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실을 말하다》를 읽고서
김 룡 운
글짓기를 숙명으로 여기고 인생의 허허바다에서 문학이라는 쪽배에 앉아 미지의 피안을 향해 힘겹게 노젓는 문인이 어찌 한둘이랴만 문학행위를 가치실현의 필수적인 수단으로, 부조리한 인생과의 대결로, 시대와 사회, 민중이 하사한 소명(召命)으로 받들고 글을 쓰는 문인은 그리 흔치 않은줄로 안다.
그 흔치않은 사람들중에 최균선씨가 서있다. 글짓기를 자아와 남의 구원을 위한 어쩔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그 득실을 가늠할수 없는 묘연한 작업에 혼신을 깡그리 태우고있는 최균선씨가 60세가 넘어 노을빛이 찬연한 고개마루에 올라서서 《구실을 말하다》라는 작품집을 내놓았다. 여직껏 쓴 소설과 평론도 적지 앉지만 우선 잡문과 수필로 세상과 통성명을 한것같다.
본인은 “늦바람에 ‘곱새’를 벗긴다지만 여태껏 이렇다할 명문장 한편 써내지 못한 자격지심을 들고” “인생의 저문언덕에서 허위단심 거두어보니 잡곡무지만 올망졸망 어수선하다”면서 자못 겸양의 자세로 나오지만 최균선씨는 명실공히 “늦바람”으로 “곱새”를 벗기고있다. 그리고 벗겨도 멋스레 벗기고있으며 쭉정이가 아니라 알찬 농사를 짓고있다.
《구실을 말하다》.도대체 최균선씨는 무슨 구실을 쓰려는가? 필자가 보건대 그 구실은 핑게로서의 구실이 아니라 인간을 구제하려는 도리로서의 구실이며 세상을 밝 히려는 진리로서의 구실이며 량심이 있는 문인이 해야 할 직분과 사명감으로서의 구실이다.
최균선씨는 도리와 진리, 직분과 사명감을 자료로 자기 특유의 사상의 집《구실을 말하다》를 지어놓았다. 그 집은 헐망한 집이 아니라 산뜻하고 아담한 집이며 문 패가 희미하게 걸려있는 집이 아니라 번듯하고 환하게 걸려있는 집이며 손님들이 들날날락하는 집이다.
최균선씨의 인생궤적을 추적해보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신작로가 아니라 파란만장한 오솔길이며 여럿이 함께 하는 행군이 아니라 외로운 고행길이다. 필자가 최균선씨를 처음 만난곳은 도문이였다. 그때 그는 도문시5중에서 훈장노릇을 하고있었다. 부인이 두부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있는 형편이였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삶의 압력에 주눅이 들지않고 열심히 글짓기를 하는 그가 무등 돋보였다.
그때 필자도 사는 멋이 여의치않아 동분서주하던 때였고 역시 한창 문학을 한답시고 붓대를 끄적거리던 때라 비록 초면이였지만 서로 의기상투하여 눅거리소주를 마시며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인생이며 문학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다보니 시간이 흐르는줄을 몰랐다. 이야기중에서 나는 그가 천부적인 문학적재질도 재질이려니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살아오면서도 수많은 고금중외의 서적들을 독파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몇번의 대면을 거쳐 나는 그의 사람됨됨이며 연박함이며 인생경력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게 되였다. 그는 결코 행운아가 아니였다. 농민, 소학교원, 중학교교원, 사범학교교원, 한마디로 분필가루를 먹으면서 작가로 된 사람이였다. 어쩌면 그의 구불구불한 인생그라프가 그로 하여금 골기가 있고 량심이 있고 정의를 주장하며 민초들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로 되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오늘은 늦바람으로 “곱새”를 벗기면서 당당한 작가로 자리굳힘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또한 이 시대의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최균선씨는 천성적으로 착하다. 고르다는 균(均)자와 착하다는 선(善)자인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는 모든 인간들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골고루 착한 마음으로 대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에는 명확한 슬로건이 있다. 이 세상을 졍직하고 진실하게 제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회와 시대를 위해 유익하고 가치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만을 전제로 한다. 그는 온갖 부정부패, 비리현상, 구겨지고 더러워진 령혼 등에 대해서는 절대로 선을 베풀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선(善)은 인간다운 인간을 위한 선이며 그것을 리탈한 모든것에 대해서는 선이 아니라 증오의 분노로 대한다. 여기에 최균선씨작품의 중요한 뜻이 있다.
