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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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한국어계 본과생 습작 참고용 명구들 (1 ) 댓글:  조회:9380  추천:0  2013-01-28
                     대학생 습작용 참고 경구들 (1 )   1. 마음을 움직이는 짧은글 № 세상은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내 마음이다.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사는 자이다. № 남은 용서하되 자기 자신은 용서하지 마라. № 운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운명을 낳는다. № 가장 큰 죄는 자기 인생을 낭비한 죄. № 적을 배신하고 온 자는 언젠가 나도 배신한다. №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오게 하라.…논어 № 일이 낙일 때 인생은 즐겁다. 일이 의무일 때 인생은 노예이다.… M 고리키 № 진정한 위인치고 자신을 위인이라 생각하는 자는 없다.…해즐리트 № 인생이란 불충분한 전제에서 충분한 결론을 찾아내는 기술이다.…S 버틀러 № 결코 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나마 하는 것이 낫다.…리비우스 № 나의 친구란 나를 동정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돕는 자이다. …T 풀러 № 기억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잊어버리고 웃는 편이 훨씬 낫다.… C 로세티 № 돌로 맞거든 솜으로 때려 갚아라.…영국 속담 № 증오는 증오로는 풀지 못한다. 오직 사랑으로서만 풀 수 있다. № 즐거움은 찾으려고 하지 말고 괴로움을 버려야 한다. №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너는 볼 것이다.…영국 소설가 샤무엘 버틀러. №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 № 욕심은 반드시 헛물을 켜게 해 준다. № 네가 일해서 얻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을 위해서 요구하지 마라! № 자기 그림자에 자기가 쫓기는 삶은 안 된다. № 자기 것만 챙기면 평화가 깨진다. №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괴테. № 그렇게 믿고 그렇게 실행하면 그렇게 된다.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진다. №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성실로서 채워가는 것이다.… 존 러스킨. №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법정이 양심이다.…칸트. № 배부른 돼지보다 생각하는 갈대(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 소크라테스 №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시간이다.… 데오프라스토스 №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다. №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어도 마음이 밝으면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 № 용서와 사랑의 무기가 최고의 힘이다. 이 무기를 어디에 쓸 것인가? № 공격보다는 피하는 것이 낫다. 피하는 지혜, 현명한자의 행동이다. №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하게 한다.…영국속담 № 수양이란…말조심, 음식 조심, 행동 조심하는 마음이다. №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입 밖에 낸 말. 흘러간 세월. 놓쳐버린 기회… 오마르 № 말(言)은 한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 베르딘 № 날카로운 말은 외과의사도 치료하기 힘든 상처를 낸다. …T 처치야드 №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맹자 №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시루스 № 우리는 착오 없이는 잘할 수 없다. 그것은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H 도로우 № 큰 부자는 하늘에 달려 있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 …명심보감 № 기쁨은 머물지 않고 날개를 펼쳐 날아가 버린다.…마르티알리스 № 거지는 거지를 시기하고 시인(詩人)은 시인을 시기한다.… 헤시오도스 № 친구에게 충고할 때는 몰래하고 칭찬할 때는 여럿이 있는데서 하라.…                       시레스 № 인생의 겨울이 와서야 삶을 알게 되었다.…윌리엄 포레스터 № 인격을 갖추지 못한 지식은 죄악이다…   간디. № 해서 안 되는 일 없고 안 해서 되는 일 없다.…공자. № 죽은 물고기는 떠내려 가지면 산 물고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 인간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의 인간이 된다.  럿셀… №인간이란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ㅡ 에머슨 № 정직하면 마음이 편하다. 겸손하면 존경 받는다. 노력하면 이루어 진다.…     家訓 № 하늘이 어디를 가나 푸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괴테. № 자기 자신의 결점을 반성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남의 결점을 보고 있을 틈이 없다.…                  탈무드 № 운명은 뜻이 있는 자를 안내하고 뜻이 없는 자를 질질 끌고 다닌다.…               클레안테스 № 미련한 자는 행복을 먼 곳에서 찾고 현명한 자는 자기 발밑에서 키운다. № 쾌락은 이따금 오는 방문객이지만 고통은 잔인하게 우리에게 매달 린다.…                  J 키츠 № 사랑의 기쁨은 순간밖에 지속되지 않고 사랑의 고통은 평생 지속된다.…플로리앙 № 사실을 말해도 남이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거짓말쟁이가 받는 벌이다.… № 양심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타일러주는 내부의 소리이다. № 슬픔은 사랑 없이도 생겨난다. 그러나 사랑은 슬픔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                 독일속담 № 누군가를 미워하면 상대가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불행해진다. № 돈은 잃으면 슬퍼지고, 돈을 보관하려면 공포가 오고, 돈을 쓰려면 유혹이 따른다. № 보통사람은 이익을, 청렴한 자는 이름을, 賢人은 의지를, 聖人은 정신을 귀하게 여긴다. № 진정으로 행복해 지려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이다.…                   슈바이처. №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때부터 바로 행동하고 처리해야 한다. №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는 것이 바로 아는 사람이며 모르면서 아는체 하는 것은 병이로다.…             노자 № 남을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자는 자기 스스로 그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격언 № 성공자란? 99가지의 어려움이 있어도 1가지에 성공 확신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하는 자이다. № 믿음성 있는 참말은 아름답지 않고, 듣기 좋은 말은 속에 진실함이 적다.…                  노자 № 번뇌란 생각 한 번 잘하면 모두 풀리고 생각한번 잘못 하면 모든 번뇌가 더욱 여러 종류로 확산되어 줄줄이 이어져 따라 온다. № 복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니 남에게서 받으려 말라. № 우물 안 개구리와 바다를 논할 수 없고, 매미와 겨울을 논할 수 없으며, 어리석은 학자와 大道를 논할 수 없다. №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요, 자가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신이 되는 것이다.             ㅡ 나폴레옹 № 열심히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철학과 인생관이 없는 삶은 그냥 동물의 삶일 뿐이다. №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하지만 은혜를 베푼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ㅡ 키케로 № 父母의 마음ㅡ 모기가 방에 들어왔다. 부모는 나를 뜯어먹으라고 옷을 벗고 잔다. № 누구도 그 사람이 산만큼 살아보지 않고는, 또한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걸어보지 않고는, 그를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준 고통은 잊어버리고 타인이 준 아픔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 인간은 아홉번 잘하고 한번 잘못하면 9번 잘한 것은 온데간데 없고 1번 잘못한 그것만 계속 탓한다. № 기회란 앞에는 귀도 뿔도 털도 모두 있지만 뒤쪽은 몸도 꼬리도 아무 것도 없다. № 눈에 보이는 것마다 먹을 필요가 없듯이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 ㅡ               롤링썬더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시도는 불확실하며, 판단은 어렵다.…          히포크라테스 № 친구여!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 마소. 적당히 져주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 스스로 돋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 주려는 사람이 눈에 띈다. № 낙원은 영원히 없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언제나 그런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 남자는 증거에 의거하여 판단하지만 여자는 정에 따라 판단한다.  쉴러 № 과학의 출발은 의심, 왜? 이다. 세상의 기존 모든 것은 왜? 라는 문제의식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 사람과의 만남이 인생을 결정한다. № 인생에 감격과 감동 없이는 변화도 없다        ㅡ 최영호 № 어린이에게는 비평보다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 잔잔한 바다에서는 절대로 훌륭한 뱃사공이 나오지 않는다. №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자는 모르는 것이며 더욱 불쌍한 것은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 № 산다는 것은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요, 고난과 싸우는 것이요, 역경 을 이겨내는 것이요, 운명에 도전하는 것이다. № 철저하게 알고 철저하게 실행해야 실패 없다. 전심전력으로 하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 № 재물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진다. 명예도 마찬가지 라고 본다. № 이미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찧을 수 없다. № 성공하는 사람은 남의 이름을 잘 기억한다. 남이 자기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일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 이상으로 좋은 칭찬은 없다. 2. 세계 속담 №. 속담은 거리의 지혜이며 격언은 일상 경험의 딸이다. №. 진리가 아닌 격언은 없다. 그러나 어떤 경구도 완전한 진리를 담고있지 않다. №. 선량한자 단명하고 악한자 일찍 늙는다. №. 늘 길을 묻는 사람은 방향을 헛갈리지 않는다.  ㅡ뽈쓰까 №. 마음이 급하면 평지에서도 넘어질수 있다.  ㅡ백족속담 №. 일체를 리해했다는것은 일체를 양해했다는것을 설명한다.      ㅡ 라틴속담 №. 마음이 좁은 자에게는 세계도 협착하다.                   ㅡ 위그르족속담 №. 지나친 솔직은 우둔함이다. №. 무엇을 잃었는지 모른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은것과 같다 ㅡ 스위스속담 №. 참된 말은 항상 조심성있게 말하여진다.                       ㅡ아랍속담 №. 길을 잃기보다 되돌아가는 편이 썩 낫다.                      ㅡ로씨야 속담 №. 거지는 영원히 파산이 무엇인지 모른다.     ㅡ 영국속담 №. 아침해가 온 하늘을 비출수는 없다.         ㅡ 영국속담 №. 태양에도 흑점이 있다.                     ㅡ 영국속담 №. 현재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시간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       ㅡ 영국속담 №. 시간과 사상은 가장 깊고 절실한 비애도 소멸한다.  ㅡ 영국속담 №. 인심은 뱀이 코끼리를 삼키려는 것보다 더 탐욕스럽다.ㅡ 중국속담 №. 악마는 십자가 뒤에 숨어있다.                               ㅡ에스빠니아 №. 길은 우불구불하기 마련이고 일은 변하기 마련이다.  ㅡ 영국속담 №.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잔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다. ㅡ 영국속담 №. 머리를 너무 높이 들지 말아라. 모든 입구는 낮은 법이다.    ㅡ 영국속담 №. 지혜는 시장에서 살 수 없다. ㅡ토이기속담 №. 지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경험의 결정체이다.   ㅡ아프카니스탄속담 №. 가장 견고한 돌도 풍화되고 만다.                                       ㅡ 칠레속담 №. 짬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짬이 없다.  ㅡ 유럽속담 №. 필요하지 않을 때 우정을 맺어라.              ㅡ 미국속담 №. 너무 고르는 자가 가장 나쁜 것을 갖는다.      ㅡ 영국속담 №. 사람은 열번 된다.                            ㅡ 속담 №. 형제는 하늘이 내려주신 벗이다.               ㅡ 속담 №.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  ㅡ 속담 №. 비온뒤에 땅이 굳어진다.                      ㅡ 속담 №. 남이 주는것을 다 받아먹으면 벙어리가 된다.   ㅡ 속담 №. 로동이 행복의 오른손이라면 절약은 행복의 왼손이다. ㅡ 속담 №. 절약만큼 확실한 리익의 샘은 없다.          ㅡ 속담 №. 절약은 진정한 황금제련술이다.              ㅡ 속담 №.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 ㅡ조선속담 №. 빈곤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도망가버린다. ㅡ  속담 №. 바다는 영원히 먼지가 끼는것을 꺼리지 않는다.  ㅡ일본속담 №. 남자는 문밖에만 나서면 일곱명의 적을 만날수 있다. ㅡ 일본속담 №. 마음착한 사람 걱정도 많다.  ㅡ일본속담 №. 보슬비도 오래동안 내리면 수재를 가져올수 있다.             ㅡ윁남속담 №. 수치스러운것을 알아야 영예가 귀중한줄 안다.  ㅡ 조선속담 №. 사람에게서 가장 귀중한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것이다. ㅡ 중국속담 №. 사람의 마음은 배가죽을 사이두고있다.         ㅡ 중국속담 3.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 №. 과거는 잊혀지고 오늘은 흘려버리고 미래는 기다려진다. №. 과거는 추억속에 명멸하고 미래는 희망속에 깜박인다. №. 과거는 이미 굳어졌지만 그속에 오늘이 잉태되고 래일에 숨쉰다. №. 과거는 미래에로 가는 밝은 지시등이다. №. 과거는 력사에 속하고 미래는 희망에 속한다.           №. 과거는 오늘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줄것이다. №. 과거의 잘못이야말로 가장 밝은 지혜의 거울이다. №. 과거란 현재가 덧쌓인 나날이고 장래는 희망으로 깁는 새 옷이다. №.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는 자는 래일도 지배하지 못할것이다. №. 현재는 과거보다 확실하지 못하고 래일은 오늘보다 더 확실하지 못하다. №. 과거는 기억으로 중요하고 현재는 느낌으로 귀중하다. №. 당신의 미래는 현재로 바꾸어올 수밖에 없다. №.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말은 오늘이라는 단어다. №. 내일을 바라보라. 지나간 일을 사랑하지 말라. №. 세월의 과정표에서 현재라는 두 글자만 중요하다.     미래 №. 미래를 두고 너무 환상하는것은 무모한 짓이다 №. 미래의 자기를 그려보려면 오늘의 자기를 반성하라 №.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살줄 아는 사람이다. №. 일체를 잃었다고 말하지 말라. 미래는 의연히 다가온다.  №. 하나의 깨여진 달걀은 한마리 병아리의 죽음을 의미한다. №. 오늘은 어제가 내여준 숙제를 푸는 날이다.  №. 오늘을 허송하는 사람은 내일도 허송할 것이다. №. 영원이란 말을 가볍게 내뱉지 말라. 영원은 하늘에만 씌여 있다. №. 미래는 세월따라 오는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안아온다. №. 태양은 같은 모습으로 떠오르지만 래일은 어제가 아니다. 사계절: 하루: №. 하루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생각한다면 시간은 더없이 보귀할 것이다. №. 오늘이 어제가 되지만 영원히 다르게 흘러간다.                    №. 동트기 전이 가장 캄캄 하기에 솟아오르는 태양이 눈부신 것이다. №. 매일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을것이다. №. 오늘은 영시에 끝났다. 새 날은 인생의 새 페지를 시작하라 №. 내일 죽을 것처럼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백년을 살 것처럼 일을 계획하라. №. 아침은 격려의 시각이고 황혼은 애석의 시각이다.   №. 황혼이야말로 로옹의 심경속에 만가를 떠올리게 하는 시각이리라.    №. 겨울밤이 길어도 꿈은 오히려 짧을 수 있다. 시간:                              №.   시간은 가장 현명한 재판관이다. №.   시간은 무리식 대부금과 같지만 목숨으로 본전과 리자를 다 갚게 되어있다. №. 시간은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명약이다. №  시간은 이 세상이서 가장 닳지 않는 숫돌로서 무엇이나 다 갈아버린다. №. 시간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이고 우주의 혼이다. №.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자는 자신의 가치도 모른다. №. 모든 것을 독점할수 있지만 시간을 독점한 자는 없었다. №. 일체가 다른 사람의 것일수 있으나 시간만은 나의 것이다. №. 분망한 사람에게는 여름해도 짧고 안일한 자에게는 겨울해도 길게 느껴진다. №. 아무 느낌도, 흔적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란 없다. 언행 №. 언어는 사상의 옷이다.                     ㅡS. 존슨       №. 언어는 존재의 집, 침묵은 언어의 집이다. №. 말은 마음의 열쇠이다. №. 진실한 말은 왕왕 적들 앞에서도 위력이 있게 된다. №. 모두가 리해하지 못하는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 말은 행동을 낳을수 없지만 행동은 많은 말을 설명한다. №. 말을 길게 해서 내용이 풍부한것도 아니고 짧게 한다해서 빈약한것이 아니다. №. 사고없이 하는 말은 과녁이 없는 눈먼 총질과 같다 №. 언행일치란 자기가 한 말을 끝까지 행동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 생각은 머리속에 있고 말은 입속에 있다. 입을 닫히면 생각이 절로 뛰여 나오는 법이 없다. 지식 №. 지식이 빛이라면 무지는 어둠이다. №. 지식이란 령혼의 행동이다    ㅡ D. 죤슨                                   №. 지식에 투자하는것이 가장 리윤이 높다.     ㅡ 프랭클랜                    №.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ㅡ 밀 №. 아는것이 힘이다.        ㅡ 베이컨                                      №.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서 래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라.ㅡ 고문진보         №. 젊었을 때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ㅡ 주희                №. 배우려고하는 학생은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ㅡ 히레르                      №. 힘이 아닌 지식은 없다.                ㅡ 에머슨 №. 빈가방은 똑바로 설수 없다.            ㅡ 프랭클린 자녀교육 №. 그 아비에 그 아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ㅡ W,랭런드 №. 아버지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모르는척 하지만 아버지가 돈주머니만 차고있 으면 자식들은 모두 효자가 된다. ㅡ 쉐익스피어 №. 아버지는 아들의 덕을 말하지 말아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ㅡ명신보감                                                   №. 한분의 아버지가 백명의 스승보다 더 낫다.   ㅡ허버드                 №. 자기 자식을 아는 아버지는 현명하다.  ㅡ쉐익스피어                       №. 형제는 자연이 준 친구이다.      ㅡ르구베                             №. 딸과 생선은 오래 보관해두어서는 안되는 상품이다.  ㅡ T. 플러         인생: №. 무대뒤에 들어가보지 않으면 꼮두각시극은 그냥 재미있다. №  인생이란 만나는 일과 헤여지는 일, 기억하는 일과 망각하는 일이다. №  인생에서 가장 길을 헛갈리기 쉬운 곳은 선택이라는 갈림길이다 №  남이 못하는 일을 해내고 먹지 못할것을 먹어봐야 인생의 진미를 맛볼수 있다. №  생각하는 인생은 희극이고 느끼는 인생은 비극이다. № 인생의 봄에 희망을 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소모한다. №. 한발로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자기 과신에 넘친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변명은 문제에 대한 해석이 아니며 더구나 리유가 아니다. №. 꽃이 피는 시절에 열매가 주렁질 가을을 그려보는 것은 낭만이다. №. 엄마의 잔등에서 걸음마를 익힐 수는 없다. 인생자세 №.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인생 자세이다. №. 바보는 스스로 똑똑한체 하고 현자는 스스로 견식이 모자란다고 자처한다. №. 꽃의 현란함에 찬탄할 때 부디 잊지 마시라. 꽃의 발밑에 말없이 누운 흙을. №. 낯간지러운 응낙보다 체면이 깎이는 거절이 그래도 현명하다. №.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을 입으로 논증하려 하지 말라. №. 말이 많은 자를 믿지 말아야 하거니와 늘 말이 없는자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 가장 충실한 삶은 자기의 소임에 책임을 다하는 데서 체현된다.  №. 내가 남을 따스하게 대하면 남도 나를 차갑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 인연이란 만날 때 소중한것이 아니라 헤여질 때 더 소중해지는 것이다. №. 구하면 얻을것이요 두드리면 열릴것이다. 신심이 문을 두드리는 벽돌이다. 인생변증법 №. 생활의 사전엔 평안무사란 말이 올라있지 않다. №. 누구나 두개의 《나》를 가지고있다. 하나는 드러나있고 하나는 숨겨져있다. №. 어데가서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존경과 인연이 없다. №. 뜨거워진 머리로는 절대 랭철한 판단을 할수 없다. №.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좋을 때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자이다. №. 흥취는 열정의 불씨이고 미침은 성공을 달구는 불길이다. №. 《너무 늦었어,》라고 말하지 말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간은  언제나 있다. №. 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것이다.  №. 먼저 자기를 믿고 그다음 남에게 기대라. 그게 확실한 자세이다. №. 버들가지는 우리들에게 연하게 사는 철학을 가르쳐준다. №. 얻는 것에 기뻐하고 잃은 것에 배를 앓게 인간상정이다 №. 이미 얻은 것보다 장차 얻고 싶어하는 것이 언제나 보귀한 법이다. №. 꽃잎이 지는 슬픔을 겪어야 열매가 익는 환희를 맞으리라 №. 정서는 문제의 반영일뿐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분투 №. 자기가 먹을 밥은 자기가 벌어들여야 한다.                                          №. 산정에 오르더라도 위만 보지 말고 발밑을 살피는것이 중요하다. №. 어떠한 연회상에든 구미에 맞지 않는 채가 있는법이다. №. 락이 장락일수 없고 고생이 장고생일수 없다. 모든것이 끝이 있는법이다. №.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가 해낼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인생 자세이다. №. 등산은 산기슭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천재가 걸어온 길은 시작부터 오불꼬불한 오솔길이였다. 모성애 №. 어머니의 품은 어린 아이에게는 곧 세계 그 자체이다. №. 어머니의 모성애는 자식들이 언제나 들어올수 갈수 있는 천당이다. №. 하늘에 신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땅에는 확실히 신이 있다. 바로 어머니들이다. №. 어머니사랑은 바다. 아버지사랑은 산, 그러나 어머니사랑이 기적을 낳았다.   №. 천백번을 불러도 싫지 않은 이름이 있다면 바로 어머니라는 이름이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리는 어머니의 부름소리이다.         ㅡ 단떼 인격 №. 인격은 얻음에 있지 않고 주는 흉금에서 고양된다. №. 인격은 고유한 것, 명예는 남이 하사한 것. 이 진리에 눈을 뜰 때 당신은 산다 №. 교오하는 사람은 말라죽은 나무와 같이 속이 텅비어 있다. №. 제자랑을 하는것은 자기의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 겸손은 인격이 피우는 첫꽃이요 타인의 호감도는 그 후에 맺힌 열매이다.  №. 겸손은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강철 대교이다. №. 겸손, 허심, 겸양, 근신은 훌륭한 인격을 형성하는 기본 인소들이다. №.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오히려 돋보 이는 법이다.
231    길림신문 <한국어마을>에 발표된 학생수필묶음 댓글:  조회:9786  추천:0  2013-01-26
                                성격의 안팎                   청도 빈해학원 08급 증효욱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성격은 자못 중요한 인소이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에 아니라고 할 사람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원만한 성격은 성공에로 오르는 사다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별별 생격을 지닌 사랑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만나면 만날 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과 첫인상은 좋았지만 점점 싫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이 세상에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듯이 똑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을리가 만무하다.     성격은 한 마디로 집어 말하기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외향적인 성격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게 친근감을 줄 수 있으며 곧 잘 어울린다. 그들은 모든 일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대단한 말솜씨와 인간관계 때문에 발이 넓다. 설사 어려운 일에 부닥치더라도 침착 하고 냉정한 머리를 유지하여 각종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으며.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것은 다 알고있는 상식이다. 반면에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한 환경을 좋아하고 사람이 몰리는 곳에 가기 싫어한다. 그만큼 성격이 취약하고 민감해서 남에게 자신의 마음을 좀처럼 열지 얂는다.      따라서 어려움에 처해도 도와 주는 친구가 별로 없다. 강한 콤플렉스로 인해 모든 일을 소극적으로 대하고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까지 걸리는 경우도 많다. 하여 성공은 커녕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도 어렵다.     왜 이런 심한 차이가 생길까?성격을 형성하는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는 데 유전과 환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전 요소도 성격 형성에 대체 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지만 후천적인 환경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를 둘러싼 정신적, 물질적 환경들이 사람의 성격을 형성할 뿐 아니라 쉼없이 성격이 바꾸기도 한다. 가정의 영향, 학교의 교육과 사회활동 등 성격을 형성하는 데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맹모삼천이라는 이야기는 처해진 환경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이 바뀔 수 있다는 좋은 예이다.    내 생각에는 외향적인 성격만 좋고 내 성격인 성격은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성격은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삶은 자신의 마음 가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생활에서 성격상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극복해야 경쟁세계에 잘 적응하며 자기 인생을 보다 원만하게 가꿀 수 있다. 좋은 마음 가짐을 가지고 꾸준히 자기 허물을 성찰하고 보완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매력이다.     그런데 나 자신은 성격상 이런 저런 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성격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른다. 비록 성격이 거의 형성된 청춘기이지만 자기 성격상 단점을 극복하며 보다 바람직하게 자기 완성을 기하려 한다.                                     2011년 3월 22                                          봄날의 서정                       빈해학원 09년급 2반 王明明       해마다 오고 또 가는 봄이지만 나는 새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왜냐하면 봄이 되면 만물이 약동하고 백화가 다투어 피어나는 향기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사쁜사쁜 걸어오는 봄아씨의 발자국 따라 내 희망도 곱게 곱게 피여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교정은 봄날이면 유난히 아름답다. 특히 벛꽃이 화사하게 필 때 벛꽃로(樱花路)는 더 매혹적요 바람 따라 풍기는 꽃향기는 그야말로 낭만적이다. 그만큼 벛꽃로를 걸을 때며 매양 그림 속을 걷는 것만 같다. 친구들은 이맘때면 벛꽃로에서 찬란한 웃음을 띠고 사진을 찍곤 한다. 아마도 아름다운 풍경에 함빡 젖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 일자호 연못가에 머리를 풀어헤친 수양버드나무이 그네를 뛰면 물고기들도 신이나서 꼬리쳐 논다. 그런 물고기들 조용히 지켜 보느라면 위대한 생명의 정신을 느끼게 된다. 만물의 소생과 약동 속에서 나는 희망이 선물하는 생명의 활력에 경탄하게 된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처녀애들도 교정의 예쁜 꽃과 더불어 희망의 꽃도 피우고 푸른 소나무아래에서 푸른 절개를 읽는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젖는다. 새 봄의 새 희망을 품고 이 봄에는 뭘 하면 좋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봄은 가고 또 오지만 우리네 청춘의 봄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더구나 애틋한 정서에 젖어들기도 한다.      땅에 뿌린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우리는 청춘의 봄날에 꿈을 심어 알뜰히 키워야 한다. 영원히 굳어져 버린 과거에 매달려도 소용없다. 매 하루가 자기 인생의 축도이므로 오늘을 보람차게 가꾸어야야 한다.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자기 할 탓에 달렸다. 하느님은 충분하게 준비한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도 믿어야 된다. 청춘은 인생여정에 첫 출발이다. 지각하면 나중에 울 것이다.     해마다 가고 또 다시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은 봄마다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나의 고운 꿈도 활짝 나래를 펼치고  미래에로 훨훨 날아간다. 나는 다시 한 번 목청껏 외친다.  “새 봄 만세! 청춘 만세! !”                                     어머니                                      왕명명       이 세상에서 어머니는 나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다. 너무도 평범한 농촌부녀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위인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셨지만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사랑은 햇살처럼 따뜻하고 사심이 없다. 내가 어떤 잘 못을 범해도 성 한 번 내시지 않고 교육하셨다. 어머니의 사랑을 산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넓다. 항상 나에게 힘을 주고 희망과 광명을 준다. 어머니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샛별같은 분이다. 어머니가 없다면 내 생활이 얼마나 암담할지 모른다. 어머니는 나의 하늘이고 어머니의 사랑은 내 인생의 뿌리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나고 허리도 더  굽으러 간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따뜻하고 넓은 등에 기대면 더없이 편안했고 안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어머니가 늙어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칼로 에이는 것처럼 아프다. 개학이 되어 집을 떠날때마다 차창너머 멀어지는 어머니의 됫모습을 볼때 매번 눈물을 흘렸다. 나를 위해서 한평생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마음 속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여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결심한다.    고중때까지 매일 잔소리를 하시은 어머니가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철이 들지 못해서 너무했다고 후회한다. 나는 어디에 가든지 한시도 어머니를 잊지 않을 것이며 내 마음은 늘 어머니곁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항상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세상에 없다면 어머니는 아마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어머니가 행복할 것이다.     날씨가 변할때 어머니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옷을 많이 입으라고 하고 아플 때는 아무리 졸려도 밤새도록 지키셨다. 그런데 나는 철이 못 들어서 항상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투정질을 했다.그래도 나를 용서한 어머니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 다시 한번 나를 사랑하세요》영화를 보고 나서 깊은 생각에 젖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에 비해 더 위대한 사람이 있을까? 영화에 주인공처럼 내 마음도 아쉬운 감정이 든다. 나는 계속 아름다운 미래와 먼 곳을 보지만  어머니는 계속 나의 뒷모습만 보신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그 모습 애틋하기 그지없다.     어머니는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보내신 천사!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이나 다하는 천사이시다. 매번 나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우셔도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신다. 그런데 어마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내세가 있다면 다시 어머니의 딸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생에서 어머니의 은혜를 다 깊을 수 없다. 그러나 내 힘이 닿는데까지 효성을 다하련다.   “어머니에게 미안해요.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싶다.                                       잊을 수 없는 친구                                 滨海学院 09级 二班   王明明      내 인생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지나쳐갔다. 어떤 사람을 곧 잊혀졌지만 어떤 사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바로 나의 절친했던 고향친구이다.     한 사람에게 진정한 친구가 없다면 아주 고통스럽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도 더구나 고통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친구란 엄동설한의 숯불, 방향을 잃어버릴 때 방향을 알려주는 북두칠성, 더운 날에 청량한 약수, 보이지 않는 맑은 공기, 잡을길 없는 양광에 비유할 수 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친구는 소림이라고 부른다. 소림이는 태생적으로 얼굴에 많은 허물이 있고 게다가 언청이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다 상종하기 싫어했다. 심지어 소림의 부모님도 소림이를 싫어했다. 소림이는 부모님의 사랑마저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늘 소외감에 울었고 성격도 아주 괴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림이는 매번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면 나한테 속심을 털어놓으며 위안을 받았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자마자 외지에 나가 돈벌이를 했는데 함께 간 고향 사람들조차 나어린 관심은커녕 따돌리기만 했다. 그러나 그가 억세게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생각밖에 소림의 편지를 받았다. 몹시 어지럽게 구겨진 편지에 이렇게 쓰이어 있었다.   “명명아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다. 앞으로 내가 하늘나라에 간다해도 너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살아온 기간 정신적으로 나를 많이 도와줘서 고맙다. 네가 사랑해주는 부모님도 있고 옆에 친구도 많아서 항상 부러웠다. 나도 너처럼 밝게 웃으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했지만 질투하지는 않았다. 너는 나를 이해해주고 품어준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난 살기가 너무 지겨워졌다. 어디가나 차다찬 이 세상이 싫어졌고 더는 살고싶지 않다. 명명아, 너를 보지 못하고 나 먼저 간다, 잘있어라, 꼭 행복하기 바란다!”     눈물에 얼룩져 있는 그의 마지막 편지를 읽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곧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 하면서 마음에 인차 회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엄마에게서 소림이가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순간, 갑자기 온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고 마음이 칼로 에이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그에게 인차 회답을 하여 삶의 용기나마 북돋아주지 못한 자신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몰랐다. 나와 같이 지 낸 동년, 소녀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던 그가 왜 갑자기 생의 의욕을 잃고 훌쩍 떠났을까? 정말 상상도 못한 불행이다. 방학때 같이 놀려고 별렀는데 이제는 …     부모의 사랑마저 잃은 그를 생각하면 부모님의 사심없는 사랑을 다 받고 사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수 있었다. 소림이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소림의 부모님이 조금 사랑이라도 주었더면 그렇게 애석하게 청춘을 버리지 않았을것이다.     동년시절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진실한 우정을 준 소림이가 보고 싶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천사같은 고운 마음을 가졌던 그애는 내 마음속도 천사로 새겨져 있다. 소림이는 지금도 밤하늘의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그리움에 젖어 명복을 빌고있는 나를 내려다 보고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소림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서 더없이 순결한 우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꼭 부모님에게 효도하려는 마음도 다져주었다. 무정한 세상의 버림을 받은 소림이, 친부모에게마저 버림받은 소림가 하늘 나라에서 이승처럼 불행하지 말기를 바란다. 못생긴 새끼오리, 그러나 나의 가정 절실한 친구였던 소림이 한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만남과 이별                     빈해학원 동방언어계 08년 조선어반 두정나(杜静娜)       인생이란 만남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먼저 엄마를 만나고 아버지,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차차 사회마당에서 생존하고 분투하노라면 본의 가 아니 이런저런 만남과 이별을 무시로 겪을 것이다. 상봉의 언덕에는 웃음이요, 이별의 정거장에는 눈물인데 인생여정에서 참으로 에돌아가고 좌우할 수 없는 중간 역이다.     만남과 이별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있는 것이다. 만나지 않으면 이별도 없을 것이요 오지 않으면 갈 일도 없을 것이다. 꽃잎이 스러진 후에 열매를 맺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고 기다리는 행복함이다. 이별을 종점이 아니다. 더욱 화려하고 바람직한 만남을 마련하기 위한 서곡이요 삽곡 일 수도 있다. 이별이 없다면 재회하는 기쁨도 없을 것이요 항상 곁에 있다가 공기처 럼 소중함도 모를 것이다. 이별은 눈물이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모든 만남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심지어 몇 번씩이나 마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얼핏 본 얼굴이지만 끌리는 감정이 있다면 필연일 것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필연이면 어떨까, 우연이면 어떨까? 그냥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면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람같은 우연을 바위같은 필연으로 만드는 노력이다.     이 망망하고 혼잡한 인간세상에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고 천갈래 만갈래 얽혀 있는 관계를 맺는다는게 얼마나 아름답고 신기한 일인가? 특히 부모님과의 만남은 이 세상에 제일 행운이다.     애인을 만나는 게 제일 기대하(되)고 가슴이 설레는 우연이다. 원수와의 만남은 제일 어이없고 도전적인 연분이다. 만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는 진귀한 선물이다. 공 정한 하늘은 만남을 베푸는 동시에 이별도 따라온다(덧붙여 준다.) 만남과 이별은 생로병사와 같이 하늘도 어쩔 수 없는 섭리이다.     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만남을 기다리는 이별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무릇 추억이 더욱 추억되게 하는 것은 이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별이 가슴 아픈 사실로만 기억된다면 고통 뿐이고 그리움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으면서도 더구나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 가슴을 찍(찢)는 아픔이요 고통의 극한이다.     그러나 이 극한의 고통을 몇번이나 경험할 것인가? 별로 없다. 그러므로 입멸이 기성 사실이 된 마당에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본다는 게 좋지 않을까? 헤어지 기전에 같이 지내는(게) 즐거운 시각이요,그날 밤새워 이야기하는(게) 시원한 (즐거운) 향수요, 송별할 때 말없이 손을 흔드는 장면이(가장 못잊을 장면이)요, 몸을 돌리는 순간에 눈에 반짝이던 눈물이(진솔한 마음의 진주)요, 심지어 무정해 보이는 그 뒷모습까지 다 우리가 진지한 감정을 담고 있지 않으랴, (그 모든 것이)영원히 간직할 만한 씁쓸하고 달콤한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은 인생무대에서 상영하는 결말이 없는 드라마이다. 희로애락을 섞은 반찬이다. 우리는 그 맛을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양념은 우리 마음에 달려있 기 때문이다. 이별가를 부를 때 만남의 축배도 먼저 들어보는 마음을 가져보자.                                          진정한 친구                                  청도 빈해학원 08년급 조선어 2반 사영위(师永伟)         친구라고 한다면 아주 뚜렷하지 않은 개념이다. 한 번만 만난 사람은 친구라고 할 수 있고 어릴 때부터 사귄 사람도 친구라고 한다. 인생행로에서 수많은 친구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진정한 친구는 내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통정하는 자가 아니라 전심전의로 나를 돕는 자이다. 진정한 친구는 나에게 총고할 때는 몰래 하고 칭찬할 때는 여럿이 있는 데서 하는 자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사심없는 사람을 만나기 심히 어렵다. 어떤 사람과 친구가 될 것인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우정은 성격과 취미가 공통 한데서 맺어지는 동맹이라고 말했다.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술친구, 도박친구, 마작친구는 다 성격과 취미가 공통한데서 맺어진 친구이지만 진정한 친구 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개를 친하면 벼록밖에 옮을게 없으니까.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인생행로에 아무 도움이나 없을 것이다.성격과 취미가 달리하고도 서로 이해하고 용인할 수 있는 친구라야 참된 친구인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것이) 수량보다 질을(이) 더 중요시해야 한다. 평소에는 친구가 많이 있다고 해도 불행을 당할 때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친구가 없다면 불행자체에 비해서 더 불행하다. 지금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진정한 친구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할 수 없는) 것 같다. 날마다 같이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놀기만 하 면 (다 친구가 아닌가 하면) 다 친구인것이 아니며 자기를 사정없이 비평하는 사람 (은)이라 해서 다 원수(가) 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친구는 모종 의미에서 부모와 같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바로잡기 마련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너의 잘못을 교정하는 사람은 너를 생각하는 진정한 친구이다. 충언역이지만 (행동)몸에는 이롭다. 진정한 친구는 자신의 발전을 진심으로 도와 주는 사람이다. 병균과 같은 친구를 사귄다면 도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뜻하지 않은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친구를 맺는 것은 쉽지만 진정한 친구를 맺는 것은 쉽지 않다. 한평생 진정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다.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친구를 사귀고 싶다 해서 (친구를 맺는 것은) 옷을 사는 것처럼 자신의 몸매와 어울리지 않아도 고집을 부리며 산다면 꼭 후회할 것이다. 자기(에) 와 뜻이 맞지 않은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언젠가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인생에 하나의 지기라도 얻으면 만족하고 진정한 친구를 찾아야 한다. 지성적인 현자들은 친구를 허투루 사귀지 않고 많이 사귀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자신을 위해서 신중하게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2011년 3월 20
                            摘 要        金万重,17世纪具有代表性的小说家,中世纪国文小说发展阶段的开创者,对中世纪小说做出了重大的贡献。他的代表作《谢氏南征记》是韩国十七世纪的一部优秀长篇小说,是韩国古典小说中的一颗灿烂明珠。它开启了中世纪文学史上现实主义小说的新篇章,对韩国现实主义小说的发展具有划时代意义。 《谢氏南征记》展示了以前文学作品中罕见的封建王朝及贵族家庭内部的种种丑恶现象,塑造了众多的人物形象。情节曲折,结构严密。        本论文首先通过陈述金万重生活的时代背景以及他的生平、思想来阐明他的文学观的形成基础,由此来观察作品中体现的矛盾现象和解决方式,从而把握理解作者与作品间的关系的契机。   关键词:谢氏南征记 现实主义 矛盾现象 解决方式                                      초 록       김만중은 17세기 대표적인 소설가, 중세국문소설의 새로운 발전단계를 열어 놓은 한 사람으로서 국문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대표작 는 한국 17세기 우수한 장편소설이고 한국 고전소설 중의 찬란한 명주이다. 중세문학사에서 사실주의 소설의 새 장을 열어놓은 대표적 작품으로서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는 이전 문학 작품에서 보기 드문 봉건왕조와 귀족가족 내부의 각 종 추한 현상을 전시하면서 여러 인물형상을 창조하였다. 이야기의 정절이 곡절적 이고 구조가 엄밀하다.     본 논문은 먼저 김만중이 산 시대의 상황과 함께 생애와 사상을 서술하여 그의 문학관의 형성기초를 해명하고 이 작품에 드러나는 갈등 양상과 그 해결 방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작자와 작품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키워드: 사씨남정기 사실주의 갈등양상 해결방식    목차 서 론    4 1.1연구의 목적 및 의의    4 1.2기존 연구사 검토    4 1.3연구범위 및 방법    5 본 론    6 2.1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관    6 2.1.1생애와  창작사상    6 2.1.2문학관    8 2.2 의 갈등 양상과 해결 방식    8 2.2.1소설 소개    8 2.2.2갈등 양상    13 2.2.3문제해결 방식    14 결 론    18 감사의 말    19 참고문헌    20                                                 서 론   1.1연구의 목적 및 의의 는 조선후기 “가정· 가문소설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되는 작품으로서 이에 상응하여 일찍부터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됨으로써 작품의 구성적 특징 및 소설사적 위상이 웬만큼 밝혀졌다. 이런 점에서 에 대한 본격적인 작가론이 마련될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더욱 밀착하여 작품에 나타난 갈등양상과 인물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작가의 해결방식도 연구 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작자와 작품의 관계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2기존 연구사 검토 연구는 다른 고전소설과 비교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반영론적 관점이나 절대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 분석은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작가와 관련지은 연구는 찾아보기 드문 실정이다. 이외 를 통해 작가 의식을 살펴보려는 여러 연구가 시도 되었지만 개별적 차원에서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뿐 작가와의 관련성 아래 작품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의론되고 있다. 1.3연구범위 및 방법     본과제는 선인들의 평론과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현유의 재료에 근거하여 역사주의 방법으로 김만중의 문학관, 고전적 장편소설 의 구조적 갈등양상 그리고 그 갈등양상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해결방식을 연구하려 한다.                                             본 론   2.1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관 2.1.1생애와  창작사상 2.1.1.1생애     김만중(金万重1637~1692)은 17세기 대표적인 소설가이며 한국 중세 소설, 특히 중세국문소설의 새로운 발전단계를 열어 놓은 한 사람이다. 그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 (文孝) 이다. 그의 부친 김익겸이 병자전쟁 시기 강화도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한 애국자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 정시문과 에 장원, 정언·지평·수찬·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 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만중이 벼슬을 하던 17세기 후반은 나라 전체적으로는 안정 기에 접어들었으나 당파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 시기였다. 김만중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 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 예조참의, 1683년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 (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 이듬해 지경연 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의 관하여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국문소설 와 은 이 유배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만중은 성품이 온화하고, 효도와 우애가 두터우며, 직언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김만중이 53세가 되던 숙종 15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에게 빠져 정사를 그르치는 것에 대해 직간한 것이 죄가 되어 남해 외딴 섬으로 귀양 을 가 위리안치를 당하였다. 효심이 지극했던 김만중은 오랜 귀양 생활로 인하여, 혼자 쓸쓸히 계실 어머니를 위하여 을 지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를 지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2.1.1.2창작 사상     김만중이 활동한 17세기 후반은 임병 양란 같은 대전란이 가까스로 사라지는 대신 당쟁이 과열되어 가던 시대이다. 그러나 김만중의 김만중 다운 점은 언제부터인가 유학을 절대시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비판하는 사상적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거듭된 파직이나 유배 같은 쓰라린 인생 경험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러한 자세가 더욱 확고해졌던 것이다.    김만중은 현달한 사대부였지만 여느 지배층 문인과는 사상이나 문학관이 크게 달랐다. 당시 지배층의 사대부 문인은 유교의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게 보통였다. 김만중 역시 기본적으로 유학자였으나 다른 사람과 달리 유교만을 전신하면서 다른 사상에 대해 배타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문학과 사상 전반에 대한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는 김만중의 을 보면, 불교에 대해 얼마나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사상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 자세로 인해 김만중은 동시대의 어느 인물보다도 앞서가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2.1.2문학관    김만중은 사상뿐만 아니라 문학상에서도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문학에서 남녀 간의 정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진실성을 인식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의 성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방향에서 시를 창작했다. 그의 일부 한문시와 악부가사 , , ,   등에서 이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     또한 그는 국어로 된 문학의 가치를 빌려 지은 한시보다 일반 백성들이 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훨씬 더 진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그는 정철이 국문으로 지은 가사 과 을 극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학자들은 소설이 풍속과 인륜을 해치고 사람의 마음을 타락시킨다고 보아 일반적으로 배격 했지만, 김만중은 소설의 가치를 옹호하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허구로서의 소설이 사람에게 주는 감동적인 효과를 깊이 터득하고 있었다. 그가 나 과 같은 국문소설을 창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2의 갈등 양상과 해결 방식 2.2.1소설 소개 2.2.1.1 창작 동기 가 쓰여진 동기는 숙종의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경계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김만중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의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말과 글자로 표현한 국문소설을 써서 항간 부녀자들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축첩제도를 비롯한 당대사회의 불합리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데 있다. 2.2.1.2 소설의 줄거리 1단계: '성혼' ~ '가화'   금릉 순천부에 대대로 그 가문이 잘 알려진 유한림(이름은 연수)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인 서정옥은 본래 대간 벼슬을 하다 간신들의 모해를 입고 귀양살이까지 하다가 죽은 사급사의 딸로서 강직한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은 사정옥은 시집온 후 시부모와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니 유씨 가문은 화기애애하였다. 