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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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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로년의 자세(6) 댓글:  조회:1709  추천:0  2019-12-30
                                           로년의 자세 (6 )                                                                                                                 회령  건강관리 지금 가장 많이 류행되고 또 실제로 중시를 받으며 실천되고 있는 말인즉 바로 건강관리라는 것이다. 개혁개방전에는 건강관리라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말그대로 남녀로소가 다 건강관리라는 말을 보통말로 쓰고 있다. “엄마! 아빠!” 하며 두어마디 말을 외우는 아기도 “할무니 건강관리 잘 해!” 하며 세배를 한다. 물론 애기는 제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 앵무새를 했겠지만, 보다싶히 건강관리라는 말은 널리 보급이 되였다. 그리고 점점 더 크게 실천되고 있다. 그원인은 생활이 제고된데 있다. 건강관리 모습을 가장 감동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은 두곳에 있다. 하나는 광장무판이고 다른 하나는 등산길에서이다. 건강관리에 나선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가히 인산인해라고 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곳의 특점을 본다면 절대 다수가 로년층이라는 것이다. 북적거리는 수영장도 건강관리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거기에는 아이들이 많다. 지금 로인들이 건강관리에 열중하는데는 데체로 두가지 리유가 있는것 같다.. 첯번째 리유는 건강장수하려는 것이다. 로인들은 지나간 세월은 고생하며 헛살았다고 한탄하며 지금의 좋은 세상에서 오래 살고싶어 한다. 이것이 가장 많은 직접적인 리유겠다. 다음 두번째 리유는 곁에사람과 자녀들에게 시끄러움과 부담을 될수록이면 적게 줘야겠다는 데서이다. 보건양생 즉 건강관리에는 동서고금 수천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가 쉽게 보는 먹는 방법을 보면 생것을 먹는것 푹 익혀서 먹는것 말려서 먹는것 물, 식초, 술, 지어는 뜨물, 오줌에 한동안 불궈서 그 물이며 건더기를 먹는다는둥 건더기도 그저 쫍쫍 우등우등 먹는게 아니라 노랗게 구워 먹는다는둥 까맣게 태워 가루내여 꿀에 반죽하여 먹는다는둥 밥가마에 넣어 쪄서 먹는다는둥 까마귀고기와 함께 어떠어떠하게 료리를 해서 먹는다는둥… 수십가지다. 운동류도 살펴보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죽어라 배를 뚜드리는가 하면 엉덩짝을 쇠궁둥이보다도 더 호되게 뚜드려 대고 전신을 사정없이 족치는데 그건 12경락을 열어주는 운동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런가 하면 잰내비처럼 반나절을 철봉대에 거꾸러 매달려 있고 말승냥이처럼 선자리에서 푸들쩍 푸들쩍 뛰며 왱ㅡ 왱ㅡ 있는힘껏 소리를 지른다. 땅바닥에서 뒹구는 사람, 자갈돌밭에서 깡충깡충 뛰다가는 힌들 나자빠 지는 사람… 벼라별 신기한 동작들이 다 있다. 어느것이 과학적이고 어느것이 비과학적인지, 어느것이 어떤사람에게 좋고 어떤사람에게는 불리한지 아직까지는 권위적인 참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관건은 실천해 보면서 자기몸에 적절하고 느낌이 좋으면 그것이 곧 나에게는 알맞는 것이며 좋은것이다. 방법을 선택한 후에는 견지하는것이 건강관리에서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건강관리는 방법에서는 수천가지지만 실천상에서는 일찌기 그리고 습관화가 된 견지다 로년기에 와서야 비로서 건강관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한다는 것은 일찌기 하기보다는 아쉬운건 사실이지만 좋은 일이다.                                                                                                                   19.9
146    로년의 자세(5) 댓글:  조회:816  추천:0  2019-12-27
                                                로년의 자세 (5 )                                                                                                                        회령  내리사랑 사랑에서 제일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것이 내리사랑이다. 즉 로인들의 후대에 대한 사랑이다. 로인들과 물어보면 후대는 다 귀엽지만 손군들이 더욱 귀엽다고 하는데 그건 나도 그렇다. 혹 자식보다는 좀 못하다는 로인들이 있기도 하다. 자식들을 더 고와하든 손군들을 더 고와하든 후대들을 고와하며 중히 여기는 면에서는 로인들이 다 같다. 이것은 로인들이 갖고 있는 애정이다. 그것은 선천적 본능에다가 후천적 의식이 결합되여 형성된 본성이다. 로인들에게 내리사랑은 다 있지만 그 깊히는 부동하다. 어떤로인들의 사랑은 혈육의 정에서 머무는데 나무릴것은 없지만 좀 더 제고된 사랑이였으면 싶다. 후대는 나의 후대이며 가족의 후대이며 나아가서는 나라의 후대이며 민족의 후대다. 이건 정치적인 큰소리를 치는것이 아니다. 실제적 상황이다. 때문에 로인들의 내리사랑은 일정하게 사상정치성이 있어야 한다. 로인들은 후대들에게 사람으로서의 기본소질인 례모, 도덕, 품행을 가르켜 줄뿐만아니라 력사와 전통을 가르켜 주며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심어줘야 한다. 이렇게 하는것이야말로 표준적인 내리사랑이라 할수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오고 가고 주고 받고 하는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극히 적다. 로인들의 내리사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의 선후를 볼때 로인들의 내리사랑이 먼저다. 지금 사회에서 말썽이 많은 “올리사랑”(효도)도 내리사랑이 있은 다음에 있는 사랑이다. 일전에 이런 기막힌 뉴스를 들었는데,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몰할 일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직장을 찿은 처녀애가 부모에게 한 최후통첩이란것이 다음과 같았다. 처녀애는 갓 입사를 했기에 월급이 7000원인데 남자애와 동거를 하겠는데 월 5000원의 집세를 보내라는 것이였다. 그러지 않을때는 법적으로 부모자식관계를 끊는다는 것이였다. 딸애는 전화로 지금까지 나에게 해준것이 무엇이며 내가 낳아달라고 했는가고 들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부모들은 통첩을 받고 아뜩해서 기절할 지경이였다. 하지만, 처녀애의 부모들은 입이 광주리구멍만해도 한마디도 할말이 없었다. 그들은 쉰살이 돼서부터 외국로무를 들락거렸는데 남편은 외국에서 번 돈을 현지처와의 새살림 재미에 다 탕진하고 안해는 시가지에 들어가 몸을 들이대며 마작으로 “쑈싸”(향락, 멋)를 했다. 결국은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산골 농촌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병만 남은 거지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생활밑천이란 밭뙈기를 세를 준 몇푼뿐인데 월 5000이라니! 대학에 붙은 딸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도 살펴주고 대부금으로 공부를 용케 마친것이다. 속이 다 타버린 할아버지 할머니는 동네사람들의 신세로 선후해서 서산기슭으로 갔다. 이 집의 상황은 내리사랑이요 올리사랑이요 하고 운운할 여지도 없는 형국이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느낌과 사색을 불러준다. 로인들의 내리사랑은 보귀한 것으로 명심할바이다.                                                                                                          19. 8  
145    로년의 자세(4) 댓글:  조회:799  추천:0  2019-12-23
                                               로년의 자세 (4 )                                                                                                                     회령 경험과 교훈 나이 많은 령도간부들이 사망하면 추도문에서 꼭 나오는 한마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당과 국가의 엄중한 손실”이라는 구절이다. 령도벼슬에 있으면서 존경을 받던 로인이든 산골화전민으로 땅을 뚜져먹던 로인이든 사망하면 일정하게  엄중한 손실, 혹은 손실이 있다. 그것은 보귀한 경험과 교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시람이 다 아는바이지만 로인들에게는 풍부한 사회적 가정적 인생경험과 교훈이 있다. 허다한 격언과 성구, 명언들은 로인들의 경험과 교훈, 지혜를 보여준다. 지내보면 조상님들의 가르킴이 하나도 틀리는 것이없다. 현실적으로도 로인들의 말씀을 명심하는가 안하는가에 따라서 잘되고 못되는 현상을 흔히 보게된다. 로인들의 좌석에서 나온 말이다. 리령감의 아들은 어느진에서 지금 당위서기로 사업하는데 나이는 방금 쉰살이다. 그의 아들은 청년시절에는 모 국영기업에서 공청단 단위서기를 했는데 사업을 참답게 잘해서 지구와 성의 모범단서기 표창을 여러번 받았으며 중앙단교를 졸업한 후에는  전국소수민족청년간부후계자 배양에 뽑혀(성내에서 단 한명) 절강성에 가서 2년의 단련실습을 하기까지 했다. 단련이 끝나 기업에 돌아온후 2년이 지나도 웬일인지 직무는 여전히 단위서기였다. 그러다가 멸달후에는 창장판공실주임으로 안배되였다. 새로운 강위에 가서 반년  남짓 지난후 기업은 파산을 했다. 파산이 되니 어제까지도 일체를 령도하던 공인계급이 일조에 말그대로 무직업, 무자산, 무산계급이 되고 말았다. 정부에서 당위서기, 창장 등 몇사람은 직업을 안배 해 주었는데 다행이도 리령감아들도 거기에 끼이게 되였다. 원래는 헴에 없었는데, 성과 지방의 단위에서 유관 령도와 부서에 입김을 넣었다는 뒷말이 있긴했으나 하여튼간에 리령감아들은 지방당위에 안배를 받았고 한달 남짓해서는 당위판공실 부주임이라는 벼슬자리에 앉게 되였다. 리령감아들은 1년남짓 지나서 지금의 산골농촌진으로 진장이라는 벼슬로 조동을 했다. 그후로부터 만 10년세월을 리령감의 아들은 진장을 두기, 당위서기를 두기채 하고있다. 그간 그는 각항사업을 잘해서 성과 지구의 표양을 수차 받았고 어떤표양은 중앙의 령도가 직접 한것도 있다.  “선진공작자”, “모범당원”등 영예의 칭호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리령감아들은 10여년의 벼슬길에서 겨우 반급의 승진밖에 하지못한 것이다. 그리고 산골에서 10년세월을 살고있다. 내남이 다 아는바이지만, 사실은 이상할것도 없었다. 리령감아들에게는 “뒷심”이 없었고 “배경”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당장규정대로, 당원간부수칙대로 하기에 명심했고 열심히 “위인민복무”를 했을뿐이 였다. 친구들이, 가까운 친척들이 “적당히 좀 먹이라!”고 내놓고 권고를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먹이지도 않았고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에게 들어온 “미끼”도 대충 꼽아봐도 100여만원은 쉽게 되였다. 그는 누구못지않게 부정부패의 생리를 환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몸을 깨끗히 지켜왔다. 그가 이렇게 “독야청청”한데는 리령감의 역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리령감은 한뉘 농사군으로 산골에서 살았지만 오랜 당원으로 지부에서 조직위원벼슬, 대대(촌)치보주임벼슬을 몇해 한적도 있다. 그는 습관적으로 자식들이 기여다닐때부터 례모, 도덕, 품행에 대한 “잔소리”를 매일 혹은 짧게 혹은 길게 하여왔다. 셋째아들이 기업에서 단위서기를 할때부터는 기회만 생기면 “사상정치과”를 즐겨 하였는데, 신기한 것은 다른자식들은 듣는둥 마는둥이 였지만 세째만은 흥미진진해서 듣는것이 였다. 하다보니 리령감의 강의는 셋째를 만나기만 하면 더욱 다채롭게 진행되군 하였다. 그의 강의는 문건적인 것이거나 리론적인것은 별로 없고 절대부분이 생동한 실제사실들이 였는데 거기에는 그야말로 아주 보귀한 경험과 교훈이 꼭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이 조상님들의 교시말씀으로 표달이 되여 인상이 깊고 오래 기억이 되였다. 례하면 “열형리를 친하느라 말고 제한몸을 지켜라.”, “죄는 지은대로 가고 덕은 닦은대로 간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등등. 리령감아들친구들이 시에서 서기요 국장이요 벼슬한 사람들이 10여명이 되는데 선후로11명이 락마를 하였다. 그중에서 둘은 감옥으로 가기까지 했다. 리령감의 아들 등 3명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로인들의 말에 의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락마한 11명은 모두 조실부모했고 곁에 이상분이 없다는 것이였다. “문제가 없다.”의 3명에게는 부모가 있는데 신통한것은 그 부모들인즉 모두가 리령감과 비슷한 로인들이 라는것이다. 한사람이 착오를 범하는가 안 범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저항력에 달린문제다. 저항력은 자동면역과 피동면역으로 형성되는데 로인들의 풍부한 경험과 교훈은 피동면역력제고에서 매우 보귀한 역활을 한다.                                                                                                                   19. 8
144    로년의 자세(3) 댓글:  조회:773  추천:0  2019-12-20
                                                  로년의 자세 (3 )                                                                                                                    회령 자사자리 강령감내외는 이젠 80고개를 넘어선 로인네다. 그들에게는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가 있는데 모두 가까이에 있다. 강령감은 고급공정사 직함을 갖고있고 로친네는 건국 한두달전에 우전국에 림시로 들어가서 심부름을 하며 밥벌이를 하였는데 그것을 언턱으로 등 대고 리휴공 대우를 받는다. 하다보니 두 늙은이의 가정 월수입이 근 만원이 된다.그들은 해마다 7ㅡ8만원의 저축을 하며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근년에 두 늙은이가 이러저러한 병으로 고급병방에 입원해서 몇번 치료를 받은바는 있지만 자기호주마니 돈은 1전도 쓰지 않았다. 아들 며느리가 일체 주선을 다 했고 비용을 전부 결산했기에. 의료보험으로 결산하다보니 너무 많은 돈은 들지 않았다. 강령감내외는 친자식은 하나도 없고 강보에 싼 남자애와 녀자애를 키웠는데 친자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다. 그런데 자식들이 커 가면서 특히는 시집 장가를 가면서 부모 자식간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최근에 와서는 상당히 험악해 지기까지 하였다. 몇달전, 정부에 공무원으로 출근하던 손녀가 뜻밖의 교통사고로 엄중한 외상, 내상을 당했는데 구급수술을 한후 10여일 구급을 거쳐 겨우 목숨을 구했다. 환자가 보통렬차로 움직일수 있게되자 성병원에서는 북경 중앙병원으로 이송하였다. 그후 1년이 거이 되는 기간에 갔다 왔다 하면서 모두 3차의 대수술과 치료를 거쳐 손녀는 기본상 치료가 되고 지금은 휴양을 하는 중이다. 아는 사람들은 사람마다 천명이고 기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의사들이 더욱 혀를 내 두르며 놀라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뜻밖의 재난을 당하다보니 아들내외와 친인들의 마음고통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였다. 2년이 거이 되는 그간 외가집을 비롯하여 모든 친척들은 있는 힘껏 경제부조를 사심없이 하였고 친우들과 단위들에서도 원조의 사심없는 손길을 뻗쳐 주었다. 부조로 들어 온 금액은 20여만이 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처음의 구급치료비나 겨우 되고, 아들네는 모든 밑천을 다 들이 밀며 치료하는 한편, 은행과 벗들에게서 돈을 빌리기에 동분서주 하였다… 그런데, 친할아버지 할머니인 강령감내외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손녀가 상해서 구급실을 거쳐 북경병원으로 갈때 처음으로 성병원에 보려 가면서 만원돈을 가지고 갔는데, 그것은 자기네와 딸의 성의라고 했다. 그런후로 부터는 성병원으로 다니든 북경병원으로 다니든, 가던, 집에 왔던… 전혀 보려 다니는 법이 없었고 1전 한푼 쥐여주는 법이 없었다. 2년이 거이 되는 지금까지 손녀가 어떠냐고 건 전화는 모두해서 다섯번도 되지 않는다. 반면에 령감은 다리가 아프다고, 로친은 눈이 어떻다고 하면서 지금 경황없이 헤매는 아들더러 성병원에, 좋기는 북경병원에 가서 병을 보이게 하여달라고 전화를 하였다. 그때는 아들내외가 딸을 데리고 두번째로 북경병원에 갔을때다. 아들은 친구에게 부탁하여 성병원에 가서 우선 보이게 안배를 하였는데 진찰결과 별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강령감 내외는 흡족해서 발편잠을 잤다. 싱거운 사람들이 강령감내외와도 물어보고 아들네와도 물어보며 열성을 발휘했는데 그들의 조사연구보고를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남의 가정일에 삐치는건 실례이기에 대충 얼버무려 전달코저한다. 강령감부부의 인정머리 없는 처사ㅡ 도무지 리해할수 없는 처사의 근본원인은 선천적인 부모정의 결핍이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형제고 자식이고 다 쓸데가 없다고 하였다. 령감은 형제가4남매고 로친은 3남매가 되지만 서로 래왕하지 않는다. 자식과도 자기에게 필요하면 자식이라고 찿고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우면 짜증을 낸다. 소학교로부터 고중까지 손녀애는 줄곧 외가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고중을 다니던 어느날이다. 그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이삼일 외출을 하게 되여 손녀애는 자기 할머니집으로 점심먹으려 갔다. 할머니는 아주 못마땅해하며 “너네에미는 점심밥을 할줄 모른다니!”하고 짜증을 냈다. 손녀애는 그걸음으로 나와서 곧장 학교로 갔다. 얼마전에는 손녀애가 출근하며 들고다니던 꽃양산을 너무도 부러워 하여 손녀애는 그것을 가지라고 하였는데, 할머니는 얼씨구 지화자 냉큼 집어갔다. 그들은 항상 떳떳히 말하기를 “내몸이 제일이고 내손에 돈만 있으면 다 다.”고 하였다. 아들은 싱거운 사람들의 물음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정이란걸 모른다. 우리를 키운건 그러면 애가 생긴다고 해서(임신) 키웠는데 애는 생기지 않고 고생은 실컸했다고, 남들과 여러번 말했고 우리가 셈이들자 우리와도 몇번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나는 그분들의 처사에 간섭을 하지 않으며 양육지은을 최선을 다하여 보답하겠다…”                                                                                                                19.6
143    로년의 자세(2) 댓글:  조회:854  추천:0  2019-12-16
                                           로년의 자세 (2.)                                                                                                                      회령 주책머리 늙은이가 개장국에 삐치듯, 혹은 덤벼들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뜻인즉슨 주책 (주착)머리가 없다고 나무리는 것이다. 이 말은 해가 동산위에 둥실 떠올랐다느니 서산넘어로 꼴깍 넘어갔다느니 하는 말과같이 정확하지 못한 말이지만 모두가 합당한 말로 인정하고 써 먹다보니 옳은 말로 되고 말았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사실(실사구시)대로 말한다면 개장국은 늙은이들에게 제일 합당하고 좋은 음식이고 늙은이들이 즐겨하는 음식이다. 하오니 개장국을 반가워 한다고 해서 주책머리가 없다고 할수 있는가… 늙은이와 개장국 문제는 이쯤해 두고 늙은이들의 주책머리에 대하여 맗해 보자. 며칠전에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우리는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서 반갑게 만났다. 수인사 후 친구는 심각한 화제를 시작하였다. 닷새전이라며 친구가 시작한 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날, 친구는 시장 한구석에 자리한 식품매대로 닭알이며 식초따위를 두루 사러 갔는데 예쁘게 생긴 매대주 아낙은 걸상에 앉아서 끄덕 끄덕 졸고 있었다. 쉰 남짓한 이 한족아낙과 친구네는 여러해 아는 사이로 친구네는 그 매대의 단골이라고 했다. 끄덕 끄덕 졸고 있는 아낙을 보고 친구는 우습기도 하고 순간에 저도모르게 작란기가 떠올라서 아차, 실수! 손가락으로 아낙의 볼을 살짝 다쳤다. 한족아낙네는 번뜩 정신을 차리며 까만눈이 올롱해서 친구를 쳐다 보는데 그 표정에는 분노가 력력 하였다. 순간, 친구는 가슴이 섬뜩해 나며 공연한 짓거리에 후회막급이였다. 한족아낙네는 아주 불쾌한 기색이고 친구는 멍 해서 아무런 응변도 못하고 있는데 아낙이 뭘 사겠냐고 한마디 물어왔다. 친구는 경황없이 닭알 두근을 사가지고 머슥해서 자리를 떴다. 그는 몇발작 걷다가 본능적으로 뒤돌아 보았는데 한족아낙은 옆의 매대여자와 틀림없이 자기말을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친구는 심리고통을 겪게되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회되고 창피하기 그지없고 후과가 어떻게 되겠는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 오르지 안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고 허물이 없다고 해도(그정도로 친한사이는 아니다.) 누가 봐도 이건 개명치 못한 행위고 부녀를 희롱한 행위가 아닌가?! 녀자와 그남편이 색을 먹고 달려들면, 공안국, 법원에 류망죄로 보안하고 고소하면 뭐라고 변명할것인가… 친구는 생각할수록 막막하고 겁이나고 개골망신을 할 일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안해와 자식들, 친척친우들 앞에서 어떻게 머리를 쳐들겠는가… 사태의 변화에 따라 친구는 죽어버릴 생각까지 하였다며 이일을 어쩌면 좋겠냐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듣고보니 친구의 처지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어망간에 아무런 심보도 없이 그만 저도 모르게 실수를 했다고 하지만 새상인심이 믿어 주겠는가?! 이런걸 버선목이니 뒤집어 보이겠는가고 하는데 그야말로 황하에 뛰여들어도 씼을수 없다. 괄시를 당해도 모두가 싸다고 할것이고 무슨 정신손해비요 위자료요 하며 몇천원 협잡을 당해도 할말이 있는가… 돈이라면 1전을 톱는 직업장사군 ㅡ 그것도 한뉘 장마당판에서 굴러먹은 아낙네다. 듣고보니 나도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의 해결고리는 장사군 아낙네의 분노를 삭히고 량해를 구하는 길 밖에 없었다. 친구는 나의 말대로 아낙네를 죽을쇠 걸음으로 찿아갔다. 친구가 너무 조르기에 나도 함께 가서 저쯤에 서서 사태를 지켜 보았다. 만약시 분위기가 험악하면 좌우간 우선은 친구를 보호해야겠기에. 그런데, 사태는 아주 평온하게 마무리가 되였다. 아낙네는 친구에게 주책머리 없는 그런짓을 늙은이가 어찌 하느냐고… 그날 기분이 상당히 나빳다고… 친구는 죽을죄를 용서받는 기분과 감격에서 녀인에게 거듭 공수례를 하고 사과를 하였다. 녀인은 웃으며 됐다고, 지나간 일은 지나가고 더 말하지 말라며 가보라고 인사까지 하였다. 친구는 기어이 나를 끌고 음식점으로 갔다. 나에 대한 초대보다 그의 기분이 한잔 하지않고는 견딜수 없은것 같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무서운 심리고통에서 해탈되고 보니 마치도 천근짐을 벗은듯 거뿐했을 것이다. 친구는 그날 사람이란 늙을수록 주책머리를 지켜야 한다고, 그간 10년감수를 한것갇다고 여러번 말했다. 지금 주변을 살펴보면 로인들의 오망이 적지 않다. 제일 꼴불견인곳은 무도장이다. 거기서는 무반(춤짝) 때문에 말썽이 많고 지어는 싸움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것은 동거로 가고 어떤것은 별거로 가고 어떤것은 황혼리혼으로 치닿는다. 가정문제, 사회문제를 야기하여 영향이 자못 아름답지 못하다. 로년의 자세에서 주책머리를 지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19.6
142    로년의 자세(1) 댓글:  조회:925  추천:0  2019-12-12
        수필                                                    로년의 자세 (1)                                                                                                                  회령 객관법칙 여러해전에 늙은이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을 다듬어 쓴 바가 있다. 그때, 아마 늙어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말아야 한다는 것과 가급적 좋은 일을 많이하며 건강관리를 중시하여야 한다는것 등을 피력한것 같다. 이젠, 련합국 보건기구에 가서든, 일본, 한국에 가서든, 세상천지 그어디에 가서 물어봐도 “어 ㅡ 확실히 늙은이가 옳구만.”할 나이가 되였다. 70도 하순이 되였으니 진짜배기 노인네다. 사람들이 “정정하다.”느니 “아직도 청춘이다.”느니 “100세시대” 어쩌구 저쩌구 하며 내남이 다 늙었음을 승인하지 않는것은 “아큐정신”이다. 아큐란 작자는 모두가 아는바와 같이 로신의 명작소설에서 나오는 정신이 얼떨떨한, 그러나 자고자대, 자부심, 자긍심, 자존심이 대단한 장년쯤 되는 한족사내다. 서양에도 아큐와 쌍둥이가 되는 인사가 하나 있는데 그자의 이름은 아마 아돌프짜리. 돈키호데라고 한것같다. 그것도 소설로서는 명작이라고해서 아이때 본일이 있다. 나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아큐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그건 어쨌든간에… 그렇더라 해두고. 내육체가 솔직하게 늙은임을 시시각각 뚱겨준다. 시니브로 로쇠해 가는 표현은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티비에서 늙은이들의 신체를 조절해 준다는 특효약을 하루에 열번도 더 되게 열심히, 힘차게 광고를 하는데, 먼저순으로 늙은이들께서 나타나는 상견증세 10가지를 내리엮는다. 그 10가지 상견증세에서 대여섯가지는 나에게도 있다. 나는 유물론자이기에 과학을 믿는다. 나는 내가 로인이라는 객관사실을 승인할 뿐만아니라 10대증상에 대해서도 응당한, 자연스러운, 정상적인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늙은이가 아니지 않겠는가… 광고는 다음순으로 10대증상을 없애준다는 약을 소개하는데 말하기를 신체를 “조절”해서 10대증상이 말끔히 없어지게 해 준다고 한다. 얼마를 먹으면 “조절”이 된다는 말은 없다. 광고에서는 약값을 말하지 않는데 약방에 가서 물어보니 한병에 작으만치 1428원이라고 했다. 로인들의 양로금을 한푼이라도 더 뜯어먹지 못해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는다. 광고대로 하면 늙음의 표현이 다 없어지는데 그러면 뭐냐? 젊은이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보다싶히 이건 사기다. 적어도 엉터리 광고다. 과학적 론리에 맞지않는다. 10대증세는 늙은이의 모습이긴 하지만 너무 심하면 적당한 대증치료를 하는것이 옳다. 실면이 너무 엄중하다든지 변비가 힘들다던지… 하면 적절한 림시 조치를 해야한다. 10대증상을 아주 근원적으로 “조절”을 해서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늙은이들은 로년에 자기의 신체에 대하여 정확한 관점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명확히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나름껏 학습, 공헌, 건강관리를 중심과업으로 힘껏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학습이란 시대에 대한 학습, 사회에 대한 학습, 생활에 대한 학습등이다. 공헌이란 사회에, 가정에, 사람들에게 나름껏 좋은일을 하는것이다. 건강관리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로쇠에 대한 로년의 자세에 대하여 나의생각은 겨우 이정도다. 형장들의 고견을 듣고 싶다.                                                                                                                                                                  19.3
