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새 창밖엔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봄이라지만 3월의 하루해는 짧았다. 오후 내내 자는듯 마는듯 흐리멍텅한채 뒹굴고 있었던 이불속에서 기여나와 세수를 하고 외출준비를 하였다. 평소에 옷장안에 걸어만 두던 레스달린 록색블라우스와 까만 스카트를 꺼내입고 거울을 마주하고 서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스킨부터 시작해 서 마지막에 화운데이션까지 다섯가지를 차근차근 발라주고 립스틱은 물론, 아이새 도어며 마스카라까지 하고나니 거울속에 비친 모습은 이미 내가 아니였다. 피씩 웃음이 나왔다. 로션만 바르고 청바지차림으로 겅중겅중 뛰여다니던 내가 언제부터 안하던 짓을 하지? 거울속의 낯선 모습을 들여다보며 이마살을 찌프리다말고 시 계를 봤다. 약속시간이 다 되여있었다. 털썩 쏘파에 들어앉아 이모콘을 꾹꾹 눌렀 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 재미없는 프로들을 한번쯤씩은 눈길을 준후 약속시간보 다는 반시간쯤 더 흘렀을 무렵,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기록이 서너통쯤 남을 무렵에 야 나는 여유있게 슬슬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 끌고다니던 운동화대신 걷기에는 조 금은 버거운 하이힐을 딸각거리며 약속장소에 이르러 예정된 특실앞에 잠간 멈춰섰 다. 안으로부터 새여 나오는 질척거리는 소리들, 이제 그 소리들속에 내가 섞여들어 갈 차례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어머,이제 오니?” 일화가 손을 흔들며 웃음을 날렸다. 강굴강굴한 파마머리를 어깨너머까지 길게 늘어뜨린 일화의 화사한 얼굴에서 발그무레 홍조가 피여오르고있었다. 난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까댁이고는 제법 폼있게 주위를 쓸어보았다. 남자 네명에 여자는 일화말고도 피끗 본적이 있는 일화의 친구 둘이 더 있었다. 남녀가 모인 술자리면 의례 그러하듯이 남자 여자가 엇갈이 끼여앉아 규칙적인 배렬을 이루고 있었고 나는 규칙 찾기 하는 애처럼 정확하게 두 남자사이에 있는 빈 좌석을 찾아 엉뎅이를 붙였다. 다들 벌써 몇잔을 비웠는지 분위기는 자못 흥성흥성하였다. 빈 좌석이라지만 앞에 놓여진 술잔에는 이미 소주가 꼴똑 채워져있었다. 소주라? 웬지 부담스러웠다. “자~ 금방 오신 분은 저의 친구 오순녀입니다. 그리고 이쪽 남성분들은 제가 낮에 오녀사한테 말씀드렸던대로 외지에서 온 친구들이고. 오순녀님의 광림을 위하여 건배~” 일화가 호기스럽게 한모금 크게 쭉 마시고 술잔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앞에 소주잔을 마주한 나는 난감했다. “전 소주 못하는데요. 맥주로 마실게요.” “야,다들 소주 마시는데 맥주는 무슨 맥주야? 그냥 소주로 해.” 일화가 손사래를 쳤다. “소주 못마신다니까. 왜 그래?” 웃으며 말하는 내 어조에는 어지간히 악센트가 들어가있었다. “왜 그러는데요? 마셔요. 지금 여자들이 소주 한잔쯤이야 무슨 대순가요? 우린 그쪽이 오기전에 벌써 많이 마셨는걸요.” 일화곁의 남자, 정확히 내 왼손편으로 세번째 남자가 날 그쪽이란다. 듣기 좋은것은 아니지만 별 부담스러운 호칭도 아니다. “당신”이나 “순녀씨”보다도 아무래도 오늘 일회용으로는 “그쪽”이 훨씬 편한 호칭일것 같다. “그래요, 마셔요. 술은 똑같은 색으로 마셔야 분위기가 흥성흥성하다니깐요.” 내 왼편 옆자리도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맞장구를 친다. 오른편 옆자리는 아예 술잔을 들어 손에 쥐여준다. 처음 보는 남자들이 날 하나 술먹이는데 이렇게 극성이라니? 낯선 여자한테 싫다는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것이 그들에겐 그렇게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우리도 다 소주 마셨는데. 맥주는 배가 부르지, 화장실 다녀야지 얼마나 번거롭다구. ” 일화의 친구인 여자들도 해쭉거리며 가세를 한다. 그냥 마셔? 같이 놀아준다고 싫은 소주까지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저어기~ 그럼 제가 대신 마셔드릴가요?” 갑자기 맞은 켠에 앉았던 남자가 움찔 일어서며 손을 내민다. 들어올적부터 말없이 술잔만 쥐고앉아있던 남자. 그제서야 그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모난 얼굴에 작지 않은 오관들이 규칙있게 자리잡은 꽤 반듯한 얼굴. 미남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쉽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무덤덤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은근히 진지한 눈빛을 내뿜고있었다. 술잔을 넘겨줘? 내 술잔에 남자의 입술을 대게 하고 거기에 다시 내 입술을 대기는 싫었다. 에라~ 이걸 마시고 죽기야 하겠나? “아뇨. 제가 마시죠. 대신 그쪽에서 함께 마셔주는겁니다.” 나는 눈을 똥그라니 뜨고 남자를 마주봤다. 당신때문에 내가 억지로 마시는데 혼자 당할순 없다는 눈빛으로. 남자가 마셔주겠다는 그 징그러운 말만 없어도 난 좀 더 버틸수 있을지도 맥주를 마실수 있을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네. 그래요.” 역시 아무일 없듯이 대수롭지 않게 싱긋 웃는다. 하긴 아무일 없는것이니까. 그럼에도 웬지 보기 싫었다. 나는 술잔을 쥔 손을 뻗어 남자의 술잔과 쨍그랑 부딪쳤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잔을 기울이자 씁고 맵고 따가운 소주가 혀를 적시며 입안에 흘러들더니 타는듯한 느낌과 더불어 식도를 거쳐 위로 흘러들었다. 금시 위가 따근해나며 온 몸에 해나른한 기운이 뻗쳐감이 알렸다. 난 눈꼬리를 치켜들고 상그레 웃으며 빈 잔을 거꾸로 들어보이고는 상에 내려놓았다. “와아~” 환성소리와 함께 짝짝짝 하는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래, 니들 오늘 잘 걸렸어. 소주라고 못마실것도 없어. 어차피 내 몸은 알콜을 필요로 하고있을지도 모르니까. “자, 제가 부을게요. 중국말에 좋은 일은 쌍으로 생긴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번 잔도 원샷입니다.” 모두들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려 난 얼른 술병을 집어들었다. 차례로 술을 붓고 쨍그랑 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웠다. 아까보다는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야~ 우리 순녀 이제야 열이 오르는구나. 잘했어.” 일화가 째각거리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싫지 않게 들려왔다. 자기 사주팔자에 오행중 <<화>>가 빠졌다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해>> 일 자와 <<불>>화자로 바꿔버린 일화-이름만큼 화끈하다. 적어도 술놀이에서만은. 고작 술 두잔이, 합해서 기껏해야 석냥이 조금 넘을가 말가 한 소주가 배속으로 흘러들자 내 몸은 제법 노긋해지기 시작했다. 립스틱을 빨갛게 바른 얄팍한 입술을 나불거리며 해도 될말 안해도 될 말들을 널어놓기 시작했다. 왼쪽켠의 옆자리남자하고도 잠간, 오른쪽켠의 옆자리남자하고도 잠간씩 쏙닥거렸다. 간간이 재미있어죽겠다는 표정으로 깔깔 웃어주기도 하고 무심한척 팔굽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야한 롱담들도 오가고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상의 분위기는 한결 무르익어갔고 방안의 분위기는 말할수 없이 끈적끈적해졌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내 얼굴은 웃고있었지만 내 머리속은 하나의 아픔으로 찌릿찌릿해지고있었다. 그랬다. 내 마음이 아닌 머리가 아팠다고 난 굳이 표현하고싶었다. 얼굴과 머리, 표상과 내면의 어우러지지 못한 부딪침속에서 내 몸은 어디를 향해 가고있었던것일가? 당신은 진달래꽃향기와 함께 왔습니다. 겨울내내 회색빛갈속에서 잠을 자던 산과 들이 쌀쌀한 봄바람이 가끔씩 데리고 오는 훈훈한 기운에 막 푸른 옷을 떨쳐입으려고 서두르던 그 계절 진달래는 산에서 붉게 타고있었습니다. 그 진달래를 보며 난 <<다시 본 진달래>>란 글을 인터넷문학카페에 올렸고 당신한테서는 쪽지글이 날아왔습니다. 사계절중에서도 유난히 봄을 탄다는 당신. 당신은 진달래꽃이 피는 때가 오면 마음이 걷잡을수 없이 황황하다고 했습니다. 해마다 그맘때면 진달래꽃을 찾아 산에 오른다던 당신, 그 봄에도 당신은 진달래꽃을 찾아 떠날거라고 했지요? 