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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50) 댓글:  조회:181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50)           다섯번째 노래(끝)       (7) "밤마다, 잠이 가장 높은 강도에 도달하는 시간에, 대형종 늙은 거미 한 마리가, 방의 세 귀퉁이가 만나는 한 교차점에 흙바닥에 파인 구덩이에서 천천히 머리를 내밀지요. 그 간나는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공기 속에서 주둥이를 놀리지나 않는지 알려고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곤충의 형태를 둘러쓰고 있는 걸 볼 때, 만일 그 간나가 여러 차례의 빛나는 의인화로 문학의 보고를 넓혀주고 있다고 우기면, 그런 간나라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주둥이를 붙여주는 일 정도야 할 수 있지요. 간나는 정적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자기 소굴에서, 심사숙고의 도움도 없이, 제 신체의 여러 부분을 차례차례 끄집어내어, 신중한 발걸음으로 나의 침대를 향해 전진합니다. 놀랄 일이지요! 잠과 악몽을 물리치는 나는 그게 내 비단 침대의 흑단 다리를 따라 기어올을 때. 내 몸 전체가 마비되는 느낌이지요. 그게 여러 개의 다리로 내 목을 끌어안고 그 배로 내 피를 빤다고요. 아주 단순해요! 그 간나가 가장 훌륭한 원인이라는 말에 걸맞는 끈질김으로 똑같은 일을 수행한 이후로, 여러분들이 이름도 모르는 주홍빛 액체를 몇 리터나 마시지 않았던가! 내가 그 간나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것이 내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부주의하여 그 간나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렸나? 그 새끼들을 빼앗았던가? 이 두 가정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어서 진지한 검토을 감당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라도 조롱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깨를 으쓱하고 입술에 미소를 떠올릴 가치조차 없습니다. 조심해라. 타란토의 검은 독거미야, 너희 행태가 반박할 수 없는 삼단노법을 핑계로 삼지 못하면, 어느 날 밤 나는 빈사의 의지로 안간힘을 다하여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 내 사지를 부동의 속박 속에 묶어놓은 네 마력을 깨뜨리고, 너를 내 손가락뼈 사이에 집어넣어 한 덩어리 물렁한 물건처럼 짓이겨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네 발이 꽃피는 내 가슴 위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내 얼굴을 덮고 있는 피부까지 기어오르도록 내게 허락해주었고, 그래서 결국 너를 구속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없다는 생각이 막연히 떠오른다. 오! 누가 내 헝클어진 기억을 풀어줄 것인가! 나는 내 남은 피를 그에게 주어 보상하겠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포함해서 계산하면, 광란의 잔치에서 적어도 술잔 하나의 절반을 채울 만큼은 있다." 그는 말하며, 내리 옷을 벗는다. 그는 한 다리를 매트리스에 걸치고 다른 다리로는 사파이어 마루를 누르며 일어서려 하면서도, 수평자세로 길게 늘어져 있다. 그는 자기 적을 당당하게 맞이하기 위해 눈을 감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매순긴 그는 똑같은 결심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 결심은 줄곧 제 숙명적인 약속의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에 의해 무산되지 않을 것인가? 그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통스럽게 체념한다. 그에게 맹세는 신성한 것이 아닌가. 그는 비단의 주름 속에 장엄하게 감싸여, 자기 방 커튼의 금색 매듭장식을 얽어 묶는 일조차 없이, 제 긴 흑발의 물결치는 컬을 비로드 방석의 술장식에 올려놓고, 독거미가 제 두번째 보금자리 삼아 깃드는 게 습관이 된, 목의 널따란 상처를 손으로 더듬는데, 얼굴에는 만족한 빛이 여실하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그와 함께 기대하시라!) 이날 밤 저 무한한 흡혈의 마지막 상연을 보리라는 것이나. 그의 유일한 소원은 형리가 그의 존재를 결단내주는 것, 곧 죽음이기 때문이며, 그는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 대형종 늙은 거미를 보시라. 그 간나는 방의 세 귀퉁이가 만나는 한 교차점의 흙바닥에 파인 구덩이에서 천천히 머리를 내민다. 우리는 이제 이야기 속에 있지 않다. 그 간나는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공기 속에서 주둥이를 놀리지 않는지 알려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 아아! 타란토의 독거미를 바라보는 자에 관해 말한다면, 우리는 이제 현실에 도달했으며, 문장마다 그 끝에느낌표를 찍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현실이 면제되는 것은 필경 아니다! 간나는 정적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바야흐로 자기 소굴에서, 심사숙고의 도움도 없이, 제 신체의 여러 부분을 차례차례 끄집어내어, 신중한 발걸음으로 고독한 인간의 침대를 향해 전진한다. 잠시 간나가 멈춰 선다. 그러나 이 망설임의 순간은 짧다. 거미는 아직 고문을 멈출 시간이 아니며, 먼저 죄인에게 형벌이 종신형으로 결정된 그럴 듯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고 혼자 생각한다. 간나는 잠든 자의 귓등으로 기어올랐다. 만일 거미가 하게 될 말을 단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저마다 정신의 주랑을 막고 있는 무관계한 잡일들을 치워버리고, 최소한 내가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는 관심을 감사하게 여기고, 여러분들의 진정한 주목을 자극하기게 손색이 없다고 생각되는 극적인 장면에 온몸으로 임석하시라. 내가 이야기하려는 사건들을 나 혼자만을 위해 간직하겠다고 고집하면 누가 막겠는가? "다시 일어나라, 지나간 날들의 사랑스러운 불꽃이여, 육탈한 해골이여, 정의의 손을 멈출 시간이 왔다. 우리는 너에게 네가 희망하는 설명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우리의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사지를 움직이진 말아라, 너는 오늘도 우리의 동물자기최면술 아래 놓여 있고, 뇌의 무기력상태는 계속된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엘스뇌르1)의 얼굴이 네 상상력에 어떤 인상을 심었는가? 너는 그를 잊었구나! 그리고 저 레지날은 그 열띤 거동으로 네 충실한 뇌에 어떤 흔적을 새겼는가? 커튼의 주름 속에 감춰진 그를 보라. 그의 입은 네 이마을 향해 기울었으나, 감히 너에게 말하지 못하는데, 그가 나보다 더 겁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네 젊은 날의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하여, 너를 기억의 길로 다시 데려가려 한다---" 오래전에 거미가 배를 여니, 거기서 두 소년이 푸른 옷을 입고, 저마다 손에 불타는 칼을 쥐고 튀어나와, 그때부터 잠의 성소를 지키려는 듯 침대 양쪽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기에게 명령이라도 떨어진 듯이 깨어 일어나, 두 천사의 자태가 팔을 얽고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다시 잠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잠자리 밖으로 팔다리를 천천히 차례차례 끌어낸다. 얼어붙은 피부를 덥히려고 고딕 벽난로에서 다시 타오로는 잔불로 간다. 속옷 한 장이 그의 몸을 가리고 있다. 그는 마른 입천장을 축이려고 눈으로 크리스털 물병을 찾는다. 차의 덧문을 연다. 창틀에 몸을 기댄다. 그는 황홀한 원추형 빛다발을 제 가슴에 퍼붓는 달을 오래 바라본다. 그 빛다발에서는 어떤 지울 수 없는 고통의 은빛 원자들이 자벌레나방들처럼 파닥거린다. 그는 아침의 여명이 찾아와, 무대배경을 바꿈으로써, 뒤집힌 제 가슴에 하잘것없는 위로라도 안겨주기를 기다린다.       1) '엘스뇌르'는 비극 의 무대인 엘시노어 성을, 뒤에 나오는 '레지날'은 햄릿의 어머니인 왕비 거트루드를 연상하게 한다.   다섯번째 노래 끝  
100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9) 댓글:  조회:189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9)           다섯번째 노래(6)       (6) 조용히 그대 엎으로 장례 행렬이 지나간다. 그대의 슬개골 한 쌍을 땅을 향해 구부리고 무덤 저편의 노래를 부르시라. (그대가 내 말을 제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엄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순한 명령법으로 여긴다면 그대는 재기(才氣)를, 그것도 최상의 재기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삶의 피곤을 풀려고 무덤구덩이로 가는 망자의 혼백을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해줄 수 있다. 그 점은 나에게 확실하기까지 하다. 그대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까지는 내 의견과 정반대일 수 없다고는 내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하시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도덕의 기초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가져, 저마다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주도록 명령하는 원칙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사제가 선두에서 행렬의 앞자리를 열며, 손에 평화의 상징인 백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남녀의 성기를 나타내는 황금 표장을 드는데, 이 육체적 기관이 대부분의 경우 그 사용자들에게서 우리의 거의 모든 악을 야기하는 알려진 정열에 맞서 적절한 반응을 낳기는커녕,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 그걸 맹목적으로 조작할 때, 그들의 손에서 매우 위험한 도구가 된다는 점을, 순전히 은유로 이루어진 추상으로, 지적하려는 것 같다. 그의 등 아랫부분에 말총이 무성한 말의 꼬리가 하나 붙어 있어서(물론 인공적으로), 흙먼지를 뚫고 간다. 고리는 우리의 악행에 의해 동물의 반열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다. 관은 제가 갈 길을 알고 있어서, 위로자의 나풀거리는 사제복을 뒤따라서 행진한다. 망자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자기들의 위치를 뽐내며, 행렬의 뒷자락을 닫기로 결심했다. 행렬은 난바다를 가르는 선박처럼 위풍당당하게 나아가며, 침몰 현상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시간에 태풍과 암초는 그것들의 설명할 수 없는 부재보다 더 미미한 어떤 것으로도 눈길을 끌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들과 두꺼비들이 몇 걸음 떨어져서 죽음의 잔치를 뒤따른다. 저들도 역시 누구의 장례건 자기들의 겸손한 참례가 어느 날인가는 보답을 받게 될 것을 모르지 않는다. 저들은 낮은 목소리로 자기들의 생생한 언어를 통해 (이 사심 없는 조언을 여러분들에게 건넬 수 있도록 허락해주기 바라며, 여러분들은 너무 잘난 체하며 자신들만이 마음속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귀중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지 마시라) 그 사람이 초록 들판을 달리며 모래 깔린 만의 푸른 파도에 팔다리의 땀을 적시는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여러 번 목격했던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 삶은 그에게 아무런 속셈도 없이 미소를 짓는 것 같았으며, 멋지게도 꽃으로 관을 씌어주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지성 그 자체가 어린 시절의 문턱에 그가 멈춰 있음을 알아차린다기보다 짐작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필연적 전언철회가 발생할때까지는, 내 엄밀한 증명의 서론을 계속 써나갈 필요가 없다. 열살, 손가락 숫자를, 어디가 다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본뜬 숫자,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이런 경우에, 나는 진리에 대한 여러분들의 사랑에 기대어, 여러분들이 나와 함께 단 일초도 더 지체하지 않고 그것은 적다고 말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한 인간 존재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희망도 품지 않고, 이 지상에서 파리나 잠자리만큼 속절없이 사라지게 하는 저 암울한 신비를 간략하게 성찰할 때, 아마도 나 자신이 이해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잘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 내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한다는 통렬한 한을 품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그러나, 내가 공포에 가득차서 앞 문장을 시작한 저 먼 시간 이래로, 어떤 비상한 우연에 의해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은 것이 증명된 이상, 특히 지금처럼 이런 위압적이고 접근할 수 없는 질문을 다루어야 할 때, 나의 근본적인 무기력에 대해 완전한 고백을 조립하는 것이 여기서 불필요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지극히 상반되고, 때로는 호의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종류의 조합에 겉보기에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맹세코, 이런 개인적 만족을 누리는 작가의 문체에 영원에 이르기까지 진지한 부엉이의 불가능하고 잊을 수 없는 모습을 무상으로 부여하는 사물들이 그것들 본래의 속성 속에 감추고 있는 닮음과 상이함을 탐구하려는(그러고는 뒤이어 발표하려는) 우리의 매력적인 경향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이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이끄는 흐름을 따르자. 붉은솔개는 말똥가리보다 비례적으로 더 긴 날개를 가졌으며, 비상이 훨씬 용이하다. 그래서 평생을 공중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는 거의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일 광막한 공간을 누빈다. 그런데 이 거대 운동은 사냥 연습도, 먹이 쫓기도 전혀 아니며, 심지어 정찰조차도 아니다. 놈은 사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행은 놈의 자연상태이며, 놈이 좋아하는 상황이다. 그가 수행하는 방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 길고 좁은 날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방향 전환을 지시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꼬리이며, 꼬리는 틀리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는 애쓰지 않고 비상하고, 사면으로 미끄러지듯 하강한다. 난다기보다 차라리 춤추는 것 같다. 비행속도를 높이고, 줄이고, 멈추고, 몇 시간 동안 내내 같은 자리에 매달린 듯이 혹은 고정된 듯이 쉰다. 그의 날개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감지할 수 없다. 여러분들의 눈을 화덕의 문처럼 연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붉은솔개가 보여주는 비행의 아름다움과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수련처럼, 뚜껑이 열린 관 위로 천천히 솟아오르는 어린아이 모습의 아름다움 간에 내가 말하는 관계를, 그게 비록 멀긴 하지만, 대번에 알아차릴 수 없다고 어렵잖게 (약간은 마지 못해서라도) 고백할 수 있는 양식(良識)이야 저마다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저마다 웅크리고 있는 고의적 무지와 관련해서, 뉘우침의 결여라고 하는 고정된 상황이 초래하는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 바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빈정거리는 비유에서 서로 비교되는 두 항목간의 관계, 차분한 위엄을 지닌 이 관계는 이미 너무나 일반적일 뿐더러 충분히 이해될 만한 상징이어서, 변명라고는 거기 걸려든 모든 대상이나 풍역에 불공정한 무관심의 깊은 감정을 초래하는 저 동일한 통속성밖에 가질 수 없음에 나는 더욱더 경악한다.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감탄을 깨워내어 그 주목을 받게 되어 있다는 듯이! 묘지의 입구에 도착해 행렬이 급히 걸음을 멈추니, 그 의도는 더 멀리 가지않으려는 것이다. 묘지기가 묘혈 파기를 끝내고,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바치게 되는 온갖 조심성을 다 바쳐 관을 내려놓는다. 몇 삽의 흙이 뜻하지 않게 날아와 아이의 몸을 덮는다. 어느 종교건 종교의 사제가 감동받은 참석자들 한가운데서 죽은 자를 참례자들의 상상력 속에 더 잘 매장할 수 있도록 몇 마디 말을 한다. "그가 말하기를 이런 쓸데없는 행위에 이렇게 눈물을 많이들 흘리는 것을 보고 놀랐단다. 말한 그대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자기가 의론의 여지가 없는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정의할 수 없어서 겁이 난단다. 그는 죽음이 그 본바탕에서 볼 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망자의 수많은 친척들과 친구들의 정당한 고통을 더욱 덧나게 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임무를 거부하였을 터이지만, 어떤 은밀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몇 가지 위로를 주라면서, 머지않아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들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열핏 보게 하는 데 불과할지라도 그 위로란 것이 쓸데없는 짓은 아닐 것이라고 알려주었단다"1) 말도로르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달아나고 있었는데, 묘지의 담을 향해 그 주행 방향을 잡는 것 같았다. 그가 탄 준마의 발굽은 제 주인의 주변에 두터운 먼지로 가짜 왕관을 일으켰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그 기사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그의 백금 얼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비록 그 얼굴 밑에야 독자가 제 기억에서 제거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예의 망토에 완전히 둘러싸여 두 눈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지만, 연설의 한 중간에서, 종교의 사제가 갑자기 창백해지는 것은, 자기 주인을 결코 떠나지 않은 저 유명한 백마의 고르지 않은 질주 소리를 그의 귀가 알아듣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내 믿음은 큽니다. 그때 우리들은 영혼과 육체의 잠정적인 분리에 어떤 의미를 결부해야할지 예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삶을 얻는 자는 환상의 품에 안겨 흔들리고 있는 것이니, 그 환상의 증발을 가속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질주 소리가 점점 더 커졌으며, 기사가 지평선을 옥죄며, 회오리바람처럼 재빠르게 시선 속에, 묘지의 출입구로 둘러싸인 시야에, 들어오자, 종교의 사제는 더욱 장중하게 말을 잇는다. "여러분들은 질병에 의해 삶의 첫 단계밖에는 알지 못하도록 강요을 받은, 묘혈이 방금 그가슴에 받아들인 이 아이가 의심의 여지 없이 살아 있는 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씩씩한 말에 실린 모호한 실루엣으로 여러분들의 눈에 들어오는 저 사내,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이윽고 히스 덤불 속으로 사라질 것이기에, 여러분들의 눈으로 가능한 한 재빨리 똑바로 보아두라고 내가 권하는 저 사내는, 아무리 많이 살았더라도, 진정으로 죽은 유일한 자라는 점만은 알아두십시오."       1) 사제의 말은 간접화법으로 인용되었으며 문장 사이에 지문도 섞여 있지만 로트레아몽은 앞뒤에 따음표를 붙이고 있다.
1007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8) 댓글:  조회:184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8)           다섯번째 노래(5)       (5) 오, 이해할 수 없는 남색자들아, 너희들의 큰 타락에 욕설을 던질 자는 내가 아니다. 너희들의 깔대기형 항문에 모멸을 던지게 될 자는 내가 아니다. 너희들을 공격하는, 수치스러운, 거의 치유할 수 없는 이런저런 병이 피할 수 없는 징벌을 짊어지고 너희에게 덤벼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바보 같은 제도의 입법자들, 편협한 도덕의 발명자들, 그자들을 내게서 멀리 치워라. 나는 불편부당한 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들, 청소년들, 아니 차라리 젊은 처녀들아, 어떻게 그리고 왜(그러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라. 나도 역시 내 열정에 저항할 수 없으니까) 복수가 너희들의 마음에 싹터올라 인류의 옆구리에 그와 같은 상처의 관을 씌우게 되었는지 나에게 설명해다오. 너희들은 그 행동거지로(나야, 존경하지!) 인류에게 제 자식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게 한다. 너희들의 매음은, 아무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몸을 바쳐, 가장 심오한 사상가들의 논리를 실행하며, 한편으로 너희의 과도한 감수성은 여자들까지 한도를 넘어 아연실색케 한다. 너희들의 본성은 너희 동유들의 본성보다 덜 지상적인가 아니면 더 지상적인가? 너희는 우리에게 없는 제육감(第六感)을 지녔는가? 거짓말하지 말고 너희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 내가 너희들을 심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관찰자로서 너희들의 창대한 지성과 사귀어온 이래로,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내 왼손으로 축복을 받고, 내 오른손으로 성화될지어다. 내 보편적인 사랑의 보호를 받는 천사들아. 나는 너희 얼굴에 입맞춘다. 너희 가슴에 입맞춘다. 내 달콤한 입술로 조화롭고 향기로운 너희 육체의 가지가지 부분에 입맞춘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너희들이 무엇인지 나에게 곧바로 말하지 않았는가. 드높은 정신적 아름다움의 결정들아. 너희들의 억눌린 심장의 고동이 감추고 있는 다정과 청순의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을 내 스스로 알아차렸어야 했다. 장미와 쇠풀 화환으로 장식된 가슴이여, 너희들의 두 다리를 반쯤 벌려 너희들을 알아보고 내 입술을 너희 부끄러움의 휘장에 걸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중대한 충고사항) 너희 음부의 피부를 매일 깨끗한 물로 씻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내 감질내는 입술의 위아래로 갈라진 접합부에 성병 궤양이 어김없이 돋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 우주가 하나의 지옥은 아니라도, 하늘의 광대한 항문일 뿐이라면, 내가 하복부 쪽을 놀려 어떤 행동을 하는지 살펴보라. 그렇다. 나는 그 피투성이 괄약근을 뚫고 내음경을 쑤셔박아 사나운 동작으로 그 골반 내벽을 깨뜨렸으리라! 불행이 그때 앞 못 보는 내 두 눈 위에 유사(流沙) 둔덕을 모조리 날려보냈다. 나는 진실이 잠들어 누워 있는 지하의 장소를 발견했어야 하고, 끈적거리는 내 정액의 강물도 그처럼 대양을 찾아내어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왜 나는 상상적인 상황을, 게다가 나중에라도 실현의 도장이 결코 찍히지 않을 상황을 아쉬워하고 자빠졌는가? 덧없는 가설을 쌓아올리려고 무심하지 말라. 그동안에 나와 침대를 같이 쓰겠다는 열정에 불타오르는 자가 나를 찾아오기 바라지만, 나는 내 환대에 엄격한 조건을 단다. 열다섯 살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그쪽에서도 내가 서른 살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나이 감정의 강도를 줄이지는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내 머리가 눈처럼 하얗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노쇠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이유 탓이다. 나로 말하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웅동체(雌雄同體)들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나를 닮은 존재들이 필요하며, 그 이마 위에 인간의 고결함이 더욱 또렷하고 지울 수 없는 글자로 새겨져 있어야 하리라! 긴 머리칼을 지닌 여자들이 나와 본성이 같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내 의견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짭짤한 침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누가 그걸 빨아서 내게서 없애주려 하겠는가> 그게 올라온다. 그게 그치지 않고 올라온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안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자들의 피를 목구멍 가득 마시고 났을 때(나를 흡혈귀라고 가정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죽은 자들이나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살아 있다). 이튿날 그 일부를 입으로 토해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바로 악취나는 침에 대한 설명이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악덕으로 약해진 신체기관이 영양섭취의 완수를 거부하는 판에? 그러나 내 속내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폭로하지 말라.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비밀의 위엄이 미지의 전자기(電磁氣) 끌려 나를 모방하려고 시도하게 될 사람들은 의무와 미덕의 한계 안에 붙잡아 두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내 입을 바라보겠다는 친절한 마음을 꼽는다면(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더 긴 예절의 정식 표현을 사용할 시간이 없다). 내 입이 그 구조의 외양으로 대번에 너희들에게 충격을 출 터이니, 너희의 비유에 뱀을 집어넣을 것까지도 없다. 그것은 내가 입의 근육조직을 최소축척까지 압축하여 내가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임을 믿게 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그 성격이 정반대임을 모르지 않는다. 내가 이 천사 같은 페이지를 통하여, 내 글을 읽고 있는 자의 얼굴을 어찌 바라볼 수 없겠는가. 그가 사춘기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가까이 올지어다. 나를 꼭 끌어안고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겁먹지 말라. 우리 근육의 유대를 차츰차츰 긴밀하게 조이자. 좀더. 이런 요구를 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짓 같다.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이 종잇장의 불투명함은 우리의 완전한 결합작업을 방해하는 가장 현저한 장애다. 나로서는 중학교의 가장 창백한 소년들과 공장의 허약한 아이들에게 파렴치하게도 늘 변덕스러운 사랑을 느껴왔다! 내 말은 어떤 꿈의 어렴풋한 기억이 아닌바, 만일 내 고뇌에 찬 주자의 진실성을 확증할 수 있을 사건들을 너희들의 눈앞에 내보여야 할 의무가 내게 부과된다면, 내게는 몰아내야 할 추억들이 너무나 많으리라. 인간세상의 사범은 그 요원들의 의론의 여지 없는 능란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를 현행범으로 체포하지는 않았다. 나는 심지어 내 정열에 충분하게 몸을 바치지 않았던 한 남색자를 살해하기까지하여(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그 시체를 버려진 우물에 던졌으나, 나를 압박할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왜 공포에 떨고 있느냐, 내 글을 읽는 소년아! 내가 그대에게도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싶어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더할 나위 없이 부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대는 옳다. 나를 믿지 말라, 특히 그대가 아름답다면, 내 국부는 영원토록 발기의 음울한 광경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게다가 그리도 많은 사람이 거기에 접근하지 않았던가!) 내 국부가 평시와 평온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착란의 순간에 내 물건에 칼질을 했던 구두닦이까지도, 배은망덕한 놈!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옷을 갈아입는데, 청결이 그런 결정의 중요한 동기는 아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구성원들이 며칠 후에는 길어지는 전투중에 소멸할 것이다. 실제로, 어느 지역이건 내가 몸을 담으면, 그들은 끊임없이 모습을 내보여 나를 괴롭히고 내 발거죽을 핥겠다고 찾아 온다. 그러나 도대체 내 정액은 한 방울 한 방울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녔기에 후각신경으로 숨을 쉬는 것 일체를 자기에게 끌어 모으는가! 그들은 아마존 강가에서 오고, 갠지스 강물이 흐르는 계곡을 건너고, 극지의 지의(地衣)를 버리고 나를 찾아 기나긴 여행을 완수하며, 움직일 줄 모르는 도시들에게 묻는다. 잠시라도 그 성벽을 따라, 산맥의, 호수의, 희스의, 숲의, 곶벼랑의, 광막한 바다 냄새를 풍기는 그 성스러운 정액을 지닌 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냐고! 나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나는 그들의 열기를 붇돋우기 위해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장소에 비밀리에 몸을 숨긴다) 그들을 지극히 유감스러운 행동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양 진영에 삼십만 명씩 갈라서고, 대포들의 울부짖음이 전쟁의 서곡 노릇을 한다. 전투대형의 양 날개가 동시에 요란을 떠는 모양이 마치 한 사람의 전사와 같다. 방진(方陣)이 짜였다가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않는다. 놀란 말들이 사방으로 달아난다. 포탄이 가차없는 유성처럼 땅을 갈아엎는다. 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조용한 달이 구름의 찢어진 틈 사이로 나타날 때, 전투 현장은 살육의 광막한 들판에 지나지 않는다. 몇십 리에 걸쳐 시체로 덮인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며, 이 별 위에 뜬 안개 같은 초승달은 섭리가 내게 점지한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의 부적 탓에 초래된 참담한 결과들을 잠시 심오한 성찰의 주제로 삼으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불행하게도 내 음험한 함정이 인류을 전멸시키기까지는 아직도 몇 세기가 더 필요할 것이다! 날렵하나 허풍을 떨 줄 모르는 한 정신이 자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맨 먼저 물리칠 수 없는 장해를 지닌 것 같은 그런 수단을 하용하는 방법이 이와 같다. 날마다 내 지성은 이 압도적인 문제를 향해 상승하고, 너희들은 스스로 증인이 되어 내가 최초에 다루려고 의도했던 하찮은 주제에 더는 내 지성이 머무를 수 없음을 목도한다. 마지막 말--- 겨울밤이었다. 전나무숲에서 삭풍이 휘파람 불 때, 창조주는 어둠 한 가운데에 문을 열어 한 남색자를 들어오게 했다.  
