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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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개인화창작을 두고 뇌까리다 댓글:  조회:8128  추천:3  2013-12-06
                                             개인화창작을 두고 뇌까리다                                                                   진 언       세인이 공인하다싶이 90년대 중국문학( 조선족문학도)은 다원적이지만 이미 색이 바래고 뒤엉킨 삼검불이 되였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것이다. 가위로 썩둑 끊을수도 없고 한오리한오리 가려내여 잘 감아놓을수도 없게 되였다. 그렇게 된 주요원인은 창작자세와 방식이 각양각색이고 그에 대한 주장들이 중구난방이기때문이다. 그러면 서도 제재내용, 문체풍격, 서사방식, 서정토로방식 등 면에서 다양하게 론증하려 하지만 창작자세와 방식상에서는 기실 내재적으로 일치성을 가지고있다.     변화무상한 인간세상, 돌고도는 인생마당에는 새록새록 다양한 이야기가 자체로 엮어져서 무궁무진하지만 개체의 경력은 제한된 공간과 생명의 제약성으로 쓰고쓰다 보면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고만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말할수 있을것인가? 작가의 자아는 환원되여야 하지만 시대속의 자아이지 진공상태에 자아가 아닌것이다.     “개인화”창작을 편면적으로 리해해서도 안된다. 사실상 작가가 자아를 상실하지 않는한 어디까지나 시대의 일원으로 남을수밖에 없다. 작가는 분명 자기립장과 시각마저 내버리지 못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창작태도와 방식은 거꾸로 문학의 특징속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고만다. 지난세기 80년대에 비하여 개인화창작에 그렇게 요란떨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내버린것은 아니다. 개인화창작은 마땅히 개인의 화어(话语)공간과 대중화어 공간사이에서 뉴대를 구축하지 못하면 대중의 열독활동에서 배제될수 밖에 없다.    “개인화”창작과 더불어 “사인화”창작이란 말이 류행되였는데 때론 녀성창작과 뒤섞어 말하기도 하였다. 두 명제는 어의상에서 뚜렷한 구별이 없는것으로 보이지만 사인화창작은 일종 자전체 혹은 반자전체성질의 작품창작 혹은 고의적으로 이런 련상을 가지게 하는 봉페성창작자세라고 한다. 사인적공간은 그의 유일한 창작공간과 화어공간(话语空间)으로서 성의식, 성생리 등에 대한 묘사가 텍스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필경 극단적창작자세와 방식이라는데서는 량자간 공통점이 생긴다.     문학의“사인화”란 언제부터 제기된 개념인지 명확히 밝힐수는 없으나“대중화”와 상반되는 일종 창작관념으로서 이런 관념과 경향은 문학을 일종 순수개체문화 행위라는 울타리안에 가두고말았다. 문학의“사인화”의 특징은 사회와의“공공대화” 를 거절하고 비의식형태화를 주장하며 문학은 그저 문학으로서 문학의 변연화는 불가피적인 정상상태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문학창작경향으로 하여 사회를 회피하고 개인의 주체가치를 내세우면서 문학을 독립적인 자족의 “우주”로 축소시키였다.     문학창작자체는 개인적작업이지만 문인으로는 자기울타리를 벗어나야 창작공간이 개척된다. 작가는 개체의 심리세계도 주목해야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의 주류적인 사상과 정서, 가치기준을 외면할수 없다, 자기의“특색”보다 더불어 이루는 문학의 미학적실천에서 독자의 심미추구를 나몰라라 할수 없다는 설명이다.     작가의 창작관념은 굳어져서는 안되지만 토성우에 갈대처럼 흔들려서도 안될일 이다. 초현실주의 바람이 불면 초현실주에 경도되고 표현주의 하면 기괴한 표현을 하느라고 골머리를 짜노라니 민족의 언어특징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 문학의 특색은 뒤로 밀리고만다. 고전적인 세계명작이 명작으로 된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비판적사실주의가 작품에 관통되여있기때문이 아닐가싶다. 내가 보수적이여서인지 모르지만,     이를테면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인 디드로, 볼떼르, 루쏘와같은 걸출한 작가들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봉건사회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유와 평등을 기저로하는 합리적이고 리성적인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투쟁을 고무하였다. 17세기의 극작가인 몰리에르는 프랑스고전극의 완성자로서 고전주의미학의 리념을 빛나게 실현한 대문호였다.     몰리에르는 그의 희극 에서 인민을 몽매하게 만들어 순종밖에 모르는 노예로 삼으려는 지배계급의 정체를 폭로하였으며 그것을 도와주는 종교의 위선을 조소하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는 사회불평등과 기만을 날카롭게 비 판한것이다. 그때문에 공연이 금지되고 박해받았으나 그로써 불후의 명작이 되였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몰리에르는 희극《따르뜌프》에서 예수회회원인 따르뜌프의 악행과 위선을 폭로하였다. 예술이 사회모순을 밝히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을 몰리에르는 희곡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와 비슷하게 디드로의 소설《수녀》에서도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의 감성을 질식시키는 사회적모순을 까밝혔다. 그런 인소가 발자끄나 유고의 작품에서도 관통되고있다. 세기를 넘어서도 명멸하는 그 사상의 빛발이 바로 세계명작이 된 론거이고 특징이고 사회적가치이다.     물론 금강산사도 식후경이라고 문학도 배부르고 등따스한 연후에 하는 생명활동이니 배가죽이 등에 붙게 굶주려서 밥을 빌어먹게 된 경우에는 문학이 흥미로울수가 없다. 경제건설의 중심시대, 일체를 휩쓸어버린 상품화시대에 문학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수 없고 근근히 보조역으로 등장할수밖에 없지만 문학이 변두리에까지 밀려난것이 반가운 일은 아니다. 문학이 자고로 공리적인 사회에서“변연화”가 된것은 곡조가 틀린 독주때문인가?자업자득인가? 문학은 일종“도구”로 충당되여서는 안되지만도 되돌아와 사회와 아무런 련계가 있어서는 안되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문학이 아직도 사회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환경속에서의 비극적조우를 펼쳐보이지 않거나, 생존환경속에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의 박투, 인성속에 선과 악의 판가리겨룸을 파헤치면서 사회와 인간의 이화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으려 하면서, 근근히 자기생존의 울타리안에서 맴돌면서 자아감상, 자아도취에 빠져서 헤여나올줄 모른다면 그 제약성은 나처럼 국외인의 눈에도 문학의 저곡으로 보인다.     문학공간은 날이갈수록 좁아지고있고 문학평론도 바야흐로 위축되여가는 학과로 연명해가고있다. 작가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작가겸 학자형이 된다면 금상첨화이다. 하긴 문학과 문학연구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문학은 응당 사회적도의와 책임을 질머지여야 하며 그것이 가능한껏 창작에서 효률적으로 체현되여야 바람직하다.     문학의“말세지감”이 아무리 심각하여도 문학의 대하에 작은 물방울밖에 안되는줄도 안다. 문학이 자아를 상실한 대가로 경제효익을 얻는것은 바람직한가? 문학의 주체성을 고창한다해서 문학고유의 사회가치와 작가의 사회적책임 그에 따른 사회효응의 제특징, 작가적인 량지와 사명감을 구중천에 버릴수는 없다. 문학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문학의 위기감을 느끼는것은 곤혹이면서도 문학의 비애가 아닐가?     문학은 슬프다. 날이 갈수록 인문정신이 소실되기때문이다. 무릇 글이란 어디까지나 사회효응을 첫자리에 놓지않는가? 과거에는 도구로서의 문학을 통탄하고서도 한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 나아가서 한낱 경제도구로 둔갑하였다. 지금의 문학은 려행, 관광을 선전하는 문화, 술문화, 성문화 등의 선전품에 지나지 않게 되였다.          문학의 시장에서는 매력 혹은 흡인력, 혹은 재미, 자극이 팔릴뿐이니 진정 숭고한 문학작품이 고갈되고있는 상태에서 문학이 슬프지 않을수 있겠는가? 광대한 독자를 잃은 문학인데 적막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중국문학(조선족문학)의 비애는 시대의 비애이며 후대들에 대한 문학교육의 비애도 간과할수 없는 풍경이다. 지금의 초고중학생들은 옛날처럼 고전명작에 매료되는것이 아니라 만화책에 매달리고있다. 누가 그들에게 세계명작을 읽힐인가? 그래서 문학은 현재도 비애이지만 먼 장래에도 비애가 도사리고 있다고 뇌까리고 싶어진것이다.                                     1998년 8월 21일 ㅡ    2013년 10 월 18일
371    오동나무아래에서 댓글:  조회:8367  추천:0  2013-11-30
                                                    오동나무아래에서                                                                                          최 균 선         교문밖 오동나무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황들기 시작한 오동잎 하나가 내어깨에 살폿이 내려앉았다. 문득 백락천의 “장한가”에 있는 시구가 시멋없이 떠올랐다. “봄바람에 복숭아 자두꽃 피는 밤 / 가을비에 오동잎 질 때 / 그 녀인을 생각한다네”오동나무라 하면 여지껏 “오동이 무성하면 봉황이 절로 날아드네”라는 말을 기억 하고 있는 정도였는데 황도에서는 너무 흔해서 흥미를 가지고 인터넷에서 두루 검색 해보니 그 자체가 귀한 나무이지만 상징성이 많음을 알고 못내 찬탄하게 되였다.    체형이 사뭇 우람지고 도고하면서도 지성미를 풍기기에 군계일학의 품위를 과시하는듯도 하다. 그러기에 한 여름이면 크고 넓은 잎으로 짙은 그늘을 지워주어 오가 는 길손들의 더위를 말리기에 적격이다. 이것이 오동나무의 일종의 특색이다. 옛말에 봉황은 남해에서 북해를 향해 날아갈 때 배가 고프면 대나무열매만 먹고 집은 오동나무에만 짓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리를 나는 동안 쉬고싶을 때는 어떤 경우라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않았다는 봉황! 그만큼 오동의 자태는 고결한 령혼과 위용과 고귀한 품위로 미담을 지니고 나무로 살았고 그만큼 귀하게 여기던 나무였다.     계절에 대한 체감이 약한 오동나무, 그러나 안으로 자제력이 강해보인다. 그렇다고 락엽수 가운데서 뒤늦게 잎이지는 나무도 아니다. 九月이 지나 땅에 지는 오동잎 한장을 주어서 보면 곧 추석이 오는것을 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짧고 굵고 멋스 러운 양자, 가장 뒤늦게 왔다가 앞서 서둘러가는 오동잎은 많은 련상을 불러준다.    오동나무는 현삼과에 속한 락엽교목으로서 조선반도의 경기도이남과 평남에도 분포되였다. 키가 15m에 달하는데 원형 또는 5각형의 잎은 길이가 25㎝ 정도이며 뒷면에 별모양의 갈색털이 있고 잎가장자리는 밋밋하다. 자주색의 꽃은 5~6월 가지 끝에 원추형꽃이 차례로 달리는데 꽃잎과 꽃받침은 각각 5장이다.     오동류에는 오동나무, 참오동나무, 개오동나무, 꽃개오동나무, 벽오동(碧梧桐) 나무 등이 있는데 조선반도에는 오동나무와 참오동 두 종류가 있다고 하며 일본인들 은 참오동을 일본오동이라고 명명했다. 오동나무와 참오동 사이에는 잡종이 생기기도 한다. 중국, 대만에도 있는데 각기 중국오동나무, 대만오동나무라 부른다. 개오동나 무는 중국이 원산이고 꽃개오동은 아메리카의 원산으로서 꽃잎은 흰빛으로 꽃속에 자갈색무늬에 옅은 주황색점이 있어 아름답고 개오동꽃 보다 더 크다고 한다.        무릇 오동나무는 생장이 빠른 편이고 목재는 얇은 판으로 만들어도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는 장점이 있어서 자고로 거문고, 비파, 가야금 등 현악기를 만들었으며 책장, 경대, 장롱 등의 가구재로 쓰이였다.오동나무로 나막신을 만들면 가볍고 발이 편하고 땀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열매에서 짠 동유(桐油)는 한방에서 음창,오림, 구충(驱蟲), 두풍(頭風), 종창(腫脹) 등에 쓰인다. 그야말로 보배둥이라 하겠다.     그래서 오동나무만 봐도 춤을 춘다는 속담까지 만들어졌을가, 오동나무만 보면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나 가야금을 생각하고 춤을 춘다는 뜻으로서 조그만 동기나 몇단계를 거쳐야 련상될만한 어떤 사물을 보고서도 곧 목적의 사물을 본것처럼 미리 좋아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사유방식이나 품성은 심히 경박한 사람의 특질이다.      어쨋거나 옛날 우리 선조들은 딸을 낳으면 집주위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빨리 자라는 나무여서 시집갈때쯤 베여서 가구를 만들어줄수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이 오동나무가 반듯하게 자라고 무늬도 예쁘며 가공하기도 쉽다. 조선력사에서 “3대 악성(三代乐圣)”으로 칭송되는 우륵이란 사람이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원래 가야국에 있다가 나라가 곧 망할듯싶어 약삭빠르게 신라의 품에 안기여 당시 진흥왕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되여있다. 비록 12현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어 가야금이라 이름하여 조선악곡계에서는 기리는 사람이라도 나라를 배반한 수치스러운 력사는 그의 미명에 치명의 오점으로 남을수밖에 없다.     곁길로 빠진 화제를 본제로 돌려오자. 오동나무를 심어놓고 줄기를 잘랐을 때 잘라진 줄기를 모동(母桐)이라 하고 원줄기에서 새로 돋는 줄기를 자동(子桐)이라 하는데 그러기를 되풀이하면 손동(孫桐)이 나온다. 나무의 질은 손동이 제일 좋다고 한다. 가구나 악기용으로 리용가치를 높이려면 첫가지가 갈라져 나오는 부분이 최대한 높아야 하기에 나무가 얼마간 자랐을 때 좀 잔인하지만 밑둥을 썩둑 베버린다고 한다. 그러면 그 밑동에 딱 한개의 가지가 나와 처음보다 훨씬 높고 곁가지 하나도 없이 훤칠하게 자란다. 이렇게 세번 잘리고 세번 재생하면 리용가치가 높다고 한다     바로 오동나무의 이런 굴강하게 재생하는 특성이 오동나무의 매력이고 그리하여 이 졸문의 핵으로 심어졌는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기특한 오동나무요 생명현상이다. 오동나무는 생각하며 사는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식물이니 사고력이 있을수야 없 지만 베일수록 높게 도고하게 자라나서 더욱 우질나무로 된다는, 여러번의 변이를 거친 오동나무라도 이런 세례를 겪은 오동나무가 더욱 생존능력이 강해져서 억차게도 살아남는다는것은 우러러 경이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내가 황도에서 본 오동나무들은 시련을 겪지 않아서인지 멋대로 자란것이 대부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동나무의 저항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 멋지다. 가시가 촘촘한 줄기를 뻗어 자기를 보호하는 아카시아나무에 대비해서도 더 멋있다. “탄압을 받을수록, 시련을 겪을수록 움츠려들지 않고 더욱 공세적으로 맞받아치는 그 기백이 참으로 돋보이지 않는가!” 조선의 오동나무는 단군족의 기백같지 않은가?     한국의 산림학박사 감홍은의 칼럼《오동나무(2)》에“오동나무를 보게 되면 시각(視覺)은 석양에 젖어있는 아름다운 보랏빛꽃에 취하게 되고 후각(嗅覺)은 그윽한 향기에 취하고 청각(聽覺)은 열두폭 치마폭이 일렁이는 가야금소리에 취하게 된다. 그리운 이를 못잊어 잠못이루고 뒤척이는 밤은 오동잎지는 소리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이보다 더 감상에 젖게 하는 나무가 어디 또 있을까” 라는 정서적인 구절이 있던데 그 정서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어 좋았다.     꽃핀오동나무를 바라보면 더구나 아기자기한 정서에 묻히게 된다. 하늘가득 솟아있는 연보랏빛 작은종들이 울리는듯싶고 그 소리가 마음에 울려오는듯싶다. 오동꽃들이 내는 소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할것이다. 다만 가슴에 넘칠듯 가득차는 서정을 동그랗게 동그리며 꽃핀 오동나무아래에서 발길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오동나무의 생존력과 굴강한 속성에 매료되여 머리가 숙여지고 그저 나무로서만 대하게 되지 않는다. 흔히 사철푸른 소나무로 굳은 절개를 상징하고 대나무로 올곧은 지조를 비유하지만 오동도 송죽의 절개에 비해 손색이 가지않는 상징성이 짙은 나무요 수백천종의 수종들속에서 생존의 강자라고 할수 있으리라. 오동의 정신을 기리며 오동처럼 굴강한 기개로 오늘을 살아가리라.                                  2010년 9월 25일  (황도에서) 2013년 2월 6일 수정 (2013.11기 연변문학)
370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댓글:  조회:9600  추천:2  2013-11-28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최 균 선       이 시대는 양식화된 창신을 고창하는 시대이다. 그 창신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있는것이 현대시다.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까다롭게 리해할것도 없이 진부하지않고 비반복적인 생신한 표현수법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것이다. 말하자 면 직유를 은유로, 묘사를 상징으로, 재현을 이미지로…그러나 후세대들에게 낯설게 하기를 선양하는것은 현실생활, 인간의 심령을 리드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가?     다시점(多視点)에서,현상학적립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감수한것을 기초로 대상에 주체의 사상과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미지로 구성하는 사물시(事物诗)가 지리멸렬하여 이제 시인들의 단순한 감정표출로는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인정하여 낯설게 하는 방법의 시쓰기가 나오게 된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또는 시적애매성이라는것으로서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 한다. 그동안 획일화, 관습화, 전통, 일상적언어로서는 신선함, 아름다움, 창의성 등을 발견할수 없다면서 극단에로 치달은것이다.“계속 아름다운것은 우리들을 질리게 한다.”는 말인가? 조금 낯선 시를 보자.     가는 비여 가는 비여/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미루나무 무심한 등치에도/가는 비여/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여윈 등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 비/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김사인이라는 시인의 “비” 전문이다. 낯선듯 싶으면서도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코 생판 낯선것도 아니고 조금 애매모호한것 즉 몽롱미를 현시하고 있을뿐이다. 겨울비속을 걸어가는 수척한 사내의 쓸쓸함, 안쓰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는 시로서 “가다”의 “가는”에는 가는(行), 가는(細),가는(離別), 가는(야위여가다,) 즉 중의(重意)적으로 중첩되고 시상전개가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표현이 시도되고있다.     그리고“비”라는 주도어를 반복함으로서“비" 그것도 ”겨울비“에 대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미끄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 시의 사상전개법은 “비 ”,“가는”의 호응관계로서 가버리는 혹은 리별한 사내의 등뒤에서 내리는 비(리별, 사랑)를 느낄수 있게 했다. 의도적 낯설게 하기의 전형이라지만 전통시의 가독성도 구비하고있는것이다.     모순된 어법으로 낯설게 하기가 난해시로 되게 하는것은 표현의 기법일세 사유, 정감의 모순성은 리해불능이 된다. 현실속에는 애매모호한 현상들이 많지만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시각은 애매모호할수 없으며 더구나 사유활동이 어릴벙벙할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무작정 애매모호성이 현대의식의 한 형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어떤 시인은 통속적인 시를 일반적으로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시라고 단정하던데 기실 상아탑속에 자아도취로서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현실에서는 이상한 눈길로 보며 응 대하지 않는다. 문학의“통속성”을 고상한 예술성이 결여된 즉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제기법은 너무 무단적이다. 작품의 다양성과 진실한 정신을 저애하는 존재로, “고상”한 독자에게는 비도덕적이고 질낮은 작품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이비도 아닌 얼토당토이다.     또한 통속적인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지적,정서적수준이 낮은 대중이 선호하는 감정 혹은 정서를 졸렬하게 반영한 렬악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야 한다는 설법은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대중은 무지몽매하다는 말이 아닌가? 선택된 사회정영들만을 위해 시쓰기를 한다면 선경에서 신선들과만 산다는 말과 같다. 어떤 시를 써내든 시인은 우주인이 아니며 적어도 진공상태에서 사는 특종생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가로사대, 통속성을 즐기는 대중은 예술적심미가치에 주목하지만 예술가들과 같은 심미안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며, 지적훈련을 받지못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대중은 세련된 교양이 결핍한 존재라고 할수 있으며, 그래서 예술이 알기쉬운 소재나 자극적인 소재로 형상화되였을 때에만 흥미를 느끼는“무리”라고 말을 하는 시인은 구름우에서“구름사탕”을 먹는 신선인가? 엉터리도 아닌 허황 그 자체이다.     문학장르중 대중들과 거리가 가장 먼 장르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시라고 할 때, 문학의 꽃이자 문학의 원형인 시가 왜 “대중”들의 시야밖으로 밀려난것일가? 여러가지 리유가 있겠지만 어렵기때문이라고만 간주한다면 대중 전체가 석두라는 말이 된다. 전문인 시인들조차 읽기가 어렵고 터득이 막연하다고 할 정도라면 그것이 숭고함이고 자랑인가? 어지간한 지적,정서적훈련으로는 현대시를 리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현대시독해학원”이라도 꾸려야 하지 않겠는가?     낯설게 하기=모르게 하기가 아니다. 낯설게 하기는 로씨야형식주의자들에게도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으로서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는것이지 금성철벽밖에 방치하는게 아니다. 독자가 아예 모르게 하기 위해 쓰는 시는 그 목적성부터 희망사항인“공명성”이 없어 글러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낯설게 하기는 시문학의 예술적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여있는 용어로 보는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여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속에 갇혀있다. 특히 일상적언어의 세계는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고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에 깜깜한“무지자”들과 도전하는식으로 나와서는 안된다. 물이 없이는 준치라도 곧 죽는다, 복합적독자군은 망망대해가 아닌가?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경험의 법칙이나 상식을 뒤엎는 일탈된 표현에도 진실성은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독자가 감동하고 시적진실을 깨닫게 하는것이 시의 목적이여야 한다. 낯설 게 하기는 일상적인 언어의 틀을 깨고 새롭게 표현하는 기법일뿐으로서 그 무슨 천국의 언어인양 신비화할것까지는 없다. 장막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무슨 무당굿인지 전혀알수 없다면 그게 제멋에 겨운 헛푸닥거리가 아니겠는가?     1) 깃발이 펄럭인다. (사실적진술>)        깃발이 전진을 부르며 절규한다.     2) 사람이 술을 먹는다.        사람이 술잔속에 익사한다.     상술한 두가지 표현에서 후자의 기법에도 선택된 상상력이 필요없다. 이런 낯설게 하기라면 소통불능이 아니고 사회효응도 바람직할것이다. 하다면 정말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이는 현대시를 짓기는커녕 리해하고 감상할수도 없어야 할가. 백명의 독자 에게 읽히는 작품보다 선발된 한명의 독자에게 백번을 읽히는 작품만이 예술이며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문학일가. 우문과 함께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며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시인이 오히려 사랑받는 시인이 될것은 의심할바 없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 이라고 부르는 류근시인의 시이다. 이 시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인“외도”를 통해 웃지 못할 가족애를 그리고있다. 보편적으로 통속적인 시는 거짓위안과 환상을 제공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다고 비판을 받는다.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유로워지길 원하며 상상적 해결을 꿈꾸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시적화자는 대책없는 랑만 즉 련애를 꿈꾸고있지만 직면하거나 직시하고 있는것은 가족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정서이다. 