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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오늘의 시론/ 시문학 10월호/ 심상운 댓글:  조회:1254  추천:0  2019-01-24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21세기 '하이퍼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상운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 '나'라면 제2 제3의 화자는 '너'와 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시점으로 바귀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땨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 '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조향/「 바다의 층계」, 문덕수/「마릴린 몬로」는 하이브리드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문덕수「철원군 노동동 당사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 만이 아닌 '너' 나 '그' 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방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 '나' 와 일반 서정시의 '나'는 입장이 전혀 다는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 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엥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모겆ㄱ의식, 의도상과 연관ㅇ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송의 서열에서 해방 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모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조1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하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으이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갓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     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직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 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자연풍경 + 사회와 정치적 사건 + 실내의 식탁 광경 + 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드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 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히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 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 공간이다.    
25    디지털 시대의 詩 展望 / 吳南球 댓글:  조회:1067  추천:0  2019-01-24
             [하이퍼텍스트 시론.2 ]                    디지털 시대의 詩 展望   吳南球       지금은 디지털 영상 시대이다. 드브레(Regis Debray, 프, 1941~)는 현대를 메디올로지 시대라고 한다. 메디올로지는 단순히 매스컴론이 아니라 IT의 기술, 제도, 조직 등을 다 포함한다. 순간적으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가라는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어떠한 정보가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다. 그는 네 개의 권역으로 구별하여 원시부족 사회의 ‘기억권’, 제국주의 시대의 ‘언어권’, 근대 이성의 ‘문자권’,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의 ‘영상권’으로 나눈다. 현대는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이다.  따라서 시도 영상의 보여주는 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보는 시란, 시는 언어로 표현되므로 묘사하여 사물의 표상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즉 ‘보여주기’가 되겠다. 독자는 보여주는 대로의 상을 마임을 보듯, 마음 속 화면에 떠 올리고 그 의미를 상상하여 읽고 감상할 수 있다. 시인은 연출자와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표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형식에 그치고 시를 완성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된다. 이 ‘보여주기’는 주체가 바뀌는 시 쓰기이다. 즉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나 강요가 아니라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쓰기의 방법이다. 이 형식은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다만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시인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 등이 빠져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관념 빼기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특성은 미래에 디지털(히이퍼텍스트)와 아날로그(텍스트)의 시 쓰기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나타날 것이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해서 살핀다. 이로써 디지털 시대의 시 특성의 일단을 소개하며 전망한다. 실험은 미완성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그 성과는 시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1.   언어에서 관념 빼기에는 ①단어에서 관념 빼기 ②어구(단어+단어)에서 관념 빼기 ③문장에서 관념 빼기 ④ 시 전체에서 그 무엇이라고 하는 주제 등의 관념 빼기가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러한 네 가지의 관념 빼기를 살펴본다.   붉은 공이 튄다. 목련 담장 넘어서 깍 깍 깍 세 번 짓는다 붉은 공이 튄다. 소리 계곡 넘어서 울긋불긋 몇 점 핀다 붉은 공이 튄다. 진달래 암벽 넘어서 日 - 出 - 山 - 行 붉은 공이 튄다.   ―吳南球 「日出山行」전문     이 시에서 첫째, 단어 ‘공’을 보자. 공에 무슨 관념이 붙어 있는가, 이를테면 인생의 비애라든가 희망이라든가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상징성이나 배경의 의미도 없이 탁구공이라든가 축구공이라든가 하는 그저 사물인 공이라는 단어만 있다. 둘째, 어구(단어 + 단어) ‘붉은 공’에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관념이 없다. ‘붉은+공’이라고 해서 공에다가 이데올로기 이미지를 더하지 않았을 뿐더러 잘 익은 사과라든가 하는 아무런 뜻도 없다. 셋째, ‘붉은 공이 튄다.’라는 이 문장에도 어떤 의미를 뜻하지 않고 있다. ‘붉은 공’이 공산주의의 공이 아닐 뿐더러 ‘튄다’에는 그저 튀는 그 사물성만 있다. 넷째, 또한 이 한 편의 시 전체에는 ‘붉은 공’이라는 사물이 심리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으로 튀고 있을 뿐, 무슨 주제니 주의주장이 있지 않다. 이 시는 공이 튀고 있는 동영상의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이러한 심리적 이미지를 묘사해내는 것을 필자는 ‘염사’라고 한다). 위의 텍스트는 ‘탈-관념의 시쓰기’(吳南球.『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p37~p51)로 ‘관념 빼기’를 하고 있다. 이 쓰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사진 찍듯(접사와 염사) 묘사하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영상 이미지를 보여준다. ‘접사’는 사진기술을 시 쓰기에 도입한 말로서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법이다. 원근법이나 방위감각에 끼어든 오염된 관념을 제거하여 외부세계의 사물을 직관하고 생생하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지금 앞에 있는 유리컵에 바짝 눈을 대어보면 일상적인 컵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지고 유리만 보인다. 새로운 질감과 함께 긴장감을 느낀다. 염사 또한 내면의 의식세계를 염사(念寫)한다. 이 쓰기는 이와 같이 사물을 인지하고 언어로 묘사하여 서술하고 독자가 이미지나 표상을 통해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념 빼기의 시와 비교되는 관념의 시를 보자.   일본의「진보적」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   ―김수영「轉向記」에서   이 시의 일본, 소련, 진보적 지식인이란 단어와 어구에는 시인의 어떤 관념이 있다. ‘일본’은 자유 민주주의, ‘소련’은 공산주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은  ‘공산주의를 두둔하는’ 등의 관념이 있다. 여기서 ‘나’는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 하는 지식인’이며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는 그러했는데, 그가 ‘전향’(轉向)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독자는 그의 회고담을 듣는다.   2. 사물성의 쓰기는 언어 이전의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추상의 슬픔, 미움, 사탄, 하나님, 사회주의는 관념이다. 관념이 아닌 사물이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일과 물건이다.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는 고성(固性)이 사물의 1차적 성질이라 한다. 다른 요인의 침입을 막고 사물 자체의 성질을 고수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사물의 넓이, 무게, 부드러움, 단단함은 고성이다. 책상을 탕 치게 되면 손이 아픈데 이것은 사물이 갖는 저항감이다. 이 순간 ‘사물의 언어와의 만남’은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1차적 사물성의 즉 고성은 색, 소리, 향, 감촉 등 거의 무한하다. 사물성의 시 쓰기는 이러한 사물이 갖는 1차적 성질의 감각적 요소가 관념의 제로 포인트인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이다. 이를 기호화(추상화)하는 것이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사물들, 즉 유리 컵, 재떨이, 열린 문, 신사, 금, 금 밖의 청자담배, 라이터, 숨 ... 이렇게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이 탁자 위에 모여서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다. 모이는 것을 ‘집합’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수학적 개념을 도입해서 말하게 되면, 사물이 집합하여 ‘순열’ 또는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문덕수는 이것을 ‘모여서 결합’되어 있다 하여 ‘집합적 결합’이라 한다. ‘집합적 결합론’을 이렇게 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좀 더 이학적인 논리를 전개시키게 되면, 모여 있는 사물들은 하나하나가 집합을 이루는 ‘원소(元素)’이다. 이 원소는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집합하여 조합하고 순열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사물성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원소의 개념으로 파악된 이 사물의 단어들이 상징 등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면, 아니 그것들이 논리적인 인과로 놓이게 되면, 즉 시인의 생각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스럽지 않다.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라면 곧 관념적이 된다. 그러면 존재하고 있는 진실이 왜곡되고 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인의 어떤 의미인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강요받음으로써 독자의 시적 공간이 극히 좁혀진다. 위의 시를 살펴보면, 앞의 ‘관념 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어, 어구, 문장에 어떤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념 이전의 순수한 사물들이 그저 탁자 위에 놓여 있고, 여기서 시인이 직관(直觀)하고 직각(直覺)하고 있다. 세 유리컵이 놓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물론 삼각형이 계급적 의미라든가 사회적 상징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저 삼각형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삼각형 금(선) 안에는 재떨이가 금 밖에는 한 사나이, 청자담배, 라이터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이 ‘오롯이 앉아 있었다.’ ‘노려보고 있었다.’ ‘밀려나’ ‘틈새’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심경의 어떤 배경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 사물에 얹히어 있다. 이런 시 쓰기가 바로 물리주의(?)인 듯싶다.   3. 사이버성의 쓰기는 가상현실의 이미지의 분리와 결합이다. 예를 들면, 물고기에다가 사람의 얼굴을 붙이면 인어가 된다. 인어를 가상현실의 시라고 보면 된다. 현대는 이미지를 분리하고 결합하는 이러한 기능이 컴퓨터 그래픽에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스캔(데이터화)하여 그림이 모니터에 뜨면 이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림을 찌그러뜨리거나 늘어 빼거나 할 수 있고 어느 부분을 떼어낼 수 있고 두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놓을 수 있고 그래서 분리와 합성이 마음대로 되므로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게 할 수도 있다.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배경(육지)을 바다로 바꾸면 된다. 이런 가상현실은 실제처럼 느낀다. 그러나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의 물질(아날로그)인 시계를 보자.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읽을 수 없고 정확하지도 않다(상대적으로 디지털과 쉽게 비교되는 특성). 더구나 이것이 거울(물질) 속에 비치게 될 때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보이고 잘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거울 속처럼 보이는 컴퓨터 화면의 시계는 정확하다. 왜곡되고 굴절되어 보이는 것은 물질이 서로 간섭하는 성질 때문인데, 소리의 잡음(노이즈 현상)은 좋은 예이다. 비물질의 가상현실에서는 이런 노이즈(관념과 같은 성질)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데이터화, 즉 샘플링(sampling. 현실에서 견본 추출하여 데이터화, 즉 디지털화 하는 것)하는 과정에서 노이즈가 제거된다. 시의 현실은 가상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을 샘플링한 세계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시인에 의해서 기호화 된 것으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는 기호화 하는 과정에서 염사와 접사 등의 방법으로 관념 빼기를 한다. 그래서 기호에는 순수 이미지만 남게 된다. 그 순 수 이미지에는 심리 세계나 현실의 표상이 담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 뒤섞이기가 가능해 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임의로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 즉 사이버성의 시 쓰기이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에서   이 시는 지하철역 사고현장을 설명 없이 최대한 간략하게 보여준다(이것은 가상현실이다). 독자는 시인이 보여주는 대로 마음속에 한 장면씩 떠올리고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장면과 장면이 서로 간섭하고 잔상을 일으키어 이미지형성의 효과를 빚는다. 이 공간엔 내면의 의식이 흐르고 영상이 움직인다. 가상현실을 만들고 있는 기법을 보자. 그는 컴퓨터 그래픽처럼 기차의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꾼다. 그때 먼지가 반짝인다. 이 두개의 장면은 기본적으로 사진 찍듯(염사접사) 샘플링(기표화)한 것으로, 어떤 의미도 없이 사물성의 산뜻한 이미지만 있다. 그래서 독자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일상적으로 칙칙하고 그을리고 무거운 기차의 관념을 파란색으로 바꾸어서 가볍고 유쾌한 환상을 펼쳐 놓는다. 그런데 특이하게 시 속의 괄호로 묶은 곳이 시나리오 지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디지털(탈-관념)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험하는 아날로그의 퓨전이라 할 수 있고 소위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디지털 시의 실험이 한발 더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를 살폈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는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노예가 되어 유한한 수명(목숨)을 가지고 있다. 유승우(시인, 인천대 명예교수)는 「시와 현실-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이란 글에 “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규제의 극복이 시적 형상화 작업이며 시의 영원성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디지털의 가상현실은 시간을 살해하고 공간을 살해하고 전 세계가 현실의 공간을 극복하고 공간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또한 현실의 시간과 원근을 극복하고 동시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시 세계는 현실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파괴하고 탈-관념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된 새로운 질서와 형태를 만든다. [문학선언.2006.11.1.시의 날]  
[하이퍼텍스트 시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吳南球 (시인, 평론가)     ❙ 들어가며 ❙현대시가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고 있다. 해체된 언어(조각, 유니트)가  다시 통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종의 초현실로서 저절로 통합되어 자동기술 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이다.     1976년, '시인의집' 모임에서 현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을 얘기하곤 했다.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한성례씨가 찾아왔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가까운 문우들에게 필자가 이 모임을 탈관념의 ‘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니 ① 탈관념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인 것과 ② 탈관념의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과 ③ 탈관념 그 습작과정에서 쓰여진 것과 ④ 수학여행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시고(詩稿)들을 읽어보니 모던이스트 중에서도 모던이스트로 그 문명비평적인 쎈스의 풍자와 기지들은 많이 지나칠 정도여서 내게 씨(氏)가 시골사람이라는 걸 아조 잊어버리게까지 하고 있다.”   미당(서정주)이 한성례씨의 시집에 붙인 서문의 글이다. 이 말이 아니라 해도 시를 읽어보면 독자는 깨뜨려진 어떤 낮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표백제로 얼룩진 물감을 탈색해서 이제 막 내어놓는 옥양목 같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이 깨뜨려지고 있는 시어들은 낯설고 싱싱하다.     한 가름, 탈관념 선언에 영향을 받은 시   당시 탈관념의 실험을 시작하면서 모임에 내세울 새로운 이슈를 선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당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읽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도 다시 읽었다. 숙고한 끝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한국적인 사상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그 해가 1980년 1월 무렵이었다. 후에 그 일부가 경구(警句)처럼 동인지 표지에 한동안 게재된다. 그 표지에 써 놓은 글은 이러하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이 같은 문구는 동인들 중 크리스천들에게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해서 ‘신이 아니라 사람, 즉 시인’이라는 등, 시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담론해 갔는데, 물론 그 선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항에서 말하는 탈관념의 논리를 구축해 가는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인데, 지적이고 논리적이던 한성례씨는 이러한 시론을 좋아했다. 이 무렵 그는 갈등하며 시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관념적 허구’로서 절대자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꼈고, ‘막막한 신천지에 서듯’ 외로움을 타고, 불안・초조 등의 실존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다음의 시를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그가 드디어 동양적인 사고로 ‘직립’하여 바로 서는 자존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서구화된 우리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절망과 고뇌를 반복한다.     1.「무풍대에서」에 나타난 자아, 그 직립   「무풍대에서」그가 자아의 눈을 뜨고 바라본 진실은 무엇인가? 시를 보자.   종소리 속에서 느릿느릿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관성만 남은 일상 더듬이가 필요한 날에는 볕이 드는 쪽과 음지를 혼동한다.   낯선 바람 원점 향해 위치 변동 꽉 채우고 있는 물먹은 공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첫째, 사고가 신의 세계에 갇혀 “종소리 속에서 / 느릿느릿 /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그런 관성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작 옳고 그름의 이성적인 ‘더듬이’의 가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 관성으로 인하여 그 판단이 혼동된다. 둘째, ‘낯선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이라고 파악되는 ‘무풍대’이지만 ‘낯선 바람’이 태동한다. ‘낯선 바람’이란 시인이 의식한 ‘새로운 것’ 즉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인 의식의 ‘새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이란 서구 정신문화가 포화된 상태로서, “꽉 채우고 있는 / 물 먹은 공기”로서, ‘새바람’의 출구도 없는 무풍지대로 인식된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 그 언저리는 꼭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다.   직립한 바람은 직립한 바람끼리 손잡고 있는 무풍대에서    껌딱지로 도배된 기지촌의 포도처럼 사인 코사인의 귀를 맞추며 덕지덕지 하품으로 이어 놓는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셋째, 그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망을 느낀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을 본다. 또 죄지은 듯이 “꼭 /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고, ‘기죽은 초라한 자아’ 그 실존의 위기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직립’ 하여 ‘바로 서는’ 자의식의 입지(立志)를 한다. 물론 ‘기지촌’, ‘껌딱지’의 서구적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의지로 견디어야 하는 숙명이다. 이제 그는 무풍대에서 직립한 바람의 존재로서 홀로 서 있다.     2. 「벼랑 끝에서」의 춤   신을 ‘관념적 허구’로 파악하고 ‘절대자’를 부정했으나, 그는 아직 확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실로 한성례씨는 두려움 속에 있다. 신천지에 서듯 막막함과 불안・초조의 벼랑에 서게 된다. 이때 ‘춤’을 추게 되는데, 불안・초조로부터의 극복과 탈출을 위한 몸짓이다. 이 절대 고독상황에서 손잡아 주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어설픈 바람’ 뿐이며, 그 절실한 모습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서서 춤을 춘다. 동작보다 언제나 한 템포 느린 음악   아래로부터 걷어 올라온 바람이 어설프게 손잡아 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엄청난 배반의 현실에도 때때로 풋풋한 여명을 맛보곤 한다.   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배 한 척 무거운 방황은 젊은 날의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 해도 음울한 예정론에 기대를 걸고 출항을 서둘렀다.   이제 나이 드는 것이 타락의 나이테라면 차라리 돌아가지 말아야지   벼랑 끝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벼랑 끝에서」전문     3.「불완전 명사의 저녁」에 나타난 존재   눈을 뜬 자아, 그래서 막 태어난 '불완전 명사'로 나타난 존재! 그 직립에 의한 행보는 방황과 갈등이다. 벼랑에서 새로운 출항을 하게 되지만 이는 불안한 항해로서 익숙지 못한 실존주의자의 삶이다. 좌절과 불안과 머뭇거림의 연속이다. 그의 사상은 불투명한 상태로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리는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갈등 한다.   터널로 빠져 드는 녹슨 연기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린다. 철분의 붉은색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자맥질처럼 움직인다.   퇴색된 석양 언저리에서 태우며,  가늘게 남은 내 생의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   줄자로 잴 수 없는 문화의 어정거리는 습성  그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   터널로 빠져드는 녹슨 연기 아우성으로 떠는 흐느낌이다. ─「불완전 명사의 저녁」 중에서   그러면서, “가늘게 남은 내 생의 /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으로 그의 존재(存在)를 확인하며, “줄자로 잴 수 없는 / 문화의 어정거리는 / 습성”을 꼬집어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질타한다. 존재자의 갈등! 바로 진실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시인, 그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그는 「도편수의 노래」에서 스스로의 배-새로운 출항을 위한 도편수가 되기도 하고, 줄타기 하는 삶의 곡예사로서 ‘땅에 발 디디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두 가름,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에서 비롯된 시   이렇듯 그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최면을 통한’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이었다. 그 한 가지 내용을 보면,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긋이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대강 이런 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 성취는 괄목할 만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대체로 들뜬 상태가 아니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마음이 가벼워졌고 바라보는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느낌을 말한다. 몇 분 전만 해도 무심히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 커피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정서로서 움직인다. 그 성취 정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달랐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강렬하고 빠른 반면에, 서구적인 종교와 철학, 지식의 깊이가 강한 사람은 그 성취가 느렸다. 그의 시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 즈음 겪은 갈등과 실험을 꾸밈없이 쓰고 있는데, 드디어 관념이 깨어지는 그의 꿈꾸기(Image-Dream)는 ‘황홀한’ 첫 시적 경험을 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    ─ 타버린다 ─ 는 감각은 없어지고 경비행기로 출발한 우주여행은 그저 행위로만 남았다   기착지는 태양 뜨거움보다는  황홀한 색채에 질식당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전문   당시 그는 자동기술의 감성훈련에 적응이 늦었던 것 같다.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서구적인 합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곤혹스런 입장을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늘 도로(徒勞)의 작업이던 ‘꿈꾸기’가 첫 느낌을 얻게 된다. 자연스러운 “기착지는 태양”으로서, 첫 시적(詩的) 체험인 “황홀한 색채에 질식” 당하는 희열을 맛본다. 이후 그는 초현실적인 감각의 시 쓰기가 익숙해진다.「구의역에서」,「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고, 또한「방」,「장마」에서는 빗줄기의 기하학적인 선(線)이 꿈처럼 펼쳐지며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있다.     1.「구의역에서」의 우주적인 시점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우주적 감각인 둥둥 떠가는 ‘느낌’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구의역에서」는 시점의 ‘일상성 벗기’라는 ‘감성훈련’으로 빚은 큰 성과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역, 길, 사람 등)이 둥둥 떠다니며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각이 바뀐다. 낮에 바로 서 있던 물건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 움직임인데, 탈관념의 꿈 중 하나이다. 한성례씨에게는 그녀 인생의 무대, 그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한다.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 밑에 가서 머문다. 시선 끝으로 길 한 줄기 붙잡으면 녹음이 앞서 무질러 오고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개로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구의역에서」중에서    그는 우주적인 감각이 자유로워졌고, 그에 따라 무한하게 시의 세계가 확장된다. ‘가로수와 함께 일렁이기도’ 하는 판토마임 속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눈을 뜬 현실로 되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구의역’을 직시한다.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투사되듯 입력(入力)되는 곳 구의역.  ─「구의역에서」 중에서     2.「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의 전전반측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시인의 정(情)은 무엇일가? 그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갈증 같은 향수를 느끼고, 그때 “기지개 켜는” 의식이 꿈꾸기를 한다.     산과 들, 강물 걸어 넘는다.   그 끝은 평행선 한 가닥 분실된 몇 낱 낯선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고 ─「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중에서   몽롱한 의식 상태의 그의 ‘꿈꾸기’는 비몽사몽간 눈앞에 고향산천을 그려보지만 원근 속에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돼가서 끝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멍든 석양의 조각들이 / 도시 꼭대기에 차양처럼” 매달린 메커니즘의 현대문명 속의 삭막함만이 남는다. 현대인의 짙은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3.「장마」에서의 기하학적인 선   1980년대의 답답한 현실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꿈꾸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빗줄기는 대단히 시원하고 자유분방하다.     빗줄기 속에서 뻗어 내린 흰 꼬리 화살 화살은 내게 일제히 달려든다.  몸짓으로 털고 몸짓으로 도망하고 또는 몸짓 거부로 넘어지는 행위   시대의 재채기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 ─「장마」중에서    그의 시는「장마」에서 안정(安定)되고 한 단계 더 세련되었다. 빗줄기로 시작한 ‘꿈꾸기’가 “시대의 재채기 /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로서,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 가름, 탈관념의 자동기술된 시   1. 수학적 시론의 전개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어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질서는 ‘자연’에서, 그 방법은 ‘직관’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험에 의한 체험적 소신이었다. 고정관념의 ‘깨뜨림’은 습작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서 상당기간 대화법으로 실험을 도왔다. 그때 집약된 내용이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이었다. ‘쓰레기통 문답’은 이러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신인들에게 보인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 “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필자는 쓰레기통에 꽃을 던진다. 그리고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쓰레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게 왜 쓰레기통입니까? 꽃이죠!”라고 무안을 주었다.’   이 쓰레기통 문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첫째,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게 하고 둘째, ‘꽃’이라는 이름이 쓰레기통(박스) 속에 들어가면 순간 ‘쓰레기’가 됨으로써 허무하게 관념(의미)이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으로 느낀 사물에 대한 정서와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표출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각기 다른 ‘의식의 함수 f(x)다’ 라는 가설로 유도시킨다. 