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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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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알뚱말뚱한 현상 댓글:  조회:2260  추천:1  2014-03-10
          잡문                                                      알뚱 말뚱한 현상                                                                                                                                                                                                                 회령           쌍방을 막으라!!     보아하니 쌍방(위에 고소하는 것)은 세상 어느나라에나 다 있고 고금에 다 있은것 같다. 그런데 쌍방은 도대체 어느놈이 하는가? 딱 두놈이다. 한놈은 제발등에 불이 떨어져 덴소납뛰듯 올리뛰고 내리뛰며 발괄하는자고 다른 한놈은 남의 일에 싱겁게 뛰여들어 감놓아라 배놓아라 고아대며 지랄하는 작자다.     살펴보면 자기일때문에 속줄이 달아서 쌍방하는 사람은 많고 순 다른사람의 일인데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사람은 적다. 지성인, 언론인들이 이따위 싱거운 짓거리를 하기 좋아하고 보통, 민중은 강건너 불보듯 구경만 한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도 가끔은 있다.     어느곳에서 누구집 귀한딸이 권력을 등에 업은 망나니에게 짋밟혔는데, 그때 권력자는 망나니를 감싸주고 되려 딸의 애비가 떠든다고 질서요 소란이요 치안이요 안정단결이요 하며 잡아 가두었다. 하여 격분한 수천명 민중들이 관청을 들부시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급에서 즉각 적절한 처리를 해서 민분은 진정되였다. 보다싶히 제일이 아니라고 해서 구경만 하는것도 아니다.     엄밀히 분석한다면 구경하는것도 관심의 한 표현으로 끼여드는 것이다.     따져보면, 세상에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왜서인가? 그것은 사람이란 누구도 군체를 떠나 살수없기 때문이다.     정신병자가 쟁기를 들고 다니며 행패를 한다면 그래 나와 상관이 없겠는가. 미국아덜이 이라크를 들이치고 일본이 해외출병권을 행사한다면 나와 상관이 없는가. 원륭평선생이 다수확 벼종자를 배육한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가. 달나라로 가고 화성으로 가는것이 그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인가. 똥돌이가 코를 흘리고 스모그(미세먼지)가 밤낮 하늘을 덮고 부정부패, 전자사기가 살판쳐도 상관이 없는가…     때문에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에게도 책임이있다.”고 하는것이며 “천하사인즉 곧 내집일이다.” 하는것이다.     왜서 쌍방을 하는가? 억울하고 원통해서 한다. 얼핏 들으면 우문우답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억울하고 원통한데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당사자가 당한 일 자체가 억울하고 다른 하나는 처리가 원통하다. 억울한 사건을 제대로 처리했다면 원통은 있을수 없다. 그러니 쌍방을 하게 만든자는 해당 권력자다.     그런데 이 권력자란 놈이 간특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고 하는데, 그는 쌍방을 하게 만들어 놓고는 또 쌍방을 기를쓰고 막아나선다. 그것은 제대로 재결해 주는것도 자기리익에 불리하고 위에 쌍방하는것도 역시 자기리익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여, 쌍방을 엄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데서 어느놈이 내려보낸 엄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저한테 불리하니까 화급히 내리떨군 수장의 지시다. 쌍방이 한건이라도 발생하면 층층의 사또에게 책임을 엄히 추궁한다고 불호령을 하였다. 벼슬아치에게는 감투가 목숨인데 감투는 위에서 주는것이여서 상전이 애비보다 더 중하고 가깝다. 그런데 엄명인즉 자기와도 관계되고 상급과도 관계되는 절실한, 실제적인 것이니 어찌 등한시 할수 있으랴. 등한시라기보다 발벗고 나선다.     얼마전에 북경에서 우연히 아무개아들을 만났다. 그는 자기네시에서 쌍방 온 사람들을 쌍방하기전에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한다고 하였다.(상급에서 알기전에, 얼른 손을써서.) 공작이 무척 재미있는데 그것은 먹을알이 많기때문이라고 아주 흥이나서 자랑했다. 쌍방 온 사람들을 술도 사 먹이고 구경도 시키고 잘 구술려서 차표를 사주면서 집으로 돌려 보내면 소임은 완성인데 돈을 물쓰듯 한다고 하였다. 그날 나도 한밥 잘 얻어먹었는데 “쌍방엄금경비’로 풀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개아들은 공부를 잘 못해서 초중을 나오자 생산대사원이 되였는데 에미가 약빠른 사람이였다. 그는 공작대로 나온 현의간부(검찰원원장과 공안국겸직법의ㅡ 현 병원부산과의사)를 친했는데 아들을 공안국간수소 보초로 출세를 시켰다. 이렇게 출세를 시작한 아무개아들은 오늘 북경주재원으로까지 “승진”을 한것이다.     아무개아들의 말을 들어보면 “쌍방차단소”는 촌과 중앙에 없고는 층층에 다 있었다. 그 요진통은 제밑을 중앙에서 알가봐(혹은 불똥이 튀여올가봐.) 예방책으로 만든 비상조치다.     “부정부패의온상”이라고 철퇴를 내린 각급정부의 북경주재판사처는 중앙의 일성대갈에 태풍이 락엽을 쓸어가듯 하루밤새에 모조리 사라졌다.아주 깨끗히 철거한것도 있고 변상적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 것도 있다.(약탕기만 바꾸고 약은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간것도 있다. 이런것을 두고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 대책이 있다고 한다. 담대하기도 하지!     “쌍방차단소”도 말밥에 오르기 시작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비준없이는 안된다!!     “언론자유”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언론뿐 만아니라 세상의 모든것이 다 상대적자유, 존재, … 그런것이다.     어느녀석이 “해는 내것이다.(미국에는 달이 자기것이라고, 무당 얼마씩 받고 팔겠다는 사람이 있다지만.) 이제부터는 세금을 받겠다.”한다든지 “타도하겠다. 죽이겠다. 개새끼다.”하면서 “이건 내 언론자유다.”한다면 그래 언론자유라고 인정이 되는가. 때문에 시위에는 “시위법”이 있고 언론에는 “언론법”이 있다. 우리만 그런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리해가 되고 동의도 되는데 어떤 현상은 실로 알뚱말뚱하다.     어떤 신문사에 꽤 능력있는 고급기자가 있었다. 그는 60이 되니 제도에 따라 애착하던 기자업을 떠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운것이 오입(잘못들어가기)질이라고 재직에 있을때보다 더 극성스레 뛰여다니며 채방을 하고 열심히 기사를 써서 여기 저기 각종 매체에 부지런히 발표를 했다. 그야말로 60청춘이였다.     잰내비도 낭기(나무)에서 떨어질때가 있고 호사다마다. 어느날 고급기자는 중앙을 바싹따라 발을 딱! 맞추어 메가톤급기사 한편을 불이 번쩍나게 일필휘지 써 갈겼는데 (특대명문장을 썼다고 흐뭇해 하면서 발표했다.) 그것이 목숨이 왔다갔다할 지경으로 말썽을 일으킬줄이야!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룡두시에서는 당위와 시정부청사로 18층의 웅장화려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중앙의 랑비반대정신이 내려오자 당위와 시정부령도에서는 인식이 고도로 제고되여 과감히 즉각 건축공사를 정지했다. 이 청사는 공안국, 환보국, 방역소라는 이름을 걸고(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 비렬한 수법으로.) 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중앙정신이 나오자 득달같이 비준한 상급이 “즉시 정지하라!” 전화호통을 해 와서(왜서일가?), 잇따라 건축취소문건도 내려왔다. 건축상에게 당위와 정부청사 는(아주훌륭한 것을.) 이미 팔았고 지금 짓는 이 건물은 당위와 시정부에서 사기로 계약을 맺었는데… 지금, 건축상은 공정공시판도 아예 뜯어치우고 건축을 추진하고 있는데 물으면 “호텔을 짓는다.”하고 대답한다. 이미 있는 좋은 호텔도 비여있 다싶히하다. 워낙 시가지가 작아서 손님이 적다. 시민들의 공중여론은 “두고보 자!”이다.(건축상은 리혼미녀. 이 시에서 “로다” 임.)     소학교 작문깨나 쓴다는 아이가 봐도 이 기사는 사개가 맞지않는 알뚱말뚱한 명문이였다. 도대체 긍정인지 부정인지, 표양인지 비판인지, 비호인지 폭로인지…     하여튼, 이 고급기자가 옛날에(재직시) 쓰던 풍격과는 달랐다. 그는 룡두시 주재기자였는데 령도를 찬양하는 큼직큼직한 기사를 잘 써서 유명했다. 군중들은 그의 기사를 보고는 오입을 잘 하는 기자라고 했다.     기사가 나간후 이틀이 지나서 고급기자는 시당위선전부에 불리워 갔다. 그는 3,4일을 선전부로 오입하며 심각한 방조를 받았는데, 문제를 교대하고 인식과 각오를 제고하고 립공속죄하겠다는 결심서를 쓰고 풀려났다. 마지막날 오후에는 보리저녘 때가 되여서 서기의 친절한 접견을 받기까지 했다. 롱구장 절반만큼한 으리으리한 집무실에서 서기는 탁구판처럼 큰 테이블 저쪽에 앉아 있었다.그는 등받이가 한발이나 되는 회전의자에서 좌우로 빙글빙글 흔들흔들 운동을 하면서 외유내강한 표정으로(낯가죽은 웃고 눈매는 날카롭다.) 다정하게 당부를 하였다.         “금후에는 우리시와 관련되는 기사는 선전부의 비준을 받고 보내십시요! 찬양같은건 뭐, 괜찮치만 비판이나 적발같은건 심중을 기해야 하니까요. 수고 합시다.”     고급기자는 언론인의 량심과 정의감이 비로서 발동되였는지 코웃음을 치면서 더욱 열을내서 관료주의, 형식주의, 사치, 랑비 등 부정부패를 폭로 비판하는 기사를 륙속 갈겼는데 거기에는 “당위와 시정부의 령도가 바뀌면 가로수도 바뀐다”는 칼럼같은것도 있었다.     그런데 웬일이냐?!     매체마다 “룡두시당위선전부의견을 첨부해 주세요.”하지 않는가. “아첨”하는 기사도 마찬가지 였다. 괘씸죄에 걸린것 같은데… 이거, 생매장을 하는건가…             왜서 벼슬을 사는가     어느 선생이 저작에서 “사람의 첫번째 본능은 식욕이고 두번째는 성욕이고 세번째는 명예욕이다.”하였는데 그런같기도 하고 아닌같기도 하고… 세번짼지 네번짼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에게는 물욕(금전도 포함.), 권세욕도 상당히 크게 있다고 사료된다.     옛날사람들은 우둔해서 “7정6욕5지”만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사람들은 발달한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해서 “10정 10욕(정부욕도 포함)10지”도 더 있는것 같다.     권세욕 즉 권력욕은 촌민부소조장으로부터 대통령, 중앙서기, 위원장, 총리, 주석까지도 다 있다고 보여진다. 욕이 없으면 싫다고 하겠는데 활짝 혹은 히죽이 웃으며 좋아하는걸 보면 그렇지 않은가. 똥별이든 왕별이든 벼슬자리에 이미 앉은자는 말할것도 없고 보기만 하는 자도 권세에 침을 한발이나 흘린다. 바라오르지 못할 나무고 그림에 떡이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권력은 이렇게 매력적이다.     권력이란 국가의 제일 크고 제일 귀중하고 제일 중대한 자원이다. 아무나 가질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것으로, 국민을 위해 쓰는것으로 한치라도 오차를 내면 모가지를 내 놓아야 한다. 그래서 공복ㅡ공무원ㅡ권력자를 하겠으면 가난과 고생을 각오하라고 한다. 애비 한분만 받들어 모시재도 쉬운일이 아닌데 숱한 민중을 섬기자면, 그것도 만족이 되게 섬겨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일인가!     그래도 벼슬을 하겠다고 대갈놀음을 하며 기를 쓰는걸 보면(미국, 한국, 일본, 대만이 제일 볼만하다.) 거기에 무슨 재미있고 맛좋은게 있는 모양이다. 우리 이곳을 봐도 그런것 같다. 개를 잡아 먹이고 미녀궁둥이를 먹이고 코수건을 돌리고 금일봉을 은근슬쩍… 이게 다 돈으로 권력을 사는 짓거린데 어디서나 누구나 다 흔하게 볼수있는 진풍경이 아닌가.     어떤 시가지에서는 이런 신시(정보)가 시민사회에 광범위 류포되였는데 그것은 오십만원만 먹이면 파출소소장벼슬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소장을 2년만 하면 3백만원이상을 히쭉 웃으며 번다고 하였다. 파리대가리만한 파출소소장벼슬이 정말로 이렇다면 호랑이같은 벼슬은 어떻겠는가. 어떤 롱단국유기업총재의 한달신봉이 몇천만원이라는 소리도 있는데 몇해만 해먹으면 돈뭉치가 천안문보다 더 클것이다. 그러니까 권력을 사는 목적은 자기를 위한것이지 나라나 민중을 위한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서 권력자가 된 놈은 나라곳간에 기여든 쥐새끼다. 판놈도 마찬가지다. 쥐는 좋은점이 한가지도 없다. 우선, 자연의 쥐를 보자. 그놈은 전문 남의 것을 훔쳐먹고 산다. 쥐가 일하는걸 보았는가. 그리고 도둑질하기 위해 무엇이나 파괴한다. 썰고 뚫고 굴을파고 어지렇히고… 좋은일은 한가지도 하지 않는다. 인쥐도 꼭 그렇다.     중국민중은 권력자를 증오하고 부자를 증오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정부패가 그런 반감을 가지게 만든것이다. 어떤사람들은 일체를 의심하고 일체를 타도하고 싶어 하는데, 그러면 제2차문화대혁명을 하자는 말인가. 이건 절대로 안된다. 전문사냥대가 나서면 된다. 쥐는 그래도 소수다. 쥐를 잡자고 독을 깰수는 없다. 도깨비가 죄를 지었는데 고목까지 벼락을 맞아서야 되는가.     우리공산당간부는 사랑스럽고 존경스럽고 좋은동지가 많다. 뢰봉이 그렇고 초유록이 그렇고 공번삼이 그렇다. 살펴보면 반짝이는 뭇별같이 많고도 많다. 밤에 푸른하늘을 보라. 뭇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런 견해를 말하면 아첨쟁이라느니 어용문인이라느니 옛날정치냄새를 물큰물큰, 팍팍 피운다느니 하면서 줄욕을 하는것은 왜서인가…                                                                                                                                 14. 2
65    그해의 3.8절 댓글:  조회:2693  추천:1  2014-03-07
           수필                                         그해의 3.8절                                                                                                        회령     해마다 3.8절이 오면 1971년도의 3.8절이 회상되며 천사만사로 무량한 감개와 차탄을 금할수 없다.     3.8국제로동부녀절이 생겨난것은 금년이 벌써 103주년이 되였다. 주지하다싶히 3.8절은 정치적 사상적 기념일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진심으로 가장 성스럽게 보는, 어머니의 명절이다. 부녀는 인류의 어머니가 아닌가?! 아무리 익살을 험하게 쓰는 놈팽이래도 3.8절을 감히 성탄절, 정든님절이거나 멍텅구리절, 애완동물절과 같이 거론하지는 않을것이다.     나는 아이때부터 어머니치마꼬리를 잡고 3.8절경축구경을 하였다. 그때는 물론 아이다보니 개눈깔사탕알을 받아먹고 어머니들이(할머니, 처녀들도) 춤을추고 노래하는것을 보는것이 제일 재미있고 유쾌한 일이였지만 후에는 차츰 3.8절을 제대로 알기 시작했는데, 청춘시절부터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성스러운 명절인즉 3.8절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이 관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이런관점을 갖게된것은 인간세상리치를 알아서거나 그무슨 정치사상각오가 있어서 그렇게 된것이 아니다. 나는 셈이 들면서 어머니의 로고를 너무도 눈물겹게 보았고, 받았고, 느꼈다. 그리고 많은 어머니들도 나의 어머니와 비슷함을, 지어는 더욱 혹심함을 보았다. 그때세월, 해방전은 말할것도 없고 해방후에도 개혁개방전까지는 농촌부녀들의 고생이 남자들보다 퍽 더 많았다. 이것은 구태여 일일이 말할것도 없는, 누구나 다 아는 력사적, 생활적사실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량식고생, 입는고생, 병고생, 돈고생이 그때는 보편적이였다. 특히 농촌에서 더 심하다보니 농촌부녀들의 고생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겠는가!... 3.8절인즉 그이들의 명절이라니 나는 감격과 기쁨과 고마움을 금할수 없었다.     해마다 3.8절을 맞으면 나는 격동된 심정을 안고 소감을 일기책에 썼다. 소감의 중심내용은 해마다 같았는데,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않겠다는것과 내가 일하게 되면 어머니를 꼭 호강시켜드리겠다는 맹세였다. 그러나 나는 맹세를 실천하지 못했다. 그것은 줄곧 신병을 갖고 악을쓰며 무리해온 어머니가 49고개를 넘지못하고 북망산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욕양이 친부대”(자식이 받들려고하니 부모가 기다리지 못하더라.)였다…     여기서 한마디를 부언한다면, 누구를 비판하자는것은 아니고, 지금세월 불효한 자녀들을 보면 나는 참으로 리해할수 없다. 부모를 박대하다니?!... 천만가지 리유를 댄다해도 나는 납득이 않된다. 똥오줌을 받아내는 부모래도, 치매에 걸린 부모래도 부모는 어느날 떠나간다. 다음은 영영 다시 보지 못한다… 나는 대소변을 시중들어야하고 식사를 시중들어야하고 정기도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를 90거이 17년을 모셔봤기에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수고를 모르는바는 아니다. 사람의 한생을 볼때 “사람은 늙으면 아이가 된다.” 아이는 어른이 보살피는게 아닌가!... 그리고 “물을 마일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말아야 한다.”는것은 최저의 도리 도덕이 아니겠는가!... 유치원애들도 말할줄아는 이런 천경지의의 “상식”이 커가면서 오히려 회박해 지고, 잊혀지고, 지어는 반대로 나가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나가는대로 말하다보니 갈지자가 되였는데 언귀정전, 71년도 3.8절을 말해보자.     그해 3.8절을 우리 인민공사혁명위원회(향정부)에서는 정치적대회사로 한바탕 본때있게 경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사혁명위원회의 “직승기령도간부”(반란으로 뛰쳐오른 간부) 들인 당위부서기 겸 혁명위원회부주임, 청년단서기 겸 혁명위원회위원, 부련회주임 겸 혁명위원회위원이 버쩍 열을 내서 기발한 창발정신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공사반란파총부에서 맹활약을 하던 그들은 혁명위원회간부로 출세를 하긴하였지만 “이농대간” (농민신분으로 국가간부직에 종사하는 사람)이였다. 그들 세사람의 속심에서 당전과업은 정식으로 국가간부가 되는 것이였다. 청년단서기와 부련회주임은 그외에도 또 입당을 해야할 간거한 과제가 더 있었다. 하여 그들은 천방백계로 정치사상수평, 사업능력이 높다는 것을 과시해야하며 정치업적을 많이 쌓아야 했다. 훗날 삐뚜러진것을 바로잡을때 이 세사람은 한결같이 자기 생산대로 쫓겨가긴 했지만, 당년에는 기세가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세사람 다 작풍문제에 걸려 전근같은건 말할나위도 없이 단통 쫓기우고 말았다. 단서기와 부녀주임은 요행 얻은 당표까지 떼우는 랑패까지 당했다.) 3.8절을 한달 앞두고 그들셋은 “창의서”(“전공사혁명적부녀들에게 드리는 우리의 한통의 공개편지”라는 부제까지 달아서)를 뻘건종이에 써서 공사대문짝옆의 담벽에 내다 붙혔다. 중점은 요약 다음과 같다. “… 모택동사상붉은기를 높히추켜들고 림부통수를 따라 강청동지를 본보기로 문화대혁명의 대풍랑속에서 계속혁명의 길로 용왕매진하는 우리 혁명적강철부녀들이여! 우리는 이번 3.8절을 우리공사 춘경생산대회전의 첯포성을 울리는 날로 하자! … 3.8절날 오전6시부터 오후6시까지(12시간) 혁명적인 실제적 실천행동으로 비료를 이고 지고 밭에 내여가는 운동을 하자! … 밤7시부터 10시까지 혁명적문예경연대회를 진행하자! …” 창의서는 그야말로 희세의 혁명적걸작이였다.     인차 기관단위들에서 “호응서”가 나붙고 대대들에서 “붉은마음표시”대자보가 올라와서 공사담벽에 쫙 들어 붙었다. 형세발전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이 신생사물에 대하여 민감한 무산계급정치적반응을 보여 즉각 “3.8절경축활동방안”을 제정하고 문건형식으로 기층에 하달하였다. 문건에서는 창의서의 첯조항 즉 춘경생산대회전운운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그것은 혁명위원회위원인 “민주혁명파”(반응이굼뜨다는, 뒤떨어졌다는 풍자. 원 공사당위서기와 사장 등}들이 3.8절을 춘경생산대회전개시일로 한다는건 농사절기상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거동이라고 해서 격렬한 쟁론끝에 “민주혁명파”들이 이겼기 때문이다. 하여 “3.8절비료운반운동”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비료운반운동부분에서도 문건은 대폭 중대한 수정을 하였다. 그것은, 로동시간을 8시간으로 하고 우차도 사용하며 우차에는 반드시 붉은기를 꽂고 남자들도 전부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사람마다 어록책을 주머니에 넣어 목에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금년 춘경생산대회전총결평비에서 3.8절날 상황을 중점으로 본다고 하였다.     만단의 준비와 련습을 하며 윽벼르는 와중에 드디여 3.8절이 왔다. 기관단위와 대대들이 총 궐기하였다. 남자들이 변소의 똥덩이를 꺼서 부녀들의 머리에 이워주면(우정 부녀들의 코앞으로 똥삽을 휘둘러서 구역질이 나게하며 흐드득거리는 치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고 지고 대렬을 지어 어록노래를 부르며 날쌔게 달리였다. (옥수수영양단지 만들곳에 날라갔다.) 퇴비무지는 바위덩이처럼 땅땅 얼었는데 남자들이 남포질을 하고 곡괭이를 휘둘러 끄고는 수레에 퍼담아 주면 부녀들이 2,3명씩 달라붙어 수레를 몰았다. 남자들만 수레를 몬다더냐!... “봉, 자, 수”(봉건, 자산계급, 수정주의)의 케케묵은 남존녀비사상을 짓부시자!... 부녀는 절반하늘이다!... 수레운전사들은 호매롭게 구호를 웨치고 어록노래를 부르고 웃고 떠들며 법석구니를 떨기도 했다. 소는 아무리 혁명열의를 다 내도 사람의 각오를 따를수 없었다. 그놈들은 사람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 몽둥이 찜질을 등어리며 엉덩짝에 무차별 수없이 당하며 또 욕사발을 먹었다. 어떤소들은 뼉다구만 울구덕 불구덕 분주히 바삐 작동하고 속도는 내지못해서 사람들이 고삐를 어깨에 메고 앞에서 끌며 달리는 바람에 코가 찢어질 지경이였다. 오늘은 소도 3.8절을 무던히 쇠게 되였다. 비료운반운동의 첯포성은 전공사의 방방곳곳에서 봄우뢰처럼 우렁차게 하루종일 울리였다. 저녘때가 되자 하루동안의 전투는 승리적으로 순조롭게 결속되였다.     잇따라 공사구락부에서 문예경연이 시작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로 엄청난 사건이 터질줄이야!     사건은 승리대대에서(원래의 이름은 복동)터졌다. 3.8절경축활동문건이 내려오자 승리대대 리서기와 부녀주임(하향지식청년)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들은 즉시 대대, 생산대간부확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였다. 승리대대의 리서기는 “4청”운동후기, 문화대혁명직전에 입당한 감때사나운 30대의 사내다. 그는 초중을 졸업하고 농사일을 시작했는데 눈매가 날카롭고 입이 맵짜고(말을 잘한다.) 성미가 까다롭고 사나워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였다. “4청”에서도 그랬지만 문화대혁명에서 그는 사람을 잡는 반란파의 본때를 충분히 발휘했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경의원지했다. 부녀주임은 인물체격이 츨츨하고 활발한 처녀였다. 그는 리서기가 지명해서 제발시킨 간부인데, 그들은 손발이 잘 맞았을 뿐만아니라 “아래”까지도 잘맞추는 사이였다.     리서기와 부녀주임은 이번에 전공사적으로 한번 본때를 보이자고 윽별렀다. 확대회의에서 리서기는 3.8절을 승리대대춘경생산대회전개시일로 한다고 선포한 후(내부결정) 정치적대사로 3.8절활동을 진행한다면서 주밀한 전투명령을 내렸다. 거기에는 공사혁명위원회문건지시정신외에 회한한 조목이 여러가지가 더 있었다. 몇가지만 본다면, 혁명적구호 등 정치표어를 붉은종이에 써서 곳곳에 많이 붙이며,(생산대마다 영구적인것을 다섯개이상 만들것.) 남녀불문 아이들까지도 모두 어록패를 만들어 목에걸것, “어록노래선진”, “충성무선진”, “량식절약대식품(나물 밥)능수”, “모범시어머니(며느리)”, 그리고 특별상으로 “모범남편” 을 생산대마다 1명을 선거해야 한다.(공사문건에서는 저작학습선진과 3.8홍기수를 선거하라고 했다.) 3.8절날 하루의 가마목일은 남자들이 책임질것, 생산대부담으로 간단한 연회를 조직하며(1년총결시 연회수평을 초과못함.) 혁명적문예활동을 할것같은것도 있었다. 리서기가 전투동원령회의를 잔뜩 긴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다우쳐 나가는데 1대생산대장이 삐뚜렁소리를 하여 분위기를 헝클어 놓았다. 그는 워낙 입이 사복개천같이 걸직한데다가 구변이 좋고 궤변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는 공사간부들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며 대대서기는 동네집애들같이 보았다. 그러나 군중위신이 좋아서 해마다 생산대장을 하였다. 말도 잘했지만 농사일에는 막히는것이 없었고 생산조직을 우선 잘했든 것이다. 그는 소리높히 씩뚝거렸다. “거, 한조목을 더 넣기오. 그날만은 안까니와 자는것두 잡아다 볼기를 치기우. 좋지?…” 회의장은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리서기는 련거퍼 엄숙하라고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는 1대대장을 노려보다가 질책은 그만두었다. 더 말을 하다가는 또 무슨 엉터리 궤변이 나올지… 리서기는 급급히 회의를 끝내버렸다. “강조하겠는데, 왕년처럼 시시껄렁한 우스개를 하거나 전투를 놀음질처럼 우습게 보면 간부는 모가지를 뽑아버리고 대비판에 세우겠소! 어디라구 감히! 전투태세를 똑바로 차리시오! 이만. 산회!”     리서기와 부녀주임이 이번 3.8절에 발벗고 나선데는 그럴만한 내역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그들도 공사의 “이농대간”들처럼 “과시”와 “업적”이 필요했던것이다. 리서기는 공사당위부서기 겸 혁명위원회부주임으로 올라간 사람과의 선발에서 미끌어진 사람인데, 그것이 앙심으로 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였다. 그는 림창이거나 량잠, 하다못해 사반기업같은데라도 들어가려고 왼심을 썼다. 부녀주임은 입당하고 공인모집에 뽑혀 시내로 돌아가기위해 적극성을 발휘하는 중이였다.     저녘후, 공사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할 선수팀이 대대판공실에 모여 출발준비를 하였다. 인솔자는 물론 리서기와 부녀주임인데 그들은 대원들의 사기를 돋구기 위하여 길은 4, 5리 멀지 않지만 뜨락또르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공사농기짬에 “얼빠”(2.8형. 그것이 쩍하면 우둘렁거리며 왕청같은데로 달아난다고 해서 붙힌 별명)가 두대 있었는데 운전수중에는 승리대대 청년이 한명 있었다. 그날도 운전수청년은 얼빠를 몰고 집으로 왔다. 그는 벌써 여러날 승리대대에 와서 제방돌을 실어 나르는 고된작업을 하고 있었다. 부녀주임은 운전수를 데리려 달려 갔다가 볼이 부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운전수가 피곤도 하지만 술을 먹어서 운전을 못하겠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일어나지도 않더라는 것이였다. 그는 워낙 술을 못하는 사람인데, 저녘에 3.8절마을연회에서 한두잔 마이고 곧바로 집에와서 쓰러졌던것이다. 리서기는 발끈 성이나서 “그눔아새끼!”하고 욕을하며 운전수를 데리려 갔다. 리서기는 운전수의 아버지가 “휘청휘청하는게… 어떻게 차를 모는가!”하며 막아나서는것을 듣는체도 하지않고 청년을 끌고왔다.     얼빠는 선수팀을(20여명) 싣고 공사구락부까지 무사히 갔다. 리서기는 경연을 구경하다가 운전수를 끌고 공사식당으로 갔다. 속이 출출하며 한잔생각이 간절했든 것이다. 그들은 경연이 끝날즈음 시간을 맞추어 구락부로 돌아와서 선수들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가 산모퉁이를 돌면서 그만 길아래로 굴러 떨어질줄이야?! 순간에 대형참사가 터졌다. 운전수와 부녀 2명은 당장에서 죽고(1명은 1대생산대대장의 처였음.) 1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후에 또2명이 죽었다.) 리서기와 부녀주임은 적재함뒤쪽구석에 딱 붙어 앉았는데 별로 상하지 않았다.     승리대대뿐만아니라 전공사가 한바탕 끓어번졌다. 온갖여론이 무성한데, 어데서부터 굴러나온 소린지 리서기와 부녀주임이 간통하는 관계라는 소문도 걷잡을 사이가 없이 전공사에 쫙 퍼졌다. 사람들은 리서기때문에 발생한 사고라며 분노해서 떠들어 댔다. 성미가 불같은 운전수의 아버지는 우멍낫을 들고 리서기를 쫓아다녔다. 그는 피값을 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광기를 썼다. 풍파는 10여일후에 운전수의 아버지를 붙잡아 가면서 차츰 누그러졌다. 령감이 잡혀가던날 운전수의 어머니는 풍을 맞고 쓰러졌다. 운전수네 집은 일조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운전수의 각시는 젖먹이갓난애를 안고 밤낮 울기만 했다…     운전수의 아버지는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은 빈농이다. 그는 무녀독남, 하나뿐인 아들이 뜨락또르운전수가 된것이 큰 벼슬을 한것보다 더 회한하고 가슴뿌듯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생벼락이냐! 리서기만 아니면 이런일이 있을수 있나? 그는 거이 미쳐버렸다. “개새끼! 공산당은 무슨공산당, 그런 개새끼가 날뛰는 것두 공산당인가! 그런 공산당은 다 죽여치워야 해! 너죽고 나죽고 끝까지 할테다…” 령감은 낫을 휘두르며 밤낮 발광을 하였다. 공사에서 달려오고 파출소에서 달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령감의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구렁이고 뱀이고 마구 튀여 나왔다. “3.8절은 무슨 개뿔짝같은 3.8절, 제노릇을 하려고 사원들을 들볶아 대면서. 국민당보다두 못한 개새끼! 우에 잘보이려구 개수작을 피우며…” 그는 리서기네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뜨락또르기름통을 안고가서 집안에 끼얹기까지 했다… 하여 현공안국에서는 “현행반혁명범”으로 운전수의 아버지를 붙잡아 갔던것이다.     공사와 현혁명위원회에서는 리서기가 운전수를 데려다 차를 몰게한것은 리해할수 있는거라고, 리서기를 감싸주며 책임은 전적으로 운전수에게 있다고 결론을 했다.     현에서는 우리공사의 그해 3.8절활동을 현적으로 가장 잘한단위라고 높히 평가하며 “이농대간”들을 구두표양까지 했다. 동시에 승리대대를 모범전형이라고, 특히 3.8절을 춘경생산대회전개시일로 한것은 현적으로 전례없는 혁명적창거라고, 농업에서 대채를따라배우는운동에서의 한차례의 획기적인 혁명이라고 하였다. 사고에 대해서는 혁명을 하려면 회생이 있기 마련이라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 계속 혁명투쟁을 하는것이 우리의 무산계급혁명투쟁전통이라며, 승리대대에서는 3.8절후에 춘경생산대회전을 억세게 틀어쥔것이 더욱 보귀한 혁명적행동이라고 높히 긍정하며 표양했다.     3.8절경축활동후 우수한 활학활용강용자가 용솟음쳐 나왔다. 그중에서도 강용을 가장 잘했다고 표양받은 인물로는 두사람이 뽑혔는데 하나는 소학교 녀선생이고 다른하나는 공사위생원의 호사였다 그들은 3.8절날 똥짐을 나른 생생한 체험을 갖고 자기의 산사상활동을 심각하게 강용했는데, 계급투쟁, 로선투쟁, 문화대혁명, 계속혁명과 세계관, 인생관의 높이와 깊이에서 매우 폭넓게 강용을 했다. 그들은 강용의 마지막부분에 가서는 자기가 모택동사상의 광휘로운 빛발과 위력하에 사상상 돌변적인 비약을 해서 공산당원의 표준에 부합되는 혁명전사가 되였다고, 이것은 또 하나의 모주석의 혁명로선,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승리이며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기꺼운 수확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높히 웨쳤다. 청중들은 그들의 철면피한 자화자찬에 입이 쓰거워 났다.     호사는 강용을 어록노래와 충성무까지 넣어가며 정신없이 하다가도 청중을 이끌어 구호를 웨치고 어록학습도 시키고 노래와 춤도 추게하며 장내를 흥성흥성 혁명적분위기가 넘쳐나게 하였다. 호사는 순회강용에서도 그렇게 하여 참신한 강용방법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소학교녀선생도 인차 호사의 선진적인 방법을 모방했지만 호사보다는 좀 부족했다.     그해9월 림표가 자멸하면서 그들의 강용은 한물이 지나갔다. 하지만, 국경절전야에 한패를 입당시킬때 그들은 영광스럽게 입당하여 오매불망 다년간 애써온 소원을 성취하였다. 좀 유감스러운 것이라면 호사는 병원의 령도가 되려는 혁명적꿈을 실현하지 못한것이라 하겠다. 학교선생은 학교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되였다.     호사는 우리공사에서 제일 먼저 뛰쳐나온 반란파인데, 다리를 절뚝거리는 잔페군인출신의 원장을 얼굴에는 광대를 그리고 고깔모자를 씌우고 헌양철퉁재를 뚜드리게 하며 공사마을로 끌고 다니며 투쟁한 장거를 단행한 사람이다. 그는 착오도 없는 원장을 “령도니까 뚜드려야 한다!”면서 그런 모욕적인 행패를 했는데, 격분한 군중들의 제지로 더 할수없었다. 기실은 자기를 입당시켜주지 않은데 대한 보복이였다.     그는 이악스럽고 일하기 싫어하며 혁명에만 달아다녔다. 내부단결, 복무태도 등 방면에서 그는 군중위신이 아주 나빳기에 령도로 되지못했다.(호사는 “이농대간” 당위부서기와 작풍문제로 말썽이 있었는데 젊은나이에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후에 그는 애비벌 되는 한국령감에게 재가를 하고 국적까지 가져갔다.)     그해 국경절후 승리대대 부녀주임은 갑자기 토하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 임신이였다!     조사가 진행되자 대대서기는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당시 지식청년을 다치기만하면 특별히 엄한 처리를 했는데, 서기는 질겁한 것이다. 부녀주임은 금방 얻은 당증을 떼우고 다른공사 집체호로 갔다.(훗날 현농구창 공인이 됨.) 운전사의 각시는 시어머니가 죽은후 집을 생산대 빚으로 들여놓고(흉가라고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로 재가를 했다. 5년후 감옥에서 나온 운전수의 아버지는 강물에 빠져 죽고말았다.     세월은 많이 흘러갔다. 그해의 3.8절도 이젠 옛말이 되였다. 그러나 력사는 강물처럼 오늘도 출렁출렁 끊임없이 흐르고 생활의 활무대는 여전히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돌고있다. 력사의 활무대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나름껏 연출하고 있다. 선과 악, 미와 추, 공과 사 그리고 우점과 결점은 력사에 그대로 찍힌다. 사람들은 그것을 필름처럼 보면서 경험과 교훈을 두고두고 말할것이다…                                                                                                                                 13.2
64    진달래 댓글:  조회:2111  추천:8  2014-03-03
           수 필                                             진 달 래                                                                                                         회 령     호원선생! 일간 안녕하세요? 글도 잘 쓰시고…     일전에 문우들과 함께 “화엄사”로 갔을때 진달래를 보고 감상이 어떠냐고 물으셨지요? 그때 나는 “글쎄요…”하며 대답을 못했지요. 문우들과 작별한후 선생의 물음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의미가 심장하더라구요. 진달래가 우리를 상징하는 꽃으로 선정이 되였다고 하니 생각은 더욱 깊어 졌어요. 나는 새삼스레 내가 진달래를 몹시 애착한다는것을 발견 했어요. 애모의 심정은 절절하나 시인이 아니여서… 지금 투박한 심정을 대답 드립니다.     나는 진달래를 서글퍼하며 지어는 싫어 했어요. 이런 심정은 어머니를 면례(이장)한후 더욱 심해 졌어요. 청명이면 우리풍습에 산소로 가지요. 한다하는 “홍색반란파”들도 그것만은 막지 못했어요. “네가지 낡은것”을 때려부신다며 상여막에까지 불을지른 그들이였지만 조상은 그들에게도 있는거고 낳아키워준 부모는 차마 괄시할수가 없었든거지요. 어찌되였든, 사람들은 청명이면 명심해서 산소로 갔습니다. 나도 물론 경건한 마음으로 어머니묘소에 갔습니다.     어머니산소는 풍만한 산줄기가 멀리로부터 줄금줄금 키를 낮추며 굽이쳐 내려오다가 머리숙인기슭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묘앞에서 내려다 보면 부채를 펼친것처럼 새강벌이 바라보이고 그 품에는 이곳저곳에 마을이 있고 두만강은 저 멀리로 들판의 동쪽변두리를 감돌며 북으로 흘렀어요. 이곳이 무슨형국의 묘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마음에는 늘 어머니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나 지천으로 널려있는 진달래는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청명 그때에는 진달래가 피지 않습니다. 뭇산은 겨울 난 그대로 모든 초목이 검스레, 부여스레 말라 있고 소나무만 여전히 싱싱 푸르지요. 잡목과 잡초들을 가려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산골에서 자란 나는 거지반 알아 봅니다. 이깔나무, 가둑나무, 비슬, 개살구, 물오리, 드릅나무, 피나무, 딱총, 열구밥, 개암, 싸리는 누구도 가리기 쉬운거니 말할것이 없고요 땅딸기, 더덕, 밥조개, 도라지, 수루취, 곰취, 물퉁구마른풀도 쉽게 가려 냅니다.     진달래에 대해서는 두말이 필요없습니다. 뿌리만 보고도 알아내지요. 진달래나무는 키는 작아도 떨기로 뭉치며 가지가 많고요 아무리 가는 가지라도 꺾기면 꺾겼지 구부러들지 않아요. 말랐을 때는 더욱 강하답니다. 누가 만약 묶으려 들면 와작와작 부러져 버려요. 불씨를 만나면 확! 붙어버려 한줌의 재가 될지언정 구차하게 숫덩이로는 남지 않아요. 아시다싶히 응달에서도 무더기 무더기 완강하게 자라며 거치른 바위츠렁도 떨기떨기 덮습니다. 찬바람 세찬 4ㅡ5월이면 기슭으로부터 산마루로 치달으며 산불처럼 붉게 붉게 피여 납니다. 봄이 옴을 선언 합니다. 하여 봄의 선구자라 찬양하지요.     사람들이 진달래꽃을 보면 찬탄하게 되는것은 산발을 뒤덮은 그 기세 때문입니다. 장관이지요. 그리고 또 한자리, 한아름씩 피여난 꽃은 정답게 눈에 안겨 옵니다. 아직도 잠자고 있는 거뭇한 산발에서 유난히 눈부시죠.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피여나 나비는 춤추고 벌들이 분주할때 만산이 푸르러 봄이 완연하면 진달래는 그속에 사라 집니다.     언제부터선지, 진달래를 보거나 생각할때면 자연히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였고 사념은 저도 모르게 흘러 선인들과 우리민족, 력사와 현실, 그리고 미래를 사색케 하였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저 진달래와 같았습니다. 가난한 집은 진달래가 뿌리박은 척박한 흙층 같았으나 어머니는 억세게 자랐습니다. 글은 몰라도 농사일에는 막힘이 없었고 누구보다도 날쌔게, 알뜰히, 잘 하였습니다. 하여 농업사때도, 인민공사시절에도 여러번 로동모범으로 당선 되였고 제일큰 모범으로는 공사(지금의 향)로동모범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낫과 목책을 상품으로 탓는데 손바닥만한 목책은 나에게 주었어요. 어머니는 지병으로 몹시 허약한분이 였어요. 그세대분들은 병이 많았죠. 대대로 물려받는 가난의 “은혜”죠. 어머니는 여러가지 신병중에서도 혈관신경성두 통증으로 특히 모진시달림을 받았습니다. 두통증이 일어 날때면 너무도 고통스러워 마구 몸부림을 쳤어요. 하지만 생산대일을 빠지지 않았죠. 어머니는 가난과 고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 로동뿐이라고 생각한것 같아요. 그이는 정말 말그대로 악을 쓰고 결사적으로 일을 했어요. 강한분이 셨죠. 하지만 결국은 마흔아홉고개를 넘지 못하고 딱! 중턱에서 사망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 남매는 오늘날 잘먹고 잘사는 세상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인생은 어땧습니까?!... 그이는 진달래처럼 일찌기 사라졌습니다. 화려한 봄날을 보지 못했죠. 력사를 보면 우리민족 선인들은 모두 그랬습니다. 백화가 만발하고 신록이 무르녹는 새중국의 봄을 위하여 그이들은 진달래처럼 산과 들에 붉게 탔었지요! 거룩하고 장쾌한 그 전진은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렬사비네!”하고 후세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습니다. 그이들이 가진것이 이것밖에 또 무엇이 있나요?...     사색이 이렇게 흘러가면 나는 서글퍼지는 마음을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창한 심정은 진달래를 슬그머니 외면케 해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적절한 표현을 찿지못하여 “싫어한다.”고 한겁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민족은 대를 이어 끈질기게 전진 합니다. 새중국 창건과 건설을 위하여 당년에 선인들이 억센분투를 하였다면(그야말로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 가면서!) 오늘은 어떠합니까! 개혁개방의 새 시대를 맞아 동포들은 거세찬 진군을 하고 있습니다. 건국전후 그 시기를 첯번째 격동기라 한다면 지금은 두번째 격동기라 할가요?! 960만평방키로 조국대지에서 우리민족의 젊은이들은 활개 칩니다.(광활한 중국의 대지위에 조선의 젊은이들 행진하네!) 조국산천에 지천으로 만발한 진달래를 보는것만 같습니다. 그뿐인가요? 세상을 두루 둘러 보세요. 어느곳에서나 우리동포가 보여요. 억세게들 일하지요. 고향 연변은 또 어떤가요! 왁작 왁작 일떠나지요?! 번영으로 달리는 기상이지요. 진달래가 불붙듯 피는것처럼!…     나는 우리민족을, 진달래를 자랑차게 생각합니다. 사랑 합니다…                                                                                                                          10.5
63    제손으로 만든 뒤웅박신세 댓글:  조회:2412  추천:2  2014-02-28
