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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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진언씨 수상록 (9) 미모의 값 댓글:  조회:6765  추천:0  2014-01-11
                                                                   미모의 값                                                                      최 균 선         미모란 무엇인가? 글자그대로 아름다운 용모이다. 미란 무엇인가? 아름답다, 보기좋다, 눈을 즐겁게 하다. 등으로 표현할수 있는데 아름답다를 조선말로 곱다. 곱살하다. 예쁘다. 예쁘장하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할수 있다.     미모는 그 임자에게는 자호감으로 거듭나고 타인의 눈에는 쾌감으로 인지된다. 미모가 뭇눈길에 쾌감을 산생시키는것이 용모뿐이란 말인가? 미감은 쾌감보다 한차원 높은 고급적인것이다. 우리는 눈과 귀로는 미감을 느끼고 코와 혀, 피부로 쾌감을 느낀다. 그러니 미모는 쾌감까지 포함시킨 최고의 감각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미모의 표준은 한두마디로 확정하기 어렵다는게 문제이다. 무우와 배추가 각기 특점이 있듯이 심미표준도 각양각색이다. 시대의 변이에 따라서, 부동한 국도와 부동한 민족의 가치취향에 따라서, 그리고 천층만층 구만층의 개체의 표준에 따라서 다를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역시 이률배반의 현상일가?     지역적으로 말하면 아프리카의 어떤 민족에게는 입이 큰것이 미이고 어떤 민족에겐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가 미이고 시대적으로 고대애급에서는 키작고 똥똥한 녀자가 절대가인이였다하고 고대중국에서는 풍만한 미녀가 선호된 때도 있었고 초나 라왕은 바싹 여윈 미녀를 선호했다고도 한다.     조선의 전통미녀의 표준으로 다섯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세가지가 커야 하는데 눈이 크고 젖가슴이 크고 엉덩이가 큰것이다. 이것은 서글서글한 심성과 생육능력을 고려한것이란다.     둘째로 세가지가 작아야 하는데 입이 작고 손이 작고 발이 작아야 한다는것이다. 이는 섬세함과 품에 드는 매력을 고려한것이라고 한다.     셋째로 세가지가 희여야 하는는데 살갗이 희여야 하고 눈의 흰자위가 희여야 하며 이발이 희여야 한다는것이다. 이는 밝고 깨끗함을 의미할것이다.     넷째로 세가지가 검어야 하는데 머리칼이 검고 눈섭이 검고 눈동자가 검어야 한다는것이다. 이는 유인하는 매력이 있음을 의미할것이다.     다섯째로 세가지가 붉어야 하는데 볼이 붉고 입술이 붉고 손톱이 붉어야 한다는것이다. 이는 건강미를 념두에 둔 표준일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무상하여 전통미는 도전을 받게 되였다. 20세기 80년대 이후 외래문화의 홍수와 더불어 심미표준도 홱 달라지면서 서시를 흉내낸“동시”들이 많아졌기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의 본색미와 원색미를 보아내지 못했거나 무시하고 맹종하면서 자기를 학대하는 일면도 읽을수 있다.     본색미란 보통 전통미를 이르는 말이다. 흑진주같은 새까만 눈동자에 하얀얼굴. 칠칠한 검은머리를 땋아내린 토배기미녀들은 지금 보고죽자해도 없다. 자연미야말로 진짜 원색적이고 건강한 미로서 꾸며낸 미는 어디까지나 진실성을 의심받게 된다. 로출의 집착으로부터 시작하여 옷차림새나 머리꾸밈새가 혁신되고 일매지게 금발을 선호하고있다. 동양미는 촌티나고 서양미만이 현대미라는 말이 되는것인지…     아마 현대류행아가씨들의 심미표준에 의하면 세가지가 커야 한다는 전통표준에서  젖가슴이 커야 한다는데는 동감이여도 엉덩이가 커야 한다는데는 그만 실소를 금하지 못할것이다. 지금은 일매지게 약하고 또 약한것을 추구하는데 엉덩이가 커야한다니 얼마나 웃기는 심미표준인가? 네가지가 검어야 한다는것에서 머리가 검어야 한다는데도 실소를 금하지 못할것이다. 지금은 파란눈에 금발머리 미인이 우상이여서 늙은녀자들도 곧잘 노랗게 붉게 염색하는것이 류행인데 검은 머리라니 될말인가?       예로부터 홍안박명이란 말이 있다. 중국4대미인의 첫자리에 놓이는 서시는 나라를 망친 나쁜녀자라는 루명을 썼다. 후에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사나이 범려와 여생을 보냈다는 설이 정말이라면 비교적 행복한 미녀라 할것이나 왕소군은 그 몹쓸 화공 모연수의 작간으로 새외에 시집가서 선후로 흉노왕 부자의 처가 되였고 초선은 여러 남자의 손에 넘겨지다가 결국에는 너무 곱다(牵强之极)는 리유로 관우의 손에 처결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한때 랑만적이였던 양귀비도 안ㅡ사의지란에 란도질을 당했다고도 하고 핍박에 의해 자살했다고도 한다. 그녀들의 경력과 최후운명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지만 결국《홍안박명》에 귀결된다.     일신천냥에 눈이 팔백냥이라고 아름다운 눈이 매력의 근거지가 될것이다. 눈은 가장 박학한 언어대가로서 거기서 경우에 따른 추천장을 찍는다. 얼굴도 잘 생기고 몸매도 미끈한 녀자는 조물주의 은총을 받은 녀자이다. 이마가 반듯하지 않으면 심령도 반듯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마음의 창문이 되는게다. 아무튼 녀자로 태여나서 미모를 지녔다면 천연재부이고 으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미모를 타고나지 못한 녀자들에게는 외모가 평생의 유감이다. 중국에는《동시가 눈살찌푸리기를 흉내내다》라는 성구가 있는데 동시의 눈에는 다병한 미인인 서시가 노상 눈살을 찌푸리고있는 자태마저 매력적이였는지라 흉내냈지만 그 동기와는 달리 오히려 꼴불견이여서 천고의 웃음거리로 되였다는 얘기다.     춘추시대에 나온 얘기인데 아름다움을 모방하더라도 자기에게 걸맞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삼고있다. 녀자로서의 동시가 미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나무릴것 없지만 문제는 자기를 잘 알지 못하고 무작정 모방하여 역효과를 자아낸데 있다. 이 성구를 자주 쓰면서도 사람들은 한가지 문제를 보아내지 못하고있는데 말하자면 동시가 자기의 원색적인 미를 모르고있었다는것이다.     아름다운 녀자들을 제일 처음으로 꽃에 비유한 사람을 천재라고 하던가? 녀자를 꽃에 비유한것은 아름다워서만이 아니다. 스러지는 꽃의 운명도 말하고있지 않는지? 그러나 사상의 아름다움은 백배나 자랑스럽다. 진정한 재부는 심령이다. 미모가 꼭 심령의 거울인것은 아니나 심령은 확실히 인격의 거울이다. 잘생긴 녀자들은 지천으로 널렸으나 아름답게 보여지는 녀자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왜 그럴가? 공성인은 겉이자 속이니라 했지만 생김새는 사람을 곧잘 속인다. 잘생긴 미남자도 극악무도할수 있다는 사실은 조물주의 최대의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순결무후한 어린애들의 얼굴에 국한된다. 외모는 인상에 그치고 인격은 본질적인 인품을 전시한다. 그래서 사랑스럽기에 아름다운것이지 아름답기에 사랑스러운것은 아니라고 하는것이다.     녀자들에게 있어서 미모는 확실히 천연재부이다. 허지만 그 선택받은 재부도 남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넝마가 될수도 있고 순결한 녀인의 눈도 공방형앞에서는 하나의 미궁으로 변할수 있다. 아무리 상품경제시대라 할지라도 미모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되였다는것은 결코 미녀의 자랑거리는 아니다. 우둔한 녀자는 끊임없이 미를 개발하여 리용하려 하지만 총명한 녀자는 자기의 미모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미식거리라는것을 잘 알기에 쉬이 상품화하지 않는다.     대저 녀자들이 뭇눈길, 특히 이성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고싶은것은 본능으로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나 남자들이 목숨걸고 미색에 빠지는것은 유다른 생리구조가 아니라 미모때문이니 미모가 고급상품이 될때 행불행은 예측불가하리라.                                                                    2008 년 4월 10 일
391    진언씨 수상록 (8) 생명혼 댓글:  조회:7741  추천:0  2014-01-11
                                                              생명혼                                                               최 균 선       인간의 수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의하면 염라왕이 인간과 소와 개와 원숭이를 불러다 수명을 하사하였는데 인간의 수명은 20년, 소는 40년, 개도 40년이고 염라왕이 손오공을 무서워하였으므로 그의 후손인 원숭이는 마음껏 살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는 먹는것은 풀이지만 평생 고역에 시달리지 못하겠다고 20년만 살게 해달라고 하였다. 약삭빠른 인간이 소가 내놓은 20년수명을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개도 집이나 지키는 일을 하는데 무료해서 어찌40년을 살겠느냐며 불평을 부렸다. 이번에도 인간이 염라왕에게 애걸해서 개가 내놓은 20년수명을 얻어가졌다. 그렇게 한갑자를 살수 있게 되였다.     하지만 더 오래살고 싶은 인간은 욕심사납게 원숭이를 홀려내여 20년 수명을 더 빌어가졌다. 오래 살겠다고 징징거리는 인간을 굽어보며 천둥같이 노한 염라왕은 생사박의 인간의 수명2 0년 아래에 무엇인가 써넣고는 (그래, 이 가소로운 인간아, 오래 살아보아라. 우마처럼 살다가 원숭이 되여진 맛을 보게 될터이니)하고 랭소하였다. 인간은 원래의 수명인 20년은 사람처럼 살다가 그후 20년은 소처럼 살아야 했고 그후 20년은 개처럼 살고 60년 살고나서 늙어지면 원숭이 나이를 살게 되였다.       아닌게 아니라 생명혼이 가는 길에는 고난이 앞서고 뒤에는 사신이 바싹 따라붙는다. 왼쪽에는 불행이 서고 오른쪽엔 행복이 서있다. 고난은 그냥 가심덤불길로 이끌어가고 불행은 부단히 고통의 씨앗을 뿌리며 눈물로 싹틔운다. 행복은 내키면 다가서고 앵돌아지면 멀찍이 숨어버리면서 반복이 무상하다. 사신은 그 모든것에 심드렁해 있지만 염라왕의 명령일하에 생명을 끝내는데는 게을리하지 않고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생명본능이란게 있어 영원히 건강과 행복을 지향하며 가치로운 인생을 살려한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아낄수밖에 없다. 심장박동은 곧 생명의 약동이다. 매 사람에게는 일생에 심장박동수가 주어져있다고 한다. 그처럼 우리에게 속한 생명혼은 린색한것이다.     생명은 목적성과 적응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있다. 생명혼은 거꾸로 걷는 본능이 없는 대신 라태를 부릴줄 모르는 특성이 있다. 생명의 옹달샘은 새여서 흐르게 되여있다. 생명은 뒤걸음칠줄 모르지만 어제와 함께 걸음을 멈출줄도 모른다. 그런데도 삼천궁녀를 롱락하며 만년을 살듯이 불사약을 캐오라고 3천동남동녀를 천애지각에 쫓아보냈던 진시황도 어이없이 일찍 죽어버렸다. 거사 서복이도 돌아오지 못했다. 생명의 존엄은 생명의 길이와 별개의 문제인것이다.     인간은 본디 어둠속에서 태어났다. 어둠이란 진실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있다. 인간은 어둠이 갖는 무의 신비로움을 다 알지 못한다. 이 무(無)는 무아(無我), 무념 (無念)과 이어진다. 모든것은 없는것이다. 무엇이 있어도 그것은 모조리 무화 (無化) 된다. 거기에 어찌 멈춤이 있을수 있겠는가. 생명은 무에서 온것이요 무로 돌아갈수 밖에 없다. 마치 락엽귀근처럼 말이다.     생명은 한차례 기우이다. 생명혼의 희열은 탄생이 엮고있고 생명혼의 비가는 죽음의 신이 연주하고있다. 생명을 하사한 조물주는 그것을 회수해갈 시각부터 미리 내정하고 주었음이니… 생명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염라전에 늦게 불려갈수 있다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생명이 비속하게 연장될수록 저승사자도 포승줄을 내들지 못하고있다.     생명은 원초적으로 불안이다. 생명의 고고성은 인생교향곡의 전주로서는 너무나 랑만적이라 할것이다. 생명혼은 서정시만 쓰는것이 아니라 산문시를 더 많이 쓰게 되여있다. 생명의 악장은 내내 찬송가로만 엮어지는것이 아니라 만가도 부르게 되여 있다. 생명혼은 각자의 운명의 테두리안에서 운동한다. 아무도 숙명적인 자기 인생궤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때 강철의 투사로 칭송받던 오스뜨롭쓰끼의 유명한 명구를 지금도 기억하고있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한번밖에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날을 회억할 때 헛되이 흘려보낸 세월을 통탄하지 않도록, 보람 없었던 생활로 하여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일생을 살아야 하며 죽으면서 나의 생명과 모든 정력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업 ㅡ 인류해방을 위한 투쟁에 바쳤다고 말할수 있도록 일생을 살아야 한다.》     이 명언을 금과옥조로 삼았던 로세대들도 지금 생각하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르나 감각을 따라 산다는 젊은이들에게는 더구나 우습게 들릴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스뜨롭쓰끼의 말에 무슨 어페가 있는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위해 산다지만 동시에 순수 자기를 위해서 사는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개체 에게 주어졌지만 의로운 빛과 열은 생명의 연소에서 발산한다.     생명혼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꽃마차안에서 하품할수 없다. 생명의 가치는 신진대사에만 있지 않다. 생명은 식물인에게서는 신진대사의 의미밖에 쓰지 못한다. 짐승도 신진대사를 아니하던가? 생명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라 할수 있다. 생명의 환희 도 정열적이지만 불타는 생명의 희열은 더구나 가치로운것이 아니랴.     술잔이 각이한만큼 부어진 술도 부동하고 그 색채도 각양각색이듯이 같은 생명이라도 개성이 다르고 인생극도 다르게 씌여진다. 생명은 그 자체가 일종 경계이다. 생명혼은 길이에 얽매이기보다 자기의 빛을 발산하는데서 값있는것이다. 처경이 어떻게 비참하든 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생명에서 어떤 의의를 찾아내야 한다. 불원이면 생명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될것이다.     생명혼은 자기의 화원에 쭉정이를 뿌리는 법이 없이 결실만은 꿈꾼다. 인간은 본능의 진화보다 욕망의 진화를 선행시켜온 동물이기때문이다. 생명자체에 원래 무슨 의의가 없다. 무의의감과 공허감이 이겨져서 생존공간을 형성한다. 우리가 생명의 의의에 대해 똑똑히 보지 못하거나 찾을수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살아가 노라면 어떤 의의가 창출되는것이다.     생명다운 생명이 되려면 사회적인간으로 공익을 위한 소모와 연소로 되여야 한다. 생명은 연소속에서 불꽃을 튕기며 제나름의 포물선을 긋는다. 오직 살아있기에 살고 살기 위해 산다면 식물인의 목숨보다 나을것 없다.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돼지와 다를배없다고 한다. 표현은 좀 야하지만 내함은 유익하다.      우리는 추상적인 생명의 의의를 찾을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나 그만의 천직 혹은 사명이 있으며 구체적으로 실현한다. 그 실천은 크게 물욕과 명예욕에서 실현되는바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고 가긍한 사람은 먹이때문에 죽는 새처럼 재물에 목숨을 걸고 아득바득하다가 비명횡사하는 사람일게다.     생명을 돈이나 재물로 바꿀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기 생명을 금전욕의 시녀로 삼는 사람들의 목숨값이야말로 비싸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름이 넘는 돈나무에 목을 매여죽는다해서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될리 없다. 자기의 생명혼을 도금하려는것은 결코 명지한 인생자세가 아님을 명기하자.                                                 2008년 3 월 13 일
390    진언씨 수상록 (7) 오늘을 사는 마음 댓글:  조회:6079  추천:0  2014-01-11
                                                     오늘을 사는 마음                                                                최 균 선       오늘이란 우리네 삶의 진행현장이다. 어제의 삶은 죽었고 래일의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오늘을 놓친 사람에게는 래일이 없다. 래일도 오늘처럼 이렇게 가면 새 날이라는 래일이 없다. 하지만 래일이라는 두글자를 믿고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해치고있다. 세월아, 네월아 타령에 목이 쉰들 어이하랴. 무궁한 세월이 하루하루로 쪼개지지 않았더라면 늙는줄도 모르고 편안타령을 부르다 죽어갔을것이다.     요컨대 젊은이는 희망에 부푼 미래에 매달려 오늘을 등한시하고 늙은이는 젊은패기와 호기에 집착한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흘러간 물이요 래일의 세계는 오늘이 아니다. 미래는 현재와는 거리가 먼 추상세계이기에 우리는 그처럼 환상을 가지고 매일 매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에 충실하면 자기 생명에 충실한것이고 유일하게 확실한것은 오늘만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스콧 펙의 정채로운 론단이 있다.《당신이 스무살이든, 마흔살, 예순살이든, 당신이 성공자이든 실패자이든, 당신의 어제가 빛났든, 폭풍이 불었든, 무덤덤한 하루였든간에 당신에게 오는 모든 아침은 새로운 삶, 새로운 시도, 새로운 눈뜸의 시작이다…》과거는 기억속에서 오늘로 재현될수 있지만 망각에 속한것이다. 과거는 확실하다. 우리가 잘못 기록하지 않으면 틀리게 기억하고 있을뿐이다. 그래서 과거가 없는 사람 은 현재도 없거니와 미래도 없다고 말한다.     개구리는 과거의 의미를 모르기에 올챙이 때를 잊고있는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과거가 력사의 한페지로 남는다면 그것은 선택된 위인들만의 몫이다. 그러나 과거는 보통사람에게도 지혜의 거울로 된다. 과거가 어수선했다면 오늘이 정채로울리 만무하다. 과거는 오늘을 증명하고 오늘은 래일을 가늠할수 있기때문이다.      과거를 스승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지성적인 사람이다. 과거를 잊었다면 당신은 현재도 잊는것이다. 과거는 어제의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과거라는 나무에는 오늘의 영광이 열리는 법이 없다. 바보도 세월이 찍어둔 옛발자국을 따라 갈수 없음을 알고있거늘 과거를 밑천으로 삼으려한다면 명지한 처사가 못된다. 과거사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칠 힘은 없지만 지시등은 될수 있기때문이다.     과거는 추억속에, 현재는 분발속에, 미래는 희망속에 살아가라. 추억에 살면 인생을 두번 산다고 하지만 그건 늙은이의 아쉬움을 말할뿐이다. 오직 회억이만이 당신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과거에 매달려 살수밖에 없다. 과거에서 현재형으로 흔상 할만 한 가치를 찾지 말라. 과거는 세월의 언덕 저쪽에 굳어져있고 미래는 당신에게 막연 한 손짓을 한다. 전지전능하다는 예수그리스도조차 과거에는 속수무책이다. 지나간 일을 친절한 마음으로 회억할수 있는 일은 련애사뿐이다.     그러니 당신의 인생을 바꿀수 있는것은 오늘이지 과거가 아닌것이다. 현재란 어제의 래일이고 곧 달려갈 과거의 후보이다. 현재란 시급히 완수해야 할 눈앞의 사명이지 게으른 낮꿈속에 잠꼬대가 아니다. 오늘의 향유는 소모가 아니라 래일의 준비작업이다. 오늘 어떻게 살고있는가는 자명하지만 래일 어떻게 변할것인가는 오리 무중이다. 그러기에 명지한 사람은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무작정 래일에 턱걸이를 하지 않는다. 미만한 미래를 바꾸어 오려면 충실한 현재를 영위하라.     과거에는 나약했더라도 현재를 견뎌낼수 있다면 당신은 래일에 닥쳐올 어떠한 일도 견뎌낼수 있을것이다. 현재만이 확실하게 자기의 생명형태를 보여준다. 현재에 충직하라. 인생좌표로는 오직 오늘이라는 단어가 제격이다. 현재가 안고있는것은 곧 넘겨질 과거이다. 그러기에 누구에게나 오로지 오늘이라는 단어가 소중할뿐이다.    퍽 오래전에《오늘의 삶을 래일 사는 남자!》라는 광고사가 텔레비화면에 나왔더랬는데 미래을 앞질러 보라는 뜻을 시사하느라 했지만 돈벌이를 내세운 헛소리 일뿐이다. 오늘의 삶도 버거운데 어찌 미래까지 당겨서 산단말인가?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지 말고 당신의 오늘을 사랑하라. 미래를 조명할 등불은 과거라는 자명등 이지만 현재라는 기름을 부여야 한다. 미래를 두고 안절부절하는것은 정력랑비이고 무모한 자기학대이다.     미래란 장차 걸려는 새 간판일뿐이지만 어떤내용일지는 결정지을수 없다.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사람의 현명정도는 시간만이 알고있다. 장래의 운명을 파악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2천년에 한번씩 세상에 난다는 성인일것이다. 장래에 대한 예측은 그래도 과거선생이 맡는것이 바람직하다. 선인들의 빛나는 발자국은 과거에로 향한것이지 미래에로 향한것이 아니다.         오늘 일체를 잃었지만 래일이 당신에게 더 많은것을 줄수 있다고 믿어보자. 오늘이라는 닭알에서 래일이라는 암탉이 꿈꾸고 있다는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과거때문에 오늘이 기가죽었다면 래일만은 오늘에서 죽이지 말자.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영원은 우주에 속한 범주인데도 말이다. 영원은 수많은 하루하루가 하늘에 저축해둔 시간의 리식일뿐이다. 지난 날에는 석유등잔. 오늘은 샨데리야, 래일은 인조태양이 밤을 불태울것이다.     당신의 미래는 뛰여가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걸어온다. 날마다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이지만 결코 어제의 그 태양은 아니다. 현재에 눈을 감고싶다면 아예 눈을 뜨지 말라. 오늘이 고달픔으로 래일을 기다리는 마음은 애처롭다. 그러나 지구는 의연히 돌고 계절은 물레바퀴돌듯 잘만 돌아간다. 시간에겐 격려란 있을수 없다.     흔히들 소털같은 날이란다. 허나 그것을 다 세고 죽을 분복이 인간에게 차례지지 않았다. 백년도 못살면서 백년을 살듯 일욕심을 부릴지언정 금전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자. 마음속에 래일이 들어설 빈자리를 남겨두자. 그리고 하루를 일년으로 알고 살아간다면 인생의 려행길 촉박함을 시시로 감지할것이여늘…     디켄즈의《쌍성기》의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다.《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시대였고 그것은 가장 엉망의 시대였으며 그것은 지혜의 년대였고 그것은 우둔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신앙의 시기였고 그것은 회의의 시기였으며 그것은 광명의 계절이였으며 그것은 암흑의 계절이였으며 그것은 희망의 봄날이였으며 그것은 실망의 겨울이였다. 우리는 천당을 향해 내달았고 우리는 모두 반대쪽으로 내달았다.》     내가 나를 지배할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다. 오늘을 내가 지배함으로써 나는 내 생활의 주인이 된다. 어제 먹은 산해진미의 맛을 오늘도 느낄수는 없다. 생활을 즐기려면 오늘을 즐기라. 오지도 않은 래일의 즐거움을 누가 설계할수 있단말인가? 우리 가 지배할수 있는 소비중에 가장 가치있는 소비는 시간이다. 자기에게 가장 미안한 일은 오늘을 허송하는 짓이다. 련습삼아 세상에 왔다가는 인간이 될수는 없다. 내 삶을 확실하게 사는 날은 이 하루뿐이다.                                                         2008년 3 월 8 일
