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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일본헌병대 통역(2) 댓글:  조회:1331  추천:0  2017-05-10
                                                     일본헌병대 통역(2) 신의주상업학교       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이제부터는 일을 하며 아버지를 돕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신의주상업학교 시험을 치라고 하였다. 크게는 받들어 줄 힘이 없지만 어떤일이 있어도, 무슨짓을 해서라도 거기까지는 시발(시중)을 할테니까 공부를 더 하라는 것이였다. 어머니는 네가 졸업할때까지는 죽지않고 뒷바라지를 할것이라 하였다. 그때 우리집은 내 아래로 영애가 있고 그 아래 순애는 한살도 못되여 죽었다. 그리고 영호가 태여나서 식솔은 다섯이였다.(후에 막내로 정호가 태여났다.) 집은 여전히 구차하고 어머니는 지병으로 앓으면서도 약한첩 써보지 못했다. 나는 목이메여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50여리 압록강 강판길을 걸어가서 신의주상업학교 시험을 쳤다. 나에게는 시험이 쉬웠다. 그런데 우습고도 너절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갓 태여난 일본황태자의 이름을 쓰라는 것이였다. 아무리 하늘같은 천황페하라고 하지만 그의 갓난애 이름을 세상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기저귀에 싸여있는 애이름을 우리또래가 알턱이 무언가. 시험문제는 천황이 아들을 본데 대하여 열광적인 축하를 하고 그리고 그 아이를 하늘같이 칭송한 아첨쟁이의 시를 써 놓고는 아이 이름을 대라는 것이였다. 이런 뚱단지 같은 시험문제가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재를 부르며 제꺽 써 넣었다. 어느땐가 일본애가 보는 “소년구락부”라는 잡지에서 그런시와 애이름을 피뜩 본 기억이 났든 것이다. 나는 똥포대기에 싸여있는 애이름을(쯔끼노미야 아끼히도) 쓴후 출생지, 생년, 월, 일까지 썼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애비 에미 이름도 썼다. 나는 최우수 수석으로 록취되고 개학식에서 전 교 사생들 앞에 나서서 표창까지 받았다. 나는 일본애들을 이긴것이 무척 흐믓했다.     그해, 일은 또 묘하게 풀리였다. 그것은 내가 신의주상업학교에 붙자와 같이 우리집이 신의주로 이사를 하게 되였든 것이다. 의주에서 아버지의 학도로 있던 백룡구씨가 신의주에 제화점을 차리면서 나의 아버지를 극력 끌어당긴 것이다. 백씨는 부자첩으로 들어 앉은 누이가 한밑천 잡아줘서 신방을 꾸리게 되였다.    전문학교에서 신의주상업학교라고 하면 당시 일본 조선 만주에서 제일 이름이 높은 학교였다. 학교에서는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을 각 절반씩 모집했는데 월사금은 3원50전, 졸업시 일본수학려행을 가겠으면 달마다 1원을 더 내야 했다.(나는 아예 포기했다.) 학제는 5년인데 한개학급에는 다섯개반이고 반마다 학생은 50명,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이 반반이였다. 학과는 20여개고 복장 모자 신은 통일적이며 가방은 국방색배낭식이 였다. 선생은 몽땅 일본인이고 군인식 통일제복이 였다. 교칙은 반군사화로서 매우 엄격했다. 조선말 조선글은 절대적으로 엄금 했고 학기마다 한달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관은 현역장교로서 대위 혹은 소좌 였다. 학생들은 매일 일기를 써서 선생의 검렬을 받아야 했다. 천황페하와 대일본제국을 가송하고 충성을 다진 일기는 좋은것으로 높은점수를 주고 애매한 소리가 있는 일기는 선생의 호된 닥달을 받았다. 학교는 전형적인(모범적 표본적) 노화교육, 파쑈교육 현장이였다. 학교의 취지는 “천황페하께 절대 충성하는 대일본제국의 젊은이를 양성한다!”는 것이라고 번듯히 내 걸었다.     나는 2학년까지는 모범학생이였다. 그런데 사달은 3학년부터 생기 였다. 그것은 한반위인 장창순이를 친하면서 부터다. 학교에는 여러가지 과외써클이 있었는데 나와 창순이는 신발만 통일적인 롱구부에 들었다. 격검, 유도, 야구, 정구, 수영, 배구대, 축구대, 그리고 문예써클들이 있었는데 욕심은 났으나 거기에 들자면 갖춤새가 많아서 들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써클의 애들과 시합을 해보면 실력이 어슷비슷 했다. 창순이는 두리둥실한 얼굴에 키가 크고 실팍했다. 그런데 심한 얽둑곰보 였다. 인물은 그랬으나 마마자국마다 슬기가 고였다는 말과 같이 그는 총명하고 학습을 잘 했으며 롱구를 잘하고 힘이 쎘다. 말수가 적고 듬직 했는데 문학을 지향하는 진짜문학도 였다. 그때까지 나는 학교에서 주는 책 외에는 다른책은 별로 접촉해 보지 못했는데 창순이와 친하면서 부터는 문학세계에 풍덩 빠지게 되였다.     나에게도 문학소질이 있었는지 창순이가 보았다는 문학서적은 밤을 패가며 몽땅 탐독을 했다. 우리는 시간만 있으면 문학을 이야기 했는데 공동언어는 저도 모르게 공동리상으로 되였다. 창순이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해서 생계를 보장하며 문학에 정진하겠노라 하였다. 나는 할바에는 불이번쩍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학교는 부모님들의 성의를 봐서 졸업은 하겠지만 졸업후 10년을 기한으로 세상을 방랑하며 견문을 넓힌후 소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창순이를 온당파 현실형이라고 한다면 나는 급진파 리상형이랄가, 하여튼 그때 나는 문학에 열광 했다. 청년기에 들어서면서 나의 성미는 칼날같이 날카롭고 급해지였다. 그리고 두려움을 몰랐다. 일본애들이고 선생이고간에 경우시비상 내가 옳다고만 인정이 되면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애들과는 두마디 안짝에 주먹이 나가고 나보다 센 애라도 팔매같이 날려 들었다. 나는 동학들 사이에서 “겐까도리”(악도리)로 불리웠다. 부모들은 동호는 점점 할아버지를 닮아 간다며 근심했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았다. 개성바닥에서 정몽주 하나만 태여나라는 법은 없을것이다. 사내가 세상에 태여나서 떳떳한 삶을 살아야지 비굴하게 틀린것에 머리를 숙이겠는가… 그때 나의 인생관에는 이런 알맹이가 박혔든것이다. 창순이는 듬직하고 너그럽고 무던했다. 그는 “야! 곰보야!” 해도 빙그레 웃으며 “왜, 무슨일이 있니?” 하는 성미였다. 창순이네는 아버지와 형 장창용(1945년봄 연안에서 해후함. 남만지대ㅡ조선의용군1지대 1대대장, 1946년 무송에서 토비숙청전투에서 희생. 의주공립보통학교 동창생 리임곤이도 그때 희생.)이가 운송회사직원이고 집살림은 괜찮은 상태였다. 나는 창순이 교복이며 가방, 교과서를 물려 가지기도 했다. 창순이는 나의 잊지못하는 좋은 친구였고 문학의 뜻을 실현 하지는 못했으나 자별한 문우 였다.(조선전쟁에서 희생)     소위 문학을 하느라고 나와 창순이는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보았다.(일문서적) 방학에는 둘이서 무전려행(방랑)을 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밤이면 호떡집에 가서 호떡을 받아서는 려관이며 술집으로 다니며 팔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고학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호떡은 술집에 가면 잘 팔리였다. 술이 서너순배가 돌면 사내들은 옆에끼고 앉은 아가씨들의 응석을 잘 들어줬다. 아가씨들이 호떡을 먹겠다고 하면 통이 크게 모판채로 사기도 했고 때로는 거스름돈도 손을 휙 내저으며 받지않기도 했다. 나는 그 꼬락서니가 가소롭기는 했으나 입으로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이렇게 번 푼전도 책을 사 보는데 썼다. 일본집으로 돌며 잡지거나 소설책을 한책에 5전씩 사서 본후 페지로 팔아서는 또 낡은책을 사서 보았다. 우리가 하리라는 소위 문학은 일본글문학이였다. 보는 책은 몽땅 일본글이 였다. 당시 조선책은 매우 적었다. 그때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소설로는 고리끼의 “동년” “나의대학” “어머니” 등이였다. 당시 히노아시헤이의 소설 “분뇨담”이 무슨 1등상을 받고 돈도 대단히 벌었다고 하며 사회에 인기가 들썽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본후 “그따윌 갖고!”하며 아주 깔보았다. 그따위 똥오줌이야기가 1등이라면 우리도 지금 당장 열배는 나은 소설을 쓸것만 같았다. 진보적 사회과학서적들도 보긴 했지만 알둥말둥한건 둘째로 치고 우선 재미가 없었다. 문학에 미치다 보니, 제대로 말하면 소설책에 미치다 보니 학과는 언녕 구중천에 달아났다. 나는 대뜸 꼴찌 2등생이 되였다. 겨우 급제를 맞으면 만세를 불렀다.     5학년, 졸업을 몇달 앞두고 나의 인생에서 큰 사변이 발생 했다.     어느날, 중국 청도상업학교에 다니는 최원규(신의주공립보통학교 동창.)가 우리학교로 와서 우리 몇은 반갑게 만났다. 원규는 꽤 잘사는 집 앤데 우리학교로 전학을 하려고 왔던 걸음이였다. 우리는 원규가 한턱 낸다고 해서 중국집으로 가서 짜장면을 한그릇씩 먹었다. 식사가 끝나서 밖으로 나왔는데 원규가 그만 호신용 단도를 중국집 밥상밑에 두고 나왔다는 것이였다. 우리는 원규를 따라 중국집으로 갔다. 원규가 칼을 찿으니 주인은 좀 기다리라고 했는데, 잇따라 조선인 순사가 헐레벌떡 뛰여 들었다. 그길로 우리 다섯은 경찰서로 끌려가서 류치장에 같히고 취조를 받기 시작했다. 취조는 밤낮 사흘이나 진행 되였다. 고함치며 때리고 기승을 부리는 것이 잡아먹을듯 그저일이 아니였다. 고등계 안경쟁이 말라깽이는(일본인) 살무사처럼 표독하고 우리를 잡아온 조선인 김순사는 미친개처럼 앙칼스러 웠다. 3일후 우리는 녹초가 되여 경찰서에서 풀려 났다. 그사이 집까지 수색을 당했는데, 우리는 “불량청년”으로 퇴학처벌을 받았다. 나는 “불량청년”이라는 딱지가 원통하고 분했을뿐 학교를 퇴학 맞은건 대수롭지 않았다. 까짓것! 졸업하고 취직한댔자 남의 밑에서 눈치를 보며30원짜리 직원따위나 되는걸, 노가대 로동판에 다녀도 그만한 돈은 얼마든지 벌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도, 나는 문학가로 될것이니 고리끼처럼 오히려 차라리 잘되였다 했다. 락심천만해 하는 부모님 보기는 정말 미안 했다. 그러나 무슨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이튿날부터 노동판을 찿아 다녔다.   복수       신흥 공업도시로 일어서는 신의주에는 노가다판이 많았다. 일본말 일본글에 막힘이 없고 팔팔한 청년이다보니 일자리 얻기는 식은죽 먹기였다. 나는 방사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원자재와 성품을 밀차에 실어 나르는 로동인데 얼마를 하면 얼마를 전표를 떼여 줬다. 그리고 열흘에 한번씩 간조를 주었다. 억세게 일하면 3,40원은 벌수 있을것 같았다.     만약에 개성을 량반적 도시라고 한다면 신의주는 상놈의 도시라고 할가, 사회는 복잡하고 치안은 혼란 했다. 우선 인군 구조부터 복잡하다. 조선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그리고 코대도 여러가진데 흑인도 때론 나타났다. 신의주에 모여든 사람들은 신분이 각양각색이고 하는일이 각가지고 류동이 심했다. 절도, 강도, 강간, 싸움, 지어는 살인도 발생했고 공사장의 사고, 화재, 정전… 마치도 란리판 같았고 복마전 같았다. 2차세계대전의 광풍속에서 일본의 대화침략전쟁은 본격적으로 진행중이였다. 하여 소위 만주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신의주는 매일 더욱 북적이며 법석 끌었다. 일본군대들의 이동, 반일투사들의 활동, 학생시위, 로조의 파업, 순사들은 매일 벌컥뒤집힌듯 뛰여다니고… 크고작은 사건들이 벌둥지를 쑤셔놓은듯 말그대로 비일비재 였다.     로동판으로 다니며 나는 생각 하였다. 나의 인생목표는 문학 ㅡ 작가가 되여 소설을 쓰는것인데 로신이나 고리끼와 같은, 적어도 히노아시헤이를 릉가하여 세상에 명성을 떨칠뿐만 아니라 뭉치돈이 저절로 굴러오게 해야하겠는데 그날을 앞당겨 오자면 이미 가졌던 생각ㅡ 10년 방랑이 가장 좋은 첩경이라고 확신 하였다. 그리고 커다란 타격과 랑패로 해서 기맥을 버린 부모님들을 구하자면, 그이들께 광명과 영광과 행복을 안겨 드리자면(나의 임무가 아닌가!) 하루빨리 문학으로 대성을 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느날, 나는 하루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창순이를 찿아 갔다. 창순이는 졸업한지 1년이 다 되여 가지만 그때까지도 취직을 못하고 있었다. 심한 곰보때문이 였다. 창순이는 소설책을 보고 있다가 나를 반겨 맞아 주었다.     “문학을 하자면 먼저 일본부터 두루 돌아 보아야겠는데 가지 않겠니?”     “나는 방랑은 지금도 생각이 없다.”     “그럼 나 혼자 간다. 자주 련계를 할게.”     “떠날때 꼭 알려라.”     저녘까지 먹고 밤이 퍼그나 깊어 나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내가 얼마전에 불타버린(원인은 모르겠다. 쉬원하기 그지 없었다.) 그 짜장면중국집을 지나 한참 걸었는데 앞에서 어떤사람이 비틀비틀 걸어 왔다. 이게 누구냐?! 우리를 잡아가던 그 조선놈 김순사가 아닌가?! 야! 오늘 잘 만났다. 이래서 원쑤는 외나무다리서 만난다고 했구나! 스쳐지날때 다시 한번 눈박아 보니 틀림없는 그놈이였다. 일이 되자고 그랬는지 마침 앞뒤에는 인적이 없었다. 서로 엇바뀌자 마자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돌멩이로 놈의 뒤통수를 힘껏 깠다. 그리고는 곁골목으로 내뺐다.(밤이 깊은데다 으슥한 골목길을 걸어야 하기에 돌멩이를 쥐고 왔다. 창순이는 자라고 했다. 놈은 즉살했다고 소문이 났다.) 며칠은 긴장하며 가슴이 떨렸다. 이일은 부모와는 말할것도 없고 창순이와도 말할수 없었다. 차츰 나의 배짱은 든든해 갔다. 좋은사람을 기어코 잡으려 드는 그런 망나니는 원래 언녕 죽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나는 속이 후련해 나기까지 했다.     그후 한달가량 지나서 일본으로 건너갈만한 로비가 마련 되였다. 일해서 번 돈은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얼마씩 뜯어 모은 것이다. 일본으로 가자면 경찰서의 통행증이 있어야 하는데 증명은 고등계에서 떼여 주었다. 어느날 오전 나는 경찰서 고등계를 찿아 갔다. 증명수속은 안경쟁이말라깽이살무사 담당이였다. 놈은 이름을 묻고 호적부를 보며 나를 면목이 있다는듯 흘끔흘끔 쳐다 보더니 서류궤에 다가가서 무슨 기록부를 뒤적였다. 잠간후 내앞으로 다가온 놈은 불이 번쩍나게 귀쌈을 때리며 “너같은 불량선인은 대일본제국으로 못간다!”하고 고함을 치는것이였다. 내가 왜 불량선인이야! 네놈이 억지로 쒸운게 아닌가. 이, 쌍놈이새끼! 나를 퇴학맞게하고 또 앞길까지 막아?! 나는 왈칵 치미는 분노를 겨우 참으며 밖으로 나왔다. 쌍놈새끼! 너 잘되나 나 잘되나 두고 보자. 성공한후 네놈을 꼭 찿을거다… 나는 이발을 갈며 속으로 줄욕을하고 윽별렀다.     네놈의 일본은 못간다고 했지? 그러면 중국으로 간다. 그거야 네놈도 어쩔수 없겠지? 네놈의 그 거미다리만한 일본에 비하면 중국이야 진짜 어른이지. 차라리 잘됐구나. 나는 그길로 신의주 기차역으로 갔다. 발차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내가 시간표를 바라보고 섯는데 누가 어깨를 툭 쳤다. 의주농업학교에 다니는 친구 장기호 였다. 그의 집은 사리원에 있었는데 괜찮게 사는 모양이였다. 그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봉천(심양)쪽으로 가볼가해서  신의주로 나오긴 했는데 고려중이 라고 했다. 우리는 10월 1일에 떠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것은 내가 간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기호와 헤여지고 나는 창순이를 찿아 갔다. 창순이는 집에 없었다. 나는 10월1일에 중국으로 간다는 것과 함께 방랑하지 못함이 아쉽지만… 10년후에 만나자는 쪽지를 써놓고 돌아섯다.     간조를 받은날 오후 나는 압록강변으로 나갔다. 고즈넉한 곳에서 조용히 앞날을 두루 생각하며 무엇을 쓰기도 하고 미역도 감으려 했다. 내가 강변 오솔길을 따라 스적스적 걸어가며 앞을 바라보니 아래 위 버들방천이 좀 사이뜬곳에서 웬 사람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사람 같은데… 가까이 가며 바라보니 아니, 고등계 안경쟁이가 아닌가?! 본능적이였든가?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의 가슴은 세차게 방망이질을 했다. 쌍놈새끼! 오늘 죽어봐라! 나는 아닌보살을 하고 놈의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슬슬 걸어 갔다. 강과 오솔길은 평행으로 뻗었는데 강변에 앉은 안경쟁이와 오솔길은 두어발작 사이가 떴다. 무슨 사색에 잠겼는지 죽을때가 되였는지 놈은 내가 등뒤에까지 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쥐고 광도뛰기를 하듯 두발굼치로 놈의 등을 힘껏 냅다 질렀다. 놈은 가뿐하게 물속에 처박혔다. 수면은 아무일도 없었던듯 잔잔하고 강물은 넘실넘실 흘러 갔다. 강변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사위는 여전히 조용 했다. 나는 오솔길을 따라 되돌아 내려오며 은근히 강변을 살피였다. 안경쟁이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두차례의 살인(1938년8월초, 9월중순의 일임.)을 류동호는 나에게 처음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왜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는가고 물으니 그는 “말하면 증실인이 없기에 오히려 복잡한 문제로 될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때문에 말하는가고 더 물으니 “나는 누구처럼 력사를 외곡하거나 떼고 보태며 가공할 리유도 없으니, 이 나이에 이젠 아무런 바랄것도 두려울것도 없으니… 비밀도 필요 없고… 지난일들을 그대로 말할뿐이다. 력사는 사실대로 말해야 하며 말은 량심있게 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면 통쾌하다.”고 하였다.(2)   
106    일본헌병대 통역 댓글:  조회:1392  추천:0  2017-05-08
           회상기                                               일본헌병대  통역(1.)                                                                                                    류동호  (회령 정리) 차례 1. 복수 선죽교 통군정 신의주상업학교 복수 2. 일본헌병대 통역 문학수업 일본헌병대 통역 랍치 3. 팔로군 적공부 간사 로소한 4.조선의용군 태항산 연안 심양 할빈 첯사랑 5. 중국인민해방군 연통산 장춘 6. 일편단심 사업 가정 후기                                            일본헌병대 통역 (1)                  1. 복수   선죽교       래일 우리집은 신의주로 이사를 가게된다. 나는 학교에 가서 전학증명서를 뗀후(개성공립보통학교)거리구경에 나섯다. 아홉살밖에 안되는(1930년) 어린생각에도 천리타향으로 이사를 간다고하니 마음이 쓸쓸해 났다. 어쩐지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못 온다는 생각에서 고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나의 생각에는 고향을 대표하는 곳이 두곳이였는데 그것은 고려충신 정몽주의 이야기가 슴배여 있는 포은서원과 선죽교 였다.     그때도 개성사람들은 정몽주를 우상으로 자랑으로 받들고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리성계의 조선왕조에 나가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역적인 조선왕조의 밥은(국록ㅡ월급) 먹지않는다는데서 그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정몽주의 이야기를 자주하여 주면서 사람이란 정몽주처럼 학식이 높고 절개가 굳고 일편단심을 변치 않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리씨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지도 이십여년이 지나 갔으나 당시 개성에는 일인상점이란 두개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고객이 없어서 멍하니 하늘 쳐다보기였다. 사람들은 “저것들은 조선 사람을 살피는(감시하는) 것들이다.”고 하면서 눈에든 가시처럼 여겼다. 조선사람들의 반일감정은 여전히 극한상태 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출세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룰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라가 왜놈들에게 망하기 시작하자 공부를 해서 출세한다는 것은 왜놈들의 개가 되는것일 뿐이라고 인정하고 집어쳤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즈음 량친마저 선후로 세상을 하직 했다. 하여 살림을 삼대독자인 할아버지가 떠메였는데 일할줄 모르는 할아버지 손에서 가세는 재빨리 기울어지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자들과 거래하면서 기와집을 한칸 한칸 뜯어 팔아서는 그들에게 활동자금을 있는대로 헌금을 하였다. 그러다가 볼라니까 소위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기생방 술놀이를 일삼지 않겠는가?! 할아버지는 크게 통탄하며 실망하고 그들과의 거래를 끊었다. 그러나 가세는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지고 셋방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궁여지책이랄가 할아버지는 집매매 거간군으로 나섯는데 생계는 점점 더 힘들어만 갔다. 그는 역시 외독자인 나의 아버지를 열세살부터 “개성양화점”(조선인이 경영.)에 다니며 일하게 하였다. 가세도 가세였지만 왜놈들 세상에서 공부란 쓸모 없는거고 무슨 기술을 배우면 평생 밥술은 먹을수 있을거라는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였든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왜소한 체격이였으나 성미가 무척 급하고 담대하고 고집스러 웠다. 그는 관청의 일본인 사무원, 순사들은 말할것도 없고 그들 밑에서 일하는 조선인들도 모두 친일파로 보면서 쩍하면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였다. 하루건너 그러다 보니 류치장 신세와 벌금, 치료비, 기타 배상비가 거이 비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수그러 들 대신 점점 더 악만 남아서 개성판에서는 유명한 “악도리”로 조명이 났다. 성미가 조폭하다보니 거간업도 잘 될리 만무하였다. 개성바닥을 거이 돌다싶히 우리집은 자주 셋집 이사를 하였다. 그것은 더 눅거리 셋집을 찿다보니 이사는 잦아지고 셋집은 이사를 할수록 헌집이고 작은집이 였다. 셋집은 할아버지가 얻어 놓았지만 수리며 이사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전담 하였다. 온순하고 정직한 아버지는 신방으로 하루 거르지 않고 출근 하였다. 월급은 1전 한푼 다치는 법이 없이 할아버지에게 드리였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술과 담배는 전혀 몰랐고 난봉기 같은 허튼짓은 근본 하지 않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량반자존심이 퍼렇게 살아서 남들과도 호통질 하기가 일수였고 식구들도 량반체모를 지키라고 호령하며 신칙했다.     어느날, 무슨 일로 푸독같이 성이 오른 할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길로 할머니와 언쟁을 하였다. 고추가루를 내느라고 할머니가 절구질을 했는데(장을 보기위해) 걷어치우라느니 어쩌느니 하여 시비가 생겼는데, 할아버지가 절구공이로 할머니를 때린것이 그만 생사람을 죽게 했다. 집안에서 생긴 일이여서 덮어 감추기는 했으나 할아버지는 그날로 도망쳐 버렸다. 이티(두해)후,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 왔는데 얼마후에는 미국인 선교사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과부를 맞아 들였다. 할아버지는 다시 거간업을 하며 들락날락 했는데 그때는 무조건 효도만 아는, 양처럼 공손하기만한 나의 아버지가 아니였다. 어머니의 비명횡사는 가슴속에 옹이 박혔고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것도 새삼스레 원통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을 무척 흠모하며 따랐는데 그 연구가들은 아버지를 무식쟁이가, 이도 안난것이 콩밥을 먹겠다고 한다며 여지없이 몰아부치며 쫓아버렸다. 