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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3    현대시의 난해성의 의의와 역할/김신영 댓글:  조회:155  추천:0  2021-01-04
현대시의 난해성의 의의와 역할/김신영 현대시의 난해성은 늘 왈가왈부하는 논의의 대상이다. 시에 대한 논의가 변방으로 밀려나도 난해성에 대해서만큼은 문단을 달구는 요소가 된다. 그만큼 난해성에 더해지는 문화예술의 창조적 역량과 심화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라는 시대가 갖는 특성 중에는난해성으로 표출되는 언어와 또한 표현의 다양성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대는 시대적인 특성으로 인한 독자적인 언어의 다양성으로 산문시나 소설같은 시의 양산을 부추키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각양각색을 가진 다양한 독자성과 자기목적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시는 더욱 난해성을 추구해 갈 것으로 여겨진다. 유럽의 시들은 난해성을 논할 때 주로 상징주의 시인들을 떠올린다. 엘리어트의 대화시나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의 시에서 발견하는 의미는 사물의 외적 요소에 대한 것들이라기보다 내적인 요소에 대한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각계각층에 영향을 미치는 데 특히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재창조되어 그 의미의 심오함을 표출하고 있다. 이에 상징성으로 대표되는 애매성(曖昧性, ambiguity)을 앰프슨은 7가지로 정의하면서 시에서 애매성이 갖는 의미를 역설한 바 있다. 이것은 시의 애매성이 그 미묘한 차이로 인하여 의미의 확장과 풍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복잡성을 제공하여 본래 가진 의미를 확장시켜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애매성이나 상징이 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소이다. 그로 인하여 시는 복잡성을 띠면서 의미를 확장하며 그때 내포된 의미로 인해 난해해진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어떤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난해한 시는 자기목적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난해한 시의 탄생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우연히 난해한 시를 쓴다는 것은 상징이나 모호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쓰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난해한 시는 시인의 뚜렷한 자기목적성을 동반하면서 탄생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시에서 난해성으로 논의되는 시인들은 대략 이상과 김수영, 김춘수, 김구용, 이승훈, 오규원 그리고 최근에 논의가 활발했던 황병승 등이 있다. 이들의 시도 산문성과 문법의 무시 또는 파괴, 그리고 상징적인 언어의 사용으로 그 난해성에 대해 논란을 일으킨 바가 있다. 이 시인들의 시는 우리 문단에 일단락 나름의 공헌을 하였다. 새로운 시를 갈구하는 사회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패턴을 제공한 것이다. 독단적인 언어 독법과 새로운 인식의 틀을 구성하면서 파란을 불러일으킨 시가 이상의 「오감도」가 아닌가? 그것은 의미전달과 더불어 존재에 대한 인식의 차원으로 확대되면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김수영 시인도 자신의 시를 난해시로 규정하면서 그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했다. 김수영의 「꽃잎.1」 이나 황병승의 시 「여장남자 시코구」등은 해석에 있어 여러차례 문단에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특히 이상의 작품은 시의 진위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으며, 김수영은 난해시가 갖는 특성으로 상징성을 들어 논의한 바 있다. 또한 최근 황병승의 작품은 소위 ‘미래파’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평단은 미래파 시에 대한 논의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난해시는 무엇보다도 시의 해석에 대한 난삽함을 드러내면서 더불어 의미의 재생이나 새로운 의미의 탄생이 화두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보니 난해시는 일면 기교중심의 시로 흐른 면도 없지 않아 이 또한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시는 시의 발달사에 비추어볼 때, 이상 시인을 선두로 꾸준히 다시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난해시는 더욱 늘어난 양상을 보인다. 시인들을 위한 말잔치라고 비판하는 독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시인들은 난해시를 즐기며 또한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술계에서 피카소의 그림은 추상화의 의미와 더불어 난해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미술계는 이미 난해한 미술이 오래전부터 나타나 일반독자와 거리두기를 시도한지가 오래 되었으며 미술은 추상미술이나 입체파로 진화일로에 있다. 그러나 문학계는 책읽기의 난독성을 제기하면서 독자층의 중요성이 확대되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시는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독자들은 일반적인 독자가 아닌 시를 이해하는 어느 정도 수준의 이해력을 가진 독자층이다. 그들은 시가 난해해 지는 것을 반긴다. 시가 갖는 신선함과 의외성은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충족시켜주는 까닭이다. 즉, 일반적인 서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세계를 난해시는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난해시가 갖는 문학적 특성이며 의의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앞서도 논의하였듯이 문학예술의 창조적 역량과 심화는 심오한 정신적인 세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현대시에서 서정성으로 나타날 때 단순화될 소지가 있으나 난해시는 이를 더욱 정교하게 복잡미묘한 세계를 표현한다. 정신병리적인 현상이나 신경증적인 강박증들이 시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거울. 무능이라도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들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이상의 시제15호에서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도마뱀은 쓴다/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낯선 문법이 등장하면 사회는 열광한다.   프랑스의 누벨바그(전통적 영화에 대항해 1957년 태동한 영화운동)도 즉흥연출과 장면의 비약적 전개로 장 뤼크 고다르에게 대단한 영예를 안긴 바 있다. (‘네 멋대로 해라’의 감독으로 누벨바그를 등장시키며 뉴웨이브의 기수로 불렸다. ) 개인의 실존문제를 주로 다루는 이 누벨바그처럼 난해시의 등장은 낯선 문법과 새로운 시의 양식으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해 난해시는 낡은 것을 밀치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은 주로 개인의 자아를 탐구하면서 새롭고 낯선 규범들을 창조하였다면, 황병승의 시에 등장하는 소수의 대변자인 캐릭터는사회의 탐구를 추구하는 측면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상의 시에는 자아의 분열적 증상이 나타나지만 황병승의 시에는 사회적인 병리현상과 더불어 신경증적인 반응들이 詩化된다. 어지럽고 복잡한 언어들 속에서 표상화되는 시어들을 살피다 보면 이 넓은 세상에 어지러이 불고 있는 갖가지 바람의 의미를 이해할 듯도 하다. 이것이 난해시의 의미이며 역할이라고 아니겠는가? 이제 난해시에 대한 나름의 논의는 일단락된 것이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을 한다. 난해시도 하나의 조류이며 새로운 현상으로 이미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신영 (시인, 문학평론가), 충북 중원 출생 94년 《동서문학》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시집, 문학과지성사, 1996) 『불혹의 묵시록』(시집, 천년의 시작, 2007) 『현대시, 그 오래된 미래』(평론집, 한국학술정보, 2007) 중앙대 국문과 문학박사, 홍익대 등에서 강의 문학서재 : http://ksypoem.kll.co.kr   아시아문예 2008년 가을호  