141    구명은인 댓글:  조회:1069  추천:0  2019-11-24
        실화                                                     구명은인                                                                                                                회령   얼마전에 나는 친구의 회갑연에 갔다가 전혀 듯밖의 상황을 만났었다. 그것은 우리가 앉은 연회상으로 친구가 막내처남이라며 60푼한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는 다짜고짜로 왈칵 나의 두손을 움켜 잡고 구명은인을 만났다고 연신 말하며 여간만 반가워 하며 흥분해 하는것이 아니였다. 나는 우두망찰 손을 잡힌대로 친구와 그의 막내처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네가 살려 준 사람이요. 경식이, 리경식!” “경식이? 누구더라…” “생각 안 나우? 총을 맞아 죽다가 산…”  “아! 그렇구만. 이거 참, 오래간만이요! 반갑소, 반갑소.!” 우리는 서로 건강이며 집안형편이며를 문안하며 무척 기뻐하였다. 경식이도 이젠 60이 넘은 사람이였는데 면목은 다 잊혀졌지만, 그도 이 시가지에서 산다고 하였다. 그날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여졌다.   이젠 40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는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해인 1976년 초여름이였다. 밤중이 지났는데 직일의사가 황급히 우리집 창문을 뚜드리며 나를 불렀다. 외상환자가 왔는데 매우 위중하다는 것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급히 병원으로 나갔다. 환자는 60여리 먼곳에서 38구구식총에 맞았는데 업혀 오다가 마중간 손잡이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실혈성쑈크 상태였다. 이름은 리경식, 19살, 학서마을 농촌청년 이였다. 그날 밤 10시경에 학서마을 민병패에서는 명령을 받고 임무 집행에 나섯다. 그들의 전투임무는 오랑캐령에서 내려오는 신작로와 알미대골안이 합치는 길목을 지키며 행인을 붙잡는 것이였다. 행인이란 바로 특무인데 그는 연길에서 비행장 비밀재료를 훔쳐가지고 지금 두만강쪽으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였다. 학서마을은 공사(향)에서 3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인데 오랑캐령에서 내려오다 첯마을이다. 학서마을 민병 10여명은 목적지까지 10여리를 목에서 겨불내가 나게 달려간후 패장이 나눠주는 총알을 받아 저마다 장탄을 하였다. 인당 세발씩이였는데 장탄을 하다가 한 민병이 오발을 하였다. 굉장한 총성과 함께 경식이가 악! 소리를 지르며 풀썩 꺼꾸러 지었다. 상처는 끔직했다. 무릎 조금 아래에서 정면으로 총알을 맞았는데 총알은 곧추 국와(무릎 뒤)로 빠져나갔다. 들어간 자리는 손가락 굵기로 경골을 뜯으며 나갔지만 국와는 오리알 크기로 뭉청 빠져버렸다. 왼쪽다리의 제일 큰 동맥, 정맥, 신경이 모두 끊어졌고 엄중히 결손되였다.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혈관을 찿아 지혈시키는 한편 강심, 혈용량 보충, 산소호흡 등 구급조치를 몽땅 사용하는 한편 공사령도에 수혈대를 빨리 조직해 달라고 하였다. 동시에 현병원의 왕진을 요청하였다.   우리가 수혈을 하며 환자의 혈압을 유지하고 있는데 현병원 외과에서 왕진을 왔다. 긴장한 수술은 오전 10시경에 원만히 끝났다. 1600여씨씨의 수혈을 받은덕에 환자의 상태는 온정되였다. 생명은 구했지만 치료는 방금 시작이였다. 어느덧 정심때가 거이되였는데, 공사무장부에서 식사를 안배하여 우리는 아침겸 정심 식사를 하고 다시 환자상태를 꼼꼼히 확인한후 직일실에서 금후의 치료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토론회에는 현병원외과에서 온 허주임 등 3명과 우리공사위생원의 의료일군 10여명이 참가했다. 물론, 행정이지만 서기 겸 원장인 리원장도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허주임은 환자의 총상수술은 빈틈이 없이 원만하게 처리되였다는 것을 돌출히 강조한후 우리병원 초년생의사 김선생을 흠뻑 춰 올리였다. 김선생은 의사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병원으로 온지 반년남짓해서 현병원외과에 가서 1년진수를 하고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았다. 허주임은 말하기를 김선생은 진수도 잘 했거니와 오늘 수술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 했다고, 앞으로 본인이 더욱 연찬하고 곁에서 지지하면 이 공사의 외과환자는 든든한 의사가 있게 될거라고 엉뚱한 말까지 하였다. 어느면에서나 상급의사인 나는 허주임의 말을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허주임은 계속하여 이제부터 합병감염을 10여일만 잘 공제하면 봉합실을 뽑고 약간씩 활동을 하게 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는 수술에 대하여, 환자의 예후에 대하여 아주 긍정적이면서도 락관적이 였다. 그러나 나는 고려가 중중하였다. 그것은 환자의 상처에서 짙은 화약냄새가 심했는 데, 이건 화약불길에 상처주변의 모든 조직이 익고 그을렸다는 것을 말 해 주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상처는 특수성이 있을것이다. 금후 순풍에 돛단듯만 하지는 않을것이다. 이전에 가스괴저란(총상, 파편상 등에서 오는 상처가 썩는 현상) 말을 들은것이 자꾸 가슴에 걸리였다. 머리를 수굿하고 있는 나에게 허주임은 의견을 물었다. “오늘 허주임이 큰 수고를 했습니다. 내생각에는 이 환자를 허주임이 데리고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다싶히 우리의 수평으로는 이런 환자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현병원 외과에는 허주임의 상급의사가 3명이 있다.) “이젠 다른 처리가 필요없고 소염제주사나 놓고 유합을 기다리면 되는 환잔데 그게 무슨말이요? 혈관이며 신경을 겨우 이어놓았는데 움직이는건 안되오.” “다 치료 된 환잔데 왜 전원을 하겠습니까?” 김선생이 발끈해서 말하였다. “외과에 한해서는 김선생을 대담히 믿고 그에게 맡기는것이 좋겠습니다. 김선생이 능히 감당할겁니다…” 허주임이 말하자 우리병원의 반란파맹장인 윤호사가 대뜸 흥분해서 말하였다. ‘우리 함께 모주석어록을 학습합시다!” 그는 “혁명은 칭커츠판이 아니며…”와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며 달마다 말하며…”등 네댓 조목의 어록을 격동된 목소리로 높히 읽은후 말을 이었다. “이환자는 전투일선에서 영광스럽게 부상을 당한 민병영웅입니다! 우리는 그를 따라 배우며 ‘만난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이건 붉디붉은 태양이시며 위대한 령수이시며 도사이시며 키잡이이신 모주석께서 우리들에게 한 교시입니다. 우리는 이 환자를 원만히 치료할 신심이 있으며 용기가 있으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꼭 달성되여야 하며 꼭 달성됩니다!” 윤호사가 계급투쟁, 정치투쟁의 화약냄새를 확!학! 풍기였으나 사람들은 코와 입을 찡그리기도 하고 히죽 웃기도 하며 한사람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여기서 김선생과 윤호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에서 말했지만 김선생은 중전을 졸업하고 우리병원으로 분배받아 왔는데 그들은 동기동창이 셋이 한꺼번에 우리병원으로 왔다. 리원장과 나는 이들을 잘 배양하자고 하며 김선생은 현병원 외과에, 얼마후 다른 두 선생도 내과와 부산과에 진수를 보냈다. 김선생은 진수를 마치고 돌아온후 자기는 외과의사라고 광고하며 외과환자외의 다른환자는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과환자는 며칠에 간혹 한둘이 있을뿐이 였다. 당시의 농촌위생원의사는 무릇 환자면 다 치료할수 있어야 했다. 금후 과를 나누어 의사를 두려는 타산은 있었지만 아직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농촌의사는 다면수여야 했다. 김선생은 외과에서 아직은 나의 조수로 더 커야 했고 다면수의 길을 걸으며 전문화를 더 제고해야 했다. 근래에 보니 김선생은 나를 부담스레 여기며 불편해 하는것 같았다. 하여, 나는 외과에 한해서는 그가 주동성을 발휘하게 은근히 배려를 하였다. 그러면서 무슨환자나 많이 접촉하라고 자주 말해주었다. 그래야 군중들의 환영을 받는다고 말해 주었으나 김선생은 별로 희끔해 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윤호사는 우리공사에서 유명한 반란파 맹장으로 병원의 리원장을 거리로 끌고 다니며 투쟁한 사람이다. 전공사적으로 령도를 투쟁하는 첯 포를 쏘았다. 전업잔페군 인인 리원장은 얼굴에는 광대화상을 그리고 신문지로 만든 한발이나 되는 꼬깔모자를 쓰고 개패와 쓰레기 왕바신을 목에 걸고 페품수구로 공소사에 들어 온 깨여진 쟁개비를 두드리며 왼쪽겨드랑이에는 짝지발을 끼고 절룩거리며 모진 모욕을 여러날 당하였다. 거기에 상처까지 도져서 무척 고생하였다. 윤호사가 초중학교애들을 데리고 이런 행패를 하자 병원군중들과 중학교선생들이 분연히 일떠나 제지하였다. 그는 이미 조직적으로 처리한지도 오랜 리원장의 작풍문제를 다시 꺼내들고 여지없는 공격을 다 하였는데, 그의 목적은 리원장을 꺼꾸러 치우고 자기가 원장이 되려는 것이였다. 그는 리원장이 자기를 입당시켜 주지 않았다고 치를 떨었다. 문화대혁명 내내 그는 병원의 일은 될수록 하지않고 “혁명”만 하였는데, 별명이 “커톨거밍파”(입으로, 말로만 혁명한다)였다. 윤호사의 야망은 원내군중들의 반격으로 어느것도 실현되지 못했다.(원장꿈, 입당꿈) 그는 병원사람들을 다 밉살스레 보았다. 그와동시에 전공사에서 윤호사를 곱다는 사람은 원내, 원외에서 그야말로 한사람도 없었다. 지금 병원으로 나오는 것은 출근하지 않으면 월급을 깍고 인사처리를 하겠다고 한것도 있지만 단위별로 자기의 혁명과 생산을(사업)하기에 그가 더는 삐쳐들곳이 없기 때문이였다. 그는 김선생을 “신생사물, 신생력량, 신선한 혈액”이라며 버쩍 춰올리며 김선생과 친하게 보냈다. 토론회는 김선생과 윤호사가 전문 환자치료를 책임지기로 결정하고 끝났다.   하루후, 나는 대대(촌)합작의료 순회검사로 하향을 나갔다. 닷새째 되는 날에는 학서대대로 갔는데, 그날 오전 나는 대대서기, 주임, 대대의사와 함께 약재배기지로 검사를 갔다. 우리가 밭을 살펴보고 있는데, 대대위생소 호사가 숨차하며 달려왔다. 리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지금 즉시 나를 오라고 한다는 것이였다. 사연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원장이 아주 급해 하는것 같더라고 하였다. 나는 즉각 30여리 먼길을 자전거로 땀을 철철 흘리며 달리였다. 병원에 당도해 보니 사연은 리경식 때문이였다! 오늘이 엿새가 되는 날인데, 환자는 수술후 미열로부터 3일째부터는 고열이 나기 시작했는데 여러가지방법을 다 썼으나 열은 내리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는데 지금은 혼미상태라고, 김선생이 병정을 소개하며 병지를 내여 놓았다. 나는 먼저 환자의 심장상태를 검사하고 수술부위를 검사하였는데, 수술부위는 팽팽하게 붓고 검붉은 피부는 불덩이 같았다. 나는 상처의 괴사라고 즉시 판단하고 봉합실을 뽑았는데, 첯코를 뽑자 간장물 같은 액체가 물총처럼 내 쏘며 지독한 악취를 풍기였다. 나는 다섯코를 뽑아 상처를 개방하였다. 괴사물이 두사발은 되게 나오고 악취는 숨쉴수 없게 하였다. 김선생과 윤호사는 밖으로 달려나가 연속 구토를 하여댔다. 나도 구역질을 하며 환자처치를 마저 하였다. 처치가 끝나자 리원장은 우리셋을 불러놓고 치료방안을 물었는데, 김의사는 대뜸 자기는 손을 들었다고 성근히 태도표시를 하였다. 매일 두세번씩 환자에게 어록을 읽어주고 어록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닥달을 했다는 윤호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나도 신심이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환자는 패혈증이 왔을 가능성이 아주 큰데, 우선은 생명위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고 다음은 동시에 상처처리를 해야겠는데 하지를 절단하지 않으면 않될 가능성이 너무도 크다. 이런치료를 나는 파악이 없고 우리위생원에서는 할수없다. 때문에 즉시 상급병원에 전원을 해야한다. 빠를수록 좋다고 시간을 쟁취해야 한다고 견해를 그대로 말하였다. 리원장은 현병원에 전화를 하여 구급차를 부르고 공사로 급히 갔다. 긴말을 간단히 한다면, 환자는 현병원에서 지구병원으로 다음은 성병원으로, 이틀만에 상해로 가서(비행기로) 하지를 절단하고 패혈증치료 등으로 넉달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또 한가지 소개할것이 있다. 상해의 어느 입빠른 의사가 환자측 사람들에게(회갑을 쇤 나의친구, 현무장부 부부장과 간사 1명) 처음 치료방법이 잘못되였는데(인류관을 꽂지 않은것 등) 엄중한 의료사고라며 하마트면 생명을 잃을번 했는데, 살아난 이런기적은 우리도 처음이라며, 사고원인을 밝히고 받아야 할 보상은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말한것이다. 이한마디 말로해서 현무장부와 공사무장부에서 나한테 조사를 왔는데, 그들의 눈치는 허주임, 김선생 등이 책임상 어떤 문제가 있기를 바라는것 같았다. 당시는 의료사고에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책임사고로 법원놀음을 해야하고 다른하나는 기술사고로 의료행정적 처리를 받아야 했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말한후 치료를 맡은 의사, 호사들이 있는 능력과 정성을 다 했다고 특히 강조했고(김선생과 윤호사는 그때 병원에서 자며 환자를 지키였다.) 증실재료도 그렇게 써주고 지장을 찍어 주었다. 후일담이지만, 현병원 외과 허주임이 우리위생원의 했내기의사인 김선생을 극력 춰 올리며 이제부터는 외과에 한해서는 김선생이 책임지도록, 그의 립지를 결정하는데 영향력이 있는 발언을 한데는 내막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병원에서 김선생이 외과의사로 업무를 분공 맡고 책임과 권리를 가지면 허주임의 왕진을 많이 부르는데 퍽 편리하고 그러면 회색수입이 증가되는데… 금후 그렇게 합작하자고 허주임은 김선생과 약조를 이미전에 하였든 것이다.(허주임과 김선생이 조사시 교대한 것이다.) 기술사고에 돈문제, 녀자문제까지 병원내부에서 적발되여 허주임은 주임직에서 철직되고 월급 두급을 깎기고 5년간 전근도, 월급조절도 못하며 외과문진의사를 하여야 한다는 처리를 받았다. 현무장부에서도 부장이 출당, 캐출을(제명) 당하는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은 그번 특무잡이 명령이 하나의 가상훈련이였는데, 여기까지는 부장의 권력행사라고 할수 있었지만 실탄을 발급한것은 군분구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것인데 부장은 그날 얼근히 한잔해서인지 군분구에는 신청도 하지않고 공사무장부에 엄명을(호령) 내렸든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후 현무장부에서는 있는 힘껏 경식의 치료에 최대의 노력을 다 하였다. 하지만, 민병들의 잘못으로, 공사무장부의 책임으로, 병원의사들의 책임으로 밀려고 광채롭지 못한 동작들을 많이하여 조직의 격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다음은 경식이가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다. 경식이는 잔페로 된후 현실을 대범하게 승인하고 생산대일을 능력껏 하였다. 그때는 집체화 시절이다보니 수입분배에서 경식이를 도와주는것은 문제가 아니였다. 대대의 결정으로 6개 생산대들에서 공익금 쪽에서 보조금을 지출해 주었다. 공사무장부 라부장은 현으로 불이나게 뛰여다나며 의족을 맞추게 하였고 현농구공장에 경식이를 취직까지 하게 했다. 라부장이 애쓴덕에 경식이는 국가공인명액에 들었고 월급살이를 하며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 왔다고 하였다. 자기의 문제로 가족과 본인이 상급기관을 여러번 찿아 다녔으나 도무지 되지않는 대사를 라부장이 애를 쓰고 해결해 주었다며 경식이는 매우 감격해 하였다. 라부장이 뛰여다니며 해결한것을 경식이네는 왜서 해결하지 못했을가… 경식이는 그간 수년동안 23명의 수혈자들을 다 찿아 보았지만(변방부대 전사 두사람은 다른 성 사람인데 찿지 못했다.) 매부가 잊지말라고, 구명은인이라고 여러번 말한 나만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마음에 그냥 걸려 있었는데… 이렇게 만날줄이야?! 그는 재삼  기뻐하며 반가와 하였다.(경식이가 상한 후 한달푼해서 나는 사업상 수요로 다른도시에 전근을 했었다.)   그날, 공원에서 경식이는 나를 구명은인이라고 자꾸 말하며 손을 잡고 놓지않았 으나 나는 량심에 걸리던 일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토론회때 내가 견결히 환자를 현병원에서 맡으라고 주장하지 못한것과 우려되는 점들을 충분히 말하지 못한것이 줄곧 후회되였다고… 내가 그러지 못한것은 나의 체면을 고려하다보니… 더 뭐라고 말하면 호박 쓰고 돼지굴에 들어가기로 중구난방 몰리우며 난처해 지겠기에… 지금 이렇게 경식이에게 직접 말하니 40여년 가슴에 걸려있은 무거운 짐을 오늘   벗었다고… 우리는 통쾌히 웃었다.                                                                                                                            19.3
140    과불급의 모범 댓글:  조회:961  추천:0  2019-09-21
     수필                                               과불급의 모범                                                                                                             회령 대만의 유명작가 리오씨는 내가 보기에는 과불급의 모범인물이다. 과불급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해도 맞춤할것 같다. 리오씨를 구체적으로 정치가, 사상가, 평론가, 수필가, 잡문가, 칼럼니스트, 지어는 리상주의자라고 착호지명을 하는 사람도 있다 리오 자신은 자기를 “기재”이며 “단 하나뿐인 칼끝(예봉)”이며 “누구도 나와 비길 수 없고” “세계에서 한 모(면)를 막고 우뚝 선 위인이다.”고 하였다. 명함자 오(敖, 거만하다.)의 냄새가 그대로 물씬 풍기는 말이다. 나는 리오씨와 거래가 없다보니 잘 알지 못한다. 여기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소리는 두루 얻어듣고 얻어보고 한 것이여서 정확성을 담보할수가 없다. 이점을 먼저 말해두고 계속해서 떠드벅거릴가 한다. 리오씨는 흑룡강 할빈에서 태여난 사람인데 지금나이는 지난세기 35년생이니까 여든네살이겠다. 지금 건재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건강장수하며 다손다복하며 건필하기를 축원하는 심정이다. 리오는 천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대부분이 비판성평론들이다. 또 그 글들의 대부분은 국민당과 장개석 일당을 즉살나게 욕한것이다. 물론 공산당을 꼬집어  뜯은것도 좀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사발을 들씨운것도 퍼그나 있다. 하여 어떤사람들은 말하기를 “리오는 자기를 내놓고는 세상사람들을 다 욕한다.”고 하였다. 리오는 그 유명한 “욕설”때문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의 욕설은 끝이 없었다. 그는 대만당국에 의하여 14번(?)을 감옥에 가서 콩밥을 먹었고 두번인가는 어느법원에서 사형이 어쩌구 저쩌구 한일도 있었다고 한다.(누가 시켜서 으름장을 놓아보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상 “업적”이 다 그 욕설로 해서 얻은 수확인데 리오는 그에대하여 전혀, 추호의 “만족”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야말로 시종여일하게 왕성한 혈기와 억센 정력으로 줄기차게 욕설을 퍼 부었다. 그의 초심과 사명은 “나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한푼의 용서도 없다.”인데, 그는 잘한것, 좋은것, 옳은것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서 말하지 않아도 될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못한것, 나쁜것, 틀린것은 말하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않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이 다 듣기 좋은말만 하고 듣기에 나쁜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는 확고부동하게 견결히 그 반대로 나간다는 것이다. 천하유일의 “반란파맹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리오다. 그리고 리오는 대담무쌍한 실천가다. 그는 극히 실제적인 작가로서 무엇을 보았으면 무엇을 보았다고, 무엇을 들었으면 무엇을 들었다고, 하나면 하나라고, 반개면 반개라고… 고지곧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지어는 자기의 은사도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꺼리낌 없이 말한다. 그는 자기의 정부 반수앵을 21일만에 만나서 이틀하고도 반날을 라체로 함께 지냈다는둥, 자기는 녀인의 배 위에서 죽고 싶다는둥… 다 솔직히 말했다. 오늘 객관적으로, 실사구시적으로 말한다면 리오의 욕설은 사회적으로 별로 거둔 성과가 없다. 그의 욕설이 나쁘거나 틀려서가 아니고 대만당국의 “영명한 안광”에서 볼때 극“좌”가 아니면 극”우”로 “채납불가”였기 때문이다. 어떤욕설은 아주 적절했지만 마의동풍이 되기도 했다. 례하면 국민당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대성질호한 글들이 모두 쇠귀에 경 읽기보다도 못했다. 리오같이 박학다식한 작가가 “중용지도”를 모를리가 없고 현실가능성을 모를리는 없다. 아마도 리오의 혈기와 정력이 너무도 과인한데 원인이 있는 같기도 하다만… 리오씨가 사회적으로 어느만큼한 공헌을 하였는지는 아직은 말할때가 아니지만 한가지만은 명학하다. 그것은 그의 초심과 사명감이다. 그리고 대담무쌍한 실천행동이다. 이것은 사회의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모든 사회의 구성인들이 따라 배울바다.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가, 악, 추가 없고 진, 선, 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기가 소원인데 그런세상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9. 8. 19
139    쌀독에서 인심 난다 댓글:  조회:941  추천:0  2019-08-02
      수필                                          쌀독에서 인심 난다                                                                                                                        회령 아침에 깨여나서 창문을 바라보니 유리창문에 물방울이 가득 맻혔다. “아하! 밤새 비가 왔구나! 감사해라!”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감탄했다. 그리고 옷도 입지 않고 창문에 다가가서 비가 얼마나 왔나 밖을 내다 보았다. 아스팔트길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이 꽤 고여 있었다. “괜찮게 왔구나. 오늘 온 하루 와도 좋아…” 나는 중얼거리며 하늘을 쳐다 보았다. 푹 흐린 하늘은 음울하고 밖을 나가보지 않아도 날씨는 몹시 을씨년스러울것 같았다. 찬찬히 바라보니 지금은 가는 진눈깨비가 보일듯 말듯 내리고 있었다. “가늘어도 좋으니… 종일 내려다오.” 나는 하늘을 새삼스레 쳐다보며 기원하였다. 금년동삼은 동삼인지 이른봄인지… 모르게 지나갔다. “지구온난화”요 “이상기후”요 하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지는 이미 여러해가 되지만 내가 그것을 직접 피부로 느껴 보기는 올해 동삼이다. 우리고장은 동삼내내 맑은하늘에서 해가 재글재글 불타고 푸른하늘에는 구름 한송이도 없는날이 많았다. 바람도 없고 혹 바람이 분대도 미풍 정도였다. 강물은 끝내 얼어붙지 못했다. 사람들은 “겨울이란게 봄날 같다.”하고 좋아선지 서운해선지 곧잘 말했다. 동삼내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 치던 옛날의 겨울날씨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강수가 적어서는 봄파종을 잘 할 수 없겠는데…”하고 근심하기도 했다. 나도 그런 근심을 자주 하였다. “농사는 천하지 대본”이라고 옛날어른들이 교시한것이 이젠 몇백년이 지나갔지만 그말은 지금도 틀림이 없다. 농사가 잘되여 농부네 씰독이 넘쳐나야 나라의 쌀독이 차게 된다. 농민이 배 부르고 등이 뜻뜻해야 나라가 태평성세가 되고 국민이 편안히 살수있다. 중국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다. 백성은 “이식위천”이다. 그들은 “온보”에 만족한다. 지금 그들은 첩도 필요없고 자가용이며 호화주택, 별장도 바라지 않으며 멋진옷이며 고급향수, 금시계, 금가락지를 부러워 하지 않는다. 가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땀 흘리고 있다. 가난하고 락후하다고 하여 백성을 우습게 알지마라. 천하는 백성의 천하다. 백성을 하늘로 여겨야 한다. 백성은 배를 띄울수도 있고 뒤엎을수도 있다. 노도와 격랑은 산악도 삼키고 쓸어버릴수 있다. 관리들은 이점을 항상 명기해야 한다. “위민복무”를 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밖을 내다보니 진눈깨비가 힘차게 쏟아지고 있다. 봄누기를 충분히 잘 해 다오. 올해도 어거리 대풍이 들어라. “3농지시”와 “부핀행동”을 하늘도 알아보네…                                                                                                                    19.3
138    폭염 폭우맹위에 황연대각 댓글:  조회:973  추천:0  2019-06-14