389    느낌에 생각이 따라 (100수) 1.락화의 한 외3수 댓글:  조회:7425  추천:1  2014-01-08
                                 느낌에 생각이 따라 (100수)                                          (1) 락화의 한                                             야 조                                                   십일무홍이라 니르더니                                      그 한철 화사하던 꽃이                                            향기마저 싸안고 살폿이                                                    하롱하롱 잎채로 지누나                                나비는 허랑한 날개접고                                      꿀벌은 속상해 말없는데                                              꽃지는 사연을 두고두고                                                      대옥은 눈물로 흐느끼고                                해님과 속삭인 그사랑을                                      열매로 맺어 무르익히려                                              꽃답게 죽어가는 락화에                                                      희생의 철학을 새기는가                                사람들 자리에 련련해도                                        물러날 때를 아는 저 꽃                                              지는 모습이 슬프더라만                                                     절대의 진리를 말하느니                                                   (2) 인생은 고해여도                                               야 조                                 죽지못해 산다하는 사람아                                                            인생이 고해라도 죽지는마                               생명이란 그처럼 소중하여                               살아지는 인생이 아니던가                                 생활이란 별것이 아닌것을                               울적하면 맑은하늘을 보고                               서러우면 가슴치며 울면서                               사는냄새 풍기듯이 사세나                                                                           (3 ) 참대숲에서                                                                                   야 조                                                       죽순은 그리도 만만하더니                            마디마디 아픔으로 맺혔냐                            미끈하고 쭉쭉빠져 멋나고                            단단해도 속비여서 아쉽다                                                        성미가 곧으면 대같다지만                            불속에 달구면 휘여드나니                            강압에는 누구도 막무가내                            소신대로 살기란 어렵더라                                                                 (4)  해야, 해야                                                                              야 조                              아침에 동산에 솟는해                            저녁에 서산에 지는해                            솟는듯 지여서 일상인                            늘보아 다정한 해님아                                                                                 어둠이 싫어진 꿈에도                            너는야 늘떠서 웃누나                            달빛도 네있어 유정코                            새날이 밝아서 고맙다                                                      암흑이 없던들 너를야                            그리도 만물이 따를가                            꽃들도 새들도 네없이                            못사는 따습은 천사여                              편없어 하좋은 해님아                                                      얼룩진 인간촌 서럽다                            땡볕은 구름에 감싸고                            엄동엔 열내여 웃어라                                                       인류의 구세주 더있니                            기한에 떠도는 류랑아                            한품에 살폿이 품어라                            하늘의 큰딸인 해님아          
388    선량=연약+바보? 댓글:  조회:8343  추천:3  2014-01-06
                                                       선량=연약+바보?                                                                 야 조       사람들은 관습상 어질면 마음이 약하고 지어는 어리숙한것으로 인지하고있다. 그래서인지 생활의 모종 단면을 시사하는 드라마들에서도 극정을 이루는 모순충돌의 대립각에“어리숙한자”와“총명이 과인한”악인들을 내세우는데 그 대조가 극명하게 설정되는게 거의 모식처럼, 관례처럼 되고있다. 례하면“사랑했나봐”에서의 녀주인공, “오자룡이 간다”, “백년의 유산”, 요즘 “숙백향”,“내 손을 잡아라”등 많은 드라마들에 주인공들은 선량=연약+바보의 모식으로 인물형상이 부각되고있디.     악인들은 하나같이 총명령리하고 과감하고 과단하고 그로써 득세하고 사활을 걸고 대갈이 터지게 음모와 궤계와 살인극까지 벌이며 쟁투를 벌리다가도 선량한자의 선량함으로 용서되고 살인죄마저 흐지부지해진다. 권선징악이라는 잠규칙도 배제되는가? 소위 경찰이나 검찰은 거개 강자의 리용물로 되여 애매한 사람을 잡아넣는데는 열정적이다가 모순해결의 절정에서는 불가사이하게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     한국은 선량한자는 늘 바보스럽게 그저 번번히 당하고 당해야만 하는 사회인가? 법치사회라고 자긍하는 한국사회의 실상인가? 맹자의“人之初 性本善”에도 반문하게 된다. 물론 한국드라마에서 현실성이 사라진지 오래니 생활의 진실같은것을 찾으려하는 생각이 우둔하지만 시청자들이 그저 재미로 보며 뒤에 올(카타르시스?)를 기대하는 리유로 선호한다는 사실조차 사이비하고 오도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 답답함을 아무리 참을만큼의 재미로 풀어간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리해가 되지 않는 주인공들의 행동은 그들의 매력을 현저히 저하시키고 드라마의 내용마저 공감할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물론 경제효익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드라마에서 흡인력이 우선이겠지만 재미를 위해 주인공의 성격을 희생양으로 삼는것은 결코 기발한 착상이 못된다. 주인공들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점점 리해할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것이 드라마의 예술적감화력에 치명적영향을 미치는것은 둘째치고 사람들의 가치취향과 가치기준을 오도할수 있기때문이다.     “오자룡이 간다”에서 오자룡의 순진함과 선량함은 착한것과 바보스러움을 자주 혼동하고있기때문이다. 선악의 대결도 력량이 어상반해야 구경이 된다. 성품이 착한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멍청한게 아닌가 하는 답답함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욕하게 되는 주요한 리유가 된다. 갈등을 극대화기 위해 100회가 넘는 분량중 95% 이상을 악인이 승승장구하다 결국 5%도 안되는 분량안에서 급작스런 해결로 귀결되는데는 그야말로 한국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처럼“말도 안돼”가 절로 새여나오게 한다. 시청률은 고고행진이라도 주인공을 놓친 드라마는 필연코 실패작이다.     “백년의 유산”에서 민채원도 선량함의 본질을 외곡, 오도하여 시어미를 비정상의 악인으로 극대화하다보니 설들력을 잃고만다. 악행도 무작정은 아닌것이다. 한국에서 잘 쓰는 말인 탈상식이다.“내 손을 잡아라”에서 녀주인공은 생모의 시체에 지문이 있다는 리유로 살인혐의자로 되는데 조작가능성마저 추단못하니 한국의 경찰은 권력자, 악행의 공모자역할뿐인가? 물론 그런 답답한 사람들이 현실에 존재하지만 예술적지향으로는 역설적이지도 않다. 주인공들은“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바보시녀도 안되기때문이다. 재미만 있으면 끌리는 흔상심리라고해도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리해불능인 드라마는 감정유희로 곧 잊혀지고만다. “두 녀자의 방”에서도 악녀는 매일 필승불패이다. 정의와 진실을 신장하려는 민경채는 그냥 헛똑똑이로 나온다. 진실이 너무 지각하고 있고 정의가 결석하지 않아도 절름발이 정의로 뒤우뚱거린다.     하긴 사람들의 관념만이 아니라 실제 이 세상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 모두가 나약성이라는 보따리를 걸머지고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선량함과 나약함이라는 자체가 딱부러지게 구별되는 품성이 아니기때문이다. 력사현실이 실증하디시피 선량함뒤에 감추어진 나약함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의 비극이 끝도없이 재연되였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국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선량한 사람들은 무던하고 우직하고 눈치코치 모르는 미련퉁이고 속창이 뒤번져질만큼 그렇게 못생긴 새끼오리들인가?     선량에도 리념적으로 량면성이 있다. 우선 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으며 동정심이 풍부한만큼 강의함도 있고 또 있어야 한다. 선량함에도 원칙성이 관통되여 있는바 무원칙적선량은 곧 연약무력으로 체현된다. 사람은 우매할수도 있고 못날수도 있지만 선량함만은 아니가질수 없다. 선량한 사람들은 겉보건대“머절스러울수”있지만 멋대로 릉멸할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농촌에서는 누른한 쇠 뜬다, “업씨부한데서” 왕불이 걸린다는 말로 어진사람을 막대하지 말라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선량한 영웅호걸들이 부지기수로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 기억할것이다. 용기는 천당으로 통하는 길이고 유약함은 지옥의 문을 두드리는것이란 잠언이 있는데 최대한의 인내와 겸양은 풍도이고 관용이지만 무원칙한 참을성은 연약무능력의 표현이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 사나이다운 사나이라면 그저 착하기만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아무튼 사람은 사람이기에 인성에도 선악이 교차되고 점철될것은 당연하다. 천성적으로 착한사람이 있다면 악한사람은 후천적이기만 할가? 악인도“위대한” 사람으로 거듭났고 선량한 사람도 천추에 기릴 명인으로 되였다. 만약 우리가 성패론으로 영웅을 론하지 말아야 한다는 력사시각으로 본다고 말할 때 그많은 “연약한”사람들이야말로 곧 진정 용감하고 견강한 사람들이라고 칭송할수 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흥량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시대가 바뀌면 일계렬의 규칙도 바뀌는 법임을 깨닫게 된다. 만약 온 사회의 도덕수준이 높은 차원에서 운행된다고 할 때 그 결과를 거꾸로 걸어서는 안될것이다.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처에서 코가 깨지고 나중에 연약무력하게 무너진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있다. 물욕이 횡행하고 리기가 극도에 이른 이 시대에 선량한 사람은 그리많지 않다. 악인들은 이런 선량한 사람들은 바보스럽고 연약하다고 볼수 있겠지만 결코 그런것만도 아니다.     착함!착하다는 리유로 연약해서는 안되며 더구나 무력해서도 안될 일이다. 진정한 착함은 몽떼 그리스도백작같은 사람의 기본품성으로 되여야 할것이다. 다른 사람을 악으로 괴롭히지 말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기시하고 릉멸한다면 응수하여야 사람이다. 선량함은 나약함이 아니기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서든 착함에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간능하고 악착한 인간들의 자사자리에 리용되는것뿐이다.     연약한 사람의 등을 밟고 기여오르려는 야바위군들도 선량한자의 강인함에는 뒤걸음질도 잘친다. 두번 참는것은 넓은 흉금이지만 그 이상 참으면 대방에게 기시와 학대의 채찍을 쥐여주는격이다. 악에 대한 묵인은 역시 범죄이다. 상대성은 여기서도 적용된다.“良心大大地坏”인 자들은 “得寸进尺”하면서 참아줄수록 기염이 솟구친다. 착한사람은 늘 손해보고 늘 기시당한다는 관념은 뿌리깊지만 그것이 착한 사람의 대명사로 되여서는 안된다.     인간은 인성과 야성ㅡ늑대(남자)와 여우(여자)의 짐승의 본성을 갖고있다, 채찍으로 때려야 움직이는 당나귀가 되지 말아야 하거니와 사정없이 때려도“와앙ㅡ”하고 울부짓지도 못하는 황소가 되여서도 안된다. 착함은 굴종이 아니며 더구나 효험이 있는“화해약(和谐药”도 아니다. “선량한자의 묘지명은 선량” 이라고 말할 때 릉멸과 기시에 시달리는 모든“선량한 바보”들은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녀자니라.” 라고 한 햄리트의 말의 의미를 짓씹어 보아야 할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들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냥 동종의“선량한 바보”들을 낳지말기를 바란다.                                                                    2013년 11월 2일
387    느낌에 생각이 따라서 (100수) (86)단시. 줄을 서시오 댓글:  조회:8998  추천:4  2014-01-02
                                                   줄을 서시오                                                          야 조                                                 줄이요 줄, 줄서시요!                                               연줄따라 줄줄줄줄줄                                               한줄도 아닌걸 설바엔                                               앞으로 나란힛 똑바로                                                 인생은 바로 줄서기요                                               잘서면 청운도 열리고                                               재운도 화알짝 트이니                                               줄서는 지혜가 최고요                                                 얽혀도 무형인 줄이요                                               잡기도 어려운 줄이요                                               못믿을 줄이라 이보소                                               어느줄 바로 명줄인겨                                                 눈뜨고 못봤냐 고약한                                               세상속 돌고도는 내막                                               보좌도 앉았던 그때뿐                                               영원한 권력이란 없제                                                 단한번 잘못서면 아차                                               련루돼 끝장은 불문률                                               앞으로 나란힛 똑바로                                               워어이 줄서기 어렵네                                                     2013년 12월 20일
386    진언씨 수상록 (6) 인간의 모습 댓글:  조회:7121  추천:0  2014-01-02