당신의 쪽지글이 날아왔던 날 내 한메일플래닛은 진달래향기로 그윽했습니다. 그렇게 진달래꽃향기를 실은 쪽지글과 함께 당신은 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사뿐히. 당신을 알고나서 난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출근시간에도 업무처리가 끝난 여가에는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그것은 문학을 향한 내 열정보다는 당신때문이였다면 당신은 믿을수 있을가요? 책을 읽으며 난해한것들을 찾아내고 글을 쓰며 어려웠던것들을 찾아내여야만 난 당신과 대화를 할수 있는 빌미가 있다고 여겼지요. 먼저 다가온것은 당신이였지만 난 당신보다도 더 절실히 당신한테로 가까이 가고싶었다는걸 당신은 알았는지요? 당신은 내가 아득히 바라보며 선망하고있던 중견소설가였습니다. 당신을 만나기전부터 난 당신을 알고있었습니다. 당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의 숨결을 느꼈고 당신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난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글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도 모르게 내 생활속에 들어와있었고 난 이미 내 마음속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이였기에 당신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그라프를 변경시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당신만 바라보고있으면 깨알같이 줄어드는 자신때문에 나는 쉼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써야했는지도 모릅니다. 좀 더 키를 키우면 해와 이야기를 나눌수도 있을거라며 해를 향해 우로만 우로만 뻗는 해바라기처럼 난 당신을 향해 발돋움해야 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기다려지는것은 밤이였습니다. 밤공기를 깨고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도 뜸해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던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자취를 감출 무렵인 깊은 밤이면 난 컴퓨터앞에 마주앉습니다.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여나 푸수수한 머리를 뒤로 대충 묶은채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를 로그인합니다. 열에 한번쯤씩 만날수 있는 당신이였지만 메신저를 로그인하는 순간이면 난 늘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당신은 늘 바빴습니다. 신문기자였던 당신은 낮이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밤이면 창작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당신을 열흘에 한번정도 만날수 있는것도 저에겐 행운이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소중한 만남이였고 더 기다려지는 밤이였겠죠. 당신의 아이콘이 회색빛으로 오프라인이 되였을 때면 난 글을 썼습니다. 컴퓨터 저쪽에 있는 당신도 글을 쓰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아이콘이 파랗게 빛을 발하며 날 바라보고있는 밤이면 난 메신저대화창을 마주하고 컴퓨터에 매달려있는 박쥐가 되였습니다. 난 내 무지때문에 당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 넘 많았고 당신은 당신이 살아온 년륜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굳이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글만 놓고라도 며칠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듯싶었습니다. 그날 밤도 난 당신이 메신저대화창 오른쪽에 걸어놓은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오늘 진달래꽃을 봤어요?” 그날 낮에 전화할 때 당신은 진달래꽃을 보러간다고 했었거든요. “아니.” “왜요?” 내 눈이 커졌습니다. “난 이미 진달래꽃을 봤으니까.” “네? 못봤다면서요?” 난 잠간 헛갈렸습니다. 당신이 진달래꽃을 봤는지 말았는지. “아니, 오전에 너한테서 전화가 올 때 마침 지나가고있던 산에서 창을 사이두고 붉게 타는 진달래꽃을 봤어.” “그것도 본거얘요?” 입귀로 풀럭 실없는 웃음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보다도 너의 전화를 받는 순간 난 이미 진달래꽃을 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 몰라, 왜선지는. 길 떠난것이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지만 내친 걸음이라 그냥 갔을뿐이야.” 난 공연히 미안해지려 하고있었습니다. “저때문인가봐요. 타이밍을 못맞추고 전화해서 흥을 깨버렸나봐요……” “그게 아니야. 니탓이 아니야. 미안해할것 없어.” “그래두…” 당신의 표정이 어떠할지 궁금했습니다. “나 소원이 뭔줄 아니?” 소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습니다. 난 애초에 소원이란것을 가지고있었던지도 이제 기억에 아득합니다. “뭔데요?” “시골에 가서 사는거야. 자그마한 농가 한채 사서 뜨락에 터밭이나 가꾸면서 그렇게 살고싶어. 뜨락에 진달래꽃나무를 옮겨심고 봄마다 진달래향기를 맡으면서,흙냄새 맡으면서 살고싶어.” 당신은 아마 윤동주생가같은 아담한 전원의 농가 하나 머리속에 떠올렸겠지요? “여기까지 온건 다 시골을 벗어날려구 그런거 아니였어요?” “당분간일뿐이야. 소설을 쓰기 위해서 아주 잠간일뿐이라고. 난 돌아갈거야. 농사를 짓던 시골로 돌아갈거야. 지금 내가 속상한거 뭔줄 아니? 내 생각엔 내가 아직도 촌놈인데 다들 날 도시인이래. 연길사람취급하거든. 후~” 당신의 이야기에서 난 진한 고독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쩜 촌사람들에게는 도시인으로 보이고 도시인들에게는 촌놈으로 취급받는 당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칠수 없는 이방인이였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혼자였고 당신의 체험과 일관된 소설들도 사랑이 빠져버린 고독과 방황과 곤혹스러운 이야기들로 이루어진거라고 난 미루어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르고있었습니다. 철저히 혼자인 당신, 자신을 혼자로 만들어버린 당신이였으니깐요. 2 눈을 뜰가 말가 망설였다. 눈은 감고있지만 주위가 환함을 느낄수가 있다. 무거운 눈까풀을 들어 눈을 떴다. 눈이 부시다.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카텐사이로 해빛이 무수한 직선을 그으며 기여든다. 카텐을 아무리 꽁꽁 여며놓아도 쓸모없다. 어느쪽으로든지 쯤이 생기고 해빛은 거침없이 그곳으로 기어이 흘러들고만다. 해빛에 보이는 동동 떠돌아다니는 먼지들이 당금이라도 얼굴에 내려앉을것 같다. 심심한 먼지들, 종일 앉을 곳도 모르게 저렇게 떠돌아다니는게 지겹지도 않을가? 멀거니 먼지를 바라보다말고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흔들림에 금시 머리가 욱신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헛구역질이 나는것을 간신히 참고 엉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 슬리퍼를 질질 끌로 창가로 다가갔다. 카텐을 확 열어제꼈다. 두터운 카텐에 가려졌던 해빛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바람에 또 눈이 부시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있다. 아빠트단지아래 서있는 관상용복숭아나무 몇그루가 복숭아나무런듯 아니런듯 분홍의 혹은 흰 색의 비닐봉지를 꿰여든채 천연덕스럽게 바람에 몸을 맡기고서있다. 복숭아나무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린 아이들처럼 빙 둘러선 가운데에 자리잡은 문구장에서는 로인들이 문구를 치느라고 바삐 오간다. 각양각색의 모자들을 저마끔 눌러쓴 그 구부정한 모습들을 찬찬히 여겨보지 않으면 남자인지 녀자인지 알수가 없다. 계절조차 알수없는 로인들의 몸에서 눈길을 떼면 눈길은 갈곳을 몰라 허둥댄다. 