        수필                                                  폭염 폭우맹위에 황연대각                                                                                                                      회령 인간이 아무리 무소부지, 무소불능, 진지전능 만물의 령장이노라고 물을 건너가는 개턱처럼 턱을 잔뜩 쳐들고 코구멍으로 세상을 보며 코방귀를 킁! 킁! 거세차게 뀌어도 그게 그런게 아니다. 사람은 그 누구나 자기가 직접 겪어보지 않고 무엇이나 다 잘 안다는건 거짓말이다. 정말로 잘 안다면 그는 귀신이거나 신선이다. 누가 만약 대체적으로 무얼 안다면 그건 그럴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대체적으로 알게 된 기초는 역시 겪어본바가 있기 때문이다. 똑 같은것은 겪어보지 못했으나 4, 5촌쯤 되는 비슷한 경우를 당해 본바가 있기에 그는 대체적으로 알수 있은것이다. 나는 금년에 폭염과 폭우의맹위를 꼼짝못하고 시작부터 끝까지를 한달반 겪었다. 피서란 말을 듣긴 했으나 그게 그저 배 불뚝이 부자들이거나 유한마담들의 호강놀이거니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는 피서의 고마움이며 수요며 팔요라는걸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승덕이며 려산, 북대하가 중국에서는 1등 피서지라고 하지만 그건 권세가 있고 돈있는 사람들이 행세멋으로 재미를 보는 곳이고, 나에게는 우리고장이 록색 천연 자연적으로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고장이였기 때문이다. 우리고장은 우선 춘하추동이 분명하고 계절따라 풍토기후가 적절해서 요란스레 무슨 피서니, “쿵툐”니 할것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여름 우리고장에 110년만이라고 하며 들이닥친 폭염이 맹위를 떨칠줄이야?! 재작년에는 110년만이라고 하면서 초특급홍수가 들이닥쳐 사람들을 벌벌 떨게하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대수로와 하지 않았다. 우리고장은 연길 뿌루하통과 두만강에서 내리 뻗치는 두갈래 홍수를 한몸에 받아 당하는 고장이긴 했지만 선인들이 다져놓은 제방이 끄떡없이 시가지를 안고 있었기에, 만약 홍수가 들이 덮친대도 지척에 빙ㅡ 둘러있는 산꼭대기로 들구뛰면 되는거니까… 겁내지 않았다. 재해구조는 정부에서 일일히 다 살펴주기에 걱정할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들이닥친 폭염은 사실말이지 대책이 없었다. 이건 불타는 태양이 이글이글 하루종일 불길을 내리퍼붓고 낮이고 밤이고 련일 계속 화끈화끈 화독더위, 후근후끈 찜통더위, 어쩌다 쉬여빠진 바람이 맥없이 부는것은 안불기만 못하다. 그것은 숫불화로를  들씌우는 것과 같기에. 가로수들은 늘어지고 곡식들은 배배 꼬이고 바싹말라 한창 푸르싱싱하던 모든 밭들이 부옇게 희누렇게 늦가을 밭으로 변해버렸다. 수도국에서는 수원지저수지가 바닥이 드러난다고 아우성을 지르며 제발 물을 아껴달라고 사정을 한다. 사람들은 눈치고 체면이고 가릴것 없이 훌떡 벗고 앉아서도 비지땀은 줄줄 흘리며 헐떡이고 눈알을 희번득거리는 것이 누구를 원망하는건가 죽을때가 되여 괴로와 하는건가… 물과 불은 사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홍수때는 해볼데가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쌓는다든지 높은곳에 미리 피난을 한다든지… 대항해볼것이 있었지만 이놈의 불더위는 막을데도 피할데도 없었다. 동쪽에 가도 그더위요 서쪽에 가도 그더위였다. 꼼짝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는 형국에서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절망하였다. 급기야 피서지로  도망하는 사람들이 없은건 아니지만, 그건 필경 쌀에 뉘만큼 극히 소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그대로 속수무책이 였다. “쿵툐”가 있는집은 괜찮았지만 선풍기는 쓸모가 없었다. 정부에서도 “일사병을 주의하시요”하고 티비에 광고를 내고는 달리 용빼는 재간이 없었다. 학교교실에 가서 주숙을 하게 한대도 쓸모가 없는거고 산에가서 나무밑에 앉아 있으라고 해도 화염은 변함없이 여전하고 그렇다고 소방대를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랭수를 퍼붓는대도 고것이 잠간일뿐 단가마에 물 한바가지를 붓길거다.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며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였다. 내 평생에서는 처음 당하는 폭염인데, 폭염은 말라죽던 타죽던 상관없이 20여일 그야말로 꾸준히 변함없이 한대중 줄기차게 열심히 지속되였다. 아니, 점점 더 단수를 높혀갔다. 그러다가, 이게 웬일이냐?! 그야말로 천지조화는 알 수 없다. 중복이 지나 며칠후 돌연갑자기 이번에는 온하늘에 회뿌연구름이 꽉 덮히고 번개와 우뢰가 맹렬히 대작을 하며 초특대폭풍취우가 터질줄이야?!... 그러면 그렇겠지! 자연이 생령을 다 죽이자고야 하지 않겠지!... 한나절 동이로 퍼부은 폭우는 시가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더러 수해는 있었지만, 쉬원하기 그지없었다. 초가삼간이 다 타버려도 빈대가 멸종된것이 쉬원하다는 것처럼 타들어 가던 신, 심이 대뜸 푸르싱싱해지고 정신이 났다. 사람들은 유심쟁이든 유물쟁이든 모두 하늘에, 자연에 감사를 드리고 고마워 했다. 그때, 황연대각 느껴지는것이 있었다. 40년전, 한창나일때 시대정신과 류행에 따라 나도 우렁찬 구호를 웨치며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나의 세계관, 인생관의 주요내용으로 수립했는데 그것이 이번의 폭염과 폭우의 세례를 받고 철저히 정리되였다. 그때, 우리또래들은 듣기만해도 힘이 불끈불끈 솟는 호매로운 구호속에서 무서운것을 모르고 자랐다. “하늘과 싸우니 그 락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락이 무궁하고 사람과 싸우니 그 락이 무궁하다!”, “하늘 땅을 밟고 일월을 휘여잡아 새세계를 창조하리!”, “인류는 만물의 령장! 자연을 개조하고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지배한다!”, “사람의 배짱이 어느만하면 량식산량이 어느만하다!”, “사람은 자연과 싸워 이긴다!”… 이런 정치적 구호들은 어떤것은 사회과학적인 것이고 어떤것은 자연과학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찌되였든, 우리열혈청춘들에게 주는 충격은 강렬하였고 영향은 심각하였다. 나같이 고지식하고 순진한 청년은 그 구호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새기고 믿어왔다. 우주천지간에서 사람이 못할일이란 있을 수 없고 인간만능이라고 확고히 믿어왔다. 개혁개방후 “생태평형”, “생태문명”, “환경보호”, “원상복구”, “자연보호구”, “자연과 인류가 조화롭게 사는”… 등 많은 말을 들어왔으나, 그리고 그말들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인류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한다는 관점을 버리지는 못했다. 나는 과학기술과 자연을 대립물로, 싸우는 관계로,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로 보아왔다. 그런데, 아니였다! 폭염과 폭우를 몸으로 겪고 나는 황연대각 깨도를 했다. 인류는 영원히 자연의 품속을 떠날 수 없으며 자연의 품속에서 생존하며 자체가 자연의 일분자로서 인류는 자연규률에 순응해야 하며 오늘의 많은 재해와 이상현상은 인류가 자연을 노엽힌 악과라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였다. 인류의 과학기술은 자연에 더 잘 적응하는 지식이며 수단, 방법이며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금후 우리가 화성에 가서 광천수를 마이고 금성에 가서 랭면을 먹고 지구로 돌아와서 노래방놀이를 하다가 목성에 가서 밤을 잔대도 그것은 자연에 적응하는 것이지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자연을 존중하며 아끼며 사랑하며 보호하며 적응하는 것이 인류의 가장 큰 문명일 것이다.                                                                                                                     18. 8. 8
137    한 녀인의 일생 댓글:  조회:1270  추천:0  2019-05-24
      중편실화소설                                                  한 녀인의 일생                                                                                                                   회령 “내가 글을 쓸줄 안다면 소설을 한책 쓰고 싶어요.”이 말은 90을 바라보는 고분이 할머니가 눈물이 글썽해서 가끔하는 말이다. 고분이할머니는 극히 평범한 산골농촌 백성이였다. 그는 지난세기 20년대에 태여난후 한뉘 농촌에서 살면서 아들딸 8남매를 보았다. 그중에서 딸 하나는 돌전에 잃고 7남매를 성인으로 키웠는데 아들은 다섯이고 맏이와 막내는 딸이다. 오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우리들은 거개가 모두 고분이할머니와 같은 어른들의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분복대로 초로, 중로의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또래가 많아서 사회는 로령화시대라느니 뭐니하고 떠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고분이 할머니와 같은 최로의 로령어른님들은 이젠 몇분이 안된다. 고분이할머니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평범한 세계ㅡ백성들 속에는 경천동지의 거대한 이야기는 없어도 진솔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많다. 그것은 그들의 력사ㅡ생활자체가 매우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고분이할머니는 자신의 한생을, 말하자면 자서전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하였다. 사람은 늙으면 쉽게 추억속에 잠기며 력사를 회고하기 좋아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거기에서 끝나는데 일종의 향수라고 하겠다. 그러나 고분이할머니의 경우에서는 다른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이의 회억은 당신의 불행한 현실과 이어진 유감과 슬픔이였다.       고 분 이   고분이는 오빠 둘, 언니 셋, 막내로 태여났다. 그의 집은 힘장수인 아버지와 무던하고 부지런한 어머니 그리고 6남매가 억척으로 일한덕에 토개(토지개혁)시에는 떳떳한 중농이 되였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는 뚝곰이라 불렀고 어머니는 암쇠라고 하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작수성례후 적수공권으로 살림을 시작하였다. 머슴총각과 부엌녀(머슴)는 부모들이 짝을 맺어준후 그대로 머슴을 살았는데, 조선이 왜놈들에게 통채로 삼키우자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을 따라 중국땅 연변으로 들어왔다. 그들 부부가 충주에서 명천을 거쳐 연변에 들어서기까지는 꼬박 다섯달 거의 걸렸다. 그때 이미 아이가 둘이였는데 맏이인 아들은 아버지의 지게에 앉고 둘째인 딸애는 어머니가 업었다. 그대로 거지인 그들은 빌어먹고 빌어자며 날품을 팔아가며 이주민들의 뒤를 따라 끈질기게 걸었다. 한지에서 자고 굶은 날은 얼마인지 모른다. 다행은 로상에서 별일이 없은것이다. 그들은 길에서 죽는 사람을 한둘만 보지 않았다.   드디여 두만강변의 작은 시가지인 봉화대에 도착했다. 엇비슴이 강건너 윗쪽에는 상탄이라는 중국마을이 있었는데 조선사람 서너호가 살고 있었다. 봉화대 대안은 꽤 큰 시가지 하탄이였다. 상탄과 하탄의 중간에는 산세가 강파로운 산줄기 하나가 내리 질렀는데 끝에 불끈 솟은 마두암은 주둥이를 두만강에 처박아서 마치도 준마가 물을 먹는것 같았다. 산이 높지 않아서 마령이라 했는데 상탄과 하탄은 등허리에 가로 걸린 10여리 오술길로 통하였다. 고분이 부모들은 상탄에 자리를 잡았다. 때는 음삼월 청명이 멀지 않았다. 임자없는 땅이 무진장 많았다. 뚝곰과 암쇠는 걸싸게 일했다. 나무를 찍어다 삼간통 집을 짓고 빈땅을 욕심스레 개간을 하였다. 별명은 그때에 붙은것이다. 농량은 하탄에 가서 장리를 맡았는데 조선에 비하면 어방없이 눅었다.   십여년 세월이 흘러 여섯째 고분이가 태여났다. 그해 봄 뚝곰은 식구가 늘어나기에 6간 기와집을 크게 지었다. 섯달 고분이는 기와집에서 태여났다. 하지만 어설픈 새집이여서 겉바람이 어찌도 심한지 산모와 갓난애가 얼어죽을 지경이였다. 구들은 불이 날 지경이였지만 하뇌바람처럼 세찬 겉바람은 귀뿌리를 씽씽 스쳤다. 아버지는 정지칸 구들에 조짚으로 고깔 초막을 틀고 산모와 갓난애를 그속에 있게 했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커 갔다. 동네는 30여호의 큰 마을로 되였다. 고분이 부모들은 아들딸 여섯을 하나도 잃지 않고 고스란히 키웠다. 아이 여섯을 공부는 하나도 시키지 못했으나 여덟식구가 자각적으로 부지런해서 배곯는 고생은 하지 않았다. 그때 세월에는 밥술을 자급한다는것이 대단한 일이였다. 마을에는 먹는것때문에 밤낮으로 근심하며 굶는 집이 20여호는 되였다. 고분이네는 그런 집들에 량식을 뀌여줄 여유까지 있었다. 마음이 무던한 고분이네 부모들은 누구든지 사정을 하면 힘껏 도와 주었다. 쌀이든 돈이든 뀌여 주고는 리자를 받는 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고분이네 일이라면 말그대로 손발을 벗고 나섯다. 이사를 해서 3년 병이 없으면 부자가 된다고 했는데 고분이네는 거이 30년 누구하나 앓지 않았고 부지런해서…그리고 마을 인심을 얻은 덕에 정말로 부자소리를 듣게 되였다.       고 생 문   고분이는 광복나기 다섯해전 18살에 10여리 이웃에 있는 산골마을로 시집을 갔다. 신랑은 그보다 2살위인 리씨 총각이였는데 항렬에서는 맏이였다. 보통키에 호리호리하고 준수한 미총각이였다. 고분이는 이름 그대로 아담하고 알뜰한 처녀였다. 혼사말은 16살때부터 있었는데 세해나 끌게 된것은 리씨네가 너무도 가난하고 총각의 아버지가 원근에 소문난 괴상한 사람이였기때문이다.   총각은 무척 총명하고 빠진데 없이 훌륭해서 욕심났지만 집은 죽물도 바로 못먹는 가난뱅이였다. 총각의 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였는데 일하기 싫어 하는 백수건달이였다. 그는 술잔이나 얻어 먹으면 공연히 남과 시비를 걸어서는 반나절씩 말싸움을 했는데 주로는 일본 사람, 잘사는 사람, 우쭐렁거리는 사람, 얄미운 사람, 관청 공무원들과 그 행패질이였다. 지어는 순사들과도 시비를 걸었는데 언쟁에서 지는때가 별로 없었다. .그는 남의 시비도 가로맡아 나서서는 약자의 편을 들었다. 하여 공술이 생길때가 퍼그나 있었다.   하탄시가지에서는 리아무개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좀 뾰족한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 면목을 아는 조아무개는 왜놈들앞에서 갑장(촌장)이라는걸 했는데 리씨는 그를 보기만 하면 “얘야!(네살위인 사람임.) 좆갑장! 이리오너라! 잘 만났다. 너 오늘 어른께 한잔 사 올리렸다.”하고 길게 왜가리청을 질렀다. 조갑장은 물론 술을 사 먹이였다. 각가지 훈계를 들으며 대접하고 시중들어야 했다. 조갑장은 리씨를 슬슬 피하느라 했지만 웬일인지 번마다 잡히군 했다. 때로는 호명을 듣고도 못들은척하고 내빼기도 했지만 다음번에 잡히면 신물이 날 지경으로 몇갑절 닥달을 당해야 했다. 몇번 경험을 본 조갑장은 아예 리씨가 보이기만 하면 선손을 쳐서 너스레를 떨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사람들은 리씨를 괴상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항일투사거나 혁명하는 사람도 아니였고 협객이나 주정뱅이 망나니도 아니였다. 젊은 시절 서당공부를 하며 청운의 포부가 컸던 그는 시국때문에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포자기를 했던것이다. 사회도 가정도 자신도 모두 귀찮았던것이다. 술잔이나 건네고 집으로 돌아 올때면 저 멀리에서부터 에헴! 에헴! 하고 곤두침을 뱉으며 자취를 알리였다. 집에 있는 식구들은 덴겁을 해서 영접을 해야한다. 조금만 소홀했거나 무엇이 눈에 거슬리는 날에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떨어진다. 일단 주정을 시작하면 마누라로부터 식구들(아들 둘, 딸 넷)에게 욕사발을 퍼붓고 다음은 동네 사람들을 욕하였다. 소를 잘못 매서 남의 곡식을 해쳤다는둥, 기음 맨 꼬락서니가 어떻다는둥, 아이들의 코 건사도 바로해 주지 않아 메스겁다는둥, 어른을 보고도 인사할줄 모른다느니…별의별 욕설을 다 퍼 부었다. 그런후에는 사돈들을 돌아가며 욕하였다. 그는 욕을 다 할때까지 정좌를 틀고 앉아서 호통을 했는데 빠르면 밤중이되여 페막사를 하였다. 취중에 하는 말이였지만 망발은 없었다. 집 식구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은 그를 주정뱅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술만 마이면 잔사설이 길고 앉아서 깨기에 견디기 어렵다고 했을뿐이다. 어찌되였든, 그의 주풍도 고분이네 집에서는 중대한 고려사안이였든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다가도 없을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수 있지만 사람은 한번 만나면 그뿐이니(그때는 리혼을 몰랐다) 당자의 사람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것인데, 리씨총각은 참다운 청년이라는데서, 그리고 시애비가 될 괴상한 리령감은 주정은 한다지만 경우 시비는 올똘한 사람이라 간대루사 며느리와 주정을 하랴 하는데서 혼사는 이루어지게 되였다. 워낙 세상사란 좋게 생각하면 다 좋아 보이는 법이다. 고분이는 삼일(첫날, 친정에 다녀오는 행사)을 갔다온 이튿날부터 정식으로 가마뚜껑 운전수로 되였다. 자기까지 아홉식솔의 후근을 맡은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지은 아침은 이밥 세그릇과 푸대죽이였다. 시어머니 신칙하에 첫날베개속에 넣어온 입쌀로 지은 이밥은 시아버지와 남편, 시동생에게(남편 바로 아래동생) 올릴것이고 시어머니와 네 시누이 그리고 자기가 먹을것은 멀건 푸대죽이였다. 반찬은 김치와 산나물 두어가지뿐이 였다.   아침식사가 시작 되였다. 정주칸 웃목에서는 시아버지가 두 아들을 대면으로 겸상을 하고 아랫목에서는 나인들이 죽사발을 들고 둘러 않았다. 김치모랭이는 가운데 방바닥에 놓았다. 그런데 아침상을 받은 시아버지가 수절을 들지 않고 밥상을 점두룩 내려다 보고만 있는것이 아닌가! 집안 어른께서 첫술을 뜨지 않았기에 모두가 기다리며 눈치를 살피였다. 그것은 7살 되는 막내딸까지도. 아마 무슨 말씀이 있을게다… 아니나 다르랴. 시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였다. 밥을 푸대죽에 넣어 다 같이 먹자는것이였다….   고분이는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다정다감한 남편을 믿고 일편단심 한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좀 잘 살아보려고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다 하였다. 하지만 식량고생, 돈고생, 병고생은 고분이와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지지리도 모질었다. 리씨총각과의 결혼은 고분이에게 고생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금슬은 백년해로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온갖 곤란, 난관 그리고 질기고 모진 고생앞에서 언제 한번 얼굴 붉힌 일이 없었다.       44년 흘린 땀물 눈물   남편의 말에 의하면 시아버지가 서당공부를 할때에는 꽤 여유롭게 사는 집이였다고 한다. 시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리웠는데 학습에 노력함이 또한 좋아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그는 포부가 커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리라 결심했고 높은 벼슬을 꿈꾸었다. 중앙급 관리가 되여 기울어지는 나라를 부강국으로 건설하며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게끔 한몸을 바쳐가리라 맹세 했는데, 조선 리왕조의 시국은 글러만 갔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 시애비와 며느리가 엎치락 뒤치락 집안 싸움을 해를 이어 계속 하더니 결국은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 갔다. 시아버지의 청운의 푸른꿈과 노력(학습)은 여지없이 파멸되고 말았다. “한일합방”전후 그의 부모님들은 선후로 돌아가고 일할줄 모르는 그의 손에서 가세는 대뜸 몰락했다. .그는 남부녀대 어린 처자를 끌고 해외 이주민 무리를 따랐다. 배운 글이 있기에 조선에서 따로 생계를 도모 할수도 있었으나 그는 망국에서 망국노로 살지 않는다는 조선선비의 지조가 퍼렇게 살아 있었던것이다. 중국 간도 --- 연변땅에 이르러 그는 여덟번이나 이사를 하며 가산을 몽땅 탕진하였다. 하여 지금은 알뜰한 소작농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지금 이 정도로 사는것은 아들 형제와 시어머니, 네 시누이가 악을 쓰고 일한 덕분이였다.   시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또 아무런 일감도 찾지 않았다. 집에 있을때는 케케묵은 책을 뒤적이고 겨울에는 전책을(소설책) 읽어서 동네 사람들이 한구들 모여 들었다. 그외의 시간은 허구한 날 하탄시가지에 가서 막걸리나 술잔을 얻어 자시고 돌아 다녔다. 어느 단위나 기관에서 간부나 직원으로 초빙을 하면 코방귀를 흥! 흥! 뀌였다. “너들따위 밑에서? 상노무새끼들!” 하고 횐목을 썼다. 얼어 죽어도 겨불은 쪼이지 않는다는 기고만장한 절개였고 고집이였다. 그는 일본사람은 쪽발이, 딸깍발이, 왜놈, 미개족새끼들이라며 남녀로소를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상대하지도 않았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 못지 않게 일본글 일본말을 알아서 시비거리는 발벗고 찾아 다녔다. 그는 중국글 중국말도 잘했다. 시아버지 주정은 여전했다. 다만 며느리를 욕하지 않았을뿐, 그는 며느리를 딸들보다 더 귀여워했다.   고분이가 시집온 이듬해 봄, 정정하고 쌩쌩하던 시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다. 어느 마을의 좌상로인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문상을 갔다가 촉한에 걸렸던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별로 아는 사이도 아니였는데, 시어버지는 례문에 등한치 않았던것이다.   시아버지가 사망하고 보니 21살의 남편이 호주의 멍에를 떠메게 되였다. 이미도 호주나 다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명실공히 호주가 되였다. 시어머니는 그간 고분이를 데리고 해오던 안살림을 몽땅 고분이에게 밀어 맡겼다. 고분이는 끼니며 옷이며… 여덟식솔의 턱없이 부족한 답답한 살림을 떠 맡았다. 그때의 시어머니들은 고방열쇠(살림경제권 령도권)를 내여놓기 싫어했다. 며느리를 맞으면 장을 세독 먹여봐야 한다느니, 간장을 세독 먹여봐야 한다느니 하면서 고방열쇠를 틀어쥐고 시집살이를 시켰다. 말하자면 소위 가문의 법도를 가르치는것인데, 자기 구미에 맞게 길을 들이는 판이였다.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욕심은 며느리를 닥달하는것으로 표현되였다. 그들은 집안이 흥성하려면 녀자가 마음쓰기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처사를 잘해야 하는법인데 그것은 들어온 남의 집 사람--- 며느리가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던것이다. 하여 수월하다는 시어머니들도 며느리와 퍼러딩딩하기가 일수였다. 령도자의 위풍과 본때를 보여주는것이였다. 여북하면 “고추 당추 맵다한들 시어머니처럼사 매우랴!”하는 군소리까지 생겨 낫겠는가. 하지만 고분이 시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고방열쇠도 없었거니와 부엌살림이 신물이 났다. 언녕 밀어놓고 싶었지만 령감의 눈치때문에 거조를 내지 못했는데 이젠 감놔라 배놔라 내마음 내키는 대로였던것이다. 막막하고 고된 부엌일을 메내부치니 거뿐하기 짝이 없었다. 맹물을 끓이든 풀뿌리를 삶든 내알바가 아니다. 령도권은 내손에 있으니 틀은 틀대로 낼수 있고… 이런 심사였다. 시어머니는 성깔이 사무럽고 까다롭고 괴벽하여 고집이 세고 꼬디(노염)가 많았다. 순박한 고분이는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여덟식솔의 힘든 안살림을 떠 맡았다.   시어머니를 비롯해서 다른 식구들은 바깥일을 나가고 집에는 고분이와 여덟살짜리 막내시누이만 남았다. 고분이는 당장 끼니를 장만해야할 준엄한 가마목현실에 부딪쳤다. 음식감이 있다해도 이렇게 큰집의 하루 세끼를 만든다는건 쉬운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집 가마목일은 만든다는데만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우선 장만해야 한다. 감이 있어야 무엇을 만들게 아닌가. 그날 고분이는 눈물이 글썽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삼동은 사발밑굽이 들여다 보이는 멀건 장물죽으로 에때워왔다. 이제부터는 일철이 시작되였기에 일군들이 장물만 마일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무슨 건덕지가 있는것을 먹어야 하겠는데 감자 시래기, 호박 무우오가리와 산나물 말린것은 좀 있으나 쌀과 된장이 큰 걱정이였다. 푸대죽에 한홉씩 넣는대도 보리고개까지는 어방 없었다. 고분이는 친정에 손을 내여미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정집 구걸도 민망한 노릇이였다. 부모들은 기력이 쇠진했고 큰오빠내외가 대여섯 조카들까지 상봉하솔의 살림을 하는데 조카들은 학교를 다니였다. 친정은 친정으로서의 사정이 또한 있었던것이다. 친정은 그 무슨 자선기구도 아니였고 대단한 부자도 아니였다.  몇차례 구걸을 하니 올케의 눈빛과 말투가 곱지 않았다. 어머니와 올케는 고분이 앞에서 티각태각 다투기까지 하였다. 매번 된장 두어사발, 보리쌀 혹은 좁쌀을 반자루 남짓 이고 돌아올때면 고분이는 가난설음에 눈물을 텀벙텀벙 흘렸다. 고분이 부부는 자력갱생을 하려고 그야말로 비장한 분투룰 하였다. 빌어온 장은 사흘못가고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법인데 허구한날을 친정에 의지하여 살수는 없는 것이다. 풀싹이 돋아서 락엽이 질때까지 고분이는 틈만 있으면 나물을 캤다. 그것은 광풍폭우가 휘몰아쳐도 멈출수 없었다. 남편은 밤에도 나가 땅을 뚜지고 호박이며 무우따위 푸성귀를 심었다. 곡식에 물알이 들기 시작하면 고분이는 강냉이 수수 콩을 뜯어다 망질을 해서는 푸대죽에 넣었다. 보리가 익기 시작하면 이삭을 뜯어다 말리웠다. 하지만 풋보리 방아는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했다. 보리방아는 찧어본 사람이라야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잉태중인 고분이가 땀을 철철 흘리며 방아를 찧을 때면 남편이 때론 슬그머니 와서 도와주었다. 고분이는 땀과 함께 눈물을 이리씻고 저리씻고 하였다. 보리방아는 워낙 두 사람이고야 찧는것이건만 고분이는 막내시누이를 데리고 사실은 혼자 찧었다. 남편이 거들면 시어머니는 녀편네 궁둥이에 붙어 돈다고 줄욕을 퍼 부었다. 대답질을 하면 왜장독장을 치고 꼬디를 쓰기에 시무룩이 웃으며 물러 났다. 시어머니는 심사가 뒤틀리우면 막내시누이를 달고 뿌르르 오래비 집으로 달아났다. 한번 가면 반달 한달씩 괄시를 받으면서도 배겨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개여 올리며 잘 빌면 돌아오군 했다. 시외삼촌은 누의를 천하에 둘도 없는 꼬디쟁이라고 하면서 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시어머니 성미는 그렇게 괴벽 했다. 고분이네는 궁여지책으로 소작 절반거이 선타작(청곡을 소작료만큼 이랑수로 떼여낸후 먹는것)을 하였다. 물퉁이지만 우선 먹어야 했기에. 달리는 용빼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박잎이 피기 시작하면 고분이는 하루에도 몇번씩 남새포기를 살피였다. 호박이 언제 달리나 감자알은 얼마나 컸는지…난들난들 호박잎이 고분이를 얼마나 울리고 애타게 했는지 모른다. 하탄에 가서 장리쌀을 꿔다먹은 이야기는 더 하지 않는다. 광복전해 고분이는 두번째로 또 딸애를 보았다. 임신기에 입쓰림이 심해서 고분이는 맹물로 연명하며 죽다가 살아 났다. 무엇을 좀 먹을만 하니까 백두산같은 보리고개가 앞에 놓였다. 고분이는 배추잎에 된장을 발라 먹으며 막달까지 견디였다. 그래도 법은 있어서 해산을 했는데, 시어머니는 또 딸이라며 산모를 팽개치고 밭으로 나가 버렸다.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를 시중하며 며칠만 끼니를 맡으라고 하자 시어머니는 왈칵 성을내며 또 막내시누이를 달고 오래비네 집으로 뿌르르 달아 났다. 고분이는 해산한 날부터 그냥 하혈을 하며 가마목일을 죽기로 악을 쓰며 하지않을수 없었다. 남편과 시누이들은 밭일이 한창 바쁜때여서 별로 도와주지 못했다. 갓난이는 젖이 없어 좁쌀미음을 먹였는데 설사를 그냥 하다가 두달후에 죽었다. 아이를 묻고 온 그날밤 남편은 고분이와 “우리는 이후 자식들과 절대로 꼬디를 쓰지 말자.”고 언약을 하였다. 그 언약을 고분이는 한평생 참답게 지켰다. 고분이는 그래도 모진세월을 견뎌냈다. 광복이 되였다. 그해 고분이네는 상탄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사이 시동생과 두 시누이는 결혼을 하고 광복 이티후에 셋째시누이는 조선의용군 3지대로 갔다. 고분이는 동생들의 결혼잔치를 그것도 셋이나 누구정신으로 어떻게 치뤘든지 생각나지 않았다. 시동생은 남편의 옷견지로 두루 갈무리를 했었고 시누이들은 자기옷을 뜯어 눈가림을 했다. 이불도 뜯어 솜을 갈라서 어떻게 했었고 남편은 리자로 겨우 돈푼을 맡아 왔는데 해준것은 없고 리자돈은 굴러 빚만 망덕만해 지었다. 후일담이지만, 동서는 큰집신세가 하나도 없었다고 두고두고 원한을 잊지 않았다. 셋째시누이가 군대로 간것도 가난한 집을 뛰쳐나간 일면도 있었다. 셋째시누이는 사평전투에서 렬사로 되여 종이장 한장을 집에 보내왔다.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가 제구실을 잘못해서 딸이 죽었다고 넋두리를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후에도 쩍하면 푸념을 하며 엉엉 울었다. 고분이부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중 마음이 곱던 셋째시누이가 아니였던가! 광복이 된 이듬해 남편은 구장의 눈에 들어 구공서에 가서 공작하였다. 말하자면 출세를 한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구공서로 쫓아가서 이찌도 행악질을 하는지 몇달 못하고 끋내 집으로 잡혀 왔다. 늙은에미와 불쌍한 동생에게 고생을(농사를) 떠 맏기고 저는 책상머리에 앉아 호강을한다는 것이였다. 그는 빗자루로 책상을 뚜드리고 아들을 쥐여 패기까지 하며 왜장독장을 쳤다. 