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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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    광고심리학 댓글:  조회:5507  추천:0  2015-03-30
                                광고심리학      어떤 광고상이 죽어 염라전에 대령했다.    《너는 광고상이였다지? 그러면 이를 소만큼 과장하는 예술에 능했겠구나.》    《예? 대왕님 아니올시다. 광고란게 원체…》    《음, 알겠도다. 이제 네가 갈 곳은 천당과 지옥중에 한곳인데 네눈으로 잘보고 선택하도록 하라.》     염라왕은 광고상을 지하광실문전에 데리고갔다. 열려진 뙤창으로 들여다보니 녕악스럽고도 징글맞은 상판대기의 악귀들이 득시글거리고있었다. 광고상은 몸서리치는 데 염라왕은 천연덕스레 말했다.    《보았겠지, 여기가 곧 천당이니라.》    광고상은 눈이 휘둥그래서 왼고개를 탈았다. 또 한곳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니 릉라비단으로 온몸을 감은 신사숙녀들이 질탕 먹고 마시며 희희락락 떠들썩하고있었 다. 광고상은 눈이 번쩍 띄였다.《저승에도 이런 극락이 있었구나.》하고 좋아하는데 염라왕은 왕청같은 소리를 했다.    《여기는 지옥이니라. 이제 네 갈곳을 결정하거라.》     광고상은 염라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꺽 대답을 올렸다.    《예. 대왕님, 소인은 지옥에 있겠나이다. 헤헤…》     그의 말에 염라왕은 빙그레 웃고는 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 광고상을 지옥에 데려다주어라.》     라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광고상을 밀고 닥치며《천당》쪽으로 끌어갔다.   《틀렸나이다. 대왕님, 잘못들었나이다. 소인은 이 지옥에 있겠나이다.》   《오냐, 분명히 지옥에 보내는도다.》   《아니오이다. 방금 본 지옥에…》  《에끼, 미욱한 놈, 네가 본것은 광고란 말이다.》    광고상이 울고불고 하였지만 염라왕은 껄껄 웃기만 하였다.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지만 작자는 현시대 말썽 많은 광고피해를 두고 무언가를 계시하려 한것 같다.    광고란 말그대로 널리 고하여 알림으로써 곧 알리려는 그 문화행위와 그 알림을 수요하는 대중의 접수심리가 기름과 불처럼 확 달라붙어야 광고의 존재가치가 당당하 게 된다. 훌륭한 광고업자는 무엇보다 먼저 광고심리학을 잘 터득한 다음 광고운영에 나서야 한다.    광고심리학이란 무엇이냐? 광고심리학이란 곧 광고의 유효조건 및 방법,욕망과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응용심리학과의 한부분으로서 연구중점은 광고수요자의 접수심리 이다.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광고륜리학이 있는데 이에는 광고의 표현, 실시에 있 어서 준수되여야 할 도덕과 허위, 과대표현, 중상, 모방, 도작 등에 대한 금지가 포함 되여있다.    개체적인간으로 말할 때 흡인력은 다방면적이고 다층적이며 우선 감성적이지만 결국 지적인것이다. 광고예술의 흡인력도 마찬가지이다. 광고설계에서 착상이 기발하 고 촬영술이 고명하여 시각상 순간적 찬탄을 인기시킬수 있겠지만 시장개척에는 실질 적추진력이 되는것은 아니므로 너무 감성전 면에 초점을 모으고 지적인 면을 홀시한 다면 실책이 아닐수 없다.    광고예술에서 유효수단으로 또 반복법이 있는데 널리 알린다는 목적성과 기억재 생원리에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제군들! 유감천만《스톱!》미안하나 좋은 노래도 세번 들으면 싫증난다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광고의 빈도수는 일정한 정도의 필요조건이 지 절대적표효률의 담보는 아닌것이다. 상품판매활동에서 강태공의 낚시질처럼 “원하 는 물릴지어라”고 할수는 없지만 진짜 설중송탄(雪中送炭)식의 광고라면 지루한 중복 은 시간과 금전의 랑비이다. 그러나 공을기처럼《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라고 생각 하면서 다다익선(多多益善) 만 고집한단면 광고심리학에서 말하는 욕망과의 관계를 무시하는것으로서 그리 현명한 결책은 아니다.    광고의 효익은 어디까지나 수용자의 접수심리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재미나는 곳에 범이 뛰여나온다고 한창 흥미진진해 보는 장면에 불쑥 광고가 튀여나온다. 그 저의가 빤하지만 오산해도 한참 가는 오산이다. 결김에 채널을 홱 돌려버리는것을  무리라고 보지 말자. 인차 광고가 끝나겠지 하고 그냥 지키고 앉아있기도 하지만 눈 을 뜨고있다 해서 다 보는것은 아니며 본다해서 다 마음에 담아두는것은 아닌것이다.    텔레비죤광고에서 흔히 쓰는것은《명인효과》인데 명인에 대한 일반적신뢰심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기실 광고의 신비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명인이란 모종 전업면에서 성취가 돌출하여 이름이 유명해진 사람일뿐 해당 상품의 창제자가 아님은 물론 상품질의 담보인도 아닌것이다. 역시 가치법칙에 따라 그 지명도로 광고 수입과 교역할뿐이다. 아니그런가?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말장사군이 말을 속여 천리마로 팔아먹으려고 백락을 찾아갔다.백락도 공방형(孔方兄), 무릅꿇은 노복이였다. 그래서 이튿날 장에 나가 늙은말을 흔상하며《좋은 말이군, 참 좋은 말이구말구》하며 입에 침을 발랐다. 숱한 장사군들도 덩달아 좋다고 하며 천리마가 분명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결국 한 어리숙한 위인이《천리마》를 고가로 사가지고 싱긍벙글하며 돌아갔다. 백락은 약속대로 사례비를 챙겨가지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광고는 해야 한다. 그러나 광고는 경제롱간술이 되여서도 안된다. 광고의 생명은 진실이다. 광고심리학을 모르고 광고업의 도덕을 무시하고 무작정 내미는 광고는 약 사발을 먹이는 야비한 짓거리이다. 광고의 홍수를 다스릴 때가 진작 된것같다.                            2001년 7월 6일
551    오래 사는 비결 댓글:  조회:6239  추천:0  2015-03-30
                              오래 사는 비결      사람이 어찌 3천갑자 동방삭처럼 장수하랴만 그래도《한 500년 살자는데 웬 성화냐》하고 애원을 하면서 한껏 욕심을 부리는게 인간이다. 하기사 그 언젠가는 북망산에 묻혀 외로운 고혼이 되거나 한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릴터이니 사람의 한생에 이보다 더 애석한 일이 또 어데 있으랴.    그래서 인간은 5복의 첫자리에 수(寿)를 놓았고 죽은 정승이 산강아지만 못하다는 속담도 생겨난것이다. 인생이 무변고해이고 산다는것자체가 힘겨운 일이지만 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으뜸가는 원초적이고 강렬한 욕구인것이다.    옛날 3천궁녀를 거느리고 만세에 향락을 누리고저 불사약을 찾아내려고 숱한 동남동녀를 천애지각에 띄워보낸 진시황 영정을 비롯하여 주색잡기에 너무 빠져 단명했던 력대의 봉건제왕들마다 무슨 령단묘약을 구워먹으며 장수를 꿈꾸었지만 당태종 리세민같은 황제는 오히려 금단을 먹고 서천행차를 앞당겼고 서진의 갈홍이 금단묘약을 굽는다고 평생을 고심참담하였으나 그자신도 장생불사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인간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온갖 병마와 싸우고 염라대왕과 대결하면서 생명각축전을 벌려왔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리시진의《본초강목》이 나왔고 화타나 편작같은 천하명의가 나타났다. 서양에서는 참대가치《청진기》로부터 현대의 ×광선, CT와 같은 첨단기술에 이르고 일반 감기약으로부터 고급명약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의학과 약학을 발전시켜왔지만 자연의 섭리인 로쇠와 사망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하긴 세상에 100세가 넘도록 장수한 사람들이 따로 있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장수로인들의 장수비결을 널리 연구하고 그것을 권장하고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져있는 장수비결을 두루 살펴보면 대동소이한중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얼핏 보아낼수 있다. 그것인즉 곧 정신적요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궁정비방이니 무슨 조상의 비방따위만큼 믿어야 할텐데 사실 그렇지 않고있다.    서방의 한 저명한 의학가는 10년동안의 연구를 거쳐 놀라운 수치를 얻어냈다. 건강장수비결의 60%이상이 그자신에게 있는데 그의 정신적힘에 달렸다는것이다. 이는《운명의 별은 당신의 가슴속에 있느니라.》라고 한 옛성현들의 말과 맞아떨어진다.    사람이 장수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심리절제이다. 이른바 자아심리절제란 곧 언제나 밝은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두고 살아가는것을 말한다. 마음이 탐욕의 대문을 지나면 필연적으로 검어지기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검둥개가 방아간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겨투성이가 되듯이 말이다. 마음에 밝은 구석이 없다면 운명의 별은 절로 스러지고만다.    사람이 물질면에서나 색에 너무 욕심을 부리면 자연 심리문란이 오게 된다. 사람이 일단 이렇게만 되면 천하의 구복액을 뜨물켜듯 마시고 만가지 보건약들을 미친년 생콩알먹듯 주어먹어도, 주지육림에 들어앉아 배꼽에 기름때를 않히고 새 자극을 찾아도 심리실조에서 해탈될수 없다. 한마디로 생명의 지휘봉은 곧 정서로서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 육체의 훼멸도 뒤따르게 된다.    이에 대한 브라질의 한 의학자의 실험이 아주 유익한 계시를 주고있다. 그는 583명의 탐관오리들과 583명의 청렴한 관리들을 대비하여 고찰하였는데 전자들속에서 60%이상이 각종 병에 걸렸거나 때이르게 저승길을 앞당기였지만 후자들속에서는 병에 걸렸거나 때이르게 사망한 사람이 근근히 16%밖에 안된다는 수치를 얻어냈다. 게다가 탐오수뢰죄를 범한 사람들이 걸린 병을 보니 거개가 암증, 뇌출혈, 심장병이 아니면 신경과민, 실면증 등 불쾌한 병들이였다. 평생 제 땀을 흘리며 두손으로 삶을 영위해가는 평민백성들에게는 자다가도 소스라칠 일이고 한창 그 무리에 가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아닐수 없다.    그러니 정녕 장수하고싶은 사람들은 황금연따위나 산해진미에 신경을 곤두세울것이 아니라 의학적인 장수비결에 마음을 써야 할것이다. 선량한 사람, 처세에 화해로운 사람, 광명정대한 사람, 벼슬도 크게 못했고 돈가방은 홀죽하나 심리상태가 줄곧 평온한 사람들은 혈액흐름량이 언제나 량호한 상태에 처해있기에 건강장수가 스스 로 담보될것이다.    반대로 심지가 불칙하고 탐욕을 부리고 못할짓만 하는자들은 장기간 공포, 불안, 경황, 고뇌, 초조한 상태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기에 자연 면역력이 약해지고 쉽게 병마에 걸려들게 되는것이다. 설사 얼마동안은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법망이란 사회병원에 입원하게 될것이다. 그때에 가서야 청빈하나 마음 밝게 살기만 못했다고 후회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것이다.    세상에 미몽도 황금몽이요, 악몽도 황금몽이다. 그러나 세상에 깨지않는 꿈이 어데있으며 파하지 않은 연회가 어데 있겠는가? 분복이 없지만 남보다 빼여나게 살고 또 오래오래 살려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병적심태가 없어야 할것이다. 그것인즉 무한정, 무절제의 탐심, 안하무인의 오만심리, 권력교역광란증 등등이다.    공자는《지자락 인자수(智者乐,仁者寿)》이라 하였으니 권력을 등대고 사욕을 채우기에 이골이 튼 사람들이《지혜》로와서 일시는 인생을 즐길수 있겠으나 어진자로는 될수 없으니 장수하기기는 글러먹었다. 혼자만 잘살아도 단명하고 잘못먹고 잘못살아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수명이란 참으로 가늠키 어려운것이다.                                 1997년 12월 13일
550    성의 곤혹 댓글:  조회:6140  추천:0  2015-03-30
                                     성의 곤혹      이브가 지혜의 금과를 따먹은후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나무잎으로 자기의 제일 은밀한 곳을 가리는것이였는데 이는 수치심이란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문명 특히는 성문명의 첫선물이였다는 원시적해석이 된다. 그러나 그 최초의 수치심은 현대문명과 더불어 거치장스러운 잠옷처럼 벗겨지고 다시 아담과 이브의 그것과도 다른 동물성에로 환원되여가고있다.    정욕이 권력욕과 물욕과 포옹하게 되자 남자가 성세계의 지배자로 되였다. 하여 웅성의 전제주의력사가 시작되였고 녀성의 성애의 화랑에는 랑만적인 전원시가 새겨질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약자에게는 약자로서의 존재방식이 고안되였다. 녀성들은 조물주가 하사한 미색으로 웅성들의 질투심과 독점욕을 꼬드기고 권력과 소통하는 방 식으로 력사발전을 추진시켰으며 자기보호술책인 유혹과 거절의 방식으로 성의 주재자들을 조정하였다.《유혹+거절》은 권력욕을 격발시키면서도 자기만족에 이르는 비상수단이였다. 그래서 남자는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녀자를 점유하고 녀자는 남자들을 정복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한다는 그 유명한 아이러니도 만들어졌을것이다.    자고로 영웅호색이요, 영웅이 미인관을 넘지 못한다는 계률이 있다. 포사의 웃음 한번 사려고 충후한 제후들을 롱락한 주평왕의 어리석음도, 서시의 치마폭에 감겨든 망국재화의 오왕 부차도,초선의 미인계에 걸려들어 비명횡사한 인중 려포도 다 이 정욕이 빚어낸 희비극이 아니랴.    물론 고대중국에 리지로 정감의 분출을 막고 덕으로 육욕을 이겨낸 철인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춘추시기의 로나라사람 류하혜를 첫손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고사는 이러하다.     어느 겨울밤, 날이 저물어 잘곳을 못찾은 한 젊고 아름다운 녀자가 류하혜의 처소로 찾아드는데 류하혜는 쾌히 받아주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 방안이 몹시 추워지자 녀자는 몸을 벌벌 떨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필경 얼어죽을것 같아 류하예는 녀자를 자기의 무릎우에 올려앉히고 옷섶을 헤쳐 포근히 감싸안았다. 기나긴 겨울밤, 류하예는 자기의 체온으로 녀자를 덥혀주면서도 모든 잡념을 뿌리치고 그렇게 고스란히 밤을 패였다. 그로부터 젊은녀자를 품에 안고있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인군자 류하혜의 미담이 오늘까지 류전되여왔다.    동서고금에 이런 유덕한 현인이 쌀에 뉘만큼이나 있었을가? 성에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이였으니 공명정대하게 시인해야 될것이였으나 유교도덕의 천하에서는 성이 금구로 될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천성이라는것은 기실 인간에게 남아있는 동물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인간의 동물성을 자인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연을 외면하는것이고 반대로 인간의 본연인 동물성을 무한정 확대하고 방종을 제창한다면 역시 순 동물성의 환원이 되고만다. 이것이 곧 성의 곤혹이 된다.    속담에 늦바람에 곱새를 벗긴다는 말이 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국문이 활짝 열리고 서방의 성문화가 들이닥쳐 수천년 억제당했던 중국사람들의 욕망을 들쑤셔놓았 다.무한정의 금전욕과 마찬가지로 성자극은 가장 큰 욕망으로 되였다. 하여 공자님의《본성론》을 짧디짧은 20년 사이에 외곡해도 엄청나게 너무 멀리 외곡해버렸다. 감각의 추구가 도덕과 관습이 방파제를 무너뜨려버리고 홍수처럼 사람들을 휘감아버렸 다.    사람들에게 제일 유혹적인 단어가 성감과 련계되는것들이다. 유흥소도 이에 동조한다. 제일 잘 팔리는것을 성기능장제이다. 상품광고도 성감색채가 짙게 설계되여야 일류광고인듯 착각되여있다. 인류의 제일 비밀이였던 자신의 방사도 제일경험자의 자태로, 침대우에서의 인간희극의 세부지도까지《성지남》으로 신문에 싣기도 한다. 밤 아씨들은 헌 양말짝을 벗어던지듯 정조따위를 팽개쳐버린다.    아무리 정이 없어도 욕은 만끽할수 있고 욕이 없이는 정이란게 없다해도 지페로 바꾼 비게덩이는 사랑과 인연이 없건만 그냥 사랑이라고 뇌까린다. 사랑의 위기시대라 할가, 인간의 생육본능이 성욕까지 만족시키고 또 행복감까지 주는것은 성문명의 최대 개척인것은 사실이나 사람이 동물과 다른 또 하나의 천성적본능은 욕을 통제할 줄 알고 에두를줄 아는데 있는것이 아닌가. 사랑은 성욕만이 아니며 플라톤식의 기적 ㅡ정신적사랑도 아니며 음욕, 번뇌, 발설만도 아니다.    성애에서의 수치심도 조절수단이면서도 자극제이고 정감의 장식품이기도 하다. 애정의 감정이 메말랐을 때 새로운 피부감각을 찾기마련이다. 정조니 도덕이니 하는 사람은 고서적을 뒤져보는 사람들일뿐, 그들이야말로 시대적락오자로 점찍혀진다.    그러나 도덕이 진창속에 나딩구는 그러한 사회야말로 자신의 릭익마저 상실했음 을 표징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좀 배부르고 따스하게 입으니 마치 모두가 성기갈 이 나서 맴돌고 그《성》때문에 사는듯한 착각을 주는 그러한 성문명을 조금 억제함 이 어떨가.    경제리익이 결코 일체를 의미하지 않듯이 인간본연에 애써 구축했던 그 고전적애 정의 륙지마저 사막화하지 말자. 아름다운 시어에 “섹스”란 단어마저 활개치게 하지 말자. 돈으로 바꾼 자극은 문명의 퇴화일뿐이며 만물의 령장이라는 자신에 대한 아Q 식의 풍자일뿐이다.                                2000년 7월 18일  
549    유혹을 씹어본다. 댓글:  조회:5825  추천:0  2015-03-30