그런데 용모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행실이 현숙 하다고 칭찬이 자자하던 사정옥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시집살이 10년이 넘어 이제는 나이 서른에 가까웠으나 가문의 대를 이어줄 자녀 하나 곁에 두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정옥은 어느 날 남편에게 첩을 맞아들일 것을 간청한다. 유한림이 "어찌 일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여 첩을 얻으리오.”라고 반대하나 사정옥은 끝내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마침내 유씨가문에는 정실인 사정옥의 소원대로 교채 란이 들어오게 된다. 교녀가 유한림의 가문에 첩으로 들어온 후 성품이 교활하여 한림의 비위 를 잘 맞춰주었고 사씨를 섬기는 것도 자못 극진한 것 같아 보였다. 유씨 가문에는 전에 없던 기쁨과 화기가 떠도는 듯하였다. 사씨는 물론  유한림 도 이제 자식을 보게 될 앞날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태평스럽고' 조용한 유한 림의 가정은 바로 교채란이 들어온 후 점차 소란해지기 시작 하였다. 교활하고 흉칙 한 교채란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교채란의 흉책은 유씨 가문으로 동청이라는 젊은 사나이가 들어온 이후 더욱 심해 진다. 교채란은 그와 한짝이 되어 주부인 사씨를 내쫓을 흉계를 꾸민다.  그들은 남몰래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는 한편 갖가지 흉계를 써오다가 마침내 교채 란 자신의 소생인 장주까지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덮어씌 운다. 요망한 교녀의 간계에 넘어간 유한림은 십 년 세월 함께 살아온 사씨에 대한 정도 잊어버리고 그를 "천지간에 용납 못할" 죄를 저지른 '음부'라고 꾸짖을 뿐 아니라 마침내 집에서 내쫓는다. 이때부터 서글프고 괴로운 사정옥의 '남정'이 시작된다. 2단계:'남정' 집에서 쫓겨난 사정옥은 친정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성동 시부모의 산소 밑 에 수간초옥을 얻어 여년을 마치려고 한다. 원래 사정옥은 여공재질이 있는 여인 이었으므로 이곳에서 남의 집 바느질이며 길쌈질을 해주기도 하면서 겨우 연명 해나갔다. 그러나 사정옥의 이러한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한다. 사정옥의 행처를 알아낸 교채란 은 동청과 더불어 또 다시 흉계를 꾸며 냉진이라는 사나이를 보내어 사정옥의 절개를 꺾어버리려 한다. 그리하여 사정옥은 또 다시 그곳을 떠나 온갖 파란 곡절을 다 겪게 된다. 이 무렵 유한림도 사정옥과 같은 큰 변을 당한다. 교채란과 동청은 간신인 엄승상의 손을 빌어 유한림이 왕을 반대하는 음모를 꾸민 다는 죄명을 덮어씌운 것이다. 하여 "임금을 기롱하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로 유한림 은 행주땅으로 귀양간다. 유씨 가문은 마침내 파산몰락의 운명에 처한다. 3단계: '가운회복' 유한림이 유배지로 쫓겨나 억울하고도 괴로운 유배살이를 하고 있을 때 왕조에서는 태자를 책봉하고 천하의 죄인들을 내놓으니 그도 귀양살이에서 풀려 다시 옛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에 유한림은 자기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원수 들의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엄승상의 간계로 태수벼슬을 얻은 동청이 교채란을 데리고 지금 막 낙양땅으로 행차하는 길이었다. 시비를 통하여 교채란의 행차를 하게 된 유한림은 바삐 몸을 피하려 했으나 뒤에는 자기를 붙잡으려는 자들이 따라오고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때 문득 강 위쪽으로부터 쪽배 한 척이 재빠르게 흘러 내려오더니 거기에서 여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유한림이 배를 세워 타니 배는 한림을 싣고 저쪽 기슭으로 빨리 달아난다. 한림이 선중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소복단장한 한 부인이 앉아 있다가 그를 맞이한다. 사정옥과 유한림의 천만뜻밖의 기연기봉인 것이다. 이 무렵 조정에서 전횡을 부리던 엄승상은 그 저지른 죄상이 드러나 옥에 갇히고 재산도 몰수 당한다. 동청은 자기의 심복인 냉진의 고발에 의해 처단되고 엄승상, 동청이 차례로 처단된 후 냉진도 처단되고 만다. 그리고 유한림이 집을 떠난 후 동청한테 붙어서 부화사치를 일삼던 교채란은 동청이 처단된 후에 냉진에게 넘어가 살다가, 냉진이 처단된 후 마침내는 창기가 되 고 말았다. 소설은 예부상서가 된 유한림이 사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가던 도중에 교채란을 만나 그를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2.2.1.3소설의 성격[2] ㄱ, 목적소설로서의 성격 이 소설은 필경 숙종의 마음을 감동시켜 폐비 민씨를 다시 복위케 하고 임시로 비위를 빼앗고 있던 장씨를 다시 희빈을 삼아 방축하게 함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목적소설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창작은 작가의 체험과 사상을 통해 생산됨을 중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은 작가의 체험으로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작품의 소재로 작용되어 그의 이상적 현실로 재구성 되는 것이다. 즉, 순수한 문학적 입장에서 이 작품은 해석되어져야 한다. 숙종시 민비폐출 사건뿐만 아나라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교육을 통한 간접체험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ㄴ,쟁총형 가정소설로서의 성격 를 가정소설의 한 범주로 보고 처첩간의 갈등이 가정파탄을 야기시킨 쟁총형의 대표적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사씨와 교씨는 애정적인 경쟁관계에 있으 면서 신분적인 주종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간의 갈등은 애정다툼과 신분다툼의 복합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하여 처첩간에 야기될 수 있는 애정과 신분문제가 중요한 갈등요인이 되어 형성된 쟁총형 가정 소설임을 밝히고 있다. ㄷ,불교계 관음소설로서의 성격 -묘희가 관음상을 통하여 사소저와 유연수의 결연을 성취시킨 것–묘희가 관음상을 모시고 남천하여 수월암을 짓고 수도하는 것.-사씨가 투신자살하려 할 때 관음보살의 계시에 따라 묘희에게 구제된 것. -유연수가 병이 깊어 사경에 이르렀을 때 관음 보살의 몽중계시로 청량수를 얻어 마시 고 완쾌된것. -사씨가 관음보살의 계시고 남편 유연수를 위기에서 구출하게 되는 것 등을 들어 이 작품이 성격상 갖춘 불교소설이라 한다. ㄹ, 폭로·풍자소설로서의 성격 교씨의 간교로 인해 시가에서 쫓겨난 사부인이 친정으로 가지 않고 시부모의 산소 에서 지내는 것이 덕을 실행해 보려는 의지로 보고 인현 황후를 폐위 시키고 중전의 자리에 오른 장희빈을 폭로·풍자하고 나아가 숙종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2.2.2  갈등 양상   조선시대의 처첩갈등은 축첩제의 불합리에서 기인되는 애정다툼에 적서 차별의 불합리에서 기인되는 신분다툼이 덧보태지면서 한층 복잡화 첨예화 되었다.   성혼 후 10여 년 동안 후사가 없자 사씨가 유연수에게 취첩을 권유하여 교씨를 첩으로 맞이하다. 교씨가 사술을 써서 아들 장주를 낳았다. 사씨가 아들 인아를 낳는다. 유연수의 서사로 동청이 들어온다. 처첩의 갈등은 전개되었다. 교씨가 사술로 유연수의 총명을 가리우고 동청과 계교를 꾸며 유연수로 하여금 사씨의 정절을 의심하게 한다. 교씨의 시비 납매가 동청 의 사주대로 장주를 죽이자 교씨가 이를 사씨의 소행으로 모함한다. 유연 수가 사씨를 축출하고 교씨를 정처로 맞다. 여러가지 일을 겪은 후 유연수가 사씨와 상봉하여 사죄하고 후일을 기약 한다. 천자가 깨닫고 엄숭을 내치고 유연수에게 벼슬을 내리다. 냉진이 동청을 고발하고 동청이 죽음을 당한다. 유연수가 사씨를 맞아 오고 사씨가 천거한 임씨가 인아를 거두어 길렀음이 밝혀져 첩을 삼는다. 교씨는 냉진이 죽자 기생이 된다. 유연수가 교씨를 잡아다가 죽여 원수를 갚고 사씨는 여훈 열두장과 열녀전 삼권을 지어 후세에 전한다. 는 부인이 공존하는 동시적 다부제 (同時的多婦制) 의 처첩 갈등을 문제로 삼고 있다. 작품에서 서사의 중심축이 되는 것은 사씨와 교씨간의 신분다툼 이다. 첩 교씨는 후사(後嗣) 생산을 목적으로 영입되며, 그의 존재가치는 이와 동일시된다. 를 비롯한 가정소설은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데다가, 그 내용이 교훈 성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취향이나 당시 부녀자들의 소망적 사고와도 잘 부합되는 것이었기에, 시대적 제약을 극복하고 적극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폭넓 은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소설에 대한 사대부들의 부정적 선입견을 교정하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2.2.3문제해결 방식   이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세계관을 탐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가정에서의 이야기가 국가에서의 이야기로 연장 되면서 두 이야기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 이다. 즉 악인과 선인, 그들의 대립 원인을 제공하는 매개 인물로 이루어진 구도에서 악인이 매개 인물의 총명을 흐리게 하여 그로 하여금 선인을 멀리 하게 하는데, 어느 순간 매개 인물의 총명이 회복되어 선인을 회복 시키고 악인을 징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말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작자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에서 작자의 독특한 지향이나 세계관 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에서 교씨의 욕망에 의해 사씨가 맞게 되는 결정적 위기는 두 번이다. 첫 번째는 교씨의 사주를 받은 냉진에 의해 사씨가 훼절될 위기이다. 두 번째는 교씨를 피해 사씨가 두부인을 찾아가다가 실의에 빠져 강물에 빠져 죽으려 한 것이다. 유연수가 맞게 되는 위기 또한 두 번이다. 교씨와 동청의 계교로 행주로 유배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는 것이 그 하나이고, 동청의 자객들에게 쫓김이 그 하나이다. 사씨는 유희 부부의 몽중 암시로 첫 번째 위기를 모면한다. 조상의 숨은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아황과 여영이 현몽 하여 죽지 말도록 설득함으로써 해결된다. 유연수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는 꿈에 백의 노인이 물을 주어 살아났고, 동청 일당에게 쫓겼을 때는 묘혜와 사씨가 꿈에서의 유희 부부의 지시대로 하였기에 살 수 있었다. 이처럼 사씨가 꿈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씨가 덕을 쌓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꿈이 사씨의 적덕(積德)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들로 설정되어 있음은 인간이 덕을 쌓고 선하면 조상이, 하늘이 감동하여 도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작자가 꿈으로 위기를 넘기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문제의 비현실 적 해결이 아니라 선을 극대화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선인이 몰락의 길을 걷고 악인이 승리의 길을 걷는 가치 전도의 상황 즉 천성이 본래 속성을 잃은 상황이 전개되다가 관음상, 관음응화가 중추가 되어 상황은 급반전되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 작품이 사대부의 수신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관점은 이제까지 작품을 효용론적 측면에서만 다룬 점을 반성하고 표현론적인 측면에서 다루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만 과연 이 작품이 사대부의 수신을 다룬 것인가 하는 점은 신중하게 판단 해야 한다고 본다. 이 작품에는 가장과 임금이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작자가 힘써 표현하고자 하였던 바가 가장과 임금의 수신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인이 악인으로, 악인이 선인으로 오인되던 상황이 해소되고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은 유연수와 천자의 깨달음에 의해서인 것은 사실이다. 그 중 이 작품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천자의 깨달음이다. 교씨의 몰락이 이때부터 시작되고 사씨가 유연수와 정식으로 재결합하여 살 수 있게 된 것도 이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보면 문제의 발단은 가정에 있었는데 문제의 해결은 국가적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적인 것으로 수렴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선 이 작품을 가정 문제와 국가 문제를 각각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이분하여 보는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작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체계 속에서 가정과 국가에서의 문제를 연속적이고도 유기적인 관계로 구성하였다는 좋은 증거이다. 이처럼 가장이 아닌 군주의 깨달음이 전환의 핵심에 놓인 것은 유가의 인식 방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작자의 붓끝아래 창조된 유한림의 성격은 너무 이상적으로 되어 있는데 기실 유한림은 봉건가문의 가장으로서 얼핏 보기에는 학식이 있고 사리에 밝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본질에 있어서 자기의 가정 하나 똑똑히 꾸려나가지 못하는 무능력한 양반관료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 작자가 사씨를 통해 표현한 선의 실체는 개인을 배제한 가문 위주의 사고이다. 결말을 선한 사씨의 승리로 나타낸 것은 소설이 독자로 하여금 자기 발견의 감동을 가지게 한다는 의식을 가진 작자의식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결 론   김만중의 는 한국 중세문학사에서 사실주의소설의 새 장을 열어 놓은 대표적 작품으로서 한국 사실주의소설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는 당시 현실의 총체적인 반영물로서 특히  제가·  치국·수신· 평천 하라는 유가의 이상적인 체계 속에서 제가 차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작자는 제가와 치국의 관계를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로 구성함으로써 제가의 중요성이 치국· 평천하로 이어짐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작자는 가정 질서 훼손의 원인을 축첩제라는 제도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시대를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성장한 첩의 자존적인 욕망 추구에서 찾았다. 즉 작품은 인간의 현재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유가적 현세주의’ 에 바탕을 둔 김만중의 현실 인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 서 제기된 모든 문제는 사씨의 선(善) 으로 해결되고 있다. 이를 통해 유가의 이상인 제가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작자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소설은 작가의 사상적 제약성도 보이고 있다. 작품에서 선하고 착한 여인의 이상화를 내세우면서 사정옥의 사람됨이 맑기가 거울 같고 덕이 옥 같다고 찬양하고 있으나 작가 자신이 사람을 대하고 평가하는 데서 봉건도덕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인물들이 위기에서 구출되는 일 역시 모두 현몽에 의거하는데, 작품의 구성상의 흠이라 할 수 있고 현실감을 크게 감퇴시키고 있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진지하고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김귀석, 조선시대 가정소설론, 1997. 2.김만중, 청목,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2003. 3.김만중, 우리가 읽어야할 고전, 푸른 생각, 2006. 4.김병권, 창선감의록과 조성기의 창작의식, 한국문학회, 1990. 5.김진영, 고전작가의 풍모와 문학, 경희대출판부, 2004. 6.박일용, 의 이념과 미학, 고소설연구, 제6집, 한국고소설학회. 1998. 7.박홍준, 문예, 창선감의록, 2000. 8.엄기주, 의 의미와 서포의 작자의식, 고전문학연구, 제8집, 한국고전문학연구회, 1993. 9.윤윤진, 한국문학사, 상하이교통대학 출판, 2007. 10.이문규, 고전소설비평사론, 새문사, 2002. 11.이상택 외, 한국 고전소설의 세계, 돌베개, 2005 12.이승수譯註, 박이정,졸수재집 : 천년뒤 知己를 기다리다, 2001. 13.이원수, 가정소설 작품세계의 시대적 변모,경남대학교 출판부,1997. 14.정출헌, 고전소설의 구도와 시각, 소명출판, 1999. 15.정출헌 외,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한겨레출판, 2006. 16.채미화, 조선문학사(고대부분), 연변대학 출판, 1992. 17.황의동, 조성기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한국동양철학회, 1998. 18.韦旭升,谈朝鲜古典小说,国外文学,1984年01期.   [1] 윤윤진 등, , 상해교통대학 출판사,2007, P154 [2] 이문규, 고전소설비평사론, 새문사, 2002. P136  
229    최치원 창작사상 연구 (고효홍) 댓글:  조회:10035  추천:0  2013-01-24
                             摘  要        韩文学是韩民族在朝鲜半岛营生以来近两千年流传下来的文学。其中汉诗从韩国古代诗歌中呈现了出来并慢慢在韩国文学中占据了一部分。其中孤云崔志远被认为是是新罗韩文学的代表人物,是韩文学的始祖。     在哲学思想、文学、历史学等许多方面,崔志远可以作为当时的代表。崔志远的思想体系在探究我们国家的固有思想和古代思想方面提供了许多。崔志远自己也因为对时代的不满和对学问的热情在矛盾中苦恼而留下了许多作品。所以他的诗并不能单纯地仅只从诗里去理解,而应该从时代环境、个人情况等方面来评价。       关键词:崔志远、汉诗、创作思想 哲学思想 时代环境                                          초  록      한문학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해 온 이래 거의 2000년 가까이 접해온 문학이다. 그 중에서도 한시는 한국 고대시가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서서히 한국 문학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 그 중에서도 고운(孤雲) 최치원 (崔致遠)은 신라 한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한국 한문학의 개조 (開祖)로 일컬어진다.   최치원은 철학 사상、문학、역사학 등 여러 방면에 있어, 당시의 학구적 지성을 대표할 만한 존재였다. 최치원의 사상체계는 우리나라 고유사상과 고대사상을 탐구하는 데 있어 많은 실마리를 제공하여 준다. 최치원 자신도 시대에 대한 불만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인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였기에 이와 같이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단순히 시안에서 이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환경. 개인적 상황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키워드:최치원  한시  창작사상 철학사상 시대환경                                          차 례  摘要……………………………………………………………2 초록……………………………………………………………3 서론……………………………………………………………5     1.연구목적과의의…………………………………………5     2.기존 연구사검토…………………………5                  3.연구범위와 방법…………………………………………5 본론……………………………………………………………6     1.최치원의생애와창작활동………………………………6      1.1최치원의 생애………………………………………6      1.2최치원의 창작사상……………………………7      1.3최치원 시의 배경……8      1.4창작동기와 문학관……………………………8     2.최치원의 문학세계……………………………………9      2.1최치원의 문학성과………………………………9      2.2최치원 시의 세계…………………………………9 결론……………………………………………………………15 감사의 말씀…………………………………………………16 참고문헌……………………………………………………16                              1. 서 론  1.1  연구 목적과 의의   한문학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해 온 이래 거의 2000년 가까이 접해온 문학이다. 그 중에서도 한시는 한국 고대시가의 모습을 나타 내면서 서서히 한국 문학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한시는 개화기 이전의 한국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한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자, 한국 한문학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진다. 오늘날에 오기까지 그가 남긴 업적은 시와 문장 등에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한문학을 산출해 놓아 ‘동국문종(東國文宗)’이라 추앙받았다. 1.2 기존 연구사 검토 최치원의 연구는 대체로 문학사적인 접근으로써 한문학적인 평가에 그친감 이 있었고 본격적인 의미에서 근대 사학적인 연구라 하기엔 미비점이 많았다. 한국 역사 학에서는 학문적 연구 논문이라 칭할수 있는 연구는 금서룡 (今西 龍)에서 비롯 되었 다고 할수 있지만, 고운의 시와 문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김중열의 논문과 생애와 시무책의 성격을 다룬 최경숙의 논문이 나옴으로써 전반적인 연구가 시도되었다 할 수 있다. 1.3 연구범위와 방법  한 작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 작가의 삶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문학작품 중에서도 한시(漢詩)에 대하여 다루 기로 한다. 그의 한시에서는 그가 가진 천부적 재능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그의 감성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 본 론 2.1 최치원의 생애와 창작활동 2.1.1. 최치원의 생애 최치원은 후기신라의 진보적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경주의 사령부의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최치원의 탄생설화가 널리 전해짐 으로서 아주 신비한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의 사망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치원 (857~?)의 자는 고운 또는 해운이라 하였다.   12살 때인 868년부터 884년까지 당나라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18세에 빈공과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20세에 선주율수현위로 임명받은 후 그곳에서 한동안 벼슬살이를 하였다. 《계원필경》의 서문에 의하면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와 산문을 창작하여 뛰어난 시재로, 재능있는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중국의 이름난 시인, 문필가들을 경탄시켰다. 그는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첫 시기에는 반동적인 통치계급의 입장에 서있었으나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점차 관료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였다. 사상의 경향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그로 하여금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짙게 하였으며 그가 16년 간의 이국살이를 끝내고 귀국할 결심을 품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28살이 되던 885년에 고국에 돌아와 약 10년간 시독,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 아찬 등의 벼슬살이를 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문란 하여진 신라의 정치체제를 바로잡고 잘못된 정사를 고치는 것에 대한 견해를 제기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자신의 뜻대로 실현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완고한 통치세력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지방관리로 밀려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생활과정을 통하여 최치원은 신라의 운명을 더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40대 이후에는 벼슬살이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은둔하였으나 그 최후행방을 모른다. 2.1.2. 최치원의 창작사상 최치원은 철학 사상, 문학,역사학 등 여러 방면에 있어, 당시의 학구적 지성 을 대표할 만한 존재였다.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동국문종” 또는 등으로 일컬어져 왔다.   고운은 다방면의 인생체험과 학문으로 인하여 역사, 철학, 문학, 그리고 민속 문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당시 개혁을 통하여 진보적인 사상으로 사회를 선도해 보려고 진력했던 점이 두드러졌으나 만년 에는 은거하여 학문과 자신의 수양을 통하여 도(道)를 찾고자 하였다.  최치원은 유교뿐만이 아니라 불교, 도교 모두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썼으며 또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였다. 문장이란 뜻이 통하는 것은 물론이며, 또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게 하려면 관심을 끌어야 하는데 이러한 관심은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는 글 자체를 중요시 하였다.    최치원의 사상적 지향은 풍류도에 있었는 바 그 풍류도는 유가와 도교 그리고 불교를 차별 없이 수용한다. 그의 사상적 출발은 유가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끝까지 당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유가 제도에 의한 왕권의 중앙집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불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최치원은 일련의 불교 저술을 통해 문장(文章)을 뜻하는 구학 (口學)보다는 선법을 뜻하는 심학(心學)을 중시하여 심학(心學) 을 주체로 하여 구학(口學)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치원은 중국의 전통적 한문학 장르들을 다양하게 수용하여 시험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 세계는 내용 면에서 안정돼 있지 않다. 이런 그의 문학관은 쇠망해 가는 통일 신라 사회에 절망하면서 그 사회를 쇄신할 삶의 원동력조차 상실했던 그의 환경과 연결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2.2.3 최치원 시의 배경   최치원은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가이며 사상가라기보다는 문장가라고 평가 되어 왔다. 이것은 최치원이 체계적이거나 이론적인 사상을 피력한 바 없고, 문장에 있어서 지나치게 수식적인 병려문을 많이 산출한 데 기인한다. 이러한 연유로 하여 최치원은 주로 문학적인 측면에서 접근이 이루어졌으며 철학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은 엉성했을 뿐 아니라 한결 같이 최치원이 일관된 사상이나 이론을 펴지 못하고 단편적인 사상을 기록 술회한 데 그쳤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최치원의 사상은 당대의 사회 문화적인 문맥에서 단편적인 것도 비체계적인 것도 아니며 특히나 중국 에서 성장기를 보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사상은 동양사상을 그대로 내보인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최치원의 철학사상은 주로 유교의 진취적인 사회정치적 이념과 도덕적 관념 그리고 도교의 자연우위사상과 불교의 비관출세사상의 영향을 많 이 받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2.4  창작동기와 문학관   최치원은 한마디로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할 것을 목적으로 문학을 시작한 사람이다. 최치원은 글이란 언어의 조탁보다 그 작자의 마음에 쌓은 뜻을 담는 것이 중요하고 또 이것은 바른 성정에서 근본한다고 보았다. 그래 야만 비로소 가르침이 있고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즉 최치원은 주로 유교적 문학관을 표방하고 또 그것을 충실히 수행했는가 하면 동시에 도교적 언어 관에 의한 표현론적인 문학관 또한 상당히 중요시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그처럼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이나 직업의 영향도 있었 으나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표현론적 문학관의 한 반영이라 할 수도 있다. 3. 최치원의 문학세계 3.1 최치원의 문학성과 최치원의 수많은 문장을 남긴 문장가이다. 비록 고국에 돌아온 후, 당나라 에서 지은 문장의 대부분을 스스로 버리기도 했지만, 그의 문장에는 다분히 현실적인 면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처럼 곡절 많은 생활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주제의 우수한 시작품들과 을 비롯한 수이전체 산문 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역사, 민속, 철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그의 저서로서는《사륙집》1권, 《계원필경》20권,《문집》30권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해진 것은《계원필경》뿐이다. 이외 많은 시와 산문들이 여러 문헌들에 실려있다.(정홍교ㆍ박정원, 조선문학개관, 한국문화사,1986, p50~51.) 3.2 최치원 시의 세계 최치원의 시 세계를 몇 가지로 분류해 고찰할 수 있다. ① 개인적 감정을 읊은 시                                     제멋대로 첩첩 쌓인 돌들에 달리어 겹친 뫼뿌리에 으르렁거리니      사람의 말소리가 지척 간에서도 알아듣기 어렵다.      항상 시시비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하여금 다 산을 채웠나 보다.   이렇게, 그는 산중에 있으면서 세상 명리에 대한 미련과 유혹을 자기 의지 로써 떨쳐 버리고 흐르는 물을 시켜서 세상의 시비 소리를 차단하려 하고 있다. 여기서 광분하는 물소리는 최치원 자신의 내면의 갈등의 상징적 표현 으로, 이것으로서도 그가 얼마나 세상 명리에 집착하였는지 알 수 있다. 자연 을 읊으면서 더 나아가 은둔한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것이다. ② 정과 사 (현실 인식의 시)                                                                                               강남 땅은 풍속이 방탕해서                딸을 기를 때 애교 있고 어여쁘게만 하는구나.                습성이 모양만 내고 바느질하기를 부끄러워하여                몸단장을 하고 나서 관현에 들어가기만을 다투네.                배운 것이 정악(바른 음악)이 아니라                춘정에 끌림이 많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꽃다운 안색                청춘이 영원할거라 생각하네                어느 날 이웃집 여자가                베짜는 것을 보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비단 짜기에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비단옷은 네게 이르지 않으리   이 시는 그가 선주 율수현위에 있을 때 강남지역의 백성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당시의 모순된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이다.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점도 특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여자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통하여 그 시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강남녀와 자기가 만든 것도 자신 것이 되지 못하는 이웃집 여자를 대조시켜서 계층 계급간의 격차를 표현하고 있다. 직접적이고 대조적 묘사를 통하여 모순된 사회상․현실의 불합리성을 보여준 그의 대표적 사회 비판의 시이다.                                                                                여우는 능히 미인으로 변할 수 있고,                  삵쾡이 또한 선비가 될 수 있네                  누가 알겠는가? 짐승의 무리들이                  사람으로 둔갑해서 속이고 흘림을                  형체를 바꾸는 것은 쉽지만,                  마음 바로가짐은 진실로 어렵고 말고,                  참과 거짓 가릴려면                  마음의 거울을 닦고 보시오      귀국후 신라사회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 시에서 그는 신라말 귀족 통치자들을 여우나 삵괭이로 비유하여 부패상과 사회적 혼란상을 잘 보여준다.                                                                                           부디 이익의 문을 닫고                     주신 몸을 해치지 마시오                     어찌하랴, 진주를 캐는 사람은                     목숨을 가볍게 여겨 바다 밑을 들어가는구나.                     몸의 영화는 티끌에 물들기 쉽고                     마음대로 물로 씻기 어렵다                     누구랑 담담한 맛을 의논하리오                    사람들은 단술만을 좋아하는고.     세상의 탐욕적인 행동을 깊은 바다밑에 기어들어가 구슬을 찾는 행동에 빗대어 말하고 있고 그들이 일시적으로 출세한다고 해도 한 번 더러워진 마음 은 영원히 씻기 어렵다고 경고하고 있다. 재물과 권세에 대한 탐욕이 극도에 달하여 그 무엇도 꺼리지 않고 날뛰는 파렴치한 봉건 통치배들의 모습과 사회상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함께 노래하고 있다.                                                                                        거칠은 밭가장자리 쓸쓸한 곳에                   탐스런 꽃송이들 여린 가지를 누르는구나                   장마가 그치자 향기 가볍고                   보리익음에 그림자는 하늘거린다.                   수레탄 자 어느 누가 와서 보리오                   벌나비만 부질없이 서로 엿보네                   천한데 태어난걸 부끄러워할 뿐,                   버림당해도 한스러워 할 수 있나?   태어난 땅은 황량한 밭 가장자리이므로 버려져도 할 수 없이 참을 수밖 에 없는 촉규화의 처지는 곧 자신의 처지이다. 자신이 갖추고 있는 학문과 자질 에 대한 높은 긍지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대한 깊은 비탄 등이 엇갈린 시이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졌어도 쓰이지 못하고 있는 자기 시대의 계급관계의 불합리성을 말하고 있는 동시에 그러한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는 자신에 대한 처지를 노래하고 있다. ③ 좌절과 원망(역시 개인적 감정을 읊은 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치원은 향수와 객고 혹은 이별의 정한을 토로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가을 바람에 오직 괴롭게 읊조리기만 하니                  세상엔 지음(나를 알아주는) 이 적은데                     창 밖엔 삼경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엔 만리를 가는 마음      이 작품은 5언 절구의 한시이다. 깊어 가는 가을 밤 비바람 속에서 시적 화자는 괴로운 심정으로 시를 읊는다. 시를 짓는 일도 괴롭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 것이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황량한 가을 밤, 화자는 가슴을 안고 늦도록 잠이 들지 못해 등잔을 마주 했으나 마음은 만리 밖을 떠돈다. 이 시는 오언 절구이며,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는 만 리나 떨어진 타국에서 고국 신라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만리심’ 은 이 세상과 화자 사이에 벌어진 심리적 거리를 표현한 것이며, 이 때 ‘지음’이란 자신을 알아 주는 벗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알아 주는 세상이기도 하다. 결구 (結句)는 등불 앞에서 잠 못 이루며 느끼는 고독과 비애, 소외감, 탈출 욕구 등이 절실하게 나타난 주제구이다.                             여관에 늦가을 비가 내리는데 쓸쓸한 창 고요한 밤 등불 밝히고 수심 속에 앉았으니 스스로 가련하기만 하네 진실로 한낱 정에 든 중이로다 이상의 시의 내용을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치원 문학의 성가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그가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당나라에서 떨친 명서에 주목한다. 동방의 시는 최치원에 이르러 비로소 발휘되었으며, 최치원 이전의 을지문덕의 여수 장우중문시나 선덕여왕의 직금송 같은 것은 비교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둘째, 최치원의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은 비록 그것이 오늘의 안목 에서 볼 때 만족할 만한 것은 못되지만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임에 틀림 없다. 이들의 평은 크게 상반된 두 부류로 나뉜다. 은 당시 (속악) 에 넣어도 무방할 정도이며 는 당나라 사람도 미치지 못할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등을 들어서 가히 중국시인들과 겨룰만하다고 하였다.                                                                                                      4. 결론 작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작품만 가지고 그의 세계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인 듯 하다. 왜냐하면 최치원의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속에는 그의 정서를 지배하는 시대적인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하대로 갈수록 혼란스럽고 왕권이 쇠퇴하듯이 최치원이 유학갔던 당뿐만 아니라 신라도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최치원 을 더욱 갈등하게 했고, 그로 인한 불안정함이 작품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었 음을 알 수 있었다. 최치원 자신도 시대에 대한 불만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인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였기에 이와 같이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전원 시의 원류로서나 고향의식을 시로 표현하여 개인 서정시를 확립한 점 등은 대단한 성과이다.   또한 최치원의 시는 인간의 감정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관극시 및 현실 풍자의 시까지 넓게 지어졌다. 사회적 현실의 여러 측면들을 자신의 생활을 바탕으로 진실되고 생동감 있게 재현하였으며, 자기자신이 소속된 봉건귀족 계급 내부의 모순과 부패상을 사실적으로 예리하게 노래하고 비판적 입장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시는 단순히 시안에서 이해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환경. 개인적 상황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최치원 자신도 시대에 대한 불만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인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였기에 이와 같이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전원시의 원류로서나 고향의식을 시로 표현하여 개인 서정시를 확립한 점 등은 대단한 국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고전연수실편역, 삼국사기(하) 제 46권 제6열전 최치원, 과학원, 1958 2. 손영목, 삼국왕조 야록, 오늘, 1999 3. 임병주,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1998, 들녘 4.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4),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2000, 한길사 5. 양귀선, 고운 최치원, 1995, 한불문화학술총서 6. 이재운, 고운 최치원, 한국문화연구원, 1999, 한국문화연구원 7. 장문평, 위인전기 최치원, 1985 금성 8.박희병,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돌베개, 1997, 9.이헌홍, 「최치원의 전기소설적 구조」, 부산여대, 1982. 10.장효현, 「전기소설의 장르 개념과 장르사의 문제」, 『한국고전 소설 사연구』, 11고려대출판부, 2002. 11.이헌홍, 「고소설의 기점설정 문제 재론」, 계명문화사, 1992. 한국고소설학회, 「한국고소설론」, 아세아문학사, 1991. 12.박태상, 「『태평통제』소재 연구」, 한국고소설학회, 고소설연구, 1995 지준모, 「최치원전 평석」, 동방한문학회, 1999 13.주류성,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 한국사학회, 2001 14.이구의, 『崔孤雲文學硏究』, 아세아문화사, 2006 15.정출헌-고미숙-조현설-김풍기 지음,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한겨레출판, 2006. 16.최준옥 편, 『國譯 孤雲先生文集』 下, 학예사, 1982  
228    나도향 초기작품의 예술특성 (관명) 댓글:  조회:8992  추천:0  2013-01-24
                                    摘 要      罗稻香韩国小说家、散文家。原名罗庆孙,又名罗彬。生于汉城(今首尔)一汉医家庭。曾在医专求学,后赴日本半工半读。1924年发表《找到自己之前》以后,开始摆脱白潮派文学的影响,走向进步文学道路。坚持走批判现实主义道路的罗稻香在他的作品中揭露与批判了日本帝国主义统治下社会的罪恶,对朝鲜人民的无权地位与悲惨生活寄予了深切的同情。 作品 短篇小说《桑树》(1925),《水碓》(1925),《哑巴三龙》(1925),《池亨根》(1926),《医生的自白》(1926》等。作品多揭露日本帝国主义的黑暗统治,反映劳动人民的苦难生活。1921年起作为《白潮》的同仁开始文学活动,陆续发表了《年轻人的时节》、《抱了星星,别哭了》等作品。在《东亚日报》连载长篇小说《幻戏》后一举成名,小说用感性的笔触描写了一个知识女性的命运。他的前期作品,如《年轻人的时节》、《佣人之子》,有伤感主义色彩和自然主义倾向。    关键语:罗稻香 批判现实主义 社会的罪 恶朝鲜人民 自然主义                                       초 록   나도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이기도 하다. 1921년 《백조(白潮)》의 동인 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 , 등을 육속 발표하다가《동아일보(东亚日报)》에 장편소설 《환멸》을 발표하여 일거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전기 작품, 예하면 《젊은이의 时节》、《행랑자식(佣人之子)》등은 감상주의 색채와 자연주의 경향이 짙다. 1924년《자기를 찾기 전까지 (找到自己之前》를 발표한 후 백조파 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진보적 문학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실주의 문학으로 도약해서 비범한 문학적 역량을 과시했던 나도향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수작들을 남겼다. 도향의 짧은 생애가 남긴 작품 중에는 극히 미숙한 것도 많고 명작으로 지금까지 성가를 더해 가는 작품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남달리 천재적 작가였던 것은 그의 작품 활동을 한 6년 동안의 작품 세계에서 역력히 살펴볼 수 있다.       키워드 나도향 비판적사실주의 사회죄악 조선인민 자연주의   차 례 1. 1연구목적과 의의 1.2 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범위와 방법 2. 본론   2.1 어휘적 특성 2.2 수사적 특성 2.3 서술방법적 특성 2.4 사조적 특징 3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1. 1 연구목적 및 의의  나도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 대한 연구는 작품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나도향이 1922년 백조 (白潮)에 발표했던 초기 작품들은 치밀하지 못한 구성이나 서술형식의 결함으로 인해 단편소설의 양식을 충족 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학자들이 이들 초기작품을 연구대상에서 제외시켜오곤 했다. 이런 시점에서 필자는 도향이의 구체 작품분석을 통하여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 1.2 기존 연구사 검토  나도향에 대한 연구는 그가 근대단편소설의 형성에 끼친 문학사적 업적 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여느 작가들에 비해 그리 깊이 진행 되지는 못하였다. 이를테면 작가의 성장과정이나 사회 배경에 지나치게 집착하였 거나 사조적(思潮的)인 부분에 치중한 나머지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외적인 면에 치우친 편향성을 보여 왔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도향이 쌓아올린 작가적 위치와 작품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3 연구범위와  방법   본고에서는 역사주의 비평의 방법과 예증법으로 기존의 도향문학 연구 에서 무시했거나 소홀히 한 초기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독특한 어휘 및 수사적 구조를 재고찰하고 서술적 특성과 사조적 변화 양상을 살펴봄으 로써 그의 문학적 성숙 과정을 재확인하여 그의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마련 한다는데 연구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2. 본론   1. 나도향의 작품세계와 생애 1.1 나도향의 생애 1902년 3월30일 아버지 성연(聖淵)과 어머니 김성녀(金姓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향, 나경손(羅경손) 이고 호는 도향․소정지옹 (笑亭 之翁)․은하(隱荷), 필명은 빈(彬)이다. 나도향은 당시 기독교 청년회관 안에 설치되었던 공옥 보통학교를 거쳐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전에 입학할 때까지 표면상으로는 평탄한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1919년 3월1,도향은 조부의 장롱에서 노자돈을 훔쳐 일본으로 도망을 하였는데 일본에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위해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할 뜻을 가졌으나 결국 몇 달만에 귀국하여 그해 8월 26일 급성 폐렴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1.2 문학창작활동 1921년 4월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펴내는〈배재학보〉 2호 에〈출학 黜學〉을 발표한 이후,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3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그의 문학 세계는 제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1921~22년 〈백조〉 동인으로 활동 하던 때로 감상적 낭만주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을 발표했다.〈젊은이의 시절〉 (백조)․〈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백조)․〈환희 幻戱〉(동아일보)〈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개벽) 등이 이에 속한다.   제2기는 1923~24년으로, 현실비판을 내용으로 한 비판적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행랑 자식이지만 인간의 존엄과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고결한 정신을 보여준 〈행랑자식〉(개벽),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위선과 비인간성을 비판한 〈자기를 찾기 전〉(개벽) 등이 이에 해당된다. 제3기는 1925~26년으로, 전기의 경향을 한층 발전시켜 사회문제와 관련된 현실비판의 정도가 더 예리화된 소설을 발표했다. 대표작〈벙어리 삼룡이〉(여명)를 비롯해〈물레방아〉(조선문단)․〈지형근 池亨根〉(조선문단) 등이 이에 속한다. 〈물레방아〉는 구성이 잘 되어 있고 인물의 성격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며,〈벙어리 삼룡이〉는 초기의 감상적 낭만주 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구원의 의미를 보여준 작품이다. 그밖에 〈추억〉(신민공론)․〈은화․백동화〉 (동명)․ 〈여이 발사〉 (백조),〈꿈〉 (조선문단)〈뽕〉(개벽) 등을 발표했다.   1.3 나도향 작품의 예술적 특성 1.3.1 어휘적 특성(語彙的 特性)   그의 초기작품은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표현 기교가 미숙하였다 할지 라도 문체상 동시대의 주요 작가들과 비교해 볼 때 어휘적, 수사적, 서술적, 사조적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 적지 않다. 즉 도향의 초기작품에 쓰인 문장의 구조분석이야말로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가. 의성어와 의태어      도향의 초기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어휘적 특성으로는 역시 의성어와 의태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도향 개인의 감성적 기질에서 연유되기도 하지만 백조동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도향의 초기작품 문장을 살펴보면 그가 의성 어와 의태어를 얼마나 즐겨 사용했 는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나에게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말 할 수 없이 갑갑하게 하며 아침 날에 광채 나는 처녀의 살빛 같은 햇볕을 대할 때나 종알거리며 경쾌하고 활발하게 흐르는 시내를 만날 때나 너울너울 춤추는 나비를 볼 때나 웃는 꽃이나 깜박이는 별이나 하늘을 흐르는 은하를 볼 때, 아하! 나의 사지를 흐르는 끓는 핏속에 오뇌의 요정을 던지셨나이까?’                에서   도향의 위와 같은 의성어와 의태어의 빈번한 사용은 비록 습작기의 기교적 미숙 에서 연유되었다 할지라도 문장을 매우 생생하게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더욱 현장감 있게 만들고 작가의 감정에 쉽게 동감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에서 웃음을 묘사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도향이 의성어와 의태어를 얼마나 다양하게 구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눈물이 많도다.....’하고 ‘하하’하고 웃는데 누님하고 온 영빈이란 청년은 껄껄하고 어디인지 아주 불유쾌한 표정을 나타내며 눈물은 위안의 할아버지요. ‘허허허’철하는 눈물을 씻고 아주 어린아이같이 한번 빙긋 웃고......’ 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도향의 초기작품에서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지나치게 많이 사용 되었으며 또한 내용에 걸맞지 않은 어색한 표현이 적잖이 눈에 띈다. 하지만 1932년 이후에 발표한 작품에서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사용 이 크게 줄어들 뿐더러 점차 세련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에서 소설의 도입부분 첫머리와 방원의 처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도향이 의성어와 의태어를 얼마나 적절하고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새침한 얼굴이 파르족족하고 길다란 눈썹과 검푸른 두 눈 가장자리에 예쁜 입, 뽀로통한 빰이며 콧날이 오똑한 데다가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엉덩이가 아무리 보더라도 무섭게 이지적인 동시에 또는 창부형 으로 생긴 것이다.’  즉 도향의 중기 이후 작품에서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사용이 양과 질에서 동시대 여타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할 때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도향이 그의 초기작품에서 의성어와 의태어를 지나치게 사용했음은 표현기교의 미숙에서 기인했음이 확실해진다.   나. 색채수식어 나도향만큼 언어미학적 의식이 강한 작가는 그리 흔치 않은 편이다. 도향은 색채 수식어를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문장을 시적 차원 에까지 승화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초기작품들에 거의 모든 문장에서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인 색채 수식어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온 감정을 몽롱한 안개 속에서 헤매이는 듯이 누런 감정을 나에게 주더니 오늘에는 불그레하게 황금색이 나는 빛을 나에게 던져 주더이다. 그리고 황금색이 농후한 액체가 평평한 곳으로 퍼지는 듯이 점점점점 보이지 않게 변하여 동색 (銅色)의 붉은 빛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어여쁜 처녀의 분홍저고리 빛으로 변하기까지 하였나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 도향은 거의 매 문장마다 색체 수식어를 사용 하고 있으며 수식 대상도 일반 사물이나 현상뿐만이 아니라 색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행위나 감정에까지 폭 넓게 쓰고 있음이 확인된다. 에서 색채수식어를 발췌하여 분류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색채가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푸른색 계통       푸른 하늘, 푸른 풀, 파란 물, 푸른 사막, 파란 액체, 푸른 웃음, 푸른 눈썹, 푸른 달빛, 파르스름한 하늘, 푸른 물결, 파란 얼굴, 파리한 얼굴 등   ○ 붉은색 계통      붉은 월계, 붉은 석양, 빨간 키스, 붉은 입술, 붉은 별, 붉은 해, 붉은 피, 빨간 사랑, 붉은 심장, 빨간 얼굴, 혈색의 옷, 다홍치마, 홍등촌 등   ○ 하얀색 계통      흰 구름, 흰 나비, 회색 풀, 흰 아지랑이, 하얀 뺨, 흰 옷자락, 하얀 구름, 하얀 모래, 은빛 달빛, 은빛 물결 등 특히 주목할 것은 나도향이 그의 초기작품에 사용한 색채수식어 중 푸른 비애, 누 런 감정, 불그레한 미소, 회색 실망, 빨간 키스, 푸른 웃음, 빨간 사랑, 회색 침묵, 푸른 감상, 회색 파문 등의 묘사는 색감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는 문장이 아름답거나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묘사에 흘러 오히려 부적절한 수식으로 보이게 한다. 이런 감각적인 언어의 남발로 인하여 어느 면에서는 운문에 가까운 문장 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도향의 색체수식어는 중기 이후 작품부터는 점차 줄어 들기는 하지만 그의 문체적 특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다. 외래어  도향의 초기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어휘적 특성으로는 외래어의 남발을 들 수 있다. 특히 도향의 에서 사용된 외래어를 내용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사람 이름 : R, DH, MP, L, W, S, Y, H, P, 동생L 등   ○ 인용 이름 : 비니큐스, 리지아, 에레나, 인사로프, 크르나도오스키 등   ○ 고유명사 : C동, KC, SC강, SP강, ,C예배당, HC강, PC 등   ○ 인용 작품 : , 등   ○ 기타 외래어 : 센티멘탈, 플렛폼, 에에테르, 등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중기작품의 그리 길지 않은 문장 속에서 브러시, 팔레트, 캔버스, 모토 등의 외래어가 발견된다. 이 같은 도향의 외래어 중독현상은 1924년에 발표한 이후 작품에 이르러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만 그의 수필에서는 여전히 외래어를 즐겨 쓰고 있음이 확인된다. 2. 수사적 특성 가. 열거  그의 초기작품의 문체는 동사, 형용사, 부사가 많은 만연체로 되어 있다. 그리고 수사법상 문장이 대등적연결어미로 이어진 열거법을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가 아프고 신흥이 나지 않아서 펴놓은 종이를 척척 접어 내던져 버리고 기지개를 한번 켜고 대님을 한번 갈아매고 모자를 집어쓰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에서 열거된 내용이 모두 마지막 서술어를 수식하고 있음은 여느 문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나 도향의 경우 열거가 지나치게 길기 때문에 문장 상호간에 연결 관계가 뚜렷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고 있다. 나. 비유 도향은 그 어느 작가보다도 비유와 상징을 많이 쓴 작가에 해당한다. 도향의 초기 작품에는 직유가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후기작품에서는 이러한 직유가 은유로 대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비유법이 도향 작품의 문체적 기조를 이루고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비유가 점차 세련되 면서 사실주의 작가로 성장하게 하는 동인이 되고 있다.   도향의 초기작품에 나오는 직유의 특징은 비유가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에 나오는 직유의 예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 작은 여신의 젖가슴 같은 풀포기 / ○ 처녀의 살빛 같은 햇빛   ○ 새색시 얼굴 같은 달/ ○ 아지랑이 같은 부드러운 마음   ○ 바람결 같이 가벼운 음조 / ○ 햇솜 같이 부드러운 여성 이 뿐만이 아니라 도향은 하나의 원관념에 다양한 보조관념을 비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서 음악소리를 비유한 부분을 발췌하면 도향이 수사에 있어 비유를 얼마나 선호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 흰 구름 같이 흰 음악소리 / ○ 아지랑이 같이 흰 음악소리   ○ 흰 구름 같은 음악소리 / ○ 아지랑이 같이 희미한 음악소리 이처럼 초기작품에서의 거칠고 유치하게 보이는 비유가 후기작품으로 갈수록 점차 세련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함께 처음에는 주로 대화나 독백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은유가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묘사에도 흔히 쓰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다. 