당시 한성례씨는 이러한 수학적 시론의 전개를 신선한 충격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필자는 보다 체계적으로 시론을 정립해 가며,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설명했다.   “시인의 삶이 f(x)면 시는 그 도함수(기울기)이다. x는 ‘만남(사물)’의 변수, y는 의식 공간이다.”             2. 의식의 단면   어느 날 좌표평면 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순간변화(의식의 단면)를 발견했다. 수학적 시론의 가설을 구체화시켜 x축과 y축으로 하는 평면좌표를 그렸는데, x축은 시간의 만남(시간적인 흐름 속에서의 만남)이고, y축은 그때그때의 ‘의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다음은 한 ‘시인(한성례씨)’과 남산’의 ‘만남을 함수관계’로서 그 의식(체험)을 나타내 보았다.   [예] 만남의 요소-남산   ① 20대의 한 시인이 1974년 1월 처음 남산을 보았다. 이후 계속 보게 된다. 그 높이를 300m쯤으로 직감한다. 이를 y축 3에 표시한다. ②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진강변의 평야지대에 살았다. 그가 산을 보아온 일상적인 의식체험은 100m 쯤의 야산들이었다. 이를 y축 1에 표시한다      위의 ‘가나다라’ 선은 시인이 사물을 만나서 느낀 의식의 그래프이다. 이것은 의식(체험)의 한 단면이고, 여기에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선분 ‘가나’와 ‘다라’는 늘 바라보았던 일상적인 것인데, ‘반복된 사건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상경하여 남산을 접한 어느 순간, 그 일상성이 깨뜨려지는 수직의 선분 ‘나다’가 나타난다. 이 순간의 의식(느낌)은 긴장이나 시적 충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일상성의 깨뜨림’이라 했고, 수평의 선분 ‘가나’ ‘다라’를 반복된 사건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일상성의 직선’ 이라고 했다. 이로써 좌표평면 상에 시의 존재(기울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선분 ‘나다’로서 긴장의 정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나다’의 선분은 앞의 가설인 함수 f(x)의 ‘시간 x축’과 ‘의식 공간 y축’으로 하는 좌표 상에 나타난 ‘순간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의 ‘순간변화’ 또는 ‘순간변화율’이라고 이름 붙였고, ‘느낌의 기울기’라고 했다.  이렇듯 '만남의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 ‘순간변화율’로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만남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집합과 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공에서 사물과의 만남은 무수히 진행되고 의식은 집합적으로 결합된다.’ 이처럼 시공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좌표 위에 '나'의 존재(의식)를 나타내고, x축을 시간의 흐름, y축을 의식공간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x축과 y축 사이에 무수히 진행되는 ’만남의 사건‘을 변수 x로 가정하였다. 그래서 자동기술의 시는 무수히 사물과 만나면서 이뤄진 체험이 잠재했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초현실 시 쓰기인 탈관념의 ‘꿈꾸기’를 하면서 시의 ‘질서는 자연에서, 방법은 직관’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게도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연스러움’은 곧 시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3. 그 습작과정에서 쓴 시,「서울의 큐비즘」   그는 그때까지 ‘매끈한 시’, ‘잘 다듬어진 시’가 좋은 시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고교생 대상의 여러 시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시에 식견이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탈관념은 커다란 충격과 혼란이었다. ‘깨뜨림’을 당한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로 인하여 시적방황이 시작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자동기술 되어 나온 작품이 ‘서울의 큐비즘’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어서 ‘지하도 풍경’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이 각각 문학지 ‘신인문학상’과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에게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핏빛 바람 갈대숲 안고 달아나는 소나무 하늘은 꽃씨 눕힌다. 누이의 속치마 능선을 타고 호랑나비 하늘을 앓는다. 소나무 허리 껴안은 거문고 울음과   한강변 세 살 난 잠실동 아이의 맏연습  아파트 아파트 우리 집은 아파트 충무로 1가에서 떠돌던 바람 소리 내어 돌아가고   호랑나비 푸득 푸드득 날개 짓 하는 하오는  종합전시장 앞 14차선 도로 악을 쓰며 누워 있다. 맨드라미 노을 넘실거리고   서울의 꿈은 유리알 맑은 모래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다. ─「서울의 큐비즘」 전문   우선 시에 나타난 어휘들을 집합(集合)해 보면, "달아나는", "앓는다", "울음", "맏연습", "떠돌던", "악을 쓰며", "허리를 반쯤 걸치고" 등의 말들이 모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즈음의 그의 갈등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 순열(順列)된 것이다. 시 자체는 좀 생경스러우나 일대 혁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화되거나 인위적으로 포장됨이 없이 시인의 솔직한 진실(감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 긍정 반 부정 반의 자세로서 엉거주춤한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 걸치고 앉아 있다”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의 신경세포가 ‘반쯤’의 어중간한 상태를 자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해의 한 시점인 반쯤 앉은 상태가 강한 이미지로 입력되었다가 자동기술(순열)된 것으로 이해된다.     네 가름, 삶 언어의 집합・조합・순열의 묘    1. 언어의 표현   시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과 만나며 느끼는 자극(느낌→의식)을 y 라고 하고, 사물과 만나는 시간 x를 변수로 하는 의식의 함수 y= f(x)를 가정할 때, 어느 시점의 자극(만남)과 반응(의식)을 나타내는 순간변화율(기울기)이 있다. 즉 사물과 만나는 '의식(느낌)의 변화율'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의식의 기울기'라 하고, '긴장' 또는 '흥분' 등의 파동을 나타내는 '시의 순간 변화율'이라고 했다. 곧 시를 어떤 순간 변화율인 '생명의 파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 기술되었을 때, 이 기울기(시라는 순간변화율)는 생명적이므로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생명의 존재질서 위에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집합, 조합, 순열된다.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으로 이를 도표화해서 보면 ‘언어A, 언어B, 언어C’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림]언어의 집합   도표를 살펴보면, 언어의 합집합인 최대공배수 ①A∪B∪C와 공통집합인 최대공약수 ②A∩B∩C 등의 모양이 나타난다. 합집합은 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최대로서 표현의 L.C.M이고, 세 단어가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는 빗금 친 부분의 공통집합은 표현의 G.C.M이다. 이 G.C.M으로써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독자(평론가)에게 수용되고 물론 그의 체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2. 시 해설은 적분   이상의 수학적 시론의 전개는 동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험습작을 했다. 그에 따른 시의 성취나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당시 탈관념의 ‘꿈꾸기’에 몰두했던 한성례씨의「지하도 풍경」의 한 예문을 분석해서 정리해보겠다.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 ─「지하도 풍경」 중에서   위의 예문에 “범람/ 성욕 / 용설란 / 남아프리카지도 / 피” 다섯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 만남(사건)으로써 생긴 단어들인데 긴장과 흥분 등 느낌의 기울기(미분)를 갖는다. 이것은 삶의 한 시점이 미분된 것이고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이다. 이 단어들이 독자(평가)에게 수용되고 해설될 때 시적체험이 되고 시인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해설은 곧 ‘적분’이다. 표현되는 내용은 집합, 조합, 순열된다. 여기서 표출되는 내용을 도표화해 보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예문의 ‘집합①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집합②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를 보자. 그림 ①처럼, ‘범람∪성욕∪용설란’의 집합과 그림 ②처럼, ‘남아프리카 지도∪피’ 의 합집합은 단어들이 갖는 상징과 이미지 등 표현의 모든 범위를 갖는다. 그리고 단어들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 공통집합(빗금)은 특별한 의미를 만들고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집합 ③에서 한 행 한 행의 내용 표현이 문장을 이루고, 다시 조합, 순열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 즉 의식 또는 체험으로 연결된 잠재의식 속의 단어(하이퍼텍스트)는 시인을 통해서 다시 집합, 조합, 순열해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같이 ‘범람∩성욕∩용설란’으로 공통집합 되면 시인 개체 안에서 자동으로 이미지나 의미가 결합되어 생명의 질서(정서)를 갖고서 표출된다.    3.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   이렇듯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원리는 미래 시의 새로운 항해에서 나침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구문론을 과감하게 파괴(탈-관념)하는 시가 길을 잘못들 경우 난해한 미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해체된 언어들은 어떤 질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의 시 ‘옵니버스 율’은 시인(생명)의 어떤 질서를 내포한 무의식의 흐름이고, 그 흐름의 경로(항해 -‘탈-관념의 꿈꾸기’)가 나열됨으로써 정서(질서)가 표출되었다.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들판」 전문   ‘산 빛 초록촉록 꽃밭동’ 에는 조사가 없다. 다른 행에서도 주어, 술어 등의 구문론이 다수 파괴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에서 보이는 선형성(線形性)이 없다. 비선형적이다. 또한 앞뒤의 문장이 원인과 결과, 논리가 없고 순차적이지 않다.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난 하이퍼텍스트 적이라 할 수 있다. 끊어져 있는 마디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언어의 마디와 마디를 뛰어 읽어가야 한다. 이때 독자는 단절된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을 뛰는 스릴을 맛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또한 시의 행갈이 순서도 자유로워서 역순 뿐 아니라 얼마든지 행을 뒤섞어 읽어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햇살은 나비의 눈물 같이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그는 이러한 시들의 묶음을 ‘옴니버스 율’이라고 했는데, 행이나 구문에 이미지나 표현이 묶이지 않고 한 행 한행 독립적으로 배열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옴니버스이므로 한 줄 한 줄 독립된 이미지의 마디를 다시 독자가 재배열해서 읽어도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역순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원본 텍스트보다 역순 텍스트인 메타텍스트가 더 하이퍼텍스트 적이고, 특히 선형성과 순차적인 배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행한 이 실험은 모더니즘 시의 한 가닥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 나가며   탈-관념의 꿈꾸기는 우주적(하이퍼) 공간이다. 그의 시「구의역에서」에서 보이는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고,「태양을 향해 날아갔다」에서도 현실감각이 사라진 공간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적 꿈꾸기는 사이버세계의 ‘경로’로 이해할 수 있다. 별과별을 잇는 상상의 ‘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과 같은 그런 경로다. 은하계의 ‘북두칠성’을 보자. 하나하나는 멀리 떨어진 별이다. 우리의 상상은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놓고 이 별자리에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의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꽃을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 ‘의식이 흐른 하나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현대시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의식을 표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경로를 통해 표출된 정서나 음률은 시의 바탕을 이룬다. 한성례씨의 탈-관념된 시가 정서와 음률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든 수준 높은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完)    
23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댓글:  조회:974  추천:0  2019-01-17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이퍼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 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3.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 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 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 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 ‘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 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 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 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 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 ‘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허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 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이 논문은 문학회의 하계 세미나(2011.8.1)에서 발표 후 창조문학지에 싣게 될 것이다. [출처]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작성자 최진연  
22    [스크랩] <의식-무의식-언어의 징검다리와 하이퍼링크 댓글:  조회:936  추천:0  2019-01-17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깍궁놀이 하던 모성에의 추억과 그리움이 애잔할 것이다. 엄마가 사랑스런 갓난애와 눈을 맞추고 깜짝 숨었다 깍궁! 하고 다시 나타나면 까르르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폭발되는 전통적 사랑놀이요, 육아법이다. 엄마나 아이 둘다 실존재이지만 갓난애 입장에서는 깍궁하는 엄마는 현실이요, 잠시 안보이는 엄마는 부재의 가상현실이기에 느닷없는 재출현에 그토록 자지러질 것이다. 배낭을 벗고 양지에 앉은 화자 자신도 싹이 트려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산곡을 넘나드는 작은 새와 진달래, 철쭉과의 정겨운 수작이 새싹들의 겨울잠을 일깨우는 깍궁놀이로 들린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 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 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 햇빛과 단풍 > 전문    시문학 발행인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수 십 년의 시력을 지닌 김규화 시인이 뒤늦게 하이퍼시에 경도되면서 시적변신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시에 대한 김규화 시인의 인식은 시문학 4월호의 심상운-김규화의 대담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외에도 등에서 하이퍼텍스트시의 실험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이어서 -- 마릴린 몬로의 금빛 머리칼----영화 포스터 보는 18살소녀--친구와 몰래 간 동방극장으로 증폭되고 --단풍속으로 돌아와 앉는 마릴린 몬로--심지 돋는 햇빛'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 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 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 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 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심상운 시인은 최근 몇 년 논란의 초점이었던 탈관념시, 디지털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촉구해 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문학 4월호에서는 김규화 시인과의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라는 대담을 통해 하이퍼시론을 피력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과 동인활동을 시도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문학 5월호에는 하이퍼시 특집으로 < 북한산의 레몬 향기> < 미완성의 시>도 선보이고 있다. 심시인이 수십년 동안 추구해온 토속적 서정과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디지털리즘과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에 주목하고 동인 에콜로 변신을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  인용한 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애착과 기법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하이퍼시가 방사성 자유연상, 공상적 의식의 흐름 따라가기이면서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림감상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실험단계라 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추상화 감상의 요점이 그림 자체의 감흥을 중시하고 사실에 입각해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인지는 부차적인 사항인 것과 같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그의 방에 걸린 다섯 개의 그림 중 첫 번째 그림 감상을 시작으로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시 첫 연의 골격은 첫 그림: 검은 철제의자위에 불타는 붉은 꽃다발--그 글 밑에 그와 내가 주고받는 컴퓨터 댓글 형식으로 -- “ 꽃밭의 햇빛 속으로 들어 간 죽은 뱀의 영혼” ”영하 10도의 겨울밤 시멘트 도로 위 귤의 꿈“ ”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시인의 여행“ 등 다소 난해한 글귀들이 화답한다.  다섯 개의 그림 감상도 차례대로가 아니라 1.3.5.4.2로 비순서적이며 세 번째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그림으로 가자 네 번째 그림에서 태평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두 번째 그림에서 나온 색색공이 굴러다니다 식탁 , 놀이터, 침대,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뛰고,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뜬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독법으로 세시인의 하이퍼시를 읽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추상화감상처럼 개개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시읽기의 무정부상태가 불가피 한듯하다. 이 점이 하이퍼시의 묘미라 할 수 있고, 살펴본 세 시인의 작품도 각기 개성이 보인다. 아직 실험단계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하이퍼링크에서도 오남구 시인은 매끄러운 언어구사를, 김규화 시인은 의식의 흐름과 링크의 완성도 여부를, 심상운 시인은 이미지 마디간의 집합적 결합을 중시하는 듯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 텍스트 제공자인 시인과는 별도로 이를 수용하는 독자태도에 따라 한스 야우스의 ‘현실독자’, 리퍼테르의 ‘초독자’, 스탠리  피쉬의 ‘정통독자’, 조나단 컬러의 ‘이상적 독자’, 볼프강 이저의 ‘내포독자’, 움베르트 에코의 ‘모범독자’ 등으로 분류될 만큼 독자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 등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한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을 답습해온 재래시의 진부함에 질린 독자에게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고, 미학적 제약을 벗어난 하이퍼텍스트시의 정서적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21    [스크랩] 하이퍼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 장경기 댓글:  조회:1176  추천:0  2018-11-16
하이퍼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멀티포엠아트 운동                                                                               장 경 기(시인ㆍ멀티포엠아티스트)       우리 몸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과 같은 첨단 지능형 테크놀로지는 구글, 패이스북, 유튜브 등이 이루는 글로벌 네트워크 환경과 융복합을 이루면서 문자, 영상, 음악,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를 지닌 디지털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접하고 공기처럼 숨 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로해서 현대인들은 어느덧 융복합 멀티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융복합 매체 환경 속에서 시의 본질을 계승하고 더욱 환하게 꽃피워나가기 위해서, 매체가 새로 생겨날 때마다 이를 활용해서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해온 시문학 운동이 멀티포엠아트 운동이다. 1996. 8. 1. 을 발표한 이래로 17년 동안 운동을 펼쳐오면서, 그 일환으로 필자가 창작해온 멀티포엠아트 작품이 시리즈다. 현재 28권 시리즈 1300여 편의 작품까지 진행되고 있다.   융복합 멀티언어를 활용하여 창작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융복합예술, 하이퍼아트, 하이퍼 시문학, 멀티포엠아트, 토털콘텐츠 산업 등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한강아리랑‘ 시리즈는 그 창작 과정이 바로 매체 발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멀티 융복합시대, 첨단 지능형 테크놀로지 시대를 관통하면서 시문학 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한강아리랑’이 특히 융복합 하이퍼아트, 하이퍼 시문학으로서는 어떤 특징을 가지며, 앞으로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를 살펴봄으로써 하이퍼 융복합시대가 펼쳐놓는 시의 신대륙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1. 디지털 정보로 축적된창작 무의식 늪지대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본격적인 시점은 17년 전인 1996. 8. 1. 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멀티포엠아트는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시문학이다. 오늘날과 같은 융복합 멀티언어 시대에 멀티언어의 꽃이자 정수로서, 영혼의 가장 섬세하고 깊은 내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해 내는 멀티언어의 크리스털로서의 역할, 융합 멀티언어의 깊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다듬어내고 꽃피어내는 역할을 해내겠다는 취지의 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은 현재 까지 발표해오면서 융복합 멀티언어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시는 정신의 순금이며 영혼의 크리스털이요 마음의 양식이다. 인류가 있어온 이래 시는 절대고독과 허무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위로하며 영원을 향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데 늘 함께 해왔다. 하이퍼 융복합 시대에 이러한 시의 본질을 계승하고 인류의 삶과 함께 해나가자는 것이 것이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의 기본 방향이다. 창작물과 창작 과정들이 계속 축적되는 외장하드는 어느덧 나의 휴먼블랙박스요 분신이 된다. 그렇게 문자, 영상, 음, 이미지 등을 모두 포함하는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해오는 언제 부턴가. 글을 써도 그림을 그려도 동영상으로 창작을 해도 컴퓨터를 통해서 하게 되었다.   한 대의 컴퓨터 안에 글, 이미지, 애니메이션, 영상, 음, 웹문서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멀티적인 창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을 하는 동안, 컴퓨터에 연결된 외장하드에는 자연스럽게 창작 재료, 과정들까지 고스란히 축적되어 간다. 내 생각, 감정의 섬세한 무늬들이 그 속으로 배여 들고 다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면 또 그만큼 나의 내면에서 나온 글이, 이미지, 영상, 소리들이 눈송이처럼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간다. 그런 외장하드 속은 거대한 늪지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나의 휴먼블랙박스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해야 했다.   2. 작품은 창작 무의식 지대의 꽃     창작이란 결국 이 사이버 늪에 나를 축적시키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창작이란 결국 사이버 늪 속에 내 스스로를 복재해 넣으며 불사를 꿈꾸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앞으로의 창작 역시 이 늪에 내 스스로를 퇴적시키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 늪 위에 피어난 수련 같은 꽃송이들이 바로 한 편의 시이고 멀티포엠이고 디지털아트 작품인 셈이라. 그 꽃송이만을 꺾어 예쁜 화병에 꺾꽂이해 보여주는 것이 작품 발표요 전시였던 셈이라.   ‘그래, 나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동안 서로 뒤섞여들면서 갖가지 꽃을 피워내고 향내를 빚어내며 독특한 모습을 이뤄나가는 저 사이버 늪지대야 말로 내 온 삶으로 일궈내고 있는, 내가 빚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나의 작품은 공기다.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네트워크 속을 흐른다. 우리는 이미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정보를 공기처럼 접하고 활용할 수 있는 융복합 멀티언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은 곧 언제 어디서든 작품을 창작 단계에서부터 서로 접하고 교감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있다. 외장하드에 있는 작품들은 그대로 디지털 네트워크 속으로 흐른다. 작품은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면서 어디로든 스며든다. 인터넷 상에서의 존재 방식 역시 서버와 같은 한 곳에 둥지를 튼 상태에서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방식을 점점 벗어나고 있다. 패이스북, 유튜브, 구글, 네이버, 다음, 스마트폰 등 다양한 터미널에 분산되어 있으면서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고 융합되어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변신해 가고 있다. 한 인간의 모든 것이 네트워크상에 분산해서 존재하면서 활동한다. 육신을 거처로 하는 나와는 또 다른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인 셈이다. 감상자중 누군가는 사이버 늪 안으로 들어와 꽃 몇 송이만 보고 나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저 지구 반대편에서 네트워크를 타고 들어와 늪 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뒤지며 자신도 그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함께 꽃을 피워낼 수도 있다.   3. 창작 현장은 융복합의 소용돌이     은 내용면에서 母語, 神話, 生命, 存在, 삶이라는 5개의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한 창작자의 머리에서 나온 시리즈는 1996년 멀티포엠아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 십 여년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은 의도적인 방향 정립이 아닌, 자연스런 흐름 속에서 그 나름의 몇 개의 굵은 흐름을 강줄기처럼 자연스럽게 형성해 가고 있다. 母語, 神話, 生命, 存在, 삶이라는 5개의 줄기다. 한 창작자의 생각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떤 갈래를 가지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강아리랑’은 멀티포엠아트, 융복합예술, 하이퍼아트, 하이퍼시문학 등의 특성을 지속하면서 디지털 정보와 네트워크의 발달과 함께 그 매체 환경에 적응하면서 아직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 진화해 나갈 것이다. 그 속에서 작품의 내용 역시 ‘母語, 神話, 生命, 存在, 삶’이라는 현재의 5가지의 갈래를 기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가지들을 돋아내고 뻗어나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와 작품들을 열매로서 꽃으로서 피워나갈 것이다.   나의 작품에 완결이란 없다. 각 프로젝트와 작품들은 변화하는 매체에 적응하면서 저마다 진화하고 번식해간다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의 일환으로 융복합 멀티언어를 활용해서 창작해온 시리즈는 현재 문자시는 물론 디지털아트, 설치미술, 멀티포엠아트영화, 시나리오, 소설, 연극 등으로 이뤄진 융복합예술, 토털콘텐츠 산업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최근에는 하이퍼 융복합 환경 속에서 열린 작품, 열린 창작, 열린 표현이라는 방향으로 펼쳐나감으로써 이 시대정신을 포괄적으로 가꿔나가고 넓게 포용하는 느티나무형 토털콘텐츠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4. 공기처럼 네트워크 속에 분산되어 흐름으로 존재하는 작품들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융복합예술, 멀티포엠아트, 하이퍼아트 시문학 작품이다 이제까지 살펴봤듯이 창작 무의식 늪지대를 이루면서 외장하드에 축적되는 디지털 정보들은, 컴퓨터를 통하여 패이스북, 유튜브, 클라우드, 스마트폰 등의 네트워크를 타고 흐른다. 이때 작품의 거처 역시 자유자재로 바꾸고 분산시켜가며 필요로 하는 어디로든 언제든 공기처럼 출몰하고 접근해 간다. 현재 28권 1300여 편의 작품으로까지 진행된 작품들과 그 창작 과정, 관련 자료들은 27개의 외장하드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그 중에 중요한 작품과 자료들은 에 중복 보관되고 있다. 작품과 관련 일부 자료가 동영상 전문 사이트인 유튜브에 동영상으로 올라간다. 디지털북과 이미지, 웹문서 형태의 작품집들이 멀티포엠 서버에 축적되어서, 멀티포엠아트방송을 중심으로 서비스된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링크로 하여 패이스북, 관련 홈들에 노출되고 있다.   오프라인으로는 종이책 작품집들, 관련 잡지 발표, CD, DVD 작품집 등이 있다. 그리고 미술전시 갤러리, 디지털아트축제, 멀티포엠아트축제, 문화예술관련 행사 등을 통해서 발표되고 보이고 있다 이렇게 외장하드, 컴퓨터, 클라우드, 패이스북, 유튜브, 각종 네트워크, 스마트폰, 그 외에 오프라인의 설치, 조형물, 전시물 등에 걸쳐서 디지털 정보 형태로 다양하게 분산되어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되어 ‘한강아리랑’이라는 하나의 덩어리, 나의 분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오늘날 작품의 한 존재 방식인 셈이다.   이 창작 디지털 정보들은 끊임없이 서로 뒤섞이고 융합되면서 또 다른 창작물들을 빚어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한 하나의 작품, 단일한 하나의 형태란 오히려 어색해 보인다. 한강아리랑 시리즈들은 별개의 아이템으로 있으면서도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또 서로를 잉태시키기도 한다.   첨단과학기술과 멀티미디어, 시, 예술 등 이질적인 분야를 융합시키는 멀티포엠아트와 같은 창작 방법을 오늘날 사회와 산업은 필요로 하고 있음을 주목 오늘날 사회와 산업은 첨단과학기술과 예술, 문학, 인문학 등의 서로 이질적인 분야들 간의 융복합을 통해서 인류의 삶을 바꿔놓는 획기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첨단과학기술 + 멀티미디어 + 시 + 예술=융복합예술= 멀티포엠아트’라는 특성을 가지고 시문학과 첨단과학기술, 미디어 등 이질적인 분야들을 구체적으로 융합시키는 멀티포엠아트의 창작 방법은 이 시대의 화두를 풀어내는 또 하나의 과정이 되고 있는 셈이다.   5. 융복합 멀티언어     멀티포엠아트 활동은 용복합 시대 주 언어인 ‘융복합 멀티언어’를 아름답고 섬세하게 가꾸는 일 시문학 본연의 역할은 그 시대 언어의 표현 영역을 확대하고 가꾸는 일이다. 스마트폰, 페이스북 등 첨단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시대에 멀티언어는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속에 정착되는 언어의 한 형태이다. 상호작용, 비선형성, 다매체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하이퍼 융복합 멀티언어’는 지능형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함께 새롭게 개발되는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표현방법을 넓혀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에 적절한 표현방법, 소통방법을 제공하고 개척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인류 삶과의 공존, 인류 언어에 대한 적극적인 개척과 개발, 활용은 ‘하이퍼 멀티포엠아트’가 가지는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정보시대가 열린 것은 불과 십여 년 전이다. 