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최 균 선
이 시대는 양식화된 창신을 고창하는 시대이다. 그 창신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있는것이 현대시다.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까다롭게 리해할것도 없이 진부하지않고 비반복적인 생신한 표현수법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것이다. 말하자 면 직유를 은유로, 묘사를 상징으로, 재현을 이미지로…그러나 후세대들에게 낯설게 하기를 선양하는것은 현실생활, 인간의 심령을 리드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가?
다시점(多視点)에서,현상학적립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감수한것을 기초로 대상에 주체의 사상과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미지로 구성하는 사물시(事物诗)가 지리멸렬하여 이제 시인들의 단순한 감정표출로는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인정하여 낯설게 하는 방법의 시쓰기가 나오게 된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또는 시적애매성이라는것으로서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 한다. 그동안 획일화, 관습화, 전통, 일상적언어로서는 신선함, 아름다움, 창의성 등을 발견할수 없다면서 극단에로 치달은것이다.“계속 아름다운것은 우리들을 질리게 한다.”는 말인가? 조금 낯선 시를 보자.
가는 비여 가는 비여/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미루나무 무심한 등치에도/가는 비여/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여윈 등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 비/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김사인이라는 시인의 “비” 전문이다. 낯선듯 싶으면서도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코 생판 낯선것도 아니고 조금 애매모호한것 즉 몽롱미를 현시하고 있을뿐이다. 겨울비속을 걸어가는 수척한 사내의 쓸쓸함, 안쓰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는 시로서 “가다”의 “가는”에는 가는(行), 가는(細),가는(離別), 가는(야위여가다,) 즉 중의(重意)적으로 중첩되고 시상전개가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표현이 시도되고있다.
그리고“비”라는 주도어를 반복함으로서“비" 그것도 ”겨울비“에 대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미끄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 시의 사상전개법은 “비 ”,“가는”의 호응관계로서 가버리는 혹은 리별한 사내의 등뒤에서 내리는 비(리별, 사랑)를 느낄수 있게 했다. 의도적 낯설게 하기의 전형이라지만 전통시의 가독성도 구비하고있는것이다.
모순된 어법으로 낯설게 하기가 난해시로 되게 하는것은 표현의 기법일세 사유, 정감의 모순성은 리해불능이 된다. 현실속에는 애매모호한 현상들이 많지만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시각은 애매모호할수 없으며 더구나 사유활동이 어릴벙벙할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무작정 애매모호성이 현대의식의 한 형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어떤 시인은 통속적인 시를 일반적으로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시라고 단정하던데 기실 상아탑속에 자아도취로서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현실에서는 이상한 눈길로 보며 응 대하지 않는다. 문학의“통속성”을 고상한 예술성이 결여된 즉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제기법은 너무 무단적이다. 작품의 다양성과 진실한 정신을 저애하는 존재로, “고상”한 독자에게는 비도덕적이고 질낮은 작품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이비도 아닌 얼토당토이다.
또한 통속적인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지적,정서적수준이 낮은 대중이 선호하는 감정 혹은 정서를 졸렬하게 반영한 렬악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야 한다는 설법은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대중은 무지몽매하다는 말이 아닌가? 선택된 사회정영들만을 위해 시쓰기를 한다면 선경에서 신선들과만 산다는 말과 같다. 어떤 시를 써내든 시인은 우주인이 아니며 적어도 진공상태에서 사는 특종생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가로사대, 통속성을 즐기는 대중은 예술적심미가치에 주목하지만 예술가들과 같은 심미안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며, 지적훈련을 받지못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대중은 세련된 교양이 결핍한 존재라고 할수 있으며, 그래서 예술이 알기쉬운 소재나 자극적인 소재로 형상화되였을 때에만 흥미를 느끼는“무리”라고 말을 하는 시인은 구름우에서“구름사탕”을 먹는 신선인가? 엉터리도 아닌 허황 그 자체이다.
문학장르중 대중들과 거리가 가장 먼 장르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시라고 할 때, 문학의 꽃이자 문학의 원형인 시가 왜 “대중”들의 시야밖으로 밀려난것일가? 여러가지 리유가 있겠지만 어렵기때문이라고만 간주한다면 대중 전체가 석두라는 말이 된다. 전문인 시인들조차 읽기가 어렵고 터득이 막연하다고 할 정도라면 그것이 숭고함이고 자랑인가? 어지간한 지적,정서적훈련으로는 현대시를 리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현대시독해학원”이라도 꾸려야 하지 않겠는가?
낯설게 하기=모르게 하기가 아니다. 낯설게 하기는 로씨야형식주의자들에게도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으로서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는것이지 금성철벽밖에 방치하는게 아니다. 독자가 아예 모르게 하기 위해 쓰는 시는 그 목적성부터 희망사항인“공명성”이 없어 글러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낯설게 하기는 시문학의 예술적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여있는 용어로 보는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여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속에 갇혀있다. 특히 일상적언어의 세계는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고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에 깜깜한“무지자”들과 도전하는식으로 나와서는 안된다. 물이 없이는 준치라도 곧 죽는다, 복합적독자군은 망망대해가 아닌가?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경험의 법칙이나 상식을 뒤엎는 일탈된 표현에도 진실성은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독자가 감동하고 시적진실을 깨닫게 하는것이 시의 목적이여야 한다. 낯설 게 하기는 일상적인 언어의 틀을 깨고 새롭게 표현하는 기법일뿐으로서 그 무슨 천국의 언어인양 신비화할것까지는 없다. 장막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무슨 무당굿인지 전혀알수 없다면 그게 제멋에 겨운 헛푸닥거리가 아니겠는가?
