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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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    “롱간술의 심전(心战) 댓글:  조회:5483  추천:3  2014-05-17
                                                    “롱간술의 심전(心战)                                                                 진 언       “롱간술의 심전ㅡ(捣鬼心传)”이란 로신선생의《남강북조집》에 수록되여있는 잡문이다. 심전(心传)이란 본디 불교선종의 용어인데 글을 남기지 않고 경권(经卷) 에도 의거하지 않고 오로지 스승과 제자가 말없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하는 전법수업을 가리르킨다고 주해를 달고있다. 로신이 이를 제목으로 단것은 당시 통치계급의 롱간술을 배웠다는것을 의미한다. 졸문은 이를 본따서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롱간술에“심전(心传)”을 심전(心战) 으로 바꾸고 좀 다른 화제를 엮으려 한다.     일단 화제가 로신의 잡문으로 시작되였으니 서두를 인용해 보자.“중국사람들은 기괴하고 요망스러운것을 즐겨하는 습성이 좀 있어서 보리꽃이 피는것보다 고목에서 빛이 나는것을 보기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기실 그들은 보리꽃이 피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것이다. (략)“에서 고목에서 빛이 난다”는것은 미신관념이니 두말할것없고 보리꽃이 피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것은 롱간질은 잘해도 아무실정도 모르는 자들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래서 롱간질할 얄팍한 심사가 생겨나는것이다.     롱간(弄奸)질은 글자에서 짐작되다싶이 다른 사람을 속여 피해를 주는 간사한 짓거리로서 교활함, 사악함, 간사함, 간계 등을 떠올리게 하는 재수없고 불쾌한 의미의 단어이다. 롱간질은 그처럼 허다한 온갖 “질”치고는 제일 나쁜“질”이라 할것이다. 하건만 인간이 문명개활할수록 이를데없이 간특해지면서 롱간의 “심전(心战)”에 사활을 건듯이 한사코 롱간질하다보니 이골이 튼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로신은 글에서 “…그러나 사람이 하늘보다 롱간을 썩 잘 부린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재주도 한도가 있는것이다. 그것은 롱간을 부리는 묘리는 절대로 발휘하지 말아야 하는데 즉 함축성이 있어야 하는데 있기때문이다. 발휘하기만 하면 롱간한 노릇이 밝혀지고 제한도 생기므로 함축적인것보다 심원하지 못하여 영향도 그때문에 희미해지는것이다. 일리가 있으면 일페가 있는 법이다. 내가 한도가 있다고 하는것도 이를 두고하는 말이다.”라고 롱간질 일반에 대해 풍자하고있다.     롱간질은 뇌리에서 조작되는것이지만 말, 특히는 글로써 잘 체현된다. 그것이 장편대론이든 토막글이든 롱간질을 간파하였을 때는 로신의 응전술을 리용하면 가장 좋 을것이다. “…단죄하고 규탄하는 공개된 글은 그 힘이 왕왕 속삭이는 귀속말보다 못한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분명한데 하는 속내를 짐작할수 없기때문이다. 가령 그 때 락빈왕이 대중앞에 나서서 눈살을 찌프리고 머리를 저으며 ‘나쁘기 그지없다. 나 쁘기 그지없다.’라고만 하고 어째서 나쁘다는 말을 실례를 들어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효력이 그 글보다 나았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 금과옥조이기때문이다.     이런 응전술은 기묘하다. “…속내를 모르게 하는 위엄은 사람들을 저상케하며 속내를 모르게 하는 묘방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게 한다…롱간에는 술책이 있고 효과도 있지만 그것은 한도가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써 큰 일을 성사한 사람은 자고로 없다.”고 롱간질의 악습을 사정없이 질타하였기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롱간질하는 사람에게는 필경 치명적인 타격이 될수밖에 없다.     누군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의론보다 더 재수없는 일이 딱 한가지가 있는데 바로 아무도 당신에 대하여 의론하지 않는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글을 써서 사회에 내놓은후 평가는 둘째치고라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허허 사막에서 저혼자 목쉬게 웨친후 씁쓸하고 싱거운 허탈감에 빠지는것과 같은 심정일것이니 말이다.     대천세계에 벼라별 사람들이 다있으니 평판도 제나름일것이고 중구난방이여서 종잡을길 없거니와 듣그러울것이다. 여론마당은 명칭그대로 의론이 정상적현상이지만 이미 내놓은 글이 변질될것도 없고 그렇다고 하늘이 무너져 작자를 매몰시킬 일도 아니니 마이동풍은 불가하되 스스로 성찰을 앞세우는것은 바람직하다.        프랑스 계몽기 사상가 볼테르의 후대 작가가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해 박해받는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했다.” 며 표현의 자유의 관용성을 강조한바있다. 미국의 련방대법원 판사였던 홈즈란 사람이 “사상의 자유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다” 라고 하였는데 아무나 미칠수 있는 사상경계는 아니지만 심히 교훈적이다.     닉명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도 사상표현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되 형식이나 결과나 암전이다. 설사 명중하였더라도 암전을 쏘는 자는 어디까지나 광채롭지 못한 “궁수”이다. 그렇게 일종의 심리롱간을 부리지만 자칫 자신의 밑창을 드러내게 된다. 그만큼 닉명으로 롱간술을 발휘하기만 하면 롱간한 노릇이 밝혀지고 제한도 생기므로 계발이나 조언으로서의 영향력은 거꾸로 되고말것이다. 로신의 말처럼 “일리가 있으면 일페가 있는 법이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우리로 하여금 불쾌하게 하는 일은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일일때가 많다. 우리는 거대한 코끼리는 피할수 있어도 파리는 피할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이것저것이 이래저래 한이 될수도 있다. 중국작가 장애령은 인생에 세가지 큰 한이 있는데 첫번째 한은 붕어가 가시뼈가 많은것이고 두번째 한은 해당화가 향기없는것이고 세번째 한은 “홍루몽”이 미완성작이 된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천층만층이니 품게 되는 한이 대동소일할수 없을진대 이것저것 한이 되더라도 남을 탓하다보면 스스로 심리혼란을 다잡지 못고 전전긍긍하게 될것이다.     인생은 마치 담담한 한고뿌의 물같지만 설탕을 넣으면 달착지근해지고 소금을 넣으면 짧짤해지고 고추가루를 풀어놓으면 맵싸하게도 된다. 세상에 동그란 네모꼴이란 없듯이 완전완미한것은 없다. 그만큼 자신의 완미함을 바랄수 없듯이 남들이 완전완미하기를 바라는것은 되우 무료한 일이나 롱간술의 심전은 무서운것이다. 세사람만 우겨대면 호랑이도 만들어낼수 있고 도깨비로 둔갑시킬수도 있다지 않는가!     얽혀도는 세상이라 회피하기 어렵지만도 공연히 사사건건 관여하고 시시비비에 열중하면 생활내용이 다양해질것이나 이것저것 아파하기엔 우리네 인생이 너무짧다. 무서운 롱간질의 심전에서 아파하더라도 의기소침해지지는 말아야 한다. 고소원이면 불감청이라고 혹 롱간술의 심전이 성찰할 계제나 반면교재도 될수도 있으니말이다.     관용과 아량은 성격에 뿌리를 두고있지만 성격이 좋다는 평판을 들을만큼 호방한 성격의 사람이 작가로서는 적임자가 아닐수도 있다. 그 반증으로 작가는 흔히 고지식한 생활의 “약자”이기 쉽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풍부한 내심세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모종의 고통으로 그늘져있기가 십상이다. 조금 신경질적이거나 심지어 심적문제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전(心传)” 은 바랄수 없고 “롱간술의 심전 (心战)”에 성찰로 마주하면 일패도지는 하지 않을수 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해 박해 받는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했다.”는 사람은 성자의 사상경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것이다. 잡다한 롱간질로 운행되는 세상이니만큼 롱간술에 능한 자들이 지천이다. 그러나 롱간질로 일시 득세할수도 있겠지만 나중엔 그저 그러고 말것이다.     “어이하여 청산속에 사느냐 물으면 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아도 마음 스스로 한적하여라, 도화꽃 류수에 흐르는 별유천지라 인간세상 아니여늘. (問予何事捿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라는 리백의 명시로 횡설수설을 마무리하면 얼추 뒤끝이 맺어질지 모르겠다.       2014년  5월 10일
451    시조 (본대로 느낀대로 31-60) 댓글:  조회:5593  추천:1  2014-05-10
1. 자고로 莫须有도 죄명이 되얏스매 코걸이 귀걸인가 귀걸이 코걸인가                          죄인을 만들어내여 재판하는 호로묘라                         2. 유달리 키가 크면 구부정해 몸낮추고                          력발산 아무때나 힘센자랑 안하는데                          난쟁이 높은데 서서 꺽다리라 으시대네                         3. 쥐×도 몰랐다는 옛말이 있더라만                          자신도 모르면서 허풍치니 어찌하오                          관둬라 용렬한자가 젠체하는 세속을                         4, 리념이 무엇이고 주의란 뭣이관듸                          혈안에 티각태각 서로잡을 칼을가니                          물보다 진한 피건만 불구대천 웬말이요                          5. 위선자 명인되고 패류가 호걸되고                          악인이 득세하니 세상사 알쏭달쏭                          두어라 릉연각상에 진짜얼골 뉘일고                         6. 수림에 우난새가 류류별별 각양인데                          제사연 自音으로 우짖으니 노래런가                          우리도 自律로 우는 새같으면 좋으련   7. 앞집개 멍멍하니 뒤집개도 왕왕하네    목쉬게 짖어대도 자음은 없는거냐    어덩덩 남의 장단에 춤추면 저같지라                         8. 강산이 결딴나니 청청하늘 보이잖네                          티끌이 몽몽하니 홍진세상 가관일다                          해맑은 하늘기운을 조물주야 돌려다오                         9. 하늘이 높푸르고 말살찌는 호시절에                          논벌에 황금물결 덕이에는 과일향기                          페쇄된 농경사회도 풍년들어 흥그럽네                        10. 첩첩한 험산준령 만리성이 주름잡아                          구름속에 굽이쳐 하늘끝에 닿았는데                          흉노병 울바자넘어 중원땅을 휘몰았네                         1. 석양은 나무끝에 댕그랗게 올라앉고                        지평선 아득하야 하늘끝에 닿았는데                        이몸은 허허공중에 티끌보다 미소해라                       2. 강건너 불구경에 손짓발짓 하리오만                        남북의 동족상쟁 아짜아짜 뼈저리다                        아서라 녹쓸은 리념 자승자박 되리라                       3. 핵우산 펼쳤던들 안전지대 어드메냐                        불구름 치솟으면 대천세계 넓을손가                        자타를 훼멸시키는 인간유희 황당해                       4. 매미가 요란해도 한곡조라 무료한데                        한가한 부채질에 무더위가 기승일세                        관두소 이상기후에 지구촌 도가니라                       5. 황페한 시골마을 인적없어 한적하고                        돛개짐승 우는소리 하품하는 개도없네                        주인장 랭수좀 주소 앗차 실언 빈집이네                       6. 도시라 여기메는 매미소리 자최없네                        록음이 없어서냐 자연정취 말째이냐                        매미도 도시문명이 귀찮은가 보오이다                       7. 시골의 빈집마당 쑥대밭이 엉성하고                        참살구 기다림에 옆구리가 터졌구료                        쓸쓸히 돌아서나니 무주공산 마중오네                       8. 사계절 우는소리 대자연의 절주로다                        새우는 봄이가면 우뢰우는 여름오고                        벌레가 울던 가을끝 삭풍불어 동삼이라                       9. 사계절 엇바뀌는 풍경선을 누가긋냐                        봄산은 아물아물 울울한 여름산천                        불타는 추색의 정취 생각잠긴 겨울강산                      10. 명산은 관광지라 새소리도 쫓겨가고                        발길이 잦은곳에 산천초목 몸살하네                        산신령 갈곳을 몰라 천방지축 하느니                                                                    1. 하늘은 창망해도 자사자리 설곳없고                        대지는 넓었어도 사리사욕 담지않고                        일월은 밝디밝아서 어둔구석 없노라네                       2. 구름이 드리운들 하늘마저 변색하며                        해달이 엇갈린들 광명이야 빛바래랴                        우주의 운행 거슬린 령장들만 징벌받지                       3. 酒家에 네온등이 먹자만세 꼬신다만                        여느때 즐비하던 호화차들 자취없음                        식음도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알괘는고                       4. 석양에 홀로서서 갈곳몰라 바장이다                        돌아설가 하는차에 걸음잡혀 바라보니                        락조가 하도 뜨거워 식은가슴 끓이네                       5. 시새운 먹구름이 일륜명월 가리우네                        하여도 구름속에 웃는달을 어이릿고                        인간촌 시기질투도 저같지를 아니한가                       6. 명리에 혈안되여 무고자도 잡아들여                        고문에 인간학대 천직인듯 하시다가                        드대어 같은꼴 되니 아비규환 처절할사                       7. 꿈자리 사나워도 이생에만 꾸는것을                        긴밤이 지겹다고 푸념질을 하지마라                        월색이 처량하던들 저승에는 없으매로                       8. 청풍은 천지간에 차넘치는 정기런가                        거칠것 없노매라 오고감이 스스럽네                        浮云의 부귀영화도 바람같더 하리라                       9. 소나기 요란해도 귀를 막는 날새없고                        번개가 찢기여도 눈을 감는 조류없네                        구린뒤 켕긴 이들만 전전긍긍 하오리다                      10. 가랑비 왔노라고 연못우에 점선찍고                        미풍은 가노라고 긴머리칼 흩날리네                        민초라 미천한 목숨 흔적조차 없으리라          
450    길을 따라 나는... 댓글:  조회:4773  추천:0  2014-05-09
                                                                길을 따라 나는 …                                                                      최 균 선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하면서 먹거리를 찾아 헤매일때는 아직 길이란 없없다. 길은 문명과 함께 시작되였고 그 속성은 열림이였고 사통팔달이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길이란 막힐수도 있다. 그래서 궁지란 말이 만들어진것이 아닌가싶다. 창창 열린 바다는 가는곳이면 다 길같지만 암초를 피해서 선정한 길이 따로있고 철길도 무한히 뻗어날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부설될수 있는 곳에만 부설된다.     산길, 대통로, 고속도로…그 모든 길은 인간의 두발이 본능으로 낸 흔적이 아니라 대자연에 그린 일종의 문명의 부호이다. 인간은 대자연을 정복하며 벼라별 부호를 수없이 끄적거려놓았다. 그것을 누군가는 인간의 언어라고 칭하였고 인간의 속성이라 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가는곳에 길이 생기였고 길이 열린곳에 하나 또 하나 문화의 새 언덕이 나지게 되였다.      길은 과거로부터 흘러온것인가? 미래로 굽이쳐가는것인가? 길이 리별의 포물선이라면 만나는 길은 집함점인가? 귀가와 탈가, 리향과 귀향, 인간과 사회의 부딪침에서 갈래갈래 찢어진 그 오리들이다. 길은 유혹인가? 기다림인가? 길은 유혹이고 손짓이기도하다, 일송정기슭에 태줄을 묻은 나의 동년의 유혹은 아지랑이 흐믈거리는 칼바위 벼랑길이였고 저녁때거리를 마련하려 장마당에 가신 큰엄마가 무엇인가 머리에 이고 룡문교를 건너 어스름을 밟으며 돌아오실 강변길이였다.      길은 동경을 그린것인지도 모른다. 길없는 길은 해란강 얼음판을 언발로 미끄럼 타고 철교를 넘어,옛그날 룡드레우물가의 골목길 에돌아 참으로 가고프던 “3.1학 교” 로 나를 불렀다. 화룡행 기차의 긴 기적소리가 저녁해를 흔드는 퇴교길에서, 여름방학 허청리를 지나 20리 수레길로 탈탈 먼지털며 걷던 길에서 부채골의 누님네 집울안에 무르익은 오얏나무의 부름을 들었다. 입하나 덜려고 방학마다 눈치밥 먹으러가면 보리밥을 가득 오이랭국에 말아주며 여윈 내등허리를 도닥여주던 사돈할머니의 주름잡힌 웃음이 배부름이였다. 그래서 누님이 사는 부채골길은 부름이였고 희망이기도 하고 기다림이기도 하였더랬다.     학교를 쉬는 날 얼씨구 찾아올라간 칼바위에서 비암산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화룡벌을 주름잡던 신작로는 우물안 개구리이던 내게는 넓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 그 자체였고 어서오라고 휘젓는 손짓이였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배부를수 있는 곳이면 어데든지 정처없이 가고픈 길이기도 하였다.    수림속 산길에는 노루가 뜀박질하는 길이있고 산토끼가 곤두박질하는 길이 있듯이 인생에도 각자 걸어야 할 길이있다. 민초로서 개개인의 삶이 이질적일수는 없어도 공동배수로 설명될수 있는 계산식은 아니다. 누구의 삶에나 꿈과 현실, 희망과 절망, 웃음과 눈물, 명상과 광기 등으로 얽히고 얼룩져있다.     나의 반평생이 시들어버린 향촌의 길은 내 삶을 찌들게 한 고난의 행군길이다. 호미메고 황혼빛 물들어가는 덕이를 내릴때 먼지를 피우고 지나가는 마지막 뻐스가 모아산 고개너머 사라지던 신작로는 내 갈망을 늘여갔다. 길은 희망을 따라 떠나고 그리움을 앞세우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느긋한 마음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길은 나에게는 타향만리에 널린 내 형제를 그리던 리별의 연장선으로 침묵하면서 만남의 감탄호를 찍어주지는 않았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래도 돌아오는 길이란 언제나 편안이 깔려있는 법이다.     당신은 소잔등에 깔단을 얹고 해저무는 논길을 터벅터벅 걸어본적이 있는가? 일밭에서 돌아오는 농부의 길은 고달픈 휴식이 기다리는 길이고 밝는날 새벽같이 일어나 일밭에 나가며 하품이 기지개켜는 길이였다. 벼이삭 고개숙인 논길에 농부의 재미가 누워있고 시골샘터로 가는 단풍든 숲길에 시골사람들의 소박함과 풋풋한 인정이 숨쉬고있음을 느껴본적이 있는가? 산과 고개를 펑 뚫고 일직선으로 뺀 고속도로 에서 자가용을 질주하며 속도의 쾌감을 느낀다면 길의 견고함을 잘알수 있겠는지는 몰라도 힘들게 걸어야 하는 인생길의 끈기를 오래 짓씹을수는 없을것이다.     한겨울 새벽바람속에 소수레몰고 이듬해 쓸 보막이용 가둑나무를 실러 동냥골로 가던 그날의 두메길은 너무나 멀었고 무거운 나무짐지고 모아산 비탈길 내리던 저녁길은 인생수업 그 자체였다. 모아툰을 떠나 영성학교의 교단을 바라고 자전거를 달리던 그 굽이길은 그렇듯 울퉁불퉁하였고 불안한 길이였다. 그리하여 내가 한평생 걸은 길들은 그대로 삶의 희로애락, 희망과 좌절, 득의와 실의의 자국이 얼룩진 길이였다.     길은 같은 길이여도 물동이 이고 걷는 색시들 똑같은 걸음새로 걷지않듯이 인간군은 일매진 자세로 인생길을 걷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감성을 더 앞세우고 어떤이는 리지를 앞세운다. 어떤이는 아무길이나 따라서 떠돌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뿌리박은터에 호박이 넌출을 뻗듯이 울타리를 맴돌며 순리대로 살기좋아한다.     봄, 진달래웃는 고개의 길은 젊은이들의 걸음처럼 경쾌할수 있고 민들레꽃씨 락하산을 타는 들길은 처녀애들의 웃음처럼 밝을수 있다. 이처럼 같은 길이라도 삶의 긍정적인 화폭을 그리는 굵은선일수도 있지만 불행과 슬픔이라는 삶의 그늘이 어둡게 드리워있는 오불꼬불한 연장선일수도 있다.     이 지구촌에 갈래갈래 뻗은길은 누구에게는 꿈길이고 락망이 돌아오는 길일수도 있다. 아무튼 길은 인간이 지구에 남기는 이런저런 락서이다. 인간에 의해 금이 그어진 길이라는 선을 따라 욕망은 동분서주하지만 문화라는 꽃을 피우는 인간들을 말없이 고이받들어가고 있으니 또 그런 길이야말로 성스럽지 않으랴,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리고 인간에 따라 길은 애절한 노래일수도 있고, 서정시가 될수도 있고 서사시가 될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길에서, 아메리카대륙을 그물처럼 누비던 인디안인들의 오솔길에서 인류의 비극을 읽을대신 현대화고속 도로에서 문명의 서사시를 읽는다면 그것은 눈물어린 아이로니이리라,     대명동, 뽀뿌라나무 그늘진 두만강가 숲길에서 강건너 마을로 통하는 수레길을 눈빗질하며 서러운 고국애를 느끼였던 내가 너무 쎈치멘탈한것이였을가? 산천을 누비며 꿈을 꾸는듯한 마을들을 이어놓은 향촌의 옛길들에서 서정을 느낄수 있었던것도 인제는 숲속으로 숨어버린 산길처럼 서글픈 추억의 오솔길이 되였다. 그대신 바쁘고 시끌벅적한 대도시의 실꾸러미처럼 엉킨 골목길에서 인간이 자연과 박자를 맞출수 없는 비인간화된 현대문명의 삶을 체험한다면 내가 너무 보수적인것일가? 인간의 냄새가 풍기는 길을 묻어버린 인간은 우습게도 이제와서 산길을 선호하니 너무나도 리기적인것은 아니란 말인가?     내 생각이 당치않더라도 버드나무 그늘진 해란강뚝길을, 벽계수 돌틈사이로 흐르는 대동골 시골길을 하냥 걸어보고 싶어진다. 명상적이면서도 청청한 민요가락같은 향촌의 길에서 논과 밭, 산과 계곡, 구름과 산바람, 자연의 친근하고 고르로운 숨소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느껴보는것은 고달픈 꿈을 다독이는 소야곡이기때문이다.     시대의 현대교통의 성과를 과시하고 속도의 쾌감과 더불어 길은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넓어진다. 그러나 그 옛날 수레길들에 추억이 끌리고 미련을 흘린다면 그것이 곰팽이낀 랑만이나 시대락오자의 거부감때문인가? 아니다. 자연과 길의 조화로운 만남속에서 살다가 가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다.                                                              2007년 7월 10 일             (연변문학 2014. 제5기 )