1082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 박상천 댓글:  조회:173  추천:0  2020-11-11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를 일컬어 흔히 언어예술이라고 한다. 언어예술이라는 말은 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시의 질료(material)이면서 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건 시 창작의 방법을 공부하건 그 출발은 언어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공부는 시 공부의 출발이자 기초이며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 공부를 언어 공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먼저 언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일이 시 공부의 출발이다.   1. 언어는 사물을 존재하게 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언어란 가장 쉽게 말해 어떤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 ‘하늘’ ‘책상’ ‘물고기’ 등 물질적인 것들을 일컫는 언어만이 아니라 ‘슬픔’ ‘기쁨’ ‘사랑’ 등 추상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들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감정들에 붙여진 이름이다.사물들은 이러한 이름(언어)에 의해 구별되고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언어에 의해 사물들이 구별되고 존재한다’는 말을 더 쉽게 설명해보자. 여기 우리가 ‘볼펜’이라고 부르는 사물과 ‘연필’이라고 부르는 사물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 사물들을 각각 ‘볼펜’ ‘연필’이라고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필기도구’라는 이름만을 붙였다고 한다면 ‘필기도구’는 존재하지만 ‘볼펜’과 ‘연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장롱’ ‘식탁’ ‘의자’라는 각각의 이름이 없이 ‘가구’라는 이름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가구’는 있지만 ‘장롱’ ‘식탁’ ‘의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이름이 붙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므로 ‘필기도구’라는 이름이 ‘필기도구’를 존재하게 하고 ‘볼펜’이라는 이름이 ‘볼펜’을 존재하게 하며 ‘연필’이라는 이름이 연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일컬어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어는 이처럼 사물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일부 어떤 사물이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이 된다.   2.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지만 사회적 약속이다   언어는 가장 쉽게 말해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사물과 사물의 이름인 언어의 결합 관계에는 필연성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는 언어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만약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고 부르는 언어 사이에 꼭 그렇게 결합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다면 세계 각국의 언어가 서로 다를 수가 없고 시대를 따라 언어가 변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을 15세기에는 ‘나모’라고 하였고 영어에서는 ‘tree’라고 부른다. 사물과 언어의 결합이 필연적이라면 동일한 사물을 이렇게 다르게 부를 수는 없고 또 다르게 불러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사물의 결합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명백해진다.그러나 사물과 언어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해서 말하는 사람이 임의로 그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 ‘나무’를 ‘나무’라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늘’이라고 한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사물과 언어 결합의 자의성은 사회적으로 용인을 받아야 하고 용인을 받은 이름으로 사물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3. 시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린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분명 자의적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면 의사 소통이 불가능해지거나 어려워진다. 그런데 시는 이러한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고 그 약속을 깨뜨리려고 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이 시는 우리가 잘 아는 유치환의 「깃발」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도 없이 이 시를 처음 대했다고 했을 때, 이 시가 무엇을 대상으로 쓴 글인지 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사전을 찾아보면 ‘기(旗)’는 “헝겊이나 종이 같은 데에 무슨 글자, 그림, 부호, 빛깔 같은 것을 잘 보이도록 그리거나 써서 막대 같은 것에 달아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쓰는 물건의 총칭”이라고 되어 있고 ‘깃발’은 ‘헝겊이나 종이로 된 기의 근본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들을 보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유치환은 누구에게나 뜻이 통하는 이런 정상적인 언어를 버리고 깃발을 일컬어 ‘소리없는 아우성’이니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니 ‘백로처럼 날개를 편 애수’니 하는 말로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한 마디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는 것이다. 일상 언어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이라 할 수 있는데 의사 소통을 위하여서는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한 일상어의 사용법을 ‘정상적 언어 사용법’이라고 한다면, 시의 언어는 그러한 정상적 언어 사용법을 어기고, 부수고, 비틀어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 용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며 비정상적 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과 둘째, 그러므로 시는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효율적이거나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4. 시의 언어는 왜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는가?   언어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언어와 사물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가 곧 사물은 아니다. 