 수필이나 잡문이라고 할 때 철리성이 체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문 얼마간이라도 인생을 새로운 꺠도에로 이 끄는 반짝이는 섬광이 있어야 수필이나 잡문의 족속에 넣읆수 있다. 철학적으로 깨달은 인생체험을 추상성과 형상성이 통일된 짧은 형식속에 다져넣는 잡문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다른 작가들이 로신을 우러르고 존경했던것처럼 최균선씨도 로신을 무한히 흠모하였다. 그의 수필이나 잡문에 로신을 언급한것이 여러곳에 나타난다. 최균선씨 는 로신문학이 갖고있는 아이러니와 유모아, 깊은 철학적사색 등등의 우수한 점들을 섭취하여 자기의 수필과 잡문을 충실히 하고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반추를 동반하고 연박한 지식을 근저에 두어야 철리라는것이 생길수 있다. 최균선씨는 상술한 슬로건을 거의 구비하고있기에 철리가 짙은 글을 쓸수 있는것이다. 한낱 삶의 어두운 그늘에 불과하고 누구에게나 소외당하는 외로움과 고독, 그러나 그것이 작자의 체험의 세계에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난후에는 일반상식과는 다른 하나의 세계, 청정함과 고독한 성찰의 자유가 있는 최고의 정신경계ㅡ성숙을 음미하게 하는 아름다운 홀로의 풍경구로 되게 한다.     론리성이 다분한《기다림의 미학》을 보자. 참으로 못견디게 절절한 기다림이라면 그자체가 곧 생명의 연소이며 인생의 소야곡이라고 찬미하고 한 사람의 의지와 감내력을 벼리는 모루이며 인간적성숙를 표징하는 눈금이고 비장한 기대감이며 아름다운 풍경선너머의 신비한 약속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작자는 일체 공리가 소실되고 허무만이 남았을지라도 자신의 생명체의 실존적의미를 기쁘게 발견하고 우주와 함 께 흔들리는 이 삶의 마당에 튼튼히 버티고 서있으라면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을 고무격력해주고있다.     이 세상에 기다림앞에서 투항하고 고꾸라진 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조금만 참으면 자기가 바라던《역전》에 이를수도 있었으련만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인생의 황막한 언덕길에 넘어진채 영영 일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또한 어찌 한둘이랴,《기다림의 미학》을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좋은 계시와 귀감으로 될것이다.    《지식인이 이미지》도 시사해주는바가 크다. 작자는 지식인에 대해 투철하고 명석한 분석을 하면서 지식인의 사명감을 천명하고있다.《지》는 많이 배웠다는것을 지 칭하고《식》은 높은 재능을 뜻하며《지》의 래원이 있다고 하면서《지》와《식》의 절대적인 구별을 내세우며 명실공한 지식인이 많지 못함을 개탄하고있다. 작자는 많이 아는 사람들을《지인》이라고는 할수 있으나《지식인》이라고는 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 리유는 지식인을 판정하는 표준이 지식과 사회량심,진리와 정의를  주장하며 그것을 과감히 표달하는 용기가 겸비되였는가 하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러면서 작자는 이 시대에《지인》은 많으나 시대와 인류와 진리를 위해 용감히 말할수 있는 로신과 같은 진짜《지식인》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다.    《침묵의 값》에서는 패자의 무거운 침묵에서 흐르는 새 도저의 삶과 승자가 안고 있는 겸손한 침묵의 값을 높이 매기고있으며 생존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침묵은 명지한 선택이고 진실을 허위와 바꾸는 침묵은 비렬한 행위임을 밝히고있다.     작자는《세상을 사는 맛》에서 생명철학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생명은 하나의 발견과정이 아니라 창조과정이다. 