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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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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 람 댓글:  조회:411  추천:0  2011-02-06
1 어느새 창밖엔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봄이라지만 3월의 하루해는 짧았다. 오후 내내 자는듯 마는듯 흐리멍텅한채 뒹굴고 있었던 이불속에서 기여나와 세수를 하고 외출준비를 하였다. 평소에 옷장안에 걸어만 두던 레스달린 록색블라우스와 까만 스카트를 꺼내입고 거울을 마주하고 서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스킨부터 시작해 서 마지막에 화운데이션까지 다섯가지를 차근차근 발라주고 립스틱은 물론, 아이새 도어며 마스카라까지 하고나니 거울속에 비친 모습은 이미 내가 아니였다. 피씩 웃음이 나왔다. 로션만 바르고 청바지차림으로 겅중겅중 뛰여다니던 내가 언제부터 안하던 짓을 하지? 거울속의 낯선 모습을 들여다보며 이마살을 찌프리다말고 시 계를 봤다. 약속시간이 다 되여있었다. 털썩 쏘파에 들어앉아 이모콘을 꾹꾹 눌렀 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 재미없는 프로들을 한번쯤씩은 눈길을 준후 약속시간보 다는 반시간쯤 더 흘렀을 무렵,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기록이 서너통쯤 남을 무렵에 야 나는 여유있게 슬슬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 끌고다니던 운동화대신 걷기에는 조 금은 버거운 하이힐을 딸각거리며 약속장소에 이르러 예정된 특실앞에 잠간 멈춰섰 다. 안으로부터 새여 나오는 질척거리는 소리들, 이제 그 소리들속에 내가 섞여들어 갈 차례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어머,이제 오니?” 일화가 손을 흔들며 웃음을 날렸다. 강굴강굴한 파마머리를 어깨너머까지 길게 늘어뜨린 일화의 화사한 얼굴에서 발그무레 홍조가 피여오르고있었다. 난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까댁이고는 제법 폼있게 주위를 쓸어보았다. 남자 네명에 여자는 일화말고도 피끗 본적이 있는 일화의 친구 둘이 더 있었다. 남녀가 모인 술자리면 의례 그러하듯이 남자 여자가 엇갈이 끼여앉아 규칙적인 배렬을 이루고 있었고 나는 규칙 찾기 하는 애처럼 정확하게 두 남자사이에 있는 빈 좌석을 찾아 엉뎅이를 붙였다. 다들 벌써 몇잔을 비웠는지 분위기는 자못 흥성흥성하였다. 빈 좌석이라지만 앞에 놓여진 술잔에는 이미 소주가 꼴똑 채워져있었다. 소주라? 웬지 부담스러웠다. “자~ 금방 오신 분은 저의 친구 오순녀입니다. 그리고 이쪽 남성분들은 제가 낮에 오녀사한테 말씀드렸던대로 외지에서 온 친구들이고. 오순녀님의 광림을 위하여 건배~” 일화가 호기스럽게 한모금 크게 쭉 마시고 술잔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앞에 소주잔을 마주한 나는 난감했다. “전 소주 못하는데요. 맥주로 마실게요.” “야,다들 소주 마시는데 맥주는 무슨 맥주야? 그냥 소주로 해.” 일화가 손사래를 쳤다. “소주 못마신다니까. 왜 그래?” 웃으며 말하는 내 어조에는 어지간히 악센트가 들어가있었다. “왜 그러는데요? 마셔요. 지금 여자들이 소주 한잔쯤이야 무슨 대순가요? 우린 그쪽이 오기전에 벌써 많이 마셨는걸요.” 일화곁의 남자, 정확히 내 왼손편으로 세번째 남자가 날 그쪽이란다. 듣기 좋은것은 아니지만 별 부담스러운 호칭도 아니다. “당신”이나 “순녀씨”보다도 아무래도 오늘 일회용으로는 “그쪽”이 훨씬 편한 호칭일것 같다. “그래요, 마셔요. 술은 똑같은 색으로 마셔야 분위기가 흥성흥성하다니깐요.” 내 왼편 옆자리도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맞장구를 친다. 오른편 옆자리는 아예 술잔을 들어 손에 쥐여준다. 처음 보는 남자들이 날 하나 술먹이는데 이렇게 극성이라니? 낯선 여자한테 싫다는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것이 그들에겐 그렇게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우리도 다 소주 마셨는데. 맥주는 배가 부르지, 화장실 다녀야지 얼마나 번거롭다구. ” 일화의 친구인 여자들도 해쭉거리며 가세를 한다. 그냥 마셔? 같이 놀아준다고 싫은 소주까지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저어기~ 그럼 제가 대신 마셔드릴가요?” 갑자기 맞은 켠에 앉았던 남자가 움찔 일어서며 손을 내민다. 들어올적부터 말없이 술잔만 쥐고앉아있던 남자. 그제서야 그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모난 얼굴에 작지 않은 오관들이 규칙있게 자리잡은 꽤 반듯한 얼굴. 미남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쉽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무덤덤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은근히 진지한 눈빛을 내뿜고있었다. 술잔을 넘겨줘? 내 술잔에 남자의 입술을 대게 하고 거기에 다시 내 입술을 대기는 싫었다. 에라~ 이걸 마시고 죽기야 하겠나? “아뇨. 제가 마시죠. 대신 그쪽에서 함께 마셔주는겁니다.” 나는 눈을 똥그라니 뜨고 남자를 마주봤다. 당신때문에 내가 억지로 마시는데 혼자 당할순 없다는 눈빛으로. 남자가 마셔주겠다는 그 징그러운 말만 없어도 난 좀 더 버틸수 있을지도 맥주를 마실수 있을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네. 그래요.” 역시 아무일 없듯이 대수롭지 않게 싱긋 웃는다. 하긴 아무일 없는것이니까. 그럼에도 웬지 보기 싫었다. 나는 술잔을 쥔 손을 뻗어 남자의 술잔과 쨍그랑 부딪쳤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잔을 기울이자 씁고 맵고 따가운 소주가 혀를 적시며 입안에 흘러들더니 타는듯한 느낌과 더불어 식도를 거쳐 위로 흘러들었다. 금시 위가 따근해나며 온 몸에 해나른한 기운이 뻗쳐감이 알렸다. 난 눈꼬리를 치켜들고 상그레 웃으며 빈 잔을 거꾸로 들어보이고는 상에 내려놓았다. “와아~” 환성소리와 함께 짝짝짝 하는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래, 니들 오늘 잘 걸렸어. 소주라고 못마실것도 없어. 어차피 내 몸은 알콜을 필요로 하고있을지도 모르니까. “자, 제가 부을게요. 중국말에 좋은 일은 쌍으로 생긴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번 잔도 원샷입니다.” 모두들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려 난 얼른 술병을 집어들었다. 차례로 술을 붓고 쨍그랑 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웠다. 아까보다는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야~ 우리 순녀 이제야 열이 오르는구나. 잘했어.” 일화가 째각거리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싫지 않게 들려왔다. 자기 사주팔자에 오행중 <<화>>가 빠졌다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해>> 일 자와 <<불>>화자로 바꿔버린 일화-이름만큼 화끈하다. 적어도 술놀이에서만은. 고작 술 두잔이, 합해서 기껏해야 석냥이 조금 넘을가 말가 한 소주가 배속으로 흘러들자 내 몸은 제법 노긋해지기 시작했다. 립스틱을 빨갛게 바른 얄팍한 입술을 나불거리며 해도 될말 안해도 될 말들을 널어놓기 시작했다. 왼쪽켠의 옆자리남자하고도 잠간, 오른쪽켠의 옆자리남자하고도 잠간씩 쏙닥거렸다. 간간이 재미있어죽겠다는 표정으로 깔깔 웃어주기도 하고 무심한척 팔굽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야한 롱담들도 오가고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상의 분위기는 한결 무르익어갔고 방안의 분위기는 말할수 없이 끈적끈적해졌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내 얼굴은 웃고있었지만 내 머리속은 하나의 아픔으로 찌릿찌릿해지고있었다. 그랬다. 내 마음이 아닌 머리가 아팠다고 난 굳이 표현하고싶었다. 얼굴과 머리, 표상과 내면의 어우러지지 못한 부딪침속에서 내 몸은 어디를 향해 가고있었던것일가? 당신은 진달래꽃향기와 함께 왔습니다. 겨울내내 회색빛갈속에서 잠을 자던 산과 들이 쌀쌀한 봄바람이 가끔씩 데리고 오는 훈훈한 기운에 막 푸른 옷을 떨쳐입으려고 서두르던 그 계절 진달래는 산에서 붉게 타고있었습니다. 그 진달래를 보며 난 <<다시 본 진달래>>란 글을 인터넷문학카페에 올렸고 당신한테서는 쪽지글이 날아왔습니다. 사계절중에서도 유난히 봄을 탄다는 당신. 당신은 진달래꽃이 피는 때가 오면 마음이 걷잡을수 없이 황황하다고 했습니다. 해마다 그맘때면 진달래꽃을 찾아 산에 오른다던 당신, 그 봄에도 당신은 진달래꽃을 찾아 떠날거라고 했지요? 당신의 쪽지글이 날아왔던 날 내 한메일플래닛은 진달래향기로 그윽했습니다. 그렇게 진달래꽃향기를 실은 쪽지글과 함께 당신은 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사뿐히. 당신을 알고나서 난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출근시간에도 업무처리가 끝난 여가에는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그것은 문학을 향한 내 열정보다는 당신때문이였다면 당신은 믿을수 있을가요? 책을 읽으며 난해한것들을 찾아내고 글을 쓰며 어려웠던것들을 찾아내여야만 난 당신과 대화를 할수 있는 빌미가 있다고 여겼지요. 먼저 다가온것은 당신이였지만 난 당신보다도 더 절실히 당신한테로 가까이 가고싶었다는걸 당신은 알았는지요? 당신은 내가 아득히 바라보며 선망하고있던 중견소설가였습니다. 당신을 만나기전부터 난 당신을 알고있었습니다. 당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의 숨결을 느꼈고 당신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난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글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도 모르게 내 생활속에 들어와있었고 난 이미 내 마음속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이였기에 당신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그라프를 변경시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당신만 바라보고있으면 깨알같이 줄어드는 자신때문에 나는 쉼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써야했는지도 모릅니다. 좀 더 키를 키우면 해와 이야기를 나눌수도 있을거라며 해를 향해 우로만 우로만 뻗는 해바라기처럼 난 당신을 향해 발돋움해야 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기다려지는것은 밤이였습니다. 밤공기를 깨고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도 뜸해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던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자취를 감출 무렵인 깊은 밤이면 난 컴퓨터앞에 마주앉습니다.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여나 푸수수한 머리를 뒤로 대충 묶은채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를 로그인합니다. 열에 한번쯤씩 만날수 있는 당신이였지만 메신저를 로그인하는 순간이면 난 늘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당신은 늘 바빴습니다. 신문기자였던 당신은 낮이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밤이면 창작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당신을 열흘에 한번정도 만날수 있는것도 저에겐 행운이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소중한 만남이였고 더 기다려지는 밤이였겠죠. 당신의 아이콘이 회색빛으로 오프라인이 되였을 때면 난 글을 썼습니다. 컴퓨터 저쪽에 있는 당신도 글을 쓰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아이콘이 파랗게 빛을 발하며 날 바라보고있는 밤이면 난 메신저대화창을 마주하고 컴퓨터에 매달려있는 박쥐가 되였습니다. 난 내 무지때문에 당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 넘 많았고 당신은 당신이 살아온 년륜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굳이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글만 놓고라도 며칠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듯싶었습니다. 그날 밤도 난 당신이 메신저대화창 오른쪽에 걸어놓은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오늘 진달래꽃을 봤어요?” 그날 낮에 전화할 때 당신은 진달래꽃을 보러간다고 했었거든요. “아니.” “왜요?” 내 눈이 커졌습니다. “난 이미 진달래꽃을 봤으니까.” “네? 못봤다면서요?” 난 잠간 헛갈렸습니다. 당신이 진달래꽃을 봤는지 말았는지. “아니, 오전에 너한테서 전화가 올 때 마침 지나가고있던 산에서 창을 사이두고 붉게 타는 진달래꽃을 봤어.” “그것도 본거얘요?” 입귀로 풀럭 실없는 웃음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보다도 너의 전화를 받는 순간 난 이미 진달래꽃을 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 몰라, 왜선지는. 길 떠난것이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지만 내친 걸음이라 그냥 갔을뿐이야.” 난 공연히 미안해지려 하고있었습니다. “저때문인가봐요. 타이밍을 못맞추고 전화해서 흥을 깨버렸나봐요……” “그게 아니야. 니탓이 아니야. 미안해할것 없어.” “그래두…” 당신의 표정이 어떠할지 궁금했습니다. “나 소원이 뭔줄 아니?” 소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습니다. 난 애초에 소원이란것을 가지고있었던지도 이제 기억에 아득합니다. “뭔데요?” “시골에 가서 사는거야. 자그마한 농가 한채 사서 뜨락에 터밭이나 가꾸면서 그렇게 살고싶어. 뜨락에 진달래꽃나무를 옮겨심고 봄마다 진달래향기를 맡으면서,흙냄새 맡으면서 살고싶어.” 당신은 아마 윤동주생가같은 아담한 전원의 농가 하나 머리속에 떠올렸겠지요? “여기까지 온건 다 시골을 벗어날려구 그런거 아니였어요?” “당분간일뿐이야. 소설을 쓰기 위해서 아주 잠간일뿐이라고. 난 돌아갈거야. 농사를 짓던 시골로 돌아갈거야. 지금 내가 속상한거 뭔줄 아니? 내 생각엔 내가 아직도 촌놈인데 다들 날 도시인이래. 연길사람취급하거든. 후~” 당신의 이야기에서 난 진한 고독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쩜 촌사람들에게는 도시인으로 보이고 도시인들에게는 촌놈으로 취급받는 당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칠수 없는 이방인이였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혼자였고 당신의 체험과 일관된 소설들도 사랑이 빠져버린 고독과 방황과 곤혹스러운 이야기들로 이루어진거라고 난 미루어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르고있었습니다. 철저히 혼자인 당신, 자신을 혼자로 만들어버린 당신이였으니깐요. 2 눈을 뜰가 말가 망설였다. 눈은 감고있지만 주위가 환함을 느낄수가 있다. 무거운 눈까풀을 들어 눈을 떴다. 눈이 부시다.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카텐사이로 해빛이 무수한 직선을 그으며 기여든다. 카텐을 아무리 꽁꽁 여며놓아도 쓸모없다. 어느쪽으로든지 쯤이 생기고 해빛은 거침없이 그곳으로 기어이 흘러들고만다. 해빛에 보이는 동동 떠돌아다니는 먼지들이 당금이라도 얼굴에 내려앉을것 같다. 심심한 먼지들, 종일 앉을 곳도 모르게 저렇게 떠돌아다니는게 지겹지도 않을가? 멀거니 먼지를 바라보다말고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흔들림에 금시 머리가 욱신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헛구역질이 나는것을 간신히 참고 엉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 슬리퍼를 질질 끌로 창가로 다가갔다. 카텐을 확 열어제꼈다. 두터운 카텐에 가려졌던 해빛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바람에 또 눈이 부시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있다. 아빠트단지아래 서있는 관상용복숭아나무 몇그루가 복숭아나무런듯 아니런듯 분홍의 혹은 흰 색의 비닐봉지를 꿰여든채 천연덕스럽게 바람에 몸을 맡기고서있다. 복숭아나무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린 아이들처럼 빙 둘러선 가운데에 자리잡은 문구장에서는 로인들이 문구를 치느라고 바삐 오간다. 각양각색의 모자들을 저마끔 눌러쓴 그 구부정한 모습들을 찬찬히 여겨보지 않으면 남자인지 녀자인지 알수가 없다. 계절조차 알수없는 로인들의 몸에서 눈길을 떼면 눈길은 갈곳을 몰라 허둥댄다. 문구장우의 허공을 가로질러 지난 전선줄에 어이없이 잠간 머물렀다가 다시 관상용복숭아아래에 오구구 모여서있는 키작은 관목들에 눈길이 꽂힌다. 아직 푸른 빛이 보일듯말듯 나무가지의 새움에 매달려있는지라 뭐가 뭔지 알수가 없지만 그 관목들에 익숙해진 눈은 해당화나무도 있고 라이라크도 있고 진달래꽃나무도 있음을 구별해보기라도 하듯이 보아낸다. 문득 바람 한오리가 휙 불어지나며 복숭아나무가지에 걸린 비닐봉지를 흔들어놓고는 관목나무들에 먼지 한웅큼 부리워놓고 간다. 봄이라지만 따스함은 느낄수 없는 3월 하순이라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종이쪼박같은것을 나르며 먼지냄새를 싣고다닌다. 숨막히고 갑갑한 창밖을 내다보다말고 창문을 열자 아직은 쌀쌀한 기운을 담고있는 봄바람이 거칠게 불어든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먼지가 섞여있는 공기를 아니, 바람을 가슴속으로 들이켰다. 가슴이 트일대신 오히려 더 갑갑해난다. 그렇게 얼마나 서있었을가? “전화 받으세요~ 전화 받으세요~” 핸드폰벨소리가 요란하다. 창가를 떠나 이불이 구겨져있는 침대로 돌아와 침대곁의 탁자우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액정에 일화의 이름이 번듯하게 떠있다. “왜?” “얘는,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니? 전화받는 센스가 왜 그 모양이야?” 일화의 목소리에는 쨍하고 해가 떠있다. “무슨 일인데? 용건만 말해.” “애두 참. 그래, 용건만 말할게. 우리 지금 방천으로 가려든 참이거든 . 얘들이 지금 방천구경을 하겠다잖아. 같이 안갈래?” 얘들이라니? “너 아직도 걔네들이랑 있는거니?” 얘들, 걔들—호칭이 참 딱하다. “응. 다른 사람들은 말구 그 있잖아. 외지에서 온 친구 둘만이야. 차는 한댄데 넘 많이 앉을수 없잖니? 네가 아무래도 적당할것 같아서 부르는거야. 같이 갈거지?” 안봐도 뻔할 뻔자. “싫어, 안가. 나 오늘 일이 있어.” “너랑 같이 가고싶어하는 사람 있는데. 그래도 안올거야?” 나랑 같이 가고싶어하는 사람?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일이 있어 안된다니까.” “계집애두. 알았어. 너 나중에 후회하지 마. 네 꿍꿍이속 내가 다 아는데…” 일화는 기분나쁜 웃음을 낄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내 꿍꿍이속을 네가 어떻게 알어? 나도 모르는데. 툴툴거리며 다시 이불속으로 기여드는데 “띠리링~”하고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귀찮은 광고메시지라 싶어서 무시한채 다시 해빛속에 떠도는 먼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다시 “띠리링~”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할수없이 핸드폰을 끄당겨 메시지를 확인했다. --만나고싶은데. 정말 안갈래? 어딜 안가냐구? 찍혀들어온 핸드폰번호는 낯선것이였다. 아리송한 기억속을 더듬으며 먼저 들어왔을 첫번째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야. 별 일 없으면 와주지 그래? 어제 일 벌써 잊은것은 아니겠지? 역시 낯선 그 핸드폰번호였다. 어제 일이라? 어제일이라면 인터넷으로 영화보고 낮잠자고 일화랑 술마시고…… 가만, 일화랑 술—그러고보니 어제 그 남자? 틀림없이 그 남자였을것이였다. “제가 마셔드릴가요?”하던 기분나쁜 남자. 내 술잔속의 술을 탐내던 남자. 그 남자라면 다시 상대할 필요가 없다. 난 그냥 가라앉은 기분때문에 술자리에 나가준것뿐이고 술자리에서 어울리다보니 그 남자랑 알게 된것뿐이니까. 어제의 시간들에 존재했던 남자를 오늘의 시간들에까지 끌여들여 피곤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메시지를 무시할가 하다가 일화얼굴을 봐서 대충 쓰기로 했다. --일이 있어서 못갑니다. 아니, 가지 않습니다. 메시지발송버튼을 누르는 내 입귀로 “픽~”하고 야릇한 웃음이 새여나갔다. 온라인에서 만난지 두어달쯤 시간이 흘렀을무렵, 당신과 난 오프라인에서 만났습니다. 지꿎은 여름장마비가 내리다 말다 하면서 온종일 질금거리던 날 오후였습니다. 낮이라 한적한 카페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심수봉의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지고있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우동을 먹고 카페로 자리로 옮긴 우리였습니다. 맥주잔을 기울이다말고 당신은 맛없게 국수발을 끊던 제 모습을 한참이나 나무람했습니다. 음식은 맛있게 복스럽게 먹어줘야 같이 먹는 사람도 맛있는거라고. 실은 나도 맛있게 먹었는데 먹는 모습이 맛없게 보였을뿐이라고 박박 우겨도 당신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난 당신을 빤히 쳐다보다말고 오른손을 쭉 펴서 당신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습니다. “아참, 내 손 봐요. 이쁘죠?” 당신은 왼손을 뻗쳐 내 오른손을 잡아쥐고 한참이나 들여다봤습니다. 그러는 당신의 모습은 진지했습니다. “정말이네. 손이 참 이뻐. 손톱에 매니큐어 칠했으면 더 이쁠거 같아. 아주아주 연분홍색으로 말이야. 진달래꽃같이 연분홍으로. 허허. 나 손톱에 매니큐어 칠해본적 있다~” 당신의 얼굴에서는 진달래꽃같은 엷은 미소가 스쳐지나가고있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피여나는 진달래꽃같은 미소를 바라보며 웃고있었던가요,말았던가요? “정말?” “정말이지. 아마 열일여덟 됐나? 손톱에 매니큐어 칠하고 기타를 탔어. 그때 어떤 여자애랑 막 사귈번했구.” “별걸 다하구 그래요.” 나는 “칫~”하며 당신 손에 잡힌 내 손을 뽑아 턱을 고이고 당신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게말이다. 나도 이상해. 여자들처럼 이쁜 액세사리랑 보면 막 갖고싶고 가슴이 활랑거린다니깐. 남의 눈길때문에 반지밖에 못하고 다니지만. 시계도 그냥 액세사리 로 간주하고 차고다니는거야. 허허. 그래선가? 널 보면 허전해보인다. 무슨 여자가 몸에 액세사리 하나 없냐? 귀구멍도 안뚫었잖아. 팔찌라도 하나 하지 그래?” 당신의 눈길은 텅텅 빈 내 손가락과 내 팔목과 내 목을 조용히 쓸어보고있었습니다. 나 도 텅텅 빈 손가락으로 내 팔목과 내 목을 만져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습니다. “거추장스러워요. 반지도 있고 팔찌도 있는데 안하고 다녀요. 귀구멍은 뚫을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어요. 가짜귀걸이도 못달아봤는걸요.” “넌 참 이상한 애야. 액세사리도 안하고 여자라는 말도 싫어하고.”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따스했습니다. 귀볼을 간지르며 불어가는 봄바람처럼. 나는 입을 다문채 이윽하니 당신의 눈속을 들여다봤습니다. 당신은 동그랗게 담배연기를 뿜어올렸습니다. 담배연기가 당신의 눈을 가려버리고 당신의 모습은 나한테서 저만치로 멀어집니다. “넌…” 담배를 쥔 당신의 오른손가락끝들이 파르르 떨립니다. 봄바람이 스쳐지난 진달래꽃잎처럼 파르르 파르르. “뭐가요?” “……” “무슨 말을 하려구요?” “…” 당신과 나사이에 숨막힌 정적이 흘렀습니다. 카페에 은은히 울려퍼지던 당신이 좋아한다던 심수봉의 노래소리도, 옆방들에서 간간히 들려오던 말소리도 갑자기 공기속에 증발해버린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밀페된 공간의 진공속에 당신과 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숨막히는 정적이. 얼마나 지났을가? “넌……사랑을 믿니?” 당신의 눈빛속엔 어떤 흔들림이 비껴있었습니다. 실바람에도 굼실굼실 일어날것 같은 어떤 흔들림이. 사랑을 믿다? 웬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결합이였습니다. 사랑은 믿고 안믿고가 아니라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다운거라고 난 생각하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난 믿고 안믿고를 따져주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믿죠. 사랑을 안믿어요?” “난 안믿어. 사랑도, 여자도. 여태 나에게 사랑은 없었어.” 난 당신의 얼굴을 스쳐지나는 고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둡기만 한 고독의 모습을. “사랑을 안믿는다면서 결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결혼은 그냥 결혼일뿐이야. 나에게 있어서 아내는 아내일뿐이고 딸애는 딸애일뿐이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사랑과 결혼을 따로따로 구분짓는 당신에게 난 무슨 말을 해줬어야 할가요? “…”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것은 내가 제대로 된 사랑을 못만났기때문이야. 내가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것은 아니라고. 아마 누구보다도 더 절실한 사랑을 원했던 까닭에 사랑을 믿지 않는지도 몰라. 난 참 오랫동안 외로웠다. 육체적으로 아니고 정신적으로 말이야. 내 주위엔 날 몰리해하는 사람들뿐이야. 그속에 있으면 난 갑갑하고 진절머리나. 난 한동안 소설을 잃어버렸어. 날 오해하고 경원시하는 사람들때문에 내 목숨같은 소설을 한줄도 써낼수가 없었다고. 나에게 숨통을 틔워줄수 있는 유일한 소설인데도 말이야. 진달래꽃같은 소설.” “…” “생활은 내 소설의 한부분일뿐이야. 난 소설을 위해서 사는거야. 나한테는 사랑을 할 겨를도 여유도 없어.” 난 갑자기 혼동스러워졌습니다. 당신이 소설을 쓰는것인지 소설이 당신을 만들어가는것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생활은 소설의 한부분이고 소설을 위해 사는 당신의 전부는 역시 소설이라니? 거기에 사랑은 빠져버리고. 당신은 어떤 존재였을가요? 3 “옷이 그게 뭐니?” 정글에라도 숨어들 양으로 격에 맞지 않게 군인들의 위장복이라니? 꺽두룩한 키와 모난 얼굴과 위장복은 어느 하나가 어울리는것이 없이 각각의 분위기를 연출하고있었다. 그 이상한 조합의 실체를 마주하고있을라니 가뜩이나 쓰린 위가 울렁이기까지 하다. “편하고 좋은데. 평소에도 이걸 잘 입어.” 까칠한 내 눈길을 느꼈는지 말았는지 색조없는 말들이 셈평스럽게 흘러나오고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 여자친구 있잖아. 근데 왜 그래?” “뭘?” 커다랗게 뜬 눈은 아무것도 읽어낼수 없이 눈빛이 얼떠름하다. “왜 자꾸 메시지 보내구 난리야? 하루에도 몇번이고 난 니 메시지 지우느라고 시간을 랑비해야 한단말이다. 올해 봄은 너때문에 내내 쌀쌀해.” 난 엄지로 태양혈을 지긋이 누른채 이를 뽁뽁 갈며 눈을 치떴다. “머 그냥. 그렇다고 당금 잡아먹을것처럼 노려보는것은 넘 한거 아니야? 나랑 안지 얼마나 됐다구 봄 내내라니? 넌 봄 내내가 고작 두세주일이니?” 심드렁한척하면서 따박따박 말대답질하는 모습이라니? 여러가지로 맘에 안든다. “네가 정말 맘에 별로 안든다. 그래 이렇게 봤음 됐니?” “이제 그만 하지? 어차피 오늘 날 찾은건 너잖어.” 히쭉 웃으며 식지를 빼들고 내 코를 살짝 건드린다. 기분이 슬슬 나빠질려는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찾았어. 실은 교원강습이 있어서 왔는데 어제 술 너무 많이 마셔서 앉아있을수가 없었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빠개질듯 아파서. 그렇다고 혼자 내버려두긴 내가 넘 아깝잖아. 누구라도 날 보살펴줘야 할거 아니니?” 궁금했던 답안을 대충 던져주고 쏘파에 비스듬히 기대여 누웠다. 킬킬킬 웃더니 탁자를 건너와서 내 다리를 들어 자기 무릎위에 놓고 앉는다.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나 착실히 해야지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내가 이러고 앉아있을테니까 좀 쉬여.” 싫지는 않다. “아~ 진짜 머리 아퍼. 공연히 술마셨다.” “누구랑 그렇게 많이 마셨어?” 글쎄 누구랑? 내가 누구랑 이렇게 많이 마셔야 하는데, 그것도 소주를. 어제 점심때쯤 연길역에 내려 사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나를 향해 손을 젓는 모습이 보였다. 훈이였다. 가다오다 채팅방에서 만난 훈이. 난 기분이 엄청 나쁠 때면 드문히 연변채팅사이트에 접속하여 채팅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낯도 코도 모르는 사람들과 부담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야한 롱담을 주고받느라면 기분이 슬슬 풀어지군 하였다. 간혹 가다 괴퍅한 사람이나 저질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지만 시스템에서 감옥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였기에 신경을 도사리진 않았다. 내가 떠나가버린 누군가때문에 힘들었던 그즈음 채팅방에서 만난 훈이는 귀국한지 얼마 안되는 미혼아빠였다. 훈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치고 할수없이 출국하여 얼마 안되여 연인이였던 여자는 아들을 낳아 훈이의 부모님한테 맡기고는 떠나버렸었다. 그렇게 미혼아빠로 된 훈이는 10년만에 귀국하여 부자간의 정을 키우고있는 중이였고 그런 훈이와 나사이에 공동한 언어가 있은것도 아니였지만 서로 편하게 대화할수 있는 상대였다. 낯선 남자와의 만남이란 생각하기에도 체증이 생길만한 일이였지만 난 만나기로 했다. 난 이미 남자를 만나고 남자를 알아가는 일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간주하고 이제 가볍게 아주 가볍게 치뤄가기로 했던것이였으니까. 남자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은 황사가 섞인 매캐한 바람이 불던 봄에 일화의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이미 작동되였고 훈이는 프로그램 작동전부터 점찍어둔 남자였다. 다만 온라인으로 만난 사이고 내가 살고있는 곳과는 거리가 좀 먼곳에 있다는 리유로 참여가 뒤로 밀려졌을뿐이였다. 어제 역에서 훈이와 익숙한 사이런듯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맥주 두병을 마시고 다방에 옮겨앉아 다시 맥주 한병을 마셨다. 그때까지는 말짱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훈이의 뜨거운 눈길속에서 난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내가 원한다면 남자쯤이야 얼마든지 가질수 있다는 저속한 자신감까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훈이의 입술이 내 입술을 거쳐 젖가슴에 이르는 짜릿한 애무를 난 거부하면서도 즐기고 있었다. 