10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7) 댓글:  조회:156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7)           다섯번째 노래(4)       (4) - 아니, 도대체 누가!---- 아니 도대체 누가 감히 여기서 내 검은 가슴께로 제 몸마디(體節)를 음모자처럼 끌고 오는가? 자네가 누구건, 이 별쭝맞은 피톤1), 어떤 핑계로 자네의 우스꽝스러운 출현을 변명하려는가? 자네를 괴롭히는 것은 막막한 회한인가? 이보게, 보아뱀, 자네의 야성적 위엄은 추측건대, 내가 그걸 범죄자들의 생김새와 견주더라도 그 비교에서 벗어나려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품을 수는 없기에 하는 말일세. 그 거품이 이는 희멀건 침은 내가 보기에 격노의 표지일쎄. 내 말을 듣게: 자네의 눈이 하늘의 광선을 빨아들이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아는가? 내가 무언가 위로의 말을 베풀 수 있다고 자네의 시건방진 두뇌가 믿었다면, 그것은 관상학적 지식이 완전히 결여된 무지의 소치로만 가능한 일인 것을 잊지 말게. 잠시 동안, 물론 마음껏, 내가, 다른 사람도 그러듯이, 내 얼굴이라고 부를 권리가 있는 것 쪽으로 자네의 두 눈빛을 움직여보게나! 그게 얼마나 눈물에 젖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가? 자네가 오해한 것이지. 이 바질릭2) 자네는 저 가련한 분량의 위안을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네. 내 근본적인 무력함이, 내 선의의 수많은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자네한테서 거두어버렸으니. 오! 어떤 힘이 표현 가능한 문장을 빌려 숙명적으로 자네를 패망으로 몰아갔는가? 내 한번 발꿈치를 찍어 자네 삼각형 머리의 뒤로 젖혀지는 곡선을 붉게 물드는 잔디에 처박아, 사바나의 풀과 짓이겨진 자의 살덩이로 이름 모를 반죽을 빚을 수도 있다는 점을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런 추론에 내가 익숙해지기는 거의 불가능하네.   - 내게서 멀리 어서 빨리 사라지게. 창백한 얼굴을 가진 이 죄덩어리야! 공포 유발의 아슬아슬한 신기루가 바로 자네의 유형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 무례한 의혹을 쓸어버리게, 이번에는 내가 자네를 고발하여, 파충류잡이 사식조(蛇食鳥)의 판단에 따라 반드시 증명될 항의를 자네에게 던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야. 상상력의 어떤 괴이한 착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가! 도대체 자네는 내가 카오스로부터 삶 하나를 떠오르게 하는 은사(恩賜)로 자네에게 베풀어주었던 막중한 봉사들이며, 자네 쪽에서도, 죽을 때까지 내 깃발을 떠나지 않고 내게 충성하겠다던 영원히 잊지 못할 그 맹세를 상기하지 않는 것인가? 자네가 아이였을 때(자네의 지성은 그때가 전성기였지), 자네는 맨 먼저 피레네산의 영양과도 같은 속력으로 언덕에 기어올라 그 작은 손을 흔들어 태어나는 새벽의 영롱한 빛살에 인사를 했지. 자네 목소리의 음조는 다이아몬든 빛을 뿜는 진주들처럼 자네의 낭랑한 후두에서 솟아올라서 그 집단적 개성을 긴 예배 찬송가의 비브라토 집합체로 녹여내곤 했지. 이제 자네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보여주었던 인내심을 진창에 더럽혀진 누더기처럼, 발밑에 내던지는구먼. 감사하는 마음은 제 뿌리가 늪의 밑바닥처럼 메말라가는 것을 보았건만, 그 대신에 야망이 형언하기도 괴로운 비율로 성장하는군. 내 말에 귀를 기울리는 녀석은 어떤 녀석인가. 자기 자신의 허약함을 남용하면서 이리도 자신만만하다니?   - 그리고 자네는 누구지. 이 뻔뻔한 실체 자네는? 아니지!--- 아니지!--- 나는 틀리지 않아. 자네가 다양한 변신의 힘을 빌리더라도 항상 자네의 뱀 대가리가 내 눈 앞에서 영원한 불의와 잔인한 지배의 등대처럼 번쩍거릴 거야! 그는 명령의 고삐를 쥐고 싶어했으나 그는 지배할 줄을 몰라! 그는 창조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싶어했으며, 성공했다. 그는 저 혼자 우주의 군주임을 증명하고 싶어했는데, 그가 틀린 것이바로 그 점이지. 오, 가련한 존재야! 자네는 저 불평과 음모에 귀기울리려고 지금 이 시간까지 기다렸는가? 지구의 표면에서 동시에 올라와 그 사나운 날개로 자네의 찢어지기 쉬운 고막의 나비 모양 테두리를 싹둑 잘라갈 저 소리들에, 이제 그날이 멀지 않았네. 내 팔이, 자네의 숨결 때문에 독기 뿜는 먼지 속에 자네를 자빠뜨린 다음 자네의 내장에서 그 해로운 생명을 뽑아버리고, 뒤틀리지 않은 곳 없는 시야를 경악으로 습격하고, 말도 못하는 그 혀를 그의 입천장에 못박아놓는 이 퍼덕거리는 살덩이와 비교되어야 할 것은, 누구라도 내정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오직 노화로 쓰러진 떡갈나무의 썩은 둥치밖에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줄, 그날이! 어떤 연민의 생각이 자네 모습 앞에 나를 붙잡아놓는가! 내 자네에게 말하거니와, 자네가 차라리 내 앞에서 물러나서, 헤아릴 수도 없는 그 치욕을 갓 태어난 아이의 핏속에 씻으러 가게. 자네의 습성이 어떤 것인지 보라고. 그게 자네한테 어울리는 거지. 가게--- 줄곧 앞으로 걸어가게. 자네한테 방랑의 형을 선고하네. 자네한테 홀로 가족도 없이 살 것을 선고하네. 끊임없이 길을 가게. 자네의 두다리가 자네를 지탱해주길 마침내 거부하도록. 사막의 모래벌판을 가로지르게. 세계의 종말이 허무 속에 별들을 삼킬 때까지. 자네가 호랑이 소굴 근처라도 지나가게 되면, 놈은 서둘러 달아날 걸세. 이상적인 패덕의 좌대 위에 높이 올라앉은 저 자신이 성격을, 마치 거울에 비춰보듯, 보지 않으려고. 그러나 강압적인 피로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여 있는 내 궁전의 포석 앞에어 자네 발걸음을 멈추라고 명령할 때는 누더기가 된 자네의 샌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현관의 우아함을 차례차례 발끝으로 넘게. 이건 쓸데없는 충고가 아니냐. 자네는 옛 성채의 토대를 따라 뻗은 납빛 지하묘지에 잠든 내 젊은 아내와 어린 나이의 내 아들을 자칫 깨울 수도 있으니까. 자네가 미리 조심하지 않으면, 그들이 지하에서 소리를 내질러 자네를 하얗게 질리게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자네의 완고한 의자가 그들의 생명을 빼앗았을 때, 그들은 권력이라는 게 무섭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그 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나에게 그들의 믿음을 확인시켜주었지). 자네의 섭리가 그 정도로 냉혹하게 나타나리라고는! 그거야 어떻든, 에메랄드 장식판이 둘린, 그러나 문장(紋章)들의 빛이 바랜, 내 선조들의 영예로운 조상(彫像)들이 쉬고 있는, 이 버려지고 적막한 홀을 재빨리 건너가게. 그 대리석 상들은 자네에게 화가 나 있지. 그들의 흐릿한 시선을 피하게. 이게 바로 그들의 유일하고 마지막인 후손의 혀가 자네에게 베푸는 충고일세. 그들의 팔이 어떻게 도발적인 방어자세로 들어올려 있는지. 그들의 머리가 얼마나 뜨겁게 뒤로 젖혀져 있는지 살펴보게. 분명코 그들은 자네가 네게 저지른 악행을 눈치챗으니, 이 조각된 돌덩이들을 지탱하고 있는 얼어붙은 좌대의 손닿는 곳을 지나간다면, 복수가 자네를 기다리지.자네의 방어가 내게 무언가 반박하라고 요구한다면, 말하게. 지금 울기에는 너무 늦었네. 호기가 왔을 때, 더 적절한 순간에 울었어야지. 마침내 자네의 눈이 뜨였다면, 자네가 저지른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판단을 하게. 잘 가게! 나는 절벽의 미풍을 들이마시러 가겠네. 내 허파들이 반쯤 숨이 막혀 자네보다 더 침착하고 더 고결한 광경을 보고 싶다고 거대한 목소리로 욕하지 않는가!       1) 피톤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출생을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그의 손에 살해된 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왕뱀을 포함해 여러 종류의 뱀을 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2) 그리스 신화에서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괴물 뱀.  
1005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6) 댓글:  조회:109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6)           다섯번째 노래(3)       (3) 인간 능력의 단속적 소멸: 당신의 사고가 무엇을 상정하려들었건 간에, 이것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말처럼 적절한 말이 아니다. 산 채로 제 껍질을 벗겨달라고 형리에게 탄원하면서, 정당한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 손 들어보라. 자진하여 죽음의 총탄에 가슴을 바치는 자, 쾌락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보라. 내 눈은 상처의 흔적을 찾으리라. 내 열 손가락은 그 주의력 전체를 집중하여 이 별난 자의 육체를 조심스럽게 만지리라. 나는 뇌수가 흩어져 내 이마의 비단 위에 튀어 박힌 것을 학인하리라. 이런 순교를 사랑하는 한 인간은 전 세계를 다 털어 단 한 명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는 웃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데, 정말이지 나 자신이 그것을 경험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엔가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려는 사람을 볼 일이 생겼는데, 그때도 내 두 입술이 넓게 벌어지지 않으려고 장담한다면 얼마나 경솔한 짓이겠는가? 자기 생존을 위해서는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 고르지 못한 운수 탓에 내 앞에 떨어졌다. 내 육체가 고통의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거야 괜찮다. 그러나 응축되고 지속적으로 긴장된 성찰 탓에 내 정신이 잦아들어간다. 그 울부짖는 꼴이 마치 육식 홍학과 굶주린 왜가리떼가 물가의 골풀 군락을 습격했을 때의 늪 속 개구리떼나 다름없다. 털오리의 가슴에서 뽑아낸 깃털 침대에서 편안하게, 제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든 자에게 복이 있도다. 내가 아직도 잠들지 못한 지 삼십 년이 넘었구나. 발설할 수 없는 내 탄생일 이후로, 나는 저 잠을 싣고 있는 널빤지에 화해할 수 없는 증오를 서약했다. 그것을 원했던 것은 바로 나,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서둘러라, 유산된 의혹을 버려라. 내 이마에서, 이 창백한 화관을 알아보겠는가? 야윈 손가락으로 이 관을 짠 것은 완강함이었다. 타오르는 수액의 잔재가 녹은 쇳물의 분류처럼 내 뼛속으로 흐르는 동안은, 나는 한숨도 자지 않으리라. 밤마다, 나는 창유리 너머로 내 창백한 눈을 별에 강제로 붙박는다.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나뭇조각 하나가 부어 오른 내 눈 눈까풀을 벌려놓는다. 새벽이 다시 오면, 새벽은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차가운 석고 벽에 몸을 수직으로 기대고 서 있는 나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인격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자유로운 운동능력은 잃지 않는다. 인광이 일어나는 어둠의 모퉁이에 숨어 있는 악몽, 곰배팔로 내 얼굴을 더듬는 열병, 피 흐르는 발톱을 곧추세우는 한 마리 한 마리 더러운 짐승, 그러니까, 저 자신의 영원한 행위에 안정된 먹이를 주기 위해 저것들을 빙빙 돌게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의지임을 아시라. 실제로 극단적으로 허약한 상태에서도 원기를 되찾는 원자, 자유의지는 자기 자식의 수에 우둔을 꼽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떤 막강한 권위로 단언하기를 겁내지 않는다. 잠자는 자는 지난밤에 거세를 당한 동물보다도 못하다는 말이다. 불면증이 사이프러스나무 냄새를 풍기는 이 근육들을 깊은 구덩이 밑바닥으로 끌고 간다 해도, 내 지성의 하얀 납골당의 창조주의 눈에 그 성역을 열어 보이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어떤 비밀스럽고 고결한 정의, 팔을 벌리면 내가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그 정의가 이 더러운 징벌을 간단없이 추격하라고 내게 명령한다. 내 경솔한 영혼의 무서운 적이여, 해안에서 등대에 불을 켜는 시간에, 나는 내 불운한 등허리에 잔디밭의 이슬 위에 드러눕는 것을 금한다. 승리자여, 나는 위선적인 양귀비의 온갖 책략을 물리친다. 결과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 식상한 싸움에서 나의 마음은 벽을 둘러쳐 제 의도를 감추었다는 것이며, 굶주리며 저 자신을 뜯어 먹는다는 것이다. 거인들처럼 침투할 수 없는 자, 나는 끊임없이 두 눈을 활짝 뜨고 살았다. 적어도 주간에는 누구라도 외적 거대객체(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 누구인가>)에 효과적인 저항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낮에는 의지가 눈에 띄게 용심을 부려 자기방어에 주의를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안개의 베일이 이제 곧 목을 매달려는 사형수 위에까지 필쳐지자마자, 오! 자신의 지성아 낮선 자의 신성모독적인 두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리라. 가차없는 메스가 그 무성한 가시덤불을 파헤친다. 의식은 긴 저주의 헐떡임을 토해낸다. 수치로다! 우리의 문은 저 하늘나라 길강도의 맹렬한 호기심 앞에 열려 있다. 나는 이 시치스러운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 너, 내 인과율의 추악한 스파이 녀석! 내가 존재한다면,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이 애매한 복수성(複數性)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 내밀한 논리성 속에서 홀로 거주하고 싶다. 자율성을---- 아니면 나를 하마로 변하게 하라. 땅 밑으로라도 꺼져라. 오, 이름 없는 상흔이여, 그리고 다시는 내 험악한 분노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내 주체성과 창조주, 그건 뇌 하나에 담기에 너무 많다. 밤이 시간의 흐름을 어둡게 할 때, 얼음 같은 식은땀에 젖은 제 잠자리에서 잠의 지배력에 맞서 싸우지 않았던 자 누구인가? 사그라지는 능력들을 가슴께에 끌어 모으는 이 침대는 네모반듯하게 잘린 전나무 널판으로 짠 무덤일 뿐이다. 의지는 보이지 않는 힘 앞에 서기라도 한 듯, 서서히 물러난다. 끈적끈적한 나뭇진이 눈의 수정체를 두껍게 덮는다. 두 눈꺼풀이 두 친구처럼 서로 찾는다. 몸뚱이는 숨쉬는 시체에 불과하다. 결국, 큰 말뚝에 네 개의 매트리스 위에 팔다리 전체를 못박는다. 그리고 제발 주목하시라. 결국 시트는 수의일 뿐이다. 여기 온갖 종교의 향이 타오르는 향로를 보라. 영원이 먼 바다처럼 울부짖으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파트는 사라졌다. 인간들이여, 촛불을 켠 빈소에 엎드리라! 때로는 가장 무거운 잠의 한가운데서, 신체 조직의 이런저런 결함을 극복하려고 쓸데없이 애쓰면서, 동물자기최면술에 걸린 감각은 이제 자신이 무덤의 묘석에 지나지 않음을 놀라 깨달으며, 비할 데 없는 정교함에 기대어 훌륭하게 논리를 편다. "그 잠자리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지. 죄수 호송마차에 올라타면, 기요틴의 두 기둥을 향해 나를 끌고 가겠지. 이상한 일이다. 무기력한 내 팔이 나뭇등걸의 뻣뻣함을 교묘하게 얻어내다니 사형대를 향해 걸어가는 꿈을 꾼다는 건 몹시도 기분 나쁜 일이야. 피가 얼굴을 덮고 큰 줄기를 이루어 흐른다. 가슴은 반복경련을 일으키다가 쌕쌕거리며 부풀어오른다. 오벨리스크의 무게가 격정의 용솟음을 억누른다. 현실이 반수사태의 꿈을 파괴하였구나! 자만심에 가득찬 자아와 강경중의 무시무시한 진행 사이에 싸움이 깊어질 때, 환각에 빠진 정신이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 누군들 알지 못할까? 절망에 파먹히면서도, 정신은 제 타고난 성질을 끝내 쳐부술 때까지 고통 속에서 즐거워하니, 마침내 수면은 제 먹이가 자기한테서 빠져 달아나는 것을 보고, 수치스러운 날개을 짜증으로 퍼덕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적수의 마음에서 멀리 도망친다. 결코 감기지 않는 내 눈을 응시하지 말라. 내가 견뎌내는 이 고뇌를 이해하겠는가? (아무튼 자존심은 충족된다) 밤이 인류에게 휴식을 권유하기 시작하면, 내가 아는 한 남자는 성큼성큼 들판으로 걸어나간다. 내 결심이 노쇠에 감염되어 굴복할까봐 겁이 난다. 어서 오라, 내가 잠들 저 운명의 날이여! 깨어나면 내 면도칼이 내 목을 통과하여 길을 내며, 사실상 이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하리라.  
1004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5) 댓글:  조회:112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5)           다섯번째 노래(2)       (2) 나는 내 앞의 작은 언덕 위에 물체가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머리를 명확하게 분간할 수 없었으나, 벌써 나는 그 윤곽의 정확한 비율을 특정하지 않고도, 그 머리가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 부동의 기둥에 감히 접근하지 않았는데, 내가 삼천마리가 넘는 게들의 보각(步脚) (나는 먹이의 포착과 저작에 소용되는 다리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해도, 그 자체로는 매우 하찮은 한 사건이 내 호기심에 무거운 조세를 징수하여 그 제방을 무너뜨리게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한 마리 쇠똥구리가 아래턱과 더듬이로 주성분이 분변으로이루어진 공 하나를 땅 위에 굴리며, 이미 말했던 언덕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며, 오직 그 방향으로 가겠다는 제 의지를 자못 돋보이게 하느라고 열심이었다. 이 절족동물이 암소보다 월등하게 큰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는 말이 의심스럽다면, 내게로 오거라. 그럼 올곧은 증인들의 증언으로 가장 의심 많은 사람들이라도 흡족하게 해줄 것이다. 나는 멀리서,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내보이며, 그 뒤를 따랐다. 이 거대하고 시커먼 공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오, 독자야, 끊임없이 통찰력을 자랑하는 너(그렇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고), 너는 그걸 나에게 말해줄 수 있으려나? 그러나 수수께끼에 대한 널리 알려진 네 정열을 거친 시련에 부딛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이 신비가 나중에야, 네가 네 삶의 끝에 이르러 너의 침대 곁으로 찾아온 단말마와 더불어 철학적 토론을 시작할 때야--- 어쩌면 이 절의 끝에 이르러서야, 너에게 밝혀지리라는 점을 (그건 너에게 밝혀질 것이다) 너에게 다시금 지적하는 것이 내가 너에게 가할 가장 부드러운 책벌임을 네가 알기만 하면 하면 그만이다. 쇠똥구리는 그 작은 언덕 기슭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녀석의 자취를 그대로 따라갔는데, 여전히 그 현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도둑갈매기들이, 항상 굶주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안해하는 이 새들이 지구의 양극을 적시고 있는 바다에 살기를 좋아해서 온대에는 우연한 사고로만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마음이 편치 못해 아주 느리게 두 다리를 앞으로 옮겼다. 그러나 내가 보러 가고 있던 그 육체를 닮은 물질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펠리컨과에 네 가지 상이한 종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다새, 펠리컨, 가마우지, 군함조, 내 앞에 나타난 그 회색빛 형체는 사다새가 아니었다. 내가 염탐한 그 유연한 덩어리는 군함조가 아니었다. 내가 염탐한 그 결정(結晶)상태의 육질은 가마우지가 아니었다. 나는 마침내 보았다. 뇌에서 환상융기가 제거된 인간을! 나는 내 기억의 주름을 막연히 더듬어보았으니, 내가 벌써 지난날에 저 기다랗고 넓적하고 볼록한 궁륭형 부리를 눈여겨보았던 것이 어느 혹서의 땅에서였던가, 아니면 어느 동토에서였던가, 그 모서리가 눈에 밟히고, 발톱 모양새로, 가운데가 솟아올랐다가 끝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저 부리를, 저 톱니형의 곧은 테두리를, 꼭지 끝부분까지 가지가 갈라진 저 아래턱을, 막질(膜質)의 피부로 빈틈없이 덮여 있는 저 벌어진 간격을, 목덜미를 온통 차지하고 엄청나게 팽창할 수 있는 저 노란 낭상(囊狀)의 넓은 포대를, 그리고 기저의 홈에 매우 좁다랗게 가로로 파여 거의 감지 불가능한 저 두 콧구멍을! 단순 허파호흡을 하고, 털로 덮여 있는 이 생물이 어깨까지만이 아니라 발바닥까지 온전한 한 마리 새였더라면, 그것을 알아보는 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여러분들이 이제 직접 보게 될 것처럼, 아주 쉬운 일이었으리라. 다만,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다. 내 증명의 명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내 작업대 위에 그런 새 한마리가, 비록 박제에 불과할지라도, 놓여 있을 필요가 있으리라. 그런데, 나는 그 새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자가 아니다. 이전의 가설을 한 걸음 한 걸음 짚어간다면, 나도 그 뒤를 이어, 병약한 자세로 고결함을 지켜내는 것이 가상한 그자에게 정체를 부여하고 박물지의 틀 안에서 자리 하나를 찾아주게 될 것이다. 그 이중 신체조직의 비밀을 완전히 모르지는 않는다고 얼마나 흐뭇해하며, 더 많이 알려고 얼마나 갈망하며, 나는 지속적 변신상태에 있는 그자를 관찰하였던가! 그가 비록 인간의 얼굴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아름답게 보이기가 곤충의 한 쌍 긴더듬이형 섬유조직 같고, 아니 차라리 서둘러 치르는 매장(埋葬) 같고, 아니 그보다는 훼손된 신체기관의 재생법칙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달리 부패하기 쉬운 액체와도 같고!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 이방인은 자기 앞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그 펠리컨의 머리로! 어느 날인가는 이 이야기의 끝부분을 나는 다시 이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활기 없이 재빠르게 나의 서술을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편에서, 내 상상력이 어디에 가닿기를 바라는 지 알기를 지체한다면(하늘의 뜻이 다르지 않아 실제로 거기에 오직 상상력이 있을 뿐이기를!) 내 편에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말해야 했던 것을 단 한 번에 (두 번으로 나누지 않고!) 끝내버리기로 결심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다고 나를 비난할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긴 하지만, 그러나 이런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심장의 맥박이 손바닥에 고동치고 있음을 느낄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얼마전에, 브르타뉴의 작은 항구에서, 연안항해선 선장인 늙은 뱃사람 하나가 거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죽었는데, 그는 끔찍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당시 원양항해의 선장으로 생말로의 한 선주에게 고용되어 항해를 했다. 그런데, 열세 달을 떠나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의 후계자를 낳아놓고 아직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아이를 인지할 어떤 권리도 없음을 알았다. 선장은 자신의 놀라움과 분노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자기 아내에게 옷을 입고 자기를 따라 도시의 성벽 위로 산보를 나가자고 냉정하게 요구했다. 때는 1월이었다. 생말로의 성벽은 높아, 북풍이 불어올 때는 가장 악착스러운 사람들도 뒷걸음질을 친다. 불행한 여자는 차분한 마음으로 체념하고 순순히 따랐으며, 돌아오는 길에 착란을 일으켰다. 그날 밤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남자인 나도 작지 않은 드라마와 맞닥뜨리면, 나 자신을 충분히 장악하여 얼굴 근육을 미동 없이 유지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는 판에! 쇠똥구리가 언덕 기슭에 도착하자마자, 예의 사내는 팔을 서쪽으로 (정확하게 그 방향에서, 콘도르 한 마리와 버지니아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공중에 싸움에 돌입했다) 들어올리고, 다이아몬드의 색조 체계를 나타내는 기름한 눈물 한 방울을 부리에서 닦아내며 쇠똥구리에게 말했다. "불행한 공이로다! 너는 그것을 충분히 오래 굴려왔지 않으냐? 너의 복수는 아직도 충족되지 않았구나. 벌써, 네가 무정형의 다면체를 빚는 식으로 다리와 팔을 진주 목걸이로 묶어, 골짜기와 길을 헤치고, 가시덤불과 돌밭을 넘어, 네 발목관절로 끌고 다녔던 그 여자는(그게 아직도 그여자인지 좀 다가가서 보게 해달라!) 뼈가 상처로 파이고, 사지가 회전 마찰의 물리법칙에 의해 반들반들 닦여, 단일 응고체로 혼합되고, 육체가 최초의 윤곽과 타고난 곡선 대신 전일 균질체의 단조로운 외관을 드러내어, 짓찧어진 다양한 요소들의 뒤죽박죽으로 한 덩어리 구체(球體)와 너무 닮아 있을 뿐이구나! 그 여자는 죽은 지 오래되었다. 그 잔해들을 땅에 버리고, 너를 소진케 하는 그 격분을 돌이킬 수 없는 비율로 증대시키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게 더는 정의가 아니다. 네 이마의 외피 속에 감춰진 에고티즘이 저를 싸고 있는 홑이불을 천천히 유령처럼 들어올리지 않느냐?" 콘도르와 버지니아수리부엉이는 싸움이 급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어느덧 우리들과 가까운 자리에 와 있었다. 쇠똥구리는 이 예기치못한 말 앞에 몸을 떨었으며, 다른 기회였더라면,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 이번에는 한계를 모르는 어떤 분노의 명백한 표지가 되었다. 그는 뒷다리 허벅지로 앞날개전을 무섭게 긁어 날카로운 소리를 냈던 것이다. "누구시더라, 도대체, 당신은, 이 겁쟁이 양반? 지난날의 기막힌 사연들을 잊으신 모양이네. 그게 기억 속에 담겨 있지 않다니요, 형님. 이 여자는 우리를 차례차례 배반했다고요. 첫번째로 형을 두번째로 나를, 이런 모욕은 그렇게도 쉽게 기억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도 쉽게! 형 말이야, 형의 고결한 본성이 용서하기를 허락하겠지. 그러나 빵 반죽통 속의 반죽이 되어버린 이 여자의 원자가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첫번째 검사에서 이 몸뚱이가 내 맹렬한 열정의 효과보다는 오히려 두 개의 강력한 톱니바퀴에 의해 밀도의 현저한 증가가 있었음을 믿어야 할지 여부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지). 이 여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아닌지 형이 알고 있다는 말이야? 입을 다물고, 내가 복수할 수 있게 놔둬." 그는 굴리기 작업을 다시 시작하여, 공을 앞으로 밀며 멀어졌다. 그가 멀어지자, 펠리컨은 소리질렀다. "저 여자는 그 마법의 힘으로 나에게 물갈퀴 새의 머리를 씌우고, 내 동생을 쇠똥구리로 변하게 했지. 필경, 그 여자는 내가 방금 열거한 대접보다 더 험한 대접을 받아도 싸지."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내가 들은 것으로, 내 머리 위에서 콘도르와 버지니아수리부엉이를 피튀기는 싸움 속에 한 덩어리로 엮어놓은 적대관계의 성질을 짐작하면서, 나는 머리를 망토 후드를 젖히듯 뒤로 젖혀 허파 운동에 가능한 한 편안함과 탄력성을 주고, 두 눈을 하늘로 가져가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불화를 그쳐라. 너희 양쪽이 모두 옳다. 여자는 너희 두 사람에게 각기 사랑을 약속해서, 결과적으로 너희를 함께 속였다. 그러나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는 너희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박탈함으로써 너희의 가장 성스러운 고통을 잔인한 놀이로 삼았다.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믿기를 주저하는구나! 더구나 그 여자는 죽었으며, 쇠똥구리는 처음 배반당한 자를 동정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어 여자에게 벌을 주었다." 이 말에 새들은 싸움을 끝내고, 더는 서로에게 깃털을 뽑지도 살점을 발라내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한 마리 개가 제 주인의 뒤를 따라 달려가며 그리는 곡선에 관한 논문처럼 아름다운 버지니아수리부엉이는 무너진 수도원의 벌어진 틈새로 잠겨들었다.성장 추세가 인체에 동화되는 분자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 성인의 가슴발육 정지의 법칙처럼 아름다운 콘도르는 대기의 상층부로 잦아들었다. 펠리컨은, 그의 관대한 용서가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나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는데, 인간 항해자들에게 자신의 예를 주목하고 음울한 마녀들의 사랑으로부터 저마다 제 운명을 지켜내라고 경고하려는 듯이 그 작은 언덕 위에서 등대와도 같은 위엄 어린 냉정을 되칮고, 자기 앞을 줄곧 바라보았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손의 떨림처럼 아름다운 쇠똥구리는 지평선으로 사라졌다. 생명의 책에서 말소되었을 수도 있는 네 가지 여분의 삶. 나는 왼팔에서 근육 하나를 고스란히 뜯어내면서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 알지 못했는데, 그만큼 나는 이 네 겹의 불운 앞에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배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라고 하는 바보 중에 상 바보는, 간다.  