실화                                             제손으로 만든 뒤웅박 신세                                                                                                             회령     미옥이는 꽤 해사하게 생겼는데 초중때에 벌서 남자애들과 련애작란을 한 경력을 갖고있다.     보슴털도 채벗지못한것이 련애질을하고 공부는 또라지여서 마을 사람들은 말할것도없고 그의부모들조차도 “간나가 사람질을 제대로 하겠는지 모르겠다” 하고 은근히 근심했다. 미옥이는 위로 오빠가 셋이고 막내딸인데 학교졸업 후에는 별수없이 집에서 농사일을 하였다. 하지만 일하는 날수는 적고 멋을따며 놀러 다니는 차수는 무척 많았다. 개체농사니 말이지 집체화 시절이라면 아무리 양념딸이고 미인이래도 대비판 대상에 올랐을것이다. 일하지않는자는 먹지말라고 했고 집체생산로동에 적극적이 아니면 대채건설 락후분자라고 할때니까.     열아홉이 되던해 미옥이는 시집을갔다.     신랑은 십여리 떨어진 아래마을 신용사회계였다. 이름은 영수, 미남이고 아주 정직한 청년이였다. 사람들은 미옥에게는 과분하다고, 미옥이가 시집을 잘 간다고 치하를 해주었다. 영수에게 부족한점이라면 위염으로신체가 좀 허약한편이고 딸이 넷인 집에서 귀하게 자란고로 굳센일을 잘하지못하는것이였다.     어린부부는 부모들 그늘밑에서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았다.     모두알다싶이 외국바람 도시바람이 맹렬속도로 불어치면서 농촌마을들이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     부모들의 기력은 날따라 못해가고 영수의 쥐꼬리월급은 생쥐볼가심 정도로나 조금씩 올랐다. 귀엽게 생긴 두딸애는 잘자라고 있었지만 애들이 커갈수록 영수부부의 근심걱정도 커갔다. 그들이 다니던 초중학교는 언녕 없어지고 중학교부터는 시가지에 가서 하숙을하며 다녀야했다. 애들은 공부를 잘 했는데 그들의 형편으로는 그것이 큰 근심거리였다. 미옥이는 남편에게 그까짓 월급 때려치고 한국벌이를 나가라고 성화를했다.그러나 영수는 안해의 닥달을 당하면서도 끝내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험한 일만 해야 한다는 한국이 두려웠다. 늙은부모들은 마치도 아들을 사지판에 보내는것만 같아서 극구 반대를했다. 화통이 발딱 치밀어 오른 미옥이는 자기가 가겟다고 검으락 푸르락했다. 영수와 시부모들은 그것도 안된다고 잡아뗐다. 바람쟁이가 우글우글 한다는 한국에 꽤 이쁘고 젊은 녀자를 혼자 내 보낸다는 것이 도무지 탐탁치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고집이 센 미옥이를 당할 재간이없었다. 여러날 싱갱이 끝에 미옥이가 나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마침 그때 다른집 녀자들도 몇이 나가자고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형편이형편이니만큼 영수는 이리저리 리자돈을 꾸고 변통을 해서 안해를 한극에 내여 보냈다. 검은비자였지만 재수가 붙어서 미옥이 일행은 무사히 한국에갔다. 그리고 수월이 술집에 일자리를 찿았다. 고되긴 해도 돈벌이가 잘되어 그해안으로 빚을 갚고 집에 전화까지 놓고 달마다 7ㅡ8천원씩 돈을 보냈다. 마을사람들은 한국벌이를 나간 집들을 침을 한발씩 흘리며 부러워했다. 영수는 가슴이 흐믓해 났다. 부모들도 은근히 좋아했다.     이듬해봄 영수는 신용사가 없어지면서 재수딱지가 없이 정리해고를 당했다.     일에 서툰 그는 늙은부모를 따라 일손을 도우며 그럭저럭 소일하였다. 안해가 달마다 목돈을 보내기에 무슨 업을 벌일 생각도 없었고 그런 궁냥을 하지도 않았고 나지도 않았다. 안해가 버는 돈으로도 부자가 되는데 허욕을 쓸게 뭐람…영수는 안해를 한국에 보낸 불중태들과 다정해져서 여름에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당나무 그늘 밑에서 마작놀이를하고 동삼에는 개를 잡아 안치고 술놀이를했다. 영수는 술과 담배를 질색이였는데 차츰차츰 파겁을했다. 그러지말고 고생하는 안해를 생각해서라도 무슨 일을 좀 하라고 동생들이나 처남들 혹은 사촌들이 권고를 하면 그는 오히려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친구들은 시내 술집에가서 주전부리를 하기도 했지만 정직한 영수는 그런 짓은 하지않았다.     그해말 마을에서는 미옥이가 한국에서 다른 나그네와 붙어 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얼마후에는 영수네 집에서도 알게되였다.     영수와 미옥이는 전화로 다투기 시작했다. 제일 험악한 싸움은 이듬해 3.8절날 밤에 터졌다. 술을 좀 마인 영수는 끓어 번지는 분통을 참을길 없어서 안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이 미옥이가 전화를 받았다. 그전에는 다른사람이 전화를 받고는 미옥이가 어데로 나갔다면서 전화를 끊을때가 많았는데 받는 사람은 녀자일 때도 있고 남자일 때도 있었다. 그럼 미옥이가 들어오면 집에 전화해 달라고 부탁하면 대답은 하는데 근근무소식이였다. 아예 전화기가 꺼져 있거나 받지도 않고 끊어버릴 때도 많았다. 너무도 분이치밀어 그럴때마다 영수는 며칠씩 자지못하며 공연히 곁사람들과 신경질을 썼다. 분한나머지 혼자서 주먹을 치며 운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영수는 신경쇠약으로 치료를 받기까지했다. 부모형제 친척들은 모두 격분은 하면서도 미옥이 신세에 사는데…아이들을 보더라도 분하지만 참으라고, 참는수 밖에 없다고…권고하고 지어는 나무리기까지했다. 영수는 그중 똑똑하다는 셋째처남한테 미옥이를 타일러 달라고 방조를 청했다. 그런데 처남이라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온집식구가 미옥이 덕에 먹고 살면서 아이들 공부시키는 주제에 무슨 흥타령인가고… 그냥 살겠으면 곱도록히 가만 있으라는 것이였다. 한몽둥이에 처죽일것들…영수의 가슴은 분노로 늘 부글 거렸다.     전화기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거, 코고는 사람이 누기야? ”     “누기문 어째? 돈을달라구 전화질이야?... 아이들은 상관말고 저절로 벌어 먹어. 날 바라지 말구.”     “누가 네 신세에 살자니? 야! 이 화냥년아, 그놈 전화 바꿔!”     “시끄러! 재간있으문 맘대루 해. 자신없으문 가만있구.”     미옥이는 전화기를 꺼버렸다. 영수는 두주먹을 불끈쥐고 가슴을 쾅쾅쳤다. 미옥이 신세에 산대서야 말이되는가?! 이제부터 이 가정을 보란듯이 내가 메고 가리라! 영수는 드디여 결심하고 나섯다.      그해 두어달후 영수는 한국으로 나갔다.     그는 한국에 나간후 미옥이를 만나자고 여러면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미옥이는 피하기만 하다가 후에는 아주 련락이 끊어졌다. 영수는 미련을 철저히 버리고 이를 악물고 일했다. 그는 건축회사에서 일했는데 전기가설을 맡아했다. 그는 간단한 전기기술을 알고 있었던것이다. 회사에서는 영수가 정직하고 책임성 있는 사람임을 보아내고 그에게 반장책임까지 맡기였다. 영수는 돈벌이가 무척 잘 되였다.     팽이처럼 돌아치는 세월은 언뜰 6년철이 지나갔다. 그간, 영수는 부모님들을 시내 딸집곁으로 이사시키고 (두 녀동생이 시내에서 산다)아이들의 공부 뒷바라지도 잘해주었다. 큰딸은 이미 대학졸업을하고 청도에 있는 일본회사에 취직 했는데 연길총각과 저희들 끼리는 약혼이 다 된 모양이다. 작은딸애는 지금 북경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미옥이는 딸들과는 드문드문 련계가 있지만 딸들이 점점 더 정이 없어 하는 바람에 미지근한 상태다. 그간 죽자살자하던 룡정사내는 위암이여서 집으로 돌아 갔는데 더는 거래할 멋이 없게되였다. 미옥이는 이사내 저사내와 붙어 다니기도 했는데 저축한 돈도 얼마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저기가 아프기도 해서 그는 중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갈곳이 없었다. 오빠네들 집으로 가니 시큰둥한 표정인데 올케들 눈길이 또한 곱지않았다. 미옥이는     룡정에 셋집을 맡고 하숙생 몇을 두기도 했는데 시답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젠 힘도 부족했고 일자리도 그닥지 않았다. 야릇한 눈길로 자기를 쳐다보는 사내들도 별로 없었다. 그는 자기가 이젠 아줌마도 지나간 중다리 할머니임을 알았다.     그는 있는 비위를 다 쓰며 영수의 행방을 찿았는데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왔다. 미옥이는 큰딸을 찿아 갔는데 큰딸은 여기서는 어머니가 할일이 없으니 집으로 가라고 했다. 완전히 꺼리는 눈치였다. 어데로 갈것인가… 시집켠은 차마 갈수없고 본가마을에도 갈만한 곳이 없었다.     미옥이는 다시 셋집을 맡고 어떻게 할가를 이리저리 궁리했다. 그러나 신통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영수는 지금도 한국에서 열심히 즐겁게 일하고있다.     누가 미옥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잊은지도 오래다면서, 딸들을 시집보낸후 처녀장가 갈거라며 한바탕 우스개를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허투로 들을수 없다.                                                                                                                              08.2
62    순간의 탈선으로 생긴 비극 댓글:  조회:2349  추천:0  2014-02-24
              실화                                    순간의 탈선으로 생긴 비극                                                                                                     회령     항미원조 전쟁이 끝난후 2년두달이 지나서 탁준보는 제대되여 고향마을로 돌아 왔다. 준보는 한없이 기쁜마음으로 걸음도 가볍게 아니, 마음은 언녕 나래돛혀 고향에, 부모형제 곁으로, 더 솔직히 말한다면 안해 곁으로 달려 왔다. 인물은 함박꽃 같고 체격은 싱싱탄력 있고 마음씨는 쾌활하고 너그럽고 무던하며 춘향이 같은 절개 심청이 같은 효심의 순금이는(그때 처녀들의 마음씨는 절대 대부분이 순금이와 같았다.) 원근에서 1등처녀라고 소문난 색시감이 였다. 지랄같은 조선전쟁이 일어나던해 늦은봄 준보와 순금이는 잔치를 하였다. 많은 시아버님 시어머님 덜먹총각들이 그리고 장인 장모 호마같은 처녀들이(준보도 끌끌한 총각이였다.) 군침을 꿀꺽, 꼴깍 넘겼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였다. 사람들은 말그대로 천생배필이라고 찬탄을 하였다. 심술궂은 사람들은 속으로는 끙끙 배를 앓았다. 그러나 무슨 용빼는 수가 있는가. 잘코사니 였다. 누가 못난데다 심술마저 고약하라 했든가.     잔치한해 9월 진보적 청년인 준보는 당과 모주석의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항미원조에 뛰여 들었다. 포연탄우의 가렬처절한 현대전에서 수십만 전우들이 삼대 쓰러지둣 희생되였다. 그러나 준보는 파편에 종아리가 한번 긁히였을뿐, 진지를 끝까지 고수하여 그번에 군공메달을 받았다. 물론 모자며 아래위 군복에 탄알과 파편이 찢고 꿰뚫고 나간것은 몇십번인지 그도 기억하지 못한다. 준보는 죽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잔페로도 되지 않고 씩씩하게 돌아 왔다. 하느님이 아니면 보살님이 보우했다고 볼수밖에. 그러나 준보네는 본인은 두말할것도 없고 그 누구도 하느님이며 부처님이 어느동네 살아 계시옵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힘으로 바른 량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밖에 몰랐고 대대로 그렇게 살아 왔다. 그러나 가난을 벗지 못하다가 부모들 대에 와서야 당과 모주석의 은덕으로 번신을 하였다. 준보는 당과 모주석을 무한히 열애 하였다.     보리저녘켠에 준보는 도랑꾸(트럭. 그때는 그것이 려객차질도 했다.)에서 내려 마을까지 5,6리길을 반달음을 하였다. 부모형제들은 마구 얼싸 부등켜 안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순금이와는 그러지 못하리. 하지만… 그건 따로 때가 있다.     마을어귀에 이르니 어데선가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집과 가까워 질수록 통곡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고 그것은 분명 자기집에서 울려 나왔다! 웬일인가?! 준보는 한달음에 집으로 뛰여 갔다.     순금이가 죽었다! 이틀전 이른아침 어머니는 뒤울안 살구나무 고목가지에 목매죽은 순금이를 발견하고 넋이 나가 고함치다가 기절해 버렸다. 준보가 나타나자 초상집은 더욱 상측집이 되여 버렸다. 친척들과 마을사람들은 준보네 집에서 줄줄히 초상이 난다고 야단들이 였다. 그들은 준보네 집에 밤낮 붙어 있으면서 준보와 그의 부모들을 안착시키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순금이가 왜서 자살을 했는지 경악하며 그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푸르싱싱하던 순금이는 왜서 자살을 했는가? 내막은 너무도 억이 막힌다. 준보가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은 순금의 장례날이 였다. 준보의 어머니는 며느리의 보내줄 유품들을(태워버릴 물건) 들춰 내여 놓다가 무어라고 쓴 종이장을 발견 하였다. 어머니는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아들에게 그 종이장을 넘겨주며 뭐라고 했는지… 하며 더욱 목메여 하였다.       준보동무!! 여보!!    나는 말언덕 수수밭에서 22일오후 구정부 오진묵이 한테 겁탈을 당했습니다. 죽기로 싸웠으나 기진맥진하고 혼미한 상태에서 당하고 말았습니다. 파출소에 고발하려니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고 놈을 죽이려니 기회가 언제 있겠는지… 원통하고 수치스러워 한시도 살고싶지 않습니다. 숨기고는 더욱 살수 없습니다. 오진묵 이 미친개새끼를 천하에 발가 놓고 원쑤를 갚아 주세요!! 한번 더렵혀진 이몸은 살수 없습니다. 나는 죽을때까지 참다운 녀자로, 안해로 살리라 맹세 했는데 그것이 여지없이 짓밟혔어요. 녀자에게서 정조를 빼놓으면 무엇이 남습니까. 더는 녀자가 아니지요.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더러운 몸퉁이 뿐이죠. 목숨보다 더 귀중한 정조를 더럽히고 어찌 삽니까!! 내가 산다는건 나 자신과 당신 그리고 가족, 친척 여러분께 치욕일 뿐입니다. 원통합니다!! 이글과 나의 죽음을 증거로 원쑤를 갚아 주세요!!                                                                                           순금이                                                                                                        9. 24     오진묵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구(향)정부에서 청년단서기로 공작하는 사람인데 준보와 같은 년령이다. 아버지는 현의 무슨 령도간부인데, 진묵이는 안해를 데리고 구정부마을에서 비둘기 살림을 하고 있었다. 진묵이는 조선전쟁이 일어나던해 초봄에 구정부에 왔는데 그때는 청년단간사 였다. 안해는 무직업이여서 집에서 놀고 있다가 얼마후에는 소학교 선생으로 들어 갔다. 사람들은 공부도 못한 농촌녀자가 인물덕에, 남편덕에 출세를 했다느니, 시애비를 잘 만난 복이라느니 하며 부러워 했다. 진묵이는 문체에 흥취가 있는 활발하고 미끈한 청년이였다. 그는 초중을 다니다가 왜서인지 그만두었는데 말을 잘했다. 항미원조 동원공작이 개시되자 진묵이는 농촌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청장년들에게 동원연설을 하였다. 그의 연설은 기가 막히게 웅변적이였다. 동원이 뜨직한 마을에는 두세번 내려가서 연설을 하면서 그는 자기도 군대에 간다고 선포를 하기도 했다. 당과 모주석께서 부르시면 그자리로 조선전쟁터에 용맹하게 달려갈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전쟁터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않는가고 물으면 그는 조직의 수요에 복종한다고 하였다.     한달음에 구정부로 달려간 준보는 눈에 달이 올라 진묵이를 찿았다. 청년단 서기실에서 진묵이는 공작성과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준보는 다짜고짜로 진묵이를 쥐여 태를치고 짓뭉개 놓기 시작했다. 아예 때려죽일 잡도리인데 사람들이 달려와서 겨우 뜯어 냈다. 진묵이는 반주검이 되여 병원으로 업혀 갔다.     몇달후 진묵이는 총살을 당했다. 사람들은 당장 죽이지 않는다고 증오를 했지만 그래도 거이 일년을 살았는데 그것은 현에 있는 아버지덕이 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도 결국에는 보배아들을 살리지 못했다. 진묵이는 탄백에서 반반한 녀자들을 보면 음욕이 일고 네명의 녀자를 직접거리며 회롱 했는데 모두 코를 떼웠다고 했다. 그는 이러면 안된다고 자신을 경고 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9월 22일 하향했다가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 오다가 수수밭 오솔길에서 순금이를 만났는데 순간 수욕이 치밀어 겁탈 했다는 것이였다. 순금이는 돼지풀을 뜯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였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현성에서 어느반란파의 두목으로 있은 진묵의 외사촌동생 동광문이는 반란파들을 끌고 와서 준보를 호되게 투쟁 하였다. 당시 준보는 공사(향)당위서기 였다. 얼마 안되는 공사내 반란파들은 준보에게 대자보를 붙히고 투쟁대회를 하긴 했으나 호되게는 해내지 못했다. 그것은 군중들의 보호가 억셋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이 더욱 창궐해 지면서 반란파들은 증실할수 없는 특무혐의를 준보에게 들씌우며 물고 늘어졌다. 광문이는 현성의 반란파들을 여러번 끌고와서 준보를 때려죽일듯 날뛰였으나 번마다 군중들의 단호한 제지로 음모를 실현하지 못했다.     림표사건후 준보는 공사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되였는데 4인패가 거꾸러진 후에는 현 농업국 국장으로 전근 하였다.     순금이가 죽은후 사람들은 오랜세월 애석해 하면서 그래도 죽은것이 옳다고 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진묵이 때문에 비극이 생겼다고 했다. 더 깊은 원인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 깊은 원인이 있는가?     지금에 와서는 “만약시…” 하면서 사람들이 엇갈리는 견해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력사에는, 인생에는 “만약”이라는 전제가 없다. 오직 무정하고 엄연한 사실만이 있을뿐이다.     순금이는 죽었다. 진묵이도 수치스러운 끝장을 보았다. 스물여섯이란 어린나이에.     하지만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며 관념이 그 어떻게 변한다고 하여도, 경천동지의 천지개벽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사람의 기본도리(량심, 도덕, 법)는 변할수 없다. 이를테면 정조를 소중히 여기며, 비량심적, 비도덕적, 비법적행위(부정부패)는 하지말아야 한다. 사람의 기본도리는 천경지위다. 유장한 인간세상은 줄곧 그랬고 또 그럴것이 아닌가…                                                                                                                  10.10
61    탐욕은 빈궁으로 간다 댓글:  조회:2219  추천:7  2014-02-21
         잡문                                       탐욕은 빈궁으로 간다                                                                                                                회령     명나라 학자 진계유선생은 동생이 현령으로 발탁되여 임지로 떠나갈때 “탐은 빈과 가깝다.”라는 글 몇자를 써 주었다.     동생은 탐욕기가 많은 사람으로 부자였는데 코밑진상을 해서 벼슬을 삿다. 가난한 진선생은 먼길을 가는 동생에게 무얼 줄것은 없고 그러나 련련한 형제의 정을 못이겨 “탐자근빈”이라는 넉자를 써서 주며 앞날을 면려했다. 그러나 동생은 코웃음을 치며 종이장을 구겨 던졌다. 이티후 그는 탐오에 걸려 가산을 전부 몰수당하고 감옥에 갔다. 그의 처자는 거지가 되여 진선생을 찿아 왔다.     진선생이 동생에게 써준 “탐자근빈”넉자에는 변증법적 철학적 교시적 깊은 함의가 있었다. 즉 탐욕의 결과는 흔히 부유해 지는것이 아니라 빈궁에 이르는 것이기에 명심하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동생은 형님의 교시를 우습게 알았고 결과는 패가 망신을 했던 것이다.     탐욕은 일단 사달이 생기면(생기게 마련이다.) 다 토해내야 할뿐만아니라 법적처리를 받아야 한다. 벌금을하고 감옥에 가야한다. 그러니 빈털털이가 되기 십상이고 명예며 직위며 모든것이 끝장나고 랑패를 보는것이다. 지어는 목숨마저 잃게되니 부유가 다 무었인가! 빈궁도 없다. 이런것을 “양극음` 음극양` 물극필반”이라고 하는데 현대 말로는 “량변이 질변을 이르킨다.”고 한다.     서한의 등통은 벼슬이 대부로서 가히 말해서 더 바랄것이 없는 사람이였다. 황제 문제는 그를 매우 귀중히 여기며 총애하여 헤아릴수 없는 장려를 자주 많이 주었다. 그러나 등통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문제는 촉군에 있는 동산을 등통에게 주어 그곳에서 생산되는 구리로 돈을 만들어 가지게 했고 그 돈을 전국에서 류통케 하였다. 하여 서한의 돈을 력사에서 “등씨돈”이라고 하는데, 이쯤하면 무엇이 더 욕심 나겠는가! 그러나 등통의 탐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 하였다. 황제자리까지 주어야 비로서 탐욕이 만족 되겠는지…그럴 상황이였다. 하다보니 거국상하 백성으로부터 황실, 태자에 이르기까지 원성과 증오가 하늘에 치달았다. 얼마후 경제가 즉위하자 등통은 철직당하고 모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경제는 너그러운데다 부황의 면목을 봐서 등통을 릉지처참은 하지 않았다. 등통은 빈궁하다 못해 결국은 굶어 죽었다.     광서쫭족자치구 원 주석, 전국인대부위원장 성극걸은 권세욕, 색욕, 물욕, 금전욕, 향락욕ㅡ탐욕이 무한정한 사람이였다. 하여 그는 일락천장으로 가산을 몽땅 몰수당하고 66살에 총살당하였다. 빈궁은 커녕 목숨도 건지지 못했다. 등통보다 더 수치스럽고 비참한 말로를 걸었다. “5독” “5미”에 구전하게 절은 성씨는 살아서는 증오와 악취를 기껏 풍기였고 죽어서는 교훈과 추명을 가득 남겼다.     가히 말해서 탐욕의화신 성씨는 지금 득시글거리는 부정부패분자들이 형님, 오빠, 아저씨, 훅은 아버지, 할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선배며 “귀감”이라 할수있겠다.     부정부패분자들은 목숨을 “요행”이라는 부적에 걸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작간을 조직에서, 정부에서, 사람들이 “요행” “모르기”를 밤낮 빌며 바라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가 뜻대로 되는것이 몇개나 있는가. 특히 부정부패 짓거리는 더욱 쉽게 사람들의 눈에나고 말밥에 오르는 법이다.     탐욕에는 “요행”이 없다. 그것은 탐욕이란 혼자하는 일이 아니고 반드시 남을 해치면서 하는 비행이기에 객관에 꼭 그 자취를 남긴다. 때문에 “요행”이고 “모르기”고 바랄것 없이 스스로 하지 않는것이 상중지상 책이다. 원체 하지않은 일을 요행이며 알고 모르고가 어데 있겠는가.     어떤사람들은 “아무개는 얼마를 처먹고 아무개는 첩이 몇개고…그래도 무사히 잘만 살더라.”고 말하는데 그건 무사한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열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죽는 법이다. 진의원수가 말한것처럼 “보응이 없는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보응이 있다.” 그들은 이미 사회여론의 칼도마에 오르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언녕부터 “저 부패분자! 부패분자!”하고 손가락질 하고 침을 뱉으며 코를 싸 쥐니… 똥묻은개 신세인 것이다. 그들은 생기기를 철면피한 자들이여서 체면도 량심도 없다. 때문에 가책도 망신도 모르며 낯짝을 쳐들고 다닐 뿐이다. 그러나 속은 항상 얼어있다.     왜서 구차스레 그렇게 사는가?!... 탐욕을 버리라. 부정부패를 하지말라. 덕과 법을 지키며 사회에 갚는바가 있으며 광명정대하게 사는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행복한가…                                                                                                                                 10.12
60    벙어리 삼촌 댓글:  조회:2007  추천:0  2014-02-17
           실화                                        벙어리 삼촌                                                                                                     회령     혀밑에 칼이 있다. 세치 혀바닥이 살인 낸다. 열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병들지 않아도 죽는다. 공은 딱은데로 가고 죄는 지은데로 간다. ... 조상들의 이런 교시가 장순이 대에서도 령험을 보일줄이야.     장순은 진위생원 원장이다. 40대의 젊은사람이지만 업무도 괜찮고 책임심, 복무태도가 좋아서 군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내과의사였으나 다른과의 병도 웬간한 것은 능히 치료했다. 하다보니 늘 환자들이 꽁무니에 따라 다니였다. 사람들은 그와 친하려고 술병이나 닭마리를 가져 오는가 하면 석탄, 장작, 쌀자루도 가져왔다. 술상은 거이 저녘마다 있고 때론 돈봉투도 있었는데, 그러나 장원장은 코밑치성을 한 사람은 두말할것이 없고 하지 않은 사람도 환자는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빈하중농 계급감정도 있었거니와 당성도 꽤 있었든 것이다, 원래, 의무인원은 마음씨가 선량하고 너그럽고 자비지심이 많다. 그런데다가 생명을 다루다 보니 책임심이 높다. 목숨이란 한번뿐이지 두번 다시는 없는것이 아닌가!     그런 장원장이 얼마전부터 사람들의 말밥에 올랐다. 제일 큰 뒷소리는 반벙어리(소리를 능히 들으며 두어마디 말을 함.)인 삼촌의 자식이라는 것이고 두번째 역시 띄끔놀라게 하며 귀맛을 돋구는 소리는 누구누구 녀편네와 어떻구 어떻다는 비밀적인 여론이였다. 수군덕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마치도 곁에서 본듯히 아니, 제가 한 일처럼 가지도 있고 잎파리도 있고, 기름에 튀긴것보다 더욱 생동하고도 구수했다.     뒷소리를 하나씩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장원장이 그의 하나뿐인 반벙어리인 삼촌의 자식이라는 소리는 력사가 길다. 장원장네는 진소재지에서 몇십리 떨어진 농촌에서 살았다. 그의 삼촌은 간단한 말은 두어마디 떠듬거리는 반벙어리긴 하였으나 인물체격은 환하고 훤칠해서 사람마다 아까워 했다. 일도 잘하고 마음도 무던하였다. 그러나 병신이여서 서른이 넘도록 장가는 가지 못했다. 장원장의 아버지는 약골이여서 아이때부터 배들배들 앓음자랑을 자주하며 자랐는데 장가든 후에도 체질은 그냥 허약하였다. 그래선지 잔치를 하고 여러해가 지나서야 장순을 보았다. 장순의 아버지가 그렇다 보니 어머니도 비슷한 약골로, 그들은 배필이 무어졌던 것이다. 장순은 성장하면서 저의 삼촌을 신통히도 점점 닮아 갔다. 우스개를 험하게 하는 사람들은 장순이가 어릴때, 장순이를 삼촌의 아이라고 놀리기도 했는데,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 쯤 해서부터는 그런 추잡한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뒤소리로는 롱담이 정말로 번져갔다. 장순의 삼촌은 아이가 둘인 과부에게 장가든후 인차 세간을 났다.     당시 마을에는 혼자사는 중년의 잔페(오른팔이 없음. )가 홀애비살림을 했는데 고생이 막심하였다. 하여 생산대에서는 그를 장순이네 집에서 살도록 안배를 하였다. 민식이나 공수면에서 좀 우대를 하였다. 장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허약하기에 화목도 마을에서 아예 해결해 주기로 했는데 이러루한 리익점이 있어서 장순의 부모들은 쾌히 동의를 했다. 그런데, 얼마후 장순이 어머니는 잉태를 하고 순산으로 딸을 낳았다. 홀애비는 다른집으로 나갔다. 원래 쉬ㅡ쉬ㅡ 하던 뒷소리는 다시 높아가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격이였다. 그런데 더욱 민망한 것은 딸이 크면서 점점 홀에비를 신통히 닮아가지 않는가!...     장순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진병원에 안배되자 농촌에서 고생하는 부모를 진소재지로 모셔왔다. 사실은, 한동네서 사는 집안집 할아버지가 어서 모셔 가라고 해서 이사를 했던것이다. 동생은 이미 시집을 갔다. 장순의 아버지는 항상 우울하고 벌컥 신경질을 내며 마누라와 자주 역증을 내군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앉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사람들은 너무 속을 썩여도 빨리 죽는다며 뒷소리를 더욱 부풀렸다. 거짓말도 열번이상 하면 정말로 되는 법인데, 장순의 경우에는 더욱 정말이 되여 버렸다. 하지만 그냥 얼굴 뜨거운 뒷소리였을 뿐이였다.     바람설은 또 어찌된 영문인가? 진정부의 부녀주임은 해사하게 생긴데다가 호들갑떨기를 잘해서 남자들이 싱숭생숭해 나게하는 녀자다. 그의 남편은 초중학교 수학선생이다. 그는 항상 무슨심사가 있는 사람처럼 찡그린 얼굴에 하나떡 먹지못한듯 찌뿌둥하고 음침한 기색이였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안해가 너무 야살을 까서, 그래서 시름을 놓지못해 저런모습이라고 아주 잘 아는듯히 긍정적으로 결론을 지어 뒷소리를 하였다. 부녀주임은 쩍하면 병원으로 와서는 장원장을 만나군 했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투시실로 들어가는것도 자주 보았고 나오는것도 여러번 목격 했다. 병원에 왔던 다른사람들은 그런가 했으나 병원직원들은 이상하게 여기게 되였다. 투시실 열쇠는 장원장 한테만 있는데, 부녀주임은 무슨병이 나서 저리 자주 투시를 할가… 야릇한 일이였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니까 도둑놈으로 보이드라고 그외에도 이상한 거동이 여러가지가 보이였다. 누구와는 서로 툭툭 다치면서 수작질 하고 누구와는 수군거리고… 민감화제여서 그런지 바람설이 수군수군 돌기 시작했다.     뒷소리는 무성히 돌고돌아 규률검사위서기 귀에까지 들어갔다. 징벌하기 바란다는 검거신도 여러장이였다. 규률서기는 령도와 상론하고 조사하는 한편 담화에 들어갔다. 그런데 진중하지 못한 그는 장원장만 틀어쥔것이 아니라 부녀주임도 동시에 틀어 쥐였다. 재빨리 민분을 진정시키고 단꺼번에 한 몽둥이로 두마리 토끼를 잡을 속심에서 그랬는지, 일처리능력이 잽싸다는걸 과시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업적을 쌓으려는 심정이 불붙듯해서 그랬는지… 하여튼, 그건그렇다 치고… 규률서기는 뚱단지 같이 “당신이 삼촌 아들이란게 정말이요?”하고 능청스레 묻기까지 하였다. 장원장이 제일 꺼려하는, 가장 수치로 생각는 문제였다. 장순은 버럭 성을 내며 “그것도 조사할 문젠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는 더 없는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장원장과 부녀주임이 규률서기 사무실을 굳어진 얼굴로 번갈아 드나드는걸 본 할일없는 간부들은 때를 만난듯 서로 찿고 부르며 수군거리였다.     어느날 오전, 제정신이 아닌 수학선생이 병원으로 드달겨 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장원장의 귀쌈을 쥐여붙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쌍놈의 개새끼야! 에미가 바람써서 내쏴더니 너두 바람쓰냐!... 이 개새끼! 오늘 죽어 봐라…” 수학선생은 온갖 악담을 다 퍼부으며 미친사람처럼 발광을 했다. 사람들은 아연해서 구경만 하다가 겨우 뜯어 말렸다. 그는 안해와 리혼하기로 작심을 했기에… 그리고, 그날로 리혼을 했던것이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빈 병실의 침대에서 죽은 장원장을 발견 하였다. 머리곁에는 병지 한장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더 살고싶은 생각이 없다. 미안하다.” 장원장은 수면제를 다량복용하고 죽었던 것이다. 곁에는 100알짜리 수면제 빈병이 놓여 있었다. 일파만파라고 할가. 장순이가 죽은후 그의 어머니는 물에 빠져 죽고 반벙어리 삼촌은 뒷산에 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세상에는 두 과부집이 남았다.     뒷소리는 이젠 더는 뒷소리로서가 아니라 확성기처럼 왕왕 울리며 두집에 덮씌워 졌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 잊어지고 사라지겠는지… 어쨌든, 슬픈일이다.                                                                                                                    12.5
59    회상기에 깃든 사연을 회고하며 댓글:  조회:2461  추천:1  2014-02-13
                           “회상기”에 깃든 사연을 회고하며                                                                                                         회령     중화민족이란 중국공민 56개민족을 총칭한 고유명사다. 지금은 대체상 56개 민족을 가리켜 하는 말이지만 얼마후에는 아마 56개가 더 될것이다. 대만에 통계에 들지않은 민족이 몇개 있으니까. 중국인구의 10%도 안되는 55개 민족은 국토의 60%에 살고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100%이다. 서장의 “진주마미”(장족)가 서안, 북경, 연변까지 와서 령양뿔과 모우뼉다구를 명약이라며 팔고 있는가하면 신강의 “야커시” (위글족)는 광주, 상해, 천진에서 양뤄촬(양고기뀀, 산적) 장사를 불티나게 하고있다. 한족아이들이 입귀에 기름범벅고물을 고양이수염처럼 발라가며 제정신없이 먹는것이 볼수록 재미 있다. “꼬리빵즈”(고구려몽둥이, 조선족)는 중국땅 어디에나 다 있다. 뿐만아니라 주지하 다싶이 세계에 진출하고 있다. “지구촌”이라는 말을 제일먼저 만들어낸 자는 조선족이다. 인가가 있는곳은 두말할것도 없고 무인지경에 가서도 개척하고 살아간다. 여북하면 고구려놈들은 껍질을 벗겨놔도 30리를 달린다고 했겠는가. 대담무쌍하고 슬기롭고 근로하고 끈질기고 대바른 민족이 조선족이다. 이것은 자화자찬이 아니고 한족들을 비롯해서 다른 민족들이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겸손하게 접수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의친구 두 사람이 서안과 상해에서 한족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는데(두 집 다 사돈이 대학교 교수들이다.) 그 며느리들이 부모들한테서 특별상금을 따로 더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족총각에게 시집가기 때문에 장려금으로 탔다고 자랑하더라는 것이였다. 장모님 사랑으로 사위에게 술을 많이 사 먹이라고 경비항목으로 준것은 절대로 아닐게다.     신해혁명 때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손중산의(거폭의 초상화를 천안문광장에 모시고 있다.) 령도를 받들고 새 중국을 위한 투쟁의 앞장에서 용맹과 슬기를 떨치며 활약했다. 그 대표적 위인으로 최용건을 말할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창건과 함께 새 중국을 위한 투쟁에서 수많은 우리겨레들은 마멸할수없는 기여를 하였다. 오늘도 여전히 하고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이들로는 양림 무정 문정일 주덕해 정률성 림민호 로기순(로박사) 최창호(사과배 육종가) 최죽송(벼 육종가) 김시룡 려근택(벼 육종가) 김철송(전투영웅) 조남기 리덕수 정판룡 김학철 김철 류창은(벼 육종가) 송순녀 (민정간부) 김광진(공안간부)… 중국공산당이 새 중국을 위한 투쟁의 90성상을 살펴보면 각계각층 각종분야에서 우리겨레의 “위인” “명인”이 2만명은 넘을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중화조선족의 1%일 뿐이다! 광대한 중화조선족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영웅적민족으로 손색이 없다.     사람들은 물론 이름을 날린, 사회에 알려진 위인과 명인에 대해서는 정도부동 알기마련이다. 그리고 찬탄을 한다. 력사도 그들만을 기록해 왔다. 대중에 대해서는 “인민은 력사의 창조자다.”라고 기록했을 뿐이다 지도자와 인민대중은 굳게 뭉친 통일체 정체다. 어느하나가 없어도 안되는 인간세계 인류사회다.     지금 인기있는 영상물들을 보면 두개측면의 형상을 공평하게 정확하게 잘 배려하였다. 결책자들이 고심하는 모습도 감동적이고 천군만마가 내닫는 화면은 그야말로 장쾌하다. “그때 어른들이 참! 대단했어! 제 죽는건 꿈도꾸지 않았다니까. 잔뜩 역어빠진 지금 놈들은 저렇게 못해.” 자기도 포함시켰는지 빼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이전에 탈곡장에서 전쟁영화를 볼때면 돌격나팔이 울리고 대부대가 “충아!”(돌격)하는 장면이 나오면 남녀로소가 엉덩이와 어깨를 들썽거리며 손바닥이 깨여져라 박수를 쳤다. 사장이 “따!”(답새워라)하고 전화로 포병부대에 소리칠때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와 같은 신분에서는 쉽게 동감이 되지만 처지가 다르면 리해력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대포를 갈기고 적들이 묵사발이 될때는 “시연허다. 에쿠! 저거 저거, 잘헌다.”하며 성수가 났는데 강원도 대머리 박령감은 벌떡 일어나서는 영사막에 대고 내리조기는 주먹질까지 했다. 그의 강원도 도리깨질이 유명했다. 사람들은 통쾌해서 와하하 웃었다. 박령감의 동생은 해방전쟁에서 회생되고 그의 두 아들은 항미원조에서 하나는 희생됐다. 둘째는 잔페로 전쟁후에 돌아왔다.     팔로군, 조선의용군, 해방군에서 9년을 싸우고 그후에는 연변에서 한생을 기여한 로혁명간부 류동호는 자기의 회상기를 나에게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하였다.     “일개 기층간부로서(부현급, 리직휴양) 내가 회상기를 쓰려고 하는것은 연변, 한국, 일본의 벗들이 여러번 권고하기에, 처음에는 뚱단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그후 오래동안은 사상갈등으로 망설였고 정작 쓰려고하니 이젠 능력과 힘이 안되는구만. 중문, 조문, 일문이 다 안되겠어요.(신의주상업학교 졸업. 고급지식분자. 일문초고 10여 장을 나에게 보여줬다. 사망 2년전임.) 회상기는 위인, 명인이 쓰는것이지 나같은 보통군중이 쓰는게 아니라고 생각 했어요. 다음은 몇년을 사색하며 말며하다가 금년초에 쓰자고 결심 했어요.(1998년) 나는 회상기를 나를 위한일로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였어요. 그렇게도 뽑느라고 한 개인주의가 질기기도 했지요. 당의 령도하에 중화민족은 기나긴 년대에 그것은 토지혁명전쟁, 항일전쟁, 해방전쟁, 사회주의건설 년대에 걸쳐 억만대중이 2천5백여만명의 희생을 내며 비장하고 장쾌하고 거창한일을 했지요. 세계적으로 드문일이예요. 나는 항일전쟁때부터 혁명대오를 따라 오늘까지 살아 왔습니다. 내가 한 일은 보잘것 없으나 당과 인민들이 한 일은 너무도 대단합니다. 회상해보면 깊은 감탄이 저도모르게 나옵니다. 어떤일들은 지금도 눈물이 나요. 참, 대단했지요. 대단했어요. 나는 내가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하여 조선족들의 당년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께 보여드릴 임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특히 젊은 후대들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새 중국을 위하여 어떻게 싸웠는가를 앎으로서 중화일원으로 떳떳한 긍지를 갖고 선인들을 계승하여 중화대지에서 더욱 빛나게 살아가기를 제일 크게 바랍니다. 대대손손이 번영창성키를 바랍니다. 하여 쓰리라 결심은 했는데… 내가 있는 힘껏 협조를 하겠는데, 수고해 주시오.”     그는 기본상 침대에 반자세로 누워서 이야기를 했다 집은춥고(80여평 1층인데 허줄하고 썰렁했다. 1998년11월 초에 처음 만남.) 기침을하며 숨이 차 하였는데 담배를 자주 피웠다. 식사는 죽 한공기를 억지로 드시는것 같았다. 고기나 기름기 있는 반찬은 먹지 못했다. 연변주 창작평론실주임 리광수씨가(극작가) 내가간 첯날 알락달락한 떡 한합을 사왔는데 그는 증편 반개를 겨우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그러면서 “한뉘 술은 못해도 떡과 고기는 무척 좋아해서 떡보라고 별명까지 달았는데 이젠 맛이 나먼저 갔어!”하고 우스개를 하였다. 그는 전해가을 맹장염수술을하고 연변병원 로간부병실에 열흘있은것이 병으로 받은 최대의 우대였다고하면서 참, 미안하더라고… 더 있으라는걸 출원했다면서 만족해하는 밝은 표정이였다. 그런데 수술후 개운치 못하여 금년 여름까지 별로 출입도 뭇했는데 지금은 별일 없다고 하였다. 신체는 바람이 좀 크게불면 날려갈듯 몹시 허약해 보였다. 그러나 정신상태는 매우 건강했다. 특히 비상한 기억력은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회상에서 노래에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노래를 부르며 유쾌해하였다.     우리는 시간을 다그쳤다. 보아하니 류동호의 여생이 그리 많을것같지 않았고(필경 80고령의 로인이 아닌가.) 나에게도 할일이 많았든것이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매일 7ㅡ8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부지런히 필기를 하였다. 련삼일 강행군을 하고나니 그는 매우 피로해하였다. 더는 무리를 할수 없었다.     나는 회상의 모를 해방전에 두었다. 전쟁년대의 그복잡한 상황에 대하여 나는 전혀 모르다보니 적지않은 사실은 뭐가 뭔지를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어서 무척 품을 들여야 했다. 해방후 부분은 사실만 말해주면 내가 력사시기에 맞추어 정리할수 있었다. 3일을 이야기한후 류동호는 이젠 기본상 되였다고 하였다. 그는 문학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보니 문학적소질이 있는데다가 회상기에 대해서도 대체적 륜곽을 가지고 있었든 것이다.     우리는 회상기를 전,후편으로 정리하기로 하였다. 류동호는 동이하지 않았는데 내가 설복했다. 난관은 해방전인데 그의 신체상황이 여유롭지못하다고 나는 인정했기 때문이다. 빨리 써서 그의 심열을 거쳐야 하지않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긴장히 다그쳤다. 필요재료를 찿고 류동호가 이미 발표한 회상기를 수집했는데 모두 3편이였다. 일주일 남짓 분투하여 초고가 완성되자(전편. 1948년 부대에서 전업하기까지 17만여자) 나는 부랴부랴 연길로 달려갔다. 그때는 1999년1월이였다. 그의 신체상황은 두어달전보다 별로 다름이 없는같기도하고 못해진것같기도 했는데 견딜만한 상황이여서 나는 우선 안도의 숨을 하ㅡ뿜었다.     류동호는 무등 기뻐했다. 초고는 내가 읽고 그가 수개의견을 말했는데 한두곳만 아니였다. 무릇 자신을 떠받든 어구나 세절만 있으면 가차없이 취소 혹은 수개였든것이다. 이렇게 심열에 걸린것이 무려 2만여자는 되였다. 수개를 나도 각오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엄청날줄은 상상못했든 것이다.     심열이 끝난후 그와 나는 심각한 대화를 나누게 되였다.     “내가 처음에 명백히 말했는데, 선생이 내 말뜻을 채 장악하지 못한것 같아요. 내가 회상기를 쓰려는 목적은 내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체험한 력사의 현장을 실사구시적으로 기록하여 특히 후대들이 선인들의 모습을 생동하게 보고 학습하고 느끼고 제고하며 긍지를 갖고 우수한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나에게 그 무슨 기념비같은걸 세우려는 사심은 꼬물도 없어요! 당과 상급의 령도와 지시를 받들고 동지들과 함께 임무를 잘 완성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지요. 모든것은 다 당에서 하라는 것이였고 상급에서 지시한 것이였지요. 나는 줄곧 그런 환경속에서 사업했고 생활했고 살아왔든 것입니다. 