려관으로 이끄는 훈이의 손을 뿌리치고 신화서점에 갈 때까지 정신은 말짱했다. 술 한방울 입에 대지 않았을 때보다 더 말짱했다. 약속대로 신화서점앞에서 15년이나 련락이 끊겼던 펜팔친구 정을 만났고 그때부터 나는 이미 취하기로 작정을 했던가 말았던가. 정과 함께 모아산기슭의 뉴코아별장으로 향했고 국화방에 앉아 정이의 첫사랑인 내 단짝친구 서연이가 오길 기다려 우린 술잔을 기울였다. 15년의 세월이 흐른후 정은 맥주 한잔에도 얼굴이 붉어지던 숫기많던 소년으로부터 엔간한 소주에도 끄떡하지 않고 열변을 토하는 수완있는 장사군으로 변해있었다. 정은 첫사랑 서연이를 마주한 설레임에 공연히 들떠서 한잔 또 한잔의 소주를 굽냈고 나는 나대로 혼자만의 희비에 엇갈려 소주를 거부감없이 위속에 쏟아넣었다. 뉴코아에서 나올 무렵에는 내 몸전체에는 알콜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우린 다시 스탠드바로 향했고 거기서 억수로 맥주를 들이마셨고 열쇠를 두고 나온 정이네 집에 열쇠수리공을 불러 문을 따고 쳐들어갔다. 서연이는 한켠에 팽개친채 나와 정은 15년세월의 이야기들을 안주하여 밤새도록 캔맥주를 들이키다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다. 잤는지 말았는지 온통 어수선한 생각으로 뒤숭숭하게 누워있다가 서연이가 떨꺽거리며 술상을 치우는 소리에야 겨우 눈을 떴었다. 그러니 정확히 오늘 새벽까지 난 내 몸속에 알콜을 부어넣고 있었다. 그게 바로 다섯시간전의 일이다. 그러니 내 골통과 몸이 고통스러울수밖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소주 마셨어. 너때문이야.” 훈이와 정을 구분하지 않은채 난 친구라고 일축해버리고말았다. 내가 낱낱이 고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왜 내 때문인데?” “네가 지난번에 소주 안마시겠다는 날 억지로 마시게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어제 또 소주 마신거지.” 정말 그랬다. 지난번에 소주 마신 경험이 없으면 난 어제 마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야 그냥 니가 못마신다니까 도와줄려고 그랬을뿐인데. 일화친구여서 도와주느라구.나까지 끌어들여 원샷하게 한건 누군데?” 역시 그냥 넘어는 못가준다. 그래서 나한테 넌 처음부터 싫었던 남자라고. 내 입술 대인 술잔을 건네주기 싫었던 남자. “여자친구하고는 잘 돼가? 언제 결혼할건데?” 내 다리를 무릎위에 놓고 쉬게 해주는 남자한테 여자친구이야기를 하는 난 이제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그럭저럭. 뭐 별로 버성길 일도 없는데 아기자기하지도 않아. 결혼이라~ 언젠가는 아마 하겠지.” “결혼할 여자친구도 있다는 남자가 나랑 만나고있다는게 찔리지도 않아? 넌 방탕한거니?” “여자친구가 있음 어떻고 안해가 있음 어때서? 유부남이 애인 만나는것은 괜찮고 결혼할 여자 있는 총각이 다른 여자 만나는것은 안된다는 법이라두 있어?” 도덕에 결릴 뻔한 일을 말하면서도 진지한 얼굴이라니?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를 역설하는 얼굴과 다를바없다. 내 술잔의 술을 마셔주겠다고 할 때부터 진지한 모습으로 탐했던것은 역시 내 입술이였나보다. “세상 다 살았구나. 불쌍하다, 너랑 결혼할 여자가. 그 여자가 내가 아니여서 다행이구.” “우리 그냥 만나는거지? 난 니가 좋아.” “나랑 결혼할거니?” “누구랑 결혼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지금이 중요해. 너랑 나랑 같이 있는 지금이.” 아무래도 위장복이 어울리는것 같다. 싸구려사유를 가진 놈에겐 시장거리 난전에서 파는 싸구려위장복이 제격일것이다. 위장복 입은 진지한 얼굴의 남자랑 진달래랭면점에 가서 물렁물렁한 맛없는 랭면을 두어저가락 먹은 뒤 해정술 하자는 남자를 뿌리치고 난 숙소로 갔다. 그리고 잤다. 아무 궁리도 없이. 진달래꽃피는 봄이 가고 온통 푸름을 자랑하던 여름도 가고 말라버린 락엽들이 누군 가의 발길에 채이면서 쓸쓸한 기운을 머금은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이리저 리 뒹굴 때 난 내 존재의 의미를 가끔씩 아주 가끔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당 신의 눈에 보이는 난 녀인이 아닌 계집애였습니다. 똑 부러지게 하는것도 없으면서 천 방지축 설치기만 하는 얼떠름한 계집애. 가끔은 사전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띨 띨하다>>는 규정어가 붙기도 하고 가끔은 <<철딱서니없다>>는 규정어가 붙기도 하는 호칭은 당신만이 부를수 있는것이였습니다. 내 주위사람들에게 난 분명히 나름대로 착실하고 소심한 참한 녀자였음을 당신은 꿈에라도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난 정말 띨띨했는지도 모릅니다. 난 띨띨했기때문에 당신의 수필을 읽으면서도 소설을 읽으면서도 외롭고 험난한 당신의 삶이 안스러워서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난 띨띨했기때문에 행복했던 순간보다 불행했던 순간이 더 많은 당신의 가슴에 쌓인 고통들을 비워내고 당신에게 웃음을 선물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난 결국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싶지만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런 무가내를 느끼신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조차 내비칠수 없는 그런 무가내를. 그럼에도 난 여전히 띨띨했습니다. 어느때부터인가 난 당신한테서 불안함을 느끼고있었습니다. 영문없이 끈적끈적 달라붙는 불안감을 아무리해도 떨쳐버릴수가 없었습니다. 가을바람이 몹시도 불던 날 오후, 일요일인데도 난 공개교수준비로 락엽에 대한 동시를 쓰고있었습니다. 한참을 쓰다 지우다 하는데 당신이 로그인하였습니다. “뭐하고있었는데?” 당신이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항상 내가 먼저였는데 그번만은 당신이 처음으로 말을 먼저 걸어왔다는것을 당신은 알고계셨을가요? “동시 쓰고 있었어요.” “동시? 동시라~ 그러고보니 너한테 참 어울리는데. 동시쓰는 일이.” “네? 전 동시인도 아닌데 뭘 그래요? 어려워죽겠는데.” 전 입이 뿌루퉁해서 투덜거렸습니다. 메신저대화를 하면서도 저는 항상 입력하는 메시지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표정까지 곁드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하나도 안어려워. 니가 워낙에 띨띨하잖냐. 그리고 철없고. 그러니 니 심리년령에 딱 맞는 일이라니까. 그냥 니 맘가는대로 쓰면 동시 될거야. 넌 동시 안쓸려고 해도 니 손에서 나온 시라면 동시로 되게 돼있어.” 아마 당신은 즐겁게 킬킬 웃고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말에서, 아니 글줄에서 난 웃음을 읽고있었으니까요. “앙~” 난 나혼자만의 멘트를 날렸습니다. 누군가 귀엽다고 했던 그 멘트. “네 수필 읽었어. <죽음을 느끼며>를. 왠지 너한테는 안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띨띨이가 언제 그런 심각한 생각을 하고있었지?” 당신도 심각한척하는 표정을 지었을테죠? “띨띨이도 죽을수 있으니까요. 저에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권리가 있어요.” “죽음에 대한 권리라? 만약에 죽는 방법을 선택할수 있다면 넌 어떻게 죽고싶니?” 죽는 방법? “이왕이면 자연사였음 좋겠는데. 만약 선택할수 있다면 전 안면사할래요. 수면제 먹고.” “그래? 난 추락사 하고픈데. 높은 곳에서 휘이잉 몸을 날려 뛰여내리는거. 생을 마감하는것치고는 스릴있잖어?” 전 흠칫했습니다. 그 순간, 빌딩꼭대기에서 씨이익 웃으며 아래로 몸을 날리는 당신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던거죠. “추락사는 너무 끔찍해요. 머리통이 으깨지고 피가 질펀히 뿌려지고. 난 그래도 죽는줄도 모르게 죽는 안면사가 좋아요. 내가 알았을 땐 난 이미 죽어있겠죠.” 난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창문 하나만 열면 쉽게 진행할수 있는 추락사, 그것은 용기있는 자의 선택이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여내리는 순간 우리에겐 날개가 달리는거다.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수 있는 날개가.”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맞아요. 당신이 좋아하던 이상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당신은 그 소설속의 주인공만큼이나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것일가요? “날개를 원하세요? 그래서 추락사가 부러운겁니까?” 난 당신에게 추락으로 인해 날개가 달리는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내가 당신의 날개가 되고싶었습니다. “난 자유롭고싶어. 사람들이 날 질투하고 경원시하고 날 헐뜯고 나한테서 등을 돌리는것쯤은 참을수있어. 구질구질한 가난때문에 내 가족이 날 비켜가는것까지도 참을수 있어. 하지만 내 소설을, 목숨같은 내 소설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하하는것은 견딜수가 없단말이야. 난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고싶어. 난 그냥 소설만 쓰고싶을뿐이야. 세상사에 관심없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듯 혼자서 소설만 쓰고싶을뿐인데 남들은 그게 아니더라. 공연히 날 씹고 시비걸고. 지금은 책읽는 사람보다 게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책읽는 사람이 더 많아질거라는 희망을 안고 훌륭한 소설만 쓰고픈데……” 그랬습니다. 그즈음 당신은 외면당하는 당신의 소설때문에 힘들어하고있었습니다. 난 알지도 못할 무슨 즘이요 무슨 주의요 하는것들과 어울린다느니 안어울린다느니 하며 평론가들이 시야비야 하고있었고 문학동인들도 언어조합이 어떻소 창작기법이 어떻소 하며 웅성거리고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날고싶어했습니다. 날개가 돋쳐 자유롭게 날고싶어했습니다. 날수 있으면 당신을 힘들게 하는 모든것들을 떨쳐버릴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테죠? 그래서 당신은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날고싶었던거죠. 추락사를 하면서라도. 그날 당신과의 대화를 마치고나서 오프라인이 된 당신의 아이콘을 멍하니 바라보며 난 눈앞에 자그마한 날개 한쌍을 떠올리고있었습니다. 하얗게 눈부신 작은 날개를. 4 제법 따스한 봄바람이 살살 불어온다. 이제 5월이니까. 봄바람이 스치고 지난 자리마다 새싹들이 파르르 파르르 웃으며 일어선지가 어제같은데 그 새싹들은 어느새 간지럼을 타며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새싹이 아닌 풀로 꽃으로 나무로 자라나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들때문에 세상은 온통 푸른 빛이다. 커다란 저수지우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있다. 반듯하던 수면이 주름을 잡으며 일렁여 잔 파문을 멀리로 밀어간다. 저수지에 릴 낚시를 던진채 까딱않고 앉아있는 정. 정의 뒤모습이 웬지 외롭다. 자기보다 두살 년상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여자는 다단계판매를 하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고 출국을 해버린 마당에 혼자서 장사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정, 이젠 장사가 어지간히 자리를 잡고 가끔은 여유를 즐길수 있다는 정, 정에게 안해는 의사불통의 여자란다. 정이 원하는 여자는 서연이처럼 아련하고 다정다감한 현처량모인데 서연이는 이미 정에게서 멀리 비껴나가 자기의 가정을 갖고있은지도 8년이다. 정에게 이제 서연은 어떤 사람일가? 난 멀리서 정의 뒤모습을 바라보다말고 정이 있는 쪽으로 스적스적 발걸음을 옮겼다. “정, 넌 서연이가 좋니?” 정의 눈길은 낚시대의 찌에 쏠려있다. 이윽토록 말이 없다. “넌 왜 서연이를 다시 만난건데? 왜 그냥 잊지 그랬어?” 나를 피끗 돌아보는 정의 눈빛은 막연하다. 역시 이윽토록 말이 없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정의 곁에 나란히 섰다. 바람이 내 볼을 스쳐 다시 정의 얼굴을 스쳐 저수지우로 스쳐지나갔다. 제법 따스한 바람이. “보고싶었어. 단 한번이라도 보고싶었어. 그래서 련락을 했던거야.” 문득 얼굴도 돌리지 않은채 들려오는 정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좋아한다던 말도 변변히 못하던 정의 입에서 보고싶었다는 말이 절절하게 흘러나오는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보다. 그 세월이 만들어간 사람은 역시 나름대로다. “그럼 이제 어쩔거야? 니 마음 지금 홀가분한거 아니지?” 서연이를 바라보던 정의 그 련민의 눈빛을 난 잊을수가 없었다. 15년 세월이 지나서도 다를바 없는 그 눈빛이라니. “그러게. 휴~” 정은 낚시찌에 눈길을 꽂은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불륜이라도 저지를거니? 그렇게 절실해? 담은 있어?” 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만 들린다. “서연일 좋아하는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는것은 사실이구…… 15년전 서연이한테 고백도 못한채 못난 모습으로 떠나버려서 잘난 모습을 보이고싶었던것도 사실이구…… 모르겠어. 15년동안 내내 만나고싶다는 생각만을 했었는데…… 정작 만나고나니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찌해야 될지. 솔직히 난 가정을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가정을 버릴 생각은 없구……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서연이만 보면 가슴이 아파서 당금이라도 서연이를 갖고싶은데 어찌해야 되는거니? 난.” 정은 모순속에서 헤매고있었다. 문제를 풀어나갈 끈 한오리 못잡은채. 난 한 손을 뻗쳐 정의 손을 잡아쥐였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정의 눈을 들여다봤다. 정의 눈길과 부딪치는 찰나 그 눈길을 읽을새도 없이 정은 씩 웃으며 머리를 돌려버렸다. “아, 그만 말하자. 나 오늘 훈춘에 그냥 너랑 친구들이랑 놀려고 온거야. 복잡한 머리도 식힐겸. 너 알잖아. 이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서연이지만 속심말은 오히려 너랑 더 잘하는거. 너한테 남의 속 뽑아내는 못된 재간이 있어.” “후훗~ 자식두. 나두 여자야. 내가 널 좋아할지도 모르니까 속 다 보이지 말어.” 돌아보며 싱긋 웃는 정의 얼굴에는 쳇하는 표정이 씌여져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사이 밝지만 않은 정의 얼굴을 보면서도, 억수로 술을 마시는 정을 보면서도 난 서연이가 이미 리혼도장을 찍은 마당에 남편과 함께 살고있는 사실을 말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가정이란 줄을 잡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가정을 지켜가려는 서연이의 부탁때문만이 아니였다. 서연이는 정에게 갈수 없는 사람이였다. 정을 만나고나서 기운없어하고 심란해하고 앓기까지 하는 서연에게 정이랑 사랑을 할거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서연은 정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정에게 안기고싶다고 했다. 그런 서연에게 난 “너 어디까지 갈수 있는데? 안기기만 할거야? 넌 정이랑 섹스 할수 있니?”라고 적라라하게 물었고 놀란 기색을 짓던 서연이는 “뭐…그런것까지 해야 하니? 난 아직 거기까진…그냥 마음으로 사랑하기만…”라고 떠듬떠듬 내뱉었었다. 그랬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남이야 불륜을 밥먹듯이 례사롭게 저지르든 말든 서연이는 륜리와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저지를 사람이 아니였다. 그런 서연이였기에 리혼서류까지 정리하고서도 붙잡는 남편과 한 집에서 한 이불속에서 살고있는게 아닌가. 어쩜 서연에게는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남자로는 남편하나뿐일지도 모른다. 서연이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으니까. 정이 훈춘에서 놀고 돌아간 날 나는 메신저에서 훈이의 아이디를 삭제해버렸다. 정이와 너무 다른 훈과 서연이와 너무 다른 난 어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린 각자 서로에게 일회용이였어야 했다. 그러는게 세상에 덜 미안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한오리의 바람처럼 불어간 흔적도 없이 어딘가로 숨어버렸습니다. 립자로 되여 공기속에 흩어져버렸을 당신. 당신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당신은 생각해보셨습니까? 난 당신이 사라져버린줄도 모르고있었습니다. 어느날부터인가 회색빛이 된 당신의 아이콘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일주일이 되도록 파란 빛을 발할 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난 전화를 넣었고 핸드폰은 불통이였습니다. 블로그에도 카페에도 어디에도 당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말았습니다. 난 믿고싶지가 않았습니다. 헌데 현실속의 당신과 련결된 핸드폰은 불통이고 가상공간의 당신과 련결된 메신저는 오프라인인데 난 어디에 가선 당신을 찾아야 하는걸가요? 무작정 당신이 근무한다던 신문사로 뛰여갔습니다. 두시간동안 차를 타고 연길로 향하는 도중 내내 당신생각뿐이였습니다. 창밖의 눈덮인 산야보다도 내 마음은 더 창백했습니다. 차라리 투병중이라는 소식이라도, 차라리 출국했다는 소식이라도 반가울것 같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내 세상에서 있었던듯이 없었던듯이 깨끗이 사라져버린다는것은 받아드릴수가 없었으니깐요. 하지만 신문사에 이르러 당신이 앉았던 의자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고 그 사람에게서 난 당신은 사직서도 올리지 않은채 모든 련락이 단절된채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순간, 머리속은 하얗게 비워지고말았습니다. 기계적으로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 신문사를 빠져나오다가 갑자기 심장이 콩콩거려 숨이 가빠왔습니다. 병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겐 심장유기종합증이란 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때문에 가끔 가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우리만치 심장이 빨리 뛰였습니다. 그날도 병때문에 심장박동이 빠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지로 들이쉼을 길게 쉬며 진정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가슴만 아파왔습니다. 마음이 아픈게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고 굳이 고집하고싶었습니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난 가슴이 아프다고 중얼거리며 형언할수 없는 아픔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있는 곳으로부터 쿡쿡 찌르는듯하기도 하고 터질것같기도 하고 쪼각이 나버릴것 같은 찌릿찌릿하면서도 먹먹한 아픔이 목구멍으로 터져나올듯 말듯 치밀어오르다가 온몸으로 전율하며 흩어졌습니다. 발버둥질하며 몸부림치고싶고 “으악~”하고 비명소리라도 지르고싶은 고통을 절감하는 내 머리속엔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당신”이라는 대명사일뿐 당신의 얼굴도 목소리도 ,당신의 그 무엇도 아니였습니다. 그냥 당신일뿐이였습니다. 가까워온적 없었던듯이 머얼리 떨어져있는 잡을수도 없고 잡아서도 안되는 막연한 당신일뿐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머리속에 들쑹날쑹 남아있는 기억의 잔해들은 당신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시간과 공간들을 한웅큼씩 쥐여다가 아파하는 내앞에 하나둘 부려놓았습니다. 어쩔수 없이 난 그속에 파묻혀 아픔들을 무마해야 했던것일가요? 사라진 당신때문에 아파해야 했던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했던것일가요? 사랑을 믿지 않는 당신을. 5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껏 기염을 부리고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데다 해볕이 정수리가 따갑게 내리쬐고있었다. 후끈후끈 녹아버린 아스팔트길은 당금이라도 신발바닥을 척 붙잡고 늘어질듯싶고 가로수들의 이파리들이 폭염에 시달리다못해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려올라가면서 시원한 비 한줄금, 바람 한오리를 목타게 기다리던 어느날 정오무렵이였다. 난 일화의 가게에 앉아 선풍기를 멀리한채 죽어라고 부채질을 하고있었다. 컴퓨터 한대와 타자기 한대, 복사기 한대가 전부의 돈벌이수단인 <<일화타자사>>는 가다오다 들리는 손님들로 한적하기만 하다. 컴퓨터가 가전제품으로 자리매김을 한지도 꽤 오래된 세월이라 굳이 돈을 팔며 타자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했다. 그럼에도 타자실안은 더웠다. 부채질을 할수록 얼굴은 더 화끈거렸다. “지금 몇신데 이러고 있니? 출근안해도 돼?” 일화가 던져오는 물음엔 근심이 한올도 서려있지 않았다. “수업없어. 그냥 병원간다고 나왔어.” 나는 무덤덤하게 뱉어내며 껌을 꺼내 종이를 발라 입에 놓고 짝짝 씹었다. 무료할 때엔 껌씹는 일이 심심한 입을 달래기엔 적당한 짓거리임에 틀림없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됐니? 모범생이.” “언제부터랄것도 없어. 사람은 워낙 량면이잖냐. 난 모범생이였던 나의 다른 한면을 지금 발굴하고있는 중이라구.” 나는 스스로도 말이 멋져서 쿡쿡 웃어주었다. “문자쓰지 마. 고리타분하긴. 정은 요즘 잘 있대?” “정? 잘 있겠지. 왜 정한테 관심이 있니?” 나는 깐죽거리며 일화를 바라보았다. “관심은 무슨? 너 정을 좋아하는거니? 그날 보니까 너와 정사이가 아주 가까와보이던데. 그냥 친구가 옳긴 하니?” “넘겨짚지 마. 그냥 친구일뿐이라구.” “그럼 그 앤 어떠니? 사귈 생각 없어?” 일화는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애라니? 누구?” 나는 부채질을 더 열심히 해댔다. 그럼에도 얼굴은 더 화끈거렸다. “얘는? 내 친구말이야. 전번에도 연길에서 둘이 만났댔다면서?” 일화는 몸을 반쯤 돌려 나를 쳐다보며 눈을 올롱하게 떴다. “허참. 그냥 커피 한잔 마시구 랭면 한사발 얻어먹은것뿐이야. 체통하고는 다르게 입술이 얄팍하네. 그새 고해바치데?” 나는 껌을 짝짝 씹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한테 직접 말한것은 아니고. 나도 얻어들은것이야.” 일화가 얻어들은것이라면 분명히 일화왼손켠에 앉았던, 날 그쪽이라던 사람이다. “걔한테서 들었겠구나. 너 걔랑 보통사이 아니지?” 일화의 얼굴에 설핏 홍조가 비껴지난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일화가 입을 열었다. “너니까 말하는데 우린 애인사이야. 사귄지 거의 1년이 됐어. 사람사는거 뭐 있니? 즐겁게 살다가 가는거지. 한국에 가있는 내 남편한테 녀자가 없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봤어. 그렇다고 화가 나는것두 아니구. 그냥 모르는척 지금을 즐기며 사는거야. 걔한테두 애인은 나말고 다른 녀자가 더 있거든. 질투하지도 않아. 나한테 오면 내가 받아주고 날 떠나가면 보내주면서 가볍게 만나고 헤여질뿐이야.” 담담하게 말하는 일화의 어조에는 아무런 감정색채도 실려있지 않았다. “…” “너도 걔랑 만나고싶으면 만나. 걔도 널 많이 좋아하는 눈치든데. 어차피 니들…” 일화는 말을 끊고 내 눈치를 힐끗 살폈다. “뭐? 뭔 이야기 할려고?” 난 갑자기 긴장해졌다. “니들…니들 그날 밤 관계 가졌다면서?...” “관계?무슨 소리야? 언제?! 아니야! 아니라구. 내가 왜 그러는데?” 난 부채를 내던지며 발딱 일어섰다. 그 서슬에 씹고있던 껌이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캑캑거리는 날 일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고있었다. “근데 그 앤 일 치렀다고 그러더라. 걔들이 훈춘에 놀러와서 내가 처음 널 불러내던 날 너랑…” 나를 바라보는 일화의 얼굴에는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력력했다. “아니라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깟일 가지고. 그게 머 별게라고.” 난 눈을 할기죽거리며 다시 의자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랬다면 말구. 암튼 넌 내 친구야. 내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 알았지?” 일화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공연히 <<친구>>라는 말에 오금을 박고있었다. “언젠 친구 아니였냐?” 난 시들하게 대꾸하며 방금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애인이 되여줄래? 난 피씩 웃어버렸다. 정이의 친구였다. 정이랑 서연이랑 나랑 함께 왕청에 있는 만천성에 1박2일로 놀러갔던 정이의 친구. 말꼬투리를 잡아 정이를 몰아주는 날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참 희한한 여자야.” 하고 혀를 차던 정이의 친구였다. 남자치곤 꽤 수다스러운 그도 안해를 출국시킨지 반년만에 외로움을 느꼈는 모양이다. 나는 핸드폰버튼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썼다. --애인 아무나 하냐? 심심하면 술집근처에 가서 어슬렁거리다가 싸구려여자나 사라. 아마 그게 더 경제적일거다. 그럼 행운을 빌면서 이만~ 나는 다리를 무릎위에 꼬아올리면서 발송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발송했다. 서비스로 <<매롱~>>하는 아이콘을 잊지 않고 넣어주면서. 그러고나서 난 잠간 아득한 눈빛으로 채팅방사이트에 접속하는 일화를 바라보았다. 일화랑 친구라? 그 남자랑 관계? 정이의 친구한테서 날아온 애인신청과 훈이와 그리고…… 난 이미 그젠날의 모범생이 아니였다. 내 주위에서 은근히 감돌던 싸늘한 기운의 보호막을 잃어버린 누구든지 노크만 하면 범접할수 있는 그런 녀자가, 내가 싫어하는 녀자가 되여가고있었다. 띨띨한 계집애보다 별 나을게 없는 오히려 더 멍청한 녀자가. 무덥던 날씨보다 더 찜찜하던 일화와의 대화가 오가고나서 한달후 일화의 남편은 귀국을 했고 일화는 아무런 일 없었던듯이 남편옆에 붙어서서 나와 친구들을 초대했다. 나도 아무런 일 없었던듯이 일화가 타자사 잘 운영하고 아이 뒤바라지를 잘한다고 일화남편에게 구구히 칭찬을 했다. 날씨는 역시 더웠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한오리 썰렁한 랭기가 바람처럼 스쳐지나고있던 계절이였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느낄수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당신. 당신이 없는 세상은 하나도 변한것이 없다는것을 당신은 알고계십니까? 당신이 없이도 신문은 매일매일 발행되고 당신이 없이도 사람들은 어제인듯 래일인듯 오늘을 즐기며 살고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사람들은 심심할줄을 모릅니다. 껌대신 당신대신 그들에겐 또 새로이 씹어야 할 존재가 생겨버린거죠. 하지만 당신이 없는 난 이미 내가 아닙니다. 당신이 말했던 계산식을 당신은 기억하고있나요? <<100-1=0>>을요. 이제 그 계산식의 의미를 알것 같네요. 분명히 부등식이여야 할 계산식이 등식을 이루는 원인을 알것 같네요. 나한테서 당신은 그 1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냥 잃어버린것은 당신 하나뿐인데 난 모든것을 잃고말았습니다. 이제 띨띨한 계집애마저 될수 없는 나. 당신은 저의 전부였으니깐요. 당신이 그 계산식이 <<하나를 잃었는데 세상 전부를 잃었다는 의미야.>>라고 말할 때 난 그랬죠. <<100-99=100>>도 될수 있다고. 내가 갖고있는 모든것가운데서 다른것은 다 잃고 당신 하나만 남으면 저에겐 온 세상이 남은거나 다름없으니깐요. 난 이제 가슴속에 남은 당신과만 이야기할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을 만난후로부터 잠간 쉬여있었던 가슴속의 당신을 이제 불러깨웁니다. --진달래꽃이 보이나요? --난 지금 하늘을 날고있어. 높고 푸른 하늘을. --진달래꽃향기를 실은 봄바람이 부나요? --하늘을 나는 이 기분 넌 모를거야. 띨띨이. --진달래꽃향기가 가슴에 스며드나요? --날개가 있으니 참 좋다. 내가 원하는대로 어디든지 갈수 있어. --저 이제 그만 힘들어할래요. 진달래꽃피는 봄은 이제 싫어요. --아~저기. 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이 보이네. 하얀 양떼들이 흐르는 초원이. --저 지금 병들었던 내 맘을 치유하는 중이얘요. 근데 처방이 뭔줄 아세요? --난 인간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아. 인간만큼 질린것은 없어. 난 자유롭고싶으니까. --처방이 남자얘요. 남자. 웃기죠? 남자때문에 멍든 가슴 남자로 치유하는거 당연하죠? --아, 시원하다~바람이 분다~ 하늘에서 바람이 분다~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 --생각밖에 외로운 남자가 넘 많아요. 저 역시 그들한텐 약처방이 될지도 모르죠. 저 넉넉하니까. …… …… 대화는 자꾸 어긋납니다. 당신과 난 이젠 그만큼 멀어진것일가요? 지금의 날 당신은 알아보실수 있을가요? 난 이제 더는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당신이 떠나버린 지난 일년동안 난 변해버렸습니다. 아니, 변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떠나버리고서야 난 당신을 향하여 열리지도 달려가지도 못했던 무엇인가에 갇혀있던 내 마음을 후회했거든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자유로웠던들 간곳조차 모르게 당신을 떠나보내진 않았을겁니다. 그전에 붙잡았을거죠. 아마? 그래서 난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들도 알아가기로 했습니다. 남편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내 몸을 거쳐간 3월의 그 남자, 내 술잔을 탐내던 남자에게 몸을 열 때 내가 떠올린 사람이 당신이였다면 당신은 수치스럽게 생각할것인가요? 난 그냥 의식을 치뤘을뿐입니다. 당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에게 나를 던질수 있는 의식을. 남자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작동의식을 치뤘을뿐입니다. 하지만 단 한번뿐이였습니다. 친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는 단 한번뿐이였습니다. 