449    가재는 게편인지라 댓글:  조회:5718  추천:2  2014-05-05
                                             가재는 게편인지라…                                                          진 언       가재는 게(蟹)로 보고 “석해(石蟹)”라 한다. 가재는 새우와 게의 중간형으로 뒷걸음질을 잘하는 특징이 있다. 게는 “거스르는 이”의 준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옆으로 걸으나 뒤로 걸으나 보편적인 걸음을 거스르는것이다. 그래서 '가재는 게편' 이라는 속담이 유래된것인가? 속담은 모양이나 형편이 서로 비슷하고 인연이 있는것끼리 서로 잘 어울리고 사정을 보아주며 감싸주기 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초록은 한빛이라는 말도있다. 우리 연변농촌에서는 오리 오리무리를 따른다거나 다리부러진 노루 한곬에 모인다거나 다같은 통속이라는 의미에서 한바지가달안에서 논다는식의 토속적인 말을 잘 썼다.     얼핏 떠오르는 력사사실을 례로 들어보자. 악명높은 일본놈들의 “731부대”의 창설자의 한놈이자 생체실험을 한 괴수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란 놈을 패망후에 모든 연구자료를 제공받는 대가로 미군이 보호했다. 미국은 점점 확대되여가는 랭전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731부대의 기밀자료를 전쟁범들과 거래했던것이다. 뉴른베르그에서 독일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있는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철저하게 무시되였다. 대부분의 일본전범들은 불기소 처분되였던것이다.     수십명의 독일전범은 사형당하거나 투옥되였지만 1960년이후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일본인 과학자는 단한놈도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2차대전후 프랑스는 나치스독일 점령아래서 부역했던자들을 2,071명을 사형했으며 39,900 명을 판결했다. 벨기에서는 55,000명, 네덜란드에서는 50,000명이상 징역형을 내렸다. 다른 유럽국가들도 수만명에 이르는 부역자들을 처단하여 다시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였다. 이는 죄는 지은데로 간다는 순리에 따른것이기도 하였다.       2차 대전뒤 150여개의 독립국이 생겼는데 핵심권력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사람들이 잡았다. 사실 미국과의 협정아래 미국의 전범수사 기록은 전혀 출간되지 않 았던것이다. “731부대”의 대다수 살인악마들처럼 이시이도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고 도쿄대학학장까지 력임했다. 미국은 저들의 장원한 전략적구도를 그 리며 일컬어 황군이 반인류적인 만행을 저지르도록 종용한 자가 천황인데도 미국은 그를 전쟁범의 괄호밖에 고스란히 모셔두었다.     진주만 기습공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죠 히데키이하 일곱명의 A 급전범이 도쿄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것이 1948년12월23일이였는데 똑같이 A급전범으로 체포되여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여있던 기시노부스께는 처음부터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뿐아니라 도죠 등이 처형된 다음날 자유의 몸이 되였다. 그자는 만주는 “내작품’”이였노라고까지 으시댄 악명이 자자한 놈팽이였다.     기시노부스께의 다음과 같은 “옥중일기”가 그것을 증명하였다.“랭전은 조만간 열전으로 변할것인데 비록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고배를 마셨다고는 하나 동양에서 으뜸가는 소질을 지닌 민족으로서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맡아야 할 세계사적임 무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식견과 포부, 용기와 결단력을 겸비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출현이 기다려진다. (1947년 9월20일)”     세월이 지나니 “아니나 다를가?”의 현실이 펼쳐졌는가? 아니면 오래전에 벌써 해두었던 계산서의 두루말이가 슬슬 풀리는걸가? 요즈음 미국의 오바마의 언동에서 그것이 확증되였다. 오바마는 4월 23일, 요미우리(讀賣)신문과의 서면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섬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훼손하려는 그 어떤 일방적 시도에도 반대한다” 선언했다.     일본과 중국이 령유권을 놓고 분쟁하고 있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면서 일본령토라고 쐐기를 박는 언동이다. 일본에 대한 지지가 로골적으로 도를 넘어서고있다. 중국을 자극하고 일본을 위하는것에서 최근 이보다 더 적라라한 도발은 없다. 미국의 남에게 공개할수 없는 의도는 무엇인가? 실질은 늑대와 승냥이의 야합인것이다.     오바마는 대일 찬사에서 한술 더 뜨고있다. “집단자위권행사에 따르는 제약사항을 재검토하는것을 포함해 일본의 방위력을 강화하고 미군과의 협력을 심화하려는 아베 총리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아베가 추진중인 집단자위권행사에 대해 오바마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에 한 인터뷰라고 하지만 가히 드러내놓고 하는 대찬사가 아닌가? 파격적이다. 미국의 력대의 대통령가운데서 일본의 집단자위권행사에 드러내놓고 지지를 표명한 대통령은 하나도 없었다.     미국의 신문리론가권위인 맥클린교수는 일찍 개가 사람을 물어놓은것은 뉴스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물어놓은건 뉴스라고 하였다. 가재가 게편을 하고있다는것은 개가 사람을 물어놓았다는식의 뉴스이지만 “일본의 재무장”이라는 개념을 현실적 으로 상기시키고 있어서 뉴스로 되고있다. 이는 마치 미국이 2차대전 종전후 무장해 제시킨 일본을 이제 서서히 재무장시키기로 방침을 결정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시아중시정책으로 대외정책을 수정한 미국이 아태지역 패권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할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로 예상해볼 수 있는것이 일본의 재무장이다. 아태지역에서 패권을 쥐려는 미국이 자신의 리해 관계와 어떻게든 재무장을 실현하려는 일본의 리해관계를 일치시키려 하는것이다. 일본의 집단자위권행사준비 움직임을 두고 오바마가“국제안보에서 큰 역할을 맡고자 하는 일본의 의욕으로 규정했다는것은 붙는 불에 키질인것이다.     민주주의리념을 가장 요란하게 웨치고다니는 나라가 미국이다. 초대강국이라 불리우는 미국은 각종 전쟁에 개입하거나 사단을 일으켰고 “세계평화를 위해” 서라는 미명하에 세계적인 분쟁과 폭력의 원흉으로 종횡무진하고있다. 합법과 비법, 허용과 금지를 누구 마음대로 정하는가? 체력단련을 하는데 허용되는 동작과 금지된 동작이 있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 동작이 있고 맘대로 해도 되는 동작이 있던가?     미제는 법이 아니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법이다. 과거 리념대립의 시대에는 실익보다 명분, 리념이 중요했으나 현시대는 리익을 최선으로 내세우기에 미국이 공공연히 일본편에 나서고 있는것이다. 러셀 미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는 2014년 3월 4일 일본의 집단적자위권행사가 필요한 핵심적인 리유로 미사일 방어체제를 제시했다. 일본이 집단적자위권행사를 주장하고 있는것도 사실은 미국이 종용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처럼 “가재는 게편”이라는 속담이 주는 역설적인 계시는 심각하다. 문명, 정의라는 구호가 얼마나 자가당착적이고 비리성적인 구호인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현시대, 지구촌엔 정의로 포장된 힘의 론리밖에 없다. 외국동화속에서 마귀할머니나 양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가 바로 미국이다. 요즘 미국국방장관 척 헤이글은 11일 오 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일본방위상과 회담을 하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수 있도록 한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지금 늑대가 승냥이, 이리를 끌어들여 제뒤에 줄을 세우고있다. 그러나 저들 말마따나 영원한 친구란 없는법, 가재가 게편을 하여도 게를 똑바로 걷게 할수는 없다. 영원한 적이 없다는 론리대로 승냥이를 살찌우는데 장차 실익에 금이 간다고 할 때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것인가? 결과 예상되는 편짜기이다.                                   2013년 7월 1일ㅡ2014년  7월 11일              
448    《놀부학원》 학생모집공고 댓글:  조회:5756  추천:0  2014-05-04
                                   《놀부학원》 학생모집공고                                                     최 균 선       교단을 떠난후 아무 할일도 없고해서 쓰잘것없는 잡궁리들을 이리저리 끄적거리며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던차2004년 8월 8일 이딸리아의 북부도시 오스타에서 세계최초의 게으름뱅이 경험교류대회가 열리였다는 뉴스를 보고 생활의 활력을 찾은듯싶었다.    대회에서《라태자선언》을 발표했는데 세계적행사로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매년 민족대표 50명을 추천할수 있다는 구절에서《놀부속성학원》을 세울생각이 문득 떠올랐던것이다. 별로 승산있는 구상은 아니지만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던 사립학교들처럼 학생래원의 고갈로 걱정할 일만은 없을것 같다. 신주대지에 지천으로 널린게 라태한자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해마다 열릴 그 대회에 보낼 대표선발이라는 미명하에 모집광고를 낸다면 필경 대성황리에 초생사업이 진행될것이다. 큰거리, 작은 골목의 그늘진 곳곳에 광고 를 붙이면 명주바지에 도꼬마리가 달라붙듯이 할것은 물론《농부일생이 무한 (无闲)》이라던 농부가가 지금은《농부일생이 유한이로세》로 고쳐불려지니 버덕마을이든 시골이든 지원자가 많을것이 당연하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나는 다 닳아빠진 붓을 찾아내여《학생모집을 알림》이라고 일필휘지하였다. 광고라는 두글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원장과 교원대오를 밝혀야 하는 대목에서 붓이 방아를 찧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당분간 명성높은 인재를 등용할수 없으니 내가 림시원장을 맡아야 할것같다. 나로 말하면 학문적으로는 아무 명성이 없으나 게으름병이라면 원근에 꽤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말이다.     쉽게 한두가지 례를 든다면 발가락에 무좀이 먹는 한여름에도 일주일건너 한번 발을 씻으나마나한데 그나마 마른수건으로 닦아낼 때가 푸술하다. 머리도 두달에 한번 감으면 고작이고 목욕은 더울 때 물한대야면 다하고도 남는다. 드믈게 치솔질을 해도 좌우로 흔들기 귀찮아서 숫제 턱을 두어번 흔들고 등이 가려워도 벽에 고정해 놓은 등긁개에 등을 대고 앉았다섰다하는 수준이니 원장이 될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리론강의와 실습지도를 할 교수들을 초빙하기가 쉽지 않다. 로신선생의 아Q씨가 적격인데 어째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원혼이 됐으니 청할길 없겠고…덧없는 세상이지만 게을러서 서두르지 않고 하잘것없는 신세이지만 게을러서 변통을 못하고 지낸 리규보의 그 거사같은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배달족대표로 추천하련만 죽은아이 자지만지는격이라. 교사대오건설은 차차 보기로 해야겠다. 나는 다시 붓을 날리였다.     모집대상:     게으름병이 있다면 공농상학, 정계, 교육계, 의료계통 등 각계통들과 사회구역의 모든 성원들이면 다 등기신청할수 있다. 구체대상으로 말한다면 기계를 돌린채 낮잠을 자다가 들통이난 사람, 직장에서 도박놀다가 제명당한 사람, 까다로운 완성품 질검사도 늘 눈감아버리는 사람, 일에는 베돌이, 먹는데는 악돌이, 팥죽함지에 코가 빠져도 입을 벌리기 귀찮아하는 사람, 힘든 일은 땀이나서 싫고 경한 일은 푼돈벌이라고 싫다는 사람, 쌀독에서 바가지긁는 소리가 나도 뺀낫자루같이 장기판이나 도박판을 쫓아다니는 백수신사, 걷기도 싫고 뛰기도 싫고 걸음마다 일마다 다 귀찮아 하는 구제불능의 무위도식자들… 이 가장 적격의 대상자들이다.     농촌의 경우, 벼모기르기가 귀찮아 이집저집에서 빌어다가 농사짓는 사람, 한뙈기 터밭에 범이 새끼치건만 호미를 대지 않는 사람, 후치질이 처졌는데도 문구장에서 행복하게 웃는 사람, 비가 새건만 지붕에 올린 벼단이 썪는줄 모르는 사람, 울바자에 개대가리 나들어도 돌멩이를 주어다 얼추 막아놓는 사람…     학교로 말하면 숙제를 밀렸다가 친구것을 베껴내는 학생, 명작한권을 일년두고 다읽지 못하는 대학생, PC방에서 밤을 패우고 수업시간마다 게침흘리는 고중생, 훈련문제나 작문숙제를 심열하기 싫어서“검사”두글자와 날인을 하고마는 교원제씨들, 정규수업에는 나그네말죽을 먹이고 자기가 꾸린 보도반에 끌어들이는 독직자 등…      정부기관으로 말하면 차물 몇고뿌, 신문 한장으로 반나절을 보내는 사람, 마작판에서는 초병의 혜안처럼 빛나도 회의장에선 기웃뚱하고 코노래하는 사람, 먹을알이 없으면 연구타령 하다가도 안속챙길 일이면 사타구니에 비파소리를 내는자, 사무실 서가에 와자자하게 진렬해 놓은 책들은 한페지도 읽지 않으나 별도로 꾸린 휴식실에서《호색경》은 열심히 파고드는 서문경류의 위군자, 상급앞에선 입다물새 없다가도 하급은 웃음으로 대하기를 싫어하는 고리삭은 관료들…      과정안배표:      본학원에서 가장 인기학부는 현대행정관리계인데 그중 비서문직의 비결일것이다. 여러가지 공문작성과 령도의 연설고를 쓰는게 전업인 비서로 말하면 꼭 게으름의 묘책에 무릎을 칠것이다. 이를테면 매번 미사려구, 류행어, 텅빈말, 틀에박은 말, 큰소리치기기법을 전수하는 대목이다. “××시는 세계로!세계는 ××시로!”라는 구호를 서두로 한다거나 “관념을 갱신하여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든가 “또 한층 새로운 차원에로 비약했다.”거나 “다시 더 새로운 창신의 광휘”등의 말은 아무 신문에서나 옮겨올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비결은 일거량득이다. 기실 게으름을 피운것이지만 령도에서는 필력이 강하고 문채가 빛난다고 치하할것이다. 조사연구가 필요할 때도 반드시 령도에서 중시하는 단위로 내려가야 한다. 그곳 사람들은 상하가 다 말재주가 있을것이여서 입술놀림과 함께 눈섭이 춤출것이고 말이 청산류수처럼 쏟아져 나올것이다. 어느것이 진실이고 어느것이 가짜인지 분간할수 없을만큼 경험들이 조리정연하게 회보될것이다. 그경우 일호차착이 없이 그대로 리용하고 신문을 적당히 참작하면 그보다 쉽게 엮어지는 조사보고가 없을것이다.     매번 재료를 쓸때면 사무실이 번잡하여 깊이 사색할수 없다는 핑게를 둘러대고 집에서 쓰도록 조건을 창조한다. 독촉이 오면 수정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다시 며칠후 독촉이 오면 다시 윤색하는 계단이라고 대답한다. 두어시간 정신을 집중해 완성해 놓으면 큰대자로 누워 낮잠자도 좋고 음악을 흔상해도 좋고 아가씨를 찾아 사우나로 가도 되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걸직한 육담으로 시간을 수식해도 누가 뭐라 말할수 없다. 이런 게으름이야 말로 신선놀음이 아닌가?     혹시 창신성이 수요된다면《공문서사작대전》을 내놓고 서두방식이나 문장결구 요구대로 쓰면 랑패없다. 번마다 생신한 맛이나게 작성한다는것은 진정 문필이 뛰여나고 성근한 비서들의 몫이지만 지금 세월에 누가 황소처럼 미욱하게 일한다던가? 게으름을 피울줄 모르면 그게 바보스러운 사람이다. (이하 략)      특수생모집조건:      본학원에서는 다음 부류의 특수생을 우선모집한다. 앞에서 마른 비행기를 잘태우는 부하를 선호하는자, 책보기도 싫어하고 진취심도 없는자, 여러가지 훈련반에 대신 보내면 열심히 필기하는자를 중용하는자, 수업강당에 얼굴 한번 내밀지 않고 시험한번 치지 않고도 석사, 박사증을 획득한 뛰여나게 머리좋은자……     리규보할아버지가 량심을 찍는 도끼로는 녀자가 첫째요, 내장을 상하게 하는 약으로는 술을 가리킨다 하는데 대낮이면 위엄이 뚝뚝 흐르다가도 밤이면 숨겨둔 작은 꿀벌네집에서 남녀평등이 되는 위군자들…총적으로 본학원에서는 무재무덕하고 무위무능한 상급아래에서는 게으름을 피우기 쉽다는 밀방 등을 터득할수 있다.     연구생 연구항목:     본학원에서는 어떻게 체력소모를 감소시키고 생활절주를 완화시키면서 마음에 맞게 느러진 삶을 영위할데 대한 기초리론을 선행시키면서 게으름병자들의 공통한 특점이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는 등 경험교류를 자주 조직하여 현시대의 인문환경에 알맞게 게으름을 피우는 기술과 예술성을 련마시킨다.    본학원에서는 게으름병을 치료하고 마음을 돌리여 인의를 공부하려는 장한 뜻을 가진이들과 랭수마시고 룡트림하는자, 까기전에 병아리를 세려는자, 등 싱겁둥이들은 일률로 문전사절한다. 아마 이 조목에 대해 오해하고 그만큼 반향이 나쁠수 있으나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다는 의학상의 도리를 체현시킬수 없음을 고하는바이다. 독은 독으로 친다는 속담처럼 스스로 게으름의 극치에 도달한 다음 그 위해성을 깨달았을 때 자연히 정도로 나갈수 있을것이다.     게으름병은 특히 우리 민족권에 만연되고있다. 게으름은 인성악의 일종으로서 빈궁의 길동무이다. 남의 사돈이야 가거나 말거나 제코나 옳게 닦으라고 조소할수도 있겠다. 접수하되 개정키 어렵다고 실토한다. 게를 똑바로 걷게 할수는 없으니까. 세상엔 악한으로 보이기 원하는 악한은 없듯이 자기가 게으름뱅이로 보이기를 원하는 게으름뱅이는 없다. 남을 넌지시 비난하며 자화자찬을 한다고 오해하지 말기바란다..     본인은 이미 신세를 망친 사람이지만 개교식날 훈사는 멋있게 할것같다. 화두는 이렇게 시작될수 있다.《당신이 만약 재산을 잃었다면 약간한것을 잃은것이고 만약 영예를 잃었다면 적잖은것을 잃은것이며 만약 근면을 잃었다면 그것은 인생의 전부를 잃은것이라고,     각종 우혜대우:     국제게으름뱅이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어떻게 현대수법으로 체력을 절약하고 생활절주를 느리게 하여 마음놓고 나름대로 안빈락도를 영위할수 있는 비법들을 배워오게 되며 일단《라태,안일도락의 권리》증서를 발급받은자는 국제라태자기금회에서 보내는 년금으로 생활을 보장받을수 있다. 초생수가 유한하다는것을 명기하라.                                  2006년 9월 10일       
447    콩이냐 팥이냐해도 댓글:  조회:7122  추천:1  2014-05-04