                                                         인간의 모습                                                              최 균 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과 대립되는 존재로서 스스로 인간, 사람이라 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자체가 판단의 기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물의 한 종류이다. 다만 동물과 다르다는것은 생각할줄 알고 도구를 만들줄 아는것이고 심리적으로 부끄러워할줄 알고 웃을줄 안다는것이며 동물들이 기적적으로 진화한다해도 도저히 미칠수 없는 인간애와 정의감이다.     미닐리우스는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하느님을 닮았다하였지만 플라우루스는 인간,  사람이 아니라 늑대라고 악평하였고 HA.조운즈는 모든 아니꼬운 문명동물무리 가운데서 내가 미워하고 경멸하는 짐승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물정에 밝은 세속적인 인간이  라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있고 정채로운 론단은《아담도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한마디가 모든것을 해명한다. 그는 사과, 그 자체를 원한것이 아니라 그것이 금지된  것이기때문에 원한것이다.》라고 한 마크 트웬의 금언이다.       인류는 문명인로 잘 진화되였지만 동물성은 영원히 진화되지 못할것이다. 인류는 노아의 방주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교훈을 잊고 비극을 재현하고있다. 인류가 그냥 이대로 자기 가원을 략탈하고 파괴한다면 가능하게 지구촌주인으로 남아있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을것이다. 인류는 이미 수요이상으로 너무 많은것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 자멸의 길로 곤두박질치고 있기때문이다.    초창기의 인류가 먹거리를 얻고 번식하려 한 수단과 열정은 너무나 유치하였고 원시적였지만 적어도 불공평은 창출되지 않아 목가적이였다. 그런데 진화가 가속화된 인류가 이미 고도의 문명을 이룩함으로써 조화세계는 철저히 망가져버렸다. 문명은 운명이였다. 힘은 악으로 되였지만 인류는 인류라는 문명한 이름을 지어내여 자기의 포악성을 덮어감추었다.     물론 문명이 없는 곳은 인간사회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자호감일뿐이다. 만물의 통치자로 된 인간은 만물지중에 최귀(最貴)라지만 가장 유일하게 잔악한 물종이다. 스스로 우주의 척도라고 자처함으로써 지구에 대한 수탈을 정당화하지만 인간의 문명은 도둑놈의 시대를 불러왔다고 개탄한 지자도 있고 문명의 시대를 파괴의 시대, 턱도없는 오만과 무지무지한 탐욕의 시대라는 문명론도 제기되고있다.     문명은 사실 인간의 광기로 번져졌다. 인간은 변화무상한 욕망의 화신, 형체를 알길없는 리기의 뭉치이다. 인간이 가령 수중동물로 되였다면 아마 바다생물도 언녕 씨를 말렸을것이다. 인간은 이제까지 욕심만 채우며 저질러 온 문명이 없이는 살수 없게 되였다. 살갗이나 오장육부나 뼈다귀로는 짐승으로 돌아갈수 없이 너무나 멀리 떠내려와 있다. 인류는 가장 리기적이고 악착하며 아니꼬운 동물로 되였다. 인류가 가장 아니꼬운 동물이라는것은 뭇동물들이 말할 때면 증명될것이다.     인간은 도덕과 정의를 등진후 가장 나쁜 동물로 변했다. 갈수록 문명에의 절망으로 사이비문명을 더욱 창궐하게 낳을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완전완미함에 도달할수 없음에도 의연히 욕심을 부리고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도 자기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머믄다. 인류의 비극은 인류의 자기 과신과 무절제한 교만에서 기인된것이다.     인간은 가장 완미할 때는 동물중에서 가장 뛰여난 무리로 되지만 법률과 정의를 거절한후에는 동물중에서 가장 나쁜동물로 변한다. 인간이 인성을 내세우지만 그 인성이 바로 야성보다 더 극악무도한 품성이다. 인간은 야수성이 있음으로써 오해려 인간의 매력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절반은 짐승이요 절반은 마귀가 되였다는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일수 없다. 인성중에 악성과 맹수들의 야성이 결코 같은것이 아니다. 가령 인류가 수천년을 맹수처럼만 살았더라도 많은 물종이 절멸되지는 않았을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비유하였는데 리해득실에 따르는 취약성을 말한것인가? 인간은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할수 없게 된데서 방종이란 단어를 만들 어냈다. 인간은 의식이 병들었다면 비루먹은 당나귀에 비해 별로 나을것이 없다. 선량하면서도 악행을 거듭 자행하는 모순된 인간이 있을지 모르나 인간은 선행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악행으로 살아간다.     콜른은 인간은 역설의 화신이요 모순의 뭉치이라고했다. 인간은 문명의 첫걸음부터 진실성을 앞세우지 않았기에 진실에는 물이요 허위에는 불이다. 인간의 진실한 모습은 어데서 체현되는가? 무엇보다 량심을 쓰는 정도에서 현연된다. 인간의 일상의 행실이 바로 각이한 인간상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극장의 경영자이다. 극종이 다양한가 빈약한가 하는것은 그 자신에게 달렸다. 사람은 어떤 제복을 입으면 그 제복에 맞는 사람으로 행세하려 한다는 나뽈레옹의 말은 명언이다. 사람은 마치 아무액체나 부어넣을수 있는 빈병 이라할가? 기실 아무나 영웅이 될수는 없다. 비록 영웅이 될수 없어도 한평생 사람으로 남아도 행복한 일이다. 혹시 강자가 아무렇게나 주물러 만들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압제하지도 누구에게 압제당하지도 않을 때 이 사회에 평화가 영주한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식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배고프지 않아도 먹기 위해 먹고 목이 갈하지 않아도 마시기 위해 마시며 놀음처럼 발설하기 위해 섹스하는 향락의 기계로 전락되였고 웃으면서 살생할수 있는 기특한 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욕망으로 살아가지만 허영심으로 포장한 빛좋은 피조물이며 운명에 끌려 다니는 미이라에 불과며 우주공간에 티끌에 불과하여 그림자로써만 빛난다.     F.칠즈는 인간은 신의 걸작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일생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그렇게 선량하지도 않은 나날의 련속이다. 인간의 판단력에는 랭철함보다는 감성 적인 즉흥시가 더 많이 끼여있다. 그러나 사람은 흐르는 물결따라 돌아가는 물레 방아가 된다면 싹수가 없다. 인류는 모두 같은 배에 탓다. 인간은 자연에서 배워낸 반항정신을 퇴화시키지 말고 끝까지 신장시켜야 한다.     인간은 두눈이 꼭뒤에 배기지 않았지만 올려다보는데 더 습관되였다. 한 개체 생명에게서도 가장 나쁜상태는 자아파악이 없을 때이다. 가령 한 인간이 좋은 사람이 될 생각이 없다면 비인간이라는 혹평에도 노여움을 잠재우고 있을것이다. 그렇지 만 한사람이 우연히 사람이 아니기는 어렵지 않으나 평생 사람이 아니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장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하는 수련이다.     인간은 결코 얼마나 가졌는가를 가치척도로 삼을수 없다. 가장 가련한 사람은 꿈마저 금으로 도금하는 사람이다.《돌이 되려거든 자석이 되고 사람이 되려거든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라.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따뜻하게 만물 을 기르는듯하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살아나고 마음이 모질고 각박한 사람은 차가운 눈이 만물을 얼게 하는듯하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죽느니라.(채근담》     따스한 가슴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남을 양으로 음으로 해치면서까지 제리속을 채우는 늑대같은 인간으로 남지말자. 죽어갈 때 참회하며 선량한 유언을 남기는것으로 한생의 유감을 미봉할수는 없는 일이다.                                                       2008년 3 월 14 일
385    진언씨 수상록 (5) 생명의 순간(수정고) 댓글:  조회:6452  추천:0  2014-01-02
                                                           생명의 순간                                                                    진 언         시간이란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시각과 시각과의 사이이며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무한히 류전되여 련속되는 물질존재의 기본형식이다. 공간 외에 존재가 황당하듯이 시간외의 존재란 역시 황당하다. 시간은 우주의 혼이고 공간은 우주의 몸집이다. 시간이란 때의 경과를 나타내는 량이나 자연현상의 독립변수로 사용되는 량으로 표시되는것만이 아니라 생명의 가는 사슬에 매 한고리이다.     시간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무정한 종신반려이다. 아주 어릴때의 시간은 땅에 나무꼬챙이를 꽂아놓고 그림자가가 도는것을 보고 점심때를 아는《가늠하는》시간이 였고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벽에 붙인 과정표에 따라 울리는 종소리로 시간을 헤아린《듣는》시간이 된다. 어른이 다 되여서는 탁상일력을 한장한장 번져지는 시간속에서 인생의 려정을 재여간다. 늙어진 다음에는 손꼽아 헤아려보는 시간이 된다. 아무리 옴니암니 따져도 남은 시간은 많지 않고 그나마 확실하지 않은 시간들이다. 주기적현상의 연장속에서 그것의 경과를 체험함으로써 느껴지는 시간엔 모두 민감하지만 그것이 곧 생명의 소모라는 시점에서는 덤덤한것이 우리들이다. 시간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인생은 육체로 구성된것이라기보다 시간으로 구성되였다고 말하는게 더 알맞을 같다. 생명이란 바로 시간이 한 사람의 존재의 체현이 아니며 생활이란 바로 시간의 흐름과 소화의 과정이 아닌가? 인생의 첫아침에는 세월령감이 울리는 퇴각의 북소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력사이래 시간에 관한 명언들도 많고 저서들도 많았다. 한마디로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고, 군사가에게는 시간이 곧 승리이고 상인에 게는 시간이 곧 돈이며 의사에게는 시간이 곧 생명이며 농부에게는 시간이 풍작이며  학자에게는 지식이라는 등의  금언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책에서 금언이지 실생활 에서는 명기되지 않는다. 시간이 돈일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가치는 금으로 환산되 지 않는다. 돈은 없다가도 생길수 있고 잃고 또 얻을수 있다. 돈을 잃고 배를 앓는 사람은 많지만 시간을 스스로 흘리고 다니면서 조바심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간은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만 사람은 시간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소털같은 날이라면 시간은 소털보다 더많다. 그러나 생명의 연장선우에서는 시간을 그렇게 계산할수 없다. 시간은 대부금이 아니다. 무리식장기대부금은 더구나 아니다. 시간은 세월이 인간에게만 나누어주는 트럼프장, 세여보라. 매양 스믈넉장이다. 더 쪼개면 매개인에게 매일 차례지는 시간은 86400초이다. 어느 누가 독점할수는 없지만 매개인이 시간에 대한 태도와 씀씀이는 현저하게 다르다.     시간은 인간이 연출하고있는 희비극의 길이를 재이는 눈금자이다. 시간은 세기적인 모든 기적의 일람표이다. 시간자체에는 완급이 없지만 심령의 시계에는 확실히 완급이 뒤바뀌기도 한다. 행복한 련인들에게는 시간이 잊혀지고있지만 자기 걸음을 늦춘적이 없다. 시계는 재난속에 모대기는 사람에겐 긴장을 조이는 잔혹한 올가미이 다. 불심지가 각일각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폭파약꾸레미를 높이 추켜들고 총탄속에 쓰러지는 전우들을 내다보는 영웅 동존서의 마음의 시계는 어떻게 달렸을가?    시간의 충고는 팔목에 찬 시계에서 읽을것이 아니라 마음의 시계에서 읽으라. 금으로 만들었든 은으로 만들었든 시계는 스믈네시간을 알릴뿐이다. 시간은 모든 번쩍이는것들에 녹이라는 랭소를 던진다. 시간은 잊지 않고 기억을 돌려놓는다. 시간이 날카롭게 벼리는것이란 없다. 시간의 흐름은 무형의 세척제로서 시간속에서 색바 래지 않는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가장 버리기 어려운 복수심조차 서서히 지워버린다. 그만큼 시간은 모든 심리고통을 치유하는 특수기능을 가지고있다.     신이 6일동안 세상만물을 만들어놓고 하루 휴식한것은 절대 시간이 넉넉해서가 아니였다. 의무도 사명도 없는 시간이란 없고 아무의미도 없이 지내보낸 시간도 없다. 시간랑비가 곧 생명랑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필요없이 늘어진 기지개도 켜지 않 을것이다. 반대로 게으름뱅이는 시간을 할인판다해도 사고싶지 않을것이다. 밤새도록 향락에 빠진 탕자들은 벽시계를 내리여 둘러메치고 싶을거이요 취생몽사로 사는자에게는 시계가 거추장스러울것이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던가? 새로운 시간속에서 낡은 경을 읽지말라. 저마다 도적놈이 도적질을 할때처럼 분초를 다투며 시간의 촉박감을 느낀다면 짧은 인생을 두배로 살것이다. 가장 큰 희생이 희생된 시간임을 자각할 때 시간도 그 사람에게 너그럽게 아량을 보일것이다. 미래. 현재, 과거ㅡ시간의 세가지 발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절대 코노래를 부르며 걷지 않는다.      그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사람들이 끈덕지게 살아가게 하는 명줄은 미래이다. 그러나. 윌리엄 포크너는 말한다. 래일이란 오늘의 다른 이름일뿐이라고. 미래란 다른 문을 통해 돌아오는 과거일뿐이라고, 롱펠로는 쓰고있다.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 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소포클레스는 말한다.“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 ”일상에 짬을 리용할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짬이 없을것이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것이다. –니체” 래일 소리높이 웃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할것이다. 시간은 인생길에서 기회를 안고간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는 버나드쇼의 묘비명은 많은것을 시사하고 많은 사색을 안겨준다. 한 사람의 인생길은 온갖 불행으로 점철되여 있지만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이 그저 생물이 아니라 인간이면서 인간의 할 일을 모르는것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한 소년이 길을 걷다가 동전한잎을 주었다. 고생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고 자랑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뒤로 소년은 땅바닥만 훑어보며 걷게 되였고 평생 총 13달러 26센트를 주웠다. 세월이 지나 죽음을 앞두고 공돈을 보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그는 땅바닥만 훑는 긴긴세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인생의 귀중한것들을 모두 잃고 살았다. 눈부신 태양, 아름다운 꽃들, 가을서리에 붉게물든 나뭇잎과 무지개, 사시절의 풍경들, 사람들의 미소…공돈을 좋아한 소년이 순간의 감각을 좇아 허송한 시간을 무엇으로 결산할것인가?     저축해둘수도 없고 돌려놓을수도 없으며 시간의 근원지를 찾을수도 없고 복제할수도 없으며 예산분배할수도 없이 순간적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것이 시간의 특성이다. 그러나 시간은 엄연히 가장 보귀한 자원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가장 개발하기 어려운 희귀자원이고 또 가장 무심하게 랑비할수도 있는 무료재부이기도 하다. 비록 보이지도 않고 만져볼수도 없으며 냄새를 맡을수도 없고 무성무형이며 또 간곳없는 무정한 존재이다. 부디 라태와 용속함으로 시간을 기록하지 말라. 돈을 목숨으로 여기는 자는 수전노이지만 시간을 목숨으로 여기는 사람은 창조자이다.     시간은 일체 의혹과 오해의 해설자이다. 시간은 가장 현명하고 공정한 재판관이라 한다. 시간속에 감춰진 그 모든 음험하고 악착한 짓거리들이 세월속에서 다시 드러나게 되여있다. 시간이야말로 잠시 법망에서 새여나가 멋대로 소요하던 일체 력사의 죄인을 재판하는 엄정한 법관이다. 시간이 력사의 죄인들을 재판하기를 고대하는 기다림은 가장 가치로운 기다림이며 가장 비장한 시간소모이다. 이런 시간만세!!                                        2008 년 3 월 9일                                                 
384    진언씨 수상록 (4) 살아가는 자세 댓글:  조회:6039  추천:0  2014-01-02
                                                             살아가는 자세                                                                   최 균 선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듯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인생자세일지 누구나 묘망하리라. 고서에《인정세태 숙홀만단 불선인득태진 (人情世太倏忽万端 不宣认得太真)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인정세태가 변화무상하므로 너무 진짜로 알지 말라는 뜻으로 리해된다. 아닌게 아니라 반칙이 다반사인 인생유희인데 매사에 너무 정색해 림하면 제근심, 남의 근심을 다 끌어안기가 십상이니 백번도 지당한 말이다.     늘 이렇게만 문제를 본다면 번뇌와 잡념을 풀수 있다는 고인의 훈계를 명심하지만 인의는 기죽어 한숨쉬고 리욕만 얼씨구, 북장단치는 시대에 의로운 일은 가물에 콩싹나듯 하고 비정은 우후죽순인 세상을 그저 긍정적으로만 보려한다면 자기 속임이 되지 아니할가? 걱정이다. 내가 눈이 비뚤어서인가?     송조때 소옹(邵雍)이란 유생이《석일소운아 금조각시; 부지금일아,유속후래수 (昔日 所云我, 今朝却是伊;不知今日我又属后来谁?)》라고 개탄했는데《어제의 내가 오늘 남이 되였으니 오늘의 내가 래일 또 누구에게 속할지 어이알랴》라는 뜻인듯 싶다. 어두운 방에 알몸으로 홀로누웠을 때를 내놓고는 자기 본연을 살짝 감추고 돌아가는 상황이나 분위기에 맞게 제2의, 혹은 제3의 인격을 내세워야 하니 자기 자신조차 알길없는데 남이야 더구나 알수 있겠는가?    변덕많은 4월의 날씨처럼 가늠할수 없는 인정세태를 용케 맞추어가며 말썽없이 살아가려면 자기의 본연은 아예 접어두고 내가 아닌 나를 내세우는게 현명할듯 싶다. 돈이 웅변하는 시대, 진리는 입다물고 인정은 점점 더 사막화되고 세속은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덕행은 시무룩해서 한켠에 비켜서있고 비행은 쌕스폰이랑 불며 내노라 행진한다. 해로운 짓을 하면 칭찬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위험하고 우둔한 소행으로 간주되는 속세에서 산다고 길이 개탄헸던 쉐익스피어가 그때 벌써 오늘까지 내다보 았다는 원견에 탄복이 앞설뿐이다.     내 본시 아둔해서 인생을 거의 살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을 못찾았다. 일생을 무난하게 살다가 고종명하는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이겠지만 시끌벅적한 인생현장에서 무풍지대가 어디에 있으며 바람새 세찬데 고요히 서있을 나무가 과연 있을것인가? 조금 사는듯싶게 살자니 국외인으로 살수 없고 더구나 진공상태에서 살수는 없으니 부딪치고 넘어지고 피터지고 상처속에 고름을 짜내며 인생의 비탈길을 아득바득 톺아오르게 생겨먹은게다.     등산길은 신명이 나기에 앞서 숨찬 생명운동이라는것을 절감하게 된다. 잘 닦아놓은 길로 가마에 앉거나 자동차에 앉아 오르고도 남들과 같이 환성을 내지를수 있지만 두발로 허위단심 올라야 산에 오르는 진정한 멋과 맛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골짜기에서부터 오른자가 제일 높이 오른 자라는 도리도 잘 먹히지 않는다.    산에 오를 때 정상에만 눈을 팔지말고 발밑을 살피고 정상이 아득할수록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것이 요긴하다. 성급함이 결코 걸음을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내닫지도 말고 쉬지도 말라. 일등에 몸이 달면 잠시 앞설수는 있지만 뒤따르는 사람보다 안전 도는 훨씬 낮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밑바닥 인생길도 나름대로의 고봉에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랑만적일가?     생명은 촉박하고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참고 견딜줄 알라. 인내야말로 운명을 좌우지한다. 인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빨리 걸으면서도 말이없는 나귀의 미덕이지만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인내심도 모든 고난의 적설을 녹일수 있다. 진정 강한자는 끈질기고 초조함으로 기다림을 달랠줄 아는자이다. 참는다는것과 견뎌낸다는것은 의미의 차이만이 아니라 태도의 차원문제이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희망이 깨지면 인내를 지속시키라. 만약 당신이 꽃지는 현실에 참을수 없다면 결실의 미래도 잃을것이다. 허리아픈 김매기를 참아 내지 못하면 가슴이 뻐근한 풍년가을을 맞지 못할것이다. 자기가 갈수 있는 길, 자신 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 굳건히 내처 걷는다면 꽃피는 새 마을에 이를것이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 배우며 가는 길이다. 속담에 무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아는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은 퇴색하지 않았다. 평생을 따스한 마음으로 책을 읽되 찬눈길로 세상을 투시하는것도 중요하다. 성거리는 의혹이 우유부단을 낳을수 있지만 데카르트는 영원히 선각자이다. 의심할줄도 알라. 의혹이 만사통은 아 지만 적어도 투시경에 초점이 될수 있다. 무지는 맹종을 낳고 맹종은 자기상실을 의미한다. 화복이 무상하다고 하는것은 세상만사에 호불호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성실이 손해의 대명사로 되고 성실한 사람이 바보취급을 받는 현실이지만 자기 인생서마저 허구할수는 없다. 거짓된 세상에 살더라도 자신에게는 성실해야 한다. 자기 약점이 드러날 때처럼 속상한 일은 없지만 자기 결함에마저 성실함으로써 오히려 강해질수 있다. 자기에게 충실해야만 남을 사기치지 않을수 있다. 자기마저 잘 기만하는자들만이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것을 락으로 삼는다.     성실의 뒤면은 선량이다. 자초에 인간은 착하디 착했을것이다. 인류는 진화하면서 선량함을 뒤로 밀어내고 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선량함은 인격력량에 기본핵이다. 죄악적행각으로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선량을 잃는다면 인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다. 성실과 착함으로 웃음속에 칼을 갈고있는 자의 내심까지 읽을수는 없지만도그러나 필요없이 너무 많은 내막을 알려하지 말라. 그러면 누구나 꺼리는 사람이 될것이다. 세상도는 형편에 눈이 어두워도 안되지만 알지도 못하는 새 노래에 손벽을 치는 싱거운 짓도 삼가해야 한다.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느니 차라리 입은 닫아두고 마뜩치 않은 눈길을 나름대로 배배 꼬아보는것이 지각있는 사람의 본심이 아닐가싶다. 물론 처사에 진중하지 않을 수 없으나 너무 각박해서도 안되며 때와 장소를 참작해서 좋도록 처리해야 스스로 딱한 궁지에 빠지지 않는다는 중용철학도 있거니와 투시불명의 인정이요 미궁같은 인생현장을 헤쳐가려면 리해와 관용을 앞세우는만큼 량책이 없겠지만 일신에 절실한 실리앞에서 누가 번번이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떠올릴 여유가 있을소냐?     인생에는 유모아도 있어야 한다. 유모아가 없는 생활은 사막과 같고 물이없는 저수지와 같다. 유모아를 모르는 남자는 련애에는 맹꽁이 될것이다 유모아가 없는 생활은 기름이 떨어진 등잔과 같다. 유모아는 지혜의 명함장이요 사상의 불꽃이다. 유모아는 여유로운 마음이 없으면 지어내지 못한다. 유모아감은 지성인들의 일종 풍도이다. 유모아는 웃기는것이 아니라 웃음속에서 찔림이 있게 하는것이다. 눈물머금은 유모아야말로 유모아의 수석대표이다.    헤겔은 말한다. 나비에게는 나비의 세계가 있고 까마귀에게는 까마귀의 세계가 있듯이 삶도 각자 믿는바에서 정신의 기둥이 될 세계를 가지고있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 상관없는 곳에서 헤매고 있다면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내가 살아가면서 혹 실수와 실패에 처할지라도 너무 자책하거나 좌절하지 않는것도 일종 지혜이고 슬기이기도 하다. 락심인즉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인생자세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살아있고 살아가야 한다면 열심히 살자는 말이다.                                                       2008년 3 월 19 일  