1003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4) 댓글:  조회:103  추천:0  2019-07-2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4)           다섯번째 노래(1)       (1) 내 산문이 즐거움을 안겨주는 행운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독자는 내게 화를 내지 말지어다. 적어도 내 착상은 기발하다고 그대는 주장한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존경스러운 사람이며, 진실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진실이다. 그런데, 착오나 모멸이 넘치는 샘이라 한들, 어느 샘이 부분적으로는 진실이 아니겠는가! 찌르레기 군단은 그들 나름의 비행 방식이 있어서, 일사분란하고 규칙적인 어떤 전술을 따르기라도 하는 것 같은데, 오직 대장 한 사람의 목소리에 정확하게 복종하는 훈련된 군대의 전술이 그럴 터이다. 찌르레기들이 복종하는 것은 본능이 줄곧 새들을 무리의 중심으로 다가서도록 떠밀고, 비행 속도는 끊임없이 새들을 바깥쪽으로 끌어가는 나머지, 자성(磁性)을 띤 동일한 한 점을 향하려는 공통된 경향으로 결속된 이 새들의 집단은 쉴새없이 오고가고 온갖 방향으로 순환하고 교차하는 가운데, 일종의 매우 격렬한 소용돌이를 형성하니, 그 덩어리의 총체는 명확한 방향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그 자리를 돌며 자전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 각 부분이 저마다 순환운동을 하는 결과인지라. 그 중심은 끝없이 확산되려는 경향을 지니면서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옥죄는 대열의 반동에 의해 끊임없이 압박하고 제한되어, 이들 대열 가운데 어떤 대열보다 밀도가 높으며, 주변 대열들도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더 밀도가 높다. 이런 소용돌이치기의 기이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찌르레기들은 보기 드문 속력으로 주변 공기를 찢고, 그들 피로의 종점과 그들 순례의 목적지를 향해 매초마다 한 뼘씩 소중한 비행공간을 뚜렷하게 정복한다. 그대도, 마친가지로, 이 장절들 하나하나를 노래하는 나의 기이한 방법에 마음쓰지 말라. 그러나 시의 기본적인 어조는 그럼에도 여전히 내 지성에 대한 본래의 권리를 고스란히 지탱하고 있다고 믿으라. 그렇다고 해서 내 성격이 있을 수 있는 것들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당신이 이해하는 바와 같은 당신의 문학과 나의 문학이라는 극단적인 이항 사이에 무수한 중간 항들이 있으며, 항목을 늘이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려니와, 상상했던 그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 확대 해석되지 않으면, 합리적이기를 그치는 이 탁월하게 철학적인 개념에 협소하고 거짓된 어떤 것을 낳을 위험도 있을 터이다. 너는 열정과 내적 냉정을 결합할 줄 안다. 내향성의 관찰자야, 아무튼 나로서는 네가 완벽하다고 본다--- 그런데 너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구나! 네 건강이 양호하지 않다면, 내 충고를 따라(내가 너에게 내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충고다), 들판에 나가 산보를 하라. 초라한 보상이라고, 그렇게 말하겠는가? 공기를 마시고 나서 나를 다시 찾아오라. 네 감각은 한결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더는 울지 말라. 나는 너를 아프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친구야, 내 노래가 너의 공감을 얻었다는 게 사실 아닌가? 그런데, 또다른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도록 너를 막는 자 누구인가? 너의 기호와 나의 기호 사이의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결코 그 선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 이 경계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라. 따라서 이런 경우 (여기서는 문제를 가볍게 건드리기만 하겠다) 네가 저 수컷 노새의 상냥한 딸이자 불관용의 그리도 풍요로운 원천인 이 동맹조약에 완강하게 서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임을 유념하라. 네가 바보가 아니란 것을 알지 못했다면, 너에게 이런 비난을 퍼붓지도 않았으리라. 네 딴에는 흔들림이 없다고 믿는 공리의 연골 등껍질 속에 움츠러들어봐야 네게 이로울 것이 없다. 흔들림이 없을뿐더러, 네 공리와 평행할 다른 공리들도 있다. 네가 캐러멜을 별나게 좋아하더라도(자연의 기막힌 농담이로다), 그것을 범죄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한결 활력 있는 지성, 더 위대한 일이 가능한 지성을 지녔기에 우주나 비소를 더 좋아할 사람들은 그렇게 여길 충분한 이유가 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뾰족뒤쥐 앞에서 입방체의 표면을 말하는 표현 앞에서 무서워 떠는 자들에게 안온한 지배를 밀어붙이려는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나는 경험으로 말을 하는 것이지, 여기서 도발자의 역할을 맡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윤충동물(輪蟲動物)과 완보동물(緩步動物)이 반드시 그 생명을 잃지 않고도 비등점 가까운 온도로 덮혀질 수 있는 것처럼, 내 흥미로운 노작이 야기하는 짜증으로부터 천천히 흘러나오는 가혹한 화농성 장액(漿液)을 네가 조심스럽게 흡수할 수만 있다면, 너도 마찬가지일 테다. 아니, 뭐라고, 산쥐의 등에 다른 쥐의 시체에서 잘라낸 꼬리를 이식하는 데에 성공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똑같이, 내 시체가 된 이성의 다양한 변형들을 내 상상력 속에 옮겨보아라. 그러나 신중하라. 내가 글을 쓰는 시간에, 새로운 전율들이 지성의 대기를 내닫는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전율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왜 그렇게 찡그리느냐? 그뿐만이 아니라 너는 긴 수습을 거쳐야만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동작을 거기에 덧붙이기까지 하는구나. 매사에 습관이 필요하다는 걸 믿어라. 처음 몇 페이지에서부터 드러났던 그 본능적인 반발이, 독서에 열중할수록 그와 반비례하여, 마치 절개되는 정저(疔疽)처럼, 현저히 깊이를 잃었으니, 네 머리가 여전히 병든 상태라 하더라도, 너의 치유가 분명 멀지 않아 그 마지막 단계로 곧장 접어들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나로서는 네가 벌써 회복기의 바다 한가운데로 항해하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너의 얼굴은 여전히 핼쓱하구나. 슬프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네 안에는 범상치 않은 정신이 있으니, 나는 너를 사랑하며, 네가 약효가 있는 어떤 물질, 병고의 마지막 증상을 소멸하는 일이라도 촉진시켜줄 물질을 마시기만 한다면, 너의 완전한 해방이 절망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수렴제와 강장제로, 너는 우선 네 어머니의 팔을 뽑아(어머니가 아직도 건재하다면), 그것을 잘게 썬 다음에, 어떤 얼굴 표정으로 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단 하루 만에 그걸 먹어야 한다. 네 어머니가 너무 늙었다면, 더 젊고 더 싱싱한, 골막박리수술기구가 감당해야 할, 걸어갈 때 그 발목뼈가 어렵잖게 상하운동의 받침점이 될 만한 또하나의 수술 대상을 골라라. 예를 들어 네 누이를, 그녀의 운명에 동정하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거니와, 나는 아주 식어버린 열정으로 선량함을 흉내나 내는 그런 인간들에 속하지 않는다. 너와 나, 우리는 그녀를 위해, 이 사랑하는 처녀를 위해 (그러나 내게 그녀가 처녀임을 확증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억제할 수 없는 두 줄기 눈물을, 두 줄기 납 눈물을 퍼붓자. 그러면 끝날 것이다. 너에게 추천하는 가장 훌륭한 진정제는 핵 임균성 고름이 가득한 대야이니, 그 안에 미리 난소의 털투성이 낭종 하나와 포상 암종 하나, 감돈포경(嵌頓包莖)으로 곪아터지고 귀두가 뒤로 젖혀진 음경의 표피 하나와 붉은 괄태충 세 마리를 녹여넣을 것이다. 네가 나의 명령을 따른다면, 내 시는 두 팔을 벌려 너를 맞이할 것이다. 이가 그 입맞춤으로 모근을 절제(切除)하듯이.  
100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4>/심 상 운 댓글:  조회:129  추천:0  2019-07-26
  *월간 2008년 3월호 발표*  유승우/고종목/박대영의 시       유승우 시인의 시-「강물이 바다로」「달빛의 혼」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가슴속에 키우던 민물고기들은 다 두고 간다. 바다의 가슴속 어디에서도 강물의 추억이나 기억을 찾을 수 없다. 송사리 새끼 한 마리도 그 품속에 숨겨두지 않는다. 이토록 깨끗한 몸바꿈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지만, 나는 송사리나 미꾸라지처럼, 아니면 산골의 가재처럼 민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강물이 바다로」전문   빛의 혼은 달빛처럼 은은하고 푸르고 깊다.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내 정신도 푸르고 깊다. 한강 상류의 여울목에서 물살에 찬란히 빠져 죽은 달빛은 밤중의 강물처럼 푸르고 깊게 흘러온 달빛의 혼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고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달빛의 혼에 취해, 술처럼 취해 달빛이 그리워 달밤이 그리워 파리한 내 정신은 달 밝은 들판에서 머리를 푼다. -------「달빛의 혼」전문   시에 대한 관점은 시대마다 시인마다 다르다. 그 ‘다른 것’이 시의 생명을 영원히 유지하게 하는 시의 에너지가 된다. 만약 시에 대한 정의와 표현기법이 같아야 한다면 시인은 그만큼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시를 읽는 맛이나 시를 짓는 흥미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유승우 시인은 자신의 시관詩觀을 (시문학 2007년 2월호)에서 ‘신과의 대화’라는 관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표현방법은 이미지의 기법을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시는 우주의 구현 즉 ‘사람의 몸’이라는 독특한 발상을 내세우고 있다. 그의 이런 시관은 동양의 시관보다는 정통적인 서양의 시관에 맥이 닿는다. 기독교의 사유와 관념을 중시하는 서양의 시관은 현대시에서도 형이상의 관념을 추구하는 철학적 시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는 김현승의 주지적 관념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시의 내용을 ‘신과의 교감交感‘이라는 정신세계에 두는 형이상의 시는 기독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 날 때, ’나‘를 버리면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는 동양의 정신세계와도 교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시에서는 이런 정신세계에 대한 천착보다 그것을 어떻게 시로 표현하고 이미지화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미지는 감각의 산물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시의 물리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에서는 ‘사물성의 이미지’ 그 자체를 시로 인정하기도 한다. 「강물이 바다로」는 시인의 관념을 하나의 비유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려는 것 같다. 에서, 바다는 분별과 차별이 사라진 우주적인 세계를, 강물은 분별과 차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바다나 강은 본래는 같은 세계지만 인간의 지식과 분별에 의해서 차별화된 세계이다. 강에서 바다로 간다는 것은 차별의 세계(비본질적인 세계)에서 무차별의 세계(본질적인 세계)로 떠나는 정신적인 여행을 의미한다. 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여행은 사물이 원소로 환원되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시인은 바다로 가는 여행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 그 기도는 신과의 만남이고 대화다. 이 보이지 않는 대화의 내용을 비유적 언어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 이 시의 표상이다. 그러면 이 시는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한 것일까? 관념의 힘에 의해서 시인의 상상력이 너무 단순화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의 전달을 목표로 함으로써 시의 감각적 기능이 위축되고 설득적인 기능이 우세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점에서 그의 초기 시「달빛의 혼」과 비교가 된다.「달빛의 혼」에는 시인의 관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관념보다는 시인의 감각이 더 진하게 묻어난다. 시인은 어느 날 푸르고 은은한 달빛에 취해서 라고,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한강 상류에서 찬란하게 빠져 죽은 달빛이 수도꼭지를 통해서 나온다는 발상은 매우 독특하고 기발하다. 그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과학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상상이고 허상이라고 할지라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상상의 기능을 통해서 관념적인 시보다 시적 즐거움을 더 향유하게 된다. 이것을 러스킨(John Ruskin 영국 1819. 2. 8~1900.1. 20)은 “시에 있어서 표상이 진실치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경우가 흔하다”고 하면서 이를 “감상적 허위(Pathetic Fallacy)”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대시에서 시인들의 시적 방법론과 시관은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한 시관에서 하나의 차이점을 집어낸다면 시는 ‘진리발견의 도구’가 아니라는 견해와 시는 진리를 표상해야 한다는 견해다. 따라서 전자의 시인들은 자신의 의식과 심리적인 이미지에 더 몰두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무한한 이미지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서 시적 성과를 얻는 반면 후자의 시인들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표상에 시의 가치를 두고자 한다. 시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진리표상의 문제는 그리스시대의 시와 철학과의 갈등관계에서도 발견된다. 플라톤은 정서와 비논리를 존재의 바탕으로 삼는 시는 공리의 법칙과 엄정한 논리를 근본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나 철학에 비해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도구로서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인들 중 형이상학적 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주지적 관념을 통해서 시 속에 우주적 진리를 담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감성적인 시의 ‘시적 진실’과 형이상학적 사유시의 ‘진리’는 서로 공생하면서도 충돌하게 된다. 유승우 시인의 시「강물이 바다로」와「달빛의 혼」은 그런 관점에서도 흥미롭게 읽힌다. *유승우(柳承佑): 1969년 추천 등단. 시집: 등   고종목 시인의 시- 「APT가 아프다」「멀티카드섹션」   아파트창이 환히 조각보를 펼친다. 창 하나, 빨간 가구 빨간 옷 빨간 몸이 창 하나, 파란 수족관속에 파란지느러미의 물고기들이 창 하나, 주말 부부 뽀글뽀글 노랑머리 여자와 뽀메리온이 흔들의자에 앉은 흔들 입맞춤이 창 하나, 설날 저녁 삼대가 앉아 보는 축구경기 슛-초록축구공의 포물선 TV화면을 출렁 흔들고 창 하나, 낡은 차 안 불이 꺼졌다가 깜박 껴진다. 10년 무주택인 K씨가 타고 있다. 2월 밤 불을 켠다. 소장 〮〮〮․ 대장 ․ 십이지장 ․ 신장 ․ 비장 ․ 췌장 ․ 맹장 ․ 애간장 아파트 내장이 부글거린다. -------------「APT가 아프다」전문 * 뽀메리온: 애완용 강아지 종   바늘구멍 속에다 한 남자가 비릿한 살비늘 떨구었다 한 여자가 벽자壁紫색 도라지꽃 한 송이 놓고 갔다 한 노인이 소태 씹은 혀를 한 젊은이가 푸르게 발기한 꿈 한 페이지를 한 어린이가 구슬을 떨구었다 고운 색실로 한 땀 한 땀 그리고 또 한 망자가 삼베로 싸맨 빈 손 낙관을 한 신부가 주문하지 않은 성경책 한 권을 한 부처가 목탁소리 내려 놓았다 바늘 ‘구멍’ 속에 쫙 펼친다 멀티 카드섹션 ----------「멀티카드섹션」전문   시는 체험이라는 말이 있다. 시인의 상상이나 사유도 체험의 파생적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종목 시인은 실과 바늘을 삶의 도구로 삼아 평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조각보는 내 시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입체적 공간이다. 또한 종교와도 같은 정신적 주체이다. 그래서 바느질로 점철된 시를 쓴다. 그 공간은 시를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만 둘 수가 없다. 작업을 통해서 시간적 공간을 넘나들며 나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를 바늘땀 한 땀씩 뜨듯, 받아쓰기 한 것이 내 시의 기본이 된다.”라는 그의 말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삶의 진실과 체험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언어로 된 시만이 아니라, 회화繪畵의 세계에서도 독창적인 이미지로 ‘조각보’의 예술적 공간을 열어 보임으로써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시편 중 조각보의 연결과 유사한 시들은 독특한 감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에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 불연속적인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APT가아프다」에서는 불빛이 환한 아파트 창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그의 상상을 모아놓음으로써 인과적 연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준다. 그는 자신의 관념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주기를 통해서 ‘공감 나누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상상은 현실과 연결되지만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그 세계는 어떤 의미나 관념에서 해방된 제2의 공간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존재한다. 그것은 또 ‘독자들의 공간 넓히기’의 방법이 된다.「APT가 아프다」를 형성하는 4개의 화상畵像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인 상상의 그림을 펼치고 있다.가 그것이다. 이 시에서 ‘빨간 가구 빨간 옷 빨간 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빨간〓욕망으로, 또는 빨간〓생명으로, 또는 빨간〓성性으로 각각 다르게 환원하여 이 시를 감상하게 된다. 그리고 4번째 화상 속에 들어 있는 무주택자 k씨의 모습은 이 시가 현실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개의 화상에 담겨 있는 동적인 영상은 디지털의 생동하는 화면이 되고 있다. 그 영상은 언제나 입체적이고 현재형이다. 그리고 가변적이다. 그 변화는 작은 단위들의 집합적인 결합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하이퍼텍스트 적인 화상에도 시인의 내적 의식의 그림자가 진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멀티카드섹션」은 보여주고 있다. 의 구절들이 시인의 잠재의식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중심 키워드는 바늘구멍이다. 그 바늘구멍은 시인이 지나온 삶의 현장을 찍어서 보관한 카메라의 렌즈다. 평생을 바느질을 하며 살아온 그에게 바늘구멍은 세상을 보는 창이 되고 세상을 표현하는 기호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논리다. 그것은 이 시가 그가 경험한 생의 풍경을 멀티 화면으로 펼쳐놓았다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도라지꽃 한 송이를 놓고 간 여자, 푸르게 발기한 꿈 한 페이지를 놓고 간 한 젊은이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젊은 날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린이, 망자, 신부, 부처 등은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 인연들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가벼운 터치로 언어의 화면에 그려 놓은 멀티 카드 섹션의 그림들이지만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의 인생을 형성시켜준 인연들이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 대상들과 만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초월한 환상적인 그림으로 만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삶을 관조하는 눈이 환하게 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화상의 세계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 원망, 저주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도 환희,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정서도 다 잦아든 담담함과 맑고 투명한 의식만 남아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 ‘건너편의’ 또는 ‘초월’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림(사진)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사실(fact)일 뿐이다. 그 속에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다. 그런 심적 상태는 선禪의 세계와 같다. 선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고종목 시인의 시편 중 사회봉사의 체험을 표출한 작품들도 그것이 독립적인 영상이라는 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종목: 1996년 시집 로 시작활동. 시집:   박대영 시인의 시- 「깨밭」「김화백이 보낸 그림」   깨 심어 놓고 그날부터 깨밭에 앉은 할머니 종일 산비둘기와 다툽니다 금줄을 쳐놓고 허수아비를 세웠지만 만만찮은 놈들 할머니의 걸음으로 알아챘나 봅니다 생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영감은 비탈밭에 누워 자꾸만 말을 거는데 돌아앉은 할머니는 막대기를 두드리며 훠이 훠이 누굴 쫓는지 모르겠습니다 속없는 자식들 이제 비탈밭은 포기하라고 올 때마다 노래를 불러대지만 알았다며 그 냥 웃지요 너희들은 모른다며 돌아서 울지요 산비둘기들이 고맙답니다 종일을 앉아있어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오늘도 지팡이 같은 막대기 들고 비둘기 쫓으러 비탈길을 오릅니다 -----「깨밭」전문   나에게는 늘 따로 셈하고 갈무리해야 하는 밑천 같은 화가 친구가 있다 무슨 한이 그리 많아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가두어 버리고 싶어하는 욕심 많은 그림쟁이 그가 보낸 풍경화를 오늘 새벽에야 보았다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 고향집 같은 아니면 지난 밤 기억 없는 꿈속에서 한참 살았을 것 같은 나지막한 산 아래 흙담의 작은 집이 있고 꿈길 같은 황톳길을 돌아들면 고즈넉이 저녁연기 깔린 마당이 보인다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렀노라면 쇠죽 쑤던 김화백이 반갑게 뛰어 나오며 빨리 술상부터 보라고 고함지를 것 같은 꼭 들러보고 싶은 저 집 그림아래 찍힌 자그마한 문패를 들어서면 늘 배경으로 남아 있는 그 친구가 살고 있겠다 --------「김화백이 보낸 그림」전문   현대의 보편적인 도시인들에게 ‘고향故鄕’은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낱말일까? 추석이나 설이 오면 고속도로에 늘어선 귀향차량들의 행렬이 고향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기억 속의 시골마을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 곳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근래에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하여 화재가 되고 있는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는 그림의 기법이 탁월한 점이 그림 값의 대부분을 차지하겠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림 속에 묻어 있는 1950년대의 삶의 추억과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다. 그 속에는 빠른 변화 속에서 도시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향기와 정서가 들어 있다. 이런 과거회귀의 정서는 빠르게 변하는 현대 도시생활 속에서 벗어나서 느리게 사는 법을 추구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느림’을 21세기의 삶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의식주에서 옛날의 생활양식을 재현하고자 한다. 시인들 중에도 그런 사고방식에 동조하여 ‘느림의 미학’을 현대시의 시적 방법으로 구조화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는 문명에 대한 반동이며 비인간적 삶에 대한 향기로운 반항反抗이라는 점에서 시대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슈가 된다. 박대영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시편에는 단순한 향토의 풍물을 넘어서는 시인의 의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기법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한 쪽을 ‘향토鄕土’라는 배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깨밭」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간 현대농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할머니는 깨 밭에서 하루 종일 산비둘기와 다투며 산다. 산비둘기들이 깨의 씨앗을 파먹기 때문만이 아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간 남편은 산언덕에 묘지가 되어 누워 있고, 홀로 된 할머니는 남편 무덤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식들은 할머니에게 비탈밭을 팔아버리라고 하지만 그런 말에는 아랑곳 않는 할머니는 남편이 있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현실의 장면을 그는 라고, 사실적인 묘사描寫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정서나 관념을 최소화하고 할머니를 하나의 이미지로 부각시킨 언어의 그림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이미지는 고향을 지키는 상징적인 캐릭터가 되어서 독자들에게 고향의 원형原形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원형의 이미지는 는「김화백이 보낸 그림」에서는 더 생동하는 이미지가 되어서 고향의 정취를 풍긴다. 김화백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흙담의 작은 집이나 저녁연기 깔린 마당이나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렀노라는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빨리 술상부터 보라고 고함지르는 쇠죽 쑤던 김화백의 모습은 그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싶어 하는 낭만적인 고향의 이미지다. 그는 그것을 환상 속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그림은 환상의 액자 속에서 뛰어나와 살아 있는 현실 속의 그림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생동하는 심리적인 이미지는 독자들을 시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이 환상과 현실의 조화는 박대영 시인의 시를 ‘독자적인 존재성이 있는 향토의 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박대영: 1998년 월간 등단 시집: 「봄을 찾아 남으로 달리지 마라」
100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3>//심 상 운 댓글:  조회:125  추천:0  2019-07-26
*2008년 2월호 발표* 김시철/위상진/이솔의 시   김시철 시인의 시-「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   눈 내리는 아침 현관을 나서려니 현관마루로 올라서던 녀석 후닥닥 도망을 친다.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 한건 나다. 도망가는 놈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이 아침 놈이 웬일로 우리 집엘 온 것일까 나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눈 쌓인 산속엔 먹을 것이 없어서 혹여 내 집엘 동냥 온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내내 도망치던 놈의 뒷모습이 선해 먹을 것을 내다놓고 닷새를 기다렸지만 종무소식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닌 걸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덫에 걸린 고라니가 마을 사람들 술안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전문   요 며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만큼을 살았으니 이제는 비켜서야 할 때다. 혼(魂) 다 빠진 육신(肉身) 굳이 무덤 만들어 썩힐 것이 아니라 뒷동산 어느 소나무 밑에 다가 한 줌 수목장(樹木葬) 을 하면 어떨까. 요 며칠 그 생각에 깊이 들다보니 뒷산이 모두 내 집이요 소나무가 모두 내 몸만 같네. -「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전문   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인 자신의 체험이다. 그 체험은 시를 의미의 세계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의 세계로 끌어 올리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T.S.엘리엇의 “시란「무엇은 사실이다」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란 말도 시의 창작과정創作過程에서 체험을 중요시한 시론으로 해석된다. 이 시론은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문덕수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도와 맥을 같이 한다. 김시철 시인의 연작시「강원도」에는 그가 서울을 떠나서 강원도 평창 산골에 터를 잡고 산 몇 년간의 생생한 생활체험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현대시의 기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자연발생적인 정서의 표현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fact)이 주는 시적 감동 속으로 독자들을 들어가게 하고 시를 읽는 맛을 진하게 한다. 특히 그의 사상이나 견해가 직설적으로 들어있지 않고, 그것이 사실적 체험 속에 융합되어서 표현된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된)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깊은 울림을 준다.「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특별한 언어적 수사가 없어서 언어와 사실이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지만 독자들을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감성과 사유의 공간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는 어느 눈 내린 겨울 날 아침, 현관에서 고라니와의 예상치 않은 마주침에 놀란다. 그때 그는 도망가는 고라니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라고 고라니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서술하고 있다. 그 심경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삶을 누리는 순수한 동화同化의 마음이다. 추운 겨울철을 견디는 산속의 동물들에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 굶주림이다. 몇 년 동안 산골 생활을 한 시인은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과 공생共生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터득하고 있다. 그 방법에는 관념적인 사상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자연과의 화합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겨울철 산짐승들이 다니는 산길에 덫을 놓고, 그 덫에 걸린 짐승들을 술안주 감으로 삼고 즐기는 것을 농한기 놀이의 방법으로 당연시한다. 그는 이 시의 끝 연에서 그 인습적因襲的(원시적)이고 무지無知한 삶의 현장을 라고 담담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어조는 담담하지만 그 어조 속에 담긴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은 시의 여운으로 남아서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 감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하느냐고, 독자들에게 인간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자연친화 사상)은「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에서 더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서라고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라고, 한없이 넓은 또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상상에 젖어들고 있다. 그의 상상은 관념의 문을 열고 나온 사실적인 이미지가 되어서 이 세상의 생명의 뿌리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변하는 자연의 원리 속으로 벌거벗은 시인의 정신이 들어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저 뒷동산의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된다는 상상은 인간의 우월성을 모두 벗어버린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큰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것은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시의 향기를 즐기면서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게 되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 김시철(金時哲): 1956년 김광섭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 등 다수   위상진 시인의 시-「한강」(각색 시)   나는 흐르는 동안에만 물의 씨앗을 낳는다 태백에서 흘러오다 두물머리 어디쯤에서 천 년을 잘라내고 어둠이 치마폭을 들추며 달을 내려놓는다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 (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오래 전 끊어졌다 이어진 다리 아래 물그림자를 밀고 가는 무늬 흐르듯 멈추듯 달이 사리를 품는 중이다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 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 김창렬이 그린 흐르지 못한 물방울이 바다로 가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양수가 싹을 틔우며 내 품으로 떨어진 꽃잎 같은 이름 하나 둘 불러낸다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 나는 흐르며 단단한 심이 박힌 물의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한강」(각색 시) 전문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잃어버렸던 음악성과 공연성을 다시 찾기 위한 시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인들은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시의 영상을 비추고, 조명과 배경음악과 연기, 시의 낭송과 노래 등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는 시의 이미지를 관객(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시를 라고 명명命名한다. (2007년 11월 17 한국 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회 전국 공연시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공식적으로 의 장르 선언을 함) 현대시의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모더니즘 시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따라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시와 연극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서 ‘열린 시’의 의미를 갖는다.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 시)은 이런 관점에서 관심을 끌고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자신이 창작한「한강」을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연출의 과정을 거치고, 자신의 연기를 통해 관객(독자)들에게 ‘보여주기(showing)’를 한다. 그리고 그 연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각색시脚色詩「한강」을 새로운 창작시와 같이 발표하고 있다. 이런 그의 각색시는 일반적인 서정시를 공연시로 만드는 ‘연출 노트’를 시의 행간에 넣은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 자체가 창조적인 시적 행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각색시「한강」은 원시와는 다른 독특한 시의 맛과 향기를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원시는 시인의 사유와 개성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평면적인 서정시다. 는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의 ‘나’(주체)는 한강이고, 한강의 독백으로 시가 전개된다. 