환원하면 자신을 발견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창조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발견에 급급해하지 말고 누구를 만들어갈것인가에 급급해야 할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되여야 하는가, 어떤 인간으로 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무게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구실을 말하다》의 예술특점을 보면 대개 아래와 같다.    첫째, 서정과 의론의 융합이다. 우리의 수필이나 잡문이 따분하고 지루한것이 하나의 병페로 되고있는데 그 주요원인은 서술이 너무 많고 서정과 묘사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있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최균선씨의 글이 따분하지 않고 취미성과 열독성이 보장을 받는 원인중의 하나가 의론성적인 글에 서정과 묘사가 알맞게 융합되여있 기때문이다. 작자는 회상적인 긴이야기를 꺼내놓고 거기에다 의론을 접목시키는 틀을 벗어나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끄집어내다가 의론과 대면시키며 그 사이에 조미료의 구실을 하는 서정이나 묘사를 적당하게 가미하여 글의 맛을 돋군다.    《오,누가 알랴, 인생이란 기괴하고 변덕스러운것을,사람의 흥망성쇠란 사소한 유혹에서 갈라질줄을…》    《산이여!우뚝 솟아 면면한 련봉이여!너는 조화옹의 가장 위대한 걸작…네 기상에 저절로 허리굽혀지누나.》     둘째, 상상과 황당성, 아이러니와 유모아이다. 이는 성숙된 작가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구실을 말하다》에는 상상과 황당성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작품이 몇편 잘 되는데 흔히 유모아와 아이러니가 함께 등장하고있다. 황당성 그자체가 벌써 아이러니컬한 성분과 유모아를 안고있으니 황당성과 아이러니, 유모아가 함께 손잡고 동보하게 되는것은 너무 당연하다.     작자는 황당성을 동원함으로써 리성을 더 리성답게 해주고 진실을 더 진실답게 해주고있다. 다시말하면 그의 황당성은 수단으로서의 황당성이지 목적으로서의 황당성이 아니다. 즉 병페의 치유를 최종목적으로 하는 황당성이다.     이 면에서의 대표작들로는《광고심리학》,《취몽유천당기》,《사회의난잡증을 전문 치료함》등이다.     《어떤 광고상이 죽어 염라전에 대령했다. “너는 광고상이였다지? 그러면 이를 소만큼 과장하는 예술에 능하겠구나.”》     이렇게 서두를 뗀 작품에서 작자는 해를 끼치는 광고를 질책하면서 경제롱간술에 충당되여 도덕을 무시하는 현시대의 광고홍수를 시급히 다스릴것을 아이러니컬하게 꼬집고있다.     《사회의난잡증을 전문 치료함》이라는 글에서 작자는 로선생의 입을 빌어 우리 사회에서 엄중한 문제로 나서고있는 여러가지 부패현상들을《유전선탐식증》,《완고성부패증》,《순발성숭외증》으로 나누고 구체적인 림상표현과 치료방안을 내놓고있는데 글이 아주 유모아적이고 풍자적이다.     《취몽유천당기》는 더욱 황당하고 동화적색채가 짙다. 꿈으로 엮어진 이 글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구경 무엇이 지옥이고 무엇이 천당인가를《황당한 구실》로 립증하고있다. 작자는 사악과 탐욕이 인간악과의 련쇄에서 최고의 고리라는것, 청렴과 박애, 참됨은 천당이고 부패와 탐욕, 사악은 지옥이라고 쓰고있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꿈이야기로 사회부패를 성토한 날카로운 항쟁의 글이다.     셋째, 고태의연한 동양적풍격이다. 고태의연한 멋도 남들과 구별되는 최균선작품의 예술풍격의 하나이다. 그의 어떤 글들은 동양적색채가 아주 짙어 마치 흰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초당에 도고연히 앉아 세상의 풍운을 근심하는 지조높고 결백한 학골선풍의 선비를 방불케 한다. 작품집에는 진충보국, 풍전등화, 설중송탄, 사무한신, 죽장망혜 등 한자어성구가 무려100여개가 나오는데 모두가 아주 적중하게 쓰이고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기의 오자서의 이야기,《장자, 춘추》편에 있는 한단학보(邯郸学步)의 전고, 분서갱유의 이야기, 조정이 미녀의 유혹을 물리친 명나라 만력년간의 이야기 등이 가끔씩 삽입되여있어 글을 한결 옛스럽게 해주고있다.     