383    진언씨 수상록 (3) 세태풍속화 댓글:  조회:6801  추천:0  2014-01-02
                                                                 세태풍속화                                                                       최 균 선       얻고 잃고 빼앗고 빼앗기는 끝없는 쟁투가 인생주제곡인가? 못가진자의 몸부림은 수요이지만 부자의 욕심은 자족감의 결핍증이다. 그래서 못가진자와 가진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것이다. 부지런함이 만능은 아닌터, 황소의 숙명에서 그것을 잘 읽을수 있니라. 황소가 우직하다고해도 자기가 끄는 짐의 무게를 잘 알고있다. 그러나 종시 투정질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아빠진 문명인들은 오히려 둥글이의 이런 정신을 우직하다고 평판한다. 순종하면 굴종을 강요하는것이 강자의 고질이고 온순하면 온순할 수록 릉멸이 기탄없이 발길질하는것이 고태의연한 인습이다.       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다른 사람의 행운이고 이웃의 어리석음은 거울이기전에 먼저 웃음거리로 흥미진진해진다. 그 어떤 불상사이든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난것이면 식후한담거리가 된다. 남의 불행으로 자기의 슬픔을 보듬는것은 거의 모든 인간들이 쓰는 량책으로 되였다. 우리에겐 재미있는 계률이 매우 많다. 례컨대 모두가 잘못일 때는 모두가 옳다는것이다. 공동의 실패는 누구도 책임져야 할 일이 없어서 안심이 되니까말이다. 야비하기는해도 그 지당함에 더 할말이 있으랴,     남의 흉을 볼 때 근본을 잃는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다. 이를테면 절름발이도 남의 우스운 걸음새를 보아내는데 결코 짝지지 않는다. 수수방관의 차원을 넘어서 랭혹무정이 인간상정이 된셈이다. 이렇듯 인간은 저마다 제목숨을 살지만 종래로 남의 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매개인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 엮은 수술대우에 누워있게 만들어진 인생현장인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는식으로 사는것이 모두의 인생궤적이다. 그만큼 뭇눈길은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읽는 투시기로 되여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철면피가 가장 수요되는 오늘의 문명시대이다.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적이 없다는 말이 현대창조어인지 모르겠으나 옛날 옛적부터 현재까지 주욱 내려온 인습의 하나이다. 이 시점에서《산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가 삶아지고 새를 다잡으면 좋은 활썩네. 적국을 이기면 장수가 죽을 차례.》라는 전고(典古)는 영원히 색바래지 않을 절대진리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이 력사규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력사가 이를 너무나 알기쉽게 설명한다. 권력욕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혈전만리를 헤쳐온 전우도 가벼운 한숨을 한번 내쉬고 숙청한다. 왕후장상에 씨종자가 따로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진승왕도 함께 김매던 가난뱅이친구를 꺼림으로써 제혀를 깨물었던것이다. 그것을 옛날식으로는 배은망덕이라고 질타했지만 권력을 위한 불의와 가혹성은 한 통치자의 과단성으로 부각된다. 재래로 그랬다.     예나제나 권력한자락 잡았을 때 음으로 양으로 해먹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세태인심속에서 막무가내함과 마비와 종용이 태평하게 살고있다. 그가 넥타이를 매고 빙글의자에 앉은 위군자이든 야차같은 강도이든 죄악은 수요의 별명이 아니라 인성에 뿌리박은 질병인것이다. 산에 범이 있는줄 알면서도 기어이 산행을 하는것은 만용이 아니라 욕심때문이다. 탐욕의 저쪽은 분명히도 천길낭떠러지인데 한사코 강행군하는 자들의 만용은 과욕이 코를 꿰여들고 앞에서 잡아끌기에 아무도 구할수 없다.     아무나 절실한 체험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겉보건대도 권세란 좋은것이다. 오래전 석탄도 공급제를 하던 그 시절, 먼저 실어달라고 급한 사정을 하는 아낙네들앞에서 갖잖게 위세를 부리던 석탄부의 밀차군들의 인간상을 보며 돼지임자보다 돼지몰이군이 더 우쭐한다는 저차원의 권세욕을 다시 씁쓸하게 웃은적이 있다. 죽은범의 등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는 그런 용기만큼 싱겁고 너절한 용기는 없으리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원리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우리가 더우면 몰켜들고 추우면 헤여지는 양들의 습성을 악습이라고 비양거릴수 있을가?가장 숭고한 일이 가장 리해불능의 일이 된다. 자신이 육박전에 나가지 않는 전제하에서 누구나 용사로 자처할수 있다. 그래서 아군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처절한 영화장면도 해바리기씨를 까며 구김없이 웃으며 볼수 있는게 인간심통이다.     인정세태에서 시기와 질투심이 아마도 제일 악습이리라. 낮은곳에 서있는 사람은 벼랑을 근심할 필요도 없지만 높이 서있으면 먼저 세찬 바람을 맞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빼여나면 뭇눈길들이 좋게 봐주지 못한다. 하긴 갈가마귀도 제일 크고 단 사과배를 쫏아먹음에랴, 사람들도 열매가 달린 나무에만 돌을 던지는 법이다. 남이 잘되면 공연히 심술나고 남이 슬퍼하면 일종 안위를 느끼는 인간심사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나는 모른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아파한다는 속담을 거들면 명랑한 해답이 되는걸가? 아무튼 질투는 인간심사의 종양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주는 인심은 가지려는 인심앞에서 다 그랑데가 된다. 먹은죄는 종지굽에 담는다지만 진수성찬이 흑백을 전도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그 사람의 륭숭한 대접을 받았으므로 좋은 사람이 되고 인정으로 시시비비를 덮어주고 악한도 친구로 둔갑하기 일쑤이다. 충언이 쓴 보약과 같다고 권장하는 사람의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 자고로 충언에 귀를 열고 웃으면서 충언을 받아들인 황제가 극히 적었거늘, 결국 그런 사람들이 더구나 입발린 말을 좋아한다는것이 실증된다.     민감한 금구에서 멀찍이 물러나와 초로인생의 세태풍속화나 다시 읽어보자.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우리 고유의 속담이 있다. 반대로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난다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의 소박한 뜻은 부자들도 자인하는것이지만 쌀독 인심의 차원이 아니라 만세불변의 인습이다. 가는 손님 뒤꼭지가 예쁘다는 속담에는 가난한 사람의 막무가내한 걱정만 담긴것이 아니다. 루만금을 가진 부옹들에게 도 가난한 친척은 불편한 보따리로 락인되여왔다. 이것도 역시 자손만대로 물려받을 인정세태이다. 린색은 절약과 통하기도 하지만 되돌아와서 후덕과 박덕의 여하이다.     인심은 시끌벅적한 대도시에서만 메말라가는것이 아니다. 우물가에 드레박을 놓아두던 미풍량속은 기억의 한페지로 되였다. 우물을 긷던 시대가 존속되여야 할 리유가 없기에 우물과 드레박, 물동이는 향촌의 잊혀질수밖에 없는 서정시라지만도 그때도 사람들은 박우물을 떠마시면서 누군가의 후덕한 손길을 생각하지 않은게 례사 였다. 우물이 마르기까지는 물의 가치를 모르는게 보편적인 심사이다. 소금이 바다를 떠나고나서야 자기 가치를 알았다는것은 주체성감오로서 별개의 문제이다.    모든것이 자아의 리익과 편리를 기준하는 이 시대이다. 이를테면 내가 하는것은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론리가 당당하게 성립된다. 허랑한 나비가 꽃이 자기에게 반드시 감사드려야 한다고 믿는 심사처럼 비틀려있다.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 심연을 갖고있는 법이던가? 우리는 자기가 미처 몰랐던것을 알고나면 기쁨과 함께 지각한 아쉬움도 맛보게 된다. 자기가 아는것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는것이다.     아아, 참으로 인정세태란 요지경속같으니 어느것이 콩알이고 어느것이 팥알인지 누가 일일이 헤아려 볼수 있을손가? 눈에 보이는 인정세태를 대강 읽고나서 나오는 소리가 자가당착의 말세타령이니 스스로 자소(自诉)에 주저앉을수밖에 없겠구나.                                                  2008년 3 월 19 일  
382    진언씨 수상록 (2) 인성의 뉴앙스 댓글:  조회:7084  추천:0  2014-01-02
                                                            인성의 뉴앙스                                                                  최 균 선       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아중심주의적인 품평은 인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수 있다. 말하자면 나를 좋게 대하면 벗이고 나에게 해로우면 원쑤로 되는 등의 심리모식이다. 원균이나 을사오적들과 친한 사람들이 있었고 리순신장군이나 안중근 지사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오리가 오리무리를 따르고 사람들은  류류상종으로 패당이 무어지는것이다.     인성은 이미 내려진 정의를 가리킨다기보다 인간의 자재성, 현존하는 본성을 가리키는것일진대 마땅히 인애와 흉포와 잔악성, 호상배려와 호상쟁투, 성실과 음모 궤계 등 인간성의 두극단을 포함해야 할것이다. 다른 동물처럼 자연에서 걸어나온 인류이기에 누구나 다 마음속에 야수성을 보류하게 된것이다. 인간은 약속력이 없으 면 짐승보다 더 잔악해질수 있듯이 력래의 인성악은 모든 동물의 소행을 합친것보다 더 악착하여 스스로 진저리쳐질것이다.     인류는 문명하고 동물은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하는게 인간의 평판이다. 인류가 얼마나 잔혹하게 동물을 대하는가는 불문하고 인간은 동류에 대해서 승냥이보다 더 잔혹하다는것을 자인하지 않고있다. 승냥이들은 동족을 대함에서 선의적이든 적의를 가지고 있든 조금도 감추지 않지만 인간은 지극히 허위적이다. 속으로는 절치부심하 면서도 웃음속에서 칼을 간다. 승냥이들은 적수와 선혈이 림리하게 할퀴고 물어뜯  으며 싸우다가 지게 되면 패자임을 승인하고 순순히 물러난다.     그러나 인간은 동류와 투쟁할 때는 명목이 많다, 칼로 베고 찍고 불태우고 물에 처넣고 총으로 쏴죽이고 폭격하고 독가스를 쓰고 원자탄을 쓴다. 고대중국에서 감행 한 주리틀기, 대못을 박기 등 혹형과 요참, 릉지처참, 차렬형 등 죽이는 방법을 동물 들이 억만년 진화해도 흉내내지 못할것이다. 승냥이들도 막부득이한 경우 동족의 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생존위기에 처했을 때는 로약병자들부터 먹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중심주의이다. 조물주가 인간을 빚을 때 악을 심어준것은 실수였을가? 아니. 조물주는 인간을 피냄새를 맡는 사냥개로 만들려하지 않았다. 하건만 인간의 진화는 살생의 진화였고 인간의 력사는 피의 력사였다. 진실한것도 인성이지만 그만큼 황당한것도 없으리라.     사람들은 매번 한마리 양을 잡아먹는 승냥이를 흉악하다고 질타한다. 그러나 인간무리의 서로의 횡포와 살륙의 현장을 살펴보라. 양을 잡아먹는 승냥이나 각마를 잡아먹는 사자를 비난할 리유를 잃고말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유일하 게 확신할수 있는것은 변덕을 부린다는것이다. 례하여 길을 가다가 누가 넘어지면 웃 음거리이기에 아무도 넘어지지 않으면 싱겁게 생각하는게 우리네 인성이다.     순자의《성악》론이나 맹자의《성선론》이나 고자의《중용론》을 두고 아직 의론이 분분하나 시비의 진가는 잠시 제쳐놓고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라. 전 세계는 말고라도 조선조의 궁정비사가 인성의 잔악함을 여지없이 말해준다. 권력의 보좌를 위해서는 육친불인이고 골육상잔을 술마시듯 하였다. 악랄한 인성은 원래 탈권자의 성품이 되여질 리유가 없다. 하지만 권력욕에 혈안이 되면 혈육도 마상의 환난지우도 불길한 잡귀신으로 보였을게다. 그래서 권좌에는 성인이 따로 없다고 하는것이다.     자기를 해친자를 용서하는것은 관용이지만 인간성의 원리는 아니다. 누군가 자기의 악착한 인성을 발견하고 상심할 대신 너털웃음을 웃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한 개체생명으로 말하면 자기 원죄에는 인성의 상실과 자포자기도 들어있다.     포송령의《료재지이》에《견간(犬奸)》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줄거리를 간추려 말한다면 한 고장에 장사군이 있었는데 일년치고 많은 날을 외지로 떠돌아다 니다보니 그 안해가 늘 독수공방하였다. 규방의 적막을 이기지 못한 녀자는 욕정을 달랠 방법을 찾아냈다. 집에서 기르고있던 흰개를 훈련시켜《군사내》로 만들어서 매일처럼 흰둥이와 운우지정을 나누며 즐기였다.     어느 날 사내가 돌아와 안해와 동침하게 되였다. 그런데 질투심이 치민 흰개가 공공연히 방안에 뛰여들어 자기의《정적》을 물어죽였다. 인명사고는 즉시 관아에 고해졌다. 자세히 캐여묻지 않고도 사태를 짐작한 현령이 간부와 개를 사형수감옥에 가뒀다. 여기서 얘기가 거의 끝난것 같지만 더 경악할 일은 뒤에 벌어졌다. 두옥졸이 개와 녀자를 뜨락에 풀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다가 개가 어떻게 녀자와 교합하는가를 구경시키고 돈을 받았는데 구경군이 백여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조금 황당한 옛얘기지만 두 옥졸과 백여명의 관람객들의 심리에서 인성속에 숨은 야수성의 경향을 엿볼수 있지 않을가? 물론 이야기가 보편성을 띠지 않는것도 사실 이고 그러한 인성의 표현으로 인성일반을 폄하해서는 안되지만 인류는 기나긴 세월 속에 야수성을 조금씩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완성된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려운것은 문명개화의 와중에 “이화”된 야성들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들이다. 아이를 납치해다가 불구로 만들어 거리에서 구걸하게 하거나 내달리는 자동차와 부딪치게 하고 배상금을 받아내는 놈팽이들이 있는가 하면 친딸을 해치는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들도 멸종되지 않고 륙속 까나고있다.     세계문명국이라는 미국의 병사들이 이라크의 감옥에서 포로들에게 감행한 성적 학대들도 인성속에 잠재한 수욕의 발작으로서 현대문명인의 수치스러운 행각들이 아닌가? 애정과 성애방면에서 드러나는 본성이 가장 적라라하다지만 그것은 인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야성도 아닌 인간악인것이다.     썩박돌도 돌이다. 인성이 훼멸된 인간도 인간이다. 그러나 다만 인피를 쓴 동물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할것이다. 현대문명의 세척제로 인성속에서 발작하는 가지가지 야수성을 조금이라도 씻어내려는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선량한 동기이다. 절대세계란 없다. 오직 상대세계만이 있다. 선속에도 악이 있고 악속에도 선이 있다. 그것이 선하다는것은 그 속에 이미 악이 포함되여 있기때문이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원인은 따지지 않는다. 원인이 더욱 중요한데도 말이다. 자연은 간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는게 자연을 보호하는게다. 자연에는 쓰레기도 없다. 완전순환이다. 오염이란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가령 욕망을 버리고 또 버리면 마음에 괴로움도 미움도 없을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다. 물론 내는 철학가가 아니여서 이러한 상황을 바르게 리해할수도 평가할수도 없다.     졸문을 마무리하면서 자문해 본다. 당신이 인간성을 옹호한다고 말할 때 인간성에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것이 아닌가? 당신이 인간성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엔 당신은 스스로에게 만족한것이라는 명언이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이로써도 부족하다면 《우리가 인간성에 대해 정말로 유일하게 아는것은 변한다는것이다. 우리가 말할수 있는 인간성의 유일한 속성은 변화이다.》라는 와일드의 말을 첨부해둔다.     하긴 속심을 털어놓으면 오히려 조소를 살수 있는것이 오늘의 인정세태라 얼마나 공감이 생길지 모를 일이지만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에 불평부리고 탄식하며 인류에게 가망이 없는 기대를 걸어보는것도 일종 인성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2008년 3 월 17 일
381    진언씨 수상록 (1) 인생만담 (수정고) 댓글:  조회:6743  추천:0  2014-01-02
                                                           인생만담                                                                진 언       만화속 세상에 만화같은 인생의 내함은 다양하고 풍부하여 수십억 창생이 해석하는 한 풀이도 각양각색일수밖에 없다. 투기는 인생이란 틈만 있으면 새여드는 바람이라고, 야심가는 인생이란 어마어마한 권좌라고, 허영은 인생이란 알락달락 눈부신 외투라하고, 염세는 인생이란 언제가는 처참하게 깨여져가는 뭇배라고…     흔히 인생려정이라 한다. 그러나 준비도 없고 련습도 없이 세월따라 걸으면서 시골아낙이 부랴부랴 보리방아찧어 저녁밥짓듯이 그때그때 채비하는 숨가쁜 길이다. 초행길이라 우왕좌왕하기 마련인데 산다는것이 무엇인지를 걸으면서 배우고 가끔 꽃 도 꺾는 여유로움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뒤짐지고 슬슬 걸어도 되는 산책길은 아니다. 거부기 걸음을 할수도 없고 토끼처럼 단숨에 내달리고 한잠 느러지게 잘수도 없다. 인생길엔 선택이라는 갈림길 에서 고생길따라 행복산에 오르는 비탈길이기도 하다. 허위단심 가고가서 이르는곳 인즉 북망산이지만 내처 가야만하는 인생길, 추겨든 생명의 횃불이 어느 굽이에서 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 감수능력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고 가치취향에 따라 걸음새가 다르게 된다.     인생을 한권의 소설에 비유한다. 인생소설은 길수도 짧을수도 있지만 고난의 려정이 가장 매력적이다. 누구의 인생이나 대하소설이 될수 있지만 어떤사람들이 쓸것이 없다고 여길뿐이다. 회억록은 대필할수 있지만 생활경력은 대신 엮을수 없다. 인 생의 전 40년은 텍스트로 엮어지고 30년은 주석을 해석하는데 바쳐진다. 한부의 완전완미한 인생이 없는것처럼 영원히 미완성작으로 남을수밖에 없다.     인생의 아침엔 도취되고 한낮은 권태롭고 황혼녘엔 후회가 깃들게 된다. 20대엔 열정으로. 30대엔 의지로 살아도 40대엔 권태가 갈마든다. 인생길에도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소모하는 4계절의 운행법칙이 있다. 돌아보면 구슬땀 흘린 자국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걸어온 길이라 소중한것이다.     생각하는 인생은 희극이요 느끼는 인생은 비극이다. 확실히 인생마당은 희비극이 벌어지는 극장이라고 할수 있다. 극정은7정6욕으로 엮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내면의 무의식속에서 표출된다. 인생은 장막극일수도 있고 단막극일수도 있지만 막간극에 광대만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생극에는 련습이 없다. 많이 련습할수만 있다면 자기 형상을 멋지게 부각할것이다. 인생극은 연출하면서도 운명적사명이기도 하다.     혹자는 인생현장을 경기장이라고도 하지만 나름대로 종점에 이르기만 하면 모두 우승자로 칠수 있다. 이미 달려온 인생길이 꿈길이였다면 이제 걸어갈 길도 꿈속처럼 걸어갈것이다. 인생은 무지개라는 노래도 있던데 인생길은 때로는 소소세우가, 때로 는 궂은비 쏟아지는 광야의 오솔길이라 할수 있다.     인생을 학교라고도 한다. 인생학교에는 우수생이 적다. 지정된 계몽스승도 없고“박사도사”도 따로 없기때문이다. 인생학교에서 더하기식만 배웠으면 좋겠지만 인격력량은 덜기식에서 배워야 한다. 인생학교에는 행복을 강의하는 선생보다 불행을 해석하는 선생이 더 훌륭하다. 행복이란 불행속에서 그 의미가 잘 해석되기때문이다.     인생은 유희이라고 하지만 결코 심심풀이가 아니다. 분망하면 유희가 짧을것이고 심드렁하면 지리멸렬할것이다. 다행히 인생유희에 가능성이란게 남아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지레 락심할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꼭 이루어질것같은 소망을 안고사는 인생은 의미로울것이요 성가실만큼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의 인생은 하품이 나올것이다.     