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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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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안해에 대한 느낌 댓글:  조회:1010  추천:2  2018-03-30
      수필                                               안해에 대한 느낌                                                                                                                         회령 아들 며느리가 올해설은 저들집에서 쇠자면서 비행기표까지 보내오다보니 우리는 상해로 가게되였다. 나는 비행기에 앉아 씽ㅡ 몇시간 가면 된다고 대수롭잖게 생각했는데 안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주비사업이 많았든것이다. 우선, 두서너달 입을 옷견지를 선택하느라 이랬다 저랬다하고 지어는 신이며 양말까지 안해는 꼼꼼히 검토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들네게 줄 물건을 준비하는데, 나는 그만 입을 딱! 벌이고 말았다. 더덕, 도라지, 낙지, 마른명태, 고사리, 내기와 젠추가루, 고추가루, 고추장, 된장, 토간장(아들이 북어를 토간장에 찍어 먹는다며), 썩장까지… 여기까지는 나도 대체로 짐작을 했는데 그다음의 물건들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희귀한 것들이였다. 통닭(수탉) 두마리, 내몽골양고기 십여근, 찹쌀가루와 명란, 모두부(어느핸가 설에 아들 며느리는 연변두부가 이렇게 맛있는가! 하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를 꼭 갖고 간다는게 아닌가?! 나는 우습기도 하고 억이 막혔다. 내가 “상해에 없는것도 있는가?” 하며 면박을 주면서 빈정대니 안해는 듣는체도 안하고 자기주대대로 주비사업을 추진했다. 나는 트렁크 두개면 넉근할줄 알았는데 당초에 어림도 없었다. 트렁크 두개에 상자두개를 더 만들고도 안해는 계속 더 장만하느라고 고심을 했다. 상자를 또 한개 더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담근 김치를 종류별로 차곡차곡 넣었다. 나는 이젠 다 됐으려니 하였는데 웬걸?! 깸과 잣을 50여근이나 구입해 왔다. 참는데도 정도가 있지, 내가 이렇게 많이 뱅기가 받지않는다고 역증을 내니 안해는 그것을 택배로 부쳐버렸다. 이젠 40대 50대가 된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들을 안해는 힘껏 완벽하게 보살펴 주고 도와주려고  항상 열성이다. 그뿐이 아니다. 청년이 다 된 손군들을 애기다루듯 하여 곁에서 보는 내가 오히려 민망하다. 나는 큰일에서나 작은일에서나 모든일에서 원칙과 도리를 지나치게 엄격히 강조하는 사람이지만(그래서 잔소리가 많다고 한다.) 안해는 “사랑”밖에 모른다. 내가 볼바에는 응당 해야할 일르는 말도(욕) 그는 하지않는다. 혹 말할때가 있긴하지만 냐의 느낌에는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게 어루만진다. 그래서 나는 안해와 여러번 쟁론을 하였다. 그렇게 쓰다듬기만 하는게 능사가 아니라구. 엄한 선생앞에 훌륭한 제자가 나고 드센장군이 있어야 용맹한 병사가 있다며 설교를 하려들면 안해는 시큰둥한 태도를, 지어는 공개적으로 “애비라는게 인정머리가 없다!”고 하며 거들떠도 보지않는다. 우리부부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엄격을 주의로 하고 안해는 사랑을 주의로 하고… 음양배합이 스스로 되고 문무의 도가 지켜진것 같다. 근년에 와서 나는 차츰 안해를 “량모”가 된다고 느낀다. 자식자랑은 반편이고 안해자랑은 팔부라고 하지만 나는 객관적인 립장에 서서 공정하게 안해에 대한 느낌을 더 말해보고저 한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안해는 처녀때부터 나에게 고분고분 온순했다. 환갑전까지는 그야말로 “부창부수”였다. 하다보니 우리부부는 “쌈”이란걸 못해봤다. 그런데 환갑후부터는 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해가 주체사상이 형성되였는지 자기주의를 내 들고 고집하기 시작한것이다. 제일 큰 표현으로는 나를 “통제”하려 드는 것이였다. 먹는것으로부터 옷, 모자, 신, 나의 일거일동을 자기의 통제권내에 두고 사사건건 지령을 내리였다. 나는 일상생활세절에서 되는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다보니 안해의 통제가 달가울리 없었다. 하여 굴레를 쓰지않으려고 대갈을 내젓는 쇠새끼처럼 엇서고 반항을 하였다. 압박이 있는곳에는 반항이 있고 반항이 있는곳에는 압박이 있다. 내가 반항할수록 안해의 “통제력도”는 드팀없이, 더욱 견정불의하게, 드세여지었다. 나는 안해에게 차츰 지치기 시작했고 실천을 통하여 안해의 지령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나는 차츰 안해의 통제에 길들여지고 저도 모르게 안해의 지령을 기다리게까지 되였다. 이렇게 몇년을 지내면서 나는 안해의 “통제”인즉 나에대한 관심이며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였고 안해는 나에게 “현처”라는것을 승인하게 되였다. 엎딘김에 절이라고 계속해서 안해자랑 3부로 들어가자. 나의 안해는 마을에서도 제일 가난한 농사군네 집에서 맏이로 태여났다. 집에는 풍을 맞아 전혀 운신을 못하는 할머니가 계셧고(17년을 누워있다가 사망.) 안해아래로 남동생다섯 끝으로 녀동생이 하나 있었다. 안해는 천성이 그랬는지 부모님 교육이 좋았는지, 아이때부터 정직하고 마음이 고왔다고 했다. 크면서는 생김새도 복상스러웠지만 그 마음씀씀이가 너무도 신통해서 “큰집맏며느리 감”이라고 별명이 나고 원근에 소문이 났다고 한다. 아이때 처녀때 일은 내가 잘 모르지만 사회생활 첯시작부터, 말하자면 혁명공작에 참가해서부터는 안해의 모든일들을 손금보듯 잘안다. 그것은 우리가 한단위에서 함께 사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업과 생활속에서 서로를 잘알게 되였고 자연스레 련애, 약혼, 결혼순으로 나가게 되였다. 안해는 아이때부터 대학에 가기전까지 줄곧 할머니의 저녘은 책임지고 밥을 대접했고 부모님들을 도와 할머니 병수발을 많이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또 대학가고 외지에서 사업하고 이어 결혼하다보니 부모님들을 너무도 도와 드리지 못했다고 두고두고 한탄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동생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고 그는 여러번 후회하였다.(우리의 신봉이 너무도 적었다.) 시집에서도 안해의 부담은 적지않았다. 시어머니가 일찍 사망하다보니 삼남매 세아이를 안해 혼자힘으로 다 키웠다. 나는 공작대다 외지장기출장이다 하향이다 학습반이다 회의다 하면서 혁명사업에 온갖 정열을 다 바치다보니 말그대로 집은 려관이였다. 안해는 사업을 잘하고 시아버지와 훗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잘 모시여 3.8절이면 해마다 표양을 받았다. 훗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14년을 살고 사망하셧다. 그간 안해는 치매끼가 있는 시어머니를 따뜻히 보살폈고 양말이며 속옷(팬티)까지도 자기가 일요일이면 손빨래를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9년을 더 앉고 돌아가셧다. 아버지는 며느리가 너무도 곱고 마음에 들어 생전에 하신다는 말씀인즉 “내가 죽으면 자네는 울지 말아라. 자네를 고생시키지 말고 껍뿌적 죽어야 하는데…”하시였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때마다 안해는 웃으면서 “아버님 절대로 아무런 근심도 마세요. 제가 다 제대로 할겁니다…”고 하였다. 안해는 시아버지가 자립을 못하면 쓰겠다고 기저귀감과 위생지를 두마대나 장만해 두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귀저기를 아버지는 한장도 쓰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침식사까지 잘 하셧는데,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셧기 때문이다.(향년84세) 지금은 우리두집에서 윗어른으로는 장모님 한분만 계신다. 장모님은 연길에 있는 연변광영원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연길에 세아들과 두손자가 있다보니 그들이 장모님보려 자주 다닌다. 우리는 도문에서 한달에 한번씩 다닌다. 매번 어머님을 면회갈때마다 안해는 알뜰히 준비를 한다. 상용약이며 각가지 음식, 과일, 음료, 우유… 한보따리가 되는데 다행인것은 호실마다 랭장고가 있는것이다. 돼지발쪽, 닭다리, 개장국, 육개장, 증편, 죠즈같은걸 갖고갈때는 종이로 싸고 솜으로 더 싸고하여 가마에서 방금 꺼낸것처럼 따끈따끈하다. 안해는 무엇이나 푼푼히 갖고간다. 음식은 서너때를 잡숫게 하고 반찬이며 음료, 우유, 약 같은건 한달분을 갖고 간다. 안해는 닭다리며 발쪽은 자기가 직접 고기를 뜯어서는 어머니입에 넣어드린다. 지난달 우리는 돼지발족을 푹 삶아서 갖고갔는데, 안해가 어지럽다며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그걸 대접하는 모습이 어찌도 보기좋은지… 내가 핸폰으로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나는 사진을 우리자식들에게 보내면서 이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향수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큰딸이 “76세의 딸이 97세의 어머니께 음식을 대접”이라고 문자를 달아 세상에 발표할줄이야?! 대뜸 찬양의 문자와 음악을 배경으로 한 목소리가 막 떴다. 안해라고 잘한일만 있고 완전무결할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것은 입당할때 두사람이 지적한 부족점 뿐이다. 그들은 지적하기를 “투쟁성이 약해서 금후에는 이면에서 노력했으면 더욱 좋겠다.”고 하였다. 안해는 그들의 지적을 접수했는지 부인했는지 아니면 망각했는지... 내가 보기에는 시종 산천이 여구했다. 근년에 와서 나는 안해를 효녀, 효부라 할만하다고 속으로 인정한다.                                                                                                                        18.1
126    송아지 친구들 댓글:  조회:1208  추천:0  2018-01-22
         수필                                                송아지 친구들                                                                                                                   회령 이젠 수십년이 지나간 소년기의 일이지만 희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고 송아지 친구들이 그립다. 소학생이던 어느해 여름방학이였다. 그날, 늦은아침때가 지나서 우리는 우두머리 희성의 휘동하에 두만강으로 미역감으려 가자고 만덕이네 집으로 갔다. 삽작문 밖에서 만덕이를 몇번 불렀지만, 문들은 다 열려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우리가 새잇문앞에 다가가 들여다 보니 만덕이는 한창 달콤히 자고있었다. 내가 만덕이를 깨우려 하는데 희성이가 다급히 제지하였다. 그는 한참이나 만덕의 동정을 살피더니 자기얼굴에 손가락금을 그으며 광대화상을 그리자고 우리에게 벙어리시늉을 하였다. 희성이는 만덕의 잉크병을 들고 살금살금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쪼크리고 앉아 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뱅ㅡ 둘러서서 솟아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킥! 킥!거리였다. 희성이는 소리를 내지말라고 잇발을 앙다물고 코와 눈을 잔뜩 찡그리며 경고신호를 보내면서 저도 키득거리였는데 그 꼴이 더욱 우스웠다. 희성이는 코수염, 턱수염을 그리고 안경까지 그린후 웃음을 참느라고 한참이나 갑자르고 나서 또 이마와 두볼에 연지곤지 찍듯히 조개떡 몇개를 더 그려넣었다. 만덕이가 태평스레 잘 자준덕에 희성이는 화상을 만족스레 완성하였다. 우리는 울바자 밖으로 뛰쳐나가서 실컷 웃어댄후 만덕이를 소리쳐 불러댔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나오는 만덕이를 보니, 아하하! 저거 귀신인가 도깨빈가… 웃지말자던 맹세가 다 무엇이냐. 우리는 서로 가댁질을 하며 입이 터지도록 웃어댔다. 만덕이는 이것들이 웬지랄이나 하듯 눈을 껌뻑거리며 아무런 눈치도 채지못했다. 우리는 만덕이를 데리고 생산대탈곡장으로 갔다. 그날따라 보리마당질과 건조담배일을 하다보니 탈곡장에는 어른들은 물론이고 조무래기들까지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우리일행이 나타나자, 정확히 말해서 만덕이가 등장하자 숱한 사람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웃음통을 터치였다. 탈곡장은 떠나갈듯 법석 끓어번지였다. 발을 구르고, 맴을돌고, 뒹굴고, 포복절도하고, 우는지 웃는지 엉엉하는 사람, 두 손을 내 저으며 허우적거리는 사람… 웃으며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으로 가관이였다. 만덕이는 영문을 모르다보니 어리둥절해 서 있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정신없이 웃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하여튼 그도 따라서 마주웃기 시작했다. 그 웃는 모습이라니…하다보니 탈곡장의 웃음판은 더욱 요란하게 되였다. 광대화상이 웃기까지 하니 또 다른모양이였다. 정말 사람을 웃겨 죽이는 판이였다. 담배일을 하던 만덕의 누나네가 조리실에서 뛰쳐나와 새된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를 휘둘러서야 사태를 알게된 만덕은 펄쩍 뛰더니 집으로 냅다 달리고 우리는 동구밖으로 달아났다. 참외밭머리까지 달아나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부질없는 작란을 너무 했다는 후회가 들고 만덕이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그보다도 만덕의 누나네가 무서웠다. 이제 어떻게 할가?! 근심이 태산같았다. 우리는 만덕이를 찿아가서 사과하기로 의논하고 외상으로 참외를 몇근사고 노리(오얏)며 복숭아를 따왔다. 희성이는 강냉이를 따다가 담배건조실에 가지고 가서 구워오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례물을 가지고 가서 사과를 하려는데 만덕이는 거들떠도 보지않고 불호령을 하였다. 회성이는 엉덩짝을 다섯대 맞아야 하고 남어지 놈들은 세대씩 맞아야 하는데 맞을때마다 “형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하고 높으게, 그러나 반드시 꾀꼴새같은 고운소리로 웨쳐야 한다는 것이였다. 엉덩이를 맞아대며 어떻게 꾀꼴새소리를 낸단말인가…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생산대 참외며 강냉이를 훔쳐 먹고 누구네 노리며 복숭아를 훔쳐 먹은 비리를 몽땅 폭로할거라고 을러멧다. 그리고 누나들과 말해서 우리를 몽땅 탈곡장에 끌고가서 볼기를 치겠다는 것이였다. 만덕의 두 누나는 아주 사나운 왈패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니 새끼들! 점심때 어디 두고 보자.”하며 몽둥이까지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지않았던가. 우리는 동구밖까지 내꼴봐라 정신없이 줄행랑을 치고.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만덕이가 내 건 조건대로 하기로 했다. 괴수인 희성이가 먼저 엉덩이를 추켜들고 맞는데, “쨩!”하는 소리와 함께 “에쿠!”하고 회성이가 엄살을 부렸다. 만덕이가 능청스레 호령을 했다. “이놈아! 왜 시킨대로 안 해?” “뭘? 에구, 정말! 형님 살려주세요." “이놈봐라. 엇먹을 테냐?” 또 “쨩!”하는 소리와 함께 희성이가 “에쿠! 에쿠!”하며 비린청으로 엄살을 질러대는데, 만덕의 누나네가 죽겠다고 웃어대며 마당에 들어섯다. 우리의 희극은 웃음판으로 끝났다. 그때의 송아지친구들은 이젠 모두 할아버지가 되여 연변각지에서 잘 살고있다. 다만, 희성이만은 지난세기 61년에 온집이 부농이라는 성분때문에 조선으로 도망간후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모른다.                                                                                                                             00.2
125    난중지 난사 댓글:  조회:1357  추천:0  2018-01-21
         잡문                                                    난중지 난사                                                                                                                    회령 삼복이 지났는데도 날씨는 여전히 화독속처럼 무덥다. 이제부터는 가물이 든대도 무섭지 않다. 가을채소가 좀 문제될가…   나는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이며 목덜미를 연신 딱으며 원고지와 낑낑 씨름하고 있었다. 날씨도 날씨겠지만 둔필이 도무지 나가지 않아서 땀은 더욱 물흐르듯 하는데, 싱검둥이 친구가 법석 떠들어 대면서 뜨락에 들어섯다.   “또 무슨거짓말을 써 대는거야?” 친구의 인사수작은 늘 이렇다. 그는 소설은 말짱 거짓말이라고 하면서도 보기는 나보다 더 많이 본다. “이거 어드렇게 오시는가. 원로에. 귀객이군.” 이상하게도 이 친구가 오기만 하면 막혔던 글이 곧잘 풀리군 하였다. 친구는 방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냉장고문을 벌컥 열고는 삐루한병을 꺼내서는 그대로 병나팔을 불었다. “엥! 찡ㅡ허다.” 그는 한마디를 우렁차게 웨치고는 입을 쓱 씻었다. 친구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며 입심좋은 말주머니를 열었다. “방금 희한한 구경을 하고 오는 길일세.” “뭘?” “그게 뭐든가? 굉달인가 통달인가… 그 백화앞의 간판집말이야. 그집앞을 지나다가 대단한 시비판을 보았는데, 나로서는 풀수없는 시비더군. 자네가 풀어보게.” “자네가 못푸는걸 내가 어떻게 푸는가. 무슨일이야?” 나는 흥미가 부쩍 동해서 친구의 입을 주시하였다. “그집문앞에서 로반(간판쟁이 주인)과 고객이 시비가 붙었는데 숱한 사람이 모여서도 어쩔수 없더란 말일세.” 친구는 사건의 전후를 자세히 말했는데 어떤 대목에 가서는 그가 불어대는것 같았다. 좌우간 그의 말에 의하면ㅡ 얼굴이 두꺼비등판처럼 우툴무툴하고 불깃불깃한, 주먹코가 특별히 시뻘건 젊은녀석이 배는 벌써 항아리만해 가지고 간판 맞추러 왔는데 그 간판이름때문에 시비가 붙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이야기는 요지가 대략 다음과 같다. … “놀부술집”주인은 경기가 그닥잖아서 그원인을 여러면으로 탐구하던 끝에 끝내 치명적인 요진통을 찿아 내고야 말았다. 간판이름에 원인이 있었든것이다. 즉, 무릇 사람에게는 체면이라는것이 있고 남의 눈치를 보는것이 있는데, 무슨돈으로 먹고 마이고 놀아대든지 백주에 “놀부술집”에 드나든다는것은 어쩐지 명성이 좋을것 같지 않아서 께름할 것이다. 밤에 나들어도 마찬가질거다. 그리고 하필이면 력사에서 제일 더럽게 이름을 날린 심술통놀부이름을 간판에 새길건뭐람. 낯이 깍기게… 쯧쯧쯧.(이상은 군중반영) 무슨정신에서 그랬던구. 황제보다도 더 황제인 고객님들께옵서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셧을가… "놀부술집"주인은 침통하게 후회하면서 이번에는 심중을 기하기 위하여 사회조사를 계속 더 진행하였다.사회조사에서 적지않은 간부들이 "술집이름을 찡하게, 화끈하면서도 고상하게 고치면 좋겠다."고 하였다.  “놀부술집”주인은 충분한 사회조사를 거친후 드디여 술집이름을 고치기로 단호한 결단을 내리였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련속 나흘이나 전 시가지를 돌면서 술집을 위주로 간판이름을 조사하였다. “큰처녀술집”, “배불뚝이식당”, “다미락술집”, "큰엉덩이주가", “개불리음식점”, “야래희술집”, “과부촌술집”, “남사녀사극락주가”, “온밤즐기는집”…울긋불긋 다종다양, 오색찬란한 간판은 그야말로 오묘하고 감미로와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고객의 눈에 뚜렸히 보이는 곳에는 성감이 극히 풍부한 차림새로 젊은녀자들이 호객을 하였다. 그리고 가슴이며 엉뎅이를 내놓은 반라체의 대형 녀자그림을 걸어놓았다. 또 출입문과 지어는 창문에도 설을 쇠는 중국집문짝처럼 주련을 써 붙혔는데 그것이 또한 희한하고 실감이 짜릿짜릿하게 나서 볼 만 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꼭 만족을 줄게요.”, “한번 맛보면 또 오실거예요.”, “잊지못하리 그 맛을!”, “깊은곳 깊은맛” “단간방도 있어요” "다있어요 다드려요"… 주련은 어느기업의 상품이거나 어느명의, 어느미용원이 내건 광고보다 훨씬 호소력이 컸다. “놀부술집”주인은 크게 계발을 받고 깨도가 되였다 그는 여러날 고심한 끝에 끝내 현대적인 좋은 이름을 지었다. 특히 국가돈으로 먹고 마이는 어른들에게 아주 마음에 쑥 드는 흡족한 이름을 지었다. 그래도 그는 이번에는 교오자만과 조급성을 삼가하며 특수공능을 업었다는 아낙네를 찿아가서 자문까지 하였다. 특수공능은 "놀부술집"주인이 작성한 이름을 입을 실룩거리며 서너번 랑독해 보드니 쩝! 하고 거센소리를 내며 입을 다시고 나서 개명을 아주 잘 하였다고 높히 긍정해 주었다.그는 주련량켠에는 한발씩 되는 거울을 걸라고 방토까지 가르켜주었다. 그리고는 중얼중얼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엉덩이를 들썽거리드니 “쉬”(수)를 든든히 붙혀놓았다는 것이였다. “놀부술집”주인은 백원짜리 두장을 그녀자의 손바닥에 “쨩!”소리가 나게 쥐여주며 팔이 빠지게 열렬한 악수를 하여주었다. “놀부술집”주인이 창조한 술집의 새이름은 “대갈보술집”(大喝寶酒家)이라는 것이다. 개명공정은 일사천리로 순리롭게 진행되였다. 공상, 세무. 공안, 소방, 위생, 환보, 시정, 시장관리, 문화시장관리, 문명반, 술담배전매국… 하여튼 10여곳 상관기관을 벼락같이 수속을 밟았다. 관건은 조선문간판에 있는데 유관어른들은 보는체도하지 않고 한자로 “동의”라고 쫙쫙 갈긴후 시뻘건도장을 쾅!쾅! 찍어주었다. 극히 중요하고도 관건적인 조선문간판때문에 술집주인은 은근히 근심을 했는데 면목에 쉬까지 붙어서인지 무사통과ㅡ "흐흐흐. 그것들이 알긴 뭘 알아 모두가 밥통, 얼빠들이야!" "놀부술집"주인은 웃음집이 자꾸 흔들거리여 날것만 같았다. 만사가 뜻대로 다 된후 “대갈보술집”주인은 범 잡은 개포수처럼 기분이 흥성흥성해서 제일 잘한다는 간판집으로 기세좋게 코노래류행가를 연신불러대며 오토바이를 냅다 몰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가 다 쑨 죽에 코가 빠졌다고 할가 간판쟁이 나부랭이가 말썽을 부리는게 아닌가?! 그는 고개를 잔뜩 삐뚜룸히 하고 비준서들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드니 이따위 조선글긴판은 절대로 쓸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였다. 이런 복창이 터질노릇이 있는가?! “대갈보술집”주인은 얼굴색이 대뜸 돼지간이 되였다. 우에서 이미 다 비준한것이래도 쓸모없고 돈을 곱으로 주겠대도 쓸모가 없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돼 먹은 속통인지 도무지 이가 들지않았다. 간판쟁이고집은 검정쇠심줄보다도 더 질긴 물건짝이 였다. 그의 리론인즉 조선글로 이 이름은 아주 더럽고 로골적인 황색이여서, 이런 음란물간판을 만들어 주면 제작자가 법에 걸린다는 것이였다. “대갈보술집”돼지간주인은 젠장! 네따위가 법은 무슨 개뿔같은 법, 위에서 어른들이 다 비준한 것인데, 돈을 세배로 주겠으니 만들어라! 윽박지르고 간판쟁이는 어른이고 대통령이고 죽인대도 안된다며 나누웠다. 간판쟁이는 견결히 음란물이라고 우기고 술집주인은 보배를 바라는 거라하고 그들은 불칼줄칼 대판드리 싸움을 하였다. 숱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머리를 짜가며 여러가지로 방안을 내여 보았으나 신통치 못했다. 나의 친구도 지대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거듭 헌책을 했는데, 창피하게도 다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열정적인 친구는 그래도 물러설념을 하지않고 머리를 굴리다가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간판을 한자로만 쓰자는 것이였다. 친구가 이 절세의 묘안을 제출하자 “대갈보술집”주인은 두눈을 뚝 부릅뜨고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다가 “뿌싱!”하고 고함을 냅다 질러대더라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팔을 휙 날리며 “꾼!”하고 소리를 치더라고. “자네가 이걸 풀어보게. 상을 주지…” 친구는 나를 쳐다보며 이죽거리였다. “그것참!” 나는 빈입만 다시였다. 친구는 무척 깨고소해 하였다. 친구가 돌아간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간판쟁이가 너무도 헌헌하고 존경스러 웠다.                                                                                                                           89.11
124    회갑잔치 댓글:  조회:2651  추천:0  2018-01-18
         수필                                                                회갑잔치                                                                                                                 회령 우리부부는 계미생 동갑으로 작년에 회갑잔치를 하였다 회갑을 쇤후 친구들을 위주로 적지않은 사람들이 수연에 대한 감상이 어떠냐고, 진지하게 혹은 우스개로 물어왔는데 모두가 나의 진솔한 느낌을 알고싶어 하는 눈치들이 였다. 나는 처음 몇번은 생각나는대로 아무렇게나 응부를 했는데 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럴일이 아니였다. 천박한 소견에도 민족의 전통에 관계되는 화제라고 생각되여 후에는 느낌을 실사구시대로 솔직히 말하였다. 중국에서 연변은 중국조선족의 본가마을쯤은 된다. 이곳에서 사는 우리는 여러면에서  민족전통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회갑잔치도 그중의 하나다.   지금 연변에서는 70이 지나서 회갑을 쇠는것이 마치도 민속의 법인듯 착각을 해서 류행이 되고 있다. 그리고 회갑잔치를 하는 취지도 여러가지가 있다. 어떤이들은 허영심에 들떠서 대단하게 거행하고 어떤이들은 쓸데없는 허례라면서 아예 무시해 버린다. 적지않은 갑둥이들은 회갑을 일찌기 쇠면(예순살 제때에 쇠면) 일찌기 죽는다느니, 빨리 늙는다느니, 남들이 웃는다느니 하며 잔뜩 미룬다. 물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제때에 못쇠는 사람들도 있다. 극히 적은 일부 사람들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회갑을 쇠기도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민속의 법지법대로 건강장수를 축하하고 여생의 행복을 축원하여 제때에 회갑을 쇤다. 내가 알기로는 세계의 2천여개 민족에서 회갑을 쇠는 민족은 우리조선족 뿐이다. 우리민족에게는 고금에 부귀빈천을 불문하고 돌생일, 결혼, 회갑, 상례를 반드시 거행하는 법이 있다. 그런데 돌생일과 상례는 본인의 감상이란게 있을수 없지만 결혼과 회갑은 그렇지 않다. 둘 중에서도 회갑잔치에 대한 감상이 제일 감개가 무량할것 같다. 나의 체험은 그렇다. 결혼은 문화대혁명때 낮에는 출근하고 저녘후 한시간을 동방홍과 어록노래합창을 하고 헤여지다보니 지금도 무슨꿈을 꾼것같기도 하고 얼떨떨 하다. 회갑년이 되자 자식들은 법대로 회갑잔치를 하자고 토론을 해 왔다. 인생에서 피할수 없는 행사이니 법대로 하자고 우리부부는 쾌히 동의하였다. 우리민속의 법에 따르면 부모가 회갑을 쇠지못했으면 자식들은 절대로 회갑을 못쇤다. 죽은사람에게도 회갑제를 차린다. 회갑은 반드시 갑년에 갑분의 생일날에 해야한다. 그런데 사정이 있을때는 생일후로 미루어 할수도 있지만 생일전에 앞당기지는 못한다. 마침 안해의 생일이 나보다 좀 앞이여서 나의 생일날에 할수있었다. 그런데 력서를 보니 그날이 목요일 모두 출근하는 날이여서 우리는 토요일로 미루어 결정했다. 자녀들의 사업과 하객들의 편의를 고려해서였다. 우리부부는 회갑을 쇠느라고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것이 싫었다. 우리자녀들은 회갑잔치는 갑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정에 따라 생일후 적당한 날자에 행사를 해도 된다는 조상님들의 너그러운 규정은 모르다보니 처음에는 머리를 좀 기우뚱거리다가 인차 우리말에 따랐다. 여기서 나의 느낌 한가지를 말한다면 회갑은 회갑년에 쇠야한다는 것이다. 70, 80에 쇠는것은 회갑이 아니다. 제때에 회갑을 쇠는데 대하여 나는 이것은 우리민족의 법이니까 그대로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따랐을 뿐인데 안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법도 법이지만 자식들이 하자고 할때 제꺽 쇠는것이 옳다는 것이였다. 그래야 자식들의 마음부담을 덜어 준다고 하였다. 나는 자식들을 끔찍히 생각하는 안해의 모성애에 감탄을 했다. 부모님 회갑잔치를 제때에 하지못한 자녀들은 그것이 빚진마음으로 부담이 될것이다. 날자가 확정된후 나는 자녀들에게 서너가지 부탁을 강조하였다. 절대로 번지르르 하게 하지말며 초청은 당날교통권내로 하며 하객접대를 꼭 잘할것을 당부하였다. 우리는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였다. 아들내외는 북경에서 사업하고 작은딸내외는 서안에서 사업하다보니 구체적준비사항들은 곁에 있는 큰딸부부가 도맡게 되였다. 잔치연회장소는 연길에 있는 백산호텔례식장으로 결정을 했는데 그것은 하객들의 왕림에 편리하다는 데서 그렇게 했다. 우리는 도문시에서 사는데 연길시로 하면 도문과 훈춘의 하객들이 불편하게 되였다. 하여 우리는 그들을 뻐스로 모시기로 했다. 회갑연주례와 촬영, 사진, 음악 등 일들은 연변인민방송국대외봉사부서에 맡기였는데 나는 그럴것까지는 없다고 반대를 했지만 자식들이 듣지않았다. 나는 그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며 쑥스럽다. 하객대접연회상은 한상에 800원, 최고급표준이라고 하였다. 이점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동의를 했다.(당시는 보통 300원 표준.) 그런데, 복장문제에서 나는 안해와 자녀들과 쟁론이 생겼다. 그것은 안해의 이복은 한복으로 곱게 맞추는 것을 좋다고 하면서도 나는 입던 양복을 그대로 입어도 된다고 우겨댔기 때문이다. 나는 이복에 대해서 워낙 등한한 사람이다 그리고 습관된것을 좋아한다. 아이때부터 새이복은 어덴가 불편하고 쑥스러웠다. 우리집에서 보통 내가 우겨대는 일은 그대로 되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지고 말았다. 그것은 끝내 연길백화에서 양복을 새로 한벌 사고야 만 것이다 백화아가씨는 너무 좋아서 눈이 가늘어 지고 입귀가 올라갔다. 원래는 내것도 한복으로 맞춘다는 것을 내가 견결히 반대를 했다. 우리이곳에서는 한복을 입는것이 생활화 되지 않았다. 녀성들은 일년에 몇번씩 입는데 참으로 곱다. 그러나 남자들은 입지않는다. 일년에 한두번, 혹은 몇년에 한두번 입는데 그것도 잠간 한두시간 입는다. 그러니 회갑날 하루때문에 랑비할수는 없다는 나의 일가견이였다. 그리고 회갑날에 복장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조상님들의 규정은 없다는 것이 나의 고집이였다. 원칙을 지키면 되는거지 지엽적 세절에서까지 옴니암니할 필요가 없을뿐만아니라 어떤일이나  매사는 상황에 맟추어 해야하고 될수록이면 검박하게, 진심으로 처사를 하는것이 제일 좋고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준비는 다 되고 회갑날은(12월13일 토요일) 박두해 오는데 그때따라 날씨가 련일 유난히도 을씨년스러웠다. 잔치날에 일기가 나쁘면 사람들은 주인공을 원망하며 의론이 많다. 주인공으로서는 애매한 일이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그보다도 잔뜩 청해놓고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한 일인가. 잔치전날도 날씨는 여전히 아니, 더욱 더 사나워만 갔다. 보아하니 래일날씨도 이에서 별로 신통할것 같지 못했다. 우리는 크게 근심을 했다. 나는 밤잠까지 설치며 밖의 동정을 살폈는데 광풍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것 같았다. 오늘까지 외지에 있는 자식들이 다 오고 원근에서 가까운 친척과 사돈님네도 다 오셧으니… 잔치는 이젠 벌려 논 잔친데 날씨가 이러니… 허나 무슨수가 있겠는가?! 여간랑패가 아니였다. 이튿날 아침, 이게 웬 일이냐?! 일기예고가 빛나가도 아주 빛나간것이다. 언제 그랬더냐싶게 날씨는 완전히 화창한 봄날 같았다! 사람들은 효자효부로 소문난 사람들이 회갑을 쇤다고 하니 하늘이 알아준다고 덕담들을 하였다.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9시, 훈춘에서 하객들을 모신 뻐스가 도착하고 도문에서도 다 모이니 우리는 이포단장을 하고 승용차가 줄지어 선 곳으로 나갔다. 그런데 쭉 훑어 볼라니 제일 앞에는 경찰차가 서고 다음에 선 화려한 꽃단장을 한 승용차가 우리가 타고 갈 것이였다. 나는 맏사위에게 앞에 있는 경찰차는 웬영문인가고 물었다. 사위는 대답하기를 공안국친구들이 가지고 왔는데 길잡이를 선다는 것이였다. 꽃차도 우리고장에서는 제일고급이라는 귀빈용 호화차 였고 그 곷단장이라니 희한하기가 난생 처음보는 것이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는가?! 나는 큰딸과 맏사위에게 경찰차와 꽃차를 철거하라고 명령하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회갑이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로망이 든거아니냐 하지 않겠는가. 딸과 사위는 경찰차는 친구들의 소행인데 꼭 설복해서 뒤에 서게 하겠지만 꽃차는 그대로 쓰자고 사정하였다. 친척들과 친구들도 그게 좋겠다고 풍을 달았다. 거기에 박자를 맟추어 안해는 “우리도 한번 꽃차에 앉아봅시다.” 하는데는 어쩔수 없었다. 이런것을 독불장군이요 중구난방이라고 할것이다. 우리는 기분좋게 연길로 달리였다. 지나간 세월이 차창밖으로 흐르는 산천처럼 다가오고 지나가며 바뀌군 했다. 제일 가슴을 설레게 하는것은 부모님들에 대한 회상이였다. 한뉘 고생속에서 허덕이며 나를 키우신 부모님, 출세를 해서 신봉쟁이가 되였지만 나는 효도를 몇번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시다 보니 내가 회갑제를 드렸다. 그날 너무도 슬퍼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나에게 어진안해는 저도 따라 눈물만 씻었지… 오늘의 우리모습을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있는것만 같았다… 학업에 힘쓰며 생기발랄하게 향상하던 청춘시절, 사업에서 성적과 선진을 다투던 보람찬 나날들, 고마운 안해, 자식들을 성가시키기까지 바쁜줄 모르고 어느덧 지나간 세월… 걸어온 인생이 얼핏얼핏 지나갔다. 백산호텔 4층 례식장에 들어서니 넓고 환한 대청에는 하객들이  가득하고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이 말그대로 명절분위기 였다. 우리는 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장모님을 모시고 상을 올린후 큰절을 하였다. 장내에서는 와르르 박수가 터졌다. “어마니! 고맙습니다.” 나는 이 한마디밖에 하지못했다. 가시집은 우리집보다 더 빈농인데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였다. 두집 부모님들중에서 지금은 80여세의 장모님만 계신다. 주례는 방송국의 인기아나운서 서태문씨가 맡았는데 우리는 그의 안내대로 꽃대문을 거쳐 칠색주단을 밟으며 큰상이 놓인 단으로 향하는데 앞에서는 나의 손녀와 외손자가 신나서 곷보라를 뿌리고 량옆에서는 젊은친구들이 꽃실과 꽃포를 연신 터뜨렸다. 음악과 어울려 박수갈채가 요란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우리옆에 서고 딸부부들은 되에 따르며 단상까지 갔다. 착석이 된후 이제부터 잔치는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데 우리는 시키는 서방질을 하면 되였다. 첯순은 아들의 친구가 축사를 하는데, 퍼그나 공력을 들인것 같았다. 그것은 당안을 들추고 채방을 했는지 우리의 지나온 력사가 쭈욱ㅡ 밝혀져 있는게 아닌가?! 부풀린건 없었지만 성적을 일일이 라렬하고 덕행을 지적하고 공로와 품덕을 높히 찬양한후 나중에는 조직과 군중의 호평을 말하고 여생의 행복과 건강장수를 축원한다고 하였다. 축사에서 찬양소리는 누구못지않게 뜨르르 요란했지만 축사를 들으며 나의 심정은 점차 착잡해 지었다. 오늘 만좌중 앞에서 우리가 걸어온 60평생을 동글가놓고보니 스산하지는 않았다. 그만하면 적지않은 일을 했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지며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잇따라 느껴지는것은 내가 더 해야할 일을 많이 못했구나! 하는 자책과 아쉬움이 였다… 다음순은 헌수절목인데 덕담과 노래와 춤이 어울려 흥성흥성 했다. 