무엇을 나무릴게 있는가? 그래서 외도가 외설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시의 격을 떨어뜨렸더라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시적정취를 선물하고있지 않는가?     어떤 고명한 이들의 견해대로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이분법을 항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저급예술이라는 전통시를 쓰는 사람은 절필해야 하는가? 전통시를 쓰면 시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던데 어처구니가 없는게 아니라 한심할뿐이다. 어떤 시인의 선언이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겠다는 용기와 오히려 통속적인것으로 인위적인 난해성을 지향하는 문학을 전복하고싶은 역설의 정신이 분발할듯싶다.     밀란 쿤데라가 “극소수의 귀족이 향유하던 예술은 숭고하다. 그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될 때 더욱 숭고해진다”고 말했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은 소통에 있으며 그 소통의 폭은 넓어져야 한다는 의미일것이다. 소통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그 존재자체만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닐수 없다. 작품과 독자가 만났을 때 비로소 예술은 온전한 의미를 지닐수 있게 된다. 이것은 식은죽이 마시기 좋으면서 원맛은 잃지 않고있다는 말처럼 절대 진실이다. 아닌가?                                                         파도                                                      최 병 수      바다는 목에 걸린 세월을/울컥울컥/모래사장에 토해낸다/벌거벗고 누워있는 수줍은 모래톱/전력질주 짝짓기 시도하지만/대양(大洋)의 기세로도 오르지 못하고 /가시 걸린 세월만 내 뱉는다 (중략)     강자의 론리를 파도에 빗대어 쓴 시다. “‘파도’라는 사물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시적자아의 형이상학적의식을 잘 그려주고있다” 그러나“현대시의 핵심인‘낯설게 하기’가 완벽하면서도,시적진실의 리얼리이티가 있는 시이다. 이런 시는 시전문이 아닌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을것이다. ‘파도’는 바다를 배경으로 강자의 론리를 파도, 모래사장 등에 투영해 약자에 대해 노래했으며 약자와 강자의 론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 가슴아픈것을 파도에 빗대고 시적대상을 향해 강렬한 심상을 표출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경우, 직설적인 시가 개탄하며 절로 물러갈것이다.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조합이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시로 되는 리유는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인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언어조합이기때문이라는것은 기성리론이다. 그런데 로씨야에서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률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가 시다운 근본적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리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기때문에 형식주의라고 했지만 대표적리론가인 야꼽슨, 쉬끌로브쓰끼 등의 기본립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으며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림시변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명이여야 한다는 립장이였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고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였다. 시의 경우에 있어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 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노력을 더욱 강요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어법은 일매지게 낯설게 만들기만인가? 전경화로 설명할수는 없는것인가? 낯익음과 낯설음은 아무래도 변증관계를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고 하더라도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선언어가 아니라 눈에 익은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 고전주의나 랑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표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고 있는것이다. 실용주의시대에 현대시도 실용적이야 할텐데…     포프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수 없는것, 즉 어려운것을 적절히 표현하는것이라 하였고 워즈워즈는 낯선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친숙한 통념에 반작용하는 낯설은 현실을 제시하는것으로서 여러번 곱씹어 더 생각하도록 지각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심하게 “낯설어버리면” 상상력의 “부재자”나 언어표현에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이 남의 사돈이야 가건말건 지나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것을 제시한것이다.     시적대상을 습관적인 표상에서 굴절시키고 언어표현에서도 일상의 문맥을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로 대체함으로써 시인은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结)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만 하는것이다. 따라서 시어는 낯선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 선함을“회복”시키는것이지 불소통속에 매장시키는것이 아니다. 깊이 숨김으로써 그것이 현대시의 시적발견이 되고 해방된 새로운 시세계의 구축이 될수는 없다.     쏘쉬르의 근원주의 언어관은 말하는 화자의 관념이나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하는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말하는 언어는 요소들간의 체계적인 관계들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것이 핵심이다. 쏘쉬르는 인지체계내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와 밖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의미불통의 시가 시로서 존재할 리유가 나변에 있는가? 물론 확답을 기대할수 없는 우문이므로 혼자의 우답으로 남겨두자. 그래서 장문(长文)이지만 아쉬운 대로 결말이 없는 횡설수설이 되여도…                                              2013년 10월 30일
369    분식에는 진실이 없다 댓글:  조회:7469  추천:1  2013-11-25
                                                      분식에는 진실이 없다                                                                     야 조        력사가 인간들과 롱담할때도 있거니와 인간들도 드문히 력사를 두고 유모아를 엮을때가 있다. 례컨대 지난 20세기 50년대초 중국의 소학어문교과서에는 주덕의 간고소박한 정신을 가송하는“주덕의 멜대”라는 문장이 수록되였더랬다. 그런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유모아가 생길줄이야, 그로부터 10년후인 1967년 2월, 학생들이 겨울방학을 보내고 학교에 돌아와 새 교과서를 타고보니 같은 내용의 과문이“림표의 멜대”로 바뀌여있었다. 하여 무수한“홍소병”들은 림표의 간고소박한 정신을 열심히 따라배우게 되였다. 이것은 인간의 총명이 엮은 3류유모아이다.     그런데 불과 몇년이 지나지 않아 림표의 운두루한 사건이 발생하여서 과문은 다시“주덕의 멜대”로 환원되였다. 하나의 멜대가 정치풍운의 변환에 좇아 부단히 바뀌였으니 이는 상식에 대한 모독인가? 현실에 대한 풍자인가? 이 이야기는 중국어문교과서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력래로 교과서와 선생님의 말을 금과옥조로 받아새기는 아이들이 어떻게 어른들이 조작하는 허구와 진실을 판별한단말인가?     자고로 교과서가 일반서적과 그저 다름에만 있지않다. 교과서의 내용은 일종 선험적인 상식과 지식의 모식을 고유하고있는바 일호의 의심도없이 받아들이는게 관례이다. 무릇 상식이란 우리들이 이 세계를 인식하는 기점이자 원점이다. 그러나 일단 상식적문제가 생기면 후속적발전과 지식은 론리상에서는 물론 결과상에서도 커다란 편차를 낳고만다. 그것을 후학들에 대한 오도라고 질타하고 있는것이다.     교과서의 편찬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강제성특징을 구비하는바 이는 교재편찬의 통칙이 되여져 지식전수를 보장함과 동시에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기때문이다. 한편 교과서자체가 원래부터 막무가내한 가변성을 고유하고있지만 주덕의 멜대가 림표의 멜대로 둔갑한것같은 일은 황당무계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기억하고 싶은것만 서술하고 남기고 싶은것만 서술된다면 진정한 력사는 끝나는것이며 력사의 몸살이는 수도 없이 반복될것이다. 하다면 력사교원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것인가?     이 문제는 결코 일개력사교원에게 달린문제가 아니며 경은 바른데 입비뚤이중이 외우는격의 문제도 아니다. 리론상 력사란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로서 진상은 오직 하나이다. 하지만 력사연구는 왕왕 사학가 혹은 력사서편찬자들의 주관의식의 변화 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변화하게 되며 분식, 가미, 외곡의 인소를 피면할수 없다. 그렇게 되는데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사학가들의 기특한“창신정신”도 한몫 하기때문이다.     세계 모든 민족의 력사는 기실 기본여건이 간단하다. 첫째로 무릇 나라통일을 추동하는것은 진보이고 그와 반대이면 반동이다. 둘째, 무릇 외세에 항쟁하면 진보적이고 애국적이며 그에 반하면 반동이고 매국적이다. 셋째로 무릇 반란은 모두 혁명 적이다. 이것은 10년동란시대에 충분히 체현되였다. 넷째, 무릇 령토를 확장하는것은 진취적이고 애국적이며 그를 반대하면 국권을 상해하고 나라를 모욕주는것으로 되여있다. 이는 력사발전에 대한 기본의식이고 모식인지 모르겠다.     일언이페지하고, 력사교과서를 외곡하고 뜯어고치는 일에서 자고로 일본이 제일 말썽이 많았고 지금도 말썽을 일으키고있다. 일본통치자들은 제2차대전기간 아세아 각국에 대한 침략을 극구부인하고 성노예를 매춘부로 개념바꿔치기를 하여 진실을 오 도하는 등 줄창 정치방귀(거짓말)를 뀌고있다. 일본은 인간의 량지에 철판을 씌우고 극악한 전범자가 아니라 당당한 “해방자”로 분식하려 어거지를 쓰고있는것이다. 특히 아이러니도 아니게 웃기는 작태는 아베가 근간에 녀성인권이 어찌구저쩌구 한것이다.     일본만 즉살나게 욕할일도 아니다. 풍문에 요즘 한국에서도 교과서개편 즉 력사분식에 열중하고 이에 대한 지성인들의 의론이 분분하다고 한다. 먼 마을에서 삐칠 일은 아니지만 동족으로서 관심이 가는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소위 '근현대사 연구 교실'이라는데서 무엇을 어째서 분장하고 분식하려는것인가? 력사라는 소녀를 정형 수술하면 보기좋을가? 일반적으로 추녀일수록 분장에 골머리를 썩이듯이 못난력사, 추악한 력사일수록 미화하려드는 법이다. 아닌가? 일본의 경우처럼 말이다.     대저, 후학들이 력사를 배우는 목적은 력사사실을 통해 과거 선조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중에 선택할것과 내버릴 부분이 무엇인가를 선별하고 새 력사를 창조하는 좌표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는데 있지않는가? 력사에 대한 분장사라해서 다 잘하는것은 아니다. 남에게 알리지 못할 어떤 저의가 있다면 오히려“자랑스러운 력사”를 못난력사로 만들어버릴수도 있다. 력사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료리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은 사학자들이 명기해야 할 잠규칙이다.     이면에서 독일은 귀감이다. 2005년은 제2차세계대전결속 60주년이였다. 독일에서는 그 한단락의 력사에 대한 반성하였는데 절대다수의 국민들의 공통한 태도이다. 당시 독일의 총리였던 슈뢰더는 악명높은 독일집중영해방 60주년기념활동에서“나치 스즘과 그들이 발동한 전쟁, 종족도살 및 기타 폭행에 대한 기억은 이미 우리 민족 자신이 공동한 인식의 한개 조성부분이다. 이는 우리들의 도의적인 책임이다.”라고 침통하게 반성하였다. 과학적인 독일인들의 민족성격의 체현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후의 독일총리였던 메르켈도 나치스정권출범의 력사를 회고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당시 나치스가 천추에 용서못할 죄를 지은데는 독일사회도 책임이 있다. 부분적 정예분자들이 나치스당에 가입하였고 더많은 사람들이 나치스폭행에 대해 침묵을 지켰기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번 독일은 력사의 죄에 영원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에서는 소학생들에게 나치스사상이 싹트지않도록 주의를 돌리고있고 청년들을 집중영유지에 가서 교육받게 하며 기회와 력사학가와 생존자들이 대화하게 하며 유관과제를 선택하여 연구하게 하게 한단다.     력사외곡의 선두주자로 한국에 소문짜한 자는 아베이다. 자민당의“력사검토위원회”에서는“도쿄재판사관”을 청산하고“침략전쟁이 아니였다.”,“학살 등의 가해사실은 없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억지를 쓰고있다. 이러한 비릿한 추태들을 세계인들은 꿰뚫어보고있다. 한국에 사유가 명철하고 량지가 있는 학자들은 요즘 소란피우는 력사교과서개편을 두고 일본극우분자들의 력사외곡과정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꼬집고있다. 방향이 일치하고 시작이 똑같다면 가는길도 비슷할수 있는것이다.     뉴스에 의하면 민주당의 한 대표는 "국사편찬위 검정심의를 통과한 뉴라이트 역사책은 교과서가 아니라 유해서적 수준"이라며 "식민사관, 독재사관을 부추기고 친일독재미화에 표절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일본이 강요한 규율로 한국의 근대의식을 일깨웠다는 주장은 나치가 포로들을 수용소에 가둔 이유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정신 나간 교학사 역사교과서" 라고 에누리없이 질타하였다. 일제“쌀수탈”을“쌀수출”이라 서술하니 말이다.     물론 력사교과서도 수많은 력사서들속에 일종이므로 금과옥조는 없다. 있다면 오직 력사교과서의 규범성이 있을뿐이다. 중국의 경우, 소위 “전업성”이 제기되는데 력사교과서에서 체현되는 력사학과지식체계의 전업성을 말한것이나 력사교과서를 현대화할수 있는가? 교과서의 학과지식의 체계상에서“중점지식”은 내키는대로 고칠수 없으며 더구나 전통모식을 타파할수 없다. 단어도 한글자 차이로 왕청같이 외곡되는것이 력사적서술이다.     가장 절실한 례를 든다면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탄해서 10년후인 1920년에 자국의 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보냈고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놈들이 뭔데 남의 나라 력사를 마음대로 왜곡하려 든단말인가? 이런 물음은 어린아이들이나 물을수 있는 천진란만한 물음이나 간악한 일제놈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놈들의 조선사외곡은 대략 기원 660년 백제가 망한후 그들이“친정집'”과 같은 조선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였다. 그리고 단군민족의 력사를 저들의 식민지사로 변조하여“4세기후반 신공부를 설치하여 2백년동안 다스렸다”는 남선경영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16년동안 사업비로 천문수자의 거금을 투자하여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식민주의 사관으로 저술한 여러가지 사서를 간행하였다. 그중에서 일제가 가장 력점을 두고 편찬한 책이 바로《조선사》이다.     일제놈들이 이른바《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단군과 관련 기록을 삭제하고 조선과 일본은 같은 조상을 뿌리로 한다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论) 으로서 조선인은 렬등하고 일본인은 우수하다는 인식을 고취했다.《조선사》간행은 조선민족정체성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아버리고 일본왕의 충실한 신민으로 전락시키려는 지극히 악랄하고 간능한 술책의 일환이였던것이다.     조선민족사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는데 리용한 "석유환인(昔有桓因)"에 담긴 의미는 사이비하면서도 심각하다.《삼국유사》명백히 기록된 "석유환국(昔有桓国)"의“국(国) 자를 모양이 비슷한 “인(因)”자로 변조하였다. 이렇게 환국이란 나라를 없애버림으로써 일제는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적인 나라로 만들버렸다. 이로써 단군민족의 7천년상고력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것이다.     이처럼 누구든 자기의 력사를 분식하려든다면 력사외곡의 능자들인 일본놈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력사외곡과 극우정치의 만남은 무서운것이다. 일본극우정치인들이 시도한 력사외곡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한다는것은 슬픈 일만이 아니다. 력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가르치려하는것이 아니라 삐뚤어진 권력을 찬양하도록 비틀어짜는 작동은 우직함도 형편없는 우직함이다.     력사교과서를 고치는것은 모종의 수단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목적에는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권력은 바뀌지만 력사는 이미 화석으로 굳어졌기때문에, 먹으로 지워지지 않기때문이다. 분식에는 진실이 없다. 덧칠하고 어루만져 다듬은 력사교과서가 아무리 화려해도 외곡된 력사를 자기 후대들에게 기억하게 하는것은 자가당착, 부메랑이 되리라. 기필코!!                                                                2013년 9월 25일
368    이보, “난치”가 온다이, 댓글:  조회:8165  추천:0  2013-11-22
                                               이보, “난치”가 온다이,                                                                                                 최 균 선     오늘 아침, 골목길에 나서는데 3층집 김선생이 창문을 열고 나를 불러세운다.    “여보, 어제저녁 난치가 왔다이, 그집도 난치가 옵데? 인젠 살았다이…”     올려다보니 80객이 되는 김선생이 만면춘풍이 되여 손짓을 하였다.    “좀 오는것같던데요. 허, 대가리를 삶았는데 귀때기가 아니익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우? 문학선생이 돼서 그런가?”    “글쎄요, 그저 그렇단 말입니다. 허허허…”     그렇다. 인제 진짜 겨울이 와도 될듯싶다. 적어도 나흘째 정황을 보면 어디선가 서성거리던 동장군님이 갑자기 군림하여 설한풍으로 대지를 휘초리질하며 호령질해도 무섭지 않을듯싶다. 아닌게 아니라 늦어진 봉창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진종일 폭설 을 퍼붓더니 지금도 그치지 않는다. 그 어디에선가 기한에 떠는 사람들에게는 설경조차 반갑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지랖이 아니 넓더라도 내 배부르니 종보고 저녁을 짓지 말라하는 격으로 세상을 볼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잡담제하고 내부터 등따스워 고마운 일이라 절로 손가락이 자판위를 달린다. 성나면 보리방아를 더 잘찧는다는격과 같은것인지, 더운듯해서  깡마른 열정이 달아오르는지…    사연은 이러하다. 13일날 오후, 여러가지로 속이 번거로워서 강둑에 나갔더니 몇몇 마을사람들이 모여서“난치”문제에 대하여 의론하였다. 물론 의견이 아니라 원성이였다. 그들의 말에 나도 풍을 치는데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리여 받아보니 민화 사회구역위원회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장금화주임이 그냥 “난치”가 안오는가고 문의하여왔다. 그냥 그 상태라고 곧이곧대로 대답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6시쯤 시건설국, 시독찰국, 열공급공사, 관도수리공들과 함께 현장조사를 하러가겠으니 집에서 기다 리라고 하였다. 희출망외였다. 하회를 기다려보자고 재작년처럼 말썽피우지 않고 누구네 말마따나“례의주시”하고있는데 설중송탄이 아닐수 없다.     역시 우는 아이를 젖준다던가, 그런데 여섯시에 온다던 사람들이 여덟시가 되여서도 아니왔다. 루대에 바람소리만 요란하고 비는 아니오는갑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장주임이 그때까지도 사무실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며 오면 곧 가겠으니 아래에 내려와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반갑던차 손전등을 가지고 달려내려가니 미구에 자동차들이 들이닥치였다. 한데 모이니 한 20명가량 될듯싶었다. 결과야 어찌될지 모르나 내사 개선장군이 된듯 우줄거리며 그들을 안내하느라, 정황을 말하느라 나이답지 않게 설레발쳐대였다. 스스로 우스워났지만도,     그 와중에도 금상첨화인가, 소문에 시독찰국에서 사업한다던 옛날 도문5중에서 가르쳤던 나의 학생이 조사조성원으로 내려와 반갑게 인사하는 바람에 또 한번 희출망외였고 똑 마치 난파선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구조선이 득달한 격이라 하겠다.    “그런줄 모르고 왔는데 선생님네 집도 여깁니까?”    “그렇소, 욕심은 굴뚝같지만 손에 쥔게 있어야 훌 떨쳐버리고 이사가지?”    “이런 곤난이 있으면 언녕 해당부문에 반영하고 해결받아야지요?”   “고맙네. 원래 이눔의 곳은 여러가지로 말썽이 많은 곳이여서…”    사제간에 오고간 짧은 대화는 접어두고 아래층 두어집에 들어가 실제정황을 확인한후 6층 우리집에 올라왔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집이 춥지 않네” 하고 말했다. 옆에 다른 사람이“밖에 얼다가 들어와서 그런거지”하고 뒤를 달았다. 누군가 온도계 를 보더니 18.3도라고 하며 수첩에 적는것이였다. 18도면 열공급기준치에 도달한 셈이니 자칫 할말이 없게 된다. 인정은 가변이여도 수자란 이렇게도 딱딱한것이다.    못들은척 할가하다가 쐐기를 박았다. “물론 국가표준에 도달했지만 그게 온종일 해볕이 들어와 덥혀준덕이지 스팀덕이 아니지요. 이제 열시쯤 되면 그 온기마저 없어지고맙네다. 그리고 검사한다니까 오늘 보이라실에서 정성을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주착없는 늙은이처럼 횡설수설 말씀이 많았다.     대여섯되는 보이라공들이 윗층복도에 있는 스팀관도를 가지고 역사질하며 열성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생각은 별스레 비틀어졌다. (아무튼 위에서 검사오면 무서운 모양이군, 시끄러울정도로 전화질할 때는 힝힝 마이동풍이더니 된통에 들었나?…) 나는 마을에 주민들이 해당기관에 신소하려 갈참이였는데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다고 치사하는것을 잊지않았다. 그렇게 한창 벅구작을 피우는것을 보며 맥도모르고 침질하지 않나하는 의구심은 버릴수 없었다. 아니면 아궁이에 촛불을 켜두는격이던가…       독찰국에서 내려온 옛제자가 래일까지 기다려보다가 그냥 열공급이 잘 되지않으면 전화하라고 하기에 맥이없는“로우”가 비벼댈 언덕이 생긴셈이라고 저절로 입이 벙글써해졌다. 비록 스팀이 당장 뜨거워난것은 아니지만 마음부터 후더워졌다. 참으 로 사람의 마음이란 가지기에 달린것인가? 그동안 혼자 풀풀거리던 노여움도 춘삼월 봄볕에 잔설이 녹듯 스르르 녹았다.…     아닌게 아니라 검사조의 위력이 무정하던 보이라를 침질해놓았는지 차갑기만하던 스팀이 오늘 저녁에도 온기를 띠고있다. 온도계를 보니 20도여서 솜조끼를 벗어도 될만큼 감각이 좋았다. 오뉴월 화로불도 쬐다 물러나면 서운하다고 하였던가? 사람이 늙으면 콩밭쪾으로 한다고 혈기가 쇠잔하니 불(온기)이 더 사랑인것을 말릴수 없다. 마음이 따스하니 덩달아 “정치”도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습근평동지는“우리의 일체사업의 성과를 검험하는것은 최종적으로 인민들이 진정 실혜를 얻는가, 인민생활이 진정 개선되였는가 하는것이다….우리는 당의 군중로선을 견지해야 하며 인민의 주체적지위를 견지하여 언제나 군중의 안전과 위험, 추위와 따스함을 마음에 새겨두고 제때에, 정확하게 군중들이 생각하고 바라는것, 근심하고 급해하는것 등 군중사업을 심도있고 세심하고 투철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求是》杂志2013年第1期,第6页)     이 말을 거역할 사람이 있을가? 만약 아래에서 이 리념대로 군중사업을 한다면야 무슨 시야비야 할게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중뿔나게“난방(暖房)정치”에 신경을 쓰는지 스스로도 싱겁고 부질없지만 그럴 사연이 없는것도 아니다. 자초에 우리 사범학교구역에“집중열공급”인지 시작하던 2008년 7월께였다. 하루는 정신없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복도층계에서 무엇을 뚫는 기계소리가 요란한지라 나가봤더니 계단구석쪽을 구멍을 세개씩 뚫고있었다. 내사 무슨 령도인것처럼 뭘하느냐고 물었더니 스팀관도를 새로 설치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건 개인소유의 건물인데 누구맘대로 이러느냐고, 이건 범법이라고 고아댔더니 개 방구뀌는 소리로 들었는지 그냥 멋대로였다.     