생명은 연소에 있다. 때때로 만취하고 밸이 탈리도록 웃어대고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쳐보지 못하는 인생은 사해와 같다. 휴식없는 욕망과 허영과 정욕으로 삶을 꾸며가지만 인생의 필수품은 지향이며 끈끈한 추구와 사랑이다. 가령 인생이 꿀떡같다면 한입에 삼킬것인가? 좋아도 싫어도 야금야금 먹어야 하는 겨자떡같은 인생이다. 그 과정에 눈물머금은 인생유모아가 엮어지기도 한다.     인생은 그림그리기와 같다고 할수 있지만 그림같은 인생화가 되기엔 인생무상이라 종잡을수 없다. 인생은 처음 백지로 펼쳐진다. 거기에 무엇을 그리는가는 각자 나름이다. 그러나 능란한 인생화가란 력래로 없었다. 생명은 초로같지만 생명의 순환으로 천만년 인류사를 엮었고 지금도 불가절멸의 인간사회를 가꾸고있다.     인생을 일장춘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열심만이 꿈을 불러온다. 같은 꿈이라도 누구는 꿈을 현실로 수놓고 누구는 현실을 꿈처럼 엮으려 할것이다. 이미 걸어온 길이 꿈길같았다면 남은길도 꿈길같을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자만이 꿈꿀수 있다. 미래는 설계도에 불과하지만 실현할수 있다는 생각이 인생을 의미롭게 한다.     누구나 단술을 마시려 하지만 고배를 더 들게되는 인생현장이다. 평범한 일생은 안일하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이야말로 산냄새가 짙을것이다. 인생이 호수같다면 너무 단조로울것이다. 생활은 매일 반복되지만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것이 아니다. 인생 에 번뇌를 느끼고 고통에 모대긴다는것은 삶에 자각했다는 표징이다. 남이 못하는 일을 해내고 먹지 못할것을 먹어봐야 인생의 진미를 맛볼수 있다.     인생길은 첫걸음부터 불안과 유감으로 시작된다.생활은 원래 무정하지만 정을 가지고 살기에 아름답다고 찬미하는것이다. 인간고는 자기의 충실한 삶을 영위하는데 쓰디쓴 보약이 될수도 있다. 비록 빛나게 살지는 못했어도 제나름의 주석을 달수 있는 일생이라면 보람있게 살아왔다고 할수 있다.     인생을 하나의 빈병이라 할수도 있다. 어떤 술을 담는가는 그 자신에게 달리였다. 그러나 그냥 부어넣어도 되는 병이 아니다. 인생의 진미는 넘치는 부유가 아니라 빈 자리를 메워가는 그 과정으로서 스스로 창조하는것이지 누가 부여하는것이 아니다. 과욕은 인생을 속박하는 검질긴 오라줄이건만 기꺼이 묶이하니 인생이 고해가 된다.     인생길에 고생이 장고생이요 락이 장락이라는 잠규칙이 없다. 인생길은 본래부터 쌍곡선이여서 행복과 불행이 나란히 달리게 만들어졌다. 일생에서 즐거운 날과 괴로운 날은 적고 평범한 나날이 대부분이다. 때때로 취하고 웃어대고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인생은 심지없는 등잔과 같다. 누구나 휴식없는 욕망과 허영과 정욕으로 인생 을 꾸며가고있다. 하지만 인생의 필수품은 지향이며 성공이 아니라 끈끈한 추구이다.     인생은 물이 새는 한척의 쪽배같기도 해서 부지런히 노를 젓지않으면 자칫 격랑 에 침몰될수도 있다. 게다가 욕망은 넘치게 실었지만 부리우는것은 늘 보잘것 없는게 인생의 쪽배이다. 인간은 뭐든 자기 뜻대로 할수 없게 된데서 방종이란 단어를 만들 어냈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욕구라면 방종은 제이 천성이다. 그래서 인생은 후회와 유감의 연속이요 순환이라고 한다.     인생이 워낙 희비극으로 엮어질 수밖에 없는것은 인간의 원시정감이 너무 개화된 탓이다. 만화속같은 세상에서 만화같은 인생이여도 열심히 그려야 하는 인생만화이다. 현자들은 우리더러 범부속자로 살지언정 용렬한“귀인”은 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인생은 류성처럼 명멸하다가 곧 스러지는 섬광이기에 촌음이 귀중한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벗겨놓으면 인차 거매지고 곧 썩기시작하는 빠나나같이 여리다. 그런 인생이 괴롭고 욕망도 시들해지면 세상은《가라》하고 무덤은《오라》한다. 누구의 인생극이나 어김없이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영원한 해탈이기도 하다.                                   2008년 9 월 20                             
380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 댓글:  조회:6841  추천:5  2013-12-30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                                                             진 언       새시기,우리의 문단에 돌풍처럼 불어친 현대파열풍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라 개괄할수 있다. 요란하고 심오한 리론을 잠시 접어두고 통속적으로 말하면 모더니즘은 개혁이나 혁명을 가능하게 해준 서구계몽주의사상 내지는 철학을 가리킨 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19세기 후반, 20세기초에 흥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창의된 문예사조인것이다.     19세기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이였다면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개인의 목소리를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지만 그 명확한 개념이나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치나“선각자”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되여졌다.     모더니즘의 리론가들은“창작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실주의적인 예술은 이미 지난 시대의 유물이기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은 언어나 형식의 유희속에서 스스로 예술발전의 첨단을 걷는다고 착각하면서 예술이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 복무해서는 안된다는 순수예술리론을 답습했다. 그런데 형식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의 작 가들이 과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과 무관할것인가?     묻건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어떤 점에서 모더니즘을 벗어나려 하는가? 그리고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과연 새롭게 생산적으로 철학적사유를 전개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못할 경우 한낱 지적인 허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 울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 조선민족의 현실과 련관하여 이들이 수행하려는 역할을 추적해 보자. 우리 조선민족은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력사적, 지정학적인 삼각지대에서 력사적, 정치적으로 특수환경에 처한 민족이다.     그런데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는 대중의 미학을 자아실현수단으로 자족한다면 너무 무책임하다. 예술의 형식성이나 현대성, 형식을 추구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진다면 작가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이요 텍스트가 어떠하오 말하 기전에 문학의 화원에 침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량면성을 투철히 리해하고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파악하여 우리 연변의 인문환경, 정치, 경제, 문화생활실정 에 맞는 패러다임(시스템)으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했다고 생각해 본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명확한 차이점을 파악하기엔 모호한 점이 많은데 그저 맹종하면 실천적으로 우를 범하지 않을수 없다. 정작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기존의 관념들을 해체하고 요란하게 분해, 조립하느라 시도하지만 실상 을 알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있다. 완성단계가 아니여서인가 ?     니체에게서 의식은 언어적파악, 언어적사고와 동일시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기원과 기능을 밝혀주는 단서는 바로 의사전달 기호로서의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사고를 따르는 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인간 각자의 본래의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일반적이며 군중적인 속성에 속하게 하고 자의식이란것도 역시 인간의 개별적자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옳바른 리해의 길은 못된다고 보았다.      인간관계에서 투쟁과 갈등이 불가피하게 생기고 그런 사회적갈등과 압력을 해결하기 위한 보편적법칙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사회적인간관계과 “언어유희”와“문자놀이”가 표출되고 이는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각각의 문자놀이는 쉽게 다른 사람의것과 일치되지 않는 각자의 특유어법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이 사회적공공언어전달에서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발휘하는가가 문제시되는것이다.     롤랑 바르트는“언어의 상대성과 불명료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관을 비판하게 된다. 언어자체가 확실한것임을 전제로 하는 일련의 노력들 은 사실상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나 자각이외의것을 보여줄수는 없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는 무기력한것에 불과하나 그러한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이나 진정한 리얼리티에 도달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해명했는데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인위적인 모호언어를 조합하니 무슨 진리성 오감같은것이 생길수 있겠는가?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 사유, 심리를 보여주는것이지 그것과 유리된 진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것은 아니다. 사용자에 의해 발견되고 창조되는 진리란 이미 절대성을 손짓하기보다는 상대성을 드러내게 된다. 언어가 환기시키는 느낌은 일종의 현혹을 일으켜 구원, 초월, 절대, 중심따위의 말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주관과 그 주관의 상대성과 허구성을 은폐시킴으로써 더구나 오리무중이 되게 한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제국적자본주의가 다국적자본주의 형태로 세계시장에 파고드는것을 도와주는 후기자본주의 론리라고 비판하고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특징을“미학적대중주의, 문화생산물의 깊이가 없음, 력사성의 빈곤, 의미의 해체, 비판적거리의 말소, 재현이데올로기의 약화 등을 례로 들고있다. 그의 말처럼 해체리론은 모든것을 텍스트로 축소시킴으로써 사회정치적, 력사적 탐색을 소홀히 하는 태생적이고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는 결코 새로운 발뎐이 아니다. 또한 해체리론은 텍스트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하거 나 간과하고있다. 그리고 해체리론은 창작과 비평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비평이 창작을 압도하는 소위 비평만능시대를 자초하였다. 특히 해체리론은 사변적리론으로 인 해 원의도와 달리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그 스스로 유리화를 꾀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며 전통과 진리를 해체한후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가 또 하나의 전통과 진리가 되여진듯 표방하는 사이비도 엿보인다. 그러나 보인다해서 다 터득되는것은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스스로“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던 류형의 문학,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시작되여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전성기를 이루던 류형의 문학은 사망하였다. 조선반도문학에서 모더니즘은 1930년경 프로문학의 퇴장과 일제군국주의의 대두를 계기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또 반세기가 지나서 중국의 한구석 연변문학에 인입되였으니 이젠 현실이 아니라 력사에 속해 있는것으로서 우리로 말하면 왕창 지각한“신사조”일진대 결코 선지선각도 아닌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다양해진 세계상은 또한 그만큼 피해를 입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해체를 통해 리성적우상들은 해체되였을지라도 해체라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리성적인 론리(로고스)는 해체되지 않았을것이다. 새로운 리성중심의 론리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양성의 기치를 추켜든 포스트모더니즘문화가 상품화된 지배문화에 종속되여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허물고있다는 점이나 자아감각을 역설하며 해석자를 필수로 등장시키는 문학은 이를 리해하는 일부의 엘리트 해석자들에게만 호소력을 지닌채 스스로를 대중에게서 격리시킴으로써 결국 자신의 모순된 론리로부터 자승자박이 되였다.     감각으로 도피하든 개념으로 도피하든 이들은 모두 력사와 현실을 벗어나 민중들의 건전한 사고를 마비시키면서 직간접적으로 인류의 진보적력사발전을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하고있다. 이들은 색정적(에로틱한)인 예술이나 신의 계시를 암시하는 애 매모호한 예술을 지향하면서 시대의 고민을 인식하고 그것을 척결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해야 하는 작가의 임무를 포기하는것이다. 그 포기끝에 무엇이 마중올가 ??                                                                        2010년 11월 30일   
379    느낌에 생각이 따라서 (100수) (85) 장하다, 冬草야 ! 댓글:  조회:7033  추천:3  2013-12-27
                                            장하다, 冬草야 !                                                     야 조                          북국의 동토대 꽁꽁 언땅에도                                  끈지여 뿌리만은 살아있느냐                                          마른채 서있는 처절한 네모습                                                  죽어서 재생을 다지니 장하다                             기한에 허덕이는 사람들처럼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죽인채                                           그 모진 칼바람도 인내하느냐                                                    그 시절 푸른꿈이 향기롭구나                             오로지 생명혼의 믿음하나로                                   기어이 오고야말 봄날을 위해                                           한철을 숨고르며 용케도 버텨                                                   묵묵히 희망을 움틔우는 동초                            생명의 지평에 만물은 평등해                                   청청한 소나무도 멋에 겹다만                                           겨울풀 너도야 살권리가 있어                                                   죽어도 생명찬가 엮어가라                                                          2013년 12월 20 일                                                                
378    몸서리쳐지는 책을 소개함 댓글:  조회:7321  추천:1  2013-12-24
                                몸서리쳐지는 책을 소개함                                        펌 글        기사입력: 2011/05/14 [01:1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지난해 2010년 11월‘당대’ 출판사에서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라는 부제가 붙은“그들이 온 이후”란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는‘워드 처칠’이라는 아메리카 토착 인디언 출신 학자이다.(황건 번역)     워드 처칠은 이 책에서 유럽의 스페인,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유럽의 나라들이 어떻게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을 학살하여 절멸시켰는지 매우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들어 낱낱이 증명하면서 미국에서는 지금도 얼마 남지 않은 인디언들의 보호구역 땅까지 모조리 강탈하기 위해 미국정부가 어떤 모략을 꾸미고 압박해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유럽 백인침략자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그 중간 카리브해의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집단학살하였으며, 특히 이름도 가지가 지의 전염병 병원에서 나온 이불과 목도리까지 선물하여 거의 멸종수준에 이를 정도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카리브해에서 1500여만 명, 북아메리카에서 1500여만 명 등 3000여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자료에 의한 주장이고 실제로는 1억 명 이상의 아메리카 인디언을 유럽인들이 학살하여 거의 절멸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실제 알려진 것과 달리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농업기술과 토목건축 기술,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 일리노이아주인 당시 카호키아의 경우 인구 4만 명 규모의 발전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저자 워드 처칠은 이 책에서 옥수수, 토마토, 호박, 감자 등 지금 인류가 이 용하고 있는 작물 절반이 인디언들이 재배하던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매우 높은 수준의 의학치료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적어도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 기록도 인디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땅도 공동 소유하는 등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넓은 영토, 풍부한 먹을거리, 높은 의학수준과 다툼 없는 평등하고 화목한 생활에 산하제한까지 없었다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숫자는 기록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 자명하다. 이 많은 인디언들을 유럽인들은 동물처럼 학살하여 절멸시킨 것 이다. 문제는 지금 남은 얼마 안되는 인디언들의 보호구역 안에서 우라늄 등 귀한 자원이 발견되자 이를 강탈하기 위해 온갖 법개정 놀음을 벌이고 인디언들 경제활동 에 장애를 조성하고 마약과 술에 찌들게 하여 완전히 멸종 해체시키려는 시도를 지금도 미국 지배세력들이 자행하고 있다면서 책의 저자 워드 처칠은 인디언들이 각성 하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해온 워드 처칠도 현재 미국의 유태인들로부터 협박과 압력을 계속 받고 있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의지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유럽인들의 인디언 학살사가 얼마나 잔악한 것인지 독자들에게 좀도 생동하게 전달 하기 위해 총 13장과 부록으로 구성된 내용 중에서 이 책의 개관에 해당하는 1, 2장의 주요 대목들을 뽑아서 아래에 소개한다. (중략) ................................. 아래 .............................. ◐ 원조 나치는 콜럼버스 [세일(Kirkpatrick Sale)은 그의 저서 ‘파라다이스의 정복(The Conquest of paradaise)’ 에서 이렇게 말했다.(155쪽)     총독(콜럼버스)이 1495년에 도입한 공물제도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동혐오를 인정하면서도 황금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단순하고도 잔인한 방법이었다. 14세 이상의 모든 타이노족 사람들은 지배자들에게 석달마다 금으로 만든 매부리(금이 없는 지역에서는 면사 25파운드)를 바쳐야만 했다. 