집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안하며 공연히 며느리와 퍼러딩딩해 하는 훗어머니와도 어성버성한 상태 였다.     어느날 저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판드리 싸움을 하였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래일로 셋집을 즉시 옮기라고 분부하자 아버지가 토를 단 것이다. 한달전에 해산하고 산후풍으로 안해는 앓고 있는데 엄동에 이사라고 하니, 그것도 래일로 당장 옮기라고 하니 아버지가 그건 안된다고 했든 것이다. 훗어머니는 선교사집 식모일을 한시도 거를수 없다하고 자신은 신방의 일이 요즘 무척 바빠서 몸뺄 겨를이 없는데… 그래서 안된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대뜸 후끈 했든 것이다. 갖바치를 하드니 이젠 상놈새끼가 다 되였다고 하며 길길히 날뛰였다. 그날 새벽으로 아버지는 어데론가 나가 버렸다.     당시 우리집은 일곱식구 였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로는 맏이로 딸 신애, 나, 아래로 딸 경애는 얼마전에 죽고 정애는 태여난지 한달밖에 안 되였다. 일곱식솔이 말그대로 코구멍만한 단칸 셋집에서 살았다. 이사 주견은 할머니 쪼간인지 할아버지 궁냥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가 당장 몽땅 나가라고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소리는 너무도 섧고 무서웠다. 그날밤 나와 누나는 싸움 말리려 나온 옆집 할머니네 집에 피해가서 쿨쩍쿨쩍 울며 밤을 새웠다.     서너달후 이듬해 할아버지한테로 아버지편지가 왔다. 돈도 얼마간 부쳐 왔는데, 편지는 신의주에서 왔었다. 자리에 앓아 누윘던 할아버지는 편지를 쥐고 아이들처럼 흑! 흑! 느껴 울었다. 또 두어달 지나서 아버지 편지가 왔다. 어머니더러 아이들을 데리고 신의주로 이사를 오라는 것이였다. 이번에도 얼마간의 돈을 부쳐 왔는데 차표를 사고 남어지는 할아버지에게 드리라고 하였다.     나는 먼저 포은서원으로 갔다. 일본사람이 문을 지키며 입장료 2전을 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포은서원에 갔는데 돈이 없다보니 참관할수가 없었다. 몹시 아쉬운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며 보려니, 일본사람과 그들의 아이들은 그대로 들어가는게 아닌가! 문지기 일본사람은 그들에게 오히려 깍듯히 인사까지 하는 것이였다. 조선사람에게서는 돈을 받으면서도 거칠고 거만하기가 짝이 없었다. 나는 억울하고도 분했다. 왜서 일본사람이 조선땅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는가?! 일본사람은 왜서 조선사람을 업신여기며 우쭐렁 거리는가?! 우리는 왜서 그들밑에서 억눌려 살아야 하는가?! 포은서원이 저들건가?!... 머리속에는 수두룩한 의문과 분함이 가득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까닭을 알수 없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선죽교로 갔다. 선죽교도 이번이 처음이다. 작으마한 돌다리는 선죽교라는 글도 희미했고 복사와 쓰레기로  거이 뭍힐 지경이였다. 그렇게 유명한 이야기가 스며있는 다리가 이럴줄을 몰랐다. 다리위를 오가며 나는 이담 크면 돈을 많이 벌어서 포은서원과 선죽교를 멋지게 만들어 놓고 일본사람들 한테 뽐내며 그들을 이길거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해는 서산위에 너울너울 하고 개성의 마지막 하루는 저물어 갔다.       류동호는 아홉살에(1930년) 고향인 개성을 떠난후(당시 개성 지정에서 살았음) 그후로는 다시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물론 할아버지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길은 고향을 마음속으로만 그리게 하였다.   통군정       나는 신의주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교복을 입었다. 개성에서는 조선옷바지저고리에 팬티도 없이 맨발로 학교에 다니였다. 책은 베보자기에 싸 들고 다니였다. 전 교 400여명 학생속에 나같은 몰골의 학생은 아마  10여명뿐이였을 것이다. 베보자기는 글이 샌다고 하였지만 갈구리가 많은 일본글이여서인지 나는 공부를 잘 하였다. 음악과 체육도 잘 했는데 달리기는 항상 1등을 했다.     왜놈세상에서 공부를 하는건 쓸모없다고 하던 할아버지가 왜서 나를 공립학교에 다니게 했는지… 할아버지는 왜놈들과 싸우려면, 싸워 이기려면 그들의 글과 말을 알아야 한다고 샣각한 모양이다. 개성에는 사숙도 여러개가 있었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도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나를 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라고 늘 당부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일본글을 떼엑! 떼엑! 일본인 선생을 모방하며 랑독할때면 조선글은 그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자주 엄숙히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명심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주는(사실은 일본에서 주는) “우”자에만 열심했다. 나는 모든 과목에서 “우”자를 맞았다. 선생님과 상급생을 보면 하루에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꼬박꼬박 경례를 하였다 하여 도덕품성도 “우”자를 맞았다. 나는 “우”자를 맞으면 기뻤고 “우”자를 맞자고 더욱 노력 하였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두시간 조선글을 배워 줬는데 알던 모르던 관계치 않았고 성적에도 넣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안에서는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학년까지는 조선말을 하다가 선생에게 들키면 “훈계”를 당하는 정도였지만 3학년부터는 단속이 철저하고 엄격했다. 불러세워놓고 귀뺨을 호되게 치는건 물론이고 목에 손바닥만한 검은패쪽을 온하루 걸게했다(교내에서) 수업정지, 변소청소, 벌금, 지어는 퇴학처벌까지 하였다. 만약 다른애가 조선말 하는걸 발견하면 패쪽을 넘겨주고 수업정지거나 변소청소같은 처벌을 모면할수도 있었다. 이면에서 학생단속을 잘하는 교원은 표창을 받는다고 하였다. 왜놈들의 조선민족말살정책과 수단은 그때 벌써 이렇게도 교묘하고 지독했다.     신의주에서 아버지는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이와다제화점”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기술은 상당히 높았지만 일본인 학도공보다 신봉은 낮았다. 집세에 물까지 사 먹다보니 우리집생활은 여전히 몹시 가난하였다. 30여원 신봉에서 아버지는 달마다 할아버지에게 생활비를 꼭꼭 보내 드리였다. 두해후 누나 신애는 할아버지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개성으로 나가고(그후로 한번도 보지 못함) 동생 정애는 페염으로 밤중에 죽었다.(죽던날 저녘 일본인 병원에 갔다가 해열제 한대를 맞고 돈이 없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냥 앓는 몸이였다. 정애가 죽었을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이 없어 네가 죽었구나!”하며 그말만 거듭하며 슬피 울었다. 그때 나는 무턱대고 이 모든 불행은 일본사람들 때문이고 돈이 없는 탓이라고 인정했다. 크면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부자가 되여 일본사람들이 부러워하게 하며 눌러놓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자꾸 치솟았다.     4학년 때다. 어느날, 5학년의 일본애가 자기대신 변소청소를 하면 돈을 10전 주겠다며 나를 시까스르는 것이였다. 나는 20전을 주면 하겠다고 하면서 되려 그애를 골려 주었는데, 웬걸?! 녀석이 그러자며 통이 크게 노는게 아닌가. 나에게는 20전이면 대단히 큰 돈으로 보였는데… 좋다! 이새끼, 그러면 해보자. 나는 불이 번쩍나게 변소청소를 해 치웠다. 그애는 나보다 큰것은 물론 주먹이 세여 우쭐거리는 앤데 동학들은 그애를 두려워 하며 조심 했다. 내가 변소청소를 끝내고 돈을 달라고 하니 녀석은 휘 검사를 해 보고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집에 갈때 주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대뜸 머리가 확! 달아 올랐다. 녀석의 멱살을 끌고 변소안으로 들어간후 골받이와 주먹을 날리며 똥구덩이에 처박자고 하니 녀석은 항복한다고 하며 당장 돈을 주겠다는 것이였다. 둘이 엉켜 붙다보니 헌옷을 입은 나는 팔소매가 찢어지는 손해를 보았다. 녀석은 잘못했다면서 팔소매가 찢어진것은 자기때문이니까 배상한다면서 50전을 내여 놓았다. 나는 그럴건 없다면서 20전만 받고 그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무의식 순간에 발생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마음은 떳떳하고 뿌듯하고 통쾌하였다. 그후부터 우리는 비교적 친한 사이가 되였다. 그애는 나에게 그일을 말하지 말아달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런 시시한 짓거리는 하지않는다고 담보했다. 그때로부터 나에게는 또 한가지 셈이 들었는데 그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건 끝까지 삗친다는 줏대였다. 그것은 나의 성격으로 되고 말았는데 이로해서 나는 훗날 많은 좌절을 당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학습, 음악, 체육에서 1등이였다. 돈으로는 너회 일본애들을 이길수 없지만 대신 공부에서는 너회들을 절대적으로 이긴다는것이 그때 나의 전부의 결심이였다. 학교에서 나는 꽤 위신이 높았다. 그러나 우쭐렁 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의 천성이 그런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나의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이기겠다는 마음뿐이다보니 우쭐거리며 너덜댈 필요가 없었다. 승리는, 1등은 다른사람들이 인정해 주는것이니까, 저절로 불어대서 되는것이 아니라고 셈이 들었든 것이다.     우리집은 또 이사를 하였다. 이번에는 신의주에서 50여리 되는 압록강 위 의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게 된 리유는 간단하다. “이와다제화점” 주인 이와다씨가 나의 아버지를 은근히 떠 보며 감시하고 공연한 트집을 잡으며 될수록이면 월급돈을 깍자고 하면서도 어데로 갈가봐 을러메고 순종케 하려는것이 아버지에게는 대단히 불쾌하고도 반감이 일게 했든것이다. 이와다는 치사스럽게도 아버지 작업대 위에 때로는 돈지갑을 슬쩍 놓고는 그것을 어쩌는가 지켜보며 나의 아버지를 숭매뜨기(떠보는짓) 하기까지 하였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의주에는 김씨가 경영하는 “시대양화점”이란 신발공장이 있었는데 김씨는 언제부터 나의 아버지를 욕심 내면서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나의 아버지는 이와다와 언약이 있었기에(여기서 일한다는) 갈념을 안했는데, 이와다가 점점 더 사람을 우습게 알며 이젠 자기에게 매운 노예처럼 취급하려고 드는데서 아버지의 분통이 터졌든 것이다.     5학년부터 나는 의주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우리집은 의주에서도 여전히 셋집살이를 하고, 이렇게 나는 소학교 6년을 세개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의주에서도 나는 공부를 잘하여 소문이 났다. 하지만 조선글은 잊어 버리다싶히 되였다.     그것은 6학년 졸업학기 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동창생친구 리임곤이와 함께 통군정 구경을 갔다. 그 당시 통군정은 조선8경의 하나라고 했다. 통군정은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선렬들을 기념하여 세운 력사유물이다. 그 위에 산꼭대기에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왜놈들이 로일전쟁에서 죽은 저들 관병을 기리여 세운것이다. 통군정에서 바라보는 산아래 압록강 일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내가 “충혼비”도 보자고 하니 임곤이는 그건 왜놈들이 죽은것이여서 보면 안된다고 하면서 우리는 크면 독릴단을 따라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말을 그날 나는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임곤이처럼 그렇게 셈이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임곤이에게 “너는 크면 독립단을 따라 가라. 나는 맏아들이니까 돈을 벌어 집부터 살려야 겠다.” 하고 말하여 임곤이는 대단히 불쾌해 했다. 말은 비록 그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임곤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후 학교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 했는데 누가 학교변소벽에 “삼천리 금수강산 삼천만 동포야! 잠을 깨라!”라고 락서를 한 것이다. 그로해서 우리 졸업반애들은 곤욕을 치뤘다. 나는 임곤의 작간이 아닐가 의심은 했으나 입밖에 말할수는 없었다. 얼마후 아버지와 그게 무슨소린가고 물으니 아버지는 크면 다 알게 되니까 어데가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은 앞으로 생사판가리 싸움을 피면할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싸움에는 나도 례외가 아닐거라고 생각 되였다. 그러나 훗날 일본헌병대통역이 될줄은 천만 꿈에도 생각 못했다.(1)
105    나의 독서생활 댓글:  조회:1007  추천:0  2017-04-21
         수필                                   나의 독서생활                                                                                                             회 령     금년들어 스물한번째로 맞는 세계독서일을 즈음하여 도문시도서관에서는 “로년독자 독서” 공모전을 펼치였다. 이 의의있는 기념일과 공모전을 맞으면서 나 역시 나의 70여년의 독서생활을 한번 쭈욱 회고해보게 되였다.       돌생일에 책과 연필을 쥐였다는데 그래선지 나는 누가 시킨것도 아니건만 아이때부터 책보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때는 그림책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가 있었다. 열두어살때로부터는 어른들이 보는 이야기책도 보기 시작했는데 이도 안 난것이 갈비부터 뜯으려 한 셈이다. 나는 이미 본 책을 보고 또 다시 보았다. 그때는 워낙 책이 귀한 세월이였지만 산골벽촌에서 책이란 더구나 희한한 보물이였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였지만 나는 책을 마음대로 볼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자주 환상을 하였다.       내가 책의 귀중함과 독서의 중요성을 알기 시작한것은 중학생시절부터인것 같다. 책에는 따라배울 본보기가 있었고 감동적인 영웅들의 모범사적이 있었으며 아짜아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고 나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웃음잔치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눈물이 줄줄 흐르는 슬픔도 있었다. 책에는 리상과 포부, 례모, 도덕, 습관, 수양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깊은 문장도 있었다.       내가 도서관을 리용하여 독서를 하기 시작한것은 연길에 가서 학교를 다닐 때부터다. 그때 처음으로 도서관이란걸 알게 되였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일요일만 되면 도서관으로 갔다. 점심은 보통 굶으면서 독서를 열심히 하였다. 배고픈줄을 몰랐다. 책은 지식의 그릇이였고 도서관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보물고였다. 지식은 전진의 등대였고 힘의 원천이였다.       독서는 사춘기에 들어선 나에게 무산계급적, 공산주의적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의 수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아니,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물론 선생님들과 단조직의 직접적인 교양과 갈라놓을수도 없다. 독서는 나에게 다방면의 지식을 알게 했고 시야를 넓혀주었다.       1962년, 나는 입단을 했는데 그때의 입단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1963년, 나는 독서를 열심히 하며 보고 느낀것을 발표하고 활용하는 등 실제행동으로 주변의 사람들께 좋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로부터 주변의 호평을 얻어 “연변주사회주의건설청년적극분자”로 당선되는 영예를 안기까지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국가의 통일적배치를 받을 때 나는 당과 국가와 인민의 수요에 무조건 복종하며 가장 간고한 곳에 보내달라고 신청서를 쓰기도 했다. 나의 이런 행동은 동창들에게 선두적역할을 끼치기도 하였다.       사회로 진출한후 나는 다년간 편벽한 변강산골 기층단위에서 사업하였다. 간고한 사업임무와 렬악한 사업환경은 각오한바이고 별문제였으나 도서관이 없는것이 제일 아쉬운 점이였다. 독서는 이미 나에게서는 불변의 굳어진 습관이였고 필수의 일과였으며 생활의 일상이였다. 회의를 가거나 하향을 하거나 한두날씩 군일로 외출할 때도 나는 잡지나 서적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소학교, 중학교에서 사업하는 책권이나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책을 빌려보기도 했다. 얼마 안되는 로임으로 살림은 계속 궁색했지만 나는 “큰돈”을 팔아 책을 사고 잡지를 주문했다.       몇년후 조직에서는 사업의 수요로 나를 도시에 전근시켰다. 전근해온이후 내가 제일 처음으로 찾은 곳은 단연 도서관이였다. 나는 무도, 마작, 트럼프, 낚시, 운동경기구경과 같은 오락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나의 유일한 흥취는 오직 독서뿐이였다. 오락은 하지 않았으나 나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그것은 나에게서 들을만한 말이 많았기때문인데 그 말들은 모두 독서에서 온것이였다.     아이때 버릇이 여든까지라고 나는 아주 독서에 중독된 사람이다. 내가 너무도 독서에 집착하니 안해와 자식들이 눈이 어떻고 건강이 어떻고 하며 나무리지만 나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병원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당부하는데도 고집을 쓰며 책을 보아 의사가 혀를 차기도 했다.       정년퇴직후 나는 도문시에 정착하였는데 그때로부터 도문시도서관과 인연을 맺게 되였다. 어느덧 20년 세월이 되여오는데 그간의 나날을 돌아보니 몇가지가 자랑처럼 떠오른다.       퇴직후 나는 “늙도록 학습하고 늙도록 개조하며 늙도록 일한다.”는것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총리 주은래의 명언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독서를 기억위주로 하였지만 도문에 온 후부터는 꼭 독서필기를 하였다. 그렇게 명언, 명구절, 새로운 지식, 독후감을 적어둔것이 어느덧 30여권이 되였다.       나는 독서로 얻은 지식을 여러 사람과 함께 향수하기에 의식적인 노력을 하였다. 동시에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을 주려고 하였다.      지금도 나는 자녀들과 주변 사람들께 독서를 성심껏 권유한다. “권학문”이라는 명문장을 본후에는 더구나 그것을 타자하여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고중생인 딸에게 보내주며 자녀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했다.       비록 이젠 석양을 지나 황혼을 맞았지만 독서로 아름다운 석양에 오래오래 머물고싶다.                                                                                                                                  2017.4
104    봄노래 댓글:  조회:1202  추천:0  2017-03-15
            수필                                                           봄노래                                                                                                                회령     또 다시 새봄이 왔습니다.     봄이 오면 제일먼저 진달래가 피여납니다. 이른봄 찬바람 거친 바위서덜응달에 무덕 무덕 활짝 핀 진달래! 아직도 겨울모습 그대로인 산발에 진달래만 혼자서 푸른잎 먼저 붉게피여 사람들에게 봄이 왔다고 알립니다. 진달래는 봄의 선구자지요.     다음으로 며칠지나면 살구꽃이 피여납니다. 아주 하얀것이 막 눈이 부십니다. 이산저산 곳곳에 진달래와 살구꽃이 만발하면 사람들은 새봄을 완연히 느낍니다.     봄에 민감한 시인들은 얼음밑 개울물소리에서도 봄의 노래를, 좁쌀알만큼 눈이 튼 버들개지에서도 봄의 모습을, 침끝같은 풀싹에서도 봄의 향기를 물씬 느낀다고 합니다만, 진달래와 살구꽃이 활짝 핀 앞산 뒤산을 바라보며 느끼는 봄맛처럼은 화끈하지 못할겁니다.     봄빛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갑니다. 산과 들은 신록으로 청신하고 냇물은 상쾌함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버들방천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웨침소리, 삘리리 삘리리 버들피리소리며 파란하늘에서 쉼없이 지저귀는 종달새의 노래소리, 푸른산 깊은 골짜기에서 구성지게 들려오는 뻐꾹 뻐꾹… 만물이 자기나름대로 약동하며 신나합니다. 논과 밭을 보세요.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춘경을 다그치는 농민들의 모습은 평화롭기만 하고요 귀맛좋게 울리는 농기계의 고르로운 발동기소리, 가끔 가끔 건드러지게 들려오는 밭갈이소 모는 소리… 정말 그대로 자연의 음악 봄 노래입니다. 산천에도 인간에도 봄은 무르익어 갑니다.     계절이 분명한 이곳에서는 해마다 어김없이 봄이 오기에 금년에 못다한 봄의 향수를 래년에 얼마든지 미봉할수 있답니다. 만물을 소생시켜주는 아름답고 고마운 봄을 응당 마음껏 향수해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 마음먹고 향수해야 할, 잊으면 안되는 귀중한 봄이 또 하나 있어요. 그것은 바로 인생의 봄입니다. 청춘은 인생의 봄이지요. 인생의 봄에는 청춘의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청춘의 몸은 약 10년으로 한이 있지만 청춘의 마음은 길고 짧음이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사람에게서 청춘의 몸은 아주 귀중한것이지요. 그러나 청춘의 마음은 더욱 보귀한 것입니다.     청춘의 마음은 울긋불긋 백화가 만발한듯 다양하고 아름답고 싱싱하고 향기넘칩니다. 청춘의 마음 기저에는(중심에는) 원대한 리상과 크나큰 포부가 있습니다. 이것은 드팀없는 확고한 분투목표와 착실하고 꾸준한 실천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인생의 봄을 맞은 청춘들은 모두가 리상이 있고 포부가 있고 실천으로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향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리상과 포부의 핵심은 자기를 인간사회에 유익한, 쓸모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의 봄은 휘늘어진 버들가지로 칭칭동여매지 않아도 어김없이 스스로 가고 옵니다. 백사장에 찍혀진 봄놀이 자욱은 만고풍상 비바람에 지워지고 씻겨져도 또 다시 찍혀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봄은 아닙니다. 한번가면 영영 가버리죠.     산천에 다시 온 새봄을 즐기실때 인생의 봄을 다시 한번 살펴보며 알차게 즐깁시다.                                                                                                                                  1996.5
