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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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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꿈 많은 삼합땅 댓글:  조회:2736  추천:2  2014-12-31
     수필                                                        꿈 많은 삼합땅                                                                                                                              회령    룡정시 삼합진은 우리집의 고향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삼합진 강역촌의 하강은 아버지의 고향이고 앞내 건너 북흥촌 샘물깨는 어머니의 고향이다. 나의 자식들 세 남매의 고향은 진소재지 삼합촌이다. 나는 소년, 초중시절까지 샘물깨에서 살았고 그후 17년을 삼합에서 사업했으니 삼합땅을 고향이라 할수 있겠다. 어데서 사업하고 생활했든간에 삼합땅은 잊을수 없는 그리운 고향이였다.    8월15일! 나는 큰딸의 효성에 받들려 동부인하고 고향방문을 하게 되였다. 꼭 32년만이다! 어느새 세월은 이리도 많이 흘렀는가…    차는 잘 포장된 국경도로를 따라 경쾌히 달렸다. 삼합경내에 들어서면서 첯동네는 강역촌, 아버지의 고향이다. 그런데 하강은 없어지고 뉘연한 밭이였다. 나는 섭섭한 심정을 억제하며 어머니의 고향인 앞마을 샘물깨로 향했다. 샘물깨는 아버지 어머니가 한뉘 구술땀을 흘리며 농사지은 곳이다. 사람세상은 변해도 산천은 여구하다고 했으나 그게 아니였다. 샘물깨는 산천도 많이 변했다. 마을길은 전부가 포장정리되였고 옛날의 초가집은 한채도 볼수 없었다. 우리집은 터만 있었는데 누가 집을 새로 지을거라고 하였다. 마을집들은 모두가 파랑, 빨강 지붕을 한 조선족문화주택으로 건설되고 다만, 마을가운데 앉은 고래등같은 10간 기와집만은 성급보호문화재로 남아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골동품”이라고 했는데 주택주변은 옛모습을 전혀 찿아볼수 없었다. 그네뛰던 늙은느티나무는 사라지고 마당앞에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치렁치렁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헛간터 저쯤에는 아담한 마을활동실이 있었다. 마을가운데를 째고나간 대두럭(관개수로)은 없어지고 마을앞언덕아래서 여러갈래로 흐르던 샘물도 사라지고 두곳만 남았는데 우리집샘물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잘하느라고 세멘을 발라 인공정리한것이 아주 망가지고 옛날의 자연미는 한점도 없어서 참으로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옛날의 모습에는 두무만한 큰바위돌옆으로 샘줄기가 나오고 거기를 아버지는 돌들을 쌓아 운치를 돋구었는데 윗턱둔덕에는 구기자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지게 하였다. 하여 푹 우거진 구기자숲속에서 샘물이 흘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다. 대신 여기저기에는 옛날의 애버들이 고목으로 자랐다. 마을은 키들이로 자란 강냉이숲에 싸여 지붕만 보이고 고즈넉 잠잠하였다. 옛날에 함께 살던 이웃들이 10여호는 된다고 했으나 알아볼수 있는 사람은 로인네가 대여섯뿐이였다. 32년전 내가 영영 삼합땅을 떠날때는 삼합에서 샘물깨가 제일 큰 마을이였다. 그때는 40여세대가 살던 마을이였는데 지금은 20여호, 그것도 여러집은 빈집이라고 하였다. 어린시절 친구들은 한명도 없었다. 마을에는 로인네와 중년들 몇이 있을뿐 청년과 아이들은 없다고 하였다. 정든사람, 정든산천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생활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으나, 과도기의 피할수 없는 현상이라고 리해는 하면서도, 서글픈 심정을 감출수는 없었다.    시가지가 고향인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번영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경탄하며 흥분해 하지만 시골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거지반 생기없이 잠잠한 고향을 안타까워 하고 서글퍼 하고 지어는 쓸쓸해 한다는데 그것은 옛정을 찿을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가라며 붙잡는 마을사람들과 작별하고 삼합으로 달리였다. 20여리의 현급포장길은 기본상 새로 뺀 것이여서 역시 옛모습을 찿아볼수 없었다. 두만강쪽으로 내려 앉은 도로량켠으로는 무성한 나무숲이 우거져 심산속을 달리는듯 하였다. 공기가 너무도 청신하였다. 얼마간 달리니 도로는 두갈래로 갈라졌다. 안내표시판에는 좌측도로는 해관, 우측은 삼합이였다. 삼합시가지로 들어가는 다리는 옛것 그대로였으나 그젯날 꽤 크던 시내물은 없어지고 돌서덕물길만 남았었다. 시가지는 아주 몰라보게 변했다. 우선, 모든 집들이 새로 건축한 것들이고 옛날에 제일 좋고 크다던 사업단위건물은 두어채가 남아 있었으나 페기되여 그야말로 꼴불견이였다. 중심가 량켠에는 상점 음식점 사업단위가 몇집 있었는데 너무도 한적했다. 삼합촌도 역시 생기발랄한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너무 적었다. 옛날 우리가 살던 집터들을 찿을수가 없이 변했다.    우리는 농가음식점에서 랭면을 먹은후(삼합랭면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주인씨 추천대로 먼저 “망강각”으로 갔다. 홍경동에서 시작된 포장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오르니 하남호옆 산정에 멋지게 건설한 “망강각”이 있었는데 남호벌과 두만강 사이섬 그리고 조선의 회령시가 지척으로 환히 전망 되였다. 나의 고향 회령시가지는 옛모습이 여전하였다. 보고 또 보아도 싫지않은 아름다운 산천이였다. “망강각”에는 유람객이 여럿있었는데 모두 탄성을 올리며 기념촬영에 열중하였다. 저쪽에서 야외식사를 하며 즐기는 패들도 여럿이였다.    잇따라 우리는 청천저수지로 향했다. 청천저수지는 대약진때부터 시작했으나 50여년 하며 말며 하다가 드디여 준공된 것이다. 저수지는 서래골 맑은물을 막아 만든것인데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음식점주인은 청천저수지물고기가 천하일미 라고 극력 찬미하며 추천했으나(특히 산천어) 우리는 아쉬운대로 귀로에 올랐다. 래일행사가 있었던것이다.    삼합땅, 고향방문은 하루로 끝났지만 나에게 깊은여운을 주었다.    삼합은 농업, 림업, 목축, 어업, 과일과 산나물(고사리와 송의버섯은 해내외에 유명하다.) 그리고 생태관광, 조선래왕…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무공해, 무오염의 청정지대다. 삼합에는 아름답고 값진 꿈이 많다. 그 꿈의 일부는 개발을 보였지만, 금방 싹이 튼 정도였다. 삼합은 꿈의 처녀지, 사업가들의 개발을 기다린다. 지금은 고즈넉, 잠자듯 조용하고 적막하기까지 하지만... 몇년을 안가서 활기로 넘칠것이다. 꼭 그럴것이다…    고향의 앞날을 상상하는 나의 마음은 거뿐하고 유쾌하였다.                                                                                                                                                                                                                                 14. 9
85    마래골의 든장질 댓글:  조회:2679  추천:2  2014-12-31
     실화                                               마래골의 든장질 참극                                                                                                                      회령    이젠 40년전의 일이니까 한세대가 지나간 옛말이다. 그러나 마래골사람들은 그때의 든장질사건이 화제에 오르면 전, 후세대가 어떤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래골의 든장질참극이란 오입쟁이 두집을 마을에서 쫓아버린 굉장한 사건인데, 원근에 들썽 소문이 났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때의 일을 말할때면 어제일처럼 생동하게 말하면서 착잡한 심정에 잠기군 한다. 그리고 쯧쯧쯧! 혀를차며 사람이란 량심을 바로먹어야 하며 그래야 후대도 잘된다고 말한다.    1975년 3.8절날밤이였다. 마래골생산대 정치대장, 생산대장, 회계가 간통현장을 덮쳐 비행의 남녀를 붙잡았는 데 그들로는 동수와 득보의 처 옥자였다. 이들인즉 바로 든장질로 쫓기운 그 두집 인데, 자세한 내막을 알자면 옥자부터 말해야 한다.    옥자는 진시가지 주변 산골마을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처녀때 아이를 낳아 작은진에서 조명이 났다. 옥자가18살 먹던해 마을소학교 유부남선생이 아이를 설게 하였다. 그때는 류산시키는 의술도 락후했지만 어느의사도 위험한 일에 손을 대려고 하지않았다. 큰병원에 갈 형편도 못되다보니 옥자는 치욕을 무릅쓰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남자애) 백날이 지난후 진시가지 누구네가 업어가고 이듬해 봄 옥자는 마래골 득보한테로 시집을 갔다.(선생은 3년 감옥살이를 갔음.)    마래골마을은 자동차가 다니는 신작로옆에서 수레길을 따라 골짜기속으로10여리 깊숙히 들어가 있다. 궁벽한 산골마을이지만 30여호가 살았다.    득보는 마래골태생인데 날때부터 8부쯤되는 사람이였다. 그리고 배들배들 약골인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서 생산대에서 먹여 살렸다.(초급사때 부모들이 사망.) 1958년11월 인민공사가 성립된후 양력설날 옥자는 득보와 잔치를 하였다. 득보는 늙은장모까지 모시는 데릴사위가 되였지만 생각할수록 꿈만같았다. 서른이 넘도록 과부자리도 소개가 없었는데, 이게 웬 떡이냐?! 마을사람들도 제일처럼 기삐하였다. 득보와 옥자의 혼사는 마래골생산대 빈하중농협회 조장인 리순덕이 주선한 것이다.(마을에서는 리주임아바이라고 존대했다. 치보조장도 겸함.) 그는 옥자네와 옛날부터 아는 사이인데, 경우가 바르고 정직하고 고정한 사람이였다. 장가든후 득보는 멀끔해 지고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시키는 일을 군소리없이 잘했다.    옥자는 함박꽃같이 아름답고 미끈한 체격의 녀자인데 성미는 쾌활하고 열정적이 였다. 그는 보기좋게 실팍한데 득보보다 한뼘은 더 컸다. 싱싱한 옥자는 잔치후 더욱 활짝 피여났다. 그는 자기의 일생이 이젠 제자리를 잡았다고 흐믓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남편이 밤일을 만족스레 하지 못하는 것이였다. 옥자에게 워낙 바람기가 있었든가… 그는 3년도 되기전에 정치대장, 생산대장, 회계와 바람이 났다. 잔치를 하면서 옥자는 제손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누구 부럽지 않게 행복한 살림을 하리라 굳게 결심했었다. 득보가 시키는 대로 잘따라주고 자기의 머리도 누구 못지않게 총명하고 자고나면 힘이 펄펄솟는 한창때인지라 그는 앞날에 대하여 신심이 있었고 소박한 꿈도 적지 않았다. 정치대장, 생산대장, 회계와 바람이 난것은 사내들이 먼저 치근덕거린것도 있지만 옥자도 쉽게 받아들였다. 마래골에서는 제일 똑똑하다는 그들은 옥자가 반부실이 득보한테로 시집을 오자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났다. 보름달 같기도 하고 함박꽃 같기도 하고 군대말 같이 싱싱하고 호함진 옥자는 그들이 흘끔거리며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별다른 투자도 하지않고 옥자와 즐길수 있었다. 옥자와 그들은 동물적관능관계일뿐 리혼하고 누구와 산다느니 어데로 달아난다느니 무슨리득을 챙긴다느니… 이러한 험악한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욕만족이면 다였다. 그들은 각자 가정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음특하고 엉큼한 한창나이인 젊은남편과 사는 안해들은 육감적으로 옥자를 항상 경계하였다. 옥자같은 활량이 곁에 있으니 시름놓을수 있는가. 년놈들이 아무리 은밀하게 눈을 맟추고 돌아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군 했다. 하여 세사내의 집에서는 가끔 시앗싸움이 비밀리에 벌어지군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내들의 얼렁뚱땅과 안해들의 으름장으로 그러루하고 넘어가군 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우듯이 마을에서는 차츰 쉬시쉬시 시시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퀴퀴한 뒷소리는 리순덕의 귀에도 들어 왔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노릇이였다. 도둑은 장물을 쥐여야 하고 간통은 현장을 잡아야 하는건데 아직 그런것은 없지 않은가. 그는 옥자에게 젊은녀자가 행동거지를 늘 조심해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변죽을 울리는 몇마디 말만 두어번 했을뿐이다. 득보는 항상 헤실헤실 웃고 다녔다.    4청운동후 다른공사에서 동수네가 이사를 왔다. 그는 어느생산대의 대장질을 하였는데 4청에서 정치대장과 회계(이들은 숙질간임.)의 탐오문제를 까밝혔다. 하지만 문제가 엄중하지 않아서 공작대에서 두어번 교육을 하고 그들은 여전히 간부질을 했다. 마을에는 다른 적임자가 없기도했다. 마을사람 다수는 정치대장네와 친척이고 동수네는 타성으로 혼자인데 차츰 동네에서 외몫으로 나게되자 이사를 한 것이다. 동수는 농촌사람이지만 하야말쑥하고 말을 잘하고 약삭발랐다. 그런데 아이는 셋이나 되지만 안해가 늘 시큰둥 했다. 심성은 무던했지만 인물이 없었고 밤생활이 미지근 했다. 동수는 이사와서 삼년남짓 지난후 옥자와 눈을 맟추게 되였다. 옥자는 동수와 관계를 맺은후 더는 다른사내들과 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떠어떠한 리득을 주겠다고 해도 옥자는 요지부동이였다. 옥자와 동수는 서로 대방의 가정을 다치지 말고 정부관계로 한평생 살자고 굳게 공수동맹을 맺았든 것이다. 이에 세사내는 동수에게 앙심을 먹게 되였다. 그리고 동수가 저들에 대하여 사사건건 눈을 밝히는것이 몹시 아니꼽고 은근히 골치거리였다.    3.8절날 밤, 부녀들의 오락판에 끼여들었든 세사내는 동수와 옥자가 얼마간 뜸을 들여 슬그머니 사라지자 미행을 하였는데 동수네 헛간에서 간통하는 남녀를 붙잡았든 것이다. 동수는 헛간에 나무침대까지 만들어 놓고 거기서 옥자와 재미를 보군 하였다. 안해는 초저녘부터 입을 하ㅡ 벌리고 쿨쿨 잤는데 그것은 득보도 마찬가지 였다. 하여 그들은 밤중까지 혹은 새벽까지 시름놓고 통간을 했다.    정치대장은 리순덕, 청년단소조장, 민병패장, 부녀대장, 출납 등 생산대 골간들을 긴급히 불러다 동수를 투쟁하였다.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동수는 자초지종을 이실직고 하였다. 옥자는 현장에서 놓아주었는데 정치대장은 가만히 딴소리는 절대로 하지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생산대장과 회계도 각기 옥자에게 그런 부탁을 단단히 하여 놓았다.    생산대의 주요간부들이란 사람들의 뒷소리가 시크므레하자 리순덕은 그들을 꼴사납게 보며 한편 동수를 쓸만한 사람이라고 동네사람들과 은근히 속심을 비추기도 했는데 이런 랑패가 있을줄이야… 그는 쓰거워서 침을 퉤퉤 뱉았다. 하지만 그는 투쟁에 참가한 간부들에게 절대로 소문을 펴지말라고 두세번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마을에 퀴퀴한 소리가 많으니 다들 주의하라고 을러놓기까지 했다. 정치대장 등 세사내는 켕기는 바가 있다보니 리주임의 말씀이 옳다면서 수긍하였다. 동수는 장밤 줄욕을 먹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틀도 넘지 못하고 그들의 추행은 마을에 쫙 퍼졌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으나 득보와 동수의 처는 감감부지였다.    나흘이 되는날 오전, 득보가 노기충천하여 동수네 집에 달려들었다. 정치대장과 생산대장, 회계가 그를 잔뜩 추겼든것이다. 그들은 득보를 불러다 놓고 사실의 진상을 말해준다면서 동수가 너의 안해를 꾀여 간통하고 이후에도 계속 데리고 살겠다고 했는데, 그래 가만 놔 두겠는가! 든장질을 해서 쫓아버려야 한다고 추겼든것이다. 득보는 참나무몽둥이를 들고 동수네 바당문을 짓부시고 집안에 뛰여든후 가마를 뽑아 던지고 후렁에 든장대를 들이 박았다. 그리고 부쩍부쩍들어 구들장을 돌아가며 번져 놓았다. 동수는 그날로 이사자리를 얻으려고 길을 떠났다.    득보가 든장질을 한후 이튿날이다. 이번에는 정치대장 등 세사내의 아낙네들이 동수의 처를 추겨 앞세우고 득보네 집에 달려 들었다. 그들은 이짬에 옥자네도 쫓아버리자고 입을 모은것이다. 옥자가 마을에 사는한 시름놓을수 없었든 것이다. 거기에 남편을 의심하던 다른 아낙네 둘까지 합세를 해서 그들 여섯은 가위까지 가지고 옥자네 집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들은 온갖 쌍욕을 퍼부으면서 옥자를 두들겨 패고 머리까지 깎아 놓았다. 그리고 네년이 바람 쓴 남자를 다 털어 놓으라고 쪼지고 들었다. 옥자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수 없었고 여지없이 든장질을 당하고 말았다.    보름도 안되여 동수네와 옥자네는 선후로 멀리 이사를 가고 말았다. 있으라고 붙잡는대도 있을 체면이 없었다. 그들이 이사갈때 리순덕이와 마을사람들은 이사짐을 신작로까지 실어다 주며 타고장에 가서는 애들을 보더라도 마음을 잘먹고 몸성히 애들을 잘키우고 잘살라면서 진심으로 동정하고 섭섭해 하며 여니(배웅)를 했다. 동수네도 그랬지만 옥자네도 온집식구가 쿨쩍쿨쩍 울면서 마을을 떠나갔다.    마을사람들은 앞에서는 화냥년 하나가 동네를 더렵혀 놓았다고 옥자를 욕했으나 속으로는 더러운 쌍놈의 년놈새끼들! 어디 잘되는가 두고보자! 하며 세사내집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하지만 정작 어쩌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밭은 친척들도 있었거니와 신통히도 똑같게 부부가 입살이 드세고 이악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합작사(공소사 즉 상점), 농기짬, 사반기업, 위생소, 소학교 등에 출세시킨 자식들도 만만치 않아서 그들의 눈에 나기 싫었다. 산골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권세있는 집안들로 보였고 무서웠다. 그들은 여전히 생산대간부질을 했다. 보잘것 없는 두메산골이지만 이들은 거기서 토황제처럼 귀족처럼 안속을 채우면서 거들먹거리며 으시대며 잘 살았다.    세월은 어느덧 이십여년이 지나갔다. 그간 동수와 옥자는 그야말로 이빨을 사려물고 자식들에게 있는힘을 다 하였다. 동수네 아들형제와 딸은 현과 진에서 국장이며 과장이 되고 옥자네 아들 삼형제는 공안국, 교통국, 신문사의 중층간부가 되고 딸형제는 식당과 상점을 경영하는데 꽤 부자가 되였다.(아이들은 얼굴에 제애비 모습이 력력했다.) 정치대장은 풍을 맞고 생산대장은 간경화에 걸려 그들은 페인이 되였다. 회계는 혈압과 당뇬가 뭔가하는 병에 걸렸는데 홀애비가 되였다 그들의 자식들도 요절했거나 감옥에 갔거나 캐출을 맞고 농사짓는 자도 있고 바람으로 가정이 풍비박산났거나 품팔이로 사는 자도 있다. 어느집도 잘됐다고 할만한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사람들을 업신여기며 으쓱거렸는데 이런꼴이 될줄이야?!...    지금에 와서 마래골사람들은 그게 다 보응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다 보는눈이 있고 시비판단이 있는것이다. 리순덕만 보더라도 말은 별로 하지않았지만 속은 뻔 하였다. “남을 해쿠면 저도 망하는거야. 그러게 죄되는 일은 하지말아야 해.” 리순덕의 어록이다.                                                                                                                        14. 6
84    도문의 아침 댓글:  조회:2455  추천:2  2014-11-24
        수필                                                     도문의아침                                                                                                         회령     중국변경갑급개방도시인 도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제일 작은 도시다. 하지만 연변에서 두번째로 부상한 현급도시다.     도문이란 명함해석에는 길복하고 아름다운 덕담이 몇가지가 있지만 나는 항상 도문이란 “그림의국문”이란 뜻이라고 인정한다. 도문시민들만 아니라 도문을 한번 본 사람들까지도 도문은 참으로 아담하고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나라의 문이라고 찬탄한다. 도문의 하늘 공기 산 물 기후는 사계절이 분명하고 깨끗하다.     고속로 고속철이 곧 증설되며(이미 있지만.) 또 세계물류집산중심, 북강공원이 시공중이고 두만강공로교 철교가 있다. 개발구공업단지는 점점 더 확대되고 시가지는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있다… 도문은 명실공히 생산 상업 문화 관광 생태 소비가 일체화한 현대화의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다.     대도시들에서 낮과 밤 아침과 저녘이 분명치 못한데 반하여 도문은 시간대가 뚜렷하다. 특히 재미있는것은 도문의 아침이다. 도문의 아침은 동계와 하계가 선명히 다르다. 명확하게 말한다면 11월중순부터 이듬해 4월중순까지는 동기아침이고 4월중순부터 11월초순까지는 하기아침이다.     먼저 하기아침을 보자.     하기의 아침은 중심시장과 북시장에서 시작된다.(남시장은 개조중임.) 새벽세시가 조금 지나면 동서남북 위성진들에서 중심시장과 북시장으로 농차(써프 뜨락또르 소, 중삼륜차 소,중트럭)들이 밀물처럼 호호탕탕 진격해 들어온다. 따르르! 쌔앵쌔앵! 퉁퉁퉁! 부릉부릉!... 몇백대의 행렬이다! 농민들과 전업호들이 자기의 각가지상품을 싣고 식전장을 보려 기세좋게 달려오는 것이다. 그 치렬하고 장쾌한 삶의정신과 모습에 감동과 고무를 느끼지 않을수 없다. 만화경같은 상품은 그야말로 풍부하고 다종다양해서 일일이 다 헤아릴수 없다. 그저, 와글벅적 번창하다고 말할수밖에. 그야말로 고양이뿔외에는 무엇이든 다 있다. 기동차들의 요란한 동음은 도문시를 들썽 흔들어 놓는다. 도문시는 잠에서 깨여난다. 이른아침이 되였다. 도문의 하루가 시작되였다. 식전장마당은 온군 하기에 걸쳐 이침 7시반까지 수백메터의 장사진을 치고 열린다. 옛날에는 두부장사가 이침을 깨웠지만 지금은 근로한 농민들이 시가지를 깨운다. 모르긴해도 80%의 시민들이 장마당으로 나올것이다. 장보려, 구경하려, 친구들만나려… 로인네 아낙네 남정들 새각시 아가씨들 아이들… 인산인해 사람도 “장마당”이다.     동계아침은 학생아이들이 불러온다. 공부에 열중해도 분수가 있지, 저보다 더 큰 책가방을 등에진 소학생 초중생, 그리고 미끈한 고중생, 기술학교 청년들… 학생들은 6섯시면 집을 나선다. 도문의 학교들은 동 남 북 시변두리에 주로 집중되여 있다. 그들을 위하여 대중교통이 잇따라 운행된다. 차를 기다리며 떠들어 대는 학생들, 자전거로 싱씽 달리는 학생들, 삼삼오오 떼지어 씩씩하게 걷는 학생들… 이른아침은 활기로 넘친다. 싱싱한 우리들의 후대들이다. 도문의 미래들이다. 몇이 안되는 두부장수 콩물궈즈가 나오긴 하지만 그들은 옛날처럼 “뚜포!”하며 아침을 깨우지 않는다. 고정된 자리에서 얌전히 앉자 따끈따끈한 모두부며 콩물궈즈를 판다. 철도광장 두만강광장 인민체육장 북강과 두만강의 유보도 일광산산책길에 그리고 시정부 은행 상점 호텔 등 청사의 앞마당공터들에서 건강관리를 나온 시민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동, 하기작식표시간대에 맞추어 울리는 우렁차고 새힘이 솟는 국가에 따라 국문에 국기가 계양되며 도문의 아침은 활짝 밝는다. 안산높은봉에 아침해가 둥실 솟았다. 출근족들이 하이야 오토바 자전거 도보로 바삐 움직인다. 보람차고 활기에 넘치는 도문의 하루가 이어진다.     부강 민주 문명 화해의 나라, 자유 평등 공정 법치의 사회건설에서 생기발랄하게 열리는 도문의 아침이여! 애국 경업(敬业)성신(诚信)우선(友善)의 도문사람들이여! 지식례의(崇文尚礼) 개방포용 실효혁신의 도문정신을 더욱높히 떨치시라.                                                                                                                     14.8
83    특별법정 댓글:  조회:2056  추천:1  2014-10-09
            잡문                                                             특별법정                                                                                                                           회령     만국의 사람대표와 동물대표가 모여서 특별법정을 열었다. 법정은 퍼러딩딩국 수도인 삐뚜루쓰깨에 설치하였다. 법정집행주석은 지구에서 최고법원원장인 사자대왕 히틀러가 친히 담당했는데 그것은 오늘 처리해야할 사안이 너무도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건은 모기종족을 지구에서 철저히 박멸할 것이냐 어쩔것이냐 하는 것이였다. 집행부주석은 사람대표 도죠히데끼다.     피고인 모기대왕(암컷)강까투리는 가장밥 먹은 뱃장으로 피고석에 틀거지를 잔뜩 내면서 앉았다. 그는 나서주는 변호사가 없기도 했지만 자기에게 진리가 있다고 자신하기에 변호사를 사지도 않았다.     “흠! 개정한다. 다들 일어서라. 만국가를 합창!”     사자대왕 히틀러의 일성호령에 따라 만국가가 합창되고 또 앉으라는 명령에 따라 전체가 착석을 했는데 법정은 매우 엄숙했다.     “지금부터 사람대표 도죠히데끼선생이 모기종족의 죄악을 선포한다.”     “애햄! 에또ㅡ, 모기종족의 죄행은 다음 두가집네다. 한가지는 이놈들은 전적으로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사망률이 아주 높은 일본뇌염 등 악성질병을 전파한다는 것입네다. 특히 이놈들은 사람의 피를 제일 맛있는 요리로 주식을 하며 뇌염, 학질을 사람에게 주입하여 고통을 줍네다.”     “가만. 저새끼들은 사람에 대해서 남녀로소 병약잉잔을 불문하고 해칠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도 무차별 악행을 한다. 나도 여러번 저놈들의 침략을 받았다. 코구멍과 귀구멍에 잠입해서, 몇번은 똥구멍과 귀중한 거시기에도 붙어서 나의 보귀한 피를 빨아 먹었다. 그뿐이 아니다. 무슨 개수작을 부렸는지 4ㅡ5일씩 가려워서 죽을 지경이였다. 배은망덕한 괘씸한 것들! 흠!”     사자대왕은 모기대왕강까투리를 한주먹에 요정낼듯이 노려보며 질타를 한후 턱을 건뜩 흔들며 도죠히데끼에게 계속하라고 신호를 했다.     “애햄! 에또ㅡ, 히틀러사자대왕주석께옵서 중요연설을 하시였지만 보다싶히 저놈들은 아주 극흉극악한 종자들입네다. 이 지구에서 철저히 제거해야 합네다. 이상 기소를 합네다. 애햄!”     “흠! 피고는 할말이 있으면 하라! 어디 들어보자.”     “감사합니다. 우리종족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세계경찰사명을 부여하여 생태평형 유지에 일정한 공헌을 하라고 그래서 탄생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지는 않고 우리를 기소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사람들과 여개방차지만, 다들 량심들이 있다면 느껴지는 바가 있을것이고 우리에 대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릴수 있을것입니다.”     “뭐?! 다들? 네놈이 담두 크구나. 그래, 어디 말해봐라. 엑! 그놈 참. 흠!”     “이 세상에서 제일 불한당 망나니 악종은 사람입니다. 저놈들은 못하는 악행이 없습니다. 보십시요. 저놈들은 애비는 없어도 살지만 소가 없으면 못산다고 침이 마르게 말합니다. 그러나 실컸 부려먹고 소가 늙으면 껍질을 발라서 구두를 만들어 신고 폼을 잡고 멋을 비기며 고기는 회를 쳐 먹고 불고기를 해 먹고 뼈까지 고와서 3,4일 우러날 국물이 없을때까지 신나게 처먹습니다. 어떤 놈들은 칼슘을 보충한다면서 다 우려먹은 뼉다구를 절구에 찧어 가루내여 먹습니다. 저놈들이 못먹는게 어디 있습니까? 신기를 돕는다며 노루 사슴 지어는 도마뱀 두꺼비 굼벵이까지도 산것을 서슴치 않고 붙잡아서는 처먹는 놈들입니다. 암컷들은 미용인가 뭔가를 한다면서 구더기 생낙지를 꿈지럭거리는 것을 그대로 먹고는 해죽거리지요. 여우가죽목도리 뱀돈지갑 악어핸드백 말가죽띠 수달피외투 토끼털모자… 과동용꿀은 다 빼먹고 벌들에게 사탕가루를 먹여 똥물싸개로 죽게 하지요. 원래 많치도 않거니와 무던하기로 소문난 북극곰 흑곰을 잡아서는 열을 빼 먹고 족대기를 잘라서 별미로 먹지요. 아첨하며 진상하기도 하고요. 파리한테서도 저들이 쓸 무슨성분을 빼낸대요. 기막힌 놈들이죠. 더욱 악착한건 저들끼리 잡아 먹는것입니다. 서로 자기의 리득을 챙기기 위하여 얼마나 무자비하게 싸웁니까?! 우리 모기족은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놈들의 피가 맛있어서, 저놈들이 무엇이나 다 먹고 무엇이나 다 가지고 살아서 그런지 피가 특별히 맛있긴 합니다만, 고까짓걸 한방울 먹는다고 해서 얼마나 지독한 복수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를 포로해서는 아주 재미로 입침을 뽑고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서 눈알을 빼고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서 다리를 몽탕 짜를고 날개를 싹뚝 베여버리고… 특등잔페로 만들어 말라 죽게하는 악행은 말할것도 없지만 전기망 화학물 등 대량살상무기까지 동원 하지요. 그러나 저들끼리 살육은 더욱 몸서리가 칩니다. 제놈의 리익을 위하여 사기 협잡 회뢰 횡령 도둑질 계집질 매관매직 살인 전쟁... 그야말로 “5독”이 구전한 온갖부정부패 악행악덕… 저놈들이 못하는 짓거리가 무엇이 있습니까?! 천하에서 제일 악독한 놈들이지요. 다 아시는 바지만…”     “야, 이놈아! 네놈이 간사하고 말주변이 그럴듯 하다만 모두가 궤변이다. 우선, 뭐가 어쩌구 어째?! 뭐 하느님이 사명을 부여해 탄생했다구? 이 철면피한 놈아! 하느님은 남을 해치지 말며 화목하게 조화롭게 그리고 제힘제공력으로 근면하게 살라고 했지 네놈처럼 전문 남의 피를 빨아먹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고통까지 주며 살라고 했느냐?! 네놈들은 병을 전파하고 혹독한 가렴증을 주는 놈들을 스스로 징벌하느냐?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공인하며 받드는 령장이다. 그들만이 지구의 조화로운 질서를 만들수 있다. 그들은 내부의 온갖 쓰레기를 스스로 척결하며 령장으로서의 사명을 잘 실천하기에 부단한 노력을 아낌없이 다 하고 있다. 어디서 감히 한치혀로 우리를 우롱하려는거냐?! 괘씸한 놈! 네놈들은 깡그리 씨한알 남김이 없이 몽땅 철저히 소멸이다!! 이상! 페정!”     “가만! 할말이 더 있습니다!”     강까투리는 있는 힘껏 새된소리를 질렀다.     “네놈의 아가리에서 무슨 들을말이 또 있겠느냐! 대왕님! 주석님! 이만 끝냅세다. 애햄!”     도죠히데끼가 손을 연신 휘저으며 긴장해서 다급히 말했다.     “아니다. 저놈이 무어라고 더 짓거리나 들어보자. 곧 죽을놈인데… 그래 어디 말해보거라.”     사자대왕이 넓은 도량을 보이며 언권을 주었다.     “법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습지요?! 그렇다면 저 똥좃히데꾼지 개대가리히데낀지한 저놈부터 릉지처참을 하고 쓰레기들을 척결해야 합니다. 저놈이 우두머립니다. 그리고 저놈이 부주석보좌에 오르기까지 대왕님도 한밥 잘 먹은바가 있습죠? 저놈이 제 본댁을 먹으라고 바쳤죠? 젊은 첩들이 우글거리니까 조강지처가 싫었든게죠. 흥! 대왕님도 무고한 들소와 얼룩말을 아주 뼈까지 우드등 와드등 잡아먹지요? 대왕은 무슨 개좃같은 대왕, 네놈도 각을 떠 죽여야 한다!”     “간나새끼! 나는 생태평형을 위하여 도태시켜야 할 렬등잡것들만 청리했다. 그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준 신성한 사명이다.”     “그럼 왜서 빈대 벼룩 이 같은것들은 놔둡니까? 쥐와 참새도…”     “빈대 벼룩 이는 너와같은 족속이여서 멸종하기로 이미 판결을 했다. 참새는 익조로 판명이 되고 쥐새끼가 괘씸은 하지만 놔두어 달라는 상소가 너무 많아서 지금 연구중이다. 도죠히데끼 문제는 심중히 다룰것이다. 더 할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다면 기본상 공정합니다.”     탕! 탕! 탕! 특별법정은 원만히 끝났다. 다만, 도죠히데끼가 그자리로 “쌍규”받으려 간것이 미지근한 여운이였을뿐.                                                                                                                               14.10
82    보리방아 댓글:  조회:2647  추천:2  2014-08-09
        수필                                                        보리방아                                                                                                                        회령    조선사람이라면 보리쌀 보리밥 보리가을 보리마당질 보리방아 보리고개… 하여튼 보리를 다 알것이다. 우리민족의 보리에 대한 사랑과 애착 그리고 애환 끈끈한인연… 절절한 감정은 길고도 깊다. 보리에 대한 나의감정은 항상 슬프다.    어느날 아침 부인이 별미로 보리밥을 지었다. 밥을 먹으며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부인은 별미를 먹는 내표정이 어떤가를 관찰하고 있었는지, 의아한 기색으로 왜서 눈물을 흘리냐고 물었다. 나는 슬픔과 함께 눈물이 왈칵 치솟아서 식탁에서 물러났다. 말그대로 목이 꽉 메여 밥을 먹을수 없었다…    광복이 된후 이듬해 봄 우리집은 조선 무산에서 어머니의 고향마을인 샘물깨로 두만강을 건너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작살이 신세를 면해보려고 조선 청진 등 시가지에 가서 품팔이를 하다가 무산철광에 벌이가 좋다해서 그곳에 갔다가 이젠 샘물깨도 좋은세상이 되였다고 해서 고향마을로 되 돌아온 것이다. 10여년만에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돌아 온 해에는 3.7제(소작의 7할은 우리가 먹음.)로 뒷마을(아버지의 고향) 최지주(부농)네 농사를 지었다. 10여년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좋은 세상이였다. 그때는 3.7제 2.8제(지주가 7,8할을 가짐.) 혹간 반작(소작을 절반씩 나누는것. 지주들은 버려도 아깝지 않을 밭때귀를 반작으로 주기도 했다.)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성수나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명년에는 토지개혁을 해서 땅 없는 사람에게 밭을 분배해 준다고 하지 않는가?! 천지개벽보다 더 희한한 소문이였다.    1947년 봄! 토지개혁이 정말 벌어졌다. 공산당의 은덕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으랴!...    그런데 우리는 아니였다. 그것은, 마을의 권력을 잡은 빈고농협회 허씨네가 우리에게는 밭을 줄수 없다고 딱 잡아뗏기 때문이다. 당시 계급획분을 하고 정식으로 가정성분을 결정할때 광복전 3년의 경제상황을 참조한다는 정책조목이 있었다. 허씨네는 샘물깨에서 제일 째지게 가난한 집들이였는데 사람들이 남녀가 하나같이 성미가 사납고 이악스러 웠다. 특히 큰허씨부부와 그의 작은삼촌은 말을 잘하고 성미가 우악스러 웠다. 그들은 청산투쟁에서 맹장이였고 토개공작대 최동무와 단짝이였다. 최동무는 빈고농협회주임인 큰허씨의 아낙네와 보통관계가 아니였다. 허씨네는 “3년경제상황참조”라는 정책조목을 확대발휘하여 갓 이사 온 우리와 똥돌이네를 샘물깨 사람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것이였다. 아무리 여겨봐도 순전한 거렁뱅이가 명백하건만,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수없고 때문에 성분을 매길수 없으니 이들은 샘물깨사람으로 호적에 넣을수 없다고, 그러면 타지방사람이니까 밭을 줄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때 연변전원공서에서는 이주민조직사업을 토개와 동시에 전개하였는데 우리두집의 출로는 이주민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허씨네가 노린것도 이점이였다. 나눠먹을 인구수가 하나라도 적을수록 좋은게 아닌가. 우리는 세식구지만 똥돌이네는 아이만도 넷이였다.(아버지는 불구인데다 환자였음.) 밭을 분배해도 그렇고 기타의 청산과실을 나누어도 그렇고 그들은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하여 눈에 달이 올랐든 것이다. 그들은 실지로 좋은것을 더 많이 가졌다. 지금와서 분석해 봐도 그 원인밖에 다른 리유는 하나도 없다.    훗날 토개사업에서의 편차와 차실을 시정할때 우리두집에 대한 처리가 잘못되였다고 마을의 일부 사람들이 잡담으로 사석에서 말을 좀 하였다지만, 그것이 무슨 쓸데 있는가! 그저 그렇다는 것이지… 샘물깨에서는 무얼 시정이고 사정이고 할것이 없다보니 그 계단을 씁슬히 지나갔다. 다만, 그때는 최동무가 이미 떠나간 뒤였다. 그는 쉬쉬한 뒷소리를 달고 있다가 공작대에서 캐출을 맞고 흑룡강 어디에 있다는 제집으로 돌아갔다. 큰허씨는 마을에서 령도자로 있다가 토개후 얼마 안 되여 사망했다. 소문에는 페병에 울화병이 겹쳐서 이른나이에 죽었다고 했다.    우리패 이주민들은 돈화현 관지구의 깡거우재라는 무인지경 산골로 가서 원시인같은 모진고생을 하다가 쓰탕촌부근의 무인지경 허허벌판에 자리를 옮겨 마을터전을 잡고 토굴막에서 살았다.(지금의 돈화시 관지진 강남촌ㅡ유명한 아름답고 행복한 순 조선족마을임.) 그때의 그 가난과 고생을 어찌 다 말하랴!... 특히 나의 어머니는 수토가 맞지않아 더욱 모진 고생을 하였다. 하나라도 더 잘살아 보려고 아니, 한첩이라도 약을 좀 써 보려고 어머니는 악을쓰고 일하며 버티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약은커녕 보리밥한술 못 잡숫고 세상을 떠나셧다. 42살 젊은나이에…    강남촌 토굴막에서 어머니는 내 남자동생을 낳았다. 동생은 세살 먹던해 오래동안 앓던 설사로 죽고 아래로 녀동생이 태여났다. 그후 어머니는 또 임신이였는데 그때가 바로 보리고개 막바지인 여름철이 였다. 보리는 이제 십여일이 지나면 가을할수가 있었다. 보리는 오곡에서 제일 먼저 익는 곡식이다. 지금은 맥주요 감주요 술 등 사치한 음식을 만드는데 주재료로 쓰지만 그때는 귀중하고 고마운 농량 생명미ㅡ 목숨이였다. 우리는 보리가을 할날을 손꼽아가면서 고대하였다. 집에는 쌀알이라고는 정말로 한알도 없었든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언제부터 산나물 푸성귀로 연명하고 있었다. 간혹 쓰탕촌 한족사람들 한테서 장리로 겉곡인 조 수수 강냉이 보리를 꿔오는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집들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강남촌에는 나의 아버지가 마을사람들을 휘동하여 만들어 놓은 절구 세개와 발방아 한틀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리쌀을 찧었다. 보리방아는 적어도 다섯번은 찧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누게를 하고(물을 주는것) 찧는다. 그러나 깔끄러미가 벗겨지지 않기에 다시 말렸다가 또 두번을 쓸어야 먹을수 있는 보리쌀이 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방아는 보리방아일 것이다. 절구로 찧을때도 그렇지만 발방아로 찧을때는 꼭 시중꾼이 있어야 한다. 긴작대기로 께끼대기질을 하면서(확속의 쌀을 뒤번져 주는것.) 혼자 찧기도 했으나 그건 조력꾼을 얻을수 없는 부득히한 경우였다. 어머니가 보리방아를 찧을때면 내가 꼭 따라나섯다. 악의악식렬악한 환경에서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는 악 하나로 벝혀왔는데 이번에는 여러날 조짚거적위에 헌포대기를 덮고 누우셧다. 그리고 자꾸 구역질을 하였다. 물밖에 마이지 못하는데 물도 한모금 마이고는 몇배를 토하군 했다. 나는 어머니가 죽는것만 같아서 매일 겁이났다. 가재나 조개를 잡아오라는가 해도, 풋감자나 호박 열콩따위를 따오라는가 해도 어머니는 다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가 벌써 여러날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고 맹물도 마이지 못하니 이러다 죽으면 어쩌는가고 내가 울상을 하며 안달아하니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제병이여서(임신기 응당한 일이라는 뜻.) 이제 얼마간 지나가면 일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줄로 알았고 그러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때 아버지는 길딲기민부로 이미 외지에 가고 집에 없었다.    이러는 어느날 늦은 아침때다. 이웃에 사는 개꼴집할머니가 어머니를 찿아 왔다. 보리방아를 찧겠는데 일손을 도와달라는 것이였다. 개꼴집은 령감 로친 량주뿐인데 연길현 개꼬리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다. 원래는 괜찮게 살아서 중농쯤은 되였는데 부농으로 매기고 청산을 하니 분통을 못이겨 이주민을 자원했는데 보내더라고 했다. 할머니는 한뉘 불임증이였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평소에 그집일을 잘 도와줬다.    그날 어머니는 보리방아라는 말을 듣더니 기적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는 호박(방아확)곁에 누워서 께끼대기를 하여 주었다. 한호박뿐이라고 하던것이 일이 빠르게 끝나니 개꼴집할머니는 냉큼 집으로 달려가서 요것뿐이라고 하면서 또 한호박을 가져왔다. 보리방아는 저녘때가 되여서 끝났는데 어머니는 말그대로 기진맥진 하였다. 개꼴집할머니가 고맙다는 치사를 거듭하며 쌀함지를 들고 가려할때 어머니는 렴치불고하고 보리쌀 한바가지만 뀌여달라고 주저주저 어렵사리 말하였다. 어머니의 말이 채끝나지도 않았는데 개꼴집할머니의 안색은 대뜸 새침해 졌다. 요것가지고는 햇보리를 바슴(타작)할때까지는 어방도 없겠는데… 꿔줄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아닌가! 그럼 나뱃겨라도 한줌 달라고 하니 개를 여러날 맹물만 먹여서… 꿔주지 못한다고 하면서 뿌르르 제집으로 가버렸다. 내가 호박이며 감자 열콩따위로 푸대죽을 끓이는데 어머니는 밖이 어둑어둑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자리에 쓰러지더니 아이처럼 엉엉 우시였다. 내가 어째서 그러시는가고 거듭 물어서야 어머니는 위에서 말한 사연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보리밥을 한그릇만 먹었으면 살것같겠는데…”하시였다. 내가 다시가서 사정해 보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그만두라고 딱 잡아떼며 손까지 흔드셧다.    나는 어린심정에도 너무도 분하고 또 원통해서 개꼴집할머니를 모질게 욕을 하며 저주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그러면 못쓴다고 하시면서 가끔 흑흑 느끼시더니 차츰 쉬는듯 조용하였다. 밤은 어느때가 되였을가? 나도 꿈나라로 들어갔다. 꿈에 개꼴집할머니와 대판드리 싸우면서 보리쌀함지박을 빼앗아 동댕이를 쳤는데 어데서 어머니가 불쑥 나타나면서 “너, 이게 무슨짓이냐?! 어른께!” 하면서 모진호통을 하는게 아닌가! 깜짝 놀라며 눈을 뜨니 해가 닷발이나 떠올랐다.    어머니는 구역질도 하지않고 꼬부리고 누워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무얼 잡술만 한가고 거듭 물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고 얼음처럼 차거웠다… 바로그때 똥돌이 어머니가 호박잎으로 덮은 사발을 들고 바당에 들어섯다. 그는 살뜰한 음성으로 “헹님에 이걸 좀 잡술만 하것는지. 겨우 보리쌀 한줌을 넣고 불개밥을 했슴메. 한술 들어보시소.”…… 그보리밥은 랭수한사발과 함께 어머니 젯상에 댕그랗게 올랐다.    그후부터 나는 보리를 피끗 생각만 하여도, 보리라는 말만 들어도 어머니가 생각났다. 보리밥을 먹을때면 아예 먹지않거나 할수없이 두어술 뜨고 말았다. 목이 메여와서 먹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남매를 데리고 한뉘 사셨는데, 내가 너무도 보리밥을 먹지 못하니 수전농사벌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후부터 오늘아침까지 나는 보리밥을 한번도 먹지 않았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보리는 나의 가슴속에 슬픔으로 지금도 살아있다.                                                                                                                               14.7