이 작품집의 첫독자로서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것은 작품집에는 수필이 더 많지만 문학적성취는 수필보다 잡문쪽에 더 있는것 같으니 잡문에 더 힘을 넣어달라는것이다. 그리고 수필과 잡문의 계선이 불명확한 글들이 적지 않다는것도 말하고싶다. 수필이라고도 할수 있고 잡문이라고도 할수 있는 글들이 퍼그나 보인다. 이건 단지 어느 한사람에게 련관되는 일이 아니라고본다. 금후 우리 문단에서 수필과 잡문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보다 접근되는 정의가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저녁노을이 곱게 비낀 산마루에 서서《구실을 말하다》라는 집을 지어놓고 세상을 향해 자기나름대로의 구실을 열심히 말하고있는 사나이,《구실》로 꽉 찬 그 《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즐거운 마실을 다닐것이다.      책의 출간을 충심으로 축하하며 이제 더 새롭고 더 많은 값있는 작품들이 세상에 태여날것을 예측하는바이다.                         연길에서                       2004년 8월  
615    “인분교수”의 만행으로부터 댓글:  조회:5885  추천:0  2015-07-15
                                “인분교수”의 만행으로부터                                                                               진 언       한국뉴스에 경기도 성남 중원경찰서는 제자에게 인분을 먹이는 등 엽기적 가혹행위를 일삼아온 혐의로 경기도 강남대학교수 장호현(52)씨를 구속했다고 7월14일 밝혔다. 장씨는 자신이 대표를 맡고있는 산업디자인학과 사무국에 한 제자(29살)를 취업시킨뒤 일을 잘못해 실수를 했다거나 그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리유로 2013년 3월부터 지난 5월까지 수시로 폭행해 온것으로 조사됐다.     장씨가 교육부산하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지원사업비 3,300만원을 편취, 협회비 1억 1400만 원을 횡령하여  이 돈의 3분의 1가량을 자신의 남제자를 폭행하는데 가담한 녀학생 정(29세) 씨의 대학등록금과 오피스텔 임대료 등을 내주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장씨는 이렇게 다른 제자들에게 폭행을 사주했으며 또한 본인이 외출중일 때 카톡방에서 정씨를 시켜 슬리퍼로 따귀를 때리고 하고 이를 아프리카 TV로 확인했단다.     정씨가 폭행에 가담한 방법 역시 가관이다. 장씨와 정씨는 피해자를 같이 야구방망이 등으로 폭행하다 전치 6주의 부상을 입고 입원해 수술을 받자 수단을 바꿔 손발을 묶고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운채 40여 차례에 걸쳐 호신용 스프레이를 얼굴에 쏘아 화상을 입히고 자신들의 인분을 모아 16차례 먹였다고 한다. 장씨가 자신의 엽기적(엽기? 만행이지-필자)행각을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서도 시인했다고했다. 모든것을 잃게 되여서야  악마가 씌웠던것 갔다고, 참회 선처니 하고 나발불고 있다는가?     피해자는 교수가 되기 위해 상상하기조차 힘든, 견뎌낼수 없는 가혹행위를 참아야 했다고 진술했다. 그토록 극단적인 폭력에도 항거못한데는 속수무책의 사정도 있었지만 참으로 기막힌 일이라 할것이다.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리조이 존슨)” 그렇게 굴욕적으로 “교수” 가 되던들 그게 무슨 쓸만한 교수이겠는가? 인간의 존엄을 잃은 인간은 인간도 아닌데 교수대접을 받으려한 그 생각자체가 불쌍하지 않은가?     비록 타국의 일로서 남이야 뒤간에서 치솔질하거나 말거나 할 일이지만도 소위 사람을 가르칠 교(教)자가 붙는 성직에 이런 교수패류, 인간말종이 생성하고 있었다는것은 세계적분노를 자아낼뿐만아니라 “교수”들의 명예에 똥칠을 했다는것은 저주에 곁들어 비애가 아닐수 없다.     