그때만도 시비깨나 좀 하는 사람들이 살고있던지라 문제를 내놓고 의론해보니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어쩌냐고 남의 일처럼 말하였다. 그것이 “꼴찌새서ㅡ사투리”“그러면 슨상님들 앞으로 추운고생을 한번 해보이소”하고 쓴소리를 했다. 그동안 줄곧 사범학교에 보이라가 있어 추운고생을 해보지 못하였다. 좀 추울듯싶으면 보이라실에 가서 누구네 말투처럼“우리가 남이가?”하며 롱담도 할수 있어 좋았더랬다. 게다가 우리 집 맞은켠에 보이라실을 책임진 사람이 살고있어 취난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니 추울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집중열공급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무슨 선견지명은 없지만 선입견은 확실하게 서있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한 보이라전문가가 연길시로 볼 때 집중열공급하면 여러가지 여건으로 문제가 생긴다고 하던말에 혹해서였는지 모른다. 집중열공급을 실시하는것은 정부차원의 시책이지만 구체적으로 열공급을 하는것은 사인기업이다. 사인기업과 소비자는 무슨 복무, 피복무관계가 아니라 상품매매관계이다. 계획경제운행도 종국적으로 리윤이지만 공급차원에서 복무 혹은 복리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사인경제는 우선 리윤을 선행시킨다. 잘 모르긴 하지만 그 운행원리는 별로 심오할것이 없다.     집집의 현관에 내붙인 공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자원원칙하에서 하기에 주민의 60%이상 동의하지 않으면 하지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거부할 정책의거가 있었다. 그래서 앞뒤, 좌우의 주민들속에서 대표 몇몇을 선출해서 진달래광장 어디에 있다는 열공급반공실에 찾아가서 협상하였다. 그들은 현지에 내려가 주민들의 의견을 직접 청취한후 결정하자고 하였다. 이튿날 주민들을 불러내여 의견청취를 해보니 거지반 불동의하였다. 막무가내라고 인정하였든지 그들은“손을 들었다.”     그래놓고 나는 청도의 어느 사립대에 초빙받아갔다. 그런데 이듬해 소문을 들으니 관도를 새로 묻고 집중열공급을 시작했다는것이다. 이미 외지에 와있는 나로서는 어쩔수 없었다. 내집은 비여있어 관도를 이어놓지 못했지만 취난비는 그대로 내였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참새 방아간 지난격이요 절로 호박쓰고 돼지굴로 들어간 격이였다. 결국 사람의 소총명이란 아무쓰잘데 없는 총명이다, 3년 후인 2011년도에 고향에 돌아와서 부랴부랴 집안에 스팀관도를 새로 개조설치하였다.     그동안 추워서 죽을번했다는 이웃들의 말을 들으며 간대루야 그정도였을가 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혼자“잘코사니”를 씹었더니 웬걸, 열공급이 말이 아니였다. 우리 이 구역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지였다. 주민들속에서는 로반이 저질 석탄만 사들이는데 원인이 있다며 여러가지 설이 떠돌았다. 하루는 보이라실에 가보니 석탄이란게 거의다 돌탄이였고 돌탄이 아니여도 돌탄가루가 가득 섞여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탄광에서도 옛날엔 가려내 던지던 돌탄을 분쇄하여 좋은 석탄에 섞어서 팔기에 자기네도 어쩔수 없단다.     회의때 주건설국장에게“동천열공급소”은 그야말로 검은기업이나 다름없다고 꼭“취디”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제기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해당부문에서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좋은 석탄 500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니 많이 나아질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주민들의 원성에 ××시장이 직접 우리 구역에 와서 시찰하고 상황이 악렬하다는것을 확인하였다. 그런후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정황이 좀 나아졌는데 어느새 음력설을 지나 봄이 오고있었다…이듬해인 2012년에는 마침내 연길시열공급소에서 대리경영하게 되였는데 그런대로 과동할만 하였다….     그런데 올해 또 문제가 생긴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급시우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주민구역에 내려와서 실제조사를 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기에 주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박절하게 해결이 요청되던 문제를 해결한것이니 못내 감사하다. 창가에 놓인 컴퓨터에 마주앉으면 솜바지를 입고 솜을 놓은 슬리퍼를 신고도 무릎이 시리고 발이 싸늘하던것이 인제 썰렁하지 않으니 만족해야 할것이다. 이 며칠 보기조차 싫던 스팀에 자주 손을 대보며 확인하군 한다. 이미 온이상 달아날수 없지만도 말이다.     알고보면 연길시내 곳곳에 난방문제로 시끌벅적하다. 열점문제가 아니면 12319 라는 열선전화를 설치하고 전문 난방문제상에서 제기되는 난제를 처리한다고 하겠는가? 새로 바꾸었다는“영덕열공급공사”에18243337572라는 열선전화를 설치하고 있지만 접수태도는 열정적이였으나 맥이 없는지 아니면“한편”인지 대답은 잘하면서도 실제해결은 묘연하다가 이번에 된통에 걸려서 스팀도 제법 열정을 내고있다.     전번에 지각한 동장군님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오늘은 지각한“설중송탄”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비록 다른 구역에 집들에서처럼 맨적삼바람은 너무 사치한 희망사항이고 온도가 20도에 매달려있지만 재작년처럼 솜바지를 입고 두꺼운 이불속에 옹송그리지 않게만 된다면야 어찌 감사에 린색하랴, 이 한달동안 한번도 오는 기별이 없던 열공님이 이붓아비 제사날 미루듯이 벼르고 별렀더라도 모쪼록 왕림하였으니 감지덕지하지 않을수 없고 내 심정인즉 이웃들의 마음이기도 하리라 믿는다.     스팀에서 “气”를 빼지않은 탓도 아니고 온돌난방을 한 집들에 관도에 무슨 깡치가 들어차서 온기조차 없은게 아니였다. 그동안 관도안에서 두세번 물이 와르륵와륵 소란을 피웠으니 열공님이 오셨다가 가실 길도 막힌것이 아니였다. “공권력”의 힘이란 이런데서 느끼지 않을수 없다. 사회구조속에서 누구나 지켜야 할 사회결약은 이래서 유용한것이다. 개체간의 약속이란것은 고무줄같아서 늘었다 줄었다할수 있으나 사회결약은 그럴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지금 공민들은 옛날공민들이 아니다. 돈을 벌더라도 얼렁뚱땅하가는 큰코 다칠것이니 사회결약이란 어길수 없음을 알야 한다.     아무튼 어느 부분에서 은을 냈는지 모르지만 닭알을 먹어보아서 감각이 좋으면 그만이지 기어이 어느 암탉이 낳은것인가를 알필요가 없듯이 우선 우리 민화사회구역에 사업일군들이 그동안 애쓴것을 알아주어야 할것이요 어디까지나 사회구조속에서 사는 공민으로서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밖에 믿을곳이 더 없음은 사실이겠다. 그 모두에 대한 내 고마움이 이 겨울내내 식지않기를 못내 바라는바이다. 졸문을 마치 고나서“난치팬”을 만져보니 정다웠다. 역시나 겨울엔 따스하고 볼판이다.                                           2013년 11월 17일    
367    카멜레온의 변호 댓글:  조회:7432  추천:1  2013-11-21
                                                             카멜레온의 변호                                             ㅡ 카멜레온의 보호색과 인간의 위장술ㅡ       우리를 중국에서는 변색룡(变色龙)피역(避役)이라고도 하는데 로씨아의 작가인 체호브의《카멜레온》에 나오는 주인공이 곧 우리 선조라고 인식하는것은 한참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 족속들은 공룡시대에 존재했는바 28만년의 서식력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 인도, 소아세아, 남유럽 등지에 널려있는 서식하며 그 종류가 80여종으로서 수자가 방대한 물종이다. 거개 깊은 밀림속에서 살기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이지 않는다.       체호브가 어느 종류을 념두에 두고 썼는지 모르나 우리의 몸빛이 광선과 온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것은 인간들이 말하듯이 그런 량면파적기질을 가져서가 아니라 생존의 본능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폄하할만한 가증한 물종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런 동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고 그로써 인간들의 위장술 특히 탐관들의 고명한 위장술에 대해 발가놓음으로써 다시 평가받고 우리에게 가해진 모독적인 루명을 철저히 시정하려 한다.     기실 아흔일곱번이나 변하는 카멜레온도 있지만 인간들의 변신술에 비하면 큰 무당앞에 새끼무당이다. 위장술에 능한 인간들은 고기술로 현대화한 각종 위장설비를 고안해내여 미래전쟁마당에서의 생존공간을 쟁탈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리고있다. 현대생물위장기술을 생물공정이라 부르는바 생존수단이자 목적이 되고있다.     인간일반이 거개 이중인격을 가지고 살지만 그중에서도 탐관들은 더구나 고명한 위장술을 가지고있다. 그들이 양광아래 저지른 죄악적행각은 권력을 편취한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중 3분에 1은 자신을 한껏 분식하여 위신을 세우고 3분에 1은 관계망으로 수뢰하고 회뢰한 자들이며 3분에 1은 하류적인 풍류여서 술집아가씨들이“정대거(情大哥)”라 부르는 시대의 총아들이다.     그들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의 통속적의미도 모르기에 장기적으로 자기를 분식하여 국민을 우롱한다. 가짜제조술이 남달리 뛰여나서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는게 관례이다. 가짜는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실용적인 경전철학으로 되여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위장대왕들이다. 그들은 눈부신 광환을 한몸에 두르고 조그마한 업적을 더없이 확대하고 각종 매체수단을 동원하여 형상수립을 한다.     그들의 위장술에 우리 족속들이 감탄할 정도이다. 변색속도, 변색수단, 변색밀방 등 면에서 수시로 변색하여 위장하는 우리들마저 혀를 내두르지 않을수 없다. 상급을 최대한으로 숭경하고 최대한으로 충성하며 최대한으로 헌신하며 최대한으로 찬미 하면서 상급의 혜안을 흐리게 한다. 상급의 안색이 청우계이고 벼슬사다리를 오르고 내리는 허가증이다. 그들에 비하면 오츄멜로브는 채진화되지 못한 가장 저급적인 카멜레온에 불과하다.     그들은 일장춘몽같은 부귀영화의 저 끝에 자기훼멸이 기다리는것을 알려하지 않는다. 하긴 광휘로운 형상만 선전되니까 추악한 리면이 스스로 무색해지는것이다. 그들의 위장술에 의해 바른것이 비틀어지고 추악이 아름답게 변하고 비합법적인것이 합법적인것으로 둔갑되며 비정상적인것을 정상적인것으로 포장하고 무리를 합리한것으로 돌려놓으며 진짜를 가짜로 뒤엎어놓고 사악을 정의로 만든다. 그 심리바탕은 탐욕심, 사악심리, 패권심리, 약육강식심리, 오만심리, 요행심리, 위선심리 등이다.        아무리 정인군자연 분장해도 거개 흉금이 좁고 량심이 멸절되여 남을 해치기 좋아한다. 그들의 추악한 몰골은 우리 족속들의 모습에 비해 더 나을것 없다. 날이 갈수록 부패척결의 천균봉이 휘둘러지자 급해맞은 탐관오리들의 위장술은 통용기량이 되여졌다. 그들의 기량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면 가소롭다. 그들은 렴결봉공을 입에 걸고다니는데 공중앞에서 입만 열면 렴결을 주문처럼 외우고 념주처럼 세며 다닌다.     그들은 렴결을 눅거리껌처럼 팔며 다닌다. 그들은 자기에게 무용지물인 수뢰품은 기률검사위원회에 바치여 청렴의 꽃감투를 얻어쓴다. 혹은 일부 금품과 현금을 바치고 더욱 높은 명성을 낚는것으로 구린 뒤를 덮어감춘다. 가짜렴결을 내세운다. 즉 질박한체 분장하는것이다. 뒤주머니는 불룩하지만 절대 사치를 부리지 않으며 늘 질박한 차림새로 공중형상을 수립한다.     남이 보는데서 산해진미를 먹지않으며 좋은 집에 들지않으며 전용차도 부리지 않기에 군중위신이 대단히 높다. 말하자면 착실한 고행승의 역을 멋지게 논다. 그러나 루추한 집안에서 곰팡이 낀 루만금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구멍이 난 양말을 신고 다니기도 한다。그러나 려산의 진면목은 안개가 가신뒤 드러나기 마련이다.     근 2천만원을 수뢰하고도 입으로는 최대의 념원이 운남의 160여만의 빈곤호문제를 5년내에 해결하는것이라고 솔직하게 분식한 성장어른도 있었다.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 1994년 《동방의 아들ㅡ성극걸》을 촬영할 때 그는 렌즈앞에서 우국우민의 모습으로 눈물을 머금고 수를 놓았다.《재해지구 인민들이 고생하는걸 보며 정말 견딜수 없었다. 그들도 엄마아버지가 낳은 사람들이다. 나도 엄마아버지가 낳은 사람이다. 나도 피와 살이 있다. 그들은 정말 고생한다. 나는 주석으로서 한잠도 잘수 없다》라고 강개하고 격앙된 목소리로《동방의 아들》노릇을 그럴듯하게 하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늘《인민이 우리에게 권력을 주었다. 권력은 쌍날검으로서 사업에 리용하는 무기이지만 잘못 쓰면 자기를 해치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훈계하곤 하였다.그러나 그가 챙긴 금액은 4000만원이였다. 얼마나 눈물젖은 유모아인가? 그때까지 광서성의 700만 인민이 가난모자를 벗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탐관들이 고행승을 잘 표방하는데는 우선 군중의 밝은 눈이 두려운것도 있거니와 도적의 목표물이 되여 실질적손해를 볼가봐서이기도 하다. 사실상 많은 청렴한 탐관들이 도적의 손에 의해 들통이 났다.     대탐관들은 위장술이 한계에 이르면 36계 줄행랑을 놓는다. 4000여명의 탐관들이 4천억원이라는 천문수자의 돈을 후무려가지고 잠적했으니 얼마나 위장술이 고명한가? 그 대표적인 인물을 례를 든다면4.2억원이나 해외에 전이시킨 진만웅부부, 4.83억원을 횡령해가지고 국외로 잠적한 여진동, 허국준, 1.8억원을 챙겼다가 총알 받이가 된 김감배 등 탐관오리들은 다 우리보다 그 위장술이 백배로 뛰여난 자들 이다.     그래 카멜레온족속들이 천성적인 본능때문에 더러운 루명을 써야 하는가? 이 문제는 반드시 해명되여야 한다. 그러자면 누구네 마따나 특검을 해야 할것이다. 인간은 자기네들의 가치척도로 모든 동물에 값을 매기고 나름대로 우롱한다. 카멜레온의 변색기능을 모방하여 고안해낸 위장술을 전쟁 마당에 운용하는것은 역시 생존의 수요에서 출발한것이기에 말려낼수 없지만 탐관 들이 탐욕심으로 하여 자기를 위장하는것은 용납할수 없다.     상술한 서술은 본고의 주요내용으로서 얼마든지 더 전개하여 장편대론으로 만들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 지구촌에 보호색을 가지고 생존하는 동물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그래도 위장술에 가장 뛰여난 동물은 고급령장동물이라는 인간들이다. 이는 결코 억지가 아니다. 탐관들은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2007. 10. 5 일  
366    인류가 우리를 미워하고 또 총애하는 이중성격에 대하여 댓글:  조회:7513  추천:0  2013-11-21
                       인류가 우리를 미워하고 또 총애하는 이중성격에 대하여                                                        ㅡ 개의 웅변 ㅡ       열변을 토하기전에 먼저 우리 개씨네 가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이것은 웅변에 군더더기가 아니라 론제를 더 충실하게 론증하기 위한 전제로 될것이다. 인류의 모든 력사와 더불어 동보해 온 전후 사연을 알아야 인간의 이중성격에 대해 론거가 충분하게 통책할수 있을게 아니겠는가?     태초에 노아의 방주에 올라 재난을 면하고 오늘날까지 목숨을 이어오며 번성한 만국의 잡다한 동물들이 이 자리에 모였지만 인류의 력사에서 우리네 개씨네들만큼 친근한 동물은 아마 없을것이다. 신석기시대 이후로부터 인간의 필요에 의해 우리 개들을 인위적으로 개량되여 도움이 될만한 많은 견종이 생겨났고 인간가족의 일원 으로 진화된 우리들이다.     이는 곧 인류가 후세에 전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현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중 인간을 제외한 최강의 동물인 개는 원시늑대로부터 진화됐다는 설도 있고 원시늑대와 전혀 다른 물종에서 기원했을거라는 설도 있는데 초기의 진화는 인간과 접촉이 시작되면서 개로서의 특징들이 나타났을것이다.     현재 개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개의 관계는 15,000년전에 시작되였을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12,000년 전까지 3,000년 동안 늑대에서 개라고 불리는 동물로 진화했다고 한다. 이때 진화된 원시개는 늑대와 다른 특징들을 나타냈다. 그 특징은 늑대보다 체대가 작고 머리는 둥그스름하며 이발도 작고 이발간격이 좁아지고 내장의 길이도 길어진것이다.     그때부터 진화된 개들은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른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견종들이 있었고 인위적으로 개량되는 견종들이 있었다. 인간과 개의 관계도 지역과 문화전통에 의해서 다르게 나타났다. 고대아시아사람들은 우리 개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반대로 이슬람제국에서는 개로 인해서 질병이 생긴다며 깨끗하지 못한 동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였다.     그러나 오래동안 지속된 인간과 개의 관계는 이제는 땔래야 땔수 없는 관계가 되였다. 원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습성을 가졌던 우리 개들은 인간에게 순종하게 됐고 무언가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짖음" 이라는 버릇이 생겨났으며 여러가지 힘든 일을 인간대신 할수 있는 지력상수 개발도 이루어졌다.     예로부터 집지킴이로, 사냥꾼으로 인간의 충실한 조력자였던 우리네 개는 인류의 문명개화발전과 더불어 아주 총명한 물종으로 부상되였는바 최근엔 맹인 안내견, 보청견· 인명구조견까지 되여 그 활동령역을 넓어졌다. 아따, 현대영화에 도 충성스럽고 용맹하고 총명한 개의 형상들로 등장하지 않던가?     호랑이님이 개회사에서 우리 개족속들이 신세를 고치여 사회적위상이 높아졌다는 말을 했는데 아닌게아니라 우리 족속들속에 번신한 류종들이 있다. 주인마담의 총애를 받아 무랍없는 사이로 되여서 침대생활을 하거나 옛날 가난한집 아이들은 꿈도 꾸지못하였던 벼라별 고급음식을 먹으며 금의옥식에 현대적문화 생활을 하는 복받은 귀족파들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앙증스러운 발바리들로서 애완견이라는 미칭을 달고 다녀도 개세계에서는 말등공민이라 할것이다.     물론 집지키개들도 마당한구석에 묶여있던 신세에서 벗어나 잘 먹으며 은빛사슬을 목에 걸고 주인과 산책하는 신세가 되였다. 지금 농촌태생의 개들도 더는 똥개라는 루명을 듣지 않고 자유자재로 살게 된것은 사실이다. 불행하다면 결국 보신탕으로 될 숙명은 면치못하였지만 말이다.     그만큼 주인가족성원들과 동격으로 취급받으며 그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우리 개씨네가 가진 문화적, 상징적의미는 날이갈수록 부연되고있다. 하긴 우리 개들의 위상이 어제 오늘 갑자기 높아진것은 아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우리 개들이 잡귀신, 병마, 요귀 등 재앙을 물리친다고 믿어왔다. 특히 흰개는 이같은 능력외에 집안에 좋은일이 있게 한다는 길상물이 되였며 재난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흰개는 또 무속신화, 저승설화속에서 환생하기 위해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사람들의 길을 안내하는줄로 알고있다. 귀신을 쫓는 개라는 삽살개는 그 명성답게 저승사자를 막아낸다. 이와 함께 소위 집터가 세다는 곳의 땅기운을 눌러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신봉해왔다.    개도 닷새가 되면 주인을 안다는 속담은 우리네 총명과 의리심을 두고 만들어진줄로 안다. 충성과 일러주는 의로운 개들의 이야기도 있고 고대에 조선전라북도 임실군이라는 사람의“오수개”는 들불을 꺼서 잠자던 주인을 구해내여서 의견비(义犬碑)까지 세워졌으며 강원도 원성군 설화에는 호랑이를 물리쳐 주인을 구했다는 개가 등장한다. 최부자네 개무덤 이야기에선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집의  아이를 젖을 먹여서 살렸다는 어미개도 나온다.     한편 사람들은 개와 관련시켜가장 속되고 모독적인 속담들을 많이도 만들어냈다. 례하면 못난 애비에미에게서 못난 자식이 나와도 “개가 개를 낳지”하고 비아냥거리고 어리석고 못난자를 두고“개가 콩엿사먹고 버드나무에 올라가게”로 비유하고 나쁜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경계해도“개를 친하면 벼룩이 옮는다” 는 말로 훈계하고 저들속에 격이 맞지 않는 꼴을 두고도 “개귀에 방울” 이라 비웃어대고 멋없이 우줄렁대는 민충이를 두고 “개잡은 포수”라고 욕하고 행실이 더러운 사람과 다투지 말고 피하는게 상책이라는것을“개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라고 문자를 쓴다.     이런 모독적인 속담을 들자면 점심때까지 들어도 끝이 없을것이다. 그리고 나쁜말에는 꼭 개를 접두사로 붙여서 말하는데 개소리, 개살구, 개방귀같은 소리, 개×같은소리, “개×같은 새끼”“개망나니”,등등이 있고 돈이 행세하는 비틀어진 세상을 개탄해도“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 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입버릇처럼“개같은 놈”“개보다 못한놈” 적의 앞잡이도 충성스러운 우리네 다리에 빗대여“개다리”라고 욕한다.     이렇듯 전후가 다르게 우리 개를 대하는데서 고급령장동물이라는 인간들의 야비한 이중적성격이 적라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단말인가? 그렇게 가장 몹쓸 물종 으로 치부하다가도 여러가지로 몸에 좋다고 하니까 잡아서 탕을 만들어먹으며“보신탕”이라고 간지러운 칭호를 달아주거나 가살스럽게 개고기라 하지 않고 뭐 “단고기”라 이름짓고 오리오리 찢어서 아귀아귀 먹어댄다.     그래 우리 개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것이 억울하지 않으며 불쌍하지 않단말인가? 나는 오늘 이 연단에서 모든 개들을 대표하여 항의를 제기하는바이다. 아마 이 지구촌에서 가장 리기적이고 량면파적이며 간능한 무리는 인간이라 일컫는 사람들일것이다. 배은망덕은 누가 밥먹듯 하는데 우리 충성스러운 개들을 빗대고 욕하니 너무 야비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래 그렇지 않단말인가?     말이야 바른대로 우리 개씨네들이 동물중에서는 가장 사랑받이동물이 되여야 할것이다. 우리 개들은 주인이 가난하다 해서 배반하는 법이 없고 주인이 무정하게 먼곳에 버려도 기어이 주인집을 찾아 천리를 달려오는 덕성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에겐 미담이 많은만큼 덕담만 하자해도 다하지 못할것이다. 욕하겠으면 그저 욕할일이지 정녕 개에 비유하겠으면 개보다 못한 무엇무엇이라고 해야 사리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실 금세의 인간세상에는 우리네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 기지부수이다. 남편이 돈을 잘벌지 못한다하여 외국령감쟁이 품에 안겨 복을 누리는 바람개비녀자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자기를 금이야 옥이야 하고 길러준 량친부모를 모실대신 박대하고 내쫓아 천고불효를 저지르는 개보다 못한 즘생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제옆차기에는 루만금을 쑤셔넣고는 고생고생하는 민공들의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내주기 싫어서 차일피일하거나 아예 주자를 놓는 놈팽이들이나 빈곤현이라는 부끄러운 모자를 쓰고도 최고급호화차에 앉아 재세를 부리는 어르신들, 절은 페해도 방장은 살찐다고 기업은 억망이 되여도 제노릇 단단히 하고 주색잡기에 흥탕거리는 선택된자들, 무재무덕하고 아무능력도 없이 권력방망이만 멋지게 휘두르며 일세영달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네 개들에 비할리유도 없이 더 패덕한 자들이다.     이런 인간들은 우리 개들에게 부끄러워 할줄 알아야 한다. 기시와 천대와 미움과 저주의 대명사로 우리 개들을 천거한 인간들은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콩죽은 내가 먹었는데 네가 왜 배를 앓는가 하는 속담이 이런데 가당한지 모르지만 온갖 추행은 인간이 저지르면서 무고한 개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냐 말이다.     항간에는 개는 똥먹는 버릇을 못고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개들도 현대사회에서는 식성을 고쳐서 별로 똥을 먹지않고도 연명해 간다. 하다면 악습이 고질로 된 사회패류들이나 탐욕병을 앓고있는 탐관오리들의 본성은 고쳐질수 없단말인가? 물론 이건 인간들이 서로 알아서 해결할 일이긴하다. 내 웅변은 이로써 마감하려 한다.                                                              2007 년 10 월 21 일          
365    “승냥이의 강도론리의 실용성” 댓글:  조회:7355  추천:0  2013-11-21