개별행동은 없었어요. 나는 줄곧 혁명대오내에서 전투집체속에서 하달된 임무수행에 충직하고저 했을 뿐이예요. 그때 모든 동지들이 다 그렇게 했어요. 동지들이 함께 맡은바의 혁명임무를 하나하나 완성했어요. 이 전투집체를 나는 회상한겁니다. 그집체를 쓰자는겁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느부대나 단위의 력사를 쓰려는게 아니고 류동호 자신을 그의일생 그의인생을 쓰는것이지요. 물론 집체속의 류동호 동지지요.”     “아니예요. 류동호가 속한 집체를 쓰세요. 바로 이문제 때문에 내가 오래동안 고심한거예요. 무엇때문에 조직에서 표양받는 모든 동지들이 성적과 영예를 당과 조직에 인민에게 돌린다고 말할가요? 거짓말일가요? 위대한겸손일가요? 모주석께서 “인민 만세!”를 여러번 웨쳤지요? 왜서 지금 누구 누구 만세를 웨치지 않습니까/? 력사는 인민이 창조하지요. 위대한 수령도 인민들 속에서 조명해야하는데 내가 다 뭡니까. 집체와 개인의 위치를, 선과후를 절대로 혼돈하면 안돼요. 개인을 집체위에 올려 놓으면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요. 망신해요. 공산당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개인주의를 부단히 반대하는겁니다. 개인주의는 만악의 근원이라 하지 않습니까. 자산계급 학자들은 개인주의가 인간의본질ㅡ인성이라고하며 지어는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까지 하는데 그건 틀린말이지요. 원동력은 생산력이지 그게 어디 개인주읩니까. 사람은 교육과 수양, 사회실천속에서 부단히 개인주의와 투쟁하며 극복하며 “대공무사”하게 행동할수 있고 그렇게 일생을 살수있는겁니다. 나의 한생을 회고해 본다면 개인주의와 투쟁하지 않은때가 없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은때가 없었어요. 이 개인주의라는게 참 끈질기고 집요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개인주의와 투쟁하며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요. 나를 좀 찬미하는것도 괜찮치않나? 이런생각도 한켠에는 지금 있거든요. 이것이 개인주의죠. 나는 극복하겠어요. 절대로 찬미냄새가 나는 어구는 사용하지 마세요. 이 회상기가 나의 기념비같은걸로 보여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나는 집필의 지도사상이 뚜렸해 지는것 같았다. 평범한 이 로인의 정신세 계ㅡ사상경계가 어디까진가?!... 안중근? 윤봉길? 동존서? 뢰봉? 초유록?...나는 정신을 바짝 가다듬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문혁시기 입당을 위해 갖은애를 다 쓰던 일부동무들이, 뻘건주먹을 높히 들고 선서한 일부동무들이 개혁개방후 너무도 변한모습을 보고 나는 리해가 되지않았다. 다른사람에게는 혁명성이 그렇게도 철저하던것이, 원칙성 투쟁성이 두번째라면 섧다고 할 어떤동지들은 자기의 당과 정부를 속이고 외국에 나가서는 이번에는 또 그나라정부를 속이고 불법체류를 하면서(나라망신, 민족망신을 시키면서)돈벌이를 하였다. 그런가하면 어떤동지는 한술 더 떠서 위장인지 진짜인지 결혼을하고 반공국가의 국민증까지 따냈다고하는데 백색구역에서 지하혁명투쟁을 하려고 그런건 아닐게다. 돈을벌고 국민이되고 꼬부랑말까지 흉내내며 아주 외성인인양 우월감을 풍기는것은 곁사람이 창피할 지경인데… 왜서 저렇게까지 되였을가… 곤혹을 느낀적이 여러번 있었다. 지금 그 답안이 환히 보이는것 같았다.     나는 조급성을 억제하며 참답게 수개를 하였다. 두어달 고심하니 기본상 합격이 될것같았다. 나는 가방을 메고 연길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전번처럼 내가 읽고 류동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침대에 반자세로 누워 심사를 하였다. 초고는 1고보다 더 커져서 근20만자가 되였다. 그것은 동지들의 모습을 더 그려넣고 류동호의 사상투쟁, 개인주의 극복ㅡ당원으로의 성장과정을 꽤 세심히 서술했기 때문이다. 특히 안효상 과의 사랑에서 그를 조선에 보내는 문제에서 사상투쟁을 세심하게 다루었다. (정률성의 부인ㅡ조선중앙화교대표 정솔송이 할빈으로 와서 주덕해와 상론하고 한패의 조선족 간부들을 데려갔음. 효상이를 데려가는 문제에서 주덕해는 결정권을 류동호에게 맡겼는데 그는 효상이를 설복하여 가게했음.) 이번에는 류동호가 “싱! 만의!.”(됐다.) 했는데 내가 불만족이였다. 마치도 조직에 사상회보 공작보고를 하는것 같아서 구수한감이 적었든 것이다. 나는 류동호의 심기를 건드리지않는 전제하에 첨삭을한후 작은사위에게 맡겨 타자를 하게 하였다.     나는 후편 집필에 달라 붙었다. 나도 체험한 시대여서 쉬울줄 알았는데 웬걸! 걸음마다 난관이였다. 그것은 계급투쟁, 사상투쟁, 혁명성, 당성제고, 부단혁명의 각오를 억세게 틀어진 그 년대들에 류동호는 적잖은 사람들과 혹은 첨예한, 혹은 껄끄러운 일들이 상당히 많았든 것이다. 거기에는 하급도 있었지만 상급이 더 많았다. 그는 자기의 개인주의와 투쟁했을 뿐만아니라 다른사람의 개인주의도 묵과하지 않았든 것이다. 나는 사실과 시비를 밝히는 작업에서 무척 애를 먹었다. 적지않은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거나 변명하였다. 지어는 궤변을 장황이 늘여 놓기까지 하였다. 이건 취재를 하는건지 규률검사위에서 조사를 하는건지 스스로도 어색할때가 많았다. 작은사위가 여가를 타서 타자를 하다보니 그해(1999.12월초)년말이 되였다.     나는 원고를 첫사람으로 리광수씨에게 심열을 부탁했다. 그는 속도가 빨랐다고 나를 고무해 주면서 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문학수단을 동원해서 감칠맛을 더 돋구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생각과 같았다. 그후 최국철씨(소설가)가 심열 했는데 력사배경을 좀 더 넣으면 좋을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나는 전편은 그쯤에서 놓아두고 후편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먼저 류동호의 심열을 거쳐야겠는데 어쩐지 그가 기다려 줄것 같지 못해서 자꾸 조바심이 났든것 이다. 새천년 첯해6월 초고가 완성되자 나는 연길로 달려갔다. 류동호는 몰라보게 수척해 졌는데 정신만은 맑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 쉬였다. 이번에는 합격을 맞았다. 나는 두달남짓 품을들여 전, 후편을 하나로 차근히 추고를 하였다. 그리고 작은사위에게 타자를 시켰다.     9월초 어느날 밤, 나는 가도 되겠냐고(원고심열) 류동호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막내아들(연길에서3식구가 살았다.)이 받았다. 며칠전에 연변병원에서 페암 같다고 해서 장춘에 갔다는 것이였다. 확진이 나오면 아마 올거라고 하는것이였다. 내가 와서야 되느냐구, 입원해야지… 하니 막내는 “에이구! 엄마가 자꾸 가자구해서 억지루 갔는데…이제 옵니다. 그 령감이 국가돈을 쓰자 합니까. 성질이 워낙 그래서 안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였다.     그날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잘수가 없었다. 류동호의 일생을 죽ㅡ 생각하니 행복했다고 해야겠는지 불행했다고 해야겠는지… 얼핏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다고 하였으나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았다.ㅡ 그후 막내에게 전화를 하니 “페암 말긴가 뭔가한데 형님네 집은 작아서 세집을 맡고 치료를 하는데 그러루 하다.”고 하는 것이였다. (류동호의 자녀는4남1녀, 셋째아들은 성 병원의사임.) 국경절이 지나서 또 전화를 했는데 막내는 장춘에 갔다 왔다면서 “좀 나은것 같기두 하구… 아마 며칠후에 올겁니다. 그때 선생님을 보자고 합데다.”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한숨을 후ㅡ 내 쉬였다.     10월말, 막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다급히 아버지가 돌아 왔느냐고 물었다.     “오긴했는데 엄마한테로 갔어요.”     “엄마한테라니?”     “23일날 장춘에서 사망 했어요. 친척 친구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라구 해서…내 혼자 생각에 그래두 단위에는 알려야할것같아… 창평실 리광수주임과 서기가 나와 함께 아침차로 갔다가 그분들은 그날 밤차로 돌아오고 누나(상해에 있음)와 형님이 나와 함께 골회함을 가지고 나와서 엄마산소에 합장 했어요.”     “아버지가 그러라드냐?” “뭐, 그런얘기는 없었지만… 산소 댕기기두 편리할게구… 합장하는게 좋습니다.”     “나한테 무슨 말씀이 없더냐?”     “없었어요.”      ……     류동호는 82세를 일기로 한생을 마치였다.     첯사랑 안효상은 조선중앙 김두봉 비서로 사업하다가 후에는 부녀동맹중앙에서 활약했다. 그들은 서신으로 그리움을 전하며 상봉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조선전쟁이 일어난후 이듬해봄부터 효상은 소식이 없었다. 그먼저 기다린다는 편지가 한통 왔었다. 후에는 영영 종무소식이였다. 할빈에 있는 친정에서도 모른다고 하였다. 조선정부에서는 “불명”이라고 했다.     류동호는32살에 화룡중학교 처녀교원 리경숙과 결혼해서 4남1녀의 자식을 보았다. 지난세기 70년대는 새 중국의 불행한 년대였을 뿐만아니라 류동호에게 있어서는 특히 액운이 겹쳐든 년대였다. 그는 “일본헌병대통역”이라는 개패를 걸고(1940년 2월 팔로군에 입대하기전 일본군 중대헌병의 통역을 4개월 했음. 고용원이였는데 지금말로 하면 림시공.) 온갖 모욕과 투쟁을 받으면서 학교교실에 같혀 있었고 맏이와 둘째는 공상으로 죽었고(류동호는 단위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안해가 죽었다.     딸과 두 아들은 그의 유언대로 5천1백원 저금과(월급 8백여원) 무휼금을 몽땅 후어머니에게 드리였다.(어머니는 그속에서 당비와 상장비를 기어코 내 놓았다.) 집은 막내가 가지였다. 막내는(한족학교 초중문화) 아버지의 그 많은 책들을 몽땅 땡땡이 페품수구 한족로친께 팔아버렸다. 한족로친은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내는 건축공사 로동자다.     광활한 중국대지 장강이북 절반땅에서 류동호는 동지들과 함께 당의 령도하에 새 중국을 위하여 노력분투를 하었다. 그의 말대로 한다면 “개인주의를 극복하며 임무를 잘 완성하려고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그의 마지막 혁명대오ㅡ집체(단위)는 연변주 창작평론실이였다. 1982년1월에 갔는데 11개월 부주임으로 사업하다가 조직의 결정대로 리휴(리직휴양)를 하였다. 규정상 5년을 더 사업할수 있었지만 그는 한마디 의견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는 43년간의 사업생애에서 개인일로 조직에 손을 내민적이 한번도 없었다.                                                                                                                        2009. 4
58    중국의 대지에서 싸운 조선족 청춘들 댓글:  조회:3744  추천:1  2014-02-10
            회상기                                                            새중국을 위하여 싸운 조선족 청춘들                                                  (팔로군, 조선의용군, 해방군에서 싸운 류동호의 회상기에서)                                                                                                                      회령           무장선전대     1940년 4월 기로변군구 주력은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사령원 소화 적공부 부장 로소한 등 사령부 수장들은 부대와 함께 행동했는데 그들은 말을타고 행군했다. 나는 로소한의 직속간사(중대장급)여서 사령부와 함께 갔다. 대 부대가 대낮에 행군하는 정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우리는 진포선을 따라 서남쪽으로 매일 100여리씩 행군했다. 로소한은 때론 나에게 말을 주며 타라고 했는데 나는 매우 송구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어떤날에는 왜놈들이 비행기를 물고와서 기총소사를 했는데 비행기가 저공으로 내려오면 우리도 까투리사냥을 하듯 기관총을 갈기였다. 쌍방은 별로 손실이 없었다. 20여일 행군하여 진포선을 넘어서자 그곳은 로서군구였다.     로서군구는 동평, 동아, 범현 등7개현의 광활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왜놈들이 없었다.     5월하순, 매우 화창한 어느봄날 우리군구와 로서군구는 련합으로 군인대회를 하였다. 수천명 군인이 참가한 대회는 씩씩하고 활발한 기상이 넘쳐 흘렀다. 노래소리 구호소리가 말그대로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오늘 이 대회는 기로변군구와 로서군구를 합쳐서 새로운 로서군구로 만드는 대회였다. 대회는 우리군구의 정치부주임 왕휘구가 집행하였다. 먼저 로서군구의 사령원 양용이 연설한후 우리사령원 소화가 연설하였다. 그들 연설의 주제는 당이령도하에 굳게 뭉치여 일제를 바다에 처넣고 인민의 새중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였다. 이어서 지방혁명정권대표들의 열정적인 축하연설들이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잇따라 문예공연을 하였다. 나는 난생처음 이런 장쾌한 정경을 목격했다. 자기이름도 바로쓰지 못하는 선전대동무들의 공연은 입을 딱 벌이게했다. 전 군에서 조선족은 나 하나뿐이였지만 외로움이니 고독이니 하는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이들과 친밀한 전우로 되여 왜놈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부시리라 또 한번 굳게 맹세했다.     로서군구의 사령원에는 양용이 임명되고 소화는 다른곳으로 갔다. 적공부는 로소한이 계속 부장을 맡았는데 나는 그의 직속간사로 그냥 사업하게 되였다.     그해9월 연안으로부터 리명이 100여명의 간부대오를 인솔하고 로서군구로 왔는데 그는 조선족이였다. 내가 팔로군내에서 처음으로 만난 조선족이다. 동족의 감정은 숨길수 없는것이다. 그때의 반갑고 기쁘고 격동되던 심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나는 열아홉살이고 그는30여세였지만 즉시 딱친구로 되였다. 나는 금년에 입대한 순 했내기였지만 그는 벌써 상당한 혁명가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혁명도리를 알기쉽게 설명해 주었고 동지들과 잘단결하며 사업을 잘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나는 그의말을 가슴깊이 새기였다.     며칠후 리명은 30명간부를 우리적공부에 떨궈놓고 남어지를 인솔하고 산동으로 나갔는데 팔로군 115사 적공부 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을 설립했고 지도했다.(광복후 조선으로 나가서 계속 혁명사업을 잘 하였음.)     12월 적공부에서 “적공공작훈련반”을 조직했는데 학기는 3개월, 학원은 30명, 내가 일어교원을 했다. 동시에 모도하시(후에 리명이 요구해서 산동으로 나감.) 미즈노(후에 팔로군 포병교관이 됨.) 기노시다, 다나까가즈오(후에 연안에서 모택동의 병을 치료했음. 본명은 사도다께오. 1993년 일본에서 만나봄.)를 골간으로 “일본사병각성련맹” 로서분맹을 설립하고 내가 지도와 협조를 책임졌다.     로서군구의 항일전쟁은 매우 활약적이고 전과가 대단했다.     우리적공부는 일본군과 괴뢰군에 대한 반전와해선전공작을 다종다양한 형식과 전술로 세차게 진행했는데 그 효력이 무척 좋았다. 우리는 여러패의 무장선전대를 조직하여 밤마다 적들의 코밑으로 갔다. 은밀하게 먼저 코밑치성을 한다. 즉 담배, 치약, 대추가 든 작은주머니에 선전물을 곁들여 가득 뿌려놓고 은페를 잘한후 총을 세방 쏜다. 다음은 구두선전을 들이대는데 웅변 노래 재담 만담이 무대연출을 하듯 멋들어지게 쏟아진다. 조선말 일본말 한어가(대상에 따라 선택) 류창하게 나가는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련마했기 때문이다. 밤이여서 원고나 대본을 보지못하지만 한구절 실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놈들이 총을쏘고 지어는 척탄통까지 쏘며 지랄을 하고 교란을 했다. 그러나 3ㅡ4일이 지나면 조용해진다. 간혹 싱거운 작자가 “낮에와서 춤이랑 추며 그럴게지. 어른이 주무시는데. 엑퉤! 얘들아, 듣지 않는다. 가서 불알이나 쥐고 자거라. 얼씨덩!(얼른)”하고 익살을 피우며 소래기를 지를때도 있었다. 새벽녘이 되면 우리는 “잘 생각해라.”하고 소리친후 총을 세방 쏘고 돌아왔다. 때로는 선전하는척 하다가 진짜로 들이쳐서 소멸해 버리기도 했다.     일본군과 괴뢰군에서 기의하는 사병이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과 포로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들이 선전효과는 이만저만한 정도가 아니였다. 거점의 적들은 낮에도 밤에도 긴장과 공포에 떨었고 장교들은 밤낮으로 사병들의 눈치를 살폈다. 사병들은 “저치들의 말이 옳아.”하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판시투 매복전     내가 로서군구에서 참가한 전투중에서 가장 멋드러진 전투는 1941년1월8일에 한 판시투 전투다.     왜놈들은 후집과 운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거리는30여리가 되였다. 놈들의 두 거점 중간쯤에 판시투가 있었다. 거기에는 놈들이 없었다. 후집에는 한개 중대가 있고 운성에는 대대가 있었다.     우리의 대부대는 판시투에 매복하고 소부대가 7일날 밤중부터 후집을 들이칠듯 공격하였다. 나는 명령을 받고 무장선전대 전사 3명을 이끌고 놈들의 전화를 도청하게 되였다. 도청내용은 세전사가 즉시즉시 달려가서 수장에게 보고하기로 되여있었다. 얼마 안되여 후집에 있는 중대장 이다가 운성 대대본부에 긴급보고를 하였다. 전화는 대대장 니히다가 받았다.     “갑자기 팔로아새끼들이 포위공격을 시작했다. 어떻게두 많은지 당해낼 재간이 없다. 빨리 지원해 달라!”     “얼마냐? 상세한 보고룰 해라. 겁부터 먹지말구…”     “캄캄해서 정확히 알수없다.”     “하긴 그렇군. 하지만 가급적 상세히 보고해! 낮에 올게지 밤중에 와가지구선. 제길할”     “4면 포위를 했는데 저 경우시비도 없는 독종들이 아주 먹어치울 잡도리다. 간나새끼들! 아직은 견딜만 한데 저것들이 그저 이러다 말 놈들이 아니다. 죽고 사는걸 개코같이 여기는 도깨비들이다. 먹자고 왔다. 확실하다.”     “건방진놈! 내가 그새끼들을 더 안다. 그렇게 속단하지 말아. 지휘관은 침착하고 판단이 정확해야해! 방어를 든든히 하며 동태를 수시로 보고해.”     전화가 뻔질나게 오갔는데 나중에는 이다가 빨리 구원해 달라고 목멘소리로 애원을 했다. 니히다는 날이 밝으면 부대가 출발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포위하고 들이칠때 용맹하게 돌진해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전화선이 무사해서 다행이였다고하며 팔로들이 그것도 생각못한걸 보면 멍텅구리라고 했다. 날이 휘붐히 밝자 니히다는 출발한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선을 끊어놓고 전선주에서 쭈루룩 내려와 매복지점으로 달려갔다.     그날전투는 매우 순리롭게 끝났다. 후집과 운성의 적들은 몽땅 섬멸되였다. 많은 군수물자도 로획했는데 거기에는 대대포도 한문 있었다.             호메가     1942년1월 나는 려단교도대에 가서6개월 정치학습을 하였다.(전해 7월 기로예군구와 로서군구가 합병하여 기로예군구로 됨. 사령원 양득지, 부사령원 양용, 정치위원 소진화 적공부 부장 리비, 과장 로소한) 패장이상간부 120명이 참가했는데 조선족은 나뿐이였다. 졸업시 11명이 우수생으로 뽑였는데 나도 그속에 들었고 입당까지 하였다.     그해 8월29일(조선 망국 국치일) 나와 양원은 “조선독립동맹” 기로예분맹을 성립했다. 나는 여전히 적공부에서 사업하며 분맹사업도 지도했다.     1943년봄 로소한은 신사군으로 가고 내가 과장대리로 사업하는데 태항산으로부터 김한중이 무정의 지시로 기로예분맹의 사업시찰을 왔다. 그는 우리의 사업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해 하였다.     김한중은 군구사령부와 토론하고 돌아갈때 나를 데리고 갔다. 이때로부터 나는 조선의용군 전사로 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는 “조선청년혁명학교”가 있었는데(곡원촌 절간) 교장은 무정, 교무주임은 정률성이였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알게 되였다. 리화림 등 녀성혁명가들을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학교는 고급반, 초급반으로 나누었는데 최창익 한빈 등 나많은 사람들은 고급반에 편입되고 젊은치들은 초급반이였다. 나는 물론 초급반인데 반장을 하였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근거지 인민들은 우리를 말그대로 금싸락같이 귀중히 여겼다. 어느 한차례의 반소탕전에서 우리동지 한명이 희생되였는데 그후부터 팔로군에서는 부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호위하며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우리를 위하여 팔로군 전사 몇명이 희생되기까지 했다. 그곳은 소금이 특별히 귀한곳인데 근거지 인민들은 세겹 네겹의 봉쇄망을 뚫고 희생을내며 소금을 구해다 주었다. 우리는 있는힘껏 자급하기에 노력했다. 그리고 팔로군과 인민들을 위해 무엇이나 하려고 노력했다. 태항산의 생활은 참으로 간고했다. 그러나 조선의 혁명가들은 여기서 씩씩하게 성장했다!     항일전쟁은 승리의 서광이 뚜렷히 밝아왔다. 이런 형세하에서 중공중앙은 조선의용군 이 연안에 집결하여 정치와 군사를 잘 학습하며 대오를 정돈하여 앞으로의 조선혁명에 대비할것을 요구하였다.     1944년2월 우리는 태항산을 떠나 세겹의 봉쇄선을 뚫고 두달동안 1000여리 행군을하여 연안에 도착했다. 4월말까지 100여명이 연안에 왔고 그후에도 조선혁명가들이 륙속 연안으로 왔다.     우리는 연안의 동관에 집결한후 건축대 농업대 후근대로 나누어 행동했다. 건축대는 라가평에 가서 학교와 숙사(요동) 건설을 하고 농업대는 감천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나는 농업대의 부 대장을 하였다.(대장은 방호산, 광복후 조선으로 나감.)     그해 추석날 밤, 조선의용군은 성대한 문예경색을 하였는데 우리 농업대의 “호메가”가 대단한인기를 끌었다. “호메가”는 조선동지들 뿐만아니라 중국동지들도 인차 따라배워 흥얼거리였다. 그 노래는 평안도 룡암포 일대의 민요인데 평시에 우리대의 전사 황칠성이 곧잘 부르군 했다. 나는 그 민요곡에 가사를 붙혀 한족들이 호미질하는 동작으로 20명으로 표연창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평심에서 기음매는 동작이 닭이 모이쫏듯 하다느니 껑충대며 궁둥춤을 췄다느니 하고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99%가 호평을 해서 1등을 했다. 건축대 심술쟁이는 “꺼꾸러뜨려야 1등을 하는건데…추석날에 뚱딴지 같이 호미깡댕이를 메구 나와서는. 떡메두 아니구. 떡메를 메구 나왔다면 두손들어 찬동하겠수. 재수없게스리.”해서 좌석에서는 와하하 웃음통이 터졌다.     “호메가”가 지금도 오락판에서 인기가 있나본데 그건 가사보다 곡이 좋아서일 게다. 가락 장단이 워낙 우리민족의 감정에 맞으니까. 그때는 8절로 가사를 붙혔는데 지금 기억 되는건 다섯개 뿐이다. 두구절이 한절인데 다음과 같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여 온다.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로다.     일하면서도 배울수 있는 즐거운 일터로다 배움터로다.     무찌르자 일제놈들을 삼천리 조국으로 진군해가자.     붉은기를 높히 날려라.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자.     후렴은 에라 에라 에라 호호메야 호메 호메를 메고가자.     1945년1월5일!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연안 라가평에서 성대한 개학식을 하였다. 학원은 300여명, 세개 구대로 나누고 매개구대는 세개 분대로 나누었다. 나는 1구대에 편입되였는데 3분대 분대장이였다.              할빈이여     광복후 조선의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국, 북에서는 쏘련이 제3세력이 입국하는것을 가로막는 상황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 간부들은 할빈에서 지대건설에 박차를가했다.     3지대 정치위원 주덕해(오기섭) 등 연안에서 나온 우리일행 19명이 할빈에 도착한것은 1945년 11 월 19일 저녘이였다. 당시 할빈에는 지대장 김택명(리상조)과 한개대대의 병력이 있었다. 국민당이 항일승리과실을 독차지하고 공산당을 소멸하려고 다급히 서두르는 형세하에서 확군, 정군임무는 긴급하고 간고했다. 확군은 북만(흑룡강성)각지에서 조선족들이 참군하겠다고 벌떼처럼 몰려드는바람에 오히려 간고했다. 중화조선족들의 혁명열정은 워낙 높은데 광복후의 기세는 붙는불에 기름을 친 그대로였다! 남녀청년 들은 두말할것도 없고 지어는 40여세되는 아주머니 50여세의 아저씨도 참군하겠다고 부대를 찿아왔다. 갑자기 대부대가 생겨나다보니 먹는것 입는것 무기까지 모든 물질급양이 단통 문제였고 정치사상소질 군사소질을 제고시키는 관건적 사업도 화급한 임무였다.     1945년11월25일 부대는 배극도에 집결하여 3지대 창립대회를 하였다.     지대장 김택명, 정치위원 주덕해, 3개대대와 경위중대 교도대 위생대를 두었다.(얼마후 후근대 선전대도 설립.) 나는 2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3지대가 부대건설에 분전한 이야기는 략함.)     1945년11월10일 심양 고력툰 회의후부터 조선의용군은 지대별로(동만 북만 남만 서만) 갈라져서 독립행동을 하며 각 성군구의 편제에 들어갔다. 대외로는 “조선의용군”(몽땅 조선족임.)이라고 했지만 실제상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이였다. 그때로부터 우리대오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장력량으로 되여 새중국을 위하여 싸우게되였다.     1945년11월21일 오후 우리는 쏘련홍군의 명령에의해 할빈시내에서 철퇴하였다. 당시 할빈시내에 중공의 무장력으로는 우리뿐이였다. 쏘련은 할빈시를 금후 국민당에게 넘길방침이였다. 하여 할빈시는 국민당과 쏘련홍군이 함께 장악하고 있었다.     1946년 4월28일 낮 12시, 쏘련홍군은 할빈에서 전부 철거했다. 3지대는 이미 만단의 전투준비를하고 할빈시내로 진격할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할빈에 주둔하고있던 쏘련홍군은 할빈을 국민당이 가지든 공산당이 가지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들은 여유작작 행군해 나갔다. 그들의 마지막 대오가 빠져나가자 3면으로부터 3지대가 그야말로 노도와같이 처들어 갔다. 돌격의 함성은 천지를 진감했다. 4천여명의 국민당 군대는 북쪽으로(그곳을 열어 놓았음.) 도망쳐서 송화강을 건너 갔다. 국민당정부 관원들은 말그대로 갈팡질팡 네거리에 나선 쥐 꼴이였다. 할빈시는 이렇게 인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2일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할빈을 해방한후 3지대는 할빈시 위수임무를 담당하였다. 할빈해방전투 바로 직전에 나는 3대대로 전근해서 대대장 사업을했다. 우리 3대대는 할빈시 남강, 향방구 위수를 책임지고 사회치안을 유지하며 그 부근의 시교 토지개혁운동을 지원 보위 하였다.     9월2일 9시경, 향방구에 주둔하고있는 우리대대 7중대에 긴급정보가 들어왔는데 “지금 사리툰(지금의 평방구 부근)일대에서 토비들이 살판치고 있다.”는 것이였다. 정보를 가져온 사람은 민운공작대 대원이였는데 후에 밝혀진데 의하면 그는 토비들과 내통하는 변절자였다. 중대장 리영택은 한개소대를 이끌고 그를 길잡이로 화급히 사리툰으로 달려갔다. 사리툰으로 가려면 반드시 서구라는곳을 지나야한다. 서구는 길량켠이 가파롭고도 높은언덕이고 거기에는 곡식과 풀이 키들이로 자라있었다. 토비들은 그속에 매복하고 있었든겄이다. 지대부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우리가 보고를 받고 달려 갔을때는 토비들이 이미 도망친 뒤였다. 그날 중대장 리영택과 전사들이 모두 21명이 희생되였다. 이것은 3지대가 할빈에서 입은 가장 큰 손실이였다. 렬사들은 할빈 인민들의 마음속에,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것이다. (할빈시에 렬사들의 기념비가 있음.)     1947년1월 나는1대대 교도원으로 임명 되였다. 5월 나는 1대대 전우들과 함께 할빈을 떠났다.     새로운 전투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09 . 4
57    알미대 사람들 댓글:  조회:2859  추천:1  2014-02-07
               수필                                              알미대 사람들                                                                                                                   회령         한뉘 연변병원에서 사업한 한고향 한반 한침실 의대동창생이 회혼례를 한다고 해서 우리부부는 세밑에, 말그대로 반세기만에 고향연변땅을 밟아보게 되였다. 친구의 안해도 동반 동창이였는데 그들은 우리반에서 유일한 한쌍이였다. 친구의 회혼례에는 수백명의 하객들이 참가했으나 동반동창은 나뿐이였다. 곡절많은 50여년 세월이 지난 오늘 동반동창들은 다 죽고 80대의 우리 셋만 남았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친구는 우리부부를 기어코 자택에다 숙식을 안배 하였다. 친구의 집은 크고 훌륭하였다. 다사다난했던 지난세월 친구부부는 모진 환난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하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혈기가 왕성해 보였다. 자손들도 모두 잘되고 있고 자신들도 건강장수하고 부부가 의학교수로 성과도 많았으니 친구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 보람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라 하겠다.         회혼례가 지나서 3일후 우리가 이젠 집으로(북경) 가겠다고 하는데 불쑥 한고향 친구인 윤일이가 친구네 집으로 찿아 왔다. 원, 이런 경사가 있는가?! 하, 그것참!...          우리셋은 삼합구(진)사람이다. 나와 회혼례친구는 북흥촌 알미대에서 태여난 사람이고 윤일이는 삼합촌 홍경동에서 살았다. 알미대는 삼합구에서 제일 길고 깊고 큰 무서운 두메산골로서 두만강과 멀리 떨어진 오랑캐령 밑이다. 홍경동은 조선 회령시가지를 건너다 보는 두만강변의 마을로서 알미대와는 50여리 떨어져 있었다.         광복후 우리셋은 회령에 가서 초중을 다니고 청진에 나가서 고중공부를 하였다. 초중때부터 우리는 하숙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했는데 1, 2, 3등은 항상 우리셋이 번갈아 하였다. 윤일이는 집살림이 꽤 넉넉하다보니 나와 친구는 그의 신세를 자주 입었다.         고중졸업을 한달 남짓 앞두고 조선전쟁이 폭발 하였다. 전쟁형세가 급속도로 백열화 되면서 고중생들을 그대로 집단적으로 인민군에 입대를 시키는데, 졸업생인 우리를 졸업은 시키지 않고 계속 학교로 나오게 하고는 전시동원사상교육과 군사훈련을 진행 하였다. 결석하면 영창에 잡아간다고 하였다. 보아하니 우리도 군대에 나가야 할 판국이였다.         어느날 밤, 우리는 대충 괴나리보짐을 싸 메고 급급히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우리에게는 애국주의, 국제주의, 공산주의혁명사상보다 싸움판에 대한 공포심이 절대적우세였든 것이다. 우리는 철길을 따라 달리고 달리였다. 200리 거이되는 기차길을 달려 회령에 도착한것은 이튿날 점심녘이 였다. 우리는 두만강변 버들방천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오후부터 비가 출출 내리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변방부대가 두셋씩 어슬렁 어슬렁 순라를 하였다. 밤이 되자 우리는 두만강을 헤염쳐 건너서 윤일이네 집으로 갔다. 요기를 한후 나와 친구는 밤도와 알미대로 떠났다. 우리가 길을 떠날때 윤일이아버지는 함부로 나 다니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는것이였다. 비법월경으로 건너 왔으니 잡히면 조선으로 도로 보낼것이고 그러면 저쪽에서는 너회들을 참군도피분자로 취급할테니 큰일이 난다는 것이였다. 듣고보니 그럴법도 하였다. 우리는 근심가득 후드둑거리는 가슴으로 달리였다. 비는 추럭추럭 더욱 줄기차게 쏟아 졌다.        그후, 담이 작고 조심성이 많은 윤일이는 집에 며칠 숨어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도문으로 해서 흑룡강쪽으로 피신을 했다.        우리는 이튿날부터 마을 집집을(20여호) 돌아다니며 문안인사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전쟁란리판에서 용케 살아 제집으로 돌아 왔다고, 똑똑한눔들이 다르긴 다르다며 우리를 칭찬 했다. 우리가 숨어있지 않고 버젓히 나돌게 된것은, 윤일 아버지의 부탁을 부모님들께 말하니 무식한 그이들은 “중국땅 제집으루 왔는데 조선아덜이 무슨 상관이야. 흥!” 하면서 대수로와도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것을 마치도 죽다가 살아온것만키로 기뻐하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며칠후 아버지는 촌장을 찿어가서 물었는데 촌장은 “갸들이 거류민증이 여기에 있구 중국사람인데 무슨 그따위 소리를… 일없다.”고 했다. 과연 별일이 없었다.        그해 나와 친구는 연변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고 윤일이는 후에 삼합초중학교에 선생으로 들어 갔다. 졸업후 친구부부는 연변병원에서 사업하고 나는 심양의과대학에 분배 받았다.         윤일이는 가정성분이 상중농(기편중농이라고도 함)인 데다가 남, 북조선에 친척이 많아서 반우파, 민족정풍, 교원정풍, 사회주의교육, 문화대혁명… 크고 작은 모든 정치운동에서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졸경을 치뤘다. 그러나 걸리지는 않고 모두 결국은 무사히 고비를 넘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서는 하마트면 죽을번 했다. 상중농(부농과 거이같게 관제함.), 참군도피분자라는 모자는 이미 씌운거고 주요하 게는 특무(일, 한, 조 3국특무)로 모는데, 공사독재지휘부 반란파들은 특무를 잡아내서 대공을 세우겠다고 발광 하였다. 윤일이는 공사와 현의 독재지휘부에 반복적으로 끌려가서 지하실에 갇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기를 3년여, 마지막으로 또 현에 넘겨졌을때는 페병과 위병으로 사람이 백골이나 다름이 없었다. 온몸과 관절은 어혈로 해서 사람이 기다싶히 하였다. 그때 어느날 밤, 한차례의 고문에서 윤일이는 피를 한사발이나 토하고 기절해 버렸다. 현병원에 실어다 검사해 보니 왼쪽 갈비뼈가 네대나 부러지고 혈흉, 기흉이 되였는데 심장이 위험하였다. 복강내에도 대량의 출혈이 있는데 장기파렬이 한두곳만 아닌것 같았다. 현병원에서는 손을 들고 연변병원으로 즉시 가라고 하였다.        연변병원반란파들은 반동학술권위라는 정치모자를 쓰고 심사, 비판투쟁을 받고있는 나의친구를 불러다 윤일의 치료를 책임지게 하였다. 윤일은 수혈을 받으며 6시간이나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 났다. 두친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여러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친구는 끝내 윤일이를 살려냈다. 그러나 육체적 생명은 구해 줬지만 정치적생명은 구해주지 못했다. 윤일은 계속 “걸어둔 문제인물”이였다.       4인패가 거꾸러진후 당에서는 그의 정치적생명을 완전히 철저히 깨끗히 구해주었다. 지쳐 쓰러진 윤일은 끝내 해방의 날을 맞았다. 그후 그는 특급교원, 우수교원으로 재직 마지막 날까지 사업을 잘 하였다. 유감이라면 신체가 허약하고 이곳저곳이 늘 아픈것이다.       그날, 윤일은 부부동반으로 노루 한마리, 꿩, 송이버섯, 개암 등 토특산품을 가득 가지고 왔었다. 친구와 그들은 전화통화는 자주 하지만 70대후부터는 별로 만나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윤일의 신체상황이 주요한 애로였든 것이다. 때문에 친구는 회혼례를 알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문득 올줄이야?!...        나와는 50여년만의 해후였다. 나는 심양에 간후 얼마안되여 일본에 가서 박사를 하고 또 북경으로 전근한후 부모님을 모셔 가다보니 연변으로 올 일이 없었다. 우리집은 조선에 친척이 좀 있었으나 전쟁후 모두 종무소식이 되고 연변에는 친척붙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세월 혁명사업을 하느라 어데 겨를이 있었든가. 경제적 사정도 사정이려니와 때거리 식량사정도 누구네집에 함부로 놀러갈 형편이 못되였다. 지금같은 세상이였드냐!…        20대에 헤어진 홍안의 청춘들이 80의 로안으로 만났다! 우리는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우리는 윤일이 한테 고향 알미대 소식을 물었다.(친구도 결혼후 인차 부모들을 연길로 모셔 왔다.) 알미대 사람들은 인민공사 초기에 버덕마을 이곳 저곳에 이사를 하고 마을은 언녕 없어 졌는데 그 후대들은 어떻게 되였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와 친구를 외우는 사람은 삼합땅에 지금도 많다고 하였다. 윤일이는 30여년 교원사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난한 산골 사람이라도 어떠어떠하게 학습을 잘하며 노력분투해야 한다고, 우리를 귀감으로 내세우고 우리의 옛말을 자주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를 자기의 자랑으로, 삼합땅의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윤일이 선전 때문일 것이다. 윤일이는 우리를 잊지않고 항상 지켜보며(우리는 매체에 여러번 소개된바가 있다.) 그리워 했다고 하였다. 무정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처럼 절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것도 하여준것이 없다. 지어는 편지 한장도 한적이 없지 않은가!...        이틀후 우리는 윤일이 집으로 놀러 가는길에 알미대 마을터를 찿아가 보기로 하였다. 승용차를 골어구에 세워두고 2리남짓 골안으로 들어가다가 우리는 돌아서고 말았다. 관목과 아름드리 나무가 꽉 들어찬 골안바닥에는 오솔길 흔적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가 이럴진대 10여리를 더 들어가야할 마을터전은 보나마나 어떻겠는가. 상상할것도 없었다. 워낙 험악한 이곳은 사람이 살곳이 아니였다. 광복전에는 왜놈들을 피하여 이곳에 숨어 살았다. 하지만 경신년토벌(1920년)을 피하지 못했다. 그때, 마을은 페허로 되고 1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을은 다시 그 자리에 일어섯다!…        지금 자세히 다시 보니(과학발전관으로) 이곳은 확실히 사람이 살곳은 아니였다. 인민공사 초기에 마을을 이주시킨것만은 옳은 시책이였다. 인민공사는 어떻든간에…       우리가 지금 알미대 후손들의 소식은 알지못해도 그들은 지금 중국의 해내외에서 나름껏 잘 나가고 있을것이다. 그것은 알미대 1, 2, 3세대 사람들을 보면 산골사람들이 우직하다고 해도 그들은 한결같이 정직하면서도 억세고 용감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근로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였다. 그들속에서는 교원, 령도간부, 의사, 전쟁판에서 공을세운사람, 모범인물 등 출세한 사람이 여러명 나왔고 혁명렬사도 셋이나 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후대들은 틀림없이 훌륭할것이라 믿는다. 전통이란 알게 모르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대를 잇는 법이다. 그것은 핏줄이 이어지듯. 그리고 지금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얼마나 총명하고 날쌘가!...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며 미래다. 씩씩하게 자라는 젊은이들을 볼때 더없는 긍지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에 의해 우리당 우리인민 우리사업 우리나라는 세계의 동방에 우뚝서서 인류의 앞길을 밝혀주며 찬란한 빛을 뿌릴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자아실현과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억세게 열심히 노력분투하여라!...                                                                                                                                    11.2
56    안해에 대한 재인식 댓글:  조회:2600  추천:1  2014-02-03