81    잡감 몇가지 댓글:  조회:2904  추천:3  2014-07-08
         수필                                                 잡감 몇가지                                                                                                                   회령              자기는 자유주의 남에게는 마레주의     고금중외 인간세상을 두루 들여다 보면 사람도 사회도 대체로 세가지다. 사람은 상, 중, 하 세가지고(공산당훌륭한사람, 일반적인사람, 망나니악한따위) 사회는 태평성대, 두루그런대로평범한세상, 혼탁하고 망태기인 란세 세가지다.(농사의 풍년, 평년, 흉년과 같다.) 그런데, 이 세가지 세상은 순자연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고 자연과 사람이 합쳐서 그렇게 된 경우도 있고 순전히 사람때문에 어떤 세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는 사람때문에 이런세상 혹은 저런세상이 되군 하였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 살수없지만 군체로 만들어 진 인간사회를 떠나서도 살수 없다. 사회의 주인은 두말할것 없이 사람이다. 망두석의 코가 석자로 되든 한치로 되든 석수쟁이 손에 달리듯 어떤 사회로 되는가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인간사회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발전하는 력사행정에서 이점을 잘 알수있다.     4484년전에 만든것이라는 노아방주 고사에서 보면, 대지에서 번성하며 살고 있는 인간들이 어찌도 고약한것들인지 하느님은 당초에 인간을 만든데 대하여 대단히 후회하며 격분한 남어지 몽땅 소멸해 치우기로 결정하고 특대홍수로 쓸어버리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명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은 노아와 그의식구들만은 종류별로 방주(배)에 실은 암수동물들과 함께 살아 남도록 하여주었다. 그때, 고약한 인간들속에서 오직 노아만은 하느님의 인간표준(지금의 공산당원표준)에 부합되고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살려주었든 것이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정직하고 선량하고 근면한 사람들이였다. 고사의 진실성은 지금도 탐구중에 있지만 보다싶히 하느님이 벌을 내리게 된것도, 노아가 구원을 받게 된것도 모두가 결국은 사람이 조성한것이 아닌가?! 이런걸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만약 노아방주고사를 모세가 꾸민 허황한 거짓말이기에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면, 문명이 시작된후 기록이 있는 한가지 사례를 더 보도록 하자.     410년8월 “영원한 성새”로 불리우던 로마성이 하루밤새에 복멸당하고 강성을 자랑하던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만 것은 납(연)그릇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사람때문인 것이다. 그때 로마사람들은 남녀로소가 모두 납으로 만든 가마, 고뿌를 사용했고 그들이 자랑하는 수도물도관도 모두가 납으로 된 것이였다. 지어는 산화연가루로 설탕을 대체하여 술에 타 먹기까지 했다. 하다보니 그들은 급, 만성 연중독에 걸려 맥을 추지 못했고 두통, 사지마비, 지어는 생육능력마저도 현격히 하락했다. 이지경이고 되고보니 적을 대항할 힘이 어데 있었겠는가.     중국의 춘추전국(싸움질만 하는 12개나라)시대와 삼국시대의 천년거이되는 인간세상ㅡ 사회는 피눈물이 흘러 넘치는 세월이였다. 사람탓이 아니던가!     근, 현대사를 보면 몸서리가 쳐지며 이가 갈리는 일본의 조선국침략병탐, 똥좃이새끼(도죠 히데끼)와 휙돌아아새끼(히틀러 아돌프), 그리고 무쪼가리벤또(무쏠 리니 베니또)가 이르킨 2차세계대전, 조선전쟁, 새끼부실(작은부쉬)의 이라크전쟁… 사람의 미친지랄이 아닌가?!     중국의 60년대초 3년재해도 천재에 인재가 겹친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긴 하지만 따져보면 결국은 사람탓이였다.     중국력사에서 당, 명, 청 봉건조대에서 한시기 태평성대가 있은것도 역시 사람이 만든것이다.     보다싶히 잘했든 못했든, 옳았든 그르든, 좋았든 나빴든, 시와 비는 그때마다 있었겠지만 어쨌든 인간사회는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놓았든 것이다.     또 력사에서 보다싶히 어떤사람들이 “우세”를 차지하면 어떤세상이 되였든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우세”란 별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정권과 힘ㅡ 즉 권과 력이다.     개인리기주의, 형식주의, 관료주의, 사치, 향락, 랑비, 탐오… 자기에게는 자유주의고 남에게는 마레주의를 웨치는 이런 위군자들, 망나니, 도둑놈, 악한, 개차반, 류망, 깡패, 테로… 악행을 일삼는 이런 너절한 쓰레기들, 인간에서 퇴화변질한 이런 온갖 부정부패분자들이 권과 력을 잡으면, 득세를 하면, 인간사회는 발전도상에서 국부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혹은 짧게 혹은 길게, 곡절을 겪게 되며 사람마다 모두 대가를 치르게 된다. 혹은 적게 혹은 많게, 누구도 요행이 없이 모두 대가를 치르게 된다.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하고 화해롭고 자유와 평등 공정과 법치가 좋은 그런 나라 그런사회를 누가 마다하랴! 나라를 사랑하며 직업도덕을 지키며 성실하고 신용이 있고 다른사람을 우호적으로 선량하게 대하며… 그런사람을 누가 싫다하랴! 그러니 사람마다 노아가 되여야 할것이며 그때의 하느님처럼 영명해야 할것이다. 지금말로 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사상과 도덕, 품행, 문화를 갖춰야 한다. 즉 공산주의적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정치구호를 웨친다느니 공산당의 어용괴뢰라느니 당나발, 개나발이라느니 문혁때 냄새를 풍긴다느니 상기도 두뇌가 이렇게 돼 먹고서야 쯧쯧쯧… 똥묻은개 투기듯 하는 이도 있지만 세상리치가 그런것을 어찌하랴!                명예는 어데서 오는가     아무리 겸손하고 어질고 수줍고 허심하고 무던하고 수월하고 태세가 없고(허물없다) 대범하고 대공무사하고… 부처님가운데 토막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자존심은 다 있다.     내가 친히 겪어본바에 의하면 부처님도 자존심이 있다.     그것은 어느한번 화엄사에 놀러갔을 때다. 그날 나는 이리저리 흔들흔들 돌아다니다가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금상을 보고 준수하게 미남으로 잘 생겼다고 말하면서 먼저 손을 경건한 심정으로 만진후 다음은 볼과 귀방울을 만졌다. 그런데, 저쪽구석에서 량수거지를 하고 공순히 서 있던 젊은 중놈이 “뿌싱!”(안된다.)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서 퉁방울 같은 눈알을 디글디글 굴리는게 아닌가?! 어마지두 살펴보니 부처님은 여전히 인자한 모습이건만 중놈이 매우 성을 내는 것이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면 부처님이 자존심이 상해서 노여워 한다는 것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에게는 부처님을 조롱하거나 괄시하려는 사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우스개나 장난질은 더구나 아니였다. 오히려 부처님께서 나를 무릎위의 손자녀석을 보듯 귀여워 하겠지 생각했다. 부처님은 노여워하는것 같지 않구만 네가 어찌 노여워 하는걸 아느냐고 내가 물으니 “지시가 있었다! 경서에 다 있다!” 하는것이 였다. 아마도 부처님의 최고지시에 (불가의 행위규범에) 나의 거동이 위반된 모양이였다. 그런데 납득이 되지않는 것은 내가 출가한 사람도 아니고, 부처님을 깔본것도 아니고, 만민이 우러르라 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존경과 애대를 표시하는것이 왜서 “뿌싱”인지… 불상을 보호하는 각도에서 만지면 안된다고 하면 대뜸 접수가 되겠지만… 별수 있나. 절간에 가면 절에 따르고 관청에 가면 관청에 따라야 하는거니까. 나는 불상을 향하여 정중히 최경례를 하고 돌아섯다.(이것도 불가의 법도에는 맞지않는다고 한다.)     내가 부처님을 존경하는것은 그의 적지않은 사상이 인간사회의 도리와 리치에 맞기 때문이다.     도리와 리치란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의 리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여, 부처님은 오늘도 많은사람의 존중과 애대를 받으며 부처님, 보살님이란 명예를 받고있으며 절당을 짓고 금상으로 모셔져 있다.     부처님을 포함해서 사람의 자존심은 명예와 직결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존심은 도리와 리치속에 있다. 사람이 도리와 리치에 어긋남이 없으면,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공헌의 크기에 따라 좋은사람, 훌륭한사람, 위대한사람이라는 명예가 저절로 따르게 된다. 그러면 꿍꿍이나 소동작을 하지 않아도 정부에서 조직에서 후세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우고 사당을 짛고 기념당을 지어 두고 두고 길이 칭송할 것이다.                  가송이냐 질책이냐     나는 작가선생들을 매우 좋아하며 매우 존경한다. 그것은, 선생들의 문학작품을 통하여 인생을 사회를 생동하게 감명깊게 배우게 되고 나 자신의 일생에 도움이 크기 때문이다.     문학작품들을 보면 인간생활화폭이 펼쳐지는데 거기에는 꼭 정면적인 인물과 반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여러가지 마찰과 투쟁을 한다. 거기서 감정적 리지적 향수와 교육을 받게 되며 감동과 깊은 인상을 갖게된다. 문학은 생활학이며 인간학이며 교육학이며 철학이며 정치며 예술이며… 인류문명이 집결한 고귀한 정신지도학이며 재부다.     문학작품에는 가송과 질책이 있다. 정면인물은 가송하고 반면인물은 질책하는데, 근년에 와서 이상한 반응이 있다. 가송을 하면 반감을 가지며 “흥! 이따위도 문학인가?! 앞잡이가 또 꼬리를 치는군. 정치냄새를 팡팡 풍기면서…”하고 격분한다. 이런사람들과 털어놓고 말해보면 결국은 공산당을 가송한데 대하여 불만을 가진것이다. 지어 그들은 지금세월 가송할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격분해 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원칙적인 시비문제다!     백년전은 그만두고 근세 백년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했다면 공산당과 계급투쟁을 주선률로 하지않고 무엇을 주선으로 할것인가? 물론 사랑이며 련애며 혼인 가정 애낳기 엄마 누룽지 김치 된장 찰떡 토비 깡패 꽃 달… 등등을 전문 다룬 작품도 없는건 아니다. 그런 작품도 인간교육에서 일정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지금시대의 주선률에는 넣을수 없겠다.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무게상에서 좀 그렇다는 것이다.     문학예술작품은 생활에서 오는것이긴 하지만 생활보다 높은 것이며 사람들을 한차원 높은 경지로 제고시키는 것이 사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음으로 양으로 공산당을 가송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말은 바른대로 사람마다 공산당사상을 소유한다면 세상은, 사회는 리상적일 것이다…     공산당을 가송하는 각도에서 질책은 좋은것이다. 그것은 공산당에게도 부족점, 결점, 지어는 엄중한 착오,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없을수는 없다. 과거, 현재의 부면에 대한 질책은 금후에 대한 편달이며 애호다.     지금 이런말이 있다. “중국사람들은 부자와 권력을 미워한다.” 이 말은 부정부패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애매하게도 공산당에게까지 튕겨져 가는것은 얼떨떨한 사유이다. 그래서 가송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는것 같다. 죄는 도깨비가 짛고 고목이 벼락을 맞는 격이다.     부정부패는 우선 공산당의 적이고 인민의 적이다. 그로해서 망당, 망군, 망국이 될수도 있다.     장개석씨가 말한바가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공산당에게 패한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부패때문에 패했다!” 말할수록 분노가 더욱 솟구치여 그는 랑씨피!!(제길할, 씨불랑게)를 련발하며 연탁을 마구 뚜드렸는데 손가락뼈까지 부러졌다.(불쌍도 하지. 얼마나 아팠으랴. 쯧쯧쯧.) 하지만 장씨는 계속 랑씨피를 웨치며 발광하였다. 그날 한밥 잘먹자고 당대회에 모여들었던 간부들은 욕사발을 즉살나게 얻어 먹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였고 사후의 청심환이 였다. 부징부패는 이렇게 무섭고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다. 주지하다싶히 장개석의 군사력은 인원, 장비, 후근… 여러면에서 공산당보다 비길수 없이 우월했다. 그리고 미국이 직접 지원해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장씨 말과같이 그놈의 부정부패때문에 강산을 잃고 대만으로 쫓겨 갔다. 물론 다른 원인도 있다.     질책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공산당가송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거나 가송을 꺼려 하는 편향은 시정되여야 한다. 더욱 격조높히 가송해야 한다. 다른한편, 반면인물에 대한 신랄한 질책은 가송을 더욱 북돋아 주는 것이기에 질책을 서슴치 말아야 할것이다. 특히, 그누구보다도 우리의 작가선생들ㅡ당과 인민의 작가선생들이 앞장에 서야 할것이다.     여기서 부대적으로 다른문제를 한마디 언급한다면, 비교인문학인가 하는 새로운 학문인데 비교에서 가송 질책이 과학적이여야 하고 공정해야 하고 력사발전에 보조와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을 비교하든 십국을 비교하든 아니면 세계를 통털어 비교통찰을 하든… 과거지사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아는것이고, 근, 현대사를 보더라도 국가와 국가간, 민족과 민족간, 사회와 사회간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과학적 문화적… 갈등 마찰 투쟁이 심각하지 않은가! 비교면 비교에서 끝혀야 하지 정치적 사상적 색채를 넣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어느군체는 가송선양하고 어느일방은 타매폄하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냄새를 은근히 집어넣으면 가송받은 측은 좋아하고 타매받은 측은 불쾌해 할것이다. 더욱히는 불명확한 앞날을 미리 단언하며 누구는 총명하고 누구는 우매하기에 누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느니 받아야 한다느니 하면(그런냄새가 나면) 이건 그야말로 실수다. 비교인문학학술인것이 아니라 엉터리정치론술이다. 결국은 궤변이라는 비평을 받게된다. 인류력사가 보여주다싶히 강성대국이였다해서 계속 강성대국이였던것이 아니였고 락후민족이였 다고해서 계속 락후민족인것도 아니다. 후진국도 마찬가지다. 한시기 한시대를 보고 형의상학적으로 앞날까지 추측하거나 암시하며 “예언”해서는 안된다. 인류사회는 긍정의부정법칙ㅡ 부단한창신법칙으로 발전한다. 각축전이 치렬한 현실에서 이쪽은 기껏 가송해서 미화하고(사실은 그들에게도 흉허물이 가득하다.) 저쪽은 꼬치꼬치캐며 크고작은 온갖허물을 들추어가면서 추화하는것은 편면적이고 공정한 립장태도가 못되며 정확하지 못하다. 그리고 쌍방진영의 사기에도 일정한 영향을 줄게 아닌가. 당신은 언녕 “세계인”이 되였지만 99.9%의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인”이다. 이들이 당신같은 경지에 오른 “세계인”으로 되자면 5천년쯤 지나야 될지말지… 그들은 실사구시적인 현실인이다… 그래서도 보조니 속도니 하기도 했다만, 모르겠다. 투보즈문외한의 소리니까 인문학자들이 개의치말기를 바란다.                    락후분자를 구하라     지금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간부들의 정풍운동(군중로선교육실천활동)을 보면서 확실히 좋다는것을 절실히 느낀다. 중앙으로부터 촌민소조에 이르기까지 우리당의 방대한 간부대오가 일신할것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그간 몇십년 당내외 국민들이 부정부패를 우려하고 증오하고 한탄하고 나라의 전도를 근심하였다.     부정부패는 고금중외, 고왕금래 항상 있었다. 앞으로도 있다. 하지만 이 한시기 그 창궐성이 도를 넘었던 것이다. 8500만당원에서 진정한 공산당원이 몇이나 될가? 어떤사람들은 부정부패분자가 정도의 차이를 따지지 않는다면 대다수가 된다고 하고 어떤사람들은 절반쯤은 될거라 하고 일부사람들이 한줌도 안된다고 하였다. 하여튼, 그간 흔하게 볼수있는것이 부정부패짓거리 였다.     당이 당을 엄하게 관리하고 간부를 엄하게 관리하고 금후도 계속 엄하게 관리할 것이니 기우는 필요없겠다.     그런데, 지금 중시해야 할 한가지 문제ㅡ 즉 과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군중에 대한 교육이다.     인민군중들 속에도 부정부패짓거리가 적지 않다. 자발적이든 어데서 배워먹은 짓거리든간에 그야말로 괘씸하고 가증스럽기 짝이없는 행위가 어디 한두가지 뿐인가?!... 이루다 헤아릴수 없다. 이전에는 “계급대오청리”를 해서 군중들을 딲아세웠지만 후에는 방임한 상태였다. 률법에 걸린것은 교육했지만 인민내부모순에 속하는것은 별로 관계치 않았다. 위성은 올라가고 붉은기는 꺼꾸러 지듯 군중들의 소질과 사회기풍이 현저히 퇴보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제밥그릇 크기만 챙기고 발등의 불만 끈다. 쓰러진 로인, 임신부를 부축하길 꺼려하고 구역내 잔디밭을 뒤번지고 채소를 심어 먹어도 누구하나 관계하지 않는다.(유관인원도) 유치원 학교에 뛰여들어 칼부림을 해도 경찰외에는 나서는 사람이 없다. 집에서 자래운 취잎도 산에서 방금 뜯어온것이라고 하고 재배한 오미자도 야생이라 한다. 중고품가전을 명표로 포장해서 팔아먹는다 쇠고기로 양고기뀀을 만든다. 주민구에 불이나도 핸드폰으로 사진은 찍어도 진화를 돕지는 않는다…… 이런 실례를 다 들자면 밤낮 일주일도 모자란다. 아마 천가지도 더 될게다. 소질이 엄중히 퇴보했다.     국민의 소질을 어떻게 제고시킬 것인가?     전방위적, 다층차적, 다종다양적, 법적제도적… 여러가지 조치를 활발히 출동 전개해야 할것이다. 사람마다 공산주의적세계관, 인생관, 핵심가치관을 소유하게 해야 할것이다. 이런 대도리는 누구나 다 알고도 남는다. 하지만, 실천이 약하다.     국민소질제고에서 공산당원은 군중의 앞에서 이신작칙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가짜당원이 되지말고 진정한 당원이 되여야 한다.     모든 공무원들도 이신작칙의 모범을 보이며 진정한 “공무원”(국록을 먹는 사람들)이 되여야 한다. 월급이 많기만 바라지 말고 직책을 적극적으로 리행해야 한다. “토개간부” “연안간부”가 되여야 한다. 모두가 “로팔로”가 되여야 한다.     그리고 작가, 예슬인들이 로고를 아끼지 말고 “정품” “명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원들이 인간육성의 사명을 참답게 리행해야 할것이다.     그외에도 또 여러가지가 있겠다. 이를테면 군중이 군중을 교육하는것, 자기로 자기를 해방하는것…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다.                                                                                                                  14. 5
80    귀신짓거리가 전쟁판으로 댓글:  조회:2413  추천:1  2014-06-30
               실화                                         귀신짓거리가 전쟁판으로                                                                                                                      회령     송구영신의 즐거운 때기도 한데다가 귀여운 손군들이 하도 졸라대서 나는 할수없이 양고기산적집으로 갔다. 이 작은도시에서 제일크고 제일잘한다고 이름있는 식당이다. 간판은 “천하일미양고기뀀”이라고 걸기는 양대가리를 걸었지만 다종경영을 해서 미식가들이 좋아한다. 돼지콩팥, 지래도 구워먹고 쇠불알, 천엽(채깨비)도 있고 꽃게, 물고기도 있고 육회, 생선회도 있고 개장국도 있었다. 또 뽀즈, 죠즈, 랭면, 찰떡, 호박, 고구마, 라면도 있다.     식당은 옛날 큰 생산대의 우사칸만큼 크지만 늘 초만원이여서 좌석을 미리 예약해야 할 지경이였다. 회원제를 해서 우대사항도 있고 서비스로 덧붙혀 주기도 했는데 봉사태도가 좋았다.     하지만 나는 이집뿐만 아니라 대체로 음식점에 가기를 싫어했다. 공짜라면 따라 갔지만 제돈을 내고는 가지 않았다. 그것은 식당놀이를 한 후에는 어째선지 늘 속탈이 생기고, 모모한 사람들과 같이 갔을때는 뀀고기가 만만한게 먹을만 했지만 수수한 사람들을 따라가면 뀀이 엉터리였다. 비계덩이 심목덩이가 자주 있었다.     그날도 나는 이구실 저구실, 이도리 저도리를 대며 가지않겠다고 하다가 아들 며느리와 손군들의 낯을 봐서 결국은 싫은대로 따라 나섯다. 외지에서 사업하는 아들내외는 일년에 한번꼴로 집으로 오는데 한턱 쓴다면서 형제와 친구들을 초청하는것이 규례가 되였었다. 그날도 딸과 사위네, 사돈네, 그리고 정부의 아들딱친구 모모네부부, 아이가 동석하였다. 연회는 “상해청”이라는 독방에서 하였다. 가정연회는 재미있게 두어시간 잘 진행되고 끝났다. 모두가 료리가 좋고 잘 먹었다고 하면서 만족해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어섯다.     우리가 퇴장하는데 갑자기 왁작 고함이 터지며 대청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대여섯 되는 젊은패가 산적꼬챙이며 접시를 동댕이 치며 소리를 지르고 귤을 수금대에 팔매질을 하는게 아닌가?! 보아하니 보통패거리가 아니였다. 걷어부친 팔뚝에는 어룽어룽 문신을 새긴자도 있고 밤이건만 말눈깔같은 선글라스를 까까머리 뒤통수에 건 자도 있었다. 불량배들이 틀림없었다. 수금대에 앉은 로반냥은 하마트면 산적, 귤 돌총을 맞을번 했다. 불량배들은 로반냥에게 개불알이니 양불알이니 또 반대로 무엇이니 무엇이니 줄욕을 퍼 부으며 기세를 올리는데 대청에서 꼬챙이를 먹던 치들은 꼬챙이로 상을 두드리며 박자를 치며 으하하 좋아했다.     나오면서 들을라니 사연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가져온 산적꼬챙이가 품질이 나빴다는것, 서비스라며 준 귤이 썩었다는것, 되지못한 개수작을 피웠다는 것이였다. 술도 가짜니 뭐니 하였다.     훗날, 면목을 아는 복무원아가씨와 물어서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였는데, 듣고보니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부정부패를 잡는 바람이 세차게 불기시작하자 “천하일미”의 영업액은 허망 뚝 떨어졌다. 전날의 삼분의 일도 되지 못했다. 하여 로반냥은 단가마에 든 개미처럼 안달아 하며 수금대에 직접 앉아 독전을 하면서 온갖 조치를 대였으나 장사는 점점 더 내리막길을 다그쳤다. 원체 영업규모가 너무 컸든것이다.     어느날, 로반냥은 시교구벽(구석진 곳)에 있는 “신선”을 찿아 자가용을 달리였다. 그날오후 로반냥은 “신선”이 시켜준 방토를 즉각 락실하였다.     “천하일미양고기 뀀”간판에서 “천하일미”만 내놓고 아래글자들은 붉은천으로 가리워 놓았고 출입문에는 손잡이마다에 안팍으로 붉은천을 정성스레 감아 놓았다. 창문과 식탁에는(밑에다) 돌아가며 모조리 붉은종이에 쓴 “복”자를 꺼꾸러 붙였다. “사방재원꾼꾼래”라는 한발이나 되는 주련도 붙혀놓고 길한 어록을 넣은 액틀도 사처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손님들에게는 꼭 귤을 일인당 두알씩 서비스를 하였다. 그것은 귤ㅡ”지즈”란 한족말에서 길하다는 뜻이라고 해서 그런 자원봉사를 대공무사히 결연히 단행했던 것이다. 하긴 그렇기는 하지만 핵산을 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로반냥은 제일 눅거리 귤을 일차로 십여상자를 들여 왔는데, 그것이 그만 그날 재수없이 잘못 걸려 들었든 것이다.     그날, 로반냥은 갖은 좋은말로 행패꾼들을 달래고 수백원의 료리값을 서비스 했다. 그러고도 래일 다시 왕림해 주십사고, 한상 거하게 서비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행패꾼들은 의자를 걷어차며 기세등등해서 퇴장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10여명이 왕림했는데 장밤 질탕 즐기였다. 로반냥은 시종 가장 즐겁고 통쾌한듯 웃고 떠들고 가분가분 친히 서비스를 하며 싸움끝에 정이든다느니 형제라느니 하면서 정이, 친절이 뚝뚝 떨어지게, 철철 넘쳐나게 서비스를 하였다. 그후 행패꾼들은 아직까지는 다시 오지 않았다.     영업은 그냥 시들한데 아니, 점점 더 글러만 가니 도대체 무슨 쪼간이냐? 몽달귀신이 붙었나 도깨비가 씌웠나… 부정부패를 계속 잡으면 장사를 망치는데… 로반냥은 뱅글뱅글 돌아가며 속을 태운다.                                                                                                                 14. 1
79    자식의 과는 부모의 과다 댓글:  조회:1846  추천:6  2014-06-17
          수필                                    자식의 과는 부모의 과다                                                                                                                   회령     부모는 자식의 첯 선생이며 영원한 선생이다. 가정은 자식의 첯 학교면서 영원한 학교다. 세상을 보면 자고로 동, 서방이 다 그렇다. 세상에 자식을 모른다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부모는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그것은 죽을때까지 아니, 죽은후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살아 있을때 남기는 유언인즉 죽은후에도 책임을 지는 표현이다. 자식에 대하여 부모의 실제적 실천행동은 제일 생동하고 제일 심각하고 제일 중요한 교육이다.     이런 대도리를 나는 늙은이들께서도 여러번 들었고 아주 새파란 젊은 부부들 한테서도 자주 들었다. 무식한 사람의 입에서도 들었고 대단한 사람들 한테서도 많이 듣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모구실을 제대로 하지못하는 부모가 적지않다. 어른들의 말씀에 자식이란 몸을 낳지 뜻은 낳지 못한다는 것이 있는데, 얼핏 들어보면 옳은 말씀 같기도 하다. 성인이 다 된 자식의 과오는 부모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기도 한데 하여, 계급투쟁 년대에 부모 자식간에 “계선을 나눈다.”느니 “관계를 단절(가른다.)한다.”느니 하는 거동까지 있었으나 그건 눈가리고 아웅! 하는 거짓말이다. 부모 자식간의 천륜은 누구도 막을수 없고 자신도 어쩔수 없는, 할수없는 숙명이다. 하기에 절대적으로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     이런 사례가 있다.     어느 마을에 강씨부부가 살았는데, 그들은 신통히도 서로 닮은 구두쇠로 살림이 괜찮았다. 그들에게는 아들 형제에 막내로 딸이 있었다. 강씨부부는 무슨심사에서인지 친척과 이웃들의 희사든 비사든 일절 래왕을 하지 않았다. 경, 조사를 만나면 꼭 이런저런 핑게를 대면서 피하였다. 부모의 신칙과 본을 받아 그의 자식들도 이웃과 거래를 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성장해서 잔치를 할때 40여호 마을에서 한사람도 하객으로 가는 사람이 없었다. 더우기 난처한 일은 강씨가 대소한간에 죽었을때 한명의 문상객도 없은 것이다. 그때는 토장을 하는 때였는데 강씨아들 형제가 마을을 두세바퀴 돌면서 방조를 청했으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정치대장이 부르튼 소리를 들어가며 겨우 네댓 사람을 데리고 가서 눈보라 세찬 엄동에 굴심을 하고 하장을 하면서 수고를 하였다. 하지만 상측집에서는 겨우 저녘한끼를 시래기국에 강술 한병만 내여 놓았다. 고기점이며 반반한 입매꺼리는 한접시도 없었고 밥은 묵은쌀로 지은것이였다. 마을사람들은 강씨아들 형제를 부모를 닮아서 아니, 애비에미보다 더한 짠돌이라고 하였다. 강씨아들 형제가 자식을 낳아 돌생일을 쇨때도 하객이 없었다. 마을에서 돌림을 당한 강씨형제는 되려 마을인품이 더럽다면서 다른곳으로 이사를 갔다. 훗날 그곳에서 모친상을 당했는데 장례는 아버지 때와 똑 같았다. 강씨형제는 부모한테서 보고 듣고 배운 버릇을 고치지 못했든 것이다.     강씨형제 이야기는 남과의 관계를 말한것이지만 다음의 사실은 혈육간의 사례다.     모 시에서 상업국국장, 서기를 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퇴직년령을 2년을 앞두고 암에 걸렸다. 하여 입원하였는데 위문오는 사람이 가물에 콩씨나기였다. 산골에 있는 형제들도 형님이 한번 왔다간후 들여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안해는 소학교선생이였다. 그들에게는 위로 아들형제가 있고 아래로는 소아마비딸이 있었다. 다년간, 산골에 있는 형님과 누이들은 막막한 사정이 있으면 콩말이나 감자, 고추따위를 들고 와서는 방조를 바랐다. 특히 형님네는 늙으신 부모까지 모시고 그야말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국장의 방조란 혹간 겨우 차비를 조금 주거나 밀가루 두어사발을 주는것이 고작이였다. 왔다가는 형제들은 누구나 다 원망을 속에 품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왕래를 하지 않았다. 국장네도 리득이 없는 가난뱅이 산골형제들과 거래를 하지 않았다. 림종을 앞두고 국장은 아들형제에게 눈물을 흘리며 신신 당부를 했다. “너희들은 모두 좋은 단위에서 월급도 괜찮고 집도 있고 출세를 했으니… 사는것이 그만하면 좋다고 할수 있으나 동생이 문제구나. 우리는 이젠 힘이 없으니(안해는 간경화)… 우리가 죽은후에 상장비며 무휼금이 나오면 동생을 주어라. 엄마것도. 집도 동생에게 주어라. 이젠 낡은집이여서 몇푼 되지 않지만… 형제간에 서로 도우며 리해하며 화목하게 살아라. 재미있게 살아라… 나는 그것이 제일 후회된다.”(그때 안해는 곁에 있고 딸은 없었다.) 얼마후 국장이 죽은후 두달도 안되여 안해도 화장터로 갔다. 아들형제는 부모의 모든 돈을 서로 눈을 밝히며 결산을 하고 나누어 가졌다. 물론, 동생에게는 1전한푼도 없었다. 동생은 궁여지책으로 가짜리혼, 가짜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나갔는데 경비는 다른사람들한테서 리자돈을 꿨다. 아들형제는 같은 도시에서 살지만 각자 자기의 생활권에서 활동하다보니 생일이며 명절이며 래왕이 없다. 그들의 자식들은 서로 면목도 모른다. 말그대로 “징수이 뿌빤 허수이”이다.     또 한가지 기막힌 일이 있다.     리씨는 소학공부도 겨우 한 농사꾼이지만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얼렁뚱땅 생산대간부들에게 붙어 써푸를 몰다가 후에는 대대(촌)뜨락또르를 몰게 되였다. 사람들은 그를 리사기(운전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구잽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는 정말로 마구잽이 였다. 집체가 해산될때 그의 거멀들인 대대간부들은 헐값으로 뜨락또르를 그에게 주었다. 리씨는 뜨락또르를 끌고 다니며 밭도 갈아주고 황무지도 일궈주며 부업을 했는데 길딲기며 제방, 건축 등 큰일도 하여 대뜸 살림이 유족해 지었다. 그는 촌간부들은 말할것 없고 진농기소, 진간부들도 여럿을 친했다. 하여 농기소의 기름이며 뜨락또르 부속품이며(국영일때) 학교, 기관청사 건축용 기초돌 벽돌 기와 목재 세면을 얼렁뚱땅 집으로 가져 왔다. 얼렁뚱땅 마구잽이로 들어내놓고 실어오기도 하고 때론 도둑질해 오기도 했다.(아들들을 데리고 도둑질 할때도 있었다.) 드디여 그는 3년에 걸쳐 뜨르르한 벽돌기와집을 짛기까지 했는데 거멀들에게 개를 잡아 먹이거나 무슨일을 방조해 주는것으로 얼렁뚱땅 “은혜”를 갚았다. 리씨에게는 아들형제가 있었다.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저희 아버지가 제일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스레 생각하며 행복하게 자랐다. 그런데 안해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안해는 아주 정직하고 온순했다. 그는 남편의 “활약”이 늘 두렵고 근심이 되고 싫었다. 하다보니 부부간에 쟁론도 자주 있었다. 안해가 뭐라고 한두마디만 하면 리씨는 대뜸 코막고 답답한 사람이라느니, 제털을 뽑아 제구멍에 꽂을줄 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머저리라느니, 개한마리면 몇십배 리득이 생기는 것두 모르는 아다모끼라느니… 줄욕을 퍼 부었다. 그리고 마감에는 번마다 자식들에게 “사람이란 역어야 한다. 구멍수를 잘 볼줄 알아야 한다. 법을 범할가 말가 틈새기를 보며, 때론 법을 어겨야 돈을 벌지 에미처럼 해서는 한뉘 번신을 못한다.”하고 결론의 훈계를 하군 했는데, 자식들이 다 큰 후에도 쩍하면 여전히 그 훈계였다. 리씨는, 큰아들은 그의 소원대로 돈을 먹여 경찰이 되게하고 작은것은 시내에 들어가 마음대로 일하게 하였다. 그런데 3년도 안되여 아들들이 선후로 중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갔다. 큰아들은 여러번 도박장을 치고 돈을 몰수하여 나누어 먹고 또 거액의 돈을 받고 마약중범을 놓아 주었든 것이다. 작은아들은 인질랍치를 했다. 리씨는 아들놈들이 똑똑치 못하다고, 자기처럼 역지 못하다고 날마다 한탄을 하고 안해는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멍청해 졌다. 리씨는 땀흘려 일하기도 싫고 기력도 없어 밭은 세를 주고 뜨락또르는 언녕 페철로 팔아버렸다. 그런데 잔치도 하지않고 손군은 셋이나 걷어 안았다. 큰아들은 남자애 쌍둥이를 낳고 작은것은 딸애를 보았다. 애에미들은 행방불명이다.     세상에는 우연한 일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 일은 인과 관계다.     자식의 뜻은 낳지 못한다고 하지만 꼭 그런것이 아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고 대들보가 구불면 서까래도 삐뚠다. 문제는 아래에 있고 원인은 우에 있다.(나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 앞에서는 물도 먹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부모의 책임은 너무도 크고 무겁다.                                                                                                                                     14. 1
78    인생교훈 댓글:  조회:1860  추천:0  2014-06-07
           수필                                              인생교훈                                                                                                               회령     새해를 맞으며 금년에는 어떠어떠한 일들을 할것인가?... 사색하는것이 버릇이 되였다. 거기에는 학습에 관한것 사업에 관한것 생활에 관한것 사상적인것 업무적인것 사생활 … 크고 작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설계도를 그리고 나면 결심이 솟고 용기가 솟고 신심이 솟고 심정은 유쾌하고 흥분되였다.     그러나 설계대로 실현된것은 결국 몇개가 없었다. 입당한다고 결심한것 국가급론문을 세편이상 쓴다고 결심한것 선진이 되겠다든것 장가를 간다고 결심한것 아버지에게 개엿을 고와 드린다는것 어머니에게 좋은 옷을 한벌 지어 드린다던것… 년말에 결산해 보니 황통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자신이 거짓말을 한것으로 되고 말았다.     물론, 생각과 같이 된것도 좀 있었다. 그러나 선배들의 말과같이 뜻대로 되는것이 몇개 없었다. 선배들은 그것인즉 인생이라고 하며 사람이란 한뉘 주관적으로 객관적으로 속아서 산다고 하였다. 나는 선배들의 이런 맥빠진 소리에 지대한 반감을 가지고 새해가 닥쳐오면 더욱 분발해서 더욱 들끓는 열정을 가지고 또 아름다운 설계도를 그리였다. 사람이란 리상과 희망, 웅대한포부를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속에 생이 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다고… 자기를 고무하며 설계도를 그리였다. 이런 호연지기는 죽ㅡ 계속 되였다.     그러나 성공은 몇개 못하고 실패는 수두룩히 하며 계속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 까닭을 몰랐다. 우둔하다보니 새해계획도 우둔하게 설계하고 그만큼 실패도 우둔하게 하였다. 하지만 나는 “흥! 제길할! 금년에는!”하고 가슴을 탕! 치며 새해에 또다시 도전했다. 그야말로 백절불굴의 기세였다.     이렇게 수십년 인생을 살면서 차츰 셈이 들고 하나하나 교훈을 터득하게 되였고 점차 푸근한 삶을 살게 되였다. 새해설계도는 보다 실사구시적이 되여갔고 따라서 성공률도 높아 갔다.     전날 왜서 실패가 많았던가? 교훈은 두가지다. 계획이 실사구시적이 못되였다. 즉 과학적발전관이 아주 부족 했다. 주, 객관적 여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욕(탐욕)에 들떴든 것이다. 말그대로 뱁새가 황새걸음을 것겠다고 만용을 한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 룡두사미인생을 많이 살았다. 허송세월을 퍼그나 하였다. 돌이켜 보면 무척 후회가 된다. 그러나 인생에 연습이 있든가!...     인생은 리상과 희망, 포부가 있어야 한다는 청년시절의 관점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것은 꿈이다. 꿈에는 작은것이 있고 큰것이 있다. 단기적인 것과 장원한 것이 있다. 한해계획이 있고 일생의 포부가 있다. 하여튼, 사람에게는 인생에는 꿈이 있어야 한다. 민족도 꿈이 있어야 하고 조직도 나라도 꿈이 있어야 한다.     나의 꿈도 담겨있는 중국꿈이 실현될 앞날을 생각할때 피가 끓고 힘이 솟는다…     송구영신의 이시각! 나는 새해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조국의 전진과 발맞추어 착실히, 힘차게, 노력분투하리라 다짐한다                                                                                                                         14.1
77    쳥년의 길 댓글:  조회:2315  추천:2  2014-05-26
