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가연
최 균 선
쁘롤로그
련애와 결혼은 등반과 같은 결과에 이르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유련애의 시대에 련애는 결혼의 전제이지만 등호로는 쳐지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결혼이란 욕망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라 운명이 결정한다고 할수 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는데는 억지춘향의 경우도 있지만 거개 숙명이라 할수도 있는 연분으로 맺어진다.
이런 녀자(남자)와 결혼하겠다. 저런 남자(녀자)와 결혼하겠다고 작심해서 성사되는것이 아니라 묘하게 운명적인 안배가 작동하여 부부의 인연이 맺어지는게 태반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서로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고 만나서 곧 헤여질수도 있는 사람들이 그 어떤 계기로 인연이 엮어져 결혼하게 되였을 때 그것을 천생연분이라 하는것이 아닐가?
서른살이 넘도록 장가를 들수 없어 심통이 비틀어져있던 내가 결혼하게 된 경우가 바로 그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어렵사리 장가들던 이야기, 그것도 해가 묵어 곰팡이냄새가 나는 어줍잖은 얘기지만 중매로 만나고 정혼하고 결혼후 련애를 하는 그런 보통의 결혼사보다 조금은 다르게 눈물젖은 가연이다.
전형환경
신주대지를 휩쓸던 광란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던 1970년대말기, 대동란속에서 버릇이 잘못굳혀진 깡패들이 쩍하면 무리싸움을 하고 몽둥이도 성차지않아 칼놀음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런 비상시국에 산지사방에서 민공(民工)들이 아동저수지공사판에 모여들었다. 힘센놈이 약한자를 억누르고 약한놈은 까닭없이 얻어맞고도 저 혼자 속을 끙끙 앓으며 풀풀대야 하는 말그대로 노가다판이였다.
아동저수지는 장인강을 가로막은 땜이다. 발달한 서방나라에서는 땜이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지층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건설하지 않거나 허물고있는데 중국에서는 한창 땜을 선호했다. 인류가 대자연에 무언가 보탬을 준다면 자연보다 더 위대한 장거로 될것이다. 보탬은 늘어나는것을 의미하고 늘어나게 하는것은 생장하는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자연의 표면으로 보면 높다란 언제를 쌓는것도 보탬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연을 좇아 흐르르는 물을 가두는것으로 강의 천연적인 생리를 파괴하고 있는것이다. 하긴 물자원과 전력공급이 부족한 상황이고 또 농업대국이기에 저수지가 절실히 필요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리하여 나도 저수지를 만드는 민공(民工)으로 뽑혀 대자연에 파괴하러 가게 되였다.
서성공사(지금의 향)에서 뻐스를 내려 이불짐을 꿍져메고 서북쪽으로 뉘엿하게 드러누운 고개길을 허위허위 걷노라니 그냥 노가다판을 쫓아다녀야 하는 내 신세가 혼자서도 한심했다. 소생의 봄, 약동하는 봄날의 산뜻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울울침침한 내 심사는 흥분한 봄아씨의 따스한 “입김”이 보듬어주어도 별로 반가운줄 몰랐다.
구불구불 아득히 뻗어간 련산련봉의 남쪽에서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어와 꽃망울 속에 한가득 해살을 불어넣고 부푸는 꿈을 산에, 들에 심어주고있다. 때는 바로 아물아물 아지랑이같이 신비로운 봄내음이 계절의 은총을 베풀어주고있는 오월이였다. 종달새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만큼 푸른 하늘에 높이 날아예며 마디마디 희열을 토하고 아지랑이의 추파에 간지럼타는 민들레꽃은 노란련정을 흐드러지게 쏟아내고있다. 봄은 로총각의 마음을 싱숭생숭 들뜨게 하는 애모쁜 계절이기도 한것인가,
강가에, 산속의 수림들에 파릇파릇 물이오르고 논두렁엔 잔풀이 뾰족뾰족 머리를 내민다. 신록의 계절이 변강산촌에 한껏 푸르름을 재촉한다. 밭갈고 씨뿌리는곳이면 어덴들 다르랴, 세전이벌, 평강벌이 농망기를 맞아 분주하다. 촌길엔 손잡이뜨락또 르, 소수레가 분주히 오가고 논벌에는 소들이 헐떡거리며 논갈이를 마무리하고있다.
드디어 룡문향이 내려다 보이자 나는 이불짐을 깔고앉아 땀을 들이며 허래성벌 한귀퉁이의 정경을 굽어보았다. 룡문향동쪽 멀리에 투도구는 옛날“삼하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하진”은 복동하와 해란강 및 장인강이 합류하는 곳이라해서 나온 말이고 룡천촌과 룡문촌 일대를 옛날에는 녀진말로“아동”이라 하였는데 “살이쪗다”, 혹은 “부유하다”는 뜻이란다. 좋은 이름에 걸맞게 잘들살았으면 좋으련만 시골이라서 아직도 궁기가 그대로 흐르고있다. 큰가마밥을 먹는판에 어딘들 다르랴,
“룡문”이라는 이름은 한마리의 기다란 룡(장인강)이 우백호 좌청룡이 지키고있는 문(벼랑)을 뚫고 나왔다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이름한번 그럴듯하게 지은 아동저수지 는 골어귀에 자리잡은 룡문촌에서 장인골쪽으로 2리쯤 올라가서 좁은 여울목에 수축 되고있었다. 룡산촌민공숙소를 찾아 이불짐을 벗어놓고 구경삼아 벅적거리는 공사판으로 스적스적 올라가보니 공연히 가슴을 들먹이게 하는 경관이 펼쳐졌다. 내 입에서 는 저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아주 좋은 형세에 힘을 입어 들끓는 공사장, 덩그렇게 높이 쌓은 언제우에는 이 른아침부터 배기관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따따 용을 쓰는 불도젤소리, 우릉부릉 로드 롤러(轧道机)소리, “워워, 위들쨔…” 우마차를 모는소리로 시끌벅적하였다. 대자 연을 정복하는 잡다한 소음에 귀가 멍멍,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그야말로 천군만마가 비등한다고 할가? 목재판, 개산툰, 삼합의 반수공정(反修工程),해란강제방공사 등 공사판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렇듯 방대한 규모의 공사장은 처음이다.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다이야차에 소 세마리를 메워가지고 자갈실이에 나선다. 이른 아침이라 벌에도 골령에도 안개가 자욱하였다. 이윽고 해가 떠올라서야 지면을 핥으며 뭉게뭉게 떠돌던 안개가 걷히면서 룡문촌이 드러났다. 마을을 둘러싼 높다란 산기슭도 어슴프레 보였다. 푸르고 장엄한 산은 담벽처럼 땅에 뿌리를 박고 거연히 서서 한참 들복아대는 공사장을 가소롭게 굽어보고있었다.
서서히 하늘로 피여올라간 안개는 여러덩이로 흩어지더니 인차 엷은 구름장으로 변하였다. 구름사이로 흘러나온 눈부신 해살은 산마루와 비탈밭에 띠같은 새파란 문양과 거무스레한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먼 산허리와 깊은 골령에 남은 솜발 같은 안개는 스러지기 아쉬운듯 한동안 스멀스멀 골바닥에서 흐늘거리고있었다.
한나절이 되자 구름은 시름없이 떠돌고 골넘어 어디선가 뻐꾸기가 구슬프게 울어대는 소리가 고막을 훑었다. 그 처량한 울음소리는 장가들지 못한 로총각의 가슴을 더구나 클클하게 하였다.
쉬는 참에 싱그러운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는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들먹거렸다. 골짜기를 울리는 물소리에 가슴이 우는것이다. 아득히 가버린것, 잊어버린것, 아른아른 생각나지않는 사람들속에 그 언제면 나도 고운 처녀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 을가고 생각하노라면 시름겨운 한숨에 가슴만 찌들었다. 만고청산은 예나제나 말이없고 한나절 구름만 오락가락하는데 골너머에 우는 뻐꾸기는 왜 저리도 슬퍼하는 지? 혹시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것이 서러워서 우는것일가.
이렇게 맥을 놓아버린 상태로 마라초를 태우며 넋놓고 먼산을 바라보면 세상사가 귀찮아진다. 산다는게 뭘가? 과거를 연장한다고해서 미래가 찬란하게 펼쳐지는것은 아니다. 인생은 생활에 대한 도전이고 리상을 향한 분투라고 하지만 진종일 비지땀 흘리며 허리가 휘도록 모래며 자갈돌을 퍼담아싣고 언제를 오르내리고나면 고역의 긴 긴 하루해가 속절없이 저문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인생이요, 리상이요 하는따위를 운운하겠는가? 아직 처녀손목도 잡아보지 못한 나에게 그런 고상한 취미는 사치였다.