따라서 시인의 관념이 시의 독백을 지배하고 한강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라는 ( )속의 지문은 가상현실의 한강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에 생동감과 예술적인 환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자극을 가하고 환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시의 감각을 오감五感으로 확대한다. 이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효과를 일반적인 서정시에 도입하는 예例로 ‘시+연극’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한 장면의 연극을 감상하는 이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에서는 연기자의 연기와 그가 사용하는 소도구에서 독자들은 독창적인 감각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 환상의 공간속으로 자신들의 상상을 넣어보는 재미와도 만나게 된다. 특히 CD를 사용하여 반짝이는 한강의 물빛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현대적인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objet)와도 관련되는 시적 소재의 확대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동하는 감성은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에서는 어떤 논리적 흐름에서 벗어난 상상의 세계로 비약하는데, 이는 시의 공간을 구체화시키고 난해성을 풀어주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상의 집합적 구조가 원을 그리며 돌다가 연기자의 다리 아래로 떨어진 빨간 체조 리본의 꽃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시의 상징이 극의 상징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이때, 연기자가 여자일 경우 시 속의 ‘양수’와 어울려서 생명의 원천을 더 본질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시의 끝부분 라는 평범한 구절이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로 인해 성스러운 제의적祭儀的 장면으로 승화되고, 이때 연기자(시인)는 물에서 생명을 받아내는 존재자로 부각된다. 이런 극적 전환의 장면에서 나는 원시보다 각색된 시의 매력에 더 끌리게 되고 각색시의 독립적인 완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시)이 아직 미완성의 실험적 작품이지만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연성이 시사적詩史的 가치와 중요성만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위상진 : 1993년 월간 등단. 시집:「햇살로 실뜨기」   이 솔 시인의 시-「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암벽 위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여 그 뿌리를 붙안고 산다 균근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곰팡이는 틈새의 물기를 먹고 실뿌리의 왕성한 힘을 양분으로 큰다 실뿌리는 암석을 부수며 곰팡이와 하나가 된다 은밀한 이야기 나누며 가느랗고 끊기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암석이 갈라지고 드러난 솔뿌리의 자태 꿈같이 뽀얀 실뿌리덩이로 피어난 한줌 흙 없이도 버텨낸 거센 바람에도 암석을 붙안고 서게 한, 나는 내밀한 암각화를 그리는 곰팡이다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전문   코끼리 장식이 붙어 있는 향나무 도장을 판다 삼각칼 끝으로 코끼리의 발바닥을 파고든다 삼각칼 끝 칼날을 세우고 파고든다 장지의 굳은살에 칼을 기대고 신중하게 한 점, 한 획을 새긴다 천천히 획을 그려나가면서 깊게 파고들고 부드럽게 깎아낸다 살짝 점을 찍고 가볍게 날리듯 삐치면서 이 아무개를 새긴다 향나무의 속살은 둥근 얼굴로 나타난다 칼끝에서 찌꺼기를 털어낸다 둥근 얼굴에 살이 붙고 여린 미소 드러나면 이제 향이 우러나올 차례다 한 점, 한 획에서 둥근 얼굴에서 깊은 향이 피어난다 ------「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전문   시를 건축물에 비유하면서 정서와 사상은 시라는 건축물의 중심이 되는 설계도나 기둥과 같다고 하는 이론은 쉽게 변하지 않는 보편성을 갖는다. 그 이론은 보통의 글쓰기 이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시의 겉모습이 되는 사물(사건)은 시의 중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 즉 건축물의 미적 표현도구나 소재로 평가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서와 고정관념(이념)에 식상食傷한 현대 시인들은 시의 중심을 시인의 정서와 사상만이 아닌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사물자체(사건)에 두려고 한다. 그들은 언어의 기능을 의미의 전달에서 언어의 순수한 예술적 기능으로 전위轉位하려 하고, 사물(사건)을 비유比喩나 상징(의미)의 도구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사물성의 세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정서나 사상은 대부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인식인데 반해서 사물(사건)과 언어는 객관적이고 비교적 가변성이 적은 독자적인 존재의 세계(fact)이기 때문이다. 이솔 시인의 시편에는 이런 ‘사물인식의 세계’가 선명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적 정서의 과장된 노출이나 고정관념의 인과적 논리성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신선한 사물성의 언어를 맛보게 한다. 그는 독자들을 자신의 행위나 사물 속으로 안내하면서 사물성의 세계가 펼쳐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의 앞부분은 미세한 사물의 세계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끝부분은 사물세계 속으로 들어간 자신의 모습 즉 사물과 합일合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는, 이 시 속에는 사물세계에 대한 시인의 몰입과 세밀한 관찰만 있을 뿐, 어떤 정서나 사상의 개입이 없다. 그의 사물인식은 대상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중립적인 위치에서 직관적이고 단도직입적 單刀直入的으로 사물과 만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의 눈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활동을 고성능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 과학자의 눈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생태에 집중되고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사물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끝부분 에서는 곰팡이와 한 몸이 된 시인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고, 그에 대한 해석은 어떤 관념이 아닌 독자의 상상과 감성에 맡기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중심은 사물세계에 대한 감지와 인식이고, 그 인식이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환기喚起’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물을 만지고 또 다른 사물을 창조해내고 즐기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사물인식의 시원始原이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흙이 무엇인지 개념을 알기 이전에 흙을 만지고 흙으로 무엇을 만들고 하는 놀이를 통해서 흙과 친해지고 흙을 인식하게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시는 보는 것보다는 만지고 즐기는 것이 더 사물의 근원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삼각칼로 나무에 도장을 새기던 자신의 체험을, 라고, 극히 사실적인 시의 언어로 재현再現하면서 독자들을 사물의 내면으로 몰입시킨다. 이런 그의 사실적 진술陳述의 언어 속에는 어떤 관념도 사상도 침투할 수 없다. 그 속에는 오로지 언어이전의 ‘물질과 행위行爲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관념)의 시달림에 지친 독자들에게 맑은 물과 같은 투명한 사물성의 감성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의미생성 이전의 사물성의 세계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우고, 세상의 풍화작용에 닳아버린 감성을 회복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언어이전의 세계로 떠나가는 상상에 젖게 한다. 이런 시를 시의 방법적인 면에서 ‘사물시事物詩’라고 명명命名하기도 하는데, 이솔 시인의 독특한(unique) 감성의 언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이솔 : 2001년 월간 등단. 시집: 「수자직으로 짜기」「신갈 氏의 외투」  
100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2>/심 상 운 댓글:  조회:143  추천:0  2019-07-26
월간 2008년 1월호 발표   송시월 시인의 시-「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입춘 무렵」   계곡의 물이랑 일렁일렁 바람이 밟고 간다. 오후 3시의 햇 살이 물속에 꽂힌다. 사정하듯 햇살올챙이들 쏟아져나와 바 람의 보폭만큼 흔들리는 바위의 배꼽 위로 줄줄이 기어오른 다. 비위가 기웃 몸을 튼다. 빛살무늬의 버들치 개버들 가지 의 그물망을 빠져나와 여인의 얼굴이, 달이 잠깐 갈라졌다가 이내 붙는다. 얼굴이 찌르르 아프다.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 을 담근다. 오후 3시의 풍경에 뒤엉켜 일그러지는 관념의 예수. ------「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전문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시 속에서 정서와 관념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것들을 못 먹게 하는 다이어트의 고행과 다르지 않다. 송시월 시인은 감상적인 정서와 상투적인 관념의 풍요로운 유혹을 물리치고, 대상을 직관하면서 군살이 붙지 않은 생동하는 디지털적인 감성의 언어(탈관념, 사물성의 언어)로 대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그 첫 작업을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관념을 최상의 것으로 모시고, 고정관념의 틀 속에서 시를 짓는 시인들에게는 지식과 사상, 종교적 관념으로 가득한 언어는 꿈속의 궁궐과 같겠지만, 깨어있는 시인에게는 지식과 사상, 종교적 관념이 축적되어 있는 언어는 언어의 감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은 그가 계곡의 물을 보면서 자신의 정신을 투명한 수면에 꽂히는 햇살같이 환하게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산 속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괴인 맑은 웅덩이를 본다. 아주 무심無心한 상태에서 계곡의 물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오후 3시의 햇살이 수면에 꽂히는 것을 보면서 집중된 자신의 마음을 계곡의 물에 일치시키고 있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라고 사진을 찍 듯 영상언어로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디지털 시’에서는 사진 찍기의 기법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접사接寫’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접사接寫’는 “비위가 기웃 몸을 튼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대상을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거울에 비친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어에는 그의 투명한 마음의 정서가 배어들게 되고 시적 향기가 풍기게 된다. 그러면서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을 담근다.”는 감각언어를 통해서 촉각과 청각으로 전달되는 물의 물성物性을 환기시키고, 정靜의 분위기를 동動으로 전환한다. 이 동적인 전환은 시 속에 생동의 기운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절정은 시의 끝 구절 속에 들어 있다. “오후 3시”는 실제의 시간으로 정확성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의 감각인데, 이 생생한 감각의 물속에서 일그러지는 것은 ‘관념의 예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관념으로 가득한 언어의 감옥에서 과감히 탈출한 시인의 벌거벗은 정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시로 탄생한다. 만약 그가 맑은 물을 보면서 상상 속의 신神의 모습을 떠올리고 신의 섭리攝理를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나타냈다면, 이 시는 보통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맑고 투명한 시선과 정서와 감각의 언어로 대상(사물)을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동안 쌓였던 관념을 토해내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시에서도 그런 면이 보인다. 「입춘 무렵」에서도 그의 맑은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 시에서는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사실을 정확하고 명료한 언어로 표현한다. 이때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이렇게 직감적인 감각과 영상성이 사물성의 투명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디지털 시’는 시를 정서의 노출로만 여기는 감상적인 서정시(낭만시)나, 시대적 현실에 경도되어서 산문에 가까워지는 이념지향의 사회시나, 모더니즘의 주지적 관념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21세기의 새로운 영상언어의 시(탈관념 시, 사물시, 기호시,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모두 포용하면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副應하는 시를 모색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현대시사韓國現代詩史에서 1930년대 대표시인 김기림이 평론
99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1>/심상운 댓글:  조회:136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12월호 발표    문정희 시인의 시-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으로 들어와 뜨락에 나뒹구는 부질없는 나뭇잎들 한쪽으로 쓱쓱 치워주세요 언듯 보면 아까워 보이지만 습관뿐인 저 거실의 꽃병 먼지만 앉히고 있는 의자를 치워주세요 그리고 가장 뜨거운 곳에 심장을 다시 놓아 처음처럼 쿵쿵 뛰게 해주세요 거꾸로 돌며 추억만을 되감는 미친 시계가 새 비둘기를 낳을 수 있도록 태엽의 먼지도 털어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에 들어와 깊고 쓸쓸하게 박힌 그의 뒷모습 쓸어내버리고 쿵쿵 뛰는 그이 심장을 나의 심장 위에 포개주세요 그의 사랑으로 눈부신 아이가 생기도록 내 안에 맑은 물길을 내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전문   새 햇살 투명한 시 한편 써보려고 처녀림을 찾아 헤매는 십칠층의 겨울 아침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왔다 지난가을 금 간 유리를 추위가 오기 전에 갈기 위해서였다 새 유리를 갈아 끼우려면 우리는 먼저 창틀부터 허물어야 했다 갑각류 껍질처럼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고 접착제로 봉할 수 없는 후미진 언어의 틈마다 더운 숨결을 훅훅 불어넣었다 고정관념이 서서히 허리띠를 풀었다 칼끝으로 민감하게 오므리는 입술을 열자 속살에서 연꽃이 발그레 피를 머금었다 하늘이 드디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빛나는 상처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무지개 오래 품은 비수처럼 빛을 발하는 시간이란 이토록 깨지기 쉬운 것일까 그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만져보고 싶다고 표현하는 순간 창가에 밧줄하나가 아찔하게 내걸리었다 청년이 거기 처형처럼 매달려 있었다 끝내 지상에 내려놓을 수 없는 나신을 납작하게 누르며 겨울 아침, 새 햇살로 빚은 시 한편이 나의 생을 환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겨울 유리창」전문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경건한 제의祭儀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말끔하게 비우는 일부터 한다. 그리고 습관(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일상에서 일탈하려는 자세를 갖춘다.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먼지 쌓인 인연들에서 떠나기를 시도한다.「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은 그런 시인의 내면의식을 소박하고 단순한 기원祈願의 언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라고. 그러나 유사한 주제의식이지만「겨울 유리창」은 새로운 시적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시의 생생한 속살을 만지게 한다. 문정희 시인은 어느 겨울 날 십 칠층 아파트에서 새 햇살처럼 투명한 시를 쓰기 위해서 정신의 처녀림處女林을 찾아 헤맨다. 그때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다. 지난 가을 금 간 유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서다. 그는 청년과 함께 먼저 창틀을 허문다. 이 창틀 허물기는 시인의 내면에 잠재한 갑각류의 껍질 같은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는 일과 이미지가 겹친다. 이렇게 전개되는 ‘유리창 갈아 끼우기’는 이 시에서 중심사건으로 부각되면서 은유隱喩의 문을 연다. 새 유리를 갈아 끼우는 작업과 새로운 시를 쓰는 일은 은유의 세계에서는 두 개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는 구절은 ‘유리창 갈아 끼우기’라는 사건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견실한 사실적 구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던진다.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 청년이 처형당한 것처럼 밧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복합적인 이미지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 발단은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 청년의 이미지와 생생한 아름다움을 만져보고 싶은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가 결국은 ‘깨지기 쉬운 시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시인이 순간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공연시적公演詩的인 특성이 발견된다. 처형처럼 밧줄에 매달려 있는 청년의 이미지는 극적인 요소(심리적 갈등)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 시를 무대에서 공연한다면, 푸른 유리창을 들고 들어온 청년과 밧줄에 처형처럼 매달려있는 청년은 대조적인 이미지로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하는 요소가 될 것 같다. 그것은 또 현대의 서정시가 단순한 기원祈願의 어조나 영탄과 감상으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극적인 영상의 이미지를 창출할 때, 단순구조에서 복합구조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서정적 진술에서 주지적 이미지로, 평면에서 입체로 성공적인 변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例가 된다. 나는 문정희 시인의「겨울 유리창」을 거듭 읽으면서 푸른 유리를 든 청년의 이미지를 통해 그가 어떤 자세로 ‘현대시’를 쓰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시는 그의 치열한 시정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선光線이었다.   *문정희(文貞姬): 1968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꽃숨」「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찔레」「우리는 왜 흐르는가」등   문태준 시인의 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는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 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전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족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 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전문   이웃에 대한 뜨거운 연민憐憫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는 지적인 깨달음의 언어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현대시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들어 있는 서정시가 독자들과 가깝게 연결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로 부각된다. 문태준 시인의 시에는 이런 연민의 정이 흥건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축축하게 적셔준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영탄이나 주관적 감상에서 벗어나서 신선하고 독창적인 비유와 사실적인 정황情況의 세밀한 표현에 의해서 객관화되어 있다. 이 객관화는 그의 시를 공감하게 하고 견고한 시로 만들어 주는 원천이 된다. 에서 그는 움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어물전의 개조개의 맨발 비유하고 또 그들의 맨발을 죽은 부처의 맨발로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이중의 비유를 통해서 그는 움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 부처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사실 부처라는 존재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인식하는 ‘자비慈悲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의 비유는 타당성이 있고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비유가 된다. 따라서 는 이 시의 끝 구절은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가장들을 떠올리게 하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실직 가장들의 눈물을 느끼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삶과 어떤 끈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정황을 그는 가상현실의 이미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을 뿐, 독자들을 향해 어떤 주관적 언설도 늘어놓지 않는다. 그것이 이 시의 아름다움이다.「가재미」에서는 그의 객관적인 자세가 대상과 한 몸이 되는 동화同化의 자세로 바뀐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실성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추상적인 개연성에만 의존하는「맨발」보다 시적 공감을 더 진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가재미처럼 누워있는 그녀의 곁에 가재미가 되어 눕는다고 한다. 이런 그의 행위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시적현실에서는 진실이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그런데 이 시에서 그녀와 그가 어떤 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녀는 한 평생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 온 농촌의 아낙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녀의 옆에 가재미처럼 누운 그는 라고 한다. 그는 왜 그녀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 ‘그녀’라는 모호한 대명사로 표현했을까? 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고모’나 ‘누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녀라고 하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넓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라는 대명사는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만이 아닌 흙냄새 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대상을 객관화시킨다. 그것은 부처가 모든 생명체를 평등하게 포용하는 것과 같다. 이 시의 끝부분 는 사람사이의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산소호흡기로 들이 마신 물을 마른 그의 몸 위에 적셔주는 그녀의 행위는 과학적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뜨거운 마음을 전하는 행위로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그녀의 넉넉한 삶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문태준 시인의 참신한 비유와 사실성, 뜨거운 연민이 더 큰 시의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태준: 1994년 신인상으로 등단함
99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0> / 심 상 운 댓글:  조회:121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11월호 발표                    이낙봉 시인의 시-「050106」「040823」   지금 시를 쓰려는 내가 식은 커피 잔 가위 구두 종이 의 자 책 연필 벗어놓은 양말 실비듬으로 떨어지고, 지금 시를 쓰는 내가 흐린 하늘 고층아파트 마을버스 보도 블 록 세탁소 약국 부동산 찢어진 비닐봉지로 휘날리고, 지 금 시를 쓴 내가 머리카락 담배 베개 이불 불 꺼진 전 등 재떨이 멈춘 시계 구겨진 잠옷으로 늘어지고, 지금 시 를 지우는 내가 어제의 내가 디지털 시계의 1,2,3,4,5, 6,..........쪼개지고 부서져 바다로 뛰어 들고, 지금 시를 지 우는 내가,                                               -----------------「050106」전문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가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는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와 연보라색누드가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는다) 불타는 지붕위에서 초록염소가 사라지고 연보라색누드 와 붉은 꽃이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손톱을 깎는 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와 연보라색누드가 사라지 고 붉은 꽃이 회색하늘과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손톱을 깎고 코털을 자르고......)   그는 그의 흐린 햇빛마을에서 색 색 색과 놀고 나는 나 의 흐린 햇빛마을에서 색 색 색에 묶여 雨期의 말과 논다 ---------------「040823」전문                                                                              음악가가 소리를, 화가가 선과 색채를 예술의 소재로 삼듯이 시인들은 언어를 소재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음악가나 화가에 비해서 비예술적인 면이 너무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소리’나 ‘색채’에는 의미가 없지만 언어에는 소리(기호)와 함께 의미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예술을 지향하는 시인들에겐 언어가 ‘존재의 집’(하이데카)이나 ‘존재의 무기’가 아닌 ‘존재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언어를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하려는 시인들에게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사고思考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의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한국 현대시에서 김춘수가 제창하고 실험한 것이 ‘무의미 시’다. 말년에 그는 무의미의 실험을 포기하고 의미 쪽으로 회귀하였지만 그의 ‘무의미 시’는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언어의 퍼포먼스였다. 그의 ‘무의미 시’에는 언어학의 원리가 밑받침이 되어 있다. 언어는 실체가 아닌 자의적恣意的이고 추상적인 기호다. 예컨대, ‘백두산 문방구’라는 상점의 명칭에서 문방구는 실체의 매재媒材가 되는 자의적인 기호이지만 ‘백두산’은 실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언어가 이렇게 실체를 떠나 ‘추상적인 기호’로 존재한다는 것은 실체(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의 언어가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색채같이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성을 갖게 되는 근거가 된다. 미당의 대표시로 알려진 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에서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는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나 형이상학적 판타지를 구현하는 기호로서의 언어일 뿐 실제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 시에 쓰인 언어들은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미적 공간’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에서 언어의 역할은 순수 회화에서 색채의 역할과 같다. 그래서 실제의 용도, 공리성에서 이탈된 사물을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하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이론’과도 맥이 닿는다. 이낙봉의 시에도 언어의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강하게 감지된다. 그는 ‘의미’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 위해서 시의 제목을「050106」등의 숫자로 표시하고 있다. 그의 시집(‘미안해 서정아’)을 보면, 이 숫자의 나열은 시를 쓴 연월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私的인 언어행위일 뿐 공적인 의미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무의미한 기호가 된다. 시의 내용에서도 그는 현실적인 인과관계나 의미형성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의식적인 행위를 한다.「050106」에서 라는 구절을 보면, 그의 언어가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내면의식 쪽으로 떠나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시가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의 예비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쓰인 시어들은 모두 구상어具象語이지만 의미면에서는 구체성이 없는 환상에 가까운 추상抽象이 된다. 그러나 이 시에는 ‘나’라는 주체의 의식이 들어 있어서 시인의 내면의식의 추적을 통해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고약같이 붙어있는 끈끈한 정서의 작용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040823」에는 추상적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무대’가 보이고, 칙칙하고 끈적거리는 의미(관념)가 말끔하게 지워진 언어(기호)의 가벼운 몸놀림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라는 시상의 전개가 거칠 것 없는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불타는 지붕, 초록염소, 연보라색누드, 우울증, 머리를 감는다, 이빨을 닦는다’ 등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현실의 행위와도 관계가 없는 기호화된 언어로 다시 탄생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무 부담 없이 시인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놀게 되는 것이다. (  )를 경계로 하여 지붕 위의 풍경과 나(캐릭터)의 행위를 분리하여 입체적인 표현을 한 것도 재미있는 착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시적 행위(언어유희)에 라고 주석註釋을 붙이고 있다. 이 ‘주석 붙이기’에는 의미(현실)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의미 쪽으로 창문을 열어놓고 있는 그의 의식이 보인다. 이 의식은 현실과 상상의 조화라는 면에서 ‘기호시’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건강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펼친 정신적인 퍼포먼스가 얼마나 치열하였나, 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언어실험에 몰두하던 1930년대 이상李箱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낙봉: 198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 아랫도리를 환히 밝히는 달」「돌 속의 바다」「다시 하얀 방」「미안해 서정아」등   이승하 시인의 시- 「소가 싸운다」   모래사장는 시방 엄청나다 뜨거운 힘과 힘이 맞서 있다 쏘아보는 저 소의 눈이 링에 오른 격투기선수 같다 거품을 입가에 디그시 물고 앞발로 호기롭게 모래사장을 찬다 징이 울리자   힘이 힘을 향해 달려나간다 사방팔방으로 모래가 튀고 사람들의 함성........소와 사람의 힘이 튄다 저놈이 지면 내 힘이 날아가고 저놈이 이기면 남의 힘이 내 힘이 되는 세상 함쪽 소의 뿔에 더 큰 분노가 �려 다른 소의 뒷발이 밀리기 시작한다   힘으로 들이 받자 힘으로 맞받는다 모래사장에 튀는 피 뿌려지는 침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싸움판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을 참던 소가 마침내 삼십육계를 놓자 징이 울린다 싸움이 끝나자 한쪽은 더 큰 함성을 지르고 다름 쪽은 욕설을 내뱉는다   쫒겨 달아난 소가 못내 미운지 이긴 소 못 다한 힘을 어떻게 하지 못해 씩씩거린다 이긴 소의 주인은 소 등을 어루만지고 진 소의 주인은 카악 가래침을 뱉는다 푸른 지폐와 누른 수표가 오갈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소의 눈빛보다 더 살벌하다 더더욱 분노에 차 있다 ---------「소가 싸운다」전문   ‘소싸움’은 두 소를 맞붙여 싸우게 하는 경상남도 진주 일대의 전래 민속놀이다. 매년 음력 8월 보름을 전후하여 연중행사로 거행된다. 소 임자는 소를 깨끗하게 씻긴 다음 가지각색의 천으로 정성들여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를 갖가지 아름다운 천으로 장식하며 소목에는 쇠방울을 단다. 소 임자도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실로 수놓은 주머니를 차고 소 싸움터로 소를 몰고 간다. 소 싸움터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꽹과리와 북을 울리고 새납을 불면서 모여들어 각기 자기 마을소가 우승하기를 기원한다. 소싸움을 주관할 노련한 도감都監이 선발되며, 싸움 붙일 짝소는 연령과 체구를 고려하여 비슷한 것끼리 골라 약한 소들부터 싸움을 시킨다. 도감이 순서에 따라 호명하면 양측에서 소 임자가 소를 앞세우고 나와서 2~3m 떨어진 뒤에서 기세를 돋우며 성원한다. 이때 소는 고삐를 다 풀어주어 몸에 걸치는 것이 없도록 한다. 대개 소싸움은 15~20분이면 쉽게 결판이 난다. 싸움에 이긴 소 임자는 소잔등에 올라타 상품을 소에 싣고 우승기를 들고서 풍물소리에 맞추어 흥겹게 마을을 돌고 돌아온다. 참가자들은 인근 남강南江 터로 가서 흥겨운 대동놀이판을 벌인다. 농민들은 소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구입할 때 키가 크고 몸체가 길고 발이 실하며 골격이 조화되고 뿔도 멋지게 좌우로 뻗은 소를 고르며, 늘 관심을 갖고 소를 관리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민속 문화) 이런 풍속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축인 소를 귀하게 여기고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주민들의 단합시키는 ‘대동놀이판’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전통성을 갖는다. 오늘 날에도 추석 때면 진주지방을 비롯하여 인근 지방에서는 ‘소싸움’ 판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명절풍속의 놀이판도 현대사회에서는 물질주의에 오염되어서 ‘대동大同’이라는 목적에서 이탈되고, 개인의 이기심을 채우는 동물학대의 격투기로 변질되었음을 이승하 시인의「소가 싸운다」는 생생한 사실적 사생寫生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이면을 꿰뚫는 시선으로 인간의 욕망이 뿜어내는 비인간적인 면을 고발하고 있다. 라는 구절에서 그의 그런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그의 시적방법에는 두 가지의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첫째로 그의 시는 현실을 사진을 찍 듯이 객관적으로 리얼하게 사생함으로써 시어의 기능을 단순화시킨다. 그의 시에서 언어와 사물(사실)이 1:1의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언어의 예술적 기능과는 거리가 멀지만 체험적 사실을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명쾌하고 생동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탈-관념적이다. 이런 방법은 ‘현실고발’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시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이 리얼리즘 시의 특성이다. 두 번째로는 ‘현실고발’ 속에 들어있는 시인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그것은 휴머니즘 시의 특성과 관련된다. 휴머니스트는 이 세계에 완전하고 아름다운 이념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들의 이념은 철학이나 종교적 관념, 또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신념이 되어 행동화된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휴머니스트는 이지러진 인간성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비애를 느끼며 비판하고 분노한다. 