                              “승냥이의 강도론리의 실용성”                                                     ㅡ양의 공소ㅡ       여러분, 내 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저 유명한 쉐익스피어의《가련한자여, 너의 이름은 녀자다.》라는 말을 흉내내여《양이여, 너의 이름은 선량이다!》라고 락인을 찍고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기회에 공소하지 않고 그냥 죽어지내서야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이 시각, 가승속에 서리고 서린 만고의 원한과 분노를 터뜨리렵니다. 모두 짐작하겠지만 불공대천의 승냥이들과의 악연을 말하려는것입니다.     어느 날, 승냥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을 구실을 대느라고 생트집을 걸어왔습니다. 어린양이 자기가 마실물을 흐려놓았다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린 양은 아래쪽에 있었거든요.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였습니다. 아니 강도론리였습니다. 할말이 없게 된 승냥이는 다른 트집을 걸었습니다. 《아, 이제 생각나누나. 2년전에 내 여기를 지나갈 때 네가 여기서 무례한 말을 하였다. 이놈아, 난 잊을수 없다!》하고 억지를 쓰면서 백번죽어도 마땅하다는것이였습니다.     어린양이 2년전에 세상에 나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자 승냥이는《오, 그렇지, 그럼 틀림없이 너의 형님이다.》《대왕님, 저에겐 형님이 없습니다.》《그렇지, 그럼 틀림없이 너의 친구, 아니면 너의 친척들이다. 아무튼 너희들 양들과 너희들의 사냥개, 그리고 너희들의 방목인들은 모두 나를 해치려하고 언제나 나를 죽이려 한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너에게 그 원한을 풀겠다. 》어린양이《그런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하고 따지고 들자《닥쳐!넌 하루종일 종알거렸다. 나에겐 너의 그 죄상을 따질겨를이 없다. 너의 죄상은 바로 내가 너를 잡아먹으련다는 그것이다. 》라고 하면서 무작정 어린양을 깊은산속으로 끌고들어갔습니다.     이 장면은 내가 직접 목격한것인데 로씨야의 유명한 우화자가 끄릴로브선생이 어데서 얻어듣고 그 유명한《승냥이와 어린양》이라는 우화를 써냈던것이지요. 지금도 소학교교과서에서 읽을수 있을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앞에서 언제나 죄인으로 된다 는 비정한 인간사회라는것, 이러한 실례는 력사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것을 까밝히고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력사를 적은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엮어내였습니다. 그러나 끄릴로브선생은 우화로써 인간을 깨우치고있습니다     나의 주인도 어릴때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무도한 승냥이에게 의분을 토하느라 침을 튕기고 정의감이 북받쳐 작은 주먹을  내흔들었답니다. 하긴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과서의 거의 모든 동화들에서 현실이 외곡되여 있습니다. 작은 흰토끼가 저기 사자님의 조부를 우물에 처넣은 이야기, 재빛승냥이를 지혜로 이긴 이야기 등, 권선징악, 인과보응의 동화들에서 지금도 아이들은 약자는 선량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관념을 굳혀가고있습니다. 선량한 약자는 언제건 강자의 악을 전승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주입하려는것입니다.     인간은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선량한 약자의켠에 서있다는 리념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반성할때가 언녕되였습니다. 이런 전통적계몽교육속에서 자신에게 정의의 홰불이 쥐여져있기에 능히 강자를 타승한다는 신념을 잔혹한 현실은 비웃는데도 그냥 기치선명합니다. 동방식의 이런 오도로 하여 인간사회에는 많은 력사비극들이 빚어지지 않았던가요?.     토끼가 풀을 뜯어먹고 승냥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인간세상에서 통합니다.《정의》의 승리는 약자의 환각일뿐이요 희망사항입니다. 중국의 동화교육과 미묘한 대조를 이루는것은 미국의 동화입니다. 중국아이들의 넋을 사로잡았 던《사자왕》에서 사자왕이 한번 포효하면 작은 흰토끼는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는습니다. 이 동화는 동물세계의 잔혹한 진실을 곧이곧대로 반영하고 있지요.     사자왕의 적라라하고 후안무치한 강권변호가 미국의 이미지이며 미국인들의  사유방식이고 인생태도입니다. 세계와 대화할 때 도탄과 핵폭탄을 휘두르며 오직 힘, 자체가 리론의거이며 엄연한 진리로 되고있어 자기네만 세계질서와 자유와 민주, 평화를 지키고 순종하지 않는 나라는 작은나라라도 위협도발이며 세계질서를 파괴한다고 강변합니다.     오직 승냥이만이 승냥이의 승인을 받고 사자만이 사자와 공존할수 있는 이 세계 입니다. 토끼는 승냥이앞에서, 양은 사자앞에서 아무발언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연히《흰토끼》를 흔상하며 최후승리를 믿어마지 않는 민족이라면 사자왕을 숭배하는 대서양건너쪽에 코가 큰 민족앞에서 감히《아니!》라는 말을 감히 번지지도 못할것입니다.     인류의 력사는 인간의 지혜와 예지를 앞세워 벌린 일이 아니라 힘과 힘의 대결로 밀고밀리며 기록한 승패의 력사가 아니던가요? 어떻게 시비하든 자연의 생존법칙인 양육강식, 우승렬패, 이것이 절대지배의 권리로 되여진 인간세계이고 동물왕국이기도 합니다. 국제사회도 법과 도덕, 인도주의, 리성은 단변주의를 내흔드는 강권앞에서는 너무나 창백합니다. 하긴 인간도 역시 역어빠진 동물일뿐이니까요.     오직 힘센자만이《진리》의 외투를 입고 구세주의 월계관을 쓸수 있을뿐이요 정의란 약자의 막연한 기대치이고 언제 부러질지 모를 정신지팽이였을뿐입니다. 인류는 문명을 부르짖었지만 피는 피대로 흘렀습니다. 미국의 이라크침략도 아프카니스탄점령도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도 다 강도론리의 체현이지만 어느 나라도 아니라고 거부하지 못하니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총명한 모략은 문맹자의 손에 있는 핵무기보다 못한법입니다. 지식과 모략이 더는 긴요하지 않으며 정의와 도의가 납함할 자리가 없게 되였습니다. 강자의 론리는 곧“힘의 숭배”입니다. 어느 국가, 어느 민족군체이든 강대해지는 길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다른 말입니다. 엎드려 말하는것은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가슴을 펴고 서서 대방을 정시하며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강대한 문명이 없으면 자유로운 인생이 있을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무차별폭격에도 감히 큰소리 한번 쳐보지 못한 레바논정권이 이를 너무도 잘 보여주 었습니다. 소위《힘》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억제할수 있는 힘이 되고있습니다. 지혜가 정의와 손잡으면 창조를 낳지만 악과 손잡으면 비극을 낳을수밖에 없지요.     눈감고 아웅하는식으로 평화요 민주요하는 미사려구를 흘리며 지구촌 촌민들을 롱락하고있는 미국의 강도론리가 곧 진리입니다. 강자에게는 시행착오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장차도 양육강식의 법칙은 의연히 무수힌 양들앞에 군림할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지혜와 승리를 자랑하지만 철두철미한 악의 실천자로서 웃으면서 살륙하고 파괴하고있으며 기아와 질병을 초래하는 만행을 저지르고고있습니다.     인류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연생산법칙을 문화법칙으로 만들어 그 규범대로 인간답게 살아갈 날이 있을가요? 오직 강자가 되는것만이 생존법보가 된 현실세계에서 사자가 살찌는것은 별로 구애될것이 없지만 만약 돼지나 양이 살찌는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말한 로신선생의 말은 도처에서 실증되고있다. 나는 양이지만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을 향해 웨치고 싶습니다.《인간들아,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라.》                                                       2005년 5월 20일
364    소의 웅변고 댓글:  조회:8422  추천:0  2013-11-21
                                                      소의 웅변고                                                    ㅡ 너무 충직하지 말라 ㅡ        우리 소족속에는 여러종류가 있다. 중국소, 서반아소, 인도소, 조선소 등. 소는 매개 나라에서 부동한 지위를 가지고있으며 부동한 생존상태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인류에 마주하여서도 우리는 부동한 신분을 가지며 생존상태가 부동함에 따라 서 우리의 숙명속에 결정된 결과에로 나가면서 이 세계를 떠난다.     기실 부동한 소들은 부동한 인류의 생존생태를 대표하고있다. 인류와 동물들은 많은 공동성을 가지고있지만 인류가 특유한 성질을 스스로 결정한것에 불과하다. 스페인소는 용사이며 역시 용사와 대결하는 적수이기도하다. 이 각투장에서 각투사와의 박투속에서 결과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결과라해도 싸워야 하는것이 소의 운명이다. 무수한 박투속에서 무수한 상처를 입고 다시 아물어가는 과정에서 소들은 자기들에게 속한 빛나는 생명의 종점에로 나가서 머리를 건뜻 쳐들고 이 세계를 도고하게 떠나간다. 혹시 이것이 용사들의 생존생태일수 있다.     각투장에는 구경군들이 있기마련이다. 그들은 용사들이 죽기내기로 분투하는것도 아랑곳없이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만난듯이 히히닥거리며 생명대 생명의 박투를 흔상한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관심밖인듯싶다. 이런 구경심리는 아마도 중국사람들이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로신선생은 몇십년전에 중국인들의 렬근성인 구경심리를 질타하였다.     인도의 소들은 신의 신분으로 인도사람들의 심목속에 존재한다. 인도인들은 동물숭배심리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에게 부복하면서 저마다 준비한 풍성한 례물을 신우에게 바치면서 영원히 함께 하면서 자기들을 보살펴달라고 빈다. 그들은 언제 어디 서나 신우를 경건한 마음으로 례절스럽게 대한다. 이런 생존환경에서 인도소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큰 거리라도 제멋대로 굼닐고 잠을 자면서 달콤한 꿈을 꾼다. 인도주민들은 감히 소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우리 소들은 어떠한 생존상태에서 서식하고있는가? 젖을 공헌하는 젖소나 살을 공헌하는 고기소들이나 밭에서 힘겨운 고역을 치르는 부림소들이나 모도 일종 노예신분으로 존재할뿐이다.     일컬어 대가를 지불하면 되돌려 받는다고 하지만 우리 소들은 자기 힘에부친 수많은 대가를 지불하지만 얻는것은 오히려 잔인한 학대와 시달림뿐이고 마지막엔 고기를 먹히우고 골수까지 빨리우고만다. 중국의 소로 태여나면 우리의 운명은 이렇 게밖에 더 될수 없는것인가?     전통적인 민속습관에 의해 더 부려먹을수 없을정도로 로쇠해진 소들은 도살장의 소백정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여있다. 중국농민들은 자기들이 애지중지 하던 소의 후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금도 모르고있다. 물론 그들을 탓할바는 아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우둔한 사람을 우리에게 비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실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우리는 늙으면 자기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으며 백정의 손에 끌려갈 때 눈물을 흘린다. 농촌에서 소와 함께 동무해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모를것이다. 우리는 자기 형제자매가 도살된 자리를 지나게 되면 울부짖고 앞발로 땅을 허비며 항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도끼에 머리를 강타당할 때 자기 생명이 끝난다는것을 알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한소리 길게 영각하여 주인과 고별한다. 그리고 최후의 눈물을 땅에 남기고 간다.     중국소들의 정신에 당신들은 감동되지 않는단말인가? 몇천년을 내려오며 숙명을 개변하지 않으며 운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반항하지도 않았고 순순히 자기 운명에 순종한다. 그렇게 인류의 죄악에 종용한다. 모든 동물들이 오늘같은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되고 물종의 쾌속절멸이 이런 종용의 결과일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각은 인류의 극도로 치달은 리기와 포학성을 드러내는것만은 사실이다. 언젠가 인류가 훼멸된다면 자기들이 도살한 수많은 동물들의 최후를 련상할것인가?     큰길에 한대의 자동차가 서있었다. 수소는 소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영각한다. 그러나 암소는 오히려 수소더러 빨리 도망가라고 음머!한다. 《저 사람들은 너의 그 힘센 좆을 빼먹으려 왔단말이다. 이 바보야, 그들이 나를 보는건 근근히 젖을 두어근 짜서 먹을 궁리를 하는거다. 빨리 도망쳐,》     알다싶이 우리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때문에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회피하지 않고 죽기전날까지 근로하고 성실하게 해낸다. 이런 황소정신은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있다. 농경사회에서 우리 소들의 작용은 모두 공인하는바이다. 봉건사회에서도 소도적은 중형으로 처벌했다. 소는 농민들의 목숨줄이였기때문이다. 로신선생이 먹는것은 풀이지만 짜내는것은 젖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다.     후기공업사회에 진입해서 우리들의 지위는 내려가고 운명은 참혹하게 되였다. 우리의 영광의 력사는 이미 력사의 한페지로 넘어갔다. 지금의 아이들, 특히는 성시의 아이들은 밭을 가는 소의 모습을 드믈게 본다. 다만 우리의 젖을 마시고 우리의 고기를 먹고 갈비뼈를 먹고 소가죽구두를 신으면 좋다는것만 알고있다.     누가 력사가 롱담을 할줄 알았으랴!사람들은 갈수록 우리를 잊어버리고 우리에 대해 랭담한 시대가 도래했다. 당신들은 소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수 있는가? 혹간씩 교외의 강가에서나 풀을 뜯을때도 늘 머리를 수그리고 그 순진해빠진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람들은 명리의 싱싱한 풀을 보면 대뜸 눈에 피발이 서서 네죽고 내살고한다. 우리 소들에 비하면 얼마나 포용력이 결핍한가? 우리는 미식을 다투지 않는바 이는 인간들이 미치지 못할바이다. 우리 소들은 수천년을 온순한 동물로 번식해왔다. 우리 는 우둔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사람들에게 지혜의 게발을 주기도 한다. 옛글에《늙은 소는 날이 저믄것을 알거니 채찍으로 때리지 않아도 걸음을 다그친다》는 말이 공연히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우리의 총명에 대한 미담은 많고많다.     우리 소들의 선조들속에서 류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밤새도록 내린 눈이 그치지않고 그냥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 화룡의 신흥동에서 류동이라는 마을로 벼짚을 사려갔던 한 농부가 잔뜩 취해서 발구에 가득실은 벼짚우에 곯아떨어졌다. 그 소는 제오던 길로 고스란히 걷고있었다. 그런데 내리막길에서 주인이 그만 소궁둥이와 발구채사이에 떨어졌다.     그것을 감촉한 소는 걸음을 딱 멈추고나서 뒤발로 주인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앞에 놓고 앞발로 슬슬 밀면서 그 먼길을 걸어왔다. 집대문가에 와서 소는 음머!하고 영각을 하여 안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였다. 남편이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아 근심 하고 앉아있던 안주인이 소의 영각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내달았다.     그런데 짚을 가득실은 발구앞에 소만 눈이 둥그래서 서있을뿐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황황하던 안주인은 그제야 소앞에 눈사람이 누워있는것을 발견했다. 후에 안일이지만 소가 곤죽이된 주인을 앞발로 밀고왔던것이다. 소가 주인을 그냥 깔고넘어가지 않은것은 인성과 통하는 본성이 있었기때문이다. 소들이 죽을 때 눈물을 흘리는것도 인성과 통하는 표현이지만 그것을 류의한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신은 소의 그 맑은 눈물을 본적이 있는가?     우리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본사람은 언제나 촉촉히 젖어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우리는 평생 눈물을 흘리며 사는지 모른다. 바람따라 끝없이 떠다니는 구름도 우리의 속상한 마음을 씻어준적이 없다. 뜨개질하기 좋아하는 찬구들을 내놓고는 절대 대부분의 우리의 눈빛은 성실하다. 아마 이 생명계에서 우리의 눈만이 가장 악의가 없는 눈일것이다. 누군가 소의 눈은 아름다운 눈이라고 감탄했다. 암소이든 수소이든 늙은소이든 햇송아지이든 다 쌍겹눈을 하고 길고 멋진 속눈섭을 껌벅거린다. 세상에는 추녀와 추남은 있어도 추우는 없다. 우리의 정기는 천생 크고 검은 눈동자속에 담겨있다.     우리의 처세철학의 정수는 끝까지 참고 견뎌내는 인내성이다. 이런 고매한 품질 을 인간들은 마구 악용해먹으며 학대하고 지쳐서 쓰러질때까지 부려먹는다. 느러진것은 우리 소들의 타고난 성격이다. 주인이 아무리 급해해도 그냥 그 절주로서 느러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조급함의 의미를 모른다. 우리는 죽는 최후의 시각까지 당당한 모습을 흐트러 뜨리지 않고 뒤걸음치는 실태를 범하지 않는다.     그것을 두고 소들은 이미 마비되였다고 여긴다. 가죽이 두터워서 그렇게 굴뱀이 지도록 아프게 맞아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무반응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은 그저 그렇게 자주맞아서 습관된것도 있지만 맞아도 당연한 동물 이라고 여기는 인간이 우리보다 못한 동물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다.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연약하면 얻어맞고 잡혀죽는것은 동물세계의 영원한 생존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특히 가축으로 길들인 인류의 걸작일뿐이다. 산야에서 자유자재로 사는 들소형제를 감히 깔보고 학대할 용사는 아마 없을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동물들속에서 배제된 특유의 존재로 생각하면서 다른 동물들을 기탄없이 학대하고 희롱질하며 나중에 잔인하게 잡아먹어버린다.     우리의 순결무후함에서 연약하면 얻어맞는다는 인간사회의 도리를 끌어내려는것은 무모한 짓이고 유치한 사유방식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황소정신을 민족정신의 모범으로 삼는것은 백해무익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의 뼈속에 유전된 연약성이 동물 중에 강자로 될수 없도록 결정하였을것이다. 무릇 초식동물은 선량하고 연약하며 육식동물은 포악하고 흉맹스럽다는것을 말해서 알겠는가?     세계 다른 나라 민족들은 범이나. 사자, 표범의 정신을 민족정신으로 표방하고있다. 사자나 표범은 동물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이다. 하다면 그것들 처럼 민족지림에서 제일 강자로 된다음 할일이 무엇인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기 의지대로 지휘하고 략탈하는 일밖에 더 할일이 있는가? 코끼리는 호랑이나 늑대나 악어처럼 전문 다른 동물을 침해하지 않고도 위엄있게 평화롭게 살고있지 않는가?     전하는데 의하면 우리 선조는 원래 천상에 하나의 별로서 옥황대제의 신변의 한 장군이였다고 한다. 반고의 천지개벽이후 대지는 황막하여 아무것도 없었다. 옥황상 제는 소를 파견하여 동서남북방에 각기 한포기의 풀을 심으라고 명령하였다. 우장군 은 풀을 네포기만 심으면 너무 적은것같아서 몇그루 더 심었다. 그런데 풀이 그렇게 빨리 무성해질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우장군이 하늘에 올라가 복명할 때에는 온 천지에 풀로 휘덮혔다. 대노한 옥황대제는 우장군더러 하계에 내려가 무성한 풀을 다 뜯어먹고야 하늘에 올라와 복직할수 있다고 엄명하였다.     왕모랑랑이 그를 불쌍하게 여기여 많은 만두를 아래에 내려뜨려 풀잎에 이슬이 되게 하였다. 소가 아침이면 이슬이 맺힌 신선한 풀을 뜯어먹고 살이 찌라고 돌보아 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소가 앞에 풀을 다 뜯어먹으면 뒤에 풀이 뒤미처 자라나서 영원히 다 먹어치울수 없었다. 후에 한 농부가 풀을 없애자면 아예 뿌리를 뽑아야 후환이 없다고 알려주면서 앞에서 쟁기를 끌어 땅을 갈아엎으면 풀이 절대 다시 자라지 못할것이니 합작하자고 제의했다. 그것도 상책이라고 생각한 우장군은 흔연히 응낙했다. 그렇게 소는 인간세상에 하강하여 인류의 충실한 벗으로 되였다.     그러나 인류의 고도로 발전한 물질문명이 우리 소족속들에게 가져다준것은 무엇이였던가? 살륙과 탐식이다. 우리의 자랑찬 모습은 저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속에서만 볼수 있다. 사람들은 무슨일을 하기싫어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같다고 비아냥거린다. 묻노니 사형장에 끌려나가는 죄인들이 기꺼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는가?     밤낮 지줄대는 실개천에서 얼룩배기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을음 우는것을 보면 산촌의 평화를 표징한다고 감상적으로 말할것이다. 그러나 저기 연집강기슭의 도살장에 한번 와보라. 거기서 터지는 우리 형제동포들의 울음은 영각이 아니라 최후의 시각을 예감하고 하늘 우러러 호소하는 아비규환이다. 참으로 사이비한 동물이 그래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아, 여기까지 설토하고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워 더 말을 이어갈수 없다. 다정다감한 제군들이여, 체대값을 못하고 훌쩍거린다고 비웃지야 않겠지? 죽음처럼 강하다는 인간언어가 만들어졌지만 그말을 만든 사람에게 고역과 죽음을 선물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연극이 벌어질줄 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수천년 인류의 칭송을 받으며 살아온것은 결코 허영심때문이 아니였다는것을 선언한면서 이만 연단을 내리려 한다.                                             2007 년 9 월 5 일   
363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아서는 용기와 그 정신내함 댓글:  조회:7863  추천:1  2013-11-21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아서는 용기와 그 정신내함                                                                                 ㅡ 버마재비의 웅변 ㅡ                우리네 버마재비를를 사마귀라고도 하는데 실팍한것은 록엽이나 붉은 꽃같고 날씬한것은 참대잎 같기도 해서 자고로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아왔다. 그래서 익충의 대우를 받지만 본성이 워낙 흉맹스러워 동족상잔이 비일비재여서 큰것이 작은것을 잡아먹을뿐만아니라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기도 한다.     천하기문이 아니다. 사실 자웅이 교배할 때 암컷은 머리를 돌려 수컷의 대가리를 물어뜯기 시작하여 나중에 옹근 몸체를 다 먹어버린다. 그러나 수컷은 최후순간까지 아무저항도 하지않고 암컷이 하는대로 자기를 내맡긴다. 보기엔 아주 잔인한것 같지만 기실 암컷은 교배가 끝나서 배속에 란충이 형성되기 위해서 대량저인 영양을 보충할 수요가 강렬하기때문이다. 수컷은 미래에 태여날 자기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헌신하는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숫버마재비를 정많은 남편이라고 칭송해 왔던것이다.     인간사회에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으려하니 가당할소냐? 라는 말이 류전되고 있는데원래는《장자ㅡ인간세(壯子ㅡ人間世)》에《怒其臂以当车辙,不知其胜任也》라는 구절에서 기원된것이다. 뜻인즉 버마재비가 앞발을 들어 수레와 맞서려하다이다. 후에 이 말은 개미가 홰나무를 흔들려한다. 달걀로 바위를 치려한다는 말과 같이 자기의 힘으로 안되는 일을 하려한다면 반드시 실패하만다는 뜻으로 쓰이였다.     버마재비가 매미를 잡으려는데 새가 뒤에 서있다 (螳螂 捕蝉,黄雀在后)는 말도 생겼는데 눈앞에것만 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처사를 형용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수레를 막는것을 더없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양거리지만 문제를 더 심각하게 사고한다면 버마재기가 수레를 막아나서는 그 용기와 그속에 숨긴 정신적내함에 대해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싶다.     여러동물님들도 혹시 들은바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신주대지에 흑백이 전도되던 어두운 시기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속에서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는 우둔한 짓을 하는것처럼 《우직한》영웅들이 더러 있었다. 노새선생의 웅변에서 제기되였던 우라극을 비롯해서 고준, 리구련, 림소, 왕신유, 장지신 등 선지선각자들의 장거는 얼핏 보기엔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으니 가당할소냐?와 비슷한것 같지만 그 정신적 내함은 오늘도 인간사회에 슬픈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시간상관계로 장지신이라는 녀선구자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많이도 흘렀지만 지성인들은 지금도 장지신을 칭송하며 기리고있다. 사실 장지신은 사상해방의 선구자이고 진리를 추구한 용사이며 현시대 순도자이며 중화의 딸들의 교오이다. 그의 견해와 주장이 정확하였다는것이 실천에 의해 증명되였다.    …1975년 4월 4일 처절한 비명소리가 중국을 찢었다. 한 미쳐난 녀인, 감옥관리인들이 강다짐으로 땅바닥에 엎어놓고 한자루의 보통칼로 병든녀자의 후두를 찔렀다. 그의 단말마적비명이 울리기전에 그녀는 참을수 없는 아픔에 자기 혀를 깨물어 끊어버렸다. 칼에 찔려 쩍 벌어진 살속으로 3촌나마 되는 불수강관을 무지막지하게 꽂고 실로 마구 꿰맸다.     그 자리에 있던 한 녀간수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만행과 차마 귀로 들을수 없는 처절한 비명에 그만 까무러치고 그후 마침내 미쳐버렸다. 녀병자의 입안에서 뿜겨나온 선지피가 살인자의 손에 가득 묻었고 그 육중한 벽돌뭉치에 20세기 참극의 세절을 력력히 새겨두었다. 이른 봄 4월, 휘몰아치는 바람속에서 살기가 하늘에 넘치고 생명도 정지되고 시간도 정지되였다. 