               실화                                                         청년의 길                                                                                                                 회령     한여름의 어느날이 였다. 나는 병원문진실에서 밖을 내다보며 저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병원의사로서 업무에 관계되는 서적은 보지않고 무슨 “조선문학”이니 “두만강”이니 한 소설책 따위만 본다고 비판을 받았는데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포부는 의학과 문학으로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겠다는 것이였다.     원장(지부서기를 겸임)은 당원과 입당적극분자, 단원을 불러 소범위 생활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보통 저녘후 밤시간을 리용하여 하는데 그날 참가자는 10여명이 되였다. 원장이 회의 취지를 말했는데, 나의 엄중한 자산계급개인주의사상을 지금부터 비판 방조 한다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입당적극분자 였는데 마, 자부에서는 몇번째 적극분자로 꼽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보기에는 금년피에 입당이 될것 같았다. 왜냐하면 의료하향, 농업지원로동, 공정판의사, 등 간고하고 다른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내가 자원적으로 제일 많이 했고 성적이 돌출해서 표양도 여러번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업들을 광영한 혁명적 임무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간고한 사업에서 앞장에 서야한다는 모주석의 교시대로 하느라고 그렇게 했다. 그뿐이 아니다. 림상업무에서도 나는 내앞의 환자를 능히 잘 처리해서 군중들로부터 기술도 높고 복무태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직일도 많이 섯고 다른사람을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중한 환자가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원에 나와서 구급을 했는데 나는 없어서는 안될 기술골간의사였다.     나는 명예를 바란것도 아니고 단순히 입당을 하기위해 그런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전심전의로 혁명을 위해서, 인민을 위해서 맡은봐 사업을 잘 하느라고 항상 자신을 편달하며 노력 했든 것이다. 그리고 나름껏 틈틈이 문학수업도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참다운 인생관이며 인생태도라고 인정 했다. 나는 자기가 공산당원의 표준에 기본상 부합 된다고 생각했고 얼마전에 입당신청서를 지부에 바치였다. 그런데, 비판을 한다고 하니 너무도 뜻밖의 날벼락이 아닐수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선참으로 로처녀 리호사가 격렬한 비판발언을 하였다. 그는 우리공사(향)에서 선참으로 뛰쳐나온 반란파중의 한 사람인데 오랜 입당적극분자로서 입이 칼날같이 맵짠 녀자였다. 머리가 총명해서 모주석의 어록과 혁명적인 어구들을 많이 암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적당히 배렬하고 응용해서 말을 잘 했다. 우리병원은 말할것도 없고 공사적으로도 웅변대회를 한다면 10등안에 들만한 사람이였다. 그는 검은것을 희다고 네모난것을 둥글다고 말할수 있는 재간이 있었다. 그런 기질에 문화대혁명 10년의 실천단련까지 거친터라 그야말로 청산류수가 울고 갈 지경이였다.     그의 격렬하고도 격앙한 고음의 비판방조 발언을 요약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산에 올라서면 저 산이 높아 보이고 이것보다 저것이 좋아 보이고 의사가 되니 또 작가가 되고 싶고… 이것은 전형적인 자산계급개인주의 명리사상이다. 왜서 작가로 되자는가? 자기 이름 석자를 날리기 위한 것이다. 병원일에 열정을 보이는것도 위선적 음흉하고 교활한 수작에 불과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속으로부터 겉에까지 자산계급개인주의사상이 꼴똑 들어찬 사람이다. 우리는 모택동사상의 볽은기를 높히들고 무산계급 혁명로선을 따라 기정 방침대로(모주석이 생전에 정해놓은 방침ㅡ 무산계 급독재 조건하에서 계속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혁명을 해야한다는 것.) 혁명을 하며 그길에서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기꺼히 바쳐야 한다. 나는 동무가 낭떨어지에서 말을 멈추고 환골탈태 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잇따라 세 사람이 앞다투어 용약 발언 했는데 자기가 혁명적사상수평이 고도로 높다는 것을 충분히 표달 했다. 그들이 높히 표현할수록 나는 그만큼 납작해 지였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나를 비판방조한다는 명의를 걸고 나를 여지없이 내리깍고 자기의 높은사상경계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4인패”가 꺼꾸러진지 반년이 지났으나 “우경번안풍”(등소평)을 비판투쟁하며 문화대혁명의 살벌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발언은 입당적극분자 네 사람이 장편으로 하다보니 밤이 늦어 졌다. 당원들과 다른 사람들은 발언할것이 없는지, 혹은 싫은지 묵묵불언이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그랬는지 부서기(원 원장겸 서기. 로당원. 잔페군인. 문혁기간 리호사 등 반란파들 한테서 비판투쟁을 호되게 당했다.)가 “건전한 개인흥춰를 나쁘다고 하는것이 옳은지… 생각해 볼 봐다.”라고 말했다. 이간단한 물음에 말싸움에 들어가서는 날고 뛴다는 리호사를 비롯해서 장편연설자들은 어안이 벙벙해 하였다. 부서기는 한마디를 더 하였다.     “여유시간이 있으면 자기가 맡은 혁명임무와 관련되는것만 학습하고 연찬해야 혁명간부라고 할수 있다는데, 그렇지 않을때는 자산계급개인주의다 하는데 그럼, 시간이 있으면 장기를 놀고 지어는 밤을 새우기도 하며(오랜 입당적극분자중 모 사람. 리호사와 단짝인 반란파. 유부남. 리호사와 퀴퀴한 관계. 그도 죽어라고 원 원장을 투쟁했었다.) 부커치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리호사) 행위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우리는 전쟁을 하다가도 즘즘하면 네말바둑도 놀고 소설책도 보고 어떤 친구들은 시를 쓰기도 했다. 나의전우 조기천은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 되기까지 했다. 전쟁하는 사람이라해서 총만 만지고 작전지도만 끌어 안고 있지 않았다. 사령관은 우리를 자산계급개인주의라고 하지않았다… .”     부서기의 한마디가 회의취지를 뒤엎어 놓았다. 더는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급전직하로 우습게 역전하자 원장이 팔을 걷어 부치고 직접 출마하였다. 원장은 나를 직방 심문했다. “왜서 문학학습을 하는가?” 그의 질문에 “여유시간을 리용하여 문학창작을 하려고 한다. 나는 가급적 더욱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 문학도 일이다. 문학도 혁명을 위한것이고 사회와 인민을 위한 것이다. 물론 나의 업여애호다. 의사직책을 충분히 감당하며 업여로 문학을 하는것이 왜서 안되는가. 왜서 나쁜가.”고 나는 떳떳하게 속심을 그대로 말했다. 재미있는 글을 써 보려는 것은 내가10여년을 키워온 애호며 포부였다… 원장은 그야말로 기세등등해서, 누구의 이의도 용서안한다는 위풍을 떨치며 열변을 뿜었다. “보라! 이 동무의 마음은 문학에 가 있다. 의사는 조직에 매여있기에 할수없이 응부적으로 하는 것이다. 의학만도 벅찬데 문학까지 어떻게 하는가. 궤변이다. 완고하고 엄중하다! 자본주의 자유세계라면 문학인가 뭔가 하는데로 달아난지도 10년이 넘었을 것이다. 동무는 당에서 의사를 하라는데, 해야하는데, 왜서 기어코 문학인가?! 그래 자산계급개인주의명리사상이 아니란 말인가! 심각히 반성해 보라. 후에 다시 보자. 오늘은 이만. 페회!”     나는 생각할수록 울분이 치밀었다.     그때 문진실로 두 청년이 들어 왔다. 나는 즉각 의사의 위치로 돌아 왔다.     걀캉걀캉 바짝 마르고 키큰 청년은 칼코가 인상적이였다. 그의 손에는 두툼하고 낧은 소설책ㅡ리기영의 “고향”이 쥐여져 있었다. 다른 한 청년은 키가 작고 통통했다. 아파서 온 사람은 키가 크고 코마루가 날카로운 말라깽이 청년이였다. 병은 위염인데 위신경관능증이 심했다. 그리고 빈혈도 있었고 신체가 허약했다. 식사조절, 영양보충, 휴식이 수요 됐다.     그런데 청년은 무척 열정적인 문학도 였다. 조양천지질대 공인으로서 우리 산골공사에 와서 석탄매장량을 탐사하는 중인데 시추작업을 한다고 했다. 3교대로 하는 시추작업은 중체력로동이고 생활은 물론 불편하고 간고 했다. 게다가 청넌에게는 사상부담도 컸다. 그것은 일할 힘이 없어서 청가를 자주 맡고, 쉴때는 말할것도 없고 출근시에도 틈만 있으면 기를 쓰고 소설책을 들여다 보는데 밤을 패가며 열중할때가 많다고 하였다. 하여 시추대 왕대장은 그를 자산계급개인주의사상이 엄중한 문제인물로 락인을 찍고 호되게 닥달을 했다. “너같은 락후분자가 뭐, 작가가 되겠다구?...” 청년과 왕대장은 개와 고양이처럼 대립되여 충돌 상태였다. 생활상 이렇게 악성순환을 하다보니 병은 나날히 심해가고 신체는 시나브로 허약해 질수밖에.     나와 청년은 같은 문학도다보니 단박 친해졌다. 청년은 쾌활하고 성실했는데 자기는 꼭 문학을 하며 큰 작가로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고장의 어느 처녀와 사랑을 속삭인다고 하였다. 그의 이름은 우광훈이였다. 나는 나와같은 문학도를 만난것이 무등 반가웠다.     나는 광훈이에게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 주의사항을 자세히 가르켜 준후 석달이란 휴식진단서를 떼여 주었다. 공사병원의사로서는 최고의 권한이 거기까지 였다. 나는 광훈이에게 6개월내지 1년은 휴식치료를 해야하는데 먼저 석달을 휴식하며 치료한후 다시 보자고 말하였다.     원래는 몇일간의 휴식진단서를 떼자고 왔던 광훈이는 너무도 좋아서 입이 떡 벌어 졌다. 그는 진단서를 들고 어깨춤을 추며 걸음도 씽씽 걸어 갔다. 왕대장 앞에 “이걸 봐라!”하며 진단서를 탕! 메내부칠 생각을 하니 통쾌하고 흐믓하고 궁둥이가 거뿐했을 것이다. “뭐?! 내가 꾀병을 하고 락후분자라구?... 작가는 커녕 떡가두 못할놈이라구?...” 하여튼 광훈이는 기분이 좋아하며 돌아 갔다.     이튿날 오후 보리저녘때쯤이 였다. 원장이 공사당위 소회의실로 즉시 가 보라는 것이였다.     소회의실에는 당위부서기와 조직위원 그리고 젊은 한족사내가 있었다. 방안의 분위기가 이상스레 긴장하고 엄숙했다.     조직위원이 우광훈이라는 시추대 공인에게 진단서를 떼여준 일이 있는가고 물었다. 내가 그랬다고 대답하자 그는 이 동무가 시추대 왕대장인데 진단서에 대하여 설명해 주라는 것이였다. 나의 설명을 들은후 왕대장은 “네가 광훈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우리 시추대에서 제일 또랑당을 부리는 락후분자인것을 아는가. 그런사람에게 휴식진단서를, 그것도 하루 이틀도 이니고 단꺼번에 석달이나 감히 떼여 주는가. “혁명과 생산을 틀어 쥐라.”는 이때에 이게 의사로서 무슨 행위라고 생각 하는가…” 하며 단통 색을 먹고 련줄포를 갈겨 대는 것이였다.     나는 왈칵 피가 솟구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누굴 훈계하는 건가! 나의 말이 거칠수 밖에 없었다.     “광훈이가 또랑당락후분자인지 반동분자인지를 내가 어찌 아는가. 내가 병을보고 진단서를 떼는걸 너에게 청시하고 비준을 받아야 하는가. 무슨 의견이 있으면 현위생국에 물어봐라. 광훈이가 현병원에 가서 보이면 아마 반년의 휴식진단서가 나올게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봐라.”     왕대장은 시추임무가 어떻게 중요하고 긴급하고 지방의 각급당위에서 어떻게 중시하고 있으며 대원들의 적극성이 어떻게 필요하고 정치사 상공작이 얼마나 중요하고 혁명적 무산계급은 마땅히… 한바탕 내리 풀었다. 나는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지금 수술을 해야겠으니 가 봐야겠다.” 하고 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조직위원은 어서 가 보라고 하였다.     그날밤, 원장은 또 전과 같은 회의를 소집하였다. 주제는 진단서문제 였다.     사전에 포치와 준비가 있었는지 리호사 등 네명의 입당적극분자들은 나에게 맹렬한 블질을 하였다. 포치가 없다해도 정치후각이 예민한 그들은 적극적일 수 밖에. 황차 7.1에 신당원을 받아 들이는 이 대목이 아닌가.     나는 같은 문학애호가라는 점에서 예리한 분석과 첨예한 비판을 받았다. 우광훈은 락후분자로 결정해 놓고 그를 감싸준 사상본질이 비판할수록 마치도 무슨 반혁명집단을 파듯 했다. 부서기가 몇마디를 했다가 하마트면 그도 련루 될번 했다. 나는 입당은 고사하고 사면초가의 곡경을 치렀다.     그번의 입당은 희극적으로 원장의 처가 되였다. 차례진 명액이 하나뿐이 였는데 그들부부는 곧 현병원으로 돌아갈 “6.26백의전사”였다. 안해를 입당시켜 산골에 내려왔던 보람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티후 공사당위부서기가 작풍문제로 감옥에 가면서 원장의 처는 궁둥이일이 드러나고 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원장은 자기처를 입당 시키기 위하여 장애로 지목되는 나를 들이친 것이였다.     리호사는 이티후에 공사당위부서기의 “신세”를 입어 끝내 입당을 했다. 그런데 병원약을 가지고 조선장사를 해서 말썽이 많았고 해관의 누구와 또 바람을 써서 개골망신을 했다. 조선서 중고품 텔레비며 랭장고를 장사해 왔는데 사람들은 그를 일부분 당원이 먼저 부유해진 전형인물이라느니 모범이라느니 하면서 풍자 했다. 후에 그는 젊은나이에 불행히 과부로 되여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국 늙은이 한테 제꺽 시집을 갔다. 그리고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치겠다든 혁명의길에 당증을 팽개치고 한국국적에 넘었다. 한국령감에게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치겠는지… 그건 더 두고 봐야 알 노릇이다.     나는 여전히 끈질기게 문학 수업을 견지했다. 정면에서 타격하고 측면에서 조소하고 배후에서 풍자하는 역경이였지만 포부를 변치 않았다. 그리고 작품도 발표 했다. 어떤작품은 일정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에서 우광훈과 비견하면 대학교선생과 소학생 차이다.     듣는말에 의하면 우광훈은 지질대를 사직하고 연변대학 조문계를 거쳐 문학의 일로를 일심정력으로 달리였는데 지금은 중국조선족 문단에서 한자리 딛고 선 유능한 중견작가이며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이라고 한다. 해외에서도 우광훈을 알아 준다고 하니 보통이 아니다.     우광훈과 나는 부지런히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우광훈이는 나보다 재수가 더 좋았다. 개방이 되고 대학문이 열리고… 그것이 진단서를 뗀후 얼마안되여 우광훈이 앞에 번쩍 다가 왔든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되는 중년이였다.     나는 후회는 없다. 의사로서의 직책을 유감없이 리행했고 문학도 나름껏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살리라 다졌던 청춘의 포부와 초심을 시종 변치않고 오늘까지 왔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원대한 포부를 품고 일단 목표를 확정한후 끈질기게 열심히 실현을 위하여 노력분투하는것이 청년의 길일것이다.     진단서를 떼 준후 지금까지 나는 우광훈이를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문학의 길에서 잘 나가는 것이 내일처럼 기쁘다.     물론 나도 노력분투한다….                                                                                                                           09. 7
76    백성들이 바라는 봄비 댓글:  조회:1721  추천:1  2014-05-19
         수필                                                       백성들이 바라는 봄비                                                                                                               회령     아침에 일어나니 잔잔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기는 신선하고 부드러운데, 봄비는 언제부터 내렸는지 꽤 푸근히 내렸다. 백성들은 봄비를 기름이라거니 쌀이라거니 하는데 그것은 봄비가 그렇게 고맙고 귀중하기 때문이다.     봄비는 동삼내 찌들어붙은 모든 때를 살살 씻어주고 터진 상처를 살살 말끔히 딱아주고 매마른 땅을 살살 조곤히 적셔주고 힘겹던 뿌리를 흐믓하게 하여준다.     봄비는 만물을 소생시켜주는 약비다. 단비다. 봄비는 하늘이 지구에 베풀어 주는 급시우다.     생각해 보면 하늘은 인자하기 그지 없다. 하늘의 품에는 태양이 있고 달과 별이 있고 또 구름이 있고 번개가 있고 눈과 비, 바람이 있다. 하늘이 품고있는 이들은 서로 단결, 배합하며 맡은바 소임을 참답게 리행하며 지구를 살뜰히 보살핀다.     인간세상에도 하늘이 있다. 백성이 바로 하늘이다. 하여 민심을 천심이라 한다. 백성에게도 저 하늘에 있는 그 모든것이 다 있다. 법과 도덕과 량심, 그리고 권력과 공무원을 갖고 있다. 이 모든것을 갖고 백성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꿈을 이루고자 한다. 저 하늘이 아름다운 지구를 가꾸듯히.     오늘, 13억 중화민족은 중국꿈을 이루려고 힘차게 일떠섯다! 힘차게 달리고 있다! 중화민족의 중국꿈은 우리의 제일 큰 민심이며 제일 큰 천심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꿈을 실현하는 드세찬 대전역에는 크고 작은 난관과 크고작은 걸림돌이 항상 있다는것을. 방해물은 제때에 제거해야 한다. 큰것은 뢰성을 울리며 벼락치고 광풍폭우로 휩쓸어 버리며 작은것은 섬섬세우로 깨끗히 목욕시키며 상처를 치료하여 건강을 찿게 하리. 군중로선교육실천활동은 백성들이 바라는 봄비다.     꿈의 실현은 우리 모두의 노력분투를 부른다. 필부지만 나역시 례외가 아니다. 팔뚝에 힘이 솟는다. 전역의 일병으로 쓰러질때까지 억세게 싸우리.     시대는 전진하고 있다. 사업은 발전하고 있다. 인민은 궐기 하였다. 당은 잘하고 있다. 중화의 대지에 봄비가 내린다.                                                                                                                                     14. 3
75    인생과 량심 댓글:  조회:3327  추천:4  2014-05-12
              중편실화                                                     인생과 량심                                                                                                                회령     5.1절전날 우리는 산동성 유산시로 관광 겸 일보러 갔다. 북경에서 유산까지는 900키로라고했는데 점심먹고 떠난것이 밤아홉시에 유산에 도착했다. 유산 은탄호텔은 3성급이라고했지만 식사며 시설이 상당히 좋았다.     이튿날 아침후 우리는 우선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날씨도좋고 기분도 상쾌한 아침이였다. 초중생손녀애는 유치원애들처럼 재잘거리며 퐁퐁 뛰였다.     이곳에는“천하제일은탄(은모래톱)”이라는 풍경구가 있는데 황해해변가로 20여리의 백사장이 휘우둠이 뻗쳐있었다. 여기에 해수욕장은 물론, 각종 유람선을 띄우는데 앞으로는 한국, 일본과 직항하는 유산항구도 건설할것이라고했다. 그리고 바다위에 멋진 다리도 놓는다고했다.     개발이 시작된지는 5년철이라고했는데 지금은 피서별장 건설이 한창 활기를 띄고있었다. 이미 지어놓은 별장들중에서는 향항투자상이 지은것이 제일이였다. 대경유전에서는 두곳에다 땅을사고 별장을 건설했는데 리,퇴직간부들에게 주는것이라고했다. 그런데 그것은 살림집모양이여서 향항것 하고는 멋이 떨어졌다.     우리는 여섯개의 별장단지들을 돌아보았는데 별장소매쎈터에는 어데가나 사람들이 붐비였다. 북경, 상해, 심수, 광주, 심양, 할빈에서 왔는가하면 서안, 성도, 곤명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사람들인데 어린부부가 특히 많아보였다. 중국에 부자가 이렇게 많은것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도 젊은세대가!... 외국인들도 가끔 보이였다.     아들부부는 향항것을골라놓고 우리에게 의논을했는데 어느모로보나 마음에들었다. 집값은 북경보다 훨씬 쌌다. 이런집을 북경에서는 평당 대체로 17000원을하는데 여기서는 2600원이였다. 그저 가지는게 아닌가!... (작년에는 1800원이였다고했다)     오후에 우리는 바다가에있는 “망해정”으로 갔다. 래일은 대고산에 있다는 명찰에 가 보기로했다. 망해정은 20리백사장 북쪽끝에서 바다로 뿌죽이내민 벼랑바위 위에있었다. 먼옛날 진시황 영정께옵서 저바다를 여기서 바라보셨다고 하는데 그때도 바다는 오늘처럼 아득하고 푸르렀으리…하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비장하고 장쾌한 희,비의력사가 도도히 줄기차게 흘러왔다.ㅡ     손녀애의 지휘에따라 우리가 포즈를취하며 사진을찍고 록상을하느라 신이났는데, 누군가 나를부르며 왈칵 안겨왔다! 이게 누구냐?! 32년전에 헤여진 친구 문덕성이 아닌가!! 너무도 꿈같은 해후였다.                                             1     32년전 덕성이와 나는 고향인 작고편벽한 산골공사(향)에서 사업했는데 나는 중학교 교원이였고 덕성이는 공사병원 의사였다. 나는 북경으로 전근한후 인차 외국에나가 몇년간 사업하다보니 덕성이와 소식이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덕성이를 잊은적이없다. 그와 나는 한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이기도하지만 그는 나의 구명은인이였다.     문화대혁명중기, 반란파들이 공사당위서기를 투쟁하던 어느날 몇몇 맹장들은 그에게 몽둥이 매질을하였다. 그때 내가 뛰쳐나가서 그들을 막으며 시비를했는데 반란파들은 나에게도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그리고 책상위에 올려세우고 투쟁을했는데 얼마못가서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장파렬이 됐던것이다. 덕성이는 급진수술을 서둘렀다. 단한명뿐인 수술실 동호사는 (병원 반란파대장. 별명은 똥호사뿅색발악단. 뿅ㅡ오입) 현병원에 넘기라고 내뱉고는 퇴근해버렸다. 200여리먼길, 교통수단도 구할수없는 상황에서(현병원 구급차는 고장났다고했다) 덕성이는 자기안해와(호사) 다른사람 둘을(내과의사와 호사) 데리고 나를 수술하였다. 덕성이가 아니였다면(그날 수술할수있는 의사는 그뿐이였다. 또 다른 수술할줄아는 조의사는 외지에 있는 집으로 갔었다.) 나는 그때 늙으신 부모님들과 젊은안해, 어린아이들을 남겨놓고 북망산의 일점분토가 되였을 것이다.     덕성이는 아들네를 따라 2년전에 북경으로 왔는데 조양구에서 산다고하였다. 우리도 조양구에서 사는데 오늘에야, 그것도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참으로 하늘의 조화라 하겠다… 그도 향항투자상이 지은 별장을 삿는데 우리것과는 서너동 건너서였다.     한달남짓 지난후 덕성이부부와 우리부부는 별장으로 피서살이를 갔다. 어느날 우리두집은 점심밥을 잘 준비해가지고 망해정 저쪽에있는 너럭바위로 산보를나갔다. 그날 덕성이는 우리가 리별한후의 경력담을 죽ㅡ이야기하였다.     그의 회고담은 나로하여금 사람의 인생과 량심을 두고 깊은사색을 하게했다. 거기에는 심오한 인생철리 같은것이 있는듯했는데, 그것은 캐고보니 결국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고 또 극히 평범한것으로서 우리가 어릴때부터 수없이 들어오던 “사람이란 량심을 바로 먹어야한다.”는 바로 그말이였다.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쓰는,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버릇이된, 잔사설과같은 바로 그말이였다. 그런데 그말이 그렇게 힘있는 진리인것을 덕성이 추억에서 새삼스레 느끼였다.                                    2     흘러간 인생을 돌이켜보면 내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때가 지나간 80년대초였다. 83년8월15일! 나는 정든고향을 아무런 미련도없이 집식구들을 이끌고 떠나버렸다. 그후로 나는 한번도 고향에 가지않았다. 보자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보고싶은 사람도 없었고 볼일도 없었던것이다. 그곳은 아버지 어머니 고향이였고 내가 자란, 40여년 살아온 곳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날때 아버지는 나에게 다시는 이곳을 돌아다도 보지말라고 하였다.     짐과 여섯식구를 태운 트럭이 갈매산기슭을 돌아갈때 나는 그곳에있는 어머니의 묘소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손저어주는것만 같았다. 나는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ㅡ돌았다. 자동차가 두개공사의 분수령인 하마느령(한많은령)을 넘을때 나의마음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이 령은 광복전에는 넘나드는 사람들이 울며넘는 울고개라고 했는데 후에는 그렇게 말하지않았다. 하마느령이란 주로 월급쟁이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울면서 넘어오고 웃으면서 넘어가는 고개라고했다. 뜻인즉 궁핍하고 편벽한 산골오지로 가는것이 기막히고, 거기서 벗어나는것이 더없이 거뿐하고 기쁘다는것이였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67년5월초 나는 자청해서 도시에 붙어있는 공사병원으로부터 만삭이 된 안해를 이끌고 고향의 공사병원으로 전근해갔는데 그때 나는 희망과 포부로 가슴이 벅차고 설레였다. 의사사업을 잘 하여 고향사람들의 애대를 받으며 부모님 모시고 행복하게 살리라…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마느령을 넘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따지고보면 쫓겨가는 신세가 되였다. 17년세월이 두서없는 악몽 같았다. 서글픈마음이 한이없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하마느령을 울며넘든 그날이 암과명의 분수령처럼 나의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으로 되였다.                                   3     덕성이부부가 우리공사병원으로 전근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반가운것은 물론이지만 그의처사가 리해되지 않았다.     우리공사는 작고 편벽한 산골오지지만 현의기구에 따라 있어야할것은 기본상 다 있었다. 베는 석자래도 틀은틀대로 10여개 기관과 단위들에는 근 200여명의 간부와 직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그 어느날 하마느령을 넘어가기를 바랐다. 산골을 벗어나 대처에 나가서 사는것이 그들의 공동한 소원이였다. 누가 전근해 나간다면 모두들 한없이 부러워했고 누가 전근해 왔다고하면 다들 은근히 아쉬워했다. 그리고 아마 무슨 불미한일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처음으로 안배받는 사람이 아니면 보통 대개가 착오진 사람들이기에. 고험과 단련차로 오는 간부도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덕성이는 병원숙직실에서 자면서 출근했는데, 만삭이 된 안해는 3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 시집으로 갔다.(해산휴가) 어느날 나는 덕성이를 집으로 청하여 술잔을 나누었다. 그날 덕성이는 사업에 참가한후 오늘까지의 경과지사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4     나는 덕성이 성미를 잘 안다. 덕성이는 단순하고도 아주 솔직하고 통쾌한 사람이다. 광명정대하다고 할가… 자기가 한일은 잘했든 못했든 했다고하며 남들의 시비도 모르는척 하는법이 없었다. 그는 외향형성격으로 마음이 수월했다. 양보하고 밎지고 손해를 봐도 대수로와 하지않았다. 맞지않으면 공개적으로 맞설뿐 음모궤계나 술수를 쓸줄 몰랐다. 그런데 그에게는 활량기가 있는것이 큰 흠이였다.     덕성이는 어머니가 지병으로 계속앓고 집이 너무도 구차하여 대학에는 가지못하고 전업학교로 갔는데 서의전업을 졸업했다. 그는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하다보니 학교문을 나서면서 직방 공사병원의사로 발령을 받았다. 우리현으로 분배된 13명졸업생에서 공사병원의사로 안배된 사람은 덕성이 하나뿐이였다. 다른동창들은 현과 진병원의 보조과실에 약제사 혹은 화험원으로 갔다. 덕성이가 간 공사병원은 우리현에서 꽤나큰 병원이였다.     사업에 참가한 이듬해 초여름 덕성이는 창피하길 짝이없는 착오를 범하였다. 그것은 어느시병원에서 온 호사와 바람을 피우다가 들통이난것이다. 그호사는 작풍문제로 리혼을 맞은후 이 공사병원으로 쫓겨왔는데 바람기가 재발했든것이다. 그녀의 추파에 덕성이는 차츰 마음이 싱숭생숭해나기 시작했고 때로는 서로 지분거리기까지했다. 덕성이는 그때까지 련애한번 못해본 숫총각이였는데 그녀의 유혹에 걸렸든것이다. 어느날밤, 수술받은 환자집에서 덕성이와 그녀를 비롯해서 몇사람을 초대했는데 돌아올때 그녀는 덕성이를 자기하숙집으로 끌었다. 술기운에 열통이 커지고 탕개가 풀어진 덕성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정작 위험순간이 덮쳐오자 덕성이는 정신이 펄쩍들었다. 이녀자를 건드리면 안된다는, 큰일난다는 공포심과함께 수치감 자책감 자존심으로해서 그는 뛰쳐나왔다. 그런데 며칠후 서기가 그를 불렀다. 원장이 그날밤 일을 반영한것이다. 조사가 있자 호사는 덕성이가 자기를 강간하려 했다고 물었다. 덕성이는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였다. 2,3일지나서 서기는 덕성이를 데리고 공사당위로 갔는데, 당위서기사무실에는 표독스럽길 짝이없는 공사당위서기와 단서기 파출소소장 그리고 당위문서가 앉아있었다. 공사당위서기는 덕성이에게 류망행위와 강간미수행위를 승인하는가 안하는가 따지고 들었다. 덕성이는 사실대로 말한후 어떤처벌이든 다 받겠다고 하였다. 공사당위서기는 “나쁜놈새끼! 로실하지 못하군. 어디 감옥밥을 먹어봐라!”하고 을러메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십여일 지난후 덕성이는 류단차간1년, 행정차간1년 처벌을 받고 현병원 외과에 림시로 전근되여 출근하였다.     덕성이가 착오를 진후 현병원과 몇개공사에서는 서로 달라고 했는데 현위생국에서는 도시에 붙어있는 공사병원에 주었다. 그 병원 원장은 해방전쟁, 항미원조까지 갔다온 2등갑 잔페군인이였는데 부대에서의 급은 중대장으로 당원이였다. 중년의 사람좋은 그는 현병원으로 와서 덕성이와 담화까지하고 친히 데려갔다.     후일담이지만, 덕성이가 착오를범한 그 공사의 당위서기와 병원서기, 원장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이 바람쟁이호사와 치정관계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에서 그들은 모두 죽을 졸경을 치루었다. 특히 당위서기는 너무도 민심을 잃은 사람이였는데 그의 104개죄장에는 혁명적청년의사 문덕성이를 고의적으로 타격해서 전도를 망쳐놓았다는 조목도있었다. 당위서기는 개혁개방전까지도 정책락실을 받지못하고 걸려있다가 페인이되다싶이되여 퇴직해버렸다. 바람쟁이호사는 투쟁을 받다가 맞아죽었다. 후에 사람들은 당년의일을 가끔 잡담할때면 “량심 나쁜것들은 그래도 싸다.”고하였다.                                            5     덕성이는 새로운 단위에 간후 사업을 잘하여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30여명 직원중에서 제일 나어린의사였지만 병진단을 잘하여 실력있는 의사라고 내외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몸이 가볍고 열정적이고 또한 겸손하고 성근했다. 그는 속이나 겉이나 다 같은, 수월하고 까다롭지않은 사람이여서 누구나 쉽게 접촉할수있었고 즉시 가까이 할수있어 다들 그를 좋아했다. 누가 방조를 부탁하면 대뜸 나섯고 간고한일에는 (하향, 농업지원, 외지공정판의사) 항상 앞장에섯다. 그는 총명하고 생기발랄했을뿐만아니라 창발력과 적극성이 높았다. 어떤일을 맡겨도 다 잘해내는 보배였다. 덕성이는 서의전업학교시절에 벌써 지구의 청년사회주 의건설적극분자로 되기까지했었다.     여러사람들이 그에게 처녀를 소개해 주었는데 원장은 은근히 자기사위로 삼고싶어 하기까지했다. 그러나 덕성이는 자기허물 때문에 늘 망설이였다. 활달한 덕성이였으나 그에게는 마음이 수줍고 여린면도 있었던것이다.     그러는중 병원에는 호사전업 처녀가 배치받아왔는데 인물체격은 두말할것도없고 성품과 행동거지에 나무랄데가 하나도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소문에는 현병원 총호사장감인데 기층단련을 시키기위해 보낸 호사라고했다. 사람들은 그를 “큰집 맏며느리 감”이라고했는데 그의 별명이 어릴때부터 정말 그랬다고 했다. 처녀도 덕성이처럼 산골 가난한농민의 자식이였는데 그의어머니도 장기환자였고 아래로 동생은 여섯이나 있었다. 그에게는 대담하게 련애를 걸어오는 총각들도 여럿이였는데 중매쟁이는 그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보다싶이 처녀는 훌륭했지만 덕성이는 아예 꿈도꾸지않았다. 그런데 웬일이냐, 이듬해 봄부터 처녀와 덕성이는 사랑을 속삭이게되였고 그해 결혼까지하였다.     그들이 사귈때 위생국과 현병원에서 사업하는 어떤사람들이 처녀를 찿아오기까지 했는데 그들은 각자의 욕심에따라 덕성이와 사귀지 말라고 온갖 감언리설로 처녀를 구술렸다. 말하자면 반간을 한것이다.     덕성이가 결혼해서 한달도 되지않았는데 현위생국으로부터 국장의 직접지시라고 하면서 덕성이를 머나먼 국방도로건설 공정판에 의사로 보내라고 했다. 병원원장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보내지 않으려했으나 국장의 명령은 아주 군대식 그대로였다.(국장은 부대퇀급전업간부) 신혼부부는 괘씸죄에 걸렸던것이다. 그런저런 쪼간을 알수도 없었거니와 단순하고 수월한 덕성이는 뢰봉식으로 좋은면으로만 생각하며 혁명임무를 받들고 기꺼이 공정판으로갔다.(6개월)     문화대혁명때 국장은 관료주의작풍이 엄중해서 호되게 뚜드려 맞았는데, 덕성이를 공정판에 보낸것도 자기의 관료죄장이라며 스스로 탄백했다. 그런데, 그 는 그 지긋지긋한 고역(투쟁)에서 얼른 해방받기위해 잔꾀를 썼는데 소위 덕성이건을 고도로 “깡과선”에(계급투쟁 로선투쟁) 올려놓고 잘, 본때스레, 심각히, 멋있게, 검사하느라 했는데 그만 재주를 쓰다가 메주를 쓰고말았다. 그는 판단실수로 말한마디를 잘못하는바람에 더욱 죽을고생을 했다. 그것은 신혼부부를 리혼시키려는 음흉한 목적에서 비렬하게 그랬노라고 거짓말을 한것이, 이쯤하면 로실하고 표현이 좋다고 좋은처리가 있으려니했는데, 웬걸! 혁명성과 상상력이 고도로 풍부하고 발달한 반란파들은 여기에 엄중한 “깡과선”상의 문제가 있다고 영명한 판단을 했던것이다. 왜서 리혼시키려 했는가?! 무슨 량심인가, 음특한 무엇이 있다. 솔직히 탄백하라!... 반란파들은 대뜸 국장을 가두어놓고 돌격적심문을 들이댔다. 국장은 현병원의 부산과 녀의사와 한차례 작풍문제가 있은것을 끝내 실토하고야 말았다. 전혀 뜻밖의 휘황한전과에 지대한 고무를 받아 사기충천한 반란파들은 물에빠진개를 끝까지 따라가며 족치는 혁명적기세로 맹렬한공세를 들이댔다. 전현 위생계통의 반반한녀자들은 모두 혐의대상이 되였는데 결국 국장은 “정말 그뿐입니다! 모주석께 맹세합니다!”라는 쪽지를 써놓고 새벽에 심문관들이 조는 틈을타서 뛰쳐나가 기차에 치여죽었다. 량심한번 잘못먹고 잔꾀로 거짓말을 한것이 엄청난 화근으로 될줄이야!...     억울한 안건을 시정할때 국장의미망인은 전안조반란파들이 남편을 때려죽였다고, 자살현장은 위조한거라고 걸고들었는데 당사자들은 그걸 해명하느라, 사과하느라, 량해받느라… 똥줄을 갈기였다. 그들전안조 몇몇은 확실히 심보가 고약한 사람들이였는데 웬일일가, 후에 몽땅 이런저런 불상사를 당했다. 사람들은 “량심이 나빠서 그렇게 되였다.”고 했다.                                              6     덕성이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인데 그의안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입당적극분자였다.     덕성이는 멀리 산골에 계시는 부모님들을 모셔오고 싶었으나 집을 해결할수없어 안타까워했다. 사정을 알게된 병원직원들은 호조금을 뀌워줬는데 덕성이는 그돈을 선불하고 외상으로 집을 마련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마을을 돌아보고나서 뜨직해하였다. 그는 그곳이 한뉘 살아온 정든 고향보다 여러모로 못해보였던것이다. 하여 덕성이는 만삭이 된 안해를 데리고 고향의 산골병원으로 전근했던것이다. 병원에서는 너무도 아쉬웠지만 효자의길을 막으면 안된다고하면서 보내주었다.     현위생국혁명의원회에서는 의무일군이 몹시 부족한 우리공사에 보낼사람이없어서 걱정이였는데 덕성이가 자원신청을하니 얼씨구! 대뜸 비준하였다. 마침 그곳에는 또 전근시켜주지않으면 안될 딱한사정의 녀의사가 있기도 했던것이다. 그는 딸애를 데리고 십년넘어 남편과 떨어져 살고있었다. 원래 그의사는 덕성이가 처음으로 갔던 병원에서 사업했는데 늘 현위생국 국장(죽은국장)을 찿아가서 남편있는데로(심양) 전근시켜달라고 떼질을씼다. 국장은 수두룩한 대도리를 늘어놓으면서 비판도하고 설복도하고 사상교육을하면서 질질 끌기만했다. 그는 덕성이를 그곳에 안배하게 되자 그녀의사를 인츰 전근시켜 주었는데, 무슨심술이 발작을했는지 누구도 싫어하는 우리공사로 보냈다. 녀의사는 딸애를 데리고 울면서 하마느령을 넘어왔다고 했다. 덕성이를 보낸후 현위생국 혁명위원회주임은 그녀의사를 수년래의 갈망대로 제꺽 전근시켜 주었는데 뒤에서는 인차 퀴퀴한 말이 돌았다. 녀의사는 꿈인가, 생신가, 마음껏웃으며 하마느령을 넘어갔다. 좌우간, 덕성이는 그 녀의사에게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 .                                        7     덕성이가 와서부터 우리가 리별할때까지의 10여년의 그의일은 내가 잘 안다. 지어는 그보다 더 잘아는것도있다. 이런것을두고 방관자가 더 밝다고한다.     뭐라고할가, 말하자면 덕성이는 오자마자 쉬털이를했다. 그것은 마치도 곡절많은 앞날을 예언하듯… 덕성이가 불운해서였는지,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가 박복해서였는지…     덕성이가 와서 딱 일주일만에 그의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했다. 덕성이 어머니는 두통증으로 오래동안 앓으며 신체가 매우 허약했으나 아주 강단이 있는 분이였다. 그의어머니는 생뚱같이 괴사성장염이라는 병으로 이틀도 안되여 사망했는데 그해 년세는 겨우 마흔아홉밖에 안되였다. 날씨가 더워서 3일장을 했는데 덕성이는 울지못했다. 집안집할머니가 곡을하라고 직신직신다치며 눈치를 했지만 그는 너무도 억이막혀 울지못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사업을 잘하며 귀여운 손군도 안겨드리며 재미있게 살겠다고 웃으며 하마느령을 넘어온 덕성이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변을 당하다니… 울음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나오는법이다. 사람들은 주어다키운 자식놈이여서 그랬을거라고 훗날 뒤공론들을 했지만, 덕성이를 투쟁할때 동호사는 그런 후론까지 쳐들면서 “무산계급사상각오니 감정이니하는건 아직 둘째로하고 최저의 인간도덕도 감정도 없는 짐승만도못한놈!”이라고 악착스레 비판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기도 하겠지만 우선은 악의에서 하는 말이였다.     나는 덕성이를 잘안다. 덕성이는 어릴때부터 꼭 부모를 잘 모실거라 자주 말했다. 우리가 “장가가면 세간난다.”하고 우스개를하면 그는 정색해서 자기는 안그런다고 했다. 우리가 효자났네하고 놀리면 그는 정말로 “그래, 효자다!” 하며 대들었다. 그것이 그의 아이때 별명으로 되였다. 덕성이는 오직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단순한 그한가지 마음과 리유로 궁벽한 이곳으로 오지않았던가! 그는 외지에 있은 그몇년간도 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부모님들의 안부를 물었고 관심을 부탁하군했다.     덕성이 안해는 시어머니 장례날부터 산통이 시작되여 꼭 일주일만에 큼직한 아들을 낳았다. 무더위속에서 밤낮닷새나 앓고 그는 수레에 실려 공사병원마을로 왔는데, 소위 공사산실에서(농촌집, 주인어머니가 산파겸임) 이틀후 해산했던것이다. 덕성이안해는 후에 그때 꼭 죽는줄로 알았다고 몇번 말했다.     대엿새후 시아버지가 수레를 가지고와서 며느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시집에는 어린시누이가 있을뿐 도와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행이 산모가 건강하고 아이가 무탈해서 휴식기가 끝나자 인차 출근할수있었다.(산가는50일)     그사이 동호사는 호사가 왔다는게 명색뿐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그는 반란하려 뛰여다니며 병원일은 점점 뒤전이였다. 그때까지 그의 “병원홍색반란단”에는 영예의대장 겸 혁명전사로 동호사 혼자뿐이였다. 성명서 창의서를 붙이고 초모문을 걸었으나 입대신청자는 시종 한명도없었다. 하지만 동호사는 대련합을 실시할때까지 일년남짓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견지했다. 사람들이 “똥호사뿅색발악단”(동호사가 친구의 발등을 디디고 약혼한것과 조의사와의 추문을 빗댄것)이라고 빈정거린 그 이름은 오래동안 계속 불리우며 화제에 남아있었다.     안해가 출근하기 얼마전 덕성이는 수치스럽고 너절하고 미련하기 짝이없는 짓거리를 했다.     그것은 본가로 놀러온 어떤녀자와(조의사의 하숙집 딸) 눈을 맞췄던 것이다. 그들은 초면이였는데 녀자가 하루에도 두세번씩 병원에 들락거리드니 며칠새에 면목이 익었다. 원래 환자와 의사는 쉽게 가까워지는 법인데, 녀자는 의식적으로 달라붙어 꼬리치며 추파를 던졌다. 당시 덕성이는 심리상태가 매우 허전하고 불안정했다고 하였다. 단순하고 데면데면하고 수월한데다가 활량기가 있는 덕성이는 녀자의 유혹에 재빨리 넘어갔다. 어느날오후 녀자는 병원으로 와서 밤에 강변버들숲으로 나오라고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녀자의 남편이 왔다. 녀자는 남편이 아버지와 마주앉아 술을마이는 사이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런저런 상황을 알길없는 덕성이는 여러번 망설이다가 끝내는 음특한마음을 억제못하고 강변으로 가고말았다. 녀자는 덕성이가 오지않으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를 만났다. 그들이 강변으로 가는데 녀자의 남편이 안해를 불렀다….덕성이가 병원숙직실에 경황없이 앉아있는데 녀자부부가 동호사와 함께 병원으로 왔다.(그들은 잘아는 사이임) 녀자는 자기가 강변에서 바람을 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덕성이가 자기를보고 볼일이 있다고해서, 그래서 뭐냐고 물으며 따라걷는데 남편이 불렀다는것이였다. 녀자의 남편은 그래, 볼일이 뭐냐고… 색을먹고 대들고 녀자도 정말 그게뭐냐고… 함께 달려들었다. 그날밤 직일로 왔던 중약제사(당원, 병원림시령도소조 책임. 성원에는 동호사와 당원인 녀의사1명. 생산지휘부라고도 했음)는 사태의 엄중성을 대뜸 간파하고 사건을 맡아나섯다. 덕성이는 녀자를 희롱하려는 더러운 심보였다고 단마디로 숨김없이 승인한후 자백서까지 썼다. 그는 몽땅 자기잘못이라고 했다. 중약제사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피해자”에게 사정한후 동호사에게도 절대로 소문내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훗날 중약제사는 나에게 말하기를 “적당히 둘러댈것이지. 원, 그렇게 고지식 하다니…”하고 혀를 쯧쯧차며 덕성이를 역지못한(눈치무딘, 교활하지못함) 사람이라고 하였다. 녀자는 형부와도 간통한 소문난 바람쟁이였다. 그녀아래로 녀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자매는 조의사가 그들집에 하숙할때 시시한 말이 많았다. 조의사는 이미 결혼한 젊은이로서 안해는 시가지에서 살았다. 후에 중약제사가 조의사에게 귀뜀하여 그는 숙소를 병원의 빈방으로 옮겼다. 덕성이에게 바가지를 씌운 그녀는 후에 젊은나이에 풍을 맞고 페인이 되였다. 량심이 나뽰던 죄값인지…                                       8     덕성이가 왔을때는 문화대혁명이 “주자파”잡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동호사는 공사내 반란패거리10여명(남어지는 광대한 혁명적군중이라고 했는데 기실은 보수파였다.)과 뭉쳐다니며 생산대(촌민소조)대장, 대대(촌)서기, 기관, 단위의 책임자들을 투쟁하느라 여념이없었다.     동호사는 우리공사에서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당시에는 그의 정치수평, 사상각오가 높다고 긍정했지만 훗날의 그의 인생을 보면 그런것이아니였다. 그는 보복과 입당과 출세(령도직위)를 위하여 발악하다싶이 기를쓰고 뛰였든것이다.     그때 병원에는 의무인원은 여섯이고 행정인원으로는 원장과 회계가 있었다. 중년이넘은 원장은 군대전업간부로서(대위) 1등 을급 잔페였는데 모진 고생을 다 하며 자란 고아였다. 광복이 되자 해방군에 입대하여 싸우다가 조선인민군에 넘었는데 후퇴시기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당과 정부에서는 로동기능을 상실한 그를 배려해서 어느진병원의 원장으로 안배를했다. 그런데 그는 어떤과부호사와 바람을썼던것이다. 하여 당내경고처분을 받고 우리공사로 왔는데 말하자면 정배살이를 온 셈이다. 그가 병원으로 왔을때에는 당원으로는 중년의 중약제사 한명뿐이였고 적극분자가 4명이있었다. 당원이3명이 안되기에 병원에는 소조도 두지못하고 그들두사람은 기관지부에 속하여 일반당원으로 조직생활을 했다. 문화대혁명 직전에 병원에서는 녀의사 한명이 입당을 했는데 그것이 동호사와 조의사에게는 참을수없는 타격과 수치였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였다. 병원의 적극분자로서는 동호사와 조의사가 년한이 제일 길었는데 후배인 녀의사만 비준이 되였든것이다. 그후 원장은 병원당소조 조장벼슬을 겸하게 되였다.                                           9     문화대혁명은 동호사와 조의사가 분풀이를 하고 출세할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동호사의 개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악스럽는데 승벽심, 질투심, 자고자대와 교만성이 특출하게 강했다. 그래서 군중관점이 나쁘다느니 단결이 나쁘다느니 했는데, 사실대로 말해서 그를 아는 사람치고는 곱다는 사람이 몇히 없었다.     우리공사에서는 홍위병아이들이(초중에 둔 고중반아이들 30여명) 선참으로 일떠났다. 그들은 “파4구”(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때려부쉬는것)에 재미가붙어 베감투, 옛날책,(족보도 있었음) 병풍을 들춰서 불태우고 량태머리처녀들을 쫓아가서는 머리태를 잘라놓았다. 그러다가 선생들께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에 힌트와 고무를 받은 동호사는 자기도 홍색반란단창립을 선포하는 한편 원장에게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공사내에서 확실히 그가 첫사람이였다. 하여 그는 문화대혁명 내내 반란파 원로 맹장으로, 가장 혁명적인 간부로 자처했고 자부했다.     그의 대자보는 첯장부터 살기등등하고 혁명적이였다. “소위 원장이라는 주자파ㅡxxx 보아라!!!!! 대류망 너는 언녕 감옥에 가야할 놈이다!!!!! 류망죄장을 철저히 탄백하라!!!!! 우리 모주석의 혁명적홍색반란파들은 네놈을 무고한 녀자들의 배 위에서 끌어내려 릉지처참을 하고야 말겠다!!!!!” (당시 통용한 술어는 저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리라 였다.)     대자보를 붙인후 2ㅡ3일지나 그는 홍위병애들을 끌고와서 원장을 투쟁했다. 얼굴에 먹칠을 한후 한발이나 되는 고깔을 씌우고 목에는 개패와 헌 왕바신(겨울솜신)을 몇컬레 걸었는데 개패에는 대류망 대주자파 아무개라고 쓰고 뻘건잉크로 가새다리를 쳤는데 그건 총살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원장더러 쭈그렁 양철바게쯔를 뚜드리게하고 그 박자에 맞추어 자기들은 신이나서 타도를 목청껏 웨쳤다. 성수난김에 골목골목을 돌기까지했는데 우리공사에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보는 놀라운 연출대였다.(어록노래를 부를때 원장이 박자를 맞추지 못하면 동호사는 훈계하며 시범을 보여줬다. 후에는 괜찮게 박자를 쳐 줬다.) 그들은 원장을 끌고 승승장구로 전공사를 시위류행을 했다. 우리공사에서 투쟁을 받은 사람은 병원원장이 첫사람이다.     이때로부터 요물잡귀신(부농, 위만직원, 이런저런 허물이 있는 사람 등등)을 인신모욕을 꺼리낌없이 하며 투쟁하는 바람이 활발히 불기 시작했다. 매질도 마음대로 할수 있었는데 그것은 사상성, 혁명성이 아주 높은 구체적 행동으로 인정 받았다. 동호사는 관건적시각이면 구체적 행동을 했는데 그 선동력이 커서 효과가 좋았다. 동호사의 위신과 권위는 혁명투쟁중에서 재빨리 형성되여갔다. 그의 패거리(공사내 반란파들)중에서 아첨을 잘하는 어떤자들은 그를 섭원재라느니 강청 같다느니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경외(받들며 두려워함)하였다. 그런데 그건 표면적인것이고 내심으로는 싫어했다. 지어는 “때려죽일 간나새끼”라고했고, 앞에서 말한 그런 광채롭지 못한 명칭을 붙혀 주기까지 했다.                                             10     문화대혁명의 형세는 주자파 잡기에 계속 열을 올리면서 한편으로는 혁명위원회를 만드느라 갑론을박하기 시작하였다. 벙어리도 말할지경으로 군중들은 이미 대대적으로 발동되였는데 령도간부 처리에서 두가지 관점이 늘 첨예하게 맛섯다.     령도간부를 때려치우고 탈권해서 자기들이 령도자리를 차지해야겠다고 날뛰는 자들은 홍색반란파라하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결점 혹은 착오가 있긴하지만 인민내부 모순이고 성적이 위주고 당을 따라 혁명을 하였고 하려는 간부라 할때는 단결, 비평, 단결의 방식으로, 과거를 징계하여 금후를 삼가케 하며, 병을치료하여 사람을 구하는 당의 일관한 조직원칙과 간부정책을 참답게 집행해야 한다고 즉, 령도강위에서 계속 사업하게 하거나 정황에 따라 적절한 정책락실을 하여 출로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수파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개파는 서로 자기만이 진정한 혁명파라고 우기며 호상 공격하며 지어는 사생결단으로 싸우기까지 했는데 그것이 바로 “문공무위”(도리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보위)라는 것이다.     