구장은 이악스럽길 짝이없는 무식한 아낙네라며 혀를 내 둘렀다. 이듬해 봄 구장은 남편을 연변전원공서에 추천하였다. 청년이 전도유망한 인재라면서 당의 간부로 배양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든 것이다. 남편은 도망치는 사람처럼 가만히 집을 떠나갔다. 몇달후 고분이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가서 시가지 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시어머니에게 잡혀서 집으로 끌려오고야 말았다. 성정부로 올라 간다고 했는데, 남편은 겨우 2년남짓 사업했을 뿐이다. 그후로부터 남편은 간부명색을 띤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고분이할머니는 오늘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한생에서 제일 큰 유감이라고 하였다. 광복이 된후 소작료가 내려가고 토개를 한후 호조조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번신을 하였다. 고분이는 가마에 밥을 지을수 있었다. 그런데 합작화운동이 불어치면서 밥가마 사정은 급전직하로 다시 긴장해 지었다. 그것은 농업사에서 수입분배를 로동공수에 따라 했기 때문이다. 상등로력이 하루 일을 하면 10부 즉 한공을 버는데 고분이네는 로력이 남편 하나뿐이 였다. 초급사가 시작되여 얼마후   막내시누이는 시집을 가고 시어머니는 풍을 맞고 자리에 누웠는데 목아래는 완전퇀환(마비)으로 손가락도 꼼짝 못하였다. 게다가 올망졸망 아이가 넷이나 되여 고분이는 근본상 일밭으로 나갈수 없었다.(맏이인 큰딸은 소학교에 다녔다.) 시어머니 곁에는 한시도 사람이 떨어질수 없었고 그리고 그 자신도 빈혈 간염 위염 신염 풍습 신경통 등 여러가지 지병을 얻어 자주 앓기 시작했다. 입 수자에 따라 구량은 탈수 있었으나 표준이 낮아서 턱없이 부족했다. 남편 하나의 공수로는 안로량(로력공수가 일년 정액을 초과하면 초과공수에 따라 량식을 더 탈수 있었다.)은 고사하고 빚에 빚만 덮쌓였다.(주로는 량식대) 군입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푸대죽을 먹고 그자리에서 허기들어 했고 사내애들이여서 먹기도 잘먹고 작란도 세찼다. 늘 배가 차지않아 숟가락을 놓지않는 아이들을 보며 고분이는 가슴이 얼마나 쓰렸는지 모른다. 학교 다니는 큰딸애는 점심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벌거벗겨 키울수는 없는거고 학교 다니는 아이는 연필이며 백로지를 사야했다. 시어머니와 자신의 병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애들은 맨발로 뛰여 다녔다. 돈이 나올 구멍은 급한때에는 부득불 쌀되박을 파는수밖에 없었다. 10여리 밖에 하탄시가지가 있어서 장을 볼수 있는것이 그나마 큰 다행이였다.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시어머니를 맏기고 고분이는 장보려 달려 갔다. 돈잎이 될만한것이면 무엇이든 이고 갔다. 산나물이며 푸성귀며 닭알이며 지어는 애들이 잡아온 고기새끼도 들고 갔다. 보는바와같이 사정은 이러해도 마을에서는 군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한마을에서 사는 사촌동서 두 사람이 더욱 그랬다. 그들은 고분이는 워낙 거친일을 하기 싫어한다는둥 집체일은 하지않고 장마당은 잘 다닌다는둥 아프다는건 거짓말이라는둥… 말새질이 많았다. 사촌지간에 의가난것은 동중일에서 남편이 바른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작은사촌동생이 초급사 회계를 했는데 어느해 그는 자기들 형제의 로동공수를 십여공 높혀 놓았다. 사람들이 뒤에서 쉬쉬하며 의론이 있자 남편은 사촌동생과 함께 로력공수를 다시 맞췄는데 확실히 틀린것이 나타났다. 남편은 사촌동생을 따끔히 타일러 준후 사람들에게는 전표를 잘못봐서 생긴 오차라고 설명을 했다. 가랑잎으로 눈가리기 같은 어설픈 수작이였으나 그때는 두루 얼버무려 고비를 넘겼다. 사촌동생은 그냥 회계를 했지만 앙심은 그때부터 생기였다. 그들은 사촌형이 말썽을 만들었다고 넘겨 짚은 것이다. 웬일인지, 친척간의 앙숙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고분이네와 사촌간은 늘  껄끄럽게 지냈다. 초급사를 거쳐 고급사가 되고 공산주의로 가는 금다리ㅡ인민공사가 되여 공산주의 천당, 지상락원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고 하였으나 고분이네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만 지였다. 맏이인 큰딸은 전업학교로 가고(경제난으로 고중을 포기했다.) 아들 다섯과 막내딸은 초중 소학에 다녔는데 공부를 특수하게 잘해서 원근에 소문이 났다.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품행이 좋아서 칭찬받는것은 자랑스럽고 기쁜일이였지만 그들부부의 부담은 그야말로 초부하 상태였다. 사는것이 너무도 힘든 고역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을 소학교 공부나 시키고는 일을 시키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추호도 그런생각은 하지않았다. 그들은 “자식들을 위하여 살며 한생을 다 하리라!” 맹세 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하였다! 훗날 아들 다섯은 대학까지 나오고 막내는 조기련애로 학업을 실패했다. 맏딸은 관내로 시집간후 자신의 힘으로 고급직함까지 따고 시부모를 잘 공대하여 큰집맏며느리라고 소문이 났다. 이것은 후일담이다. 사촌시동생은 “4청”운동에서 탐오건으로 졸경을 치르고 나 떨어 졌다. 그후 그들형제는 회갑전에 모두 사망했다. 과부가 된 사촌동서들은 워낙 심술이 곱지않은 사람들인데 그들은 고분이네를 실없이 미워하며 시기하고 질투 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집체생산에는 배돌이고 자본주의만 한다느니(장보기를 두고 하는 말이였다.) 그런 사람들은 량식도 주지말아야 한다느니 하며 험담을 하고 공격을 했다. 지어는 터밭에 무얼 심었는가 보자며 자귀밟은 밭고랑을 파 보기까지 하였다. 밭에서 고추씨가 나오자 “이걸 봐라! 량식은 없다면서 또 자본주의를 심었다. 먹을게 없으면 집체에 손을 내 밀고… 렴치짝도 없지!”하고 악담을 하였다. 그 거동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오히려 밉살스러워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며칠후 동서가 함께 상점물건을 훔치다가 당장에서 덜미를 잡혀 투쟁을 당하며 개골망신을 했다. 그후 타고장에 이사를 갔는데 선후로 일찌기 남편들을 따라 갔다. 마을에서는 별로 불쌍타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것을 보면 사람이란 마음이 고와야 하고 동네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자식들은 산골에서 그럭저럭 살고있다. 고분이네는 생산대(마을)의 배려로 공수가 높은일을 맡아 했다. 담배모 키우기, 황연불 보는 일인데 그것은 기술로동이여서 공수가 높았다. 하루에 한공5부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벌이는 석달남짓 밖에 안되였다. 온실에 불을때며1리도 더 되는 두만강물을 지게로 걸어다 담배모를 키우는 일은 무척 힘드는 일이였다. 고분이도 틈만 있으면 10여미터 깊은 드레우물울 길어다 남편을 도왔다. 하지만 남편은 공수를 더 벌기위하여 그외의 일도 더 맡아 하였다. 이를테면 가까운 곳의 기음을 떼여 맡는다든지 담배모 나르는 상자를 짠다든지 하며 조금도 쉬지않고 기계처럼 일하였다. 고분이도 틈나는대로 일손을 도왔다. 사촌동서들은 “저봐라! 도거리라 하니까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하는걸.” 하며 입을 비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분이부부는 기를쓰고 일했다. 남편은 온실안 빈틈에 고추 가지 도마토모를 붓기도 했다. 뜨락에 심을것과 장마당에 팔 모종이였다. 물론 또 말썽은 뒤따랐다. 어느 한번의 대비판 회의에서 사촌동서들은 사촌시형을 냅다 비판하였다. 우리 생산대에서는 제일 전형적인 자본주의라는 것이였다. 남편은 “자본주의긴 하지만 자력갱생으로 살겠다는건 사회주의 겠지? 동네 여러분들이 뻔히 들여다 보듯이 아이들을 공부 시키자니 그렇게 할수밖에 없고… 집체빚을 한푼이라도 적게 지고… 우리도 목숨이 살자는건 착오가 아니잖소? 아이들은 크면 나라를 위해 일할거고.”하고 대답을 해서 회장에서는 호응이 일어났다. 생산대 정치대장은 집체일을 잘하며 틈틈이 제집일을 하는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말한후 고분이네는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여도 생산대 옥수수대 하나 꺾어 먹는법이 없고 이삭하나 다치지 않지만 어떤집애들은(사촌동서네) 쩍하면 남의 터밭이나 생산대 밭에 뛰여드는데 아이들 교육을 잘하라고 훈계를 하기까지 했다. 고분이는 하탄시가지에 가서 강냉이가루를 꿔다가 농량에 보태기도 했다. 갚을때는 물론 쌀을 준다. 개 닭 돼지를 팔면 개인빚을 갚고 또 꾸어 썼다. 그는 병든몸으로 악을 쓰고 삼복무더위에도, 엄동의 겨울에도 장보려 다니였다. 눈물나는 너무도 모진 고역의 계속이였다. 그렇게 일곱자식의 공부뒤바라지를 하였다. 그리고 출세를 시키였다. 그들은 다진 맹세를 실현 하였다. 자식들은 외지에서 월급생활을 하면서 부모를 방조하느라 했으나 모두 초년생이라 여유가 별로 있을수 없었다. 잇따라 줄줄이 결혼이 닥쳤다. 막내까지 시집을 보내고보니 남은건 말 그대로 빚과 골병뿐이였다. 남들은 용케도 사명을 완수하였다고 하며 칭찬을 하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빚을 자식들에게 물려줄수 없다는 데서였다. 하지만 태산같은 저 빚을 무슨수로 갚겠는가?! 병은 깊어가고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못해만 가는데 생산대 수입은 내리막 재주만 하였다. 20여년 공산주의를 향해 숨차게 달려 왔지만 해마다 차례지는건 실망뿐이였다.  그사이 두번 풍작이 들었으나 한공에 겨우 70전, 량식대와 추렴새 따위를 떼고나니 제일 분배가 많은집이 백원 조금 더 되였다. 평년은 한공이 2,30전, 몇차례 흉년에는 무슨 마이너스 30전이라든가… 문화대혁명 10년에서 8년이 마이너스를 했다. 30여호 마을사람들이 몽땅 빚을 지고보니 누가누구를 말할 형편이 못 되였다. 제일 빚 꾸러미인 고분이네는 좀 “위안”이 되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빚은 갚아야 한다. 고분이네는 생산대 빚이 3천여원, 신용사 빚이 2천여원이였다. 개인빚은 2백여원이였다. 보아하니 죽는순간까지 갚는다고 해도 다 갚을 재간이 없는 빚이였다. 자식들이 하나 둘 집을 떠나면서 량식사정은 나아갔다.  17년을 온갖 심술을 다 피우며 누워있던 시어머니는 욕창 한곳 생기지 않고 깨끗히 앓다가 사망했다. 고분이는 그만큼 정성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돌봤든 것이다. 마을에서는 효부라며 모두 감탄 하였다. 막내딸 잔치까지 한후에는 밥상이 꽤 좋아 졌다. 닭알이나 고기반찬도 때론 올랐다. 하지만 빚을 생각하면 밥술을 든채로 멍해질때가 자주 있었다. 이대로 계속 혁명을 한다는데, 혁명은 언제가야 승리하며 부러운것이 없다는 공산주의는 어느때 보는건가… 다른것은 다 그만두고 빚만 청산하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라고 그들부부는 한탄 하였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살길이 열였다. 개혁개방이 된것이다. 1983년 이른봄 고분이네 마을에서는 집체화의 틀을 마스고 개체를 실시하였다. 고분이네는 제비쥐기로 가진 과수원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주고 3천원빚을 일조에 탕감했다. 원, 이런 경사도 있나! 꿈인지 생신지 황홀하기만 했다. 그해 농사는 어거리 대풍이 들었다. 고분이네 수확은 잡곡까지 3천여근이 되였다. 남편은 키높히로 쌓아올린 낟알마대를 밤중에도 두세번 일어나서는 쳐다보며 허 허 허 웃곤 하였다. 감자 무우 가을배추 파 마늘까지 처리한후 신용사 빚을 5백원 갚았다. 그후 5년을 농사와 뜨락경제(공예작물)로 신용사 빚을 몽땅 청산했다. 빚까지 다 갚고나니 두로인의 기맥은 탁! 풀리였다 삭신애 한점 기력이 없고 아프지 않은데가 없었다. 령감은 때론 복통이 심하다며 2,3일씩 달팽이처럼 꼬부리고 자리에 눕기도 했다. 고분이는 워낙 지병인지라 자기는 원래 그렇거니 하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갔다. 여기저기 시가지에서 사업하는 아들들은 방산집이 아니면 세집에서 그런대로 말씽은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령감은 나날이 쇠약해 가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가끔 만져보며 개혁개방이 10년전에만 실시 되여도 지주 뺨치게 되였을 텐데… 하며 아쉬워 했다. 지금와서 그들부부의 여한은 아들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단념 하였다. 이젠 정말 기력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시집와서 개혁개방전까지 44년세월을 그러니까 회갑나이가 지날때까지 고분이는 식량고생, 돈고생, 병고생까지 너무도 모진 고생을 하여왔다. 연변은 몰라도 하탄진에서는 제일 고생한 사람이 고분일 것이다. 그가 흘린 땀물 눈물은 과연 몇동이가 될가?!... 그의 신체상의 아픔과 생활상의 고통은 말과 글로 형용할수 있겠지만 마음의 설음, 슬픔과 쓰라림은 무엇으로 표현하랴… 그야말로 일구난설, 일필난기라 하겠다. 좋은 세월이 왔다! 고목봉춘이라 할가?... 하지만, 고분이부부에게는 그림의 떡이였다. 그들의 한생은 다 지나간 것이다… 양 로 원 1990년 봄, 고분이량주는 큰아들을 따라 시가지로 왔다. 수중에는 집과 잡동사니를 처리한 돈이 천여원 있었다. 이것인즉 그들의 전부의 재산이였다. 밭은 세 맡겠다는걸 사절하고 마을에 공유지로 들여 놓았다. 그들은 지난 수십년간 마을사람들의 신세가 크다고 생각했든 것이다. 그들이 떠날때, 전날밤 마을에서는 환송회를 했고 이튿날에는 수레에 태워 하탄시가지 역전까지 갔다. 마을사람들은 거이 모두가 하탄까지 따라오며 여니(배웅)를 했다. 큰아들은 2,3년전부터 부모를 모시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둘 중에서 하나가 죽으면 그때 모시라고, 그래야 부담도 적고 간편하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않았다. 큰아들네 세식구는 20여평 두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며느리는 개인식당에서 일을하고 손자는 초중학생이였다. 그때만해도 사람들의 관념은 부모는 큰아들이 모셔야 한다는 것이였다. 딸은 출가지외인이고. 늙으면 아들을 따르는 법인데 그것은 아들들의 항렬에 따라 봉양을 책임졌다. 이를테면 맏이가 책임을 못하면 둘째가, 둘째가 안되면 셋째… 이런식이였다. 만약 형님들이 있으면서 지차가 모시면 사회여론에 오르고 말밥이 되였다. 본인들도 광채롭지 못한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고분이량주는 아들과 합가를 하지않았다. 림시방편으로 아들집 근처에서 세집을 맡고 량주가 기거를 하였다. 사정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다른 아들들은 큰형이 어떻게 처사하나 눈치만 살피는듯, 그것은 며느리들이 더욱 그러는것 같았다. 시가지로 와서 두해만에 령감은 한생을 마치였다. 제일 고통스럽다는 이선암인가 하는 병이였는데 령감은 신음소리 한마디 하지않고 땀만 철철 흘리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림종이 가까워 올때 로친의 손을 맥없이 잡고 “고생이 많았지… 수고했어… 아이들을 애 먹이지 마우.”하고 유언을 당부했다. 그리고 혼미하더니 사흘후에 조용히 숨이 사라졌다. 고분이할머니는 큰아들집으로 들어 갔다. 짐이래야 이불한채에 옷견지따위를 싼 보따리 하나 그리고 작으마한 낡은 려행가방 하나뿐이였다. 그속에는 진통제 소화제 따위 상용약품 몇가지와 돋보기 치솔 수건 머리빗 숟가락 같은것이 들어 있었다. 배운것, 본것 없이 무지막지 막돼먹은 맏며느리는 퍼랄수구(페물수구) 한족로친을 불러다 남비며 사발이며 숟가락까지 왈카당 절카당 팔아버렸다. 남어지는 불을 처박아 버렸는데 마치도 무슨 분풀이를 하는것 같았다. 그는 큰시누이부부와 시동생들 그리고 동서들 앞에서 항상 렬등감을 느끼였다. 그들은 자기보다 여러차원 높은 사람들이였든 것이다. 하여 그는 형제들이 모이는걸 제일 싫어 하였다. 명절이나 무슨일사로 모이기만하면 그는 꼭 사단을 일쿠었다. 음식상이 다 갖추어진 후에야 펄쩍 뛰여들기가 일수였고(그때는 하탄에서 살았음) 자기는 무슨일이 있다면서 또 부산을 떨며 먼저 달아났다. 어떤때는 괜히 아이를 뚜드려 패며 소란통을 이르키기도 했다. 그의 눈에 제일 만만한것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막내시누이부부 였다. 큰아들이 이런 개차반같은 녀자에게 장가들게 된것은 다리를 살룩살룩 절고 집이 가난하고 부모에 동생들이 여럿이여서 부담이 많다는 약점 때문이였다. 그리고 서른이 거이되는 로총각이여서 장가들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큰아들이 다리는 다섯살때 두엄무지 쇠줄을 밟은것이 염증을 이르켜 그렇게 되였다. 그때 다리를 찍어야 한다고해서 고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행이 느릎나무뿌리껍질로 반년여 치료를 해서 다리를 살렸다.    큰며느리는 시집온후 기실은 제일 부담없이 제살림을 했다. 명색이 큰며느리라는 사람이 군일마다 이핑게 저핑게 요리빠지고 저리빠지면서 떡이나 먹고는 달아 났다. 때로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아예 오지도 않았다. 다섯째아들의 잔치 때에는 신부가 받은 큰상을 차 엎겠다고 날뛰다가 제지를 당하니 자기를 부등켜 안고있는 큰시누이(13년 이상임.) 파마머리를 잡아 끌고 뜯어 놓았다. 잔치하객들이 겨우 떼여 놓으니 이번에는 큰시누이남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틀어쥐고 얼굴을 할퀴자고 발광하였다. 큰시누이남편이 “맏며느리라는 사람이 군일이 될수록이면 잘되게 앞뒤를 살필대신 이게 무슨 행실인가!”하고 나무랬기 때문이다. 그는 제밸을 못이겨 방바닥에 쭐 늘이져서는 헐떡이였다. 사람들은 혀를 내 휘두르며 천하에 둘도 없는 망졸이라느니 정신이 나쁜것 같다느니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그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패질을 한것은 넷째까지는 잔치가 자기와 비슷했거나 지어는 못하기도 했지만 다섯째의 잔치가 자기때보다는 훨씬 좋다는 데서였다. 자기는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산골농촌녀자라고 업신여긴다는 앙심을 늘 품고 있었든 것이다. 그는 부부가 대학에서 선생질하는 셋째시동생네와도  앙숙이였다. 둘째시동생네(두 사람 모두 대학출신)는 수월하고 겸손한(두살 위지만 자기한테 예,예 한다고)사람들이라고 좋게 보았다. 하지만 넷째와 다섯째네는 코풀레기라느니 제노릇만하는 것들이라느니 하며 째째하다고 밉게 보았다. 주로는 자기를 위촌하지 않는다고 불만이였다. 시정부 간부인 큰아들은 매우 똑똑하고 정직하고 젊잖은 사람이였다. 그는 전통적 보수적 관념을 갖고 있어서 부모는 자기가 꼭 책임을 져야하며 형제들에게는 직접적 책임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들이 스스로 부모에게 효성하며 간혹 자기를 방조하는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면에서 안해의 생각은 매우 현대적이고 급진적(당시로는)이였다. 그는 아들들이(딸은 부쏸. 헴에 넣지않는다. 책임이 없다는것.) 무조건 돌아가며 부모를 모신다든지 생활비를 고루 병탐한다든지(고루 풍기는것) 해야한다고 인정했다. 친정어머니(남편은 일찍 사망. 시부모를 학대한 전형인물.)와 동생들은 그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부추겼다. 그런데 시동생부부들은 남편과 같은 견해들이였다. 그들은 형님의 로고를 마음속으로 잊지 않으면 된다고, 혹 여유가 있으면 물질상 적당한 표시를 하는것도 좋고…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아닌가! 그러니 책임지는것은 천경지위라는 것이였다. 그것은 고분이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했다. 좋든 굿든 큰아들을 따라야 한다고 법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큰아들은 어머니를 모셔온후 살뜰히 보살펴 드리였다. 가마목에서 쉬게하고 닭알을 삶으면 꼭 제손으로 발라 드렸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전면검사를 하니 모병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내과주임의사는 집에서 대증치료나 하라면서10여가지 약을 알려 주었다. 그는 가지가지 약물을 갖춰 놓은외에도 험방책에서 토방법을 선택하고 보건동작도 어머니에게 가르켜 드렸다. 아들의 효성에 고분이할머니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자주 흘렸다. 령감과 지나간 인생이 자꾸 떠 올라 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고분이할머니에게는 체질적으로 무슨 눈물이 그렇게 많은지 눈물을 줄줄 잘 흘렸다. 정감이 풍부하고 마음이 여리였든가?... 좋고 궂은 눈물겨운 사연이 너무도 많았든가!… 사람은 그 누구나 기왕지사에 대하여 어떤일은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에 충실하며 래일을 기대하여야 한다. 이것은 유익한 인생태도다. 고분이할머니도 이런도리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않는 심정이였다. 하여 그도 때론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생을 거이 눈물속에서 살아온 그를 눈물이 헤프다고 하여 나무릴수야 있겠는가… 하여튼,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자주 흘렀다. 그런데 이것은 그이의 커다란 허물이였다. 나무는 고요히 서 있자고 하지만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새가 없다. 산골에서 농사짓던 막내딸부부는 하탄시가지로 올라와서 뜨내기 일을 했다. 말하자면 그들로서는 쌰해를 한것이다. 사위는 오토바이삼륜을 몰고 딸은 도라지짠지를 해서 팔았다. 그런데 사위녀석이 노래방에 드나들며 바람을 피우기 시작해서 하루건너 싸움질을 해대는 모양이였다. 워낙 일하기 싫어하고 건달기가 있어서 고분이량주는 꿈도꾸지 않았는데 막내딸이 녀석과 한덩이로 굴러 다닐줄이야! 녀석이 손이야 발이야 빌며 허혼을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맹세를 하니 잔치를 해 주고 말았는데 그 꼬락서니였던 것이다. 볼갑스럽고 표독스레 생긴 큰며느리는 공연히 들펑질을 하며 불손했는데, 시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것을 제일 짜증나 하였다. 그는 “누가 죽었는가! 누굴 죽으라고 우는가!” 하고 악청을 지르며 내놓고 면박을 했다. 시어머니가 내가 스스로의 생각에서 공연히 그런다고 대답하면 나는 그런 꼴 보기 싫으니까 다른아들집에 가서 실컷 울라고… 우리집에는 이만있었으면 되였다고… 거침없이 내 쏘는 것이였다. 그러던 차 마침 막내딸네가 사단이 생기니 며느리는 딸께로 가 보라고, 가서 지키라며 막 떠 밀며 쫓았다. 늙어빠진 장모가 제집으로 오자 막내사위는 짓뿌디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술을 물켜듯 하며 집이고 나발이고 다 짓부셔 버리겠다고 하며 지어는 도끼까지 들고 행패질 하기가 일수 였다. 어느날은 밤중에 녀편네와 장모를 쫓아 내기까지 하였다. 하여 그들 모녀는 그날밤 친척집에 찿아가서 밤을 새웠다. 고분이할머니가 작고 낡은 려행가방을 들고 딸집으로 간지 한달남짓 후 였다.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큰아들 장례후 둘째아들이 어머니를 모셔 갔다. 둘째아들 때문에 당년에 고분이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둘째가 중학교에 다닐때다. 학교에서 갑자기 병이 났는데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터진다고 아이는 땅바닥에서 마구 뒹구는 것이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발작을 하는데 하탄진 병원에서는 무슨병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큰병원으로 가는것은 옳지만 돈이 있는가! 그때 울면서 사정사정 꾼 돈이 신용사 빚이다. 둘째는 석달넘게 입원치료를 받고 병이 떨어지긴 했지만 무얼 먹으면 목에 걸린다고 하면서 가슴이 막힌다고 하였다. 하여 입쌀을 꿔다가 미음을 먹이며 3년여 각별히 돌봐야 했다. 둘째는 마음이 수월해서 자기것을 아끼지 않았다. 돈도 그랬고 물건도 그랬다. 옴니암니 따지는 성미가 아니였다. 하지만 참을성이 없고 단순한것이 큰 결함이였다. 며느리는 젊은사람이 한없이 무던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습관성류산이였다. 새끼를 미워하는 부모는 없다. 열손가락을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것이 없듯이 자식에 대한 정은 똑 같았으나 그러나 길고 짜름은 있다. 고분이량주는 자식들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산전수전 세파를 많이 경험한 그들은 자식들을 성가 시킨후 아들 며느리들에 대하여 평론이 있었고 견해가 있었다. 셋째네는 아들은 원칙을 아는 사람이지만 중병으로 앓는 몸이고 며느리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친정까지… 부담이 많은 사람이였다. 넷째는 말은 잘 해도 나약한 성격이고 며느리는 허욕이 많은데다가 시부모는 근본상 자기와는 상관없는 늙은이들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였다. 즉, 책임감같은건 꿈도 꾸지 않는 사람이였다. 그들은 제노릇만 하는 사람들이였다. 다섯째는 어떤가? 아들은 아직 순진하고 천진 했다. 그런데 며느리는 쥐방울만한것이 앙큼하고 녕악스럽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둘째네가 제일 마음에 들었으나 법도가 있는거고 큰아들의 얼굴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여느아들들은 당시 여건이 안되였다. 모두가 공령이 짧아 박봉인데다가 살림을 시작한 초기여서 아직은 터도 잡히지 못했다. 그리고 코구멍만한 셋방살이에 끼울 렴치도 형편도 못되였다. 비록 마음에 싶던 둘째네 집으로 오긴 했으나 고분이할머니의 눈물은 더욱 많아지였다. 밥상에 오른 닭알을 보고도 목이 칵! 메고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하여 밥상에 마주 앉았다가도 그대로 물러나기도 했다. 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비감을 억제 못하니 둘째는 위안하던데로부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고 그다음은 싫증을 내며 때로는 어머니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물론 다른 자식들도 어머니의 눈물을 좋다고 한것은 아니다. 안해가 어머니 심정을 리해 하라고, 리해하면 될거 아니냐고 수차 권고해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자기와도 신경질을 벌컥 벌컥 썼다. 안해는 워낙 듬직한 성미여서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몸도 불편할때가 자주 있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등한하고 시어머니는 극진히 진심으로 보살폈다. 그가 이렇게 한것은 천성도 관계가 있겠지만 수양과 품덕 때문이였을 것이다. 둘째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진정어린 정성이 보람이 있었는지, 시어머니는 우정 상탄에 가서 단오날 아침에 익모초를 베여다 고약을 한단지나 만들어 며느리를 먹였다. 그러기를 련속2년후 그는 임신에 성공하여 아들을 낳았다. 시어머니가 기특하고 장하다고 칭찬하니 그는 어머니 덕분이라며 감사해 하였다. 둘째며느리는 아이가 소학교에 다닐때쯤부터 고혈압과 관심병으로 앓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몹시 고통스러워 했다. 그사이 다섯째 아들은 단위가 파산되여 곤경에 처했는데 이악스런 며느리는 매일 남편과 바가지를 긁으며 싸움질을 하여 대드니 끝내는 리혼 하고야 말았다. 얼마후 다섯째는 심수시에 가서 한국기업에 들어갔는데 그만 교통사고로 죽었다. 얼마후에는 막내사위가 술을 먹고 삼륜을 몰다가 길아래 웅덩이에 처 박으며 죽었다. 딸은 그후 한국으로 시집을 갔다. 불상사가 거듭생기자 사회에서는 늙은이가 오래 사는것이 일이 아니라는둥, 좋지않다는둥 하며 고분이할머니를 빗대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어는 늙은이는 일찌감치 죽는것이 복이라고 꺼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러면, 자기들은 환갑이 지나면 곧 죽을텐가?! 둘째며느리가 자주 앓자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시에는 세 아들과 세 며느리들은 양로원에 가는것을 매우 체면이 깎기는 일로 생각하였다. 자식들이 뗑! 