언어는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예를 들어 여기 ‘연필’ 두 자루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자루의 연필은 각각 별개의 사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별개의 사물을 모두 ‘연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러한 언어 사용법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두 자루의 연필 중에 하나를 A라 하고 또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그러면 우리의 언어 사용법으로 볼 때, A〓연필, B〓연필이고 이 명제에 따라 ‘A〓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A와 B는 서로 다른 사물이므로 ‘A〓B’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까닭은 ‘A〓연필’, ‘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사물과 언어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또한 사물 개개의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자의적으로 붙여진 이름(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연필’이라는 언어는 연필 하나하나에 붙여진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필의 공통적 속성(흑연 심을 가느다란 나무때기 속에 넣어 만든 필기도구)에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공통적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언어의 성격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A가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B도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말한 ‘슬픔’은 동일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의 ‘슬픔’이 동일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슬픔’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이 가진 그 다양한 ‘슬픔’의 공통적 속성(뜻밖의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뽑아내어 ‘슬픔’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슬프다’ 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슬픔’의 진실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시는 일상의 언어가 지닌 이러한 추상성과 불완전성을, 언어를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슬픔.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슬픔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한 노력이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시는 비유, 묘사, 상징, 이미지 등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동원하여 사물의 공통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 개별적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에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법이 아닌 언어의 비정상적 사용법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셈이다. 5. 시의 언어는 의사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적 약속을 지켜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언어의 정상적 사용법을 무시하고 깨뜨리고 왜곡한다. 따라서 시는 언어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그다지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다시 말해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정상적 용법으로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의사 소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다.그렇다면 시는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시도 언어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의사 소통의 목적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의사 소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시는 일상의 언어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생각해보자. 의사 소통이란 발신자(말하는 이)가 어떤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말 듣는 이)에게 ‘내용’을 보내고 수신자는 매체를 통해 받은 ‘내용’을 해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과정이 제대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발신자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내야 하고 수신자는 발신자가 매체를 통해 보낸 내용을 발신자가 의도한 내용대로 해독하여야만 한다. 만약에 발신자가 보낸 내용이 수신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거나 또는 발신자가 보낸 내용을 수신자가 임의로 해석하게 되면 의사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인은 발신자, 시의 언어는 매체, 독자는 수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에 따라 시인은 독자가 해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어떤 세계를 창조하였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를 해독할 뿐이다. 즉,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를 알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6. 시의 언어는 체험하게 하는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시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그대로 시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능 면에서 두 언어는 차이를 보여준다.언어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정보 전달의 기능이고 둘째는 행위 요구의 기능이며 셋째는 체험의 기능이다.첫째 정보 전달의 기능은 일상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정보 전달을 위하여서는 언어는 가장 간명해져야 하며 사전적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효과적인 정보 전달의 방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한다고 하자. 사전에는 ‘사랑’을 ‘①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또는 그러한 일 ②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이렇게 사전적인 정의를 통해 그 개념을 전달하면 읽는 이나 듣는 이에게 가장 간명하면서도 분명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 전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설명의 방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설명의 한계로 먼저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설명하는 데에는 따르는 어려움을 들 수 있다.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언어는 개개의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되는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이란 ‘낱낱의 구체적인 사물에서 공통되는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관념적으로 뽑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개인의 감정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해 보여주지 못한다.