덕성이는 확고하게 보수파의 관점이였다. 그는 두개파가 함께 령도간부를 비판, 투쟁하며 함께 결론하고 정책을 락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혁명위원회 구성도 모든사람들이 즉 군중성적으로 선거 결정해야한다고 력설하였는데 그것은 보수파들의 구미에 제일 들어맞았다. 덕성이는 보수파들의(기실은 광대한 군중) 지지를 받게 되였고 보수파지휘부의 고문역활을 하게되였다.     보수파조직의 대장, 부대장들은 반란파들과 때로는 첨예하게 맞서자고 주장했다. 보수파조직상급의 지시도 그랬고 군중들의 정서도 반란파들을 “소멸”했으면 할때가 많았다. 그들은 반란파들의 과격한 행동을(붙잡고 가두고 때리는것 등) 행패질로 보며 증오했던 것이다. 덕성이는 보수파조직에서 무단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한편 반란파들과 련합하기위한 담판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공사로부터 대대, 생산대와 기관, 단위의 생산지휘부 건립을 적극 협조하여 혁명과 생산을 틀어쥐도록 하였다. 당시 반란파들은 보수파조직의 책임자를 붙잡아 가두거나 때리며 위공(둘러싸고 몰아부치며 공격하는것)하는 짓거리를 몇번하였는데 격분한 보수파들은 이기회에 아예 반란파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여러번 떠들었다. 그때마다 덕성이가 책임자들을 설복했다. 하여 우리공사에서는 그 흔한 무단적 충돌이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점을 후에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공로라고 인정해 주었다.     공사내에서 덕성이 위신이 높아짐에 따라 동호사와 소위 공사독재지휘부(전안 조라고도 했음. 반란파들로 조직된것) 사람들은 그를 눈에든 가시로 보았다. 특히 한단위에서 덕성이와 밤낮으로 코를 맞대고있는 동호사는 그를 애비죽인 원쑤보다도 더 미워하고 증오하며 이를 갈았다. 덕성이는 전근해온후 얼마안되여 대뜸 원장과 병원군중들켠에 서서 사사건건 동호사와 맞서면서 애를 먹이는 것이였다. 병원안에서 동호사는 그야말로 고립되고 촌보난행이였다. 동호사의 눈에는 덕성이가 똥구덩속의 돌멩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덕성이 작풍문제를 폭탄으로 일격에 소멸해치우리라 작심했다.     소위 공사전안조는 반란파들이 만든것인데 거기에는 중학교 교원3명과 동호사 그리고 다른단위의 반란파 3명 모두 일곱이였다. 그중에는 덕성이 소학, 초중 동창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덕성이 앞에서 늘 렬등감을 느끼며 그를 질투하였다. 그들은 동호사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전안조는 때론 독재지휘부라고도 했고 때론 전안조라고도 했는데 누구를 잡아가두고 수색하고 투쟁하는걸 마음대로 결정하고 지휘했다. 사실은 공사내 “홍색반란단”의 지휘부였다. 사회적으로 반란파들이 득세하는 형세였으나 우리 공사에서는 진짜 반란파는 공사적으로 3,40명도 되나마나 했는데 행동대 주력은 홍위병 애들이였다.     어느날 오후 덕성이가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홍위병대장아이가 아이들 서넛을 데리고 와서 독재지휘부에서 오란다고 했다. 덕성이는 일을 끝낸후 웬일일가 궁금해하며 공사로 갔는데 동호사와 두 동창이 회의실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는 일하려 나가지 않은 마을아낙네들과 아이들이 가득 했다. 사람이 워낙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동창이 개회를 선포했는데 공사군중독재지휘부에서 덕성이 비판대회를 지금부터 진행한다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말그대로 돌연 습격이였다. 우선 지금 까지의 착오를 전부 검사하라는 것이였다. 말하자면 남녀작풍문제부터 검사하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부터 덕성이는 반란파들이 만든 “9종인(문제인물)학습반”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는 동호사와 두 동창, 그리고 몇몊 사내들의(덕성이 안해를 은근히 넘보는) 눈에는 가시였지만 전공사 6천여명 사람들에게는 마치도 수령같은 인물이였다. 본인은 모르고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 지어는 존경했다. 그런데 순간에 그는 바람쟁이로 소문이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누구하나 그를 역성들수 없었고 들자고도 않했다. 보수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못해하면서 혀를 끌끌차고 침을 뱉았다. 그때 사회풍기는 누가 오입을 했다고 하면 똥묻은 개보다 더 더럽고 너절한 인간으로 보았다. 동호사와 그의 친구들이 갑자기 덕성이 추행을 터뜨린 목적은 보수파들의 코대를 꺾어 놓으며 인간적으로 덕성이를 납작하게 만들려는데 있었다. 그들이 목적은 일거에 쉽사리 달성 되였다. 낯가죽이 두텁다고 할가, 아무튼 덕성이는 조금치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이 문화대혁명에 계속 삐쳐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시무룩히 조용히 가만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점점 더 동호사와 맞서고 반란파들과 맞섯다.     소위 9종인학습반에는 공사당위서기, 공사사장 그리고 공사재량위원(위만시절 작은 목재판에서 회계를 한적이 있는 공사간부, 력사불청백 리유) 공사생산조리원(동생이 조선인민군고위급간부, 특무혐의) 림창의 령도(위만시절 철로호로대에 참가하여 총을메고 두어달 다리보초를 섯다. 력사불청백 리유)와 병원원장, 덕성이가 참가했다. 독재지휘부에서는 모주석 저작, 어록, 신문의 사론, “홍기”사론과 문장을 학습하고 자기의 죄장을 검사 교대하며 “깡과선”상에서 사상근원을 찿고 계급투쟁, 로선투쟁, 계속혁명 사상각오를 제고 하라고 하였다. 계급의 적이라면서 또 무슨 사상각오를 제고하라는것이 마치도 령도간부배양학습반 같기도 했다. 그덕에 덕성이는 말재간이 더욱 늘게 되였다. 밤낮 학습하고 대조를하며 검사를 해봤자 그것이 그것이고 별 희끔한것이 없었다. 진짜 독재건더기는 공사사장과 병원원장, 덕성이의 남녀작풍문제 뿐이였다. 그런데 그것 또한 아무리 “깡과선”에 올려놓아 봐도 도덕상 작풍상의 착오일뿐 형사문제도 아니고 적아모순은 더구나 아니였다. 다른사람들의 작풍착오는 조직에서 이미 결론한 오래전의 옛말이고 덕성이가 몇달전에 또 같은착오를 범한것이 제일 엄중한 문제이긴한데 그는 여러차례 비판 투쟁을 받았고 참답게 심각한 검사를 하였다. 너절한 짓거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때려죽일수는 없는일이고, 소위 혁명반란파로서 국가대사, 대방향을 틀어쥐고 혁명한다면서 남녀작풍문제만 들고 다니면서 열을 올린다는것도 광채로운 일은 아니였다. 사회상에서 뿐만아니라 반란파 내부에서도 덕성이를 두둔하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다. 덕성이가 잘못한건 번연한 것이지만 그럼 동호사는 어떠냐?! 자기친구의 남자를 가로채지 않았는가! 두집이 약혼식까지 치르고 당자들은 갈데까지 간걸 번연히 알면서도 동호사는 친구의 남자와 부부로 놀아났던것이다. 약혼은 두말할것도 없이 파혼이 되고 처녀는 지금도 정신이 온정치 못하다. 동호사는 친구의 남자와 정식으로 버젓이 약혼식까지 했는데, 공사당위부서기까지 올라갔던 남자가 남녀작풍문제로 곤두박질 할줄이야! 정절이 너무 엄중해서 남자는 당적, 공적을 모두 제명당하고 도루메기로 다시 농민이 되였다. 하지만 동호사는 파혼할 형편이 못되여 그들은 지금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동호사에게는 조의사와의 애매한관계 등 다른 퀴퀴부레한 뒷소리도 있었다. 우리공사에서는 문화대혁명이 화냥년놈을 잡는것이 중점이고 대방향이라면 동호사 문제도 “깡과선”에서 들춰봐야 할게 아닌가… 그리고 덕성이 두 동창이라는 작자들 밑구멍도 향기로운건 아니였다. 하나는 녀편네 궁둥이에 “깡과선”이 붙어있고(문화대혁명후 안해한테 리혼 당함.)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작자에게는 이것과 사귀다 저것과 사귀다 한 지저분한 련애사가 있었다.(문화대혁명후 죽었다.) 이러루한 추문은 웬일인지 사람들의 흥미를 쉽게 끌어서 여론이 술렁술렁 끓기 시작했다. 그시기에 “똥호사뿅색발악단”이라는 우습고 치사한 별명은 더욱 공개적으로 보급 사용 되였다. 눈치빠른 독재지휘부에서는 “9종인”학습반을 걷어치우고 덕성이를 풀이 주었다. 그사이 그들은 대비판대회 투쟁대회에 산과녁으로 끌려 다녔고 생산대에가서 로동개조를 하는등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     대방향을 틀어 쥔다면서 두개파의 예봉은 다시 각급령도에 집중 되였다. 령도 한사람을 놓고 두개파가 만든 죄장이 달랐고 따라서 처리의견도 물론 달랐는데 누가누구를 설복할수 없었다. 그때에 마침 대련합을 하라는 모주석의 지시가 내려오고 빈선대(빈하중농 모택동사상 선전대), 군선대(해방군 모택동사상 선전대)가 대대들과 기관 단위에 진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대련합을 좌파에게 통합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선전했는데, 우리공사의 좌파는 “홍색반란단”이라고 했다. 보수파들은 삶은 소대가리가 웃다가 꾸레미 터질일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반란파들은 기고만장해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수파들은 선전대와 맞서서 따지고 들었는데 사태는 날따라 험악해 지었다. 보수파 두령들은 “선전대고 나발짝이고 쫓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행동안을 짜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반란파들은 반동로선을 숙청한다면서 보수파의 대장과 덕성이를 밤중에 돌연습격으로 붙잡아다 투쟁대회를 하였다. 그들은 련 삼일밤 “검은두목”의 류독을 청산한다면서 투쟁대회를 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홍위병 맹장 아이가 뛰쳐나와 손전지로 보수파대장의 머리를 깠는데 선혈이 랑자하게 흘렀다. 분노한 보수파들은 수천명이 몽둥이를 들고 공사마을로 몰려 들었다. 공사건물을 차지하고 있던 반란파 지휘부 성원들은 재료보따리를 싸들고 어데론가 도망쳐 버리였다.     보수파대장과 덕성이는 군중들을 학교운동장에 집결시키는한편 빈선대와 군선대 책임자를 찿아 군중과 접견할것을 요구 하였다. 선전대 책임자들은 그렇게 할수 없다고 나누웠는데 덕성이가 “당신들은 모택동 사상을 선전하려 오지 않았는가, 지금 저 군중들에게 대련합을 선전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인신안전은 우리가 보증 한다.”고 재삼 설복해서야 대회장으로 갔다.     대회에서 덕성이는 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여러분들이 아다싶이 나는 창피히기 짝이없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금후에는 없을것이니 믿어달라. 우리는 모택동 사상을 완정하게 정확하게 체득하고 실천에서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다 같은 군중이다. 두개파의 갈등은 사실상 인식상의 차이다. 호상 교류에서 능히 해결될 것이다. 대련합 형세에 주동적으로 적극 나서자. 우리는 혁명적군중이 아닌가!...”    그의 발언은 눈앞이 환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참! 인물이다!”하며 찬탄을 금치 못해 하였다. 덕성이 위신은 다시 회복되여 갔다.                                           12         그후 인차 선전대 책임자들은 바뀌고 공사의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는 림시 지휘부”가 성립 되면서 두개파는 사라졌다. 지휘부는 비교적 온당한 사람들로 구성 되였는데 그들은 현 혁명위원회(얼마전에 성립)의 지시와 선전대의 방조를 받으며 주로 두가지 일을 하였다. 한개조는 혁명을 틀어쥐였는데 당면의 급선무는 간부정책을 락실하며 혁명위원회를 내여오는 것이고 다른 한조는 생산을 틀어 쥐는 것이였다.     두어달 지나 간부들 문제는 전부 락실 되였는데(병원은 제외) 모두 좋은간부로 결론되고 각급 혁명위원회 책임자로 되였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몇년을 올리뛰고 내리뛰며 주자파를 잡아내는 혁명을 하였다는 반란파들만 머슥하게 되였다. 자기들의 심술사납고 비뚤어진 량심만 내여 보인셈이 되였다. 그러나 누가누구를 비웃지는 않았다. 후에 사람들은 “세월이 환장했는데 사람이 온전할수 있나.” 하고 대범히들 말했다. 하지만, 비판 투쟁을 당한 사람이나 기를쓰고 투쟁을 한 사람이나 그리고 구경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인생교훈을 얻은것만은 사실이리라.     덕성이만 보더라도 그후로 부터는 시시한 소리가 더는 없었다.                                             13     공사병원은 직원이 아홉밖에 안되는 작은단위 였으나 공사적으로 제일 유명한 “로다난”(문제꺼리)단위 였다. 빈선대가 두사람이나 들어 갔다가 손들고 나온후 군선대가 들어 갔는데 그는 어린 한족청년이였다. 반장인가하다고 했는데 문화수준이 낮은데다가 언어장애로(병원직원들은 한어를 거이 못했다) 작용을 별로 발휘하지 못했다. 매일 오후 반날을 떼여 회의를 했는데 그는 모주석어록과 림표어록을 떠듬떠듬 몇토막 읽고는 자기말을 한바탕 했는데 누구도 알아 듣지 못했다. 동호사와 조의사 그리고 덕성이가 한어를 대충 얼버무리긴 했으나 자기의사도 바로 표달 못하는 상황에서 번역원질 한다는건 더욱 어려운일이였다. 게다가 한사람이 한개부문씩 맡다보니 환자가 오면 회의를 제대로 할수 없었다. 군선대 동지는 그런때를 오히려 더욱 좋아하는것 같았다.     대련합후 사상인식 통일을 위하여 첯보조로 학습단계를 놓고 다음은 자기의 패성을 검사 비판하는 단계인데 두달이 지나도록 공사병윈에서는 땅뗌도 못하고 있었다. 륙속 각급 혁명위원회가 세워지자 군선대는 가버렸다.     공사혁명위 원회에서는 소학교혁명위원회 부주임(녀. 말을 잘했다. 후에 작풍, 경제문제로 철직)을 공작대로 병원에 들여보내고 뒤에서는 내가 책임지게 했다.(나는 그때 공사혁명위원회에서 혁명을 틀어쥐는조에서 사업했다. 일명 떠, 피, 개ㅡ”투쟁, 비판, 개혁” 판공실이라고도 했음) 병원은 원장을 빼놓고는 모두 지식분자들이여서 원래 말을 잘하는 데다가 벙어리도 말하는 말대혁명(대변론 대비판) 단련까지 몇년 거친지라 한사람이 언권을 쥐면 반나절씩 말하였다. 그러고도 한결같이 “우선 여기까지 간단히 말한다.”고 했다. 특히 동호사와 조의사는 리론수평과 사상각오, 웅변기교를 시위하듯 어록과 사설의 단락을 넣어가며 기막힌 대론을 내리 풀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학습단계가 언제가야 끝이날지 부지하세월이였다.     녀교원은 수심이 가득낀 얼굴로 나에게 정황회보를 하였다. 인식을 적극적으로 발언들 하라고 해놓고 시간이나 차수를 제한 할수는 없고…남의 말을 듣고도 또 새인식이 나오고 인식은 새록새록 자꾸 나오고 높아만 가는데, 그건 기꺼운 신생사물이지만 운동의 진도상… 어떻게하면좋겠는지…지시해 달라는 것이였다. 이 녀교원은 소동작 (고자질)을 곧잘하며 남의 발등을 잘 디디는 수단이 있기에 조심해야 했다. 그와 동호사는 반란파 전우로서 “나는 녀교장!” “나는 녀원장!” 하며 서로 뽐내며 고무하던 사이였다. 나는 그의 사업성과를 잘 춰준후 한사람에게 반날씩 발언시간을 주면 한번 발언시간이 충족하겠냐고 되물었다. 그는 한번시간은 되겠지만 이튿날 사흘날 계속 발언을 요구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하고 물으며 문제를 나에게 도로 넘기였다. 만약 내가 발언을 적당히 제한 하라고 하면 어떤 말썽을 초래할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구두상의 발언은 이제 반날씩 더 하고 남어지는 서면상발언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한달 거이 지나 학습단계는 아쉬운대로 끝났는데 서면발언은 동호사와 조의사가 오히려 제일 적었다.                                             14     다음은 “뚸쓰피슈”(사심을 투쟁하며 수정주의를 비판)와 결부해서 자기의 패성을 비판하고 단결을 제고하는 계단인데 처음부터 긴장한 분위기 였다.     역시 사단은 동, 조가 일으켰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기의 고도로 높은 사상각오와 인식을 반나절 말한후 자기가 한 모든 행동들이 모주석의 무산계급사령부를 바싹 따른, 모택동사상과 혁명로선에 충성한 가장 정확하고 혁명적인 것이였다고 “검사”하였다. 그러면서 락후한 사람들의 파괴와 저애력과 견결한 투쟁을 진행한것이 자산계급패성이였다고 어처구니도 없는 발언을 하였다. 그말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격분한 사람들도 분분히 앞다투어 그런식으로 발언했는데 이거야말로 서로 빗대고 공격하기 였다. 패성을 비판하고 단결을 제고하기위한 학습반은 되려 패성을 추켜들며 분렬을 조장했다. 마치도 문화대혁명 초기로 되돌아 간것만 같았다. 발언은 점점 첨예해 지면서 변론으로 치달았다.     녀교원은 또 나한테로 달려와서 대책을 상론하였다.     나는 격동과 감정충돌을 제지하면서 사실을 내놓고 도리를 따지는 방법으로 충분히 변론하게 하라고 하였다.     모순은 폭로해야 해결되는 것이다. 만약 혁명이라는 외의속에 불순한 동기와 사심이 숨어 있었다면 폭로하고 개조해야 한다. 사심을 가지고는 혁명을 잘할수없고 자신도 좋은 사람으로 될수없는것이다. 사람이란 량심이 나쁘면 남을 해치게 되고 자기도 좋을수 없는법이다.     원장을 투쟁한 일련의 작법과 덕성이를 돌연적으로 투쟁한 사실, 그리고 다른 반란행동들은 동호사가 아무리 궤변을해도 그의 난처한 처지를 개변할수없었다. 변론할수록 그의 본질만 발가져 나왔다. 사람들은 동호사를 꺼리며 싫어했다. 그와 호흡이 맞는 조의사도 표면상에서는 거리를 두었다.     문화대혁명 전 기간 조의사는 두 파 사이에서 계산적으로 행동하였는데 자대는 누구에게도 인심을 잃지않으며 자기위신을 높히는 것이였다. 하지만 원장과 공사당위서기에 대한 그의견해는 동호사와 똑 같았다. 오직 동호사처럼 공개적으로 표면에서 날뛰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음으로 양으로 기회만있으면 자기는 어릴때부터 가정성분(상중농)때문에 눈치를 살피며 언행을 무척 조심해서 나쁜일을 하지않았다고, 의식적인 노력으로 늦긴했이도 소선대, 청년단에 들었고 수년간 꾸준히 당을따라 당원표준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퀴퀴한 소문에 대한 방패막이와 자아변호라는것을 사람들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가 음특하고 의뭉한 사람이라는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동호사처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호사나 그처럼 확실하지않은 남의 치부를 기어코 캐려고 하지않았다.     어느날 내가 덕성이에게 동호사, 조의사에 대한 시시한 소리는 나오지 않는가고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그사람들이 나를 제일 비판했는데…그럴수있나. 혹 어떻다해도 조용히 교육할 일이지…”     두달남짓 옥신각신한 끝에 이 계단을 대충 끝내 버렸다. 얼마후 공작대 녀교원도 철수해 버렸다.     병원의 혁명과 생산은 다시 령도소조에서 맡아 안았는데 소위 조장인 중약제사는 동호사와 조의사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였다. 병원의 권력은 사실상 동호사와 조의사의 손에 들어갔다.     혁명위원회를 건립하기 위하여 원장에 대한 정책락실을 진행하게 되였는데 동호사와 조의사를 비롯해서 네사람은(중약제사와 당원 녀의사) 철직을 주장했고 덕성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직무를 회복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동호사네들은 원장과 입당한 녀의사를 작풍상에서 어떤문제가 있다고 걸고드는 한편(녀의사의 입당을 왜서 동의했는가?) 원장이 조선전쟁후퇴당시 력사가 의심스럽다고 따지고 들었다. 중상을 입고 홀몸으로 두달이나 적후를 돌다가 빠져 나왔다는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원장을 적의 특무일수도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기발한 상상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병원의 계급대오청리를 먼저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계급대오청리란 자기의 성분, 사회관계, 력사를 똑똑히 밝히고 결점과 착오를 철저히 교대하고 계듭투쟁, 로선투쟁, 계속혁명 사상각오를 제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민정풍이고 적아를 분명히 계급대오를 정돈하는 것이다. 방법상 적발, 질문, 비판, 조사, 증실을 동시에 모두 사용할수 있었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씩 고비를 넘어야 했다. 병원은 직원이 아홉밖에 안되는 작은 단위였으나 몽땅 외지조사를 해야했고 어떤문제는 이렇다 저렇다 결론할수 없어서 걸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4인패가 멸망된후에 몽땅 없던일로 흐지부지 싱겁게 취소되여 버렸다.) 례하면 원장의 후퇴시기력사,(특무혐의) 로중의사의 해방전력사(일본, 한국, 중국 길림시 부근에서 해방전에 살았는데 일본, 남조선, 국민당 특무혐의) 그리고 덕성이 신상 수수께끼였다. 성분, 사회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겠는지… 혁명자로서 무산계급 경각성과 투쟁성을 높혀야 한다고, 덕성이력사를 까다롭게 캐고든 사람은 동호사와 조의사 그리고 다른 한 입당적극분자호사(얼마후 남편있는곳에 전근. 조의사와 관계애매. 몇해후 남편이 남녀작풍문제로 감옥에 가자 리혼을 했는데 정신이 나빠졌음.)였다. 그야말로 강생, 강청식 사고방식과 수법이였다. 특히 동호사와 조의사는 자기의 리익에 방해된다고 인정되거나 어떤일로거나 혹은 공연히 밉게본 사람은 기어코 타격하고 배척하려 했다. 덕성이와 중의사는 다른사람들과 함께 원장의 복권문제로해서 그들과 첨예하게 맞섯을 뿐만아니라 입당심사시(군중들도 견해를 말하게 했은.) 반대발언을 했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에게 미운털이 박혔지만 덕성이와 중의사는 눈에든 가시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틀어쥘만한 쪽지가 있었든 것이다. 하여 원장까지 그들 셋은 계급대오청리에서 소위 “력사문제”에서 관을 넘지못하고 걸려 있게 되였다.                                                   15     이악스런 동호사와 음특하고 의뭉스러운 조의사는 덕성이를 될수록이면 하찮은 인간으로 폄하하려고 애를썼다. 그들은 덕성이를 일본애라느니 술집간나가 낳은애라느니하며 그의 두 동창 등 사람들과 이미전부터 후론을 많이하며 비웃어왔는데, 계급대오청리가 시작되자 덕성이 력사를 철저히 밝혀야 한다고 정식으로 들고 나왔다.     하여 나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의 아버지 한테로 가서 증실재료를 받아오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 말에 따르먼 덕성이는 조선 회령읍 사동에서 1943년에 태여났는데 생모는 쏘련으로 간다고 했고 생부모들은 항일하는 사람이라는 한마디 말밖에는 들은것이 없다고 하였다. 해산한지 두주일이된 덕성이 생모는 반듯하고 고운 젊은여자였는데 얌전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는 덕성이 부모에게 아이를 훌륭한자식으로 잘 키우길 진심으로 축원한다고 단 한마디말 밖에 하지 않았다. 당시 덕성이 아버지는 사동에 있는 작은야장간에서 일했다. 그는 늦장가를 간데다가(가난때문에) 아이를 련이어 둘이나 다 잃고 세번째 애도 백후로 잃은지 얼마 안 되였는데 사람들이 불쌍한 애를 하나 키우면 훗날이 좋다고 권고한바도 있지만 그때 덕성이 어머니는 마침 젖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사동장마당에서 오구랑죽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통하여 아이를 영영 가진다는 전제로 덕성이를 안아왔던것이다. 덕성이 생부모에 관해서는 오구랑죽장사할머니가 잘 알 가능성이 많지만 덕성이 부모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구태여 알아두려고 하지않았고 비밀을 철저히 지키자는 다짐만 하였다. 덕성이를 안아온후 소문이 나지않게하려고 그들은 인차 조선 무산읍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덕성이 아버지는 무산철광에서 날품을 팔며 살다가 광복이 된 이듬해 이듬해 중국 처가마을로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또 억지공사로 떠미는 이주민으로 멀리 갔다가 다시 처가마을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덕성이 앞가슴에서 붉은넥타이가 팔랑팔랑 날릴때였다.     오랜세월 모진가난과 고생속에서 덕성이 어머니는 을병이 들어 마르고 허약해서 할머니처럼 늙었고 덕성이는 또래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고 까무잡잡했다. 그러나 몹시 령리하고 귀여웠다. 덕성이 부모들은 덕성이아래로 또 아이를 셋이나 잃고 끝으로 딸애 하나를 키웠는데 훗날이 좋다던 말이 맏는다고 해야할지, 틀린다고 해야할지… 어쨌든, 가난이 원쑤인것만은 사실이다.     덕성이 외할아버지는 외손주가 귀여워서 하는 소린지 아니면 찌뿌둥해서 그러는지 쩍하면 “일본노무새끼 같은게”하고 말했는데 집안에서만 하는 소리를 부실한 그의 막내딸이 밖에 나가서도 그렇게 말했다. 마을사람들은 그저 애를 욕하는 소리겠거니 했을 뿐이다.(그때는 그런말로 욕을 잘했다.)     우리가 초중학교를 다닐때부터 위에서 말한 두동창과 몇몇애들이 (그들은 모두 다른마을의 애들이였다.) 덕성이를 “일본새끼”요 “술집간나새끼”요 하고 놀려 댔는데 우리 생각에도 그건 너무 지나친 롱담이고 모욕적인 것이여서 다른 친구들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마을에서는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덕성이를 “얻어온 애”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때 내가 부모들께 덕성이에 대해 물으니, 그이들은 벌컥 성을 내면서 그런 미친소리를 누가 해?! 싱싱 자라는 애를 누가 그렇게 더렵혀?! 하며 되려 나에게 욕사발을 퍼 붓는 것이였다. 덕성이는 쾌활한 성격이여서 친구들의 그런 놀림을 근본 탄하는 법이 없었고 전적으로 롱담인줄로 알았다. 우리도 전혀 믿지않았다.     덕성이 부모들은 량심이 바르고 선량하고 마음씨가 무던한데다가 아버지는 침구와 토방법을 퍼그나 알아서 마을사람들을 열두밤중이라도 곧잘 도왔으며 어머니는 바느질, 음식솜씨가 좋아서 역시 마을사람들의 일손을 자주 방조했다. 덕성이네는 마을인심이 매우 좋았다.     덕성이 부모들이 그토록 고생하며 애를 쓰고 지켜온 비밀이, 30여년이 지난 지금에와서 동호사와 조의사에 의하여 덕성이 “력사문제”로 불거져나오며 만천하에 폭로될줄이야!... 참으로 맹랑하고 어처구니가없는 일이였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였다.     덕성이 부모는 진짜고농인데(중국에 온후 부농집 땅을 소작했다.) 그들이 안아다 애지중지 줄곧 지금까지 키워온 핏덩이 아들이 그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생부모가 만약 친일파거나 특무, 지주, 자본가라면 덕성이도 계급의 적이라는 말인가… 자기들의 상중농성분에 대해서는 분자(부모)와 자녀(자신)를 절대 혼돈하면 안된다고, 부모가 반동이래도 자식은 혁명자일수 있다고 얼마나 말 잘하던 그들이였든가... 그들의 심보는 “력사문제”라는 정정당당한 제목을 가장 혁명적인 어구로 표달해서 자기들의 높은 혁명적사상각오를 표현함과동시에 작풍문제까지 겯들어 밉살스럽길 짝이없는 덕성이를 기껏 똥칠해 놓자는 거기에 있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대기후가 량심이 바르지못한 어중이 떠중이 야심가들에게 활무대를 펼쳐주었다면 계급대오 청리는 그들이 마음껏 사람잡이 기량을 한바탕 발휘할수 있게, 야심실현에 박차를 가할수 있게 또 한 막을 마련해 주었다.     동호사와 조의사는 덕성이 아버지의 증실은 제집식구가 한 것이여서 무효라고 주장했는데, 통일적 결론을 도무지 내릴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코막고 답답한 노릇이였다. 당시는 특무요 지하당이요 하면서 누가 계급의 적인가해서 반란파들 끼리도 눈에 쌍불을 켤때였다. 덕성이는 착오가 있는데다가 의심스러운 인물로까지 되여 걸려있는 수 밖에 없었다.     어느한번 회의에서 조의사는 덕성이를 비판방조한다면서 “필요없이 젊은여자의 젖가슴에 청진기를 대고…곁에있는 내가 다 어떠하고 아짜아짜 했다… 나는 늘 덕성이를 강변에 내 놓은 아이처럼 시름놓지못하고 근심하게 된다.”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못박아 놓으면서 멸시하고 자신을 슬쩍 분칠했다. 그날 덕성이는 역겹길 짝이없고 분통이 치밀었으나 꾹 참았다. (당신이 그토록 극진히도 나를 생각해 왔는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 내가 언제 필요없는 청진을 했는가. 당신 참으로 말과같이 음특하고 의뭉한 사람이구만. 아니, 엉큼하고 능청스럽군.) 그후 어느날 조의사는 회의전 몇사람이 있는 좌석에서 밑도 끝도없이 덕성이 안해 이름을 부르며 “오늘밤 나한테로 오너라. 우유를 한고뿌 먹여 줄게.”하고 추잡한 롱담을 하였다. 그들 사이는 년령차이도 차이였지만 그런 육담은 말할것도 없고 보통의 우스개도 원래부터 하는 사이가 아니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무안과 창피로해서 덕성이 안해는 얼굴이 빨개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는 어질고 말주변이 퍽 약한 여자였다. 인차 회의는 시작되고 롱담은 이상한 여운만 남기였다.     며칠 지난후 동호사는 덕성이 안해에게 긴히 생각해주는 친절성을 무등 보이면서 덕성이는 너무도 너절하고 여지없는 사람이여서 당초에 짝이 안되니 “걸려있는” 이때에 리혼하고 새출발을 하라고, 좋은 사람이 있으니 소개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때에야 정신이 번쩍든 덕성이 안해는 “당신들! 시시하게 놀지 말라. 우리는 당신들을 언녕부터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하고 면박을 주었다. 그때 덕성이는 대대로 하향 나가 있었다. 덕성이 안해는 이런 사실을 우리부부에게 말하면서 매우 격분해 하였다. 훗날 내가 덕성이에게 그 너절한 사람들을 가만 놔 두엇냐고 물으니 덕성이는 대답하기를 “ 그따위를 뭘!... 그보다 나는 내 허물이 너무도 후회 되였네.”하는 것이였다.                                 16     중의사에게 3국특무 혐의를 제일 처음으로 창조발명해서(기실은 창조발명도 아니다.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 강생 강청과 형제반란파들 한테서 배운것이다.) 덮씌운 사람도 동호사와 조의사였다. 중의사도 그들의 입당심사에서 “바른소리”를 했던 것이다. 동호사와 조의사가 너무도 끈질기게 달려들자 중의사도 그만 악이 나고 말았다. 너희들이 쩍하면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사람잡이를 하는데 누군 몰라서 가만있는가. 어데 한번 맛 좀 봐라! 중의사는 이런 반발심으로 어느날 밤 회의에서 조의사의 가정성분과 력사를 다시 심사해야 한다고 맞공격을 들이댔다.     “조의사가 제입으로 말말간에 장을 비는식으로 은근슬쩍 자주 말해온바지만, 쬐꼬만 애새끼때부터 눈치보기를 하며 살아왔다고 하니 절대루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였는가? 왜서? 어떻게 살피였는가… 이런 사람은 속에 꼭 꺼리고 원망하는것이 있고 야심과 음모가 있다. 속에 꺼리낄것이 없는 광명정대한 사람은 누구 눈치보기를 할 필요부터가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잘못이 있어도 다 털어놓은 사람은 발편잠을 잔다. 내가 보기에는 문선생이 그렇다. 무슨 지하당에 들었는지 무슨 퀴퀴한 노릇을 했는지 알게 뭐람. 흥! 조의사 같은 사람은 속을 알수없다. 믿기 어렵다….”     워낙 말을잘하는 중의사가 한바탕 내리 엮으니 반박할 재간이 없었다. 귀에걸면 귀걸이고 코에걸면 코걸이가 되는 이런궤변을, 게다가 몇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함께 우기기만하면 누구를 잡아 족치기에는 충분한 그때 그 세월이였다. 그는 조의사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문제를 만든후 동호사도 납작하게 만들어 놓을 작정이였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신이 있었든 것이다. 하지만 중의사는 독불장군으로 구류소로 쓰는 빈집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련속 3일밤 중의사 대 조의사, 두 입당적극분자(동호사와 다른호사) 가 한편이 되여 치렬한 변론을 하였다. 원장과 덕성이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은 지지도 반대도하지않고 하회를 지켜보았다. 중구난방으로 중의사는 궁지에 몰려 비판투쟁을 받게 되였다. 동호사와 조의사는 애비벌되는 중의사에게 마구 해라를 하며 멱살을 잡아 흔들고 귀통을 치기까지 했다. 그들은 마치도 마친사람이 광기를 쓰는것 같았다. 끝내 그들은 “위대한 계급대오청리운동을 교란 파괴하였다!” 는 현행반혁명죄장을 씌우고 자칭 혁명을 주관한다는 동호사가 궁둥이에서 불패소리 나게 뛰여다니드니 공사혁명위원회주임(공사당위서기. 어느 진 홍색반란파총지휘 였음. 훗날 녀지식청년 동호사 등 수명의 여자들과 작풍문제로해서 감옥에 갔음) 과 숙덕거린후 중의사를 구류소에 집어 넣고야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돌변하자 덕성이 등 군중들이 떠들고 일떠나 그들과 대항하게 되였는데, 병원의 혁명과 생산은 란장판이 되고 전공사 여론이 왁자하게 되였다. 십여일후 현의 공작조가 와서 중의사를 석방하고 병원을 종전대로 돌게 하였다. 하지만 누구를 잡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일장풍파는 평정 되였지만 병원은 더욱 “로다난”(문제꺼리 애물단지)단위로 되여버렸다.     후에 중의사는 그때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죽을생각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애가 밥을 날라 올때면 그것처럼 가슴 터지는 일이 없더라는 것이였다.                                      17     공사병원은 자체로 자기문제를 해결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것인가?... 공사혁명위원회에서 한창 속을 태우고 있는데 우뢰소리같은 회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현과 지구급병원에서 “6,26백의전사”가 한꺼번에 십여명이나 안배 되였는데 그중에는 혁명위원회주임, 부주임까지 있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오뉴월에 쓰고있던 누더기를 벗어 던진것같이 통쾌했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제코를 제가 씻지 않으리…     그때는 또 각자 자기단위로 돌아가서 혁명과 생산을 하라는 시기였다. 더는 남의 젯상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말고 제노릇이나 착실히 하라는것이였다. 홍위병애들도 이젠 그만했으면 됐으니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반란에 재미를 붙인 불량끼 있는 애들은 그래도 반란할것이 없나해서 사회를 기웃거리며 돌아 다녔는데, 어데서나 “너들 여긴 왜 왔어? 또 무슨 못된짓을 할려구…되지못한 송아지새끼 엉뎅에서 뿔 난다구, 어서 학교루 가 공부나 해! 쬐꼬만 애새끼들이 어른들을 호령하다니 엑! 드르워서 쯧쯧쯧. 무슨 개망태기 판인지…”하고 거침없이 야단을 치는것이였다. 그전같으면 선자리에서 모가지가 달아날 소리를,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정정당당하였다. 홍위병이니 반란단이니 반란파요 하는것이 이젠 다 한물이 지나갔던것이다. 단위는 단위끼리 사람은 사람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18     이제부터는 모택동저작을 활학활용하는 자만이 값이가는 한막이 열려졌다. 말하자면 모택동사상으로 사상혁명화를하고 계속혁명을 해야하는데 말과 행동이 따라가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전날에 반란경력을 갖고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영광스러운 경력으로, 무슨공로를 세운것처럼 생각하며 자기를 다른사람들보다 한단계 높은 한발작 앞선 혁명자로 자부했다. 병원의 동과 조가 바로 그런 사람이였다. 그리고 그때에도 혁명적투쟁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반란으로 일어난 사람들을 선진분자로 인정해 주었다. 사람들은 량심 나쁜것들이 득세하는 별난 세상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위로는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가 호령하고 아래로는 각급 혁명위원회가 받들고 있으니 나중에 어찌되나 지켜볼 뿐이였다. 림표와 쿵로얼(공자)을 납작하게 죽여놓고 뚸쓰피슈를 하며 매일 “로삼편”과 어록, 최고지시, 중요문장을 학습하면서 특히는 모택동저작과 사상을 활학활용하는 운동을 고조로 이끌면서 천하는 대란으로부터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서는 “복벽”(국가의 정상상태 회복)과 “계속혁명”의 새로운 투쟁이 차츰 심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는 활용에 중점을 두다보니 자연히 입살이 드센것보다 손발을 놀리는것이 더욱 값이가게 되였다.     혁명위원회주임 벼슬을 달고 “6.26백의전사”로 내려온 박주임은(현병원 내과부주임) 활용파 였다. 부주임은 활학파로서 말로는 누구보다 더 혁명을 잘 했으나 위신이 없었다. 그는 행정인원이였는데 간이 나쁘고 술중독이여서 타락해 가는 사람이였다. 원래의 원장은 당지부 부서기로 있다가 얼마후 현성에 있는 진병원의 당지부서기로 전근했다.     박주임은 진심으로 농촌의 의료, 위생면모를 크게 개변하려는 포부를 품고 사업을 억세게 틀어 쥐였다. 그는 맨발의사 대오를 건전히 하며 합작의료 (대대위생소. 즉 지금의 촌위생소)를 꾸리고 3급의료위생망(향, 촌, 촌민소조)을 건립하며 의료와 위생방역, 계획생육, “3토4자”(토의사, 토방법, 토약. 자체로 배양하고, 자체로 재배하고, 자체로 만들고, 자체로 사용), “량관5개”{음료수와 분변관리. 우물, 변소, 돼지굴, 퇴비장, 환경 등 개혁.}, “사해소멸” 등 농촌의 의료워생사업을 전방위적으로 활발하게 힘차게 추진했다. 그는 무산계급정치통수, 사상혁명화를 견지하고 동력으로 각항사업을 이끌었다.     당시 어느 대대에 부농성분인 로중의가 있었는데 원근에 명의라고 소문났고 군중위신도 좋았다. 하지만 박주임은 그를 밀어내고 자기가 선택한 자습위주 배양중인 초학자를 그 대대의 맨발의사로 앉치였다.     그때 대대 당지부와 혁명위원회, 군중들의 반발이 컸는데 제일 마구잡이로 범무서운줄을 모르고 소리를 친 사람은 대대빈하중농협회주임이라는 로당원 늙은이였다. 그는 “개코두 모르는 햇내기를 의사질하라고 하구 군중들이 좋아하는 한뉘 의사인 명의는 쫓아버리는 그런 철딱서니 없는 지랄이 어디 있는가.”하며 기승을 부리였다. 박주임은 병원의 당원들과 동호사 조의사 등 골간들을 이끌고 련며칠 밤마다 그 대대로 가서 로선시비를 했다. 대대 로선시비대는 병원대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서너번 붙어본후 다른 전투원들은 백기를 들고 투항을 했는데 제일먼저 항복한자들로는 서기 부서기 주임 부주임 등 사령부 일급들이고 끝까지 비전향투사로 사책에 이름을 남긴 영웅은 빈협주임 로당원 늙은이였다. 그는 “이제 병이나서 다 써거져{죽다}봐라!”하고 최후의 악담까지 했다. 뿐만아니라 “진리는 소수인에게 있다.”고 한 모주석의 말씀까지 활용하면서 비분강개해서 웨쳐댔다. 워낙 알짜 빈농로당원인데다가 그때는 마구 모자를 씌우는 때가 아니여서, 인식문제로 그쯤해 두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후에 진행된 “토구납신”(낡은것을 내여 보내고 새것을 받아들 임.)운동에서 그는 류소기의 자산계급 수정주의 류독을 토구하고 모주석의 무산계급 혁명적 위생로선을 납신하고야 관을 넘었다. 그후 그는 대대합작의료를 적극 받들어 주었는데 초약재배지도 좋은 밭뙈기를 떼여 주도록 주장하고 틈틈이 일손을 자원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다.     훗날 맨발의사는 선진인물로 되여 전국 위생공작 좌담회에 박주임과 함께 참가하기까지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붉은기수” 강청을 뵙는 영광까지 지니고 돌아왔다.     그번 로선시비에서 가장 표현이 돌출했든 사람은 부주임(활학패. 말로만 혁명하는 사람이라는 뜻), 동호사, 조의사, 박주임의 안해{현병원 내과의사. 무도쟁이. 퀴퀴한 말이 많았음.}, 그리고 다른 한 “6.26백의전사” 리의사였다. 어느날 밤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경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한창 자고있는 로중의 부농의사 늙은이를 끌어다가 산과녁으로 한바탕 투쟁하기까지 하였다. 조의사는 그한테서 짬짬이 중의를 배우며 험방, 밀방을 얻느라고 술병을 들고 슬금슬금 드나들던 사람이였는데{훗날 그 밑천으로 중의 흉내를 내며 돈벌이를 했으나 그닥지 않았다. 그는 로중의를 모시고 더 배우는 것인데… 문화대혁명때문에 랑패를, 보았다고 툴툴 거렸다.} 어느틈에 현성에 있는 “피해자” 환자까지 불러와서 부농의사는 그의 호된 투쟁까지 밤새껏 당하는 졸경을 치루었다. 세번째 날에는 박주임의 건의로 대낮에 전 대대의 군중들을 모아놓고 부농의사의 류독을 숙청하는 대회까지 하였다. 그 환자는 간경화, 신염으로 오래앓은 사람인데 부농의사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두달가량 부지런히 다니면서 약을 썼다. 그후 병은 완전히 치료가 되였다. 하지만 그는 조의사의 계발교육을 받고 부농의사와 철저히 계선을 가르고 투쟁을 했는데, 투쟁하는 리유로는 “그 먼 현성에서 차비를 숱해 팔며 뢰물까지 사 들고 앓는 몸으로 숱한 고통을 겪으며 치료를 다녔는데… 왜서 빨리 치료해 주지 않았는가?! 그 숨은 심보를 탄백하라!”는 것이였다. 워낙 쇄된 목소리로 구호를 잘 부르는 동호사는 조의사에게 한발 떨어진것을 감지하고 미봉책으로 최고음 악청을 다하여 10여가지 구호를 여러번 선창했다. 부농의사는 “돈을 빨아먹기위해 그랬다. 약값외에 받은것은 모두 배상하겠다.”하고 탄백과 함께 결심발표까지 하고서야 풀려났다. {병술과 사탕 과자 따위}     로선시비에서 소극적인 사람들은 원장과 중약사, 당원녀의사, 그리고 덕성이 등 따라다니던 군중들이였다.     부주임, 동호사, 조의사 등 다섯 사람은 박주임의 이번 전역에서 큰 역활을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의사는 대공을 세운셈이다.     하지만 다른 전역들에서는 그들의 역활이 미약했다. 박주임은 그들을 2선 즉 병원문진이나 지키게 하고 말보다 실제적인일을 잘할수있는 사람들로 하향공작대를 묶었다. 이 공작대는 로선시비에서 소극적이였든 사람들로 조직 되였는데 그들은 박주임의 기대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하였다. 특히 덕성이는 박주임의 모사면서 유력한 맹장이였다. 난제는 그가 가면 원만히 풀리였다. 공사당위서기(투쟁받던 원 당위서기)와 현, 지구 하향공작대들은 덕성이를 능력있는 간부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생활작풍문제는 꺼림직 했다.     박주임은 위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억척스레 사업을 전개했다.(적절한 치료기를 놓쳐 후에 위암으로 사망.) 우리공사위생원은 성의 깃발로 되여 성과 중앙의 령도에서 시찰을 왔었고 성내 여러곳에서 참관 학습을 왔다.     박주임과 초년생 맨발의사의 활학활용강연테프와 문자재료는 위생계통 뿐만아니라 다른부문에서도 학습재료로 하였다.     명성이 날리게 되자 지구급 당보에서 취재를 왔는데 책임심ㅡ직업도덕이 높은, 융통성 령활성이 없는 고지식한 기자는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여러사람들을 채방했다. 결과, 표양도 있었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특히 합작의료의 “3토4자”에 대하여 군중들은 의견정도가 아니고 원망을 했다. 그중에서도 토약에 대해서는 “개짓을 한다!”면서 비난하고 풍자하고 심지어는 증오까지 했다. 그들은 공사위생원에서 만든 “서슬”주사를 맞고 어린애 한명과 어른 한명이 죽은 일을 분노해서 떠들었다. 그러면서 “토약을 만드는 자도 없고 믿는 자도 없으며 쓰는 자는 더욱 없다.”