                                                       콩이냐 팥이냐해도                                                                  최 균 선                                 만약 달걀이 표준어냐? 계란이 표준어냐? 닭알이 표준어냐? 라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한다면 소학생도《픽》웃고 돌아설게다. 따져봐야 거기서 거기이고 같고 같아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때문이다. 사실 우리 말에는 달리 표현되는 동일개념이 많고도 많다. 이를테면 강냉이, 옥수수, 옥수끼, 옥씨(사투리), 면화와 목화, 솜, 남새와 채소, 푸성귀, 감자와 마령서와 감재(사투리), 입쌀과 백미, 흰쌀, 국가와 나라…등등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다. 조개떡이나 빈대떡이나 번져놓고 뒤집어 놓아도 그 떡이 그 떡이다. 동질의것이니까,      한국어(조선어)의 호칭문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그 다른 국가나 지역에서 어떻게 호칭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때문이다. 알고보면 이에는 력사적 연원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조선어라는 명칭만 존재했었으나 1948년에 조선어를 공 용어로 하다가 남북에서 동시에 정부를 수립하면서 각국의 공용어를 다른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였 다는데서 문제의 발단이 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1949년 건국 당시 조선을 조선반도의 유일정부로 승인하였기 때문에 조선어로 호칭되였다. 하여 우리 중 국조선족은 조선어라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수교후 문화교류가 활성화되면서부터 “한국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러나 조선어가 쓰이는 지역이 력사적으로 조선반도였기때문에 학계 또는 공문서에서 는 조선어라고 부르는것이 관례이다. 한편으로 한국의 지성적인 학자들속에서 한글이라는 명칭의 사용이 잘못되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언어명에 관한 정해진 규칙이 없이 습관적으로 민족명, 국명, 그 언어로 종족을 나타내는 단어등에 “~어”를 붙여서 언어명을 짓는 관례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어”에 대해서도 단지 문자명에 기원한 언어명에 관례가 없다는것이다. 분명한것은 조선조시대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 창제한 글은 조선어이다.    그런데 요즘 조선어(연변조선족어)가 선진적이냐 한국어가 선진적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말씨름이 많은데 이한 문제도 정체상에서 그리고 속성상에서 달걀과 계란문제와 비슷 한 문제가 아닐가싶다. 지방에 따라 형님을 성님이라고 하고 매부를 매형이라 하는데 어느 호칭이 더 문화적이고 선진적인가? 조선반도라는 말은 락후한 개념이고 한반도라 해야 선진적이란 근거가 확실한가? 소고기라 하면 경제락후국의 언어이고 쇠고기라 하면 선진국 냄새가 나는것이냐?     한마디로 조선어나 중국조선어나 한국어의 일부 차이를 비유하건대 함경도 방언과 제주도방언, 평안도말이나 경상도말의 어투, 어조, 일부 단어의 사투리적표현의 차이에 불과할뿐 어휘체계나 음원체계에서 성질상 확 바뀌여 버린것이 아니다. 중국 조선족과 조선사람, 한국사람이 대화할 때 번역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숫구멍에 온기가 없는 사람일것이다. 원인은 자명하다.     여기 중국에서는 상류에서는 금사강이라 부르고 중류에서는 장강이라 부르고 옛날에는 양자강이라고도 하였는데 강이 달라진것은 없다. 중국에서는 도문강이라 하고 조선반도력사에는 두만강으로 새겨지고 장백산이 백두산으로 되고 있는 문제와 같고 같은 문제이다. 죽은 풀어져도 가만안에 있다. 리념문제든 존엄문제든 한 사물에 대한 부동한 명칭을 달더라도 우리는 현실존재 리유를 무시하지 않는다. 아바이라 하면 촌티나고 할아버님 하면 문화적이고 할배라 하면 상놈냄새가 나는지 모를 일이지만도 말이다.    조선반도나 한반도가 나름대로 부르는데 다 맞는 명칭이다. 물론 한반도라 부르 던 때 남북이 갈라진것이 아니니《북한, 남한》이란 명칭은 론거부족이 아닐수 없다. 그처럼 한국어나 조선어나 뿌리가 같고 달린 열매(기본단어군)도 대동소이한 정황하에서 한국어와 조선어를 기본성질상에서 외국어인양 가르는것은 부질없다. 이른바 한국어에 새 단어와 조선어에 생성된 단어와 중국조선족어에서 인입한 많은 단어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표현이 다를뿐 성질은 왕청같은것이 아니다. 콩이야 팥이야 시비했대야 콩이 팥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어떻게 자칭하든 하나의 동일민족이다. 언어상에서도 동일개념을 가지고 편을 가르자니 무중생유의 말썽이 생기는것이다. 외래어람용을 선진화, 세계화한듯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근원적으로 빌어온 고양이는 내집 고양이가 아니며 빌어온 고양이가 알락달락하다고 해서 쥐를 더 멋지게 잡는다는 법이 없다.     언어가 발전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로서의 발전이 아니라 민족정신의 고양과 민족문화전통 등 거창한 문제와 더불어 발전변화 하는것이다. 언어의 발전변화는 단순히 부동한 개념의 인입이 아니라 민족문화의식과 더불어 발전변화는게 법칙이다. 시공간적으로 낡은 서사규범은 어느것이고 새 서사규범은 어느것이라고 누가 딱 부러지게 말할수 있는가?     시간적으로 오랜것이라해서 낡은 서사규범이라 할수 있는가? 중국조선어문법도 건국후 한글맞춤법, 조선의 맞춤법을 가져다 쓰다가 썩 후에야 자기식의 문법규범을 내왔는데 그것도 뛸데없이 원래의 한글맞춤법, 조선어맞줌법에 뿌리를 둔것이다. 문법규칙상에서 근원적으로 신구의 차이를 론할 계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리조때 국명이 조선이였으니 조선글이라 한것이고 1897년 고종이 국호를《대한제국》이라 개칭하면서 한반도라는 말이 생겨나고 한글이란 말이 뒤따르고 그뒤 현대 한국이 생겨서 한국어라 지칭하게 된것을 력사가 말하고있지 않는가?     고대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어로 대표되는 북방 부여계언어와 신라어로 대표되는 남방한계(韓系)언어로 나뉘였는데 두지역 언어사이에 언어적차이가 있었다. 신라가 반도통합후에 경주방언 중심의 한계, 신라어에 바탕을 둔 중앙어화를 거치게 되였다. 그러다가 고려의 건국으로 조선반도의 언어는 또 다시 조정을 거치게 되였는데 경주중심의 신라어가 개성중심의 고려중앙어로 옮겨지게 되였다. 그것이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계속 중앙어로 된다. 결과적으로 현대한국어의 형성은 고려중앙어에서 비롯 되였다고 볼수 있다.     현재 조선의 조선어니, 한국의 한국어니, 중국조선어니 하지만 다 뛸데없는 우리 말, 우리 글이다. 일종 지역적인'방언'차이라고나 할가. 조선어니 한국어니 중국 조선어니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리념적 내지는 정서적으로 주관적인것에 불과하다. 배나무 가지에 사과나무가지를 접목해서 사과배라는것이 생겼지만 고유의 그 뿌리이다.    경제론리에 따라 발전국의 언어가치가 고양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이 세상에서 변화발전하지 않는것이란 없다는 시점에서 너무 극단적으로 일변도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돌고돌아서 결국 우리 단군족의 말에 귀속된다. 선진국에 경도되여 언어 문화적가치취향도 결정되겠으나 조선-한국의 전통문화의 우수성에는 우렬이 없고 그것을 모체로 한 중국조선어의 우수성도 마멸될수 없다.     가로뛰나 모로뛰나 언어의 동질성, 민족의 혈연성으로 하여 불가분리적이요 조선어에서 다듬은 극단적인 단어와 중국조선어의 중국식단어, 한국어에 영어식잡탕과 두음법칙의 공연한 오해를 제거하면 남는것이 무엇일가?각자 우결점이 있으니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서로 감싸고 보완하며 동시에 발전할 일이지 내 잘났니, 네 못났니 하고 자존심만 내세우는것은 무모한 짓이다.     현재는 서로의 수레를 제 산으로 끌어올리느라 안깐힘을 쓰지만 사회발전의 필연성에 따라 통일의 광장으로 밀고오게 되여있다. 그러니 현재의 명칭을 잠시 승인해 두고 시대발전에 따라 창조되고 인입된 새 단어, 개념들은 수요되는대로 수용하면서 삼각지대에서 공동히 발전시키는것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막대기 두개는 쉽게 넘어지지만 삼각으로 벋쳐놓으면 든든하지 않던가?    누구들이 선호하고 경도되자고 해서 아교풀로 널판지를 붙이듯이 통합될 언어도 아니거니와 원래 정체적으로 통합되여있고, 아니 융합되여 있기에 넘어지고 번져져도 그냥 한함지에 엎어질것이니 시야비야할것 없이 언어발전규률에 따르자. 그리고 시대 의 변이와 발전양상에 발맞추고 호흡을 조절하며 공동히 전진하자. 뭉쳐야 살수 있다. 모래알이 되면 죽게 되여진 오늘 지구촌의 험악한 공기가 아닌가?!                                         2008년 9 월 24 일         청도에서       
446    글은 읽기쉽게 써야 하는데... 댓글:  조회:4992  추천:0  2014-05-04
                                                       글은 알기 쉽게 써야 하는데…                                                                                                        최 균 선       글을 짓는다는것은 일종 생명운동이요 자아가치를 실현하는 한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하다면 글은 남들이 알아보기 쉽게 써야 할가 아니면 특정된 독자들만을 념두에 두고 심오하게만 써야 하나? 제기법 자체가 퍼그나 무료하고 우스운 작동이지만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다시 자문하게 되는것은 나의 글이 괴까다롭다는 말을 종종 듣고 있기때문이다. 이는 나에게 지극히 유익한 일침이 아닐수 없다.     글을 짓는 사람들은 거개 자각하겠지만 남들이 읽어서 유익하고 감동을 받을수 있을것이라는 자신이 설때 글쓰는 자아감각이 좋은법이다. 혼자 읽으려고 쓰는 글은 상관할바 아니지만 남에게 보이고싶어 쓰는 글이라면 일반독자들도 좋아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것을 알면서도 통속적인 글이 못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일컬어 숭고한 작업이라는 문학이 모든 사람이 즐기는데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일부 특수계층만을 위한 문학이 되여서도 안된다는것은 확실하다.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편하게 즐길수 있는 삶의 문학이 되야야 한다는것도 글을 짓는 이들로서는 모두 공인하리라고 본다. 글은 특수한 기술이 되여서도 안된다. 그리되면 문학이 뿌리내릴 옥토를 대채전을 만듭답시고 생땅을 드러내던 그때처럼 잡풀마저 자라기 저어하는 박토가 되고 글에 생명력을 기대하기를 스스로 내버리는것이 된다.     모든 삶의 글이 다 문학이 될수 없고 될 필요도 없지만 문학이란 이름으로 씌여진 모든 글이 결코 문학아닌 실용적인 글보다 가치있다는 법은 없다. 오늘날 문학이 저곡에 들어서게 된 많은 원인중의 하나가 대중적이 못되고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걱정하는 문학으로 중흥을 도모하는것을 누가 아니라고 할가, 농민들도 막벌이노동자도 안방할머니들… 누구나 쉽게 다가올수 있는 글을 지향하지만 나 로서는 그게 잘 안되고 작심하고 까다롭게 쓰는것은 아닌데 동기와 결과가 틀린다.     모든 사람이 쓰고 싶어하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써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있는 내용과 주제의 글을 써내야 독자들의 가슴에 얼른 닿을것은 자명하다. 독자가 살아야문학이 살아난다. 문장은 쉽게 읽혀져야 한다. 그러자면 부질없이 꾸며서 복잡하게 쓰는것은 바람직한 문풍이 아니고 진정한 문인의 자세가 아니다. 문장이 노상 현학적이여서 유식을 람발하는 사람으로 인지되면 만성자살이라는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특히 수필은 고아대는 글이기보다는 정감을 은밀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수필은 희로애락을 웨쳐대기보다는 글밑바닥에 깔고 시사하는 글이라 하는것이 합리적일것이다. 그래서 보기쉽고 알기쉬우며 읽기쉽게 써야 한다는 론제가 세워지는것이다.시작부터 빙빙 에돌며 어정거리면 열독흥취를 잃게 할것은 자명하다. 사람을 놀래우려고 유식함을 뽐내려는 작자야 흔하랴만 아무튼 신비스럽게 꾸며서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짐작할수 없게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하고싶은 말을 쓴면 글을 쓰게 된 계기, 동기를 묘술하더라도 알쏭달쏭하게 하지 말고  허심탄회해야 매력을 가질것이다.     왜 내글을 읽기쉽지 않다고 느낄가? 글은 심장으로 쓰는것이기에 때로 긴가민가 하는 단어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전을 뒤져보기도 하지만 보다 화려한 어구를 구사하기 위해 성구사전이랑 외래어사전이랑 펼쳐놓고 단어선택을 하지 않는 다. 존재의 집에서 절로 튕겨나오는 단어를 잡아서 한줄에 꿰는것도 힘든 작업이다. 그러지 않아도 글을  쓰노라면 어려울때가 많은데 스스로도 재미가 없다면 멋을 부릴 계제도 못된다… 갈수록 언어의 빈곤증을 느끼는데 문자유희를 할 기분이 날것인가     물론 미사려구로 짜여진 화려한 글을 즐기는 독자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작자로 말하면 글을 언제나 그렇게 꾸며낸다면 그것은 몰취미이다. 대관절 문학이 될수 있는 글이 따로 있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편지나 일기, 설명문이나 보고문과는 별개로 꼭 심오하고 현혹스러운 아름다운 문장이여야 문학인것은 아니다.     연극작가는 늘 무대를 념두에 두고 극본을 쓴다고 하는데 여타의 글을 쓸때도 대상을 의식하고 정확하게 알리는것이 목적이다. 어떤 글이든 독자를 등뒤에 세워놓고 쓴다고 생각하면 자세가 달라진다. 말을 다듬는 까닭은 론리를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나름대로 말을 조합해내고 분식하고 기괴하게 늘여놓으면 그 마음과 론리는 무성한 가지에 감추어진 줄기가 되기에 그러기를 원하는 작자는 없을것이다.     속심의 말을 토로하는것이 글일진대 그 속심이 꾸밈속에 묻혀버린다면 자타에게 애석한 일이며 글짓기는 무효로동이다. 싸르트르는 "작가는 펜대가 보여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문장 저쪽에 있는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말일것이다. 이 말은 과히 창작의 길에 라침판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주지하다싶이 사물을 보는 그대로 나타내도록 해야지 번다한 묘술때문에 주제가 흐지부지해지면 그보다 더 큰 실책이 없다. 독자가 글을 읽을때 글이 보여주려하는 사상을 곧 인지하고 가슴에 와닿음을 느끼게 하는것이 작자의 기술이다. 주제는 숨박꼭질하고 기괴한 단어조합의 퇴적이 되거나 유식이 란무한다면 진실을 지향하는 독자들이 외면하는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 말 어휘군에서 죽어버린 한자어 단어들을 끄집어내여 신대륙이나 발견한듯이 람용한다면 부질없는 짓이 아닐수 없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결국 자신에 대한 해부도 투철하지 못한것을 느끼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될수록 순수한 우리 말을 골라써야 하겠다고 자신을 단속하면서도 습관처럼 한자어말이 내달아오고 미진해서 괄호안에 한자를 대입해 넣느라 수고스러울때 많다.     체호브가 가장 아름다운것은 가장 단순한것이라고 했던가? 속도를 추구하고 편리할대로 살려는 현대인들인데 그 괴까다로운 한자어단어들을 전매품인듯이 라렬한다면  어느 해가에 사전을 찾아들고 읽는단말인가? 글짓는이의 자아감각은 좋을지 모르되 독자는 인지능력에 앞서 번거롭고 짜증나 할것이다.     물론 내용의 부동함에 따라 일매지게 통속적일수는 없다. 하지만 글을 어렵게 쓴다는것은 어려운 단어에 있다기보다 이상하게 배배 꼬아서 엮는데 있다. 필력이란 알기 어려운 문장에서 체현되는것이 아니다. “팔고문”같은 글을 풍격이라고 “내 글을 읽을수 있는 수준급의 독자들이 따로 있다고 ”고 호통쳐도 메아리는 없을것이다.     책은 보라고 찍어낸다면 글은 알아보라고 쓴것이 아닐가? 글은 자신의 체험을 진솔하게 절실하게 털어놓고 독자군의 공명을 기대하는것일진대 자기표현의 기준을 내세우고 우선적으로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얻는것보다 잃는것이 더 많을것이다. 헤밍웨이의 작품들에 또 다른 우수성은 사전을 들춰봐야 알만한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것이다. 대가들도 추구하는 그런 창작자세를 누가 마다할수 있으랴,                                                                               2009년 1월 30 일 2014년 5월 20일 (수정)                       
445    자기를 잃고있는 이들에게 댓글:  조회:5136  추천:1  2014-05-04
                                          자기를 잃고있는 이들에게                                                                                       최 균 선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크의 명구를 빌어서 달리 표현한다면 민족어는 민족의 존재의 집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민족어의 존재가 그 민족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상식적문제를 두고 급공근리적인 가치취향에서 자기 민족의 얼이요 상징인 그 언어를 버리고 타민족화함으로써 출세해야 한다고 고아대는 사람들이 있다.     명실상부한 민족성의 고양이란 민족성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며 이런 노력은 민족이 사멸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여야 할것이다. 한 민족의 조화로운 발전의 조성이란 곧 민족성안에 내재하고있는 여러 자질을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일이지 민족성의 핵인 언어마저 버리고 대민족에 동화되자고 서두르는 썩은 사대주의가 아니다.     민족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민족어를 잘 배워야 한다. 한어의 망망대해속에서 자맥질하려면 한어도 잘 배워야 한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식을 습득하는것을 음식을 먹는 일에 비유할수 있다. 조밥을 먹을수 있는 사람이면 보리밥도 먹을수 있다. 조밥과 보리밥을 함께 먹어서 죽는 일은 근본없다. 이밥을 먹기 위해 자기가  먹고 자란 조밥사발을 차던지는것은 우직한 놈만이 할수 있는 망동이다.     자기 민족어도 잘배우고 한어도 잘배울수 있는가? 묻는것 자체가 어리석다. 조선족은 원래 총명하고 구지욕이 강한 민족으로서 조선어에 한어만이 아니라 영어. 일어, 프랑스어, 등 각국어도 배워낼수 있다. 영어가 세계공동어라고 한어를 버리고 영어만 배워야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은 한족들중에는 한사람도 없을줄 안다. 그런데 왜 우리 민족들가운데, 그것도 사회정영이라는 사람들속에서 기어이 조개떡 하나만 가지고 서울길 재촉하자고 고아대는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여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있다. 그저 조선족이라면 조선족인가? 조선족다워야 조선족이지, 아니그런가? 민족인은 민족교육을 통해서만 민족인이 되는것이며 따라서 민족어교육이란 현실적존재를 민족적 당위성을 현실화하는 기능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 시점에서 민족교육이란 민족적 인간의 내재적민족성을 조화롭게 발전시켜 민족인재로 되게 계몽하고 인도하는 근본도경인것이다.     그가 누구이든, 그리고 무엇이 되여지려 하든지 자기의 민족성과 계승성을 가슴에 새기고 이를 신장시키고 민족성 즉 주체성을 지니고 자기의 책임과 구실을 착실히 하여야 그 성취도 민족군체를 위해 빛나는것이다. 그러자면 확고하고도 타당하게 타민족언어문화를 배우고 민족성을 기반으로 한 출세관을 가져야 자률적으로 인재의 길, 출세의 길을 온건하게 걸어나갈수 있다. 말하자면 민족어교육은 출발점은 물론 마지막 단계도 민족성교육이다. 이것을 포기하려 한다면 자기를 포기하는것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에 묻고 나서 나는 어느 민족인가 물어보라, 민족교육은 그 개인으로의 인간의 조화적발전과 인격력량의 완성을 위한 조성작용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속한 수천년 민족발전사를 통해 축적되여 온 유익한 경험, 그중에서도 특히 민족적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계승, 유지시키고 나아가서 그들의 내면적각성을 통해 확충, 발전시키고자 하는 작용이기도 한것이다.     우리 중국조선민족은 지금 준엄한 력사적도전에 직면하고있다. 이에 어떻게 응전할것인가? 그것은 민족교육을 통해서이다. 그만큼 민족어교육을 배제한 민족교육을 론하는것은 참으로 우스운 사유일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족교육의 성격을 변화시키는것이 민족성을 고수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눈감고 야웅!하는 짓거리이다. 민족의 정신적, 경제적, 자주, 독립의 기반의 조성위에 서야할것은 두말이면 잔소리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지리학적, 인문환경적 삼각지대에서 생활하는 특정된 민족의 시점에서 현실을 투시해야 하며 분단민족의 탈리념적 대화위에서 미래를 설계해야 할것이다. 민족이란 기본사회이다. 그것이 기본사회라 함은 다른 사회에서 파생되는 사회가 아니고 타민족사회를 그 안에서 파생시키는 터전이 되는 사회라는 뜻이다. 환언한다면 혈연적사회, 지역적사회, 문화사회, 국가사회, 인류사회의 터전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민족이란 숙명적으로 결성되여있는 인종만도 아니며 후천적체계적으로 조정되는 국민만도 아니고 선천적인 소여의 뉴대를 바탕으로 한 후천적노력에 의해서 형성된 군체이다. 민족은 주어진 불변의 실체가 아니고 성장, 발전하는 생명체라고 할진대 따라서 격변기시대 민족교육의 과제의 다변성이 필연적이라는것을 아무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소털은 소가죽우에서만 난다. 말잔등에서 소털이 나올수 있단말인가?     이제 지루한 전제우에서 요즘 거론되고있는 “대학입시 어종선택”문제의 불가함을 상식적으로 서술하려 한다. 가령(성사될리 없겠지만도) 조선족학생들의 대학입시를 한어로 한다는 제도가 나온다하자. 그러지 않아도 입시교육이 위주인 현시점에서, 한어화경향이 백열화하는 현실에서 고중단계는 문리과를 불문하고 백프로 한어로 교수해야 할것이다. 시험에 쓸모없는 조선어가 설자리가 어데 있으며 시간을 많든 적든 배당할 리유가 무엇인가?     교육은 피라미드식이 아니라 사다리식이다. 고중입학은 둘째치고 고중단계의 대학입시준비에 적응하려면 초중에서도 한어로 강의해야 할것이 불보듯 뻔하다. 그저 한어문교수만 개혁하고 정진해서만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소학교라고 뒤지겠는가? 노래에 있듯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것은 당연하다.     결론도 자명하다. 조선족학교에 민족어교육이 필요없고 민족어교육이 필요없는 교육진지에 조선족교원도 무용지물이다. 조선족교원들이 할일이 무엇인가? 문제는 이렇게 류추될수밖에 없다. 이는 억지추론이 아니다. 대학입시를 한어로 치른다면 련쇄적으로 따르게 되는 상식적인 흐름일뿐이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가다가 닿는곳은 민족동화의 꽃언덕이다. 거기서 저마다《영재》로 되여 조선민족의 번영창성을 두고《万岁》를 곤백번 웨친들 그게 잠꼬대가 아닐가?       대학입시에 한어로 쳐야 한다는 주장에 립지를 마련하려고 이런저런 론거를 들고 있지만 나무를 보고 수풀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 례컨대 무슨 책을 번역하는데 수준 미달이여서 한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등, 물론 사실이겠지만도 그 번역자가 곧 모든 조선족번역일군들의 수준미달을 표징한다고 말하면 어불성설이다. 만약 그 론리가 기어코 성립된다면 한어수준이 미달이 아니라고 자긍하느 이들도 다리를 만지고 곧 코끼라라고 장담한 소경의 경우에서 자유롭지 못할것이다.     왜 인재의 기준을, 사회적응력의 표준을 한어장악으로만 잡아야 하는가? 지금은 한창 세계화가 고창되고있고 영어가 세계통용어인데 대학교육을 받은 모든 한족학생 들은 다 영어수준급인가? 어느 민족교육마당에든 상중하가 있고 어떤 어종의 학습에서든 수준미달이 없을수 없다. 한족들이 영어수준이 미달이라고 통탄하며 모국어를 팽개치고 영어교육에《몰입》해야 한다고 대성질호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만나보고 포옹하고 싶다. 그러데 왜? 우리만 호들갑을 떠는가?     시발점은 민족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더많은 영재배출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게 아니다. 번쩍거리는것이라 해서 다 금인것은 아니며 명문대학을 나왔다해서 다 영재인것이 아니라는것을 현실이 증명하지 않는가? 우리 조선민족대학졸업생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족,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존재하는 문제인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민족성을 버리고 타민족에 완전히 흡수되고 싶다고 안달하는 민족은 이 지구촌에 하나도 없다고 단정하고싶다.     우리가《이건 아니라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조바심치며 막아보자해도 대세가 이미 한어화에로 용왕매진하고 있는 실정인데 한술 더 떠서 아예 민족교육의 특혜마저 차던지고 무수히 많은 한족학생들과 한어입시로 경쟁하라고 내몬다면 게잃고 구럭잃고 자기마저 잃는 꼴이 되지 않으면 기적일것이다.    시대적안목에서 오늘을 가늠해야 한다. 지금 학생들의 한어수준은 과거와 비길수 없다. 유치원생도 웬간히 야무지면 한어를 곧잘 번지고있다. 물가에서 놀면서 신이 젖지 않은 애가 있다면 가만히 앉아있은 아이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한어의 망망대해에서 한어를 잘 배우지 못한 학생은 백치가 아니라면 게으름뱅이다. 그런 학생은 젖꼭지를 물리면서 한어교육을 한다해도 그밥에 그 나물이다.     우리의 졸업생들이 모두 명패대학생이 될수는 없으며 모두가 한어화한 사회정영이 될수 없다. 연목감이 따로 있고 기둥감이 따로 있다. 연목감은 아무리 해도 기둥이 될수 없다. 그렇다고 기둥감을 연목으로 쓸수도 없다.     연목이 따로, 대들보가 따로, 기둥감이 따로 제 구실을 하기에 구중궁궐도 일어선것이 아니랴? 어데이든 빼여난자가 있고 처지는 자가 있다. 백메터경기에 모두 일등을 하지 못한다고 백메터경기항목을 취소할수 있단말인가? 한어교육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문제를 극단으로 보지 말자. 국내 각대학들에서 한국어과를 설치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것이 비록 한시기 반짝할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재로서는 한국어 (조선어)무용론을 뇌까리는 사람들을 뺨치고있지 않는가? 이렇게 나가면 민족동화는 시간문제이다. 그 시간문제가 그리도 안타까워 특허로 준 민족교육의 자주성마저 내던지자고 고견을 내놓는단 말인가?!!!                                   2008년 7 월 27 일      