그날 그 시각을 동북은 심양을 기억하였고 세계도 심양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아무일도 발생하지 않은듯이 그렇게 평온하였다. 마치 공기가 흐르는 소리마저 들릴것 같았으리라. 졸도한 녀간수를 끌어내고 다른 회자수들은 죽음을 초개같이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의 눈을 읽었을뿐이다. 이것은 노예제도하에 도살장도 아니였고 일본파시스트의 감옥도 아니였으며 히틀러의 집중영도 아니였다. 곳곳에서 제비가 춤추고 꾀꼬리 노래하는 아주 좋은 형세하의 신주대지에서였다.     이미 정신이 실성된 한 나약한 녀자의 후두를 칼로 짜른 초인성적인 살인마들은 그야말로 세기적인 장거를 하고 그날 배불리 먹은후 그 피가 랑자했던 악착한 손으로  자기 마누라의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지며 인륜지락에 비린 웃음을 웃었을것이다. 그렇게 잔혹하게 학살당한 녀자의 죄명은 림표를 반대하고“4인무리”를 반대한것이였으며 영원히 지지않는 붉은태양에도 흑점이 있다는것을 보아내고 본대로 말한 죄였다. 그리고 20세기 신화의 비리를 꼬집었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자기가 진리를 버릴수 없다고 완고하게 나온것이 죄였고 폭압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웨친것이 백번죽어 마땅한 죄였다.     그렇게 죽어간 장지신, 악형과 시달림에 미쳐난 장지신, 야만적으로 후두를 잘린 장지신, 그렇게 강포속에서 시달린 장지신이 마침내 억울한 루명을 벗고 사상해방의 선구자로, 진리를 고수한 용사로 거듭나는 날이 마침내 왔다. 야심이 량심을 대체하 고 권력이 법률을 총살하고 폭압이 자유를 교살한 시대에는 그들은 천추에 용납못할 이단자들로 락인되였지만 검은 구름은 영원히 밝은 해를 덮어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세상이 밝아지고 시비가 바르게 잡히게 되자 량심적인 수많은 지성인들의 원성속에서 장지신의 고귀한 넋이 해방받는 날이 경축되였고 눈물로 쓴 한수 또 한수의 격정적인 시들이 신주대지 곳곳에서 용솟음쳐 나왔다.                                                              무게                              그녀의 피묻은 머리를                              생명의 천평우에 놓으라                              하여 구차스럽게 살아온                              그 모든 사람들이 무게를 잃게 하라 ㅡ한한(韩瀚)        그렇다. 《력사》속에서는 흔히 대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국계민생에 관계된다고 맹종하지만《소인물》들의 신사상은 홀시되거나 압살당하기가 십상이다. 비천한 농부에게 진리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압도된 실패한 영웅들의 몸에서 선구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사상이 빛발칠수도 있다는것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장지신형의《버마재비》들은 비장한 영웅인물들이며 력사의 어두운 밤에 미약한 빛을 발산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빛이였을뿐만아니라 시대의 진상을 밝혀준 빛이였다.     광란의 년대가 지나서 맑게 개인 새 시기에 태여난 젊은 세대들은 당시의“버마재비들”에 대해 아는것이 별로 없고 또 별로 흥취를 가지지 않는게 보통이다. 허나 그것은 시대의 변천을 말해주는것이 아니라 새 일대의 정신적빈곤을 말해준다. 정신 적빈곤이란 주요하게 력사감의 상실을 의미한다.     력사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간단한 공능은 마땅히 기억이여야 할것이다. 즉 망각을 거절하는것이다. 그러나 력사의 유익한 교훈은 모든 잡물질을 휩쓸어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있다. 수십년전에 발생했던 사건들과 흘렀던 피와 눈물이 색바래지 고있다는것이 이 나라 국민들의 비애일가, 지혜일가? 젊은이들에게는 그 시기의 사사건건이 모두 요순우시대의 신화로만 인식될수 있다.     고준, 우라극, 장지신 등 순직한 시대선각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속에 일원이였고 흉중에 륙도삼략을 품고 민생을 위한 웅심을 품은것도 아니고 그것을 위한 대서특필의 격문을 날린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참사람이 할수 있는 생각을 하였고 참사람이 할수 있는 참말을 하였을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학살되였다.     아직 건재해 있을수도 있는 가해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참회해야 한다. 회억이 없는 참회란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먼저 회억이라도 해야 한다. 오직 회억할줄 알아야 비로소 력사가 있게 된다. 력사를 망각한다면 력사의 비극은 다른 일종 방식 으로 재연될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을것이다. 그 시대는 전제시대여서 그렇다면 지금은 민간사상이 발굴되여야 하고 제때에 건져올려져야 한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진리의 영원한 생명력에 의하여 드디어 세상에 밝혀진 영웅들의 빛나는 사상은 우리들의 견실한 사상의 기점이 되여야 한다. 너무 많은 력사의 징벌을 받았다는것은 슬픈 일이다. 잊혀진 력사는 침중한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버마재비 수레를 막아나서는 그 주제넘는 작동을 그저 망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그속에 담긴 용기만은 긍정해야 하며 인간사회에서 압살되여버린 그 많은《버마재비들》의 불의와 감히 맞서 진리를 신장하고 진리를 견지한 고결한 정신적 내함에 대해 사색하고 자신을 반성해본다는것은 역시 일종 삶의 지혜를 얻는것이요 국민적인 일대 각성이고 진보의 커다란 발걸음이라 할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 모든《우직한 버마재비》들에게 경의를 드리며 기리고 또 기리고싶다.                                                         2007년 10 월 20 일   
362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댓글:  조회:7319  추천:1  2013-11-21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ㅡ 노새의 자탄 ㅡ     여러분, 보다싶이 우리도 말과에 딸린 동물로서 말과 엇비슷하지요? 노새는 어깨높이, 모피색의 균일성 및 목과 엉덩이의 형태에 있어서 말과 닮았습니다. 짧고 두꺼운 머리, 긴 귀, 날씬한 다리, 작은 발굽과 짧은 갈기에 우는소리는 나귀를 닮았지요. 우리들중에서 덩치가 크게 생긴 친구들은 어깨높이가 160~175㎝에 체중이 550~700㎏이고 썩 작게 생긴 친구들은 120~160㎝의 어깨높이에 272~612㎏의 체중을 가지고있답니다.     부끄러운대로 신분을 밝힌다면 우리는 나귀아버지와 말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난 변종이지요. 그러나 나귀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답니다. 우선 우리는 당나귀에 비해 몸집이 훨씬 큰만큼 힘이 무척 세고 성격도 제멋대로입니다. 보편적으로 성질이 온순한 편이지만 꾀도 있어서 불만이 있으면 마구굴어대는 사람들에게 가끔 달려들기도 한답니다. 또한 식성이 좋아서 아무거나 잘 먹고 피부가 워낙 튼튼해서 갑자기 변하는 기후에도 잘 견뎌내며 웬만한 비바람이나 따가운 해볕에도 끄떡없지요. 더운 지역이나 고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작업에 어김없이 우리 노새족속들이 등장하는것도 이런 특성때문입니다.    한편 아버지당나귀의 장점은 튼튼하고 몸은 비록 노새보다 작지만 오랜 시간 물을 마시지 않고도 먼 거리를 걸을수 있고 거친 먹이를 먹어도 여간해서 병에 걸리지 않는것이지요. 다만 우리 노새에 비해 민첩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당나귀는 번식능력아 강하지만 노새네의 가장 치명적이고 선천적결함은 정자가 성숙하지 못하여 후대를 번식하지 못한다는것입니다. 이는 정말 속상한 유전인자입니다. 인간들은 아예 우리를 만들어낼 못된 궁리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물론 우리네와 처지가 비슷한 버새들이 있어서 우리만 홀로 수치스러운 물종은 아닙니다. 버새를 모른다구요? 버새는 우리 정반대로 애비는 말이고 에미는 암당나귀 (한국에서는 별스레 암탕나귀라고 부르더군요)사이에서 난 변종들인데 보다 귀한 잡종들입니다. 우리 노새들보다 체대가  작고 외모는 우리 우리아버지네와 거의 닮은 꼴이랍니다. 체질은 우리처럼 튼튼하나 체격과 참을성에서 우리 노새네보다 떨어지고 숫컷은 전혀 번식력이 없으며 암컷은 혹간 수태하나 새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골충들을 낳기가 십상입니다.     인간들은 머스카니 잡교우세라는 말들을 잘하지만도 버새들은 례외인가봅니다. 그러게 저희들이 만들어낸 잡종으로 인간들속에 부실한 자들을 비유해 버새라고 몰아세우지 않습니까? 결국 인간심리도 변태적이라 할것입니다. 아차, 말이 왕청같이 번져지는군요. 우린 원래 이렇게 물덤벙술덤벙한다니까요,     오늘 내가 이 연단에서 말하려는것은 노새나 버새에 대한 동물학강의를 하려는것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잡종, 아니 변종으로 태여났기에 출신타령이 자연히 많아지고 있습니다요. 왜 안그렇겠습니까? 천리를 질풍같이 달리는 건장하고 날쌔고 총명하고 성깔스러운 말도 아니고 꾀돌이 나귀도 아니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나 말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는 그 비운입니다. 게다가 인간들은 자식을 못낳는 돌계집들을 곧잘 노새라고 폄하하지 않습니까?     한국에 한 시인은 영광스럽게도 우리네 노새를 가송하였습니다. 뭐? 어떻게 가송하는가를 듣고싶다구요. 아따, 그럼 내가 주인의 컴퓨터에서 퍼온 그 시를 한번 읊어 드릴가요? 괜찮게 쓴것같더라구요. 제목이《노새의 길》입니다. 서시만 읊어드리겠습니다. 에헴!                                                  노새야.                                                   새끼도 낳지 못하는                                                노새야.                                                    아무도 없는                                                아스팔트길을                                                   똥 한번                                                제대로 누지 못하는                                                    노새야.                                                털빠진 가죽                                                    등허리로                                                힝힝 우는                                                    노새야.     어떻습니까? 곁에서 듣기만해도 우리네를 동정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상 그렇습니다. 식물학적으로 본다면 농사군들이 콩심은데 콩이 나고 팥심은데 팥이 난다는것은 속일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거시기 싸리긁에서 싸리난다고들 말합디다. 참 답답한 령장동물들이지요.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는것은 섭리가 아닙니까? 그래 싸리긁에서 싸리가 나지 참나무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왜 버새는 말긁인데 말이 나지 않고 버새가 생겨났습니까? 우리 노새는 나귀긁인데 변종이 되였습니까? 하하하!     이런 말은 하나마나 한 말입니다. 결국 애비가 영웅이면 아들도 호한이고 애비가 반동파이면 아들도 개자식이라는 말을 만들어 정치목적에 리용하였지만 말입니다. 우리같은 미물들도 출신때문에 기가 질리고 주눅이 들어서 살아가는데 계급사회라는 인간사회에서야 더 말이 있겠습니까? 하긴 우리와 별로 관계가 없는 까다로운 인간들이 놀탓이지만 나의 늙은 주인량반도 정말 우리네《노새신세》가 되다보니 그 뛰여난 머리를 가지고도 대학문에 못들어가고 지구수리공을 하고있는데 정말 안스럽다는 얘기입니다요.       나의 로주인님의 청년시절 문화혁명인지 광란인지 하던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던데 초기에 담력부란자가 류경이라는 자와 련합하여《애비가 영웅이면 아들도 호한이고 애비가 반동이면 아들도 개자식이다》라는 구호를 내붙이고 반드시 계급로선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떠벌려서 갑자가 명인이 되였다고 합니다. 담력부란자는 1966년 8월 20일 그 유명한 연설에서“뭐 평등, 박애같은 쓰레기를 가지고 말하려면 변소간에 가서 말하는것이 좋을것이다”라고 나발불었답니다.      그로부터 중국의 광활대지에 가정출신을 따지는 악풍이 불어쳤답니다. 그리하여 혁명간부, 혁명렬사, 혁명군인, 로동자와 농민가정 출신의 소위《붉은 오류 (红五 类)》와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와 우파분자 및 그 자녀들을 일컬어《검은오류(黑五类)》로 나누게 되였답니다.     검은분자의 자녀들은 숫제“개종자”로 치부되여 모택동마크도 달지 못하게 하였고 모택동어록도 외우지 못하게 하였으며 홍위병에는 더구나 참가할수 없었다고 합디다. 전국각지에서《검은오류》의 집을 수색하는 행동이 전개되였습니다. 1966년 8월 북경의 홍위병들은 3만호나 작살냈고 상해에서는 10만호를 수색하여 아수라장을 만들어놓았고 일부 지방에서는 “검은 오류”분자들과 그 자녀들을 때려죽이기까지 하였답니다.     례하면 북경의 대흥현에서1966년 8월 27일부터 9월1일 사이에 맞아죽은 사람들가운데 최고년령자는 80세이고 최소년소자는 근근히 태여난지 38일밖에 안된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중 스믈두호는 온식구가 몰살당했답니다. 광서에서는 20일 사이에 3천여명이 도살되였고 호남성의 도현에서는 두달사이에 4천여명이 죽고 핍박에 의해 자살한 자가 300여명이였다.    그러나 그후 간신 진백달이 담력부의《반혈통론》에 대해 질책하고 최고어른도 직접 나서서 유일성분론을 제창하지 않는다고 지시했답니다. 그때 북경의 로동자였던 우라극(遇罗克) 이라는 청년이《출신론》이란 문장을 써내여 담력부란자가 일으킨 력사적풍파인 가정출신이 전도와 운명을 결정하는 기시적인 작동에 대해 무자비하게 비판하였답니다.     그는 글에서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도 개자식이 되여 한대한대 내려간다면 인류는 영원히 해방받을수 없고 공산주의는 영원히 성공할수 없다고 제출했답니다. 그는 중앙문화혁명령도소조에서도 지지하는것이니 자기의 견해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순진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초기에 개잡은 포수로 우쭐렁거리던 척본우가 우라극의 문장을 반당적인 대독초라고 선포하자 사상적선구자 우라극은 체포되였습니다. 당시 담력부란자도 투옥되였으나 통수의 지시에 의해 석방되여 주총리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총리는 락심하지 말고 계속혁명하라는 고무격려까지 해주었답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결과인가요?     1970년 3월 5 일 우라극은 총살당하였습니다. 담력부는 문화대혁명이 끝나서 청운의 길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답니다. 1979년 중앙에서는 우라극을 무죄로 선포하고 명예를 회복해주었지만 그저 그뿐이였지요. 우라극은《초시대적인 리상과 환상》의 대가로 순직하였습니다.     후에《능히 교육해낼수 있는 자녀》라는 복음이 류행되였지만 약탕관을 바꾸었을뿐 약은 실제상 그약이였고 그냥 재탕이였습니다. 겉보기엔 검은 오류분자들의 자녀들에게 출로를 열어준것 같았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원죄를 시인한것이였습니다. 곳곳에서 정치적으로 기시정책이 실시되였습니다. 이 면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아니고는 리해할수도 없었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신은 소외당한 그런 부류의 청년들을 질식시킬만큼 무겁게 짓누른 태산이였답니다.     평등사상이란 기실 중앙의 계급로선과 어긋나는 주장이였습니다. 그러나 고관들의 자녀들은 부모가 번신하게 되면 뒤따라 운명의 신이 미소지었습니다. 그야말로 봉건세습제와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9족이 련루되는 봉건적악습이 지속되였습니다. 절대 계급투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최고지시가 집행되는 한 출신이 나쁘면 출세는 망상일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우라극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거니와 지금은 더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시대의 영웅은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우라극이였고 진정한 맑스주의자였으며 선구자였습니다. 비록 이단자로 혹형을 당하였으나 죽을때까지 굴하지 않고 자기의 리상과 신념을 견지하면서 가장  보귀한 청춘의 생명으로 비장한 주체가치를 실현하였던것입니다.     지금 영웅의 선혈은 언녕 말라버렸고 흥겨운 노래와 춤속에서 숫제 망각되였습니다.《출신론》을 비판했거나 그것의 고무를 받은 사람들은 지금 나이가 50 대 중반이나 60대들이겠지요. 10년의 광란시대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었거나 비판대회의 선봉이 되였거나 닥달당하고 비판투쟁당했던 사람들이 거개 살아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단락의 국민적비극은 잊혀진지 오래되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은 잊는것이 약이라던가요? 그러나 미쳐나는 약을 잘못먹고 발작을 하였지만 약효가 업성지니 일체가 태평영월이 되는 인심이니 무엇을 더 말할수 있겠습니까? 예? 아, 예에ㅡ제목은 자탄이라고 번듯이 달아놓고 몹쓸 령장동물들의 얘기는 웬 뚱딴지냐고요? 중간에 질문할만도 합니다. 리해됩니다. 하지만 우리네 동물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게 누구입니까? 특히 우리같은 노새족속들을 장난삼아 만들어놓고 노새니 버새니 하는 알량한 인간들을 성토하지 않고 누구를 성토한단 말입니까? 사실 오늘 나는 주인의 대변인이 된셈입니다. 속담에 칼도마우에 고기는 베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인이 시키는 일이니 할수 없이 나선것도 있지만 늙은 바깥주인이 노상 아들에게 옛말삼아 하는 얘기를 귀동냥하다 보면 자연히 의분이 생기면서 동병상린이 된것입니다.     인젠 쓰잘것없는 얘기를 그만두라고요? 예예,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노새의 자탄이니 누가 듣기 좋아하겠습니까?                                                           2007년 10 월 17 일    
361    나비의 질문 댓글:  조회:7463  추천:0  2013-11-21
                                                           나비의 질문                                  ㅡ 나비가 꽃을 희롱하는가. 꽃이 나비를 꼬시는가?ㅡ                      녀자를 제일 먼저 꽃에 비유한 천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남자를 나비에 비유한 사람도 그와 대등한 영재라고 할수 있겠다. 나비가 꽃을 찾아왔나? 꽃이 나비를 불러왔나? 라는 노래도 있듯이 꽃이 천생 곱고 향기가 진동하여 나비와 꿀벌이 찾아들게 된것을 꽃의 유혹이라 말할수 있겠지만 그것은 꽃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화간에 제멋에 겨워 넘노며 흥청거리는 나비로 말하면 이꽃 저꽃을 찾아 날아예기에 방탕하다고 비난을 받을만도 하지만 꽃이 아름답지 아니하고 향기로 끌지 않는다면 봉접이 날아들지 않을것이다. 여기서 나비가 먼저냐 꽃이 먼저냐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마치 달걀이 먼저 생겼냐? 닭이 먼저 생겼냐? 아니면 수탉이 먼저 생겼냐? 암탉이 먼저 생겼냐? 하는 재미있는 문제가 제기되기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나비가 꽃을 희롱하는가? 꽃이 나비를 꼬시는가? 하는 영원한 화제거리가 있게 된다.     생물학상 나비는 아름다우면서도 연약한 생화보다 더 연약하다. 나비는 천성적으로 아름답고 자유를 동경하기에 자유자재로 날아예기를 즐기기에 화사한 봄날 일만백꽃을 찾아다니며 화간에서 노닌다. 나비의 생명은 분방하지만 그 꽃다운 생명은 속절없이 짧디짧다. 꽃바람에 취생몽사 한계절이랄가?     호접몽(蝶梦)이라는 전고가 있는데 꿈속에서 나비가 되여 훨훨 날아다니다가 꿈을 깨고보니 여전히 사람이더라는 장자의《제물론 (齊物论)》에서 온말이다. 장자의 호접이란 무엇인가? 장자의 호접은 가볍고 허무한 꿈이였다. 꿈은 어디까지나 깨기마련이다. 특히 단꿈은. 깨고나면 꿈은 꿈이다. 현실과는 넘어설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일컬어 장자의 호접은 그의 일종 정신기탁과 아름다운 념원에 불과한것이다.     나비는 류동하는 꽃이라고 비유하면 틀리는 말일가? 나비는 진실한 꽃떨기보다 더 다채롭다. 꽃나비는 일종 고통스러운 경력을 가지고있는바 육체와 정신적인 승화 과정이라 할수 있다. 여기서 잠시 나비의 공과 죄를 론하지 말자. 층층의 속박속에서 몸부림쳐서 나온 나비는 번데기로부터 진화된것으로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나중에 날아예게 된 꿈날개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비가 꽃을 탐한다고 하는데 나비가 꽃을 탐하지 않으면 꽃은 무엇에 련련한 정을 쏟게 될것인가? 기실 웅성모기도 꽃을 탐하는데 그것들이 꽃을 탐하는 목적은 빨아내는것인데 왕왕 훼멸을 대가로 지불한다고 한다. 달디단 즙을 빨아먹고 기운을 챙긴 숫모기는 그래도 용기부족이여서 수백마리씩 떼를 지어 한마리의 암모기를 맹공격한다. 그 교배욕의 란무속에서 교미하는 놈은 한놈이뿐다.     솔직히 말하면 나비는 자기 생존의 비결이 있는바 추악한 일면을  아름다운 날개 밑에 감추고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근히 나비의 아름다운 외표만 보고 미혹된다. 나비는 농민들이 구슬땀으로 지어놓은 농작물과 록색을 씹어먹는다. 우리 나비네들은 기실 양가죽을 얻어쓴 승냥이보다 더 고명한 기편술을 가지고있는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비네들의 소총명때문에 자기를 망치는바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게 된다. 우리 나비들은 아름답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잡히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며 표본을 만들기 좋아하는 생물학가들이나 소학생들의 손에 잡혀 채갈피속에서 질식해죽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것이다. 혹은 아이들의 손바닥에서 희롱당하며 치욕속에서 죽어버리는 숙명을 타고난 생령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나비는 바람에 말리워져서 청태같은(미이라)가 된 나비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의 교훈은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기쁨을 취하지 말고 내재적 품질을 소중히 여기는것이연만 천생 미물인 나비네는 영원히 이 교훈을 모르고 산다. 어쨋거나 나비는 나비일뿐으로서 천생의 아름다움과 가벼움과 꽃다운 날개짓으로 천지간에 생존하면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것으로 생명을 장식하고있다.     여기서 나비로서의 진실된 고백이라면 우리 나비들에 담겨진 함의는 여러가지로서 녀자애가 나비같다고 말하는것은 칭찬이고 꽃나비같다고 말하는것은 거개 폄하하는것이다. 나비는 너무 많은 희망을 엷은 날개에 싣고있다면 사람들은 너무 무거운 리상을 걸머지고있다. 량산백과 축영대가 나비로 변하고 나비가 샘물가의 나비로 된것은 나비가 이미 일종 정신으로 환각화된것을 의미하는것으로서 천만년의 기탁이다.     우리 나비들이란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재간이란 날줄 아는것으로서 아름다운 벌레일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 심목속에서는 이점이 중요하다. 재래로 탐화봉접이란 말이 있는데 꽃을 탐하는 꽃과 벌이라는 뜻이지만 심층적으로는 나비를 허랑하다고 락인찍고 녀색을 좋아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나비는 남자를 상징한다. 그러나 현실속에 실태를 본다면 진정 재능이 뛰여난 남자는 수수한 나비이고 화려한 꽃나비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버는 남자는 자기 집을 잘 돌보지 않으며 가정에 집념하는 남자는 전도가 없는 나비로 락인된다. 전도를 개척하려면 랑만을 잊어야 하고 랑만적이 되여지면 믿을수 없는 남자로 변하고 믿을수 있는 남자는 무능하다는 평판을 면치못한다.     녀인의 대명사가 아름다운 꽃이라 할 때 개탄할 일이 많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녀인은 화식칸에 들어서기 싫어하고 화식칸에 들어섰다면 부드럽지 아니하며 온순한 녀자는 주견머리가 없는 녀자로 되고 주견이 선 녀자로 되면 녀자의 맛이 없어진다. 녀자의 맛이 있으면 돈을 가랑잎처럼 날리고 돈을 아끼면 류행에 뒤처진 촌아낙네가 되여진다. 류행(패션)에 마음을 놓을수 없다면 마음을 놓게 된후엔 차마 볼수 없는 녀자로 전락하고만다.       지금 한다하는 남자들이 녀자를 텔레비와 핸드폰에 비유하는게 류행이다. 안해는 드팀이 없는 텔레비이고 정부(애인?)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핸드폰이라 한다. 집에 있을때는 텔레비를 보고 문을 나서면 핸드폰부터 챙긴다. 파산하면 텔레비를 팔고 갑부가 되면 무시로 핸드폰을 바꾼다고 한다. 텔레비는 가끔씩 보게 되지만 핸드폰은 손에 받쳐들고 싫증을 낼세라 가지고 논다. 텔레비는 평생 료금을 받지 않지만 핸드폰은 료금이 떨어지면 곧 정지된다.     남자들은 돈이 많아지면 나쁘게 변한다. 지금 항간에서는 이십대 남자는 나쁜것을 배우려고 대기하면서 웃세대들을 바라보며 사랑을 갈망하고있으며 삼십대 남자들은 한창 나쁜것을 배우는중으로서 동세대들을 안고 같은 사랑을 흥얼댄다. 사십대 남자들은 이미 나빠질대로 나빠졌는데 아래 세대들을 안고 지각한 사랑을 노래한다. 사랑의 절름발이라고 하는 오십대의 남자들은 확실하 제일 나쁘게 변해서 제삼대를 안고 몽유병자가 잠꼬대하듯이 얼빤한 사랑을 뇌까린다.     