난 내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싶었습니다. 내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면 , 남자들을 향한 마음이 열려있으면 당신에게로 가는 마음도 자유로와질것이 아닐가요? 남에겐 불륜으로 보일 사랑이 나에겐 로맨스일테니까. 6 이외로 담담했다. 방문취업비자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나 리혼제의를 들을 때나 듣고들어 신물난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남편은 담담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난 내가 좀더 일찍 떠나길 남편이 기다리고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올 일 없는 집에서 내 숨결이 느껴질것 같은 자질구레한것들을 치워버리고 짐을 챙기는 내앞으로 남편은 뭣인가 휙 던져왔다. 내 발치에 가볍게 내려앉은것은 한장의 그림엽서였다. 푸른 하늘이 시원히 높게 트인 그림엽서. --띨띨아, 지금 여긴 바람이 불어. 시원한 바람이. 갑작스레 사라진 나때문에 당황했었지? 떠나는것은 언젠가는 돌아가기 위한것이야. 숨막힌 곳을 떠나서 숨통을 트이고나면 다시 갑갑함과 외로움을 견딜만한 면역력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려야만 했던 내 심정을 띨띨한 니가 알았을가? 아니, 어쩜 니가 나보다 더 똑똑했는지도 몰라. 안면사하고싶다는 니가. 죽는 순간까지도 편하고싶어하는 니가. 추락사 --아직은 시간이 안됐어. 난 지금 날개가 달렸어. 날개가. 난 지금 자유롭게 날고있다. 자유롭게 훨훨~ 글은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엽서를 떨어뜨리며 물먹은 솜처럼 스르르 땅바닥에 물앉는 나를 남편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 만나러 학교에 갔다가 접수실에서 전해받은거야. 당신 핸드폰이 안된다며 주더라. 그자리에서 구겨버리고싶은걸 여태 간직하고있었어. 난 당신이 떠날줄 알았어. 당신은 조화롭지 못한 가정을 떠나기 위해서 나랑 결혼한거지 나를 사랑해서 한거 아닌줄 알고있었으니까.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긴 마찬가지구. 우리사이엔 애초부터 사랑이란것은 없었어. 그래두 부모님들세대처럼 끝까지 갈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당신은 늘 흔들렸어. 바람속에 서있는듯이. 어쩜 당신주위로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갔는줄도 모르겠구. 그런 당신을 난 언제면 떠날가 언제면 떠날가 하면서 바라보았어. 당신이 가고싶다면 언제든지 보내기로 했어. 그러고보니 그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일지도 모르겠네.우리사이에 아이가 없는게 다행이야. 서로를 이어주는 아이가 없는게. 지금 당신의 선택이 가장 훌륭한 선택일지도 몰라. 혼자서 나몰래 방문취업시험 칠 때부터 당신은 떠날 준비를 하고있었던게 아니라고 말할수 있어? 어차피 떠날 사람 돌아올것도 아니니까 아예 리혼서류 정리하고 가는게 당신이나 날 위해서 나을수도 있어. 이제 우리 둘 다 상대로부터 자유로와지는거야. 자유로와……” 남편은 준비해온 말을 하듯이 단숨에 긴 말을 토해냈다. 그동안 가슴에 서렸던 곰삭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듯이. “한가지만 묻자. 그거 보낸게 누구야? 당신의 생일에 왔던 당신 친구 정이야? 당신 지금 그한테로 가는거야?” 난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정이 아니라고. 바라보기만 하는 서연이를 대범하게 한번 안아주고 몇날며칠을 술만 퍼마시다가 원양어선을 타버린 정이 아니라고 말할수가 없었다. 머물듯 말듯 바람처럼 내 주위에서 스쳐다니다가 바람처럼 스쳐지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라고 말할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인줄 알고있는게 남편에겐 더 편할지도 몰랐다. 그쯤은 나한테 덜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난 려행용트렁크를 끌고 집을 나섰다. 밖에선 바람이 불고있었다. 가을바람이. 나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높고 푸른 하늘은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그 하늘로 노랗게 물든 가을락엽 하나 실은 바람이 불어가고있었다. 난 려권을 꺼내 뿍 찢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또 그리고 그림엽서 한장 손에 들고 발걸음을 뗐다. 시원한 하늘이 펼쳐져있는 그림엽서 한장 들고서. 그런 내 얼굴도 바람이 불어지난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내 얼굴을 만지며 바람은 속삭인다. --난 날개가 있어. 훨훨 날수 있는 날개가. ……
4    배설장애 댓글:  조회:871  추천:0  2011-02-06
1 “넌 오노요코가 될수 있겠니?” 갑작스런 물음에 나는 얼떠름해지고말았다. 오노요코라니? 오노요코가 누군데? 내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전에 그의 전화는 끊겨지고말았다. 항상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그때문에 나는 이미 신경줄이 팽팽해져있었다. 어느 한순간에 문득 던져오는 물음 하나, 눈빛 하나에마저 신경을 도사리지 않고있으면 그의 심중을 종잡을수가 없었다. 했으나 결국 오늘도 멍청한 꼴이 되고말았다. 대답소리 한번 끙 하고 내보지도 못하고 눈만 디룩디룩하면서 알수 없는 질문에 황황함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넌 오노요코가 될수 있겠니? 오노요코가 뭔데 내가 될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을 개 먹이주듯 훌쩍 던지는지 알수가 없었다. 오노요코— 뭔지 알아야 했다. 어떤 성질의 내용물인지 알아야 나는 그 질문에 어슬프게나마 대답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 알아내는거다. 한번 철저하게 알아내서 완벽한 답안을 주는거다. 마침 늘 수업시간에 딴 곳에 정신을 팔다가 지적받은 소학생처럼 그앞에 어정쩡해진 모습으로 허둥대기만 하던 내 모습을 개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있던차였다. 어떤 오기같은것이 볼끈볼끈 치솟는 쾌감에 몸이 근질근질해났다. 나는 서둘러 인터넷을 접속하였다. <<통합검색>>에 <<오노요코>>하고 처넣고 검색을 했다. 사이트가 열리는 사이 가슴은 콩닥거렸다. 도대체 어떤 놈일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직전 나는 그것을 <<놈>>이라고 부르고싶었다. 어떤 놈이기에 내가 되거나 되지 말아야 할 존재란 말인가? 드디여~ 검색이 완료되여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 이룬! 코바람이 휭하고 나갔다. 여자였다. <<오노요코의 프로필>>이라고 떡하니 뜬 곳에 박힌 사진은 여자였다. 검스레하다고는 하나 눈이 환연히 보이는 안경을 건 단발의 늙수그레한 여자. 수수한 미모보다는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주는 얼굴의 여자였다. 내가 왜 이런 여자가 되냐 마냐 해야 하는건지 감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사진옆에 붙어있는 설명은 이랬다. <<이름 : 오노 요코 (小野洋子) /출생 : 1933년 2월 18일 /신체 : 키163cm /출신지 : 일본 /직업 : 공연예술가 /학력 : 사라로런스대학 /가족 : 배우자 존 레논/ 데뷔 : 1964년 /작품집 '그레이프푸르트' >>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그런 물음을 던진 그의 저의를 리해할수가 없었다. 금방까지도나를 긴장하게 만들던 기운들이 서서히 가셔지며 그 어떤 기대감같은것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였다. 무엇인가 상징적인 의미를 띈것일거라고, 최소한 내가 닮을수 있는 존재일거라고 예측을 하고있었는데 이건 아니였다. 미모도 직업도 내가 하등 관심을 가져야 할 리유를 주지 않는 여자라니? 그런 여자와 나를 관련지어야 할 리유가 굳이 뭐란말인가? 프로필아래 간식타러 나온 유치원애들처럼 조롱조롱 나붙은 카페글을 읽어볼 흥미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내민 손바닥에 뭔가 쥐여주길 바라다가 아무것도 못가진채 손을 옴츠려야 하는 머쓱한 기분이였다. 그 글들을 읽어서 그 여자를 알아야 할 상식을 무시한채 나는 모니터만 멍청하니 응시하였다. 모니터에 그의 얼굴이 잠간 클로즈업되여 나타나는 순간이였다. 찌르는듯한 눈길에 전률하며 솜털이 오소소 일어남을 느꼈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왔다. 신경세포들이 또 하나하나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를 잊고있었다. 평범한 얼굴의 여자를 대하고있다는 허탈감에 내가 항상 잊지말고 있어야 할 그것을 잊고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말 한마디라도 허투루 던지는 사람이 아니였다. 내가 알고있는바로는 그랬다. 그런 그가 쓸데없는 질문을 던질리가 없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이제 손가락 까딱하고 클릭하면 내앞에 와르르 쏟아져내릴 저 여자의 이야기들이 무서워졌다. 평범한 프로필뒤에 숨어있을 그 여자의 이야기가 무엇일가를 숨막히며 의식해야 한다는 자체가 두려움이였다. 작정하고 던진 질문 하나가 그 여자의 이야기로부터 내가 뭔가를 깨닫고 거기에 내 의사까지 첨부해야 할 과제임을 이제 나는 전률하며 깨달아야 했다. 긴장감과 불안감에 호기심까지 동반하는 이름모를 흥분을 느끼며 컴퓨터앞에 앉은 내 몸은 경직되고있었다. 그렇게 하고있기를 한참이나 됐을가. <<띠리링~>> 야무진 소리와 함께 모니터 오른쪽귀로 메신저알림서비스가 쪼고맣게 뜬다싶더니 대화창이 파란 빛을 발하며 번쩍거렸다. --누나 , 머해? --응, 민이구나. 그냥 머 좀 찾아보구 있어. 갑자기 하기 싫은 일을 피할수 있는 핑게가 생겨버렸다. --누나, 나 오늘 기분이 별로야. --왜 그런데? --몰라, 사는게 귀찮아죽겠어. 이렇게 살바엔 콱 죽어버리기라도 할가 하는 생각도 막 든다~ --자식, 먼 소리 하고있는거야? 또 니네 매형이 머라 글데? --휴~ --그렇구나. 니네 매형이 일 저지른거구나. --막 미칠거 같아. 인간이 왜 저러지? 오늘도 내가 밖에 나가가고 없는 사이 울 누날 때렸어. 내가 돌아와보니 매형이란 작자는 쿨쿨거리며 뻐드려자구있구. 누나는 얼굴이 퍼렇게 멍들어있었어. 집안은 고약한 냄새로 가득차있구. 그걸 보고있을라니까 주먹이 우는거 있지? 으지직~하고 술에 한껏 취하여 고주망태가 된채 제 네편네를 나무패듯 두들겼을 몰상식한 남자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대체 남자들이란? --그래두 어쩌겠니? 니 누나와 같이 살 매형인데. 니 누나보구 확 갈라서라고 말이라도 하지 그래. --그 미친놈이 안 놔준다는거야. 울 누나보다 열두어살이나 더 많거든. 지가 우리 누날 놓치면 어디 가서 여자맛이라도 못볼거니까 그런거지. 생각같아선 언녕 뜨고싶은데 내가 없으면 누나를 더 못살게 구니까 그것이 걱정돼서 내가 이러구 있어. 정말 돌아버리기 직전이야. --어떡하냐? 그렇다고 네가 맨날 할일없이 누나곁만 지키고있을수도 없고. 남들처럼 부모라도 있으면 역성이라도 들어주련만… … --후~ 부모없이 산 세월이 얼만데. 나 이제 누나 데리고 도망갈거야. 그 미친놈이 못찾게. 암튼 애도 없으니까 울 누나도 이제 미련이 없을거야. 외지에 가서 발붙이고있는 친구들도 있거든. 근데 가기전에 누날 봤으면 좋겠어. --날? --응. 누난 내가 안보고싶어? --ㅎㅎ 궁금하긴 하지. 하지만 난 원칙이 있거든. 가상공간의 만남은 가상공간으로 끝낸다~이거야. 만나서 피차 좋을게 없잖아. 궁금증이 풀리는 대신 실망하거나 흡인되거나 하면 곤난할거니까. 안그래? --으이? 서른밖에 안 된 여자가 왜 이리 봉건이야? 나보다 두살만 많으면서 생각하는것은 영 딴판이네. --그래, 나 봉건이다. 니가 잘났다 ,잘났어! 짜식! --ㅋㅋ 그래도 누나랑 이야기하고나니 속 좀 후련하다. 누나가 있어 참 다행이라싶어. --내가 이 세상에 가상공간속에서나마 있다는걸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살어라,착한 동생아. --ㅋㅋ --ㅎㅎ 나는 어느새 컴앞에 앉은 리유를 잊은채 키들키들 웃고있었다. 민이와의 대화를 끝낼무렵 나의 마음은 서서히 평온을 찾고있었다. 미련없이 검색을 하던 홈페지의 카페글제목들을 일별하고나서 홈페지를 닫고 컴을 끄는 일들을 순서있게 진행시켰다. 속으로 한가지 생각을 굳혔다. 그래, 당분간 생각을 멈추는거다. 오노요코란 여자가 존재하는 이상 그가 던진 질문의 답안지는 이미 던져진게 아닌가? 내가 그 여자처럼 되느냐 안되느냐가 그와 나사이의 중대한 결정을 유발할거니까. 서둘지 말자. 답안지가 주어진 이상 그걸 확인하는것은 내몫이다. 나는 정통편 한알을 꺼내 삼켰다. 일상의 나로 돌아가야 했다. 밖은 어느새 어스름이 내리고있었다. 오늘도 나는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할것 같은 예감에 벌써부터 뇌신경이 팽팽해졌다. 2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찌뿌퉁하던 기분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텁텁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밥을 모래알 씹듯이 으적으적 씹다말고 숟가락을 놓고 휭하니 일어서서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변기에 쭈크리고 앉아 한참이나 낑낑거렸다. 아래배에 지긋이 힘을 주어 홍문이 열려지게 하였지만 내용물은 나오지 않았다. 왼손편의 아래배를 만져보니 변이 들어찼음직한 딱딱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신경질적으로 두어번 더 힘을 주다말고 좌르륵 변기에 물을 내리고 일어서고 말았다. 변비가 도졌던것이다. 이제 무리를 하면 또 홍문어딘가가 파렬되며 피가 흘러내릴것 같아 그만두었다. 께름직한 변을 배속에 가둬두기로 했다. 피를 보며 변을 털어내느니 차라리 은근한 복통을 느끼면서라도 피만은 피하고싶었다. 나는 피를 싫어했다. 첫월경을 경험하면서부터 피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활구석구석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워낙 살이 여려서 어설픈 바느질을 끝내고 실을 당겨끊거나 덤벙거리며 꽛꽛한 종이나 돈을 다룰 때도 손가락이 곧잘 베여지며 피가 슴배워나왔다. 피를 싫어하면서부터 혹시라도 손이 베일가봐 칼질도 조심히 했고 실도 꼭 가위로 끊어냈으며 종이는 더 조심히 다루었다. 빨간색까지도 보기 싫어했던 까닭에 붉은 옷은 입으려 하지 않았고 닭알과 도마도를 섞어서 끓인 도마도국도 먹지를 않았다. 티비를 보다가도 피를 흘리는 장면만 보이면 채널을 바꿔버렸고 학급애들이 코피를 쏟아도 어쩔바를 몰라 덤벙대며 이웃학급의 담임교원을 불러오군 했었다. 그러는 나를 주위에서 담이 작다고 놀려줬다. 놀림을 들으면서 나는 피를 싫어하는것은 담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앙앙불락하였다. 아무튼 피만 보면 현기증이 일었기에 될수 있으면 나는 피라는것을 아니, 그것보다는 붉은색자체를 거부하고싶어했다. 했으나 아침에 피를 보고야말았다. 변을 아래배에 묵직하게 괴여넣은채 괜스레 짜증이 나서 싱크대에 있는 그릇들을 왱강댕강 소리를 내며 치우다가 끝내는 접시 하나를 떨어뜨렸다. “어머!”하는 소리가 끝나기도전에 “짤라당”하는 소리가 이어지며 접시는 몇쪼각으로 부서지고말았다. 결국 접시쪼각을 치우다가 내 손가락은 피를 보고야 말았다. 손가락에 파스를 감는 나를 보며 남편은 “오늘은 비가 올려나?”하고 궁시렁거렸다. 날씨때문에 변덕이 많은 내 기분을 남편은 알고있었던것이였다. 하지만 집안에 환하게 해빛이 비쳐드는것으로 보아 날씨는 쾌청했다. 파스를 감은 손가락에서 눈길을 떼여 남편을 찔 흘기다가 내 눈길은 한곳에 꽂히고말았다. 오른쪽목에 볼썽스럽게 붙어있는 파스. 어제밤 회식때문에 늦게 귀가한 남편의 목에는 누르스름한 색상의 파스 한장이 꼼꼼하게 붙어있었다. 벗어내린 샤쯔를 받아주다말고 눈이 올롱해서 쳐다보는 내 눈길을 피하며 남편은 “사무실정리하면서 사무상을 옮기다말고 모서리에 긇혀버렸어.”하고 스스럼없이 뱉어냈다. 그렇거니 하면서도 찜찜했다. 문득 어떤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발도장을 여기저기 찍고다닌다던 친구의 말이 퍼뜩 떠오르며 가슴이 섬찍했다. 설마하면서도 눈길은 자꾸 남편의 목에 붙은 파스에 달라붙었다. 콱 잡아채고 파스밑의 피부를 보고싶었다. 스친 상처자국인지 이발자국인지 확인하고싶었다. 남편목에 붙은 파스를 어둠속에서 꼬나보며 밤새 궁싯거리다보니 새벽녘에야 가물가물 잠이 들었던것이다. 내 손가락에 감긴 파스와 남편목에 붙은 파스를 보며 깐죽거리고싶어졌다. “우리 파스커플이다~” “쳇!” 남편이 혀를 찬다. “커플답게 누구 상처 더 큰가 비교해볼가? 당신 상처 아마 딱지 앉았을거야. 파스붙이고 있으면 공기가 안 통해서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니까 파스 떼여봐요.” 눈꼬리를 치켜뜨며 파스를 뜯을려고 손을 뻗쳤다. “왜 그래?! 아침부터 재수없게!” 남편이 화를 버럭 내며 뿌리치는바람에 나는 저만치 밀려나고말았다. 출근을 하여서도 나는 파스를 감은 손가락을 펴든채 파스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와락 파스를 뜯어버렸다. 허여스름해진 살갗에 약간 갈라진 살가죽이 언뜻 보여왔다. 피는 파스에 배여져있었다. 남편의 목에 붙은 파스를 떼여내면 어떤 피부가 보일가? 살갗이 긁혀 여기저기 피가 돋아난 흔적이 보일가? 아님 쫙 째지기라도 했을가? 파스밑의 피부가 궁금했다. 상처가 궁금한것은 아니였다. 살갗에 빨갛게 찍혀진 이발자국이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있는것만 같았다. 저도모르게 끈적끈적 묻어나는 저압의 기분에 휩싸이고말았다. 누군가를 잡아먹지 못해 눈살이 꼿꼿해서 이를 뽁뽁 가는데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어머나, 어마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개뿔같이~” 전화벨소리마저 짜증이 나서 사무상우에 있는 핸드폰을 와락 끄당겼다. “누구세요?” 말이 없다. “누구세요?!” 그래도 말이 없다. “누구야?!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 사람 놀리는거야” 시어미역정에 개배때기 찬다고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말았다. “이씨~” 또 욕지기가 쏟아질려는데 깊은 한숨소리가 전화기 저끝에서 힘없이 새여나왔다. “누나, 나야. ” “민이? 근데 왜 대답을 안하구 그래?” “누나, 사랑한다~” “야가 왜 이래? ” 꽥 소리를 지르며 발딱 일어서고 말았다. 쳐다보는 동료들의 눈길을 의식하고 사무실밖으로 나가며 목소리의 톤을 억지로 낮췄다. “너 무슨 일 있니?” “누나, 나 오늘 술 마셨다. 친구랑 둘이서 흰술 두병을 다 마셔버렸어.그런데도 말짱해. 근데 갑자기 누나생각 나는거 있지?” “왜 또? ” “울 누나랑 싸웠어. 외지로 가는데 은행카드가 필요하거든. 현금을 지니고 갈수가 없잖아. 아침에 누나가 은행카드하라고 돈 100원주면서 얼마 남을거라고 그러더라. 정작 가보니까 누나생각한것보다 20원 더 들데. 그래서 그거 하고나서 누나한테 남은 돈을 주면서 20원 더 들더라고 했더니 왈칵 화를 내면서 나를 욕하겠지. 내가 다른데 썼다고 말이야. 그래서 싸웠어.” “누나가 잘못 알고 그러겠지. 그런다고 싸우면 되냐? 가뜩이나 힘든 네 누나인데 니가 참아야지.” “나두 그럴려구 했어. 근데 갑자기 나도 화가 나더라. 내가 누구땜에 외지로 가는데 말야.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돈 20원때문에 누나가 그렇게 해도 되는거야? 누나랑 싸우고나서 그길로 친구집에 가서 술퍼먹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누나도 니 맘 알거야.” “후~누나, 사랑한다~ ” “짜식, 먼 소리야? 그래 사랑해라 사랑해! 니 누나로 콱 사랑해라!” “그게 아니라니까. 사랑한다니까!” “그만 씨벌거리고 이제 쉬여. 자고나서 머리가 맑아지면 다시 이야기하자.” 민이의 대답이 있기도전에 서둘러 전화를 끄고말았다. 가슴이 벌렁거렸다.민이가 그런 말을 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있었다. 두어달전에 채팅방에서 우연히 만나서 나에게 메신저아이디까지 신청해준 녀석이다. 민이가 신청해준 메신저아이디로 출근시간에 짬짬이 대화를 했었다. 두살은 어려서 동생으로 귀엽게 봐주는 나에게 민이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는 눈치더니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 자기의 신상에 대해 터놓기 시작했다. 민이는 어려서 량친부모를 잃고 할머니손에서 오누이가 자라다가 누나가 결혼을 하고 누나랑 같이 살게 되였었다. 초중을 졸업하고 친구들 연줄로 연해지구에서 일자리를 찾아 밥벌이를 하다가 여의치 않아서 돌아와보니 누나가 매형의 구박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매형이 다니던 공장이 불경기로 생산을 멈추고나니 술과 도박에 젖어서 진위생원에 다니는 누나의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무슨 심술인지 걸핏하면 애매한 누나와 걸구들어 치고박고하였다. 워낙 한달쯤 있다가 떠나려던 민이는 그걸 보고 서너달째 눌러앉게 되였고 급기야는 누나와 함께 탈가를 계획한 모양이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나를 사랑한다느니 어쩌니 하는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술취한 충동이라고 볼수밖에 없었다. 그걸 뻔연히 알면서도 그 소리를 들는 찰나 가슴속에서 뭔가 뒤웅박질을 하는것은 달리 해석할길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요상하렸다. 입으로는 별소릴 씨벌인다고 민이를 몰아세우면서도 그 소리가 과히 싫지는 않았다. 가슴이 뛰고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지며 구름위에 뜬것같은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엄습해왔다. 눈을 꼭 감고 숨을 길게 들이쉬고 왼손으로 벌렁이는 가슴을 꼭 누른채 한겻이나 앉아있는데 갑자기 목이 콱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난데없이 단단한 이발이 목을 꽉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라니. 눈을 번쩍 떴다. 목을 만졌다. 목은 매끄러웠다. 이발의 흔적은 없었다. 후~ 한숨이 나왔다. 내가 너무 예민했던것 같았다. 남편의 목에 붙어있는 파스때문에 신경이 팽팽해있는 탓이였다. 정말로 사무상을 움직이다가 긁혔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한껏 곤두서있는 신경을 눅잦혀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구정물찌꺼기처럼 끈끈히 남아붙는 불쾌감만은 가실수가 없었다. 갑자기 묵직한 아래배에서 통증이 느껴져왔다. 통증은 서서히 홍문쪽으로 옮겨가고있었다. 수지를 구겨쥐기 바쁘게 화장실로 뛰였다. 피를 보면서라도 배속의 변을 부리워내야 했다. 결국 봐야 할 변이니까. 3 민이는 무얼 하고있지? 누나랑 외지로 가긴 간건가? 일을 하다말고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민이와 련락이 끊긴지도 벌써 며칠째다. 그날 이후로 메신저는 오프라인상태였고 전화도 늘 부재중이였다. 내가 넘 심한것은 아니였던가고 돌이켜보아도 심하게 한 말은 반마디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한메일사이트에 접속하였다. 로그인을 하다가 눈이 반짝 빛났다. 민이의 메일이 들어와있었다. 자식? 여기 숨어있었네. 혼자 웃음을 빼여물며 서둘러 메일을 열었다. --누나, 안녕? 나 민이야. 나 지금 광주로 와있어. 당연히 울 누나랑 같이 왔지.오기전에 누나한테 말이라도 할가 하다가 안그러는게 좋을거 같아서 그대로 와버렸어. 말한마디 없었다고 욕하지 마. 안그래도 충분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실은 정말로 누나랑 한번 만나보고싶었는데… …누나가 날 비켜갈가봐 무서워서 그만뒀던거야. 누나가 언젠가 메신저로 대화하면서 그랬잖어. 울 둘은 그냥 오누이로 남아있을거라구. 만에 하나 누가 누굴 좋아하게 된다면 누난 그 즉시로 자기가 사라져버린다고 했어. 마지막으로 전화하던 날 억수로 취했는데도 누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또렷하더라구. 이튿날 술을 깨면서 참 후회했어. 혹시라도 누나가 날 멀리할가봐. 그래서 메신저도 못하고 전화도 못했어. 누나가 사라진것이 확인이라도 되면 나 어쩔줄을 모르겠거든. 그 길로 와버린거야. 어차피 떠날 준비는 거의 된 상태였으니까. 누나에게 더 이상 부담은 안줄테니까 내 감정따위는 무시하고 그냥 사라지지만 않으면 돼. 할수 있겠지? 핸드폰을 사는대로 전화할게. 1314521! 뭐야? 1314521?! 녀석의 편지는 수자로 끝을 맺고 있었다. 그 수자를 보며 괜스레 가슴이 활랑거렸다. 언젠가 민이는 통화를 하다말고 “1314521”라고 말해보라고 날 시켰다. 별걸 다 시킨다고 궁시렁거리며 “안해!”하고 딱 잡아떼고 통화를 끝마치자바람으로 나보다 한참은 어린 동료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었다. “한어말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한평생 널 사랑할게 ’라는 뜻으로 쓰이는 수잔데요.” 라고 말하며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동료의 올롱한 눈이 떠올라 머쓱해졌다. 공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돌리고있지 않았다. 웬지 허전하기만 했다. 이제 나는 민이가 날 사랑한다던 말이 진실이였음을 막연하게나마 믿어야 했다. 난 참 감각이 무딘 편이였다. 집에서 반시간은 족히 걸어야 이를수 있다는 컴방에 민이가 맨날 다니며 이야기를 나눌 때에 무언가를 눈치챘어야 했을텐데, 언젠가 매형을 화김에 한매 때려부시고 밤중에 컴방에 뛰여가 나한테 메일을 보냈을 때라도 그 애의 심중을 들여다볼수 있었어야 했을텐데, 캠이 효과가 나빠 내가 잘 안보인다고 투정질하는바람에 이리저리 자리를 옮길 때라도 짚이는데가 있어야 했을텐데… …난 여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누나랍시고 내 수다떨기에만 열중했던것 같다. 그럴줄 알았더면 일찍 민이한테서 멀어져야 할걸 그랬다고 자신을 나무람하면서도 뭔가 속에서 쑥 뽑혀나간 느낌이다. 이제 만리타향으로 가버린 민이. 언제 볼수 있을가가 막연하다. 연변에 있을 땐 내가 보지 않을 따름이지 내가 허락만 하면 언제고 뛰여올수 있는 녀석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든든한것 같았다. 갑자기 민이가 보고싶다. 얼마전에 캠으로 보았던 얼굴이 흐릿하기만 하다. 문득 민이의 한메일아이디가 생각났다. 잇달아 비번도. 언젠가 자기 메일에 자기가 다운한 영화들이 많다며 비번을 가르켜줬었다. 내가 막 들어가봐도 일없냐고 했더니 자기 메일에는 비밀이 없다며 편할 때 들어가서 자기 사진도 보고 영화도 다운해서 보라고 했다. 얼른 내 아이디를 로그아웃하고 민이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했다. 로그인이 되는 사이 그새 비번을 변경이라도 했을가봐 걱정을 했다. 짠~ 로그인 완료. 기쁨이 넘실거렸다. 편지함을 뒤적거리며 사진을 찾았다. 드디여 <<내 사진>>이라고 쓴 메일제목을 보는 순간 환성이 터질려 했다. 녀석, 여기 있었구나. 제목을 클릭했다. 메일이 열렸다. 운동모자를 쓴 사진이였다. 캠으로 찍은거여서 화면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모습은 알렸다. 꾹 눌러쓴 모자밑에 웅숭깊은 눈이 나를 직시하고있었다. 남자치곤 검지 않은 얼굴색에 약간 긴듯하면서도 정작 길어보이지는 않는 여자라면 갸름하다고 표현해야 할 얼굴형, 코날도 곧고 반듯한것이 얼핏 봐도 잘생긴 얼굴이였다. 사무실에서 캠으로 처음 민이의 얼굴을 봤을 때 곁의 동료들이 모여들어 멋지다고 우야우야 떠들던 일이 생각나서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 잘 생긴 녀석의 얼굴을 흐뭇하게 마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녀석아, 나없이도 잘살어라. 민이의 메일을 로그아웃해버리며 불쑥 내 답안을 기다릴 그가 생각났다. 이제 나는 답안지를 확인할 때가 된것이 아닐가고 궁리했다. 그날 그렇게 질문을 던져놓고나서 감감무소식이 되여버린 남자. 그걸 나에 대한 무관심으로 리해해야 할지 내 답안에 대한 절실한 기다림이라고 리해해야 할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답안을 기다리고있을거라고 내 욕심은 믿고싶었다. 나는 늘 일방적으로 그를 판단하고 내 의사에 따라 리해하였다. 그러는 나를 항상 귀여워죽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요즘 들어 자기 기분에 젖어 혼자 떠벌일줄밖에 모르는 차가운 여자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속으로 살얼음이 쫙 건너감을 느꼈다. 온몸에 서걱거리는 얼음덩이들의 맞부딪침들때문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을것 같은 위구심으로 한참은 끙끙거렸다. 자신을 흐물흐물 녹여버리고싶은 집념에 불고기뀀을 찾는 차수가 많아졌다. 불가까이에 화기를 확확 느끼며 앉아있는 동안이면 얼굴이 홧홧해나고 손에 온기도 돌며 내 몸전체를 향하고 덮씌워지는 따뜻한 기운이 몸속 랭기를 서서히 밀어내군 했었다. 지금 나는 불을 마주하고 앉고싶음이다. 불고기뀀점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좌석마다 사람이 꽉 찼고 반쯤만 막은 칸막이로 하여 시끌시끌하다. 좌석들 사이사이로 웨이터들이 소반을 쳐든채 웨치듯 답하며 급히 움직이고 있다. “뭘 먹을래?” 굳이 보고싶은것도 없으면서 초점없이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그가 조용히 물어왔다. “글쎄, 뭘 먹으면 좋지?” 선한 눈빛의 그를 쳐다보며 나는 그 눈속에 뛰여들고싶다고 생각했다. 깊이를 알수 없이 시원하게 서글서글한 눈, 그 눈동자속에 눈동자에 꽉 찰만큼 조그맣게 비쳐든 나를 들여다보며 문득 작은 노루 한마리가 내 눈안으로 뛰여듦을 보았다. 아빠가 키우는 송아지의 털빛을 닮은 노란 털을 가진 작은 노루 한마리. 산자락을 에돌아 끝간데 없이 빠진 길가에서 보았던 그 노루가 이제는 어른으로 되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루는 지금도 그 산속에서 노닐고 있을가? 어느새 내 기억은 노루를 찾아 거슬러올라가고있었다. 가끔씩 옷섶까지 찬기운이 스며들며 불어치는 바람때문에 봄기운을 실감할수 없는 어느 봄날, 도시를 향해 뛰고있는 중형뻐스에서였다. 혼자서 탈탈거리며 친정집에 다녀오는 걸음이라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장모님생신날인데도 사위가 안보인다고 엄마가 서운해하는 바람에 일때문이라고 해석을 하면서도 내 맘 한구석도 까부장해져있었었다. 객적게 눈을 지긋이 감고있는 옆자리임자를 슬쩍 훔쳐보다말고 창밖에 눈길을 주고말았다. 고향에 다녀갈적마다 옆자리임자가 옛동창생이라기라도 했으면 하는 기대가 내 가슴밑바닥에 은근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고향을 다녀가는 10여년 려정에 그런 기대는 단 한번도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10여년 집에서 단위에로, 단위에서 집에로 가방 달랑 메고 오고가는 코스를 반복한 꽉 막힌 내 일상에 신물이 날대로 난터였고 본의아니게 흐물거리는 병적인 즐거움으로 비명소리 아싸한 도시생활에 젖어들고싶은 충동으로 몸을 달구고있었다. 남편아닌 다른 남자를 바라보는것도 될상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가슴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여올라 밖으로 터지기 일보직전이였다. 오늘도 옆자리임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였다.