공물을 바친 사람에게는 그 증거로 토큰을 주어 목에 두르도록 했다. 공물을 바치지 못한 사람은 페르난도(콜럼버스 동생)가 조심스럽게 말한대로‘처벌’받았는데, 그것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 (사제) 의 말대로 두 손을 잘라 피 흘려 죽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콜럼버스 총독 재임기간 동안 에스파뇰라 섬에서만 이런 식으로 1만 명 넘게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에는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히달고)들이 타이노족을 집단으로 목매 달아 죽이고, 쇠꼬챙이에 꽂아 굽거나 화형에 처해 죽이고(종종 한 번에 수십 명씩), 어린이들을 잘게 썰어 개의 먹이로 주는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 모두가 원주 민들에게 스페인‘상전’ 들에 대한 ‘올바른 존경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먹이아기의 발을 잡아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럼 꿰기도 했다.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나치 친위대들도 이보다 더 사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런 짓거리는 끊임없이 대규모 학살극으로 이어졌다.“어떤 스페인 사람이 …갑자기 칼을 뽑았다. 그러자 100명 전체가 일제히 칼을 뽑아, 겁에 질려 앉아있던 일단의 타이노족 남녀노소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잘라 죽이기 시작했다. …얼마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근처에 있던 큰 집에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소가 도살당한 것처럼 피가 냇물처럼 흘러나왔다.”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이번에 최대의 포악행위와 학살극이 자행되어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했다. 인디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기들의 왕국과 땅, 자유, 목숨, 아내 그리고 집을 유린당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스페인 사람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로 죽어가고, 말 발굽에 뭉개지고, 칼로 동강나고, 개에게 먹혀 찢기고, 산채로 묻혀 죽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굶어죽었다. ”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이런 학살극은 도륙할 타이노족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런 학살은)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언을 열등인간,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생각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라스카사스와의 논쟁에서 귀족인 프란시스코 데 세풀베다는 대다수 스페인 사람들을 대변하여 아프리카 흑인이나 그밖의‘하급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영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어디서 조우하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죽이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지닌 신성한 책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도 바로 이런 골수 인종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 그들이 온 이후’ 19-21쪽 ◐ 전염병 유포로 인디언 대량학살    [물론 ‘콜럼버스의 만남’은 약탈적인 유럽의‘신세계’ 정복, 5세기에 걸친 대량 학살 및 식민지화 사이클의 길을 터놓았으며, 이 과정은 토착 아메리카의 면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꿔놓았다. 사실 콜럼버스가 총독으로 있었던 스페인의 카리 브해역 주둔 첫 10년 동안, 그 후에 이어진 모든 사태의 틀이 만들어졌다.     콜럼버스가 실행한 노예제도와 방자한 살육정책은‘구세계’의 병원균의 도입과 결합되어 1496년에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의 토착 타이노족 인디언 수를 800만에서 300만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년 후에는 타이노족의 수가 10만 미만으로 감소했고, 1542년에는 스페인의 인구조사에서 불과 200명 남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 에스파뇰라 섬의 ‘인디언’들은 한 세기 전만 하 더라도 1400만에 달했던 카리브해역의 다른 토착민들과 함께 멸종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1513년 폰세 데 레온 탐험대의 플로리다 진입 때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천연두 전염병이 온 대륙에 퍼져 1524년에는 리오그란데 강 북쪽 지방의 전체 토착민 중 약 3/4이 절멸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520년부터 1890년까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속에 무려 41차례나 천연두 전염병 및 풍토병이 전파되었다. 이에 더해 홍역, 백일해, 결핵, 선(線)페스트,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디프테리아, 성홍열, 늑막염, 유행성 이하선염, 성병 그리고 일반 감기 등 수십 가지 치명적인 질병이 퍼졌다.     이런 질병에 의한 토착민 감소는 흔히 비극으로 취급되지만, 그러면서도 전적 으로 유럽인과 토착민의 접촉에 따른 우연하고도 고의가 아닌 부산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전연 다르다. 왐파노아그족과 나라간세트족이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과 벌인 1675~76년의 이른바‘필립 왕의 전쟁’은 인디언들이 천연두를 유럽인들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고 믿은 데서 촉발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영국군의 전술과 의도에 관한 그 같은 인식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점은 제프리 암허스트경이 1763년에 휘하 헨리 부케트 대령에게 내린 명령서로 충분히 입증된다. 암허스트는 이 명령서에서‘천연두 병균에 오염된 담요 등-이들 형편없는 종족을 절멸시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폰티액의 인디언연맹군 대원들을 감염시키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암허스트는 ‘천연두 병원에서 나온 담요 두 장과 목도리 한 장을 그들에게 주었다. 바람직한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성과가 있었다. 암허스트의 생물학전에 의한 전염병으로 최소한 10만 명의 인디언이 죽었다. 1836년에 일어나 비슷한 사례에서 미국군은 미주리 강 만단족에게 고의로 천연두 병균으로 오염된 담요를 배급했으며, 그 결과 전염병이 퍼져 토착민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7세기 초 플리머스와 버지니아에 영국 식민지가 설치되고 네덜란드가 뉴암 스테르담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북아메리카 토착민 말살정책은 훨씬 더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1637년 5월 26일에 고전적인 사례가 발생했다. 이날 영국군이 미스틱 (코네티컷주)의 피쿼트 마을을 포위, 북을 지르고 나서 도망가는 남녀노소 약 800명 을 학살하고 도끼와 칼로 난도질했다.     18세기 거의 내내 이 같은‘사고’는 더 한층 빈발했다. 이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인디언전쟁(인디언을 총알받이로 앞세운 전쟁이라는 말인 듯)을 벌였고 이때 토착민들은 어느 한편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도록 강요되었으며, 그 결과 토착민의 인구감소는 한층 더 가속화했다.-‘그들이 온 이후’] 34-36쪽 ◐미국의 절멸적 학살     [그(마셜)에 따르면‘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는 데‘저항’하는 것은‘전쟁행위’가 되어 이론적으로 미국의 무력을 수반한‘대응’을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토 착민들의 물리적 저항능력이 완전히 분쇄된 1903년에 와서는 마셜 독트린이 더한층 발전하여, 대법원은 연방정부가‘고유하게’ 영역내의 모든 인디언들에 대해‘전권’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여러 조약을 통해 획득한 토지소유권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미국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조약상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연방법원은 또한 정부가 원주민들의 나머지 재산에 대해서도‘당연’하고도 영구적인‘신탁’ 특권을 갖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1840년대에 동부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나아가 멕시코의 북쪽 절반에 대한 권리도 무력으로 강탈한 미국은 스스로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진출할‘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백인은 하나님의 섭리로 신대륙을 지배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뜻-옮긴이)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했다. 이 개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디언에게 돌아갈 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연방정부 정책결정자들과 일반여론은 서둘러 인디언 절멸논리를 노골적으로 펴나갔다.     이런 정서는 어김없이 수많은 대규모 인디언 학살로 이어졌으니 그중 대표적인 사건만 보더라도 블루리버(에브래스카, 1654), 베어리버(아이다호, 1863), 샌드크리크 (콜로라도, 1864년), 와시타리버(오클라호마, 1868), 캠프 로빈슨(네브래스카, 1878), 둥디드니(사우스타코타, 1890) 등을 들 수 있다. 1894년에 미국연방센서스국은 미국이 한 세기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에 원주민을 상대로 ‘40차례 이상’ 전쟁을 벌여 이 과정에서 자체의 추정치 3만 명보다‘훨씬 많은’ 사망자를 냈다고 밝혔다.     센서스국은 또한 이 기간 동안 ‘민간인’에 의한 토착민 학살도‘매우 많았다’고 시인했다. 캘리포니아에서만도‘주로 광산업자와 초기 정착민들이 저지른 잔혹행위와 대규모 학살로 인해’ 1800년 30만에 이르던 토착인디언 수가 1890년에는 2만 명 미만으로 격감했음에 비추어볼 때, 민간인에 의한 사망자 수는 군대에 의한 사망자 수보다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는 인디언 의 머릿가죽을 관공서에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현상금을 내주었다. ‘대체로 인디언을 개만큼도 여기지 않는…유로아메리카 사람들에 의해 텍사스인디언들은 대부분 절멸되거나 멸종지경에 이르렀다.’ 서부지역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토착민들이 살해되면서 그들이 살던 땅에 백인 정착민들이 대신 들어앉았다.     1890년에는 미국 내에 살아남은 인디언 수가 25만 명에도 못 미치고 사망률이 95%를 웃돌았다. 생존자들은 조그만 ‘보호구역’에 갇혀 살았는데, 그나마 이른바 ‘일반토지할당법’에 따라 해체의 길을 걸었다. 1887년에 제정된 이 법령에 따라, 공식우생법이 제정되어 미국의‘기준’으로 해서 누가 인디언인지(그리고 누가 인디언이 아닌지)를 결정했다. 자신이 ‘1.5등친 이상의 인디언 혈통’임을 납득할 만큼 입증하고 그 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아들인 사람은 대체로 160에이커 미만의 개인 토지증서를 받았다. 충분한‘혈통량’을 가진 개인이 토지를 할당받고 나면, 보호구역의 나머지 땅은‘잔여’토지로 선포되어 비인디언이 입주하거나 기업이 취득하거나 또는 국립공원 용지로 전용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930년까지 토착민 보호구역 중 가장 좋은 땅 1억 에이커를 빼앗겨, 인디언들은 원래 보유지의 2.5%에 해당하는 5천만 에이커의 불모지에 더욱더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이 모델은 나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답습하여 원주민에게 영토를 할당하는 ‘인종자 치구’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이 온 이후’ 38-40쪽     ◐ 총 몇 명의 인디언을 학살했을까?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의 한 해변에 표류하여 처음 상륙하던 날 북아메리카는 오래전부터 풍부하고 매우 복잡한 여러 문명들을 물려받고 있었다. 적어도 5만 년 동안 줄곧 이 대륙을 차지해온 토착원주민들은 총인구 약 1500만에 달했고, 인구 4만의 카호키아(오늘의 일리노이주 소재)의 도심지 같은 대도시들, 고도로 성장한 건축, 토목개념, 현대 생태과학에 맞먹는 지식이 구현된 영 적 전통, 약물학과 전인의학에 관한 높은 지식 그리고 매우 정교한 정치, 교역 및 외교 체제 등을 실현했었다.     대륙의 전통경제는 일차적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는 식물성 식료의 절반이 훨씬 넘는 작물(옥수수, 감자, 토마토, 호박, 고추 등-옮긴이)을 만들어낸 친환경적 영농절차에 바탕을 둔 농업이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룩한 토착민 사회는 매우 평등하게 조직되어 부동산은 집단소유였고 모계중심 사회가 기본이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식 전쟁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쟁은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온 이후’ 34쪽     [콜럼버스의 프로그램으로 타이노족의 수는 그의 지배체제 초기에 800만에서 1496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감소했다. 총독이 떠날 즈음에는 약 10만 명가량 남 았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계속되어 스페인이 1514년 인구조사에는 이 섬에 살아남은 인디언 인구가 고작 2만 2천 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1542년에는 겨우 2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 1500만 명에 달했던 카리브해 전역의 인디언들과 함께 멸종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이 온 이후’ 18쪽■                                           2013년 12월 24 일 옮김
377    이른바 사회량심 댓글:  조회:7911  추천:0  2013-12-24
                                                    이른바 사회량심                                                             진 언       량심이란 현실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도 인정하는 행위규범과 가치 표준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량심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적절한 때 에 인간에게 명령하는 리성의 자률적판단이기도 하다.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흔히 “량심이란게 몇푼어치가 되는냐?”라는 말을 잘하는데 량심의 위치에 대한 현대사회의 역설적인 평가라할수 있겠으나 아이러니하게 사용빈도는 매우 높은 단어로 되였다.     갑골문에서 량(良)자는 형태상 마치 상하에 두가닥의 물도관이 있고 중간에 하나로 직결된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마디마다 구멍을 뚫어 통하게 한 참대를 말하고 심(心)자는 기혈(器皿)을 가리켰다. 여기서 거꾸로 생각해보면“량심”은 고대인들의 생활세절로서 참대로 물을 그릇에 이르게 하는것에 대한 묘술이다. 역으로 생각하면“량심”이 없으면 곧 물이 없고 물이 없으면 당연히 살아갈수 없고 생명도 없다는 뜻으로 된다. 전자체(篆体)에서“良”은 “工”与“曰”자가 거꾸로 된형태이고“心” 은 사람의 심장모양이란다. 즉 전자체에서“良心”은 한사람의 마음이다. 그 사람은 권세가 일수 있고 부자일수 있으며 가난뱅일수도 있으나 심장이 없을수는 없다.    “량심(良心)”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가장 일찌기 선을 보인것은《맹자. 고자(孟子•告子)》라고 전해지고있다.“虽存乎人者,岂无仁义之心哉?其所以放其良心者,亦犹斧斤之於木也。” 朱熹集注:“良心者,本然之善心。即所谓仁义之心也。”여기에서 인의지심에는 련민, 수치, 공경 등 여러가지 정감이 포괄되고있다.     하여 량심에 대한 위인들의 명언이 많이도 류전되였다. 이를테면 제2차대전시기 영국의 원수인 몽고마리 (詹. 蒙哥马利)는 량심은 죄인의 지옥이라 하였고 발자끄는 겸허는 신체의 량심이라 하였으며 구쏘련의 교육가 쑤호무린쓰끼는 량심은 신념의 정감초병이라 하였다. 또한 량심은 인생의 근본이라 하고 량심의 법칙은 영원히 휴정(休庭)할줄 모른다고 하며 오늘의 량심은 행복에 대한 요구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사회량심이라 할 때 사회는 모든 사람들의것이고 량심은 자신의것이다. 량심이 있으면 사회에 유조하고 량심이 없으면 사회의 해충에 불과한 고급동물이다. 현실이야 여하튼간에 리론적으로 량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사회의 들보이고 동력이 된다고 말하는것이다. 인간의 사회적량심이라면 우리는“구라파의 량심”이라는 볼떼르를 떠올리게 된다. 기실 그는 구라파의 량심만이 아니라 전 지구촌의 량심이 였다고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하다면 현대사회에서 사회량심은 누구일가?     우리는 보통 기자들을 이 시대 사회민중의 눈과 귀요 “사회량심”이라고 일컫는다. 정체적으로 말할 때 신문사업일군들은 시대와 사회에서 가장 량심적인 군체의 하나이다. 당전 중국신문계에서는“잡문보”를 창시한 저서경(储瑞耕)을 첫손에 꼽는데 《사회량심-저서경평전》이란 책도 출판되였다. 그의 필촉아래 무려 5000만자의 문장이 엮어졌는데 신문계, 평론계에서 굴지의 문필가로 공인하고 있고 당대중국신문 사업가들의 응유의 사회량심을 체현한 수재라는 칭송소리가 높다.     문필에 흥취있는 사람은 미국정치가이고 발명가인 프랭클린의“만약 당신이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면 가치있는 글을 써내여 사람들이 읽도록하라. 혹은 어떤 의의가 있는 일들을 후세사람들이 쓰게끔하라.”라는 명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삼림속에 딱따구리가 없으면 안되듯이 저서경기자야말로 신문계라는 이 “문화삼림”속에 “딱따구리”였기에 중국신문계만의 귀감으로 되였다.        주지하다싶이 이미 발생한 사실을 진실하게 보도하는것이 신문의 생명이고 핵심이다. 골목소식도 소식이라지만 떡은 떼고 말은 보태라는 속담처럼 잡다한 풍문들은 대부분 류언비어이다. 그것을 언론화한다면 헛소문을 류포하는것이 된다. 실체도 경 계도 애매모호하고 시정에 떠도는 헛소문일수도 있는데 추적이 어렵고 책임회피도 무난하여 사이비여론의 수단으로는 적격이다. 통념에 가깝고 근거도 출처도 불분명 하기에 정보속성상 지상에 나도는 그 순간에 벌써 가치가 거꾸로 서는 운명이다.     거개 “-ㄹ것으로 보인다.-ㄹ것으로 관측된다. –ㄹ것으 로 추정된다. -가능성이 커 보인다(작아보인다.),-ㄹ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보에 의하면, -소식통에 의하 면…” 등 문구가 기본모식이 된 기사는 출처인 “누구?”를 숨기고 의혹의 증폭을 조장하기에 사회적으로 아무도움이 안되고 사실무근의 폭로와 곤혹외에 아무것도 남는것이 없다. 그럴듯 포장해서 매체화하는 사기성언기사들을 두고 한국의 지성인들 은 무책임한“ㅡ카더라"식, 련재소설식기사는 “썩은 언론이라고, 한국언론계가 병들었다고, 망국적난상제조기 언론매체에 대한 대대적청소가 필요하다”고 질타하고있다.     그렇게 비판받는 리유는 바로 “바른말을 론란거리로 만들고 거짓말을 확산시키는 풍토가 형성되였기때문”이라며 “한국언론은 사회량심커녕 사회를 거짓과 분렬과 혼란의 세상으로 만드는데 선봉장노릇을 하고있는것이다.”라고 타매하고있다. 게다가 추측성에 아전인수하거나 사기성을 침투시켜 호도하기에 중구난방,오리무중이 된다. 기사는 수필이 아니다. 쏜살을 되돌릴수 없듯 호들갑떨며“낭설”에 매달리기전에 사실과 결과가 사개맞도록 투철히 파악하고 운필해야 언론다운 언론이 된다.     무슨 꼬투리를 잡지 못해 마구다지로, 함부로 써갈기면“곤란”하다. 마치 로신선생이“짧은소매적삼을 보면 하얀 어깨를 떠올리고 곧 전 라체를 떠올리고 생식기를 떠올리고 성교를 련상하며 뒤이여 잡교를 떠올리고 사생아를 떠올린다”고 한 말처럼 상상력비리를 저지르기를 꺼리지 않는데 이런 사기성뉴스를 흘렸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한국언론은 마구 흘리기만할뿐 책임은 질줄 모른다. 어떤 기사를 쓰는가 어떻게 엮어대는가가 그리 요긴한게 아니다. 확실성이 우선이다. 도무지 알수도 없는 타국의 사실도 마치 제눈으로 보고 제귀로 들은듯 엮어대면 인간성이 문제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인데도 독자의 말초적감각을 자극하는 선정적기사는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피의사실에 대한 보도 자체보다 보도과정과 방식이 지나치게 감정적인것도 문제인데 작자의 급공근리적인 허영심마저 개입하니 말이다. 그러나 언론자유라는 궤변이 나온다. 언론자유도 인권이지만 절제없는 언론자유란 곧 무질서, 사회결약의 파괴, 독자에 대한 우롱이 아닐가? 처녀면 다 확실한가?     범죄심리학에는“마사진 창문효응(破窗效应)”이라는 명제가 있다. 례하여 어느 층집에 유리창이 깨졌을 때 제때에 수리하지 않으면 뭇돌팔매질에 하나둘 마사지다가 폭격맞은 집같이 된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담장이나 바람벽에 락서질한것을 제때에 지우지 않으면 락서장이 되고 말끔한 곳에 누군가 쓰레기를 던지면 인차 쓰레기장이 되고마는 현상이다. 여론의 역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가?     다산 정약용은 일찍 현대언론인과 맞먹는 언관(言官)의 역할을 두고“날마다 적절하고 바른 의론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이 널리 알려지게 하며 잘못된 짓을 하는 관리들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고했다. 언론의 역할은 자고로 만고불변으로서 영향력이 그처럼 막대한것이다.     정다산은“언관은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언관의 직책을 행사하여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음탕하며 사치하는 일에는 당연히 손을 써서 조치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의리를 인용해서는 안되고 자기편만 편들고 다른편을 공격해서 엉뚱하게 남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글은 정다산이 1810년에 쓴것이지만도 비정한 언론인들에게는 금과옥조가 아닐수 없다.                                           2013년12월 5일