       수필                                     안해에 대한 재인식                                                                                                       회령      주제넘은 소리지만 나는 모택동사상이 꽤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활동성”이 부족해서 재직당시 한자리를 크게 해 먹지는 못했다. 나의 안해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다. 부부는 서로가 닮는다더니 아마 그래서 그런건지…     우리는 처녀, 총각시절부터 그러니까, 사회에 첯발을 들여놓을 때로부터 한단위에서 근 40년을 사업 하였다. 원앙새나 기러기 같은 극진한 한쌍은 못되지만 하여튼, 밤낮 그냥 함께 있었다. 그런데 령도급에 들어가서는 안해가 나보다 반급이 더 높았고 입당도 나보다 2년을 먼저 했다. 부서는 달랐다. 그러나 실제 령도권은 내가 쥐고 있었다. 집에서도 단위에 나가서도 지어는 잠자리에서도 내가 상급이였다. 안해의 입당지원서, 자전서, 사업계획, 총결재료 등등 중요한 것은 내가 심사 수개를 해 주었고 밥이나 국, 고기반찬은(어쩌다가 먹지만.) 수뎃것으로(숫것) 알뜰한건 으례히 내가 먼저 먹었고 내가 수저를 두어번 든 다음에라야 안해와 아이들이 먹었다.     나에게는 모택동사상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말해서 사실은 “남존녀비”, “가장독재” 같은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가풍을 은근히 흐뭇해 하면서 습관이 되고 령도버릇이 자랐다. 그건 순전히 안해가 미인계를 쓰며 아첨하여 조장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수년을 이러다 보니 무슨일이나 나의 구미가 원칙이였다. 안해의 처사가 나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즉각 고치게 했고 그러면 안해는 대부분 경우 나의 의견에 따라 주었다. 아주 성근한 태도로, 나의 기분에 맟추어 주었다.     안해는 특히 가정살림에서, 큰일은 말할것도 없고 깨알만한 일도 모두 나에게 통보를 해 주었고 부지런히 회보하고 청시를 했다. 나는 그의 고분고분, 나긋나긋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고 슬그머니 내가 똑똑한것 같아 자존심이 무둑해서 코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높아 졌다. 단위에 나가서는 내가 “숴라쏸”(내말이면 다다.)이 아니지만 여덟식구 대가정에서는 모든일이 내가 숴라쏸이 였다. 기실은 잡다한 가정일을 대부분은 안해가 자기 마음대로 처사해 놓고는 나에게 통보를 하고 청시하는드키 “예술”(수단)을 썼는데 나는 거기에 미혹되여 “응, 잘했어. 응, 그렇게 해.”하고 비준을 했는데 그 멋이 좋았다. 정작 나의 주의대로 한것은 수십년 동안에 몇가지가 안된다. 나는 가정일에 대해서는 아주 부담이 없이 단위사업에만 몰두 했다. 안해가 경영을 제대로 하기에(나의구미에 맞게, 나의생각과 같게.) 가정의 운행은 원활 했다. 나는 집에서도, 단위에서도 방침, 정책, 대방향을 그것은, 세절까지도 아주 능란하게 다루는 유능한 간부라고 은근히 자부하기까지 했다. 가정재정은 안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나는 용돈도 그에게서 타서 썼다. 그는 수중에 현금이 있든 없든 얼마를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갖다 바치었다. 나는 나의 권위에 늘 흐믓해 하며 령도틀거지가 습관이 되였고 안해는 괜찮은 내조쯤으로 얕잡아 치부를 했다. 여러해를 살아 가정구성원은 많이 변동이 되였으나 안해의 내조작풍은 의연히 일관적이 였다. 그야말로 부창부수의 부부생활이 였다.     그런데, 안해에 대하여 크게 재 인식하게 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정년퇴직을 한 해의 일이다. 정년퇴직을 한 날인즉 내 생일날인데, 그날에 나의 회갑연을 할것이라고 안해가 청시를 하듯이 의논조로 말을 했으나 본질상에서는 일방적인 강력한 통보였다. 하여 우리부부는 처음으로 련 며칠 공방설전을 전개 하였다. 나는 지금의 류행에 따라 70대에 가서 함께 회갑을 쇠자고 주장하고 안해는 회갑이라는 것이 그런거가 아니라고 아주 나를 우습게 보며 지시를 묵살 했다. 이런일은, 특히 이런 중대사안 앞에서 안해가 이렇게 령도에 대여든 일은 참으로 난생 처음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이막히고 가슴이 떨려서 두눈을 딱! 부릅뜨고 입을 하ㅡ 벌리였다. 밸은 치밀었으나 일순간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안해를 노려 보기만 하다가 놀란 가슴이 좀 진정이 되니 그제야 말이 나왔다.     “원, 어처구니두 없는 한심한 소리를, 다시는 입두 뻥끗 말아요. 소갈머리가 없어두 여분수지.”     “회갑이란게 무엇입니까. 만 예순살 자기 생일에 쇠는것이 회갑이랍니다. 날자를 하루라도 어기여 쇠는것은 둔갑이라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이 어느때오? 바지 벗고 춤을 춰두 다 제멋인데. 흥! 누가 회갑이 무엇인지 그걸 모르는가. 회갑을 일찌기 쇠면 일찌기 죽는다오. 그래서 다들 80대, 90대에 가서 죽기 전날에 회갑을 쇠는게오. 자기야말로 쥐뿔두 모르면서.”     “쥐뿔을 봤습니까? 그걸 나두 좀 구경 합시다. 호호호. 한뉘 령도를 하더니 아는것이 정말 많네요? 호호호.”     “쳇! 누구 면전이라구 또박또박 대꾸질이야. 한심하군. 무조직 무기률루. 안돼!”     “첯날 색시처럼 얌전하게 앉아서 주는 떡이나 받아 잡수시요. 눈을 부릅뜨면 누가 겁낼줄 아나 봐.”     “글쎄, 안쇤다니까! 무슨말이 그리 많아.”     “아이구! 호호호. 아무때라두 쇠야 할것 간단히 제대루 합시다. 더 말씀 말아요.”     “안된다는데두. 엑, 그것 참! 고집 쓸줄 다 알구? 튀슈를 했다구 업신 여기는가. 드러봐서… 그럼 회갑이구 둔갑이구 밸대루 하오. 매일 쇄 주오. 여북 좋아서!”     시비를 하다보니 차츰 안해의 말에 웃음집이 흔들거렸으나 나는 체면상 엇먹어 보았던 것이다. 자식들까지도 어미와 맞장구를 쳐 대니 우습고도 좋았다. 지들이 내 령도수완에 넘어 갔지. 갈데 있나… 나는 아큐의 정신승리법으로 그래두 내가 한수 더 높다고, 이겼다고 흐믓해 하며 슬그머니 물러 섯다. 제때에 후딱 치뤄버리는 것이 질질 끌기보다는 부담스럽지두 않구 거뿐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든 것이다.     회갑후 어느날, 안해는 기세 등등해서 한바탕 “후라까이”(휘뜩 뒤집는다.)를 단행 했다. 이번에는 상론은 커녕 아주 독단적으로 과감히 용감무쌍하게 “쪼반”(반란)을 감행 했다. 그것은, 언제부터 내가 “해야지! 이제부터는 꼭 해야지!” 하면서도 하지 못한일ㅡ 금주, 금연이라는 중대결행이다.     재직에 있을때 공짜로 술과 고기와 고급담배를 입에 달고 있었는데 혈압이 오르내리며 파동이 심하고 임신배가 되였는데 의사들은 동맥경화, 지방간, 알콜간, 관심병, 뇌출혈, 중풍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위혁을 했다.(저희들도 술, 담배를 좋아 하면서.) 하지만 나는 비타민씨나 생각나면 몇알씩 먹는둥 마는둥 대수로와 하지 않았다.(집에 20여가지 무슨 약, 무슨 보건품이 가득하다.) 그날 안해는 각종 고급술, 고급담배(거지반 가짜겠지만, 아까운걸), 지어는 내가 애용하는 금붕어가 헤염치는 술잔, 도자기재떨이, 찔리깨라이타까지 단꺼번에 몽땅 무차별 료정을 냈다.     그뿐이 아니다! 그날부터 고기와 기름튀기, 닭알, 젓갈 등 알뜰한 반찬은 일체 철거하고 시래기국, 김치, 콩나물, 비지장따위만 그것도 겨우 야박하게 한공기만 먹이는게 아닌가! 이렇게 먹고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굶겨 죽일 작정인가… 나는 삐뚜렁 소리를 하면서도 과학리론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안해에게 단호한 결단력과 주대가 있다는 것을, 고집이 세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크게 놀랐을 뿐만아니라 좀 겁을 먹기까지 하였다. 이제부터는 주의 해야지…나는 그의 관리대로 수굿하고 따랐다. 우파때 개조에 복종하듯히.     또 더 있다. 산으로 들로, 장마당이며 상점, 공원, 강변으로 소를 끌고 다니듯히 끌고 다니는데, 활동시간, 자는시간이 군대규률처럼 엄격했다. 나는 코꿴 송아지처럼 욕사발을 얻어 먹으면서(어떤때는 게두덜거리며 싫다고 떼질을 써서.) 따라 다녔다. 반항하면 안해가 신경질을 내는데, 그러면 신체에 불리하다 하지 않는가… 나는 일약 군중신분이 되고 안해는 횡포한 독재자처럼 군림을 했다. 보아하니 나를 단단히 틀어쥘 잡도리 였다.     몇달후, 권위를 부려 볼 기회가 왔다. 그것은 안해의 생일이 눈앞에 다가 왔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안해에게 공개적인 생일상을 차려 준 적이 정말로 한번도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는 안해의 생일상을 나와 꼭 같은 규모로 공개적으로 차려 주리라 작정을 했다. 남들은 언녕 그렇게 했는데 나라고 못할것이 있는가. 이전에는 안해가 쑥스럽다느니, 돈벌이를 하자고 생일을 쇠는가? 그러지 말라고 자꾸 강조를 하는데… 하면서 거절하기에 나도 그게 옳다고 칭찬해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지금은 나의 비위짝도 두꺼워 졌든 것이다. 정년퇴직후 탕개가 풀어져서 꺼리는것이 없어 졌는가…     재직에 있을때 나는 지천명이 썩 지나서 그러니까 개혁개방이 15년도 더 지나서부터 공개적으로 생일연회를 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많이 파란 령도동지들도 생일연을 누구에게 질세라 굉장히 차리는데 나만 가만 있자니, 믿지기만 하는것이 반발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생일상을 차리고 축하금일봉을 받아 먹었다. 솔직히 말해서 생일떡보다 그것이 더 맛있었다. 안해는 군말없이 나의 지시를 관철 했으나 번마다 계면쩍어 하면서 송구해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해마다 생일연을 포치 하였다. 흥! 내가 뭐, 남없는 짓을 하나?!... 손가락질 하며 웃겠으면 웃으라지. 개코는 아니구. 나는 대수로와 하지 않았다.     안해의 생일을 앞두고 내가 결정을 자식들에게 선포를 하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찬성을 하는데 안해가 대뜸 반대를 할줄이야! 웬 망발이냐고, 어째 벌써 치매가 오는가고, 호되게 쏘아 붙히는 것이였다. 이번에는 권위를 세우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기에 나도 벌컥 언성을 높히며 련줄포를 쏘았다.     “찍소리 말구 그전처럼 좀 얌전하오. 내가 튀슈한후부터는 무스게나 다 제맘대루 숴라쏸을 하자구 들면서. 어따대구! (오래간만에 큰소리를 쳐보니 속이 다 쉬원했다.) 안되우! 이번에는 내 말을 따르오.”     “아이구! 이거 좀, 남 웃길 소리를 작작 하세요. 녀자가 생일술상을 차리고 동네방네를 청한다면 세상이 번져지겠습니다. 창피하게스리. 할일이 없으니 심심합니까. 별생각을 다 하고.”     “창피는 무슨 생뚱같이 창피야! 남들은 언녕부터 부인님, 부인님 하면서… 그것이 지금은 신식이구 고상하고 젊잖구 신사적이구 서양식으루 고급류행이라는데… 가시에미사촌이 죽어두 다 알리는데… 내가 그간 등한했던건 미안하구… 자식들 위촌(존중)두 이젠 받을때가 됐지. 받을줄두 알아야 하오. 안 그렇소?”     “됐습니다. 부인님, 부인님 하던 어른들이 오망은 더 씁데다. 당신이 내생일을 다 생각하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은 당신의 생일마다 함께 쇳는데 뭘 또 그럽니까.”     “무슨 왕청같은 소리를. 언제?”     “당신이 생일을 쇨 때마다 교배주를 마이라고 해서 함께 마이지 않았습니까? 그럼 됐지. 나도 축하를 받았는데. 나는 당신이 생일을 쇠면 나도 쇤거라고 생각했어요. ”     “이런! 그게야 작란이지… 안되우! 이제부터는 꼭꼭 당신두 생일을 크게 쇠야하우. 그렇게 알구 있두룩!”     “쇠는가 보시요. 정말 그러는 날에는 달아납니다.”         아이쿠! 케를 보니 안해의 태도는 확고했다. 밸머리가 정말로 그럴수 있다고 판단 되였다. 달아나면 큰일이다. 북경이나 상해는 너무 머니까 안 가겠지만(아들과 딸의 집) 가까운 룡정에 막내딸이 있고 또 친척집도 여렀이다. 어데로 도망을 하는 날이면 독수공방도 문제지만 당장 누가 밥을 끓여 줄것인가. 큰코 치겠다… 나는 달래고 설복을 하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였다. 안해에게 숨은 밸이 있다는건 이미 명확히 알았으나 이렇게 땅고집일줄이야!... 나는 더는 어쩔수 없어서 두손 두발을 들고 머리까지 흔들었다. 한번 본때스레 권위를 세워 보자던 노릇이 우습게 되고 말았다. 되려 부옇게 몰리우기만 했다. 나는 뿔빠진 쇠 상통을 하고 풀풀 한숨을 쉬며 툴툴거리긴 했으나 별수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 가만 보니까 안해는 고분고분, 나긋나긋한 일면도 있고 원칙과 주대도 상당히 센 일면이 또한 있었다. 이래서 우리 녀성들을 “외유내강”이라고 했는가…     그후, 나는 여러날 안해에 대하여 진지하게 사색하여 보았다. 부부로 산지가 이젠 40년 세월도 거이 되지만 이렇게 심각해 보기는 처음이다.     기나긴 세월! 나의 안해는 과연 어떤 녀성이였든가?!... 돌이켜 보니 나의 안해도 현모량처라고 할수 있었다.         첯째로, 그는 맡은봐 사업을 잘 하였다. 현과 주의 표창도 여러번 받았지!...     둘째로, 그는 가정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한몸을 아낌없이 헌신했다. 꽃다운 어린나이에 째지게 가난한 산골집에 맏며느리로 들어선 그날부터 오늘까지 그는 너그럽고 무던하게, 그리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따뜻하게 식구들을 안아 주었다. 시부모로부터 시동생 시누이… 누구도 차별을 두지 않고 받들고 사랑했다. 친척들에게도 있는껏, 힘껏 베풀었다. 정신상 물질상에서 성심껏 최선을 다 하여 관심하고 방조를 하였다. 하여 가까운 친척집에 놀러왔던 친척들도 우리집에 묵기를 더 편해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팬티도 깁고 또 기워 입었다.(안해의 별명은 큰집맏며느리감.)     셋째는, 나다. 내가 바람을 피워 개골망신을 하며 피둬(비판과 투쟁)를 받을때 그는 이불속에서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등뒤에서는 그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도 단위에서도 예전과 다름없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가장 뜨거운 교육을 받았다. 가정은 평온하게 대해항행을 계속할수 있었다…     넷째로, 그는 자식들을 모두 바르게 키웠다. 큰 아들애가 생산대 옥수수 이삭을 두개 뜯어 왔을때 그는 아이를 데리고 교장선생을 찿아가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아이들에게 숙제를 한후에는 닭먹이풀(세투리, 돌피 등)을 뜯어 오게 임무를 주었고(닭알은 반알도 먹지 않았다. 닭고기탕을 하면 감자나 무우 건데기에 국물만 먹었다.) 휴일에는 딸애들을 데리고 웃으며 말하며 빨래를 한 함지씩 하였다. 밝고 엄하고 또 자애로운 어머니를 자식들은 무척 존경하며 사랑한다.     다섯째, 그는 매사에서 원칙을 지키면서 령활하게 처사하는 총명과 능력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의 잘못을 발견한것이 없다. …     나는 생각 된다. 기실은 녀자들이 남자들보다 백배는 더 총명하고 강하고 훌륭하다고!(제일 크다는 산고를 이겨내는 것만 보더라도.) 녀성은 꽃이며 또 우리를 품어주는 집이다. 남자들은 흔히 녀성을 꽃으로만 보며 포근하고 아담하고 안온한 요람ㅡ가정은 자기의 덕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집은(가정은) 녀자가 관건이고, 꾸려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님들은 한 집이 잘 되자면 녀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고 한것 같다. 한 가정, 한 가문의 흥망성쇠는 녀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의미심장한 교시도 있다.(나라도 그렇지 않은가!) 앎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있는데 녀성의 중요성, 품행, 덕성, 위력을 일컷는 말일게다.     녀성은 인류의 어머니다. 세상에서 어머니가 가장 위대하다. 어찌 존중하고 애대하지 않겠는가!...     사내대장부들이 나를 치관얜(공처가), 팔부, 애처가라고 놀린대도 할수 없는 일이다. 안해들에 대한 나의 진솔한 인식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사실이 그런걸 달리 말할수야 없지 않겠는가…                                                                                                                                 12.2
55    산천당 댓글:  조회:2539  추천:1  2014-01-31
             중편실화                                                        산천당                                                                                                            회령     신석동 동구앞에는 운동장 크기의 공터가 있는데 그 복판에 산천당이 있다. 산천당은 마을과 3백여메터가량 떨어져 있다. 그런데 신석동의 산천당은 그 무슨 단(坛)도 아니고 당(堂)도 아닌 수림이다. 운동장크기의 공지가운데 아름드리 참나무고목이 20여그루 무럭무럭 서 있는데 열두칸 기와집 터전보다 더 넓어보이는 땅이다. 주변으로는 배배 탈린 가지를 양산처럼 펼친 애송나무와 비술나무가 몇그루 서 있고 싸리나무 개암나무 무더기가 몇곳에 있을뿐 자질구레한 잡초들 뿐이였다. 마을에서 내다 보거나 멀리쯤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면 참나무숲은 마치도 커다란 궁궐같이 안겨왔다. 아름드리 미끈한 줄기가 10여메터 곧게 뻗친위로 무성한 가지들이 얼기 설기 엉켜 마치도 지붕같이 되였는데 봄, 여름에는 푸른기와, 가을에는 황금기와를 얹은듯 했고 겨울한철에는 검은기와를 덮은듯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산천당 즉 참나무고목수림속에는 커다란 바위가 세개 박혀 있는데, 천신을 대표한다는 제일 큰 바위는 자동차대가리만큼 컸고 그옆으로 대여섯 발작 떨어져 있는 지신 대표 바위돌은 천신바위보다는 작았지만 그것도 수레안틀만큼은 컸다. 천신바위와 지신바위 뒤켠으로 대여섯발작 떨어진곳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또 한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 보호신을 대표하는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세개의 바위돌은 급에 따라 크기가 분명했는데 마치도 서너살 터울이 되는 형제들 같았다. 위치도 이를테면 아주 적절했다. 천신과 지신을 대표하는 바위는 다정하면서도 점잖은 부부처럼, 나란히 서있고 마을신을 대표하는 바위돌은 효자처럼 뒤에 선것이 공손해 보이였다. 현대적시각에서 보면 지도자 뒤에 따라다니는 겸손한 아래간부 같았다.     산천당이 천생적인것인지 인공적인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산천당 제례행사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백여년전에 신석동이 생겨서부터 해마다 치르는 동중대사로서 음력 사월초여드레날이면(4월8일) 마을사람들은 리유불문하고 하루 휴식하면서 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산천제를 올리였다. 휴식이라기보다 매우 정중한 행사의 날이였던것이다.     제례음식감은 추렴으로 걷었는데 집집마다 정성을 다해 자기몫을 내였다. 돼지값과 술값은 돈으로 풍기였는데 어떤때는 잘사는 집들에서 전담을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공익행동을 한것인데 그런 소행은 오래동안 원근에 미담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극히 적었다.     해방후 윤영칠이란 사람이 신석동에 토지개혁공작대로 오게 되였다. 그는 산천당제례를 걷어치우라고 불호령을 하였지만 빈고농협회적극분자들을 위수로 마을사람 전체가 듣는체도 하지 않아 시무룩하고 말았다.     빈고농협회 몇몇 적극분자들은 마을에서 한집뿐인 부농인 문명순을 청산하는데는 말그대로 발벗고 나섰고 마을사람들도 따라 나섰는데 허석근이란 사람은 그때 입당까지 하게 되였다. 허석근은 사람들이 “거렁뱅이”라고 부르는 허씨문중에서 장손인가 한 30대 장년이였는데 정직하고 말머리가 무거운 사람이였다. 그런데 우직한것이 흠이였다. 그는 광복후 야학반에 다니긴 했으나 글귀가 트지 못해서 반문맹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지주, 부농을 때려부시고 빈고농은 번신해야 한다!”, “청산과실(지주, 부농의 모든 재산)은 혁명과실이다. 빈고농의 재산이다!”하는 몇마디 정치구호는 잘 사용했다. 그리고 사람이 우직해서 마을의 부농집 문명순을 투쟁하는데 앞장을 섯다. 윤영칠이 밀어주자 그는 자기도 신세진바 있는 문명순 내외를 여러번 호되게 구타 하기까지 했다. 어느 마을에서 부농이거나 상중농을 투쟁하는 열정이 높지 못하면 공작대에서는 허석근을 불러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허석근은 상기의 그 익숙한 정치구호를 고래 고래 소리친후 대뜸 호된 손찌검을 들이 댔다. 그런데 몇달후부터는 허석근이 주먹질이 쑥 들어가버렸다. 입당을 하면서 공작대책임자의 교육도 있었거니와 마을 또래들로부터 “그러는게 아니다.”는 꾸중도 받았던것이다.         허석근의 안해는 동글납작하게 생긴 해사한 녀자였다. 알릴듯 말듯하는 사팔눈은 어찌보면 애교를 부리며 추파를 보내는것 같기도 했다. 토개공작이 끝나갈무렵 허석근의 처와 윤영칠이 바람피운다는 말이 수근수근 돌다가 얼마안되여 윤영칠이 흑룡강밀산에 있는 제집으로 돌아 가면서 흐지부지 해지고 말았다.     다른 마을에서도 해마다 사월초여드레날이면 산천제를 지냈으나 농업합작화후부터는 선후로 거지반 식어버렸다. 그런데 신석동에서는 해마다 어김없이 산천당에 가서 신령께 제를 올리였다. 공사관리위원회(향정부)와 대대(촌)령도에서 허석근이나 마을의 간부라는 사람들께 봉건미신활동이니 그만두어야 한다고 몇번 말하였으나 다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허석근이를 비롯한 신석동 간부들은 “동네로인님들이 쉬는겸 그러는걸 가지구 … 무슨 대단한 일이라구. 듣지 않는걸 완력으루 때려 부시겠수? 모르는체 하시우.”하고 되려 대방을 설득하려 들었다. 당시, 상부에서는 께름직하기는 했지만 경찰을 동원할일도 아니고 하늘이 무너질 일도 아니여서 그러다가 놔두고 말았다.차츰 개명해지면 저절로 없어질것이니까 급해할 일도 아니였다. 풍속습관이란 사회의 발전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페습은 저절로 점차 사라지고 진보적인 새로운 형식이 점차 또 형성되기 마련이다.     신석동의 산천당제레행사는 끈질기게 해마다 이어졌다. 집집마다 귀한 차입쌀과 통장제로 사온 기름방울을 산신제 공양보시로 상몫을 떼여 두었다가는 행사전날 잔치집에 가져갔다. 거기서 정성껏 제사음식을 만들었다. 유사는 들어오는 진상품을 호별로 적발했다. 그리고 동중노인들 좌석에서 보고를 했는데 누구네가 추렴으로 분담한것보다 더 가져 왔거나 닭알 혹은 북어, 닭마리를 더 가져 왔다고하면 “그것참, 기특헌지고!”하며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집체에서는 돼지와 분토재(감분국수), 술 같은 큰돈이 드는것을 슬그머니 보시 했는데 군중들은 물론 상급령도에서도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4청”운동때 공작조가 캐고 들어서 신석동간부들이 고백을 했지만 온마을 남녀로소가 누구도 빠짐없이 다 같이 먹었는데 대장이나 부기원을 탐오 했다고 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공작조로 온 사람이 우선 너그러운 사람이였다.     “4청”운동을 련속 3년이나 거듭했지만 신석동의 그 랑비문제는 그냥 해마다 존재했고 계속 그 정도의 액수였다. 신석동에는 그때까지 다른 문제는 한건도 터지지 않았다. “랑비”부분은 “생산대집체봄놀이활동경비”라고 결론을 내리였다. 물론 신석동 간부들에게 예수쟁이 간부라느니, 미신에 걸린 얼떨떨간부라느니 … 하는 말도 들렸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깨끗한 간부”들이라는 감정을 받았다. 제례행사뒤에 온마을사람들이 점심밥으로 제사음식을 한밥 잘 먹고는 유쾌한 오락을 저녁때까지 하고는 저녁밥까지 먹고 헤여 졌던것이다. 하여 봄놀이라는 명분을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제례전날 마을사람들은 몸을 깨끗히 씻었다. 부부들은 몸이 근질거려도 잠자리를 갈랐고 이튿날에는 새것이든 묵은것이든 아무튼 깨끗한 옷들을 갈아입었다. 이속에는 신령께 정성을 다해 앞날을 기원하는 심정과 마을 전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집단의식이 들어있었다. 부정한 몸과 마음으로 산천당제례에 참석하면 본인과 가족, 동네 모두가 화를 당한다고 대대로 엄히 훈시를 받아 왔기에 사람들은 아주 자발적이고 자각적이였다. 신석동에서 제일 무서운 꾸중은 “동네를 망칠놈!”이라는 것이였다.     산천당제례 도감은 당시 마을에서 좌상 로인이 맡는게 관례였다. 만일 좌상어른이 사정으로 (주요하게는 신체상황)도감을 못할 경우에는 동중어른들이 복이 있고 덕망이 높은 노인을 천거하여 지정했다.     사월초여드레날, 늦으막한 아침이 되면 공복으로 제물을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도감어른이하 년령의 고하순으로 줄을 서서 마을 사람들은 극히 공손한 자태로 산천당에 간다. 유사는 오늘 정중한 행사의 집사(집행주석)소임을 하게 되는데 그는 술방구리(술통)를 조심히 껴안고 수레옆에 붙어서 따라가야했다.     산천당에 이른후 집사는 선정된 몇몇 사람을 지휘하여 제례상을 차리는데 천신께 먼저 상을 올린다. 그런데 수절은 꼭 두벌을 놓는다. 그것은 신령님과 부인이 겸상으로 음복하기 때문이다.     상이 다 차려진후 도감어른이 사람들을 이끌고 신령님께 문안인사를 올린다. 도감어른이 “일배! 재배! 삼배!”하는 구령에 따라 남녀로소 전체가 말그대로 코가 땅에 닿게 절을 한다. 다음은 도감어른이 잔을 받쳐들고 집사가 술을 따른다. 도감은 첫잔을 좌측에 갖다놓고 다음잔은 우측에 갖다 놓는데 그것은 천신님은 남자고 좌측에 착석했기 때문이다. 잔을 올린후 도감은 땅을 짚고 꿇어 앉은 자세로 머리를 들어 천신바위를 쳐다보며 얼마간 뜸을 들이는데 이 시각이 제일 요긴한 대목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때에 도감어른이 천신님께 마을사람들의 간절한 념원을 말씀 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리를 내면 신령님께서 놀라시기에 속으로 말한다. 하여 사람들은 제대로 잘 말씀하지 못할가봐 은근히 긴장해하고 말씀 잘하기를 또한 긴장해서 기다린다. 신령님은 지존지대지강한분으로 무소부지, 무소불위신통력을 갖고 있기에 심기를 노엽히지 말고 환심을 잘 사야한다고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순간에는 모두가 한결같이 그랬는데 그것은 그들의 얼굴표정과 절하는 모습에서 충분히 보아 낼수 있었다. 토개당원인 허석근만 보더라도 이마와 코를 땅에 붙이며 참답게 절을 하고는 슬그머니 얼굴을 훔치였다.     도감이 신령님께 아뢰 올리는 기원에는 크게 두가지 부분이 있는데 첫부분은 지난해도 보살펴준 은덕에 잘 살았으니 고맙기 그지 없다는 찬사의 말이고 두번째 부분은 금년에도 여러모로 보살펴 주십사 하는 부탁이다. 끝으로 약소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올리는 음식이니 많이 잡숫기를 복망하나이다하면 도감이 중임은 끝나는 셈이 된다. 이것은 고정된 격식이지만 도감의 언변과 수준에 따라 뜸을 들이는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어찌되였든, 도감이 일배를 올리고 일어서면 기원이 끝난 것이다. 도감은 좌측으로 조용히 물러가서 량수거지를 하고 옆으로 시립한다. 수절을 진지밥그릇과 돼지 갈비우에 올린다. 술을 마시는 것은 끝나고 이제부터는 식사를 하신다는 뜻이다. 또 적당히 뜸을 들인후 수절을 내리워놓고 정화수 두사발을 올린후 집사는 우켠의 자기 위치로 가서 역시 도감처럼 량수거지를 하고 공순히 서 있는다. 천신님 내외가 양치질을 충분히 했겠다고 짐작되는 시점에 도감이 다시 제례상 앞에 나와 서서 천신바위를 바라보며 입속으로 우물 우물 중얼거린다. 이때의 말은 간단한데 “기체 평안히 다녀 가옵소서.” 하는 인사 말이다. 지금까지 좋이 한시간 벙어리 시늉만하던 도감어른은 홀가분한 기분이 되여 기세좋게 “일배! 재배! 삼배!” 하고 구령을 웨친다. 구령에 따라 마을사람 남녀로소는 또 이마빡과 코를 땅에 납작하게 붙이며 절을 한다. 이로써 천신님께 올리는 제례행사는 끝난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기꺼운 표정들이 되여 얼굴을 활짝 편다. 다음은 지신님과 마을 보호신차례가 되는데 제례법식은 먼저와 똑 같다.     제례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천신바위와 지신바위앞에 줄느런히 시립해서 도감어른의 훈시를 경청하는데 마치도 무슨 선서를 하는것처럼 엄숙하다. 도감어른의 훈시는 수십년 내려오는 “동훈(洞训)”인데 번마다 신성한 힘이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심정을 품게 했다.      “심성위정(마음과 성미를 바로 가지며) 언행위도(말과 행실은 도덕을 지키라)! 들었으냐?”      “예.”      “명심불망하겠습니다.”      "잘 지키 겠수.”     “암. 그렇습지요.”     대답은 각가지 였으나 공통한것은 우렁차고 확고하고 또 진심인 것이였다. 이순간, 나쁜짓을 할 궁리를 하며 거짓대답을 하는 자는 한명도 없어 보였다. 신석동 산천당제례행사는 민속인지, 봉건문화인지 … 우매한 미신활동인지, 반혁명반동행위인지 … 그때까지는 누구도 알맞는 모자를 씌우지 못했다. “4청”운동에서 “생산대사원들의 집체적봄놀이활동”이라고 가래장부대보다 더긴 명함을 붙인바는 있지만 그것은 자타가 함께 만들어 붙인 엉터리 억지 변명이였다.     하지만, 긍정할 점이 한가지는 있었다. 제례행사를 통하여 사람들께 “동훈”을 다시 한번 힘있게 강조했고 그 “동훈”은 제창할만한것이라는 점이다. 이 “동훈”은 신석동에서 확실히 일정한 생명력과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과 마을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고 바른마음, 바른행실을 하여야 나도, 너도, 모두가 좋다는 사상의식을 갖게 되였던것이다. 이것은 계급투쟁과 정치사상교육과 혁명화를 틀어쥐여 형성된것이 아니라 사람고유의 인성을 부단히 환기시켜 습성, 체질화 된것이였다. 신석동 사람들은 도둑질하거나 이웃간에 다툼을 하거나 지어는 아이들도 못된짓을 하거나 싸우는 일이 없었다. 광복전 왜놈들 등살에 가난은 해도 사람들은 화목하게 살았다.     마을에서 자수성가해서 차츰 잘 살게돼, 토개때”부농”으로 성분이 매겨진 문명순도 마을 인심만은 좋았었다. 그는 신석동 토배기농민으로 주요하게는 목재장사를 해서 차츰 춰 섰고 광복나기 몇해전에는 기와집을 지었으며 (신석동 유일의 기와집) 뒷마을 최지주가 파는 땅을 눅다고 여러헥타르 사들였는데 그것을 소작도 주고 농망계절에는 계절고농도 사서 썼다. 광복이 된후 토개시 그는 정책계선에 걸려 꼼짝 못하고 “부농”이 되고말았다. 고아인 김문덕을 거두어준것은 되려 머슴을 둔 죄악으로 치부됐다.     당시, 부농내외를 청산투쟁할때 허석근은 윤영칠이 부추기자 그들의 멱살을 쥐여 흔들던데로부터 부지깽이로 매질하기에 이르렀다. 감춘 돈과 보물따위를 내놓으라는 것이였다. 김문덕이 때리지 말라고 악을 쓰며 왕왕 울어대자 윤영칠은 덜미를 끌어 쫓아버렸다. 빈고농단 주임자리에 앉혀놓은 리순보는 “문명순(부농)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우.”하고 기막힌 소리를 어벌짝이 크게 한마디 했다가 윤영칠에게 반나절이나 줄욕을 먹었다.     개체농시절이나 집체화세월이나 신석동 사람들은 화해롭게 살았다. 사람들의 인간미가 제일 짙게 풍긴시절은 소결이때와 호조조때였다.     그후 초급사, 고급사, 인민공사로 그리고 “4청”때까지 정치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면서 사람들 관계는 정치사상관계로 서먹해졌고 어제날의 다정하던 이웃사이도 계급관계로 변해버렸다. 사람마다 인성을 버리고 계급립장에 서야했다. 하지만 신석동 사람들은 인심, 인정, 인성을 더 중히 여겼다.     다른 생산대들에서는 집체의 위력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농업산량이 내려가고 수입분배가 줄어들어 사람들은 점점 더 울상이 되여갔다. “계급투쟁은 틀어쥐기만 하면 효험이 있다.”는 말이 그때는 없었지만 사실은 계급투쟁, 정치사상교육을 점점 더 강도를 높혀 틀어 쥐였는데도 집체경제의 발전은 내리막 길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신석동에서는 농업산량이 온당한 수준을 기본상 유지했고 부업을 조직하였기에 수입은 원유 수준과 엇비슷 하거나 조금 올라갈때도 있었다. 신석동은 화해로운 마을, 살기좋은 마을이라고 원근에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부러워했고 총각들은 장가를 잘 갔다. 제마을 혼사는 과거급제보다 더 어렵다고 했는데, 신석동에서는 동네혼인도 여러쌍 되였다. 신석동은 공사내에서 제일 큰(50여호) 마을이였지만 사람들은 말썽없이 평온하게 화목하게 살았다. 누구네집에 불상사가 있으면, 이를테면 누가 앓거나 돼지가 갑자기 병이 나도 어느집에서나 빠지지 않고 위문을 가 보았다. 이것도 이 마을의 특유한 풍속이였다. 어떤사람들은 신석동에서 산천당제례를 잘 치르기에 동네가 잘 된다고 했지만 기실은 마을에 “동훈”같은 기강이 있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을 책임지고 가족을 책임지고 남을 생각하며 마을을 위하며 정직하고 선량하고 또 너그럽고 무던한 품성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들의 인간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을의 환경정리도 잘해서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갔고 그때 벌써 수도물(自来水)까지 끌어왔었다. 한집식솔이 서로 닮듯이 한마을에서 함께 오래 살면 서로 닮는법이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은 좋은것을 따라 배우려한다. 사람이 나쁜짓을 좋아하며 본을 받으려만 한다면 인간세상은 언녕 훼멸되여 버렸을 것이고 인간은 진작 동물화 되였을것이다. 동물세계에도 꿀벌이나 개미나 코끼리같은 우수한 족속들이 있기에 농통한 소리로 “동물화”라고 하지 말고 비렬하고 간악한 승냥이나 여우같은 짐승이 되였을거라고 말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인간은 문명으로, 화해의 사회, 화해의 세계로 나가고 있다. 인간쓰레기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다. 그리고 래일도 물론 있을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아 청결능력을 갖고 있기에 근심할것이 없고 전도는 광명하다.     말바른대로, 광복후로부터 인민공사가 성립되기까지 농민들은 당을 바싹 따르며 점점 더 열광적이였다. 곧 지상락원인 공산주의가 실현 되는데 공산주의가 되면 지주, 부농을 찜쪄 먹게 잘 살게 되고 기음매러가도 하이야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며 아니, 김도 기계가 저절로 매기에 농민들은 당나무그늘에 앉아서 장기나 놀면 된다고하니, 이밥에 고기, 술도 마음껏 마시고 … 잘놀고 잘먹는 그런세상을 누가 좋다고하지 않겠는가!     아낙네들은 밭머리 쉼을 할때면 모여 앉아 행복한 앞날을 놓고 까르르 웃고 떠들군 했다.     “나는 그때가 되면 재봉침을 한대 가질 테야!”     “그건 뭘 할려구?”     “애들옷을 기워입히자면 밤잠을 못자니 얼마나 고되우. 나는 재봉침으로 새옷도 만들고 애들 옷도 깁고 …재봉침으로 박으면 기운것이 오히려 정말 보기 좋더라니.”     “저 말하는걸 좀 봐. 공산주의는 낡은 옷이 없대요. 매일 새것을 준다는데…”     “정말?! 정말 그렇겠구나! 호호호.”     “야! 그런 세상이 어서 왔으면 …”     “나는 술기(수레)는 몰수 있어두 그 오토반가 뭔가 하는건 아무래두 자신 없는데?” 옆에서 담배쉼하던 남정들도 깨끼였다.     “그러면 영화나 기껏보지? 평원유격대는 보고도 또 보구 싶더라니 …”     마을사람들이 와그르르 무리지어 일밭으로 나가고 또 함께 돌아 올때는 서로 기분들이 들떠있었다. 마을에서도 일터에서도 수십명이 무리지어 웃고 떠들고 … 집체화가 좋긴 좋았다. 어떤 사람들이 “양무리 모는식”으로 일한다느니 어쩐다느니하고 비꼬았지만 농민들은 흥겹고 즐겁기만 했다. 너도 나도 일을 잘하고 년말총결분배가 올라가고 공평하게, 서로 비슷하게 먹고 사니 마음에 불쾌할것도 별로 없었다. 먹는것은 모두가 같은 표준인데 현금분배에서 격차가 있는것이 아쉽긴 아쉬웠다. 그러나 배가 아플것은 없었다. 그 사람은 그만큼 일을 더 했으니 나보다 고생을 더 한것이고 나는 그대신 편안하지 않았는가. 일 한대로하는 분배이니 의견이 있을것이 없었다. 농민들은 그때까지는 정치바람에 불편을 느끼지 못했고 장단에 맞추어 춤을 잘 췄다.     부농분자인 문명순내외는 청산투쟁에 그냥 불만을 품고 있어 인민공사 사원이 되지 못하고 떼여준 돌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십여년 집체화의 길로 마을은 달렸지만 그들은 그냥 개채농으로 있었다. 가을에 탈곡이 끝나면 민식(농량)표준이 초과되는 곡식은 생산대에서 가져갔다. 그들에게 제일 척박한 돌밭을 조금 떼여 줬는데도 어찌도 이악스레 걸구었는지 소출이 해마다 괜찮았다. 생산대에서 밭을 잘 다루는가 드문드문 검사도 했지만 워낙 그들은 내외가 모두 “꼬리없는 수쇠, 암쇠”로 별명을 불리우는 농사군들이여서 공연한 근심이였다. 그점을 보면 “감독개조”가 잘되는것 같았는데, 속에는 “청산투쟁”에 대한 앙심이 그대로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늘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아들딸 5남매는 사원에 들었다.     《공산풍》에 농민들이 와뜰 놀라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얼마간은 신기하기도 하고 희한한것이 어정쩡했는데 다음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이거, 도대체 사람 사는 꼴이 무슨 란장판인지 모르겠다.     식당은 기와집(문명순의 집)에 앉혔는데, 하루세끼 애새끼들은 데리고 사발두개에 숟가락을 가지고 가서 줄을 서서 밥을 타먹는것이 … 사나운 날씨에는 여간만 귀찮은일이 아니였다. 강냉이 죽이나 된장찌개, 오구랑떡을 먹고 싶어도 어쩔수 없었다.(집에다 먹거리는 일률로 감춰두지 못함.)거동이 불편한 로인네와 환자가 있을 경우에는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먹기 싫을 때는 별일 없어도 더 먹고 싶을때는 짜증이 났다. (후에는 밥표제가 실시되여 적게 먹을수도 많이 먹을수도 있었다. ) 설상가상으로 3년재해가 왔다. 사람들이 맛이 있다고하든, 없다고하든, 배가 부르든 말든 … 그것은 아직 둘째, 세째문제고 당장 하루세끼 가마를 끓이는 것이 답답한 골치거리였다. 공산주의로 가는 광명대로요 금빛다리요 하긴 하지만 그것은 보아하니 하루이틀 사이에 이루어 질 일이 아닌것 같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게 아닌가 …     사람들은 이것이 점점 더 기승부리는 정치란것은 아직 몰랐지만 《공사바람》, 《식당바람》,《공산풍》이라고 부르며 공개적으로 타발을 하기 시작했다. 겁모르는 리순보는 “집체식당인지 집체돼지굴인지… 이게 무슨 지랄이야! 날마다.”하고 벌컥 역정을 쏟을때도 많았다. 어느날 누가 “반동패 소리를 한다.”고 시까스르자 순보는 “내가 반동파면 이 마을에 반동파가 아닌놈이 어데 있어? 속으로는 모두 투덜거리면서. 너도 아니야.”하고 발끈했다. 사람들은 모두 동감하는 표정들이였다.     잇따라 들이 닥친 “4청”(농촌사회주의 교양운동)은 사람들사이를 뒤숭숭하게 하던데로부터 긴장하게 만들었다. 공작조가 이사람 저사람을 붙들고 적발하라고 들쑤시는가하면 사원대회를 열고 다른곳의 엄중한 사실들을 렬거하면서 신석동에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다들 정신을 바싹 차리고 두눈을 딱 부릅뜨고 주인의 각도에서, 인민공사 사원답게 간부들 문제를 대담히 검거적발하라고 몰아 붙였다 (간부아닌 사람도 적발할수 있다고했다.) 그때도 농민들은 “4청”바람이라고 했을뿐 점점 승화하는 정치운동임은 감감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경계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불안해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감자나 콩 이삭을 주어 집체에 내놓지 않고 집에 가져다 아이들을 먹인 사람들도 있었고 가만히 땅을 뚜져 호박이나 콩, 감자 따위를 심어 먹은 사람들도 있었던것이다. (자류지는 이미 취소했다.) 새강물(시냇물) 혹은 논코에 채발을 놓아 세치네(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말려서는 시가지에 가지고 가서 푼돈잎을 만들어 쓴 사람들도 발편잠을 잘수 없었다. 이게 모두 “4청”에 걸린다고 하니 사람들 마음이 불안 할수 밖에.      “4청”의 마지막해(1965년)에는 끝내 마을을 뒤숭숭하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것은 호조조때부터 마을의 추렴새문서(돼지나 소를 잡아먹은 문서 따위)를 봐주던 신병호가 탐오를 했다는 것이였다. 병호는 매우 정직하고 또 마음이 어질어서 누구와 언쟁 한번 못해보고 자라온 사람인데 초급사 시절부터 오늘까지 줄곧 신석동 생산대의 부기원을 맡고 있었다. 근년에 와서 부기원공수(보수)라는걸 조금 주었지만, 근 10년 그는 무보수로 부기원장부를 맡아 했다. 안해가 밤잠을 바로 자지도 못하면서 그 고생 그만 걷어치우라고 바가지를 긁었으나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청드니 병호도 해마다 거절할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받았고 착실하게 일했다. 사람들이 자기공수합계가 맞지 않는것 같다고 찾아오면 그는 공수기록전표를 한장한장 다시 수판질하며 맞춰보았다. 어떤 사람은 두세번 지어는 여나문번씩 찾아 와도 항상 웃는낯으로 차근차근 대조를 하며 문서를 따져 주었다. 마을에서는 그를 《비당원!》하고 불렀는데, 그도 그 별명에 습관이 되여《예. 》하고 대답하고는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해 공사 3급간부회의에서 당위서기가 “신석동의 비당원동무 왔소? “하고 회장에 대고 소리친적이 있는데, 그로해서 그의 “비당원”별명은 공사내에 까지 퍼지였다. 그는 현의 표양을 받은적도 있었다. 그런 신병호가 탐오를 했다고 하니 모두가 꿈쩍 놀랐다. 그리고 여론이 와글와글 했다.     마을의 간부들인 정치대장 허석활, (대약진때 입당) 생산대장 허명남, 부녀대장 남옥자, 그리고 대대치보주임인 허석준 (대약진때 입당) 등 골간인물들은 토개당원 허석근, 토개간부 윤영칠(그해봄에 이사를 왔음.) 빈고농단주임이였던 리순보 그리고 청년단 소조장, 민병패장 등 사람들을 이끌고 신병호를 “단지고움”(심사)을 하였다. 그들은 밤마다 허석근의 집(문명순의 기와집을 허석근이 분배받았었다.)에 모여 신병호를 압박했는데 윤영칠은 병호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귀썀을 치기까지 했다. “4청”공작대로 온 박영주는 심사를 지휘하는 한편 공사재량위원과 대대부기원을 불러다 모든 장부를 엄밀히 검사했다. 근 10여일 정치사상공세를 들이대고 장부검사를 했는데도, 결과는 “청백”이였다.     그해 년말결산분배총결후 신병호는 부기원을 안한다고 딱 나누웠다. 사원들이 간청을 하고 간부들이 정치사상공세까지 들이 댔지만 어질디 어진 사람이 한번 아니라고하니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후 신석동에서는 해마다 부기원을 바꾸었는데 3년후에는 또 신병호가 부기원을 맡게 되였는데 그는 1983년 집체를 해산할때까지 부기원을 맡아왔다.     그해 “4청”에서 또 한가지 사건이 마을 인심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허문수라는 사람이 탈곡장 콩, 수수, 조, 벼를 훔쳤다는 소문이였다. 허문수는 기골이 장대하고 근력이 좋은 사람이였다. 그에게는 아이들이 여덟이나 있었고 안해는 새들 새들 말라서 늘 앓기만했다. 잔밥이 많고 로동력이 하나뿐이다보니 허문수네는 안해의 병치료는 둘째치고 죽물로 연명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였다. 아이들이 민식표준은 낮았지만 먹기는 어른들에 짝지지않았다. 허문수는 늘 배고픈 설음을 안고 억척스레 일했다. 우로 아들 둘이 소학교를 졸업하자 일을 시켰으나 애들이 버는 공수는 몇푼되지 못했다. 문수는 그야말로 헐벗고 살았는데 그는 팬티도 없이 홑바지를 입고 다니였다. 그나마 집체덕분에 생산대 저비량을 꿔 먹을수 있은것이 다행이였다. 해마다 탈곡철이 되면 문수는 산더미같이 그 많은 낟알을 도맡다싶이 양창질(바람에 북데기와 쭉정이를 날려버리고 알곡을 정선하는 일)을 했다. 힘들고 솜씨가 수요되는 양창질을 문수는 잽싸게 잘 했다. 그런데 하늬바람은 항상 밤이면 잘 불어 왔다. 남포등이 둬개가 희미하게 켜진 탈곡장에서 문수는 바람이 끝날때까지 담배쉼도 없이 바삐 돌아치며 양창질을 하고 검불을 쓸어내고 낟알을 끌어모았다. 커만가는 낟알무지는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고 눈에는 만풍년이였다. 거지반 그는 밤새도록 일하고 사람들이 탈곡장에 나오는 아침이면 지치고 허기 진 배를 쓰다듬으며 집으로 아침먹으려 가군 했다. 아침을 먹고는 또 일하려 나왔다. 문수는 해마다 거의 생산모범이 되여 낫가락이거나 초모자, 어록책 (문화대혁명시) 같은것을 상품으로 타군 했다. 그리고 어떤때는 량식을 50여근 장려 받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배려이기에 받는 마음은 눈물겹게 고마웠다.     어느날, “4청”공작대 박영주가 문수네 집앞을 지나가다가 길에 콩알이 떨어진것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치다가 문득 계급투쟁신경이 꿈틀해난 그는 자세히 주변을 보았다. 문수네 집 마당에도 콩알 몇개가 보이였다. 박영주는 대대치보주임을 맡은 허석준과 수근거린후 탈곡장 보초를 서는 청년(민병)들을 조용히 불러 조사를 했다. 청년들은 탈곡장 보초막에서 저희들 놀음만 놀고도 아주 보초를 명심히 잘 선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상동정 없었음!”하고 큰 소리를 치며 장담 했다. 박영주는 이번에는 허문수네 아이들을 꾀여냈다. 이리 저리 유인전술로 조사를 해 보니 콩을 닦아 먹은 일이 여러번 있었는데, 큰애가 말하기를 그것은 터밭에서 거둔 콩과 저희들이 밭에 나가 주어온 콩이삭이라는 것이였다. 박영주는 치보주임 허석준과 부녀대장 남옥자를 데리고 허문수네 집을 들추기까지 했는데 사실 지푸래기라도 잡을게 없었다. 한번 크게 공을 세워보려고하던 영주는 달갑지 않는지 생산대골간회의를 열고 문수를 죄인처럼 심문 했다. 련 3일간 밤마다 허석준의 집에서 문수를 족쳤는데 하지 않은 일을 – 그것도 도둑이라는 루명을 문수는 도저히 쓸수 없었다. 