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띠풀이
억조창생이 붐비는 지구촌, 더불어 살기마련인 삶의 현장이라 류류별별의 인간상을 다 보게 된다.
한사람의 개성특징을 심리학에서는 성격이나 기질로 분석, 판정하고 의학상에서는 혈형과도 관련시켜 보는데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그 사람으 성격, 됨됨이, 운세를 타고난《띠》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를테면《쥐, 룡, 원숭이》띠의 사람들은 적극적인 활동형의 리상적조합이라 풀이했고《소, 뱀, 닭》띠의 사람들은 목적의식적이고 차분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최선으 결과를 위해서 충성스럽고 헌신적으로 싸우는 투사들이며 끈기와 흔들리지 않 는 결단에 의해 성공하는 류형이라 한다.
《범, 말, 개》띠의 사람들은 인도주의를 추구하고 보편적리해를 중시하기에 대체로 인간관계가 좋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뉴대를 강하게 발전시키며 솔직하고 열려있어 적응력이 강하다고 했다.《토끼, 양, 돼지》띠의 사람들은 감정에 의해 움직이기 좋아하며 내보이기 좋아하고 직관이 뛰여나 심미예술면에서 탁월하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띠의 사람들이라도 태여난 시각과 달에 따라 다를수 있고 띠와 상극인 동물의 시각에 태여났다면 그의 성격이 어떤 동물의 영향을 따른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결론적으로《띠는 각 사람의 심장에 숨어있는 동물》이라는 재미스러운 표현이 있는데 띠풀이가 얼마나 과학적인가는 론단할수 없으되 실생활에서 어떤 사람은 정말 그 동물로부터 진화되지 않았나 당혹할만큼 근사한것을 보게 된다.
먼저 소띠의 풀이를 보자.《북방의 황소이든 남방의 물소이든 설산고원의 모우이든 소라는 동물은 인류의 가장 충실한 벗으로서 불굴의 정신과 고된 일을 통한 번영 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아닌게 아니라 인류의 문화사에는 소에 대한 미담이 많이도 올라있다.
견우와 직녀의 아름다운 전설도 있거니와 로자가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났다는 고사도 있고 전국시기 제나라 명장 전단이 불소를 적진으로 내몰아 연나라대군을 일거에 깨뜨렸다는 전쟁담도 있다. 그래서인지 력대의 화가들이 천자백태(千姿百态)의 소들을 그리기에 필묵을 아끼지 않았으며 천고의 명화들이 오늘에까지 남겨져있다.
우리 말 속담에도《농사군은 아비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 못산다.》고 했으니 소와 인류의 친밀도를 알겠고 로신선생이《찬 눈길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숙여 유자의 소가 되리.》라고 격앙한 시문도 지었으니 소에 대한 찬미라도 리유가 당당함을 말한다.
비록 소띠는 아니여도 더없이 충직하고 근면하며 조용하고 자률성이 강한 소의 고매한 품성을 닮은 동량지재들을 만날 때 인격적으로 탄복이 가는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랴, 그들은 생명의 순환을 영속시키는 안정력, 역경의 시련속에서도 단호하고 나무랄데 없는 자세로 정의의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 일체를 바치는 소처럼 일터에서 무겁고 힘든 일만 골라지고 말없이 꾸준히 봉사한다. 풀을 먹고 우유를 짜내는 젖소들처럼 그들에게 차례지는것이 남보다 적더라도 원망소리 한마디 없다.
그러나 공리주의가 앞서는 현시점에서 그런《황소》들에게 주는 찬사에는 모두 린색한 법이고 입만 까진자들이 외히려 우직하다느니 고집불통이라느니 하고 입방아를 찧으니 세상도는 인심이 한심함을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힘세고 떼질없이 짐만 잘 끄는 기둥소에게는 짐을 실을수록 욕심부리다가도 혹여 가파른 올리막길에 헐떡거리거나 하면 사정없이 채찍을 안기는 고약한 농부의 심사라할지 아니면 인간성의 세기말적타락이라할지…
사회경제력의 발전과 더불어 뜨락또르, 자동차가 농촌에서 소의 로동을 대체하면서부터 영광의 로동소가 한낱 고기소로 전락되여 소의 빛나는 창업사도 력사의 한페지로 남게 된것은 사실이다. 인류사회 물질적재부창조에서 황소의《실각, 실총》이 숙명적인것이였다면 우리 사회에서 줄곧 제창해 온《황소정신》이 색바래지고 안일함과 실혜의 리론이 이 사회의 풍조로 대두한것은 인격력량의 진보인가? 퇴보인가?
가령 소가 말할줄 알고 늦게나마 자각하여서《너무 충직하지 말라.》는 유촉을 남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얼굴 뜨겁게 받아외워야 할것이다. 초유록이나 공번삼 같은 절세의 충혼들은 더구나 구천에서 개탄할것이고…소가 마침내 인류와 함께 일하며 살아온 력사의 무대에서 퇴직당하고 도살장에 적을 옮겼다지만 인간의 복지사회건설에서《황소정신》은 영원한 추진력이 될줄로 믿어마지 않는다.