이 시에서 그가 ‘소싸움’의 현장에서 느낀 비인간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그것이다. 라는 이 시의 끝 구절은 그런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소싸움’이라는 객관적 대상에 주관적인 높은 인간성과 도덕적 가치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그는 결코 너그러운 마음으로 소싸움 꾼들을 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소싸움의 현장에서 분출되는 생의 에너지나, 그 광경을 보고 잃어버렸던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관객들의 심리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 하는 것은 부질없는 행위일 수도 있다. “휴머니스트에게 대해서 사상은 체험의 한 단계로서 감각이나 감정과 불가분리不可分離한 관계에 있다. 그는 체험의 요소들이 결합해서 생동하는 모양에 늘 주목하기 때문에, 사상의 객관면과 주관면의 차별을 그렇게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사상과 정서의 융합된 상태를 추구하여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흥미를 갖지만, 객관적인 현실이 횡폭橫暴하게도 인격을 분단하여 체험의 조화를 유린할 때에는 그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싸움을 사양치 않는다.”(최재서「문학원론」Ⅺ사상) 이 구절에는 휴머니즘 시에 들어있는 체험적 생동감과 사상과 정서의 관계, 사상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분출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 이론에 이승하의 시를 대입하면 그의 시는 체험적 생동감이라는 면에서는 이 이론에 부합된다. 그러나 그의 시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집단적 이념의 시’(1920대의 카프계열, 1980년대의 민중주의 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이념(사상, 신앙)에 근거를 둔 휴머니즘 시로 분류된다. 따라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더 순수한 공감과 전율을 느끼는 이유가 해명된다. *이승하(李昇夏):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생명에서 물건으로」「뼈아픈 별을 찾아서」「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나희덕 시인의 시-「벗어 놓은 스타킹」「소나무의 옆구리」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마한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그것은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벗어 놓은 스타킹」전문 어떤 창에 찔린 것일까 붉게 드러난 옆구리에는 송진이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기어가던 개미 한 마리 그 투명하고 끈적한 피에 갇혀버린 것은 함께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눌러서 버둥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춘 개미, 그날 이후 나는 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제 목숨보다도 단단한 돌을 품기 시작한 그의 옆구리를 보려고   개미가 하루하루 불멸에 가까워지는 동안 소나무는 시들어 간다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가 제 몸에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소나무의 옆구리」전문   인간에게 옷은 단순한 입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옷이 사람의 몸에 입혀졌을 때 그 옷은 육체의 일부만이 아닌 그 사람의 인격과 감정과 정신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이 입었던 헌 옷에는 그 사람의 혼이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걸쳤던 넝마 같은 옷을 기독교인들은 ‘성의聖衣’라고 하면서 그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신과 접촉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생각은 그 옷이 예수를 대신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옷에 대한 이런 감성과 생각은 남자보다 감성이 섬세한 여자가 더 하다. 나희덕 시인은 어느 날 자신이 벗어놓은 스타킹을 보면서 잠시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벗어놓은 자신의 스타킹을 이라고 삶의 피로감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타킹에 이입移入 시키면서 감각적인 비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라고, 무겁거나 칙칙하지 않게, 자신의 체온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감각의 언어로 촘촘한 사유의 올을 풀어낸다. 그는 생에 대한 부정에도 환한 긍정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생동하는 현재의 자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상을 사생寫生 하는 주체의 위치다. 낭만주의자들처럼 대상에 자신을 전적으로 이입하거나 대상을 자기화自己化 하면 대상과 주체가 너무 밀착되어서 객관적인 관조의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상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감각과 사유는 개념화 되고 구체성을 잃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희덕 시인의 대상과의 거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적당하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감정노출을 억제하면서 감성적인 사유의 언어로 대상을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감성적이고 이성적 자세는「소나무의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사유의 눈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소나무의 옆구리에서 끈적끈적한 송진이 흐르다가 굳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끈적하고 투명한 속에 개미가 갇혀서 송진과 함께 굳어 있는 것을 관찰한다. 그는 소나무의 옆구리에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송진이 소나무를 소멸시키는 암 덩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송진에 갇힌 개미는 불멸에 가까워지고 소나무는 소멸에 가까워진다고 하면서 이 상대적인 둘의 존재를 한 몸 속에 안고 있는 소나무를 자웅동체로 인식한다. 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인식의 절정을 이루는 구절은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라는 구절이다. 자웅동체[雌雄同體,hermaphroditism]는 암수의 생식기가 한 몸에 있는 생명체다. 자웅동체성 동물은 대부분 연형동물蠕形動物·태충류苔蟲類·흡충류吸蟲類·달팽이·민달팽이·삿갓조개 등과 같은 무척추동물로서 주로 기생하며, 느리게 이동하거나 다른 동식물에 항상 고착하여 사는 생명체들이다. 사람에게도 비정상적인 매우 드문 일로 자웅동체가 되어 태어나 경우가 있다. 이때 성의 선택은 어느 편이 더 우월한가에 따라서 외과수술로 결정된다고 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자웅동체는 이런 생물학적인 의미의 자웅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불멸과 소멸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존재의 모습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소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소나무의 옆구리에 불멸에 가까워지는 송진 속의 투명한 개미의 모습은 사유의 공간을 확대하는 상징적인 그림이 된다. 이 그림은 소나무가 불멸과 소멸의 대립적 운명을 안고 조금씩 시들어 가는 것같이 우리 인간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인식하게 한다. 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송진 속에서 불멸에 가까워지고 있는 개미 같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 시에서는 ‘자웅동체’ ‘불멸’ ‘소멸’이란 단어가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두 편의 시 속에 들어 있는 사유의 공간은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시간이 사유의 오솔길을 걷는 시간이 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나희덕(羅喜德) :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등
99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9>/심 상 운 댓글:  조회:121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 10월호 발표      양병호 시인의 시-「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     악몽이 없는 잠은 심심하다 심심해 반칙이 없는 축구는 심심하다 심심해 대형사고 없는 뉴스는 심심하다 심심해 바람 없는 하늘은 심심하다 심심해 전쟁 없는 세계사는 심심하다 심심해 안주 없는 술자리는 심심하다 심심해 술자리 없는 연애는 심심하다 심심해 돌지 않는 바퀴는 심심하다 심심해 변태 없는 섹스는 심심하다 심심해 섹스 없는 인생은 심심하다 심심해 죽음 없는 인생은 정말 심심하다 심심해 그런데 죽음 있는 인생도 심심하고 섹스 있는 인생도 심심하고 변태 있는 섹스도 심심하고 돌고 있는 바퀴도 심심하고 술자리 있는 연애도 심심하고 안주 있는 술자리도 심심하고 전쟁 있는 세계사도 심심하고 바람 부는 하늘도 심심하고 대형사고 있는 뉴스도 심심하고 반칙 있는 축구도 심심하고 악몽 뒤척이는 잠도 심심할 때 재밌게 놀면서도 심심할 때는 어떻게 하지?               -------- 「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전문   #1 다리가 겁나게 무겁고 축축하다 지각변동으로 흔들리는 침대 누군가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르고 무채색으로 일그러지는 풍경 실컷 얻어터지고 싶다 억울하다 울고 싶다 담배 피우고 싶다 피융 날아오는 것을 낚아챈다 시퍼렇게 날선 도끼이다 도끼로 다리를 찍는다 여러 번 피가 나지 않는다 살 속에서 빛나는 뼈가 가느다란 아름다움 아프지 않다 전혀 통증 �는 세상으로 잠적하기를 꿈꾸는 삶이여 허망이여 현실 같은 꿈이여                             ----------「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1 전문   우주론에서 카오스 (chaos)는 혼돈상태,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우주의 시원적 공허를 의미한다.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은 동적인 변화가 매우 불규칙적이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운동 상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미분화 된, 질서 이전의, 어쩌면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카오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현대시에서 실험성이 강한 시운동을 카오스적인 면에서 논할 수 있는 것도 기성의 질서를 부숴버리고 혼돈된 상태로 돌아가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모색하는 시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의 현대시에서 일어난 해체시 운동은 이성理性 중심의 세계관의 허위를 해부하여 (파괴가 아님) 보여주고 그 허구성을 깨닫게 하는 데리다의 해체이론에 기반을 둔 시운동이었다. ‘패러디’를 주축으로 하는 풍자와 야유, 테레리즘 적 언어의 사용은 당시의 민중적 현실과 결부되어서 현대시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는 흔적을 남겼지만, 시어의 저질화, 경박성, 형이상학적 사유의 부족으로 현대시에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양병호 시인의「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 속에 현실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진단이 들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에서, 라고, 없는 세계와 있는 세계를 대립적으로 배치하여 ‘없다’와 ‘있다’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를 모색하고자 하는 지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없어서 심심하고, 있어도 심심할 때, 아니 “재밌게 놀면서도 심심할 때는/어떻게 하지?” 라는 시인의 물음은 역설이나 억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 크게 들어 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기 때문이다.「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1은 라고, 그의 ‘심심함’에 대한 치유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무엇에선가 강한 자극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실컷 얻어터지고 싶은 꿈, 시퍼렇게 날 선 도끼로 자신의 다리를 찍는 꿈을 꾼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자신의 심리적 무료감無聊感을 치유하려는 본능적인 심리치료행위다. 이런 그의 심리상태는 그의 사유가 ‘허무’에 너무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수필「권태倦怠」에는, 이상이 시골 생활의 권태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최 서방 조카와 장기를 두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는 번번이 이기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상태放心狀態가 되어버릴 수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하고 자신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말한 ‘방심상태’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도道의 경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초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상의 실험적인 다작多作은 세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여겨진다. 양병호 시인의 ‘심심함’도 그가 허무의식에서 탈출하여 독창적인 카오스의 시론을 심화 확대할 때, 실험성이 강한 시정신의 힘이 될 것 같다. * 양병호: 1992년 으로 등단 시집: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하 늘 한 번 참말로 맑게 반짝이더라」「시간의 공터」   김충규 시인의 시-「손자국」「구름의 장례식」     보수공사를 끝낸 시멘트 골목길 누가 찍어놓은 것일까 발자국이 아닌 손자국 선명하게 찍혀 있다 시멘트 굳기 전 누가 작심하고 찍어놓은 자국, 자세히 보니 새끼손가락 턱없이 짧다 斷指-. 분명 그 흔적인 듯! 옛적 병중인 부모에게 제 피를 내어 먹이려고 끊었다던, 조폭 세계에서 의리를 보이려고 끊는다던, 입대하지 않으려고 작두에 넣고 자른다던, 화석 같은 손자국을 보며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는 아침. 내 오랜 친구 녀석은 연상의 여인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온통 붉은 문장의 편지로 고백했다고 말하며 훗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돼지 피였다고 농을 한 적이 있지만, 손가락 마디 하나 없는 손자국 섬뜩해서 누군지 몰라도 세상을 향해 뭔가 항의를 하려고 찍어 놓은 듯해서 쭈그리고 앉아 그 자국 위에 내 손 맞춰 보는데 허, 마치 내가 찍어 놓은 듯 별 어긋남이 없다 다만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자국 밖으로 삐죽 나와 만약 내가 마디 하나를 끊게 된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생각해 보다가 흠칫 놀란다 그 손자국, 길 가던 이들을 섬뜩하게 했던지 저물 무렵 다시 그곳을 지나쳐 오는데 새 시멘트가 뭉클 덧씌워져 있다                                     ----------「손자국」전문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확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 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구름의 장례식」전문   현대시에서 언어의 신선한 감각과 상상력의 확대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낭만주의 시나 모더니즘의 주지시도 상상력과 언어 감각이 부족하면 성공작이 될 수 없다. 이 ‘신선한 상상력’은 현대시에서만이 아니고 21세기 기업운영에서도 핵심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2007년 2월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 이 제품은 미래 지향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제품이다. 김충규 시인의「손자국」에는 싱싱하게 살아 있는 언어감각과 상상이 넘치고 있다. 마치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려 퍼들거리는 등 푸른 물고기 같다. 그의 상상은 독자들에게 구태의연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갖가지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시를 읽는 재미와 자기 성찰의 계기를 주고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시멘트 공사를 하는 골목길 바닥에 찍힌, 새끼손가락이 잘린 손자국을 보면서 등의 상상을 펼쳐 놓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을 그 위에 겹쳐 보면서, 고 말한다. 현장성과 사실성 그리고 시멘트에 손자국을 남간 사람과 자신과의 동일성을 드러내어 긴장감을 조성하고 공감의 영역을 확대한다. 이런 그의 상상은「구름의 장례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의 세계로 퍼져나간다. 구름이 비가 되어서 내리면 하늘의 구름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시인은 그 자연현상을 의식화儀式化하여 ‘구름의 장례식’이라고 창의적인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 의식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가상현실의 세계이지만 사실화된 표현의 힘에 의해 독자들은 신선한 감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비를 맞음으로써 지상의 먼지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더 활발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을 이라고 표현하여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빗줄기를 맞을 때 대숲에서 나는 소리를 이라고 하여 대숲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더욱이 이라는 빗소리에 대한 그의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놀라움을 준다. 그의 이런 감각세계는 이라고 하여 탈-관념의 현장성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라는 상대적인 공간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상상의 언어들은 논리적, 인과적인 구성과는 다른 집합적集合的 구성構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상상의 다양함과 새로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시상을 이끌어가는 “.....하는,”이란 동사動詞의 관형형어미冠形形語尾의 종결시구는 그 다음에 연결되어야 하는 논리적 언어인 체언體言과 단절되면서, 어떤 관념의 형상화가 아닌 순수 이미지의 공간을 활짝 열어 준다. 만약 논리와 인과因果에 의한 상상이라면 그의 상상은 관념의 감옥 속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논리와 인과는 자유로운 상상과 싱싱한 감성을 죽이는 사막砂漠과 같은 언어구조의 완고한 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상상)의 집합적 결합’ 이라는 방법으로 자기 시의 영토를 푸른 풀들이 무성한 초원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야생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김충규 시인의 시세계를 즐거운 마음으로 답사해본다. * 김충규: 1998년 문예공모「낙타」외로 등단 시집:「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김선호 시인의 시-「몸 속에 시계를 달다」「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     새벽 6시면 알람시계가 울린다 시계소리 한 알을 삼킨다 둥글고 매끄러운 시그너스 시계 캡슐이 몸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침이 시작된다 몸 속의 시계는 쉬지 않고 약물을 퍼트리며 나를 데리고 어디로든 가려고 한다 몸과 마음은 시계에 갇힌 채 시계바늘을 따라서 둥근 세상을 돈다 시계는 제가 정한 처방대로 나를 이끈다 밥을 먹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를 재촉한다 내 안의 시계는 시간의 경계가 확실치 않아서 슬픔 너머 저쪽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거나 희망 언저리를 따뜻하게 데우기도 한다 약효가 소모될 때쯤이면 시계에 의지했던 하루가 제자리로 돌아 오고 내일 삼키게 될 알약을 다시 준비한다 --------「몸 속에 시계를 달다」전문   정전된 건물에 들어오니 산 속 암자처럼 조용하다 쉴 틈 없이 돌려대던 환풍기 소리가 멎으니 천정에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빼곡이 앉아 있는 나한상들처럼 몸 맞대고 서 있던 바코드들만 분주하게 움직인다 대량의 소비를 촉진하던 욕망들에게 창틈으로 빛이 안쓰럽게 비칠수록 이들의 욕망은 배로 번식한다 나가지 못하고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슬슬 부패를 시작하거나 제 몸 속의 물을 내보내며 가벼이 날기를 기도한다 이곳은 세상의 속인가 바깥인가 나는 이곳에 한 오년 갇혀도 살 듯 싶은데 동안거에 들어가 박스 속에 담긴 상품들을 화두 삼아 겹겹이 포장된 옷 벗겨 보고 싶은데 소비 사이클이 순간 정지 하자 금방이라도 질식할까 봐 저들은 불안해 한다 --------「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전문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어떤 곳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겠지만,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벗어나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을 갖게 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벗어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생존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라는 답이 보편성을 가질 것 같다. 그래서 현대의 도시인들은 건설, 개발, 풍요, 대량소비가 발생해 내는 공해, 비인간화, 물질주의 등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도 그 조직의 원소元素가 되어서 살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손익계산마저도 잊어버린 채, 마치 마법魔法에 걸린 동화 속의 캐릭터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공해, 비인간화 등을 피해서 도시의 생활기반을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가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간 자연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고 이미 도시화都市化된 반쪽 자연일 뿐이다. 김선호 시인의 시에는 물질문명이 고도화된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가 들어 있다. 그는 반문명反文明 또는 문명비판이라는 상투적 메시지에서 벗어나서 인공적인 것들과 화합하면서 새로운 삶의 꿈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그 꿈을 보여주기 위해 몸속에 알약처럼 시계를 넣는다는 독창적인 상상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리포터가 되어 대량소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의 그런 행위에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스스로 내적사유의 세계를 확대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과 자연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과 부합된다.「몸 속에 시계를 달다」는 전자에 해당하는 시다. 그는 아침 6시에 알람시계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것을 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고 한다. 시계소리를 알약처럼 매일 먹으면서 사는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시계가 정해준 일과日課에 따라서 움직이고 생각하는, 로봇robot 같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 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반문명의 메시지를 넘어서는, 인공적인 것(문명)과 자연적인 것(인간의 감성)의 화합을 통해 제3의 길을 여는 사유의 열쇠를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여겨진다. 이 시에서 시계소리는 알약에 연결되고 알약은 현대인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시계의 기능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슬픔 너머 저쪽”이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런 발상 속에는 약을 많이 먹는 현대인들의 생활습관도 들어있어서 독자들의 거부감을 최소화시킨다.「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에는 자신의 몸을 현대도시를 상징하는 대형 마트 속에 밀어 넣고 공포와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는 어느 날 대형 마트에 들어갔다가 정전停電이 된 공간 속에 놓이게 된다. 그 정전된 대형 마트의 공간 속에서 그는 고 오히려 자연 속과 같은 안정감을 찾는다. 그리고 라고 여유로움을 보이고 있다. 그 여유로움은 그의 내면적인 사유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 사유의 바탕에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불교적인 마음이 들어 있다. 그리고 변화에 부동不動하는 선禪의 정신이 담겨있다. 정전은 현대사회에서 대형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정전이 되면 은행의 컴퓨터는 물론 지하의 전동차가 멈추고, 통신,TV 등이 제 기능을 잃는다. 냉장고의 음식이 상하는 것은 작은 일에 속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도시전체가 마비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대도시의 허점이며 아킬레스건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 현대도시이고 그 속에서 불안감을 안고 사는 존재가 현대인이다. 그런 현대인들이 스스로 평화를 만들며 자유로워지는 삶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김선호의 시는 그것을 인간의 내적 해방이라는 체험적 행위로 보여주려고 한다. 나는 거기에 ‘도시선都市禪의 시적 체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본다. 그리고 문명비판을 넘어서는 모더니즘 시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 김선호: 2001년 월간 등단 시집: 「몸 속에 시계를 달다」
99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8>/심 상 운 댓글:  조회:126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 9월호에  발표   남진우 시인의 시-「깊은 밤 깊은 곳에」「전갈에 물리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우면 차갑게 식은 몸에서 비명이 스며나온다 스며나와 방바닥을 가로 지른다 내 몸을 떠나가는 저 하루치의 쓰라림 서서히 모든 집 문지방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새어나와 피처럼 골목을 적신다 때로 웅덩이를 이루고 때로 거품을 일으키며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는 비명소리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비명은 모여 든다 모이고 모여 마침내 일어선다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비명이 다 빠져나간 몸은 침침한 어둠 속에 가라앉고 지상은 눈부신 달빛 아래 치솟아 오르는 비명의 소용돌이 비명으로 뒤덮인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깊은 밤 깊은 곳에」전문 책을 펼치면 보인다, 지난 밤 나를 물고 사라진 전갈이 기어간 자국 사막을 가로질러 지평선까지 무수한 문장이 이동한다 낙타 등에 실려 전갈에 물린 내 발뒤꿈치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온 몸에 독이 퍼진 채 나는 죽어 간다 낙타 등에 미끄러져 내리면 끝장이다 곧 회오리바람이 그치고 무시무시한 정적이 찾아 올 것이다 차가운 별빛이 이마를 적실 것이다 흰구름이 떠가는 하늘에 책이 펼쳐진다 전갈이 내 몸 속을 빠져나간다 낙타 등에 실린 채 혼곤한 내가 책에서 실려나온다 눈먼 탁발승 하나 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 ------------「전갈에 물리다」전문    새벽 3시 쯤 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집의 문틈이나 창문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연기처럼 골목길을 흘러가는 것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통행금지가 없는, 밤새도록 자동차가 다니는 대도시의 아파트 지역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지금도 중소도시의 주택가 골목에서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린 새벽에 접하게 되는 정경情景이다. 남진우 시인의「깊은 밤 깊은 곳에」는 그런 정경이 담겨 있어서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개성적인 영상映像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시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중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 가장 공감을 준다. 그런 말의 이면에는 현대시의 기능이 들어있다. 그 기능의 대표적인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는 심상心象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현대사회에서 그림, 사진, 영상, 인상, 느낌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생명의 비명’을 영상의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시에서 비명은 ‘하루치의 쓰라림’이 되어서 모든 집 문지방에서 새어 나와서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고, 그 비명들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서 마침내 소용돌이를 하며 일어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 한다. 시인은 ‘비명’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자신이 감지한 것을 그대로 영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해석과 느낌에 따라 ‘비명’의 의미가 다양해진다. 만약 이 시에 시대적인 어떤 상황의 옷을 입히면 ‘모여서 일어서는 비명들’의 의미는 사회적 저항의 기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옷을 입히지 않고 순수한 관점에서 보면 비명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향하는 ‘생명의 본질적인 현상’으로 해석된다. 시를 사회적, 시대적 산물로만 인식할 때 시의 영토는 좁아지고 시인의 위치도 선동가의 수준에 머물게 되기 쉽다. 그래서 시의 해석은 언제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좋다.「전갈에 물리다」는 인공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진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현상’ 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전갈’은 ‘나’의 본질적인 생명을 해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전갈은 꽁지에 독침이 있어서 쏘이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거미류의 독충이다.) 그래서 이라는 이 시의 첫 연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인간이 책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독서讀書 행위가 전갈에 물려서 죽음으로 끌려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 너무 역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그는 라고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라고 필사적으로 독서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현대인)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 가상현실의 언어영상은 현대 지식인들의 ‘독서’에 대한 맹신을 지적하기 위한 과장된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식의 창고라고 하는 ‘책’은 반자연적인 인공의 산물이라는 것. 책을 이루고 있는 문자언어는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기호일 뿐이라는 것.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경구警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라는 자연과 시인(화자)이 만나는 장면이 시속의 문제(갈등)를 해결하는 선명한 이미지로 피어나는 까닭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이 가장 생명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인간이 갈 길은 어디인가? 이 시가 던지는 화두話頭다. *남진우(南眞祐) : 1981년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등   최문자 시인의 시-「닿고 싶은 곳」「달맞이꽃을 먹다니」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닿고 싶은 곳」전문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 그렇다고 그 꽃을 으깨다니 그 꽃 종자를 부수고 때리고 찢어서 캡슐 안에 처넣다니 그 피범벅 꽃을 먹고 혈관의 피가 잘 돌아 가다니 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나다니 그렇다고 나까지 하루 두 번 두 알 씩 그걸 삼키다니 머지않아 꽃향기로 가득 찰 혈관 그렇다고 하필 그 환한 꽃을 죽이다니 밤마다 달을 바라보던 그 꽃을 꽃 심장에 가득 찼을 달빛을 그 달빛으로 기름을 짜다니 노오란 꽃에 앉았던 나비의 기억까지 모두 모두 으깨다니 부서진 달빛, 꽃잎, 나비, 두 알씩 삼키고 내 피가 평안해지다니 생수 한 컵으로 넘긴 감마리놀렌산 두 알 혈관에 달맞이꽃 몇 송이 둥둥 떠다닌다 -----「달맞이꽃을 먹다니」전문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주제가 되는 문제다. 불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생과 멸을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 이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반야심경) 여기서 말하는 생멸은 현상現象이 아닌 본질本質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창발과 환원의 원리라는 물질세계의 사이클로 해명하려고 한다.(승계호의 ‘마음과 물질의 신비’) 이것도 대상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현상現狀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관념과 감성에 물들어 있는 언어로 표상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적으로 본질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서의 세계에서 완전한 이탈’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최문자 시인의「닿고 싶은 곳」은 비록 본질과는 거리가 먼 주관적인 사유와 감성의 표출이지만, 죽음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슬픔의 세계’가 은은한 울림을 준다. 슬픔 속에는 삶의 아름다운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논리도 종교의 명상도 닿을 수 없는 삶의 따뜻한 체온과 호흡과 꿈이 서려있다. 그래서 는 구절은 독자들에게 죽음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나무가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은 새들이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와서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슬픈 땅을 찾는 새의 이미지는 철학이나 종교가 들어갈 수 없는 시인의 감성영역에 속한다. 독자들은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삶의 이면을 성찰하게 된다. 이것이 시적사유와 감성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이고 신비한 기능이다.「달맞이꽃을 먹다니」에서는 시인이 안고 있는 연민憐憫의 감정이 물에 흠뻑 젖은 수건처럼 축축하게 감지된다. 그 연민의 감정은 인간의 탐욕스러움과 자연과 인간의 동화同化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는 혈액 순환 약 감마리놀렌산을 매일 두 번 두 알씩 먹으며 산다. 그런데 그 약이 달맞이꽃을 으깨서 만든 약이라는 것을 알고, 라고, 자기성찰의 고뇌에 빠진다. 현대문명은 인간위주의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을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한다. 