꽃으로 되여진 녀자들에게 충고할 여섯가지 계률이 있다. 나비들이 불어대는 침발린 말을 견뎌내야 하며 부연(敷衍)을 받아당해야 하며 기편을 참아낼수 있어야 하고 낙언을 잊어버릴줄 알아야 한다. 나비들의 낙언은 즉흥시같은것이고 산을 옮기고 바다를 기울일듯한 맹세는 기실 마음의 모래우에 쓰는것이기때문이다.     녀자들이 일단 나쁘게 변하면 돈이 많아진다. 지금은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는 시대이다. 사람들의 가치척도도 비틀어지고 도덕도 금전의 강대한 압력하에 변질되여 상실되였다는것은 더는 론쟁거리가 아니다.     녀자들은 도시의 아빠트창턱에서 시드는 꽃이 될지언정 청산속에 청순한 생화가 되려하지 않으며 자가용속에 인형이 될지언정 자전거뒤의 랑만을 바리지 않는다. 인성이 더없이 추악화 된 시대이며 물질욕과 자극욕에 근시안이 된 이 시대이다.       사람들의 심미관으로는 도저히 접수할수 없는것들이 맹목적인 환호속에 인기를 끌며 이 시대의 주류로 되였다. 현처량모형의 녀자는 촌닭으로 전락되고 심미가치의 렬변에 따라 녀자의 매력은 로출증의 광도와 심도에서 과시되고있다.       물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재래의 내면세계의 아름다움과 전통미를 추구하는 의식은 근근히 수구파의의 념원에 불과하다. 모든 나비와 꽃들이 그런 미적가치 기준을 코웃음치고있다. 녀인들의 순정은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현대녀인들의 순결과 정조관은 먼저 뒤골목의 로류장화들로부터 시작되였고 그것을 더러운 지페로 권장하 면서 시작이자 끝나는 정사에 열불내는 부나비들로부터 가심화되였다.     사람들은 탕녀들이 그렇게 된것은 사회의 핍박이라고 인정하는데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기꺼이 타락했는가를 모른다. 이런 사회비극의 의의는 사람들의 동경심을 격발시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심각한 반성을 하게 하는데 있다. 질서가 무너진 현실이 타락의 리유로 될수 없다. 그것은 자기 기만이고 구차한 변명이다.      육체적욕망이 일단 방종하게 되면 절제하기 어렵다는것은 모두 알고있다. 순간의 쾌락과 금전욕은 사람들을 그 깊이를 알수 없는 타락의 심연에로 밀어넣는다. 선량한 민중들이여, 당신은 이런 시대에 응당 신중하게 자기의 행위준칙을 잘 세워야 한다. 기분이 가정을 말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정욕의 방종은 다만 현세상에 대한 감각을 극대화시킬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인격마저 매몰해버릴것이다.     현자가 아닌 보통인간의 량지는 자발적인것이 아니라 피동적이다. 우리의 고달픈 인생살이가 곳곳에서 시시로 깨우쳐주지 않던가? 현실을 정시하지 않는다면 이 혼탁한 세계에서 미로에 오를수 없다. 도시의 유혹성과 자극성은 저도 모르게 도덕의 방파제를  허물수도 있다. 량지는 우선 생존이 확보된 다음에야 고려되는 문제이지만 감각에 따라도는 현실에서는 선행되여야 한다. 그러니…     할말은 끝난듯 싶은데 마지막으로 시한수를 읊어드리는것로 사의를 표시하려 한다.                                                              꽃과 나비                                             새 꽃을 찾아 넘노는 나비를                         탓해서는 무삼하리오                   꽃은 그래서                         그 자리에서 다소곳이 웃고                       꽃이 피고 지는 사연을                          알아서는 무삼하리오                   나비는 그래서                          오고감이 스스럽다/                       하건만 멋모르는 철새들은                          시들어진 꽃을 두고                   락화의 사연을                          나비에게 묻는다             꽃은 나비를 허랑하다 원망하고              나비는 꽃마다 뭇나비를 꼬신다고 하니         꽃이 방자하냐? 나비가 허랑하냐?              누가 누구를 탓해야 하릿고                                                  2007 년 10 월 10 일            
360    룡토템문화의 력사연원과 가치원소 댓글:  조회:7528  추천:1  2013-11-21
                                   룡토템문화의 력사연원과 가치원소                                    ㅡ만국동물웅변대회에서 한 룡의 웅변ㅡ      예, 말하자면 토템이란 주지하다싶이 미개사회에서 부족, 씨족 또는 씨족적집단의 성원과 특별한 혈연관계를 갖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종류의 동식물이지요. 그러니까 토템숭배란 원시사회조기의 종교형식의 일종으로서 현대시각에서는 별로 가치원소가 없는 원시문화현상입니다.     내가 수천년을 내리 중국사람들의 정신숭배물로 부상된것에 더없는 자부심을 가지지만 기실 토템문화는 력사현상으로서 지구촌이 하나로 된 현시대에 와서는 이미 볼일이 끝난것입니다. 별볼일이 없지만 상상적인 토템ㅡ나 룡에 대해 열중하는 현대국민인들의 시각을 바로 잡아주려는데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스스로 내가 번식한 후대라고 자호하는데 작가 진희는 백사에 룡을 내세우는것은 너무 민족정서에 사로잡힌 정신현상으로서 상상력이 없다는 표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본상징물을 개변시킬 필요는 없지만 토템은 필요없는바 룡을 토템으로 삼는 관념은 약한 민족의 자존심에서 생성된것으로서 가소로운 자비정서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관념은 대단한 애국인것 같지만 나라를 해칠수 있습니다.     사실 나를 토템으로 하는것은 민족성격의 완미화의 상징으로서 일정한 정도로 국민들의 암흑면에 대한 의식을 저애하고 자기발견과 자기의 부족점에 대해 정시하지 못하게 할뿐입니다. 나를 완미한 상징으로 삼고 어떤 비하도 할수 없다는 그런 사유 자체가 두려운것입니다. 학술관점에서 가히 쟁론할수는 있지만 도덕모자를 씌울필요는 없으며 더우기 무한히 끌어올려서는 안될 일이라 사료됩니다.     나는 력대제왕들의 전용부호, 위엄으로 되였는데 살상대권을 가지고있어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였습니다. 그들이 내가 황제를 대표한다거나 내가 중국을 대표한다고 할수 있는가? 기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욕심으로 황제의 표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나를 숭배하는것은 왕권숭배와 순복공구사상의 표현입니다. 이런 왕권미학은 제한성을 가지고있는바 농업시대 민중자신이 자기위안의 령혼이 되였지만 현대 도시생활에서 내가 망각의 언덕에 묻힐 운명을 면치못했습니다.     다만 명절때마다 나의 형상이 현시되지만 국민들의 실생활에서는 곧 퇴출하고있는 형국입니다. 그뿐이지요. 사실 나는 고대인들의 상상에서 나온 허무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재물인것처럼 믿고있는데 민족형상의 상징물로 될뿐입니다. 문화층차에서는 나, 룡이 여러가지 함의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나는 서방세계에서는 일종 사악한 짐승으로 각인되여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나를 토템으로 삼는것에 대해 오해를 사고있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되였습니다. 중국은 력사상에서 휘황하였던 시기도 있고 치욕의 시기도 있었는데 기실 이 룡이 좌우지한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기치는 코끼리와 나귀이지요. 코끼리는 륙지상에서 최대거물이고 나귀는 굴강한 동물이기때문 입니다. 왜 미국사람들은 나귀가 중국사람들의 오해를 살가 근심하지 않는가? 나를 토템으로 하는것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관점은 협애한 민족정서입니다.     지금 절대대분의 국민정서가 나를 토템으로하는 문화현상은 영원히 존속되여야 한다는데 기울어지고 있지만 중국에서 말하는 룡이란 허다한 동물의 다원적인 융합에서 산생된것으로서 서방의(룡, 드래곤-Dragon)은 주요하게 악을 대표하고있는바 패기와 공격성으로 충만되여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내가 선량을 대표하여 공격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화해와 희열의 일면도 있다고 긍정하고있는것입다.     룡에 대한 중,서방의 인식이 부동하게 된것은 주요하게 번역에서 인기된것입니다. (Dragon)은 서방어경에서, 이를테면 성경에서는 모가지가 매우 길고 날 개가 있으며 몹시 흉맹하고 무서운 동물로 묘사되여 제거해버려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중국문화어경에서는 나는 몸이 가늘고 길며 위엄도 있는 길상동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일 처음(dragon)로 번역한 사람은(dragon)가 영어문화권에서의 함의에 대해 리해가 깊지 못하였기에 나를 중국의 룡으로 번역하여 놓았는데 습관상에서 오늘의 정황이 굳어진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의론이 분분합니다요.    중국에서 나의 형상을 정확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단방면적으로 너무 과대하면 교제효률과 실제효과 등 문제에 영향이 있습니다. 나에 대한 중외의 인식이 다르게 된것은 문화결구, 인지결구와 력사침적과도 관련되며 동시에 세계에서 중국의 영향력 문제와도 관련되여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흔쾌히 접수되려면 더깊은 연구와 표현기교가 수요됩니다. 외국인들의 심목속에서 내가 흉악한 형상으로 새겨져있는것을 교육과 선전을 통해 개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내용이 나의 본고의 골자로 되여 심오하게 전개될것이다. 본고의 결말은《이 람색의 지구덩이가 억만겁을 공전하여 일체가 먼지로 변해버렸네. 흰 구름아래 한 소년이 해빛처럼 찬란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남해의 바람 따스하게 불어 오고 동해의 파도 자장가 불러주네. 북방의 삼림과 서녘땅의 격상화(格桑花)는 한 하늘을 우러러 너를 축복하여라.》라는 노래로 맺으려고 합니다.     중국어에“엽공호룡(叶公好龙)”이라는 성구가 있지요. 여기서 엽공이란 누구인가? 엽공은 춘추시기 초나라의 저명한 정치가이고 군사가이지요. 이름은 심제량이고 자는 자고로서 초나라 소왕이 엽읍윤을 하사한데로부터 성이 엽가로 되였다고 합니다. 엽공의 증조부는 춘추 5패의 하나였던 초나라초장왕이였습니다.    어떤 사학가는 류향의《신서. 권5. 잡사》에서 엮어낸《엽공호룡》의 이야기를  다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습니다. 룡이란 신화적동물로서 엽공의 집에 내려올수 없다는것이 론거입니다.《엽공호룡》을 조선말로 풀어말하면“엽공이 룡을 좋아 하다”이지요. 엽공이 어찌나 룡을 좋아하였던지 가구와 실내장식에 전부 룡의도안을 채용했습니다. 심지어 갈구리나 목수도구인 끌같은것도 룡모양으로 만들어썼고 문이나 창틀에도 각종의 룡을 새겨놓았습니다.     내가 이 소문을 얻어듣고《엽공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니 한번 답례방문을 해야 하지.》하고 지상에 내려와 엽공의 집창문에 머리를 쑥 디밀고 《엽공이 있는가?》하고 알은체하였습니다. 평시에 그렇게 나를 숭경하며 좋아하던 엽공은 진짜 내가 래림하자 혼비백산하여《아이구, 괴물이야,》하고 아비규환을 불렀습니다. 내가 어쩌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내가 서운하여《어찌 괴물이라고 놀라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룡이란 말이오.》《어어…내, 내가 좋아한건 가짜룡이지 진짜 룡이 아니오.》하고 말도 마치지 못하고 36계 줄행랑을 놓는게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이 이야기는 나를 두고 엮은 풍자의미가 짙은 우화이지요. 엽공은 력사상 실재 인물이지만 이야기정절은 허구해낸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성구로 굳어진것이 바로 입니다. 우화는 아주 생동하게 엽공식의 인물들을 풍자하고있는바 말은 번지르 르해도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는 나쁜 관념과 작풍을 발가놓고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장이 로애공이 현자를 존중하고 아낀다는 소문을 듣고 배알하러 갔으나 로애공이 례로 대하지 않자 직언하였습니다.《신은 군왕께서 명사를 례로 대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나이다. 백사불구하고 찬서리, 눈바람과 먼지를 무릅쓰고 백사불구 늦을세라 허위단심 찾아왔는데 이레동안이나 만나주지 않으니 임금님의 명사를 좋아한다는것은 엽공이 룡을 좋아한것과 다를바 없나이다.》라고 하소했답니다.     그후 자장은 스승 공자앞에서 로애공을 엽공같은 군왕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실 력사상 엽공이나 로애공같은 인물이 지천으로 널려있습니다. 이 성구는 입으로는 무 엇을 좋아한다고 요란하게 떠들어치지만 실제상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인물들을 비유 한것으로 널리 쓰이고있습니다.       연단에서는 얼굴한번 붉힘이 없이 렴결봉공, 부패척결을 요란하게 고아대지만 연단을 내리면 속이 굴뚝같은 자들이야말로 엽공식의 인물들입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엽공이 룡을 좋아한것과 탐관들이 렴결을 부르짖는 현상은 그 추향이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죠. 이 관점이 본론문의 골자입네다.                                                                                        2007. 10。 5  
359    동물왕국 “계급분석”초고 댓글:  조회:7252  추천:0  2013-11-21
                                               동물왕국 “계급분석”초고                                             ㅡ 매화록녀사의 웅변고 발취록 ㅡ                                        정글법칙에 따라 본능으로 사는 동물계에 계급이 존재한다고 하면 되우 웃기는 얘기가 되는데 조금 비틀어보고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상징적“계급”이 존재하 고있음은 사실임을 알수 있을것이다. 그로부터 인류의 립장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벗인가 하는 금이 그어진다. 누구네 말마따나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인류사회에 지고무상의 통치자가 황제와 황후였듯이 동물계에 룡과 봉황이 이에 맞먹는다. 맞먹는게 아니라 룡과 봉황으로 중국봉건사회의 최고권위자를 비유하였다. 다 알다싶이 력대 중국황제들은 룡포를 입었고 황후는 봉관( 风冠)을 썼는데 이는 룡과 봉황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미신하였기때문이다.     하여 황제의 얼굴을 룡안이라 하고 황제의 풍도를 룡장(龙章)이라 하고 황제의 보좌를 룡기(龙椅)라 하였으며 황제의 자손들을 룡손(龙孙)이라 하였고 황제가 죽으면 룡어빈천(龙御宾天)이라 하였다. 황제가 있으면 그 아래 재상이 있기마련이다. 동 물왕국에서 코끼리(大象)는 재상(宰相)급이다. 중국장기로 실증할수 있는데 검은장기쪽은 상(象)이라 하고 붉은쪽은 상(相)으로서 권력이 상등하고 급별이 같지 않는가?    코끼리가 재상은 재상이로되 문관이다. 무관은 호랑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군대속에서 용맹한 장수를 일러 호장(虎将)이라 하지만 구장(狗将), 묘장(猫将)이라 하지 않는 도리가 이에 있다. 이것은 륙군에 해당되는 말이다. 수군(水军)에서 게(螃蟹)가 장군급이고 새우(虾)는 병졸이다. 그래서 한어에서 새우병사 게장군(虾兵螃将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것이다. 이들은 다 통치계급진영에 속한것들로서 인류사회에 비유하여 말하면 제국주의자들에 해당되기에 극단적인 “반동파, 계급의 적”들이다.    소와 말은 인류사회로 말하면 빈하중농계급에 속하는 로동계급으로서 인간사회에 서는 혁명의 주력군이지만 동물세계에서는 룡과 봉황, 코끼리와 호랑이를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킨적이 없다. 소와 말로 진화하면서부터 수천년을 고역에 시달리다가 잡혀먹히는 운명을 면치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중국의 구사회에서 빈하중농은 우마보다못한 생활을 하였다고 소고대회에서 성토하군했다.     말은 몸값이 소보다 고귀해서 흔히 자연사로 일생을 마치는지 모르나 인간세계에 우공(牛公)의 운명은 인간사회의 고도의 물질문명과 농업기계화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걸어다니는 료리감으로 전락되여 무시로 도살의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는 역축을 제멋대로 잡아먹으면 “역축도살죄”로 옥살이를 하였으나 지금은 농우로가 아니라 고기소로 전락되여 수천년 영광의 력사는 다시 돌아올수 없게 되였다.     제천대성 손오공의 후손들인 잰내비(원숭이)들의 경제지위나 혁명에 대한 태도로부터 분석한다면 “류망무산자”에 근사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지에 자기들의 비밀조직이 있는데 례하면 “화과산”은 유서깊은 아지트에 해당한다. 그들은 산을 차지하고 왕으로 자칭하고 있기에 동물세계에서 문제거리 군체이다. 그러나 천균봉을 휘두르며 옥황전을 들부시던 로선조인 손오공같은 반란정신은 유전되지 못했다.     개미는 무슨 계급에 속하는가? 개미는 한어서 말하는 의민(蚁民)으로서 인간사회에 민초들에 해당한다. 문화적으로 말하면 “군중”이라 할수 있는데 동물세계에서는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하였다. 천리방둑도 개미구멍으로부터 무너진다. 개미가 태산을 옮긴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전설에 불과하고 동물세계에서“정치체제”를 개혁할 사명이 있지만 자질이 차하다. 동물세계에서 말하면 대부분 “문맹”들이다.     꿀벌의 계급성분은 비교적 복잡한데 계급분화가 엄중하다. 절대다수 로동벌들은 진종일 꿀을 빚느라 백리길도 마다하고 일하는데 왕벌을 비롯한 극소수의 벌들은 세화변질되여 놀면서도 왕장만 먹으며 성유희로 일생을 즐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로동벌들이 한 여름 빚어놓은 꿀을 인간들이 자꾸자꾸 짜내다보니 벌들은 사탕물이나 먹으며 연명해야 한다. 비록 인간들이 근로의 대명사로 꿀벌을 내세웠지만 그게 다 눈가림을 하는 미사려구일뿐이다.     동물세계의 계급분석에서 쟁의가 가장 큰 동물은 개이다. 인간사회와 밀접한 련대성을 가지고 있는 개들에 대한 평가는 중외가 불일치한데다가 현대에 와서는 평가기준이 더구나 모호해졌기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동양에서 개(때론 견공이라 존칭하지만도) 전통적관념상에서 좋은 물건으로 간주되지 못하였다. 한어에 “狗东西”,“狗崽子”라고 하듯이 우리 조선말에도 개종자, 개물건짝, 개는 똥먹는 버릇을 못고친다 등등의 지극히 광채롭지 못한 표현들로 개들을 폄훼하는것이 관습으로 되였다.     듣자니 서방의 선진국들에 개들은 언녕 똥먹는 버릇을 비롯하여 개성(狗性)을 고쳐서 애완동물로 둔갑하였다. 하여 전문 특식(통졸임 등 특제개식품)을 하고 나들이나 하면 비단조끼를 입고 번쩍거리는 개사슬에 매여 꼬리를 흔들며 거들먹거릴수 있다. 그러다보니 기기괴괴한 잡종일수록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미련사“(美联社)”의 2013년 6월의 전자신문에 의하면 “뉴욕의 개들은 그들의 주인과 동등하게 복리를 향수 할수 있다”고 한다.     사람과 같이 고급승용차에 턱하니 앉아 시내돌이를 할수 있고 전직변호사를 부릴수 있으며 전담의사를 둘수 있고 형상설계를 할수 있기에 미용미발은 물론 발톱미용도 할수 있다고 한다. 류행감기를 내놓고 류행이라면 죽기내기로 따르는 풍조로 말미암아 여기 중국에서도 이면에서는 크게 후진국으로 만족하지 않고있는 실정이다. 우습지도 않게 서양의 개들은 구권(狗权)만 수호할뿐만아니라 인권도 누리고 있단다. 물론 동양의 여러나라들에서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각국의 국정, 인문환경에 따라 똑같을수는 없다. 아무튼 현대개들은 환골탈태는 못했지만 신세는 고쳤다.     동물세계에서 양의 계급지위는 비참하다. 양은 약세군체의 대명사로서 인간사회 에서도 마찬가지 대우를 받으니 가나오나 불쌍한 동물이다. 인간이 조작해낸 이른바 띠풀이책에는“나는 자연의 총아, 나는 신뢰하고 신뢰로써 보답받는다. 운명은 나의 용모에 미소짓고 나의 온화한 사랑속에서 만물은 피여난다. 나는 내가 보는 모든것속 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양띠생들을 위로하는데는 그럴듯한지 모르나 양들의 운명에는 아무런 도움도 없다. 여북하면 죄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을 두고“희생양”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겠는가?     돼지는 선조들이 인간들에게 속히워 산을 내린후 렬악한 환경속에서 안빈락도를 즐긴 모순의 집합체와 같은 동물로서 환영은 받되 사회지위는 말째이다. 여북하면 이런 우화가 엮어졌겠는가? 에미돼지가 곧 사람들에게 팔려갈 새끼돼지를 놓고 전통교육을 하였다. “귀여운 내 새끼야. 우리는 이름도 혁혁한 저팔계라는 선조를 두었지만 그게 다 소용없고 차례진 운명은 아무때건 사람들에게 잡혀 료리가 되는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생활을 즐길줄 알아야 하느니라. 비록 칼도마위에서 걸어다니는 료리이나 짧디짧은 목숨대신 잘먹고 늘어지게 자면서 편안한 일생을 보낼수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자신이 숙명을 개변하려 한다는것은 망상이다. 알겠느냐?” 에미돼지는 무식하지만 생명철학의 정수를 장악하고있었다. 참으로 애재애재로다.     시간상 관계로 수백천종의 동물들의 계급성분을 일일히 분석할수는 없으나 동물세계에서 룡과 봉황처럼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다 허상에 불과한것이고 기타 맹수를 비롯하여 인간들의 말처럼 산짐승으로 통칭되는 우리 동물들은 인류와 함께 진화되였지만 결국 인간의 도살대상, 놀이대상이 되였으니 슬프지 않은가?
358    신세기 만국동물웅변고 목록 댓글:  조회:7204  추천:0  2013-11-21
                                    신세기만국동물웅변고 목록                                                          야 조     ※ 소의 유촉: 너무 충직하지 말라 “황소들이 인류의 찬미를 받으며 살게 된것은 허영심때문이였는가?” ※ 호랑나비:   “우리가 꽃을 희롱하는가? 아니면 꽃이 우리를 꼬시는가?” ※ 양의 공소     “승냥이의 강도론리의 실용성” “개고기를 파는데 양대가리를 거는 작법의 현실성을 론함” ※  노새의 자탄: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  버마재비: “감히 수레를 막아서는 용기와 정신내함에 대하여” ※ 개:  “우리도 똥먹는 습관을 고쳤는데 탐관오리들은 본성을 왜 못고치는가?” ※ 원숭이:  “인류가 자기의 선조를 잡아죽이는 잔혹성과 비애를 해부한다.” ※ 참새,    “절개를 론함” ※ 모기: “피를 빨아먹는것은 우리의 생존권리이다.” ※ 돼지: “탐욕스러운것은 우리들뿐인가?” ※ 사슴: “말과 사슴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치는 서한” ※ 비둘기: “우리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전쟁광들에게는 속수무책이다.” ※ 꿀벌: “우리가 빚은 꿀이 략탈당하고 있다.”   ※ 백조: “당신의 젓가락을 놓으라”ㅡ 위기에 처한 일체 동물들의 납함 ㅡ ※ 닭: “원숭이를 혼내우려고 우리를 내거는데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수탉이 액외선전을 하는것은 반대한다.” ※ 개미: “우리는 미물이지만 인류가 우리의 덕을 따를만한가?” ※ 여우: “여우의 교활성과 탐관의 분식” ※ 까마귀: “우리가 골탕을 먹게 된것은 어디까지나 실말을 한탓이다.” ※  승냥이와 이리의 합저 “우리의 생존론리와 면양의 약점”   ※ 숫사자: 훈사, 나를 내놓고 또 누가 왕이 될수 있는가?     “왜 체대가 비슷한 각마(角馬)마가 우리에게 당하기만 하는가?” ※ 코끼리: “인류의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략탈하는 행위를 통책하노라” ※ 커룽양(克隆羊) “만물의 령장들이여, 탐관오리들을 재조하는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 게: “세상에서 우리만 똑바로 걷게 할수 없단말인가?” ※ 뱀: 1 편 “굴절운동의 철리성을 론함” ※ 박쥐: “우리가 동물도 못되고 조류도 못된 연원에 대한 력사적사고”   ※ 족제비:   “족제비에게 닭을 맡긴다는 속담의 내함과 인민이 준 권력문제” ※ 바퀴: “국고에 좀벌레는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가 기름방울을 훔치는것에 신경을 살리는가?” ※ 두꺼비: “지금은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면 우리 족속들도 고니고기를 먹을수 있다” ※ 늙은 쥐: “국고에 큰 쥐는 기실 우리가 아니다.” ※ 거미 : “그믈을 짜는것은 우리들의 생존수단이지 생존목적이 아니다.” ※   “나귀의 철학 석마를 끝까지 찧지 말라.” ※ 노새: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 물고기:  “사람들이 지렁이를 미끼로 우리를 꼬시는 얄팍한 행위를 규탄한다.” ※ 백호왕: “면양이여, 너의 이름은 선량이다” ※ 토끼: “굴앞에 풀을 먹지 않는것의 합리성을 론증한다.” ※ 우물안의 개구리: “우리가 우물밑에 숨는 합리성을 론증함” ※ 고양이: “나의 라태성은 누가 키웠는가?” ㅡ 겸하여 인간사회에서 해당 직능기구의 실직행위를 론함 ㅡ ※ 앵무새: “관원이 비서가 쓴 원고를 읽기와 내가 말을 배우는것의 동일성을 론한다.” ※ 쉬파리:   1. “우리는 세멘트바닥에 쉬쓿는법이 없다.” ㅡ 부패의 온상을 생각함 ㅡ ※ 씨수퇘지: “나를 무책임하게 씨를 뿌린다고 비난하는데 인간들속에는 없는가?” ※ 오리:“각자 걷는방식이 다른 법이다. 모델들은 왜 우리를 흉내내는가?” ※ 까치: “까치둥이를 점령하는 비둘기와 제3자의 가증스러움을 론함” ※ 원과 앙의 합저:     “사회진보는 필연적으로 혼인위기를 자초하는가?” ※ 금실제비:“우리의 보금자리를 략탈하는 인류에 항의한다” ※ 들닭 “탕녀들의 더러운 명성을 왜 우리에게 덮씌우는가?” ※ 매화사슴     “동물왕국계급분석”을 론함 ※ 도마뱀: “우리는 왜 꼬리를 잡히면 재빨리 끊어버리는가?”  ※ 자라:      “ 인간이 자라탕을 마신후 사발을 내려놓고 욕질하는 변태심리를 평함.” ※ 잠자리   “일부 공복들이 하향하는것과 우리가 꼬리로 물을 차는것의 동일한 추향성” ※  고슴도치 “사람들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사람을 찌른다.” ※ 곰  “곰사양장의 비극을 까밝힌다.” ※ 승냥이“우리가 사는 기술은 양가죽을 쓰고 행세하는것이다.”   