여기서 특히 잊을수 없는 장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손녀애와 외손녀, 외손자가 헌수를 하며 합창으로 목청껏 건강장수를 축원하던 장면이다. 고 어린것들의 맑은 목소리를 들을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참으로 기뻣다. 이래서 후손후손 하는건가?! 다음장면은 정말 전혀 생각지 못한것이다. 그것은 수십패의 헌수가 다 끝나고 주례가 “루락되신분들이 없으십니까?”하고 좌중에 묻자 꽃대문 밖에 운집해 서있던 수십명 사람들이 일제히 나오는 것이였다. 눈여겨 보니 혹 아는 얼굴도 보이는것 같고 창졸지간에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그들은 우리앞에 줄느런히 두줄로 섯는데 30여명은 되였다. 한사람 한사람씩 자기를 소개하며 인사를 하는데, 아하! 그들은 나의 환자들이였든것이다. 안해앞으로 온 이들도 여럿이였다.(안해는 호사임.) 나는 참으로 반갑고 또 너무도 고마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허허 웃으며 옷소매로 눈물을 딲았다. 우리부부가 의료사업을 할때 세번 전근을 했는데, 오늘 오신이들은 그 세곳에서 대부분이 오시고 몇분은 외지에서 왔는데 한분은 흑룡강 할빈에서 왔다고 했다. 전혀 면목이 없었다. 그가 말해서야 우리는 알았는데 그는 청년시절 안해의 피를 수혈받고 자기가 살게 되였다는 것이였다. 내가 친히 초청한 사람들 가운데서 딱 한사람이 오지않았다. 그는 15분교통권인 룡정시에 있다. 지금 병원어느과의 주임인데 우리는 함께 12년을 사업했다. 내가 령도로 있을때 그는 “매부 매부”하면서 은근하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는데 대인관계에서 지나치게 리해득실을 따지며 계산적이여서 사람들은 그를 “요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를 늘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그는 아무런 설명 한마디도 없이 오지않았다. 우리가 정년퇴직을 하였으니 이젠 볼일도 쓸모도 없다는 건가. 그야말로 사람이 떠나자 차물도 식은 셈이였다 헌수절목이 끝나자 주례는 나에게 한말씀 하라며 마이크를 넘겨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새해 여러분의 가내제절이 건강다복하기를 축원한다고 한마디 한후 끝내려. 했는데, 단상에서 내려다 보니 숱한 젊은이들이 쳐다보지 않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특별히 두어마디를 더 하고 싶었다. “오늘 많은 젊은친구들이 다망함에도 불고하고 이렇게 우리의 건강장수를 축원해 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바이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많이 좋아지었지요. 지금은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혈기왕성하고 정력이 포만한, 아침 8ㅡ9시경의 태양이지요. 현실도 여러분의 것이고 미래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세요. 여러분의 빛나는 성과를 기원합니다.” 장내에서는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답사를 하는 이 중요대목에서 나는 흥분으로 그만 큰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마이크를 안해에게 넘겨줘야할것을 깜빡한 것이다. 오늘 그와 나는 똑 같은 주인공이 아닌가?! 나는 두고두고 안해에게 사과하고 오늘도 미안하다. 그런데 안해는 내가 말하고 자기는 가만히 서 있는것이 더 멋지다고 하였다. 자기까지 나서서 뭐라고 하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것이였다. 가정에서나 단위에서나 그는 시종 부창부수, 현모량처형 녀인이였다. 회갑잔치는 오후 두시에 끝났다. 우리는 하객들에게 일일이 차비를 드리고 전송한후 귀로에 올랐다. 안해는 음식을 보내야 할 집들에 제대로 보냈는가를 꼽아본후 원만히 되였다며 기뻐했다. 저녘후 큰사위는 하객들이 무사히 돌아가셨는가를 확인했는데 한건의 사고도 없었다. 우리는 거뿐한 심정으로 잔치총결을 하였다. 래일 아들네와 막내딸네는 돌아가야 하기에 간단하게라도 지금 총결해야 하였다. 나는 자녀들의 처사를 긍정해 준후 기쁨과 고마움을 표시하고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 “오늘 내가 잔치연회에서 젊은이들께 한 말은 니들께도 하는 말이니 명심하기 바란다.” 하객들의 본첨(축의금)은 10만이 훨씬 넘었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혔다. 원, 이런변이라구야?! 민망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물론 다 오고 가는 돈이지만 이건 너무도 지나치다고 생각되였다. 나는 자녀들에게 자기앞으로 들어온 본첨은 자기가 챙기며 금후 잊지말고 답례를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자녀들의 주장은 그게 아니였다. 답례는 등한히 하지않겠지만 이 축의금은 아버지 어머니가 유람하는데 쓰라는 것이였다. 싱갱이 끝에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자식들은 흥이 도도해서 지칠줄 몰라했고 귀여운 손군들은 깔깔거리며 뛰놀았다. 온갖시름을 다 놓아선지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침실에서 손군들의 웃음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갔다. 회갑을 쇤후 제일 큰 느낌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부터는 인생을 보람있게 살겠다는 결심이였다.                                                                                                                             04.5
123    패가망신 댓글:  조회:1105  추천:0  2018-01-12
       잡문                                                        패가망신                                                                                                                   회령 사람이 돈을 벌고 돈이 사람에게는 필수물이다보니 사람과 돈의 관계는 말그대로 불가분리의 관계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살다보니 돈을 버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리”선생”과 그의 안해 리”녀사”는 내가 옛날부터 잘 아는 사람들이다.(“선생”이니 “녀사”니 하는 존칭은 사람들이 붙힌 별명이다.) 그들은 순전한 농촌사람으로 농민이였다. 그런데, 리선생은 한손이 불구여서 생산대에서 일하기 불편했다. 리선생은 닭마리며 쌀자루를 메고 공사당위서기네 집을 슬금슬금 나들었는데 얼마후 공사에서는 그를 뻐스역에서 복무원으로 일하게 하였다. 신봉을 받으며 쉬운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일년후 리선생은 농촌처녀지만 인물 체격이 환한 처녀한테 장가까지 들었다. 신봉쟁이여서 장가도 쉽게 잘 갔다고 사람들은 부러워 하며 칭찬했다. 각시의 성씨도 리씨였다. 그들은 뻐스대합실한쪽켠에 붙어있는 매표실 겸 숙직실인 작은 단칸방에서 살림을 차리고 아기자기하게 살았다. 전기며 수도며 화목은 모두 공짜였다. 그러면서도 숙직비를 달마다 받았다. 안해의 민식은 생산대와 상냥상냥해서 별말썽이 없이 타다 먹었다. 리선생은 또 어찌어찌해서 성시호구로 넘었다. 그렇게 몇년을 오붓하게 보낸것은 그들부부가 “활약”이 좋은탓이라고, 특히 안해인 리녀사가 보통녀자가 아니라고 사람들은 뒤에서 이죽거리였다. 몇년후 활약이 좋은 그들은 현성으로 이사를 갔는데, 리선생은 방산관리소에 들어가고 리녀사는 현계획생육판공실에 들어가서 일약 간부로 되였는데 집이며 호구며 월급까지 상당히 잘 “처리”를 받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중요대사는 주로 리녀사가 나서서 거침없이 빤썰을 했다고 한다. 그후 10여년 나는 그들의 소식을 듣지못하고 거이 잊기까지 했는데 최근에 그들의 소식을 자세히 듣고 크기 놀랐다. 따라서 차탄을 금할수 없었다. 내가 알때까지만해도 좀 께끈한(께름한) 점이 있긴해도 그렇게 망태기는 아니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에게는 누구를 구워삶을만한 돈도 없었고 뛰여난 무슨 특장이나 능력도 없었다. 그러니 무슨수로 그렇게 대단한 “번신”을 하였는가?! 내가 의아해서 머리를 기우뚱거리니 소식통은 아주 자기가 본듯이 “거, 리녀사의 큰 엉덩이가 있잖은가.”하고는 한바탕 웃어댔다. 그러니 엉덩이가 밑천이고 난질이 특장이더라는 말인가?! 그들부부는 “문화혁명당원”이긴 하지만, 사람이 10여년간에 그렇게 철면피하게 부패타락할수가 있단말인가… 내가 놀라며 차탄한 그들의 “사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리선생은 안해의 “능력”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휘하게 하고 리용하였다. 집에 관계되는 일은 더 말할것도 없고 자기의 문제도 안해를 내세워 빤썰을 하게했다. 안해의 활동으로 그들은 방산집을 헐값으로 두채나 가졌고 리선생은 방산관리소의 서기로 되였다. 계획생육판공실에서도 리녀사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그어떤 문제든, 단위의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리녀사가 일단 출동을 하면 꼭 해결이 되였다. 리녀사는 판공실의 주임이 되였고 지구의 선진공작자까지도 되여 매체에 들썽 사적까지 났다. 따라서 작은 현성이다보니 그들의 반면사적도 수근덕수근덕 반공개가 되였다. 그들이 거리바닥에 나서기만하면 앞에서는 흘끔흘끔,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하며 킬킬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겁을 한 그들부부는 뻔뻔하고 당당하였다. “너도 재간있으면 나처럼 해 봐라. 흥!”이런 배짱이였다. 흥진비래라 할가 사필귀정이라 할가 그들의 수치스러운 결국은 드디여 오고 말았다. 농창은 어느날 끝내 터지고 말았다. 그날, 그들부부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호기를 뽑으며 각자 자기단위로 출근을 했다. 때는 9시쯤 되였는데 한무리 녀자들이 리녀사의 판공실로 짓쳐들어 왔다. 그것은 드살이 세고 내노라하는 공안국국장의 안해와 재정국국장의 안해, 민정국국장의 안해를 위수로 무슨주임, 무슨과장이요 하는 사람들의 안해들로 무어진 결사대였다. 이들의 남편들은 신통하게도 모두가 근래에 선후로 잡혀서 처리를 받았든것이다. 그들의 안해들은 리녀사보다는 어느면에서나 우월한 사람들이라 남편의 문제가 결론을 보기전에는 잠자코 있었다. 소란을 피우면 사회영향도 나빠지겠지만 우선은 남편에게 불리할것이 아닌가? 쥐를 쳐 죽이고 싶긴하지만 독이 아까워 어쩔수가 없어서 그간 최대의 인내력으로 참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아니였다. 감옥에 갈건 감옥으로 가고 캐출맞을자는 쉬원히 캐출을 맞았다.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은 이 마당에 이젠 꺼릴것도 참을것도 바랄것도 없었고 불타는 악만 남았던 것이다. 감옥에 간 세 국장의 안해들이 나서서 사발통문을 돌리고 결사대를 무었다.(홍색반란대 같은) 남편들이 잡혀가고 나떨어 지고 쫓겨난것이 오입질을 해서만이 아니였으나 분풀이를 할수있는 대상은 맞장구를 친 화냥년들 밖에 없었든 것이다. 리녀사는 파마머리를 다 깎기우고 가슴띠와 팬티만 끼고 거리돌림에 잡혀 나왔다. 목에는 “대류망 대화냥년 리^^”이라고 크게 갈겨 쓴, 붉은잉크로 가새다리를 친 개패를 걸고 크고작은막대기에 맞아대며 조리돌림을 당하는 그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처참하고 흉측한 광경이였다. 10여년전에도 이런 장면은 그리 흔치 않았다. 결사대들의 행동방안은 그야말로 용의주도하고 주밀하였다. 그것은 방산관리소 앞 거리로 리선생이 안해와 같은 몰골로 여러명 남자들에게 잡혀 나왔던것이다. 작은 현성이 발칵 뒤집히고 소란이 생겨 반나절이 지난후 경찰들이 달려와서 리씨부부와 주모자들을 어데론가 데려갔다. 그날저녘, 리씨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오전 10시경 그들단위의 사람들은 리씨부부와 어린남매 두아이가 죽어있는것을 발견했다.                                                                                                                 95.11
122    량심 댓글:  조회:1077  추천:0  2017-12-31
          수필                                                           량심                                                                                                                     회령 사람에게 없어서는 않되는 가장 귀중한 것이 바로 량심이다. 량심이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절대적인 것이다. 나에게는 간단하면서도 명백한 이런 리치를 실지로 절실하게 느껴본 일이 한번 있다. 95년 4월초, 청명전날이 였다. 진 림창에서 창장사업을 하는 둘째아들이 단위 자동차로 땔나무를 가득 싣고 우리집으로 왔다. 며느리와 손녀애는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고 나와 아들은 땔나무를 부리웠다. 나무를 다 부리우고 마루이 걸터앉자 아들은 1계도 잔페금이 나왔다면서 돈봉투를 꺼내 놓았다. 잔페금봉투를 받을때마다 나는 무량한 감개에 마음이 설레이였다. 황송하고 감동하고 또 처연하기 그지 없었다. 한마디로는 다 표달할수 없는 심정이 였다 희생된 수많은 전우들과 오늘을 위하여 노력분투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때 나는 잔페금을 받는것이 늘 송구스러웠다. 그들과 비하여 볼때 나는 경탄할만한 군공이거나 모범사적을 세운것도 없고 부상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해도 커다란 행복인데 달마다 잔페금을 받다니… 감격할 뿐이다. 그날도 나는 잔페금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추억에 잠기였다. 곽문성(하북성 고원시 사람. 전투영웅. 회생.)의 모습이 눈앞에 떠 올랐다. 53년 6월 23일, 조선 철원계선에서 싸울때다. 온하루 발악하던 놈들은 숱한 주검을 고지앞에 남기고 물러갔다. 그날따라 특별히 저녘노을이 붉게 탔는데 고지에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오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분풀이를 하는지, 놈들은 우리쪽에 대고 망탕 포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경기관총을 쥐고 전호에 녀려서는데 “엎뎌라!” 하는 웨침소리와 함께 문성이가 뒤로부터 나를 덮치며 엎어지였다. 동시에 지척에서 포탄이 터지였다. 얼마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성이는 희생되고 나는 오른쪽 옆구리가 터져버렸다. 그때 입은 부상으로 해서 나는 이 잔페금을 받게 되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여진다… 아들이 돈을 세여보라는 소리에 나는 무심히 돈을 세다가 뜨끔 놀랐다. 웬 돈이 이렇게 많은가?! 나는 의아해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둘째는 어색한 웃음을 띄우고 낮은소리로 나의 잔페급수가 올랐다고 하였다. 내가 꿈틀 놀라며 긴장해서 바싹 캐여 묻자 둘째는 떠듬거리며 자초지종을 실토하였다. 그는 진과 현의 몇사람과 짜고들어 당안을 뜯어 고치고 나의 잔페급을 올리였던 것이다. 나는 온몸이 얼어드는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대견하고 사랑스럽고 은근히 자랑스럽던 아들이 순식간에 낯선사람으로 변하였다. 음흉하고 비루한 망나니로 보이였다. 가증하고 혐오스럽길 짝이 없었다. 나는 심한 모욕감과 배신감을 느끼면서 돈봉투를 아들의 낯짝에 힘껏 팽개쳤다. 그날저녘 우리집 식구들은 저녘도 먹지 못하고 나의 불벼락을 맞았다. 제일 되게 조지워 댄 것은 물론 둘째네 부부고 안해도 공연한 소리를 한마디 했다가 즉살나게 욕사발을 먹었다. 철부지 손녀애는 무엇을 알아 들었는지 방구석에 엎디여 쿨쩍쿨쩍 울었다. 한바탕 벼락을 치고나니 마음이 차츰 가라앉으며 리지를 찿게 되였다. 나는 아들에게 사람의 량심을 호소하였다. 량심은 인간의 재부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보귀한 재부라고 한다. 사람은 량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항상 마음이 떳떳하고 인생에 힘이 생기고 앞길이 환하고 하는일이 잘되고 즐겁다. 세상에서 가장 참되고 훌륭하고 행복한 사람은 량심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개혁개방이후 돈의 매력은 놀랍게 커지였다. 돈을 모르던 사람이 돈을 알게 되고 돈을 등한시 하던 사람이 돈을 중시하게 되였다. 돈을 좋아하던 사람은 거이 미칠지경이 되였다. 돈을 벌려고 기를 쓰는 사람이 날따라 많아져서 말그대로 배안의 아이도 손을 내밀게 되였다. 개혁개방덕분에 나는 시장경제의 물결을 타고 상품경제의 배를 능란하게 몰아 마을에서 일약 1등부자가 되였다. 나는 떳떳하고도 깨끗한 돈을 벌었다. 나의 돈은 1전한푼짜리도 다 래원이 분명하였다. 나는 부자로 된후 성심성의로 이웃들을 도와 주었다. 우리마을을 다같이 잘사는 부자동네로 만드는 것이 나의 희망이며 목표다. 나는 비록 평범한 농민이고 보통당원이지만 량심적으로 살았다. 당원의 량심에 부끄러운 일을 한번도 한적이 없다. 이것이 만약 자랑으로 된다면 나에게는 유일한 자랑이다. 사람마다 증오하며 손가락질을 하는 부정부패, 악덕악행을 들여다 보면 거이 모두가 돈과 관계되는데 근원은 량심을 버린데 있다. 결과는 패가망신을 하며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량심의 빚을 지고 살아간다. 죽기만 나은가… 둘째를 구하기 위하여 나는 모진마음을 먹지않을 수 없었다. 즉시 령도를 찿아 반성할것을 요구했고 잔페금을 원래대로 해 놓으라고 했다. 둘째네는 그날밤으로 돌아갔다. 둘째가 진당위규률검사위원회에 갔다 온 이튿날 나는 진당위서기한테 전화로 둘째에 대하여 전면적인 심사와 엄격한 처리를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4월 12일, 나는 첯뻐스로 진당위서기를 찿아 갔다. 서기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아들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번에 아주 심각한 교훈을 받았다면서 금후는 잘 할 거라고 하였다. 동시에 나를 당원답게 처사하였다고 칭찬하였다. 나는 사람의 량심을 속일수 없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나는 진 민정을 찿아 갔다. 민정은 나를 보더니 매우 겸연쩍어 했다. 나는 그에게 되지못한 내아들 때문에 민정이 욕을 보았다고 사과한후 금년부터는 나의 잔페금을 몽땅 진광영원(렬군속을 위주로 모시는 양로원.)에 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민정은 매우 딱해하다가 결국은 승낙하였다. 나는 민정이 점심대접을 하겠다고 간곡히 붙잡는것을 사양하고 아들집으로 갔다. 마침. 아들부부는 집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도 무척 어색해 하였다. 둘이 다 수척해 보였다. 점심상이 갖춰지자 아들은 나에게 술을 따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성근히 말하였다. (며느리도. 이번풍파에 며느리 작간도 컸다.) “아부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바른 량심으로 살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소.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지금 둘째는 현 림업국 령도직에서 사업을 잘 한다고 한다.                                                                                                                  98.8
121    일망타진 댓글:  조회:1192  추천:1  2017-12-31
       잡문                                                       일망타진                                                                                                                  회령 두부방 왕령감네 로친은 천성이 고양이를 기막히게 고와 하였다. 벽에는 고양이 사진과 그림을 잔뜩 붙혀놓고 놀이감 고양이도 여러갠데 돈냥을 상당히 투자하였다. 그리고 실지로 고양이를 여러마리를 키웠다. 고양이를 몹시 사랑하는 왕령감네 로친에게는 고양이와 유관되는 지식과 이야기가 상당히 풍부하고 많다. 그는 사람들과 고양이를 화제로 이야기 하기를 좋아했다. 근일에 나는 그에게서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심중히 경청하였다. 그의 일장설화를 나는 그대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일언반구의 거짓말도 하지않는, 실사구시의 전범이라고도 할 만큼 솔직하고 정직한 로친이기 때문이다. 왕령감내외는 고양이를 손군들 못지않게 보살피며 어루만졌다. 그런 배려속에서 왕령감네 고양이들은 따뜻한 구들바닥은 더 말할것도 없고 진수성찬 산해진미로 그야말로  소캉보다 퍽 좋은 온포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령감 로친은 군일집에 갔다 울때도 언제나 고양이 몫으로 각종 료리를 알뜰하게 갖춰왔다. 왕령감네 고양이들은 자고싶은대로 실컷자고 먹고싶은대로 실컷먹고 계획생육 제한도, 그 어떤 법의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편안하게 살았다.그놈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뛰놀고 뒹굴고 목욕하고 미용하고 고운옷을 입고 병이 나면 공비치료를 받고 생일까지 쇠며 라디오를 듣고 티비를 보고… 하여튼 어느 부자 못지않게 행복하게 살았다. 술놀이와 책보기만은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천적으로 무능력, 무흥취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쥐의 천적이다. 하지만 왕령감네 고양이들은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그놈들은 쥐를 잡지않았을 뿐만아니라 되려 무서워 하던것이 후에는 친해지였다. 고양이들은 쥐들이 아무리 날뛰여도 관계치 않았고 재미있게 구경하고 보호하고 협조하고 련애를 하고 함께 뒹굴기까지 하였다. 하여, 살판을 만난것은 물론 자연히 쥐들이였다. 낮이고 밤이고 지상이고 지하고…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이 온갖 행패질을 기탄없이 하여댔다. 노래하고 춤추고 뛰놀고 먹고 마이고 오입질하고 굴을 뚫고 물건을 쏠고 두부에 똥, 오줌을 갈기고…하여튼 지랄이란 지랄은 돌아가며 다 하였다. 때로는 운동회를 하고 싸움판을 벌려서 집이 무너질 지경으로 그 소란이 대단하였다. 더욱 기막힌 것은 쥐와 고양이들이 앞발을 서로 잡고 옹헤야를 추지않으면 꼬리를 서로 물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청춘원무곡 왈쯔를 신나게 추어대는 것이였다. 이 집 고양이와 쥐들은 한패거리가 되여 왕령감부부를 허수애비로 보며 우롱하였다. 그러나 왕령감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다. 고양이들 때문에 쥐약이며 착고 같은걸 사용할수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들은 교대로 보초를 서고(두부를 지켜야 했다.) 몽둥이를 들고 쥐들을 쫓거나 때려잡았는데 그럴때면 꼭 고양이들이 앞에서 알찐거리며 방해를 하였다. 왕령감내외가 쥐들과 결전을 할때면 고양이들은 모여앉아 미국 공포영화를 보듯 흥미진진해서 구경하였다. 그러다가도 관건적 시각이면 뛰쳐나와 쥐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틀전이다. 한창 두부를 앗는데 어데선가 완바신만큼한 큰쥐 두마리가 콩물에 풍덩풍덩 뛰여 들었다. 잇따라 작은놈들이 십여마리가 콩물에 뛰여들었는데 무리싸움이 붙은것 같았다. 오늘 두부는 철저히 망치고 말았다. 왕령감내외는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러 쥐들을 때려 잡았다. 몽둥이 앞에서 알찐거리는 고양이들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쥐들을 때려잡은후 왕령감부부는 마대를 두개나 가져다 고양이들을 몽땅 잡아넣었다. 그리고는 마당에 내여다 놓고 늘씬하게 몽둥이 찜질을 무차별 퍼 부었다. 연후, 마대를 강물에 처 넣었다. 몽땅 사형에 처한 것이다. 만약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고있는, “동물의 벗”이란 빛나는 영예의 칭호를 갖고있는 법관씨가 안다면 당장에서 기절할 것이다. 그리고 개복한 후에는 련합국 동물권익보호법에 즉각 기소를 할것이다. 이 법관은 루이스. 베싸라씨가 안해가 바람을 피운데 격분하여 침대밑에 있는 고양이를 쐬 죽인데 대하여 21년의 도형을 심판한 사람이다. 왕령감네는 고양이들을 몽땅 릉지처참을 하고도 격분이 내려가지 않아서 고양이 사진이며 그림이며 놀이감 등등을 몽당 부엌아궁이에 처 넣었다. 그리고 쥐약이며 착고, 옭노를 실내외 곳곳에 늘여놓아 쥐들을 대대적으로 소멸하였다. 그후부터 왕령감과 로친은 사람을 보기만 하면 고양이와 쥐이야기를 하였는데, 고양이는 부정부패분자들이고 쥐는 흑사회깡패망나니범죄자들이라며 이것들이 결탁하면 집을 망하게 한다면서 철저히 추호의 용서도 없이 몽땅 때려잡아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그리고 사람세상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99.10
120    주총리의 명언 댓글:  조회:1191  추천:0  2017-12-27
     수기                                                     주총리의 명언                                                                                                                  회령 주총리께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은 “내 여기에는 일이 없으니 다른 동지들을 가 보시요. 그들에게 동무들이 더 수요되오.”라고 하신 이 두마디 뿐이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겨우 이렇게 말씀하신후 몇초후에 그이는 두눈을 크게 뜨시고 영원히 이 세상과 리별하시였다. 해야할 일이 많고 많았던, 더 많은 일을 하려던 그이께서는 종시 그것이 마음속에서 내려가지 않으시여 눈을 감지 못하였으리라… 신변의 의료일군들을 다른 동지들 한테로 가 보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관심하는 그이의 성미와 품성의 표현이기도 하며 그이께서 한 마지막 지시이기도 하다. 주총리께서는 생전에 “사람은 늙도록 학습하며 늙도록 개조하며 늙도록 일해야 한다.”는 극히 평범하면서도 극히 절대적인 진리의 명언을 하시였는데 그의께서는 림종까지 자신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다. 나는 극히 평범한 이젠 퇴휴까지한 일개의 무명백성이지만 주총리의 명언을 두고 깊은 사색과 감탄을 금치못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나는 주총리의 명언을 나의 좌우명으로 하고 매우 명심하게 되였다. 퇴휴하였으니 놀고먹는 팔자가 되였다. 그러나 좌우명을 상기하면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사지는 멀쩡하고 건강한데 그저 놀고먹어서야 되겠는가?! 적어도 월급의 절반만큼이라도 나라에 보답하는 바가 있어야 할것이다. 나는 자꾸 이런 생각으로 불안한 날들을 보내였다. 무도장이며 놀음이며 낚시질, 문구같은것이 기막히게 재미있다고 하면서 주위에서 거듭 권고를 했으나 나는 워낙 그런데는 흥취가 없고 그렇다고 당장 무슨 일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였다. 어떤사람들은 인생의 도리를 조리있게 풀어가면서 향수할 때는 향수할줄도 알아야 한다고 력설하면서 나를 교육하였으나 나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당과 인민에게, 나라에 보답할것인가? 나는 여러날 궁리하던 끝에 개인진료소를 꾸려보자고 작정하였다. 나는 사회공작에 참가할 때부터 의사였고 안해는 호사였는데 지금까지 쭉 의료공작이 우리들의 직업이였다. 우리부부는 30여년을 국가병원에서 청춘의 정열과 지혜, 중년의 원숙한 능력을 이바지 하였다. 그간 우리는 당과 인민, 국가의 배양으로 고급기술인재로 성장하였다. 개인진료소를 꾸리자면 문제될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돈벌이를 위한것 같아서 그것이 마음에 몹시 께름하였다. 우리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한가지만 확고부동하게 명심하면 개인진료소를 잘 할수 있겠다고 신심을 가지고 위생국에 허가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정책이 어쩌구 조건이 어쩌구 하면서 비준을 하지 않는게 아닌가?! 진료소를 이미 시작한 동료들이 어떠어떠하게 뒤문을 쓰라고 귀뜀을 해 주었지만 나는 그러고는 싶지 않았다. 그러는 중 향, 진병원 세곳에서 초빙요청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해가 구체적인 리유를 배렬하면서 거절하였다. 주요하게는 외지에 가서 살림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라는 리유였다. 보수를 받지않고 몇년을 잘 사업해 보려던 나의 미몽은 수포로 되고 말았다. 어느날, 시 중점고중에서 사업하는 막내사위가 무슨말을 하다가 학교도서실 녀선생이 아마 1,2년 휴식할것 같은데 인원안배가 문제라고 하였다. 그말에 나는 귀가 번뜩해서 교장선생을 찿아갔다. 대체상 나를 알고 있는 교장선생은 미안해 하면서도 기꺼히 동의하였다. 나는 일전한푼의 보수도 받지않기로 하고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키로 교장과 약속하였다. 나의 심정은 기쁨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나는 학교도서실사업을 착실하게 할뿐만 아니라 학교위생사업도 잘 도우리라 결심하였다. 재직에 있을때 나는 이 학교의 위생사업을 성급1류에 올리자고 전임교장과 약속한바가 있었는데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나는 이번에 약 1,2년간의 노력을 들여서 그 목표를 실현해야겠다고 은근히 좋은생각을 하였다.(학교에는 의무실과 교의가 있었지만 했내기 교의는 다른 판사원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요일오후 안해에게 학교로 출근하게 된 사연을 말했더니 안해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얼른 갈피가 서지 않는 모양이였다. (이번에는 반대못하리…) 나는 거뿐하고도 유쾌한 기분이였다. 그런데 저녘후에 안해가 고견을 늘여 놓는데, 결론을 말한다면 한마디로 않된다는 것이였다. 사위가 사업하는 곳에 나가  일하면 각가지 뒷소리가 대뜸 생겨서 결국은 사위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불리할 뿐이라는 것이였다. “보수도 받지않고 일을 잘해도 뒷소리가 생기는가?!” 내가 발끈해서 언성을 높히니 안해도 만만치 않게 대여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말을 누가 곧이 듣겠습니까? 지금 세상인심이…” 여러날 쟁론을 거듭한 뒤끝에 내가 두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보수를 받지않고 학교일을 해 준다면 아마도 열에아홉은 코웃음을 칠것이다. 뿐만아니라 “사람이 그런줄을 몰랐는데, 엉큼하기루 속에 구렁이가 들어 앉았네…”할것이다. 지금세상에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닐것이다. 불똥은 사위와 교장선생에게도 튀게 될것이다. “저것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여.. ㅎㅎㅎ.” 이런경우를 두고 버선목이니 번져 보이랴! 한다. 음미해 보니 안해의 말이 옳았다.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큰가마 밥인 국영기업의 경제상황은 날로 곤경에 빠져들고 온갖 여론이 죽가마 끓듯하면서 인심은 황황해 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런때에 령도들은 엉뚱하게도 자기들 몫으로 고급주택을 짓고(사람들은그것을 “부패뤄”라고 했다.) 고급승용차를 사들였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비리행각들이 있었다. 할일없는 퇴휴패들은 종일 모여앉아 불평, 불만으로 시간가는줄을 몰라했다. 그들은 기업령도들을 내놓고 착호지명을 해가며 욕을 하고 거침없이 상급기관까지 거론하였다. 얼마후, 기업에서 월급을 몇달 미루자 퇴휴패들은 령도와 해 내자고 사발통문을 돌리였다. 그들에게는 “근거”가 수두룩 했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몽땅 일떠나서 (2000여명) 령도를 들이 치자는 것이였다. 나는 이렇게 하지말고 대표를 선출해서 문제해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지만, 그들은 이미 여러번 그렇게 해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앖었다며 “과단”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드디여 일은 터지고 말았다. 퇴휴패들은 기업의 사무청사를 점령하고 령도들을 잡아다 족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화대혁명 그대로 였다. 나는 그들속에 가담하지 않았다. 비난이 무성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것은 어쩐지 당과 걸고드는것 같아서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든 것이다. 퇴휴패들이 한바탕 난동을 부리자 아닌게 아니라 문제가 즉각 해결이 되였다. 왜서인지… 그 리치를 나는 지금도 리해할수 없다.  퇴휴월급을 “공밥”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고민은 여전히 심각했다. 나는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 보았다. 나처럼 무위도식하면서 나날을 허송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돈벌이를 하느라고 밤낮으로 헤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돼지치기를 하다가 너무도 힘들어 지금은 약재부업으로 일을 바꾼 윤서기(재직시는 중층간부. 나보다 10여년 이상.),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대중 꾸준히 두부장사를 하는 한선생(고중교원. 역시 나보다 10여년 이상.) 그리고 꼭꼭 제시간에 2,3리 먼 숙직실로 출근하는 조령감, 짠지장사 뒷바라지로 일년열두달을 마을사람들과 한자리에 잠간 앉아 한담할새도 없이 바삐보내는 박령감, 산속에 들어가 소방목을 하느라 얼굴도 볼새없는 강령감… 그들은 쉬지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의 두손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들에게도 달마다 퇴휴월급은 있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였다. 나는 우정 그들을 찿아 이야기를 하여 보았다. 그들의 말인즉 극히 평볌하고도 또 가장 실제적이 였다. “… 공장사정이 어려워 월급도 제때에 주지못하는 처진데 제힘으로 살아야지. 일을 꺼리지 않으면 돈벌일은 많다오. 맞춤하게 활동하면 건강에도 좋고…” 나는 그들의 말에서 백성의 본색, 굳세고도 소박한 인생관, 근로인민의 순수한 량심을 보았다. 나는 “공밥”만 믿지말고 내힘으로 살아보리라 결심하였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힘으로 가꾸는것이야말로 떳떳하고 보람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늙도록 학습하며 늙도록 개조하며 늙도록 일하는”것이야 말로 보람있는 인생이다. 어느날, 안해는 엉뚱하게도 일잡상점을 하여보자고 하였다. 나는 대뜸 반감이 치솟았다. 직업의사이고 고급지식분자인 우리가 장사를 하다니?! 장사군은 제애비도 속인다고 나는 장사군들을 늘 바로 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상품시대, 시장경제시대 제애비가 아니라 제자식도 속여먹는 장사치가 한둘이 아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당당한 단위와 기업체도 그따위 짓거리를 하여 사회적문제로 되고 있다. 우리의료부문만 보더라도 화타, 편작을 찜쪄먹을 “명의”가 밤을 자고나면 비온뒤 똥버섯 돋듯 사방에서 뛰쳐 나온다. “명약”광고는 삼년전에 죽은사람도 살려낼듯 요란하고, 암이란 암은 다 떼고 백혈병, 당뇨, 심장병, 풍습병, 배속에서 귀신이 우는병(처음 듣는 병이다.), 맹장염을 수술하지 않고 몽땅 치료하며, 골질증생을 침한대로… 하여튼 못떼는 병이 없다. 노벨의학상은 다 에데로 가고 이런 “명의”들을 몰라보는가. 지금은 어데 가서 “나는 의사입니다.” 하고 말하기 부끄럽다. 의사와 변호사는 나라에서 내놓은 도둑놈들이라고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렬악하기는 처음인것 같다. 이런 사태를 보고만 있는다는 것이 어쩐지 나의 잘못인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보았다. “옳다! 바로 이것이다. 의사들을 구하자. 그들의 직업도덕, 직업량심을 불러 일으키자.” 나의 머리속에서는 당년에 뻬쮼, 장사덕을 따라배우며 의료위생사업을 활발히 진행하던 나날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안해는 그때 생면부지의 농촌환자에게 수혈까지 하여 주었지… 나는 이제부터 정신문명건설에 있는 힘을 다 바치리라 결심했다. (안해는 소원대로 무역청사에 매대를 열었다. 그의 목표는 “당원모범매대”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개혁개방이후 상품경제, 시장경제로 물질문명건설은 고속발전을 가져오고 있지만 정신문명건설은 오히려 엄중히 퇴보한것 같았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연구를 적극하여 정신문명건설에 이바지할 때라고 인정하게 되였다. 정신문명건설은 돈으로 하는것이 아니며 거기서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효력은 돈으로 계산할수가 없이 거대하고 심윈하고 중요하다. 정신문명이 없다면 말그대로 “위성은 하늘에 올라가고 붉은기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이 말세라고 하는 미국사회처럼 기형적인 사회가 되고 말것이다. 나는 매일 10여시간씩 문학작품창작에 몰두하였다. 가정과 사회란 두개의 그릇속에서 각종인간들을 고찰하고 연구하였다 그리고 진, 선, 미를 추켜들고 가, 악, 추를 타매하며 사람들의 정신문명건설에 도움을 주려했다. 나는 주총리의 명언을 좌우명으로 여생을 이 사업에 바치려 한다.                                                                                                                  09. 10