문구장우의 허공을 가로질러 지난 전선줄에 어이없이 잠간 머물렀다가 다시 관상용복숭아아래에 오구구 모여서있는 키작은 관목들에 눈길이 꽂힌다. 아직 푸른 빛이 보일듯말듯 나무가지의 새움에 매달려있는지라 뭐가 뭔지 알수가 없지만 그 관목들에 익숙해진 눈은 해당화나무도 있고 라이라크도 있고 진달래꽃나무도 있음을 구별해보기라도 하듯이 보아낸다. 문득 바람 한오리가 휙 불어지나며 복숭아나무가지에 걸린 비닐봉지를 흔들어놓고는 관목나무들에 먼지 한웅큼 부리워놓고 간다. 봄이라지만 따스함은 느낄수 없는 3월 하순이라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종이쪼박같은것을 나르며 먼지냄새를 싣고다닌다. 숨막히고 갑갑한 창밖을 내다보다말고 창문을 열자 아직은 쌀쌀한 기운을 담고있는 봄바람이 거칠게 불어든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먼지가 섞여있는 공기를 아니, 바람을 가슴속으로 들이켰다. 가슴이 트일대신 오히려 더 갑갑해난다. 그렇게 얼마나 서있었을가? “전화 받으세요~ 전화 받으세요~” 핸드폰벨소리가 요란하다. 창가를 떠나 이불이 구겨져있는 침대로 돌아와 침대곁의 탁자우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액정에 일화의 이름이 번듯하게 떠있다. “왜?” “얘는,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니? 전화받는 센스가 왜 그 모양이야?” 일화의 목소리에는 쨍하고 해가 떠있다. “무슨 일인데? 용건만 말해.” “애두 참. 그래, 용건만 말할게. 우리 지금 방천으로 가려든 참이거든 . 얘들이 지금 방천구경을 하겠다잖아. 같이 안갈래?” 얘들이라니? “너 아직도 걔네들이랑 있는거니?” 얘들, 걔들—호칭이 참 딱하다. “응. 다른 사람들은 말구 그 있잖아. 외지에서 온 친구 둘만이야. 차는 한댄데 넘 많이 앉을수 없잖니? 네가 아무래도 적당할것 같아서 부르는거야. 같이 갈거지?” 안봐도 뻔할 뻔자. “싫어, 안가. 나 오늘 일이 있어.” “너랑 같이 가고싶어하는 사람 있는데. 그래도 안올거야?” 나랑 같이 가고싶어하는 사람?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일이 있어 안된다니까.” “계집애두. 알았어. 너 나중에 후회하지 마. 네 꿍꿍이속 내가 다 아는데…” 일화는 기분나쁜 웃음을 낄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내 꿍꿍이속을 네가 어떻게 알어? 나도 모르는데. 툴툴거리며 다시 이불속으로 기여드는데 “띠리링~”하고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귀찮은 광고메시지라 싶어서 무시한채 다시 해빛속에 떠도는 먼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다시 “띠리링~”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할수없이 핸드폰을 끄당겨 메시지를 확인했다. --만나고싶은데. 정말 안갈래? 어딜 안가냐구? 찍혀들어온 핸드폰번호는 낯선것이였다. 아리송한 기억속을 더듬으며 먼저 들어왔을 첫번째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야. 별 일 없으면 와주지 그래? 어제 일 벌써 잊은것은 아니겠지? 역시 낯선 그 핸드폰번호였다. 어제 일이라? 어제일이라면 인터넷으로 영화보고 낮잠자고 일화랑 술마시고…… 가만, 일화랑 술—그러고보니 어제 그 남자? 틀림없이 그 남자였을것이였다. “제가 마셔드릴가요?”하던 기분나쁜 남자. 내 술잔속의 술을 탐내던 남자. 그 남자라면 다시 상대할 필요가 없다. 난 그냥 가라앉은 기분때문에 술자리에 나가준것뿐이고 술자리에서 어울리다보니 그 남자랑 알게 된것뿐이니까. 어제의 시간들에 존재했던 남자를 오늘의 시간들에까지 끌여들여 피곤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메시지를 무시할가 하다가 일화얼굴을 봐서 대충 쓰기로 했다. --일이 있어서 못갑니다. 아니, 가지 않습니다. 메시지발송버튼을 누르는 내 입귀로 “픽~”하고 야릇한 웃음이 새여나갔다. 온라인에서 만난지 두어달쯤 시간이 흘렀을무렵, 당신과 난 오프라인에서 만났습니다. 지꿎은 여름장마비가 내리다 말다 하면서 온종일 질금거리던 날 오후였습니다. 낮이라 한적한 카페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심수봉의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지고있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우동을 먹고 카페로 자리로 옮긴 우리였습니다. 맥주잔을 기울이다말고 당신은 맛없게 국수발을 끊던 제 모습을 한참이나 나무람했습니다. 음식은 맛있게 복스럽게 먹어줘야 같이 먹는 사람도 맛있는거라고. 실은 나도 맛있게 먹었는데 먹는 모습이 맛없게 보였을뿐이라고 박박 우겨도 당신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난 당신을 빤히 쳐다보다말고 오른손을 쭉 펴서 당신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습니다. “아참, 내 손 봐요. 이쁘죠?” 당신은 왼손을 뻗쳐 내 오른손을 잡아쥐고 한참이나 들여다봤습니다. 그러는 당신의 모습은 진지했습니다. “정말이네. 손이 참 이뻐. 손톱에 매니큐어 칠했으면 더 이쁠거 같아. 아주아주 연분홍색으로 말이야. 진달래꽃같이 연분홍으로. 허허. 나 손톱에 매니큐어 칠해본적 있다~” 당신의 얼굴에서는 진달래꽃같은 엷은 미소가 스쳐지나가고있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피여나는 진달래꽃같은 미소를 바라보며 웃고있었던가요,말았던가요? “정말?” “정말이지. 아마 열일여덟 됐나? 손톱에 매니큐어 칠하고 기타를 탔어. 그때 어떤 여자애랑 막 사귈번했구.” “별걸 다하구 그래요.” 나는 “칫~”하며 당신 손에 잡힌 내 손을 뽑아 턱을 고이고 당신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게말이다. 나도 이상해. 여자들처럼 이쁜 액세사리랑 보면 막 갖고싶고 가슴이 활랑거린다니깐. 남의 눈길때문에 반지밖에 못하고 다니지만. 시계도 그냥 액세사리 로 간주하고 차고다니는거야. 허허. 그래선가? 널 보면 허전해보인다. 무슨 여자가 몸에 액세사리 하나 없냐? 귀구멍도 안뚫었잖아. 팔찌라도 하나 하지 그래?” 당신의 눈길은 텅텅 빈 내 손가락과 내 팔목과 내 목을 조용히 쓸어보고있었습니다. 나 도 텅텅 빈 손가락으로 내 팔목과 내 목을 만져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습니다. “거추장스러워요. 반지도 있고 팔찌도 있는데 안하고 다녀요. 귀구멍은 뚫을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어요. 가짜귀걸이도 못달아봤는걸요.” “넌 참 이상한 애야. 액세사리도 안하고 여자라는 말도 싫어하고.”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따스했습니다. 귀볼을 간지르며 불어가는 봄바람처럼. 나는 입을 다문채 이윽하니 당신의 눈속을 들여다봤습니다. 당신은 동그랗게 담배연기를 뿜어올렸습니다. 담배연기가 당신의 눈을 가려버리고 당신의 모습은 나한테서 저만치로 멀어집니다. “넌…” 담배를 쥔 당신의 오른손가락끝들이 파르르 떨립니다. 봄바람이 스쳐지난 진달래꽃잎처럼 파르르 파르르. “뭐가요?” “……” “무슨 말을 하려구요?” “…” 당신과 나사이에 숨막힌 정적이 흘렀습니다. 카페에 은은히 울려퍼지던 당신이 좋아한다던 심수봉의 노래소리도, 옆방들에서 간간히 들려오던 말소리도 갑자기 공기속에 증발해버린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밀페된 공간의 진공속에 당신과 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숨막히는 정적이. 얼마나 지났을가? “넌……사랑을 믿니?” 당신의 눈빛속엔 어떤 흔들림이 비껴있었습니다. 실바람에도 굼실굼실 일어날것 같은 어떤 흔들림이. 사랑을 믿다? 웬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결합이였습니다. 사랑은 믿고 안믿고가 아니라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다운거라고 난 생각하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난 믿고 안믿고를 따져주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믿죠. 사랑을 안믿어요?” “난 안믿어. 사랑도, 여자도. 여태 나에게 사랑은 없었어.” 난 당신의 얼굴을 스쳐지나는 고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둡기만 한 고독의 모습을. “사랑을 안믿는다면서 결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결혼은 그냥 결혼일뿐이야. 