103    송구영신지감 댓글:  조회:1023  추천:0  2017-03-15
         수필                                                     송구영신지감                                                                                                               회령     세월이 류수와 같다고 누가 말했는지 명언중의 명언이다. 잰내비해를 맞으며 새해결의를 굴뚝같이 다진것이 방금 어제같은데, 수탉이 코앞에 와서 노려보고 섯다.     작년이때 “올해는 좋은글 한편을 꼭 써낼거다!”하고 일기장첯장에 대서특필로 번듯하게 쓸때 나는 용기백배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줄도 모르고 김매는 농민처럼 부지런히 글을 썼다. 낮이고 밤이고 열심하였다.     바야흐로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닥쳐오는 이 시각 한해 “농사”를 돌아보니 도대체가 이럴수 있는가?! 부끄럽고 어처구니없고 비참하기 그지없다. 평작도 아니고 흉작도 아니고 이건 완전페농을 한것이다. 이곳 저곳에 20여편의 글을 보냈으나 몽땅 퇴자를 맞은것이다. 해외에 보낸것이 네댓편이 활자화되고 두편은 무슨상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입도 뻥끗 못했다. 그런데, 사정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친척, 친구들이 무슨 해외성과가 어쩌구 저쩌구 하며 축하요 기념회요 하는데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난감한 처지가 되였다. 내가 무슨 국제주의전산가. 나의 복무대상은, 나의상전은 국내의 독자님들이다. 해외의 성과보다 국내의 성과가 나에게는 더 기쁘고 값진것이다. 본분을 떠난 엉뚱한 짓거리를 가지고 마치도 장원급제나 한듯 칭송하는 작태가 심히 불편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것이 더 필요하고 소중하고 좋은것이다. 해외의 것이라면 무턱대고 침을 한발씩이나 흘리는 몰골이 너무도 역겹다…     내가 글을 쓰는 취지는 극히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보는이에게, 사회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일을 하려는것이 전부다. 취지든 동기든 스스로 인정하건대 나쁘지는 않은데 왜서 번번히 코밥을 먹었는가? 년말년시 송구영신을 하면서 나는 깊히 사색하고 반성하였다. 내가 투고한 글들을 한편한편 꼼꼼히 검토해 보았다.     허물을 찿자해서 그런지 온통 허물뿐이였다. 나는 교훈을 몇가지로 귀납했다.     첯째는 사상성문제였다. 나의글들에서 주제사상은 선명하지 못하고 흐리멍텅 하거나 애매모호하였다. 어떤것은 착오적이였다. 사상을 해방하고 인권, 인성을 개방한다고 해서 원칙이 없는건 아니다. 글에는 정확한 령혼이 있어야 할것인데 내가 쓴 글들은 그렇지 못했든것이다.     다음은 예술성문제였다. 글은 두말할것없이 재미있어야 하건만 내가 쓴 글들은 “정치과”도 아니고 “당과”도 아니고 목사의 “설교”도 아니였다. 무슨 “과”나 “교”를 할 수준과 능력도 없는것이 잔뜩 장황설을 늘여놓으니 어느 독자님이 보자고 하겠는가…     세번째는 수평부족이였다. 이도 안난것이 콩밥에 갈비추렴을 하겠다고 덤벼들듯 쓰는 족족 지체할세라 여기저기에 투고를 했는데 어떤것은 페지를 빠뜨리는 망신까지 하였다.     새해를 맞으며 나는 새롭게 결의를 다진다. 금년에는 우선 재충전에 공력을 들여야 하겠다. 힘써 학습하며 부지런히 사색하며 온당하게 실천할것이다. 금년에는 수량보다 질량을 추구하리라…                                                                                                                            17.1
102    문단의 차일시 피일시 댓글:  조회:1478  추천:0  2017-03-03
          잡문                                        문단의 차일시 피일시                                                ㅡ김학철선생에 대한 인상 두어가지                                                                                                                회령     중국조선족문단에서 김학철선생은 원로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광복전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여 80여고령의 지금도 열심히 붓을 달리고 있다니 창작생애가 환갑이 넘었다. 그런데 금상첨화로 선생의 가슴에는 또 여러가지 문학상이 주렁주렁 훈장처럼 빛나고 있다하니 성과작이 적지않은 모양이다.     그뿐인가! 선생은 항일투사이고 로당원이다. 인생경력도 마치 깊은 산골짜기에 든 사람같이 험난하고 굴곡적이고 역경과 순경, 고통과 기쁨, 치욕과 영예… 전기적색 채가 가득 차 있다고 한다. 금년초에 “연변일보”에서 보았는데, 선생께서 스스로 “영예와 치욕이 점철된 인생이였다.”고  자신을 말헸는데 내 짐작에도 신통히 맞는 말인것 같다.     경력이나 자격이나… 여러면에서 선생은 원로대접을 받을만한 분이시다.     내가 김학철선생을 알게된것은 아니, 명함을 보게된것은 초중학교시절ㅡ 바로 코흘리개 아이때다.     그때 무슨일로 교원실에 갔는데 선생님들만 보는 책장에서 “해란강아 말하라”라는 소설책을 발견하였다. 두꺼운 소설책이 작으만치 1,2,3권이나 되였다. 나는 반주임선생님께 졸라서 그 소설책을 빌려보게되였는데 먼저 제1권을 가져다 보게 되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인상은 그때 그 소설이 너무도 재미가 없어서 얼마보지도 않고 팽개친일이다. “림꺽정”, “손오공”, “수호전”, “삼국연의”보다는 너무도 멋대가리가 없었든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에 아이때 한번체한 음식은 평생을 두고 다시는 먹지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 “해란강아 말하라”에 체했던것 같다. 왜냐하면 그후부터는 김학철이란 명함이 붙은 글이기만 하면 길든 짧든 일률로 풀꺼덕ㅡ 건너 뛰였으니까.     그렇게 30여년이 지나간후 나는 선생의 글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문단에서 너무도 “김학철! 김학철!”하고 소리를 지르고 또 “김학철문학연구소”라는것까지 성릴했다고 하니… 또 듣는말에 남조선에서 김학철선생을 하늘만큼 올리 받든다고 하니… 이거,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해서 선생의 글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다. 사람을 말할때는 사실로 말해야하고 작가를 론할때는 작품으로 론해야 하는거니까, 나는 선생의 작품을 만나는대로 열독을 하였다. 그러기를 여러해 선생에대한 편단적인 새로운 인상을 몇가지 가지게 되였다.     우선, 선생의 끈질긴 문학열정에 감탄하게 되였고 왕성한 정력과 비상한 기억력, 대담무쌍한 필봉을 탄복하게 되였다. 그리고 글이 재미있다고 느끼였다. 나는 잡문, 수필, 실화, 력사물을 좋아하는데, 근년에 내가 접촉한 선생의 작품들이 거개 다 그런것들이여서 보기 좋았다. 선생의 글은 감각과 묘사가 사실주의적이여서 리해하기 쉬웠다. 어떤이들의 글을 보면 감각과 묘사가 너무도 시적이여서(몽롱신지 환상신지 무슨 하이펀가 뭔가 한) 무슨뜻인지 지어는 뭘말하는지조차 도저히 리해할수가 없어서 왈칵! 짜증을 내며 보지도 못한 도깨비를 여울건너는 소리같다고 욕하며 책을 팽개치는데, 동시에 나의 우둔함을 한탄하기도 하는데… 선생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30여년전의 체증이 결국은 선생의 손에서 떨어진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깊은인상은 선생은 글로 남을 욕하는데 이골이 텄구나! 하는것이다.     문학작품은 체재에 따라 크게는 두가지로ㅡ 산문과 운문으로 나누고 성격에 따라서는 찬미, 폭로, 서정… 등등으로 나눈다고 하는데 폭로를 욕이라고 해도 뜻은 통할것이다. 말씀이 고상한가 상스런가 하는 다름이지 그말이 그말인데 선생의 작품에는 욕이 많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자고 하는것은 선생의 욕작품에서 극히 적은것이긴 하지만 중국조선족문단과 관련이 있는 몇마디욕에 대한 소견이다.     언젠가 선생의 글에ㅡ 문단내부에서 서로 물고 뜯고, 비방 중상하고, 지어는 무함 고자질까지 해가며 다른사람을 더럽히거나 모해하는 현상, 패거리를 짜고 몇사람이 지면을 독점하고, 먹이지 않으면 실어주지않는 현상, 모자를 씌우고 때려눕히는 현상… 소인배의 광채롭지 못한 행위를 근절하자고 질책하고 호소한것을 본일이 있는데 매우 쉬원했다.     그때, 나는 우리문단내부에 그렇게 너절하고 창피스러운 현상이 있다는것에 아주 크게 놀랐다. 나는 “문인상경”(문인들은 서로 깔본다.), “니전투구”(진흙탕에서 개들처럼 싸운다.)라는 옛글을 본 일은 있어도 그것을 우리문단과 련계시켜 본적은 없었다. “인류령혼의 공정사”라고 하는 작가들을 나는 고상한 인격자로, 특수한 지성인으로 보아왔고 믿어왔든 것이다. 선생의 글을 본후 나는 착잡한 심정에서 “그것 참! 이럴수가 있나… 이러면 안되지… 욕한번 쉬원하다.” 하고 여러번 중얼거렸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서다. 기업가의 실화를 써준 사람을 “어용문인”이라고 신랄하게 풍자하고, 고인이 된 시인에게 비석을 세워준 일을 아주 못마땅해 한 남어지 “여기에 개를 묻었다.”고 쓴 비석을 세우라고 한 대목, “토끼를 다 잡아먹고 사냥개를 구워먹었다.”는 대목, 선생의 글을 실어준 사람과 거절한 사람을 운운한 대목… 등등의 글을 본 후에는 머리가 기우뚱거려졌다. 어쩐지 이런욕을 지상(사회)에 내여놓는것이 마음에 뜨뜨미지근 하였다. 학술적인것보다 인신공격이 주선률 같았든 것이다.     최근년간에 우리문단에서는 보기드믄일이 나타났다. 그것은, 김학철선생에게서 무슨일로 욕을 얻어먹은 사람이 젊은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배가 잔뜩 부어서 “엄정성명”을 발포(發砲)한 것이다. “엄정성명”의 골자는 “금후 우리편집부에서는 다른사람을 빗대고 욕한 글을 싣지도 않을것이며 받지도 않을것이니 당신 그런줄 알어라.”라는 것이였다.     그때, 사태가 이렇게 번져가니 나는 조마조마해 났다. “엄정성명”은 김학철선생에게 직방 대여든 것인데, 이거, 큰일이 터졌군. 범에게 콧침을 놓다니… 하, 그것 참… 나는 가슴이 후두두 해 났다. 아니나 다르랴! 김학철선생께서 “폭로문학”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휘두르며 버르장머리 없는 되지못한 “엄정성명”을 냅다 깔아뭉개며 아갈잡이를 해 놓았다. 문인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부싸움이 본격적으로 터질판이니… 이런 변이라구야! 나는 긴장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냐?! “엄정성명”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린것이다. “엄정성명”은 자신의 성명을 솔선수범 지킨것이다. 다행히 내부싸움은 한합만 붙고 끝났다. 나는 식은땀을 쭉ㅡ 흘리고 안도의 숨을 씨익ㅡ 내 쉬였다. “엄정성명”이 잘했다고 긍정했다….     “엄정성명”건이 진정되여 얼마후 문단에는 또 싸움이 터졌다. 이번에는 원로 대 원로가 붙었는데, 그것은 김학철선생과 김철선생이 한판 배뜨기를 붙은것이다.     김철선생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시문학으로 대단한 분이라고 하는데, 나는 “노랑꿈”이요 “빨강꿈”이요 하는 시어들이나 “태양을 먹었다!”느니 “산이 웃는다.”느니 하는 시감각을 모르다 보니 시는 재미가 없어서 보지 않는다. 하다보니 물론 김철선생에 대해서도 일자 면무식이다.     김철선생이 대단하든 대단하지 않든 그건 다른문제고, 김학철선생의 잡문에서 보면 40여년전 반우파정치운동에서 김철선생이 되게 잘못한 일이 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고것을 뼈가 저리게 반성하고 참회하고 눈물코물을 흘리며 사과하고 빌고해도 모자랄판인데 스리슬쩍 간지러울 지경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였다. 김학철선생은 이점을 틀어쥐고 김철선생을 냅다 조기였는데 그 정도가 얼굴을 들고 다닐수 없을 지경이였다. 이럼에도 선생은 성차지 않아서 “꽁꽁 적어둔 분이 있는데 이제 세상에 나올것이다!”하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납작하게 만들려는것 같았다. 김철선생의 대꾸도 물론 우아할수 없었다… 싸움은 서너합 치렬하게 붙은것 같다.(뒷부분은 보지않았다.)     김학철선생은 그이의 수필에서 보면 원통한 일이 많고도 많은 분이다. 주의며 사상이며 하는것은 그만두고 단순히 인간적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벌써 서른살이 되기도 전에 왜놈들에게 귀중한 다리 한짝을 떼우지 않았는가… 공산당세상에서는 24년간이나 글 한자를 못썼다고 하니… 작가의 황금시기는 다 지나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속에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10년옥살이까지 끼여있다. 억울하게 당한 그 치욕과 모진고통, 통분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사람은 리지도 있고 감정도 있다. 인지상정으로 김학철선생과 같은 그런불행을 겪었다면 누군들 그것이 잊혀지며 격분의 불덩이가 가슴에서 치워지겠는가. 비리와 교활, 사악, 부정부패… 온갖 틀린것을 극도로 미워 내지 증오하며 추호의 용서도 없는 선생의 심경과 칼끝같은 필봉은 이십분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선생은 우리문단의 원로이다. 그리고 항일투사이며 로당원이다. 지금 우리문단을 빛내이며 맹활약을 하고있는 작가들은(김철선생을 포함해서 선생한테서 욕을 먹은 모든 작가들도.) 모두 선생의 후생들이다. 그들에게는 정도부동의 미숙으로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이런저런 착오와 결함이 있었거나 있을수 있다. 그러나 필경 우리문단을 신근한 로동으로 가꾸며 꽃피워가는 인재들이다. 네가 나를 치고 내가 너를 박는다면… 그어떠한 명분에서 하는 내부싸움이든 그것은 우리문단, 우리모두에게 망신이며 불행이다.    만약 백가쟁명이라면 백가쟁명답게 엄숙하고 허심하고 화해롭고 진지한 학술태도로 림해야 할것이다. 백가쟁명이 아니라면 지면(사회)에 올리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선생은 내부싸움의 질곡을 골수에 사무치게 겪은 분이다. 내부싸움을 앞장서서 막아야 할 분이고 막자고 이미 오래전에 호소한 분이다…     나는, 원래 이런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이 글도 결국은 누구를 욕하는 글이겠다고, 훈장님 앞에서 문서질하듯 돼먹지못한, 버르장머리없는 소행이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분 김원로분들 앞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주 삼가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단에서 또 싸움이 터졌다.     이번전투에는 팔팔한 젊은선생과 나이지긋한 선생이 뛰여들었다. 전쟁은 시작부터 백열화되였다. 오가는 대포알을 보면 “건달작가”라느니 “류망시인”이 어쩌구 저쩌구… “네따위가 아무리 많은 책을 써낸들…”, “개방귀같은 헛소리를 작작 줴쳐라!”… 나는 생각하기를 쟁명은 어디까지나 좋지만 싸움은 말리는게 도리라고, 문단에서 이런풍기는 극복하고 단결을 도모해야함이 마땅한것 아니겠는가… 하여 이런글을 쓰게 되였다. 나는 중국조선족작가선생들의 단결된 힘과 노력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이 더욱 아름다운 화원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2000.10.1     후기: 인터넷에서 우리글 “조글로”에 들어가면 중국조선족작가넷을 만날수 있다. 나는 이 무대를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거기에는 댓글광장도 펼쳐져 있는데, 그것은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활무대이다. 거기서 백가쟁명을 보면 학습할점이 많다. 그런데 때로는 비문인적, 비지성인적, 인신공격, 인신모욕… 댓글을 보게된다. 나는 이런 댓글을 올린 선생들께서 자신의 자존심절반만큼 다른 선생들을 조금 존중하는 배려를 하였으면 좋지않겠나… 참고로 건의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3.3
101    새벽쥐새끼 댓글:  조회:1638  추천:0  2017-02-28
         잡문                                                           새벽쥐새끼                                                                                                             회령    어찌된 영문인지 연변이 더 심한것 같다. 내가 다녀본 시가지들에서는 이런현상을 별로 보지못했다. 북경, 상해, 천진, 서안, 심수, 향항, 오문… 동서남북중 나라안을 꽤 돌아다닌 셈인데, 연변처럼 이렇게 창궐한 곳은 보지못했다. 시장경제의식이 발달하고 광고중시도가 높아선지 아니면 미개해서인지… 단속을 미처 하지못해선지, 하지않아선지 아니면 뒷심이 있는가… 하여간 요진통은 있으련만 나로서는 알수없다.    산뜻하게 장식한 아름다운 건물이며 보기좋은 담장, 대문, 크고작은 표어판, 다리란간, 기관, 개인주택, 심지어는 길바닥에까지… 무릇 사람의 눈길이 닿을만한 곳이기만 하면 핸드폰호를 구불구불 갈겨 쓴 광고를 볼수있다. 번호끝에는 아주 함축해서 주명을 달았는데 “증건만듬”(辦證)이다. 겯들어 전단지도 있는 모양인데, 어느땐가 대중교통역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그야말로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증건만듬”의 함의가 그렇게 풍성할줄이야?! 나는 한참동안 눈알이 곤두서서 혀를 내 휘두르며 풍을 일구다싶히 했다. 그 핸드폰이 만들어 주는 증건에는 총서기증, 총리증, 화페외의 모든것이 다 있었다. 운전기사증,(고속철, 려객기, 기선 등) 교원증, 의사증, 군인증, 경찰증, 박사증, 부장증, 국장증, 외교관증, 려권, 당증, 호구부, 신분증, 방산증, 결혼증, 리혼증, 출생증, 사망증, 건달증, 깡패증, 부패증… 조금 과장을 했지만 하여간 무슨증건을 주문하면 곧! 그것도 당지에서 만들어 준다고 성명을 했는데 정말 가관이 였다.    최근년간 연변의 여러도시와 진들에서는 건설과 정리정돈을 잘해서 도시와 마을의 면모가 일신되여 산뜻하고 환해지고 아름다워 졌다.    그런데, 구불구불 갈겨 쓴 핸드폰호와 “증건만듬”때문에 건물의 품위가 일락천장이 된건 더 말할것도 없고 전 시가지가 난처한 꼴이 된다. 언젠가 도문시도심에 있는 “해방탑”을 유람했는데, 새로 잘 정돈해서 숭엄하고 그윽한 정서를 충분히 자아내였다. 마침 로씨야청년들 20여명이 “해방탑”을 보려고 왔는데 그들은 꽃다발을 증정하고 탑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어떤청년들은 바라보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손키스를 보내며 우호와 단결과 경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얼마후에 또 탑에 갔는데 깜짝 놀람과 동시에 지대한 격분을 참을수 없었다. 그렇게도 잘 정리된 탑좌에 돌아가며 4면 모두에 아주 쉬원히 대짜배기로 독사가 룡트림하며 기여가듯 구불구불 핸드폰호와 “증건만듬”이 검은색과 뻘건색으로 영구불멸의 기개를 떨치며 씌여 있지않는가?! 이런 기절할 일이 도심복판에서 번듯히 벌어지다니?! 너무도 한심하고 분통이 터졌다. 새집을 잘 건축해 놓으면, 깨끗히 청소하고 잘 정리해 놓으면 꼭 찿아와서는 이따위 짓거리를 해놓고 달아난다. 무엇으로 갈겼는지 자원봉사자들이 지워버리기도 쉽지않다. 그뿐이 아니다. 전단지, 종이딱지를 출입문에, 유리창에, 상가의 간판에, 지어는 공안국, 법원, 정부와  당위의 간판에까지도 주저없이 붙혀 놓는다.    광고를 뿌리는 이런작법은 소음보다도 더 시끄럽고 가증한 공해로 되였다. “핸드폰증건만듬”은 공해를 넘어 범죄행각이다. 수수방관하면 되는가?    공안국의 누가 말하기를 이자들의 활동시간은 밤 12시부터 새벽4시사이라고 했다. 보통 두셋씩 짝을 무어 활동하는 새벽쥐새끼들인데 어찌두 날쌘지…미국이나 일본에 보내여 빨찌산을 하게하면 그저그만이겠는데… 그는 하하하 웃어댔다. 빨찌산감이든 유격대감이든, 내가보기에는 련계전화호까지 번듯히 내걸고 나 여기있수 잡아잡수하는데 단속이 않되니... 어찌된 문세가락인가... 괴상하다.    나는  대낮에 큰거리를 순라하는 경찰을 밤에 순라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에는 대낮에 순라하는 것도 마, 무슨 효과가 있겠지만 밤에 더 효력이 있을것 같은데… 열사람이 도둑놈 하나를 못 지킨다고 애는 먹겠지만 품을 들이더라도 “새벽쥐새끼”를 생기는 족족 잡았으면 좋겠다. 물론, 새끼쥐도 잡고 그 어미쥐를 반드시 잡아야 씨알머리가 말끔히 없어질거다... 하면 연변의 체면에 좋을것 같다.                                                                                                  2012.10
100    괴벽한 글쟁이의 절개 댓글:  조회:2094  추천:0  2017-01-18
        수필                                               괴벽한 글쟁이의 절개                                                            ㅡ최서해의 “혈흔”에 화답하여                                                                                                                                    회령     내가 문학에 뜻을 둔것은 20대 열혈청년시절이였다. 그때 나는 일생을 다 바쳐 문학을 하며 단 한구절이라도 좋으니 세상에 내놓아 부끄럽지않은 글을 꼭 써야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하였다. 그때 다진 나의 이 맹세는 필을 놓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을것이다.                                                                 x                  x       어느날 나는 최서해의 “혈흔”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영원히 잊을수 없는 교육과 계발을 받았든 것이다. “혈흔”은 마치도 “공산당 선언”과도 같이 나의심령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후부터 나에게는 괴벽한 글쟁이의 절개가 생겨났다. 하여 세상에 내여놓을 글을 함부로 쓰지못하였다.                                                                 x                  x       나는 아첨하는 글 타협하는 글 얼버무리는 글 외면하는 글 령혼을 부식하는 글… 량심에 부끄러운 글을 쓸수 없었다. 하여 겨우 몇편의 글밖에 발표하지 못했다. 유감은 가득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비록 고지식하고 괴벽한 둔재이지만 나의 념원을 실현하기위하여 한생을 노력분투하련다.                                                                x                   x       인간은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것울 인식하고 개조하고 건설하고 창조하여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만들어 모든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게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인간의 최대의 임무며 최종분투목표이다. 문학자의 사명은 이 임무와 분투목표의 실현에 사람들을 인도 고무 격려 추동하는 것이다.                                                               x                 x       인간과 사회에 유익한 글을 쓰는것은 문학자의 사명이며 도리이며 도덕이다. 그렇지 못한 글은 비평하고 금지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문학자들의 미룰수도 사양할수도 없는 책임이다. 나는 남들의 틀린점을 직방 곧이곧대로 바른소리를 하여 인심을 잃기도 했으나 미안하지는 않다. 모르긴 해도 “충언이 이역이나 리어행”이라고, 그렇게 되였다면 나는 만족이다.                                                               x                  x       물질문명건설에서 자본주의적방식이 어떤것은 귀감이 될수 있지만 정신문명건설에서는 사회주의적인것이 좋다. 문학자에게는 정확한 건전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1980.1