119    고추가루 댓글:  조회:1107  추천:0  2017-10-19
     수필                                                              고추가루                                                                                                                      회령 조선사람은 매운고추를 즐겨 먹는데, 고추가루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식품이다. 고추가루는 우선 김장을 담그고 고추장을 하는데 기본적인 주요재료다. 내가 알기로는 이 두가지에 고추가루가 대량 사용되는외 그 외로는 양념작용이 주로이다. 나는 고추가루를 밥먹듯 하는 사람이여서 안해는 해마다 고추가루 장만에 심혈을 기울인다. 나는 퍼러딩딩하게 독이 오른 풋고추로(알짜 순매운것으로) 채를 해 주면 고봉밥 한 식기에 고추채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땀을 뻘뻘 흘리며 입이 몽땅 떨어져 나가듯 얼얼하게 먹는다. 그래야 속이 훈훈하고 포만감이 나고 군이 뚝 떨어지게 먹었다는 만족감이 생긴다. 고추가 빨갛게 익으면 고추채로서는 맛이 떨어지지만 햇고추가루맛이란 그게 또한 사람을 감질이 나게한다. 나는 안해가 고추가루를 어서 장만하기를, 어서 고추가루철이 되기를 은근히 기다린다. 묵은고추가루가 단지에 항상 비축이 되여 있긴하지만 햇고추가루와는 비기지 못한다. 우선 신선하지 못하고 특유의 향기가 없고 매움도가 떨어진다. 시퍼렇게 독이오른 생고추를 된장에 찍어 여나문개씩 먹는 그맛도 한철이고 고추채도 한철이다. 고추가 빨갛게 익을때는 내입맛도 한철이 지나간다. 나는 고추절임이나 장밑고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해는 해마다 그런것도 명심해 담그는데, 그것은 내가 때론 엄동에 갑자기 그런걸 먹고 싶어하는 입맛변덕이 있기 때문이다. 고추장은 생선탕에 없어서는 안될 주료이다. 뻘건생선탕, 신선로는 내가 즐겨먹는 요리이고 특식이다. 무슨국이든 무슨채든 뻘겋게 고추가루를 듬뿍 치면 나는 군침부터 삼킨다. 이렇게 나는 일년내내 고추가루를 한끼 건느지 않고 잘 먹는다. 사람들이 나의 배속에 고추충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나로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고추를 특히 편식하는 바람에 안해의 고역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남정과 수십년 함께 살다보니 안해의 고추명심이 습관으로 되였다. 그는 고추를 별로 먹지 않지만 명심은 나보다 훨씬 자각적이고 또한 높다. 나를 섬기는 안해의 진심과 배려와 노력을 이전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는 일일히 느껴진다. 세월이 오래 가니 우둔한 나도 셈이 드는건가… 고마운 안해다. 지금은 고추철이 되여 장마당에는 고추장사가 절반장터를 차지하고 판을 치는데 아낙네들은 포대채로 사들이는 열조가 일어났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고추를 다듬고 썰고 뒤적이고… 종일 바삐도는 아낙네들을 볼수있다. 할머니들도 있고 젊은 각시들도 있다. 일손을 돕는 령감들, 남정네들도 적지 않다. 이 고추철은 시간이 긴박하고 절주가 빠른 시각이다. 통고추대로 말리는것은 전통적 옛날법인데 그때는 집집마다 고추다래가 주룽주룽해서 가을맛이 물씬나고 보기 좋았다. 그렇게 바싹 말린 고추를 하나하나씩 마른헝겊으로 깨끗히 딱은후 가루를 내였다. 고추절구, 고추방아를 찧을때면 녀인들은 코구멍을 막고 입에는 수건을 감고 눈물, 재채기, 기침을 련속 퍼부으며 고역을 했다. 지금은 발전하고 약아져서 통고추를 즉시 썰어 말린다. 그리고 기계로 번뜩 가루낸다. 이 수단은 녀인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진보다. 보통 고추가루 한근에 50전의 가공비를 받지만 약삭빠른 수공업자는 1원을 받는다. 그래도 얼마나 거뿐한지 모른다. 예전에는 안해들이 팔이 느른하게 종일 절구질을 했지만 남정들은 슬금슬금 뺑소니를 쳤다. 위엄이 떨어지게 고추방아 찧겠냐고… 나도 피신해서 반두질을 하고는 생선탕을 끓인다며 고추가루부터 찿았다. 넙죽해서. 안해는 해마다 남의집 쇠절구를 빌어다 쓰며 그걸 매우 부러워 했다. 고마움을 표시해서 고추가루를 한사발씩이나 갖다 주면서도 안해는 항상 미안해 하였다. 퍽 후에야 쇠절구를 장만하고 안해는 무척 기뻐했다. 그는 절구를 보물 다루듯 하여오다가 무척 아쉬워하며 얼마전에 페물장사에게 팔아치웠다. 금년 고추철이 되자 어느날 아침 안해는 장마당에 나가 빨간고추를 세마대나 사왔다. 그것을 보고 고추를 제일 잘먹는 나는 너무도 아름이 차서 입을 딱 벌이였다. 저것을 어찌 다 다루겠는가?! 우선 딱고 썰어야 하고 또 바싹 말려야 겠는데, 물퉁박이 고추는 적어도 4일은 말려야 한다. 하늘이 잘해줘서 해가 바짝 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그런 좋은날씨여야 3ㅡ4일 역사를 하면 기계칸으로 가서 번뜩 고추가루를 낼수 있지만 요즙 날씨는 어찌도 변덕스러운지… 나는 그 잔손질이 싫어서 언녕 금년부터는 고추가루역사를 하지말고 농촌에 고추가루를 합동해서 먹자고 우겼다. 그런데 안해는 그렇게 만든 고추가루는 믿음성이 부족하다느니 질이 나쁘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김장을 했다가 김치가 물크면 큰 랑패를 본다느니… 가지가지 리유를 렬거하며 기어코 제손으로 고추가루를 장만하겠다고 주장을 세웠다. 그러면서 나를 삐치지 말라고 하였다. 자기가 놀음질 삼아 오락삼아 살랑살랑 한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게 어디 놀음질 삼아 오락삼아 살랑살랑 하는 일인가! 아주 고된역사를, 나는 굉장히 부담스러 웠다. 고추 세마대를 장터에서 집가지 날라온것만도 내가 낯이 깍기는 일이였다. 106근이나 된다는데 그걸 운임이 아까워서 삼륜차를 쓰지않고 쪽바리밀차로 실어왔다니 남들이 남정네가 없는 과부로 보지 않겠는가… 무거운 일은 남편네가 응당히 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여튼 고역은 시작 되였다. 고추를 널어 말리기 시작했는데, 무슨일이나 후닥닥 해 치워야 시름을 놓고 거뿐해 하는 나의 성미다 보니 나는 즉시 썰어서 말리우자고 하고 안해는 그러는게 아니라고 했다. 싱갱이가 쓸모있나. 이런일에서는 안해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 보아하니 날씨가 신통치 않기에 우선은 통고추를 널어 말리우며 날씨가 좋을때에 재빨리 손을 쓴다는 안해의 전략이였다. 날씨가 궂으면 통고추대로 둬야지 썰어놓으면, 그걸 제때에 말리우지 못하면 고추를 다 썩여 새까맣게 되여버린다는게 아닌가. 그런걸 왜 날씨가 신통치 못한 오늘 삿는가고 내가 화를 내니 어쩌다 진짜 숫배치고추를 만났다는거다. 장사군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고추가 숫배라고 소리 지르지만 진짜 숫배를 만나기는 힘들다고 했다. 날씨가 언제부터 좋아지겠는지 기회를 기다린다는데, 이거 장기전 지구전을 하게 생겼군. 나는 부담이 하늘만큼 컸다. 금년에는 태풍이 벌서 다섯개나 불어치면서 우리고장에도 영향이 많았는데 하늘은 그야말로 괘씸하게 변덕을 부리였다. 고추철 요만때면 파란하늘에 해가 지지듯 불타다가도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켜돌고 비를 뿌리다가는 방금 멀쩡해 지고 또 갑자기 미친바람이 불어치기도 했다. 하늘이 이렇게 심술을 부리면 아낙네고 남정네고 급급히 달려다니며 널어놓은 고추를 걷어들여야 하고 또 비죽히 맑은하늘이 보이면 내다 널어야 하고… 말그대로 무슨 전투를 하는것 같았다. 밤에는 그 숱한 고추를 걷어들여 장판바닥에 널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아침에는 밖으로 내여 가는데 자리다툼도 긴장하다. 이틀인가 지나서 안해는 이젠 고추를 썰어야 겠다고 하였다. 관건은 날씬데 오늘부터 며칠은 날씨가 좋다고 기상대가 말했다고 했다. 우리는 새벽두시에 일어나서 100여근의 고추를 11시까지 다 썰고 마당에 널기까지 했다 배구장 절반만큼은 되는것 같았다.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제발 변덕이 없기를 빌며 고추를 자주자주 젓으며 해빛을 찿아 자리를 옮기며 잔손질을 부지런히 하였다. 이렇게 고추를 말리우는 동안은 가슴도 말라들면서 손발이 쉴새 없다. 그런데 이거 웬일이냐?! 신신펀펀 좋던 하늘중천에 갑자기 검은구름 한덩이가 뜨더니 멀쩡하든 하늘이 대뜸 찌부등해 지었다. 나는 기상대를 죽일놈 살릴놈 줄욕을 퍼부으며 급급히 고추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전기장판을 켜고 선풍기를 틀고… 고추말리기대회전이 집안에서 벌어졌다. 이렇게 련 속3일을 역사를 해서 고추를 살려내고 드디여 다 말렸다. 그런데 정작 가루를 내고보니 가루가 거칠고 주근주근해서 다시 전기장판을 켜고 선풍기를 돌리는 동작을 거듭해야 했다. 이틀이 지나니 고추가루가 다 말라서 다시 가루를 냈는데 고운 고추가루를 십여근 얻었다. 안해는 숫배고추여서 알이 잘 났다고 하며 상등고추가루를 얻었다며 무등 좋아했다. 저녘에 한술 듬뿍 떠서 돼지다리곰국에 넣어 먹어보니 고추가루맛이 정말로 일품이였다. 그런데, 2ㅡ3일이 지나 안해는 또 고추 세포대를 사왔다. 이런 기막힌 일이라구야! 내가 벌컥 역정을 내니 안해는 또 그말ㅡ 삐치지 말란다. 요건 자기가 알뜰살뜰 다루어서 자식들에게(세집) 나누어 준다는 것이였다. 발상은 기막힌 모성애의 발상이긴하지만 고양이손도 빌어쓰는 이 고추가루철에 가만 있을수야 있는가… 이번에는 일기가 너무너무 좋아서, 천기가 어미심정을 알아줘서, 좋은고추가루를 또 10여근 얻었다. 이로서 금년의 고추가루역사는 결속이 되였다. 두번째로 고추가루를 내여온날 저녁에 안해는 불고기로 총결연을 했는데, 내가 수고를 많이하고 공이 크다고 표양 하였다. 나는 속으로 “당신이야 말로 현모량처, 진짜로 훌륭한 녀성이요!” 하고 말하며 카ㅡ 한후 큼직한 불고기 한점을 햇고추가루에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별맛이 따로 없었다.                                                                                                                          17.10                                                                                      
118    댓글:  조회:1342  추천:0  2017-06-16
        중편실화소설                                                                   한                                                                                                                      회령     “그때법이 지금같으믄사 샘물깨서는 순보네가 데일 잘살게우.”     “지금법이 어때서?”     “아따, 나라법이 고쳐진걸 모루오?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다.’했능디…”     “그러문 이전에 때려부쉬고 뺏은걸 어떻게 하능가? 지나간 얘기디만.”     “그때는 그때고… 이제부터능 개인의 합법적재산은 불가침이란거요.”     “법이란게 원래 기래야디…”     동구옆언덕 정자나무그늘에서 샘물깨마을 로인 넷이 앉거니 눕거니하고 옛날이야 기를 하고있다. 그들로는 80대고령들인 장재석, 김만덕, 배점동이와 70이 지난 나ㅡ 문순보다.     샘물깨는 이고장에서 60여호의 제일 큰 마을이였는데 지금은 10여호 궁벽한 마을로 되였다.     오늘도 날씨는 무척 뜨겁다. 정자나무가지에서는 매미 두어마리가 지친듯 가끔 서너마디씩 울어보고 무슨새는 맑은소리로 곱게 지저귄다. 까치둥지가 있는 저쪽나무에서는 까치 한쌍이 생기발랄해서 깍! 깍! 짖어댄다.     “그때 우리가 딩역살이 할셈치고 김대장을 찿아갔으니 말이디, 순보네는 아주 페가가 됐을게우.”     “기막힌 일이디! 허씨네와 신씨네가 원, 그리두 지독할줄이야.”     “그러니 갸덜 잘된게 무스게 있소? 다 환갑전에 죽구 자손들이래야 온전한건 하나두 없으니… 망했어.”     “사람이 너무 이악하능게 아니야!”     “후ㅡ. 정책이 좋구 간부가 좋아야 혀. 기래야 나라가 잘되구 백성두 잘되지. 기때나 디금이나…”     “사실이 그렇티.”     지금 이들이 하는 이야긴즉 나도 여러번 들어서 잘 알고있는 토지개혁때의 이야기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겪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역은 알지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가슴이 미여져서 나는 듣고싶지도 않았고 그들이 외우고 또 외우는것이 질색이였다. 하지만 타박할수는 없다. 이상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생애에서 제일 큰, 그리고 유일한 이야기거리니까.       광복이 되자 조선 청진감옥에서 아편밀수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허덕근이와 그의 사촌매부 신흥칠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샘물깨에는 그들의 부모처자와 형제 그리고 일가친척붙이들이 십여호가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째지게 가난했다. 하지만 덕근이와 흥칠이, 덕근의 삼촌인 허문섭, 흥칠의 두 남동생, 그리고 친척들 중에서도 남자 너덧은 하도 감때가 사나워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꺼리며 피하고 싫어했다. 그들은 농사에는 별반 전념하지 않고 노가다판이거나 투전판을 나들며 싸움질 하고 도둑질, 건달질을 꺼리낌 없이 하였다. 마을에서는 그들을 망나니무리라고했다.     광복난 이듬해초가을 샘물깨에는 토지개혁공작대가 왔는데 리일룡이라는 사람이 목갑총을 메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를 리대장이라고 불렀는데 기실 그는 대장이 아니고 보통대원이였다. 리일룡은 서른살푼한데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에 칼자국까지 있어 까마잡잡한 것이 볼품은 없었으나 뱀눈처럼 차갑고 흉악한 삼각눈빛이 반짝일때면 살기를 뿜었다. 그는 샘물깨에 오자마자 허덕근, 신흥칠이네와 손잡고 “빈고농단”을 뭇고 맹활동을 하였다.     샘물깨에서 제일 잘사는 집은 우리집이 였다. 다음은 장재석이네 등 서너집이 괜찮게 살고 김만덕, 배점동 등 십여호가 자작농이였다. 남어지는 모두 소작농인데, 뒷마을 지주 최군필의 땅을 소작지었다.     우리집은 할머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누이 셋은 농사일을 하였다. 학교가 먼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딸들은 물론, 나까지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나에게는 외양간을 치고 소꼴을 베고 돼지풀을 뜯는 등 잡일을 시켰는데 늘 힘에 부치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배워준 사람의 도리란 “사람이란 부지런해야 산다.”는것과 “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어찌도 억척스레 하였는지 원근에 “꼬리없는 수쇠”, “꼬리없는 암쇠”라고 소문이 났다.     우리집이 부자로 된것은 대개 광복전 3년부터이다. 3년전에는 자작농을 하면서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세 딸들까지 기를 쓰고 부업을 하였는데 땔나무장사와 돼지와 닭, 개 등 짐승치기를 하며 닭알한개, 고기한칼 먹지않으며  푼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는중 광복 4년전부터 뒷마을 최지주가 논밭을 얼마씩 팔았는데 시가보다 좀 눅긴해도 현금직거래여서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최지주는 자기의 논밭을 사라고 아버지에게 자청했는데(아주 생각해 주듯히) 마침 아버지손에는 푼돈이지만 얼마간의 현금이 있다보니 최지주의 논밭을 비교적 헐값으로 사들이게 되였다. 시국이 급하게 글러감에 따라 최지주는 논밭이며 가산을 슬슬 처리하면서 여차직하면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자기가 지주로 되기까지는 원근에 너무도 많은 악행을 했던것이다. 옛말에 부자가 하나면 세동네가 망한다고 했지만 이고장에서는 최지주 하나로 열동네가 망했다. 최지주 본인도 흉악했지만 그가 결탁한 개다리왜놈순사나부랭이들도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최지주는 첩살림을 세곳에 두고 살았는데, 첩으로 끌려가기를 반항해서 자살한 처녀도 셋이였다. 물매로 맞아죽은 사람은 일곱, 병신이 되였거나 골병든 사람은 몇인지 셀수없다. 엄동설한에 가마가 뽑히우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집은 몇백호가 될것이다… 최지주가 헐값으로 혹은 지어는 외상으로까지 밭이며 재물을 처리하니 나의아버지는 이게 웬 떡이냐?! 좋아라하고 사 들였다.(광복이 터지자 최지주는 일본사람들과 함께 즉각 도망쳤다.)     토지개혁이 시작되자 우리집은 꼼짝없이 부농으로 잡히워 청산을 맞게되였다. 집식구들의 힘만으로는 논밭을 다 다룰수 없다보니 더러는 소작을 주었고 농망기에는 품삯을 두셋씩 쓰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장리쌀과 리자돈을 놓기도 했다. 광복전해에는 12칸기와집을 짓기까지했다. 땅이많고 재물이 많고 기와집에 압박착취까지 했으니 청산을 맞아도 단단히, 철저히 맞아야 한다고 빈고농단에서는 땅! 땅! 을러메며 별렀다.     얼마후 성분을 획분하고 청산을 시작하였다. 리일룡이 조직한 샘물깨빈고농단주석 은 허덕근이고 부주석은 신흥칠인데 골간은 두말할것없이 그들 줄래였다. 덕근의 삼촌인 허문섭이도 한자리를 했는데 청산위원이라 했다. 덕근의 처는 왼쪽눈이 경하게 사팔뜨기였는데 해반주그레하게 생겨서 눈을 할기죽거릴때면 애교스럽게 보였다. 그는 어느새 일룡이와 배가 맞았는데 부녀반장을 했다. 치보위원은 흥칠의 손밑동생이 되여 그는 구구식보총을 한자루 가지고 있었는데 매일 그것을 매고 성수나서 우쭐우쭐 마을을 돌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마을에도 갔다왔다.     빈고농단에서는 청산대상에 우리집은 잡아놓은 소고기고 그외에 장재석이네 등 세집을 상중농이라 하면서 털어먹기로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유일하게 조선 청진고중을 졸업한 (광복 되는해) 재석이가 정책규정조목에 따라서 토지면적, 집재산, 착취행위 등 모든것을 따지고 들며 계산하는바람에 그만 꿍꿍이가 실패를 하였다. 기실 그들은 하중농정도도 되나마나 하였든 것이다.     청산투쟁시작첫날 빈고농단에서는 우리집마당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세딸과 나 그리고 할머니까지 다 내 세우고 투쟁을 시작하였다. 높은마루에는 탄자를 깔아 주석대로 하고 치보위원인 흥칠의 동생은 장총을 메고 대회장주변을 위엄스레 어슬렁 어슬렁 순라를 했다. 주석대 복판에는 일룡이가 목갑총을 차고 않았다. 량켠에는 덕근이와 흥칠이 문섭이가 앉았는데 덕근의 처는 낯을 반짝 쳐들고 남편곁에 앉았다.     일룡이는 잔뜩 위엄을 부리며 나의아버지를 문초하기 시작했다.     “너, 문명준! 부농이 맞지?”     “나에게 땅이 많으니 부농이 옳겠지…”     “빈고농의 피땀을 빨아먹은놈! 어떻게 착취를 했는지 몽땅 탄백을 해라! 이 때려쥑일 놈으새끼!” 일룡이는 제애비벌도 더 되는 나의아버지에게 거침없이 반말질을 하여대며 불호령을 하였다.     “내가 누기를 착취했소?”     “소작주구 장리쌀에 변놓이꺼정… 머슴도 두구… 그래, 이게 착취가 아닌가! 이 개쌍놈으새끼가!”     “이것보슈. 남들이 제일 후하다해서 반작을(지주와 작인이 절반씩 나눔) 줄때 나는 2.8로(지주 2, 작인8) 주었소. 장리쌀은 한말을 주고 두말을 받을때 나는 두되를 받기두 하구 받지않기두 했소. 변놓이는 제일 눅은 변을 주긴했지만 한번도 변을 받아본적은 없소. 문섭이, 흥칠이어마님네  말씀해보시우. 저분네 몇집은 너무두 구 차해서 어예 소작료를 받지도 않았소…”     “엉? 네놈으새끼! 악질완고통이구나! 되우족쳐라!”     일룡의 일성대갈에 흥칠이와 그의 치보위원동생이 살기등등해서 몽둥이를 들고 나섯다. 그들은 말그대로 사정없이 나의아버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그들은 사전에 일룡의 지시를 받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험악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경악하는데 재석이 만덕이 점동이 등 여러사람이 나서서 그들을 제지하였다. 재석이는 유일한 고중학교졸업생이고 만덕이와 점동이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지공장에서 일하다가 광복이 되며 공장이 서게되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샘물깨에서는 이들만큼 학식이나 견문이 넓은 사람이 없었다.     “순보아버지 말이 사실이요. 따질건 따지더라도 사람을 때리는건 틀리오. 리대장이 이래도 되오?” 감때사나운 만덕이가 일룡이에게 다가서며 시비를 걸고들었다.     “니들 혁명맛을 모르는구나! 문명준! 니놈이 얼마나 뻗치는가 두구 보자!” 케가 우습게되자 일룡이는 산회를 선포하고는 빈고농단간부들을 데리고 덕근이네 집으로 갔다.     이날후로부터 우리집은 초상난집과 같았다. 빈고농단간부들이(기실은 허씨와 신씨네 줄래들) 시도 때도없이 뛰여들어서는 재산을 조사등록한다면서 집을 샅샅히 뒤번지며 돌아쳤다. 그리고 닭이며 개를 잡아 술상을 차리라 호통치고 밥을 해 올리라고 하였다. 그러기를 며칠지나 그들은 아예 우리를 마을뒤켠에 있는 반나마 허물어진 페가에 내쫓았다. 깨여진 쟁개비며 이가 떨어진 사발, 부러진 숟가락, 누더기보다도 더 구역질 나는 넝마같은 이불, 이런것을 주며 우리를 빈몸으로 쫓았는데 옷까지도 벗겨내고 저네들의 집에서 가져온 누더기를 주었다.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들 그리고 할머니까지 결사적으로 악을 쓰며 죽기로 대항해 나섯는데 결국은 죽을지경으로 물매를 맞고 쫓겨났다. 나는 기를 쓰고 울어대여 줄욕을 먹으며 호된매를 맞기도 했다.     우리집청산은 허씨네와 신씨네가 물건이며 옷, 이부자리, 세간기물, 쌀… 등등을 슬금슬금 가져가다보니 얼마 않되여 거덜이 났다. 30여호 빈고농들은 쌀 한되, 숟가락 한개도 가지지 못했다. 정작 청산과실분배는 간단했다. 큰소 두마리는 덕근이와 흥칠이가 끌어가고 송아지는 문섭이가 가졌다. 밭도 좋은자리는 허씨네와 신씨네가 차지했다. 집은 우리를 쫓아낸날부터 공회당으로 쓴다며 관리는 덕근네가 한다던것이 그대로 덕근이가 가지고 말았다. 마을사람들은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뻔히 보고 아는지라 뒤에서는 여론이 많았다. 사람들은 샘물깨에 토비무리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두목은 일룡이고 대장은 덕근이와 흥칠이라 했다.     일룡이가 주도한 소위 청산과실분배와 토지개혁이 끝난 이튿날이다. 일룡이는 샘물깨에 있을때는 계속 덕근이네 집에서 숙식을 했는데, 전날 밤늦게까지 술놀이를 한 일룡이는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그냥  자고있었다. 점심때가 거이되여 나의어머 니는 덕근이네 집으로(우리집) 시걱거리를 가지려 갔다. 집에서 쫓겨난날부터 우리는 끼니마다 빈고농단에서 내여주는 나뱃겨(마지막으로 나오는 보드라운 겨), 흙모래가 섞인 싸래기를 타다 먹었다.(우리집에서 돼지와 닭모이로 둔것.) 때꺼리쌀은 때로는 일룡이, 때로는 덕근이, 어떤때는 덕근의 처가 창고문을 열고 내여줬는데 제것을 공짜로 주는것보다 더 거들쩍 거리며 각박하기 짝이 없었다. 큰누나는 일룡이에게 강간당하고(감춘 금품을 말하라며 심문하는척하다가) 아래누나들은 일룡이와 덕근이에게 강간당할번한 후부터는 쌀타려 가지않았다. 주로는 할머니가 다녔는데, 할머니가 앓아눕자 어머니가 다녔다. 어머니가 가자 마침 덕근이가 창고안에서 무얼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운베보자기를 가지고 창고에 들어서니 덕근이는 잽싸게 곳간문을 닫고 어머니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헐떡거리며 입쌀을 주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와락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와서 한바탕 저주를 퍼 부었다. 꼬부리가 누워있던 아버지는 벌컥 일어나드니 도끼를 쥐고 씽! 달려나갔다. 아버지가 뜨락에 뛰여들자 마침 마루에 앉아있던 일룡이와 덕근이, 흥칠이가 대뜸 응전을 했다. 아버지는 누구를 찍지도 못하고 몽둥이란타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룡이는 공포까지 한방 쏘았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사람들이 급급히 몰려와 보니 아니, 이런?! 나의아버지는 피못에 쓰러져 인사불성이고 그 장면은 처참하고도 끔찍스럽기 짝이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룡이는 “이놈새끼! 반동놈새끼!”하고 련속 게목을 지르며 허장성세를 하였다. 그러면서 또 련속 두방이나 공포를 쏘았다. 일룡이가 거침없이 또 총을 쏘자 날파람있고 감때사나운 만덕이가 대뜸 일룡의 귀통을 갈기였다. 그리고 호통치며 쏘아부쳤다. “왜놈이 왔소?! 토비가 왔소?! 당신 왜 쩍하면 총질이요? 당신, 이마을에 와서 마음대로 행패질하며 자꾸 이러는거 아니요!”     재석이와 점동이는 나의아버지를 번갈아 업으며 집으로 달리고 만덕이는 도끼를 주어들고 뒤따랐다. 아버지의 몰골을 본 할머니는 식칼을 들고 덕근이네게로 갔다. 그리고 당장에서 맞아죽었다. 일룡이는 또 공포를 두방 쏘았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격분하여 치를 떨었다. 이런 무법천지가 있는가?! 그래, 이마을이 저 몇놈의 건달망나니들 세상인가… 재석이와 만덕이, 점동이는 따라나서는 마을사람들을 말리고 40여리밖에 있는 구정부로 토지개혁공작대 김대장을 찿아갔다. 그들은 저녘켠이 다 되여 김대장을 만났는데, 샘물깨의 그간의 정황을 낱낱히 전부 고발하였다. 소위 청산과실분배며 토지개혁, 그리고 일룡이와 덕근이, 흥칠이가 피워댄 건달짓거리까지 고발하였다.(나의큰누나와 재석은 혼약까지 한 사인데 일룡이에게 강간당한 누나는 그것을 재석이에게 말하고 혼약을 취소했다.)     깜짝놀란 김대장은 대원 두사람을 데리고 밤도와 샘물깨로 달려왔다. 사실이였다! 마을사람들의 반영은 재석이네가 고발한것보다 더욱 엄중했다. 이틀후, 김대장은 일룡이와 덕근이, 흥칠이는 현으로 압송하고 샘물깨빈고농단을 정돈하였다. 주석에는 배점동 부주석 겸 치보위원은 김만덕이가 선거되였다. 장재석은 문서에 회계까지 겸하게 되였다.    샘물깨의 문명준청산은 김대장의 직접적지도하에 다시 진행되였다. 밭분배를 다시하고 큰소 두마리는 식솔이 많아서 밭면적이 많은 두 빈농에게 분배했는데, 거기에 다섯집씩 붙혀서 소결이까지 무었다. 기와집은 식구가 제일 많은 전춘식이네 와 집을 바꿔 가지도록 하였다. 그런데, 전춘식로인네가 싫다고 떼를 써서 나의아 버지가 사정을 하기까지 했다. 밭도 우리집인구수에따라(죽은 할머니도 포함.) 량전을 분배받았다. 덕근이네가 준것은 페경지로 있은 자갈밭이 였다. 이부자리, 옷견지와 세간기물도 적당히 돌려받았다.     현에 잡혀간 리일룡이는 마희산토비의 밀탐이라는 것이 탄로나서 총살당했다. 덕근이와 흥칠이는 1년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후 얼마안되여 죽었다. 덕근이는 창피해서인지 두문불출하다가 페병으로 죽고 흥칠이는 조선밀수를 하다가 조선서 맞아죽었다.       청산투쟁을 맞은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페인이 되고 말았다. 물매를 호되게 맞은것이 어혈로 되고 특히는 머리와 허리뼈를 크게 다쳤는지 두통증과 허리병으로 운신조차 하기 바빠했다. 하지만 두분은 삼노끈으로 머리를 동이고 기다싶히 하면서도 농사일을 하였다. 그간 큰누나와 둘째누나는 흑룡강 밀산어덴지 홀애비한 테로 시집을 갔다. 두 누나는 까치둥지만한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함께 떠나갔다. 누나들이 떠나갈때 나는 무척 울었다… 막내누나와 내가 일군이기는 하지만 우리집은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으로 살았다. 3년재해 첫해가을 아버지는 마당에 심은 감자를 캐다가 “아구 가슴아!”하고 두번 위치고 숨을 거두었다. 석달후, 어머니도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아버지처럼 “가슴아!”하고 돌아가셨다.     집에는 막내누나와 나뿐인데 누나는 나를 장가보내기전에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하며 로처녀로 늙어갔다. 그래도 가끔 누나에게 혼처중매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들어보면 너무도 기가막혔다. 팔부가 아니면 벙어리, 마흔살, 쉰살이 되는 후처자리 였다. 누나는 원근에 소문난 인물체격이 너무도 아름답고 똑똑하고 알뜰하고 일잘하고 허물할데가 없는 색시감이 였다. 아니, 부농의 딸이라는 너무도 큰 허물이 있었다. 누나는 모든 중매를 단마디에 거절했다. 나에게는 혼처문안도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몇년후 우리마을에 장춘에서 지식청년들이 20여명이 왔다. 몽땅 조선말은 한마디도 모르는 한족청년들인데 호장이라는 쑹가는 나이가 스무살이 넘었다고 했는데 험상궂게 생긴데다 롱구선수처럼 우둑진 체격이였다. 그애는 낡은 수레바퀴를 두개나 얻어다 놓고 하루에도 몇번씩 거중운동을 하였는데 확실히 힘이 장사였다. 쑹가는 남자와 녀자애 몇을 졸개처럼 달고 다른집체호로 놀러다니기도 하며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생산대 령도와 사원들은 그들을 건드리기 싫어했다. 반달남짓 지나서 집체호청년들은 저들을 “붉은기반란단”이라 하며 마을의 계급투쟁 뚜껑을 열어제낀다고 소리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나와 막내누나는 그들에게 불리워 가서 이것저것 닥달을 당하며 자주 심문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이번에는 누나만 불러 갔는데, 누나는 밤중이 되여서야 집으로 왔다. 나는 그때까지 자지않고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누나의 기색이 다른때와는 달라 보였다. 내가 그새끼들이 어쩌던가? 무슨일이 없었는가? 이리 저리 물으니 누나는 그저 그렇다. 하면서 자기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찜찜하기만 했다.     며칠후다. 그날은 두만강변에 있는 콩밭의 기음을 매게 되였다. 그날 집체호청년 들도 여럿이 나왔는데 희한하게도 호장 쑹가도 일하려 나왔었다. 쑹가는 나의누나 곁에 이랑을 잡고 기음을 매여 나갔다. 얼마쯤 김을 매며 보니 쑹가가 누나보다 한발쯤 앞서 나가고 있었다. 내가 다시 엎드리는 순간! 기절할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나의누나가 호미뒤등으로 쑹가의 뒤통수를 힘껏 깟던것이다. 누나는 련속 두번을 더 내리깟다. 쑹가는 찍소리도 못하고 즉사를 했다. 누나는 호미를 던지고 달려나가 두만강에 뛰여들었다.     파출소에서 누나의 방을 검사할때 수첩에 쓴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였다.     “네놈이 나를 더럽혀?! 너는 내손에서 끝장이 난다!!” 화불단행이던가?! 누나가 죽은후 한달남짓 지나서 흑룡강 밀산에서 외지조사를 나온 사람들이 큰누나와 둘째누나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일본특무, 조선특무로 심문을 받다가 맞아죽었다는 것이였다… 두 누나 모두가 후손은 없다고 하였다.       나는 서른살이 넘어서야 어리숙한 리혼녀에게 장가를 갔다. 안해는 사지는 멀쩡해도 일도  살림살이도 바로 하지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본능은 어쩔수 없어서 우리에게는 아들형제와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이들을 소학교까지는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실력이 형편없고 내가 뒷받침 할 힘이 없다보니 모두 집에서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안해는 부증으로 시름시름 앓음자랑을 하다가 샘물깨에서 개혁개방이 실행된해 초가을에 나를 떠나 갔다.(샘물깨에서는 1983년부터 개체를 하였다.)     개체가 실시된후 우리4부자는 극성스레 일하였다. 하여 첫해에 “온보”를 해결하여 더는 배고픈 고생을 하지않게 되였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는 청산투쟁으로 집에서 쫓긴날부터 개혁이 된 이해초가을까지 40년가까히 계속 배고픈고생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이밥을 가득 담은 소래를 가운데 놓고 먹을때마다 이 이밥 한술 먹지못하고 죽은 안해, 그리고 부모형제들, 개벽같은 지금세상! 앞날에 대한 서글픔… 여러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갈마들어 목이 메군하였다…     우리집 살림은 남과같이 펴이지 못했다. 세상은 잘살수 있는 세상으로 되였지만, 잘살고픈 마음은 있지만 나는 마음처럼 할수없었다. 신체가 어찌도 하약한지 영 기맥을 출수없고 여기저기가 아프지 않을때가 없었다. 자식들의 형편을 본다면,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이 똑똑치 못하니 제노릇하기가 글렀다.     큰아들은 그래도 저와 비슷한 짝을 얻어서 장가를 갔으나 작은것은 향방이 없다. 딸은 제그릇이 그렇다보니 만난 짝도 그저그렇다. 나는 손녀애를 보긴했으나 고것도 답답한 애물이다. 왜냐하면 우리 이고장에는 학교란게 없다. 원래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개혁후 사람들이 련이어, 대량으로 마을을 떠나가면서 소학과 초중이 한개로 되여가지고 향소재지에 있다. 샘물깨에서 40여리나 먼곳이다. 손녀애를 어떻게 공부시키겠는지… 그것도 나는 대책이 없다.     세월이 좋아져서 사람들은 “두번째 해방”을 맞았다고 좋아하지만, 모두 풍족한 생활로 웃음꽃이 활짝피고 있지만 나는 폴싹 늙어버리고 지쳤다. 사람들은 나를 재석이네들보다 더 나이를 먹은 사람으로 본다.       “세월이 참 빠르단 말이야! 명준어른이 순보를 안아온것이 아주 어끄제 같은디… 그때는 모두가 순보를 떡판에 떨어졌다구 했디…”     “그때, 저사람이 너, 몇살이니 물으면 새발같은 손가락을 일곱개도 보이고 여덟개도 보였지. 보기에는 대여섯살 같았구만.”     “자네부모는 항일한 사람 같아. 조선 종성에서 왜놈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달아났다니께…”     “지금두 살아 있을가? 어디에 계신지… 아마 이젠 모두 사망했을게야…”     나는 광복나기 두해전, 문순보로 문명준의 아들로 호적에 올랐다. 지나간 평생을 돌이켜 보면 쓸쓸한 마음을 금할길 없고 무량한 감개를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다.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쓸쓸하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긴하지만 나와는 연이 없다…                                                                                                           1990.3
117    나의필명에 대한 설명 댓글:  조회:1697  추천:0  2017-06-05