                                    유혹을 씹어본다.      억조창생이 붐비는 지구촌 어디에나 인간의 리지력으로는 걱부하기 어려운 일종의 마력같은 힘이 군림하고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유혹이라고 이름했다.    유혹이 뭐냐? 추상적대상이면서도 구체적대상물이기도 하고 객체적인가 하면 자성(自性)적인것이기도 한 유혹에서 달랠 유(诱)는 말씀(言) 에 빼여날 수(秀)자가 그림 자처럼 붙어섰으니 충분한 흡인력을 갖고있는 미혹할 혹(惑)은 혹(或)시나 하는 마음 (心)으로 되여있어 문자그대로 남을 흘려서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것, 나쁜 길로 꾀여 내는것이라 사전에서는 명료하게 해석하고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생성, 발전과 더불어 그렇게 락인된 명사일뿐이고 그 속성은인간이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되면서 벌써 인간정신과 리성에 선행되여있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리고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고 유혹에 상응하여 탐혹이라는 말도 있는데 쌍둥 이자매쯤 된다고 할가, 유혹은 타아에서 기인되고 탐혹은 자아에서 기원되지만….아무튼 오색잡다하기로 요지경같은 살의 소용돌이속에서는 그렇게 가볍게 풀이되거나 소위 싹 비워둔 마음으로 림할수 있는것은 아닌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청 만물의 령장이라 하지만 온갖 유혹앞에서는 가모목에 놓아둔 엿가락처럼 마음이 흐물흐물해지고 삭신은 연골증에 걸린 아이처럼 되여 자칫 넘어지고 엎어져 코빼기를 벗기기 일쑤이고 심하면 천길나락에도 굴러떨어지기 십상이니 헤겔씨가 고집하던 절대리념보다 어어마어마한것이 아니랴.    그런데 주지하다싶이 유혹일반이 다 나쁜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생명을 선도하는 그 방향, 결과로 본다면 유혹에도 선악의 구별, 추하고 고운것의 계선, 고매하고 저렬한것의 차이가 있다.    유혹이 구체적인 대상물에서 기인될 때 류류별별에 각양 각색이 되겠지만 크게 나누면 황금(돈)의 유혹과 미색에서 오는 유혹이 우두머리격이고 제일 난당(难当)이라 하겠다. 하긴 권력의 보좌가 주는 유혹도 엄청난것이지만도 돈이 있으면 권력 따위는 팔고살수 있는것이고 권력 한자락 잡으면 돈나무에 올라앉는 격이라 오동이 무성하면 봉황이 절로 깃든다고 미녀도 명주바지에 도꼬마리처럼 들어붙을것이니 그게 다 그안 에 있는것들이 아니겠느냐?    인류의 모체인 대자연이 주는 유혹을 보자, 광막한 별세계은 우주인이라도 있을 듯싶으니 우주탐험가의 유혹이 될것이요, 천하제일 험봉은 등산가의 유혹이 될것이요, 미지의 바다밑세계는 해양학자의 유혹이 될것이다.    자유로이 창공을 날으는 수리개의 그 멋진 날개짓은 미국 라이트형제의 유혹이였을것이고 번개불의 그 강렬한 빛은 로모노쏘브의 생명을 앗아간 유혹이였을것이며 골드바흐의 추측의 탄생은 진경윤으로 하여금 진씨정리를 낳을수 있게 하였던 유혹이였을것이다. 상술한 그 모든 유혹들은 선지선각자들이 스스스로 당한 유혹으로서 인류의 물질문확재의 창조를 위해 선도자의 길에 오르게 한 세기적전환의 유혹들이다.    동물세계에도 약육강식의 근원이 되는 유혹이 있을것이다. 닭우리속의 씨암탉은 여우, 삵괭이들의 유혹이고 개구리는 굶은 늘메기의 유혹이고…우등불은 부나비의 비 극적정사를 낳는 유혹이요, 백화는 탐화봉접(探花蜂蝶)의 유혹이다.    세속의 유혹은도 얼마나 막무가내한가.《금준미주》는 공짜배기 취한의 유혹이 될것이고《옥반가효》는 쏘바께위치 같은 탐식가의 유혹이 될것이며 큰 권력은 벼슬에 불만족한 용속자의 유혹일것이다. 또 뭐니뭐니 해도 번쩍거리는 금덩이, 빨깍거리는 지페는 어섯눈을 뜬 애숭이로부터 백발로옹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불가항력의 유혹이 아닐수 없다.    그러니 정신이 멀쩡하고 오장륙부가 구전한 사람치고 유혹일반과 등지고는 살수 없는게 틀림없다. 유혹을 도피하거나 거절한다는것은 생활을 도피하고 거절하는것과 같고 삶 그자체를 포기하는것과 같은 짓이라 할것이다. 그래서 어느 선배님은 인생의 행복과 성공의 절반은 유혹을 접수하는데 있고 절반은 유혹을 거절하는데 있다고 했다. 아닌게아니라 유혹에 대한 접수자세, 명지한 선택은 생명의 완미함과 불미함, 흥망성쇠와 관련된 인생철학에서 대난제가 되는것이다.    만나고 헤여지고 배우고 잊어버리는 환득환실의 인생길에서 유혹은 인간을 지치도록 피곤하게 만들며 까불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어쩔수 없이 웃으면서 매달리고 울면서 나떨어지기도 했다. 더구나 물질생활이 점점 풍요로와지는 현시대에서 유혹과 리성, 방종과 절제의 대결은 현대인의 참혹한《인생전쟁》이 되였다. 한번 실수가 천고의 한이 된다는 도리는 다 알지만 그 누구도 자기가 유혹에 맞다들지 않는다고, 유혹에 가슴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없다. 유혹앞에서 욕망이 꼼지락거리고 피가 끓는것이 오히려 정상인의 마음가짐이며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가!    문제는 그 유혹의 결과가 어떠냐에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하지만 천고의 미담을 엮어놓은 현인들도 적지는 않다. 이런 재미있는 고사가 있다.    명나라 만력년간에 산동 태화에 조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치안을 관리하고 도적을 나포해들이는 전(典史)였다. 어느 여름날 조정은 타현에 가서 녀도적을 잡았는데 인물이 천하절색이였다. 조정이 녀도적을 압송해가지고 본현 관아로 돌아오다가 날은 저물고 주막은 먼지라 산간의 빈 절에서 밤을 묵게 되였다.    무인산중이요, 야밤인지라 조정은 녀도적의 포승을 풀고 편히 쉬게 하였다. 그런데 밤중에 미녀도적이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조정을 유혹해왔다. 조정은 악연했지만 그래도 젊은가슴에서 일만잔나비가 뛰놀았고 피가 설설 끓어올랐다. 녀자가 스스 로 원해오니 육욕의 향연을 마은껏 베풀고 인정도 봐줄겸 녀자를 놓아준들 시비를 걸어올 사람도 없을것이였다.   그러나 조정은 마침내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지필을 꺼내여《조정은 절대 방종할수 없노라.》하고 큼직하게 써서 벽에 붙였다. 한참후 뜯어내여 불사르고 다시 써서 붙인후 열심히《념불》하였다. 그러기를 여나문번이나 거듭하고나니 날이 밝았다. 나라의 집법관으로서 자기 직분을 지키고 명분이 바르게 처사한 명관이긴 하지만 그렇게 우직한 방법으로 미녀의 유혹을 물리쳤으니 조정이야말로 딱쇠라 할가? 예로부터 영웅호색이라 했건만 조정이야말로 꿈속에서도 자기를 다스릴만한 대장부가 아닌가?    옛날에도 이런 무탕무욕(无荡无欲)하고 일심종사하는 청렴관리가 꽤나 있었는가부다. 헌데 물욕이 횡행하고 돈이 인성을 타래떡모양으로 비트어놓는 현시대에 청백한 관리를 따라 배울이가 몇몇이나 될는지?    석류치마아래 다투어 무릎을 꿇고 공방형(孔方兄)앞에서 소인으로 전락되여버린 개국공신도 있었을라니 기타 녹녹한 무리들이야 더 이를데 있으랴.    이렇듯 사악한 유혹에 포로되여 질탕거릴 때는 내노라 하다가도 마침내 흥진비래 (兴尽飞来)라 쇠고랑을 차고 옥살이하는자, 불콩알맛이 따끔한지 고소한지 기억할 새 도 없이 저승사자에게 덜미를 잡혀 가는자들이 비일비재이니《선재, 선재로다.》인생비극을 빚어내는 위험천만한 유혹이로다.    저마다 제멋의 인생을 사는 마당에 감놔라 배놔라 할수는 없지만 살찌는 돼지는 운이 나쁘다는 외국격언이 자꾸 떠올려진다. 아무렇게나 놓아둔 쌀주머니속에 덫이 있는줄은 모르고 탐닉만 하려든다면 필경은《재판받은 쥐》에 나오는 장끼처럼 붉은콩 한알의 유혹에 목숨까지 빼앗길수밖에 없으리라.   오, 누가 알랴. 인생행로란 기괴하고 변덕스러운것이거늘 사람의 흥망성쇠란 사소한 유혹에서 갈라질줄을.                                  1999년 8월 5일
548    허영의 비극 댓글:  조회:5049  추천:0  2015-03-30
                                허영의 비극      인류의《정감사전》에 영예욕이 오른 그 시각부터 참된것과 허위적인것의 겨드랑밑에, 나발불기와 으시대는것의 내핵속에, 황당한 추구와 허무한 자족의 표피속에 허영심은 암세포마냥 확산의 기회와 응집의 매체를 노려오면서 끈덕지게 생성하여왔다.    허영심은 줄곧 인간과 더불어 숨박곡질을 해왔다. 하여 어떤이는 그것으로 심리평형을 얻어 만면춘풍이 되고 어떤이는 그것으로 충실하지 못한 자기의 생명을 윤색해가고있으며 많은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그것으로 하여 자생자멸의 삶을 기탁한다.     노랑머리소년은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한다.《어제 울 아버지 비행기타고 왔단말이야!높은 사람이구야 앉아다닌단 말야, 흥!》    이런 노랑머리소년들의 자아표현에는 기특한 일면이 있다하겠지만 백발늙은이들 마저 희뜩머룩하는데는 머리가 저어진다.《난 그때 ××와 함께…참, 그와 나는 친밀했지…》××란 물론 권력가나 큰인물일것이다.    이렇게 허영심은 소년시절부터 늙어 쇠잔해질 때까지 인간에게 묻어다닌다.    허영의 번성기는 젊은시절이다. 청춘의 빛발아래엔 늘 허영의 그림자가 엎드려있다. 그것은 마치 금방 돋아난 새싹이 자기의 풍채를 하루 빨리 과시하지 못해 안달아 해하는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허영은 일종의 동력이란 하겠으나 너무도 취약한것이다. 그가 만약 한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인격과 품성을 갈아먹는 석마돌이 되고만다.    허영은 영원히 자아를 원심력으로 원주운동을 하는바 단순한 자전가운데서 순간순간 쾌감을 맛볼수도 있지만 시간은 나중에 가서 무자비하게 그를 막다른 골목 에로 밀어넣고말것이며 광채롭지 못한 생활의 한페지를 남겨줄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성숙을 향해 나아갈때 문득 머리를 돌려 회고해보면 허영은 웃음거울마냥 비틀어진 인격을 비쳐주고 알찌근한 유모아로만 선물할것이다. 그가 만약 지성인이라면 자기 풍자속에 주렁진 열매만 짓씹을것이다.    영예와 허영은 한글자 차이이지만 그 내포는 천양지차이다. 허영은 어느 명인이 말한것처럼 초불과 같아서 세차게 타오를수록 녹아내리기도 그만큼 빠른것이다. 하건만 사람들은 허영의 노예로 즐겨 충당되는데 인간의 원초적비애라 할는지…    서부독일의 한 유명녀가수가는 남달리 유별나게 차리고다니는것을 좋아해서 자기의 머리칼을 금발도 아니고 종색도 아닌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다녔다. 하루는 그 가수가 분수가에 앉아 자기의 독특한 미를 과시하고있는데 마침 곡마단의 락타한마리가 지나가다가 맛나는 풀인줄 알고 마구 물어뜯었다. 녀가수가 죽는다고 비병을 질러댔지만 락타는 막무가내로 뭉텅뭉텅 잡아뜯었다. 이것은 확실히 기문이다. 이처럼 해괴한 거동들은 우리 신변에도 비일비재이다.    어떤 과외작가가 몇해를 두고 고심참담 창작을 하느라 했지만 한편도 활자화된 작품이 없어 친구들의 비웃음을 자아냈다. 전전긍긍해있던차에 우연하게 한 잡지에서 동성동명인이 쓴 소설을 보게 되였다. 이에 기발한 생각이 든 그는 자기의 처녀작이 발표되였노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였다. 썩은 알만 낳는 묵은 암탉이라고 비웃던 친 구들이 성공을 축하한다며 한턱 내라는바람에 그 알량한《작가》는 울며겨자먹기로 여윈 돈지갑을 툭툭 털었다 한다.    서부독일의 녀가수는 머리카락때문에 혹사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은 자라면 되는것이다. 그러나 생활속에 이러저러한《염색자》들이 각종 물감으로 자기를 분 장함으로써 빚어지는 희비극을 두고 우리 모두 포복절도할것인가? 아니면 방성대곡할것인가? 본색은 어디까지나 본색이고 원모습은 어디까지나 원모습이다. 노마에게 금안장을 얹어준다한들 천리가 될수는 없는것이다. 누가 만약 모종의 심리만족을 위해 허영을 추구한다면 차례지는것은 황련밖에 없을것이다.    시대의 총아로 불리우는 적지않은 기업가들의 흥망사를 보면 거개 허영이 출연한 희비극이다. 그 자신은 지고 일어서지 못할만큼 나라의 대부금을 맡고있건만 무슨 회사요, 기금이요, 자선사업이요 하면서 통이 크게 노는데 받아안는것은 뜬구름같은 명성이요 돌아앉으면 벙어리 랭가슴앓기이다. 우리 말 속담에 웃돌빼서 아래동 괴이고 아래돌 빼서 웃돌 괴인다는 말도 있지만 나라돈을 가지고 멋을 부리는 거동이야말 로 가증한 일이 아닐가? 하긴 그네들에게도 이런저런 고충이 없는것이 아니지만 이런 허영의 희비극을 조장하는 여러가지 사회깆에 대해 대성질호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해방군의 한 장군이 수수한 찦차를 타고 회의하러 가서 렬등려관에 숙박하 려하다가 가짜 장군이라는 오해를 사서 한바탕 활극을 벌린 사실을 세인이 다 아는바이다. 진실한 인격자로서의 장군에 대해 말하면 눈물겨운 감격이 앞서나 말썽을 일으키고 오해극을 논 그 녀복무원의 심리바탕은 어떻게 분석해야 옳은지…사회현상이 그 복무원을 그렇게밖에 사유하지 못하도록 키워놓은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허영심은 인간의 성실을 독살하고 인간자체를 훼멸하는 비상히 틀림없는데 어찌하여 인간은 허영을 껴안고 맴도는지…인간이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는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징 즉 성실성을 상실한 뜻이 된다.     상품경제시대 허영심에 둥둥 떠서 부평초같은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 세상에 어떤 유익한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기실 대단히 귀찮은 존재들인것이다. 잘살아도 못살아도 제모습 그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깨에 받들려 우리의 사회는 더 밝고 훌륭하게 되는것이다.                        1991년 3월 27일  
547    식도락 댓글:  조회:5186  추천:0  2015-03-29
                                      식 도 락       유교적관념에서 일컫는 5복《(수,부, 강, 녕, 유효덕, 고종명(寿,富,康宁,攸,好德,考终命)》가운데 어찌하여 식복(食福)이 들지 못했는지 알수 없으나《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는것을 보나 고서에《민이식위천(民以食为天)》이라 씌여진 것을 보거나《만복의 배우에서 머리가 즐겁게 웃누나》는 외국의 속담이 있는것을 보면 동서고금 억만창생들이《식》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았느냐 싶으며 그속에 담긴 식도락(食道乐)인즉 곧 제일가는 락이 아니겠냐고 생각해본다.     저 먼 아라비야에서는 책과 녀인의 가슴과 말잔등에 세가지 인간락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먹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손쳐도 생명보존의 제일법칙인즉 곧 식이니만큼 그외의것은 다 여건에 속한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서투른 이 글을 끄적거려보는 순간에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굶주림에 목숨을 넘기는 비참한 생령들이 많고도 많을테니 조물주가 인간에게 골고루 식복을 하사한건 아닌것같다. 게다가 식복이란 잘살고 못살고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반복무상하고 변화다단하여 한사람에게서 없다가도 오는 법이기도 하니까. 한나라가 국태민안(国泰民安)하고 풍의족식하면 국민도 식도락을 누릴것이요, 한집안이 유족하면 하루 세끼 식복이 흐를것이니 더는 말고라도 이 나라에서 살아온 동년배들이면 저마다 식도락의 절실함을 체험했을것이다. 말하자면 1960년대초 그 어렵던 세월에 대식품으로 연명해오면서도 혀만은 살아서 머리속에 만백가지《식도락》을 누려보던 그 눈물겨웁던 때를 잊지 않고있을것이다.     말이 났으니 정녕 식도락이란 무엇이냐? 이발과 손톱으로 생고기를 찢어 기아를 말려야 하던 원시인들의《식도락》과 익은 고기를 포그로 찍어서 금준미주를 안주하 면서 배에 곱을 올리는 현대미식가들의 식도락과는 천양지차겠지만 아무튼 식도락은 식도락이렸다. 하기야 지간막을 먹는답시고 수백마리 오리를 잡아들이라 호령하던 지고무상의 자희태후가 진짜 식도락을 누렸겠지만 아무튼 사람은 제나름의 식도락이 있을것이고 또 그멋에 주눅이 들지 않고 사는지 모르겠다.     집 떠나 타향천리에서 돈을 버느라 아글타글하는 관내사나이들이 공사장 여기저기에서 앉은채로, 선채로 목이메게 거친 음식을 먹는 모습을 일별할 때마다 열여덟 한창때에 고동하목재판에서 생활개선을 한답시고 나누어준 서근 찰떡을 소금가루에 묻혀 우겨대던 자신이 돌이켜져 남의 일같지 않고 중학시절 학교를 가다말고 온얼굴에 검댕이칠을 하며 콩서리를 하던 그때의《식도락》이 되새겨지기는 하지만 밀림의 긴 겨울밤 배고픔을 참을수 없어 난로불에 두병쪼각을 구워먹으며 느끼던《천하일미 의 식도락》은 더는 찾을수 없으니 나도 웬간히 식복이 있는 미식가 된 셈이다.     참으로 그때는 좀만 몸이 난 사람을 보면《간부》가 된다고 부러움에 차서 바라보던 세월이였으니 지금은 해바라기를 파는 장돌뱅이도 비게만 좋아하면 대뜸《틀》 이 나니까 세월이 바뀌여도 엄청나게 바뀌였고 그 세월엔 미친소리로 여겼을 살까기가 현대의 골치거리가 되였으니 세상은 좀 좋은 세상인가,     두말이면 잔소리이다.집집의 식생활이 풍요로와지고 저마다 식도락을 누린다면 평민백성으로 더 바랄것이 있으랴, 새 세계를 찾은 무산혁명의 기발도 먼저 주리고 종된자들이 추겨들었고 혁띠를 우려먹으면서 설산초지를 넘던 로홍군들도 나라의 주인된 만백성이 골고루 식도락을 누리며 잘살도록 하자고 허리띠를 졸라맨것이 아닌가? 마침내 피흘려 싸운 건국영웅들의 덕분에 후대들인 우리가 허리띠 느슨히 늦춰놓고 식복을 누리고 곳곳에서 식도락의 쾌재가 높아가게 되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국의《식문화》는 찬란한 력사를 가지고있어 중외에 널리 알려진 하나의 자랑거리이다. 따라서 한바탕 차려놓고 주지육림속에서 패기를 떨쳐보는것이 중국사람들의《식문화풍도》로 되여왔다.    그런데 옛글에 복중화(福中祸)라고 온 국토에 흉용팽배하는 식도락의 급류속에 일종의 비애가 무겁게 깔려있다고 한다면 공연한 소리일지는 모르겠으나 거리와 골목들에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들어앉은 크고작은 식당, 호텔들에서 수수하든 호화롭든 식탁에서 용서못받을 랑비가 주욱 이어지고있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의 수치로서가 아니라 부의 현시로, 인격과시의 표지로 되고있으니 중국의 음식문화에 찬탄하던 외국인들이 나중엔 최대의 죄악이 중국대륙에 만연되고있다고 개탄하는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보다 몇십배 더 잘사는 나라의 부호들도 랑비를 최대의 적으로, 죄악으로 여기고있는데 아직도 발전도상에 있고 겨우 락후의 누데기를 벗어던진 우리 중국사람들이 오히려 시뚝해서 한술 더 뜨며 야단법석하니 향락문화의 때이른 급류가 나중엔 어떤 악순환을 가져올지 생각해야 할것이다.     기실 호화세계에서 패기를 떨치는 주인공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결산은 무엇으로 하고있던가? 우리는 강자들의 노래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지만 현조사회의 구석구석 을 살펴보면 이 세상은 더욱 많은 약자들의 어깨에 받들려있으며 식도락의 향수라기보다 생계를 위해 전전긍긍하는《실락자》들을 너무도 쉽게 간파할수 있다. 바른대로 말하여 결코 엷은 로임봉투의 임자들이 고급식당에서 식도락을 즐기는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중국사람의 식도락의 비애가 커가고있다. 말하자면 국민의 피땀이 명색좋고 허울좋게 식도락속에서 구정물에 흘러들고있다는 가슴아픈 사실이다.     북경의 크고 작은 음식점들에서 하루에 내버리는 먹다남은 고급료리들이 20만근 씩 된다니 우리 여기 산간도시 연길에서는 얼마만큼 내버리면 될가? 돈이 있고 없고, 내 돈이건 아니건간에 저마다《즐거운 소화공정》에 열을 올리며 마음만 태평하니 쥐같이 벌어서 소같이 새김질하는것이 아니며 그 좋은 식도락에 어두운 그림자를 씌우는게 아니겠는가!절약이라기보다 절제하자. 아직도 절제는 우리의 좌우명이 된다.     국민자질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회거울속에 투영되는 사회병태는 그렇게 자부하 는 중국의《식문화》가 지금에 와서는 날로 더 무거워지는 국민의 보따리로 되고있다 는 설명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면에서 우리 나라에 돈이 없다고 할수 없다. 몇해전 어느 실화문학잡지에 한해에 온 나라가 먹어치우는 돈이 400억원이 된다는 초풍할 지경의 수자가 기재된바 있다. 그러나 불가사의한것은 국민의 현대화자질제고의 기본바탕이며 지레대인 교육경비는 노상 보잘것 없다는것이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일떠서는 고급호텔, 식당, 유흥장소는 번창하는 상품경제시대의 일각을 이루고있는듯하지만 실은 향락문화, 소비문화의 시기상조의 현란한 피상적현상일뿐 결코 현대화발전의 장구적이고 내재적필수인것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 기저에 깔린 어두운 점은 너무도 많다.     얼마전 돈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는 수백수천의 까막눈들을, 현대문명의 구렁텅 이에 빠져들어가는 미래의 일군들을 위해 교육기금회를 세우고 의연금을 모으는 전국적호소가 내린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아직도 비가 새는 헐망한 교실, 맨봉당에 찌그덕거리는 책상을 놓고 조국의 미래를 익혀가는 앞날의 주인들이 우리 연변에는 얼마이고 전국에는 얼마일가!그리고 또…     만복의 배우에서 머리가 즐겁게 웃을 때 국민의 비애는 침묵속에서 짙어가고있다. 당신은 믿지 않는가?…                                                                1994년 5월 28일   