이 휴머니즘을 자연에 대입시키면 자연은 인간의 존재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휴머니즘이 품고 있는 독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깨달아야 자연과 화합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의 주류를 이루는 연민의 감정, 시인의 자기성찰과 내적갈등은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자신의 행위지만) 달맞이꽃의 피범벅으로 이루어진 알약을 하루에 두 번 두 알씩 먹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상상을 자극해서 달맞이꽃에 담겨 있는 달빛, 나비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으깨서 기름을 짜서 먹는 인간의 철저한 강탈행위로 확대된다. 따라서 그의 내적갈등과 연민의 언어는 그런 행위를 당연시하고 무신경하게 처리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과 경종警鐘이 된다. 휴머니즘은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탐욕과 편견에 사로잡힌 반자연적인 사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과 종교, 각종 문화도 인간위주의 관념이나 휴머니즘의 맥락과 연결될 때 반자연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위해서 실험실의 흰 쥐들이 오늘도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주사를 맞고 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현실이다. 이 시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반자연의 무서운 현실을 상기시키면서 독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21세기 문학은 ‘휴머니즘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라는 무겁고 큰 과제를 지고 있다. *최문자(崔文子):1982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 울음소리 작아지다> 등     박유라 시인의 시-「흘러가는 아침」「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   간밤 태풍 지나고 출렁, 산들이 내려앉은 식탁 위 2004년 6월 28일 아침 필루자에서 부산까지 비행기가 흘러 간다 된장찌개 김치 미나리 꽈리고추 오이무침 구이김 버섯볶음 디지털 풍경이 빠르게 흐르고 소화하기엔 너무 아픈 육질들 훈제오리, 삼겹살, 삼치토막...... 냉장고 문을 도로 닫는다 흘러가는 풍경 사이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지고 오늘다라 유난히 뜨거운 잡곡밥을 아이에게 먹여 매운 바람 속으로 보낸 뒤 나는 어금니 사이로 질긴 마늘쫑 장아찌를 오래 씹다가 푸성 귀들 남은 반찬을 다독거린다 음악 검색 창에 ‘Climbing up the walls' 무한반복 흐를 동안 설거지를 끝내고 씻어 둔 현미에서 쌀눈 뜨는 소리 싸르륵 싸르륵 다시 비가 내린다 흘러가는 아침 문득 돌아서면 자꾸만 어두워지는 손 행주와 도마와 칼을 함께 소독제에 담그고 눈물 한 방울 출렁, 대기권을 흔들며 간다 --------「흘러가는 아침」전문 햇빛을 탁탁 털어 청소한다. 락스를 뿌려대면 무균의 햇살 알갱이들이 비수처럼 반짝인다. 텔레비전에서는 ‘히말라야 동산’이 디지털 시험방송 중이고 강아지는 제 그림자를 보며 엎드려 있다. 눈부신 방의 한 순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장면들이 잘게 떨린다. 1000분의 1초쯤, 화면 속 티벳의 흰 돌집과 화면 밖 강아지 숨소리, 그 아 리아리한 것들을 포를 뜨듯 살짝 저며 낸다면, 30도 각도 로 칼집을 넣는 소리는 나지 않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게, 겨울 오전 10시 15분의 적막이 난자당한다. 소리 없이 점 멸하는 나날들. 날 선 햇살이 눈물 나게 한다. ------「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전문    형식과 내용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형식을 그릇에 내용은 그릇에 담긴 물질(내용물)로 비유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할 뿐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과 내용의 구분은 칼로 무를 썰 듯이 그렇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시에서 현대시와 근대시를 구분하는 기준도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게 된다. 그 형식은 언어의 표현방법이다. 박유라의 시「흘러가는 아침」은 형식이 내용(의미)을 만들어 내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매우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아침에 주부가 식탁을 차리고, 아이에게 밥을 먹여 학교로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어쩌면 권태로울 그 일상이 이 시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옷을 입고 독자들에게 다가 온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두 개의 장면을 겹치게 하여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로부터 벗어나서 현상의 흐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현상은 그가 지각하는 현실의 선명한 모습이다. 그는 그것을 라고, 공간 속을 ‘흘러가는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미지 속에는 관념의 요소(의미)가 제거된 사실(사물)의 나열과 집합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의 나열과 집합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존재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시점과 입체적인 현실인식이 만들어 내는 세계다.「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감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시의 내용도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이다.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면서 텔레비전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티벳의 흰 돌집(사이버의 현실)과 화면 밖의 강아지 숨소리를 있는 그대로 살짝 포를 뜨듯 자신의 의식 속에 인화印畵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진 찍기의 방법이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이라고 언어의 기표로 옮겨 놓고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관념이나 감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에 들어온 현실의 영상을 그대로 포를 뜨듯 찍어내려고 한다. 그 현실은 시인자신의 투명한 의식에 투영된 현실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은 탈-관념의 직관直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이 내용을 창조하는 용기라고 한다면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사이버 시대에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여는 새로운 창조적인 용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 박유라 : 1987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등
99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7>/심 상 운 댓글:  조회:112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8월호 발표                 이수익 시인의 시- 「겨울 판화版畵」「배후는 따뜻하다」                 겨울 나루터에 빈 배 한 척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               아니다! 빈 배 한 척이 겨울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홀로 남기를 두려워하며               함께 묶이는 열망으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으로, 몸부림 끝에 흘리는 피와              오오 눈물겹게 찍어내는              겨울 판화版畵                 ---------「겨울 판화版畵」전문              길옆            자전거보관소에            몸이 뜯긴, 오래 된, 주거불명의            자전거 몇, 버려져 있다.            안장이 사라지고            체인이 풀린            타이어가 땅바닥까지 함몰된 자전거들이            구겨진 풍경의 액자를 만들며            어둠 속을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오랜 무관심에 길들여진 편안함이            어느덧 그 심연에            맞닿아            나태와 궁핍이 제법 반질반질하다.            이제는 더 이상 뜯길 것이 없으므로            자유가 너희들을            화평케 하리라!            날마다 이맘때쯤 찾아오는 그늘이            친구처럼 유정하게 툭, 툭,            바큇살을 건드리는 오후            자전거들은            왕년에 달리던 기세를 되살려            저렇게 뻗어나간 아스팔트길을            씽씽 내질러보고 싶은 푸른 욕망에 진저리치며            한 번 씩은 꿈틀,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배후는 따뜻하다」전문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성립된다. 이는 개인의 원자적 가치에 기반을 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유교적儒敎的인 관점이라고 하지만 개인은 분리 불가능한 사회적 원자라는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특히 도시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어느 하나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공동체는 마치 하나의 인체 조직과 같아서 그 관계의 밀접성과 인과성은 무섭도록 치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상호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면 아무런 존재성을 갖지 못한다.  이수익 시인의 시 「겨울 판화版畵」에서는 인간의 이런 상호관계와 부분/전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겨울 나루터에 묶여 있는 배를 보고 그는(시적 화자) 나루터가 배를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배와 나루터의 상호관계는 인과관계가 되고 유의미한 관계가 된다. 그는 그 원인을 라고 독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정경을 칼로 파서 새긴 ‘판화版畵’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그런 삶의 원초적인 관계가 인간의 숙명적인 모습이라고 인식한 까닭인 것 같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고독이고 외로움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엔가 자신을 묶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돈에, 또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무형의 세계에 자신을 묶으려고 한다. 이성간의 사랑도 묶고 묶여짐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창발적인 생성의 원리다. 「겨울 판화版畵」는 그런 본질적인 관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에 비해「배후는 따뜻하다」에는 환원의 원리가 들어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자전거 보관소에서 기능을 잃고 분해된 버려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깊은 사유 속으로 들어가서, 라고 그 자전거의 존재의 자유와 만난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대한 기억과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라고 끝을 맺고 있다.  기능을 상실하고 순수한 물질의 세계, 원자의 세계로 환원되는 낡은 자전거에 대한 시인의 명상은 인간의 삶에 대한 명상과 다르지 않다. 탄생→ 성장 → 소멸의 반복되고 회전하는 사이클 속에서 우리들의 삶도 벗어 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쓸모를 잃음으로서 얻어지는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관계의 묶임으로부터 벗어나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존재의 해방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를 의미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에 대한 해석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끝내버리지 못하는 ‘푸른 욕망’은 이 시에서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푸른 욕망’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생명체의 소중한 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수익 시인의 시「겨울 판화版畵」와「배후는 따뜻하다」를 읽으면서 그의 사유가 존재의 본질적인 것에 닿아 있으며 완벽하게 시적형상화의 옷을 입고 있음을 확인하며 시를 읽는 즐거움을 혼자 맘껏 누려 본다.   *이수익(李秀翼): 1963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등           이재무 시인의 시- 「트럭」「감나무」                심야의 고속도로              트럭 행렬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거친 사내들은 단내 나는 더운 숨              연신 토해 내며 살 맞은 짐승처럼 고함              질러대고 있었다 딱딱한 밤공기가              과자부스러기가 되어 부서졌다              하늘에 핀 별꽃들이 경기 들린 아이처럼              놀라 자지러지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우락부락한 다혈질의, 각진 얼굴의 사내들은              힘이 세다 그들이 실어 나르지 못할              물건은 없다 조폭의 무리 같기도 한 그들이              지날 때 함부로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그저 절로 벌어진 입 당분간 닫지 말고              사고 없이 어서 이 위기의 시간이              지나가길 소원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생의 저속을 사는              그들은 언제든지 분노로 폭발할 수 있는              슬픔 몇 됫박씩은 가슴에 지니고 산다 밤의              질주에는 그런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트럭」전문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으로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감나무」전문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관심과 시선은 세상을 조감鳥瞰하게 하지만, 독자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살 비비며 사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며 시선이다. 그것은 시가 왜 정서적이어야 하는가의 해답이 된다. 시의 정서는 시의 사물성과 다르다. 사물성은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는 유형적有形的 감각인데 비해 그리움, 두려움, 사랑, 미움 등의 정서는 무형無形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이 ‘무형의 감성적 정서’는 강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건조한 견고성(dry hardness)을 내세우는 현대시에서도 정서의 기능은 무시될 수가 없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내세우고 있는 카타르시스의 기능도 시의 정서적인 힘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재무 시인의 시「트럭」은 사실적인 표현이 주는 현장성과 긴장감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시의 정서가 폭발일보 직전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있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터질 듯한 분노의 숨소리가 그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라고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라고 그들의 거친 행동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면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은 그들의 위험한 질주의 원인을 라는 구절 속에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사회계층간의 갈등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긴장감이 조성하는 분위기는 “..... 온 나라의 화물 취급자/떠들썩하고 꺼칠한 목소리에 왁자지껄한/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도시”라고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신흥도시 시카고를 노래한 미국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의 시「시카고(Chicago)」연상시킨다. 따라서 그의 시「트럭」은 관념과 주관적 환상, 언어유희 등으로 점점 작아지고 힘을 잃어가는 한국현대시의 언어에 건강한 야성의 힘(이미지)을 드러내는 존재성을 갖는다. 그의 저소득층에 대한 연민의식은 계급의식을 조성하고 선동하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시와는 다르다. 그는 시의 정서적 기능을 바탕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을 뿐 자신의 관념을 전혀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감나무」도 그런 그의 시적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주인이 없는 어느 집의 감나무가 이 시의 대상이다. 감나무 주인이 무슨 일로 도망기차를 탔는지 그 구체적인 사연은 시 속에 없다. 독자들은 그 사연을 시대적 상황과 연계하여 유추하고 상상해 볼 뿐이다. 그 감나무는 사립문 쪽으로 가지를 더 뻗는다. 그 까닭을 시인은 감나무가 주인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심리적 현상의 시적표현을 단순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의 기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물리적인 세계가 아무런 목적 없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라는 승계호 교수 글 「마음과 물질의 신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감나무의 마음과 행위’는 시인의 직관적直觀的 시선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다. 그래서 라는 구절은 자연스럽게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나는 이재무 시인의 이 풍기는 현장성과 긴장감 그리고 생동하는 언어들이 주는 감각에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감나무와 시인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장면에서 그것이 단순한 시적 기법이 되기 이전에 거기에도 깊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가 잠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았다.   * 이재무(李載武):1983년 에 등단. 시집: 등             이은봉 시인의 시- 「늙은 바람과 함께」「폐타이어」                   하루의 일 마치고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길가 생맥주집 앞                푸른 평상이 벌떡 일어나 반갑다고                손 마주잡고 흔들어댄다 오늘 하루                저도 많이 외로웠나 보다                엉덩이를 내밀며 좀 깔고 앉아 쉬었다 가라고 보챈다                생맥주집 안 늙은 바람도 달려 나와                가슴 끌어안고 등허리 토닥여준다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으로 돌아가 보았자                누가 날 기다려주겠는가                푸른 평상이며 늙은 바람도 잘 알고 있어                지금 손 마주 잡고 흔들어대는 거다                푸른 평상의 엉덩이를 깔고 앉아                늙은 바람과 주고받는 맥주 맛이 쓰다                안주로 씹고 있는 멸치 대가리 맛도 쓰다                더는 해찰하면 안 되지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마음 너무 잘 알고 있는 길가의 황매화가               귀볼 가까이 다가와 혀 끌끌 차댄다               돌아가지 않으면 14층짜리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                저도 그만 외로우리라.                                          --------------「늙은 바람과 함께」전문                버려진 폐타이어는 검다              검게 저무는 지장보살이다              반쯤 땅속에 묻힌 채              세상의 질병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장보살은 둥글다              둥근 마음으로 사방 그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만든              피고름을 삭히고 있다              지장보살이 아프니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도 그는              거름 만들고 있다 사루비아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꾸고 있다.                                       -------「폐타이어」전문    ‘낯설게 하기’는 현대시만이 아닌 모든 예술의 중요한 기교다. 평범하고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결코 사람들의 눈을 끌어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는 그런 면에서 인기가 높은 그림이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양손을 들어 귀를 감싸고 있는 인물의 해골 같은 얼굴과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자세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인물은 황혼의 다리 위에서 무슨 외침을 듣고 있는 것일까? 관람객들에게 공포의 분위기와 함께 의문에 잠기게 한다. 이 그림을 그린 뭉크의 일기에는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일몰을 보고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깐 이 그림은 상상화가 아니고 자신의 실제체험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을 그는 개성적인 직관의 이미지로 낯설게 그린 것이다.  이은봉 시인의「늙은 바람과 함께」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기가 기거하는 아파트를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이라고 하면서 생맥주집 사람들과 행인들을 ‘푸른 평상’ ‘늙은 바람’ ‘길가의 황매화’이라고 동화적인 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게 되고 시인의 정서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만약 “하루의 일을 마치고 14층 아파트로 가는 길이 너무 외로워서 생맥주 집에서 아가씨들과 맥주를 마시고 노닥이다가 14층 아파트로 돌아왔다.“라고 사실적으로 기술했다면 시의 세계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극히 평범한 산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동화적인 상상과 그로테스크한 언어표현은 시인의 의도적인 ‘낯설게 하기’의 한 기법으로서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기법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외로움이라는 정서다. 외로움은 살아 있는 것들이 살 비비며 사는 마음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시의 독특하고 깊은 감성이며 사유다. 는 구절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열린 감성이 그것이다. 「폐타이어」는 자신의 개인적 정서 세계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이 세상의 넓은 정서와 연결되는 시다. 이 시에서 폐타이어는 세상의 아픔, 피고름을 안고 앓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폐타이어는 ‘버려진 존재’라는 것. ‘검다’는 것. ‘둥글다는 것’ ‘땅과 관련 된다는 것’ 등이 지장보살상과 부합되는 이미지다. 그래서 반쯤 땅 속에 박혀 있는 검은 폐타이어를 보고 땅과 함께 앓고 있는 지장보살이라고 감지한 시인의 감성과 사유가 타당성을 갖는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그는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그는 중생들의 영혼이 구제되어 그들이 모두 열반에 들지 않으면 자신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서원한다. 그래서 라는 구절이 불교적인 관념의 형상화라는 카테고리에만 머물지 않는 열린 세계로 향하게 된다. 도시화로 인해서 파괴되고 공해에 시달리는 자연환경을 거대한 유기체라고 볼 때, 이 시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원하는 서원과 함께 땅의 병을 치유하는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라는 구절은 ‘땅의 모태’인 지장보살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적 상상으로서 신선한 감각과 의미를 던지고 있다.   * 이은봉(李殷鳳): 1984년 에 등단. 시집: 등
99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6>/심 상 운 댓글:  조회:122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7월호 발표   성찬경 시인의 시- 「나사.1」「유리와 병」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수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수나사를 주우면 기분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찌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수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숫자數字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나사.1」전문   유리가 병으로 있는 한 언제까지나 병이다. 인간의 수족이다. 깨어져야 유리는 유리가 된다. 병은 기능이요 쓸모다. 소유의 차원이다. 값을 매겨 사고 판다. 파편은 무엇이고 그것 자체다. 쇠는 쇠요 구리는 구리요 은은 은이다. 존재의 차원이다. 무값이다. 에덴동산이 어디뇨. 있는 것 모두가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나뒹굴면 바로 거기지. 산산조각난 것들이 창궁의 별처럼 모여들어 존엄의 왕좌에서 반짝이고 있다. 빛 뿜는 파편의 삼천대천세계다. -------「유리와 병」전문   삶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 다양성은 개개인의 취향과 성격과 감각과 관념의 척도의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속에는 시대적인 유행도 들어 있다. 이런 것이 모여서 형성된 것을 문화라고 한다. 성찬경 시인은 길거리에서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나사를 줍는 취미가 있다. 그는 그 나사들을 주워서 집에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을 하고 암수 나사를 맞추어본다. 그는 그런 자신의 취미생활을 이렇게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라고. 이 시에서 나사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퇴출당한 퇴직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시인도 나사들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모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장난감 같은 오브제로서 모으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의 손에 주워진 나사들은 나사로서의 임무를 모두 끝내고 그의 집에서 제2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 나사들을 미술품으로, 식구와 같은 존재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부속품에서 벗어난 나사가 미술품 같은 존재로 승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사가 나사로서의 용도에서 벗어나 어느 한 가지의 영역에 구속되지 않는 무無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곳은 존재의 자유가 열리는 지점이다. 우리들의 사유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사유의 자유를 누리고 그만큼 상상력의 세계가 넓어진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이론이며「나사.1」이 안고 있는 사유의 세계다.「유리와 병」은 이런 취미 정도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존재의 근원을 더 깊게 추구한다. 따라서 「나사.1」보다 더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들어있다. 철제나사들은 형태를 유지한 채 용도만 바꾼 상태이지만 (그래서 다시 재활용될 수도 있지만) 유리병들은 깨어진 형태가 됨으로써 순수한 유리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생生과 사死라는 관념에 묶여서 유리병이 깨지면 그것은 유리병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유리병이 유리로 환원되는 새로운 경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관념도 이와 같다. 인간의 죽음을 존재의 해방. 존재의 자유영역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원인은 인간의식의 중심에 ‘나’라는 관념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의식은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현재상태의 유지를 소망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나’의 변화를 죽음으로 오해하고 생로병사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중생衆生의 삶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깨달은 이들은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면 이 우주의 원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시에도 그런 깨우침을 주는 교훈성이 있다.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시인은 물질의 탐구를 통해서 의식형성 이전의 무의식의 세계까지 인간 존재의 문제를 상상하고 있다. 사실 에덴동산도 또한 ‘나’의 존재를 전제로 한 관념의 세계이지만 그 깨달음은 매우 중요한 정신적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 세계는 이미 불교의 사유를 통해서 관념적으로 알려진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과감하게 시로 형상화하여, 우주의 현상을 라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발산시키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체득한 세계와 그의 시선이 통과한 오브제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한껏 누려본다.   *성찬경(成贊慶): 1956년 에 등단. 시집: , , , , 등   이상옥 시인의 시-「아포리아」「조물」   고야가 물고 온 너구리 속을 엿본 적 있다 내장 안에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산의 계곡에 살았을 법한 비단개구리 열 마리 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너구리 한 마리가 하루의 끼니로 비단 개구리 수십 마리를 먹어치운 것이다 오늘 점심으로 안양해물 탕을 먹었다 새우, 게, 소라, 고동, 아 이름 모를 많은 생명, 한 끼 점심으로 좀 과할 정도의 개체. 어제 교회 오는 길에 트럭 에 실려 가는 암소 네 마리를 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크 고 순한 눈망울 두려움의 기색이 완연하더라, 도살될 운명을 알기라도 하는 양. 덩치가 크니 몇 사람의 며칠 분 생명은 이어 갈 수 있을 터 생명은 생명을 먹고 생명을 이어가는............, 난해한 네트워크 ----------「아포리아」전문   연구실에는 강동주 선생에게서 얻어온 물풀이 오지항아리 에서 자라고 있다 마산 어시장에서 산 오지항아리에 물을 붓고 물풀을 키우기 시작한 지 벌써 달포가 지나고 있다 물표면이 일렁이는 듯하다 작은 고동이다 비닐봉지에 담아온 물풀에 붙어 왔나 자세히 보니 눈에 띄는 녀석 들만 해도 열 마리 정도다 돋보기를 들고 관찰하니 죽은 물풀도 먹는다 고인 물이지만 깨끗한 것이 물풀의 정화작 용과 함께 요녀석들의 청소부 노릇도 한몫한 때문이다 신기하기도 대견스럽기도 하여 틈틈이 물을 보충하며 햇빛이 드는 곳으로 오지항아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옮겨놓 는다 나는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물」전문   SBS TV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는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에서 본 인터뷰 기사의 내용이다. 이상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윤동혁 PD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선이 생명세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세계가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세계인가 하는 것은 우주를 생각해 보면 안다. 이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천체天體의 수효는 엄청나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는 초과학적인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많은 우주의 천체 중에서 지구는 생명체(유기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다. 우주의 암흑 속에서 파란 루비 같이 빛나는 것이 지구라고 한다.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지구를 푸른빛의 보석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우주 속에서 지구의 존재를 생각하면 신의 은총 또는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생명세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생태계의 구조는 먹이사슬로 되어 있다. 그 속에는 원래 생명체의 본능적인 행동만 존재할 뿐 감정이나 정서는 개입될 수 없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은 꽃의 종족보존의 방법이지 인간을 위한 꽃의 쇼가 아니다.「아포리아」에서 시인은 고야에게 잡힌 너구리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비단개구리를 보고 고 한다. 비단개구리에 대한 연민이나 어떤 관념의 개입이 없이 냉정하게 관찰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라고 자신의 경험을 삽입하고 있다. 이 삽입구절 속에 “아 이름 모를 많은 생명”이라는 감성적인 표현이 들어 있다. 이 감정노출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이런 그의 감성은 그 다음 구절 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명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드러낸다. 자연을 보는 우리들의 눈은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는 것이 옳다. 야생에서는 어떤 존재 건 먹는 자 아니면 먹히는 자일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태계의 법칙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다르다. 시인은 인간에 의해 죽으러 가는 소에 대한 연민의 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성이며 과학자와 시인의 다른 점이다. 이 시에는 이런 생명세계의 법칙을 라고 풀이하여 독자에게 생명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의 계기를 주고 있다.「조물」에서는 ‘물풀의 생태가 들어 있는 오지항아리’라는 생명세계의 한 덩어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물풀이 자라고 죽고 하는 오지항아리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생명세계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있다. 라는 구절은 그가 오지항아리에서 이루어지는 생태계의 시스템을 얼마나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오지항아리는 공기의 유통이 잘 되고 생명체들이 제각기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또 하나의 생명공간이다. 그 생명공간은 작은 우주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끝부분 라는 구절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인도 힌두사상(우파니샤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큰 우주에 속하는 수많은 소우주의 개념으로 생명의 실재적 본성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오지항아리의 생명 공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상옥 시인은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과 시를 결합하여 ‘디카시’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시는 창조하기보다는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창조와 포착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공존한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창조의 순수한 뜻은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그것도 창조가 된다. 태초에 하느님이 이미 존재한 사물에 명칭을 붙이는 행위와 같다. 그런데 이 창조의 전단계가 포착이다. 이 시에서 오지항아리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들었다 놓으면서 “나는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라는 순간적 인식이 포착이며 오지항아리를 ‘우주’로 명명命名는 것이 창조다. 포착은 현실 속에서 눈의 기능만이 아닌 마음(의식)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상옥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그가 포착하고 창조한 생명세계의 관람자가 되는 즐거움을 누린다. 좋은 시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우주를 발견하게 하는 시라고 생각하면서.   * 이상옥: 1989년 월간 등단. 시집: 등