하고 하늘에 올라붙자 고분이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령감의 림종시 부탁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든 것이다. 고분이할머니는 죽을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처신을 하면 자식들의 얼굴이 무엇으로 되겠는가! 그는 죽을수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넷째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가장 합당하였다. 그런데 넷째는 안해를 설복할 재간이 없었다. 둘째며느리는 심장병으로 앓으면서도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고집하였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남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셋째며느리가 자진해서 시어머니룰 모셔 갔다. 그는 자기가 끝까지 모시겠다고 결심을 내렸든 것이다. 작고 낡은 려행가방을 들고 시어머니가 보따리를 든 셋째며느리를 따라 택시 타러 나갈때 둘째며느리는 따라나가며 눈물이 핑 돌아 하였다. 그는 시어머니 손을 꼭 잡고 “며칠후 좀 낳으면 모시러 가겠어요. 그간 무사히 계세요.”하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구천으로 갈 줄이야!... 고분이할머니는 돌째며느리와 16년을 함께 살았다. 시고부가 16년을 하루같이 화목하게 살게된 비결은 며느리가 “리해, 존경, 관심”을 좌우명으로 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번의 표창대회에서 둘째며느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로인을 좋아할 젊은이는 없을 겁니다. 더욱히 사랑한다는 거창한 말을 나는 믿지 않아요. 그러나 리해하고, 존경하고, 관심한다는 말은 승인 합니다. 그렇게 하는 며느리들이 많지요. 나도 그렇게 하기 위하여 노력 합니다. 사람은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지요. 정말 그런것 같아요. 어느 의사와 자문해 봤는데 정말 그렇대요. 우리도 그 자연법칙을 어길수 없대요. 로인님들의 정상적인 거동은 맑은정신이 지배한 거고 실수, 착오는 흐린정신 때문이죠. 이런 분들과 우리 젊은사람들이 좋으니 궂으니 무슨 시비를 합니까!... 그분들은 우리를 사랑 했습니다. 그의들의 로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오늘이 있는게 아닙니까. 부모님을 포함해서 선인들의 은덕을 다 보답할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그럴 겁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로인님들의 여생을 책임지고 자기 나름껏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수는 있어요.” 그의 발언은 회장에서 오래동안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 뜨락의 나무밑 걸상에 앉아서 저 멀리에 있는 시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식사시간도 잊고 눈물을 흘리기가 일수였다. 처음몇번은 복무원들이 알은체를하며 동정의 말도 몇마디 하던것이 얼마후부터는 “밥 먹어요!” 하고 꽥 소리치고는 관계치 않았다. 오늘도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 뜨락의 나무밑 걸상에 앉아서 저 멀리에 있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그곳 서쪽하늘에는 저녘노을이 곱게 피여 있었다.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또 주루루 흘러 내렸다… 지금 그는 가장 큰 소원이 자식들에게 더는 별 탈이 없을것과 자기가 하루빨리 령감곁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말은 그렇게 해도 자손들이 번창하며 잘되는것을 오래오래 보고싶은 것이 사실은 진솔한 마음이다. 양로원이 어떠어떠하게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말들은 잘해도 그것은 삼자들이 하는 말이고 그의 경우에는 절대로 그것이 아니였다. 고분이할머니에게 있어서 양로원은 부득이한 선택이였다.    고분이할머니와 같은 세대들은 삼대 사대… 손군들을 눈앞에 보며, 만지며, 정으로, 오래오래 사는것이 인생 최대의 락이다. 그리고 간절한 바람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인생이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 어쩌라 설교를 하지만 고분이할머니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생명의 본능적인 욕망도 욕망이겠지만 후대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너무도 절절했든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그어떤 보답같은것을 바라는 마음은 조금치도 없었다. 시체말로 “대공무사”라고 할가, 자신의 일체를 깡그리 자손들에게 바친, 바치는 고분이할머니 였다. 어른들의 마음은 모두 그렇다. 그런이들을 후손들이 어찌 효도치 않겠는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세상보다 넓은것이, 해님보다 더 따뜻한것이 천하 부모님들의 자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다!… 힘으로 안되면 마음으로라도 자손들을 생각는것이(돕자는 것이) 로인들의 유일무이한 마음이다… 고분이할머니의 마음은 그랬다.ㅡ                                                                                                                09.6
136    이주민 문제 댓글:  조회:948  추천:0  2019-05-14
      실화                                           이주민문제                                                                                                         회령 광복이 된 이듬해 봄 우리집은 조선 회령으로부터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연변땅 샘물깨로 두만강을 건너 왔다. 샘물깨 뒤마을 하강은 아버지의 고향이다. 두 마을은 시내물을 사이로 2리가량 떨어져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0년 거이 조선에서 헤매며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잔치후 그들은 이불보따리 하나를 메고 조선으로 건너갔다. 샘물깨나 하강에서 소작살이를 살기보다는 대처에 가면 살기가 나으리라 생각하고 두만강을 건너 갔는데 정작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조선 회령시가지 였다. 거기에는 셋째형님네가 살고 있엇다. 아버지는 형님이 꾸리는 야장간에서 일하다가 그것이 신통치 않아 얼마후부터는 온돌쟁이 건축공사장 하천제방공사 제지공장원목운반… 등 각종 품팔이 로동을 하였다. 아버지는 눈썰미가 있고 손재간이 좋아서 무슨일이나 한번 보면 깐지게 따라하였다. 어머니도 삯빨래 정미소일 자갈치기 물고기장사… 마른일 젖은일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그날벌어 그날을 겨우 살아가는 최하층 빈민생활을 면할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련이어 아이를 둘이나 잃고 빚은 잔뜩 커졌다. 어머니는 몹시 허약해 졌다. 그러나 절인 물고기를 이고 농촌마을로 돌며 쌀이며 콩 지어는 감자 강냉이를 바꾸어 나갈때도 올때도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다니는 일은 너무도 고되였다. 어머니 정수리머리는 그래서 많이 빠졌다. 하는일이 어느것 하나 쉬운일이 없었으나 살려니 악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내위로 태여난 두 딸애는 돐전에 잃고 세번째로 태여난 나도 힘들게 자랐다. 처음에는 잿불에 오른쪽 발을 뭉텅 데여 몇달을 어머니 등에 업혀 지냈다. 그후 어느날 어머니가 왜놈순사집에 빨래를 가서 나를 눕혀 놓고 일하는데 내가 깨여 우니까 순사네 아이가 부저가락으로 나의 목을 마구 지져 놓은것이다. 순사녀편네는 일하려 다니면서 아이는 왜서 업고 다니냐고 자기사 바로 왜장독장을 치며 1원을 주며 어머니를 쫓았다. 그후 서너달 어머니는 밤이고 낮이고 나를 업어 달래며 겨우 목이 아물게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는 명이 길어 살았다고 여러번 말했지만 그게 어디 명이길어 산것인가?! 어머니 잔등과 눈물과 땀물이 나를 살린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힘드는 세상으로 굴러가고(왜놈들이 최후발악을 하던때다.) 아버지는 청진에 가서 고기배를 타면 벌이가 좋다해서 고기배를 탔는데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후 그일을 그만두었다. 그때 어머니는 선주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아주 종취급을 당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무산철광이 벌이가 괜찮다고 해서 무산철광으로 갔다. 거기서 광석을 캐기도 하고 구루마(광차)를 밀기도 했는데 그곳이 곧 전쟁판으로 된다고 해서 다시 회령으로 돌아 왔다. 회령에 온후 이일 저일 품팔이를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이 조선사람에게 광명과 기쁨을 가져다 준것은 두말할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갑자기 터진 사변은 사회가 혼란하게 했고 생활이 무척 어렵게 했다. 두어달이 지나며 회령시가지도 인민위원회가 사회를 관리하게 되였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전보다 더 험악했다. 아버지는 요행 회령역에서 일자리를 찿았는데 그것은 기차기관고에서 잡일을 하는것이였다. 일을 하면 배급쌀을 그날그날 받아 때를 넘기군하며 어려운 살림을 하는데 이듬해 봄 어머니 큰동생이 우리를 데리려 왔다. 샘물깨는 이제는 소작살이도 할만하게 정책이 좋아지고 명년에는 토지개혁을 한다는데 샘물깨로 가자는 것이였다. 샘물깨는 두만강변에 앉은 비교적 큰 마을이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짛고 살았는데 부농은 한집이고 중농이 댓집이 되였다. 남어지는 소작농 반소작농들이 였다. 마을은 대체로 화목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은 대여섯호가 되였는데 그들로는 허씨네가 너덧집이 되고 그들의 친척들인 신가와 김가네 두집이였다. 허씨네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도둑질을 하거나 싸움질을 자주 해서 마을 인심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녕악스러 웠다. 광복이 된 해는 갈팡질팡 어리둥절 지나가고 46년도부터는 중국공산당세력이(민 주대동맹) 연변을 장악하였다. 샘물깨에는 공유지 등 왜놈과 그 주구들의 땅과 재산이 없기에 청산이요 분배요 할것이 없었다. 우리는 우선 외가집의 헌 사랑채에 있으면서 외가집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남들이 버린 황무지뙈기를 더 다루었다. 하반년이 되면서 마을에는 토개공작대(토지개혁공작대)간부가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샘물깨를 맡았다는 간부는 서른살쯤 되여보이는 최씨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최대장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때로는 목갑총을 메고 오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료해를 했는지 처음부터 허씨네와 손을 잡았다. 얼마후에는 빈고농협회를 내오고 허덕근을 주임으로 그의 삼촌 허문순, 사촌매부 신흥칠을 부주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근의 처 사팔뜨기 배씨를 부녀반 반장이라 했는데 최씨는 그와 간통을 하였다. 배씨는 동글납작한것이 꽤 자색이 있었는데 특히 그 사팔뜨기눈을 할기죽거릴때는 아양을 떠는것 같았고 유혹적이 였다. 마을의 “생살권”을 틀어쥔 허씨네는 기탄없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협회간부들이 마을을 위하여 수고를 한다며 이집 저집을 다니며 추렴새를 걷우기도 했는데 이런 심부름은 김씨네 아들들을 시켜먹었다. 김씨네는 아들이 4형제였는데 풍을 맞은 홀애비가 맨봉당에서 짚거적을 깔고 사시장철 누워 있었다. 아이들인 그들 4형제는 추렴심부름을 시키면 성수나서 뛰여 다녔다. 한밥 잘 얻어먹는것이 성수났고 찌꺼기를 가져다 아버지에게 대접하는것이 더없이 자랑스러 웠다. 마을사람들은 그애들이 드달겨 와서 쌀을 내라거나 콩이거나 닭을 내라거나 두부나 떡을 하라면 군소리를 한마디 못하고 대령하였다. 그애들의 뒤에는 우락부락하는 협회간부들이 있었고 더욱히는 목갑총을 멘 최대장이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추석이였다. 밤에 마을사람들은 우리외가집 마당에서 오락을 하였다. 추석달이 둥글 떠서 오락이 흥겹게 무르익어 가는데 최대장이 난데없이 목갑총을 련속 두방이나 냅다 갈기엿다. 막걸리 사발이나 들이 켠 그는 흥이 솟구쳤든 것이다. 바로 문앞에서 천지가 터지는듯한 총소리가 울리자 기진맥진해 구들에 누워 있던 우리어머니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류산으로 피못에 쓰러졌다. 그날밤 우리어머 니는 사경을 헤매다가 그래도 겨우 복색해 났다. 이일은 인차 여러가지 소문으로 원근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우리집과 외가집, 그리고 친척들은 여기에 대하여 일체 말을 삼갔다. 그해 가을후 마을빈고농협회에서는 연변전원공서의 지시에 따라 이주민모집사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토지개혁준비도 은근히 하였다. 빈고농협회간부 대여섯은 공작대 최씨와 짜고들어 마을에서 살림꼴이나 잡고 사는 집들을 이짬에 몽땅 털어 먹을 작정이였다. 훗날 얘기지만, 이듬해 봄 청산과실과 토지를 분배할때 허덕근네들은 최씨를 끼고 마음대로 행패를 하였다. 좋은물건, 좋은밭은 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정책이고 뭐고 욕심나고 눈에 드는것이 있으면 청산이라며 빼앗아 가졌다. 말그대로 허씨네 천하였다. 이런 무법천지가 있을수 있는가?! 만약 광복이 금방 났을때쯤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지금이 어느땐가?! 공부를 한 중농집 자식들과 세상물정에 눈이 뜨기 시작한 마을사람들의 반발로 최씨와 허덕근네 빈고농협회는 그간의 모든비행이 몽땅 철저히 적발 폭로 되였다. 현과 구의 공작대에서는 이 사건을 고도로 중시하고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여 엄정한 처리를 하였다. 이주민모집사업을 하게된것은, 당시 연변의 조선족마을들의 실정을 보면 토지는 적고 분배받아야 할 인구는 많아서 사람을 줄여야겠다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판단한 것이다. 그때 마침 돈화현과 액목현에 일본개척민들이 버리고 간 밭이 많다고 전원공 서에서는 불확실한 정보를 믿었든 것이다. 이주민모집은 46년 겨울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였다. 모집을 나온 간부는 마치도 자기가 거기서 사는듯 혀가 돌아가는 대로 황통을 불어댔다. 그의 임무는 이주민을 한집이라도 더 끌어 모으는 것이고 거기에 따라 그의 성적이 결정 되였던 것이다. 시꺼먼 부식토에 발이 푹푹 빠지는 황무지가 무진장하고 감자는 사발통 같고 무우는 베개 같은데 강냉이는 방치같고 조이삭은 황둥개꼬리 같다는둥 노루와 꿩이 저절로 가마에 뛰여들고 냇물에는 가재며 조개며 물고기가 우글우글 하다고 하였다. 일본새끼들이 그게 여간만 요사하고 녕악스러운 놈들인가?! 좋은것은 제놈들이 다 빼앗아 차지하고 우쭐렁 대다가 망하니까 하루밤새에 다 팽개치고 똥줄이 빠지게 도망을 쳤지. ㅎㅎㅎ. 이제 우리가 누가 먼저 가면 누가 먼저 마음껏 문전옥답을 가지게 되는거다… 공작대가 련며칠 회의를 불러놓고 옛말을 하듯 구수하게 불어넣었으나 이주민에 가겠다고 자원하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이주민모집은 자원원칙하에서 본지에 온지가 3년이 되지않는 집들을 주로 동원하라고 하였다. 자원이 없자 이주민공작대는 울상이 되였다. 그는 최씨와 허덕근의 빈고농협회에 술잔을 사며 매달렸다. 그들은 샘물깨로 온지 3년이 되지않은 우리집과 류인산네를(똥돌이네) 대상으로 잡고 공략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똥돌이네는 길림어데서 살다가 광복이 되니 강원도 철원산골에 있는 고향으로 간다고 떠난것이 샘물깨로 두만강 옆에까지 와서 주저앉은 것이다. 그들 네식솔은 걸어서 길을 떠났는데 품팔이를 하며 오다보니 46년봄에야 샘물깨에 도달했든 것이다. 똥돌이와 개똥네는 아직 어리고 안해는 앓으며 기여오다싶히 했는데 이젠 더 걸을 맥이 없었든 것이다. 류인산은 앞날을 기약하며 강건너 조선산을 바라보며 한탄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샘물깨에서는 우리아버지와 류인산을 초과할만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우선 세상을 돌아다닌 경력이 남다르고 풍부했다. 그만큼 아는것이 많았다. 최씨와 허덕근네 일파는 나의 아버지를 불러다 닥달을 하는데, 조선서 무슨일을 하고 살았는지? 왜놈들과 어떤 사이였는지? 아주 무슨 정치문제나 있는듯히 걸고 들었다. 류인산도 국민당구역에서 왔는데, 광복전이나 광복후나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였다. 한편 부녀반의 배씨는 마을의 녀자들을 다 끌어 모으고 나의 어머니와 똥돌의 어머니를 투쟁하기 시작했다. 추석후부터 나의 어머니는 아주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배씨는 기어코 나의 어머니를 끌어다 투쟁을 하였다. 죄장은 공작대를 공격했다는 것이였다. 련며칠 터무니 없는 악다구니에 나의 어머니는 쓰러지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였는데도 배씨는 사람들을 우리집에 끌고와서 어머니를 단지고음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이주민으로 가겠는가고 대답을 강박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꼴을 보니 허덕근네 등쌀에 괄시와 행패를 당하기 보다 아예 이주민으로 가는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집이 이주민으로 가겠다고 하니 모든것이 조용해 지었다. 똥돌이 어머니는 남편과 같이 “의문점”으로 끝없는 닥달을 받았다. 끝내 류인산도 이주민을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47년도 2월 우리와 똥돌이네는 이주민으로 떠났다. 우리는 소수레 두대를 빌어가지고(한대는 외가집것) 큰외삼촌과 이웃집 사람을 데리고 룡정으로 떠났다. 룡정에서 기차를 타고 돈화로 떠나면 수레는 그들이 가져와야 했다. 100여리 먼길을 당날로 가기위하여 우리는 아침 일찍히 길을 떠났다. 그날은 시퍼런 날씨가 삭풍이 몰아치며 진눈개비까지 휘뿌리며 몹시도 을씨년 스러웠다. 그래도 마을사람들은 동구밖 멀리까지 우리를 바래주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거이 10여리를 따라왔다. 우리나 똥돌이네나 무슨 이사짐이란게 별로 없었다. 누더기 이불보퉁이 외에 말그대로 바가지짝이나 있고 수레에는 어머니와 아이들이 앉아도 자리가 헐렁했다. 허덕근네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거기로 가면 정부에서 집이며 량식이며 뭐나 다 마련해 준다는 것이였다. 그저 길에서 먹을것과 차비나 가지면 된다며 우리의 이사짐을 은근히 살피였다. 우리가 십여리 잘 갔을때 길옆 바위밑에서 장정 대여섯이 뛰쳐나왔다. 허덕근을 비롯해서 허문순, 신흥칠 그리고 김씨네 아이들이 였다. 그들은 우리의 짐을 규정에 어긋나는것이 없는지, 검사를 해야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쌀자루며 보따리를 들추고 수레에 깐 북데기밑까지 들추었다. 두집길량식이 이만하면 넉근하다고 하면서 쌀자루와 콩자루 등 량식을 빼앗고 사발과 숟가락도 몇개를 빼앗는것이였다. 지어는 마을사람들이 준 떡덩이며 삶은 닭알까지도 갈라냈다. 신흥칠이는 닭알을 통채로 누런입안에 넣고는 히물거리기 까지 하였다. 저들의 눈에 드는건 다 빼앗은 그들은 우리를 가라고 하였다. 이주민으로 가서 우리가 겪은 피눈물의 곡절을 여기서 대충 말하자 해도 소설책 하나는 될 것이다. 귀납해서 간단히 소개한다면 당시 돈화나 액목현에서는 왜서인지 이주민들을 전부 무인지경 산골에 안배를 했다는 것이다 일본개척민들이 살던 고장에는 조선족 이주민을 한명도 넣지 않았다. 산골이라 해도 화전을 뚜질만한 땅뙈기가 있으면 그대로 눌러 앉겠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도저히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이 아니였다. 하여 이주민들은 저절로 살곳을 찿아 이리저리 떠나가 버렸다. 우리아버지는 이주민패를 데리고 돈화쪽으로 되 나오며 마을터를 잡았다… 훗날, 연변전원공서 부전원을 했든 문정일씨는 “우리가 조직한 이주민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가슴 아프게 회고를 하였다. 우리가 잡은 마을은 명당이였는지 지금도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 우리집은 어머니가 자꾸 앓으며 샘물깨로 나가자고 하여 53년봄에 샘물깨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왔을 때는 초급사 시절인데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다만, 허덕근이가 심화병에 결핵까지 덮쳐 죽고 배씨는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후60년대 초 까지 첯빈고농협회간부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후손들도 그후 다 망하고 말았다. 샘물깨 사람들은 그때 옛말을 두고두고 하면서 사람이란 량심을 바로 써야 한다고 후대들에게 말한다.                                                                                                                 95.7(을해)
135    재수없은 재수 댓글:  조회:1089  추천:0  2019-03-02
     실화                                           재수가 없은 재수                                                                                                             회령   일전에 우리부부는 혼례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다. 우리는 신부측 하객이였는데 신부는 안해의 11촌조카 였다. 지금세월은 생활절주가 긴장하고 빨라서 그리고 계산적으로 살다보니 40여년전보다 인정이 많이 엷어 졌다. 친척도 5촌까지 꼽으면 법도와 례문이 있는 화목한 가문이라고 칭찬을 한다. 지금은 말할것도 없지만 옛날에도 8촌, 9촌이라하면 대체로 타남으로 여겼다. 하지만 우리가 11촌조카의 잔치에 먼 길, 교통불편도 헤아리지 않고 참석하게 된데는 특별히 깊은 정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이 중간쯤 되였을 때다. 7월 어느날 밤이다. 2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사는 안해의 9촌숙모가 갑자기 우리집으로 찿아 왔다. 9촌숙모는 어질디 어진 산골 아낙네인데 40푼하다. 그는 땀에 눈물범벅이 되여 두서없는 설분을 한바탕 발괄하였다. 자다 깬 우리부부는 자초지종을 반복해서 물어서야 상황을 알수 있었다. 안해의 9촌숙부벌이 되는 어른은 대대서기 겸 혁명위원회주임이였다. 그런데, 그는 젊은오끼(로망)를 쓰고 말았든 것이다. 40푼한 9촌숙은 사람이 워낙 약삭빠르고 해박스럽고 날파람이 있었다. 공부는 비록 잘하지 못했지만 아이때부터 똑똑하다고 칭찬을 들었고 해마다 공사(향)운동대회 때는 대대(촌)축구대 선수였으며 교련이 였다. 문화대혁명이 갑자기 터지자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얼떨떨 해서 멍해 있는데, 9촌숙만은 “홍소병”(소학생) “홍위병”(초중애들)애들과 섭쓸려 다니며 혁명을 하느라고 전 공사를 뛰여 다녔다. 그 꼬락서니가 마치도 열중의 무리에 끼운 게사니 같다고 사람들은 웃었지만 얼마 안 가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 될줄을 몰랐다. 그는 공사반란패두목이 되여 생산대(촌민소조)대장으로부터 공사당위서기, 사장에 이르기까 지 간부명색을 띈 사람이기만 하면 우선 뚜드려 부셧는데,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걸어놓고 계속 파며 뚜드리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입에서 한마디만 떨어지면 결판이 났다. 여북하면 아무깨가 왔다 하면 우는애도 그쳤다고 했겠는가… 그는 승승장구 하여 “토구납신”(낡은것은 토해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인다)할때 입당을 하였다. 그리고 대대서기, 혁명위원회주임으로, 공사혁명위원회부주임으로 벼슬도 하였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가 호사다마라고 할가 개별적 사람들이 극히 비밀적으로 뒤에서 그에게 비람기가 있다고 하였다. 아무 부녀대장이, 아무 부녀주임이 “피둬”(비 판두쟁)판에서 해방을 받은것은 궁둥이 효과라느니, 어느 각시가 공소합작사(상점)에 영업원으로 들어 간 것은, 어느 처녀가 민반교원으로 된 것은 지어는 누가 대대위생소 접생원, 호사로 된 것도 무슨일이 있은것으로, 본것처럼 구설이 돌았다. 하지만, 불거진 말썽은 별로 없이 9촌숙은 서기와 주임을 떳떳히 해 먹고 있었다. 그러는 중 약 보름전이다. 9촌숙과 뒷마을 부녀대장이 환한 대낮에 조밭에서 간통을 하다가 마을사람들에게 들킨 것이다. 그날 오후, 오쟁이를 진 사내 형제들이 9촌숙과 그의집을 들부셔 놓았다. 이튿날 새벽 9촌숙과 부녀대장은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3일후 그들은 조선으로부터 압송되여 돌아 왔는데, 현공안국에서는 심문을 해 보니 정치건은 아니고 작풍문제로 인민내부모순이 였다. 그런데 수정주의 로 달아난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반혁명, 판국(반역)죄”라고 하기는 어려웠다.(보수패라면 사정은 꼭 달라진다.) 그리고 사건담당자들은 반란패들로서 9촌숙과 이미 친한 사이들이 였다. 하여 본 대대에서 적당히 비평교육을 하라며 집으로 돌려 보냈다. 여기까지는 우리도 잘 아는 것이다. 우리는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여서 하회에 대하여 신경을 끄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말이냐?! 숙모의 말을 듣고 우리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숙모의 말에서 보면, 적당히 하라던 비평교육은 말그대로 모든개매질인데 한개 생산대에서 2, 3일씩 몽둥이 닥달을 하는데 세번째 생산대로 넘겨졌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였다! 문제의 부녀대장은 원래 바람쟁이여서 자기마을에도, 이웃마을에 도 주전부리가 많았다. 두 바람쟁이는 간곳마다에서 이빨을 갈며 벼르는 피해자들을 만났다. 하다보니 그들은 머리는 언녕 가새질로 개뜯어먹개가 되였고 고깔에 개패에 헌 왕바신, 고무코신을 목에 걸고 바람 쓴 경과지사를 자백해야 했고 다른것도 다 몽땅 탄백하라는 몽둥이닥달찜질을 당했다. 세번째로 간 생산대에서는 오늘 보리저녘켠에 어린청년 둘을 숙모네 집에 심부름을 보내여 사람이 죽었으니 당장 주검을 가져 가라는 것이였다. 강에 빠져 자살한것을 오늘 점심후에 시체를 찿았다는 것이였다. 숙모는 마을에서 궂은일에 도움을 잘하는 이웃집 로인에게 청을 들었다. 로인은 한참 생각하다가 “죽은사람을 미워할수야 없지…”하고 말하며 대장을 찿아가 수레를 얻어 왔다. 숙모는 마을의 로인 두분과 함께 7,8리 먼 이웃 생산대 강변으로 가서 거적대기를 덮어 놓은 남편의 시체를 실어 왔다. 그리고 우리집으로 달려 왔는데, 그가 볼바에는 남편의 죽음에 의문점이 너무도 많았든 것이다. 9촌숙은 문화대혁명 시작부터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지어는 증오하는 일만 골라가며 했다. 그가 “혁명적 반란파”라며 “혁명적 맹장”이라며 기를 쓰고 밤낮 뛰여다니며 한 소위 “혁명적 행동”이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산골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소학교와 초중학교 애들이 “네가지 낡은것을 짓부쉬고 네가지 새것을 수립”(사상 문화 풍속 습관)한다는 행동으로부터 시작을 하였다. 앞에서 말했지만 9촌숙은 병아리무리에 끼여 든 게사니처럼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네가지 타파와 수립에 부쩍 열을 냈다. 