나에게 있어서 아내는 아내일뿐이고 딸애는 딸애일뿐이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사랑과 결혼을 따로따로 구분짓는 당신에게 난 무슨 말을 해줬어야 할가요? “…”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것은 내가 제대로 된 사랑을 못만났기때문이야. 내가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것은 아니라고. 아마 누구보다도 더 절실한 사랑을 원했던 까닭에 사랑을 믿지 않는지도 몰라. 난 참 오랫동안 외로웠다. 육체적으로 아니고 정신적으로 말이야. 내 주위엔 날 몰리해하는 사람들뿐이야. 그속에 있으면 난 갑갑하고 진절머리나. 난 한동안 소설을 잃어버렸어. 날 오해하고 경원시하는 사람들때문에 내 목숨같은 소설을 한줄도 써낼수가 없었다고. 나에게 숨통을 틔워줄수 있는 유일한 소설인데도 말이야. 진달래꽃같은 소설.” “…” “생활은 내 소설의 한부분일뿐이야. 난 소설을 위해서 사는거야. 나한테는 사랑을 할 겨를도 여유도 없어.” 난 갑자기 혼동스러워졌습니다. 당신이 소설을 쓰는것인지 소설이 당신을 만들어가는것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생활은 소설의 한부분이고 소설을 위해 사는 당신의 전부는 역시 소설이라니? 거기에 사랑은 빠져버리고. 당신은 어떤 존재였을가요? 3 “옷이 그게 뭐니?” 정글에라도 숨어들 양으로 격에 맞지 않게 군인들의 위장복이라니? 꺽두룩한 키와 모난 얼굴과 위장복은 어느 하나가 어울리는것이 없이 각각의 분위기를 연출하고있었다. 그 이상한 조합의 실체를 마주하고있을라니 가뜩이나 쓰린 위가 울렁이기까지 하다. “편하고 좋은데. 평소에도 이걸 잘 입어.” 까칠한 내 눈길을 느꼈는지 말았는지 색조없는 말들이 셈평스럽게 흘러나오고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 여자친구 있잖아. 근데 왜 그래?” “뭘?” 커다랗게 뜬 눈은 아무것도 읽어낼수 없이 눈빛이 얼떠름하다. “왜 자꾸 메시지 보내구 난리야? 하루에도 몇번이고 난 니 메시지 지우느라고 시간을 랑비해야 한단말이다. 올해 봄은 너때문에 내내 쌀쌀해.” 난 엄지로 태양혈을 지긋이 누른채 이를 뽁뽁 갈며 눈을 치떴다. “머 그냥. 그렇다고 당금 잡아먹을것처럼 노려보는것은 넘 한거 아니야? 나랑 안지 얼마나 됐다구 봄 내내라니? 넌 봄 내내가 고작 두세주일이니?” 심드렁한척하면서 따박따박 말대답질하는 모습이라니? 여러가지로 맘에 안든다. “네가 정말 맘에 별로 안든다. 그래 이렇게 봤음 됐니?” “이제 그만 하지? 어차피 오늘 날 찾은건 너잖어.” 히쭉 웃으며 식지를 빼들고 내 코를 살짝 건드린다. 기분이 슬슬 나빠질려는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찾았어. 실은 교원강습이 있어서 왔는데 어제 술 너무 많이 마셔서 앉아있을수가 없었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빠개질듯 아파서. 그렇다고 혼자 내버려두긴 내가 넘 아깝잖아. 누구라도 날 보살펴줘야 할거 아니니?” 궁금했던 답안을 대충 던져주고 쏘파에 비스듬히 기대여 누웠다. 킬킬킬 웃더니 탁자를 건너와서 내 다리를 들어 자기 무릎위에 놓고 앉는다.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나 착실히 해야지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내가 이러고 앉아있을테니까 좀 쉬여.” 싫지는 않다. “아~ 진짜 머리 아퍼. 공연히 술마셨다.” “누구랑 그렇게 많이 마셨어?” 글쎄 누구랑? 내가 누구랑 이렇게 많이 마셔야 하는데, 그것도 소주를. 어제 점심때쯤 연길역에 내려 사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나를 향해 손을 젓는 모습이 보였다. 훈이였다. 가다오다 채팅방에서 만난 훈이. 난 기분이 엄청 나쁠 때면 드문히 연변채팅사이트에 접속하여 채팅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낯도 코도 모르는 사람들과 부담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야한 롱담을 주고받느라면 기분이 슬슬 풀어지군 하였다. 간혹 가다 괴퍅한 사람이나 저질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지만 시스템에서 감옥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였기에 신경을 도사리진 않았다. 내가 떠나가버린 누군가때문에 힘들었던 그즈음 채팅방에서 만난 훈이는 귀국한지 얼마 안되는 미혼아빠였다. 훈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치고 할수없이 출국하여 얼마 안되여 연인이였던 여자는 아들을 낳아 훈이의 부모님한테 맡기고는 떠나버렸었다. 그렇게 미혼아빠로 된 훈이는 10년만에 귀국하여 부자간의 정을 키우고있는 중이였고 그런 훈이와 나사이에 공동한 언어가 있은것도 아니였지만 서로 편하게 대화할수 있는 상대였다. 낯선 남자와의 만남이란 생각하기에도 체증이 생길만한 일이였지만 난 만나기로 했다. 난 이미 남자를 만나고 남자를 알아가는 일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간주하고 이제 가볍게 아주 가볍게 치뤄가기로 했던것이였으니까. 남자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은 황사가 섞인 매캐한 바람이 불던 봄에 일화의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이미 작동되였고 훈이는 프로그램 작동전부터 점찍어둔 남자였다. 다만 온라인으로 만난 사이고 내가 살고있는 곳과는 거리가 좀 먼곳에 있다는 리유로 참여가 뒤로 밀려졌을뿐이였다. 어제 역에서 훈이와 익숙한 사이런듯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맥주 두병을 마시고 다방에 옮겨앉아 다시 맥주 한병을 마셨다. 그때까지는 말짱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훈이의 뜨거운 눈길속에서 난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내가 원한다면 남자쯤이야 얼마든지 가질수 있다는 저속한 자신감까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훈이의 입술이 내 입술을 거쳐 젖가슴에 이르는 짜릿한 애무를 난 거부하면서도 즐기고 있었다. 려관으로 이끄는 훈이의 손을 뿌리치고 신화서점에 갈 때까지 정신은 말짱했다. 술 한방울 입에 대지 않았을 때보다 더 말짱했다. 약속대로 신화서점앞에서 15년이나 련락이 끊겼던 펜팔친구 정을 만났고 그때부터 나는 이미 취하기로 작정을 했던가 말았던가. 정과 함께 모아산기슭의 뉴코아별장으로 향했고 국화방에 앉아 정이의 첫사랑인 내 단짝친구 서연이가 오길 기다려 우린 술잔을 기울였다. 15년의 세월이 흐른후 정은 맥주 한잔에도 얼굴이 붉어지던 숫기많던 소년으로부터 엔간한 소주에도 끄떡하지 않고 열변을 토하는 수완있는 장사군으로 변해있었다. 정은 첫사랑 서연이를 마주한 설레임에 공연히 들떠서 한잔 또 한잔의 소주를 굽냈고 나는 나대로 혼자만의 희비에 엇갈려 소주를 거부감없이 위속에 쏟아넣었다. 뉴코아에서 나올 무렵에는 내 몸전체에는 알콜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우린 다시 스탠드바로 향했고 거기서 억수로 맥주를 들이마셨고 열쇠를 두고 나온 정이네 집에 열쇠수리공을 불러 문을 따고 쳐들어갔다. 서연이는 한켠에 팽개친채 나와 정은 15년세월의 이야기들을 안주하여 밤새도록 캔맥주를 들이키다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다. 잤는지 말았는지 온통 어수선한 생각으로 뒤숭숭하게 누워있다가 서연이가 떨꺽거리며 술상을 치우는 소리에야 겨우 눈을 떴었다. 그러니 정확히 오늘 새벽까지 난 내 몸속에 알콜을 부어넣고 있었다. 그게 바로 다섯시간전의 일이다. 그러니 내 골통과 몸이 고통스러울수밖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소주 마셨어. 너때문이야.” 훈이와 정을 구분하지 않은채 난 친구라고 일축해버리고말았다. 내가 낱낱이 고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왜 내 때문인데?” “네가 지난번에 소주 안마시겠다는 날 억지로 마시게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어제 또 소주 마신거지.” 정말 그랬다. 지난번에 소주 마신 경험이 없으면 난 어제 마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야 그냥 니가 못마신다니까 도와줄려고 그랬을뿐인데. 일화친구여서 도와주느라구.나까지 끌어들여 원샷하게 한건 누군데?” 역시 그냥 넘어는 못가준다. 그래서 나한테 넌 처음부터 싫었던 남자라고. 내 입술 대인 술잔을 건네주기 싫었던 남자. “여자친구하고는 잘 돼가? 언제 결혼할건데?” 내 다리를 무릎위에 놓고 쉬게 해주는 남자한테 여자친구이야기를 하는 난 이제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그럭저럭. 