99    도문제방둑 댓글:  조회:1900  추천:1  2016-11-28
       수필                                                        도문제방둑                                                                                                            회령     하늘에는 알지못할 풍운조화가 있고 사람에게는 알수없는 길흉화복이 있다고 어른들이 말씀했지만, 금년이야말로 어른들의 말씀과 맞아떨어진 셈이다.     금년농사를 보면 밭갈이며 파종과 입종이 참 잘 되였다. 누기와 일조가 약속이나 한듯 거기에 산들바람까지 삼박자가 신통히도 알맞아 한전출묘가 백프로고 벼모는 건실해서 제때에 모내기를 쉬원히, 번개같히 하였다. 하서에 들어서도 밤에는 소나기가 오고 낮에는 무더위가 찌는듯해서 말그대로 오곡백과가 소리치며 우썩우썩 자랐다. 강냉이는 두세이삭씩 업고 키들이로 검푸른 화폭을 이루고 벼이삭은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황금벌로 물들어 갔다. 과원에서는 사과배 사과 복숭아 백살구 딸기 포도가 탐스럽게 주렁지고 향기 그윽한데 새농촌 집집마다 뜨락은 어떠한가! 오이 고추 가지 불기(상추) 배추 파 마늘 젠추 내기 감자 양파 진채… 각가지 햄(반찬)으로 먹는 채소가 기름지고 푸르싱싱. 찰옥수 줄당콩 호박과 깨는 담장밑으로 돌아갔다. 살찐돼지는 꿀꿀 앎탉무리에서 수탉은 긴목을 빼들고 꼬끼요 황둥개는 댑싸리그늘밑에서 늘어지게 자고있다. 풍요로운 넓은벌, 울긋불긋 산기슭, 아담한 새농촌마을이다.     “금년두 어거리대풍일세…” 농민들은 말할것도 없고 비만오면 풍년이라고 하는 시가지사람들도 풍년세월이라고 머리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그들에게도 풍년은 좋다. 온갖 먹거리가 흔하고도 눅(싸)겠으니.(그래도 앵앵거리며 한푼이라도 깍고 톱는 시내깍쟁이들이 있다만.)     하느님께 부처님께 신령님께 귀신님께 개여올리는 사람이 많아선가 빌지않는 사람이 많아선가… 8월하순에 들어서며 하늘이 하는 짓거리가 신통치 못했다. 한번 본때를 보이자고, 위풍을 부리며 심술을 피우기로 작심을 했는지 련일 찌뿌둥한 하늘에서는 시도때도없이 비가 찔끔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장마비가 늦게 오는것 같다고 하며 근심에 싸여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주책머리가 없다고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며 대포를 갈기겠다고 을러메며 밸(성)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은 련일 비 질을 하였다. 25일부터는 밤낮으로 비를 내리는데 비발이 굵어지며 주룩주룩 한대중 내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무슨 률동이나 박자를 넣듯히 때로는 쏴아! 거세찬 폭우를 마구 쏟아붓기도 했다. 순간에 대통로는 개천으로 변하군했다. 동시에 미친듯 광풍이 마구 갈개치며 대작을 하는데 땅위의 모든것을 뽑아버리고 날려버릴듯 기승을 부리는게 아닌가?! 천상 보지못하던 태풍이 왔다는 것이다. 사자산인가 사자대가린가 한 태풍이 들이 닥친거다. 이놈의 태풍이 그예 큰일을 치겠다고 떨고있는데 이틀이 지나서 태풍은 동북간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데 웬걸?! 떨리던 가슴이 아직도 후두두한데 이번에는 특대홍수가 수백수천마리의 사자무리처럼 감때사납게 질풍같이 덮쳐온다고 하였다!! 물결이 15메터높히로 짓쳐온다고 하였다. 이 홍수는 백년만에 오는거라고도 하고 일백삼십년만에 일백오십년만 일백팔십년만에 오는거라고도 했는데 황황한 인심에서 나오는 공포의 비명이였다. 도문이 생겨난지가 150년이 채 않되니 일백팔십년만이라는 것은 지나친 말이지만, 하여튼, 이번홍수가 상상외로 엄청난사태임은 사람마다 알았다.     지방티비에서는 태풍, 홍수주의홍색경보를 주야로 24시간련속방송하고 시정부와 가도, 주민구 모든공무원 주둔부대장병들까지 대거 출동을 하였다. 성, 주 일급령도 들이 도문제방둑에 붙어있었다. 덮쳐오는 물갈기를 맞으며 도문은 두가지일에 총력을 몰부었다. 하나는 제방둑을 보강하는것이였고 다른하나는 수만의 시민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는 사업이였다. 말그대로 피를 말리며 분초를 다투는 백열전이 였다!! 후일담이지만, 시정부어느국의 국장은 한시간에 거이 백근에 달하는 흙마대를 80여개를 메여날랐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흘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시민대피에 나선 공무원들은 8월30일11시부터 대피대상 매개집들을 찿아다니며 다시한번, 최후의 동원과 락실을 하였는데 밤12시전까지 달려다닌 거리가 매인당 평균 백여리에 달한다고 한다. 어떤여성간부들은 목이 쉬고 인후염으로 며칠을 말도 못했다고 한다.(새농촌마을들에서도 간부와 당원, 단원, 많은사람들이 피어린 투쟁을 하였다!) 8월30일11시부터 두만강수위는 5분단위로 각일각 불어갔다. 이런속도라면 최대물갈기가 도문에 이르는 시간은 밤12시부터 31일 새벽5시사이 일거라고 했다. 물갈기는 9월2일아침부터 수그러지기 시작한다고 했는데, 8월31일과 9월1일은 도문의 생사존망을 결판내는 시각이라고 하였다. 최대물갈기가 오기 40분전까지 도문은 사람이 할수있는 작업은 전부 완료를 하였다. 다음은 하늘놈의 몫이였다. 20리도문제방둑은 위험구간을 전부 보강하였고 땅바닥을 떠날수 없는 물건들 례하면 각종차량, 귀중물품은 전부 고지대로 옮겨갔다. 8월30일 밤 11시까지 3층까지의 시민들을 몽땅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다.(좀 낮은구역에서는 4, 5층까지 대피.) 비는 뜬금없이 휘뿌리고 5,6급의 미친바람이 몰아치는 불순한 악천기속에서 도문사람들은 최후의 각오로 주야련삼일 악전고투를 하였다. 끊임없이 힘차게 울리는 싸이렌 소리는 돌격의 나팔소리였고 도문사람들의 함성이였다!     특대홍수는 많은 제방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고 새농촌마을들에 참혹한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도문시가지는 안연무사했다!     모진시련이 지나간후 나는 일광산기슭으로부터 시작된 도문제방둑을 곡수망해탑산 기슭까지 20리를 쭈욱 답사를 했다. 보강하느라 쌓았던 모래주머니, 흙무지들을 다 청리한 뒤여서 도문제방둑은 원모습 그대로 정겹게 고맙게 안겨왔다. 도문시가지는 범진령, 일광산, 망해탑까지 서로 이어진 높은산 기슭으로부터 펼쳐졌는데, 그곳을 삼각형의 밑변으로 할때 삼각형의 두 옆변은 두만강과 부르하통하다.(부르하통하를 도문사람들은 도문강 혹은 북강이라고도 한다. 연변에서 제일 큰 이 강은 삼각형의 정점격인 도문시동쪽변에서 직각으로 두만강에 뛰여든다.) 도문사람들은 지난세기 60년대초반부터70년대중기까지 두만강과 부르하통하(량안)제방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번의 특대홍수는 두만강철교, 인도교의 교면밑을 스치면서 지나갔는데 제방둑에서 는 약 반메터쯤을 남기고 격류가 사품치며 용트림하며 날뛰였다. 북강홍수도 팔엽교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내달렸다.     과학적인 준확한 설계, 영명한 지휘, 신근한 로동, 백년대계 확실한 질 보증은 오늘 충분히 과시되였다. 도문제방둑은 형식주의 관료주의 산물도 아니였고 형상공정 업적공정도 아닌 실사구시의 실제적인 민생공정이였다. 도문제방둑은 도문을 지켜냈다!!  산자락과 제방둑안에 포근히 안긴 도문시가지를 바라보니 너무도 아름답고 평온하고 포근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고마운 도문제방둑이여! 너는 력사의 시련, 인민의 고험을 끄떡없이 이겨냈다. 아니다. 당년의 기획자, 설계자, 지휘자, 로력자들이 백년의 시련과 고험을 이겨낸 것이다….     고마운 선인들에게 심심한 경의를 드린다!!                                                                                                     16.10.20
98    아버지의 유산 댓글:  조회:2125  추천:1  2016-10-22
       수필                                                                            아버지의 유산                                                                                                                     회령     제자랑을 하자는건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녀들 교육, 신칙을 한시도 등한히 하지 않는다. 천하의 자식 가진 부모는 다 그럴것이다. 나는 거창하게 그 무슨 당과 인민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자녀들을 경각성 높히 교육, 신칙한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교육, 신칙한다.     부정부패를 호되게 족치면서 륙속 범죄자들을 잡아내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인민들은 통쾌해서 갈채를 보낸다. 나도 물론 그중의 하나다. 통쾌하기 그지 없다. 호랑이든 파리든 몽땅 잡아내라! 억세게 척결하라!... 인민들은 당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면으로는 그들의 친인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럴때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 무고한(관련이 없는)그들, 친인들의 심정이 어떨가?... 모르긴 해도 아마 감고신염산 오미가 다 괴여 오를 것이다… 잘나갈때는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이고 행복이였겠지만 계하수가 된 지금은 그야말로 개골망신이고 패가망신 랑패다. 총적으로 슬프고 유감스럽고 아쉽고 불쌍하고 쉬원섭섭하고… 대개 그럴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가긍스럽다. 아글타글 자식을 키워 나중에 저런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옳은말은 듣지않고 시키는 일은 바로하지 않고 량심을 버리고 못된 짓거리만 하여 죄진놈은 이제 법이 알아서 처리할거지만 그들 친인들에게 생각이 미치면 나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무거워 진다. 그것은 나의 자녀들도 부정부패 앞에 완전로출이 되여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들과 며느리는 외지에서 꽤 큰 령도간부로 있고 큰딸과 사위는 당지에서 역시 시급령도강위에 있다. 막내딸은 시병원 신경내과주임이고 사위는 주둔부대 퇀급간부다. 나는 아들네와 큰딸네는 대체로 믿음을 갖고 있다. 아들과 큰딸은 아이적부터 정직하게 성장했고 지금까지 정직하게 사업하며 발전하여 왔다. 며느리와 사위도 원칙을 알며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당하게 나가고 있다. 당이 간부를 엄하게 관리하며 여러가지 규정, 학습과 활동, 조사와 고찰이 수시로 있는데, 그들은 말썽을 듣은일이 없었고 모범당원, 선진령도간부로 번번히 당선되였다.     내가 늘 조마조마하고 시름을 놓지 못하는 애물단지는 막내딸넴이다. 어릴때부터 온냐 온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운것이 멋 따고 련애하고 공부안하고 줏대와 고집이 잔뜩 자라 어벌짝이 커졌다. 사위녀석도 어슷비슷하다. 고관의 품에서 귀염둥이 보배둥이로 자랐고 그 빛광덕으로  내가 보건대는 출세를 빨리 하였다. 이점이 나는 늘 탐탁치 못하다. 막내딸네는 뜨르르 잘 산다. 내앞에서 꺼리낌 없이 저들의 “부정수입물”을 자랑하고 가져오고 하여 “정치과”에 줄욕을 여러번 먹었으나, 입맛을 영 버리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의멸친하며 규률검사위를 찿아 갈 용기는 없고, 나는 아들과 큰딸에게 상황을 말해주고 협력을 지시하였다. 한시기 지내보니 막내딸 부부에게 개변이 있는것 같았다. 물품류는 사절하거나 값을 주고 “훙보”를 거절하고 받았던건 돌려주고 어쩔수 없는것은 규률위에 가져가고 “칭커연”도 여러번 사절했다는둥… 개변이 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태평가에 노들강변코노래를 부르며 공원을 흐느적거릴수는 없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넘어지랴 떨어지랴… 항상 자식들을 념려하게 된다. 당이 당원과 간부를 사랑하고 관심하고 념려하는 그 심정과 똑 같은 부모의 마음이다. 고민끝에 나는 한가지 조치를 연구해 내였다.     내가 보건대, 사람이 좋게 나쁘게 변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량심에 있다.     세상은 광천수통같이 말쑥하지만 않다. 같은세상, 같은 벼슬길에서 누구는 락마하고 누구는 활개치며 발전한다. 왜서일가?! 열가지 백가지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그 량심하나에 달린것이다. 나는 자식들이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을 소유하면 만사대길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자식들이 우수한 량심을 수립하는데는 여러면의 인소가 역활을 발휘할것이다. 그중에서 “부모의 부탁”도 큰 작용이 있을것 같았다. 락마한 관원들의 “참회록”을 보면 모두가 “당에 미안하고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가장 후회하는것인즉 당과 부모의 말을 듣지않은 것이였다. 나는 “부모의 부탁”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금년설을 우리는 북경에 있는 아들집에서 쇠기로 결정했다. 세집 큰사돈님들도 동참하기로 했다. 나는 그 기회에 육필로 된 “부모의 부탁”을 자식들에게 선물로 줄 작정이다.     나의 “부모의 부탁”은 다음과 같이 되여 있다.     ...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의 농사군이였지만 원근에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다. 너들도 기억에 있겠지만 지난세기 80년대초반까지 우리집은 힘겹게 살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때까지 우리집은 “먹는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수입이(월급) 낮은데다 너들 삼남매가 한창 자라며 소비만 할 때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밥보다 약을 더 잡숴야 할 상황이고… 살림이 참으로 힘들었다. 나는 17살에 중전학교로 갈때까지(경제난으로 고중은 갈수 없었다.) 팬티란걸 몰랐고 운동화를 한컬레도 만져보지 못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맨발이고 겨울에는 짚신감발이였다. 우리집이 가난하게 산 원인은 집체분배수입이 낮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앓았기 때문이다. (여북하면 생산대보조까지 받았겠는가?! 아이에게 광목바지 하나 해 입히라고.) 중전에 다닐때 나는 털모자, 장갑이며 버선, 양말 같은걸 몰랐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맨발이여도 나는 별문제였으나 체면때문에 좀 큰 운동화(발이 크겠기에.)를 제일 눅은거로 사서 아껴신고 기워신고 한컬레로 3년을, 졸업까지 하였다. 겨울에는 찌께다비(제일 눅은 로동화.), 양말이 없기에 왕바신(솜신)이 좋지만 너무 비쌌다. 손, 발, 귀까지 얼구었는데, 그때는 겨울이 악착스레 추웠다. 1학년 초겨울 반주임 윤순임선생과 동학들의 관심으로 나는 반따이(솜외투.)를 입게 되였는데 그것이 밤이면 포대기에 겹덮혀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3년을 계속 한해에 한번씩 나에게 1등 조학금(보조금) 5원을 주었다!! 나는 방학, 개학때면 집과 학교사이160여리의 산길을 걸어 다녔다.(그중에서130여리는 무서운 무인산중. 어뜩새벽에 떠나서 밤중이면 목적지에 도착 함.) 1학년 첯 방학(겨울방학)때 역전에 가서 석탄부리우는 일을 하자고 하니 너무 어리고 약하다며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산에 가서 버섯, 약초부업을 하고 겨울방학이면 싸리, 든장대부업을 해서 어머니 병치료에 씼다. 나의 필기장은 몽땅 마분지고 쓰는것은 줄곧 연필이였다. 몽당연필이 되면 38보총탄알깍지에 꽂아 썼는데(탄알깍지 구멍이 신통히도 연필굵기와 꼭 맞았다.) 연필이 콩알만 해서 더 어쩔수 없을때까지 썼다. 맨물세수 빈치솔질을 했다. 이렇게 아끼고 아낀 조학금을 어머니 병치료로 드렸다. 나는 당과 인민의 신세로, 선생님과 동창들의 관심으로 150여명 졸업생에서 특등모범생으로 중전을(국가공비임) 원만히 졸업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는해 성 모범공청단원의 영예를 받아 안았다.     나의 아버지는 말그대로 뼈빠지게, 앓지도 못하고, 소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였다. 농한기인 겨울목재부업 벌목공모집이 생산대에 떨어지면 명액이 2,3명씩 내려왔으나 위험하고 힘들고 고생스럽고 벌이는(보수) 않되고… 가려는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는 해마다 혼자서 그 험한곳으로 갔다. 겨울철, 일년농사로 지친 농민들이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가마니깨나 치며 편안히 휴식할때 아버지는 설한풍이 울부짓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산판에서, 소도 힘겨워 헐떡이는 아름들이 목재채벌을(도끼와 톱으로.) 4,5개월씩 하였다. 눈이 녹으면 집재를 (채벌한 원목을 자동차길까지 끌어내리는 일.) 할수없어 정부에서는 동기채벌을 총결하고 민부들을 하산 시켰다. 그때면 또한 일년농사가 시작된 때다. 아버지는 닭곪한마리 잡숫지도 못하고 또 농사일에 달라붙는다. 여름철농한기에는 버섯, 약초를 캐기도 하고 슬슬 일년화목도 하는데, 아버지는 다그쳐 화목을 하고는 떼목타러 갔다. 그것도 정부에서 민부를 모집해 하는 생산대의 부업이다. 몇달 떼목타기를 하고 오면 또 부지깽이도 뛰는 가을철이다.      생산대수입분배는 한공(10점)에 2, 30전, 어거리대풍이 들면 7,80전이 될때도 있었는데, 그런때가 30년 집체화시절에 우리생산대에서는 서너번인가? 있은것 같다. 어느때 내가 손꼽아 헤여보니 나의 아버지가 8급기술자수평으로 할줄 아는 일이 무려 28가지나 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출세”하지 못하고 심심산골벽촌에서 농사일을 한뉘 하였다. 이주자유가 없는것도 있지만 아버지는 고향과 공산당이 준 땅을 너무도 소중히 고마워 했고 집체화에 충실했고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밥은 주는대로 먹고 일은 굽석굽석 충성스레 하였다. 개인부업을 할 재간은 가득했으나 집체에서 반대하는 행위기에, 그리고 우리 그 고장은 장마당이란 말도 모르는 산골인데다가 사실은 장을 볼 사람도 우리집에는 없었다. 이렇다 보니 우리집은 참으로 구차했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보고 “저 량반은 재간이 없어서 못사는게 아니라 운수가 나빠서 못사는거야.”라고 말했다. 그들도 밥술이나 겨우 먹는 처지로서 그때사람들은 모든것을 팔자소관으로 알았다…     첯머리에 말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였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아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다. 거기서 서너가지만 말하겠다.     어느날, 뒷집 앎닭이 우리집 뒤울안 벼짚단무지에서 알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마침 띄여보고 얼른 가 보니 닭알이 여섯개나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닭알을 바가지에 닮아 나에게 주면서 뒷집에 가져가게 하였다.     어느해, 우리도 어쩌다가 돼지를 중돼지 남짓하게 키웠는데(어머니가 늘 앓다보니 도깨짐승치기가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또 몹시 앓아서 더 키워야 할것을 팔자고 했다. 아침후 아버지는 공소사에 가서 중돼지 남짓해도 수매하겠냐고, 병치료 때문에 팔자고… 공소사주임은 크게 마음을 써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사이 나는 근량이 더 나가라고 남들처럼 돼지죽을 있는대로 다 퍼 주었는데, 돼지는 실컷 먹고 구유에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보고 나를 호되게 책망하셨다. 량심없이 이게 무슨짓이냐고, 생각해서 받겠다는데… 돼지죽을 팔겠는가고…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량심을 속이며 나쁜짓을 하면 어느때고 꼭 그 벌을 받게 된다고, 사람이란 량심을 지킬줄 알아야 한다.”고하였다. 아버지는 구유의 돼지죽을 말끔히 퍼 던지고 오후 보리저녘때가 다 되여서야 배가 홀쭉해진 돼지를 싣고 공소사로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고지식하다고 욕하면서 돼지를 팔지 말라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분해하는 어머니곁에 우두커니 않아서 아무말도 못했다. 속으로 생각해 보니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목재판부업, 떼목타기부업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눈보라 혹은 몸살로 일하지 못한 날들을 적어서 생산대대장에게 주었다. 그날의 공수는 받을수 없다는 량심이 였다. 대장은 너무도 기가 막혀 사람들과 여러번 외우며 감탄했다.     로년에, 마을사람들은 아들 며느리가 모시자고 할때 어서 가라고 권고를 했으나 아버지는 그저 놀면서 어떻게 생산대민식을 타 먹겠냐고 하면서 한해 두해 합가를 미루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생산대에서는 대담하게 부업으로 참외와 수박농사를 하였다. 나의 아버지 재배기술을 믿고 벌린 항목이였다. 아버지기술에 천시 지리가 맞아서 그해 원두는 잘 되였다. 아버지와 다른 한 로인이 원두막을 보았는데, 또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길줄이야?! 그것은 아버지가 그간 두분이 잡순 원두명세서를 생산대에 바친것이다. 대장과 회계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급기야 한바탕 웃어제끼며 그럼, 아바이가 그간 모아서 마련한 원두종자값을 생산대가 지불해야 한다고… 바투 들이대니 나의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아니요. 그건 원두밭을 다루는 사람이 응당 해야 할 일이요. 원, 그런법이 어디 있소?!”라고 하더라고, 대장과 회계는 두고두고 말하였다.     83년도이른봄 개체화가 되면서 아버지는 드디여 우리와 합가를 하였다. 그때 토지와 집체재산을 처리할때 아버지는 정책에 따라 밭한이랑, 소고삐한개도 가지지 못했다.(로동력에서 빠지는 인원이라고. 아버지는 불평한마디 없었다.) 대신, 집과 가장집물을 두루 처리하여 생산대 빚을 갚았는데 그러고도 233원의 빚을 안고 왔다. 그때는 우리도 빚을 달고 사는 형편이였으나 아버지가 생산대에 너무도 미안해 하기에 나는 돈을 꾸어 생산대 빚을 갚았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물질유산은 한푼도 남긴것이 없다. 그러나 보귀한 정신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사람이란 꼭 자기의 량심을 지킬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항상 명기하며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다. 긴세월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직, 간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여러번 감격하며 더욱 더 가슴속에 아로 새기게 되였다. 그중에서 한가지만 말하겠다.     87년도 봄, 우리병원에서는 서기와 회계, 출납이 주동이 되여서 3산업을 대대적으로 벌렸는데 그때 나는 견결히 반대를 하였다. 나는 병원의 업무수평, 복무질량 제고를 억세게 틀어쥐고 거기에 경제적 수단을 침투시켜야 하며 경영관리를 빈틈없이 잘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독불장군, 중구난방으로 지고 말았다. 