대조 도향 작품의 수사적 기교들 가운데 또 하나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대조법이다. 그의 대조는 서술에서 뿐만이 아니라 대화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소설의 전체 분위기 마저 대조의 구도로 이끌어가는 복합성을 보이고 있다. 의 일부 구절에 보이는 대조를 보면 도향 이 다른 수사기교에 비해 대조법을 능란하게 구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날이 매우 따뜻해졌습니다. 내일 쯤 한 번 가서 뵈오려 하나이다. 하오에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W군은 어저께 동경으로 떠나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나보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하외다. 그리고 S군 Y군도 그리로 향하여 수일 후에 떠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아, 저는 외로운 몸이 홀로이 서울에 남아 있게 되겠지요. 정다운 친구들은 모두다 저 갈 곳으로 가버리고......’     ○ MP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 누님의 도적질한 것은 그것을 죄를 정할까요, 상을 주어야 할까요?   ○ 내가 행복한 자냐, 불행한 자냐?   ○ 호의의 비평을 하였을는지, 악의의 비평을 하였을는지? ○ 아 누님, 그 소리가 진정이거나 거짓이거나 관성으로 인하여 우연히 나온 말이거나 아무 것이거나. 위에서 보여주듯 설의문의 경우 강한 긍정과 강한 부정이 함께 짝을 이루어 대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도향의 초기작품에 보이는 대조는 단조롭지 않고 서술에 커다란 변화를 줌으로써 내용을 강조하는데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라. 반복 도향은 초기작품의 문장에서 단어를 반복하여 쓴 경우가 적지 않다. 도향의 초기 단편소설에서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뿐 아니라 구(句) 와 절(節)의 반복까지 적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연체문장이 주는 지루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복의 경우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에레나는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 없는 사람을 사랑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MP도 언제든지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할 터이지요. 그러면 그 MP가 저에게 신앙이 없다고 한 말은......   ○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있을 뿐이지요. 사람이 사랑으로 나고 사랑으로 죽고 사랑으로 살기만 하면 그 사람의 생은 참 생이 되겠지요.   ○ 경애는 영빈을 사랑한다. 영빈도 경애를 사랑한다고 한다. 경애는 사랑이요, 사랑은 경애요, 영빈은 사랑이요, 사랑은 영빈이다. 사랑과 영빈과 경애는 한 몸이다. 위에서 보여 주듯 도향의 초기작품에 보이는 단어와 구와 절의 반복은 단편소설의 문장으로서는 전반적으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3. 서술방법적 특성   나도향의 초기작품은 대부분 소설의 전통적인 서술형식을 외면하고 고백적, 자서전 적인 서술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1922년과 1923년에 발표한 작품들은 거개가 자신의 과거체험에 초점을 맞춘 서간체적시점으로 서술하였다. “초기작품에서는 내용의 대부분을 직접화법으로 일관하고 있어 독자 들에게 지루한 감을 주지만 중, 후기작품에서는 상당부분을 간접화법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야기의 보폭이 빨라졌을 뿐 아니라 사건이 보다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향의 초기작품에서는 서술자가 항상 소설 속의 참여자로 나온다. 또한 서술자와 작중 인물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적당한 거리감에서 생기는 객관적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즉 서술자가 직접 독자들 앞에 나서서 읍소(泣訴)하듯 서술하고 있으므로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이야기의 서술자를 의식하게 된다.   도향의 초기작품에서는 생을 열정적이며 주관적으로 본데 비해 중기 이후 작품 에서는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시야를 갖게 된다. 그리고 서술자는 소설 내용의 중심 에서 서서히 밖으로 이동을 하게 되고 독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또 한 객관적인 자세를 회복하면서 초기작품에 비해 훨씬 안정된 소설구조를 갖추게 된다.   도향의 작품세계는 을 기점으로 하여 다분히 열정적 이고도 내면적인 1인칭 서술에서 벗어나 3인칭의 객관적 서술로 옮겨간다. 이상에서 알아본 바와 마찬가지로 도향의 초기작품은 서술기교 의 미숙에도 불구하고 서간체에 직접화법을 사용하여 시제의 현재법을 이루고 있는 점이라든가 작품의 화제 첫머리에 결과를 짐작하게 하는 예시를 한 점 등은 관심을 가질만한 기법이다.  4. 사조적 특성(思潮的 特性)   문학사적으로 볼 때 한국에 있어서 19세기 초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다양한 사조 적 조류에 휩쓸린 시기였다. 도향의 소설 역시 19세기 초 한국 문단의 분위기가 그러했듯이 문학사조의 격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백조파 동인 이었던 약관(弱冠)의 도향에게 서구적 낭만주의 는 매력이 있는 사조로 인식되었으며 이의 서툰 흉내는 그의 초기작품을 감상적 낭만주의에 흐르게 만든다.   도향의 초기작품은 구성과 문체를 보건데 신소설의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의 감상주의적 기질은 그의 문체가 영탄에 흐를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된다. 특히 과 , 그리고 등 세 작품은 작품 전체가 영탄으로 되어있고 이나 등 사실주의의 작품을 발표할 때까지 자기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내뱉는 감탄사가 작품 자체를 지극히 염세주의적이며 탐미주의적 분위기로 몰아간다. ‘아아, 누님은 생의 모든 것을 욕보였습니다. 누님은 누님 자기를 욕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우를 욕하고 .......아아, 나는 참으로 그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어요. 나의 목을 누르는 듯한 누님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는 없어요. 아아, 내가 독사, 악마라면 누님은 나보다 무엇이라 할 수 없는 요녀입니다. 사랑의 육계를 앙상한 이빨로 뜯어 먹는 요녀예요. 무덤 위로 방황하는 야차입니다. 아아, 나의 가슴은 터지는 듯해요. 아아, 어찌하면 좋을까요. 누님 ...네......’  도향의 초기작품은 지나치게 영탄조로 흐름으로써 오히려 수사에 실패하였으며 작가 스스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감탄사를 연발함으로써 산문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였다.                                                                        3.  결론     도향은 지극히 짧은 창작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있어 사조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휘, 수사 서술방법에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의 분석을 위해서 그의 초기작품에 대한 문장 해부는 도향의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도향의 초기작품은 어휘나 수사, 서술방법 및 사조적 측면에서 독특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도향의 초기작품에 대하여 산문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습관이나 수사적 기교의 미숙, 서술방법에 있어서의 객관성 결여 등을 이유로 치기어린 작품 이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 지적해야 할 점은 초기작품의 표현 기교와 서술방법이 그의 성공적인 작품의 기초가 되고 있으며 창작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도향의 초기작품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전체 작품을 더 깊이 연구하지 못함으로써 한계가 있다. 그리고 후기작품의 계속적인 연구와 재평가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참고문헌    1. 金載弘, 『한국대표명작 나도향』, 지학사, 1985. 2. 윤홍로, 『나도향 낭만과 현실의 변증』, 건국대학교출판부, 1997. 3. 이국룡, 『나도향 소설의 작중인물 연구』, 단국대학교, 1991. 4. 羅稻香, “梨泰院에서 ‘二’” 批判(서울: 批判社, 1932. 3) 5. 玄吉彦, “羅稻香小說의 一考察” 濟州大論文集 제13집(제주, 濟州大學校, 1982) 6. 최영미,「나도향 소설의 변천과정고」,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1982 7. 김우종,『나도향론』,현대문학, 1962, p. 204 8. 이인복,『나도향론』,현대문학, 1969, p. 300 9. 구인환,『한국근대소설연구』,삼영사, 1977, p.161 10. 정한숙,『한국문학의 주변』,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5, p. 25 11. 윤홍로,
227    허균의 “홍길동전”에 대한 초보적 연구 (담혜 ) 댓글:  조회:11556  추천:0  2013-01-24
                                        摘 要   许筠是十七世纪朝鲜李朝杰出的政治活动家和著名的文学家、小说家,诗歌批评家、中朝文化交流史上的重要人物、朝廷官员、著名的“异端”。许筠的文学成果是当时朝鲜朝社会环境和中国中晚明文化影响共同作用形成的。 他为反对封建的嫡庶差别,和封建王朝作了英勇的斗争。《洪吉童传》是朝鲜最早的国文小说,主要是反对嫡庶差别,反对贪官污吏,并有推翻封建王朝的思想。他的小说《洪吉童传》深刻地反映了当时的社会面貌,艺术上也是优秀的,作为朝鲜文学史上出现的第一部长篇小说,对后世朝鲜文学的发展产生了深远的影响。   关键词:小说家 社会面貌 嫡庶 理想王国                                           초 록   허균은 17세기 조선 이조시기의 걸출한 정치활동가이자 저명한 문학가, 소설가, 시가비평가이며 중조문화교류사상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조 정의 관리였지만 또한 저명한 “이단자”이기도 했다. 허균의 문학성과는 당시 조선사회환경과 중국 중,만시기 명나라문화의 영향이 공통하게 작용 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는 봉건적 적서차별을 반대하여 봉건왕조와 영용하게 투쟁하였다. 《홍길동전(洪吉童传)》은 조선의 최초의 국문소설로서 주요하게 적서차별 을 반대하고 탐관오리를 반대하였으며 봉건왕조를 뒤엎으려는 사상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설《홍길동전(洪吉童传)》은 당시 사회면모를 심각 하게 반영하였으며 예술상에서도 역시 우수한 바 조선문학사상에서 출현된 첫번째 장편소설로서 후세 조선문학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키워드: 소설가 사회면모 적서차별 이상왕국   목차 서론 1.1 연구목적 및 의의……………………………………………4 1.2 기존 연구사 검토……………………………………………4 1.3 연구 범위와 방법……………………………………………4 본론 2.1 허균의 생애 …………………………………………………5 2.2 문학창작 활동 ………………………………………………6 3. 작품해설…………………………………………7 3.1 창작배경…………………………………………7 3.2 창작동기 ………………………………………8 3.3 의 구성 …………………………………………9 3.4 의 사상내용 ……………………………………9 3.5홍길동의 인물형상이 가지는 의미………………………11 4. 영웅구조를 통해 본 ………………………… 12 4.1문학사적 가치………………………………………………13 4.2소설의 제한성………………………………………………13 5.결론…………………………………………………………15 6.감사의 말 …………………………………………………16 7.참고 문헌 …………………………………………………17                                              서 론 1.1 연구목적 의의 조선문학사상 최초의 국문장편소설〈홍길동전〉은 홍길동이라는 영웅이 적서차별과 같은 사회적 불합리에 항거하여 활빈당을 이끌고 지배체제와 대결하고 결국 후에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고전이다. 소설은 그의 비판 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주제면에서 적극성이 있거니와 예술상에서도 우수한 국문장편소설로서 후세 조선문학 의 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 조선 고전명작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1.2 기존 연구사 검토 『홍길동전』은 최초의 국문 소설이라는 점에서 명예를 누려왔지만 그만 큼 의론도 많았다. 일반적으로『홍길동전』연구에서 대체로 거론되고 있는 문제는 첫째 작가론, 둘째 영향론, 셋째 작품론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작가론에서는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영향론에서는 주로 『홍길동전』과 중국소설과의 영향관계를 다루며, 작품론에서는 『홍길동전』의 성격 규정이 그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1.3 연구 범위와 방법 본고에서 필자는 사회 문화학적 연구 방법과 원형비평의 방법을 앞세우 고 허균의 작가적인 위치를 재조명하여 허균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홍길동 전』의 창작 배경을 천명하고, 『홍길동전』의 구성을 분석하여 작품이 지닌 예술적 특성도 규명하려 한다. 겸하여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 를 재평가하고 주제상, 표현수법상의 일련의 제약성도 제시하려 한다.                                              본 론   2.1허균의 생애와 업적 허균(许筠)은 1569년-선조 2년 음력 11월 3일에 태어났는데  호를 교산,성수,성성옹,백월거사라 하였고, 자는 단보였다. 그는 어릴때부터 신동 으로써 출중한 재주를 보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 기 시작하였고, 아홉 살 때엔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열 살 즈음엔 논어와 총감을 읽고 통달 하였고 열두 살에 이르러서는 사략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 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 를 갖게 되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 문학 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성수시화 惺叟 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 부 부고 惺所覆藁〉등 일부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학론(學論)· 정론 (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2.2  허균의 창작활동   한국에서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사람으로써 그 지명도가 높은 인물인데 시대를 앞질러가는 개혁적인, 시대에 반항하는 혁명가적인 인물로써 해석되어지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어떠한 이는 그를 ‘낭중지추’ 적인 인물로써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글의 천재로써 최고의 시인이요 놀라운 안목을 지닌 평론가로써 이야기되기도 한다.   허균의 창작활동은 임진조국전쟁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벼슬에 오른 후 한때 양곡을 운반하는 짐배를 관리하는 조관 벼슬을 비롯하여 낮은 벼슬을 한 일이 있다. 이 시기에는 삼남일대와 강원도 강릉, 삼척 등지에 드나들면서 인민들의 생활에 접촉하였고 자기 조국의 명승고적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그는 이때에 자기체험에 기초하여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는데 ,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허균은 1610년에 봉건국가의 과거 문제를 잘못 처리하였다는 죄로 함흥으로 유배살이를 가게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 하여 그는 한국 동해안 지방 인민들의 생활에 더욱 접근하였고 그에 기초하여 많은 작품을 쓰게되었다. 그는 홍길동전만을 지은 소설가가 아니었다. 〈손곡산인전>, 〈장산인 전〉·〈장생전〉·〈남궁선생전〉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그리고 , 과 같은 혁신적인 사상이 담긴 논설들도 지었다. 또한 많은 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그의 논설과 한문소설에 담긴 사상은 당시 충격적인 것이었고, 오늘날에도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 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 을 비판하면서 탐관 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3. 심층연구 3.1 의 창작 배경 이 단락에서 필자는 을 창작한 허균의 삶과 시대를 통해 작품을 보는 방법과, 형성배경 및 경개,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서 알아 봄으로써 당대를 대표하는 홍길동전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17세기, 선조 40년부터 광해 5년 4월 사이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것은 허균이 선조말 사회의 혼란을 틈타고 일어난 7인 서류 사건이 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창작의 동기는 7인 서류 등에 대한 동정의 마음과 자신의 실의 (失意) 에서 더해지는 사회에 대한 불평, 그리고 적서차별에 대한 의분심을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에 불평한 것 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15세기에 훈민정음이 창안되자 비로소 한국의 국문문학을 제대로 가꿀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국문문학은 상하층 문학담당자들의 상호 교섭과 협동이 있어서 나타난 결과로 민중을 가르치면서 다스릴 필요가 있어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도덕적 교화의 효과적인 방법을 국문문학에서 마련하려고 했다. 국문소설이 권선 징악의 주제를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그런데 민중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지배층의 특권에 반발 하는 문학을 이룩했다. 여기서 최초의 국문소설이라 할 수 있는 홍길동전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3.2작품의 경개 작품의 배경은 조선 시대, 조선국과 율도국이다. 홍길동은 서울에 사는 홍정승의 둘째아들로, 천비 춘섬의 몸을 빌려 태어난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병서와 도술에 관한 책을 정독한 끝에 도술을 체득하게 되며, 흘륭한 인물이 되어 출세하고자 하였 다. 그러나 천비 소생이라 호부호형 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구박과 학대를 받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홍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 안으로 그를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 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3.3 의 구성 이 소설을 4단 구성으로 볼 때 성격발전의 객관적 근거로 될 발단 부분에서는 서자로 태어나 천대를 받는 비참한 정경을 펼쳐보이고 마침내 집을 뛰쳐나가 의적이 되는 것으로 엽기적인 이야기가 엮어지며 나라에서 도 막지 못할 대적으로 됨으로써 절정을 이루다가 율도국에 가서 이상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대단원을 내린다. 만약 5단 구성으로 볼때 소설은 추보(推步)식으로 구성되었다. 발단에서 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태여나 천대를 받는다. 사건 전개에서는 적서 차별의 사회 제도에 반항하여 이상을 찾아 집을 떠난다. 위기부분에서는 도적의 무리 활빈당(活貧黨)의 괴수가 되어 빈민을 구제한다. 절정(絶頂) 에서는 나라에서 길동을 잡으려 하니 길동이 율도국 (律島國)으로 떠난다. 결말에서는 율도국에서 이상국(理想)을 세우고 선정을 베푼다. 3.4 의 사상내용   소설의 주제사상을 적서 차별의 철폐와 인간 평등 사상[봉건적 사회 제도의 개혁],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일소와 빈민 구제사상[탐관오리 규탄]. 율도국의 정벌,지배 [해외 진출과 이상국 건설]라고 귀납할 수 있다.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자 양반 가정의 서얼 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 소설이다. 또한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 사상을 담고 있으며 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 분신법, 승운법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도교 소설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 혁신을 꿈꾸는 사회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율도국 같은 이상국의 건설에 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허균 역시 이상향을 꿈구던 대표적인 선비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중기 사회의 양반과 민중들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얼 문제를 비롯한 사회 계급의 불평등에 대한 것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회 쟁점으로 부각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 전반에 걸쳐 '홍길동전'은 혁명 사상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소설의 줄거리를 분석해 보면 이 소설은 혁명소설로 다루기도 한다. 길동의 가출은 봉건적 속박에서 탈출하여 반봉건적 투쟁을 시작한다는 의의가 있다. 길동의 활빈당 활동은 조선 왕조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 활빈당은 그 이름에서 벌써 봉건 구조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난 구제는 국가의 의무인데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봉건왕조를 대신해서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겠다는 것은 활빈당이 국가를 대신하겠다는 것과 다를바 없다. 소설에서 활빈당 홀동은 봉건적 모순을 폭로하고 이를 응징하여, 봉건 사상의 허구성과 냉혹성을 비판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는 인륜이니 천륜 이니 하며 봉건권력이 표방하던 봉건윤리마저 스스로 내팽겨친 것이다. 봉건권력은 이제 더 이상 길동의 상 대학 될 수 없으므로 길동의 승리는 사회발전규율에 부합되며 그만큼 확연해진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또한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사회 변혁 사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이후 에도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 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길동은 후대의 박지원에 의해 '허생'으로 재탄생되어 혁명의 사상을 잇게 되었고, 민간에게는 사실적 인물로 전해져 전라도 영광의 홍길동 마을에 대한 전설을 낳았다. 3.5 홍길동의 인물형상이 가지는 의미 한국 문학사에서 영웅형의 인물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제시된 작품으로 는 허균의 「홍길동전」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소설은 적서 차별의 철폐 와 인간평등 사상을 주제로 하는 조선 시대의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점에 서 국문학적 의의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국문소설로서 그 입지 를 굳히고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홍길동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 으나, 실존 인물의 행적에 의존하지 않고, 작가인 허균에 의해 소설 속의 인물로 다시 만들어졌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사오니 이만한 즐거 움이 없습니다. 하오나 지금껏 서러워하기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여 집안의 종들조차 저를 보잘것없게 여깁니다. 나이 어린 친척 아이들조차 저를 손가락질하며 천한 종놈이라 이르니,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홍길동의 대사를 통해 계급사회의 모순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 또한 홍길동의 활빈당 활동은 그 시대 양반사회가 주는 권력적인 모습을 고스 란히 보여주고 있다. 홍길동은 그 모순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허균의 노력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매우 가능한 일이다. 홍길동은 민중적인 영웅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이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한 일면이 있지만, 그의 영웅적 행동의 발단은 개인적인 문제였다. 홍길동을 집에서 떠나게 하고, 도적들과 만나 그들의 수령이 되고 자신의 형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엔 자신이 속한 곳에서는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서 율도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왕으로서 살게 된다. 이러한 행동의 추이는 건국 신화의 주인공들이 역경을 이겨내고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와 골격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홍길동은 자신이 받아들 여질 수 없는 곳에서 떠나왔는데도 떠나 온 그곳을 오히려 희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러한 모순적인 양상은 또한 그의 행동의 발단이 결국은 '적서차별'의 모순을 극복해 보려는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보여 주기도 한다. 「홍길동전」에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은 홍길동의 자아실현으로서 진취적 이며 현실성이 강하다. 홍길동은 적극적인 의지의 인간형으로 서자의 신분 으로 인한 제약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글과 무예 및 도술을 익히 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다. 이러한 제(諸) 과정은 홍길동의 적극적인 자아실현 의지과 고난 극복의 의지를 나타내 준다. 이는 보통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도 부합하는 면이다. 4. 의 문학사적 가치 및 제약성 4.1 문학사적 가치   한국 문학사에서 최초의 국문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을 창작 한 허균은 혼란하고 불합리했던 조선의 한 시대를 살면서 깊은 통찰력으로 그 사회의 문제점들 을 인식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고소설들이 관념적인 문제들을 전기적 (傳奇的) 인 방법으로 다뤘던 것과는 달리, 현실사회의 문제점들을 소재로 하여 사회성과 대중 성을 고루 갖춘 이런 국문소설을 창작하였던 것이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의 이 국문 소설의 효시. 영웅의 일생이라는 서사 전통이 최초로 소설화된 작품. 가전(假传),전기(传奇)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이 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기본상 소설다운 형태를 갖추 었고 사회 제도의 불합리성을 문제 삼은 사회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며 내용상 저항 정신이 반영된 평민 문학이 으로서 , 등 에 영향을 준것은 사실이다. ”① 이전의 이야기들이 모두 환상적인 얘기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인데 비해 은 당시 백성들이 실제로 살고, 겪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라는 점. 백성들의 뚜렷한 생각을 담고 있고 사회 문제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갖춘 최초의 문학 작품이라는 점. 무엇보다 한글로 쓴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4.2. 소설의 제한성 소설에서 홍길동은  당당한 승리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승리자일 수                           ① 이문석 < 홍길동전 연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97년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시점에서 길동은 봉건왕조에 병조판서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이런 타협안은 이 소설의 작가가 그때까지는 봉건왕조 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길동은 조선 왕조와 싸워 뒤엎어버리고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게 되는 데 이것은 봉건 왕조를 대체할 또 다른 새 세상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작자의 시대적, 사상적 한계의 산물로서 그의 사회 변혁관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소설에서 모든 변혁적 사고나 행동은 전적으로 길동 개인의 영웅적 사고방식에 의거하고 있다. 이런 영웅주의적 혁명관으 로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변혁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전혀 없는 시대에 소설의 주인공이 민중의 요구와 희망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역사, 시대적으로 의의를 확보 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당대의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로서 현실성이 강하기 하지만 서전기적 (传奇的) 요소와 도술적 요소가 다분함으로써 오히려 비판적, 사실적 묘사 미흡하게 되었다. 소설은 주지하다싶이 국문으로 된 문어체로 씌여져 대중성을 보유하게 되었 으나 서사시점은 작가 전지적 시점으로서 표현 방법상 묘사적이라기보다 “~하더라'” “~하는구나” 식으로 화자가 개입된 설명식 지문이 되었고 작자가 자신의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홍길동의 인물형상이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소설적인 완전한 성격 묘사에 이르지 못한 등 기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결 론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사회 개혁가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동시에 1급의 문인이었던 허균은 17세기 초엽에 창작한을 통해 사회 개혁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열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허균이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과 함께 반란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됨에 따라 그가 쓴 일체의 글들과 함께 은 금서로 지목되어 공개적으로 유통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몰래 전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왔 으며, 현재 국문 고전소설 가운데서 불후의 명성을 얻고 있는 작품의 하나이다. 〈홍길동전〉은 문제의식이 아주 강한 작품이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지배 이념과 지배 질서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방향에서 다루었으므로 문제 의식이 뚜렷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지배 이념에 맹종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면서 무수히 쏟아져 나온 흥미본위의 상업적 소설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당대 현실에 실재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지니며, 적서차별 등의 신분적 불평등을 내포한 중세사회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제 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홍길동 전〉은 작품 경향,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어서 후대의 연암소설 (燕巖 小說)과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넘겨주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설사적 의의를 가진다.                               허경진 1책세상 2004년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진지하고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이이화, 『허균』, 한길사, 1997. 2) 이성무, 『조선의 사회와 사상』, 일조각, 1999. 3) 허경진, 『허균』, 평민사, 1983. 4) 이문규, 『허균 문학의 실상과 전망』, 새문사, 2005. 5) 신동욱, 『허균의 문학과 혁신 사상』, 새문사, 1981. 6) 김동욱, 『허균 연구』, 새문사, 1981. 7) 허경진, 『허균의 시화』, 민음사, 1982. 8) 정주동, 『홍길동전 연구』, 민족문화사, 1983. 9) 허경진, 『매창시선』, 평민사, 1997. 10) 이이화, 『허균의 현실 개혁사상』, 『문학사상』, 1974. 11) 소재영, 『허균의 생애와 문학』, 김동욱 외, 『허균연구』, 새문사, 1981. 12) 강동엽, 『허균과 유토피아』, 한국어문학연구, 2003. 13) 신병주, 『호민을 꿈꾼 자유인 허균』, 선비문화, 1995. 14) 이복규, 『우리 고소설 연구』, 역락, 2004. 15) 박수천, 『허균의 전과 세계관』, 1996. 16) 김은정,「홍길동전의 구조적 특성연구」,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1990.        
226    <심청전>의 효사상의 심층적 의의 (董 鹏) 댓글:  조회:11129  추천:0  2013-01-24
                                         摘要   《沈青传》是韩国古典小说作品中一部具有鲜明特色的文学作品。《沈青传》形成于朝鲜后期,带给了读者很多的感动,即使到了现在,这部作品依然受到很多喜爱古典小说人们的青睐。《沈青传》这部作品已经被翻译成多种语言,流传到国外被人们所喜爱。   一提到《沈青传》,人们自然而然地想到了“孝”。《沈青传》里的“孝”极具现代意义。现在关于“孝”的各种含义到处流传。沈青的“孝”是积极的,是值得人们关注的一种“孝”。同时也启发了现代人们对“孝”的探索.为构造和谐美好的社会具有重要意义。   关键词:孝 沈青 古典小说 感动                                                                                                                     초록   은  한국 고소설중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에 형성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작품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우리는 흔히 이라고 하면 “효”를 생각하게 되었다. 에 나타난 효사상은 지극히 심대한 현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심청이 의 효도정신은 오늘까지고 널리 전해지게 된 것이다. 심청이의 효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삶에 접목시켜, 현대 사람들의  “효도정신”에 접목시킨다면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는 역사 행정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키워드:효, 심청, 고소설, 감동   차례 초록………………………………………………………………3 제1장 서론……………………………………………………5 제2장 본론............................................................ 8-22 2,1  의 형성 배경……………………………  8-9 2.2  의 경개………………………………………9 2.3  의 주제와 구조 ………………………… 10-16 2.3.1 의 주제……………………………………10-12 2.3.2 의 구조……………………………………12-14 2.3.3 의 사상적 특징………………………… 14-16 2.4   의 효사상의 심층적 의의…………… 16-22 2.4.1 의 효사상의 심층적 의의…………… 16-19 2.4.2 의 효사상의 제약성……………………19-21 2.4.3 의 효사상이 주는 계시………………  21-22 제3장 결론………………………………………………23-24 감사의 말…………………………………………………25 참고문헌………………………………………………  26-27                                            Ⅰ. 서론   1.1연구 목적과 의의 은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면서도 범세계적 성격을 가진 작품 으로서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1972년에는 독일에서 <오페라 심청전>이 공연되어 절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한국의 민족 예술이라고 하는 판소리로도 불려지는 데 고소설 가운데 특이 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개화기에 신문학 비평가들로부터  '눈물 교과서'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심청전」의 효사상을 무조건 현대사회의 현실에 맞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도 유익할 것이다. 1.2 연구사 검토   은 과 함께 고소설 가운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그에 따른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구되어왔다. 의 배경사상론으로 불교 와 도교사상을 주제와 관련시켜 많이 논의되었는 데 흔히 심청이의 효를 유교적인 성격의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의 주제가 효이고, 그 효가 오늘날도 중요하다고 하는 것으로는 어딘지 부족하다. 1,3 연구 범위와 방법 필자는 본고에서 선행연구자들이 사회학적, 심리학적, 구조주의적, 신화 비평적으로 한 연구 성과를 참조하면서 에 나타난 효사상의 현대 의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심청이의 효를 긍정적인 것으로 우리삶에 접목시켜, 현 시대의 좀 더 나은 효에 대해 모색해 볼 수 있는 유익한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2. 본론   2.1 의 형성 배경 고소설 작품 중에는 당시에 민간에 전해오던 설화를 수용하여 구성한 작품이 많이 있다.<심청전>역시 당시에 전해 오던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여러 이본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용 단락을 구성하는 데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 하는 설화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심청의 출생 : 태몽(胎夢) 설화 ② 심청의 성장과 효행 : 효행 설화,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 ③ 심청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 : 재생(再生) 설화 ④ 심청의 아버지 만남과 아버지의 눈 뜨기 : 개안(開眼) 설화 등이다. <심청전>은 작자 미상이지만 이 작품의 각 단락을 구성하면서, 상술한 설화를 수용하여 작품의 효과를 올리도록 구성하였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국의 문학적 전통 위에서 작품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2.2 의 경개 주인공 심청은 생후 7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눈 먼 심봉사 밑에서 동냥젖을 먹어가며 자랐으며, 철이 들자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15살 때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절에 시주할 공양미 삼백 석에 뱃사람들에게 몸이 팔려 임당수에 제물로 바쳐진다. 그 후, 심봉사는 뺑덕어미란 음란한 여자와 살며 세속적인 인간으로 변모되고 만다. 한편, 물에 빠진 심청은 죽지 않고 수정궁에서 지내다가 연꽃이 되어 임당수에서 선원에게 발견된다. 선원은 이 꽃을 황제에게 바치고 청이는 연꽃에서 환생하여 황후가 된다. 심청은 아버지를 못잊어 맹인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딸을 만난 심 봉사는 반가움에 눈을 뜨게 된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현실 세계가 중심을 이루는 전반부와 환상의 세계가 중심을 이루는 후반부로 구분된다. 가난한 심 봉사의 외딸 심청의 지극한 효성과 아버지를 위한 헌신적인 사랑은 전반부의 중심 내용이다. 이 부분에서는 효성이라는 사회 윤리적 가치가 중심축에 놓여있다. 물론, 이야기의 핵심적인 모티프는 인신공희 (人身供犧)이다. 후반부는 심청의 환생과 함께 심봉사가 광명을 얻는 환상 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2.3   의 주제와 구조 2.3.1 의 주제  효를 최대의 덕목으로 강조한다는 면에서는 유교적이고, 화주승을 통해 부처의 신통력을 내세운 점에서는 불교적이며, 옥황상제와 선궁(仙宮), 선녀 등이 등장해서 심청을 소생시킨다는점은 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주제에 대해서는 불공에 따른 불교적 극락왕생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대체로 심청의 효를 주제로 보고 있다.   심청전의 주제와 그것이 작품 속에 구현되는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전개과정에서 보이는 극적 전환의 핵심인 심청의 자기 희생과, 이를 통해서 뚜렷이 구분되는 대립적 두 세계 즉 현실공간과 초월공간이 갖는 시대 사회적 의미를 상호 관련성 아래 파악하고 그 심층적 의미를 음미해 보아야 한다.   심청전은 심청이 인당수에 투신하는 대목을 전환점으로 해서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으로 이질적인 전개를 보인다. 이러한 환상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삶의 논리가 현실 세계에까지도 적극 개입됨으로써 맹인 심봉사가 딸을 만난 감격으로 눈을 뜨게 되는 기적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심청은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를 매개하는 중간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청의 의미를 윤리적 덕목의 화신 그 자체에 둘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고난과 아픔, 대립과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구원자적 존재라는 적극적 안목에서 음미 해석해야 할 것이다. 2.3.2의 구조 은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바 '비현실 계와 현실계의 순화'과 '현실계에서의 순화'이 나타나는데, 이 두가지 순환유형을 비교해 보면, 첫째, 앞의 것은 현실계와 비현실계가 순환하는데 비하여 뒤의 것은 현실계 안에서 행과 불행이 순환된다는 점이 다르고, 둘째, 현실계의 고난과 불행이 앞의 것 은 비현실 계에서 극복되는데 비하 여 뒤의 것은 현실계 안에서 극복되어 바뀐다고 하는 점이 다르다. "이 작품에 나타난 순환은 모두 불행한 현실을 폐기하고 행복한 새로운 현실을 만들려고 하는 현실의 재생적 순환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순환의 의미와 원리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또 따른 각도에서 심청이 임당수에 몸을 던지는 투신 이전의 세계와 임당수 투신 이후의 두 세계로 크게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임당수에 투신함으로써 심청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새로운 세계는 초경험적, 환상 세계이다. 따라서 심청은 더 이상 일상 세계의 비속 한 여인이 아니다. 심청전에서 볼 수 있는 현실계와 초월계라는 대립되는 두 세계의 공존 현상은 이 작품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2.3. 3 의 사상적 특징 『심청전』은 현대소설처럼 완벽한 구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구비하지 못했어도 당시대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은 환상적 이야기 이면서도 인물들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환경들이 충분히 납득이 가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 인물과 구성이 겉으로 보기에는 단조롭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 깊은 의미와 사상이 담겨 있기도 하다. 특히 주제와 사상 측면에서 보면 현실 세계에서 쉽게 부딪칠 수 있는 문제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접수하고 공감할 수 있게끔 문학 적인 감동을 앞세우고 이야기하고 있다. 에서 주제로 제시한 것은 자기 희생의 가치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은 교훈이나 도덕을 가르치기에 앞서 독자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서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고 거기서 교훈을 얻게 한다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의 주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이런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며, 막연 한 도덕률이나 교훈적 차원에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존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의 주제를 막연히 효라고 규정짓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비극적 정화'로 보거나 '희생적 참회(懺悔)·비원(悲願)에 의한 생극락' 또는 '인간의식의 각성' 이라고 본 것 등이 그런 견해의 일종이다.   심청의 행위 가운데서도 그녀의 죽음에 특히 비중을 두고 있는 데 그녀 의 죽음은 제의적 의미도 가진다. 선인들의 안전과 심봉사의 개안을 성취 시며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선행의 결과는 자신에게도 왕후가 되는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는데 이 작품의 핵심적 의미가 있다. 2.4  의 효사상의 심층적 의의 2.4.1 의 효사상 의 가장 핵심적 사건은 바로 심청의 '희생과 그에 대한 보상'이므로 의 주제는 '심청의 (선한 행위로서)희생효'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청의 '희생 효'는 인간의 '보편적 심성으로서의 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전통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효의 문화가 가장 아름답고 독특하게 체현된 것이라 할 수 있는 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 했던 지극한 효성을 나타내고 있는 데 정말 실제적인 효도인가 하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우리가 감동받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아버지를 위해 바친 심청이의 아름다운 효심이 때문이다.  동양의 전통 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정신문화는 효사상이다. 효사상의 배경에서 본 심청의 효행은 불교적 효관에 의한 자기희생적 효와 유교적 효의 충돌은 절대적인 신앙으로 극복한 효행이었다. 이와 같은 자기 희생적 효의 선행에 대하여 도교적 질서를 제시하여 보상했다고 볼 수 있다. 심청의 효는 개인적 효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하며 실천해야 할 효인 것이다. 심청의 효행의 심층적 의미는 유교적 윤리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극적인 효행이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효를 실천한다는 것은 유교적 인 효행관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청의 효는 단순한 효를 행한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 어서는 안 된다. 심청의 효는 의지보다 운명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더 많다. 즉 심청의 자기 희생은 유교에서 여자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정조가 강조되는 사회 현상이 작용한 것이다. 결국 효성이 지극하면 그 부모까지 영화를 누릴수 있다는 의 사상을 이야기로써 입증하기 싶었다는 말이 된다. 즉 효는 단순한 윤리적 규범일 뿐만이 아니라 종국에는 그에 따르는 응보가 보장된다는 생각을 관통시키고 있다. 심청의 죽음은 부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효성의 대가로 황후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아버지의 눈까지 뜨게 할수 있다는 보상을 받게 함으로써 효의 미덕을 상징화한 것이다. 2.4.2 의 효사상의 제약성   에 나타난 전통 도덕의 정신은 “효”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고 몇 가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것은 심청이 정말 효녀라면 눈 먼 아버지를 왜 혼자 남겨 둘까, 그것이 정말 효(孝)일까하는 의문과 심봉사가 양반의 후예라면 왜 이야기 곳곳에서 그렇게 주책스럽고 어리석은 모습 으로 그려질까 하는 것, 마지막으로 심청이 왕후가 되었다면 아버지를 좀더 일찍, 그리고 좀 더 편하게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런 의문점들은 그것이 바로 고전소설의 한계인 지나치고 극단적인 과장과 개연 성의 부족, 논리성의 결여 때문이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이라는 것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는다는 점,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 가치가 검증된 작품이라는 정의를 생각해 볼 때, 과거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작품들이 지금의 사고체계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무시 하고 그 작품의 가치를 깎아 내리려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은 이야기의 진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작품에서 구가되는 심청의 효성인 것이다. 2.4.3 의 효사상이 주는 계시   한국 국문학에서는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출천대효(出天大孝)' 라는 말로 심청의 효행을 한민족 효사상의 대표적 상징으로 전하고 있으나 오늘날은 그저 관습적 인식에서 효교육이나 효(행)에 관한 일이 있을때 마다 인용해보는 옛이야기로 남아 있는듯하다. 그러나 실상 도(道) 가 살아있던 동양의 옛나라들에서는 다 도를 지키는 사람들의 행실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리라 생각해본다. 오늘날 과학·정보 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전통 윤리와 정신을 기반으로 했던 전통 사회의 모습과 생활 방식을 급속도로 변하게 만들었다. 이런 변화에 편승해서 많은 사람들은 문화적 전통과 윤리적 전통 의식을 불합 리한 것으로 생각하고 배척하려고 한다. 그들은 새 시대에서는 새로운 윤리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소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인류의 정신사를 살펴보면 모든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개혁과 발전, 모든 위대한 혁명조차 그 기본적인 정신은 전통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개혁적인 정신 운동들은 언제나 전통 문화 속에 담겨 있는 기본적인 가치들의 새로운 실현을 지향해 왔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떤 발전과 변화도 그것이 전통 문화에서 단절되면 참다운 의미에서의 성공을 이룰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도덕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덕을 밝히기 위해서 한국의 전통 문화 속에 담겨 있고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도덕적 가치들을 되살려야 한다. 물론 전통을 중시한다고 해서 그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의 것만 고집해서 안 될 일임은 사실이다.                                                 결 론   은 지배 계층에서부터 천민 계층까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즐겨 듣고 읽어온 고전적 작품이다. 그러나 모든 계층의 사람이 즐겼고, 즐긴다고 해서 모든 계층에게 이익을 주는 문학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그 문학의 주인이 되는 계층에는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고, 그 반대로 그 문학의 노예가 되는 계층에는 엄청난 피해 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고전으로서 그 가치가 분명 히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작품 속 사건의 비논리성, 과장, 문학적 완성도의 미달 등을 이유로 고전적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심청의 효행이 구축하고있는 상징성이 가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심청은 우선 앞에서 언급한바 선천 상극문명이 후천 상생조화 문명으로 전이되는 과정의 한 중계자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서 하느님의 대효(大孝)를 받들어 심봉사의 눈을 뜨게하는 구원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정신문화는 바로 효사상이다. 효도라 고 하면 부모를 받들어 모시는 행위를 말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다양한 의미로서의 인간의 참된 도리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우리는 과 같은 효를 실천하려고 강조할 수는 없지만 조상들이 실천했던 효를 본받아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유의 미풍양속인 효를 실천하도록 하여 에 체현된 효사상이 도덕건교양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려는 데 있다고 본다.                                 참고 문헌   1, 강봉근, 심천전의 인물론, 「국어문학」20, 전북대, 1979. 2,김기동,『沈淸傳의 背景論 』 양주동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1963. 3. 김복희, 심청전의 신화비평적 연구(2), 「이화어문논집」4, 이화여대, 1981. 4,『심청전의 주제 문제』김준겸, 국어국문학논문집 7·8, 도국대, 1969. 5,『심청전의 구성과 주제』김창진, 박붕태 박사회갑논문집, 배영사, 1986. 6, 김창진, 심청전의 구성과 주제, 「봉죽헌 박붕배박사회갑기념논문집」, 배영사, 1986. 7. 유영대, 「심청전연구」, 문학아카데미, 1989 8,『沈淸傳의 異本考』吳世夏, 國文學 6, 고려대, 1962. 9. 정하영 교주, 「심청전 - 한국고전문학전집 13」, 고려대 민족 문화연구소, 1995. 10. 전신재, 심봉사 인간상의 해석 - 이날치판 `심청가`의 경우 -, 「판소리연구」2집, 판소리학회, 1991 11. 정출헌, 심청전의 민중정서와 그 형상화 방식, 「민족문화사연구」9집, 창작과 비평사, 1996 12. 최운식, , 시인사, 1984 13. 최운식, , 집문당, 1982 14. 김진세 편, , 집문당, 1990 15. 정하영, ,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95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최균선교수님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225    김시습의<금오신화> 대하여 ( 杜路飞) 댓글:  조회:10713  추천:0  2013-01-24
                                               摘 要   金时习是朝鲜王朝前期的著名文人,第一个小说作家。 他的《金鳌新话》被看作是韩国文学史上汉文小说的开始,具有非常重要的文学史意义。《金鳌新话》在人物描写和情节安排上,都突破了稗说作品的范围,成为朝鲜的第一部小说作品。 《金鳌新话》收有短篇小说5篇,其中《李生窥墙传》塑造了背叛封建礼教的一对青年情侣的形象;《万福寺樗蒲记》表现了神女对人间生活的向往;《醉游浮碧楼记》写一个青年在平壤游历古迹时,遇见一个古朝鲜时代的仙女,两人以对诗的形式抒发情怀;《龙宫赴宴录》和《南炎浮州志》描写文士韩生去龙宫的见闻和隐士朴生在梦中与阎王的对话,反映了作者对李朝统治者的愤懑。   关键语:汉文小说 金鳌新话  反映 愤懑                                                초 록   김시습은 조선왕조 전기의 저명한 문인이며 첫번 째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집《금오신화(金鳌新话)》는 한국문학사상에서 한문소설의 개척 성적인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바 비상히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금오신화》는 인물묘사와 정절의 안배상에서나 모두 패관소설작품의 범위를 벗어난 조선의 제일 첫번 째 소설작품으로 되었는데 소설집에는 모 두 5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그중에서《이생규장전(李生窥墙传)》은 봉 건례교를 배반한 한 쌍의 연인들의 형상이 부각되고 있으며《만복사 저포기(万福寺樗蒲记)》에서는 인간생활에 대한 신녀의 지향을 표현하 고 있다. 《취유부벽정기(醉游浮碧楼记)》에서는 한 청년이 평양의 역사고적 을 유람할 때 고조선시대의 선녀를 만나 시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서로의 정회를 토로하고 있으며 《용궁부안록(龙宫赴宴录)》과《남염부주지 (南炎 浮州志)》에서는 문사 한생의 용궁 견문과 은사 박생이 꿈속에서 염라 대왕과의 대화를 묘사하여 이씨조선의 통치에 대한 불만정서를 토로하고 있다.   키워드:한문소설 금오신화 반영 불만   차 례   서론 1.1 연구목적과 의의 1.2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방법과 범위 본론 1.1 김시습의 생애 1.2. 김시습의 문학관 1.2 김시습과 1.2.1  < 금오신화>의 창작배경 1.2.2 < 금오신화> 의 형성과정 3.