           수필                                                     나의필명에 대한 설명                                                                                                                        회령     내가 문단에 끼여든것은 지난세기 90년대다. 그때 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나의 괴상한 이름을 번듯히 그대로 썼다. 나의 “존함”은 우습게도 “김재국”이다. 아이때는 이름으로 무슨 말썽이 없었는데 커가면서 이름이 우스개로 될때가 자주 있었다. 원래 우리고장에서는 무엇을 잘못하거나 나쁜일이(사고, 사달) 생기면 “재홰” (재화)를 친다. 쳤다.하지 “재구”를 친다. 쳤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있는줄도 몰랐는데 어데서 누가 주어왔는지 “재구”란 말이 인입되였다. 그때로부터 익살쟁이 친구들은 나만보면 얼씨구 좋다. 재구를 기어코 “재국을 친다.”는 말로 와전해 가지고 활용하며 놀려댔다. 그럴때면 나는 친구들과 “네, 이놈덜! 어른을 치다니. 데끼! 불알을 까놓을 불상놈덜같으니라구. 으험!” 하고 맞장구를 치며 우스개판을 벌리였다.     나의 이 괴상한 이름은 외가켠의 학식도 꽤 있고 점괘도 볼줄안다는 복술쟁이 장할아버지가 작명을 한것이라는데 그는 일주일이나 나의 사주팔자를 고심연구를 하고 이런 희한한 이름을 지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때 나의 부모님들은 선후로 아이를 둘이나 잃고 자식이 없다가 나를 얻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이름 하나 좋은걸로 붙혀보자고 장복술할아버지께 간청을 했다고 한다.     하여튼, 그 이름에 무슨 천기가 내포되여 작간을 하였는지 나는 “재국”을 많이 쳤다. 목숨도 험한고비를 여러번 넘고넘으며 오늘까지 붙어왔다. 사람들은 내가 나쁜일을 해도 “재국을 쳤다.”하고 좋은일을 해도 “그느마 재국을 쳤다!”하면서 나의 이름을 놀림감으로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름때문에 무슨 부담같은건 느끼지 않았다. 언제어데서나 글자그대로 주저없이 이름을 썼다.     이름덕인지… 광복50주년기념행사에서 나의작품이 한국에서 상당히 큰 상을 받게되였다. 그때 나는 나의 이 하찮은 이름도 세상볕을 보았구나! 하고 감개무량했다. 하여 부모님께 감사하고 장복술할아버지께 감사하고 나의 이름에 자호감과 애착이 갔다. 하여 작품은 줄곧 호기롭게 떳떳히 김재국이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그러던중, 아주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문단에 동성동명ㅡ 글자까지 똑같은 김재국(金在國)이 나타났든 것이다. 신문에서 우연히 알게되였는데 나는 심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신문에서는 김재국씨가 쓴 “한국은 없다”(없애치운다. 죽여치운다는 뜻인것 같았 다.)라는 실화단행본이 출간되였다고, 출간기념 및 작품세미나가 성대히 진행되였다고 하였다. 주최는 연변작가협회였다. 우리중국조선족에게서는 가장 크고 가장 권위적인 국가급작가조직이다. 김재국씨는 연변작가협회회원으로 중견의 찬양받는 작가라고 했다. 그의작품 “한국은 없다”는 세미나에서 높은 호평을 받았고 후에 여러잡지 들에서 련재를 하고 재판을 하는 호황을 누리였다.     연변작가협회에 김재국이 둘이 있음을 안후 나는 문단에 동성동명의 문인이 등단하는것은 가급적이면 피면하는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작품집에서 김재국씨의 간력을 보니 그는 화룡사람으로 나보다는 17년이나 어린사람이였다. 하다보니 재국이란 이름을 사회생활에서는 내가 먼저 사용했다. 하지만 문단에서는 재국씨가 나보다 퍽 먼저 이 이름을 사용했든 것이다. 나는 사정이 이런줄을 모르고 그간 문단에서 흔들거린것이 재국씨에게 손상과 영향을 준것같아서 그에게, 여러작가분들께, 독자님들께 무척 미안하고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동시에 젊은사람을 애호하고 지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적에 오른 이름은 어쩔수 없는, 뭐 별문제가 아니지만 문단에서의 이름은 즉각 고쳐야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두루 생각던 끝에 필명을 “회령”이라고 지었다. 동시에 재국씨가 우리문단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성과와 공헌이 크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였다…     내가 필명을 회령이라고 붙힌것은 무슨 특별한 내역이 있는건 아니다. 조선 함북 회령은 나의 고향이다. 나는 회령대안인 중국 삼합땅에서 여러해 산 적이 있는데 밤낮으로 두만강 건너 고향 회령을 바라보며 그리워 했다. 내가 회령이라는 필명을 선택할때 마음에 다진바가 있다. 그것은 독자와 사회에 유익한 글을 쓰며 고향에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리라는 결심이였다.     몇년전, 북경에서 살때 어느날 김재국씨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한국에서 나와 서신거래가 있던 학자분이 왔는데 저녘시간에 만나자는 것이였다. 그날 나는 다른사정으로 몸을 뺄수가 없어서 한국분도 재국씨도 만나지 못했다. 그후에도 이래저래 지금까지 재국씨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재국씨가 잘 발전하기를 바란다. 젊은작가들이 우리문단에서 대를 이어 용솟음치며 백화가 만발하기를 항상 기원한다.     나의 작가증은 김재국으로 되여 있지만 문단에서는 회령으로 통한다. 많은 지인들은 내가 작가인줄을 모른다. 어떤 지인들은 회령인즉 나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왜서 그렇게 숭고하고 위대한 사업을 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빛내지 않는가고… 재대로 성명을 쓰라고… 나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필명을 쓰는데 대하여 아무런 유감도 없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조금이라도 사람들께 유익한 일을 하기위한 것이지 나의이름을 날리기위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7.3
116    두만강 성에장 댓글:  조회:1160  추천:0  2017-06-01
           수필                                                두만강 성엣장                                                                                                                   회령     언제고 두만강을 보면 나의 마음은 항상 슬프다… 봄이 와서 3월하순께가 되면 우리이곳 두만강에는 성엣장이 내리고 한식전에 강은 완전히 풀린다. 그때는 강기슭 룡바위벼랑과 산기슭츠렁바위서덜에 진달래와 살구꽃이 아름답게 피여난다. 강믈은 이곳에서 폭이 넓어지고 잔잔한 물결이 유유히 흐른다. 강변으로는 백사장과 자갈밭이 길게 펼쳐지고 다음은 유보도 량켠으로 버들방천이다. 하루종일 봄놀이 하는 사람들로 강변은 행복과 기쁨과 활기가 넘친다. 화창한 봄날, 마음껏 웨치며 뛰노는 아이들, 웃고 노래하고 떠들며 봄을 즐기는 저이들… 사람들은 모두 유쾌, 상쾌, 통쾌, 즐거워 한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한없이 슬프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세살때 잃다보니 성함도 면목도 년세도 모른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는 해 한식날이 였다.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두만강변 이곳에 와서 두만강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에서 2ㅡ3리 위에 있는 이곳이 그때는 인적이 아주 적어서 고즈넉하고 조용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강을 향하여 술을 석잔 붓고 새번 절을 하라고 시키였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였다. 내가 세번 절을하고 일어서자 이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였다. 연후 우리는 강변너럭바위에 앉아 제사소물을 음복하였다. 제사소물이래야 이밥 한그릇과 닭알지짐 석장, 그리고 고추장덩이에 달래와 무슨둘레 봄나물이였다. 해방후에도 우리집은 30여년 줄곧 가난했다. 아버지는 술을 한잔 마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이런걸 무슨맛에 먹는다니…” 하시고는 담배를 말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오늘 너에게 지금까지 기다리며 참아 온 말을 하여주마. 음ㅡ. 이 애비와 에미는 너를 길러준 어시고 너를 낳아준 부모는 저ㅡ기, 어디에 계신단다.(두만강아래쪽을 바라보시며.) 이젠 네가 소학교를 다 배우고 곧 중학교로 가겠으니 세상을 알때지. 옛날같으문 서방두 간다. 사연은 이렇다. 그러니까 광복나던해 한식얼마전인데, 그날이 음력으로는 이월 열사흘이고 양력은 삼월 스무엿새였다…”     아버지는 차분한 어조로 나의 신상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그날 저녘무렵, 두만강 건너 마을에서 사는 홍씨부부는 강변뙈기밭에서 메를 캐고 있었다. 아직 땅은 얼마 녹지않았으나 농량은 얼마없고 식솔은 여럿이여서, 죽물에 보태자고 그들은 언녕부터 나물을 뜯고 풀뿌리를 캐던중이였다. 홍씨부부가 메 캐기에 골몰하는데 어데선가 갑자기 젊은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몹시 다급해 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남자가 업은  애기를 내리우더니 홍씨안해에게 아이를 안겨주며 이런말을 하였다. “우리는 쏘련서 건너 온 홍군인데 지금 부대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강이 이렇게 풀릴줄을 예상못했는데, 우리 이 아이를 맡아주시오. 곧 오겠 으니 수고해 주시오.” 그들은 홍씨부부가 사는 마을이름과 성씨를 묻고는 어쩔새없이 즉시 강물에 뛰여들었다. 성엣장이 둥둥 떠내리는 강물을 그들부부는 손잡고 건너기 시작했다. 룡바위이곳에서 두만강은 폭은 넓어도 깊지않고 물살도 너무 세차지는 않았다. 홍씨부부는 아이를 안은채 강을 건너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물은 남자의 어깨쯤이 되는것 같은데 녀자는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건너고 있었다. 그들이 강을 절반넘어 건너갔는데 이쪽 아래위 량켠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요란한 총소리가 터졌다. 왜놈병정 대여섯놈이 몰방으로 총질을 하여대는데, 홍군부부는 물에 잠긴후 다시 솟아나지 않았다…     아이는 이발이 난걸보아서는 두세살 되는것 같았다. 홍씨네는 아이를 받아온날 밤으로 30여리 먼곳에 사는 나의 아버지를 찿아왔다. 두집은 좀 늘긴해도 친척간인데 우리집이 홍씨네보다 좀 괜찮게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를 둘이나 잃고 어데서 아이를 하나 얻어 키울가 했다는데 마침 내가 생겨난 것이다. 광복이 된 이듬해 우리집은 룡바위 아래마을로, 지금이곳에 이사를 왔다.     그날 아버지는 이런 말씀으로 이야기를 끝내셨다.     “너는 홍군의 아들이고 량심이 바른 농사군의 아들이다. 앞으로 좋은사람이 되여야 한다.”     나는 그저 슬픈마음에서 쿨쩍쿨쩍 울었다.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나의머리를 자꾸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며 아까처럼 저 멀리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많은 세월이 지나갔다. 홍군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래전에 멀리 가셨고 농민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생을 아주 정직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농민아버지의 말씀을 명심하고 실현하였다. 30여년 공직생활에서 나는 근본을 항상 잊지않고 당의 말을 잘 듣기에 노력하였다. 하여 큰 모범인물은 된적이 없지만 사실대로 말한다면 착오 진 일은 한번도 없다. 나에게도 부정부패를 할수있는 순간은 항상 있었고 또 많았다. 하지만 나는 렬사증 한장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할때, 묵묵히 땅에 충실하고 인생에 성실하고 평생을 정직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할때, 그리고 뢰봉, 초유록 등 모범인물과 당의교시를 생각할때… 량심에 어긋나는, 궤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절대로 할수없었다.     우리마을이 지금은 아름다운도시로 엄청 커지고 룡바위벼랑, 츠렁바위서덜 그 일대는 유원지로 건설되였다. 나는 그곳으로 자주 간다. 언제나(사시장철) 거기에는 남녀로소 희희락락 즐거워 하는 사람들로 분빈다. 나도 그들속에 있다. 하지만 나의 심정은 미묘하다. 자호감을 느끼면서도 그리운 마음이 슬픔으로 되여 짙은 비감을 어쩔수 없다…                                                                                                          2017.3
115    일본헌병대 통역(10) 댓글:  조회:1552  추천:0  2017-05-20
                                                      일본헌병대 통역(10)              6.일편단심   사업       연길에 도착하니 우리일행을 지위초대소에 들게 했다. 나흘 휴식한후 우리는 지위조직부로 불리워 갔다. 부부장이라는 젊은녀성동무가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는 지금 주덕해동지가 회의중인데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윽하여 주덕해가 방으로 들어 왔다. 그는 “부대에 가서 유능한 간부들을 지원해 달라고 했드니 전부 문제꺼리들만 보냈군. 부대 일처사가 글러 먹었어.”하며 부대를 욕하는지 우리를 시답잖아 짜증을 내는지 툴툴거리였다. 이건 사람을 괄시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대뜸 부아가 치밀어 “그럼, 우리를 부대로 돌려보내 주시오.”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우리가 무슨 죄인인가… 주덕해는 “됐어. 됐어. 그저 그렇다는 말이지.”하며 손을 흔든후 연변의 형세를 설명하면서 사업을 잘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어 조직부 부부장 녀성동무가 사업터를 안배해 주었다. 장춘에서(164사)온 전업간부들은 개산툰종이공장으로, 심양에서(166사)나온 동무들은 석현종이공장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날오후 우리는 개산툰으로 갔다.     당시 개산툰공장은 생산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창장 서명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면서 며칠 쉬라고 하였다. 우리는 공장초대소에서 주숙을 하였다. 서명은 광주시 사람으로 중산대학 졸업생인데 가정성분은 지주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 혁명에 참가했고 1938년에 입당한 연안간부 였다. 그는 영어에 능통했다. 서명은 주덕해와 달리 우리를 “로팔로” “항일간부”, “연안간부” 하면서 존중하고 관심 했다. 그는 출근할때면 먼저 우리를 둘러보고는 공장으로 갔다. (서명은 후에 동북국 공업부문에 갔다가 외교부에서 사업하며 구라파 여러나라 대사로 사업. 1988년9월 사망.)     나는 며칠 쉬면서 사상상 정서상에서 마음을 정리 하였다. 부대를 이끌고 보무당당히 귀국할 날을 꿈꾸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군복을 벗고 지방으로 왔다. 어떻게 할것인가. 조직의 안배에 복종하며 맡겨주는 사업을 참답게 할수밖에. 무슨수가 있겠는가. 개별행동은 할수없다. 어느날, 조직은 조국으로 부를 것이다… 나는 효상이에게 편지를 써서 사연을 말하고 좀 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며칠후 나는 서명을 찿아가서 아무일이나 다 좋으니 사업을 맡겨 달라고 하였다. 서명은 일하겠다는 사람으로는 내가 첯사람이라고 하며 매우 반가워 했다.       지금부터 류동호의 곡절적인 인생길은 더욱 심화되기 시작 한다.       서명은 류동호의 본보기였다. 대단한 지식분자이며 혁명에서 고경력자인 그는 광주를 떠나 머나먼 북쪽의 변강산골인 개산툰에 와서 오직 혁명을 위하여 사업하지 않는가… 류동호는 안착하고 혁명사업에 충성하리라 새롭게 다짐 하였다.     서명은 류동호에게 인사고 고장사업을 하라고 하엿다. 그것은 공장에 와서 일하려는 사람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사업이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림으로부터 서명의 안해가 왔는데 동북제지국에서는 그를 공장 선전고에 전근 시켰다. 서명의 안해는 선전고는 싫다면서 인사고에서 사업하고 싶어 했다. 서명이 미안해 하면서 이런 사연을 류동호와 말하자 류동호는 선뜻히 자리를 내 주고 선전고 일을 맡았다. 류동호는 간사로 리삼을 데리고 선전고 사업을 시작 했다. 그는 급선무로 문맹퇴치와 선전대를 조직하는 사업을 틀어 쥐였다. 그는 원목차간에서 림시공으로 일하는 처녀 조춘복이를(중학교 졸업생) 선전고로 오게한후 문맹퇴치를 맡게 했는데 춘복이는 3대거리로 문맹퇴치반을 참답게 가르쳤다. 춘복이가 공장에서 정식으로 선생질을 하자 적지않은 농촌 처녀 총각들이 공장으로 일하려 왔다. 류동호는 청년들 속에서 알맞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문맹퇴치반 선생대오를 보강하고 인차 업여선전대도 조직 하였다. 업여선전대는 다양한 문예절목들을 만들어 공인들에게 연출하고 주변의 농촌마을에도 공연을 다니였다. 내용은 주로 혁명의 주인공답게 혁명을 잘 하며 공산당과 모주석을 노래하며 계급각오를 제고하며 혁명정권을 보위하며 공장을 사랑하고 복구와 생산을 하루 빨리 회복하자는 것이였다. 워낙 이 방면에 흥취와 소질이 있는 동호인지라 선전고의 사업은 활기롭게 잘 되여가고 있었다.     몇달후 어느날 인사고 책임으로 있던 조경현이가 툴툴거리며 류동호를 찿아 왔다. 그는 서명이가 안해를 인사고 고장으로 안배하며 자기를 안전고에 가라고 한다는 것이였다. 돌이켜 보니 서명은 전업간부들을 차요한 부직이 아니면 지어는 공인으로 안배 하였다. 류동호는 즉시 서명을 찿아가서 당신이 창장과 서기직을 도맡는 것은 적당치 못하며 민족지구에서 민족간부를 중시하고 배양할 대신 차요시 하는것은 원칙적 문제라고 엄숙히 의견을 제출 하였다. 서명은 류동호의 의견을 허심히 접수 하였다. 그는 지부대회에서 자기의 편면적인 사상견해를 검사 하였다.     그해 년말 류동호는 석현종이공장에 파견되여 생산관리를 학습하게 되였다. 갈때 그의 건의로 리훈과 리일민을 데리고 갔다. 학습을 마치고 그는 생산을 틀어쥘데 대한 구상까지 가지고 신심있게 돌아 왔다. 그런데, 서명은 연변지위의 지시라며 동북국당교에 가라는 것이였다. 그는 그자리로 심양에 갔다. 학습은 조선전쟁 때문에 한달 앞당겨 끝나고 단위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에게 계획과 과장을 하라고 하였다. 이로하여 서명과 류동호는 크게 쟁론을 하였다. 동북제지국에서 계획과 과장으로 왕 모(한족)를 보냈는데 서명은 그를 생산과장으로 안배하였다. 서명은 연변지위의 의견이라며 류동호를 설복 하였다. 류동호는 조직의 결정에 복종한다면서 계획과로 갔다. 얼마후 항미원조 동원이 있자 동호는 선참으로 지원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조직의 수요라며 비준하지 않았다. 1951년7월 동북국에서 금주팔프공장에 간부를 지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공장에서는 류동호를 가라고 하였다. 류동호는 두말없이 금주로 갔다. 금주에서는 그를 계획과 과장을 하라고 해서 그가 사업에 몰두하는데 52년 3반5반운동이 개시되자 이번에는 그에게 그 책임을 지라고 했다. 류동호는 심입된 조사를 거쳐 증거가 확실한20여명의 문제인물을 잡아냈다. 그런데 공장령도에서는 한명만 처리하고 남어지는 이리저리 빼 돌리고 풀어 주었다. (공장령도들의 친척들임.) 이로하여 류동호와 공장령도는 맞서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공장에서는 류동호에게 임무를 잘 완성 했다면서 원단위로 돌아가라는 것이였다. 54년3월 동호는 다시 개산툰으로 왔다. 그때는 개산툰공장이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동호에게 계획과 과장을 하라고 했는데 얼마 안되여 성당교 학습임무가 내려 왔다.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모양, 왕창장(원래의 생산과 과장)은 동호를 가라고하였다. 동호는 두말않고 성당교로 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왕창장은 계획과부과장 리삼을 과장으로 안배하기 위하여 그런 소동작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호가 돌아온후 얼마안되여 리삼은 계획서를 분실했다. 숙반이 갓시작된 그때 이사건은 큰 사건이였다. 좀 더 찿아보자며 보고를 미룬것으로 해서 동호는 심사까지 받고 기건과 과장으로 림시 안배되고 리삼은 출당철직 되였다. 동호가 기건과로 간후 기건과가 확대되여 회계조가 나왔는데 동호는 회계조 조장으로 배치되였다.     1957년초 연변주에서 기본건설과에 방조인원이 수요되여 공장에서는 동호를 보냈다. 동호는 림시로 과장직을 맡고 사업하였다. 그때 마침 성에서 검사조가 왔는데 그들은 자기들을 잘 초대해 달라고 동호에게 말하였다. 동호는 그런것을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였다. 결과는 검사조를 노엽히고 주위서기 전인영을 대노케 했다. 동호는 쫓겨 개산툰으로 되돌아 왔는데 그때는 아무런 직무도 주지 않았다. 그는 기건과의 일반간부로 있었다. 이로써 류동호의 관직(벼슬)은 끝나버렸다.     전업후 류동호가 장기판의 말이나 포쪽처럼 이리뛰고 저리뛰고 굴러 다니게 된것은, 그리고 기껏해야 중층령도급에서 더 벗어나지 못하고 밀렸다 당겨졌다하게 된데는, 나중 “벼슬”에서 영 떨어지고 만데는, 그 내역이 있다.     류동호의 일본헌병대 통역경력(말하자면 력사문제)을 팔로군에서는 근본상 무슨 문제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팔로군기로변군구사령원 소화, 정치위원 왕휘구, 적공부부장 로소한이 직접 심사결론한 것이다. 40년2월 혁명에 참가한이후 류동호의 계급의식과 사상각오, 혁명적극성은 현저한 제고와 뚜렸한 성과를 가져 왔다. 하여 42년도에는 팔로군로서군구에서 입당까지 하게된다. 후에 입당이 취소된것은 로서군구 조직고고장의 말과같이 그런원인이 아니다. 그 당시 중공중앙에서는 외국동지들이(당시는 조선족도 외국인으로 인정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문제를 원칙상에서 금지할데 대한 내부지시를 했던 것이다. 43년봄, 류동호가 태항산으로 올때 당안재료는 분실없이 따라왔고(진한중이 휴대) 45년10월 심양으로 올때까지의 그의 당안(력사)에는 이렇다 저렇다 할만한 흠집이(문제, 결점) 없었다. 그의 당안은(력사) 좋았다. 그런데, 고력툰회의(심양회의) 직전에 조선의용군 사령부에서는 모든 재료(당안 및 기타 문서재료), 물품, 지어는 개인소지품까지 몽땅 기차편으로 조선 신의주에 부치였다. 류동호는 그때 누구보다 많은 책을 조선에 부치였다. 로소한에게서 기념으로 가진(1943년 갈라질때) “백과주해신어사전”은 가방에 넣고 다니며 늘 보다보니 남았다. 그는 지금도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모든것은 영영 분실되고 말았다.(아깝게도 한장뿐인 부모님사진도 조선에 부치다보니 잃어 버렸다.)     현재의 당안은 3지대로부터 건립한 것으로 가장 중요한것은 49년7월 전업할때의 부대(164사) 감정서다. 감정서는 이렇게 되여 있다.     “류동호에게는 천진일본헌병대통역으로 있은 엄중한반혁명력사문제가 있다. 주의하 여 관찰하며 공제하여 사용해야 한다.” 하단에는 사장 리덕산, 정치위원 장복의 친필서명이 있었다. (그 먼저의 조직의견 혹은 감정에는 “일반적인 력사문제”라고 했다.) 지방에서는 부대의 이 감정을 충분히 중요시한 셈이다. “엄중한반혁명 력사문제” “주의관찰” “공제사용”이라는 이런 전제가 있다보니 류동호를 다루는데는 소속단위 령도로서는 아주 편리했든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지 못하게 하는것인즉 “공제사용”에 부합되는거고 이리저리 굴리는 것은 “주의관찰”에 맞는 작법이였다. 그리고 “엄중한 반혁명력사문제”가 있는 사람이기에 아무때고 죄인 취급을 할수 있었다. 손오공은 금고주 하나로 당나라 중 현장의 노복을 했지만 류동호에게는 금고주가 세개나 씌워져 있었다. 그는 이렇게 발전전도가 이미 막힌 사람이였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의 승급용 발판이기도 했다. 입당하려는 사람, 승급하려는 사람, 어떤 리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은 흔히 그를 내리까는것으로 자기의 높은 사상각오와 수평을 표현하였다.     1955년 개산툰공장 당위 간부과(조직부)에서 “5인소조”가 전면적인 심간(간부심사)공작을 했는데 류동호에 대한 심간결론은 다음과 같다.     “천진일본헌병대 통역을 한 엄중한력사반혁명문제가 있다. 그러나 력사반혁명분 자로 모자는 씌우지 않는다. 인민내부모순으로 한다. 하지만 주의하여 관찰하며 사용에서는 공제 한다.”     1957년부터 날따라 열이 오르는 “계급투쟁” “정치사상투쟁” 환경에서 류동호의 운명은 더욱 비참해지기 시작한다.     1957년9월 연변주위와 직속단위들에서 민족정풍을  하였는데 류동호는 “소수민족지구가 발전하려면 소수민족간부를 대량적으로 배양해야 한다.” 고 발언 하였다. 이 언론은 승진을 위하여 밤낮 고심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류동호의 “엄중한력사반혁명문제”로 부터 근원을 내리 풀어 나중에는 그에게 “지방민족주의분자”라는 모자를 씌웠다. 류동호는 자동에 있는 공장 부업기지에 가서 로동개조로 소사양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멀리 산골인 세린하 향에가서 농사를 지으며 밤마다 반우경학습반에 참가 하였다 어느 한번 그는 학습반에서 “당지부가 행정일을 간섭하거나 도맡아 하는것은 적당치 못하다.”고 발언 했다. 이로하여 그는 또 한차례 발판으로 되였다. 이번에는 그에게 ‘우파분자”라는 모자를 씌웠다. 류동호는 1962년6월까지 만5년을 로동개조로 농사일을 하다가 공장으로 돌아 왔다. 이만하면 개조가 되였다고 인정해서였는지, 아니면 납작하게 만들어 놨다고 봐서였는지… 공장당위에서는 그에게 씌운 두가지 모자를 이젠 벗겨 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건재차간에 가서 로동을 하라고 했다. 그후 원목차간을 거쳐 2년여 로동을 하다가1964년 하반년부터는 공장도서실의 도서관리원 사업을 하였다.     도서관리원으로 사업한지 2년거이 되여 류동호는 문화대혁명을 맞게 된다. 운동이 시작되자와 같이 그는 “엄중한력사반혁명분자”로 잡혀나와 인신적 모욕을 당하며 모진 투쟁을 당하였다. 처음 몇달은 류동호를 직접 투쟁 하였다. 즉 그가 투쟁의 과녁이였다. 그러다가 후에는 더 투쟁할멋도 없고 죽은귀신이라고 인정되여 잡귀신무리에 그저 따라다니는 팔자가 되였다. 어느 잡귀신을 투쟁할때면 그도 따라나가 잡귀신들의 행렬에 서서 모든개투쟁을 받으면 되였다.(1966 년부터 1969년감옥에서 나올때까지) 1968년3월 개산툰공장혁명위원회가 투쟁속에서 “승리적으로, 영광스럽게 탄생했다.” 혁명위원회주임은 송복진이라는 한족이였다. 그는 당, 정, 군(민병) 공장의 대권을 한손에 틀어쥔 인물로 되였다. 그의 곁에는 군 대표가 붙어 있었다.     송복진은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쥐였다. 그는 명령을 내려 “문제인물학습반”을 꾸렸는데 중점인물들은 쇠살창을 댄 배양중심학교 교실에 가두었다. 류동호는 거기에 열한달을 같혀 있었다. 1969년 감옥에서 나온후 류동호는 당적취소, 간부자격취소, 5급공으로 강급처리를 받고 생활복리과에 가서 땔나무실이 로동을 하였다. (월급은112원으로부터 58원24전으로 깍김.) 류동호는 이 로동을 만7년 하였다. 그간 1971년 송복진이 조정하는 당위는 류동호의 당적을 회복해 준다고 하였다. 류동호가 “그럼, 너회들이 나에게 씌운 정치모자는 어떻게 하는가?”하고 물으니 송복진은 “인민내부 모순으로 한다.”하고 얼버무렸다. “그럼! 들씌운 죄장은 벗기지 않고 당적은 무슨놈의 당적이야! 너같은 자식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마당에 평판은 또 무슨 개뿔짝 같은 평판이야?! 싹 걷어 치웟!” 류동호가 문을 거세게 박차는 바람에 출입문유리는 박살이 되고 말았다. 그때 세월에 이 사건은 보통일이 아니 였다. 그후 이 일은 전기적색채까지 띄고 공장에서 오래동안 류전 되였다. 당적은 두리뭉실 그냥 회복이 되였다고 했으나 간부자격이며 기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류동호는 그러건 말건 관계치 않았다. 그는 그냥 우차몰이를 하며 좋은 화목이 나오면 탁아소, 직공식당에 우선으로 가져다 주었다. 그는 이 평범한 일도 혁명사업이며 자기는 장사덕처럼 오직 혁명만 하면 된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어느날엔가 당은 공정한 대답을 줄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다.     1976년 “4인패”가 거꾸러진후 얼마안되여 송복진은 류동호를 보자고 하였다. 송복진은 류동호와 비하면 어느면에서나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였다. 류동호는 무슨 연극을 하나 보려는 심사에서 그를 찿아 갔다. 송복진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원목구입이 어떻게 중요하고 어쩌고 하며 뜸을 들였다. 류동호는 꼴같지않아 역정을 버럭 내며 “밖에 소를 세우고 들어 왔으니 얼른 말해라.” 하고 퉁명스레 쏘았다. 송복진의 말은 원목구입원을 하라는 것이였다. “하지!” 류동호는 외마디 대답을 하고 나와 버렸다. 이튿날 류동호는 앓고 있는 안해에게 “병원에 자주 가 보라.” 하고는 머나먼 가목사로 떠나 갔다. 그때로 부터 3년동안 류동호는 동북각지 림업국과 산판을 무수히 돌아 다니며 공장의 가장 중요한 기본 원료인 목재구입을 하였다. 77년, 78년에는 공장의 선진생산자로 당선 되여 년말표창대회에 참가하라고 통지가 왔지만 그는 아른체도 하지 않고(송복진 등 그들을 보기 싫었다.) 목재구입에 동분서 주 하였다.     1979년2월 공장에서는 구입원 두 사람을 파견하여 류동호의 사업을 인계 받도록 하였다. 류동호는 마지막으로 원목차피 40바곤을 띄우고 공장으로 돌아 왔다. 전해에 송복진 등 사람들은 철직, 전근 등 조직적 처리를 받았다. 개산툰공장의 문화대혁명 뒤처리는 비교적 간거했다. 600여명의 억울한 안건과 80여명의 인명건은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그만큼 “4인패”류독이 심하고 사건들이 많았다.(바로잡는 사업은 근 3년시간이 걸렸다.) 이 공작은 조봉명(후에 주당위조직부부장으로 사업함.)이 공작대를 이끌고 많은 수고를 하였다. 공장의 령도기구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류동호가 돌아 오자 창장 강귀송(조선족)은 그에게 계획과 과장사업을 맡기혔다. 그러나 류동호는 태도를 보류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중앙방직부에서 일어통역을 한명 요구 하였다. 제일 적임자는 류동호 였다. 류동호는 기꺼히 임무를 접수하고 북경으로 갔다.(평정산에 가서 사업.)     1981년 임무를 완성하고 단위로 돌아오니 공장에서는 그때까지도 그의 계획과 과장직을 걸어 놓고 있었다. 류동호는 창장 강귀송을 찿아 직무를 해임하여 달라고 하였다. 모두가 한급이라도 벼슬을 못해 안달을 하는 판에 이런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였다. 강귀송은 “지금까지 로혁명간부를 박대 한것을, 섭섭하지만 량해하고 사업을 하여 달라.”고 하며 류동호를 설복 하였다. 류동호는 “그런것이 아니다. 이젠 나이도 다 먹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중요한 부서에서 대담히 사업하게 해야 한다.”하며 그냥 자기의 의견을 고집 하였다. 하여 이 문제는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년말, 류동호는 생애에서 평생처음으로 개인일로 당조직을 찿아 연변주당위로 갔다. 아침 저녘으로 바라보이는 서산에는 두 아들과 안해의 무덤이 있고 이고장에서 바친 청춘과 한생이 어쩐지 서글프기만 해서 마음을 도무지 진정 할수가 없었다. (1949년7월, 28살 총각으로 여기에 오지 않았든가! 어느덧 60이 되였다.) 그는 자꾸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환경을 바꾸기로 생각 하였던것이다. 주위 조직부부장 조봉명은 자기의 불찰이기나 한듯히 관심이 부족했다며 거듭 사과하고는 어떤부문에 가고싶냐고 물었다. 류동호는 문예단위 같은데 자리가 있으면 일반직원으로 아무일이나 하였으면 한다고 대답 하였다. 조봉명은 즉석에서 선전부장 김영만에게 직접 전화로 련계를 하여 주었다.     1982년1월 류동호는 연변주문예창작평론실 부주임이라는 벼슬을 달고 연길로 전근해 갔다. 그리고 10달후 리직 했다.(부현급 정치, 생활대우. 정책상 원래는 5년을 더 재직에 있을수 있었으나 그는 자원리직을 했다.)   가정       1949년7월초 류동호는 개산툰에 온후 효상이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편지를 했다. 얼마후 효상이 회답편지가 왔는데 더 기다릴수 없다며 파혼을 하자는 것이였다. 류동호는 그러는 것도 좋겠다며 동의를 했다. 이렇게 그의 첯사랑은 막을 내리였다. 164사는 1949년7월17일 사장 리덕산과 정치워원 장복의 인솔하에 조선으로 나갔다. 조선에 간후 라남 5사로 재편되였다. 사단장은 김창덕(리덕산) 문화부 사단장은 리덕원(장복)이 였다.(후에 모두 실각. 장복은 회령에서 감독개조로 농촌일 을 하다가 수레에 깔려 죽었다.)     효상이는 류동호와 파혼한후 어찌되여 김택명(리상조)의 아이를 심양에서 낳았다. 그때 그는 김일성저작 한문번역 사업으로 심양에 있었다. 김택명이 실각한후  효상이 행적도 사라졌다. 지금까지 류동호는 물론,그의 집에서도 효상의 소식은 모르고 있다.     1950년 동북국당교에 갔을때 류동호는 490퇀 선전고에서(장춘) 함께 사업하던 전우 김동무를 만났는데 그는 전업한후 화룡현에서 공회주석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류동호는 화룡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처녀 리경숙과 련애를 하게 되였다. 편지가 서너번 오간후 당교학습이 끝나면 만나기로 약속 하였다. 학습이 끝나기전 류동호는 화룡현위 조직부부장으로 있는 김명한(류동호가 3지대 1대대 교도원으로 갔을때 김명한은 1중대 중대장이 였다. 류동호는 그를 교도대에 학습을 보냈다. 거기서 김명한은 중대장을 했다.)에게 편지를 써서 리경숙의 정황을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하였다. 얼마후 김명한의 회답이 왔다. 처녀는 위 만주국 사도대학 졸업생인데 훌륭하다고 하였다. 홀어머니와 함께 있는데 어머니는 려관업을 하는 젊잖은 분이라고 했다. 그때 어느날 주덕해가 그들을 보려고 당교로 왔다. 주덕해는 “나는 네가 효상이를 따라 조선으로 갈줄로 알았는데, 너의 사상각오에 만족과 감탄을 금할수 없다. 너는 훌륭한 혁명간부다. 내가 조선방문을 갔을때 효상이를 데려 오려고 했는데, 설송이 말을 들어보니 효상이는 너무 더러워서 데려 오지 않았다. 싹 잊어 버려라. 연길 공안국에 좋은 처녀가 있는데 소개 할가?”하며 동호의 눈치를 보았다. 류동호는 “지금 화룡에 있는 처녀와 련애중인데 결과를 보고 결정 합시다.”하고 대답 하였다.     당교학습이 끝나자 류동호는 김동무와 함께 화룡으로 갔다. 경숙이는 역전에 마중을 나왔다. 로총각 로처녀의 약혼은 그날로 결정 되였는데 어머니는 그들을 한방에서 자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들은 그해 국경절에 결혼식을 올리려 했는데 류동호가 사업이 바빠서 설로 미루었다. 설에도 또 시간이 없어서 결국 잔치는 이듬해 5.1절에 간단히 치루고 말았다.(너무 간단했고 축의금을 일체 받지 않아서 모두 과부잔치같다고 했다.) 결혼후 경숙이는 연길로 전근 했다가 다시 개산툰공장으로 전근 했다. 그는 개산툰공장에 온후 줄곧 원목차간 회계사업을 했다.     그들부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큰아들은 1976년 잔치를 한달 앞두고 아침을 먹고 나간 사람이 건축현장에서 사고로 죽었다. 둘째는 삼년후 공장에서 홍반(극독품)을 실은 차로 날라온 물고기를 먹고 중독성간염으로 앓다가 어린처자를 남겨놓고 역시 서산으로 갔다. 1981년에는 환난을 함께 하여온 안해도 두 아들의 뒤를 따라 류동호의 곁을 떠나 갔다. 이렇게 련속 덮쳐드는 불상사는 류동호로 하여금 비창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게 하였다. 그는 생각다 못하여 주당위로 찿아 갔던 것이다…   부기       류동호가 리직한후 이듬해 주당위에서는 로간부들을 조직하여 혁명사적지 현지답사를 진행 하였다. 류동호는 거기에 참가하여 무한, 계림, 태항산, 연안, 할빈 등 지를 한달여 방문 하였다. 당년의 전우들과 수장들을 다시 보는것만 같았다. 그는 돌아온후 문단사람들의 손을 빌어 회상기 10여편을 발표 했다. 류동호는 여생을 그토록 애착하던 문학에 바치려 결심 했다. 그런데 그는 필력이 너무도 따라가지 못함을 새삼스레 발견하고 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어로도, 일어로도, 조선글로도 문장을 쓰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그러나 전우들의 우렁찬 함성이 귀에 쟁쟁하고 씩씩한 모습이 눈에 삼삼하여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는 문단의 젊은 사람들께 소재를 적극 제공하는 한편 부지런히 조선어 공부를 하며 습작을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정력이 따르지 못했다.       1983년봄 류동호는 가족을 찿아 보려고 조선 신의주로 갔다. 