그만큼 융복합 멀티언어의 영역은 아직 미답의 신대륙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미지의 땅에서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창작해 나가는 영역이 母語다.   母語는 물질계에서의 산소(O), 수소(H) 등의 기본 원소들에 비교될 수 있다. 정신계를 이루는 기본 원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어를 활용해서 다양한 이야기와 표현을 해내는 것이 작업 내용이다.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형적인 언어세계, 오늘날의 언어들로 분화되기 이전의 원형 상태의 언어를 모어라 칭했다. 그리고 그 모어들을 단어처럼 활용하고 결합시켜서 작업한 것이 바로 제2권 , 제9권 , 제22권 등이다.   6. 융복합 멀티포엠아트의 발표, 소통, 산업화 과정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창작 유통 감상이 이뤄진다 창작공간이 되고 있는 컴퓨터에는 프리미어, 포토샵, 워드, 플래시, 베가스, 드림위버, 쿨에디터 등의 디지털 저작도구들이 열려 있다. 동시에 창작 과정과 작품 일체를 축적시키는 외장하드가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인터넷으로는 패이스북, 유튜브, 구글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완결된 작품이나 과정에 있는 작품, 아이디어, 자료들이 보이면서 관련 인들과 아이디어를 교환한다. 스마트폰은 항상 옆에 있어서 카카오톡 등으로 수시로 네트워크가 이뤄진다.   이와 같이 컴퓨터를 중심으로 외장하드, 스마트폰, 저작 프로그램들, 인터넷, SNS 등이 서로 연결된 상황에서 창작이 이뤄진다. 그리고 유통, 감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감상 면에서는 검색기능 강화, 대용량 터미널 활용, 네트워크, SNS 발달 등으로 어떤 작품이든 언제 어떤 곳에서든 바로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쌍방향 네트워크 상황이 주어지고 있다고 해서 창작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많은 변수들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경제적인 부담이나 기타 여러 제약 요소에서 많이 풀려나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디지털 정보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인접 장르들과 융합할 때, 공기처럼 세계 어디로든 어떤 형태로든 다가갈 수 있는 폭넓은 활동의 문이 열린다. 문자뿐만 아니라 영상, 음, 조형 설치물 등 다양한 형태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융합 확장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융복합 네트워크에 자유자재로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문학 활동 역시 언제 어디서든 어떤 매체로든 언어, 국경, 미디어 형태, 장소, 온오프라인 등의 구별과 제한을 초월하여 이뤄지는, 창작의 유비쿼터스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7. 멀티포엠아트 17년사는 디지털정보시대 매체발달 과정의 문학 예술적 기록     신예술장르 는 17년 전인 1996. 8. 1일 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한국이 낳은 융복합 시예술이다 1996년 멀티디지털시대의 신예술장르로서 ‘문자, 영상, 음, 설치 조형물 등 가능한 모든 매체를 함께 활용하여 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융복합 시예술’이라는 개념을 선언문을 통하여 뚜렷하게 정립하고 그 이후부터 2010년 까지 발표해오면서 작품 창작과 관련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융복합시대에 융복합 멀티언어로 표현하는 ‘멀티언어의 정수’ ‘멀티언어의 꽃’ ‘멀티언어로 빚어내는 시’라는 독자적이고 뚜렷한 영역을 개척해왔다. 2010년을 전후해서는 스마트폰, 클라우드, 패이스북, 유튜브 등의 네트워크가 융복합 환경을 본격적으로 이뤄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2010. 10. 1일 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서 ‘첨단과학기술 + 멀티미디어시 + 시 + 예술=멀티포엠아트’라는 개념으로 확대하여, 현재 까지 발표해오면서 융복합예술로서의 멀티포엠아트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 17년 동안의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영상시집, CD롬 시집, DVD시집, 母語 그림을 단어로 활용한 작품집, 시를 원작으로 한 토털콘텐츠 산업, 400여 미터의 대형 시화전, 야외 대형스크린으로 발표하는 시집, 디지털아트형 멀티포엠아트, 외장하드로 된 시집, 멀티포엠아트 영화, 유튜브로 발표하는 시집 등을 발표해오면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이러한 매체환경에 충실하게 적응하면서 이를 활용하여 창작해 왔다. 그로해서 현대의 매체환경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8. 융복합 멀티언어 창작에 있어서의 17년 동안의 창작 환경 변화 과정     현재는 지능형테크놀로지, 쌍방향, 다매체, 비선형, 소셜네트워크 등의 창작 환경이 이뤄지고 있다 멀티포엠아트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1996년 만해도 비디오, 티브이, 필름 등이 멀티 매체의 주를 이루던 시대였다. 2000년대를 전후한 디지털시대의 도래로 문자, 영상, 음, 이미지 등이 모두 디지털 정보화되고 저작도구 프로그램들이 컴퓨터 안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융복합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지능형테크놀로지가 등장하여 그야말로 모든 매체들을 한데로 융합시키고 있다. 패이스북과 같은 쌍방향 소셜커뮤니티 (SNS)의 발달,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써비스의 발달 등이 작품 창작, 발표, 감상 모든 면에서 바로 이전 세대들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매체 환경이 하루하루 밀려오고 있다.   인간의 뇌를 스캔해 축적해 놓은 외장하드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창작과정에서 특징적인 첫째 현상은 역시 창작 무의식 늪지대 형성이다. 디지털 정보화된 창작 작품, 창작 과정, 관련 자료들이 외장하드에 17년여 동안 축적됨에 따라서 그 자체로 창작 무의식 늪지대, 콘텐츠 늪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외장하드, 인터넷, SNS 네트워크, 멀티저작 도구, 스마트폰 등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행해지는 창작 현장도 보여주고 있다. 그 안에 디지털정보들은 서로 뒤엉켜 융복합을 일으키면서 진화하고 번식해나간다. 작품은 그 늪 위로 피어나는 꽃들이라 할 수 있다.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면서 융복합예술로, 멀티포엠아트로, 하이퍼아트, 하이퍼시문학의 모습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작품은 공기다, 네트워크 속에 흐름으로 생존하는 디지털정보로 된 창작품들 두 번째 특성은 바로 ‘나의 작품은 공기다’라는 선언을 가능케 하는 현상이다. 발표, 감상 면에서 보면 검색기능 강화, 대용량 터미널, 인터넷 SNS 등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작품 감상, 유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오프라인의 책, DVD, 조형설치물, 박물관, 테마파크, 콘텐츠 산업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작품들은 동시에 디지털 정보로 변신하고 진화하여 네트워크상에, 유튜브에, 패이스북에 스마트폰에 어디에든 분산되어 존재한다. 그러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네트워크 속에서 흐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특히 정보, 네트워크, 인터렉티브, 융복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활용하는 창작 방식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 단일 작품을 착상에서 완결까지 창작하는 방식에서는 미리 주제와 구성 등을 정하고 창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흐름이라는 형태로 디지털정보들이 네트워크 상에 산재하면서, 이들이 모이고 융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구체화되어가는 융합 멀티언어를 활용한 창작 방식에서는 주제나 구성 등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이뤄지는 속에서 나중에 결정되고 구체화 되어가게 된다.   무정형, 애매한 형태로 모티브가 생기고 이것이 진화하고 번식해가는 과정에서 작품의 주제, 표현방법, 발표, 감상 시스템 등도 그 시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 과정들은 쌍방향, 다매체, 비선형을 핵심으로 하는 하이퍼아트, 하이퍼시의 특성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강아리랑’에서 각 권들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들 중에 고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외장하드 속의 콘텐츠 늪은 바로 뒤엉켜 있는 한 덩어리로서의 리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융합 멀티언어를 활용한 창작은 과학, 패션, 인문학 등의 이질적인 분야들과 더욱 폭넓게 융복합을 일으키면서 또 다른 미지의 창작 방법과 형태, 작품을 낳게 될 것이다.   9. 멀티포엠아트는 융합 멀티언어의 詩魂     하이퍼 융복합 시대 시 예술의 방향 지능형 테크놀로지로 불리는 스마트폰은 인체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지적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을 확대시켜 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인터넷, SNS 네트워크, 티브이 등에 접속한 채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메모, 클릭, 검색 등의 사소한 행위들까지 구글, 애플 등의 빅테이터에 저장되고 분석 처리되어 다양한 용도에 데이터로 활용된다.   이와 같은 정보와 지능형 테크놀로지는 이미 우리의 공기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정보, 지능형 테크놀로지, 빅데이터, 클라우드, 인터렉티브, 융복합, 로봇, 사이보그, 생명공학, 줄기세포, 뇌스캔, 나노 등은 요즘 가장 많이 우리의 주변을 떠도는 말들이고 실제로 우리의 삶을 이뤄가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해내는 창작 방법, 형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 찾아내고 제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우리 창작자들의 작업이리라.   멀티포엠아트는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 운동 작품 역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지능형 청소기 등과 같이 실제로 정보나 지능형 테크놀로지를 포함하고 있는 창작품, 이런 것들을 활용하고 있는 창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형 면에서 보면 돌덩이, 석고 덩어리로서의 조각에서 더 나아가 컴퓨터, 로봇, 스마트폰과 같은 형태의 정보 유기체로서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음악,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감각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고를 이끌어내는 정신의 꽃으로서의 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매체 활용 면에서도 단일 매체에서 더 나아가 융복합예술, 인터렉티브예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반영할 때, 우리의 삶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작품을 빚어낼 수 있으리라 본다. 하이퍼 멀티포엠아트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지능형 테크놀로지 환경을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디지털정보,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생명공학 등의 우리의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 하이퍼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여건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10. 작품에 완결이란 없다. 계속 진화하고 번식한다     융합 멀티언어를 활용하여 창작하는 멀티포엠아트라는 영역에서 태어나 17년이라는 독자적인 역사성을 가지면서 아날로그로 비디오테이프에 담기기도 하고, 디지털 정보로 CD-ROM, DVD 등에 담겨 발표되기도 하고, 극장에서 필름으로 상영되기도 했던 작품들은 이제 인터넷 네트워크 환경 속에 흐름으로서 존재 방식을 변신시키고 있다. 유튜브, 패이스북, 스마트폰, 구글 등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흐르면서 어디로든 스며들고 함께 호흡하면서 스스로를 변신시키고 진화하며 번식해 나간다.   현재 28권 1300여 편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의 존재방식이다. 이라는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작품들은 하나의 촉수에 해당된다. 그 작품들은 저마다 제 촉수를 세상으로 뻗어가면서 계속 분열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이라는 전체성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융복합 멀티언어를 활용하여 창작하는 장르로 태어난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이, IT 강국으로 지능형 테크놀로지인 스마트폰, 인터넷 등의 활용 면에서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선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로벌 무대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가슴 벅찬 일이다.   주) 하이퍼 융복합 시대를 맞이하여, 원고 개재에 있어서도 다매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본 원고에 나오는 28권 시리즈 1300여 편의 작품은 인터넷 상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본 원고의 과 ‘자세한 관련 이미지들이 함께 하는 원고’를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장경기 1992년 로 등단. 1996. 8. 1일 을 발표한 이후로 시인, 멀티포엠아티스트로 활동. 현재 제 10 선언문까지 발표해오면서 멀티포엠아트 연작 작품집 시리즈로 , , 등 28권 1300여 편을 발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영토화 개념으로 본 이선의 시 세계     김혜천(시인)         이선 시인(이하 이선)의 두 번째 시집『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1부는 카니발을 연상케 한다. 중세의 카니발(carnival)은 민중들의 축제였다. 욕망을 절제하는 금욕의 시간인 사순절을 맞아하기 전 민중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문화적 해방구였다. 비(非)카니발적 위계질서에 의해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카니발의 공간 안에서 서로 연계되었다. 카니발은 민중들을 억압과 학대로부터 해방시키고 민중의 웃음을 찾아내는 대중의 축제이며 가치와 권력 그리고 권위와 위계에 대한 도전과 해체의 장이었다. 이선은『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에서 50여 종이 넘는 동물, 곤충, 조류 등 여러 대상을 등장시키고,등장시킨 대상에 무의식을 투영하여 내면에 깊숙이 도사린 억압과 분노, 그리고 트라우마를 끌어올려 상상력과 무의식 속 영상들과 연결한다. 대상을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확장시킬 뿐 아니라,대상으로 치환된 스스로와 우리 모두의 상황을 반전시켜 해방시키고 꿈을 갖는 유토피아를 지향시킨다. 또한 사물과 상상력으로 동원한 텍스트에만 한정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로만 말하고 사유의 문을 열어두었다. 끝없는 이미지의 변주를 통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켜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고 재생산하게 하여 텍스트를 탈영토화시킨다. 하이퍼시를 쓰면서 하이퍼시 쓰기 운동을 해온 문덕수 오남규 심상운 김규화 시인 등과 동인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론을 모색하는 평론가이기도 한 이선이 어떻게 자신의 시세계에 탈영토화를 추구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들뢰즈/카타리는 “글쓰기는 모든 종류의 것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분열증적 흐름”으로 간주하였다.지적 신경증의 회로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대상의 다의성을 읽어내며 다의성의 라인을 타고 끝없이 탈주하면서 시세계를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는 것이다.탈영토화는 욕망을 끝없이 생산, 혹은 “̔생성” 하여 무엇이 “되기”̕의 도정에 풀어 놓는 것이며 구분과 경계와 가둠에 대한 거부이다. 사상의 고원을 계속해서 이탈하는 지적유목민과 같아서 물길을 찾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킨다. 반면, 미로와 퇴로가 있는 텍스트에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찾는 것은 다양성으로 열려 있는 텍스트를 가두는 것이며 “영토화(territorialization)”하는 것이다.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를 가능케 하는 리좀(rhyzome)   1. 리좀의 특질   리좀은 원래 다양한 뿌리줄기식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뿌리가 중심이 되는 줄기가 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구마의 줄기가 땅에 닿는 접점마다 새 뿌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각 줄기들이 사방으로 경계 없이 새로운 것들과 만나서 끊임없이 증식해 나간다. 들뢰즈/카타리는 리좀을 “계통수(系統樹)” 구조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계통수는 군대조직처럼 위계적이고 상하적이며 직선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반면, 리좀은 모든 형태의 위계를 부정하며 다양한 접속과 생성으로 열려있는 관계이다. 그 어떤 동질성, 통일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다의성을 의미한다. 2. 리좀이 가동되는 원리   들뢰즈/카타리의 리좀이 가동되는 다섯 가지 원리를 통하여 이선의 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접속(connection)의 원리   계통수 모델이 동일성과 통일성 위에 세운 위계와 질서 세우기라면 리좀은 다양한 각도와 방향으로의 접속을 특징으로 한다.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열증적이며 끝없이 새로운 방향을 만들며, 그 어떤 다른 텍스트와도 접속시켜 나간다.   왼쪽 발목이 절단된 저 비둘기가 제대로 날 수 있을까? 한쪽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 바퀴처럼 의심은 뒷좌석을, 불안케 한다 비둘기를 관찰하는, 27분 43초 공원 벤치 왼쪽 다리도, 관절이 아픈지 삐걱댄다   피카디리 극장에는 1989년 3월 7일, 기형도의 지문을 기억하는 아침 9시에 눈을 뜨는 의자가 있다 희미한 극장 비상구는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을 닮았다   어린 날 갖고 놀다, 분질러버린 방아깨비 뒷다리 누나가 구워준, 방아깨비 길다란 배를 먹던, 물컹한 느낌 분실된 뒷다리를 찾기 위해 신문과 고문을 반복하는, 자학적 패턴은 종종, 그의 꿈을 방해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꿈 조각’을 가져오라 명한다   잃어버린 꽃게 앞 다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것인지? 방아깨비 뒷다리에 대한 권리를 위임할 것인지? 인터넷은 늘 누군가를 성토 중이다   지진의 소문이 있는 밤엔, 특히 꿈을 조심하라 꿈 조각 틈새로, 큰 새의 날갯짓 소리 범람하리라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詩의 나라로 뭉게구름, 조각조각, 시시각각, 이미지를 배송한다 예언의 아침이 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복숭아 꽃잎 ㅡ흰색이거나 분홍색이거나   붉은 의자는, 기형도의 이름을 만지작거리며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은 버드나무 잎사귀를 닮았다고 중얼거린다.   ㅡ「기억의 초상肖像」 전문 위의 시는 좌절과 불안한 미래에 맞서는 자의식을 표현한 시로서 니힐리즘을 넘어서서 영원회귀에 대한 초극의 삶의 태도를 지향한 니체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관절이 아파 삐걱대는 비둘기”, 어두운 세월의 지문을 일일이 기억해 내는 “기형도의 지문”, “발목이 절단된 방아깨비”, “잃어버린 꿈 조각” 등의 언술로 좌절과 불안을 표상하였고 “꿈 조각의 틈새”, “큰 새의 날갯짓”, “짜라투스트라의 눈빛”, “버드나무 잎사귀”등의 언술로 현재에 대한 극복의지와 상승, 그리고 미래지향적 삶의 태도를 표현하였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락을 접속시켜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끝없이 새로운 방향의 텍스트와 무한대로 접속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둘째, 이질성(heterogeneity)의 원리   리좀적인 접속은 이질적인 것들과의 다양한 접속을 전제로 한다. 손기계는 무한히 다른 이질적인 기계들과 만나면서 동일성이 지배하는 정주(定住)가 아니라 무수히 새롭고 다른 강(밀)도를 생성한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 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에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동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거울 속, 염색한 빨강 머리카락을 보고 있어요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 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ㅡ「소금꽃을 꺾다」전문   위의 시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상황을 입양아를 통해 고발한 시로 제목부터가 이질적이다. “소금 꽃을 꺾다”니, 꺾을 무엇조차 없는 대상을 꺾는다 하여 낯설게 했다. 역설적 표현이다. “사막의 낙타”,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 “도마뱀의 빨간 엉덩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초등학생”, “도둑고양이” 등 서로 이질적인 대상들을 한 공간 안에 접속시켜 혼란을 야기하고 의미를 단절시켜 새롭고 다양한 사유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다의성(multiplicyty)의 원리   리좀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다양한 접속들의 집합이며 다른 하나가 추가될 때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배치라는 개념은 이와 같은 리좀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배치’란 접속되는 항목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의 수가 달라지는 다양체이다. 예를 들면 붉은 색이 어떤 맥락의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차원들로 생성된다.   새벽 로데오 거리, 안개 숲은 포옹을 풀고 창세기 1장 28절은, 개화와 낙화를 반복합니다   내 입술은 당신의 펜촉 끝에서, 빨갛게 채색되거나 억압된 욕망은, 당신의 손바닥에서 결박이 풀립니다. 당신, 기억의 저장고에는 패턴 분리가 되지 않은, 욕망 알갱이들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당신은 창세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여자여, 당신의 욕정은 아직 생리를 합니까? 당신 심장의 빠른 박동은, 욕정의 첫 단계 그 긴장과 공포를 압축하여 옥죄면, 오르가즘이 증폭됩니다.   양버즘나무 열매가 슬몃슬몃, 떨어집니다 잎새들 눈빛이 흔들립니다   가로수들은, 등과 등이 결박당하는 꿈에서 깨어나 허공을 잉태합니다   결박된 거리의 욕정이 해체되며, 2단계로 발효 중입니다 ㅡ「칵테일파티 효과」전문   술이 새로운 술과 혼합될 때, 어떤 술과 혼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맛의 칵테일로 변화되듯이 다양한 집합체의 접속인 리좀은 다른 하나가 추가될 때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6연으로 완성된 위의 시는 연관성이 없는 각 단락을 배치하여 의미를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억압된 욕망의 로데오 거리’는‘해체’와 ‘발효’를 통해서 성질 자체가 바뀐다. 본성의 변화를 예고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와 이미지의 끝없는 탈주를 경험하게 한다.   넷째, 비(非)의적 단절(asignyifying ruture)   리좀의 다양성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안정된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구조주의적 의미의 의미화와 다르다. 그것은 다양한 접속을 통하여 무엇이 되기도 전에(영토화 되기도 전에) 의미화 과정에서 벗어난다. 의미가 아니라 비의미의 끝없는 단절을 통해 항상 새로운 생성의 도정에 있다.   공룡새 발자국 화석 옆에 시인새가 ‘발가락 낙관’을 찍는다 700만년 뒤에도 발톱은 날개에 집착할 것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시인새   사막독수리부엉이 부리로 잡은, 물고기자리별 비늘 껍질을 떼어내는, 시인새   유행에 민감한 낮달의 귀걸이가 팔랑거린다 시조새의 부리에 입을 맞춘 채 크레타섬에 왼발을 딛고 카리브해를 궁금해 한다   시조새는 큰 입을 벌려 낮게 뜬 헬레니즘 구름 몇 조각 비잔티움ㅡ콘스탄티노플 문명조각을 푸딩처럼 맛나게 먹는다 이오니아해, 뽀얀 안개숲을 소스로 얹어서 날쥐, 작은새, 도마뱀, 곤충은 노벨섬의 소중한 간식 여우나 뱀들이 낚아채기 전에 낚아채야   사막박쥐가 떼 지어 노벨섬을 날아다닌다   원시부터 불어온 모래태풍은 달빛에 맨발을 드러내고 모래고양이 털 속에서 콜콜 낮잠을 잔다   다시 깨어날, 환상의 노벨섬! 일곱 번째 인을 떼고 ㅡ「노벨섬을 향하여 달리는 새」전문   위의 시는 미래를 향한 시인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표현한 시다. 원시로부터 현재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시인새”가 되어 끝없는 욕망과 새로운 생산의욕을 표현하고 있다. 텍스트를 의미화 영역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의 단절을 통하여, 무엇이 되기 전의 새로운 도정으로 넘어 설 때 가능하다 1연에서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시인새”가 2연으로 넘어와 “물고기자리별 비늘껍질을 떼어내고” 다시 3연에서는 “크레타섬에 왼발을 딛고 카리브해를 궁금해 한다”. 다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문명조각을 푸딩처럼 맛있게 먹다”가 “박쥐가 날아다니고” “모래태풍이 고양이 털 속에서 잠을 자는 환상의 노벨섬”을 깨우는, 시간과 공간이동을 통하여 머물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확장시켜 나간 것이 그것이다.   다섯째, 지도 그리기(cartogrnphy) 혹은 데칼코마니(decalco mania) 원리   리좀적 다양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베끼기, 즉 재현으로서의 모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리좀의 다양한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데칼코마니는(오스카 도밍게즈가 개발, 1906ㅡ1958) 물감을 칠한 부분을 접어서 다른 면과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 접속의 순간 접촉한 면들의 성질과 압착의 강도에 따라 원래의 물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파열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리좀적 지도는 접촉하는 순간의 강(밀)도와 원래의 물감에 따라 그리지만 원본(현실)이 변형될 때가 많다. 데칼코마니 시는 현실과 심리작용에 의한 작가의 창작을 독자가 재경험하는 기법이다.   강가에 서성거리는 사슴을 잡아먹고 황색 암구렁이, 한 마리 여러 마리 수컷과 둥글게 한데 엉키어 구애를 하네 물속 나라에도 꽃 피고, 잎이 돋네 몸을 휘말고 황색 얼룩무늬를 잉태하네 ㅡ 대지의 어머니, 고구려 유화   백번, 죄가 허물을 벗네   하늘과 땅이 껍질을 벗고 꽃물 흘러, 흘러 유화의 자궁 속으로 밀려오네 뱃속에서 알이 꿈틀대네 천둥 번개 타고 구름 속으로, 용이 승천하네   함지박만한 달이 황색구렁이 몸통에 올라앉아 힘을 주네 광활한 우주가 알을 낳는다네 대지의 아들, 주몽   ㅡ「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전문   잘 구워진 한 점의 분청사기, 국보 제259호인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를 보고 쓴 시라면, 국보 제259호에는 황색구렁이가 없다. 데칼코마니 하듯 구름의 변화무쌍함을 보면서 황색 구렁이 여러 마리가 얽혀 있는 문양과 용이 천둥 번개를 타고 승천하는 파열과 변형을 나타냈다. 또한 달의 음기를 받은 “유화의 자궁”을 빌려 “우주의 알”, “대지의 아들, 주몽”의 탄생 신화를 탄생시켰다.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에 그치지 않고 시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이상과 같이 이선은『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카니발을 열어 소외된 대상들을 호명하여 대상들과 함께 스스로 ‘다리가 파란 커다란 새’가 되어 춤을 추면서대상들과 말하고 노래하며 그들을 억압과 분노,깊은 트라우마에서 해배시킨다.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꿈과 희망을 제시한다.   이선의 시작법을 다섯 가지 ‘리좀이 가동되는 원리’로 살펴보았다. 이선은 의미를 고정하는 어떠한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생산 흐름을 열어두고 계속해서 텍스트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1) 접속의 원리를 통하여,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접속시켜 새로운 방향의 무한대한 접속을 시도하였다. 2) 이질적 대상의 접속을 통해, 의미를 단절시키고 새롭고 다양한 사유를 확장하였다. 3) 다의성의 원리를 통해, 추가적 이미지를 배치하여 독자로 하여금 끝없는 이미지의 탈주를 경험하게 하였다. 4) 비(非)의 단절의 원리를 통해, 텍스트가 영토화되기 전 의미를 벗어난 새로운 생성의 도정을 보여주었다. 5) 데칼코마니 원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베끼지 않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새로 접촉하는 것들의 성질과 압착 강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파열과 변형이 가능케 했다.   이선은 전통적 어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어법을 만들면서, 현재에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한데, 이선의 상상력의 힘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세계가 아니다.그것은 깊은 사유와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온다. 내면을 바라보는 그의 심리적 에너지는, 현실을 탈주하는 힘이 되어 자신의 시세계를 끊임없이 탈영토화 시켜 나간다.   이 외에 다수의 시편에는 리비도가 바탕에 깔려 넘실거리는 생명력으로 출렁인다. 이선이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해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색채 이미지를 통하여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공간 이동과 시간이동을 통하여 상상력을 확장시켰으며, 환타지 기법을 통하여 영상미를 추구하였으나 이 부분들에 대한 관점은 논외로 하였다.   파란 스카프를 휘날리며 퍼포먼스를 통하여 온 몸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모색하는 갈라파고스 섬의 한 마리 파랑새 이선 시인. 최근 양평 대흥리 300번지에 더 깊은 사유의 산실을 마련한 그가, 그의 시세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켜나갈지 다음이 매우 기대된다. 참고 문헌   들뢰즈, 질, 카타리, 펠릭스. 김재인 역.『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들뢰즈, 질. 김상환 역.『차이와 반복』. 믿음사. 2012 오민석.『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문학의 전당. 2017         약력   201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윤동주서시문학상 제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한국전통차문화협회 회장 겸 지도교수