뭐 별로 버성길 일도 없는데 아기자기하지도 않아. 결혼이라~ 언젠가는 아마 하겠지.” “결혼할 여자친구도 있다는 남자가 나랑 만나고있다는게 찔리지도 않아? 넌 방탕한거니?” “여자친구가 있음 어떻고 안해가 있음 어때서? 유부남이 애인 만나는것은 괜찮고 결혼할 여자 있는 총각이 다른 여자 만나는것은 안된다는 법이라두 있어?” 도덕에 결릴 뻔한 일을 말하면서도 진지한 얼굴이라니?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를 역설하는 얼굴과 다를바없다. 내 술잔의 술을 마셔주겠다고 할 때부터 진지한 모습으로 탐했던것은 역시 내 입술이였나보다. “세상 다 살았구나. 불쌍하다, 너랑 결혼할 여자가. 그 여자가 내가 아니여서 다행이구.” “우리 그냥 만나는거지? 난 니가 좋아.” “나랑 결혼할거니?” “누구랑 결혼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지금이 중요해. 너랑 나랑 같이 있는 지금이.” 아무래도 위장복이 어울리는것 같다. 싸구려사유를 가진 놈에겐 시장거리 난전에서 파는 싸구려위장복이 제격일것이다. 위장복 입은 진지한 얼굴의 남자랑 진달래랭면점에 가서 물렁물렁한 맛없는 랭면을 두어저가락 먹은 뒤 해정술 하자는 남자를 뿌리치고 난 숙소로 갔다. 그리고 잤다. 아무 궁리도 없이. 진달래꽃피는 봄이 가고 온통 푸름을 자랑하던 여름도 가고 말라버린 락엽들이 누군 가의 발길에 채이면서 쓸쓸한 기운을 머금은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이리저 리 뒹굴 때 난 내 존재의 의미를 가끔씩 아주 가끔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당 신의 눈에 보이는 난 녀인이 아닌 계집애였습니다. 똑 부러지게 하는것도 없으면서 천 방지축 설치기만 하는 얼떠름한 계집애. 가끔은 사전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띨 띨하다>>는 규정어가 붙기도 하고 가끔은 <<철딱서니없다>>는 규정어가 붙기도 하는 호칭은 당신만이 부를수 있는것이였습니다. 내 주위사람들에게 난 분명히 나름대로 착실하고 소심한 참한 녀자였음을 당신은 꿈에라도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난 정말 띨띨했는지도 모릅니다. 난 띨띨했기때문에 당신의 수필을 읽으면서도 소설을 읽으면서도 외롭고 험난한 당신의 삶이 안스러워서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난 띨띨했기때문에 행복했던 순간보다 불행했던 순간이 더 많은 당신의 가슴에 쌓인 고통들을 비워내고 당신에게 웃음을 선물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난 결국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싶지만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런 무가내를 느끼신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조차 내비칠수 없는 그런 무가내를. 그럼에도 난 여전히 띨띨했습니다. 어느때부터인가 난 당신한테서 불안함을 느끼고있었습니다. 영문없이 끈적끈적 달라붙는 불안감을 아무리해도 떨쳐버릴수가 없었습니다. 가을바람이 몹시도 불던 날 오후, 일요일인데도 난 공개교수준비로 락엽에 대한 동시를 쓰고있었습니다. 한참을 쓰다 지우다 하는데 당신이 로그인하였습니다. “뭐하고있었는데?” 당신이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항상 내가 먼저였는데 그번만은 당신이 처음으로 말을 먼저 걸어왔다는것을 당신은 알고계셨을가요? “동시 쓰고 있었어요.” “동시? 동시라~ 그러고보니 너한테 참 어울리는데. 동시쓰는 일이.” “네? 전 동시인도 아닌데 뭘 그래요? 어려워죽겠는데.” 전 입이 뿌루퉁해서 투덜거렸습니다. 메신저대화를 하면서도 저는 항상 입력하는 메시지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표정까지 곁드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하나도 안어려워. 니가 워낙에 띨띨하잖냐. 그리고 철없고. 그러니 니 심리년령에 딱 맞는 일이라니까. 그냥 니 맘가는대로 쓰면 동시 될거야. 넌 동시 안쓸려고 해도 니 손에서 나온 시라면 동시로 되게 돼있어.” 아마 당신은 즐겁게 킬킬 웃고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말에서, 아니 글줄에서 난 웃음을 읽고있었으니까요. “앙~” 난 나혼자만의 멘트를 날렸습니다. 누군가 귀엽다고 했던 그 멘트. “네 수필 읽었어. <죽음을 느끼며>를. 왠지 너한테는 안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띨띨이가 언제 그런 심각한 생각을 하고있었지?” 당신도 심각한척하는 표정을 지었을테죠? “띨띨이도 죽을수 있으니까요. 저에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권리가 있어요.” “죽음에 대한 권리라? 만약에 죽는 방법을 선택할수 있다면 넌 어떻게 죽고싶니?” 죽는 방법? “이왕이면 자연사였음 좋겠는데. 만약 선택할수 있다면 전 안면사할래요. 수면제 먹고.” “그래? 난 추락사 하고픈데. 높은 곳에서 휘이잉 몸을 날려 뛰여내리는거. 생을 마감하는것치고는 스릴있잖어?” 전 흠칫했습니다. 그 순간, 빌딩꼭대기에서 씨이익 웃으며 아래로 몸을 날리는 당신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던거죠. “추락사는 너무 끔찍해요. 머리통이 으깨지고 피가 질펀히 뿌려지고. 난 그래도 죽는줄도 모르게 죽는 안면사가 좋아요. 내가 알았을 땐 난 이미 죽어있겠죠.” 난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창문 하나만 열면 쉽게 진행할수 있는 추락사, 그것은 용기있는 자의 선택이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여내리는 순간 우리에겐 날개가 달리는거다.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수 있는 날개가.”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맞아요. 당신이 좋아하던 이상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당신은 그 소설속의 주인공만큼이나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것일가요? “날개를 원하세요? 그래서 추락사가 부러운겁니까?” 난 당신에게 추락으로 인해 날개가 달리는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내가 당신의 날개가 되고싶었습니다. “난 자유롭고싶어. 사람들이 날 질투하고 경원시하고 날 헐뜯고 나한테서 등을 돌리는것쯤은 참을수있어. 구질구질한 가난때문에 내 가족이 날 비켜가는것까지도 참을수 있어. 하지만 내 소설을, 목숨같은 내 소설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하하는것은 견딜수가 없단말이야. 난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고싶어. 난 그냥 소설만 쓰고싶을뿐이야. 세상사에 관심없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듯 혼자서 소설만 쓰고싶을뿐인데 남들은 그게 아니더라. 공연히 날 씹고 시비걸고. 지금은 책읽는 사람보다 게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책읽는 사람이 더 많아질거라는 희망을 안고 훌륭한 소설만 쓰고픈데……” 그랬습니다. 그즈음 당신은 외면당하는 당신의 소설때문에 힘들어하고있었습니다. 난 알지도 못할 무슨 즘이요 무슨 주의요 하는것들과 어울린다느니 안어울린다느니 하며 평론가들이 시야비야 하고있었고 문학동인들도 언어조합이 어떻소 창작기법이 어떻소 하며 웅성거리고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날고싶어했습니다. 날개가 돋쳐 자유롭게 날고싶어했습니다. 날수 있으면 당신을 힘들게 하는 모든것들을 떨쳐버릴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테죠? 그래서 당신은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날고싶었던거죠. 추락사를 하면서라도. 그날 당신과의 대화를 마치고나서 오프라인이 된 당신의 아이콘을 멍하니 바라보며 난 눈앞에 자그마한 날개 한쌍을 떠올리고있었습니다. 하얗게 눈부신 작은 날개를. 4 제법 따스한 봄바람이 살살 불어온다. 이제 5월이니까. 봄바람이 스치고 지난 자리마다 새싹들이 파르르 파르르 웃으며 일어선지가 어제같은데 그 새싹들은 어느새 간지럼을 타며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새싹이 아닌 풀로 꽃으로 나무로 자라나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들때문에 세상은 온통 푸른 빛이다. 