여러날 헤매인 끝에 동생 영애와 영호, 정호를 만나 보았다. 아버지는 신의주군화공장에서 일했는데 조선전쟁시 폭격에 죽고 어머니는 영호네와 함께 삭주에서 살고있었다. 그는 창순이도 찿아 보았는데 창순이는 전쟁시 이미 죽고 그의 안해가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류동호는 창순이 형 창용의 사망소식을 그의 부모들에게 알린후 삭주에  가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보안서에서 아무리 사정하여도 비준하지 않아 그대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동생들의 집 살림은 모두 넉넉치 못했다. 류동호 자신도 줄곧 가난한 살림을 하였다.       류동호는 1993년 일본 민간단체인 “무궁화”회의 초청으로 일본 유람을 하였다. 그때 다나까가즈오(본명은 사도다께오)와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꼭 반세기가 지나 갔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조선의용군행진곡”(리정호 사, 곡)을 정률성의 작품으로 오인한 문제를 류동호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 시정하였다.       그후, 한국에서 공훈보훈처 리보온선생이(력사학자) “상해림시정부”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항일활동력사를 수집하려 왔을때 류동호는 사료를 적극 제공하는 한편 그를 배동하여 사적지를 답사하고 경력자와 증실인들을 찿아 다니며 조선민족의 항일투쟁력사를 재조명하는 사업에 적극 협력 하였다.   후기       류동호는 새세기 첯해인2천년 10월23일에 세상을 하직 했다.(1921.9.17 ㅡ2000.10.23) 페암말기로 진단을 받고 한달후에 작으만한 셋집에서(장춘) 사망 했다.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성병원에 가본다고 모시고 갔는데 입원할수 없어서 셋집을 맡고 대충 치료를 받았다. 그는 림종에 무슨 요구가 없는가고 물으니 아무런 요구도 없고 죽은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필자도 몰랐다.) 자식들은 그의 골회를 개산툰으로 안고가서 어머니와 함께 합장하였다.       류동호는 두가지 꿈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문학으로 크게 성공해 보겠다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조국(조선)을 위하여 몸바쳐 사업 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어느것하나 실현되지 못했다. 1949년 부대에서 전업한후 그는 중국의 혁명과 건설에서 충성을 다하여 사업을 잘 하겠다고 결심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편단심은 긍정을 받지못했다. 건국후 30년의 계급투쟁환경은 그를 줄곧 “주의관찰” “공제사용” 하였다.     중국의 간부는 혁명(사업)에 참가한 시간을 기준으로 건국전과 건국후로 자격을 론한다. 건국전에 혁명에 참가한 간부로서 제일자격자는 장정간부(공농홍군)이고 두번째는 항일간부(팔로군, 신사군)이고 세번째가 토개간부다.(항일전쟁후 혁명에 참 가한사람.) 건국전에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개국공신들로 인정한다. 때문에 당의 귀중한재부로, 귀중한간부력량으로 당에서는  중시하고 중용했으며 사회적 으로는 매우 존중했다. 이런 건국전 간부들중에서 연안에서 사업한 경력이 있는 간부는 특히 “연안간부”라고 부르면서 더욱 높히 보았다.     류동호는 두말할것 없는 항일간부, 연안간부로 건국전에 이미 중공당원이였고 부퇀급간부(대대교도원) 였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극히 귀중한 당의 지식인간부 였다. 적어도 70년대까지는 보기드문 고경력자 간부 였다. 혁명에 참가한 이래 그에게는 크고작은 공로는 있어도 착오는 없었다. 그는 오직 혁명을 위하여 사업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그는 사업을 잘한, 능력있는 훌륭한 간부였다. 응당 중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업후 그는 반급의 승진도 못했다.     그런데 왜서 리덕산이나 장복은 류동호를 압제하고 지어는 타격까지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대량의 간부력량을 전쟁에 투입하여 소모 하던데로부터 돌려서 권력기구를 건설하게되니 죽은 적고 중이 많은 국면이 조성되게 되였다. 말하자면 벼슬자리(령도직위,직급)는 적고 적임자는 많았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경쟁이 있게 마련이다. 올리훝고 내리훝고 허물있는자는 모조리 뽑아 치워도 적임자는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사를 주관하는 책임자의 사적인소가 작용할때는 어느누구를 도태 시킨다는건 식은죽 먹기였다. 류동호는 이런 분위기에서 희생물로 되고 말았다. 그와 주덕해, 리덕산, 장복의 개인관계는 그닥 원활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주풍(이상 세 사람은 애주가다.)과 남녀작풍에 대하여 류동호는 늘 곱지않게 보았든것이다. 허물잡기에서 4개월의 통역경력은 좋은 흠집이 되여 인위적으로 부풀려 졌다.(엄중한 력사반혁명문제로.) 4개월이 결국은5년의 항일경력과 3년의 해방전쟁, 즉 8년간의 목숨을 바쳐 싸운 혁명투쟁경력을 덮어버리고 눌러버린 것이다. 전업후의 상황도 어금비금 하였다. 일반적으로 령도자들은 자기를 초월하는 하급을 그닥 반기지 않는다. 그 가장 근본적원인은 로소한의 말과같이 개인리기주의사상일 것이다.     개혁개방의 새시대, 새세상을 만났을 때 류동호는 몹시 기뻐하였다. 사람마다 마음껏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수 있는 좋은세상이라며 그는 찬탄을 금치못해 하였다. 등소평이 참 잘했다고 그는 여러번 말했다. 그는 이제부터 문학을 잘 해 보리라 새롭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마음은있어도 기력이 따라주지못했다.     류동호는 기구한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사업에 나름껏 충성하였다. 더 많은 역활을 발휘하지 못한것은 보다싶히 그의 탓이 아니다. 류동호의 불우한 한생은 막을 내리였다. 하지만 정직한 사람들은 오늘도 그의 한생을 아쉽게 생각하며 추억하고 있다.(10)                                                                                       끝                                                                                                               10.4
114    일본헌병대 통역(9) 댓글:  조회:1401  추천:0  2017-05-19
                                                 일본헌병대 통역(9)         5.중국인민해방군   연통산       1948년4월 송강군구 8퇀1대대는 기차로 가목사를 떠나 목단강을 거쳐 연변 도문으로 빠진후 곧추 길림으로 갔다. 우리는 길림에서 며칠 휴식한후 8퇀의 집결처인 연통산으로 갔다. 그때는 령도기구에 많은 인사변동이 있었다. 주덕해는 이미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가고 기타의 적지않은 령도들은 조선으로 나갔다. 하여 8퇀(3지대) 퇀장은 리덕산(김창덕), 참모장에는 관건, 정치처주임에는 정경호, 부주임에 장복(리덕원)이 임명 되였다. 장복은 전해 여름에 조선으로 나갔었는데 어떻게 되여선지 도로 들어와 주덕해의 안배로 정치처에 있었다. 주덕해와 장복은 연안시절부터 아는사이고 매우 친한사이다. 나도 그때부터 그들과 아는 사이였다. 연통산에 도착한후 나는 대대장 왕휘, 부대대장 윤명환과 함께 대대의 정군과 휴식을 참답게 틀어 쥐며 교도원의 직책을 적극 감당 하였다.     1948년6월 중국인민해방군 독립 11사가 조직되였는데 사1급 령도에는 한족간부들이 안배되고 사 부직과 퇀급간부에는 몽땅 조선족들이 안배 되였다. 부사장은 리덕산, 정치부부주임은 장복이였다.(사장은 왕효명, 정치위원은 송경화, 정치부주임은 왕해청) 독립11사는 사1급의 한족간부 몇명을 제외하고는 몽땅 조선족들인데 모두 세개 퇀을 두었다. 1퇀 퇀장은 왕휘, 2퇀(원 3지대, 즉 송강군구 8퇀임.)) 퇀장은 관건, 3퇀 퇀장은 박정덕이였다. 우에서 이미 알다싶히 이들은 모두 나의 하급간부들이다. 독립11사가 조직되면서 사부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부사장 리덕산과 정치부부주임 장복은 나의 대대교도원 직무를 부교도원에게 인계하라고 하고는 다른 안배는 하여주지 않았다.     그후 한달이 지나서 부대는 장춘 근교의 쌍양현으로 이동 하였는데 거기서 건사경축대회를 가지였다. 대회는 오후 3시 버드나무숲속에서 성대하게 진행 되였다. 대회에서 주보중장군이 열렬한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민당반동파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 국제주의정신과 혁명적영웅주의정신을 더욱 발양하여 중국혁명에 더욱 큰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 목전에는 신식정군운동을 잘 틀어 쥐여야 한다.” 고 하였다. 나와 많은 사람들은 이제 중국인민해방전쟁이 끝나면(곧 끝날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가 조국으로 나가게 될것이라 생각 했다. 우리는 중국혁명이 하루빨리 승리로 끝나게 하기 위하여 더욱 분투하리라 결심 했다.     독립11사는 장춘포위전역을 눈앞에 두고 신식정군운동을 기세높히 전게 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전에1대대에서 창조 진행한 “3사”활동과 매우 비슷 하였다. 그런데, 장복은 여전히 나를 안배하지 않았다. 이 긴장하고 바쁜대목에 두달이나 하는일 없이 빈둥거린다는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릇이였다.     어느날 나는 끝내 더는 참지못하고 퇀장 관건을 찿았다. 사람좋은 관건은 자기도 도대체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겠다면서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사이 1대대1중대로 내려가 지도원을 협조해 신식정군운동을 틀어쥐라고 하였다. 나는 즉시 1중대로 내려가 사업 하였다.     내가 갔을때는 운동이 중간계단으로 사람마다 “3사”를 회고하며 결심을 다지는 때였다. 그런데 고도로 발동된 전사들은 서로 언권을 가지려고 앞다투며 한사람이 언권을 가지면 반날이고 하루고 “3사”를 말하며 울고 웨치고 땅을 치고 뒹굴기까지 하며 끝날줄 몰랐다.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아버지!”하고 통곡하며 원쑤를 갚겠다고 아우성 치고 벽에 머리를 쾅! 쾅! 짓쫏는 전사들도 있었다. 나는 전사들의 발언을 순서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될수록이면 울고 웨치는건 억제 할것을 요구 하였다. 중대의 “3사”활동은 순조롭게 진행 되였다. 마지막 단계는 집체적으로 제사를 지내며(추도회 비슷한 형식으로) 전투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어느날, 사부 정치부에서 한 간사가 순회를 하고 갔는데 이틀후 장복이 친히 1대대로 왔다. 그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직방 나를 지명하고 비판 하였다. 신식정군에 영향주고 전사들의 열정에 랭수를 끼얹었다는 것이였다. 회의에서 장복과 나는 치렬한 쟁론을 하게 되였다. 나중에 퇀장 관건이 모두가 사업을 잘하기 위한것이니 적합치 못한 부분은 시정하며 더욱 노력하자고 엉너리를 쳐서 수습 했다. 장복은 나를 중대에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대대부로 돌아와서 울적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 기간, 나는 지나온 나날들을 곰곰히 회고해 보았다.     일본헌병대에서 넉달을 통역으로 일한것은 팔로군에서 일반적인 력사문제로 이미 결론을 내린거고 그후 여러번 표창을 받으며 맡은바 사업을 잘 감당 하였다. 태항산과 연안에서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3지대시절 몇가지 불쾌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 잘못이라고 할것까지는 없는것이 아닌가. 그것들로는 대개 너덧가지가 되였다. 46년도말 주덕해는 나에게 가목사, 목단강일대로 나가서 그곳에 있는 다섯개 조선족중대를 훈련해 가지고 데려 오라고 하였다. 나는 즉시 리명일을 데리고 가목사로 갔다. 그런데 중대들은 간부들을 기다리다 못해 군구 각 퇀에 분산 배치된 뒤였다. 당지 부대령도에서는 그러면 순시를 하면서 관리를 하던지…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나는 돌아와서 우리가 늦었더라고 주덕해에게 회보 하였는데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할수없지. 됐다. 됐다. 설인데 술이나 마시자.” 하였다. 나는 사처로 뛰여 다니며 어떻게 하나 얼마만이라도 끌어 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다. 그곳 부대령도들과 여러번 교섭도 하고 군구 유관부문도 찿아 다니며 토론 했는데 총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전사들을 내놓기 싫어 했다.(당시 한족들의 참군열은 높지 못했다.) 하지만 공로는 없어도 고로는 있은건데 주덕해는 불만스러워 하는것 같았다.  내가 재삼 “우리가 손을 늦게 썼다.”고 하니 주덕해는 “그럼 내탓이란 말인가. 됐다. 됐다. 그만 하자.” 하며 술을 마이였다. 그날 나는 마일줄 모르는 술을 마이고 취하기까지 하였다. 두번째 일은 주덕해가 결혼을 할때 나에게 주례를 서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나는 부끄러워 견결히 거절 했다. 주덕해는 그때 아주 불쾌해 했다. 나는 지어 창피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새파란 어린 총각인 내가 어찌 나먹은 사람의 혼례를 주관한단 말인가.(그는 나보다10살 이상이다.) 다음은 효상이와 내가 약혼식을 할때 그는 시종 시무룩한 태도였는데 “인연이란 따로 있는 법이니 할수 없지.”하고 한마디만 하였을 뿐이다. 나는 그때는 그 말 뜻을 몰랐다. 후에 관건을 어쩌구 저쩌구 말이 돌아서야 알았는데 주덕해는 “생각지도 않은 류등이 나서는 바람에…”하더라는 것이였다. 그말을 듣고 나는 무슨 못할짓을 한것처럼 참으로 민망 했다. 다음의 일은 좀 심각하게 생각 되였다. 그것은 내가 1대대 교도원으로 갔을때, 박약한 1대대를 재빨리 춰세우기 위하여 중대에 당지부를 건립하고 “3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사훈련도 억세게 틀어 쥐였는데 군구에서 내려 왔던 순시원이 좋은 경험이라며 퇀에 보급하고 군구내에 소개까지 하였다. 보다싶히 이 일은 내가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한 일도 아니고 어데다 보고를 한적도 없고 보급이라든지, 소개라든지 한건 사실상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주덕해는 “그런일을 나에게 회보해야지… 나를 초과하자는건 좋은 일이지만…”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와 직접 말하는 것이였다. 그때 곁에서 장복은 “자기의 직계상급을 무시하거나 초월하는 행위는 좋지 않다!”고 하면서 사상상 방법상 주의하라고 동을 달았다. 내가 벌컥 성을 내며 그런것이 아니라고 변백하자 주덕해는 “좋은 일이다. 됐다. 됐다.”하면서 손을 저었다. 그리고, 지대부간부들이 자주 술을 마이고 무도를 추는데 대하여 마땅치않아한것이 있다. 그외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오, 이번에 장복과 크게 다투었지. 그러나 그것은 사업을 위한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별문제라고 생각했다.     장복이 돌아간후 나는 그래도 중대에 내려가 보통전사의 신분에서 신식정군에 참가 하겠다고 관건과 떼질을 썼다. 학습할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린지 여러날 되는 리질이 말썽을 이르켰다. 고열이 나고 혈변이 나가며 현기증까지 일어 휘청휘청 하였다. 죽는것만 같았다. 관건은 큰일 나자고, 이지경에 무얼 하겠다고 이러냐 하며 나를 억지로 사부 병원에 보냈다. 한달 넘어 치료해서야 병이 나았다.     나에게는 여전히 직무안배가 없었다. 어느날 나는 사부로 찿아 갔다. 부사장 리덕산은 조선으로 가겠으면 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면 조직적 수속을 하여 달라고 하였다. 리덕산이 뭐라고 말하려 하는데 장복이 말을 가로채가면서 “수속은 없다. 가겠으면 오늘이라도 개별적으로 가라.”고 하는것이 아닌가!... 아! 그때의 그 섭섭하던 심정은 지금도 가슴이 막혀 온다.     나는 퇀부로 돌아와 관건에게 사연을 말하였다. 관건은 “참, 알수없는 일이다. 너와 무엇이 틀렸는가…”하며 처연한 기색을 지었다. 내가 주덕해도 만나보고 귀국하는 길도 알아보고… 할빈, 연변쪽으로 나가 보겠다고 하니 관건은 그것이 좋겠다며 려비를 푼푼히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마땅치 않으면 부대로 꼭 돌아 오라고 당부 하는 것이였다. 먼저 연변 도문에 이르러 알아보니 조선으로 가려면 통행증 수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단위에서 증명을 떼고 수속을 밟는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가도 별일은 없다고 하였다. 밀수군 마냥 내가 어찌 그럴수야 있는가!... 나는 강건너 조국산천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할빈에서 주덕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의 말을 듣고는 “부대의 일은 부대에 가서 말해라. 나는 이젠 부대를 떠난 사람이니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함께 식사 하자는 말도 없이 잘 가라고만 하였다. 나는 착잡한 심정을 안고 다시 부대로 돌아 왔다.   장춘       “신식정군”을 보통 “3사3정”이라고도 하는데 그 중점내용은 토지개혁교육과 정당 정군이였다. 부대에서 내건 구호는 “신식정군을 잘 하여 장춘을 해방하자!”였다. 각 부대는 “신식정군”을 하면서 장춘주변의 크고 작은 적들을 각개격파 하였다. 우리 독립11사는 맹가툰 전투에서 크게 본때를 보이였다. 그것은 “천하제1군”이라는 신7군에서도 가장 정예한 38사가 서교비행장을 탈환하려고 나오는것을 때려부순 것이다.     장춘외위의 적들은 아군에게 격파되여 몽땅 시내로 들어갔다. 아군은 군사상 포위전, 경제상 봉쇄전, 정치상 공심전의 전략방침을 세워놓고 장춘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적들로 하여금 량식과 탄약이 떨어져 군심, 민심이 동요하고 혼란할때 들이칠 계획이였다.     적들이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우리는 더욱 맹렬히 “신식정군”을 하였다. 낮에는 대부대의 련합작전훈련을 진행하고 밤에는 이쪽부대가 저쪽으로, 저쪽부대가 이쪽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곧 진공이 있을듯 허장성세 하면서 적들로 하여금 밤낮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 못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공심전”은 더욱 가관이였다. 그것은 우리가 팔로군시절에 쓰던 무장선전대식인데 고음나팔이 울려대고 연에 달아맨 삐라가 날아가고 밤이면 함화가 진지코앞에서 판을 쳤다.     들어도 못가고 나오도 못하고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여 공중운수에 명줄을 걸고 매일을 전전긍긍 하였다. 장개석은 심양으로부터 비행기로 먹을것을 날라다가 공중에서 내리던지였는데 그것을 교란, 파괴하는것은 신나고 재미 있었다. 비행기가 오고 락하산을 뿌리면 고사포, 기관총, 보총을 갈기는데 비행기는 그것이 무서워 고공에서 되는대로 짐짝을 뿌려던지고는 달아났다. 락하산이 터지고 짐짝이 흩어지고 어떤것은 초속으로 떨어져서는 박살이 되였다. 락하산이 우리구역에 떨어질때도 자주 있었다. 짐짝에는 먹을것도 있고 무기 탄약도 있었다. 우리는 장개석을 “우리네 운수대장”이라고 했다. 익살쟁이들은 운수과장이라느니 반장이라느니 조장이라느니 하기도 했다.     48년10월19일0시 국민당 운남부대군장 증택생이 전 군을 이끌고 기의를 했다. 하여 동, 남, 서쪽의 방선이 활짝 열리게 되였다. 관건은 2퇀을 거느리고 재빨리 담당위수구역인 동쪽을 점령하였다. 우리퇀이 입성하여 북경로까지 전진하였을때 선두인 2영과 신7군이 맞붙었다. 먼저 우리측에서 전사 몇명이 희생 되였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길을 사이두고 장춘은행 앞까지 돌진했다. 장춘은행은 신7군의 지휘부로서 적들은 악질적이였다. 놈들은 은행의 견고한 건물에 의지하여 완강히 저항해 나섯다. 장춘해방전투에서 이 전투가 제일 치렬하게 마지막까지 진행된 전투다. 우리퇀은 싸울수록 용맹하게 적들을 족쳤다. 나는 일선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전사들과 함께 싸웠다. 이 전투에서 차라리 죽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총알은 나를 피해 달아났다. 저녘때가 거이되여 적들은 은행건물 3층창문으로 흰기를 내걸고 투항하였다. 이로써 장춘해방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 되였다.(1948년10월19일) 독립11사는 입성후 지금의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우리퇀은 동부(동북, 동남지역까지 포함.), 1퇀은 서남부, 3퇀은 서북부 위수임무를 감당하게 되였다. 입성후 사부는 위 만주국국무원 자리에 들고 우리퇀은 일본령사관 자리에 들었다. 입성후 시내 정리사업은 참으로 간거했다. 그러나 3일후부터 기차가 통하고 전기가 통하고 량식, 채소가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내 치안질서는 온정 되였다. 그해 11월2일,심양이 해방 되고 료심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11월11일 장춘시위와 정부, 독립11사는 련합으로 동북해방경축대회를 굉장하게 거행하였다. 13일에는 장춘철로공인구락부에서 독립11사 장춘전투총결 표창대회를 진행 하였다. 대회는 48년6월 독립11사가 건립된이래 지금까지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총결하고 선진단위와 모범인물을 표창 하였다. 대회는 련속 5일간 진행 되였다.     대회 마지막날, 장춘전선사령부 정치위원 소화의 연설이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1940년4월 어느날 팔로군기로변군구 사령원이였든 소화는 간부들 회의석상에서 “이 동지가 조선혁명동지 류동호다.” 하고 나를 소개하면서 뜨거운 악수까지 하여 주었다. 로서군구까지 1년반 나는 그의 신변에서 사업하며 많은 사랑과 관심, 지도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아래위내이까지 나를 입혔다. 그후 6,7년 세월이 지난 오늘 뜻밖에도 옛 사령원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 갈수 없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기에!”… 수장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정치부주임 왕해청이 나를 부르기에 달려가니 정치위원 송경화가 오늘 수장의 통역을 맡으라고 직접 임무를 주는것이였다.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주석대 귀퉁이에 서 있었다. 소화는 주석대로 오다가 나를 보고 “류동호! 너 여기 있는가?!”하며 몹시 반가워 하였다. 나는 제꺽 경례를 한후 소화가 내여미는 손을 두손으로 마주 잡고 눈물을 떨구었다. 무슨말을 했으면 좋겠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날 소화는 조선동지들의 국제주의정신과 혁명적영웅주의를 매우 높히 찬양하면서 나를 껴 안다싶히 하고 어깨를 다독이며 이 쑈류도 잘 싸운 동지라고 하였다.(이말은 통역하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소화의 연설을 통역 하였다.     기쁨과 흥분속에서 설이 지나고 이듬해 3월 독립11사는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164사로 개편 되였다. 한족간부들은 모두 전근해 가고 조선족들로 무어졌는데 사장에는 리덕산, 정치위원에는 장복이 임명 되였다. 원 1퇀은 490퇀으로, 2퇀(3지대)은 491퇀으로, 3퇀은 492퇀으로 편성 되였다. 그때 사부에서는 나를 490퇀 정치처 선전고에 가서 사업하라고 하였다. 나는 수년간 정들고 함께 싸운 전우들과 작별하고 이불짐을 둘러메고 490퇀의 위수구역인 장춘서남쪽으로 갔다. 선전고에는 화룡에 집이 있다는 김동무(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가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사업 하였다. 직무는 여전히 없었다.     그해 7월초, 내가 사무실에서 재료를 쓰고 있는데 정치처주임 정길운이가 퇀장의 지시라며 나를 사부에 가 보라고 하였다. 나는 무슨일일가? 생각하며 사부로 갔다. 사부 회의실에는 이미 20여명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후 조직고의 간부가 종이장을 들고 들어와서 점명한후 “동무들은 오늘 제대하여 연변으로 가게 된다.”하고 선포 하였다. 이어 몇사람을 지명하며 수속문건을 가져가라고 하고는 나가 버렸다.     제대간부 20여명은 장도선 북행렬차에 앉아 연변으로 떠났다. 모두가 머리를 수굿하고 묵묵히 앉아 갔다. 부대에서는 송별도 환송도 없었다. 부대가 곧 조선으로 나간다고 모두가 들뜨고 기뻐할때 우리는 제대되여 중국땅에 떨어지게 된것이다. 나는, 나의 일은 왜서 이렇게 자꾸 꼬이기만 하는지 알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국으로 나가게 된다고 얼마전에 효상이와 편지까지 하였다… 차탁에 엎디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로소한이 “혁명가가 울면 되나!” 하고 방불히 곁에서 말하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슬프고 서러운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렬차는 뚜두둑! 뚜두둑! 쉼없이 달리였다…(9)
113    일본헌병대 통역(8) 댓글:  조회:1606  추천:0  2017-05-18
                                         일본헌병대 통역(8) 심양       10월말 우리는 심양에 도착했다. 내가 속한 4구대는 심양에서 조금 더 나가서 대성역에서 내리였다. 밤중인데 역에는 조선독립동맹 북만특위 김택명(리상조. 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파견한 안내원 안경쟁이 원일우(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분대별로 백성들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기름기가 반지르르 도는 이밥에 김치와 토장국에 고추가루를 듬뿍 놓아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배가 터지게 먹었다 환한 전등불, 막걸리… 익숙한 것이긴 하지만 몇해 만인가! 웃고 떠들고 대 잔치같았다. 사실 경사의 대 잔치가 옳았다. 나는 새삼스레 무량한 감개로 가슴이 뭉클하고 눈뿌리가 뜨거워 났다. 여기까지 오면 집문턱까지 다 온 셈이다. 17살 어린나이에 문학을 한답시고 겁없이 뛰여 왔든 심양이다. 잠든 어머니를 작별하고 집을 떠날때 10년을 기한으로 방랑 하리라 맹세를 했는데 헤여보니2년을 앞당겨 집앞에 왔다. 그간 나는 공산주의 혁명전사로 성장 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힘차게 일하리… 우리의 우렁찬 노래는 현실의 행동으로 되였다… 구슬픈 방랑가를 부르며 떠났던 내가 씩씩한 혁명가를 부르며 돌아올 줄이야! 격세지감을 금할수 없었다. 그때 내가 부르던 “방랑가”는 이렇다.                      방랑자의 노래          부지런히 걸어도 보람이 없고                       걷지않고 멎어서도 쓸쓸하다.        울지 말아라                     광야의 벌레들아        촌에서 하루밤 쉬고                    풀밭에서 이틀밤 자고        꿈에 본 고향어머니 모습이여       잠자리는 소학교에 마련되였는데 콩깍지를 두툼히 깔고 그 위에 벼짚을 펴서 고급침대처럼 푹신푹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잠자리가 험해서 안 되였다고 송구해 하였지만 우리는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애민활동을 열정적으로 하였다.     11월7일 심양역 광장에 세운 쏘련홍군 심양해방 기념탑 제막식이 있었는데 동북인민자치군(팔로군, 림표부대)과 조선의용군은 보무당당히 열병식에 참가했다. 그날 우리는 료녕성 주석(중공)장학사의 연설을 들었다.     1945년11월10일! 심양시 근교에 위치한 고력툰(지금의 심양시 우홍구 대흥조선족향 오가황) 조선족소학교에서 조선의용군 전군대회가 열렸다. 그때까지 심양에 집결한(관내에서 나온) 조선의용군은 대략 2700여명이 되였다. 그외에 할빈, 통화, 안동(단동) 등 지에 1500여명이 있다고 했다.     이 회의를 력사에서 “조선의용군심양회의”라고 하는데 그때의 력사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5년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쏘, 미, 영 3국 수뇌들인 쓰딸린, 트루맨, 처칠과 그들의 외교부장은 베를린 포쯔담에서 회의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2차대전후 독일문제 처리와 기타문제 처리원칙에 관하여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제7항의 령토위탁관리 협정에 따라 조선에다는 38선을 그어 놓았다. 38선 남에서는 미국이, 북에서는 쏘련이 일본의 투항을 접수하며 위탁관리를 하기로 쓰딸린과 트루맨은 협정에 조인 하였다. 치욕의 38선! 증오의 38선은 이렇게 하여 생긴 물건짝이다!      우리가 조국을 향하여 나갈때 쏘, 미는 이미 조선땅에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에서는 리승만을, 북에서는 김일성을 위수로 한 정권 수립을 온양하고 있었다. 10월, 한청(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50여명의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인솔하고 선견대로 조선 신의주로 나갔는데 거기서 그들은 쏘련홍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했을뿐만 아니라 학교에 같히기까지 하였다. 한청은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났는데 김일성은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조직적 입국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겠으면 개인신분으로 오라.”고 답복 했다. 한청은 이 상황을 의용군과 동맹 령도에 전달 하였다.     형세가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의용군과 동맹의 주요령도들은 개인적 신분으로 입국을 결정 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조국으로 이사를 나갔는데 그들도 그런 이주민의 한 사람이 된 셈이다. (중경에 있던 “한국광복군”은 조직적으로 환영을 받으며 남조선에 입국 했다.)     고력툰회의(심양회의)는 사실상에서 조선의용군의 해체를 의미 한다. 그날 회의는 중공동북국과 동북인민자치군의 지도하에 열리였다. 회의는 부사령원 박일우가 사회하고 사령원 무정이 결정을 선포 했다. 무정 사령원이 시커먼 기색으로 선포한 결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용군 사렁부와 동맹의 일부 령도들이 개인적 신분으로 먼저 귀국 한다. 부대는 중국 동북지구에 체류하며 확대 공고히 하며 새로운 임무를 완성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3.동북국과 팔로군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개편하며 당지군구의 지휘를 받는다. 부대를 아래와 같이 개편 한다.                   1지대(남만지대): 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 안빈                                                  정치주임: 주연                                    3지대(북만지대): 지대장: 김택명                                                 정치위원: 주덕해                                                 참모장: 김연                                                 정치주임: 리근산                 5지대(동만지대): 지대장: 리익성                                                정치위원: 박훈일                                                참모장: 조렬광                                                정치주임: 전우                 7지대(서만지대): 지대장: 김극                                                정치위원; 박훈일      이 7지대는 심양회의당시 무정의 명령에는 없었다. 7지대는 박일우가 5지대와 함께 동만으로 나가다가 길림지구에서 조직해 준 것이다. 각 지대는 그후 부대를 확대 가강 하였다. 그외 압록강지대, 영구독립대대, 개원조선의용군독립퇀 등 무장력이 산생 되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고 싶은것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대부분 간부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선후로 귀국 하였는데 거이 모두가 김일성에 의하여 실각 당했다는 것이다. 조선혁명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북조선에 집중하였는데 처음에는 남로당계, 다음은 쏘련계, 그다음은 중국계와 국내계(김일성계렬)간부들 대부분이 권력에서 실각 되였는데 이 변동은 1970년대에 이르러 기본상 결속 되였다. 오래동안 권력층 정돈을 하게 된것은 김일성을 위수로한 공고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였다.       심양회의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칭호는 사실상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였다. 심양회의가 끝나자 즉시 우리는 말그대로 동서남북으로 헤여 졌다. 조국으로 나가던 발길을 중국대지에로 돌리였다… 심양회의에서 조선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하니 사실은 많은 동지들이 달통되지 않아 하였다. 어떤 동지들은 울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명령에 복종 했다. 그리고 조국으로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다들 생각 했다.   할빈       심양회의후 3지대 간부들이 재일 먼저 심양을 떠나갔다. 우리는 안경쟁이 원일우의 안내하에 심양역에서 할빈행 기차를 구하느라 일주일이나 기다렸다. 어느때 기차가 있겠는지 알수없기에 대합실 한쪽귀퉁이를 차지하고 먹고 자며 외출도 하지못했다. 일주일후 석탄을 실은 화물차편을 요행 만나 할빈으로 떠나게 되였다. 때는 엄동이고 북으로 달릴수록 추위는 혹독 했다. 그러나 혁명의 새로운 임무를 맞으려 가는 우리의 붉은피는 뜨겁게 끓어 번졌다.     우리 일행은 모두 19명이였다. 그들로는 주덕해(오기섭), 리덕산(김창덕), 김연, 관건(황재연), 리근산과 그의 처 김화순, 왕휘, 류등(류동호), 김학룡, 최서화, 박근택과 그의 처 박련옥, 리명일, 전광일, 한룡선, 류창렬, 리욱성, 고영룡, 공효 였다. 그외 안내원 원일우가 있었다. 3지대에 배치된 간부가 제일 적은것은 김택명(리상조)이 이미 부대기초를 딲아 놓았기 때문이다. 김택명은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의 파견을 받고 북만에 간후 파안현을 중심으로 지하활동을 하면서 동맹 북만특위(제12지부)를 건립했고 광복후에는 재빨리 수백명 조선족 청년들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45년11월19일 밤에 할빈에 도착 했다. 그날밤은 원 위만군 군관구 청사에서 며칠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조선족 전사들이 보초를 섯다. 이튿날 아침 김택명은 우리를 보러 와서 너무도 기뻐 어쩔바를 몰라 했다. 