매일마다 들쑹날쑹한 산봉우리에 찢어진 살구빛 비단쪼각같은 저녁노을이 걸려서야 빈 다이야차에 앉아 덜렁덜렁 숙소로 돌아오군 하였다. 서둘러 소에게 여물을 주고 도랑물에 얼굴을 씻고나면 어느새 어스름이 깃든다. 일기장에 무엇을 써넣으려 해도 그럴만한 이야기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책에서 본 한구절을 적었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기승스럽게! ”
발단
그날도 여느때처럼 네댓차를 실어올리고 한축 더하려고 서두르는데 또 배가 살살 아파났다. 원래 십이지장궤양이 있는지라 때마다 먹는 옥수수밥이 사람을 괴롭혔다. 쇠덩이도 와작와작 씹어먹을 혈기방장한 나이건만 밥먹을때가 되면 위가 쓰리고 아파나서 식욕도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마음까지 산란하여 시도 때도없이 울적하고 늘 모든것에 반감을 가지게 되였다. 나는 점심전에 우차를 몰고 언제를 내려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막 광신공사 민공들이 거처하는 숙소앞을 지나려는데 화식칸쪽에서 웬 녀자가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나는 얼결에 소를 세워놓고 열려진 문으로 화식칸을 기웃거렸다. 그 소리는 간막이 건너쪽에서 들려왔다.
“야, 이 간나 그냥 소리칠래, 목주래를 콱 분질러버릴라, 좀 가만있어봐, 악! 이년, 사람을 물어?…”
옷이 쫙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였다. 공사판에서 화식칸의“광신공사 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비록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소문에 굉장히 아름다운 처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들은 거개가 눈독 을 들이며 은근히 넘보고있는터였다. 십중팔구는 화식원처녀가 무슨 봉변을 당하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경우가 어찌 되였든간에 “싸움”은 말려야 했다.나는 문가에 세워놓은 멜대로 구정물도람통을 탕탕 두드렸다. 갑자기 화식칸이 잠잠해지는듯싶었다. 이윽고 문이 펄쩍 열리며 30대의 남자가 총알같이 뛰여나오다가 내가 짚고있던 멜대채에 걸려 보기좋게 꼬꾸라졌다. 그 와중에도 나는 화식칸 힐끗 살펴보았다. 량태머리가 풀어져 봉두란발이 된 처녀가 찢어진 옷사이로 하얀 젖가슴이 삐죽이 드러난채 벽에 기대여 사시나무떨듯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땅바닥에 넘어졌던 사내가 발딱 몸을 일으키며 눈을 부라렸다. 낯익은 얼굴이였다. 우뚝선 코마루, 조금 쳐들린 들창코, 마당질하고 무져놓은 검불더미를 방불케 하는 부시시한 머리…어쩌면 조물주가 한창 흥이 날때 측백나무를 베여다가 되는대로 깎아만든것처럼 거칠고 투박해 보였다. 사람은 생긴대로 논다는 옛사람의 말이 맞는것 같았다.
그는 광신공사에서 온 놈팽이인데 주먹깨나 쓴답시고 쩍하면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말썽거리를 찾는 무뢰배였다. 게다가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이 난다고 언젠가 한마을에 과부네집에 뛰여들었다가 들통이 난적이 있는 색마이기도 하였다. 얼마전, 점심때에 졸개 두셋을 달고 우리 숙소에 와서 공연히 트집을 걸며 행패질하다가 우리 룡산촌민공들과 드잡이가 벌어질번했더랬다.
“이 이새끼, 너 룡산촌에서 왔다는 그놈이구나, 네가 뭔데 개×에 보리알삐치듯 남의 흥을 깨는거야? 오늘 잘걸렸다. 어디 이 어른의 주먹맛 좀볼래?”
나는 멜대를 불끈 무지막지한 놈에게 연약하게 보였다가는 무슨 랑패를 당할지 모른다. 원래 공사판은 별의별 위인들이 다 모인 험악한 곳이기에 오기로라도 버텨야지 어리숙하게 보였다가는 자칫 동네북이 된다.
“그래, 이 개새끼야, 백주대낮에 녀자를 강간하려고 설쳐대면서 뻔뻔스럽게 무슨 큰소리야? 덤벼봐라. ”
우리가 왁작 고아대는 소리에 마침 대대지휘부에서 사람 두셋이 뛰여나왔다.
“무슨 일이야? 왜 멜대채를 쥐고 행패질이요?”
“저 잘난 개 잡은 포수에게 물어보시오, 아니면 저 안에 있는…”
때마침 점심을 먹으러 돌아오는 민공들까지 욱 모여들다보니 다행히 류혈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놈팽이와 처녀와 함께 지휘부에 불리워갔다. 그제야 나는 봉변당할번했던 처녀를 지척에서 똑똑히 볼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단독조사를 받고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말이 아니였다. 옷매무시는 대충 했지만 그의 얼굴은 밀랍처럼 해쓱했다. 공포에 질려 두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있었는데 마치 수천개의 별들이 반짝이는것 같았다. 처녀는 치욕을 참을수 없어 몸을 부르르 떨고있었다.
공사판에서 남자들끼리 주먹질은 푸술히 있었지만 강간미수사건은 처음인지라 간단히 지나칠 사안이 아니였다. 나는 목격한 사실을 자초지종을 말하고나서 곧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무지한 놈팽이는 파출속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이른바 “무산계급독재”의 된맛을 톡톡히 보았던것이다. 그러나 그의 짝패들이 암암리에 나와 그 처녀를 벼르고있었다. 나는 싱겁게 그 처녀의 신상을 먼저 걱정했다.
어느날, 나는 랭수를 마신다는 핑게로 화식칸을 찾아가서 그녀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마을밖의 길가에서 만났다. 어둠이 각일각 짙어가고있었다. 깊은 산골짜기에 먼저 깃들었던 어둠이 나무의 우둠지들을 감싸더니 개울을 덮고 산허리로 해서 살금살금 산마루로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소나무숲 상공에는 오뉴월 산모퉁이에 소문없이 피여난 이름 모를 꽃들처럼 별들이 총총히 반짝이였는데 마치 소근소근 다정하게 속삭이는 련인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무더운 적막속에서 싱그러운 풀내음까지 들판에 가득 풍기여 그야말로 처녀총각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기에는 족했다.
그녀는 다소곳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나의 지꿎은 눈길은 슬며시 그녀의 아래우를 훑었다. 달빛에 어린 희고 동탕한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녀자가 아름답다는것은 가장 녀자답다는 뜻이고 가장 녀자답다고 하는것은 녀자다운 마음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고운 마음씨는 수집은 얼굴에 어린 예쁜 미소와 상냥하고 따뜻한 말씨, 세심하고 절제된 행위로 표현된다. 녀자의 예쁜 미소는 잔잔한 호수에서 이는 미풍과도 같다. 이 녀자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죄다 갖춘 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나의 마음은 좀체로 바람직한 사랑을 이룰수 없다는 실의로 황페해질대로 황페해져있었다. 헌데 마침내 내 마음의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그것은 지금 송녀라는 녀자로 구체화되여 서있는것이다. 하지만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고 혼자만 서뿔리 망녕되게 닭알가리를 쌓는것 같아 허구픈 웃음이 터져나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의 별들도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여 빛을 쏟아내 는듯싶었고 래일아침의 태양도 우리의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서 솟을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를 떨쳐버릴수 없는것은 웬까닭일가? 그저 남자의 본능만은 아닐터,
난생처음 처녀와 나란히 걷고있는 내 마음은 자못 설레이였다. 심지어 낯선 마을의 골목길마저 그처럼 정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오래동안 내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꿈이 피여나는 내음이였고 아늑한 안식처를 찾아헤매는 로총각의 욕망이였다. 긴장감보다는 전류가 흐르는것 같은 짜릿한 희열이 나의 전신에 부단히 줄달음치고 있었다. 집집의 불빛도 이제는 거의다 꺼지고 안개속에 희미한 륜곽을 드러내는 마을의 여기저기에서 지쳐버린 개짖음소리만 가끔씩 들려온다. 밤이 이슥해진것이다. 이제 곧 이 녀자와 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삭막한 황무지를 걷는 심정이였다.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촌사람의 품성그대로 진지하게 말하였다.
“요즘 돌아가는 형편을 보니 내가 그냥 여기에 눌러있다가는 필경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것 같소. 나는 곧 집에 돌아가려 하오. 동무도 앞으로 조심하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녀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나를 마주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날은 정말 고마왔어요. 잊지 않을거얘요.”
그윽한 눈매와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녀자였다.