224    현진건 문학의 사실주의 (이선지) 댓글:  조회:8827  추천:0  2013-01-24
         摘要   玄镇健可以说是当时韩国最优秀的短篇小说家,其作品风格与写作技巧近似于莫泊桑和契诃夫,他有着殖民体制下的生活体验,作为当时少数不愿屈从于殖民体制的一员而备受瞩目。玄镇健是韩国极具代表性的作家,提及短篇小说人们就会想起他那篇「走运的一天」。玄镇健开创了近代短篇小说,也开启了现实主义文学之门。 在韩国近代文学初步发展时期,玄镇健开创了短篇小说这一文学形式,为写实主义文学的确立奠定了基础,由此看来,他无疑在韩国文学史上占据着十分重要的地位。 玄镇健是一位在韩国文学史上具有重要地位的作家。他试图努力正视和直面殖民统治下朝鲜和朝鲜民族的面貌,他所特有的虚无意识在其短篇小说中表现得淋漓尽致,其文学作品通常并非以革命或启蒙而是以死亡和出走为结局,而这正是玄镇健式短篇小说的特色所在。本文旨在研究贯穿其整个作品世界的写实主义思想。   关键词:开创,现实主义文学,近代文学,样式                                       초 록   현진건은 한국의 그 시기에 가장 우수한 단편소설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풍격과 기교는 모두 모파쌍과 체호브의 풍격과 비슷하였다. 현진건은 식민지체제를 체험한 작가이다. 그 식민지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많지 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이며, 한국인의 단편소설하면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국의 대표적 작가 이기도 하다. 빙허(憑虛)현진건은 근대 단편 소설과 본격적인 리얼리즘의 문을 열었다. 또한 한국문학사에서 근대문학 초창기에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바탕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빙허 현진건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조선의 얼굴을 직시하여 민족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하였 으며 빙허 특유의 허무의식으로 빙허만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를 항상 어떤 혁명이나 계몽이 아닌 죽음이나 떠남 등으로 맺으며 현진건식 단편소설을 형성했다. 이러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통된 사실주의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취지이다.                        키워드: 개척, 사실주의 문학, 근대문학, 양식   차 례 1.서론 1.1 연구 목적과 의의 1.2 선행 연구사 연구사 검토 1.3 연구 범위와 방법 2. 본론 2.1 문제의 제기 2.2 작가의 생애 2.3 문학창작활동 3. 현진건의 작품 세계 3.1 현진건 창작 사상 3.2 현진건 소설의 특성 3.3 현진건 문학의 의의 3.4현진건 소설의 한계 4. 결론 감사말                                                  1. 서 론   1.1연구 목적과 의의   빙허(憑虛) 현진건은 근대 단편 소설과 본격적인 리얼리즘의 문을 열었다. 빙허의 수많은 작품은 1920~30년대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감으로 다가왔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한국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문학적 가치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진다. 이광수「무정」의 추상적, 낭만적 비현실성을 거부하면서 현실에 기반 한 문학을 창작하려는 작가들의 반성과 함께 20년 대에 오면 사실주의 문학에 눈 뜨게 되는데 특히 현진건은 20년대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1.2 기존 연구사 검토 사실주의 작가, 단편문학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온 현진건 문학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들은 해방이전 의 기법을 중심으로한 인상비평의 단계, 문학사적 의미 속에서 종합적 작가연구가 시도되던 60년대, 다양한 방법으로 현진건 문학세계를 파악한 70년대 이후의 경향의 세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3 연구 범위와 방법 단편소설에서의 성과와 함께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하는 선행 연구 방향 을 넓게 수용하여 현진건 그의 사실주의 창작의 문학사적인 공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진건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질과 가치를 밝히고 나아가서 현진건의 문학적 특질과 가치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려한다.                                            2. 본 론   2.1 문제제기 현진건 소설은 그 변모 과정을 살펴볼 때, 크게 3단계로 구분되는데, 첫째, 지식인이 보여주는 무력감과 우월의식,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 에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빚어지는 지식인의 사회에 대한 부적응과 갈등, 좌절,양상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둘째,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는 상화에서 궁핍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이 현실에 절망 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과 성격 특징에 대해 조명한다. 셋째, 위선적 이고 이중적인 인간상이다. 여기서는 불건전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현실에서 속물근성을 지닌 인물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조명된다.  2.2 작가의 생애 현진건은 1900년 대구의 한국의 전통적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격동 기에 개화 지향적인 주변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어렵고 혼란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가까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대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립했다. 열한 살 때 생모를 여의고, 열여섯에 부호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세이조중학 4학년을 중퇴하고 중국 후장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 하다가 1919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생활에 절도를 유지했고, 문단의 세기말적 분위기에 초연했다. 조혼 한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여성관계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 출옥 후 살림이 기울었고 부암동에서 양계를 하기도 했으나 1943년 향년 44세 때 폭음에 의한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2.3. 문학창작 활동 현진건이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1920~ 1940년대라고 말할 수 있다. 1920년 11월에 발표된 처녀단편 「희생화」로부터 1941년의 장편소설 「선화공주」까지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작가 생활 20여 년 간에 걸쳐 보여준 그의 작품량은 단편소설 25편, 장편 소설 6편인 것으로 집약된다. 현진건은 한국 근대문학의 초창기에 해당되는 1920년대 초반, 『백조 (白潮)』파의 일원으로 소설 를 발표해 문단에 데뷔한 후 근 20여 년의 작가 생활에서 혁혁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 그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한결같이 리얼 리즘 문학의 선구자, 또는 그 공로자로서 뚜렷한 작가임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현진건의 문학 활동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등 일련의 자전적 양식의 소설을 발표했던 초기이다. 이때 작품에는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사회의 과도기적 상황 을 문제 삼아 탐색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진입한 조선사회에서 지식 인의 자의식과 갈등·좌절을 통해, 근대 사회의 중요한 요건인 사랑과 가족, 직업과 돈 문제를 추구했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자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적 자아가 덜 확립된 지식인의 모습을 통해 변동기 지식 인과 그 사회를 탐구하고 있다. 44세란 극히 짧았던 생애를 통하여 그가 내놓은 문학은 민족적 비애로 충만된 민족의 수난과 역사를 성실히 증언하는 사실작가로 일관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처녀작 「희생화」는 황석우에게서 혹평을 받았으나, 1921년 빈곤 속에서 나타나는 아내의 따뜻한 애정을 그린 「빈처」와 암담한 현실을 탈출하는 길이 술밖에 없음을 보여 준 「술 권하는 사회」 를 발표함으로써 당당한 소설가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한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화적으로 서구 취향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의식을 지탱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대처하여, 생활과 문학을 하나로 일치시켜 살았던 작가이다. 그의 문학사적 위치와 선구적인 공적은 그가3.1 운동 이후에 전개된 한국의 근대문학운동에 헌신한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에는 그가 근대문학을 전개시킨 선구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한 최초의 중요한 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기교의 가치를 보여준 최초의 작가라는 것 등 그의 선구적인 공적이 그대로 그의 문학사적인 위치이기도 하다. 3. 현진건의 작품 세계 3.1 현진건의 작가의식 문학은 그 시대의 모순을 작가 자신의 문제로 파악하고 그 모순의 본질을 올바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인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소설에서 이러한 작가의식은 주로 작중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즉 작가는 작중 인물이 ‘그 시대의 사회 현상을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시대적 인식을 표출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는 당시 3대 동인지 나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경향이 짙었지만 현진건 같은 백조파이면서도 그들과는 달리 어두운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짙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선언하고 있다.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달나라의 소요도 그만둘 일이다. 구름바다의 유희도 그칠 일이다. 조선 문학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든든히 디디고 서야 할 줄 안다.” 이것을 보면 그의 작가적 의식은 다음과 같이 개괄된다. 그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증언하는 리얼리즘의 길을 선택했으며 둘째로 그는 민족 주의적 자각이 투철했고 민족의 당면 현실을 외면한 어떠한 문학도 거부하 고 있었다. 그의 이런 면을 그의 대표작 (1924) 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때 김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첨지는 돈벌이를 위해서는 빈사직전의 아내의 애원도 이렇게 뿌리치고 만다. 가난이 이 같은 비정과 냉혹함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같은 외면적인 표현과는 달리 내면적으 로는 아내에 대한 동정이 깔려있다. 그리고 허기진 배로 온 종일 빗속을 철퍼덕거리면서도 아내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력거를 끌고 달리다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날 마침내 아내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가지고 들어가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을 통해서 작자가 보여준 것은 일제하의 가난한 한민족의 고통이며 특히 하층계급의 인간들에게 행운의 기적도 있을 수 없다는 냉혹 한 현실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왜냐하면 김첨지는 그날 운수가 좋아서 오랜만에 돈 몇 푼을 벌게 되었지만 그날 이미 아내는 세상을 떠나버리고 다시 비극에 말려드는 것이 작품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한편 (1921)는 지식인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서 대조 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주인공은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온다. 아내 는 남편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매일 보는 것은 혼자서 고민하고 술 마시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술 마신 동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낯면이 없이 말하는 ‘사회’의 낱말 뜻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한다. “그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① 이래서 작가가 표현하는 대화 속엔 꽤 심각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아내는 이 집안의 아내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사회의 어리석은 모든 민중을 상징하는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하게만 살아온 민중이다. 그리고 이 같은 민중을 이끌어 나갈 책임자는 바로 여기서 남편으로 등장하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민중은 몽매하고 지식인은 무능할 뿐이다. 또 지식인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작당과 파벌의 분열만 일삼고 있다.   작자는 이처럼 민중과 지식인들 양쪽을 다 같이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 보면서 우리들의 암담한 현실을 고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정을 지적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그 같은 ‘구체적인 참상을 목격할 때에 우리의 감회가 어찌 천연할 수 있으랴,“하고 호소하고 있다. 는 이 같은 기록과 대조해 볼 때 당시의 암담한 현실을 누구 보다 정직하게 작품으로 증언하고 고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에서 더욱 끔찍한 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26년 작인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군은 낙천가요 어떤 고통도 웃고 넘기며 참아낼 수 있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딴 작품들의 경우처럼 타고난 비극적 성격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웃음으로 끝낼 수 있는 인간형 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극의 깊이가 따르게 된다. 그는 뼈를 저미는 추위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배가 고파도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성격도 결국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요정에서 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음식을 주워 담다가 기생과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굶주리는 처자식 때문에 굴욕을 참고 찌꺼기를 주워 담던 그는 조롱을 받다가 격분해 버리고 정신이상 자가 된다. 그래서 자식들을 기둥에 묶어놓고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 동안 정신이상자를 감시하고 간호하던 자신이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당시의 한국 민중이 얼마나 처참한 굶주림에 빠져 있었으며 가족을 거느린 부모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또 이와 달리 그의 대표작으로서는 농촌 현실을 말해주는 (1925) 이 있다. 작자는 무지몽매한 민며느리제도가 저지른 한국농촌 사회의 비극 성을 폭로하고 있지만 그 같은 비극성의 근본적인 원인도 가난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된다다. 딸자식 하나를 먹여기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 민며 느리로 보내는 것이요, 자식이 노총각이 되도록 장가들일 밑천이 없기 때문에 그런 어린애를 민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 주인공 순이는 노예처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그것보다 더욱 가혹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미성년자로서 이 집 노총각 으로부터 당하는 그 짓은 견딜 수 없는 질곡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짓을 매일 당하던 방에 방화하게 된다.   에서도 그랬듯이 작품의 종말은 방화로 맺어지며 그것이 비극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같은 민중의 고통을 좀 더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과 직접 적으로 관련시켜서 작자가 마무리한 작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작품은 단편으로서의 기교면에서는 큰 뜻이 없다. 왜냐하면 단편의 구성의 묘미나 표현의 기교를 살려나간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열차 속에서 만난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대로 서술한 형식이다. 그렇지만 작자는 당시의 가난했던 백성이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그들의 수탈 행위로 말미암아 농토를 잃고 얼마나 처참한 역경을 헤쳐 나갔는지를 생생 하게 기록문학 형식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열차 속에서 만난 인물은 17세 때 이역만리 간도로 떠났던 인물이다. 조선 백성이 조선 땅을 버리고 남의 땅을 찾아간 건 일제에게 조선 땅을 빼앗겼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거기서 끝없는 육신의 혹사와 굶주림이 이어진다. 그래서 부친은 병을 얻어 작고한다. 홀어머니는 그 후 역시 병들어 ‘흰죽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아사한다. 다음에 주인공은 부모의 유골을 버리고 현해탄을 건넌다. 역시 남의 땅이다. 규수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후 다시 그곳을 떠나서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은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황폐해 있다. 우연히 꼭 하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녀는 유곽으로 팔려가서 시달리다 성병을 얻고 늙어버린 폐물로서 지금 은 일본인 집의 하녀로 있는데 바로 그녀가 옛날엔 그의 아내가 되려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26년 3월에 발행된 그의 단편집 맨 뒤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집의 이름을 이라고 했고, 이런 표현이 단편집에서 사용된 것은 오직 에서 단 한번뿐이었으며 이 작품이 이 단편집의 맨 끝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작자는 자기문학의 결론적인 의미를 이 작품에 담았다고 짐작된다. 3.2  현진건의 문학적 특성 현진건은 식민지체제를 체험한 작가이다. 그 식민지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많지 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이며, 한국 인의 단편소설하면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그 문학적 기법도 사실주의적이었으며 그의 작품 내용도 대부분 빈곤, 사회적 모순, 지식인의 고뇌 등을 다루고 있어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이었음이 분명하다. 현진건 소설은 김동인 이후 주도적인 양식으로 등장한 단편소설의 기법 적인 완결을 추구하여 소설적 미학의 확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초기 소설에서 ‘나’라는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켜 소설 속에서 성격의 초점과 서술의 초점을 일치시키면서 인물의 내면 분석의 가능하게 하였는바 문학에 있어 기교의 가치를 보여준 최초의 작가이다. 이재선은 현진건의 문학사적 위치와 그의 문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적 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의 한 사람 인 현진건의 작품의 특성은 단적으로 아이러니의 틀 속에 20년대의 한국사회의 파라다임을 창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김동인의 단음적인 직선 구조나, 진공적 언어와는 달리 아이러니와 현실의 언어군으로써 이 땅의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머릿돌을 놓은 작가다. 현진건의 또 다른 가장 큰 특징인 눈물로 얼룩 진 1920년대 현실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리얼리티가 충만하게 그려냈다는 것인데 그 대표작으로「운수 좋은 날」과「고향」을 들 수 있고, 극단적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의 궁극적 고통을 참지 못해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많은 비윤 리적인 행동, 곧 비극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일상을 그려내듯 써낸 「서투 른 도적」,「정조와 약가」,「신문지와 철창」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같 은 소설에서 항상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서사의 핵심이 있다. 조선의 얼굴을 드러내는 소설,「고향」은 정말 뛰어난 소설적 구성을 가졌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짧은 시간 동안 기차에서 주인공과 ‘그’가 나눈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그’가 읊조리듯 부른 노래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고백 형식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운수 좋은 날」 이후의 작품에서는 3인칭을 도입하여 작중 인물의 삶을 좀더 치열하게 묘사하였는데, 그의 대표 단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고향」 등이 여기에 속한다. 3.3 현진건 문학의 의의 현진건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조선의 얼굴을 직시 하여 민족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빙허 특유의 허무의식으로 빙허만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를 항상 어떤 혁명이나 계몽이 아닌 죽음이나 떠남 등으로 맺으며 현진건식 단편소설을 형성했다. 오로지 자신의 경험밖에 쓸 줄 모르는, 장편은 안 되고 단편만 쓰는 작가라고 비판도 받았지만 그것은 현진건의 소설만이 가진 수많은 장점에 비하면 작은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순수문학이 아닌 현실을 그려내고 묘사하는 문학으로 작가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고 에 재직하면서는 일장기 말살 사건과 연루되어 감옥 살이도 하고 직업도 잃게 되지만 그는 끝까지 통속 소설을 쓰거나 친일을 하는 등의 행위를 전혀 하지 않고 꿋꿋이 양계나 쌀장사를 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그도 변변치 않았는데 그래도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선비정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그의 삶과 문학은 대부분 일치 하는 경향을 보이며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가치 있는 문학을 제공하여 주는데 여기서 독자로서, 중국의 독자로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참 많다. 3.4  현진건 문학의 한계 현진건의 소설은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고 또 탐구해볼 수 있다. 그의“憑虛御風”에서 憑虛御風란‘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다.’라는 뜻으로 평소 빙허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 에서 드러나듯 빙허는 현실을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경향도 있다. 그의 생애부터 시작하여, 문학관, 한계와 고민, 개별 작품을 통한 지식 인의 세계를 향한 갈등과 고민. 그것은 동인지 시대를 맞이하며 급격히 성장하던 수많은 작품의 경향 중 현진건만의 차별화된 성향이었으며, 그것을 한 가닥의 끈으로 이으려는 힘든 작업을 시도하였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된 그가 택해야했던 글쓰 기의 고민은 그의 작품 결과보다도 더 치열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쓰인 이들의 소설에서 돋보이는 것은 한마디로 사실주의적인 면모였다. 현대의 정신을 망각한 채 과거로만 몰입하는 민족주의 문학이나 각종 문예사조를 모방하는 당시의 문학 풍토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진건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학을 주장한다. 바로 그의 이런 작가적 의식과 창작태도가 그의 문학사적의 위치를 굳게 자리잡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수좋던 날”이 그토록 노동자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서 이 작품의 발표연대는 프로문학이 대두되던 시기이며 그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적인 대립관계를 나타낸 적절한 소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작자는 그 같은 입장을 떠나서 다만 고통 받는 계층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였을 뿐 프로문학적인 입장은 나타내지 않았다.                                          3. 결 론   빙허 현진건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조선의 얼굴을 직시하여 민족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하였 으며 빙허 특유의 허무의식으로 빙허만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를 항상 어떤 혁명이나 계몽이 아닌 죽음이나 떠남 등으로 맺으며 현진건식 단편소설을 형성했다. 오로지 자신의 경험밖에 쓸 줄 모르는, 장편은 안 되고 단편만 쓰는 작가라고 비판도 받았지만 그것은 빙허 현진건의 소설만이 가진 수많은 장점에 비하면 작은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순수문학이 아닌 현실을 그려내고 묘사하는 문학으로 작가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고 끝까지 통속 소설을 쓰거나 친일을 하는 등의 행위를 전혀 하지 않고 꿋꿋이 양계나 쌀장사를 하며 살아갔다. 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선비정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빙허 현진건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며, 나는 빙허 현진건은 한민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작가였고, 있어주었기에 앞으로도 그 이름은, 그 작품은, 그 삶은 영원히 기억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학은 그 시대의 모순을 작가 자신의 문제 로서 파악하고 그 모순의 핵심 또는 본질을 올바로 파헤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한 시대에 대한 고통 스러운 지성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문학적 언어에 대한 예리한 감성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한 시대를 바라보는 고통스러운 지성은 나타나 있으되 그것이 문학적 언어로 잘 빚어져 있지 않으면 문학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줄어든다.   참고 자료   1. 나병철,「현진건 소설의 아이러니와 탈식민주의」,현대문학 이론학회, 2000 2. 고인환,「현진건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적 자의식 연구」, 어문연구학회,2006 3. 이재민,「새 자료로 본 빙허의 생애」 4. 안남연,「현진건 소설 연구」,경일대학교,1996 5. 김중하, 『현진건연구』, 새문사, 1981. 6. 백철, 『신문학사조사』, 신구문화사, 1972. 7. 신동욱 외, 『현진건의 소설과 그 시대인식』, 새문사, 1981. 8. 이재선, 『한국단편소설연구』, 일조각, 1975. 9. 조남현, 『소설원론』, 고려원, 1982. 10. 조동일, 『한국문학사상시론』, 지식산업사, 1978. 11.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 성문각,1980. 12. 고명철,「식민지 자본주의의 통속성에 대한 서사적 대응 - 빙허 13. 현진건의 장편『적도』읽기」, 『한국어문학연구 제46집』, 한국어 문학연구학회, 2006. 14. 고인환,「현진건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적 자의식 연구-,,를 중심으로」, 어문연구학회, 2006. 15. 곽순애, 「1920년대 전반기 소설의 현실 인식 방법 연구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23    연암 박지원과 그의 실학사상 연구 (범지민) 댓글:  조회:10267  추천:0  2013-01-24
                                          摘 要   朴趾源是朝鲜十八世纪杰出的实学思想家和现实主义文学家,在朝鲜思想史和文学史上居有重要的地位。也是其中最喜爱文学创作并取得巨大成就的人之一。朴趾源生活的时代及写作《热河日记》的年代,是朝鲜封建社会行将步入近代社会的历史交替时代与通过燕行的亲身体验之间的差距,造就了朴趾源矛盾的心态,而这种心态又直接反映在《热河日记》之中。 在特殊的历史时代,依据作者本人特殊的生活经历和思想历程而完成的《热河日记》,无论从作品所引发的社会效应,还是从作者个人的文学创作活动,都具有非同小可的重要价值。 (참고하세요) 关键词: 朴趾源 朝鲜封建社会,实学思想 热河日记                                            초 록   박지원(朴之源)은 18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실학사상가이며 뛰어난 사실주의 작가로서 조선의 사상사와 문학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문학창작을 가장 열애하고 거대한 성취를 취득한 사람의 하나 이다. 박지원이 생활한 시대 및《열하일기(热河日记)》를 창작한 시대는 바야흐로 조선 봉건사회가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역사교체시대와 연경여 행을 통하여 직접 겪은 체험 사이에 낙차는 박지원으로 하여금 모순된 심 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심태가《열하일기》에 관통되었다. 특수한 역사시대, 작자의 특수한 생활경력과 사상여정에 근거하여 《열하일기》를 완성하게 되었다. 무릇, 작품이 일으킨 사회효응이든 작자 개인의 문학창작활동이든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연암의 소설작품은 그의 창작성과를 집중적으로 과시하고 있을 뿐더러 한국중세 소설문학의 고봉을 이루고 있다.   키워드:  박지원  조선 봉건사회 실학사상  열하일기 차 례 서론 1.1연구 목적과 의의 1.2 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 범위와 방법 2. 본론 2.1.1박지원의 생애 2.1.2박지원의 시대적 배경 2.1.3학문적 경향 2.2.1 연암 박지원 문학에 나타난 실학사상 연구 2.1. 2독창성과 자주성 2.1.3 법고창신 2.2.1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 2.2.2 인간성의 긍정과 평등사상 2.2.3 당대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3. 결말                                1. 서 론 1.1 연구목적과 의의 는 박지원의 문학을 대표하는 저작으로서 "조선 시대 한문학(汉文学) 유산 가운데 근대지향적인 성격이 가장 뚜렷한 구체 적 작품분석을 통해 문학사적 의의를 재평가하는 것은 매우 의의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본 논문은 박지원의 실학사상과 그의 작품의 문학적 특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연구를 시도하는 것은 실학의 본질에 한걸음 더 접근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짚어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박지원의 실학사상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1.2 기존사 연구 연암문학은 최근들어 조선후기 한문학(漢文學) 유산에 내포된 근대지향 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부각하려는 연구경향이 대두함에 따라 그 예술 성과 문학사적 의의가 높게 평가되어 왔으나 연구대상 작품이 , , 등 수편의 단편적인 작품들에 국한되었기에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1.3. 연구 범위와 방법 지금까지 국내외 학술계에서 박지원과 그의 작품연구는 다양하게 진행 되었고 성과가 혁혁하기에 필자는《열하일기》에 내재한 문화가치와 시대 의의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탐구하여 《열하일기》가 가진 역사의 전환의 시대의 근대계몽 가치와 의의를 재확인하려 한다.                                                                     2. 본 론   2.1 박지원의 생애와 문학활동 2.1.1 박지원의 생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를 지은 뛰어난 문장가로서 1737년(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65년 과거에 실패한 뒤 오직 학문연구와 책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등과 학문 적으로 교류를 가지기도하고, 특히 이 시기에 박지원은 이덕무, 홍대용 등과 실학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벌이고, 이덕무 유득공 등과는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은 1777(정조1)세도 정치가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면서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 하였고, 그 곳의 지명을 따서 호를 '연암' 이라 하였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 (下敎)에 응해〈과농소초(課農小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2,1.2  연암 박지원의 시대적 배경  18세기를 전후하여 조선 후기 사회는 극심한 갈등으로 번민하면서 소리없이 요동 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잃은 것은 삶과 삶에 대한 윤리, 그리고 행복이었고, 얻은 것은 비참과 자아 각성이었다. 연암이 그의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던 18세기 중반 경의 조선사회는 영조의 노련한 통치 하에 외관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신축(辛丑)·임인(壬寅) “1721년 (경종 1)과 1722년” 두 해에 걸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를 일컫는 신임 사화 이후 정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노론과 소론간의 알력은 그 이면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2.1.3 학문적 경향   청나라에 영향을 받은 박지원의 학문적 경향은 한마디로 이용후생론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수레와 배의 효용성을 강조하였으며 과학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서양인 들을 초빙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사상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측면이라고 하겠다.   서경(書經)에서는 《정덕이용후생(正德利用厚生)》‘’이라고 했지만 연암은《이용후 생정덕(利用厚生正德)》으로 순서를 바꾸었다.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윤리, 도덕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사상은 전통적으로 유교에서 상업은 말리(末理)라 하여 배척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연암은 문장은 寫意(사의)에 그쳐야지, 망상이나 가식이 스며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위주의 문장론을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글로써 놀이를 일삼 는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반성과 또 한편으로 불우한 처지에서 그릇된 사회를 해학과 기지로 조롱, 풍자하는 태도를 보인 점인데, 이는 바로 모순 된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그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보여주는 일면 이다.   박지원의 문풍(文風)은 '열하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었다. 이를 '패관소품(稗官小品)체' 라고 했는데, 중국 에서 명나라 말과 청나라 때 유행한 것이 조선에 들어와 널리 회자된다. 희곡, 소설 등의 서민적 문예에서 나타난 자유분방하고 감각적인 내용의 단문 문체로, 양반가 에서 주로 쓰이던 진부한 느낌의 장문 고문체와 많이 달랐다.   정조는 1792년에 엄중한 전교를 내려 '패관소품'체의 사용을 금지하고 주요 인물에게 반성하는 글을 쓰게 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박지원 이었고, 그 대표 저작물이 열하일기였다. 과거 시험이나 공문에 그러한 문체를 사용 하면 즉시 죄를 물어 파직하고 중국에서 패관 소품이나 소설의 수입을 일체 금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2.2.1창작활동  한 작가의 창작사상은 사회 현실에서 형성된 것이다. 시대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한 작가의 사상은 현실 속에 발을 붙이고 시대를 통찰 해야 한다는 것이 연암의 창작 사상의 기틀이었다. 연암의 창작 태도는 현상과 실상 의 차이를 인식한 데서 출발한다. 물론 시대적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실상을 규명 하는 데서 그의 문제의식과 문학적 진실이 현시된다.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 다.〈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의리있는 도덕행동 과 사리 사욕과 명예에 눈 먼 양반을 대치시킴으로써 양반의 가식적 도덕 을 폭로·비판했다. 〈마장전 (馬駔傳)〉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 한 도덕성과, 고결성이 퇴색되고 비속화된 양반들의 사교를 대비시킴으 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비판했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 (嚴行首)의 삶에서, 서민적 덕성(德性) 으로서의 건실한 생활철학을 형상화 했다. 근로 인민의 도덕이야말로 진실 한 도덕이라고 강조하고, 엄행수는 성인(聖人)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년기의 작품인〈양반전〉은 양반도덕의 허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관통되어 있고, 양반 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잇속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략)"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 (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 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민군상 (庶民群像)과 함께 호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서민군상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따라서 박지원은 역시 허생 (許生)처럼 숨어 살면서 세상을 풍자 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만년의 그의 사상은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이었고, 따라서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 타협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박지원의 소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서는 이완을 통해 사대부를 비판하며 매점매석 을 통한 치부와 무인도의 이상사회 건설을 통해 당시의 경제제도의 개혁을 역설하며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에서는 부자 상민과 가난한 양반의 신분거래를 통해 양산의 허상을 폭로 하고 신분제도의 개혁을 암시하였다. 다음으로 에서는 위선적인 북곽선생과 그를 질타하는 호랑이를 통해 양반 사대주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였고, 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훌륭한 인품을 나타내며 인간성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음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양반들의 위선을 비판하였다. 연암은 당면한 사회가 왜 낙후하고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 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다. 소설가는 그가 바라본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위치뿐만 아니라 그가 삶을 바라보는 위치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어떤 본질적이면서도 장르적인 형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 형식들은 새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볼 때, 연암은 독특한 안광으로 당대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근대의식의 기초인 목적 합리적인 바람직한 행위를 추구하고 있다. 비천한 신분 또는 경제적으로 빈궁한 평민들이지만 진실된 삶을 살아 가는 인간상에 긍정적 시선을 박고, 양반의 입장에서 양반 사회의 폐해를 무자비하게 질타했던 것이다. 그가 당면한 현실을 재해석한 것은 미래에 대한 대안 제시의 의미가 있으며, 이는 현실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동시에 고양시킨 혁신이라 볼 수 있다. 2.2.3  박지원 문학에 나타난 실학사상 가) 사실주의 연암은, 문장이란 누구든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억지로 옛 사람이 쓴 고어를 생각하고 고전의 經旨(경지)를 찾으며 근엄하게 글뜻을 장중하게 꾸미려는 것은 마치 화공이 그림을 그릴 때에 원래의 모습을 다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연암은 글을 쓸 때에는 사실을 그대로 꾸밈없이 표현하는 진실이 으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연암은 거울처럼 비치는 진실이 그대로 훌륭한 글이요. 문학이라는 관점 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재나 표현에 있어 갖가지 미화 (美化)의 방법을 동원하여 위장과 수식을 일삼으면 그대로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당시 漢(한), 唐(당)을 도습하려던 문학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나) 독창성, 자주성  연암은 그의 문학론을 통하여 도처에서 작품에서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옛것을 본받는 사람들은 옛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함이 근심되고 새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 不經(불경)됨을 근심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벌받으면서도 변화할 줄을 알고, 새것을 창조해 내면서도 능히 전거가 있다면 이 시대의 글이 옛 시대의 글과 같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고 창신의 조화라는 것이다. 전통과 변혁의 조화를 통하여 보다 나은 창작의 세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근본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변천하는 시대감을 흡수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구현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글이란 사실에 진취가 있다. 하필이면 고대를 취할 것인가. 한당 (漢唐)은 지금과 다르고 풍요 (風謠)도 중국과 다르다. 반마(班馬)가 지금 나왔다 한들 옛적을 그대로 본받지 아니할 것이다. 신자 (新字)를 만들기 어렵다 하지만 어찌 고법 (古法)에만 구속되겠는가?   여기서 고법에만 구속되지 말고 우리의 것을 그대로 묘사하여야 하며, 지금을 근시라고 하지마는 지금이 천년 후에는 고대가 된다고 하여 낭사 (郎事)와 신자 (新字)를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연암은 속어, 속자를 배척하는 당시 古文派(고문파)들의 주장을 개탄하고 있었다. 민간의 좋은 풍습과 말을 문자로 옮겨 놓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스런 문장이 되어 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우의 진솔함이 드러나는 자주적 성격의 글이 되 수 있음을 내세우고 있었다. (趙東一, , P.269) 이상에서 보듯 연암은, 문학은 자주적인 것이 바탕이 된 독창성을 지녀야함을 주장했다. 다) 법고창신 연암은 그의 문학론을 통하여 도처에서 작품에서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옛것을 본받는 사람들은 옛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함이 근심되고 새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불경 (不經)됨을 근심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을 알고, 새것을 창조해 내면서도 능히 전거가 있다면 이 시대의 글이 옛 시대의 글과 같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고 창신의 조화라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근본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변천하는 시대감을 흡수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구현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연암은 속어, 속자를 배척하는 당시 古文派(고문파)들의 주장을 개탄하고 있었다. 민간의 좋은 풍습과 말을 문자로 옮겨 놓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스런 문장이 되어 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우의 진솔함이 드러나는 자주적 성격의 글이 되 수 있음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연암은, 문학은 자주적인 것이 바탕이 된 독창성을 지녀 야함을 주장했다. 연암 박지원은 고문을 반박하면서 참다운 문학의 질은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연암에 있어서 풍자란 중세적 봉건사회가 무너져 가고 그 속에 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 역사적 변화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이들을 직시했던 비판적 태도로 나타난다. 라) 인간성의 긍정과 평등사상 평범한 사람 혹은 사회에서 천대받는 인물들로서 전대의 소설에서 주인 공이 될 수 없는 인물로의 광문,의 엄행수, 의 송욱,조탑타, 장덕홍이 그런인물이다. 인간성을 긍정하고 남녀 귀천에 관계없이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이는등에서 잘 나타난다.속에 드러난 작자의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허생의 아내를 통해 당시 사대부의 허위격 삻과 무능함을 비판했다.   마) 당대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연암은 문학이야 말로 현실에서 뜻을 펴지 못한 (낙척불우-落拓不遇)의 위치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요, 또 이를 통하여서만이 사회를 의도적으로 개선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음 글을 통해서 그의 이러한 생각을 알아보자.   “나 같은 사람은 중년 이래 樂拓(낙척)하여 쓰러져 자산을 귀히 여기지 않고 글로써 유희를 일삼았다. 때로 궁색한 근심과 무료함이 느껴지고, 잡되고 무심한 말을 일삼고, 배우처럼 남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천하고 비루하다. 성품이 나태하고 산만하여 벌레를 새기고, 갈대를 그리는 사소한 기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남을 모두 그릇되게 했다.”   이 글은 자신의 반성이면서, 한편으로는 힘의 시대에 도전하는 반주자(反朱子)적 풍자성의 과시라고도 할 수 있다. 글로써 놀이를 일삼는다. [이문위희] (以文爲戱)는 표현은, 낙척하여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사회를 비웃고 풍자하는 자조와 개선) 방법이다. 사회를 향한 일종 의 매서운 비판 정신이다. 벌레를 새기고 갈대를 그린다. (彫蟲畵蘆 [조충화노])는 사소한 기술은 곧 현실의 사실적 표현이면서 자신의 행위를 비하하여 표현한 것은 일종의 반어적 기술이다.   특히 연암은 풍자와 골계, 반어의 수단으로 비유를 자주 이용했다. 그의 적절한 비유와 속어적 표현의 묘를 통하여 연암은 경직된 유가사회의 비리 들을 골계와 풍자의 열기로 용해시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가 요구 하는 문학의 이념을 그 위에 한껏 꽃피웠다. 이상에서 연암의 문학관을 사실주의, 독창성-자주성, 골계성-풍자성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연암은 조선 후기와 시대를 함께 하는 문인으로서 사상과 문학성이 골고루 갖추어진 문인이었으며 실학을 문학에 참여시켰던 진정한 지식인이기에 손색 이 없는 문학대가이다. 3. 에 대한 총체적 고찰 3.1 의 사상내용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친척 박명원을 따라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열하일기]를 썼다. 이 작품 집에서 정치, 군사,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 하였는데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용후생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 〈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 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 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 (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에는 그에게 자송문(自訟文: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 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연행(燕行) 이전의 문학창작은 고문(古文)의 참정신을 본받아 당대의 현실을 창의 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문학론에 입각, 무명의 하층 민중 들을 立傳의 주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건실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이에 비추어 양반들의 윤리적 타락성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것이었는데 이같은 사상적· 문예적 특질은 < 열하일기(熱河日記) > 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3.2 사상적 특질 에 나타난 사상적 특질로 연암 특유의 북학론(北學論)을 지적 했다. 작품에서 제시된 그의 북학론은 청조 문물의 적극 수용을 근간으로 한 부국강병 책(富國强兵策)으로서 "淸은 미록 夷나 중화문명을 계승· 보존 하고 있는 그 문물은 화(華)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북학파 인사들의 속에서 보기 어려운 커다란 계몽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선입견과 감각에 좌우되지 않는 주체적 사고와 현실세계를 편견없이 탐구하려는 개방적 자세, 그리고 지구중심적인 종래의 비과학적 천문학설을 타파한 지구지전설(地球地轉說), 청조문물 에서 철저한 이용, 후생의 정신 을 배울 것을 주장한 중국제일장관론 (中國 第一壯觀論)등 기존의 사상적·학술적 전 통에 내재한 진보적 제요소를 통합 한 연암의 진보적 사상이 전편에 관통되어 있다.   3.3 예술상의 특질 의 문예적 특징으로 문체의 다양성을 첫손꼽는다. 이 작품 에서 연암 은 자신의 여행체험과 청조 중국의 실정을 보다 생생히 전달하 고자 고문(古文)체와 패관소설체를 망라한 다채로운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 데 문어체인 고문(古文)으로 표현된 한국말 대화장면에서는 정통 고문 (古文)에서 금기시하는 조선식 한자어와 조선 고유의 속담을 즐겨 구사하여 토속어의 정취를 돋구면서 해학적 효과를 도모 하고 있고 중국인과의 대화장면 등에서는 소설적인 문체인 백화체(白話體)를 구사 하고 있다.   다음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연암 은 이 작품에서 우언과 해학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북학론 (北學論)을 중심으로한 진지한 사상적 논의들이 전개될 때마다 지리해지기 쉬운 대목 들에 해학적 한담을 덧붙임으로써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또 여행도상의 견문을 여느 연행록(燕行錄 )처럼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중심의 입체적인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는 사실주의적 경향은 특히 인물묘사에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이고 있다.                                                           4. 결 론   연암 박지원의 문단적 위치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는 작자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 오래도록 공개출판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만 유포되었는데 당시의 보수적 문풍하에서는 시대착오적 반청사조 (反淸 思潮)를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이 작품의 현실비판적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용납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암의 창작 태도는 현상과 실상의 차이를 인식한 데서 출발한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시대적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바탕한 실상을 규명하는 데서 그의 문제의식과 문학적 진실이 발견된다. 연암은 당면한 시대가 왜 낙후되고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한 학자는 는 "연암의 위대한 창조적 역량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예술적 성과들이 집약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임을 강조하면서 "이 작품은 북학파의 사회개혁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을 뿐아 니라 다채로운 표현기법과 특유의 사유구조를 통해 이를 효과적 으로 제시한 일종의 계몽문학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참고문헌   1.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2. 김학성, 연암의 실학사상과 허생전의 작가의식. 창작과 비평사, 1990 3. 이우성, 실학파의 문학 연암 연구, 계명대출판부, 1984 4. 고미숙 외,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린비, 2008 5. 김인규, (북학사상의 철학적 기반과 근대적 성격), 다운샘, 2000 6. 박수밀, (박지원의 미의식과 문예이론), 태학사, 2005 7. 강동엽, 박지원의 시대인식과 문학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3        8. 김명호, 박지원 문학 연구, 실학연구입문 9. 신용하,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연암박지원의 사회신분관과 사회신분개혁사상, 한국문화, 1989 10. 김지용作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0년 11. 김명호作 성균관 대학교 2004 12. 문현경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5 13. 강동엽(1988), 「80년대 이후 연암문학연구 경향과 그 전망」, 한국학                 연구 제 11집, 한국 한문학연구회. 14. 강혜선(1996), 「박지원 산문의 고문 변용에 대한 연구」,서울대학교 15. 김경희(2005), 「연암 박지원 문학의 교육 방안 – 한문소설 『열하 일기』를 중심으로」,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3. .5 805)김창주(1997),「연암박지원의 문학관 연구」,『자연과학연구논문집』, 공주대학교자연과학
222    이규보의 <동명왕편>분석연구 (소우) 댓글:  조회:10297  추천:0  2013-01-24
                            摘 要   李奎报是朝鲜高丽时期诗人。字春卿,号白云居士,京畿道骗州人。他精通经史百家、佛老之书。青年时与“海左七贤”派诗人交游,经常参与他们的诗会活动,深受他们不满现实思想的影响,1190 年登同进士第,曾博览群书,并开始写作。 著有长诗《东明王篇》和《三百零二韵诗》等。他能诗善文,历任高官。在朝鲜文学史上,他是最早一个同情农民、憎恨贪官污吏、描写民间疾苦的诗人。一生写了近万首诗,仅存2000 余首。表现劳动人民生活、关心农民、热爱祖国、憎恨敌人者占多数。奠定了朝鲜现实主义诗歌的基础。 他的经典著作民族诗篇《东明王篇》里收有七千余首诗歌,是朝鮮古代第一部長篇事詩,是神話傳說歷史化和作家文學中“復活”的一個典型例子,具有強烈的幻想和浪漫主義色彩,情節離奇古怪,但有生活依據,偶然中蘊藏著必然性。語言生動活潑,風格豪放雄渾。   关键语:李奎报 东明王篇 長篇事詩 風格                                    차 례 서론 연구목적과 의의 기존 연구사 검토 연구범위와 방법 본론 1. 이규보가 살던 역사적, 사회적 배경 2. 이규보의 생애 3.