그는 공사내에 있는 전부의 상여막(다섯채)에 직접 몽땅 불을 질렀고 20여 집을 들춰 베감투, 상복, 병풍, 지어는 개다리소반까지 빼앗아서는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제사를 못하게 하고 아이돌생진, 결혼잔치를 못하게 파토를 쳐 놓은 “혁명적영웅적미담”도 여러건인데, 지금도 구전민요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남의 궂은일을 잘 돕는다는 그 로인네 모친초상도 9촌숙이 파토를 쳐 놓았다. 다음은 잡귀신을 투쟁하고 간부명색을 띈 사람은 덮어놓고 우선 닦아세우고 보는데, 9촌숙의 고비를 넘는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꼬리를 끊어버리는 대회전에서도 9촌숙은 “혁명적영웅적미담”을 여러건 창조하였다. 뜨락에 있는 과일나무를 찍어버린다든지 피우자고 심은 초담배를 포기수가 초과되였다고 뽑아 버리고 닭도 마리수가 초과되였다고 때려잡고… 하여튼, 9촌숙같은 “반란패맹장” 은 흔치 않았다. 그때 어느날, 나는 9촌숙에게 그를 생각해서 넌짓히 한마디를 권고 한 바가 있다. “혁명을 하는건 좋은데, 해야하는거지만… 군중들의 미음을 사기보다는 인심을 얻는게 더 좋지 않겠는가.”고 말했다가 부옇게 몰리우고 말았다. 그는 먼저 “혁명은 칭커츠판이 아니며 수놓이도 아니며…”란 모주석의 어록을 한단락 인용한 다음 나에게 훈계하기를 “강청동지를 따라야지 군중을 따라서는 우경착오, 로선착오를 범하기 쉬우니 특히 조심하라.”고 엄포를 놓은후 “너와만 하는 말인데, 지금 이 문화대혁명은 내가 산골 농사군 신세를 벗어메치고 출세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고 말하며 어데 가 외우지 말라고 재삼 당부를 하는것이 였다. 나는 입이 쓰거워서 더 말하지 않았다.    한쌍의 바람쟁이가 세번째 생산대로 끌려가서 피둬를 받는 두번째 날이다. 그날도 낮에는 집집의 변소를 치고 저녘후 “경과보고”와 탄백을 하며 란타를 맞은후 그들은 가둬두는 집으로 끌려 갔다. 그 생산대의 현임 정치대장은 9촌숙 못지않게 총명하고 문화대혁명 초발에 벌써 반란으로 일떠선 사람이였다. 그도 야심이 만만치 않은 맹장으로서 공사반란패 우두머리자리를 결정할 때도 그리고 그후의 혁명위원회 위원선거 경쟁에서도 그는 9촌숙의 뻐근한 적수 였다. 안달이 난 9촌숙은 악착스러운 한가지 꾀를 사용했다. 그는 정치대장이 집체호 모, 모 녀지식청년들과 애매한 관계라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린후 군중들의 반영을 들었다며 공사파출소와 현공안국에까지 익명밀고를 하였다. 하여, 정치대장은 여러번 조사를 받았고 큰문제는 없는것으로 두리뭉실, 미지근하게, 흐지부지하고 말았는데… 뀌면 쐈다고 하는 그때세월 이건 그의 명성에 먹칠이였고 똥칠로서 영향이 아주 컸다. 정치대장은 대개 9촌숙의 작간이라고 추측은 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심기가 불편하고 앙앙불락이였지만 뭘 어쩔수는 없었다. 옛말에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옛말과 같은 형국이 되였다. 그 생산대에도 9촌숙을 은근히 의심하는 사내들이 몇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잔뜩 벼르고 있는 그들을 정치대장은 의미심장하게 부추기기까지 하였다. 밤이 깊어가자 정치대장은 피둬대회를 그만하고 그들을 외딴집으로 데려갔다. 그집은 로인량주가 사는 집인데 마을에서 퍼그나 떨어져 작으마한 시냇물 가까이에 있었다. 정치대장은 의처증이 가득한 사람 둘을 데리고 밤을 지키기로 안배를 하였다. 로인량주는 요즘을 다른집에 가서 자게 되였다. 숙모는 그들이(정치대장네) 남편을 때려죽이고 강물에 처 놓었다는 것이였다. 숙모는 정치대장과 남편사이가 앙숙인 전후사정을 이미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남편의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가 흐물흐물한 것이 박살이 난것 같더라는 것이였다. 그뿐이 아니다. 조리돌림이 시작되는 첯날 그는 남편에게 새바지를 입게하고 새운동화를 신게 하였는데, 바지무릎과 엉덩이가 풀썩 다슬어 헐렁채가 되였더라는 것이였다. 운동화 앞코와 신등, 뒤축도 다슬어 구멍이 났더라고 하였다.(녀자의 시체는 찿지 못했다.) 듣고보니 9촌숙의 죽음이 이상스러웠다. 나는 세개공사의 법의를 겸하고 있었는데, 숙모를 데리고 파출소 소장을 찿아갔다. 소장은 현공안국에 즉시 보고를 하고 우리는 밤도와 현장으로 내려갔다. 이듵날 늦은아침켠에 현공안국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시체를 힐끔 보고 사진을 두어장 찍은후 정치대장네를 만나려 가면서 장례를 해도 된다고 하였다. 사체해부검사를 해야하지않는가고 내가 말하니 책임자는 필요없다고 하였다. 숙모가 왜서 이사람이 죽었는가고 물으니 책임자는 “자살”이라고 하면서 찌프를 타고 뿌르릉 떠나가 버렸다. 나는 숙모에게 장례를 하지말라고 이른후 점심을 먹고 떠나는 뻐스를 타고 현공안국으로 달려 갔다. 현공안국의 원래의 국장과 서기는 지금 모두 공안국 혁명위원의 령도로 복귀를 했는데, 나와 잘 아는 사이다. 그들은 나의 말을 자세히 들은후 즉각 현 법의와 형사조를 파견하였다. 우리는 찦차로 숙모네 집으로 달려왔다. 사체부검으로 명확히 타살이 판정되고 돌격적 조사가 진행되였다. 4일만에 안건은 결론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딴집으로 돌아온후 정치대장과 두 사내는 대대공소사(상점)에서 사 온 술을 마이며 “오늘밤 저새끼한테서 실토를 받아내자.”고 약조를 하였다. 그들이 받아내자고 하는 실토는 세가지 였는데, 하나는 정치대장을 지식청년처녀들과 작풍문제가 있다고 네놈이 꼬장을 하지않았는가? 하는 실토고 다른 두가지는 우리안까니와 잤는가 않잤는가? 그것에 대한 실토였다. 그들의 모진매질에 9촌숙은 세가지를 다 승인하고 더욱 죽을 매를 맞았는데, 그들이 부녀대장을 륜간한후 조금 지나 정말로 숨을 거두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들은 부녀대장도 머리를 쳐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남자는 끌고 나가 냇물에 던지고 녀자는 버들방천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들이 그렇게 처리를 한 것은 남자는 이미 머리를 많이 뚜드려 맞아댔기에 법의가 머리뼈가 부서진것을 밝힌대도 누구의 탓인지는 공안국에서 짚을수 없기에(모든개 물매니.) 자살로 쉽게 인정이 되리라 믿었고 녀자는 머리를 별로 맞은 사람이 아니여서 파묻어 흔적을 없앴던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 숙모는 여섯남매를 데리고 모진고생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항렬로 맏이인 큰딸은 아버지가 죽은 해에 명색이 고중을 졸업하고 그 다음의 큰아들은 초중졸업반이 였는데 모두 엄마와 함께 농사일을 시작 했다. 아래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9촌숙이 죽은 후 숙모는 자식들의 문제를 거이 우리와 의논하고 처리했는데, 결혼이며 승학이며 취직이며… 우리의 견해를 따랐다. 우리는 여러해를 있는힘껏 숙모네를 방조했다. 나는 “관계망”(뒷문치기)을 뚫어 킅딸은 소학교 민반교원으로, 큰아들은 공사공소사(중심상점) 보조회계로, 작은아들과 딸 하나는 공사림창과 량잠에 취직을 시켰다. 아래로 둘은 대학을 졸업한후 국가분배로 하나는 병원에, 하나는 공안국에 취직을 하였다. 숙모네는 우리의 관심과 방조를, 사실대로 말해서 일정하게 받은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숙모는 우리의 관심과 방조를 공으로 받기만 한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배급절반의 잡량을 자기네가 먹고 그만큼 우리에게 세량을 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토장과 간장을 담당해 주었고 땔나무까지도 해마다 두 세 수레를 해다 주었다. 인정이란 부모자식간에도, 형제자매간에도, 친척, 남과도 오고가며 주고받는 것이다. 여러해를 우리두집은 깊은 정을 쌓았다… 선량한 숙모는 일희일비의 눈물을 자주 씻었다. 출세를 한 여섯 남매를 볼때 그들의 아버지를 잊을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쉬운 심정은 정도부동하게 있었지만 한 사람도 그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안해의 9촌숙의 이름은 재수.)                                                                                                             18.12
134    졸업사진 댓글:  조회:2365  추천:0  2018-12-10
     수기                                                   졸업사진                                                                                                              회령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행복한 시절이 어느 시절인가? 사람마다 경력이 다르다보니 그시절이 서로 다를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청소년시절이 가장 귀중하고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는 견해를 동의할 것이다. 예로부터 청소년시절을 인생의 황금시절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시절에 인생의 기초를 딱기 때문이다. 인생은 물론이고 모든 일에서 제일 관건적이고 중대한 일이 기초공정이다. 나는 청소년시절을 고스란히 학창에서 보냈다.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선생님들은 나에게 인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었고 지식의 힘을 키워주었다. 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나의 학창시절은 나라적으로 수난의 년대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주석이 계셨기에 새중국이 성립되여 부모님들께는 살길이 열리고 나에게는 학교문이 열리였다. 이말은 누구에게 아첨하느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실지 사실이 그랬다. 나는 광복전에 아주 가난한 집에서 세상에 태여 났다. 내가 어릴때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위로 녀자애가 둘이 태여났댔는데 모두 돐이 되기전에 죽고 세번째로 내가 태여 났는데 순전히 명이 길어서 살아났다는 것이였다. 때는 왜놈들이 최후발악을 하던때여서 식민지 조선사람들의 생활이란 더 말할수 없이 극도로 비참하였다고 한다. 우리집 형편이란 어른들도 그날그날을 겨우 연명하며 허덕이는 상태였다. 하다보니 피덩이인 내가 살수 있으리라고는 부모님들부터 믿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이 된 이듬해 우리집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 연변땅 샘물깨로 왔다. 이곳은 어머니의 고향이고 시냇물 건너 뒷마을은 아버지의 고향마을이였다. 새중국은 우리집에 생의 광명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몸뿐인 우리는 다른집들 보다 훨씬 더 가난하였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미전부터 여러가지 신병으로 자주 앓기까지 했다. 다행인것은 아버지가 튼튼하고 내가 별탈없이 자라는 것이였다. 소학교졸업사진 나는 한쪽길이 6리나 되는 소학교를 부지런히 다니였다. 버들개지가 움틀때부터 서리가 하얗게 내릴때까지 나는 맨발바람으로 학교를 다니였다. 겨울에는 아버지가 틀어준 투세기(벼짚으로 버선처럼 만든 짚신)를 맨발에 신고 다녔다. 나는 공부를 잘 해서 소문이 났다. 작란은 심해도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해 들었고 집에 와서는 부모님들의 말씀을 잘들었다. 나는 반에서 첯번째로 소년선봉대에 들었고 반장을 줄곧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은 우리들에게 공부를 잘해서 크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늘 말하였다. 나는 공부를 잘하라는 말은 알수있었지만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사람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명심하였다. 어느덧 6년이 지나 우리는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졸업식은 전교적인 행사로 진행하였다. 하급생 대표가 축사를 한후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했는데 답사는 반주임인 한창옥선생님이 쓴것이고 내가 읽었다. 답사는 금후 더욱 많은 지식을 배워 훌륭한 사람으로 되겠다는것, 후배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며 학습에 노력하라는 등 내용이였다. 이어 우등생과 개근생(결석, 지각, 조퇴가 한번도 없는 학생.)에게 학교에서 등사기로 찍은 상장을 수여 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자주 앓아 결석이 많았기에 개근생은 못되고 최우등상장을 탔다. 마지막순은 교장선생님의 격려사가 있은후 “졸업가”노래를 불렀다. 1절은 “진리의 새학문을 터득하 고서…”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1절은 졸업생들이 부르고 2절은 “광활한 무대에서 잘싸워 주세요.”하고 재학생들이 불렀다. 졸업식이 끝나자 우리는 운동장에 나가 졸업사진을 찍었다. 사진사는 구정부 마을에서 왔는데 그는 세다리 사진기를 세워놓고 포대기 만한 검정보자기를 쓰고 사진기를 조절하느라 역사를 하였다. 사진기도 처음이고 찍는것도 처음인 나는 무척 긴장하고도 신기했다. 사진사는 움직이지 말라 눈을 깜빡거리지 말라 하며 찍는다 찍는다 하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해서 나무막대처럼 꼿꼿히 서 있었다. 학교에서는 졸업사진을 가질 사람은 30전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때 우리집에는 말그대로 1전한푼도 없었기에 나는 졸업사진을 살수 없었다. 나처럼 졸업사진을 사지못하는 동무가 몇이 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소학교졸업사진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과 도수높은 근시경을 걸었던 한창옥선생님의 모습은 나의 머리속에 지금도 빛나는 영상으로 새겨져 있다. 초중졸업사진 내가 다닌 초중학교는 구정부마을에 있었는데 우리집에서는 한쪽길이 25리였다, 나는 시험을 잘쳐서 중학교에 철썩 붙었다. 마을사람들이 “너, 중학교에 붙었다지! 이젠 중학생이 되였구나!”하고 칭찬을 하면 나는 입이 뻥긋해서 무척 좋아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못하는 동창들이 그때는 푸술했다. 그들은 열네댓에 호미자루를 쥐고 쇠궁둥이를 뚜드리는 팔자가 되였다. 학교길이 30리이상이 되는 동학들은 방법없이 구정부마을에서 하숙을 했지만 절대부분은 통학을 했다.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하고 어머니는 약한첩 쓰지못하고 지병으로 고생하셧다. 초중 3년간 나는 정심밥을 싸는법이 없었고 여름철에는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 당시, 나와같은 맨발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감발을 하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솜옷이며 털모자는 꿈도 꾸지못했다. 학교다닐때 제일 싫은 날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였다. 비옷이며 우산은 구경도 못하는 산골인지라 비만 오면 노배기로 비를 맞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나 책은 한번도 비에 젖지 않았다. 그것은 책가방을 해바라기잎이거나 호박잎으로 감쌌기때문이다. 왕복 50리를 3년이나 걸어다니며 공부를 한 나도 고생을 했겠지만 어머니는 나보다 더 모진 고생을 하였다. 어머니는 병환으로 운신을 못해도 나의 아침은 거르지 않았다. 닭이 첯홰를 울면 어머니는 일어나서 아침을 끓였다. 닭이 두번째홰를 치면 정신없이 자고있는 나를 깨웠다. 어느덧 3년이 지나 초중을 졸업하게 되였다. 졸업시 우리는 지망을 선택하게 되였는데, 나는 아무데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집형편이 더는 공부를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에서 춰서지 못했고 어머니 병환은 나날이 더 심해갔다. 나는 3년간 조학금을 받았기에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내가 지망선택을 하지 않으니 반주임인 윤영일선생님은 나와 세번이나 담화를 하며 나를 설복하였다. 선생님은 그어떤 곤난이 있어도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가고 앞으로 박사까지 꼭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님의 격려는 고맙고 감동적이 였지만 나는 접수할수 없었다. 내가 쿨쩍거리며 울자 선생님도 눈물을 씻었다. 며칠후, 아버지가 나에게 고중시험을 치라고 하였다. 그간 윤영일선생님이 향정부(당시는 인민공사 임.)와 대대(지금의 촌.) 생산대까지 령도를 찿아다니며 나의 전도를 토론했든 것이다. 토론결과 생산대에서는 나의 아버지를 겨울에는 삼도만목 재부업에 보내고 여름에는 두만강뗏목부업에 보내기로, 수입은 생산대에 량식대를 물고 남어지는 가정에서 쓰기로 했던것이다. 나는 어린가슴에도 파도같이 감격이 솟구치고 무한한 힘이 솟구치였다. 졸업하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1원20전을 주면서 졸업사진을 사고 남어지가 있으면 국밥 한그릇을(12전) 사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돈으로 동생에게 줄 그림책을 세개 사고 남어지 38전은 어머니에게 도로 드렸다. 나는 졸업사진을 사지 못했지만 훗날 미봉하리라 생각하며 별로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까지 초중때 졸업사진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고중에 수석으로 입학이 되자 통지서를 친히 가지고 우리집에까지 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고 격동하시던 윤영일선생님의 모습은 오늘도 생생하다. 고중졸업사진 고중에 간후 나는 일년 사계절 매일 신을 신고 다닐수 있게 되엿다. 나는 조학금을 받으며 학교숙사에서 하숙을 했다. 식당과 숙사조건은 매우 렬악했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호강이였다. 나는 방학이면 집에가서 닷새 이상을 놀지 않았다. 집으로 오갈때면 100여리 먼길을 꼭 걸어서 다니였다. 방학이면 역전이거나 공사장에 가서 품팔이를 하였고 3년동안 수건 한장 치솔 한대를 사용 하였다. 3년내 나는 음식점에 한번도 간적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삥궐이거나 사이다 한병을 사 먹은적이 없다. 학교에서는 우리들에게 정치사상교육을 심도있게 하였는데 나는 그때 공산주의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기본상 수립하게 되였다. 하여 공청단에도 가입했고 학생회 간부로 되기도 했으나 내가 명심하는건 첯째도 학습 둘째도 학습이였다. 나는 학습을 잘하여 좋은 대학에 가며 금후 박사가 되여 당과 국가와 인민의 은덕에 보답하며 고마운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였다. 고중 3년은 그야말로 번개같이 지나갔다. 나는 한푼이라도 아끼는 버릇때문에 1원50전을 팔면 되는 졸업사진을 사지 않았다. 그러면서 역시 훗날에 미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졸업사진을 미봉하지 못했다. 학교가 커서 선생님들도 많고 동창들도 많아선지 지금 기억되는 선생님과 동창이 얼마되지 않는다. 지어는 나에게 련애를 걸었던 녀동창이 누구던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청춘시절은 학습 한가지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후회됨은 하나도 없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참으로 보람이 있었고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고마운 순간이 였다. 대학졸업사진 나는 청화대학에 합격이 되였다. 그때의 심정을 지금도 무슨말로 형용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다. 기쁨으로 흥분되고 천사만사로 엉킨 무량한 감개는 일희일비의 눈물이 솟게 하였다. 당시의 정세는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감하고 붉은기가 숲을 이뤘지만 우리집은 더욱 쇠락했다. 어머니는 아주 병석에 눕고 아버지도 폴삭했다. 살림은 녀동생이 그나마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학교로 갔다. 경비는 마을사람들의 방조와 신용사 대출로 그래도 마련이 되였다. 나의 손에는 80여원의 돈이 있었다. 이른새벽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딱아드리고 괴나리 보짐을 메고 길을 떠났다. 150여리의 먼길을 단숨에 걸어 저녘켠에 연길에 대여 북경행 기차를 타게 되였다. 기차를 처음 타 본다. 차창으로 각일각 황혼이 짙어가는 마을들과 산천을 바라보는 나의 눈앞에는 아버지 어머니 어린 녀동생의 모습이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루루 눈물을 흘렸다. 나는 새삼스레 포부를 다지며 뜨거운 눈물을 딱았다. 그리고 보따리를 풀고 새벽에 어머니가 싸 준 보자기를 꺼냈다. 그것은 호박잎으로 싸 넣은 조개떡이 였다. 나는 그때에야 온하루 물 한모금도 먹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에서의 나의 대학시절은 더욱 오직 학습뿐이 였다. 내가 목숨을 다하여 해야 할 일은 이 학습뿐이라고 나는 인정했던 것이다. 나는 북경에서 4년을 청화원 밖을 몇번 나가지 않았다. 천안문광장에 두엇친구들과 함께 가서 사진을 한번 찍고 그 외에는 학교의 단체행사로 몇번 외출을 했다. 4년간 나는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자주 하고 사진을 몇장 보냈다. 청화대학에서 나는 입당을 했고 정말로 마음껏 공부를 했다. 졸업할 림박에 나는 공비생으로 일본류학을 가게 되였다. 그때 4년만에 피끗 집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내가 집에 도착 한 그날의 정경을 나는 여기서 더 써내려갈수 없다. 어머니는 14일 전에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던 것이다… 학교에 돌아온후 나는 참으로 슬픔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모든일에 관심도 흥취도 없었고 허탈했다. 졸업으로 분주하던 나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나는 수속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갔다. 졸업사진은 어떻게 되였는지 나는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여튼, 내손에 없는것만은 사실이다. 16년 세월을 일심정력으로 학습에 몰두하며 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사진이 한장도 없다는 것은 지금와서 볼때 섭섭한 일이고 유감이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은 자랑스럽다.                                                                                                                96.9
133    모성은 있어도 효성은 없다 댓글:  조회:1154  추천:0  2018-07-25
     수필                                      모성은 있어도 효성은 없다                                                                                                                   회령 일전에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마주 앉았는데 안해가 웃어대며 핸드폰을 내 밀었다. 이걸 보라며, 아주 재밋다는 것이였다. 나는 핸맹이여서 전화를 걸고 받고 할줄은 알지만 다른건 모른다. 그러다보니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거, 정신이 잘못됐군.’하고 측은하게 생각했는데, 꼭 그런건 아니였다. 나의 안해는 핸드폰 박사다. 상해 가서도 핸드폰으로 장을 보고 지하철을 타고… 손가락 한개로 사통팔달이 였다. 하여 나는 계발과 교육을 많이 받고 배우려고 결심 했다 그런데 지금도 유치원 정도여서 안해가 나를 많이 보살펴 주고 있다. 안해가 주는 핸드폰을 들여다 보니, 참으로 기막히게 재미 있는 록상이였다. 우리가 대학 다닐때 꼬량밥과 시래기국을 한데 담아서 먹던 대짜배기 고뿌와 똑 같은 고뿌에 욜(먹이)을 담아서 닭을 먹이는데 엄지로는 수탉 한마리와 암탉 한마리고 애기 주먹만한 노랑병아리 알록병아리가 십여마리 되였다. 그런데 재미 있는 화면으로는 병아리들은 키가 안되여 욜을 먹지 못하고 안달아 하는데, 암탉은 욜을 물어내서는 땅바닥에 놓아 병아리들이 먹게 하지 않는가?! 수탉은 고뿌에 주먹만한 대가리를 꾹 들이 박고는 그야말로 제정신 없이 욜을 먹어대고 있었다. 수탉의 가슴팍 밑에서 안달아 하던 서너마리 병아리들은 부성애에 실망하고 격분하고 어미곁으로 쪼르르 달려 갔다. 그놈들이 오자 암탉은 특별히 그들에게 욜을 물어 주었다. 수탉 곁에 있던 병아리들이 부성애에 실망하고 격분 했다는건 그들이 수탉의 종아리와 발을 쪼아놓고 엄마쪽으로 “기이”하는 행동에서 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탉은 부지런히 욜을 먹어대고 있었다. 암탉의 모성애는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병아리들은 뱅글뱅글 돌면서 어미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놈들의 거동도 너무 신통했다. 글쎄! 한입 먹은놈은 물러서고 다음놈이 먹고… 그러는게 아닌가?! 하, 고것 참!... 아이때 나도 우리집 마당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적이 있다. 그날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이 독수리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우리집 검정개(새끼를 낳은지 얼마간 됐었다.)도 합세를 해서 독수리를 물리쳤다. 우리는 웃으며 감탄하며 록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누가 제작한 작품인지 너무도 생동하고 진실하고 고상하고 예술적이고 흥미진진 하면서도 교육적이여서 참말 고맙고 감사했다. 짐승의 모성애도 숭고하지만 인간의 모성애는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위대하고 강렬하고 강대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에서 제일 선천적인 훌륭한 정이다. 나는 이전에는 녀성을 업신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녀성숭상주의자다. ㅎㅎㅎ. 그날 아침후에도 나와 안해는 록상에 대한 감상을 말하며 다시 보기도 했다. 그러던중 우리는 저도 모르게 북경서 목격한 한 사실을 회고하게 되였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도 충격적이 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들집에서 손녀애를 돌보고 있었다. 손녀애가 나서부터 고중갈때 까지 우리는 여러해를 북경에서 살았는데, 옆집 즉 이웃집은 절강에서 온 한족 장씨 였다. 장씨네는 형제자매가 여덟인데 상당한 부자인것 같았다. 호주인 장복은 아들로서는 막내고 항렬로는 여섯째라고 하였는데 아버지는 이미 작고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아이는 소학생 오누이가 있었다. 장복의 어머니는 성이 진씨 였다. 진씨도 우리처럼 “후근부장”이였다. 그는 여덟자식을 돌보며 “전근”해 다니다가 여섯째네가 곧 샛째를 낳게 되여 다시 여기로 “전근”해 왔다고 하였다. 풍더분한 로친네가 무던해 보였는데 나이는 우리보다 네살이 위 였다. 우리두집은 아주 화목하게 치우재를 (거래하다. 사귀다.) 하였다. 장복의 셋째아이(녀자애)가 네살 되던 해다. 초겨울인데 어느날 진씨가 풍을 일궈 풍대인민병원으로 실려 갔다. 병원에서 치료를 잘 했는지 아니면 본래 풍울 그정도로 맞았는지 진씨는 죽지 않고 두어달 후에 집으로 실려 왔다. 우리가 볼바에는 갈때나 지금이나 비슷한것 같았다. 진씨는 전혀 운신을 못했다. 장복은 이미 전탁보모를 구해놓고 있었다. 우리는 장복내외가 효성을 제대로 한다고 감탄하였다. 그해 음력설이다. 장복의 형제자매들이 우르르 륙속 모여 오는데 아이들 까지 20여명은 되는것 같았다. 장복이네는 집이 커서 우리집 방을 쓰라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여기서 요점만 말한다면, 후에 알았지만 그들이 어머니가 풍을 맞아 넉달이나 되여 이번에 처음으로 이렇게 모여 온 것은 부담문제를 담판하기 위해서 였다. 