546    울고싶을 때는 울어라 댓글:  조회:4689  추천:0  2015-03-29
                              울고싶을 때는 울어라         꿈속에서도 능히 자기를 다스릴줄 안다는 그런 억센 사나이는 눈물을 모른다던가. 옳거니《사나이여, 부디 사나이다와라, 부디 망성중이로는 되지 말라.》사내명색에 뉘집 아낙네처럼 눈물이 헤퍼서야 쓰겠느냐? 황차 아침 풀이슬같은 목숨을 살며가는 그 한길도 에둘러갈수 없는 북망산으로 가는 길인데 살려거든 웃으며 사는 마음부터 가져야겠지.     그래서 윌콕씨는 이렇게 말한다.     《웃어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것이다. 울어보라. 너 혼자 울겠지? 서글프고 늙은 이 세상에서 환희는 빌려와야 한다. 자기 고통도 너무 많으니까.》      유고씨는 다르게 말했다.     《예수는 울었다. 볼떼르는 웃었다. 신의 눈물과 인간의 미로써 오늘의 문명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진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누구를 위해 울었는지《구라파의 량심》인 볼떼르가 왜 웃었는지 유고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백한것은 신의 세계나 인간사회는 모두 울음과 웃음이 동반되여있다는 그 말이다.     말못하는 금수들한테도 인간이 모르는 희노애락이 따로 있을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기분대로 어떤 새는 운다고 생각하고 어떤 새는 노래한다고 느낀다. 지어 같은새라 하여도 접동새랄 할 때는 별스레《접동접동 아울오래비 접동…》하고 울고 소쩍새라 하면《소쩍,소쩍!》하며《심산의 밤이 서러워》운다고 한다. 늦은 봄 깊은숲 그늘에 숨어앉아 우는 뻐꾹새도 때로는 밭갈이 재촉하느라고《뻐꾹, 뻐꾹》노래한다 하고 때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버리고 온 자신이 한스러워 운다고 한다. 그냥 노래한다고 생각하는 꾀꼬리도 기실 어떤 사연에 우는것이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조롱속에서 자유를 잃고 우는 새마저 노래한다고 느끼는 인간의 심사는 어찌된 판인지…     곁길로 빠진 화제를 돌려보자. 천성 한과 유감으로 빚어진 생명체가 우리 인간들이고 그 삶도 확실한 계산서처럼 착착 풀리는것이 아닐진대 조화무상한 정감생활에서 평균치를 구하려 든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어느 노래에 인생은 무지개라고 하지만 봄날에 만발한 들꽃처럼 웃음꽃이 쭉 깔린 인생행로가 누구에겐가 마련되여있다면 그것은 운명의 은총을 받은 행운아들에게나 가능할가? 인생의 초행길을 떠나면서 미루어 그려보아도 아름다운 동경의 무지개는 있을법한 소망이라 할것이다.     무릇 숨쉬는 인간은 고통도 있고 비통도 있기마련인데 행불행(幸不幸)으로 얼크러진 삶의 현장에서 하냥 웃으며 살기에는 인간이《생각하는 갈대》로 진화된것부터 잘못되였다고 해야 하리라. 비록《(万物之中唯人最贵)》라지만 생명의 탄생을 하필 울음으로 선고하게 한것이 조물주의 실수가 아니라면 울며살아야 한다는 징표가 아니겠는가? 웃으면서 이 세상에 왔다는 사람을 누가 보았는가?     나온다. 운다. 그로써 인생 첫아침이 열리거나 어머니의 류혈과 고통속에 울린 그 고고성이야말로 성스러운 생명찬가가 아니며 위대한 모성애를 환기시키고 호소하는 인생극장의 서곡이 아니랴. 이렇듯 인류의 정감사전에 웃음보다 울음이 먼저 올랐다는것은 그리 잘된 일은 아니지만 아기의 첫울음소리는 운다는 그자체와는 이률배반적으로 이 세상에 온 첫환호성으로 감지되고 생명력의 첫과시로 되여 눈물겨운 감동속에 받아들여지는것은 사실이겠다.     아기는 그렇게 이 세상에 도전하고 자기 존재의 리유와 권익을 확보한다. 아기는 그렇게 엄마와 대화하고 그 마를줄 모르는 눈물샘으로 장차 혼탁한 이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키운다. 가식도 억지도 아닌 아기의 울음은 자초에는 그렇듯 당당하고 생명표현의 귀여운 방법, 수단이였지만 어른들이 망가뜨린 풍진세상에서 기고 딩굴면서 차차 커가는 동안 꾸미으로, 리기로 그 성분이 복잡해진다.     마침내 어른이 도면 슬퍼서도 울고 기뻐서도 울고 어떤 목적에서도 울게 된다.  그 울음은 더는 순수의 생리반응이 아니며 눈물도 단순히 루선에서 흘러나오는 배설물이 아니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정감의 사치품인것처럼 눈물에도 이런저런 의미적색채가 담긴다. 아무튼 운다는것은 웃는것보다 보기에 곱지 않다. 그러나 웃 음은 허파에서 새여 나오는 간헐적인 바람처럼 순간적이다. 울음은 웃음처럼 자발적인 때보다 심각한것이다. 그래서 함께 웃어주던 사람은 쉽게 잊혀지지만 함께 울어준 사람은 좀체로 잊혀 지지 않는 법이다.     녀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잘 울고 눈물이 헤프게 조물주가 빚어놓았다. 그래서 누군가는《녀자의 눈물만큼 빨리 마르는것도 없다.녀자의 눈물에 쉽게 감동되지 말라. 녀자들의 눈이 울도록 가르치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녀자들의 눈물을 선험적으로 너무 가볍게 보지는 말아야겠다. 녀자들의 눈물은 처음부터 절대적억압자로 군림한 웅성들을 그들과 다르게 정복해 버리고 다스리는 상규무기로 되여왔으니 말이다.     한과 고독속에서 흐르는 숙녀의 눈물은 다같이 무색이긴 하지만 경박한 녀자의 눈물과 대비할바가 못된다. 속절없이 지여서 물우에 떠내리는 꽃잎이 애처로워서 울고 하염없이 녹아내리는 초불에도 눈물짓고 그렇게 정과 한에 울고 흐느끼다가 원혼이 된 림대옥의 눈물은 비록 중중첩첩한 애정의 장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그야말로 운률이 있고 색채가 있는 천고의 눈물이라 할수 있다. 부역에 나갔다가 비명횡사한 남편의 시체를 안고 구천에 사무치도록 울고울어서 마침내 장성까지 꺼져들어 갔다는 맹강녀의 눈물은 방울방울이 그대로 혈루였으리라. 비록 끊어진 남편의 목숨을 이어주지는 못했을망정 만고미담으로 전해진 렬녀의 눈물이였다.     잠간만, 울음은 결코 녀인들의 특허저매권은 아니였다. 춘추전구시기 초나라 충신 신포서의 눈물은 얼마나 유명하였던가? 오나라에 도망쳐간 오자서가 복수의 대군 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엄습해올 때 진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갔던 신포서는 진양공이 출병을 거절하자 풍전등화의 국운이 통분해서 련 이레낮, 아흐레밤을 대성통곡하였다 한다. 그 가슴을 찢는 울음소리에 감동된 진양공은 구원병을 내주었다. 결과 신포서가 눈물로써 나라를 구했으며 진충보국한 충신의 력사적인 눈물이라 할것이다. (울어서 얻은 강산)의 명주인 류비의 눈물도, 천하기재 제갈량이 음참마속(泣斩马谡) 할 때 흘린 눈물도 다 녀인들의 눈물이 따를바가 못된다.     비겁한자, 용렬한자의 눈물은 그저 눈물에 불과하지만 강자, 지성인의 눈물은 화산용암같이 뜨거운 불이다. 한편 세상엔 역겨운 울음, 더러운 눈물도 많다. 만복의 배우에서 가가대소하던 탐욕자들이 계하수가 되여서 눈물코물 짜며 훌쩍거리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네들의 울음을, 눈물을 자기 스스로 판 무덤가의 때늦은 참회라고 하기보다 법관의 동정심같은것을 꼬여보려고 피워대는 속물적인 기량이라 보는게 알맞을것이다. 그네들의 눈물은 심령의 시궁창에서 새여나오는 구질구질한 오물 일뿐이다. 그러기에 남자의 눈물이 일단 공리성을 띠게 되면 그 기만성은 녀인들의 눈물보다 더 위험하다. 그러한 울음과 눈물은 사람이 사람으로 현연되는 기제에서, 이런저런 인간상을 비쳐보이는 거울에서 배제되지 않지만 내가 론하려는것은 아니다.      진실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발현일 때 울음은 절절한것이다. 사람의 한생이란 근원적으로 슬픈것, 회한스러운것 즉 울음의 속성으로 받들려있는것으로서 살아가노라면 울음이 절로 터질때가 많고많다. 리별의 역두에, 친인의 비보에, 못다한 사랑에 그리고 통탄스러운 그 무엇무엇…     그래서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가 있다고 하였는가, 크낙한 슬픔은 례의에도 구애되지 않는다고 선인들이 말한바있다. 누구군가의 비위를 맞추느라 마음에 없는 김빠진 웃음을 짓기보다 제 설음에 두다리 뻗어버리고 우는게 오히려 진솔한 자기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루밤 서럽게 울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론하지 말라고 누가 말했던지…하늘 우러러 부끄럽고 땅을 굽어보아 통한이 찢길 때 꺼이꺼이 울어도 보아라. 그래도 피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거든 소리소리 질러보아라. 한가슴이 터지도록…                            2001년 2월
545    웃음의 이미지 댓글:  조회:5487  추천:0  2015-03-29
                                                웃음의 이미지        조화옹이 천지간에 중생을 내실제 유일하게 7정6욕을 가진 인간을 내시고 또 웃을줄아는 기특한 본성까지 하사하시니 그때로부터 인류의 정감사전에 웃음이라는 당혹스러운 현상이 기록되여왔다. 하여 인류의 력사는 웃음으로 수놓아진 력사이기도 하였다.     옛사람이《질풍노우(疾风怒雨)위에는 금수도 근심하고 청풍명월에는 초목도 즐거워하나니 인심에 한시라도 화기가 없어서야 되리오》라고 이른것을 본다거나 현대문 명인들이 저마다《웃으며 살자!》는 생활신조를 내세우고 웃음거리를 찾아내고 웃음꽃을 피워가며 인생을 풍요롭게 영위하고있는것을 보면 확실히 울면서 이 세상에 온 인간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이 없이는 그 존재의 가치마저 운운할수 없음을 잘 알겠다.     그렇지 않으랴! 괴롭고 즐겁고 밉고 고운것이 뒤얽힌 인생살이일지라도 마음가짐에 있다 하거늘 밉게 보면 모두가 화날 일이요, 명랑하게 웃으며 바라보면 모두가 기 뻐할 일인바하고는 웃으며 살줄아는 마음가짐부터 기르는것이 현명한 처사로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자유로와야 할 인간이 부자유한 기계와 같은 운동을 할 때에도 웃음이 나온다고 희극적인것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웃음의 사회성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아닌게 아니라 웃음에는 웃는 리유, 웃음의 의미, 웃음의 색채, 웃는 양태… 등등 깊고 오묘한 학문이 깃들어있음은 사실이다.     또 능글능글 웃으면 어떤 비밀을 감추고있는듯한 인상을 줄수 있고 히죽히죽 웃으면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웃음이 되고《하하하…》하고 크게 소리내여 웃으면 포복절도할 웃음거리에서 기인된 심벽의 세찬파동일수도 있거니와 반대로 어떤 악의의 표현인 앙천대소일수도 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웃음은 쾌적한 정신활동에 동반하는 감정반응의 일종으로서 비교적 지적인 생활이거나 사회생활에 대응하는 현상을 말한다. 웃음은 눈물과 같이 다 감각의 수레바퀴를 굴리는바 전자는 바람의 힘이요, 후자는 물의 힘이라 할것이다     그러나 잘 웃는다 해서 곧 웃을줄 안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허다한 웃음은 고통스러운 웃음이라 해야 할것이다. 어떤 웃음이 고통스러운 웃음인가?자기 마음에 어긋나는 그러한《웃음》이다. 바로 그래서 거짓웃음이요, 비굴한 웃음이요, 허구픈 웃음이요, 이지러진 웃음이요 하는 말들이 생겼거니와 소위《웃음속에 칼이 있다.》는 그런 웃음은 오싹 소름이 끼치게 한다.    물론 사회인으로서 우리는 일생동안 자기 마음에 사전의 챙김이 없는 그러한 《웃음》을 얼마나 웃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마음차림이 없는 허다한 웃음은 스스 로도 감내키 어려운 고통스러운《웃음》이며 지어는 막무가내한 굴욕이라 할수도 있 다. 그러한《웃음》들은 자기 심령의 기꺼운 해방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종합증이 사람들에게서의 병적반응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이는 우리 인간이 또 하나의 영원한 비애를 안고사는 보잘것 없는 동물로 되게 하는 슬픈 궤적이라 하겠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웃음은 어리석은자, 표히부동한자, 주견이 없는자들의 처세술이 아니라 대바르고 성실하고 자아를 나름껏 실현해가는 그런 지성인들의 내심의 반영인것이다. 또 그러한 진짜웃음이야말로 그 나라의 국민성과 그 사회의 화목정도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되는것이다.    《웃으며 살자!》 아무렴 웃으며 살아야지, 울음으로 시작한 힘겨운 인생이지만 웃음으로 주욱 가꾸어간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또 어데 있으랴!그러나 웃음이 자발적인것이 아니고 그 어떤 처세수단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갈대들, 돈에 웃음을 파는 그러 가련충들에게는 저 열혈의 반역작가 최서해처럼 남이 웃을 때 혼자 울줄도 알고 의에 울지언정 아첨에 웃으려 하지 않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리라.     묵시할수 없는 부패분자가 상급이라 해서《웃음》으로 굴종하는데 반해 차라리 굳어진 얼굴로 맞서나가는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우러러보이는가?!《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숙여 유자의 소가 되리라》는 로신선생의 말씀을 우리 모두가 명기할바라고 생각한다.                                                 1995년 8월 9 일  
544    가진자의 게트림과 못가진자의 뇌까림 댓글:  조회:5006  추천:0  2015-03-29
                         가진자의 게트림과 못가진자의 뇌까림        대저 랭수를 마시고 이발을 쑤시거나 갈비트림하기는 심히 뇌꼴스러운 짓거리로서 진수성찬으로 배불리고 “껄ㅡ”하는 게트림지른 확실히 부한자의 일종 자기과시이 리라. 한편 속으로는 경이원지(敬而远之)하면서 “제길헐, 껄껄거리긴! 사레든 돼지 처럼…”하고 게두덜거리는것은 심기가 비탈린 빈자의 속절없는 뇌까림일 하리라.    인류가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나뉘여진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진자의 게트림질과 못가진자의 뇌까림은 줄곧 사회의 불협화음을 이루어왔다. 두보의 “부자 집엔 술고기 썩어나건만 길가엔 얼어죽은 시체 딩구네.”란 시구는 당시 사회의 최강 음이라 할수 있겠다. 시인자신이 평생 불우하였기에 더구나 절치부심(切齿腐心)하여 주린자들을 두고 애를 끓였던것은 눈물겨우나 결과적으로는 역시 빈자의 속절없는 뇌 까림에 그치고만것이다. 아니면 어쩐단 말인가? 부익부빈익빈(富益富贫贫)의 불공평 한 사회현상이 궁한 문인의 뇌까림으로 변하였던가.    하지만 부귀빈천도 반복무상(反复无常)하다. 아사지경의 주린자로부터 득세하여 가진자의 행렬에 끼이면 누구보다 “껄ㅡ”하는 게트림소리를 내기에 서두르는것도 인 지상정(人之常情)이니까, 력사의 하늘아래 류성처럼 흘러간 진승, 황소, 주원장도 다 그랬다. 태평천국을 펼친다던 홍수전도 궁궐에 깊숙이 들어앉아 주지육림에 롱탕지며 “껄ㅡ”하기에 급급하다가 내홍과 외력의 강타로 말미암아 훼멸되고말았다.    봉건사회에서 절대 대부분의 사회재부를 소수인이 점유한것이 사회성질과 정권의 성질에 의해 결정되였다면 오늘날 빈부의 차이가 현격해진것은 무엇때문인가? 개체적 인간의 근면과 라태, 총명과 우직함에서 기인된것인가? 차지한 위치나 행운때문인가? 아니면 사기협잡, 횡령인가? 그 모두가 요인이 될수도 있겠다.    아무튼 가진자가 어떻게 가졌고 못가진자는 어찌하여 못가지게 되였든간에 당대 중국공민들의 빈부의 차이는 사회여론의 초점이 되였다. 물론 국민수입의 격차는 산업화과정에 경제장성에 따라 증대되는것으로서 단지 중국에만 존재하는 불합리한 사회분배현상은 아니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 복잡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해당 전문가들이 분석하고있다.    1998년 전국 국민의 저금총액이 5.4억만원이였는데 10%의 저금호가 80%에 달하는 4032억만원을 점유하고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거기에 해외의 저금액까지 합하면 소수인이 점유한 사회재부는 5.5억만원이라는 국민수입총생산액과 맞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가진자의 게트림질은 갈수록 요란해지고있는것이다.    광주에서 가치가 6,000~7,000원에 달하는《황금연》이 한달새에 100여찬 팔렸다는 뉴스가 파다했다. 말로는《황금연》의 목적이 중화음식문화를 널리 발양시키는데 있다고 했다. 중국사람들속에는 확실히 벼락부자가 많다고 믿어야겠다. 그리고 확실히 지혜가 넘치는 국민이다. 황금료리가 무슨 맛인지 알바없지만 분명 돈내를 피우는 일종의 게트림이 틀림없다.     웃물이 흐렸는데 아래물이 맑으랴. 남경의 모중점학교의 한 1학년 학생은 대변을 보고 휴지가 없으니 100짜리 지페넉장으로 뒤를 닦고 여유작작하게 일어섰다는 사실이 한때 남방뉴스로 전해졌다. 수림이 깊으면 벼라별 새가 다있다고 부호들이 서로 백원짜리 불태우기. 