221    조선시대 시조의 발전양상 (손정정) 댓글:  조회:9267  추천:0  2013-01-24
                                    摘 要          时调是朝鲜时期具有代表性的诗歌重要形式,时调作为一种诗歌,它以艺术的形式再现了当时社会的政治以及人民生活的真实面貌,是我们考察以及研究古时社会面貌的重要依据。        关于时调的起源有高丽中期之说,新罗末高丽初之说,高丽末之说,朝鲜初之说,朝鲜末期之说等等各种各样的说法,但是时调的形态真正形成却是在朝鲜时期。朝鲜时期,时调从兴起到发展,经历了很多,各个时期时调都呈现出不同的发展样像,对于时期我们可以从朝鲜前期和朝鲜后期两个方面来观察。对于时调内容本质的变化我们可以从作家层的变化,中心思想的变化,素材的变化,句型上的变化,以及音乐层面上的变化来考察。但是对时调的这些研究总的来说还是要进行在时调的基本特征上来。 对韩国古代文学的重要研究是了解古代人民生活的一个重要方法,而时调则是堪称韩国古代文学的精华的一种文学形式,所以对于时调的继续研究是具有重要价值。   关键语:时调 面貌 朝鲜时期 精华 特征                                          초 록   시조는 조선시기에 대표성을 띤 시가의 중요한 형식으로서 시조가 일종 시가로 되여진 후 이런 예술형식은 사회적 정치 및 인민생활의 진실한 면모를 재형하였는 바 우리들이 고대사회의 면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거로 되고 있다. 시조의 기원에 대하여 고려중기에 기원했다는 설, 신라말 고려초라는 설, 고려말설, 조선초기설, 조선말기설 등등 각이한 설법들이 있다. 그러나 시조의 형태의 진정한 형성은 바로 조선 시기로 보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조선시기, 시조의 흥기로부터 발전에 이르기까지 오랜 발전과 정을 겪어왔는 데 각개 시기의 시조는 모두 부동한 발전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기에 대하여 조선전기와 조선후기 두개 방면으로 고찰할 수 있다. 시조의 내용의 본질적 변화에서 우리는 작가층의 변화, 중심사상의 변화, 소재의 변화 문형상의 변화 및 음악상에서의 변화 등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의 이러한 연구는 총적으로 말한다면 시조의 기본 특징상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 고대문학의 중요한 연구 는 고대인민들의 생활에 대해 요해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시조 가 한국고대문학의 정화로서의 일종 문학형식이므로 시조의 발 전양상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고 여겨진다.   키워드: 시조 면모 조선시기 정화 특징   차 례  서론……………………………………………………………………………. 1. 연구목적과 의의 2. 시조의 발생과 기원의 선행연구 3. 연구 범위와 방법  본론………………………………………………………………………………… 1.시조의 기원과 발생 1.1조선 전기의 시조 1.2조선 후기의 시조  2.시조양상의 변화 2.1 작가층의 변화 2.2 이데올로기의 변화 2.3소재의 변화 2.4 연행상의 차이 2.5 음악적 측면에서 시조의 흐름 3. 시조의 일반 특징 결론…………………………………………………………………………………. 참고문헌………………………………………………………………………………. 감사의 말………………………………………………………………………………                                                 서론   1. 연구 목적과 의의 한국 문학사에서 시조(時調)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시가이자, 사대부의 시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역대의 평론가들이 시조에 대 하여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시조야말로 뛰어난 한국문학의 유산이며, 그 연원이 아득한 한국의 고유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조의 흥성기였던 조선조 시조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심원한 의의가 있다. 2. 기존 연구사 검토 시조의 발생시기에 관한 논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조가 고려말엽에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시조의 발생시기를 둘러싸고 이와 같은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시조 발생론 자체에 대한 연구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일단 확실한 논거를 확보하고 있는 16세기를 기점으로 삼아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방법과 시각을 동원하여 그 이전 시기를 재구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3. 연구범위와 방법 필자는 조선조 시대 시조의 전개 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학설들을 검토하였으며, 시조문학의 당담 층인 사대부와 시조와의 연관성을 찾으며 조선시대 시조 작품들을 섭렵하였다. 또한 사대부 이외 또 다른 시조의 담당층인 기녀들을 중심으로 창작된 기녀 시조도 함께 살펴보았다. 본논문에서는 특히 선행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역사주의 연구방법과 실증 주의 방법으로 조선조 시가문학의 꽃이자 ‘국민문학’이라 평가받은 조선 시대 시조의 발전양상을 문학적 측면에서 재고찰하려 한다.                                                  본론 1. 시조의 발생 뿌리 없는 나무가 무성할 수 없듯이 조선조 시조의 발생과 발전 양상을 살펴 보기전에 시조의 발생과 기원에 대하여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순리일 것이다. 시조의 기원설로는 외래기원설, 재래기원설, 그리고 향가에서 기원 했다는 설 등 여러 가자가 있다. 향가가 의미상 3개의 단락으로 되었다는 점이나,〈균여 전〉의 향가에 대한 최행귀(崔行歸)의 언급 가운데 나오는 삼구육명 (三九六名)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시조의 3장 형식과 흡사하다는 데서 나온 추리다. 시조의 발생을 두고 한국 시조형식이 고려 중엽에 발생하였다는 설, 신라말 고려 초엽설, 고려 말엽설, 조선 초엽설, 조선 중엽설 등 각이한 설법이 있으나 시조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는 조선시대에 와서라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조는 고려조 말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하나, 시조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고 하는 것이 주류이다. 하여 필자는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누어서 이 문제를 살펴본다. 1.1 조선 전기의 시조의 양상 이 시기에는 단종의 퇴위에 관련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자기들의 절개를 읊은 작품들이 많은데,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등의 절의가와 함께 15세기의 시조작품으로 한가롭고 평화로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가 등장하였다.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안정되면서 사대부의 여유 있는 생활이 시조의 소재가 되고, 낙관적이며 관조적인 사고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긍정적 삶의 자세가 시조의 주제를 이루었다. 자연미를 감상하면서 유교적인 충의를 노래하는 것이 이 시기 시조의 특징이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4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평화로운 삶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은혜라는 뜻의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그 뒤 계속된 서경시의 한 전형이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건국 당시의 공훈으로 권위를 유지해온 옛 세력 에게 도전하는 신흥세력의 역량이 축적되자,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지배하 는 이른바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그대로 시조에 반영되어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 등의 작품에서는 붕당정치로 인해 인재들에 대한 애석함, 서경덕(徐敬德)·권호문(權好文) 등의 작품에서는 자기수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적인 자성(自省) 등이 주제로 나타났 다. 이들 유학자들은 붕당정치에 패배하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망정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조는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 였는데,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 九曲歌)》로, 여기에서는 정치적 이념과 태도가 저변에 깔린 채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처럼 유교적 윤리관을 주제로 하되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부류이다. 그리고 황진이(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들의 작품으로서 구체적 이고 인간적인 애정의 형상화가 시조시형을 통하여 이루어진 시들이 있다. 1.2 조선 후기의 시조의 양상 17세기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 한사람인 윤선도(尹善道)는, 4계절마다 각 10수씩, 총 40수로 된 연시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으로 세속의 자연을 시적인 흥취로 엮어 자연과의 교감을 승화시켰다. 조선 후기 시조 의 표현기교는 <어즈버,아희야, 두어라> 등의 감탄사를 쓴 영탄적인 방법과, 전원의 서경을 서술적인 방법에 의해 묘사한 것으로 크게 구별된 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유학자들에 비해 피지배계층인 서민들은 유학 자들의 미의식을 수용하는 한편 사설시조에서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를 선택, 희극미를 창조하였다. 사설시조는 사실적 묘사와 상징적 은유로써 표현기교를 바꾸고 있고 애정 , 패륜·육감·거래(去來)·수탈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시조의 발달과정에 있어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평민 가객(平民歌客)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대개 문벌이나 지위가 낮고 사회적 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였을 뿐 아니라, 가단(歌壇)을 이루어 시조집을 편찬 함으로써 시조문학의 항구적 발전을 꾀하였다. 18세기 초반 일군의 가객들과 가단활동을 한 김천택(金天澤)은 가단 구성원들의 협조로 시조집《청구영언(靑丘永言)》을 엮었고, 김천택이 이끄 는 가단의 일원이 었던 김수장(金壽長)은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한 사람 으로《해동가요(海東歌謠)》를 엮었다.《청구영언》《해동가요》는 19 세기 후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이 엮은《가곡원류(歌曲源流)》와 함께 작품 수가 많고 편차체제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 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윤선도는 시조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손꼽힌다. 그의 작품 는 4계절마다 각 10수씩 총 40수로 된 연시조인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에 뛰어났으며, 속화된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대표작이다.   조선 후기의 시조에서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변화는 사설시조의 등장이다. 조선조 유교주의가 고려의 고속가의 인간적 성정에 대한 반명제로 나타났다고 하면 18세기 중엽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설시조는 유교주의의 반발로 나타난 것은 좋은 대조 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등장한 실학사상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시조가 지닌 3장체의 형식적 특성은 살리면서, 초장과 중장에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일부 비판적 유학도들은 정형률을 깨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발달과정에 있어 가장 주동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평민가객(平民歌客)의 출현이다. 이들 평민가객 들 중의 한 사람인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 에는 17, 18세기에 걸쳐 활약한 가객 5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들은 대개가 문벌이나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며, 사회 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로서16세기 이래 시조의 창작에 참여한 기녀들과 함께 시조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는 바 이들의 업적을 세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은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고있다. 둘째로, 이들은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현전 하는 사설 시조는 그 대부분이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고 또 가객들이 창작한 작품도 평시조 가 대부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18세 기의 평민가객을 대표하는 김수 장이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문학과 음악은 이들 평민가객에 의하여 발달하였고 동시에 이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인 희극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이들은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시조집을 편찬함으로써 시조문학 의 항구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김천택은 시조집 을 편찬하 였고, 김수장은 시조집 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편찬한 , · 는 다른 시조집들에 비하여 수록한 작품수가 많고 그 편차체제(編次體制) 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이라고 일컫고 있다. 2. 시조의 변화 시조의 변화는작가층의 변화, 이데올로기의 변화, 소재의 변화, 연행상 의 차이, 음악적 측면에서의 시조의 흐름  5방면을 포괄한다. 2.1작가층의 변화 조선 전기의 시조 향유층은 대체로 양반 계층이고 당대의 명공석사 (名公碩士)에 해당한다. 초기 작가로 일컬어지는 이색(李穡)이 그러하고 정몽주(鄭夢周)도 그렇다. 그들은 노동의 현장에서 육체의 괴로움을 겪는 서민도 아니고 이별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처지도 아니다. 주자학을 도입 하여 유학적인 이데올로기와 교양을 갖춘 인물들이다. 따라서 시조의 내용도 다분히 관념적이고 조학적인 것이 많았다.  조선 전기 또 주목된 다른 시조의 향유층은 당시의 기녀들이다. 기녀들의 시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반 사대부의 시조와는 다르다. 기녀 시조는 남녀의 애정 문제 를 포함한 인간의 정서를 진솔하게 그려내어 시조의 내용과 표현에 생기를 불어넣고 서정시로서의 성격을 한층 더 발전시켰으며, 여성만이 지닌 섬세한 감정으로 진실 하면서도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까닭에 더욱 감동적이고 여성 특유의 우아한 정서 를 전달하고 있으며,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런 점 에서 기녀 시조는 시조의 내용과 표현 영역에서 근대 문학에 빨리 근접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기녀들의 시조가 유교의 도덕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주목 된다. 기녀들의 시조는 남녀의 애정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어 표현 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고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 탓에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을 도외시하는 일이 많았는데, 기녀들의 시조에는 그러한 면을 넘어 서서 인간의 진솔한 정서를 긍정적인 자세로 바라보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기녀시조는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조 담담층인 사대부 시조와 비교된다. 말하자면 황진이의 시적 정서와 사대부의 시적 정서는 판이하다. 한편 기녀 시조는 이별이 제재라는 점에서 고려가요와 상통하는데 고려가요가 이별의 순간을 노래한다면 기녀시조는 현재적인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다. 시적 화자의 의식 면에서도 고려가요가 님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고 있다면 기녀시조는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있다. 황진이의 한시 한 수를 예로 들어보자. 밝은 달 아래 뜨락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내려도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있구나. 누각높아 하늘과 지척의 거리 사람은 취하고 남겨진 술잔은 천이라 흐르는 물 차가운데 거문고는 화답하고 매화가지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내일 아침 그대... 나...이별후 정은 물결따라 멀리멀리 가리라   또, 발화의 차이에서도 고려가요는 이별의 순간에 발화하는 것으로 직접 적이고 절박 한 발화가 이루어지는 반면, 기녀시조는 이미 지나간 과거 이므로 자아를 성찰하고 더불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발화 한다. 요약해 말하자면 기녀 시조는 이별 상황, 언술 방식, 태도, 갈등의 해결 등은 여요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그것을 변용시킨 셈이라 할 수 있다.   기녀 시조는 세련된 표현 기교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 국어를 잘 구사하였 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내용면에서는 남녀간의 애정 및 인간 의 정서를 솔직 담대하게 표현하였다는데 초점을 둔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맛깔난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기녀들이 시조를 짓고 향유했던 문화는 시조 작가층의 확대와 더불어 시조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조 를 조선 중기에 이르러 기녀들도 짓고 읊었다는 점은 후기의 가객 및 평민층으로까지 시조 작가층이 확대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한 것이며,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기녀 시조는 시조 문학 변모에 큰 역할을 하였 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2 이데올로기의 변화 고려가요는 불교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어두움을 체념과 취기(醉氣)로 넘기려 한〈청산별곡〉이나, 이별의 안타까움을 하소 연한〈서경별곡〉이나 가시리도 불교적 인연과 관련을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에서는 군주에 대한 충성이 주제를 이루었고, 망국의 시점에서 방황하는 지성의 갈등을 읊었다. 전원의 한가로운 삶은 군은으로 감사하게 여기는 유교적 가치관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중화(中華)의 높은 문화를 숭상하였다. 15세기 조선의 애국주의 장령 김종서(金宗瑞ㅡ1390-1453)의 시조와 이 순신장군의 시조를 예로 들어보자 삭풍은 나모(나무) 끝에 불고 : 김종서(1390-1453) 시조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조선시대 4군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의 호방한 기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일장검을 짚고 서 거칠 것이 없이 탁 트인 기상을 노래했다. ※ 이순신 시조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 시조는 임진왜란 때의 陣中作(진중작)으로, 선조 28년(1595)에 지은 것이다. 우리 옛시조 중에서 武將(무장)의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순신의 작품은 깊은 우수와 고뇌를 담고 있다. 조정은 전란중인데도 파쟁을 일삼고, 나라의 운명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때, 홀로 적군에 맞서고 있는 장수의 마음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절대적인 열세 에서 몸을 일으켜 한 나라를 구해낸 한 장수의 위해한 힘의 원천에는 이러 한 깊은 우수와 고뇌를 노래할 수 있었던 정서와 지성이 있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광식 『우리 옛시조 여행』(가람기획) 에서) 2.3 소재의 변화 작자 계층이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시조의 소재는 사대부들의 서정이 중심이 되고 그들의 생활이나 관심사가 중요 소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소재의 변화 역시 새로운 표현도구를 요구할 것은 당연하다. 강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는 사랑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표현 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소재의 변화는 또한 이념과 작가층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에 이러한 상호작용이 새로운 장르의 개발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4 연행상의 차이 시조는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어지는 현장에서 노래로 불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불려진다는 점에서도 고려가요도 같다. 그러나 그 불려지는 양상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고려가요〈동동〉이 연주되는 과정을 『악학궤범』에서는 아박(牙拍)이라는 항목에서 초입배열도 (初入配 列圖) 다음에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적절하게 지어 부른다. 이렇기 때문에 특별히 무희나 창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르면 된다. 이 점이 고려 가요의 연행과 다른 것이다. 고려가요의 연행에 필요한 복잡한 악기의 반주가 아니라 장고 하나나 무릎 장단으로도 시조는 불려졌다. 이러한 데 사용하기 위하여서는 새로운 장르의 창조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그 연행이 소박하다는 데 있어서도 고려가요와는 다르지만 그런 소박함이 바로 이 장르를 생성하게 된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5 음악적 측면에서의 시조의 흐름 시조는 시가장르로서 음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아직까지 시조의 기원과 발생시기에 관해 많은 이설이 공존하고 있지만 음악과의 연관성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성호경은 “고전시가들이 대체로 가사가 중심이 되고 악곡(선율)이 부수적인 것이 되는 문학 위주의 양상을 많이 보인다.   음악에서의 시조는 시조시(時調詩)를 노래하는 전통 성악곡이다. 본래 시조는 성악곡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노랫말인 단형시를 지칭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시조창이라고 한다.   시조창의 발생은 조선조 영조대의 학자 신광수(申光洙)의 (石北集)에 일반 시조에 장단을 배열한 사람은 이세춘(李世春)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시조는 가창 (歌唱)되었기 때문에 시조시를 노랫말로 하는 전통가악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곡 (歌曲)이라는 곡조로 불린 것이 가장 오랜 창(唱)이다. 이 가곡과는 달리 영조 연간에는 시조창이 나타났다. 오늘날 불리는 시조창은 크게 평시조·중허리시조 [中擧時調 (중거시조)]· 지름시조[頭擧時調 (두거시조)]·사설시조로 구분된다. 시조창 은 경제 (京制)· 영제(嶺制)·완제(完制)라 하여 지방적 차이가 있다. 초창문개설태진(初唱聞皆說太眞)                                 지금여한마외진(至今如恨馬嵬塵)                 내자장안이세춘(來自長安李世春)   조선 후기의 풍류방에서 전승된 시조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 장악원의 음악유산을 후대에 전승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왕직아악부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왕 직아악부에 아악부원양성소가 설치되면서 그곳에서 아악사장 이하 장악원의 후예들은 새 세대들에게 구한말의 국악 을 교육시켰다. 그런데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에서 1930년대부터 정악이 교과과정에 삽입되었고, 하규일과 임기준에 의해서 시조·가곡· 가사가 아악생들에게 전수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3. 시조의 일반 특징 시조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로서 초장,중장, 종장의 3장으로 되어있으며 형식에 따라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로 나뉜다. 시조는 읊거나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시조는 한국 시가 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니면 서 가장 풍성한 유산을 남겨준 문학형태이다. 엄밀히 따지면 시조는 노래로 불리었기에 음악 곡조의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 창가, 신체시, 자유시 등이 나타나면서 그와 구분하기 위해 3장 45자 내외의 특정한 형태를 갖춘 이 시형을 음악상의 명칭인 시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시조의 일반 특성을 다시 조목식으로 살펴보자. 시조의 특징을 조목식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시조의 형식: 3장(초장, 중장, 종장) 6구 12음보(45자 내외)로 되어 있다. ②시조의 율격: 각 장은 4음보의 율격이다. 3·4조 ③시조의 형식상의 제약: 종장의 첫 음보는 반드시 3음절이어야 한다. ①평시조: 기본 형식의 단형 시조(短型時調)이다. ②엇시조: 평시조보다 어느 한 구가 길어진 시조이다. ③사설시조: 평시조에 비해 2구 이상이 길어진 장형 시조(長型時調). 특히 중장이 거의 무 제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④연시조: 2수 이상의 평시조가 모여 한 작품을 이룬 시조를 말한다.                                                     결 론   시조는 한국 시가 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니면서 가장 풍성한 유산을 남겨준 문학형태이다. 시조의 역사가 곧 한국시가의 역사라 할 만큼 우리의 문화 유산으로서, 시조는 한국문학연구의 보배로운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시조는 한국인이 지닌 정신생활사의 일환으로서 전통적,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중요한 양식이다. 전통적 가치를 지닌 시조는 한민족의 생활, 사상,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시이기 때문에 시조의 특질은 곧 한민족의 특성이 된다. 또한 시조는 한민족의 미의식이 빚은 특성 적 양식이기 때문에 그러한 특성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곧 한민족 시가의 이념과 미의 식을 이해하는 길이다. 시조는 한국 사람의 심경에 가장 적합하고 또 한국 사람의 정신적 생활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시형식이였다. 그만큼 현존하는 한국 고시가의 어느 양식보다도 작품수가 가장 많다. 그래서 시가사적으로나 작가 분포로 보아 시조는 한민족의 성정에 가장 알맞은 양식이였다는 고증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조는 향가, 속가, 가사와 같이 과거의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현재도 창작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조는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창작되고 또 향유되었던 문화이다. 그러나 시조는 조선시대로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그 창작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조 때 시조를 가리켜 '고시조'라 하여 근대 이후의 시조와 구별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조가 현재에도 그 창작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변혁과 발전을 통해 시조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계승, 창조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시조의 발생과 발전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한국 시조 문학의 발달사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1. 권두환, 「시조의 발생과 기원」, 『고시조 연구』, 국어국문학회편, 1997. 2. 김대행, 『시조유형론』,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6. 3. 김병국, 「시조의 발생 시기」, 『한국문학사의 쟁점』(장덕순 외), 집문당, 1986. 4. 정재호, 『한국 시조 문학론』, 태학사, 1999. 5. 이연숙, 「시조발생에 대한 한 고찰」, 『국어국문학지』16집, 문창어문학회, 1979. 6. 한국시조문학론 정재호  태학사 7. 시조문학연구론 이정자 국학자료원 8. 제4판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조동일 9. 국문학개론, 새문사, 김광순외 10. 국문학개론/김광순 /새문사/2003 11. 한국 시가문학의 탐구/전병욱지음/1999 12. 시조유형론 / 김대행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 1994 13. 한국문학통사2,3/ 조동일 / 지식산업사 / 1994 14. 이찬욱, 「시조의 형식과 미의식」《어문연구》 111호, 2001 15. 시와 시조 창작론 /이정자/ 국학자료원     감사의 말 본 논문의 과제를 설정하고 집필을 끝내고 논문답변을 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최균선 교수님의 사심없는 방조와 직접적인 지도하에 마침내 순리롭게 탈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수님에게 심심한 사의와 경의를 올리는 바입니다.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20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세계 비교 (풍첩) 댓글:  조회:12168  추천:2  2013-01-24
                                               摘要   直到 1925年、1926年,朝鲜文坛出现反对颓废的唯美主义倾向,具备近代精神和抒情化鲜明的诗人,其代表是金素月和韩龙云。金素月作为一个民谣诗人和抒情诗人,达到了韩国近现代诗歌的高峰。金素月的代表作有: 《金达莱花》,《招魂》等。金素月开启了韩国民谣的旋律,由于他对民族诗歌形式的创新,而成为民谣诗派最卓越的诗人。 20年代与金素月一起代表韩国近现代诗坛最高水平的另一个诗人是韩龙云,他本来是禅师、独立运动家。代表作有:《君的沉默》等。他写的《君的沉默》表达了作者对人间存在的现实意味的质疑,这表现出一种韩国诗歌史上以前所没有的形而上的特征。他写的“ 君”不仅仅单指某一个对象,而是一种存在和意识的辩证结合,也就不是“ 君”的形而上的印象,所以“ 君” 沉默了。韩龙云的诗歌源自“ 君”不在的绝望,但是他使人们摆脱绝望,充满希望,坚信离别后能重逢。   关键词:金素月 韩龙云 民谣的旋律 金达莱花 君的沉默                                             초 록       1925년,1926년에 이르기까지 조선문단에는 퇴폐적 유미주의를 반대하고 근대 정신과 서정화가 선명한 시인들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시인들로는 김소월과 한용운이다. 김소월은 민요시인고 서정시인으로서 한국 근대시가의 고봉을 이루었다. 김소월의 대표작은《진달래꽃(金达莱花)》《초혼(招魂)》김소월로부터 한 국민요적 선율이 시작되었으며 그로부터 민족시가형식의 혁신이 시작되었는 바 민요시파의 탁월한 시인이다.    20년대 김소월과 같이 한국 근대시단의 최고봉을 이룬 또 하나의 시인은 한용운으로서 그는 독립운동가요, 지사요, 사상가요, 불교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님의 침묵(君的沉默》등이 있다. 시인은《님의 침묵》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의미에 대하여 질의를 던지고 있는 바 이는 일종 한국시가 사상에서 전례없었던 형이상적 특징이다. 그가 쓴 “님”은 한 대상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일종 존재와 의식의 변증적 결합으로 역시 “님”의 형이상적 인상이므로 “님”은 침묵하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에서 가버린 “님”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에서 파탈하게 하며 한가득 희망을 가지고 이별후 다시 만남을 굳게 믿게 하고 있다.    키워드: 김소월 한용운 민요선율 진달래꽃 님의 침묵     목 차 1. 서론 1.1 연구 목적과 의의 1.2 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 범위와 연구 방법 2. 본론 2.1 김소월의 생애와 문학활동 2.1.1 김소월의 생애 2.1.2김소월의 창작 배경 2.1.3김소월의 시 세계 2.2 한용운의 생애와 문학 활동 2.2.1한용운의 생애 2.2.2한용운의 창작 배경 2.2.3 한용운의 시 세계 3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비교 분석 3.1 시적 소재의 발굴에서 3.2 두 시인의 자연관 3.3두 시인의 문학사적 위치   결론 :   감사의 말:                                              1. 서 론   1. 1 연구 목적과 의의 김소월과 한용운은 1920년대 식민지 상황에서 현대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한 시인이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각기 자신들의 대표적 시집인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특색 있는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문학의 학문적 연구에 있어 현명한 출발점은 문학작품 그 자체의 해석과 분석이다. 본고에서는 두 시인의 생애와 창작 배경 및 시 세계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두 시인의 작품 그 자체에 의하여 비로소 올바른 의의가 부여함으로써 두 시인에 대해 보다 깊이 요해하는데 목적을 둔다. 1.2 기존사 연구 검토 기존 논의들은 김소월의 시는 여성적 화자로서 서정을 극대화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한용운은 불교적 세계관을 ‘님’에 대입시켜, 통속적이지 않게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을 살펴보면 김소월의 시에서는‘한의 미학’으로 한용운의 시에서는‘님의 정체 규명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와 논란이 있었다. 김소월 연구의 경우 전통적 정서면에서의 고찰, 한용운 연구의 경우는 주로 불교사상면에서 살펴본 것 등이 있다 1.3 연구범위와 방법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에서 ‘님’의 의미는 공통적으로 상실의 주제를 보이고 있지만 두 시인은 해결방법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본논문에서는 역사주의 관점과 비교분석의 방법으로두 시인의 동일한 주제의 시에서의 부동한 시점, 독특한 풍격의 체현을진일보 연구, 분석하려 한다                                             2.  본론 2.1 김소월의 생애와 문학활동 2.1.1 김소월의 생애 김소월은1902년 9월 7일(음력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에 있는 외가집에서 부친 김성도(金性燾)와 모(母)친 장경숙(張景淑)의 장남 으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공주이다. 1904년 부친이 철도 공사중 일본인 목도군에게 맞아 정신이상을 일으키자 조부 김상주(金相疇)에게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 1909년 남산학교를 졸업 후 오산 중학교 중학부 입학. 스승인 안서(岸曙) 김억(金億)에게서 민요풍의 시를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시인은 1935년 병으로 작고하였다. 2.1.2  김소월의 창작 배경   소월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1920년 전후의 시기는 한국의 현대 문학 사상으로는 물론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뜻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시기 이다. 그것은 3.1운동이 일어나고 연이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된 때이기도 하며 이른바 그들의 문화정책으로 약간의 출판활동이 허용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며 3대 동인지로 일컫는 「창조」,「폐허」「백조」 등의 잡지가 연이어 창간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 소월을 가리켜 「정한의 시인」이라고 불리울 만큼 그의 작품에 처절한 애수를 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적 배경 즉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에서 눈뜨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예술은 시대 적 산물이며, 또 그것은 시대성을 반영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는 생명지향과의 대립, 극복, 융화의 변용과정을 거쳐 시를 창조한다.” “시인은 시를 낳기 위하여 역사를 의식하고, 인생의 체험을 절실하게 지각하며, 현실의 상황을 민감하게 수용하면서 자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시인은 역사와 상황을 자기의 가치의식에 따라 변용시키려 한다.”① 김소월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와 그 영향으로 한민족은 민족적 분노와 비창감 일색에 젖어있어, 시의 주제와 정감 역시 이러한 지배적 민족 감정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저항과 좌절, 의지와 허탈, 분노와 패배감이 뒤엉켜 그것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것에 휩쓸려 내려가는 풍조 속에 비관이 차츰 감상과 퇴폐로까지 빠져 들어가던 시기였다.   소월 역시 이러한 시기에 허락된 개인주의 삶에 뿌리를 내린 채 식민지 한과 슬픔의 미학을 구축한다. 개인주의 이상은 비록 건강한 사회에 의하 여 보장 받는다 할지라도 한계를 지니는 법이다. 하물며, 전통의 단절이 강요되고 이념과 역사가 전도된 전체를 위한 삶의 질서가 무너진 일제 식민지치하에 있어서랴... 2.1.2 김소월의 시세계 1925년《님에게》,《먼 후일》, 《못잊어》, 〈오는봄〉 《버리운 몸》, 《초혼》 《진달래꽃》,〈산유화(山有花)〉 《금잔디》〈엄마야 누나야〉 등 모두 127편을 창작 발표하였다. 1910년대의 한국의 시는 1919년 일대 전환을 이룬다. 1920년대 초의 허무와 좌절은 곧이어 등장한 김소월과한용운에 의해 단순한 허무와 좌절이 아닌 새로운 차원으로 극복,                   윤재근, 시적표현과 배경의 변용Ⅱ, 문학비평 1권 3호, p786 (박두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일조각, p.37)② 승화되기에 이른다. 김소월은 김억, 김동환, 주요한 등과 함께 `민요조 서정시 [민요시]`를 다수 발표한다.  민요조 서정시란 민요적인 3음보의 율조를 기본으로 하고, 설화적인 소재를 취급 하며, 향토성 짙은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말한다. 김소월은 이러한 민요조 서정시를 창작하면서도, 정형적 율조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개인의 비애를 넘어서는 민족적 정한을 노래함으로써 군계일학 (群鷄一鶴) 의 일급 시인으로 떠오른다. 2.2. 한용운의 생애와 문학활동 2.2.1 한용운의 생애 일제 식민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며 불교시인인 한용운은 1879년(고종 16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의 오세암에 출가하고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법호는 만해, 법명은 용운이다. 1919년 3.1운동을 이끈 33민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에 머물던 집인 심우장 (尋牛莊) 에서 65세를 일기로 입적하니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2.2.2 한용운의 창작 배경 만해 한용운은 위대한 승려이자 행동적인 민족주의자로서 민족 운동사에 있어서도 물론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를 통해 자유 사상․평등 사상․ 민족 사상․ 민중 사상․ 진보 사상,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기미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저로서 체계화한 데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일제 패망 직전 극도의 궁핍 속에서 심우장 냉돌 위에서 순국하기까지 보여 준 정신의 일관성과 지절은 참으로 귀한 민족적 사표가 아닐 수 없다. 만해의 문학은 그의 문학이 지닌 예술적 형상서의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그의 문학이 지닌 문학사적 위치 때문만도 아니다. 그와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일깨워 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끊임없는 실천과 행동,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과 사상의 일관성이야말로 만해 정신의 위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2.2.3 한용운의 시세계 한용운에게는 ,. , , , , 등이 주요 작품이 있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출판된 한용운(1879-1944)의 대표적 시집일 뿐 아니라, 20세기에 출판된 가장 중요한 한국 시집 중의 하나이다. 이 시집이 중요한 것은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이 그렇듯 하나의 새로운 언어-세계를 창조하였다는데 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님이 침묵하는 시대'로 표현 하고, 님이 침묵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나날의 삶의 괴로움을 윤리적,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서 님을 통해 성찰, 표현하면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시적 비전을 노래하고자 하였다.   그의 교양이나 이력이 남달랐기 때문에, 이 시집에 수록된 89편의 시들은 그 내용과 세계가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띤 독특한 점이 있다. 근대 시중에서도 난해한 시에 속한다. '님의 침묵'의 님을 조국, 민족, 부처 등으로 보는 기존의 단선적 견해가 대부분이지만 만해의 시가 현대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세가지 요소, 즉 시대성 사상성 문학성이 모두 치열하게 수용되어 있고 이 요소들이 한 덩어리로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3 김소월과 한용운 시에서 “님”의 의미 1920년대의 시에서 눈여겨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지향의 시이다. 특히 김소월과 한용운은 을 통해 높은 시적 성취를 달성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시인은 임의 상실로 자기 시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김소월은 과거로의 도피나 망각을 통한 해결을 그려냈고, 한용운은 미래 속에다 희망의 기약을 내거는 표현을 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용운의 '님'이 가진 속뜻을 생각하면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김소월의 '님'을 비교할 가치가 있다. 김소월의 시에도 '님' 또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님이 현재의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3.1  김소월의 김소월은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를 받는데 내용면에서 그의 시는 집 없고 길 없는 설움과 고향상실에 따른 비애를 형상화 하여 식민지 시대의 정서를 잘 압축하고 있다. 이러한 고향상실의‘없음’과 ‘결핍’ 에서 오는 정서는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와 상통한다. 이처럼 김소월의 시에서 은 한(恨)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恨)이라는 의미를 좀더 깊이 들여다 볼 때 동경 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을 통해 ‘한(恨)의 정서’ ‘기다 림의 정서’를 표출 하지만 그 표출하는 정서 속에 무엇인가를 동경하고 갈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용운은 비록 지금 여기에 '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시는 끝없는 절망에만 빠지지 않으며 마침내는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슬픔과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돌아오고야 말 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다. 시 《님의 침묵》에서 이런 이념이 잘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시인이 가졌던 현실 감각과 역사 의식에서 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 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3.2 한용운 시에서의 “님”의 의미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새는 차다찬 티끌이 되어서, 한 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가) 김소월의 “님”: 두 시에서의 공통점은 님과의 이별을 통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고, 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월의 시에서 임은 "헤어진 이름이여!" "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등 각 연의 끝부분에서 보듯이 죽었거나 또는 아주 멀리 떠나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임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 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 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님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나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할 때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나) 한용운의 “님”: 만해의 임은 단일 의미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합성을 띠고 있으며, 삶답게 하여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을 통해 슬픔과 절망보다는 " 새 희망의 정수 박이"와 "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에서 보듯이 언젠가는 돌아올 님에 대한 사랑과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만해의 님은 현재에는 부재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님으로 희망, 사랑의 힘을 노래하였고, 소월의 님은 죽었거나, 다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으로 절망, 애절한 슬픔과 한의 정서를 드러내었다. 3.3 두 시인의 “님”의 부동한 양상   은 "이름이여!" "부르노라" 에서와 같이 격정적으로 슬픔을 직접적으로 영탄한 것으로 보아 세상을 떠난 임을 애타게 부르는 남성의 노래이다. 시적 화자의 부름은, 임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는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부름이기에 더욱 애달프다.    이 시는 초혼의식과 망부석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임과의 사별에서 오는 극한적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초혼' 이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이 시는 죽은 사람을 소생 시키려는 전통적 고복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대부분의 소월시가 임과의 이별을 여성적인 목소리로 노래한 것과는 달리, '초혼'은 세상을 떠난 임을 애타게 부르는 남성의 어조이다. 한 편, 떠난 임을 부르는 이 시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국권 상실로 상실감에 젖어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은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이 이별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켜 사건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는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이 지배적이다. "갔습니다"와 같이 존대법을 써서 경건, 간절. 애절의 모습에서 여성적이다.  그러나 만해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현실 상황에 대한 저항 의식과 극복 의지가 내재 해 있다. 즉,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국권 회복에 대한 소망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만해 시에 등장하는 '님'은 대체로 부처, 조국, 사랑, 희망, 무아, 연인 등으로 해 석된다. 그렇지만 만해에게서 '님'이란, 의 에필로 그인  에서 '님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 이라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삶을 삶답게 해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용운의 에 서는 님을 통해서 나라를 잃고 고난 에 처한 민중들을 위로하고 붇돋기 위해 씌인 한용운의 상징적 코드인 . 그것은 신이든, 연인이든, 자연이든,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야기될수 있는 시적 유연함이 이들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4.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특징의 비교 4.1 시적 소재 발굴에서 정형율의 민요시를 민요가락에 실어서 노래한 작품을을 선보인 김소월은 에서는 독특한 리듬감으로, 그 유명한 에서는 한국적 토착정서와 정한의 세계, 자연의 모습등을 노래함으로서 한국 고전 가사인 나 에 맥이 닿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한용운은 직업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3,1운동에 앞장서 싸운 독립투사고 혁명 가이고 불교에 귀의한 승려였듯이,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그 주를 이룬다. 그의 , 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도 아름답게 해석될수 있는 방향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 자연파 시인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자연이 단순한 관조가 아니고 종교적 또는 민족적 존재의 내면 탐구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라고도 불려진다. 산문체 의 긴 호흡의 유장한 리듬은 타골의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하지만, 불교의식의 계송법. 낭독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4.2  자연관에서의 비교 김소월은 자아실현의 주관주의적 자연관을 가지고 있다. 김소월은 민족 적으로 시대적으로 상실의 상황에서 자연을 모티브로 삼아 내면화의 규명 에 추구하였다. 소월은 근대적인 개인으로서 자아실현의 대상으로 자연을 선택했다. 그런데 소월의 자아실현의 조건은 자연뿐 아니라 부재중인 님에 대한 동경, 그리움의 정서와 함께 한다. 자연이 자아실현의 부차적인 매개 라면 님을 향한 그리움은 오히려 그의 내면을 활력으로 이끄는 중심이다. 김소월의 시는 기약이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하는 데 대개 애절한 슬픔 과 한으로 젖어있다. 한용운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밝음을 시으 밑바탕에 깔고 있다. 4. 3 시작 방법에서 두 시인은 창작할 때는 상징인 사작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은 한 여자의 말투로 애인의 떠남에 대한 슬픔을 토로한다.  은 남녀간의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역설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민족의 원형에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에는 화자는 임과 이별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서도 만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임은 갔지마는 언젠가는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조국의 광복에 대한 희망 을 상징하였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사작시대배경이 비슷한데 김소월은 조국을 잃음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고 않고 작품에 절망이 나온다. 하지만 한용운은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갖고 어떤 날 “님”이 다시 돌아올 것은 믿다고 한다. 5. 김소월과 한용운의 문학사적 위치 김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3. 결 론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는 식민지 초기에 한국시가 짊어진 두 가지 과제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면서 한국인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줄 새로운 시형식을 찾는) 를 자기 나름으로 성실하게 해결하려 한 작가들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김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 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소월 시의 저변에 흐르는 한(恨)은 한민족의 심층에 깔린 정서이다. 여러 민요를 살펴보면 소월이 그의 시에서 노래한 이별의 한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소월 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소중한 전범(典範)이 된다. 한용운는 식민지 초기에 한국 사회의 구조를 가장 명료하게 파악한 시인 이다. 그가 파악한 한국 사회의 구조는 자기만의 사랑이며, 슬픔의 제스처이며, 탄식의 포즈 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강렬한 개인 의식으로 조명 한다. 한용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은 비록 님과 리별하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체험하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슬픔을 새 희망으로 바꾸어 님과 만날 확고한 신념을 안고 살아간다. 여기 에는 조국을 빼앗긴 슬픔과 허탈속에 빠져있는 무기력한 인간이 아니라 어떤 역경 속에서도 광복의 그 날을 굳게 믿고 굴함없이 살아가는 지조있는 지향의 세계가 엿보인다.   참고문헌 1.이용남 외, 『한국현대작가론』, 서울: 민지사, 1984. 2. 신동욱. 『김소월 시에 관한 연구』 서울: 연세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1990 3.김재용 외.『한국근대민족문학사』.서울: 한길사.1993 4.이영섭 외, 『新문예사조론』, 서울: 우리문학사, 1994. 5. 김영철,『김소월-비극적 삶과 문학적 형상화』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4 6. 강진호.『한국근대문학 작가연구』.서울: 깊은샘. 1996 7. 박철석.『한국현대시인론』, 서울: 민지사. 1998. 8. 한용운,『님의 침묵』, 서울: 민음사. 1999. 9.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46권. 과천: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2000 10. 김소월,『진달래꽃』. 서울: 미래사. 2001 11. 신동욱,조남철 공저.『현대문학사』서울: 방송대학교 출판부. 2003. 12. 이정자. 『시와 시조 창작론』.서울: 국학자료원. 2004 13. 김종태, 『한국 현대시와 서정성』, 서울: 보고사. 2004 1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5권, 서울: 지식산업사. 2005 15. 최대호, 만해 지훈의 한시, 은하출판사 16. 유근조, 소월과 만해시의 대비연구, 단국대학교대학원 17. 최동선, 김소월연구, 성균관대학교대학원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19    왕교 《运气好的日子》的社会性和艺术成就 댓글:  조회:7488  추천:0  2013-01-23
                                                本科毕业论文   题    目:《运气好的日子》的      社会性和艺术成就 韩文题目: 의 사회성과      예술 성취           系    部:       东方语言学系      专    业:        朝鲜语           姓    名:          王巧           学    号:      20060420207        指导教师:        崔均善           2010年   5月    15日 毕业论文独创性声明   该毕业论文是我个人在导师指导下进行的研究工作及取得的研究成果。文中除了特别加以标注和致谢的地方外,不包含其他人或其它机构已经发表或撰写过的研究成果。其他同志对本研究的启发和所做的贡献均已在论文中作了明确的声明并表示了谢意。   作者签名:  王 巧      日期: 2010  年   5 月20    日         毕业论文使用授权声明   本人完全了解青岛滨海学院有关保留、使用毕业论文的规定,即:学校有权保留送交毕业论文的复印件,允许被查阅和借阅;学校可以公布全部或部分内容,可以采用影印、缩印或其它复制手段保存该毕业论文。保密的毕业论文在解密后遵守此规定。       作者签名: 王 巧   导师签名: 崔均善  日期: 2010   年 5  月 20日           摘 要   玄镇健的小说《好运的一天》发表于1924年,当时正值韩国的日帝强占期,整个韩民族在日本的统治之下遭受了前所未有的苦难,而其中最悲惨的莫过于处于最下层的无辜百姓。《好运的一天》通过记述一个处于韩国社会最下层的人力车夫的“好运”的一天,真实的反映了当时韩国下层人民的苦难生活。 笔者利用文献研究方法和文学批评方法等两种研究方法,在已有研究的基础上进一步进行了研究对玄镇健的《好运的一天》的社会性和艺术成就,希望通过本论文使读者更了解玄镇健的文学世界,并希能够更好地体会当时韩国下层人民的苦难生活。   关键字: 玄镇健 写实主义 反语 最下层社会                                                   초 록   현진건의 소설 은 1924년에 발표되었다, 당시는 일제가 한국 을 강점한 시기었다. 한민족은 모두 일본의 통치하 미증유의 고난을 격고있었 다. 그 중에서 최대한 고난을 당한 사람은 한국 최하층 인간들었다. 은 한국사회 최하층에 있는 인력거꾼의 “운수 좋은” 날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 한국 최하층 인간의 고난한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문헌연구방법과 문학비평의 방법으로  선배 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진일보 현진건의 소설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를 재조명하려 한다. 본 논문을 통해 독자들은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과 최하층 인간의 생활상을 보다 깊이 요해할 수 있으며 현진건의 문학세계를 보다 깊이 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논문은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많지만 한국문학을 배우는 동학들 에게 일정한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해 본다.   키워드: 현진건 사실주의 반어 최하층 사회                           차례 서론------------------------------------------------------ 연구의 필요성 및 의의----------------------------------- 연구내용과 방법----------------------------------------- 본론------------------------------------------------------- 현진건(玄鎮健,1900-1943)------------------------------- 창작배경------------------------------------------------- 2.1사회적 배경------------------------------------------ 2.2문학적 배경------------------------------------------ 의 분석----------------------------------- 3.1줄거리----------------------------------------------- 3.2 반어(irony)------------------------------------------ 3.3 대화 분석-------------------------------------------- 3.4사실주의적 묘사-------------------------------------- 결론------------------------------------------------------- 참고문헌--------------------------------------------------- 감사의 말--------------------------------------------------                     1. 서론 1.1.연구의 필요성 및 의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80년대에 출생한 대부분 청년 세대들은 이미 전통 문화에 대해 소원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전통문학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각성을 불러일으킴에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 말하면 한국의 전통문학에 대한 연구는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특히 시공간적으로 우리와 소원해진 일제 강점기 한국사회와 인민들의 생활 상을 반영한 작품에 대한 연구는 더욱 의미를 가진다. 일제 강점기(1910-1945년)에는 한국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난을 당했 다. 이는 어느 개인의 수난이 아니라 전사회나 전민족의 대수난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작품의 연구를 통해 당시 한국 최하층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 일대들이 유익한 계시도 받을 수 있다. 특히, 80년 대에 태어나 우월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우리 일대들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현진건은 1920년대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적 작가로 사실주의적 소설의 집대성자이다. 여기서 연구하는 그의 걸작 은 그의 사실주의적 소설의 대표작으로서 일제 통치하에서 인력거꾼 김첨지의 “운수 좋은” 어느 하루를 펼쳐 보이면서, 당시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일반화하고 있다. 은 현진건의 창작 전환점으로 작품의 사회성과 예술성취에 대한 연구는 문학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현진건의 문학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지위로 많은 문학계의 대가와 학자들이 현진건 본인이나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우수한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에 대한 전문적 연구도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학자들은 대부분 이 작품의 반어에 관심을 많이 돌렸다. 그리고 이 작품의 사회성에 대한 연구도 많지 않고 연대도 멀다. 한국 학자인 변태수의 논문도 1981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여러 모로 보면서 현진건의 소설의 사회성과 예술성취에 대한 연구는 필요성가 많이 있는 것이다. 1.2. 연구내용과 방법 학술잡지, 단행본, 한국문학사 등에서 현진건의 소설에 대한 재료를 찾아 분석하고 정리한다. 선배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진일보 현진건의 소설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를 재조명하려 한다. 다음에는 그때의 역사적 사회 배경을 고찰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회배경 속에서 을 고찰하고 작품의 예술성이 잘 드러난 부분을 찾아 깊이 있게 분석한다. 그 기초상에서 상황의 아이러니, 인물의 구체적인 심리 묘사, 현살감 있는 서술, 비속어의 사용 등 면에서 정체적으로 작품의 예술성 을 진일보 탐구한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사회성 과 예술성취를 나름대로 연구하여 아직 미흡한 문제를 재조명하려 한다. 문헌연구방법과 사회적 반영이론이란 두 가지 연구방법을 통해 현진건의 소설  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를 연구한다. 2. 본론 2.1.현진건(玄鎮健,1900-1943) 현진건은 호가 빙허로서 1900 년 8월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에 한문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졸업했고 후에 중국에 건너와 상해 호강대학 독일어전문부에서 수학했다. 1919 년 대구에서 이상화 등과 함께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1920 년 지에 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햤다. 1922 년에 동인지에 가담하였고 1925 년에는 사에 입사하여 사회부장 등 직을 역임하였다. 1936 년에 손기정 선수의 보도사건에 관련되어 1 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3 년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현진건의 창작활동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는 1920 년대 이다.  현진건은 파의 일원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놓은 후 근 20여 년의 작가 생활을 통해서 뛰어난 문학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많은 사람에 의해서 다양하게 거론되어 왔지만, 한결같이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로서, 또는 그 공로자로서 우리 소설사의 뚜렷한 작가임을 높이 찬양 하고 있다.   44세란 극히 짧았던 생애를 통하여 그가 내놓은 문학은 민족적 비애로 충만 된 민족의 수난과 역사를 성실히 증언하는 사실작가로 일관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한국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격동기에 개화지향적인 주변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어렵고 혼란된 시대를 살아 가는 여러 가까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대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립했다. 그는 생활에 절도를 유지했고, 문단의 세기말적 분위기에 초연했다. 조혼한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여성 관계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 그의 문학적 특징은 사실주의의 확립에 있다. 즉, 치밀하고 섬세한 사실주의 적 묘사,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반전의 수법, '나'라는 고백적 시점의 사용, 현실에 대한 객관적 묘사 등을 통해 현대 한국 단편 소설의 특징은 단적으로 아이 러니의 틀 속에 1920년대의 한국 사회의 한 전형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는 그에게 있어서 현실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미학적 구성 원리이며, 그의 언어는 현실과 사회에 밀착된 현장의 소리이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빈처」, 「운수 좋은 날」, 「B 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있다. 명암, 정신 대 물질, 빈부의 대립 등 이원적 구성을 미적으로 소화하는 데 능하다.   그는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이다. 전기의 작품 세계는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와 기본적 사회 단위인 가정 속에서 인간관계를 다루면서 강한 현실 인식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했고, 그 때의 제재는 주로 모순과 사회 부조리에 밀착했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기에 와서는 그 이전 단편에서 보였던 강한 현실 인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한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화 적으로 서구 취향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의식을 지탱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대처하여, 생활과 문학을 하나로 일치시켜 살았던 작가이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고백 형식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단편에 능한 작가”로서 “현대 단편소설의 시조”로 불릴 만큼 한국단편소설의 기술적인 기틀을 마련한 작가로서 한국현대소설사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상에 있는 작가이다. 현진건은 한국현대문학사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철저하게 사실주의를 소설 창작에 구현함으로써 “사실주의 집대성자”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하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무기력한 삶의 모습을 감상주의적 색채가 다분히 도배되어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후의 직품에서는 3 인칭 서술방법을 도입하여 어두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을 좀더 치밀 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단편소설 ,,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 , 등이 있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 기교적인 면만을 높이 평가하거나 자연주의적 경향을 지녔던 문학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실주의문학의 터전을 가장 공고 하게 닦아 놓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2.