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서리쳐지는 책을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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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5/14 [01:1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지난해 2010년 11월‘당대’ 출판사에서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라는 부제가 붙은“그들이 온 이후”란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는‘워드 처칠’이라는 아메리카 토착 인디언 출신 학자이다.(황건 번역)
워드 처칠은 이 책에서 유럽의 스페인,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유럽의 나라들이 어떻게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을 학살하여 절멸시켰는지 매우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들어 낱낱이 증명하면서 미국에서는 지금도 얼마 남지 않은 인디언들의 보호구역 땅까지 모조리 강탈하기 위해 미국정부가 어떤 모략을 꾸미고 압박해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유럽 백인침략자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그 중간 카리브해의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집단학살하였으며, 특히 이름도 가지가 지의 전염병 병원에서 나온 이불과 목도리까지 선물하여 거의 멸종수준에 이를 정도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카리브해에서 1500여만 명, 북아메리카에서 1500여만 명 등 3000여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자료에 의한 주장이고 실제로는 1억 명 이상의 아메리카 인디언을 유럽인들이 학살하여 거의 절멸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실제 알려진 것과 달리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농업기술과 토목건축 기술,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 일리노이아주인 당시 카호키아의 경우 인구 4만 명 규모의 발전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저자 워드 처칠은 이 책에서 옥수수, 토마토, 호박, 감자 등 지금 인류가 이 용하고 있는 작물 절반이 인디언들이 재배하던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매우 높은 수준의 의학치료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적어도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 기록도 인디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땅도 공동 소유하는 등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넓은 영토, 풍부한 먹을거리, 높은 의학수준과 다툼 없는 평등하고 화목한 생활에 산하제한까지 없었다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숫자는 기록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 자명하다. 이 많은 인디언들을 유럽인들은 동물처럼 학살하여 절멸시킨 것 이다. 문제는 지금 남은 얼마 안되는 인디언들의 보호구역 안에서 우라늄 등 귀한 자원이 발견되자 이를 강탈하기 위해 온갖 법개정 놀음을 벌이고 인디언들 경제활동 에 장애를 조성하고 마약과 술에 찌들게 하여 완전히 멸종 해체시키려는 시도를 지금도 미국 지배세력들이 자행하고 있다면서 책의 저자 워드 처칠은 인디언들이 각성 하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해온 워드 처칠도 현재 미국의 유태인들로부터 협박과 압력을 계속 받고 있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의지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유럽인들의 인디언 학살사가 얼마나 잔악한 것인지 독자들에게 좀도 생동하게 전달 하기 위해 총 13장과 부록으로 구성된 내용 중에서 이 책의 개관에 해당하는 1, 2장의 주요 대목들을 뽑아서 아래에 소개한다. (중략)
................................. 아래 ..............................
◐ 원조 나치는 콜럼버스
[세일(Kirkpatrick Sale)은 그의 저서 ‘파라다이스의 정복(The Conquest of paradaise)’ 에서 이렇게 말했다.(155쪽)
총독(콜럼버스)이 1495년에 도입한 공물제도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동혐오를 인정하면서도 황금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단순하고도 잔인한 방법이었다. 14세 이상의 모든 타이노족 사람들은 지배자들에게 석달마다 금으로 만든 매부리(금이 없는 지역에서는 면사 25파운드)를 바쳐야만 했다. 공물을 바친 사람에게는 그 증거로 토큰을 주어 목에 두르도록 했다. 공물을 바치지 못한 사람은 페르난도(콜럼버스 동생)가 조심스럽게 말한대로‘처벌’받았는데, 그것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 (사제) 의 말대로 두 손을 잘라 피 흘려 죽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콜럼버스 총독 재임기간 동안 에스파뇰라 섬에서만 이런 식으로 1만 명 넘게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에는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히달고)들이 타이노족을 집단으로 목매 달아 죽이고, 쇠꼬챙이에 꽂아 굽거나 화형에 처해 죽이고(종종 한 번에 수십 명씩), 어린이들을 잘게 썰어 개의 먹이로 주는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 모두가 원주 민들에게 스페인‘상전’ 들에 대한 ‘올바른 존경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먹이아기의 발을 잡아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럼 꿰기도 했다.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나치 친위대들도 이보다 더 사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런 짓거리는 끊임없이 대규모 학살극으로 이어졌다.“어떤 스페인 사람이 …갑자기 칼을 뽑았다. 그러자 100명 전체가 일제히 칼을 뽑아, 겁에 질려 앉아있던 일단의 타이노족 남녀노소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잘라 죽이기 시작했다. …얼마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근처에 있던 큰 집에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소가 도살당한 것처럼 피가 냇물처럼 흘러나왔다.”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이번에 최대의 포악행위와 학살극이 자행되어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했다. 인디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기들의 왕국과 땅, 자유, 목숨, 아내 그리고 집을 유린당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스페인 사람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로 죽어가고, 말 발굽에 뭉개지고, 칼로 동강나고, 개에게 먹혀 찢기고, 산채로 묻혀 죽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굶어죽었다. ”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이런 학살극은 도륙할 타이노족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런 학살은)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언을 열등인간,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생각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라스카사스와의 논쟁에서 귀족인 프란시스코 데 세풀베다는 대다수 스페인 사람들을 대변하여 아프리카 흑인이나 그밖의‘하급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영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어디서 조우하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죽이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지닌 신성한 책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도 바로 이런 골수 인종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 그들이 온 이후’ 19-21쪽
◐ 전염병 유포로 인디언 대량학살
[물론 ‘콜럼버스의 만남’은 약탈적인 유럽의‘신세계’ 정복, 5세기에 걸친 대량 학살 및 식민지화 사이클의 길을 터놓았으며, 이 과정은 토착 아메리카의 면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꿔놓았다. 사실 콜럼버스가 총독으로 있었던 스페인의 카리 브해역 주둔 첫 10년 동안, 그 후에 이어진 모든 사태의 틀이 만들어졌다.