19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 / 정 신 재 댓글:  조회:1101  추천:0  2018-11-06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   정 신 재   “얼마나 많은 기차가 지나갔는지/ 얼마나 많은 이별을 했는지/ 낡은 침목은 가끔 쿨럭거리고/ 날것의 비를 온종일 맞은 침목처럼/ 갈비뼈는 평생 울음을 받치고 있었다/그 새벽 기차 소리 듣는 사람은/ 소리가 시나브로 사라질 무렵/ 한 가지 깨닫는 게 있다/ 더 이상 기차가 가슴 위를 지나지 않을 때/ 마지막 승객이 내가 된다는 것/ 철커덩철커덩 기차가 멀리 떠나고 소리 잠든다/ 아직 새벽이다”(이성주,「기차 떠나는 새벽」에서)   사람들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곳은 미지의 세계일 수도 있고,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일 수도 있다. 우리가 창작을 하는 것은 현실을 닮은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한 고독과 사색의 경험도 포함된다. 그곳에 가면 진실과 진리와 아름다움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모두(冒頭)에서 이성주의 「기차 떠나는 새벽」을 인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침목은 가끔 쿨럭거리고/ 날것의 비를 온종일 맞은 침목처럼/ 갈비뼈는 평생 울음을 받치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들의 갈비뼈는 실재(實在)에 가 닿기 위한 창작열로 불타고 있다. 우리가 왜 전국 각지에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여기에 모여 있는가. 그것은 단지 하나 문학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문학이 우리를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 모여서 우리는 각자 그동안 쌓아 두었던 고독의 짐을 풀어 놓고 영혼을 전율시키는 감동을 찾아 그것을 독자들에게 실어나르기 위해서 잠시 정거장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찾아나서기 위한 기착지(寄着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인간 구원과 존재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창작의 길이 쉽지  않음을 실감할 것이다. 그것은 문학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전철을 타거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갤럭시를 보는 데 익숙하고, 맛집이나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데서 쾌락을 맛보기도 한다. TV 시청자들은 리모콘을 들고 보다 재미 있는 프로를 찾아 채널 돌리는 데에 익숙해 있다. 이제 전철에서 책을 보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에 따라 문학은 몇몇 유명 문예 잡지를 제외하고는 온라인 문학 카페에 정착하기도 한다. 달라진 것은 비단 문인들의 모임만이 아니다. 문학 양식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시에 소설적인 이야기나 대화가 들어가는가 하면, 극적 구성이 짜여지기도 하고 소설에서 시나 소설적인 요소가 나타나기도 한다. 장르의 탈경계나 가로지르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의 음보만 보더라도 예전의 3,4음보보다 훨씬 긴 음보가 유행하고, 아예 산문율로 이야기나 대화가 전개되기도 하며, 극단적이거나 엽기적인 행위가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이 컨시트로 엮어지거나, 현실과 환상이 하이퍼링크로 연결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기법들이 문예 잡지사마다 특징을 가지고 자리잡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하이퍼시를 소개하려 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단편적인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는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하여 정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 그림이나 밑줄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화면에 나오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하여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는데,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쌍방향성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 텍스트가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통의 지식, 성장하는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연결 고리는 리좀(rhizome)의 사유에 닿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tree)형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 바 있다. 리좀은 우리말로 근경(根莖)이나 뿌리 줄기에 해당한다.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속을 파고들어 사방팔방으로 소통하면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모호해진 상태를 말한다. 수목의 개념이 계통화되고 위계화되는 방식에 있다면, 리좀의 개념은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성에 있다. 리좀은 새로운 접속과 창조가 이어지면서 열린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리좀은 원줄기를 가지고 있으나 수만 갈래의 뿌리 줄기와 네트워크화를 이루고 있어 원줄기와 단절되어도 생명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리좀은 탈중심성, 탈고정성, 탈유한성을 지향하는 담론에서 즐겨 비유된다. 리좀은 이성적 사유, 전통적 시적 주체를 해체하고 시인과 독자의 소통 구조를 단선적 구조에서 다양한 해석 체계로 전환시켜 주고 있다. 리좀적 사유를 담고 있는 하이퍼시는 시어 혹은 시행을 따라가다 보면 시적 주체가 더욱 탄탄해진다. 좌충우돌하는 듯한 이미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교차되면서 더욱 탄탄한 의미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시는 생명을 얻고 이미지는 성장을 한다. 초현실주의시들이 이미지조차 단절시키고 있는 데 비하여,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새로운 결합을 보여준다. 하이퍼시는 첫 시어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이미지가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절은 영구한 단절이 아니라 또다른 연결고리를 위한 일시적인 단절이다. 결국 그 연결망은 한 편의 작품에서 충실한 의미를 가진다.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정보가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퍼시가 가진 의미의 단단함과 주제의 생명성은 하나의 주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해석, 즉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행은 끝이 나도 이미지의 구성은 끝나지 않고 독자들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래서 언어적 유희, 발랄한 상상, 재빠른 이미지의 전환 등과 같은 요소들이 비틀어짜기로 결합될 수 있다.  심상운은 「하이퍼시의 창작 방법」(, 2008.10)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 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 현실의 보여주기는 갈등 구조인 소설적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떠한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되었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 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를 보면 하이퍼시는 초현실주의시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시가 의식과 무의식 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이미지와 이미지, 현실과 상상, 행과 행, 구절과 구절이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제시하고 두 사물 간의 거리를 멀게 함으로써 상상의 힘이나 의미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하이퍼시는 사물 간, 이미지 간 거리가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의식과 무의식, 존재와 존재, 사물과 언어가 하이퍼링크로 연결되어 있음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이성주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어머니 나를 물에 빠트린다 괘씸한 년, 말 없는 손이 무겁게 짓누른다 수초를 뒤집어 쓴 어머니 나를 잡아끌었다, 떨칠 수 없이 엄마, 나는 물에 젖어 울었다 사람들이 명당이라고 말한 송추松楸는 시름시름 앓았고 차오르는 물보다 더 빠르게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유택幽宅으로 향하는 길목 번번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나도 이끼로 덮여갈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수의 하나 맞췄다 물에 잠겨 퉁퉁 분 몸으로 관 속에 들어갔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 물은 바닥을 다 드러내고 어머니 안녕하시다  - 이성주,「이장移葬」전문   이 작품에서는 죽은 어머니와 산 화자가 하이퍼링크로 만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은 슬픔으로만 고착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화자를 “물에 빠트”리는 악마도 될 수 있고, 화자는 어머니와 놀아주는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이때 무덤은 놀이의 공간이 되고, 물은 두 존재를 맺어 주는 수단이 된다. 놀이는 화자가 관 속으로 들어가는 입관의식으로까지 발전한다. “나도 이끼로 덮여갈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수의 하나 맞췄다/ 물에 잠겨 퉁퉁 분 몸으로/ 관 속에 들어갔다”. 이 작품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는 꿈 장면과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무덤)을 다룬 현실이 하이퍼링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하여 존재와 존재-화자와 죽은 어머니-, 존재 存在와 부재不在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시선을 해체하고 현실과 무덤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가져다 준다. 이는 하이퍼링크가 가져다 준 놀이의 방식이다.      잘 익은 부사를 깎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이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깎아낸 부사 쟁반을,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전문   이 작품에서도 “잘 익은 부사”와 “문장 부사”가 하이퍼링크되어 있다. “부사”는 “꽃뱀 한 마리”와 연결되지만 “또아리를” 트는 사과 껍질을 연상하면 두 사물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행에서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도 “부사”와 단절되어 있는 것 같지만, “부사”의 둥근 모양과 사람의 둥근 얼굴이 환유의 관계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등을 비롯한 현대의 철학자들은 해체를 강조하여 왔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 간에 기존의 관계를 해체하여 존재나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해체가 존재로 나아가는 다양한 의미를 표출한다고는 하지만, 존재나 사물이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해체된 의미들이 엮어져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결합이 요구된다. 하이퍼링크는 흩어져 있는 의미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데 소용된다. 이미지나 사물의 단절과 결합은 생명력 있는 존재나 사물을 만드는 필요적절한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존재와 존재를 해체하고 결합함으로써 시에 생동감과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를 응용하는 것은 여러분의 권리이다.            * 정신재 약력                                 1983년 1월 지를 통해 문학평론으로 등단. 1992년 국민대에서 문학박사학위 취득. 제14회 문학평론가협회상, 제4회 이은상 문학상 수상. 현재 시인, 문학평론가. 저서-『 성과 광기의 담론』외 14권.  
18    하이퍼시의 현실성 / 이영지 댓글:  조회:1010  추천:0  2018-11-06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MmP7&fldid=cMZO&datanum=120
17    [스크랩]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댓글:  조회:788  추천:0  2018-11-06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ㅁ 조대희의 시 세계 인식에서 탐색한 불확실성의 해법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序-현대시의 유형과 경향 현대시의 유형과 그 경향은 대체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시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정성이 충만한 리리시즘(lyricism-詠嘆調)이나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낭만적인(romanticism)시법에서 주제의 창출(創出)에 근원을 두고 많은 시인들이 만유(萬有)의 자연과 인간의 소통에 관한 교감을 시적 진실로 현현(顯現)하면서 미감(美感)의 언어와 잠언적(箴言的)인 구도에 집착한 경향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 후에는 민족적, 역사적으로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문질문명의 팽배(彭排)로 다양한 사회적인 변혁(變革)이 현실적으로 삶과(혹은 인생과) 직결됨으로써 우리 인간의 사유(思惟)에도 혁기적(劃期的)인 변화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6. 25라는 단일민족의 상쟁(相爭)과 4. 19의거, 5. 16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우리들의 정서에서 발현된 시적 구현은 그 시대적인 모순과 불합리들이 문학적인 비평의 대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천은 결과적으로 우리 문학에도 다원적(多元的)인 영향을 주면서 오늘까지 발전해 왔다. 그것이 시대적으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성이 복합적으로 포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학의 지향점을 적시(摘示)하는 과도기적인 역할을 충분히 발휘한 것이라고 평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대체로 그 변화를 살펴보면 20세기 초 영국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의 다다이즘(dadaism)과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그리고 독일의 표현주의나 미래파 등이 주창하여 세계적인 문학운동을 포괄한 반항적이며 실험적이었던 모더니즘(modernism)이 우리 문학에도 도입되고 그후에 포스트 모던(post modern)이라는 경향까지 대두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김춘수는 시에서 역사와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체의 선입관을 중지하는 현상학적 환원으로 몰두함으로써 언어의 물화(物化)를 주장하면서 모더니즘을 철저하게 심화(深化)한 ‘무의미 시’를 내세워서 시적 인식이 대단히 낯설고 난해한 인상을 우리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다시 우리들은 정치적인 참여시(혹은 민중시, 노동시 등)의 시대를 지나서 디지털시대를 접하면서 디지털 시(digital poetry))와 하이퍼 시(hyper poetry)의 출현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우선 이 두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오남구의 「디지털 시대의 시 전망」중에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 ‘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심상운의 「하이퍼시의 구조적 전망」중에서   이와 같이 ‘탈-관념’이라는 시인의 주제(의미)의식을 배제한다면 독자들에게 전해질 메시지가 애매해진다는 점이다. 결국 사물시(physical poetry)의 형태로 남아 모든 관념은 사물에게 의탁(依託)하게 되는 것이다. 조대희 첫 시집『오돌뼈』를 읽으면서 먼저 왜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느냐 하면 그의 표현 기법이 어쩌면 관념의 이탈(離脫) 어법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완전한 티지털이나 하이퍼가 아니면서도 약간 난해성이 포함된 시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우리의 서정주의의 범주(範疇)에서 변형된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의 암시(暗示)가 짙게 흐르고 있다.   바람 많던 어느 여름날 문 밖의 사람이 스치듯 초인종을 눌렀다. 머릿기름의 양복쟁이는 일만원권 상품권 열장을 부챗살처럼 펼치더니 굉장한 행운이라도 안긴 듯 말씀이 많다 말씀은 허공을 울리고 난 그의 얼굴과 몸짓을 신기한 듯 관찰한다 몇 분 뒤 그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배고픈 나는 비빔밥을 맵게 비벼 먹었다. 얼마 뒤 하나님의 나라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하늘님과 전화선을 연결하는 꿈을 꾸던 나는 직접 통화를 하고 싶었다 문밖의 사람들은 비밀인 듯 난처해 한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천국을 빼앗으려 했다. 무례한 그들을 그냥 둘 수 없던 나는 재봉틀 바늘처럼 말박음질을 해두었다 그날 밤은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편안히 잤다. 며칠 뒤 온종일 비가 내렸다. 문 밖의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나는 공손하게 문 밖의 사람을 문 안으로 들였다. 문 안의 사람은 자식은 딸만 둘을 두었고, 두 딸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 하며, 주일이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음식으로는 후춧가루 듬뿍 친 카레를 좋아한단다. 결국 나와는 닮은 게 없는 문 안의 사람 나는 문 밖으로 문 안의 그림자를 내쫓고 모든 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 문 밖의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다.   그렇다. 실제로 이 작품「문 밖의 사람」 전체에서 풍겨지는 관념이나 이미지는 별 흡인력(吸引力)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대희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인 광활한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내어 우리 인간들과 접맥(接脈)하려는 언술(言述)이 하나의 스토리로 전개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강렬하게 취택(取擇)하려는 주제의 향방은 ‘나’라는 화자(話者)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대체로 자아(自我)의 인식을 통해서 미지(未知)이거나 미확인(未確認)된 진실을 탐색하는 현실적인 고뇌가 응집(凝集)되어 있어서 그의 깊은 시혼(詩魂)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2. 자아 인식과 시적 진실 조대희 시인은 그의 시적 체취(體臭)에서 풍기듯 시어나 소재 혹은 주제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자아의 인식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무엇을 갈구(渴求)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몰입(沒入)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으로 많은 시인들이 추구하거나 탐색하는 시적 구도의 상황(situation)은 대체로 자아를 인식하기 전에 상상력을 통한 체험의 회상(回想)이 현실적인 존재와 생명성 그리고 가치관 등이 복합적으로 창조를 위한 한 단계의 의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그 시인이 지향하는 실생활(real life)에서 가감(加減) 없는 인식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는 현실과 상충(相衝)하는 고뇌와 갈등의 요인이 발견된다. 시인들은 이 요인들을 새롭고 진취적인 인생관의 정립을 위해서 또 다른 진실을 탐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대시의 보편적인 흐름으로 나타나지만, 작금(昨今)의 우리 현대시의 경향은 다소 다른 세계의 시법을 이해하게 한다.   이랑 사이를 구르며 밤새 내린 서리처럼 김장독을 파묻은 땅 속만큼의 온기도 없이 나의 몸속은 한겨울 밭고랑이었나 파르르 떠는 이파리를 지나 저 멀리 첩첩산중 넘어간 바람의 속도로만 달려 왔는가 장작불 연기가 더 높이 오르는 나무 가지마다 터질 듯한 열망들이 자라고 썩은 동아밧줄인 줄도 모른 채 고기 심줄 같은 고집이 내 몸 속에 자라고 있는가 간간이 돌부리 사이로 돋은 황갈색 겨울풀들을 위안 삼는 동안 짧은 해가 나를 넘어가고 있구나 내가 그늘지고 있구나 남은 것은 속도뿐 깊은 고랑엔 하얀 눈물이 고이는구나 겨울 땅속 지렁이처럼 그림자도 없이 젖어가고 있구나 --「남은 것은 속도뿐」전문   조대희 시인이 ‘나’를 인식하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 감지(感知)할 수 있듯이 ‘저 멀리 첩첩산중 넘어간 / 바람의 속도로만 달려’온 ‘나’는 ‘온기도 없이 / 나의 몸속은 한겨울 밭고랑이’며 ‘고기 심줄 같은 고집이 / 내 몸속에 자라고 있’으며 ‘짧은 해가 나를 넘어가고 있’으며 ‘그림자도 없이 젖어가고 있’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이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아니 절대 절망에서도 ‘나’를 발견하고 자성(自省)의 언어를 매정스러운 현실 속에 녹이고 있다. 이는 그가 ‘한겨울 밭고랑이었나’, ‘달려 왔는가’ 혹은 ‘자라고 있는가’ 등의 의문형으로 시적 진실을 탐색하고 있는데 마지막 두 연에서는 ‘있구나’라는 긍정의 의식으로 전환하는 특성이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 살 여름 늦은 오후 그날따라 난 혼자였다. --중략--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위로해 줄 사람도 없었으므로 --「일곱 살 그 어느 날 먹빛 하늘의 밤」중에서   슬픈 인형놀음 같던 지난 날들 썰물에 던져버려라 소용없던 침묵의 세례 밤하늘에 날려버려라 --「섬」중에서   조대희 시인은 다시 ‘난 혼자’라는 고독감에 젖어 있으나 ‘나를 구해줄 사람’과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너는 햇살에 춤추고 / 빗물로 자라는 꽃 / 나는 부들부들 떨며 / 나를 지키는 눈이었을 뿐(「애인」중에서)’이라는 체념(諦念)과 자성으로 이러한 절망의 ‘먹빛 하늘의 밤’을 쳐다보면서 그는 ‘지난 날들’은 ‘밤하늘에 날려버’리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망은 결국 부질없다 마음이 주저앉아 있을 때도 실핏줄 가득한 낙엽은 차곡차곡 쌓여 씨앗의 대동맥으로 뻗어가고 있다는 것을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네 겨울 숲길을 나오며 난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했네 --「행복」중에서   그는 이와 같은 인식의 계곡을 지나 비로소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으며 ‘난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심리적인 변환(變換)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러한 고뇌를 ‘내 노래의 유일한 반주는 / 외롭고 긴 침묵(「행복」중에서)’이라는 진솔한 심경을 토로(吐露)하고 있어서 그가 감응(感應)한 ‘깨달음’은 바로 ‘나’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나’를 정립하는 그의 진실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밖에도 ‘나 다시 태어나면 / 인정 깊은 산골마을에 / 개봉숭아나무 한 그루로 서고 싶다’거나 ‘내 몸은 견딜 수 없어 / 햇살에 바람에 날아갈 듯 / 낼개춤을 출 것이다(이상「구두 발자국」중에서)’라는 긍정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그가 탐색하는 자아의 인식은 현실과의 괴리(乖離)에서 파생(派生)된 잡다한 모순과 불합리에서 탈피하려는 진실 지향의 시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3. 불확실성 시대의 해법 조대희 시인은 이러한 시적 상황을 중시하면서 다시 그에게서 시적인 절정(絶頂)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불확실 시대에 대한 해법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은 / 둘 중 하나다 / 인생을 통찰通察했거나 / 아니면 / 무지몽매無知蒙昧 // 그런 점에서 / 난 / 부자유不自由하다(「자유」전문)’는 언술과 같이 어쩐지 ‘부자유’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인생의 통찰’은 그의 시야에서 미지(未知)이거나 불확실성(不確實性)이다. 그는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요(「우문 즉답」중에서)’라거나 ‘담장 그늘 밑 얼음이 녹고 / 장독대 위로 하얀 나비가 날 때쯤이면 / 풀잎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오돌뼈」중에서)’라는 시적 화자(話者)의 단정이나 의문과 같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은 모두가 불투명한 채 인생행로를 달리고 있다.   땅 위의 삶은 행복했을까. 어쩌면 옮기고 싶지 않은 용궁에서 계속 헤엄치며 살고 싶었을지도 몰라. 울긋불긋한 국방색 무늬와 너무 커져버린 몸뚱어리가 내내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꼬리 없는 엉덩이를 흔들며 미나리깡 풀섶을 하염없이 맴돌고 다녔을지도 몰라. 흐르다, 변신하며 떠밀려 온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올챙이에 대한 단상」중에서   그렇다. 조대희 시인은 ‘몰라’라는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미지나 불확실성에 대해서 자신만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데 ‘싶었을지도 몰라’,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다녔을지도 몰라’, ‘있었을지도 몰라’라는 그의 절실한 호소는 ‘올챙이’가 ‘땅 위의 삶은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불투명한 대답이다. 결론적으로 ‘몰라’라는 대답은 현실적인 의식에서 불확실하게 작용하는 모든 불합리나 부도덕 그리고 불평등 등에 적용된다. 그는 이러한 미확인의 갈등에서 생성하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시적 구도를 형성하면서 더욱 미지의 세계를 확인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그는 작품 「문 밖의 사람」에서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으며 /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지 못한다 / 배달을 언제부터 했는지 /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 아내도 모를 것이다’라거나 ‘가정방문 받은 어린 아이처럼 / 허둥거리는 나에게 / 수치를 적은 아저씨는 / 오래 말린 곶감 같은 입술로 / 고맙다는 인삿말을 남긴다. / 뒤돌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 내년쯤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라고 ‘우유 배달부’와 ‘가스 검침 아저씨’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 ‘모른다’라고 일관함으로써 그의 미지에 대한 시적 발상은 더욱 현실적인 거리감이 팽배한 우리 인간들의 갈등이 상존(常存)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 그림자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물기에 젖어 빛나는 / 깊은 구렁 속 그 눈빛과 / 멀리서도 언제나 혼자였던 / 그의 뒷모습만을 /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어조와 같이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서만 현실을 유추(類推)할 뿐이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나 불확실성의 현실은 ‘물이 물의 이름을 갖기 전 / 바람이 바람의 이름을 갖기 전 / 내가 내 이름을 갖기 전 / 서 있던 자리마다 / 내가 보이기 전까지 / 난 사람도 아니다(「난 가끔 사람도 아니다」중에서)’거나 ‘이제는 바라는 것도 없어 / 그저 무덤도 없는 남편이 불쌍할 뿐이야 / 세상이 나를 참 오랫동안 속였어(「꽃다지」중에서)’와 같이 깊은 자책(自責)을 하거나 수긍(首肯)하고 있다.   네가 나무로 서 있던 시절 내 몸 속이 온갖 잡초로 무성해 바람에 이리저리 나자빠질 때 물줄기를 끌어 올리던 힘으로 나를 끌어 올리던 것이 혹시 너였을지도 그래, 나무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라 --「나를 벤 종이와 대화하기」중에서   나는 또 물었다. 너는 어디 있느냐고 오래 전 떠났던 길로 돌아와 동무들과 술을 건네고 때론 어깨동무같은 촌스런 몸짓을 부리다 뜨듯한 국밥 한 그릇 나누다 보면 너를 만날 수 있느냐고 --「여행」중에서   보라. 조대희 시인의 사유는 이제 ‘나’와의 대칭인 ‘네(너)’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네가 나무로 서 있던 시절’에는 ‘내 몸 속이 온갖 잡초로 무성’했으며 ‘나를 끌어 올리던 것이 / 혹시 너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라’라는 어조로 서로의 의문을 대화로 해법을 탐색하고 있다. 다시 그는 ‘너는 어디 있느냐’ 또는 ‘너를 만날 수 있느냐’하고 ‘나는 또 물’어 보고 있다. ‘오래된 주인과 함께 늙은 / 벽걸이 그림, 속 / 서늘한 달빛 하늘을 / 수십 년동안 목을 빼고 바라보는 저 사슴이 / 네가 아니더냐’라는 물음에 그의 사유가 집착되면서 ‘나는 나와 마주한 거울 속 사내에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적절한 화해(和解)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화해의 언어는 이 시집의 표제(標題詩)가 되는 「오돌뼈」에서 그 해답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는 ‘뱃속을 두툼하게 입힌 소주의 온기에도 / 덜덜거리는 입속의 한기에 / 오도독 오도독 이빨 조각들을 씹는 것인지 / 이빨 사이로 흐르는 감탄사를 씹는 것인지 / 헛소리만 뻥뻥 쳐놓고 / 마른 장작처럼 갈라질 거면서 / 오래된 찰흙 인형처럼 똑똑 부러지고 말거면서 / 타액과 섞이다 이내 부서지는 / 오돌뼈 같은 삶'이라는 결론으로 유로(流路)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4. 結-현실적 고뇌와 기원 그렇다면 조대희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기원하는 시적 진실은 무엇인가. 그가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내 시의 주인은 / 고향이고 바람이고 꽃이고 이웃이다.’라는 간명(簡明)한 언술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그가 지향하려는 심저(心底)에는 이미 ‘고향’과 ‘바람’, ‘꽃’ 그리고 ‘이웃’을 연결하는 정서의 원류(源流)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가 지금까지 시적 구도로 설정한 자아의 인식이나 불확실성에 관한 다원적인 문제들이 결국 삶의 현장에서 파생한 현실적인 보편성에 근원을 두고 새롭고 진취적인 기원의식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나이 마흔, 앞으로만 달리기에는 지나간 시간이 아프고 시리기만 하여 갈바람을 등짝으로 맞서며 휘휘 자유롭게 날아보는 꿈을 꿈꾸고 싶다 --「여로(旅路)」중에서   혼합된 덩어리색들로 어지럽고 무거워 숨도 고르게 쉬지 못했다. 땟국물같은 물감을 씻어내고 계곡물속의 모래알을 보듯 멀리로 아름답게만 갈 수 있는 시냇물이고 싶었다. --「전시회」중에서   사래라도 잔뜩 낀 양 토하지도 못하고 어두운 새벽길을 홀로 길들여 왔듯 이젠 눈부신 강 너머 꽃밭길을 해 다 지도록 걸어봤으면 좋겠네 --「십일원의 새벽 안개」중에서   이들 작룸에서 일별(一瞥)할 수 있듯이 ‘내 나이 마흔’이라는 시간성을 먼저 설정하고 이를 전제로 한 기원이 현현되고 있는데 그는 ‘.....싶다’라거나 ‘....싶었다’ 그리고 ‘좋겠네’라는 기원의 언어로 현실적인 삶과 상관관계를 심층적(深層的으로 적나라(赤裸裸)한 어법으로 열망(熱望)하고 있다. 그는 ‘자유롭게 날아보는 꿈’과 ‘멀리로 아름답게만 갈 수 있는 /시냇물’과 ‘눈부신 강너머 꽃밭길을 / 해 다 지도록 / 걸어봤으면’하는 소박하면서도 청순한 소망이 어찌보면 조대희 시인이 탐색하는 진지한 해법으로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작품「바람 1」에서 ‘난 / 바람이 / 참 좋다’라거나 「어느 날」에서 ‘멈추고 싶지 않은 예행연습 / 끝내야 할 때를 // 알고 끝낼 것’ 그리고 「바람 2」에서 ‘숲을 열고 머리칼 빗는 / 햇살 한 무리에 섞여 / 강으로 들판으로 나는 / 바람이었으면 해’라는 긍정의 해법으로 기원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에게 내재된 진실의 중심에는 미지와 불확실 혹은 미확인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고뇌와 갈등을 스스로 해법을 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대희 시인은 이러한 현실성과 공감하는 사회성과 시사성에 대한 작품도 대할 수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적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순정적이며 서정성을 잃지 않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잘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불란서의 시인 볼테르가 말했듯이 시는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녹아 흘러야 할 것이다. 이는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리라. 그의 시가 고향과 바람과 꽃과 이웃이 공존하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더욱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진실로 각인(刻印)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시인들의 숙명(宿命)이며 영원한 과제로 남는 것이다.*  
15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 심은섭 댓글:  조회:863  추천:0  2018-11-03