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 소리없이 내 곁에 자리를 찾아 앉았던 남자는 내가 부스럭거리며 눈을 떴을 때에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채 미동도 않고있었다. 옆눈길로 남자를 힐끔거리며 눈을 감은 사람의 모습은 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툭툭 삐여져나온 륜곽만 알릴 뿐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눈동자를 볼수 없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꼬아본다는것이 이상한 짓거리같이 생각되여 나는 멋적게 눈길을 창밖에 돌려버릴수밖에 없었다. 산자락을 가로질러 차창밖으로 휙휙 스쳐지나는 길가의 나무와 연록색으로 단장을 한 산들에 허옇게 무덕무덕 모여있는 살구나무들을 살구꽃만큼이나 희멀건 시선으로 한참이나 바라보다 말고 내 입은 “어머”하는 소리를 짧게 뱉어냈다. 작은 노루 한마리가 폴짝 길가로 뛰쳐나오는 모습이 눈안에 비쳐들었던 탓이다. 그 놈도 멈칫 멈춰서서 눈을 말똥거리며 차쪽을 바라보고섰다. 그때 나는 그놈의 눈에서 선한 빛을 보았던가 말았던가. “노루 좋아해요?” 머리를 비틀어탄채 창밖의 노루를 향해 시선이 경직된 나한테 물음표 하나가 내물같이 촐랑이며 다가왔다. 노루를 좋아한다니? 그게 뭐 고양이라도 된다고. 속으로 이죽거리며 머리를 돌리는 찰나, 내 눈에 비쳐든 그 눈빛때문에 나는 흠칫하고말았다. 선한 숫사슴의 눈빛. 조건반사적으로 내 머리속에서 튀여오른 단어결합이였다. “노루와 사슴의 구별점이 뭐죠?” 어느새 나는 사슴과 노루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하고있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노루입니다. 녀석이 참 귀엽습니다.” 남자의 눈길에서 부드러움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전 항상 노루도 사슴같고 사슴도 노루같거든요. 저 놈이 사슴인지도 모르겠어요.” 난 정말 아까 본것이 사슴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머리속에는 사진으로 본 사슴과 노루의 모습들이 엇갈아 배회하고있었다. 헌데 어느것이 어느것인지 분간을 할수가 없었다. 내 눈엔 똑같은 존재였다. 그 사이 뭘 생각하고있는지 남자도 입이 닫겨져버렸다. 답답했다. 내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남자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침묵이 꽉꽉 숨통을 조여오는것임을 처음으로 숨막히게 절감하는 시간이였다. 대신 심장박동소리가 내 귀를 넘어 남의 귀에 들리기라도 할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길은 창밖에 두었지만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별난 옆자리임자때문에 재수없다는 생각이 귀찮게 달라붙을 즈음 차는 이미 도시에 들어서고있었다. 산은 어느새 저만치 물러서서 파랗게 굳어지고 량켠에 일어선 콩크리트숲이 뿌옇게 눈앞을 가리기 시작하였다. “제 명함입니다.” “네?” 남자는 차에서 내리며 파란 하늘색바탕의 명함장을 내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받아쥐고말았다. 헌데 두장이였다. 이건? “한장엔 전화번호 적어서 절 도로 주셔야죠?” 나는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내 핸드폰번호를 또박또박 적어 남자에게 넘겨주고말았다. 멀어져가는 남자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망연해지고있었다. 낯선 남자에게 핸드폰번호를 적어준게 나란말인가? 허나 후회는 눈꼽만큼도 묻어나지 않고있었다. “먼 여자가 맨날 머가 먹고싶은지도 모르고 살어? ” 그가 따스하게 웃으며 핀잔비슷이 궁시렁거렸다. “가을하늘은 참 시원할거죠?” 갑자기 하늘의 냄새를 맡고싶었다. 청청한 가을하늘의 냄새, 높고 푸른 가을하늘만큼이나 시원할것 같았다. “그냥 고기로 할거지? 맥주 마실거야 말거야?” 흰구름 몇점 둥둥 떠있는 가을하늘이 뵈여온다. 하늘을 우러러 팔을 뻗고 심호흡을 하고싶었다. “하늘냄새 맡아본적이 있어요?” 그는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하고 담배 한대 빼여물었다. 하얀 담배연기가 몰몰 피여오른다. “담배연기 참 맛있거든. 난 담배없이는 못살것 같애.” 그 연기속에 내 가을하늘은 혼탁하게 흐려져버렸다. 작게 숨을 쉴 때마다 내 가슴으로 알싸하게 흘러드는 담배연기. 내 코끝으로 흘러드는것은 싱긋한 하늘냄새가 아니라 매캐한 담배냄새였다. 나는 캑캑 마른 기침을 해대고말았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뭘요?” 동그래진 내 눈을 그가 의아쩍게 들여다본다. “답안이 있어서 불렀던거 아니야?” 답안? 그랬다. 난 답안이 있어야 했다. 역시 그는 답안이 궁금했던거다. 파란색의 명함장이 내 돈지갑안에서 다슬어갈무렵, 그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만나자고 했다. 나는 1초의 여유도 가지지 않은채 선뜻 대답을 해버렸고 한참이나 거울앞에서 머뭇거리다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앞에 나서고말았다. 그런 나를 그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한참이나 바라봤다. “왜 나왔죠?” 난데없는 물음에 흠칫했다. 나는 그가 왜 불렀는지 안궁금한데 그는 내가 왜 나왔는지 궁금해했다. “글쎄요.” 나는 입을 조그맣게 오무려뜨리며 웃는 모습을 지어보였다. “이거 줄려고 불렀어요.” 종이봉투 하나를 넘겨주었다. 받아도 되는건지 몰랐다. 그러나 명함장을 받을 때처럼 내 손은 쑥 나가버렸다. “그날 하도 노루와 사슴이 어떻고 하길래 자료 좀 찾아보았어요. 부담갖지 말고 봐요. 노루와 사슴의 사진하고 거기에 관한 자료들입니다.” 내 기억속에서 까마득히 지워져있는 길가의 노루를 그는 상기시켜주고있었다. “안나오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공들여 찾은 자료가 무용지물이 될가봐서요. 근데 정말 왜 나오셨어요? 리유도 안묻고. 물으시면 대답할 말 다 준비해주고 있었는데요.” “그냥요.” 정말 왜 나왔는지 나로서도 몰랐다. 불러준 사람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여도 나왔을지 궁금했다. 문득 아들녀석이 생각났다. 이제 여섯살을 막 먹은 준. 아침에 유치원가는 길에서도 아들녀석은 나에게 꼬박꼬박 말을 시켜댔다. “엄마, 준이가 몇살이니? 하고 물어봐.” “준이가 몇살이니?” “여섯살입니다. 엄마, 엄마는 몇살입니까? 하고 물어봐.” “엄마는 몇살입니까?” “엄마는 서른한살이얘요. 엄마, 준이가 참 똑똑하구나 하고 말해봐.” “울 준이 참 똑똑하구나.” 그제야 아들녀석은 캐득캐득 즐겁게 웃어댔다. 유치원에 붙은후로 준이는 나에게 물 어볼 말을 시켜주고 그 물음에 대답하기를 좋아했다. 제가 시켜준 물음이라 녀석은 답안을 알고있었다. 알고있는 물음에 알고있는 답안을 말한다는것이 녀석에게는 매양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였던 모양이다. 지금 그가 그랬다. 상대방이 자기에게 던져올 질문과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 에게 나는 그가 원하는 물음을 던져주지 않았다는것에 미안함을 느껴야 할지 말지 잠 간 망설였다. 원하는 놀이를 안해주면 뿌루퉁해하던 준이의 모습이 얼핏 스쳐지났다 “왜 만나자고 했죠?” 내 눈은 요사스럽게 눈꼬리가 치켜올라갔을거라고 생각했다. “노루와 사슴이 어떻게 다른건지 알려주려구요.” 남자의 입귀가 살짝 우로 말려올라가며 묘한 웃음이 배여올랐다. “누구라도 궁금한거 있음 알려주지 못해 안달이 나는건가요?” 이제 나는 해쭉해쭉 웃을 준이의 모습을 보고있었다. “아뇨. 그쪽에게만 알려주고싶었을뿐이죠.” 나의 눈을 직시하는 남자의 눈빛은 진지했다. “참 착한 분이시네요.” 남자가 쿡쿡 웃었다. 그 얼굴에 캐득거리던 준이의 얼굴이 겹쳐왔다. 헌데 준이의 얼 굴은 엄청 작았다. 웬지 그게 께름직했다. 내 맘속에는 가슴이 꽉 메여질만큼 크기만 한 준인데 낯선 남자의 얼굴앞에서는 무작정 조그맣게 줄어든다는것이 화가 났다. 똘 망똘망한 준이의 눈빛을 떠올리며 언제까지 준이랑 시켜주는 물음을 묻고 답하는 유 희를 놀아야 할가고 잠간 생각을 해봤다. 아마 며칠이 더 갈는지, 몇달이 갈지도, 두 어살 더 먹을 때까지 해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묻죠. 그쪽은 왜 나오셨어요?” “그냥요.” 역시 나는 대답이 궁했다. 한번이 아니라 열번, 백번을 물어도 나는 답안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상대방이 물어올 질문과 답안을 준비하고있는 그와 달리 나는 그의 물 음에 답안을 가지고있지 못했다. 하여 나는 키들키들 웃는 재미를 느낄수 없는것인지 도 몰랐다. 오늘도 나는 답안을 갖고있지 못했다. “답안이 없는데…” “그럴줄 알았어. 니한테 답안이 퍼뜩퍼뜩 생기면 니가 아니지. 근데 오노요코가 누군지는 알아?” “검색은 해봤어요.” “그럼?” “프로필만 보고 다른것은 안읽었어요.” 내 눈빛이 암담하게 흐려졌을거라고 생각했다. 잠간 서글픔이 그의 눈을 스쳐지나는 모습을 나는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그랬구나. 넌 아마 될수 없을거야. 차라리 읽지 말어.” 왜 내가 읽음 안되는거지? “그 사람은 어떻게 알어요?” 내 입은 또 제맘대로 주절거리고있었다. 그가 씩 웃는다. “카페글을 읽다가 우연히 봤어. 내가 어떻게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넌 항상 문제의 요를 파악못하더라. 너 그거 아니? 너한테는 단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니가 그러는게 부럽다는거. 누가 뭘 물을지도 모르고 자기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러다가는 문득문득 생뚱같은걸 물어오고. 참 오래동안 그런 널 바라보는 재미로 산것 같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아득했다. 나도 날 바라보는 당신 눈빛을 내 눈속에 집어넣는 재미로 살았었는데. 이제 저 눈빛을 나는 언제까지 바라볼수 있을가? 4 해살이 참 밝다. 창에 부딪치는 해살에서 쟁그랑쟁그랑 소리가 날듯 싶다. 밖에서는 싸구려소리가 흥겹게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참 울적하다. 울적한 기분에도 해살의 밝음을 느낄수 있는 내가 이상스럽다. 이때쯤 남편의 핸드폰은 몇번이나 울렸을가? 남편의 핸드폰은 굳이 내가 전화하지 않아도 한가할 새가 없다. 그걸 나는 어제 문득 깨달았다. 시간이 밤 열두시에로 치닫는 시간이였다. 남편의 핸드폰벨음악이 울렸다. 헌데 <<저 달우에~>>하고 한소절도 넘기기 바쁘게 끊겨져버렸다. 잘못 걸린 전환줄 알았다. 5분이 지났을가 할 때 또 벨음악이 울렸다. 역시 <<저 달우에>>를 한소절도 못넘긴채 끊겼다. 궁금증이 슬슬 일기 시작했다. 술마시고 집에 들어온지 반시간이 되나마나한 남편은 코까지 드릉드릉 골며 굳잠에 빠져있다. 남편머리맡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핸드폰폴더를 여는데 벨소리가 또 울렸다. 냉큼 접속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어? ” 얼떠름해진 여자목소리가 울려왔다. 피줄기가 짱하니 머리위로 올리뻗쳤다. “이거 …이거…리주임 전화 아닌가?” 바삭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더듬더듬 반말을 내뱉고있었다. 마른 꽃 한송이가 문득 머리속에 픽 떠올랐다. “맞는데요, 지금 자고있거든요. 누구시죠?” “아, 그런가? 안됐네.” 전화는 그렇게 끊겨지고 말았다. 한밤중에 받은 낯선 여자의 전화. 게다가 반말을 따박따박 뱉어낸다니? 내 기분은 금시 엉망으로 되고말았다. 핸드폰통화기록을 뒤졌다. 그 여자의 전화번호가 란발하고있었다. 그속에 낮에 한 내 전화번호가 비좁게 끼여있었다. 휴~ 한숨이 나왔다. 핸드폰을 다시 남편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남편이 언젠가부터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자는 리유를 알것 같았다. 머리속이 복잡해났다.남편목에 붙어있던 파스며 여자목소리, 핸드폰번호 --온갖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두서를 잡을수가 없었다. 거기에 잠간 비쳐드는 그의 모습까지. 신경안정제 두알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머리속은 지긋지긋해났다. 부석부석해진 남편얼굴을 올려다보기조차 싫어졌다. 찌뿌퉁한 모습으로 남편을 보내고 곧장 청가를 맡고 드러누워버렸다. 딱히 짚어낼만한 리유도 없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나와 남편사이, 거기에 대해 나는 얼마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눈빛이 그립다. 선한 사슴의 눈빛이. 그가 준 자료에 사슴은 령물로 기록되여있었다. 영생을 대표하는 령물. 대신 노루는 보은할줄 아는 착한 짐승이면서도 담작은 동물로 기록되여있었다. 내가 노루를 보았던것은 착한 그를 보고싶었음일가? 내가 노루와 사슴을 헛갈리는것은 그를 내 맘속에 영생시키고싶었음일가? 어쩜 내가 노루였던지도 모르겠다. 그를 보고있는 시각이면 내 마음은 한껏 느긋느긋해져있었다. 부드러운 솜뭉치같은 구름송이를 타고 파아란 하늘에 한적하게 떠있는 기분이였다. 아득하게 뻗은 푸른 들판과 들판이 끝나는 곳에 굼실굼실 이어진 산발들을 바라보며 잡념을 훌훌 털어버린채 하얗게 비여진채로 구름송이우에 그대로 행복하게 굳어질수가 있을것 같았었다. 마주앉은 그의 각진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재미나게 쳐다보며 나는 그의 말을 듣고있으면서도 듣지 않을수가 있어서 자유로왔다. 가끔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단어그대로 나는 얼떠름한 표정이였다. 어떤 때는 질문의 내용조차 파악하지 않은채 “몰라.”하고 부담없이 말할수 있는 내가 되여갔고 어떤 때는 캐득거리는 준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전혀 답안이 궁금하지 않고 답안이 뻔한 질문들을 그에게 하면서 쿡쿡 웃어주는 그를 귀엽게 바라볼수 있는 내가 되여갔다. 어쩌다 한번 심각한 질문을 한적도 있었다. 금방 점심시간을 넘긴 오후라 그런지 그날따라 “커피나무”카페는 한적했다. 커다란 홀안은 조명이 밝지 않았고 손님이래야 나까지 합쳐 고작 대여섯명정도였다. 자리를 잡기전 커피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몇장의 사진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부동한 표정의 선명치 못한 얼굴들을 보며 아무곳에나 자기사진을 스스럼없이 공개할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가고 궁금했다. 피씩 웃음을 물지똥처럼 흘리고말았다.항상 중요하지 않는 자잘한것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고있는 자신이 가소롭게 여겨졌다. 머쓱해서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은켠에 앉을 그를 생각해서 조금은 밝은 곳을 골랐다. 내가 모카골드 한잔과 카푸치노 한잔을 시키는 사이 카페에 들어선 그가 두리번거리고있었다. 밝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씩 웃으며 곧장 걸어오는 그의 몸에서 활력이 느껴졌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커피는?” “모카골드하고 카푸치노 시켰어요.” 말을 안해도 모카골드는 내몫이고 카푸치노는 자기몫임을 그는 알것이였다. 두 팔을 겹쳐 상우에 놓고 그 팔우에 머리를 놓고 엎드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를 쳐다보는 내 눈빛은 은근했을것이였다. 그대로 그를 내 눈속에 빨아들이고싶었으니까. 보고있으면서도 보고팠고 헤여지고나면 금방 그 모습이 아리숭해져서 그와 갈라져있는 시간이면 나는 그 얼굴을 떠올리느라고 머리속을 박박 털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었다. 보고있을 때 기를 쓰고 머리속에 사진을 팍팍 찍어두어야 했다. 하여 나는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냥.” 나는 샐쭉 웃어버렸다. 그냥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속에서 이는 불길을 아주 조심스럽게 겹겹이 쌀수밖에 없었다. 그 불빛이 행여 눈으로 비쳐질가, 행여 입으로 새여나올가 걱정하며 나는 나를 숨기는데 익숙해져야 했다. 하여 나는 담작은 노루였던것일지도 몰랐다. 커피가 들어오는 사이는 꽤 길었다. 봉지를 터뜨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는 커피믹스가 그립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였다. 말없이 마주 바라보는 둘의 눈길은 뜨거울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애써 눈길속에 랭기를 피여올렸다. 그러기를 한참이나 지났을가. “사랑이란게 있어요? 남녀사이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가요? 죽도록 사랑할수 있는 사랑이?” 느닷없이 세개의 물음표가 하나의 단어를 둘러싸고 튕겨나왔다. 사랑의 존재의 유무에 대해서말이다. 내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질문같은 질문이였다. 답안을 알수 없는 보다 심각한 질문. “있을거야. 사랑이란 느끼기에 달린거 아니겠어?” 이외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무나 쉽게 해버린 그 대답때문에 그 답의 정확성을 믿을수가 없었다. “사랑은 마음-육체-영혼 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 완성이 된다고 하던데요. 섹스가 없는 사랑을 어떻게 봐요?” “섹스”라는 단어를 뱉어내면서도 빨개지지 않는 내 얼굴은 뻔뻔스러웠다. 나는 뭔가를 원하면서도 거부하고있었다. 사랑을 하고싶다. 섹스는 싫다. 고로 섹스가 없는 사랑을 하고프다. 내 맘은 이렇게 웨치고있은지가 한참이나 되였다. “죽음과 사랑의 구별점 알어? 죽음은 말이야, 몸이 가면 마음도 어쩔수 없이 따라가는거야. 사랑은 마음이 가면 몸이 따라가게 되여있는거라구. 섹스가 없는 사랑이라? 그걸 사랑이라 할수 있을가? 사랑을 확인할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것이 섹스와 금전이라고 생각안해? 입으로만 하는 사랑 난 안믿어.” 대답은 완벽했다. 아니라고 할 틈서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섹스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고로 사랑한다면 섹스는 필수다. 문제의 답안은 이미 어긋나고있었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사랑을 운운한다는 자체가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이 안들어요?” 나는 또 무슨 답안을 원하고있었던겔가? “도덕? 도덕이 먼데? 맘은 다 줘버리고 몸만 지키고앉아있는게 더 비도덕적이 아닐가? 그건 자기를 책임지는 자세도 아니야. 맘과 몸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하는건데 둘을 갈라놓으면 고통스러워져.” 사랑에 대한 강의를 듣고있는것인지 ,륜리와 도덕에 대한 강의를 듣고있는것이지 헛갈렸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섹스는 거부하는것 –어쩜 내 상식의 선은 거기에 머물러있는것이였던지도 몰랐다. 하잘것없는 육체를 붙잡고 몸을 안주니 나는 결백하다, 나는 도덕적인 인간인거라고 자신을 위안하고싶었던것일것이다. “자기의 도덕성에 대해 어느만큼의 점수를 줄 자신이 있어요?” 나는 집요했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난 자유분방한 사람이야. 무엇에 얽매인다는게 싫거든. 난 내가 고독한 리유를 아는 놈이야.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은 리해를 못해. 난 인간의 육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성애는 신성한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구. 내가 왜 너한테 내 그림을 안주는 리율 아니? 넌 내 그림을 받아들일수 없을거야. 넌 교원이니까. 고정된 사유방식과 애들의 순진성을 많이 갖고있는 너이니까.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라체화를 그리고 섹스장면을 그리는 날 다른 사람은 리해를 못해. 나의 그림실력보다 내 사상자체를 리해못하는 인간들과 난 상종하기가 싫거든 . 난 그래서 고독해. 안해는 나에게 그냥 안해일뿐이고 애엄마일뿐이야. 니가 보기엔 내가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니?” 나는 참담했다. 굳어진 눈길로 그를 멍하니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렇게 헤여지고나서 그가 불쑥 전화로 질문을 던져왔던것이다. “넌 오노요코가 될수 있겠니?” 하고. 5 그를 못본지도 두달에 가까와온다. 오노요코에 대한 답안을 찾지 못한 나때문에 나는 그를 마주할 용건이 없어졌다. 한주일에 한번꼴로 보던 그를 두달이나 못보고있을라니 힘들었다. 하지만 만나서는 안되였다. 나는 답안이 없으니까. 괴로웠던 그 시간들을 나는 일로 몸을 혹사하며 보내야 했다. 내 몸이 바쁜 시간만은 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러노라면 나는 밤이면 한껏 잠에 노그라질수가 있었다. 그렇게 기계같이 자신을 무마하면서 지내온 동안 내 맘과 몸은 서서히 지쳐가고있었다. 이제 어떡할가? 답안지를 번져볼가 말가? 몸을 일으켜 컴퓨터앞에 앉아 잠간 고민을 했다. 그때 민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녀석은 한껏 들떠있었다. “누나, 나 여자친구 만났어.” “응? 여자친구라니? 언제?” 꿈쩍 놀랐다. 핸드폰을 사고나서 곧잘 전화를 하던 민이다. 회사일도 이야기하고 옷사입은 이야기도 하고 누나이야기도 하면서 통 여자친구이야기는 없었던것이다. “여기 온지 얼마 안돼서 채팅을 하면서 알게 된 여자애가 있었거든.” 여자애라? 그래, 민이에게 어울리는것은 여자애여야 했다. 내가 그걸 왜 모르고있었는지 한심하다. “그래? 직접 만난거니?” “응,지난 일요일에 만났어. 음식도 같이 먹고 스티커사진도 찍고 그랬거든. 근데 지금 여자애들 참 막 나가더라. 헤여질적에 여자애가 뭐라는줄 알어? 나랑 같이 살재. 재밌지?” 민이는 즐겁게 킬킬 웃어댔다. 내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고있었다. “넌 어쩔건데?” “모르겠어. 요 며칠을 고민했는데도. 그래서 누나한테 물어보는거야. 어쩔가? 같이 살가?” “여자가 어때 보였어? 괜찮은 여자애 같애?” 나는 엄마가 아니면서 엄마들이 물어야 할 말을 묻고있었다. “응. 생김새도 귀엽구. 넘 싸가지 없는 애는 아닌거 같았어. 나두 적당히 호감은 가구. 총적으로 싫진 않았어.” 민이는 여자애랑 살고싶다고 말하고있는거였다. “너 그거 생각해봤니? 처음 만난 너랑 같이 살고픈 여자 다른 남자랑도 같이 살고싶어할수 있다는걸. 너한테 헤픈 여자는 남한테도 헤픈 여자일수 있으니까.” “글쎄말이야. 근데 같이 살자는데 뭘 어쩌겠어? 내가 밑지는것도 아닌데…” “하여튼간에 잘 생각해봐. 너 지금 아무 여자나 덥석덥석 만날 나이가 아니잖니. 제대로 된 여자 한번 만나서 결혼까지 갈수 있게 해야잖어.” “알았어. 나두 잘 생각해보구 결정할게. 근데 누나가 봐도 아마 맘에 들어할것 같은 여자앤데…” 통화를 끝내면서 민이가 그 여자애랑 같이 살것 같은 예감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민이는 이미 답안을 찾은 문제를 갖고 공연히 나에게 묻고있는것이였다. 거기에 내가 빨간 잉크로 맞다는 체크를 해주기를 바라고있었던것이였을가. 마치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선생님이 별표식하나를 찍어주기를 바라고서있던 아들녀석처럼. 바락바락 신경질을 내며 핸드폰을 저만치 팽개쳐버렸다. 가슴왼쪽이 아릿해나며 콕콕 찌르는듯한 아픔이 전신에 찌르르 퍼지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질것 같았다. 나는 괴로웠다. 외로웠던 민이에게 함께 살아줄수 있는 여자애가 생긴데 대해 나는 기뻐해야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텅 비는것같이 허전해남을 어쩔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나는 민이가 혼자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가슴밑바닥에 옹송그리고있었던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민이를 가질수 없는 나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가지고싶었던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숨어있었다는것에 대해 나는 부끄러워했어야 했다. 나는 민이만 욕심냈던것이 아니였다. 그도 내 남자로 만들고싶었다. 하지만 확실히 내 남자로 만들만한 행각을 저지를 담은 없었다. 남편을 내 생활에서 지워버릴 용기도 없었다. 하다면 나는 노루였던겔가? 자신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를 짚어낼수가 없다는것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내것이 아닌 누구인가를 소유하고싶은 욕망이 신경세포마다에 골똑골똑 차있을줄은 몰랐다. 욕망은 욕망대로 넘쳐흐르는데 탈선을 하면 안된다는 리성때문에 껍데기만 남은 도덕이며 륜리때문에 터지기 직전으로 팽창되여있는 몸을 추스리며 괴로움을 어금이로 으드득 깨물어 삼켜버려야 하는 자신에게 참 화가 났다. 언제 봐도 똑 부러지지 못하고 맹꽁이같은 내가 밉기까지 하다. 이런 나를 그가 이뻐해줬고 부러워했다니 나는 그에게 감사해야 했음이다. 이제 내가 바라볼수 있는 남자는 그만 남은것일가? 이제 나는 민이를 깨끗이 잊고 살아야 할 때가 온것이리라. 혹시 민이가 날 사랑하면 ,혹시 내가 민이를 사랑하면 내가 사라져버릴거라는 낙언을 리행해야 할 때가 온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은 아프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접속을 했다. 한메일사이트를 열었다. 로그인을 할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번만 열어보는거다. 아이디와 비번을 써놓고 로그인을 했다. 량심에 철판을 깔고 내가 보면 좋아할것 같다는 민이의 여자친구를 보기로 했다.여자애의 사진이 들어있을가가 걱정되였다. 한편 속으로 나보다 훨씬 밉게 생긴 여자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마음에도 질투는 분명 파랗게 살아있었다. 드디여 메일페이지가 열렸다. 보낸편지함에서 <<너와 나사진>>이란 제목으로 된 메일이 눈에 띄였다. 들이숨을 쉬였다. 어떤 여자애일가? 둘이는 어떤 포즈를 취했을가? 제목을 클릭했다. 짠~ 말짱 스티커사진이였다.그 사진들을 스킨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며 싱글거렸을 민이의 얼굴이 얼핏 스쳐지났다. 운동모자를 쓴 여자애였다. 모자밑에 두쪽으로 갈라서 맨 머리가 귀밑에서 달랑거리고있었다. 하얀 살결에 새물새물 웃는 눈을 가진 귀여운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옆에 민이가 싱긋 웃으며 비좁게 상고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마우스를 굴려 아래쪽을 보다말고 헉 하고 숨이 막혀왔다. 생글거리는 여자애의 볼에 민이가 키스를 날리고있는 장면이였다. 민이의 옆모습이 참 행복해보였다. 사진을 직시할수가 없었다. 여자애가 귀엽다던 민이의 말소리가 울림이 되여 귀전에 왕왕 들려왔다. 이제 민이는 정말 가버리는걸가?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여버렸으니 나는 박수라도 쳐줘야 할게 아닌가? 신경질적으로 사이트를 확 닫아버렸다. 한참을 모니터앞에 엎드려있었다. 머리속에 온통 민이의 얼굴뿐이였다. 생글거리던 여자애가 비꼬는듯한 눈길로 쏘아보는듯한 느낌에 머리를 홱 쳐들었다. 가라, 가! 넌 워낙 내것이 아니였잖아. 6 잠들수가 없다.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아마 1층 노래방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소리일것이다. 이맘때면 노래방에는 질탕 먹고 마신 남녀들이 끼리끼리 모여 한껏 목청을 돋구고있을것이다. 가담가담 찬송가소리도 섞여서 들려온다. 옆단원의3층의 기독교신자집에서 울려나오는것이리라. 처음에 찬송가소리를 들을 때는 누구네 집에 상사가 난줄이라도 알고 두려움에 떨었었다. 찬송가소리가 내 귀에는 울음소리로 들렸던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공포에 떠는데 문득 낯선 아줌마 둘이 문을 두드리더니 교회에 들라고 권고를 해왔다. 그제야 밤에 호곡소리처럼 들리는 소리가 찬송가소리인줄을 알았고 옆단원 3층에 기독교신자가 새로 입주했음을 알았다. 오늘도 찬송가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가 찬송가소리인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솜털이 오소소 일어나며 섬찍해난다. 이불을 팍 뒤집어썼다. 그러고있기를 한참이나 지났을가. 콱콱 숨이 막히는바람에 다시 이불을 확 제끼였다. 어?! 끔쩍 놀라며 식은땀이 등골을 쭉 훑으며 내돋았다. 어둠속에 누군가 내 침상곁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활랑이는 가슴을 누르며 시선을 한곳에 집중했다. 차차 어둠에 습관되며 눈앞을 가려볼수가 있었다. 그였다. “?! 여기 웬 일이야?” 벌떡 일어나앉았다. 밖에서 비쳐들어오는 불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여위여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는데? 얼른 가요!” 외식한다던 남편이 문득 들어설것 같은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이불을 밀어던지고 침상에서 내리려고 서둘렀다. 손발이 허둥거려 몸을 똑바로 가눌수가 없었다. 허걱~ 바닥에 내려서는 내 몸위로 그의 몸이 쓰러졌다. 화끈거리는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아 헤매고있었다. “이러지 마, 이럼 안돼!” 그를 밀어던지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 중압을 감당할수가 없었다. 촉촉하고 부드 러운 그의 입술이 까칠하게 마른 내 입술을 찾아 포개여졌다. 입술이 통채로 그의 입 속에 빨려들어갔다. 다시 그의 혀가 입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으윽~ 신음을 토해내며 벌어진 내 이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다시 내 혀가 그의 입으로 넘어들어갔다. 끈적끈적한 타액이 입가에 묻어내렸다. 그의 손이 브래지어를 헤치고 한껏 팽대된 내 가슴을 어루쓸고 있었다. 손은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미끌어져내렸 다. 손길따라 내 몸이 꿈틀거리고있었다. 숲을 따라 흘러내리던 손이 헛구멍에 쿡 꽂 히던 찰나 나는 내 얼굴에서 그의 얼굴을 떼에 가슴에 꽉 그러안고말았다. 미칠것 같 았다. 내 몸이 그를 향해 스르르 열리는 순간이였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왔다. 이게 뭐야? 뭐야? 어떻게 된거지? “따르릉~” 다시 전화벨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번쩍 떴다. 얼굴에서 땀이 범벅이 되여 흐르고 있었다. 이부자리가 구겨져서 다리사이에 끼여져 있었다. 아래도리가 축축해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머무른 흔적은 있는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수가? 컴퓨터모니터에서 보호막으로 된 풍경화들이 퍼뜩퍼뜩 바뀌고있었다. 