고 하였다. 사용률이 몇프로고 효과가 좋아서 군중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농촌의 췌의쑈요(의사가 결핍하고 약품이 적다.)가 근본상에서 해결되였다는 소리는 “당나발, 개나발”이라고 하였다.     덕성이는 “3토4자”에 대하여 박주임과 질량, 효과, 사용을 놓고 여러번 견해상 충돌이 있었다. 그는 “3토4자”를 아직은 그렇게 높히 긍정하며 성과를 회보하거나 경험소개를 할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른 항목들은 궤도에 올랐고 량성순환을 하기 시작했지만 “3토4자”만은 아직 모색계단이고 박주임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근본문제를 해결한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했다. 그러면서 대약진때의 허풍치기 과대보고 작법을 쓰면 안된다고 거침없이 내뱉았다.     박주임은 너는 하나만알고 둘은 모르는 단순한 놈이라고 하면서 한심하다는듯 허허허 웃었다. 하지만 말은 옳은말을 하였다. 덕성이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였다.     기자가 그를 찿았을 때에도 그는 자기견해를 그대로 말하면서 이것이 중점적으로 틀어쥐여야할 미완성의 임무이며 연구과제라고 덧붙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상급에서는 박주임의 회보와 활학활용강연에 더 구미가 당겨했다. 신생사물(합작의료)의 생명력과 위대한 성과가 정치적으로 더욱 급히 필요하고 수요됐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공로이며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로선의 승리였고 신생사물인 공사와 대대혁명위원회의 성적이였고 병원, 박주임의 성적이였든 것이다.     박주임과 초년생 맨발의사는 전국농촌위 생공작좌담회에 가서 강청을 뵈옵기까지 했는데, 현 혁명위원회에서는 문교 위생 을 책임졌다는 부주임이 갔는데 그는 뚝불기같이 현병원 외과 수술실 호사를 데리고 갔다. 금후 계획생육수술을 선진적 방법으로 잘하기위해서 어쩌구저쩌구 했는데 그건 가랑잎으로 하문 가리기였다. 사람들은 입을 씰룩거리고 코를 찡긋거리였다. 이 부주임은 현 홍색반란총부 총지휘였는데 농구창공인이였다. 수술실 호사는 그의 반란파 전우였다. 그는 좌담회에 갔다온후 인차 입당을 하고 현병원 혁명위원회부주임이 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가 몇년후 두사람은 “대류망” 이라는 명함을 달고 쌍캐출(당적, 공직박탈)을 당했다. 지구신문에서는 묵묵 벙어리였다. 다만, 위생방역과 “량관5개”를 틀어쥔 성과와 경험이 손바닥 두개만한 자리에 3면기사로 발표 되였을 뿐이다.     후일담이지만, “췌의쑈요” 궁벽한 농촌에 영원히 뿌리를 든든히 아주 깊히 박고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적위생로선을 활짝 꽃피우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하겠다면서 숨가삐 달려왔다던 영광의 “6.26백의전사”들은 선후로 몽땅 가버렸다. 4인패가 꺼꾸러진후 중앙에서는 수요 및 구체상황에 근거하여 적절히 조절하여 일부분은 원 단위로 돌아갈수 있다고 했으나 그때까지도 뻗치고 있던 신생사물ㅡ 혁명위원회에서는 “엣다 모르겠다. 다 가라.”하는식으로 몽땅 돌아가게 했다. 달아나는데 선후차이가 있은것은 뒷문 여하에 있었다.     우리공사위생원에는 시가지에 있는 안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퇀환(마비)이 온 “6.26백의전사”가 있었는데 그는 현과 지구혁명위원회를 수차 찿아가서 닭이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사정해서야 제일 마감으로 전근해 갔다. 그는 너무도 순진한 사람이였는데 단위에도 혁명위원회에도 힘써 줄만한 사람이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6.26전사라는 백의가 있었기에 시가지 안해 곁으로 갔지만 당원녀의사는 6.26이 아닌데다가 뒷문도 없고 립장상 쓸수도 없어서 시가지 남편곁으로 가지못하고 근 10년을 견우 직녀같이 살았다. 아이는 시집에 맡기고 그러다가 끝내는 리혼까지 당했다. 후에 재혼을 했는데 남편이 많이 활동을 했기에 3년후 작은 진시가지로 전근을 했다. 50을 코앞에 둔 때였다.     박주임은 원 단위로 돌아간후 옛날자리 그대로 내과부주임이 되고 그가 힘써 수립한 맨발의사는 그의 상급인 위생국 부국장으로 되였는데 혁명위원회가 없어지면서 그의 감투도 인차 날아났다. 훗날 그는 강청덕에 상해구경을 했고 혁위회 덕에 부국장 감투를 몇달 써 보았고 공사위생원의 직공으로 월급쟁이가 되였다며 감사하다고 하였다. 그가 부국장으로 영전하자 대대에서는 부농의사를 다시 썼다. 그런데 그는 얼마간 하다가 사직을 했다. 리유는 “3토4자” 등 형세의 요구에 따라갈수 없다는 것이였다. 합작의료는 그의 제자였던, 맨발의사와 함께 일하던 약제사가 넘겨 받았다.                                            19     “토구납신”운동이 시작되면서 신 당원을 받아 들이는 활동이 활기를 띄었다. 공사당위에서는 한해에 두번씩 입당지표를 지부에 주었는데 그래도 적극분자들의 갈망을 전혀 만족줄수 없었다. 누구나 다 입당하고 싶어했다. 아마5류분자, 9종인들도 입당하고 싶었을테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그림의 떡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너무도 개선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은 역경속에서 벗어나고싶은 본능이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갈망은 당시로서는 어처구니도 없는 공상, 망상이였다. 그들은 무산계급독재의 대상들이였고 아무런 인권도 없는자들이였던 것이다. 덕성이도 그중의 일원이였다.     그런데, 덕성이는 또 입당적극분자기도 하고 위생원의 골간이기도 했는데 지어는 사람들이 박주임조리라느니 장래의 원장감 이라느니 했는데 자신도 자기가 무슨 배역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생활작풍 허물로해서 바람쟁이로 널리 조명이 났으니 입당도 벼슬도 다 어려울 것이고 오직 사업을 잘하여 당과 인민의 호평을 받는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이 두가지만은 명석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입당도 벼슬도 자기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것이라고 인정했기에 사상상 그어떤 부담도 없었다. 자수안맹을 했으니 누구를 원망할일도 없었다. 부담이라면, 누구나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안해에게 량심상 내내 미안한 것이고 같은착오를 다시는 더 범하지 말며 깨끗하게 살아야 겠다는 그 한가지 뿐이였다. 하지만 그는 문뜩문뜩 떠오르는 량심의 가책과 참회의 마음으로 해서 괴롭고 후회되고 고통스러울 때가 어쩔수없이 자주 있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쑨죽이 밥이 되랴…훌륭한 의사로 꼭 되겠다!”하고 결심을 다지고 다지면서 자기의 마음을 달래며 용감하게 일어섯다. 그는 자기는 당의문앞에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안해는 꼭 입당해야 한다고 안해에게 자주 말했다. 안해는 그의 마음을 리해 하였다. 착오는 고치면 좋은 동지라고 말하지만 생활작풍 착오만은 모든 사람들이 당사자의 이마빼기에 락인해놓고 죽은후에도 손가락질하는 치욕스러운 멍에였다. 입당하겠다고 그치욕의 허물을 어떻게 만천하에 제입으로 공포를 하겠는가! 그들부부는 입당심사시의 자아소개, 자아감정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졸아들고 온몸이 떨리면서 소름이 끼쳤다. 사실상 그들부부는 이렇게 천진무구한 량심을 소유한 사람들이였다.     공사당위에서는 병원지부에 매번 한명의 지표를 주었다. 병원에는 이름을 걸어놓은 적극분자만해도 10여명이 되였다. 그속에는 두말할것도 없이 덕성이 부부도 있었는데 동호사와 조의사는 10여년의 자격을 가진 원로형 적극분자였다. 죽은 한공기고 배가죽이 등때기에 가 붙은 중대가리는 한구들 되는데, 사태가 이러다보니 누가누구에게 자비심을 베풀거나 사양하는 공산당원의 고매한 풍격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다. 입당을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여온 적극분자들은 심사시기만 되면 고도로 긴장해 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당원표준으로 바싹 단속하는 한편 경쟁자의 약점을 수집 장악하기에 그야말로 혈안적이였다. 아이들이 원족에서 보배찿기보다 더욱 맹렬했다.     이면에서 병원에서는 동호사와 조의사를 당할자가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10여년의 실천을 통하여 풍부한 경험과 교훈 및 수완을 구비하고 있는 실력가였다. 그리고 눈에 달이 올랐다. 왜서 그렇지 않겠는가. 앉은 석동도 창피하기 그지없는 놀림감인데 10여동이란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는! 이번에는!”하며 매번 이를 깨물고 적비상전을 했지만 번번히 락방을 하면서 오늘까지 왔든것이다.     “파퍼운동”(올리막 톱기. 모택동사상, 무산계급혁명로선, 계급투쟁각오에 자기를 대조하여 뚸쓰피슈를 하며 사상인식, 각오를 제고하는 운동)이 거이 마무리 되여가는 때에 잇따라 또 납신을 하게 되였다. 당조직의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신 당원을 받아들이라는 모주석의 최고지시, 명령에 따라 지부의 입당심사에는 전체 당원, 본인, 그리고 군중대표가 참가했다. 때로는 상급당위에서 순시원이 내려와서 참석하기도 했다. 순시원은 근엄하기가 국제공산조직에서 온 관찰원 같았다. 무엇을 적기도 하고 그러나 말한마디 없이 앉아 있다가 중간에 가 버리는것이 상례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회의장의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고 긴장하게 하였다. 워낙 긴장한 판이긴 하지만. 목숨보다 더 귀중한 정치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관건적 순간이 아닌가!     동호사와 조의사는 공사당위2부서기 겸 혁명위원회2부주임인 옛날의 홍위병대장을 뚜져서 중요기밀을 입수 하였다. 그것은 둘 다 금년에 희망이 있을것 같은데, 병원은 지식분자들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복잡해서 서기가 납신을 직접 틀어쥔다는 것이였다.     “내가 해 보겠다니까 햇내기라고 깔본단 말이야. 씨! 얼마 못가구 물러날 것들이!”     2는 분해서 투덜거렸다. 동호사와 조의사는 자기들이 오히려 더욱 분해죽겠다는듯 색을먹고 표현을 하며 긴히 역성을 들었다. 속으로는 “이번에는!” 하고 이를 악물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날 밤, 박주임은 전 원 직원 회의를 소집 하였다. 그는 먼저 인심을 고무하는 특대희소식을 전한다면서 래일부터 납신을 시작한다 고 공포하였다. 잇따라 이는 정치적대사로서 어떠어떠한 중요성과 심원한 의의가 있다고 누구나 다 아는 대도리를 한바탕 력설한후 운동기간 군중들이 지부와 밀접히 련계하는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군중들은 납신에 관한 회의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제부터는 태도표시를 하겠지 했는데, 웬걸?! 덕성이 착오를 비판한다는 것이였다. 아니, 덕성이가 또 무슨 착오를 졌어?! 또 바람?... 오이밭에 한번 똥눈개를 보면 항상 저개저개하는 식으로 사람들은 대뜸 그것부터 생각했다. 덕성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이 휘둥그래서 박주임을 바라보았다.     “지금 사회와 원내 군중들이 문선생이 집을 가지고 투기모리를 한다고 여론이 아주 나쁜데 본인이 검사한후 동지적 각도에서 비판방조 합시다.     ” 박주임은 굳어진 표정으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 덕성이와 군중들은 더욱 얼떠름해 졌다. 박주임이 집을 사고 팔며 그속에서 어떻게 투기모리 행위를 했는지 솔직히 검사하라고 다시 뚱겨줘서야 덕성이는 비로서 깨도가 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로는 투기모리라고 하면 매우 비루하고도 매우 큰 경제적 범죄였다. 탐오와 마찬가지로 형사적 추궁을 했고 법적처리를 했다.     사연은 이러 했다.     덕성이는 어머니가 사망한후 아버지와 녀동생을 공사마을로 데려오고 싶었으 나(원래 부모를 모시려고 고향산골로 오지 않았든가!) 집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과 함께 그런대로 아직은 살림할수 있으니까 동생을 시집 보낸후 보자는 것이였다. 그때 동생은 17살이였다. 어머니 삼년제가 지난후 덕성이는 동네어른들의 권고로 새 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들어보니 도리가 옳았든 것이다. 아버지와 의논하니 아버지는 뗑! 하고 반대를 했다. 덕성이는 아버지를 설복하여 재취를 하게했다. 계모는 친척할머니가 외지에 있는 아들집에 두어번 놀러 갔다가 풋면목이나 익힌 분이였다. 그는 한뉘 불임이다보니 네댓번 자리를 옴기며 여러 자식들을 키웠으나 어느집 하나 마땅치 않아 헤여지고 헤여지고 하다가 나중에는5촌조카에게 의탁했는데 그런데 조카와도 맞지않아 또 헤여지고 홀로 살았다. 친척활머니는 달린것도 없고 고생을 많이한 로친네여서 좋다고 하였다. 단순하고 데면데면한 덕성이는 친척할머니 말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들 부부는 앞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잘 모시겠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계모를 모셔 왔다. 덕성이 이런 처사는 원근에 소문났다. 사람들은 덕성이를 하늘이 굽어볼 효자라느니 며느리가 더욱 휼륭하다느니 하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것이 파멸로 끝날줄은 그때는 물론 알지 못했다.     몇년후 동생은 시집가고 부모들은 그냥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간 덕성이는 방 두개짜리 초가를 마련했다. 이런집을 마련하기까지 그는 7,8년세월 10여차의 이사를 하며 헛간, 건넌방, 창고, 버린집을 돌며 한심한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는 쾌활하고 락천적이였다. 그의 안해는 한결같이 밝은 모습이였고 그들은 열정스레 사업을 잘했다.     좌우간 집이 있게되자 덕성이는 부모를 모시겠다고 들썽거렸다. 아버지는 너의 다섯식구도 비좁은데 되지도 않을 소리라고 하면서도 합가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계모는 계산이 달랐다.     훗날 스스로 밝힌바지만 그는 덕성의 아버지가 사망하면 마을에서 “오보호”로 두루 살다가 기맥이 없을때는 양로원으로 간다는 방안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아들 며느리라는 사람들의 쥐꼬리만한 월급은 그들만 먹고 살자해도 판부족인데 령감에게는 재산은 고사하고 량식대 빚만해도 몇백원이 되였다. 하지만 밥은 먹을수 있고 그리고 말은 바른대로 이집 식구들은 사람들이 우선 모두 좋았다. 덕성이 내외는 진심으로 부모를 관심했는데 사람단련을 많이한 로친은 첯눈에 대뜸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호구를 옮길때 그저 동거를 하는걸로 하라고 했는데 덕성이는 그 눈치를 모르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하였다. 데면데면한 덕성이는 아마 쑥스러워 그러나보다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계모는 그럴듯한 리유를 여러조목 엮으면서 덕성이를 춰주며 합가는 곤난하다고 설복했다. 덕성이 생각에도 집조건 하나는 확실히 무리였다. 덕성이 계모는 기력이 좋아서 생활상 별일 없었지만 아버지는 작년이 다르고 금년이 달랐다. 계모는 아버지보다 7년이나 지하고 신체도 건강했지만 생산대 일은 근본상 하지 않았고(농사일을 모른다고 했다. 크고작은진에서 생활. 배급통장은 팔았음.) 집일도 좀 힘드는 것은 하지않았다. 지어는 김치움에 가는일도 령감을 시켜, 마을에서는 저 령감이 로친한테 감투가 벗어졌다고 하였다. 후일 덕성이 아버지는 말하기를 나의 속옷 빨래도 로친은 “내가 이런일을 하자고 이 산골로 왔는가.”고 하면서 해주는 법이 없었고 내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그가 먼저 들어 눕는다고 했다. 덕성이 아버지는 몇번이나 갈라지려고 하다가 참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들 며느리를 망신시키지 않기위하여 그랬다는 것이였다. 로친은 쩍하면 양로원이 어떠어떠하게 좋다고 하면서(실지로 구경가 보기까지 했다.) 함께 가자고 하기까지 했는데 그럴때마다 내가 막아치웠는데 동네가 모르게 싸운적도 수십번이라고 하였다.     그런저런 내역을 전혀 모르는 덕성이는 부모를 하루빨리 모셔오지못하는것이 죄스럽고 민망했다. 그러는중 마침 알맞는 집이 나타났다. 비록 헐망한 초가였으나 그래도6간 집이였다. 덕성이는 작은집을 팔고 그 집을 삿는데 200원을 빚을 지었다. 그는 작은집을 팔때 몇년전의 원가에 수리하며 든 돈 60원을 더 받았다. 집을 산 사람은 덕성이보다 퍽 나이 많은 공사간부였는데 덕성이 설명을 들으며 히죽이 웃었다. 그는 흥정을 끊고 술까지 한잔 삿는데 사실은 자기가 수월한 사람을 만나서 집을 눅게 삿노라고 했다. 덕성이는 그럼 됐다고 하면서 돈을 받았다. 여기에는 그 무슨 사기협잡이거나 투기모리행위가 근본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사간부는 덕성이 같은 년하 사람에게 속히울 사람도 아니였다. 큰 집을 마련하자 덕성이는 부모와 합가문제를 또 의논 하였다. 아버지는 동의 했지만 계모가 부동의였다. 계모는 워낙 구변이 좋았는데 이번에도 이런저런 리유를 라렬하며 몇년 더 지난후 보자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덕성이에게 천천히 설복을 하겠으니 급해 말라고 하였다. 몸은 이집에 있으나 마음은 다른곳에있는 로친이 그에게는 사실말이지 커다란 심복지환이였다. 상황이 또 이렇게되자 덕성이는 미몽을 잠시 억제하는수밖에 없었다. 마른나무가지 꺽듯할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했다. 그는 나에게 답답한 심정을 자주 말했다.     그런데, 일은 또 생각 밖으로 꼬이였다. 그것은 원 집주인이 시가지로 이사를 하면서 불같이 빚재촉을 하였든 것이다. 량심이 곧은 덕성이는 단가마에 오른 개미처럼 빚임자보다 더 급해 했다. 지글서 응부하라고 내가 귀띔하니 그는 펄쩍 뛰는 것이였다. “사람이 그러면 되나.” 나는 무안해서 뭐라고 말할수 없었다. 200원을 마련할 재간이 없은 덕성이는 단호히 집을 팔았다. 그저 줘도 싫다할 정도로 형편없은 집을 덕성이는 아버지와 함께 그야말로 우라까이(대수리. 변모시킴.)를 했는데 이번에도 원값에다 수리비용을 쓴것만큼 추가했다. 집은 한족이 삿는데 “호! 호! 띵호 띵호. 잉가이디 잉가이디.”(좋다. 응당이다.)했다. 집터가 커서 자기도 욕심은 있었으나 수리할일이 기가막혀 사지 않았는데 이렇게 차려졌다면서 그는 매우 기뻐했다. (2년이나 비여뒀던 집임)     덕성이는 다시 빈헛간을 얻어서 단간방 살이를 시작했다.     덕성이를 비판한다는 회이는 우습게도 변론회로 되고 말았다. 부주임, 동호사, 조의사, 박주임안해, 그리고 다른 6.26 입당적극분자 리의사 등 다섯사람은 최고경지의 “깡과선”에서 웅변을 토하고 근20명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분석할일이 아니라고 머리를 저었다. 박주임은 “혁명적 간부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엄격히 높으게 할수록 좋다.”고 하며 대도리를 력설한후 회의를 끝내였다. 그는 서슬주사를 맞고 죽은 사건도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적위생로선의 승리로 구가한 능력있는 달변이였다.     덕성이에게 투기모리행위를 한다고 제일 처음으로 말거리를 만든 사람은 동과 조다. 동호사는 덕성이라하면 눈에 든 가시기에 사사건건 허물을 잡으려고 하는것이 그로서는 응당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조의사는 좀 다른차원의 심층 내역이 있었다. 시가지에 안해와 아이까지 있는 일가지장이였으나 10년세월이 지나도 전근한다는건 부지하세월이고… 젊고 곱고 훌륭한 덕성이안해가 항상 욕심이 나서 애가 탔다. 그가 보건대 덕성이는 어느모로 비겨도 자기보다 형편없이 처지는 사내고(그는 대학졸업.) 동호사를 통해 코빵을 먹은일이 한번 있기는 해도 어찌보면 회망이 있을것 같기도 했다. 하여 그도 사사건건 덕성이를 살피며 허물을 잡아 납작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자기의 가장친한 액내들과 술김에 떠벌이기를 덕성이안해는 이제 조만간 자기것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박주임은 왜서 빨리도 늦지도 않게, 바로 납신전야에 덕성이에게 방망이 찜질을 하려고 했는가? 그 내역은 두세사람만 알뿐이다.     당위 조직위원이였든 나는(학교에서 공사당위로 이미 전근) 어느날 서기의 의지를 박주임에게 간단하게 전했는데 그것은 “상급에서 덕성이안해가 이번피에 입당하면 공사부련회주임으로 쓰려는것 같다.”라는 것이였다. 박주임은 안해를 입당시키려고 은근히 힘쓰는 중이였다. 원래는 작년에 희극적으로 처녀호사와 청년의사가 입당했는데 공사당위에서는 처녀호사를 부련회주임으로 쓸 타산에서 그런 무리수를 썼던것이다. 그런데 처녀는 입당후 시가지 총각과 벼락같이 결혼하고 또 뒷문거래로 선손을 써 벼락같이 시가지로 달아 났다. 공사당위에서는 언약을 차버린 처녀가 괘씸하기는 했으나 닭쫓든개 지붕 처다보기가 되고 말았다. 서기는 “수고스레 죽을쒀서 개좋은 노릇을 했다.”고 하면서 음ㅡ 음ㅡ노여워 했으나 말그대로 죽은아이 자지 만지기만도 못했다. 청년의사는 입당신청서 따즈보를 써 거리에 붙힌 장거로 납신을 했다. 그의 집은 현성에 있었는데 과부어머니는 우리공사에 점을잡은 공작대대장 (현혁명위원회부주임. 전국농촌위생공작좌담회에 갔다 온 그사람)과 친밀한 관계였다. 그청년도 입당후 인차 현병원으로 달아났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처녀호사는 시가지에 간후 또 벼락같이 리혼을 하고 자유의몸이 되였는데 개혁개방초기에 벌써 술집을 경영했다. 그는 병원에 적을 남기고 술집장사를 했는데 벼락같이 부자가 되고 또 벼락같이 죽었다. 사람들의 허튼소리에는 너무 바람을 써서 그리 되였다고 했다. 청년의사는 바람을 피우다 덜미잡이를 당했는데 물매를 맞고 다른곳으로 전근했다. 생동한 경험과 교훈을 섭취한 령도에서는 이번에는 안가락호ㅡ뿌리박은 녀간부들속에서 주임감을 은근히 물색했는데 전 현적으로도 덕성이안해만큼한 사람이 없는것 같았다.     3년후에 폭로된 것이지만, 그번의 납신에서 동호사는 궁둥이로, 조의사는 수류탄(병술) 권총(닭다리)에다가 피동이긴 했지만 녀편네 궁둥이까지 받치며 할동했으나 치욕적인 랑패를 보았다. 동과 조는 그해 납신에서는 또 헛물을 켜고 앙앙불락이였지만 이듬해에는 10여년의 숙원을 끝내 이루고야 말았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든지 이듬해 현공작대대장은(상해회의에 갔던 사람임.) 그들 두 사람과 은밀한 인연을 맺게 되였든 것이다. 대장은 공사2부서기와 함께 병원지부에 대하여 그리고 당위에서 유력한 “역활”을 했든 것이다. 공작대대장은 “사실이 증명하건대 그사람들이 계급투쟁성이 제일 높구만. 맑스주의철학은 계급투쟁의철학이고 우리당은 계급투쟁을 하는 당인데 그런사람들이 입당못하면 누가 하겠소?! 주류를 봐야지. 주류를! 사소한 결함은 입당후에 당의 교육하에서 얼마든지 고칠수 있는게구.” 그는 퍼러딩딩해서 반대자들을 훝어 보았다. 다수가결로 입당은 통과 되였다. 2부서기와 대장은 “조직적 료해”라는 기회로 조의사의 녀편네와 바람인연을 맺았든 것이다. 조의사가 잘 접대하라고 한 당부도 물론 작용을 했겠지만. 2부서기가 병원의 납신을 친히 틀어쥐기 시작해서부터3년후 호황은 막을 내리였다. 그것은 2부서기가 대낮에 옆집녀편네를 건드렸다가 그만 큰코를 쳤기 때문이다. 문발만 치고 낮잠을 자는 옆집아낙을 2부서기는 수월히 생각하고 덥썩 끌어안았는데 아이쿠! 웬걸, 뜻밖에도 녀자는 야생말처럼 날뛰며 사생결단을 한 것이다. 2부서기는 6년징역을 가고, 얼마후 공작대대장은 현병원 외과 수술실호사와 함께 쌍캐출을 당했다. 그번의 납신에서 덕성이안해는 “가정혁명화에 노력할 것이며 계급투쟁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귀중한 방조를 받고 미끌어 졌다. 동과 조는 “남에게 마레주인것만큼 자기에게도 마레주의여야하며 입으로만 혁명하지말고 행동으로 하며 아무와나 쩍하면 다 싸우지 말고 자고자대, 교오자만을 극복하며 환자를 비롯해서 군중들과 단결을 주의하며 단정했으면 좋겠다.”는 충고룰 받았다. 그해 명액은 박주임의 안해와 “6.26백이전사” 리의사가 가지게 되였는데 2부서기 때문에 박주임의 안해는 훗날 “궁둥이당원”이라는 이름을 여벌로 달게 되였다.                                                  20     나는 외지로 전근할때 덕성이와 술잔을 나누며 이런말을 하였다.     “아마도 다음은 너희부부가 입당할 차례일것 같은데 사상회보도 자주 써 내고 신청도 적극 해야지 신청하지 않는걸 어떻게 토론을 하나…”     내가 이렇게 말하니 덕성이는 싫다고 하였다. 생각하면 수치스럽기만한 착오사실(작풍문제)을 도저히 말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였다.     “아는사람들 앞에서는 그런대로 비위장 두껍게 용서해 주시요. 당에 받아 주시요. 하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모르는사람들에게 내게 이런일이 있었소. 하지만 이미 고쳤소. 당에 들고싶으니 받아주시요.하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나는 단념했네. 당초에 비위가 약해서 않되겠네. 좋은 의사가 될 생각 뿐이네.”     그는 서글픈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걸 왜 그따위 짓거리를 했어!”     내가 벌컥 역정을 내니 그는 넉살좋게 이죽거리는 것이였다.     “그러게 말이 아닌가. 얼빠진 놈이야. 생각할수록 나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괜찮아. 입당을 포기하면 되는거지. 입당이 내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덕성이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인데… 랑패가 아닌가?!... 그야말로 일실족천고한이라 하겠다. 우리는 술을 마이며 기분나서 떠들썩 했지만 아래방에서 덕성이안해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고 나의안해는 머리를 수그리고 시무룩해 앉아 있었다.     “자, 마셔. 까짓거!”     우리는 녹초가 되게 술을 마셨다. 그것이 우리들이 젊은시절에 마인 마지막 술잔이다.     많은 세월이 지나간 오늘, 우리는 풍치좋은 바다가 너럭바위 위에서 술잔을 마주하게 되였다.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가는 세월을 누가 막으랴. 바라보니 흰머리가 새삼스럽다. 인생은 지나 갔는가! 오늘 부턴가!...                                                21     “자네가 떠난 이듬해 나는 위생원에서 지은 사택에 공짜로 살게 되였네….”     덕성이는 말을 이었다.     4인패가 꺼꾸러지고 “6.26백의전사”들이 모두 가 버리니 위생원은 텅 빈것 같았다. 외지에 집이있는 사람들도 가버리고(조의사도 갔음. 한국에 불법체류를 하던중 죽었다.) 안가락호ㅡ뿌리 박은 사람들만 남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빼고 들어온 벌이 왕!ㅡ 한다고 그간 몇년을 누구정신에 들볶이우며 법석 끓었는지 모르겠다. 하긴 나라전체가 팥죽끓듯 와글거리였으니 조용한 구석이 있을수도 없었겠지만 우리 위생원은 특별히 복잡했다. 그것은 내부에 동, 조와 같은 유명한 말썽꾸러기 반란파가 사사건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정이 되는것 같았다.     동호사는 입당후 찬바람을 쌩쌩 일구며 더욱 날카로와 졌는데, 이젠 그야말로 명정언순, 문화대혁명의 치렬한 계급투쟁속에서 용솟음쳐 나온 참신하고 당당한 혁명가로 되였다. 그런데 1년 조금 지나서 그의코는 납작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2부서기의 피해자중의 하나라고 덮어주는 명분이 있어서 낯짝을 들고 다닐수 있었다. 그것은 가랑잎으로 하문 가리기여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막을수 없었지만 그로서는 달리 궤변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끌어오던 결혼을 소리없이 해버렸다. 사람들은 피장파장인데 뭘… 잘됐다고 하였다.(몇년후 과부가 되였다.)     위생원의 업무는 차질이 없이 돌아갔다.     이제와서 맏며느리가 무던한줄 알겠다고 군중들은 말하면서 우리부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공사위생원은 국가의 제일 기층 의료위생기구로서 나는 의료위생업무와 행정령도책임을 림시로 감당하고 있었다. 업무는 우리가 일을 더 하면 되는것이였으나 행정은 령도가 있어야 하는건데 위생원에는 령도가 없었다. 중약사와 동호사가 당원이긴 했으나 현위생국에서는 그들을 령도로 쓰지 않았다. 현에서는 현병원의 직원들중에서 한사람을 파견하여 림시책임으로 보냈는데 두달에 한번씩 바꾸기로 했다. 주지하다싶히 이것은 림시방편으로 응부책이고 뿌리박을 령도를 결정해야 겠는데 그것이 마땅치 않았다. 후에야 안 것이지만 유관부문에서는 나를 놓고 한창 저울질 하는 중이였다.     집이 생기자 이듬해 봄 나는 부모들을 모셔 왔다. 아버지의 기력이 이젠 살림하기에 힘겨운 상황이여서 나는 무작정 합가를 결정했는데 계모는 더는 구실을 댈수 없었다. 그런데 1년도 되기전에 계모는 마을로 되돌아 가려고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잡아뗐다. “오보호”타산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양로원 꿈을 다그쳐 추진했다. 그는 아들 며느리가 어찌도 구박을 하는지 도저히 살수없다고 대대서기를 찿아가고 공사민정을 하루에도 두세번씩 찿아 다녔다. 한편 사회에는 우리가 어떠어떠하게 나쁜사람이라고 온갖 여론을 퍼뜨렸다. 온갖 빨래는 자기에게 다 시키고 이밥은 저네들만 먹고 자기에게는 강냉이떡만 주는데 그것도 애기주먹만큼, 죽도록 앓아도 주사한대는 커녕 정통편 한알 어떻겠는가! 아니, 어느한번은 죽을 좀 쒀 달라고 하니 인차 쒀 주긴 했는데 너무 쓰거워서 먹지못했는데 쥐약같은걸 넣는것 같았다고… 계모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사람처럼 온갖 허튼소리를 구애없이 하고 다녔다.     그런저런걸 전혀 모르는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매일매일을 흥겨워 했다. 아버지도 벙글써 흐믓해 하고 아이들은 성수나 했다. 나는 살맛이 났다. 안해는 계모의 속옷까지도 알뜰히 빨래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는 이밥은 어른들께 떠 드리고(겸상)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배급대로 먹었다. 아이들은 응당 그러려니 했고 습관이 되여서 잘만 먹었다. 계모는 하루건너 포도당 링겔주사를 맞다싶이 했는데 정작 약을 써야할 아버지는 로친때문에 늘 사양했다. 안해는 진심으로 시부모공대를 나름껏 잘 하였다. 우리집이 병원울안에 있다보니 병원사람들은 제집 나들듯 하면서 우리집일은 손금보듯 환히 안다. 그런데 계모가 이런 여론을 퍼뜨리고 다니니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모두가 보아와서 아는바이지만, 너무도 허무맹랑한 기막힌 소리였다. 사람들은 저 로친이 로망이 드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량심이 삐뚤어진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럴줄을 몰랐다고 하면서 계모를 어루만져 주며 부추기고 맞장구를 처 주기까지 했다.     동호사와 병원안의 두세 사람은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고 신이 났다. 그런 사람들은 령도자리가 어떨꿍 해 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였다. 병원의 공금으로 가만가만 술판을 벌이고 지어는 되거리장사까지 하는것을 내가 지적한것이 몇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였든 것이다.     어느날, 내가 하향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말그대로 우리집앞은 초상난 집이였다. 집앞에는 병원사람들을 비롯해서 알고모를 사람들이 가득하고 아버지와 안해가 계모를 몰아 부치고 있었다. 비로서 사태를 알게된 그들은 억이 막히고 분통이 터졌든 것이다. 그날, 대대서기와 공사민정은 우리집에 와서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고 당자들 앞에서 무릎맞춤을 했던것이다. 계모의 헛소리는 당장에서 발가지고 안해는 분지도에 기절까지 하였다. 나는 너무도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일순간 도무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 그후 삼사일 나는 화해를 시켜보려고 노력했는데, 모두가 수포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절팔리고 중팔린 이김에 아예 갈라지겠다고 선언했고 안해는 철저히 실망 했다는 것이였다. 그런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한품에 안아 받들었는데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울다가는 사설을 하고 오열을 토하다는 쓰러지고 했다. 계모는 견결히 양로원에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호구도 동거로 한거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덧붙혀 한다는 말이 미안하긴하지만 내가 조작한것임이 다 발가졌으니 너무 분해하지 말라고, 양로원에 가기위해 구실을 만드느라 그랬으니 량해를 하라고했다. 이런어른과 무슨말을 더 한단 말인가…     나는 계모를 소원대로 양로원에 보내 드렸다. 지금은 양로원을 가장 리상적인 “로인의 집”이라고 하지만30년전에는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이 있어가지고 부모나 친척을 양로원에 보낸다는건 천하에 불효막심한 행실이였다. 나는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는 말도마에 올라 화제의 인물로 되었다. 공사당위에서는 우리집 경제형편이 너무도 궁색한것을 감안해서 계모의 양로원일체비용을 면제해 주면서 우리더러 사업을 잘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일이 지금도 미안하다.     계모는 양로원에 간후 너무도 심술을 부려서 양로원 원장과 공사민정은 도리머리를 떨었다고한다. 그는 3년철 되는해에 사망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13년을 보냈다.     현에서는 당지에서 사람을 뽑아 위생원의 인원을 보충 했는데 원장에는 대대의사를 앉히고 서기로는 대대서기가 올라왔다. 그들은 또 자기자녀와 친한사람을 끌어 왔다. 병원은 마치도 생산대 같기도 하고 누구네 집안가문 같기도 했다. 10여명 직원은 패거리가 생기고 우리는 아무데도 붙지않아 외목에 났다. 하지만 업무골간이다보니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였다. 우리는 일심전력으로 사업에만 몰두했다.     현위생국에서는 나를 시가지의 어느 공사에(그때는 시에 속하지 않았다. 두달후 시에 넘었음.) 원장으로 안배하려고 했는데 나는 사절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근했다. 원래는 고향산골에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령도로도 쓰려는데가 없고 받자는 곳도 없는 인물”이라는 여론은 안해를 너무도 힘들게 했든것이다. 내가 간 그병원은 시급 병원인데 그곳에 간후 안해는 인차 입당을 하고 총호사장으로 사업했다. 그는 지구의 모범호사장으로 되기까지 했는데 위생부로부터 영예의 금메달까지 받았다. 나는 과주임사업을하며 연구생 학습을 거쳐 주임의사가 되였다…                                                     22     내가 고향을 떠난후 10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주던 사람들은 모두 횡액을 당하였다. 이상한 일이였다. 그렇게 날고뛰던, 한다하던 사람들이 웬일인가?! 량심이 나빠서인가? 어찌보면 그런것 같기도 했다….     화창한 날씨 춤추는 갈매기 푸르른 바다에서는 신선한 해풍이 살살 불어오고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09. 5
74    황천이 어드메냐 댓글:  조회:2395  추천:7  2014-05-05
           실화                                             황천이 어드메냐                                                                                                                        회령     법이 없은 문화대혁명시기(1966.5ㅡ1976.10)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무법천지였든 그 10년을 회고하면 법이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하고 귀중하며 고마운 것인가를 심절히 느끼게 될것이다. 사회주의법제가 있기에 우리들이 오늘 활개치며 살지 않는가!...     인구가 2864명 뿐인(1966년) 두메산골 칠도공사(향)에서는 문혁의 란을 시정할때 피해 상황을 상세히 준확한 조사와 통계를 한바가 있다. 비판투쟁을 받은 사람이 73명, 맞아서 을병이 든 사람(뇌진탕후유증, 고막이 터졌거나 생이발이 부러지고 빠진 사람, 눈알이 터지고 귀가 비틀려 버리고 코등뼈, 갈비뼈, 사지에 골절 된것이 바로 붙지 못하여 병신이 된 사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 등등)이 44명, 자살 6명, 타살이 1명이였다. 귀통을 맞아 코피가 터졌거나 몽둥이 몇대를 맞았거나 발길에 채우고 멱살을 휘둘려 넘어지고 구울린것 등 이런 경한 피해는 통계에 넣지 않았다. 본인들이 “쏼라바.”(그만둬라.)해서 빼 놓았다.(21명, 곱게 투쟁당한 사람은 겨우 8명뿐임.)     평판시정은 공사혁명위원회에서 주관 했는데, 학교마당(소학, 초중에서 함께 쓰는 운동장)에서 대회를 열고 혁위회주임(로 머슴출신. 토개간부. 즉신하게 투쟁받아 고막이 터지고 생이발이 두대가 빠짐.)이 연설을 했는데 통쾌하고도 감동적이 였다. 그의 연설요지는 다음과 같다.     “에ㅡ 흠, 우리 다 같이 먼저 모주석의 로작을 학습합세다. '혁명위원회는 좋다.' 잠시 이만 학습하고. 에ㅡ 흠, 거밍동미(혁명동무)덜! 우리공사에서 니른서이(73명)나 되는 사람덜에게 온갖 죄명을 덮어 씌우고 달구쳤으나 죄로 될만한 것은 사실상 개뿔짝도  없지 않수?! 제길할! 씨불랑게, 일이 더럽게는 되였수. 억울하고 분하게 되였수만 다 거밍군중덜인데 량해 하우. 투쟁 받은 사람이나 투쟁한 사람이나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무스거 어쩌겠수. 죽은사람덜은 살아올수 없구… 제길할! 씨불랑게, 다 그 요사한 림표아새끼와 새끼낳고 미친 암캐같은 강청이라는 간나새끼덜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되였으니… 제길할! 씨불랑게, 우리는 단결해서 이제부터 또 잘해보기우! 경심(점심)을 갖춰 놨으니 한잔하구 속덜을 쑤욱 푸오. 싹 잊어 버리우.”     공사식당에는 암소 한마리를 잡아 앉히고 상마다 두부와 고구마술을 다섯사발씩 내놓았다. 그리고 국밥을 대접 했다. 그날 적지않은 산골사람들은 평생에서 처음으로 이런 희한한 공짜 대접을 한번 받아 보았다.     을병이 든 사람들에 한해서는 공사병원에서 공비로 치료를 해주었는데 어떤사람들은 신통한 방법이 없다보니 두루두루 그러다 말았다.     그런데, 자살한 여섯사람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대체로, 자살한것은 당과 국가를 배반한 행위라고 책망하는 눈치 였는데 이러쿵 저러쿵 캐고 들거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영 그러고 말았다. 그러니까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고 개똥밭에 굴러도 살고 보는건데… 지레 겁부터 먹고 죽지 않았는가. 공연히. 그것, 참! 죽긴 왜 죽었느냐 말이다. 다만, 그들을 투쟁할때 너무 악착했든 사람 몇이 후에 슬그머니 타고장으로 이사 간것 뿐이다.     자살한 네 사람은 그아말로 하찮은 일에 신경이 곤두서서 자살하고 말았다. 소학교 처녀교원은 생산대 풋강냉이 몇이삭을 훔쳤는데 반란파 골간 두엇이(련애를 걸었다가 퇴자를 맞은바가 있다.) 작란 삼아 개패를 걸고 투쟁한 것이 그날밤으로 목을 매 달고 죽었다. 남자 세 사람은, 한사람은 조선특무혐의 때문에,(조선에 꽤 높은간부 친척이 있었다.) 또 하나는 해방전에 일본, 남조선, 길림근처 국민당 구역 등 곳에서 품팔이 로동을 하면서 떠 돌아 다닌것이 역시 2중3중 특무혐의를 받아 자살 했다.(이 두 사람은 순 농민이다.) 다른 한사람은 어느 대대위생소의 늙은 로 중의인데 부농성분이 였다. 그는 고정한 사람으로 의덕도 괜찮은 의사였다. 그런데 죽은 환자가족 몇이 기어코 “혈채”를 갚으라고 달려 들어서 자살하고 말았다.     다른 두 사람은 한쌍의 남녀로서(대대지부서기와 부녀주임. 유부남 유부녀임.) 간통한 추행이 들통나서 투쟁 받다가 자살 했다. 그들은 개처럼 끌려 다니며 온갖 모욕과 뭇매질을 당했는데 더는 세상에 얼굴 들 체면이 없어서 죽고 말았든 것이다. 이상 여섯사람중 간통한 두 사람은 누구나 증오하는 치사스러운 죄가 있기에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화간이든 강간이든 천하에 용납 못할 패덕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사람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맹랑한 것이여서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찿다. 특히 처녀교원의 죽음은 사람마다 애통해 하였다. 인물도 고왔거니와 심성은 또한 얼마나 참했든가!... 그는 배고파 하는 두셋아이에게 옥수수를 구워주며 자기도 반이삭을 먹은 죄를 지었든 것이다.     맞아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은 중년으로서 초중학교 지리교원 마명춘이다. 가정성분은 하중농인데 그 자신은 중공당원이였다. 그는 일본특무, 쏘련특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뻗치다가 끝내는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마명춘은 중국 도문 사람으로 조선 회령에서 중학을 다니다가 1944년11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 갔다. 그는 흑룡강 쌍하진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에 가서 보초를 서다가 이듬해 8월 쏘련홍군에 포로되여 원동 포로집중영에 갇히였다. 쏘련홍군의 포로집중영에 대한 관리는 매우 엄혹 했다. 과중한 로역은 보통 12시간 이상이였고 숙식조건도 매우 렬악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부터는 차츰 많이 개선 되였다. 포로집중영에는 소대마다 홍군정치간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정치사상 교육을 주입하는 사람들이였다. 마명춘은 로어기초가 있는데다 순진하고 총명 했다. 그는 공산주의사상과 혁명적 세계관, 인생관을 재빨리 터득하고 흡수하기 시작 했다. 1947년부터 마명춘은 중대포로민주위원회주임으로(포로들이 선거함.) 되여 로동을 탈리한 간부로 되였다. 민주위원회는 3명인데 다른 두 사람은 로동을 탈리하지 못한다. 마명춘의 임무는 포로들에게 공산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쏘련의 우월성을 선전 주입하는 것이였다. 그는 사업을 참답게 적극적으로 하였다. 하여 1948년에는 원동군구 정치학습반에 가서 두달동안 “쏘공당사” “변증유물주의와 력사유물주의” “공산당선언” “국가와 혁명” “레닌주의 기초” “쓰딸린 전” 등 저작들을 학습 하였다. 집중영에 돌아온후에는 영에서 전직 정치교원을 했는데, 1949년말에는 입당까지 하였다. 일본군 포로들이 선후로 다 귀국하자 마명춘은 쏘련에 정착하였다. 그는 원동지구 당교에서 정치교원으로 사업하다가 1955년에 귀국하고 연변의 모 고중에서 로어교원을 하였다. “반우파 투쟁” “교원정풍” “민족정풍” “사회주의 교육” 등등 정치운동에서 마명춘은 밀리고 밀려 이 산골공사까지 왔다. 무슨 모자는 쓴것이 없었으나 “일본군 학도병”, “일본군 포로병”, “수정주의쏘련에서 왔다”는 도장이 그를 내리먹게 하는 쪽자루가 되게 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계급투쟁각오가 가장 먼저 발달 제고 된 사람들은 바로 반란파들이 였다. 마명춘은 대뜸 그들에게 일본특무, 쏘련수정주의특무로 락인 찍혔다. 그런데, 특무활동을 했다는 근거로는 일어, 로어를 알고(그것도 아주 류창하게) 원문 책자를 막힘없이 볼수 있다는 그것뿐이 였다. 꼭 왜놈들과 마우재들 한테서 특무훈련을 받고(장기적인) 임무를 맡아가지고 온 놈임은 백번 틀림이 없는데, 새끼도 많이 쳤겠는데… 고것을 밝히는게 애간장이 타고 울화가 치밀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되게 족치는것 뿐이였다.     반란파 골간들은 전국을 아니, 세계를 진동하는 특등공을 세우기 위하여 그야말로 말그대로 혈안이 되여 발광을 하였다. 그들의 원시적인 고문은 우직하고도 혹독하고 악착했다. 고추물을 코구멍에 부으면 효과가 좋다해서, 손톱눈에 참대침을 박으면 은이 난다고 해서, 집계로 아래배 가죽을 뜯으면 꼼짝 못할거라고 해서… 현총부에 넘겼다 끌어 왔다 두세번을 번복해도 마명춘은 죽기를 결심 했는지 그냥 반항 하였다. 반란파들은 대단한놈이라고(큰 놈) 더욱 발악을 하고 마명춘은 공산당원의 절개를 굽힐수 없다고 더욱 도리를 떨었다.     그러기를 넉달이 지나서 어느날, 현총부에서는 군중심판에 맡긴다며 마명춘을 공사로 끌고 왔다. 그들은 학교 마당에서 투쟁대회를 열고 전 공사의 군중들을 동원해 왔다. “무공대”가 장총을 메고 뻗찌른 기상이 무슨 큰 거조를 낼듯 위풍을 과시하는 가운데 책임자가 목이 터지게 소리를 쳤다.     “무산계급 혁명파 전우들! 일본특무, 쏘련수정주의특무 마명춘은 오늘도 우리와 대항하고 있습니다. 이 완고한 특무놈에게 무산계급의 무쇠주먹 맛을 보여 줍시다! 지금부터 용약 투쟁하기 바랍니다.”     “네놈의 죄장을 탄백해라!”     “졸개들을 교대해라!”     “마명춘의 개대가리를 짓부시자!”     ……     공사내 반란파들은 기세를 올리며 고함을 지르고 십여명은 달려들어 뭇매질을 하여댔다. 마명춘이 땅에 쓰러지자 그들은 마구 짓밟고 걷어 찼다. 마명춘은 기절하고 말았다. 현총부 반란파들은 마명춘을 트럭에 올리 던지드니 공사병원에 갖다 팽개쳤다. 현총부의 책임자는 “공사의 혁명적 반란파들에게 영광스럽고도 간거한 혁명적 임무를 맡긴다. 만난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라! 기쁜소식을 기다린다.”하며 너스레를 떨고는 급급히 달아났다.     마명춘은 그날 저녘켠에 복강내 대량출혈로 죽었다.     무법천지세월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이 였다.     마명춘의 부인 백로씨야 녀자 유리야노브 . 싸샤(사람들은 마우재녀 자라고 불렀다.)는 아이 셋을 데리고 쏘련으로 돌아 갔다.(마명춘은 쏘련정부에서 백로씨야족을 은근히 경계하므로 시끄러움을 피하여 귀국 하였다. 그루지야족 쓰딸린의 협애한 민족주의정책 영향이였다.)     그후 사람들은 차츰 정신들이 맑아 졌다. 참으로 한심한 지랄들을 했다고 혀를 차며 망인들을 애석해 하였다.     4인패가 꺼꾸러 지자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었다.     중국은 10년만에 다시 법이 있는 나라로 되였다.ㅡ     황천이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 그들의 혼백이 있다면 많은 위로의 말을 하련만… 그리고 세상이 좋아졌다고, 바로 잡혔다고 알리련만… 죽은자만 불상할 뿐이 아닌가!...                                                                                                                               10.10