물론 어머니도 한번 보고 겸사겸사 해서 왔겠지. 3, 4일 지나니 모두가 돌아가는것 같았다. 어느날 장복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나간후 우리는 진씨를 보러 갔다. 집에는 발목을 접지른 큰애가 있었다. 보모가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진씨의 방에서는 악취가 정말 지독했다. 보모는 설쇠려 가고 장복은 어머니 시중을 건성으로 했는지… 우리는 모르는척 내버려 둘수는 없었다… 진씨는 풍을 맞았지만 정신만은 말짱 했는데, 그날 진씨는 아이처럼 여러번 흑! 흑! 흐느껴 울면서 신세 한탄을 끝없이 하였다. 듣지 않을수도 없고 듣자니 들을수록 기가 막히고 원통 하였다. 진씨부부는 산전수전 소갈데 말갈데 가리지 않고 년년생의 여덟자식을 키워냈다. 그들부부는 번갈아 가며 비렁뱅이업(거지)을 하고 지어는 바다로 나가 밀수를 하기도 하며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다하여 자식들을 키웠다고 하였다. 남편은 밀수길을 트자 거기에 열중하다가 그만 풍랑으로 죽었다. 아버지의 목숨으로 자식들은 한밑천씩 잡고 지금 살만하게 되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에 모여들어 계속 싸우다가 뿔뿔히 달아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장복은 어머니 생활비를 한달에 2천씩 공평하게 안자고 주장하고 형제자매들은 너네집에서 고역에 시달리다가 풍을 맞았으니 당연지사 두말할것 없이 네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몰아 부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법이며 원칙이며 인간의 도덕이며 도리며 량심이며… 많은 말들을 하며 밤낮 시비를 하고 싸우다가 헤여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풍을 맞았으면 제꺽 죽을게지 살아가지고서는… 그만 살았으면 잘 살았지… 하며 에미가 빨리 죽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시비가 없더라고 했다. 돌아갈때 자기를 들여다 본 자식은 손군들 까지도 한놈 없었다고 하였다. 자식들의 얼굴은 오든날 한번씩 보았지만 손군들은 보자고 불러도 방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끝내 귀여운 고것들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진씨는 “사람이 늙으면 곱다는 사람이 없다.”느니 “긴 병에는 효자가 없다.”느니 하며 자식들의 부담으로 되지말고 이젠 어서 죽었으면 제일 좋겠으나 셋째아들과 막내딸이 가슴에 걸린다고 하였다. 다른 자식들은 다 근심 걱정 되는것이 없으나 셋째는 상처하고 딸을 데리고 홀애비로 살고 있고 막내는 리혼하고 딸애와 함께 혼자 사는데 그것이 자꾸 가슴에 걸리며 아프다고 하였다. 우리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글의 제목에 “모성은 있어도 효성은 없다”고 한것은 진씨네를 두고 한 말이다. 세상 사람이 다 그런건 아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나의 장모님의 생신일이다. 이번 생신은 장모님이 95세가 되는 큰 경사여서 우리는 온 집 식구가 출동 하였다. 장모님의 생신은 그야말로 성대 하였다. 생신후 아들과 며느리는 사정으로 이틀후에 돌아가고 우리는 고향 연변에서 한달거이 더 놀았다. 북경으로 돌아갈때 우리는 장모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하며 큰절을 올렸다. 장모님은 우리 부부의 손을 잡고 끝내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떠날때 안해는 동생들에게 백당부를 하였다. 어머니가 편치 않으면 조금도 지체말고 즉시 전화를 하라고… 우리는 아버지 때도 그랬고 그래서 림종을 지켜 드릴수 있었다. 뱅기안에서 안해는 어머니의 옛말을 끝없이 하였다. 어떤것은 나도 잘 아는 것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감격이 느껴 졌다. 주정뱅이 시아버지와 풍을 맞은 시어머니를 16년을 하루같이 욕창 한번 없이 깨끗하게 모셧다는 장모님이시다. 안해의 형제자매는 모두 아홉인데, 안해가 맏이고 그들은 몽땅 출세(국가간부)를 했다. 그젯날 산골농촌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의 가시집은 마을에서 특등 가난뱅이 였지만 장모님은 “모범며느리”, “모범학부모”로 상장이 많았다. 내가 장인과 장모를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다고 감탄하니 안해는 동감을 하면서도 처연한 기색이였다. 그렇다. 장인님은 칠년전에 돌아가셨고 장모님의 년세는 백수에 가까우니… 로인님들의 일을 어찌 알랴. 그래서 안해는 처연한 심정인가 보다… 우리가 북경으로 돌아 와서 어느날이다. 복도에서 장복의 안해를 만났는데, 퍼퍼의 문안을 하였더니 그는 해짝 웃으며 “쓰라!”하였다.(69세) 우리는 더 긴말을 하지 않았다…                                                                                                                 18.6
132    추석때가 오면 댓글:  조회:1166  추천:0  2018-06-26
       수필                                                      추석때가 오면                                                                                                                    회령 지금은 추석이 즐거운 명절로 되여 있는것 같다. 추석은 고인의 묘소를 찿아 성묘를 하는것이 기본 행사인데… 즐겁다고 하면 좀 어페가 되는것 같다. 다른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일년치고 제일 슬픝때가 추석전후 10 여일이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부모생각을 할줄 알면 셈이 들었다고 하는데 나도 이젠 셈이 드는건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어머니에게도 이런저런 사연이 많다, 긴이야기는 훗날로 미루고 오늘은 한가지 이야기만 하고저 한다. 광복후, 우리집이 이주민으로 쫓겨가서 우마보다도 못한 모진고생을 하며 살던때의 일이다. 그날은 49년도, 추석을 닷새 앞둔 날이였다. 이미 한달거이 기진맥진하여 움막집 땅바닥에 잦아든듯 누외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논밭으로 나가 보자고 하였다. 어머니 곁에 무거운 시름에 겨워 지키고 앉아 있던 나는 너무도 신기하고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나의 어머니에게는 여러가지 신병이 있었는데, 그때는 물한모금도 마이지 못하며 계속 구역질을 하고 열물을 토하였다 토할것이 없을때는 헛구역질을 했는데 죽지않으면 사는가 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주민으로 간 그곳은 원근에 의원은 커녕 인가도 없었다. 어머니의 신체는 말그대로 겨릅대처럼 말랐고 심장병, 빈혈로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어머니가 심장병이며 모진 빈혈에 걸린것은 원통한 사연이 있는데, 그것을 다 말하기는 너무 길고 간단히 한마디 하려한다. 광복이듬해 우리가 조선서 샘물깨로 건너와서 외가집 사랑에서 살때다. 그해 추석날 밤 외가집 마당에서 마을사람들이 오락을 했는데, 우리집 바로 문앞에서 토개공작대 최씨가 목갑총을 두발 갈기였다. 천지가 터지는듯 한 총소리에 나의 어머니는 기절하며 류산을 하고 피못에 쓰러졌다. 그날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머니를 죽는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죽지않고 개복을 했다. 그날후부터 나의 어머니는 자주 하혈을 하며 심장병으로 고생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공작대 최씨때문에 생사람이 죽을번 했다며 여론이 많았는데 최씨와 그와 단짝인 허씨네 패거리들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공작대와 빈고농협회를 무함, 공격한다고 죄명을 씌우고 투쟁대회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주민정책이 내려오니 우리를 쫓았든 것이다… 썩 늦은아침때가 되여 어머니와 나는 논밭으로 나갔다. 논밭이란 손바닥만한, 아버지가 벼농사실험을 해 본다며 봄에 만든 것이다. 산종을 뿌린 논바닥은 허옇게 들여다 보이며 가느다란 벼대가 성기게 자랐다. 그래도 철이 철인지라 잠자리꼬리 같은 벼이삭이 맻혀 있었다. 어머니는 벼이삭 한개를 걲어 파리대가리만한 벼알을 조심히 뜯어 껍질을 벗기고 쌀알을 씹어 보더니 “됨즉 하구나.”하며 벼이삭을 꺽기 시작했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벼이삭을 꺽었다. 벼이삭을 하나 흘릴세라 다 꺽으니 까치둥우리 만큼은 잘 되였다. 나는 벼이삭 베보퉁이를 들고 어머니를 부축하며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이제 추석날 아침에 이밥을 해 주겠다며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였다. 그러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어깨를 감싸 짚기도 하며 천천히 걸었다. 나는 이밥을 하면 어머니가 혼자 다 잡숫게 하리라 다짐하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이밥 한술을 먹으면 살것같겠는데… 하고 여러번 말씀했기 때문이다. 마을앞에 이르자 어머니는 좀 쉬여가자며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차 옆으로 다리를 꼬부리고 누웠다. 나는 벼이삭 보퉁이를 어머니에게 제꺽 베워드렸다. 얼마후 어머니는 다리를 펴며 반듯히 누웠다. 어머니는 쉬는듯 마는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가 나를 부르며 “너는 이담에 큰 사람이 되거라.” 하고 상냥히 말씀하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였는데 나는 “큰 사람”이란 어떤사람인지 알둥말둥했으나 번마다 “예!”하고 힘차게 대답하였다. 내가 역시 “예!”하고 대답하며 어머니를 바라보니 어머니 눈굽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이마에는 구슬땀이 가득 돋아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눈물과 땀을 딱아 드렸는데 어머니의 이마는 얼음처럼 차거웠다. 얼마후 어머니는 눈을 뜨시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가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점없이 맑고 푸른 하늘은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 해는 어느덧 보리저녘때가 되였지만 어머니는 일어 날 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이대로 그냥 앉아있고 싶었다. 곰팡이 냄새 흙냄새가 나는 쯘쯘하고 어둑컴컴한 움막이 너무도 싫었든 것이다. 해가 너울너울 서산위에 걸리자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어머니 이젠 집으로 가요.”하고 말하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냥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이상해 보였다. 나는 더럭 섬찍해나서 어머니를 부르며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그날은 음력으로 8월10일이였다. 나의 어머니는 스물아홉의 짧은 한생을 이주민부락 동구밖 푸른잔디밭에서 마치셧다. 금년은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지 꼭 쉰돐이 되는해다.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며 다른사람의 슬픔을 위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문뜩문뜩 어머니가 더 자주 회상되고 그때마다 슬픈마음을 걷잡을수 없다…                                                                                                                1999.8
131    층집별명에 대한 고찰 댓글:  조회:1008  추천:0  2018-06-06
       잡문                                층집별명에 대한 고찰                                                                                                                   회령 제한된 좁은 땅을 더 잘 리용하기 위하여 발명창조해낸것이 층집이다. 사람의 머리수는 해마다 놀랍게 급증하지만 무소불위 무소불통 전지전능하다는 하느님께서 무슨 심술이 나서인지 땅덩이를 늘궈주지 않아서 인간들은 고심참담 끝에 장대기에 매여달린 잰내비처럼 층집을 짓고 사는것을 연구해 냈다. 오,륙십년전만해도 남의 땅을 빼앗으려고 행패질하며 발광하는 자들이 우글거렸 지만 지금은 그런 미친놈들이 많이 적어졌다. 지금 세상사람들은 화평, 진보, 평등, 번영을 공동의 목표로 지향하고 있다. 누가 만약 남을 해치기만 하면 즉시 유엔에 진정이 되고 국제재판으로 제재를 들이 댄다. 어느때라고… 대낮같이 밝고 개명한 세상천지에서 음특한 짓을 해 먹겠는가?! 그러나 층집마을에는 해괴한 짓거리들이 많다. 층집들에는 모두 이름이 붙어있다. 그것은 호상간에 서로 구별하며 소재를 밝히는데 편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번듯하게 이름이 있건만 별명이 붙어서 그것이 오히려 이름보다 더 사용되는 층집들이 많다. 세상에서 층집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 하다보니 자연히 층집이름도 많고 따라서 별명도 많다. 그 이름을 대충 살펴보면 어떤이름은 참으로 신통하게 사개가 맞게 잘 지어졌다. 이를테면 “승냥이”, “악어”, “안경사”, “해적”…같은 것들이다. 집주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달아 놓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주인들이 민주토론을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국제상에서는 이름을 아주 잘 지었다고 인정해 주고 사용한다. 별명은 따로 필요 없다고 한다.  "백악관”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악을 다 집중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지만 미국의 정치인들은 최대의 민주를 발휘하여 붙인 이 이름을 더없는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의 리해에 따르면 좋은일은 상관할것이 없지만 악행은 자기네가 주관, 독점한다는 것이다. 악행을 쥐고 마음대로 휘두르니 이 얼마나 신나고 드센가?! 이런 풀이다. 일본에도 층집이 상당수로 많은데 그 건축질량과 예슬은 세계 최상급 수준이다. 그런데 그렇게 호화로운 아파트며 맨션, 호텔빌딩에 “불여우”, “박쥐”, “악바리”, ”깔따귀”… 등 별명이 붙어있다. 이런 이름 혹은 별명으로 조명이 난 층집은 잘 팔린다. 그것은 일본사람들이 자기들 취미기호와 더욱히는 성미 본질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내지의 큰 도시들에서 괴상한 이름이거나 별명이 붙은 층집을 나는 보지못했다. 그러다가 얼마전에 사업차로 어떤 산골의 작은 진으로 갔댔는데 나는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 작은 진은 군수품공장이 들어 앉으면서 생긴것인데 공장은 중앙급으로 엄청 크고 진은 아담한 도시맛이 났다. 공장에서는 시가지에 살림집으로 층집을 많이 건축하였다. 그런데 층집마다 좋은 이름이 붙어 있었건만 당지의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전부가 별명으로 통용을 했는데 당지에서는 막힘이 없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외래객에게는 아주 곤난이 컸다. 나는 이런 신기한 현상에 호기심을 갖고 한달여 머무는 기간에 의식적으로 심입 된 고찰을 업여로 하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주택용 층집이 생겨난것은 70년대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형편없이 낡은양식의 층집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희한한 층집이였다. 그때는 집분배를 귀천을 따지지 않고 주택사정이 제일 곤난한 사람부터 집을 주었는데 비슷한 상황에서는 공령의 대소를 참조 하였다. 그런데 사람마다 공산주의 풍격을 발휘한데서 집을 주는것이 주지않는것보다 더 힘들었다. 창장 서기로부터 높고낮은 각급간부들, 당원들, 선진일군들은 아무리 권고해도 집을 가지려고 하지 않앗다. 말그대로 고생에는 앞장서고 향수에는 뒤에 섯다. 그때 지은 층집들에는 “웅덩개” (웅덩이를 메우고 지은 집) “서산”, “휴양소쑈뤄(小樓), 따뤄”등 지대에 따라 붙인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악의가 없었다. 공장에서는 80년대에도 살림용 층집을 많이 지었다. 그때의 층집들에도 별명이 있었는데 주인의 신분에 따라 붙인것으로 색다른것이 없었다. “교사뤄”, “병원뤄”, “부부뤄”, “투슈뤄”…등등이다. 그때까지도 집을 분배하거나 새집과 낡은집을 조절하거나 등등 일련의 문제들에서 처리가 공평합리하엿기에 불평불만이 없었다. “백악관”이거나 “불여우”, “악바리”, “깔따귀”같은 빗대고 풍자공격하거나 악의적으로 모욕한것 같은 흔적은 한점도 보이지 않았다. 90년대부터는, 정확히 89년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문제는 한두해 후이면 2선으로 물러나야할 창급간부들에게서 생기였다. 그것은 그들이 현재의 주택도 상당히 좋으면서 150평 이상이 되는 새호화주택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제배만 채운다.”느니 “게걸스레 먹는다.”느니 “해먹을 날이 많지않으니 발광을 한다.”느니…뒤통수에 줄욕을 달고 다니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것을 상관치 않았다. 손가락질이면 어떻고 줄욕이면 어떻고 층집은 번듯히 지어졌고 그들은 번듯히 이사를 했다. 사람들은 이 층집에 즉각 “멍츠뤄”라는 별명을 달아줬다. 상급에 반영이 올라갔지만 “그 급별에 그런 대우를 향수할수 있다. 실정에 좀 어긋나는 면이 있긴하나… 자태가 높았으면 좋았겠는데… 할수없지.” 이런 대답으로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군중들은 “국영은 벼락맞아 죽은 쇠고기여서 아래위가 모두 배터지게 먹었다.”고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멍츠뤄”가 2선으로 물러난후 생기발랄 패기가 넘치는 새로운 창급간부들이 올라 앉았다. 그들은 “우질산품을 가지고 세계로!”라는 거폭의 프랑카드를 공장과 거리에 내걸고 외국고찰이니 종, 횡유관부문과의 련계니 감정투자니… 하며 뻔질나게 뛰여다녔다. 마치도 천지개벽이 일어날듯 우뢰소리는 요란했으나 정작 비꼬치는 한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신임 창급간부들의 초호화주택이 번쩍 번쩍 일떠섯다. 서기의 아낙네가 자기 남편은 달마다 만여원씩 부수입을 둘여 온다고 가만히 자랑하니 창장녀편네는 자기남편은 다른단위에 돈을 물거나 빌려줄때 10프로의 “휘커”를 먹는다고, 그들은 혀를 홀랑거리며 해죽거렸다고 한다. “멍츠뤄”에는 “충성1호”라는 이름이 벽체에 영구불변으로 새겨져 있지만 사람들이 그걸 사용하지 않는것처럼 새 창장뤄에는 “충성2호”라는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층집을 직방 “부패뤄”라고 착호지명을 했다. 내가 그 진을 떠날때 사람들은 위에서 반부패공작대가 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진짜 몇놈 아덜이 대가리가 떨어질게라고 하였다. 산속 령길을 달리면서 나는 리몽룡의 칠언절구를 흥얼거렸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요는 만성고라 촉루락시 민루락 가성고처 원성고. 장쾌한 암행어사 출도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96.11
130    청명절 점경 댓글:  조회:1145  추천:0  2018-05-25
       수필                                                  청명절 점경                                                                                                                  회령 천기의 조화를 변화무쌍하여 대중할수 없기에 신비스럽다고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오묘하고 복잡다단하여 알기 힘든것이 인간세상이고 사람의 마음이다.            하늘의 마음 춘추시대에 있은 일이다. 진나라 제후에게 중이라는 총명이 과인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파쟁의 암투에 걸려 중이는 사세부득 외국으로 도망하게 되였다. 중이는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망명살이를 했는데 그때 그를 따라다닌 측근들 가운데는 개자추라는 충신이 있었다. 어느해인가, 한번은 중이가 고기를 몹시 먹고싶어 했는데 어데서도 고기 한점을 얻을수가 없었다. 그때 개자추는 추호의 주저도 없이 자기의 다리살을 베여내서 대접 하였다. 중이에 대한 개자추의 충성심은 이렇게 극진 하였다. 얼마후 이사실을 알게 된 중이는 몹시 감동하였다. 중이는 타향살이 10년만에 귀국을 하고 강산을 차지하게 되였는데,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진문공은 진나라 임금으로 된후 자기가 망명살이를 할때 따라다니며 환난을 함께 한 신하들에게 그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다. 그런데, 백골난망의 개자추를 깜빡잊고 빼놓을줄이야?! 진문공은 천추에 한이 될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든 것이다. 개자추는 자기와 진문공의 인연은 이로써 끝났다고 인정하고 섭섭하고도 슬픈마음을 안고 로모를 업고 면현의 면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 갔다. 그는 거기서 막을 짓고 고생스레 살았다. 태평성대 어느 화창한 봄날에 진문공은 그젯날의 공신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다가 문뜩 개자추를 생각하게 되였다. 진문공은 자기의 실수를 연신 크게 한탄하면서 제때에 한마디 귀뜀도 하여주지 않은 신하들을 몹시 책망 하였다. 연회는 기분없이 파해지고 신하들은 모두 무안해 하면서 헤여졌다. 진문공은 사람을 여러번 파견하여 개자추를 찿게 하였다. 끝내 개자추의 행적을 찿아 낸 진문공은 신하들을 보내여 그의 입궐을 초청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개자추는 진문공의 호의를 거절하고 더 깊히 숨어 버렸다. 진문공은 아무리 애를 써도 개자추를 데려올수 없으니 한 꾀를 생각해 내였는데, 그것은 면산을 둘러싸고 불을 놓는 것이였다. 산에 불이 붙으면 개자추가 뛰여 나올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청명전날에 놓은 불은 련속 3일간이나 면산을 태우고 마감날 오후에야 꺼졌다. 말끔히 타버린 면산은 수색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수색대는 깊은 골짜기바닥에서 로모와 함께 큰 버드나무를 끌어 안고 타죽은 개자추의 시체를 찿게 되였다. 진문공은 너무도 억이 막혀 대성통곡을 하면서 그날은 우선 개자추 모자를 감장하고 간단히 제를 지냈다. 제례가 끝나자 하늘에서는 난데없이 갑자기 봄비가 수루루ㅡ 내리는게 아닌가?! 진문공은 궁궐로 돌아간후 성지를 내리여 개자추에게 현후를 추봉하고 면현을 개후현으로, 면산을 개후산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나라적으로 면산에 불이 붙은 그 3일간에는 불을 쓰는것을 일체 엄금하고 한식을 먹게 했으며 3일째 되는 날에는(개자추를 감장한 날. 한식절.) 고인들의 묘소에 성묘를 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때가 되니 진문공이 새삼스레 몹시 비통해 한것은 물론이고 개자추의 성묘를 친히 성대히, 정중하게 거행한것은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날 진문공이 성묘제례를 마치고 천사만사로 끝없이 무량한 감개에 잠겨 서 있는데, 방금까지도 말끔하던 하늘에서 작년처럼 또 봄비가 수루루ㅡ 내리는 것이 아닌가?! 진문공은 “하늘이 내마음을 알아 주는도다.”하고 길게 탄식하였다. 그후에도 역시 해마다 그랬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이 진문공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런것이라고도 하고 개자추의 유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또 어떤사람들은 진나라 조정신하들의 야박한 인심에 대하여 하늘이 유감해 하는거라고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면산이 불에 탈때 비를 주지않은 하늘의 처사에 대하여 백성들이 원망하는 심정을 하늘이 사과하는 것이라고도 하며 그래서 민심을 천심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무정한 세월은 아득히 흘러가고 진문공의 어명도 지금은 형편없이 와전되였다. 간사한 자들의 작간으로 3일간의 금화요 한식이요 하는것은 언녕 오간데 없고 정작 한식날에는 비가 오며 일기가 불순하니 성묘를 청명날 혹은 그 전날에 에때워 치운다. 하여 지금은 한식절이 청명절로 바뀌여 버렸다. 이런 사정을 고인들은 아마 모를것이다. 우에 정책이 있으면 아레에서 대책을 대는 간교한 자들이 백성을 기만하고 하늘과 고인을 우롱하지만, 어찌하랴?! 민심은 천심에 닿아 해마다 한식날이 되면 하늘에서는 어김없이 봄비를 수루루ㅡ 내리니…                 까마귀떼들 이곳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데다가 여러개의 산줄기에 둘러싸인 오지의 작은 진이여서 대부분 사람들이 상호간에 비교적 익숙히 알고 있다. 그들은 거지반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토장을 하기에 진 정부에서는 일찍부터 원견성 있게 공동묘지를 지정해 놓았다. 근래에 어떤집들에서는 시구를 백여리 밖에 있는 시가지로 가지고 가서 현대식으로 화장처리를 하기도 한다. 청명절이 되면 총총한 봉분들 사이에 사람들이 가득 널려서 쓸쓸하기 그지없던 북망산이 일종의 특수한 활기로 가득 차 넘친다. 워낙 자고로 인간세상에는 별이별 희한한 일이 많은데 청명절의 북망산에도 구경거리가 많다. 나는 부친의 묘소의 사초를 마치고 성묘하려 온 몇몇친구들과 반갑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였다. 오늘의 날씨는 유난히도 화창하다. 갑자기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뿌르릉 씨르릉 줄쳐 드달려 오더니 저쪽 혼자 떨어져 있는 묘옆에 가서 여기 저기에 적당히 정차를 하였다. 이어 텅! 팅! 차문이 여닫기며 내리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니 진 부서기 쑹가네 제절들이 였다. 쑹서기 부친은 작년에 사망하였는데 자녀가 적으만침 아홉이나 되여 이곳에서는 구형제패거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공부는 크게 못했으나 지금 모두 괜찮게 출세를 해서 세력들이 만만치 않게 잘 살고 있다. 오늘 아버지 묘에 성묘를 왔겠는데 피뜩 보아도 잡도리가 웬간한 기세가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된 초점에서 쑹서기네는 성묘행사를 시작하는데 그 배포유한 거동을 보면 자못 긍지와 자호감을  느끼는것 같았다. 우선 집체우사문짝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묘비를 정중히 내리우고 어데서 생긴것인지 화환 몇개를 조심히 내려 놓았다. 다음은 와당탕! 퉁탕! 기초돌이며 벽돌, 세멘트판이며 석회, 세멘포대를 부리웠다. 그리고 삽, 곡괭이, 망치, 물통따위 연장들을 든 일군들이 우르르 뛰여 내렸다. 쑹서기와 무슨장자가 붙은 동생 몇은 건축현장에 시찰을 나온 령도간부의 풍모로 근엄하게 서서 그 광경을 넌짓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진 건축대에서 대장인지 뭔지를 해 먹고 있는 여섯째만이 꿍톨과 무슨종이장을 펴들고 들여다 보며 뭐라고 말하며 분주히 돌아쳤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특히 령도들이 친히 보는 앞에서 일손을 잡은 일군들은 성수가 나서인지 솜씨가 제비같이 날랬다. 20여명이 단꺼번에 달려붙은데다가 여섯째와 꿍톨의 신칙까지 엄하다보니 쑹령감의 묘는 삽시간에 “릉묘”로 일신하였다. 이고장에서는 천지개벽이래 처음 보는 일이였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사람들은 혀를 내 두르며 연신 찬탄을 금치 못해 하였다. 