커다란 저수지우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있다. 반듯하던 수면이 주름을 잡으며 일렁여 잔 파문을 멀리로 밀어간다. 저수지에 릴 낚시를 던진채 까딱않고 앉아있는 정. 정의 뒤모습이 웬지 외롭다. 자기보다 두살 년상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여자는 다단계판매를 하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고 출국을 해버린 마당에 혼자서 장사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정, 이젠 장사가 어지간히 자리를 잡고 가끔은 여유를 즐길수 있다는 정, 정에게 안해는 의사불통의 여자란다. 정이 원하는 여자는 서연이처럼 아련하고 다정다감한 현처량모인데 서연이는 이미 정에게서 멀리 비껴나가 자기의 가정을 갖고있은지도 8년이다. 정에게 이제 서연은 어떤 사람일가? 난 멀리서 정의 뒤모습을 바라보다말고 정이 있는 쪽으로 스적스적 발걸음을 옮겼다. “정, 넌 서연이가 좋니?” 정의 눈길은 낚시대의 찌에 쏠려있다. 이윽토록 말이 없다. “넌 왜 서연이를 다시 만난건데? 왜 그냥 잊지 그랬어?” 나를 피끗 돌아보는 정의 눈빛은 막연하다. 역시 이윽토록 말이 없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정의 곁에 나란히 섰다. 바람이 내 볼을 스쳐 다시 정의 얼굴을 스쳐 저수지우로 스쳐지나갔다. 제법 따스한 바람이. “보고싶었어. 단 한번이라도 보고싶었어. 그래서 련락을 했던거야.” 문득 얼굴도 돌리지 않은채 들려오는 정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좋아한다던 말도 변변히 못하던 정의 입에서 보고싶었다는 말이 절절하게 흘러나오는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보다. 그 세월이 만들어간 사람은 역시 나름대로다. “그럼 이제 어쩔거야? 니 마음 지금 홀가분한거 아니지?” 서연이를 바라보던 정의 그 련민의 눈빛을 난 잊을수가 없었다. 15년 세월이 지나서도 다를바 없는 그 눈빛이라니. “그러게. 휴~” 정은 낚시찌에 눈길을 꽂은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불륜이라도 저지를거니? 그렇게 절실해? 담은 있어?” 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만 들린다. “서연일 좋아하는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는것은 사실이구…… 15년전 서연이한테 고백도 못한채 못난 모습으로 떠나버려서 잘난 모습을 보이고싶었던것도 사실이구…… 모르겠어. 15년동안 내내 만나고싶다는 생각만을 했었는데…… 정작 만나고나니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찌해야 될지. 솔직히 난 가정을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가정을 버릴 생각은 없구……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서연이만 보면 가슴이 아파서 당금이라도 서연이를 갖고싶은데 어찌해야 되는거니? 난.” 정은 모순속에서 헤매고있었다. 문제를 풀어나갈 끈 한오리 못잡은채. 난 한 손을 뻗쳐 정의 손을 잡아쥐였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정의 눈을 들여다봤다. 정의 눈길과 부딪치는 찰나 그 눈길을 읽을새도 없이 정은 씩 웃으며 머리를 돌려버렸다. “아, 그만 말하자. 나 오늘 훈춘에 그냥 너랑 친구들이랑 놀려고 온거야. 복잡한 머리도 식힐겸. 너 알잖아. 이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서연이지만 속심말은 오히려 너랑 더 잘하는거. 너한테 남의 속 뽑아내는 못된 재간이 있어.” “후훗~ 자식두. 나두 여자야. 내가 널 좋아할지도 모르니까 속 다 보이지 말어.” 돌아보며 싱긋 웃는 정의 얼굴에는 쳇하는 표정이 씌여져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사이 밝지만 않은 정의 얼굴을 보면서도, 억수로 술을 마시는 정을 보면서도 난 서연이가 이미 리혼도장을 찍은 마당에 남편과 함께 살고있는 사실을 말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가정이란 줄을 잡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가정을 지켜가려는 서연이의 부탁때문만이 아니였다. 서연이는 정에게 갈수 없는 사람이였다. 정을 만나고나서 기운없어하고 심란해하고 앓기까지 하는 서연에게 정이랑 사랑을 할거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서연은 정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정에게 안기고싶다고 했다. 그런 서연에게 난 “너 어디까지 갈수 있는데? 안기기만 할거야? 넌 정이랑 섹스 할수 있니?”라고 적라라하게 물었고 놀란 기색을 짓던 서연이는 “뭐…그런것까지 해야 하니? 난 아직 거기까진…그냥 마음으로 사랑하기만…”라고 떠듬떠듬 내뱉었었다. 그랬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남이야 불륜을 밥먹듯이 례사롭게 저지르든 말든 서연이는 륜리와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저지를 사람이 아니였다. 그런 서연이였기에 리혼서류까지 정리하고서도 붙잡는 남편과 한 집에서 한 이불속에서 살고있는게 아닌가. 어쩜 서연에게는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남자로는 남편하나뿐일지도 모른다. 서연이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으니까. 정이 훈춘에서 놀고 돌아간 날 나는 메신저에서 훈이의 아이디를 삭제해버렸다. 정이와 너무 다른 훈과 서연이와 너무 다른 난 어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린 각자 서로에게 일회용이였어야 했다. 그러는게 세상에 덜 미안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한오리의 바람처럼 불어간 흔적도 없이 어딘가로 숨어버렸습니다. 립자로 되여 공기속에 흩어져버렸을 당신. 당신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당신은 생각해보셨습니까? 난 당신이 사라져버린줄도 모르고있었습니다. 어느날부터인가 회색빛이 된 당신의 아이콘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일주일이 되도록 파란 빛을 발할 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난 전화를 넣었고 핸드폰은 불통이였습니다. 블로그에도 카페에도 어디에도 당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말았습니다. 난 믿고싶지가 않았습니다. 헌데 현실속의 당신과 련결된 핸드폰은 불통이고 가상공간의 당신과 련결된 메신저는 오프라인인데 난 어디에 가선 당신을 찾아야 하는걸가요? 무작정 당신이 근무한다던 신문사로 뛰여갔습니다. 두시간동안 차를 타고 연길로 향하는 도중 내내 당신생각뿐이였습니다. 창밖의 눈덮인 산야보다도 내 마음은 더 창백했습니다. 차라리 투병중이라는 소식이라도, 차라리 출국했다는 소식이라도 반가울것 같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내 세상에서 있었던듯이 없었던듯이 깨끗이 사라져버린다는것은 받아드릴수가 없었으니깐요. 하지만 신문사에 이르러 당신이 앉았던 의자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고 그 사람에게서 난 당신은 사직서도 올리지 않은채 모든 련락이 단절된채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순간, 머리속은 하얗게 비워지고말았습니다. 기계적으로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 신문사를 빠져나오다가 갑자기 심장이 콩콩거려 숨이 가빠왔습니다. 병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겐 심장유기종합증이란 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때문에 가끔 가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우리만치 심장이 빨리 뛰였습니다. 그날도 병때문에 심장박동이 빠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지로 들이쉼을 길게 쉬며 진정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가슴만 아파왔습니다. 