밖에서 쿵쟈쟈 하는 노래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왔다 .찬송가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후~ 어느새 전화벨소리는 끊겨져있었다. 수신기록을 들춰보았다. 남편이였다. 전화선코드 를 확 뽑아버렸다. 마우스를 움직였다. 모니터화면이 확 재생되였다. 오노요코를 소 개한 카페글이 모니터화면을 꽉 채우며 떠있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음악가중 한사람으로 비틀즈의 존 레논을 빼놓을수가 없다.반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초등학교 학생들도 알만큼 유명한 예스터데이를 시작으로 해서 클래식하고도 독특한 여러 음악으로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존 레논. 그의 유명한 노래중에 반전을 꿈꾸며 불렀던 “imagine”란 곡이 있다. 유 명했지만 외롭고 고독해서 마약과 섹스에 빠져 있던 한 예술가가 세계평화를 꿈꾸 게 하고 반전 캠페인을 주도하게끔 만든 여인은 바로 또 한명의 예술가 오노요코이 다. 존 레논과 오노요코가 처음 만났을 때 존이 스물여섯, 오노가 서른 여섯으로 오노가 열살이나 년상이였으며 둘 다 결혼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 공허한 결혼생활을 하고있었다. 당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자주 드나들던 영국의 한 갤러리를 찾은 존과 그 곳에서 “숨을 쉬시오”라는 카드를 내밀며 이벤트 전시회를 하고 있던 오노는 첫 눈에 서로에게 빠졌다. <플럭서스>라고 하여 영화나 사진 혹은 행위예술 등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대중적이지도 못한 예술을 추구하는 오노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존이 도와주기를 자주 요청했고 그때마다 존은 거절하지 못했다. 점점 존에게 매달리게 된 오노는 그의 집에 불쑥 찾아가거나, 심지어 그가 부인과 함께 있는 차안에 뛰여들어가기도 했다. 결국 존의 부인이 인도에 여행을 간 사이 오노는 그의 집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되였다. 존의 아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남편의 극성팬이라고만 생각했던 여자가 자신의 가운을 입고 자신의 식탁에서 아침식사를 하고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게다가 그녀는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태연히 “하이”라고 인사말을 던졌을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존 레논의 가슴에 깊이 박혀버렸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이틀이상 떨어져본적이 없었다. 잠시 존이 다른 여자와의 애정행각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위기에 빠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가 바람을 필수 있는 대상을 자신의 비서로 정해주기도 했다. 정말 독특하고 이해할수 없는 사람들이였다. 서양인과 동양인, 다른 인종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얼굴은 물론 개성과 기질,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까지 닮아가기 시작했다. 늘 같은 생각과 감정들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예술적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번호판을 꾹꾹 눌렀다. 발송신호음이 뚜뚜 하고 들려왔다.통화가 되면 나는 빠르게 뱉어낼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당신은 존 레논이 될거야? 오노요코는 존 레논에게만 필요한 존재거든.” 이제 나도 질문을 던지는것이다. 답안이 어려운 질문에는 어쩜 또 다른 하나의 질문이 가장 훌륭한 답안이 될지도 모른다. “엄마는 누구니?”하고 시켜주는 준이녀석에게 “준이는 누구니?”라고 되물으면 준이녀석은 어떤 표정이 될가? 캐득캐득 웃어줄가, 아니면 눈이 올롱해서 날 쳐다볼가? 이제 준이한테도 물음을 시켜주는 놀이가 멀어져갈 시간이 온것같다. 갑자기 묵직한 아래배에서 은근한 복통이 느껴진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보는 일이 무서워지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께름직한 변을 내 몸속에 가둬둘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변의 배설을 거부하고싶다. 결국 나는 또 피를 보아야 할거니까. 일을 볼가,말가? 아직도 발송신호음이 울린다. 뚜~뚜~
3    버마재비 댓글:  조회:466  추천:0  2011-02-06
1 “길남아~”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찐한 먹물을 풀어놓은듯 주위는 캄캄하다. 목소리의 임자는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깊고 무거운 검은 색들이 주위로부터 한꺼번에 덮쳐오며 가슴이 답답해왔다. 가까스로 들이숨을 몰아쉬였다. “길남아~” 환청같이 들려오는 부름소리는 석쉼했다. 문득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길을 들어보니 앞에 아버지가 서있었다. 나타나는 자취도 없이 나타나버린 아버지. 앙상하게 여위고 찌든 얼굴에 턱수염이 더부룩했다. 소죽이 얼룩덜룩 묻어있는 볼썽사나운 옷을 걸치고 있는 허름한 품속에 난데없이 아기 하나가 안겨 방긋방긋 웃고있었다. 웬 아기지? 길남이는 눈이 머룽해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윤택없이 꺼슬꺼슬한 아버지의 얼굴에 느긋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봐라. 귀엽지? 아기가.” 아기는 길남이를 향해 뭐라고 옹알거리며 작은 팔다리를 바둥거린다. 똘망똘망한 눈빛이며 볼우물이 옴폭 패인 얼굴모양이 눈에 익다. 누구지? “네 아들이잖아. 꼭 널 빼닮은 네 아들!” 아버지가 벙글거리며 아기를 길남이의 코앞으로 들이민다. 아들? 길남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뒤에 어눌해서 서있는 히죽히죽 웃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길남이는 아기를 향해 팔을 뻗쳤다. 갑자기 어디선가 불길이 치솟았다. 아버지가 아기를 안은채 돌따져 걸어갔다. 길남이는 허둥거리며 아버지를 쫓아갔다. 어딘가로 몰려가는 사람들로 주위가 소란스럽다. 악을 쓰며 달려도 아버지는 아득히 멀어만 가고 낯익은 남자애가 치솟는 불기둥앞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다…… 껑충한 장정 하나가 찌그러진 걸상우에 위태롭게 서있고 그를 향해 돌멩이며 몽둥이며가 날아간다. 왁자하니 소란스럽다. 귀가 멍멍하다…… 누구지? 왜 저러는데? 아버지는? 내 아들은? 길남은 식은 땀을 쫙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깜깜하다. 눈을 떴다는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깜깜하다. 깊은 갱속에 버려진것 같은 느낌에 금방의 꿈까지 합세를 하여 웬지 기분 이 찝찝했다. 자기 다리우에 놓여진 옆사람의 다리를 들어 옮겨놓고 몸을 반쯤 일으키고 손 더듬질하여 담배를 찾아 피워물고 라이타를 켰다. 알싸한 담배연기가 목구멍으로 흘러들며 정신이 맑아왔다. 손을 베개밑에 밀어넣어 얄팍한 작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라이타를 켜고 가물거리는 빛을 빌어 수첩에 적힌것을 살펴보았다. 7월에 탄광에 온 날부터 적은 로동량이 다. 매일마다 석탄을 몇버럭씩 캐냈는지를 또박또박 적었다. 이제 결산을 할 때면 자기가 적은것과 탄광로반이 적은것을 맞추어보면 된다. 50여일동안의것을 합하니 적지 않다. 돌 아갈 때면 꽤 큰 돈을 쥘수 있을것 같아 길남이는 마음이 느긋해졌다. 꿈에 보았던 아버지 의 얼굴과 아기의 얼굴이 눈에 밟혀온다. 길남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수첩을 베개밑에 밀어넣고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2 “휘여~휘여~” “망할놈의 닭새끼들, 가을배추 다 쪼아먹으면 어쩌누? 휘여~” 마우재댁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삽작문을 들어오다말고 급히 머리에 썼던 거무틱틱한 세수수건을 벗겨내려 휘둘러댔다. 밭이랑사이에서 안짱다리로 용케도 일자를 그으며 몸을 기우뚱거린다. 그 흔들림에 따라 수건은 대중없이 너펄거리는데도 닭들은 푸드득거리며 펑 뚫린 울바자사이를 비집고 달아났다. “명호에미, 뭘 하우? 닭두 안쫓구?” 마우재댁은 뼁끼칠이 누룽지처럼 꺼슬꺼슬 까풀이 벗겨지는 출입문을 향해 소리를 높이다말고 역시나 기우뚱거리며 징검다리를 건느듯이 아슬아슬하게 밭이랑을 타고넘어갔다. 발로 툭툭 차기도 하고 손으로 헤집어놓기도 하며 옥수수대로 엉성하게 엮여진 울바자사이의 구멍을 막아놓았다. “에구, 길남이라두 있으문 장재라도 온전히 세우련만~” 마우재댁은 우묵한 눈두덩이를 쓱쓱 문질러댔다. 누르끼레한 눈꼽 하나가 물기와 함께 손등에 묻어나온다. 마우재댁은 그 눈꼽을 희부옇게 색을 잃어가는 검정몸베에 쓱 닦아버렸다. “이 배추를 저눔집 닭들의 성화에 제대루 먹을수 있을지 모르겠네. 닭건살 왜 저리 한다우? 쯧쯧~” 혀를 차며 닭의 발에 밟혀 넘어진 배추포기들을 바로 세워놓고 북을 돋구어주었다. “아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머리를 들어보니 다섯살잡이 명호녀석이 밭이랑을 넘느라고 뒤뚱거리고있었다. “에그~ 기다려라. 아매 인차 갈게.”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마우재댁은 또 아슬아슬하게 밭이랑을 탔다. “아니, 너?!” 팔을 벌려 명호를 안아주려다 말고 마우재댁은 기겁을 했다. 애가 코구멍에 알약 하나씩 밀어놓고 팽하니 제 할미를 쳐다보고있지 않는가? 장한 일이나 한듯이 새물새물 웃기까지 하면서말이다. 코물을 훌쩍이기라도 하면 당금이라도 알약이 코구멍으로 미끌어져들어갈것 같았다. 마우재댁은 서둘러 애가 들이숨을 못쉬게 왼손으로 애의 코량쪽을 꼭 쥐고 오른손으로 머리삔을 뽑아 알약을 살살 뚜져냈다. 그 사이 영문을 모르는 명호는 난데없는 봉변에 몸을 비틀며 앙앙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약알이 넘 작지 않았던 까닭에 코구멍끝에 걸려있어 쉽게 꺼낼수가 있었다. “너 다시 이럼 죽는다, 죽어~ 코가 깡 막히면 숨을 못쉬여서 죽는다구.” 마우재댁은 명호의 볼기짝을 짝짝 쳐대며 혼을 냈다. “니 엄만 뭐하느라고 대가리두 안내미는거여?” “잉~엄마, 없다, 엄마 빰빠다~ 잉잉~” 명호는 훌쩍이며 할미의 다리를 부둥켜안는다. 마우재댁은 명호를 건뜩 들어올려 안은채 그걸음으로 씽하니 달려가 출입문을 벌컥 열었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정지칸은 애놀이감이며 옷견지들로 한가득 널려있었다. “에그, 맨날 이렇게 어찌 사오? 제 새끼 건사두 안하구 또 어딜 갔다는게우?” 심기가 불편해진 마우재댁이 투덜거리며 주섬주섬 널린것들을 줏는데 밖에서 떨렁거리는 소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삽작문에 매달아놓은 소방울소리다. 삐꺽거리는 삽작문을 열고 미적거리며 들어서는 여자의 모습이 창문너머로 훤히 보였다. “아니, 어딜 갔다오는게우? 애건사두 안하구 집두 안지키구……지금 어느 때우?” 마우재댁은 창문을 열어제끼고 막 채마밭중간에 난 길을 따라 걸어들어오는 여자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 불깃해진 얼굴에서 거멓게 줄을 그으며 땀이 흘러내리고있는 여자의 아래배는 툭 다치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터질듯 부풀어있었다. “저어기메르~” 여자는 길중가운데에 엉거주춤 선채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대중없이 손가락질을 해댔다. “저기 어디루? 그 몸으루 맨날 돌아다님 어찌우?” “명호애비 왔는가구……가서 피뜩 보구 오느라구……와서 날 찾을가봐……” 여자는 한손으로 허리를 짚고 한손으로 불룩한 배를 슬슬 만지며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님앞에 호명된 소학생처럼 고개도 못든채 떠듬거린다. “뭐라우? 또 건너마을 갔다왔소? 내 가지 말라고 몇번 말했소? 명호애비 이전 안오우, 안와! 그리구 이전 길남이가 명호애비우. 왜 그렇게두 말을 못알아듣수?” 마우재댁은 발을 탕탕 구르며 침방울을 튕기건만 여자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고개를 숙인채 흰자위가 많은 눈을 희번덕거린다. “에그, 이전 정말 가지 마오. 다시 가문 이 집에 못들어오게 하우 양? 쯧쯧~” 여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다말고 뚱기적거리며 뒤축이 물앉은 낡은 운동화를 질질 끌며 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말고 마우재댁은 화김에 혼자 놀고있는 명호의 엉뎅이를 철썩 두드렸다. “으앙~” 울음이 터지는 동시에 출입문이 드세게 벌컥 열렸다. 불편한 몸매와는 달리 제법 날래게 들어선 여자가 헐씨금거리며 구들에 올라와 명호를 그러안는다. 그러고는 마우재댁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길이 웬지 독살스럽다. “어이구~ 제 새끼는 알아가지구. 쯧쯧…” 마우재댁은 여자의 눈길을 피해 구들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발에 꿰였다…… 3 사지가 욱신욱신하다. 눈을 떠야겠는데 눈이 떠지지 않는다. 너무 깊은 잠이 들었나보다. 가끔 깊은 잠에 들면 깨여날려고 해도 온 몸이 해나른해나며 깨여날수가 없었다. 일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길남이는 그래도 일어나야지 하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여전히 깜깜하다. 요즘엔 이상하다. 눈을 뜰 때마다 주위가 깜깜한것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자꾸 헛갈린다. 확실하게 눈을 뜰려고 길남은 눈을 힘주어 깜박였다. 여전히 깜깜하다. 라이타라도 찾아 켜야겠다. 베개밑을 손더듬질해야 하는데 오른손이 천근무게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다시 왼손을 움직여본다. 짜릿한 통증이 전해온다. 악몽이라도 꿨나? 아직도 꿈속인가? 왼손을 베개밑에 넣었다. 베개대신 딱딱한것이 만져진다. 응, 뭐야? 잇달아 머리가 만져진다. 눈앞이 아찔하다. 손에 끈적끈적한것이 묻어나온다. 가까스로 왼손을 끄당겨 눈앞에 갖다댔다. 보이지 않는다. 코를 킁킁거렸다. 비릿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뭐지? 길남이는 몸을 일으키려고 안깐힘을 썼다. 움직여지지 않는다. 제몸같지 않다. 왼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돌멩이같이 딱딱한 덩어리들이다. 다시 얼굴을 만졌다. 무슨 부스러기와 끈끈한것이 묻어난다. 주위를 더듬었다. 차가운것이 손끝에 맞혀온다. 가까스로 끄당겨 더듬더듬해보니 쭈그러진 안전모다. 어?! 길남은 신음 비슷한것을 토해냈다. 꿈속이 아니였다! 갱속이였다!!! 그제야 사고가 났다는것을 남의 일처럼 기억해내고 말았다. 점심을 대충 먹고나서 석탄을 한버럭쯤 캐냈을 때였다. 드릴을 멈췄는데도 갱속이 흔들리고 있었다. “뿌지직~뿌지직~” 하는 소리에 머리를 돌려보니 갱에 받쳐놓았던 버팀목이 넘어지며 갱이 무너지고있었다. 흠칫하고 몸을 튕길새도 없이 천정이 와그르르 무너지며 길남이는 “악~”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상황파악이 전혀 안되였다. 갱이 어느만큼 무너졌는지도, 자기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도, 자기가 숨을 쉬고있는 공간이 어느만큼 되는지도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저 깜깜했다. 눈앞도 머리속도 깜깜했다. 오른손과 몸의 가슴아래부분이 파묻힌것 같고 머리통도 깨여진것 같았다. 파묻힌 부분도 상했는지 어쨌는지 통 감각이 없다. 몇시쯤 됐을가? 아직도 점심때일가? 우에서는 내가 파묻힌줄 알고나 있을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머리가 찌끈찌끈 아프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갑자기 추워났다. 불이라도 쪼였으면, 성냥불이라도 쪼였으면…… 길남이는 팍하고 성냥개비를 그어댔다. 시린 손을 녹이려고 두손을 오무려 성냥개비에 붙은 불을 감쌌다. 꽁꽁 언 작은 손은 짚더미를 뚫고 스며드는 랭기를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불이 꺼졌다. 다시 성냥개비를 그었다. 발을 내밀었다. 누덕누덕 기운 꺼먼 왕바신을 신은 작은 발과 역시나 솜이 미여져나온 솜바지를 꿰맨 다리는 몸과 떨어져있기라고 하듯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이 성냥개비를 쥔 손 근처에 닿기도전에 불은 꺼졌다. 성냥파는 처녀애를 닮은 자기 꼴을 생각하며 길남이는 신경질적으로 성냥개비를 팍팍 그어댔다……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길남이가 치솟는 불기둥앞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다. 작달막한 체구의 어린 남자애 길남이…… 껑충한 장정 하나가 찌그러진 걸상우에 위태롭게 서있고 그를 향해 돌멩이며 몽둥이며가 날아간다. 왁자하니 소란스럽다.……아버지가 거무죽죽하게 찌든 이불을 덮은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길남이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헌데 누군가 그 손을 확 채간다. 잔뜩 얼굴에 독을 올리고있는 엄마다. “아버진 이제 우리 식구가 아니다. 길남이하구 엄마만 같이 사는거다! 둘만.” 길남이의 손목을 잡고있는 엄마의 손아귀에 힘이 가해진다. 그렇게 손목이 아프도록 끌려가는데 갑자기 웬 여자가 마주보며 헤벌죽한다. 멀쑥한 얼굴에 군살이 시허옇게 붙었다. “길남아, 네 색시다.” 그래, 색시지. 색시. 나에게도 색시가 있었지. 그런데, 그런데……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내가 지금 몇살이지? …….여기가 어디지?.......색시 찾으러 가야 하는데, 아버지의 손도 잡아드려야 하는데……. 4 지명도 없이 애들엉덩짝만한 석비에 <<17>>이라고 씌여져있는 곳에 마우재댁과 여자는 짐짝처럼 부리워졌다. 어제 늦은 오후에 탄광에서 길남이가 일한 돈을 받으러 오라고 전화와서 아침 첫차로 막 올라오는 길이였다. 돈을 길남이에게 주면 될것을 자기를 부르는것을 봐선 아마 일감이 많아서 계속 일을 시키려고 그러나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석연치가 않았다. 왜 꼭 여자를 데리고 오라는지 알수 없었다. 여자가 임신 막달이여서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는데도 기어이 여자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돈은 누가 받으나 마찬가지일텐데말이다. 여자가 하는 소리며 행동이 남사스러워서 데리고 다니기 껄끄러웠지만 혹여 길남이가 배속의 애때문에 보고싶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호만 떼여 옆집에 맡겨두고 왔던것이다. 거의 다달을즈음 웬 아줌마가 마주나오다말고 아는척을 했다. “우메~ 길남이네 식구들입지?” “양, 그렇소. 여기 길남이 일하던데우? 주길남이?” 마우재댁은 옳게 찾았다싶어 반색을 했다. “예. 그렇스꾸마. 날래 들어갑소. 사람들이 기다리꾸마. 어유~ 어쩌겠슴둥……” 아줌마는 얼굴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였다.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었는지 집안으로부터 남자 대여섯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키며 몸집이 저마끔이지만 얼굴은 하나같이 우둘투둘하고 거무칙칙하다. 헌데 길남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비집고 딱 바라지게 생긴 땅딸보사내 하나가 튀여나와 마우재댁의 손을 덥석 잡는다. “길남이 어마임까? 오느라고 수고했음다. 내 여기 로반의 처남임다. 길남이 각시는?” “양. 같이 왔소. 인사해라.” 마우재댁은 뒤에 있는 여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안녕하심둥?” 여자는 별스레 머리를 비탈며 킥킥 웃었다. 다들 그러는 여자를 어정쩡해서 바라본다. “근데 우리 길남이는? 어디 일하러 나갔수?” 마우재댁의 눈길은 길남이를 찾아 휘휘 한바퀴 돈다. “길남이어마이, 힘들겠는데 먼저 들어가깁소. 각시두~ 글구 당신들은 가서 머 정리할게 있음 정리하우.” 땅딸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저어보이고는 마우재댁과 여자를 집안으로 끌었다. 마우재댁은 들어서자바람으로 한눈에 제일 옆에 포개져있는 길남이의 이불을 알아봤다. 길남이의 자리일거라싶어서 얼른 그쪽에 다가가 엉덩이를 건뜩 쳐들어 겨우 구들에 붙이고 들어앉아 방을 휘둘러보았다. 사람 대여섯이 들어서도 답답할만큼 비좁은 코구멍만한 방은 두칸으로 나뉘여져있었다. 출입문쪽은 한족구들로 되여있는걸 봐선 잠을 자는 곳일것 같았고 안쪽은 부엌인것 같았다. 구들에는 길남이의 이불말고도 거무틱틱한 이불이 다섯개나 뭉때그러져있었다. “우리 길남이 이런데서 자면서 일했구나.” 마우재댁은 중얼거리며 엉거주춤 서있는 여자를 자기옆에 끄당겨 앉혔다. “저어기…저…길남이어마이~” 땅딸보는 아까와는 달리 말을 갑자르고 있었다. “양? 어째 그러우?” “저어….저… 맘을 크게 가집소…며느리두 당금 해산하겠는데…” 땅딸보는 길지 않은 말을 목에 가래라도 걸렸는지 끙끙거리며 한마디씩 뱉어냈다. “뭐? 무슨 말이요? 맘을 크게 가지라니? 양?...” 마우재댁은 갑자기 속이 덜컥했다. 조선온돌인줄 알고 화닥닥 일어서다가 하마터면 넘어질번했다. 여자는 그것이 우습다고 손으로 입을 막고 키들거렸다. “저…사실은 우리 탄광에서 어제 …사고났음다.” “그래서? 그래 우리 길남이는? 어디 많이 상했소? 병원갔소?” 마우재댁은 허둥거리며 두서없이 물었다. 낯색이 벌써 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죽…죽었음다…” 로반은 혀아래소리로 웅얼거렸다. “뭐? 뭐이라구?!” 마우재댁은 눈을 뒤로 까집으며 그 자리에 쿵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땅딸보는 급히 마우재댁을 안아 구들에 눕히고 연신 “길남이어마이”를 불러댔다. 여자는 눈이 데꾼해서 마우재댁을 바라보다가 길남이의 이부자리를 꼭 껴안는다. 아까부터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어느새 우르르 집안으로 몰려들었다…… 5 갱입구는 경사지게 한메터쯤 들어가서 풀썩 물앉고있었다. 여기저기 석탄덩이가 어지럽게 널리고 꺼먼 흙들이 볼썽스럽게 뚜져져 있었다. “여기…이 밑에… 길남이 있단 말이지? …흑흑~ 어쩌다가…흑흑~” 마우재댁은 무너진 갱입구에 퍼더버리고 앉아 땅을 어루쓸고 있었다. 땅을 어루쓸다 말고 석탄덩이를 주어내고 석탄덩이를 주어내다가는 다시 땅을 어루쓸며 넉두리를 하였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있었는지 손이 석탄덩이만침이나 꺼멓고 손가락끝이 부르터서 피가 내돋아있었다. 아까 한참이나 쓰러져있다가 정신을 차린 마우재댁은 땅딸보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었다. 무너진 갱을 파서 길남이를 살려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어딘가에 길남이가 살아있을거라고, 이 에미가 와서 구하길 기다리고있을거라고 했다. 헌데 땅딸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길남이어마이, 어마이 마음은 알만함다. 그런데 그게 어디 될 소림까? 저 갱이 얼마나 깊은지 암까? 경사루 수백메터구 또 수평으로 수백메텀다. 여기서 보구 어딘지 알구 어떻게 파겠음까? 우리두 구하기 싫어 안구한게 아님다. 저기 가봅소. 판 자리 있을겜다. 그런데 몇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못파겠습데다. 그렇게 두꺼운 흙이 무너졌는데 사람이 살수 있겠슴까? 우리두 다 생각해보구 길남이어마이를 부른겜다.” “글구 이 사고두 엄격히 따짐 길남이탓임다. 어째 남이 다 올라와서 점심을 먹는데 길남이 혼자 갱에서 일을 하는가말임다. 원래 처음에 길남이 점심에두 일한다는 소릴 듣구 우리두 못하게 할가 하다가 어려운 형편에 1전이라두 더 벌라구 가만놔뒀음다. 지금 보문 그때 말리지 않은게 후회됨다. 어찌갰음까? 그게 길남이 명이거니 합소. 산 사람은 살아야잰캤슴까?" 땅딸보는 미리 연습해온 대본을 외우듯이 한마디도 걸리지 않고 아무 색갈도 없는 말을 무덤덤하게 뱉어냈다. 마우재댁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울다가는 실신하고 깨여나서는 다시 울고 하기를 거듭하다가 늦은 오후에야 차츰 진정하는 추세였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 길남이가 묻힌 자리라도 알고가려고 이렇게 무너진 갱을 찾은 마우재댁이였다. 거의 탈진한 상태의 마우재댁과는 달리 여자는 한켠에 있는 석탄더미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마우재댁이 하는 짓거리를 남일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이구…저건 제 남정 죽은줄도 모르구…흑흑~ 이전 어떻게 하우? 길남아, 니 어찜 그리두 맘이 모지냐? 이 에민 너만 믿구 여태 살아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흑흑~ 내 죽기전에 니한테서 엄마라는 소릴 다시 한번 들어보는게 소원이였는데…….” 마우재댁이 길남이한테서 엄마라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것도 까마득한 옛날이였다. 길남이가 열두살나던 해, 우사칸에서 불이 난 날의 이튿날이였다. 매를 맞는 남편을 뒤로 한채 우는 길남이의 손목을 잡고 우사칸앞마당을 꿰질러 나오며 마우재댁은 입을 옥물었다. 그날로 마우재댁은 남편과 계선을 갈랐다. 길남이의 이름도 마우재댁의 성을 따서 <<주길남>>으로 고쳤다. 쏘련특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있는 남편이지만 길남이를 위해선 어쩔수가 없었다. 기실 남편은 쏘련특무가 아니였다.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몇년전 사냥하러 산에 갔다가 쏘련변경에서 키가 꺽두룩한 군대 하나를 만나 헬레발 두개를 얻어온 일밖에 없었다. 그걸 길남이가 들고다니며 쏘련맨보라고 자랑을 했었다. 그때는 아무 일도 없던것이 언제부터인가 쏘련이 수정주의요 뭐요 하는 소리가 뒤숭숭하게 떠돌더니 남편이 덜컥 쏘련특무로 루명을 쓰게 되였던것이다. 고중졸업생이라고 소학교교원질을 하던 남편은 하루아침에 우사칸으로 쫓겨가고 밤이면 목에 패쪽을 걸고 비판을 받군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은 남의 눈치만 보며 가만히 있었지만 한창 들뜬 젊은패들은 하늘을 찌를듯이 기고만장해서 설쳤다. 한참은 구호를 웨치다가 한참은 구타하기를 거듭하였다. 련루될가봐 친하던 사람들도 슬슬 피해가는 눈치였다. 자기에게 갑자기 붙어진 <<마우재녀편네>>란 온역신같은 별명도, 남편한테 가해지는 구타도 견딜수 있었다. 하지만 철도 모르는 길남이가 학교에서 따돌리고 점차 우울해지는것만은 그대로 넘어갈수가 없었다. 그쯤에도 며칠째 학교에 안갔다는 애가 불길이 솟는 우사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는 무슨 일인가 있었을것이 뻔했다. 애를 버릴수가 없었다. 결국 계선을 가른 날부터 남편은 다시 집에 오는 일이 없이 우사칸에 자리를 잡고말았다. 헌데 그러면 나아질줄 알았던 길남이가 입을 다물어버릴줄이야. 불때문에 겁을 먹은줄 알고 좀 지나면 말을 할거라고 생각하고있는 와중에 그번 사건으로 구타를 심하게 당한 남편이 황천길을 가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이런저런 일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말을 안하고 있는줄 알았다. 석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록 길남이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끄덕이거나 저으면 그만이였다. 촌위생소에 가니 애가 심하게 놀라서 그럴거란 애매한 대답밖에 들을수 없었다. 남편도 죽은 마당이지만 이미 남의 이목에 났는지라 왁작 소문을 내며 병보이러 다닐수도 없었고 병보일 돈도 없었고 생산대일에 빠질수도 없었다. 농한기를 기다려 한해 일공수를 받아가지고 시내병원에 갔을 때는 벌써 애가 말을 안한지 일년이 되여왔다. 물어물어 병원에 가니 목안도 살펴보고 귀도 살펴보고나서 귀를 먹거나 벙어리인건 아닌데 말을 하지 않는걸 봐선 심리질환이라고 했다. 약보다도 애와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알뚱말뚱한 소리를 얻어듣고 돌아와서 마우재댁은 가급적이면 길남이와 말을 많이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길남이는 마우재댁이 입을 열 눈치같으면 눈길도 마주치지 않은채 자리를 피해버렸다. 결국 길남이는 마을에서도 다 아는 듣는 벙어리로 되고말았다. 말없이 수걱수걱 일만 하는 길남이를 볼 때마다 마우재댁은 죄인이 된 기분이였다. 남편을 버린 자기에게 애가 불만을 품은게 아닌가고, 그게 병의 원인이 된것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다 성장하여서도 한국바람에 농촌총각들이 무더기로 늙어가고있는 판에 말을 안하는것을 다들 알고있는 터에 온전한 색시 하나 구할수가 없었다. 몇해전에 수소문하여 연길뇌과병원에까지 가서 상황을 말하니 <<자페증>>일 것 같다고 했다. 자페증환자는 많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면서 여태 30여년을 살고있는것부터가 기적이라고 했다. 당사자를 꼭 데리고 와서 다시 보이라고 했으나 마우재댁은 종시 길남이를 설복해 데리고 갈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 여자가 애를 낳으면 애를 핑게로 기어코 병원에 데리고 가서 병도 고치고 손주를 어르며 알콩달콩 살 날을 기다리고 있던 마우재댁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길남이를 깊이도 모르는 땅속에 묻게 될줄이야! 6 “아부지~아부지~” 길남이는 아버지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아 갑갑했다. 목이라도 잡아뜯고싶은데 손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렇게 속으로 아버지를 부르다가 길남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했지만 여전히 깜깜하다. 왼손을 움직여보았다. 그것도 힘들다. 이젠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머리속마저 흐리터분하다. 지금쯤 어느때가 되였을가? 엄마는 내가 이러고있는걸 알면 까무러칠테지? 내가 이러고 잇음 안되는데…엄마, 엄마, 나 이속에서 나가야 하는데…당금 태여날 내 아들이 기다리고있을텐데…아들애에게 말도 배워주고 걸음마도 배워줘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길남이의 머리속에는 태여날 아이의 생각으로 골똑 차있었다. 아직 아이의 성별을 알수 없지만 길남이는 아들일거라고 단정을 지어버렸다. 아님, 어쩜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태여날 아들, 그것은 길남에게 있어서 단순한 의미의 성별로만의 남자애가 아니였다. 이태전의 어느 여름날 저녁무렵, 길남이가 잎담배를 썩썩 썰고있는데 엄마가 여자의 손을 끌고 집에 들어섰다. 그 여자의 손에는 또 아장거리는 남자애 하나가 이끌려져있었다. “이 여자 알지? 명호에미다. 이젠 네 색시다.” 엄마의 말에 길남이는 눈이 화등잔같이 커졌다가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잎담배를 써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헤식은 웃음을 실실 흘리고있었다. 