예를 들어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보도록 하자. ‘나는 요즈음 A를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라고 설명을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모두 전달할 수는 없다.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명의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 명이 지닌 각각의 사랑을 ‘구체적, 개체적’이라고 한다면 그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사랑’이 지닌 공통의 속성 즉,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이라는 관념을 뽑아낸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추상적 언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언어는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있는 대로 모두 다 표현해 낼 수는 없다.둘째는 말하는 이가 말 듣는 이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유도’하기 위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를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의지’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하여, 설득하여 행동하게 하기 위하여 씌어지는 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을 읽은 이들이 그 글에 설득당하거나 감동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간혹 그 글에 감동하여 그 글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언어 행위는 읽는 이의 ‘의지’라는 장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사랑하자.”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것인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 모두는 개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 요구나 유도 지향의 언어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시의 언어는 정보 전달이나 행위 유도를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의 언어는 어떤 기능을 하는 언어인가?먼저 다음에 있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당신 곁에 머물면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동상(凍傷)에 걸린다. 아나벨리 내 사랑. 아아, 불 ―이세룡의 「아나벨리」 이 시는 ‘사랑’을 ‘불’의 속성에 비유하여 시화하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凍傷에 걸린다.’는 사실(정보)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사람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으니까 가지 말라거나 또는 사랑은 이렇게 좋은 것이니까 사랑을 하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이 시인이 ‘사랑’의 속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또는 ‘사랑’을 요구하기 위해서 시를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는 산문의 언어,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의 아이러니를 단 6행으로 표현해내고, 세계 어느 나라 사전에도 없는 ‘사랑’의 속성을 새롭게 말하고 있다.이처럼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기존의 ‘사랑’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내는 ‘발견자’이며 그러한 발견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사물을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 ‘명명자’이기도 하다.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또는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정보 전달의 언어가 지닌 관념성이나 추상성을 극복하려는 시의 언어는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일정한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가 지닌 추상의 세계를 극복하고 구체화한다. 이해의 대상은 될지언정 체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추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체험의 세계로 만들어 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이해하고 있었던) ‘사랑’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을 만족시켜주는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상을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보듯 한 시인에 의해 ‘사랑’은 새롭게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는 시인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그렇다면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과 만나게 되고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데 이를 ‘지각’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각을 통해 대상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대상을 지각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어떤 느낌(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이성적 사유를 하기도 한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체험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체험들이 반복되면서 체험의 대상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상 만나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습관적이고 무감각해진 삶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자동화된 삶’이라고 말한다. 자동화된 삶 속에는 감동이 있을 수 없다. 어떠한 느낌도 주지 못하는 체험, 그 체험은 이미 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이렇듯 일상의 반복되는 체험은 우리의 삶을 무감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대상과 삶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새로운 체험이야말로 시를 시답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사랑’이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여름에는 나무가 푸르고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내가 실연을 해서 슬프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시는 무디어져버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고 느낌이 사라져버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그리고 세계의 사물을 새롭게 지각하고 체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시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를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시의 언어가 새롭게 존재하게 해준 세계를 만남으로써 현실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시는 기존의 삶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출처 : 나는..영혼을 적시며 서있다  |  글쓴이 : 푸른하늘저편 원글보기 [출처]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작성자 최진연    