콜럼버스가 실행한 노예제도와 방자한 살육정책은‘구세계’의 병원균의 도입과 결합되어 1496년에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의 토착 타이노족 인디언 수를 800만에서 300만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년 후에는 타이노족의 수가 10만 미만으로 감소했고, 1542년에는 스페인의 인구조사에서 불과 200명 남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 에스파뇰라 섬의 ‘인디언’들은 한 세기 전만 하 더라도 1400만에 달했던 카리브해역의 다른 토착민들과 함께 멸종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1513년 폰세 데 레온 탐험대의 플로리다 진입 때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천연두 전염병이 온 대륙에 퍼져 1524년에는 리오그란데 강 북쪽 지방의 전체 토착민 중 약 3/4이 절멸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520년부터 1890년까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속에 무려 41차례나 천연두 전염병 및 풍토병이 전파되었다. 이에 더해 홍역, 백일해, 결핵, 선(線)페스트,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디프테리아, 성홍열, 늑막염, 유행성 이하선염, 성병 그리고 일반 감기 등 수십 가지 치명적인 질병이 퍼졌다.
이런 질병에 의한 토착민 감소는 흔히 비극으로 취급되지만, 그러면서도 전적 으로 유럽인과 토착민의 접촉에 따른 우연하고도 고의가 아닌 부산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전연 다르다. 왐파노아그족과 나라간세트족이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과 벌인 1675~76년의 이른바‘필립 왕의 전쟁’은 인디언들이 천연두를 유럽인들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고 믿은 데서 촉발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영국군의 전술과 의도에 관한 그 같은 인식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점은 제프리 암허스트경이 1763년에 휘하 헨리 부케트 대령에게 내린 명령서로 충분히 입증된다. 암허스트는 이 명령서에서‘천연두 병균에 오염된 담요 등-이들 형편없는 종족을 절멸시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폰티액의 인디언연맹군 대원들을 감염시키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암허스트는 ‘천연두 병원에서 나온 담요 두 장과 목도리 한 장을 그들에게 주었다. 바람직한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성과가 있었다. 암허스트의 생물학전에 의한 전염병으로 최소한 10만 명의 인디언이 죽었다. 1836년에 일어나 비슷한 사례에서 미국군은 미주리 강 만단족에게 고의로 천연두 병균으로 오염된 담요를 배급했으며, 그 결과 전염병이 퍼져 토착민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7세기 초 플리머스와 버지니아에 영국 식민지가 설치되고 네덜란드가 뉴암 스테르담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북아메리카 토착민 말살정책은 훨씬 더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1637년 5월 26일에 고전적인 사례가 발생했다. 이날 영국군이 미스틱 (코네티컷주)의 피쿼트 마을을 포위, 북을 지르고 나서 도망가는 남녀노소 약 800명 을 학살하고 도끼와 칼로 난도질했다.
18세기 거의 내내 이 같은‘사고’는 더 한층 빈발했다. 이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인디언전쟁(인디언을 총알받이로 앞세운 전쟁이라는 말인 듯)을 벌였고 이때 토착민들은 어느 한편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도록 강요되었으며, 그 결과 토착민의 인구감소는 한층 더 가속화했다.-‘그들이 온 이후’] 34-36쪽
◐미국의 절멸적 학살
[그(마셜)에 따르면‘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는 데‘저항’하는 것은‘전쟁행위’가 되어 이론적으로 미국의 무력을 수반한‘대응’을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토 착민들의 물리적 저항능력이 완전히 분쇄된 1903년에 와서는 마셜 독트린이 더한층 발전하여, 대법원은 연방정부가‘고유하게’ 영역내의 모든 인디언들에 대해‘전권’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여러 조약을 통해 획득한 토지소유권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미국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조약상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연방법원은 또한 정부가 원주민들의 나머지 재산에 대해서도‘당연’하고도 영구적인‘신탁’ 특권을 갖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1840년대에 동부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나아가 멕시코의 북쪽 절반에 대한 권리도 무력으로 강탈한 미국은 스스로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진출할‘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백인은 하나님의 섭리로 신대륙을 지배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뜻-옮긴이)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했다. 이 개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디언에게 돌아갈 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연방정부 정책결정자들과 일반여론은 서둘러 인디언 절멸논리를 노골적으로 펴나갔다.