얼마후의 원장선거에서 나는 나떨어지고 부원장이 올랐는데, 그는 서기네 편이였다. 음식점, 다방, 사우나, 안마원, 노래방, 려관, 약방을 병원구역내외에 여러개를 개업했는데, 엉뚱하게도 병원전체직원들에게 고객을 끌어오면 수입의 얼마를 장려한다고까지 호소 하였다. 서기, 원장, 회계, 출납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의사, 호사… 말그대로 병원의 전체직원이 총 궐기한 형국이였다. 지어는 직일서는 사람까지도 강위에서 빠져나가 고객안배를 하고는 느물적 돌아오는 현상도 있었다. 얼마 안 되여 병원은  군중들의 말밥에 오르기 시작했고 사회여론의 질타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한명의 고객안배도 하지 않았고 착실히 치료사업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3산업수입으로 주는 장금을 일률로 받지 않았다. 의료사업쪽으로는 수입지표를 완성한후 초과수익에서 장금이 있었는데, 나는 환자의 기름을 한방울도 짜지 않았고 항상 환자의 주머니를 근심해 주었다. 하여 수입지표를 완성하지 못했고 따라서 장금이 있을수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2년9개월이 지나 병원에서는 집체부정부패와 탐오집단이 적발사출 되면서 대 지진을 겪었다. 나의 똑바른 량심과 명석한 량심은 시와 성의 모범당원, 로동모범의 영예를 안아 왔고 서기 겸 원장이라는 직책을 담당하게 했다. 내가 일정한 발전을 하게 된것은 당의 교시를 명심하고 정, 반면 학습을 중시하고 아버지가 준 유산을 명기하였기 때문이다.     나와 할아버지는 평범한 백성이다. 앞에서 한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수있는 간단하고 쉬운소행일 뿐이다.     아래에 세계적 위인이신 모주석의 이야기를 두가지만 보충하며… 그것은 너희들에게 깊은 사색과 계발과 교육과 감동을 주겠기 에… 그러면서 “아버지의 부탁”을 마칠가 한다.     1949년3월 모주석은 북경교외 향산 쌍청별장에서 민주당파책임자, 각계대표, 사회저명인사들을 련일 접견하게 되였다. 첯번째 귀빈으로 장란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모주석은 위사장 리은교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장란선생은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에 적지않은 공헌을 하신분으로, 민주인사중에서 매우 높은 위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로선생을 존중해야 한다. 나를 도와 좀 좋은 옷을 입게 골라 다오.” 리은교는 모주석의 밑천을 전부 뒤지며 반반한 옷을 찿았으나 도무지 찿을수가 없었다. 깁지않은 옷이 한견지도 없었다. 은교는 방법이 없어서 “주석님! 우리는 정말로 가난뱅이수재가 서울로 시험치려 들어온 격입니다. 괜찮은 옷이 한견지도 없군요. 지금 새로 짓자니 시간이 없구요… 한벌 빌어 올가요?” 하고 문의하였다. 모주석은 대답하기를 “기운것도 괞찮다. 반듯하고 깨끗하면 된다. 장로선생은 현달하신 분으로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거다,” 모주석은 기운옷을 입고 장란선생을 접견하셨다 그리고 심균유, 리제심, 곽말약, 진숙통 등 저명인사들을 련일 접견하셨다. 그이는 한평생 근검소박을 좋아 하셨다.     모주석은 만년에 병석에 눕기전까지 줄곧 잡곡밥에 간단한 채소를 잡수셨다. 혁명전쟁년대에는 그럴수도 있었겠다고 인정되지만, 새중국이 성립된 후에도, 조건이 충분히 있는데도, 그이는 계속 잡곡밥에 4채1탕 음식습관이였다. 4채란 채소, 무슨고기채,(그이는 돼지고기를 즐겨했다. 다른고기들은 별로였다.) 매운고추, 썩두부. 1탕이란 사실은 소금물. 그외 일주일에 한, 두번 돼지고기훙쏘뤄를 아주 맛있게 잡수셨다. 은교, 보건의 등 주변사람들이 식사를 다양하게, 영양가 있게 조절하자고 하면 그이는 절대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이는 가끔 혼자말로 “언제면 농민들이 나처럼 먹을수 있을가.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가… 대단한 일이지!”하고 개탄하였다. 그이는 주변사람들과 “우리가 세계에서 사는 목적은 세계를 먹기 위한것이 아니고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동물과의 구별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조금 더 보탠다면, 모주석은 한평생 세수비누, 무슨크림, 향수, 무슨고 따위를 쓰시지 않았다. 그리고 치약을 쓰지 않고 렴가의 치분을 썼다. 은교가 좀 괞찮은 치약을 쓰자고 하니 그이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나는 다른사람들이 좋은치약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생산한 목적은 쓰자는데 있다. 모두 쓰지 않으면 생산이 발전할수도 없고 필요할수도 없다. 그렇긴 하지만 이 치분도 쓸수있다. 인민들의 생활수평이 제고되여 모두 치약을 쓴다면 나도 쓸것이다.” 그이는 평생 산해진미, 연회를 싫어했다. 꼭 참대저가락을 쓰고 상아저가락 금속저가락 등은 쓰지 않았다. 누가 만약 왜서 좋은 저가락을 쓰지 않는가고 물으면 그이는 “너무 비싸서 나는 쓸수없다.”고 대답하였다.     모주석은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으로 추호의 사심도 없이 인민을 위하여 초지일관,  한평생을 다 바쳐 복무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이처럼 위인은 될수 없지만 그이를 따라 배울수는 있는 것이다.                                                                                                        16.7.19
97    독서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630  추천:1  2016-07-15
   수필                                                 독서에 대한 생각                                                                                                              회령     나는 아이때부터 소설책보기를 무척 좋아했다. 서점에는 보고싶은 책들이 그렇게도 많았지만, 욕심나기 그지없었으나 가난뱅이 나로서는 무슨방법이 없었다. 하여 친구들, 책권이나 있다는 집에서 빌어다 보았는데 사실말이지 빌어 볼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 그들도 가난뱅이 학생들이고, 가난한 농사군이다 보니 소설책이 다 무엇인가. 나는 꾀를 써서 점심시간만 되면 서점으로 달려가서 소설책을 살것처럼 내색을하며 보았는데, 여러날 그런수작을 하니 영업원들의 주시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영업원들이 각각이였다. 어떤영업원은 내가 책을 보는것을 묵인해 주고 어떤영업원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눈살이 꼿꼿해서 노려보았는데, 그런날은 아닌보살하고 책구경만 하고는 머슥해서 학교로 돌아왔다. 아쉽고 밸이나서 툴툴거리며. 이렇게 묵인도 받고 미움도 받으면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거이 하루도 빠짐이 없이 동냥독서를 하였다.     내가 책을 마음껏 볼수있게 된것은 연길에서 학교를 다닐때부터다. 그때 학교에는 도서실이 있었는데 이런걸 처음으로 알게된 나로서는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건 교원용도서실로 학생은 출입금지! 어방에도 붙지못하게 하였다. 숱한책을 곁에두고 보지못해 감질이 날 지경인데, 용빼는 수가 있나. 나는 무작정 도서실선생에게 생떼질을 썼다. 하도 여러번 떼질을 쓰니 도서실선생이 가만히 나에게 책을 빌려 주는거 아닌가! 그때 나는 떼가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신통히 맞는다고 감격하며 기쁘기 그지 없었다. 물론 감지덕지해서 도서실청소를 하거나 책이 왔을때 도와주는 등 은공에 갚음을 하느라고 하기도 했는데, 내막을 모르는 반,학년단지부, 학교단위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모범사적으로 재료에 넣으며 나를 연변주모범단원으로 선거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건 빼라고 했지만 리유는 얼버무리며 말하지 못했다. 도서실선생과의 비밀을 말할수 없었기에 견결히 우기지는 못했는데 나는 그것이 늘 량심에 가책이 되였다.     연길에 가서 의학전문을 다닐때부터 나는 문학에도 포부를 품었다. 가난뱅이여서 고중, 대학쪽으로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전문으로 가며 나는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도 무척 서운해 하셨다… 나는 금후 대학함수를 꼭 하겠다고 담임선생과 약속하고 전문으로 갔는데, 의학학습은 힘들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완강히 의대함수준비와(고중과정) 문학자습을 동시에 내밀었다. 후에 의대함수는 끝내 자격을 가질수 없어서 뒤로 미루었다. 반면에 문학학습에 더욱 열중할수 있었는데, 도서실선생은 지금도 잊을수 없고 고맙다. 나는 그때부터 독서에 완전중독이 되였는데 그 중독은 지금도 계속 여전하다.     의학은 인간의 육체를 다루는 과학이고 문학은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학문이다. 두가지가 다 사람에 대한 사업이기에 심오한 지식과 엄숙하고 철저한 책임정신(담당정신), 열정적이고 따뜻한태도가 있어야 한다. 의사도 작가도 손에서 책을 놓을수 없다. 책을 파고 들며 독서를 하고 필기를 하고 일기를 쓰고 때론 습작도 하며 의전시절 나는 무척 부지런 했다. 그때로부터 새벽3시면 기상하고 밤 10시면 자는것이 수십년의 완고한습관으로 되였다. 때로는 아예 밤을 새기도 했다. 입지못하고 먹지못하고 손발을 다 얼구면서도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힘든줄을 몰랐고 책을 안고 자기까지 했다. 나의인생에서 책과 독서는 줄곧 인생의 벗이였고 생활의 향수였고 전진의 등대였고 지식의 보물고였고 지혜와 힘의 원천이였다.     청춘시절 나의 인생관과 포부는 단순하고 명확하고 굳세였다. 나는 훌륭한 의사, 훌륭한 작가로 되여 당과 국가의 은덕에 보답하며 인민을 위하여 더욱 잘 복무하겠다고 맹세를 했다.(의학전문은 국가공비였다. 나는 학기마다 국가보조금을 받기까지 했다.) 나는 왼눈 한번 팔지않고 열심히 학습했다.     30여년이 지난후 우리는 학년급동창만회를 하였는데 세개반에서100여명이 왔었다. 그때, 3반녀자동창이(반 단지부서기) 한잔을 걸치고 “야! 학교때 너를 어떨꿍 했는데… 너, 눈치코치없더라? 몰라그랬니? 뻐기느라 그랬니? 네가 그러길 잘했다. 하마트면 이 함박꽃이 쇠똥무지에 꽃힐뻔 했지. 하하하.” 하고 롱담을 시작한것이 그만 동창들의 화제가 되여 와하하 해해해… 한바탕 떠들썩 했다. 7,8명 녀자동창들이 비슷한 우스개를 퍼부었는데 혹 정말이 있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나는 정말로 련애며 사랑이며 호감이며 느낌이며… 이성감각이 전혀 없었다. 어린탓도 있겠지만 학교규칙이 련애엄금! 퇴학맞은 동학도 있었다. 나는 오직 의학도 문학도 잘 학습하여 인민을 위하여 힘껏 복무하여야겠다는 마음뿐이였다.     의학전문을 졸업한후 나는 사업을 참답게 적극적으로 하며 학습을(주로는 독서) 계속 꾸준히 견지했다. 하여 나의 포부를 일정하게 실현하였다. 물론, 만족하는건 아니고 계속 노력분투하고 있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무지 좋아하고 사랑한다. 나는 졸업후 시간을 내여 서점에 자주 다니며 책을 삿다. 외지에 출장을 가면 책을 갇고 가는것은 물론이고 꼭 그곳 서점을 구경했다. 이렇게 아끼며 모은책이 퍼그나 되는데 이젠 그것이 부담으로 되였다. 지금은 사람들의 “독서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시청각매체수단의 비상한 발전은 그야말로 경탄을 금할수 없다. 내가 두석달이 걸려서 보던 작품을 지금은 하루 이틀이면 흥미진진하게 다 볼수 있다. 이책저책 공구서를 반나절 뒤져야 찿을수 있는 답을 네이버나 빠이두에 물으면 즉각 정답이 나온다. 지금의 청소년은 두말할것도 없고 중, 장년들도 신식에 맛을 들였다. 여가만 있으면 티비에 붙던 사람들이 얼마후에는 컴에 빠져 버렸다. 그런가 했드니 워걸! 지금은 모두가 핸드폰에 중독이 되고 말았다. 마약이 다 뭐냐. 밥도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먹고 부부가 한침대에 누워서도 저마끔 핸드폰을 보다가는 그대로 잔다…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부끄러운 소리지만, 나는 독서절이란 명절이 있는것을 사실은 몰랐었다. 목과 어깨, 팔에 자개가 붙고 발등이 보동보동 부어도 그런줄 모르며 책을 보아서 안해한테 미련하다느니,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 책보는 재미밖에 모른다느니, 도서차용증을 불태워버린다느니… 별이별 공갈협박과 지청구를 다 들어가면서도 열심히 독서를 했지만 독서절이란걸 정말 몰랐다.(안해는 핸드폰중독쟁이.)     며칠전 도서관에 가니(큰거리 옆에있다.) 마당을 차지하고 수많은 책을 벌려 놓았는데 이쪽은 서점이 차지하고 저쪽은 도서관이 차지했다. 그리고 도편, 채색사진판을 쫙 진렬하고 전람을 시켰다. 기자들인지 사진기를 멘 사람이 여럿이고 촬영기, 록상기를 어깨에 둘러멘 사람도 서넛 되는것 같았다. 곱상하게 생긴 아가씨와 오늘 책을 감가해서 파느냐고 물으니 아가씨는 의아해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오늘이 독서절이여서 경축행사를 한다고 하였다. 참! 세상에 명절, 기념일이 많기도 하구나! 다 모아놓으면 반년은 되겠네. 나는 크게 깨도가 되여 머리를 끄덕이며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이 독서절이야 말로 어느분들이 정한것인지 참으로 영명하다고, 제일 좋은 명절이라고 인정했다. 나는 호기심 가득 경축행사를 지켜보았다. 거리로 오가는 사람은 그사이 수백명은 된것 같은데 경축장을 기웃거린 사람은 나까지 겨우 여섯명! 령감 넷 중할머니 한분 젊은각시 한명. 원래는 하루를 한다던 행사가 세시간도 않되여 걷어치웠다. 독서절경축행사에 “참석”하고 집에 온후 나는 깊은 사색을 하게 되였다.     지금, “점점 더 책이 팔리지 않고 신문보는 사람도 없고 독자들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사람들이 돈밖에 모르고 문명소질이 내려가고… 이거 큰일이야! 글 쓸 맥이 나지않아. 멋이 없어. 멋이 없어. 말세야!...” 이렇게 울분을 토하거나 시국을 원망하는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독서절경축행사에 나온 사업일군들도 저들끼리  똑같은 불평을 했다. 책을 보지않고 신문을 보지않고 잡지도 보지않는 사람이 많을뿐만아니라 점점 더 늘어나는것이 현실상황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어데로 갔는가?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더 재미있는 곳에 갔고 가고 있는것이다. 그것인즉 시청각작품이다. 시청각매체에는 독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것은 적지않은 작가들에게 준엄한 도전이다. 작가들은 시청각창작기교를 장악, 활용, 제고, 발전시켜 독자들의 수요를 만족시켜야 할것이다. 책은 필요 없는가? 아니다. 명작의 생명력은 무한하다. 작가들이 피타는 심혈을 바쳐 명작을 창작하면 그것은 서적으로 음향으로 영상물로 독자들이 즐겨찿는 “독서”물로 될것이다. 독서절경축활동은 지금 상황에서 아주 좋은 행사다. 다만, 서적홍보에만 멈추지 말고 좀 더 풍부하게 다채롭게 진행되였으면 좋을것 같다.     나는 또 생각했다. 내가 한평생 아끼고 사랑하던 저 귀중한 책들을 페지로 되게 할수는 절대로 없다. 학교며 도서관이며 마을책방에 보낼것이다.                                                                                                         16.4.28
96    가치관의 기준 댓글:  조회:1878  추천:0  2016-03-05
         4.가치관의 기준     지금은 가치관도 아주 다종다양한것 같다. 그것은 여러가지 기준때문인것 같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동서고금에서 천경지위의 천륜이다. 이건 세살먹은 애로부터 천하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극히 일반적인 상식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 왔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현상이 있을뿐만 아니라 그런 현상을 하늘만큼 춰 올리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다.       매체에서 보면 일부 젊은이들이 산골에서 기여다니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부모는 상관하지 않고 경로당이며 보육원에 찿아가서 자선봉사활동을 하는데 그 친절하기가 입안의 혀보다 몇십배 더 나긋나긋 하다. 사랑의 마음이 어찌도 강렬한지 어떤 젊은이는 아프리카 원시부락까지 날아가서 자선봉사를 한다. 힘겹게 사는 부모가 있으면서, 부모는 관계치 않고 자선봉사에 열중하는것은 리해하기 어렵다. 부모에 대한 부담은 없으나 주변에 보살핌이 수요되는 동포가 상당히 있건만 기어이 외국으로 날아가 봉사를 하는건 무엇때문인지… 련합국에서 파견한 구조대천사도 아니면서. 내역은 어떻든간에 봉사장면을 대서특필, 대방특보 하는 관방매체의 용의는 또한 무엇인가…     선진발달문명국이여서인지 내가 알기 힘든 가치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또 이런것도 있다.     그것은 동물애호, 동물사랑인데 참으로 납득이 않갈때가 많다. 옆에 쓰러진 사람이 있건만 코물이 난다고 호들갑을 떨며 발바리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귀부인, 유한마담, 배고파서 손가락을 빠는 아이들곁에서 고양이에게 고기전을 냠냠 먹여주는 아가씨, 할머니… 어떻게 보는것이 옳은가… 사람에게는 얼음보다 더 랭혹하지만 짐승을 보면 “얘네들, 쟤네들!” 아들이요 딸이요 손자요 하는데, 지어는 짐승과 살겠다는 남녀까지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케 하지만 이것도 동물애호 동물사랑으로 긍정해 주고 제창할바인가…     한때 류행되던 “지구촌”이란 말을 지금은 왜서인지 별로 쓰지 않지만 통신정보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어느구석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세상이 그길로 다 안다. 하다보니 벼라별 일들을 다 접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야말로 “신기”한 것들이 많다. 미국에서 “전국방귀자랑대회”를 굉장하고도 정채롭게 성공리에 거행한후 이곳저곳서방문화권에서 미가슴(녀자)선발대회, 미엉덩이(녀자)선발대회, 미거시기(남 녀복식)선발대회, 미허벅지(녀자)선발대회, 남녀라체혼합군중대회, 남녀라체혼합시위 행진, 남녀라체혼합경축대회… 등등 범국가적행사들이 미국의 대대적인 지도와 지지하에, 솔선수범 이신작칙의 영향하에 거이 해마다 펼쳐지고 있다. 이런행사들에 대한 미국의 지도사상과 학술리론을 보면 그것이 “인성, 인권의 원초적 본성이며 자유, 민주의 요구며 발휘”라는 것이다. 선진문명의 표징이기에 세계가 모두 환영해야 하며 따라배워야 하며 나아가서는 보급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침을 한발이나 흘리면서 인성의 전면적 해방이며 인권자유의 절대적 보장이며 이것이야말로 천당이라고 극찬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물질문명은 발달했으나 정신문명은 극도로 타락했다고 한다.     서양을 포함해서 세상만민의 절대 대부분 사람들은 “미친놈들이 미친지랄을 한다. 이 세상이 제대로 잘 되자면 미국놈들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격한 웨침을 한다.     세상의 모든일에는 진리가 오직 하나뿐이라고 하는데, 기준도 그런거 아닌가… 그 유일정확한 기준으로(진리기도 한.) 하나의 지구촌, 하나의 인류가 되자면 세월은 얼마가 더 흘러야 겠는지… 우리를 보더라도 통일인식, 통일사상, 통일행동이 그렇게 쉬운일이 아님을 알수있지 않은가… 일조에 모든사람이 공산주의사상과 풍격으로 통일된다면, 동일한 가치관을 수립한다면 세상에 무슨 말썽꺼리가 있겠는가?!...     일만년이 오래지만 조석을 다투어야 하리…                                                                                                               16.3.4
95    기준문제 댓글:  조회:1654  추천:0  2016-03-02
       3.기준문제     옳고그름, 좋고나쁨, 길고짧고, 곱고밉고… 이런것들을 판단하는 데는 고금중외 모두 기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준이 애매모호해서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문제(현상)가 많다.     문단에도 기준문제가 있는것 같다.     개혁개방전에는 전쟁영화에서 우리편의 주요인물이 희생될때면 두세가지 만세를 부르거나 전진돌격을 웨쳤다. 혹은 당을 따라 혁명을 잘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절대 다수의 관중들이 감동을 하고 고무추동 교육을 받았었다. 극소수가 가슴에 총을 맞은 사람이 어떻게 구호를 웨치거나 긴 유언을 할수있겠냐고 하며 의문을 품거나 내놓고 떠들기도 했는데 그런사람들은 두뇌가 꽤 까다로운 사람들이지만 성분은 좋았다. 그래서 엄중할 경우에는 단, 당지부대회에서 검사비판교육을 한두번 받았다. 성분이 나쁜 사람이면 큰일난다. 하지만 그때세월 성분이 나쁜사람들은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며 살았기에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좋은말만 하고 나쁜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시절의 모든 문학예술작품은 무산계급의 정치돌출, 사상돌출, 영웅인물돌출이 절대적 주선률이 였다. 사상성과 예술성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하긴 했으나 정치사상이 우선이였다. 작품은 군중을 공산주의 사상과 작풍으로 교육하며 공산주의길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진것 같다.     “계급” “혁명” “만세” “투쟁” 지어는 공산당, 공산주의, 자본주의, 압박착취… 이런말들을 하기 매우 꺼리며 작품에 정치사상성언어가 한마디만 있어도 그 작품은 창비를 맞는다. 그리고 “정치냄새가 난다.” “문화혁명때냄새가 난다.”고 할뿐만 아니라 어용나팔수라느니 어용문인이라느니 앞잡이라느니 하며 지금이 어느때라구!... 원, 참! 한다.     지금이 어느땐가? 사회주의초급계단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공산당의 령도와 무산계급독재를 수호, 견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작가 예술가들은 인민의 인재들이며 당의 인재들이다. 하다면 홍색주선률에 접근하거나 가담해서 자신을 이바지하는 것이 본분이 아닌가… 알쏭달쏭하다.     지금은 시에 "아!", "오!"하는 감탄어가 아주 적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의 순수한 감정을 노래하며 순수한예술 문학본연을 찿았기에 비로서 지금의 좋은시가 나온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오입쟁이를 다룬것을 상품으로 매기는데 인성, 인권의 본질을 밝혔고 문학본연을 찿은 명작, 명품이라고 한다. 시든 소설이든 사람의 사상과 정서에 유익한 점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지금의 평가기준은 무엇이며 문학본연이란 어떤것인가...     작품의 언어사용에도 아기뚱한 점들이 있다.     한국식으로 영어나 불어, 독일어를 사용해서는 아무 거침이 없이 통과가 되지만 한어를, 례하면 위에서 쓴 창비(총살)거나 피주, 쏘폴(구멍가게), 써푸, 땐디, 꽈호, 양뤄촬… 이런 우리가 익숙할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변형된 상용어들을 쓰면 권위어른께서 면색이 퍼러딩딩해 나며 심기가 불편해 하시는데, 그것 참 까리까리 하다.     사투리 사용에서도 한국작가가 사용한것은 “하ㅡ 대단하다니!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 계승하고… 참, 대단해!”하고 무릎을 치고 엉덩이를 들썽거리지만 우리고장 작가들이 감히 그랬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진다. 왜서 이러는지 리치를 알수없다.                                                                                                           16.3.2