357    만국동물웅변대회 개막사 댓글:  조회:6856  추천:0  2013-11-21
                                              만국동물웅변대회 개막사                                                           사회자 청룡         새 세기 세계환경의 날“삼림광장”에서 새 세기만국동물 웅변대회가 열리였다. 주최자인 청룡이 개회를 했다.        《여러분, 모두 조용히 제자리에 착석합시다. 오지 않은 분들은 손을 들어봅시다. 좋습니다. 손을 든 분이 없습니다. 여러 형제자매들, 오늘은 6월 5일, 새천년의 첫세계환경의 날입니다. 목전 사회발전과 과학기술의 비등에 힘을 입어 우리 동물들의 생존환경은 날로 악화되고있습니다. 우리 동물권내에서 절멸되는 물종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류와의 화해로움도 날따라 못해지고있습니다.     이번 웅변대회의 취지는 사람과 사람지간, 사람과 동물지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동물을 보호하고 생태환경을 보호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것입니다. 아래에 백호대왕께서 본기 웅변대회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열렬한 박수로 환영합시다.》    백호대왕이 연단에 나서서 개막사를 읽기 시작했다.   《근간에 인간사회에서 동원이란말이 류행되지 않습니까? 무슨 환영동원대회, 휴식일동원대회, 아름다운 총동원대회 등등, 오늘 나도 한차례 대동원을 하려합니다. 먼저 론문평심위원들의 명단을 선포하겠습니다. 백호님, 청룡님, 코끼리선생, 개동지, 우선생, 이렇게 다섯으로 선정되였습니다.     예, 원래는 군중들속에서 추천한 심사위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만 다음같은 분들에게 비교적 집중되였습니다. 우선 꿀벌입니다. 꿀벌은 력래로 근로치부의 전형으로서 군중형상이 비교적 훌륭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꿀벌중에 왕벌은 만인지상으로 군림하여 날개짓 한번 하지 않고 좋은것을 먹으며 권세를 부리는 가증스러운 독재자입니다. 그래서 민원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만약 꿀벌족들에게 위원지표를 하나주면 자연히 왕벌이 차지할게 아닙니까? 그러면 영향이 좋지않습니다. 그래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뭐 이렇게 한데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을줄 압니다.     원숭이가 당선되여야 한다는 의견도 비교적 많았습니다. 만물의 령장이라는 인류의 선조라는 시점에서는 우선 고려해야 했습니다. 손대성이 천균봉을 휘둘러 옥황전을 들부시지 않았습니까? 반란의 년대에 진두에서 골간작용을 논것은 사실이지요. 허지만 지금은 경제건설시기에 진입하였는데 원숭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올리뛰고 내리곤두박질하면서 제자리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그러구서야 어찌 차분한 정서로 론문들을 심열할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양이 차하고 입을 단속할줄 몰라서 토론가운데서 나온 부동한 의견들을 곧이곧대로 당자에게 불어대면 안정단결을 파괴하는것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뭐라구? 원숭이동생. 의견이 있다구? 이미 결정한것이니 그 의견을 보류해두겠소.     본래 위원들중에 기층대표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추천명단에서 개미가 비교적 조건이 합당했습니다. 우선 개미네족속들은 류종이 다양하고 인구가 많은것입니다. 둘 째로 개미들의 단결합작정신은 입둔이마다 칭송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매우 부지런한 물종들이지요. 그러나 온종일 들랄날락 동분서주하는 개미들은 천생 책을 읽지 않는 성미가 아닙니까?     국내외의 형세에 감감이지만 자신의 문화자질을 제고하려하지 않는데 그중에서 비교적 뛰여난 자를 뽑았대야 웅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 어찌 평의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려밖이였습니다. 당연한게 아닙니까? 후선인명단에 봉황아가씨가 있는데 봉황부부는 일평생 서로 화목하게 백년해로 한다는 미담이 고금에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황부부는 미만한 혼인의 상징물이지요.     하지만 듣는바에 의하면 봉황아가씨가 늙은 부옹에게 시집갔는데 첩을 두셋씩이나 두고도 다른 색을 탐하다보니 봉황아가씨가 요즘은 리혼한다, 자살한다 하면서 동네가 부산스러울 지경이랍니다. 봉황아가씨가 밤낮 눈물로 세수를 하고있는데 무슨 경황에 사회활동에 참여한단말입니까?     다음 오리가 제기되였는데 괜찮다고 할수 있지요. 오리무리속에서 대명인들이 배출된것은 모두 알고있지 않습니까? 텔레비명인인 그 유명한 탕로야(唐老鸭)씨가 바로 그 명인이지요. 뭐라구? 쥐동생 거기서 뭐라고 씨부렁거리는가? 오, 그래 맞다. 늬들 서가네족속에도 명인이 나왔지, 깜박잊었군, 그 미로수(米老鼠)를 말하지?      그건 그렇다치고, 오리형이 최근 피를 화험했는데 현대부귀병에 걸리여 혈지가 대단히 높다는 진단이 나왔다던군. 뭐 피검사까지 할것없다고 봅니다. 저 장군배만 보아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걸을때 뒤우뚱거리는 모양은 정말 못보아주지요. 에헴, 뭐라구? 그에겐 중풍징조가 보인다고 하던데 웅변을 면제시킵시다. 뭐? 그래도 기어이 하겠다구? 그래,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나 론점이 또렷하고 론거가 확실해야 하며 론술이 잘 째야야 하네. 알겠는가?      그다음 쟁론이 있은 인물은 개입니다. 개의 공공형상은 재래로 광채롭지 못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왜 입만 벌리면 개판이니 개종자라니 개가 주인등을 업고 행세한다느니 하는 욕이 쏟아져나오겠습니까? 하긴 발전적관념으로 문제를 보아야 하겠지요. 이 근년에 개신세도 활짝 펴이게 되였습니다. 애완견이 되여진후 그 몸값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개팔자가 늘어지게 되였습니다.     천하디 천하던 개들이 상류사회에 진입하였고 특히 갑부들의 집에서는 고귀한 주인과 함께 먹고 함께 앉으며 현대화고급문명의 향수를 누리니 말입니다. 모두들 거리에서 못보았습니까? 개류행복장점이라든가 개미용원이라든가 개진료소라든가 개병원이라든가 개형상설계쎈터라든가 개변호사라든가 아무튼 개에게 복이 넝쿨째 떨어졌지요. 총적으로 당전 개의 사회지위를 누가 홀시할수 있겠습니까?       더욱 중요한것은 이번 웅변대회경비는 참가자의 머리수에 따라 분담한외에 사회상에서 협찬한 의연금이 대부분인데 개의 공로가 크다는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개도 통이 크게 제주머니를 풀어서 협찬하였는데 자신의 작은 금고를 헤쳤다고 합니다. 경제지위가 정치지위를 결정한다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개에게 한자리 안기는것이 사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예, 당연 하다구요, 되우 감사합니다.     예, 그리고 말이 난김에 하는 말이지만 바퀴벌레 얘긴데요 이전에 중국에서는 “두유랑(偷油郎)”이라고 하면서“사해(四害)”명단에 올렸지요. 그런데 향항에서 거시기 뭐라하는 련속드라마를 돌린후 향항지구에서 기르는 총애물이 되였다더군요. 이번에 바퀴벌레도 협찬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희사입니다. 이에 특히 표양하는바입니다. 뭐라구? 박쥐도 총애물이 되였다구? 그거 참 해괴한 뉴스구만, 난 듣지 못했습니다만.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의 총애물이 된다는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젠장, 여러분은 이런 뉴스를 본적이 없는지? 한집에서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 고양이아씨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정신이 황홀해서 사처로 쏘다니게 되였답니다. 그래서 주인은 부인의 동의를 거쳐 고양이혼인광고를 냈는데 조건이 무척 각박했습니다. 우선 같은해 같은 날에 난것이야 하고 체형이 단아해야 하는데 더욱 중요한것은 응모자는 반드시 총각고양이라야 한다는것입니다. 아니, 날 좀 보지, 말하다 말하다가 그냥 버릇처럼 주제를 떠나서 왜지밭에 갔네그려, 으하하하!     본화제로 돌아옵시다. 앞에 다섯 평심위원가운데서 나는 산중대왕이라 일컬어온터이고 이번 활동의 발기지이자 조직자여서 주임자리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길래 이렇게 한자리 차지했구요, 청룡님으로 말하면 중화민족의 상징이고 토템이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호소력과 영향력이 막강하기에 응당 부주임이 된겁니다.     코끼리어른으로 말하면 거물급이지만 선전과 조직사업을 맡게 되였습니다. 코끼리는 체대에 걸맞게 일처리에서 온당하고 군중위신도 돈독하지요. 이 직위에 적격이라 할것입니다. 우형은 본성이 근면하기에 베끼고 쓰는 등 후근사업을 맡게 되였습니다요. 게다가 어느새 컴퓨터까지 다 배웠다고 하는군요. 꼭 잘할겁니다.     재무과장이야 당연히 개씨가 맡아야 하지요. 뭐라구? 개씨가 웅변을 모른다구? 거야 관계없지, 언제는 내항이 내항을 령도합디까? 개형은 그저 사무실에 버티고 앉아서 전화나 받고 표나 예약하고 돈을 잘 간수하면 되는겁니다. 걱정할것 없다는데두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절대 탐오할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가지고 있는 돈만해도 평생 다 쓰지 못할지경이랍니다.     이 말은 이만하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초심에 참가할 웅변자는 제한되여있지 않지만 5분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장려는 세등급으로 하는데 일등상에 한명으로서 웅변자에게 타이에 열흘 유람을 할수 있게 합니다. 물론 왕복 비행기를 타게되지요. 2등에 2명인데 계림을 닷새동안 유람할수 있습니다. 3등에 3명인데 해남도를 사흘간 유람하는것입니다. 갈때는 공기조절기가 있는 최고급호화뻐스를 타고갈수 있습니다.     부대적으로 설명할것은 어떤 상을 탓던간에 왕복교통비, 주숙비는 대회측에서 전부 도맡는다는것입니다. 그러나 타이에 가서 녀요정을 눈요귀한다거나 안아본다거나 독칸에서 즐기는 비용은 자부담해야 합니다. 웅변에 참가한 모든 웅변고는 한데 묶어서 론문집을 내는데 제목은《신세기동물론문집》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군중의 반영에 의하면 이번 활동이 시작되기전에 벌써 경비를 탐오하는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해구말구요. 회의전 주비위원회에서 엄숙하게 토론한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디 빈입을 다시며 하는 회의가 있던가요? 빈배엔 애국자가 없다지 않습니까? 배부른 뒤에는 노래한곡조 부르지 않고서야 배겨내겠습니까? 아따, 노래가 있으면 자연히 어깨가 으쓱거리지 않습니까?     엉덩이춤에 취하고보면 독방을 청하지 않을수 없을거구요? 독방도 그렇지요, 베게를 안고 잘 멋이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연 아가씨의 배동이 있게 되지요. 배동아씨를 그저 안고만 있겠습니까? 자연히 격렬한 동작이 따르게 마련이 아닙니까?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하하하…롱담입니다. 에헴,      자, 지금부터 웅변을 시작하겠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모실분은 청룡님입니다.                                     2007. 10. 4  
356    궤변술의 함정 댓글:  조회:8629  추천:1  2013-11-18
                                                 궤변술의 함정                                                        진 언       혹자는 궤변술자체가 일종 방법론이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 론증방법임은 사실이나 그것의 근본적특점은 일종 외곡된 론증이다. 궤변술은 무단 (武断)과 다르고 또한 요언과도 다르다. 무단적인것은 근본상에서 리유가 없으며 요언은 무중생유로서 듣기만해도 역겨워진다. 한편 궤변이 론증에서 모종 도리가 있을때 언제나 한무더기의“근거”를 들이대는바 표면상 적지않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궤변술의 특징은 첫째, 겉보건대는 짐짓 정확한 추리수단을 리용하는듯 하지만 실제상에서는 론리규률에 어긋난것으로서 사이비한 추론을 이끌어낸다. 둘째, 무리하고 교활한 궤변론철학의 근원은 상대주의로서 상대주의는 일종 반변증법적인 철학학설이다. 맑스주의의 철학은 상대성속에 절대성이 포함되여있는바 절대는 되돌아와 상대성속에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말하자면 상대성과 절대성은 변증통일관계이다.     궤변론자들이 궤변을 부리는 목적, 방법은 어리둥절할만큼 다종다양하다. 진리가 오직 하나라 할 때 진리를 외곡하고 부정하는 형식은 몇십가지, 몇백가지 심지어는 수천종이라 할수 있다. 연막탄을 뿌리고 슬쩍 숨거나 물을 흐리워놓고 고기를 잡는 수단과 같은 궤변술에 홀리우지 않으려면 궤변수법의 본질부터 투시해야 할것이다.     궤변술의 상투적수법은 일반적으로 모호개념을 쓰는것이다. 즉 론증과정에 궤변론자는 론제의 명확한 원칙을 고의적으로 위반하고 론점을 애매모호하여 알쏭달쏭하고 사이비하게 조작하여 부동한 정황에 따라 부동한 해석을 늘여놓음로써 대방을 미궁에로 끌어들이여 주제를 가리워놓고 모종의 목적을 변호하기에 이른다.     다음 개념을 슬그머니 바꿔버리여 대방의 주의력을 분산시킨다. 즉 론제를 슬쩍 바꿔놓는 수법은 궤변론자들이 가장 잘 쓰는 일종 음모술수이다. 이들이 개념을 슬쩍 바꿔놓는 수법으로선 첫째, 한개 개념의 내함과 외연을 슬그머니 바꾸어놓음으로써 다른 개념이 되게 만드는것이다. 둘째, 다의어를 부동한 개념과 뒤섞어버리는것이다.     셋째, 개념지간의 모종 련계성과 표명되는 상사점을 틀어쥐고 부동한 개념지간의 근본적인 구별을 말살하려 시도한다. 례하면 “해결”과“치유”라는 말을 가지고 크게 문장을 지으려면 이런 음흉한 수법을 쓸수 있다. 넷째, 집합개념과 비집합개념을 뒤섞어놓는 수법을 쓴다. 집합개념이 반영하는것은 한류의 사물의 정체적속성이고 비집합개념이 반영하는것은 한 사물을 조성하는 매개 분자의 속성이다.     다섯째, 론제를 슬쩍 바꿔버리는 수법이다. 궤변론자들은 론증과정에서 고의적으로 론제가 명확해야 하고 동일한 규칙이여야 한다는 잠규칙을 위반하고 슬그머니 론제를 전이시킨다. 론제를 바꾸어놓는 수법이나 개념을 바꾸어놓는 수법은 하나로 련계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론제를 바꾸는 수법은 론제중에서 어느 중요한 개념을 바꾸어놓는데서 잘 표현된다. 궤변론자들이 이런 론리규칙이나 구별점을 몰라서 궤변 부리는것이 아니기에 더 가증스럽다고 하는것이다.     허위적론거를 라렬한다. 즉 고의적으로 론거가 진실해야 한다는 규칙을 위반하며 조작한 례증과 착오적인 원리를 론거로 내세워서 착오적인 론제를 론증하려 시도한다. 우리는 요즘 다른 국토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결말이 우습게도 모호해진 시시비비에 실소를 금할수 없게 된다. 궤변론자들은 이처럼 총명하면서도 간능한 자들이다. 순환론증도 그렇다. 론제의 진실성은 론거에 의해 론증에 의하여 증명되는바 론거의 진실성은 또한 론제에 진실성에 의해 증명된것이여야 한다. 즉 순환론증이다.     사람을 가지고 론거로 삼는수법은 한사람의 품질을 평가함으로써 그 사람이 제출한 론단을 평가해버리는 작법이다. 바꾸어말하면 대방의 품질평가로 론제의 론증을 어물넙쩍 대체해버리는 기량이다. 다음 권위로서 론증하려 하는것인데 어떤 권위의 편단적인 말을 꺼내들고 사람을 놀래우고 기편하려든다. 환언하면 어떤 권위인사의 개별적인 언론으로 론제의 론리적론증을 대체해버리는 술수이다. 권위로서 론증하는것은 사람을 론거로 삼는 수법의 일종 특수한 표현이라 할수 있다.     인신공격법은 론쟁상대를 있는 사실, 없는 사실로 마구 욕질하는것으로 구체적인 론제의 론증을 대체해버린다. 심각하고 공공적인 문제일 때는 어용문인, 어용매체를 리용하는데 우리 여기서는 건국후 문단쟁론에서 이런 악질기량들이 잘 발휘되여 무고한 작가들을 매몰시켜버렸다. 과거도 그렇거니와 자국만이 아니라 어떤 주변국에서 지금 한창인 국사론쟁에 이 수법이 동원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는 론쟁에서 가장 악렬한 작풍이고 지략이 아닌 모략이다.     기계적류비도 곧잘 운용하는데 성질이 근본적으로 부동하거나 혹은 표면상에서 모종 면이 같거나 상사한 두개의 대상을 류비하는데 그로부터 그 중에 어느 한개의 대상에 고유한 성질로부터 다른 한 대상에 고유한 모종성질을 추출하여 론증하려는 수법이다. 이런 기계적류비에 의해 도출된 결론은 보편적으로 믿을수 없다.     편면적인것으로 전부를 덮으려는 알량한 수법도 있다. 즉 불충분한 조건으로 전면인양 우겨댄다. 마치 나무의 어느 가지가 병들어 말라죽은것을 보고 옹근 나무가 죽는다고 고아대는격과 같다. 원래 론쟁의 시발점이 되였던 론점을 증명할수 없을 때 슬그머니 순환론증하면서 론점을 바꾸어 가지를 쳐놓고 그게 간파되면 다른 론점을 끌어내고 그렇게 부단히 론증이라는 나무에 고의적으로 곁가지를 무성하게 뻗치면서 원줄기ㅡ원쟁론의 시점이 묻히게 한다. 궤변론자들은 단매에 쳐죽이고 싶을만큼 그렇게 교활하고 악랄하고 악착스럽다.     총체상에서 말하면 궤변술에는 늘 착오적판단이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착오적판단이 궤변이라고 말할수는 없다. 하나의 고립적이고 론리적모순을 가지지 않은  착오적판단은 객관실제에 부합되지 못할지라도 궤변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착오적판단을 론제로 내세우고 정확하다고 론증하려 기도하거나 혹은 그것을 론거로 삼으려할 때 기타 판단이 정확하더라도 궤변으로 된다. 이런 철학이야기가 있다.     “ 너는 무엇을 배우려느냐?”      어떤 청년이 천산만수를 넘어 대서양의 버무다군도의 삼각해역중에 한 작은섬에 이르러 거기에 은거하고있는 철학가에게서 심오한 지식을 배우려 하였다. 청년이 철학가에게 자기가 온 목적을 얘기하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들었다. 이 철학가는 원래 궤변술대사였는데 몇마디 안짝에 청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다.     철학가: 너 지식을 배우고싶다지?     청년: 그렇습니다.     철학가: 그러면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들을 배울생각이 있냐?     청년: 아니요. 나는 이미 알고있는것은 배우고 싶지않습니다.     철학가: 음,그러면 너는 네가 알지못하는것을 배우고싶다는거지?     청년: 그렇습니다요.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것을 배우려합니다.     철학가: 만약 네가 말이 있다는것을 전혀 모른다면 말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을 할것이냐?     청년: 아니요. 말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을수 없습니다. 철학가님, 나는 말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세상엔 확실히 말이라는 동물이 존재하니까요     철학가: 잠간, 내가 무엇을 물으면 무엇을 대답하라, 화제를 딴데로 돌리지말구 내가 다시 묻도록 하라. 만약 네가 버무다삼각해역에 하나의 신비한 작은섬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그 섬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냐?     청년: 나는 내가 근본 모르는 작은 섬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없습니다.     철학가: 만약 태양계의 작은 별에 한 외계인이  “외계인이 만든 소행성”을 가지고있는데 이 소행성은 네가 당연히 모를것이다. 너는 이 작은 소행성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느냐?     청년: 아니요. 나는 그것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을 가질리없습니다.     철학가: 그렇다면 네가 알지 못하는것이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란 말인가?     청년: 그렇습니다.     철학가: 금방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은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너는 또 네가 알지 못하는것도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지? 사물은 어디까지나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 혹은 네가 모르는것도 례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네가 배울것이 없니라.    청년: 예? 정말 그렇단말입니까?       철학가: 만약 배울것이 없다면 여기까지 찾아와서 뭘한단말인고?       철학가의 궤변술에 미혹된 청년은 구경 무엇을 하려왔는지 알둥말둥해졌다.    이 철학가야말로 개념을 슬쩍 바꾸어놓는 마술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하다면 이 철학가는 무슨 “마술”로 먼곳에서 온 청년을 함정에서 헤여나올수 없게 하였는가? 기실 철학가가 화두에서 제출한 세번 물음과 청년의 세번 대답에서 가히 엿볼수 있다. 그들의 처음 토론문제는 “너는 네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는가 없는가인데 이 문제에는 실제상 두개의 작은 문제가 포함되여있다.” ① 네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은 존재하는데 너는 이미 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장악하고있기에 배우고싶은가? 생각이 없는가이다. ② 너는 모종 사물이 존재한다는것을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너는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아직 장악하지 못하고있는데 배우고싶은가? 아니배우고 싶은가이다.     첫번째 물음에 청년은 부정하였고 두번째 물음에는 긍정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대담에서 두사람이 사용한 “것”이 표달하는것은 모두 “지식”의 개념이다. 그것을 알고있는 철학가는 뒤미처 세개의 가정구(假设句)형식으로 “너는 네가 아직 알지못하나 존재하고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원래의 토론문제를 슬쩍 바꾸어버린것이다.     이에 청년은 부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철학가는 다시 “이제 금방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이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너는 또 네가 알지 못하는것도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지?,”라고 옥죄였다. 이역시 개념을 바꾸어 버린것이다. 본래“것”이란 단어가 앞에서 표달한것은 “지식”인데 여기서 철학가 그것을“사물”로 표달되는 개념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이 술수를 보아내지 못하였다. 표면상에서 보면 세개의 질문구가 뒤섞였는데도 결과적으로 속히워서 긍정적인 대답을 해버렸던것이다.     철학가는“것”이라는 이 불완전명사속에 “지식”과 “사물”이라는 두개의 개념을 들이밀어“고로 그 무엇도 네가 배울것이 없니라.”라는 결론을 내렸고 청년은 철학가의 롱간질에 머리가 어리벙벙해지였다. 서방철학사상에서 헤겔이야말로 궤변론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비판한 철학가라 할수 있다. 그는 일찍“궤변은 흔히 임의의 방식으로 허적인 근거를 빌어오거나 혹은 진짜 도리를 부정하면서 동요를 기도하거나 혹은 허위적도리로 비상히 듣기좋게 작간질하기에 마치 정말인것처럼 여기게 한다.” 《哲学史讲演录》,第2 卷,第7 页》。     헤겔의 이 한단락의 론단은 궤변론이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뒤섞는 특점을 에누리없이 까밝힌것이다. 일상적인 쟁론은 그럭저럭 헛소리나 어거지로 치부해버리고 사실로 밝히게 되여있지만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는 대방의 궤변술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각성을 높여야지 어덩덩해서 대방의 물음을 제기하는대로“옳소, 아니오”하고 끝없이 끌려다니다보면 자신이 제기한 원론도 흐지부지하게 되고 대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만들것이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려는 그 한일념에 매달려 사유가 “단순”해질수 있으나 진실을 덮어버리려고 작정한 궤변론자들은 대방의 순진성을 롱락하면서 문제를 왕청같은데로 끌어가버리고 나중에 원문제가 뒤로 밀리도록 넓은마당에 알짜와 쭉정이를 마구 널어놓는식으로 론쟁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무슨 말을 했냐 안했냐로부터 시작된 문제를 이리저리 비틀다가 하나하나 밝혀지니까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되돌아가서 지엽적인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여론을 호도한다. 뭘 한다는 사람들은 음모술수를 잘 부리는 궤변론자들의 궤변술을 역으로 읽어야 하련만...                             2013년 11월 15일  
355    네편, 내편 그리고... 댓글:  조회:8519  추천:2  2013-11-15