마음이 아픈게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고 굳이 고집하고싶었습니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난 가슴이 아프다고 중얼거리며 형언할수 없는 아픔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있는 곳으로부터 쿡쿡 찌르는듯하기도 하고 터질것같기도 하고 쪼각이 나버릴것 같은 찌릿찌릿하면서도 먹먹한 아픔이 목구멍으로 터져나올듯 말듯 치밀어오르다가 온몸으로 전율하며 흩어졌습니다. 발버둥질하며 몸부림치고싶고 “으악~”하고 비명소리라도 지르고싶은 고통을 절감하는 내 머리속엔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당신”이라는 대명사일뿐 당신의 얼굴도 목소리도 ,당신의 그 무엇도 아니였습니다. 그냥 당신일뿐이였습니다. 가까워온적 없었던듯이 머얼리 떨어져있는 잡을수도 없고 잡아서도 안되는 막연한 당신일뿐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머리속에 들쑹날쑹 남아있는 기억의 잔해들은 당신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시간과 공간들을 한웅큼씩 쥐여다가 아파하는 내앞에 하나둘 부려놓았습니다. 어쩔수 없이 난 그속에 파묻혀 아픔들을 무마해야 했던것일가요? 사라진 당신때문에 아파해야 했던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했던것일가요? 사랑을 믿지 않는 당신을. 5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껏 기염을 부리고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데다 해볕이 정수리가 따갑게 내리쬐고있었다. 후끈후끈 녹아버린 아스팔트길은 당금이라도 신발바닥을 척 붙잡고 늘어질듯싶고 가로수들의 이파리들이 폭염에 시달리다못해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려올라가면서 시원한 비 한줄금, 바람 한오리를 목타게 기다리던 어느날 정오무렵이였다. 난 일화의 가게에 앉아 선풍기를 멀리한채 죽어라고 부채질을 하고있었다. 컴퓨터 한대와 타자기 한대, 복사기 한대가 전부의 돈벌이수단인 <<일화타자사>>는 가다오다 들리는 손님들로 한적하기만 하다. 컴퓨터가 가전제품으로 자리매김을 한지도 꽤 오래된 세월이라 굳이 돈을 팔며 타자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했다. 그럼에도 타자실안은 더웠다. 부채질을 할수록 얼굴은 더 화끈거렸다. “지금 몇신데 이러고 있니? 출근안해도 돼?” 일화가 던져오는 물음엔 근심이 한올도 서려있지 않았다. “수업없어. 그냥 병원간다고 나왔어.” 나는 무덤덤하게 뱉어내며 껌을 꺼내 종이를 발라 입에 놓고 짝짝 씹었다. 무료할 때엔 껌씹는 일이 심심한 입을 달래기엔 적당한 짓거리임에 틀림없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됐니? 모범생이.” “언제부터랄것도 없어. 사람은 워낙 량면이잖냐. 난 모범생이였던 나의 다른 한면을 지금 발굴하고있는 중이라구.” 나는 스스로도 말이 멋져서 쿡쿡 웃어주었다. “문자쓰지 마. 고리타분하긴. 정은 요즘 잘 있대?” “정? 잘 있겠지. 왜 정한테 관심이 있니?” 나는 깐죽거리며 일화를 바라보았다. “관심은 무슨? 너 정을 좋아하는거니? 그날 보니까 너와 정사이가 아주 가까와보이던데. 그냥 친구가 옳긴 하니?” “넘겨짚지 마. 그냥 친구일뿐이라구.” “그럼 그 앤 어떠니? 사귈 생각 없어?” 일화는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애라니? 누구?” 나는 부채질을 더 열심히 해댔다. 그럼에도 얼굴은 더 화끈거렸다. “얘는? 내 친구말이야. 전번에도 연길에서 둘이 만났댔다면서?” 일화는 몸을 반쯤 돌려 나를 쳐다보며 눈을 올롱하게 떴다. “허참. 그냥 커피 한잔 마시구 랭면 한사발 얻어먹은것뿐이야. 체통하고는 다르게 입술이 얄팍하네. 그새 고해바치데?” 나는 껌을 짝짝 씹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한테 직접 말한것은 아니고. 나도 얻어들은것이야.” 일화가 얻어들은것이라면 분명히 일화왼손켠에 앉았던, 날 그쪽이라던 사람이다. “걔한테서 들었겠구나. 너 걔랑 보통사이 아니지?” 일화의 얼굴에 설핏 홍조가 비껴지난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일화가 입을 열었다. “너니까 말하는데 우린 애인사이야. 사귄지 거의 1년이 됐어. 사람사는거 뭐 있니? 즐겁게 살다가 가는거지. 한국에 가있는 내 남편한테 녀자가 없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봤어. 그렇다고 화가 나는것두 아니구. 그냥 모르는척 지금을 즐기며 사는거야. 걔한테두 애인은 나말고 다른 녀자가 더 있거든. 질투하지도 않아. 나한테 오면 내가 받아주고 날 떠나가면 보내주면서 가볍게 만나고 헤여질뿐이야.” 담담하게 말하는 일화의 어조에는 아무런 감정색채도 실려있지 않았다. “…” “너도 걔랑 만나고싶으면 만나. 걔도 널 많이 좋아하는 눈치든데. 어차피 니들…” 일화는 말을 끊고 내 눈치를 힐끗 살폈다. “뭐? 뭔 이야기 할려고?” 난 갑자기 긴장해졌다. “니들…니들 그날 밤 관계 가졌다면서?...” “관계?무슨 소리야? 언제?! 아니야! 아니라구. 내가 왜 그러는데?” 난 부채를 내던지며 발딱 일어섰다. 그 서슬에 씹고있던 껌이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캑캑거리는 날 일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고있었다. “근데 그 앤 일 치렀다고 그러더라. 걔들이 훈춘에 놀러와서 내가 처음 널 불러내던 날 너랑…” 나를 바라보는 일화의 얼굴에는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력력했다. “아니라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깟일 가지고. 그게 머 별게라고.” 난 눈을 할기죽거리며 다시 의자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랬다면 말구. 암튼 넌 내 친구야. 내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 알았지?” 일화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공연히 <<친구>>라는 말에 오금을 박고있었다. “언젠 친구 아니였냐?” 난 시들하게 대꾸하며 방금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애인이 되여줄래? 난 피씩 웃어버렸다. 정이의 친구였다. 정이랑 서연이랑 나랑 함께 왕청에 있는 만천성에 1박2일로 놀러갔던 정이의 친구. 말꼬투리를 잡아 정이를 몰아주는 날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참 희한한 여자야.” 하고 혀를 차던 정이의 친구였다. 남자치곤 꽤 수다스러운 그도 안해를 출국시킨지 반년만에 외로움을 느꼈는 모양이다. 나는 핸드폰버튼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썼다. --애인 아무나 하냐? 심심하면 술집근처에 가서 어슬렁거리다가 싸구려여자나 사라. 아마 그게 더 경제적일거다. 그럼 행운을 빌면서 이만~ 나는 다리를 무릎위에 꼬아올리면서 발송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발송했다. 서비스로 <<매롱~>>하는 아이콘을 잊지 않고 넣어주면서. 그러고나서 난 잠간 아득한 눈빛으로 채팅방사이트에 접속하는 일화를 바라보았다. 일화랑 친구라? 그 남자랑 관계? 정이의 친구한테서 날아온 애인신청과 훈이와 그리고…… 난 이미 그젠날의 모범생이 아니였다. 내 주위에서 은근히 감돌던 싸늘한 기운의 보호막을 잃어버린 누구든지 노크만 하면 범접할수 있는 그런 녀자가, 내가 싫어하는 녀자가 되여가고있었다. 띨띨한 계집애보다 별 나을게 없는 오히려 더 멍청한 녀자가. 무덥던 날씨보다 더 찜찜하던 일화와의 대화가 오가고나서 한달후 일화의 남편은 귀국을 했고 일화는 아무런 일 없었던듯이 남편옆에 붙어서서 나와 친구들을 초대했다. 나도 아무런 일 없었던듯이 일화가 타자사 잘 운영하고 아이 뒤바라지를 잘한다고 일화남편에게 구구히 칭찬을 했다. 날씨는 역시 더웠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한오리 썰렁한 랭기가 바람처럼 스쳐지나고있던 계절이였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느낄수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당신. 당신이 없는 세상은 하나도 변한것이 없다는것을 당신은 알고계십니까? 당신이 없이도 신문은 매일매일 발행되고 당신이 없이도 사람들은 어제인듯 래일인듯 오늘을 즐기며 살고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사람들은 심심할줄을 모릅니다. 껌대신 당신대신 그들에겐 또 새로이 씹어야 할 존재가 생겨버린거죠. 