94    알쏭달쏭한 문제(2) 댓글:  조회:2204  추천:2  2016-02-26
                  잡문                                           알쏭달쏭한 문제(2)                                                                                                            회령              2.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         앞에서 머리통이요 대갈통이요 하며 무식하고 개명치 못한 악담을 하긴했지만 떠들다 보니께 워낙 주제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여서 급급히 함구를 했다. 세계관, 인생관, 사상, 량심, 도덕, 인격, 원칙, 당성, 진리… 감히 의식형태를 건드리다니… 고양이 새끼가 쇠대가리, 사자대가리를 맡은것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닌가.         하여 이제부터는 중한것은 피하고 경한것으로, 즉 직접 보고 듣고 한 현실적인 알쏭달쏭한 문제를(나로서는 리치를 알수없는것.) 말하고저 한다. 목적은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받자는데 있다.         세상이 다 알다싶히 중국의 제5대의 중앙령도들은 맡은일을 잘하고 있다. 중국이 망하기를 늘 바라고 있는 사람들은 맹랑하고 괘씸하기가 짝이 없겠지만 그들도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수는 없을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바른말 하기를 싫어하고 심술통이 바르지 못한 미국아덜이지만 갸들도 습근평을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잘했는데 앞으로는 어떨가… 더 잘할거다하고 신심을 가지면서도 머리가 기우뚱거려지는, 말하자면 반신반의하는, 신심도 있고 우려도 있다. 그것은 양봉음위, 흥상만하(상급은 법석떠들며 얼렁뚱땅 속여넘기고 하급은 직접  기편한다.) 관관상호(아래위령도가 서로 감싸 줌.)가 여기저기서 보이기 때문이다. 암행어사(독찰조)가 다니는데도 담이 큰 놈들이 여전히 있는데 이놈들의 방해와 교란, 파괴를 간단하게 볼수없다. 그래서 속이 개운치 못하고 우려가 생기는거다.     층층의 령도가 업적을 올리자고 기를 쓰고 초유록처럼 사업하는것은 위인민복무일뿐만아니라 그의 벼슬급도 오를수 있기에 말그대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다. 이것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칭찬할 일이고 대단한 일이고 자타가 기뻐해야할 일이고… 좋은일이다. 그런데, 어떤령도의 업적올리기에는 치사스럽고 더럽고 젖먹던 밸까지 올라오는 문세가락이 들어있다.     여기서 간단한 실례를 한번보자.     한국시골에서 부는 바람을 얻어 먹었는지 우리고장에서도 “문화축제”라는 바람이 불어치는데, 어떤것은 희한하기 짝이없다. 중공18대에서 5위일체건설을 호소했는데 거기에 문화건설이라는 조목이 들어있다. “문화축제”는 문화건설범주에 넣을수 있을뿐만 아니라 중앙과 언행보조를 일치한다는 명분도 세울수 있고(모든면에서 보조를 맞추라고 중앙에서 말한바가 있다.) 업적을 쌓는데도 유익하고 첩경일것 같아서… 하여튼, 여기저기서 문화축제붐이 일어났다. 하지만 남이 한걸 그대로 옮겨다 할수는 없는거고… 여덟신선이 바다를 건널때처럼 저마다 기발한 신통성, 창발성, 능동성, 적극성, 필요성, 절박성, 효익성, 위기감, 책임감, 사명감, 원대한안광, 혁명적포부, 과학발전관, 당성… 일체의 전략전술, 방법과 수단, 열량을 다 발휘해서, (어떤령도는 우격다짐으로) 축제잔치를 결정하고 굉장히 크게 경쟁적으로 펼치는데, 축제가 그야말로 다종다양하다.     변소문화축제, 뱀장어문화축제, 술문화축제, 봄똥문화축제, 개구리, 두꺼비, 거머리, 나비, 개똥불, 한우, 제주도똥돼지, 개, 짚신, 낫가락, 대장간, 도자기, 막걸리, 뻥튀기(옥수수튀기), 각설이… 지어는 미국의 선진문화를 학습하여 방귀문화라는것도 창출하였는데, 미국에서는 정신병자들이 이미 방귀대회(축제)까지 남녀가 용약 달려들어 엄숙하게 거행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하내비를 따라가지 못하여 방귀축제를 하지못한 상황이긴 하다만 하여튼, 한국에서는 무엇에나 다 거창하게 “문화”라는 두글자를 붙이기 좋아하며 거기에 따르는 축제가 말그대로 여기저기산골마을, 버덕마을들에서 비온뒤 똥버섯 돋듯, 눈온뒤 강아지 뛰놀듯 비일비재다.     우리 이 고장 령도들에서도 한국의 “선진문화”를 혜안으로 예민하게 통찰하고 인입접목을 해서 무슨버섯 문화, 무슨배 문화, 무슨꽃 문화,  무슨강 문화, 돌문화, 찰떡문화, 초두부, 감주, 비빔밥, 소싸움, 빙설, 얼음, 여름철, 겨울철… 문화가 버쩍 만발했는데 거기에 따르는 축제도 가지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어떤령도자는 사심이 발작했다.     우리고장 어느부락에서 처음으로 축제잔치를 하는데, 시작부터 말썽이였다. 그것은 1, 2령도가 생각이 달랐든 것이다. 1령도께옵서는 기발한 신통성과 창발성, 필요성, 절박성… 20여가지 “성”에 나중에는 당성까지 내 휘두르며 축제를 주장하고 얼빠수는 필요없다고 일언지하 내놓고 반기를 들었는데, 결국은 거수가결로 축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속심을 말한다면 반대자가 훨씬 더 많았으나 일빠수가 노려보는 관건적 시각에 미움깨 살거있나, 내돈 드는것도 아닌데… 아주 대찬성이기나 한듯 번쩍 혹은 정중하게 다수가 거수를 했든것이다.     얼빠수가 코방귀를 뀐 리유는 다른데서 야단법석 진행한 축제들의 사회효익(초상인자, 경제진흥, 문화건설에서)을 보면 그 휘황한 성과라든지 심원한 의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돈은 백만단위로 날아났다. 할일 없는 귀빈, 수장, 로령도를 모셔오고 외국에 통기하여 엉덩이가수(노래할때 엉덩이를 돌출하게 심하게 률동함. 그래서 군중들이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 듣기좋고 부르기 좋은 이름으로 엉덩이가수라고 함.), 마구 뒹굴고 물구나무를 서며 고함을 지르다가는 도깨비가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사설을 하는(신형의 노래라고 함.) 무슨 예술그룹… 그런걸 품삵을 주고 사오고 축포를 터치고 꽃불을 쏘고 기념품(뢰물)을 주고 연회를하고 먹거리전시, 민속놀음활동도 하고… 하여튼, 며칠을 여가있는 사람들은 심심풀이를 하였다. 축제잔치에서는 예술공연이 주요한 한장면인데 우리네 연원들의 연출은 박수갈채를 받았으나 거금을 주고 사온 외국연원들의 연출은 박수 한짝 없었다. 소학교아인지 중학교아인지 한 녀자애 둘이 새된소리를 두번 질렀을 뿐이다.     이렇게 시작한 축제를 이 부락에서는 련8ㅡ9년을 힘차게 하고 이젠 걷어치웠다. 번마다 축제뒤끝에는 우리부락을 세계에 알렸다는둥 민족문화를 고양했다는둥 정신문명건설을 했다는둥… 총결에서 라렬하는 만질수도 없고 볼수도 없는 성과는 수두룩 했으나 원래 없는 재정에 뭉테기 지출만 뚜렸했다. 유형의 성과가 전혀 없은건 아니다. 일빠수동지가 티비화면에 몇초를 생광스럽게 면목을 낸바가 있고 무슨지면에 사진과 함께 인터뷰내용이 나온것이, 그리고 그간 일빠수 두사람이 상급으로 조동을 했는데 하나는 반급이 오르며 조동하고 하나는 한급을 올리 조동을 한것이 휘황한 성과였다.     첯번째 축제가 있은후 군중들은 부질없는 짓을 한다며 돈이 아깝다고 하였다. 하지만, 일빠수동지들은 만난과 교란을 맞받아 용왕매진 나가며 짓부시고 해마다 두세번씩 축제잔치를 강행하였다. 결국은 “가성고처에 원성고라.” 돈만 팔아먹고 개뿔도 쓸데없는 축제를 걷어치우라는 민성질타와 나중에는 상급의 엄명일갈에 축제놀음이 사라졌다. 그간, 돈은 몇백만을 날렸는지, 어느놈이 얼마를 먹었는지… 뒷소문은 무성해도 일절 비밀에 붙혀 정작 말썽을 이르킨건 하나도  없었다. 축제는 창위집체결정이였고 학비를 지불한것은 정정당당, 잘한일이라는 것이였다. 성적앞에서는 일빠수가 돌출해 지고 실책, 오책, 손실, 실패… 이런것들 앞에서는 창위가 집체로 나섯는데 다들 무사했다. 했다는 심각한 검사란 “학비를 냈다.” 하며 히쭉 웃는것이고 두어번 궁둥이를 터니 깨끗히 끝났다.     근년에 기층에서 정풍의 일환으로 “생활회의”라는 활동을 하는데, 이곳 군중들은 생활회의가 어떻게 되나 지켜 보았다. 군중들이 보건대는 몇년 진행한 축제놀음 한가지만에서도 서넛은 무사할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일빠수를 비롯해서 창위전원이 히쭉웃고 무사통과! 생활회의는 끝났다. 축제덕을 입어서 한급을 춰 상급에 간 전임 일빠수가 파견을 받고 이곳 생활회의 감독, 지도를 내려와 친히 참석했는데 그의 평가결론은 다음과 같다.     “… 에ㅡ 이번 본부락지도부의 생활회의는 상급의 지시정신에 완전히 부합된다. 준비가 충분히 잘 되였고 얼굴을 붉히고 땀을 흘리고 목욕을 거뿐히 하고 새옷을 입고 경쾌한 심신으로 사업에 뛰여들게 되였다. 단결의 대회 승리의 대회다…”     군중들의 평론은 좀 달랐다. 중구난방 떠들어 대는 그들의 공론을 대충 귀납하면 다음과 같다.     “… 그게 관관상호라는 게오. 양봉음위 흥상만하 부정부패 그런짓거리를 같이 해 먹은것도 있고 해 먹도록 도와준것도 있고… 서로 걸리니까… 하이야며 별장이며 벼슬팔아 모은돈… 다 무사하게 새겼군! 그간 이곳아덜이 해 놓은게 뭐이요? 상급에서 회의를 하면 따라서 회의를 하구 상급에서 시찰을 오면 따라서 댕기구 그리구 축제를 하느라 북쩍거리구 또 다른게 뭐이 있수? 없지?... 어느촌에서 갑자기 홍수피해를 당했을때 한눔이나 대갈짝을 내 밀었소?... 흥! 생활회의가 뭐, 단결의 대회, 승리의 대회라구?... 빌어먹을! 쯔쯔쯔. 엑!퉤!”                                                                                  16.2.26
93    알쏭달쏭한 문제(1) 댓글:  조회:1813  추천:2  2016-02-24
     잡문                                                      알쏭달쏭한 문제(1)                                                                                                                   회령         1.사람의 머리통문제         천지간 우주간 수수께끼가 많지만 많이 해명되였고 계속 해명되고 있다. 해가 동쪽에서 솟아 서쪽으로 굴러가 퉁! 떨어진다던 문제(수수께끼)도 해명을 보았고 미친수캐가 달을 짓씹어 먹었다든 문제도 언녕 해명되였다. 상아아가씨가 옥토끼를 데리고 절구를 찧는다는 문제는 해명중에 있다. 말과 당나귀가 노새와 버새를 만들어낸(창조한) 오묘한 문제도 해명을 보았고 화성에 물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거이 해명이 되는 모양이다. 사람이 250년까지 살수 있다고 이전에 어떤정신병자가 기염을 토하며 대성을 질러 웃긴바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무슨 백세시대라는가 하면서 건강장수의 비밀, 비결이 륙속 밝혀지는 중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약아빠지면서 보는 눈 생각하는 눈 분석, 판단하는 눈 그리고 실천행위가 고속으로 발달해서 말하자면 과학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해서, 계속 발전을 하고 있어서 수수께끼는 다 해명을 볼것이다. 천당이며 극락세계며… 다 밝혀질 것이다. 시간문제일뿐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리론상에서 해명을 보았고 지금 건설이 한창 진행중이다.     그런데, 요상한것이 사람의 머리통문제다. 인간세상 수천년래 동서고금을 두루 보면 사람이 사람문제를 해결못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주를 탐색하고 사막을 다스리고 대기온난화를 조정하고 러씨아가스를 도관으로 한국에 가져가고 장강의 물을 북경, 천진에 끌어오고… 이런 어마어마한 어기찬 일은 하면서도 사람이 제머리통 하나를 다스리지 못하여… 세상이 시끌벅적 여전히 계속 복잡하다. 온전한, 바로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건 아니다. 말썽은 제대로 되지못한 인간의대갈통 때문에 생기는데, 그것이 줄곧 인간사회의 미해결문제로 되고 있다. 멀리는 말고 근, 현대만 본다면 1,2차세계대전은 누구의 머리통 때문에 일어났는가? 38선은 어느놈 때문에 생겨나고 조선전쟁은 어느애들 때문에 터져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원통케 하고 또 세인들앞에서 부끄럽게 하는가! 주영강, 서재후, 령계획, 소영동무… 그느마들 먹을게 없었는가 잠자리 불편했는가… 왜서 개골망신, 패가망신을 했는가… 아무리 따져봐도 그 머리통에 문제가 생긴거다. 주은래, 주용기… 이런 이들은 왜 오늘도 세계적 존경을 받는가?! 머리문제다. 머리통에는 정신이 있는데 그속에 의식이 있고 의식속에는 지식, 사유, 감각, 사상, 감정, 량심, 도덕, 습관… 이런것이 들어 있다. 사람은 머리통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세상의 모든일은 머리통에 달렸다.     머리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공자님을 모셔와도 쓸데없고 그리스도, 석가모니, 나무아미타불, 마르쿠스, 레닌, 모택동… 고금중외 철학가, 사상가, 정치가, 종교가, 문학가, 교육가, 의학가, 생물학가… 그어느 성현을 모셔와도 쓸데없다.     인간은 오늘까지도 사람의 머리통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지 못했고 태평성대를 만들어 보지 못했다. 뒤죽박죽 치고박고 막고뚫고 잡고뛰고 양봉음위… 예나 지금이나 북새통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대갈통에 문제가 있는 인간나부랭이는 부단히 잡아버려도 부단히 생겨나니… 도대체가 생존바탕과 환경에 문제가 생겼나 염색체 유전인자에 귀신이 붙었나…                                                                                                                      16.2.24
92    개관정론 댓글:  조회:1841  추천:0  2015-10-12
     수필                                                                                                  개관정론                                                                                                               회령      이런글을 자주 써서 빈축을 사며 타매를 받긴하지만, 아는것과 재간이 그뿐이다보니 궁냥이 트지못해서 또 이런글을 쓰게 되였다. 누가 쓰라고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그 무슨 사명감 같은것이 북받쳐서 자꾸 쓰기는 쓰는데, 나로서도 답답할때가 있다. 순전한 실화도 아니고 그런가하면 소설, 수필, 잡문도 아니고… 글은 글이지만 어느 문체에 집어넣었으면 좋겠는지(합당하겠는지) 가름할수 없는 범벅잡탕 이런글 때문에 나는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그중 비슷할것 같은 모자를 씌우고 천방지축 써 갈기는데, 문체는 어떻게 되여먹었든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구 알맹이가 있으면 나는 만족이다. 걸작이요 명작이요 하는데는 꿈도 꾸지않고 아예 견줘본 일도 없지만(워낙 어방사촌도 않되는걸 안다.) 알맹이가 있는 글을 씼다고 생각이 되면 참으로 무척 기쁘다. 지금 쓰는 이 글에도 될수록이면 깸알같은 알맹이를 몇개 넣어보자고 고심을 한다만, 모든것은 보는이들의 입에 달렸다. 내가 말하는 알맹이란 사회적 가치(효과) 를 말한다.     일전에 우리부부는 잔치집에 갔었는데 신부가 안해의 11촌조카라 했다. 그러니까 신부의 아버지가 안해의 10촌동생인데 나는 10촌처남이 그날 초면이였다.     나는 재수없게도 독신이다보니 늘 혈육을 부러워한다. 원래는 친가 외가가 모두 조선남북 에 많았다고 했는데 조선전쟁통에 몽땅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이젠 반세기도 지나서 나는 혈육찿는 일을 포기했다.     대신 처가마을은 대가문인데 5촌까지만 꼽는다해도 100명은 거이된다. 그런데, 지내보니까 집안이 많아선지 패가 많았다. 말하자면 친해서 거래를 하는 집이 있고 개, 닭울음소리는 들려도 전혀 거래가 없는 친형제, 4,5촌들도 있었다. 그 원인을 대강 들어보니 계급성분때문에, 계급투쟁을 깡으로 하던 년대의 투쟁사건때문에, 리해관계때문에, 감정알륵때문에… 두루두루 그러루한 과거지사때문인데 그매듭을 풀지못하고 있었다. 나의 가시집도 한마을 어느 사촌네와 쓰겁두루하게 지내는것 같았는데 한집은 땔나무를 도적질해간 비행때문이고(찿았지만) 다른한집은 두부를 앗거나 어쩌다 순대를 해 먹을때 타남은 청해들여 먹이면서도 사촌형님은 문접관도 없은것이 그런일들이 괘씸했고 두고두고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든 것이다. 나는 문객이다보니 “파쟁”에 들지않고 중립을 지키며 팔방미인이 되기에 주의를 하였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우,결함이 있는건데 위법인것은 법지법대로 처리하면 될거고 아닌것은, 말하자면 인내모순은 틀린것을 고치면 좋고 고치지 못해도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니까 너그럽게 대해주며 우호적으로(友善)지내는것이 옳다고 나는 인정하기에 누구와도 하하허허 비교적 잘 지낸다. 그리고 가문, 문중화목에서 녀인들의 작용이 상당한데 워낙 정직하고 어진 안해는 부창부수 나를 잘 따라 주었다. 하여 누구네와도 우호적이고 위신이 있어 군일이면 청하는 처가친척이 많았다. 청첩을 받으면 나는 중대사안으로 정중히 꼭꼭 참석을 했는데, 친척들은 5촌이상 군일에는 빠지기도 하라면서, 부담도 부담이겠지만 수고가 너무 많다고 하였다.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 친척간 타남과도 인정은 엎픔갚품 오고 감이다. 우리부부의 생일에는 청하지 않았는데도 오는 친척이 많다. 안해가 감탄을 하면 나는 내가 적덕을 잘해서 그런거라고 하며 우스개를 한다.     시시껄렁 범벅잡탕소리는 이만하고, 그날 처11촌조카의 잔치이야기를 집중해서 해보자.     손님격관(초대, 대접)은 한상에 10명씩 둘러앉게 되였는데 우리부부가 앉은 상에는 열넷이나 앉았다. 석상에는 아즈바이 아재도 있고 처남 조카 손자벌도 있었다. 한자리에 앉지못한 친척들은 번갈아 와서 술을 부어주었는데 까놓고 말한다면 우리부부를 보고 그런것이다. 저쪽상에 앉았던 6촌처남 되는 사람이 술을 붓고 간후 우리상의 천만장자 조카가 엉뚱한 말을 끄집어 냈다. 잠간, 여기서 이 조카를 간단히 소개를 한다면 그는 환갑나이가 갓 넘었는데 공장을 세개나 운전하는 기업가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천만장자로서 처가일편에서는 제일 대단한 부자다. 한마디로 찍어 말한다면 이 조카는(신통하게 안조카도 같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문중에서 자기가 제일이라고 어깨와 목대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지만 일가친척들은 될수록이면 그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말그대로 중판친리(众叛亲离)상태다. 그는 그 누구와도, 지어는 부모형제간에도 일체처사를 계산적으로 하는데 일전이라도 리득을 보아야 심리평형을 찿는 사람으로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선행위같은건 꿈도 꾸지않을뿐만아니라 종래로 누구에게 공술 한잔 먹인일이 없다. 형제간에 돈을 좀 뀌워줘도 꼭 고리자를 받는다. 공장기지땅을 살때, 세금납부, 공인대우…그러루한 일들에서 어떻게 처사를 했고 어떻게 부자가 되였는가… 그는 뒷말을 많이 듣는 사람이다.     “쟈네애비가 참 고약한 사람이였소. 동네허물은 크던작던 다 쟈네애비가 향에 패출소에 꼬장을 해서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했던게요. 한번은, 그때 대대단 서기땐데 마을청년들을 데리고 논김을 매다가 논두럭을 보니 물고기가 어찌두 많은지 그래서 서넛을 시켜서 고기를 잡게 했지. 고기를 두소래나 잡았는데 저녁에 술까지 떠다가 모두 잘먹었지. 그런데, 처음에는 나두 몰랐는데 아이글쎄! 쟈애비가 향에 꼬장을 해서 내가 대대단지부, 민병련대회에서 검사를 하고 비판을 받았소. 련속 이틀밤이나. 그래서 이티(2년)나 입당두 못하구.”      “세치네천렵을 할때 아바이를 청하지 않았겠구만.”     “무슨소릴! 대대지부위원에 치보주임이구 대무위원인데… 두세번 아이들을 보내두 오지않더구만. 그래서 내가 잘보일겸 세치네국을 서너사발 소래에 담아들고 갔지. 그런데 웬걸! 썩 가져가라며 다시는 그런짓거리를 하지말라며 반나절 정치과를 하지 않겠소?!”     “그래, 되들고 왔던가.”     “어찌겠소. 호령이 추상같은데. 그때일을 생각하면 지금두 젖먹던 밸이 올라오우, 어찌두 난처하구 억이 막히던지.허, 그것 참.”     “당신들은 잘 모를게오만 그 형님이(4촌) 토개때부터 나서서 공작을 했는데 후에 입당을 하고… 조금이라도 이건아니다! 라고 생각되는 일은 한가지두 하지 않았소. 사람이 그렇게두 꼿꼿하구 고정하기라구야. 참, 꼿꼿했지.”     고중에서 수학선생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나의 큰처남이 한 말이다.     “꼿꼿해두 너무 꼿꼿했지. 네네(누구네) 아이가 옥쉬대를 꺽어 먹거나 두어이삭 뜯으면 이튿날로 핵교에 꼬장하고 바쁜일이 있어서 누가 몇푼도 않되는 조선밀수를 좀해도 그날로 패출소에 꼬장하고 누가 바람을 좀 피워도, 거치럭손질을 좀 해도 다 꼬장한단 말이우. 뒤에서 개라니, 특무라니… 모두들 얼매나 욕을 했수. 흥!”     “욕하는 사람이야 있었겠지. 하지만 진짜루 미워하구 욕한사람은 극상해야 서넛일게우. 이젠 다 옛말이오만. 내가 그 형님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적이 있소.. 세치네천렵건두 그렇구 소구랑거리는 애들 일두 그렇구 밀수, 바람당사자들은 후에 류치장신세까지 졌지만, 그때는 초발이였는데 내가 말했지. 형님! 거, 웬간한 일은 슬쩍 두어마디 말해주고 우에다 꼬장은 하지 않는게 좋지 않수? 형님이 뭐랬는지 당신네들 알만하겠소?”     큰처남은 좌중을 둘러보다가 이윽해서야 하던말을 계속했다.     “형님은 정색해서 말하기를 동생! 내 속심소원을 좀 말하겠소. 동생도 잘 아는거지만 우리는 공산당덕분에 번신을 했소. 나는 당원이구 당에서 맡겨준 치보주임이요. 내가 당에서 하라는 대로, 령도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하오 하지말아야 하오?... 바늘도둑이 쇠도둑이 된다구 나쁜일은 나쁜버릇은 초발에 단단히 잡져야 하오. 나는 우리마을이 화목하고 편안하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좋은사람이였으면 하고… 그게 제일 소원이요. 나라의 주인이라며 집으루 말하면 호주처럼 해야하는게 아니우? 나는 더 할말이 없었소. 사람이야 정말로 바른사람이지…”     “와느루(진짜로 정말로) 모범인물이구만! 그래 모범두 되구 후에 잘 됐겠지?”     “무슨. 다른건 별게없구 앓아누울때꺼정 열몇해를 그냥 대대치보를 했지. 좌우간! 우리 동네와 대대가 치보모범은 몇번 되였어.”     큰처남은 왜서인지 처연한 기색으로 대꾸하고는 술을 들었다.     “지금은 그런사람이 적어. 모두 치보주임형님 같아야 하는데...”     큰처남의 말에 좌중에서는 여럿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나도 깊히 동감이였다.     비행을 보고도, 선색 혹은 진상을 알면서도 함구무언하는 사람이 적지않다. 나의 리익만 건드리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 여럿이 먹을 찰떡을 한두놈이 다 처먹어도, 망당, 망군, 망국이 되여도 당신과 상관이 없는가?!...     한뉘 농사군이던 당신이 서기, 촌장이 되더니 시가지에 집을 사고 하이야를 사고 아들은 미국에 딸은 영국에 류학이랍시고 로무를 보내고 당신은 무슨 백골난망의 대공을, 대은대덕을 입힌바가 있어서 300만원짜리 별장을 “하사”받았는가. 자네는 쬐꼬만 진 간부던것이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일약 지구급 령도반즈에 발탁이 되였던가. 산기슭의 별장은 누가누가 무슨돈으로 지은건가. 당신은 어떻게 천만장자가 되였는가. 당신의 첩살림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그 누구의 비행이든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꼬장”바람이 아직은 약할뿐…     당의일에 나라일에 등한해서 되겠는가… 나같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라의 주인이 아닌가… 나는 힘차게 건배를 하였다.                                                                                                             15. 9
91    세 녀인의 한 댓글:  조회:2786  추천:2  2015-09-16