홀엄마와 같이 살다가 팔부라는 평을 달고있었던 까닭에 서른살이 되여서야 10여살이나 년상인 건너마을 철수한테 시집간 여자는 복도 지지리 없었다. 결혼해서 3~4년을 말썽없이 살더니만 명호가 한돐이 되기전에 철수가 로무수출로 한국에 다녀오고 살림도 펴이나싶더니 덜컥 버림을 받은것이다. 철수는 한국에서 웬 과부여자를 데리고 왔고 여자는 친정집에 보내지고 말았다. 엄마가 부실하니 아들도 똑똑할리 없다며 명호까지 딸려보내고는 매일이다싶이 찾아가는 여자를 피해서 시내로 이사까지 가버렸다. 얼마전에 친정엄마까지 돌아가는 바람에 여자는 오갈데없이 되였던것이다. 그날 밤 엄마는 여자를 길남이의 이불속에 들이밀었고 길남이는 키드득거리는 여자를 데리고 어줍게나마 일을 치렀다. 길남에게 있어서 여자는 그냥 같이 잠을 자주는 여자일뿐이였다. 그 여자한테서 길남이는 안해라는 느낌을 느낄수가 없었고 그 여자를 향한 사랑이나 련민같은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 여자를 향한것은 오로지 동물적인 욕구의 분출일뿐이였다. 처녀가 아니라 반반한 녀인네들마저 보기 힘든 농촌의 상황을 길남이는 묵과한지 오래였다. 엄마 역시 그걸 알아차리고 버림받은 여자일지라도, 팔부라는 평을 달고있는 여자일지라도, 애딸린 여자일지라도 길남이의 더꺼머리 총각모자를 벗겨주고싶어서 여자를 데려왔는지도 몰랐다. 하여 속되게 일러 그 여자는 길남이에게 여자맛을 알게 한 여자일뿐이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에게 길남이는 애정이 생겨버리게 되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여자의 배에 대한 애정이였다. 길남이네 집에 온지 서너달이 되였을가 할때부터 여자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뭐든지 꾸역꾸역 자꾸 입속으로 밀어넣기만 하더니 서서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엄마는 임신이라고 했다. 여자의 배속에 길남이의 애가 들어있다고 했다. 동물적욕구의 분출이건 애정표현이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데는 차별이 없었던 모양이다. 여자의 배속에 들어있는 아이, 이제 태여날 아이를 생각하면 길남이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누구든지 붙잡고 말하고싶었다. 아버지가 된다고. 드문히 팔다리를 대자로 뻗은채 자고있는 여자의 배에 귀를 대고 애의 태동을 들으며 길남이는 아들애의 이름을 지어 부르고 싶었다. 이름을 부르며 아빠라고, 반갑다고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움씰거리기만 할뿐 좀체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길남이의 마음을 몇십년만에 한껏 부풀게 하면서 여자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갔고 길남이는 해산을 두어달 앞두고 경비마련으로 탄광일을 하게 된것이였다. 이제 한달이면 태여날 아들, 그 아들에게 뭐라고 말할가? ……난 어떤 아버지가 될가?.......이제는 정말 엄마마음을 헤아려가며 잘 살아야 하는데……엄마……이제 엄말 용서해줄거야. 아들애가 태여나면 엄말 용서해줄거라구……아버지성씨를 앗아가버린 엄마가……아버지를 버린 엄마가 미웠는데……엄마가 아버질 버리지만 않았어두……아버지가 우리곁에만 있었어두 아버진 그렇게 ……그렇게 죽진 않았을건데……아니야, 다 나때문이야. 나만 아니였어두 나란 새끼만 아니였어두 엄만 아버질……버리지 않았을거야……나 이제 엄마마음 알거같은데……다시 엄마라구 부르고싶은데…… 토막토막 끊어진 생각들이 머리속을 복잡하게 헤집고 다니다말고 길남이는 다시 까마룩한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7 마우재댁은 종이장우에 <<주기자>>라고 금방 글자를 익힌 1학년생처럼 비뚤비뚤 적었다. 그리고 엄지에 뻘건 도장즙을 발라 이름우에 꾹 눌러찍었다. 그옆에 여자의 이름을 썼다. 멍청해 서있는 여자의 손을 끌어다 엄지에 도장즙을 묻혔다. 엄지를 꾹 누르려던 찰나 여자가 손을 홱 나꾸어챘다. “어마이, 어째?” 여자는 도장즙이 묻은 손을 등뒤에 감춘채 눈이 화등잔만해서 마우재댁을 쏘아보았다. “양? 여기 그냥 도장 찍기우. 그리구 집에 가야지?” “나그내는? 안데리구 감두?” “어? 갸는 후에……우리 먼저 가기우~” “싫스구마. 난 손도장 안찍개. 전번에두 명호아맨데 얼리워서 손도장 찍었던게 명호애비 다시 안오꾸마. 이번에두 날 도장찍게 하구 어마이 저 나그내를 다른데 데리구 가자구 그래지?” 멀쩡한 사람처럼 긴 말을 또박또박 구사해내는 여자를 마우재댁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게 아니구…” 마우재댁은 여자를 설득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알아들을지 알수 없었다. 명호애비가 아직도 돈벌러 간줄로 안 여자, 죽은 엄마를 멀리 놀러간줄로 아는 여자한테 뭐라고 말해야 한단말인가? 마우재댁이 여자의 손을 잡고 휘청휘청 갱에서 내려오자 땅딸보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마우재댁에게 랭수를 건네주고나서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한자가 반장 빼곡이 적혀있었다. “뭐유?” 마우재댁의 목소리는 바람에 날려갈듯이 쇠잔했다. 기운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길남이가 병으로 죽었다는 증명섬다. 길남이어마이 여기에다 이름 쓰구 손도장 찍음 우리 매부 보상금 5만원을 내겠담다.” “뭐라? 병으루 죽었다구? 왜 그런 거짓말하우? 길남이 어디 병으루 죽었수? 갱이 무너져서 죽었지. 아니, 죽은게 아니구 저네 죽었다구 했지.” 마우재댁은 다 쉬여빠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길남이어마이, 아까두 말했잼까? 길남이 이젠 죽었슴다. 이미 죽은 사람이 병으루 죽었다믄 어떻고 갱이 무너져죽었다믄 어떻슴까? 산사람은 살아야잰겠슴까? 여기 로반이…그 우리 매부두 형편이 바쁨다. 죽은게 길남이탓인데 나몰라라 함 길남이어마이 어디 가서 어찌갰음까? 다 그래두 형편이 어려운걸 봐서 보상금을 주는겜다. 5만원이 어디 적은 돈임까? 우리두 어디 가서 사고났다는 소리 듣기 안좋구, 길남이네두 그 돈임 당분간은 먹고살잼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좋게 처리하깁소.” 땅딸보는 다시 한번 종이장을 바투 들이밀었다. 그 종이장을 보며 마우재댁의 눈앞에는 언뜻 남편과 계선을 나눌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때도 종이장에다 <<나 주기자는 쏘련특무김성수와 계선을 나눈다. 아들 김길남도 주기자를 따르며 이름을 주길남으로 고친다. 주기자와 김성수사이에 일체 관련이 없다.>>라고 쓰고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었다. 그렇게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으면 종이장은 더는 종이장인것만이 아니였다. 종이장에 또박또박 적혀진 내용을 리행하는 그 어떤 힘을 갖고있었다. 이제 저 종이장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으면 길남이는 영원히 병으로 죽어버린 존재가 될것임을 마우재댁은 어렴풋이 알고있었다. 마우재댁의 눈길은 문득 부푼 여자의 배에 가닿았다. 그속에 있을 길남이의 아이, 그 아이를 위해서 마우재댁은 또한번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5만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였다. 마우재댁은 여태 그만한 돈을 구경하지도 못했다. 그 돈이면 여자의 출산비용을 마련하고도 엔간한 벽돌집 한채도 살수 있고 아껴쓰면 몇년은 먹고 살수 있을것 같았다. 길남이가 갱에서 죽었다고 해봤자 뭐가 달라지는것도 없을것이였다. 죽었다는 길남이가 살아날리는 없었다. 결국 마우재댁은 종이장에 손도장을 찍고말았다. 그런데 생뚱같이 여자가 안찍는다고 나누울줄이야. 손도장을 안찍는다고 뒤걸음질치는 여자를 보며 마우재댁은 코마루가 시큰거려왔다. 반편이라도 길남이가 제 남편인줄은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할수없이 여자는 안찍으면 안되는가고 물었더니 호구부에 여자가 안해로 있기에 실제법률적효률이 있는것은 여자라면서 꼭 찍어야 한다고 했다. 마우재댁은 여자에게 이 종이장에 손도장을 찍으면 길남이가 일을 더할수 있다고, 그럼 돈을 더 벌어갖고 애를 낳은 다음에 돌아오는거라고 말해주었다. 한참을 얼리고 닥치고 해서야 여자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엄지에 도장즙을 발라 대충 눌러찍고는 그 손을 입에 쓱 문지르고 헤시시 웃음을 지었다. 도장즙이 묻혀 뻘건 입술이 피라도 물고있는것 같았다. 8 “엉~엉~…불을 …아부지…엉엉~” 길남이는 말을 끝까지 하려고 모지름을 썼다. 불은 아버지가 지른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불은 자기가 지른것이라가 말해야 했다. 헌데 울음만 터질뿐 말이 나가지 않는다. “엉엉~아부지…아부지…” 목이 터질듯이 아프다. 절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초라한 모습의 아버지가 보인다. 아버지의 손이라도 잡아줘야지, 손을 잡고 불은 내가 지른것이라고 말해줘야지.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으려는데 난데없는 돌멩이가 우르르 떨어지며 뻗은 길남의 손과 아버지를 묻어버린다. 깜깜하다. 분명 눈을 떴다. 오른손도 가슴아래 몸도 여전히 무엇인가에 파묻혀있다. 석탄덩어리거나 돌덩이, 흙덩이들일것이다. 머리를 움직여봤다. 천근무게다. 들수도 드텨놓을수도 없다. 빠개지듯이 아프다. 비릿한 냄새만 진동하며 코로 흘러든다. 아버지랑 같이 있는것인지 혼자 있는것인지 도무지 알수 없다. 겨우 움직일수 있는 왼손, 그것도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다. 안깐힘을 써서 움지여봤자 겨우 가슴께로 올라올뿐 가슴우에 덮인것을 주어낼수도 밀어낼수도 없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자꾸 저 멀리 깊은 잠속으로 달아날려고 한다. 아득하니…아득하니… “아부지, 내가 잘못했음다…불은 …내가 질렀음다…일부러 그런것은 아님다. 아버지가 질렀다고 …말할려고 한 것이…아니였음다…그냥 무서워서 울었을뿐인데…울다보니 말이 끊겼을뿐인데…그 사람들이 …그렇게 …그렇게 몰아부쳤음다… 그 죄로…그 죄로…35년동안 입을 다물구 있었음다…이럼 죄값 안될가요?...나두 이제 살구싶슴다…애가 태여나면…이름을 김염이라고 지어줄려구 했음다. 엄마가 뺏은 아버지의 성씨를 아들애에겐 물려주구 싶었음다…그리구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구…아버지가 불을 질렀다구 말해버린 내 죄를 기억하구 아버지에게…아버지에게 용서받으라구 <염>이라구 지을려구…그리구 애에게 말도 배워주구 이야기두 들려줘야 할텐데…이제 나두 말을 할려구 했는데…아버지두 날 용서할거라구 생각했는데…” 길남이는 수많은 말을 했다. 헌데 입술만 달싹거릴뿐 말은 한마디도 입밖으로 튀여나오지 않았다. 길남이는 말을 뱉어내려고 모지름을 썼다. 목구멍에서 울컥 무엇이 치밀었다. 비릿한것이 입귀로 꿀룩꿀룩 흘러나왔다. 길남이는 헉헉거리며 입술을 움씰거렸다. “아부지~” 드디여 길남의 목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열두살아이의 목소리도 아니고 마흔일곱살 장정의 목소리도 아닌 철판을 긁는듯한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부지….불을…불을…내 지른겜다…으으윽~…” 길남이의 숨이 가빠지고있었다……. 9 무너진 갱입구에 조촐한 음식들이 갖추어졌다. 종이장에 싸인을 받아내고나서 땅딸보가 차례준 제사상이다. 장정들은 이미 인사를 하고 내려간 뒤고 문어구에서 만났던 식모아줌마와 마우재댁, 여자만 남았다. 식모아줌마가 마우재댁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마음 크게 가집소. 길남이 말은 한마디도 안해도 그렇게 부지런하구 착하던게……다 자기 타고난 명이 있는걸 어떡하겠슴두? 죽은게 불쌍하지. 그만함 뒤처리 잘됐음다. 실은 여기 로반은 한족임다. 그랜게 조선족각시를 얻어가지구 처남이 일을 다 맡아함다. 여기를 쭉 둘러보문 다 개체탄광인게 무슨 안전하겠음까? 해마다 사고나는데 있슴다. 그래문 어떤 로반들은 무서워서 다 던지고 도망감다. 그래두 길남이일은 보상금이라도 받게 됐으니 그만함 잘됐음다…길남이어마이와 가만히 하는 말인데…길남이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나까지 포함해서 그 사고난 일을 안말하기루 하구 한사람이 2000원씩 받았음다. 원래 석탄층이 얇아 석탄이 얼마 안나와서 그만두자던 갱이였음다. 이 틈에 아예 페갱하고 다른 갱을 또 뚫을겜다. 어찌갰음까? 산 사람이야 살아얍지…후~” 마우재댁의 귀에는 이제 아무말도 들리지 않았다. 마우재댁은 멀지 않은 곳에 금방 교미를 끝낸 암컷버마재비가 수컷버마재비를 잡아먹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너라고 …어쩌겠냐? 배고픈데….그거라도 먹고 살아야지…그거라도 먹어야 니 새끼들이 크지……” 마우재댁은 알수없는 소리를 중얼중얼거리고있었다……
2    버려진 열쇠 댓글:  조회:460  추천:0  2011-02-06
1 성우는 선참으로 교실문을 빠져나왔다. 머리를 수긋한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곁눈질로 주위를 힐끗거렸다. 아는 애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문어구는 손님을 실으려고 줄을 지어선 삼륜차와 드문드문 보이는 하이야, 오토바이 그리고 아이들 마중을 온 학부모와 부모의 손을 잡고 집으로 막 향하는 애들로 북적거리고있었다. 성우는 혹시나 하고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자꾸 처지는 책가방을 추스르며 요리조리 사람들속을 비집고 혼자 집으로 향했다. 큰 길에 이르러 차가 있나 없나 오른쪽 왼쪽을 차례로 살피고나서 조심스레 큰 길을 건넜다. 골목길을 따라 곧장 걷다가 왼쪽 공공변소가 있는 쪽으로 굽어들었다. 몇발자국 더 걸어들어가 세번째 집문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성우네 집이였다. 부지런히 걸으면 학교와는 10여분이 되는 거리였다. 헐렁한 삽작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마당에는 가을을 맞아 누렇게 시든 풀들이 볼썽사납게 서있다. 목에서 열쇠를 벗겨내려 자물쇠에 꽂아넣고 삑 하고 오른쪽으로 돌리였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였다. 성우의 입귀가 우로 말려올라가며 웃음이 피여올랐다. 들쑹날쑹한 앞이들사이에 이발 하나가 홀랑 빠져있었다. 자물쇠를 벗겨내고 열쇠를 뽑아 다시 목에 걸었다. 성우는 문손잡이를 쥐고 주춤거렸다. 숨을 들이쉬고나서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눈길이 가마목에 쏠렸다.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성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코를 킁킁거렸다. 먼지냄새와 음식냄새, 이름모를 냄새가 한데 섞여 퀴퀴한 냄새가 코로 흘러들었다. 서둘러 신을 벗고 구들로 올라갔다. 웃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누구도 없었다. 웃방에 들어가 옷장문을 덜컹 열었다. 구겨진 아빠의 옷과 때묻은 성우의 옷이 아무렇게나 무져있었다. 다시 정주칸으로 나와 찬장문을 열었다. 아침에 먹다남은 마늘장아찌가 성우의 이발자국을 남긴채 접시에 담겨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사발과 접시 몇개가 어수선히 쌓여있었다. 엄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후~ 짤막하게 날숨을 토해낸 성우는 찬장문을 닫고 책가방을 벗었다. 텔레비죤 옆에 놓인 유리통에 콩알을 한알 주어넣었다. 콩알을 담았던 비닐주머니도 훌쭉하다. 아빠와 콩알을 더 사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밥상을 펴놓고 숙제책을 꺼냈다.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쪼박을 꺼냈다. 숙제를 적은 종이였다. <<어문숙제: 바침 ㄹ가 드러간 다너를 다서개씩 쓰기, 수하숙제: 자기 지베 인는 물거니 이름가 개수 저거오기. 한어숙제: 썽무 한줄씨 쓰기>> .크기가 저마끔인 비뚤비뚤 적혀있는 그 글들을 성우는 용케도 알아보며 왕왕 소리내여 읽었다. 천으로 된 필갑에서 심이 뭉툭해진 연필을 꺼내 어문숙제부터 쓰기 시작했다. << 달갈, 사발, 물통>> 세개를 쓰고나서 눈을 깜박거렸다. 손등으로 코를 씩 씻으며 벌씬 웃었다. 그리고 마저 써내려갔다. <<자물쎄, 열쎄>>하고. 성우는 자기가 쓴 단어를 소리내여 또박또박 읽었다. <<자물쎄, 열쎄>>하고 읽다가 목에 건 열쇠를 피끗 내려다보았다. 목에 걸려있는 열쇠때문에 숙제를 완성할수 있는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달전까지 성우와 아빠는 탄광에서 살았던것이다. 임시로 지은 자그마한 집에는 성우와 아빠말고도 다섯 남자와 한 여자가 살았다. 그들을 성우는 삼춘이나 마다바이, 마다매로 불렀다. 삼춘과 마다바이는 아빠와 같이 석탄을 캐는 일을 했고 마다매는 하루세끼 밥을 지었다. 집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었고 녹이 쓴 커다란 자물쇠는 집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있어 제대로 자물쇠구실을 하는적이 없었다. 마다매가 집에 있지 않으면 삼춘이나 마다바이중에 한두사람이 담배쉼을 하군 하는 탓에 집이 비여있지 않은 까닭일것이였다. 얼마전 아빠가 탄광일을 그만두고 시내에 세집을 잡으면서 성우는 아빠와 둘이서만 살게 되였다. 시내에 온 첫날 아빠는 성우와 함께 튼튼한 자물쇠부터 골라샀다. 열쇠가 셋이 달린것이였는데 반짝반짝 빛났다. 며칠전 아침이였다. 아빠가 성우에게 반짝이는 열쇠를 넘겨주었다. 성우의 눈이 열쇠만큼이나 반짝 빛났다. “성우야, 집열쇠다. 이젠 컸으니까 혼자 오갈수 있겠지? 며칠 다녔으니까 오가는 길도 알잖어. 큰 길을 곧장 건너서 들어오면 돼. 할수 있지?” 성우는 입이 벙글써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열쇠는 부착물이라도 되는 양 성우의 목에서 달랑거렸다. 열쇠가 있은후로 눈이 까매서 아빠가 데리러 오기를 교문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였다. 학교공부가 끝나면 애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성우는 우쭐우쭐 혼자서 집으로 갔었다. 대신 수업시간이면 창밖에 눈길을 주는 시간이 많아졌었다. 아빠한테서 열쇠를 넘겨받은 날부터 성우는 당금이라도 엄마가 찾아올것 같아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틈만 나면 창밖을 내다보군 했다. 유치원 다닐 때도 엄마는 성우가 유치원에 있는 시간에 왔었다. 몹시 더웠던 여름이였다. 낮잠을 자고 깨여나서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있는데 선생님이 밖으로 부르셨다. 교실문을 나서는 순간 성우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엄마처럼 생긴 여자가 선생님과 함께 서있었다. 여자는 성우를 보자마자 “성우야~”하며 꼭 껴안았다. 성우는 몸을 뒤로 젖히며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쌍가풀진 눈이 엄마의 눈을 닮았다. 오똑한 코도 엄마의 코를 닮았다. “얘가 저와 떨어져있은 시간이 오래 되여서 그래요. 한 1년쯤 되였으니깐요.>> 여자가 성우의 등을 다독였다. “성우야, 엄마잖아. 성우가 유치원에 처음 온 날 손잡고 왔던 엄마. 얼른 엄마라고 불러야지.”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으셨다. 성우는 다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엄마같은 여자는 웃고있었다. 입귀에 까만 점이 한알 박혀있었다. 엄마의 입귀에도 까만 점이 한알 박혀있었다. 아무래도 엄마같았다. 다르다면 머리가 강굴강굴한것과 하얘진 얼굴이였다. 성우와 아빠와 함께 살았던 엄마는 긴 머리를 뒤에 질끈 졸라매였고 얼굴이 감스레 했었다. “엄마~” 성우는 나지막하게 엄마를 불렀다. 그리고 허리를 꼭 그러안았다. 선생님과 엄마가 기분좋게 호호하고 웃었다.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 아닌데도 엄마는 성우를 데리고 유치원에서 나왔다. 유치원 뜨락을 걸어나오면서 엄마는 아빠가 어디 가셨나고 물었다. 아침에 아빠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밭에 일하러 나갔다고 말하면서 엄마가 아빠 찾으러 일밭에 가려는가고 생각했다. 유치원문밖에는 하이야 한대가 세워져있었다. 성우와 엄마를 실은 하이야는 고르지 못한 지면때문에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이야는 성우네 집앞에 멈춰섰다. 엄마는 하이야에서 내리며 성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러는지 몰라 성우는 엄마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는 웃으며 성우의 목에서 열쇠를 벗겨내렸다. 아마 집에 들어갔다가 아빠한테 갈 모양이였다. 엄마랑 같이 집에 들어가고싶었으나 엄마가 차안에 앉아있으라는 바람에 성우는 곱다란히 차안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한참후 엄마가 나왔다. 엄마의 손에는 전기밥가마가 들려져있었다. 성우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늘 저녁은 일밭에 가서 밥을 해먹나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엄마는 몇번을 더 들락거리더니 메치와 그릇들, 옷꾸레미같은것을 차뒤꽁무니에 꿍꿍 밀어넣었다. 그러고나서 엄마는 급히 차에 올라탔다. “엄마, 왜 이런것들 밭에 가져가?” 성우는 잔뜩 움츠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은 엄마가 참 서먹서먹했다. 엄마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차문을 쾅 하고 닫았다.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헌데 엄마는 열쇠를 돌려줄념을 하지 않았다. “엄마, 열쇠는?” “이제 그 열쇠 필요없어. 집에 뒀으니까 찾지 마.” 엄마는 팔을 뻗어 옆에 앉은 성우를 그러안았다. 이제 열쇠가 없으면 어떻게 집에 들어갈가고 걱정하기도 하고 엄마는 왜 아빠보러 먼저 가지 않을가, 아빠가 찾기전에 엄마와 말해서 얼른 집에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성우는 소르르 잠이 들었다. 성우가 “아빠~”하고 부르며 잠에서 깨여났을 때 아빠의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을 비비며 살펴보니 밥가마도 있고 메치도 있는데 아빠랑 같이 살고 있던 집은 아니였다. 그제야 엄마따라 하이야를 탔던 기억이 났다. 부엌에서 밥을 짓던 엄마가 성우를 흘낏 돌아보며 웃었다. “곤했는 모양이구나. 어쩜 차에서 안아내리는줄도 모르고 잠을 자니?” 성우는 목을 만졌다. 열쇠가 없었다. 무엇을 잃어버린것 같아 성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말할수가 없었다. 그날 아빠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에도 오지 않았다. 아빠가 왜 오지 않는지를 모른채 성우는 엄마와 같이 살게 되였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엄마가 없다. (엄만 언제 올가?) 성우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다말고 어문숙제책을 한켠에 밀어놓고 수학숙제책을 꺼냈다. 집안을 삐이익 둘러보았다. 무슨 물건의 개수를 쓸가고 생각했다. <<옫짱 1개, 테레비존 1개, 전기밥까매 1개, 메치1개 >>하고 쓰다가 고무지우개를 꺼내 썩썩 지워버렸다. 입이 쀼죽 나왔다. 뭐나 다 하나씩이여서 너무 쉬운것 같았다. 수자가 더 많은게 없을가고 방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때 밖에서 저벅저벅 하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성우는 냉큼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빠!” 성우는 문턱에 선채 아빠를 보며 벌쭉 웃었다. “오~ 일찍 왔구나.” 아빠는 냉큼 성우를 안아주었다. 성우는 코를 킁킁거렸다. 아빠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오늘따라 아빠는 참 멋있었다. 머리가 정연하게 빗겨져 있었고 연한 하늘색 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성우야, 너 민수랑 친하지? ” 아빠는 성우를 품에서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민수아빠가 아빠랑 친구라고 아빠가 잘 놀라고 했잖아요?” 성우는 볼부은 소리를 했다. “난 혼자서두 얼마든지 집에 있을수 있는데…” 성우는 묻지도 않은 말을 낮은 소리로 우물거리며 뱉어냈다. 이사온지 얼마 안되여 아빠는 저렇게 두어번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성우는 친하다고 대답을 했고 그 대답이 끝난후면 아빠는 성우를 민수네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런 날이면 성우는 민수네 집에서 자야 했다. 성우는 민수가 싫었다. 그잘난 놀이감권총도 마음대로 만지게 못하고 크레파스도 꺼먼색 한대만을 쓰게 했다. 성우는 파란색으로 풀도 그리고 빨간색으로 해도 그리고 여러가지색으로 알록달록한 칠색무지개도 그리고싶었지만 꺼먼색 크레파스만 쓸수 있기때문에 참대곰이나 축구공같은것을 그릴수밖에 없었다. 성우는 알록달록한 크레파스를 가득 가지고도 나무밖에 그릴줄 모르는 민수를 보며 쌩통이라고 입을 비쭉거렸다. 민수엄마도 싫었다. 성우의 뒤를 쫓아다니며 바닥을 쓸어내면서 “쯧쯧”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있었다. 갈적마다 “엄마 안보고싶니?”하고 물어보는것을 잊지 않았다. 성우가 아무 말도 안하고있으면 또 “쯧쯧”했다. 민수엄마는 아무래도 “쯧쯧”하는 하는 말이 그렇게도 재미있는 모양이였다. 성우는 오늘도 민수네 집에 데려다줄가봐 걱정이 되였다. “아빠가 오늘 일이 있거든. 오늘 저녁에 민수네 집에 가서 자라.” 성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빠가 달래듯이 말했다. 성우는 샐쭉해졌다. “난 혼자서두 집에 있을수 있는데…학교두 혼자 가고 오고 할수 있고…” 목에 건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떠듬거렸다. 아빠는 대꾸도 않은채 성우의 책가방을 챙겼다. 아빠의 손에 끌려 성우는 집문을 나섰다. 삽작문을 나서는데 웬 여자가 서있는것이 보였다. 여자는 아빠를 보며 피씩 웃는듯했다. 성우는 흘끔 아빠를 쳐다보았다. 마침 성우를 내려다보는 아빠의 눈길과 딱 마주쳤다. 아빠의 얼굴이 금시 빨개졌다. 아빠는 화를 낼 때면 얼굴이 빨개졌었다. 성우가 숙제를 안하고 선생님한테 혼났을 때도 선생님앞에 서있는 아빠의 얼굴이 빨개졌었다. 성우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성우가 미적거리며 따라가서 아빠가 막 화를 내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뒤돌아보며 여자를 쨀 흘겨보는것을 잊지 않았다. 2 성우는 뒤치락뒤치락거렸다. 옆에 누운 민수는 벌써 코를 쌕쌕 골고 있다. 성우는 살그머니 민수의 코를 꼭 쥐여놓았다. 민수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성우의 손을 툭 쳐버리고는 끙 돌아눕는다. 성우는 다시 발로 민수의 궁둥이를 툭툭 찼다. 민수는 이불을 차던지며 저만치 기여가 눕는다. 그러는 민수를 보며 성우는 깨고소하게 웃었다. 언제봐도 괘씸한 민수였다. 저녁에도 그랬다. 저녁밥을 먹고나서 민수엄마가 수박을 쪼개서 갖고나오셨다. 빈 쟁반을 옆에 놓으면서 씨를 거기에다 뱉으라고 했다. 민수는 수박씨를 뱉을줄 모르는지 자꾸 손가락으로 뚜져내기만 했다. 여기저기 수박물이 튕겼다. 민수엄마는 짜증도 안내시고 얼른얼른 닦아주셨다. 성우는 서걱서걱 뜯어먹었다. 한참을 먹다말고 민수엄마가 눈이 동그래서 성우를 올려다봤다. “너 수박씨는 어쨌는데?” “먹었어요. 난 수박씨를 먹는데…” 성우는 장한 일이라도 한듯이 벌씬 웃었다. 민수엄마가 칭찬해줄것 같았다. “너 수박을 먹을줄 모르지? 수박은 못먹어봤지? 하하!” 민수가 앞질러 주어박으며 깔깔 웃어댔다. “아니야, 먹어봤어. 먹을줄 아는데 .씨… …” 성우가 볼이 잔뜩 부어 씩씩거렸다. 성우가 뭘 어쩌지 않아도 공연히 우스워하고 놀려대는 민수가 얄미웠다. “됐다 ,됐어! 그만들 해라. 근데 수박씨를 왜 먹니? 수박씨를 먹으면 배에서 수박이 달리는데… 쯧쯧” 민수엄마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잊지 않고 또 “쯧쯧”하셨다. 하지만 성우는 대수롭지 않았다. 수박씨를 먹어도 수박은 달리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고있기때문이였다. 성우가 수박씨를 먹게 된것은 고모때문이였다. 성우가 엄마랑 만나 하이야에 앉아 엄마집에 간 그날 엄마는 잠에서 깨여난 성우에게 밥을 갖춰먹이고는 자기는 먹지 않았다. 배가 안고파서 안먹는줄 알았다. 성우가 밥을 다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놀고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웬 아저씨가 들어섰다. “이제 오셨어요?”하며 엄마는 반갑게 맞아주었고 낯선 아저씨는 “성우 왔구나.”하며 벌씬 웃으셨다. 그러는 아저씨와 엄마를 번갈아보며 성우는 어정쩡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군데 자기의 이름을 아는지 알수 없었다. 엄마가 인사를 하라고 엄마앞에 내밀어도 성우는 다시 엄마뒤에 숨어버렸다. 아저씨는 “녀석, 낯가림하는구나.” 하고는 밥상에 마주앉아 엄마와 같이 밥을 먹었다. 그날 밤 아빠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에도 , 그 이튿날에도 아빠는 오지 않았다. 대신 아저씨는 꼬박꼬박 저녁이면 집으로 들어왔고 아침이면 일찍 일하러 나가셨다. 엄마는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집에 있는 아빠는요?” “성우는 이제 엄마랑 살아야 돼. 엄마는 또 이 아저씨랑 살거니까 이 아저씨가 성우의 아빠야. 한 집에서 사는 사람이 아빠인거야. 알았지?” “그럼 아빨 데려와서 한집에서 살면 되잖아요?...” “네가 크면 다 알게 될거야. 엄마 시키는대로 해라. 이제부터 남들이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면 <김학범입니다>하고 대답해야 돼 . 알았지?” 아저씨는 아빠가 아닌데도 왜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다. 아빠이름은 <<리설민>>인데 왜 아저씨이름을 아빠이름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알수 없었다. 영안에 온후부터 성우는 알수 없는것이 너무 많았다. 갑자기 머리속이 의문투성이로 되여버렸는데 엄마는 그 답안을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빤 왜 여기로 안데리고 왔는지, 아빤 왜 자길 찾지 않는지, 아저씨는 왜 엄마랑 같이 사는지, 왜 아저씨를 아빠라 부르고 아빠이름을 물으면 아저씨이름을 알려줘야 하는지 알수 없었다. 의문덩어리가 많았지만 성우는 차츰 엄마랑 사는데 습관되여갔다. 아빠가 없긴 해도 이전보다 좋았다. 집문만 나서면 멀지 않은곳에 있는 커다란 굴뚝과 언제보나 하얀 김이 물물 피여오르는 굴뚝보다 키는 작지만 훨씬 실한 콩크리트건물을 볼수 있었다. 그것이 있는 곳이 화력발전소라고 했다. 전기를 만든다고 했다. 전기를 어떻게 만드는건지는 알수 없지만 아무튼 신기했다. 엄마는 밥을 맛있게 지어주었다. 아빠랑 같이 있을 때엔 묵은 밥도 찬것채로 먹거나 반찬도 감자반찬 아니면 두부였는데 엄마는 매일매일 밥을 지었다. 혹 묵은 밥이더라도 따뜻하게 덥혀주거나 볶음밥을 만들어주었고 반찬도 닭알, 물고기, 남새, 고기반찬을 엇바꾸어 만들어주었다. 옷은 성우가 어지럽혀놓기 바쁘게 씻어주었다. 성우는 영안학교 학전반에 붙었다. 영안학교에서 처음 고모를 봤었다. 아저씨의 동생인데 학교선생님이라고 했다. 