한 사람의 성장환경은 그의 문학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온돌쟁이, 나무군, 두부장수, 서당훈장으로서의 삶이 최서해를 반항의 문학,항쟁의 문학의 길로 나아가게 했듯이말이다. 최하층에서 붓을 들고 일어선 사람이기에 최균선의 글에는 어쩔수없이 인격존엄, 인격력량, 생명가치 등이 관통되여있는것이다.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식 내지 문학적인식은 자연스럽게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며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한때 우리 문학을 충격하던 현대파문학의 물결에 맹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리얼리즘에 경도하게 되였다.
최균선씨는 성격이 곧고 허위를 모르며 아유구용(啊谀苟容)같은것은 더구나 질색한다.
력사에 길이 남는것은 글이지 벼슬이 아니다. 최균선씨의 작품이 진솔하고 깨끗한것은 벼슬이나 영예같은것을 초개처럼 여기고 인성의 참된 가치와 시대의 비희고락을 그대로 파헤치고있기때문이다. 그것으로써 인간과 력사에 충실하기때문이다.
작품집《구실을 말하다》를 사상내용상으로 고찰하면 아래와 같은 몇가지로 귀납 할수 있다.
첫째, 민족얼의 고창이다. 작품집에서 민족얼을 고수하고 민족얼을 제창하는 내용이 하나의 중요한 구실로 나서고있다. 그 얼은 흔히 민족어와 맥을 함께 하고있다. 물론 이런 내용을 다룬 글들에는 감성적인 표출이 좀 과분하고 리성적인 절제가 소홀하다는감이 없지는 않지만 민족이 지성인으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완성하고있다는것만은 의심할바없다.
작자는 우리의 민족어를 산곡간에 돌돌 흐르는 청계수처럼 맑고 잔잔하고 때로는 천지의 폭포처럼 가슴을 쾅쾅 울려주고 때로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푹 찌르는 말, 백의결에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로 여울치는 말이라고 긍지높이 말하고있으며 그러므로 한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최후는 민족얼을 잃는것이라고 경고하며 민족문화전통의 계주봉이 우리 시대에 와서 놀쓸게 하지 말자고 웨치고있다. 그러나 작자는 선지선각의 자세로 남에게만 웨치는것이 아니라 그 간절한 호소에는 자신의 참회와 반성의 성분도 다분하다. 강마른 호소가 아니라 다정함과 허심함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가까와진다.
둘째, 강렬한 사회참여의식이다. 이는 최균선문학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의 적지 않은 잡문이나 수필들이 자아의 작은 울타리속에서 맴돌다가 결국은 소아(小我)에만 머무르고 대아(大我)에로 승화되지 못하는데 반해 최균선의 글들은 대부분 자아의 울타리에서 초탈하여 군체와 사회, 력사와 현실을 암흑면에 필봉을 돌리며 흔히 그것은 예리한 비판과 폭로를 동반한다. 다시 말하면 암흑에 대한 폭로와 비판, 항쟁이 핵심으로 되고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나니다. 그가 평소에 가장 선망했던 문학이 바로 날카로운 비수의 문학, 로신의 문학이였으니까.
작자의 고백을 례문으로 옮겨본다.
《로신의 문학은 썩어문드러진 사회에 대한 해부도, 비수였고 발자끄의 문학은 랑만적구성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크나큰 거울이였다. 체호브의 문학은 눈물겨운 유모아였고 최서해의 문학은 그 자체가 항쟁이였다.》
이 말은 작자의 고백이자 곧 내심의 발로일것이다. 이러한 문학적지향이 바탕으로 되기때문에 그의 글들은 은은한 정보다 거칠은 목소리가 더 많으며 싱그러운 향기보다는 폭풍우전야의 암울한 구름같은 어두운 사색이 더 많다.
잡문《도적의 도의 및 부패》에서는 허위적인 문명이 인간의 심령에 갈수록 탐욕을 불어넣어 죄악이 더욱 창궐해지는 시대의 병페를 고발하고있으며 높은 자리에 앉아 렴결봉공을 부르짖는 이른바 문명하고 합법적인《도적》들을 규탄하고있다.《편안이 행복이냐》에서는 우리 겨레들에게 존재하는 현대병ㅡ 향수위기, 향락의 긴박감, 근거리공리적경쟁을 질타하고있으며《성의 곤혹》에서는 지페로 바꾼 비게덩이의 사랑, 정조를 헌양말 버리듯하는 광란의 시대의 사랑의 위기를 채찍질하고있다. 그리고 《선택의 곤혹》에서는 상품경제시대 공리주의 실혜가 어떻게 순결무구한 농촌처녀들을 롱락하고 타락시키며 화페토템의 에네르기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성인의 시각의 로 피력하고있다.
비판을 다룬 글중에서 가장 유모아적이고 아이러니컬한것은《구실을 말하다》에 있다.《자고로 소가죽이 다 썩었는데 윤기나는 털이 있었던가》썩은 소가죽, 이 아이러니컬하고 유모아적인 평범한 입말에서 최균선의 문학작품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쳐든다. 이외《인성과 야성》,《제 잘난멋》,《광고심리학》,《유혹을 씹어본다.》, 《문화의 우환》등 이 작품집의 거의 70%에 달하는 글들이 비판성이 짙은 참여의식의 내용들이다.