그녀와 헤여지면서 나는 용기를 내여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주밋주밋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이 잠자리날개처럼 파르르 떨리고있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어둠속으로 한들한들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멀찌감치서 그녀를 뒤따랐다. 저 녀자의 마음속에서도 금실은실 실타래가 맺히고있을가? 그 끝에 내가 묶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내가 저 녀자의 마음의 금선에 묶인다면 끊어지지도 동이나지도 않을것이다. 그것을 내가슴속에서 한도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엉뚱한가? 엉뚱하면 또 어떻단말인가? 사랑에는 원래 항상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지 않는가. 자고로 미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랑을 할수 없다고 했다.
나는 며칠후 공정판을 슬며시 떠났다. 그자는 응당한 징벌을 받았지만 그의 등쌀을 믿고 개잡은 포수마냥 우쭐렁거리던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있노라면 재미가 적을것이 뻔하였다. 대대책임자도 여기를 떠나라고 등을 밀었다 서성공사로 가는 고개길을 스적스적 걷는데 삼신할미가 인연을 맺어주느라고 그랬는지 나이지숙한 한 나그네가 이불짐을 멘 그녀를 데리고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만 알은체하며 같은 길이면 처녀와 동행할수 없는가고 했다. 아마 왕복20여리길을 시고스럽게 걸어서 갔다오기가 싫었던모양이다. 나를 거절할 리유가 없었다. 오히려 하늘이 도와 준 기회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늘찬 십리길을 함께 걷게 되였다. 단둘이 남게 되자 나는 아예 그녀의 이불짐까지 빼앗아 둘러메였다. 뻐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걸음을 재우쳐야 했던것이다. 그녀는 거의 강다짐으로 이불짐을 빼앗아 메는 나를 바라보며 감격해마지 않았다. 부채살같은 속눈섭, 정이 찰찰넘치는 눈, 상큼한 코, 마음이 밝은 날엔 분명 따스한 웃음이 물리여있을 봉긋한 입술… 청초한 그녀의 얼굴은 대번에 내 마음을 사 로잡아버렸다. 녀자는 깊이있는척 하는 껍데기라고 하지만 이 녀자만은 겉이자 속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안겨왔다.
서성공사가 내려다보이는 고개마루에서 다리쉼을 했다. 나는 풀밭에 벌렁누워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흘러가는 먹구름장들은 인간세상처럼 변화무상하였다. 누군가 인생을 하늘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구름처럼,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고 하였지만 나에게는 하낱 잠꼬대같은 헛소리일뿐이다.
한줄기 바람이 으스스 불어왔다. 비가 올 조짐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조금 지나자 산마루에 투명한 검은비단장막과도 같은 비발이 드리웠다. 비발은 바람과 함께 산비탈을 후려치더니 이윽고 콩알같은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면서 고개길을 뽀얀비안개속에 묻어버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방목군의 초막이 있어 그리로 진동한동 달려갔다. 녀자는 얼굴에 그늘이 비꼈지만 나는 은근히 기뻤다. 이제 갈라 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녀와 짤막짤막하게 주고받는 대화였지만 소낙비가 지난뒤의 무지개처럼 나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었다. 나는 그녀가 머루알같은 눈동자로 경계심을 도사리고있다는것을 진작 보아냈다. 하지만 나는 그 눈길이 비라면 땅속에 스며들수 있고 그 눈길이 화살이라면 내 가슴을 꿰뚫을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농촌처녀였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건강하고 얌전하고 담담하여 더욱 돋보였다.
비가 점점 억수로 쏟아졌다. 밖에서는 바람이 기승부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소나무숲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세차게 설레였다. 나는 련거퍼 담배를 말아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가슴이 쿵쿵 뛰였다. 그녀는 내가 담배꽁초를 주어서 꽁꽁 묻었다. 산불이 날가봐 우려되였던 모양이다. 제기랄, 차라리 내 가슴속에서 활활 타번지는 불을 꺼주면 얼마나 좋아? 산불이 나면 기껏해야 나무가 타겠지만 사나이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은 심장을 태운단 말이야. 나는 애모쁜 생각에 가슴이 탔지만 체념하였다. 사랑의 감정이란 성스럽고 진지한것이기만 하다면 그리고 사랑이란 이 티없이 깨끗해야 하거늘 서뿔리 신성한 사랑에 먹칠을 하고싶지 않았다.
“비가 그쳤군요. 자, 어서내려갑시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면서…”
내리막길은 질척거렸다. 신발이 젖어 풀을 밟고 지날 때면 자칫 미끌어져 넘어질 위험이 있었다. 옆에서 걷던 송녀가 가끔 휘우뚱리며 내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붉히며 나를 할끔 쳐다보았다. 인간의 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비밀을 고백한다고 한다. 나는 그녀도 야릇한 눈길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의 눈길은 따뜻하고 살갑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용기를 내여 그녀의 집주소를 물어보았 다. 뜻밖에 그녀는 선선히 알려주었다. 이후 련락을 허락하는 의미일가. 그 바람에 나는 이불짐이 훨씬 가벼워졌다.
전개
집에 돌아왔으나 그녀의 모습을 잊을수 없었다. 구멍이 펑뚫린 내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든것이다. 눈이 맑고 마음씨 착한 그녀, 비내리는 밤이나 찬서리내린 새벽녘이면 지꿎게 생각나는 볼이 고운 그녀, 달이가고 밤이가고 한숨도 말랐다. 비가 내려 질척한, 싱싱한 곡식밭들이 펼쳐진 서성의 푸른고개길을 함께걷던 그녀가 생각나서 참을수 없었다. 봄은 이미 가버리고 그 화사하던 풍경은 없지만 푸르던 그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며 그녀의 모습이 눈에 삼삼히 밟혀왔다.
허수룩한 나의 초가삼간 뜨락귀퉁이에 초병처럼 서있는 백양나무는 이미 한여름 푸른 꿈이 색바래여져 잎사귀가 누렇게 황이 들었지만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황이 들기커녕 새라새롭게 푸르러만갔다. 서른살이 넘도록 혼사말은 여러번 있었어도 번번히 퇴자를 맞아서 웅성의 용기마저 깡그리 빠진 무골충이 된 나였지만 끝내는 참지못하고 밤을 패가며 편지를 썼다. 그동안 이러루한 편지를 여러번 썼지만 이번만은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내 심정을 고백했다.
송녀 앞:
나의 이 편지가 뜻밖일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주시면 더 바랄것이 없겠습니다.
송녀, 나는 내가 가진것, 남은것을 다내주고 정말로 진심으로 그대를 뜨겁게 사 랑하고싶습니다. 내 가슴은 언제나 텅 비여있었습니다. 성분때문에 남들처럼 기를 펴고 살수 없어 내 청춘의 시름 하늘에 닿고있을 때 그 가엾은 령혼을 마지막으로 깨우쳐준 사람이 바로 그대입니다. 본래는 못난새끼오리로 늘 당하면서도 참으며 살아온, 세상밖에 던져진 하나의 보잘것없는 조약돌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나 발길 나가는대로 차고 무시하던 하찮은 인간이였지요 그런데 그대와 우연히 알게 된후 모름지기 사랑이 봄싹처럼 돋아났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 내 마음속에서 무성한 여름을 지나 열매익는 가을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가득차있었지만 감히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저혼자 벙어리 랭가슴앓듯 애간장만 태웠습니다. 헌데 날이 갈수록 그대를 향한 사랑이 한많은 내 마음에 사랑은 반월처럼 둥글어가고 있으니 이를 어쩌지요? 시들어가는 내 청춘의 빛발을 다시 찾아준 그대여, 운명처럼 만난 우리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줄수는 없을가요? 듣기만해도 가슴이 설레이게 하던 그대의 맑은 목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을 휘젓고 있군요.
내가 말했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대의 가슴 속에 고이 그려지고있는 사랑의 동산이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 갈수록 생생하게 현연되는 그대의 모습과 평생 지울수 없는 자국으로 남아있을 그대와의 추억때문에 더욱 그대를 잊을수 없습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원망하지 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사랑할수 있고 또 사랑해야 하는 리상적인 남자가 꼭 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대의 인생반려로 유일하게 하나인 남자가 되고싶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고백한다고 믿어줄수 없는가요? 내 가슴속에 한남자의 진심이 꼬드기는 모순된 아픔과 고통, 말못하는 나의 슬픔과 고독과 번민을 리해하여 줄수는 없을가요?
나는 자신의 마음을 갑속에 숨겨두려고 애쓰지만 도저히 숨길수 없군요. 오늘 고백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고 여한으로 남을것 같아서 용기를 내여 이 편지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그림자에서 해탈할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생에서 몇번이나 진정한 사랑에 가슴을 불태울가요? 그대를 생각하며 쳐다보는 달은 정다운 귀속말로 속삭이며 나를 신비한 세계에로 이끌어갑니다. 이 세상에 그대가 있기에 이 달밤은 유난히 아름답고 정답게 느껴집니다.