그는 몹시 기다렸다고 하며 우리들의 손을 잡고 억세게 악수를 하였다. 아침후 부대가 주둔해 있는 “사꾸라소학교”로 가서 전사들을 만났는데 한개 대대쯤은 되였다. 그날 오후에는 오상현으로 부터 수백명의 조선족 청년들이 붉은기를 날리며 대렬을 지어 호호탕탕히 입대하려 왔다.     그런데 오후 늦게 지대부에서 긴급명령이 내렸다. 즉시 할빈시내에서 철퇴하라는 것이였다. 그것은 쏘련홍군이 할빈을 국민당에게 넘겨 줬기 때문이다. 참모장 김연은 부대를 세개 대대로 편성하고 1대대는 왕휘, 2대대는 류등, 3대대는 김학룡이 책임진다고 선포 하였다.     부대의 정황은 산만하고도 혼란 하였다. 사상각오와 입대열정은 높았으나 군사소질은 운운할 여지도 없었다. 입대하려 오는 조선족 남녀 청년들은 매일 끊임이 없었다. 나는 녀자들은 지대부로 보내고 남자들은 직접 받아 들였다. 그리고 부대의 전투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밤낮을 분주히 돌아쳤다.     11월25일, 우리는 배극도 술공장 창고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 창립대회를 성대하게 거행 하였다. 그날 부대를 정식으로 편성 하였다.               지대장: 김택명    부지대장: 리덕산               정치위원: 주덕해               참모처참모장: 김연    참모: 한룡선               정치처주임: 리근산   조직고장: 조경형    선전고장: 한탁주               공급처처장: 관건               1대대: 대대장 겸 1중대장: 왕휘                                             2중대장: 최서화               2대대: 대대장 겸1중대장: 류등     부중대장: 박근택                                                 2중대장: 류창렬   부중대장: 김만선               3대대: 대대장 겸1중대장: 김학룡  부중대장: 리명일                                            2중대장: 리욱성   부중대장: 윤명환              간부교도대대장: 고영룡              지대경위중대장: 전광일              위생대대장: 공효       부대의 조직편성은 깔끔하게 되였지만 부대건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였다. 나는 대대 지전원들의 정치사상소질과 군사소질 제고에 모를 박고 억세게 추진 했다. 부대의 전투력은 현저한 제고를 가져 왔다. 창립대회 며칠후 지대부에서는 나에게 일본군 군수품 창고의 무기와 물품들을 5일내로 옮기라는 지시를 하였다. 나는 대대를 지휘하여 그 임무를 3일내에 완성 하였다.       12월 10일 우리 2,3대대와 지대부는 빈현에 가서 주둔하게 되였다. 1대대는 송강군구 사령부 경위를 맡다보니 늘 우리와 떨어져 행동했다. 여기서 교대해야 할것은 3지대 창립 그날부터 우리는 송강군구에 귀속 되였는데 대외로는 조선의용군 3지대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명칭은 이듬해 6월 송강군구 8퇀으로 되면서 완전히 취소 되였다. 조선의용군은 사실상 심양회의후 동북인민자치군, 동북민주련군, 중국인민해방군으로 연혁 되였다.       빈현에서 나의2대대는 전위부대로 되여 송화강변의 신전이라는 곳에 진주 하였다. 대안에는 국민당 정치토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놈들은 악독하고도 기세가 사나웠다. 우리대대는 송강군구 사령원 섭극정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눈보라가 세찬 어느날 밤, 은밀히 송화강 얼음강판을 기여넘어 대안에 매복 하였다. 모진 추위는 뼈속까지 얼어들었으나 전사들은 매복을 견지 했다. 날이 휘붐이 밝자 우리는 맹호마냥 적진으로 덮쳐 들었다. 적들은 목란현성까지 버리고 아예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전투는 휘황한 승리로 끝났지만 2중대장 류창렬이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우리 대대는 목란현성에 주둔하면서 새로 건립된 지방정권을 보위하며 치안과 군중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새로 해방한 목란현의 정세는 재빨리 온정 되였다. 그런데 현성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혼부라는 곳에 일본인 개척단이 있었는데 토비들과 일부 중국사람들이 그들을 여지없이 유린한다고 하였다. 군구에서는 우리대대에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령 하였다. 나는 즉시 한개 중대를 이끌고 혼부로 갔다. 우리가 간 날 저녘 대표격인듯한 일본인 3명이 “장관”인 나를 찿아 왔다. 녀자 셋을 내여 놓겠으니 사병들이 다른 녀인들은 다치지 말아 달라는 것이였다. 나는 그들에게 공산당과 팔로군의 정책을 설명해 주면서 안심시킨후 군중공작을 바싹 틀어쥐는 한편 토비들의 행적을 정찰 하였다. 여러날 정찰하여보니 토비들이 가까이에는 확실히 없었다. 멀리 도망쳐 버린것이 였다. 치안질서가 온정 된후 우리가 혼부를 떠날때 일본인민들은 떨어지기 아쉬워 하며 멀리까지 부대를 따라 왔다. 몇명의 녀성들은 기어코 부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아 나는 할수없이 그들을 지대부로 보냈다.       목란현이 온정되자 우리대대는 군구의 명령에 따라 연수현으로 이동 하였다. 우리는 전방인 류하툰에 주둔하면서 부근에 있는 흑룡궁과 마가점의 토비들을 숙청 하였다. 연수현이 온정되자 대대는 또 명령을 받고 주하현으로 이동 하였다. 주하현을 교란하는 토비들은 위하일대에 있었다. 우리는 위하 근처인 일면파에 주둔 하면서 토비숙청에 기세를 올리였다. 얼마후 잔여 토비들은 아예 멀리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때가 1946년 3월이였다. 3월 20일! 나의 입당이 비준 되였다. 입당소개인은 주덕해 였다. 나는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힘으로 부대건설과 지방사업을 억세게 추진 했다.     4월초, 나는 부지대장 리덕산의 긴급명령을 전달 받았다. 대대장 직무를 류창렬에게 인계하고(류창렬은 상처가 채 낫지 않았는데도 중대로 돌아왔었다.) 즉시 지대부로 오라는 것이였다. 나는 통신병과 함께 말을 달렸다. 내가 도착하자 리덕산은 임무를 주었다. 리영택, 마창근, 한탁치 3명 중대장을 인솔하여 할빈전선으로 곧 출발 할것.(사만툰에서 주덕해가 기다리고 있음.) 3대대 대대장직을 맡고 할빈전투에 참가할것.(원 대대장 김학룡은 오상방면으로 조동.) 할빈부근에서 입대를 기다리는 500여명의 사람들을 3대대에 편입 시킬것! 나는 즉시 할빈전선으로 달리 였다.     1946년4월28일 낮12시 쏘련홍군은 할빈시내에서 전부 철거 하였다. 쏘련홍군이 빠져 나오자 용기백배, 만단의 준비를 하고 있던 3지대와 민주련군 형제부대는 할빈시내로 노도와 같이 처들어 갔다. 4000여명의 국민당 군대들은 총 한방 쏘지 못하고 송화강을 건너 도망치고 할빈은 해방되여 인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 할빈 해방후 3지대는 할빈 위수임무를 수행하면서 근교의 토지개혁운동을 보위 하였다. 입성후 지대부는 남강에 있는 일본령사관자리에 들고 우리3대대는 그 길건너편에 있는 흥농합작사자리에 들었다. 우리의 임무는 남강, 향방구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며 주변농촌의 토지개혁운동을 보위하는 것이였다.     그해 9월2일 오전 우리대대 7중대장 리영택 등 21명은 주변농촌 토지개혁운동 보위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희생되였다.(그들의 기념비가 할빈시렬사릉원에 있다.) 이것은 3지대가 성립된이래 처음으로 당한 손실이였다. 리영택 등 21명은 중국의 혁명사업에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그후에도 3지대 전우들은 중국의 혁명사업에 피와 생명을 많이 바쳤다.     1947년1월 나는 1대대 교도원 직무를 맡게 되였다. 나는 한달을 주는 휴가도 마다하고 대대장 왕휘, 부대대장 윤명환과 함께 부대의 정치사상건설과 군사건설을 억세게 틀어 쥐였다. 중대에 당지부를 건립하고 “3사”(개인사, 가정사, 반동정권의 압박 착취사)활동을 전개하여 정치사상각오를 현저히 제고 했고(이 경험은 군구내에 소개되고 전 퇀에 보급.) 군사훈련을 가강 하였다. 하여 비교적 박약하던 1대대는 재빨리 현저한 제고를 가져와 각항 전투임무를 잘 완성 하였고 퇀부의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     그해 5월 우리1대대는 할빈을 떠나 가목사에 가서 주둔하면서 북쪽의 학강, 부금으로부터 남쪽의 쌍학산, 화남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에서 무기탄약창고와 병기공장, 비행장의 수위임무 및 무기수송을 감당 하였다. 그 외에도 토지개혁운동과 지방정권건설을 보위하며 토비를숙청하고 반혁명파괴활동을 진압하며 치안유지를 보장하는등 막중한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그해 하반년 부터 중국인민해방전쟁의 형세는 방어단계로 부터 진공단계로 전이 되였다. 우리는 대부대를 따라 남하할 준비를 긴장히 하였다.   첯 사랑       조선족들의 참군열정은 참으로 드높았다. 부자가 함게 오는 일도 있었고 어떤 마을에는 지어는 남자가 없다고도 하였다. 부대에는 처녀들도 많아 졌다.     우리가 할빈을 해방하고 위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을때 지대부 공급처에 안효상 이라는 처녀가 배치되여 왔다. 효상은 할빈시내 사람으로 할빈녀고 졸업생이라 하였다. 꽤 예쁜 얼굴에 호리호리 하고 탄력 있는 몸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문예에 흥취가 있었고 피아노도 칠줄 알았다. 입대전에는 은행직원이였는데 돈을 아주 빨리 세는 특장이 있었고 장부처리도 할줄 알았다. 그리고 글씨를 곱게 썼다. 효상이는 선전대에도 알맞츰 하고 공급처에도 적당한 처녀 였다. 효상이가 입대하자 그를 눈에 띄워본 주덕해는 그를 공급처에 배치 했다. 그것은 공급처 처장인 로총각 관건에게 련애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였다. 이것은 후에 들은 소리다.     46년 늦은 봄, 어느날 1대대2중대 부중대장 전광이 우정 우리대대부로 나를 찿아 왔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안효상이라는 처녀에게 청혼을 했는데 처녀가 우물쭈물하며 쉬원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어 애가 탄다고 하며 나더러 방조해 달라는 것이였다. 내가 나서서 설복하면 일은 백발백중 성사 된다는 것이였다. 전광이는 얼마전에 리혼했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안효상이라는 처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나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거니와 시시하고도 또 아주 난처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도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은 사람이다. 이런일에 대해서는 아직 꿈도 꾸지않는 사람보고 누구 중매질을 하라고 하니, 나는 역증을 내다싶이 뗑! 거절 하였다. 그런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전광은 검질기게 달라 붙는 것이였다. 나는 할수없이 건성으로 후에 보자고 대답하였다. 전광이는 효상이를 구슬릴때 한 말까지 나에게  털어 놓으며 꼭 방조를 부탁한다고 거듭 다짐을 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효상이에게 관건은 너와 인물체격면에서도 짝이 너무 기울뿐만 아니라 나이도 너무 차이가 나고 지식수평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호인이 돼서… 3지대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은 3대대 류등대대장이지만 그는 또한 너의수평에서는 바라볼 처지가 못된다. 제일 합당한 천생배필은 오직 자기뿐이라고 했다는 것이였다. 건성이라도 대답을 하고보니 꽤 답답한 노릇이였다.      그런데 지대부에서 향방구 주변의 토지개혁운동의 순리로운 진행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동안 그곳에 력량을 집중하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 내가 두어달 거이 지나 대대부로 돌아오니 전광이가 기다렸다는듯 찿아 왔다. 그는 아주 소태 씹은 상으로 격분해서 “바람쟁이 같은게” “부르죠아 같은게” “그런 계집애는 두번 보기도 싢다.”하며 효상이를 한바탕 줄욕을 하였다. 그간 효상의 답복을 받았는데 철저히 퇴짜를 맞았다는 것이였다. 전광의 일은 안됐으나 나는 큰 시름을 놓았다. 나는 그와 우스개까지 하였다. “네가 퇴짜를 맞았으면 대단한것 같은데 그리 쎈가. 어디 내가 한번 걸어 볼가?” 전광이는 정말 그러라며 한번 톡톡히 코대를 꺽어 놓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스개로 그러고 말았다. 나는 물론 마음속에 넣어둘것도 없고 잊어 버렸다.     그후 퍼그나 지난 어느날 나는 사무장 대신 공급처에 볼일을 갔다. 보려던 관건은 없고 어떤 처녀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하야말쑥한 꽤 예쁜 처녀 였다. 저 처녀가 그 효상인가…     “동무가 안효상 이요?”     “네. 누구신지…”     “3대대 류등이요.”     “아! 그러세요?! 어서 앉으세요.”     이상했다. 정작 효상이를 마주하고 보니 종래로 그렇지 않던 마음이 싱숭거리고 두서없는 헛소리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이 어떠느니 예술이며 연극이며 영화 가 어떠느니 이야기를 하다가 또 음악, 무용, 미술까지 거들어 댔다. 나는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 말까지 한바탕 내리 풀었다. 나중에 우리는 함께 연극구경까지 하기로 약속 하였다. 그때 마침 할빈에서는 “피눈물의 원한”이라는 연극공연이 있었다. 일요일 나는 쭉ㅡ 비다듬고 효상이와 함께 연극구경을 했다. 효상이도 무척 맵시를 내고 나왔다. 보아하니 나에게 호감을 갖는것 같았다. 그후로 우리는 접촉이 더욱 잦아 졌고 애정이 진짜로 싹트기 시작 했다. 지내보니 효상이는 교양 있고 사상도 건전한것 같았다. “바람쟁이 같은게” “부르죠아 같은게”는 아니였다. 그간 나는 효상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두번이나 갔었다. 그의 아버지는 철로 직원으로 일하다 사망하고 어머니는 인자하고 젊잖아 보였다. 오빠는 철로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이듬해 3월 우리가 할빈을 떠나기 두달 앞서 나와 효상이는 정식으로 약혼식을 거행 했다. 약혼식은 작은 음식점에서 가지였는데 주덕해와 1대대간부, 그리고 전우 몇이 참가 했다. 효상이 어머니와 오빠도 참가 했다. 그때의 약혼식은 지금의 결혼등기나 잔치와 같이 엄숙한 절차였다. 우리는 모두가 악수를 해야한다고 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손을 잡아 보았다. 그리고 그날을 기념하여 약혼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참석자 일동이 찍고 부대사람들과 우리가 또 한장 찍고 가정사진도 한장 찍었다. 모두 넉장을 찍었다.     47년말 조선으로 부터 화교대표로 정설송(정률성 부인)이 할빈에 왔는데 그는 김일성의 부탁대로 간부를 데려가려고 하였다. 안효상의 입국문제는 본인과 주덕해가 결정권을 나에게 맡기였다. 그때까지도 우리의 입국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대찬성을 했다. 효상이는 떠나기에 앞서 가목사로 나를 보려 왔다. 그는 3일간 대대부에 있으면서 나의 옷도 빨래하고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떠날때 우리는 두번째로 악수를 하였다. 믿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두번의 악수만 하였을 뿐이다. 할빈행 렬차는 길게 기적을 울리고 효상이는 그렇게 떠나 갔다.     효상이는 조선에 간후 김두봉의 비서실에서 사업하다가 녀성동맹중앙에서 사업 했다. 그는 모스크바국제녀성대회, 아세아녀성대회 등 국제적 활동에도 참가하며 사업을 잘 하였다. 우리는 편지로 그리운정과 기쁨과 고충을 교류하며 전진을 고무 하였다.(8)
112    일본헌병대 통역(7) 댓글:  조회:1531  추천:0  2017-05-17
                                                   일본헌병대 통역(7) 조선의용군   태항산       1943년4월 중순, 로소한이 하남성에 있는 신사군으로 떠나간(정치위원으로 제발되여 감.) 이튿날 나는 태항산 “조선청년혁명학교”로 떠나 갔다. 며칠전 태항산에서 진한중(김한중. 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무정(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의 파견으로 “조선독립동맹기로예분맹”의 사업을 시찰하려 왔는데 그가 돌아갈때 나를 데려가기로 조직에서 결정 했던것이다. 나의 심정은 날듯이 기뻤다. 조선혁명대오에서 자기의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직접 싸울수 있게 되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항일전쟁 형세가 들쭉날쭉 상치상태여서 우리는 이리저리 에돌며 여러날을 걸었다. 5월초 우리는 드디여 태항산 근거지인 섭현 하남점에 도착하였다. 하남점에서 조선의용군 사령원이며 “조선독립동맹” 책임자인 무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5리길을 걸어와서 우리를 마중했던 것이다. 하남점에서 나는 조선의용군에서 꾸렸다는 상점, 리발관, 신수리, 병원을 참관 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리화림(호사) 등 조선의 녀성혁명가들을 만나보게 되였다.     조선청년혁명학교는 하남점에서 8리 떨어진 곡원촌의 절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에는 고급반과 초급반이 있었다. 고급반에는 년령이 많고 학식과 혁명경력이 풍부한 로혁명가들이 편입되고(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 초급반은 젊은 혁명가들 이였다. 초급반은 학원이 많았는데 문화수평이 높은 사람은 1대에 편입되고 낮은 사람들은 2대에 편입 되였다. 교장은 무정이고 교무주임은 정률성, 교육간사에 리인철(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였다. 무정은 나를 1대 대장으로 임명하며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학습을 잘하며 사업을 잘하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고급반은 문건, 정치리론학습과 토론, 정풍이 위주고 초급반 1대는 정치리론, 군사리론학습이 기본이였다. 2대는 문화학습을 중점으로 하였다.     팔로군과 근거지인민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전해 5월 반소탕전에서 학원 몇명이 회생된후 팔로군은 우리들을 전투행동에 일률로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부대를 파견하여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하여 나는 학원에 간후 전투에는 한번도 참가하지 못했다. 근거지 인민들은 우리를 물심량면으로 지지 했다. 태항산에는 소금이 매우 귀했는데 우리가 먹는 소금은 인민들이 적후로부터 생명의 대가를 치르면서 몇등대 교통참을 거쳐 날라온 것이였다. 우리는 인민들이 먹는 “쿠얜”을 먹으며 소금을 힘껏 아꼈고 인민들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노력 하였다 우리는 팔로군을 본받아 자급에 노력했다. 탠캉(태항산에는 야생감이 많다. 그것을 썰어서 겨에 버무려 말린후 다시 가루내여 죽을 쒀 먹는다.)을 만들고 채소를 심고 목탄구이를 하고 농망기에는 일손이 딸리는 농민들을 지원했다. 조선사람들은 무슨일을 하나 불이 번쩍나게 하기를 좋아한다.  팔로군과 근거지 인민들은 “조선혁명가들이 다르긴 다르다!”하며 우리를 칭찬하고 열애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우리들의 목전의 임무는 조선민족의 해방과 조선공산주의 혁명을 위하여 학습하는것이라고 명확히 지적 하였다. 말그대로 혁명을 위하여 학습하며 학습이 곧 우리들의 혁명과업이 였다. 우리의 학습열정은 대단히 높았다. 토론을 할때면 앞다투어 자기의 일가견을 발표하는데 때로는 갑론을박 열띤 변론이 붙기도 했다. 한번은 중국혁명의 장래를 놓고 토론을 하였는데 다수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피를 많이 흘리게 된다고 주장 하였다. 그 리론적 근거는 혁명이란 이계급이 저계급을 뒤엎는 것이기에 총을 들고 싸우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였다. 나는 모택동의 리론을 인용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은 경제건설이 중심이고 건설은 전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계급투쟁의 형식은 여러가진데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가서는 사상개조를 위주로 할것이고 총으로 소멸하는 형식은 사용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간단한 문제도 몰라서야 되겠는가 고하였다. 그런데 교육간사 리인철이 변론에서 진후 오히려 나를 불러다 “류등은 좀 안다고 자고자대 하면서 다른 동지들을 부옇게 잘 까는데 단결에 주의하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자고자대 한건 아닌데… 하며 그의 비평이 접수되지 않아 정률성을 찿아 갔다. 정률성은 나의 견해가 옳다고 긍정한후 우리는 조선혁명을 위하여 통일된 사상인식을 마땅히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서로 차이가 있을수 있고 단시일에 통일될수 없을수도 있다. 때문에 조급성을 삼가하며 동지들과 단결에 주의하며 감정을 손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해방구 공작에 나갔을때 군중들과 단결하기 위하여 치솔질 하는것을 그만둔 적도 있다며 단결하여 함께 사업하는 가운데서 통일과 제고를 가져와야 한다고 사업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이 말이 옳다고 수긍되였고 명심 하였다.     태항산에서 우리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은 하지 않았으나 생활은 매우 간고 했다. 특히 먹는것 때문이였다. 사람이 겨를 먹을수 있는가? 먹을수 있다. 그러나 먹지 않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변비증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목숨을 달갑게 내여 놓은 혁명가들이긴 하지만 변비증 때문에 남녀 로 중 청 혁명가들이 울때가 많았다.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변비는 여전했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굶기도 했으나 혁명을 위해서는 결심하고 다시 먹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은 혁명적 락관주의로 항상 활기에 넘쳤다. 변비에 울면서도 익살을 하고 떠들고 웃어댔다. 웅변회, 오락만회, 군중선전, 문예연출, 체육회, 장기시합… 우리가 있는 곳에는 혁명적 랑만과 약동하는 혁명적 생명이 있었다.(련애, 작풍문제는 한건도 없었다!) 곡원촌 상공에서는 “조선의용군 행진곡”(리정호 사 곡. 현재 미국에서 생활.) 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씩씩하게 성장 했다.   연안       중국의 항일전쟁은 상치계단에서 반공계단으로 전환하기 시작 했다. 승리의 서광은 더욱 밝아 왔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공중앙은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모든 혁명력량을 연안에 집결하여 사상상 조직상에서 대오를 더욱 공고, 제고 하기를 건의 하였다.     1944년2월, “조선청년혁명학교”는 태항산 곡원촌을 떠나 연안으로 행군 했다. 대오는 박효삼(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과 정률성의 지휘하에 합치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하며 세겹의 봉쇄선을 둟고 1000여리를 행군하여 연안에 도착했다. 행군은 팔로군에서 부대를 파견하여 안내와 호송을 하여 주었다.     4월7일 오전, 쾌청한 날씨, 우리가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저 멀리 아래로 연안시가지가 펼쳐지고 연하는 흰띠처럼 구불구불 늘여 놓이고 보탑산은 그 건너에 숙연히 바라 보였다. “연안이다!” 함성을 지르며 우리는 산아래로 내리 달리였다. “산밑에 가서 총 집합할것!” 박효삼이 다급히 소리 쳤다.     우리는 연안 동관에 집결한후 세개대로 편성하여 행동 했다. 농업대는 감천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메밀과 기장을 심었다. 나는 농업대에 편입 되였다. 건축대는 라가평에서 학교와 숙사(요동)를 건설 하였다. 후근대는 채소를 재배하고 축산을 하고 목수, 리발, 상점 등 다종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들은 엿도 만들어 팔았다. 농업도 하고 벽돌, 기와도 굽고 집도 지으며 억척스레 일하는걸 보고 중국동지들과 인민들은 “조선동지들은 참으로 훌륭하다!” 하며 찬탄 했다. 중공중앙과 팔로군에서 우리를 백방으로 보살펴 주었지만 우리는 가급적 자력갱생 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해 가을 추석날이다. 우리 세개대는 라가평에서 성대한 문예경연대회를 하였다. 농업대에서는 10여명의 대원으로 표연창을 한절목 만들었는데 부른 노래는 “호메가”였다. “호메가”는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 널리 불리우는 민요곡에다 가사를 붙인 것인데 그 가사는 내가 창작한 것이다. 원래는 8절로 되였는데 지금 기억되는건 5개절 뿐이다. 1944년도에 연안에서 우리가 부른 노래가 광복후 동북각지 조선족들에게서 애창 되는걸 보고 나는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홍색주선률로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호메가                 류동호 사, 평안도호메가민요곡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여 온다.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애서 나오는 곡식이로다.        일하면서도 배울수 있는 즐거운 일터로다 배움터로다.       무찌르자 일제놈들을 삼천리 조국으로 진군해 가자.       붉은기를 높히 날리며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리라.          후렴: 에라 에라 에라 호호메야                  호메 호메를 메고 가자.       세개 대는 모두 풍만한 성과를 올렸다. 12월 총결표창대회를 성대히 거행 했는데 60세에 나는 김백선 등 9명의 로동모범인물들을 표창 하였다. 그속에는 영광스럽게도 나도 들어 있었다.     이듬해 1월 5일! 드디여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라가평에서 탄생 하였다. 이날 대회는 부교장 박일우의 사회하에 애국가 열창으로 시작 되였다. 이어 교장 김두봉이 연설 했는데 그는 연설에서 학교의 교육방침은 조선혁명에 수요되는 중,고급 정치간부와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잇따라 중공중앙과 팔로군사령부를 대표하여 주덕 총사령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이 민족통 일전선을 어떻게 결성하는가를 연구하며 전체 조선인민을 묶어세우며 자기의 무장대오를 조직하여 민족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정치와 군사를 배우며 경제와 나라건설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면에서 중국공산당의 경험은 조선동지들에게 참고가 될것이라고 하였다. 림백거는 중국공산당과 인민은 조선혁명을 전적으로 지지할것이라고 하였다. 오옥장의 연설은 의미가 심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혁명가들이 수양문제에 중시를 돌리기 바란다. 개인영웅 주의, 종파주의 등 개인주의를 반대하며(당시 그런현상이 있었다.) “일체는 인민을 위하여”라는 관점을 수립하며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서특립은 남의 경험을 학습하되 자기의 실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령도동지들이 축하연설을 한후 중공중앙조직부, 중앙당교, 섬감녕변구정부, 연안의 여러대학 대표들이 축하를 하였다. 끝으로 “일본해방동맹”(일본반전동맹)과 일본공산당을 대표하여 오까노스스무가 연설하고 월남 벗 황중광, 미국래빈도 축하연설을 하였다. 나는 오까노스스무의 연설을 감명깊이 들었다. 그는 일제파쑈분자들은 일본인민에게 막심한 고통을 주었을 뿐만아니라 조선인민, 중국인민에게도 커다란 재난을 가져다 주었는데, 한줌도 못되는 이런 망나니들로 하여 더없는 수치와 원통함을 금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민족의 이름으로 사죄 한다고 하면서 파쑈반동들은 이제 길어야 1년반을 넘지못하고 멸망할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인민은 조선,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여러나라 인민들과 꼭 사이좋게 지낼것이라고 하였다. 대회는 우렁찬 “조선의용 군행진곡” 합창으로 끝났다. 이튿날 “해방일보”는 대서특필로 “조선혁명군정학교” 개교성황을 세상에 알리였다.     개학 당시의 학교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교장: 김두봉     부교장: 박일우(조직과장, 교육과장을 겸임.)     대대장: 박효삼     조직과부과장: 주춘길     교육과부과장: 허정숙     총무과과장: 주덕해      (주덕해 허정숙외의 이상 동지들은 광복후 조선으로 나간후 모두 실각했다.)     학원은 150여명이였는데 3개 구대로 편성 했다. 그리고 매개 구대는 또 3개 분대로 나누었다.     1구대 구대장: 조렬광  협리원: 방호산     2구대 구대장: 왕자인  협리원: 장복     3구대 구대장: 전우    협리원: 채국범     나는 1구대 3분대 분대장이 였다. 구대 간부들은 광복후 모두 조선으로 나간후 실각당했다. 분대의 많은 간부들도 광복후에 조선으로 나갔는데 후에 절대대부분이 실각당했다.     교원은  군사과: 박효삼, 각구대의 구대장, 협리원.                   정치과: 김두봉, 최창익, 박일우.                   철학과: 한빈                   쏘련공산당사, 레닌주의기초: 허정숙                   사회과, 정치경제학, 조선어문: 리홍염, 양민산, 류문화.                   국제형세: 박일우, 오까노스스무     학습은 과목이나 교원들이 고정불변이 아니였다. 때로는 중공중앙의 문건을 학습하기도 하고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 “련합정부를 론함” 등 저작을 하습하기도 했다. 박일우가 중공7차대회에서 발표한 “조선독립동맹의 제반과업”을 하습하고 열렬한 토론도 하였다. 나는 중공중앙 문건과 모택동의 저작들을 이미 로소한의 마대속에서 많이 보았기에 학습이 더욱 잘 되였다. 군정학교에서 나의 혁명리론 수평과 사상각오는 매우 현저한 제고를 가져 왔다.     1945년8월15일! 우리가 저녘을 먹고 휴식하는데 “해방일보”편집부에서 사업하는 고동무(김창덕. 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가 헐떡이며 쓰러질듯 우리에게로 왔다. 그는 숨을 톱으며 연신 중얼 거렸다. “왜놈들이 망했다! 투항 했다!” 그는 10여리를 뛰여오다보니 이순간에는 기진맥진 해서 소리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소식을 듣자 동포들에게 알려야 겠다고 벌떡 일어선것이 라가평으로 갔더라고 훗날 감명깊히 말하였다. 라가평은 30여호의 조선족 마을로 그때는 300여명의 조선혁명가들이 살고 있었다. 연안시가지와는8,9리 떨어져 있었다.     그날밤, 연안은 온통 끓어 번졌다. 얼싸안고 환호하고 만세를 부르고 북과 꽹가리를 치고 횃불행진은 장밤 끊을줄 몰랐다. 교장 김두봉은 환호로 들끓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왜놈들때문에 조국으로 가지 못하던 동무들아! 조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라!”하고 연신 높히 소리 쳤다. 우리는 횃불을 추켜들고 연안으로 나갔다…     중공중앙과 팔로군 총부에서는 주덕총사령의 명이로 8월11일 낮 12시에 6호 명령을 하달 하였다. 우리에게 전달된것은 12일 오전이였다. 6호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안총부 명령 제6호     중국 및 조선경내에 진군하여 싸우고 있는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리고 있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 부대를 통솔하여 동북으로 출병하며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함과 아울러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것을 명령한다.     총사령 주덕                              중화민국 34년8월11일12시       우리가 명령을 받고 출발준비를 긴장히 다그치고 있는데 왜놈들이 투항하고 말았다.     우리는 9월17일 아침, 연안을 떠나 조국으로 출발했다. 팔로군과 연안인민들은 우리를 열렬히 환송해 주었다. 우리는 출발에 앞서 부대를 4개 구대로 재편을하였다. 4구대는 증설한 것인데 구대장은 김극(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 협리원에는 윤공흠(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였다. 나는 이때 4구대12분대에 편입되고 분대장을 책임졌다. 우리는 기쁨과 흥분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조선의용군행진곡”과 정률성이 밤도와 창작한 “조국향해 나가자”를 목청껏 우렁차게 부르며 씩씩하게 행진 하였다.       그날의 그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 본다며 류동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하였다. 로안에 그득하던 눈물은 주루루 주름진 볼로 흘러 내렸다. 그의 무량한 감개를 어찌 다 헤아리랴!...                     조선의용군 행진곡                                                       리정호 사, 곡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맞춰 나가자. 다앞으로.               지리한 어둔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속에              의용군 기발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쑤의 철사망              양자와 황하를 뛰여넙고              피묻은 만주벌 결승전에             원쑤를 동해로 내여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앞으로                        조국 향해 나가자                                                      정률성 사, 곡              하낫, 둘, 셋 발맞춰 조국 향해 나가자.              씩씩하고 용감한 조선의 용사들              오늘은 화북걸쳐 래일은 만주지나              앞의장애 물리치며 조국 향해 나가자.              진리로 굳게 뭉친 우리는 강철대오              모든 정신 행동 인민위해 노력해              용감히 싸우리라 조국의 해방위해              끝까지 싸우리라 인민의 자유위해              하낫, 둘, 셋 발맞춰 조국 향해 나가자.       “… 대오가 등성이를 넘어가자 노래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껴 울었다. 땅에 쪼그리고 앉아 섧게 울었다. 얼마후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동지들이 사라진 등성이를 이윽히 바라본후 발길을 돌리였다. 학습을 마치고 곧 조국으로 가겠는데, 뭘?!... 나는 스스로 위안하며 학교로 돌아 왔다.…”(무정의 지시에 의하여 연안의과대학에서 계속 학습 함.)     은실백발에 말쑥한 리화림은 조선의용군 대오가 연안을 떠나가던 그때를 회고하며 긴 한숨을 쉬였다. 우렁차게 부른 노래도 좋고 걸음도 씩씩 했으나 류동호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리화림도 그랬다.)       우리는 매일 5,60리씩 행진 하였다. 숙영지에 이르면 팔로군에서 미리 안배하여 놓아 유쾌한 려행길 그대로 였다. 연청, 청화평, 수덕, 미지를 지나 황하를 건너서니 산서성땅이 였다. 우리는 계속 동북쪽으로 행진하여 대동을 지난후 장가구 기차정거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는 태항산에서 나오는 조선의용군 전우들과 감격적인 회합을 하였다. 장가구역광장에서 진찰기군구 사령원 섭영진과 팔로군 총참모장 등대원이 우리들에게 열정적인 환송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중국혁명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귀국하는 조선동지들을 열렬히 환송 한다. 조선혁명의 승리를 축원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차로 회래까지 간후 다시 행군으로 고북구까지 갔다. 거기서 만리장성을 넘은후 승덕을 지나 금주까지 행군하니 이젠 동북땅에 들어섯다. 금주에서 부터는 심양까지 기차로 나가는데 우리의 기쁨과 흥분은 절정에 이르렀다. 기차가 역에 이르면 서로 세상구경을 하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기차가 신민역에 이르니 바깥에는 기차를 타려는 조선동포들이 와글와글 하였다. 우리는 너무도 반가워 저마끔 소리를 질렀는데 동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급기야 마구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였다. “조선 군대다!” “조선의용군이다!” “조선 팔로다!” 함성을 지르고 팔을 휘둘렀다. 우리는 “조국 향해 나가자”를 목청껐 불렀다. 만세소리 환호소리 들썽하는 가운데 기차는 역을 떠났다. 우리들은 “조국에서 만나자!”고 소리지르며 오래오래 서로 손을 저었다.(7)