성우는 얼굴이 하얀 고모가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학전반에 가기는 신났다. 큰아이 작은아이 마구 뒤섞여서 있는것이 아니라 죄다 성우와 동갑이였다. 공부도 하고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해가 한창 비칠 때면 학교애들이 운동장에 줄을 지어 무슨 곡에 맞추어 체조를 하는것도 구경할수가 있었다. 그때면 성우네도 저마끔 팔다리를 너펄거리며 따라하느라고 난리였다. 고모는 가끔 성우를 볼러 학전반에 왔다. 고모는 선생님하고 무슨 이야기인지 나누다가도 성우쪽을 보며 웃기도 하고 눈을 째려보기도 했다. 언젠가 고모가 불쑥 물어왔다. “성우야, 너 아빠이름이 뭐지?” 어느 아빠이름을 묻는지 알수 없었다. “김학범입니다.” 어물거리며 대답하는 성우를 보며 고모가 또 물었다. “그럼 넌 이름이 뭐니?” 이름을 알면서 왜 묻는지 이상했다. “리성우입니다.” “아빠는 성이 김가인데 성우는 왜 리가지? 왜 김성우가 아니니?” 난데없는 물음에 성우는 눈이 둥그래졌다. 누구도 그렇게 물은적이 없었다. 학교선생님이니까 고모는 물음도 까다로왔다. “응, 응… 내가 김성우면 내가 잘해도 … 비행기가 못올라가요. 울 반에 김성우것이 올라가는데…그래서 난 리성우…” 성우는 떠듬거리며 답을 주어댔다. 선생님과 고모를 번갈아 핼끔거렸다. 고모와 선생님이 마주보며 소리내여 웃었다. “그 녀석 보기보담 머리가 팽팽 도네. 그래 맞다. 비행기가 못올라갈가봐 그런거야. 호호” 고모가 성우의 이마를 튕겨주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잘한것 같았다. 정말 자기가 리성우가 아니면 자기랑 이름이 같은 김성우의 비행기가 올라갈것이였다. 그날 저녁에 고모는 성우네 집에 놀러와서 낮에 있은 이야기를 하며 엄마랑 아저씨랑 웃었다. 성우도 덩달아 웃었다. 엄마가 일때문에 바쁠 때면 성우는 가끔가다 고모네 집에 며칠씩 있군 하였다. 어느 땐가 밥을 먹고나서 고모가 랭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쪼개주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수박쪼각을 들고 한켠으로 수박씨를 뱉어내면서 잘도 먹는데 성우는 수박씨가 자꾸 입안에 들어가서 먹을수가 없었다. 빨간 속살을 물어뜯을 때마다 수박씨가 꼭꼭 따라들어갔고 그걸 뱉어낼려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들어갔다. 할수없이 수박쪼각을 쳐든채 손가락으로 수박씨를 뚜져냈다. 벌건 수박물이 손가락과 손을 거쳐 팔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팔굽부근에서 뚝뚝 떨어졌다. 옷이 금방 어지러워졌고 방바닥도 질펀해졌다. 그러는 성우를 고모는 얄미운듯이 째려보았다. “먼 수박을 그렇게 먹니?”하고 짜증스레 투덜거리다가 성우 골통보다도 큰 빈 플리스틱그릇 하나를 성우의 무르팍에 덜렁 놓아주었다. 성우는 수박씨를 뚜져내다 말고 눈이 둥글해졌다. 한입 베여물었던 수박을 꿀꺽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수박쪼각을 도로 놓아야 할지, 뚜져낸 수박씨를 거기에 담아야 할지 알수 없었다. “머리를 그쪽으로 기울이고 먹어라. 수박씨도 거기다가 놓고. 그럼 수박물이 안떨어지잖니?” 덩둘해진 성우에게 고모부가 차근히 일러주었다. 그제야 성우는 고모의 눈치를 핼끔거리며 수박을 먹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성우는 다시는 수박씨를 손가락으로 뚜져내지 않았다. 입으로 도로 뱉어낼줄 알게 된것도 아니였다. 그냥 수박속살과 함께 우멀우멀 씹어먹어버렸다. 생각외로 수박씨는 쓰겁지 않았다. 수박은 씨와 함께 얼마든지 먹을수 있었다. 그러는 성우를 고모는 말리지 않았다. 입이 벌어진채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안하셨다. 수박물로 옷이며 방바닥을 어지럽히지 않아서 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외에도 성우는 사과배도 껍질채로 먹을수 있었다. 과일칼을 쓸줄 모르기에 고모 먼저 집에 왔을 경우에는 사과배를 수도물에 대충 씻어서 그대로 떼여먹은 성우였다. 암튼 그때 고모집에 가끔 있는 사이 성우는 수박씨를 먹는 법과 사과배를 껍질채로 먹는 법을 배워버렸다. 하지만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고모는 성우가 고모집에 있을 때의 일을 엄마한테 이야기하는것을 싫어했다. 성우는 엄마랑 있을 때는 수박씨나 사과배껍질을 먹지 않았기에 엄마는 성우가 그러는줄을 모르고있었다. 엄마는 수박을 여러 쪼각으로 쪼개지 않고 중간을 갈라서는 속살만 숟가락으로 폭폭 떠서 사발에 담아주었다. 성우의 사발에 든 수박속살은 엄마가 손으로 씨를 살살 빼서 주었다. 사과배도 성우가 없는 사이 몇개씩 깎아서는 찬장에 넣어두었다. 까다로운 고모도 생기고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야도 했지만 엄마가 있어서 성우는 좋았다. 아빠가 없는게 서운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모집에 가있던 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한걸 보니 수박씨를 먹은지도 꽤 된것 같다. 그래도 성우의 배는 커지지 않았다. 수박이 달리면 수박만큼 배가 둥글하게 커져야 하는건데 성우의 배는 홀쪽하게 들어붙어있다. 수박이 배속에서 달리지 않은게 분명했다. 성우는 “칫~”하면서 자고있는 민수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민수도 민수엄마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되였다. “엄마가 왜 안올가? 이젠 열쇠도 있는데. 엄마가 오면 이 열쇠로 같이 집에 들어갈수 있는데… …” 중얼거리며 엄마생각을 하다말고 성우는 잠이 들고말았다. 3 성우는 대문을 지키는 선생님한테 들키기라도 할가봐 잔뜩 몸을 옹송그린채 달음박질치다싶이 교문을 빠져나왔다. 점심에는 집에 못가게 되여 있었다. 하지만 성우는 빨리 집에 갔다와야 했다. 아빠와 물어볼것이 있었다. 오전의 마지막시간은 체육시간이였다. 체육시간에 성우는 물을 마시려고 교실에 갔다왔었다. 교실에는 선생님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뿔테안경을 건 여자였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성우는 가슴이 쿵쿵거렸다. 어제 복도에서 딪쳐서 하마트면 넘어질번 했던 일을 선생님한테 일러주러 왔나보다고 생각했다. 선생님한테서 당장 호통이 떨어질것 같아서 눈치를 흘끔거리며 자기 책상으로 슬몃슬몃 게걸음을 쳤다. “성우학생, 인사 안해요? 울 학교 선생님인데. 전학해온지 두어달밖에 안돼서 언니가 선생님인줄 모르나봐요.” 선생님이 성우를 보며 웃고있었다. 성우는 책상안에서 물고뿌를 꺼내다말고 그대로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마트면 머리를 책상에 박을번했다. “네” 얼굴이 하얀 여자는 짧게 대답하며 웃는듯 마는듯 성우를 바라보았다. 성우는 눈을 내리깔며 그 눈길을 피하여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고뿌를 책상안에 넣기 바쁘게 부랴부랴 교실문을 나왔다. 막 복도를 달아지나려다 다시 교실문어구로 발볌발볌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선생님한테 어제 일을 일러주는게 아닌지 듣고싶었다. “저 애가 어떻니?” “저 애요? 애가 똘망똘망하고 좋아요. 근데 집에서 틀어쥐는 사람이 없어서 생활이 꼭 째이지 못했어요.” “엄마 아빠는?” “글쎄요. 아빠말로는 엄마가 일본갔다 그러는데 그런것 같지도 않아요. 애하고 물어보면 모른다 그러거든요. 리혼한것 같기도 한데 물어보기도 그렇고… 애가 자꾸 사람눈치를 핼끔핼끔 봐요. 엔간해서는 애들이고 저한테 맘을 줄려고 안해요. 암튼 가정에서 잘 틀어쥐면 잘할수 있는 애예요. 언니, 저 애 알아요?” “아~ 잘 아는것은 아니고. 내가 영안에 있었잖니? 저 애가 영안에 있을 때 본적이 있거든.” “아, 맞다. 언니가 영안학교에 있었지.” 성우는 콩콩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며 급히 되돌아쳐나갔다. 운동장에서는 애들이 한창 유희를 하고있었다. 체육시간을 보는 동안 성우는 내내 엄마생각만을 했다. 성우는 엄마가 일본으로 갔다는게 밑겨지지 않았다. 일본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주 멀리 있다는것만은 알고있었다. 거기 가면 쉽게 오고갈수 없다는것도 알고 있었다. 성우네 학급의 금실의 엄마도 일본으로 간지 2년이 되는데도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철수의 아빠도 한국으로 간지 까마득하게 오란데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튼 엄마 아빠들이 어덴가로 가면 몇년이 지나도 올수 없는 곳인줄을 성우는 알고있었다. 성우가 유치원 때 어디 돈벌러 간다던 엄마도 아주 오래되여 돌아왔었다. 아무래도 엄마랑 그냥 영안에서 살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냥 영안에서 살았더면 엄마와 헤여지는 일도 없을것이였다. 그런데 아빠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빠때문에 엄마와 헤여진것 같았다. 성우는 체육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기 바쁘게 집으로 도망을 쳤다. 아빠랑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고 다시 학교로 갈 생각이였다. 아빠는 탄광에서 이사오고나서 늘 집에서 노니까 아마 이 시간이면 집에서 텔레비죤을 보고있을것이였다. “엄마가 일본에 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럼 참 오래동안 못올건데… …난 엄마가 있어야 좋은데…” 성우는 중얼거리며 급하게 큰 길을 건넜다. 10여분되는 거리를 5분도 안되여 뛰여온것 같았다. 덜렁거리는 삽작문을 열고 마당을 꿰질러 막 달려들어갔다. 집문에 열쇠가 걸려있지 않았다. 성우는 문손잡이를 쥐고 당겼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힘을 덜 주었나 싶어 더 힘있게 당겼다.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속이 덜컥했다. 도적이 든게 아닐가고 생각했다. 겁이 났다. 성우는 발볌발볌 창문가로 다가갔다. 카텐이 드리워져있었다. 창문의 한쪽 귀퉁이로 눈을 가져갔다. 카텐끝이 살짝 들려져있었다. 손으로 눈언저리를 막은채 창문에 골을 바싹 갖다붙였다. 안을 들여다봤다. 아빠가 찬장쪽으로 몸을 돌린채 자고있었다. 성우는 창문을 잡아두드릴려고 주먹을 쳐들었다가 흠칫 내리우고말았다. 아빠가 낑하더니 성우쪽으로 몸을 돌려누웠던것이다. 성우의 눈이 커졌다. 가슴이 활랑거렸다. 옷장켠에 웬 여자가 누워있었다. 혹시 엄마인가고 찬찬히 여겨봤다. 엄마가 아니였다. 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 성우는 식지끝을 입에 문채 눈을 되록거렸다. 누군지 알수 없었다. 갑자가 화가 났다. 볼이 잔뜩 부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씨~ 아빠곁에 엄마말고 다른 사람 누우면 안되는데…” 정말이였다. 아빠곁에는 엄마밖에 누울수 없었다. 엄마랑 아빠랑 성우 셋이서 살 때 엄마는 성우를 벽쪽에 눕게 하였다. 성우곁에 엄마가 눕고 엄마곁에 아빠가 누웠다. 성우가 아빠와 엄마사이에 눕고싶어 끼여들라치면 엄마가 살살 달래면서 그랬다. 아빠곁에는 엄마만 누울수 있는거라고. 왜냐고 물으니 엄마와 아빠는 한편이기때문이랬다. 그 사이에 성우가 누우면 엄마랑 아빠랑 한편이 될수 없다고 했다. 성우는 누구편인가고 물었더니 엄마아빠가 한편이 되면 성우고 따라서 한편이 되는거랬다. 엄마아빠가 한편이여서 성우가 있게 된거라고 했다. 한편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아무튼 엄마와 아빠가 가지런히 누워야 하는줄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오늘 아빠곁에 다른 여자가 누워있다니? 그럼 아빠와 아빠곁에 누운 여자가 한편이 되는걸가? 성우는 자기는 누구편이 되여야 할지 몰랐다. 혹시 아빠가 화나서 저러는것은 아닐가고 생각했다. 성우와 엄마가 아빠 혼자 놔두고 영안에 가서 한동안 아저씨랑 살아서 화났을것 같았다. 아빠가 엄청 화를 낸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성우가 영안에 간지 한달쯤 된후의 어느날이였다. 성우가 학전반에서 돌아오니 집마당에 오토바이 한대가 세워져있었다. 누가 왔나보다고 생각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아빠가 씽 달려나왔다. “아빠~” 성우가 반갑게 소리쳤다. “어?! 성우야!” 아빠가 성우를 덥석 안아주셨다. 성우의 볼에 아빠얼굴을 마구 부볐다. 까칠한 수염때문에 얼굴이 따가왔다. “성우야, 아빠 보고싶었지? 아빠랑 같이 가자!” 아빠가 성우를 안은채로 오토바이께로 다가갔다. “안돼요!” 뒤따라나온 엄마가 성우를 확 나꿔챘다. 그바람에 성우가 땅에 떨어질번했다. “왜 안돼? 성우는 내 아들이야.” 아빠가 성우를 내려놓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성우는 내가 키울거예요. 내가 없는 1년사이 당신 성우 제대로 밥먹이고 거둬준적이 있어요? 내가 성우를 데려올 때 애가 가무잡잡하고 까칠합데다. 아빠질을 어떻게 잘했으면 애가 그래요? 당신 애를 키울 능력 없어요.” “뭐야? 그래 내가 애를 잘 안 키워서 그새 니보다도 어린 놈이랑 붙었냐? 너 외지로 돈벌러 간다구 갈 때 벌써 그 작정을 하구 간거지? 농촌에서 땅 뚜지기 싫어서 다 팽개치구 간거지?” “내가 뭘 보구 살아? 남처럼 돈있냐, 능력있냐? 그러게 내가 언녕 말했지? 시내에 들어와서 사람답게 살자구. 허구헌날 땅속에 파묻혀 그게 머야? 차라리 두더지하고나 살어. ” “난 성우 데려갈거야! 바람난 년놈한테서 애가 멀 배우겠어?” 아빠가 성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안돼. 애는 엄마가 있어야 해!” 엄마가 성우를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된다거니 안된다거니 하며 아빠와 엄마가 밀치락거리는 통에 성우는 량쪽에 잡힌 팔이 아파왔다. “성우가 누굴 따라가겠는가고 물어보구 결정해.” “그래 그러자. 성우야, 아빠랑 같이 갈거지?” 아빠가 성우를 바라봤다. “성우야, 엄마랑 같이 있는게 좋지?” 엄마도 성우의 눈을 들여다봤다. 성우는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난 엄마 아빠가 다 같이 있었음 좋겠는데…” 성우가 입속으로 어물거렸다. 왜서 한사람을 선택해야 하는지 몰랐다. “성우야, 아빠랑 같이 가자. 아빠가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찾았다구 그러니?” 아빠가 성우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성우야, 엄마랑 있어야 돼. 아빠 따라갈거야?” 엄마가 눈을 크게 뜨고 성우의 입만 쳐다본다.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보다말고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같이 있을건데…” “너?!” 아빠가 성우를 노려보더니 발을 탕 굴렀다. 두볼이 무섭게 씰룩거렸다. 아빠는 성우와 엄마를 한참이나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더니 성우의 팔을 홱 팽개치고 오토바이에 힝하니 올라탔다.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뽀얗게 피여오르는 먼지를 보며 성우는 아빠가 무척 화가 났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있고싶었다. 저녁에 아저씨가 돌아왔다. 엄마가 낮에 있은 일을 아저씨한테 이야기해줬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어요. 생 야단을 치고갔어요.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당장 자기와 함께 가자데요. 내가 안가겠다고 하니까 목에 칼을 들이대데요. 죽인대요. 그런다고 내가 가겠어요? 나 다시 그런 시궁창에 들어가 못살아요. 다시 갈거면 집을 나오지도 않았겠어요. 한참 시악거리다가 제풀에 물러가는 판에 성우가 온거얘요. 성우를 데려가겠다길래 못데려가게 했죠. 애하고 물으니까 애도 안가겠다고 했어요. ” “그랬어? ”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했고 아저씨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으셨다. 그날 밤 성우는 아빠걱정을 하며 엄마곁에 누워서 한참이나 뒤치락거렸었다. 아저씨는 엄마곁에 누우셔서 성우보고 빨리 자라고 재촉을 하셨다. 엄마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학전반에 간다며 빨리 자라고 했다. 곰인형을 안고 겨우 잠든 성우는 꿈에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얼굴이 빨개서 화를 잔뜩 내면서 성우를 보는척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아무래도 성우가 엄마랑 아저씨랑 한편이 된것때문에 화가 났을것 같았다. 4 아빠가 자기때문에 화가 나서 모를 여자와 한편이 되였을거라고 생각하니 성우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성우는 갑자기 편이 없어지고말았다. 외토리가 되고말았다. 아빠와 엄마가 어디 갔냐고 물을걸 잊은채 성우는 목에 걸린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타박타박 집마당을 걸어나왔다. 눈물이 똘랑똘랑 떨어졌다. 삽작문앞에 쪼크리고 앉았다. 엄마가 보고싶어졌다. 정말 엄마는 일본에 갔을가? 엄마는 지금 누구랑 한편이 되였을가?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났다. 점심밥도 먹지 않고 도망쳐나왔던것이다. 학교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생님한테 발각되였을것 같았다. 학교에서 주는 도시락이 맛이 없다고 밥을 안먹는 애들이 한둘씩 있었다. 슬그머니 밥곽을 도시락통에 담아놓으면 선생님은 누가 점심밥을 먹지를 않았는지 금방 알아내고 조금이라도 먹도록 독촉을 하셨다. 오늘도 도시락이 남은걸 보면 성우가 없어진것을 눈치챘을것이다. 이맘때쯤이면 애들을 시켜 성우가 어디에 가서 놀음에 빠졌나 구석구석 찾고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성우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막 뛰였다. 학교대문에 들어서는데 접수실에 있던 당직선생님이 부르셨다. “학생, 어디 갔다오는거죠? 대문출입허가증은 바쳤어요?” “네? 저…” “아~ 제 친구네 앤데요. 제가 좀 데리고나갔댔어요.” 성우가 어물거리는데 하얀 손이 뻗쳐와 성우의 손을 잡았다. 힐끗 쳐다보았다. 뿔테안경속에서 쌍겹눈이 성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직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보라고 손을 저으셨다. 성우는 하얀 손에 이끌려 교실까지 갔다. 아니나다를가 선생님이 한창 애들에게 성우를 못보았느냐고 묻고있었다. “성우가 저기서 혼자 놀고있어서 데려왔어. 애 닥달하지 마.” “언니, 수고했어. 난 그런줄도 모르고 애가 잃어진줄 알고 놀랬어. 막 성우아빠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였어.” 선생님이 성우의 뒤통수를 툭 치며 도시락을 주셨다. 성우는 머리숙여 인사하고는 제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밥을 먹으며 뿔테안경을 건 여자선생님이 오늘 왜 저럴가고 생각했다. 어제 부딪쳐서 넘어뜨릴번 한 일을 선생님한테 고자질하지 않은것도 이상했고 아까 거짓말을 한것도 이상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는줄 알고있었다. 성우는 언젠가 한번 거짓말을 해서 크게 혼난적이 있었다. 아빠가 왔다가 화를 내고 간후의 가을, 엄마와 아저씨는 성우를 고모네 집에 맡기고 경신에 있는 아저씨네 집으로 가을하러 가셨다. 고모는 학교선생님이라서 그런지 성우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법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말라 구분이 분명했고 저녁마다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성우가 조금이라도 모르는 눈치가 보이면 짜증을 내셨다. 옷을 씻을적마다 장난이 심하다고 잔소리를 했다. 학교에서도 쩍하면 학전반에 찾아와서 성우가 어찌하는지를 살피곤 하셨다. 하얀 얼굴이 성우를 볼 때면 찌푸러져있었다. 성우가 고모집에 있은지 열흘쯤 되였을가 하는 일요일오전이였다. 빨래를 한다고 소란스럽던 고모가 째지는듯한 소리로 성우를 불러댔다. 그림영화를 보던 성우는 화들짝 놀라 눈이 둥그래서 고모한테로 뛰여갔다. “성우야, 너 똥 쌌니?” “아…아닌데요.” “너 똥 쌌잖아?!” “안 쌌습니다.” 성우가 울먹거렸다. “아니, 요것이?” 고모는 당장 내려치기라도 할듯이 주먹을 쳐들었다. 성우는 겁이 나서 목을 움츠렸다. “왜 그렇게 소란스러워?” 고모부가 다가와 힐끔거렸다. “얘가 글쎄 똥을 싸고도 안쌌대요.” 고모가 쌕쌕거렸다. “관둬. 안쌌으니까 안쌌다겠지.” 고모부가 고모를 말리셨다. “이걸 봐요. 팬티에 분명이 똥이 묻어있는데 안쌌어요? 쌌으면 말이라도 해야지 이게 뭡니까? 조꼬만것이.” 고모가 어지러워진 성우의 팬티를 성우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댔다. 성우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바들바들 떨렸다. 당금 매가 떨어질것 같았다. 언젠가 고모네 학급에 갔다가 고모가 학급의 애를 혼내는것을 본적이 있었다. 짧다란 막대기로 막 때리는것이 무서웠었다. 고모가 뭐라도 쥐고 내려칠가봐 무서웠다. “이 녀석이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거예요. 지난번에두 분명히 오줌을 쌌어요. 아침에 자리를 거두면서 축축하길래 물었더니 안쌌다고 하니 그런줄 알았죠. 오늘 봐요. 이렇게 팬티에까지 묻었는데 똥을 안쌌다고 우기잖아요.” 고모는 성우가 들으라는듯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성우는 아니라고 할수가 없었다. 아침에 대변을 보는데 물지똥이 찔찔 흘러내렸다. 다 누었는데도 또 마려워 변소로 달아가는 사이 팬티에 찍하고 말았던것이다. 슬그머니 팬티를 벗어 씻을 옷더미속에 처박았었다. 고모가 다 알고 말하는데 우길수가 없었다. “쌌…쌌어요…” “그런데 왜 처음에 승인하지 않았어?” 고모가 눈을 부릅떴다. “무서워서…” “너 그러고 또 엄마보면 고모 어떻게 혼내더라고 흉 볼려구 그러지? 고모가 잘해줘도 넌 고모흉만 보잖아. 암튼 피는 못속인다니까. 저게 제 피줄이면 저러겠어? 아니, 오빠도 머가 좋다구 애딸린 여자를 얻구 그래? 아무리 농촌에 여자없어서 장가 못간다구 해도 그렇지. 남의 자식 어떻게 키울려구 저래?” 성우를 혼내다말고 고모는 알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비누를 바른 옷을 빡빡 비벼댔다. 그날이후로 성우는 고모집에 한달 있는 사이 거짓말을 할 엄두도 못냈다. 한달후 엄마가 돌아와서 고모가 어떻게 해주더냔 말에 고모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었다. 5 성우가 밥을 먹고 밖에서 노는데 누군가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찾는다고 하셨다. 점심에 집에 갔다온것이 들통났나싶어 걱정하며 교무실에 가보니 뿔테안경을 건 여자선생님이 계셨다. “울 선생님은요?” 성우는 선생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오~ 내가 널 불렀어.” 성우는 눈이 커졌다. 어제 부딪친 일을 이제야 혼내려는줄 알았다. “성우야, 아까 점심에 어디 갔다왔지?” “집에요.” “집엔 왜? 집이 가깝니?” “저기 큰길뒤에 있어요. 아빠와 엄마가 언제 오냐구 물어볼려구요.” “그랬구나. 엄마가 어딜 갔지?” “몰라요. 먼데 갔어요. 금방 온다 그랬는데 안와요. ” “언제 갔니?” “내가 학전반때 갔는데… 아저씨랑 싸우고 날 아빠한테 데려다주고……” “결국 그렇게 됐구나. ” 여자선생은 한숨을 지으셨다. “너 날 뭐라고 부를건데?” “네?” 난데없는 물음에 성우는 얼떠름해졌다. “선생님이라고…” “고모라고 안불러? 응?” 성우의 어깨를 부여잡고 성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 말에 성우는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울 학교선생님인데…선생님이라고 …” “그러는것도 좋겠다. 난 이제 니 고모가 아니니까. 원래부터도 아니였지만. 그래, 그렇게 선생님이라고 불러.” 성우는 고개를 까댁거렸다. 어제부터 하는것을 봐선 고모라고 부를 때보다 무척 상냥해보였다. 다들 고모가 되면 애한테 무섭게 대하는 모양이였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성우를 미워하지 않는것 같았다. 교무실에서 나오며 성우는 정말로 엄마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다. 엄마는 성우에게 그냥 먼데로 간다고 했다. 돈을 벌면 인차 돌아올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안온다. 콩알을 넣은 유리통도 거의 찬다. 엄마가 성우를 아빠와 같이 살던 문앞에 부리워놓던 날부터 성우는 유리통 하나를 얻어다가 콩알을 넣기 시작했다. 큰 수자는 잘 셀수 없지만 매일 한알씩 넣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 유리통에 콩알이 차기전에 엄마가 돌아올거라고 믿었다. 아빠와 같이 세집동네탄광으로 갈 때도 그 유리통과 콩을 가지고 갔다. 놀음에 빠지다가도 자기전이면 꼭꼭 한알씩 주어넣었다. 이제 50알까지는 셀수 있다. 그런데 50알을 다 세여도 콩알은 엄청 많이 남는다. 전번날 콩알을 좌르륵 쏟아놓고 50알씩 세여 무지를 만들어보았다. 여섯무지가 되고도 콩알은 남았다. 여섯무지가 얼마인지 알수 없었지만 넘 많은것 같았다. 엄마가 왜 이리 안오는지 알수 없었다. 아빠가 남의 편이 되기전에 얼른 왔으면 좋겠다. 겨울에 눈이 내릴 무렵, 엄마는 점심무렵이면 영안에서부터 시내로 차를 타고 갔다. 어느 노래방에서 카운터를 본다고 했다. 늘 밤중에 성우가 잠이 든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항상 술냄새가 났다. 어떤 날은 련며칠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저씨와 엄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티각태각 말싸움이였다. 싸움은 꼭 아저씨가 먼저 걸었다. 잠을 자다가 엄마가 들어오는 문소리에 일어난 아저씨는 화를 내군 했다. “당장 그 일을 때려치워. 맨날 밤중에 다니는게 싫지도 않아?” “안그럼 어떡해요? 당신 혼자 번 돈으로 생활하기가 빠듯한데. 내가 혼자 좋자구 이 짓거리 하구 다녀요?” 엄마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들었다. “다른 일은 못해? 하필이면 노래방이야?” “그 일만큼 일이 쉽고 돈을 잘 버는게 어디 있어요. 월급 말고도 매일마다 얼마씩은 떼여낼수 있다고요.” 이쯤이면 아저씨가 벌컥 역증을 내셨다. “정말 돈때문이야? 당신 남자랑 추근거리는 본성때문이 아니야? 제힘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돼.” “허이구, 그렇게 제힘으로 벌어먹구 살아서 여태 장가도 못가구있었어요? 내가 아니면 자기가 어딜…” “말이면 다야?” 엄마말이 끝나기도전에 아저씨의 말과 함께 베개가 날려갔다. 엄마도 지지않고 먼가를 쥐여뿌린다. 성우는 이불속에 옹송그린채 숨도 크게 못쉬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냥 자는척 꼼짝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그렇게 자주 싸우더니 어느날엔가 엄마가 성우의 짐을 와락와락 꿍쳐 차에 싣더니 성우를 짐과 함께 아빠집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성우야, 엄만 이제 멀리 가야 돼. 그러니깐 아빠하고 살어. 엄마가 돈 벌면 성우 데릴러 올게.” 하고는 차에 도로 앉아 가버렸다. 그렇게 성우는 아빠랑 같이 살게 되였고 아빠가 농사일을 집어치운다기에 세집동네탄광에서 살다가 시내에까지 이사를 오게 된것이였다. 성우는 교실로 가면서 목에 걸린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열쇠를 목에서 벗겨내려 한참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아무래도 열쇠가 있어도 인제 엄마는 안올것 같았다. 아빠가 남의 편이 될려고 하니까. 성우는 열쇠를 층계옆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에 확 던져버리고는 교실로 종종걸음을 쳤다. 뒤따라나온 뿔테안경을 건 여자선생이 성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서있었다……
1    밤은 멈춘다 댓글:  조회:443  추천:0  2011-02-06