셋째, 철리성이 짙다. 누구나 다아는 사실이지만 무릇 수필이나 잡문이라고 할 때 철리성이 체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문 얼마간이라도 인생을 새로운 꺠도에로 이 끄는 반짝이는 섬광이 있어야 수필이나 잡문의 족속에 넣읆수 있다. 철학적으로 깨달은 인생체험을 추상성과 형상성이 통일된 짧은 형식속에 다져넣는 잡문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다른 작가들이 로신을 우러르고 존경했던것처럼 최균선씨도 로신을 무한히 흠모하였다. 그의 수필이나 잡문에 로신을 언급한것이 여러곳에 나타난다. 최균선씨 는 로신문학이 갖고있는 아이러니와 유모아, 깊은 철학적사색 등등의 우수한 점들을 섭취하여 자기의 수필과 잡문을 충실히 하고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반추를 동반하고 연박한 지식을 근저에 두어야 철리라는것이 생길수 있다. 최균선씨는 상술한 슬로건을 거의 구비하고있기에 철리가 짙은 글을 쓸수 있는것이다. 한낱 삶의 어두운 그늘에 불과하고 누구에게나 소외당하는 외로움과 고독, 그러나 그것이 작자의 체험의 세계에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난후에는 일반상식과는 다른 하나의 세계, 청정함과 고독한 성찰의 자유가 있는 최고의 정신경계ㅡ성숙을 음미하게 하는 아름다운 홀로의 풍경구로 되게 한다.
론리성이 다분한《기다림의 미학》을 보자. 참으로 못견디게 절절한 기다림이라면 그자체가 곧 생명의 연소이며 인생의 소야곡이라고 찬미하고 한 사람의 의지와 감내력을 벼리는 모루이며 인간적성숙를 표징하는 눈금이고 비장한 기대감이며 아름다운 풍경선너머의 신비한 약속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작자는 일체 공리가 소실되고 허무만이 남았을지라도 자신의 생명체의 실존적의미를 기쁘게 발견하고 우주와 함 께 흔들리는 이 삶의 마당에 튼튼히 버티고 서있으라면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을 고무격력해주고있다.
이 세상에 기다림앞에서 투항하고 고꾸라진 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조금만 참으면 자기가 바라던《역전》에 이를수도 있었으련만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인생의 황막한 언덕길에 넘어진채 영영 일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또한 어찌 한둘이랴,《기다림의 미학》을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좋은 계시와 귀감으로 될것이다.
《지식인이 이미지》도 시사해주는바가 크다. 작자는 지식인에 대해 투철하고 명석한 분석을 하면서 지식인의 사명감을 천명하고있다.《지》는 많이 배웠다는것을 지 칭하고《식》은 높은 재능을 뜻하며《지》의 래원이 있다고 하면서《지》와《식》의 절대적인 구별을 내세우며 명실공한 지식인이 많지 못함을 개탄하고있다. 작자는 많이 아는 사람들을《지인》이라고는 할수 있으나《지식인》이라고는 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 리유는 지식인을 판정하는 표준이 지식과 사회량심,진리와 정의를 주장하며 그것을 과감히 표달하는 용기가 겸비되였는가 하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러면서 작자는 이 시대에《지인》은 많으나 시대와 인류와 진리를 위해 용감히 말할수 있는 로신과 같은 진짜《지식인》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다.
《침묵의 값》에서는 패자의 무거운 침묵에서 흐르는 새 도저의 삶과 승자가 안고 있는 겸손한 침묵의 값을 높이 매기고있으며 생존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침묵은 명지한 선택이고 진실을 허위와 바꾸는 침묵은 비렬한 행위임을 밝히고있다.
작자는《세상을 사는 맛》에서 생명철학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생명은 하나의 발견과정이 아니라 창조과정이다. 환원하면 자신을 발견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창조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발견에 급급해하지 말고 누구를 만들어갈것인가에 급급해야 할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되여야 하는가, 어떤 인간으로 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무게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구실을 말하다》의 예술특점을 보면 대개 아래와 같다.
첫째, 서정과 의론의 융합이다. 우리의 수필이나 잡문이 따분하고 지루한것이 하나의 병페로 되고있는데 그 주요원인은 서술이 너무 많고 서정과 묘사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있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최균선씨의 글이 따분하지 않고 취미성과 열독성이 보장을 받는 원인중의 하나가 의론성적인 글에 서정과 묘사가 알맞게 융합되여있 기때문이다. 작자는 회상적인 긴이야기를 꺼내놓고 거기에다 의론을 접목시키는 틀을 벗어나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끄집어내다가 의론과 대면시키며 그 사이에 조미료의 구실을 하는 서정이나 묘사를 적당하게 가미하여 글의 맛을 돋군다.