444    (교육에세이) 아직도 한어때문에 근심하시는가요? 댓글:  조회:4752  추천:0  2014-05-04
                                아직도 한어때문에 근심하시는가요?                                                          최균선        온 지구촌이 세계일체화에로 매진하는 때에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중국에서 살아가고 남보다 빼여난 인재가 되려면 무엇보다 한어 하나만은  잘해야 한다면서 자식을 유치원때부터 백프로 한어화교육에로 내모는 부모들이 아직도 많다.     그런 부모들속에 무식자가 별로 없이 유식자들이라는것이 희한하다. 특히는 자기 학생들앞에서 민족어는 그 민족의 표지이고 넋이라고, 민족어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고, 우리는 단군의 후손답게 민족의 얼인 우리 말과 글을 빛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서 민족어교육을 가강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교원들도 있고 민족교육의 중임을 떠멘 교육행정관리도 있고 한평생 민족어사업에 몸을 담그어 왔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는 언어학자들도 있다. 참으로 반도인들만이 엮어낼수 있는 유모아가 아닐수 없다.    속담에 강가에서 놀면 신이 젖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만천하에 한어인 중국땅에 살면서 한어를 배우지 못할가봐 안달복달한다니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한심한것은 이중언어교육을 취지로 행정적으로도 전면한어화에로 진군령을 내리여 조선족학교에 한어교원이 있음에도 한족교원을 초빙하여 한어반을 꾸리게 하고 교수용어도 특수상황이 아니면 한어로 할것을 명령하여 조선족교원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안절부절하게 하였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한어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나고 있기에 더구나 한어교육을 더 틀어쥐여야 한다고 말할수 있는가? 중국조선족은 한어의 망망대해에서 사는 중국 국민이기에 외국에서 한어학습열을 일으키는 상황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 조선족아이들로 말하면 한어가 국어이지만 민족의 견지에서는 외국어와 다름이 없다.     전면 한어화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사유모식대로 한다면 자식을 국내를 벗어나 세계적인 인재로 만들려 작심했을 때 가장 좋기는 어릴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다디게 하는것이 상책일것이다. 지금 전중국적으로 영어학습열로 들끓지 않는가? 멀리 내다보느라고 한어화에 모를 박은것 같지만 기실 상대적으로 근시안적이다.     한국어가 외국어로 된 한족학생들의 립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말로 조선어는 중국에서 별로《쓸모없으니》뒤로 제쳐놓더라도 명색이 조선족이지만 조선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면 필요시에 그에게는 한국어가 외국어로 다가서게 될게 아닌가? 그 다음에 무슨 생각이 떠오를가? 그래도 백프로 한어화교육을 받은 자기 자식을 두고 긍지와 자랑을 느낄것인가? 알수 없다.     한어가 중국에서 대민족의 언어이고 국어라면 조선어도 민족어이고 민족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한어를 류창하게 잘하면 장차 좋은 직업을 찾는데 우선 조건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을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것을 부정하고있다. 어찌하여 그 많은 명패대학을 졸업한 한족학생들이 졸업후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을가? 알겠지만 한어를 잘하지 못해서가 아닌것이다. 유치원때부터 한어를 배우게 했다해서 다 인재가 되였다는 말을 못들었지만 내내 조선언어교육을 받고도 인재로 된 사람들을 세라면 한나절은 걸릴것이다.     사실 연변내 조선족고중을 졸업하고 관내의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인재로 된 학생들을 한어에 짝지여서 제노릇 하기가 어려울것이라고 단언할수 있는가? 반대로 조선족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적어도 한어, 외국어, 민족어(한국어?) 이 세개 언어를 장악하게 되지만 대부분 한족학생들은 자기 모국어에 외국어 한가지를 장악 하는게 보통이다. 세개 나라말을 하는 사람과 두개 나라 말을 할줄아는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채용할가? 한국기업이 아니래도 경제무역의 세계화시대에 그리고 동아세아에서 경제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한국의 언어를 배제하려는 기업은 없을것이 다, 그렇지 않단말인가?      전반 중국의 언어생활을 놓고 볼 때 아주 화해롭지 못하다. 영어와 한어를 대등하게 간주하고 영어공부를 전면에 내세우고있고 급공근리의 가치추구로부터 수많은 한족대학생들이 자기 민족언어구사에서 대학생이 응당 갖추어야 할 수준에 미달이다. 그래서 교육부에서 골머리를 앓고있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국내대학들에서 한어ㅡ 모국어를 공통과로 설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가령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서만 사업한다고 가정할 때 한어만 잘하면 만능이고 만사대길일가? 같은 지력상수에서 동등한 학력에서 아무리 한어를 어릴때부터 배운 학생이라해도 한족학생들의 한어수준보다 월등할것이라는 담보는 없다. 바로 이면에서 조선족학생은 한족학생들에게 짝지고 들어가는것이다. 이것은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원망할게 아니라 부모의 고명하고 원견성있는 자녀교육사유론리를 원망해야 할것 이다.     현재 국내적으로 업적을 쌓은 과학자, 교수들치고 자기 민족어에 제로인 사람은 없다. 그래도 그들은 한족들의 정영들속에서 떳떳이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사회에 공헌하고있다. 물론 그들이 공부할 때 전면한어화할수 있는 조건이 없어서였던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은 유치원때부터 한어전면화를 하지 않았어도 인재만 되였으니 웃음기를 거두는 특수한 유모아가 아닌가?     조선족작가들속에 한어로 창작하여 한족문예지에 발표하는 작가들치고 자기 민족어를 등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물론 지금 와서 별로 대단치 않은 작가들을 거들것없다고 한다면 한걸음 물러서서 유치원때부터 한족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수많은 인재들이 중국의 광대한 지역에 널려 한어구사에 막힘없이 제할일을 하는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가?     중국에서는 그래도 한어를 잘하면 되고 조선어따위는 몰라도 된다는 사유방식은 얼마나 진부한것인가? 왜? 지금은 어경이 완전히 변했다. 텔레비를 켜면 보이고 듣기는것이 한어이다. 거리에 나가도 한어를 모르면 촌보난행이다. 조선족이 대다수로 되였던 지나날처럼 한어를 배우기가 어려운것이 아닌것을 잘 알것이다. 한어의 망망대해에서 지력이 차하지 않으면 귀동냥을 해도 옛날 고중생의 한어수준을 훨씬 초과할 수준에 이를수 있다. 작심하고 귀를 막고 다니고 눈을 감고 다니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저저히 총명하여 배워주지 않아도 배우는게 한어이니 야단이 아닌가?     천재인 아인슈타인이 만약 모국어ㅡ독일어로 사고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세계적인 과학가로 되지 못했을것이다. 물론 우리 조선족아이들마다 다 아인슈타인이 될수 없겠지만 문제는 충분히 설명할수 있는 실례인것만은 사실이다. 진정한 조선족이라면 그리고 민족사업일군이라면 자기 민족의 지혜를 키우도록 자식을 교육하고 인도해야 한다. 민족어를 단순히 교제도구로만 알지 말고 외국어로 한번 생각해보는것이 좋지 않을가 싶다. 민족어이니 저절로 배워낼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필자는 한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학교에 와서 대학전과교육을 받는 조선족학생들을 적지 않게 접촉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자습하여 시험치는 (自考)학교여서 한족반에서 공부하자니 한어로 시험치기는 난당이고 특히 대학전과중문같은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준이여서 조선족반에 와서 조선어로 시험쳐볼가 시도하고있다.    그러나 늦었다. 그들은 조선어로 된 문학개론, 조선, 중국, 세계문학사의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죽도 밥도 안되였으니 엎디여 자는수밖에 없고 백일몽속에서 양양한 전도를 개척하는 길밖에 더 있으랴,     하긴 이류의 학생들과 차원이 높은 자기 자식들이겠으니까 비교가 안될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반대로 한족, 몽고족인데 유치원때부터 조선어를 배워 대학시험까지 친 두 학생이 있었는데 그들의 부모들의 원견성에 축하를 보내고싶었다. 한 한족처녀애 는 시험점수가 좀 미달이였지만 길림성공안학원에서 데려갔다. 한족으로서 조선어교육을 받은 학생이 수요되였던것이다. 나는 그 학생이 부모들의 원견대로 전도가 양양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내 고향 마을에 한 한족아이가 연변대학 조선어계를 다니고 지금은 한국대사관에 관원으로 나가있다. 그애들의 부모는 면무식의 보통농민이였고 자녀교육에 무슨 계획이란것도 없을 정도였다. 그애는 강보에 있을때부터 조선족아주먼네가 맡은 탁아소를 다녔고 커서는 그냥 조선아이들처럼 류창하게 조선어를 하였지만 한어도 그만큼 잘했다. 그래서 인재가 되였는지…그리고 특수 실례이긴 하겠지만,     아닌게 아니라 근간에는 조선족학교에 입학는 한족아이들이 늘고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개인유치원에도 조선족애들반에는 한족애들이 더 많았고 한족반에는 조선족애들이 더 많았다. 이전에는 한족애들이 막부득이한 조건이 아니면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극히 드믈었다. 자기 아이들에게 본민족언어는 가정에서 책임지고 조선말과 글을 학교교육에 기탁하여 그 많는 경쟁자들을 이길수 있는 한가지 언어조건을 미루 준비하려는 그런 한족부모들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하고싶다.     전하는데 의하면 2020년이면 중국에 거주할 한국인이 200만이 될거라는 추측이 나오있다. 그것은 우리 조선족대학생들이 일자리가 늘어나리는것을 설명하지 않는가? 만약 국내기업에 취직한다고 하자. 조선족젊은이가 우선적으로 채용된다면 그것은 필경 한어우세가 아니라 민족어까지 장악한 우세일것은 뻔하다. 그렇지 않단말인가?     여기까지 횡설수설하고 보니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 한것같아서 민안한감이 들기도 하고 스스로 어리석은감도 든다. 그렇게 백프로 한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어가 어떻고 어떻게 쓸모있다고 말한다면 아니꼽게만 볼테니 말이다. 경은 좋은데 입비뚤이중이 경을 잘못 읽는 격이 되는걸가? 이불을 보고 발을 펴라고 했거늘 이제 각자 가치취향이 다른데 무엇을 더 말한단말인가?                         2007 년 7 월 20 일  
443    시랑송풍격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5022  추천:0  2014-05-04
                                                시랑송풍격에 대한 단상                                                             최 균 선            문학예술로서의 시작품에는 제반 특징들과 더불어 시각적미와 청각적미도 고유 하고있다.     이른바 시각적미란 시의 외재적형식미(우미한 언어문자, 재치있는 외재률, 정교한 시행배렬 등)에서 락인된 시각적인상이 주는 미적감수이고 청각적미란 한수의 시를 멋지게 랑송하는 그 마당에서 청각을 통해 받아안는 미적감수이다.     시는 특히 랑송을 통해서 독자들을 시적경지에 이르게 하고 그 미적향수속에서 시의 아름다운 뜻이 봄비처럼 가슴가슴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그 과정에 시의 핵을 자 연스럽게 일반화한다. 이와같이 잘된 시랑송은 활자화되여 굳어진 시작품을 소리 와 색채로 윤색해주고 생명의 활력을 부여하는 기이한 마력을 갖고있다.     랑송이란 어원이 라틴어(scande—re—올라가다)로서 시의 운률을 목소리로 강조하며 운각의 력점있는 매개 음절을 뚜렷이 구별하면서 시를 읽는것을 말한다.     시랑송의 객관적물질기초는 시에 특유한 운률—말소리의 률동이다. 률동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음악에서 속도와 박자의 련쇄적인 작용에 의해 아름다운 률동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 말소리에도 률동이 생기는데 말소리의 높이세기가 대조되고 균형을 이루면서 률동을 만든다. 이 률동은 소리마디에 주는 힘의 량과 세기에서 나타난다.      우리 말의 률동은 세계 어느 민족의 언어보다 아름다우며 그 변화가 다양하다. 그러므로 시에 운률—률동감이 없으면 시이기를 그만두는것처럼 시랑송에서도 이 률동이 무시되면 역시 랑송이 아니된다. 한것은 문장안에서 힘줄기가 더욱 뚜렷 해지고 높낮이가 고르로운것 등이 다 조선말흐름을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류창하게 발전시키는 요인으로 되고 또 그러함으로 시를 시처럼 쓸수 있기때문이다.     우리 조선말 말소리흐름은 모든 구성요소에서 민족적특성이 옳게 살려지면서 우리의 생활감정에 맞게 다듬어지고 세련되여왔다. 그리고 말소리빛갈에서도 그 사회계급성원들의 구미에 맞게 발전되면서 말소리의 속도조절에서도 문화성과 더불어 시대적절주가 구현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들은 80년대말까지도 방송화술에서나 시랑송에서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 격정을 지니고 억양이 뚜렷하게 시를 읊어왔으며 전 사회적으로 별다른 이의(异义)가 없이 흔상되고 류행되여왔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인들의 창작풍격에 획기적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라 시읊기풍격도 급전하여 지금은 완전히 경향적이 되였다. 말하자면 시마다 거의 한국식으로 읽는것이 기준이 되여진것이다. 바로 여기에 필자와의 분기점이 생성되고있다.     일컬어 때지난 전통식이라는 딱지가 붙어 외면당해버린 (평양식)랑송과 소위 새풍격으로 인입되여 너도나도 본따고 또 그리함으로써 무척 흔상되고있는(한국 식)읽기사이에 어떤 근본적구별이 있는가? 민족을 특징짓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인 언어 의 동질성으로부터 감안할 때 대동소이하다고 할수 있겠으나 풍격상 각이한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우선 억양에서 구별점이 뚜렷해진다.     우리 말 흐름억양의 형태는 뜻을 전달할 때와 느낌을 전달할 때 서로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흐름억양은 뜻억양과 느낌억양으로 나뉘여진다. 뜻억양의 특징은 흐름의 높낮이가 큰 물결을 이루는것이고 느낌억양의 특징은 흐름의 높낮이가 미미하나 소리빛갈로 사상감정을 보충하는것이다.     필자의 천박한 견해에 의한다면 시랑송에서 뜻억양이 특별히 중시되고 큰 물결을 이루며 읊을것을 강조하는것이 평양식풍격이라면 흐름의 높낮이는 미미하나 소리 빛갈로 감정을 보충하는 느낌억양이 시읊기 일반에 애용되여 그 기본적정서 흐름으로 관통되는것이 한국식풍격이라 할수 있다.     이른바 전통식은 격정적이여서 고동성이 강하며 공명대가 크다고 할수 있으며 소위 새로운 풍격은 차분하게 정서적이여서 사색의 여지를 주며 흡인력이 강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특징들은 정치적, 시대적인 경향성에서 창출된것이라 보아 야 할것이다. 이에 반하여 량자는 부족점도 갖고있다.     이를테면 시마다 뜻억양이 무분별하게 강조되거나 높낮이가 잘 조화되지 않으면 뜬감이 날수 있고 진실한감이 약화될수 있다. 반면에 시마다에서 느낌억양을 의식적 으로 읊기의 기본음조로 삼는다면 자칫 병없는 신음소리가 되여지기 쉽다. 정서적 이라해서 꼭 애상적인것이 아니며 사색적이라 해서 곧 저조적인것이 아닌것이다.     다음 시읊기에서 소리빛갈을 어떻게 착용하는가에서도 다른 특색을 보이고있다. 우리는 소리빛갈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은 그 사회집단성원들의 특성과 정신적도덕풍모에 의해 결정되며 말소리발음에서 어떤 소리빛갈이 많이 쓰이는가 하는것은 중요하게 그 사회성원들의 감정정서에 의존하게 된다고 리론적으로 배워왔다. 따라서 다른 모든 화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랑송에서도 목소리의 기본 빛갈은 맑은 소리가 기본바탕이 되여야 한다고 인식해왔다.     그러므로 느낌억양으로 서정성을 깊게 한다하여 자연스러운 전통적인 맑은 소리를 버리고 인위적인 다른 소리빛갈로 시를 형상한다면 시마다의 개성을 죽일수 있으며 진실감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바이다. 띄우는 어두운 소리나 울음섞인 우울한 소리. 떠는 목소리를 우리는 특수경우에만 써왔으며 또 효과를 보아왔다. 세기말적인 전 지구적비운이 도래하지 않은 이상 세상은 아직 아주 밝으며 시대 역시 너무도 격동적이다. 그러니 시마다 상아탑속에서 새여나오는 흐느낌이 될 필요도 없거니와 또 시마다를 울음식으로 뇌까릴 리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기야 우리에겐들 리별, 애수, 사랑, 배반, 증오, 눈물, 한탄, 랭혹, 저주, 비애가 없으며 또 그런 내심세계와 정서들을 토로할 창작자유야 어찌 없으랴만 그렇다해서 한국인들의 정감세계와 지향이 우리의 정감세계와 지향과 일치된듯한 착각은 유감 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비록 동일민족이라 할지라도 필경은 부동안 국도에서, 부동 한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하는 이상 많은 면에서 자기의 특징을 보류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놀랴》한다면 되겠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중국이라는 그 특정된 정치환경속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 중국 조선민족군체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것이다. 사회 풍토에서나 시대적정신풍모에서나 사상감정상에서 출발한다면 우리에게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보다 고상하고 전투적인 정신적도덕풍모가 반영되는 건전하고 듣기 좋으 며 씩씩하고 부드러운 소리빛갈이 접수심리상 더 공통적이고 공감대가 크며 바람직 한것이라 생각한다.     시구를 입말처럼 억양을 붙이거나 읽기식으로 시를 읊지 못할것은 아니로되 시자 체가 일반적으로 운률을 붙여 읊을것을 요구하는 불가결의 전제하에서 시랑 송이라 하면 언필칭 높낮이를 뚜렷이 나타내여 음악적선률성을 보장해야 보다 감동적이 될것이라 본다. 아무리 잔잔한 정서의 시라도 산문처럼 읽는것은 비리이다.     무릇 시의 흐름에는 잔잔한 물결도 있거니와 거세찬 파도도 있어야만 잔잔한것에 대비하여 거세찬것이 두드러지고 반대로 거세찬것에 대비하여 잔잔한것이 해면에 물처럼 속속들이 스며든다. 잔잔함도 거세참도 없고 높은것도 낮은것도 없는 산문을 읽는것과 별반 다를배 없는 그런 《시읊기흐름》은 마치 회전이 잔뜩 늘어빠진 록음 을 듣는것처럼 권태롭고 짜증이 난다. 시 구절구절에 어떤 감동이 맥맥히 흐르고 있을 진대 그속에서 랑송자도 어떤 감흥을 받았다면 마땅히 높고낮은 정서파동의 흐름과 세고 약한 방출이 있어야 할게 아니겠는가!     그 누가 말했듯이 느낌에는 워낙 짝이 없는 법이다. 바로 그러기에 하늘에 별들처럼 하많은 시인들이 같은 경물을 두고 각이한 내용측면, 각이한 형식, 각이한 풍격의 시작품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에 따라 시랑송자의 내심감정의 로출방식에서도 그 모든것이 그대로 드러나야 할것은 자명하다. 