        실화                                         세 녀인의 한                                                                                                       회령         장손을 위하여           구순이 래일모레인 안씨할머니는 배추줄거리처럼 하야말쑥하고 갸냘프지만 정신만은 명석하고 정정하다. 그는 비록 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부부의 생활ㅡ 운우지락은 모두꼽아 열번도 되지 않는다. 로인은 지금 아들집에서 반년, 딸집에서 반년씩 아주 평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한생을 회고하면 떠오르는 슬픔과 유감을 잊을수 없다. 그것은 안씨할머니의 평생한으로 남아있다. 안씨할머니는 자기는 한평생을 녀자답게도 살지못했고 녀성답게도 살지못했다고 인정하면서 자기의 사주팔자는 더럽게도 되였다고 탄식하군 한다. 자기는 녀인도 아니라고 한다.       안씨할머니는 조선 무산군 어느 두메산골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여나 자랐다. 그는 서당이니 학교같은건 이름도 모르고 자랐으나 부모로부터 녀아의 행실은 참답게 배우며 성장했다. 인물곱고 일잘하고 얌전한 안씨는 17살 되던해 두만강 건너 벌방마을로 시집을 갔다. 시집은 마을에서 제일 잘사는 집으로 장씨문중의 종가였는데, 안씨는 맏며느리로 되였다. 신랑은 안씨보다 4살위였다. 신랑은 배들배들 약골인데다 고자였다. 이점에 대하여 그의 부모들은 대개 짐작은 있었으나 보약을 꾸준히 쓰면 되리라 기대를 하면서 장가를 들이고 사돈집을 이웃마을로 이사시키는 등 배려를 하였다. 안씨 본가에서는 딸의 신세로 번신을 했다고 흐믓해 하였다. 시집에서는 고아가 된 사촌시동생을 자래우고 있었는데 그는 안씨보다 세살이 어렸다.     잔치를 해서 6년철이 되였지만 며느리가 전혀 태기가 없자 시부모들은 완전히 절망을 했다. 그들은 아들대에 와서 장씨문중의 대를 끊어 놓았다고 여간만 안타까워 하지 않았다. 문중사람들도 차츰 아니꼬와하는 눈치로 쓴외보듯 하기 시작했다. 결혼 6년이 지나고 7년철이 되는 이듬해 가을 안씨에게는 태기가 생겼다! 어찌된 기적인가?! 문중에서는 누구라 없이 기쁨에 벙실거리며 그것은 철모르는 아이들 까지도 아들며느리에게 꾸준히 보약을 쓰고 산천당과 절간에 치성과 불공을 잘한 덕이라고 하였다. 장씨네들은 “그러면 그렇겠지! 하늘이 우리문중을 굽어 살피신다네!” 하며 목대가 꿋꿋해 하였다. 그러나 종가집 네식솔은 항상 파리를 삼킨 기분이였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더없이 환한 얼굴들이 였다.     긴말을 짧게 한다면 그 내역은 이렇다.     엉큼한 시부모들이 치사스럽고 비루한 간계를 은근히 써왔든 것이다. 그들은 아들의 무능을 언녕 알면서도 열심히 보약을 쓴다 치성을 드린다 하면서 성심성의를 보이는 한편 자래우는 조카에게 눈독을 박았다. 조카가 성장하며 속옷에서 몽설이 나타나자 그들은 의식적으로 조카와 며느리에게 은밀한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동생의 아들로 종가대를 잇는것은 조상전례 예로부터 있는 정정당당한 법이라느니 미덕이라느니 하면서 아들며느리와 조카에게 은근슬쩍 귀띰을 주기도 하였다. 드디여 절호의 기회가 왔다. 먼곳에 있는 문중친척집에서 회갑찬치가 있게 되였는데 시부모들은 아들을 데리고 떠나면서 며느리와 조카는 집을 보라고 하였다. 4,5일 잘 걸릴것이니 소여물 돼지죽… 명심하며 집을 잘 보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그들은 나들이를 갔다. 그들이 간후 두청춘은 누가 먼저고 누가 주동이였다고 할것도 없이 파겁을 하고 한자리에 들었다. 안씨도 시동생도 인생에서 처음 겪는 황홀경이 였다… 하지만, 욕정과 유혹, 미련은 감질이 날 지경으로 강렬했으나 그들은 량심의 가책으로 심리부담도 금할수 없었다. 안씨는 3종4덕, 7거지악이라는 거울앞에서 자책을 금할수 없었고 동생은 천륜과 배은망덕이라는 거울앞에서 자책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더는 그런일을 하지말자고 약속하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그 몇번에서 수태가 될줄이야… 천지조화였는가! 지리 인화 시간이 그렇게 신통히도 딱! 맞아 떨어질줄이야. 이듬해 안씨는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다. 며느리가 잉태를 하자 시부모들은 부랴부랴 조카를 장가들이고 먼곳에 이사를 시켰다.     손주는 자라면서 용모는 말할것도 없고 말씨며 행동거지가 천연히 저의 5촌숙을 닮아갔다. 문중에서도 마을에서도 쉬쉬 키득키득 안씨를 손가락질 하고 소문은 가근방에 널리 퍼졌다. 어떤 사람들은 “얘가 삼촌을 쏙 빼닮았네!”, “문중을 위하여 대공을 세웠네.”하며 말했는데 이건 놀리는건지 비웃는건지 아니면 몰라서 희한함에 경탄을 하는건지… 알수없는 웃는낯으로 빤히 쳐다보며 말할때면 안씨는 난처하기가 짝이 없었다. 후론은 인차 “시동생과 살아 아이를 낳았다.”는것으로 되여버리고 그것은 등뒤에 난 혹처럼 한평생 안씨에게 붙어다니며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였다…     해방이 된후 안씨네는 부농으로 청산을 맞고 거지가 되였다. 그후 몇년간에 시부모들은 울화증으로 세상을 뜨고 초급사, 고급사 합작화덕에 안씨네는 죽물이 나마 먹고 살수 있었다. 고자긴 해도 눈치는 멀쩡한 남편은 항상 오만상을 찌프리고 할금할금 하며 술에 곯아 떨어졌다. 그는 아무일도 하지 못했다. 초급사때는 그래도 회계일을 보았으나 고급사가 되면서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는 페인이나 다름없었다. 안씨는 악을 쓰고 일을 했지만 극빈호의 멍에를 벗을수가 없었다. 고달픈 생할은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었지만 안씨에게서 제일 어려운 것은 땔나무를 하는 것이였다. 갸냘픈 녀자의 몸으로 아무리 적게 땐다고 하여도 백여단의 나무를 해야하는 일도 힘든 일이였지만 발구나 수레로 나무를 실어오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였다. 나무수레를 번지여 울면서 소만 끌고 돌아올때도 자주 있었다. 부농이다 보니 문중에서는 들여다 보는 사람도 없었다. 때로는 방조해 주겠다며 히죽거리는 사내들이 있기도 했으나 안씨는 질겁하며 거절했다. 슬금슬금 산으로 따라오는 사내들이 보이면 안씨는 가다가도 돌아섯다. 없친데 덮친격으로 뒷소리를 더는 만들수 없었다. 남자들 때문에 그는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수 없었고 그것도 그에게는 상당히 크고 중대한 부담이였다.     방금 고급사가 된후 마을에는 한쪽다리가 없는 잔페군인이 돌아왔다. 그는 이마을에서 살던 고아였는데 광복이 된후 참군을 해서 해방전쟁, 항미원조까지 갔는데 다리를 상해서 포로가 되고 포로교환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가 오자 생산대에서는 땔나무를 담당해 주는 조건으로 그를 안씨네 집에 주숙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사에서 사양원일을 하게 하였다. 안씨는 싫었으나 부농이다 보니 생산대 지시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어느 겨울날 밤, 안씨는 잔페사내에게 강간을 당했다. 30대중반인 두사람의 간통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그러나 안씨는 인차 정신을 펀뜩 차렸다. 이러다가 임신을 하는 날에는 죽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무슨낯으로 세상을 더 산단 말인가… 안씨는 정치대장을 찿아 죽어도 손님치기를 못하겠다고 완강히 떼질을 썼다. 리유는 사내가 자꾸 치근거린다는 것이였다. 정치대장과 치보주임이 조사할때 사내는 안씨와의 공수동맹대로 치근댔다고 승인을 하고, 포로병놈이 그따위 너절한 짓을 하느냐고 눈알이 빠지게 줄욕을 먹었다. 류망죄로 감옥에 가지 않은것이 너그러운 관대처리인줄 알라고, 사내는 우사에서 자며 자취를 하게 되였다. 그러나 안씨의 팔자에 무슨액이 씌였는가! 그는 덜컥 임신을 한것이다. 이듬해 안씨는 딸을 낳았다. 딸은 특등잔페군인(그때는 포로병놈)의 금붕어눈을 똑 떼여 닮아 안씨는 “원래부터 더러운 화냥년”이라는 치욕의 혹을 영원히 짊어지게 되였다.      눈물의 헌신(1)     인순이는 마을에서 첯손가락에 꼽는 일등 처녀였다. 인물 곱고 마음씨 곱고 명랑하고 쾌활한 그는 일솜씨도 잽싸고 알뜰하였다. 그는 스무살에 생산대장 창걸이와 결혼을 하였다. 창걸이는 듬직하고 직심인데 훤칠하고 잘생긴 준수한 총각이였다. 사람들은 그들 둘을 놓고 천생배필이라고 곧잘 우스개를 하였는데 그것이 정말로 되였다. 잔치한 이듬해 인순이는 귀여운 아들을 낳았다. 인순이와 창걸이는 행복에 겨워 매일 싱글벙글 걸차게 일했다. 그들은 앞날을 생각할때마다 무궁한 힘이 솟구쳤다. 돼지를 두마리나 키우며 개와 닭도 키웠는데 뜨락은 농가의 생기가 넘쳐났고 집안은 기름기가 반즈르르 포근하고 아담했다.     이의 돌생일때다. 아이생일술에 기분이 잔뜩 좋아진 시형 창일이는 아이를 안고 노래하며 춤을 추다가 그만 아이를 방바닥에 퉁! 떨구었다. 아이는 당장 기절을 하고 경풍을 일구었다. 인순이부부와 시형네는 아이를 안고 공사병원으로 써푸를 달리였다. 그때까지 아이는 죽지 않았지만 새파란 얼굴에 거품을 물고 깜작깜짝 놀라면서 바들바들 떨었는데 울지는 못했다. 의사가 구급처리를 한후 경풍이 멎으면서 아이는 그대로 잠들었다. 그후, 아이는 간질병발작을 하며 성장했는데 빠짐이 없이 츨츨한 미청년으로 되였다. 사람들은 모두 창걸이네 아들을 두고 너무도 아까워 혀를 끌끌찿다. 그리고 술만 먹으면 흥분해서 날뛰는 창일이를 죽일놈 살릴놈 원망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간질병발작을 하는 아들과 함께 인순이네 부부는 암담한 나날을 보내며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들이 사는 유일한 목적과 희망은 오직 아들의 병을 치료하는것 뿐이였다. 그들은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찿아 다니고 좋다는 방문은 다 써 보았다. 지어는 선무당을 데려다 굿도하고 점쟁이 방토도 숱해 하였다. 그야말로 악전고투 였다. 십여년 이러다 보니 생산대와 신용사 빚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집까지 팔고 생산대탈곡장보초막에 들었다. 모든 밑천을 아이의 병치료에 깡그리 바쳤다. 그것은 창일이네도 마찬가지 였다. 그들도 있는 힘을 다 하였다. 그들도 집을 팔고 남의 집 헛간을 수리하고 이사를 했다. 그들 형제는 생산대에서 제일 가난한 빈털털이로 되고 말았다. 그들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생산대보조를 받기까지에 이르렀다. 두집 다 말그대로 이젠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의 병은 아무런 차도도 없었다.     형제가 마지막으로 쓴 방법은 너무도 끔찍한 토방문이 였다. 그것은 사람의 대골(뇌수)로 환약을 만드는 것이였다. 이미 여러번 사람의 뼈로 만든 환약을 써본바는 있었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었는데, 이것은 어떨가… 창걸이는 형 창일의 닥달을 끝내 당할수 없어서 이 끔찍한 토방문을 써 보기로 대답을 하였다. 그러지 않다가는 우뜰우뜰하는 형이 무슨일을 저지를지 알수 없고 두려웠다. 자기가 함께 하지않으면 형은 혼자서 무슨거동을 할지… 살인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들은 어데서 상측이 나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마침, 기회가 왔다. 그것은 윗마을 덕보의 처가 사망한 것이다. 덕보의 처는 중풍으로 몇년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창걸이 형제는 망자의 안신제를 지낸날 밤 도굴을 하고 대골을 뜯어냈다. 창일이는 관뚜껑을 열고 술까지 부은후 “좋은일을 하깁소. 신세를 집시다.”하고 너스레까지 하며 그 끔찍한 일을 불이 번쩍 해 재꼈다. 창걸이는 봉분을 할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삽질을 하였다. 그는 죄송하다고 빌고 또 빌면서, 그리고 아들의 병이 났게 하여 달라고 끝없이 중얼거리며 봉분을 알뜰히 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병에는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헛짓이 였다. 창걸이네는 철저히 실망하였다. 창걸이는 시도 때도 없이 강술만 마이고는 엉엉 울다가는 아무데고 고꾸라져서는 쿨쿨 잠들군 하였다. 인순이가 온갖 좋은말로 달래면 “그래야지. 그래야지…”하고는 또 인차 “나에게는 술밖에 없다우.”하며 곤죽이 되군 하였다. 창걸이는 엉성한 허우대만 남고 페인으로 되여버렸다. 인순이의 갸냘픈 어깨에는 곱으로 무거운 부담만 실리였다.      사람대골을 쓴후 창일이는 조카애의 치료비를 벌겠다며 로씨아장사를 떠나가고 마을에는 두집 아낙네가 호주로 남았다. 두 동서는 서로 의지하며 어려운 농사일과 힘든 생활을 버텨나갔다.     땔나무철이다. 동서가 속앓이로 눕다보니 인순이는 혼자서 나무를 갔다. 점심때가 되자 인순이는 밥보자기와 낫 숫돌을 들고 골짜기냇물로 내려갔다. 인순이가 열심히 낫을 갈고 있는데, 이거 누군가?! 윗마을 덕보가 망태를 들고 냇가로 왔다.      “인순이가 아니우? 나무하러 왔소?”      “예. 거기서도 나무를 합니까?”      “한 사날 하면 되겠소만. 기까이서 살지만 동네가 다르다보니… 소문을 들었소만 그것참 않됐소. 그렇게 좋던 창걸이가 그렇게 되다니… 아이는 좀 차도가 있소?”      “그저 그렇습니다. 못떼는 병이 돼서…”       “고생이 여북하겠소. 참 않됐구만.”      “팔자탓이지요.”     덕보는 윗마을에 사는데 인순이보다 다섯살 더 많다. 이젠 모두 중년이 되였지만 당년에 덕보는 인순이에게 세번이나 혼사말을 넣었다가 퇴짜를 맞았다. 사람이 온순하고 무던해서 신랑감으로는 허물이 없었으나 인순이는 꼴기없어 보인다며 싫다고 했다. 덕보는 인순의 낫을 썩썩 갈아주며 말을 하였다.     “농촌에서 남자손이 없으면 막막할때가 많겠는데 무슨 곤난이 있으면 허물말고 기별하우. 내가 틈나는대로 돕기우.”     “말만해두 감사합니다. 그런대로 살아갈만 합니다.”     그날후로 련 나흘간 덕보는 인순이네 나무를 직심으로 해 주었다. 사흘째 되는날 덕보와 인순이는 떡갈나무숲에서 한몸이 되고 말았다. 그후 그들은 오고가며 힘든일을 서로 방조하였다. 남보기에는 낮에만 래왕을 하였으나 마을에서는 뒷소리가 무성했다. 인순이가 역어서(약삭빨라서) 꿩먹고 알먹고 든든한 머슴을 두었다는둥, 해사한 낯짝을 팔아먹고 궁둥이로 살림밑천을 한다는둥…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뱉았다. 그러나 덕보의 방조는 진심이였고 인순이의 마음은 일편단심이였다. 그는 자기가 죽을때까지 아들과 남편을 책임지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순의 한이기도 했다.     눈물의 헌신(2)     창일이는 로씨아장사를 떠나간후 두번인가 간단한 편지가 오고는 종무소식이 되였다. 마른속을 까맣게 태우며 복자는 10여년 세월을 보냈다. 복자는 인순이와 함께 쓸쓸하고 힘겨운 생활을 악착같이 견뎌나가면서 아들을 키웠다. 창일이가 떠나간후 10여년 세월 복자는 음특한 사내들의 너절한 유혹을 경계하며 인순이와 더불어 참답게 살았다. 그는 인순이가 사람들의 구설수에 씹혀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않고 정답게 동정하고 속으로 리해하여 주었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아담하던 인순이네가 자기네 때문에 오늘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복자는 자기가 해야할 일은 오직 인순이를 보다듬어 주는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복자는 그의 본가마을에서 훌륭한 색시감이라고 소문났든 녀자다. 그는 5남매항 렬에서 셋째로 태여났는데 딸로는 맏이였다. 위로는 오빠들이고 아래로는 녀동생 남동생이 있었다. 복자는 내성적인 성미여서 아이때부터 얌전하기 그지없었다. 복자가 창일이에게 시집오게 된것은 그의 부모들과 오빠들이 창일이를 사내답게 생겼다며 마음들어 한것도 있지만 훤칠하고 잘생긴 용모에 그가 반했기 때문이다. 창일이는 집과 마을에 배겨있기 싫어하고 수리공정, 길딲기, 목재판, 탄광같은데로 민공명액으로 쫓아다니기 좋아했다. 하여, 사람들은 창일이를 노가대활량이라느니, 건달팔풍객이라느니, 그래두 우리마을에서는 제일난눔(잘난사람, 똑똑한사람))이라느니 했다. 창일이는 성미가 급하고 우락부락했는데 말도 잘하고 주먹질도 잘했다. 그가 복자와 약혼할때는 공사탄광에서 채탄공으로 반장을 할때다. 약혼할때 창일이는 마치도 가시집을 제가 다 먹여살릴듯 흰소리를 탕탕치며 호기를 기껏 뽑았다. 그는 가시집에 석탄도 실어가고 술과 고기근도 자주 들고 가면서 각근한 정을 보였고 복자를 살뜰히 사랑해 주었다.     아들이 현성에 있는 고중에 붙자 1년후 복자는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갔다. 그는 한국 부산에서 부자집 치매할머니보모일을 하였는데 어떻게도 일을 알뜰히 잘했는지 주인집에서는 로임도 많이주고 잘 대해 주었다. 복자는 아들뒤바라지를 하면서 달마다 인순이에게 천원씩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아들은 셈이들어 공부에 열심했고 대학까지 졸업했다. 그는 일본회사에서 일자리를 찿았는데 사업을 잘해서 집까지 타고 약혼까지 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여러번 전화를 해서 이젠 돌아오라고, 함께 살자고 간곡히 재촉했는데, 복자도 이젠 힘든감이 들고 때론 아프기도 해서 돌아 왔다. 그는 지금 아들과 함께 대련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덧 세월은 20여년이 흘렀다. 그간 남편한테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하지만 복자는 시집과 여일하게 사이좋게 지냈다. 그간 시부모들은 다 사망했으나 두 시동생, 두 시누이들과 자주 련계하며 특히 창걸이네를 힘껏 방조했다. 하여, 마을에서는 복자를 관세음보살같은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아들과 시남매들은 갖은 노력을 다하여 끝내 창일이를 찿았다. 그는 우주베끄쓰딴 어디에서 살고 있었는데 안해를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고 했다.(안해는 흑룡강 사람. 남편과 아이 하나가 있는여자.)     복자는 모든것이 일장춘몽같았다. 그리고 인생이 너무도 허무했다. 한달 거이 앓고난 복자는 남편에게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 23년만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간 여러가지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사실 애타게 기다렸어요. 괞찮아요. 무사히 잘 살면 됩니다. 여기는 모두 잘 보내고 있습니다. 인선이네는 우리가 성의껏 도와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리혼서류같은것이 수요되면 아무때고 기별하세요.)     편지를 보낸후 복자의 마음은 평온해 지었다. 그는 매일 손자를 안고 구내 놀이터로 간다. 복자에게는 아무런 한도 없는것 같다… 그 자신만 알뿐…                                                                                                                                                                                                                                   15. 4
90    지금도 죄송한 마음 댓글:  조회:1950  추천:0  2015-07-02
             수필                                            지금도 죄송한 마음                                                                                                                  회령     허정숙씨 죄송해요     40여년전의 일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어느날 상강대대합작의료위생소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는 리선생이 걸어왔는데 그는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김선생! 이거 큰일 났습니다! 허동무가 사고를 쳤습니다!...”     사연은 이렇다.     현방역짬의 포치에 따라 우리공사에서는 파상열예방접종을 하게되 였는데 상강1,2대를 맡은 허동무(부유보건원)가 오작을 하였다. 그는 두사람분의 감독활균역묘를 한사람에게 접종해 버린것이다. 파상열이란 가축으로부터 전염되는 질병이다. 감독활균역묘는 독성을 약화시킨 산 세균으로 제조한것이다. 잘하느라고 한 예방이 오히려 병에걸릴 위험을 주었든 것이다.     나는 즉각 현에 보고한후 자전거로30여리 먼 현장으로 달려갔다. 내가 땀벌창이 되여 응급처리를 하는데, 현과 주에서도 달려왔다. 사건이 발생한후 나는 현으로부터 엄격한 추궁을 받으며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처리는 너그럽게 받았다.     허정숙씨는 30여세의 해사한 젊은과부로 어린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접산이며 계획생육, 유치원위생관리 등 사업을 괞찮게 하였고 호사업무도 하여 대대령도와 군중들은 기본상 만족해 하였다.     그는 사고를 낸후 앓아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리선생과 피해받은 농민들이 떠들어 대며 량해하려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웬일인지 공사혁명위원회주임도(반란파 맹장) 합세를 하였다 주임은 단통 “계급투쟁의 새로운동향”이라느니, “혁명과 생산을 파괴 한 현행반혁명사건”이라느니 하면서 호되게 투쟁한후 현공안국에 넘기라고 하였다. 아주 단매에 사람을 때려잡자는 것이였다.     나는 납득이 되지않았지만, 나의 리해득실로 부터 출발하여 적극성을 보이느라고 그를 공사내 위생계통에서 개패까지 걸고 비판투쟁한후 상강대대에서도 비판투쟁하며 위생소에서 캐출할것을 대대에 건의했다.(그때 나는 입당심사를 앞에 두고있었다.) 허정숙씨는 위생소에서 쫓겨난후 먼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가서 대대위생소에 들어갔다.     후일담이지만 리선생과 혁명위회주임이 허정숙씨를 미워한것은 그를 치근거렸다가 코를 떼운 탓이였다.(그들이 자백한것.)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나는 차츰 량심을 찿게 되였다. 생각해 보니 나의 사상, 량심이 협애하고 저렬하고 비루했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세상에 한명도 없지않은가?! 고의적인것도 아니고 순전한 순간의 사업상실수를, 그것도 만회할수 없는 손실을 빚은것도 아닌것을, 그리고 또 주동적으로 사고를 보고했는데… 나는 그때일이 줄곧 가슴에 걸려 있었다. 원칙을 견지못하면서 당원은 무슨 당원! 참! 부끄럽다. 미안하다.     너무 늦었지만… 허정숙씨 죄송해요. 량해를 바랍니다.                                                                                                                                           14.7     박은자씨 죄송하오     우리 림상의사실습조 10여명이 훈춘현병원에서 긴장한 림상실습을 할때의 일이다.     5월 13일 오후 3시 실습조 전체가 긴급회의를 하게 되였다. 회의는 우리의 실습을 책임진 유광의주임(외과)의 지시에 의하여 소집된것인데 당연히 집행은 실습조조장인 김성철이 하게 되였다. 점심때 성철이는 나를 찿아와 박은자(성씨는 똑똑히 기억되는데 명함은 가물가물하다. 왕청사람.)의 련애사건을 바판하겠는데, 호되게 중점발언을 잘하라는 것이였다. 나는 쾌히 대답했다.     성철이는 나와 한반인데 세살 이상이다 그는 벌써 사회생활에 대하여 나보다는 훨씬 로련한 사람이였다. 나는 그때 20살, 그야말로 천진하고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생기발랄한 청년이였다. 줄곧 학생으로, 자고자대 교오자만 남을 깔보며 으시대거나 건방진… 그러한 나쁜품행은 나에게 없었지만 진취심 경쟁심 승벽심같은것은 개성이랄가 아주 강렬하였다.     회의에서 은자는 원래 해말쑥한 예쁜얼굴이 홍당무가 되여 누구와 련애한 사실을 자아검사, 자아비판을 하였다.(현병원 내과 청년의사. 훗날 그들은 결혼.) 은자가 교대한 련애착오란 사랑한다는 편지를 두번 주고 받은것 영화를 세번 보고 함께 국수를 먹은것, 그리고 서로 손을 잡아본것… 이것이 전부였다. 그때 은자는 스물서넛 되였던것같다.     왜서일가? 누구못지않게 리론이 세고 말을 잘하는 성철인데, 개회사로부터 두루뭉실 미적지근한 말만 얼버무려 하고는 우리더러 비판방조의 발언을 용약하라고 거듭 강조하는게 아닌가… 나는 성철이가 집이 은자와 같은현이여서 낯이 가려워 그러는가 짐작하면서, 나의 실력을 과시하려고 마음먹었다. 누구보다 더 잘 말하려고 목청을 다듬고 대뜸 엄격한 어투로 비판의 예봉을 들이댔다. 필요이상 높은 악청으로.     그때 학교에서는 우리들의 작풍, 규률을 엄격히 강조했는데, 련애는 절대로 엄금이였다. 때문에 나의 호된 비판발언은, 물론 명정언순이다보니 말이 거침없이 잘 나갔다. 나는 은자의 엄중한 착오는 “실습조와 모교의 얼굴에 먹칠한 비루하고 수치스럽고 가증한 행위”라느니 “학교에 보고하여 퇴학처리를 줘야할 정도”라느니 “당의 배양과 기대를 저버린 자산계급후대, 수정주의싹”이라느니… 아주 원쑤를 족치듯 무자비하였다. 은자는 수수떡이 되여 울기까지 했다. 다른 동학들은 묵묵불언이였다. 나의 격앙한 장광설은 저녘때가 되여서야 끝났다. 성철이는 미지근하게 두어마디를 하고 회의를 끝냈다.     나는 은자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평생 잊을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두달후 우리는 림상실습을 끝내고 돌아와서 필업시험을 친후 모두 통일분배를 받아 조국각지로 나갔다. 은자도 별일없이 활짝웃으며 공작강위로 갔다. 련애건에 대한 그의 자아검사가 심각했고 뉘우침표현이 좋았고(총각과 래왕을 엄격히 단절했다.) 필업시험성적도 좋았든 것이다. 그리고 유광의주임의 감정서도 좋았다.     동창들을 그리며 잊지못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동창들을 생각할때마다 나는 은자씨가 먼저 생각된다. 그때마다 나의 유치함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왜서 그리 “각박”했던가… 나는 다른동창들보다 셈이 늦게 들었던 것이다…     훗날 느낀바지만 다른사람의 결점(착오)을 비평한다는것은(그것은 가족, 친구간에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평은 어디까지나 아주 성근한 선의적인 “방조”여야 하며 절대로 감정을 상하게 하여서는 않된다. 말한자는 죄가 없고 듣는자가 삼가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것이 아니다. 말할때는 반드시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어느때고 꼭 은자씨에게 진솔한 사과를 하고 량해를 구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주소를 알수없어 마음속에만 넣고 있었는데, 30년만에 동창회가 열렸다. 나는 은자씨를 만날수 있을거라고 믿으며 동창회에 갔는데, 은지는 오지 않았다. 동창회 이틀간 나의마음 한구석은 내내 무겁고 아쉽고 섭섭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은자씨! 그때 철부지였든 이 동창을 너그럽게 생각해 주오. 정말 부끄럽고 미안 하오. 건강과 행복을!                                                                                                                        14.8