저 하늘에 하얀 달은 눈부신 은빛바퀴런듯, 내 심상의 오솔길에 굴러가며 사랑을 다지고 저 하늘에 초생달은 한자루 은빛낫처럼 내 마음의 창가에 걸려 아픔을 찢는 군요. 내 인생길에 달빛럼 비춰줄 그대가 바로 나의 달님입니다. 나혼자서 아름다운 사랑의 꽃바구니를 엮고있는것이 스스로도 못마땅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나온 감정을 억제한다는것은 네굽을 안고달리는 들말을 멈춰세우려는 것처럼 내게는 어렵고 힘든 일이니 말입니다. 그대가 잡아줄수 없나요?
오늘은 이만 그치겠습니다. 안녕히!
1978년 5월 20일
ㅡ그대를 그리워하는 사람
사랑의 꽃편지를 써본 사람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손꼽아 회답을 기다리는 그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더구나 우연한 계기로 늘찬 십리고개를 넘으며 가담가담 주고받은 수집은 대화를 일방적으로 인연의 가느다란 금다리로 여기고 외람되게 덜컥 사랑을 고백해버린 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안타까웠는지 짐작될것이다.
한마디로 답장을 기다리는 나날은 지루함 그 자체이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기다림속에서 내 마음은 분홍빛깃털을 가진 고운새가 푸른 창공을 날아예듯 들떠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회답편지가 한달넘어서야 드디어 도착하였다. 몇번이고 거듭 편지를 읽는 심정은 한입으로 형언할길이 없다.
회답편지:
편지를 고맙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무어라고 호칭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제야 편지를 보내니 량해하세요, 잠시 오빠라고 부를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부끄럽던 그 일이 있은후, 그리고 우연히 함께 고개길을 걸어서 뻐스에 나란히 앉아 룡정까지 오게된 그날 이후, 저한 테도 가끔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평생을 두고 고맙게 여겨야 할분인데 어찌 쉽게 잊겠어요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인지상정이 아니겠어요.
전류가 흐르는 도선의 주위에는 자기마당이 생긴다는것을 알고계시지요? 책에서는 간단히 앙페르법칙이라고 하지요. 즉 자석들사이나 전류가 흐르는 도선들사이, 자석과 전류사이에 작용하는 자기적힘의 마당을 가리키지요. 미안해요. 유식하게 보이려고 한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썼어요. 사랑의 마당에도 자기마당법칙이 있지않을가 하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도 오빠를 가다오다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쉽게 잊을수 없어요. 오빠가 그날 나타났기에 저는 얼굴을 들고 새 아침을 맞이할수 있고 달을 쳐다보아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사이엔 어두운 그림자가 끼여있다는것을 안타 깝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어요. 오빠도 지금 형세를 잘 알고있겠지요?
저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요. 한 처녀의 순결을 지켜준 백골난망의 은인이 아니얘요. 또한 남자에 고마운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고 익어갈것인지? 시들어가는 풀이 한줄금 단비를 바라는 심정이예요 그런데 비가 오지않는데도 우산을 펼쳐야 하는 제 마음이에요…저도 오빠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예요…지금 처녀들이 남자를 얻는 첫째조건은 출신이예요. 그러나 제가 바라는것은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감정이 융합되고 령혼이 하나로 될수 있는 그런 사랑이예요.
오빠의 편지는 저의 마음의 호수에 감정의 물결과 사랑의 물보라를 일으키기엔 충분해요. 우리 서로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진정을 익혀가자요. 꽃도 태양과 땅의 화합에 의해 생겨났지만 열매를 맺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녀자는 사랑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다고 여기는대로 되여간다는 말처럼 나도 그렇게 되여갈지도 모르지 않아요? 호ㅡ
오늘 이만 갈무리하겠어요.
1978년 6월 30일
(늘 고마와하는 녀자로부터)
편지란 한 사람의 마음의 울림이다. 너무 지어낸듯, 너무 다듬은듯한 나의 편지에 대한 송녀의 반응을 짐작하면서 머쓱한 기분에 빠졌었는데 그녀의 회답편지를 받고나니 저도 모르게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에 나가 전업학교를 나오고 황해도 해주의 어느 제철기업소에서 수압프레스를 다루다가 부모가 그리워 대동란초기에 다시 중국에 돌아왔다는 그녀의 문화자질과 삼합조동령을 넘어30리 서리골을 밤에 혼자걸었다는 파란많은 인생경력을 놀라웁게 절감하였다. 나는 재자가 아니지만 그녀는 가인임에 틀림없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우리는 남들처럼 버젓이 내놓고 래왕하지 못하였다. 죽어난것이 그저 잉크를 묻혀쓰는 철필촉과 누런 편지지였다. 그러나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녀자에게 편지를 쓰는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고 회답편지를 읽는날만큼 마음이 둥둥 뜨는 순간이 없었다.
사래 긴 콩밭을 제일 앞장서 매면서도 허리 아픈줄을 몰랐다. 내가 김을 잘매서 가 아니라 여러사람의 지껄임을 피해 혼자서 내 사랑의 꽃밭을 매고 또 매고싶었기에 힘을 가배로 냈던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것을 감수하기에 사랑을 하고있을 때 다른 어느때보다도 훨씬 힘이 솟구치는법이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회답편지를 본따 두번째 편지를 썼다.
송녀:
그대의 의미깊은 편지를 단번에 외워버렸습니다. 그대가 음극이라면 나는 양극이 되고싶습니다. 우리 서로 의지한다면 사랑의 전기가 평생 어두운 인생길을 밝힐것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은 정수, 나는 부수, 우리 모두 유리수이기에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가요. 그대는 존재, 나는 의식, 유물론의 원리에 근거하면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지요. 나는 영원히 그대의 충실한 노복이 되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은 그대에게서 편지가 오려나 하고 기대하고 일밭에서도 내내 그생각뿐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필연적인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점차 얽혀가고 서로를 보듬어주려는 애틋함이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좋은 생각이기만 하지만도 얼마만큼 깊이 고뇌하는가가 사랑의 무게를 누르지않을가요?
사랑이란 하나를 만들려하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믿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두 심장이 하나로 뛰는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그 불가항력적인 위력을 깨닫기전부터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이여, 서투르나마 심장으로 엮은 시 한수를 보내드립니다. 제목은 “개살 구, 호박꽃, 해님”입니다.
개살구도 그냥 살구라구요/ 시금털털 어른들은 등돌려도/ 뒤동산에 꽃피여 열매 맺으니/ 개구쟁이들 마구 따더랍니다// 호박꽃도 피는 꽃이라구요/ 봄마다 울밑에 소담스레 피여/ 수수해도 꿀벌은 향기를 따라/ 꿀을 빚습디다// 호박꽃, 개살구, 저 하늘 해님/ 더불어 하나로 엉킬수 없어도/ 하냥 따사로워 만물을 보듬으매/개살구 열리고 호박꽃도 피지요// 야산에 흔해빠진 개살구같다고/ 개밥에 도토리신세 보기 싫다고/ 내내 저어하고 망설이며/ 애끓이지 마시고 오세요, 내곁에,
ㅡ그대를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가
…하루는 늦도록 콩밭김을 매다가 어슬녘에 돌아오니 정전이 되여있었다. 시름 시름앓는 몸으로 얼추 저녁을 지어 차려놓은 밥상머리에 마주앉았다. 찬장우에 올려놓은 콩기름등잔이 가물가물 시래기국을 비춰주었다. 허기진김에 숟가락이 부러지게 밥을 퍼넣고 시래기국을 떠먹다가 무엇인지 씹어도 씹어도 씹혀지지 않았다.
어머니 몰래 가만히 뱉어보니 시래기가 아니였다. 로모가 허벅지에 종기가 생기여 고약을 붙이고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되여 국가마에 들어갔고 방정맞게 내 국사발에 담겼던것이다. 나는 투정질할수 없었다. 고래희를 바라보는 로모가 남처럼 며느리의 손에서 밥을 얻어잡숫지 못하고 로총각아들의 때시걱을 맡아하는 신세가 안쓰럽기도 했거니와 내 신세가 너무 서러워서 설음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몇술 더뜨는척 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대충 옷을 갈아입은후 헌 자전거를 타고 룡정으로 달렸다. 생각이 엉망이여서 세흥촌앞을 지나다가 그만 술주정뱅이를 박아놓았다. 거기서 밀고닥치고 하다가 홧김에 그자를 도랑에 처박은후 허겁지겁 페달을 밟다보니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이미 떠난길을 돌아설수도 없어 내처 달렸다. 룡남촌에 이르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서야 송녀의 집을 찾았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내밀듯 불쑥찾아든 나의 출현에 송녀는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아연실색한것은 당연했다. 송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장인강혁 명근거지에서 소년아동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집체귀순하라는 지시에 따라 귀순한 력 사를 가지고있는 사람인데 《삼국연의》,《춘향전》같은 고전명작들을 달달 외울만큼 지자인데가 사리에 밝고 동정심도 강하다고 하였다. 그는 부인을 일찍 저 세상으로 보내고 팔삭둥이 맏아들과 두딸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집살림은 째지게 가난하였다.