73    밭갈이 노래 댓글:  조회:2226  추천:1  2014-04-28
수필 밭갈이노래                                                                     회령     생각해 보면 나처럼 무정한 사람이 없다. 아니다. 무정하다하기보다는 사정이 딱했다고 하는것이 정확하다. 무슨일로 이렇게 심각하는가? 그것은 30여년 한번도 고향에 가 보지 못한것 때문이다. 고향마을에는 외가친척 몇집이 지금도 있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고 할때도, 또 사망했을때도 나는 불효막심 가지 못하고 눈물만 주루루 흘렸다.     수십년 고향으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 딱한 사정이란 기실은 별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리유를 대며 변명을 하자면 여러가지 구실이 있겠으나 툭! 찍어서 통말을 한다면 내돈이 아까워서 고향에 가지못한 것이다.   지금도 시간상, 재력상 크게 여유가 있는 팔자는 아니지만 지난 30여년 나는 정말로 바쁘게 보냈다. 그때, 나는 항상 뼈물었다. 이제 꼭 어느날 돈을 한마대 가득 메고 고향에 가 보리라! 고향사람들을, 아이고 어른들이고 모두 청하여 한상 크게 차리고 “용돈”도 두툼하게 드리고 차츰 더 발전하면 “기념비적인” 무얼 해 놓고… 포부도 컸고 꿈도 많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일이던가?!...     나는 외사촌동생의 전화를 받고 5일간의 시간을 내여 고향에 갔다. 막내외삼촌이 회갑을 쇤다면서, 사업만 사업이라고 하지 말고… 면목도 다 잊어지겠다고 하면서… 무슨 좋지않은 일이 있는지 발길을 끊는거 아니냐고 사람들이 말한다면서… 이번만은 꼭 와야 한다는데는, 아차!하고 나는 가슴이 꿈틀 하였다. 돌아보니 30년도 넘었다.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갔는가! 정신없이 달렸구나… 나는 부랴부랴 회사일을 안배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안해와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까지(학생이지만) “방문단”을 거느리고 고향나들이에 올랐다.     상해에서 뜬 비행기는 기분좋게 날았다. 넓고넓은 중국대지, 나의조국, 나의활무대! 중화대지 조선족용사들 활개치네!... 주먹을 부르쥐고 분투한 지난날이 가슴뿌듯 하였다.      연길에서 택시 두대를 붙잡아 타고 산골고향으로 달렸다. 그젯날 신작로는 고속도로로 아득히 쫙 뻗었는데 여기저기 농촌마을들은 아름다운 문화농촌으로 변하였다. 초가집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촌촌마다 포장도로가 들어갔다. 천지개벽이였다. 어찌 않그러랴. 옛날에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을려니 세번도 넘는 10년이 지나지 않았는가! 아름다운 연변, 고향땅이여! 우리민족 얼마나 똑똑하구 날쌔다구!... 하여튼, 한번 하자꾸나! 달라붙으면 불이 번쩍나게 해 제낀다니깐. 중국조선족은 워낙 그런 민족이니까!... 나는 환성을 련발하며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외사촌동생이 연길공항에 마중오겠다는것을 그만두라고 하고 출발날자도 알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때부터 엉뚱한 짓을 하기 좋아했다. 그 버릇이 지금도 살아있어 이번에도 엉뚱한 거동을 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쳐 사람들로 하여금 입이 딱 벌어지게 하고 싶었다. 얼마나 멋진가…     “샘물깨”, 마을이름은 변하지 않았으나 마을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규격을 맞춰 앉은 아담하고 산뜻한 문화주택, 집집마다 문앞까지 길이란 길은 모두 포장도로이고 앵두, 살구, 복숭아, 오얏(노리. 특히 흔하다.)… 과일나무 꽃나무로 길이며 집들이 꽃속에, 연록속에 묻혔다. 알뜰히 정리한 터밭, 뜨락, 온 마을이 생태체험장이 아닌가?! 별장마을이 따로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 외가집을 알지 못하니 기사는 “당연히 그렇지요.”하면서 차를 “샘물깨마을활동실”이라고 멋진간판을 건 2층짜리 멋진건물앞에 세웠다. 멋을 피운 철근울타리 안 넓은 뜨락에는 건신운동기, 문구장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려서자 “아이구! 형님!” 하고 소리치며 외사촌동생이 달려 나왔다. 잇따라 여러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 왔다. 막내외삼촌 내외도 거기 있었다.     막내외삼촌의 회갑잔치는 굉장하였다.(내외분이 함께 쇰.) 축수의식은 활동실에서 거행하고 연회도 거기서 하였다.(활동실에는 도서실, 열람실, 오락실, 사무실, 회의실이 있었다.) 남녀로소 온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온갖 장끼가 쏟아져 나오고 웃고 떠들고… 오후 3시까지 잔치는 흥성흥성 하였다. 마을의 인심, 잔치풍속은 옛날처럼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했다! 굉장하게 변하고 발전했다.      퉁소, 장구, 새납 농악을 울리고 음향기가 쿵작작 꽝꽝… 꽃보라를 터치고 축포를 쏘고 사진, 록화도 저절로 하고 음식상은 절반이상 남고… 시가지에서는 볼수없는 흥겨운 정경이였다. 과연 쌀독에서 인심난다. 말그대로 별장같은 마을에서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서 고기국 먹는다. 마을의 발전에 대하여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감탄 하였다. 나만 괜찮게 번신한줄로 알았는데, 웬걸! 고향사람들은 모두가 “사또님”이 되였다. 시가지 사람들처럼 신경을 세우고 오글복작거리지 않는다. 느긋하게, 하하하 웃으며, 마음 편히, 흐믓하게 일하고 흐뭇하게 살아간다.     우리 “방문단”은 련일 이집저집에 불려다니며 하루 두세번씩 연회초대를 받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짬을 내서 “방문단”을 이끌고 어머니산소로 갔다.(아버지는 상해에서 사망.) 외가집에서 돌보아 산소는 깨끗하였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여럿 동행하여 주었다. 49세 아까운 년세로 문혁기간에 사망한 어머니는 그때 상여도 없이(몇개 마을에서 쓰던 상여는 상여막에 불질러 없앴다.) 달구지에 실려 여기로 왔다. 지금도 살아 계셔야 할 어머니!...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머니산소는 산기슭 중턱쯤에 있었는데 전망이 쉬원했다. 저 멀리로 두만강이 굽이쳐 흐르고 조선의 시가지와 뭇산봉우리가 한눈에 들어 오는데 샘물깨 앞으로는 논벌이 쫙 펼쳐지고 여기 산기슭 밑으로는 또 한전벌이 뉘연히 펼쳐졌다. 때는 5월중순이여서 진달래는 붉게 타고 개살구나무꽃은 하얗게 산허리를 수 놓았다. 대지는 연록으로 꽃으로 물들고 여기저기에 그림같은 마을들이 앉았다. 푸른하늘, 종달새의 아름다운 노래… 논벌과 한전벌에서는 대여섯대의 농기계가 한창 밭갈이에 분주했다. 뜨락또르의 고르로운 동음은 고향벌에 가득차서 생기가 넘쳐나게 하였다. “뻐꾸기 울며 울며는 에루화 데루화 이랴낄낄 소를 몰아 밭갈이 가세…”하던 느러진 밭갈이노래는 이젠 고전이 되였다. 쿵짝 쿵짝작!하는 박자가 빠르고 경쾌한(무도에 맞는) 밭갈이노래가 새로 나올것이다… 마을에는 농업합작사가 서고 온 마을이 다 거기에 들었는데(33호) 힘든 농사일은 거지반 기계로 한다고 하였다. 수도화, 전기화, 가스화, 기계농사, 쌀풍년, 다각경영, 심층가공, 상품화생산, 명표브랜드 창출, 돈풍년… 마을은 그렇게 발전번영하고 있었다. 농업우혜정책, 변강소수민족에 대한 우혜시책, 과학발전관… 당과 정부의 밝고 따사로운 해빛은 여기서 활짝 꽃피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이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 작곡가, 화가라도 이 자연을, 이 고향모습을 다는 그리지 못하리…     떠나기 전날 나는 마을사람들께 답사연을 하였다. 그리고 고민 하였다. 마을사 람들에게 무슨 “기념비적”일을 하나 보암직하게 하긴해야하겠는데 무얼로 하면 좋을가…
72    백성의 천하다 댓글:  조회:2157  추천:3  2014-04-21
        잡문                                                 백성의 천하다                                                                                                                     회령     국가의 핵심가치관은 “부강, 민주, 문명, 화해”이고 사회의 핵심가치관은 “자유, 평등, 공정, 법치”고 개인의 핵심가치관은 “애국, 경업, 성신, 우선”이다. 누구의 핵심 가치관이라고 했든 이상의 열두조목은 모두 사람을 놓고 하는 말이다. 사람마다 이 핵심가치관을 참답게 리행한다면, 소질로 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천당이고 지상락원일게다.     무릇 세상만사는 천시, 지리, 인화, 3대요소가 구비돼야, 맞아떨어져야 성사된다. 지상락원ㅡ 공산주의가 실현되자면 아직도 긴 세월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지금 도로, 리론, 제도에 자신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5위일체(경제, 정치, 사회, 문화, 생태)건설과 핵심가치관실현은 장구한 시간과 과정을 수요하는 거대한 사업이며 공정이다. 하지만 “조석을 다투어야 하리.”     누가 조석을 다투는가? 두말할것 없이 그것은 백성이다. 백성(인민군중)은 력사의 주인이며 창조자다. 이런말을 한것이 2백년이 거이 되지만 그런뜻을 안것은 2천년도 더 된다 그러나 백성을 하늘같이, 물과같이 진정으로 인정하고 공경한것은 얼마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얼떨떨한 혼란이 자주 있기까지 했다. 하여 인민의 당ㅡ 공산당에서는 백성의 수요, 요구에 따라 자주 정풍을 하며 정신을(사상을) 바로 정돈하군 하였다. 지금 하고있는 군중로선교육실천활동도 그것중의 하나다. 군중과 당의관계, 군중과 공복(령도자, 간부 등 공무원)의관계를 투철히 바로 하자는 것이다. 늦은감이 좀 있기는 해도 지금 잘하면 된다. “활동”이 빠르다고 말하는 어른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속심에서 했든 그건 공정한 말이 못된다. 중앙어른으로 부터 촌장에 이르기까지 아니,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정짓거리, 부패짓거리가 어디 적은가! 말그대로 털면 먼지 안날 놈이 없을 지경이다. 그래 아닌가?! 두메산골 노친네도 거짓말을 식은죽 먹기로 한다. 터밭에 심은 취나물도 산에서 뜯어 왔다고 하고 묵은 고추가루도 어제 찧은거라고 한다. 벼가 밭에서 퍼런데도 유기농햇입쌀이라 한다. 쟈모위레, 중고품가전을 명품새것이라 하고 하수도기름을 천연록색특급식용유라고 하는데, 가짜우유, 가짜약품, 가짜신발… 이루다 말할수 없다. 눈을 떴는데도 빼 먹을 지경으로 사회가 험악하고 살벌하고 오물시궁창이 되는데 뭐?! 빠르다고?!... 지금 백성들은 경제(물질문명)는 발전하고 사람(정신문명)은 퇴보했다고 말하는데 일리가 없는 말이 아니다. “활동”은 너무도 적시적이다.     물론, 지금 우리사회는 정직한 사람, 선량한 사람, 량심있는 사람이 다수다. 진정한 공산당원, 충직한 공복이 다수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활동”만 보더라도 말은 바른대로 우리당은 위대하고 정확하고 영광스러운 당이다.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리고 백성의 심기를 눈치채고 스스로 문제를 보아내고 스스로 고치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이런 정당이 몇이나 되는가! 앞에서 생눈깔을 빼먹을 지경으로 사회가 어쩌구 저쩌구 지껄인 것은 미꾸라지 몇마리가 개천물을 너무도 흐리워놓는 꼬락서니에 분개해서 내뱉은 즉흥적인 과격한 말일뿐이다. 새우파가 나와서 공산당을 뒤엎자고 하는거 아니냐 오해하지 말라. 부정짓거리, 부패짓거리에 대하여 백성들은 극도로 증오하며 격분한다.     백성은 천하의 주인이다. 천하는 백성의 것이다. 백성은 력사의 주인이다. 인간사회력사는 백성이 만든다. 공산당원과 그의 당, 정간부는 인민의 공복이다. 인민은 그들에게 중국의 꿈, 백성의 꿈을 실현하는 조직자, 인솔자의 소임을 맡겼다. 당신이 해야 할 소임은 오직 그것뿐이다. 다른것이 더 있는가? 없다.     “공복”이란 무엇이냐? 유식하게 말한다면 당, 정기관의 모든 직원 즉 공무원들이다. 범위를 조금 넓힌다면 8500만 공산당원들도 공복이라 할수있겠다. 그리고 무릇 공공단위에서 일하는 자들도 공복이라 할수있다. 무식하게 말한다면 “공복”이란 심부름꾼, 뽀이, 종년(놈), 유사, 집사, 복무원… 그러루한 말들이 대개 있겠다. 공무원이라 하든 뽀이 종놈이라 하든 “공복”은 상전의 비위를 맞추어 팽이알처럼 날쌔게 돌아치며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경을 친다. 경하면 욕사발을 얻어먹고 볼기짝을 얻어맞고 중하면 얼굴에 자자를 새기고 감옥에 갇혀 마소처럼 고역을 하거나 수족을 잘리우거나(불알을 까 버리는 형벌도 있다.) 지어는 모가지가 뎅겅 날아난다. 그러니 “공복”으로 살아가자면 상전의 눈에 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일을 잘하면 상전은 입이 벙글써 해서 당신을 구두표양을 하고 (이것이 위주다.) 상장 메달도 준다. 혹간 초채쟁개비나 야룽포대기 같은걸 상품으로 줄때도 있지만 그건 작년까지 하던 수작이고 지금은 걷어 취웠다. 그러면 그 상전이란 놈은 누구냐? 뻔히 다 알다싶히 상전이란 바로 백성들이다. 지구땅덩어리에 백명의 사람이 있다할때 아흔아홉은 백성이고 “공복”은 한놈뿐이다. 그런데 아흔아홉은 성미가 각각이고 식성이 또 각각이고 무슨 요구 수요도 각각인데 들어보면 거개가 정당하고 옳은것이다. 게다가 쩍하면 민주요 자유, 평등이요 공정, 법치요… 인권을 들먹이며 까다롭기 그지없다. 제길, 고추장단지가 열두개래도 시애비입맛을 맞추기가 어려운데, 아흔아홉의 구미를 다 맞추자니 그것도 흡족하게 맞춰줘야 하는거니까 쉬운일인가. 이거야말로 고역중의 고역이 아닌가! 하지만 “공복”이니까 짹! 군소리 한마디 없이 받들어 대령해야 한다. 어디라구 감히! 태만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장사꾼들이 고객(그에게는 백성이라 할수있다.)을 왕이니 황제니 하는 말은 참새를 굴레씌워 타자는 약은 수작이지만 당신은 진심으로 진짜로 백성을 황제로 모셔야 한다. 하여, 당신은 주차대소다소, 경중완급을 식별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락실해야 한다. 그러니 수고하고 고생하고 회생해야 한다. 형식주의 관료주의 향락주의 사치기풍 부정부패짓거리… 그런데다 잠깐이래도 한눈 팔았다가는 큰일난다. 초유록을 보았지? 뢰봉동무를 보았지? 그렇게 못하겠으면,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자원퇴당, 자원사직을하라. 그것이 백성에게도 당신에게도 유익한, 현명한 선택이다. 공복자리를 내 놓으면 될게 아닌가.     지금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활동”은 당내 상하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의 공복들을 똑똑하게 딱아세우는 일이니까 우리가 두손 걷우고 나서야 한다. 저절로 손발이거나 낯의 때는 씻을수 있겠지만 등때기때는 살살 혹은 빡빡 밀어줘야 한다. 가달두새(가랭이, 사타구니)때는 제놈이 부끄럽다고 움켜쥐고 내놓지 않으면 여럿이 달려들어 사지를 누르고 배때기를 누르고 말끔히 벗겨내야 한다. “방조”하는것을 시끄럽게 여기거나 남의 일로 여기거나 겁나하면 더욱 안된다. 페일언, 우리가 참녜해야 한다. 제일인데 제가 하지않고 누가 하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사안은 우리(백성)자신도 부단히 핵심가치관수립에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을 숭상하며 실천하는 세상, 그것이 백성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천하다. 우리손으로 그런세상, 그런천하를 만들어야 한다.                                                                                                                                                                                                                          14.4
71    임신부를 아끼는 세상 댓글:  조회:1880  추천:3  2014-04-13
             수필                                                                       임신부를 아끼는 세상                                                                                                                 회령     가슴붙이 막내딸이 아마도 임신인것 같다. 요즘은 하루건너다싶이 우리집으로 와서는 저의 어머니를 보고 이걸 먹고싶다 저걸 먹고싶다 하면서 소곤 거린다. 그때마다 안해는 딸의 입이 떨어지기 바쁘게 장마당으로 달려가서는 먹고싶다는걸 사다가 어서 배껏 먹으라고 어룬다. 어떤때는 딸이 밥상에 마주않아 숟가락 방아만 찧고 있으면 안달아난 안해가 무얼 먹고 싶으냐고, 음식이름을 주어대며 진지하게 묻고 토론하는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고 우습기도 했다.     녀자들이 임신하면 입쓰림이라는것이 저리도 까다로운건가… 안해가 아이 셋을 낳도록 나는 그런줄 몰랐다. 임신이란 녀자들이 의례히 하는 일이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것도 있거니와 안해는 별로 입덧을 하지 않은것 같다. 혁명사업을 잘하느라 올리뛰고 내리뛰며 밖에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집일은 뒤전이고 안해가 임신으로 고역을 하는지 노래를 하는지 알턱이 없었다. 그리고 개혁개방전 30년세월에는 녀자들이 잉태를 해도 지금처럼 호강을 할 형편이 못되였다. 임신이 어찌 쉬운일이랴! 안해는 참고 견뎠을 뿐이다. 창자가 뒤번지는 임신오조도, 손가락이 쑥쑥 들어가는 임신부증도 그는 말없이 감내했다. 그도 혁명열의가 높아서 아이셋을 산통이 시작되는 직전까지 출근하고 낳았다.     녀자들이 임신으로 입덧이 났을때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당자가 아니고서는, 특히 남자들은 그 절절함과 심각함을 도저히 상상할수가 없다. 몇년전에 미리견(미국)인가 불랑국(불란서)인가 한데서 아이씨를 사내배속에 집어넣고 키운일이 있는데 임신맛이 어떻더라는것은 공개하지 않아서 조금도 알수가 없다. 그사내녀석이 무슨 체험이 있기는 있었으련만 입을 딱! 다물고 있어서 알수가 있는가. 그러나 어쨌든 녀자들의 채험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입쓰림 한가지만 보드라도 같은 녀자들끼리도 엄청 다르다는데 제깟놈이, 멀쩡한 사내녀석이 그 진미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수작부터가 원체 글러먹은 것이다. 다른일이라면 그래도 남녀가 어슷비슷한 체험이 있을수도 있겠으나 임신의 체험만은 남자놈팽이들이 영영 맛볼수 없는것이다. 무슨일이나 감수는 겪은 당사자가 제일로 깊은 법이다. 그래서 제발등의 불이 제일 따갑다고 하는 것이다.     임신을 하면 녀성들은 해부, 생리, 심리, 성격, 습관, 행위… 여러면에서 백여가지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개방전 남자들은 고작해야 임신부의 남산만한 배를 보고 “저거, 되우 바쁘겠지?...” 혹은 무더운 삼복철이거나 하면 “매우 더울거야…”하는 정도였다. 나부터도 그랬다. 그리고 누가 임신한 안해를 좀 관심하면 “저자식은 좁쌀같은게 한뉘 살림군이야. 째째하게 애처가야.”하고 놀려주며 깔보았다. 혁명가 답지 못하다고, 사내대장부 답지 못하다고 인정했다.     지금은 개벽같이 달라졌다. 그때사람들은 남존녀비 류독에 우둔하기까지 해서 그랬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어찌도 총명하고 약삭바른지 안해가 임신했다고 하면 안고 다니며 핥아먹을상을 한다. 추세를 보면 오라지 않아서 “안해임신기10대걸출남편” 뽑기라도 할듯하다. 그런데 걸핏하면 또 리혼을 밥먹듯 하는것은 리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옛날보다 진보해서인지 총명해서인지… 사랑이란 말은 꿀보다 더 달콤하게 입술에 바르고 다니지만… 하여튼 이점은 개혁개방전 사람들이 가근방사촌에도 따르지 못할바다.     지금의 젊은부부들은 임신하면 텔레비드라마에서 보는 장면 그대로이다. 옛날각시들은 임신하면 배가 커질때까지 부끄러워 하며 될수록이면 감추려고 했다. 서방도 “각시가 애 설었다며?”하면 “무슨 소릴!” 하면서 얼굴이 지지벌개 하였다. 입귀가 귀밑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것을 보면 좋아하는 것이 확연했지만 지금사람들처럼 환성을 지르며 뒹굴고 날뛰며 안해를 안고 뺑뺑 돌아치고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안해도 남편에게 조심조심 어려워 하며 귀속말로 속삭였지 어디 지금 각시들 같았던가! 이건 아주 흥부박이 터진듯 요란을 떤다. 부모형제와 친척친우들에게 전화를 치고 메세지를 날리고 대방에서는 드달려 와서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풍덩풍덩 뛰며 축하전화, 전보가 쏟아진다. 마치도 무슨결전이 승리한것 같다.     다음은 임신기 보건이다. 남편은 먹는것으로 부터 놀이감, 음악, 동화책… 하여튼 안해가 유쾌해할 이벤트 깜짝쇼를 만드느라 온갖 지극정성 아첨을 다 한다. 밖에서 다른재미를 보는 작자들도 이때만은 충성을 하며 아양을 떨고 열정을 보인다. 부모들은 임신복으로부터 이이의 옷이며 신 모자까지 마련하고 대기하고 있다. 이때라는듯 잉부는 마음껏 응석을 부리며 향수를 한다. 임신부는 아기방처럼 꾸민 포근한 방에서 영양품과 탕과류를 떨구지 않고 노래를 듣고 그림책을 보며 배속의 아이와 대화를 하고 유희도 하는데 이것이 소위 태아교육이라는 것이다. 30년전에는 상상이나 했든가!     지금은 임신모에대한 사회의 중시도 각별하다. 사람들은 임신부를 보면 무조건 나름껏 배려를 한다. 대합실, 대중교통… 무릇 공공장소에는 임신부 전용석이 마련되여 있다. 그리고 용무에는 절대적 우선이다. 병원에서는 “잉부수첩”을 만들어 정기적 검진을 하는것은 물론이고 보건과 육아상식을 미리 전수 한다. 거기에는 산후 건강미체조와 미용관리 지식까지도 들어 있다. 이디 그뿐인가! 관련부문에서 방문도 자주 한다. 참으로 문명하고 발전 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30년전에는 임신이 어쩔수 없는 고역이였으나 지금은 최대의 행복이고 호강이라 하겠다. 새인간, 새생명을 창조하는 이 공정은 원래가 위대하고 신성한 행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정받고 인식된것이 이제 겨우 30년, 개혁개방 덕분이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남편들이 우매하고 무정했다. 연약한 녀자들이 시련이 많았다…     임신녀들의 행복한 모습, 밝은얼굴을 볼때면 화창한 봄날같아 마음이 즐겁다. 그리고 살뜰하고 듬직한 보호자가 곁에 있어 대견한 심정을 금할수 없다. 전날세상에야 언제 그랬던가! 그때는 세상도 살벌했지…                                                                                                                                 10.5
70    하향간부 댓글:  조회:2704  추천:2  2014-04-08
            실화                                         하향간부                                                                                                           회령     지금은 공작대가 별로 없지만 30년전에는 크고작은 여러가지 공작대가 많았다. 큼직큼직한것을 대충 꼽아본다면 “토지개혁운동공작대” “진반숙반운동공작대” “3반5반운동공작대” “농업집체화운동공작대” “대약진운동공작대” “4청운동공작대” “사회주의교육운동공작대” “공인선전대” “빈하중농선전대” “해방군선전대” “대채를따라배우는운동공작대” 등등이 있었다. 그때는 중요한사업이면 보통 “운동” “대회전”으로 했는데 공작대가 군중들속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지휘를 했다. 이들은 당의 중심사업을 잘 완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업하였다. 공작대성원은 각양각색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공작대나 공통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철같은 규률이다. 그 규률을 공작대에서는 보통 “3 대규률 8항주의”라고했다. 공작대 모든 성원들은 마땅히 높은 정치사상각오를 가지고 규률을 엄격히 지키며 군중들의 앞장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야했다. 시기시기의 당의 중심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수천만의 공작대원들은 피땀을 흘리고 지어는 보귀한 생명을 바쳐가면서 간고분투를 하였다. 마멸할수 없는 그들의 로고와 공헌, 성과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으랴!... 농촌에서는 공작대성원들을 보통 하향간부라고 불렀다.     나는 붉은기아래서 성장했다. 소학교때에는 소선대원이였고 의학전업학교를 다닐 때에는 청년단원이였는데 그때에는 이런조직에 가입하는것이 아주 싶지 않았다. 한반 학생이 3, 40명이라 할때 소선대원은 기껏해야 7, 8명이였다. 청년단원도 그랬다. 정 치사상각오가 높아야 할뿐만아니라 학습과 품행이 좋아야했다. 가정성분은 빈농이여야하고 8촌까지 정치, 사상, 력사와 현실표현에 문제가 없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다정한 친구들에게도 문제가 없어야했다. 나는 의전 3학년때에 연변주직속기관청년사 회주의건설적극분자에 당선되기까지했다.     학교를 졸업하자 당과 국가에서는 나를 변강산골공사병원에 의사로 배치하였다. 우리청년들은 모두 가장 간고한곳에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공사병원에 간후 얼마안되여 공사단위에서는 나에게 공사기관단지부서기직책을 맡겨주었다. 나는 당과 모주석의 지시를 받들고 혁명사업에 충성하며 인민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복무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사회에 나선 그날부터 장장 22년을 나는 공사병원에서 사업했는데 해마다3분의 둘의 시간은 하향간부로 사업하였다. 본직업무에 관계되는 하향은 두말할것도 없고 농업생산과 관계되는 하향도 병원에서는 내가 도맡아 하다싶히 하였다.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이 전개된후(1966ㅡ1978) 대회전형식을 많이 사용하면서 림시적인 공작대를 자주 조직하였다. 례하면 비경생산대회전공작대 모내기대회전공작대 공구량대회전공작대 그리고 잇따라 제방뚝건설, 수리공정, 농토기본건설, 대채전건설대회전을 기세높히 진행하는데 사업량은 많고 선진을 다투는 혁명열의는 북받치고 공사의 간부력량은 부족한 상황에서 공사당위에서는 기관단위들에서 하향간부를 뽑아 공작대를 조직하였다. 병원에도 번번이 명액이 떨어졌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용약 자원을 했고 매번 비준되였다. 나는 당의 중심사업을 완수하는 일선에 나가는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내가 공작대에 자보한 동기는 극히 단순하였다. 하향간부란 병원에 앉아서 새하얀 위생복을 입고 병을 보기보다는 몇십배 간고한 임무라는것은 모두가 잘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간고한 곳일수록 더 가려하며 그런곳에서 적극적으로 사업하는 동지야말로 훌륭한 동지”라고 하신 모주석의 말씀을 가슴속에 깊히 새겼고 또 단위의 실정을 보더라도 청년인 내가 간고한일에서 앞장에 서지않는다면 그건 도리가 아니였다. 나는 당을위한 사업에서 청춘을 남김없이 이바지하며 훌륭한 당원으로 단련성장하며 인민을위한 혁명의길에서 한생을 살리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것이야말로 정확한 인생태도이며 보람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의 나의 인생관 가치관은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였다. 하긴,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에서는 대채를따라배우는운동에서 상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 시간은 대개 3, 4년으로 매개 생산대에 한명씩 들어갔다. 이것을 “점을 잡는다”고하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하향간부를 상대적으로 온정시켰다. 그들은 험수에 합격될때까지 4년이고 5년이고 대채식생산대를 만들어야한다.     나는 상년공작대에 자원하였고 비준되였다. 나의 점은 학서생산대였는데 공사소재지와는 10여리떨어진 차도 통하지않는 곳이 였다. 20여호의 작은 생산대로서 정치대장은 갓 입당한 청년이고 생산대장은 초중을 졸업한지 3년되였다. 그들은 모두 반란파출신들이였다. 부대장은 장가간 젊은이로 농사일에는 미립이 튼 감농군이였다. 그런데 성분이 상중농이였다. 하여 문화대혁명초기까지는 대장을했지만 탈권바람이불자 떨어졌다가 다시 부대장으로되였다. 정치대장은 농기짬같은데로 들어갈가해서 은밀히 “활동”하는 엉큼한 사람이고 생산대장은 공사모주석저작학습적극분자로 입당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였다.     그해 모내기철이다. 공사당위에서는 3급간부확대회의를 열고 모내기대회전을 호소 했다. 공사유선방송에서는 새벽2시부터 “모내기타령”을 띄우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학서에서는 4일늦어 모내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부대장을 비롯해서 사원들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도리가 있었다. 하여 나는 그들을 지지했다. 살얼음이 깔린 논판에 맨발로 들어서서 모내기를 한다는것도 어기낭차한 일이였지만 우선은 벼모가 아직은 어렸다. 정치대장과 생산대장은 당의지시요 계급투쟁, 로선투쟁이요 대채건설이요 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중구난방으로 시무룩하고 말았다.     어느날 반란파출신으로 벼락출세를 한 공사당위서기가 시찰을 내려왔는데 그는 노기등등해서 나와 생산대간부들을 한바탕 닦아세우고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자기생각대로 모내기를 하였고 기한내에 완성하였다.     무슨대회전이든 꼭 동원대회, 총결대회가 있었는데 3급간부들을 불러다가 성대하게 하는것이 그때는 류행이였고 규례였다. 모내기대회전총결대회에서 학서생산대는 지명비판은 받지않았으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게 욕사발을 먹었다.     일이 안되느라 그랬는지 회의가 끝나자 점심이나 먹고 가려고 집에 들르니 부석부석 부은 안해가 울먹울먹하며 맞아주었다. 태여난지 두달도 안되는 딸애는 점적주사를 달고 있었는데 불덩이같이 열이 올랐고 이곳저곳에서는 붉은반점이 보이였다. 벌써 일주일이 되였다는게아닌가?! 그리고 재탄도(눅거리. 한수레에 3원.) 거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갓난애는 감기에 걸렸는지 열이나서 병원의사들이 번갈아 들어와서 보아주었는데 의사마다 항균소를 처방했지만 효험은 고사하고 점점 더 중해만 간다는 것이였다. 진찰해보니 항균소부작용이 였다. 나는 점적주사를 뽑아치우고 알콜찰욕을 하였다. 보리저녘때쯤되여 아이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소재지생산대에 가서 우차를 빌어가지고 급급히 재탄 실으려 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재탄을 실어다 놓은후 밤도와 학서로 돌아갈 타산이였다. 이웃생산대에서 부업으로하는 소형탄갱은 산언덕위에 있었는데 산길로 가면 험하긴 해도 5, 6리고 좋은길로는 10리가 더 되였다. 나는 지름길을 잡았다. 눅거리 재탄은 반수레도 되나마나 하였다. 밤당번으로 나온 농민들은 재탄에 덩이탄을 더 실어 재탄값으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수 없었다. 나는 부지런히 석탄을 채에 쳐서 재탄을 한수레 가득 싣고 바삐바삐 돌아섯다. 날은 깜빡 어두워지고 비는 그냥 주룩주룩 내렸다. 저녘꼴을 먹지 못한 소는 성깔을 부리듯 와락와락 걸었다. 좁고 울퉁불퉁 험한산길은 미끌고 질척거렸다. 나는 소코뚜레를 바싹거머쥐고 소를 달래면서 조심조심 산길을 내렸다. 날씨는 칠흑같이 캄캄해지었다. 급한내리막이면서 90도로 꺾어진 대목에 이르러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수레가 곧추 내리쏠리였다. 밀바가 끊어진 것이다! 찰나, 소는 대가리를 번쩍들고 밀리지 않으려고 앰! 앰! 갑자르며 네다리를 뻗치고 안깐힘을 썼다. 뿔로는 수레멍이를 받치였다. 나도 소와 함께 멍에를 힘껏 뒤로 밀며 단숨을 톱았다. 진땀이 줄줄 흘렀다. 수레는 서너발작 내리 쏠리다가 멈춰섯다. 수레를 세우고 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캄캄한 골짜기바닥이 밑창없는 죽음의 함정같아 보이였다.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곳에서 한발작만 더 나갔더라면 소와 수레는 박살이 되였을것이다. 그 후과를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소의 목덜미를 자꾸 쓸어주면서 소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재탄을 석탄굴에 다 퍼넣고나니 열한시가 지났다. 그런데 아이가 또 열이나기 시작했다. 나는 새벽까지 안해와 함께 아이를 돌보다가 그만 깜빡 잠이들었다. 깨여보니 이게 어느땐가?! 오전10시가 지났다. 나는 마치도 지각한 학생처럼 부랴부랴 학서로 돌아갔다. 반날일을 빠진것이 몹시 마음에 켕기였다. 아이는 후에 별일 없었다.     모내기대회전이 끝난후 인차 한전기음에 달라붙었다. 어느날 비가 쏟아져 사원들은 하루 쉬게되였다. 그날 나는 부대장과 함께 모판써료부를 시냇물에 싣고가서 씼었다. 우리는 써료부를 다 씼은 후 반두를 가져다 고기잡이를 하였다. 세치네는 서너사발이 되였다. 부대장은 으슬으슬한데 한잔 하자며 자기집으로 나를 끌었다.     며칠후 공사당위에서는 하향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당위서기는 나를 호되게 비판하였다. 착오는 모내기대회전에서 상중농 부대장과 단짝이되여 군중의 뒤꽁무니를 따른것, 청가도 없이 모내기대회전총결후 반나절이나 집에서 늑장을 부린것, 그리고 세치네를 잡아 술놀이를 한것 등이였다. 회의에서 서기는 당위의 결정이라면서 나의 점을 학서에서10여리를 더 산골로 들어가는 초평더기생산대로 옮긴다고 하였다.     후일담이지만 학서생산대 정치대장과 생산대장은 당위서기에게 나의착오를 반영하며 잘못된 일의 모든 책임을 나에게 밀었든 것이다. 그래도 대대서기가 나서서 일은 잘한다고, 밤중이라도 환자가있으면 곤히 자다가도 달려가고 이튿날에는 또 일은 일대로하고 속탈과 몸살을 앓을때도 코피를 흘리면서도 일을 했다고 두둔한데서 상년공작대에서 쫓기지는 않았다. 그해 학서생산대의 정치대장은 “활동”한 보람이 있어 소원대로 공사농기짬으로 가고 생산대장은 “사상리론수평이 높고 계급투쟁을 잘 틀어 쥐여서” 입당을 했다. 학서생산대의 대채건설은 성과가 많았지만(주로는 사상상에서) 그해 산량은 전해보다 더 내려 갔다.     초평더기생산대에 간후 나는 그해의 공구량임무를 제때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곳은 한전뿐인데 전기가 없다보니 마당질을 전부 군재와 도리깨질로 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사원들이 일을 잘 했다. 달밤에도 기음을 매고 후치질 가을걷이 탈곡을 했다. 바람이 좋으면 밤에도 양창질을하며 공구량임무를 기한내에 완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한을 어겼다. 나는 또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계급투쟁, 로선투쟁 정치사상투쟁을 바싹 틀어쥐쥐 않는다는 모자까지 씌웠다. 비판투쟁 해야할 사람도, 사건도 없기에 나는 모주석저작학습, 신문의사론, 선진사적 등 정면교육만 했던것이다.     탈곡후 대채전건설대회전이 전개되였다. 초평더기에서는 다락밭을 만들 마땅한 필지가 없었다. 초평더기생산대는 말그대로 구릉위에 있는 더기여서 수전은 풀수 없어도 한전밭들이 모두 반듯한 평전이였다. 그런데 공사당위서기는 정치적각도에서 상징적으로라도 다락밭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내리 먹였다. 서기는 로선적, 정치적, 사상적, 혁명적 높이에서 중요성, 필요성, 박절성을 강조했지만 생산대간부와 군중들은 코방귀를 뀌였다. 나도 그랬다.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궤변이였든 것이다. 돌을 실어들여 뚝을 만들고 흙을 퍼다가 채워서 다락밭 모양을 만들라고 하는데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망발이 였다. 나는 조짚과 꽁깎대로 벼짚을 바꾸어다 사원들에게 동삼내 가마니짜기 개인부업을 하게 하였다. 그것은 사원들의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는 일이 였다. 이로하여 나는 또 계급투쟁 로선투쟁 정치사상투쟁 높이에서 호된분석과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하도 엄중하기에 병원에서도 입당적극분자와 군중들의 비판을 몇차례 받았다. 안해는 병원호사인데 마음만 곱고 언변이 없는 사람인데 그는 쿨쩍쿨쩍 울기까지 했다. 가정혁명화가 부족하다고 그도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점”을 바꾼다고는 하지 않았다. 초평더기보다 더 간고한 곳은 없었든 것이다.     새해 농사가 시작 되였다. 한전농사에서는 씨붙임과 기음, 후치질이 관건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비가오면 한전일은 하지 못한다. 그런데다 초평더기에는 워낙 밭면적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실속있게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동이트면 밭으로 나가고 풀이 보이지 않아서야 집으로 돌아 왔다. 등에 모기불 쑥타래를 꽂고 기음을 매고 후치질을 했다. 달밤에도 일을 했다. 초평더기에서는 대회전마다 며칠씩 규정한 시간을 어겨 나와 간부들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해 농사는 풍작을 했다.     생산대총결이 끝난후 어느날 밤 초평더기 간부들은 콩 한마대와 학서생산대와 바꿔 먹는 그 귀한 벼 두마대를 우리 집에 가져 왔다. 나는 겨우 그들을 설복하여 돌려 보냈다.     그간 몇년사이에 병원의 적극분자들은 모두 입당을 하였지만 나와 안해는 그해에도 입당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락심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동지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줄곧 해석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모주석께서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삼가하며 사업을 잘하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든가! 나는 전혀 위축정서가 없었다. 친구들이 밤낮 하향만 하며 제노릇은 한가지도 못하는 “머저리 하향간부”라느니, 번마다 비판이나 받는 “운동간부”라느니 하고 놀리며 우스개를 하면 나는 “그것 참, 듣던중 좋은 말이야.”하며 유쾌히 웃었다. 친구들은 “저 부실한것 하구는 말도 말아. 아이쿠! 하여튼, 사람은 진투야…”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였다. 나는 그 어느날 나도 당원으로 될것이라고 확신 하였다…     이듬해 봄, 주위생국에서 동북삼성간염병고찰단 성원으로 가라고 해서 나는 상년공작대 하향간부사업을 그만두게 되였다. 두달여 고찰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니 전근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향간부 경력에서 나는 별로 해 놓은 일도 없고 그토록 념원하든 입당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후회되는 것은 없다.                                                                                                                                  11.4
69    괴상한 남도치 댓글:  조회:2231  추천:2  2014-03-31