376    무엇을 쓸가? 댓글:  조회:7414  추천:2  2013-12-21
                                                              무엇을 쓸가?                                                                     진 언       문장에 숙달하여 달필이 된 작가들은 어떻게 쓸가? 하는 문제에 먼저 집념할지 모르지만 거개 무엇을 쓸가? 하는 문제에 우선 고민을 짜내게 된다. 어떻게 쓸가? 하는 고민은 서사화의 기법 혹은 기교에 속하는 형식문제이고 무엇을 쓸가는 선재와 주제확정에 관한 내용문제이다. 재간있는 색시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짓지 못하나 쌀이 있으면 곧 밥이 되는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여건이 다 구비되여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땔나무도 있어야 하거니와 우선 가마가 있어야 한다. 가마란 그안에 넣고 끓이는 내용에 따라 다르다. 전통가마의 경우, 같은 하나의 가마라도 밥을 앉히면 밥가마요 죽을 끓이면 죽가마요 국을 끓이면 국마가요 엿을 달이면 엿가마요 메주를 삶으면 메주가마, 돼지죽을 삶으면 돼지죽가마 등 내포가 달라진다. 그러나 가마의 형태와 속성이 달라지는것은 아니다. 이처럼 글을 지음에도 어떤내용을 담고 익혀야 하는 그릇이 필수적조건부로 수요된다.     글을 지음에서“무엇을 쓸가?”는 결국 자기가 쓰는 글의 사회적효용에 직결된 가장 급선무로 나서는 문제이다. 글을 지음에서 여러가지로 많이 고민해본 사람들은 다 체험했겠지만 무엇무엇을 쓰고싶지만 써서는 안되고 쓰지말아야 한다는 잠규칙이 있음에 속을 앓게된다. 이렇게 쓰지 못할것과 쓰지 말아야 할것들이야말로 문인들게 무형울타리가 되겠고 작가의 원초적인 비애가 되는 근원이다. 무엇무엇은 써볼 욕심이 나는데 전혀 익숙하지 못한 제재이고 절실한 체험이 없으므로 첫운필에서부터 빈붓방아를 찧게 된다. 이는 매개 작가의 종합적인 국한성이기도 한것이다.     무엇무엇은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것이여서 쓸 흥심이 발발하지 않고 무엇무엇은 써낼 엄두를 못낸다. 이를테면 신문기사는 어느 문체보다 제약성이 많다. 이는 결코 기사문자체의 제약성문제도 아니고 기자의 안광, 투시력 혹은 문장능력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사실에 립각하여 방향성, 선전목적성 등을 전제로 글을 써야 하는 기자의 고충은 그 누구보다 심각하다. 집필에서 잠규칙, 제약성때문에 마음이 다르고 써낸 글이 다르게 된다. 이는 특히 무형의 큰손아래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숙명적고충이다.     창작소설은 허구가 허용되므로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이 많이 주어지지만도 선재범위나 언어표현상 무한대한 창작자유가 보장되는것은 아니다. 이는 소설작가에게도 무형의 울타리가 있다는 설명이 된다. 이처럼 실용문이든 잡문이든 운필의 폭이 욕망대로 확장될수 없는것이 문인들의 원초적비애로 되였고 문자옥같은 문화비극이 재연되는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누구더러 무엇무엇을 쓰라고 권장하지 못한다. 제가 춤추고싶으니 시누이를 권하는격과도 또 다른 문제이다.     한편의 글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가 못하느냐는 재치있는 표현기교보다 작자의 사유의 심도에 달려있다. 작자의 심층사유는 독자들에게 오래 사색하도록 충격을 주고 사색의 창신성이 없이 겉충도는 문자유희는 독자들에게 초를 씹는맛을 줄것이다. 골기가 있고 량지가 있는 작가라면 비정하고 타락한 시대, 집체무의식속에 침체된 민중을 깨우쳐 인문신념을 다시 건립하도록 인도할것이다. 그러한 창작정신은 바로 일종의 사명감과 의무를 수행하려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로신이 말한것처럼 무궁한 머나먼 곳과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나와 련관되여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만이 보편적으로 공리화되고 세속화된 작금의 어경속에서도 엄숙한 창작관념을 수립할수 있다. 연후에 무엇을 쓸것인가 명확해진다. 희망사항에 속하지만 한 작가의 바람직한 경지는 우선 적자(赤子)가 되여 시대의 임무를 발견하고 공동체ㅡ민초들의 조우와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쏟는 창작사상이라 할것이다. 생명의 정의감은(正义感) 그 어떤 리익보다 높으며 인간의 가치는 그 어떤 권위보다 고귀하다는 신념을 고양하는 작가야말로 참된 작가라 하겠지만 쉬운일이 아니다.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상은 진리를 신장시키려는 사상이다. 이 시점에서 작가군을 크게 두개 부류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부류는 자기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들로서 기실 넓은 의미에서는 개인경력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한부류는 사상령역에 대한 개척자들이다. 제1차세계대전전야 프랑스를 들썩하게 한“드레푸스사건”을 두고 “나는 고발한다”라고 납합한 졸라와같은 작가들이다.    이 부류의 위대한 작가들은 정신문명의 좌표뿐만이 아니라 작가적량심의 귀감으로서 호한한 문자세계에 찬란한 항성들로 빛나게 된것이다. 이와달리 소박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은 암흑속을 비추는 꺼질줄모르는 등불이다. 그들의 머리위에서 빛나는 등불은 인류의 심령세계를 밝히는 자명등이기도하다. 작가적리상주의가 거의나 붕괴된 이 시대, 참된작가의 정신가원을 수호하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리욕의 망령만이 어슬렁거리는 허무주의사막에서 미와 량심, 진리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나 가는 그런 작가들이야말로 무엇을 쓸것인가를 잘 알고있는 명실상부한 작가이다.     례를 들어 수필이 아무리 자기를 벗어보이는“라체”의 글이라도 남부끄러운 은사는 아무도 곧이곧대로 세상에 드러내려하지 않는다. 더러운 빨래는 집안에서 하라는 나뽈레옹의 명언이 있듯이 혼자만 주물럭거릴수 있는 은사나 궁리여서 체념하지 않을수 없다. 풀어서 말하면 할말이 있고 못할말이 있듯이 글로 쓸게 있고 못쓸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누가 나무릴 리유가 없는 작가의 합목적인 사심이다.     무슨무슨, 어떤어떤 내용범위가 주어진 원고청탁을 받고 요구한 제재 혹은 주제가 자기소관과 무관할때는 막무가내로 긁적거린다해도 치약을 짜내는격이 된다. 무엇무엇을 쓸가해서 생각을 굴리다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암탉을 잡아 알을 꺼내는 작동 같은 운필은 스스로도 무모하다는 느낌을 줄것이다. 억지로 문자조합을 하여도 결과적으로 억지춘향을 만들려던 변학도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이것저것 피해가며 정작 발굴, 제련하려면 열어젖힌 아리바바의 동굴에서처럼 보 물들이 쏟아져나오지 않는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한 파란많은 인생일지라도 자기 신변잡사ㅡ자신, 가족, 친구들의 사연 등등을 쓰고쓰다가 바닥이 아니날수 없다. 그리 고나서는 어쩔것인가? 유한한 작가의 생명권내에서 무한정으로 글이 엮어질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나 체험 혹 감수도 국한성이 있기마련이다.     대체로 무엇을 쓸가? 하고 생각하는것은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수 없다. 문제의식에는 참여의식이 그림자처럼 슬며시 붙어서게 된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 사람은 사유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연경물을 싸고돈다. 자아표현에 너 무 집착하면 뛸데없이 자신의 신변잡사만 눈앞에서 새로운 경지인듯 펼쳐질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자아감각이지 사회적효응의 거도는 못된다.     결국 인생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확대, 발전되면 인간의 문제로 객관화되고 문제의식으로 살아움직이게 된다. 문제의식은 인간의 근원적인 과제와 련결되며 나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문제가 되고 인류공통의 문제로까지 확대될수 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을 쓸가? 하는 난제의 해답범위가 될런지 모르겠다. 유감이지만 필자의 궁리계선이 여기에서 그칠뿐이니,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를 감명스럽게 표현하여 살아있음에 대한 표징으로 자족한다면 자기안계에 짙은 색안경을 걸어주는격이 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의 발굴은 경험세계, 체험의 소울타리속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무엇을 써서 자신이 존재하고있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것인가? 특히 수필창작에서 제기되는 이 문제에서 내용의 선택성과 가치함량은 꼭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체현되는것이 아니다.     글을 어떻게 썼는가는 심미향수를 줄수 있지만 글이 특별한데가 없어도 쿡 찌르는 충격이 있는것은 주로 무엇을 썼는가에서 비롯된다. 은은한 감동을 주는 수필이라면 자아실현의 주체척도가 되고 개인의 심미표준이 되면서도 나아가서 인간공유의 정감을 건드린것이여야 신변잡기식의 전통적수필에서의 탈피가 아닐가 생각한다. 수필에서 자아감정에 도취되는것은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격이다.  보건대는 흥겨운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싱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예술에서 반복은 죽음이라는 말은 창작의 독특성을 권장하는 말이지만 소재의 중복성을 경계하는데도 적용될수 있다. 부단한 창작인만큼 노루친막대 삼년을 우려먹기가 되여서는 안된다. 열달잉태도 힘들고 난산일수밖에 없다. 그것이 곤혹이다. 수필에서 자아표현의 도취나 발설이 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으라는 법은 없다. 한편의 수필에 무엇을 담을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시종 난제로 제기될것이다. 자기 자신의 심령세계를 파헤칠 때 생명의 본질이 파악되지만 무엇으로“료리”해야 독자들이 잘“잡수실가”는 벌써 다른 문제이다.     주제는 작가의 인생관이나 사상에서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인생관 그 자체가 꼭 주제가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쓸가?”에 대한 물음에 해답은 대관절 무엇인가? 내용이 교훈적인것, 비평적인것여도 그 전달에서 독자가 느끼게 하고 공감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동화효응은 어떻게 쓰느냐에도 달렸지만 사색적이고 저돌적이기도 한 현대독자들에게는 무엇을 썼느냐가 더욱 요긴한 관심사이다. 소재는 자기감동여하를 기준으로 선택하지만 주제전달은 독자의 접수로서만 완성된다는것을 망각한다면 패필로 될수밖에 없다.     무엇을 쓸가?는 정서의 지성화문제이다. 정서의 지성화란 정서를 객관화, 보편화함으로써 자기감정의 순화와 독자공명에 이르는것이다. 지성화가 부재하면 자아도취에 빠지면서 감상일변도의 정서를 과장하여 글을 허공에 뜨게 한다. 그렇게 되면 어 떻게 쓰느냐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생은 짧으나 체험은 많다. 그러나 쓸거리가 많다는 의미와는 등호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구나 골머리가 아프다.     저저의 인생에는 사연도 많고 정한도 많지만 다같은 콩알이라도 알알이 골라서 심듯이 선재ㅡ무엇을? 심을가에 고심참담하게 된다. 글짓기를 뼈를 깎는일이라것은 무엇을 쓸가보다 어떻게 쓸가를 두고한 말이지만 어떻게 쓸가하는 고민은 “미사려구” 에 매인 문제라 할수 있고 무엇을 쓸가는 사상, 주의문제로서 민감성에 직결되는 문제이자 벙어리 랭가슴앓듯 하게 되는 창작의 전제이다.           사유의 각도에서 지혜는 속박받지 않는 사상이다. 사상(思想)에서“사”는 사유능력을 가리키며 일정한 실천성이 전제로 된다. “상”은 루적한 지식과 경험, 관념 등 회억과 선택을 가리킨다. 지혜로운자는 사상에서“상”의 상태에 있는것이 아니라 “사”의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틀어쥐고 쓰느냐가 선행되는것이다.     공자가 가라사대 “인자불우, 지자불혹, 용자불구(仁者不忧,智者不惑,勇者不惧)” 라 하였다. 인자도 많고 지자도 많으나 유독 용자가 희귀한 현실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실패할지언정 당신이 싫어하는 일에서 성공하지 말라는 말이 있거니와 명지한 사람은 원래 물덤벙 불덤벙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무엇이나 다 쓰는“용자” 가 되여 불구(不惧)할것인가? 물음을 제기하는 필자도 답이 꽉 막힌다.                                                 2013년 6월 8일
375    돈이야!돈!! 돈봐라!!! 댓글:  조회:7429  추천:1  2013-12-16
                                               돈이야!돈!! 돈봐라!!!                                                                                         최 균 선      세상에 허구많은 타령중에서도 “돈타령”이 천하사람들의 귀맛을 제일 당기리라. 돈타령도 가지가지인데 그중에 한가지만 흥얼거려보자.                            돈아 돈아 돈아 너는 어디에 있니 동쪽에 있니 서쪽에 있니                            담봇짐을 질끈 매고서 돈벌러 가지만 벌고싶다해서 벌어지지 않더라                            고생길이더라. 돈 돈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너는 어디에 있니 남쪽에 있니 북쪽에 있니                           호미자루 짊어지고서 돈캐러 가지만 갖고싶다해서 가져지지 않더라                           고생 길이더라. 돈 돈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발가락이 보인다 꼭꼭 숨어라.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자고로 사람들이 돈을 목숨처럼 여기며 “공방(孔方)”라 공경하였다. 인생의 영원한 주제가 사랑이라지만 돈이라는 주제속에 소주제일뿐다. 돈문화는 기나긴 인류의 력사무대에서 수많은 희비극을 연출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돈에 웃고 돈에 울고 지금도 돈, 돈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심지어 한목숨 죽여가고있는가?     그리하여 속담들이 많이도 만들어졌다. “돈떨어지자 입맛난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다, 돈만 있으면 처녀불알도 산다, 돈에 침뱉는놈 없다, 돈이 많으면 두억신을 부린다.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라, 돈이 장사라, 돈이 제갈량, 돈한푼 쥐면 손에 땀난다, 돈이 있으면 귀신을 석마를 돌리게 한다. 빈천하면 도적질할 마음이 생긴다. 소경도 돈을 보면 눈을 뜬다. 돈소리하면 배속에 아이도 손을 내민다”는 등등 아무튼 돈을 마다할 사람이 아직까지 세상에 나지 않았다는것을 잘 알수 있을것같다.     돈에 대한 명언도 많다. 베이컨의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프랭클린의 “돈은 그것을 종으로 부려먹을 때는 최선의것이지만, 돈에 의해서 조종당할 때는 그 돈은 최악의 주인이 되여 그것을 소유한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돈의 가치를 알아보고 싶거든, 나가서 남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요청해보라. 적에게 돈을 꿔주면 그를 이기게 되고, 친구에게 꿔주면 그를 잃게 된다”, 존 레이언의 “돈은 현악기와 같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줄 모르는 사람은 불협화음을 듣게 된다” 지브란의 “돈은 사랑과 같다. 이것을 잘 베풀려하지 않는 이들을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인다. 반면에, 타인에게 이것을 베푸는 이들에게는 생명을 준다.” 등등.     당조의 명재상 장설(张说)의《전본초(钱本草)》라는 글은 200자도 채안되지만 돈의 성질,용도, 리페, 모으고 헤치는 도리를 생동하고 구체적으로 해석한 천하기문이다. 돈이 실체로 될 때 하늘도 있고 땅도 있게 되여 쌓아놓으면 마치 산같고 흐르면 강물같다. 돈은 귀가 없지만 사람들을 부린다. 인간이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지였다면 현시대 인간을 완성시키는것은 돈이다.     인격이야말로 최고의 학위라지만 작금에는 돈이야말로 최고의 “인격”이 아닌가? 세상에 돈이 존재하는 한 량지도 자제력도 신빙성을 잃는다. 돈이라는 단어는 이제 수요에의 만족이 아니라 탐욕의 미궁이다. 인생현장에 오색잡다한 유혹들이 기다린듯 우리들의 코를 꿰여가지고 자멸의 함정에로 이끌어간다.    권력이란 한 사람의 인격품성의 시금석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돈은 량심의 무게를 떠보는 천평이요 돈은 진정한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돈, 돈은 결과적으로 소유욕의 최상의 표징이다. 죽어지면 한오리 연기로, 한줌의 하얀재로만 남을 인생인데 왜 그리들 과욕인가? 론어《(论语)》의 에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중용(中庸)의 핵심어이기도 하다. 글을 좀 읽고 제노라하는 사람들 모를리없는 철리이지만 실천과는 별개인가?     묻거니와 사람을 죽였다살구는 돈바람속에 군자가 누구이냐? 그가 누구이든 뭐하는 사람이든 돈에 눈멀면 소인중에 소인이다. 돈앞에서는 위인, 군자가 따로 없는 현시대이다. 볼바엔 번듯하고 군자연해도“돈벌레”가 되여 좋아하다가 수갑을 차고 랑패상을 짓는 몰골을 수도없이 본다. 그래서 농촌에는 남자는 세끝ㅡ혀끝, 손끝, ×끝을 주의하라는 인생철학이 류행되였다.    욕망과의 거리를 뉘라서 임의대로 조절할수 있을가? 물위에 떠서 가만히 있으면 물결따라 흐른다. 욕망에 리지를 잃고 돈에 코를 꿰우고 색을 따라 도는것은 매 사람에게 난당의 유혹력이다. 호수의 푸른물결이 그렇듯 매혹적이여도 그냥 걸어들어 갈수는 없다. 시내물은 웅덩이에 머물지 않고 늪가의 안정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바다의 꿈을 안고 주야로 흐를수 있다. 인간의 심사는 욕망의 대해로 흐르는가?    조화는 조화로되 절대 만능은 아니다. 례컨대 돈으로 학위증은 사도 박학은 살수 없고 돈으로 권세를 살수 있지만 덕재는 살수 없고 돈으로 허명을 살수 있으나 실속은 살수 없고 돈으로 소인의 마음을 살수는 있어도 군자지심은 살수 없다. 옳거 니!그러나“고기와 웅장을 다 얻을수 있는가?”누가 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다 볼수 있을고? 돈때문에 죽고살든 그의 자유에 맡기고 흥보의 돈타령이나 외워보자.     …박홍보가 매품을 팔기로 하고 선대받은 돈닷냥을 받아들고 좋아라고 질청밖으로 썩 나서니 에라 돈타령이 절로난다.                                 얼씨구나 좋구나 돈 봐라 돈 돈봐라 돈 돈 돈 돈 돈 돈봐라                                 돈이 돈을 눈에 대고보면 삼강오륜이 다 보이고 조금 있다                                 나는 지화를 손에 다 쥐고보면 삼강오륜이 끊어져도 보이난건 돈밖에 또 있느냐                                 돈 돈 돈 돈보라 돈, 떡국집으로 들어를 가서 떡국 한푼어치를 사서 먹고                                 막걸리집으로 들어를 가서 막걸리 두푼어치를 사서 먹고 어깨를 드리우고                                 죽통을 빼뜨리고 대장부 한걸음에 엽전 서른닷냥이 들어를 온다                        얼씨구나 돈봐라 제집으로 들어가며 "여보게 마누라 집안어른이 어딜갔다가 집안이라고서 들어오면 우루루루루루 쫓아나와서 영접하는게 도리에 옳제 계집이 사람아 당돌히 앉아서 좌이부동이 웬말인가 에라, 이 사람 몹쓸사람"                     [중중모리]                                     흥보마누라 나온다 흥보마누라 나온다                                 "어디 돈 어디 돈, 돈 봅시다 돈봐 "                                 "놓아두어라 이 사람아 이 돈 근본을 자네 아나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갔다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절씨구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봐라"        흥보는 볼기돈이니 눈물겨운데 돈욕심에 탐욕을 덧쌓으며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다가 꼬리길면 밟히는줄 모르고, 아무리 달콤한 미몽도 깨는 때가 있는줄 모르고, 좋을 때 그만두는게 좋은것인줄도 모르고 가질수록 냠냠거리니 참으로 우서웁다. 이에 한마디 더 보태면“에라만수!에라, 래일은 삼수갑산 가더라도 돈놓고 히히하하 웃다가 흑흑 흐느끼며 목이나 매고 나락길에 버둥거려보세…                                               2012년 5월 15일  