지긋이 눌러오는 압박감. 그 압박감에 나는 숨이 막혔다. 풍겨오는 숨소리가 화끈화끈하다.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며 몸구석구석을 더듬는다. 이건 아닌데… … 하면서도 몸은 그 손가락이 머물었던 자리마다 새록새록 살아난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아오르는 몸때문에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손길안에서 부서지고싶음은 뭣때문일가?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내 몸짓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와락 안아버리고싶다는 충동에 가슴이 먹먹하다. 나를 원하는 그의 손길은 집요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흘러갈것인가? 마음속에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헌데 마음보다 몸이 먼저 빗장을 열고싶어 얼쩡거린다. 난 내 안에서 나가고싶었던겔가? 이건 아닌데… …. 다시 되뇌이는 사이 어느새 살덩이 하나가 흠뻑 젖은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아찔한 그 느낌. <<널 사랑할거야.>> 내 맘의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이미 열려져있었던것일가? 누군가가 열어주길 바라고있었던것일가? 혼돈하는 사이 출렁이는 밤은 흐른다… …. 못된 계집애같으니라구! 나는 속이 괴여올라 버럭버럭 화를 내고말았다. 옷을 주어입고 핸드빽을 챙겼다. 허둥거리는 나를 보고 남편이 뻑 소리질렀다. << 어딜 가는거야?>> <<나 급히 갔다와야 할데가 있어요. 당신이 애 좀 챙겨서 학교 보내세요.>> <<당신 왜 요즘 맨날 펄럭거리고 다녀? 또 무슨 일 꾸미는거 아니지?>> <<일은 무슨 일?!>> 내쪽에서 버럭 역증을 냈다. 남편의 말속에 숨은 뜻을 나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 그놈의 출국붐때문이였다. 돈을 벌어서 잘 살아보겠다는 내 욕심과 여자는 착실히 집구석을 지켜야 한다는 남편의 고집은 어긋나고있었다. 나는 어디론지 떠난다고 윽윽 벼르고 남편은 안된다고 가로막는 바람에 둘사이는 팽팽해져있었다. 혹 둘중 누군가가 긴장이 풀려 느슨해지기라도 하면 버티기에서 지기라도 할가봐 나도 남편도 신경이 송곳처럼 날카로와져있는 상태였다. <<그럼 어딜 뭐하러 바람같이 달려가는지 말해봐.>> <<수연이한테 가요. 됐죠?>> <<거긴 왜?>> 급해하는 내 모습을 무시한채 남편은 질문에만 열중하고있었다. 콱 숨이 막혀왔다. <<갔다와서 말할게요.>> 짜증섞인 남편의 목소리가 발뒤축에 매달리거나 말거나 나는 문을 차고 나와버렸다. 부랴부랴 역으로 달려가면서 속으로 제발 수연이한테서 영미의 말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무 없는 소문은 안날거잖아.>>라던 영미의 말이 귀에 쟁쟁 울려왔다. 차표를 끊고 차에 앉아서 직장에 전화를 하여 말미를 맡으면서까지도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여있었다. 언뜻언뜻 차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연하게 이어지는 6월의 록색을 바라보고있으면서도 나는 그 푸름에 젖어들수가 없었다. 수연이, 수연이가? 뭣때문에 나는 수연이땜에 허둥거려야 하는걸가? 남편의 아니꼬운 눈길을 감내한채 무작정 수연이를 향해 뛰여야 했던것은 뭣때문인지를 알지 못한채 나는 마음이 급해진다. 몇번이고 엉뎅이를 들썩이며 어디까지 왔는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을 한대야 도무지 방향감이 없는 내가 알수 있을리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러기를 몇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내 20대에 고스란히 곁에 서있어주던 수연이가 살그머니 걸어나온다. 하얗고 동그스름한 얼굴에 약간은 튀여져나온 이마, 고집스럽게 꼭 닫힌 도톰한 입술, 웃을 때에도 얼굴표정이 한점 흐트러짐없는 수연이다. 내 첫사랑이 나를 위해 나를 놓아준다는 멋있는 말을 던진채 표연히 떠나가버린 후의 어느날 아침이였다. 욱~ 우욱~ 갑자기 토악질이 나왔다. 먹은것도 없이 나오는 헛구역질이라니? 입안에 남은 씁쓰레한 열물을 뱉어내는데 누군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어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병원에 갈가?>> 수연이였다. 어릴적부터 한고향에서 자라온 수연이였다. 어쩌구려 대학까지 한곳으로 와서 이제 그림자와같이 되여버렸다. 꽁꽁 내속을 숨기는 수연이와는 달리 덜렁거리는 나여서 수연이는 내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수 있다고 그랬다. 병원엘 가? 쌍놈의 새끼!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도 되는거야? 이가 뽁뽁 갈렸다. <<내가 왜 병원엘 가야 하는데?>> 구역질을 시작한지도 며칠째다. 나는 나를 알고있었다. <<너 가야 되는거 아니니?>> 은근히 고집스러움이 묻어나고있는 말투였다. 근심스러러워하며 나를 바라보는 수연이의 눈빛은 모든걸 다 알고있다고 말을 하고있었다. 그날 나는 결국 수연이의 손에 이끌려 차거운 수술대에 오르고야 말았다. 첫사랑을 떠나보낸지 한달만에 나는 배속에서 자라고있는 살점 한덩이를 무참히 떼여버리고말았다. 수술대에서 금속도구들이 내 하신속을 드나들며 남기는 그 통증을 이를 깨물어 참으며 이제 사랑따위는 믿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때가 바로 내 20대였다. 수연이만 보면 웬지 발가벗은 느낌이여서 수연이를 보기가 창피했던 20대, 하지만 수연이와 같이 아니할수가 없었다. 수연이만 나를 알고 나를 리해해줬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연길에, 수연이는 도문에 있으면서도 항상 련계를 끊지 않았고 가끔씩 만나곤 했었다. 수연이나 나나 평범한 출근족이기는 다 마찬가지였지만 둘의 삶의 방식은 완연 달랐다. 나는 주위의 사람들과 어울릴줄도 알았고 술상에서 둥글게 분위기를 열어갈수도 있었지만 수연이는 떠들석한 장소부터 거부한채 항상 조용한것을 즐겼다. 수연이를 만날 때마다 세월속에서 변함없이 청순한 수연이를 보면 어쩜 저렇게 살수 있을가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이제 세파에 어지간히 물든 내가 짜증스럽고 그게 수연이탓인듯 수연이와 시까스를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지만 헤여지면 금방 궁금했고 어떻게나 수연이를 마주하고있어야 내 맘은 평형을 이루고 편안했다. 내 부족함을 수연이의 몸에서 찾고있는 느낌이랄가. 그런속에서 이제 나와 수연이는 30대의 문턱을 넘어서고있었다. 내가 수연이를 만나본지도 이제 석달이나 된다. 석달전의 그날 내가 이르러보니 수연이는 혼자 앉아서 오렌지쥬스를 홀짝이고있었다. 나를 본 수연이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껴나갔다. <<요즘 뭐하는데?>> <<그냥 그렇지 뭐. 출퇴근하고 밥지어먹고 자고. 넌 안그러니? 근데 갑자기 왜 왔어? 올려면 일찍 오던지 할거지. 그래야 나랑 수다랑 떨구 그럴수 있잖아?>> <<오,그냥. 집에 있다가 갑갑해서 숨통이나 트일려구. 오늘 축구경기 어떻게 됐어?>> 갑자기 물어오는 수연이의 말에 나는 얼떠름해지고 말았다. 축구경기라니? 그제야 오늘 연변축구팀이 홈장경기를 치른 날임을 상기해냈다. <<언제부터 축구에 그렇게 관심이 생겼니? 어, 맞다. 니 남편이 축구팬이라 그랬지?>> <<응. 실은 오늘 남편이 축구구경 온대서 함께 올려했는데 남편이 먼저 왔었거든. 혼자 집에 있을려니까 은근히 부아통이 터져서 나도 올라와버렸어.>> 수연이의 말을 들으며 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얌전한것 같으면서도 먹혀들어가지 않을만큼 단단한 구석이 보이는 수연이였으니까 그럴법도 했다. <<나도 확 한국이나 가버릴가?>> <<뭐야?!>> 수연이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한국이라니? <<에이~ 네가? 그냥 해본 소리지?>> 수연이가 샐쭉 웃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 들었니? 그런 생각은 내게나 어울리는거야. 넌 아니잖아. 집에 무슨 일 있는거니?>> <<그런건 아니구. 그냥 요즘 들어 가끔 어디론지 훌훌 떠나고싶어서 그래.>> 수연이의 례사롭게 뱉어내는 말을 들으며 나는 그냥 수연이가 주위세상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울뿐이라고, 조금 흔들리다가 한치도 드텨앉지 않은채 자리지킴을 할거라고 믿고있었다. 내가 알고있는 수연이는 도에 넘는 일을 하지 않는 그런애였다. 학생시절에 수연이가 영철이와 사귈 때였다. <<너희들 어디까지 갔니? 손잡았니? 키스했어? 아님 속도위반?>> 이렇게 시까스르는 내앞에서 수연이는 토라지군 했다. <<넌 연애하는것이 소꿉장난인줄 아니? 난 마음이 안가면 몸도 못가. 마음이 가도 정규적인 절차를 밟기까진 날 지킬거야.>>하면서말이다. 그때마다 <<헹, 지금이 어느때라고 그러니? 난 느낌대로 살거야.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저지르고 말거야.>> 하고 나는 발끈했다. 예고도 없이 내 첫사랑이 떠오르며 내가 구접스럽게 느껴졌던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눈을 팔아버린 영철이때문에 갈라설 때까지도 수연이는 처녀성을 고스란히 지키고있었다. 그런 수연이때문에 나는 가끔 어지간히 화가 나있군 했었다. 그런 수연이가 출국할 생각을 했다니? 그냥 생각으로 머물다가 사라질게 뻔했다. 그날 나는 수연이의 말을 그냥 귀등으로 흘려버렸었다. 헌데 아침에 걸려온 영미의 전화는 나에게 있어서 충격적이였다.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수연이가 그러고 있다고? 언젠가 무심코 던졌던 내 말이 떠올랐다. <<수연아, 나 애인이라도 사귈가봐?>> <<무슨 소리 하는거야?>> <<지금은 애인 없는 사람은 반편이라 그러잖어. 남 하는대로 해보는거지 뭐.>> <<넌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게 탈이야. 세상에 발맞추려고 하지 마. 너 하나 세상돌아가는데 안맞춰 산다고 서운해할 사람 아무도 없어. 항상 마음속에 도덕의 성이라는거 쌓아놓구 살아야지.>> <<그래두… …>> 이쯤에서 나와 수연이의 대화는 항상 어긋났다. 결혼을 하고나서 수연이는 별로 밖에 나와 돌지도 않았다. 친구들모임에도 가급적이면 빠졌고 언제 어디로 훌쩍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는 수연이를 보며 나는 가끔 나라는 인간이 참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수연이와 대비하면 나는 흐려도 한참은 흐려진 물이였다. 수연이와 마주하고 있을 때마다 나는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군 했었다. 그러면서도 난 수연이를 멀리할수가 없었다. 왠지 나에겐 수연이가 필요했다. 그랬던 수연이가 이제 소문의 줄을 달고다닌다니? 나는 믿을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사이 또 다른 수연이가 되여있단말이가? 내가 알고있는 수연이는 단지 그렇게 보이고자 했던 수연이의 과거뿐이란말인가? 나는 의문덩어리를 안은채 차체에만 몸을 맡겨버렸다. 헌데 말할수 없는 불쾌감과 불안감이 땀에 절은 속옷처럼 끈적끈적 몸에 달라붙는 이 기분이라니? 뭔가 터질것 같은 이 느낌. 그 불안의 근원지를 알수 없는 허탈감에 가슴이 알싸하니 아파왔다. 이제 수연이를 만나면 난 어째야 하지? 이제 내가 다시 알아가야 할 수연이는 어떻게 되여있지? 수연이의 소식이 이렇게 나를 미치도록 황황하게 만드는 이유는? 머리속이 복잡하다. 이대로 멈추고 싶다. 가던 길도 생각도 멈추고싶다. 차체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린다. 속이 울렁울렁하다. 문득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내 몸을 원하던 남자. 나한테서 수치심까지 깡그리 빼앗아가버린 남자. 그 남자는 무얼 하고 있는것일가? <<너랑 자고싶어.>> 나를 만난 남자의 첫마디였다. <<안될것도 없지 뭐. 근데 왜?>> 나역시 직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를 보면 항상 궁금했었거든. 남이 머라든 자기의 느낌대로 살아가는 네가 맘에 들었다. 너를 볼 때마다 저런 여자랑 자고나면 기분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참 묘했어.>> 남자의 눈빛속에는 종잡을수 없는 그 무엇이 스쳐지나고있었다. 이 남자랑 잠을 자? 가슴밑창으로부터 뭔가가 온몸에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넌 내가 싫으니?>> <<아니.>> <<근데 넌 왜 항상 비켜서있었던거니?>> 바보야, 것두 몰라? 나때문에 네가 나쁜 남자 되는것이 싫었으니까. 넌 이미 나의 몫이 아니였으니까. 쭈욱~ 잔이 비여진다. <<난 혼자가 좋았던거야.>> 중얼거리는 내 눈은 허옇게 비였을것 같았다. 빈 술병들이 울바자처럼 그 와 나사이에 촘촘히 세워질 무렵 나는 한껏 취해있었다. 드디여 내 몸이 뉘인곳은 어떤 모텔의 작은 방안. 그곁에 가지런히 누웠는 그 남자. 취해버린 몸과 취하지 않은 머리가 싸움을 할 즈음 나는 이미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여있었다. 나는 언제까지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여있을수 있는걸가? 집안은 한산하리만친 간소했다. 침실 하나에 거실 하나 딸린 집이였다. 거실에는 텔레비죤 한대, 정수기 한대, 컴퓨터 한대만이 당그랗게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불필요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나를 마주하고 앉은 수연이의 눈빛은 차분했다. 원망도 후회도 없이 하얗게 비여있는 눈빛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을수가 없었다. 나도 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였다. <<왜 그랬는데?>> <<뭘?>> 끝까지 아닌보살하는 수연이가 불쌍했다. 어렵게 찾아낸 수연이다. 수연이의 주위의 사람을 줄줄이 거쳐 수연이의 거처를 찾아내는동안 수연이의 핸드폰은 내내 꺼져있었다. <<왜 이러고 사는가말이다?>> <<낮에 영미한테서 전화왔었어. 자기 말을 듣던 니가 심상치 않으니까 니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핸드폰을 끄고있었던건데…>> 수연이는 내 물음을 외면한채 꺼진 핸드폰얘기를 하고있었다. <<핸드폰 끈거 대수니? 내가 그거 묻는거 아니잖아?>> 내 목소리가 저도모르게 한옥타브 높아지고있었다. <<내가 어쨌는데? 이러고 사는데는 어쨌다고 그러니?>> 착 깔린 수연이의 목소리에는 단단함이 엿보이고있었다. 불륜의 정당성의 답안을 나는 수연이에게서 찾을수 있는것일가? 커진 내 눈을 일별하던 수연이의 탱탱하던 얼굴이 느슨해지고있었다. <<어디까지 알고있는거야?>> 정말 어디까지 알고있는걸가? 수연이한테 애인이 생겼다는 영미의 얘기뿐이다. 그것마저 내가 믿고싶지 않은 이야기인걸 보면 나는 알고있는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수연이가 정말 애인이 있는지도, 왜서 그렇게 되였는지도 , 나중에 어떻게 될것인지도 아무것도 모른채로였다. <<그냥 니한테 남자 생겼다는 얘기밖에 들은게 없어.>> 사실이였다. 다들 그 말외에 나한테 해준 얘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체념을 해버린듯 고개만 까닥거리며 그린듯이 앉아있는 수연이. 깊고 아득한 수연이의 눈빛을 따라 나는 수연이의 과거속으로 걸어들어가고있다. 수연이는 지금 체육장문어구를 지키고 서있다. 경기가 막 끝나기 5분전이다. 이제 5분만 지나면 저 문어구로 사람들이 밀려나올 판이다. 경기에서 연변팀이 이겼을지 졌을지 수연이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밀물처럼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속에서 그 얼굴을 찾을수 있을가가 걱정될뿐이다. 수연이는 자기의 직감이 빗나가길 바랬다. 어제 아빠트단지아래에서 수연이는 앞서가는 남편을 보았었다. 막 부르려다말고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에 열심히 전화를 하고있는 남편이였던것이다. <<… …영선이도 아홉시쯤이면 출발할수 있다더라. … …그냥 차비로 50여원 있으면 되겠지 뭐. 입장권은 내 친구가 알아서 해준다니까… …>> 수연이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줄도 남편은 모르고있었다. <<어디로 뭘하러 가는데요?>> <<어?>> 느닷없는 수연이의 말소리에 남편은 뒤돌아보며 흠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뿐. <<응, 연길에 있는 민수 알지? 래일 축구경기 한다고 보러 오래서 그래. 관람권 얻어준대.>> <<그래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시간되면 맘대로 해. >> 남편은 심드렁했다. 이게 아닌데? 영선이라는 이름과 아홉시,차비, 입장권, 축구경기가 어느새 수연이의 머리속에서 하나의 문장을 구사해내고 있었다. 아홉시쯤에 영선이랑 같이 차비만 준비해갖고 축구구경 간다? 헌데 남편의 말은 그게 아니잖는가? 수연이의 마음속에서 불신임 하나가 슬슬 꼬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남편한테서 불안감 같은것을 느끼고 있은지가 하루이틀일이 아니였다. 언젠부터인가 수연이에게 외식할 일이 있을 때면 남편은 밥 지어먹기가 귀찮다고 아들애를 데리고 외식을 하군 했다. 그때마다 아빠랑 같이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는 석이녀석의 손에는 늘 값비싼 놀이감이 들려져있었다. 누가 사준거냐고 물으면 아들녀석은 이모가 사준거라고 그랬고 남편은 여자동창생이 우연히 보고 이쁘다고 사준거라고 했다. 얼마전 석이가 페염으로 입원했을 때도 그랬다. 수연이가 출근해서 급히 사무를 처리하고 병원으로 가려고 할무렵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도 지금 일이 있어서 애를 병보이러 온 동창생한테 맡기고 나왔으니까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자고말이다. 그래서 한참을 기다렸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일 다 보고 들어왔으니까 절로 찾아오라고 말이다. 투덜거리며 수연이가 병실에 이르러보니 아들애는 신나게 비행기를 갖고 놀고있었다. 또 이모가 사준거라고 했다. 거기에 남편은 동창생이 자기 애의 놀이감을 사면서 함께 사준거라고 덧붙였다. 남편이 물뜨러 나간 사이 애하고 이모네 애가 이쁘던가고 물었더니 애는 이모 혼자 왔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설마 하면서도 수연이는 웬지 석연치가 않았었다. 아마 모르는 사이 수연이가 남편에 대한 믿음은 쪼각이 나고있었던것일가? 남편이 티비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수연이는 슬쩍 남편의 핸드폰에서 통화기록을 체크해보았다. 아까 아빠트단지에서 통화를 했을 시간대에 찍혀진 번호는 남편친구 민수것이 아니였다. 본시내의 시티폰번호였다. 통화기록을 쭉 훑어보다말고 수연이의 눈이 커지고있었다. 남편의 핸드폰 통화기록에는 그 시티폰번호가 수연이의 핸드폰번호보다 더 많이 찍혀져있었다. 신경세포가 서서히 올올이 일어서고있음을 수연이는 느꼈다. 당금이라도 그 시티폰번호를 꾹꾹 누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 어느새 사람들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사람들의 물결속에서 낯익은 얼굴를 찾아헤맸다. 그러면서도 수연이는 그 얼굴이 보이지 않기를 내심 바랬다. 수연이보고 오겠으면 같이 따라오라던 남편의 핸드폰은 오전에 수연이가 시간에 맞춰 떠나려고 할 무렵 내내 불통이였다. 통화가 되였다면 수연이는 이렇게 문어구를 지켜서고있지 않을수도 있었다. 남편을 의심하기에는 아직 너무 마음이 약해있는 수연이였다. 점심무렵 어렵사리 통한 전화에서 남편은 이미 연길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연이는 속에서 뭔가 욱하고 치미는감을 느꼈다. 어제 들었던 통화내용이 어쩔새없이 머리속에 떠올랐었다. 결국 수연이는 오후차를 잡아타고말았다. 문득 수연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시 눈빛은 암울해지고 말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너져내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한 수연이는 급기야 택시를 잡아타고 말았다. 남편곁에 선 사람은 민수뿐이 아니였다. 남편과 민수를 중심으로 여자 둘이 좌우에 각각 하나씩 붙어서있었다. 남편옆에 밀착해서있는 둥근 얼굴의 여자를 보는 순간, 수연이는 아찔하니 현기증을 느꼈다. 언젠가 본적이 있는 얼굴이였던것이다. 바로 남편의 생일날이였다. 그날 남편친구신분으로 생일축하파티에 참가했던 여자에게 남편은 <<넌 술을 못하잖니? 음료나 마셔.>>하며 친절을 베풀었고 아들애 석이녀석은 <<이모, 이모>>하며 살갑게 굴었다. 그날저녁 꼬부장해진 수연이한테 남편은 그랬다. 친구 민수의 안해의 친구인데 자주 술상에 함께 어울리다보니 친구사이로 되여버렸다고 말이다. 민수의 안해는 한국으로 간지 1년이 거의 되여온다. 그런 친구안해의 친구인 여자도 남편이 일본으로 가버린 상태라는것이 수연이의 마음에는 께름직했다. 벌레먹은 과일을 한입 베여먹은 기분이였다. 친구안해의 친구인 여자와 남편이 그 사이사이를 뛰여넘어 친구로 어울린다는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었다. 헌데 지금 같이 있는 여자가 그 여자라니? 결국 시티폰번호의 임자는 그 여자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사이 남편과 여자는 어느만큼 가까와져있는걸가? 수연이의 머리속은 복잡하게 엉키고있었다. 그날 이후로 수연이는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여기저기 발길따라 빙빙 돌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서야 할수없이 집에 들어가는 습관이 생겼다. 전화번호를 뒤져 련락이 끊겨졌던 동창생들도 찾아내고 만나서는 반갑다고 밤새도록 떠들석했다. 이런저런 줄에 매달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둘 익혀갔고 모임이 많아졌다… … <<접때 네가 갑자기 연길로 뛰여온것이 그때문이였구나.>> 수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석달전의 수연이와 나의 만남을 떠올렸었다. 그래서 수연이는 갑자기 한국에 가고팠던겔가? 마치 그곳이 도피소라도 되듯이말이다. 자기가 어딘가로 빠져버리면 모든게 원상복귀되는줄로 수연이는 잠시 착각했었나보다. 그런 상황을 겪고나서도 나한테 아무 티도 드러내지 않은 수연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알싸하니 아파왔다. <<맞어. 바로 그날이였어. >> 그러고보면 그때까진 수연이는 남편의 부정을 지켜보고섰을 슬픈 여자였을게 아닌가? 그럼 영미의 얘기는? 수연이한테 애인있다는 영미의 얘기는? 나는 그제야 가슴이 조금 트이는감을 느꼈다. 수연이한테 애인이 생겼다는것은 어쩜 시댁쪽에서 만들어낸 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수연이를 믿고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갈라선거니? 어디까지 온거니? 석이아빠하고는 영 서류정리까지 된거니?>> <<아니, 아직은 별거중일뿐이야.>> <<더 볼거리도 없잖아? 기어이 현장을 잡아야 믿겠다는 얘기니?>> <<그게 아니구… …>> 수연이는 수연이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고있었다. <<사랑했어요, 사랑했어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내 핸드폰의 벨소리였다. 찍혀들어온 번호는 남편의것이였다. <<왜요?>> <<당신 지금 어디야?>> <<수연이네요.>> <<거기서 머해?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거 아니야?>> 남편의 말소리에는 잔뜩 의심이 묻어나고있었다. <<작당이라니? 내가 음모가야? 나중에 얘기한다니까 그래요?!>> <<나 지금 당신때문에 화가 나있거든. 일단은 집에 와서 이야기하는거로 하고. 당신 기억해둬. 한국이든 일본이든 중국국경밖으로는 한발짝도 못나가는거니까 그줄을 알고있어.>> <<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겨버렸다. 또 무슨 일이야? 시도때도없이 들볶아서 이제 짜증스러운 남편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핸드폰폴더를 닫아버리는 나를 수연이는 눈이 올롱해서 쳐다본다. <<철컥~>> 느닷없는 자물쇠열리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눈길은 문쪽으로 날아갔다. 수연이도 몸놀림이 어색해지고 있었다. 다음순간. <<어?!>> 내 입에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을 따고 들어선 임자는 흠칫하더니 씩 웃음을 지어보인다. <<은미가 여기 웬일이니?>> 갱핏한 얼굴에 항상 말하는 눈을 갖고있는 남자. 지금 그 남자의 눈은 뭘 말하고있단말인가? 그는 영철이였다. <<수연이가 애인사귄다더라.>>하던 영미의 말이 발이 달려 눈앞에서 뱅그르르 돈다. 애인소리는 시댁에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였다. 수연이의 생활속에 실재하고 있는 애인은 영철이였다. 내가 종일 찾아 헤맨 사연의 실마리는 이것이였던가? <<저녁에 중요한 손님을 만나야 되거든. 옷 갈아입으려고 왔어. 은미도 오랜만에 왔으니 놀다 가라. 나중에 보자.>> 어정쩡해진 나를 일별한채 영철이는 들어올 때처럼 휭하니 나가버렸다. 수연이가 더듬더듬 이어나가는 이야기를 나는 무덤덤하게 듣고만 있다. <<니가 본대로야. 나 지금 영철이와 같이 있어. 영철이의 안해는 한국으로 간지 이제 5년도 더 되는데 올념을 안한대. >> 수연이가 하얗게 웃는다. 창백한 저 웃음, 해말갛던 웃음이 저렇게 하얗게 비워지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어야 하는걸가. <<남편에게 여자가 있는걸 알고나서 난 어째야 할지 막막하더라. 꼬챙이에 쳐들고 누구한테 말할수도 없구 그렇다고 남편한테 앙탈을 부리며 따지기도 싫었어. 내가 그들이 정사를 벌리는 현장을 잡은것도 아닌데 뭐라고 할수 있겠어? 내가 따진대야 기껏 친구들사이 그런 교제도 못하냐구 목이 뻣뻣해질 남편인데말이다. 설사 내가 오해를 했다 치더라도 남편을 믿어버리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많이 쪼각나있어. 남편만 날 떠난게 아니라 내 맘도 언녕 남편을 떠났을지 모를 일이니까. 그러다가 우연한 경우에 영철이를 만났고 난 날 던지고 말았다. 그냥 아무한테나 던지고싶었던걸 면바로 던져진 그 자리에 영철이가 있었던건지도 모르겠어. 오히려 그 상대가 영철이였다는게 다행이다싶었어. 너 그거 아니? 나 여태 영철이를 잊고산적이 없어. 영철이가 다른 여자가 있대서 영철이와 갈라진줄 알어? 실은 영철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니인줄 짐작하고있었기때문이야. >> <<응?!>> 영철이가 날 좋아했다구? 그걸 니가 알어? 데꾼해진 나를 일별한채 수연이는 담담히 입가에 웃음 한오리 빼여문다. <<내가 아무리 꽉 막힌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남자를 포용할수 있는 아량까지 없는것은 아니였다구. 하지만 내가 마음에 없는 남자, 그보다도 널 향한 남자의 마음을 붙잡을 생각은 안했어. 그 상대가 너였으니까.>> 나는 이제 죄인이렸다. 내가 죄를 짓지 않음에도 죄인으로 되여버린다는 그 기분 더~럽다! 헌데 가슴이 아프다니? <<그런데 내가 물러섰음에도 니들은 안이루어지더라. 결혼하고나서도 그것때문에 내 맘속 한구석은 늘 뭔가가 결려있는 느낌이였어. 이러구러 결국 내가 니가 알게 된 이런 사람으로 된게지. 바람난 여자로.. 근데 그거 아니? 떠나는 나를 남편은 붙잡지 않더라. 언녕 내가 떠나길 바라는 사람처럼말이다.>> 수연이의 표정은 처연했다. 저건 분명 버림받은 여자의 표정이지 바람난 여자의 표정이 아니였다. 수연이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굴러떨어지고있었다. 그 눈물에 나는 어느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걸가? <<난 세상이 싫어. 지금 이 세상이 싫단말이야.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렸니? 언제부터 이렇게 내것이 아닌 남자, 여자랑 같이 살아도 된다고 허락이 되여버렸니? 다 그놈의 출국붐때문이야. 떠나간 사람들이 타향살이 외롭다고 짝짓기를 한 탓이야. 난 그게 싫었거든. 나에게도 외국으로 갈수 있는 기회가 없은것은 아니였어. 하지만 가고나면 나도 어쩔수 없이 누군가랑 같이 살게 될가봐 무서웠던거야. 그래서 남아있기로 했어. 남아있으면 나도 가정도 지켜질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남아있는 사람들도 아우성이거든. 떠나가든 남아있든 남의걸 탐닉하는데는 한가지인가봐. 그래서 나도 이렇게 된거 아니니? 내 탓이 아니야! 세상탓이야! 세상이 증오스러워!!!>> 수연이는 드디여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는 수연이를 보며 나는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난 누굴 탓해야 하지? 이윽하니 그를 쏘아보았다.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이렇게 했어야 했느냐구?>> <<너한테는 사랑이라는게 뭔데?>> <<처음부터 수연이를 사랑하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맑고 청순한 수연이가 좋았어.그래서 사랑을 했던거구. 헌데 시간이 지나니 그게 아니더라. 내 눈엔 수연이보다 곁에 선 네가 더 들어왔어. 수연이는 나의 모든걸 닦아주는 대신 너라면 날 있는 그대로 받아줄것 같았어.결국 난 흔들렸던거야. 방황했어.>> <<그래서 헤여졌던거니?>> 나는 왜 지난 과거를 들추어야만 할가? <<수연이하고 말했어.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고. 그래서 갈라섰던거야.>> 헉~ 수연이도 알고있었다는 뻔한 사실을 나는 모르고있었다. 수연이와 데이트할적마다 나를 끼워주던 영철이를 이제야 알것 같다. 자기 친구도 같이 있다며 기어이 나를 불러내던 영철이, 자기 친구와 내가 무랍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자 리유없이 화를 내며 휭하니 자리를 뜨던 영철이를 이제야 알겠다. 헌데 영철이는 끝까지 나를 몰랐었다. 낯간지러워하면서도 항상 수연이의 곁에 붙어 영철이보러 가던 내 마음을. 수연이와 갈라지고나서 며칠후인 비내리는 날밤, 숙소밖에서 배회하는 영철이의 모습을 창문으로 내다본적이 있었다. 주룩주룩 그치지 않은 비속에서 숙소쪽을 향해 멍하니 서있던 영철이, 온몸이 흠뻑 젖은채 망연한 눈빛으로 서있던 영철이였다. 그를 보면서 내맘속에서도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허나 다가갈수 없는 그, 수연이때문에 다가갈수 없는 영철이였기에 나는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연이와 영철이 ,나는 어긋났나보다. <<그럼 지금은?>> <<지금?>> <<지금은 왜 이 모양이니? 언제까지 날 속이려 했어?>> <<속일려는 생각 없었어. 우연하게 많이 힘들어하는 수연이를 만났고 이제 수연이를 받아들인것뿐이야. 어차피 인생은 이런거 아니니? 내가 아니라도 수연이는 다른 남자가 필요했을게구. 나역시 고상한 놈은 아닌데야. 전번날 처음으로 널 내것으로 만들면서 참 행복했다. 방광이 팽팽하도록 차오른 오줌을 쏘아버리는 그 기분, 너 알지? 내가 이제껏 갖고싶었던 사람은 너 한사람뿐이였어. 그걸 방탕이라고 해야 하니? 그게 아니잖아. 난 사랑때문이라고 변명하고싶어.>> 그럼 수연이는 어떻게 하는건데? 수연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작정 뛰여내려와야 했던 까닭을 이제야 알것 같다. <<너 그거 아니? 난 요즘 세상 참 살맛 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널 잡을수 있는것은 세상의 덕을 본게 아니겠니? 아무리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사는 너라지만 이전같은 세상에서 날 다시 보기나 하겠니? 륜리며 도덕에 손발이 꽁꽁 묶이는것은 어쩔수 없는거였으니까. 정부고 애인이고 이름들을 달지만 어쩔수없이 남자여자들이 얽히는것을 다들 묵인하고있는 상태니까. 안그럼 어떡하겠니? 반쪽들이 외국으로 가버린 가정들이 얼만데? 난 내 안해가 지금 외국에서 누구의 품에 안겨있을가 가 궁금하지도 않아. 본인은 아니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아니라는 말 믿지도 않아. 세상은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되여버린거야. 외로운 인생들이 위로하며 사는거지. 안그래? 나 이제 널 안놓아버릴거야. 넌 내거니까.>> 어느새 힘있는 팔뚝이 어깨를 감싸안는다.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난 어째야 하지? 답을 찾기도전에 흘러내려오는 손길따라 몸이 노긋노긋해지는 그 구접스러운 느낌. 내 몸은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길 원하고있었다. 이래서 나는 수연이를 보기가 항상 부끄러웠던것일가? 새벽으로 이어지는 늦은 밤. 나는 쏘파에 쓰러지듯이 무너져내리고말았다. 무너진 내 앞으로 남편이 기다렸다는듯이 홱 종이 한장을 내던진다. <<이게 뭐야?!>> 어딘가 날이 서있었다. <<뭔데요?>> 나는 엉거주춤 종이장을 주어들었다. <<내가 뭐랬어? 한국 가면 안된다고 했지? 근데 왜 려권수속용지가 여기 있는거야?>> <<왜 안되는데요?>> 내 말은 무기력했다. 바람이 불면 날려가기라도 할듯 가벼웠다. 어느새 힘은 내 온몸의 세포마다에서 빠져버려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외국간 사람들중에 99퍼센트는 다 저들끼리 짝을 무어 사는거라구. 정말 가정을 버릴 생각이야?>> 한국의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남편은 이제 퍼센트수까지 곁들이며 출국한 사람들의 형편을 넘겨짚어말하고 있었다.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온집식구가 오손도손 모여사는게 좋은거야. 누군 돈이 싫어서 이러구 있는줄 알어? 남아있는것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거라구.>> 남편에게 중요한것은 떠나느냐 남아있느냐였다. 남아있다고 다 가정을 지킬수 있는것일가? 그게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난 할말을 잃고말았다. 수연이의 얼굴과 영철이의 얼굴, 그리고 수연이의 남편의 얼굴과 그 옆에 붙어섰다던 둥근 얼굴의 여자까지도, 그리고 또…… 남아있어도 외롭긴 마찬가지였을것이다. 남아있어도 흔들리지 않긴 마찬가지였을것이다. 마음속깊은곳에 고독이 웅크리고 있는 한은. 문득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 뜨거운 숨결이 귀전에 느껴진다. 나는 나를 삼켜버릴 그 손길이 그리웠다. 남아있음에 나는 이미 떠나버렸다. 내 맘속 깊이에서 꿈틀대는 그 무엇이 나를 만듬에야. 내 몸속에 남아있는 그 끈끈한 정액과 함께 이대로 멈춰버리고싶다. 욕망을 향한 밤을 이대로 비끄러매고싶다. 밤이여, 멈추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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