사흘째 되는날 리순보가 “허문수는 나와 같이 자란 불알친군데 그런 사람이 아니야! 생사람을 잡자고 해서 되는게우? 4청인지 지랄인지 … 거, 박동무 그만 두우.”하고 꾸중하여서 박영주는 머쓱해 물러나고 회의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얼마 안되여 “4청”이 이젠 원만히 끝났다고 했다. 신석동 당원과 간부들은 물론 사원들까지도 무슨 영문인지는 알턱이 없다보니, 끝났다고하니 끝났는가하고 … 그저 그랬다. 그보다도 회의를 안하고 발편잠을 잘수 있으니 한시름 놓았다.     “4청”이 농민들의 사회주의사상각오를 높이고 집체화의 길로 한걸음 더욱 전진하게 하였다고, 그리고 더욱 뭉치게 하였다고 하였지만 신석동사람들의 민심은 어수선 해만 져 갔다.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바짝 긴장하게 보냈다. 당내에 자본주의 길로 나가려는 나쁜놈이 있고 계급투쟁이 날로 엄중해간다고하니 모든게 무시무시했다. 세상이 이제 어찌 되려나 … “4청”에서 들은 소리를 보면 그저 일이 아닌것 같고 … 하여튼 다른 사람을 조심해야했고 제입을 주의 해야해. 풀떡하다가는 억울하게 큰코 다친다니까. “비당원”이나 문수를 보지? 재수없을때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니깐. 마을에는 언제부터인가 수근수근 뒤공론을 하며 다른사람을 헐뜯거나 꼬집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10여년전에 쉬쉬거리던 윤영칠과 허석근의 마누라 추문까지 새삼스레 되살아나 말밥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듬해(1966년)봄 동네로인들이 산천당제례를 해야 하지 않는가고 마을의 간부들께 물었다. 모두들 이번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사리였다. 언제부터 마을의 대,소사를 좌지우지 해오던 그들이 아닌 보살하니 로인들은 혀를 끌끌 찼다. 정치대장 허석활이와 물으면 생산대장께 밀고 생산대장 허명남이와 물으면 정치대장께 밀었다. 토개당원 허석근이는 어정쩡한 태도로 “글쎄 ,4청에서 해마다 말썽이 많아서 … 원! … 지금이사 령도아덜이 다 알지 내가 뭘 알아야주 … 그러다가두 또 4청이 내려 오겠는지 …”하고 어물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나중에 동네로인들은 리순보를 위수로 산천당제례를 했는데 정치대장 허석활이와 대대치보주임을 맡은 허석준이가 빠지고는 몽땅 참가 했다.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사원들께 추렴으로 나눠주고 대가리는 제례에 쓰라고 보시를 했다. 음식은 매우 간단하게 만들었기에 제례 뒤끝에 로인 10여명이 술추렴을 하고 말았다. 신령님 내외들도 섭섭 했겠지만 마을사람들도 허전하고 서운했다. 이해를 마지막으로 굳건히 거행해 오던 신석동의 산천당제례행사는 옛말로 되고 말았다.     그해 여름부터 마을에는 뒤숭숭한 소문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령도간부들속에 반동패가 숨어 있었다우. 지금 막 파내기 시작했는데 한둘이 아니라 우에두 있구 아래두 있는데 비밀조직이라우. 들추기 시작하니 자꾸 걸려 나온 다오. …”     “문화대혁명을 한다는데 세상이 히뜩 번져질게라더구만. 우리 백성이사 이래두 백성이구 저래두 백성인데 뭐라우. 우리는 별일 없을 게우…”     “현장과 현위서기를 가두어 넣었다더구만. 자본주의를 만들자고 했다오. 그런패들이 모두 권력을 잡았는데 이번에 몽땅 뽑아 죽인다오. 에—끔찍해라…”     “그러게 벼슬한다구 해서 대구 좋아 할게 아니라니. 벼슬이란게 앉아 있을때는 흐뭇해두 일단 떨어진다하면 모가지가 날아 난다는 거요. 흥!”     “벼슬을 해 봤수?”     “딱 해봐야 알겠는가. 변학도나 장개석을 봐두 아는게지.”     “그나 저나 … 제일 무서운게 홍위병이라구 합데. 처녀애들 치마를 벗겨버리구 량태를 잘라 버리구 뒤축이 높은 구두만 신으면 몽둥이루 갈긴다오. 잔치두 제사두 못 지내게 한다오. 상을 막 부수고 감투를 벗겨 버리고 물매를 안긴 다오…”     “저런! 그건 왜?”     “봉건이라우. 치마를 입고 꺼떡구두를 신는건 서양 미국애들식이구 … “     “허허 – . 그것 참!”     “상문이나 병풍도 다 불질러 버리구 개다리소반도 박살을 낸다는데 … 들키면 큰일난다오. 일찌감치 없애 버리거나 잘 치워 두든지…”     “그것 참! 별일이네 … “     ……     그야말로 매일 매일 도무지 리해할수 없는 으스스한 소식이 무성히 날아 들었다. 제일 후두두 떨리게 하는 소문은 홍위병이 마을마다 검사를 하며 부실건 부시고 잡아갈건 잡아 간다는 소문이였다.     “범이야! 범이야!” 하면 정말로 범이 온다고 신석동에 홍위병이 들이 닥친건 그해 초가을이였다.     이 공사에는 초중학교가 하나뿐이였는데, 현성에 있는 고중에 붙지 못한 애들로 고중반 두개를 두고있었다. 고중반은 갓 설치하다보니 1학년과 2학년뿐이였는데 학생은 모두 30여명뿐이였다. 머리가 큰 그애들은 홍위병을 조직하고 초중애들을 끌고 “파구립신(破旧立新)”운동에 나섰다. 거기에는 학교선생도 대여섯 끼여있었다. 기관단위에서 뛰쳐나온 반란파도 몇사람 있었다. 그들은 참모 혹은 고문격이였다.     어느날 점심시간, 홍위병이라고 쓴 붉은기를 앞세우고 홍위병 완장을 낀 학생이 신석동에 기세등등하게 들이 닥치였다. 어른들도 칠팔명 끼여 있었다. 홍위병들은 우사칸 앞에 있는 넓직한 탈곡장에 진을 치고 노래를 부르고 어록을(모주석저작중의 단락)합창으로 소리높이 랑독하고 또 구호를 웨치였는데 “당내의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그때는 아직 류소기를 타도한다는 구호를 웨치지는 않았다.) “봉건미신을 타도하자!” “자본주의, 수정주의를 타도하자!” “네가지 낡은것을 타도하자!”(그들은 봉건적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말한다고 했다. ). “잡귀신을 타도하자!”… 등등의 구호를 신석동이 떠나갈듯이 소리소리 질렀다. 마을 사람들은 한창 점심을 먹거나 좀 누웠다가 기겁을 해서 탈곡장으로 달려 왔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홍위병이란걸 보았는데 머리 큰사람 몇을 빼고는 말짱 아이놈들 뿐이였다. 몽둥이나 무슨 쟁기를 들고 들부시려 쳐들어 왔는가 했는데 몽땅 자기네 자식같은 아이들뿐이여서 놀란 가슴은 진정이 되고 대신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마을사람들이 숱해 모여오자 대장인지 사령인지 한 애가 연설을 하였다. 그는 문화대혁명은 무얼 무얼 때려부수는 운동이라고 열변을 토한후 오늘 이 마을의 네가지 낡은것을 검사하고 때려 부시려 왔다고 선포했다. 머리가 유별나게 큰 그애는 호각을 까륵 까륵 세번 불고 명령을 하였다.     “소조별로 해산! 집집마다 검사 시작!”     아이들이 대여섯씩 짝을 지어 쫙 흩어지더니 탈곡장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마을로 뛰여 들어갔다.     그날 그들은 상문(부모가 사망한후 3년간 위패를 모시는 제사상) 세개를 걷어치우게 하고 병풍 두폭, 개다리소반(6각의 작은 상, 량반들의 밥상이라고 했다.) 여라문개 그리고 상복(베로 만든 감투와 옷, 제사때 입음.) 대여섯 벌, 산다루(서양물건, 수정주의, 자본주의것으로 인정) 몇컬레를 탈곡장에 걷어왔다. 어떤 아낙네들은 상복을 돌려 달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뜯어서 베옷을 만들어 입겠다는것였다. 홍위병들은 듣는체도 하지 않고 “잡귀신을 타도하자!” 고 우렁찬 구호를 웨치며 물건들을 모아놓고 불질러 버렸다.     홍위병을 따라온 나먹은 사내가 쑥 나서면서 연설을 했다.그의 팔에도 홍위병완장이 끼워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이름에 신(神)자가 앞자리를 차지한것은 엄중한 봉건미신적, 반동적 행위라고 하면서 당장 고치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저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어정쩡해있는데 윤영칠이 불쑥 나서서 그사내한테 물었다. 그래도 되느냐고, 그러면 당신이 이름을 지어 세상에 공포를 하라고, 우리는 아무래도 일없으니 좋을대로 하라고 했다. 그 사내는 머쓱해서 입만 씰룩거리다가 올봄 산천당제사를 누가 주동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마을사람들이 뜨끔해서 멍해 있는데 이번에는 리순보가 나섰다. 그는, 해마다 동네로인들이 주관했는데 금년에는 최로인이 앓아누워 동중의 의논에 따라 자기가 주동을 했다고 말했다. 홍위병사내는 순보를 노려보다가 성분이 뭐냐고 물었다. “성분이사 공사적으루 다 알지만 나는 대대루 머슴살이를 산 사람이요. 산천당 제례는 생산대가 봄놀이 삼아 해오던것인데 이젠 걷어치우기로 했소.” 리순보는 급기야 생각나는대로 산천당제례를 이젠 걷어치운다고 말해 버렸다. 그런데 그말이 동중결론으로 되여 버렸다.     홍위병들은 그날 산천당 나무들을 찍어버리고 바위돌을 짓부셔 버리라고 엄포를 놓은후 호호탕탕 돌아가다가 몇개 마을에서 함께 쓰는 상여막에 불을 질렀다. 상여막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참으로 곱게 만든 상여 였는데 한시간도 못되여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후부터 상측이 나면 관을 수레에 덜렁덜렁 실어 내가는것이 여간만 볼성 사나운 일이 아니였다.     이듬해 봄, 신석동에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든장질 사건이 발생 했다. 주인공은 윤영칠이였다.     윤영칠은 흑룡강성 밀산의 어느 농촌마을에서 살았는데 집은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머리가 꽤 총명하고 말을 잘 하는 그는 주변의 불량자 청년들과 섭쓸려 다니며 건달을 피웠다. 그러다가 당지 조선족들의 참군열에 휩쓸려 참군했다. 군대에 참군은 했으나 윤영칠은 가만 가만 술을 먹고 때로는 싸움질도 해서 중대에서 몇번 호된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칠이 나쁜 버릇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는데 주둔해 있은 마을의 한족처녀를 희롱하는 건달행위까지 발생했다. 중대에서는 영칠이 착오를 종합하여 대대에 보고하였는데 군사재판으로 처리할것을 청시하였다. 지도층에서는 젊은 청년의 전도를 고려하고 출로를 주어야한다는 판단으로 제대를 시키고 지방 토지개혁공작대에 소개해주었다. 하여 윤영칠은 토개공작대성원이 되고 후에 연변에 와서 신석동에까지 오게 되였던것이다. 윤영칠은 머리가 꽤 총명한데다 한어를 잘하고 소학교정도의 문화수준도 있고 공작에서 적극적이긴 했으나 입당은 아직 못하고 일반대원으로 있었다. 허석근이처와 쉬쉬한 소문이 돌자 공작대에서는 윤영칠을 심사했는데 그는 희롱을 한바는 있으나 사통한 일은 없다고 딱 잡아 뗐다. (기실은 몇번 사통을 했었다. 그외에도 부농 문명순의 처도 두번이나 강간했다.) 공작대에서는 윤영칠을 제집으로 쫓아 버렸다. 윤영칠은 밀산에 돌아간후 인차 장가를 갔고 농업합작화운동에서 꽤 열성적으로 나왔다. 그는 자기가 병으로 집에 오긴 했으나 조선의용군3지대와 토개공작대에서 혁명한 간부라고 은근히 생색을 내었다. 그후 인민공사가 된후 그는 입당을 하고 대대부주임으로 사업하다가 공사간부가 되였다. 그때 그가 맡은 사업은 생산조리원이였는데, 두개 대대의 부녀주임(한사람은 한족이고 다른 한 녀자는 조선족이였는데 그들은 모두 유부녀였음)과 자주 사통을 했다. 어느해 여름 윤영칠은 공사부련회주임을 끌어안고 억지로 간음하려다가 성사하지 못하고 덜미를 잡히웠다. 부련회주임이 그 자리로 서기에게 고발하자 윤영칠은 출당, 제명(开除)을 당하고 다시 제집으로 돌아 가게 되였다.     윤영칠은 마흔살이 되는 사람이 마을에서 더는 낯짝을 들고 다닐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려고해도 갈만한곳도 없었다. 뒤통수에 손가락질이 따라 다니니 다른곳에 간들 별반 나을바가 없었고 사람취급 받기는 다 틀려 버렸던 것이다. 그는 수천리 떨어져 있는 신석동을 떠올리게 되였다. 하여 허석근이에게 편지를 쓰고, 두해전에 신석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마을에서는 토개공작대로 왔다가 돌아간후 윤영칠이도 줄곧 농사를 지은줄로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시 몸이 좋지못해 집으로 돌아가다보니 간부가 되지 못하고 이렇게 농사군이 되였노라고 넉두리했다.     그해봄 어느날밤 윤영칠은 허석근의 동생 허정근의 안해가 집에 혼자 있는 기회를 타서 그의 집에 뛰여들었다. 그는 신석동에 온후 이미 허석근의 처와 옛정을 다시 나누기 시작했고 허정근이처와도 이미 사통을 했는데, 불을 죽이고 엉켜있다가 정근이가 집으로 오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들통이 났던것이다. 영칠이는 옷을 걷어 안고 뒤문으로 내빼고 정근이 안해는 영칠이가 강간을 하려고 뛰여들었는데 악을 쓰며 발악하다가 기진맥진했는데 아슬아슬한 고비에 당신이왔기에 화를 면했다고 둘러대면서 엉엉 울었다. 손가락틈새로는 남편의 반응을 살폈다. 어리무던한 사람이긴하지만 정근이도 남자다보니 자기 안해몸을 영칠이가 깔아뭉개려고 했다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안해가 소문내지 말고 딴 방법으로 원쑤를 하자고 애걸복걸했지만 정근이는 집을 와닥닥뛰쳐 나갔다. 정근이가 장작개비를 거머쥐고 씩씩거리며 가다가 생각해보니 조력군이 하나 더 있는것이 좋을것 같았다. 그는 형님벌되는 석준이를 우선 찾아 갔다. 그들은 간이 콩알만해서 떨고 있는 영칠이를 다짜고짜로 한바탕 두들겨패고는 정근이네집으로 끌고 왔다. 영칠이가 피투성이 되여 집에 끌려 들어오자 정근이 안해는 선손을 써서 “네놈이 나를 더럽히자구?!”하고 악을 쓰며 그를 쥐여 뜯었다. 석준이는 안해를 시켜 석근이, 석활이와 명남이를 데려 오게 했다. 이를테면 신석동의 간부들이자 세력가들인데 또한 허씨문중 사람들이였다. 그날밤 영칠이는 늘씬히 물매를 맞고 강간죄를 승인하는 자백서를 쓴후 피를 발라 지장까지 찍었다.     이튿날오전 파출소에서 영칠이한테 수갑를 채워 끌고 갔다. 동네가 발칵 뒤집힌 와중에 이번에는 허씨문중젊은이 몇이 어른들의 지휘하에 영칠이네 문이며 가장집물을 부수고 든장대를 가져다 구들고래까지 휘딱 번져 놓았다. 이것이 이른바 “든장질”이라는 것인데 옛날 고약한 원을 거적들것에 싸서 지경밖으로 갖다버리는, 축객령과 같은 것이다. 백성들은 마을에서 못된짓을 한 집은 “든장질”을 해서 쫓아 버렸다. 허씨네는 원근에서 “거렁뱅이허씨네”들이라고 소문은 났었지만 신석동에 집안들이 많고 광복후에는 세력이 커졌다. 그들은 자기네 허씨문중을 모욕했다고 영칠이집에 축객령을 내렸던것이다.     그런데 사태는 희극적으로 번져졌다. 파출소에 잡혀간후 영칠이는 이실직고를 했는데, 정근이처와 사통한것외에도 석근이처와도 오래전부터 사통했노라고 자백을 했던것이다. 파출소에서는 영칠이를 “군중독재지휘부”에 넘겨 비판투쟁하라고 하였다. 석근이처와 정근이처는 영칠이와 함께 헌신발짝과 (오입쟁이를 모욕하는 한족들의 법) 개패를 걸고 온공사 마을마다 끌려다니며 지대한 모욕과 호된투쟁을 당했다.     신석동마을사람들은 집체화후부터 점차 허씨네를 은근히 질투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산천당제례후부터는 즉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서부터는 허씨네를 거의 로골적으로 미워하며 맞서기도 했다. 신석동의 권력은 허씨사람들이 모두 쥐고 흔들었는데 그들은 허씨네를 드러내놓고 싸고돌았다. 그리고 나먹은치들은 쩍하면 “허씨문중”을 들먹이며 무슨 대단한 문벌이라도 되는듯 거들먹거리기 좋아했고 아낙네들과 젊은 축들도 집안세력이 세다고 은근히 우쭐해 하였다. 농촌에서는 특히 집안(친척)관념이 세다. 타성씨들이 보기에는 좋은일은 모두 허씨네가 독차지하는것 같았다. 대대나 공사기업에 로동자를 뽑아가거나 벌이가 좋은 일자리 혹은 외지부업에는 거지반 허씨들이 차지했다. 민영교원으로 자격이 더 나은 리순보아들과 신병호딸 대신 석근이 아들과 선준의 딸이 간것도 뒤공론이 많았다.     윤영칠사건이 터진후 타성치들은 30여호가 이구동성이 되여 석근이네와 정근이네 집에도 “든장질”을 하였다. “개쌍년들을 마을에서 쫓아! 신석동에는 그런 쌍년들이 사는곳이 아니야! 더러운 것들!” 리순보와 몇사람이 소리치자 타성씨들이 와하고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와서 치보주임인 허석준이나 석활이, 명남이도 어쩔수 없었다. 그해 윤영칠, 허석근, 허정근이네는 선후로 다른곳에 멀리 이사를 갔다. 그들이 정작 이사를 갈때 마을사람들은 이사짐을 역전까지 실어다주며 잘 가라고 했다.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모순된 감정이였다.     한해에 세집이나 이사를 가서 마을에는 괴괴한 빈집이 우두커니 있는것이 여간한 꼴불견이 아니였다. 다른곳에서 이사 오려는 사람이 간혹 있었으나 신석동 동중여론은 받지 않는다고 그루를 박았다. 그것은 인구는 늘고 땅은 줄어든다는 리유에서 였다.     허석근이네 기와집은 1년넘어 비여있다가 부농 문명순이 큰아들이 샀는데, 그때, 사람들은 착잡한 기분에 시달렸다.(문명순의 세 아들은 장가간후 마을에 세간나고 두딸은 외지로 시집갔다.)     그후 장춘에서 한족애들 20여명이 하향지식청년으로 왔는데 마을에서는 비여있은 두집을 수리하여 들게했다. 하여 공사적으로 신석동은 집체호가 두집이라고 소문이 났다.     진보도싸움(중, 쏘 변경 충돌사건)후 마을에는 현성으로부터 소산호가 한집 배치되여 왔다. 그집세대주 탁광도는 40대중년인데 늙은부모를 모시고 아이는 넷이나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오른족다리가 병신이고 막내인 딸애는 왼쪽다리가 소아마비로 불구였다.     탁광도는 시가지에서 장마당 되거리 장사도 하고 보이라불도 때며 뜨내기로 살다가 “불안정요소”로 찍혀 농촌으로 왔던것이다. 그가 왔을때는 계급대오청리운동이 한창 진행중이였다.     “회억밥”(해방전 극빈시절에 먹던 악식–겨푸대죽 같은것)을 몇번 먹고 “피눈물의 공소”(고생을 회억함)와 “회억대비”를 한후 지금은 사람마다 사상인식관을 넘는고비였다. 즉 사회주의각오를 제고하고 잘못을 반성하고 자아비판, 호상방조를 하며 (사실은 비판투쟁) 소자산계급(농민을 소자산계급이라 했다.) 근성, 사상을 뿌리채 뽑고 사상혁명화를 하는중이었다. 이번에도 간부나부랭이는 두말할것없고 군중들까지도 하나 하나씩 모두 고비를 넘어야 했다. 신석동 사람들은 한마을에서 오랜세월 함께 살아왔기에 서로 조상3대까지도 잘아는 사이였다. 하중농 두집외는 말짱 빈농이였고 순전한 빈하중농대오무산계급켠이였다.     그런데 “회억대비”에서 모두 말문이 열리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상혁명화고비에서 또 시간이 걸리였다. “공산당과 모주석덕분에 번신하고 잘 살게 되였다. 모주석께서 집체화로 나가라고 하시니 좋든 궂든 따라야 합네다.”하고 누가 말하면 “동의하우.” “그게사 그래야지비. 좋든 궂든, 좌우간 옳은 말이우.”하고 여럿이 태도표시를 했다. 그러면 먼저 말을 한 사람은 관을 넘는 셈이였다. 다른사람이 또 관을 넘을때도 같은 장면이였다.     어느날 반란파맹장이자 공사 모주석저작학습적극분자모범인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이 친히 시찰을 와서 참가 했는데 사람들의 발언은 여전히 그 모양새였다. 그날 리순보는 기껏 잘 말한다는것이 “그래두 소겨리때와 호조조때가 좋기는 좋았지. 후에 도거리를 할때가 좋았는데 … 소도 개인이 기를수 있고 … 류소기로선이라구 다 때려 부시긴 했소만, 우리사 모주석이 시킨걸루 알았지. 그때 모주석께서 집에 계시지 않았을 게우. 류소기맘대루 한걸 봐서는. 하여튼 모주석이 하라는 대루 안하면 혼쌀이 나우. “하고 생전 처음으로 긴말을 했다. 군중들은 또 “동의하우.” “옳게 말했소.”하고 찬동을 표시 했다.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은 너무도 한심하고 억이 막혀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멍해 있었다. 한참후 그는 계급투쟁, 로선투쟁, 모택동사상을 한바탕 내리 푼후 빈하중농협회 주임이라는 간부가 이렇게 사상혁명화를 못했으니 말이 되는가고 잔뜩 흥분하면서 정치대장은 뭘 하느냐고 소리질렀다. 그는 선전대를 파견 하겠으니 다시 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계급대오청리에서 사상혁명화 – 지금고비가 제일 관건적인 것인데, 사상에 따라 계급대오를 청리한다고… 사상이 락후하면 반면으로 나가서 적이 된다고 을러메기까지 했다. 어제날의 계급의 전우가 새로운 계급의 적이 되니까 모두 정신들을 바짝 차리라고 얼떨떨해 있다가는 머리가 떨어져도 어느칼에 떨어졌는지 모르니까… 계급의 적들은 아주 교활하니까 경각성을 높이고 그러자면 모주석저작을 잘 학습하고 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하고 사상혁명화를 잘 해야 한다고 한바탕 력설하면서 리순보가 교활하고 엉큼하고 음험한 계급의 적인듯 변죽을 울리기까지 했다.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은 거리가 먼 신석동을 밤낮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 부녀대장 남옥자를 자주 만나는 것이 눈에 띄우면서 마을사람들이 뒤에서 쉬쉬했었다. 그가 반란파대장질을 하면서 맹장으로 날뛸 때 남옥자도 섭쓸려 다니며 우정을 쌓았던것이다. 그는 남옥자한테서 정치대장 허석활의 표현을 알아보기도 했다. 남옥자는 석활이와 이미 은밀한 관계였는데, 춰올리지도 않고 내리깎지도 않으면서 괜찮게 사업한다고 둘러댔다. 마을의 다른 정황도 그는 너그럽게 회보했다.     계급대오청리에서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이 파견한 선전대는 집요하게 밤마다 신석동에 와서는 이른바 사상각오가 제고되였음을 알리는 말들을 주입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느날밤, 탁광도가 고비를 넘겠다고 나섰다. 그는 무엇을 헷갈렸는지, 해방후 시내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지긋지긋 고생한 이야기, 아이가 다리를 분질렀는데 치료를 못하여 병신이 되고만일,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는 병원문앞에도 못가보고 역시 영원한 불구가 된일, 량식고생, 석탄고생, …온갖 눈물겨운 이야기를 울먹이며 늘여놓았다. 선전대가 “그러면 당신은 새 중국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오?”하고 눈총을 쏘았다. 탁광도는 속이 꿈틀했다. 그러나 시가지에서 굴러먹은 그는 약삭빨리 대뜸 말머리를 돌렸다. “이게 다 류, 등로선의 피해지요. 모주석로선대로라면 나는 시가지에서 그냥 행복하게 살았을 겁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는데 무산계급대오를 떠나 (그는 보이라 삯일을 한것을 무산계급이라고 했다.) 생활의 핍박하에 장사를 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장마당에서 이것저것 쫄막 쫄막한 장사를 했지요. 그것은 더욱 말이 아니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답니다. 지금, 모주석사상을 학습하고 선전대동지들의 가르침을 받아보니 나의 사상이 바로 소자산계급의 악독한 사상이란걸 크게 깨닫고 알게 되였어요. 소자산계급사상은 죽음의 길로 나가는 사상입니다. 나는 소자산계급사상을 뽑아버리는 실제행동으로 산천당나무를 몽땅 찍어버리고 바위를 뽑아버리겠습니다.” “그게 탁동무 혼자 힘으로 될가 … 생산대 일은 안 하겠소? 밤낮 붙어 있어도 1년은 걸릴 텐데. 좌우간, 장하우.” 리순보가 칭찬인지 비웃는 것인지 슬쩍 께끼였다. “밤시간에 혁명으로 생각하고 하겠습니다.” 선전대(모두세명)들은 너무도 감동되여 박수까지 쳤다.     탁광도의 발언은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의 중요한 사업성취의 생동한 일례로 여러번 사용되였고 탁광도는 공사로동자로 제발 되였으며 불구자 아들은 대대공급판매합사(상점)점원으로 채용되였다.     그런데 탁광도는 혁명임무를 완성하지 않았다. 그는 산천당 당나무숲에서 변두리에 있는 제일 가는 참나무한대를 겨우 찍어 넘겼을 뿐이다. 그것도 밑둥이가 그의 몸통만큼은 되여 아름찼다. 참나무고목은 워낙 쇠덩이 같이 단단하고 무겁다. 그는 반나절이나 똥힘을 다 써가며 비지땀을 흘렸는데 누구도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줄기는 어쩌지 못하고 가지를 쳐다가 땔나무를 했다. 줄기는 생산대에서 가지라고 했으나 석활이도 명남이도 듣는체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거기에 손을 대는것이 몹시 께름직 했던 것이다. 그후 탁광도는 그 나무줄기를 여러토막을 내여 대대기업 전기톱으로 각목과 널판자를 뽑았는데 한수레가 너머 되었다. 그는 그것으로 변소도 짓고 돼지우리도 만들고 또 사립문도 만들어 달았다.     그런데 무슨 조화냐? 공사기업에 출근한지 얼마 안되여 탁광도는 자전거와 함께 언덕밑으로 내리 굴러 타박상을 입고 즉사하고 말았다. 한달남짓 지나서 멀쩡하던 아버지가 밤에 쉬던 맵시대로 사망했다. 잇따라 어머니는 풍을 맞고 두어달 고생하다가 돌아 가고 또 얼마후에는 안해마저 풍을 맞고 죽었다. 한집안을 폴싹한 어처구니 없는 참변에 신석동은 말할것도 없고 전공사를 놀래 웠다. 사람들은 괴상한 일이라고 수근거렸고 락후한 농민들은 신령이 노한 탓이라고 내놓고 우기였다.     대대혁명위원회주임도 그때쯤에 두어달 몹시 앓았다. 탁광도의 혁명적소행을 자꾸 입에 올린탓이라는 엉뚱한 해석도 있었다. 사실은 남옥자와 을씨년스러운 어느날밤 밖에서 운우지정을 나누고 병에 걸렸던 것이다.     결국, 신석동 계급대오청리는 룡두사미격으로 지지부진 여러달을 걸려 끝냈는데 몽땅 고비를 넘어 여전히 빈하중농협회 회원이 되고 주임은 이구동성으로 리순보를 선거해서 그는 그냥 벼슬자리에 앉아 있게 되였다.     림표사건후 “림표와 공자를 비판” 할때는 열정들이 높았고 운동도 빨리 끝났다. 그런데 림표는 줄욕을 퍼부으면서도 공자는 욕을하지 않아 싱겁게 되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절반운동을 했다고 비꼬긴 했으나 그런대로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신석동에서는 리순보가     “림표가 하여튼 묘한 사람이우. 좌우간 간사하게 생겼더라니. 모주석을 죽이자고 하다니… 그런 놈은 급살을 맞아야 하우. 모주석이 그렇게 춰 주는데두 배때기가 차지 않던게지? 쌍놈이새끼… 어느집이나 안깐들이 납뜨고는 잘 되는 일이 없수. 여북하면 옛날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구 했겠소? 좌우간. 그런데 공자님은 농사 지을줄도 모른다면서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해 가지구는 지금도 욕을 먹소? 가만 있을 게지… “     “동의 합네다.”     “리주임아바이는 무슨 문제나 정말 정통으루 잘 보시우. 동의합네다.”     “암. 항상 그렇지. 나도 동의하우.”     사람들이 동의 한다는 외마디 소리에 신석동의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은 원만히 결속 되었다. 리순보가 페막사 겸 총화발언을 했던 것이다.     석활이와 석준이는 마을의 유일한 당원들이지만 마을사람들에게서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될수록이면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들도 련이어 진행되는 운동에 싫증이 났다. 우선 밤마다 하는 회의가 딱 질색이였다. 낮에는 고되게 일을 하고 밤에는 회의를 하는데(그럴수밖에 없으니.) 사람이 고단해서 죽겠다. 아홉시나되여 두루 거지반 모이면 회의는 빨리 끝나야 12시가 지난뒤였다. 남옥자도 오지 않은 사람을 소리쳐 불러오는일이 무척 시끄럽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부녀대장이 소임이라 어쩔수 없었다. 사람들의 “동의합니다.” 소리가 나오면 석활이는 “발언들을 잘 했어요. 일찌감치 돌아가서 쉬시우.”하고는 제꺽 회의를 끝내버렸다. 이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애용하는 페막사 였다.     그사이 탁광도네집이 페가로 되다싶이 된후 마을에서는 예닐곱집이 외지로 이사를 갔는데, 그들은 어쩐지 불안하고 스산해서 더는 못 살겠다는 것이였다. 동네에는 이사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장춘지식청년들도 선후로 떠나가고 마을에는 빈집이 여나무호가 되였다. 마을에 빈집이 있으면 그야말로 스산하다. 한집이 있어도 그런데 여러집이 괴괴하니 비여 있으니 그 정상이 말이 아니였다. 신석동은 몰라보게 변해 갔다. 마치도 페허로 몰락하는것만 같았다. 생산대에서는 빈집은 1년이 지나면 허물어 버린다고 결정하고 그렇게 했다.     어느해 3.8절밤이었다. 그날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추렴으로 사원들께 나누어주고 두족(头,足)과 내포는 부녀들이 명절음식으로 먹으라고 주었다. 그리고 생산대공익금에서 몇십원을 더 보내주었다. 신석동부녀들은 남옥자의 지휘하에 순대도 만들고 분토재와 사탕, 과자도 사왔다. 부녀들은 말그대로 명절분위기에 흠뻑 젖어 웃고 떠들고 성수나서 기뻐 했다.     저녁에 마을부녀들은 기와집(문명순이 큰아들집)에 모여 음식을 먹은후 오락만회를 벌리였다. 그들은 마을의 간부어른들인 정치대장 허석활, 생산대장 허명남, 그리고 빈하중농협회주임인 리순보와 부기원 신병호를 초청했는데, 대대치보주임인 허석준이는 공사파출소에 회의를 가서 참석하지 못했다. 연회후 오락판이 벌어지자 남자들은 조금 앉아 있다가 모두 제집으로 돌아 갔다. 남자들이 없으니 녀자들은 별이별 오락을 다하며 집이 떠나갈듯 흥이 올랐다. 거기에는 물론 석활이 처도 한몫 했다.     그런데, 오락판이 한창 무르익어가는데 남옥자가 어째서 속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남옥자는 문명순이 집에서 거둬준 김문덕의 안해다.     김문덕은 문명순이 청산투쟁을 맞은후 리순보네 집에 얹혀 살았다. 량식은 청산품 입쌀을 타다보니 별문제 없었다. 그후 김문덕은 변방부대에 참군하여 보초를 섯는데 신체도 허약하거니와 사람이 어수룩해서 취사원으로 배치 되였다. 그는 그저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돼지를 기르는 따위의 허드레 잡일이나 하는 정도였다. 그는 부대에서 3년 좀 넘게 있다가 제대 되여 다시 신석동으로 찾아 왔었다. 그때부터 그는 허석근이 사랑방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허석근이가 청산분배로 탄 문명순의 기와집) 다행히 집체화가 되였기에 문덕이는 시키는 일이나하고 민식을 주기에 밥술을 먹을수 있었다. 문덕이는 31살 되던해 천만뜻밖으로 남옥자한테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그때 옥자는 20살이였다. 옥자는 리순보네 먼 친척벌되는 녀자였는데 흑룡강성 목단강부근의 어느 산골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 소학교의 유부남선생과 바람을 써서 아이를 낳은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문덕이는 늙은 장모와 어린 처남을 달고온 옥자를 안해라기보다 부모같이 받들었다. 그는 데릴사위로 되였지만 세상이 좋기만하고 기쁘기만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옥자는 늘씬하고 풍만한 체격이였는데 인물은 말그대로 함박꽃 같이 환하고 몸매 또한 탐스러 웠다. 남자라면 누구나 두세번 다시 보고싶은 녀자였다.     어느해, 여름밤, 옥자는 준수하고 끌끌하게 생긴 허석활이 품속에 와락 감겨들었다. 석활이는 헛간에 침대같이 다락을 매고 거기서 자고 있었다. 그날밤에도 모기불을 피워놓고 잠에 들었는데, 뭉클하고 녀자가 품에 감기니 안해인가 했었다. 그후부터 그들의 관계는 극히 은밀히 계속되였는데 그들은 서로 육욕을 즐길뿐 다른 일은 없었다. 자기의 성욕을 도무지 만족 못주는 문덕이가 안타깝기 그지 없었으나 그때 사람들은 리혼이란걸 천하에 없는 사변으로 생각했고 옥자는 그럴상황도 아니였고 꿈도 꾸지 못했다. 문덕이가 사람이 온전해서 밤일을 제대로 한다면 옥자는 바람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찌되였든, 옥자는 석활이와의 정사에서 맛을 들인후 그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살아 가리라 작심하였다. 그런데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이 치근거리니 또 그쪽에도 몸을 열어주었다. 옥자는 결국 방탕한 녀자로 전락 했다.     3.8절밤, 옥자가 나가자 젊은 아낙네 셋이 서로 눈짓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먹은 아낙네 몇이 한창 각설이 타령을 놀았는데 너무 우스워 오줌이 나갈 지경이였다. 그날은 그믐께인데다 흐리기 까지 하여 밖은 칠흑같이 캄캄 했다. 긴장한 눈으로 살펴보니 옥자가 자기집 방향으로 가다가 바로 꺾어 돌지 않는가?! 그쪽으로 가면 석활이네집이다. 아낙네들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안고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뒤를 밟았다. 그들은 석활이네 집으로 접근하며 두귀를 도시렸다. 눈길은 예리했으나 이상한것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헛간안에서 사람의 자취소리가 났다.     “음 –. 아, 숨막혀.”     “별일 없겠지?”     “그냥 여기 있었어요?”     “그럼.”     아낙네 들은 밖에서 지키고 하나는 급급히 기와집으로 갔다. 얼마안되여 석활이처와 달려갔던 아낙네가 왔다. 헛간문을 와락 열고 손전지 두개를 쫙 비추니 이불속에누운 옥자와 석활이의 머리가 보였다. —     이튿날 점심후, 동네 젊은 아낙네 대여섯이 석활이네 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머리를 싸매고 누워있는 석활이처를 잔뜩 충동질 하여 일어나게 한후 가새와 장작개비를 들고 옥자네 집으로 달려 갔다.     옥자네 식구들은 모두 집에 있었다. 옥자는 가마목에 누워있고 그의 늙은 어머니는 무엇을 깁고 있었는데 문덕이는 방웃목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오누이 자식들은 웃방에서 놀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다짜고짜로 신발도 벗지 않고 옥자에게 덮쳐 들었다. 그들은 콩타작하듯 장작개비로 옥자를 두들겨 팼다. 석활이처는 옥자의 머리를 마구 가위질 했다. 옥자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웅크리고 엎딘채 찍 소리도 치지 못했다. 문덕이와 할머니는 두눈을 화등잔처럼 뜬채 와들 와들 떨며 구석에 피해서서 보고만 있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해서 엉엉 울다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들은 외삼촌한테 알리려 뛰여갔다. “네, 이 개쌍년아! 말해라! 오늘 죽지 않겠으면 제대로 다 말해라.…” 아낙네들은 옥자를 사정없이 족치며 악다구니질을 했다. 옥자는 “살려 주세요.” “잘못 했어요.”하고 연신 애걸하면서 모진매앞에서 실토를 하고 말았다. 석활이는 더 말할것도 없고 그가 실토한 사내가 넷이나 되였는데, 바로 지금 여기서 옥자를 두들겨 패는 아낙네 남편들이 였다. 그중 두 아낙네의 남편들은 애매하게 안해의 의심을 받아 왔던것이다. 그 두 아낙네는 시름이 활 놓이였다. “피해자”아낙네 다섯이 새삼스레 분통이 폭발하여 옥자를 또 한바탕 쥐여 뜯고 꼬집고 뚜드려 팼다. 손발에 못지 않게 입으로는 온갖 쌍욕과 악다구니가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다. “피해”를 보지 않아 시름이 놓인 아낙네 둘은 리지를 회복 했다. 그들은 승냥이처럼 달려 드는 아낙네들을 뜯어 낸후 자기들이 심문을 맡아 했다. 그들은 옥자가 자기네 남편들과는 정말로 살지 않았다는 확답을 다시 받아 낸후 간통사연을 한사람 한사람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옥자가 틀림없이 자기 남편과도 살았을거라고, 이를 갈며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 왔댔으나 그게 아니니 가슴이 쑥 내려 갔다. 남편을 도적 맞히고 랑패상이 되여버린 “동료”들을 보니 오히려 흐뭇하고 깨고소 했다. 잘코사니야! 잘난척 하더니… 그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계속 옥자를 심문했다. 옥자는 대대혁명위원회주임과 사통한것도 승인했다. 그러니까 여섯이나되는 사내놈들께 궁둥이를 들이 댔단 말인가! 에익! 더럽고 너절한 화냥년, 개도 붙었던것과만 붙는데, 너는 개보다 못한 쌍년이다. 낯짝이 아깝다. 썩고 구린내나는 변소칸이구나. 공동변소… 심문하던 두 아낙네는 옥자를 걷어차며 침을 퉤퉤 뱉았다. 그들은 뒤켠으로 물러 났다. 우리는 볼장을 다 봤다. 우리가 할일은 없다는 배짱이였다. 옥자입에서 “살았다.”는 말을 정작 듣고 보니 다섯 아낙네들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옥자도 괘씸하고 남편도 괘씸하고 그리고 개골망신이 아닌가 … 분하고 원통하다. 이게 무슨 개판인가. 죽은듯 늘어진 옥자를 더 때리고 짓밟을 여지가 없었다. 손맥이 탁 풀리였다.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죽일년 탓이야! 저런년은 마을에 들수 없어. 그중의 두사람이 밖으로 씽 나가더니 장대를 들고 들어 왔다. “든장질을 해 놓고 가자!” 아낙네 다섯의 눈에는 다시 살기가 번뜩이였다. 그들은 가마를 뽑아 던지고 물독을 박살내고 찬장을 뒤엎었다. 장대기 두대를 구들고래에 깊숙히 들이 처박고 번쩍 들었다. 구들이 벌컥 벌컥 뒤집혀 졌다. 옥자 남동생부부가 달려 오고 대대치보주임인 허석준이가 숨가삐 달려 왔을때는 란동이 끝나갈 무렵이였다. 말그대로 기막힌 수라장이였다. 석준이를 보자 아낙네들은 악에 받쳐 소리 쳤다. “저 쌍년을 잡아 가요!” “때려 죽여요!” 아낙네들은 뽀르르 제집으로 달려가고 뒤늦게 모여온 마을사람들이 멍—해서 옥자네 집을 들여다 보았다. 그속에는 옥자와 계집질을 한 사내도 둘이 있었는데 그들은 영문을 모르다 보니 역시 멍청해서 참상을 보고 서있었다.     지금까지 말한마디 못하고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부들 부들 떨고만 있던 문덕이가 맨발바람으로 밖으로 불쑥 나왔다. 그는 장작더미로 씽 — 가더니 장작개비를 쥐고 달려와서 무작정 두사내를 마구 두들겨 팼다. 칠푼도 못된다던 사람이 성을 내니 아주 미치광이 같았다. 문덕이는 석활이 등 다섯사람의 이름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는 처남과 함께 다섯집을 돌아가며 들부셨다.—     신석동은 발칵 뒤집혔다. 석준이와 리순보, 명남이 등 마을사람들이 붙잡고 말리고 달래고 해서야 싸움을 겨우 진정시킬수 있었다. 그러나 석활이 등 다섯사내의 집들에서는 밤새껏 가정싸움이 끊어나질 않았다. 신석동은 마치도 집단초상이 난것 같았다.     이튿날 늦은아침때 사람들은 산천당 왜송나무에 목매죽은 옥자의 시체를 발견했다. 허석활이도 농약을 먹고 자기집 헛간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     그해봄, 석활이네와 문덕이 그리고 옥자 남동생네가 외지로 이사를 간후 잇따라 계집질한 네집에서도 선후로 멀리 이사를 떠나 갔다. 그들은 얼굴을 쳐들고 나 다닐수 없었던것이다. 아이들이 까만눈으로 말똥말똥 쳐다 볼때는 면구스럽기 짝이 없고 사람들이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살자니 신석동에서는 차마 더는 살수가 없었던것이다. 계집질 한 당사자뿐만아니였다. 안해도 아이들도… 온집식구가 모두 그랬다. 사람에게는 얼굴이라는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여북하면 얼굴이 아니면 무슨짓을 못하랴 했겠는가.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은 반란파 맹장으로 벼락출세하다보니 공사적으로 위신이 괜찮은 허석활이를 은근히 경계하고 있던차였다. 석활이를 벼슬자리 경쟁적수로 보았던것이다. 그런데 석활이가 죽었다니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 났다. 옥자가 죽은건 은근히 아까 웠다. 그러나 그는 며칠뒤에 자기의 머리우에도 벼락이 떨어질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날 저녁, 래일 아침 일찌기 공사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그는 밤새도록 궁싯거리면서 바로 자지 못했다. 전화는 공사당위 조직위원한테서 왔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좋은 일이니 와보면 안다.”고 하며 전화를 끝는 것이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30여리를 단숨에 자전거로 달려갔다. 정말로 아침일찍 갔던것이다. 공사에 이르러 들어가라는 소회의실에 들어서니 거기에는 당위서기, 부서기 그리고 조직위원과 파출소 소장, 또 낯모를 경찰 두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은죄가 있기에 대번에 가슴이 꿈틀하고 얼굴이 벌개 지었다. 거기서 주임은 반나절도 안되여 죄를 승인하고 그자리로 잡혀 갔다. 그는 유부녀 대여섯명과 간통했을뿐만아니라 (두사람은 강간)지식청년처녀애들도 여럿을 희롱, 간음 했던것이다. 두달후 주임은 6년도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갔다.     어수선해진 신석동은 30여호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치대장을 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부녀대장은 모두 싫다는걸 억지로 한명 뽑았지만 정치대장이 문제였다. 정치대장은 당원이여야 하는데 신석동에는 당원이라고는 허석준 하나뿐이였다. 그런데 그는 대대치보주임을 맡다보니 이래 저래 일이 많았다. 하여 정치대장을 명남이가 잠시 맡는것으로 하고 석준이가 거들게 하였다.     어느날 겨울밤 사원대회가 소집되였는데 회의에서 석준이가 지금부터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운동을 하게 된다고 선포했다. 상급에서 바싹 틀어쥐고 잘 틀어쥐라고 하는데 이 운동은 우리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것이여서… 다들 회의에 잘 나오라고 그는 엄포를 놓았다. 회의에 잘 참가하지 않는것 때문에 미리 조치를 한다는것이 그렇게 침을 놓았던것이다. 물론 말은 상급에서 들은 말이다.     “운동은 또 무슨 개뿔짝같은 운동이우? 밤낮운동을 해서 마을이 이 꼴이우? 나라에서는 좋겠는지 … 우리는 개뿔짝도 리로운게 없소. 좌우간 며칠밤 하우?”     리순보가 부르튼 소리를 하자 다들 동감인듯 석준이 입을 쳐다 보았다.     “하, 주임아바이는 무슨 말이나 그렇게 툭! 툭! 하시우? 지금이 어느때라구. 말한마디에 감옥에 가구 총살을 맞는데. 거, 말을 조심하우. 큰코 다치지 말구. 원… 머리를 수그리고 수레를 끌지 말구 밭고랑을 타구 세계를 좀 내다 보시우.…”     “별소리를 다 하는구만. 수레가 무거울수록 머리를 수그리고 끄는법이우. 빈수레를 끄는 소새낄수록 대가리를 쳐들고 우줄렁거리지. 그런데, 밭고랑을 타구 무슨 세계를 내다보우? 허리도 펼겸 밭머리를 내다 볼때는 있지만.”     “농사꾼이 농사를 잘지어 배불리 먹고 뜨뜻하게 입으면 됐지. 나라에 여량을 많이 바치구. 그게 모주석을 따르는게 아니우. 제앞도 바루 못가리는게 세계혁명은 무슨 개뿔짝같은 세계혁명이우? 지금은 말을 잘하는 년놈일수록 나쁜것들이라니. 대대주임아새끼만 보우. 말이사 누가 따르겠소. 석준이두 말은 잘 한다지만 그 자식 발뒤축에나 가우? 석준이사 싸움을 말리는 말이사 잘하지.”     그건 그랬다. 오래동안 치보주임을 하다보니, 쟁기를 들고 죽일내기 하는 사람도 석준이는 화해술을 마이게 했다. 그는 될수록 큰문제는 적게 만들고 작은것은 덮어주며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어떤 치보주임들은 될수록 문제를 크게 해서는 사소한 일도 안건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성적을 올리였다. 상급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계급투쟁, 로선투쟁, 사상투쟁, 사상혁명화, 계속혁명자각성과 각오가 높은 간부라고 춰 주었다. 그런나 석준이는 치안사업을 잘 해서 안건 발생률이 적다고 말해주면서도 표양할때는 찬밥신세로 빼놓았다. 그에게는 “투쟁”적인 사적이란 별로 없고 “화해”시킨 사례들만 있어서 선진재료로는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석준이는 우선 군중위신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앉은 다섯동으로 그냥 대대치보주임질을 했다.         “나는 안 나오겠수. 데리려 오지마우. 그렇지 않아두 허리가 아픈데…”     “하, 그만 하시라는데두. 원! …”     석준이는 히죽히 웃고 회의를 끝내였다.     리순보는 옥자가 죽고 마을이 피페해진후 몹시 기분이 얹짢았다. 그는 옥자가 괘씸했고 문덕이가 억울했고 계집질한녀석들이 더럽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바락바락 악을 쓰던 아낙네들도 다 미웠다. 밤낮 경읽듯 학습이요 혁명화요 한것이 다 어데로 갔단 말인가. 사람들은 점점 더 이악해지기만 하는것 같았다. 하긴 밤낮 투쟁이라고만 하니 그럴수밖에… 그는 지어는 운동이니 학습이니… 뭐니 하는것이 산천당제례보다 못하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런말은 하지 않았다. 인심이 더럽게 된것이, 사람들이 나쁜마음, 나쁜행실을 한것이 다 이 근년에 문화대혁명인가 뭔가 한 것을 했기때문이라고 그는 생각 했던 것이다. 그는 소겨리, 호조조때가 그리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흘러간 옛노래다. 그는 가끔 서글프기도 했다. 자기 생전에 다시는 좋은 세월을(호조조 때 같은)볼것 같지 못했다.     우경번안풍을 때려 부신다던 운동은 제대로 발동이 되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졌다. 4인무리가 꺼꾸러졌던것이다. 그 운동은 그들이 한바탕 멋드러지게 하자던 고단수였는데, 그만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4인무리가 멸망된후 운동이라는 소리가 다시는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이젠 끝났다고 했다. 10년세월을 누구정신에 살았는지… 리순보는 도깨비장난에 끌려 다닌것만 같았다.     “그거 보우. 내가 말하지 않았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구. 하기사 내가 말한게 아니라 조상님들이 말한게지만. 녀자가 할일이 있구 남자가 할일이 있지. 공자님이 말했지만. 거? 강청이란년이 진짜 녀자는 옳수? ”     “글쎄… 안까니란게 어째 젖통두 없구 엉덩짝두 없구… 밤낮 모자만 쓰는게…”     “원, 별소리를 다하우. 하여튼 리주임아바이가 천리앞을 내다 본다니까… 저래 뵈두.”     “에끼! 고현놈. 하내비에게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여.”     “그러니까, 림표가 죽을때 강청이두 사달이 날걸 내다 봤수?”     “그렇지! 좌우간.”     “으하하…”     마을 늙은이들이 우스개 잡담을 할때면 아낙네들이고 소동패들이고 곁에서 재미있게 들으며 좋아했다.     그후에도 마을에서는 여러집이 인맥(관계망, 친척)을 따라 이사를 갔다. 그들은 더 좋은 곳으로 찾아갔다.     신석동에는 20여호 밖에 남지 않았다. 큰마을로 화해롭게 살던 그젯날은 말그대로 옛말이 되여 버렸다. 신령이 삐친다느니, 제마을사람끼리 붙어먹는 더러운촌이라는둥, 사람들이 이악스럽고 질이 나쁘다는둥, 지맥이 이젠 기수를 다 했다는둥… 신석동은 원근에 더럽게 소문나서 이사 오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983년 봄! 신석동에서는 집체농사에서 개체화시대에 들어섰다. 틀속에 갖혀 있던 사람들이 풀어지는 순간이였다. 사람들은 광복과 같은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기쁘기도 하고 좀 두렵기도 하고… 하여튼 자기맘대로 살라고하니 긴장되면서도 격동 되였다. 밭을 썩썩 베여 패말까지 박아 놓으니 개체화가 현실로 성큼 안겨왔다. 진짜 토지개혁이였다. 옛날 토개때처럼.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 왔음을 느끼였다. 이제야 제대로 되였음을 느끼였다.     신석동사람들은 토지분배를 많이 받았다. 그것은 50여호의 몫을 20여호가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부농분자인 문명순내외에게도 똑같이 좋은 땅을 주었다. 이 마을의 대부분 면적은 수전인데 자판이 좋고 일조가 길고 또 관개수가 총족하고 좋았다. 이를테면 오염이 없는 자연수ㅡ 광천수 같은것이였다. 그것이 저수지를 거쳐 흘러나오기에 수온이 높고 땅이 기름져 벼가 잘 되였다.     저수지, 산천당, 탈곡장은 공중재산으로하고 나머지는 철저히 분배를 했다. 그런데 문명순네 둘째가 저수지에 물고기를 길러보겠다고하면서 사용권을 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을사람들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서도 그러라고 쾌히 동의해 주었다.     신석동은 개혁개방의 새 시대를 맞이 했다.—                                                                                                               08.6