              잡문                                           괴상한 남도치                                                                                                                        회령     옛날에는 서울을 중심으로해서 남도치요 북도치요 남선이니 북선이니 했지만 지금은 이런말을 별로 쓰지않는것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요(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무슨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인봉건공화국이 뻔 하구만.) 대한민국이요(대한 좋아하구 있네. 연변보다 좀 어떠한걸 가지구. 자유민주민국! 식민지는 아니구?! 사람웃기고 자빠졌네.)하는데, 우리를 꼭 중국조선족이라고 쪽을 놓아(구별해) 말하는것처럼 거리감이 확연히 느껴진다. 남남으로70년을 페인사하고 살다보니 아니, 척을지고 웬쑤로 살다보니, 더구나 근년에 와서는 엄연한 주권국가로 련합국에 등록까지 하고보니 아주 남이 되고 말았다.     조조의 둘째아들 칠보재조식의 칠보시와 같은 상황을 민감하게 통찰하고 지성인들은 “민족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칠보시에 조금 첨삭함. “가마에 콩을 넣고, 콩깍지로 불을때니, 콩은 가마에서 타고, 콩깍지는 재가 되였구나. 본시는 한뿌리에서 낳는데, 서로 죽이기에 그리 급한가.”) 두루 어찌구려 꼬락서니가 우습게 되여 세상의 제일 큰 웃음꺼리가 되긴 되였지만 정체긴 정체다. 하지만, 세계관이 다르고 인생관, 가치관이 다르고 정치제도, 사회제도… 원체 국가가 다르다 보니 정체성수립이 그렇게 쉽지않은 현실이다. 상당한 시간과 과정을 거쳐야 할것이다.     탁상공론을 좋아하고 잘하는 지성인들은 “애국애족을 해라!” “포용을 해라!” 리산가족 상봉을 일상화 해라. 편지거래를 해라. 서로 마음을 좀 열어라. 넓게 마음들을 써라. 나눠 먹어라. 작은것으로 부터 합치면서… 민간거래를 확대 하면서… 화합을 이루어라. 비방중상, 쌍욕질을 말고…(어째서 군사훈련은 거론하지 않는지, 까먹었나…) 서로 좋은 낯으로 웃어라.ㅡ 수십가지 크고작은 대략이요 방략이요 방침이요 책략이요 건의요 하지만 말그대로 탁상공론일뿐… 부질없는 짓거리고 이라리(말공부)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이, 기득자들이(리익을 챙긴자들이) 말하자면 상층인물들이 (실리실세실권강세군체) 통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밤낮 웨쳐대는 “평화통일”이란 민족을 민중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제스처(몸짓 손짓), 거짓말이다. 오직 인민대중의 리익만을 생각는 첯자리에 놓는 공산당원 같은, 초유록 같은, 뢰봉같은, 그런 상층인물이 몇이나 되는가. 내남이 모두…     초유록이나 뢰봉같은 위원장, 최고사령관, 대통령이 나올때까지, 그런사람들로 구성된 령도권력반즈가 나올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라. 그것이 오뉴월에 쇠불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것처럼 아득하고 하염없는일 같겠지만, 그래도 내심하게 기다려라. 별수있나… 그렇다고 또 싸워보겟는가. 딱 단둘이서 딴다를 한다면 혹 어느놈이 항복을 하겠는지?(그럴 가능성은 없다.) 사태가 어디 그런가. 미국과 중국이 대뜸 코를 힝힝 불며 나서겠는데. 왜서? 그들의 리익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보다싶히 미국은 전세계를 미국화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나라고 중국도 중국의 주의가 진리라고 은근히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은 패권국이 되지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세계무대에서 중국말이 점점 더 선다면서(영향력이 커진다면서) 좋아하며 또 더욱 그렇게 나가기를 바라지 않는가.     까놓고 말한다면 대통령이든 백성이든 약소민족이든 강대민족이든 약소국이든 강성대국이든 다 제 욕심이 있는거고 그 욕심을 채우려고 노력분투 한다.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식물도 욕심이 있다. 세상만물은 다 욕심이 있다. 욕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적어도 누구에게나 오래 살겠다는 욕심은 다 있지않은가. 그러니 욕심을 무턱대고 나쁘다고 할수는 없는것이다. 문제는 자사자리개인리기주의냐 대공무사욕심이냐에 달려있다.     초유록이나 뢰봉은 대공무사의 욕심이 가득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빨리 행복하게 잘 살게하려는 욕심뿐이 였다. 그들은 자기의 가치, 행복, 모든것이 이 욕심을 실현하는 그 속에 있다고 확고부동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래도 좋고, 성현이래도 좋고, 하느님 부처님이래도 좋고… 하여튼, 이런 욕심을 사람은 가져야 한다.     세상 6,70억 사람이 한날한시에 공산주의전사로 성현이나 부처님 하느님으로 되였으면 인간세상이 요꼴 요모양이 아니련만, 삼천리 금수강산 고국이, 백의민족이 이 꼬락서니가 아니련만… 이건 어처구니가 없는 얼빠진 미친소리지만 너무도 한심하고 안타까워 해 보는 허황한 소리다. 그러나 수백년 수천년이 지나서 물질문명, 정신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 화해로운사회, 공산주의사회는 꼭 이루어질 것이다. 관건적인것은 물질문명, 정신문명건설인데 즉 경제건설, 사상건설인데 이것은 노력분투ㅡ 투쟁으로 이루어 지는것이다. 큰어른들은 큰 투쟁으로, 무명백성은 평범하고 지모싼피일상에서 투쟁을 해야한다. 사실은 노력분투ㅡ 투쟁은 계속 진행형이다.     나는 벌레보다도 못한 보잘것 없는 백성이다보니 보는것 생각는것 모두가 지모싼피 뿐이다. 극히 개별적인 지엽적인 어떤현상을 가지고 남도치를 괴상하게 보게 된 것도 이래서다. 안광이 좁고 짧아서다. 그러나 투쟁성이라는 본능은 있어서 남도치들의 어떤거동은 리해되지 않고 반감이 생기고 적어도 우리는(중국조선족) 그러지 말았으면 바란다.     일본에 갔다온 어떤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대단히 문명하고 인정스럽고 친절하고 경우가 바르고… 하여튼 우리보다는 사람이, 인격이 대단히 우수하다고 하는데, 어떤 유명한 학자선생은 수백년 력사까지 둘추어 가면서 일본을 미화하는데(미국을 춰 올리는 학자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곳의 백성들이 우수하지 권세가들이 우수한것 같지는 않다. 제일 되지못한, 우리보다(나보다) 백배는 더 나쁜 망나니는 상층것들이다. 일본이나 미국은 알지도 못하면서 이만 지꺼리고 남도치를 말해보자. 물론 역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큰것이라고 사료되는 한가지만 먼저 말한다면 군사훈련이다. 대한민국은 일본과 미국을 등에 업고(무슨 방위조약이라는가.) 쩍하면 조선을 쳐 부쉬는 전쟁연습을 한다. 미국헹님은 아주 한국에 진지를 틀고 앉아서 조선을 과녁으로 겨누며 매일 사격련습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선에서 우리도 쎄니까… 덤벼들면 목숨을 걸고 할거니까… 니들 작작 까불어라… 하며 주먹쓰는 훈련을 하거나 기한이 지난 대포알을 몇알 쏘거나 굶으면서도 원자탄을 두어발 만들면 아주 난리가 일어나지 않는가.(한국에는 핵무기가 없는가.) 남도치들이 미국아덜을 보고 쟁기를 몽땅 걷어가지고 니들 집으로 나가라고 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한미련합전쟁훈련도 언제 한번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보지 못했다. 남도치들은 조선에서 칠가봐 그런다는데, 이전에는 어쨌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공연한 우려가 아닌가. 단 둘이 붙는대도 무승부가 뻔한데… 누구도 전쟁을 바라지 않는거 아닌가. 남,북상층들이 서로 전쟁을 하려한다고 대방을 질책하는것은 민중을 민족을 세상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엉터리 잔꾀다. 자기의 현재처지를, 리익을 지키며 유지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자기에게로 오는 불만과 모순을 전쟁공포로 돌려 완화 내지 진정시키려는 방책일 뿐이다.     사실은 남의집에가서 제일 전쟁을 하고싶어하며 전쟁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미국상층들이다. 중국을 날때부터 생기기를 수탉처럼 생겨서 싸움하기를 좋아한다고 비꼬지만 그건 제가 춤을 추고 싶으니까 동서더러 춤을 잘 춘다고, 춤을 추라고 하는것과 같은 수작일 뿐이다. 큰것이래야 아는것이 기껏 이정도, 이것뿐이니까 이로서 끝내고 내 피부에 감촉이 되는 지모싼피나 말해보자.     남도 어떤젊은치들은 다른사람들 앞에서는 부모님을 개여올리며 여러해 보려도 가지못했다고 눈물을 짜고, 코맹맹이 소리로 용돈도 드리지 못하고 효성을 못했다고 가슴이 쯔르르 해 나는 소리를 잘하지만 외국에 유람가고 운동구경이며 연출구경이며 도박놀이 계집놀이를 하루건너 다니는건 무슨 영문인가. 괴상하지 않은가.     7,80고령의 부모네들이 산골에서 땅을 뚜지고, 산나물을 캐여 먹으며(명절이 되여도 고기한점 먹어보지 못하면서) 그야말로 원시인처럼 살아가는데 자기는 아프리카 흑인부락에 날아가서 자선사업을 하노랍시고 하늘에서 날아온 천사인양 폼을 잡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산골에 박혀 사는 노인네들은 고독과 고생을 달래려고 궁여지책으로 큰집에 모여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며 때로는 억지춘향으로 노래도 두어마디 하며 웃기도 하는데 그것을 건강보건록색식품을 먹으며 오염이 없는 청정지대에서 맑은공기를 마이며 문화생활을 한다고 잔뜩 자랑하는것은 보건복지사회의 은덕인가 자식들의 효도인가.     지하철이거나 구석진 곳에서 혹은 주어온 넝마속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는 사람이 자주 보이지만 세상에서 열몇번째 부자나라라고 간데마다 희떱게 자랑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굶어죽는 사람도 있더구만. 한둘도 아니고, 그야말로 돼지굴 같은데서 돼지처럼 사는 빈민이 가득하더구만 "동믈애호" 단체니 뭐니 하면서 개, 고양이를 얘, 쟤 어쩌구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것은 변태인가 정신병인가. 동물애호도 나쁘다고는 할수없겠으나 사람애호가 먼저 아닌가.     정력(성기능)에 좋다고만 하면 자라는 나무에 서로 질세라 구멍을 빼고 물을 받아 먹고 겨우살이를 먹겠다고 나무를 마구 찍어 넘긴다. 두꺼비, 도마뱀, 굼벵이도 산것채로 삼키고(죽은자도 있는데 병균때문인지 목구멍이 막혀선지) 까마귀대가리를 중국돈 천원에 사먹고 돼지풀도 특효라하고 정력에 좋다고만 하면 개똥도 용약 집어삼킬 지경이니 이상하다. 남녀 모두가 정력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것 같다. 그리고 오입질이 자랑스러운 영광으로 국민운동이 된것 같은데… 잘모르겠다만.     현대신조어라는데도 괴상한것이 많다. 번연히 돼지고기를 씹으면서도 담백하고 고소하고 달착지근하고 향기가 입에 꽉차고 쫄깃쫄깃하고 아삭아삭하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무슨맛인지 알수없다. 지금 한창 먹으면서도 “맛있는것 같아요.” “먹은것 같아요.” 화장실에 갔다오고도 “갔다온것 같아요”… 하는데 우아하게 문명하게 말하느라고 그러는가. 남편을 자기야(우리에게도 옮아 왔다.) 하던데로 부터 지금은 오빠, 아저씨라 하고 안해는 누나, 지어는 엄마라고 부르는자도 있다. 그리고 영어투성이여서 한국말이 잃어진다고 아우성이다.     술판만 펴면 사, 오차, 노래방, 찜질방에서 늘어지고 길거리에서 게우고 싸고… 경찰서로 달려가 싸움질하고 음주운전, 조폭질주… 남녀가 구별없이 뒹굴며 천방지축… 발달국이여서 인권자유, 자유민주, 문명문화, 민국이여서인가.     노래를 해도, 춤을 춰도, 엉덩이를 특별히, 중점적으로, 세차게 흔들어대며 사람들에게 기를쓰고 배꼽과 엉덩이를 보이는것이 보급, 국민화가 된것 같은데 그것은 왜서일가.(우리는 팔로 춤을 추지만 남도치들은 엉덩짝으로 춤을 춘다.)     지금 대한민국노래의 열에 아홉은 “내남자 내여자, 부르면 5분내로 달려갈게, 우리의 비밀아파트, 그때만난 그사람, 또 만나려고 기다리지만, 떠나간 그사람, 너를 안고 놀자, 분위기 좋네 내가 간다, 한번만 더,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그날밤 우리는, 니앞에서 다 벗었다, 무엇이든 다 줄게…” 이러루한 가사인데 아이고 어른이고 흥이나서 부른다. 특히 네댓살, 여나문살 쬐꼬만아이들이 나서서 부를때는 어른들이 너무도 좋아서 법석구니를한다. 주먹만한 발바리가 흘레하는걸 보는것처럼 난증스럽고 민망하기 짝이 없더구만… 나의 정체성수립이 잘 되지못해선가.     대한민국 전임대통령 전두환씨를 비롯해서 억만대재벌부자들이 탐오한 비행은 세상이 다 아는 뉴스다. 어떤상층인물이 수백억벌금을 물게 되였는데 자유민주대한민국법원에서는 교도소에서 하루 간단한 로동을 하면 5억원씩 탕감해 준다는 세계최초의 영명한 판결을 하였다.      …… ……     대한민국만 괴상한 사람이 있는건 아니다. 사람이 있는곳에는 다 상중하의 사람이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사회에 가서도 여전할것이다. 지금과는 물론 성질, 정도의 차이, 구별은 있겠지만.     내가 어떤남도치들을 비웃는데는 나에게, 우리에게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 한국바람깨나 쐬우고 왔다는 어떤사람들이 무분별 대구 한국식을 피워대서,(연길은 서울을 찜쪄먹는 뿌르하통하 기적을 창조했다고 말하는데, 좋은 기적을 말하는게 아니다.) 좀 주체사상이 있기를 바라서, 지각있게 처신하기를 바라서, 우리의 우량한 전통, 풍격, 사상을 고수, 계승, 발전시키며 자존, 자립, 자애, 자강을 고양하기 바라서… 그래서 이런 잡소리를 횡설수설한것이다.                                                                                                                                        14. 3
68    잊을수 없는 유감 댓글:  조회:2810  추천:8  2014-03-24
           중편실화                                            잊을수 없는 유감                                                                                                              회령     장장 십년에 걸쳐 연출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장막극의 력사활무대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충분히 연출하였다. 물론, 총적도연은 중앙에서 했지만 연기기교는 자기나름대로 발휘했든것이다. 지금와서 40대 이상되는 사람들이 그 한단락의 경력을 잘 총결해 보는것은 매우 필요하고도 유익하다. 총결이란 경험과 교훈을 찿는것이 중점이다. 각자의 그 한단락의 경험과 교훈은 자신과 후대들의 인생에 무척 도움이 될것이다.      나는 의과대학 졸업을 반년 앞두고 문화대혁명 광풍을 맞게 되였다.     대학의 열혈청년들은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대자보를 붙이느라고 정신없이 돌아쳤다.     처음에는 “각박하게 굴던”선생님들과 허물이 있는 선생님들이 대자보 포격 대상으로 되였다. 이를테면 학습에 대한 요구가 높고 엄격하여 글자 한개를 놓고도 점수를 깎으며 까다롭게 굴던 선생님, 쩍하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기에 책임성과 업무기술능력, 복무태도가 어쩌구 저쩌구하며 반나절씩 훈계하기 좋아하던 선생님, 무도장에 다니는가, 멋을 피우는가, 련애를 하는가, 술을 먹는가, 담배질 하는가… 쥐잡이하는 삵괭이처럼 눈알을 밝히며 밉살스레굴던 선생님, 우파로 되였다가 풀려났거나 가정성분, 정치력사, 사회배경, 그리고 지난날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선생님들이였다.     그러나 예봉은 인차 대방향인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각급령도자)와 “반동학술권위”(교수, 박사, 학과주임)에게로 집중 되였다. 잇따라 학생들은 “혁명반란파”조직을 만들고 학교를 쥐고 흔드는것은 물론, 사회에까지 뛰쳐나가 시병원, 성병원, 시정부, 성정부를 들쑤시였다. “장”(长,각급령도책임자)자가 붙은사람은 덮어놓고 모조리 비켜 세운후 우선 “타도”를 붙이였다. 그리고 군중더러 검거, 적발, 비판, 투쟁하라고 선동했다. “탈권”(夺权, 령도권 즉 령도책임자리를 빼앗는것)해서는 반란파두목들이 그자리를 차지했다. 뚜드려봐서 “장”자에게 문제가 없으면 “해방”(비판투쟁에서 풀어주는것)을 시키고 단위령도반즈 혹은 반란파지휘부 성원이 되게했다.     나는 반란파를 따라 다니긴 했으나 맹장은 아니였다. 그것은 내가 미친듯 분별없이 날뛰며 마구 반란하는 그런 작법이 썩 내키지 않았기때문에 소극적이였고 가정성분이 상중농이여서 (착취성은 있으나 부농계선에까지는 좀 미치지 못하는것) 반란파조직에서 중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황패”(반란을 반대하는 보수파, 류소기 등소평을 보호하는파)로 몰리우면 혁명의 적이 되기에 좋든 궂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반란파를 따라 다녀야 했다.     한편 모주석께 충성하는 정치적활동과 저작학습, 혁명적대비판을 반복적으로 밤낮 거듭하는 과정에서 나의 사상의식은 커다란 제고를 가져 왔다. 나는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당과 인민에게 충성하며 혁명적일생을 살리라 굳게 다짐 했다. 나는 의사와 약품이 결핍한 변강농촌—가장 간고한 곳에 가서 사업하겠다고 마음먹고 아름다운 설계도를 그리고 랑만적 꿈을 꿨다.     1968년 상반년, 우리 졸업학년동창들은 석달간 졸업학기 학과를 후닥닥 배우고 조국의 각지로 분배되여 나갔다. 그때는 국가의 통일적 배치였다.     나는 원래 참답게 학습하는 우수한 학생이였고 반란세월에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기에 졸업시험도 우수하게 치렀다. 시험은 형식적이여서 쉬웠으나 대부분 동창들은 모르는것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 졸업장을 탔다. 우리는 또 정치시험을 쳤는데 그것은 문화대혁명과 결합하여 저작학습심득 혹은 대비판 문장을 쓰면 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필업론문이고 중요한 항목이였다. 동창들 모두가 이 론문을 잘 썼는데 나도 물론 잘 써서 우수론문에 뽑혔다. 나는 론문에서 나의 인식과 굳은결심을 조금도 거짓이 없이 솔직하게 그리고 만강의 열정으로 서술 했다. 가장 높은 긍정과 호평을 받게 된 단락은 제일 간고한 곳에 가서 혁명사업에 일생을 헌신 하겠다고 한 대목이였다.     내가 이불보따리를 메고 학교를 떠나던날 생화학교수와 약물학교수는 “학교에 남아 과학연구를 하면 가장 알맞는것인데…”하며 무척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의 피끓는 청춘은 “광활한 천지”에 나가 림상의사를 마음껏 하는것이 전부의 소원이였고 “반동학술권위”가 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나는 내심 존경하는 선생님께 “과학연구는 위험해서 싫어요.”하고 대답하며 “반동학술권위는 싫어요.”하는 뒷말은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솔직히 말해서 문화대혁명직전까지 내가 꾼 황홀한 꿈은 생리학방면에서 과학연구를 일생동안 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의 광풍폭우속에서 혁명적인생관이 형성되게 되였다. 그리고 론문을 통하여 세상에 소리높이, 장엄하게 선포했던것이다. 선생님들은 “하긴 그렇다!… 백성이 제일 좋지…”하며 처연한 기색을지었다. “반동학술권위”교수며 박사인 그이들은 설상가상으로 미국특무, 일본특무 혐의까지 쓰고 그때도 한창 고역을 치르는 중이였다. (후에는 전국과학기술대회에서 표창까지 받았다.)     나는 소원대로 편벽한 산간지대—농촌공사(향)위생원에 배치 받았다.     이 공사는 면적이 크고 인구는 많았으나 현성과는 300여리 떨어져있었다. 골짜기 시내물에 다리도 놓지 못한 험악한 신작로는 뻐스나 트럭이 한쪽길만도 대여섯시간 꾸물거리며 달려야 했다. 거리가 멀고 교통이 렬악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하다보니 중한 환자는 집에서 죽을수 밖에 없었다.     공사위생원의 규모는 너무도 보잘것이 없었다. 건물은 비록 기와를 얹긴 했으나 회칠한 흙벽이였고 직원은 모두 10명, 원장(당원), 회계, 출납은 행정인원이고 기술인원은 로중의 문의사, 30대의 서의 왕의사(입당적극분자), 부유보건을 맡은 로처녀 리의사(당원) 그리고 시집간 30대의 서호사(입당적극분자), 처녀호사 허명순, 약국에 중약제사와 서약제사가 각 1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년이였는데 중약제사는 당원이였다. 리의사와 서호사 그리고 처녀호사 허명순은 지구위생학교졸업생이고 다른 기술인원들은 모두 “다다끼아가리”(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기술인원)였다. 그들의집은 모두 공사마을에 있었다. 나의집은 심양시부근의 농촌에 있었는데 이곳과는 수천리 떨어져 있었다. 부모들은 농사를 지었다. 위생원에는 보조진단설비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간단한 화험조차도 할수 없었다.     내가 위생원에 갔을때 정치형세는 어수선 했는데 박원장은 남녀생활작풍문제로 여지없이 뚜들겨 맞은후 남조선특무혐의까지 쓰고(조선전쟁당시 중상을 입고 적후에서 두달만에 빠져 나왔는데 서호사와 왕의사는 거기에 특무혐의가 있다고 걸고 들었다.) “걸려있는”(결론하지 못한것, 직무를 회복 못한것)상태고 위생원에는 소위 림시령도소조라는것이 있었는데 령도성원은 중약제사와 리의사, 서호사였다. 그런데 중약제사와 리의사는 비록 당원이긴하였으나 문화대혁명초기에, 서호사와 왕의사가 박원장을 반란할때 그를 두둔했다가 혼빵을 먹었는데 그후부터는 서호사와 왕의사의 눈치를 은근히 살피며 조심을했다. 서,왕 두 반란파는 쩍하면 다른단위 반란파들과 홍위병을 불러왔다. 병원안에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령도소조조장은 중약제사가 맡았지만 실지로는 서호사가(왕의사는 참모격이였다) 좌우지 하였다.     박원장은 문화가 낮고 착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혁명적인 좋은간부에 속하는 사람이였다. 그런데 우리공사에서는 기세등등한 반란파인 왕의사와 서호사가 견결히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해방받지못하고 그때까지도 걸려 있었다. 공사위생원에서는 혁명위원회도 설립하지못한 상태였다. 공사적으로 유명한 “로다난단위”(문제꺼리단위)였다.     들은바에 의하면 왕의사와 서호사는 이 공사에서 제일처음으로 반란의 기치를 들고 나온 맹장들이였다. 위생원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혁명적군중이라고 했는데 기실은 박원장 보황패들이였다. 박원장에게는 10여년전 어느진위생원에서 원장사업을 할때 어떤 과부호사와 바람피운 전력이 있었다. 하여 그는 당조직으로부터 엄중경고처분을 받고 이공사에 전근 되였는데 말하자면 정배살이로 쫒긴 셈이다. 하지만 출신성분이 좋고 착오가 악렬하지 않고 회개표현이 좋아서 원장벼슬만은 가까스로 지킬수 있었다. 그는 고아로 머슴살이를 하다가 광복(1945년 8월15일)이 되자 인차 참군했는데 해방전쟁, 항미원조에까지 갔다가 돌아온 2등갑 잔페군인이였고 부대에서의 급별은 조선인민군대위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입당적극분자인 왕의사와 서호사는 박원장에게 대자보를 붙이고 불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학교 홍위병들을 끌고 와서 박원장을 투쟁하였는데 고깔모자를 씌우고 개패와 헌신짝을 목에 걸고 (한족들이 바람쟁이를 모욕하는 방법) 쭈그러진 양철통을 뚜드리게 하면서 거리로 끌고 다니였다. 공사내에서 이런 극히 모욕적이고 창피스러운 투쟁을 당한 사람은 박원장이 첫 사람이였다고 한다. 그의 죄장은 이미 처리받은 남녀생활작풍문제와 혁명적군중을 타격 압제 했다는 것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왕의사와 서호사를 입당 시켜주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위생원 군중들과 다른 사람들은 쩔룩거리며 끌려 다니는 박원장을 동정하였고 지어는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군중들은 왕의사와 서호사를 “개인보복을 한다.”, “너무 한다.”하고 뒤에서 욕질했다고한다. 특히 서호사는 왕의사보다 몇갑절 말을 잘하고 악착스러운 여자인데 사람들은 “구린것이 더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서호사가 자기친구의 약혼자를 가로챈 비행을 두고 한 말이였다. 친구와 남자는 이미 약혼식까지 버젓히 한, 갈데까지 간 사이였는데, 그것을 다 알면서도 서호사는 중간에 끼여들어 결국은 결혼까지 했던것이다. 그일로 해서 친구는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외에도 유부남인 왕의사와 시시한 소리가 있었다. 서호사는 입당은 말할것도 없고 원장 혹은 공사부녀주임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가 갔을 때는 그들이 단위에 주로 배겨있으면서 혁명과 생산(사업)을 틀어 쥐느라고 할 때였다. 그리고 계급대오청리운동을 하느라고 밤마다 긴장하게 회의를 하군 했다. 계급대오청리는 사람마다 자기의 력사와 가정상황, 사회관계를 명백히 밝히고 과거의 착오와 사상문제를 털어놓고 혁명적인식을 수립하여 무산계급대오에 서는 운동이다. 말하자면 사람마다 관을 넘는 전민정풍운동이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실행과정에서 운동은 이 사람이 계급의 적인가 아닌가를 식별하는, 특히 눈에 쌍불을 켜고 이색분자, 그물에서 빠진 력사반혁명분자, 특무…를 붙잡아 내는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되였다. 하다보니 운동에서 검사, 교대, 탄백, 적발, 심문, 조사, 핵실, 비판, 투쟁…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적의 켠으로 밀려가지 않으려고 무진애를 썼는데 그것은 인식여하를 보고 판가름이 났다. 하여 혁명적인식을 수립하느라고 (표달하느라고)진땀을 흘려야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과거를 통분해하며 혁명적인식—결심을 발표 했다. 례하면 해방전에 사무원을 했거나 일본인회사에 다녔다면, 굶어죽더라도 왜서 그런일을 하며 밥벌이를 했던가고… 두뇌속에 모택동사상이 없다보니 그런 기로를 걷게 되였다고… 뼈저리게 후회하여야 하고 (심각하게) 이제부터는 모주석을 따라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여들겠다고 혁명적이고도 비장한 결심을 내려야 했다.     로중의 문의사는 과거력사가 불투명하다고 여러날 심사를 받으며 애를 먹었는데, 어린시절 남조선과 일본에서 산 력사는 불투명부분으로 하고 (증실인이 없다보니) 그후의것은 몇번 외지조사까지 하고 결론했는데 “우리켠으로 끌어당길 사람이다. 금후의 실제 표현을 본다.” 이렇게 결론하고 고비를 넘겨줬다. 왕의사와 서호사는 그에게 일본특무, 남조선특무, 국민당특무(해방전 장춘부근의 농촌에서 가난뱅이 뜨내기의사로 살았다.) 혐의를 쐬우고 호되게 닥달을했다. 그들은 아버지벌 되는 로인에게 마구 해라를하며 멱살을 쥐여 흔들고 귀뺨까지 쳤다. 나중에는 공사구류소에 가두기까지 했는데, 훗날 문의사는 그때일을 말하면서 통분하다못해 죽을생각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상중농(소수레가 있고 빌려줄때는 값을 받았다. 그리고 농망기에 일손을 사서 썼다. 그것이 착취행위라고 했다. 하여 상중농이 되였다.)의 자식인데다가 류소기수정주의교육로선의 류독을 받을대로 받은 고린내나는 더러운 아홉째여서(9종문제인물중의 마지막분자 즉 지식분자) 오던날부터 재교육대상일뿐만아니라 요시찰인물(주의해서 관찰할 문제인물)이였다. 그런데 나의 혁명적인식과 결심이 투철하고도 확고해서 여러사람들이 신임해 주었고, 착취계급과 철저히 결렬하며 가정과 계선을 나누고 혁명을 잘하라는 고무격려까지 받으며 고비를 넘었다.     위생원림시령도에서는 나를 생산대에 로동력지원인원으로 내려 보내기도 하고 공정판(수리공정, 국방도로건설, 제방뚝쌓는공정)에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지시대로 열심히 로동에 참가 했다. 하여 어데가서나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당시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기관, 단위들에 생산대 하향임무를(대채건설공작대)하루 건너 떨궜는데 위생원에서는 독신이자 피끓는 청년인 내가 제일 적임자였다. 나는 생산대와 공정판, 지어는 목재판까지… 어데로 가라면 어데로 달려가서 열심히 로동을 했다.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것이 응당한 일이고 나쁠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 했다. 1년후 나는 감정을 받고 정식간부(의사)로 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서호사는 위생원령도반즈에서 세력인물이였는데 그는 왕의사와 함께 공연히 대학졸업생인 나를 질투하고 시기했던것이다. 하여 나는 위생원에는 별로 앉아 있지 못하고 “재교육”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미명하에 이리저리 로동판으로 내 몰리웠던것이다.     림표사건(1971.9.13) 전해에 우리위생원에는 도시병원으로부터 두쌍의 내과의사부부와 화험사 1명, 약제사1명이 변강에 뿌리박는다면서 내려 왔다. 그들은 “의료위생공작의 중점을 농촌에 두어야 한다.”는 모주석의 6.26지시에 따라 의사가 결핍하고 약품이 부족한 농촌의 의료위생면모를 개변하기 위하여 내려왔는데 세간에서는 그들을 “6.26백의전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원적으로 뛰여 왔다고 했지만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것이다. 단위에서 솎아버리고 밀려났던것이다. (혁명성이 북받쳐 자원한 사람도 있다.)벙어리가 소태씹은격이였으나 그들은 가장 즐거운듯 웃는 얼굴이였다. 잇따라 지구위생학교졸업생 다섯이 분배되여 왔는데 총각 두사람은 의사학과이고 처녀 셋중 둘은 호사전업이고 하나는 부유보건의사 학과였다.     “6.26백의전사”중에서 현병원 내과부주임이였던 장의사(당원)는 우리 위생원혁명위원회주임이라는 벼슬을 달고 내려 왔다. 동시에 박원장에게는 부주임이라는 임명이 내려 졌다. 원래의 령도성원에 주임과 부주임이 안배되다보니 위생원의 령도기구는 보다 충실해 진것 같았다. 뿐만아니라 위생원직원도 대뜸 30여명으로 확대 되였는데 그것은 약품이 부족한 국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토제약창”을 꾸리고 직원가족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6.26지시후, 위생원에서는 기술인원만 받은것이 아니라 투시기, 화험설비, 수술실설비와 기타의료기재, 그리고 위생원건물을 지으라고 자금까지 받았다. 그야말로 복이 넝쿨채로 떨어진것이다. 그런데 구호차는 현위생국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가지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위생원(병원)모양새가 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당장 시급한것은 상당히 중요한 외과의사가 없는 것이였다. 농촌에서, 그것도 현성과 300여리나 떨어져 있고 교통이 극히 불편한 상황에서 외과의사가 없다는건 보통문제가 아니였다. 장주임과 박주임은 현위생국에 뛰여 다니며 연수지표를 단꺼번에 네개나 얻어왔다.(구호차를 양보한것이 큰 은을 내기도 했다.) 나와 처녀호사 허명순이는 지구병원 외과로, 위생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두 총각의사는 하나는 오관과(구강과도 겸함) 다른 하나는 소아과 연수를 하기로 했는데 그들은 현병원으로 떠나갔다.     우리의 연수기간은 1년, 명순이는 수술실호사를 학습하게 되였다. 명순이는 산골에 핀 함박꽃같이 환하고 싱싱한 처녀였다. 활달하고 듬직한 성격에 마음씨가 착하고 온순했다. 사람들은 그를 “큰집맏며느리감”이라고 칭찬하며 부러워 했는데 그는 그때까지 약혼하지 않았었다.     나와 명순이는 참으로 열심히 연수를 하였다. 나는 외과병동의사직일실에서 자면서 밤낮으로 수술학습을 하는 한편 틈틈히 ×선(투시)학습도 하였다. 그것은 외과에서 (특히 골과) ×선과와 배합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배워 두어야했다. 그리고 부산과수술도 참답게 배웠다. 부닥치는 모든 환자를 위생원에서 치료하는것이 기본이며 기술상 설비상 해결 못하는 환자도 구급은 할수있어야 한다는게 내 좌우명이였다. 당시 상급부문에서도 당지에서 치료하는것이 원칙이라고 지시했고 무엇보다도 군중들이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명순이와 나는 1년간의 연수생활에서 서로를 더욱 알게 되였고 친근한 벗으로부터 차츰 애정이 싹트게 되였다. 우리는 애정문제에서 심중하고 리지적이였다. 명순이는 첫사랑이였지만 나는 이미 련애사가 있었고 또 가정성분이 상중농이다보니 자신에 대해서도, 명순이에 대해서도 여러번을 심각히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주요한것은 명순이 앞날에 피해를 안주고 끝까지 책임질수 있느냐, 그에게 행복을 줄수 있겠냐가 고민이였다. 우리는 연수에서 돌아온 이듬해 국경절에 결혼식을 치루었다.     대학시절 졸업학기에 와서 나는 동창생처녀와 사랑을 언약한적이 있었다. 그 처녀는 나무랄데가 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그의 부모들은 성정부 간부들이였다. 그런데 내가 고지식하게 제일 간고한 곳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그와 나는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였다. 그에게는 자신은 더 말할것도 없고 나까지도 도시의 큰병원에 분배받게할 힘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주석의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말씀에 고무되여 추호의 동요도 없이 변강농촌을 선택하였다. 그후 처녀와 나는 줄당기기와 같은 싱갱이 련애를 계속하다가 지치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다보니 결국은 헤여지고 말았다. 나는 명순이에게 전부의 과정을 말해주었다. 그는 웃으면서 “괜찮아요.”했다. 그것이 나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였다.     연수에서 돌아온후 나와 명순이는 1년간의 자아감정서와 함께 입당신청서를 위생원 당지부에 바치였다. 우리는 영원히 이곳에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혁명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입당적극분자로 되였다.     환자는 의사를 따르는법이다. 위생원에 내과의사, 외과의사, 오관과, 소아과, 부유보건의사와 중의까지 구전하게 있으니 매일과같이 환자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내과의사는 로중의 문의사까지 여섯이나 되였지만 외과의사는 나혼자뿐이여서 눈코뜰새가 없었다. 수술은 오관과의사와 부유보건처녀의사를 데리고 할때가 많았다. 수술이 있을때마다 수술전준비와 수술후정리를 명순이가 도맡아 했는데 기재소독, 수술실청소와 살균처리, 수술복, 수술포 빨래… 모두에 명순이 손이 가야 했다. 처치환자도 주사실환자 못지 않게 많았다. 하여 나와 명순이는 그야말로 매일 팽이처럼 바삐 돌았다. 우리에게는 출퇴근시간이 따로 없었다. 외과환자란 거개가 시간을 다투고 모진 고통을 동반하는 환자들이여서 외과의사의 궁둥이는 가벼워야 하고 손발이 잽싸고 준확해야만 한다. 늑장을 부리거나 등한시 했다가는 무슨 후과가 생길지 모른다. 열두밤중이라도 환자가 부르면 즉시 달려가야한다. 우리는 30미만의 젊은이다보니 피곤한줄을 몰랐고 그보다도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높았다. 우리부부는 결혼시에 며칠 휴가를 맡아서 그때 나는 명순이를 데리고 집에 한번 갔다온후 그후에는 한번도 위생원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수 없었다. 우리는 애기 갖는것도 뒤로 미루었다.     우리가 환자를 열정적으로 대하고 세심히 보살피며 참답게 책임진데서 호평은 날따라 높아 갔다. 로원장 박주임은 우리를 자주 고무격려해주었다.     농촌환자들은 어느의사가 용하다고 하면 무슨병이고 가리지 않고 그 의사를 찾는다. 기층 일선의 의사로서는 무슨병에 부딪치면 무슨병을 치료할줄 알아야 한다. 위생원의사에게는 이점이 상당히 귀중하다. 그때 상급위생부문에서는 “한가지에 능통하며 여러가지를 할줄 알아야 한다.”(一专多能)고 호소 했는데 나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나는 이빨을 뽑을줄도 알았고 코구멍과 입안의 수술도 할수 있었으며 계획생육관련수술과 인공류산에도 능숙했다. 그리고 투시와 촬영도 하였다. 나는 명순이에게 화험조작법을 배우라고 권고 했는데 그는 틈틈히 화험을 배워냈다. 일단 “6.26백의전사”들이 떠나버리면 모든일은 뿌리박은 우리들이 맡아 안아야 하고 또한 잘 해내야 하겠기에 다방면의 능력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위생원에서 공인하는 기술골간이였다.     위생원령도에서는 단위가까이에 우리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상당히 먼곳에서 남의집 건넌방살이를 했었다. 시비는 있었으나 결국은 직원을 관심하고 단위사업상 편리도 고려 한다는 차원에서 령도성원들의 의견은 가까스로 합의점을 찾았다한다. 위생원에서는 수술실, 투시실, 화험실, 주사실, 처치, 오관, 부유보건, 지어는 약국의 열쇠까지 우리에게 맡기였다. 하여 급진환자는 언제고 처리할수 있었다. 직일서는 사람들도 매우 편리해서 좋아 했다.     당시, 의료위생계통에서는 “의료위생사업의 중점을 농촌에 두어야 한다.”는 모주석의 6.26지시를 관철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구체적인 사업들을 많이 하였다.     례하면 대대에(촌) 합작의료위생소를 건립하고 “맨발의사”를 배양 안배했고 단위와 생산대에는(촌민소조) “홍의참”(红医站)을 만들고 생산을 탈리하지 않은 위생원(卫生员)을 1-2명 양성해 주었다. 약품이 부족한 국면을 해결하기 위하여 “3토4자”(三土四自, 토의사, 토약, 토방법, 자기절로 배양하고, 만들고, 장만하고, 사용한다.)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 했다. 장주임은 대대합작의료위생소의 70%이상을 “3토4자”가 점령해야 한다는 지표를 결정하고 강력히 추진했는데 이는 전 성적으로 가장 혁명적수준이였다. 그외에도 위생방역, 계획생육, 애국위생운동을 지도 전개 했는데 농촌에서는 “량관5개”(两管五改, 물과 분변관리를 틀어쥐고 변소, 돼지우리, 퇴비장, 마을길, 우물개조,)와 “4해소멸”이 중심과제였다. 음료수와 분변관리를 틀어쥐는것은 기본고리(纲)이고 5개에서는 마을실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그리고 “4해”는 참새가 빠지고 파리, 모기, 빈대(이도 빈대와 함께 한개 항목에 넣었다.) 쥐가 소멸대상이였는데 사람들은 참새가 너무 재잘거리며 억울하다고 하는 바람에 시끄러워 빼 주었다고 하며 와하하 웃기도 했다. 공사위생원은 자신의 의료업무도 잘 완성해야 할뿐만아니라 대대합작의료위생소를 지도 협조하여 상술한 임무를 완성해야 했다. 위생원 장주임은 사업열정이 높고 창발력이 뛰여난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를 “신발의사”(개조가 수요되는 지식분자, 후에 이말은 위생계통의 류행어가 되었다.)들이라고 하면서 기층에 내려가 맨발의사와 한덩어리가 되여야 하며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부단히 받아야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우리는 시기시기에 따라 “3토4자의료대”, “계획생육의료대”, “량관5개의료대”, “4해소멸검사조”, “애국위생검사단”, “순회의료대”, “위생원, 접생원 배양학습반”, “농업지원”… 등등 다종다양한 명의로 줄기차게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하며 하향을 련속 부단히 하였다. 매개인에게는 하향날자 지표와 농업로동에 참가하는 날자 지표까지 있었다.     장주임은 무슨 사업이나 임무지표, 완성시간을 명확히 결정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추진했는데 현과 지구, 성에까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우리공사의 의료위생사업은 확실히 많은 개선과 제고를 가져와 령도로부터 긍정을 받았고 군중들도 만족해 하였다. 특히 위생방역, 계획생육, 애국위생 방면에서 성적이 돌출하였다. 이면에서 나는 장주임의 유능한 조수이자 주력이였다.     장주임은 무슨일에서나 선진을 다투고 앞장에 서려 했는데, 책임자로 말하면 장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명예를 추구하며 실제를 탈리하고 극좌로 나간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마늘로 감기를 예방할수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대뜸 생산대 위생원들까지 발동하고 임무를 주었는데, 마늘즙을 내여 코구멍에 떨궈넣게 하고 생마늘로 코구멍을 번갈아 틀어막게 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통계수자를 보고하게 했다. 학교와 단위들에서도 위생원들이 마늘즙소동을 벌리게했다. 또 식초를 증발시키는 방법도 일반화하면서 재채기소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뒤에서는 공사위생원을 아이들 작란을 한다고 욕하였다. 벼모철에는 모내기대회전을 지원한다면서 생당쑥과 오이풀을 달여 리질예방약이라고 하며 논판으로 이고 나가 사원들께 돌아가며 한사발씩 먹이는 활동을 했다. 농민들이 억지로 그것을 먹고 토하거나 배가 아프다고하면 위생원들은 모주석의 혁명적위생로선, 6.26지시에 맞선다고 그들을 비난했다.     그때 사회상에도 괴상한 일들이 많았다. 토끼와 닭을 안고 다니며 피를 빼서는 주사를 맞는 일도 있었는데 장주임은 그것도 신생사물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감숙인가 청해인가 한데서 서슬(卤水)을 끓여 깡치를 먹고 위병 , 풍습병, 심장병, 페병을 떼였다고했는데 그것이 만병통치명약이라고 널리 소문이 나고 위생행정기구에서는 추광하라고 지시까지 했다.     장주임은 누구에게 질세라 그 토방법을 적극 받아 들였다. 현병원에서 서슬로 주사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는 우리 토약공장에서도 즉시 주사를 만들게 했다. 서슬주사는 혈관에 놓는것인데 우리공사에서는 그것을 맞고 어린애 한명과 중년부녀 한명이 죽기까지 했다. 서슬주사탓인지, 다른탓인지는 밝히지 못했으나 장주임은 서슬주사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하며 누가 만약 이 신생사물을 공격한다면 그와 끝까지 로선시비를 할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서슬주사는 약국에 번듯하게 진렬해 놓고 상급검사단이 볼수 있게 해놓았을뿐 장주임자신을 망라하여 위생원의사들은 누구도 더는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장주임의 드센 지휘하에 대대합작의료위생소들에서는 70%이상의 “3토4자” 지표를 실현 했다. 이것은 전 성적으로 앞자리였다. 그런데 기실은 모두가 형식적이였다. 대대맨발의사들은 감기약 1호, 2호… 설사약 1호, 2호… 하고 병에 (알도 있고 가루도 있었다.)표딱지는 붙여 놓았으나 그것은 검사맟히기 위한 눈가림이고 실지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차라리 첩약을 먹게 하여 달라고 떼질 쓰며 접수하지 않았다. 그것을 한줌씩 여러번 먹는것이 힘들기도 했거니와 효과도 알리지 않았던것이다. (기침물약같은 한두가지 토약은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침을 놓아달라고 했다. 아니면 집에서 강다짐으로 들어 누워 앓기도 했다.     장주임이 친히 선발하고 배양한 어느 맨발의사는 (당원. 다리를 상하여 불구가 된 농촌청년) 장주임의 지시를 적극 따라 나섯는데 그는 자기의 몸에 자기가 직접 침을 놓으며 의학 학습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자체로 약을 만들어서는 자기몸에 실험 했다. 그러다가 몇번은 중독이 되여 큰일날번 하기까지 했는데, 그는 맨발의사의 모범인물로까지 되였다. 장주임은 그를 어느대대의 합작의료위생소에 안배 했다. 그 대대에는 원래 유명한 로중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성분이 부농이고 그가 바로 부농분자였다. 장주임은 대대혁명위원회와 반복적인 협상(투쟁)을 하고 로중의를 밀어낸후 맨발의사를 안배 했던것이다. 그런데 대대빈하중농협회주임이 맨발의사를 “개뿔짝도 모르는 생둥이”라느니 “도끼의사”라느니 하며 모욕중상하고 비방공격하는데 앞장 섯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3토4자”약을 “쥐똥같다, 토끼똥, 염쇠똥 같다, 쇠똥부스러기 같다.…”하며 똥이란 똥은 다 주어다 빗대면서 악렬하게 무함 공격했다. 이런 정보가 장주임에게 입수되자 그는 성이 나서 펼펄 뛰였다. “이눔이 령감쟁이, 한번 혼빵을 먹여야 겠군!” 장주임은 왕의사, 서호사 등 대여섯 사람을 이끌고 가서 그 빈하중농협회주임과 대대적인 변론을 했다. 그들은 련5일간 밤마다 그 대대로 가서 수정주의반동위생로선을 비판하고 류독을 숙청 했는데, 애매한 부농의사는 산과녁이 되여 빈협주임대신 즉살나게 투쟁 당했다. 나중에 빈협주임은 인식착오를 승인하고 태도표시를 하였는데 기껏한다는 소리가 “먹고 싶은 사람은 사발들이로 갖다 먹소. 