하지만 당신이 없는 난 이미 내가 아닙니다. 당신이 말했던 계산식을 당신은 기억하고있나요? <<100-1=0>>을요. 이제 그 계산식의 의미를 알것 같네요. 분명히 부등식이여야 할 계산식이 등식을 이루는 원인을 알것 같네요. 나한테서 당신은 그 1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냥 잃어버린것은 당신 하나뿐인데 난 모든것을 잃고말았습니다. 이제 띨띨한 계집애마저 될수 없는 나. 당신은 저의 전부였으니깐요. 당신이 그 계산식이 <<하나를 잃었는데 세상 전부를 잃었다는 의미야.>>라고 말할 때 난 그랬죠. <<100-99=100>>도 될수 있다고. 내가 갖고있는 모든것가운데서 다른것은 다 잃고 당신 하나만 남으면 저에겐 온 세상이 남은거나 다름없으니깐요. 난 이제 가슴속에 남은 당신과만 이야기할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을 만난후로부터 잠간 쉬여있었던 가슴속의 당신을 이제 불러깨웁니다. --진달래꽃이 보이나요? --난 지금 하늘을 날고있어. 높고 푸른 하늘을. --진달래꽃향기를 실은 봄바람이 부나요? --하늘을 나는 이 기분 넌 모를거야. 띨띨이. --진달래꽃향기가 가슴에 스며드나요? --날개가 있으니 참 좋다. 내가 원하는대로 어디든지 갈수 있어. --저 이제 그만 힘들어할래요. 진달래꽃피는 봄은 이제 싫어요. --아~저기. 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이 보이네. 하얀 양떼들이 흐르는 초원이. --저 지금 병들었던 내 맘을 치유하는 중이얘요. 근데 처방이 뭔줄 아세요? --난 인간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아. 인간만큼 질린것은 없어. 난 자유롭고싶으니까. --처방이 남자얘요. 남자. 웃기죠? 남자때문에 멍든 가슴 남자로 치유하는거 당연하죠? --아, 시원하다~바람이 분다~ 하늘에서 바람이 분다~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 --생각밖에 외로운 남자가 넘 많아요. 저 역시 그들한텐 약처방이 될지도 모르죠. 저 넉넉하니까. …… …… 대화는 자꾸 어긋납니다. 당신과 난 이젠 그만큼 멀어진것일가요? 지금의 날 당신은 알아보실수 있을가요? 난 이제 더는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당신이 떠나버린 지난 일년동안 난 변해버렸습니다. 아니, 변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떠나버리고서야 난 당신을 향하여 열리지도 달려가지도 못했던 무엇인가에 갇혀있던 내 마음을 후회했거든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자유로웠던들 간곳조차 모르게 당신을 떠나보내진 않았을겁니다. 그전에 붙잡았을거죠. 아마? 그래서 난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들도 알아가기로 했습니다. 남편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내 몸을 거쳐간 3월의 그 남자, 내 술잔을 탐내던 남자에게 몸을 열 때 내가 떠올린 사람이 당신이였다면 당신은 수치스럽게 생각할것인가요? 난 그냥 의식을 치뤘을뿐입니다. 당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에게 나를 던질수 있는 의식을. 남자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작동의식을 치뤘을뿐입니다. 하지만 단 한번뿐이였습니다. 친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는 단 한번뿐이였습니다. 난 내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싶었습니다. 내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면 , 남자들을 향한 마음이 열려있으면 당신에게로 가는 마음도 자유로와질것이 아닐가요? 남에겐 불륜으로 보일 사랑이 나에겐 로맨스일테니까. 6 이외로 담담했다. 방문취업비자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나 리혼제의를 들을 때나 듣고들어 신물난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남편은 담담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난 내가 좀더 일찍 떠나길 남편이 기다리고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올 일 없는 집에서 내 숨결이 느껴질것 같은 자질구레한것들을 치워버리고 짐을 챙기는 내앞으로 남편은 뭣인가 휙 던져왔다. 내 발치에 가볍게 내려앉은것은 한장의 그림엽서였다. 푸른 하늘이 시원히 높게 트인 그림엽서. --띨띨아, 지금 여긴 바람이 불어. 시원한 바람이. 갑작스레 사라진 나때문에 당황했었지? 떠나는것은 언젠가는 돌아가기 위한것이야. 숨막힌 곳을 떠나서 숨통을 트이고나면 다시 갑갑함과 외로움을 견딜만한 면역력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려야만 했던 내 심정을 띨띨한 니가 알았을가? 아니, 어쩜 니가 나보다 더 똑똑했는지도 몰라. 안면사하고싶다는 니가. 죽는 순간까지도 편하고싶어하는 니가. 추락사 --아직은 시간이 안됐어. 난 지금 날개가 달렸어. 날개가. 난 지금 자유롭게 날고있다. 자유롭게 훨훨~ 글은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엽서를 떨어뜨리며 물먹은 솜처럼 스르르 땅바닥에 물앉는 나를 남편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 만나러 학교에 갔다가 접수실에서 전해받은거야. 당신 핸드폰이 안된다며 주더라. 그자리에서 구겨버리고싶은걸 여태 간직하고있었어. 난 당신이 떠날줄 알았어. 당신은 조화롭지 못한 가정을 떠나기 위해서 나랑 결혼한거지 나를 사랑해서 한거 아닌줄 알고있었으니까.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긴 마찬가지구. 우리사이엔 애초부터 사랑이란것은 없었어. 그래두 부모님들세대처럼 끝까지 갈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당신은 늘 흔들렸어. 바람속에 서있는듯이. 어쩜 당신주위로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갔는줄도 모르겠구. 그런 당신을 난 언제면 떠날가 언제면 떠날가 하면서 바라보았어. 당신이 가고싶다면 언제든지 보내기로 했어. 그러고보니 그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일지도 모르겠네.우리사이에 아이가 없는게 다행이야. 서로를 이어주는 아이가 없는게. 지금 당신의 선택이 가장 훌륭한 선택일지도 몰라. 혼자서 나몰래 방문취업시험 칠 때부터 당신은 떠날 준비를 하고있었던게 아니라고 말할수 있어? 어차피 떠날 사람 돌아올것도 아니니까 아예 리혼서류 정리하고 가는게 당신이나 날 위해서 나을수도 있어. 이제 우리 둘 다 상대로부터 자유로와지는거야. 자유로와……” 남편은 준비해온 말을 하듯이 단숨에 긴 말을 토해냈다. 그동안 가슴에 서렸던 곰삭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듯이. “한가지만 묻자. 그거 보낸게 누구야? 당신의 생일에 왔던 당신 친구 정이야? 당신 지금 그한테로 가는거야?” 난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정이 아니라고. 바라보기만 하는 서연이를 대범하게 한번 안아주고 몇날며칠을 술만 퍼마시다가 원양어선을 타버린 정이 아니라고 말할수가 없었다. 머물듯 말듯 바람처럼 내 주위에서 스쳐다니다가 바람처럼 스쳐지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라고 말할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인줄 알고있는게 남편에겐 더 편할지도 몰랐다. 그쯤은 나한테 덜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난 려행용트렁크를 끌고 집을 나섰다. 밖에선 바람이 불고있었다. 가을바람이. 나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높고 푸른 하늘은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그 하늘로 노랗게 물든 가을락엽 하나 실은 바람이 불어가고있었다. 난 려권을 꺼내 뿍 찢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또 그리고 그림엽서 한장 손에 들고 발걸음을 뗐다. 시원한 하늘이 펼쳐져있는 그림엽서 한장 들고서. 그런 내 얼굴도 바람이 불어지난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내 얼굴을 만지며 바람은 속삭인다. --난 날개가 있어. 훨훨 날수 있는 날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