재언명하거니와 시랑송의 흐름은 바늘이 가는데 실이 가듯이 시의 내용여부, 내재적감정정서의 각이 한 흐름에 따라 각이하게 물결쳐야 한다. 이는 필자의 주관욕망이 아니라 시자체에 고유한 마멸될수 없는 제특징이 규명해주는것이다.     하긴 우리의 시도 애상에 푹 젖어나올수 있고 고독한 감정의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혀 자아를 나직이 표백할수도 있다. 이런 시는 확실히 느낌억양으로 읊으면 좋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연변에 재빨리 류행된 시랑송풍격이 이대로 한가지 경향에서 굳어져버린다면 페단이 아닐수 없다. 뻐꾸기는 종달새소리를 흉내낼 필요가 없으며 부엉이는 매미소리를 본딸 리유가 없다, 앵무새는 아무리해도 까치의 울음소 리를 외울수 없는 노릇이다.     시랑송은 방백이 될수는 있어도 독백이 되여서는 안된다. 격조높은 조기천의 《백두산》이나 《불타는 거리에서》와 같은 격정적인 명시편들을 시종 느낌억양 으로는 도저히 읊어낼수 없다는것은 명백하건만 어느 한번 규모가 꽤 큰 시랑송 콩클에서 한 랑송자가 《백두산》을 느낌억양으로 랑송하는것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시읊는 사람이 혼자 시설질하듯 뇌까리고 듣는 사람들은 한가한 구경군이 되여 하품을 한다면 시에 대한 그보다 더한 모독은 없을것이고 또 그처럼 무료한 일은 없을것이다.     한 시인이 자기 심령의 비밀을 노래할지라도 흔상자가 직접 감지할수 있도록 진실하게 예술적으로 재현해야 함은 기성도리이다. 바꾸어말하면 시인이 시공간 관념을 자유롭게 운용하면서 시적예술미를 창조해야만 곧 개방된 문화상태의 심미 심리결구에 대한 자각적인 탐구로 되듯이 그 시를 표현하는 랑송자도 시인과 같은 심리자세로 시를 읊어야 한다는말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가수들이 권위가수를 본따서 같은 목소리, 같은 창법으로 노래한다면 그처럼 안타깝고 따분한 일이 더 있으랴! 숲속의 뭇새들은 저마다 명 창인데 왜 처마끝의 참새들은 아침저녁으로 재잘거리건만 그처럼 시끄러울가? 그것은 그것들의 울음소리에 똑같이 률동이 없고 절주감이 없이 단조로운 반복만 있기때문이 아니겠는가?!     문화경험을 기초로 진행되는 자유선택과정으로서의 문화예술교류에서 접수심리 문제는 복잡한 사회심리현상으로서 누가 누구를 설복하는 문제가 아니며 나아가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학술성문제로서 전문가들의 연구와 쟁론이 요청된다. 그런 각도에서 이 단상은 결코 전통에 대한 막무가내한 보수성과 신생사물간의 충돌이 아니라 표연주체와 접수자일 개인의 심미심리간의 락차에서 인기된 작은 울림이라 하면 가당할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뜻을 이렇게 비유해본다. 어깨에 어깨를 겯고있거나 서로 마주보는 면면한 산봉우리들을 보통 산이라고 부를지라도 그 뭇봉우리들은 높고 낮아도 저마끔 자기의 모습을 지키고있어 사람들의 눈에 기이하고 또 그래서 이목을 끄는것이다. 이는 사람도 산의 그 개성처럼 자기 특성을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대저 사람이 지나친 추종과 자기를 잃고 남을 닮아보려는 심리는 심히 부끄러이 여길바이다. 뭇사람들이 다 부끄럽게 여겨야 할뿐만아니라 문화지성인으로서는 더구 나 꺼릴바이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지키는것으로부터 출발한다면 나가는 걸음이 현대파적이든 국제적이 되든간에 자기다운 튼튼한 진출이 될것이다.     우리에게 우선 우리의 시가 따로 있어야 하고 우리만의 랑송풍격이 있어야 하리라고 기대해본다.   ※ 때때로 시를 읊는 양자와 소리를 들으며 10년전의 묵은 장부를 다시 들추어 내여 오늘의 시읊기를 잣대질해본다. 낡은것이라 해서 모두 쓸모없는것이 아니며 옛 것이라 해서 모두가 볼장을 다본것이라 말할수 없겠다는 혼자 생각에서 다시금 중언 부언해보는 바이다.                    2007년 10 월 14 일 밤      
442    색바랜 민족의식 댓글:  조회:4396  추천:0  2014-05-04
                                         색바랜 민족의식                                                최 균 선       13억 인구대국에서 200만도 안되는 중국조선족은 창해일속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족의 망망대해속에서 민족성을 지켜온 중국조선족은 내구력이 강한 군체이다. 비록 망국노의 한과 설음을 안고 거친 만주땅에 입주한 월경민족으로 청조의 온갖 기시와 민족동화정책, 그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시달렸지만 백여년의 민족사를 기록하며 끝끝내 민족지조를 지켜온 불요불굴의 민족으로 부상한 민족이다.     자칫 한족으로 동화될수 있는 주객관적인 환경속에서도 조선반도에 뿌리를 둔 특정된 민족으로서 부단히 모체의 민족성을 자양분으로 그 허점을 미봉할수 있었다 는것은 참으로 불행중다행이 아닐수 없다. 특히 건국후 정부의 옳바른 민족정책은 파란만장한 세기의 비탈길을 넘어오면서 민족자아의식을 보존하고 발전시킬수 있은 정신기둥으로, 옥토로 되였다.     그런데 개혁개방의 물결따라 제2차 대인구류동이 시작되면서 조선족집거구의 인구비례에 반차가 나타기시작하여 미구에《민족위기설》이 제기될만큼 민족정체의 붕괴의 변두리에 나서면서 민족의식은 가급적으로 색바래졌다. 농민들의 도시진출, 출국열로 인한 농촌의 황페화, 농촌총각들의 결혼난과 그 련쇄반응으로 인구의 현격 한 감소, 그에 따라 농촌학교가 하나하나 페쇄되고 기초교육의 뿌리가 뽑히고 있다.     리론적으로는 심각하게 거론되고 희망적으로 해석되고있지만 현실은 확실하게 중국조선족사회의 위기를 예시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고민하게 한다. 자연소실이냐? 새롭게 부상하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념원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족이 처한 현실을 정시하고 랭철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불가항력적인 민족동화의 대추세와 양으로 음으로 침투되는 타민족의 문화에 문을 닫아걸어서도 안되지만 물먹은 흙담이 되여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민족의 공동체의 영존과 더불어 민족문화를 보존,발전시킬수 있는 새길이 모색되여야 한다. 이는 리론에서 리론으로, 의론에서 의론에 매달려 아롱다롱한 환상을 수놓을 일이 아니라 초미의 문제이다. 물론 기본뿌리가 반도에 있고 7천만을 헤아리는 백의겨레가 있기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 켠에 서있지 않다.     우리 선조들은 선혈과 구슬땀으로 백년민족사를 기록했다. 건국후에도 의연히 조선과 문화, 교육, 출판 등 분야에서 뉴대를 이어옴으로써 모체민족과의 동질성을 확보할수 있게 되였고 민족자아의식의 벋침목으로 되였다는 력사사실을 부인해서도 안될것이다. 한국과 수교후 민족성은 더욱 활성화되고 있는데 천재일우이다.     그런데 경제, 문화의 발전과 반비례적으로 중국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의 위기가 대두하고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것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불가피한 개관적조건에서 기인되는것이 많은것도 주지하는바이다. 례컨대 문화, 교육방면에서 조선족은 자기의 언어, 문자를 사용할 권리가 있지만 실제로 자기 민족어의 포기를 전제로 하는 한어화현상이 엄중한것이다. 더는 말고 우리 민족의 자랑이던 연변대학 에서마저 조선말로 수업하는 학부는 조선어학부뿐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가치기준에 따라 스스로 본민족의 언어, 문자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있다. 정계나 공직자들속에서 한족으로 자처하기도 하는 민족허무주의자들이 날로 늘어나고있다. 이런 경향은 관내를 비롯하여 조선족산재구에서 날로 더욱 확산 되고있다. 연변에서도 정부의 크고작은 회의용어는 일매지게 한어이다. 시행상의 인위적인 민족문화차별은 조선족의 민족의식의 퇴화를 가속화하지 않을수 없다.     중소학교의 교육단계에 민족의식신장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민족력사교육이 무시 당한채 지금껏 공백이다. 하여 우리 후대들은 자기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자기 민족 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편적으로 모르고있고 알려하지 않는다. 민족의 정영들이 모였다는 연변대학 조선족학생의 92%정도가 단군을 모르고 있다는 한 지자의 서술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더 말해 어찌 될것도 없지만 통탄만은 당연할것이다.     가장 심각한 현안은 조선족사회위기의 기제로 되고있는 인구의 대류동으로 민족의식퇴화의 주객관인소가 우심해지고 있는것이다. 현재 한국체류자가 35만을 웃돌고 산해관을 넘은 사람들도 몇십만이다. 청도에만도 조선족이 20여만이 살고 있다는데 타향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자녀들은 자연스레 한족화될수밖에 없다.     새삶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희망사항이 장차 중국조선족사회의 발전과 운명을 결정하는 사활적문제를 제기하고있다. 결국 남을것이 무엇인가? 인구감소, 민족집거 구역의 인구류실, 보금자리상실, 민족교육의 퇴화…이에 수반되는 민족의식이 소실 뿐이다. 다른 무엇을 환상할것이 없다. 뒤바뀐 가치취향의 풍조가 민족공동체를 위협하고 민족자아의식의 옥토를 갈수록 세차게 씻어내리고있다.     나무는 뿌리로 생존하고 가지와 잎으로 그늘을 만든다. 특정된 인구량이 없이 민족의식, 민족공동체를 운운할수 있을것인가? 주지하다싶이 한 민족의 우수성은 그 민족의 경제력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수준, 응집력, 인구증장 등에서 복합적으로 나타 난다. 중국 56개민족의 심목속에 깊이 새겨졌던 우수민족의 이미지대신 허영심이 강하고 모래알로 된 민족이라는 평판이 나있게 되였다.     한족들과의 불가피적인 래왕에서 민족자부감이 희석되고 민족자비감이 늘어가고 민족의식교육이 단절됨으로써 조성된 악순환은 심각하다. 현재 정부관원들중에 자기 언어문자사용을 꺼려하고 한어장악도를 유일한 능력의 척도로 보는 경향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언어문자는 민족복장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민족의 첫째로 가는 상징이기도 하면서 동화되는 요소라는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언어, 문자의 동화는 곧 민족동화의 결과라고 말할수밖에 없게 된다.        중국조선민족은 모체민족의 언어문자, 민족전통을 보존해왔지만 점차 타민족의 습성과 문화를 수용하게 되여 이중성을 띠게 된것은 사실이나 조선반도내의 모체 민족과도 또 다른 문화를 창조하여 특색을 이루었는바 세월의 흐름에 색바래질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계승되여야 하므로 교육의 이중성과 지연적인 3각지대의 특성을 살리는것을 전제로 하여야 할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조선족사회위기는 피치못할 산업화시대의 진통으로 해석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진통끝에 괴태를 낳아서도 안되고 더구나 죽은 아이를 낳아 서는 안된다. 현실을 정시하고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데 일편단심이 되여야 살길이 남는다. 더욱 성숙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민족지림속에 우뚝서는 비결은 과연 없는 것인가? 파란만장한 세기의 언덕을 넘으며 어렵게 형성된 우리 조선민족인만큼 그 어 떠한 역경과 좌절속에서도 만세유전되여야 한다.     민족의식을 충격하는 세찬 타민족의 문화격류속에서 지탱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바로 민족이 민족으로 살아남는 얼인 민족어이고 그 민족어를 핵으로 하는 민족교 육의 터전에서 민족의식고양을 종지로한 민족교육의 백년대계이다. 자기 언어문자를 잃고 민족교육의 터전을 상실한다면 우리가 오를 대안은 민족동화의 언덕일수밖에 없다. 먼 래일을 걱정하는것은 무모한 정력랑비일수 있다. 장래 어떻게 되든 시간에 맡기고 그 한계에 이르기전까지는 스스로 음으로 양으로 민족의 자멸을 손짓하는 비리한 작동만은 없어야 하겠다.                                                                          2008년 6월  24 일                                       
441    민족복장과 민족의 혼 댓글:  조회:4683  추천:0  2014-05-04
                                            민족복장과 민족의 혼                                                              최균선       오늘 텔레비화면에 성황리에 거행되는 《2008중국북방관광교역회와 중국조선족 민속문화관광박람회》의 장면이 생방송되고있었다.《교류, 협력, 개방, 발전》이라는 표어, 강령을 내건 국제성을 띤 연변의 관광축제의 장관이 주내 각민족 인민들의 이목을 끌것은 당연하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정부의 주요사업일정으로 거대한 인력, 물력을 동원하여 오래동안 준비해왔고 몇천명의 국내외 손님들까지 왕림하였으니 각자의 심목속에 새겨진 인상은 깊을것이며 따라서 받은 감수도 각이할것이다.     필자의 첫인상은 민족성의 부재라는것이다. 민족자치주의 조선복장을 착복하고 개회사는 또 한번 놀라웁게도 한어로 시작되였다. 알심들여 착복한 민족복장과 한어 연설문은 너무 이색적이였고 그 뒤에 조시장의 민족복차림과 조선말 박람회선포는 미묘한 대조를 이루고있었다.     복장은 그 민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한가지 인소이지 본질적속성은 아니다. 언어 야말로 그 민족의 본질적특징을 나타내고 그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제일 요소인것이 다. 그 장면에 얼핏 눈길을 주었다가 불현듯 많이 씻겨가버린 기억의 언덕에 새겨진 연변자치주조례의 해당부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연변조선족자치주조례는1985년7月31일길림성제6기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제14차회에서 비준되였다. 조례 제18조에는  제18조에는 자치주기관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조,한 두가지 언어문자를 통용할수 있으되 조선언언문자를 위주로 한다고 규정되여 있다.     2002년12월 16일 연변조선족자치주제12기 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의 결정되고 2003년 1월6일 길림성 제9기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제35차회의에서 비 준된 자치주조례 제18조에도 자치주기관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조,한 두가지 언어문자를 통용할수 있으되 조선언언문자를 위주로 한다고 규정되여 있다. 자치주내 국가기관, 기업 사업단위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문건, 포고를 내려보낼 때 응당 동시 에 혹은 분별하여 조,한두가지 언어문자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조선언어 문자 사업기구를 두고 조선언어문자의 연구와 규범화사업을 가강하여 조선언어문자의 건강 한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고 엄연히 규명되여있다.     한것은 56개의 소수민족을 가진 다민족국가에서 어떤 언어문자정책을 실시하는 가 하는것은 민족문제에서 핵심문제의 하나로 나서기때문이였다. 건국후 반세기를 넘으면서 나라에서는 매차 헌법마다 민족평등과 언어평등을 제기해왔고 각민족은 자 기 언어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다고 규정하였다. 소수민족으로서 이보다 더 큰 나라의 혜택이 있을것인가?     그러나 이런 지도사상과 방침정책이 조선족사회권에서 어떻게 체현되며 특히 사회정영, 민족의 정영들로서의 각급지도층에서는 어떻게 솔선수범으로 관철 집행되 는가? 정확하고 영명한 민족언어문자정책을 하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언어문자의 사용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외면하거나 포기하는것은 복속에서 복을 모른다는 격으로 밖에 해석할수 없다.     당의 민족정책과 민족어문정책의 따사로운 빛발아래 마음껏 민족이 제특성을 살리고 민족전통을 살리면서 시대의 발걸음에 맞춰 민족문화를 발전시킬수 있는 이런 영명한 시책이 있었기에 천입민족으로부터 중화대가정의 당당한 조선민족으로 이 땅 의 민족지림에 떳떳이 서게 된것이 아닌가?     한개민족은 복장으로 살아남는게 아니며 특징적인 민족으로 부상되는것도 아니다. 얼이없는 인간은 빈껍데기이듯이 민족의식이 없으면 그 민족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민족언어야말로 그 민족의 핵이자 곧 상징이기도 한것이다. 물론 시대의 발전과 더불 한 어종의 사용범위와 인구가 확대될수도 있고 축소될수도 있으며 언어자체의 류동과 변화를 말려낼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의식과는 별개인 사활적인 민족생존문제이다.     언어문자는 한 민족은 물론 전인류와 더불어 영생하면서 발전하는 가장 예리한 문화의 무기이다. 따라서 민족언어는 민족혼의 연줄이기도 하고 우리 겨레만이 느낄 수 있고 알수 있고 거침없이 통할수 있는 향기와 맛과 정이다. 단군민족이 형성되면 서부터 생긴 겨레의 친숙한 말에 담겨있는 의의는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의 세계, 곧 얼의 세계를 열어가는 유일무이한 길잡이요 소중할손! 더욱 단단히 잡고 세기의 언덕을 넘고 또 넘어갈 정신지팽이라는데 있다.     만족이나 회족의 가장 큰 력사적불행이 자기 언어문자를 상실한것이라는것은 상식문제이다. 민족언어문자체계는 하루아침새에 무너지는것은 아니지만 시작이 있으며 그 끝에 이르게 되여있다. 민족사회를 리드해가는 민족지도자들부터 자기 민족언어 문자사용에 적극적이지 못한것은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는 속담차원에 머므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구태어 구구히 해석해야 하는가?     이번에 성대하게 진행되는《2008중국북방관광교역회와 중국조선족 민속문화 관광박람회》의 행사에서 의식적으로 첫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인상이 선행되다보니 그뒤의 정채로운 절목들은 다 부차적인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하긴 나의 언어관념과 가치기준에 곰팡이 끼여서인지 모르겠으나 그저 미중부족이라 는 가벼운 표현으로 간과할 일은 아니라고 꼬집고싶다.                                                 2008년 6 월 28 일 
440    우리는 우리식대로! 댓글:  조회:5058  추천:0  2014-05-04
                                                    우리는 우리식대로!                                                              최 균 선       우리가 쓰고있는 중국조선어는 조선민족의 언어임과 동시에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언어이다. 조선어는 조선민족의 언어로서의 공통성이 있음과 동시에 중국조선족의 언어로서의 특수성도 나타내고있다. 만약 자체의 특수성을 외면하거나 스스로 버린다면 언어사용의 실체를 탈리하게 되여 교제에도 불리하기도 하거니와 민족문화발전의 자주성에 소급되는 문제이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신문매체나 문필사업자, 초고중학생들속에서 한국의 맞춤범을 선호하여 중국조선어규범화를 공공연히 무시하고 있는데 아직 전체 조선민족의 통일된 맞춤법이 나오지 않은 이상 정부차원에서, 학술차원에서 규정하고 반세기넘어 사용해온 우리의 언어규범만큼은 지켜야 하지않을가 생각한다.    문필가들의 저마끔의 표기방식을 볼때 어느것을 기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늘 곤혹스럽다. 하긴 다 제멋대로 할수 있는 범위안에 자유문필활동이니 법적으로 규제 할수도 없는일이고 왈가왈부할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경제강국이고 문화가 발전했기에《한국서사어규범》에 기준하는것이 당연하다고 할수도 있겠고 질서재조직의 격변기에 기준문제를 거론하는것은 고루한 생각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이다. 즉 중국조선민족이지 한국인이 아니기에 민족언어 정책의 혜택아래 규정하고 부단히 완선화하여 가고있는 서사규범을 우습게 본다는것 은 자기를 부정하는것이 아닐가싶다.     한국어와 조선어의 차이점에서 우선 눈에 띄는것은 한자어두움법칙인데 습관적으 로는 물론이거니와 한자어에서의 표의적인 일자일음의 법칙을 엄중히 위반함으로써 리해에 불리한것이다. 문맥상에 이어볼 때는 그런대로 통하지만 단독으로 여자(女子) 와 여자(余子)라든가 요소(要素)인지 요소(要所)인지 알수 없고 뇨소(尿素)같은것도 기어이《요소》로 적는다면 인위적인 장애를 설치한것이 아닐가?     련습(练习)과 연습 (演习)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다 《연습》이라고 적으면 어떻 게 되는가? 례컨대《군사연습》이라는 말은 되지만《군사련습》이란 말은 없다. 그런 데도 그냥 그렇게 쓴다면 무지가 된다. 아닌가? 련대 (连队) ,년대(年代),연대 (演 台)련대(连带), 연대( 烟台)를 다《연대》라고 쓴다면 공연한 오해를 불러오는것이 아닌가? 조선어한자음에는 더러 2중한자음뿐 만아니라 3중한자음도 더러있다. 그때는 더구나 시끄러움을 자청한다.    한국식맞춤법에는 소리대로 적는 원칙외에《어법에 맞도록》표기한다는 원칙이 있다. 여기서 《어법에 맞는 표기》란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표기를 일정한 형태로 유지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한글자 한글자가 일정한 뜻을 가지고있는 한자의 음을 표기할 때에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맞춤법 곳곳에서 엿보인다.     례하여 고유어끼리의 결합이나 한자어와 고유어로 된 합성어에서 사이소리 현상이 나타날 때는 사이시읏을 받쳐적지만 또한 한자어와 한자어결합에서는 사이 시옷을 붙이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다. 례하여 내과(內科), 대가(代价), 시점 (时点), 이권 (利权), 초점(焦点), 마구간(馬廐間), 맥주병(麦酒甁), 차이점(差异点) 등등.     이는 사이소리 현상이 나타나는 발음현실과 달리 한자 ‘內, 代, 时, 利, 焦, 馬廐, 麥酒, 差异’가 언어의식속에 《내, 대, 시, 이, 초, 마구, 맥주, 차이’라는 일정한 형태로 굳어져 있다고 보아 ‘냇, 댓, 싯, 잇, 촛, 마굿, 맥줏, 차잇’으로 쓰는것을 피한것이다. 결과적으로 표기가 실제발음과는 동떨어지게 된다.     이와달리 한자의 본음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발음의 변화를 충실히 드러내는 표기도있다.