374    “입방정을 떨다”를 방정떨다 댓글:  조회:10022  추천:3  2013-12-11
                                           “입방정을 떨다”를 방정떨다                                                                                                       최 균 선       입방정이란 사전해석에 의하면 버릇없이 수다스럽게 지껄이면서 경망스럽게 하는 말을 뜻한다. 어른들이 입방정 떨다가 일을 그르친다고 하시거나 말이 씨가 된다고 훈계하군 하였다. 사실 말로 운이 왔다갔다 하는수도 있다.     자고로“남자는 입이 무거워야,”라는 고훈이 있다. 속담에 호사다마라고 녀자들이 입방정을 떨어서 될일도 그르치는 경우가 많지만 입방정은 녀자들의 특허만은 아니다. 녀자들이 말단것은 생리적특성이라할세 남자로서 입이 가벼우면“콩새”라고 힐난하며 사람들이 은근히 경계하였다.     세상엔 장부일언 중천금이란 말과는 어긋나게 입이 가벼워 입방정을 잘떠는 남자들도 많다. 입이 가볍다는것은 경박한 성격의 표현이라는것은 물론 생각이 깊지 못하고 궁리가 단순하다는 표징이다. 입방정이 자초한 입덕을 거론하는 본인도 구설수에 잘올라 평생 입덕을 톡톡히 입어왔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교훈이 한가지있다.     20세기 60년대초 거국적인 “농촌사회주의교육”부터 시작해서 비상시국 10 년 동안 무심히 한말도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는판이라 입단속 한번 잘해야하지“멸문지화”를 당하기가 여반장이였다. 그런데“천안문사건”때에 있은 일이다. 1976년 4월5일 인심이 구시렁거리던 때, 저녁을 먹고 집뒤 옛우물가에 나앉아 마라초를 태우는데 전선대에 달아놓은 확성기에서“반동시”를 읊으며 여론전을 펼지고있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덩덩 달타령이나 부르던 농군으로서는 그저 감각에 좇았을뿐이였는데 그 감각도 이만저만한 재난을 몰고올줄이야, 방송에서 읊어가라사대가 너무 진한 감동을 삼키게 하고 그대로 곧 토해내게 하였다.                                                    나는 슬퍼하는데 요귀는 좋아하고                                  나는 통곡하는데 승냥이들은 웃는구나                                      눈물을 뿌리며 영웅을 추모하고                                          분노하여 검을 빼드노라       워낙 시와 시랑송이라면 혹하던때라 사위가 캄캄하고 곁에 사람도 없고해서 제딴에 격동적으로 흉내를 내여보았다. 옛말에 낮말은 새가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담장에도 귀가 있다더니 누군가 내 작태를 당시 반란단두목으로 마을에서“일인자”였던 장 ××에게 고자질해서 그가 “계급투쟁의 새 동향”에 크게 문장을 짓는바람에 단단히 혼나게되였다…다행히 1978년12月, 중앙에서“천안문사건”은 완전히 “혁명적행동” 이였다고 선포했으니 망정이지 그 후유증이 평생 나를 괴롭혔을것이다.     입방정을 떨다가 말실수ㅡ실언쯤으로 리해될수도 있지만 실언을 잘하는것은 결국 기질, 성격문제이자 그 사람됨됨이가 부족함을 꼬집는 말이 되기도 한다. 농촌에서도 입방정을 잘떠는“팔삭둥이”를 두고 “에그, 저 주둥이를 그저 목침으로 막막아 쳐놓으라니?”하고 된욕을 퍼붓군하였더랬다. 항간에는 혼사말에는 흥소리도 방간이라는 말도있다. 입방정은 깨방정, 토끼방정과 같은 의미로서 언행으로는 저질적이다.     대저 잘되여가는 남의 일을 시기하여 훼방놓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되는 호박에 손가락질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왜“북한어”라고 딱지를 붙여놓는지 모르겠으되 얼마나 생동하고 형상적인 표현인가? 우리 연변농촌은 물론 도시사람들속에도“되는 호박에 손가락질”을 잘하는 괴짜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시기질투는 다있겠으나 타고난 달인들이 따로 있는법이다.     “사촌이 기와집 짓는다해도 배아파한다”는 속담처럼 남이 잘되면 축하는 못할망정 어이 배배꼬인 시기심부터 앞세울가? 그런 심리가 배달민족의 민족적렬근성으로 굳어져있다는것은 참으로 면괴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시샘은 녀자들의 본성적특징이라 하지만 남자들속에도 시기질투로 배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 민족의 공통한 약점으로 되여진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빚어진 사람들이 보통 입방정을 잘떨고 또 일종 병태적인 품성으로 되여 뼈속까지 슴배여있다. 그런 심사는 그저 심사가 아니라 심통 혹은 심보라하는것이 보다 접근적일것이다. 자고로 심통ㅡ하면 천하에 고약한 귀태인 놀부를 떠올리게 되고 비뚤어져서 구제불능으로 된 그의 심통머리가 묻어나온다.     입방정을 잘떠는 사람은 왕왕 입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지난7월 7일 아아니항 공기추락사고 때 한국에서의 종편방송의 하나인 채널A 뉴스진행 앵커분이 소식을 전하던중 "사망자 2명이 모두 중국인으로 확인됐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다"라는 발 언을 하여 중국누리꾼은 물론 자국인들내에도 벌둥지터진듯 시끌벅적하는 와중에 비판의 물매가 쏟아졌고 그 후과가 상상외로 엄중해졌다.     단순히 실언인가? 당위성문제인가? 민족본위사상의 로출인가? 그 모두일수 있으나 결국 입방정을 떤것이다. 말은 속심의 로출이다. 평시 그의 관념속에 타민족인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경향은 없었는가? 질의를 던져볼 건덕지가 많다. 공공언론인으로서는 자격미달을 시사하는 입방정이 아닐수 없고 그로써 온 나라가 입덕을 톡톡이 보게된것이다.  대표자의 사과가 무슨소용인가? 엎지른 물인데…     언론인들만이 아니다. 특정국에 대한 소위 전문가들의 사사건건 전망분석이나 참새 방아간 지나는격의“전략”이나 생각나는대로 욕질해대는 다음의 댓글이나 백해무익한 입방정인데는 정말 곤혹이 곤두선다. 그저 미우니 분개해서인가? 계제가 어찌되였든간에“분개한 사람만큼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니체”      입방정을 잘떠는 사람들은 흔히 요언을 잘 퍼나른다. 뱀은 발이 없어도 잘 기여다니고 매미는 입이 없어도 잘 울어대고 요언은 날개는 없어도 누리떼와같다. 그러나 빨리퍼지는 소문이라해서 모두 진실인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두운 낮이라도 밤보다는 환하다. 진실을 말하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진실을 사랑하면 천국에서는 물론이고 이 땅에서도 보답을 받는다하지 않던가?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처럼 아량과 포용은 내부를 단결시키고 공영을 도모하지만 티를 잡고 멸시하려고만 들면서 알륵을 조장한다면 대방에 대한 파괴와 증오를 드러내는것으로서 리념의 산물인 반목, 대결로는 아무것도 성사하지 못한다. 대방의 재난에 대한 악의적인 심리에서 출발한 온갖 입방정은 대방의 폭발적인 역반심리를 야기시키고 극에 대립하여 극으로 나가게 하면 자타에 안겨질것은 재난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문화국가라는것은 근대적관념에 불과하다. 이편은 저편을 먹고 살며 저편은 이편을 희생시켜 번영한다. 문화상의 모든 위대한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몰락의 시기이다.”, 공존하고 단합하여 공동히 번영하는 길에 자기중심주의, 극단의 리기는 걸림돌이다. 사람은 자기의 관점, 주장을 표현하거나 이런저런 한담을 주고 받을수 있지만 입방정만큼은 떨지말아야 한다.     …할진대, 민족화해의 한길로 나가야 할 때 생각의 곬이 깊지 못하여 입방정이나 떨어대며 대방의 속창을 뒤집어놓으면 과연 얻어질게 무엇일가? 똘똘뭉쳐도 세계민족 지림에서 존망이 어떨가 하는판이 아니던가? 소는 생각머리없이 본능으로 반추하지만 우리는 소처럼 늘 자기 자신부터 먼저 반추할줄도 알아야 할것이다.                                                                         2013년 7월 10일
373    진언련시조 (7) 댓글:  조회:8463  추천:3  2013-12-08
                                                 진언련시조 ( 7 )                                                                      풍운                                          1.  더우면 짜증이요 추우면 타발이네                                                     춘추가 륜환인데 봄볕만 머무를가                                                             인간은 불평불만이 고질병이 되였나                                          2.  청풍은 불고가도 자취 곧 없거니와                                                     오고감이 스스로워 거칠것 없으매로                                                            공수래 공수거인줄 바람에서 알괘라                                          3.  바람이 돛을따라 건듯불줄 있으리오                                                     풍향따라 돛을달면 순풍이 되리로다                                                             순응자 흥할것이요 역행자는 패하리                                          4.  번개가 구름찢는 굉음이 천둥인가                                                      헌사토 헌사할샤 빈우뢰 비는없네                                                              연설서 공리공담도 저같다고 하리라                                          5.  떠도는 쪼각구름 태양을 가리운들                                                     구중천 광명이야 네감히 덮을소냐                                                             진실도 이와같거늘 백일하에 알괘라                                           6.  운해에 묻히면 절승도 무색해라                                                      구름이 시샘하야 그양자 뒤덮거늘                                                              두어라, 려산진면모 가리운들 변할고                                           7.  내리는 눈송이는 펄펄 나는 나비런가                                                      소복소복 쌓이노니 은세계 이렇든가                                                             두어라 북국의 풍광 설경밖에 있으랴                                                                          세월                                           8.  세월은 若流波요 불귀라 못오는데                                                        도르래 돌던듯이 사계절은 잘만도네                                                                인생도 사계절인양 가고오면 좋으련                                              9.  태여난 생명에는 세월이 축복이요                                                         늙은이 마음에는 황혼빛 짙어가니                                                                 일력장 넘기는소리 시든몸을 저미네                                            10. 세월이 무정한데 우리만 울고웃네                                                         인생이 초로인걸 늙어서 깨달으니                                                                 백년도 못사는 인생 허무하기 짝없네                                             11. 세월은 류수같고 인생은 쪽배같네                                                          욕망을 만재해도 갈길은 망연해라                                                                  한사코 노를 저어라 아차실수 번질라                                              12. 현대판 호로승의 호로안 비일비재                                                           억울한 인명안이 하나둘 아니여니                                                                   세월이 기다린다면 원혼들이 없을가                                               13. 창천은 허망하고 세월은 야속한데                                                            인생이 순간이라 애가탄들 어이하리                                                                    여생의 이랑이랑에 후덕이나 심으세                                               14. 인명이 재천이라 생로병사 섭리로다                                                            한백년 사자는데 세월이 성화로세                                                                    身老에 心不老라니 열심히들 살자네                                                                                과거                                                15. 과거는 가라하고 미래는 기다리라                                                             현재는 쏜살같아 허황하기 짝없거늘                                                                     래일을 환상하느니 오늘이나 잘사세                                                16. 과거는 굳어지고 오늘은 흘러가고                                                            미래는 불확실해 기다림도 묘망해라                                                                    오늘을 영위해갈뿐 무엇을 더 하리요                                                17. 과거는 슬퍼도 추억으로 소중하고                                                             현재는 진행형이 버리질랑 못하는데                                                                     미래는 서성거리니 새희망이 마중가                                                               18. 과거에 련련함은 당년의 호기때문                                                                                    찬란함에 취하느니 오늘을 성찰하소                                                                   자아를 확인하는 일 오늘에만 있노라                                                 19. 과거를 기워간들 참회로 구멍나고                                                             희망을 재단하면 미래가 대길할고                                                                     현재를 비단옷으로 지어감이 좋으련                                                  20. 세월의 비바람에 과거는 락엽인듯                                                               망각의 이끼속에 고즈넉 굳어질뿐                                                                       썩을줄 모르는것을 잊으란들 잊으랴                                                  21. 래일도 오늘처럼 확실할지 뉘알리요                                                               인생은 한치앞도 내다보기 어렵거늘                                                                       꿈속에 천리길가서 깨여보니 침대라                                                      22. 과거란 원인속에 맺혀지는 결과여늘                                                                인생공부 요긴한것 현재수업 아니던가                                                                            세월은 무정하여도 현재만은 남기더라                                                    23. 죽어간 이들에겐 갈망의 래일인데                                                                무심히 소일하는 한량들 많고많네                                                                                                      목숨이 줄어드는줄 언제알려 하느니                                                    24. 동경에 아롱지던 머나먼 그 미래를                                                                 현재로 살고보니 허무가 가슴치네                                                                         생각도 오락가락해 갈곳몰라 하노라                                                    25. 지구촌 수백민족 반목이 무상해도                                                                우는소리 웃는소리 신통히 닮았거늘                                                                        남북은 어느 세월에 함께울고 웃을가                                                                                     미래                                                    26. 미래는 유혹해도 기약은 없으매로                                                                                 공상을 그리느니 오늘을 잘가꾸소                                                                        과거의 고개를 넘어 새아침이 밝으리                                                     27. 일체가 끝났다고 락심천만 하지마라                                                                  래일도 아침해가 동녘에서 솟으리니                                                                          실수는 병가상사라 절망하면 끝인즉                                                     28. 한알의 생닭알에 고운생명 꿈꾸나니                                                                  핫불싸 깨여지면 병아리의 죽음이라                                                                          미래는 불확실해도 동경만은 미쁘니라                                                      29. 오늘에 눈감기면 래일도 눈감기리                                                                   현실에 어두우면 미래도 어두우리                                                                           마음눈 어둡다면야 보았던들 어이리                                                      30. 미래란 다른 문을 열고갈 과거인가                                                                   현재가 마중하니 미래가 등쳐내네                                                                           예약은 하였다만은 믿지못할 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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