111    일본헌병대 통역(6) 댓글:  조회:1156  추천:0  2017-05-16
                                                 일본헌병대 통역(6) 팔로군    적공부간사       류동호가 기로변군구 무공대에 랍치된 시간은 1940년 2월2일 오전이다. 기로변군구 사령부 정치위원 왕휘구, 적공부 부장 로소한은 류동호에게 금후 간력을 쓰거나 무슨 등기표 같은걸 쓸때면 이날을 “혁명에 참가한 시간”(혹은 사업에 참가한 시간)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조직(당)의 결정이라고 하였다. 류동호는 그대로 하였다.     그날부터 류동호는 두 적대진영에서 혁명의 진영ㅡ공산당 켠으로 넘어 섯다. 그리고 거기서 혁명에 일생을 바치였다.     여기서 류동호의 “혁명에 참가”하기 전까지의 력사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직(당)감정서의 유관 단락을 보면 이러하다.     “류동호(조선인. 학생출신.)는 1921년9월17일 조선 개성부(시)에서 신을 만드는 가난한 수공업 로동자의 집에서 태여 났다.(부 류석진 모 송성락) 신의주상업학교 졸업.(졸업학기에 일제치안조례위반이란 억울한 죄명으로 퇴학당함. 1938년8월.) 조선 신의주에서 자유직업. 로동. 동년 10월1일 중국으로 온후 심양, 천진 등 지에서 자유직업. 로동.(이상은 본인의 자아감정에 준함.) 1939년 8월 하순 ㅡ1940년 2월1일까지 천진일본헌병대 창현분대(세가와이혼성려단헌병대) 중대배속헌병조 통역으로근무. (2년계약. 민간고용인.) 그간 부상으로 40여일 병원치료. 헌병조통역 실지근무시간은 4개월가량임. 죄악이 없음.(기로변군구 창현무공대 장준리, 공보 증명.)이것은 일반적인 력사로 문제가 아님. 1940년 2월 2일 팔로군 기로변군구 사령부에서 혁명에 참가.…”       감정서는 팔로군 기로변군구사령원 소화, 정치위원 왕휘구가 서명한 것으로 두말할것없이 조직(당)의 감정서 였다. 이것은 류동호의 력사를 실사구시적으로 감정하고 내린 결론이였다.     그런데, 일본헌병대에서 4개월 근무한 이 한단락의 어린시절경력 때문에 그는 지금부터 많은 곡절을 겪게 되며 또 많은 좌절을 당하게 된다. 무엇때문인가?! 그의 경력에서 답을 찿게된다.       나는 적공부에서 로소한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사업 했다. 로소한이 나에게 주는 임무는 일문재료를 중문으로 번역하고 중문을 일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였다. 대부분 내용은 반파쑈, 반전선전이였다. 반전선전의 적지않은 문장들은 로소한이 직접 작성한 것이였다. 나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사업을 부지런히 하였다. 적공부에는 일문을 아는 사람으로는 사실상 나 하나뿐이 였다. 로소한은 일본대학을 (경제과) 다녔다고는 하나 일년만에 돌아온후 인차 중국 혁명에 참가하다보니 일어를 별로 알지 못했다. 내가 적공부에서 사업하면서부터는 대 일본사병 선전이 대뜸 활기를 띄였다. 로소한은 내가 번역한 일문을 한글자 한구절 물으면서 틀린것을 세심하게 바로 잡아 주었다. 례하면 “네놈 새끼들은” “쫄병과 장교간나들” “미친개들”… 같은것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쓰면 안된다고 도리를 말해 주었다.       로소한의 지도하에 나의 사업능력은 재빨리 제고 되였다. 약 한달후에는 적공부 간사(중대장급)로 임명되여 대 일본사병 선전사업을 전적으로 맡게까지 되였다. 나는 문학도다 보니 원래 글쓰기에 흥취가 있을뿐만 아니라 세계관, 인생관에서도 근본적인 전변을 가져와 사업에서 주동적이면서도 아주 적극적이 였다. 당시 부대는 야간이면 활동하고 낮이면 휴식 했는데 나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선전문을 창작하고 직접 등사깡판을 쓰고 등사까지 하였다. 나는 팔로군에서 줄곧 이 사업을 책임지고 하였다.     1940년 5월 하순, 기로변군구 주력부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로서군구와 합병 하여 로서군구로 되였다. 사령원은 양용, 부사령원은 소화, 정치위원에는 왕휘구 였다. 적공부 부장은 로소한, 나는 적공부 간사 였다. 로서는 진포선 넘어 7개현의 광활한 해방구 였다. 항일전쟁 형세는 들쭉날쭉 상치계단이 였다. 왜놈들의 발광적인 진공계단은 한풀 꺾기고 항일의 승리서광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팔로군 대오는 더욱 장대해 지고 사기가 더욱 높아 지었다. 부대의 생활도 많이 개선 되였다. 그때 부대에서는 진테비도 주었는데 매달 전사는 1원, 중대급 간부로부터 퇀급까지는 3원, 사급이상은 5원이였다. 사령원도 5원이였다. 나는 중대급이여서 3원을 받았다. 진테비는 비록 적었지만 우리들의 사상각오와 전투의지, 적극성은 대단히 높았다.     그해 9월 연안으로부터 리명(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간부대100여명을 인솔하고 로서군구로 왔다. 나는 처음으로 팔로군에서 동포를 만났다. 리명은 30대의 세련된 혁명가 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혁명도리를 말해 주면서 앞으로 우리민족의 혁명과업에 대비해 중국공산당을 잘 따라배우며 사업을 잘 하라고 격려 하였다. 그리고 “일제하의 조선민족혁명운동사”라는 책자를 주면서 며칠내로 보고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제 산동으로 나가서 “조선독립동맹” 훈련반 학습재료로 써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밤도와 내용을 베끼였다. 며칠후 리명은 로서군구에 50명의 간부들을 떨궈놓고 산동으로 나갔다. 우리는 작별할때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힘껏 싸우자고 약속 하였다. 훗날 우리는 그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다. 연안에서 온 간부들은 로소한이 직접 적공부에 배치를 했다. 그때 적공부는 할일이 무척 많았다. 나에게도 10여명 간부가 차례 졌다.     12월 적공부에서는 30여명의 간부훈련반을 조직 했는데 시간은 3개월이 였다. 로소한은 나에게 일어교원을 맏긴외에 “피압박 민족의 해방과 국제적 단결”이라는 리론강의를 하라고 하였다. 교재가 없는 상황에서 이 과제는 너무도 아름찬 것이였다. 로소한은 나와 함께 제강을 짜고 참고재료를 선택해주었는데  나는 강의를 하는 한편 실로 많은 학습을 했고 안계를 넓히게 되였다. 그 재료는 후에 퇀급이상 간부들에게 학습재료로 발급하기까지 했다. 나는 군구결정으로 사령부의 표창까지 받았다. 그리고 당의 동정원(입당대상)으로 되였다. 이때로 부터 나는 류등 이라는 가명을 사용 했다. 그것은 적구에 있는 가족과 친척, 친지들의 안전을 위해서 였다. 이름은 훈련반 학원이 일어단어를 몇개 베껴 달라면서 쪽지를 써 나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류등 동무 앞”이라고 썼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조직에 보고 하였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해서 훗날 여러번 심사를 받을줄이야.     로서군구에는 포로 했거나 의거한 일본인이 여럿이 있었다. 나는 로소한의 지시에 따라 그들에 대한 선전교육사업도 책임 지었다. 얼마후에는 다나까가즈오,(본명은 사도다께오. 연안에서 모택동의 병을 치료했음. 1993년 일본에서 해후 함.) 기느시다, 하시모도,(리명의 요구로 료남군구로 감.) 미즈노(팔로군 포병교관을 함.)등 골간으로 “일본사병각성동맹”을 건립하고 그 지도사업도 책임졌다. 또 일본인들로 무장선 전대도 조직했는데 그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일본사병각성동맹”은 후에 더욱 발전하여 “일본반전동맹”으로 되여 반파쑈전쟁에서 중대한 작용을 했다.     로서군구의 무장선전대 활동은 다종다양하고도 맹렬 하였다. 나는 중요한 할동은 직접 지휘하였다. 활동은 일반적으로 밤에 진행 하였다. 선전대는 적진 코밑에 까지 다가가 위문품과 함께 삐라를 뿌리고 구두선전을 들이 대였다. 왜놈과 괴뢰군들은 낮이면 팔로군 전투부대를 긴장해서 경계하고 밤이면 무장선전대와 전투부대를 경계하느라 더욱 긴장해 했다. 때로는 선전만 하는것이 아니라 진짜로 들이 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포로거나 기의한 적군들은 “당신들의 선전은 도리가 옳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팔로군에서 내가 직접 참가한 전투로는 판시투전투가 가장 크고 멋드러진 전투 였다. 1941년1월7일, 나는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사 3명을 이끌고 밤중에 적구로 나갔다. 판시투는 왜군대대부가 있는 운성과 중대가 있는 후집거점 중간쯤 되는곳이다. 놈들의 두 거점사이는 30여리가 되였다. 우리임무는 적구에서 적들의 전화를 도청하여 판시투전선지휘수장에게 즉각즉각 알리는 것이였다. 새벽이 거이 될때 대부대는 판시투에 매복하고 일부 병력은 후집을 포위공격 하였다. 후집의 왜놈중대장 이다는 기를 쓰고 방어하는 한편 운성에 있는 대대장 니히다에게 급보를 하였다. 이다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팔로 대부대가 왔다. 포위 되였다. 빨리 증원해 달라!”하고 고함 지르고 니히다는 “완강히 방어 해라! 팔로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었다. 이다는 “상당히 많다. 어두워서 확실하게는 모르겠다. 사면포위를 하고 달려드는데 저새끼들이 아주 먹자고 지랄을 한다! 빨리 오라! 빨리!”하며 목갈린 소리를 련속 질러 댔다. “이렇게 새까만데 어떻게 가니. 두시간만 버텨라.” 니히다는 되려 호통을 쳤다. 날이 밝아오자 니히다로부터 “대대가 출발한다. 저놈들이 전화선을 끊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다. 바보 같은것들! 이만!” 우리는 전화선을 끊어 놓고 전투위치로 갔다. 그날전투는 인차 끝났다. 판시투까지 달려온 적들을 전멸한것은 물론이고 후집과 운성에 있는 적들까지도 몽땅 섬멸 했다. 니히다 대대는 왜군에서 번호가 지워져 버렸을것이다. 우리는 많은 포로를 잡았고 자동차와 무기, 군수품을 숱해 로획 했다. 거기에는 대대포도 있었다. 포로된 사병들은 우리들이 선전을 들었기에 포로되는것이 두렵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투총결대회에서 나는 군구 결정으로 직접 양용사령원의 표창을 받았다. 1941년7월 로서군구와 기로예군구는 합병하여 기로예군구로 되였다. 사령원에는 양득지, 부사령원은 양용, 정치위원은 소진화 였다. 소화와 왕휘구는 다른곳으로 갔다. 적공부 부장은 리비, 로소한은 적공과 과장직무를 맡고 나는 그의 밑에서 여전히 간사로 사업했다. 부대가 대규모로 커지면서 부 아래에 몇개의 과가 설치 되였는데 우리의 적공과는 먼저의 부일때보다 엄청 더 커지고 사업이 더욱 많아졌다.     적공과 간사고 당의 동정원인 나는 자기의 혁명적 사상각오 제고에 시시각각으로 노력 하였다. 혁명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더욱 확고히 수립하기 위하여 맑스주의 혁명리론 학습에 노력했고 간고한 투쟁실천속에서 단련하며 혁명과업을 적극적으로 완성 하였다. 조직에서는 또 우리들에 대한 교육과 배양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였다. 령도들은 사업임무가 그렇게 막중하면서도 우리들에게 친히 당과를 하여 주었다. 나를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이끌어 준 사람은 로소한이다.     1942년1월 조직에서는 나를 군구교도대(부대 중,고급간부 배양)학습반에 보냈다. 그때 사업이 그렇게 많고 바쁘면서도 학습반에 보낸다는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조직이 나에대한 배려일 뿐만 아니라 중시이기도 했다. 학기는 6개월이고 패장이상간부들로 학원은 120명이였다. 조선사람은 나 하나뿐이 였다. 학원은 군사중대와 정치중대 두개반이였다. 나는 정치중대에 편입되고 부중대장으로 임명 되였다. 학원에서 나는 학습을 잘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다. 당의 동정원이라는 신분외에도 조선민족의 영예를 빛내야 한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할때 우수생이 모두 6명이였는데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우수생속에서 동정원으로는 한족친구와 나 두사람 뿐이였다. 다른 네사람은 당원들이였다. 졸업할때 우수생 우리 두사람은 입당이 비준되였다. (1942년7월) 그때의 기쁘고 흥분된 심정은 지금 이 시각도 잊을수없고 가슴 설레인다.     학원을 졸업하고 적공과로 돌아오니 양원(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라는 조선족이 간사로 내가 하던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과장으로 제발 되였다. 나는 일본과 조선사람을 대상으로 반파쑈, 반전사업을 구체적으로 책임졌다. 1942년8월29일(이날은 조선민족의 국치일임.) 나와 양원은 “조선독립동 맹기로예분맹”을 창립하고 창립대회를 거행하였다. 분맹창립대회에는 여러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했다. 기로예군구에서는 양용 부사령원이 참석 하여 ”당신들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다”라는 제목으로 축하연설을 하였다. 분맹창립 소식을 “기로예일보”는 대서특필 하였다. 나의 사업임무는 한차원 높고 넓은 범위에서 분망하게 되였다.   로소한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나와 로소한은 1940년2월2일 저녘켠에 한족집 캉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로부터 1943년3월까지 만 3년을 우리는 줄곧 함께 사업 했다. 4월초 로소한은 하남성 신사군으로 가고 나는 태항산으로 갔다. 우리는 말그대로 혁명의 수요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 졌다.     로소한은 19살 어린나를 혁명의 길로 이끌어준 다정한 동지이고 친밀한 전우다. 그는 자애로운 선생이였고 믿음직한 선배, 따뜻한 형장이였다. 키가 훨썩 크고 삐쩍 마른 몸매(팔로군 군복이 늘상 헐렁헐렁 했다.)에 훌렁 벗어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내가 레닌 같지?”하고 우스개를 하던 그를 지금도 보는것만 같다. 그때 갈라진후 유감스럽게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그는 문화대혁명에서 핍박으로 죽었다.(전력부, 호남대학 등 단위에서 사업 했음.)     로소한은 강소성 사람이다. 가정은 대지주라고 했다. 1920년대에 모택동을 따라 혁명에 참가한후 얼마 안되여 공산당에 가입 했고 2만5천리 장정까지 한 혁명간부 였다. 그는 나보다 16살 이상이였다.     로소한은 나를 만난날 밤 행장을 메고 와서 함께 잤는데 그후에도 계속 그랬다. 조직의 의식적인 안배였을 것이다. 어찌되였든, 그와 나는 함께 자고 함께 사업하며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였다.     팔로군 기로변군구에 처음 갔을때 부대에서는 나에게 어린전사를 통신병이라며 붙혀 주었다. 나에게 밥을 갔다주고 재료를 가져오기도 하고 번역한것을 가져가기도 하며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것이였다. 지어는 용변을 봐도 얼마쯤 떨어저 지켰다. 그럴수 밖에. 사령원 소화, 정치위원 왕휘구, 적공부부장 로소한이 나를 만나줄때 집으로 가겠다고 떼쓴바가 있었으니 부대에서 나를 지키며 감시하는것은 당연지사 였다. 어느날 밸이 꼬여있던 나는 통신병이 따라다닌다고 귀쌈을 쥐여 붙혔다. 그리고 물러가라고 소리를 쳤다. 통신병은 볼따구를 만지고는 히쭉 웃으며 정말 물러 갔다. 그런데 얼마안되여 두억시니 같은 털보를 데리고 오는 것이였다. 털보는 화등잔 같은 눈알을 뒤룩거리며 “왜놈들 본때를 하는가!” 하며 나를 쏘아 보았다. 나는 “너는 누구냐?” 하고 소리치며 마주 쏘아 보았다. 바로 그때 로소한이 휘적휘적 급히 걸어 왔다. 그는 털보를 가보라고 한후 나를 데리고 마을앞 시내가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는 너럭바위에 앉아 담화를 하였다. 말은 내가 먼저 꺼냈다. 처음에는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지만 소사령원이 안된다고 해서 그럼 있겠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 나를 믿지 못하는가. 왜서 쑈왕이 똥눌때도 붙어 다니며 감시를 하는가. 제길! 나는 거짓말을 안한다.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사람이다. 나도 왜놈을 미워한다. 싸우기로 결심했다. 무엇을 의심하는가. 한바탕 고와대고나니 속이 쉬원 했다. 나는 내친김에 김순사와 고등계 안경쟁이를 죽인 일까지 말하려 하다가 너무 불어대는것 같아서 그건 말하지 않았다. 로소한은 담배를 피우며 나의 말을 심중한 기색으로 들어 주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였다. 쑈왕은 자기의 통신병이고 나를 완전히 신임하지 못한건 사실이고 때문에 감시하고 지켰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나쁜사람으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신병을 안배한것은 너를 관심한 일면도 있는데 이점은 믿어 달라고 하였다. 쑈왕은 고아인데 부모가 왜놈들에게 살해되자 팔로군을 따라 왔다고 하였다. 부대에 온지 3년이나 되고 스물한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 동지고 전우고 친형제와 같다면서 이런 사이에 사람을 때린건 과분한 처사라고 말하는데 나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로 쑈왕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쑈왕은 히쭉 웃으며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다.”하며 나의 손을 잡기까지 하는 것이였다. 그날후로 쑈왕의 “감시”는 매우 느슨해 졌다.     며칠후, 아침을 먹고 마을안을 이리저리 산책하는데 한 집 마당에서 팔로군 여럿이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것이 보이였다. 나는 호기심이 나서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나무통에 죽을 담아놓고 저마끔 공기에 떠다가는 후룩후룩 맛있게 먹는데 죽을 젓가락으로 먹는것이 신기하고 우스웠다. 거기에는 그 두억시니 같은 털보도 있었는데 그가 경위반 반장이였다. 털보는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며 “츠반! 츠반!” 하였다. 그때 집안으로부터 로소한이 공기를 들고 나왔다. 그날 나는 크게 감동했다. 그들이 먹는것은 겨가루가 껄쩍껄쩍하는 푸대죽이였든 것이다. 사령부 “장관”인 로소한도 그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쑈왕이 밥을 가져오면 나는 때론 여기서 함께 먹자고 했는데 그럴때면 히죽이 웃으면서 나는 다른데서 먹는다고 하며 나가던 로소한. 나는 사령부 간부들은 고급으로  먹는가부다 생각 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고급생활을 한게 아닌가…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단호히 경위반 전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브샨즈를 벗고 팔로군 군복을 달라고 했다. 로소한은 “각성했다!”하면서 무척 좋아 했다.     행군할때나 사업할때나 휴식시에도 로소한은 나의 곁에 붙어 있다싶히 하였다. 아니, 내가 그를 따라 다녔다. 사령부간부들에게는 말이 있었는데 로소한에게도 밤색말이 한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좀체해서는 말을 타지 않았다. 그는 말등에 책과 재료를 싣고 다녔다. 그의 마대(큰 주머니 두개)속에는 혁명리론서적들이 많았는데 나더러 마음대로 보라고 하였다. 주머니에는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 그리고 모택동의 저작이 있었고 력사책과 철학서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책이 세상에 있는줄을 처음으로 알았다. 공구서들도 있었는데 “백과주해신어사전”은 특히 좋았다. 나는 거기서 많은것을 배웠다. 책에는 “강우 서”(江右 书)라는 싸인이 있었는데 그것이 로소한의 본명이다. 로소한은 그책을 우리가 남북으로 작별할때 나에게 기념으로 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소중이 갖고 있다. 로소한의 마대는 사회과학원이 였고 대학교도서관이 였다. 나는 로소한의 지도하에 열심히 학습(독서) 하였다. 그는 나에게 학습계획(독서순서)을 짜주고  심득을 묻고 의난문제를 보도해 주었다. 때로는 어떤 제목을 내여놓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례하면 공산주의는 왜서 과학인가, 공산주의와 공산당, 혁명의 당전의 임무와 장래의 임무,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국제적 단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현재와 금후의 임무,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관계, 류동호의 전도… 나는 로소한과 함께 있은 3년간 그때가 나의 대학이였고 혁명적 세계관, 인생관을 수립하게된 관건적 시기였고 나의 혁명적 인생항로가 결정된 시기라고 인정 한다.     로소한은 인격과 사상수양면에서도 나를 많이 방조해 주었다. 다른사람을 존중하며 단결하며 관심하고 방조하며 자고자대, 교오자만을 하지말며 허심하며 간고분투, 실사구시, 원칙견지 작풍을 발휘하며 부화타락, 세화변질에 항상 자각성과 경각성을 잃지말며, 학습과 개조, 학습과 실천을 평생 견지해야 한다고 자주 이깨워 주었다.     1942년 12월 24일, 기로예군구 조직고 고장이 나와 입당이 취소되였다며 담화를 하였다. 리유는 당성단련이 더 수요 된다는 것이였다. 동정원으로 있게해 주겠으니 단련에 더 노력하라고 하는것이였다. 말인즉 사상이 아직 당원수평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더 개조하고 단련하고 조직에서 더 고험하며 두고봐야 겠다는것이였다. 나는 억이 막혔다.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그래, 지금 당장 기관총을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면 나의사상을 인정해 주겠는가. 그래야 표준에 도달된다고 보겠는가. 명령만 하면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할것이다. 나는 혁명에 나의 일체를 바치겠다고 언녕 맹세를 했고 나는 맹세대로 했다. 금후에도 그럴것이다. 나는 그런사상으로 사업하며 행동했다. 좋다! 그럼 무슨 단련이 더 수요 되는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더 개조하고 단련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달라. 나는 흥분을 억제 못하고 고장과 시비를 걸었다. 고장의 입에서 끝내 실속이 터져 나왔다. 네가 일본헌병대에 있은적이 있지? 조선사람이지? 왜놈교육을 받은 지식분자지? 더 두고 봐야 너를 알수 있다. 나의 불같은 개성은 분통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헌병대에서 내가 무슨죄를 졌는가. 조선사람이 어째서? 당의교육은 안 받았는가. 싹 걷어치워라! 안한다. 동정원이구 나발이구 싫다! 다른곳으로 가겠다. 여기가 아니면 혁명을 못한다더냐?! 더러워서! 흥! 나는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적공과 사무실에서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 씩씩거리며, 잉!잉! 울며, 서성거리는데 로소한이 들어 왔다. “혁명가가 울면 되나.” 로소한은 나를 끌어다 캉에 앉힌후 어깨를 다독였다. 전후사연을 듣고난 로소한은 얼굴이 시컴해서 머리를 떨구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의 입당 소개인의 하나였다. 그날밤, 그는 나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당을 믿고 꾸준히 혁명사업을 잘 해야 한다는둥, 우리는 명예도 지위도 바라지 않는 혁명자가 되여야 한다는둥, 혁명자의 최대의 기쁨과 행복은 혁명의 승리라는둥, 한 사람에 대한 긍정과 평가는 그 어떤 개인 한두사람이 하는것이 아니라 력사와 인민대중이 하는거라는둥, 당은 정확하다는둥… 허다한 대도리를 숱해 말하였다. 그러한 도리를 나도 그때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자도 필경은 7정6욕 5지가 있는 인간이 아닌가! 황차 나는 그때21살의 청춘이였다. 리지보다 감정이 더 많고 앞서는 때인지라 분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는 로소한에게 분풀이를 하며 막 대들었다. 그리고 당장 조선의용군을 찿아 가겠다고 잡아뗐다. 로소한은 그것도 혁명의길이 아닌건 아니지만, 다 혁명조직인데 그래도 조직적으로 행동하는것이 좋다면서 두고 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뻬쮼의 실례를 들면서 어데서 혁명하나 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거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거고 전 인류의 해방과 진보와 행복을 위한거니까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였다.(나는 로소한의 마대속에서 모택동의 문장 “뻬쮼을 기념하여”를 이미 보았다.)     나의 동정원자격은 아닌게 아니라 취소 되였다. 인류의 해방과 혁명을 위하여 입당하려는 것보다 영예를 위하여 입당하려는 표현이 더 보이는데 입당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이였다.(조직고 고장과의 담화에서 나타난 태도를 보더라도 그럼을 충분히 알수 있다고 하였다.) 까짓거! 말라면 말지. 나는 대수롭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동정원을 하겠다고 했던가. 니들이 시켰지. 별꼴 다 보겠네… 그때 나의 성숙정도는 이랬다. 그러나 정서는 억망이였으나 사업은 여전히 힘차게 하였다. 새해 3월 나의 동정원신분을 회복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고장과 다툰것을 검사하라고 하였는데 나는 입당이 취소된것이 여전히 리해가 되지 않는다고 속심을 그대로 말했다. 서기 리비(적공부 부장)와 조직고장은 입만 쩝쩝 다시였다.(로소한이 양용, 소진화에게 반영. 개성때문이니 동정원 자격을 취소할것까지는 없다고 했음.)     4월초 로소한은 나와 한차례 의미심장한 담화를 하였다. 그는 자기가 혁명에 참가한 후에 겪은 곡절적인 경력을 이야기 하였다. 로소한의 곡절은 참으로 만만치 않았다.     “나는 혁명에 스스로 뛰여 들었지만 가정성분 때문에 항상 일부 사람들의 외눈총을 맞았다. 장정 전 까지는 “계급이색분자” “변절자”, 후에는 또 국민당 특무, 일본 특무 혐이까지 받아 여러차례 심사를 받고 반복적인 설명과 교대를 해야 했다. 1938년에는 “뜨로쯔끼분자”로 몰리워 하마트면 총살을 당할번 하였다.(그때 저명한 조선 공산주의자이며 혁명가인 장지락은 총살 당함. 1983년 명예를 회복 함.) 내가 반복적으로 곡절을 겪게 된것은 대오내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기의 그 어떤 리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수단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이였다. 이런 소인은 세계 그어디에나 그어떤 단체, 정당에나 다 있다… 때문에 자아보호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당에 충성하며 혁명사업에 충성하며 광명정대 하는 것이다. 혁명가의 사명은 주관과 객관의 개인리기주의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우리당은 정확하다. 이점을 동요없이 믿어야 한다. 당은 흑백을 정확히 판정하고 정확이 처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날 나는 그의 말뜻을 다는 리해하지 못했으나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나는 평생의 경력을 통하여 그의말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그날 그는 리비와 조직고장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친한사이인데 그들은 머슴을 살다가 일찍 혁명에 참가한, 공이 많은 동지들이긴 하지만 문맹이나 다름 없는데, 혁명의 발전이 지식을 점점 더 수요하자 그들은 하급의 지식분자들을 좀 경계하는 눈친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의 사업에 변동이 있을거라고 귀뜀하는 것이였다. 아니나 다르랴. 10여일후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문화대혁명에서 로소한은 70고령의 나이에 30여년전의 그 각가지 혐의 외에도 반당, 반사회주의, 반혁명, 반모택동사상, 반혁명로선, 수정주의… 등등 수두룩한 죄명을 쓰고 갖은 박해를 받다가 유감스럽게 죽고 말았다. 그를 죽인 괴수는 개인리기주의분자(사상)들이였다.(6)
110    일본헌병대 통역(5) 댓글:  조회:1056  추천:0  2017-05-16
                                                   일본헌병대 통역(5) 랍치       이듬해(1940년) 2월2일! 늦은 아침, 장준리와 공씨가 동촌에 큰 년집(세밑, 묵은해 제일 큰 장마당)이 선다며 구경을 가자고 너스레를 쳐서 우리는 장마당 구경을 갔다. 그날 스즈끼와 친한 처녀도 스즈끼를 찿아 와서 장마당 구경을 가자고 졸라 댔다. 나는 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장준리와 공씨가 하도 끄잡아 당기기에 따라 나섯다. 우리 일행은 공씨까지 다섯이였다.     동촌은 흑룡촌에서 대략 4,5리 띨어진 곳에 있었다. 마을 가운데로 길게 뻗은 신작로 량켠에 난전들이 앉았는데 꽤 북적이였다. 우리가 동촌 년집에 이른것은 10시쯤이였다.     스즈끼는 처녀를 데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무엇을 사 주느라 하고 나는 거느즉이 떨어져서 따라 갔다. 장준리와 공씨는 어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두리번 거리며 그들을 찿는데 흑룡촌의 촌장이 수인사를 하며 말을 걸어서 스즈끼와 더욱 떨어지게 되였다. 내가 촌장과 갈라져 두어발작 걸었는데 대여섯되는 사내들이 욱! 달려 붙으며 자기들과 함께 뒤돌아 뛰라는 것이였다. 앞에 막아 선 작자는 싸창부리로 나의 가슴을 쿡!쿡! 질렀다.     나는 어마지두 “스즈끼!”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20여보 앞에서 가던 스즈끼는 휙! 돌아보더니 처녀고 뭐고 돌따서서 냅다 뛰였다. 찰나 땅! 하는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스즈끼는 풀썩 꺼꾸러 지었다.     나는 괴한들에게 둘려싸여 뛰지 않을수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꺼떡하는 판인데, 총앞에서 무슨 수가 있겠는가. 괴한들도 날쌔게 달렸지만 나도 다부샨즈 자락을 걷어쥐고 있는 힘껏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이 말로만 듣던 그 팔로들이겠는데, 무서워 할것이 없다고 생각 되였다. 나는 지금까지 팔로들에게 나쁜일을 한것이 없고 죄진일도 없으니 무엇이 두렵고 근심 되랴… 나는 배짱이 생겼다. 너들쪽은 또 어떤 곳인지, 지금까지 왜놈세상에서 살면서 왜놈세상은 알만큼 거진 알수 있는데 공산당 세상은 그러구 보니 한번도 구경 못했구나. 한번 부딫혀 보는것도 좋은 일이다. 나는 달리기 경주를 하듯 앞장에서 씽씽 달렸다. 나는 워낙 누구보다 잘 달린다.     5,6리는 잘되게 달린후 반나절을 급행군을 하였다. 저녘이 거이 되여 산골의 어떤 마을에 도착 했는데, 이런 변이라구야?! 마을에는 총을 가진 팔로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로소가 팔로군과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고 야단들이 였다. 어떤데서는 오락판이 벌어져 쾌발을 하고 노래를 하며 박수를 쳐 댔다. 아이들은 이리 저리 뛰여 다니고… 아주 희희락락 생기가 넘치는 딴 세상이였다. 나를 랍치해간 사내들은 어데론가 가 버리고 총부리를 들이대고 가슴팍을 사정없이 찌르던 사내가 나를 어떤 집으로 데려 갔다. 그리고 사내는 가 버렸다. 내가 캉에 오도카니 걸터 앉아 있는데 키가 훨씬 크고 여윈 사내가 성큼 들어 서면서 “네가 왔는가.”하고 말하며 히죽이 웃는것이였다. 밖에는 마을 사람들이 열어 놓은 창문에 꽉 모여서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애 같다느니, 어려 보인다느니, 곱게 생겼다느니… 하면서 서로 나를 더 보겠다고 싸개통을 놓았다. 키큰 사내는 자기는 팔로군 기로변군구 사령부 적공부에서 사업하는 로소한이라고 하면서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내가 류동호라고 대답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우냐고 묻고는 권연갑을 내 밀었다. 내가 담배는 피우지 않는데 랭수를 달라고 하니 그는 밖에 대고 ”쑈왕! 물을 떠 오라.”하고 소리 쳤다. 좀 지나서 쑈왕은 시꺼먼 사발에 랭수를 떠 오고 나가드니 또 얼마쯤 지나서는 역시 시꺼먼 사발에 우동을 가득 담아 왔는데 닭알까지 놓은 것이였다.     로소한은 팔로군은 포로를 우대한다면서, 너는 포로도 아니고 우리가  청해온 사람이기에 더욱 우대한다면서 어서 식사를 하라고 하였다. 더 요구되면 쑈왕과 말하라고 하며 밤에 다시 오겠노라 하고는 나가 버렸다.     그날밤, 부대는 온 밤 행군 했는데 나는 로소한과 함께 걸었다. 부대는 날이 휘붐이 밝아올때 어떤 곳에 다달았는데 이번에는 더 깊은 산골이고 더 큰 마을이였다.(5)
109    일본헌병대 통역(4) 댓글:  조회:1279  추천:0  2017-05-14