89    5전짜리 효자 댓글:  조회:2349  추천:2  2015-04-03
     잡문                                               5전짜리 효자                                                                                                        회령     춘추시대 진나라 제후 진헌공의 아들 중의는 파쟁에 몰려 외국을 돌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중의와 그의 수종들은 천신만고의 모진고생을 하였다. 수종중에는 개자추라는 충신이 있었다. 어느날, 중의는 앓음자리에서 고기를 몹시 먹고싶어 했다. 하지만 수종들은 고기를 얻어올수 없어서 그저 안타까워만 했는데 개자추가 자기의 다리살을 베여 끓여 먹일줄이야?! 중의는 내막은 모르고 고기국을 맛나게 먹은후 병석에서 일어 났다. 후에 사연을 알게된 중의는 크게 감동 하였다.     중의는 죽을고생을 하며 19년 망명생활을 한후 본국에 돌아와서 정권을 쥐게 되였는데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진문공은 집정한후 자기를 따라다니며 고생한 사람들에게 공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었다. 그런데 유독 개자추만은 빠뜨려 놓았다. 개자추는 진문공과 더는 인연이 없음이라고 인정한후 아무런 유감도 없이 로모를 업고 면산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효성을 다하며 고생스레 살았다.     어느날, 진문공은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다가 문득 개자추가 없음을 발견하고 연유를 물었는데, 비로서 자기가 크게 실수하였음을 알게 되였다. 진문공은 즉각 신하들을 보내여 개자추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번마다 개자추를 찿지못하여 데려올수 없게되자 진문공은 면산에 불을 놓게 하였다. 산불이 타면 개자추가 밖으로 나올줄로 믿었든 것이다. 그런데 개자추는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온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 갔다. 청명 전날에 놓은 면산의 산불은 면산을 다 태우고 3일째 되는날 점심께 저절로 꺼졌다. 진문공은 사람을 풀어 개자추를 찿게 하였는데, 그들은 로모와 큰 버드나무를 끌어안고 타 죽은 개자추를 끝내 찿아 내였다. 진문공은 자기의 두번이나 되는 실수를 통탄하며 오후에 큰 제례를 갖추어 개자추 모자를 장례하였다. 진문공이 손수 지은 축문을 다 고하고 술을 석잔 붓자 쾌청하던 하늘에서는 갑자기 비가 수루루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날 진문공은 칙을 내려 면산은 개산으로, 현은 개후현으로 부르게 하였으며 그리고 개자추가 죽은 청명날 전후 3일을 불을 쓰지 않고 찬밥을 먹으며 개자추를 기리게 하였다. 동시에 집집마다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아주 중대한 효성으로 간주 하였다. 그후 차츰 청명하루만이 한식절로 되였다.     원래, 한식절이란 이런 비감한 사연을 갖고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한식절은 민간의 풍속습관으로 되면서 오늘 많이 변천 되였다. 아이들은 아예 설과같은 기쁜명절로 알며 적지않은 젊은이들은 즐거운 봄놀이날로 여기며 하루를 성수나 한다. 제사는 뒤전이고 제밥에만 정신이 빠진 것이다.     형세는 부단히 변하고 사물도 변하지 않는것이 없다. 풍속습관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은 그시대 사람들에게 편리토록 변한다. 이것은 발전이고 진보다.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해서 세상천지 만물에는 변하지 않는것이 있으며 변하면 안되는것이 있다. 돌고도는 밤과 낮이 그렇고 오고가는 사계절이 그렇다. 인간도 량심과 도덕을 버리면 안된다. 여러가지중에서 효도 하나만 보더라도 그럼을 알수 있다. 미물도 반포의 정과 행이 있으려니 만물의 령장인 인간임에랴! 그러나 그렇지 못한것이 또한 인간이다.     요사한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개자추가 누구네 할아버진지 그건 잊어버린지도 옛날이고 청명전후 3일은 불을 쓰지 못하며 찬밥을 먹어야 한다는 진문공의 칙명은 정신나간 소리로 언녕 페지해 버렸다. 그뿐이 아니다. 어느 깜찍한 어른이 발명한 것인지 성묘가기 싫거나 사정이 안되면 십자로에서 저녘후 귀신돈 지전을 태워도 된다고 해서 그렇게 꿈때 버리는 후손들이 급격히 증가 되였다. 하여 십자가에 검은 재무지가 랑자하다. 귀신놀음이 되여버린 것이다. 어느모로 보나 간편해서 얼씨구 지화자 좋다. 깡통맥주에 북어와 낙지는 부부가 다 뜯어먹고 공동묘지에서 쿵짝짜 뚱딱따 노래와 츔판을 벌렸다. 룸바 탱고 한국궁둥이춤 말대가리말뛰기춤...  기쁜날 좋은술 먹고 에루화 데루화 니나노 흥이 났다. 이거, 웬망녕인가 비난을 하면 뭐? 비통을 힘으로 바꾼다나 바꿧다나... 기막힌 지랄이 아닌가! 아이들은 사탕을 물고 깡충깡충, 몇백억 몇천억 귀신돈을 불이 번쩍나게 태워버리고는 급급히 마장판에 붙는다. 그러나 누구나 다 자기가 성묘를 제일 정성껏 잘했다고 자부 한다. 그것은 조상신령들께 자기와 새끼들을 많이많이 도와 달라고 진심으로 곱씹어 부탁했기에 성묘를 알맹이가 있게 했다고 긍정하기 때문이다. 생전에 짜내지 못한 기름을 귀신에게서 계속 짜내는 것이다. 현대인의 알량한 “효도”다. 이것을 5전짜리 효도라고 한다.      한식, 단오, 추석에 왜서 성묘를 하는가? 왜서 이런법을 만들어 전했는가? 그 취지는 고인이 된 어른들의 은덕을 고맙게 느끼며, 그의들의 품덕을 되새기며, 배우고 계승하여, 부모님생전에 더욱 잘 효도를 하자는데 있다. 어떤격식으로 성묘를 하든 이 취지는 변할수 없다.     그런데 현실을 보라! 도리깨아들, 쥐며느리가 적은가.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말하고 싶다. 당신의 로후가 행복하려면 자녀들 앞에서 시시각각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하라. 말로도 잘하고 행동으로도 잘하라. 그래야 당신의 로후가 행복하게 보장될 것이다.                                                                                                                      08.2
88    고모의 치매증 댓글:  조회:2282  추천:2  2015-02-14
     수필                                               고모의 치매증                                                                                                  회령    안해의 고모가 치매증에 걸린것이 70세부터였으니 이젠 7년철이 된다. 그이의 자식들 삼남매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니 유일최선의 대책으로 그이를 경로원에 보냈다.         고모가 경로원에 간후 나는 안해를 따라 달마다 한번씩 방문을 갔는데, 참으로 서글프길 짝이 없었다. 잡숫는것과 화장실출입은 대수 자립이였으나, 사람을 알아보긴 하지만 대화며 기타의 모든것은 엉망인, 퀭한안질, 온통 크고가는 주름살로 덮힌얼굴, 새하얀봉두란발, 호물어진입(아래위틀이는 어데서 잃어버렸는지…), 장작개비같은 팔, 다리, 몸무게는 5,60근이 되겠는지… 말그대로 백골페인이 다 된 참혹한 그 모습은 볼때마다 안타깝고 불상하고 그의 한생의 불행, 억울함과 그리고 동정, 원망, 격분… 슬프고 착잡한 심정을 한입으로 다 표달할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길고 깊은 한숨만 자꾸 나왔다. 사람의 신수팔자가 어쩌면 이럴수 있단말인가?!… 안해는 번마다 울고 돌아올때도 눈물이 글썽해 하였다. 한번 갔다오면 우리는 며칠씩 울적한 기분이였다. 나는 때론 차라리 방문을 가지말았으면, 안해가 혼자 갔다오겠다고도 했으나 그러나 가지 않을수도 없었다. 얼마를 더 앉겠는지… 생존해 계실때 자주 나들며 조금이라도 보살피는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있을때 잘 해”라는 노래말처럼. 뭐 잘한건 없지만. (자식들은 코앞에 있으면서도 어쩌다 한번씩 방문을 감. 우리는 외지다 보니 하루가 걸린다.)    고모는 여섯번이나 경로원을 바꾸었는데, 이번에 또 옮겼다. 그것은 경로원의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사회가 로령화 되면서 더욱많이 생겨난 경로원은 이름도 좋거니와 내용도 좋아서 그야말로 현실적이고 실용적이고 아주 편리한 시설이다. 경로원은 민영도 있고 관영도 있다. 경영자의 봉사약속과 소개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훌륭한 로인복지, 천당이였다. 친인들보다 더 낫게, 더 책임적으로, 살뜰히 보살핀다고 경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력점을 찍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본 바에는 어느것이나 모두 다 입원비보다 봉사질량이 부실했다. 지어는 렬악하기까지 했다. 무력한 로인들을, 죽을날을 기다리며 아무런 의욕도 요구도 없이, 불평불만타발이없이 말그대로 양처럼 온순하기만 한 로인들을 경영자들은 아주 식은죽 먹기로 얼렁뚱땅 관리하는것 같았다. 특히 고모와 같은 어른들은 더욱 쉬운 관리대상인것 같았다. 고모는 밤낮 침대에 누워만 있으며 방에서 나가지 않는데, 세수도 목욕도 머리 손발톱깍기도 잊어버렸고 옷을 갈아입거나 침대이부자리를 정리하거나 빨래하는것도 잊어버렸고 더 먹겠다는 말도 무얼 해 달라는 말도 없어서 관리자는 차라리 품을 덜었다는듯, 상관하지 않는것 같았다. 바깥바람을 쐬우거나 해볓을 쬐우는것 같은 호사는 언녕 없는일이 되였다. “떼를 쓰며 싫다고 해서 어쩔수 없었다.”고 했는데, 우리와도 그러긴 했으나 좀 어루며 달래면 아이처럼 말을 들었다. 치매로인이여서 입원비는 갑절 높았으나 관리품은 갑절 “절약”하는것이 너무도 확연했다. 죽은 반공기(치아때문에 살뜰한 보살핌으로…) 채와 국물에는 기름방울이 한두개, 고기점은 혹 한두점.(로인들의 보건장수를 기원해서 소식위주라나…) 우리는 격분을 억제하며 거짓웃음을 발라가며 의견을 아니, 사정을 매번 했으나 가보면 여전했다. 원장에게 복무원에게 선물까지 했으나 그 효험이 한두번뿐이 였다. 하여, 고모를 자주 “이사”시킬수밖에 없었다. 고모에게는 경로원ㅡ 로인복지ㅡ 천당복이 너무도 없었다. 고모가 거쳐간 그 몇몇 경로원에 고상한 직업도덕은 바라지 않지만 “등가교환”정도의 직업도덕은 요구하고 싶다. 협잡, 사기, 부정부패가 아무리 살판을 치는 풍토라고 해도 로인들을 가지고 비도덕적악덕영업을 해서는 안될일이다. 천벌을 받을 짓이다.(관영의 어느원장은 감옥행을 했다. 경제건으로.) 자기도 곧 경로원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부기: 정신병원의 어떤권위적의사는(원장) 치매가 절대로 아니고 신경질환이니 꼭 장기적으로 치료를 하라고, 치료하면 꼭 낳는다고 각근히 당부를 했는데, 만여원을 썼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점점 더 심해만 갔다. 그래도 그는 약을 떨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무슨 심사인가… 지금은 치료를 포기했다만.    나는 고모의 치매원인을 여러면으로 분석해 보았다.    큰단위인 시건축공사에서 38홍기수로 민족단결모범으로 문예선전대 춤, 노래연원으로 북과 장고도 잘 치고 마음이 비단결 같아서 모범며느리로 소문난 미인의 고모가 어째서 이렇게 제일 불행한 돌이킬수 없는 정신질환에 걸렸을가?    돌이켜 보면 고모의 불행한 인생길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되였다. 6남매에서 막내인 고모는 산골의 가난한 농사군가정에서 자랐으나 초중공부까지 하며 귀엽게 자랐다. 인물곱고 명랑하고 선량정직하고 음전한 고모는 원근에 좋은 색시감으로 소문이 나서 중매가 많았다. 고모는 24살때 모 철로공안국에서 과장으로 사업하는 말끔한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그때세월 시가지로, 그것도 월급쟁이 벼슬높은 간부에게 시집을 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자랑이고 기쁨이였다. 몇년후 고모의 호구는 시가지로 옮겨지고 잇따라 시건축공사대집체공인으로 되였다. 그 전에는 건축공사 자갈치기, 역전 석탄부리기 등 막일날품을 팔았다. 민식은 생산대에서 사다 먹었으나 뒷욕을 무던히 먹었다. 돈이면 다냐고. 힘든 농사일은 하지않고 민식은 먹는다고. 민식을 타오는 일이 살점을 뜯는것보다 더 괴롭고 난처한 일이였으나 처지가(농촌호구) 그렇다보니 어쩔수 없었다. 이렇게 몇년을 고모는 목에 걸리는 밥, 눈치밥 살이를 했다. 시집은 20여평의 헐망한 초가였지만 방은 두개, 청상과부로 아들형제를 키운 쌩쌩한 시어머니, 자기까지 네식솔이였다. 시동생은 간질병으로 직업이 없었다. 풍상고초를 많이 겪으며 살아온 시어머니는 말주변이 좋고 수단이 좋고 성미가 팩하고 까다로왔다. 남편은 술담배도 모르는 정직한 사람이긴 했으나 우스개도 하지않는 꼬장꼬장한 성미의 신경질적 사람이였다. 집안살림 대소사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모두 챙기는데, 40여원 월수입은 1전한푼도 에누리없이 몽땅 남편이 틀어쥐고 관리했다. (이런 상황은 남편이 사망하기전 두어달까지 30여년 주욱 계속되였다.) 그러니까 비누한장 크림한통도 시어머니가 사오고 채소 한포기 쌀과 석탄도 시어머니가 주관하는데 고모는 딸따리차를 끌고 짐군으로 따라다니면 되였다. 사사건건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끝이 없고 훈계(야단 책망)가 빠질날이 없었다. 지어는 세수물을 많이 쓴다고까지, “똥되놈새끼들은(시어머니는 한족들을 왜서인지 깔보며 얕잡아 말했다.) 수건에 물을 조금적셔 얼굴을 딲는데 너는 무슨물을 그리 많이 한바가지씩이나 쓰느냐! 쯧쯧쯧. 헤이구!” 혀를차며 반나절씩 책망하였다. 더욱 난처한건 본가집에서 형제들 혹은 조카들이며 친척들이 놀러오는 때다. 그들도 시가지살림 형편을 대략 알기에 자주 오는것도 아니건만(1년에 혹 한두번) 일단 한번만 왔다가면 온갖 지청구를 고모는 적어서 열흘은 줄곧 들어야 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았는지 두고두고 새김질을 하였다. 남편은 시종 어머니와 박자가 맞았다. 고모의 시집살이는 그야말로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소경3년으로 남편이 사망할때까지 계속되였다. 고모가 해박하지 못하거나 어데가 좀 부족한 사람이였다면 혹 그럴수도 있겠다고 리해를 하겠지만, 이건 멀쩡한 생사람을 닥달이 아닌가. 그래도 고모는 항시 밝은얼굴 일언반구 대답질을 하지 않았다. 그래선가? 시어머니는 사돈집 식구들 앞에서는 그들이 아이든 어른들이든 며느리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여댔다. 주변사람들과도 그랬다는데, 그래서 마음이 비단결 같고 모범며느리라는 칭찬도 생겼는지… 하여튼, 단위에서도 그렇고 곁에서도 그렇고 고모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밉다는 사람이 없었다.    시동생이 간질병발작을 할때면(보통 밤중, 새벽) 집은 북새통이 된다. 의사왕진을 불러오고 더렵혀진 옷이며 이부자리를 손질하는 등 일들은 거지반 고모의 소임이였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얻어오는 처방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제일 힘든것은 죽은사람의 뼈(두개골), 태반, 죽은갓난애를 얻어다 구워서 가루내여 환약을 만드는 일이였다. 이런일은 시어머니와 남편도 끔찍하고 께름하고 구역질이나서인지 전부 고모를 보고 하라고 엄명을 했다. 고모는 울며 겨자먹기로 봉행 했는데, 약효가 있었는지 정성이 닿았는지 시동생은 발작이 뜨음해져서 장가를 가고 몇달후 세간을 나기까지 했다.(훗날 결국 간질병으로 사망.) 결혼해서 10년안에 고모는 맏이로 딸, 아래로 아들형제를 보았다. 그간 시동생네도 남매를 보아 네식구가 되였지만 집은 고모네보다 더욱 가난했다.(동서는 농촌호구, 무직업. 장마당난전을 했는데 성깔이 거칠고 아다모끼였다. 그는 쩍하면 시어머니와 시형에게 불평이였다.) 하여, 고모네가 도우지 않을수 없었고 결국은 두집이 모두 최하층의 극빈생활을 하게 되였다. 혹 어쩌다 팔이 빠지게 맷돌을 돌리고 종일 돌아쳐서 두부를 앗으면(혹 색다른 음식을 해도.) 시어머니는 절반을 갈라 시동생네 집으로 가져 갔다. 일년치고 서너번이 될가? 색다른 음식을 만든날은 고모가 마른군침만 꼴깍꼴깍 삼키는 날아였다.(시어머니도 물론 배를 곯았다.)    모진세월은 그래도 흘러 3년대식품시대도 용케 넘기고 아이들은 줄렁 줄렁 소학교에 들어갔다. 3년재해마지막해 시동생이 사망하자 풍을 맞아 자리에 누운 시어머니는 3년을 앓고 사망했다. 말은 바른대로, 고모의 부담이 덜어진것만은 사실이지만 불행은 더욱 기막히게 덮쳐왔다.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얼마후 남편은 조선특무로 지목되였는데 그것도 골간책이라는 것이였다. 남편이 잡혀가서 6년여 소식일점을 전혀 모르며 고모는 생속을 썩였다. 그때로부터 고모의 머리는 백발이 되였다. 십여번 집은 철저한 수색을 당하고(지어는 마분지와 신문지로 도배를 한 천정과 온돌바닥을 일곱번이나 몽땅 뜯기웠다.) 고모와 아이들은 몇십번을 심문당했는지… 기억할수 없다. 후에 해방을 받았지만 남편은 왼쪽귀가 찢어지고 비틀려서 아주 흉칙한 병신으로 되고 두 귀는 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허리병, 심장병, 위병은 아주 고질이 되여 페인이 되고 말았는데, 앓으면서 회갑상을 대충 받은후 인차 사망하였다.(61세)    고모의 지겨운 인생길은 갈수록 심산이랄가? 그이는 또 자식들 때문에 근심걱정을 놓을날이 없었다. 아들 둘은 그래도 고중까지는 공부를 했는데, 큰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쪼궁을 받아 철로에 공인으로 취직을 하고 딸은 초중을 마치자 집체호로 나갔는데 후에 역시 쪼궁을 받아 민족침직창에 취직했다. 막내아들은 초중때부터 부모의 속을 무던히도 태웠다. 그애는 애물단지들의 두목격이 되여가지고 도둑질, 싸움질, 결석을 밥먹듯 하면서 선생들과 파출소경찰들을 신경질이 나게 하였다. 나쁜짓거리들에 자기는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조사해 보면 조직자 지휘자는 막내였다. 하여, 성미가 팩한 아버지는 빗자루찜질을 그칠날이 없었는데 그럴때면 아들은 도망을 쳐서 2,3일씩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집은 막내때문에 편안할 날이 없었다. 제일 속을 썩이는 것은 고모였다. 정작 사달을 치는 아이보다 피눈물을 더 짠것은 고모였다. 천하의 가련한 부모의 마음ㅡ 어머니의 모성애는 어쩔수 없이 애모뿐것이 였다. 애옥살이 따로없는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앞당겨 퇴직하자 막내는 아버지의 제발로 철로에 취직했다. 이쯤하면 한숨나오게 된것 같았으나 자식들이 커가는 만큼 큰일도 자주 생겼다. 큰딸은 남편이 무슨장사를 한다면서 다른녀자를 끼고 돌아다니며 서푼도 안되는 살림을 다 털어먹고 게다가 가정폭력까지 매일 휘둘러 끝내는 리혼을 하고야 말았다. 딸은 할수없이 서너살 되는 딸애를 데리고 두칸들이 본가로 들어오고 말았다. 단위가 파산되여 그는 이미 무직업이 되였다. 큰아들은 처가에 얹혀 살았는데 안해가 시집과 틀려서 명절이며 생일이며 일체 거래를 하지 않았다. 지어는 코앞에 있으면서도 시아버지제사에도 오지않아 사람들이 가서 데려왔다. 막내며느리에게 결혼시 목걸이를 사준것과 셋집월세를 반년분 대 준것이 탈이였다. 그리고 딸이 들어와 사는것도 심술이 났다. 그는 무직업이여서 놀면서도 자기아이도 보라고 맡기는가 하면 사람들과 시집에 대하여 온갖 악담과 저주를 하여 듣는 사람들은 정신이 나쁜것 같다고도 하였다. 어리뭉그레한 큰아들은 안해말만 따랐다. 막내며느리는 마장도박에 붙어서 빚을 걸머지고 아들은 하해를 한답시고 일본으로 간것이 5년이나 소식한번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에미속이 어떻겠는가?!... 고모는 막내가 살아오라고 불공을 드리고 점쟁이를 찿고 한숨과 눈물이 없는날이 없었다.    작년여름 어느날, 나는 막내와 술잔을 나눈적이 있었는데 그때 막내는 눈물을 찍으며 이런말을 하였다.(그들부부는 보따리장사를 하는모양. 소문에는 안해가 마장도박빚으로 본가집을 팔아먹기까지 했다고 함.)    “어머니가 저렇게 된것은 다 내탓입니다.”    “네탓이라고만 할수없지…” 나는 얼버무리며 괴로워하는 막내를 위안하였다.    지금에 와서 후회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나 고맙게 들리였다. 딸과 큰아들 입에서는 지금까지 그런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큰며느리는 사망. 며느리가 죽었을때 고모는 “오래 살지도 못하면서…” 하고 사설을 하면서 매우 애통해 하셨다. 딸은 재혼후 제노릇만 하느라고…)    우리가 방문을 가면 고모는 꼭 이런말을 하였다. “다 쓸데없소!” 하고는 돌아누워 더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들을 두고하는 말인지,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신이 떠나버린 고모에게서 이 한말씀만은 자신의 한생을 총결하고 하는 올똘한 말씀인지… 한생을 살고 얻은 철학인지… 때론 “다 큰수술을 했는데… 어쩌우…”하기도했는데, 지금도 고모는 자식들을, 친인들을 잊지못하고 근심걱정을 하는걸가…    나의 생각에는 고모가 치매증에 걸린것은 정신적타격과 심리적부담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라고 인정된다. 고모의 정신력, 심리감당력이 취약한것이 원인이겠지만 그러나 객관요소도 부정할수 없는것 같다. 모주석의 철학론단처럼 사물의 변화는 내인이 원인이고 외인은 조건인데… 고모의 경우도 그런것 같다.    부기: 그에게는 자신의 퇴직금이 있기에 자식들에게 별로 부담을 주지 않는다. 고모는 끝까지 자식들을 돕고 배려한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사회에도 미안한 일을 한적이 없다. 그러나 자식들은, 객관은 어떠했든가?!… 불행한 인생… 허무한 인생… 고모와 같은 인생이 적은지 많은지…    오호 애재.(아아 슬프구나.)                                                                                                                 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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