‘곳간(庫間, 툇간(退間,) 찻간(車間), 숫자(數字), 횟 수(回數), 셋방(貰房)’은 한자어의 결합에서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는 기본원칙과 는 달리, 발음을 반영하여 사이소리를 표기하고있다.     여자(女子), 연세(年岁), 양심(良心), 역사(历史), 낙원(乐园), 내일(來日) 등, 한자음의 변화를 수용한 표기는 단어첫머리에만  한정되는것은 아니다.‘나열 (羅列), 치열(齒列), 분열(分裂), 진열(陈列), 규율(規律), 비율(比率), 선율(旋律), 전율 (战慄)’ 또 렬(列, 烈, 裂, 劣), 률(律, 率, 栗, 慄)’이 [열], [율]로 소리나는 현 실을 중시한다는가.‘연연불망(恋恋不忘), 유유상종(类类相從),누누이(屢 屢- ) 와 같이 한단어안에서 같은음절이 겹쳐나는 일부 한자어에서도 두번째 음절의 소리 변화를 그대로 표기하고있다.     두음법칙에 따른 표기외에 다음과같이 본음뿐만 아니라 널리쓰이는 관용음을 표기한 례도있다. 승낙(承諾) 수락(受諾), 쾌락(快諾), 허락(許諾) 안녕(安寧) 의령 (宜寧), 회령 (會寧)분노(忿怒) 대로(大怒), 희로애락(喜怒哀樂) 오륙십(五六十) 오 뉴월 (五六 月), 유월(六月)…이에 따라 '寧'은 본음은‘녕’이지만, 때로는‘령’으 로 표기되기도 하고 어두에서는‘영’으로 표기된다. 이렇게 한글맞춤법의 한자어 표 기에는 한자의 원래음을 유지하려는 원칙과 한자가 우리 말에서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려는 원칙이 공존하고 있는것이다.      처녀면 다 확실한가? 젖이나오는 모든 녀자가 다 엄마일수 없고 젖이라해서 다 참젖은 아니듯이 “잘사는” 나라의것은 무조건 정확하고 무조건 따라야 할 리유는 없다. 세인이 다알다싶이 한국 어와 조선어는 동질언어인데 리념의 분기로 제각기 발전해오면서 다다소소한 차이를 낳게 되였고 갈수록 그 차이가 커지고있지만 본질 적으로 달라진것은 없으며 또 달라지자고 해도 달라질수도 없다.     한국에서 여자라고 하는것이 좋다해도 우리식으로 녀자라써도 소통이 막힐일이 없겠고 띄여쓰기도 량자의 규칙을 아는이상 어느것이 선진적이고 어느것이 락후한것 이라고 금을 그을수 없는노릇이다. 지난세기 50년대에 우리도 지금의 한국처럼 단 어를 규준으로 띄여썼더랬다. 결국 돌고돌아서 원점으로 가는셈이다.       그냥 이대로 나가 조선족서사생활의 주류로 된다면 중국조선민족언어문자사업위 원회라든가 조선어사정위원회같은것은 존재의 리유를 잃고만다. 문제는 이런 기구들 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중국조선어규범이 유명무실하게 되는 시점에서 백프로 한국식 표기를 하는것에서 만사가 해결된다는것일가?하는 문제이다. 물론 동족어이기에 여러 가지로《초ㅡ한계선》을 그을수 없지만 전민족이 수용하고 수용해야 하는 통일조선어 (한국어?)가 제정되기전에는 우리식으로 쓰고 말도 우리식으로 하면서 살아야 명실 공히 중국조선족이라고 할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한국화한다해도 귀 화하지 않는이상 필경 한국국민은 아니지 않는가?     무릇 언어에는 어휘규범, 문법규범, 말소리규범, 서사규범 등이 있다. 우리 중 국조선족들에게도 분명 자기언어규범이 있는데 왜 가급적으로 한국어규범에 맹종해 야 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가치취향인소가 있기에 사회적약속력 같은 것으로 규제할 상황이 아니고 뾰족한 방법은 없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주체의식이다. 서사어규범에서 이신작칙해야 할 문인들이 더구나 한술 더 뜨고 있어서 학생들이 중국조선족언어규범화에 근거하여 편집출판한 각종 교과서를 배우면서도 서사에서는 멋대로라면 그게 바람직한것일가? 완전히 한국식 맞춤법도 아니고 한국식 띄여쓰기도 아니고 이래저래 또 잡탕이 되고있는 형편이다. 한국식 띄여쓰기가 못배워낼만큼 어려운것은 아니지만 긁어부스럼이라고 왜 공연히 이것도 저것도 아닌것에 열중하고 있는것일가? 필자가 몇년 한족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리키고나서 얻은것은 표기혼란 등 조선어서사규범의 혼란이다.     자기의 언어규범을 지키는 문제는 결코 제쓰던 몽당비자루가 좋다는 그런식의 가 치취향이 아니라 엄연히 민족군체의 문화적주체성문제인것이다. 물론 한국식으로 표 기하고 띄여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서사생활에 주류로 된것도 아니고 또 주류로 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모래가 몇알들어가도 모래밥이 된다. 에둘러 말할것도없이 우리 식도 아니고 한국식도 아닌 잡탕서사를 만들지말자고 말하고 싶은것이다.     한국과 조선의 맞춤법 차이는 말과 글에서의 다른 모든 차이와같이 비단 한국과 조선자체내에서만 문제거리로 되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옮겨쓰는 다른 모든 나라들에 서도 마찬가지로 문제거리로 되는것이므로 그의 전일적인 규범화는 국제적의의를 가질수밖에 없다. 본래 허리가 동강난 국토에서 리념과 국격을 내세우는 바람에 말과 글의 규범화통일이 묘연한데다가 중국조선족이라는 제삼각점까지 생겨나서 더구나 나름대로 조선어가 우왕좌왕하고있어 안타깝다.     맞춤법의 규정이란 인공적이여서 소수인이 규정이라면 규정이 되는것으로서 그 어떤 규정도 만사통일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그른것이란 있을수 없듯 이 우렬이란 더구나 운운할수 없다. 문제해결의 고리는 남북학자들이 통일대사전을 만들고있는 상황에서 중국조선민족인이상 서사어마저 한국화하려고 모지름쓰고 안달 할 필요는 없다. 무릇 우주만물이 순리를 따르는데 언어발전이라고 례외랴!언어는 억지로 변화시키는게 아니라 발전하는것이다. 나무는 죽어도 서서죽는다. 우리는 가 는데까지 우리식대로 나아가자, 엎어놓고 뒤집어놓아야 조선어라는 민족어이다!                                    2008 년 5 월 24 일 초고 ㅡ 2013년 5월 24일 수정       
439    (교수단론)한국어글짓기 무엇이 문제인가? 댓글:  조회:4638  추천:0  2014-05-04
                                         한국어 글짓기교수 무엇이 문제인가?                                                            최 균 선       정체적으로 볼 때 대학 한국어 글짓기교수는 제고를 가져왔지만 의연히 박약한 환절로서 적지않은 문제가 미해결 상태이다. 이를테면 교재의 전문성, 계통성, 지식 함량, 능력시험과 글짓기훈련과의 뉴대문제, 글짓기교수에 수업시간 안배문제, 정독, 범독교수에서의 글짓기 기초를 닦는 문제, 글짓기교수, 지도 및 훈련방법 등 면에서의 일련의 문제들이 학생들의 주관능동성의 발휘, 가급적인 글짓기능력 제고에 걸림돌이 되고있다. 물론 교원들이 글짓기 교수에 진력을 다하고 있지만 한국어 4 ㅡ6급 능력시험에서 많은 점수를 깎이고 있는것이 바로 글짓기로서 합격률에 크게 영향주고 이에 학생들도 글짓기에 대한 박절한 수요를 상실하고 있는 실정이다.       1. 교재의 편찬문제     현행되는 여러 판본의 교재들은 거개 해당문체의 간단한 기초지식을 주고 범문을 제공하는것으로 엮어져있다. 정독과 범독과 교수는 듣고 읽기의 언어수입에 정력을 몰붓는게 주요임무라면 글짓기는 배운 언어를 종합적으로 수출하는 단계이다. 대량 적인 열독은 언어학습에 기본도경이지만 수출ㅡ활용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정독, 범독교재에 문장들은 알심들여 선재한것으로서 종합적 어휘구사능력 배양 을 꾀하고 있는 방면 실용문글짓기에 직접적인 기초로 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환언하면 상기한 교재에는 실용문체에 쓰이는 단어가 별로 많지 않다는것이다. 그리 고 문장의 결구, 글의 맥락분석 및 수사적표현기교가 실용문에서는 수요하지 않기도 하다. 상기한 과문에서의 론리사유와 형상사유와 실용문짓기에서의 론리사유가 별개 의 문제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용문은 피동성과 수명성(受命性), 내용표현에서의 권위성과 약속력, 표현형식의 순서화와 모식화, 쾌속성과 시간성 등 네가지 특점이 있기에 비교적 강한 종합지식과 풍부한 실천경험이 구비되여야 하며 높은 정치리론수준과 정책수준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에 선행하여 글짓기 기초와 론리사유능력이 수요된다. 그리고 행업에 따른 업무지식과 경험. 강한 학습능력, 착실한 사업태도가 뒤받침되여야 한다.     모든 수요는 용도에서 온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로 말하면 한국대기업에서 비서사업을 한다해도 한국어로 해당 상급부문, 각사회단체. 나아가서 사회를 상대 로  곰문서, 경제문서, 법률문서, 선전류문서, 광고문안 등을 쓸 기회가 별로 없다 는것을 학생들 자신이 잘 알고있다.     이러한 실용문의 격식, 결구, 모식등은 대동소이함으로 한국어로 각종 실용문체 지식을 장악하고 론리적이게 쓴다는것은 습작일반 훈련에서 모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실용성이다. 실용목표가 없는 글짓기훈련은 한국어로 훈련한다는데 흡인력이 있을지 모르나 실생활상에서는 그 기대감이 막연한것이 현주소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교재건설에서 문체선택에 실용성을 념두에 두고 편찬해야 할것 이다.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수 없다.      3. 글짓기 지도문제         글짓기 지도에서도 학생이 단독작전하고 심열도 교원이 단독작전을 하기에 사생지간. 학생지간에 교류할 기회가 없다. 그리하여 수차례 수개하여 주고 평어를 써주지만 반복하여 틀리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학생들은 다만 점수에만 관심하게 되고 숙제차수의 완성에만 마음을 쓰게 된다. 필자가 있었던 빈해학원의 경우 매학기마다 한반에 50명 이상의 학생들이 안배되기에 200여명의 한차례 작문을 상세하게 수정하려면 드는 품은 둘째치고 보다 건설적인 수정안을 실현할수 없다는것이 더 큰 문제였다.     여기서 실용문의 실용가치 유무와 범위선정, 문체선택, 지도문제가 제기된다. 사실상 대학생들로 말하면 언어표현 문제이지 실용문체지식이 전혀 생소한것이 아니다. 현행교재들에 수록된 건의서. 상품주문서. 항의서 같은 문체훈련은 국내실정에서는 훈련을 위한 훈련에 그치고 장차 사회에 나가서는 쓸모가 별로 없게 된다. 특히는 한국어능력시험에서의 전통적인 문체요구와 현행교재의 실용문체 지식에 뉴대 성이 극히 적다.  능력시험은 자기식으로 나가고 학교에서의 글짓기는 또 다른 한 갈래 오솔길로 되어 있는 셈이다.     4. 글짓기교수 시간문제     일계렬의 한국어교학의 종합적성과는 서면어표한ㅡ글짓기에서 체현되므로 가능 껏 일찌기 시작하여 쓰기 기초를 잘 닦아야 하며 전문 글짓기수업시간을 상대적으로 충분하게 안배해야 한다. 글짓기는 리론지식의 장악으로 완성되는것이 아니라 부단한 훈련속에서 제고된다는것은 다 아는바이다. 그러나 정독, 범독수업에서 글짓기는 흔히 부대적으로 취급하거나 유격전을 할진대 고급학년에 와서 긴 문장을 쓰려면 공중 루각을 짓는격이 될수밖에 없다.      5.  어떻게 하면 바람직하게 될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신심을 뒤밭침한 흥취를 지레대로 글짓기에 림하게 할것 인가? 정독, 범독교수이든 글짓기교수이든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긴밀히 협작하여 글짓기의 연속성을 잘 체현해야 한다. 한국어글짓기는 응당 정체성 지식전수와 지속 적인 훈련이 되어야 하고 군체적교제활동이 되여야 바람직하다. 구절은 문장을 이루는 작은 단위이므로 정독, 범독과에서 억세게 틀어쥐어 긴문장을 쓰기위한 문법기초 를 비롯하여 말을 조직하는 능력을 착실하게 키워야 한다. 무엇보다 초록글짓기를 중시해야 한다. 한국어능력 시험에는 하나의 문장을 읽고 30자 이내로 개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이 점에 상응한 훈련이 원초적으로 진행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독,범독과에서 이런 훈련을 경상적으로 해야 한다. 현행교재의 습작 기초지식을 바탕으로 명제작문, 자유작문을 짓게 하려면 역시 탈절감을 느끼게 된다. 명제작문보다 자유작문을 짓게 하면 발산사유, 창조성사유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좋다는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사실 동일한 학생이 명제작문과 자유작문을 짓게 하면 차이가 많이 난다. 왜서인가? 해답은 그안에 있다.     자유작문은 자기 직접적체험을 토대로 쓰기에 할 말이 많기때문이다. 물론 평시에 학생들이 공통으로 관심하는 세상사와 이야기를 하여 글감을 풍부히 하게 하는것 도 필요하다. 글짓기에 선행되는것은 정감이다. 정감인소에는 학습자의 학습동기, 학습태도와 학습흥취 등이 포괄된다. 한편의 문장은 내심감정의 표출이다. 한국어와 영어는 사유모식이 다르지만 한국어와 한어는 련계성이 많으며 많은 단어가 한자어로 되었기에 구사에서 영어보다 익숙한 점이 많다.     한족이나 한국인은 모두 형상사유를 하는 전통적공통성이 있으며 두민족이 다 변증사유를 중시한다. 한족과 한국인은 다같이 정체성을 우선하며 큰데로부터 작은 데로, 앞에서부터 뒤에 이르는 사유모식에 이른다. 한어에서는 문장의 서두에서 왕왕 배경이나 환경을 소개하고 차츰 주제를 이끌어낸다. 이 역시 한국인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어나 한어에서는 모두 결말은 비교적 엄숙하고 감정을 토로하는 수법으로 독자 의 공명 혹은 정감을 이끌어내는 수법을 쓴다. 이 점은 한국어로 글을 짓는데 일정한 우세로 되기도 한다.     학생들로 말하면 한편의 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국내외에 가장 영향이 큰것은 “결과법” “과정법”이다. 결과법은 주요하게 수업활동의 위주로한 학생이 모방 하게 하거나 베끼거나 고쳐쓰기를 하는 등 훈련으로서 이는 아래로부터 우로 올라가는 구절차원에서의 글짓기과정 즉 고립적인 단어를 합리하게 이어서 단락을 이루고 일정한 단락을 구성하여 옹근 문장을 이루게 하는 기초훈련이다. 물론 글짓기에서 교원이나 학생에게서 가장 중요한것은 결과이다. 이런 결과법 은 제목내기ㅡ짓기ㅡ평의 세개 단계가 보통인바 수업활동부분이 포함되지 않고있으 며 작자와 수정자간에 호상교류와 련계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 과정법이 새로운 교학 리념으로 중시되고있다. 이런 시점에서 합격된 실용문을 써내는 결과에 목표를 두기 보다 쓰기 과정에 더 류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한편의 글을 지을 때 먼저 모국어로 사유하게 하고 그것을 번역하는식으로 지을 수도 있다. 한국어 글짓기에서 우선 정확성을 추구해야 하고 다음 구체적서술능력이며 다음 한국어의 정감색채와 어의상에서의 차이를 충분히 리용하게 하는것이고 연후에 형상성, 생동성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종합적인 글짓기능력만 구비한다면 격식, 결구가 기본상 굳어진 해당 실용문도 어렵지 않게 쓸수 있다고 본다.     물론 전국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실용문 글짓기교재 모식을 한 개인으로서 타파 하고 개혁한다는것은 공담일수도 있으나 훈련하기 위한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냥 현상을 유지하는것은 비실제적인 작법이라고 생각할 때 이 방면에 경험자, 전문가들이 한번 토론을 벌리는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2011년 4월 12 일             길림신문(한국어촌)
438    민족어와 민족의 운명 댓글:  조회:4375  추천:0  2014-05-04
                                    민족어와 민족의 운명                                               최 균 선     자기의 민족어를 단순히 교제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은 의연히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개체발전의 리페와 선택성에 이어진다. 자식을 백프로 한어화에로 떠밀것인가? 선택은 자유이지만 벌에게 좋지 않은것은 벌떼에도 좋지 않다. 저마다 민족어를 한낱 교제어로만 리해하고 가볍게 포기해버린다면 민족언어의 생존과 민족 의 정체성에 소급되니까 하는 말이다.     민족어는 사상감정의 교류수단이기전에 민족의 정서를 담는 그릇이요 그 민족을 특징짓는 공통성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징의 하나이다. 민족혼을 지켜갈수 있는 유일하게 남을 불패의 철옹성이며 그 민족의 력사를 이어가는 무비의 힘인것이다. 언어는 민족의 형성발전과 더불어 완성되어왔으며 민족의 단결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바지하여왔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사상을 입어 운용하는 최고 수단이며 언어공동체에 있어서는 문화의 공동을 통한 정신적결합의 뉴대가 되며 사학적으로 볼때 인간의 사상 및 문화의 발전을 담보하는 보물고이다.     민족어는 한낱 교제도구만이 아니다. 사유를 다르게 표현하는 타민족어는 사상교류의 다른 그릇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족어는 벌써 교제도구의 차원을 넘어서 이루다 말할수 없는 심오한 의의와 가치를 가진다. 민족어교육은 단순히 개인으로서의 조화발전, 인격의 완성을 위한 조성작용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수천년의 력사를 통해 축적되여 온 좋은 경험, 그중에서도 민족정신적 문화유산을 계승시키고 나아가서 민족성원의 내면적각성을 통해서 그것을 확충, 발전시키고자 하는 수단이다.     민족어는 그 언어공동체인 겨레의 문화적전통속에서 구축된 얼로서 언어속에 정서와 사유와 감성까지 인도한다. 문화의 창조는 언어속에 살아있는 이 얼의 힘에 의거한다. 따라서 언어는 그 언어공동체인 겨례의 풍속, 습관, 신앙은 물론 기술, 경제, 법률, 종교, 과학예술 그 모든 령역에서의 유일무이의 전제로 된다.     조선(한국)어가 어떤 말인가? 세상에서 부러울것 없이 과학적으로 창제되고 다듬어진 우리 말과 글을 한어로 대체하려는것은 민족의 만성자살을 자초하는 무모한 발상이다. 그 민족의 말과 글은 민족과 더불어 구원하게 발전하는 무딜줄 모르는 문화의 리기며 민족생활의 중핵이기때문이다.     우리 말과 글에는 우리 조상의 숨결이 높뛰고 우리 민족혼이 서리여있고, 우리의 피와 얼이 반죽되여있고 우리 겨레들만이 느낄수 있는 향기와 맛과 정이 깃들어있다. 그 말소리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아니 우리 겨레가 생기던 때로부터 우리와 함께 한 친숙한 음성이기에 지닌바의 력사적가치는 무엇으로도 값매길수 없다.     민족어는 민족의 존망과 관련되는 사활적인것이기에 력사적으로 외래침 략자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마다 례외없이 그 나라 민족어말살정책을 강요 하여왔다. 일제의 창씨개명과 일어전민화가 좋은 교훈으로 된다. 국민이 없는 나 라란 존재하지 않는다. 산국어가 있어야 산국민이 있다. 자기 민족어가 없는 민족은 절름발이 민족이다. 사람은 제민족언어로 사고하고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타민 족어로 인지하고 사고한다면 그의 지적,문화적력량은 뿌리가 뽑힌다. 민족어는 민 족의 세계, 곧 얼의 세계로 이끄는 꺼질줄 모르는 등탑이다.     일제강점36년은 그야말로 암흑시대였다. 일제의 문화적폭압아래 우리 조선민족은 주권과 생존권은 물론 민족혼마저도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감격스럽게도  선각자적인 국어학자와 문인들의 고수로 우리 민족어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시인 리상화는《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네"라고 절규하였는데 여기에서 들, 또는 땅이란 개인적인 의미에서 농토, 즉 생존권을 표상하며 나아가 공적차원에서는 령토 즉 주권을 상징한다. 더욱 중요한것은 이 “땅”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민족혼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수천년 조 상의 숨결과 혼이 스며들어있는 땅(들)이란 바로 민족혼과 민중정서의 근원이자 표상이기때문이다.     민족어로서의 우리 말과 글은 바로 땅, 즉 국토와 하나의 등가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땅이 생존권과 주권, 그리고 민족혼의 실제적인 표상이라면 말과 글이야말로 실제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생존권과 주권, 그리고 민족혼의 상징이 아닐수 없다. 온갖 것이 다 박산나고 민족혼마저도 절멸될 위기에 처해서도  우리 말과 글을 갈고 닦고 지켜나감으로써 민족혼과 민족정신을 살려나아가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지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 민족이 있게 된것이다.     잔혹한 일제치하에서도 한 최서해, 리기영 등 작가들과 리상화 김소월 등 시인들의 민족어창작은 바로 우리 말과 글을 지킴으로써 민족혼과 력사를 살려내기 위한 민족운동이자 독립운동의 의미를 지닌다. 민족어를 살리고 지켜나감으로써 민족어의 완성을 지향해간다는것은 단순히 우리 말과 글을 쓴다는 소극적 차원에 머믈지 않고 더 나아가 민족어가 지닌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창조와 발굴 및 확대와 심화작업을 통해서 민족혼과 정서를 고양시켜 나가는 일과 긴밀히 이어져있다.     언어에서 민족주체를 내세운다는것은 민족고유의 특수한 감정과 미감에 맞게 말하고 글을 쓰는것을 말한다. 물론 고유한 말을 살려쓰는것을 제창함에서 낡은 것을 그대로 되살리는 복고주의경향에 빠져도 안되지만 한극단에서 다른 극단에 로 나가듯이 시대조류에 맞게 발전시킨다고하여 언어의 민족적특성을 무시하는 허무주의적 경향에 빠질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민족어를 고수하고 활용하는 것이 세계적인 문명개화기를 열어가는데 걸림돌이 되지않는다.     어느 민족이든 자체 언어는 그 민족과 국가의 상징이며 표출이다. 또한 민족성의 발로이고 민족혼의 대표적발현인 동시에 정신문화이기도 하다. 언어가 없어지지 않는 한 민족정신은 죽지 않는다, 순수한 민족어를 살리는 민족은 창조적이고 진취적이고 길이 번영할것이며 그렇지 못한 민족은 결국 력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중국경내 여러소수민족의 력사가 그것을 실증한다. 말갈족ㅡ녀진ㅡ만족을 보라. 민족어의 멸살이 란 바로 국가는 물론 민족의 쇠멸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것이다.     수난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민족어의 힘과 민족혼이 얼마나 끈덕진것이였는가를 새삼스레 알게 된다. 망국민이 되였어도 꿋꿋이 민족혼을 지킬수 있었던 힘이 바로 민족어가 죽지 않았기때문이다. 민족어가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외세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할수 있었던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힘을 갖고있는 민족어에 담긴 혼을 세세대대 지켜가는 초석을 우리 스스로 허물어가서야 되겠는가?     이 땅에서 어엿한 민족으로 살아남으려면, 민족군체로서의 경제, 문화발전의 진흥을 지향한다면 자기의 보귀한 민족어의 계승과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 언어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는데 초석이다. 다른 무엇을 지킬것이 없다. 오직 우리 말, 우리 글을 드팀없이 지키는 길밖에 없다. 혼이 없는 육체는 산송장이고 민족혼이 없는 민족은 허울뿐이며 전통과 풍습의 관성에 매달려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있을 뿐이다. 하루를 살아도 민족혼을 가지고 살자!!!                                                     2008 년 7월 3 0일                                               《훈민정음》63돌 날을 기리며