고가의 외제고급술병을 깨뜨리기로 자기 재력을 뽐내는 등 행위는 다 비릿한 게트림질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짓거리들은 새끼무당의 푸닥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광동성 순덕시의 모은행 행장은 기분이 뜬 김에 안마아가씨에게 한번 팁으로 10만원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이 돈은 인구당 년평균수입이 500~600원좌우밖에 안되는 중원지구의 편벽하고 빈궁한 농촌에서의 천여호의 년말상납금에 해당된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먹고입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학령아동이 교문밖에서 헤매고있는가? 이런 자들의 게트림질과는 다리 악연히 놀랄 기문이 있다. 독일총리였던 콜이 한번은 친구를 초대하였는데 식사가 끝날무렵 접시에 국물이 좀 남아있는것을 보고 빵으로 그것을 묻혀서 먹었다.그래도 말끔히 가셔지지 않은것을 보고 아예 접시를 들고 혀로 싹싹 핥았다고 한다.이 얼마나 격세지감을 주는 유모아인가!하지만 우리 중국국민들의 가치관념,소비관념에서 출발하여 볼 때 천하에 웃음거리가 될 이야기이다.     자고로 부자가 못가진자의 찌그러진 삽짝문안을 살펴본 일은 없다. 그네들은 자선보다는 자기 향락이나 유산에 더 신경을 써왔다. 부귀하고 교만하면 스스로 재화를 불러오건만…현재 부한자의 눈덩이처럼 커가는 재부의 위력앞에서 조금 가졌던것마저 지켜내지 못하는 빈자의 뇌까림은 동시적현상이기에 더욱 절실해진다.     빈부의 현격한 락차는 또 그만큼의 심리락차를 동반하는바 그 불평등을 뼈저리게 체험할 때 사회의 불협화음은 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심리상태를 그저 사촌이 기와집 지어도 배아파한다는 전통적인 시기심리로만 일축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준엄한 사회문제이다.     어쨋거나 진짜 배불러서 하는 게트림질은 왈가왈부할것이 없다쳐도 같잖게 흉내 내는 게트림질은 보기가 정말 꼴불견이다. 언젠가 식도락과 유흥으로 연길의 밤은 불 야성을 이루고있어 몇시인가 물을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글을 읽은바 있다. 글에서 이르되 주말이면 주안상에 빙 둘러앉는것을 일과로 삼는 미식가들이 이젠 느끼한 료리에는 싫증이 나서 서양음식에 매달려 만포식하는가 하면 맛과 여유와 멋으로 어우러지는것이 시체멋이 되였다던가, 읽고나서 저도모르게 선망감이《맙시사》로 번져져 나왔다.    《어ㅡ쩌ㅡ엄?》우리 연길이 이같은 복지사회가 되였나싶어 눈이 다 올롱해졌다. 기업이 겨끔내기로 파산을 선고하고 실업대군이 거리에 밀려나왔는데도 이 무슨 게트림질이냐?부끄러운 자랑거리를 부득부득 내세우자면 택시 잘 타고 식당, 노래방, 사우나, 안마방이 많고 배동아가씨가 많은게일가?      백열화된 연길의 밤에 류행되는 멋과 여유를 선양하기는 아무래도 싱거운것 같다. 몇해전 연길에서 하루밤 유흥업에 흘러드는 돈이 200만~300만원이라는 통계가 나왔는데 이에 “긍지감”을 느꼈다면 지금은 더구나《장부의 호연지기》에 놀라리라. 한때 노래방마다에서 울려나오던《아니놀지는 못하리라. 챠챠챠…》가 진정 연길시민의 식후대합창이 옳기나  할가?     잘살고 못살고가 불야성의 밤시간을 모르고 흥청거리는데서 갈라질지라도 게트림질은 아직 이른것같다. 기실 우리 민족군체속에는 난부자 든거지가 너무 많은게 탈이다. 혹시 동정칠백리 내 당나귀 타고 가는데 웬 훤화(喧哗)사설이냐고 까박줄이도 있겠지만 이젠 조금 먹고 살만하니까 제세부린다면 맹동이 아닐수 없다.     연길은 겉도는 모양은 알락달락하다. 그러나 연길의 밤이 정녕 몇시인가는 멋과 여유로 사는 복받은이들의 시계에 시침을 맞출것이 아니라 생계문제로 한숨 태우는 실업자들에 묻는게 량심적이요,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고도 돈이 없어 속썩이며 눈물흘리는 가난한 집 녀고중생에게 묻는것이 더 실제적일게다.     진잎 먹고 잣죽트림한들 누가 대견해할손가? 이 사회는 아직 여유로운 멋과 맛이 무엇인지 모르고 땀흘리는 보다 많은 생활의《약자》들의 어깨에 받들려 둥글어지는게 아닐가? 발달국가들에서도《한탕주의》를 수치로 알고있다.《리기와 향락이 삶의 진실이 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소란스러워지 마련이다》라고 서구의 한 지성인이 말했다.     물론 자기 향락외에 더 흥미로운것이 없는것이 바로 가진자들의 보편적인 심리상태라 할 때 그만 심기만 비틀어져 뇌까리기만 하는 못가진자의 마음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워낙 부조리가 곧 조리이기도 한 현대사회라 하지 않는가. 두보의 “최강음” 도 이 시대엔 크게 도움이 못된다. 동정이 필요한가? 동정심을 갸륵한것이지만 종래로 부러진 다리를 이어주지는 못했다. 저주로운 뇌까림으로 마음만 주름잡지 말고《나도 가져보자 !》하고 열심히 뛰여보라. 그러나 부디 게트름질은 급해말고…                         2003년 2월 22일  
543    《구실을 말하다》책을 내면서 댓글:  조회:5635  추천:0  2015-03-29
                                                   책을 내면서      울고웃는 세상,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체험이 있게 되고 절실한 감수가 있기마련이다. 그것은 시대와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으로서 사상의 분방함과 정감의 분출로 열정을 연소시킨다. 이것이 나의 문학창작의 기점이다.    무릇 어떤 쟝르이든 자아표현이다. 그런데 자기의 사상정을 분위기에 맞게, 바르 게 표현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난의 작가 쎄르반떼스는 붓을 마음의 혀라고 했다. 그만큼 문학은 세상에 대한 개성적반응의 기록이 되는것이요 진실을 호소하는 메가폰이 되기도 한다.    인생이 괴로운가? 세상이 괴로운가?《어진자는 슬퍼하고 지혜로운자는 즐긴다》더 라만 기실 모든것이 견해에 달렸다. 야망도, 사치도, 탐욕도…비리의 범람, 착위현상, 음과 양의 모순과 통일, 환득환실, 실락감…이 시점에서 문학을 자기존재의 의미와 가 치에 대한 탐색으로서 현실에 의문부호나 감탄표를 찍게 된다.    작가의 마음밭에 진리와 진실한 사상의 관개가 없다면 문학의 상록수는 없을것이다. 자신이 아프게 혹은 감미롭게 느낀 그대로 구김없이 쏟아내야 진실한 문학이 될 것이며 그것으로만 자기 삶의 뚜렷한 흔적이 될것이다.    수필문학은 인류감정의 상태를 개선하는 일종 생명운동의 수단으로서 인생이 꽃피워준 심령의 향화라고 할수 있다. 수필은 눈초리로 쓴다고 하지만 문학의 백화원에 랑만의 꽃만 피우는것이 아니듯이 수필도 가분 좋은이의 심령의 파티만이 아니다.    비수같은 로신의 문학, 비판의 채찍인 발자크의 문학, 랑만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사회암흑을 비춰보이는 밝은 거울같은 유고의 문학, 눈물 머금은 유모아적인 체호브의 문학, 항쟁의 북소리였던 최서해의 문학이 이 점을 증명해준다.    세상은 넓고 인생길은 험난하다. 오직 태여나지 않는 자만이 고통을 모른다. 발바닥인생에서 무시당한 인간존엄, 인격, 생명가치창조가 얼마나 가슴아픈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나는 붓을 지향하였다.    인생의 반고개가 넘도록 농토에서 밭갈고 씨뿌리던 투박한 손으로 첫붓대를 잡아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붓을 잡을 때 씨뿌린대로 거두겠다는 농부의 마음처럼 글밭 을 갈고 또 갈았지만 글풍작은 숙명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생의 저문언덕에서 허 위단심 거두어보니 잡곡무지만 올망졸망 엉성하다. 그나마 헛농사는 짓지 않은것 같 아서 이번에 수필과 잡문을 추려서 한단 묶어보았다.    누군가 수필은 산뜻한 감각의 연소이고 마음의 산책으로서 사랑의 글, 믿음의 글 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수필이 심령의 목장이며 체험이나 사색으로 맺혀지는 생활의 여운, 생명의 웨침이다.     내 수필은 친구와 무릎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밀담처럼 은근한 정이 없고 대신 자꾸 꼬집기가 일쑤이이며 싱그러운 문화향기 대신 암울한 구름같은 사색으로 어두워 져있다. 수필에서 무엇을 꼬집어봤댔자 제 마음만 상할뿐이겠지만 나는 제마음을 간지르며 어떤 미묘한 코감을 느끼자고 수필을 쓰지 않는다.     수필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만 글에 사상이 없다면 자칫 문자유희에 멈추기 십상이 아닐가? 인간은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감각적인상의 끝없는 파도의 넘실거림과 충격파를 언어속에 간직되여있는 형식과 범주 등을 동원해서 구별하게 된다고 할 때 역시 자아표현이 각각이기 마련이다.     잡문시대가 아니줄 알면서도 잡문에 집념하고싶었다. 잡문이 비록 의론성문체이긴 하지만 개념, 범주를 사유재료로 하는것이 아니라 직접 인생과 마주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대화를 할수 있고 그 와중에 세태를 건져올릴수가 있어 좋았다. 다른 문학쟝 르와 마찬가지로 인생경험이 잡문창작의 욕망을 격발시키는것이다.     인생의 천태만상을 보다 철학적으로 깨닫고 감수한것을 응집시켜 이미지화, 상징 화하면서 추상성과 형상성을 유기적으로 통일하여야 좋은 잡문이겠지만 시대의 맥박 에 따라 쓴다는것은 힘든 작업이다. 그래도 나는 될수록《잡문가》가 되고싶다.     나는 문학의 화원에서 작은 로동벌에 지나지 않는줄 안다. 우왕좌왕한 발자국들 에 절로 허구픈 느낌이 들지만 각고정려(刻苦精励) 한것만은 사실이니 어여쁘게 보아 주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     세월이 흘러서 사람은 떠나가버리더라도 그 사람의 생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 록이 있다면 자기 생명가치의 실현으로 되는것이 아니랴. 어찌 이에서 더 욕심부리겠 는가.     졸품편집에 각고하신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2004년 11월 1 일                                  저자
542    《구실을 말하다》차례 댓글:  조회:5017  추천:0  2015-03-29
                                《구실을 말하다》                                        차 례                                   내가 본 세상 (잡문)   №. 제 잘난멋 №. 도적의 도의 및 부패 №. 사회의난잡증을 전문 치료함 №. 가진자의 게트림과 못가진자의 뇌까림 №. 웃음의 이미지 №. 울고싶을 때는 울어라 №. 식도락 №. 허영심의 비극 №. 유혹을 씹어본다 №. 성의 곤혹 №. 오래 사는 비결 №. 광고심리학 №. 《하얀》에 대한 생각 №. 인성과 야성 №. 《초탈》의 외투를 벗으며 №. 《정치방귀》와 그 위해성 및 기타 №. 지식인의 이미지 №. 거짓말을 보듬어보다 №. 《관계학》에 깃든《학문》 №. 선택의 곤혹 №. 스승의 덕을 말한다. №. 자리철학 №. 고함과 납함 №. 인간백태 №. 공룡의 방귀가 주는 계시 №. 우리가 키우려는 사람들 №. 변절자의 새 의미 №. 감동과 감사                                 사색의 골짜기 (생활수필)   №. 글은 왜 쓰느냐? №. 문인의 비애 №. 구실을 말하다 №. 수상소감 №. 조화석습 №. 새 띠풀이 №. 낚시질과 인생 №. 구실을 말하다 №. 수상소감 №. 조화석습 №. 새 띠풀이 №. 낚시질과 인생 №. 고락의 변증법 №. 건강의 안팎 №. 《편안》이《행복》이냐? №. 나의 산노래 №. 고향산별곡 №. 기다림의 미학 №. 돌아서기의 지혜 №. 홀로의 풍경구 №. 《문화》우환 №. 침묵의 값 №. 사향별곡 №. 흘러가느니 이같을진저 №. 아이러니 유머러스 №. 세상을 사는 맛 №. 산행 №. 꽃과 녀인 №. 석양 №. 겨레의 얼을 지켜 한생을 №. 알맞춤해야지 №. 고향을 잃은 친구                                 초불눈물 흐를 때(교육수필)   №. 분필례찬 №. 초불눈물 흐를 때 №. 교원의 이미지 №. 생일에 부쳐 №. 아들에게 주는 편지 №. 사계절의 사색 №. 민족의 얼이란 무엇이기에 №. 영예, 실태, 희망   《구실을 말하다》를 일고서  김룡운                      
541    (교육칼럼) 닮아가는건가? 댓글:  조회:5471  추천:0  2015-03-28
                              닮아가는건가?                                    진 언      11월 6 일, 장사시수목령호남성공업무역학교에서 발생한 교내폭력사건이다. 반에 위생위원인 쑈몽(가명)이라는16세의 녀학생이 직일생이 청소를 해야 한다고 일깨워준 것이 빌미로 되여 말다툼이 일어났고 미구에 녀자애들에게 뭇매질 당하였는데 고막까 지 터졌다. 그번 집단폭력에 반장, 부반장, 기률위원 등도 참여했는데 쑈몽(小梦)이 부모와 교원에게 고자질할가봐 옷을 홀딱 벗기고 사진까지 찍어 위협하였다.    피해자는 동학들이 가위까지 들고 위협했는데 열다섯이 번갈아가며 귀뺨을 때리고 끄뎅이를 잡아쥐고 벽에다 짓쫗았고 바닥에 쓰러지자 엇갈아 짓밟았대면서 새벽 한시까지 못살게 굴었다고 말하였다. 그때 숙사에는 여섯명이 숙사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다섯은 자기가 옷을 발가벗기고 세시간이나 얻어맞는데도 그저 구경만 하면서 선생에게 알린 학생이 하나도 없었고 그중 한명은 덩달아 때리는데 가담했단다.    아침저녁으로 코를 맞대고 보내던 동학을 무참하게 구타한다는것은 시대의 비애에 앞서 공중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수 없다. 이 근년에 전국각지에서 녀자애들의 폭력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인다. 례하면 2013년 6월 15일 복건룡해시동원중학 1학년의 13세의 녀자애가 여섯명의 같은 또래의 녀자애들 에게 뭇매질당하고 라체사진까지 찍히여 QQ에 올리게까지 되였다.    금년 3월 4일, 해남성툰창현 오파진오파중학교 초중1학년학생인 소연(화명)이 교실에서 11명의 같은 학급의 녀자애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라체사진까지 찍히여 인터넷에 퍼지기까지 하였다. 8월, 광동성무명시모중학교 초중2학년에 오 ○○이라는 녀자애가 남자친구를 꼬신다는 혐의로 7명의 동학들과 다른 학교의 녀자애들에게 뭇 매질당하고 라체사진까지 찍히는 모욕을 당했다…. 이런 악랄한 교내폭력은 언제부 터 시작되였고 급기야 전국 곳곳에 만연되였는지 모르지만 너무 한심하지 않는가?    이른바 “왕따”란 개념은 개방의 덕분에 시작된 “새 문화현상” 이다. 한국에서 왕따, 폭력이 불치의 학교병,사회병으로 시끌하던데 여기 신주대지의 교정들에서도 만연되여 참혹한 풍경을 이루었다는것은 결코 반가운 문화현상일수 없는바 학생들의 문제로 그칠일이 아니라 사회의 도덕건설에 이어지는 미래지향적인 문제에 소급된다.    “왕따”라는 단어가 존재한것은 90년대로서 70ㅡ80년대는 사회문제로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90년대에 일본에서 “이지메 (izime)ㅡ둘이 상의 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특정한 사람을 따돌리고 무시하는 일.”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한국에 소개되였다 한다. 조금만 다르면 배척하고 외면하는 문화인 이지메가 그렇게 수입되였고 현재는 일본 못지않은 영광스러운 “왕따제국”이 되였다.    “왕따”란 한군체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존재가 마음을 먹으며 시작되고 시작되면 장티브스처럼 보이지도 않고 가급적으로 전파되는 정신전염병인가? 학교폭력현상은 체제,국토여하를 불문하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의 격분을 자아낸다. 한국에서 자주 언급하는 인성교육의 부재인가? 주요원인을 입시교육때문이라고 하지만 근원은 그게 아닌것같다. 이런 애들이 장차 어떤 인간상으로 사회에 등장할것인가? 그런 녀자애들이 장차 위대한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가 된다면 과시 유모아가 아닐수 없다.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한 가해자학생ㅡ언제 터질지모를 시한폭탄같은 존재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책임져야 할 이 시대 사회의 자화상이 아닐수 없다. 남을 짓밟고 위에 올라야만 살아남을수 있는 경쟁시스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불포용의 문화가 아이들때부터 때이르게“폭력”에 물들게 하였는가?    국내외에서 가심회되는 왕따문제로 골머리를 이런저런 대책들을 세운다고 하는데 본질적인 해결책은 학교내 입시교육을 개인의 특성과 능력의 차이를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거나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사회전반적으로 확립 시켜야 한다고 하던데 념원은 좋지만 너무 공리적인것같다. 황하물을 길어다 절강의 불을 끄겠는가?  “왕따, 폭력문제” 는 일시적공론으로 보르르해서는 해결이 어렵다.    개과천선이란 말이 있듯이 착한놈이 되면 그보다 더 좋을일이 없지만도 개꼬리 삼년 파묻어도 황모가 못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린다고 어린놈들의 피에 “학대증”이란 괴질이 스며들었으니 말 한두마디, 시간적인 조작행동으로 그런 악행의 소지가 씻은듯 가신듯 환골탈태할수 있다고 믿는것은 너무 천진한 생각이다. 마치 반성 몇마디하면 악마도 천국에 갈수 있다는 말과 같다. 물론 사람을 구하는 각도에서 교육을 선행시켜야 하겠지만 그리고 흔히 통용수법으로 강제전학을 시키는 일도 고명한 발상이다.       실개천에 미꾸라지를 도랑물에 가져 다놓아도 미꾸리는 미꾸리요 그냥 물을 흐리운다. 화살을 맞은 사람을 화살대만 베여 버리고 내과에 쫓아보내고 내과에서는 화살촉은 살속에 놔둔채 살가죽만 기워매고 약을 바르고는 곧 나아질게라는 처지술과 같고같은 작법이 아닌가?    상식적으로 가해자 학생들을 준엄하게 단죄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면 사회에서 매장당할수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해야 하는데 똥싼놈이 와달랑한다고 가해자 학생이나 부모가 더 설친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요 도적이 매를 들어도 유만부동이 아닌가? 피왕따학생들이 괴로워서 비명을 지르고 구원을 청했으려만 필경 외면당했고 그 외면속에 어린목숨이 죽어갔고 가해자들의 악행은 기세등등해진것이 아니랴,     한국의 한 지성인은 “모두가 문제입니다. 왕따 문제는 모두가 가해자입니다. 우리 사회가 방관했고 상식이 무너진 사회에서 기형적인 인성을 가졌지만 자신의 인성이 기형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가해자를 우리 사회가 키운 것이죠. 또한 불의에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가해자가 더 날뛰는 것도 있습니다. ”라고 꼬집으며 질타하였는데 공감이 가는 말이였다.    기실 왕따문제는 중국, 한국, 일본만이 아닌 미국에서도 문제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1,300만명의 학생들이 집단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한다. 세계적민주와 자유를 위한 “구세군”의 나라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심성이 비틀어지면 별로 다를 것없다는것은 분명하다. 왕따문제를 왕따당한 학생의 문제로 치부하다가 인명사고가 나서야 부산을 떠는것은 소잃고 외양간고치기도 아니면 언발에 오줌누기식인가?    물질적으로, 인권적으로 더없이 풍요롭고 안정된 스웨덴같은 복지국가에서도 쉽게 풀지못한 문제가 왕따와 자살과 같은“소외”문제라고 한다. 복지국가도 자본주의다보니 개인주의가 기본일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소외의 문제도 불거지지 않을수 없었던것인가? 특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수록 인간사이의 뉴대는 더욱 약화되기 쉽기에 경제발전이 아무리 빨라도 왕따, 자살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것이다.     이런 소외문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범람에서 파생된것이니 집단주의교육을 회복함으로써 해결할수 있을것이다. 집단주의와 사회결약을 무작정 개인자유의 속박이니 사회주의리념이니 하며 경원시한다면 영영 이 소외의 문제는 해결못 할것이 자명하다. 말처럼 열린자세도 필요하지만 사회결약을 기한 “봉페기제”도 필요하다.     불순한 문화침투가 홍수보다 더 불가항력적인 현시점에서 남의 사돈령감이야 가거나 말거나 하는 자세로 방심할게 아니라 우리들의 학교에서도 먼저 사람이 되여 지게 인성교육, 사회도덕교육을 우선시하고 착착 실행에 옮겨야 할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중국학교들, 특히 관내 각류형의 학교들에서의 교정폭력도 각양각색, 천양백이던데 우리 연변은 어떤지? 치사한 인간괴질이 더 전염되지 않기를…                                           2013년 7월 23일