99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5>/심 상 운 댓글:  조회:110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 6월호 발표   송준영 시인의 시-「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습득」     기차보다 한 뼘 앞에 검은 바람이 지난다 낫과 톱을 어깨에 맨 갱부의 환한 장화발이 소리도 없이 지난다 하얀 이빨이 이 빨을 마주보며 바삐바삐 떠간다 역사 안 드럼통 난로에 괴탄 이 이글거린다 플랫폼엔 급행열차가 잠시 멈춘다 이곳은 철 암, 산이 떠나가고 산보다 먼저 사람이 캐고 버린 버력만 산이 되어 어둠에 배를 깐다 무게적재함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 이 검게검게 볼록한 이마를 내민다 금세 어둠이 꺼먼 버력에 엎친다 바람이 검은 철사 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괘달려 윙 윙 강철소리를 낸다 저탄장의 탄가루를 업고 간혹 분간 어려 운 칠흑 뚫은 별빛 같은 마을을 휘 몰아친다 어둠의 사타구니 속으로 돌진한다 형광등과 네온이 창백한 통리 역사엔 괴탄이 이글거리던 드럼통 난로가 없다 이빨과 눈이 유난히 빛나던 갱부들도 없 다 탄가루와 긴 쇠꼬챙이가 콱콱 내리찧으면 빨갛게 흘러내 리던 불티들도 없다 바람이 분다 멍멍한 하늘 사이 머얼건 땅 위로 바람이 분다 영화 속 같은 사람들이 파리한 형광등 대합 실에서 앉거나 서 있다 유령처럼 땅을 밟지 않고 미끄러 진다 빛깔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사이로 파리한 눈이 온다 나는 오늘 통리역에 내리다 -----------「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전문   1호선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있는 건 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 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 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 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 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 날 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 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 솔바람이 있네 아니 지하철분실물센터 알림판엔 깔깔 웃음 웃던 습득물이 붙어 있네 동굴 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 습득*이 붙어 있네 습득이 보이네 ----------「습득」전문   *습득은 당나라 때 사람. 국청사 풍간 선사가 주워 키웠다. 한산과 늘 같이 한암 깊은 굴에서 지냈고 절에서 허드렛일하여 밥을 얻었고 미친 짓 하면서도 선도리에 맞았고 시를 잘 했다. 태주사자가 한암으로 찾아가 옷과 약을 주니 ‘도적놈아 조적놈아 물러가라’하며 웃으면서 한암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오랜 시간 쌓아놓은 학문,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등 온갖 인공적인 것들의 총체가 문화이고, 그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진보상태가 문명이다. 인간은 그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문명은 야만의 반대이고 자연과는 대립적 개념이 된다. 문명은 인간에게 안전과 편함과 행복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고 억압하여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 반작용으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으로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잠재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친환경 건강법이니, 친자연의 주택이라는 것들도 모두 인간의 행복이 인공적인 문명으로만 충족될 수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송준영의 시편들은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성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에서는 철암과 통리라는 지역적 경계가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철암에는 검은 석탄더미라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는 비록 가난하지만 인간적인 정과 삶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한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석탄도시에는 라는 표현 그대로 점차 인공화 되어가는 자연의 삭막한 풍경이 노출된다. 하지만 이 철암에는 근대화 이전의 이 있다. 통리에 오면 그 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 그는 철암과 통리의 대조적인 풍경을 통해서 문명에 의해 자연성을 상실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 철암을 지나 통리에 도달한 현대인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시인은 그 해답을「습득」에서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습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닌 분실이후에 생기는 행위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실낙원의 현대인에게 복락원의 꿈을 회복하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지하철 1호선 분실물센터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습득하게 된다는 이 시의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시인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의 지하철을 가상현실의 무대로 삼아서 라고, 현대인들이 분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면서 끝내는 그 진면목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라고. 이 시는 이 끝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자연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도시선都市禪으로서 독자들에게 한 순간이지만 흙탕물 같은 자신의 내면을 맑게 투시하는 의식의 힘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때 선禪은 그들의 본성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선과 시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하고, 선의 감각을 현대시에 접목시키려 한다. 이 시의 언어에서 풍기는 선미禪味가 그것이다. 사실 선은 스님들의 선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잡한 도시의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서 엉뚱하게도 당나라 때의 선승 습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송준영 시인의 의도적 방법-현대시와 선의 융합-은 깊은 의미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문명과 자연의 새로운 만남을 일깨워주는 언어의 포퍼먼스라고 말할 수 있다.   * 송준영: 1995년 으로 등단. 시집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정유준 시인의 시- 「목공소에서」 「살구나무는」   작업이 끝났다. 먼지 속에서 목을 늘어뜨린 알전구가 도구들을 흔든다. 이가 두 개 빠진 기계톱은 열기를 식힌다. 대패는 누워 있다. 결이 선 명한 대패밥, 잘게 썰린 톱밥의 가벼움, 보드라움을 만져본다. 나무의 혼들이 걸어나온다. 여린 잎들의 친근함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줄기의 비틀림, 바구미의 가느다란 길까지도 읽을 수 있다. 허공 속으로 나뭇 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나이테가 무수히 생겨난다.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이 오늘밤도 저마다의 꿈을 꾼다. --------------------「목공소에서」전문   살구나무는 간지럽다. 세월의 더께, 무딘 껍질을 기어오르는 노린재 더 듬이에도, 나폴거리는 배추나비 날갯짓에도 몸을 뒤틀고 싶다. 혼곤히 갈라지는 햇살사이로 곤두박질치고 싶다. 늙은 수양버들들은 쿨렁거리 고 까치는 식욕을 돋구고 우체부가 지나가는 한낮이 반짝거린다. 개미 들이 발목을 스멀거리는 아우성의 봄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구나무 꽃불을 치쳐든다. ------------------------ 「살구나무는」전문   조선시대의 산수화山水畵의 자연풍경은 진경眞景도 있지만 거의 추상적인 가상현실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하나가 되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풍경화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그림이기 때문에 독특한 맛과 향기와 정신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과학적인 사실성을 중시한 서양의 인상파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화의 다른 점이다. 그림 속의 안개 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들은 보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고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하면서 궁극적이며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산수화는 현실적인 자연의 미美와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의 높고 깊은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현대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의 도 사실성과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관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정화하는 일종의 예술적 아이콘(ic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동물적인 욕망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자연이 소멸되어가는 현대의 과도한 인간주의人間主義의 문명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나무의 명상」속에 담겨있는 그의 식물성의 명상언어들은 시대적인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언어이지만, 그 시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정화작용은 조선 시대의 산수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소외감과 고독감은 정신적으로 연대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 연대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 사물과 인간(나)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확대 된다. 따라서 연대성의 상실은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단절이며 열린 세상과의 단절이다. 정유준의 시편은 이런 단절의식을 연대의식으로 회복시키고,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융합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만나고 그 내밀한 만남의 순간을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내고 있다.「목공소에서」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따스함, 겸허한 마음이 일을 끝낸 목공소 안의 풍경을 깊이 있고 정겹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과 나무의 친근함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죽은 나무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어서 죽은 나무와 시인이 결코 다른 세계로 분리되지 않고 한 세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는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잘게 썰린 톱밥의 가볍고 보드라운 감각, 목공소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나무들의 혼, 허공 속으로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생전 모습,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의 꿈....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포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살려놓는다. 이런 그의 언어는 사물과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어가는 경이로움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고, 시인과 함께 그런 경험을 하게 한다. 「살구나무는」에서는 사물과의 융합이 더 생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가 아닌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에서 감지되는 무아無我의 경지는 시인과 살구나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전혀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 감지되는 그 세계. 그래서 시인의 마음과 살구나무는 한 몸이 되어버리고 환한 봄날의 한 때와도 한 몸이 되는 그 세계는 도道의 경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적 경험의 세계는 독자들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념이나 지식과는 별개의 세계다. 마치 산수화 속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상상에 빠지게 하는 그 세계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아이콘(icon)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鄭有俊): 1998년 에 등단. 시집 「사람이 그립다」「풀꽃도 그냥 피지 않는다」「나무의 명상」「물의 시편」     김상미 시인의 시- 「죽지 않는 책」「하얀 늑대」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 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얘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한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 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敵이기도 하지만 책읽기란 맨 얼굴로 산소를 들이 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을 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 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 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 내는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책! --------「죽지 않는 책」전문   늑대 한 마리를 그렸다 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 그러자 스무 마리의 늑대 사냥개들이 나타나 둥그렇게 늑대를 둘러쌌다 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가 먹고 먹히기 직전의 생명체에서 살인적인 에너지를 뽑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늑대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 그럼에도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 오른쪽과 왼쪽, 뒤쪽과 앞쪽,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핏빛 외마디 비명소리들! 픽픽 내팽개쳐지는 개, 개, 개들의 시체 20대 1의 피비릴내 나는 압도적 승리! 그 앞에 홀로 포효하는 불굴의 전시 나는 그를 색칠했다 굽힐 줄 모르는 순백의 혈통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을 휘저어 놓고 우아하게 흰 목털을 곤두세우며 웃는 거대한 야성! 이제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진 하얀 늑대 한 마리 --------「하얀 늑대」전문     독서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반자연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죽지 않는 책」에서 시인의 갈등과 고민은 인공과 자연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작게 만드는 책을 운명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임종을 앞 둔 인간에게도 책은 죽지 않는 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죽지 않는 그만의 책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이다. 현실과 상상의 결합이 빚어내는 사유의 공간이 깊이 있게,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가상현실 속에서 더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실존적 모습 때문이다. 예술에서 리얼리티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드는 이들은 이미지의 사실성을 무시하고, 실재하는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때때로 예술 그 자체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외면한다. 「하얀 늑대」는 순수한 심리적 이미지의 시다. 시인은 어느 날 하얀 늑대의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이 늑대와 사냥개들의 혈투는 악과 선의 경계가 없는 순수한 본능적인 싸움이다. 시인은 그 본능적인 싸움의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잠재된 야성野性의 일부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야성은 문명 속에 파묻혀버린 자연의 에너지다. 그러나 인간의 DNA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 야성은 언제 분출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그는 그런 인간 심리의 내면적인 강렬한 의식을 가상현실의 ‘늑대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 생생한 가상현실의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이 경계 허물기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현대시가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적인 현상을 이미지로 구현하고 그것을 실상의 세계와 동일하게 처리하는 ‘디지털 시’의 가상현실과 같다. 디지털 시대의 이런 문학현상을 이인화는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조선일보 2007,4,9) 김상미의「하얀 늑대」는 그런 가상세계의 이미지와 함께 시의 끝부분 에서는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낭만적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서부 영화는 한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수십 명의 악당을 상대로 싸우는 보안관의 우직하고 늠름한 모습을 그려내어서 정의를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당시 명배우 등에서 잔인한 총잡이의 이미지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 사라졌지만, 당시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모습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뇌리腦裏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하얀 늑대」를 읽으면서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미지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미지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따라서 21세기의 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무한한 상상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언어의 꽃이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 김상미: 1990년 여름호로 등단. 시집
99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4>/심 상 운 댓글:  조회:105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5 월호에 계재   김지향 시인의 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소나기 온 밤 집 없는 도둑고양이, 어둔 헛간에서 내 신경을 긁어 댔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깜깜한 어둠 속 을 잠입했다 순간, 차량의 전조등 같은 사파이어가 잽싸게 내 눈에 발을 넣었다 나를 신어볼 눈치였다 나도 잽싸게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다 고양이 눈동자 가 왜 사파이어인지 인터넷 만물박사에게 물어볼 참 이었다 만물박사를 깨우는 사이 사파이어는 한바탕 잠든 공기를 뒤흔들어놓고 뒷구멍으로 내뺐다 창밖엔 소나기에 섞여 번개가 몇 차례 창문에 불똥 을 갈겼다 어둠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고양이가 가엾 어졌다 (번개에 명중되었을 지도 모를 집 없는 도둑고 양이!) 요 며칠 툭, 부러뜨려 놓았던 여린 감성이 슬그 머니 머리를 내 밀었다 감성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인터넷 속에서 ‘마음’의 소재지를 찾아보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부에 누워 있는 내장 속속들이 잎사귀를 들춰보며 조직검사하듯 사이트와 사이트를 한 잎 한 잎 열어제쳤다 (처음에‘ 마음’은 어떻게 짜깁기 되어 있을까?) 창밖은 벌써 뿌연 새벽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번개가 창문에 불꽃을 질렀다 언뜻 언뜻 눈을 깜박이는 벽걸이가 나체를 드러내고 나를 놓아 준 어둠이 창밖으로 발을 옮기 는, 하늘엔 간간이 꼬리뿐인 전기 코드가 빗금을 긋고 간다 바로 그때 잃어버린 고양이가 야-웅, 자기의 건 재함을 알려 왔다 아, 그렇군! 잃어버린 생각을 돌려준 고양이, 우레 속에 야영한 그가 반가웠다 이 반갑다는 ‘마음’이 또 어디에 감춰져 있을까 생각 속에 있을까 생각은 늘 잡동사니로 가득한 머리 속에 있지만. -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전문   ‘마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만큼 심오하다. 그리고 존재의 실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흔히 말하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마음이 무한한 에너지’라는 작은 범위로부터 우주만상의 존재에 대한 문제와 답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냐 하는 답은 미궁 속에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도 만족스럽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단지 마음의 한 모서리나 마음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의 입구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설령 발견하였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어서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불입문자不立文字’ 라는 경지를 스스로 깨우치게 할뿐이다. 중국 선종의 초대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달마達磨는 소림사 토굴에서 면벽面壁을 하던 중 법을 구하러 온 제자 혜가慧可와 이런 문답을 한다. “제가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십시오.”“편안치 못하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오면 편안케 해주리라.”“아무리 마음을 구하려 해도 구할 길이 없습니다.”“구할 길이 없는 마음이 어떻게 편하고 안 편함을 아는고”. 도를 찾아서 헤매던 혜가는 한때 도교를 신봉하기도 했는데,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 밤을 새우며 스스로 왼팔을 잘라 피를 뿌리면서까지 달마에게 법을 얻기를 간구했다고 한다. 혜가의 간절한 마음을 확인한 달마는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고 혜가는 이 ‘안심安心법문’을 듣고 홀연히 깨쳤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후세의 제자들이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 꾸민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간절한 희구의 구도과정’은 선禪의 핵심이 체인體認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그 과정을 지나온 당사자인 혜가는 달마의 법문을 듣고 깨우침을 얻지만, ‘간절한 희구와 구도’의 체험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 3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라는 것을 탐색하는 계기를 얻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김지향 시인의「마음은 어디에 있을까」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 속에 자기 마음의 향방을 추적하는 ‘작은 체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오는 날 밤에 도둑고양이를 만난다. 그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 사파이어 같은 눈빛을 빛내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순간 그는 왜 고양이의 눈이 사파이어 같이 빛이 나느냐에 관심을 둘뿐 고양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때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번갯불이 불통을 튕기며 번쩍인다. 이때 그는 고양이가 가엾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그는 라고 ‘마음의 실체 찾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일 뿐, 그의 관심은 고양이로부터 떨어져서 번개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벽걸이나, 전기 코드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그의 마음에 닿는 두 번째의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그의 관심을 다시 고양이에게 돌아가게 하고 한 걸음 더 자신의 마음의 실체에 다가가게 한다. 그 장면이, 이라고 이 시의 끝 구절을 예기치 않은 마음의 체험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시적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의 마음은 한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는 풍선처럼 떠돈다. 특히 많은 사건들이 계속 터지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마음을 잠시라도 한군데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인들의 삶이다. 이 시는 그런 현대인들의 ‘마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찾는 과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긴장감 속에 드러내고 있다. 지식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암시가 그것이다. 그 암시는 이 시를 선적 경향의 현대시로 분류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런 분류보다도 언어들의 참신성이나 긴장감, 어둠속 고양이의 사파이어의 눈빛으로 함축되어 있는 현대인의 마음의 모습 등 모더니즘 언어의 감각이 이 시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음을 거듭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나이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그의 현대적 사고와 체험을 통한 언어표현은 나를 경이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김지향(金芝鄕): 1956년 시집 로 등단. 시집 등     김종섭 시인의 시- 「내 뼈가 걸려있다」「성자처럼 눕다」     내 몸이 한 장의 필름으로 분리되어 판독기에 걸려있다. 검고 희멀건 채색에 담긴 앙상한 늑골들의 빗살 구조. 그 중심부로 휘어져내린 척추. 골반은 육중한 내 육신을 힘겹게 지탱하며 예까지 왔다. 한번도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이 나이까지 용케 버티어왔다. 문득 낯선 사람이 불을 끈다. 캄캄한 어둠속으로 내 몸은 감춰지고, 젊은 사나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최후의 심판을 준비한다. 나약해진 내 의식은 두려움에 졸아들고, 생명이란 것이, 육체란 것이 내 의지로부터 이렇게 쉽사리 떨어져나갈 수도 있는 걸까? 그의 논고가 神처럼 무서워진다. 혹시나 뻥 뚫린 허파, 퉁퉁 부운 간덩이가 안막을 덮어오는데, 창백한 벽면을 타인처럼 바라본다. 그곳엔 선고를 기다리는 내 뼈들이 기도처럼 걸려있다.                                         ------------「내 뼈가 걸려있다」전문   젊은 교수의 퍼즐 같은 말장난에 주눅들어 더위 먹은 하루 며칠 간 그 방황의 끝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한여름 비웠던 방문을 열면 슬며시 방을 점거한 저 많은 곰팡이들의 무자비한 침입 벽마다 검은 꽃들이 피어 냄새를 풍기고 간혹 붉게 충혈된 눈알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본다 내 식욕을, 내 미감을 채워주던 달디단 한 알의 과일 마저 부재중 모반에 가담하여 역겨운 악취로 나를 기습한다 이 정물들의 반란 습지가 된 내 침구를 접으며 나는 오늘 밤 성자처럼 눕는다 창문을 열고 별들의 무욕을 마신다 아, 이제야 돌아가는 모터소리의 생동감이여. ----------「성자처럼 눕다」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허구는 실제성이 없는 이미지나 환상이나 가상세계이기 때문에 임의적인 변경이 가능하지만, 과학적 사실에서는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방법 외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섭 시인의 시「내 뼈가 걸려있다」에는 허구에서 벗어나서 사실과 만났을 때의 두려움과 허무감이 들어있다. 그는 어느 날 병원에 가서 전신 X 레이 촬영을 하고 자기의 뼈 조직 필름을 보면서 자기로부터 분리된 또 하나의 자기를 보는 체험을 한다. 그때 그는, 라고, 자기 육체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의사의 판정을 기다리는 순간, 라는 허망감에 사로잡히면서,라고, 의사의 존재를 신처럼 인식한다. 이 시는 그런 사실 체험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알레고리가 아닌 사실적 기술記述을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간접체험의 효과와 충격을 준다. 그것은 사실적 언어가 발휘하는, 살아있는 힘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서와 사고思考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인의 객관적인 눈과 인내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시에는 그것이 잘 극복되고 성취되어서 독자들에게 공감을 안겨주고 생명의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공간을 제공한다.「성자처럼 눕다」에는 그가 냉정하게 사물을 대하게 되는 정신의 수련과정이 담겨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시는 또 그가 허상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사물의 실체와 만나는 생생한 과정을 감지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젊은 교수의 퍼즐 같은 말장난에 주눅이 들어서 정신적인 방황을 하다가, 한여름 내내 비워 두었던 자기 방에 들어와서 방안에 있던 것들의 변한 모양을 보고 관념의 놀이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그는 그때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부재중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 일상의 작은 사건들은 그에게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관념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실체와 만나는 공간속의 자신을 보여주게 된다. 라고. 이 시의 끝 구절 ‘창문을 열고 별들의 무욕을 마신다’와 ‘ 모터소리의 생동감’이 함축하고 암시하는 것은 생생한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접근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과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그대로 먹어보는 감각적 체인體認인 것이다. 나는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퍼즐 같은 말장난’의 허상에서 탈출하여 사물의 실체와 삶의 정체성에 접근하는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시는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살아있는 정신의 날카로움을 느끼면서.   *김종섭(金鍾燮):1983년 에 가 당선 등단. 시집 등     김기택 시인의 시- 「토끼」「소」     햇빛이 비치자 좁은 토끼우리도 환해졌다. 토끼 한 마리 한 마리는 그대로 움직이는 불빛이 되어 판자와 철망으로 막힌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머리 위로 솟은 귀들은 햇빛에 연분홍색이 되어 토끼들이 움직일 때마다 봄꽃처럼 흔들렸다. 주인은 이 토끼들을 어떻게 할까. 잡아먹을까? 시장이나 음식점에 팔까? 죽을 때까지 기르다가 쓰레기와 함께 버릴까? 희디힌 털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은은하게 빛났으므로 무위의 경지에서 오물거리는 입들은 너무 흥겨웠으므로 갑자기 그 위에 엉뚱한 미래가 겹쳐보였다. 어린토끼 한 마리를 가슴에 안아보니 뜻밖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서 떨고 있었다. 토끼의 두려움은 내가 쓸데없이 걱정한 미래와 상관없이 오로지 지금 내 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토끼」전문   소의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옹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고 그저 끔벅 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근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베어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는 것이다. --------------------「소」전문     대상과 시인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존재의 독립성에 의한 간격이다. 따라서 그 간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상의 실체와 만나느냐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의 어려움이다. 너무 가깝게 밀착되면 시인의 개인적인 감상성에 의해서 대상의 모양이 변질되기도 하고, 또 너무 멀어지면 시인의 정서가 메말라서 시가 아닌 지식이나 관념의 표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김기택 시인의 시는 그런 면에서 좋은 텍스트가 된다. 그의 시편들은 대상과 시인의 간격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인 밀착성과 함께 깊은 사유를 내포하고 있어서 거듭 읽힌다. 그 까닭은 시 속에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만이 아니라 대상과 한 몸이 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편들은 관념과는 거리가 먼 실제적 체험의 산물이다. 그 체험 속에는 그의 시적감성이 잘 녹아 있다. 그래서 최소의 알레고리나 수사修辭만으로도 시의 맛을 충분히 내고 있다.「토끼」를 읽어보면, 그의 시가 일상의 가장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범상치 않은 시적 감성과 사유의 공간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시골 농가 뒤뜰에 있는 토끼장에서 어린 토끼들을 본다. 그때 환한 햇살이 비친 토끼우리의 풍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라고. 여기서 감지되는 시인의 개성적 표현은 햇빛에 비친 토끼들의 귀를 연분홍색이라고 한 것과 토끼들의 움직임을 봄꽃에 비유한 것이다.‘봄꽃’은 토끼를 아름답게 느낀 소박한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심리적 이미지는 토끼에 대한 시인의 연민으로 이어져서 라고, 인간과 토끼의 관계, 인간 속에서 토끼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라고, 인간의 척도로 토끼의 존재성과 가치를 평가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의 끝부분은 어린 토끼의 실체적 인식과 생명체에 대한 정감을 생생하게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그 충격은 라는 구절에 들어 있다. 인간의 잔인성을 이미 직감한 듯이 어린 토끼의 떨리는 감각은 오로지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팔에만 집중되어 있는 생존의 엄연한 현실이 그것이다.「소」에서는 소가 하고 싶은 말이 소의 둥근 눈 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되어 달려 있다는 그의 관찰이 생동하는 감각으로 전해진다. 그는 라고, 소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情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인간적인 연민의 정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표출이다. 따라서 그 마음은 소와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 같다. 그 길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길이다. 마음은 언어이전의 정서와 사유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말보다 더 근원적이다. 수도승들이 가끔 말을 버리고 묵언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소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도 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가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태초의 신성한 말은 이미 사라지고 허상만 남은 말이, 간교한 지혜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들의 말을 생각해보면 부정적인 추측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의 말은 소에게 무아無我의 낙원을 앗아갈 수도 있다고. 이 시는 이렇게 둥글고 큰 눈을 끔벅거리고만 있는 소.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소의 말을 통해서, 독자들이 말에 관해 넓고 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치게 하고 말의 실체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침묵과 언어의 득실을 분별하게 한다.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김기택 시인의 사실적인 세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건강하고 따뜻한 삶의 진정성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만끽해본다.   *김기택(金基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등