석가모니가 림종에 앞서 뭇짐승들을 불렀을 때 제일 약삭바르게 대령한것이 쥐였다고 한다. 그래서 12지지의 첫자리에 놓였다는 쥐띠의 풀이도 그럴듯하다.
《쥐는 진보, 탐험, 통찰활동의 모태로서 쥐띠생들은 성격상 보통 밝고 명랑하고 사교적인데 그속에 대단히 당파적인 기질의 사람이 많으며 인생에 장애물은 그들 자신의 과도적인 야심이라 한다.》
역시 꽤나 기분이 들리는 띠풀이지만 실상 동물중에서 뱀의 버금으로 가증한것은 쥐무리이다. 쥐족속들은 그 왕성한 번식력으로 인류와 대결하여 오면서 오늘까지 한 지구촌에 공존해있지만 불공대천이 흉물이다. 그래서 자고로 큰길에 나온 쥐를 보고 때려잡으라고 소리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저 유명한《시경》의《위풍,석서》에서《큰쥐놈아, 큰쥐놈아 /나의 기장 멀지 말라 / 석삼년을 살렸건만 / 나를 아니돌보는가 / 너를 떠나가리로다 / 락토 / 내 살곳 을 찾으리라.》하고 당시 봉건적통치자들을 큰쥐에 비유하여 성토하며 노예들의 원한을 표현하였다.
조선의 고전명작 림제의《재판받은 쥐》에서도 쥐가 얼마나 악착하고 음충맞으며 방자한 놈들인가를 재삼 감득하게 된다. 허나 만물의 령장이라는 인류는 고양이의 힘을 입어 쥐를 대처해왔고 물질문명시대에 들어와서 고양이족속들이 육체적, 기능적으로 퇴화하고 정신적으로 라태해지자 인류는 화학적, 물리적조치를 대고있으나 전지구적인 쥐의 피해에 망연자실하고있다.
세상에 쥐띠를 타고난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나 가끔 정말 못돼먹은 쥐로부터 진화되지 않았나 의심이 가는 자들도 있다. 이네들은 안광이 좁아서 눈앞으 리익에만 혈안이 되여 날친다. 마치 흙뒤주이든 콩크리트벽이든 닥치는대로 뚫고 들어가서 기탄없이 갉아먹고 쏠아대다가 고양이에게 먹히우고 덫에 치우고 독약에 비명횡사하는 쥐들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확천금하고 국고에도 감히 손을 대여 사욕을 채우다가 쇠고랑을 차고 노란콩알 먹고 저승길을 가건만 그런《쥐》들이 계속 번성하기만 한다.
중국력사상 인피를 쓴 석서(碩鼠)들이 부지기수였는데 그중에서 청조의 고관대작 이였던 화신을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기재에 의하면 징치당하기전 전답이 8,000무, 전당포 75곳, 화원루대106채, 은장집이 42곳, 골동품가게 13곳이 있었고 총재산은 은1억냥이나 되는데 건륭의 집정시기 군비지출의 10배에 해당되고 그 시기 청정부의 재정수입의 절반에 해당되였다. 그런데도 전문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대권을 쥐고 호령질하였다닌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석서》들은 지금도 번성하고있어 원성이 터지고있다. 원 북경시 시위부서기 왕보삼도 공금을 람용한것만 해도 인민페 1억원에 또 2,500딸라가 더있다고 하니 제 옆채기에 넣은것은 얼마겠는가? 이외에도 수도강철공사의 관지성, 거금을 가지고 출타한 무한의 위지안, 태안시의 위군자인 호건학 등 잡혀서 처형된자도 많거니와 아직 덫에 치이지 않은《석서》들이 얼마나 될지 땅귀신이나 알 일이다.
돼지띠의 풀이는 어떠한가,《신의 모든 아이들중에서 나는 가장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천진한 믿음으로 사랑으 신의 보호속을 거닌다. 나자신을 넘치게 줌으로써 나는 더 풍부해지고 두배의 축복을 받는다. 공통의 우애로 모든 인류와 련결되는 나의 선의는 우주적이며 끝이없다. 나는 돼지다.》라고 풀이한다.
역시 기분이 번쩍 드는 띠이지만 인류의 실생활에서 돼지는 재래로《걸어다니는 료리》였을뿐이다. 돼지의 숙명은 어이 그리 처절한가? 주작인이《양저(养猪)》라는 글에서《륙축중에 돼지는 가장 타락한 일종이다.》라고 썼고 영국작가 파톤은《편안함이 돼지를 타락시켰다.》고 썼다.
안일한 생활에 습관되여 철저히 퇴화한 륙축가운데의 이《부옹》은 자초에 향락 을 탐내여 그 날카롭고 악세던 이발을 움츠러뜨리고 사라을 따라 산을 내린후 비록 늘어지게 향락을 누리게 되였으나 측간옆의 더러운 안식처에서 드디어《록림호한》의 그 용맹과 흉포는 철저히 사라지고말았다.