540    (교육 에세이) “고효률수업”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5512  추천:0  2015-03-23
   (교육 에세이)               “고효률수업”에 대한 단상                                             최 균 선      근간에 새로운 교수규범으로 추광되고있는 “고효률수업(高效课堂)이란 고효률형수업과 고효률성수업의 간칭이란다. 내함은 교육교수효률 혹은 효과상에서 상당히 높은 목표를 달성하는 수업이다. 달리말하면 고효률수업의 기초상에서 교수 임무와 교수목표를 완성하는 효률이 보다 높고 효과가 보다 좋으며 아울러 보다 높은 교육, 교수의 영향력과 효익을 얻는 과당수업이라고 정의하고있다.    고효률수업의 본질은 교원과 학생들에게 가장 적합한 수업조직형식으로서 학생들의 주의력을 전부 과당수업에 집중시켜 학생들로 하여금 최대한도로 지식을 학습하고 개체능력을 제고시키는것이라고 해석,정의하고있다. 수업형식상에서 본다면 ①합작학습 (合作学习)으로서 병사가 병사를 가르치고(兵教兵)、병사가 병사를 훈련시키고(兵练兵)、병사가 병사를 바로잡아주고(兵正兵),차한 학생들도 참가하는가 표현이 어떠한가? 수업분위기가 짙은가? 사람마다 활약적인가 하는것이다.    ②개체의 전시, 분석, 정채로운 표달, 순통하고 류창한 언어, 목소리가 우렁찬가? 병집이 없이 말하는가? 하는 전제하에 교단 혹은 학생들의 이목이 쏠리는 곳에 나와 정서가 있고 감동적으로 발언하게 하여 도리를 따지고 분석변론하는 와중에 자기 능력에 신심을 가지게 하는것이다.    ③ 판서설계가 정채로운가? 미관이 있고 규범적인가? 가로세로가 균형이 잡혀있는가? 작도(作图)가 과학적인가? 요점을 돌출하게 하였는가? 본질적규률에 중점을 두고 동학들의 평가에 표시가 있어야 하고 당장에서 틀린것을 고칠수 있어야 한다는 등 요구가 있다.    이런 수업은 교사로 말하면 교수방식이라고 한다. 신과정에서는 학생중심의 과당 수업과정을 제창하고 학생들의 자주성과 탐구성학습모식을 제창한다. 고효률수업은 고효률수업일뿐만아니라 더우기는 교육교수형식의 거대한 변혁이라 한다. 과당수업의 높은 효률성은 평상적인 수업과정에 교원의 인도하에 학생들이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학습하게 함으로써 한시간의 수업이 고효률적이 되게 한다는것이다.    이런 고효률수업을 원만하게 완성하려면 우선 강의 위주이던 교원의 관념이 전변되여 학생들의 학습활동의 조직자, 참여자로서 학습과정에 학생을 주체로 배운것에 의거하여 가르쳐야 한단다. 그 근거로는 학생들은 가히 자기의 심령으로 깨닫고 자기 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자기의 언어로 표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자주적발전무대를 가지게 한다는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교수안이 도학안(导学案)으로 되여진다.    수업효률문제상에서 연구도 많고 론술도 많지만 결국 기본선률은 가능한껏 적은 시간, 정력과 물력투입으로 최대한의 교수효과를 보는것으로서 효률의 최대화 즉 단 위시간내에 학생들의 수익의 최대화로서 주요하게 수업용량과 과내외학습부담에서 체현되여야 한다고 한다. 그경우, 오직 효률의 최대화 혹은 오직 효익의 최적화한 수업은 진정한 의의상에서의 “고효률수업”이 아니라 량자가 조화되여야만 명실상부 하게 고효률수업이 된다는것이다.    고효률수업의 일반모식은 10+30+5로서 세개환절로 나눈다. 즉 예습지도+합작교 류+목적도달,평가이다. 교원이 수업에서 지배하는 시간은10분을 넘기지 말아야 하는 데 이 시간내에 신과도입, 임무분배, 의난점제기, 귀납총화, 평의조직이 완성된다. 수업에서 학생의 자주적학습은 30분을 보장해야 하는데 이 시간내에 자습, 동학간 대질, 소조학습형식으로 자주, 합작, 탐구를 체현해야 한다. 나머지 5분에 해당수업에 대한 평가를 한다. 그런데 전통의의상에서의 시험지채점은 작업검사가 아니라 학습소조를 통하여 배운것을 검사하는것으로서 형식이 령활하고 다양해야 하는데 쪽지형식으로도 할수 있고 구두로 즉시 평가할수 있다고 한다.    산동성의 성공경험에 의한 고효률수업의 특점을 개괄한다면 아래와 같다.    1. 高效课堂的特点:(1)三高:高效率、高效益、高效果.(2)三动:身动、心动、神动(3)三量:思维量、信息量、训练量(4)三特点:立体式、快节奏、大容量(5)三学:肯学、想学、学会(6)减负:轻负担、高质量;低耗时、高效益。    “고효률수업(高效课堂)”도 기실 교육원점에서 출발한 교수개혁에 대한 사고이다. 곰곰히 따지고보면 약탕관을 바꾸었지만 이른바 “전통수업”리념과 추구를 달리 표현한것뿐이다. 전통수업에서도 학습주체의 작용을 시종 중시해왔고 효과가 강구되였다. 아닌가? 산동성의 보통고중에서 시행되고있는 신과정개혁중에서 보편적으로 중시해온 “고효률수업”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되여 중소학교 고효률과당에 대한 탐색과 연구 및 교류가 현학 (显学)로 되여졌다. 그런데 이런 교수모식이 계몽교육단계인 소학교 저급학년에도 적중할것인가? 학원에 다녀도 따라갈가말가 하는 아이들에게 수학과도 천편일률적으로 자습하고 토론하여 능력으로 전화시킬것인가?    중학교단계에서 대수, 기하, 물리, 화학같은 어려운 학과목도 자습을 위주로 하면 신지식이 곧 능력으로 전환될것인가? “눈을 떠야 별을 보지”하는 속담이 있다. 새 지식을 깨득하기전에 소조토론으로 의난문제를 해결한다면 그야말로 영재들이 아니겠는가? 실천에서 시사하다싶이 학원에서 “딴밥”을 먹은 아이들은 “찔 날고”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어덩덩, 두루 뭉때리고있단다. 결국은 한결같이 학원에 매달리게 될뿐이다.    “고효률수업”의 표준은 무엇인가? 한 중학교교원의 반성(反思)을 보자. “신과정 (新课程)”이 실시된지 이미 5년남짓한데 객관적으로 말하면 교원들이 신과정리념을 기억한것은 적지 않다. 례컨대 교원의 교수설계, 교수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세가지 목표ㅡ지식과 능력, 과정과 방법, 정감태도가치관 등, 그러나 수업실제조작에서 볼진대 신과정리념에 대해 기억한것은 많지만 깨득한것은 적으며 벌려놓은것은 많으나 얻는것은 적었다”고 말하고있다. 경은 좋은데 입비뚤이 중이 잘못 읽은것인가?    상술한바와 같이 리념상 혹은 동기와 목적상에서의 리론적서술에는 흠잡을 곳이 없고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설계도가 곧 건축물인것은 이니며 설계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집이 훌륭하게 지어진다는 담보는 없다. 부실공정이란것도 있지 않던가? 실천을 통하여 “고효률수업” 의 리페를 론술한 교원도 있다. 우선 페단으로 수업시간에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고 몰래 군입질하는 현상이 많아지고 다른애의 숙제를 베끼는 현상이 많고 웃어대는 현상이 많으며 쌍담하는 현상도 많다고 한다.    좋은 점을 말한다면 수업시간에 학생발언이 많고 학습애호자가 많으며 수업시간내에 지식면이 넓어지고 교원이 일대일로 가르쳐줄수 있으며 소조합작이 많아지는 등이다. 세상에 완전무결한것이란 없듯이 교수개혁의 길이 처음부터 순탄할수 없으며 꽃이 하루아침에 자라고 꽃필수 없듯이 대번에 개혁의 큰 열매만 따먹을수도 없는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교수개혁문제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으로서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만큼  “고효률수업”모식이 절대적일수 없다.     “교효률수업”에서 지식용량이 큰가? 과당수업환절이 많은가? 교원이 이런 지식을 전수하는 방식, 방법이 풍부하고 다양한가에 따라 한시간의 고효률어문수업이라 말할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실사구시적으로 반성해봐야 한다.” 이 교원의 반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색하게 되는가? 학생의 학습흥취를 이끌어내면 고효률수업인가?    그런데 극적인것은 수업시간에 교원이 말할필요가 없다고 한다. 교원이 아무리 말을 잘한들 조본산보다 더 잘할수 있는가? 노래를 아무리 잘 부른단들 송조영宋祖英)보다 더 잘 부를수 있는가? 라고 대비하면서 학생들이 다 절로 할수 있으니 학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고 한다. 중국의 중소학생들이 언제부터 모두 “척척박사” 로 변화했는지 의문이다. 이 전문가씨의 대비는 탈절된 대비이다. 조본산의 소품언어는 생활언어이고 교수용어는 과학언어이다. 교수용어도 예술성이 수요되지만 소품언어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무지의 소치는 아닐세 너무 무단적이다.    물론 새 교육관념을 알게 된것은 교원들로 말하면 일종 연분이고 일종 필연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교육의 원점에로 회귀를 전제로 한다. 기실 “새 교육(新教育)”이 라는 개념이 가장 일찍 출현된 곳은 19 세기말의 영국에서였다. 당시 영국교육가였던 레이디(雷迪)가 제출하였는데 20세기중기에 이르러 구라파에서 주도적지위를 차지한 신교육사상으로 부상되였다. 레이디는 교육의 주요한 임무는 어린이들의 개체의 자유적발전을 촉진하는것으로서 즉 몸과 심령의 건전한 발전이지 서책지식으로 아이들의 발전을 억압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자질교육의 추진과 학생학습부담문제는 시종 교육개혁에서의 주제이나 미해결 문제로 남아있다. 개혁하고 또 개혁하느라했지만 교육의 원점에서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은것을 잃어버렸다. 전통적관념에서 교원의 임무는 강의하고 학생들더러 문제를 풀게 하고 반복훈련시킨 다음 성적을 내오고 줄을 세우는것인데 이런 교육활동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작업이란다.즉 세가지 수자를 잘 틀어쥐면 만사대길이다. 즉 시험점수, 승학률인수와 득점이다.    혹자는 국가리익과 교육의 취지로 볼 때 득점을 위한 고중생들의 피나는 노력에는 도리가 없고 무가치하다고 말하지만 응시교육렬차가 일심분란 절대승학의 궤도위에서 질주하는데 누가 멈춰세울수 있을가?그러므로 자질교육을 고양하는 이 마당에서 교원은 그저 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을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반드시 점수와 시험문제 밖에서 체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실현가능한가?    대학승학률로 가동되는 교육기제하에서 교원은 본의가 아니나 흐름식생산선에 선 로동자로 이화되였다. 누가 가장 우수한가 누가 가장 우수하지 못한가는 학생의 성적표에 따라 판정되고있다. 사람을 키운다는 교육의 본의에서 탈리되여있어 얼마나 유지할것인가? 묻고있지만 달리는 토끼의 마음은 양배추밭에 있다고 오로지 대학문 직행을 위해 판가리혈전을 벌려왔고 벌려가는 고중생들을 설들할수 있을것인가?    산동성의 어떤 고중들에서는 “나는 귀족이 아니다. 그러나 귀족의 선조가 되려한다. 어머니를 위하여 머리를 번쩍 쳐들수 있기 위해 죽기내기를 한다. ” 어떤 지방에서는 “대학시험을 위해 일체 길을 비키라. 대학시험을 틀어쥐려면 피를 짜내야 한다.” 등 구호가 류행되고 있듯이 응시교육의 고열이 식지않는데 실제적이고 최종적인 고효률, 고효익, 고효과가 어데서 체현된것인가?     한 사람이 유용한 인재로 성장했는가를 자리매김할 때 결코 장악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에서가 아니라 그의 인생의 경지와 시야, 신앙과 책임 및 자유적심령에서 금그어지는것은 두말할것 없다. 그러나 현재 승학위주의 교육기제에서 급진적인 념원만을 앞세우고 자질교육, 능력배양 위주의 교수모식을 일매지게 도입하려 한다면 비실제적이고 비현실용적이며 비현실적이다.    물론 진리는 실천에서 검증될것이고 실천이란 원래 일정한 시간을 요청할것이니 두고봐야 알수 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절대적이고 영구불변의 교육모식은 존재할수 없으므로 이른바 교육의 영원한 원칙인 “인재시교”에 립각하여 부동한 지방, 부동한 학생실정에 눈높이를 맞추며 실제적으로 개혁해 나가야 바람직하다. 맹종은 맹동을 낳고 맹동은 무목적성을 낳기마련이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걷는것은 잰걸음이라도 헛걸음이 될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2014년  12월 5일
539    (교육수필) 사이비“만능렬차” 댓글:  조회:5081  추천:0  2015-03-17
                                  사이비“만능렬차”                                       최 균 선    아이들이 저저 오르지 않을수 없고 한번 오르면 내리기도 어려운 “렬차”가 있으니 그게 무어냐 하면 바로 “사교육렬차”이다. 유치원 학전반학생부터 고중3학년에 이르기까지 점수라는 차표를 들고 오르는데 종착역은 대학입시라는 곳이다. 무관한 학부모들에게는 비정상으로 보이지만 한번 오르면 내리고 싶어도 내릴수도 없는 막무가내한 렬차, 제동장치가 아예 없는 사이비한 렬차이다. 아이들도 이 렬차에 기꺼이 오르고 여러가지 여건이 미달이여서 오르지 못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생활에서 무엇이 부족한듯 불안해하고 시대풍조에 뒤떨어진듯 조바심을 가지게 된 이상한 교육환경이 되였다. 아이들의 심신과 학부모들의 경쟁심을 코꿰여 끌고가는 사교육, 미워도 숭상하지 않을수 없는 점수, 점수의 노예로 사는게 불만이여도 장차 부대껴야 할 학벌사회에 자리를 마련하려고 모지름쓴다.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것만이 신분확보의 사다리에 오를수 있는, 아니 최소한 부모세대만큼의 사회적지위라도 유지할수 있는 유일한 도경이라고 굳게 믿고 일편 단심이고 일심불란이다. 현시대 아이들이 걷고있는 공부의 길이 정도(正道)가 아니란것을 누가 확답해줄수 있는가? 이게 바른길이 아니였다는것을 뒤늦게 깨닫고 회심의 미소가 아닌 일종 비애를 씹어야 할 때는 일찍하지도, 늦지도 않는 대학가에 들어선 순간이다. 혹여 내심으로 언녕 알았다하더라도 도저히 외면할수도 없었을게다.    래일은 삼수갑산 가더라도 로무로 아글타글 번돈을 아낌없이 학원에 들이밀며 로후대비는 뒤로뒤로 밀린다. 아이들은 점수에 동년을, 청춘을, 미래를 맡겨버리고 학부모들은 사교육에 전반생을 저당잡힌 형국이다. 하지만 리론적으로 어떻게 시비하든 자신들은 가장 바람직하고 합목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한다.    학습성적이 올라가지 않거나 원래 좋던 성적이 내려가면 근본원인이 학원에 다니지 않기때문이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원인을 확정하는 사람은 해당교원들 이다. 자신의 로동을 무효로동이라고 스스로 선포하고 다니는격이랄가. 만약 그의 로심초사를 부질없다고, 차라리 학원에 전탁하라고 하면 천정에 올라붙을것이련만… 정규교육에 반신반의하며 성적을 올리려면 밉던곱던 그래도 학원에 붙박혀야 한다고 믿게 된 오늘의 학부모들, 그러나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러면 누구의 잘못인가? 유관부문에서 무슨 단속같은것을 가끔가다 떠올릴때면 주마등처럼 휘익 돌다가 “이상없음”으로 락착짓기가 일쑤이다. 자식에 대한 투자에서 지력투자는 의심할바없이 가장 확실한 투자이고 본전을 수십백배로 뽑아낼수도 있는 보람찬 투자이지만 왜 그게 꼭 학원투자여야 할가? 점수에 사활을 걸만큼 준엄한 경쟁적인 학습분위속에서 아이들은 “적수”의 존재부터 배우며 “약육강식”,“우승렬패” 의 엄혹한 생존계률을 너무나 일찌기 몸에 익혀가고있다. 우리 아이들이 인간상정과 조화는 눈에 띄지 않게 “초한계선”을 넓혀가며 성장하고있다.    학벌이 낮거나 없는 학부모들은 경쟁사회에서 학벌렬등감을 뼈저리게 느끼다보니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식으로 한사코이다. 이런 공동된 심리를 교묘하게 리용하 여 학원을 꾸린 “특수한”교수자들이 누이좋고 매부좋은데 누가 곁에서 흥흥거리냐? “태공이 낚시질하노니 원하는 자는 물릴지어다”를 외우지만 재미가 짭짤할것이다.    물론 학교 정규교육이 주도로  되고 수요되는 자가 자기 선택을 하는것은 비리가 아니지만 지금 날이 갈수록 학원교육의 실태가 점점 별랗게 꼬여간다. 나름대로인 학원교육에 단맛을 보는 애들도 있고 그냥 다녀도 개 바위에 갔다오는식의 아이들도 있으니 학원교육이 기대하는것처럼 만사통이 아니고 무소불위가 아닌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넓은 마당쓸기에 내몰지 않고 제아이가 부족한 학과목에 점을 찍고 해당학원에 보낸다고 하지만 그게 누구탓인가? 학교과임은 그저 45분수업에 빈탈곡기를 돌리고섰는가? 하고 질의하지 않을수 없다. 내터밭은 내가 가꾸는게 전통관념이다. 내터밭엔 뜯어먹을만한게 없어서 남의 터밭에 들어가 이것저것 뜯어먹고 배가 불룩해지면 원터밭임자의 심정은 어떨가? 모르긴해도 면괴, 자괴, 실책감 등 각이한 심리현상이 반죽될것이다. 그마저 전무후무하다면 자격상실자이고,    순리대로 말하면 아무리 능력자라도 정규교육담당자의 우세를 넘어설수 없어야 하는데 지금은 거꾸로 되여가고 있지 않은가? 현상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사교육렬차를 타서 장기훈련을 받았기에 어떨꿍이를 앞세우고 중간역에서 오르면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래서 첫역부터 올라야하고 중간에서 내려도 다른 렬차 에 오를뿐이지 사교육이라는 강철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길은 한곬이지만 와중에 홍수에 철길이 타래떡이 되는 경우처럼 아이와 부모사이가 틀어지기도 비일비재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도 그렇다. 내가 이미 여물을 먹였으니 네가 잘 소화하고 살찌는가 하는것은 전적으로 네할탓이라는 식의 가르침자세, 아이는 소화불량이 생겨도 “맨날 학원다닌다는게 웨 그냥 그꼴이냐?”하고 욱박지르는 부모들의  심리자세, 그래서 지레 기질리고 무슨 고민이 있어도 벙어리 랭가슴앓는 아이들…그 러다보니 아이는 탈선하려 하고 부모는 더 무리수를 두고 학원은 그냥 손짓한다.    아이가 학습이 지겨워질정도로 사교육으로 내모는 학부모들인들 마음이 마냥 셈평좋을리 없지만 학력콤플렉스의 충격탓일까. 공연한 경쟁심의 꼬드김때문일가? 좋은 학벌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사나 의사같은 전문직을 가진 학부모도 적지 않다. 학력 높고 위치좋고 수입이 좋은 학부모들이 학원교육에서는 더 열성을 부리고 더욱 높은 점수의 고봉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스스로 과열경쟁에 휘말려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애들이 숙제반으로 줄을 지어가게 되였으니 교원들은 점점 홀가분해지고 누구는 돈가방이 무거워지고…가나오나, 어디로 가든간에 아이들이 학원밖에 더 갈데가 없다는것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는것이 학습흥취의 체현일가? 흥취는 원초적으로 자발적이여서 곡식모가지를 잡아당겨 키를 늘이는 일도 아니다.    하건만 학교도 완벽한 “진공상태”의 교육이고 나와서 숨이 활 나올것같다가도 곧장 다른 형태의 “진공속에”들어서야 하는 아이들, 현실생활에서는 두마리 토끼를 다잡을수 없다. 그러나 학원에서는 두마리 토끼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잡고있다. 돈이라는 토끼와 돈나무아래 부딪쳐 까무러치는 토끼(학생) 말이다.     물론 먹은 소가 똥눈다. 물론 대가없는 희생은 아니다. 아이들은 명문대, 그리고 졸업후 전직, 혹은 공무원이라는 성과로 부모의 대공무사한 희생에 보답한다. 학부모들이 기대하는 "어떤 수준의 애라도 딱맞는 수준(레벨?)의 수업을 하는 학원이 있는지 필자는 모르지만 별로 믿지도 않는다. 그저 “약자선수”비슷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딴밥을 먹이는수도 있겠지만 아침을 먹기전에 요기부터 시키고 그래서 밥맛을 잃게 하는 그런 방법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왜 학교가 아니라 학원에서 머리가 터야 하는가? 학원이 만능이 아니고 “구세군” 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하는 사례도 많다. 교문밖에서 자기애는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공부만 잘하니까 신경을 안쓴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놀며놀며 보리방아 한말 다 찧는다”는 그런 여유로운 자세가 돋보인다. 그러나 소수여서 경화된 학원추구 관념을 깨뜨리지 못한다. “달린다. 점수만세 웨치며 달린다, 사교육만능렬차가 달린다!”                                                                      2012년 12월 25일