1081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 -유승우 댓글:  조회:169  추천:0  2020-11-11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                             유 승 우   1.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시에 대한 정의의 문제이며,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그런데 시의 개념과 시에 대한 정의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시, 곧 문학의 관점과 정의는, 시는 세계를 모방한 것이라는 관점(모방설-아리스토 텔레스),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초점으로 하는 관점(실용설-호라시우스), 작품을 예술가인 시인 자신의 표현으로 보는 관점(표현설-워즈 워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작품 그 자체에 초점을 두는 관점(객관설-신 비평) 등에서1) 보는 바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없는 시에 대한 개념이나 정의가 있다. 시라는 말의 어원에 의한 개념이나 정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원에 의한 시의 정의를 고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내용적 정의와 형식적 정의를 시도함으로써 시 창작의 이론과 실제의 문제를 밝혀보고자 한다. 시의 내용적 정의는 ‘시는 무엇을 쓰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시의 형식적 정의는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제까지는 시의 정의와 같은 것은 이론의 측면이고, 시 창작 곧 시를 쓰는 것은 기능의 문제라고 하여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에 대한 이론은 시 창작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시의 이론은 오히려 시 창작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의 이론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것이고,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이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가 아니며, 또한 시를 떠난 이론의 연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의 이론이 시인의 생리가 되고,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삶 자체가 될 때, 시가 사람의 삶 속에서 생기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 곧 존재 자체가 바로 시이며,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살아가는 것이 될 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의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2. 시는 언어(言語) 예술이다     시는 언어(言語) 예술이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藝術)의 ‘藝’자를 자전에서 ‘種也’라 풀이하고, ‘種’의 뜻은 ‘씨앗’과 ‘심다’라고 했다.2) ‘씨앗’ 곧 종자란 무엇인가. 생명의 씨눈이 잠들어 있는 집이다. 이 씨앗을 심어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생명의 잠을 깨우고 자라게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기술이 곧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에는 반드시 그 열매인 ‘작품’이 있어야 한다. 이 열매인 시작품에서, 언어는 시적 생명의 씨눈이 잠들어 있는 종자이다. 그러면 언어(言語)에서 씨눈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말씀(言)이다.   이 말씀(言)은 마음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며, 글(文)은 마음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말씀(言)이 글(文)보다 먼저이다. 이 말씀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말(語)이 되기도 하고, 시(詩)가 되기도 한다. 말씀(言)이 관청(寺)에3) 바쳐지면 시(詩=言+寺=poetry)가 되고, 나(吾)를 위해 쓰여지면 말(語=言+吾=language)이 된다. 관청에서 가장 높은 곳엔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 있다. 그러므로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관청에 바쳐진다는 것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言)과 시(詩)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언어(言語)처럼 언시(言詩)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말씀은 곧 신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말씀(言)이 곧 신이며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함께 있는 ‘言=神’의 모습 그대로였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이 곧 신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신(神)의 자리에 내(吾)가 끼어 들면서, 말씀은 그 본래의 생기인 신성(神性)을 잃고,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도구인 말(語)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상어이며, 본래의 생기가 죽은 말인 것이다. 생기가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기운이 잠들었다는 것이지, 생명이 끊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어(言語)가 된 것이다. 언어는 말씀(言)과 말(語)이 함께 사는 존재의 집이다. 그래서 언어는 시의 종자이다. 이를테면 번데기나 식물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이 번데기나 씨앗과 같은 언어에다 따뜻함 곧 사랑을 불어넣고, 다시 말해 신(神)을 불어넣으면 시가 태어난다. 예술이란 원래 생기와 신을 불어넣어 생명의 잠을 깨우는 기술이다.   시의 종자인 말(言語)에서 생명의 씨눈은 말씀(言)이다. 이 씨눈을 싹틔우려면 이 씨눈을 잠들게 한 나(吾)를 죽여야 한다. 언어라는 집에서 나(吾)를 내쫓고 그 자리에 신의 아들(天子)을 들이면 시(詩)가 된다는 것이다. 관청은 곧 신의 아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관청은 곧 신전인 것이다. 로마에서도 주(主)라는 영어단어를 소문자로 ‘lord’라고 쓰면 노예가 자기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대문자로 쓰면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말씀을 신에게 바치면 시가 되고, 나를 위해 쓰면 말(言語)이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대화는 시가 되며, 사람과의 대화는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곧 신이며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교감하면 시가 되고,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언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에서도 시는 신탁(神託)이라고 해서,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으며,5)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해서 그냥 뜻을 받아 진술할 뿐 자기가 짓지 않는다고 했고,6) 구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뿐 자신의 생각을 보탤 수 없었다. 그래서 서정시를 ‘신과의 대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천자를 섬기면 시인(詩人)이 되지만, 몸으로 천자를 섬기면 또 다른 시인(侍人)이 된다. 몸으로 천자를 섬기려면 궁중 안에 있어야 함으로 내시(內侍)가 된다. 