이런 정서는 어김없이 수많은 대규모 인디언 학살로 이어졌으니 그중 대표적인 사건만 보더라도 블루리버(에브래스카, 1654), 베어리버(아이다호, 1863), 샌드크리크 (콜로라도, 1864년), 와시타리버(오클라호마, 1868), 캠프 로빈슨(네브래스카, 1878), 둥디드니(사우스타코타, 1890) 등을 들 수 있다. 1894년에 미국연방센서스국은 미국이 한 세기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에 원주민을 상대로 ‘40차례 이상’ 전쟁을 벌여 이 과정에서 자체의 추정치 3만 명보다‘훨씬 많은’ 사망자를 냈다고 밝혔다.
센서스국은 또한 이 기간 동안 ‘민간인’에 의한 토착민 학살도‘매우 많았다’고 시인했다. 캘리포니아에서만도‘주로 광산업자와 초기 정착민들이 저지른 잔혹행위와 대규모 학살로 인해’ 1800년 30만에 이르던 토착인디언 수가 1890년에는 2만 명 미만으로 격감했음에 비추어볼 때, 민간인에 의한 사망자 수는 군대에 의한 사망자 수보다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는 인디언 의 머릿가죽을 관공서에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현상금을 내주었다. ‘대체로 인디언을 개만큼도 여기지 않는…유로아메리카 사람들에 의해 텍사스인디언들은 대부분 절멸되거나 멸종지경에 이르렀다.’ 서부지역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토착민들이 살해되면서 그들이 살던 땅에 백인 정착민들이 대신 들어앉았다.
1890년에는 미국 내에 살아남은 인디언 수가 25만 명에도 못 미치고 사망률이 95%를 웃돌았다. 생존자들은 조그만 ‘보호구역’에 갇혀 살았는데, 그나마 이른바 ‘일반토지할당법’에 따라 해체의 길을 걸었다. 1887년에 제정된 이 법령에 따라, 공식우생법이 제정되어 미국의‘기준’으로 해서 누가 인디언인지(그리고 누가 인디언이 아닌지)를 결정했다. 자신이 ‘1.5등친 이상의 인디언 혈통’임을 납득할 만큼 입증하고 그 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아들인 사람은 대체로 160에이커 미만의 개인 토지증서를 받았다. 충분한‘혈통량’을 가진 개인이 토지를 할당받고 나면, 보호구역의 나머지 땅은‘잔여’토지로 선포되어 비인디언이 입주하거나 기업이 취득하거나 또는 국립공원 용지로 전용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930년까지 토착민 보호구역 중 가장 좋은 땅 1억 에이커를 빼앗겨, 인디언들은 원래 보유지의 2.5%에 해당하는 5천만 에이커의 불모지에 더욱더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이 모델은 나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답습하여 원주민에게 영토를 할당하는 ‘인종자 치구’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이 온 이후’ 38-40쪽
◐ 총 몇 명의 인디언을 학살했을까?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의 한 해변에 표류하여 처음 상륙하던 날 북아메리카는 오래전부터 풍부하고 매우 복잡한 여러 문명들을 물려받고 있었다. 적어도 5만 년 동안 줄곧 이 대륙을 차지해온 토착원주민들은 총인구 약 1500만에 달했고, 인구 4만의 카호키아(오늘의 일리노이주 소재)의 도심지 같은 대도시들, 고도로 성장한 건축, 토목개념, 현대 생태과학에 맞먹는 지식이 구현된 영 적 전통, 약물학과 전인의학에 관한 높은 지식 그리고 매우 정교한 정치, 교역 및 외교 체제 등을 실현했었다.
대륙의 전통경제는 일차적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는 식물성 식료의 절반이 훨씬 넘는 작물(옥수수, 감자, 토마토, 호박, 고추 등-옮긴이)을 만들어낸 친환경적 영농절차에 바탕을 둔 농업이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룩한 토착민 사회는 매우 평등하게 조직되어 부동산은 집단소유였고 모계중심 사회가 기본이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식 전쟁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쟁은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온 이후’ 34쪽
[콜럼버스의 프로그램으로 타이노족의 수는 그의 지배체제 초기에 800만에서 1496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감소했다. 총독이 떠날 즈음에는 약 10만 명가량 남 았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계속되어 스페인이 1514년 인구조사에는 이 섬에 살아남은 인디언 인구가 고작 2만 2천 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1542년에는 겨우 2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 1500만 명에 달했던 카리브해 전역의 인디언들과 함께 멸종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이 온 이후’ 18쪽■
2013년 12월 24 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