난간을 마시다 / 최정애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나는 매일 모래를 마신다 난간이 넘어간다 비린내를 풍기는, 난간은 뾰족하다 꿈틀거린다 차갑게 등을 노출한 아스팔트에서 핸들을 잡고 달린다 난간으로 머리가 날린다 다리가 빠진다 속력을 거부하는 몸체의 부작용일까? 아니다 난간에 긁혀야만 하는 감정의 거부 반응일지도 몰라 물 속의 파장처럼 파장의 경계처럼 나는 난간을 발목에 걸고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코끼리 그림자 / 최정애       렌즈 속에 내 얼굴을 가득 채웠지 모서리에 잘리지 않으려고 그에게 웃음을 보내 주었지 눈 밖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렌즈를 꽉 물고 있는 어금니, 속엔 고층 빌딩과 샌들이 걸어가고 나의 사랑과 짖어 대는 개와 봄날의 젖은 밤이 째각거리고 있었지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눈만 감으면 지하로 이동하는 너는, 하지만 오늘 나를 습득할 수밖에 없지   옹이 박힌, 나의 그림자 하나를 끌고 추억의 갠지스 강을 찾아가야 하지 흙 속에 발자국을 던져 놓고         한 장의 벽 / 최정애       그를 소유하지 못하고 직선과 사선을 내가 감상할 때 그는 외면한다 눈을 감은 채 어두워지고   굳은살이 기어다니는 바닥으로 비가 내린다 벽지 속에서 눈망울들이 흘러나온다 빗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벽, 수많은 입술이 벽과 벽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방싯거린다 물에 지워지고 흔들리는 안개 속에서   풀잎 하나 지워지는 저녁 무늬가 퇴색한 달빛과 곰팡내 풍기는 방에서 빗물은 어둠 한 줄을 칠하고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아이를 만들다 / 최정애     야심한 밤, 희미한 스탠드 아래 누워 잉태에 필요한 음식을 조리하는, 나는 아이 만드는 사람   1시간이 70분이면 넉넉할 텐데, 언제나 십 분씩 모자라는 시계를 차고 아침이면 방을 떠났다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시계 바늘을 꽂은 달빛 속으로 들어가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생산하러 이 세상에 온 기계라고) 혼자 중얼중얼 생각하다가 잠시 머뭇머뭇 고민하다가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금성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심은섭 (시인·문학평론가)   1. 시작하며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사고를 하는데 있다. 최정애 시인은 이성적 사고를 통한 시쓰기로 생산력이 낡은 시의식을 깨부수고 있다. 몇 편의 시작품으로 그 시인의 시세계를 짚어본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 권 분량의 시집으로는 그 시인의 시세계, 또는 시의식이 어떤 세계에 와 닿아 있는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최정애 시인의 시집을 통해 그의 시(詩)세계나 시의식을 큰 틀에서 두 개의 본류(本流)와 몇 개의 지류(支流)를 구분하여 모색할 수 있다. 최정애 시인의 먼저 첫 번째 본류는 유목적 사유를 함으로써 서열의 지층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의 시세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이며, 허공에서 몰입하는 정신의 푯대다. 계층구조를 깨뜨리며 지속적인 횡단운동을 한다. 또 다원적 무질서와 예측불허의 우발성이 시적 사유에 선명한 무늬로 삽입된다. 두 번째로는 언어에 밝은 색을 칠하며, 성찰하는 자아를 반추하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가 ‘자성(自性)’과 함께 노마드적 삶의 방정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의 무게로부터 이탈을 시도한다. 또 그의 시의식은 치열한 삶과 치열한 예술성이 함께 동행한다. 그리고 그는 삶과 예술을 동시에 찬미한다. 이처럼 크게 두 개의 본류로 구분 지을 수 있으나, 몇 개의 지류가 시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적 사유를 탈근대적인 인식으로 병렬 접속을 하며,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최정애 시인이 추구하는 모더니티의 본질 또한 영원성과 새로움이다. 낡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과 극단적인 전통 파괴로 현재를 구성한다. 요약하면 최정애 시인은 예술성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원성에 둔다고 하겠다.       2. 횡단하는 쪽으로 시를 완성하는 사유   최정애 시인의 사유의 종착점은 정신분열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근대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리고 전복하는 행동이다. 근대를 탈출하여 새로운 영혼과 인간해방을 가지려 한다. ‘여간 해선 별이 뜨지 않는 방’(「장마」)에 별을 띄우려고 한다.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난간을 마시다」일부     에서 ‘난간’은 난간으로써 그 자체가 불안이다. 여기서의 ‘난간’은 경험했던 불안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불안의 총체적인 불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안과 단절을 꾀하며, 또는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정애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불안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불안과 소통을 통하여 대립적인 관계를 청산하려고 한다. 바로 고통을 고통으로 맞섬으로써 고통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 속을 면면히 들여다 보면 주정시(主情詩)에 돌멩이를 과감히 던지고 있다. 그 예로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고 시적 진술의 한 부분을 그 한 예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Irony)이고, 이 아이러니는 모더니즘의 시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사법이고, 이 아이러니를 통해 현대의 부조리, 부패, 무능 등을 비판하며 풍자하는 이중적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또 모더니즘의 시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지성주의를 앞세우고 성찰, 반성, 통찰, 압축, 상징을 통해 시의 깊이를 만들고, 언어의 밀도를 높여 난해함을 만든다. 거기에 당혹감마저 준다. 첨언하면 성찰, 반성, 통찰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통사규칙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 역시, 근대의 모든 것과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고 그들을 적으로 삼고 있다. 특히 그는 과거의 모순이나 문제를 모더니티(modernity)로 극복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적인 모델로는 어떤 제도(현실)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모델로 제도(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탈근대의 의식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그는 파편적 글쓰기를 한다. 그러면 파편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후기현대와 파편적 글쓰기」에서 정의한 바 있는 윤호병의 말을 요약해보면 “반―유기적 형식의 글쓰기이자, 정의가 유보된 글쓰기”라고 파악했다. 반―유기적 글쓰기는 통일성의 해체, 다시 말하면 이것은 콜리지(Coleridge, Samuel Taylor)가 강조했고 신비평에서 시 읽기의 기본원리로 인식했던 시의 유기체론에 대한 반전 혹은 뒤집기라고 볼 수 있다.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난간을 마시다」일부     난간, 즉 불안을 끌어 안아야 평온을 얻을 수 있듯이, 곡선을 포용해야 직선이 될 수 있다. ‘사방에서 직선과 곡선이 난간을 모으는 동안’ 그는 휘어져 버린다. 그러나 휘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절망’의 본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휘어질 수 있는 부드러움이 없다면 난간을 마실 수 없고, 뾰족한 난간 위로 달릴 수도 없다. 또 휘어짐은 ‘여유’이며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수용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관용인 것이다. 그는 ‘난간’에 대해, 또는 ‘불안’에 대해, 어찌 보면 실존하는 현상학을 추구하고 있다. 즉 팔이 없어도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시는 고안되고 제작되는 것으로 인식할 뿐,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최성애 시인은 그의 시 작품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생각하는 자아, 사유하는 자아로서 단일성, 즉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이라는 결국 ‘난간=나’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그의 ‘자아’는 단일자아임을 말 한다. 즉 그의 ‘자아’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어 대체가 불가능한 자아이다. 따라서 자아는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자아다. 첨언하면 ‘네’가 누구인가를 ‘내’가 설명해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빗소리’이고, 이 ‘빗소리’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최시인에겐 음악이다. 결국 ‘나’는 ‘음악’이다. 그러므로 ‘빗소리’를 ‘비명’으로, ‘비명’을 음악으로 은유 시켜 전통적인 감정의 그 무엇과 대립 시키며, 사물을 사단(四端)의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아픔으로 보고 있다.     그를 창살에 매달아 놓았어 부드러운 동작을 내 귀에 고정시켜 놓았어 마음껏 다리를 흔들어 보렴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는   건널목에 그의 비명이 쌓이고 있어 이럴 때 나에겐 따뜻한 입술이 필요해 그의 눈빛을 저장할 오선지가 필요해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는   내 혀가 자라고 있어 드라마가 끝나고 녹음기도 꺼졌는데 종일 기둥에서,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고 있어 그림자만 바닥으로 쏟아 내는, 그는 도대체 어디 숨은 걸까?   그의 몸, 마디마디 악보가 있을 꺼야 젖어 있을 꺼야 울음을 그치고 내 아늑한 포켓으로 몸을 던져도 좋아 지금 나는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이거든     -「빗소리」전문       서로 몸을 부대끼며 내리는 소리, 이 빗소리는 최정애 시인의 시 몸 속에서 나오는 삶의 아우성이다. 이 비명소리는 건널목에도 높게 쌓이고, 악보에도, 아늑한 포켓 속에도 쌓인다. 이렇게 시는 인간의 체험을 언어로 그려 놓는 재현성의 결과물이다. 그의 체험에서 얻어낸 시의 모티브는 슬프지 않다. ‘빗소리’가 삶의 ‘비명’소리이고, 이 비명소리는 온전한 음표이기 때문이다. 이 음표는 비명소리로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으로 오선지에 머무른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빗소리’와 ‘비명’을 상호적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 삶의 애환을 미적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최정애 시인의 시적 가치는 아이러니, 위트, 언어의 경제성, 그리고 시인과 시적 화자가 단절되는 현대시의 몰개성(impersonality)과 형식의 완벽성에 근거를 둔다. 어찌 보면 그의 시적 모험은 시적 가치에 대한 도전의 양상이다.   최 시인은 형식에 억압된 삶의 본능적 흐름을 시작품에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그래서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엔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무질서를 표현하면서 원형 혹은 신화 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이런 자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공적이고 반자연적인 문명의 세계를 표방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형식의 완벽성은 형식의 폐쇄성이며, 이 폐쇄적 형식은 내적 유기성, 통일성, 수미일관성, 표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를 강조하다. 최정애 시인을 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또 다른 측면의 시세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는 ‘빗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즉, 탐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라며 ‘중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최 시인이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인 유목적 사유를 적극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이런 시작(詩作)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하는 차연(difference)이며, 개방성, ‘탈중심’의 의미를 생성 반복하는 것이다. 앞의 시 「빗소리」에서도 최 시인은 형식의 개방성을 지향하는 해체시를 추구한다. 이 개방성은 미적 형식과 관련되는 인위적 세련성보다는 자발적 직접성을 강조한다.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일부       흔히 미술의 기법 중의 하나인 고전적인 방식으로 ‘유화’가 있다. 이 방식은 순간적인 동작들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크로키(croquis)는 짧은 시간 내에 움직이는 대상물의 형태를 그리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최정애 시인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어제의 나팔꽃이었지만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그리고 죽은 척하고 있는 내 생각들을 크로키로 ‘찰라’를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과거에 대한 현재의 반란이다. 또 과거의 안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피이며 반복에 대한 차이(差異)인 것이다. 이런 정황들이 최정애 시인이 시적 대상의 인식의 주체로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요약하면 ‘현재’라는 정당성 확보 차원인 것이다. 과거의 ‘~주의’와 현재에 싸우는 중이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와의 전쟁이고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어떤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난간을 마시다」는 이 시에서 근대적 단일자아를 보여 오다가 「코끼리 그림자」에서 와서 복수의 자아를 보이고 있다. 즉 두 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컨대 코끼리 그림자가 ‘나팔꽃’이고, ‘뭉게구름’이고, 죽은 척 하는 ‘내 생각들’이 그렇다고 함의 할 수 있다. 이것은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정신의 울혈증(鬱血症)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최정애 시인의 시정신이며, 그의 문학성에 대한 본질이다.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한 장의 벽」일부     벽은 소통을 단절시키는 근본이다. 그는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라도 단절된 벽과 벽 사이에서 무한한 소통을 꾀하려 한다. 최정애 시인이 이 작품에서 소통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심미적으로 소통을 끌어 들여 조용히 탐미한다. 천국의 계단을 가볍게 오르려면 누구나 몸을 말려야 한다. 몸을 말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무소유의 일환이다. 그래서 ‘수북하던 달’도 몸을 말리고 있다. 몸을 말리는 것은 보름달이 그믐달로 가기 위한 절차상의 절대적 통관의례다. 이것은 달이 달로 태어나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한 윤회사상이 바탕이 된다.   앞의 시 「한 장의 벽」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의식이 표층에서 심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에서 언어가 표층에서 표층으로 미끄러지는 ‘다원주의’로 이동됨을 알 수 있다. 소통을 위해 벽 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벽 속으로 이동’하며 미끄러지고 있다. 어쩌면 중심이 없는, 행위가 종결되지 않고 계속 유예되는, 다시 말해 차이에 대해 연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최 시인이 횡단하고 미끄러지는 이 운동 그 자체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직 수평적인 비대칭만의 고집이며,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는 생산이고, 리좀(rhizome)과 같은 다원주의와 비(非)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이다. 지금도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저 한 장의 벽,/속으로’ 최 시인은 횡단이라는 운동을 하며,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횡단하고, 미끄러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허허로움을 추구하는 최정애 시인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낭만주의로의 회귀(?)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처음엔 그 소리가 바닥을 쓸고, 책장에서 흘러내린 낙서이거나 ①귀에 잠시 머무는 이명耳鳴이려니, 오후를 지나가는 구름의 균열이려니, 끝없이//지워진 안테나를 지나 나를 회전하는 반사경을 지나 몸을 끌어당기는, 터널로 이어지는 소파 위에서 모래 가득한 ②혀를 내밀고 날름거리는 바람,//…………//③목에 손을 넣었다 ④귀를 잡아당기다 바람은 계속 불고 있다 고단한 침대에선 ⑤머리칼이 한 올 두 올 부서져 모서리를 날아다니고     -「몸을 엿듣다」일부     귀와 혀, 그리고 목, 머리카락 등의 신체 일부를 통해 몸을 엿듣고 있다. ‘몸을 엿듣’는다 것은 표층에서 간접적으로 엿 듣는 행위를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를 성찰한다는 것이고, 이 성찰은 소통을 위한 엿 듣기인 것이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소통을 위해 ‘벽에 걸린 새장’마저 허물고 있다. 내면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자성이고, 반성이고, 자아를 찾는 일이다. 앞의 시작품인 「한 장의 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다가「몸을 엿듣다」의 시작품에서는 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결국 두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뜻도 된다. 또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초월성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두 경향,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동행을 하지만, 서로 상반된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두 개의 세계를 최정애 시인은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시적 사유가 초월성에 근거를 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심주의’에서 ‘탈중심주의’로, ‘탈중심주의’에서 ‘중심주의’으로, ‘수목적 체계’에서 ‘노마드적 체계’로, ‘노마드 체계’에서 ‘수목적 체계’로, ‘단일자아’에서 ‘복수자아’로, ‘복수자아’에서 ‘단일자아’로 넘나드는 그의 유연한 시세계는 영역과 영토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그리고 시적 사유가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런 까닭으로 최정애 시인에게서 확인되는 것은 문학과 예술적 감각을 재배치하는 시의식이 감춰진 이교도(異敎徒)적 시간관의 발견이다. 그는 지금도 대칭과 비대칭의 경계에서 고유한 언어로 집 짓기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   꿈틀대는 구름 속, 터널에서 이별의 거리는 눈 위에 떨어지는 눈금일 뿐 벼랑을 목에 걸고 뱀과 바퀴가 회전하는 속력 위에서   이별은 초침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친다   -「컨베이어 벨트」일부       시적 화자는「컨베이어 벨트」의 시에서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가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은 ‘뱀’은 ‘컨베이어 벨트’이고 ‘컨베이어 벨트’는 인간 삶의 양식이다. 그것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을 구속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컨베이어 벨트」는 문명을 비판하는 의미도 되지만, 바퀴와 바퀴에 걸쳐 일정하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획일적인 인간 사회의 형상화다. 서양의 물심이원론은 대립적인 삶으로써 인간성 본질을 늪으로 한층 가라앉게 한다. 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컨베이어 벨트 역시, 두 바퀴의 상호소통이라는 미명아래 공간을 점령하고 이성적 사고를 마비 시킨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최정애 시인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치며 산다고, 인간의 영원성과 불멸성을 시라는 미적 양식으로 담론화하고 있다. 그는 또 비리와 허망, 그리고 욕망에 맹목적인 현대인의 ‘수많은 눈’과 ‘발자국’은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뱀 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최정애 시인은 ‘벼랑에 목을 걸고’ 회전하는 ‘뱀의 고통’을 절대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를 신화에서 구원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죄는 인간의 삶을 규격화한다. 규격화는 일종의 억압이고, 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예술은 예술을 낳는다. 시의 소재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은「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형식주의적 태도를 보여온 부조리한 사회성, 관료성, 인간 본성의 취약으로 ‘안개에 손을 말리는 사람’(「시계가 고장나」)들을 보곤 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티의 우연성, 순간성, 일시성으로 전통시를 봄볕에 고드름 녹이듯 거리를 두는 이유는 기존의 담론과 제도들에 의해 구현된 규범을 무너뜨리고 ‘탈영토화’에 시적 사유를 두려는 그의 믿음이다.       3. 언어에 색칠하고 봉사하는 견자   칸트는 “언어를 목적으로 사용할 때 시가 나온다”고 했다. 언어란 시인으로부터 고통의 외침을 자아내는 통점의 기호이다. 이런 언어로 시인은 타자를 인도(引導)해야 한다. 타자를 인도한다는 것은 언어로 그려 놓은 높은 빌딩을 보고, 타자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노와 비판의 소리를 통점의 기호로 나타내는 최정애 시인의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시를 감상해 보자   그 시간 나는 회전문 속에 있었다   에스카레이터가 2층을 관통하고 있을 때 그녀의 발목이 접히고 있었다 절반으로 잘리는 건널목에서 그녀의 허리가 접히고 있었다 빨간 샌들이 함께 접히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리고 ………… 나는 회전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접히고 있다」일     최정애 시인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보여 주었던, 일시성과 우연성, 그리고 순간성을 보았다. 예시된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이 시 역시 「컨베이어 벨트」의 시와 같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과 시적 화자가 같은 목소리를 내는 단일 자아로서 개성론에 가깝다. ‘그녀’가 시적 화자이고, 시적 화자는 시인이고 최정애 시인은 시인으로서 시적 화자가 된다. 따라서 ‘그녀’가 ‘최정애’라고 할 때 최 시인이 ‘회전문을 나오’려면 몸을 접어야 한다. 접는 행위는 자세를 낮추는 태도이고, 자세를 낮추는 태도는 수목적 사유체계가 가진 위계질서로 형성된 계급사회의 지층을 흔드는 일이다. 접힌 발목의 ‘샌들이 함께 접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린다는 사유는 인간, 동식물, 무기물 등과 같은 모든 우주 만물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감화 시키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시정신이다. 예컨대 적당한 수분과 햇볕, 그리고 바람과 땅이 유기적인 관계망를 형성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날 수 있다. 그는 낡은 전통을 아무 조건 없이 버리자는 극렬 분자는 아니다. 익히고 배우되 지층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에겐 ‘동시대’란 말은 폭력이다. 그가 ‘회전문’을 나오는 것은 ‘나와 함께 태어난 사람이 나와 동일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지 않는 행위이다. 최정애 시인이 「그녀가 접히고 있다」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의식은 ‘나’는 ‘나’와 다르고, ‘너’는 ‘너’와 다르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자아가 상호 ‘다름’의 동일성을 보이고 있다. 인격체로서 ‘나’와 ‘너’는 다른 것이지만 ‘아픔’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서로 같은 동질성을 갖는다. 시적 진술은 자성과 해명이 작품의 축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의 진술은 ‘성찰’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한다.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또 다른 어떤 것과도 접촉할 수 있고, 접촉되어야 하는 접속의 원리를 양산한다.   돌멩이를 던졌는데 꽃 한 송이가 피고 있다 꽃을 피우며 돌은 호수 가득 적막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는다 어제의 빗물을 흘리다가 바람의 뼈대를 쏟아 낸다 붉은 공기가 팽창하는 틈새에서, ‘돌이 살아 있나 봐’ 돌멩이 한 알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의 경계를 가르며   -「돌이 핀다」일부     ‘허공에 색칠하며 사는 것이’ (「거미 소리」) 거미의 운명이라면 언어에 색칠하면 사는 일은 최정애 시인의 운명이다. 그 동안 온 몸에 색칠하던 그는 언어에 색칠 하기 시작한 것은 순간성의 ‘현재’에 있다. 즉 낡은 전통성으로부터 과감한 이탈의 정신에서 비롯된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돌이 핀다」에서는 몸과 언어에 동시적으로 색칠 한다. 온 몸엔 저녁 노을빛을 색칠하고, 언어엔 새파란 청춘을 색칠 한다. 지난날의 시간은 ‘돌멩이를 던졌는데 한 송이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최 시인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밤의 근육질」)’라고 회고한다. 실험적이고 파편적인 글쓰기를 하던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황급하게 ‘인생론’으로 돌아선다. 그의 ‘목에 걸린 쇠 방울이 눈에서 불똥을 일으’(「일식」)킬 만큼 삶을 달려왔으나 이젠 ‘스웨터의 검은 털들이 놀라 등에 납작 엎드(「일식」)’리고, 이따금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서면 내 뒤에 아련하게 따라오는 소리/오늘도 그 소리를 덮고 그 쪽으로 기울다 잠들(「아직도 살아있다」)’고 있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꽃으로 피어나던 돌은 호숫가에 가득 쌓인 ‘적막을 밀어’ 낸다. 시간이 최정애 시인에게 가져다 준 숙명의 결과다. ‘운명’과 ‘숙명’은 분명히 다른 개념을 각각 함의 한다. ‘운명’은 본능적으로 피할 수 있거나 개척할 수가 있다. 그러나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순환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시간은 최정애 시인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만남이다. 이 숙명적인 시간과의 만남이 최정애 시인을 ‘인생론’으로 몰고 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세월은 ‘푸른 절벽’이 최정애 시인의 ‘발목을 부수고’ 설상가상으로 ‘빠른 속도로 몸이 가라앉’ (「돌이 핀다」)게 한다. 그러나 황혼빛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시적 화자는 ‘돌멩이 한 알에서 숨소리를’ 듣는 듯이 삶에 애착하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다 왔습니다” 라는 ‘소리 들리는 길에서 가던 길을 놓치고 마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 (「어항 속으로 들어가다」)’가 될 때까지 그는 언어에 색칠할 것이다.   늦가을 오후가 날린다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린다 ………… 밤이슬에 젖으며 내가 만장輓章처럼 날리고 있다   -「내가 날리고 있다」일부     오후가 날리는 늦가을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바람의 한쪽 모서리’로 날리던 시적 화자는 ‘만장(輓章)처럼 날리’며 ‘밤 이슬에 젖’는다. 최정애 시인은 특히「내가 날리고 있다」는 시에서 그의 시의식이 ‘인생’ 쪽으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잃지 않고 가야 하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려고 물고기처럼 뜬 눈으로 죽음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존하려고 한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이 날’리고, ‘내 방이 하얗게’ 날린다는 인식으로 조용히 죽음을 탐미한다. ‘늦가을 오후가 날리’는 것도,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리’는 것도, 모두 상상적 질서 속에서 가능하다. 이 상상적 질서는 환상과 이미지의 영역이며, 상징적 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체가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또한 주체가 재현되거나 구성되는 것 역시 상징적 질서, 곧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 시인은 언어로 날리고 있다. 그것도 ‘잔뜩 발기된 달의 표면처럼’ 접신(接神)된 광기로 날리고 있다. 그는 ‘둥근 배가 봉지 속에서 불룩 불룩’하게 날린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처럼 날리고 또 날린다.     머리 속엔 아침부터 스카프에서 빠져 나온 새들이 나선형 방향을 돌며 날고 있다 …………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 새들이 날아다니는 건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난다」일부     돌 속에서 한 송이의 꽃을 피워도 어차피 인간은 한 장의 스카프로 날릴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개체로서 고독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고 인간에게 무상의 은총을 내려주었던, 예수의 그 고통에 필적할 만한 자신의 고통이 수반될 때 시인은 언어로 본질의 실체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스스로 받아 들이는 최정애 시인은 낡은 언어로는 존재의 성안에 들어갈 수 없고, 낡은 의식의 언어로서는 실존하는 사물을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겐 ‘스카프’가 언어이고 기호가 된다. 그 ‘스카프’가 언어인 것은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고 ‘스카프가 구름’인 까닭이다. ‘스카프’란 언어로 ‘스카프’의 실체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언어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 하고자 한다. 그것도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니는 건/ⓑ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에서 ⓑ와 ⓒ구절은 도치된 ⓐ의 조건 절이다. 다시 말해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에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닐’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을 언어로 진술하게 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로서 상생의 관계를 만든다 그의 언어는 ‘온통 구름’이고, ‘스카프’이고, ‘구름’이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나=구름’이고, ‘스카프=구름’이다. 그렇다면 ‘나=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나=구름=스카프’는 동일한 존재이고, 최정애 시인은 언어로 이 동일성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언어는 사물의 안쪽을 파고 들어가 본질을 파악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은 본질 파악의 주역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스카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못한다.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 주었을 때 ‘스카프’는 ‘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기여하고, 따라서 시인은 언어를 버릴 수 없고 최정애 시인 역시 언어를 떠난 시쓰기란 상상 조차할 수 없다. ‘스카프 속에서 빠져 나온 새들’의 행위는 언어만이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언어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카프가 점점 두꺼워’지는 현상을 타자에게 가시화 내지 가청화하는 주체도 역시 언어이다. 때문에 언어는 혼돈을 질서화 한다.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아이를 만들다」일부       인간의 출생은 탄생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우주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神)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이「아이를 만들다」의 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는 인간의 위대한 승전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과 시학」에서 “어떤 언어 공동체나 어떤 화자(話者)에건 언어는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명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체는 존재로서 동일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언어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언어는 명명행위의 도구일 뿐 존재의 주체는 아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시인 최정애는 ‘시니피앙 정자’이고 시인 최정애의 삶의 타자는 시니피에 ‘난자’이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빛으로 잉태한 ‘알전구’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인 동시에 삶의 무늬가 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처럼 언어로 ‘아이’를 만들 때 시인은 본질의 현상과 존재의 가치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다.   작금의 시대에서 시(詩)가 중요시 하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다. 최정애 시인은 ‘우량아에 필요한’ 언어를 ‘몽땅 사들’이고 있다. 이것은 존재로부터 창조된 언어(langage)의 힘을 옹호하는 일이다. ‘죽는 그날에도 어쩜’ 언어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하는 최 시인은 진정한 언어의 봉사자이다. 언어로 탑을 쌓는 일, 즉 언어로 ‘아이’를 만드는 일이 곧 시인이며, 창조적 행위자이다. 이렇게 그 언어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뮤즈(Muses)가 시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시를 낳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시의 주체가 된다. 즉 시를 만드는 원천은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상상력(imagination)으로 인지하고 있다. 여기 최정애 시인 역시 영감으로 사물을 인지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시적 대상을 인지하고 관찰한다.     4. 마치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시인은 실패하는 쪽으로 인생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그는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고, 산문가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발레리(Velery)는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춤”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의 명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말해왔던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 ‘실패’는 ‘성공’이라는 역설의 의미다. 그렇다면 최정애 시인은 ‘성공’의 시를 한층 더 나아가 ‘완성’해 가고자 한다. ‘이제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너’ (「12월 31일」) 즉,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언어를 버리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통시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로는 존재의 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없으므로 철저히 언어 고르기로 봉사한다. 또 하나는 최정애 시인의 시는 보행을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정지 버튼을 누르면 go go가 달려와’ 춤을 춘다. 이「빗소리」의 시에서도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고 있고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는 태도로 보아 그의 시는 일관되게 춤추고 있다. 그는 음악이 흐르는 시에만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시는 최정애 시인에게 억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정애 시인 스스로 억압을 필요로 한다. 그 필요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쓰기 작업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는 참 젊다. 젊다 못해 매우 푸르다. 푸르다 못해 연초록빛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가 젊다는 것은 시가 건강하다는 것이고, 그의 시가 건강하다는 것은 한국의 문단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는 나이와 무관하다. 그것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무관하다. 다만 예술의 치열성과 관계가 깊을 뿐이다.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걸어온 긴 여정 속의 피곤함을 잠재우기 위해 이 평자는 최정애 시인에게 “몰입의 낭만은 오직 젊은 시에서 나온다”는 이 한 마디 꼭 들려주고 싶다.       시인의 말    시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이고 동시에 울음이기도 하다. 어느날은 고통과 놀고 어느날은 고독과 놀면서 내 상상력이 닿는, 어느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서성거리며 나를 확인하고 조명한다. 세월이 거슬러 이쪽으로 오기도 하고 저쪽으로 가기도 하는, 마치 내가 시간을 갖고 노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따금 나를 목마르게도 하지만 행복한 존재임이 분명한 건, 시는 내 온몸을 적시는 사랑의 환유이기 때문이다.