538    느낌에 생각이 따라 (71-75)저 군자씨네들 외 4수 댓글:  조회:4626  추천:0  2015-03-13
                              (71)  저 군자씨네들                                          야 조                                 났노라, 저저이 제 잘나서                               내노라하는 저 군자씨네들                               손톱눈 곪아 아우성치면서                               허리 동강나 반신불수인데                               제욕심만 챙기느라 쿵쟈쿵                                 황새는 조개를 짓쫗아대고                               조개는 황새부리 덥석물고                               지쳐버린 싸움 헐떡이는데                               저어옹 너털웃음 찢기누나                               어부지리 좋아서 신명났제                                 저저의 일세영달 달아매고                               북산남산 제산으로 리념을                               올리끌고 내리끌고 할때에                               강국들 비린침에 웃음녹고                               보나니 군자씨들 멋스럽다                              (72)  나혼자의 사연                            나혼자 애모쁘게 생각한 사람                          끝끝내 마음닫고 떠나간 당신                          눈물로 슬픈사연 헹구던 일을                          세월이 흘러간들 잊을수 있나                            두번을 다시못할 내사랑 당신                          나몰래 혼자떠난 무정한 님아                          아픔에 찢기여도 가슴을 치며                          혼자서 당신만을 그리던 나야                            아직도 소원하나 있으라 하면                          두몸이 하나되여 사랑을 하며                          당신을 보듬다가 죽어갈 때에                          내곁을 지켜줄이 당신이 하나                                                    다시는 찾지못할 내사람 그대                          그리워 가슴곳곳 피멍이 들고                          가슴타 재되여도 몾잊을 당신                          세월도 씻어가지 못하는 녀자                            (73) 송죽을 찬미하기전                              소나무의 창창한 사연을                            부끄러워 칭송할수 없네                            불측한 풍운의 조화속에                            나는 그냥 칠면조였기에…                              참대는 굳세다 니르기에                            입가볍게 찬미하나 나는                            마음에 옮겨심지 못했네                            굽히면 굽혀질 약자길래                              2010년 11월 12일                       (74)   황금신 뇌까리되                             암석에 혈맥으로 뻗었는데                           파내여 녹여만든 금속으로                           내이름 어마어마 황금이라                           지구촌 주재자로 되였노라                             부귀를 자랑하는 주인된듯                           거꾸로 노예되니 꿈밖이라                           군자도 위인들도 무릎꿇어                           하명을 기다리니 가련토다                    (75 )      석탄의 호소                                     야 조                             몇억년 몇백억년 땅속에                           묻히고 억눌리여 죽었다                           세상에 나와서야 석탄요                             활활활 타오르기 전에는                           제몸이 뜨거운줄 몰랐네                           싸늘한 석탄재로 부서져                             길바닥 웅덩이나 메워도                           고귀한 사람들아 늬들은                           제한몸 불태운적 있었냐
537    느낌에 생각이 따라 (66-70)살구는 익어터지고 외 4수 댓글:  조회:5427  추천:1  2015-03-08
                     (66 )       살구는 익어터지고                                시골도 하마래촌 어느빈집에                              참살구나무 혼자도 궁금해서                              조동고개쪽으로 더 가지뻗고                              살구철도 잊었나 혼져옵셔예                                에라, 싹 다 털어뿌릴까보이                              가지 흔들며 푸념질 한-마당                              뿌리박고 한백년 살자하더니                              출국바람에 모두들 신들렸나                                십년세월 묵은기억도 날리고                              불평에 옆구리 터진놈 에-라                              뿌리에 떨어져 원-망 썩이며                              저도 안부가 궁금한가보이네                        (67)     길섶 바위돌에 쓴다                                         야조                                                            20년전, 이 시골길로                             터벅터벅 오고갈 때에                             다리를 뻗던 너럭바위                             지금도 덤덤히 누웠네                               그 한자리에 천년만년                             오가는 발길 지켜보려                             작정한듯 드팀없는 너                             바위야 이끼도 안돋냐                               버리고 생각나 또한번                             찾아-걷는 백바위굽에                             엎어져 멋대가리 없네                             떨군 사과면 주어가지                               바라-보다가 굳어져서                             망부석 되였단데 너는                             한자리 지켜도 무명석                             떡판같은 너럭-바위야                               다들 떠나버리고 너만                             상기 길목에 파수보냐                             흘러간 시골-큰길목을                             호을로 지키니 서럽지                    (68)        모래에 써놓은 시                                      야 조                                   밀물이 일고간 금모래                                 썰물이 일렁인 은모래                                 손으로 쥐노니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새누나                                   삼라가 고요히 잠든밤                                 달빛에 가슴을 헤치고                                 구름을 띄우고 설레며                                 바다는 그렇게 숨쉰다                                   하얗게 솟구며 와서는                                 물러나 남겨둔 은조개                                 버림에 원망을 하는듯                                 기다림 숨기고 말없다                                   젖어든 모래에 젖은시                                 굵직이 깊도록 써놓고                                 쓸쓸한 그림자 밟으며                                 작별을 남기고 떠난다                                    2011년 7월 15일 (황도의 밤)                      (69)       그래, 그냥 걸어라                                      야 조                           그래 맞다!그렇게                         그냥 멋대로 걸어라                         길은 갈래도 많거니                         큰길이면 씨엉-씨엉                         걸어라, 오솔길은                         오불~꼬불 걸어라                           가시밭 험난한 길은                         헤쳐가며 걸어라                         비탈길은 숨말리며                         절벽길이면 엉금엉금                         넘어라, 짙은 안개속                         초행길은 더듬어가라                           탄탄대로만 있것냐                         동이랴, 남이랴                         가다가 지쳐도                         가는 시간, 걸어야                         줄어드는 길이여                         외다리, 징검돌은                         마음잡고 걸어라                           허허벌판 주막은                         멀어도 내처가라                                                동으로 천리                         북으로 또 만리ㅡ                                      지쳐도 줄어든 멋에                         걷고걷는 길인것을…                            (70 )       발을 씻으며                                                                           야 조                                                     농부야, 긴-긴 해가 꼴깍졌다                               팔다리 해나른, 위도 발꿈치에                           발벗어든 흙길이라도 발씻어라                               석양빛 도랑물에 고달픔 풀고                             부글대던 논물에 두발 잠근채                               마라초 태운 담배연기 별로다                           호미,지탑, 삽자루에 걸어둔채                                숨찬 청춘 요로코롬 시드는가                             저멀리 하전자골 높은 동산령에                               얼씨구,달이 둥글어 벌쭉웃네                           어저, 얼러덩가자 오이랭국이                               갈한목 기다린다. 농부의 만찬                             농-부일-생이 무한이로다아아                               뿌리를 긁어준 벼포기들 우-쭐                           올해는 몇마대 착실히 탈라나?                               낼아침 다시오마, 뼈농사 벼야                                             1969년 6월 25일  
536    느낌에 생각이 따라 (61-65)허위는 가라 외 4수 댓글:  조회:5134  추천:1  2015-03-01
                       (61 ) 버들피리 불던시절                                       야 조                             지금 애들에게는                                웃기지도 않을                                      먼옛날의 동화가                                            추억을 부른다                             봄은와 해란강반에                                 흔해빠진 애버들                                       마구꺾어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시절                             농가집 아이들의                                 아름다운 선률                                       삘리리 삘리리                                             어서오라 친구야                             일송정 칼바위에                                 동심을 널어놓고                                       짝짜꿍에 해지는줄                                             모르던 시절이여                                                            버들피리 소리였나                                 동심에 울린…                                       고향의 메아리였나                                             꿈같던 그 소리는                             색바랜 추억                                 아지랑이 되였어도                                                                 백발에도 동심이                                             피리로 울려온다                                                                      (62) 락화의 비애                                                                               야 조                             꽃잎지는 소리를 누가 들었는가                              모두들 바람에 꽃이 진다고 하니                                 매정한 바람이 꽃지는 소리 듣나                                                     제멋에 몰래피여 모올래 진 꽃을                              울밑에 울어싸던 귀뚜리보았을가                                 살며시 서럽게 지는 꽃의 그림자                                                      지켜나 보고 화조월석을 말하는가                              꽃이 남몰래 지듯이 묻히여 사는                                 진실의 임자인 사람들을 아는가?                             