54    비 당원 댓글:  조회:1973  추천:1  2014-01-27
            실화                                              비 당원                                                                                                           회령     80이 넘은 외삼촌 내외분이 회갑을 쇤다고하여 우리부부는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다. 수천리 먼 광주에서 제노릇에 바쁘다 보니,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하는 걸음이다.     나의 고향은 향에서도 제일 궁벽해서 사람이 못살 고장이라고 소문난, 산골에서도 산골마을이다. 그런데 30여년만에 와보는 고향마을은 이거야말로 천지개벽 그대로 였다. 향정부마을에서 고향마을까지 30여리를 마치도 흰비단필을 쭉ㅡ편것같은 포장도로가 경탄을 금할수 없게 하였고 30여호의 벽돌기와집, 인삼장, 버섯장, 비닐하우스, 굉장히 큰 양돈장, 우사, 양봉, 양계장, 산천어, 하마양식장… 경운기, 자동차, 오토바이도 여러대가 보이였다. 마을에는 또 산장(다공능 유흥시설. 상점도 경영)하나, 가공업(가루를 내고 국수, 기름, 두부를 만듬)을 하는 집도 한집이 있었다. 그리고 합작의료를 하는 위생소도 있었다. 아이들은 향정부마을에 있는 소학과 초중에 다니는데 소형뻐스가 15분이면 실어가고 실어 왔다. 일손이 바쁜 마을사람들, 기계의 동음, 들락거리는 유흥객… 마을은 생기가 넘치고 흥성흥성 하였다.     꼬부랑 산골로인네로 언녕 된줄로 알았는데, 웬걸! 외삼촌 내외는 꿋꿋하고 정정 했다. 60대 같았다. 내가 하아! 하아! 하면서 마을의 변화 발전에 연신 감탄을 하니 외삼촌은 매우 흐믓해 하면서 놀라운 일은 아직도 더 있다면서 흥분하며 말하였다. …지금은 새마을 초급계단이여서 원시적영농이 위주지만 이제 몇년내로 심층가공상품영농이 벌어지면서 더욱 흥성거릴거라는 것이였다. 개발여지 발전여지가 무한이 많다면서 성수가 나서 말하는 외삼촌은 혈기 왕성하고 패기가 넘치는 4,50대장년 같았다.     회갑잔치는 마을의 산장에서 온하루 흥겹게 진행 되였다. 도시의 잔치는 돈냄새가 물큰물큰 나서 거뿐하고 유쾌한 기분이 못되지만 고향마을 외삼촌의 잔치는 그야말로 배껏 먹고마이고 한바탕 마음껏 놀아제끼는 신나는 잔치마당이였다. 남녀로소 온마을 사람들이(200여명) 점심 저녁을 함께 먹었다. 원근의 하객들은 점심후 대부분이 돌아갔다. 밤참까지 먹고가라면서 붙들고 말리고 야단법석을 하는가 하면 익살군 경로원 원장은 두무만한 벌건배를 두드리며 아낙네들 앞에서 마음대로 만져보라고 내밀어 웃음통이 터지게 하였다. 촌서기량반은 우정 비틀거리며 갈지자를 놓고 촌장은 뒹굴고 기며 사람들을 웃기고 향정부민정은 훌렁 벗어진 번들이마에는 증편을, 량 볼따구에는 찰떡을 붙이고 노들강변을 한들한들 췄다.… 하객들은 떠나가면서도 한막을 놀아 주었다. 생콩을 뜯어먹고 배가불어 다 죽게된 소를 살려줘서 한뉘 잊을수 없다면서 곱새춤을 추는 사람, 하우스에 도라지, 더덕, 산딸기와 곰취재배를 하게 인도해 줘서 오늘이 있게 됐다면서 감격에 목메여 연설하는 사람… 인정미, 사람맛이 물씬물씬 풍기는 푸짐한 잔치였다.     고향마을에서는 4년전부터 관혼상제(결혼 회갑 상측)를 마을공적금으로 치른다고 한다. 듣다가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생활이 윤택해지니,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틀린말이 아니였다.     마을에는 “촌민소조”라는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사람들의 추천으로 만들어진 행정기구 였다. 말하자면 옛날 집체화시절의 “대무위원회”같은 것이다. 다섯사람으로 된 소조에서 조장은 정부에서 승인하는 법인대표격이고 다른 네사람은 마을에서만 인정하는 령도들이다. 그속에는 나의 외삼촌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벼슬은 어마어마하게도 고문이라는 것이였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장회계아바이” 혹은 “비당원아바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호조조시절로부터 개체화가 될때까지 줄곧 마을의 회계일을 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어느땐가 공사(향)3급간부회의때 당위서기어른이 “거, 천불치에서 장회계비당원동무가 왔소? 주석대루 나오우.”하고 별명을 부른데서 아주 정식으로 명명이 되였든 것이다.(그날 대회에서 생산대재무관리경험을 소개 했음.) 촌민소조간부들은 일전한푼 보수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조화로운 새마을 건설을 위하여 크고작은 실제적인 일들을 참답게, 책임성 있게, 열성껏 한다고 하였다. 중대사는 마을회의에서 결정하고 재무장부는 낱낱히 공개하여 그야말로 관료주의, 형식주의, 부정부패가 없었다.     나의 외삼촌은 내가 알기로는 원근에서 드문 훌륭한 분이였다. 그는 공산당원처럼 살려고 은근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의 본보기는 김시룡(전국로동모범)이였던것 같다. 외삼촌은 “자기집을 집체우사로 내여놓다니?! 참!... 김시룡은 정말로 훌륭한 분이다.”하고 감탄하며 자주 말했다. 그가 아는 김시룡은 대개 이정도 뿐이였으나 그는 매우 감동해 하였다. 그는 김시룡과 같은 당원이 되리라 다짐한것 같다.     그러나 외삼촌은 끝내 입당을 하지 못했다. 왜서 입당을 못했는가? 이 문제를 말하자면 좀 심각하고 길다.     외삼촌은 조선 청진에서 고중을 다니다가 광복이 되자 집으로 돌아 왔다. 그때로부터 줄곧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농민지식분자인 셈이다. 토지개혁공작대가 소수레가 있고 자작농을 하며 생활상 자급을 한다고 해서 나의 외가집가정성분을 상중농이라고 획분 했었는데, 외삼촌이 그것을 바로 잡아 집안에 큰 공헌을 했다. 상중농은 부농이 될가말가한 것으로 개혁개방전까지 기본상 계급의 적으로 취급하였다. 이것은 후일담이고, 당시에는 소수레와 밭의 일부를 청산과실로 빼았겨야 했다. 그런데, 외삼촌이 밭이며 소수레, 집… 가정재산 전체를 식구당 비례를 뽑아보니 그것이 아니였다. 하여, 하중농으로 매겨지고 몰수를 피면했든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갈것은 그때 마을에서 득세한 허씨네가(빈고농단간부들) 공작대간부를 롱락하여 수작을 부렸다는 것이다. 지금말로 하면 부정부패행위라고 할수 있겠다.     외삼촌이 정직하고 온순하고 착실함을 잘 아는 마을사람들은 소겨리, 호조조때로부터 마을의 “도티(돼지)고기문세(장부)”를 하게 하였다. 고집이 센 외할아버지는 마을간부질을 하는 허씨네가 보기싫어 싹! 걷어장지라고 하루건너 야단을 쳤지만, “마을사람들이 자꾸 부탁을 하는데 어찌 그럴수 있어요.” 하며 외삼촌은 문세를 맡았다. 그렇게 시작한 회계일을 외삼촌은 장장 38년이나 하였다. 그러다가 개체화가 되면서 집체의재산처리까지 원만히 끝낸후 마을의문세를 젊은사람에게 인계해 주었다. 외삼촌의 회계능력은 현에서도 높히 인정해 주었다. 그는 현과 공사(향)의 표양도 여러번 받았다.     “4청”운동시 허씨네를 중심으로한 대무위원회에서는 회계직을 빼앗아 자기네 집안사람에게 넘기려고 하였다. 그들은 탐오한걸 탄백하라면서 단지곰을하며 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 생사람을 잡는판인데, 공사재량위원과 몇개대대(촌)회계들이 와서 장부를 몽땅 맟춰본후 1전의 차이도 없다고 결론해서야 외삼촌은 풀려 났다. 전체사원대회에서 문제가 없다고 재량위원이 선포한후 외삼촌은 회계를 다시는 안한다고 성명을 했다.     그리고 반년거이 파업을 하다가 마을사람들의 아우성을 못이겨 다시 수판을 쥐였다. 이번에는 외할아버지는 더 말할것도 없고 외삼촌댁까지 나서서 기를 쓰고 막아 나섯다. 장부책이며 수판을 둘러메친것이 몇번인지 모른다. 수판은 네개나 박살이 났는데 외삼촌은 번마다 자기돈으로 수판을 사서 썼다. 석유등잔도 여러개가 부셔졌다. 외삼촌댁은 일전한푼 보수도 못받는일을, 아까운 집의 석유만 축낸다며 시도때도없이 쩍하면 바가지를 긁고 또 긁었다.(문화혁명중기부터 회계공수를 주었지만 종래로 받지 않았다. 장부처리는 밤이거나 일을 못하는 날이면 하였다.) 여기서 또 간단히 짚고넘어갈것이 있다. 외삼촌이 파업을 할때 공사재량조리원으로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무위원회”에서 장회계를 데려가면 집체경제가 망태기로 된다면서 사원들이 반대한다고, 집체를 내들고 훼방을 했다. 하긴 회계뿐만 아니라 농업기술에서 지식이 깊다보니 외삼촌은 생산대(촌민소조)총공정사 역활도 착실히 했든 것이다. 그는 오직 생산대가 잘되게 하려고, 자신을 포함해서 마을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잘살게 하려고, 그 일념뿐이였다. 그야말로 전심전의 였다. 그에게 만약 “사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추호도 량심을 속이는 일이 없이, 집체를 위하여, 사원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을 한다면 어느날엔가는 자기도 김시룡과 같은 당원으로 될수 있겠다는 것이였다. 재량조리원건에 대하여 사원들은 아깝긴 하지만 남이 출세하는걸 막으며 심술 피우는건 일이 아니라고들 했다. 역시 그때 대대에서 회계로 쓰려고 했다.(로동탈리 전직임) 그런데 이것은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것은 후보자가 둘이였는데 락선이 되는 사람인즉 능력이 약하기도 했지만 신체가 허약했다. 하여 외삼촌은 다시는 회계를 안한다는 태도로 막아치웠다. 기실은 이번 기회에 생산대를 떠나고 싶었으나 허약한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때 양보하지 않고는 량심상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허씨네 사람들은 무식하고 사심이 많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정치후각만은 민감 했다. 문화혁명 기간까지 허씨네는 세 사람이 선후로 입당 했다. 그들은 대대와 공사의 간부들을 잘 친하는 기교가 있었는데 미인계도 쓸줄 알았다. 허씨네 소위 문중에는 젊은과부가 있었다. 그의 남편은 조선전쟁시 변방보초 순번을 나갔다가 밤에 특무놈들에게 피살 되였다.(민병임) 아이가 셋이나 되는 과부는 미인은 아니여도 바람 쓸줄은 알았다. 이런 눈치를 알고 있는 허씨 간부들은 뭐니뭐니해도 령도어른들과 잘 친해야 이런저런 리득을 본다느니, 무슨일이나 득이되는 일을 해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바람멱수를 내다보게 은근슬쩍 꼬드겼다. 대대와 공사의간부 몇은 과연 과부와 도둑재미를 보았다. 농민들은 남의 허물은 부부간에도 수월히 말하지 않는다. 과부는 수년을 그렇게 살면서 별탈이 없은외에는 실제로 리득을 본것은 별로 없었다. 바람피운 간부들은 제발등이 저리고 사람들의 눈치가 꺼려 과부를 내놓고 돌봐주지 못했다. 대신 허씨네는 있는힘껐 달라붙어 세 사람이 입당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합작사며 림창 공사기업에 취직시키는 등 소궁둥이를 벗어나게 하였다. 과부는 아들 하나를 겨우 대대벽돌가마에 출세시켰을 뿐이다.(얼마후에는 벽돌가마를 걷어 치웠다) 문화혁명후 틀린것을 바로 잡을때 허씨네 당원 세 사람은 재료며 리력을(당안) 위조하여 토개간부라느니 문화혁명기간에 맞아서 을병이 들었다느니 하며 온갖 간계를 다 썼다. 하여 그들은 국가의 유관정책 대우를 받아먹는 “농민월급쟁이”로 둔갑 했다. 그중 한사람은 공사생산조리원으로 승진까지 했다. 그들의 뼈속까지 궤뚫고 아는 마을사람들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끌끌 차기만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남의 허물을 추켜들고 말하지 않았다. 훗날 그들은 왜서인지 슬금슬금 다른 고장으로 이사 가 버렸다.     나의 외삼촌은 대대, 생산대 “간부”들을 속으로 미워하며 싫어 했다. 지어는 멸시하기까지 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조직과 멀어 졌다. 대대와 공사의 어떤 간부들과 당원들이 조직에 의거하며 사상회보를 적극하며 입당을 쟁취하라고 한두번만 권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삼촌은 결벽증(더러운것 그릇된것을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성질)이 있는 사람처럼 “나는 아직 멀었수다.”하며 될수록이면 “령도”들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재무에 한해서는 추호의 모호함도 허용치 않았다. 공금으로 먹거나 지출에서는 일전한푼 똑똑히 눈을 밝혔다. 결국은 “령도”들도 그를 눈에든 가시처럼 미워 했다….     개체화후 외삼촌은 아들 며느리를 로무로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인삼장과 버섯장을 소규모로 시험삼아 꾸리였고 성공 했다. 그후 아들 며느리를 돌아오게 하고 본격적으로 상품화영농을 통이 크게 벌이였다. 외삼촌이 “만원호”에 들어선것을 보고 마을사람들도 술렁거리기 시작 했다. 외삼촌은 그들에게 항목 선택으로부터 기술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고도 정성어린 방조를 하였다.ㅡ     회갑잔치후 어느날 내가 입당을 하지 못한것이 섭섭하지 않은가고 물으니 외삼촌은 왜서 섭섭하지 않겠는가?! 섭섭한 마음은 지금도 그냥 여전하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김시룡 같은 당원을 본보기로 일생을 살아온것은 가슴이 뿌듯하다고 하였다. 비록 그이처럼 영웅은 되지 못했지만… 여한은 없다고 하였다. 여한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외삼촌의 말이 리해 되였다.ㅡ                                                                                                                                                                                                                                         10.8
53    부패의 댓가 댓글:  조회:2783  추천:1  2014-01-24
         실화                                          부패의 댓가                                                                                                             회령     “정부”라는 것이 지금 어떤사람들에게서는 비밀아닌 비밀로, 마치도 응당하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개인의 은사로 보호받아야 할 인권의 하나인듯, 행세인듯히 인정되고 있다. 그러면서 권세가 있고 돈이 있고 뒷심이 있으면 으례히 그런것으로, 그래야 하는것으로, 그래야 체면이 서는것으로 생각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적인 근거가 있다.     나의 한 친구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개탄하며 이런말을 하였다.     어느날, 그는 7,8명 친구들의 모임에 나갔는데 모두가 낯선 녀사들을 배동하여 왔더라는 것이였다. 나의 친구만 외톨이였다고 한다. 그날 모인 친구들은 모두가 “기”자 “장”자 아니면 “임”자, “리”자가 붙은 “어른”들이였다. 나의 친구는 작으마한 서기어른이다. 술집에서 일어서자 일행은 호호탕탕 노래방으로 직진했는데 경비는 비교적 큰 “장”자와 “임”자가 결산을 했다. 노래방에서 질탕 놀아제낀후 사우나쪽으로 향하는데 친구는 떨어졌다고 하였다. 케가 보아하니 눈치가 도끼등 같은 사람도 알아먹을수 있었던 것이다. 잔뜩 술독이 오르고 흥이 난 친구들은 “서기가 다르긴 다르다니. 녀자친구도 없이… 쯔쯔! 감춰둔게지? 친구들끼리 비밀이야?! 얌전 떨지말어. 불쌍해. 림시용을 하나 얻어줄게. 소비는 근심말고.”하며 거침없이 떠들고 웃어댔다.     적잖은 사람들이 정부라는것이 근년에 생겨난 부패의 “신생사물”인가 하는데 그렇지 않다. 무대랑의 처 반금련은 서문경씨의 정부이고 염파석은 장삼의 정부인데 남편씨는 유명한 송강이다. 중정 장개석선생께서도 정부가 있어서 가정분란이 여러번 있었다. 근년에 와서 정부가 그어느 력사시기보다 더욱 빈번히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말해서 되겠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자주 보고, 듣게 된다. 그런데, 정부란 출발점도 불행이고 종말도 불행이라는것이 예나 지금이나 공동한 특점이다. 세상에는 “행복한 정부”란 종래로 한명도 없다. 반금련과 염파석은 정부를 했기에 칼날밑에 귀신이 되고 장개석의 정부 진아가씨는 행방불명이 되였다.     지금도 정부들의 팔자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역시 실지 사실적인 실례가 있다.     부흥대대(촌) 당지부서기 박대삼과 부서기 최경자는 한때 전 현이 알아봐 주는 선진적인 인물들이였다. 그들이 당원이 되고 또 대권을 틀어쥔 서기, 부서기로 된것은 순전히 문화대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대삼은 초중을 졸업하고 고급사때로부터 농사를 하였는데, 공부할때는 중간도 될가말가한 수수한 학생이였지만 광활한 천지에 나와서부터는 되똥오리가 물을 만난듯 활기를 펴기 시작했다. 대약진때 잘해서 입단을 하고 이어 단지부서기를 했는데 문화대혁명때에는 혁명중기에 입당을 하고 당지부서기가 되였다.     그먼저의 부흥대대 당지부는 하류를 좀 벗어난 중간축에 속하는 지부였다. 공사(향)당위에서는 부흥대대당지부를 토끼도 아니고 거부기도 아니고 중늙다리암소새끼 같다고 하였다. 부흥대대의 10여명 당원은 토개, 해방전쟁, 항미원조, 초,고급사때 입당한 사람이 다수고 사상은 좋았으나 민주혁명파로서 문맹을 벗은 정도의 문화수준은 낮았다. 서기는 해방전장에서 부상당해 돌아온 사람이고 부서기는 토개당원이였다. 선전, 조직위원은 초, 고급사패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고집들이 세고 농사일에는 막힘이 없어서 상급의 지시도 구미에 맞으면 듣고 자기들 생각과 다르면 통 듣지 않으면서 제 주대대로 하였다. 무서운걸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이였다. 령도와도 쩍하면 시비를 하며 제 배짱대로 해서 대약진때는 하마트면 “백기”로 뽑힐번 했다. 다들 출신, 성분이 좋고 경력이 좋아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대절면에서는 옳아서(실천이 증명하다싶히.) 서기는 그냥 서기를 하고 위원들도 그냥 위원을 했다. 농촌에서는 한번 무슨벼슬을 하면 보통 줄곧 그 벼슬을 하기가 일수다. 걸리는 것이 별로 크게 없기만 하면.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민주파고 중간파인 지부에 불질이 시작 되였다. 거기서 뛰쳐나온 반란파 맹장인즉 박대삼과 최경자다. 최경자는 지식청년으로 인물은 수수해도 체격이 멋있었다. 그래서 배구선수라고 불렀는데(지금말로하면 성감이 풍부했다.) 그는 정말로 배구를 잘쳤다. 그리고 말을 잘하고 노래, 춤도 잘하고 문장도 잘쓰고 활발했다. 그때세월에 중국사람치고 말못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경자는 우선 문화수평, 리론수평이 쎘다. 또 받들리우는 하향지식청년이 였다. 말로는 재교육을 받으려 왔다고 했으나 어덴가 공작대 비슷한 감을 주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반란파들의 천하다 보니 당권, 행정권… 일체의 무산계급정권을 몽땅 그들이 거머 쥐였다. 부흥대대의 원래의 당지부는 어데서 날아온 것인지도 모르고 얼떨떨하게 “민주파”라는 모자를 쓰고 몽땅 비켜섯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판국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쩍하면 고깔을 씌워 끌고다니며 투쟁하고 우사에 가두고 뚜드려 패는 기세에 놀라 아예 책임을 벗어메고 싶은데다가 권력을 내놓으라고 하니 얼씨구 비켜섯든 것이다. 린접대대의 서기는 고급사를 잘해서 국무원의 상장까지 받은적이 있는데, 기어코 류소기 졸개라고 닥달을하고 뚜드려패서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하지 않았는가! 비켜서라고 할때 제꺽 자리를 내는것이 약삭빠른 처신이라고 그들은 한결같은 속구구를 했든것이다. “민주파”들이 달갑게, 자진하다 싶히 온순히 권력을 내여 놓는데다가 모두가 대삼의 아버지벌들이여서 새지부는 그들을 그닥 험하게는 잡도리를 하지않았다. 대삼이는 은근히 그들을 감싸주기까지 했다. 사상이 민주혁명계단에 머물러 있어서 락후하고 형세에 따르지 못할뿐이지 빈하중농 기본군중은 넉근히 된다고 대변을 해 주었든것이다. 하여 그들은 크게 닥달을 받지 않고 군중이 되였다.     천하는 바뀌여 부흥대대는 박대삼의 “숴라쏸”세상으로 되였다. 부서기에는 최경자가 되고 선전, 조직위원도 생기발랄한 반란파맹장출신들로 신선혈액이 토구납신 되였다.     혁명적인 새로운 당지부에서는 부흥대대에 새로운 기상을 불어 넣었다. 그들은 저작학습으로 이끌고, 대비판으로 길을 열며, 혁명으로 생산을 촉진하였는데, 말로는 생산을 촉진한다고 하였지만 혁명에 더 열정을 집중하였다. 그들은 혁명이 잘되면 생산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그것이 곧 변증관계라고 하였다. 생산대와 대대의 사람이 자주 거치는 곳, 이를테면 탈곡장, 우사, 야장간, 위생소, 공소사, 대대판공실, 지어는 유치원 마당, 밭머리, 퇴비장똥무지에까지… 등등 공지에는 선전란을 세우고 흑판보를 꾸리는가 하면 정치구호판을 만들어 세우고, 산비탈을 깎가 내리고 나무뿌리를 뽑아던진후 대량의 사원, 학생을 동원, 돌을 주어다 영구적인 정치구호를 글자 하나가 배구장 크기로 새겨 놓았다. 그리고 확성기나발을 도처에 늘이고 집집마다 하루 세번 회보 청시하기 활동(감독원이 있었다.), 어록노래, 양반극노래 보급, 충성무 추기, 소근장을 따라 배우며 혁명이야기 하기, 전간학습, 밭머리대비판, 밭머리강용회, 홍색선전원, 대대, 생산대문예선전대, 외지의 선진경험참관학습단, 양걸대… 하여튼, 농사는 두번째고 혁명이 첯번째 특등가는 사명인데, 매일 구호가 우렁차고 나발소리, 북소리, 꽹가리 소리가 요란하였다. 조용하던 농촌마을들이 흥성흥성 북적거리며 행사도 볼거리도 많아서 지금의 무슨 유람촌 같았다.     부흥대대에서 무산계급정치, 사상혁명화, 혁명로선을 억세게 틀어쥐고 생기발랄하게 모택동사상으로 홍색정권을 보위 건설한다는 선진사적은 층층의 업적이 되여 상급에 보고 되였다.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자기들의 사업성과로, 그 생동한 실례로 부흥대대를 현에 보고했고 현에서는 지구와 성에 성과작으로 보고했다. 하여 산소통을 메고 다니는(천식증이 가끔 나온다던가.) 상급의 어떤모범령도간부가 시찰까지 다녀 갔는데 그는 대단히 흡족해 하였다. 그는 재료조를 파견하여 사적을 잘 작성한후 성과 중앙에 보고하여 좋은칭찬을 받았다.     혁명활동에 따라다니면 공수는 공수대로 상등을 받고 힘든 농사일은 하지 않고 뛰놀며 구경도 하는거니까 사람마다 장끼를 발휘하여 거기에 붙어 돌아가기에 있는 창발성과 꾀를 다 하였다. 누가 농사가 어떻구 밭김이 어떻구 하면 “유일생산력론”, “홍색정권건설반대”, “사상혁명화파괴” “소근장활동파괴”… 하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정치모자가 단통 날아 왔다. 일밭에서 일하는 자는 “5종인”, “9종인”뿐인데 그들은 몇이 되지 않았다. 페농이 되다싶이 되여 감산하고 마이너스 빚장부분배를 해도 “우리 빈하중농 호매롭게 혁명의 길로 달리네! 사회주의 풀을 요구할 지언정 자본주의 곡식은 먹지 않으리!”하였다.     노래하고 춤추며 놀고 건달을 피우다 보니 고유의 기풍이 허물어 졌다. 사람들이 방탕해 지면서 남녀가 시근덕대고 “바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대삼은 아이가 셋이나 되였지만 입당을 시키면서 최경자를 정부로 만들었다. 그런데, 최경자뿐이 아니였다. 그와 주전부리를 하는 녀자는 대여섯이나 되였다. 그러니까 정부가 7,8명 된다는 말이다. 선전, 조직위원도 거이 마찬가지 였다. 최경자는 그사이 군인총각과 결혼까지 했으나 박대삼과 군입질을 자주 했다. 도둑질은 다 같은 도둑질이지만 “바람”쓰는 도둑질은 왜서인지 사람들 눈에 쉽게 걸린다. 하지만 화냥년놈과 도둑은 앞에서(현장에서) 잡아야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키득키득, 쉬쉬하면서도 누구하나 상급에 반영을 한다든지 오쟁이를 쓴 피해자들에게 귀뜀을 한다든지는 하지못했다. 하지만 전혀 혼자만 알고 있는것도 아니였다. 마음맞는 사람들끼리는 수군덕 거리고 키드득 거렸다. 당자들만 그런눈치를 모를 뿐이였다. 부흥대대 지부위원들의 부패행위는 사람들의 말밥에 올랐다.     일은 급기야 터지고 말았다.     무슨회의가 그렇게 많은지, 밤마다 거이 빼놓지 않고 회의를 하는데 회의 뒤끝에는 거이 둥세(밤참)를 서기인 대삼이네 집에서 먹어댔다. 대삼이는 하향간부식당을 저의 집에 정하고 늙은 로모와 처를 식당일군으로 하여 상등공수를 타게했다. 밥하는 일은 전간로동보다는 쉬운것으로 그들은 신형의 농민신봉쟁이가 된 셈이였다. 그리고 화목, 쌀, 기름, 된장, 고기… 등등은 현물 혹은 현금으로 결산을 했는데 그건 대삼의 처가 명세를 작성하기에 달린것이였다. 톡톡히 재미나는 업종이였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하기 싫어하는 손님치기를 한다고, 사람들은 대삼이네를 수고가 많다고 치하를 했다.     그건 어쨌든, 대삼이네 집에서 술추렴을하고 밥을 먹을때면 경자는 얼른 밥을 먹고는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의 집은 3, 4리 떨어진 이웃마을에 있었는데, 그때마다 의례히 대삼이가 데려다 준다면서 술을 먹다가는 함께 따라 나섯다. 다른사람들은 덤덤한 태도였으나 대삼의 안해는 신경이 늘 곤두섯다. 그것은 그런날이면 남편의 팬티가 꼭꼭 끈적끈적 젖어 있었고 빨래할때 보면 흰덕지가 말라붙어 있었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날밤에는 맥을 추지 못했든 것이다.     어느날 밤, 남편이 또 데려다 준다며 나간후 대삼의 처는 옆에 있는 사촌네 집으로 불이나게 뛰여가서 알렸다. 사촌네 부부는 미행을 나섯다. 경자와 대삼은 흘금슬금 대대판공실로 들어갔다… 이런정경을 사촌네는 처음 보았지만 어떤사람들은 이미 여러번 보았다. 선전, 조직위원도 누구누구와 수작질하는 수상한 거동을 사람들에게 여러번 들키웠었다. 하여 사람들은 “바람쟁이지부”라느니 “오입쟁이간부”라느니… 뒷말을 하였든 것이다. 대삼의 처는 집이 밤낮없이 분주하다보니 큰소리 지르며 앙탈 한번 써보지 못했다. 그는 잠자리에서 남편을 꼬집어 뜯으며 분풀이를 했다. 그리고 이제 경자를 한바탕 조겨 놓고 “거기”도 페물이 되게 할거라고 이발을 갈았다. 안해는 능히 그럴 녀자였다.     대삼은 온갖 구변을 다 하여 안해를 구술리는 한편 경자를 도시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는 웃어른께 입쌀자루를 갖다주고 공인모집지표를 하나 얻어왔든 것이다. 경자는 궁둥이를 툭툭 털고 거뿐히 집으로 갔다. 워낙 입당도 정부도 이걸 견주고 한 노릇인데, 그는 리상을 앞당겨 실현해서 날것만 같았다. 대삼이 따위가 다 무엇인가.     그러나 앞에서는 천길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경자는 그걸 알지 못했다.     어느날 대삼과 선전, 조직위원께 7,8명되는 사내들이 단체로 달려들었다. 오쟁이를 졌다고 달려든 사람들이였는데, 딱 잡아쥔 사실적 근거는 없고 이사람 저사람들의 입에서 얻어들은 소리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다마토리 강술냥이나 마이고 분통이 터져서 달려든 그들은 대삼네들의 변명에 주먹행사를 들이댔다. 확실한 근거는 없고 분통은 상투밑까지 치밀어 오른 그들은 생활작풍이 어떻구 주풍이 어떻구 일처리가 어떻구 사상이 어떻구 저떻구 하면서 기세가 잔뜩올라 달려들었다가 되려 몰리게 되였다. 벙어리가 파리 삼킨듯 속은 뒤틀렸지만 직방 치부를 드러내고 “네새끼가 내 안해를 건드려!”하고 따질수는 없고 이것저것 집탈을 하다가 나중에는 낡은지부 말을 꺼내 시비를 걸고 들었다. 이것이 한때 원근에 소문이 들썽한 “환향단”, “역청산”, “우경번안풍”이다. 한줌도 못되는 계급의 적들이 문화대혁명기간에 잡혀나와 납작하게 되고 나떨어진 “민주파”, 수정주의 졸개들을 위하여 억울하다고 웨치며 “환향단”을 무어 역청산을 하며 혁명적 간부들에게, 무산계급전투보루에 무단적인 진공을 들이댔다는 것이였다. 그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보니 대삼이네들은 늘씬히 부쉬웠든것이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이여서 공사에서는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떼겠다고 윽윽 했지만 부흥대대당지부가 가로막고 나섯다. 모두가 빈하중농들인데 인식문제일뿐, 계급적보복은 아니라고, 소근장활동을 심입전개 해서 자체로, 단결의 념원에서 인민내부모순으로 능히 잘처리할수 있다는 것이였다. 다른때는 방귀 뀐 것도 적아모순이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인민내부를 들고 나와 극력 상급을 설복했다. 거기에는 선진전형의 형상, 체면을 고려한 인소도 작용을 해서… 그번 “환향단”풍파는 그리그리하고 말았다. 모순이 악화되면 대삼이네들에게 좋을것이 없었든 것이다. 군중들은 그속내를 알기에 입을 비죽거리고 코를 싸 쥐고 웃으며 속이 쉬원해 하였다. 사단을 이르킨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루까나 쎄루까나 서울만 까문 되는커니켜. 당신들이 이번에 봉창을 꽤 했닥꼬 널리덜 생각덜 허시께. 그게 뭐 다스는꺽두 아닝께루. 참는게 할애빙께.”하며 되지도 않는 앞대말로 위문인지 조롱인지 시까슬렀다. 더 말하면 밑이 드러나서 제 망신뿐이고 하여 “환향단”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못들은척하며 입만 찝찝 다시였다. 이젠 비밀아닌 비밀로 되였다. 그들에게는 쩍하면 “오줌깨”, “요강떠깨”라는 별명이 겉 롱담 속 진담으로 날아들었다. 그런 걸죽한 롱담판이 벌어질때마다 당사자들은 대범한듯 했으나 “령도”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롱담”이 더 험상해지면 무슨판이 되겠는지… 36계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후, 4인패가 꺼꾸러지고 삐뚠것을, 억울한것을 바로잡는 바람이 기세높히 드닥쳐 왔다.     부흥대대에서는 낡은지부를 밀어던지고 새지부가 올라선것이 제일 큰 잘못된 안건, 억울한안건이라고 군중들이 떠들어 댔다. 이런 와중에 최경자의 남편이 퍼러등등해서 친구 서넛을 끌고 부흥으로 찿아 왔다. 그는 제대된후 시내 방직창에 배치를 받았는데 안해를 리혼하고 대삼이를 한바탕 패 주겠다고 윽벼르며 달려 왔던것이다. 무지막지한 경자의 남편은 회의장소에 뛰여들어 박대삼을 개 두드려 패듯 두드려 팼다. 대삼은 호되게 물매를 맞은것도 여지없는 체면랑패였지만 그보다 는 더욱 지독한, 벌거벗기우고 온갖 악담에 가래침을 받는 등 개골망신을 했다. 그는 그길로 천방지축 강으로 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선전, 조직위원은 “동풍”의 기세를 타고 다시 달려드는 “환향단”에게 물매를 맞고 자리에 누워 녀편네들의 닥달을 또 매일 받았다. (그들은 얼마후 출당처벌을 받고 후에 다른고장으로 이사를 갔다.) “환향단”네 가정들도 무사치 못했다. 이번에는 대삼이처를 맹장대장으로 선전, 조직위원의 처가 반란돌격대원이 되여 “보복단”을 무어가지고 “환향단”패들의 아낙네들을 돌아가며 조기는 판이 였다. 동시에 “환향단”과 “보복단”집들에서는 울며불며 악다구니를 쓰며 리혼풍파가 터졌다. “정부”질한 댓가가, 엎음갚음이 그야말로 푸짐했던 것이다. 부흥대대는 매일 전쟁판으로 아우성을 지르는데, “문공무위”때보다 더 치렬했다. 말그대로 생사판가리 였다. 하여 공사와 파출소에서는 화급히 달려와 여러날 무진애를 쓰며 노력한 끝에 겨우 진화를 해 놓았다.     경자는 개가를 소리높히 부르며 돌아간 남편에게 뼉다구도 추리지 못하게 뚜드려 맞고도 코까지 뜯여 졌는데, 쥐약을 먹고 죽어 버렸다. 그는 도시로 간 후에도 정부의 재미를 버리지 못했든 것이다.     새월은 그런대로 많이 갔다. 그러나 그번의 “정부”전쟁에서 요행 살아남은 당사자들의 가슴은 그냥 요강뚜께로 물떠먹은 기분이 가셔질줄 모르고 있다…                                                                                                                    12.5
52    발바리 정신병 댓글:  조회:1938  추천:1  2014-01-20
                실화                                                                                발바리 정신병                                                                                                              회령     시가지가 크지않다보니 사회구역은 물론 작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생기는 일은 마을이 크고 작음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여하에 따른다.     시 화원구에는300여 가구에 천여명 인구가 살고 있다. 개발한지 몇해 안되는 주민구는 이 도시치고는 매우 아담하다. 우선 반봉페식 치안관리는 사람들에게 안전감을 주며 물업의 봉사가 면밀주도해서 비용은 많이들어도 생활상 편리하고 좋았다. 구내의 록지미화 조성과 인조폭포 련못 가산 그리고 다리 정자 배치는 청나라 1등 탐관 하신네 화원을 모방했다. 구내에는 유치원 위생소 슈퍼가 있고 또 지하주차와 정구장도 있었다. 이곳에는 중층이상 주요령도자가 여럿이 살고 있어서 사람들은 보통 “간부화원”이라고 했다.     시공안국 부국장 왕광도(사람들은 부르기 쉬워선지 왕강도 라고 했다.)는 예쁜 안해와 어린딸애를 데리고 간부화원에서 폼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인물만 보고 얻은 안해가 점점 골치거리 였다.     한뉘 돼지고기 장사를 하는 집에서 자란 안해는 성격이 거칠고 오만 했다. 그의 부모들은 자기 딸애를 백정의 딸이라고 사람들이 업신여길것 같아서 어릴때부터 딸애 버릇을 사납게 키웠는데 그것이 그대로 성미가 되고 말았다. 딸애는 쩍하면 동무들과 악다구니를 하며 걸고 들었다. 집에 씽 들어와서는 채도재를 들고나가 휘둘러 댈때는 사내애들도 “워차우니, 아야마야! 쥬밍아!”하고 비명을 지르며 똥줄이 빠지게 도망을 쳤다. 그뒤에는 흑선풍 리규같이 생긴 아버지가 퉁방울 눈을 부릅뜨고 뻗찌르고 서서 쏘아보는데 진저리가 나게 무서웠다.     안해는 어릴때부터 잘먹고 잘입고 돈을 잘 쓰며 시가지에서 일등 멋쟁이로 자랐다.     왕강도는 뒤문치기로 경찰이된후 보통민경으로부터 파출소부소장, 소장, 부국장으로 까지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벼락출세를 하였다. 미끈하게 생긴 체격과 무관답게 과감한 성격은 지어는 우락부락하기까지 했으나 그것이 사내답고 형사경찰로는 제격이였다. 범죄자를 제압하는 위풍이 드세고 름름했다. 거기에 안해의 돈줄이 거침없이 흘러들고 부수입이 또한 기름진데 왕강도는 열통이 크게 그것을 내 번졌다. 말하자면 “쓸데가서는” 손탁이 크게 뭉텅뭉텅 써 제꼈던 것이다. 왕강도의 마른비행기 진급에 대하여 뒤에서는 말이 많았으나 앞에서는 모두 꿀먹은 벙어리였다.     주민구역이 작은 탓도 있겠으나 왕강도가 부국장이여서 그의 안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보다도, 그는 워낙 이곳 태생인데다가 아이때부터 유명했고 지금은 더욱 활개를 쳐서 온 시가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이 없었다. 무슨일이나 그에게 부탁하면 사통팔달이였다. 그 자신은 하는일이 없었지만 음식점, 노래방, 사우나… 여러곳에서 그에게 월급을 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슈퍼와 상점들에서는 구매권을 보내오고 물건을 보내오고 누구는 집을 일류로 장식해 주었고 또 누구는 가전제품을 증송해 왔다. 왕강도의 안해는 하루에 세번이상 옷을 갈아 입고(모자 장갑 안경도) 귀, 목, 팔목, 손가락, 발목과 발가락에까지 금은장신구를 걸고 다녀서도 유명 했다. 그리고 발바리를 네마리나 달고 다니는 것이 매우 희한한 풍경이였다. 이 도시에서는 유일무이한 멋쟁이였다. 발바리 단장도 매우 기발 했다. 어느 심술쟁이가 언제 붙인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발바리정신병자라는 괴상한 별명이 있었는데 그것이 널리 애용 되였다.     왕강도네는 돈이 많으니까, 개를 열마리 끌고 다니든 돼지를 타고 다니든 누가 뭐라고 할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녀편네가 아침마다 발바리를 령도해 가지고 나오는 것이 구역내 사람들에게는 딱 질기가 나는 노릇이였다. 며느리요 아들이요 딸이요 사위요 하는 그 발바리들에게는 미국 이름인지 영국 이름인지 유별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쌍쌍을 따로따로 재운다고 하였다.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발바리들을 데리고 나와서는 잔디밭 화원에 똥을 싸게 하였다. 앙증맞게 생긴 그 미물들이 깽깽 갑자르며 똥을 쌀때면 사람들은 코를 찡그리며 구역질이 나서 달아 났으나 그들은 너무도 기특하고 재미 있어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좋아라 손벽을 치기까지 했다. 개들의 뒤건사는 종래로 하는 법이 없었다.     “아이고! 조것 봐. 신통히도 꼭 요만때면 방구도 뽕뽕 뀌고 똥을 싼다니까! 총명도 하지. 여기 유치원 애들은 비기지도 못한깐!”              “잘때는 안구 자우?” 련조조장아주머니가 어느날 이죽거리며 능청스레 한마디를 하였다.     “부부끼리 자는데 정신 나갔어요? 주책머리 없이. 쩐 쏴과.”     “손군들을 인차 보겠구만. 자식들이 늘어나서 만복을 받겠소. 한턱 내겠지?.”     “아리랑이나 쓰리랑에서 연회를 하겠어요. 참가해요.”     “개새끼는 똥을 먹으니 똥사발을 상에 올려야 하오. 나는 부조돈이 없어 못가오만.”     “그래두 조장아이야 광림 하셔야지.”     “자네가 죽었다면 가겠지만.”     “내가 왜 죽어요? 찡썬삥!”     “사람일을 아는가.”     “하긴 그래요.” 사람들은 흐아아! 웃으며 흩어졌다. 침을 퉤!퉤!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롱담의 말이라고 함부로 하는것이 아니다. 조장아주머니 말이 씨가 되였든지 아니, 온 구역 온 시가지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을 한것이 무슨 저주가 되였던지 왕강도 부부는 며칠후에 비명횡사를 하였다. 그것도 끔찍한 참사로! 마음씨 무던한 조장아주머니는 훗날 매우 후회를 하였다. 그럴줄 알았드라면 그런 롱담을 하지 않는건데…     일이 생기던 그날저녘, 조장아주머니는 가도에서 내려온 주임과 함께 재해지구지원헌금을 걷우려 다니였다. 이불이나 옷견지, 현금을 받았는데 어느집에서나 성의껏 헌납을 하여 모금은 순조롭게 진행 되였다. 지어는 극빈호대상들까지도 눈치를 알고 지원을 했다.     그들이 왕강도네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니 개들은 죽어라고 짖어 대는데 사람대꾸는 없었다. 한참이나 노크를 하며 불러서야 “써마?! 쎄야!”하며 왕강도의 안해가 부르튼 소리로 짜증난 대답을 하였다.     “래일 쟤들을 데리고 가서 건강검사도 하고 미용도 시켜야 하는데 돈이 어디 있어! 없어! 가! 취! 취!”     “옷이나 신도 되니까…”     “우리집에 그런델 보낼게 어디 있다구. 재수거리 없게. 가! 꾼!”     가도주임과 조장아주머니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침을 퉤퉤 뱉으며 돌아 섯다. 천하 더러운 것들! 저런것두 사람인가. 뒈질것들… 그들은 듣지도 않는 욕을 죽도록 퍼부으며 격분을 금치못해 하였다.     그날 밤, 새벽 네시 쯤! 요란한 총소리에 사람들이 기겁을 해서 어리둥절 하는데 총소리는 또 한방 꽝! 구내를 뒤흔들었다. 경찰차가 달려오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간부화원은 벌컥 뒤집혔다.     818동8단원8호. 왕강도네 집문을 여니, 아! 이런 참변이라구야?!... 왕강도는 이마위가 터져 나갔는데 침대에 반듯히 누워 있고 그의 안해는 가슴이 펑 뚫린채로 옆에 누워 있었다. 권총은 그들부부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발바리는 어떤놈은 자지러지게 악을 쓰며 짖어대고 어떤놈은 침대에서 피를 핥아먹고 있었다. 문패가 길한수자라고 간데마다 자랑하던 집은 그야말로 일조에 흉가로 되였다. 사람들은 참혹한 정경에 몸을 벌벌 떨었다. 간부화원은 대뜸 으스스한 구역으로 되여 버렸다.     흉사의 내막은 인차 밝혀졌다.     침상곁의 탁자에는 종이가 한장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글은 왕강도의 안해가 쓴 것이였다.     “왕강도! 강도같은 개새끼! 개보다도 못한 개새끼! 네가 감히 나를 업수봐?! 너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을 졸이는데… 너는 밖에서 잡년들과 희희닥거려?... 오늘 죽어 봐라! 이 개새끼야! 나도 죽는다. 너죽고 나죽고 같이 죽자! 감옥에 가기보다는 낫다.”     그후, 왕강도의 거멀들은 이런 말을 했다. 소위 피의 교훈을 총결한 것이였다.     “녀편네들에게 총 쏘는 법을 배워주지 말아야 해!”     그들은 녀편네들을 끼고 들놀이 산놀이를 가서 무슨 지랄이 났었는지 총쏘는 오락을 성수나서 여러번 놀아댄바가 있었든 것이다. 그것이 켕기였다. 그들은 왕강도가 녀편네에게 총 쏘는걸 배워줘서 아까운 나이에 불쌍하게 죽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민들은 왕청같은 소리를 했다. 하늘이 징벌하지 않으면 사람이 징벌한다느니… 죄를 지으면 발이 짧다느니… 또 무슨 자업자득이요, 도끼로 제발등을 찍었소, 그런것들은 일찌감치 죽는것도 옳아… 착실히 살게지… 별 소리를 다 하였다.                                                                                                                              0.1