437    (교육칼럼)종신교육문제 댓글:  조회:4313  추천:0  2014-05-04
                                              종신교육문제                                                    최 균 선       항간에 죽을때까지 배워도 다 못배운다는 말이 있다. 배움의 바다에는 등탑은 있어도 뭍이란 없다. 전통적관념에서는 대학교육으로 일생의 교육이 끝나는것으로 인기되여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현대교육은 학교교육에서 완성되는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은 오직 승학을 위한것이 아니라 종신학습의 바탕을 마련하는 과정일뿐이다.     세기말에 제기된 종신교육은 전통교육리론을 개변시켰다. 1차성적인 학교교육은 부단히 지식을 갱신하려는 현대인의 수요를 만족시킬수 없다. 학교교육을 진일보로 사회에 개방함으로써 학력교육, 비학력교육, 계속교육, 직업기술교육 등 공능을 전면 발휘하여야 한다. 하여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사람마다 모두 배우는 국토로 되게 하여야 한다.     교육이 더는 학교교육의 동의어가 아니며 학교교육도 더는 교육과 학습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발점으로 되여야 한다. 학교교육은 엄격한 의미에서 단순히 승학을 위한것이 아니라 종신교육에 길에 로반이 되여야 한다. 종신교육사상은 이미 그 생명력과 감화력을 가진 당대교육사조로서 21세기 교육발전의 전략으로 되였다.      대학입학이 점수경쟁일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막무가내하게 승학공부에 몰두하게 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 지능검사로 측정할수 없는 다른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는것이다.《락방거사》들이라해서 모두 저지능도 아니려니와 설령 지능이 낮다해도 다른 능력도 낮다고 볼수는 없다. 그들의 지능이나 다른 능력이 활용되고 개발될수 있는 교육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전면발전교육이다.     극심한 경쟁속에서 운동이나 취미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하여 정서배양교육이 결석하고 말았다. 대학입시제도의 경쟁구조는 결국 여러가지 도덕적문제를 야기시 켰다. 부모는 성적제고를 강요하고 교원은 입시공부만을 요구하고 동학끼리는 정당한 경쟁의식이 쇠갈되고 대신 불신과 리기주의가 성행하여 학생들의 도덕발달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여있다. 학교에서는 도덕수업을 하고 교원도 훈계한다. 그러나 천군만마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려는 현장에서 도덕륜리는 사치스런 넌센스가 되여버린다.     이런 승학위주교육은 교육의 본래의 리념을 근저로부터 리탈하고있다. 이른바 승학준비의 교육철학이 본연의 리념을 비틀어놓고있다. 교육본연의 목적인 고차원적 정신기능의 양성은 외면당하고 단순지식의 저장으로, 고정된 시험모식에의 적응만이 강조되고있다. 하여 출제가능의 내용에만 매달려 창의력, 탐구력, 비판력 등 신장은 뒤에 밀려나있다. 결과적으로 아는것에 대한 긍지와 환희를 체험시키지 못함으로써 교실수업은 교육본래의 취지를 리탈하고만다.     대학입시교육은 인간교육을 외면하고있다.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 인간성을 윤색하는 활동은 완전히 도외시되고 있다. 학생들의 개인적 재능이나 적성을 살릴수 있는 과외활동 등이 공공연하게 등한시되고있다. 입시공부가 최고의 목표가 되기에 민주의식, 도덕성, 협동심, 질서의식 등은 색바랜지 오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육은 전인의 철학을 그 기본전제로 한다.         교육에서의 전인철학은 전면발전한 창조형의 인재배양을  목표로 한다. 전면적인 자질교육은 지, 정, 도, 예의 균형을 말하며 그 앞에 개성을 충분히 살리는것이 자질 교육이다. 전면교육은 시대의 수요이다. 그러나 가로가도 서울만 가랬다는 속담의 뜻을 좌우명으로 우선 대학문이나 들어서고 보자는것이 모든 부모들의 공통한 심경일 것이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에 순응하려는 의식에서 해탈하지 못하는 한 자질교육은 빈구호에 불과하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미래지향적이다. 현실이 그러니 어쩔수 없다는 체념은 당장은 급공근리의식에 만족을 줄지 모른다. 먼 장래를 내다본다면 문제는 달리 해석될수밖 에 없다. 21세기는 더욱 전면발전한 인간상이 요구되며 그런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 지금의 교육이 필연적으로 더욱 차원이 높은 교육이 되여야 할것이다.    사실 자질교육의 구호는 그것이 잘 안되고 있기때문에 제기된것이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교육과정모식과 방법도 중요하다. 그런데 주입식과 암기학습은 깨뜨릴수 없는 하나의 관례로 지속되고있다. 지금의 입시제도하에서는 본래의 교육은 구조적으로 비틀어지고 곁길로 빠져버렸다. 점수에 목매여 창의력, 탐구력, 지적호기심과 같은 고등정신과정은 발붙일자리가 없다. 한마디로 절름발이 교육이라고 말할수 있다.     교육열이 높은것은 좋지만 출세하려면 대학간판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있어 부모들의 발목을 잡고있다. 고중3학년생이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의 심리적 압력이 크다. 학생도 고3병에 시달릴뿐만아니라 고중3학 년의 증후군에 걸려있다. 승학제일의 파행적교육은 가정과 학교뿐만아니라 사회전반 에 걸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있다.     사회전체가 해마다 입시 증후군을 앓고있는것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시대의 풍경선이다. 승학과열경쟁으로 인한 사회부조리 역시 간과할수 없는 실정이다. 고액의 과외보도비, 시험장에서의 갖가지 부정, 거액의 수수료를 주고받으면서 감행되는 승학사기행위, 고위층과 결탁된 검은 거래등은 승학병이 가져올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병적현상들로서 과외보도비 고지출현상이 전형적인 례증이다.     모든 부모들이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고 있는 현실에서 대학시험제도의 개혁이 시도되고있지만 점수기준의 선발이다. 대학진학이 점수경쟁이기에 학부모의 무분별한 경쟁의식은 젊은 생명을 병들게 한다. 공부만 잘하면, 그리고 대학만 가면 출세한다는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과 돈을 들인만큼 해낼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 자녀에 대해 객관적인 파악을 못하고 기대치만 잔뜩 높이고있다.      전국통일시험에 의한 고도의 중앙집중식의 학생모집방법은 학생선발과 관련해서 대학에 거의 자률성을 허용하지 않고있다. 상술한 문제점들은 학생과 교원 등 교육 당사자는 온 국민적인 심각한 문제로서 교원이나 교육학자들만이 해결할 성질의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의 견해들이 있다. 사전에 잘 고안된 시험지에 기성지식을 외운대로 써넣으면 만사대길로 되여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은 입시 준비에 찌들어있고 퇴폐적인 사회풍토에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혹사당하고있다. 이러한 혼란에서 학생들을 해방시키는것은 우리가 추구할 교육의 새로운 구상이다. 그것은 사회의 어느 한 측면에서의 개혁이나 변화가 아니라 국민정신의 건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교육세력들이 서로 상보하여 교육역할을 수행하는 교육공동체의 건설에서만 실현가능하다.     학부모들이 겪는 고통은 비현실적인 기대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종신걱정은 앞에 있다. 지금 거의 모든 부모들이 많은《물고기》들 잡아놓고 자식들이 향수하게 하려고 자신을 혹사한다. 그러나 자식이 학벌은 높으나 경쟁사회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지 못했거나 경쟁에서 밀려 무위도식자가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눈을 감지 못하고 저승길에 올라야 할 근심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자식이 물고기를 잡는 기술을 전수 받았거나 튼튼히 장악하고있다면 안심을 앞세우고 저승길에 오를수 있을것이다.     종신교육리념은 격변하는 후기산업사회의 개인적, 사회적, 교육적욕구를 적절하 게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교육모형이자 리념이다. 이에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이 포함된다. 종신교육은 유아교육, 청소년교육, 중,장년교육, 로인교육 등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내용을 수직적으로 조정, 통합하고,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으로 각각 전개되는 형식, 비형식, 무형식적인 교육내용과 형태를 수평적으로 통합하여 삶이 곧 교육인 교육사회구축을 지향하는것이다.     종신교육은 전통교육의 목적, 내용, 층차, 령역, 모식, 체계 및 교학형식에 대한 한차례 중대한 대혁명으로 된다. 종신교육목적은 더는 아동들과 청소년들을 훈련시키고 기성지식정보 전수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소유의 사람들이 종신교육을 받게 하여 사람들의 자질을 전면적으로 제고시켜 지력, 체력, 정감과 륜리 등면에서 평형으로 발전하게 하여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하는것이다.     종신교육내용은 더는 지식을 전수받고 저장하는데 만족하는것이 아니라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찾기에 노력하게 하면서 학생들의 능력, 수준, 창조력과 잠재능력을 발굴해내도록 이끌어주는데 있다. 종신교육은 의,식,주행 등 저층차적인 수요에서 벗어나 이미 자아발전의 수요단계에 이르렀다. 정규교육이든 단기훈련반 등 다양한 교육형식 등을 물론하고 오직 인간의 자질을 제고시키는데 유리하면 종신교육범주에 포함시킬수 있다.     종신교육은 더는 전통적인 1차성교육처럼 봉페적인 직접적전수에 목매이지 않고 근거리면전전수와 원거리개방교육 등 형식을 병행하면서 교육받는자의 주체성과 주동 성을 더욱 자유롭고 령활하게 운용하는것이다. 종신교육체계는 교육발전자체의 필연 적선택이다. 종신교육사상은 날로 인심에 침투되여 습관적사유의 틀을 타파하고 현대인들의 자질을 전면적으로 제고시켜 학습화사회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촉구하고있다.      종신교육에서 관건은 자각적 구지욕이며 유효도경은 자학이다. 그리고 효용적인 구체적방도는 현대지식을 담은 선택성적인 군서들을 독파하는것이다. 그러나 현시대 전세계적으로 독서열이 하강됨에 따라 우리 민족사회에권에도《상투를 대들보에 달아매고》독서하려는 심리자세는 아득한 옛말로 되여버렸다.     교육이라는것은 어떠한 관문을 넘기기 위한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찾아 그에 적응하며 홍익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보람찬 삶을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 이다. 배움은 어느 한시기에만 하는것이 아니고 또한 한두번의 시험결과로 인생이 좌지우지되는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서 배워야 하는것이라는것을 자각한다는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문화대국이 경제대국에 선행한다는 전제로 종신교육이 놓여있다. 국민들이 생명 운동의 다른 수요로부터 평생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을 때에만이 진정 강성대국이 되여질수 있다. 학벌에 주저앉아 언제까지나 밑천타령을 불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학벌이 곧 쇠밥통인것은 아니다.     지식경제시대, 적자생존의 섭리가 엄연히 작동하는 현실사회에서 부단히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수밖에 없다. 진정한 공부는 대학문밖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독서해야 한다. 상투를 달아매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공자왈 맹자왈같은 곰팽이낀 고서가 아니라 현대지식을 담은 서적들을 될수록이면 널리 섭렵하여 자신을 무장해야 해야 건전한 삶의 자세를 가질수 있다.     현대적삶의 기술을 독서에서 터득하고 사회경쟁속에서 익혀나가야 살아남는다.  급변하는 시대, 우리 민족이《지식의 빈곤》으로 비극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독서를 생활의 주선률로 설정해야 맞다. 잔머리로 돈을 벌던 시대는 지나갔다. 아는것이 힘이라는 말은 절대진리이다. 사람마다 자각적으로 종신교육관념을 확립하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독서하면서 배움의  길에서 삶을 영위해야 웃으며 살수 있다.                                   2008 년 3 월 1 일
                                                               곤혹과 사색                                                                         ㅡ 고중3학년 조선어문교수실태를 두고ㅡ                                                                  최 균 선                                                                  문제제기       다원화의 시장경제시대 조선어문교수를 어떻게 사회의 수요에 접속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앞에 놓인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제이다. 그러나 현재 고중조선어문교수 특히는 3학년 조선어문교수는 여전히 응시교육의 지휘봉아래 해해년년 승산없는 “유격전”을 중복하고있다.     교원들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길이를 알수 없는 강을 발더듬으로 건넌다고 말할수 있다. 하여 교원들에게 있어서 고중3학년에서 조선어문교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리용할것인가, 과연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학생들에게 마땅히 무엇을 시험쳐야 하는가 하는 일련의 문제들은 곤혹과 사색을 자아내는 문제가 아닐수 없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고중조선어문교수 특히는 3학년 조선어문교수의 현주소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자문과 곤혹을 주소없는 편지로 이 지면에 싣는바이다.                                        곤혹1. 교재의 가치함량과 실용성       대학시험에 법적의거가 되고 출제의 보물고가 되여야 할 교과서가 언제부터인가 련습문제바다의 기슭에 밀리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타나 조선어문교수를 곤혹에 빠뜨리고있다. 학생들에게는 실용가치를 상실당하고있는 교과서에 거부심리가 생기고 교원들은 교재에 회의를 품고 수업하고있는 실정이다.     비록 조선어문의 도구성과 문화성이 똑똑히 규정되여있는 “과정표준”의 요구에 좇아 전면적으로 연구하고 알심들여 편찬한 교재이지만 현실적인 실용가치는 사람을 실망하게 한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고중조서어문교수의 목표성이 명확하지 못한데 주되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5권으로 된 현행고중조선어문교과서에는 71편의 글이 수록되였는데 근 80%가 문학작품고 20%가 실용성, 과학기술성의 글이다. 자습교재도 대부분이 문학성글이고 조선어문훈련집의 기초지식문제와 열독문장도 대부분 문학성글이다. 이는 교재자체는 문학교수에 조건을 마련해주었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대학시험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경우 경전작품이라 해도 분석은 분석대로 남고 시험준비는 별개의 문제로 되여 있기에 리해와 감상, 예술감수는 그냥 말타고 꽃구경이 되여진다.     문학작품분석은 인물형상을 둘러싼 문학교수가 되여야 실천과 검증이 어긋나는 현상을 극복할수 있다. 그런데 입시문제를 전제로 하다보니 어떤 글이든 무조건 해체 해놓고 문제를 만드는 기계적인 복습설계가 위주로 되고있다. 그리하여 학생의 사유 공간개척이란 리론에 머물고 사유의 령활성, 창조성사유배양도 공담이 되고만다.  《고중어문과정표준》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되여있다.《열독과 감상을 통 하여 시가, 산문, 소설, 희곡 등 문체의 기본특징 및 주요한 표현수법을 료해하여야 하고 작품과 관련되는 배경재료를 작품에 대한 리해와 분석에 리용하여야 한다. 중국 고대의 우수한 작품을 학습하면서 전통문화의 함의를 리해하는데 일정한 기초를 닦아 야 한다.》《어문과정표준해독》에서도《어문자질》의 개념을 새롭게 밝히면서 그것을 어문과정의 총적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즉 글자, 단어,구절, 문장에 대한 지식의 루적, 사유품질, 어문학습 방법과 습관, 열독습작과 입말교제능력. 문화품위, 심미정취, 지식시야, 정감태도, 사상관념 등 내용으로 원래의 어문능력의 개념에 비해 외연이 넓어졌으며 내포도 역시 풍부해졌다.     따라서 한족들의 어문시험에서는 어문의 종합자질인 언어표달능력을 측험하는데 치중하면서 학생들이 장악정도를 측험하는 문제를 제출하는 동시에 교재에서 선정해 한다는 기본요구를 체현하여 교재를 중시하는 방향에로 발전변화하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이에 비추어 조선어문시험문제도 상응한 개혁과 진전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 된다.                                                                 곤혹 2. 총복습모식과 그 효률성       교재의 강독교수를 마치고 전면적으로 돌입하는 총복습단계의 수업모식은 더구나 교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안전도가 높게 넓은 마당쓸기를 힘겹게 하지만 결국 사생들은 자기들이 쏟아부은 정력과 시간을 두고 허탈감에 빠지기 일쑤이다. 복습수업 형식은 주로 기계적강훈련으로서 학생들은 독립적으로 사색할 경황도 없고 쟁론할 담 량도 없기에 역향사유라든가 창조적사유의 배양은 사치한 념원이 되고만다. 결과 학 생들의 조선어문학습은 심리수요가 아니라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기 위한데 있다.     현행교재에서 설명문, 의론문이 약 20%를 차지한다. 어문이 각종 지식을 담은 그릇이라 할 때 과학성지식도 담아야 하고 인문정신은 그 기초우에서 상승해야 할것 은 물론이다. 교과서의 종합훈련문제에서 문학성글과 실용문, 과학기술성 글의 비례가 비슷한데 훈련문제집에서의 열독문장들은 리성사유에 치우치고있다. 설명문은 리해를 위주로 하면 충분하고 의론문은 리해식과 느낌식을 결합시키면 효과적일수 있으며 문학작품은 리해식, 느낌식, 감상식 이 세가지 방식을 결합하여야 효과적일것이다.     수업이든 총복습이든 주체는 학생들이다. 련습문제해결에서도 자주권을 극력 학생들에게 주고 학생들의 자각적인 학습심리를 불러일으키며 자기능력과시의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바람직하다.     고중3학년 조선어문교수의 중요한 임무는 기초지식을 잘 장악시키고 조선어문종 합능력을 배양하면서 최종목표인 대학입시에 접근시키는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해당 부문에서 만든 련습집에 자체련습지까지 덧쌓인《문제산》에 짓눌려 숨도 바로 못쉬고있는 판이라 자기판단력을 검증해볼 기회도 없이 불문곡직하고 해답을 베끼는게 상수다. 그리고 시험에 교재외의 열독문장들을 선정하는것은 학생들의 과외열독을 자 극하면서 발산사유, 창조적사유를 키워주고 독립적인 열독능력을 제고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출제의 전제는 원칙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조선어문과의 자체특점과 기본임무를 등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싶다.     수험생들이 교재밖에서 내는 열독문장을 대할 때 고중3년간의 강독과수업에서 축적한 불충분한 열독능력으로는 너무나 어려운것이다. 특히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 성 문장들은 수험생들을 궁지에 몰아넣기 쉽다. 그러지 않아도 고중생들의 조서어문 지식과 능력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분석능력이고 교원들도 학생들의 종합분석능력을 키워주어 하나를 배우면 열을 통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신통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고중조선어문교수에서 인문정신발굴이 주요한 과제라면 시험에서도 문학성 문제를 위주로 선정하는것이 좋지 않을가고 기대해본다.                                                   곤혹 3. 출제의 현실성과 검증의 진실성       조선어문시험에서 표준화시험형식과 교수요강의 요구를 초월하여 학생실제를 떠난 문제를 내는 현상을 두고 쟁론이 분분하다. 표준화시험형식은 학생들의 사상감정 을 료해하는데 불리하고 학생들의 사유를 활성화시키는데 불리하다. 표준화시험형식 에 대해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하지 오랜바 동일한 사유모식에 얽매이게 하고 발산사유발전에 수쇄를 채우는 격이라고 질책하고있다. 또한 사유의 결과에만 매달리게 하고 사유의 과정을 홀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있다.     지금 이런 표준화시험형식을 페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있는데 우리도 가급적으로 조서어문교수를 표준화시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는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전면발전의 목표에 도달할수 있으며 조선어문종합자질제고에 길이 열릴수 있다.     부대적으로 말할것은 입시작문에서 문체를 제한하지 않는것인데 이는 거시적으로 볼 때 학생들의 사유를 한곬으로 몰지 않고 역향사유, 발산사유 등 사유활동에 넓은 무대를 마련해주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의론문쓰기를 제일 힘들어하고 싫어하는데 그 소극적정서에 본의 아니게 푸른 등을 켜준셈이 된다. 하여 교재에 수록된 의론문과 의론문습작은 응당한 중시를 받지 못하고있다.                                                      곤혹과 사색을 동그리면서       교육의 핵심이 인간일진대 인간의 생명운동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자질검증을 설계해야 교육은 우선 인간학이라는 교육사상이 명실상부해질수 있다. 따라서 조선어문의 도구성과 인문성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파악되여야 한다는 도리는 자명해진다. 조선어문학과가 인간심령의 학문이란 특점을 잘 사리지 않고 지식점, 능력점, 점수선에만 집념하여 조선어문교수의 궁극적목적을 망각한다면 인문정신의 배양은 공리공담 에 그치고말것이다.     그러므로 고중3학년의 조선어문교수도 리성사유에 편중하지 말고 문학교수형식으로 인문정신을 구비한 민족형인재를 양성하는 무거운 사명을 바람직하게 담당할수 있도록 인간학강의가 되여야 할것이며 교수에 충족한 지시루적, 사유의 쾌락, 정감의 도야, 성공에로의 격려 등을 체현시키는 동시에 시험형식, 내용범위, 채점표중 등 일련의 개혁이 선행되여야 할것이다.                                                               2006년 4월호 《중국조선어문》