말리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안 먹겠소. 앓지 않으문 될게아니우.”라고하는것이였다. 그리고 한술 더 뜨며 “요새 보니까 당신들 기운살이 드세더군. 혁명성이 대단하던데 래일부터 우리대대 제전(다락밭)건설에 나오슈. 로동력이 부족한테. 커털(口头)혁명파만 하지 말구 실지 행동으루 해야지…”하고 역공격을 하는것이였다. 장주임은 속에서 홍두깨가 치밀었지만 로력지원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응낙하지 않다가는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에 소극적이였다는 모자를 뒤집어 쓸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3토4자” 보급률이 70%라는 기적적 성적을 올린후 장주임은 그것이 경상화 되였을뿐만아니라 더욱 공고발전 되여간다고 상급에 보고하고 경험소개도 여러번하였다. 농촌에서 대채 참관을하듯 지구는 물론, 성내 여러곳에서 우리공사의 “6,26지시”관철락실선진사적을 학습하려고 참관단이 련속부절 들이 닥쳤다. 성혁명위원회 위생청에서는 우리공사위생원을 따라 배우자는 구호를 정식으로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잇따라 “신의료법”“신침료법”을 대폭적으로 일반화하는 바람이 맹렬히 불어쳤는데 신화같은 소문이 매일과같이 들려왔다. 어떤것은 중앙인민방송국에서 방송원이 목이 꽉 메여 격앙된 목소리로 방송까지 했다. 그 실례의 하나로 광주 모병원에서 침구마취로 수술하는데 성공 했다는 소식을 들수 있다. 침을 꽂고 모주석어록학습을 겸용했는데, 환자는 무려 여섯시간이나 되는 대수술과정에서 저작학습 심득을 발표하고 어록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며 원만하게 수술을 받았다는, 세계를 놀래우는 희한한 뉴스였다. 그뿐이 아니다. 은침 한대가 모주석의 위대한 혁명사상과 무한한 사랑을 주어 벙어리가 “양반극” 노래를 하고 소아마비 후유증이 말끔히 치료 되여 롱구장에서 맹호같이 뛰였다는 방송과 문장도 있었다.     그때 우리지구병원에서도 경천지동의 희한한 기적이 창조되였다. 그것은 맨발의사가 백선피가루봉지를 안고 서의들만의 신성한 령역인 수술실에 들어가(폭파약을 안고 적의 또치카에 뛰여들듯 용맹한 기세로) 반동학술권위들과 서의들이 쩔쩔매는 출혈을 지혈시켰다는것이였다. 그 맨발의사는 백선피가루를 뇌수술환자의 골속에 뿌려 넣었다는것이다. 물론 환자는 죽었으나 따라서 지혈은 된것이다. 백선피가루가 막았는지, 심장이 서서 지혈 되였는지… 혁명적 목소리는 맨발의사의 “3토4자”가 위력을 떨쳐 휘황한 승리를 쟁취했다고 소리높이 말했다. 지구병원에서는 침구마취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가져오고 있다고 했다.     다급해난 장주임은 우리공사위생원에서도 형세에 바싹 따라 “신의료법”, “신침료법”을 대대적으로 보급하게했다. (왕의사를 현에서 꾸린 학습반에 파견하여 배워오게한후 공사, 대대, 생산대와 단위 위생원들에게까지 배워주게하였다.)“신의료법”에는 물론 여러가지 기발한 방법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피부에서 이상한 점(기미같은)을 찾아 삼각침으로 그것을 뚜지고 병줄을 (사실은 근막임.)뽑아내는 방법도 있었다. 실오리같은 흰색섬유를 끊어놓거나 조금 뜯어 내고는 모든 병의 근원을 쉬원히 뽑아 버렸다고 했다. 시술과정에 환자는 몹시 아파도 모주석어록을 따라 외우며 참아야 한다. 시술이 끝나면 “만세!”를 웨치기도 했다. 하긴 생살을 뜯어내는 고통에서 풀려 났으니 만세를 웨칠만도 했다. (마취제는 금용함) “신침료법”도 희한했다. 그중에서 나를 제일 조마조마하게 한것은 경추에 있는 대추혈을 3-4치 심도로, 즉 척수강내에까지 찌르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정신분혈증환자치료에서 즉효라고 했는데, 왕의사는 위생원, 맨발의사와 위생원의사들이 전부 모인 장소에서 “신침료법”조작을 하여 보였다. 그런데 정신병환자가 호흡이 정지되는 바람에 우리는 무진애를 써서야 목숨을 구했다. 정신병환자는 그후 없던 증세까지 겹치어 가정을 매일 살풍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상완, 중완, 하완혈을 (명치아래, 복부의 침혈)등어리로 나가게 침을 놓는 소위 “투혈(透穴)”료법도 손에 진땀을 쥐게했다. 그밑에는 간, 위, 대동맥이 있다. 그런데 이런 혁명적 “신침료법” “신의료법”은 간단하고도 배우기 쉽고 또 많은 문제를, 특히 서의가 손을 들고 나 앉은 난치, 불치의 병 치료에서 그 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모주석의 혁명적위생로선을 관철집행하는 구체적 실천행동이라고했다. 맨발의사와 위생원들은 쉽사리 배우고 응용했다. 이점에서는 신을 신은 위생원의사들이 뒤떨어졌다. 하여 장주임은 병원의보급률, 사용률 지표(그가 결정한 높은지표)가 달성 못된다고 매일 우리를 닥달질 했다. 그러나 소나기만 울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환자에게 사정 사정 해서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게 요긴하지 않은곳을 침 두어대 놓아 주는것으로 보급률, 사용률 지표를 완성했고 장주임은 상급에 할말이 있게 되였으며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였다.     장주임은 우리도 수술에서 침구마취를 하여 또 한번 전 성을 깜짝 놀래우며 뒤흔드는 기적을 창조하자고 여러번 시도를 했다. 그러나 번마다 환자가 마취가 안된다고 고함을 지르며 반항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 모주석어록랑독과 노래를 잘하는 리의사와 서호사, 양반극노래를 한곡조 잘 뽑아넘기는 왕의사가 전국 노래자랑 경연을 하듯 목이 쉬게 읽고 부르고 했으나 환자에게 효험이 없었다. 그러나 장주임은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진사적을 불이 번쩍나게 만들어 냈다. 계획생육대회전(돌격섬멸전)을 전개할때 우리는 절육대상들을 위생원에 불러다 수술하던 데로부터 수술기재보따리를 둘러메고 찾아 내려가서 붙잡아 수술을 했는데 이 조치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후 장주임은 외과수술도 그런식으로 하여 보자고 나를 핍박하다싶이 했다. 나역시 영웅심이 발동되어 한번 모험해 보기로 했다. 마침, 란미염환자가 수레에 실려 위생원으로 왔는데 단순성이여서 보수료법으로도 치료 될것 같았다. 그런데 환자는 기어코 쉬원히 떼여버리겠다는것이였다. 장주임은 그 환자를 다시 집에 싣고가서 수술하자고 했다. 그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되였다. 장주임은 소리높이 개가를 울리고 우리위생원은 또 한번 전성을 들썽케했다. 모르긴해도 성적으로 혹은 전 지구적으로 우리가 첫포를 울렸을 것이다. 이런식의 수술을 장주임은 “캉톨수술”(炕头手术)이라고 명명했는데 인차 의료위생계통의 혁명적행동을 상징하는 류행어가 되였다. 장주임은 “캉톨수술”에 온갖 혁명적어구와 높은 사상경지를 부어 넣었는데, 상급에서는 아무리 찬양하고 미화해도 절대로 과분한것이 아니라고 부추기며 한술 더 떴다. 그후 우리는 또 한번 “캉톨수술”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수가 없었다. 수술후 환자는 염증이 와서 위생원에 올라와 오래동안 입원치료를 했다. 장주임은 “캉톨수술”에 대하여 더는 강조하지 않았고 나도 다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문화대혁명은 8-9년 진행 했지만 끝날줄 몰랐다. 운동에 운동이 꼬리를 물고 학습에 학습이 거듭 되면서 점점 더 심입되고 계속되였다. “비림비공”(批林批孔)에 잇따라 “수호전”에 나오는 송강의 “투항주의”를 비판하고 “1타3반”“로선톺기” “토구납신”(ㅁ土旧纳新)을 전개하면서 또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바람이 슬슬 불어 왔다.     문화대혁명후기 공사당위에서는 우리위생원에 입당지표를 두장 주었다. 그런데 위생원에는 입당적극분자가 일곱명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입당을 신청했다. 그들로는 왕의사, 서호사와 같은 로적극분자가 있었고 우리부부와 장주임의 안해, “6.26백의전사”인 최의사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왕의사나 서호사에 비하면 햇내기 적극분자였다. 그러나 스스로는 누구에 못지 않게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중은 많고 죽이 적은 상황에서 입당신청자들은 은근히 긴장해 하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위생원 지부사업은 박주임이 주로 책임 졌는데 그는 신청자들의 재료정리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재료준비는 충분하게 되였으나 나의 재료가 채 되지 못했다. 하여 지부에서는 중약제사와 왕의사, 서호사를 파견하여 나에 대한 외지조사를 하였다. 성분문제와 대학시절의 나의 표현을 재확인 조사하는것이 주요내용이였다.     위생원당지부에서 본격적으로 입당심사를 하려고 하는 어느날 란미염환자가 수레에 실려 왔다.     환자는 19살되는 청년이었는데 급성화농성란미염이였다. 아직 터지지는 않았으나 급히 수술해야 했다. 나와 명순이는 수술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장주임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란미염환자의 치료문제를 토론시키는것이 아닌가?! 그는 “군책군력”(群策群力, 군중의 지혜와 힘)을 발휘하여 치료하자고 호소했다. 나는 아연실색하였다. 환자가 시간을 다투는데, 너무도 명확한 치료방안이 눈앞에 있는데 “군책군력”이라니?… 나는 뗑-해서 여러사람들의 입만 바라 보았다. 항상 남먼저 발언하는 왕의사와 서호사가 앞다투어 발언하고 잇따라 입당신청을 한 다른 세사람들도 뒤질세라 발언했다. 환자는 죽는다고 아우성 치는데 그들은 고도로 되는 사상각오를 표달하며 장편대론을 펼치였다. 그들의 발언을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우리위생원에서 외과수술실이 “양노철학”과 “숭양미외”의 소굴이며 완고하고 락후하고 썩어빠진 수정주의반동적위생로선의 보루라는 것이였다.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가하는 문제는 단순한 치료문제, 업무문제인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로선투쟁, 사상투쟁이며 누가 누구를 전승하느냐하는 사활(死活)적인 대시비, 대방향문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국의 위대한 보물고인 중의적 방법으로 이 “금구”를 단번에 짓부시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자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은 꼭 달성되어야 하며 능히 달성 된다고 호매롭게 말하였다. 그야말로 감동적인 장면이였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멍해 있었다. 장주임은 확실히 위중한 환자가 옳은가고 나에게 물었는데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는 “그럼 좋다! 이런 환자를 ‘군책군력’으로, 중의적 방법으로 치료한다는것은 혁명적 기적이다. 우리는 단결하여 더욱큰 승리를 쟁취하며 다시 한번 세상을 놀래우자.”고 격정 드높이 호소했다. 그는 당장에서 치료소조를 뭇고 자기의 지휘아래 입당신청자 다섯사람과 (나와 명순이는 빼놓았다) 로중의 문의사 그리고 중약제사를 성원으로 결정했다. 장주임은 문의사에게 “혁명의 중임을 맡긴다.”고하며 잘하라고 고무격려를 하였다. 서호사는 제꺽 나서며 문의사에게 모주석어록 두마디를 증정 하겠다고 했는데 (당시령도들이 이런 제스처를 잘 사용했다.)그가 증정한 어록은 “일부파쿠 얼부파쓰(一不怕苦,二不怕死)”와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무서워 말며 만난을 물리치며 승리를 쟁취하려 가자.”였다. 그리고 잇따라 이것은 한차례의 사상표현을 보는 중대한 고험이라면서 혁명적극성을 다해야 한다고 압력과 고무를 동시에하였다. 그런데 문의사는 오히려 몹시 당황해하며 난처해 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련한 처세가였다. 그는 매우 겸손하고 허심한 태도로 자기의 능력을 극력 과소평가하면서 여러사람이 공동히 노력하자고 하였다. 특히 장주임이하 왕의사, 서호사, 그리고 여러선생들의 구체적인 지도하에서 자기도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궁여지책이랄가 대대의사들과도 협의하는것이 어떠냐고 건의를 했는데 장주임은 그것도 참 좋은 발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뒷말 한마디로해서 나는 뒤통수가 부옇게 몰리웠다. 그것은 부농의사를(대대위생소에서 쫓겨난) 회진에 참가시키면 어떠냐고 건의했는데(그는 원근에 명의라고 소문난 로중의다.) 서호사는 대뜸 “계급의 락인은 어쩔수 없구만! 한심하네!”하고 나를 찔- 흘겨보며 쏘아 부쳤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뒤질세라 격분해서 나를 한바탕 성토했다.     치료소조는 긴장히 돌아쳤다. 누구의 처방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서슬점적주사를 환자에게 달아 놓고 두세가지 첩약을 급히 달이였다. 장주임은 대대맨발의사들을 불러 올리고 현병원중의과와 중의병원에 전화로 자문을 하였다. 환자는 약을 먹이면 토하고 죽겠다고 소리쳤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서호사는 문의사에게 증정한 그 두마디 어록을 환자에게도 몇십번 증정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어록노래와 양반극노래도 불러 주었다. 그러나 환자의 복통은 가중해만 갔다. 그때, 나는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에 조급해 나고 격분까지 했지만, 그리고 사상상 량심상 갈등과 투쟁이 심각했는데 결국은 자신을 위하여 명철보신에 일변도를 하고 말았다. 처방을 련속 바꾸어 들이 댔으나 환자는 약을 삭이지 못하고 토하기가 일쑤였다. 배에는 중약으로 고약을 만들어 바르고 장주임이 배양한 그 맨발의사는 환자의 귀와 복부, 사지에 몇십대의 은침을 하루 두번씩 명심해서 놓았다. 서슬점적주사병은 디룽디룽 달려있었다. 이틀이 지나도 환자의 병세는 조금치도 수그러 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 갔다. 환자의 어머니는 현병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빨리 수술해 달라고 애걸 하기도 했는데 내과의 세 입당신청자들은 그에게 계급투쟁, 로선투쟁을 말해주고 모택동사상과 6.26지시를 선전해 주느라고 땀을 흘리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산골아낙네는 자꾸 대항하며 락후한 소리를 거듭 했다. 순박하고 어리무던해 보이는 산골 농민은 “하여튼, 있는 힘을 다 써 주시우. 수고해 주시우.”하며 수심 가득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억지로 띄우며 자꾸 손바닥을 비비였다.     사흘이 지나서 환자는 진정되여간다고 했다. 치료소조에서는 성수가나고 사기가 배로 오르고 장주임의 얼굴에는 승리의 희열이 력력 했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신기해났다.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 모순되고 조마조마하든 마음이 활 내려갔다. 이제 기적같은 경험을 잘 학습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서 환자는 진정되여가던 그 맵시대로 죽고 말았다. 환자의 어머니는 “병원것들이 다 벼락 맞아 뒈져라!! 급살을 맞아라!!”하고 실성하여 악을 썼다. 산골농민은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말을 그렇게 하우. 좀 그만 하우.”하며 마누라를 달래였다. 그는 부근의 생산대로가서 수레를 빌어다 죽은 아들을 싣고 집으로 갔다. 그는 장주임과 치료소조의사들에게 “수고 하셨수다.”하고 작별인사까지 했다.     환자는 죽었다. 그러나 그간의 과정을 가지고 장주임은 네댓시간이나 되는 “활학활용강용”(活学活用讲用)재료를 만들어 가지고 현과 지구의 위생계통대회에서 선진사적 보고를 하였다. 그의 선진사적보고는 마지막 부분이 특히 정채로웠다. 그 단락은 다음과 같다. “환자는 죽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은 혁명적이였고 정확했고 위대한 승리를 했다! 모주석의 위대한 무산계급위생혁명로선을 관철하는 길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수 없다. 지나온 혁명의 로정이 그렇지 않았던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섯다. 전진의 도로는 곡절적이고 전도는 광명하다. 우리는 위대한 모택동사상의 기치를 높히들고 무산계급혁명로선을 따라 힘차게 전진할것이다!우리의 앞길을 막을자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의 목표는 꼭 실현 되여야한다! 우리의 목표는 꼭 실현 된다! 동지들! 노력분투 합시다!!”청중들의 느낌은 다종다양 했겠지만 박수갈채는 우렁찼다. 구구절절 모주석을 높이 받들고 그이의 말씀으로 배렬했는데, 사개가 맞고 빈틈이 없고 흠이없이 미끈하고 류창하고 힘찬 강용앞에서 박수를 치지않을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절창이라 할만큼 기막힌 기담괴론이였으나 혁명위원회가 지지하는데 누가 감히 시비를 할텐가?! 성혁명위원회 위생청의 지시로 장주임의 선진사적강용발언은 록음테프로 편집되여 전성 방방곳곳 위생계통의 학습재료로 되였다. 지어는 다른 부문에서도 갖다 들었다. 강용재료에서 나와 명순이는 두말할것없이 전형적인 반면교재로 인용 되였다.     그런데, 제갈량이라고 소문난 장주임도 이번일에서 한가지 실책만은 승인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환자선택에서 경한환자 - 이를테면 만성발작성란미염 같은 환자를 선택하여 중의방법을 썼더라면 더욱 휘황한 성적을 걷우었을 것인데 그점이 아쉽게 되었다. 치료하지 않아도 며칠지나면 별일 없는 그런 환자를 선택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제돈을 쓰면서라도 환자를 실물견본으로(증인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멋드러진 강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별문제였다. 환자가 죽었든 살았든,(살았다면 더 대단했겠지만) 장주임의 도금칠에는 별로 영향이 없었다. 상급에서는 그의 높은 계급투쟁, 로선투쟁, 무산계급사상각오와 혁명성, 령도예술 그리고 여러가지 사업성과를 이미 긍정하고 있었던것이다. 그해 그는 친히 배양한 맨발의사와 함께 전국농촌위생공작좌담회에 참가하여 강청을 뵙는 영광까지 지니였다.     며칠후 위생원당지부에서는 입당신청자들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게 되였다. “토구납신”지시에 따라 당조직 활동에 군중대표를 참가시키는 새로운 형식이 창조 되였는데 입당신청자 일곱은 당사자면서도 군중대표신분으로 모두 참가 했다. 그외에 군중대표가 너덧사람 더 있었다.     나는 첯번째로 심사를 받았는데 대뜸 미끌어 떨어지었다. 그러나 심사시간은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길었다. 내가 미끌어진 주요한 원인은 란미염환자(죽은 청년)를 다짜고짜로 수술하려고 한 엄중한 착오 때문이였다. 입당을 신청한 다섯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언 했는데 당원들보다 그들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였다. 그들은 발언에서 저마다 십여조목의 모주석어록을 인용하면서 계급투쟁의 강(纲)과 로선투쟁의 선(线), 그리고 사상투쟁의 심도에서 나를 분석하고 “성근한 동지적 방조”를 하였는데 마치도 대비판을 하면서 나를 투쟁하는것 같았다. 란미염환자사건은 나를 어느코에 갖다 걸어도 다 들어 맞는 비판거리였다. 그리고 분석 심도가 아무리 깊어도 과분하지 않았다. 발언자들은 나를 방조한다는 형식을 통하여 자기의 높은 사상각오를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하여 마치도 웅변 경쟁을 하듯 했는데, 내가 듣기에는 그래도 왕의사와 서호사가 한차원 더 고명한것 같았다. 란미염환자건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발언과 기본상 대동소이 했지만 그들의 발언은 보다 전면적이고 체계적이였고 또 모주석어록과 당장규정을 그 누구보다 더욱 많이 인용하면서 심각하게 “성근한동지적방조”를 하는것이 특색이었다. 그들은 계급투쟁 각도에서 문제를 력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사상적근원을 파 헤치였다. 우선 나의 가정성분에서 계급적근원을 찾았는데 상중농과 부농은 친형제다보니 (형님과 아우사이라고 생동하게 비유해서 말했다.) 계급적 본능에서 부농의사를 란미염환자 회진에 참가시키자고 말할수밖에 없었다는것이였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일로서 계급투쟁각오가 너무도 낮다보니 그럴수 밖에 없다는것이였다. 다음은 위생원에서 집을 마련해 줄때(단위방산임) 당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 혁명적군중의 사상각오정도여도 그것을 사절해야 마땅한 것이거늘 입이 떡 벌어져서 좋아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행동인가, 결국은 세계관 인생관 사상에 원인이 있다는 지적을 했다. 잇따라 “캉톨수술”문제를 거론했는데 수술자리화농은 기술사고면서도 책임사고이고 그것을 구실로 신생사물을 요람기에 압살 했다는것이였다.이것도 당성여부를 보기에 앞서 엄중한 착오이며 사상문제인데 거기에는 계급성, 세계관, 인생관, 로선문제 등 다양한 측면들이 종합적으로 포함된다는것이였다. 또 그들은 나의 련애사를 공개한후 의미심중하게 거기에 의문점이 있다고 했다. 회의참가자들은 귀가 번뜩해서 저건 또 무슨 소리냐는듯 긴장해 하는것 같았다. 내가 무슨의문이냐고 물으니 그들은 이성지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것이 의문된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사랑을 언약 했지만 손도 별로 잡은적이 없다고, 많은 동창들이 증명설수 있다고 격분해서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일을 남이 보게 하는가? 어떻게 증명을 서는가. 량심에 달린문제다.”하고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도 내가 한 처녀를 롱락, 희롱, 유린까지 한것처럼, 류망인것처럼 듣는 사람들이 느끼게 말을 구사하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혀 멍해 있다가 “입당을 못해도 상관 없는데, 이 문제는 당조직에서 꼭 해명해 달라.”고 소리쳤다. 나의 입당심사는 결국 싱겁게 우스운 꼴로 끝나버렸다. 나는 입당을 하려다가 공연히 더러운 루명만 쓰고 말았다.     명순이도 심사에서 떨어 졌는데, 그에 대한 심사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위에서 집을 줄때 좋아한 사상적근원,“캉톨수술”과 이번의 란미염환자문제에서 나와 원칙적 투쟁을 견지해야할 대신 맞장구를 친 사상적근원이 분석 지적 되였다. 서호사는 말하기를 “부부는 부부이기보다 우선 혁명적 동지 관계다. 때문에 가정혁명화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의철학이니만큼 부부사이에도 원칙적투쟁을 견지해야한다.”고 했다. 왕의사도 한마디를 보충했는데 “명순이는 계급투쟁성이 결핍하다. 호인주의다보니 사람들은 이라고 한다. 공산당원은 투쟁성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밤낮 일만 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류소기의 유일생산력론의 표현이다.”고 했다. 입당심사는 나를 몹시 억울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명순이도 억울하게 되였다. 아니, 나 보다 더 억울하게 되였다. 그는 복무태도가 너무도 좋아서 전공사에서 사람마다 칭찬하는 “큰집맏며느리감”이라는 여자였다. 명순이는 일을 엄청 많이 잘 했고 작은 오차도 한번 없었다. 그리고 책임성이 각별히 높았다. 명순이가 만약 나의 안해가 아니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번에 입당 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애매한 두꺼비가 떡돌에 치인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명도, 반박도 하지않았고 더욱히는 누구를 보복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입당심사는 긴장속에서 십여일 계속 되였는데 나중에 통과 된 것은 극적으로 장주임의 안해와 “6.26백의전사”최의사, 두사람이였다.     서호사는 사람들이 앞에서는 경외하고 뒤에서는 “되지 못한년, 죽일년”하고 욕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자고자대가 이만저만한 사람이아니였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였다. 성미 또한 이악스럽고 까다롭고 괴팩한것이 어찌보면 선천성결함 같았다. 쩍하면 사람들과 시비를 걸고 싸우기까지 했으며 번연히 틀린 시비도 궤변을 늘여 놓으며 끝까지 이기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와 무슨 언쟁을 하다가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대상하지 않고 피해버리는데 그럴때면 그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가장 “투쟁성”이 높다고 인정했다. 맑스주의 철학은 투쟁의 철학이고 모택동사상은 반란과 투쟁이기에, 공사적으로 제일먼저 반란의 기치를 든 자기가 당원표준에 가장 부합된다고 늘 인정해 왔던것이다. 그런데 당조직과 군중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서호사는 군중위신이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했다. 주사를 놓을때 환자가 아프다고 말하면 “쇠바늘이 들어가는데 그래 아프지 않고 가렵 겠는가…”하고 쏘아 붙이면서 약물을 콱 주사해 더욱 아프게 하는가 하면 아이들의 혈관주사는 터지면 두세번 더 찔러봐서 안될때는 손을 바꿔야 하는데, 서호사는 아이엄마들이 손을 바꾸면 어떠냐고 하면 “나를 초과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하며 오히려 더 기를 쓰고 자기가 조작했다. 곁에 다른 호사가 있음에도 그는 손을 바꿔주려하지 않았다. 하여 주사 맞을 환자들은 그를 슬슬 피하기도 했는데 그는 사람을 가린다고 되려 괘씸해했다. 이런일들은 극히 자질구레한 복무태도 혹은 방법문제지만 군중들의 인상은 대단히 나빴다. 원내동료들과도 그는 자주 충돌을 일으켜 왁자 떠들며 부산하게 하였다. 다른 부문에서 일손이 바쁘면 서로 돕는것이 응당한 처사건만 그는 일부러 분공과 제도를 내 세우면서 물건너 불보듯하며 약을 올리듯했다. 심통이 발작할때면 의사들의 처방을 비꼬기도 했는데, 어느 의사가 만약 포도당주사를 처방하면 “이따윗걸 맞아 무얼해, 개눈깔사탕 두알보다도 못한것을…그래두 무슨 의사라구…흥!”하고 환자앞에서 꺼리낌없이 의사들을 폄하 했다. 서호사는 복무태도, 단결, 군중관점, 교오자만극복 등 방면에서 더욱 노력해야 하며 남에게 마레주인것 만큼 자신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세계관, 인생관 개조에 계속 노력하라는 충고를 받고 미끌어졌다.     왕의사는 업무능력이 약하고 사업적극성이 부족했다. 그는 의료사고를 자주 쳤는데 번마다 우리가 곁에서 수습해 주었다. 그리고 왕진과 기층하향을 싫어해 비판을 받기도 했고 사업임무(지표)를 잘 완성하지 못하여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에게는 퀴퀴한 뒷소리도 많았는데 사람들은 체면을 돌봐서 말하지 않았다. 왕의사는 업무자질을 제고하며 사업적극성과 책임성을 제고해야하며 세계관, 인생관 개조에 노력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최의사의 안해는 당원으로서는 거리가 먼 보통 녀자였다. 그는 가정살림에 지나치게 집착 했다. 직장에서 자주 뜨개질을 하여 핀잔을 받으면서도 미안한줄도 모르고 집일 때문에 출근시간에도 자리를 뜰때가 많았다.     4인무리가 꺼꾸러진후 “6.26백의전사”들은 선후로 위생원을 떠나갔다. 그들은 거개가 원단위로 돌아갔다.     장주임은 “4인무리”가 꺼꾸러진후 제일 먼저 위생원을 떠나 갔는데, 지구위생국 국장이 된다느니 어쩌느니 하였는데 결국은 원단위인 현병원 내과부주임으로 되여 제자리로 갔다. 그런데 여기서 희극적인 장면은 그가 알심들여 양성한 맨발의사가 전국농촌위생공작좌담회에 갔다온후 현위생국 부국장 보좌에 발탁 되였다는것이다. 맨발의사는 장주임의 령도로 되였던것이다. (한달후에 소리없이 취소되였다.)     장주임을 제갈량이라고 하게 된것은 그가 사업에서 멱수를 잘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이름을 날릴수 있는 항목을 틀어 쥘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번 큰 인물이 되여 보겠다는 포부와 야심이 있었다. 하여 혁혁한 사업성과들을 만들어 내고 도금칠을 번쩍번쩍 빛나게 잘 하였는데, 조직부문에서 보는 시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의 안해는 올때도 뒷말을 달고 왔지만 가면서도 꼬리를 달고 갔다. 그것은 현병원에서 사업할때 자산계급생활방식을 추구하는 멋쟁이라느니, 무도쟁이라느니, 누구누구와 어떠 어떠 하다느니 했는데 우리공사에 와서는 입당을 하면서 “궁둥이당원”이라는 꼬리를 달게 되였다. 공사당위의 부서기라는 사람이 그와 소위 조직담화를 한다면서 간통을 했던것이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엉켜붙었는데 부서기는 3년의 감옥살이를 갔다. 그는 순 남녀생활작풍문제로 해서 옥살이를 갔는데 문제가 여러건이 있었다. 어떤사람들은 장주임을 오줌깨라고 비웃었다.     장주임은 원단위로 돌아간후 그간 자기의 실무수평이 많이 뒤떨어졌음을 절감하고 업무능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위가 아픈것도 참으면서 상해에 가서 1년의 연수를 열심히 하고 돌아 왔다. 그런후2년남짓 지나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후 어느날 나와 명순이는 병문안을 갔다. 그날 장주임은 나에게 “나는 김선생부부가 훌륭한 사람들이란걸 잘 알고 있었소. 그러나 받들어 주지 못했는데 참으로 미안하오. 꼭 훌륭한 사람들이 되오.”하고 말하면서 몹시 감개무량해 하였다. 말은 바른대로, 사실 우리부부는 원내외에서 참답게 사업하였다.     최의사는 “6.26백의전사”로 내려온후 사업을 잘 했다. 그는 마음씨가 무던해서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또 부지런 했다. 대채를 따라 배우는 공작대에 나가서도 일을 잘 하여 사원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생산대에서 가만히 갖다주는 벼마대를 받아 먹은것이 그가 떠나간후 뒷소리가 되였다.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때는 아주 엄중한 착오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최의사를 혈뜯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인심이 중요한데 그는 인심이 좋았던 것이다. 서호사와 왕의사는 입을 비쭉거리며 때론 험담을하였지만 사람들은 응대하지 않았다.     장주임이 떠나간후 위생원의 령도권은 다시 박원장에게로 돌아 갔다. 4인패가 멸망한후 혁명위원회는 취소되고 원장제가 회복되면서 위생원의 소위 령도성원들도 해산되였다. 박원장은 원래대로 원장이 되고 후에 현위생국에서는 나를 부원장으로 임명 하였다. 그후 나와 명순이는 입당을 했는데 현위생국에서는 나를 다른 공사위생원의 원장으로 배치 했다.     우리가 그 공사로 떠나간후 얼마안되여 왕의사는 의료사고와 남녀작퐁문제로해서 감옥에 가고, 서호사는 젊디젊은나이에 불행하게도 과부로 되였다.“금후의 실제 표현을 본다!”고한 로중의 문의사와 중약제사는 편안하게 사업하고 만년을 복하게 살았다. 부유보건 로처녀 리의사는 혼인광고로 만난 도시 로총각과 결혼해시 아들딸 남매를 낳고 지금 행복하게 살고있다. 그런걸 보면 어른들이 사람마다 모두 제 배필이 있다고 한 말이 틀리는 말이아니다.“6,26백의전사” 최의사부부는 개체진료소를 꾸리고 부자가 되였다고한다.(최의사안해가 집살림에 지나치게 집착한것은 가난도 한 원인이라고 이전에 나는 생각했다.) 박원장은 현으로부터 리휴로간부 대우를 받아 도시에 가서 행복하게 살았다.     나는 다른 공사에 간후 위생원의 업무건설에 노력 하였다. 그러는중 모교에서 석사연구생모집시험이 있었다. 나는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이되고 2년후 석사학위를 가졌는데 조직에서는 모교에서 사업하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심양시로 이사를 하였다. 얼마후 나는 국비로 일본에 연수를 가서 생리학박사학위를 따고 돌아 왔다. 나는 커다란 곡절이 별로 없이 인생을 순리롭게 걸어 왔고 나름대로 성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괜찮게 되였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을수 없는 커다란 유감이 있다.     그것은 급성화농성맹장염으로 죽은 청년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 일이 눈에 선 하다. 나는 20여년의 외과림상의사 생애에서 한차례의 실수도 하지않았다. 그러나 청년의 죽음은 외과의사로서 나의 엄중한 실직이다. 가끔가끔 그때일을 회고하면 마음은 한없이 괴롭고 량심의 가책은 끝이 없다.그리고 그때가 너무도 아쉽고 원망스럽다. 세상에는 후회약이 없다. 우리들은 산골 농민부부에게, 청년에게 참으로 큰 죄를 지었다!...     나는 왜서 수술을 못했던가?!... 청년은 왜서 죽었는가?!...     그때, 만약 내가 견결히 나서서 수술해 주었더라면 청년은 8일내에 깨끗히 잘 완치가 되였을것이고, 정직하고 참답고 아주 총명했다는 그 청년은 지금 훌륭한 사람이 되였을 것이다.—     그때가, 만약 정상적인 세월이였다면 청년은 절대로 죽지않았을것이다.ㅡ     그러나 무정한 력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설이 없다. 오직 보귀한 력사적경험과 침통한 력사적교훈만이 있을뿐이다.                                                                                                                                   08.10
67    적선자 적악자 댓글:  조회:2277  추천:2  2014-03-17
              실화                                           적선자 적악자                                                                                                            회령     대체로 지난세기 80년대까지 우리고장에서는 “간통죄”를 제일큰죄로 증오하고 멸시했다. 률문으로 “간통죄”라는것은 없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죄중지대죄였다. 그다음이 도둑질, 망나니, 개차반, 주정뱅이 등 순이였을것이다. 법을 범보다 더 무서워하는 백성들 세상에서는 이보다 더큰죄가 있을래야 있을수도없었다. 백성들은 안광이 짧은데다가 실제주의여서 진짜 대죄인 살인, 강간, 강도나 탐오는 자기와 먼일로 생각하고 간통이나 좀도둑질같은 치안조례에나 걸리는 비행은 릉지처참할 대죄로 치부하며 “때려쥑일놈” “콩밥멕일놈”하고 격분해서 삿대질하고 침을 퉤! 퉤! 뱉았다. 백성들로서는 도덕과 량심, 풍속, 습관이 제일크고 신성한 법이였던것이다. 원래 백성들은 순종과 도덕, 량심, 풍속, 습관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여서 법이 없어도 살수있는 사람들이다. 아주 정직하고 자각적인자는 백성이다. 형법에 걸리는 각종범죄의 원흉은 보다싶이 대다수가 백성들의 어버이라는 자들 속에 있다.     언귀정전, 내가 어느 진당위에서 사업할때였다.     때는 “4청운동” 두번째해였는데 어느날 진병원당지부서기(원장겸임)가 나를 찿아 왔었다. 그의 용건은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병원회계와 부유보건의사가 생활작풍문제착오를 범했는데 어떻게 처리하는것이 좋겠는지 청시한다는 것이였다. 회계는 당원으로서 해방전쟁, 항미원조에까지 갔다온 사람이고 의사는 독신녀였다. 그의 남편은 심양에서 사업하고 소학생 아들은 시가지 시부모가 키우고있었다.     쪽지를 쥐게된 경과는 간단했다.     병원에서는 매달 월말이면 시가지에 있는3급의약공사피발(도매)에가서 약품을 채구(구매)해오는데 보통 두사람이 갔었다. 회계는 꼭 가야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사람은 조력군으로 따라가는데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안배하였다. 채구임무는 대부분 그날로 완성했다. 특수사정이 아니고서는 시가지에 묵지않았다.     회계는 부대에서 련의 사무장을 력임했던 사람으로서 재무사업에 능력있고 까근하고 또한 책임감이 높았다. 그의 돌출한 우점은 “알뜰한 살림군”이라는 것이였다. 한달에 한번하는 채구만 보더라도 기차에 부치는 운비를 절약하기위하여 두사람이 힘자라는데까지 잔뜩 짊어지고 돌아왔다. 만약 채구를 당일에 완성못하면 돌아왔다가 이튿날 혼자가서 완성했다. 그것은 왕복한차례 기차값보다 려관비가 훨씬 더 비쌌기 때문이였다. 하여튼, 그는 말그대로 국가돈을 자기돈보다 한푼이라도 더 아끼고 절약하는 사람이였다. 회계는 해마다 현위생계통, 재무계통의 선진공작자였다.     부유보건의사는 말과 같아서는 아이들 말처럼 방귀타고 서울에라도 갈 사람인데, 말새질은 많고(남의 흉을 잘본다.) 일하기는 싫어하는 사람이였다. 업무량이 별로 없어서 주사실, 처치실업무를 좀 방조하라면 무슨구실이 많았다. 원내로동 (대청소, 회칠등)이거나 생산대(촌민소조) 농업지원 같은것이 있기만 하면 하향해야할 일이 있다면서 피해갔다. 대신 해사한 인상덕에 너무 눈에나지는 않았다.     지난번 채구는 그와 회계가 갔댔는데 하루밤 묵어서 돌아왔다. 그들은 채구량이 많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채구온 사람들이 많아서 묵었노라고 묻지도 않는 말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저 그렇거니 괘념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후에 시가지에서 진병원서기한테로 난데없는 편지가 한통 과호(등기우편)로 날아왔다. 내용은 간단했는데, 동무네병원 모모와 모모가 모월모일 모려관에 주숙했는데(이전에도 몇차례 주숙했음) 한방에 들고서도 려관비수거는(령수증) 딴방으로 각각 떼라고해서 복무원과 쟁론까지 있었는데 이상하다는 것이였다.     서기는 속이 뜨금했다. 본인들은 말할것도없고 두집가정에 풍파가 곧 들이닥칠것 이고 그 사태는 어떻게 번져갈지… 단위는 또한 무슨꼬락서니가 되겠는가. 이거야 말로 중팔리고 절팔리는 랑패였다.     이 병원에는 창시인이자 의덕과의술이 높은 로중의 한분이 있었다. 그는 매우 젊잖은 학자풍의 의사로서 전국군영회대표였다. 그리고 지구정협위원으로서 사회에서 유지인사로 존경받는 사람이였다. 서기는 부대전업간부로서 순 행정인원이였는데 그는 사업에서 로중의의 이견을 많이 참고로 하였다. 서기는 로중의와 상론한후 부서기(조직위원겸임 내과의사)를 데리고 시가지로 조사를 갔다. 모든것이 사실이였다.     려관주임(중년녀자)의 말에 따르면 그날 수거를 뗄때 갓 들어온 복무원처녀와 말썽이 있었는데 처녀는, 규정상 들지도 않은 다른방 번호로 뗄수없다거니 그들은 이전에도 그랬는데 떼라거니… 결국 옥신각신 하게 되였다. 수거는 주임아주머니가 떼여주긴했으나 부유보건의사의 말 한마디가 복무원들의 격분을 자아내게 되였다. “복무원질이나 하는 주제에… 하라는 대로 할게지…”그들은 가 버리고 처녀는 성이나서 씩씩거리며 울기까지 했다. 복무원들은 워낙 남녀가 한방에 들면 눈을 밝히는데 (파출소에서 항상 강조함) 이렇게 되자 그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게 되였다. 한단위면서 수거를 각각 떼는것이 수상하다는둥, 어느때는 점심시간에 들어와서 새로바꾼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려놓고 갔다는둥, 복무원을 종인가 한다는둥… 려관주임은 의분을 금치못해 편지를 썼든것이다.       서기는 그들이 부부가 옳긴하지만 말은 잘못했다고 거듭 사과하고 돌아왔다.     서기와 로중의는 그들의 문제를 세사람만 아는 절대비밀로 내부처리를 하자고하고 부서기는 적어도 지부대회는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부서기와 회계는 껄끄러운 사인데, 공비환자치료에서 부서기가 원칙을 견지하지 못한다고(공비치료비초과를 현에서 몹시 공제하며 강조함) 회계가 몇차례 지적한바가 있다. 지어는 지부생활회의에서 부서기 가 술잔을 받아먹고 공비가 아닌 가족까지 공비대우를 해 주었다고 까밝히며 그를 난처하게 만든일도 있다. 물론 부서기는 자아검사를 하고 비판을 받고 고치긴 했으나 그것이 늘 마음속에 맻혀있었다. 부서기는, 일반군중들도 증오하는 비루한 행위를 당조직에서 어물쩍 넘길수 없다고, 일반간부도 안되는 일을 당원으로서… 이것은 절대적으로 사상문제이며 세계관, 인생관문제이며 당성문제로서 마땅히 엄격한 비판을 해야하며 처벌해야 한다고, 전면교육 견지에서 군중성적 비판대회도 고려할바라고 강경히 주장했다. 옳은 말이였다. 하지만 단매에 때려죽일 문제는 아니잖은가. 모든행위는 사상과 련계안되는것이 없긴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도덕과 량심에 더 치우치는 것이다. 비판의 목적은 어데까지나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기만 좋아서 되는것이 아니다. 방법도 적절해야한다… 서기와 로중의의 견해는 이러했다.     서기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난후 나는 다음과 같이 태도를 표시했다.      “참! 치사스러운 짓을 했구만. 낫살이나 먹은사람들이 그게 무슨 망신꼴이요. 주책머리없이… 부서기 주장대로하면 콱! 망신을 해서 납작하게 되겠지. 얼굴을 들고 다니겠소? 두 가정은 풍파가 일게구… 인민내부모순이니까 단결, 비평, 단결의 공식으로 해결해야지요. 아무래도 내부처리를 하는게 좋겠습니다. 그 녀의사는 될수록 빨리 조동시키시오.”     그후, 한달남짓 지나서 부유보건의사는 먼곳에 있는 심양으로 조동해 갔다. 병원서기가 많이 힘을 썼던것이다. 그때세월은 조직에 무조건 복종하며 일체를 혁명에 바치는 때여서 개인사유로 조동한다는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하여 공작하는 젊은부부들이 십여년씩 갈라져 사는 일은 보통이였다. 국가에서는 그들을 견우직녀처럼 일년에 한번, 보름씩 만나보도록 배려했다.     이년후 전례없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폭발했다. 나와 병원서기는 십여가지 죄장으로 투쟁을 받았는데 그속에는 병원회계 작풍 문제를 감싸 주었다는 조목도 들어 있었다. 적발은 무산계급독재지휘부 전안조 부조장이며 훙색반란대 부대장이라는 병원부서기가 하였는데 그때는 부서기가 아니였다. 그는 시시껄렁한 문제들로 군중위신이 없어서 일년반전 지부위원 개선에서 떨어졌다. 나와 병원서기는 회계와 부유보건의사의 작풍문제를 감싸준 죄장으로해서 죽을고생을 했다. 그것은 병원부서기였던 내과의사가 무슨 돌파구나 찿은듯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져서 깊이파고 들었기때문이다. 그는 우리도 마치 부유보건의사와 그 어떤 은밀한 관계가 있는듯이 분위기를 만들면서 사람들을 선동했고 또 회계를 끼고 경제상 어떤 내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병원회계는 문화대혁명이 폭발하던해 초봄에 시시한 여론이 돌자 다른성으로 멀리 조동해 갔다. 역시 병원서기가 힘써줬다. 후에 사람들은 회계가 알은듯이 면바로 피해 갔다고 말들을 했다. 그러지 않았드라면 뛸데없이 개골망신을 했을 것이다.     운수좋은놈은 이래저래 빠지고 재수없는 우리만 골탕먹었다고 병원서기와 나는 훗날 잡담을 하면서 한바탕 유쾌히 웃었다.     병원부서기였든 내과의사는 문화대혁명초기 무단싸움판에 뛰여들었다가 종신병신이 되고 말았다. 돌멩이에 머리를 맞은것이 뇌출혈을 이르켜 수술을 했으나 신경이 어찌 되였다는 것이였다. 그래도 목숨을 건진것이 불행중다행인데 어떤사람들은 죽기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런사람들은 거개가 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였다.     문화대혁명후 병원서기는 시당위 조직부장으로 승급하고 나는 성당위로 조동했다. 물론, 지금은 리휴(정년리직)를하고 편안한 백성이 되였다.     회계와 부유보건의사의 그후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덕과 량심을 지키며 바르게 살았으면 꼭 행복했을 것이다. 나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믿는다.                                                                                                                      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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