14    현실과 초월의 접목체椄木体 하이퍼시 탐색하기 (김 필 영) 댓글:  조회:755  추천:0  2018-11-03
평론부문 당선작   현실과 초월의 접목체椄木体 하이퍼시 탐색하기 (김 필 영) 1. 서문      스마트시대를 맞아 하이퍼텍스트를 손바닥 안에서 읽고 사용한다. 보편화된 인터넷망을 통해 방대한 학문영역과 정보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됨에 따라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구별의 개념이 없이 누구나 하이퍼텍스트를 읽으며 살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종이 하이퍼텍스트를 포함) 사람의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한 무한한 사이버공간의 가상적 영역에서 ‘하이퍼텍스트시스템’은 문자적인 텍스트와 무한의 이미지 간에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변화상황에 따른 하이퍼텍스트 등장에 있어 학자들은 그 등장의 의미를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한국에서도 2000년 전후로 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바탕에는 기존문학의 수동적 전달과정을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범위를 ‘하이퍼텍스트시’(이하, 하이퍼시), 특히 전자(電子)가 아닌 종이 하이퍼시로 범위를 좁혀 탐색하고자 하며, 본 논점에서 밝히고자하는 핵심은 그간의 하이퍼시의 성립과 관점에 대한 일부 오류를 지적하고 조정된 방향에서의 2000년대 하이퍼시의 이해와 관점을 재고하여 발전방향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2. 하이퍼시 비판관점 조정의 필요성      비판하는 제도적 기준이나 방법이 비판 후의 건전한 발전적 의도에 부합되지 않을 때 비판의 가치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간의 하이퍼시에 대한 비판시각에는 ‘등장의 의미’에 무게가 실렸으며 외적 성과물에 대한 결과도출의 기대가 성급하여 평가를 속단한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이치적이다. 왜냐하면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당사자든, 읽는 자든, 비판하는 자든 중요한 것은 하이퍼시가 우리 환경에 접목되어 대중에게 다가갈 가치나 시문학에 기여할 가치가 있느냐의 문제나 어떤 메스미디어를 통해 하이퍼시가 어떻게 제작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시의 시적 구성요건과 시적 완성도에 대한 냉철한 고찰과 이론이 정립되어 계도되는 일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의 방향과 선입견이 거세게 일어나 평가자체의 방향과 평가의미가 가치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의 시문학적 역사에서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에도 ‘하이퍼적 특성’은 시대마다 있었다. 1930년대 외부 세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세계의 이론을 배경으로 현실의 시간과 공간구조를 벗어난 내면세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초현실적 이론이 한국의 문학계에는 실제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었으며 한국은 전통적 서정과 이데올로기적 시류가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이단자처럼 등장한 시인이 이상(李箱,1910~1937)이었다. 이상의 초현실적, 기호학적 지식 터득 수준이 어떠했든, 그가 기존의 전통적 문체를 부정 또는 파괴하려는 실험을 감행한 의도의 유무를 떠나 그의 기존 구문과 차별화된 이질적인 이미지의 자유로운 전개와 결합은 한국현대시사의 ‘초현실적 시쓰기’와 하이퍼텍스트의 효시였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李箱)이후, 하이퍼적 요소를 지향하는 아방가르드적 작품의 발표는 조향(趙鄕, 1917~1984), 김춘수(金春洙, 1922~2004), 문덕수(文德守, 1928~ )를 걸쳐 발전해 왔으며, 황지우, 박남철, 오남구, 심상운 등이 이 계열로 볼 수 있으며, 근래 ‘월간 시문학’의 김규화 등이 전개하는 ‘하이퍼시클럽’도 그 맥을 잇는 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하이퍼시적 요소(초현실적 시-3.4문학)가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실패의 소산물이라고 단정하거나 계도부족으로 인한 단편적 조명을 냉소적으로 비판만 하는 것은 한국의 현대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연구와 이론적 정립은 비판에 답할 만큼은 발표되었으나 충분히 계도(啓導)되지 못한 점도 문제 중 하나이다. 이제는 하이퍼시론이 상당수 발표된 바 있으며, 창작과 경험적 이론정립과 탐구가 지속되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지나간 시대의 작품에서 하이퍼적 작품을 발굴해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시작(詩作)의 새로운 시도로서의 하이퍼시의 창작을 긍정적으로 주시해보는 것이 합리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하이퍼적 구조로 창작되어 발표된 작품이 기존의 흐름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그것이 작가의 자연적인 소양이었든,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 의도였든, 그 용기와 노력을 비판만 할일은 아니다. 물론 이 주장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창작하는 당사자들도 하이퍼시가 아닌 타 경향의 시를 겸허히 바라보고 건전하게 비판하며, 하이퍼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복이 선도되도록 서정과 이해의 지평을 넓혀 위로와 감동을 제공하며 진리와 정의로 향하는 하나의 길잡이임을 증명할 수 있을 때, 편견과 오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서는 현재 하이퍼시의 가능성에 대해 작품과 시론을 동시에 실행하고 있는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과 또 한 평론가의 하이퍼시론에 문덕수 시인의 시를 반추시켜 하이퍼시의 성립을 분석해보고 검증해봄으로써 하이퍼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3. 두 권의 하이퍼시론 탐색   (1) 문덕수 하이퍼시론 요약 ◉ 하이퍼시의 전 단계 와 현 단계 요약    문덕수 평론집 『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 중심으로 논문에서 동일인물의 시와 시론에서 논점으로 대두시켜볼 수 있는 부분 요약을 거론해본다.    문덕수 시인은 위 평론집의 「하이퍼시의 전 단계와 하이퍼시의 현단계」*『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 124~125쪽) 머리말에서, “전자(電子)가 아니라 종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시험해보려는 하이퍼시동인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의 충격을 가라앉힐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이퍼시의 성공을 상정(想定)해 볼 수 있는 영역에는 많은 문제점의 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이퍼시의 가능성’과 ‘하이퍼시의 성공’과 ‘문제점’이라는 세 가지 상황을 문제적인 것처럼 기정사실화하고 있지 않음이다. 그러나 이 세 상황은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일반 독자대중의 보편적 인식의 관점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객관화된 관점은 하이퍼시만이 현대시가 지향하여 나아가야 할 점이라고 강변하고 있지 않음이며, 시문학을 대하는 시인으로서, 학자로서의 합리적 자세를 인지할 수 있다.(이 논문에 문덕수의 시와 시론을 적용한 이유도 그러한 객관적 관점에 바탕을 둔 것임을 밝힌다.) 그 논의 방향은, (1) 언어 예술인 시의 하이퍼적 가능성, (2) 사물과 기호가 가지는 하이퍼성과 하이퍼성이 아닌 단계, (3)컴퓨터의 인공언어와 시어(詩語)와의 관련성에 대해 논하였다. ‘하이퍼시의 전 단계’는 “지각의 원인으로서 감관(감관: 즉 눈)과 대상을 분석하였다. 그 점에서 체득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논리는 “지각이나 지각 이전 단계의 사물세계는 하이퍼성(hyper性)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과 “시의 언어가 하이퍼 가능성을 지니게 된 하나의 조건으로 ‘원근법의 파괴’와 둘 이상의 사물에서의 관계성”이라고 했다. ‘하이퍼시의 현 단계’는 “20세기 전위회화에 와서 원근법이 완전히 부정된 것”으로 보이는 ‘고정된 시점의 파괴라는 점에서 하이퍼시로 나아가는 단계의 구실을 함을 거론하였으며, ‘관계성의 발견’에서 ‘유사성’이 폐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동 평론집 136쪽) 그리고 “아날로그 의미의 세계로부터 디지털 의미의 세계로 이동 때, 기호의 지향대상(指向對象)이 소멸”된다고 볼 때, “데이터로서의 자연언어는 외부세계의 사물과 연관되어 있지만, 컴퓨터에 입력되면 이진법의 언어로 변환되고 다시 기계신호로 바뀌어 출력에 도달한다.”(생략) 즉 “컴퓨터에서 인공 언어로 바뀌고 지향대상을 소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대상의 소멸은 시간과 공간을 비약한다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즉 “시간과 공간을 무화(無化)하거나 축소〮〮,확대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춘수는 ‘현대시의 계보’라는 글에서 이러한 현상을 ‘무의미’ 또는 ‘언어의 방임상태(언어의 유희)’라고 했다. ◉ 하이퍼시의 구조* 요약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현실과 초월』 하이퍼시의 방향: 시문학사 발행) 165~187쪽)    문덕수 시인이 위 주제의 논고에서 기술한 예문을 생략하고 평설의 요지를 소제목형식으로 임의적으로 정리하여 ‘하이퍼 시의 구조’로서 10개항으로 요약해본다. 논문에 열거된 주요한 구조를 놓치는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미묘한 의미중복이 있음을 밝힌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구조’를 소제목처럼 열거했다고 해서 한편의 시에 10개 항 모두 충족되어야함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의 시에서 이러한 구조가 복합적으로 나타날 때 하이퍼적 요소가 짙어질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시의 전개에서 반드시 아래 순서에 따라 의미를 다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 “하이퍼시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를 연결한 시”이다. 2) “표현에 있어서 설명보다(관념적 진술보다) 묘사(암시적 묘사 등)를 더 강조”한다. 3) 단위를 모아 구성(연이나 절, 리좀덩어리 등과 구별하여 단위라고 부르기를 권함) 4) 두 존재의 관계 사이의 심연, 단절, 틈을 포괄적으로 초월이라는 이쪽과 저쪽을 지닌다. 5) 초월의 구성 : 한 단위와 단위 각각의 관계 有와 無의 대립적 관계 구성을 중시 한다. 6) 〔A〕단위와〔B〕단위간을 연결하는 부분이 전체구조로서의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 7) 본의(本義, tenor)와 유의(喩義, vehrcle)간의 유사성에 의한 결합인 교유(交喩, diaphor). 8) 〔A〕단위와〔B〕단위간을 연결할 수 있는 현실과 초월의 고리 찾기(살리기)를 중시 한다. 9) ‘리좀’이나 ‘모듈’ 같은 연(聯)인 단위(單位, unit) 구분하기(필수적인 것은 아님)도 하나 굳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10) 묘사와 실제 의미사이의 간극, 차이성에 의한 긴장을 지향하는 차유(差喩, trensphor)를 말하는 견해도 있다.     (2) 심상운 하이퍼시론 요약- 하이퍼시 창작법      심상운 시인은 2006년 경 디지털시론에 몰두했다. 『디지털 시의 이해』라는 혁신 시론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탈관념시론과 디지털시론, 하이퍼시론을 집필하여 발표해 왔다. 시론에 더하여 김규화 시인 등과 하이퍼시동인, 하이퍼시클럽을 결성하였으며 정연덕 시인 등과 ‘시현장’ 동인을 이끌며 ‘하이퍼시쓰기 운동’에 불을 지피고 ‘하이퍼시쓰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심상운은 2010년에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평론집을 발표하여 현대시의 다양한 기법, 변화의 추이에서 ‘하이퍼시의 필연성과 이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그의 저서내용 중 ‘21세기 하이퍼 시 이해를 위하여’라는 부제로 집필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평론집에 수록된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내용에서 ‘하이퍼시 창작법’으로 기술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심상운 저,『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푸른사상, 2010. 103~131쪽) ◉ 하이퍼시 쓰기를 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의 이동방법 (본 소제목은 논고의 이해를 돕도록 필자가 임의로 설정한 제목임)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전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자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시의 특성과 결합한,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를 통한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변형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 ‘선택과 집중’, ‘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 ‘가상현실의 세계’라는 하이퍼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한다. 3) 다시점의 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사물도 캐릭터가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적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심상운 저,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푸른사상, 2010. 130~131쪽)에서 인용 이 경우에서도 시에서 문덕수 시인의 시론 적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9가지 방법이 다 적용된 시만이 하이퍼시라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4. 하이퍼적 요소의 시 들여다보기 (문덕수 시집, 『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 중심으로)      문덕수 시인은 평론집 『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의 ‘한국시의 현황’이란 주제의 글에서 “한국시의 현황을 ‘방법’이라는 기준으로 1)전통과 서정(전통적 서정시), 2)메시지와 관념(관념시), 3)이미지와 사물(물리시), 4)탈관념의 모험(실험시),주지적 처리(주지시) 등으로 분류하여 논한 바 있다.* * 『현실과 초월』 50쪽, 2014년 시문학사 발행)    문덕수 시집,『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는 시선집으로서 수록된 시는 하이퍼적 요소가 희소한 시들도 여러 편 수록 되었으며 문덕수 시인이 쓴 시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55년 현대문학 10월 시 「침묵」「화석」「바람 속에서」 등으로 등단한 이후, 1956년 첫 시집 『황홀』을 상재하고, 1966년 〮〮〮『선.공간』, 1968년 3인시집 『본적지』, 1975년 『새벽바다』, 1976년『영원한 꽃밭』, 1980년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1981년 『수로부인의 독백』, 1982년 『다리놓기』, 1990년 『만남을 위한 알레그로』, 1994년 『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 1995년『조금씩 줄이면서』, 1996년 『그대, 말씀의 안개』, 1997년 『빌딩에 관한 소문』, 2002년 『꽃잎세기』, 2007년 『꽃먼지 속의 비둘기』, 2009년 장시집 『우체부』, 2012년 『아라의 목걸이』(5권의 시선집과 4권의 번역시집 제외)까지 발간된 시집 속의 셀 수 없이 방대한 작품을 모르고 『라일락 향기』에 수록된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문덕수 시세계의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는 것일 수 있다. 허나 시집 내에 서평이나 평설이 없는 점을 고려하여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시인의 시를 놓고 동일 인물의 시론과 다른 논자의 시론을 대입해 하이퍼시의 성립요소와 효용성 그리고 하이퍼시의 방향에 대해 논할 때 그 객관성 입증에 논리적일 수 있다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덕수 시인의 근래 출간되어 대중 가까이 보급된 시집 (문덕수 시집, 『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에 수록된 시들 중에서 하이퍼적 요소가 내재된 시를 중심으로 평을 펼쳐본다. (시집에 편집된 시들의 목차는 창작 순서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함)     (1) 선(線)의 하이퍼적 소묘(素描)      시집 서두에는 5편의 선(線)을 소묘(素描)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선(線)이란 면(面) 위에 길게 그어 놓은 금, 또는 수학적으로 점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이루어진 자취로 정의 하는 바, 점(點)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발생하는 운동선(moving line)이라 할 수 있다. 소묘(素描)는, 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연필이나 콘티, 목탄, 파스텔 등을 사용해 선으로 그린 그림 또는 그 회화표현으로 그린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파생된 단어 흔히 데생(dessin)이라고 부르는 회화기법이다. 그렇다면 그 단순한 선(線)이 어떻게 하이퍼적 구조를 지녀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색채가 없는 점이라 할지라도 연필을 들고 백지 위에 점을 찍어보자. 그 점을 똑바로 그으면 직선이 되고, 구부려 그리면 곡선이 된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선이 각에서 만나는 점을 모서리라 한다. 고개를 들어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보면, 처음 바라보는 지점에서 다음 바라보는 지점이 있겠으나 우리 눈은 전광석화처럼 ‘총천연색 전자동 카메라’ 기능을 발휘하여 촬영하는 데 그 행위를 슬로비디오로 구현한다면 무수한 점과 점이 이어지는 선(線)을 동시에 촬영하여 뇌로 보내어 물체를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측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을 보면 선(線)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시인이 선(線)을 소묘(素描)한 묘사에서 어떤 묘사가 현실과 초월의 각자 영역을 드러내므로 하이퍼적 구성요소를 보여주는가. 첫 시,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을 들여다본다.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동그란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 전문      까만 밤하늘에 한 유성이 춤을 추듯 등장하여 선의 질주로 시작되는 이 광경은 샌프란시스코 거리나 홍콩거리의 야경을 공중에서 원적외선 촬영기법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는 듯하다. 이 시 첫 행에서 나타난 “한 가닥 선(線)”은 어떤 사물을 직유하고 있지 않다. 선(線)에는 어떤 관념이 없다. 그러나 그 ‘실뱀처럼’ 달아나는 선을 ‘또 한 가닥 선이 뒤쫓’으므로 시작된 점의 운동인 ‘선의 상상의 이미지’가 태동하여 결합하게 된다. 마치 SF영화에서 지구라는 별에 점(點) 하나가 떨어져 움직이기 시작하자 발생하게 되는 광경을 연상하게 된다. “빛살처럼 쏟아져 나”와 뱀처럼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들이 꽃잎을 물고 질주하는 선(線)의 출처를 주목하면 “어둠 속”이다. ‘어둠’은 상징적으로는 빛과 대칭적인 상태인 진리나 정의와 반대편이라 한다면 ‘빛살처럼 쏟아져 나온 선이 문 “꽃잎”은 거짓이나 불의로 유혹하는 물체로 유추할 수 있다. 하반절에서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물자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것이 있다. 연속적으로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꽃이다. 이 때의 꽃의 출처는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이며, ‘단절의 틈’에서 나와 “불꽃처럼 피어나”온 것이므로 그릇된 욕망일 수 있으며 그릇된 욕망의 말로는 결국 ‘찢어지고 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뱀처럼 꼬리를 물고 질주한 선의 세계는 그릇된 욕망을 향한 몸부림이며, ‘진실’이라는 과녁을 빗나간 위장된 ‘빛살’, 또는 ‘정의’의 길을 위장한 ‘빛살’이 물고 물려 현란하게 뒤따르는 ‘혼돈의 세상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는 사물을 촬영하여 과대하게 확대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이는 점묘의 집합체로 보이는 그물망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물리적으로 우주라는 무한공간을 볼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우주를 무슨 수단을 통해 포획할 수 있는가. 오직 창작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만이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은 “동그란 우주”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線)은 ‘현실’이나, 선(線)이 꽃잎을 물고 질주하는 것은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이다. “동그란 우주”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은 “동그란 우주”를 받아내는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을 지향하는 차유(差喩, trensphor)기법이 적용되었으며, 우주와 망사를 대치시킴으로 현실과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을 통한 시적상태를 ‘하이퍼적 고리’라 볼 수 있다. ‘리좀’이나 ‘모듈’ 같은 연(聯)인 단위(單位, unit)가 이 시에서는 도입하지 않은 것은 리드미칼 한 운율과 이미지결합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시인의 의도로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상의 혼돈을 여러 가닥의 선(線)으로 동시에 끌어들여 은유함으로 하이퍼적인 시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2」를 통해 선(線)의 하이퍼적 묘사를 좀 더 들여다본다.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 불사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2」 전문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은 무엇일까, 진리를 탐구하는 길일 수도 있고, 우리 인간이 아직 겪지 못한 미래를 상징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에서 현재라는 지점이 활시위라면 어느 목표를 향하여 활시위를 떠난 화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면 한마디로 “의문의 화살”이 아닐까. 그 “의문의 화살”이 진리를 탐구하는 몸부림이든, 비켜가지 못하고 불의와 장애와 맞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든, 사람의 수만큼 또는 사람이 상상하는 수효만큼 무수할 수 있다고 본다면 “의문”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합한 묘사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한 가닥의 선(線)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線)이 와서 걸”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가 벌어진다. 한 가닥 선은 탈관념의 사물이며, 또 하나의 선이 와서 불꽃을 뿜고 난무하여 결합하므로 ‘상상의 이미지’가 태동하게 된다. 본문에서는 이 “의문의 화살”을 “불사의 짐승일까”라고 암시적으로 묘사하여 초월적 긴장구조가 상승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 생을 살아가는 길에 무수히 따라 붙는 ‘불사의 짐승’은 무엇인가. 다음 행의 묘사에서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가 “삭아서 떨어”졌다는 묘사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과 환경에 따른 언어의 구조적 결함이나, 주관적 주장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로 나타난 몰이성적 양태가 상대를 향해 던지는 “짐승”의 행위와 같은 언어행위라 할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불사조”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어 우리를 향해 불꽃 속에서 얽어매고 태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에 남는 것이 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짧은 생애라는 피하지 못할 한계로 인해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생의 진리가 “신비한 매듭”으로 남는 것이다. 결구는 그 한탄을 재판장의 망치처럼 명징하게 내리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은 ‘화살’이나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의 의문의 비행’은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이다. ‘한 가닥 선’은 현실이나 서로 얽혀 난무하여 불꽃을 뿜는 ‘불사의 짐승’은 초월이다.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현실이나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은 초월이라 볼 때, “일체가 불타버”린 것과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은 초월의 이쪽과 저쪽이며,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관계구성이자 차유(差喩, trensphor)의 성립구조로 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초월의 관점은 명백해지고 두 상황의 접목체인 하이퍼적 요소가 시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언어와 사물의 하이퍼적 소묘(素描)      언어의 현실과 초월을 시어로 실현하는 것이 의도적일 때 그 비평은 독자의 몫이다. 아래의 시는 1961년 현대문학 74호에 발표 되어 『선(線) • 공간(空間)』(1966)>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인 50년 전 작품이나 그때는 스마트 시대에 읽어도 한 폭의 일러스트(illust)화면을 보는 듯하다. 다시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꽃과 언어」 전문      긴 세월 이 시에 대한 세간의 평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쇄반응에 의한 순수 조형(造形)에 관심을 보이는 무의미의 시로서 표현 그 자체로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초현실주의 시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무의식이란 이성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방임상태에서 무질서하게 축적된 의식의 단편들을 아무런 의미 관련도 없이 자동기술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떠오르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 김현승(金顯承)이 그의 시론적 저서에서 가장 새로운 시로서 인용한 작품이다.    [상징사전]에서는, “언어 자체는 내연(內燃)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생명력을 눈치 채고, 감지한 시인에 의해서만 생명의 참 모습, 참 의미(나비와 꿀벌)를 찾게 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이 시의 주제는 ‘꽃을 통한 언어의 생명력’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언어’라고 하는 무형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꽃잎 · 나비 · 깃발 · 밀물 · 불꽃 · 꿀벌’과 ‘되다 · 찢기다 · 펄럭이다 · 쓰러지다 · 밀려오다 · 타다’ 등의 이미지만을 느끼면 그만인 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그러면 위 시의 감상평에 앞서,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하이퍼시 구조’에 위의 시를 의도적으로 대입시켜 궁금증을 해소시켜보고자 한다.      첫 행에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는 묘사에서 ‘언어’나 ‘꽃잎’은 ‘탈관념의 사물’이나 “언어가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것은 ‘상상의 이미지’이므로 ‘하이퍼시의 구조’ 제 (1)항을 충족 시켰다고 볼 수 있다. 2연에서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는 묘사는 (2)항을 충족시키는 ‘암시적 묘사’라 할 수 있다. 모두 4연으로 ‘단위를 모아 구성’된 것은 (3)항,(9)항의 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꽃과 언어는 두 존재 사이에 있는 ‘초월의 이쪽과 저쪽’을 상징하므로 (4항)을 충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다간 꺼”지는 무(無)의 이미지와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되는 유(有)의 이미지는 초월의 구성상 무(無)와 有의 대립적 관계구성인 (5)항인 동시에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 성립 구조인 (6항)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개 연을 통해 ‘단위’를 구성하고 있으므로〔A〕단위와〔B〕단위 간을 연결할 수 있는(8)항 구조의 ‘현실과 초월의 고리’는 “꽃”임을 알 수 있다.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지는 ‘언어’와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되는 ‘어떤 언어’사이엔 ‘언어’라는 교유(交喩,diaphor)가 이루어진 것으로 (7)항의 구조요건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10)항의 차유(差喩, trensphor) 구조도 적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시를 심미주의(審美主義)적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어떠한가. 그러한 관점으로 시읽기를 시도해보는 연유는 하이퍼시가 독자에 따라 어떤 상상을 제공해 주는지 ‘시의 수용성면(受容性面)’에서의 하이퍼시의 가치를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언어’가 “꽃잎에 닿자” 어떻게 “한 마리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 추한 꽃잎은 없다. ‘꽃잎’이라는 ‘아름다움의 실체’나 상징적 대상을 바라본 사람은 그 감흥을 나비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언어로 나타낸다. 이때의 언어는 결코 추하지 않으며 상처를 주지 않는다. 이때 발하는 본능적인 언어는 훨훨 나래를 저어 날아오르듯 자유와 평화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지상의 첫 남자가 자신 앞에선 첫 여자에게 한 언어가 연상되는 이 도입부는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발하는 향기로운 언어도 2연의 묘사처럼, 서로 미워할 때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그 뜻을 전하지 못하고 패배진영에 매달려 “찢긴 깃발처럼” 허공에서 펄럭이다 쓰러져 갔는가. 이 묘사는 불통의 시대를 향한 처절한 외침처럼 들린다. 언어로 수많은 생명의 생사가 결정됨을 생각할 때, 언어는 어떤 무기보다 강하고 파괴적이며 그만큼 비극적이다. 3연에서 묘사된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는 모습은 곱고 바르게 “꽃‘처럼 살아보려는 우리들이 격랑의 밀물처럼 세상을 향해 꽃처럼 달려와 포말로 부서지는 우리 생의 아픈 모습들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역사는 무수히 내뱉는 언어가 밀물처럼 밀려와 산을 태워버리듯 삶이란 짧고 허망한 시간을 불살라 황패케 하는 역사가 이어졌기에, 언어가 향기를 발하여 꽃가루를 날라 꽃씨를 맺게 하는 “한 마리 꿀벌”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기에, 지구상에 ‘꽃 같은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표현방법의 절정이 시(詩)라는 표현의 형태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다른 그물망에 비친 하이퍼시 소묘(素描)      이번에는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를 자신의 시론이 아닌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론의 그물망에 올려 심미적 시각을 접사시켜 들여다본다.   수천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춤이다. 벽이 일천의 벽이 앞질러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나 솟기도 하고 줄 지어 멀리 달아나듯 쫓아온다. 벽이 꺾이어 막아서기도 하고 때로는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기도 하고,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고, 벽이 유리처럼 환해지면서 그 안에 또 다른 벽이 우뚝우뚝 솟는다. 도시는 커다란 어항 빌딩도 층층이 쌓아올린 어항이다. 어디로 가나 나는 그 어항 속의 금붕어다.     「벽 2」 전문      수천의 발자국 소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수천’은 무수한 수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완전수이고, ‘발자국소리’라는 현실적 묘사는 ‘지구 위를 걷는 무수한 인간들의 삶의 꿈틀거림’을 의미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수천의 발자국과의 결합을 기다리는 다음 행간의 이미지는 파격적이다. “그것은 춤이다”라는 단정으로 ‘발자국과 춤’이 ‘집합적 결합’을 이루는 것은 단아하고 명징하다. 시어의 울림에 있어서 깊이와 너비는 독자의 상상력에 비례할 것이나 ‘벽’이라는 주제 앞에 ‘발자국’이 ‘춤’으로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하고, 2연인 단위의 변환에서 주제인 “벽이 일천의 벽이 앞질러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나 솟기도 하고 줄 지어 멀리 달아나듯 쫓아온다.”고 묘사함으로 ‘발자국’과 ‘춤’이 ‘쫓아오는 벽’으로 化하는 ‘다시점(多示點)’ 즉 ‘다선구조(多線構造)’로 펼쳐지는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전개되는 ‘가상현실 묘사’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하여 큰 울림으로 들려온다. ‘소통의 단절’을 상징할 수 있는 ‘벽’을 ‘춤’이라는 율동체로 변환시킨 것은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라 할 수 있으며 ’현실을 초월한 공상의 세계로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가장 가까우나 등을 지고 서있는 ‘벽’이란 고정물체는 “벽이 꺾이어 막아서기도 하고 때로는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기도 하고,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므로 ‘정지된 이미지’에서 벽이라는 이미저리가 확장된 ‘동영상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우리는 호흡하며 얼마나 다양한 벽 앞에 좌절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지금의 나는 ‘미로 찾기’보다, 사면초가보다 답답한 온갖 ‘벽’의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여 야위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벽을 대할 것인지를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게 하여 시인은 묻고 있다. 이제 시의 결구로 향하는 단위에서 시인은 ‘연출자’ 입장으로 시를 향해 나아간다. 4연인 단위 하반부에서 답답하게 막힌 벽을 투시해주는 “유리처럼 환해지”는 ‘투명한 벽’을 등장시키는 연출로 ‘벽의 이면과 벽 너머의 세상’을 통찰케 한다. “벽이 유리처럼 환해지면서 그 안에 또 다른 벽이 우뚝우뚝 솟는” “커다란 어항”안에 존재하는 인간존재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어항 속의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탈출하여 살 수 없듯, 우리가 지구를 떠나 아니 ‘벽’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문덕수의 시인은 ‘벽’이란 사물을 통해 우리 스스로 지각하도록 ‘시의 벽’을 제시하여 시의 생명인 ‘진리를 향하는 길잡이’로서의 ‘벽’의 역할을 에둘러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벽’을 투시하며 벽을 넘어가려는 우리의 발길엔 ‘계단’이라는 사물이 기다리고 있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난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스치고 부딪힐 때마다 발등은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그 사나이도 이제는 돌이 되어 올라간다. 「계단」 전문        ‘계단’ 앞에서 ‘계단’을 올려다본다. 반드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 ‘계단’으로 시는 우리를 데리고 오르고자 한다. 점점 물이 차오르는 구멍 난 배에서 구조선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절대 절명의 긴장감이 흐르는 ‘계단’이라는 이미지에 ‘구르는 돌’이라는 불안정한 이미지가 집합적으로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한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삶의 계단을 올려다봤을 때, 그냥 오르기도 쉽지 않은데,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계단이란 어떤 계단인가. 여기서 계단을 올려다보는 화자의 시점과 돌이 굴러 내려오는 타자의 시점과 그 두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의 시점이 다시점(多示點)으로 형성된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지기도 하고,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나는 가상현실의 전개는 소설적 서사(敍事)를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묘사된 돌들의 다양한 모습,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는 묘사는 우리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며 감성을 건드려 유혹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나는 돌은 무엇인가. 