                                                       네편, 내편 그리고…                                                                     진 언       원초적으로 인류는 공생공존하는 우주법계(宇宙法系)생명공동체였다. 류인원들이 날로 똑똑해지면서 철학에서의 2분법을 모르면서도 제일 먼저 터득한것이 네편,내편이였다. 리익분배와 소득물을 수호하기 위한 분쟁과 피비린 무리싸움이 그래서 시작된것이요 네편,내편이라는 의식이 골수에 깊이 아로새겨졌다고 하리라.     소위 편이란 무엇인가? 편짜기의 기본은 자기의 부족함을 타자로부터 빌려와 채우면서 자기가 속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속성이다. 너를 지지한다!이 한마디에 힘을 얻는것은 그가 내편이란 믿음에서 얻어지는 액외의 힘이다. 내편이란 무조건 내가 무슨일을 하건 나를 받쳐주고 밀어주어야 한다.     각기 혼자의 분투로 살아가는 동물들은 내편이 없어 비참하다는것을 모른다. 동족에 대한 기시나 기편이나 음모술수를 모르니까. 비참함이란 동류를 예속시키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에게만 발생하는 심리현상이다. 그 정도로 자신의 힘과 능력을 불신하고 드러내놓고 남을 릉멸할수 있는것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고급령장동물이런가?     더불어사는 인생이라하지만 인생마당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편짜기를 하여 티각태각 다투고 눌러버리고 잡아치우는 실상이다. 항간에서 사람은 곁에 사람이 없는것이 제일 큰 불행이라고 말하는데 곧 내편을 들어줄 사람을 말한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부대끼고 찡내며 살아야 하는 삶살이에서 내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것은 마음의 기둥이되여 속이 든든해짐은 사실이다.     아이때 내편이란 내가 누구와 싸운다고 할때 잘잘못을 따지기전에 일단은 내편이 되여 상대를 함께 패줘야 한다. 이런 기초적개념이 없는편은 내편이 아니다. 아이들속에서 내편이란 곧 동고동락의 친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스운것은 강짜이다. 례하면 “이새끼야,너 웃마을에 ××가 공부도 잘하고 힘도 쎄다구 칭찬했다메? 나쁜새끼, 그래문 왜 그애편에서 놀게지 우리 무리에서 얼쩡거리니?” “내마음이고 내입으로 말하는데 뭔상관인데?”,“이새끼 안되겠다. 우리편에 오지마?…” 코흘리개들의 대결이라도 상식적인 단합이란 원시적덕목도 못가춘 어거지라고 해야 할것이다.     편가르기란 얼만 무서운 편향인가? “누구는 누구와 인제 친하지 않는대,” 하면서 쾌재를 부르는 얄팍한 심통의 아이들도 있었는데 심지바른 애들의 빈축을 샀다. 오히려 대바른 우두머리에게도 조롱당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인가? 편이란 그렇게 좋았지만 한편속에도 똘마니가 있고 발바리도 있었다.     편가르기에서 절친한 친구사이에 신임은 일종 미덕으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한 친구라야 동고동락할수 있는 환난지우가 될수 있다. 또는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더 큰 일을 도모하면서 조직전체의 힘을 활용하는것! 위로도 받을수 있고 앞으로 나아 갈수도 있는 타력이 내편의 힘이다. 내편이 없는 아이는 그야말로 무리잃은 못생긴 새끼오리가 되기마련이였다. 그러나 애매한 욕이지만 빈충맞은“개다리”가 되기보다는 낫다고 할가,     공생공존하며 공동히 번영발전을 도모하는 그런 편짜기는 종래로 없었다. 궁극적으로 편짜기란 어느 사회에서건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 편짜기가 남에게 해를 주는것을 전제로 한다.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을 가진, 타방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로 편짜기를 할수 없다. 그래서 개체간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이든, 국가이든 천방백계를 다해 편짜기에 몰두하였다. 동맹,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세계에서 승냥이 늑대, 이리를 같은 물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물형상구별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두 개과에 속한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개와 노는건 늑대이고 개와 안노는건 승냥이라고 단정하는것이다. 늑대중의 일부는 짝을 못구할 경우 개와도 짝을 짓는데 대부분의 경우 암늑대가 그러하단다. 개는 왜 승냥이와 불공대천이 되였는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개가 있는곳에는 승냥이가 마을입침이 불가능했다. 류류상종도 아닌 이런 현상은 인간사회의 어떤 현상들과 비슷한가?     류혈이 랑자한 인류의 력사는 따지고보면 “편싸움”이였다. 두차례의“세계대전” 처럼말이다. 집단,국가적인 편가르기 시점에서“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수 없다. 어떤 리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는 말을 누가했든 사리에 딱맞는 말인데도 내편이 아니라는 그 한가지 리유로 진실조차 아예 부정해버린다. 그게 지극히 리기적인 편짜기의식이다.     편가르기엔 시비가 없다. 조고의 론리대로 내편이 되려면 사슴도 말이라 해야 한다. 이것은 악랄한 음모이지만 내편의것이면 똥도 된장이 되고 적편의것이면 된장도 똥이 되는판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런걸 이중잣대라고 하던가? 옛날 악명높은 진회(秦桧)처럼 “莫须有”를 내들기도 한다. 나를 따르면 흥하고 나를 거역하면 반드시 망한다고 공공연히 고아대는 귀감으로는 대서양건너 아메리카 양코배기아자씨들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들의 내편, 네편기준은 코흘리개들보다 더 엉터리다.     엄연히 존재해있는 대상물을 가랑잎으로 똥을 가리듯하면서 이데올로기, 편가르기, 조롱하기, 대방에 대한 윽박지르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때문에 하나의 체제로서, 합리적행위자로서의 대방에 대한 분석과 시비기준을 늘 배배꼬는것이다. 이런 식견은 동족끼리의 공존, 단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수밖에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보편적인“인지적오유”를 범하기쉽다. 편가르기의 사람들이 쉽게 당하는 편향오유는 바로 네편,내편을 가려서 내편의 잘잘못은 어물넙쩍 외면하고 상대방의 잘못만을 가지고 공격하며 네가 잘못한것이 인정되면 내가 잘한것으로 으쓱거리는 심태에서 범해진다. 대방이 밉더라도 있는 사실만을 가지고 잘잘못을 가리고 잘못된것은 비판하고 반성하고 잘한것은 치하하는 아량을 가지는것이 세인을 웃기지 않는 민족의 기본자세인것이다.     편을 가를수밖에 없는 이 정글세계에서 편가르기를 두절할수는 없지만 편을 잘 잡아야 한다. 뭐, 줄을 잘서야 한다던가? 물론 동물의 대전에서 왔다리갔다리 하다가 조류도 아니고 쥐도 아닌 박쥐처럼 된다면 행운일수 없다. 물고기가 익사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그러나 편가르기를 잘하는 인간들은 네편내편이라는“탁류”에서 익사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만 “토사구팽”이라는 재수없는 경우같은것이다.     개체가 아닌 집단적이라면 리념으로 네편내편 가르더라도 멀리 풍물을 내다보고 누구와 친해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영존할수 있다. 하나의  진영리념의 충복이면 그 진영을 위하여 극단의 말이나 행동을 하는 꽉막힌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갈등이 마치 임진왜란전의 리조때 동인ㅡ서인의 대립행태가 생각난다. 지금도 당쟁의 흙탕물속에서 음모궤계가 자맥질하고 소위 학자, 혹은 론객들이 편가르기를 부추기느라 신나하면서 대립파에게“莫须有”를 들씌우는 작태들이 멀리서도 가관이다.      돌고돌아서 동족끼리 서로 대결하며 이불안에서 활개치는격이다. 이제는 민족의 화합을 해치는 웃기지도 않는 작태를 그만두고 편을 잘 짜야한다.   비록 리념으로 네편내편으로 갈라졌지만 혈관속에서 흐르는 동족의 피를 속이지 못하고 5천년을 뻗어내린 혈통이 단절될수 없다. 이는 도리가 아니라 진실이요 섭리이다. 분렬은 인위적이였지만 단합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착오적시간에 착오적인 분렬이였고 타자의 착오적롱간질의 악과이기때문이다.  장차 누가 진정한 내편이 될거이고?                                                                  2012년 8월 20일
354    렬근성도 가지가지 댓글:  조회:7932  추천:2  2013-11-10
                                                렬근성도 가지가지                                                              야 조       우리 민족의 렬근성계렬에 남을 헐뜯기라는 몹쓸 근성이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흠을 들추어내여 말하는 헐뜯기란 사람이 집이나 쌓은 물건을 헐어서 내려앉게 한다는“헐다” 와 결합된 합 성어인듯싶다. 어찌되였거나 헐뜯는 목적은 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것으로서 비방, 중상, 류언비어, 날조, 비난, 모독 등 단어들의 어두운 의미를 곁들어 가지고있다.     인간의 본연 혹은 본성으로부터 본다면 헐뜯기와 깎아내리기란 말은 전혀 새로 울것이 없으나 시대와 인문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은 달라진다. 얽혀서 돌아가는 지구마당에서 살아가노라면 남을 헐뜯고 저도 헐뜯기울때가 있고 남을 깎아내리기도하고 자신도 남에게 깎이우기도하는 인생이여서 일종 관습으로까지 되여진 상태다.     예로부터 조선사람의 렬근성을 “독속의 게꼴”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오지독속에 많은 게를 잡아넣어두면 제각기 독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려 한다. 그러나 다른 게가 기어오르는 게를 붙들고 늘어져 밑으로 떨어진다. 독속에서 제각기 기어오르고 붙들고 떨어지고 하는 반복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어느 한마리도 기어나오지 못한다.     현대인의 집단생활에서“독속의 게”현상은 너무나 보편적이여서 일종 인간성으로 되였다. 어려워지거나 불행해지면 입으로나마 위로지만 누군가가 돈을 잘벌거나 벼락 출세하거나 하면 뒤에서 아무튼 흥흥거리며 흉을 본다. 그런 비평균적인 사람을 헐뜯으면 속으로 시원해지는 사이비한 자극마저도 선호하는 이률배반적인 심성이다.      모가 나지않고 둥글둥글 평균치를 이룬 인간으로 공존해야 하는 판에 누군가 그 평형을 깨려할 때 뒤다리를 잡아당겨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사가 시기질투라면 그에서 비롯되여 극에로 나아가서 헐뜯기로, 깎아내리기로 전환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고무상의 황제나 권세가들은 헐뜯을 계제가 못되듯이 생면부지의 사람은 헐뜯을 일이 없거니와 그럴 기회도 없다. 그래서 내주위에서 늘 코를 맞대고 있는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헐뜯기시장이 있게 된다. 그런데 손익관계에 있는 사람에 게만 행해지는것만은 아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픈 심리가 이러한 평형인간층의 뾰족함에 심리장애와 거부감을 느끼는것은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의 체질때문만일가 ?     현대도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류별나게 재능이 있거나, 류별나게 고매하거나, 류별나게 잘되거나, 류별나게 완강하거나, 류별나게 린색하거나, 류별나게 사치하거나, 류별나게 타산적이거나, 류별나게 시비가 분명하거나 등등 평형을 깨뜨린 사람을 거부하고 배척한다. 그래서 자고로 모난돌이 정맞는다는 속담까지 만들어내고 평균을 벗어나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 그런 인간을 지향하고 교육도 줄곧 이 비평형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였던것이다.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과 직관되여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욕을 먼저 내세우는 개체들 사이에 비일비재한 헐뜯기는 일종 삶의방식, 삶의양태 로 리해하면 되지만 흔히 말하듯 세상에 사람값에 못가는 달인들이 따로 있어 우리의 삶은 껄끄러워진다. 그들은 자기과시 혹은 자위(自慰)로 헐뜯기, 깎아내리기, 비아냥, 조소, 고자질, 리간질 등 못하는 수작질이 없고 아니하는 악담이 없다.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인생현장이니 산사람끼리 헐뜯고 헐뜯기우는것은 례상사라 하겠으되 죽은 사람들마저 놓아주지 못하고 헐뜯고 모욕주고 깎아내리는 언동은 헐뜯기 기술에서도 최악이다. 죽은 범은 겁많은 산토끼도 올리타고 내리타며 제멋에 겨워할수 있고 풀숲에 새앙쥐도 찍찍거리며 갉아먹을수도 있다. 인간사회에서 소위“개관정론”에 시시비비가 많아도 죽은자는 말이없기에 기탄없는것이다.     널리 와전되여 비유어로 잘쓰이는 오자서의“부관참시(剖棺斬屍)”가 제시하는바 는 심오하다. 오자서의 사무친 원한으로 자행된 거동을 보고 신포서가 사람을 띄워 너무 지나치지지 않는가고 질책하였을 때 오자서는 심부름군에게“신포서에게 이렇게 전해라. 갈길은 먼데 해가 저물어서 하는수없이 역행하면서 막된짓을 했다고해라” 라고하였다. 후에 “일모도원 (日暮途遠)”은 몸은 늙고 쇠약한데 아직 해야 할일은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더 깊은 의미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진실한 인간상이 어떠하든 이미 고인이 자기네 사람을 개똥녀부르듯 찍어  헐뜯는데 자조(自嘲)도 유만부동이다. 민초들마저 체질화되여 국풍(国风)급의 어경 (语境)으로 되였다는것은 그들을 위해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쇠덩이는 녹쓸기를 자청하지는 않지만 일단 녹이 쓸면 녹이 녹을 청하여 덧얹히고 자기를 갉아먹는 비참한 결과를 빚는다.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현상도 녹이 쓰는것과 같은 도리를 가지고있다. 아무리 반대해도 사실이 그렇고 그렇다.     말그대로 니전투구는 개들이 물고뜯는것을 의미하지만 사람들은 말과 글로 콩이 야팥이야 한다. 거두절미식 인용표로 말꼬리를 잡고 짜드래기나 캐고캐며 사사건건 부정하고 헐뜯는 언론, “아니면 말고”식의, “ㅡ카더라”식의 추측성보도, 사이비한 억측으로 의혹만 제기하고 결국 빈대포에 불과하면 “나는 몰라라”하는 민중을 우롱하기, 그래도 언론인이라고 자아감각은 좋아있겠지만 결국은 하잘것없는 기량일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적대감을 가지고있더라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공정해야 하련만 잘하고 좋은것에는 함구하다가도 무슨 헐뜯을 일이 생기면 꼬쟁이에 뀌들고 닭알에서 뼈를 찾으려하며 없는것은 있고 있는것은 없다는식으로 헐뜯지못해 안달한다. 마치 “넌 힘도 능력도 없어, 공연히…”,“그런데 왜 경계하는데”,“그래도 넌 나에게 위협이 되니까…”라는 억지를 쓴다면 얼마나 기특한가? 대방을 옳게 까밝히려면 좋은것은 좋은대로, 잘한것은 잘한대로, 나쁜것은 나쁜대로 말해야 설득력이 있는데 그저 덮어놓고 폄훼하니“여기 은전삼십냥이 없소”가 되고  스스로 미아임을 폭로할뿐이다,     배우려면 적에게서 배우라는 외국명언이 있던지…적대방이라고 불문곡직 부정하고 비난을 일삼는다면 미래와 그에 수반되는 공영은 없다. 따지고보면 무조건적인 헐뜯기, 내리깎기는 렬등감(콤플렉스라던가)에서 기인된것이다. 단순하게 폄훼해버리 는것이 스스로의 스트레스해소에는 좋을지 몰라도 진실의 료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렬등의식, 피해의식이 헐뜯기괴질이 된것은 결코 자랑할만한 민족성이 못된다. 죽은 풀어져도 가마안에 있지만 모래는 삶고 쪄내도 그냥 모래알이다.     우리 말 사전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올라있다. 례컨대 실정이 어찌되여있든 피를 나눈 동족임에도 평민들마저 한피줄의 평민까지 싸잡아서 조롱과 업신여김, 비아냥과 헐뜯기와 깎아내리기를 하느라 침을 튕긴다면 결국 자기 자신속에 그런 몹쓸 기운을 채워가는 과정으로서 민족대동세계를 열어가는 주체력량이 되기에는 싹수가 글렀다. 남을 헐뜯지 않으면 못사는 민족이 이 지구촌에 더있을란가?      눈딱감고 헐뜯는 리유는 너무 얄팍하다. 대방을 인정해주면 힘을 실어줄것이라는 타산때문이다. 그래서 진실도 아전인수식으로 외곡하고 거짓말하고 터무니없이 깔보는것이다. 언필칭“그러나, 그런데, 하지만…그게 될라나? ”등등의 토를 달면서 잘못되기에만 신경쓰면서 감정분렬을 극대화한다. 그것이 필수적생존수단인가?       지구가 둥근것은 길을 잃은자를 원점으로 돌아올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가? 어떤 사람들은 평행선이 가장 두렵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가장 두려운것이 교차선이라고 생각된다. 부딪침에 자신이 없기때문일가? 속이 궁글어서 헐뜯기에 열중하는건 아닌가? 지구촌을 웃기는 일이 맞는가? 우문에 현답은 있는가 ?                                                   2013년 10월 17일
353    (교육칼럼)듣던중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댓글:  조회:7568  추천:0  2013-11-07
                                             듣던중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최 균 선     최근 교육부에서 소학생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열가지군규(十项军规)”를 내놓고 사회적으로 의견청취를 하고있는데 열가지 규정에서 네번째 규정인즉 소학생의 서면숙제를 전면 취소하는것이다. 그리고 서면숙제대신 체험식숙제를 낼것을 제 창하였다. 다섯번째 규정인즉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어떠한 형식의 통일시험을 치지 못하며 4학년부터 어문, 수학, 외국어는 매학기에 한차례 전교통 시험외 기타 다른 통일시험을 안배해서는 안되며 매과목의 측험은 매학기에 2차를 초과하지 못한다는 것 이다. 여섯번째 규정은 등급평가제를 실시하는바“등급+평어”의 평가방식을 운용 하되“우수, 량호, 합격,대기합격”등 등급으로 평가해 한다고 규정하고 백점제를 전면 취소함으로써 점수를 가지고 옴니암니 따지는것을 피면하도록 하는것이다.     상술한 규정에 대하여 적지않은 학부모들이 현실적이 못된다고 왈가왈부하고 어떤 전문가들은 단칼에 베듯 숙제를 전혀내지 않아서는 안되는바 새규정이 듣건대는 아름답지만 실제 실행하려면 조작이 어렵다고 시야비야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질교육의 일대 진보로서 실험해볼 만하다고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면취소하는것은 너무 리상적으로서 합리하게 숙제를 내는게 좋다고 한다. 아무튼 현재 전국적으로 2억이 넘는 중소학생들의 학부모들은 천층만층이므로 중구난방이다.      근간,《신문완고봉(新闻晚高峰)》의 보도에 의하면 북경, 강소,상해,산동 등 성시들에서 일전 대학시험을 개혁방안을 무르익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있다. 각성시 에서 밝힌 방안중에는 모두 영어시험제도를 개혁의 중점으로 삼고있다고 한다. 즉 “영어시험을 도대체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하는것이다.     산동성에서는 새해부터 영어듣기능력시험을 취소하려 한다하고 강소성에서는 영어시험을 대학시험에서 아예 “퇴출”시키려한다고 전하고있다. 북경에서는 영어점수를 낮추려 한다고 한다. 이런 풍문이 현실로 된다면 영어학원이 충격받을것이고 아이들은 차차 영어복습반이라는 우리에서 벗어나게 될가? 하고 혼자궁리를 굴려본다.     지금 아이들은 지식의 초원에서 방목하는 양무리도 아니고 그저 이 울타리 저 울타리에 옮겨 갇아두는 양무리에 흡사하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장난질에서 원시적창조정신을 키운다는 교육원리가 나온지 오래지만 그것을 진정 믿는 부모들은 많지 않 다. 아이들의 천성적인 본성, 본능을《촌스럽다》고 일축해 버린다. 비오는 날 물레방아 걸어놓고 짝짝꿍치던 향촌의 개구쟁이들속에서 수많은 영재들이 나왔다는것은 결코 낡은터에서 이밥먹던 소리가 아니다.     물론 한창 배워야 할 때 게으름 피웠다면 동경의 미래도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망아지처럼 뛰놀고싶어하는 아이들에게는 배움이 들놀이처럼 신나는 일이 아니다. 배움을 공부(工夫)라고 이름한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준마도 채찍이 발굽을 들뛰게 하듯이 독촉은 어디까지나 필요하지만 독촉이 곧 교육성과로 될수는 없다. 자기민족어보다 영어가 더 중요시되는 사이비한 교육현상에 재빨리 습관되여온 오늘 날 갑자기 영어시험성적이 대학입시에서 뒤로 밀리면 어떤 현상이 생길가?비유컨대 빈절간에 향불피울 사람이 없듯이 만약 무슨무슨 학원이란게 없다면 갈일도 없고 올일도 없게 될것이 아닌가? 달리 가고올데 없으면 아이들은 그냥 학교라는 정규적인“우리”에서 싫든궂든 제공부를 할수밖에 없고 교원들도 미루고 피룰데가 없이 본직업에 더욱 분발하게 될것은 당연하다.     전통적으로 교원을 원예사요 초불이요 인류령혼의 기사라고 하는데 멋진 비유이지만 나름대로 선생이란 망망한 지식의 바다에서 대안을 향해 돛대를 높이달고 원항을 하고있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선장"같다고 하고싶다. 생활의 대해에서 풍랑과 파 도를 경험해보지 못한 철부지에게 폭풍과 격랑의 무서움으로 겁주며 선각자연 위세를 피우는 위치에 그치지않고 엄마가 아이를 젖먹여 키우듯이 바람을 견딜힘 뿐만아니라 폭풍에 맞서 풍랑을 헤치고 나가는 용기뿐만아니라 풍향과 바다길과 물길, 폭풍의 씨줄과 날줄을 세세히 헤아리는 지식과 바람을 비켜타고 풍랑을 올라타는 지혜도 갖추도록 붙잡아주고 이끌어주는 일이다.     이런 일을 게으름없이 일심불란으로 해나가는 선생님이 진짜 선생이고 스승이고 도사이다. 참되고 책임성있는 진짜선생은 학생을 타박하지 않는다. 모르니까 배우러 온 학생들이기때문이다. 배우러 온 학생은 당연히 모른다는것을 전제하고 학생의 인 지정도에서 나올수 있는 언어로 학생이 리해하도록 설파하며 한걸음 한걸음 지식의 고봉에로 손잡고 올라가는 선생이 훌륭한 선생님이다. 깨우침이 늦다고 타박하는것은 진도가 중요하고 시간이 급한 지식장사군에 다름아니다.     이런 훌륭한 선생님들이 정규교육의 전연에서 알심들이고 있는데 무슨 빈틈이 있기에 사교육이 비집고 들어서게 되였을가? 사교육이 갓류행될때는 무슨무슨 써클이라 하였는데 차차 과외보도반, 복습반으로 번졌다가 지금은 정규중소학교를 초월 하는 “학원”으로 격이 높아졌다. 아이들마따나 학교교원이 더 쎈가? 학원선생이 더 쎈가? 물론 전국적으로 합법적으로 경영되고있고 선전하여 가로사대 과외시간의 과정 보도를 해주기 위해 성립된 일종 교육기구라 하며 보도반 과정안은 중소학교에 과정안과 똑같으며 형식이 다양하다고 한다.     하다면 정규학교수업이 주류인가? 비정규직의 학원수업이 주류인가? 이런 물음은 얼핏 듣건대는 우문이지만 실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학습성적제고에서 주도작용은 학원선생님들의 몫이 되고있다. 그만큼 학원교육이 주류가 된듯한 착각을 주는것 도 사실이다. 학부모들은 물론 아이들도 내심의 경쟁심에서 열정을 내고 단맛을 보는 경우도 있거니와 남이 다하니까 락오자로 되기는 싫고해서 울며겨자먹기식인 경우도 없지못해 있는 형편이다. 이런 경쟁환경은 반가운 일인가? 당연지사인가?     한국식으로 이런 사교육에 대해 의론도 많지만 아무도 왈가왈부라고 확언할수 없는 오늘의 우리 교육실태이다. 이런 사이비교육실태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으로 합법화된 수업의 변종으로 자리잡게 된 원인이 승학위주의 현교육시스템이 운행에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이제 너무 진부하고 정답도 없는 물음이지만 공교육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더 탁하게 말하면 제구실을 잘하지 못하고있다는 실증은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해당된 사람들은 아주 심기가 불편해질것이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더 높은 점수를 맞으려고, 성적이 차한 아이들은 높은 점수를 맞는 아이들을 따라가려고 학원에 다니다보니 층차가 각이한 아이들이 한데 몰려앉아 앞당겨 배우거나 보충수업을 받는데 한마디로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 좀더 나은것을 찾기위해 비싼 사교육비(학원비)도 아랑곳없이 개근생이 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이러저러하게 료해하여 보니 학원에서의 진도앞당기기, 복습하기, 올림픽수학으로 지력틔우기 등이 만능은 아니였다. 수학골이 뛰여나지 못한 나의 손자놈의 경우 많이 개발이 된듯싶기는 해도 성적이 온당하지 못한것은 그냥 그 본새이고 어떤 아이들은 전혀 진전이 없어 가지않겠다고 떼질쓰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결국 학습부담이 과중하다는 실증이 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학습흥취가 관건이라는것은 기성도리이다. “공부기계”로 된 아이들에게 무슨 흥취가 생기겠는가? 아이들이 과외독서를 하지 않는것도 있겠지만 눈을 떠야 별을 보지, 하는 속담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경우 어찌해야 하는가? 이런 조류에 말려든 자신도 자가당착에 빠졌기에 질의하는바이다.                                               201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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