송녀의 아버지는 딸에게서 내 얘기를 들어서 잘 알고있다면서 서로 좋아하는건 반대하지 않지만 아직 집안형편이 어려워 딸을 시집보낼 처지가 못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설수 없어 진드기처럼 검질기게 들어붙었다. 나중에 두 집에서 잔치에 쓸 돈을 내가 전부 부담하겠다고 큰소리를 쳐서야 마지못해 허락하고 절을 받았다. 드디어 나도 꽃같은 녀자를 안해로 삼게 되였다. 온세상을 다차지한듯 뿌듯하였다.
이튿날 집에 돌아와 어머님한테 희소식을 전했더니 밤이길면 꿈자리가 어지러운 법이니 달구쳐서 얼른 결혼식을 치르자고 서둘렀다. 사랑이 두려운것은 사랑이 깨지 는것보다도 사랑이 변하는것이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며칠후 나는 다시 송녀네 집에 찾아가서 약혼식도 생략한채 잔치날자를 받았다.
내가 송녀를 데리고 마을에 들어서니 어디서 병신이나 데려오면 다행이겠다고 입방아를 찧던 마을아낙네들이 입을 딱벌렸다. 공사에 가서 결혼등기를 할 때 민정 위원이란자가 송녀에게 출신도 나쁘고 나이도 많은 사람에게 왜 시집오려 하는가, 혹 시 불순한 짓을 당하여 마지못해 오는게 아니가고 캐고묻더란다. 송녀가 하도 견결 하게 나오니 할수없이 도장을 찍어주면서도 그냥 못마땅해 하더란다. 혼사엔 흥소 리도 방간이란데 그자가 뭐길래? 물론 그때는 감히 엄두도 못냈지만 혹간씩 그자를 만날때마다 주먹이 울었다.
밤, 송녀와 마주앉은 나는 황홀경에 빠졌다. 나는 송녀의 고운 얼굴을 멍청이처럼 눈한번 깜박하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송녀의 입술은 방긋 벌어진 석류처럼 물들여 져있고 호르륵 뜨거운 숨소리가 곱게 새여나와 남자의 본능을 깨웠다. 여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충격이 나를 걷잡을수없이 만들었다. 가슴이 떨렸다. 마치 전기에라도 닿인듯 온몸이 짜릿해났다.
우리는 만나면 새로운 화제가 샘물처럼 솟아났고 새로운 빛갈로 희망이 물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해지군했다. 인생이란 슬픔절반, 기쁨절반으로 엮어지는것, 바로 녀자에 대한 일종의 숭배심에서 오는것이라고 한다. 이런 숭배심리의 기저에는 정욕이라는 끝없는 욕망에 뿌리내린것이 아닐가? 그 숭배의 진정한 연원을 인류의 미의식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고있고 그런 의식은 오직 심령으로써만 감수할수 있을뿐 육체적접촉으로는 감수할수 없다고 말하지만 남녀의 정사를 말로 하는건가?
나는 저도모르게 절절한 갈망과 은근한 기대의 눈길을 박고있었고 그녀의 눈에 서도 나와같은 어떤 욕망이 내비치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는 아무말도 필요하지 않다. 남녀가 진정한 마음을 교류할 때 눈속에 신비한 빛이 내비친다. 진실이 또 하나의 진실과 마주할때에는 더욱 진한 색채를 띄는 법이다.
나의 눈에서 강렬한 정염의 불꽃이 튕기였을것이고 그 불꽃이 그녀의 눈에 박혀 광채를 띠고있는듯싶었다. 나는 거칠게 폭발할것같은 정염을 리성의 마지막 방선에 가두어넣으려고 자제하며 심장에 압축된 호흡을 조금씩 흘렸다. 그녀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눈물은 마력, 그 자체였다. 오그라들어 있던 쇠가죽이 더운물에 퍼진것처럼 팽팽하던 나의 긴장도 느른해졌다. 곱고 올곧고 착하고 알뜰한, 때로는 매섭기도 할 그녀가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여는 소리가 육감각으로 들리였다.
사람은 쾌락이라하면 정욕을 생각한다. 감각이라하면서 육감성을 생각한다. 육체라고 하면서 신비한 삼각지대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가지 좋은것때문에 리성의 방뚝은 와르르 무너져버리는것이다. 만일 정욕이라는것이 이토록 제어할길없이 맹렬하 고 사려가 없는 성질을 갖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번성하지 못했을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면괴스러운 자기 변명이였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자리를 펴고누워 어색하게 둘이만의 밤을 앞질러 만들기시작했다. 나는 한껏 완숙한 녀자의 라체를 처음보았고 그녀의 달착지근한 정열을 만끽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것을 확인했다. 피차 서툴 렀지만 더없는 신비를 앞세우고 진지하고 따뜻하게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젊은 생명력을 확충하며 서로를 탐닉하는 란무속에서 남녀가 함께 연주해가는 생명 률동의 교향곡으로 새벽을 밀어냈다. 경이로운 흡인력에 빨려들어 그대로 굳어지고 싶었다. 녀자라면 다 이런지는 몰라도 송녀는 흐드러지게 핀 한송이 꽃과 같은 녀자였다.
젊은 녀인의 육체란 이런것인가? 송녀의 머리로부터 발끝까지에서 신성한 빛이 발산하였다. 그 흡인력은 항거할수 없는 무비의것이였다. 나는 그녀의 뜨겁고 향기로운 숨결에 도취되지 않을수 없었다. 마치 뜨거운 김이 뽀얗게 솟구쳐오르는듯 일체가 사라졌다. 오직 나와 그녀의 육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 계급, 신앙, 미래…그 모든것이 보잘것없는 헌 발싸개로 여겨졌다. 오직 충격, 흘러드는 전류만이 감각되고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얼굴과 턱, 수집음을 팽겨쳐버리고 활 드러낸 흐벅진 젖가슴, 미끈하고 풍만한 허벅다리, 되는대로 내버린 하얗고 탐스러운 두팔…그 모든것이 내것이 된것이다. 나는 두팔을 벌려 숨막히도록 끌어안았다. 밀물뒤에 썰물이 있었고 썰물뒤에 다시 밀물이 하얗게 밀려온다. 애욕의 뜨거운 물이 용솟고 세찬 파도는 한껏 달아오른 두몸을 마구 휘감아친다. 질풍노도속에서 환락의 첫밤은 행복으로 바래졌다. 한없이 부드럽고 폭신한 이성의 육체속에서 웅성이 완성되는 것인가? 이런것을 무아의 지경이라 하는가? 착각아닌 착각의 미궁속에서 넋은 온 우주를 행해 나래쳤다…
절정
드디어 결혼식날이 다가왔다. 잔치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물론 형제자매들은 천애이역에 흩어져 살고있다나니 오고싶어도 오지 못하였다. 하여 하객이 얼마되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반란파두목인 산호씨가 빈하중농회의를 열고 내 결혼식에 참석하 는 사람은 계급립장문제로 엄중하게 다스릴것이라고 을러메는 바람에 이웃들마저 바자굽너머로 구경만 해야 할 상황이였다. 자고로 잔치집은 흥성거려야 길한데 나는 그런 사치한 행운을 바랄수 없었다. 생각하다 못해 강건너 평안촌의 절친한 친구 상길이를 찾아가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그가 팔을 걷고나섰다. “너네 동네 새끼들은 인정머리도 없는자들이구나” 하고 욕설을 퍼붓더니 자기네 대대의 과외 선전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한바탕 결혼분위기를 띄워주겠노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재수없는놈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개똥에 코를 박는다더니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불쾌한 일이 생겼다. 잔치떡을 칠 찹쌀이 없어서 소학교동창인 방대장 에게 여쭈었더니 생산대것을 먼저 가져다 쓰라고 하였다. 차입쌀을 가지러 최금지란 창고보관원을 찾아갔더니 자기는 대장에게서 그런말을 들은적이 없다고 하면서 딱 잡 아뗐다. 방정맞게도 방대장은 룡정에 잎담배바치러 가고없었다. 내가 감히 거짓말을 하겠는가고 사정사정했지만 어째서 심술이 꼬였는지 힝힝 코방귀만 뀌였다.