                                                  일본헌병대 통역(4) 일본헌병대 통역       압하양행에서 뛰쳐 나온후 며칠 지나서다. 어느날 서점으로 가서 문학서적들이 진렬된 서가를 두루 훝어 보니 히노아시헤이의 소설 “보리와 병사” “땅과 병사”가 있었다. 내가 책을 뒤적이며 보고 섯는데 누가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이게 누구냐?! 창순이와 기호 였다! 긴말을 짧게 한다면 창순이는 삼촌의 교육하에 신의주로 돌아 가다가 천진에서 내렸다. 이미 지내본봐지만 신의주에서는 일자리 찿기가 힘들고 여기까지 온바에 차라리 이곳에서 직장을 얻을가 해서였다. 한달 거이 헤매고 다닌 끝에 꽤 마음에 드는 일터를 찿았다. 그것은 탕그스텐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보조회계 자리를 얻은 것이다. 기호는 천진에 있는 사촌형과 함께 약담배 장사를 한다고 하였다. 창순이는 자기한테로 가면 취직이 될것이라고 했고 기호는 함께 약담배 장사를 하자고 했다. 최원규도 함게 한다고 했다. 몇탕만 뛰면 뭉치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였다. 나와 창순이는 그런일은 꼬물만치도 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사회 지성인 문학가를 지향하는 사람으로 사회를 해치는 그런 잡종망나니는 뒬수 없었다. 굶어 죽는한이 있더라도! 나는 며칠 더 지난후 련락을 하겠다고 창순이와 약속 했다. 그날 우리는 기호가 한턱 쓰는 바람에 배불리 먹었다.     2,3일후 발길 가는대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 곳에 이르니 그곳은 천진일본헌병대 대문앞이였다. 량켠에는 무장을 한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정문앞에는 공시판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통역모집”이라는 붓글씨 광고가 붙어 있었다. 헌병대통역이라면 어떤성질의 직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꽤 신분있는(점잖은) 일일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보초와 내역을 물으니 대문안 층집을 가르키며 그곳에 가서 알아보라는 것이였다. 현관에 들어서니 수직이 사연을 묻고 1층에 있는 한 사무실을 가르켜 주었다. 노크를 하니 일본말로 “들어 오시요.” 하는 대답이 들렸다. 정숙하고 위엄이 풍기는 방안에는 넥타이를 맨 중년의 사내가 커다란 테블뒤에 젊잖게 앉아 있었다. 무표정의 엄숙한 사내였다. 그는 용건을 물은후 통역모집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고는 등기표를 주면서 5일후 오전 10시에 등기표와 증명사진 두장을 갖고 자기한테로 오라는 것이였다. 그날 시험을 친다고 하였다. 월급은 40원이고 숙식, 이복, 치료, 등등 기타는 현역헌병과 기본상 동일시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응모해 보리라 결심 하였다.     나는 그길로 창순이를 찿아 갔다. 그도 시험치게 하려는 생각에서 찿아 갔는데 창순이는 뜨직해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건 보통직업이 아니고 정치 같은데, 왜놈들 밑에서 그런일을 하는것이 좋을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정된 생활이 아니면 가정살림이 문제가 될것 같다는 것이였다. 자기는 곰보여서 보나마나 인상에서 미끌어 질것이고… 회계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10년안에는 장가를 가지 않을거니 가정살림 같은건 나와 상관 없는거고 통역만 하는데 정치와 무슨 련루가 되겠냐고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다. 훗날 나는 창순이 말을 우습게 들은것을 너무도 후회를 했다. 말그대로 일실족 천고한이 였다.     시험치려 온 사람은 40여명 되였다. 모두가 중, 장년들이였는데 맵시가 허술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넥타이까지 매고 신사풍이 였다. 보통 차림의 애숭이 청년은 나 하나뿐이 였다. 시험지는 두장이였다. 한장은 한문을 일문으로 번역 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장은 일문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였다. 소학생 수준급이였다. 한시간의 시험시간을 나는 20여분에 마치고 시험지를 바치였다. 시험생들은 오후 3시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오후 3시, 시험관이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모두 3명이였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시험관은 한사람씩 어떤 사무실로 데려 갔는데 제일 처음으로 나를 데려 갔다. 으리으리한 사무실에는 헌병대위가 잔뜩 위엄기를 뻗치고 앉아 있었다. 대위는 엄엄한 눈길로 나를 지켜 보드니 첯마디로 “전선에 가겠는가!”하고 엄숙히 물었다. 전선의 총알을 나와는 상관없는걸로 아는 나는 “가겠습니다.” 하고 제꺽 대답 했다. 원래 전쟁터에 가보고 싶어하든 내가 아닌가! 나는 그 순간 기쁜 심정에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하였다. 대위는 일본헌병대통역용원(민간인, 고용인원)으로2년을 복무한다는 보증서를 쓰게하고 소개신과(거기에는 나의 증명사진을 붙이였다.) 차표값이라며 돈을 주었다. 3일내로 창현에 주둔하고 있는 세가와이 혼성려단 헌병대로 가라고 하였다. 나는 창순이와 작별하고 창현으로 갔다.     창현 주둔 세가와이려단헌병대로 찿아가니 사무실에서 한 장교가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거기서 또 2년을 헌병대 통역 용원으로 복무한다는 각서를 썼다. 장교의 설명에 따르면 “용원”이란 민간인을 부대에서 고용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림시공으로 사용시간은 2년이고 그러나 부대에서 수요되지 않을때는 아무때고 해고 하지만 본인은 2년내에는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2년후에는 본인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다. 생활상에서는 일체를 부대와 함께 해야하며 동일대우를 향수한다고 하였다. 일본사병들의 옷을 주는데 입고 안 입는건 자기마음대로지만 모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모자에는(센또보시, 전투모) 노란 오각별이 붙어 있었다. 무기는 금지고(다치면 안된다.) 신분증명 같은건 없었다.     장교는 나를 한 중대로 데리고 가서 중대배속헌병조 조장에게 맡기였다. 그 중대 헌병조에는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20대 청년으로서 오장급이였다. 조장인 시라이시는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고 조원 오야마는 표독스러워 보이였다. 1939년 8월하순부터 나는 정식으로 그들의 통역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부대에서 발급하는 옷이며 비품에서 나는 속옷과 신 이불 배낭은 사용 했으나 겉옷과 모자는 사병들을 줘 버렸다. 모자를 쓰지 않는다고 시비하는 놈은 없었다. 나는 돈벌이를 하려 온 민간인 2년 계약공이지, 그리고 조선사람이지 너들과 같은 천황페한지 개뼉따군지 한 무슨놈에게 매운 일본쫄병은 아니라는 자존심에서 그랬다. 후에도 줄곧 그랬다. 로신의 작품을(한문, 일문)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이처럼 되겠다는 야심에서 상고머리를 하고 다부샨즈를 항상 입었다. 얼마 안되여 나는 헌병 두놈이 다 나보다 지식이 낮은걸 알고는 그들을 항상 속으로 얕잡아 보았다.     내가 가서 10여일이 지났으나 별로 할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중대는 전선으로 이동 한다고 하였다. 팔로가 출몰하는 남피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는데 남피는 작은진으로 창현에서 남쪽으로 50여리 내려간 곳이였다. 팔로가 무서워서 부대는 대낮에 행군 했다. 반나절 강행군을 해서 남피에 이르렀을 때는 바로 점심때 였다. 불같이 내리 지지는 태양아래 사병들은 기진맥진하여 우선 그늘을 찿아 늘어 지었다. 팔로는 이미 달아난지 오래고 마을은 조용했다. 중대 장교들을 선두로 모두가 팬티바람으로 큰대자가 되여 낮잠을 자건만 오야마는 자지 않고 마을로 뛰여 다녔다. 시라이시와 나는 우물곁에서 등멱을 감았다. 우리는 중대장교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왔기에 힘은 빼지 않았다. 얼마후 오야마는 남녀로소 중국사람 20여명을 붙잡아 왔다. 시라이시는 “또 적극성을 보이느라 수고한다.”하고 히죽이 웃으며 나에게 말한후 나무밑으로 자려 갔다. 오야마는 나를 불러다 곁에 세우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대일본제국이며 황군이며 위력을 뒤죽박죽 떠벌인후 팔로가 몇놈이 왔던가 어데로 달아 났는가 이곳에 공산당이 있는가 누군가… 제대로 말하면 상을 준다. 속이면 쓰라쓰라다… 그리고 나더러 통역을 하라고 하였다. 자기딴에는 무척 잘 말했다고 긍정하는지 그는 만족한 표정이였는데 나는 우습고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침을 퉤! 뱉았다. 자식이! 쉬지도 못하게 하면서 지랄이 아닌가. 조장이 시키지도 않는, 그런데 너의 물음에 대답할 중국사람이 여기 누가 있을텐가. 정말로 안다고 해도 숱한사람 앞에서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미련한 놈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는 그의 웅변을 대충 번역했다. 오야마는 자기가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 왜서 그리 짧은가고 하며 눈알을 지릅떴다. 나는 중국말은 짧아서 그런걸 난들 무슨 수가 있겠니? 하고 마주 눈알을 부라렸다. 개자식! 의견이 있으면 조장과 말해라. 주제꼴에 누굴 업신 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했다.     중국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한결같이 모른다는 대답뿐이였다. 머리를 내젓고 손사래를 치면서 벙어리 소리를 하였다. 약이 오른 오야마는 늙은이며 녀자며 아이들과 으르딱딱거리며 멱살을 쥐여 흔들기도 하고 귀뺨을 치기도 하다가 한 장년을 끄집어 냈다. 그 장년은 어제오후 팔로같은 사람들이 10여명 저 앞길로 지나가는걸 보았다고 하였다. 어데로 가더냐고 물으니 그건 모르겠다는 것이였다. 오야마는 돌파구를 만났다는듯 집요하게 따지고 물었는데 사내의 대답은 여전히 다른것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이였다. 악이 바짝 오른 오야마는 칼집으로 장년의 머리를 사정없이 갈기였다. 대뜸 피가 물흐르듯 주루룩 흘렀다. 사내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드는데 마을사람들이 붙잡고 말렸다. 오야마가 소리치자 사병 둘이 달려 와서 사내를 틀어 잡았다. 오야마는 사내를 묶어가지고 자동차 있는데로 끌고 갔다. 순간에 벌어진 사태앞에서 중국사람들이 벙벙해 떨고 있는데 이번에는 선무반의 한 녀석이 나섯다. 그는 대체로 중국말을 얼버무릴줄 알았다. 그도 적극성을 보일때라고 생각 했는지  일화친선, 우애, 단결을 떠벌이며 한바탕 씨부렁 거렸다. 한놈은 생사람을 뚜두려 패고 한놈은 우애단결이 어쩌구저쩌구… 세살먹은 애들 작란인가, 나는 그들의 꼬락서니가 너무도 가소롭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윽하여 중대는 또 출발 하였다. 남피는 안전지대여서 한개 소대를 남겨놓고 중대 병력은 송경툰이라는 위험구역에 가서 주둔한다고 하였다. 한 30여리를 남쪽으로 더 내려간다고 했다. 시라이시는 소대와 함께 남피에 있겠다고 하며 나와 오야마는 중대를 따라가라고 하였다. 그 속내는 뻔 하지만 오야마는 명령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중대는 저녘때가 다 되여 송경툰에 도착 했다.     송경툰에는 중국 괴뢰경찰 한개 소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들에게는 류치장도 있었는데 오야마는 끌고 온 사내를 류치장에 가두었다. 헌병조는 류치장과 길을 사이두고 작은 집에 들고 얼마간 떨어진 곁에는 중대부가 있었다. 당지 사람들인 문서 장준리와 화식원 공씨는 우리가 도착하자 블려왔는데 한집에 함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경찰서에 속한 사람들이 였는데 오야마가 문서와 화식원을 요구해서 넘어온 것이다. 장준리는 30푼한 얌전한 사람이고 공씨는40대의 무던해 보이는 사람이였다.     장준리와 공씨는 제집에서 출근하던 사람들인데 오야마가 전시상태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헌병조 사무실에서 자라고 하였다. 집 가운데 칸은 넓직한 봉당이고 량켠은 캉(온돌)이 있는 방이였다. 방 절반은 캉이고 남어지 절반은 봉당이였다. 거기에 사무상을 하나씩 놓았다. 그날밤 나는 오야마와 함께 잤다. 그런데 녀석이 어찌도 지독하게 이발을 갈아부치고 잠꼬대를 하는지 한잠도 잘수 없었다. 짜증이 바짝 난 나는 침구를 몽땅 걷어 가지고 밤중에 장준리네 방으로 건너 갔다. 아침에 깨여난 오야마는 성이 푸르르 나서 왜서 마음대로 위치를 변경했느냐고 하면서 야단이 였다. 한집안에서 위치는 무슨 개뿔같은 위치고 네가 개 뼉다구 널어대듯 까드등 까드등 이발을 갈아 대고 고함까지 지르는데 사람이 어떻게 자느냐…내가 벌컥 밸을 쓰니 그는 한참이나 노려 보다가 제 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나는 이놈애에게 그저 굽실거려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아침후 오야마는 어제 남피에서 잡아온 사내를 데려 오라고 나에게 명령조로 소리 쳤다. 나는 “내가 할일은 통역이지 심부름군은 아니니까 그따위 일은 나와 말 말아.”하고 마주 소리 쳤다. 두번째로 마찰이 생긴 것이다. 오야마는 이발을 앙다물면서도 할말이 없는지 장준리더러 심부름을 하게 했다.     시에미 역증에 개배때기 차듯 그날 중국사내는 오야마에게 지독하게 맞아 댔다. 나와 장준리에게 본때를 보이느라 그러는것 같기도 했다. 심문은 저녘때까지 계속 되였다. 오야마는 말그대로 소나 말을 때리듯 사내를 마구 두드려 패고 사내는 한대중 팔로가 어데로 갔는지 누가 공산당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오야마가 지칠정도 였으니 사내는 어떻게 되였겠는가! 화식원 공씨는 그 사내를 자기가 안다면서 사람이 고지식하고 우직하며 부실하다고 하였다. 순 토배기 농사군인데 팔로며 공산당을 알 사람이 근본 못된다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것 같았다. 나는 오야마에게 공씨의 말을 말해 주면서 저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량민 같다고 하였다. 오야마는 표독스레 나를 노려 보더니 “이놈이 불량민일때는 너도 책임 지겠는가!”하고 걸고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오야마는 심문을 계속 했다. 뜨락에 끌고나가 사다리에 동여맨후 묻고는 두드리고 두드리고는 묻는데 사내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어제처럼 대들지 못했다. 두드려도 크게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오야마는 사다라를 쾅! 차서 넘어 뜨린후 장준리더러 주전자에 물을 길어 오라고 소리쳤다. 내가 통역하자 장준리는 우물에 가서 물을 한주전자 가득 길어 왔다. 커다란 주전자의 물을 오야마는 사내의 입에 마구 들이 부었다. 그리고는 배를 밟아 물이 분수처럼 솟게 하고는 또 반복 했다. 오야마가 고함을 치며 물었지만 사내는 응대도 못하였다. 점심때가 거이 되여 사내는 축 늘어진것이 죽은것 같았다. 오야마는 당황해 하였다. 점령구에서 헌병이 생살권을 쥐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게 되였든 것이다. 오야마는 괴뢰경찰을 불러다 사내를 끌어 가게 하였다.     점심후 경찰이 달려와 사내가 죽었다고 보고 하였다. 오야마는 경찰을 따라 길건너 류치장으로 가드니 얼마후 인차 돌아 왔다. 그는 한참 맴돌며 서성거리드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였다. 두어시간 지나서 오야마는 나와 장준리를 불렀다. 그는 헌병대 공문지에 쓴 보고서를 내여 놓고 나와 장준리에게 지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보고서는 두장이였는데 하단에 그의 이름이 씌여져 있고 그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 통역 류동호 문서 장준리라고 쓴 것이였다. 나는 보고서를 쭉 내리 보았다. “왕귀생은 팔로군의 밀정임은 탄백 했는데 다른 비밀은 말하지 않아서 심문을 하였다. 심문후 류치장에 감금 했다. 놈에게 심장병이 있고 신체는 허약했다. 때문에 체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오전 심문후 류치장에 가뒀는데 머리를 돌벽에 박고 자살 했다. 시체는 집에서 처리하게 했다…” 중점이 요약 이러 했다. 나는 지장 찍기를 완강히 거절 했다. 오야마는 후에 보자면서 “통역 류동호”를 새까맣게 지워버린후 장준리를 다그쳐 지장을 찍게 했다. 장준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지장을 찍었다. 오야마는 창현 헌병대로 간다면서 중대부로 뛰여 가드니 얼마후 자동차로 급급히 떠나갔다. 때는 저녘때가 거진 되였다. 이곳은 위험구로서 밤은 팔로군세상이고 낮은 일본군 세상이였다. 하여 왜놈들은 밤이면 잔뜩 긴장해서 경계를 가강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야마는 왜서인지 사병 두엇을 데리고 부랴부랴 떠나 갔다.     그시간후로 오야마는 다시 중대로 오지 않았다. 이틀후에 중대로 스즈끼라는 헌병이 새로 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오야마는 송경툰과 남피사이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팔로군무공대의 습격을 받아 즉사를 했다는 것이였다. 시라이시는 여전히 조장으로 남피에 있었다. 스즈끼는 하야말쑥한 20대 청년으로서 역시 오장이였는데 중국말도 좀 알았다. 그는 소설책이나 보다가는 마을안을 빈들빈들 돌아 다니기 좋아 했다. 헌병대 일에는 열중하지 않았고 우리와도 사이좋게 지내려 했다. 스즈끼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처럼 되였다. 우리는 소설책보기를 좋아해서 장준리가 소설책을 자주 얻어 왔다. 우리 넷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곧잘 하였다. 스즈끼는 오늘 고운처녀를 보았는데 소개해 달라고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     공씨는 될수록 맛있는걸 하느라 했고 장준리와 나는 괴뢰경찰들과 앞잡이 밀정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정리해서는 스즈끼에게 보고했다. 정보를 장준리가 기록부에 올리고 내가 그것을 번역했다. 내가 보건대 정보라는 것이 말짱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였다. 밀정들은 아침후에 담당마을로 나갔다가 오후면 돌아오는데 소위 정보를 장준리에게 보고했다. 어느마을 누구네 집에서 잔치를 했다거니 누가 남피로 장보려 갔다왔다느니 팔로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느니… 이러루한 것들이 였다. 스즈끼는 보는둥 마는둥 하고는 상우에 던져 버렸다.     중대가 송경툰에 주둔해 있은 한달남짓한 사이에 두번 출동한적이 있었다. 어느 마을에 팔로가 왔었다고 해서 주변을 한바탕 돌고는 돌아 왔다. 그후 이곳은 비교적 온정해 지였다고 인정 되였는지 어느날 흑룡촌이란곳으로 부대가 이동 했다. 그곳은 송경툰에서 서남쪽으로 20여리 내려간 곳이 였는데 마을은 작지만 팔로들의 활동이 빈번하다고 하였다.     중대는 대낮이 되자 행군 하였다. 그런데 수레길은 파도가 친것처럼 기복이 심하고 전호처럼 푹 패인것이 아주 나빴다. 량켠은 강냉이, 수수밭이 아니면 쑥과 잡목이 꽉 들어섯는데 팔로가 그속에 매복하기가 한참 좋은 지형이였다. 길안내로 송경툰에서 늙은이를 데리고 떠났다. 자동차가 앞에 서고 나와 늙은이는 운전사 옆의 발판에 서서 길을 안내하라고 중대장이 명령 했다. 그날 무슨일로 중대의 통역이 없었다. 운전사 곁에는 소대장이 앉고 차에는 10여명 사병들이 탔다. 중대장은 3,40메터 떨어져서 부대를 이끌고 따라 왔다. 수레길이 산기슭을 끊고 나간 좁은길로 자동차는 요동을 치며 겨우 빠지는데 세차게 기우뚱 하는 바람에 나는 길옆의 바위돌에 부딪치며 어망결에 매달렸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전진하면서 옆에달린 갈고리로 나의 왼다리 무릎뒤를 끊어 놓았다. 비명소리와 함께 차는 서고 사병들이 뛰여 내려 나를 차 위로 들어 갔다. 상처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동통은 숨이 막히게 하였다. 위생병은 지혈을 시키느라 붕대로 무릎위를 끊어져라 동여 매고 진통제를 놓았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련속 질렀다. 위생병은 다리가 끊어진것 같다고 하였다.     부대가 흑룡촌에 이르자 거기서 퍼그나 먼곳인 동광이란 곳으로 나를 이송했다. 거기에는 대대부가 주둔해 있었는데 기차역전도 있었다. 대대의사는 다리뼈가 끊어 졌다고 하면서 창현 려단병원으로 후송 했다. 부상된후 반날도 안되여 창현까지 왔다. 려단병원에서는 천진륙군병원으로 또 후송 했다.     너덧달 전에 내가 청소부로 일하든 병원이다. 저들 부상자라고 해서인지 아니면 의덕이 좋아선지 병원에서는 나를 살뜰히 대해 줬다.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고 야단법석을 했는데 다행이 다리뼈는 상하지 않았으나 상처는 심하다고 하였다. 영양식을 갔다주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움직이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일 시간주사를 놓고 약도 여러가지를 주었다. 그런데 며칠후 홍수가 들이 덮친다고 하면서 환자들을 일본으로 옮긴다며 대소동을 하였다. 나는 뜻밖에 일본으로 가게 된것이 무척 기뻤다. 그것참! 화가 복이 됐군. 하지만 나는 크게 실망하며 일본을 증오하게 되였다. 그것은, 조선사람은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북경륙군병원으로 옮긴다는 것이였다. 다른리유는 없고 오직 조선사람이기 때문이였다. 망할새끼들! 조선사람은 사람이 아닌가. 왜놈들의 민족차별시 정책은 이렇게 선명하고 공개적이 였다. 나는 앞으로 꼭 유명한 문학가로 되여 네놈들이 입을 딱! 벌이게 하고야 말리라 맹세 했다.     당시 북경 일본륙군병원은 지금의 청화대학 자리였다. 병원조건은 천진보다 오히려 좋았다. 조선과 일본에서 위문대가 와서 연출을 하기도 했는데 최승희(조선의 유명한 무용가)가 추는 춤을 그때 처음으로 관람했다. 입원기간 나는 많은 소설책을 보았는데 로신의 작품을 그때 제일 많이 보았다. 그리고 습작도(일문) 많이 하였다.     40여일이 지나 나는 출원 하였다. 의사는 두어주일 더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갑갑해서 출원시켜 달라고 사정 했다. 다 나은것 같은데 빈둥빈둥 논다는 것이 량심상 께름해서 견딜수 없었다. 일본사병들은 하루라도 병원에 더 있으려고 별수작을 다 부리였다. 아침검사를 들어오기전에 죽어라고 뜀박질을 해서는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오르게 하기도 하고 아침밥을 위가 어떻다며 먹지 않기도 하고(검사후에 게눈 감추듯 했다.) 머리가 아프다느니 허리가 아프다느니… 하면서 꾀병을 하였다. 나는 그런 비루한 꼬락서니가 더구나 보기 싫어, 그들에게 본때를 보이기도 하느라고 출원을 우기였다. 조선사람은 너들과 같지 않다! 나를 봐라. 이런 오기 였다.    출원후 나는 곧장 창현에 있는 헌병대로 찿아 갔다. 가는길에 천진에서 창순이를 찿아가니 그는 신의주로 돌아 갔다고 했다. 헌병대 대위는 네가 왔는가고 하며 무등 반가워 했다. 우리는 언녕 네가 오지 않을거라고 믿었는데,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였다. 나는 속이 흐믓했다. 중대는 그냥 흑룡촌에 있으니 거기로 가라고 하였다. 흑룡촌에는 스즈끼도 장준리도 공씨도 그대로 있었다. 그간 팔로가 나타났다고 하여 서너번 헛탕을 치며 달아다닌외에는 별일이 없었다고 했다. 서쪽에서 보았다고 하여 서쪽으로 달려가면 또 동쪽에 있다고 하여 그리로 달려 갔는데 꿩구어 먹은 자리였다. 후에는 밀정들의 정보를 신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마구 부정할수도 없어서 부아통이 터지기도 했다는 것이였다. 특별뉴스로는 스즈끼가 어떤 처녀와 련애를 한다는 것이였다. 우리가 하는일은 여전히 그랬다.(4) 
108    일본헌병대 통역(3) 댓글:  조회:1096  추천:0  2017-05-12
                                                  일본헌병대 통역(3)          2.일본헌병대 통역   문학수업       떠날 날이 되였다. 학교때 메던 가방에 입던옷 두어견지와 공책 연필따위를 넣으니 행장은 다 갗춘 셈이다. 커다란 가방은 훌쭉했지만 더 넣을것이 없었다. 나는 유일하게 한장뿐인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을 찿아 공책에 끼워 넣은후(팔로군에게 랍치되다보니 잃어버렸다.) 부모님께 하직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 했다.       연필을 든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조선글을 쓸수 없었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십년을 일본글만 읽고 일본글만 쓴것이 아닌가! 스스로도 억이 막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갔다. 부모님께 할 말은 많고도 많은데… 그렇다고 일본글로는 쓸수 없는거고(일본글 아는 사람이 집에는 없다.) 반나절이나 연필대를 굴리며 겨우 두어자를 썼다.          “자 거시소. 마주로 가니다. 10너후 오니다.”(잘 계시소. 만주로 갑니다. 10년후 옵니다.)     그때일이 지금도 똑똑히 기억 된다. 말은 제대로 할수 있으나 글은 생각나지 않았는데 받침은 도무지 깜깜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섯다. 어머니는 가마목에 꼬부리고 누웠는데 잠이 드신것 같고 새삼스레 자세히 보니 폴삭 늙으셧다. 영애는 빨래를 가고 영호와 정호는 놀러 나가서 집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신방으로 나가면 저녘 늦게야 오셧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온후 어머니를 향하여 경례를 하였다. 눈믈이 왈칵 쏟아졌다.       그날후로 동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도 뵙지 못했다. 부모님들은 광복후에도 생존해 계셧으나 상봉의 기회는 인위적인 장애로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의 평생 유감으로 된 이 곡절의 사연은 뒤에가서 알게 된다.       역전에 도착하니 기호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발차시간은 꽤 남아 있었다. 내가 혹 창순이가 오겠는가 해서 두리번 거리는데 과연 창순이가 달려 왔다. 우리는 문학으로 꼭 성공하자고 약속하면서 비장한 작별을 하였다. 창순이는 호떡 두봉지와 돈 3원을 주면서 객지에서 무사하기를 거듭 당부 하였다. 나는 그의 문학성취를 부탁 하였다.     기차는 구슬픈 기적소리를 길게 내면서 서서히 조선을 떠났다. 얼마후 우드등! 우드등! 하며 신의주철교를 건너 갔다. 넓고 푸른 압록강은 넘실넘실 흘러 가고 갈매기떼들은 가로세로 날았다.     변상적인 일본식민지 만주국은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이국 풍경이였다. 만주국 국경도시 안동(단동)에서 기차는 거이 반시간을 정차 했다. 우리는 홈에 내려 바람을 쏘이였다. 마치도 피난민 같은 남부녀대한 조선사람들, 저들 세상이라고 활기에 넘친 일본사람, 쑤왈쑤왈 떠들어 대는 중국사람, 중국경찰과 일본순사들이 공연히 호각을 까르륵! 까르륵! 불어대며 고함을 지르고 눈알을 부라리였다. 땅도, 지저분한 건물도, 사람도 검은색, 회색이 위주고 하늘까지도 희뿌옇게 흐리터분 하였다… 기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구운통닭과 마화(타래떡)를 사들고 뛰여 왔다.     차칸에서 우리는 심양으로 연출을 가는 “랑랑극단”을 만났다. 나는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 극단을 따라 다닌다면 방랑도 하면서 배울것도 많을것 같았다. 단장이라는 맑스머리 사내한테 극단을 따라 다니게 하여달라고 간절히 청을 하였는데 그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눈이 휘둥그래서 입을 딱! 벌이였다. 나는 시키는 일은 다 할것이며 신봉도 필요없다고 했지만 단장은 아예 거절 하였다. 저녘이 되여 심양에 도착하자 우리는 무턱대고 극단의 꽁무니를 따랐다. 그들은 어떤 극장에 이르더니 그안으로 들어가 버리였다. 우리는 눅거리 강냉떡을 두어개 사 먹은후 다시 극장으로 갔다. 기호는 마음드는 학교를 찿자고 왔지만 나는 방랑이 목적이고 그것은 극단의 꽁무니에 붙어 다니는 것이 제일 좋을것 같은데, 또 떼질을 써 볼 작정이였다.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사정하면 맑스머리가 감동을 해서 들어 줄것만 같았다.     기호와 나는 극장앞에서 작별 하였다. 여기까지 동무해서 함께 오긴 했으나 길이 다르기에 일찌감치 갈라서는 것이 옳았던 것이다. 극장앞은 공연을 보려온 조선사람들로 분비였다. 나는 연극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푼이라도 돈을 아껴야 했다. 내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왈칵 안겨 왔다. 의주에서 온 소학교때 친구들이 였다. 그들셋은 여기서 자동차운전학교에 다닌다고 하였다. 내가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그들이 표를 끊어 와서 함께 공연을 보게 되였다. 공연을 보며 다시 생각해 보니 맑스머리가 받아줄것 같지 않았다. 그럴수 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왜서 공밥을 먹이며 달고 다니겠는가. 나는 친구들이 끄는대로 그들의 하숙방에 가서 끼이게 되였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일자리를 찿아 나섯다. 그때 나의 생각은 이랬다. 중국의 큰 도시들을 돌면서 여러가지 생활을 체험하며 이도시에서 저도시로 갈 경비를 마련하며, 시간을 짜내여 책을 보며 습작을 한다는 것이 였다. 먼저 이 심양에서 일자리를 얻어 천진까지 갈 경비를 마련하는 한편 사회를 관찰 하기로 하였다. 그때 호주머니에는 10여원 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찿는것이 힘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후 거리를 돌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책방으로 들어 갔는데 점원으로 받겠다는 것이였다. 숙식을 주고 한달에 5원을 주겠다고하였다. 나는 거기서 겨우 3일을 일하고 나와 버렸다. 일은 쉽고 마음대로 책을 볼수 있어 좋았으나 주인녀편네 꼬락서니가 역겹기 그지 없었든 것이다. 우선 밥을 따로 먹게 했고(그들 내외와 한상에 앉지 못함) 먹기전에 “이다다끼마스”(고맙게 잘 먹겠습니다)하며 꼬박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주인녀편네가 귀엽다는 뜻인지 불상타는 뜻인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며 어깨며 만지는 것이 징그럽고 불쾌했다. 내가 이집 종인가! 거진가!… 그리고 떳떳한 한개 청년을 아이 취급하는건가? 놀이개로 희롱 하는건가?… 나는 주인녀편네가 변태같아 순간도 싫었다.     그후 려객운수회사에서 한달을 일하였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은 몹시 고되였다. 자존심이 구겨질 일은 없었으나 단일하고 책 볼 시간이 없는것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마침 일자리가 나졌다. 그것은 자동차운전학교 친구의 형이 “인테리가 이런일을 해서야 되느냐”고 하면서 책방일을 소개하였든 것이다. 창씨개명을 한 조선사람 후지이씨가 경영하는 “신풍호서점”이였다. 숙식 외에도 한달에 30원의 월급을 주었다. 중년의 후지이씨는 내가 책을 즐겨 보는것을 기특하게 보면서 이런 이런 책들을 보라면서 추천해 주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진보적 서적들이였다.     이듬해 1월 나의 편지를 받고 창순이가 왔다. 그는 나와 함께 방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천진을 거쳐 창순이 삼촌이 있는 북경에 들렸다가 무한쪽으로 갈 작정이였다. 그곳이 전쟁터라고 하니 실황을 본다는 데서 였다. 우리가 포부와 계획을 말하니 후지이씨는 매우 놀라며 장하다고 거듭 칭찬을 하여 주었다. 그는 우리의 성공을 축원한다면서 떠날때 돈을 20원이나 더 주었다.     1월중순경 우리는 산해관까지 기차로 가고 산해관을 돌아본후 천진까지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산해관은 소위 만주국과 중화민국의 국경도시로 소문난 곳이였지만 너무도 보잘것없는 촌락에 불과했다. 만주국 군대가 국경이랍시고 성문에 보초를 서고 있긴 했으나 아무것도 거들떠 보지 않으며 관계치 않았다. 그때는 관외 관내가 이미 일본 점령구여서 국경이란 사실은 유명무실이였다. 우리는 진황도까지 걸어간후 다시 기차로 천진까지 갔다. 천진에서 며칠 도시구경을 한후 우리는 북경으로 들어갔다. 창순의 삼촌은 천교에서 살고 있었다. 북경에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우리는  거이 20여일 북경구경을 한후 곧추 무한으로 가려고 어느날 역전으로 나갔다. 우리가 차표를 사려고 하는데 창순이 삼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 왔다. 그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였다. 며칠전에 우리의 계획을 말하니 창순의 삼촌은 한심한 소리를 한다며 야단을 했다. 그날 우리는 가만히 빠져 나왔는데 그가 눈치를 챈 것이다. 북경역에서 창순이와 나는 갈라졌다. 창순이는 삼촌에게 잡혀가고 나는 계획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해서 역전에 남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무한으로 간다는건 확실히 모험이였다. 혼자서 전쟁판이라는 그곳까지 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끝에 나는 다시 천진으로 나가기로 작정 했다. 그곳에서 로비를 얼마간 마련하면 청도, 상해,  광주, 홍콩방면으로 방랑할 타산이였다.     때는 2월초 음력세밑인데 날씨가 무척 추웠다. 천진에서 나는 매일 일자리를 찿아 헤매였다. 처음에는 목욕탕에서 자다가 돈이 얼마 남지 않아 역전으로 가서 한둔을 하였다. 밤 12시까지는 2등 대합실에 머물수 있었으나 그후에는 쿠리들이 몰려와 저들의 자리라고 빼앗는 바람에 3등 대합실로 쫓기였다. 3등 대합실은 한지나 다름이 없었다. 음력설 전후에는 일터도 적었거니와 그때는 한족들 습관이 일군을 쓰지 않았다. 그러구려 며칠이 지나자 주머니에는 1전 한푼이 없었다. 나는 일자리를 찿아 헤매다 역전으로 돌아와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은 더운물 한모금도 얻어 먹지 못했다. 지치고 허기진 몸은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와들와들 떨려서 죽을것만 같았다. 어떻게 할것인가? 그때 번쩍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역전앞 길옆에 중국 파출소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찿아가면 무슨수가 있을것만 같았든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파출소로 갔다. 불이 환한 숙직실에는 중국인 경찰이 신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니 경찰은 무슨일이냐며 들어 오라고 하였다. 방안은 후끈후끈 하고 부뚜막에 놓인 시꺼먼 주전자에서는 김이 씩씩 뿜겨 나오며 물이 끓고 있었다. 나는 물 한고뿌를 달라하여 얻어 마신후 사연을 말하였다. 그 중국경찰은 마음이 좋은 사람이였다. 그는 나에게 밤참으로 싸온 강낭떡까지 먹으라고 주면서 내심하게 나의말을 들어 주었다. 이튿날 그가 가르켜 준대로 나는 천진 일본군 륙군병원에 가서 청소부로 춰직을 했다. 병원에서 먹고 자며 월급을 25원 주었다. 그리고 일요일은 륜번으로 휴식할수 있었다. 나는 두번이나 휴식일을 리용하여 그 중국 경찰을 찿아 갔으나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도 미안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륙군병원 청소부로 서너달 지난 어느 휴식일 나는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하게도 신의주상업학교때 선배며 친구인 장을선이를 만났다. 그는 창순이와 친한 사이였다. 이국 타향에서 친구를 만나니 반가움은 더 말할데 없었다. 을선이는 나를 끌고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여러가지 요리를 주문 했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지금형편도 말이 나오게 되였는데 내가 청소부로 일한다고 하니 을선이는 펄쩍 뛰며 래일 당장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였다.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압하양행” 사무실에서 일했는데 군부대에 말안장이며 장화 기타 비품을 납품하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 나는 이튿날로 압하양행으로 갔다. 내가 할 일은 물품출납장을 명세하는 일이였다. 사무실에는 모두 다섯이 있었는데 셋은 일본 사람들이 였다. 그들은 군대 장교들을 끼고 술집을 드나들며 군비를 슬쩍슬쩍 뜯어 먹었다. 나는 그들이 가져다 주는 전표를 장부에 올리고 품목을 기입하면 되였다.     두어달 편안히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일본에서 사장이 검열을 왔다. 그는 사업상황을 이것저것 검사하고는 회의를 소집 했는데 다른 직원들의 불찰을 가지고 전문 나를 딱아세우며 훈계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롱간을 부리고 탐오한것을 나에게 덮씌우며 품행이 나쁜 조선놈이라고 을러메며 호통을치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부아통이 터져 장부며 전표묶음을 그앞에 둘러 메치고 사무상을 뒤엎어 놓은후 문을 박차며 뛰쳐 나왔다. 을선이가 뒤따라 나오며 저건 일본직원들을 훈계하느라고 하는 허장성세이니 참으라고 달래였다. 그러면 죄는 도깨비가 짛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는 것처럼 내가 무슨 리용물이란 말인가! 다시는 거기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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