천자도 남자이고 내시도 남자이지만, 내시는 자신의 남성을 거세해야 한다. 이것은 주(主)를 모시기 위해서는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시가 천자를 속이고 권세를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하늘 자리에 앉으면 우상이 되고, 이 우상이 바로 용(龍)이다. 용은 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늘에 올라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은 귀머거리다. 용(龍)의 귀(耳)는 귀머거리(聾)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신의 음성, 곧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신은 무엇인가.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어떤 무엇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 신의 소리다. 여기서 참고로 관청 시(寺) 자가 어떻게 절 사 자가 되었는지를 알아보면, 후한(後漢)의 명제가 백마에 불경을 싣고 인도에서 돌아온 마등과 축법란 두 스님을 귀빈 접대 관청인 홍려시에 머물게 했다가 낙양성 교외에 그들을 위한 거처를 짓고 백마시라고 했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가 되었다고 한다.7)              사람에게 처음 주어진 것은 마음(心)이며, 이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 말씀(言)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시(詩)가 되든지 아니면 언어(言語)가 되든지 하는 것은 순전히 그 마음에 달렸다. 그래서 휠더린은 “그러므로 모든 재보(財寶)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하기 위해---”8)라고 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주어졌고, 그 마음의 씀인(用) 언어가 주어졌다. 이 언어가 나를 위해 봉사하면 죽음을 지향하게 되고, 신에게 바쳐지면 시가 된다고 하겠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재보인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證示)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없음(無)’이며, ‘0’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없음’이 되고, ‘0’가 된 것이다.   싸르트르는 자의식 곧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물체와 생물)를 ‘즉자(卽自․en-soi)’라 하고,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부른다. 사람은 의식 곧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없음(無․neant)’이라고 한다는 것이다.9) 이 ‘없음’에서는 ‘있음’이 되고자 하는 지향성이 있기 마련이며, 이 지향성이 곧 욕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게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 주어졌다. 물론 사람에게도 본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 사람에겐 마음이 더 주어졌기 때문에 본능의 욕구 위에 마음의 욕구가 더 있게 된 것이다. 이 마음의 욕구를 우리말로 옮기면 ‘그리다’가 될 것이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은 이 욕구를 소유(to have)에의 욕구와 존재(to be)에의 욕구로 나누고 있다.10) 소유에의 욕구는 ‘욕심(慾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에의 욕구는 ‘꿈’이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밥이나 옷을 주지 않는 즉 소유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꿈과 사랑, 즉 존재에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존재 일반의 단순한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존재 일반도 사람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존재의 목자’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런데 그 목자도 말이 없이는 그가 할 일을 다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말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의식되어 졌다’고 할 수 없으며, 의식되어지지 않은 것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캄캄한 어둠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존을 비롯하여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캄캄한 무지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의식 곧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물체나 생물처럼 어둠 속에 버려진 채로 묻혀 있을 수는 없다. 빛을 캐내어 나의 실존도 비추어 밝혀야 하고, 모든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그 모습을 밝혀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의무를 진 사람을 가리켜 ‘존재의 목자’라고 하며, 이러한 사람에게만 ‘위험한 재보(財寶)인 말’이 주어졌던 것이다.11)   사람은 말(言語)로써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증시(證示)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소유의 욕구’로 쓸 때엔 오히려 더욱 더 어둠 속에 묻히게 된다. 그래서 말을 위험한 재보라고 하는 것이다.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쓰는 수단이나 기호가 아니라 어둠에서 빛을 피워 내는 존재 그 자체가 될 때 재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본질적 언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언어는 ‘비본질적 언어’이며, 시는 ‘본질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비본질적 언어’인 ‘외연적 의미(denotative meaning)’의 말이 시인의 가슴속에서 그 일상성이 죽고, ‘본질적 언어’인 ‘내포적 의미(connotative meaning)’의 말로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어에서 내(吾)가 죽어야 시로 환생하는 것이다. 언어에서 말씀(言)은 곧 언어 속에 잠들어 있는 씨눈이다. 이 씨눈이 시인의 가슴에서 싹이 터서 시의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가슴은 정서(emotion)의 도가니이기 때문에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 때문이며, ‘존재에의 향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이며, 이 욕구가 동사로 표현될 때 ‘그리다’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리다’라는 말은 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은 언제나 ‘없음(無)’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0’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이 ‘없음’이기 때문에 ‘그리다’가 아니면 ‘0’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그리다’라는 말의 한자어는 상상(想像)이다. 상상의 뜻은 어떤 모습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아가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다’이고, 애인이 없는 사람이 애인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다’이다. 그러니까 ‘그리다’라는 동사는 ‘없음’의 상태를 느꼈을 때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은 원래 ‘없음’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그리다’이다. 