51    특별감옥 댓글:  조회:2235  추천:3  2014-01-17
              잡문                                              특별감옥                                                                                                       회령     고왕금래, 인간세상에는 감옥이 부지수로 많고 그 형태도 다양하다.      그중에서 장학량의 감옥살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일례가 된다. 장씨는 57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처음부터 “연금”이라는 징역을 살았다. 장학량은 범상죄를 지었으니 군사법정에서 죽임을 당하든지 수족을 잘리든지 아니면 정배살이를 하든지 벌을 받게 마련이지만 그보다 더 억울한건 옥졸들이 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일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것은 특무대장을 한 류을광, 웅중청, 단육기의 인생이라 하겠다. 그들은 허무하기 짝이없는, 부질없는 삶을 살았든 것이다.     장개석의 충견인 대립(강생과 배짝이 된다)은 장학량의 연금을 세겹으로 포치해 놓았다. 제일밖에층은 순찰조로 한개련의 헌병이 장씨 거주지를 둘러싸고 24시간 순찰하며 “안전”을 확보하고 3보1강, 5보1초로 보초를 세웠는데 초병들은 서로 지껄이를 하며 바라볼수 있었다. 중간층은 집둘레를 둘러 싸고 지키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개바자 같은 것이다. 안층은 출입문, 창문을 지키며 방안까지 지키였다. 그리고 장학량의 신변에는 두셋이 붙어 있었다. 안층조는 장씨가 어데로 가면 어데로 따라 다니였다. 밤에 부부가 동품할때도 창문에 매달려 들여다 보고 방문을 열고 방안을 기웃거리며 제대로 붙어 자고 있나, 이상한 기미가 없나 동정을 살피였다. 화력은 50자루의 싸창, 돌격총2대, 자동보총2대, 기관총이 한문이였다. 이들을 통칭해서 특무대라고 하였다. 장학량이 활동범위는 낮에는 집을 중심으로 반경이 100미터고 밤에는 집안에 박혀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은 후일 조금씩 변동이 있었으나 장경국이 죽을때까지 대체로 비슷 했다.          류을광     서안사변 이듬해(1937년) 춘절직전 장학량은 절강 계구로 옮겨져 연금 되였다. 이때로부터 류는 특무대 대장이였는데 25년을 하루와 같히 장학량을 지키였다. 그먼저 두어달은 특무대 대장을 주위룡이라는 사람이 했다. 류을광은 호남사람으로 황포군교 4기생이다. 그는 북벌전쟁에 참가한후 군통에 전근되여 장개석의 경위대 대장, 특무대 대장 등 직무를 담당했다. 1962년에 안전국으로 돌아가면서 장학량을 떠나게 되였다.     류을광은 아주 얌전하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였지만 속대는 매우 악착하고 한치 에누리 없이 각박한 사람이였다. 그는 감독규정의 모든 세절을 엄격히 집행 하였다. 장학량을 밤낮 철통같히 둘러싸고(포위하고) 감독했을뿐만아니라 지어는 자기의 처자까지 데려다 숙식을 함께하면서 장학량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1946년 장학량은 대만 신죽시 정상온천에 옮겨져 연금 되였다. 이듬해 대만인민들이 국민당을 반대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2.28사건) 류는 “일단 장학량에게서 이상기미가 있으면 그들 부처를 즉시 죽이라.”는 특별예방조치를 특무대에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같은해 10월 장치중이 장학량을 보려 왔는데 그때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두가지 요구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하나는 평민으로 살게 자유를 달라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류을광을 내집에서 나가게 하여 달라고, 나의 생활을 내가 관리할수 있게 하여 달라는 것이였다. 장치중은 남경에 돌아가는 즉시 이 부탁을 장개석에게 전달 하였다. 류을광도 물론 이런 정보를 제때에 대립에게 보고했다.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에 대한 답복으로 한술 더 떠서 “이제부터는 그누구도 비준없이는 장학량을 만나지 못한다.”는 밀령을 대만성 경비사령 팽맹집에게 내렸다. 장학량과 장치중은 이렇게 할줄을 생각도 못했다. 그야말로 혹을 떼려다가 덧붙이고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었든 것이다.     1949년 장개석은 대만에 쫓겨간후 고웅에 안둔한지 얼마안되여 즉시 류을광을 불러다 장학량의 정황을 물었다. 그는 류을광의 공작을 십분 만족해 하면서 장금으로 황금 300량을 주었다.     류을광이 안전국으로 돌아갈때 장학량은 연회를 열었는데 장경국과 팽맹집도 참석했다. 연회에서 장학량은 “류을광은 나의 원쑤이기도 하고 은인이기도 하다. 원쑤라고 하는것은 그가 나를 너무도 각박하게 감시했기에 하는 말이고 은인이라고 함은 내가 급성맹장염에 걸렸을때 청시하고 비준받을 겨를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 나를 병원에 보내여 수술받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떠나는 마당에 나는 한몫 돈을 주려고 한다.” 하였다. 하여 좌석이 매우 난처하게 되였는데 장경국이 완곡히 말려서 겨우 체면을 수습 했다.      25년을 하루같히 장학량 하나를 눈박아 지켜온 류을광! 그때는 좋은세월이 다 지난 늙은이가 되여 북망산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였다. 일생동안 그가 해놓은일이 무엇이든가?!... 류을광은 그후 여생을 적막속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           웅중청     웅중청은 호북 사람으로 항주특경반 1기생이다. 그는 생기기는 말수가 적고 어리무던하게 생겼지만 무엇이나 속으로 살피는 능청스럽고 음흉한 사람이였다.     장학량을 연금하는 첯날부터 대립은 그를 장학량의 신변에 박아 놓았다. 밤낮으로 장학량을 감시하는 이 고역을 그는 30년이나 하였다. 첯 14년은 조장이란 직급으로 공작하고 후에는 부대장으로 또 꼬박 12년을 일하다가 류을광이 떠나자 겨우 대장 벼슬에 올랐다.     웅중청은 류을광과는 달리 장학량과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장학량을 아주 유모적이고 박람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평론하기도 했다. “그는 애국자다. 그의 출발점은 좋았다. 서안사변에서 범상죄를 지었으나 란장판을 치지 않았다. 애국충심 한가지만으로도 그는 중국에서 천고에 이름을 전할것이다.” 장학량에 대한 그의 이런 동정비슷한 호감은 훗날 진급에 치명적인 장애로 되였다.     웅중청을 대장으로 제발시킨후 장경국은 매년 한두번씩 그를 불러 장학량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어느 한번 장경국의 물음에 그는 “장학량이 기독교 세례를 받은후부터 태도가 비교적 겸손해 지었다.”라고 대답 하였다. 그말을 듣자 장경국은 “아ㅡ”하고 더 말하지 않았는데, 마치도 “네가 어찌 그를 두둔 하는가?” 하는것만 같았다. 눈치빠른 웅중청은 제꺽 말머리를 돌려 “그러나 여전히 잘난척하는 우월감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장으로 진급하는 일은 헛탕을 치고 말았다. 결국 웅중청은 상교군함으로 퇴역당하고 말았다. 장씨 부자에게 말그대로 한생을 다하여 충성을 했으나 그의 만년은 헌신짝만도 못했다.          단육기     단육기는 장학량 신변에서 23년을 하루와 같이 감시를 하였다. 그는 장경국의 지시를 한점 오차도 없이 충실히 집행했다. 그러나 수하인원의 고발로 앞당겨 퇴역 당하고 말았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한번 단육기 큰딸이 장학량부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날 단육기가 며느리 진약의(작가)를 장학량부부와 만나게 안배 했다는 것이였다. 단육기 본인은 절대로 그런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안전국에서는 그를 밤중에 불러다 4시간이나 심문 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해명하지 못했지만 즉시 퇴역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다. 단육기는 23년을 부조장, 조장질을 조금 하다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리진원     1988년 장경국이 죽은후 특무대는 제1특근대로 이름을 고치고 조장으로는 상교군관 리진원이였다. 감시인원은 18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무장도 휴대하지 않고 가스총을 사용했다. 보고도 한달에 두번으로하고 이전에 “절밀”로 취급하던것을 “기밀”로 처리하였다. 후에는 특근대를 취소하느니 어쩌느니 했는데, 그것을 반세기가 넘도록 공포와 감시속에서 살아온 장학량 본인이 극력 회망하지 않았다. 그는 특근대가 계속 자기를 감시해 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안전했기 때문이였다.     1993년 장학량부부는 비로서 국민당 손아귀에서 벗어나 미국 하와이로 가서 정착하게 되였다. 이로서 리진원의 조장소임도, 특근대의 사명도 끝나게 되였다. 장학량을 지킨 몇사람가운데서 리진원이 제일 운수가 좋았다. 그는 4년남짓 장학량을 지키다가 재수좋게 "해방"을 받았든 것이다.     그전해 장학량부부는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만단의 준비를 다하였다. 그들은 먼저 홍콩에 있는 벗 하세례의 손자 혼례식에 참가한후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려권수속도 이미 다 하였는데 아쉽게도 하씨네 혼례식이 지연되여 계휙은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학량부부는 영영 이국타향의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장학량의 평생 유감으로 남았다.     반세기에 걸친 국민당의 특별감옥ㅡ장학량의 감옥에서 그들부부를 비롯해서 류을광, 웅중청, 단욱기 세사람은 하나뿐인 일생을 부질없이 허송했다. 장학량이 무슨 호랑인가, 마귄가 … 감시해서 생긴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허무한 인생비극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독한 감옥은 세상에 지금도 많다. 개인독재정권은 나라를(사회를) 그대로 감옥화 하고 있다.                                                                                                              10.4
50    송죽의 절개 댓글:  조회:2664  추천:5  2014-01-15
                실화                                                  송죽의 절개                                                                                                                    회령     지금 절개니 지조니 정조니… 하는 말을 하면 시대에 떨어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가? 그런 우려심에서 좀 망설일 때가 간혹 있다. 정조니 절개니 하면 렬녀문을 세워주던 춘향이 시절을 대뜸 생각하게 되고 케케묵은 봉건통 냄새가 물씬 난다. 말 자체가 봉건시대의 오래된 말이여서, 그리고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따위에서 강조한 주제사상 말하자면 핵심골자여서 봉건사상이라는 선입견이 즉각 튀여 나온다. 공맹지도를 죽어라고 비판투쟁한 여파라고도 할수 있겠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유가학설을 다시 학습하며 유교례의범절을 부활 강조하는 당전 시각에서 볼때 많이 응용해야할 말이라고 인정 된다. 이를테면 모주석의 어록을 학습하던 때처럼 활학활용 해야할 말이다. “신결혼 시대”요 “리혼 행진곡”이요 또 무슨 “자유의 인생 랄랄라”… 같은 주책없는 드라마의 망발을 배격하기 위해서, 청소년과 중장년… 인간들의 건강한 심령을 위해서 활학활용 해야할 말이다.             림표의 첯번째 안해     림표(원명 림육용)가 8살일때 그의 부모들은 그보다 3살 위인 왕(汪)씨네 둘째딸을 민며느리로 삼았다. 왕씨네도 림표네 집처럼 회룡진에서는 부자였다. 왕씨네 둘째딸은 수려하고 단정하고 령리하며 얌전하여 린근에서 모두 귀여워 했다. 전통관념에서 볼때 이 혼인은 매우 미만한 것으로 그야말로 문벌이 맞고 천생배필이 였다. 그러나 림표는 아이다 보니 남녀의 정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와 응석을 부리며 각시는 싫고 공부를 하겠다고 떼질을 썼다. 어머니는 아들을 어루만지며 이 혼사를 대답하면 장래에 꼭 큰 인물이 될거라며 달래 였다. 림표는 알둥말둥 하면서 응낙 하였다.     림표는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차츰 혁명의 길에 들어섯는데 황포군관학교를 거쳐1926년에는 실습패장으로 북벌전쟁에 참가 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공산당원이 였다. 13살에 집을 떠난 림표는 그간 림가만에 있는 집으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 왕씨는 독수공방 하면서 23살이 되는 처녀로 되였다. 적막과 처량한 나날이 였다. 림, 왕의 이 혼인은 처음부터 비극적이 였다. 이것은 두말할것 없이 림표를 나무릴바가 아니다. 림표는 처음부터 처녀에게 아무런 정도 없었고 그의 일생을 책임질것도 없었다. 비극의 괴수는 오직 봉건례교일 뿐이다.     1927년 음력설 전야에 무한에 있는 북벌군의 정식패장인 림표에게로 집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부친이 쓴 것이였는데 늙고 또 병이 고망에 들어 기동도 못하니... 죽기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싶다는… 그런 슬프고 절절한 사연이였다. 효자인 림표는 즉시 청가를 맡고 밤낮을 달려 집으로 갔다. 그런데 부친은 정정하고 집에서는 웃음꽃이 넘쳐 났다. 림표를 결혼 시키기 위하여 부친은 거짓말 편지를 보냈든 것이다.     림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일때 당신들이 해 놓은 일이니 당신들이 없던 일로 만들라. 고 딱 잡아 떼였다. 되기나 한 소린가! 자고로 혼인은 부모의 명에 따르는 법이고 중매의 말을 듣는것인데, 십여년 림표를 기다려온 왕씨 처녀는 그래 그저 헛되이 청춘을 랑비해야 한단 말인가. 이웃들에서는 림가네는 말에 신용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늙은 부모들이 애걸하다싶이 사정사정하고 로안에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데야 림표도 어쩔수가 없었다. 설날, 굉장하게 혼례를 거행하고 동방화촉의 신혼방에 떠밀려 들어간 림표는 울적하기만 했다. 그는 왕씨 처녀에게 아무런 인상도 호감도 없었고 애정이란건 더 말할 여지도 없었다. 왕씨 처녀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꿈나라로 들어 갔지만 림표는 도무지 잘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림표는 밖으로 나와 부모들이 계시는 방에 절을 한후 그길로 떠나 버렸다. 부대에 돌아온후 림표는 즉시 부모와 왕씨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자기는 이미 혁명에 몸을 바쳤으니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일이고… 왕씨 처녀께서는 아까운 청춘을 헛되이 하지말고 좋은 사람을 찿아 가기를, 인의가 없는 나를 량해 하여 달라고… 부모님들이 불효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이런것이 였다. 편지를 받은후 부모들은 대노하여 줄욕을 퍼 부었으나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왕씨 처녀는 며칠 대성통곡을 한후 이생에서 다시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선포 하였다. 그는 말과 같이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고 종신 재혼을 하지 않았다. 시종 림씨 집에서 온집 로소 식구들을 받들어 모셨다.     해방후 림씨네 일가는 림표를 따라가서 복을 누리였으나 왕씨 녀인은 불청객으로는 되기 싫다며 본가로 돌아가서 독수공방을 하며 헝겁신을 만들어 팔며 적막한 여생을 보냈다. 류수와 같은 세월은 30여년이 지나 갔다. 림표는 시종 집으로 오지 않았고 무정한 세월은 아름다운 왕씨의 얼굴에 한오리 또 한오리의 깊은 주름살을 새겨 놓았다. 그는 피지 못한 꽃처럼 일찍 늙어 버렸다.     1959년 초가을 무한에서 중앙공작회의에 참가한 림표는 회의가 끝나자 갑자기 고향에 가 보겠다고 하였다. 누가 감히 등한할수 있는가. 경찰차 한대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여러대의 승용차가 림표의 까만 홍기패 하이야를 옹위하며 호호탕탕 림가만으로 달리였다. 고향집의 경물은 의구 했으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치심의 왕씨는 어데로 갔을가. 반나절 두루 돌아 보던 림표는 공사(향)서기에게 왕씨가 어데로 갔는가, 생활은 할만 한가… 하고 물었다. 서기는 마을 로인들에게서 림표가 혼인을 피해 도망간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고 또 왕씨를 몇번 본적도 있는지라 림표가 누구를 묻는지 대뜸 알수가 있었다. 그는 인차 왕씨할머니는 금년에 56살이지만 신체는 단단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생활은 일반적이라고 대답 하였다. 그러면서 만나 보겠는가고 조심히 물었다. 림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머리를 흔들며 필요없다고 말한후 비서더러 3000원을 내여 서기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서기에게 이 돈을 왕씨에게 전해 줄것과 그가 돈의 래력을 물으면 그저 당에서 주는거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림표가 돌아간후 서기는 왕씨를 사무실에 불러다 돈을 건네 주면서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씨가 그말을 곧이 들을리 만무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였다. 서기는 왕씨가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자 그의 귀에 대고 사실을 말해 주었다. 왕씨의 눈에서는 대뜸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왕씨는 그 후에도 여전히 신발을 만들어 생계를 하였는데 다른점이라면 공소사(상점)에서 열훌에 한번씩 사람이 와서 시장값보다 한배 더 주면서 얼마가 있으면 얼마를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정부에서 “혁명로인광영카”를 주어 달마다 생활보조비를 탈수 있었다.     1967년 왕씨는 적막하고도 처량한 한생을 마치였다. 그때는 “림부주석께서 영원히 건강하시라!”는 구호가 신주대지에 울려 퍼질때 였다. 왕씨가 사망 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군구 후근부부장(림표와 절친한 사이)은 림표에게 전보를 쳐서 무슨 지시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림표는 그런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부장은 상등관재를 마련하고 차 한대에 10여명 전사들을 데리고 가서 후사를 처리해 주었다. 유물을 정리할때 궤짝 제일 밑에서 붉은천에 꽁꽁 싼 3000원 돈뭉치가 나왔다. 부장은 그것을 들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도 고지식한 녀인도 있단 말인가!” 부장은 깊이 한탄하며 머리를 숙이였다.            허광달대장의 애정     허광달(원명 허덕화)대장은 풍채가 름름하고 미남이면서도 위엄있게 생긴 인물 체격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와 부인 추정화의 애정은 절개와 정조를 지킨 미담으로 전기적 색채가 농후하다.     허광달의 혼인도 림표의 첯번째 혼인처럼 부모가 도맡아 결정한 것이다.(림표보다 한살 어림) 그러나 허광달 부부는 그 혼인을 한평생 순결히 지키였다. 말하자면 “부모의 명”에 따른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사례는 공화국고급간부들의 혼인사에서 매우 드문일이다.     허광달은 호남성 장사 동상향 라복충의 극히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 났다. 그의 아버지 허자귀는 순박하고 로실한 농민이였다. 허광달은 7살때부터 지주집의 소몰이를 하였다. 천성이 매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허광달은 마을에 있는 학교 창문 밖에서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를 틈만 있으면 였듣군 하였다. 어느해 엄동설한의 어느날 그는 글읽는 소리를 였듣다가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학교의 선생은 추희로였는데 그는 밖에서 글읽는 소리를 자주 훔쳐 듣는 아이에 대하여 언녕부터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아이의 학습정신에 감동한 추희로선생은 학비를 받지않고 허광달을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반년후 추희로는 동창이며 친한 벗인 서특립이 창립한 장사사범학교에 초빙되여 교원을 하게 되였다.(모택동의 모교) 장사로 갈때 추희로는 허광달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가난 때문에 허자귀는 동의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추희로와 허광달의 두 백부가 적극 권고하고 설복한 결과 허광달은 장사사범에 다닐수 있게 되였다. 학교에서 허광달은 학습이며 품덕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였다.     허광달이 14살 되던해 추희로는 허자귀와 토론하고 자기의 9살난 둘째딸 추정화와 혼인을 결정하였다. 당자들은 아이들이다보니 혼인이 무엇인지 물론 알지 못했다. 혼약을 한후 추정화는 장사에 가서 녀자직업학교를 다니였다.     925년17살에 허광달은 이미 공산당원이였다. 이듬해 그는 조직의 안배하에 황포군관학교에 가서 제5기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허씨네와 추씨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년 13살이 된 추정화는 조숙한 셈이였는지 허광달에 대하여 몽롱한 애정이 있기 시작했다. 허광달은 황포군교에 간후 인차 추정화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군복을 입고 칼까지 찬 멋드러진 사진까지 한장을 보내였다. 추정화는 그사진을 보배처럼 한평생 귀중히 갖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그때 황포군교는 손중산이 세운거고 손중산을 따라서는 틀림이 없을거라고 믿었다.     1927년 허광달은 황포군교를 필업한후 국민혁명군에 배치 되였는데 그해9월 부상을 당하였다. 하여 손씨 농민집에서 치료를 하게 되였다. 18살 되는 그집 딸 손취화는 적위대원으로 허광달을 극진히 보살폈고 사랑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허광달은 자기의 혼인사를 그에게 말해주면서 그의 사랑을 거절 하였다. 취화는 십분 괴로웠으나 여전히 허광달을 세심히 보살펴 주었다. 얼마후 취화의 아버지가 허광달을 반동파들에게 밀고하였다. 취화는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심산밀림속에 전이 시키고 계속 보살펴 주었다. 취화는 허광달의 구명은인이였고 혁명전우였으며 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처녀였다. 인물체격도 추정화보다는 훨씬 나은 처녀였다. 그러나 애정면에서 허광달은 추호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상처가 회복되자 그는 즉시 부대로 돌아 갔다.     1928년 허광달은 당의 지시로 국민당군대에 들어가서 병운공작을 하였는데 신분이 폭로되여 도망치게 되였다. 도중에서 동지들이 서로 흩어지다보니 그는 우선 집에 돌아가서 다시 조직을 찿기로 결심하였다. 오래만에 만난 허광달과 추정화의 기쁨은 이를데 없었다. 때는 이미 허광달은 21살, 추정화는 16살이여서 애정을 아는 청춘들이 였다. 허광달이 집으로 오자 두집 부모들은 8월20일(음) 그들을 제꺽 결혼 시켰다. 그들은 결혼으로 허광달을 집에 붙잡아 두자는 속셈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허광달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는 혁명을 하는 공산당원이기에 수시로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이고 정화에게 련루되는 피해를 방지하자는데서 였다. 결코 정화가 싫어서가 아니였다. 하지만 부모들의 결정에 따랐다. 결혼후에도 그는 매일 장사에 가서 조직과 련계를 가지였다. 아니나 다르랴! 결혼후 열흘째 반역자의 밀고로 허광달의 신분은 폭로 되였는데 마침 장사경비사령부에 근무하는 친척이 급보를 전해와서 그는 피신할수 있었다. 급보는 부모들과 정화에게 청천벽력이였다. 정화는 아연실색해서 “당신이 정말 공산당인가요?! 빨리 도망 하세요. 멀리 도망할수록 좋아요.” 여기까지 말한 추정화는 목이 메여 더 말하지 못하다가 좀 진정한후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걷는 길은 옳아요. 나쁜무리를 타도하지 않고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살길이 없어요.” 이렇게 급급히 갈라진 그들은 기적같이 꼭 10년후에 만나게 된다. 아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리저리 피신하며 도망친 허광달은 당조직과 련계가 끊어졌을뿐만아니라 북경의 어느려관에서 병들어 눕고 말았다. 아울러 병세는 날따라 엄중해만 갔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경지였는데, 이때에 한 처녀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 올줄이야! 그는 려관집 주인의 딸 수씨처녀 였다. 수씨처녀는 북경녀자사범에서 학습중이 였는데 정직하고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쾌활한 현대적 처녀 였다. 다다소소 허광달의 경력을 료해하고 있은 처녀는 그를 몹시 존중하였으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허광달은 병이 차츰 회복되여 갔을뿐만 아니라 그의 방조로 지하당조직까지 찿게 되였다. 수씨처녀는 허광달을 존경하던데로부터 절절히 애모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허광달은 참으로 이 복지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안해를 생각할때 남편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허광달은 이번에도 리지적으로 수씨처녀를 떠났다.     1929년7월 허광달은 상해에서 주은래가 령도하는 중공중앙군사간부훈련반을 거쳐 하룡이 지휘하는 홍2군단의 참모 등 직을 력임하면서 혁명투쟁을 하였다.     추정화는 결혼 열흘만에 남편이 도망한후 장사에 있는 본가로 돌아와서 명헌녀자중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집이 더욱 가난해 지여 학업을 접고 한 방직공장에 들어가서 로동을 하였다. 남편이 공산당원이며 혁명을 하는 사람임을 아는 추정화는 항상 남편의 안위를 근심 하였고 또 몹시 그리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나날을 보내였다.     1931년 부상을 당한 허광달은 상해에서 치료하면서 가명으로 집에 편지를 보내였다. 남편이 살아있었다! 추정화는 일희일비의 격정을 참을길 없어 아이처럼 엉엉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후 다시 여러달 감감 무소식이였다. 추정화의 초조한 심정은 무어라 말할수 없었다. 어느날 문득 쏘련에서 편지가 왔는데 그것은 남편이 보낸것이 였다.(상해에서 수술을 곧 하려는 때에 반역자의 밀고로 갑자기 쏘련으로 전이함,) 편지에는10장의 종이오리에 로문으로 쓴 남편의 주소까지 있었다. 회답시 이것을 봉투에 붙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은전 백원을 보내여 왔는데 사범학교에 다니라는 부탁이였다. 추정화는 곧 그대로 하였다. 하지만 10장의 종이오리로 한 편지는 다시 종무소식이 였다. 추정화의 가슴속에서는 자꾸 불길한 생각이 솟아 올랐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서특립은 추정화를 연안항일군정대학에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추희로에게 건의 하였다. 아버지와 딸은 대뜸 찬동 하였다. 하여 추정화는 허광달의 녀동생 허계량과 함께 연안으로 달리였다. 여러날이 걸려 연안에 이른 그들은 몹시 피로 했다. 그들이 한바탕 푹 자려고 하는때에 꺽두룩한 군인이 불쑥 집으로 들어 왔다. 삼씨기름 등잔불에 비쳐진 그는 허광달! 6년이나 소식이 없던 남편이였다!     그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젊고 름름하고 고급군사간부인 허광달이 연안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주의력이 집중 되였다. 특히 처녀들이 그를 눈박아 보았다. 많은 녀작가 녀연원 녀기자 녀군관 등 녀자들이 그에게 경모의 감정을 품었으며 어떤 녀자들은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두말할것없이 모두 거절을 당하였다. 하여 어떤 녀자들은 그를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까지 하였다. 하지만 보다싶히 허광달이야말로 가장 감정을 알며 가장 감정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였다. 그는 시종 자기의 결발지처를 잊지 않았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은근히 권념조로 “당신이 안해와 헤여진지 10년이나 되고 또 이 란세에 만약 안해가 이미 없어졌다면 기다리는것이 헛짓이 아닌가.”라고 말하니 허광달은 견정불의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였다. “나는 기다리겠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얻는다면 그의 마음을 너무도 상하게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여러해동안 그는 나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며 나를 기다렸는데…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해도 그의 묘를 꼭 보고야 승인할것이며 한줌의 흙을 덮어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다시 얻는 일이 없을 것이다.” 추정화가 연안으로 오려할때, 하광달과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은 림백거는 서안에서 허광달에게 전보를 쳐서 오는것을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세심한 림백거는 적지않은 사람들이(특히 고급간부들이) 혁명에 참가한후 부모들이 결정한 혼인을 추호의 미련도 없이 뒤엎는것을 보았기에, 혹시 허광달의 생각은 어떻겠는지?... 그래서 전보를 쳤든 것이다. 전보를 받은 허광달은 너무도 놀랍고 기뻐서 마구 날뛰며 춤을 추었다. 정화가 무사히 살아 있었을 뿐만아니라 혁명에 참가 하겠다고 까지 하니 희사가 하늘에서 떨어진것만 같았다. 허광달은 즉시 회답전보를 날렸다. 그러나 추정화는 그런저런것을 알기전에 이미 연안길에 올랐다. 허광달 부부가 만난후 항대의 동사들과 학원들은 교육부장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녀자가 이토록 평범한 녀자임에(인물체격도 언변도) 모두 놀랐다… 그리고 허광달에게 심심히 탄복 했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줄곧 함께 있었다. 이듬해, 결혼 10주년을 맞으며(그해 추정화는 입당) 허광달은 금할수 없는 격동을 시로 써서 안해에게 주었는데 추정화는 그것을 진귀한 보물로 보관하며 한평생 감미로움을 만끽 하였다. 1949년 허광달 부부는 란주해방전쟁에 참가한후 그곳에서 개국성전을 맞게 되였다. 그날 그들 부부는 무량한 감개로 밤을 새우며 지나온 나날들을 회고 하였다. 그날밤 추정화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당년에 내가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을 생각 하였겠어요. 당신과 만날날만 바라면서 만나기만 하면 더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 했죠.” 얼마나 진지한 순정이며 진솔한 고백인가!...     1950년 허광달은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사령부가 성립 되면서 사령원으로 임명 되였다. 그리고 추정화는 사령부기관당총지서기가 되였다. 국가의 고급 장령이면서 령도인인 허광달은 부인을 대동하여 중대한 례의장소에 나가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추정화는 그런 활동에 참가하는것을 싫어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젊고 아름답고 눈부신 부인들 앞에서 자신은 너무도 늙고 평범하여 볼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남편의 형상에 손상을 준다는데서 였다. 그러나 허광달은 전혀 다른 관점이였다. 그는 중대한 활동마다 꼭꼭 부인을 대동하여 참가 했다. 그는 매번 부인을 이런말로 설복 하였다. “국가의 위엄있는 례의는 겉치례에서만 표현되는것이 아니다. 주요하게는 국가의 령혼, 사기, 민풍과 인민의 정신면모에서 보게 된다. 이면에서 당신은 외국의 무관부인들과 당당하게 비교할수 있다. 조강지처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못한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최저의 사람도덕이다. 황차 당신과 나는 수 년의 환난부부가 아닌가!”              태산의 송죽같은 진소민     동악의 태산은 오악에서도 제일 이름 높은 태악이다. 태산의 상상봉에 조용히 서 있는 몇그루의 낮으막한 송죽은 음미하며 보면 볼수록 감회가 깊다. 소나무는 변함없는 그 푸름으로 절개를 상징하고 대나무는 꺾길지언정 굽으러 들지 않는 특성으로 정조를 표현한다. 진소민이 바로 그 송죽과 같은 녀인이다. 그의 32주기제를 보내며 고인을 간단히 회고해 본다.     진소민은 산동 수광 사람으로 1902년에 태여났다. 그는 13살에 일본 면사공장에서 아동공으로 일했으며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하였다. 1930년 스물아홉의 로처녀 진소민은 임국정과 결혼 하였다. 당시 임국정은 산동성위서기였는데 청도에서 세집을 맡자고 하니 부부가 아니면 세집을 주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여 조직에서는 진소민을 그의 안해로 가장시켜 세집을 맡게 했다. 후에 그들은 애정이 생기면서 가짜부부가 진짜부부로 되였다. 1931년10월 반역자의 밀고로 임국정은 체포 되고 그해 11월에 사형당했다. 1년 남짓 부부생활을 한 진소민은 서른살에 과부로 되였다. 그후 한평생 재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준 반려는 임국정의 사진과 작으마한 도자기 조각상이 였다.(강서에서 남편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들었음) 그야말로 “일부종신”(한 남편을 지킴)을 지킨 렬녀라 하겠다.     지난세기 20년대부터 직업 혁명자로 나선 진소민은 우수한 공산주의전사였고 인민의 좋은간부였고 좋은누나였다. 그는 당의 중요한 위치에서 여러가지 령도직무를 력임하면서 혁명사업에 충성을 다 하였다. 군에서도 사업했고 정부에서도 사업 했으며 7기 중앙후보위원, 8기중앙위원이였고 인대와 정협의 상무위원 전국총공회부주석을 지내였다.     1968년10월13일부터 31일까지 중공중앙8기12차 전체회의가 북경에서 진행 되였다. 중앙위원인 진소민은 당연히 회의에 참가해야할 사람이였으나 총공회반란파들이 회의통지서를 깔아두고 계속 그를 투쟁하였다. 진소민은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처음에는 소수의 자산계급사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육을 진행하는 것인줄로 알았다. 하여 적극적으로 군중을 발동하며 운동에 뛰여 들었다. 그는 기층에 내려가서 운동의 진행정황을 료해하는 한편 총공회당조 령도들에게 군중속에 들어가서 운동에 대한 령도를 가강할것을 요구 하였다. 동시에 군중들에게 자신의 착오와 결함, 부족점들을 대자보로 지적 비판하며 총공회 사업에 대해서도 비판의견을 대자보를 붙이라고 호소 하였다. 그런데 운동은 류소기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치달으며 건국후 그때까지 17년의 모든것을 부정 하였다. 자산계급반동로선, 수정주의, 검은선이 통치했다고 하면서 모든 로간부와 각급령도를 비켜 세우고 비판투쟁을 진행 하였다. 당신들은 검은사령부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당신들의 검은사령은 류소기라는 것이였다. 해방전과 해방후 장기간 류소기 신변에서 그의 령도를 받으며 사업해온 진소민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그런 견해를 절대로 동의할수 없었다. 그는 이것은 딴심보를 품은 일부 사람들의 작간이며 로간부들을 밀어내고 권력을 빼앗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간파 하였다. 진소민은 자기의 정치적 관점을 조금도 숨김이 없이 공개적으로 반란파들과 맞서고 문화대혁명과 대항 하였다 그는 두말할것 없이 극히 완고한 “보황파”, “검은맹장”, “반동분자”로 찍혀 호된 투쟁과 참혹한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회의직전 주은래는 직접 사람을 보내여 진소민을 데려오게 하였다. 반란파들은 “진소민은 검은패거리며 반역자다. 중앙수장(강청)이 지시했는데 그는 참가자격이 없다.”하며 맞섯다. 파견을 받고 간 사람들은 “주총리의 지시를 누구도 막지 못한다.”하고 엄정히 선포하였다. 이렇게 진소민은 8기12차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는 소조로 나뉘여 소위 “2월역류”의 “검은맹장”들인 진의 엽검영 담진림 리부춘 리선념 등 로일대 혁명가들을 포위공격 하였다. 다음은 류소기전안조에서 만든 “심사보고”를 토론 하였다. 그리고 위원마다 태도표시를 해야 했는데 진소민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하였다. 하여 그는 여러날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심사보고”는 사실과 맞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모순이 많았다.     10월31일! 전체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류소기에 대한 “심사보고”와 “당에서 영원히 제명”하는 결정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행하게 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집행자 림표는 “심사보고”를 공중에 내여 흔들며 “이것을 한개 재료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이것으로 류소기가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부터 표결을 하겠는데 동의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132명이 손을 들었다. 림표는 또 공식적인 어조로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말하였다. 진소민 한사람이 손을 들었다.     페회후 강생은 진소민과 따지고 들었다. “무엇때문에 심사보고를 동의하지 않소?” “나는 심사보고의 그런 사실들을 믿지 않소. 적발한 사람의 재료도 믿지 않소.” “왜서 류소기의 출당을 동의하지 않는거요?” “이건 나의 권리요.” “그럼, 당중앙을 믿지않는 거요?” “강생동지! 나는 당원이요.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무슨표를 내든지 이건 나의 권리요. 나의 그 한표에 그렇게 많은 내용이 포함되여 있지 않소. 무한히 고도에 끌어 올리지 말기를 바라오.”     그날, 진소민은 회의실에서 쓰러졌는데 마음 좋은 운전수가 집까지 모셔 갔다. 그후 진소민은 줄곧 병석에서 신음하며 비인간적인 투쟁을 당하였다.     이듬해 10월 진소민은 림표의 “전비소산” 명령으로 해서 악예변구의 로 혁명근거지였던 라산으로 갔다.(병이 중하여 사람들이 기차에 들어 올렸다) 이곳은 당년에 그가 군중을 령도하여 항일을 하였던 곳이다. 당지의 군중들은 진소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감독인원들을 아랑곳 하지않고 진소민을 보살폈다. 하지만 매우 차한 환경에서 그의 건강은 몹시 악화 되였다. 림표가 죽으후 그는 비로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다.     4인패가 망한후 그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젠 당과 국가가 희망이 있게 되였다. 나도 눈을 감을수 있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신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정황에서도 진리를 견지해야 한다고 당부 하였다. 림종에 그는 두 조카에게 “나는 가야겠다. 너희들은 나처럼 당당정정한 사람이 되여라. 제손으로 살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죽으면 돈을 쓰지말고 내가 한평생 제일 즐겨 입던 그 곤색낡은옷을 입혀 다오. 로동하기 편리하게.”     1977년12월14일 밤, 진소민은 76세의 빛나는 한생을 마치였다. 그는 인민들에게 사심도 두려움도 없는 혁명정신을 청사에 길이 빛날 한표에 담아 남겨 주었다.                                                                                                          10.1