창작배경 2.1사회적 배경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8월29일~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지배아래 놓였던 시기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또 다른 표현으로 일제 암흑기, 일제 식민 통치 시대, 일본 식민지 시대, 일본 통치 시대, 일정 시대, 왜정 시대(倭政時代), 대 일본 전쟁기, 대일 항쟁기, 국권 피탈기(國權被奪期) 등이 있으나, 표준어로는 “일제 강점기” 라고 명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 경찰 통치기 (무단 통치기)(1910년~1919년)”, “민족 분열 통치기(문화 통치기) (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일제의 무단 식민 통치는 한국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 여성의 지위 하락. 일본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았고, 그 영향 으로 한국 여성 또한 지위가 그 이전보다도 더 하락하였다. 둘째, 민족 말살과 민족성 변질.“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목표로 역사를 왜곡하였으며, 일본의 풍습과 문화를 이식하였다. 일본과 친일 학자들을 앞세 운 일선동조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 식민사관으로 전반적인 한국의 역사 왜곡 과 유적 파괴와 도굴 방치 및 일제의 맹수 사냥으로 인해 한반도의 시베리아 호랑이와 아무르 표범 멸종 위기. 그리고, 경제 수탈로 인한 민생 피폐 한국인 들은“죽음을 담보한 노동”에 시달렸고,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을 발표하는 1924년은 문화 통치기에 속한데 더 중요시하는 사회성이 나타나고 있다. 또는 빙허 현진건은 1900년에 출생하고 1943년에 돌아가셨는데 딱 일제 강제기를 몸소 겪은 일이었다. 2.2문학적 배경 1920 년대의 소설은 인간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설정에서 서사적 대결양식을 찾는다. 그리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여하는 이 시기 소설의 기본 적인 과제가 되어 소설의 발전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시기 소설은 크게 개인주의를 내세운 유미주의와 자연주의 경향, 사회현실에 관심을 보여준 사실 주의경향을 내세운 작품으로 나뉘게 되는데 본 논문에서는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고찰하게 된다. 현진건은 개인의 사회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등에서 보여주듯 빈곤과 지식인의 삶의 고민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게 되며 사회비판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19 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학 정치를 표방하면서 분리조정 정책을 취하였다, 즉 일부 언론, 집회, 결사 등의 자유를 허가하였다. 따라서 여러 의식단체와 사회운동단체 나왔다. 현진건은 개인의 삶만을 비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가지고 있는 삶을 비통해 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고민만이 아니고 타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으로 자기의 고민은 개인의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못하는 사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진건은 처럼 꽤 무게가 있는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일제 통치하에는 지식인의 고통은 김첨지의 고통과 다른 것이 없다. 그는 폐허화된 조선이 당하는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안은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의 작품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3.의 작품분석 3.1줄거리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행운이 불어닥친다. 아침 댓바람에 손님을 둘이나 태워 80전을 번 것이다. 거기에다가, 며칠 전부터 앓아 누운 마누라에게 그렇게도 원하던 설렁탕 국물을 사줄 수 있으리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를, 1원 50전으로 불러 세운 학생 손님까지 만났기 때문이다. 엄청난 행운에 신나게 인력거를 끌면서도 그는 마누라 생각에 내심 켕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님 하나를 흥정하여 또 한차례 벌이를 한 후, 이 “기적”적인 벌이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길가 선술집에 들른다. 주기가 얼큰히 오르자, 김첨지는 마누라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술주정을 하면서 미친 듯이 울고 웃는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김첨지가 설렁 탕을 사들고 집에 들어온다. 무서운 정적이 감돈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이의 젖 빠는 소리만 난다. 어쩌면 이 침묵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대문에 들어서면서 괜히 소리를 지르며 허장성세를 부린다. 김첨지는 문을 왈칵 연다. 땀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김첨지는, 이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을 거냐고 하면서 발로 아내를 찬다. 반응이 없자 달려들어 머리를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러다가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눈을 보게 되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다. 김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비비대며 중얼거린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3.2. 반어(irony) 반어(irony)는 원래 “은폐하다(隐蔽)”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希腊语) “eironeia”에서 온 말로, “표면적 진술과 실제의 발화 의도가 다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인식의 방법론으로 쓰여 오다가 나중엔 수사학(修辭學)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여기엔 복잡한 분류 체계가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류 체계를 단순화하면, 크게 ‘상항적 아이러니’ 와 “언어적 아이러니”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중“상황적 아이러니”는 “기대했던 바와 실제 벌어진 상황이 반대이거나, 바라는 바와 실제로 처한 바가 서로 반대일 경우”를 뜻하는 것이다. “첫째 번에 삼십 전,둘째 번에 오십 전——아침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운수 좋은 날”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보는 것이다. 팔십 전을 아침결에 번 것이다. 그 돈을 가지고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컬컬한 목을 소주 한 잔으로 적실 수 있었다. 참 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 학교 문을 돌아나올 때 뒤에서 한 학생이 “인력거!”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일 원 오십 전만 줍시오”하는 말이 김첨지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놀라는 엄청난 액수이다. 둘이 흥정하다가 이런 차삯으로 갈 데로 갔다.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첨지는 스피드 스케이트를 하는 듯하였다. 정거장까지 끌어다 주고, 그 깜짝 놀란 일 원  오십 전을 정말 제 손에 쥐었 을 때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정말로 생각할 수 없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수 없기에 이 행운을 꼭 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거장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이어 한 사람을 태워주었다. 이 번에 육십 전을 벌었다. 길가 선술집에서 나온 친구인 치삼이를 만났다. 둘이 선술집에 들어가서 한잔 하였다. 추어탕과 구워지는 너비아니, 제육, 간, 콩팥, 북어, 빈대떡…… 등 안주를 사먹었다. 그리고 두부와 미꾸리가 든 국 세 그릇을 받아들고 제우 던 막걸리 곱배기 두 잔이 더웠다 .또 곱배기 한 잔 마셨다. 친구인 치삼이가 술을 더 마시지 말라고 했을 때 김첨지는 개의치 않고 계속 곱배기를 마시라고 하였다. 돈 몇 푼이 땅에 떨어져 다시 줏는 것을 보고 마음에서 너무 더러운 행위로 여기기도 하였다.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었다. 이상  열거한 것은 모두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하는 경우를 증거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운수 좋은 날”은 아내가 죽는 날이었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특정된 환경에서 벌어진 비극의 아이러니가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의 아내가 기침으로 쿨룩거린지 벌써 달포가 넘었다. 반듯이 누워  일어나 기는커녕 모르도 눕지 못하는 안해였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그리고 오늘 집을 나올제 아내는 김첨지에게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며 숨이 그렁그렁하여 이렇게 부탁하였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 경우는 이내가 자기 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운수 없는 날이었다. 김첨지가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아내가 죽음과 거리에게 더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작품의 제목인 “운수 좋은 날”은 너무나 대조적이며 상황의 아이 러니를 두드러지게 한다, 현진건은 이 작품에서 예술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라는 수사법이다. 3.3.대화 분석 “에이, 오라질 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을 하게. ” “아따,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 “젠장맞을 것! 이 지를 맡으며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고 돌아를 간담. 이런 발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비가 왜 남의 상판을 딱딱 때려! ” “이런 젠장맞을, 술을 왜 안 부어…… ” “이놈, 오라질 놈, 왜 술을 붓지 않어. ”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왜 남을 귀찮게 굴어! 어리구, 소리가 처신도 없지, 허허 ” “죽기는 왜 죽어. 생때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오라질 년이 밥을 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 “이년아, 말을 해,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이상 열거한 대화를 보고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년, 오라질, 젠장 맞을 등 비속어를 통해 그 시대에 특유한 습관을 보일 수 있으며 일제 통치하 에서 하층민의 궁핍상도 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에 하층민의 사화 상과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또한 현진건의 창작 특징 하나이다. 3.4. 사실주의적 묘사 “그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런 묘사는 비극의 발생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김첨지가 생활한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으며 독자에게 진실감도 보여 주었다. 이런 경우는 그 시대의 하층민 비참한 생활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첫번째에 삼십 전, 두 번 째에 오십 전을 벌었다, 아침에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돈이 김첨지에게는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소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음이다.” 이런 묘사는 독자에게 하층민인 김첨지의 내심 생각을 잘 보여 줄 수 있다. 이런 갑자기 닥쳐온 벌이에 대해 김첨지의 가슴에서 나타난 생각을 명랑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김첨지같은 인력거꾼의 궁핍상을 소설화하고 있었다. 빈곤 으로 돈이 생기자 평소에서 못 마시던 술을 사는 것과 병에 걸린 아내가 가장 먹고 싶은 설렁탕을 살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가 이미 기침으로 앓아누운지 달포가 넘었는데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조밥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병이 심해지는 것은 열흘 전에 조밥을 먹고 체하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굶기를 밥먹듯 하면 살아왔는데 돈을 벌어서 좁쌀을 사다 먹을 수 있어 마음이 급하고, 불길은 달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것을, 숟가락은 그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두 볼이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이 먹었다. “땀과 빗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 주머니가 다 된 광목 수건으로 닦으며……” 그리고 선술집에서 김첨기가 돈이 있기에 거기 있는 모든 먹거리 를 다 시키는 경우에 대한 묘사, 먹다가 아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지르는 취한 행위에 대한 묘사, 마지막 김첨지가 집에 돌아갔을 때 주위의 고요하고 괴이한 상황 묘사 및 집안에서 얘기의 “응아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기진한 것 같다.” 라고 한 묘사는 다 비극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 결론   본문의 묘사와 서술에 의하며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진건의 소설 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는 다음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이 소설은 1924년에 발표하였는데 한창 일제 강점시기의 제2단계의 통치기 였다. 소설은 일제 강점기에 하층민의 궁핍상과 사회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바 모두 인력거꾼이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기에 다른 동사들을 피하여 외딴 곳에서 손님을 찾았다. 아내가 병에 걸린줄 알았지만 약을 사다 먹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김첨지였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사회의 비극이다. 예술적인 성취를 말하면 은 1920년대 초기에 사실주의적 소설으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사회상를 소설화 하는 창작 의식형태, 비속어를 이용한 것과 구조면에서 돈 벌이와 아내의 죽음 사이에 서의 모순구성, 등은 모두 사실주의적 묘사이다.. 이로써 현진건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1920년대 한국문학, 특히 현진건 소설에서의 사실주의를 알아보고, 그것이 당시 시대와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한 현진건 소설에 대한 비판을 병행 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가지는 한계가 사회 현실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는지 알아 보았다.                       감사의 말 논문 집필과정 최교수님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논문집필에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는 방법도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에 다시 한번 진심 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韓國文學論綱[韓]趙東一等著周彪,劉鉆行譯,北大出版社2003年10月第1版 2. 韓國現代文學史[韓]金允植,金宇鐘著;金香,張春植譯,民族出版社2000年 3. 韓國文學史,尹允鎮,等,編著,上海交通大學出版社2008年1月第1版 4. 韓國現代文學作品選,尹允鎮等編著,上海交通大學出版社2007年 5. 한국 현대문학 대계 . 3 , 소설 1900-1935  권영민, 민음사 [1994] 논저: 6.현진건 중단편선 ‘운수좋은날’ , 현진건, 문학과 지성사, 2008.03.05 7.현진건의 단편 소설 연구, 이준호,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8.현진건의 단편소설 연구, 존 프랭클, 1993 9.현진건의 硏究, 이성희, 西江語文, 1994. 10.玄鎭建 小說의 리얼리즘, 김성수, 泮橋語文硏究 제3집, 1992. 11.玄鎭健의 作品에 나타난 社會像과 作家意識 김영민 (연세어문학, Vol.12 No.-, [1979])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P187-P205 12.玄鎭健文學에 나타난 社會性 考察 卞泰洙 (國語敎育論叢, Vol.1 No.-, [1981]) 朝鮮大學校 教育大學院 國語教育學會P207-P243 기타: 13.http://ko.wikipedia.org/wiki/현진건 14.http://www.reportshop.co.kr/detail/41/D40453.html 15.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oseol/18-mun-hak-text/un-su-jo-eun-nal.htm          
                                        摘 要         朝鲜时代,高丽末期,从中国传入的性理学与儒教思想在朝鲜时代以政治理念的形式贯彻到整个朝鲜,收到此影响女子的地位渐渐变得低下了。但是当时的妓女脱离了这一道德制约,由于身份的特殊性,成为了兼备教养与才能的特殊的存在。 在这一时期,朝鲜时期的时调基本上是男性专有,特别是朝鲜前期的时调多是作为贵族卖弄风雅或是传达儒教理念的手段。但是女性诗人,尤其是黄真伊为首的妓女诗人们创作的时调可谓别具一格。        妓女时调传承高丽歌谣,显示了她们的情操,歌颂人间真情.黄真伊,作为妓女诗人的代表性人物,出身虽是进士庶女,精于四书五经,尤其诗、书、音律方面才能出众,容貌更是出色。黄真伊色艺双全,超越时代的独立思想性格更是实属罕见。   关键词:妓女时调、黄真伊、独立思想 情操                                              초 록       조선 시대, 고려 말기, 중국에서 전해온 성리학과 유교사상이 조선 왕조 정치 이념의 형태로 온 조선까지 구현되었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녀들은 유교의 엄격한 도덕의 제약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신분의 특수성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교양도 겸비하였던 특이한 존재들이었다. 조선 시대의 시조는 대체로 남성 전유물이었고, 특히 조선 전기의 시조 들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유교적 이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 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여인들, 특히나 기녀들에 의해 창작된 시조들은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기녀들의 시조는 고려 가요의 맥을 이어가는 정조를 보여주며, 인간의 진솔한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황진이는 기녀 시인의 대표로서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지만, 사서오경에도 능숙하고 특히 시가, 서예와 음율 등 면에서도 재능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미모도 출중했다. 황진이는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 시대를 넘어서는 사상적 독립성, 정감표출로 하여 한국문학사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관건어: 기녀시인 시조 황진이 독립성 정조                                     차 례 초록…………………………………………………………1-3 제1장 서론……………………………………………… 1 제2장 본론 ……………………………………………  1-9 1기녀문학의 시대배경……………………………………1-2 2조선시대 기녀(妓女) 출신의 시조작가들………………2-3 3황진이의 생애와 작품세계………………………………2-3 4황진이 시조창작의 사상, 감정기초…………………… 3-5 5황진이의 시조세계가…………………………………… 5-7 6황진이 시조의 예술특색 및 성과………………………7-9 제3장 결론………………………………………………… 9 감사의 말……………………………………………… 13-14 참고문현…………………………………………………… 14                                         1. 서론 1.1.시조의 발전사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 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부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그 명칭의 사용은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 (短歌)· 시여(詩餘)·신번·장단가(長短歌)·신조(新調) 등의 명칭이 시조라는 명칭과 함께 두루 혼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문학의 영향을 입어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즉 창가· 신체시·자유시 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들과 이 시형을 구분하기 위하여 음악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부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 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조라는 명칭이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시조는 고려말 이래의 새로운 지도이념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 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조의 간결 한 정형성은 유학자의 미의식에 알맞은 시형으로 그들은 한시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을 이에 담아 단아한 기품으로 노래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주의의 구현은 분명 조선시대 시조 중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제재론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시조에 있어서 동일한 주제가 그 모티프를 어떻게 달리 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은 시조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여러 모로 뜻 깊은 암시를 준다. 가령 고려 말의 회고가(懷古歌), 조선조의 창업송영(創業頌詠), 중기의 강호가(江湖歌), 도학가(道學歌), 억군가 (憶君 歌), 충의가(忠義歌) 등은 서로 다른 모티프의 선택에 따라 그 제재와 계기는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역시 주제는 유교적 윤리이다,   그리고 주제인 유교적 이념의 시적 변이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서도 시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호가 역시 일견 자연시로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시가 아니라 충의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주관적으로 관념화한 것이다. 맹사성(孟思誠)의 가 바로 그것이다. “적군은 (赤君恩) 이샷다”로 작품을 끝맺음으로써 임금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을 구가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 를 잊지 않고 그것을 노래 속에 반영하였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후반에 이르 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 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 과 이이 (李珥)의 등이 대표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의 자연에 대한 유학자들의 태도 가 도달할 수 있는 고아한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訓民歌)가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교 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하되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여진 토속적인 언어기교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황진이 (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 (妓女)들의 작품들로서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의 형상화가 시조시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자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표현을 시조 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고, 시조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기녀시조 (妓女時調) 기녀 시조는 사대부 시조와 더불어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부장제의 독특 한 사회구조 속에서 생겨난 문학 장르의 하나이다. 기녀 작가군은 딸, 아내, 어머니라는 여성들의 전통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난 가족의 관습적인 울타리에서 추방된 특수 여성 집단이다. 조선조 지배 계층 남성들에게는 성(性)에 대한 표현들이 허용되는 사회적인 성적 장치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기방의 기녀라는 특성 집단이다. 따라서 기녀들이 처한 제한된 문화적 환경요인, 다시 말해 규방의 아녀자들이 남성 중심적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을 이루었다면 이러 한 틀에서 벗어난 기녀들은 자유로운 여성으로서의 의식이 그들만의 언술 로 담겨져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조 사회에서 부조화의 이중성은 기녀들의 억압된 의식을 가중 시키는 요인으로서 여성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리라는 추산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때에 기녀들의 작품 속에서 여성성이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또 이러한 의식 속에 여성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그 동안 기녀 시조에 대해 단순히 사대부와 향유하면서 성적 표현과 이별의 정한을 읊었다는 기존의 시작에서 벗어나 여성 의식이나 여성성 등을 탐구한다는 것으로 기녀 문학을 다시 읽고, 또 새롭게 읽고자 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 방향 조선조 사대부 양반들에 의해 널리 쓰여졌던 독특한 문학장르인 시조가 그들의 풍류와 교양을 나타내는 표현체였다는 점에서, 기녀들은 사대부와 의 관계라는 의미만을 통해 공공의 성적 장치의 대응물이라는 입장에서 시조라는 글쓰기를 익힐 수가 있었다. 기녀들은 각종 연회에 나가 가무를 제공하고 사대부, 문인의 주석(酒石) 과 시회 (詩會)에 참석하여 높은 풍류와 아취(雅趣)에 접하는가 하면 육체 를 제공하며 남성들 틈에서 인생의 아픔을 체험하는 존재들로서 기녀들은 남다른 애환 속에서 순탄할 수 없는 일생을 살아가면서도 서정적 정서가 넘치는 시조 작품을 창작해 내었다. 사대부 남성들에게 성과 향락을 제공했던 기녀들은 사회적 신분 계층상 천민이기에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아녀자로 편입될 수 없는 소외된 자이 면서도 한편 조선조 유교적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윤리관에서 벗어나 그들의 재능이나 지식 등에서는 엘리트적인 요소를 지닌 자유인일 수도 있는 모순된 이중성을 보인다. 이와 같은 모순된 상황 속에서 기녀들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심정을 토로해 놓을 수 있었 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그 동안 기녀 시조에 대해 단순히 사대부와 향유하면서 성적 표현과 이별의 정한을 읊었다는 기존의 시작에서 벗어나 텍스트 내면에 가려졌던 여성 의식이나 여성성 등을 탐구한다는 것으로 기녀 문학을 다시 읽고, 또 새롭게 읽고자 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기녀문학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특히는 황진이의 생애와 창작활동,및 그 의 주요작품을 연구하여 한국문학에 끼친 기녀문학 ㅡ황진 이의 시조창작의 예술적 가치와 문학사적 의의을 재조명하려 한다.                                             2. 본론 2.1, 기녀문학의 시대배경 조선시대 기생이라 하면 노비와 비슷한 천한 계급의 하나로 지체 높은 남성들의 곁을 지키는 노리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기녀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신분이 높은 양반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멋과 재주를 키우며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천인이라도 노비와는 현저하게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기녀를 둔 목적이 경기(京妓)나 지방기(地方妓)를 막론하고 공사(公私)의 연향 (宴享)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들은 춤·노래·악기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 했고, 장악원(掌樂院)에서 일정한 교육과정을 두어 이들을 가르쳤다. 기녀의 활동형태는 대개 3가지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시조는 주로 연회에서 불렸던 성악(聲樂)의 가사로 창작되 었던 것이었으므로, 그 연희의 주역이었던 기녀가 시조의 창작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최동원(崔東元)의 연구에 따르면 기녀 작가의 이름이 전하는 경우는 황진이 (黃眞伊)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기명 (妓名)을 쓰고 있다. 이들 모두를 통틀어 〈역대시조전서 歷代時調全書〉에 실린 기녀작가의 수는 28명, 작품의 수는 56수인데, 신빙성이 희박한 것을 제외하면 25명에 44수가 된다. 기녀의 작품은 일반작가들에 비해 전승이 불완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이 연회석상에서 불려 작품의 내용보다는 음악의 창사 (唱詞) 로서의 구실이 더 중요했고 유흥이 끝나면 부른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경향이 짙었으며 출신이 천한 이들이었으 므로  당시의 시조집 편찬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기녀 자신들 역시 자기 작품에 대한 전승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고시조 중에서 성(性)을 주제로 한 작품이나 여성화자 (女性 話者)의 작품은 상당수가 기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여겨 진다. 황진이로 대표되는 기녀 들의 시조는 정서를 완곡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괄목할만하다.   2.2 . 조선시대 기녀(妓女) 출신의 시조작가들. 기녀시조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성종(成宗) 때의 소춘풍(笑春風)이 지은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으로 시작되는 작품이나, 이 작품은 상투적 문구를 늘어놓았을 뿐 형식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기녀시조로 가장 우수한 작품은 조선 중기에 와서 황진이·매창 (梅窓)·홍랑(紅娘) 등에 의해 창작되었다. 기녀는 성리학적 이념아래 억압당했던 일반여성들과는 달리 미천한 신분과 직업상의 이유로 인해 사대부들과 자유로이 교유할 수 있었던 신분적으로 특수성고 직업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남성에 대한 상사의 일념이 대부분이고 자유롭게 연정(戀情)을 표현했으며, 즉흥적으로 남성의 수작에 화답하는 노래 또한 많다.   진실한 사랑을 염원하고 인간의 신뢰와 지속적인 의지 등을 소중한 가치로 인식하였으며, 자신의 내적 갈등에 기인하여 동물이나 자연을 문학적 소재로 빌어 존재적인 문제를 표현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3 황진이의 생애와 작품세계 황진이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알수가 없지만 중종 6년에서 36년 정도까지 살았다고 추정된다. 당시 송도의 명기였던 그녀가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그의 미모가 출중해서라기보 문학사에 기재될만큼의 가치로운 명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조작품에는 여성적 정조와 조선말의 아름 다움을 아주 잘 표현했던 것이다.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 (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 (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 (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 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황진이는 여러 사람들을 유혹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유독 서경덕만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황진이 의 인격적 인간형상의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 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주요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 (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 (朴淵瀑布詩)》 《봉별소양 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 월시(初 月詩)》 등이 있다. 황진이의 작품으로 확실한 것은 6수인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로 시작되는 작품이 절창으로 손꼽힌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애정과 이별을 주제로 하되 참신한 시상(詩想)과 표현으로 당시 매너리즘에 빠진 사대부시조를 자극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송이(宋伊)·매화(梅花)·명옥(明玉)·천금(千錦) 등 의 기녀시조시인이 등장했으나, 작가가 남성으로 표기되는 등 특정한 작가 의 작품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개의 내용은 역시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애정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 1587)  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2.4 황진이 시조창작의 사상, 감정기초 조선시대 기생이라 하면 노비와 비슷한 천한 계급의 하나로 지체 높은 남성들의 곁을 지키는 노리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기녀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신분이 높은 양반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멋과 재주를 키우며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천인이라도 노비와는 현저하게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2.5. 황진이의 시조세계   황진이 시조작품에서 우선 유명한 것으로 꼽는 것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 》이 다.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감미로운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보다싶이 시조에서 시인은 겨울의 기나긴 밤에 임을 기다리는 절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한허리를 베어낸다”고 표현하고, 그리던 님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될 이불 속을 “봄바람”이라고 재치있게 비유함으로써 은근 히 에둘러 표현하는 국어의 미묘한 맛을 운치있게 살리면서 간절한 그리 움과 기대를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황진이가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 애정시이다. 황진이의 신분과 시조의 제재들로 보아 그녀의 시조는 기녀시조이면서 애정시조로 파악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 결과 들을 참고하여 보면 먼저 기녀시조로서의 측면에 중심을 둔 경우가 있다. 조선전기 기녀들의 시조는 사대부들의 시조와 대비하여 시간의식을 포함 한 내면의식의 추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녀시조로서만 접근 한다면 애정시로서의 본질을 부각시켜 이해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청산리 벽계수야… 》를 꼽을  수 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의 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지만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 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 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철학적 이미지를 다분히 담고있는《산은 옛 산이로되... 》 이다. 황진이 이 시조에서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 하고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황진이는 한시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면 독특한 자기의 정감을 토로하고 있다. 아래에 그이 대표적인 한시 《잣나무배》를 보기로 하자.                           잣나무 배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을 법한 시이다. 또 다른 한시인 《반달을 노래함》을 흠사해 보자.                     반달을 노래함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시조에서는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어져 내 일이야…》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것으로 황진이가 시조의 형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조이다.                       相思夢 (상사몽) 꿈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侬訪歡時歡訪侬 (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이 시는 김안서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라는 제목의 가곡 으로 만들어졌다. 2.4. 황진이 시조의 예술특색 및 성과 다른 기녀들의 시조들처럼 황진이의 시조는 풍류적이고 정서적이다. 그러나 황진이의 시조는 언어가 우미할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시조들은 철학적 사색까지 주고있어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 있다. 그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2.5황진이는 시조창작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한시창작에도 조예가 깊어 적지 않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이 시조가 주로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였다면 그의 한시는 그 폭이 넓어서 사랑 뿐만 아니라 보다 다채 로운 내용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섬세 한가 하면 정열적이였고 상정 (伤情)이 있는가 하면 영사회고(咏史怀古)도 있었다. 朴淵瀑布 (박연폭포)  一派長川噴壑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仞水潨潨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舂玉碎徹晴空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이 한시에서는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이 시에 굽이치는 기백을 보면 녀자의 정서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다. 황진이는 자기를 스스로 천한 기생으로 낮추지 않았다. 이 시에 묘사된 박연폭포의  힘찬 울림, 장쾌한 기상 그리고 그것을 누리의 으뜸이 라고 한것은 한편 자신으 높은 뜻과 자긍심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만큼 황진이의 한시는 기녀문학의 한계를 넘어선 문학이라 칭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3. 결론    황진이는 서민 시조의 선구자이며 탁월한 녀류 시인이다. 상기한 시조 들에서 보다 싶이 은일적이며, 도학적인 시가들이 불려지고 있을 때, 황진 이는 은일적, 도하적 경향들과는 달리 생활에 발을 붙이고 남년간의 애정 과 인정 세태를 사실적으로 노래하는 우수한 예술 작품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조국 산천의 아름다움도 노래하는 작품을 내놓아 16세기 국문 시가를 빛나게 하였는바, 녀류 시인 황진이는 시정인들의 시가가 새로운 서정적인 세계를 열어 주어 인민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그 한가지 사실로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의 무덤가에서 읊은 시로서도 더 증명되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임제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 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이렇듯 녀류시인이자 기녀 시조대가인 황진이는 한국문학사 에서 오늘도 굳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최균선교수님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참고 문헌   1. 조광국,『기녀담 기녀등장소설 연구』, 서울: 도서출판 月印, 2000. 2. 조옥라,「가부장제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여성학』제2집, 1986. 3. 황충기,『여항인과 기녀의 시조』, 국학자료원, 1999. 4. 황패강,『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73. 5. 기녀 시조 연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03, 정윤환. 6. 기녀 시조의 특성 연구,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03, 김지현 7. 조선시대 여류시조 연구, 조선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2000, 장성호 8. 한국 여류 고시조 연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1999, 조상진 9. 옛시조 감상, 정신세계사, 1999, 김종오 10. 전경린,『황진이1,2』, 서울:이룸, 2004. 11. 김동하,「기녀시조의 특성 연구」,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12. 김용숙,「한국 여류문학의 특질」, 『아세아여성연구』, 제14집, 1981. 13. 신은경,「기녀시조 연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14. 양진국,「기녀시조 연구」, 학위논문(석사): 국어국문학, 1999. 15. 임명숙,『기녀, 그는 "창녀" 인가 "성녀" 인가』, 서울 : 업그레이드  미디어, 2002.  
217    상고가요와 향가연구 (장지운) 댓글:  조회:9890  추천:0  2013-01-23
                               摘 要       韩国三国时期之前的歌谣内容大多是通过口头传唱并记录下来的,并且只是用简单的汉字记录了它的意思,现今我们知道也只有三篇而已,具体的题材模式以及这个时期形成的独特的样式我们却很难研究,所以将这一时期的歌谣称为古代歌谣,代表作有《龟旨歌》《箜篌引》等,通过一些作品来了解并推论出三国以前文化的题材及文化背景等;乡歌作为新罗时期到高丽时期形成的文化在统一南北的新罗时期极为盛行。 这一时期的乡歌借助了汉字的音和意用乡扎标记来,录又称借字文学,形成了特有的文系,是创作文学的根源,代表作有《薯童謠》等。古代歌谣和乡歌形成了固有的文化特色,将当时民族文化的个性形象化,对韩国文化具有重大意义,是贵重的文化遗产。      关键词:口头传唱  文化和背景  乡歌 个性形象化  文化遗产                                                초 록          한국의 삼국시기 이전에 가요내용은 대부분 구두로 불리어오다가 기록된 것들이며 아울러 간단한 한자로 그것의 뜻을 기록하였는데 지금까 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세 편밖에 없으며 구체 제재모식 및 이 시기에 형성된 독특한 양식에 대하여 연구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가요를 고대가요라고 부른다.     대표작으로는 《구지가》《공후인》 [箜篌引] 등이 있는데 일부 작품 으로 3국시기 이전의 문화제재 및 문화배경 등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향가는 신라시기로부터 고려시기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어 통일신라÷ 시기에 가장 성행하였는데 이 시기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빈 향찰로써 기록하였으며 또한 빌려온 글자문학이라고도 하는바 특유한 문자체계를 형성하였다. 대표작으로는《서동요(薯童謠)》등이 있다.     고대 가요와 향가는 고유한 문화특색을 형성하였는바 당시 민족문화의 개성의 형상화는 한국문화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되고 있다.   키워드: 구두   문화와 배경   향가 개성의 형상화   문화유산   차 례 서론…………………………………………………………………………………… 1. 고대가요의 개념……………………………………………………………… 2.고대가요의 율격……………………………………………………………… 3.고대가요의 특징……………………………………………………… 본론……………………………………………………………………… 현존작품분석……………………………………………………………………… 향가의 소개……………………………………………………………………… 향가의개념…………………………………………………………………… 향가의 발생………………………………………………… 명칭과 갈래…………………………………………………………………… 결론 상고가요와향가문학의 의의 감사의 말 참고문헌                                           1. 서 론        농경 생활을 위주로 했던 한국인민의 조상들은 농사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기마다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는 문헌 기록이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 (舞天), 백제의 오월제(五月祭) 등과 같은 제천 의식이 그것인데, 이 과정 에서 행해진 원시 종합 예술로서의 제의(祭儀)놀이 속에서 고대 가요가 발생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가요는 집단적 민속요와 개인적 서정가요로 분화되어 발달하여 왔다. 1,상고가요의 개념     삼국시대 이전의 노래로서 오늘날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세 편 뿐인데, 그것도 한자로 짤막하게 뜻만을 기록하고 있어 그 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시기의 노래가 특별한 양식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대 가요'라 부른다. 초기 가요는 일정한 률동을 가진 감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인류의 의식과 언어가 발전하고 가요창작의 경험이 쌓아짐에 따라 점차 자유로와지면서 후렴구에다 집단적인 사상감정과 후의 개인감정을 표현하는 가사가 첨가 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상고가요란 함은 대게 한민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예・맥족이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 생활의 터전을 잡은 이후부터 삼국시대 초 향찰 표기의 향가, 즉 기록문학이 나타나기 이전의 가요를 지칭하는 것이다. ‘상고’라 함은 문학사에서 고대 원시 시대부터 삼국시대 이전, 즉 본격적인 국가 체제가 형성되고 기록문학이 등장할 무렵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고 가요(歌謠)는 민중 가운데 널리 불려진 속요와 음절을 붙여서 불려지는 노래를 총칭하는 의미의 본래 ‘악가와 속요’룰 칭하는 말이다. ‘가(哥)’는 곡과 장이 있고 절을 떼여서 음영하게 된 것이고, ‘요(謠)’는 곡이나 장이 없이 악기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노래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요’가 더 오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상고가요의 율격     상고가요의 시행은 여전히 4구체 형식을 취하고 있고 시행도 한 시행 이 두 개 시구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형식을 띤 한 국 후세에 국문기가에 자못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반면 내용은 인간적이나 시어는 넑두리나 푸념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말은 그 언어조직이 2음절 또는 3음절어가 거의 주를 이루는 교착 어이고 체언에 용언이 잇달아야 하나의 문장이 이루어지는 통사구조를 갖기 때문에 후세에 한국어로 번역, 해석할 때 자연히 3․4조 또는 4․4조로 가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랫동안 한국인의 몸에 젖어 그들의 정서, 감정 표현에 적절한 음조, 음수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말은 굴절어인 까닭에 위에 한시처럼 엄격한 잣수율을 갖춘 정형시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시 시가 처음 4구체 우수체 시가로부터 시작되였다는 것과 조선시가 고유의 특질의 하나로 되고있는 어음상 내외구 대응의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3,상고가요의 특징     상고 시대의 노래 세 편이 지니는 공통점은 그것이 모두 노래로 전해 지다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들이 널리 전해진 것은 의식적인 노래로서의 가치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 들을 주술 또는 제의 중심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원시적인 신앙생활과의 결부속에 집단적성격을 띠고 상위일치의 미분화 상태에 있는것이 특징이라면 상고시가 개인에 의한 문학창작의 성격을 나탄내면서 계급문학으로서 분화상태에 있는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상고 가요는 세편뿐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이 보여 주는 문학적 의의는 그 공통성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노래들이 널리 전해진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럴 만한 이유란 의식적인 노래로서의 가치 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시가 문학의 장르에 대해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2.  본 론   1. 현존 작품분석     상고시기의 주요한 문학작품으로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원시가요 와 고대서정가요 그리고 등이 제일 유명 하다. '구지가'는 노동이나 놀이에 노래가 수반되었다는 전통성과 보편성을 보여주는 반면에, '공무도하가'나 '황조가'는 인간 본연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어 이미 시가의 기능과 성격이 다양하게 분화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전통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미 상고 시대는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다양성을 지닌 시가문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는 「삼국유사」의 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북에게 머리를 내놓으라고 위협한 짤막한 노래다. 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나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는 노랫말의 짜임이나 노래를 불러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낸 경위가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에 나오는 와 매우 흡사하다    이를 근거로 의 성격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위협 적인 노래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는 주술적인 노래로 볼 수도 있고, 거북의 머리 모양이 남성의 서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이 노래를 매개로 사람이 태어났다는 점을 연관시켜 해석하면 출산 기원의 노래로 볼 수도 있다.     는 조선원시사회 의 실제적내용을 전하는 상고시가의 유일한 실례라는것 그리고 조선고전문학에서 가장 오랜 원시가요라고 추정되는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이 '구지가'의 성격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위협적인 노래를 불러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려는 주술적인 노래로 보기도 하고, 거북의 머리가 남성의 성기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이 노래를 매개로 하여 사람이 태어났다는 점을 연관시켜 출산 기원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본디 노동요였던 것이 나중에 설화 속에 끼워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 동요와 흡사한 놀이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龜何龜何 (구하구하)               首其現也 (수기현야)               若不現也 (약불현야)               燔灼而喫也 (번작이끽야)       이 가요의 기록년대를 보면 1 세기 좌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가요가 불리우기 시작한 것은 거슬러올라가 퍽 오랜 고인시대가 아니겠는가 생각 된다. 다른말로 퍽 이전 거부기를 토템으로 하여 불리워지던 원시가요 이던 것이 가야국의 건국과 관련해서 노래되었고 후에 기재된 것이라 인정된다.      에 대한 연구도 오늘날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연구 방법 및 연구자들의 서로 다른 견지로 인해 그 해명이 많은 차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명한 학자 박지홍선생님은 에서 를 영남지방의 와의 비교 속에 주가로 추정하면서 노동 가나 무답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병욱선생님은 에서 를 영신가로서가 아나라 명령과 위혁적인 표현에 근거하여 원시시가형태로 간주하면서 구수를 남성의 생식기로 보고 원시 시대의 생명근원설에 기초한 남녀간의 구애가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김열규선생님의 에서는 원시사회 에서 희생 또는 제의무용과 함꼐 가창되는 주가라 하였으며 김병욱선생님은 에서 신가라 하였다.     위의 견해에 의하면 이 가요는 원시인들이 주술로 이용하고 있던 가요라 지적한다. 이 가요가 원래 주사였는가 주문이였는가 주언이였는가 하는 것은 가요 연구 자체의 핵심과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다. 상기한 것들이 후에 음악적 주원가로 변모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에는 거부기를 숭상하는 토테미즘의 원시자연종교사상이 반영 된다, 그리고 그 위협적인 표현을 보아 문면의 형성은 원시적인 토템사상 의식이 아직 성숙되어 가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식면에서 이 가요는 소박하고 단순하며 또한 일정한 운률조성과 시행조직에 안받침되면서 반복법, 수사학적 부름말 등의 수법도 비교적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는 일부 학자들은 와 신라 성덕왕때의 와의 비교를 통해 조선고대시가의 근원적형식을 립증해보려고까지 하였다. 이 는 아주 훌륭한 유일한 상고가요작품이다. 조선시가 창작사의 유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하여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또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는 이 시기의 훌룡한 작품 이다.  일명 이라고도 한다.  公无渡河              님이여 가람 건너지 마소  公竟(终)渡河        님아 그대 가람 건느시네  坠河而死              가람에 빠져 싀오시니  将(当)奈公何           어저 님아 내 어이 하리오    와 작품의 작자, 창작동기 그리고 배경설화룰 전하고있는 가장 이른 문헌으롯서는 중국의 진나라사람 최표가 쓴 이다. 그 배경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는 조선진졸 곽리자고의 안해 려옥이가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배를 저어가는데 어떤 백수광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든채 강물을 거슬러 거니는 것이였다. 그 안해가 뒤쫓아가서 소리치며 말렸으나 사나이는 듣지 않고 계속 강을 건느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고말았다. 이에 안해가 공후를 끌어다 타면서 라는 노래를 불렸는데 마디 마디가 구슬프고 처량하였다.     노래를 마치자 그도 물에 몸을 던져 죽였다. 자고가 집에 돌아가 안해 려옥에게 그 광경을 말하였다. 려옥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후에 맞춰 그 광경을 노래를 지어서 타니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자가 없었다. 려옥은 노래를 이웃인 려용에게도 들려줬는데 이름을 이라고 하였다.     위에 배경설화를 볼 때 인간 본연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부부의 순정과 절조 룰 노래한 가요라 볼수 있다, 안해는 남편이 강물에 몸에 던져 죽자  자기 도 남편을 따라 물에 빠져 죽는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주 서정적인 소유 하고 있는 사상감정세계는 그만큼 개인적이였고 사회적이였으며 또한 윤리 도덕적이였다. 다른 가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간의 사상감정의 발현이다.     는 일련의 새로운 특징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락구를 갖추고 있다. 즉 마지막 시구가 감탄사를 가진 락구로 되여있는데 깊은 여운을 남기고있다. 이러한 시가형식에서의 낙구형태는 후세 조선 국문시가 형식발전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되고있었는데 그만큼 이 가요는 조선국문시가의 낙구형태의 연원적 연구가치를 갖고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시가는 음절수조직이 더 길어 운률미가 보다 굴곡적이고 정서깊은 등 새로운 발전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시행조직의 새로운 발전요소를 담고있는 면에서 주목된다. 즉 란 시구에서 우리는 이 시구를 두 행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 이것은 조선고대시가의 8 구체 형태에로의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향가     향가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이어진 시가 문학으로써 고대 후기에 해당하는 남북국-통일 신라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 향가는 구비 전승되던 노래에서 문자에 의해 기록되는 기록문학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삼국 통일 이후 향찰이 창안됨으로써 가능 하였다. 향가를 차자문학(借字文學)이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문학사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민족 최초로 자국 문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향가 문학은 국어 문학을 개시 하였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향가는 단연형 정형시의 원형과 창작가요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10구체 향가의 삼단 구성이나 낙구법은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까지 연결되어 한국 시가의 기층적인 구조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단연형 정형시의 원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향가는 종합 예술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했던 상고대의 시가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서정성을 노래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 1,향가의 개념    순수한 자기글이 없었던 때에 한국말로 된 노래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적는 향찰표기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시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향가는 에 실린 14수와 에 실린 11수 등 모두 25수의 시가를 지칭하는 장르 명칭이다. 이 시기에 제작되어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로 표기된 시가.〈도솔가 兜率歌〉나 〈사뇌가 詞腦歌〉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를 총칭하는 말로 신라가요·신라시가·사뇌가라고도 한다.     중국의 시(詩)나 불교의 범패(梵唄)에 대해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 노래'라는 개념으로 향가라고 했다.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했는데,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향가도 많았다. 일반인들이 유희와 오락으로 삼는 도구 였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대중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고유한 문화적 성격을 한반도 전역에 확대시키면서, 민족 문화 로서의 개성을 뚜렷이 형상화(形象化)시킨 귀중한 문학적 유산이다. 2.2. 향가의 발생     여기에는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중요한 사안별로 정리해 본다. 우선 초창기 연구자들의 견해는 조윤제의 학설로 집약해 볼 수 있다.     조윤제는 기사방법이 이두식 문자에 의해 표기되었으면 이것을 향가라고 전제하고, 향가문학의 성립연대는 부득이 그를 표기하는 이두문자의 발명 연대에서 구하였다. 여기서 조윤제가 보는 이두의 발명 연대는 신라의 통삼기, 그렇다면 향가의 성립도 역시 삼국통일의 전후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향가문학의 성립은 국문학의 형성을 의미한다고 확대해석을 시도하였다. 국문학은 항상 민족의 생활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의 성립연대는 자연 민족의 형성기인 통삼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통삼기가 이두의 발명과 더불어 향가의 발생기로 보는 또다른 근거인 셈이다. 조윤제는 신라의 한문학도 통삼기에 와서야 제대로 발달 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하고 있다.     조윤제의 이같은 생각은 대체로 최근까지 받아들여져 왔다. 조동일은 그의 문학사에서, 향가가 노래를 지은 연대가 확실하고 노래를 짓게된 동기도 분명하고도 납득할 수 있게 나타나 있어서 그 출현은 문학사적 전환의 중요한 국면을 이룬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발생경위를 밝히고 있다.    굿노래를 부르며 주술을 행하던 전통 또한 새롭게 계승될 필요가 있었으며, 화랑제도가 창안되고 산천을 찾아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수련을 일삼는 기풍이 고조되자 사뇌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일반 백성의 민요도 나라에서 채택해 다듬을 수 있는 소재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것대로의 오랜 전통을 이으면서 생활 내용이 복잡해지는 데 따른 발전을 보이는 한편 이따금씩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향찰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두 방향에서 사뇌가인 향가와 민요인 향가가 나타 났다. 3, 명칭과 갈래 ① 문헌기록 ‘향가’라는 명칭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王素與角干魏弘通,至是常人內用事,仍命與大矩和尙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明素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梵聲…明又嘗爲亡妹營齊, 作鄕歌祭之…羅人尙鄕歌者尙矣.”   “釋永才 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夫如是則 八九行之唐序, 義廣文體,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         향가란 명칭은 고려 문종 때(1075) 혁련정의 에 처음으로 보이고, ,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은 고려 때의 것이지만 그 내용을 보아서는 신라 당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② 명칭   일반적으로 ‘鄕’ 즉 시골이란 말이 암시하듯 중국에 대한 한국노래의 비칭의 뜻으 로 이해되어 왔다가 점차 향가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라 노래’, ‘우리 노래’ 등으로 풀이하고자 하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근대에 일본 학자인 오꾸라(小倉進平)의 식민사관에서 사용되기 시작 하여 자기비하적이고 부적으로 인식되어 온 단어이다. -신라 것을 ‘鄕言 ․鄕樂․鄕謠․鄕人’ 이라고 하고 唐을 ‘國’이라 한 것을 보아 사대부적 사고가 들어있다고 본 것이다..    홍기문도 ‘鄕’을 ‘國’의 의미로 해석하다가 황패강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되는데 즉 ‘향가’란 ‘國歌(나라노래)’로 한시나 한문이 아닌 한국말로 된 노래를 지칭하되, 향가라는 말로써 자기 노래를 지칭했던 신라와 고려 시대에 국한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③갈래   현전하는 작품과 용어의 개념에서 볼 때, 향가의 갈래로 크게 도솔가와 사뇌가, 그리고 불찬가의 세 갈래를 설정할 수 있다.   4, 대표적 향가작품    통일신라시대말 진성여왕대에 향가집 〈삼대목 三代目〉이 편찬되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가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삼국유사 三國 遺事〉에 14수, 〈균여전 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문헌상의 창작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최초의 작품은 진평왕대(579~631)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이며, 마지막 작품은 고려 광종(917~973) 때의〈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이다. 350여 년 간 당대인의 애호 속에 창작되었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했다.〈보현십 원가〉 이후로 고려조에는 향가가 더이상 창작되지 않았으며 예종이 1120년에 지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다. 이 (薯童謠)는 현전하는 최초의 향가이며 향가중 유일한 동요이다.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니믄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스지 얼어 두고    남몰래 사랑해 두고 薯童房乙                                    맛듕바알              맛둥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매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는 서동이 묘계로 선화공주님을 얻은 설화이다.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시킨 데 수사적 특징이 있다. 국경을 뛰어 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하층인민들를 지혜에 찬미이며 왕공귀족에 멸시도 반영이다.     서동이의 꿈이 장애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 은 의식하기 어렵다. 다만,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 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시대 남녀의 연애는 오늘날에 비해 오히려 자유롭고 공개적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경우 연애는 자유로왔지만 결혼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이 노래는 "공주의 통정"을 고발조로 노래하여, 듣는 사람들의 주위와 관심을 강하게 끌게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3. 결 론       고대가요와 향가는 개인적인 사상감정 정서의 발견으로서의 개인창작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시가사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획기적의의가 있는 것이다.상고가요으로서 는 조선의 유일한 원시가요작품이라는 면에서, 조선시가창작사의 유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하여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그리고 는 상랑을 위해 목숨을 건 고대인들의 강한 정열과 순진하고 소박한 노래로서 고대 동요의 정형적 형식을 띠고 있다.     원시가요와 향가는 원시적인 신앙생활과의 결부속에 집단적성격을 띠고 삼위일치의 미분화상태에 있은 것이 특징이라면 고대시가는 개인에 의한 문학창작의 성격을 나타내면서 계급문학으로서 분화상태에 있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원시가요라 할 때는 로동구호적인 성격을 벗어나 집단 적인 사상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가사가 첨가되고 운률에서도 일정한 마디를 갖출수 있는 노래를 두고 말한다. 민족 문화으로서의 개성을 뚜렷 이 형상화(形象化)시킨 귀중한 문학적 유산으로서 후세에도 아주 큰 영향 을 줄 것이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교수님의 사심없는 지도하에 논문을 순리롭게 완성했 습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조선고전문학사 (수정판) 문일환 민족출판사 2006.9 2. 김승찬, 신라향가론, 부산대학교 출판부, 1999 3. 화경고전문학연구회, 향가문학연구, 일지사, 1993 4. 나경수, 향가문학론과 작품연구, 집문당, 1995 5. 김승찬, 향가문학론, 새문사, 1986 6. 임기중외, , 1998, 아세아문화사. 7. 임기중, , (연도미표시), 현암사. 8. 백영정병욱선생10주기추모논문편찬위원회, 1992, 집문당. 9. 조동일, , 1994, 지식산업사. 10. 한국문학개론편찬위원회(편), , 1991, 혜진서관. 11. 김열규 외(1992) : 한국고전시가작품론Ⅰ, 집문당 12. 박광정(1999) : 재미있게 풀어 쓴 고전시가 문학, 좋은날 13. 성기옥(1987) : 구지가의 작품적 성격과 그 해석(1), 울산어문논집 제 3집 14. 정병욱(1988) :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5. 장덕순(2001) : 이야기 국문학사, 새문사 16. 정병욱(1993) :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7. 최두식·하상규(2002) : 고시가연구, 동아대학교출판부      