어쩌면 ‘눈의 욕망’으로 야기된 ‘살의’와 물질의 기만적인 힘 앞에 욕망을 드러내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다선구조(多線構造)’로, ‘동영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존재가 있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이는 ‘의식 세계’의 우리의 모습인 ‘자아’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간에서는 “스치고 부딪힐 때마다 발등은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그 사나이”가 있음을 묘사하는데 그 상황을 ‘무의식 세계’라 볼 때,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행간에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전 편의 시 「벽 2」에서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인 벽에서 투시할 수 있는 ‘유리벽’을 등장시켜 ‘현실과 초월의 고리’인 희망의 고리를 제시한 문덕수의 시는 「계단」에서도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불굴의 사나이를 ‘현실과 초월의 고리’로 등장시키므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야 하는 우리들에게 ‘돌파구’와 같은 희망을 제시하고 있음에 문덕수의 시의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이번 논의를 통해 들여다본 문덕수의 시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초상」을 통해 “천개의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모습을 비우고 타자에게 맞는 ‘다정한 악수’를 청한다. 「네 개의 막대기」를 통해 ‘환경을 파괴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선함을 말살하려는 ‘막대기’에게는 ‘죽음을 선고’하기도 하고, 「원(圓)에 관한 소묘」에서는 ‘한 개의 원을 ‘천개의 원’으로 증폭, 분할시켜 ‘신의 눈알’로 치환함으로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을 결코 가릴 수 없는 것임을, 어떤 불의도 결국 드러나고 마는 것임을 알려준다. 「라일락 향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도심의 삭막한 골목길에 비둘기 한 쌍의 주둥이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냄새나는 작은 트럭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원(圓)에 대하여」에서는 원이 점에서 출발하여 선이 되고 형(型)을 이루어 생명체로 존재하여 완성체에 이르는 시련의 과정에서 스스로 ‘원’이 되고자 한다. ‘원’은 결코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 찬 충실이”라고, 한 점 지극히 작은 씨로 시작된 원, 우리는 “하나의 물방울로”, 마땅히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일 것인가를 자문하게 한다. 「섬」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가 ‘외딴 섬’이기에 눈과 눈을 반짝이고 입김서린 잔잔한 마음을 서로 나누라 한다. “「사과」한 알”에서 ‘천체(天體)’를 보며 사과를 붉게 맛 들게 하는 태양의 한 점 원초의 빛깔에서 “자아”를 찾는다.    이상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를 본인의 시론의 그물망에 비춰보기도 하고, 타자인 심상운 시인의 시론에 접사시켜 들여다 본 결과는 논하기 전에는 예측 못했던 큰 지진과 해일로 다가왔기에 하이퍼시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공상적이어서 난해하여 소통이 어렵고, 서정의 결핍으로 감동이 없으며, 다선구조의 복잡한 이미지망으로 인해 혼란스럽다는 등의 종래의 문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이 그 점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아니 ‘현실과 초월’을 접목한 생경한 묘사들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채로운 상상으로 읽힐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시편들의 행간들에서 지루함 없이 흥미를 느낄 수 있었음이 필자가 조장한 일이거나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더욱이 모든 시편들에는 인류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이 녹아있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어 시인의 역할에서 충실히 임하고 있음을 본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며, 곁길로 가지 않고 쉼 없이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열정적인 시인의 시적 행보에 경의를 표한다.   5. 결론      필자는 하이퍼시를 예찬하고자 이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지향해야할 가장 우수한 시쓰기가 하이퍼시라고 주장하고자 함도 아니다. 문덕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이 다 하이퍼시가 아니듯 문덕수 시인이 하이퍼시만을 쓰는 시인도 아니며 평론가로서 학자로서의 문덕수의 평론이 다 하이퍼시론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덕수의 하이퍼시론을 한편의 시가 아닌 몇 행의 시적 행간에만 적용해보아도 이 논의의 진의를 파악하리라 생각한다.    하이퍼적 묘사는 지금까지의 시도된 어떤 묘사보다도 시의 ‘낯설게 하기’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여 시어의 식상함을 불식시켜준다는 것을 본 논의에 인용된 작품들이 스스로 증명한다. 표현에 있어서 관념적 설명보다 ‘암시적 묘사’는 통찰력을 갖게 하여 사물의 틈과 이면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물의 이쪽과 저쪽의 대조적 상황은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현실과 초월의 대조 상황을 제공하여 상상의 이미지를 확장시켜주므로 시를 읽는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다채로운 상상의 세계를 선사한다. 이는 시가 ‘현실과 초월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섰을 때, 하이퍼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임을 밝혀주며 지금까지의 묘사에서 느끼지 못한 상상이 확장된 초월적 묘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새로운 언어의 꽃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이 점은 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논리인 것이다.    그 점에 관한 심상운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심상운 시인의 시집과 지면을 통해 발표한 시들 역시 다 하이퍼시가 아니며 많은 평론들이 모두 하이퍼시론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그의 저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평론집에 수록된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내용에서 ‘하이퍼시 창작법’으로 기술한 것을 인용하여 문덕수의 시를 접사시켜 해부해 봤을 때 시가 스스럼없이 증명해주었다. 그가 논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한 시들의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하여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한 시들은 다시점(多示點)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개성을 등장’시켜주어 새로운 시쓰기를 제시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긍정하는 것이 무리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활용을 통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 점은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켜주는 역할에 기여하고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아울러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공존하는 시를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제작할 수 있게 하는 창작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논리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하이퍼시적 요소가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실패의 소산물이라고 단정하거나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한국현대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현재 하이퍼적 구조로 창작되어 발표된 작품이 기존의 흐름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그것이 작가의 자연적인 소양이었든,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 의도였든, 그 장르를 인정하고 건전하게 비판하는 자세가 합리적이다. 물론 이 논리는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창작하는 당사자들도 하이퍼시가 아닌 타 경향의 시를 겸허히 바라보고 건전하게 비판하며, 하이퍼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복이 선도되도록 ‘서정과 이해’의 지평을 넓혀 나아가 위로와 감동을 제공하며 진리와 정의로 향하는 하나의 길잡이임을 증명할 때,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꽃 같은 언어’로 향기를 발하여 꿀벌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13    하이퍼텍스트 시 들여다보기/ 이선 댓글:  조회:791  추천:0  2018-11-03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12    사물과 기호/ 문덕수 댓글:  조회:774  추천:0  2018-11-03
사물과 기호 ― 사물시와 기호시의 가능성                                           문 덕 수(시인, 예술원 회원)            1. 탈관념(脫觀念)은 유행어인가, 시론의 한 중심개념인가. 탈이데올로기, 탈서구(脫西歐), 탈모더니즘 등이 갖는 비슷한 유행성 및 인문학적 개념 등과의 이중성을 갖는다. 우연히 걸리는 길바닥의 지푸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덮치는 강력한 회오리 같은 것이 아닐까. ‘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낡은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다는 뜻이다. 벗어 던져야 할 ‘관념’이란 어떤 관념의,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관념을 벗어던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물’(物 또는 사물)이라면 물이란 관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이란 또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물음이 서로 얽혀서 꼬리를 문다. ‘탈관념! 탈관념!’ 하고 외쳐도 이론이 뒷받침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빈 양철 두들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그리스어의 이데아(idea)의 역어라고 한다. ‘notion’도 이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불타나 진리를 관찰하고 사념(思念)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관상념불’(觀想念佛)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한자의 ‘관(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두루 자세하고 똑똑하게 본다’는 뜻이고, ‘염’(念)은 생각하여 마음 속에 굳게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데아’도 ‘본다’는 의미의 동사인 ‘에이도스’(eidos)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어원적으로 ‘본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데아는 보이는 모습, 형상(形狀), 형식 등, 이른바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념이건 이데아건 ‘감각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어원을 공유한다. 근대 이후 ‘관념’은 사유(思惟)의 대상으로 한정되어 사물을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떨어져 버린 것 같다. 한편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갈려 논의되는 경향도, 관념에서 감각적 경험이 떨어져 버린 것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의 형상을 관념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상’이라고 하고, 사유를 형성하는 능력을 ‘오성’(悟性)이라 하여 구별하는 것도 관념에서 감각적 기능이 탈락되고 있는 추세다. 관념에는 가상성(可想性)과 가감성(可感性)이 논란의 핵으로 불거지면서, 어느새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상성’만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관념이란 넓은 의미의 정신적 원리(의지, 이성 등)에 의하여 세계의 현실을 해석한 내용을 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론에서 그런 것 같다.        2. 탈관념시 운동의 효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부터인 듯하다. 정지용(鄭芝溶)과 이상(李箱)이 그 주역이다. 이 때가 탈관념시 운동의 제1기라면 오늘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제1기가 지닌 아방가르드성(性), 실험성 등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적 의미의 요청으로 변용․계속되고 있다. 정지용과 이상은 외부와 내부, 외면 사생(寫生)과 내면 기록의 대립상을 보이나, 기존의 시적 관념세계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둘의 전위적 성과의 물량은 적으나 퍽 감동적이다. 광복 후 조향(趙鄕)도 방황을 거쳐 이 노선에 합류한다.(탈관념 운동의 3인방이라고나 할까.)     바다는 뽈뽈이 달어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 정지용, 「바다 2」에서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 임화, 「玄海灘」에서     두 편 모두 30년대의 작품으로서 ‘바다’가 대상이다. 정지용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는, 그냥 벌거숭이 바다이나, 임화는 한․일간의 역사적 굴곡이 투영되어 있다. 30년대의 모더니즘이 역사주의 회피를 위한 탈출구가 아니었지만, 역사주의 쪽에서는 그런 비난을 한다. 이런 비난은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 있다. 분단상황과 통일 및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반민족적 예술지상주의라는 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 탈관념 시론은 관념주의의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물’(사물) 자체를 중요시하고, ‘관념’은 그 다음 것으로 본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 이상, 「꽃나무」에서     ‘꽃나무’에는 역사주의적 관념이 없고, 정지용과 같은 외적 객관적인 존재도 아니다. 주체(이상)의 내면 속에 상상된 점에서 정지용의 사물 점묘(事物點描)와는 다른 심리주의적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심리 속의 사물이긴 하나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니다. 30년대 탈관념론은 사회주의에 편승한 카프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운동이다. 카프계와의 골치 아픈 논전을 피하고(카프계의 조직적․전투적 논리의 과격성이 싫었던 것 같다), 정지용은 모던한 감각적 물리성에서, 이상은 내면의 역설적 고뇌의 회오리에서 조용히 사물을 응시하는 탈관념 시쓰기로 혁명한다. 그런데, 조향은 이 두 선배보다 더 치열하고 극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탈관념 시쓰기와 더불어 탈관념 이론(초현실주의 수법, 단절의 논리, 오브제론 등)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노선은 이상 쪽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손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 조향, 「EPISODE」에서     광복 후, 문단이 좌우로 분열되면서 관념시의 정치적 폭위에 맞선 조향의 탈관념 운동의 보기다. 초현실주의 시론의 영향에 압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조향이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서정주의 전통적 서정주의나 정지용 계열의 모더니즘(이미지즘)에도 맞섰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로 많이 다가간 오늘의 탈관념론 운동의 한 방향을 시사한다.     조향의 초현실주의 클럽의 멤버이면서조향의 지도를 받은 이선외(李善外)의 글이 있다. “논리적 계산하에 뒤에 올 말이 빤히 집히는 수직적인 언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진 언어들보다는 벌거숭이 언어, 인간의 현실적인 지휘(指揮)를 받지 않는, 생동하는 언어, 존재로서의 언어가 더 시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이선외, 「의식(존재)의 확대」, 초현실주의문학 예술연구회 편, ������오브제������, 덕문출판사, 1980. 3, p. 44) ‘날 이미지’나 ‘날 것’보다 훨씬 앞선 “벌거숭이 언어”라는 말이 유난히 돋보인다.        3. 탈관념 시쓰기는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고 물 또는 물체를 중시한다. 기존의 관념을 배제한다는 뜻은, 구문(構文) 구조에서 굳어진 기존의 선조적(線條的)․시간적인 단선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구문의 종지점(終止點)이건 구문의 중간 지점이건 간에 어디든 접속되어(링크하여) 새 맥락의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 맥락에서 다시 새 구문이 발생하여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도 포함된다. 이리하여 ‘물’ 또는 ‘물체’의 의미는, 내면세계의 무질서와 비슷한 하이퍼텍스트 속의 사물이나, 외적 현실 세계의 사물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세계에서 흔히 날 것, 벌거숭이 언어, 날 이미지, 있는 그대로의 사물 등을 강조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김소월, 「가는길」에서     ‘그리움’은 사물인가, 관념인가. 이 시에는 ‘이별의 현장’이 전제되어 있지만, 며칠 몇 시, 어느 곳에서, 누구와의 이별이라는 구체적․개별적 현장체험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실제의 체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도 ‘이 사람’ 또는 ‘저기 계시는 저분’에 대한 그리움임이라고 특정할 수 가 없다. 시행(詩行)의 연결에도 관념적 연속성이 있고 또 인간중심주의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도 관념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위」에서     유치환의 ‘바위’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1인칭 주체의 의지세계를 강조한 인간중심주의가 돋보이고, 사물 자체도 개념화되어 그것에 흡수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가 이어져, 바위가 지닌 물성(物性) 즉 바위의 견고성, 무게와 부동성, 풍화작용 등의 물리성을 암시하지만 바위에 대한 관념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관념이긴 하나 해석에 의하여 물성 또는 물리성을 파악할 수 있고, 이 물성을 근거로 ‘바위’라는 실물에까지 닿게 된다. 그러나 이 시를 탈관념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 서정주, 「문둥이」에서     서정주의 「문둥이」도 체험적 현장성이 약하다. 특히 문둥이의 서러움이 어떤 모양의, 어떤 성질의 서러움이냐고 묻는다면 그 구체성을 대답하기 어려운 즉 구체성이나 개별성이 없는 추상된 관념성이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밀어」),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부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귀촉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당도 청마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여서 인간 바깥에 실재하는 사물이 개념화되어 인간 쪽으로 수렴되고 있다.     -나의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 다오 -나의 더러운 몸을 말끔히 씻기게 해 다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에 물줄기는 끊기고 몇 군데 웅덩이에 웅덩이물만 남았다 그 변두리에 어떤 돌은 옆으로 서 있고 어떤 돌은 자폭(自爆)인가 엎드려 있고 어떤 돌은 엉거주춤 앉고 어떤 돌은 손을 들고 기도하듯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다 -내 죄가 있다면 물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입니다 -내 죄가 있다면 수석가의 선별 대상이 되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박명용의 「돌」 전문     이 시는 ‘돌’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타자’(他者 other)로 인식하고 있고, 돌이 의인화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그렇다고 돌을 자기화(自己化)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치사한꼴…”의 ‘나’는 의인법을 말해주는 근거이나,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바위」), “노오란 네 꽃잎이 필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 「국화 옆에서」)와 같은 ‘나’와 비교해 보면 돌과 나와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박명용은 ‘사물과 주체 사이와의 거리’를 많이 떼어 놓고, 사물을 비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바로보는 한 계기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람과 날개」, 「춤꾼」, 「숯」, 「보길도」 연작시 등이 모두 그런 작품이고, 특히 「보길도․2」 등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려는 태도를 훨씬 짙게 드러내고 있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 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에서     이 시는 박명용의 태도를 더욱 철저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 자체가 주체(시인)로부터 떨어져 거의 별개의 존재(실재)로 독립되어 있는 대상이 되어 있다. 표현에서 관조하는 시인의 감각적 시선(視線)이 감지되나, 시인의 인간주의적 어떤 감정이나 어떤 사회적 관념(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의 개입을 최대한도로 억제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이 시인은 마치 관찰의 기술자나 시 제작의 직공처럼 사물의 미세한 운동을 놓치지 않고 더듬는 운동을 보여준다.(그러나 이런 시의 경향만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성질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존 로크(1632~1704)는 사물의 성질을 세 갈래로 분석해서 보여준다. (1)물체의 고성(solidity)이 지닌 양, 형태,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靜止). 이것을 물체의 1차성질(primary Quality)이라고 한다. (2)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는 색, 성, 향, 미 등. 이것을 2차성질(second Quality)이라고 한다. (3)물체의 1차성질이 다른 별개 물체의 양, 형태, 조직, 운동을 변화시키는 능력. 이것을 물체의 능력(Power)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물 그 자체가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성질과, 물이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성질로 대별된다. 1차성질과 2차성질은 전자에, (3)의 능력은 후자에 해당된다.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 -박명용 「보길도․2」에서     파도라는 사물의 모양이나 운동을 묘사한 이 시는 존 로크가 말하는 사물의 1차성질이다. 앞에 예로 든 이솔의 시도 역시 1차성질의 것이다. 사물을 강조하는 시는 존 로크가 든 사물의 성질(1차성질, 2차성질 및 능력)을 읊은 것, 사물에서 기존의 어떤 관념을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오규원, 조영서), 사물 자체가 다른 어떤 관념이나 의미를 배후에 거느리고 마치 상징이나 메타포의 유의(喩義)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마지막 경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카프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주의적 관념이다. 청마의 의지나 미당의 서정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이다. 모두 휴머니즘을 지향하지만, 탈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임화나 청마나 미당이나 모두 오십보 백보의 관념세계다. 오늘의 분단을 강조하고 통일과 평화를 외치는 민중시도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나 역사주의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4. 이제 모더니즘의 또 한 갈래인 좀더 과격한 전위시를 보기로 한다. 이 경향은 물리주의(사물을 중시하는 모든 경향을 일단 이렇게 부른다)보다는 대상(사물)과 주체(시인)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기호의 매개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사물의 실체와 그 실체의 성질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보다는, 그 사물을 표현하는 ‘매개적 기호’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이다. 이미 이상(李箱), 조향(趙鄕) 등이 그렇게 해 왔다. 그런대로 의미 있는 이 계열의 상속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황지우, 박남철은 해체시 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기호파’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심상운, 양준호, 박찬일 등의 최근 실험은 모두 이 계열로 보인다.     앞 바다를 빨래처럼 걸어 줄에 매어놓고 나면 나부끼는 바다 핏빛 선명한 해가 미끈, 미끄러지며 캄캄하게 사라졌다 -오남구 「서해」에서     이 시는 고군산군도 근처 서해의 일몰(日沒) 현장 풍경의 이미지이지만 결코 서해 일몰의 리얼한 사생(寫生)은 아니다. 서해라는 현실적 현장의 일몰풍경이, 하이퍼텍스트 이미지 형성의 모티프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시인 자신의 자유로운 원근법에 의한 별개의 기호세계를 이루고 있다. ‘원근법’도 매개적 관계자다. 이 텍스트는 바깥에 존재하는 현장의 사물을 지향대상(referent)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자체는 사물의 세계를 넘어선 기호세계의 텍스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에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시문학, 2007. 6)의 제1연만으로는 여느 물리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분명히 사생(寫生)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2연은 다음과 같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 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심상운 윗 시의 제2연     시위 장면의 촬영현장과 제1연의 안개 속의 나무, 사회와 자연이라는 두 장면이 한 작품의 구조 속에서 몽타주처럼 연결된다. 더욱이 이 시의 제3연, 제4연에서는 계속 더욱 이질적인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연결되어 겹쳐진다. 즉 제3연은 촬영한 안개 속의 나무를 벽에 걸어놓은 식탁의 한 광경이고, 제4연은 회를 먹는 리포터의 입이 화면 가득히 확대되는 TV의 사이버 이미지다. 이 작품은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집합적 결합’(문덕수 「나의 시쓰기」)이라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분명, 우리 시의 미지의 세계다. 조향의 “유리창에 시꺼먼 손바닥/따악 붙어 있다/指紋엔 나비의 눈들이/(M․S)/쇠사슬을 끊고”로 시작되는 「검은 SERIES」는 역사주의도 아니고 인간중심주의도 아니다.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은 물체이면서 그 기호(記號)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론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일종의 혁명적 징조다. 임화, 미당, 청마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성질의 시다. ‘물체에의 접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호의 혁명적 전환에 의한 기호의 외적 지향성의 관련사물일 따름이다. 임화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물론 아니요, 청마류의 의지나 미당류의 서정 같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이퍼텍스트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물체의 벌거숭이, 날 것 그대로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 이미지’에는 내적 맥락의 연속성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맥락의 연속성도 관념이다.) 「아시체놀이」는 그런 맥락도 없다. 더욱 과격하다. 「아시체놀이」의 관념은 더욱 철저히 배제했다고 볼 수 있다. 「雅屍体 놀이」라는 시는 조향이 서울에서 주도한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연구회에서 발행한 ������오브제������(덕문출판, 1980. 3)에 수록된 작품이다. ‘놀이’라는 말에서, 여러 사람의 합작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조향 씨 주동의 학습클럽 멤버들(김요환, 이용진, 김병만, 민장호, 이선외 등 제씨)이 참여한 합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검은 SERIES」가 보여준 행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는 그것마저 단절되고, 마치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처럼 엉뚱하고 기발하고 충격적이다. 다음에 양준호의 시 「눈뜨는 나뭇잎의 9월」과 「아시체놀이」를 함께 든다.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양준호의 하이퍼텍스트도 「아시체놀이」와 비슷하다. 송시월, 박유라도 이 계열에서 논할 수 있을 것 같다.(다음 기회에는 ‘서정시와 관념시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 시궁창에 쳐 넣어진 거야. 안경알에 비친 무지개 빛깔은? 머리카락이다 세모꼴의 치아의 촌수는? 미학의 꽁무니다 -「雅屍体놀이(문답시 1)」 전문     내가 깔고 앉았던 바다를 공중변소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온 날, 뜰 앞의 노오란 민들레는 눈 멀어 종일 바닷새가 회항(回航)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준호 「눈뜨는 나뭇잎의 9월」 전문      
11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심상운 댓글:  조회:844  추천:0  2018-11-03
한국시문학아카데미 금요포럼 주제발표 원고 (2011년 8월 26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정리 : 조 명 제     ☞ 구조주의의 한계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공허하고 분명치 못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면을 ‘언어의 감옥’이라고 비판한 경우도 있다(프레드 리 제임슨『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72).   ②본디 반역사주의적인 성향에서 오는 문학의 배경 등에 걸친 입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③언어구조 등에 치우치는 데서 오는 탈사물화(脫事物化)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 다.   이런 취약성을 안고 있는 구조주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해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구조주의의 특성과 제문제   196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 특성은, 우선 그것이 ‘언어(기호)’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 곧 구조의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대별된다. 이 같은 관념은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문화, 문학, 인류학, 신화 및 기타 사회적 관습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저에 숨어 있는 공통된 체계나 법칙, 혹은 틀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그 특성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개별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켜 버리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첫째 구조주의자들은, 리얼리티는 작가의 언어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가 창조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공시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통시성을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 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서 생성되고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개체’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특권을 부여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랑그/빠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자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을 이분화한 다음, 전자(前者)에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이항대립적) 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기호의 재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없는 포스트구조주의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포스트구조구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에서 ‘해체’ 또는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가진 포스트구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우선 전술한 여섯 가지 구조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면서 시작된다.     1)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2)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이성 중심적 태도를 지양 한다. 3)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 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4)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5)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이는 곧 형이상학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 능력을 불신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서 하라리는 여섯 번째 것, 즉 재현에 대한 차이를 든다. 그에 의하면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들의 재현 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 그리고 기호와 대상 사이의 연계성을 믿는 이상주의적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구조주의의 그러한 이상주의적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안정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낙관적인 생각이 틀린 것이며, 사실 의미란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유보적인 상태일 뿐이며,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및 기호학 이론가로 자신을 해체시켜 가면서 탈바꿈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 계열의 주요 저작으로는『S/Z』(1970)가 있다.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인「사라진느(Sarrasine)」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적 책읽기를 통해 반재현적 독서를 유발하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S/Z』에서 바르트는 독자가 어떻게 고정된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후기의 바르트는,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와 가치 있는 텍스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유희(play)'할 줄 아는 작가와 텍스트를 의미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저작인『글쓰기의 영도』를 보면, 당시 사상의 중심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관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여는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르트르의 언어의 도구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관과는 달리, 바르트는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신화(myth)'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작용에는 두 수준의 질서가 있다. 