돼지가 인류의 핍박에 의해《록림》의 예기를 잃은것은 막부득이한 선택이였다면 집짐승들의 회의에서 선발되여 주인의 생일상에 오르게 된 운명은 그자신의 생활관의 악과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살찌는 돼지는 운이 나쁘다.》는 사람이 만들어낸 격언을 그자신은 모르고있기에 그냥《실컷먹고 자는》데 도취되여있는것이다.
욕설인들 얼마나 먹고 사는가?분명 사람이 탐식하면 꼭《돼지같이 처먹는 놈》이라고 빗대고 욕하고 목덜미가 실해도《돼지목덜미》라 비유하고 잔뜩 배가 불거지면《돼지배》라고 하니 인간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빨리 살찌기는 바라면서 천대는 천대대로 하니 스스로으니 풍자가 아닐수 없다.
진짜 돼지혼을 타고난 사람을 당신은 못보았는가?일하기 싫어하고 리해득실에는 늘 두덜거리고 공명과 공리에는 등한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다 돼지띠를 타고나지 는 않았지만 기실 돼지보다 더 나을게 없다. 돼지띠의 풀이가 우습게 탈려진것같다.
인류의 선조와 한족속이였다는 원숭이의 띠풀이를 보자.
《나는 미로를 헤치는 능숙한 려행자, 민첩함의 수호신이며 불가능한 일을 하는 마법사, 나의 탁월한 창의력은 아직까지 누구에게 견줄바 없으며 나의 마음은 백가지 주문을 거는 강력한 마법으로 가득차있다.》
원숭이띠의 사람은 창조자이고 림기응변자이며 다른 사람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자극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속이는 능력뿐만아니라 인간의 고도의 지능을 물려받은 사람이 원숭이때라는것에 놀라지 말라고 하였다. 한편 모방할수 없는 간계와 매력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야바위군이라고도 한다.
누군가 원숭이띠를 타고났다면 어느 면으로 길한데가 있겠으나 원숭이띠가 아닌데 원숭이혼을 타고난듯 얄망궂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흉내를 잘내면 코흘리개들은 《잰내비》라고 놀려대기 일쑤다. 앵무새도 사람흉내를 곧잘 내지만 원숭이에 비하면 영원히 렬등생이다. 열두동물중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금수들중에서 원숭이가 가장 많이 인간을 닮아서일것이다.
흉내를 점잖은 말로 모방이라고도 하지만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겨서 하는 짓인 흉내와는 또 다른 의미여서 다른것을 보고 본따거나 본받음을 일컫는데 모방창조라는 말이 있듯이 사회적류행, 고도의 문화활동에서 모방의 영향력은 크며 인류의 문화, 사회발전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발생을 인간의 모방본능에서 기인되였다고 인정하였는바 그후 모든 사회현사의 근원이 모방에 있다고 주장하는 모방설까지 나온다.
흉내쟁이로는 원숭이가 제일 적임자이긴 해도 창조적모방의 고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미물이다. 모방에 확실히 창조성이 곁들어있다면 그저 흉내현상에는 아무래도 원숭이의 앙증스러운 상판부터 떠올라 재수없고 흉내란 원숭이들이나 하는 최저급행위라는 결멸적인 거부감이 솟구치는것을 숨길수 없다. 한즉 정말 원숭이띠를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흉내와는 담을 쌓고 살것은 뻔하다.
《한단학보(邯郸学步)》라는 한어성구가 있다. 조나라사람들의 걸음새가 멋진것을 보고 배우러 갔다가 흉내도 제대로 못내고 원래 걷는 능력마저 상실하여 벌벌 기여서 돌아왔다는 그 연나라 사람처럼 흉내에 열을 올리지 말자. 남을 너무 닮아가면 결국 자기인격의 훼멸인줄 알면서도 기꺼이 고집한다면 별수없는 일이겠다. 유식한 멍청이는 무식한 멍청이보다 더 멍청이라는 격언이 있으니 말이다. 서울말씨를 본따봐야 그저 흉내이고 한국식외래어람용에《재기》를 피워봤대야 참새 방아간 지나는 격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금발머리를 욕심내도 파란눈이 되지 못하는데 왜들 설칠가?
원숭이가 수천만년을 사람흉내를 내봤지만 여직껏 사람으로는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소총명때문에 동물원에 갇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곡마단에서 재주보이기를 하고 지어는 남방사람들에게 산채로 두개골이 깨지는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존재하게 되였을뿐이다.
선조들이 남겨준 띠풀이대로 기분 쾌하게 풀이한 열두가지 띠와 인간의 개성특징, 운세관계를 왈가왈부하는것이 내 소임이 아니기에 일일이 까밝히고 뒤집지는 않겠다. 그저 필자의 새 띠풀이를 흥미있게 보아주면 좋겠다.
2003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