《오,누가 알랴, 인생이란 기괴하고 변덕스러운것을,사람의 흥망성쇠란 사소한 유혹에서 갈라질줄을…》
《산이여!우뚝 솟아 면면한 련봉이여!너는 조화옹의 가장 위대한 걸작…네 기상에 저절로 허리굽혀지누나.》
둘째, 상상과 황당성, 아이러니와 유모아이다. 이는 성숙된 작가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구실을 말하다》에는 상상과 황당성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작품이 몇편 잘 되는데 흔히 유모아와 아이러니가 함께 등장하고있다. 황당성 그자체가 벌써 아이러니컬한 성분과 유모아를 안고있으니 황당성과 아이러니, 유모아가 함께 손잡고 동보하게 되는것은 너무 당연하다.
작자는 황당성을 동원함으로써 리성을 더 리성답게 해주고 진실을 더 진실답게 해주고있다. 다시말하면 그의 황당성은 수단으로서의 황당성이지 목적으로서의 황당성이 아니다. 즉 병페의 치유를 최종목적으로 하는 황당성이다.
이 면에서의 대표작들로는《광고심리학》,《취몽유천당기》,《사회의난잡증을 전문 치료함》등이다.
《어떤 광고상이 죽어 염라전에 대령했다. “너는 광고상이였다지? 그러면 이를 소만큼 과장하는 예술에 능하겠구나.”》
이렇게 서두를 뗀 작품에서 작자는 해를 끼치는 광고를 질책하면서 경제롱간술에 충당되여 도덕을 무시하는 현시대의 광고홍수를 시급히 다스릴것을 아이러니컬하게 꼬집고있다.
《사회의난잡증을 전문 치료함》이라는 글에서 작자는 로선생의 입을 빌어 우리 사회에서 엄중한 문제로 나서고있는 여러가지 부패현상들을《유전선탐식증》,《완고성부패증》,《순발성숭외증》으로 나누고 구체적인 림상표현과 치료방안을 내놓고있는데 글이 아주 유모아적이고 풍자적이다.
《취몽유천당기》는 더욱 황당하고 동화적색채가 짙다. 꿈으로 엮어진 이 글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구경 무엇이 지옥이고 무엇이 천당인가를《황당한 구실》로 립증하고있다. 작자는 사악과 탐욕이 인간악과의 련쇄에서 최고의 고리라는것, 청렴과 박애, 참됨은 천당이고 부패와 탐욕, 사악은 지옥이라고 쓰고있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꿈이야기로 사회부패를 성토한 날카로운 항쟁의 글이다.
셋째, 고태의연한 동양적풍격이다. 고태의연한 멋도 남들과 구별되는 최균선작품의 예술풍격의 하나이다. 그의 어떤 글들은 동양적색채가 아주 짙어 마치 흰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초당에 도고연히 앉아 세상의 풍운을 근심하는 지조높고 결백한 학골선풍의 선비를 방불케 한다. 작품집에는 진충보국, 풍전등화, 설중송탄, 사무한신, 죽장망혜 등 한자어성구가 무려100여개가 나오는데 모두가 아주 적중하게 쓰이고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기의 오자서의 이야기,《장자, 춘추》편에 있는 한단학보(邯郸学步)의 전고, 분서갱유의 이야기, 조정이 미녀의 유혹을 물리친 명나라 만력년간의 이야기 등이 가끔씩 삽입되여있어 글을 한결 옛스럽게 해주고있다.
이 작품집의 첫독자로서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것은 작품집에는 수필이 더 많지만 문학적성취는 수필보다 잡문쪽에 더 있는것 같으니 잡문에 더 힘을 넣어달라는것이다. 그리고 수필과 잡문의 계선이 불명확한 글들이 적지 않다는것도 말하고싶다. 수필이라고도 할수 있고 잡문이라고도 할수 있는 글들이 퍼그나 보인다. 이건 단지 어느 한사람에게 련관되는 일이 아니라고본다. 금후 우리 문단에서 수필과 잡문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보다 접근되는 정의가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저녁노을이 곱게 비낀 산마루에 서서《구실을 말하다》라는 집을 지어놓고 세상을 향해 자기나름대로의 구실을 열심히 말하고있는 사나이,《구실》로 꽉 찬 그 《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즐거운 마실을 다닐것이다.
책의 출간을 충심으로 축하하며 이제 더 새롭고 더 많은 값있는 작품들이 세상에 태여날것을 예측하는바이다.
연길에서
200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