아무리 계급감정이 인정을 삼켜버릴때라 하여도 이건 너무나도 각박한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호사다마도 류만부동이 아닌가? 아무리 눌려사는 처지라도 밸이 울컥 치밀었다. 그러다보니 언쟁이 생기게 되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역시 칼자루 쥔자를 이길수는 없다고 빈손으로 돌아오고말았다. 이튿날 다시 대장친구를 찾아갔더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
“어제 최금지아주머니에게서 량식창고열쇠를 달라했다는게 사실이니?”
“그게 무슨소리니?”
“창고열쇠를 달라고 한 네가 참 철딱서니없다. 빈하중농사원도 아닌 네가…”
“야, 그게 말이되는 소리니? 설사 준다한들 내가 뒤주에서 저절로 퍼내다가 저울질할수 있단말이니? 말같지않은 소릴, 개가 미친들 풀을 뜯어먹겠니?…
“그래도 최아주머니가 자기가 열쇠를 내주지 않으니 한바탕 욕했다고 하더라.”
앙앙불락해서 돌아오는데 마침 가을하러 우리 집옆을 지나가는 최금지를 만났다.
“아주머니, 생사람을 잡아두 유분수지, 어제 내가 언제 창고열쇠를 달라고 했습니까? 꾸며내도 좀 사리에 맞게 꾸며내시오, 억울하게 바가지를 씌우지 말고.”
“그래 찹쌀을 내주지 않는다고 똥밸을 쓰지 않았소? 그게 창고열쇠를 달라구 한것과 무스게 다르오? 제가 무슨 사람인데 내게 막 접어드는거요?
“무슨 사람이면 어떻단 말입니까? 그래도 우선 사람이 아닌가요?”
마을에서 암펌으로 불리우는 그녀의 입에서 좋은말이 나올리 없었다. 결국 언쟁 이 팽팽해지면서 욕설이 쏟아져나갔다. 그녀의 남편은 원래 당소조장이였는데 산호에 게 타도당해서 한쪽구석에 처박혀있었다. 내 입에서 뱀이나가는지 구렝이가 나가는지 모르고 나가는대로 망탕 내뱉은 말에 그녀는 하늘이 낮다고 길길이 뛰였다.
어머니가 내 팔에 매달리며 떡을 못치면 그만이지 좋은날을 앞두고 이게 무슨 일 이냐고 락루하였다. 친척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나를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잔치전부터 곳곳에서 코가 깨진셈이다. 저녁무렵 방대장이 찹쌀 30근을 가져다주어서 다행히 찰떡없는 잔치상을 면하게 되였다.
저녁, 강건너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방안이 터지게 들어앉아 술상을 벌리고 있는데 사원대회에 오라는 전갈이 왔다. 흥이 깨졌지만 어쩔수 없었다. 헌데 설상가 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불쾌한 일이 기다리고있을줄이야,
달패골집 너렁청한 팔간집에 사원들이 꽉들어 앉아있었다. 늘 하던듯이 창문쪽에 내 지정석에 가서 앉았다. 그동안 크고작은 비판을 수없이 받았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비판을 받는다는것은 기상천외한 일이였다.
산호가 예이제 팔을 내저으며 회의를 집행했다. 얼굴은 강낭떡같고 머리칼은 고 슴도치를 방불케 한다. 손바닥만한 얼굴은 도료에 쐬인듯 까슬까슬하였으며 주독이 올라 무르익은 아가위처럼 빨간코에서는 당금이라도 피방울이 떨어질것같고 조그마 한 눈은 살기를 띠고 신경질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너나없이 계급투쟁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제멋대로 놀아대는 판이라 정세가 제게 유리할듯싶으면 자기의 뒤틀어진 야심을 그럴듯한 혁명구호속에 끼워넣고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너절한 인간들이 수두룩이 뛰쳐나왔다. 산호가 그런 놈팽이였다. 그가 계급투쟁의 불길을 지필때마다 왼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오른손은 공중에 마구 저어댔는데 마치 미국대통령 후보나 된듯 시뚝해하였다.
“어제 우리 생산대에 새로운 계급투쟁의 동향이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집체 창고의 열쇠를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엄중한 두갈래로선 투쟁의 표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한 부농자식이 감히 한 공산당원에게 접어들어 욕질한것은 그저 사원대 사원 의 언쟁으로 볼것이 아니라 분명히 계급의적들이 당에 대한 창궐한 공격이 멈추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합니다. 에, 그리고 빈하중농들이 결혼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한데 대한 변상적인 보복행위라고 봐야합니다. 여러분,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노래 잘부르는 형가가 말주변은 어떤지”하는 고사가 있듯이 산호가 시비도리없 이 상하좌우를 투쟁하고 비판하는데는 열을 올리고있지만 그의 말에는 어불성설이 많았다. 그자식이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로 나를 공격하였지만 나는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만약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나의 눈에서 두줄기 암울한 빛이 번뜩이고 있음을 보아냈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화를 눅잦혔다. 나는 열쇠를 내라는 말을 한적 도 없었고 설사 내주었다해도 나절로 쌀을 떠내온다는것은 애당초 있을수 없는 일이 며 또 최금지아주머니와 다툰것은 한 당원에 대해 모욕한것이 아니라 인지상정으로 다투었을뿐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발 물러서서 년상분을 분별없이 막 대한것은 례절상 잘못된 점이 있으니 반성한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일의 자초지종을 빤히 알고있는 사원들은 서로 눈치만 아무도 입을 열지않았다. 아무리 가재는 게편이라지만 최금지가 산호의 호소에 호응하여 열변을 토하는것이 머 쓱했던지 잠자코 있었다. 산호는 자정까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게 되자 스스로도 억지공사라는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혁명열의가 식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하지 못했을것이다.
죽지 부러진 수탉이되여 돌아온 나는 마당가에 백양나무를 부여안고 방성대곡 하였다. 나같은 사람은 마음대로 소리쳐 울지도 말아야 하는 비상시국이다. 꾀꼴새 노래하고 제비가 춤추는 아주좋은 형세하에서 사람마다 혁명열의 끓어넘치는데 통곡 이라니? 사회불만죄로 몰아도 할말이없는 그런 위험천만한 울음이였다.
나의 울음소리는 마치도 서리가 눈이 하얗게 내린 숲속에서 혼자 방황하는 늙은 승냥이의 소름끼치는 호곡성처럼 처절했다. 어느새 상길이라는 친구가 집에서 달려나와 “이게 어느때라구 함부로 울음소리를 내는가”고 호되게 꾸짖었다. 말이 맞았다. 어둠속에서 불쑥 산호가 나타났다. 집에 돌아온 내가 어쩌는가 도적공양이처럼 살피러왔던것이다.
“ 너 왜 한밤중에 꺼이꺼이 울고있니?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있는거지…”
“야, 네가 아무리 반란단 단장이라 해도 옛날 고향친구로서 이렇게까지하는 저의가 뭐니? 우리가 무슨 애비죽인 원한이라도 있니? 일생에 결혼식은 한번뿐이야, 그 런데 하필이면 잔치전날 비판대회를 열다니? 너 너무 지독하구나,”
“헛소리 치지 말라, 준엄한 계급투쟁마당에 무슨 고향친구구 개나발이구 있니? 네가 잔치하든말든 내게 무슨상관인데? 다만 계급투쟁은 날마다 말하고 시각마다 말해야 하기때문이다. 알겠니? 그래도 무산계급의 인도주의정신으로 래일 잔치날에는 비판대 회를 하루 그만두기로 했다. 빈하중농들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사한줄이나 알아라.
그러지 않아도 함께사는 동네에서 너무 무지막지하게 행세한다고 풀떡거리던 친구 상길이가 산호에게 말을 걸며 트집을 잡았다. 렬사의 아들인지라 그는 두려운게 없었다. 당연히 그의 입에 좋은말이 나올리 없었고 결국 산호가 욱 달려드는 평안촌 친구들에게 얻어터지고 말았다. 후과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줄은 알았지만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에 응어리가 풀리면서 속이 후련해났다.
이튿날, 우시군들과 같이 모아산에서 뻐스를 타려고 뒤산오솔길에 오르는데 산호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나를 불러세웠다.
“너 지금 당장 내려오라.”
“또 어째 그러니? 그래 잔치날까지 파투를 칠 작장이냐? 야, 제발 좀 그만해 라…”
“괜한소리, 너를 찾는 손님 둘이 지금 우리 집에서 기다고있다.”
말을 내뱉고는 오거나말거나 밸대로 해보라는듯 코웃음치는 산호의 음흉한 눈에는 조롱의 빛이 력연하였다. 나는 할수 없이 우시군들을 집에 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해놓고 코를 꿰운 송아지처럼 산호를 따라갔다. 과연 30대 중반의 한 남자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와있었다. 그들은 송녀네 집에서 파견한 “전권대표”라고 하면서 삐딱하게 나왔다.