99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3>/심 상 운 댓글:  조회:109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4월호에 발표   이기철 시인의 시- 「고요의 부피」「들판은 시집이다」     저 새의 이름이 뭐더라, 저 풀의 이름이 뭐더라 하는 동안 해가 진다 땅의 가슴이 더워질 때까진 날아간 새의 이름을 부르지 말자 어제의 산이 그늘을 데리고 와서 이제 그만 세상을 미워해라, 이제 그만 세상을 발길질해라 하며 문설주에 산그늘을 걸어 놓는다 조그만 생각을 끌고 가던 물이 마른 풀잎 끝에 고드름을 단다 청둥오리가 날아가고 짧은꼬리할미새가 날아와도 차마 그곳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바람이 시든 깃고사리 위로 버석거리는 신발을 신고 지나간다 지금쯤 찌르레기, 벌새들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늙은 밤나무는 다 안다는 듯 한 겹 더 껍질의 옷을 껴입지만 아직도 숲이 추운 곤줄박이만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바쁘게 날아 다닌다 춥다고 산 것들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숲이 깊은 숨 쉬고 새가 길게 날면 고요의 부피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저물면 낯 선 것들이 낯익어진다 해지는 광경만큼 황홀한 음악은 없다 -------「고요의 부피」전문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들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의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이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들판은 시집이다」전문    2000년대 들어와서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새로운 외래어로 크게 유행하더니 이제는 우리말이 된 것 같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행복, 안녕, 복지, 복리라는 의미의 이 말을 우리말로 ‘참살이’라고 하자고 의견을 내는 것을 어느 잡지에서 보았다. 행복이나 안녕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휴일이면 아파트의 규격화 된 공간 속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찾는 등산화의 발길이 도시의 인근 산을 누비고, 식탁에는 인공식품보다 신선한 채소류가 중요한 식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연성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자연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여하튼 자연이 인간에 끼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현대인들이 늦게나마 깨닫는 것은 다행이다.    현대시에서도 이 자연성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화두(話頭)가 된다. 원래 동양의 시인들에게 자연은 시의 원적지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서양정신에 대응하는 동양정신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신(神)의 개념도 동양에서는 자연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의 시인들은 자연을 관념화하여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숨결이나 욕망의 몸짓이나 무언의 언어를 충실하게 시에 담아내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황진이(黃眞伊)의 시조에 나오는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도 멋진 비유와 풍자의 언어는 되지만 실재하는 자연의 존재 즉 ‘산 속의 푸르고 맑은 냇물’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 상황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된다.    이기철 시인의 시「고요의 부피」는 인공식품 같은 지식과 관념들이 지배하는 의식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연과의 사실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신선하고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참살이’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을 쉬고 사는 시인의 생활이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도 배경에 넣지 않은 그의 언어는 식탁 위에 놓인 채소의 신선한 향기를 풍기며 온갖 인공 조미료 같은 관념에 절어진 독자들의 미적 감각을 회복시킨다. 라는 구절을 그냥 읽어만 봐도 관념 이전의 자연의 실체가 살아서 숨 쉬는 현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도道의 경지다. 아니 도라는 관념의 옷마저 벗어버린 무아(無我)의 경지다. 이때 자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 속에서 숨 쉬고 퍼덕거리고 날개 짓을 한다.   「들판은 시집이다」는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은유의 구조를 시의 골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관념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잎처럼 돋아난 단순한 비유이기 때문에 오히려 관념을 뛰어넘는다. 는 구절은 자연과 한 몸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접근도 하지 못 할 실제의 세계다. 인간 세상의 시시비비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세계를 시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21세기 현대시의 ‘자연의 재발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연은 누구나 시의 재료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생활을 하며 자연과 일체가 되어서 무심(無心)의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기철 시인의 자연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도달한 거리낌 없는 정신의 경지를 가늠해본다.   * 이기철(李起哲): 1972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낱말추적」「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우수의 이불을 덮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웠다」등     신현정 시인의 시- 「별사탕」「극명(克明)」     별들 속에서도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이 꿈인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 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 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집 앞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별을 봉지째 팔았다 ---------------「별사탕」전문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 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 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다들 날아 간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克明)」전문      언어의 형이상학적 추구의 결과로 언어가 ‘존재의 집’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는 존재(실상)가 될 수 없고 단지 존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여서 선(禪)이나 직관(直觀)을 통한 존재의 파악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에서는 언어를 ‘존재의 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어를 떠나서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시에서 불가능한 일이고 시의 예술적 본질과도 상충되기 때문에 현대시에서 언어를 탐구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포착하는 행위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으로 여전히 중요시된다. 따라서 언어와 존재의 이런 관계 즉 허상을 통한 실상의 발견과 포착은 현대시에서 언어와 존재에 대한 시인의 투명한 인식에 의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허식(虛飾)이나 실감이 없는 관념적 언어로는 존재의 그림자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현정 시인의「별사탕」은 이런 언어와 존재(실상)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게 하는 시로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별사탕’ 즉 ‘별+사탕‘이라는 언어를 포착하여 인간의 꿈을 인식하게 하고 꿈의 맛과 아름다움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차츰 희미하게 색이 바랜 어린 시절 꿈의 세계를 환기시켜 독자들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언어인식의 투명함이 시 속에서 움직이는 에너지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움직이는 인식의 에너지는 천진하고 열린 상상을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처럼 펼치는데, 그것이 언어의 허상이 아닌 아름다운 꿈의 이미지가 되어서 존재의 실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라는 엉뚱하고 단순한 의미의 구절들이 생명력을 얻은 언어가 된다.    이런 그의 인식능력은「극명(克明)」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침에 참새들이 앉아다 떠나간 나뭇가지를 보면서 ‘반짝이는’이라는 심리적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별사탕」처럼 언어를 통한 인식이 아니라 현장의 사물을 보고 발견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에 더 삶의 실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탈-관념화 된 투명한 인식의 눈은 어쩌면 분별심이 가득한 육안(肉眼)을 넘어서서 빛의 경지인 천안(天眼)이나 혜안(慧眼) 쯤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아침에 참새가 앉았다가 날아간 나뭇가지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누구나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정경이지만 거기서 ‘반짝이는’ 느낌을 감지하고 포착하는 것은 남다른 마음의 눈에 의한 직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눈은 어둠도 밝은 빛의 세계로 보는 눈이다. 그래서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라는 구절이 경이로운 감각으로 살아난다. 그 자신도 그런 인식의 경지가 너무 놀라워서 ‘극명(克明)’이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눈이 밝아야 한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여 보이는 것으로 변환할 수 있다. 신현정 시인은 오랜 시업(詩業)의 수련을 통해서 밝은 눈을 얻게 된 것 같다. 나는 대상의 내면을 투시하는 그의 시「별사탕」과「극명(克明)」을 거듭 읽으면서「극명(克明)」은 그가 포착한 오도(悟道)의 한 순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나름대로 확인해 본다.   * 신현정(申鉉正): 1973년 에 「그믐밤의 수(繡)」가 당선 되어서 등단. 시집 「대립」등     이재훈 시인의 시-「보길도 갯돌」「황홀한 무게」     돌은 시간의 은유다 긴 세월 동안 견뎌온 피부는 거칠어졌다가 이내 속살처럼 안락하다 만질한 자갈이 된 사연, 선술집에서 침묵을 지키는 사내의 등, 역마살로 떠돈 자의 주름잡힌 미소, 생일날 아침 공복의 커피, 할증시간 택시기사의 붉은 눈, 술이 깨는 새벽 라디오 소리, 노트에 적어 넣은 정지된 시간들, 그리고 서서히 딱딱 해지는 연보 네 기억이 드문드문 찾아오게 되면 모든 사물은 굳은 껍질로 스스로의 집을 만든다 딱딱함 속에 들어앉은 기억들이 제 몸을 뒹굴어 내는 소리 나는 너의 눈을 기억한다 너의 하얀 이를 기억한다 구르고 굴러 환멸까지도 그리움이 돼버린 이 소란스러운 돌의 은유                                                --------「보길도 갯돌」전문   눈이 나뭇잎에 앉았다가 햇살을 참을 수 없어 제 몸을 녹였 다 사람들은 그것을 학대라 부르기도 하고, 혁명이라 부르기 도 한다 체 게바라가가 위대한 이유는 자신을 죽여 또 한 생 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혜화동, 시위대가 장대 깃 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깃발을 두 명이 잡고 겨우 걷는다 나는 그 행렬을 보는 대신 버스에서 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몇 사람들은 그들이 깃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 는 지금 내 가방도 무겁고, 늦어진 약속도 무겁다고, 혼잣말을 했다 한 아저씨가 버스 창문을 열고 외쳤다 힘내요, 파이팅! 싸락눈이 비로 바뀌었다 나대신 깃발을 지고 가는 사람, 제 몸 을 거리에 내버린 풍경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황홀한 무게」전문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는 현대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관념의 극단과 물리적 이미지의 극단은 시의 성립에 위태로운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덕수시인은 그의 시론 ‘수퍼비니언스의 원리(2005년 시의 날 주제 발표)’에서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국 현대 시사(詩史)를 간략히 조감하면서 현대시의 과제로 “형식주의 (언어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시론은 한국 현대시에서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 즉 현실참여의 역사주의와 모더니즘의 조화(調和)를 강조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재훈의 시편들은 비교적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아서 시를 읽는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것은 그의 시가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조작된 모더니즘 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물론 한 두 개 정도의 이미지를 통해서 확장되는 의미의 세계를 안고 있으며, 그 속에 구체적인 현실이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새로운 시의 모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시정신이 풀어야할 과제로 남는다.   「보길도 갯돌」은 ‘돌의 은유’라는 발상이 시의 폭을 넓힌다. 그 돌은 인간의 삶을 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개성적인 관념으로서 독자들을 상상의 세계로 유인하고 인간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보길도 갯벌에는 바닷물에 쓸린 돌들이 널려있다. 그 돌들도 처음에는 예리하게 각이진 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에 쓸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진 돌들은 만질만질한 자갈이 된 것이다. 그것을 그는 라고 한 생애의 고단한 삶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라고 연민의 정까지 넣어서 독자와 밀착시킨다. 하지만 이 시는 독자들에게 시적 상상 속에서 삶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게 해줄 뿐, 어떤 사고思考를 유발하거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는 삶에 대한 성찰은 들어있지만 생의 에너지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황홀한 무게」는「보길도 갯돌」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날 혜화동 버스 안에서 시위대를 보고 느낀 감정과 생각을 시로 형상화 하면서 젊은 시인답게 자신을 죽여 또 한 생을 꿈꾸었다는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라고 솔직하게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감정의 드러냄은 독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시킨다. 그래서 그런 감정은 소극적이지만 생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끝부분 라는 구절은 그의 정직성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또 하나의 심리적 공간을 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공간이 시인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이 아니라는데 의미가 있다.「황홀한 무게」라는 이 시의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꿈이 살아 움직이는 그 공간은 현실만이 아니라, 생의 허무를 무너뜨리는 에너지가 함축된 심리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재훈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현실인식이 들어있는 시적 상상과 젊은 정신이 생동하는 감성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 이재훈 : 1998년 에 등단
99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2>/심 상 운 댓글:  조회:98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3월호에 발표   황송문 시인의 시-「물레」「돌」     木花茶房에 한 틀의 물레가 놓여 있었다. 수십 년만에 햇볕을 받는 할머니의 뼈다귀처럼 물레는 앙상하게 낡아 있었다. 都市의 詩가 他殺되던 날 밤 다방을 피신해 온 나는 물레소리에 미쳐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眞言처럼 사른사른 살아나는 물레 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靑竹 같은 자식을 戰場에 보내놓고 四方八方 치성을 드리던 할머니의 물레소리가 내 가슴을 다르륵 물어 감고 있었다. 보기도 아까운 그 얼굴 한 줌의 재되어 온 자식을 끌어안다가 까물치던 할머니의 목쉰 소리 다르륵, 숨이 막혀 울지도 못하고 낮은 음자리 돌아 감기는 恨의 물레소리 가락에 시름을 감으며 지렁이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달지는 밤이면 버언한 창호지 마주 앉아 남편 생각 자식 생각에 손을 멈추다가도 꺼지는 한숨, 달달달달 다르륵, 시름을 감아 돌리고 있었다. -----「물레」전문   불 속에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山賊이 되어 한 천년 숨어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를 집어 들고 물속에서 한 천년 원없이 구르다가 영겁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神仙峰 花潭先生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雲霧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 끓는 속계에 내려와 좋은 詩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돌」전문    어떤 대상으로부터 펼쳐지는 상상은 시인의 내면세계의 표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황송문 시인의「물레」에서는 현대문명과 대비되는 감성의 세계와 우리민족의 독특한 한(恨)의 세계가 담겨있어서 전통적인 서정시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도시의 문명에 의해서 자신의 시가 ‘타살(他殺)’ 되었다고 절망한 그가 도피처로 택한 ‘목화다방(木花茶房)’에서 발견한 한 틀의 물레는 그에게 향토의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상징적인 매체가 된다. 그는 그 물레의 소리를 환청같이 들으며 스스로 ‘미쳐들고’ 있다. 그리고 ‘사른사른’ 들려오는 물레소리는 그를 어린 시절 할머니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라고 전쟁이 휩쓸고 고향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게 한다.    그가 물레를 통해서 명주실처럼 풀어놓는 어느 할머니의 비극적인 이야기의 이미지는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전쟁의 비극이 그려놓은 우리겨레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보편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존재는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집안에서 물레를 돌리던 할머니의 환생(還生) 이미지라고 해석된다. 이 여성적인 이미지는 늘 남성의 그늘에 가려서 숨어있는 음성적인 이미지이지만 남성적인 이성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 되는 감성적인 이미지다.    현대의 도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문명의 성채(城砦)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성채는 인공의 화려함 속에 삭막한 인간관계와 비극적인 미래의 시간을 운명처럼 안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인공적인 이성의 문명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비록 남성이지만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적인 온화함과 눈물과 그리움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가 지향하는 반문명적인 세계는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야 하는 원초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세계다.    서양의 문명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바뀌는 것도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들 때문이다.「물레」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사유의 공간은 문명과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돌」은「물레」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정신세계를 조감하게 한다. 에서 보여주는 동양적인 초월과 환상 그리고 환생이 그것이다. 이런 초월과 환생은 그의 동양적인 정신수련의 과정을 단편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서양적인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의 세계에 천착하는 그의 감성과 현실 초월의지는 현대문명 속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나는 그의 반문명적인 축축한 감성과 현실 초월의식과 환생의 이미지가 담긴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시세계를 방문하는 즐거운 탐방객이 된다.   *황송문(黃松文): 1971년 에 등단. 시집: 「조선소」「목화의 계절」「내가슴 속에는」「메시아의 손」「그리움이 살아서」등     이길원 시인의 시- 「두더지」「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엘리베이터 자판기 커피 마시고 전화 받다 구내식당 서류 뒤적이다 소주 마시고 지하철 오늘도 바람은 부는데 이웃집 김대리가 결이 곱던 은행의 김대리가 교통사고로 이승을 빠져 나갔단다. ------「두더지」전문   승무를 추는 비구니의 외씨버선이 슬프도록 고운 까닭이 아닙니다 감전이라도 된 양 온몸에 흐르는 그대의 뜨거운 노래 때문만도 아닙니다 때로는 달빛이 미루나무에 머무는 밤에도 나비처럼 흐르는 까닭을 나는 모릅니다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너울거리는 두 팔의 의미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 합니다 나의 춤이 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더 더욱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살아 숨쉬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황홀한 춤을 추워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나는 온몸을 적시어 춤을 추어야만 합니다 푸른 하늘이 거기 있기에. ---------「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전문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 그리스의 비극은 살아있는 유산이다. 그래서 현대의 문화 속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등장한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비극 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적 비극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생부(生父)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인간 비극의 절정을 보여줌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프로이트는 그 비극의 내면을 투시하면서 그와 같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개념화 하였다. 이 그리스의 비극은 인간은 주어진 운명의 굴레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시인들도 이 운명론과 싸우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이길원 시인의「두더지」에는 현대인의 운명적인 비극성이 들어있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이들과 인사도 못하고 이승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이웃집 김대리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냉엄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 하고 순간적인 착오나 실수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비해서 인간적인 고뇌와 극적요소는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허망한 비극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이러한 비극을 단순한 시적구조 속에 담아서 단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신의 관념을 넣지 않고 남의 얘기하듯 단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의 객관적 서술은 현대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시의 전달효과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라는 최대로 생략된 시의 구문은 사실의 압축과 언어의 경제라는 단순한 시적 방법론을 넘어서 문명의 이기가 주는 반대급부 즉 부정적인 측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낸 인간이 문명의 이기에 의해서 그들의 운명이 어떤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있다. 문명의 횡포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들의 문제도 포함하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은 엄청나게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비극에만 묻혀있지 않고 「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에서는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의 양면성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는 현실이라는 주어진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연극 속의 삐에로 같은 존재로 표현하면서도 ‘푸른 하늘’ 즉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의 희망의지는 독백적인 진술에 담겨서 직접적인 울림을 준다. 그래서 라는 구절은 절실한 감정을 내포하면서 독자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 시의 ‘푸른 하늘’은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발견이라는 철학적·종교적인 의미를 붙일 수도 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자연은 서양의 신(神)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춤을 추는 이유를 라고 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찾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서 이성적인 세계를 추구하고자하는 의도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궁극적인 세계는 인간을 벗어난 자연 즉 절대적인 존재성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관념을 어떤 고정된 틀 속에 넣는 것보다도 허무를 극복하려는 개인적인 의지나 정신적인 경지의 지향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비극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 내는 정신적인 굴레에서 비롯된다. 만약 인간이 희로애락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서 밝은 마음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자연은 그 자체가 빛나는 열락의 세계가 된다. 이것은 갇힌 사고와 열린 사고의 차이를 의미한다. 따라서「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이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정신적인 수련의 결과물이라 해석된다. 나는 현대인의 비극을 담은 「두더지」와 현실의 허무를 극복하는 정신적인 지향을 노래한「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을 읽으면서 이길원 시의 현실인식 속에 들어 있는 균형감각을 음미해 본다.   *이길원(李吉遠): 1991년 에 등단 시집: 「어느 아침 나무가 되어」「겨란껍질에 앉아서」「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하회탈 자화상」     이춘하 시인의 시- 「고구마 모종을 내시는 어머니」「하늘공원」     팔순을 훨씬 넘기신 내 어머니 여름날 새벽안개 속으로 들어가신다 베렌다 한 켠에 세워둔 녹슨 호미날도 뒷짐에 챙기신다 (나풀나풀 초록이 멈춘 곳) 이 빠진 주택가 공터가 내 어머니 농장이시다 어머니 굼뜬 손으로 고구마 줄기 걷어 올려 모종내신다 삿갓처럼 호박잎으로 낸 모종 위에다 초록봉분 만드신다 팔남매 이부자리 다독이듯이 꼭꼭 흙으로 눌러놓으신다 바람 불어 날리지 않게 뜨거운 햇볕 가려주라고 중얼중얼, 당부의 말씀 잊지 않으신다 (고깔 쓴 초록봉분들 고만고만한 자식들처럼 다소곳하다) -------「고구마모종을 내시는 어머니」 전문   지하철을 타고 내려 시장골목을 지나 사람 사는 마을의 다리를 건너, 딴 세상으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미아가 된다. 어느 우주의 한 귀퉁이, 작은 역에서 내려 이름 없는 외딴집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한 무더기 억새풀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나누는 걸까? 손등이 붉고 손가락이 긴 억새풀들이 물결을 이루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강건너 신기루 같은 빌딩들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떼를 지어 몰려다 니는 멧새들만 바쁘다 번지수나 문패가 없는 데도 여유롭기만 하다 그늘 한 점 없이 종일 땡볕에 앉아 이마를 그을리고 있는 패랭이꽃도 소소롭다 밤에는 별들이 내려와 노숙을 하고 지친 영혼들 쉬어갈 수 있는, 하늘과 땅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 너와 나 사이에 하늘공원이 있다 -----------「하늘공원」전문      시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시의 옷은 다 벗겨지지 않는다. 벗기고 벗겨도 다 벗겨지지 않는 옷. 손에 움켜잡았다고 하는 순간에 물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시의 실체. 그것 때문에 영원히 청순한 연인으로 다가오는 시의 가슴. 그래서 시에 대한 해석은 무모(無謀)하고, 그 무모함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한다. 시인은 자기의 시 속에 신생아의 울음소리 같은 생명의 근원을 담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어떤 이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는, 물이나 불이나 공기나 땅 같은, 그것들을 운용하는 신(神)의 마음 같은 그런 자유롭고도 조화로운 무한한 무엇이 자기의 시 속에 들어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독자들이 발견하여 제 멋대로 해석해 주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이 시인을 외로움과 허무로부터 구원한다.    이춘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서 신선하게 솟아오르는 발랄한 생명의 기운 때문이다. 그 기운은 그의 시어 곳곳에서 감지된다. 따라서 그의 언어감각은 단순한 수사(修辭)에서 벗어나서 언어이전의, 대상에 대한 그의 감성작용을 느끼게 한다. 그는 대상에 대한 감지능력이 남다르고 자신의 감정 노출보다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다.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주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객관성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고구마 모종을 내시는 어머니」에서도 대상과 시인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끈적끈적한 관계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하나의 피사체로 생각하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그려내고 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감정에 치우쳐서 냉정함을 잃게 되고 또 너무 멀어지면 그림자만 남게 되기 쉬운데, 이 시는 그것을 잘 조절하여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풍경화를 보듯 아무런 부담도 없이 시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에서 어머니의 행위는 독자들에게 아파트가 밀집된 현대 도시공간에서 삶의 근본인 농촌을 떠나온 노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관계, 현대사회의 공해문제 등,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라는 이 시의 중심 장면은 독자에게 그런 것들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아파트 공터에서 초록생명들을 자식같이 다독이면서 키우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세상에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떤 존재의 모습까지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늘공원」에서도 그의 사실적인 시의 기법이 새로운 감각의 시어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하늘공원’이라는 공원으로 가는 과정도 사실적이면서도 현실과 유리되는 환상적인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그 그림 속에 그의 우주적인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는 끝 부분이 맑고 투명한, 열린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잡는다.    이 열린 사유의 공간은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은 그의 시적감성과 기존의 어떤 유형에도 가담하지 않은 그의 독창적인 어법의 산물이라고 판단된다. 나는 어떤 관념의 그림자도 들어 있지 않고 감정의 절제가 잘 이루어진 이춘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면서 현대시의 기법에서 탈-관념이 왜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적 시라 하더라도 고정 관념에 갇혀 있는 사유의 언어에서는 결코 새로운 시의 탄생은 기대할 수 없고, 그런 언어로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이춘하: 1994년 에 등단. 시집 :「콩꽃을 해부하다」「낮선 곳에서의 자유」「세석능선에 걸린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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