교직자라는것은 둘째로 치고 인피는 썼으되 과연 인간인가? 하는 생각을 앞세우게 된다. 인성을 잃었거나 인성이 부재한 인간도 인간인가? 인성이란 단순히 선악문제도 아니고 리성과 비리성문제도 아니다. 선악도 근근히 일종 시각문제가 아니라 사회성시각문제이다. 하다면 인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해묵은 화제여서 구구히 해석할 필요도 없겠지만 관념상 선악으로 인성을 정의하였으니 간단히 짚고넘어가자.     선과 악은 인성의 정반면의 속성이다. 흔히 비유하듯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것이다. 말하자면 인성이란 선과 악의 혼합체라 할수 있다. 이 시점에서 세상엔 백프로의 착한 사람이 없고 반대로 절대적인 악인이란 없다. 인간이라면 머리속에 필연적으로 선한 관념과 악한 관념이 존재하는바 착한 사람도 악념이 생길수도 있어 모종의 경우 악행을 저지를수도 있고 악인도 때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할수도 있다.        인성이 인류 일반의 공성이고 가장 기본적인 품성일진대 상습적으로 제자를 폭행하고 저질적인 다른 년놈들을 시켜 폭행하게 하고 며칠씩 굶기고 재우지 않고 돈까지 갈취한 장씨라는 이자는 기질적으로 인성이 부재한 악마임에 틀림없다. 한편 인성의 본질이 생명진화의 최종적인 동력이라고 하는 리기일진대 자기 제자를 학대함으로써 얻어지는것이 과연 무엇인가? 변태적인 쾌감밖에 더 있는가?     하긴 인권을 고양하는만큼 인간대 인간폭행이 만연된 국토이고 교수들의 성폭행 추문이 그칠새없는 인문환경이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럴수가? 저네들의 인분을 억지로 먹이면서 ”먹어라, 포도주라고 생각하고 먹어라”고 강권했다니 가증하다는 말도 무색하지만 이건 너무 아니다. 그리고 이른바 권위자의 눈에 들려고 시키는대로 같은 생명을 학대하며 날쳐댄 똘마니년놈들은 얼마나 기특한가?     아무리 언어의 빈곤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이라도 이 자를 “엽기교수”라고 하는것은 또 얼마나 가공할만한 표술인가? 엽기란 기이하고 괴상한 일이나 물건에 호기심과 흥미를 갖고 즐겨 찾아다님을 이르는 말이란다. 그래 이 자가 호기심이나 흥미가 농후해서 인간학대에 광란했단 말인가? 어디까지나 소수인 인간패류들을 두고 인간성을 론한다면 썩은나무 몇그루를 보고 수림이 통채로 썩었다고 하는격이여서 어페가 되겠지만 인젠 그 몇몇 타락한 인간말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성 상실의 시대라 한다. 그 인성은 누구의 잘못이고 무엇의 실패인가? 종종의 비인간적인 폭행사건을 두고 가정교육, 그 개인의 문제로 몰아간다. 맞는가? 인간성의 상실을 교육의 실패라 할진대 교육을 한다는 치들이 이러니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신분으로 최고의 인성과 인품을 지닌 교육자로 되기에 노력해도 잘 안되는판에 작정하고 야성을 휘두르는 자가 교수라니 교육의 치욕이 아닌가?     자초에 약육강식의 인간사회이지만 인간을 가르친다는 신성한 교육마당에서 가해자 피해자로 분렬되고 피해자가 제2의 가해자로 거듭나는것도 슬픈 일인데 인제 교육자들마저 학생에 대한 가해자로 타락했으니 실어증이 생길만도 하지 않는가? 장교수란 자에게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은 청년학생이 장차 늙어빠져 기맥을 못추는 존경스러운 교수님을 찾아가 받은바의 대접을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있을가?     사람사람 서로가 잃지 않기 위해 공격하고 짓눌러야 하는 그러한 인문환경이라면 그 사회는 암담할뿐만아니라 미래가 없다. 포악이 횡행하는 그런 사회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고 다시 자기 후배들에게 무엇을 물려줄것인가 명약관화(明若观火)하지 않는가? 아무리 인문교육을 표방하던들 제자에게 똥물까지 먹일 기발한 착상을 하는 장교수같은 자들이 있는데 무엇을 한단말인가? 인문, 인문을 웨치는 교육자, 그것도 교수라는 자들이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질렀으니 아이러니컬 하다고 말하면 너무 빈약한 표현이 될것이다.     