“우리가 여기로 온것은 다름이 아니오, 오늘 우리 송녀의 결혼문제때문이오. 어제밤, 우리 송씨네집안에서 토론하여 결정한것인데, 말하자면 이 혼사는 없던일로 한다는것이요. 말하자면 파혼이란 말이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제 아니고 그제도 아니게 생뚱같이 딱 오늘입니까?
“허, 이 사람이 원,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쪽이 출신을 속이고 송녀를 홀려 냈고 또 송녀애비가 계급각오가 무디여서 허락한것이 아니요. 이는 사기결혼이란 말 이요”
모르긴해도 한집안에서 말깨나하고 시비깨나 캘줄 안다는 사람을 보냈겠지만 내가 보기엔 어처구니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이지 세상에 이런 한심한 일도 있단말인가? 연길서 사업하는 6촌형이 발끈해서 따지고들었다. 그들이 나름대 로 리유를 내세우며 뭐라고 지껄여댔지만 내 귀에는 그저 멍멍개소리처럼 들렸다. 속이 터지고 찢기여도 천쪼각 만쪼각이 나는것 같았다. 하늘이 두 쪼각이 나도 결판 을 지어야 했다.
“이보시오. 무슨 뜻인지 대강 알겠는데 한마디만 합시다. 당신들 파혼과 리혼의 구별도 모릅니까? 우린 이미 결혼등기까지 합법적인 부부란 말입니다. 그러니 파혼이 아니라 리혼인것이지요. 당신들은 여기앉아서 파혼얘기나 하시오, 나는 나대로 새기집에 가서 리혼협의를 할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고 나왔지만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그렇게 믿고있던 사랑이 결국은 허무하게 무너지니 가슴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불덩이를 누를길없었다. 집으로 오면서 보니 이웃집바자굽에 몇몇 아낙네들이 붙어서서 수군덕거리고있었다. 좋은소문이 장화를 신고있는 동안에 나쁜 소문은 준마를 타고 천하를 질주한다고 어느새 입이 빠른 산호녀편네가 온동네에 소문을 퍼나른 모양이였다. 그 모양을 보니 목에서 겨불내가 나고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구경군들속에 옥희도 끼여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측은하였다. 우리는 몇해를 두고 서로 좋아했었다. 헌데 렬사의 딸이라는 넘을수 없는 장벽때문에 옥희 는 결국 왕청에 시집갔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몇달 안되여 리혼하고 친정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선 나는 궁핍한 살림에 어렵사리 갖춘 사지옷을 구들에 벗어 메치고 꺼이꺼이 울었다. 친척들을 보기 민망하여 얼굴을 들수 없었다. 집안에 일장풍파가 일어났다. 친구들과 몇몇 조카들이 잔치날에 파탄내는 집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몰려가서 박산내고 오자고 펄펄 뛰였다. 상길이가 내 어깨를 콱 쥐여박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이 못난새끼야, 울긴 왜우는데? 너 래일 리혼수속을 밟더라도 오늘은 새기를 억지로라도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넌 평생 오쟁이를 진놈처럼 치욕을 뒤집 어쓰고 살아야 할것이다. 어서 옷입고 룡정에 가자!에익 더럽게도 불쌍한 놈아…”
맞는 말이였다. 나는 어금이를 뿌드득 갈았다. 나는 두 젊은이의 일생대사를 망가뜨린 장본인들에게 시비곡직을 따져야 했고 평생 진심으로 따르겠다고 말하던 송녀의 얼굴을 다시 보아야 했다. 너도나도 간다는 바람에 나를 따라나선 “토벌대”가 열이나 되였다. 룡정에 이르러 조카들은 식당에서 술을 마시며 기다리게 하고 6촌형님과 둘이서 송녀네 집으로 찾아갔다.
송녀네 집은 결혼식집 같지 않게 않게 마당에 사람그림자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올때는 범이라도 때려눞힐 기세였지만 막상 집앞에 이르니 긴장으로 다리가 굳어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였다. 그러나 더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이미 결판을 지을 각오를 하고 온 이상 여기서 주저앉으면 모든것이 나무아미타불이 되고만다. 나는 용기를 내여 문을 뚝 떼고 들어섰다. 어른 몇몇이 둘러앉아 무슨 얘기를 나누고있었다. “전 권대표”로왔던 사람들이 지름길로 달려와서 사태가 심상치않음을 알린 모양이였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밥상우에 간장종지처럼 쌀쌀하게 대했지만 나는 넉살좋게 구들에 털썩 앉았다. 내가 찾아온 사연을 여쭈었더니 좌상인듯한 어른이 구구히 설명 했다. 나는 입씨름을 생각이 없었다.
“시비를 캐고싶지 않습니다. 결혼은 우리 두 사람이 하는것이지 삼자가 감놓아라, 배놓아라 할 일이 아닙니다. 아님둥? 그러니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본인도 마음이 변했다면 이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송녀가 있을 뒤방사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예상대로 송녀가 구석쪽에 쪼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먹거리고있었다. 시집간다는 색시가 화장은커녕 머리가 푸시한 모습이 볼썽 사나왔다. 후에 안일이지만 친척들이 몰아세우는 바람에 생각이 변한 장인어른이 마음을 돌리라고 윽박지르다가 송녀가 입한번 뻥긋하지 않고 고집부리자 두들패기까지 하였단다. 나는 특별히 말을 골라할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만은 솔직하게 말해주오. 아무리 시대가 험학해도 사랑만은 자유요. 그러니 모든것은 송녀의 선택에 달렸소? 만약 송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내가 당 장 당신을 데리고 이 집을 나가겠소. 잔치고 뭐고 무슨 소용이요? 첫날상을 받지 못 해도 원망하지 않겠소. 우리들의 마음만 철석같다면 그 누구도 이 결혼을 막지 못할것이요.”
송녀는 더세차게 어깨를 들먹거릴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할수도 있다. 동방화촉도 밝히지 못하고 과부로 될수도 있는 송녀를 내려다보니 원망대신 련 민의 정이 씨알마냥 가슴에 가득찼다. 혀가 마르고 입술이 타번졌다. 불길이 발바닥 에서 머리우로 치솟아 올랐다. 다시 앞방에 나와앉자마자 엄정하게 선포했다.
“방금 송녀의 마음을 알아보았는데 좋다궂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진작 새각시로 너울을 써야 할 송녀가 결혼을 파탄낸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지 않는다는것은 무언의 동의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집에서 잔치상을 차려주 든말든 송녀를 데려가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해결
나의 말에 좌중이 어정쩡해졌다. 아까부터 어른들속에 끼여앉아 나를 뜯어보던 30대의 사람이 내 신상을 캐여물었다. 소통이 되자고 그랬는지 인상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였다. 내가 룡강촌태생이고 누구의 아들이라는것을 말하자 “네가 쌍디동생이 였구나 ”라고 하며 무릎을 탁쳤다. 찬찬히보니 어덴가 낯익은 얼굴이였다. 소시적에 얼음강판에서 내 발구랑 빼앗아 타며 애를 먹이던 명철이라는 고향마을의 형벌되는 사람이였다.
그는 송녀의 사촌오빠로서 군대에도 갔다왔고 연길가마공장에서 서기로 있어서 집안에 말이 서는 사람이였다.
“그럼 됐다. 이제 우리 큰형님이 오면 결정을 낼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탄자를 펴주면서 신랑대접을 했다. 이때 갑자기 정주칸이 소란스러워졌다. 대사를 좌우지할 권위자가 들어선 모양이다. 명철이가 집안어른들을 다 밖으로 불러내갔다. 후에 안 일이자만 연변방송국에서 근무한다는 명철이의 큰형님이 사연을 듣고나서 어른들을 닦아세웠단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량자가 이미 정한 일을, 그것도 서로 좋아서 죽자살자 하는 젊은이들을 억지로 갈라서게 해서 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떼여놓는건 인간도리가 아니다.”라고 야단쳤다고 한다.
이윽하여 그가 방에 들어와 나에게 이것저것 묻고는 일이 우습게 되였지만 너무 곡하게 생각하지말라고 사과했다. 그제야 닭모가지를 비튼다, 떡쌀을 씻는다, 채를 볶는다 하며 부산을 피웠다. 안방에서도 새기의 차림을 시키느라고 소란스러웠다. 초상난것처럼 썰렁했던 집이 잔치분위가 완연했다. 마을의 청년들도 소문을 듣고 말썽많은 신랑을 구경하려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상을 받고 어쩌고 하다보니 오후가 되였다. 기다리다못해 우르르 무리지어 온 나의 “토벌대”들도 집안에 따로 모셔져 술상을 받게 되였다. 깨여질번했던 혼사는 전화위복이 되여 더욱 이채를 띄였다.