216    중,한천주교의 비교연구 외 1편 (소이연) 댓글:  조회:9991  추천:1  2013-01-23
   설명: 모 평심위원이 엄중한 정치문제가 있다고 상급에 고발한 논문임)                                                   摘要     众所周知,天主教是世界三大宗教之一基督教的一个分教。天主教、东正教和新教都隶属于基督教。但在中国基督教则是专指新教(俗称耶稣教)。虽然天主教传入亚洲已经有相当久的历史,但即使作为一名教友,也有很对人对天主教的历史并不熟悉。天主教传入中国已经有上千年的历史了,而传入韩国也有两百多年的历史了,在中韩两国,天主教都获得了不错的发展。但问及天主教的发展历史时,很多人一脸茫然。为什么会出现这样的情形,为什么大家对那些历史都不知晓?     两千多年前,耶稣做在耶路撒冷创立了基督教,而天主教与基督教是同源的,所以,至今也有两千多年的历史了。但人们对天主教的传入和发展却是一问三不知,更有甚者,问及天主教的教义时,也是模棱两可。天主教从唐代传入中国开始,历经误解、不支持,甚至迫害,直到今天,得到国人乃至政府的认可和支持,经历了一个漫长的过程;而在韩国,天主教也获得了很好的发展,现在越来越多的人开始相信耶稣,走进圣殿。天主教进入的同时也给当地国民的生活、思想带来了一定的影响。虽然一开始当地文化遭到了冲击,但随着天主教的发展,与神职人员的努力,使东西方的文化能够和谐共处,最终导致今天百花齐放的局面。     面对这种越来越好的局面,我认为每一个奉教者都应该了解自己所信仰的宗教,否则不能成为一名合格的教友。所以,作为一名奉教者的我,决定对这方面展开探讨。 关键词  天主教 中韩 历史                                         초록      이 연구과제를 선택한 이유는 본인이 천주교 신자이고 한국어학과 학생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다시피 천주교는 기독교중의 한 분파이다. 천주교와 동정교 그리고 신교가 기독교에 속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기독교는 신교의 특직이다. 천주교가 아시아에 오래전에 유입되었지만 많은 신자들이 천주교의 역사와 연변과정에 대하여 거의 모른다.     천주교가 중국에 유입된지는 천년이 넘고 한국은 이백 여년이 된다. 이처럼 천주교는 중한 양국에서 잘 발전하여 왔지만 사람들에게 천주교의 역사에 대하여 물으면 거의 몰랐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2천년 전에 예수가 기독교를 창립하였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는바 천주교도 이 천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의 전입과 발전과정을 거의 몰랐거니와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조차 모르고 있다.     천주교는 당조때에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기시와 박해를 많이 받았는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지지를 얻고 있지만 너무 긴 과정을 겪었다. 천주교는 다른 민족에 전파되면서 당지의 문화와 충돌하면서도 당지 국민들의 사상과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천주교가 발전함에 따라 동서방의 문화가 점차 조화되면서 평화공처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오해가 있었고 박해당했지만 지금은 온당하게 발전하고 있다. 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천주교에 가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천주교는 자기의 TV방송국과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신자들이라면 사람마다 자기의 종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합격된 신도가 될 수가 없다. 하여 본논문에서는 한 보통 신자로 이 방면에 대해 나름대로 검토하기로 한다.   키워드: 천주교  중한 역사  사상영향     차 례   논문 초록……………………………………………………………1-2   제 1 장 서론 ………………………………………………………… 3 제2장 본론 ……………………………………………………… 2.1역사의 비교 ………………………………………………… 2.1.1천주교의 역사 …………………………………………… 2.1.2중국 천주교의 역사 …………………………………… 2.1.3한국 천주교의 역사 …………………………………… 2.1.4중한 양국의 비교 ……………………………………… 2.2중,한양국 국민들의 생할과 사상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 3 제3장 결론 ……………………………………………………   감사의 말 ……………………………………………………   참고문헌 ………………………………………………………                                         서론   Ⅰ. 머 리 말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17~18세기의 전환기적 사유 구조는 물론 19~20세기의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사 연구는 폐단의 논리를 고수해 오던 성리학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질적인 서양의 종교관념이 수용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탈주자학(脫朱子學) 내지 반서학 (反西學)의 입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아울러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사와 천주교회, 신자 집단의 성격,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겪게 된 민족사와 교회사의 관계도 연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개화기나 광복 운동기에서의 교회와 국가, 현대사 안에서 차지하는 천주교회의 위상 문제도 연구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교회 내적인 문제, 즉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교회의 정착, 천주교 신앙의 확대과정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특히 이러한 연구는 한국사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내용면에서 이러한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도 있었다. 반면에 교회사를 민족사의 전개과정과 별개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때로는 구교론(護敎論)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민족사와 호교론이라는 두 관점을 별개로 생각한다면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價値中立的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교회사 연구자들의 고뇌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實證史學의 입장에서 교회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으며, 그 결과 민족사와 함께 교회사를 이해하려는 연구가 하나씩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전체성, 완전성, 보편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화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가톨릭' 교회, 또는 '천주교'라고 한다." 이는 천주교용어위원회에서 정리한 개념이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중국을 통하여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쓰는  '천주교' 라는 말을 그대로 함께 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라는 말은 천주교와 그 신자는 물론 교리나 가르침, 사상, 전통, 예법, 단체운동 등을 꾸미는 말로 널리 쓰인다. 그리고 동방 정교회의 작은 분파들에서도 해당 예법의 수좌 주교를 가톨릭 총대주교(KaqolikoV)라고도 한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천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서학서적들을 통해 서구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천주교 사상과 한국의 전통 사상은 그 후 2세기 정도 탐색기를 거쳤고 1784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본격적인 조선 천주교가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전래된 서구 사상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주요 책자는 로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천주교와 서학 을 전할 목적으로 쓰여진 책으로 종교, 윤리, 지리, 천문, 과학, 역사, 기술 등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특징이 있다.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의 선교사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간 조선의 지식인 간의 교제로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간 것이다. 주로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파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적인 벽파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탄압했다. 즉, “조상을 몰라보는 사람” (무부지자[無父之者])이라는 게 박해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성을 띤 사건이었다.     실제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가 반대 당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나오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청나라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 등 활발히 성장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교구는 서울, 대구, 광주의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교주회의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본론   2.1 역사적 비교 2.1.1 천주교회의 발전약사    1) 천주교는 공교、로마공교、로마천주교라고도 한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신교와 동정교 그리고 천주교 기독교라고 한다. “천주교”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와서 선교를 한후 중국의 원래의 명칭을 빌어 전파되었다. 전설에는 기독교는 예수가 타륵사탄에서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님 탄생의 기원이며 천주교의 기원이다.    2) 고대 교회(1~604년) :교회 창설부터 311년까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참혹하게 박해하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함으로써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39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를 이루게 된다.   3) 중세기 교회(605~1500년)   1054년에 콘스탄틴의 총주교가 천주교회의 교황권을 거부하여 동방 정교회(東方 正敎會 그리스 정교회)를 세움으로써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 와 1차 분열이 된다.   4) 근세기 교회(1500~1965년)   1517년 천주교 신부인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교황권에 반대하고 이탈하여 개신교 (改新敎) 를 세우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2차 분열된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교회의 현대세계에 대한 적응을 목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하였다. 교회는 안으로 자각과 밖으로 개방을 목표로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 적응-개혁과 쇄신)란 담대한 표어로써 오늘날 세계와 대화 중에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5)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베드로가 첫째 교황에 임명된 후, 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까지 264대에 걸쳐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 오고 있다. 세계 천주교 현황 (2000년 1월 1일 )신자 수는 10억 4천5백여만명으로서 전 세게 인구의 17.4% 이며 아시아 인구의 3.0%이다.    1054년, 동서 기독교가 분열하였다. 동파교회는 정교를 자청하고  서파 교회는 공교로 자칭하였다. 천주교와 교황은 독특하고 단일한 교회와 체제를 정식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중세기 천주교는 서유럽 각국 봉건사회에서 통치지위를 차지한 종교이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 후에 천주교는 유럽의 부분적 국가에서 통치지위를 잃어버렸다. 종교의 개혁운동에 대항하고 자체의 통일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천주교 로마교정에 일계열의 조치를 반종교개혁이라고 하였다. 2.1.2중국에서의 천주교회의 발전사     천주교는 처음 당조때 중국에 전파되었다가 13세기에 다시 유입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 중국에서 천주교가 거의 없어졌다. 16세기에 천주교는 서방 식민주의 물결을 타고 또 중국에 다시 유입되었다.     1840년에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의 국가가 되면서부터 선교사들이 중국에 육속 들어오면서 천주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정부의 보호를 받아서 여기저기 교당과 수도원을 짓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고아원을 창설하였는바 이런저런 방법으로 천주교를 재빨리 전파하고 발전시켰다.     1840년부터 1949년까지 백년 동안의 발전을 통해 300만의 천주교 교우가 있지만 교회의 지도권은 아직도 외국 주교가 장악하고 있다. 중국  천주교는 외국 세력이 지배하는 종교로 되었다.     50년대에 중국 천주교는 “독립자주적이고 자체로 꾸리는 꾸린다”는  반제애국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십년 대동란중에 천주교는 엄중한 박해를 받아 원기를 손상받았다. 신도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박해받았다. 그런데 이런 잔인무도한 박해를 겪었지만 헌신적인 예수의 자민들은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살벌한 시대에도 그들은 모두 자기의 신조를 잘 지키었다. 그처럼 일종의 신앙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가슴속에 사랑과 힘이 가득차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게 되어 당과 정부에서 실시한 종교신앙자유정책의 덕분에 중국 천주교는 재빨리 회복되었고 발전하게 되었다. 몇 십년의 발전을 거쳐 중국천주교는  자기의 권리를 찾게 되었고 천주교 애국종교조직 중국 천주교애국회를 성립하였다.   개혁개방 후 중국 천주교애국회는 희망소학교 70여개. 유치원 30여개,  진료소 200개를 건립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천주교의 신도가 530여만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 전국 각지에 교당이 6000동, 대수도원 12개소, 수녀회 70개가 건설되었다.   2.1.3 한국 천주교의 역사 1.한국 천주교회 성립의 배경  1) 대외적 배경 :   16세기 말엽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던 한국은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마태오 릿치가 쓴 「천주실의」이다. 마태오 릿치는 기존 중국 문화를 바탕으로 해 천주 교 신앙을 전파시키는 선교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천주실의」는 진리에 목말라하던 소수의         실학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17세기까지는 지식과 사회문화운동의    대상이었을 뿐 실천적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2) 대내적 배경 :   문화의 변동으로 15세기 리씨 조선의 건립이래 조선의 지도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18세기 후반에 그 긍정적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는바 이에 지식인들이 성리학의 가치를 대체할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념적인 면에서 볼 때 서학이란 천주교를 가르키는 것이다. 3) 사회적 배경 : 18세기 후반 신분제 사회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서학 즉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기초한 이론은 한국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활력소로 되었다. 2. 교회의 성립   위에 설명한 배경하에 천주교가 일종의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인권과 평등사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 을  얻게 되었다. 이벽, 정약전, 권일신 등 신앙 선조들은 중국의 교리서를 통해 몸소 신앙을 실천하였고,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을 시작하다가 마침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교리를 더 깊이 배워오게   하였다.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교회를 성립하였다. 이벽은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연구한 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 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양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전교를 시작하였고, 점차  신분의 차이를 건너뛰게 되었다. 그러나 1789년 윤지충에 의해 조상제사 문제가 생기자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긴 양반층들이 떨어져나가고 하층 계급의 서민들속에서 더욱 순수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3. 가성직 제도와 성직자 영입 운동    1786년부터 지도급 신도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의 발전을 꾀했다. 이것이 가성직 제도로서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이 제도의 타당성을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북경의 주교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 주었고, 이에 조선교회는      성직자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794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활동했으나,   1801년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조선교회는 그 이후 33년간 성직자가 없이 지내면서 계속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갔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16세는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소 주교는 조선으로 오는 도중 병사했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모방, 샤스땅 신부와 소 주교의 후임인 앵베르 범 주교가 차례로 입국하게 된다. 4. 방인 성직자 배출      교우의 수가 늘어나면서 범 주교는 방인 성직자 양성을 꾀한다. 그는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고자 그 적격자를 물색하는 한편, 학생을   가르쳐 짧은 기간에 신부가 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 1838년에 4명의 장년 신학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때까지 성직자 를 맞아들이기 위해 열두번이나 북경에 왕래한 정약전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 이승훈의 친손이던 29세의 홀아비 이재용(도마)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최방제(프란치스코)의 맏형 최 베드로 등이었다.)   범 주교는 이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정하상과 이문우는 몇 해 사이에 신품을 받게 될 것 같았으나 이듬해 일어난 기해박해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24일에 방인으로서는 최초로 서품을 받고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하지만 1846년 6월에  체포된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실패한다. 이에 9월 16일에 한강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에 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신부가 된다. 그는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전교와 저술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쓰러져 보름만에 사망하게 된다. 5. 천주교 박해   천주교는 조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된다.  그 중에서도 네 차례의 큰 박해가 있었는데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이다. 박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사상적 원인 - 유교사상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의 충돌. 2) 사회적 원인 - 조상 제사문제 3)정치적 원인 - 당파싸움의 방편(남인에 대한 박해) (1) 신유박해 (1791년)이 때 주문모 신부와 300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 였다. (2)  기해박해 (1839년): 이 때 성직자 세 명과 신도 200명이 순교하게 된다. (3) 병오박해 (1846년): 이 때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4) 병인박해 (1866년): 대원군의 탄압으로 9명의 성직자와 8천 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6. 오늘의 한국 천주교     천주교는1886년에 한불통산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된다. 이 후 일제시대, 6.25 등을 겪으면서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간헐적 탄압을 받아 오면서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한국천주교회는 현재 103명의 성인을 배출하였고, 14개의 교구를 가진 교회로 발전했다. 한국천주교회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순교자들의 피를 바탕으로 이 땅 위에 세워졌다. 2.1.4 한국 천주교의 연구    한국은 일본을 통해 천주교를 접촉하였지만 전파되지는 못하고 명나라 때까지 중국을 통해 정식으로 전파되었다. 천주교는초기에 양국에서 다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에 대한 신도들의 열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준엄한 시각에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일부분 사람들이 희생했지만 교회는 장구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시대의 발전은 피의 대가를 필요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현세적 입신양명만을 목적으로 하는 유교사상이 성하였다. 겨우 시문이나 지어서 벼슬자리에 앉은 이후 사상적 결함으로 당파 싸움이 노골적으로 계속 되었다.      한국 실학 운동의 선구자는 이수광(1563~1628)이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348종의 책을 읽고 그 개요를 부문 별로 정리하여1614년 20권으로 된 『지봉유설』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편찬하 였는데 그 속에 『천주 실의』, 『만국여도』등을 수록하였다. 170여 년이 지나 그의 후손 중에서 이경도, 이순이, 이경언 등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이후 천주교 사상은 백여 년 간 묻혀 있다가 경기도 광주에 숨어살던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에 의해 다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남인 파의 학자들로 그 제자들 중에는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이윤하, 황사영, 김범우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은 앵자산에 있는 주어사의 천진암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천주교리 강학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정약전, 이승훈, 김원성, 이총억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출발하여 호랑이가 많은 높은 산을 넘어 100 리를 걸어가 자정 쯤 그 절에 도착하였다.     이 강학회는 10여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이 강학회가 끝난 뒤 정약전은 『십계 명가』를, 이벽은 『천주 공경가』를 지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벽은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진리를 깨달은 후, 천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그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기 위하여 만나는 남인 학자들마다 가르쳐 주었다.    2.2 중한 양국 국민들의 생활과 사상에 끼친 영향     명조와 청조 시대의 천주교 선교사는 수학가、역사가、천문가、 예술가 그리고 선교사를 겸한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천주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에 서방에 발달한 과학기술을 가져왔다. 그중에서 천문역법、 수학、 농전수리 광학, 건축학、 물리학、 생물학、 철학、 음악、예술 여러 방면에서 중국의 과학기술과 문화발전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동시에  선교사들도 서방에게 중국문화를 소개해 주었다. 마테어리치는 등을 라틴문으로 번역하여 서방에 전파하였다. 그는 서방에 중국 문화를 소개한 첫사람이다. 18세기 30년대 선교사가 조국에 보낸 편지에 중국 문화와 역사 풍속습관을 많이 소개하였 다. 동시에 많은 문학작품를 외국어로 번역하였다. 선교사들은 학문적으로 굶주린 중국사람들에게 풍부한 정신양식을 가져다 주었다. 중국 문화 발전의 석표에 공전의 이색적인 곡선을 그려준 셈이다.    에서는 중국 근대발전에 대한 천주교의 공헌에 대해 이렇 게 쓰고 있다. “천주교와 사회 사업이 중국사회문화의 하나로 되고 중국 근현대사회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천주교는 사람에게 남을 자기 처럼 사랑하는 관용정신을 격려하고 물질향수와 부패타락을 반대하였다.     전국 정치 협상 회의 위원 중국 천주교 애국회 부주석 류박년 (刘博年)는 중국 천주교회는 사회의 약세군체에 관심과 배려를 많이 돌려 희망소학교. 유치원, 양로원을 자주 도와주었다고 말하였다. 수녀가 병원에 가 환자를 돌보주었다.     가난한 사람과 허약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우리 천주교의 일관된 종지이다. 천주교는 도박과 폭음과 주정 등 악습을 반대 하였다. 중국 천주교회의 타이름으로 한 실족한 청년은 인생의 방향을 찾은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화해사회 건설에 공헌하고 있다.                                         결론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형성되고 종교는 번성한다. 사람의 능력은 유한 하여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 욕구이다. 사회질서의 윤택함과 인간다움의 생활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종교의 기능은 중요하다. 천주교는 중한 양국 역사의 질곡 속에서 민중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멘토 역할을 다하였다.  반듯한 사회형성을 위해 천주교는 나름대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천주교는 초기박해를 순교로 극복하며 성장하여 한국의 민주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종교가 종교 간 갈등으로 인한 국론통합의 장애가 되어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 종교갈등은 사회와 종교 간의 간극이 커지고, 종교 간의 이해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종교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종파적 통합의 의식과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 어를 동시에 작동시켜, 종교가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선진 법치주의의 활착을 향도하는 국민의 우군으로 자리매김되어, 항상 종교에 대한 감사함이 넘치는 내일을 기대한다. 종교는 결코 아편이 아니다. 종교는 사회통합을 위한 진한 향기이다.      현재 종교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의론도 많고 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천주교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그들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오해했던 천주교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던 것을 배움으로 새로운 안목을 가져보자.      우리가 바로 알아야 자기 신앙심이 견정해지는게 아닐까? “산의 정상에 오르는데 여러 가지 길이 있듯이, 구원의 길 역시 여러 가지다.” 이것을 세상사람들과 타 종교는 좋게 볼 진 몰라도 성경적으로 위배되는 이 발언과 또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사실 상 천주교나 교황, 추기경 등은 많은 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천주교가 시대의 추세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통합, 종교 다원주의가 오늘날의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다. 이에 유일하게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기독교 뿐이다. 이 땅에 있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지 모르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종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인생관, 세계관, 내세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고, 내세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삶을 제시해 준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 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 키기를 원한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2항 참조).     세계의 여러 종교를 볼 때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여 타민족을 배척하는 폐쇄적인 종교는 결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다. 참 종교는 모든 인류와 우주 전체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종교를 창시한 이들의 사상 속에 이미 인간의 보편적 염원과 이상을 배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사의 말   논문 작성에 많은 지도를 하여 주셨고 심열하여 주신 최균선선생님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나에게 자료를 제공해준 왕건공 신부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드립니다.     참고문헌   1.《官府、宗族与天主教--17-19世纪福安乡村教会的历史叙事--宗教与中国社会研究论丛》 张先清 中华书局 2009-5-1 2.《两头蛇——明末清初的第一代天主教徒》黄一农 上海古籍出版社 2006-8-1 3.《中国天主教史人物传》方豪 宗教文化出版社 2007-8-1 4.《中国天主教基础知识》任延黎 宗教文化出版社 2003-9-1 5.《中国天主教评述》顾裕禄 6.《天主教研究论辑》赵建敏 宗教文化出版社 2006-9-1 7.《当代天主教》傅安乐 东方出版社 1996-6-1 8.《한국천주교회사 (上,中,下)》 서울 교회사 연구소 1995   9.《한국천주교회 창역사 논고》변기영(卞基榮),  광주, 천진안성지, 1997 10.《한국천주교회사의 용위》 주재용(朱在用), 서울 천주교 중앙협의회, 1970 11.《한국천주교회사 연구》 이원순(李元淳), 서울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소, 1986 12.《한국천주교회사(上,中,下)》유홍열(柳洪烈), 서울 천주교출판사, 1962                                       摘要   长篇小说《九云梦》,是朝鲜17世纪小说家金万重(1637—1692)的代表作之一。关于小说的主题问题,学术界一向众说纷纭,莫衷一是。现将其大体归纳为三种不同观点,主要批评了佛教的禁欲主义,歌颂了男女主人公的爱情自由和个性解放。 小说《九云梦》着重反映了儒家“修身齐家、治国平天下”的立身扬名思想。主要体现了富贵功名是一场春梦的人生虚无主义观念。这些观点,都从不同角度触及到了这部长篇所显示的本质的东西,但在对这部长篇真正思想内涵的把握上,显然缺乏全面性、准确性、科学性。本文认为, 《九云梦》有明显的佛教倾向,表达了作者“富贵功名,如一场春梦”的佛教“空观”思想。   关键词:金万重 九云梦 富贵功名“空观”思想 초록 장편 소설 은 조선 17 세기 소설가 김만중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소설의 주제 문제에 대해 학술계에서 의론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세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주요하게 불교의 금욕 사상을 비평한 것, 남녀 주인공의 연애자유와 개성해방을 찬양하였다는 것 등이다.   은 착중하여 유가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사상을 반영 하고 있다. 주요하게는 부귀공명은 일장춘몽이라는 인생허무주의 관념을 체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모두 부동한 각도에 이 장편소설에서 현시된  본질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장편 소설에 담긴 진정한 사상내함을 파악하는 데서 전면성, 정황성, 과학성 등 면에서 부족하다. 본논문은 에는 분명히 불교경향이 엿보이고 작자의 "부귀공명은 일장춘몽 같다(富貴功名,如一場春夢) "의 불교의  "공관(空观)" 사상이 체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 문제가 본논문에서  필자가 천명하려는 골자이다. 키워드: 김만중 구운몽 부귀공명 공관사상   목차   초록 …………………………………………………………………………………2 1 서론……………………………………………………………………………… 4 2 본론……………………………………………………………………………… 5 2.1 김만중의 생애 및 창작동기………………………………………………… 5 2.1.1 김만중의 생애……………………………………………………………… 5 2.1.2 김만중의 창작동기………………………………………………………… 5 2.2 대표작의 줄거리…………………………………………………  7 2.3 이해와 감상 ……………………………………………………………………9 2.4 주제와 사상적 배경………………………………………………………… 10 2.5 내용 연구 …………………………………………………………………… 12 2.6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14 3 결론……………………………………………………………………………… 16 감사의 말 ………………………………………………………………………… 17 참고문현…………………………………………………………………………… 18   1 서론 1.1 “구운몽”연구사 구운몽은 환상설화와 소설의 완결편으로서, 불교사상을 허구적으로 극대화한 독보 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고전문학의 한 정점을 점령한다고 할 수 있으 며 그에 따라 구운몽은 많은 고전소설 가운데에서도 가장 풍성한 연구량을 생산해 내었고, 더불어 그만큼의 다양한 연구 방법과 논란의 갈래도 만들어 내었다. 그 가운데서도 구운몽의 연구사는 거의가 구운몽이 지닌 사상이 무엇이냐고 따져온 것이라고 할 만큼 사상 문제에 직결되어 왔다. 애초에 구운몽에 대한 사상풀이는 유,불,도(儒,佛,道) 삼교사상의 화합내지 혼합설이 등장하였고 이가원(李家源), 김기동(金起東)에 의해 불교사상으로 좁혀져 논의되다가 정규동(鄭銈東)에 의해 불교사상의 공관(空观)으로 훨씬 좁혀져 논의 되어 이제는 대승불교(大乘佛教)의 중심인 금강경(金剛經)의 공관(空觀)으로 굳어진 추세이다. 구운몽에 대한 학계의 주제관의 갈래는 대체로 불교적인 주제로 보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 그리고 불교적인 주제로 보는 측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리고 非佛敎的인 主題라고 보는 측은 제각기 달라서 “꿈같은 세계를 지양한 참세계 즉 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을 준 것” 이라고 학자도 있고, 성현경교수는 “불교사상이 근저에 있기는 하지만 유교적 부귀공명을 지향한 것” 이라고 보았으며 김병국교수는 심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재생체험의 생생한 경험 자체가 주제”이 바로 구운몽의 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구운몽의 주제는 분명 불교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 교리의 핵심이랄 수 있는 금강경의 공사상(空思想)이 바로 그 주제라고 보는 정규복(丁奎福)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며 본논문의 논점을 나름대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1.2 구운몽 연구 목적과 의의 서포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은 한국 고전 소설 중에서도 커다란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연구사의 뿌리가 다른 고전소설 작품들에 비해서 깊은 편이다. 또한 현재에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구운몽 속에 담겨진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각적인 연구가 구운몽에 대한 해석의 견해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상충된 견해가 나타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즉, 아직도 구운몽에 대한 연구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연구 방법론의 선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기존의 견해 중 하나를 선택해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존의 학자들이 연구해왔던 견해에 동조하는 것으로, 구운몽을 해석하는데 있어 자신만의 뚜렷한 해석 방법을 얻기 어렵고 자칫하면 작품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 중 일부만 보게 된다는 점에서 나로선 취하기 어렵다. 또 다른 방법은 기존의 연구들을 부정하거나 기존의 연구에 각주를 다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독창적인 해석과 기존의 연구보다 더욱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러한 견해들이 자칫하면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견해들과의 차이를 뚜렷이 보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기존의 다양한 견해들이 구운몽의 어떠한 특성들에 주목했는가를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은 작품과 연구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작품에서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작업을 더욱 필요하게 만든다. 이런 작업들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ꡔ구운몽ꡕ과 그간의 견해들 사이에 미약하지만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아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논문의 성격을 구운몽과 그간의 연구들 사이를 잇는 작업으로 규정지었다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기존의 연구들 중 어떤 부분들과 그 관계망을 만들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구운몽이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구운몽”은 다양한 사상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상관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 혹은 서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창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이 다르게 나타난다. 하여 기존의 연구들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상당한 혼선을 빚고 있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난 세계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작품의 원전 비평 및 비교 문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비교의 방법, 구조주의 비평방법으로 저작 시기 논증, 구운몽의 표기 문자론, 그리고 비교 문학적 연구를 검토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본논문의 집필을 시도하고자 한다.  구운몽의 인생 무상은 인생이 무상하고 허무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허무 하니까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웅 소설과 몽유 소설을 변형 시켜 결합한 소설이다. 기본 구도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이루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것을 깨닫는다. '현실 - 꿈 - 현실'의 과정을 그리고 있으나 양소유가 8 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독특하게 꾸미고 있고, 8 명의 여인들이 각기 개성적으로 행동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 등을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지은이의 창작력이 돋보인다. 유교, 도교, 불교의 화합을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소설적 흥미는 물론, 사상적 깊이까지 더하고 있어 지식 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본론 2.1김만중의 생애 및 창작동기 2.1.1김만중의 생애 김만중의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益謙)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 (副修撰)이 되고 헌납 (獻納)· 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任用,录用)되어 대제학 (大提学)·대사헌(大司宪)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被。。。放开)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没落为庶民) 그도 왕을 모욕 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1] 2.1.2 창작 동기 가) 개인적 동기 :   노모(老母)를 위로하기 위해 창작.(김만중의 어머니는 청춘과부로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오직 두자 식에 마음을 붙여 정성껏 길러 여생을 즐기려 했는데, 그 장자 만기를 잃어버리고 또 만중조차 유배지로 자주 귀향가게 되어 허무한 삶을 한탄하며 살았다. 김만중은 그 같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고, 이 작품 역시 작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그의 어머니를 향하여 내면화된 결과라 하겠다. 즉 이 작품은 어머니를 위해서 쓰면서 어머님께 지금 현실의 고통은 한 순간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었고, 한편으로 삶의 유한성과 허망함을 극복하는 영생의 길을 갈망하여 자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나) 문학적 동기 :   한국인은 한국어(韓國語)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민족자주문학론'을 내세운 그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창작에 임함 사상 : 유·불·선 사상이 혼합되었으나 불교사상이 주가 되고, 김만중이 바라던 이상의 세계를 묘사     불교적인 부분: 핵심적 주제를 이루는 사상으로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못한 것을 전생의 죄악이라고 보는 데는 인과응보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의 구절 "보살 대도를 얻어 모두 극락세계로 갔더라" 라는 것에서 불교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유교적인 부분: 입신양명, 부귀공명 (당시 양반 사회의 이상적 인생관)은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모순을 안고 있으며, 조선조 귀족 사회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3) 도교적인 부분: 작품의 비현실적 내용을 이루는 신선 사상은 부귀 영화 끝의 허무감을 그린 것은 도교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2.2 “구운몽” 의 문본(文本) 연구 2.2. 1소설의 경개 내용은 당(唐)나라 때 천축(天竺)으로부터 육관 대사(六觀大師)라는 고승(高僧)이 중국에 와서 큰 절을 세우고 제자를 모아 불도(佛道)를 강론(講論)한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성진(性眞)이었다. 어느날 성진은 대사의 심부름으로 용궁에 가게 되었는데, 용왕의 융숭한 대접에 술을 몇 잔 마시고 돌아온다. 한편 선녀 위진군(魏眞君)은 팔선녀(八仙女)를 대사에게 보내 약간의 보물을 선사한다. 길 중간에서 팔선녀와 성진이 만나게 되어 서로 희롱하다 돌아온다. 절에 돌아온 성진은 선녀들을 그리워하며 속세의 부귀 영화만 생각한다. 끝내 그는 죄를 얻어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양소유(楊少遊)가 된다. 한편 팔선녀도 같은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각각 다시 세상에 환생한다. 양소유는 차례로 그들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벼슬은 승상에 이르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린 양소유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양소유(楊少遊)]은 15세에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약하고, 난을 피해 있다가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중 낙양의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경사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는 여자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경패의 시비인 '가춘옥'과도 인연을 맺는다. 하북의 왕이 역모하려 아니 양소유는 절도사로 나가 이를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인 줄 알고 만난 여자가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상경하여 예부 상서가 된 양소유는 황제의 누이인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인연으로 부마로 간택이 되는데.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2]. 토번왕이 쳐들어 오자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 양소유는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백룡담에서는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 주어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에 난양 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을 이루지 못하여 실심한 정경패를 만나 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제 1 공주인 '영양 공주'를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의 벼슬에 오르고, 영양 공주 난양 공주 2처와 진채봉, 계섬월, 가춘옥, 적경홍, 심요연, 백릉파의 6첩을 거느리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아홉'이라는 숫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 이제는 승상의 벼슬에서도 물러나 한가히 그의 여생을 즐기던 양소유는 어느 가을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이때 한 노승을 만난다. 때마침 찾아온 어느 고승에게 불도(佛道)에 귀의할 것을 말하자 그 도승은 쾌히 승낙하고 짚고 온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린다. 그러자 모든 것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에 백팔 염주를 들고 있고 까칠까칠한 중의 머리를 한 자기(성진) 뿐이었다. 당황한 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귀 영화는 하룻밤 꿈이었고 자기는 분명히 연화 도량(蓮花道場)의 성진이었다. 꿈을 깬 성진은 황망히 대사 앞에 뛰어가 엎드린다. 팔선녀도 이어 들어와 제자되기를 청한다. 후에 대사는 도(道)를 성진에게 물리고 천축으로 돌아가고 팔선녀는 성진이 앞에서 계속 도를 닦아 후에 아홉 사람은 모두 극락 세계로 갔다고 한다. 소설은 이원적 환몽 구조를 지닌 일대기 형식, 곧 액자소설(환몽세계 부분) 현실 세계 → 환몽세계 → 현실복귀이다. 이처럼   '구운몽'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 설화와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다. 성진이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형이하학적 세계로 내려가 온갖 욕망을 성취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형이상학적 세계로 복귀하는 꿈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현실과 꿈의 세계를 이중(二重)으로 그리고 있는 이 구조는 결국 인생의 무상함, 삶의 덧없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 구조 상 꿈의 세계로 되어 있는 양소유의 일생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현실 세계로 되어 있는 선계(仙界)는 오히려 신비로운 꿈의 세계이다. 현실 세계(선계)   성진과 8선녀: 천상 세계 수도자로서의 의지(불교적). 8선녀에 미혹되어 불도 수련에 회의함 파계(天上) 환몽 세계(인간계)   양소유와 8부인: 지상 세계 영웅으로서의 생애(유교적), 세속적 욕망의 성취 단계.  입신 양명, 일부다처의 향락적 생활 환생(地上) 현실 세계로 복귀(형이상학적 세계)    미혹과 환몽을 거쳐 대각(大覺)의 경지로 이룸 각성(天上) ① 1 단계 :   육관 대사가 제자 5, 6백 명을 거느리고 서역천축국으로부터 형산(衡山)의 연화봉(蓮華 峰)에 수도할 즈음에 남악(南岳) 위부인(魏夫人)이 상제의 명에 따라 선동 옥녀를 거느리고 머문다. 그 때 수부에 갔다가 산으로 돌아오던 육관 대사의 수제자와 위부인의 명을 받고 육관 대사에게 문안드리고 돌아가던 팔 선녀가 만나게 된다. 그 후 여덟 개의 명주로서 인연을 맺고 산문으로 돌아온 성진이 팔 선녀와 인간 세계를 동경한 때문에 육관 대사의 노여움을 사서 중국 회남도(淮南道) 수주현(秀洲縣)의 양씨집에 환생하기까지의 과정. ② 2 단계: 속세에 환생한 성진, 즉 양 소윤는 과거에 응시하려고 가는 길목에서 규수 진채봉을 만나 혼인하려 했으나 구사량의 수해로 진소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노모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도인 두연사에게 혼처를 부탁한다. 소유는 그곳에 찾아가서 제일부인 정경패와 그의 몸종 가춘운을 맞는다. 그러니까 팔 선녀 중 네 선녀가 인간으로서 양소유를 만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③ 3 단계: 양소유가 사신, 원수로 활약하면서 팔 선녀를 모두 만나게 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④ 4 단계: 양소유가 승상이 되어 팔 선녀 중 여섯 명은 첩이 되고 두 공주는 부인이 되어 모두 궁중에 모여 단란한 세월을 보내는 시기. ⑤ 5 단계: 인간 양소유가 속세에서 불도로 소생하여 팔 선녀와 더불어 다시 극락 세계로 귀의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데까지. 대부분의 우리 나라 고대소설이 한결같이 그렇듯이 "구운몽"도 중국을 무대로 했다. 하지만 "구운몽"의 세계는 당나라처럼 광활한 무대가 아니며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의 활동을 자유자재로 표현 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무대가 선계와 인간 세계 등 두 세계에 걸쳐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흡사 단테의 "신곡"처럼 이차원의 세계를 일차원의 세계로 구성시키고 있는 구성의 묘를 거두고 있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언뜻 보면 이율배반적인 것 같으면서도 수긍되는 점이 많고,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작가적 역량을 과시하는 점이라 하겠다.   2.2.2 이해와 감상 조선 숙종 때 김만중 ( 金萬重 )이 지은 고전소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 국문필사본 · 국문활자본· 한문필사본·한문현토본 등 50여 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춘택(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 南征記 〉 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 ( 李圭景 )의 ≪ 오주연문장전산고 ≫ 의 〈 소설변증설 小說辨證說 〉 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 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균( 悠 )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 ( 仁顯王后 )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근래에 ≪ 서포연보 西浦年譜 ≫ (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지고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 ( 李縡 )가 〈 구운몽 > 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 구운몽 〉 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 공(空) ’ 에 있다. 공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 구운몽 〉은 ≪ 금강경 ≫ 이 소설화 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2.2.3 주제와 사상적 배경 인간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즉 이는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에서 온 것이므로 이 소설은 또한 인생의 무상함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구운몽"은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소설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불교 사상만이 아니라 유, 불, 선(儒佛仙)사상의 융합 상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것을 전생의 적악이라고 보는 데는 불교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깃들어 있고,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 사상이 있으며 영화 끝의 허무를 그린 것은 도교 사상의 영향이라 하겠다. 유가적인 부귀영화는 사실상 김만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상이었고, 선망의 적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욕망이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이상의 삶을 갈망한 끝에 한바탕 꿈을 꾸어 본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것은 분명히 꿈이었고 따라서 허무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처해 있던 환경과 현실이란 확실히 그 꿈과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3] 여기에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고, 스스로의 처지는 더욱 허망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에 몸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그는 종교심을 발휘하여 평소에 잘 이해되고 있던 불교에라도 귀의해 볼까 하는 심정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이상의 낙원이란 과연 없는 것일까? 김만중은 이와 같이 꿈의 세계보다도 더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극락 세계를 동경하여 천상으로의 영생의 길을 떠났다. 이렇게 볼 때 "구운몽"은 불교 위주의 소설이기도 하지만 유교적인 이상세계는 언제나 서포의 염두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또한 여성들의 생활 해방을 갈구하는 구절도 있지만 여자들 스스로가 일부 다처주의를 자인하는 언사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그 당시 유교 사회의 귀족이나 양반들의 생활 이념에 따르는 일부다처주의의 옹호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어 보인다. 2.2.4 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인간 의식의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상충적 갈등, 즉 욕망의 내향 운동과 외향 운동의 부단한 반복은,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뇌, 광명과 암흑, 천국과 지옥 등 모든 상충적 이미지 패턴을 낳는데 이 순간에 느끼는 좌절과 상실의 심연 에서 재생하는 이미지로부터 인간은 신(神, God)의 모습을 창안하였다. 서양에 있어 서, 신의 이미지는 이러한 인간 욕망의 상충적 양면성의 중간에 서서, 이를 화해시 키는 조정자 내지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에 있어서는 수 천 년 동안이나 이 재생 또는 구원의 이론이, 어떤 조정자로서의 인격을 심상화(心像化)하지 않고, 오직 인간 자신이 스스로 희구하는 '전인격으로서의 자기' 속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운몽에서 성진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친 번뇌는 그 양극성을 화해할 인격적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는 오로지 자기 실현에의 노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 전체의 내용처럼, 인생은 어떻게 보면 한순간의 꿈과 같을 수도 있다.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덧없듯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단순히 무더운 여름날 잠시 눈 붙이는 오침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꿈과 인생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꿈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병도 있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 병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름대로 명확하게 꿈과 현실을 구별하고 있는 우리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것이고, 꿈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와 정반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실제의 인물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꿈이 아닌 것이냐`. 이러한 대사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꿈이 현실의 바탕이라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꿈에 나온다는 설, 현실이 꿈의 바탕이 된다는 설도 있다.                                         3 결론   이 작품의 기본설정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실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의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같은 몽유소설(夢遊小說)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꿈 속에서 이룬 욕망성취가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한 점은 다른 몽유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몽유소설과는 달리 꿈 속의 주인공인 양소유의 삶이 ‘영웅의 일생’에 따라 전개되는데, 투쟁이 약화되는 대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영웅 소설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구운몽〉은 몽유소설과 영웅소설을 변형시켜 결합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구운몽〉은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과정이나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미있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인물·심리를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적 흥미를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며, 사상적 깊이를 가지도록 하여 유식한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구운몽〉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구운몽〉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구운몽〉은 고소설 창작에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어, 〈춘향전〉과 더불어 고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감사의 말     논문 작성에 많은 지도를 하여 주셨고 심열하여 주신 최균선선생님께 삼가 감사 의 말씀을 올리며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올립니다.                       참고문헌                           [1] 丁奎福 九雲夢硏究 고려대학교출판부 1974 [2] 金戊祚 西浦小說硏究  螢雪出版社  1974 [3] 丁奎福 九雲夢原典의 硏究 一志社  1977 [4] 赵东一 韓國小說의 理論 知識産業社 1977 [5] 金烈圭·申东旭 金萬重硏究  새문社 1983 [6] 丁奎福 韓中文學比較의 硏究 高麗大學校出版部 1987 [7] 丁奎福 韓國古小說史의 硏究 韓國硏究院 1992 [8] 金炳国九雲夢硏究-그幻想構造의 心理的 考察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68 [9] 丁奎福 九雲夢의 比較文學的 考察高麗大學校論文集 16 1970 [10] 成賢慶 李朝夢字類小說硏究-특히 九雲夢과 玉樓夢을 中心으로- 국어국문학 54 1971 [11] 金一烈 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75 [12] 金圭泰韩国古典文学大全集 (4) 13. 설성경, 구운몽 연구, 국학자료원, 1999 국어국문학회, 고소설 연구1, 태학사, 1997 김병국, 저작 시기 변증, 1997 정규복, 구운몽연구, 고려대출판부, 1974 박하철, 구운몽 연구:사상과 구조 및 교육방안을 중심으로, 인하대 교육대학원, 2000 이경수, 구운몽 연구 : 사상과 작가의식을 중심으로, 경희대 교육대학원, 1995 조동일,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김병국, 구운몽, 집문당, 1990   [1]金戊祚 西浦小說硏究  螢雪出版社  1974   [2]丁奎福 韓中文學比較의 硏究高麗大學校出版部 1987   [3]金一烈 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75  
215    이백의 음주시 연구 (려원) 댓글:  조회:10467  추천:0  2013-01-23