이 마음의 움직임이 손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습을 만들었을 때 ‘그림’이 되고,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金春洙 〈능금Ⅲ〉 전문     이 작품은 시로 된 시론이면서 또한 존재의 원리를 시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 김춘수는 ‘그리움’을 제시한다. 모든 시작품은 이 ‘그리움’의 성육(成肉 : incarn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그리움을 가지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상상력(imagination)이란 에너지가 정서의 도가니에 열을 가해 꿈과 사랑을 끓일 때 반짝이는 빛이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움’은 존재를 지키는 등대이며, 시인은 그 등대지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일상의 언어, 즉 때묻은 말은 허물을 벗게 되는 것이다. 허물을 벗으면서 존재는 개명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인의 가슴속에서 ‘그리움’은 존재의 목소리인 ‘빛깔과 향기’를 가진 새로운 말의 수육(受肉 : incarnate)되어 시로 탄생하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리움의 성육인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金春洙 〈꽃〉 전문     꽃은 시인이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다. 시인의 그리움에 성육된 말을 통하여 살아 있는 눈짓이 되는 것이다. ‘나’도 어는 누구의 그리움에 성육이 되기 전까지는 보통명사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린다. 그리하여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마음으로 해서 그리움이라는 의식의 병을 앓고 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생각 있음의 존재이며 그리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가슴속에서 꿈과 사랑이 뜨겁게 끓고 있는 정서의 도가니가 있기 때문에 시에서 떠날 수도 없고 시를 버릴 수도 없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기보다 ‘정서의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은 ‘정서의 동물’이기 때문에 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를 떠난다는 것은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서의 동물’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의 나라의 백성일 수밖에 없다. 정(情)이란 무엇인가. 정(情)은 마음(忄)이 푸르게(靑) 살아 있는 것이다. 육체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동물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살아야 사람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영혼의 다른 표현이며, 영혼은 사람 속에 자리한 신(神)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살면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영혼이 신과 교감하는 것을 영감(靈感)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영혼과 육체를 갈라서 말하는 이원론은 아니다. 육체나 영혼이나 살아 있는 것은 느낌(感)이 있어야 한다. 육체의 느낌은 육감(肉感)이며, 영혼의 느낌은 영감(靈感)이다. 마음이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 정감(情感)이지만, 영혼이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 영감이다. 그러니까 정감이나 영감은 ‘그리다’라는 동사가 활동하는 단서가 된다. ‘그리다’가 활동을 시작하면 나(吾)는 죽게 되고, 내가 있던 자리에 신(神)이 자리해서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부터 시의 나라가 건설된다. 육체가 죽는 것은 죽을 사(死) 자로 표현하고, 영혼이 죽는 것은 망할 망(亡) 자로 표현한다. 육체가 사는 것은 살 생(生) 자로 표현하지만 영혼이 사는 것은 흥할 흥(興) 자로 표현한다. 그런데 영혼이 살 수 있는 길은 시의 나라에만 있다.12) 시의 나라는 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곳에서만은 신과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신과의 교감이 시(詩)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에서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영혼의 감각이 살게 되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시는 곧 신과 만나는 길이며, 신과 통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관청에는 신이 없다. 인간만이 살아서 서로 다투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관청은 그 사회의 중심이다. 이 관청을 중심으로 사회는 활성화된다. 여기서 활성화의 활(活)은 육체의 삶인 생(生)과 영혼의 삶인 흥(興)이 합작해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그러니까 활(活)은 곧 ‘몸’의 삶이다. 인간의 사회에는 특히 관청에는 영혼의 삶인 시와 나의 삶인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는 없고 언어만 있다는 말이다. 육체는 죽으면 썩는다. 영혼도 죽으면 썩는다. 그것을 부패라고 한다. 오늘의 관청이나 사회가 부패한 것은 시가 없고 언어만 있기 때문이다. 시가 살아야 관청이 살고 사회가 산다는 말이다.      3. 시는 신화이다     ‘시는 神話이다’라는 말은 시의 내용적 정의이다. 시의 내용, 즉 시는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러니까 시의 내용은 ‘神話’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神話의 의미를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면 신화는 무엇인가. 신화는 글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 혹은 ‘신과의 대화’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들의 황혼’도 훨씬 지난 신들의 밤의 시대, 신들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세기(世紀).”13)라는 인간들의 세기에 신들의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 인간들의 세기에 대해 토마스 만은, “합리주의란 현대인이 행하는 자기 억제의 속물적 표현이다.”라고 했다.14) 그리고 이어서 토마스 만은, 자신의 신화에 쏠리는 관심을 ‘흔들리는 배의 균형 잡기’에다 비유했다. 신화적 세계가 대표하는 초 합리와 과학이 대표하는 합리 사이에 형평을 유지하려는 것을 인간들이 지닌 충동 내지 본능이 빚은 결과로 보는 것이 토마스 만의 ‘균형의 이론’이라는 것이다.15) 그렇다. 현대는 아무리 봐도 신(神)들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시대다. 균형이 맞지 않는 시대다. 땅의 시대이며, 육체의 시대이며, 물질의 시대이다. 육체는 죽었다가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고 잠든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깨울 수 있다. 현대는 신이 죽은 시대가 아니라 잠든 시대다. 신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 언어 속에 말씀(言)으로 잠들어 있다. 이 말씀을, 이 시의 씨앗을 싹틔우면 신이 깨어나 신화의 세계가 열린다. 그러면 신화(神話)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화 연구가들에 의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풀이된다.     ① 신들의 이야기  ② 신과의 대화  ③ 신의 말씀     위의 세 가지 신화의 의미 중에서 시의 내용이 되는 것은 ②번의 ‘신과의 대화’이다. 오늘날에는 시라고 하면 서정시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므로 ‘신과의 대화’는 곧 서정시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①번의 ‘신들의 이야기’는 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펼치는 이야기로서 그리스․로마 신화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도 시의 내용이긴 하지만 서사시와 극시의 내용인 것이다. 