꽃이 피는소리 꽃이 지는소리는                              천지간에 가득넘쳐 흘러-흐른다                                 꽃처럼 진 꽃다운 생명 한둘인가                                                    꽃은 때도없이 무참히도 지거늘                              슬픔은 때를 가리지 않는법이다                                 인간-세상은 비애가 남아돌거니…                                                            (63) 그리움은 가거라                                              야 조                                그리움은 저리 썩 가거라                                  만남은 날래 얼러덩 와라                              그리워 그리움이 마중간다                                  만남이 만남을 등 밀어내                              멀어도 한하늘아래 사는데                                  못만나 애모쁜 그리움이여                              락엽지는 소리에도 만남이                                  내 가슴열고 들어서는듯이                                창문이 활열렸다 그리움은                                  썩 나가 ! 뵈기싫어 쫓는다                              상봉아, 이 밤이 새기전에                                  쿵쿵 층계를 울리며 오라!                                그리움이 지치니 만남마저                                  기다림 껴안고 눈물코물이                              만나고 헤여지는 인생일세                                  이리될줄 아, 내사 알았냐                                       2008년 6월 10일                                                                  (64)  허위는 가라 !                                          야 조                                  웨치노니 바라건대는                                그 모든 허위는 가라                                가짜를 답새기는(真)                                너만 남아 实로 살자                                  쭉정이들 나불대느니                                훌-훌 불어라 진심아                                가짜행진곡 지겹구나                                기죽지말고 쓸어버렷                                  힘내! 민심이 있잖아                                보란듯 요란떨어대도                                쓰잘것없는 위군자들                                빵구난 고무풍선같지                                  지각하는 진실이라도                                바장이는 정의라해도                                결석하지는 않거니와                                무쇠비로 무겁더란다                                   허위야, 너는 가거라                                젠체하지말고 썩가라                                진리행진곡만 남아라                                진실의 새 아침 온다                                    (65)  쾌감                                           야 조                                   지하실                                       어스레힌 불빛아래                                 성자들                                       성스러운 사업한다                                 때리다못해 지쳐                                       전기고문                                 피빛비명                                       쾌감이 짜리릿해                                   받아내 아니                                       짜내여 업적                                 올리고 돌아가                                       고운 아이도 꼭                                 안아주고                                       마누라 뜨시한                                 엉덩이속에                                      파고들 그 다정                                   학대증에                                       이골이튼 괴물                                 누이앞에                                       됴흔 오-빠되고                                 정부에겐                                       차악하고 따스한                                 그런체- 하는                                       변태-귀태들                                   날마다 심문으로                                       피맛을 보고                                 소름끼치는                                       신음-소리에도                                 차디차게 웃는                                       고문-전업가                                 저주는 어디에서                                       다 뒈졌는가
535    느낌에 생각이 따라 (56-60)흙의 노래 외 4수 댓글:  조회:5768  추천:0  2015-02-22
                                   (56)  마음의 송림속                                            야 조                                 어스름깃든 숲속이 더 좋아서                               마음은 늘 송림속을 헤매인다                               마음에 먼저 어둠이 들어앉아                               생각은 별을 찾아 서성대노니                                 엉키고 서린 풀덩쿨이 말한다                               세상은 하늘만 보기가 아닌것                               먼저 땅보며 나가야 할것임을                               꼬부랑 숲길은 거칠것도 많고                                                                        울창한 숲을 나서면 개활지라                               잡념을 털고 모아산 쳐다본다                               산은 천생 올려다보게 생긴것                               산위에 산있고 산밖에 산있고                                 산아래 서면 왜소해지는 자신                               그러나 막막해진 마음이 먼저                               비탈길 따라 오른다 세상에는                               아무도 걷지않은 길이란 없다                                                                            1974년 7월 20일                                           (57 ) 흙의 노래                                            야 조                                 땅이야 누군들 떠나서 살랴만                               흙은 누구나 다안다고 못하리                               발바닥 티눈생겨도 밟아야 할                               땅이라도 구두발 발로는 몰라                                 땅, 흙과 씨름하며 사는 농부                                                  맨발로 더기밭 매고 무릎치는                               수렁논에서 피부로 느끼는 흙                               흙에서 오는 촉감은 별로여라                                 흙에 찌들어 흙냄새에 절어든                               한뉘 농부만 체감하는 일이다                                                                 슬픔도 기쁨도 흙으로 버무려                               땅으로 웃고 흙으로 울며사는                                                             흙냄새 구수하니 어쩌니 마라                               흰손에 쥔붓대 무언들 못쓰랴                               흙의 숨결과 흑토혼이 부르는                               그소리 논과 밭길에 있더니라                                    (58) 그때 나는 정말                                           야 조                              그때 나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였다                            눈뜨면 호미쥐고                            김매러 나가야 하고                            돌아오면 토장국에                            묵은밥 목이 메고                            새벽닭 모가지 비틀며                            콩걷이에 나가고                              아무도 내 마음을                            알은체하지 않았다                            유령처럼, 쥐구멍에                            볕들날을 꿈꾸며                            차차차 청춘을 죽여                            죽이면서 살아간                            그때는 참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얽혀 살아도 부딪칠듯                            총총한 별들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를 안다고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할수도                            없는 나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보잘것없지만 세월의 함정                            잡초나 늪속에 흙꿈을                            꾸는 미꾸라지                            그 이상은 아니고 그                            그 이하였을 나였더니라                                      (59) 요지경속같은                                         야 조                              세상은 만화경인가 요지경인가                               세모꼴 유리쪼각속 천태만상은                            찬란하고 선명하고 사이비하고                               굴리면 변하고 번지면 또 변해                              실체도 없고 뭘 취할것도 없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요술부리며                            거짓같고 진실같이 존재하는것                               사람을 현혹시키는 만화경인가                              투명한것은 내비치고 들이비쳐                               속속이 진실로 드러나는 투명체                            요지경은 문명자랑은 물론이요                               문화-찌꺼기도 변태로 내보인다                              눈에 보이는 현란함에 취해살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걸작들을                            사회란 요지경속에 보이고 있느니                               현대문명의 구석-구석 쓰레기랑                              그 모든것 현대인의 자기과시다                                요지경속 인생현장 우리 현주소                            시궁창도 해가 비치면 번쩍거려                               먼지도 반짝이는 풍경 멋스럽다                                                                                            (60 )  갈대의 순정                                           야 조                                                     빈들녘 갈숲에 새떼가 날아오른다                             부러진 화살같고 던져진 돌멩이같은                                 갈꽃이 내뱉아버린 통증의 덩인가                                     바람에 가벼운 존재를 알리는건가                           동풍이랴 서풍이랴 남풍이랴 불어라                             실바람에도 신이나서 나붓기는 갈대들                                 바람먼저 허리를 굽히고 바람이 잠들면                                     속상해 처량한 갈대의 순정이 얄밉더라        
534    느낌에 생각이 따라 (51-55)앉을자리 외 4수 댓글:  조회:5463  추천:0  2015-02-15
                                 (51)    앉을자리                                             야 조                               설자리 앉을자리 높고낮은 권좌라                                     인생은 자리찾기 자리다툼 시끌해                             내자리 네자리 옥신각신 아귀다툼                                세상은 넓어도 자리찾기 어렵더라                               의자는 빙글빙글 잘만 돌아가는데                             임자가 따로있냐 앉으면 임자인걸                             노래는 좋더라만 현실이 그렇더냐                             돈묶음 묶음따라 자리가 주어진다                               무우도 한자리 나무도 한자리있어                             공존에 공생이 우주적인 마음인데                             나누지 못할자리 권좌라고 하느니                             네죽고 나살기로 혈안된걸 못보냐                                 (52)  강자 그리고 약자여                                             야 조                                                                강자여, 그대 만약                                      약자를 흔상한다면                                         련민이 아니라                                            악어의 눈물이리라                                     약자여, 그대 만약                                      강자를 찬미한다면                                         숭배가 아니라                                            빌붙는 아부이리라                                     강자여, 그대 만약                                      강자를 찬미한다면                                         영웅의 상봉아니라                                            협로에 기우이리라                                     약자여, 그대 만약                                      약자를 찬미한다면                                         동류항 있다는것에                                            은근히 자위되리라                                                                          (53)  젊다는것은…                                                                                         야 조                              젊음아 그만한 일에도 락심하냐                            만금주고 못사는 젊음이 재부여                            청춘시절을 산다는건 네-앞길에                             가슴아플 일도 실락도 많다는것                                                         그래  좌절이 두려워 기죽었다니                            참고 견디는건 짜증나는 일인줄                            차차 더 알게 되면 헉 주저앉냐                            너의 재부는 젊음과 용기이니라                              젊어좋은건 가슴아픈 일 남아있고                            청춘이 좋다는건 할 일 많다는것                            용기가 재부인것은 두려워않는것                            찾음이 짖꿎으면 얻음이 없으랴 !                              