1) 깃발이 펄럭인다. (사실적진술>)
깃발이 전진을 부르며 절규한다.
2) 사람이 술을 먹는다.
사람이 술잔속에 익사한다.
상술한 두가지 표현에서 후자의 기법에도 선택된 상상력이 필요없다. 이런 낯설게 하기라면 소통불능이 아니고 사회효응도 바람직할것이다. 하다면 정말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이는 현대시를 짓기는커녕 리해하고 감상할수도 없어야 할가. 백명의 독자 에게 읽히는 작품보다 선발된 한명의 독자에게 백번을 읽히는 작품만이 예술이며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문학일가. 우문과 함께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며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시인이 오히려 사랑받는 시인이 될것은 의심할바 없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 이라고 부르는 류근시인의 시이다. 이 시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인“외도”를 통해 웃지 못할 가족애를 그리고있다. 보편적으로 통속적인 시는 거짓위안과 환상을 제공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다고 비판을 받는다.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유로워지길 원하며 상상적 해결을 꿈꾸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시적화자는 대책없는 랑만 즉 련애를 꿈꾸고있지만 직면하거나 직시하고 있는것은 가족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정서이다. 무엇을 나무릴게 있는가? 그래서 외도가 외설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시의 격을 떨어뜨렸더라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시적정취를 선물하고있지 않는가?
어떤 고명한 이들의 견해대로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이분법을 항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저급예술이라는 전통시를 쓰는 사람은 절필해야 하는가? 전통시를 쓰면 시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던데 어처구니가 없는게 아니라 한심할뿐이다. 어떤 시인의 선언이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겠다는 용기와 오히려 통속적인것으로 인위적인 난해성을 지향하는 문학을 전복하고싶은 역설의 정신이 분발할듯싶다.
밀란 쿤데라가 “극소수의 귀족이 향유하던 예술은 숭고하다. 그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될 때 더욱 숭고해진다”고 말했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은 소통에 있으며 그 소통의 폭은 넓어져야 한다는 의미일것이다. 소통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그 존재자체만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닐수 없다. 작품과 독자가 만났을 때 비로소 예술은 온전한 의미를 지닐수 있게 된다. 이것은 식은죽이 마시기 좋으면서 원맛은 잃지 않고있다는 말처럼 절대 진실이다. 아닌가?
파도
최 병 수
바다는 목에 걸린 세월을/울컥울컥/모래사장에 토해낸다/벌거벗고 누워있는 수줍은 모래톱/전력질주 짝짓기 시도하지만/대양(大洋)의 기세로도 오르지 못하고 /가시 걸린 세월만 내 뱉는다 (중략)
강자의 론리를 파도에 빗대어 쓴 시다. “‘파도’라는 사물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시적자아의 형이상학적의식을 잘 그려주고있다” 그러나“현대시의 핵심인‘낯설게 하기’가 완벽하면서도,시적진실의 리얼리이티가 있는 시이다. 이런 시는 시전문이 아닌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을것이다. ‘파도’는 바다를 배경으로 강자의 론리를 파도, 모래사장 등에 투영해 약자에 대해 노래했으며 약자와 강자의 론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 가슴아픈것을 파도에 빗대고 시적대상을 향해 강렬한 심상을 표출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경우, 직설적인 시가 개탄하며 절로 물러갈것이다.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조합이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시로 되는 리유는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인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언어조합이기때문이라는것은 기성리론이다. 그런데 로씨야에서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률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가 시다운 근본적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리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기때문에 형식주의라고 했지만 대표적리론가인 야꼽슨, 쉬끌로브쓰끼 등의 기본립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으며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림시변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명이여야 한다는 립장이였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고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였다. 시의 경우에 있어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 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노력을 더욱 강요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어법은 일매지게 낯설게 만들기만인가? 전경화로 설명할수는 없는것인가? 낯익음과 낯설음은 아무래도 변증관계를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고 하더라도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선언어가 아니라 눈에 익은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 고전주의나 랑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표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고 있는것이다. 실용주의시대에 현대시도 실용적이야 할텐데…
포프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수 없는것, 즉 어려운것을 적절히 표현하는것이라 하였고 워즈워즈는 낯선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친숙한 통념에 반작용하는 낯설은 현실을 제시하는것으로서 여러번 곱씹어 더 생각하도록 지각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심하게 “낯설어버리면” 상상력의 “부재자”나 언어표현에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이 남의 사돈이야 가건말건 지나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것을 제시한것이다.
시적대상을 습관적인 표상에서 굴절시키고 언어표현에서도 일상의 문맥을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로 대체함으로써 시인은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结)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만 하는것이다. 따라서 시어는 낯선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 선함을“회복”시키는것이지 불소통속에 매장시키는것이 아니다. 깊이 숨김으로써 그것이 현대시의 시적발견이 되고 해방된 새로운 시세계의 구축이 될수는 없다.
쏘쉬르의 근원주의 언어관은 말하는 화자의 관념이나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하는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말하는 언어는 요소들간의 체계적인 관계들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것이 핵심이다. 쏘쉬르는 인지체계내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와 밖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의미불통의 시가 시로서 존재할 리유가 나변에 있는가? 물론 확답을 기대할수 없는 우문이므로 혼자의 우답으로 남겨두자. 그래서 장문(长文)이지만 아쉬운 대로 결말이 없는 횡설수설이 되여도…
2013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