                                         摘 要       众所周知,唐诗是中国非常宝贵的文化财富。特别是李白的作品占据着唐诗无法动摇的地位。李白留给了后诗人九百多首诗篇。这些熠熠生辉的诗作,表现了他一生的心路历程,是盛唐社会现实和精神生活面貌的艺术写照。 作为“盛唐之音”的代表,李白的作品以其独特的浪漫主义和无穷的生命力成为千古绝唱。他成功的完成了从初唐以来诗歌革新的历史使命,为中国古典诗歌的革新和中国古典文化的发展做出了卓越的贡献。 研究李白的饮酒诗不仅有助于我们了解当时诗歌的基本面貌,也对将来诗歌的发展进一步指明了方向。李白的诗中意向很多,本论文着重对他饮酒诗中飘逸豪放和浪漫主义的表现做一个细致的研究。   关键词:唐诗 李白 诗风格 饮酒诗 豪放飘逸 浪漫主义                                               초 록    세인들이 다 알다시피,당시(唐诗)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백의 시작품들은 당시에서 한마디로 평판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걸작들은 현재 약900여수가 유전되고 있다. 이런 시 들은 이백의 평생의 포부와 미학사상을 표현하였으며 성당시기 사회 현실 과 정신 생활을 예술적으로 집중화하고 있다.    “성당지음”의 걸출한 대표로 되어 있는 그의 시작품들은 독특한 낭만 적 풍격으로 하여 천고절창이 되었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다.그는 초당이래 시가 혁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는데 중국 고전시가의 혁신과 중국고전문학의 발전에 크게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이백의 시창작 풍격을 연구하는 것은 당조시기 시가의 기본면모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시가들을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고 미래 시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가일층 모색할 수 있다. 이백의 시가들은 이미지가 아주 많은데 본고는 이백의 음주시 중의 낭만주의와 호방표일한 풍격을 재조명하려 한다. 키워드: 이백 시풍격 음주시 호방표일 낭만주의   차 례 논문초록…………………………………………………………………………1~2 제1장  서론……………………………………………………………………4~5 제2장  본론……………………………………………………………………6~10 2.1이백의 생애…………………………………………………………………6~8 2.2대표적인 음주시의 분석…………………………………………………8~10 2.2.1 장진주(将进酒)의 분석 2.2.2 월하독조(月下独钓)의 분석 제3장 결론………………………………………………………………… 12~13 감사의 말………………………………………………………………………14 참고문헌………………………………………………………………………15                                      제1장 서 론       본 고는 이백의 생애와 그를 대표하는 음주시를 둘러싸고 이백의 창작 사상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백은 중국 시가사에서 대표적 시인이다. 흔히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으로 비유하는데 이백이야말로 당시 가운데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또한 이백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며 현전하는 이백의 시는 약 천 수에 달한다. 이백의 시는 당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백은 천재시인이라 불린다. 그는 시를 지을 때 퇴고 없이 일필 휘지로 써 내려간다. 이백은 호방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를 썼으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백하면 음주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시가들 중에서 많은 것이 정치서경시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비범 한 포부,분방한 격정, 호쾌한 기개를 충분히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 (盛唐)시가 앙양되고 분발한 전형적인 음조를 집중으로 대표하였다. 이백 의 시가 제재는 아주 다양한데 7언절구,5언절구와 고체시등 있다. 이백은 술의 친구이어서 음주시는 대표적이고 유명하다.     이백은 성당문화 속에서 배출된 천재적 시인이어서 성당시가의 기(气)와 정이 이백의 시가들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가창작은 열정 으로 넘치고 있으며 기특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장쾌한 경치 도 있고 자연스러럽고 명쾌한 경지도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이백의 매력은 바로 성당의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백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과장된 비유,풍부한 상상 등 낭만주의 표현 기법과 신화전설을 능란하게 운용해서 호방한 기개, 앙양된 정조, 기특한 형상과 비범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어서 강렬한 예술감화력을 발산한다. 게다가 생생하고 명랑하고 우미하고 청신 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아름답고 눈부시여 이목을 끌며 천고에 길이 이름 을 남기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백의 많은 작품중에서 음주시를 위주로 고찰하고 있다. 이백의 시의 제재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백은 직감적으로 술고래를 떠올리 게 된다. 그것은 이백은 시선인 동시에 주선이라는 두 이미지가 결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는 이백을 평하여 ‘술 한 말에 시 백 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백과 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이백시에서 음주시가 차지하는 영역은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이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백의 음주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2.1 이백의 생애   술과 달의 시인 이백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이며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사상 굴원 을 잇는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라고 불린다.(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왕유는 시불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조상이 농서 성기(현재 감숙성 천수현 부근)사람, 조상이 수나라 말엽에 서역으로 흘러들어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면주(지금의 사천 면양지방)에 거주하여서, 어릴 때부터 촉나라에서 수학,유람함. 25세 때에 혼자 몸으로 촉나라를 나와서 임협방도(의협을 신뢰하고 도리를 찾는것)와 교유간알(신분이 높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통해 벼슬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들을 평안하게 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정, 금릉, 양주 등지를 유람했으며 수년후, 전 재상이었던 허어사 의 손녀와 결혼을 하여 안륙(지금의 호북 안륙)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양양,낙양,태원 등지를 유람했다. 후에 또한 공소   부등 "죽계육일"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과 함께 동노에서 은거하였다.    천보 초기에 오균이라는 도사의 추천으로 임금의 부름에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귀족들로 여러 차례 비방을 받아, 천보 34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와 개봉을 중심으로 제, 노, 회, 사, 강동사이 북으로는 유연 일대까지 왕래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노산에 은거하였으며 계속해서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면밀히 주시하였고 후에 영왕 인의 막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숙종 지덕 2년 영왕 인은 패배하고 이백은 연루되어 욕양에서 옥살이를 하게되고 이듬해 야랑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사면을 받고 무창, 욕양, 의성 각지를 전전했다. 대종 보응 원년에 친척 아저씨인 당도(지금의 안휘성 당도현)현령인 이양빙의 집에서 병사했다.     그는 불운을 겪었고 복잡한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시인이며 또한 자객, 은사, 도인 등과 같은 기질을 지니기도 했다. 유가, 도가 그리고 협객 등 세 가지 사상을 몸소 실천했는데, ‘공성신퇴 (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물러 나자)’ 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주도적 사상이었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이백은 그의 천거로  43세 때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 [남릉 별아 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 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현종 의 마음에 들어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을 3년간 지속하며 당시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하였으며, 현종의 애첩 양귀비 (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고 서있게 했던 기인이다.      장안에서 보낸 3년의 정치 생활은 이백의 창작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이상과 암울한 현실은 첨예한 갈등을 보였으며, 가슴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불만이 쌓였다. 분노는 훌륭한 시를 낳았고, 그래서 , 등의 시에는 옛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으 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써나갔다.    이백은 후세 사람들에게 9백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렇게 빛나는 작품 들은 그 일생의 마음 역정을 표현한 것으로, 성당(盛唐)시기 사회의 현실과 정신생활 모습의 예술적인 묘사이다. 이백은 일생동안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한치의 속임도 없이 업적을 쌓으려는 바램을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협객 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많은 시를 썼는데, 이 그중 대표작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 (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 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 (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 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 (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2 대표적인 음주시    이백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주선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충분이 증명된다. 그의 벗 두보가 “이백은 술 한 되에 시를 백 편이나 쓴다”고 읊은 사실과 이백 자신이 “백년은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음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음주는 삶의 충족을 위해 마신 것만은 아니였다. 영원한 것으로의 지향, 유한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마셨다. 이백은 술을 마시 면 마음이 쾌활하고 호방해졌다. 취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도취 속에서도 각성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술에 대한 시를 볼 때 잠꼬대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표현 속에 엄연한 객관화 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정확한 작시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 “장진주(将进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 보지 않았는가 황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奔流到海不復回               기운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 보지 않았는가 고당의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뜻을 얻었을 때엔 모름지기 환락을 다해야 하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쓸데 있을 것이다. 千金散盡還復來 천금 다 써버려도 다시 손에 돌아올 날 있으리 烹羔宰牛且爲樂 양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저며서 술 잔치를 즐겨보자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술은 한 번에 3백잔은 마셔야지 岑夫子         잠부자여 丹邱生         당구생이여 進酒君莫停        지금 곧 술을 권하여 하니 잔을 멈추지 말아요 與君歌一曲        그대 위해 한 곡조 시를 읊으리니 請君謂我傾耳聽 청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귀 기울여주오 鏡鼓饌玉不足貴 아름다운 음악 맛 좋은 음식은 귀한 것이 못된다 但願長醉不用醒 다만 소원은 오래 취하여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 옛 성현들은 죽으면 그뿐 잊혀지지만 惟有飮者留其名 술 잘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 陳王昔時宴平樂 옛날 진왕은 그의 평락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斗酒十千愁換謔 두주를 만금에 사서 마음껏 즐기고 노닥거렸다. 主人何爲言少錢 집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는가 徑須沽取對君酌 모름지기 술을 사서 그대에게 권하겠노라 五花馬                 다섯가지 꽃 무늬의 말 千金衣                 천금의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불러 끌어내어 맛 좋은 술과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우수를 쫓아 버리자       이 시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술을 마셔야만 우수를 잊을 수 있다는 이백 특유의 술철학이 담겨있다. 황하가 분류하는 것 같은 웅대한 시, 자유분방,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화려한 시구에는 억제하기 어려운 인생의 비애가 넘쳐 흐른다.     이 시와 비교하여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내용상 이질적인 면이 보이고 있 는데 예하여“조여청실막성설(朝如靑絲暮成雪)”에서‘아침에 푸른 실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對酒》에서는 어제의 홍안 소년 오늘은 백발(昨日 失顔子 今日白髮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용 상에 있어서도 대조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는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하고 《把酒問月》에서는 바라 는 것은 노래 부르고 술 마실때 달빛이여 깊이 비쳐다오 금술독 속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 까지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과 술은 서로 이질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데 묶어서 다루어 보려는 의도는 그만큼 이백의 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달과 술을 동시에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가 다른 시인에 비하여 많을 뿐만 아니라 이 계열의 시가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달과 술이 동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시 제목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나타나고 있는데 月下獨酌등이 바로 그런한 예이다.   2.2.2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다 花問一壺酒 꽃나무 사이에 놓인 한 단지 술은 獨酌無相親 서로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對影成三人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다 月旣不解飮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른다 塹伴月將影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으로 行樂須及春 행락은 오로지 봄이 가기 전에 즐기는 것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흔들린다 醒時同交歡 술이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氷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놀이를 그들과 맺어서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밝은 달 아래 꽃나무 사이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심경을 독특한 기법으로 노 래하고 있다. 전부 4수로 되어있는 이 시들은 각각 착상이 다르다.    중국문화는 장르중에 시는 역사적으로 주총을 이루었고 특히 당대에 있어서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당대에서도 성당이 당시의 절정기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백이다. 이백은 진보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낭만주의를 굴원 이래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당조때 두보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기봉을 이루었다면 이백은 진보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이백은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전국 수많은 명산과 대천을 다니며 조국의 자연을 찬미하는 많은 분량의 우수한 시들을 썼고, 시를 통해 자유를     사랑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속에 기묘한 산천은 거스르고 머무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완벽 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백은 조국을 매우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폈으며 현실을 인식했던 위대한 시인이였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열정을 담아 보내는 노래를, 통치자들의 불쌍한 병사 들에 대한 무정한 채찍질을 담은 시들을 썼다. 이백은 또한 많은 악부시를 지어, 노동자들의 힘든 생활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 했다. 이백의 시는 ‘붓이 떨어져 비와 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되어 혼을 울리는’ 예술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이백 시의 가장 뚜렷한 예술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자아실현의 주관적 정서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위세당당하고 일사천리한 기세를 담고 있다.     시는 항상 상상, 과장, 비유, 의인 등의 기법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신기하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백의 낭만주의 시가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함과 신선같이 뛰어난 운치를 주는 원인이다.     이백의 시는 이전 낭만주의 창작의 성과를 이어받아 반역사상과 호방한 풍격으로 성당시대의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창조정신 및 봉건질서에 만족 하지 못한 잠재된 역량을 반영하며, 낭만주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기법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준까지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이런 한 성과로 인해 그의 시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새로운 절정이 되었다. 이백은 당대 시가의 혁신에 대해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는 진자앙 시가의 혁신적인 주장을 계승하여 이론과 실천에서 시가혁신의 최후 성공을 거두었다.                                                       3. 결 론     이백의 위대한 시편들은 성당시대의 상승발전하는 기백을 반영하였다.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그는 극대한 용기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책과 열려있는 밝은 정치를 하고자 이에 투쟁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투쟁정신과 자유해방의 열정에 대한 추구는 그의 시가에서 적극적인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성당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짧은 일생에 천만고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인생, 무엇으로 그 시름을 잊고 이 인생의 무상을 극복할수 있을가 술이 야말로 바로 그 시름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선물이라는 대 전제하에 과연 이백다운 종횡무진의 낭만과 과장으로 호기로운 음주예찬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취중인 만큼 과장도 호기도 백배로 부풀어 있는 가운데 또한 은근히 때를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의 분한을 시종 그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자연과 인생은 하나의 사랑으로 귀의가 되어있다. 산천초목이며 일월신성이다. 그러한 중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과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은 그의 술자리에 동참하여 항상 이백과 함께 하였다. 이백에게 있어서 자연은 적극적 능동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이백의 음주시는 그저 단순한 작시하는 그러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천인하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파악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이백의 음주시를 더욱 더 음미해보아야 한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1. 孫宗燮, 『李杜詩新評』, 정신세계사, 1996 2. 郭沫若, 『李百과 杜甫』, 까치, 1996 3. 張基槿, 『李太白評傳』, 乙西文化社, 1987 4. 金學主, 『中國文學史』, 新雅社, 1993 5. 丁範鎭, 『中國文學史』, 學硏社, 1993 6.《李白诗歌鉴赏集》,巴蜀书社 1998年2月 7. 《李白集》山西古籍出版社,2004年6月 8. 安旗:《李白全集编年注释(上、下)》巴蜀书社,2000年4月第1版 9. 王寅明著:《李白全传》长春出版社,2002年7月第一版 10. 霍松林、尚永亮:《李白诗歌鉴赏》,上海教育出版社,1989年 11.《李白诗》,人民文学出版社,2005年5月 12. 王步高:《唐诗鉴赏》,南京大学出版社,2006年7月 13.   박충룩저, 북경민족출판사, 2003년10월제1판 14. 이창룡, 『李百』,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15. http://www.ccnt.com.cn/literature/wenxue/shiren/libai.htm
214    안수길의 장편소설에 담긴 민족 비극의식 (증녕) 댓글:  조회:9202  추천:0  2013-01-23
                                         摘 要       安寿吉作为韩国著名的移民作家,在战争时期写出了很多著名的小说,主要有《초련필담》(初恋笔谈)《북간도》(北间岛)《원각촌》圆觉村〉《여수》( 旅愁)《제3인간형》(第三人间型)等。     其中最为著名的就是具有代表意义的北间岛,《北间岛》代表了安寿吉小说创作的最高水平。《北间岛》描述了朝鲜移民李昌润一家四代人,在中国吉林延边的生活及土地之争,成为韩国民族文学的重要作品。此书通过描述朝鲜民族的移民史来表现朝鲜民族的深刻悲哀意识。同时也透漏出朝鲜民族的深刻的民族精神,不但代表农民阶级,同时也代表了朝鲜整个民族。之所以研究安寿吉,主要通过研究北间岛,是想通过作家的笔下描写,去了解当时在社会深刻变动下受难的朝鲜人民,当时社会的深刻变革和人民的精神世界,折射出的宝贵的民族精神。     关键词:安寿吉 北间岛 朝鲜文学 民族意识                                       초 록     안수길은 한국 이민작가들중에서 가장 유명한다.그는 전후 유명한 소설 을 많이 썼다.《초련필담》,《북간도》,《원각촌》 《여수》(旅愁) 《제3 인간형》(第三人间型)등 있다.     그중에서 장편소설《북간도》는 안수길의 창작에서 최고수준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조선이민 이창윤 일가 4대의 사람들이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살면 벌어진 토지쟁탈을 묘사하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학에서 중요 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설은 조선민족의 이민사로 조선민족의 심각 한 비애의식을 묘술하고 있다.     이 비애의식은 조선민족의 심각한 비극의식을 표현하고 있는바 비단 농민 계급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전체 조선 민족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소설《북간도》는 중국에 이민한 이창운일가의 생활려정에 대한  묘사을 통해 그 시대의 심각한 사회변혁과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펼쳐보이 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 안수길을 연구하려면 그의 대표작《북간도》중심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작가의 붓끝에서 묘사된 정경을 통하 여 당시 사회의 심각한 변동 속에 고난을 겪는 조선인민들의 정신세계 및 굴절반사되어 나온 보귀한 민 족정신을 더 깊이 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 례 초록 ………………………………………………… 1-3 제1장 서론……………………………………………… 1 제2장 본론 ……………………………………………  1-9 1.안수길의 생애 및 창작세계…………………………    1-3 2.대표작줄거리…………………………………   3-4 3.이해와 감상……………………………………………    4-5 4.소설의  상징성…………………………………………   5-7 5.소설에서 보여준 장면의 의미,비극적 미학…………   7-9 제3장 결론………………………………………………  9 안수길 소설중에 문학예술…………………………… 10-12 감사의 말……………………………………………… 13-14 참고문현…………………………………………………… 14                                    1. 서 론       안수길은 한국 이민작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다. 사상사적 측면에서 고찰하여 보면 『북간도』(1959~1967)를 비롯하여 『북향보』, 『성천강』 등 장편 소설은 모두 조선민족 선조들의 개척의지나 강한 민족의식을 문제삼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렇게 출발 초기에는 만주에 머무르며 조선 이주농민이 대륙에서 흙과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농촌소설에 주력했으며,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도시 소시민의 생활 단면을 그리는 많은 장·단편을 발표하였다.     안수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고향의 이중성과, 작품을 쓰게 된 동기인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수길은 항상 ‘어떻게 사느 냐’를 고민하며 산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안수길 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사상성은 작품 속에 강렬히 반영된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안수길의 작가정신은 민족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과 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적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는 데 그 근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2. 본론   2.1 안수길의 생애 및 창작 세계      간도 용정 광명고등여학교의 교감을 지낸 아버지 용호(镕浩)와 어머니 김숙경(金淑卿) 사이의 2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흥남으로 이사해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2년 만주 간도로 이주했다. 1926년 간도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동맹휴교 사건과 관련해 자퇴했다.     1928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광주 학생사건으로 15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学]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과 학비문제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32년 박영준·이주복·김국진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북향 北乡〉을 펴냈고, 1936년 간도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다 1937년 만선일보사로 옮겨 염상 섭·송지영·이석훈 등과 함께 일했다. 1945년 6월 건강이 악화되어 만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8·15해방을 맞았으며 3년간 과수원에서 요양했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 차장, 조사부 부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복무했고, 1952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용산고등학교 교사,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강사, 1960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 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의 문학세계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8·15해방 이전까지로 만주에서의 직접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만주에 사는 한국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민족 수난사의 의미와 결부시켜 폭넓게 제시했는데, 창작집〈북원 北原〉(1943)과 장편〈북향보 北乡谱〉(1944)가 그것이다.     이 시기 그의 작품경향은 개척 이민의 전사(前史)에 해당되는 〈새벽〉 · 〈벼〉·〈원각촌 圆觉村〉 등과 1932년 이후 만주 개척이민의 현단계를 다룬 〈새마을〉·〈목축기〉 등의 두 갈래로 나뉜다. 이들 초기 소설들은 '어떻게 사느냐' 라는 문제를 민족적 단위에서 파악하려는 작가 정신이 밑받침되고 있다. 둘째, 월남한 이후 1950년대까지로 〈여수 旅愁〉(백민, 1949. 5)·〈밀회〉(문예, 1949. 10)·〈제3인간형〉(자유세계, 1953. 6)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작품들의 창작배경은 8·15해방과 월남, 6·25전쟁이다. 앞의 두 작품이 만주에서의 체험과 관련된 것이라면, 뒤의 것은 6·25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제3인간형이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변질된 세 사람의 지식인상을 뜻하며, 이것 역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에 대한 작가적 탐색 이다.     셋째, 1950년대 말기 이후로 기념비적인 장편 〈북간도〉가 그 대표 작이다. 이 작품은 만주로 이민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4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순응주의자들의 자기기만을 폭로하고 비순응주의자의 생활태도를 옹호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적 성과를 얻고 있으며 그의 민족적 리얼리즘의 가치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외 소설집으로 〈초연필담〉(1953)·〈제2의 청춘〉(1958)·〈이화에 월백하고〉(1978) 등이 있다. 1954년에 아시아자유문학상, 1967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2.2 대표작 줄거리      의 중심 내용이 한민족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그 수난의 현장에서 살아온 인물들의 삶의 양상을 그린 작품이므로 이러한 문학연구 경향과 자연스레 합치되었던 것이다. 실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작가 안수길이 재창조한 허구의 인물들이 여기에 직접 뛰어들어 함께 어우러진다.     이 작품이 시작되는 1870년대의 함경도는 고종 ‘기사정오(己巳丁午) 북부 육진의 대흉작’이 휩쓴 때이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주민들은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두만강 가운데 있는 기름진 땅, 사잇섬에 도둑농사라도 짓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대사상에 젖어 있던 정부에서는 ‘월강죄 (越江罪)’라 하여 강을 건너는 것을 법으로 엄중히 금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와중에 이한복은 야음을 틈타 감자를 캐어 오게 되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태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한복은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강북, 즉 간도 지방(두만강의 북쪽은 북간도, 압록강 건너는 서간도라 칭함)이 우리 영토라는 것을 입증 하는 정계비가 백두산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답사를 다녀온 결과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월강은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간도 이민은 공공연히 이루어져 수많은 동포들이 남부여대(男负女戴)로 강을 건너게 된다.    이한복도 그의 가족과 최칠성, 장치적 일가와 함께 강을 건너 비봉촌 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청국 관헌에 세금을 내고, 흑복변발을 하고 입적하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고 마음대로 농사를 짓게 해주겠다는 청국측으로부터의 압력이 들어오게 된다. 오직 스스로의 힘밖 에는 믿을 곳이 없는 이주민들에게는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대표를 선출하여 청국인으로 귀화시켜 토지 소유문제를 처리케 하는데 여기에서부터 인물들 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갈등이 시작된다.   2.3 이해와 감상    안수길은 가장 대표적 한국 이민작가이다. 예전에 다른 이민작가의 부족점이 많다. 그는 연소시대에 이민생활을 경험하였기에 이민생활에 대해 잘 요해하고 있다. 이민시기에 그는 일보의 특파원으로 이민의 진실한 생활을 많이 접촉하였다. 사회 의식과 계급의식은 그의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소설을 통해 안수길의 입장과 사명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인물 유형 이 나타나게 된다.     이한복,이장손,이창윤,이정수,이창덕등은 저항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입적 요구에 끝까지 반대하며 이주자라는 특수한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으로 수난기인 비극적 시간 속에서도 민족정신과 의지를 굽히지 않고 저항하면서 사는 이한복 일가가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관습과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시대에 대응한 인물들로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정수의 직업은 교사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대로 농사꾼 집안에서 보자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면모일 뿐만 아니라 이는 실제 안수길의 개인적 경험이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당시 시대 상황과 적절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철저하지 못한 작가의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에 있어서 한계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최칠성, 최삼봉, 최동규는 반동적 인물들이다.이한복 일가가 어려운 현실에 저항하며 살아갔던 인물들이라면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농민에게 땅이란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이며 땅의 소유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순응 태도는 다시 민족의식에 역행하는 반동적 인물과, 반민족 적이지는 않지만 그때그때 자신의 이익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기회주의저 인물로 나눌 수 있다. 두번째가 바로 반동적 인물유형으로 나타나는 최칠성 일가이다.     세번째로 현실 순응이라는 면에서는 같을지 모르나 최칠성 일가와는 달리 중심 인물인 이한복네와도 큰 대립 없이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해 가는 장치덕,장현도 일가가 있다. 이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사회·정치·경제적 변화과정에서 근대의식을 지닌 인물들로 적극적이고,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하며, 낙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 기도 한다.   2.4 소설의  상징성     1930년대 당시 식민지 상황이라는 특수한 환경하에서 시대적 각성에 따른 성숙된 작가 의식의 발로로써 소설의 장편화 경향이 나타났다. 민족 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다루기 어려웠던 시기이기에 개인이나 가족을 단위로 하여 당대의 사회 모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가족사 소설의 양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북간도』는 50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소설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30년대의 그것과는 차별성을 띠고 있다. 대부분의 가족소설 또는 가족 사소설은 단일 가문 내에서 세대간의, 인물들간의 갈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렇지만 소설 『북간도』는 이한복, 최칠성, 장치덕 3가의 중심 구조로 그들의 인간성을 가문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에 따라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형의 근본 바탕에서는 가문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 여타의 작품들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앞서 이한복 일가의 특성을 얘기할 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물 유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적어도 우리 나라와 같이 유교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던 사회에서의 가족사적 전개 구조는 필연적으로 남성 중심의 인물 유형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족적 인물의 전형성은 결국 여러 가족의 설정과 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북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다각적인 삶의 자세와 변천상을 지속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수법으로 인정된다. 문학적 관심을 총체적으로 민족적 단위 로 확산시켰다는 데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 지나치게 개입되어 있는 것이 인물을 사건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10여년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씌어졌다고는 하나 1·2·3부에 있어서는 한인과 청인이 갈등의 축을 이루고 비봉촌을 중심으로 삶의 본질이 땅과의 투쟁과 결부되나, 4·5부에서는 일제와의 대결이 중심을 이루고 삶의 뿌리를 이전 과는 변질된 초기 상업자본주의가 나타나 있어, 당시 사회구조적 문제로 대두되는 이러한 실정들이 연관성이 결여된 채 두 토막이 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잠깐 작품 속의 용정을 살펴볼 것 같으면 실제로 안수길이 20여 년을 생활했던 곳으로 1924년 그의 나이 14세 때 북간도에 있는 부모 곁으로 가서 청년기의 성장이 용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던 체험의 공간이다. 비봉촌이 1910년 이전에 이주한 이주농민의 삶을 형상화하기 위한 허구의 공간이라면, 용정은 1910년 이후의 간도 이주민의 독립운동 활약상과 교육사상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체험 공간 에서 재창조된 곳이다.   2.5 소설에서 보여준 장면의 의미,비극적 미학     이 작품은 2중적 대결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민족간의 대결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각기  다른 가치와 삶의 적응태도에서 발생하는 한인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다. 이민족과의  대립적 관계는 다시 청국과 일본이라는, 한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주변국가들과의  대립이 작품 1,  2부에  나뉘어  나타나고  있다.     청국식  흑복변발(墨服边发)과 입적에  대한  요구, 일본의  조선 침략이  구체화  되면서 빚어지는 갈등과  이러한  시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 가에  따라  동족내에서도 차차 문제들이 발생한다. 친일적 사고와 행위를 통하여 불의와 타협하는  근대인의  삶의  한  형태를  제시하고  있는 장현도는 당시 현실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하여 신분계층의 변화를 시도한 그리고 성공하는 인물유형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제가  등장 인물간의 대립과  충돌의 ‘엉크러짐’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고  볼 때, 이 소설의  중심  갈등은  이한복  일가를 정점으 로 하여  배신과  타협의 길을  걷는 최칠성과  장치덕  일가 사이의 갈등 으로 표출된다. 그것의 의미는  청국과의  대립을  통한 국토회복의  의지 와 일제와의  대립을 통한 국권회복 의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분적으로는 농민이지만, 고향보다는 새로운 희망으로 개간되는 개척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해 가는 이민족이다. 그래서 농민이기 보다는 유랑민족의 성격이 짙은 집안 내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민족혼을 고수하며 이민족과 이주지라는 시대현실 상황에서 저항적 자세로 살았던 인물의 유형들이 주로 나타난다.     민족 주체성으로 상징된 이한복 일가의 제1,2부에서는 청인 지주 동복산과 결탁한 최칠성 일가와, 제 4,5부에서는 일본과 결탁한 장현도 일가와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2. 6 장편소설《북간도》결구미학    소설 《북간도》는 이한복, 최칠성, 장치덕 3가의 중심 구조로 그들의 인간성을 가문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에 따라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형의 근본 바탕에서는 가문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 여타의 작품들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앞서 이한복 일가의 특성을 얘기할 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물 유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적어도 우리 나라와 같이 유교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던 사회에서의 가족사적 전개 구조는 필연적으로 남성 중심의 인물 유형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족적 인물의 전형성은 결국 여러 가족의 설정과 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북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다각적인 삶의 자세와 변천상을 지속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수법으로 인정된다. 문학적 관심을 총체적으로 민족적 단위 로 확산시켰다는 데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두뇌를 통하는 방법에는 사실의 정확성이나 논리가 필요하고 심장을 통하는 경우에는 생동하는 감동이 요망된다. 논리 위주의 전달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요, 감동 위주의 방법이 예술적 방법인 것이다. 역사학, 철학, 법률학, 사회학 등등의 인문과학(人文科学)이 여기에 속하게 된다.     넓은 뜻으로 문학을 정의하는 경우 모든 문자로 씌어진 것이 이 범주 안에 든다. 그러나 글자로 씌어졌다고 해서 역사, 철학, 법률학 등등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학이라고 하면 역사나 철학 같은 것과 엄연히 구별되는 그 어떤 개념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좁은 뜻으로 본 문학일터인데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말의 예술’로 요약될 것이다.                                          3. 결론       본 논문은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들을 그 연구대상으로 잡았다.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원이라고 확인할 때 안수 길과 그의 작품은 바로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결론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 확인과 직결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길은 만주 이민역사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식민지 억압 시대에 대한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의도적으로 만주 이주민의 개척사를 다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초기 소설세계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이 모순되고 배척되는 상황 속에서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하여 절대적 억압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작가 안수길의 현실 인식이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형이상의 이념 성찰에 날카로우면서도 형이하의 억압적인 인간 조건을 비약하지 않고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하여 작품화 했다.     그의 이러한 작가 정신은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한 이주 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에 이어지면서, 단지 만주 체험소설이나 망명문학이 아닌, 정착 지향의 향토문학으로 정립, 성장할 수 있었다. 본논문은 이런 취지에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텍스트의 의미 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해보았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최균선교수님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참고문헌   张春植 ( 2007)《身份认同的不同而引起的文学表现之不同》 闵玹基编《韩国流移民小说选集》启明大学出版社 吴养镐 (1988)《韩国文学与间岛》文艺出版社  吴养镐(1996)《日帝抢占期满洲朝鲜人文学研究》文艺出版社 김용성(1991), 「한국현대문학사 탐방」, 현암사. 金允植(1982), 「韩国近代作家论」, 一志社. 金允植(1985), 「鼓吹民族历史意识的作家安寿吉」 志学社 민현기(1989), 「한국 근대소설과 민족현실」, 문학과 지성사 朴昌顺(1990), 「北间岛研究」 朴永根(1992), 「한국문학대사전」, 고려출판사 박은숙(2002), 성균관대 박사논문 계곤(2002) , 경남대 박사논문 벽호(1993), 김윤식 편,
213    한국 전후 소설의 비극미학 (왕은녕) 댓글:  조회:8687  추천:1  2013-01-23
                                   摘 要       6.25战争给韩国人民留下了深重的灾难,这些苦难不是由他们自身引起的,也不该由他们来担负这个责任,而是社会单方面施加予他们的,因此他们的绝望是一条没有尽头的遥远的路。     战后韩国的小说文学,在当时混乱的社会环境下,呈现出复杂的局面。这时期,许多作家以战后小说家的身份登上文坛。其中以描写历史剧变期的农村人民生活而出名的河谨灿尤其受人瞩目。在这样的时代背景下,反映苦难农村人民,就这一点自身而言,已经是具有跨越性意义的。河谨灿的诸多作品中,最有名的是他的处女作《受难2代》,清楚地反映了作家河谨灿的创作倾向。 《受难2代》中失去一支手臂的父亲背着失去一条腿的儿子过独木桥的画面,将战后小说的悲剧性美学展现的淋漓尽致。我认为《受难2代》所表现出来的战后小说的悲剧性美学不失为一个新的研究课题。   关键词:韩谨灿,受难2代,战后小说,苦难,独木桥,农村人民                                          초  록   6.25전쟁은 한국 민중에게 깊은 고통을 남겨주었다.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이 책임질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된 고통이기에 그 절망은 헤어날 길이 없는 아득한 것이 되고 만다.   전후 한국의 소설 문학은 그 당시의 사회적 혼란 속에세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전후 작가로 등단하였다. 그 중에세 역사적 격변기의 농민생활을 잘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하근찬은 유난히 주목 받았다. 이러한 시대에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하근찬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 되는 것은 그의 데뷔작 이다. 하근찬의 작품 세계의 뚜렷한 성향도 "수난2대"에 잘 나타나고 있었다. 한국 전쟁을 소재한 소설들, 가령 최인훈의 , 황순원의 , 박경리의 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전쟁이란 무엇이고, 왜 있어야 하고 역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실존의 몸부림을 치는 반면 「수난2대」의 두 부자는 '소극적'인 대응법을 취한다. 이들은 기껏해야 운명론의 무드에 빠지거나 아니면 팔자타령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와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를 생존 본능의 확인을 통해서 잊으려 하거나 뛰어 넘으려 하는 것이다.   이소설에서 팔 하나 잃은 아버지가 다리 하나 잃은 아들을 업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한국 전후소설의 비극적 미학을 잘 표현해 주었다. 가 보여준 한국 전후소설의 비극적 미학은 새로운 연구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워드:하근찬, 수난2대, 전후소설, 고통, 외나무다리,   차 례   서론 하근찬의 생애 및 창작 세계...................................................................3~5 본론 2.1평가..................................................................................5~6 2.2줄거리...............................................................................6~8 2.3이해와 감상 ...................................................................................8~10 2.4소설의 소재 상징성..............................................................................10 2.5이해 문제.............................................................................................11 2.6소설에세 보여준 장면의 의미........................................................11~12 2.7의 비극적 미학 ...........................................................12~13 결론………………………………………………………………………………… 13 감사의말....................................................................................................13   참고문헌..............................................................................................13~14                                         1. 서 론   1.1. 하근찬의 생애 작가 하근찬은 1931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했다. 전주 사범을 다니다 교원 생활을 했고, 동아 대학의 토목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가 당선된 뒤 작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군에 입대한 시절을 제외하고 그는 계속 교육 관계를 전문 으로 다루는 신문사와 잡지사에 관여하다가 최근에는 직장을 갖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같은 작품이 그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학교 생활이 다루어진 자전적인 작품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데 농촌의 학교는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어있다.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서는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작가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 이유는 작가의 유년 시대와 청년 시대의 개인적 경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ㅡ나는 고향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우쭐우쭐 활개짓을 하며 부르는 를 참으로 좋아한다. 달밤 같은 때 먼 곳에서 이 칭칭이 소리가 흘러오면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어떤 공동의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팔도의 가지가지 민요의 가락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슬픔인 것이었다. 슬픔이라는 어휘가 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할까, 한이라고 할까 정한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유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작가로서의 자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하근찬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농촌과 농촌 인구에 대한 혈연적 동정이야말로 하근찬 세계의 핵심이고 그것은 그가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에서 작가로서의 근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등이 모두 전쟁의 직접 피해자를 다루고 있다. 의 두칠이도 의 아버지도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다. 더욱 기막힌 것은 불구인 그들을 도와 주는 아무런 사회적 장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에서는 많은 전사 자들이 배경으로 나오고 이들의 가족에게 재앙의 소식을 차마 전달 하지 못하는 마음씨 약한 우체부의 얘기가 나온다. 은 전쟁이 끝난 후 엉뚱하게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의 얘기 이다. 그러니까 전쟁의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한 황폐성이 하근찬 소설의 집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2. 하근찬의 창작세계 하근찬의 작품 세계는 처음에는 농촌을 소재로 형성되었다. 그의 농촌은 폐쇄된 자연이 아니고,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연관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문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실존주의의 영향과 전후파적 취향이 영향을 미치던 1950년대 후반기에 소설 영역에도 지적 허영과 관념적 난삽함이 적지 않게 성행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농촌은 사회적 변화에서 유리된 자연공간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수난과 고통을 가장 절실하게 축적해온 삶의 현장이다. 농촌의 삶과 현실이 역사적 상황의식에 대응되어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이다. 전체적인 내용이 생활 속의 절실한 인정과 역사적 수난의 아픔이며, 그 아픔을 이기고 일어서는,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인 점에서 창작의 당연 하고도 새로운 본령을 일깨웠다. 또 (1959)이나 (1963)은 주체적인 민족의식이 토착적인 세계 속에서 외래적인 것과 갈등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서, 이처럼 농민 생활과 농촌 현실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농민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자기 아들을 징용에서 빼주지 않는다고 면사무소에서 대변을 보는 아낙네를 그린(1961), 전사통지서를 배달하지 않고 물에 띄었다는 죄로 해고당하고 웃는 등에서는 역사적 현실 속에 드러난 사회의 모순에 대해 강한 고발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하근찬은 현실의 어두움을 그리면서도 해학미를 잃지 않고 있는데, 이는 농촌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농민들의 삶과 그 애환을 작품 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대부분의 전후 작가들이 전쟁의 상처로 황폐해진 도시 소시민의 내면세계와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던 것과는 달리, 그는 인정과 향토성이 짙은 농촌을 배경 으로 그들이 겪는 민족적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것도 작가가 의식적으로 농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고 작중 인물과 작가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동일성에서 똑바로 나오는 공감이요 사랑이다. 헐벗고 기운 없는 한국의 시골 사람 들이 적어도 50년에서 60년에 이르는 고달픈 시기에 하근찬에게서 아주 친근한 대변자를 찾게 된 것이다                                            2. 본 론   2.1. 줄거리. 그래서 다음은 를 중심으로 연구하려고 한다.이 소설의 주인공 박만도와 그의 아들 진수는 순박하고 선량한 이 땅의 민중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이 뒤틀어져 가는, 말하자면 역사의 피해자들인 셈이다. 박만도는 일제 말기에 징용되어 남양군도에서 비행기 활주로를 닦는 노역으로 내몰린다. 그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비행장을 닦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굴을 파려고 산허리에 다이너마이트 를 장치하여 불을 당기고 나서려는 순간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했던 굴로 들어가 엎드렸다가 팔을 잃었 다. 그의 얄궂은 운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방이 되어 귀국은 했으나 이번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족의 분열이었고, 동족상잔의 끔찍한 전쟁이었다. 박만도가 일제 말기에 징용 으로 내몰렸듯이 이번에는 그의 아들 진수가 이 전쟁에 징집되었다. 그러 나 왜정의 그 혹독함이 지나가듯 동족상잔의 광풍도 지나가고 진수가 돌아 온다는 통지가 온다. 박만도는 삼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돌아온다는 통지를 받고 마음이 들떠서 일찌감치 정거장으로 나간다. 그런데 그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이라 하니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는 팔이 없어서 늘 주머니에 한쪽 소맷자락을 꽂고 다닌다. 아들의 귀향 생각에 휩싸여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린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서, 언젠가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옷을 널어 말리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면 물 속으로 들어가 얼굴만 내놓던 일을 생각한다. 정거 장으로 가는 길에서 '진수'에게 주려고 고등어 두 마리를 산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만도'는 과거의 일을 회상한다. 일제 강제 징용에 의해 남양의 어떤 섬에 끌려갔었다. 비행장을 닦는 일에 동원되 었는데, 굴을 파려고 산허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여 불을 당기고 나서 려는 순간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장치 했던 굴로 들어가 엎드렸다가 팔을 잃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만도'는 초조해진다. "아부지"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로 돌아선 ‘만도'는 다리를 하나 잃은 채 목발을 짚고 서 있는 아들을 보고 눈앞이 아찔해진다. 자신이 한쪽 팔을 잃어버린 것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닥친 재앙을 그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도'는 분노를 씹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다가 주막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부정을 나타낸다. 술기운이 돈 ‘만도'는 ‘진수'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수류탄에 그렇게 된 것을 알게 되고,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겠냐는 아들의 하소연에 아들을 위로한다.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만도'는 머뭇거리는 ‘진수'에게 등에 업히라고 한다.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들고 아버지의 등에 슬그머니 업힌다. ‘만도'는 용케 몸을 가누며 조심조심 걸어간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2.2. 이해와 감상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은 아버지 ‘박만도’,아들 ‘진수’, 주막집 여편네 세 명이 있었는 데 박만도는  일제시대 때 강제 징용되어 끌려갔다가 외팔이 신세가 되지만, 일제에 대한 분노나 원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 아들의 부상에 화가 치밀지만 이내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고마는 정적 인물,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다. 박진수는6.25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상이군인으로, 아버지 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정적인물이다. 주막집 여편 네는 쾌활하고 스스럼없는 성격의 소유자요, 작중 보조 인물로서, 만도 와 진수의 심리 상태를 표면으로 드러나게 하며, 두 사람 사이의 침울한 분위 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6·25 동란이지만 구성상 대칭 관계에 있는 또 다른 배경은 태평양전쟁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겪은 태평양전쟁과 아들이 겪은 6·25 동란이 시대적 배경과 함께 인물의 삶의 조건을 형성 한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경상도 농촌인데, 이 농촌이란 배경은 농민 들의 삶의 현장으로서보다는 전쟁의 피해를 입어야만 했던 사람들, 특히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로 부각 된다.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수난은 그들 가족 단위의 수난 이자 한민족이 겪은 수난의 의미를 지닌다. 즉, 2대에 걸친 한 가족의 수난은 민족사적 수난의 하위 개념이자 대유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고등어를 든 '진수'를 업고 '박만도'가 건너는 외나무다리는 바로 주제를 표출하는 배경이면서 유기적 구성의 훌륭한 장치로 작용한다. '외나무다리' 자체가 지니는 그 생김새의 허술함과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강물 속에 오랜 세월 동안 놓여 있었다는 그 항존의 강인함이 곧바로 주제 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극적 역사의 상징인 동시에 극복의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부자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행위를 통해 불구인 상황을 협동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민족 의 비극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소설의 표현상 특징이다. 대충 말하면  세 가지가 있다. ①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 회상 또는 연상의 기법을 적절히 구사한것, ② 사실적 묘사, 토착어의 구사 등을 통해 인물의 성격과 상황, 분위기를 제시한것. ③ 오전에서 오후로의 이동을 통해, 희망에서 절망으로, 상승에서 하강으로의  분위기 변화를 자연스럽게 끌고간 것이다. 이 소설에는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되겠나, 그제?”란 말이 있다. 여기 서 독자는 어떤 어려움이 그들 앞을 가로막아도 어떻게든지 살아가는 민중 들의 질긴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가족사적 비극을 통해 한민족의 수난사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 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 팔 하나를 잃고 불구의 삶을 살아간다. 아들 진수는 한국전쟁으로 다리를 잃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가계를 이어가는 뿌리들이 이렇게 불구자가 된다면 그 가계의 삶이란 간난 신고의 연속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이 책임질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된 고통이기에 그들의 절망은 헤어날 길이 없는 아득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이 부자는 어디에서고 만날 수 있는, 질곡의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자의 아픔을 집중적으로 그림으로써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민족의 아픔을 극화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2.3. 소설 소재의 상징성 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인물과 행동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외부 현실에 대한 일직선적인 대응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그런 경우도 흔하지만) 상징적인 대응 관계로 해서 빚어지는 수가 많다. 이 소설에서 ‘주막'과 ‘술'과 ‘외나무 다리', 고등어등 소재들이 나왔다. ‘주막’은 낭만적 환상과 실제적 현실이 부딪치는 장소요 만도와 진수의 마음이 합일하는 공간이다. ‘술’은 절망에서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고 역사의 어려움 혹은 삶의 어둠을 카타르시스 시켜주는 피와 눈물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특히 그중에서 외나무 다리와 고등어 두 소재는 만도 부자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주제 표출과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이바지한다. '고등어'는 부자 화해의 계기, 분위기의 전환, 부자 간의 온정 확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부자 협동에 의한 수난 극복의 소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외나무 다리'는 앞에서는 아들이 한쪽 다리를 잃고 나타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뒤에서는 '협동'이 수난을 극복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부자간 협동에 의한 수난 극복의 현장으로 활용된다.   이 소설에서 외나무다리는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읍내로 나갈 때이며, 두 번째는 아들을 업고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올 때이다. 첫째 장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기쁨에 가득차 있다. 둘째 장면에서는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로 인해 슬픔 과 절망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외나무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와 아들은 이러한 절망감을 딛고 일어선다.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이 한 팔을 잃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넘으로써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소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만도가 불구가 된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에라이 이놈아!' 라고 화를 낸 것은 어떤 심정이었겠는가? 충격과 놀라움과 아득한 절망의 표현 이지, 결코 아들 진수가 제 몸을 건사하지 못했다는 책망의 표현은 아니다. 엄청난 운명의 비극 앞에 참담해진 마음이 진수에 대한 모진 소리로 드러난 것이다. 둘째: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아들은 6 · 25로 불구가 된다. 이러한 비극적 설정을 통하여 작품이 의도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명백하다. 이 소설은 한 가족사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한 민족사의 비극을 보여 주면서 수난을 극복하는 삶의 의지, 역사적 시련 극복의 한 모습을 나타 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부자가 외나무 다리 건너는 장면)은 전후 소설이 거둔 비극적 미학의 절정으로 평가받는 장면이다. 외나무 다리는 ‘위태하게 살아온 두 사람의 삶(=민족의 삶)'을 상징하는 배경으로, 다리 하나를 잃은 진수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황혼의 이 외나무 다리를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건너는 장면은 실로 장엄한 비극이요, 만일 두 사람이 건너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했다면, 그 비극성은 치열해질 것이고, 전쟁이 두 사람에게 남긴 상처 의 고통이 독자의 심상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와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은 충분하고, 그러기에 무사히 외나무다리를 건너게 했던 것이 조화스럽게 여겨진다. 이를 두고 한국 문학 속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라고 극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 의견도 있다.  ‘그 자체로서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며 굳센 생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결말이 문제 의 더욱 철저한 망각을 가져 온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계속되어 온 수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고 그건 그것대로 버려 두고, 피해를 받은 대로 어려운 대로 서로 도우며 어떻게든지 살아나가는 것이 객관은 어떻든 주관만 편하게 가지는 것이 택할 길이라는, 끈덕지나 소극적인 인간상을 암시적으로 완결시키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하근찬 소설의 특징을 '독자들에게 전쟁의 현장을 목격시킴 없이 전쟁의 야수성을 가장 다부지게 고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농촌 사람들의 삶을 다룸에 있어서 전후 작가의 한 사람인 하근찬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50년 전쟁의 파괴의 흔적이다. 그의 작품 으로서 동시대의 전후 작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전쟁을 전쟁현장에서 다룬 것은 거의 없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전쟁이 국토의 대부분의 주민들 에게 끼친 상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 서로 다른 전쟁 통에 불구의 몸이 되는 재앙을 다루고 있는 에서부터 작가의 관심은 전쟁의 야수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작가적 출발을 도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수난이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구를 딛고 살아갈 의욕을 다지게 된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서로의 결손을 채워가며 힘들지만 외나무 다리의 위태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것이다. 이 장면은 앞으로 이 부자가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용머릿재라는 높고도 험난한 고개가 버티고 있는 것이, 그들의 앞으로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힘들지만 둘은 힘을 합하여 고난을 개척해 나갈 지 모른다.                                       3.  결론   는1957년 신춘 문예 당선작이면서 하근찬의 데뷔작이다. 대개 작가들의 성향은 데뷔작에서 이미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하근찬의 작품 세계의 뚜렷한 성향도 "수난2대"에서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정치나 역사와는 상관없이 순박하고 선량하게 살아오는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통해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를 조명한다. 처녀작 에서부터 하근찬이 끈질기게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관점으로 채택한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농촌 사람들의 그것이다. 이는 그가 주로 농촌 사람들을 다루고 그들의 가난함과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들을 깊은 공감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겨레의 수난을 가장 무방비 상태로 당해야 했고 또 가장 가혹한 형태로 겪어야 했던 농촌 사람들의 고단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는 겨레의 수난과 삶의 실상을 가장 정직하고 참되게 보여 줄 수 있었다는 점은 하근찬 문학이 거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러한 주제의식에 있다. 이대에 걸친 가족의 수난, 그리고 앞으로 험난한 길이 버티고 있는 고통의 현실, 오로지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가야 하는 처지, 이런 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마침내 수난의 시대를 끝내게 될 것이다.가 보여준 한국 전후소설의 비극적 미학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근찬의 소설 에 대한 재고찰과 분석을 통하여 독자들이 이 소설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인식을 얻으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전후소설 연구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김병민 연변대학 출판사 2003년 6월 2. 윤윤진 상하이 교통대학 출판사 2008년 1월 3. 金永琪 著 《韓國文學의 源流》1988녀 6월 10일 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2판) 제3권, 지식산업사, 1989년판 5. 조동일 “한구소설의 리론” 지식산업사, 1993년판 6. 김경선 외국교학과연구출판사, 1998.10 7. 김근총, 김응준, 리성권     연변인민출판사 10월 1판 8. 柳宗鎬 9.원문   전자판 2009 10.장사선, 2008    11.두산세계대백과 서울:2009 12. 金允植. 趙南哲共著 “韓國近代作家論”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1997년 2월15 일 발행 13.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7. 14. 윤윤진등 상해교통대학출파  2005.9 15· 김선, 한국당대소설, 서울:예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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