젊음아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냐                            아침에 솟는해 서산에 넘어가고                            별들도 궤도에 도는길만 돌거니                            밤하늘에 한획을 긋는 별을 보라                              별똥별 빛나는 순간의 아쉬움마저                            더없이 소중하기에 찬란하지 않냐                            자유란 해탈로 궤도를 벗어나는것                            젊음은 그래서 패기를 가지라는것                                      (54) 자, 충성무요                                              야 조                              띵-땅땅, 쟁-징소리 가슴 띄운다                                나오라, 모두 나오라 충성무이다                            우사마당 푸른달빛아래 벌린춤판                                남녀로소 열의충천 신나라 쿵-쟉                              술몇잔 알딸딸해야 흥나는 농부들                               비상시국 엄엄해도 가슴 부풀어라                           꽹과리소리에 피는 끓고 힘솟는다                              킬킬대면 립장문제 각오 바싹차려                             콩밭에 범이 새끼쳐도 소근장따라                              충성무 열풍인데 흉작인들 대순가                           팔다리 쭉쭉펴라 발꿈치 지축울려                              세계혁명 새 아침이 밝아오는도다                             도라지, 노늘강변, 옹헤야 비켜라                              우리네 혁명정신 동풍타고 날아라                           한팔을 들고 맹세하고 두발굴러라                              인류해방 재촉하니 동방하늘 밝네                                                         1971년 6월 9일                                   (55 ) 다 풀어놓고                                          야 조                                 어쩌다 하루                               일손을 놓은날                               정주칸에 네각 쭉                               큰 대자로 누우니                               부엌문으로 훌훌                               통바람 불어든다                               겨드랑에 땀내가                               어허, 썩 마르도다                                 멋겨운 제비                               뒤곁으로 들어와                               대들보 둥지에                               새끼들 찾는다                               하얀 가슴이                               사랑으로 부풀어                               가마뚜껑에                               똥을 내싼들 어떠랴                                 육신도 마음의                               탕개도 풀려서                               손가락 까땍하기도                                 너무 귀찮은데                               심신의 무방비가                               이리도 좋아서                               농부일생 무한인가                               에라-만수 대신이야                                 강물처럼                               평평하고 넓게 퍼진                               최대한의 마음과                               몸 느슨히 풀어놓고                               손가락 튕기는                               짧은 순간인듯                               인생은 초로인데                               서두를 일 있으랴                                 꽁꽁 마음의                               문을 닫아걸던들                               들어올이도 없는                               내 안은 컴컴해                               나가면 대천세계라                               활짝 열림보다                               더 좋을일 있으랴                                  1973년 7월 7일
533    (생각에 느낌이 따라 46-50)제좋은 생각외 4수 댓글:  조회:6043  추천:0  2015-02-06
                                  (46) 제좋은 생각                                             야 조                                   뉘기 뜻대로                                      안되는 세상이길래                                 마냥 이랬으면                                      저랬으면 좋겠다                                 시침은 반전하고                                       세월은 멈춰지고                                 늙어도 맥이좋게                                       생생 살았으면                                   강이면 아무데서나                                       물맛이 달달하고                                 나무가지 푸르러                                       새들이 깃들고                                 이 땅에도 구름집                                       집같은 집이 많아                                 정 내키면 아무나                                       들어살수 있다면                                   영구불변의 권좌도                                       없는 마당에                                 기득권에 앙탈말고                                       훌훌 털어버리고                                 자타가 무릎을                                        마주하고 좋도록                                 겨례 통합의                                       백년대사 이뤘으면                                   아는사람 모르는                                       종족간 모두들                                 배고픔을 모르고                                       추위를 모르고                                 편안히 쉴수있고                                       피눈물 모르고                                 인간의 학대도                                       살륙전 없었으면                                   붐비고 시끌벅적한                                       세상만사라도                                 동구밖 비술나무아래                                       곰방대늙은이들이                                 부들부채에 바람을                                       부르며 허-허-이                                 웃음에 부쳐버리듯                                       하면 좀좋을가                                   이랬으면, 저랬으면                                       너무너무 좋겠다                                 바라는것이                                       많은게 아니였으면                                 사람이 사는목적이                                       간단해 명료한데                                 하,제좋은 궁리는                                     궁리로만 남는구나                                 47.     눈물샘                                         야 조                                   눈이 우는가                                 마음이 울고픈가                                 마음이 슬플때                                 눈이 울어주냐                                 눈에 눈물의                                 샘은 마를줄몰라                                 좋아도 울고                                 속상해서도 울고                                   내 아파 울고                                 네 불쌍해 울고                                 눈물은 녀자의                                 말없는 웅변고                                 울음끝에 찍힌것                                 눅거리 련민인가?                                 잘울고 눈물도                                 그래 잘마르고                                   사람은 웃을줄                                 아는 동물이여                                    슬픔도 지어내며                                 제마음 절고                                 슬퍼서 눈물샘                                 파고 눈물샘은                                 눈물속에 또                                 눈물을 덧치나니                                   웃음은 전염되여도                                 따라서 울어주는                                 정많은 사람은                                 많지를 않더라                                 내 슬픔도 남아도는                                 어눌한 세상인데                                 남의 기분에                                 내마음 적실건가                                       슬픔는 지어내고                                 눈물은 짜내                                                               련민을 꼬드기고                                 감동을 속여                                 눈물샘 깊어서                                 익사자가 많다                                 울고웃는 한세상                                 눈물샘 용용 좋네                                 (48) 대동골 흐르는 물은                                              야 조                                  하마래라                                      대동골 청계천물에                                아침안개                                      외로움 풀어가는데                                  일찌기 깬                                      산새가 요란을 떨고                                산그림자                                      쪽배같이 떠나간다                                  가재미 하늘구경에                                      넋을 풀어버린                                녀자의 흰살결같이                                      연연한 맑은물                                벽계수에는                                      낛시끝 미끼없어                                산천어가                                      제멋대로 휘젓는다                                  계곡을 찢는                                      아침해살 눈부셔                                수집던 함박꽃                                      화들짝 놀라느냐                                  웃음도 색바래며                                      이슬을 터는데                                시골은 황페속에                                      눈물도 다말랐네                               (49)    두만강                                      야 조                             지금 흐려흐르는 7백리                          두만강을 따라 걸어보라                          백두의 가슴에서 솟아나                          도망온듯 다시 흐르는데                            흘러서 흘러도 단군족의                          핏줄같은 개울 모여들고                          해저물어 락조가 불타면                          량안은 피빛으로 붉더라                            옛날엔 남평서 큰소리로                          여보 로친네 잘있소꼬마                          바람이 전한듯이 로덕에                          마누라 잘있수다 했다나                            애절한 그사연이 애달파                          울다가 웃다가 몸이달면                          두만강 깊은물을 날아서                          그리움을 얼싸 안았을가                            굽이굽이 유서도 깊은강                          두만강수 따라가며 보라                          국경으로 금이 그어져서                          마주보는 청산이 되여도                            두만강에 발 잠그어본후                          일어서서 쓰린 가슴치며                          한왕산 우러러 물어보면                          침묵으로 대답해 주리라                            가노라 굽이쳐 군함산을                          에돌아 도문 방천지나서                          동해물과 백두산 젖줄기                          격랑으로 푸르러 동해라                                         (50 )  하나로 엉키자                                         야 조                                    가슴과 등허리는                                        반대편에 있지만                                              심장을 꼭감싸고                                                    엉켜-이어져있다.                                   가슴의 갈비뼈와                                       등허리 척추골은                                             혈맥으로 통하는                                                    하나의 육체이다                                    심장이 뛰고있어                                        혈관속에 피더워                                              가슴이 시리잖고                                                    등허리도 따스해                                   서로 각각이지도                                         아니한 등과가슴                                                남선과 북선같이                                                     다같은 살붙이요                                     백두산과 한라산                                         대동강물 한강수                                                삼천리 금수강산                                                     하나로 엉키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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