435    사과와 사죄 댓글:  조회:5597  추천:5  2014-05-01
                             사과와 사죄와 그리고…                                            야 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사과 (谢过) 문화”가 보급된듯싶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꼭 벼르지 않고도 하게 된것은 례의에 대한 자각성의 표지로서 사람간에 불필요한 갈등을 해소시키려 노력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소학교 1학년애들마저 잘못하였으면 “사과”해야 한다는 의식이 앞당겨 자리잡은듯하다. 비록 “사과하다”를 어째서인지 “사과친다”로 말하지만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그 누구든 실언하거나 잘못 행동하거나 일처리가 타당하지 못한 등 행위실책을 피면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작든크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줄안다는것은 인격력량의 중요한 인소로서의 크낙한 용기를 의미한다. 보통사람의 실언이나 잘못은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부작용이 크지 않고 주는 손실도 크지 않기에 진심으로 사과(道歉)하면 가히 량해를 받을수 있고 없었던 일로 될수도 있다.    진정한 사과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되 반성과 참회가 바탕이 되여있다. “사과”와 “사죄”, “미안”, “죄송(송구)”을 비슷한 의미으로 묶을수 있지만 “사과”보다 “사죄”가, “미안”보다 “죄송(송구)”이 좀 더 심중한 의미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인지되고있다. 사죄는 상술한 개념들보다 의미색채상 차이가 있다. 사죄는 지은 죄나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것으로서“석고대죄”라는 표현에 이르기도 한다.      흔히 사과는 일차성적인 잘못에 국한되고 사죄는 의식적인 죄에 대한것이지만 통털어 일종 정감상의 리해소통과 감정융합이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이룩하는것은 대방의 자존심, 체면을 다시 살려주는것이고 거둬들이는것은 량자의 동지지감(同知之感)이다. 이러한 사과, 사죄는 인간교제에서 중요한 한가지 요건으로서 오묘한 학문이 있거니와 필수적인 기교도 수요하고있다.    그러므로 일단 사과, 사죄하기로 작심했다면 가렵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거나 찡해나는 맛이란 전혀없이 구두를 신고 발바닥을 긁는식으로가 아니라 직설하여 대방의 거부심리벽을 뚫어야 한다. 사과는 들고있던 물고뿌를 건네듯해서는 실효가 없다. 성심성의로, 철저히 책임지려는 자세로 나와야 한다. 일반적인 실수로 인기된 일에 대한 사과는 말로 끝나지만 사죄해야 할만큼의 사과는 말로 에때울게 아니라 행동이 있어야 하고 책임(보상)이 따라가야 한다.    사과해야 할 일은 적시적으로 사과해야하지만 사과해야 할 일이 자주 빚어져서는 안된다. 사과한다는것은 어떤 일로이든 대방을 상해하였기때문이다. 자신이 잘못한 어떤 일을 사과하고 기억력이 제로인 닭처럼 또 같은 일로 사과한다면 좀 “곤란”하다. 대방에게 사죄해야겠다는 용기도 갸륵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자기의 잘못이 어디에 있으며 왜 사과하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대한 자성이다.    사과, 사죄하는것이 스스로의 치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까지는 인격적으로 성숙되여야 한다. 그래야만 내심으로 우러나서 하는 사과에 성실과 성근함이 넘치게 할수 있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는“사과”라는 멋진 말대신 잘못을 “빌었다”고 말하는게 보통이였다. 사과라는 말보다 더 질감이 나는 표현으로서 사실 누구에게 빈다는것은 굴욕적인 냄새가 다분한 표현이기때문이다. 사람이 잘못을 하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라는 말도 있는데 용서하여 달라고 간절히 비는 모양을 생동하게 표현하고있다.    그러나 사과하고 사죄하면 만사대길은 아니다. 례하면 일제가 조선을 침점하고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들, 이를테면 황군성노예들에 가한 비인간적인 악행도“잘못했습니다”면 끝날것인가? 조선인민을 수없이 학살하고 무지경으로 자원을 략탈해가고 끌날같은 조선청년들을 대포밥으로 내몰고 산사람을 묶어놓고 생체실험을 하는 등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는 그 죄악을 두고“사죄”도 아닌 “사과”만을 요구하는것은 아무튼 무기력하고 싱거워보인다. 인류가 언어의 빈곤증을 앓고있는것인가?    말은 “아해” 다르고 “어해”다르다고 “사죄”가 아니라 석고대죄해도 시원찮을 일이다. 승냥이더러 양을 잡아먹은것에 참회하라는것과 같으니말이다. 일본정부는 자기들의 피비린 침략력사에 대하여 사죄하려하지 않는데 “사과”가 가당한것인가?    근간에 중국에서는 “력사적사과”행위가 시작되는듯싶다. 례하면 문혁시기 홍위병으로 갖은 악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로 내몬 사람들이 몇십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무슨 궁리가 돌았는지 피해자가속들에게 자기를 반성하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역시 문혁의 피해자였던 진의의 아들이나 송임궁의 딸은 애비들과 계급계선을 나누고 립공속죄하느라고 극성을 부렸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지각한 사과가 자기의 도덕적가책을 해소하려는 작동은 아닌가?    사과하던들 쓴죽이 밥이되랴, 사과는 잘못쓴 글자를 지우는 고무지우개도 아니고 수정액 (修正液)도 아니고 더구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 누가 혹은 어느 집단이 력사사회적인 잘못, 국정운행에서 시행착오를 범했다면 사과로 종료될수 없다. 사과한마디로 인간백사가 원점이 된다면야 “원한”,“불구대천”, “천추에 용납못할 ” 이란 표현은 공연히 만들어진것이 되고 인간세상이 이렇게 알륵과 쟁투로 시끌벅적하고 살벌하지 않을것이다.     “사과”란 말이 외교용어로 되여있지만 시비도리에 지여 궁지에 몰리게 될 때 곧 잘 “사과”를 하거나 “유감” 을 내뱉는것은 상황모면의 술책이지 참회가 아니다. 진정한 사과는 내심상 참회의 표현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관용 내지는 용서인데 사과와 용납이 부등식이 될때도 있다. 사과하면 원점회귀가 아니기에 사과 혹은 사죄를 씹던 껌처럼 내뱉지 말아야 한다. 사과의 심도와 광도가 어찌되였든 사과한다는것은 사과하지 않은것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병주고 약주는격의 사과는 간계이다.    작정하고 남을 때려놓고서“참 아프겠구나, 내 본심이 아니였는데…이 놈의 손이 그만, 미안해 사과할게…”라고 할 철면피야 있으랴만 사과, 사죄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량심과 인격력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사과” 는 모종 측면에서 겸손과도 련계되는바 어려운것을 쉽게 말하는것은 겸손의 체현이다.    결국은 “사과”는 도덕문제와 직결되기전에 갖잖은 자존심에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자기는 사과라는것과 담을 쌓고도 누군가 자기 사과하지 않으면 하늘낮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혹 사과한다면 그것은 다시 범하겠다는 복선이 될수 있다. 잘못하고도 제때에 사과하면 적어도 모순격화는 생기지 않는다. 사과란 원래 그렇게 심각한것이다. “사과”란 말을 상황모면의 얄팍한 술책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일상에서 사과는 례의이지만 사과하기전에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는게 명지하다. 하지만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고 그래서 아직도 사과는 바르고 사려깊은 사람의 소중한 품격이 된다. 사과는 진심이여야 하지만 체호브의 소설 “관리의 죽음”에 나오는 체르바꼬브처럼 자심할 정도의 사과는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사과하는것과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일은 별개다. 그만큼 진심으로의 사과는 아무나 쉽게 하는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려면 자존심을 굽혀야 하기때문이다.    사과가 구겨진 자기 체면을 살리기 위한 림기응변책이나 빠져나갈 구멍을 파는 간능한 술수가 되면 받아들이는 대방의 립장에서는 오히려 조롱으로 들린다. 더구나 사죄해도 시원치 않을 일을 사과하는것은 시비를 얼버무리는것이다. 사과 혹은 사죄함에서 가장 수요되는것은 충심으로의 속죄의식이다.                                                     2013년 11월 5일
434    (시) 수중원혼들을 기리여 댓글:  조회:4616  추천:1  2014-04-28
                                           수중원혼들을 기리여                                                       진 언                                                       불쌍해                                                         애도할가                                                             하니 억이막혀                                                       통탄이                                                         울컥하니                                                             억장무너져                                                       칠흑의 수심속                                                         얼마나 무서울가                                                             숨막히고 기막혀                                                                 희망도 졸도할제                                                       부디나 살아와라                                                         절규가 하늘찢고                                                             구원은 묘연하여                                                                 창파도 노하여라                                                       바다가                                                        무정한가                                                            인간의 리기에                                                                사신도 치떨리라                                                                                             한목숨 살겠다고                                                          선도망 추한 넋들                                                              원혼들 저주속에                                                                 유취만년 어찌사누                                                                                                        2014년 4월 18일
433    (교육에세이)“교육의 원점회귀”에 대한 소감 댓글:  조회:5505  추천:1  2014-04-25
                                      “교육의 원점회귀”에 대한 소감                                                         최 균 선       물질문명, 고기술 등 각방면에서 오로지 발전, 발전을 목적으로 천방백계를 다하는 이 시대에 어떤 방면에서 “원점에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호를 제기한다면 우선 떠올려지는것이 “퇴보”라는 단어일것이다. 그러나 퇴보하기 위한 원점회귀가 아니라 보다 가급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원점에로의 회귀가 있으니 바로 우리의 교육이다.     중국교육이 회귀해야 한다는 원점을 신비롭게 생각할것도 없는바 간단히 말하면 교육의 핵심점에 착지한다는것이다, 즉 핵심적가치관수립이다. 전통교육에서 핵심주제는 “덕지체교육”이였다. 하여 중소학교교육에서 대대적으로 제창한것이 다섯가지를 말하고 네가지가 아름답고 세가지를 열애한다는 “五讲四美三热爱”이였다. 그 후에 여덟가지 영광과 여덟가지 수치(八荣八耻)와 도덕자질교육과 인격교육 등에 이르게 되였다. 이제까지의 교육실천에서 성과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교육이 곁길로 빠져들게 된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글로벌시대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세계에 낯을 돌리고 세계와 발을 맞출것을 지향하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는 1970년 련합국교과문조직에서 통과한 현대 세계교육의 최종목적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1-131 호결의를 좌표로 삼아야 할것이다. 그 교육목적은 다음같다.     1. 과학적인도주의에로 나아가야 한다.     2. 창조성을 배양해야 한다.     3. 사회의무를 짊어지려는 태도를 배양해야 한다.     4. 완선된 인간을 배양해야 한다.     고도로 개괄한 네가지 목표이지만 현대육의 핵심가치관을 완정하게 표술하고 있는바 민족, 국가, 계급과 당파를 초월하여 전지국적인 시야를 가지고 전인류적인 보편적교육의의를 내포하고있다. 우리의 교육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것도 바로 이 네가지 목표에 담긴 가치관으로 교육을 통솔하면서 전부의 교육사업을 출발시킨다는것으로서 그리해야 가히 백년대계의 현대화교육이라 할것이다.     우리의 교육을 돌이켜본다면 오래동안 국가차원의 공리화목표만 바라보고 걸어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즉 배양목표상에서 먼저 문화가 있는 보통로동자, 혁명계승자 배양이였고 후에는 현대화건설의 전문인재, 네가지가 있는 신형의 인재 등이였다. 물론 전통교육모식에도 자체의 합리성일면이 있고 실용가치가치가 있지만도 교육으로 하여금 원점에서 탈절되여 현대교육의 변연에서 맴돌게 하였던것이다.     한 전문가는 진정한 교육은 무엇보다 먼저 생명교육에로 회귀되여야 한다고 말한다. 생명교육이란 학생들이 생명을 열애하고 생명을 향수하도로 하는것이다. 생명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종목표인 행복의 밑천이다. 자기의 생명을 열애해야 할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아낄줄 알게 하는것이 생명교육이다. 이는 범세계적으로 교정내폭력이 날로 우심해지는 때에 더욱 초미의 과제로 제기되기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의 각급학교들에서 생명교육이란 안전상식교육에 그치며 전통적인 인문교과서에는 그냥 학생들에게 두려움없는 혁명영웅주의와 자아희생정신을 선전고취하면서 개체생명을 진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교육을 뒤로 밀어버리고있다. 이러니 다른 사람의 생명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이 희박할수밖에 없다. 이런 생명의식이 결여된 교육에 대하여 아직도 충분히 중시하지 못하고있다. 비일비재로 발생하고있는 교정내의 각종 폭력사건, 자살사건들이 바로 생명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지 않는가?     물론 교육인만큼 지력교육을 중시해야 한다는것은 편지에 문안이다. 그러나 지력교육에서도 학생의 호기심의 격발, 독립사고능력배양, 자주적학습정신과 자습능력 배양 및 배움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학구정신배양, 순수한 흥취와 비공리성적인 탐구정신의 배양 이 네가지가 선행되고 일관하게 관통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의 종지로 되는 학생의 령혼교육이다. 령혼교육은 우리가 흔히 말 하는 심미교육으로서 바로 령혼세계를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는 교육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덕육교육으로서 고상한 령혼세계를 구축하도록 이끄는 교육이 포함된다. 현재 일반 학부형들도 중국교육에서의 방향성문제와 시행착오들에 불만이 많지만 “중국교육은 어디로 가고있는가?”하고 감히 대성질호하지 못하고있다.     그러나 지성인들은 언녕 교육이 원점에로 회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우리가 먼길을 갈 때 방향만 틀리지 않는다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리없다. 오늘 하나의 구호를 내놓고 래일 무슨 개혁조치를 공포하고 들볶아대서는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미국같은 자본주의나라에서도 “사랑”을 교육리론의 핵심으로 삼은지 오래다. 우리 여기서도 사랑할줄 모르는 교원은 교육을 모른다는 명제가 류행된지 오래다.     미국은 학생의 인격, 개성의 발전을 고도로 중시하고 충분히 존중한다는 리념으로 미국식의 “사랑교육리론”을 충실히 하여왔다. 그들에게는 우리처럼 엄숙한 정치과는 없지만 도덕수양교육과 애국주의교육이 호상침투시켜 긴밀히 결합되게 하면서 학교의 각종 활동에서 체현시키고있다. 교실마다 미국국기를 걸어놓고 선서하게 하면서 도처에서 무시로 국가의식을 심어주고있다. 그들의 교육실천속에서 공정성, 책임감, 존경심, 합작정신, 자률, 신념, 우의교육 등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있다.     근 10여년래 우리 나라 본과생, 연구생 및 박사, 교수의 수량은 이미 세계제일의 수준에 이르렀으나 질량과 과학기술성취는 이렇다하고 말할수 없는 형편이다. 중국의 학생들의 응시능력은 세계적으로 으뜸이지만 상상력, 창조력은 일반정도도 안된다는 평가이다. 그래서 점수는 높으나 능력은 낮(高分低能)다는 반갑지 않은 감투를 여지껏 벗어던지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물론 이미 쌓은 교육성과들을 전면 부정할수는 없다. 그러나 성과들을 제기하지 않는다해서 그것이 달아나는것이 아니며 더구나 마멸되는것도 아니다. 요는 어떻게 가급적으로 교육이 원점에로 회귀하도록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앞으로 대학시 험도 기술형인재배양과 학자형인재배양을 념두에 두고 두가지 시험형식을 도입한다고하니 늦게나마 시대수요에 한걸음 더 접근한것이라고 환영하게 된다.     중국교육이 원점에로 회귀하는 길에 가장 큰 장애물은 교육을 산업화, 시장화하느냐? 하는 교육리념과 방향성문제의 미확정이다. 이 시비문제에서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데 교육에 고유한 사회공능으로부터 볼 때 무조건 산업화, 시장화해야 한다는것은 편파적이고 모종의 급공근리적인 사유이다. 교육의 첫째공능은 교화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전면발전과 사회진보를 실현하는 수단이며 둘째는 교육은 지식을 보존하고 지식을 정리하여 전수하고 지식을 신장시키고 창조하는 특수한 작업이다.     이러한 교육기구가 어느 특정된 사회집단 혹은 계층의 리익에 좌우지된다면 안될 일이다. 교육산업화찬성론자들은 교육을 근근히 일반상품으로 보는데 이는 교육의 특수성을 무시하는것이다. 학생들을 돈나무로 여기는 현상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중국의 대학들은 “청수아문”이 되여있고 관원화되여 있는데 이런 현상은 교육의 원점회귀에 장애물이 아닐수 없다. 고등교육의 산업화는 이미 교육의 공익성원칙을 엄중하게 위반하여 기로에 들어서게 했다. 교육의 원점회귀의 길에서 이런 걸림돌을 제거하는것이 초미의 문제로 제기되고있다. 이는 일가견도 아니다.                                                2013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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