인제 유네스코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만큼 “인분교수”라는 호칭까지 가진 장씨가 원래는 과거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새누리당의 산업 통상자원위원회 정책자문위원이라고 한다. 인분교수가 여당의 현직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수 없다. 중언부언 긴말을 늘여놓았지만 설사 그따위들이 한두놈이라 할지라도 그네들의 인성이란 참으로 가긍하다.                        2015년 7월 14일
614    영예 실태 희망 댓글:  조회:4667  추천:0  2015-07-14
                                              영예 실태 희망        1월 25일 흑룡강신문《교정내외》에 실린 방초의 글《한 술판에서 있은 일》을 읽고나니 주마등처럼 떠오른 생각이 많다.      어찌보면《술판》은 사회일반의 인식과 의론의 축도라고도 할수 있다. 물론 교원절의 함의와 의의에 대하여 직장에 다니는 친구의 리해가 피상적이긴 하지만 타면으로는 교원의 실제적;''사회지위에 대한 평판이기도 하다.     하긴 몇년래 교원들의 사회적지위가 높아진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업조건, 생활환경, 사회적대우 등 면을 살펴볼 때 그들의 실제처지는 교육사업이야말로 태양아래 가장 광휘로운 직업이라는 긍지와 객관적인 공인을 갖기에 아직 어울리지 않는데가 많다. 여북하면《막벌이군친구》가 불룩한 돈지갑을 들고《교원의 위신》을 론했겠는가!따지고보면 그《친구》들이 너무 무지하다고 타매할것도 못된다. 바로 오늘 교원들의 실태가 그들에게 그런 인상을 준것이 아닌가? 사실 교원들의 사업, 생활, 사회거래, 건강 등 면에서 받고있는 이루말할수 없는 고충은 당사자들이 아니고서는 체험할수가 없다.     교원들이 바라는것은《교원절》을 맞을 때의 축하와 찬송 그리고 안위, 위문식의 《우대》나《선물》보다도 우선 교원사업에 대한 충분할 리해이며 정치상에서의 관심이며 정신, 물질면의 실제적인 지지와 관심이며 교원인격에 대한 충분한 존중이다. 하여 교원들이 안정된속에서 일심정력으로 사업하고재능을 펼칠수 있는 여지를 갖게 하는것이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의 드러난 기시도, 막벌이군의 무지한 돈자랑도, 기자친구의 군자연한 축배도 아랑곳할것 없다.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할 때 그가 이미 무상의 보수를 받고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교원만이 가질수 있는 풍모이며 고매한 덕성인것이다. 인민교원들이야말로 가장 우렁찬 시대의 주선률을 울리고 있지 않는가?    교원친구여, 머리를 떳떳이 들고서 주저앉아 안일과 자족의 피리를 불고있는 친구들의 머리우로 미래를 직시하라. 그리고 자기의 경건한 자세를 잃지 말라. 그대는 가장 신성한 토양에 가장 귀중한 씨앗을 뿌리는 파종자이다. 장차 그대가 가꾼 풍만한 열매는 그대에게 희열과 긍지, 보람으로 찬 진정어린 축배를 드릴것이다. 시대와 함께, 조국과 함께, 인민과 함께!                            1988년 2월 26일  
613    민족의 얼이란 무엇이기에 댓글:  조회:5533  추천:0  2015-07-14
                                 민족의 얼이란 무엇이기에       어언 수삭이 흘러갔건만 파도치는 감동의 물결우에 무시로 한 청년교원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에 따라 그처럼 소탈하고 진실하게, 구김새없이 털어놓던 말들이 흉벽을 친다. 그의 얼굴이 남달리 준수해서도, 전국조선족교원《인재컾》콩클에서 일등수상자인 유망한 청년문필가라 해서도 아니고 그의 말이 선동적인 달변이여서도 아니다.    《…나는 북방의 산재지구의 자그마한 소학교에서 온 한 평범한 조선어문교원입니다. 그러나 “북방의 하얀얼”을 지켜왔다는 그 하나의 긍지감에서 여러분앞에 나서게 되였습니다. 하긴 말하기 좀 머쓱하지만 우리 겨레들이 모여사는 연변, 어디가나 부드럽고 정다운 자기 말을 할수 있고 들을수 있는 여기, 마음의 고향에서 처음으로 여러선생님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민족어의 교육과 발전에 대하여 마음껏 이야기할수 있다는 기쁨과 감격에서 용기가 났다고 할가요?     