49    인민의 총리 댓글:  조회:2517  추천:2  2014-01-13
                    실화                                       인민의 총리                                                    주은래총리 서거 33주년에 즈음하여                                                                                                                                   회령     금년 1월8일은 새중국 제1임총리 주은래 서거 33주기가 되는 기념일이다.      주은래총리는 26년을 총리직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전부의 심혈과 정력을 남김없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그이는 사업에서 시종 최선을 다 하였다. 그러나 생활면에서는 항상 최저표준, 엄격한 요구를 했으며 추호의 특수화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이께서는 우리나라 인민들의 근검절약, 간고소박한 전통미덕을 충분히 발휘 하였다.     건국후 주총리는 줄곧 중남해 서화청에서 살면서 사업하였다. 이 집은 청나라 선통년간에 지은 구식 단층주택이다. 집안광선은 어둑스레하고 방바닥은 조습하고 문은 쯤이 많아 세찬바람이 불면 책상에 먼지가 한벌씩앉았다. 수년간 이런 집에서 살며 사업하다보니 주총리는 늘 무릎이 아파하였다. 하지만 그이는 여러차례나 집 수리를 거절하였다. 1959년 겨울 비서는 주총리와 부인 등영초가 북경에 계시지않는 틈을타서 집을 보호성 수리를 했다. 그리고 몇가지 낡은기물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결과 비서는 주총리의 엄한 비판을 받았다. 주총리께서는 낡은기물을 제대로 들여 올때까지 밖에서 살다가 비로서 서화청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이께서는 총리판공실주임 동소붕과 행정비서 하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 “내가 총리로서 좋은 본을 보이면 넓은범위에서 좋은 영향을 주게 되고 나쁜 본을 보이면 역시 넓은범위에서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해야한다. 동무들이 이렇게 많은돈을 들여 나의집을 잘 꾸며 놓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볼것같은가? 일단 모두가 나를따라 배워 집을 수선한다면 군중들 속에서 어떤영향이 조성 될것같은가? 이점을 왜서 생각하지 않았는가?!” 서화청을 수리한 일로해서 주총리는 국무원회의에서 여러번 자아검토를 했다. 그러면서 “동무들은 절대로 나의 착오를 중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주총리는 음식면에서도 간단하고 청담했다. 1/3은 잡곡이고 고기가 조금 들어간 채 한접시 나물채소 한접시 뿐이였다. 남는 밥과 반찬은 절대로 버리지 않고 다음끼에 잡수셨다. 사람들이 리해되지 않아할때마다 그이는 명랑한 어조로 “이것은 인민군중들이 먹는것보다 훨씬 낫다. 과거와는 비할수도 없다. 우리는 근본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국민경제 곤난시기(지난세기 60년대 초) 그이와 모택동은 함께 앞장에서 고기, 물고기, 닭알을 먹지않는 규정을 세웠고 또 주총리는 자기와 등영초의 매달 량식표준을 각기 15근, 13근으로 낮추었다. 그이는 “모주석은 당중앙에서 앞장서고 나는 국무원에서 앞장선다. 군중들이 곤난할때 령도가 특수화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주총리는 자신의 식생활이 간단할뿐만 아니라 자기의 국내손님들 대접도 간단하게 했고 종래로 공가의 돈을 쓰지않았다.      매번 시찰을 나갈때면 그이께서는 항상 간단하게 행차를 하였다. 앞에서 마중하고 뒤에서 옹위하며 기세가 어마어마하고 틀거지를 내며 위풍을 떨치지 않았다. 그리고 화식에 대하여 꼭꼭 문의하며 신변의 공작인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식비를 제대로 결산하게 하였다. 한번은 항주 루외루에서 그이가 몇사람을 초대한바가 있었는데 성의 배동한 간부가 식사비를 지방에서 물겠다고 하였다. 하여 서로 싱갱이 끝에 총리가 20원을 기어이 냈는데 그러고도 그이는 비행기에 오를때 아무래도 식사비를 적게낸것 같아서 10원을 더 내고 떠났다. 그날 식사비는 모두 19원이였다. 루외루 복무원은 결산명세와 정황을 상세히 설명한 편지와 함께 승천(거스름돈)을 총리에게 부쳐 보냈다.     주총리가 소집한 각종회의는 흔히 시간이 길어서 공작식사를 준비해야할때가 많았다. 식사를 하면서 회의를 계속 하였는데 총리께서는 공작찬은 꼭 가정의 일반끼니처럼 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해 놓았다. 하여 보통 죽과 짠지, 혹은 우동 이였다. 그이께서는 “이런 식사는 매우 경제적이며 실속이 있다.”고 하시면서 만족해 하였다. 어느 한번 늦게 회의에 온 하룡원수가 “와아! 국가의 경제는 호전 되였는데 총리네 밥상에서는 왜서 좋은형세가 체현되지 않는가?”하고 우스개를 하였다. 총리는 웃으면서 “장래에 나라가 부강해 지어도 간고소박한 전통은 잃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그래서…”하고 말하여 한바탕 유쾌한 웃음통이 터졌다.     주총리는 옷과 생활용품에서도 일관적으로 간고소박하였고 근검절약하였다. 그이 속옷은 깁고 또 기운 것이였으며 신은 수리하고 또 수리한 것이였다. 양말도 그랬다. 그이 손목시계는 줄곧 “상해”패 국산품이였다. 세수수건도 기운것이였고 욕조는 여러군데가 사기칠이 벗겨진 것이였다. 침대는 널판자 침대였고 쏘파는 구식의 낡은 것이였다. 그이의 잠옷은 1950년 1월에 쏘련 방문시 맟춘것인데 깁고기워서 원래의 모습이 다 없어졌다. 하지만 26년 그이를 동무해 주었다. 그러니까 총리로 되여서부터 사망할때까지 그이를 감싸준 것이다! 공작인원들이 새것을 갖추자고 하면 그이는 항상 “낡은것도 능히 입을수 있지 않는가. 간고소박은 우리 공산당인들의 본색이다.”하고 엄숙히 말씀 하셨다.     주은래총리의 가정경제조건으로부터 볼때 생활은 본래 잘 살수 있으며 지어는 매우 잘 살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와 인민들이 가난한것을 생각할때 그이의 심정은 항상 괴롭고 불안 하였다. 그이는 늘 버릇처럼 자신과 타인에게 이런말을 자주 했다. “우리 령도간부들은 만족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물질대우가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야 한다. 나아가서는 과분하다고, 좀 적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야 한다. 인민들이 우리에게 많이주면 불안감을 느낄줄 알아야 한다. 간고소박이 우리의 미덕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쉬원해지게 되며 절약할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러사람의 복리를 해결할수 있으며 나라에도 저축이 있게 할수있다. 이래야만이 우리나라를 더욱빨리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할수 있다.” 혹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는데, “주은래와 등영초의 공자수입이 당시로는 매우 높았으니, 두분께서 일관적으로 그렇게 아껴먹고 아껴썼다니까 저축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기실은 그렇지않다. 주은래의 매달 공자는 404원80전이고 등영초는 342원70전인데, 1955년7월 국가에서 공자제를 실시해서부터 1976년1월8일 주은래가 사망할때까지 두분은 생활비외에 쓰는곳이 많았다. 주요하게는 다섯가지에 썼다. 친척에게 부조, 생활이 곤난한 신변 공작인원들과 경위전사들께 부조, 렬사후대 양육비, 개인적손님 초대비, 당비를 더 낸것 등이다. 초보적 통계를 보면, 친척부조에 36645원50전, 신변공작인원, 경위전사부조 10218원60전, 자원으로 당비를 더 낸것이 3차인데 14000원이다. 이 세가지에서만 나간돈이 60864원10전이다. 이것은 12년5개월의 공자다. 저축해둔 돈이 얼마나 있을것 같은가?!...     주은래총리는 돈도 물건도 개인것으로, 말하자면 유산같은것으로 남긴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이는 자신의 골회마저도 조국의 산하에 비료로 뿌려달라고 여러번 유언하였다.(등영초와 당중앙에서는 그대로했다.) 20여년후 부인 등영초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인재산”은 더욱 철저히 정리되였다. 국가의 물건은 국가에 돌리고 사인용품은 혁명전통교육용으로 전람관에 바치였다. 거기에는 내의와 잠옷 끌신은 물론, “상해”패 손목시계와 치솔, 절반남짓 쓴 “백옥”표 치약까지 있다.(국산임) 등영초가 가지고 있던 사인편지와 사진들도 연구자료로 당안관에 들어 갔다. 주은래는 그야말로 말그대로 빈 손으로 인간세상에 왔다가 빈 손으로 사라졌다. 아니다! 주은래는 령도간부들, 당원들, 인민들, 후대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만고천추에 길이 빛날 형상을 지구에 남겼다.(련합국에서 반기를 내리여 애도했다.) 그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주은래총리는 종래로 례물을 받지 않았다. 되돌릴수 있는것은 돌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배로 값을 지불한후 유관부문에 보내여 처리했다. 절대로 안면을 보지 않았다. 1961년 그의 고향 회안현에서 토특산 련꽃씨, 국수 등 례물을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주은래는 비서를 시켜 사랑하고 관심하는 마음은 알지만 당의지시와 규률을 위반하는 이런 행동은 나쁘기에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편지와 함께 돈 100원을 보냈다. 그리고도 강소성위, 회음지위, 회음현위 책임자에게 중앙의 통지(칭커쑹리를 엄금할데 관한 통지)를 다시 한번 참답게 학습하며 철저히 락실 집행할데 대한 회시를 친필로 하였다. 외빈들이 증송한 례물에 대해서도 그이는 그것을 종래로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았고 우의의 상징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어느 한번, 한 렬사의 딸이 서화청 객실, 판공실, 침실에 아무런 장식품도 없는것을 보고 너무도 이상해서 총리에게 영문을 물은바가 있었다. 그때 총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주었다. “내가 총리기 때문에 그들이 준 것이다. 만약 내가 총리가 아니라면 그들이 주겠느냐? 그들이 준 것은 우리나라에 준 것이지 이 주은래에게 준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그것들을 모두 가진다면 그것은 무슨 행위겟니?” 이 한마디 말은 렬사의 딸로 하여금 어떤것이 렴결봉공인가하는것을 심각히 알게 하였다.     주은래와 등영초의 애정은 오늘의 젊은이들까지도, 세인들이 모두 잘 알다싶이 각별히 심후 했다. 그들은 초혼으로 그야말로 흑발이 백두옹이 될때까지 백년해로를 하였다. 두분은 같은 시각에 혁명의 길에 나섯고 평생을 중요한 위치에서 자신을 공헌 하였다. 등영초는 재능, 경력, 위망, 그어느모로나 당과 국가의 주요간부로 될수 있는 당당한 자격자 였다. 주총리는 안해와 높은 정치적 표준을 견지 했으며 엄격 했다. 그는 부부관계에 정치관계까지 맺어지는것을 절대로 금지했다. 새중국이 탄생할때 적지않은 부녀계 지명인사들이 당과 국가의 령도직위에 등용 되였다. 송경령, 채창, 하향응, 리덕전, 사량… 등 녀성혁명가들이 부장급 이상의 중요직무를 담임 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주총리가 직접 각계인사들과 협상하고 선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등영초만은 주은래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아 아무런 “벼슬”도 하지 못했다. 이에대하여 도무지 리해가 되지않아 강선운녀사(황포군교 1기생이며 남창기의위수사령 팽간신렬사의 부인)가 주총리에게 직접 물은바가 있다. 그때 주총리는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 “이 문제를 당신이 처음으로 제출하는것이 아니다. 과거에 이미 말한 사람들이 있었고 건국초기에도 당내외 인사들이 여러번 제출한바가 있다. 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극진히 권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나는 총리고 등영초는 무슨부장이라 할때 나 이 총리와 그를 분별하기 힘들어 진다. 사람들은 그의ㅡ 부장의 말을, 또 그가 한 일을 내가 지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가정관계, 부부관계, 정치관계가 한데 엉키면 당의 사업에 불리하며 총리사업에 불리하다. 내가 하루라도 총리로 있는한 등영초는 령도벼슬을 절대로 못한다.” 주총리의 결정을 등영초는 충분히 리해했을뿐만 아니라 견결히 지지했다. 림표, 엽군, 강청들과 너무도 대조적이 아닌가!... 정치적 대우에서뿐만 아니라 생활향수에서도 주총리는 등영초에 대하여 종래로 엄격하였다. 1955년7월 공자급별을 확정할때 중공중앙에서는 채창은 3급, 등영초는 5급으로 비준 했는데 주총리가 친히 6급으로 깎아 내리었다. 1974년 모택동은 등영초를 인대부위원장으로 비준 하였다. 그러나 주총리가 그것을 깔아놓고 공개하지 않았다.(감추었다.) 1982년4월 등영초는 후대들과 이런말을 하였다. “지금 나는 인대부위원장이고 정치국상무위원이며 중앙기률검사위원회서긴데 이러한 공작들은 모두 당에서 나에게 분배해 준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큰아버지가 생전이라면 절대로 못하게 했을것이다. 물론 나도 하지 않았을 거고.”     주은래총리는 인정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타인의 사정을 헤아려 주며 될수록이면 도와주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하고 방조함에 원칙이 있었다. 그는 인민이 준 권력으로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고 친척들이 추호의 특수화도 못하게 하였다 위법란기 되지못한 짓은 두말할것이 없다. 그이가 몹시 증오한 것은 “손을 내밀기 좋아하며 뒤문거래를 하며 한사람이 벼슬을 하면 온 가정이 복을 누리며 한사람이 출세를 하면 개 닭도 승천하는” 부정부패의 추악한 사회현상이였다. 주총리는 친척들의 착오적 사상을 어떻게 대할것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친속에 대하여 도대체 당신이 영향을 받을것인가 영향을 줄것인가? 이것은 한개 령도간부로서 우선적으로 대답해야 하며 해결해야할 문제다.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하면 당신이 그들을 영향줄수 없을 뿐만아니라 그가 오히려 당신을 영향줄수 있다.” 주은래의 친동생 주동우는 지난세기 20년대에 혁명에 참가한 사람이다. 건국후 그는 공업부에서 보통인원으로 사업 하였다. 후에 병으로 내무부참사로 안배 되였는데 이로해서 주은래는 내무부부장 증산에게 여러번 의견을 제출했다. 후에 또 한차례의 회의에서 이 일을 말했는데 “주모의 동생이 내무부참사로 있는데 그어떤 리유에서였든 영향이 나쁘다. 공업부에서는 능히 일할수 있었기에 나는 간섭하지 않았다. 지금은 참사가 되여 공짜로 월급을 타는데 이것은 고려해볼 문제다.” 회의후 주은래는 내무부에서 자기동생을 병퇴직 시키라고 엄숙히 요구했다. 연후 동생에게 자기돈으로 달마다 보조를 해 주었다.     주은래와 등영초에게는 자녀가 없다. 그들은 친속의 자녀들을 매우 귀여워 했다. 주은래는 그들에게 줄곧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자기에게 엄격한 요구를 해야한다. 대두적으로 당과 국가의 각종 정책규정을 지켜야 하며 절대로 친척의 직권을 리용하여 특수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두분은 그들에게 엄격한 “가법”을 규정해 주었는데, 전문적으로 우리를 보기위해서는 북경으로 오지 못함. 북경에 오면 일률로 초대소에 들며 식당에서는 줄을 서며 자기돈으로 밥을 사 먹어야 하며 돈이 없으면 우리가 화식비를 물어 준다. 공가의 자동차를 쓰지 못한다. 주은래의 친척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함. 생활은 간고소박해야 하며 특수화를 못한다. 이런 조항이였다. 그는 친속자녀들에게 지망을 선택할때 당과 국가의 수요를 제1지망으로 하며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항상 교육 하였다. 1961년 중앙에서 성시인구를 축감할데 대한 호소를 한후 주총리는 친조카부부가 솔선적으로 향응할것을 요구하였다. 하여 그들부부는 북경을 떠나 고향 회안으로 갔다. 중학을 졸업한 친조카 주병화와 주병건(녀)은 각기 연안과 내몽골 농촌에 자리 잡았는데 1970년말 둘이 모두 당지에서 참군하게 되였다. 병건이는 기쁜소식을 큰아버지에게 알리였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군복을 벗고 농촌으로 돌아가라.”고 하실줄이야?! 남매는 깜짝놀라 아연실색 하였다. 그러나 차근 차근 하시는 큰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도리가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의 참군은 비록 수속에는 부합되지만 생각해 보아라. 그곳에 그렇게 많은 청년들이 있는데 왜서 너희들을 골랐겠니? 우리들의 얼굴을 본게 아니겠니? 우리는 이런 특수화를 절대로 할수 없다. 조금치도 할수 없단다. 참군하는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농촌이 간고해서 일부 령도간부들은 자녀를 참군으로 빼 돌리는데 인민군중들 속에서 영향이 아주 나쁘단다.” 남매는 기꺼히 제고장으로 돌아갔다.     주은래는 일부 고급간부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비추어 중공중앙과 국무원 직속기관 책임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대성질호 하였다. “우리의 령도간부, 우선 나를 포함한 407명의 사람들은 마땅히 본보기가 되여야 한다. 작은나으리를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늙은나으리도 반대해야 하며 작은나으리도 반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후대들에게 할말이 없게된다.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다.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처럼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력사를 거울로 할수있다. 진시황은 능히 중국을 통일할수 있었지만 진2세를 너무도 어루만졌다. 결과 진왕조는 그의 손에서 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절대로 자기의 자녀를 나라와 사회의 골치꺼리가 되게해서는 안되며 우리사업의 전진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된다. 자녀들에 대해서 요구를 높히고 엄하게 책망하는것은 응당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좋은점이 있고 그들의 진보를 독촉할수 있다.” 주총리의 이 말씀은 오늘도 경종으로 되며 지도적 의의가 있다.     무엇 때문에 주총리는 일생을 시종여일 솔선수범하며 엄격히 자률하고 간고소박 렴결봉공 할수 있었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맑스주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굳게 수립했기 때문이다. 즉 사상이다. 사람의 행위는 사상의 지배를 받는다. 정확한 행위는 정확한 사상이 지배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의 핵심은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 주은래는 일찍부터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리익을 도모하는것을 숭고한, 유일한 인생목표로 추구해 왔다. 하여 그는 자신을 시종 인민의 근무원(공복ㅡ공무원)으로 인정했고 충실히 복무 하였다. 민주혁명시기 그는 “성근하게, 로실하게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겠다. 소처럼 노력분투하며 동지들과 일치단결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길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사회주의건설시기 그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곧 우리의 국가, 민족,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것이며 전인류의 광명한 전도를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공산당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만강의열정으로 부지런히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고귀한 품질이 타락하여 자산계급의 비렬한 개인주의로 되는것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변의 공작인원들에게 경상적으로 “1분의 시간을 쟁취하여 1분의 공작을 더 하자. 나는 늙었기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을 앞당겨 공작해야 옳다.”하고 밀하였다.     그는 언행이 일치했고 표리가 일치 했다. 인민들의 우환을 근심했고 인민들의 행복을 기뻐했다. 그이는 군중들이 급해하는것을 급해했고 군중들이 생각하는것을 생각 했다. 인민들이 질고에 시달릴때면 항상 침식을 잃었고 동분서주 하였다. 주은래총리는 인민군중들이 한재 수재 풍설 지진 등 엄중한 재해에 부딫히면 곧 그곳으로 친히 달려갔다. 나라의 전반 대소사를 그는 관활하면서 많은 일들은 친히 틀어쥐고 처리 하였다. 1956년 광서 부분적 지구에서 아사현상이 발생 했을때도, 1958년7월 황하특대홍수, 1961년5월 하북에서 공공식당과 대약진 편차로 문제가 발생 했을때도, 1966년3월 형태대지진, 문혁시기 좌경로선이 고도로 득세하여 횡포를 마구 휘두르는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등소평 등 100여명의 간부를 보호한것…그가 직접 지휘하고 처리한 중대한 허다한 사업들을 여기서 일일히 다 꼽을수는 없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경각에도 수술대에서 중국의학과학원 리빙교수를 불러 운남 석광공인들이 폐암에 많이 걸리는데 즉시 내려가서 조사를 하고 대책을 연구하라고 십분 견결한 어조로 분부 하였다. 서거하기 바로전에는 오계평의사가 병상 곁에 서 있는것을 보고 “오선생, 나는 별일 없으니 다른 사람들을 가서 돌보시오.”하고 부탁 하였다. 이 말씀은 그이가 생전에 한 마지막 말씀이다. 주은래총리는 만년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라고 새긴 기념장을 가슴에 항상 달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오직 헌신만 하며 종래로 사욕을 챙기지 않으며 한이 있는 생명을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데 몽땅 바치리라는 위대한 사상과 인격, 고상한 정조의 진실한 표현이다.     각개력사시기 특히 사회주의현대화건설시기에 인민을 위하여 일정한 기여가 있었던 일부 령도간부들이 왜서 좋게 끝나지 못하고 시대의 락오자 지어는 부화타락 퇴화변질하고 말았는가? 우리는 주은래가 참답게 당성수양을 견지하고 부단히 사상개조에 힘쓴 감동적인 사적들에서 그 정확한 답안을 쉽게 찿을수 있다. 당원들의 사상개조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수 있는 근본이며 전투력을 제고할수 있는 근본이다. 주은래는 공산당인들의 사상개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비상히 강조 하였다. 그는 “무산계급은 기타 로동자들을 단결, 교육, 개조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 지고있다. 하지만 우선 자아개조를 해야한다. 자아개조를 능히 하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개조 시킬수 있다…각종 낡은 정치영향과 습관세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을 준다. 하여 사상 작풍상의 문제가 더욱 많게 되였다… 사상개조는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엄숙히 지적 했다. 그이는 자신의 좌우명은 “늙을때까지 일하며 늙을때까지 배우며 늙을때까지 개조한다.”는 것이라고 여러번 말씀 하였다. 그는 전당의 사상개조를 중시하였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모범대두작용, 이신작칙, 자각적이고도 엄격한 사상개조를 더욱 중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바가 있다. “나는 금년에65살이다. 당성수양을 잘 했기에 이젠 더 개조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다… 각종관계와 각종사물들이 개인의 사상에 영향 준다는것을 승인해야 한다. 경상적으로 반성하며 동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경상적으로 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개조중에 있다. 나는 달갑게 선두가 되겠다… 간부의 정치소질의 좋고 나쁨은 당풍의 좋고 나쁨에 직접 영향주며 당의로선, 방침, 정책제정과 집행에 직접 관계가 된다.” 1961년 그는 일부 령도간부들이 자아사상개조를 홀시하는 경향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호되게 질책 하였다. “자아개조는 진보를 위한것으로 광영한 것이다. 전문 남만 개조시키는 사람은 없다. 남을 개조시키려면 자신부터 먼저 개조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성질호를 해야 한다. 너부터 먼저 개조 하라!” 령도면 우선 령도다워야하며 연후에 백성을 령도하라는 것이였다. 제코가 석자나 되는 주제에 누굴 훈계하며 군중들 앞에 “령도”노라고 나설 면목이 있는가!... 주은래총리의 마디마디 말씀은 오늘도 경종으로 되며 우리들의 인생지침으로 된다. 주은래총리는 시종 참답게 당성수양을 견지하며 사상개조를 진행했기 때문에 공산당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항상 튼튼히 보지할수 있었으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길에서 죽겠다!”고 한 맹세를 유감없이 충실히 리행할수 있었다. 인민의 훌륭한총리로 길이 빛날수 있게 되였다.     주은래총리의 위대한 형상은 청사에 영생불멸 할것이다!                                                                                                        09.12              
48    반포지은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833  추천:2  2014-01-10
              수필                                                     반포지은에 대한 생각                                                                                                                       회령     일본사람들은 까마귀를 길조라고 한다지만 우리는 흉조라고 대단히 밉게 본다. 흰자위가 없이 눈알까지 새까만 것이 꼬락서니도 흉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청승맞기가 짝이 없다. 마을에 와서 어디에 앉기만 하면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역증을 벌컥 내며 “저놈의 까마귀새끼, 후여! 후씨!” 소리치며 쫓아 버린다. 그리고는 재수가 없다고 아주 불쾌해서 투덜대며 액막이로 공중에 대고 침을 퉤! 퉤! 퉤! 세번 뱉는다. 그러고야 마음이 개운해 한다. 만약시 그놈이 젊잖을 빼고 앉아서 혹은 마을상공을 지나면서 까욱! 까욱! 중음을 구성지게 한곡조 뽑으면 “저 쌍노무 까마귀새끼! 누굴 데려가자고 저 지랄이야?! 제기랄! 엑, 퉤!... 혹, 아무개 할아버지가…” 하고 마음이 꿈틀해 한다. 그것은 까마귀를 저승차사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까마귀를 멸시하며 미워하다 못해 이름까지도 제일 더럽고 천한것으로 “까마귀새끼!”라고 지었지만 말못하는 까마귀로서는 사실상 아주 억울한 일이다. 까마귀는 생활습성상 생존을 위해 할수없이(선천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것을 어찌하랴.) 악습이 한두가지가 있긴있다. 그러나 까치와 함께 오작교를 놓는외에 “반포지은”이라는 거룩한 미덕이 있어서 지성들은 “자오”(자애로운 검은색의 새)라는 존함을 지어 주었다. 자오의 악습에 대해서는 지엽적이고 부차적이고 불가피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피해가 그리 크지않은 점을 감안해서 너그럽게 봐주고 반포지은의 미덕을 주류적인, 원칙적인, 성스러운 것으로 높히 긍정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오라고 부르는 놈팽이는 한놈도 없으니 분통한 일이 아닌가. 자오에게 울뚝밸이 있다면 그는 사람들과 대판드리 싸움을 할것이다. “쳇! 지놈들은 산야가 몽땅 저희들 것이기나 한드키 불을 질러 밭을 만들고 배불리 먹으면서 어른이 강냉이 두어이삭, 어쩌다가 병아리 한두마리를 집어 먹으면 뭐가 어쩌구 어째? 말끝마다 까마귀새끼, 까마귀새끼 하면서. 돼먹지 못한 것들이! 그뿐인가! 제 배때기를 위해서는 사기치고 협잡하고 탐오하고, 대포를 쏘고 도탄을 갈기면서 개보다도 더 니전투구를 하지 않는가! 거짓말에, 계집질에… 온갖 나쁜 짓거리는 다 하면서, 뭐?! 까마귀새끼?! 드러봐서. 개방구나 먹어라. 간나새끼들…” 그러나 자오는 조만해서는 인가로 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며 미워하는 일을 부등부등 할거야 있는가. 아마 그래서 사람과 거리를 두는 모양인데, 이런점을 보면 시비가 밝고 정직하고 선량하다. 자오가 맞긴 맞다.     이런 황당한 소리는 그만하고, “반포지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자오는 어미 품속에서 20여일이 되면 알에서 나오고 30여일 지나면 둥지에서 떠난다. 그러니까 대개 50여일이면 성인이 되는 셈이다. 성인이 되기 까지는 두말할것 없이 부모가 먹이를 물어다가 입에 넣어 준다. 그리고 똥오줌을 치워 준다. 그런데 둥우리를 떠나서부터는 우리 인간들도 따르지 못할 갸륵한 일을 한다. 그것은 처음 잡은 먹이를(며칠 굶으면서 어쩌다가 힘들게 잡은 먹이를) 꼭 어미에게 먹이며 어미를 배불린 다음에 자기가 먹는다는 것이다. 자기배가 고파도 절대로 먼저 어미배를 불린다. 이러기를 60여일! 낳아준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다. 만물의 령장이라는 우리 인간들도 시행이 어려운, 마땅히 배워야 할 자오의 이 효성에 감동한 나머지 성현들은 “반포지은”이라는 절세의 사자성구를 만들어 냈다. 기대한 것은 천지만물, 그것이 보잘것 없는 미물일지라도 우수한 점이 있으면 허심히 따라배우며, 명심하며, 실천하며… 후손들이 훌륭한 인간으로 되기를 바란 것이리라.     그런데, 현실을 보라! 지금사람들은 문화수양이 높아서 세상리치를 다 알며 효도란 말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부모에게는 “만수무강”, “무병장수”, “만년행복”, “만복을 받으시라”, “길이길이 모시리”, “부여남산 장명백세”… 온갖 미사려구를 참깨기름을 반지르르 발라 입에 올리며 나아가서는 효도정신을 더욱 확장 피력하여 “당과 인민에게 이 한몸 다 바쳐 충성하리!”, “당과 국가와 인민의 은덕을 잊지않고”, “전심전의 위 인민 복무를”… 두눈을 부릅뜨고 두주먹을 불끈 쥐고 맹세를 한다.     미사려구대로, 맹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많다고 하면 좀 생각이 복잡해 진다. 왜냐하면 호로자식(옛날에는 도리깨아들 쥐며느리라고 했다.), 부정부패망나니를 신변에서 비일비재로 볼수있기 때문이다. 리론은 미끈하고, 절묘한 어구로 언변은 청산류수지만 언행불일치는 식은죽 먹기다.     지금, 기본적인 인간성인 효성과 도덕이 최저선 이하로 떨어진 현상을 흔하게 볼수 있다. 하여 온가보총리께서는 “지금 중국사람들의 도덕이 최악의 상태로 추락 했다.”고 대성질호 하기까지 했다.     시장경제의 치렬한 생존경쟁으로 눈코 뜰새없는 밤낮을 뛰지만 부모에대한 반포지은, 인민에대한 반포지은을 잊지 않는다면 나쁜사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을것이며 뒷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일은 자기 할 탓에 달렸다. 사람구실을 제대로 하며 사람답게 살려면 어른들의 교시를 어찌 등한시 하겠는가… 공자님께서도 하루 세번 자신을 돌아 보셨다지 않는가… 빈소리를 하지말라! 거짓말을 하지말라!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찰과 자률은 립신양명의 보증이라 하였다. 부모를 공경하며 당과 국가와 인민을 공경하면 매일 만복을 받는다.     온갖 화액은 그러지 않는데서 온다.                                                                                                       12.1
47    잊지못할 생활회의 댓글:  조회:2000  추천:1  2014-01-06
               수필                                                         잊지못할 생활회의                                                                                                             회령     사람에게는 자각성과 자률성이 있어야 할뿐만아니라 약속력, 압력, 감독이 있어야한다. 지난날이나 현실을 살펴볼때마다 조직의작용을 새삼스레 느끼게된다. 한 사람이 선진적인 신앙을 가지고 선진적인 조직에 가입하여 조직생활을 하는것은 한생을 결정하는 중대사라고 말할수있다. 다른조직체들도 그러하겠지만 우리 공산당조직에서는 생활회의를 조직생명의 건강을 보장하는 중요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있다. 수백차의 생활회의에서 잊을수 없는 두번의 생활회의는 추억속에 있지만 오늘도 현실적 의의를 가진다.     남녀작풍문제를 취급한 생활회의     1956년10월의 어느날이였다. 구(향)당위서기 왕광보동지가 저녁7시부터 생활회의를 하니 모두 참가하라고 통지를 했는데 이 회의는 림시로 소집되는 것이였다. 당지부의 생활회의는 토요일 밤마다 하는것인데 이날은 월요일이였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없던일이였다. 다음은, 정부의 간부들이 모두 참가하는 회의였다. 그때, 우리 구정부에는 간부가 모두해서 8명이였는데 생산조리원과 부녀주임, 단서기인 나는 아직 당원이 아니였다. 그런데 모두가 참가하라고 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의 생활회의는 사상과 작풍을 바로잡고 제고하는데 모를 박았는데, 하다보니 단결ㅡ비평ㅡ단결의공식을 주로 사용했다. 생활회의는 사상회보, 학습심득발표, 표양, 자아검사, 호상비평방조, 어떤알륵(갈등 혹은 모순)해결, 처벌, 누구에게 혹은 가정에 어떤곤난이 있는데 어떻게 방조하겠는가 하는 조치도 결의하는 등… 다채롭고 활기로웠다. 생활회의에서는 서로간에 간격이 없었고 못할말이 없었고 허물을 잡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었고 듣는사람이 삼가하였다. 생활회의를 하고나면 말그대로 통일된인식, 의지도있고 개인의 심정도 유쾌하였다. 생동활발한 조직생활로서 우리는 생활회의를 기다리고 좋아했다. 모두가 친형제보다 더욱 친밀한 혁명동지로서 조직의 귀중함과 따사로움, 고마움을 느끼게 되였고 더욱 관심하고 방조하고 단결하였다.     그날, 저녘밥을 먹은후 제시간에 모두 숙직실에 모여 앉았다. 다들 유달리 긴장해 하는 눈치였다. 조직위원이 회의를 사회하고 왕서기가 발언을 하였다. 왕서기는 항일간부로서 우리 이 일대에서도 토기그릇장사를 하며 정찰임무를 한적이 있다고 했는데 문화수준은 거이 없었으나 사업능력은 비상하였다. 그는 혁명사업만 골몰하는 사람 같았다. 집은 흑룡강 어느 산골에 있는데 안해도 있고 아이도 둘인가 셋인가 하다고 하였는데 안해는 자주 앓는다는것 같았다. 왕서기는 단통 첯마디로 오늘저녘에는 당원과 간부들의 남녀작풍문제에 대하여 생활회의를 한다고 선포하였다. “에키! 누가 지치부레한 짓을 했는 모양이군. 왕서기에게 걸렸군…” 나는 속이 꿈틀했다. “남들은 전방에서 피땀을 흘리고 지어는 생명까지 바치며 싸우는데 후방에서 뜨신밥을 먹구 뜨신구들에서 자면서 그것두 모자라서 바람을 써?! 아예 그걸 뜯어 개를 주라구. 바람쓰는 자는 몽땅 철당철직캐출이라구. 괘씸한새끼는 콩밥이야!...” 왕서기는 당원이요, 간부요하며 내리 풀고는 인민을 위하여 사업한다는 사람들이 이래서야 말이 되는가? 우리들은 항상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들 명심하라. 주의하라… 한바탕 “줄욕”을 퍼 붓고는 손가락만큼 크게 담배를 말아 피워댔다.     조직위원이 다들 인식을 말하라고 서너번 재촉하니 선전위원을 비롯해서 서너사람이 작풍문제는 꼭 주의해야 한다고 남녀간문제뿐만아니라 사업작풍, 주풍, 언어까지도 당원과 간부는 꼭 주의해야 한다고, 참으로 명심할바라고 범위와 심도가 깊은 발언을 했다. 다른사람들은 “옳습니다. 동의합니다.”하고 자기발언을 대체했다. 회의는 룡두사미처럼 인차 끝나버렸다. 간단했다. 그때의 회의는 보통 그랬으나 효과는 상당히 길고 좋았다.      건넌산 꾸짖기로 변죽만 울린 그날 생활회의는 우리들에게 의의가 깊었다. 딱 그번 회의역활이라고는 말할수 없겠지만 우리들에게서 훗날 두고두고 남녀생활작풍문제는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구정부에 한명뿐이던 부녀주임은 생활회의 이튿날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진상은 이렇다.     부녀주임은 농촌아낙네로 촌에서 부녀주임공작을 했다. 문맹퇴치를 하여 글도 알고 말을 잘하고 노래, 춤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사업적극성도 좋았다. 그의 남편은 항미원조에 나가서 대공1차, 소공2차를 세우고 잘싸웠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구정부에서는 그를 중용해서 구부련회주임으로 임용하였다. 일요일 밤, 부녀주임은 자기사무실에서 무엇을 보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서 밤늦게 사업하였다. 숙직실이자 숙소로 하고 있는 왕서기는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련일 하향했다가 오늘 오전에 구정부로 돌아 왔던것이다. 그때의 구정부간부들은 모이면 회의를하고 흩어지면 하향하였다. 구정부간부들의 사업임무는 아래에, 농민들속에 있었기에 사무실에서 볼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밤은 어느때가 되였을가, 왕서기는 무엇이 뭉클하며 자기몸에 덮치자 와뜰놀라며 정신이 곤두섯다. 부녀주임이 자기목을 끌어안고 마구 몸부림치지 않는가!... 우리는 부녀주임이 어덴가 속병이 재발하고 집사정도 있고해서 사퇴했다고 조직위원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했을뿐이다. 얼마후 촌에서 새로 처녀부녀주임을 물색해 올려왔다. 그가 바로 나의 안해다.     집으로 돌아간 부녀주임은 남편이 돌아올때까지 그리고 인생의 긴 훗날에도 다른 구설수는 없었다. 그들부부는 자식도 여럿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때의 생활회의가 그를 정신차리게 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실수”를 아는 사람은 아마 두셋뿐일 것이다.     주풍을 다룬 생활회의     1961년봄, 두만강물을 끌어들이는 수리공정을 하게 되여 조선측에서 유관대표단이 우리현으로 왔다. 협상은 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원만히 끝나고 조선손님들은 돌아가게 되였는데 점심에 우리공사(향)에서 연회를 마련하게 되였다. 그날 연회에서 워낙 주량이 큰 왕서기는 기쁜김에 고급병술을 만나자 종지들이로 마이며 손님들과 주량을 겨루기까지 하였다. 누구나 술이 과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왕서기는 조선대표단 단장에게 “어이, 동생! 야! 술도 못마이는게 단장은 무슨 개코같은 단장이니. 이잔만 내면 내가 최고사령관을 시켜줄게…흐흐흐.”하고 아주 유쾌해서 떠들어 댔다. 우리는 그를 겨우 려관방에 데려다 눕혔다. 왕서기는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다.     우리는 어제일을 우스개로 한바탕 왕서기를 놀려줬다. 그런데 이틀이 자나서 현위 조직부장이 찌프를 타고 드달겨 올줄이야! 부장은 공사조직위원과 반나절 밀담을 한후 공사간부 전체 생활회의를 소집 하였다. 회의는 물론 공사조직위원이 사회를 했다. 그는 “오늘 긴급생활회의를 하게 된것은 왕서기가 주정을 한데 대하여, 조선서 대단히 유감스러워 하기에, 그러지 않는대도 왕서기는 크게 실수를 하고 우리를 망신시켰으니 좀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회의를 하는데 모두 방조를 서슴없이 하라.”고 개회사를 했다. 현조직부장이 잇따라 장광설을 휘둘러 댔다. 그는 주풍도 주풍이지만 이건 엄중한 외사활동파괴라며 사상상에서 근원을 찿아야할, 영향이 극히 나쁜 엄중한 착오라고 을러멨다. 모두는 대뜸 긴장해 하고 왕서기는 술을 마이였을때보다 더 얼굴이 불콰해서 머리를 떨구고 담배를 말았다. 누구도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해서 왕서기가 말을했다. “미안합니다. 평시처럼 생각하구… 술이 들어가니 세상이 녹두알만한게… 뭐, 파괴하자구 그런건 아닌데 에참! 내가 다시는 술을 먹지않겠으니까 한번 용서해 주시우. 처벌은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클수룩 좋아유.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릴게니까… 그것참, 무슨술을 그리 많이 먹었는지… 출출하던참에 도투괴기를 보니 정신이 나가서 게걸스레 먹구는… 에참, 망신을 했수. 부끄럽수다. 두번 다시야 그런일이 또 있겠수? 꼭 고칠테니까 널리 봐주오.” 왕서기의 심각한 자아검사란게 이러했는데, 사람들은 그만 와하하! 웃음통을 터쳤다. 현의 조직부장은 얼굴이 벌개서 웃지말라고 소리치고는 왕서기를 노려보다가 자기도 으하하! 웃어댔다. 모두가 진정이 되자 현의 조직부장은 차근차근 아이를 교육하듯 왕서기를 그리고 우리모두를 교육하였다. 우리는 마디마다 옳은 말이라고, 명심하겠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우리는 왕서기를 잘 알기에 그의 말이 정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왕서기에게 다음과같은 처벌이 결정 되였다. 현위의 결정은 “왕광보동지는 금후 일체의 외사활동에 참가하지 못한다.”이고 지부의 결정은 “언제든지 술을 두냥이상 먹지못한다. 이에 경고처분을 준다.” 였다. 본인은 두말할것 없고 우리전체도 아주 지당하다고 인정하였다. 그후, 왕서기는 인차 농업주관부현장으로 전근해 갔다.      나는 그와 함께 사업할때도, 리직한후에도 술좌석에 종종 함께 앉았는데 왕서기가 두냥이상 마이는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느한번, 내가 이젠 그 반가워하는 술을 량껏 마이라고 하니 그는 “난 술 경고처분을 받은 당원이야.”하며 유쾌히 웃었다. 왕서기는 우리현에서 초유록식간부라고 찬양을 받으며 사업을 잘하였다. 술로인한 착오는 말할것도 없고 다른착오도 한번없이 그는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건강했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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