나는 송녀를 데리고 귀로에 올랐다. 산호가 생산대의 손잡이뜨락또르를 쓰지 못하게 하였기에 마음씨 착한 성철이라는 마을친구가 소수레를 가지고 모아산뻐 스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녀한테는 지참품도 별로 없었다. 그저 이불한채, 드렁크 하나, 시시한 보따리 몇개뿐이였다. 첫날 각시가 흙을 밟아서야 되겠냐며 수레에 앉으라고 했지만 잔뜩 뿔난 송녀가 그냥 걷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천히 걸어 서 산을내렸다.
마을에 들어서니 호기심많은 아낙네들이 내가 혼자오는가 해서 바자굽에 붙어서 있었다. 너울도 쓰지못하고 그저 수수한 일반복차림으로 뒤산 오솔길을 내려오는 색시를 보는 그들속에서 혀를 끌끌차는 아낙네들이 있었다. 나는 제법 의젓한 자태로 마을길을 에돌아 “실락원”에 들어섰다. 맨발바람으로 내달온 어머니가 새며느리를 붙안고 락루하셨다. 마음이 알짝지근해나며 나도 눈물이 울컥 솟구쳤다.
두루 격식을 차리여 오락도 하고 친구들의 성화도 받고나니 밤이 깊었다. 정지칸에 불도 꺼지고 어머니도 친척들도 모두 기쁨과 유감과 애석함을 다독이며 잠든듯했 다. 우리도 전등을 껏다. 화촉동방을 밝히는 첫날밤이였지만 우리는 쉽게 자리에 눕지 못했다.
과거를 현재에 매장하려는것은 불가능하다. 어렵사리 치룬 눈물겨운 잔치이지만 남자의 본능대로 만시름을 활 놓고 안해의 풍만한 육체속에 그동안의 모멸감도, 비애도, 분노도 한꺼번에 다 파묻어버리고싶었다. 안해의 싱싱한 체취가 시끄러운 세상을 잊게 한다. 그녀의 가슴에 그렇게 아름다운 예술진품이 감추어져있고 눈부시게 희고 섬세하고 따스해 보이는 몸에 인륜지락의 생경함이 넘치고 있음에랴
처음 안해를 속속들이 알게 되였던 그날밤. 흐드러진 가슴에 넋을 잃고있을 때 수집음의 잔물결이 찰랑대던 안해, “아,아ㅡ”하는 석류빛도는 신음소리가 미묘한 정욕의 피리를 불었다. 두 심장은 하나의 융합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과 영원! 그 집 합점에서 남녀의 첫교향악을 연주하며 극광이 되여 작열하며 새벽으로 달려갔었다.
그녀의 전신에 다시다시 관능의 잔물결이 찰랑대였다. 두개의 심장은 하나의 융합을 부르고있다. 순간과 영원! 그 집합점에서 그들은 하나의 교향악을 연주하며 극광이 되여 작열하며 새벽으로 쭉 뻗어갔었다. 생명의 환희와 기쁨이 얼룩진 그 장쾌 한 충격파와 질풍노도에 휘말려 전률하며 행복한 육욕의 향연을 확인해나가고싶었다.
성스러운 이 시각에도 안해는 감동의 눈물과 함께 몸을 한껏 느슨히 풀어놓고 남자가 쏟아내는 그 모든 사이비한것들을 받아줄것이다. 야성의 그것을 지혜로운 동물이 느끼는 향락 그 자체로 말이다. 온몸에 굽이굽이 감도는 감격과 감동의 여울이 떨리는 속삭임속에서 생명의 환희와 기쁨이 얼룩진 장쾌한 충격파에 휘말려 전률하며 행복한 육욕의 향연을 확인해 나갈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촉동방이 아니던가?
옛날에는 “화촉동방”이란 신혼방의 의미로 쓰인것이 아니라 얼굴이 동탕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미녀가 동방(洞房)에서 천천히 거닌다는 뜻으로서 곧 규수가 거처하는 깊숙하고 호화로운 내실을 가리켰다. 그후 당조중기에 이르러서야 “동방” 이 신혼방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였다고한다. 유래야 여하튼간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신혼의 잠자리에는 어둠이 없는법이다. 희열과 광명에 싸여있어 밤도 움츠러든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먹통인데 이밤, 화촉동방이 가당하기나 한가?
매돌밑에 낟알이 무엇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송녀와 나의 생각과 같을것이다. 넋과 넋이 혼합되는 그런 신비한 첫날밤이 되여야 하지만 나의 마음은 너무 지쳐있었다. 다소곳 고개를 숙이고앉은 송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듯싶었다. 나는 송녀에게 옷을 두툼히 입혀가지고 밖으로 끌어냈다. 우리는 뜨락의 굵은 백양나무에 기대섰다.
늦가을, 차디찬 밤하늘 서천가에 쪼각달이 걸려있고 별들이 쏟아질듯이 총총하다. 헤아릴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는것은 제각기 종알거리는 작은 입술같아보였다. 저 별들도 얽히고서린 세상사의 어지러움을 비웃는것인가? 나는 별을 쳐다보며 중얼 거렸다. 남편으로서 안해에게 정말 좋은 한때를 마련해 주지못한다면 남자는 녀자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는것이다. 나는 내옆에 붙어선 송녀에게 무엇을 마련해줄수 있는가? 나는 대답이 궁해져서 자기변명처럼 구시렁거렸다.
“송녀,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의 사랑의 경력과 사랑의 기적, 사랑의 비극이 있는법이요, 착한 사람들은 삶이 뜻대로 되지않기가 일쑤이고… 간혹 행복을 만들더 라도 보잘것없을거요. 일월성진의 궤도는 알아도 사랑의 궤적은 아무도 모른다오. 당신의 넋과 마음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맑다는것을 나는 잘아오. 그런데 한번 흐리게 되면 맑아질수 없을것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잘 알고있어요.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것인지두, 당신은 나의 바다물이 되여주세요. 넓고 깊고, 암만 헤염쳐도 대안에 닿을수 없구, 물장구를 쳐도 자맥질을 해도 언제나 부드럽게 감싸주고 받들어주는 바다물이 되여주세요. 다 른 무엇을 더 바라지 않을게요.
나는 송녀의 손을 잡고 마을을 벗어나 신작로로해서 해란강으로 나갔다. 밤길이였지만 어둠속에 따스한 무엇을 향수할수 있었다. 동방화촉으로 굽이굽이 서렸던 정 염을 풀대신 우리는 말없이 별빛을 즈려밟으며 걷는 내내 이렇게 걸었다. 우리가 갈길이 얼마나 멀지는 모른다. 그러나 넘어지더라도 내처 걸어야 하는 길이다.
에삘로그
나를 잡아먹지 못해 쌍불을 켠 산호가 정말 잔치이튿날 다시 비판대회를 열고 계급투쟁의 불길을 지피느라 열을 올리였다. 내가 불려나가며 내가 바닥에 내려서서 신을 신는데 안해가 슬그머니 돌앉아 눈굽을 훔쳤다. 안해가 울자 나는 마치 실어증 에 걸린 사람처럼 입이 굳어져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저 속으로 내 운명에 저주를 퍼부었을뿐이다.
풍파가 없는 항해가 단조롭더라도 내 생활의 대해에는 다른 풍랑이 없기만 바랬다. 어긋날번했던 내 사랑의 피난처는 바로 안해의 드팀없는 순정이고 내 삶의 보루가 아니겠는가? 이제 고난이 심할수록 안해가 고마워서라도 내내 이렇게 가슴이 세차 게 뛸것이다. 백발이 성성하도록 처음 만날때 그 혹하던 마음을 식히지 않을것이다.
안해로 말하면 빈궁이란 단어의 의미에서 기아란 단순히 먹거리가 없는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갈망이고 알몸이란 단순히 입을 옷이 없다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의 박탈을 의미할것이다. 돌아갈 집이 없다는것은 몸을 뉘이고 휴식할 곳을 가리킬뿐만아니라 배척과 기시를 가리킬것이다. 빈궁과 기아외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고독과 적막이다. 고독역시 일종 정신적기아이며 따스 한 사랑에 대한 주림을 의미하고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시끌벅적해도 신혼생활은 의연이 인간성 그대로 엮어진다. 성유희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둘이만의 아름다운 악장을 감상하며 격동적이고 조화롭고 은밀하며 뜨거운 도가니속에서 삶겨진다. 사랑의 위대한 힘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다. 험악한 세월속에서 어렵게 이루어진 우리의 사랑,그야말로 눈물젖은 가연이였다.
1978년 10월 26일 (2014년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