말하자면 가정이야깁니다. 나에게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있지요. 우리 집의 귀염둥이가 유치원으로 처음 가게 되였을 때 우리 부부간에는 일장풍파가 일어났습니다. 안해는 애를 한족유치원에 보내자고 고집했고 나는 조선족유치원에 보내야 한다고 우기였습니다. 안해의 리유라면 한족유치원이 가까운데도 있지만 자기는 조선글을 전혀 모르기에 앞으로 아이의 학습을 지도할수 없는것, 그보다는 중국에서 사는 만큼 어릴때부터 한어를 잘 배워야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는것이였지요. 참으로 실용주의였고 처세술의 “원견”이라 할는지…어찌보면 도리도 있는것같고 리해도가는 어머니 된 심정이였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도저히 접수할수 없었습니다. 나의 리유라면 곧 무엇무엇해도 나의 아이를 민족의 뿌리를 잊은, 민족문화의 계주봉을 버린 아이로 키울수 없다는것입니다. 옛말에 립신양명하여 조상을 빛낸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큰 인재가 된다한들 그가 자기 말과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근본을 잃은 “불효자”가 아니면 절름발이 인재가 아니겠습니까?     분기는 첨예했고 쟁론은 치렬했습니다. 아무튼 조선어문교원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량심과 책임감에서 나는 안해에게 지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지고든다면 어떻게 교단에서 떳떳이 우리 글을 가르칠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안해는 내가 외지로 학습간 틈을 타서 아이를 끝내 한족유치원에 넣고말았습니다. 나는 천둥같이 노했습니다. 남편의 권위와 존엄이 무시되였다는 그때문이 아니였습니다. 늘 사랑이 찰랑이던 안해의 얼굴에 주먹이 날아갔습니다. 안해의 얼굴에 영원히 가셔지지 않을 락인 찍혔을 때 내마음도 찢기였습니다. 정녕 무엇때문이였을가요? 안해가 느낀 아픔보다 백배나 더한 아픔이 내가슴에서 고패치고있었다는 것을 안해는 몰랐습니다…》     듣고보면 흔히 볼수 있는 사소한 일화같지만 그저 웃어버릴 일이 아니다. 산재지구에서, 아니, 민족집거지구인 연변에서도 경쟁이나 하듯이 아이들을 한족학교에 보내는것이 제딴엔 원견성이 있는 부모요, 유지지사(有志知士)로 되듯이 알고있는 현실속에서 그러한 “부부싸움”이 있었다는것은 희한한 일, 감동적인 거사가 아닐수 없다.     민족의 얼이란 무엇이기에 그는 그처럼 떨쳐나서는것이냐? 내 마음속에 사색과 반성의 물결이 일렁거리였다. 그렇다, 그가 안해에게 안긴 귀쌈은 순간적충동에서 온 미움만이 아니였다. 어데서나 민족어의 정다움에 취하여 참으로 사는듯한 희열을 연변에 와서야 느껴보았다는 그 마음에서, 아침저녁으로 먼먼 학교길에 어린 딸애의 발자국을 찍어가고있는 끈질긴 추구에서, 조선어를 모르는 안해에게 딸애와 함께 배우게 하는 그 아량있는 포옹에서 그것을 읽을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청년교원을 쳐다보았다. 단순히 문화심리의 차이에서, 가치관념의 변이에서 생긴 풍파가 아니다. 언어의 동화의 자발세력에 대한 타협없는 모대김이 아니냐 하는 엄숙한 사고를 해보면서,     나는 북방의 사나이 그 심장속에서 힘차게 숨쉬는 민족혼을 기쁘게 보았다. 정녕 민족어발전도상우에 한가닥 빛이라도 보태려 한껏 반짝이는 북방의 하나의 별이 아니겠는가? 별은 태양처럼 그렇게 단번에 강산을 비출수는 없다. 그러나 매 한곳에 비친 빛은 거기에 한갈래 길이 있음을 가리킬수 있다.     인격의 양성이 문화의 공적일진대 우리 민족인재의 바람직한 양성도 민족어교육의 요람에서부터 시작되는것이 아닐가? 붓길을 멈추었으나 먼 북방에 띄우는 생각은 오히려 푸르게 짙어간다ㅏ.                       1991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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