쑹서기네는 간단한, 보통일이라는듯 우선우선한 표정들이 였다. “릉묘”건설이 끝나자 맵짠 새납소리와 폭죽소리가 한바탕 들썽하는 가운데서 쑹서기네 형제들은 봉분에 뗏장을 올리였다. 뗏장은 일군들이 사처로 뛰여다니며 떠 왔는데 봉분에 입히는 일만은 쑹서기형제들이 경건한 태도로 친히 하였다. 그사이 일군들은 꿍톨의 지휘하에 아이들의 키 만큼한 소나무를 여러구루 뽑아다가 “릉묘”담장 밖으로 옮기느라 열성을 다 하였다. “릉묘”는 규정이고 뭐고 상관없이 터를 넓직히 차지했다. 묘지기 왕가는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창발정신을 발휘 했는지 하여튼 작년에 쑹령감을 여기에 매장한후 그 주변에 다른 묘소는 일률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묘를 쓸때는 반드시 왕가가 비준하는 자리에 감장을 해야 하는데 묘와 묘 사이는 전후좌우가 먹줄을 친듯히 가쭌하고 정연한것이 마치도 군대 대렬 같았다. 작년에 동떨어진 위치에 자리를 쓴 쑹령감의 묘는 마치도 무리에서 쫓겨난 닭처럼 외롭고 가련해 보였는데 오늘은 사태가 급변하여 열병부대 앞에 선 장군의 지휘차처럼 위풍이 름름해 보였다. 사전의 제반 일들이 결속되자 이번에는 장중한 추도곡소리가 높히 울리는 가운데서 성묘제례가 진행되는데 그것은 신, 구례식이 범벅식으로 혼합이 되여 과연 볼만한 정경이였다. 사진사와 록화촬영사는 그 심원한 의이가 있는 력사적 귀중한 장면들을 포착하느라 바삐 돌아쳤다. 쑹령감은 한뉘 막로동으로 고생을 했는데 도둑질 하는 버릇이 있어서 생전에 평판이 좋지 못했는데 죽어서 자식들 덕에 호강을 하는 셈이 였다. 쑹서기네 성묘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운전수 몇이 우리네 좌석으로 와서 이야기에 끼여 들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 이 행사에 동원이 된 모든 비용은 다 “부조”에 의한것이고 이제 내려가면 “부림문술집”에서 연회를 먹는데 그것도 몇개 식당에서 “약소한표시"로 차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제 한밥 잘 먹겠노라고 하면서 우리가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였다. 술에 거나해진 한 친구가 크게 감동이 되여서 시인보다 더 격정에 넘쳐 말했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효자들이군! 망할놈들! 나중에는 죽은 애비낯짝에 까지 똥칠을 하며 지랄이네. 엑, 퉤! 고수레ㅡ” 그는 그쪽에 대고 술 한잔을 쫙ㅡ 뿌렸다.                 망나니무리들 술이란 묘한 물건이다. 한순배 더 돌고나니 좌중의 이야기는 더욱 활기를 띄였다. “참! 전대미문의 경탄할 일이란 말일세. 저ㅡ기, 우리어머니 산소 곁에 두칠령감 노친네 산소가 있는데 그것참, 묘하더란 말이요.” “무스게?” 좌중의 흥미는 대뜸 말꼭지를 뗀 친구에게로 쏠리였다. “두칠령감에게 아들 삼형제가 있지않소? 그런데 그들이 지에미 산소 성묘를 딱 삼분의 하나씩 하는데, 그 경계가 38선보다도 더 엄격하더란 말이요. 하ㅡ 그런데 재작년 추석에 막내가 와서 제몫의 벌초를 하고 간후 작년부터는 한놈도 오지 않더란 말이요. 하ㅡ”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우?” “왜 모르겠소? 금방 곁인데. 전해에 막내가 남겨놓은 쑥이 그대로 자라서 오늘 와 보니까 키들이가 됐는데, 막내 몫도 애들키만큼은 되고… 마치도 더벅머리를 한쪽만 갂아 놓은것 같아서, 너무도 보기에 않돼서 오늘 내가 벌초구 가토구 한꺼번에 다 해 버렸소.” “술은 부었소?” “제대로 다 했소.” “참, 세상에 별일도 다 있군. 그런데 두칠령감두 작년인가? 사망하셧지? 로인의 산은 어드멘가?” “산이 다 뭐요. 당날로 날려 보냈는데,” …… 두칠령감 먼저 장기 지병으로 누워있던 로친은 끝내 령감 먼저 사망했다. 삼형제는 어머니의 치료비, 생활비 등 소비로 해서 하루건너 싸움질을 하며 동네까지 부산하게 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한후 그들은 어머니의 묘소관리를 세몫으로 나누어 했다. 처음 얼마는 돌개돌이로 하는것 같았는데 그후에는 분공제로 하다가 이젠 아주 파산을 해 버린것이다. 로친이 사망한후 두칠령감은 근근득식으로 고생고생하며 죄롭게 살다가 작년겨울 아무도 모르게 사망하였다. 어느날, 드문드문 놀러다니던 로인이 발견해서 알았던 것이다. 삼형제는 아버지를 화장으로 날려보낸후 집을 팔아 나누어 가지고는 완전히 남남이 되여 버렸다. 원래는, 큰아들이란 녀석이 집을 손자에게 물려준다고 했다며 혼자 삼키려 했는데 증거가 없어서 무효가 되고 셋이 나눠 가졌다. 큰아들은 법원놀음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동네사람들과 증명을 서 달라고 하기까지 했는데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두칠령감이 그런말을 하는것을 들은 사람이 정말로 없었다. 이때, 저쪽에서 돌연히 박장대소하며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그쪽으로 쏠리였다. 그곳에서는 10여명의 남녀가 빙 둘러앉아서 술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제찬소물을 한마당 질펀히 펴 놓았는데, 한쪽에서는 젊은녀자 둘이 양뤄촬을 부지런히 구워대고 있었다. 지금은 뚱뚱한 젊은이가 넥타이를 펄럭거리며 뭐라고 하는데 좌석에서는 손벽을 치며 그 야단들이 였다. 이어 뚱보가 노래를 하는데, 한 사내녀석은 녀자를 업고 묘소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사내녀석은 두손을 하늘로 뻗치고 무엇을 안타까이 호소하는 형국이고 업히운 계집은 한팔로는 사내의 목을 휘감아 안고 다른 한팔로는 사내의 엉덩짝을 연신 갈겨대는데 마치도 군대말을 채찍질 하는것 같았다. 또 다른 한 사내는 그 뒤를 따르며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 올리는 시늉을 하였다. “어머니! 대답이 없네. 저 하늘 끝까지 업고 갈테야.” 뚱보는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데 그 구절이 후렴인지 아니면 제일 마음에 드는 대목이여선지 자꾸만 되풀이를 하였다. 그곳에서는 포복절도를 하며 곁사람의 등줄기를 갈기며 흥겨워 야단법석이였지만 우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멍해 있었다. “저런, 미친 망나니 같은 놈들이라구야! 아니? 저게, 두칠령감네 큰아들 아냐?!(술병을 든 자.) 원, 별꼴을 다 보겠네.” “아까 내가 봤소. 어마니 산소에 왔는가고 물으니 어마니 산소는 작년부터 파산했다고 아바지두 쉬원히 날궈버리구… 오늘 가시에미 비석을 세우기에 왔다고 하더구만.” 한 친구가 그쪽에 대고 액막이를 하듯 “엑, 퉤! 고수레ㅡ”하고 웨치며 술 한잔을 쫙ㅡ 뿌렸다.                  백성의 마음 가는이, 오는이들로 성묘객은 련락부절이고 북망산은 사람들로 분비였다. 여기저기서 간혹씩 들려오는 구슬픈 울음소리, 파파늙으신 저 할머니, 젊고 젊은 저 아낙네 누구를 그리도 슬퍼하는고… 쓸쓸한 이곳의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누구며 절세가인은 또 누구던가?!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것이니… 에라! 만수ㅡ 조상들이 신통히도 잘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으면 북망산의 한줌 흙으로, 아니면 화장터의 한줌재를 남기고 사라진다. 유체를 영원히 보존한다는 것도 산사람을 위한것이지 고인에게는 한푼의 의이도 없는것이다… 오늘 여기로 온 사람치고 누군들 추모의 심정이 없으랴… 그런데, 아까부터 저쪽에서 할머니 한분이 외롭게 홀로 앉아서 울다가는 사설을 하고 사설을 하다가는 또 울고… 비통이 망극해 하였다. “저 로인님은 누구신지…” “김해방네 로친이야.” 자세히 바라보니 총총한 봉분들 사이에 끼여 있는 김해방의 분묘는 여느 분묘와 다름이 조금도 없었다. 림시로 세운 나무묘표는 다 삭아서 형체만 알리고 제단은 퇴락해서 폴싹 내려앉았다. 김해방은 2중전투영웅이다. 상급에서는 그의 묘소를 릉원식으로 잘 돌보라고 지시를 했지만 진 정부에서 대답만 하고 아직도 락실을 하지 않은 것이다. 상급에서도 사업이 바쁘다 보니 검사 독촉은 말할것도 없고 한번 외우거나 묻는 사람도 없었다. 김해방은 이 진에서 광복을 맞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 혈혈단신 고아로 제지공장에서 원목 목도일을 하고 있었다. 광복이듬해 그는 해방군에 참군하였는데 해방이란 이름은 그때 누가 지어준 것이다. 김해방은 참군한 날부터 싸움터에서 뛰여 다녔는데 우직하고 용맹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별로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다. “항미원조 보가위국”이 시작되기 전에 김해방의 부대는 조선으로 나갔는데 그들은 어느날 하루밤 사이에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 에서 줄곧 중기사수를 했는데, 그 육중한 물중기(막씸중기)를 따발총 다루듯 하며 힘차게 잘 싸웠다. 김해방은 부대에서 분대장 한자리도 못했지만 무슨임무를 주면 무슨임무를 억척스레 완수히였다. 그는 조선의 전후 3년복구건설까지 하고 다시 이 산골 진으로 돌아 왔다. 그에게는 그래도 이곳이 정든 고향이였다. 그는 제지공장 원목차간에서 원목 목도를 하며 그간 농촌처녀에게 장가까지 들었다. 인민공사가 실시 된 이듬해 김해방에게 조선으로부터 불쑥 전투영웅 칭호와 금메달이 전달되여 왔다. 그때, 그 희한하고도 경사스럽던 일을 이곳 사람들은 오늘도 잊지않고 옛말처럼 외우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크던 작던 간부란 간부는 우선 다 때려부쉬고 보는 판인데 김해방은 알지도 못하면서 “해방전에 혁명에 참가한 사람은 다 좋은 사람들이다.”하고 공개적으로 소리치며 집권파들을 역성들어 나섯다. 하여 그는 “보황파”라는 모자를 쓰고 반란파들의 투쟁을 받았다. 다른 “보황파”들은 몇번 두들겨 부쉬면 립장을 바꾼다고 성명을 했지만 김해방은 검정쇠심줄 보다도 더 질기고 완고 했다. 반란파들은 그를 반란파감옥에 가두고 집중해서 죄증재료를 만드는데 다른것은 너무도 빤한 것이고 오직 력사를 캘수밖에 없었다. 중점은 조선특무라는데 두었다. 반란파들은 혈안이 되여 특무증거를 찿느라고 뛰여 다녔다. 그런데, 이런 복창이 터져 죽을 노릇이라구야?! 군 정치부 당안에서 김해방이 전투영웅이며 중공당원이라는 재료가 불쑥 튀여 나올줄이야?! 군부수장들은 김해방이 지금 살아 있다고 하니 너무도 기뻐 어쩔줄을 몰라 하였다. 반란파들은 김해방에게는 인식상에서 좀 문제가 있지만 인민내부모순으로 처리한다 면서 두번째 해방을 주니까 일을 잘 하라고 하며 그를 감옥에서 풀어 놓았다. 김해방은 코방귀를 뀌면서 너들의 코나 씻으라고 소리 질렀다. 김해방은 해마다 공장에서 모범이 되며 일을 잘 하였다. 그런데 리직을 한 후 부터는 이병 저병 시름시름 자주 앓아 누웠다. 그는 공장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말며 하다가 사망 하였다. 큰병원에 가 본적도 없고 좋다는 약이나 영양제 한병 써 본적도 없다. 옛날, 진나라 개자추는 진문공에게 다리살 한점을 베여 먹인 공로로 현후의 작을 받고 한식절에 고인에게 성묘를 하는 민속을 남기기 까지 하였다.(지금은 청명으로 바뀌였지만.) 거기에 비하면 김해방에게는 릉원 한자리를 만들어 주는것이 너무도 지당한 일이다. 다시 바라보니 사람들이 뛰염뛰염 김해방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참배를 갔다.                                                                                                        96(병자년).4
129    청진기를 버린 사연 댓글:  조회:1565  추천:3  2018-05-22
     수기                                       청진기를 버린 사연                                                                                                                회령 병원에서 우리부부는 화제인물이 되였다. 그것은 내과주임의사인 나와 총호사장인 안해가 갑자기 내부퇴직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규정대로 하면 61살이 되여야 퇴직을 하는데, 우리부부는 쉰살 밖에 되지않으면서 내부퇴직을 신청했든 것이다. 내부퇴직이란건 단위에서 자체로 만드는 규정인데, 남 50세 녀 45살이면 신청할수 있다. 병원에서 이번에 내부퇴직을 단행하게 된것은 직원수를 감축하기 위해서 였다. 퇴직후의 대우는 상당히 후하였는데 우리같은 고급기술인재인 경우에는 신봉전액을 그대로 받을수 있었고 매인당 자녀 1명을 국가직원으로 취직시킬수 있었다. 우리집에서는 막내딸이 직업이 없어서 놀고 있었다. 그래서 안해가 내부퇴직을 신청하게 되였다. 그래놓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직도 나비처럼 사뿐사뿐한 안해가 집에서 그저 논다는 것이 답답하고도 불쌍한 노릇이였다. 하여 나도 아예 함게 퇴직하고 개인진료소를 꾸리기로 작정하였다. 하나는 의사고 하나는 호사니 안성맞춤이 아닌가. 그리고 이 고장에서 명성도 꽤 좋은편이니 진료소가 잘 되리라 신심이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로 간부처에서 동의하지 않았고 병원령도에서도 도리를 떨었다. 리유는 기술골간이 나가면 병원사업에 영향이 크다는 것이였다. 거금으로 초빙해 모셔도 모자랄 판에… 그들의 태도는 아주 완강하였다. 어덯게 할 것인가? 우리는 통용되는 방법인 “뢰물공세”를 하였는데 그 방법이 듣던바와 같이 효험이 신통했다. 나는 그때 참으로 얼굴이 뜨거웠다.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그방법을 쓸수밖에 없었다. 92년 7월, 우리부부는 생각대로 내부퇴직을 하고 막내딸은 랄랄랄 노래부르며 성수나서 국영단위로 출근하였다. 한달후 우리는 시위생국의 비준을 받아 개체진료소 개업을 하였다. 우리부부는 학교졸업후 30여년을 즐곧 국가병원에서 사업하였다. 우리는 사업기간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재능과 정성을 남김없이 바치며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천직으로 알았고 저도 모르게 그것이 체질화 되였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민군중들의 호평을 받았고 중앙, 성, 지구의 표창도 여러번 받았다.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후 우리고장에서도 우후죽순마냥 개체진료소가 생겨나고 국영과 사영이 경쟁하는 국면이 조성되였다. 의료기술과 설비를 놓고 광고열이 일어났는데 목적은 환자를 더 많이 끌어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기 위한 것이였다. 사회에는 가짜광고, 대포광고, 명의명약광고가 란무하고 가짜저질약품이 범람하여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들 까지도 우려하게 되였다. 그리고 돈의 충격으로 병원과 의사들의 직업도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런사태에 고도의 경각성을 높히며 자기의 의료도덕과 작풍을 시시각각 명심하였다. 우리는 세가지를 지키며 견지하였는데, 약품구입은 반드시 국가의약도매 부(의약공사)에서 하며 약품가격을 공개하며 처방은 복사지를 대고 두부를 써서 한부는 환자에게 주었다.(거기에는 수금명세가 밝혀져 있다. 침구, 주사비, 작은처치는 면비.) 우리고장에서는 나처럼 하는 개체진료소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광고경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환자가 늘 많았다. 밤이건 낮이건 시걱때건 우리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맞아주었다. 왕진을 거절함이 없었고 중병환자는 주동적으로 가정방문을 하였다. 그런데, 3년철이 되던해 날벼락이 떨어질줄이야?! 그것은 지구정부에서 개체진료소를 대폭 정리 축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우리고장에서는 아예 없애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국가병원이 두개나 있기에 개체진료소가 필요 없고 국영의 수입에 영향이 크기에 취소한다는 것이였다. 개체들이 떠들고 일어났으나 날쥔 놈이 자루쥔 놈을 당할수 있는가?! 나는 통지를 받는 즉시 간판을 뜯어 버리고 개체진료소를 걷어 치웠다. 환자들이 찿아오면 무료로 진찰을 해주고 처방을 써 주었다. 개체진료소를 취소한후 얼마되지 않아 변상적인 개체진료소가 륙속 생겨났다. 그들은 관계인원을 삶아서 “ ^^병원분원”이라는 간판을 번듯히 내걸고 영업을 했다. 그런 분복이 없는 자들은 아예 “지하진료소”를 하였다. 따라서 명의명약광고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으로 가관이 였다. 이사람이 자기는 아무리 중한 간경화라도 제꺽 치료한다고 하면 저사람은 국내외에서 치료할수 없다고 하는 뇨독증환지를 직접 만든 약으로 백퍼센트 치료한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누구의 제자라는둥, 무슨금질상을 받았다는둥, 백혈병을 비롯해서 모든 암증을 국제적 돌파를 했다는둥, 맹장염(란미 염)을 약 세첩이면 말끔히 치료한다는둥, 침 한대면 곱사등이가 허리펴고 앉은뱅이가  뛰여다닌다는둥… 맨발의사, 맨발위생원이든 사람이 지어는 농촌아낙네가 박사, 교수라고 둔갑을 하고… 그야말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막힌 사태였다. 나는 의료위생계의 기풍과 동료들의 소행에 경악을 금치못하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들의 타락에 나는 내가 의사라는 것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어떤사람들은 우리를 관심해서 “뒤문치기”를 하라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서너곳의 초빙도 다 사절 했다. 그러는중 지방정부와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원단위 에서 우리를 초빙하자고 했는데 이건 거절할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내가 올린 수입에 따라 보수를 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그런것을 따지지 않겠다고 명확히 표시하였다. 나는 다시 청진기를 잡은것이 무등 기뻤다. 전문가진찰실에 출근하면서 나는 환자들에게 자아치료방법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게 하고 딱 필요한 부분만 병원치료를 받게 하였다. 하다보니 점심시간을 거르고 늦게 퇴근하며 환자를 많이 보았지만 병원에는 목돈을 벌어주지 못했다. 어느날, 원장이 나를 보자고 하였다. 내가 원장실로 가니 그는 반겨 맞아주며 문부터 잠갔다. 무슨 중대사가 있는게로군. 나는 이렇게 직감하며 자리에 앉았다. “병원수입이 올라가야 직원들의 장금도 오르고 선생님의 수입도 오르겠는데… 좀, 무슨 방도가 없을가요?” 원장은 뜸을 들이며 서두를 떼고는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나는 의아해 하며 원장을 쳐다 보는데 그는 시물시물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말입니다. 처방을 좀 크게 떼며 말입니다. 감기약에 영양제며 보건품을 섞어 준다든지, 기장단위, 공비치료에 기계검사, 화험항목을 넣고 가족의 약도 떼 주고… 이렇게 하면 환자도 좋고 우리도 좋고 선생도 좋은일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생각하면 방법이야 많지요. ㅎㅎㅎ.” “그게 그러니까 일거삼득이구만. 그런데 여보, 원장나리! 나는 의사는 할줄 알지만 돈벌이는 전혀 할줄을 모를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흥취가 없어서… 거, 미안하지만 않됐소.” 나는 격분하여 원장실을 나와 버렸다. 그후부터 나와 원장의 사이는 껄끄러워 졌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나의 인생항로가 바뀌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어느날, 200리도 더 되는 먼 곳에서 늙은 농민이 7살이 되는 손자를 데리고 나를 찿아 왔다. 옛날 우리부모와 한마을에서 산 농민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이가 잘때면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서 성 병원 오관과로 갔는데 주임의사가 말하기를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수술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데 5ㅡ6천원을 준비해 가지고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였다. 일년수입이 잘 돼야 천원이 되나마나 한데 5ㅡ6천이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오관과에 대해서는 전공이 아니다 보니 농민을 데리고 지구병원 오관과 주임을 한 옛동창을 찿아 갔다. 그는 전문가문진실에 출근을 했는데, 아이를 자세히 검사한후 수술할 필요가 없다면서 약을 처방했는데 백원도 들지 않았다. 약을 쓴후 한달도 되지않아 아이의 코골이는 말끔히 나았다. 나는 의료계에 대하여, 의사들의 직업도덕의 타락에 대하여 격분과 안타까움으로 심각한 고민을 하지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무슨 독야청청 고매한 인격자는 못된다. 그러나 현실상황이 천만금을 준대도 의사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보이는건 비렬하고 가증한 꼬락서니고 들리는건 분노가 치솟는 악행과 원성이였다. 나는 의사들의 “령혼”을 구하지 않으면 않될 절박한 시점이라고 인정하며 의료계를 떠나리라 결심하였다. 30여년, 나의 청춘과 정열을 다 바쳐 아니, 나의인생 전부를 바치다싶히 하며 노력하고 분투해온 분야에서 떠나려니 마음이 서글펐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가다듬으며 애착하던 청진기를 땅바닥에 힘껏 메여쳤다. 그리고 의사들을 “치료”하는 것이 긴박한 급선무라는 일념에서 필을 틀어 쥐었다.  나는 북받치는 격정을 쏟아가며 의료비리에 대한 조사보고를 한편 또 한편 썼다. 나는 의사들의 량심에 백의천사로 돌아갈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01.5
128    석양이 붉게 타는것은 댓글:  조회:1061  추천:0  2018-04-08
       수필                                                    석양이 붉게 타는것은                                                                                                                           회령 곧 백년이 되는 중국의 력사가 증명하다싶히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의 위대하고 영명한 대구성이다. 이 점에 대해서 국내외 세인들은 중국의 현대력사에서 몇개의 력사적전환점(리정비)만 얼핏 살펴봐도 모두 인차 알수 있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을 이끌고 28년의 피어린 투쟁을 거쳐 새중국을 건립하였다. “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네”라는 노래는 중국의 억만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러 나온 노래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대다수사람들을 극히 비참한 고난에서 구해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을 이끌고 40년의 복잡하고도 간거한 개혁과 개방사업을 거쳐 광활한 중국대지에 새시대를 펼쳐 놓았다. 13억 중국인민들은 생기발랄히, 꿀벌처럼 부지런히, 사회주의현대화 실현을 위하여 궐기하였다. 중국공산당은 2017년10월 19차당대회를 거쳐 습근평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고 당과 국가의 여러면의 사업에 대하여 전략적 포치를 하였다. 거기에는 당창건 100돐이 되는해에는 초요사회를 전면실현하며 공화국 창건 100년이 될때에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실현한다는 피가 끓게하는 선언, 맹세가 들어있다. 30년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적 강국이 되며 세계무대의 중심에 선다! 19차당대회는 중국인민들에게 새시대 새장정의 총진군을 호소하였다. 력사는 인민이 창조하며 인민이 쓴다. 하지만 정확한 령도력량이 있어야 하고 이 력량에는 영명한 령수가 있어야 한다. 이 력량으로, 령수로 중국의 력사와 중국인민은 중국공산당과 습근평동지를 선택하였다. 중국인민은 중국공산당 주위에 한결같이 뭉치여 습근평총서기를 받들고 억세게 용왕매진할 것이다. 이런말이 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심사숙고해야할 심각하고도 무거운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필부란 바로 나같은 사람ㅡ 순전한 백성을 말하는 것인데, 말인즉슨 당신도 나라일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당중앙의 진군의 나팔소리는 우렁차게 울렸다.!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건설에 전민이 총동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중화민족의 전면적 부흥을 실현하는 이 장쾌한 공정에서 나는 무엇을 할것인가?! 내가 해야할 일을 명확히 하기위하여 나는 19차당대회정신을 참답게 반복적으로 학습하였다. 학습에서 내가 상당한 품을 들인 대목은 “습근평새시대”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이라는 론단에 대한 리해다. 이 론단에 대한 준확한 리해를 위하여 나는 여러사람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여러사람과 탐토를 하였다. 19차당대회정신을 투철히, 준확하게 알게되니 내가 해야할 “책임”이 뚜렷해 지고 로구에 청춘의 활력이 솟는것 같았다. 나는 직업의사로 사회에서 괜찮게 인정을 받는 의사였다. 내부퇴직후 돈을 벌기위하여 나와 안해는 몇곳의 초빙을 사양하고 개체진료소를 경영하였는데, 얼마후 나는 크게 실망했다. 그것은, 배금주의가 란무하며 의덕, 의풍이 망태기로 굴러가는것이 아닌가?! 병마의 시달림에 울며 신음하는, 불쌍한 환자의 뼈에서 기름을 짜먹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현실이였다. 나는 경악을 금치못하며 지대한 분노를 느끼였다. 지어는 내가 의사라는것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나는 문학에 흥취가 있다보니 청년시절부터 문학학습을 견지하여 왔는데, 때로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내부퇴직후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나는 문학에도 열중하였다. 의사도 문학도 비록 특출하게는 못하더라도 꼭 하리라 맹세할때의 나의 초심은 “혁명을 위하여! 당과 국가와 인민의 은덕에 보답하며 복무한다!”는 것이였다. 나의 초심은 줄곧,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여지없이 타락한 이곳 의료계에 나는 한시간도 더 머물고 싶지않았다. 나는 진료소를 걷어치우고 문학일변도를 선택했다. 나의 재간으로는 문학을 해서는 죽벌이도 못한다는것을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나의마음은 너무도 떳떳하고 긍지 높았다. 개체진료소를 할때, 개인돈벌이를 하면서 국가의 월급을 받아먹는것이 늘 량심에 걸리였다. 나는 진찰비며 침구, 주사비를 받지않았고 약값만을 규정대로 받았다. 하지만, 마음은 늘 개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위도식은 더욱 못할 일이여서, 배운재간대로 진료소를 열고 조금이겠지만 인민에게 복무하려 했는데, 의료환경이 급격히 치사하고도 너절하게 더러워질줄이야?!... 나는 잘되는 큰돈벌이를 포기하고 푼전벌이도 않되는 문학의 길을 본격적으로 유쾌히 힘차게 걸으며 부정부패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나는 여러편의 작품으로 부정부패를 호되게 족치였다. 19차당대회정신에는 사회주의 문예를 번영, 발전시킬데 대한 구체적 요구와 포치가 있는데, 거기에는 “문예작품의 품위, 격조, 책임을 따지며 저속, 용속을 제재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습근평동지는 “작가, 예술가는 시대사조의 선각자, 선행자, 선창자가 되여야 한다. …인민의 위대한 실천과 시대의 진보, 요구를 기록해야 한다.”고 하였다. 문예계의 현실을 볼때 아주 적시적이며 지당한 지적이며 요구와 편달이다. 나는 조막손이 닭알 만지듯 둔필이다. 하지만 중국의 사회주의 문예를 번영,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명기하며 당의 초심과 나의 초심을 끝까지 지키겠다… 석양이 붉게 타는것은 하루의 마감을 더욱 화려하게 마무리하기 위함이며 래일의 찬란한 나날들을 그려보기 때문이다.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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