오늘날의 소설과 희곡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들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의 마음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③번의 ‘신의 말씀’은 종교적 차원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시는 다시 말해서 서정시는 ‘신과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신과의 대화’가 시의 내용이라면, 시인은 신을 만나서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시인과 종교인은 같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인은 신의 말씀을 듣고, 신의 뜻에 순종하고, 신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시인(詩人)이 아니라 시인(侍人)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시인(詩人)은 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표현은 신에게 보내는 회답이다. 그래서 시를 ‘신과의 대화’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신과의 대화’를 가리켜 시적 영감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를 신탁(神託)이라고도 했다. 신이 사람을 매개로 해서 그의 뜻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신과 대화하는 사람인 것이다.     詩神의 詩觀은 詩를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詩로써 神(Muses)과 인간은 通話를 한다고 보았다. 그 通話의 通路가 바로 靈感(inspiration)이었다. 詩神에게 靈感은 시인을 부르는 것이었고 詩人에게 靈感은 부름에 응함이었다. 詩神의 부름과 詩人의 응함을 가능하게 했던 靈感은 神의 목소리를 듣는 귀였고 읊는 입이었던 셈이다.16)      이것은 그리스 시대의 ‘詩神의 詩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 오늘날 예술(Art)로 번역되는 그리스의 용어인 Techne를 ‘황홀함의 양식(a mode of ecstasis)’ 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는 양태(a pattern of looking beyond whatever is already given at any time)’로 보기도 한다.17) 이것은 신화의 신비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적인 견해이다. 신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영혼이 되고, 이 영혼의 작용이 마음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언어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言語)에서 내(吾)가 죽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죽어야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다시 말해서 신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입신의 경지를 의미한다. 입신의 경지가 바로 황홀함이며, 한자로는 흥(興)이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신의 소리를 듣는 데까지는 시인이나 종교인이나 같다. 그런데 종교인은 신의 말씀에 대한 회답을 몸으로 하고, 시인은 언어로 한다. 신의 말씀에 대한 회답으로서의 언어, 이것이 곧 언어 예술이다. 신의 말씀은 지식이 아니다. 느낌으로 전해 오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에 대한 회답도 살아 있는 언어라야 한다.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이 곧 언어 예술이다. 예술이란 생명(藝)을 살리는 기술(術)이란 뜻이라고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시인이란 뜻의 영어인 ‘poet’은 만드는 사람(maker)이란 뜻이다.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드는 사람 곧 창조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시를 우리말로는 노래라고 하는데, 노래는 ‘놀+애’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놀이도 원래 ‘놀+이’의 구조라고 한다. 그런데 ‘놀’이라는 말이 ‘神’의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노래는 ‘神樂’의 의미이며, 놀이는 ‘神遊’의 의미라고 한다.18) 서정시는 원래 시가(詩歌)이다. 그러니까 시와 노래는 사람의 영혼이나 마음, 곧 사람 속에 있는 신(神)이 살아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워즈워드는 강한 느낌(powerful feeling)의 자발적 유로(spontaneous overflow)라고 했으며, 한자로는 흥(興)이라고 하고, 그리스의 ‘techne’에서 말하는 ‘황홀함’이라 하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나타남이며, 영혼은 곧 사람 속에 있는 신이다. 이 마음이 신과 만나서 교감(交感)할 때 이를 영감이라 하며, 영감에 의해 시가 탄생하고, 거기서 마음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상태를 ‘神난다’라고 한다.   사는 것의 반대는 죽는 것이다. 땅에서 온 물질인 육체가 물질의 모체인 자연과의 교통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듯이, 영인 마음도 영의 모체인 神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과의 교감, 마음과 마음과의 교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떤 사람이 시를 낳게 되며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흔히 시를 가리켜 체험이라고 한다. 그런데, 체험을 정의해서, ‘남은 못 보는 것을 나만이 보고, 남은 못 듣는 것을 나만이 듣는 것’이라 하고, 또는 ‘경험+사랑=체험’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체험을 하려면 누구보다도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 뜨거운 사랑이 없이는 경험에 그치고 말며, 체험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이 많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은 ‘그리움’이며, ‘사랑’인 것이다. 문학적 용어로는 ‘상상(想像)’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상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어떤 모습(像)을 생각한다(想)’이다. 그러니까 상상을 우리말로는 ‘그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다’의 작용은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 작동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성을 하늘로부터 명부 받았다고 한다.19) 그런데 남성은 남성만을, 여성은 여성만을 하늘로부터 명부 받았기 때문에 남성에겐 여성이 없고, 여성에겐 남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다’의 원리이며, 시 창작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상상력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다시 말해서 가슴이 뜨거울 때, 사람은 신을 만나서 교감하게 되고, 남은 못 보는 것을 보게 되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신과의 대화’라고 하는 것이다. 신의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며,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시인은 뜨거운 가슴으로 모든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 음성을 듣는 시적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체험만으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이 체험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어서 회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