제1차의 질서는 현실의 수준 또는 자연의 수준이며, 제2차의 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다. 의미작용의 제1차 질서는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외시(外示) 의미만을 생산한다. 이 수준에서 ‘한 알의 모래’는 모래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제2차 질서는 기호의 두 기본 소자들, 즉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들로부터 비롯된다. 기호가 두 개의 기본 소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2차 질서 또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함축적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신화의 질서이다. 먼저, 함축은 기표의 제2차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표가 기호의 형태를 결정한다. 기호 형태의 변이와 변용들이 여러 가지 주관적 함축 의미를 일으킨다. 이 수준에서 예의 ‘한 알의 모래’는 모래 이상의 것이 된다. 영국의 시인 W.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토목 건축업자들이라면 ‘한 알의 모래’라는 기표에서 거대한 건축 구조물을 떠올리고, 반도체 공학자들은 거대한 인공 통신조직을 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표는 보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 의미들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니는 함축 의미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 함축 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호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째로 기호를 통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신화에 의한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화를 ‘함축 의미의 체계’라고 정의하는데, 이 신화는 끊임없는 변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고전적인 신화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호의 ‘의미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섬유조직 자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패션의 체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그 텍스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의상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제 의상이 아니라 패션잡지에 글로 기술된 의상이라는 점이다. 그 글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이미 소쉬르의 제안들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에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이 언어학에 속해 있는 학문임을 주장한다. 그러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할 때는 항상 그 대상을 언어화해서 이해하도록 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피할 도리 없이 의미를 짓는 언어체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며, 나아가서 언어체는 현실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뿌리 깊은 신념인 것이다.   후기의 바르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영향과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 아래에 서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텍스트이다. 그는 텍스트의 유희성을 다룬『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비롯해서, 포스트구조주의 문학 논쟁으로 번진『저자의 죽음』(1968)을 썼는데, 다원적 텍스트론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쓸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히 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의 개념은 고정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수용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한 창조적인 하나의 저자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 있어서, 수용미학(독자 지향 이론)과 더불어 독자의 위치를 높이고 독자의 능동적 독서 행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반적인 텍스트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 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영화, TV프로그램,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code)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정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나중에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낳게 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같은 학자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리다의 초기 3부작인『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이』『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했던, 후서얼의 기호학 체계 비판과 소쉬르의 언어 중심주의 비판에는 흔히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알려진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에 있었다. 그래서 존재신학 혹은 서구 중심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공격하는 이런 데리다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논문의 핵심은 섣부르게 오해되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거 작가들에 대한 신화를 전복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바르트 역시 단일한 의미란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소설이나 미슐레의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세부 사항에 주목한다. 그것은 지시 사항과 기표의 직접적인 공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의는 기호에서 추방되고 지시 대상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형성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장치는 사실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J.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기호(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연구는 초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기표의 물결을 뒤덮는다. 데카르트 이래 소쉬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의였으며, 그것은 구조주의자들과 초기 롤랑 바르트에게까지는 중요한 입장으로 실천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와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전복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사람은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그의 강의 속에서 그 같은 전복의 관계를 설명한다. 어떤 구조 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공존하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또는 이원항)이라고 할 때, 그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보드리야르에 이르게 되면 기의는 사라지고 오직 기표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데리다는 라캉과 보드리야르 사이에서, 라캉식으로 보자면 기존의 담론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보드리야르식으로 보자면 기표들의 유희를 만들어 낸다.   데리다가 문학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 내부에서가 아니었다. 데리다의 이론은 동시대인인 미셀 푸코와 함께 빠르게 미국 학계에 전해졌는데,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인 폴 드 만을 비롯해서 해롤드 블룸에 이르기까지 해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강단에서 환영받게 된다.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파는 버로우즈나 토머스 핀천 같은 기존의 비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른바 해체비평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들   언어로 표명되는 성욕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적인 ‘무의식’을 추구하면서 특히 세 가지 주요 양상, 즉 저자(‘등장인물’), 독자, 그리고 텍스트를 취급했다. 정신분석 비평의 시작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학작품을 예술가의 징후로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 정신분석 비평은 정신분석적 독자반응 비평을 통해 포스트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문학작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는 칼 융의 ‘원형’ 비평에 의해 논박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 의해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었다. 이들은 ‘욕망’의 역동적인 개념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형을 결합시켜 영향력 있는 쇄신 작업을 해 왔다.   1.자크 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혼합한 것 같은 자크 라캉의 이론은 우선 주체(주관Subject)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조주의와 정면 충돌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불안정한 지시어에 비교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처럼 지시 어와 지시 대상 사이도 역시 불안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술행위는 만족이 아닌 욕망만을 가져다 주는데, 이 욕망은 물론 무의식과 상통하고 있다. 모든 지시어는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권하며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를 제안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따르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미끄러진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어와 혁명     문학적 의미에 관한 크레스테바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특별한 사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정렬되고 합리적으로 수용돤 것이 ‘이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에 의해 계속 위협당하는 과정을 천착하려 한다. 크리스테바의 제목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견해로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권위 있는 담론들의 분열과 연루되어 있다. 시적 언어는 사회의 ‘닫힌’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학적’인 것의 전복적인 개방성을 도입한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 분석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앙띠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5)과『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1972)에서 정신분석을 과격하게 비판하고-라캉을 끌어들이나 그를 초월하면서-동시에 그들이 ‘정신분열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을 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 분석’은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며, 편집증적 무의식적 욕망과는 달리, 분열증적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총체성의 전복을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를 한다. 문학과 정신분열의 관계는 문학도 역시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고 체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텍스트도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담론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을 해방시키는 독자’, 즉 ‘분열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rhizome)이다[엘리자베스 라이트].   해체 이론     해체비평(Deconstruructive Criticism)은 더러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해체주의는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하부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평방법을 지니고 있는 해체비평은 재래적인 작품 읽기나 해석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주장한다. 소쉬르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주의 기호학에 의해 발달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태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띤 이론이다.     1. 자크 데리다의 해체 이론     롤랑 바르트가 구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었다면, 자크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기본 명제들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며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36세 무렵의 무명학자이던 그는 1966년 미국의 존즈 홉킨즈 대학에서 열린 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여 세계적인 구조주의 석학들을 놀라게 한 논문「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이론은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의 해체적 이론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구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지만,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의 구조 개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첨예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에 새삼 주목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며,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의미가 형성된다고 여겼다. 하나의 기표는 시대의 흐름과 변천에 따라 새로운 기의가 덧씌워지곤 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들은 ‘중심’을 원한다. 중심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例)의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의 내면에서 그것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어떤 의미의 ‘중심(center)’이 ‘완전한 현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중심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욕망과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데리다는 서구의 ‘말(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 또는 ‘음성 중심주의’(『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를 들고 있다. ‘로고스’(희랍어로 ‘말’을 뜻함) 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다. 글은 말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음성을 글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 중심주의의 고전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호 체계 즉 글은 현존해 있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회의를 던지며, 근원과 현존의 부재를 주장한다. 만일 현존에 도달, 완전한 재현이 가능한 것이라면 모방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예술이나 언어도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존이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글의 서열제도를 없애 버렸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들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왜 기호는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말 중심주의는 틀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diffe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프랑스어 동사인 ‘differer’는 ‘차이나다(다르게 하다), to differ’와 ‘연기하다(지연시키다), to defer’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것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과 맥락에 의해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현존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영원히 ‘차이’를 갖게 되며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상호텍스트성 또는 범텍스트성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중심과 근원이 유보되어 있는 현 상태는 작가들에게 활발한 유희 를 유발시키며, 현실은 곧 꿈의 속성을 띠게 된다. 또한 절대적 진리의 유보는 곧 해석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고정된 결합까지도 부정하고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열린 지평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태도나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비이데올로기적이고 비투쟁적이며 텍스트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과 괴리된 비평가라는 비판을 가져다 주고 있다.   2. 미국의 해체 이론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신비평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자 수많은 외국의 이론들을 자유롭게 섭렵하고 있었다. 노드롭 프라이의 과학적 ‘신화비평’, 루카치의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뿔레의 현상학, 그리고 엄격한 프랑스 구조주의가 각각 유행하였다. 데리다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미국의 해체론과 프랑스 해체론 간의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는 비평적 글쓰기의 양 식에 있다. 예컨대 데리다와 바르트가 때로(특히 1970년대 이래로) 파편화되고 장난스러운 담론을 선보이는 데 반해, 드 만과 밀러 그들은 잘 짜여진 관습적 텍스트를 내놓는다. 그러니까 미국의 해체론자들은 온갖 텍스트성의 자유 유희를 주창하면서도 전통적인 담론 양식을 실천한다.   ✿폴 드 만(Paul de mann)/ 드 만은 모든 언어는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반대의 뜻을 갖는 것은 언어의 지칭력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언어의 수사성’이라고 불렀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상반된 뜻을 갖는 경우에 해석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신비평의 모호성과는 다르다. 모호성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이지만, 드 만의 수사성은 이미 언어 자체가 서로 반대 의미를 품고 있어 해체되어 버리므로 엄밀히 어느 쪽 의미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헤이든 화이트/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사적 유형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바, 역사 편찬학(역사 이론)에서 화이트는 잘 알려진 역사가들의 저작들에 대해 과감한 해체를 시도했다.『담론의 수사학』(1978)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서술을 객관적이 라고 믿지만, 구조와 관계되는 그들의 기술 행위는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롤드 블룸/ 블룸은 전통에 대항하는 시인의 강한 자기 주장이 괴기한 오독을 낳는다고 했다. 시인은 늘 앞선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강한 에고는 선배의 시를 잘못 읽는다. 그러나 억압된 선배의 시는 흔적으로서 후배의 시에 수정되어 나타난다. 블룸은 ‘시적 오독’에 관한 4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후 영미의 주요 시인을 탐구했다.   ✿제프리 하트만/ 하트만은 모든 것이 자리바꿈이고, 다만 과정에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비평의 사회적 책임 역시 텍스트를 서로 공유하는 상호 관련성에 있을 뿐이다. 그는 ‘연기(delay)’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면서 의미의 결정이 늦춰지는 게 아니라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스스로 해체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J. 힐리스 밀러/ 밀러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라고 설파한다. 그의 수사비평은 데리다의 ‘차이’와 폴 드 만의 수사성이 묘하게 혼합되어 단어, 이미지, 작품들의 관계가 모두 반복이고 자리바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셸 푸코의 언술과 권력     미셸 푸코는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언어를 모든 역사적, 사회적 틀에서 분리시켜 언어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이다.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푸코는 ‘글쓰기’란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언술의 힘을 통해, 그리고 특정 의미의 부여를 통해 저자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언술행위라는 것은 곧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그래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배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개념이란 사실 그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합법화시킨 것일 뿐, 혁명 후에는 그것이 곧 불의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절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곧 임의적인 것이 되고 불안하게 되며, 드디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영합한 공식적인 언술행위와 그것의 억압에 대한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그러한 공식적인 언술행위가 오랫동안 제외해 온 또 다른 소외된 언술행위로 눈을 돌리게 해 주었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온갖 억압을 합법화,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당화는, 압제자에게는 스스로 당연한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그리고 피압제자에게는 압제가 당연한 것으로 순응토록 만든다는 점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감시와 규율과 교화의 목적은 비정상인의 정상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정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문제려니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간 정상화되었다고 판정을 받는 비정상인들은 대부분 모범수가 되어 이번에는 제도적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동료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결탁과, 제도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문제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형무소, 복지원, 고아원, 학교, 정부, 성(性) 등의 모든 사회제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푸코는 시사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교묘히 모든 것 속에 들어가 있고 너무도 널리 편재해 있어서 밖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푸코는 바로 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탐색하여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 비평가의 작업이라고 했다.『광기의 역사』『말과 사물』『지식의 고고학』『감시와 처벌』『감옥의탄생』『性의 역사』등 그의 저서들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에 큰 획을 그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작 이론/ 푸코의 미국쪽 제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중요한 저서『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푸코의 담론 이론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데리다를 세속성(worldiness)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한 더욱 급진적인 비평가이다. 사이드는 텍스트가 산출되고 위치해 있는 역사적 순간이나 그 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무시한 채, 텍스트 내면의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 문학비평의 현황을 개탄하며, 텍스트는 고고한 고립에서 벗어나 보다 더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사이드가 말하는 세속화란 물론 텍스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텍스트와 현실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을 의미한다. 사이드의『시작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우선 그것이 그 동안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지배적 언술행위의 군림과 횡포에 저항하여, 그것과 다른 언술행위를 찾아 내고 인정하며, 또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   신역사주의 비평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던 해체론이 80년대 후반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역사 또는 역사주의를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는 비평 이론의 하나로 등장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이론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신비평과 해체비평에 이르는 여러 비평 경향들을 원용하여 낡고 고착된 ‘역사’의 개념을 다시 꺼내어 재조정하고 재조합해 보려는 일종의 역사 새로보기 작업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모든 표현적 행위는 유물론적 실천의 그물망에 내재되어 있고, 문학과 비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그 전략을 살펴보면 신역사주의 이론이 해체비평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와의 근친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신역사주의가 푸코의 역사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 이론과 카니발 개념까지 넘나들면서 해체주의와 변별성을 유지하고 이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유물론이란 용어는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좌파 전통의 진보적 정치비평가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것의 실천적 활동은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 진행되어 온 문화 분석의 여러 형태를 토대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역사학, 사회학, 문학연구 분야의 영문학, 여성론, 대륙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혼합, 수렴되어 왔다. 알뛰세와 미하일 바흐찐의 영향하에 있는 영국 문화유물론의 기본 가설과 개념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깔려 있는데, 문화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을 특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설사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렇듯 사회적 과정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보편적 진리라든가 인간의 본질적 본성 등에 집착해 왔던 관념적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코 한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조의 이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심문을 하면서 비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형이상학 전체의 전제와 가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 그것이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항해 해체되도록 하는 비평태도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현대 서구 문학비평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 방대한 지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으며,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절대적 의미의 안정된 근원을 교란시키고 해석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며 모든 결론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 체제나 지배 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개체’의 해방을 외치며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끔 인정하듯이 주장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숙명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만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려는 것조차도 그들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신역사주의자들은 그 이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도와 주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입주의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 텍스트적인 역사 이론을 창시한다. 문화유물론의 경우 그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하는 반면에 의미의 순진한 자유 유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 ❧   ⓛ.담론(談論): ‘discourse’의 역어인 ‘담론’은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학문분야와 사상조류들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말로 하는 언어에서는 한 마디의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을 가리키고,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 말 또는 한 문장만을 분석하는 언어학적 방법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문장이 다른 말 또는 다른 문장과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론이란 한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이론의 범위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셸 푸코는 담론을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고 자기 지시적인 집합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 형성, 권력의 체계 및 행사에서 담론과 권력은 구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담론이 비평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전개, 편입되면서 담론비평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담론비평의 이론적 원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반기를 든 바흐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흐찐은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언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언어를 이데올로기, 물질성, 계급 투쟁과 분리시키려는 일체의 언어론에 맞서고 있다. ②.의미작용(의미화):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③.코드와 코드화: 코드화란 기의와 기표간의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작을 말한다. 의미 작용과 코드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코드화가 자의적 조작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려면 기호 사용자들에게 코드화된 것을 관습화시켜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화를 필요로 하지만, 의미 작용은 코드화와 동시에 탈코드화를 허용한다. 탈코드화는 예술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술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예술에 생명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코드란 메시지를 한 가지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변환시켜 주는 명료한 규칙들의 묶음이다. 즉, 코드란 ‘기호를 위한 명료한 사회적 관습들의 체제’이다. --------------------------------------------------------------------------- ❧ 라만 셀던 외(정정호 외 譯)-현대문학 이론 개관(한신문화사), 레이먼 셀던(현대문학이론연구회 譯)-현대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문덕수-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시문학사), 이명재-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권택영-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민음사), 김용권-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윤호병-후기구조주의(고려원), 인문과학연구소(편)-현대 문학비평 이론의 전망(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움베르토 에코-기호학 이론(문지), 자크 라캉(권택영 엮음)-욕망 이론(문예출판사),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한국기호학회 엮음-문화와 기호(문지), 한국기호학회 엮음-현대사회와 기호(문지), 이상우 외-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이승훈(편집)-현대시사상ㆍ2(고려원, 1988) 외. ------------------------------------------------------------------------ ❧   ‘살려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김춘수「처용단장-제2부, 3」,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同,4). ☞ 대상과 주제가 없이도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해체적 인식 끝에 얻은「처용단장」제2부는 일체의 관념이나 설명이 제거되고 증발된 탈관념의 세계요, 통일된 어떤 아이콘[像]으로서의 이미지도 없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언어와 언어, 또는 문맥과 문맥 사이의 단절과 차단으로 중심이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기호는 그 고유한 의미를 잃고 오직 무한한 상호지시의 관계로 존재할 뿐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도 춤추며 노래한 처용의 그 기이한 행위처럼, 일상적 혹은 논리적 의미체계를 일거에 소거시킨 이 비논리적 리듬의 연속성은 의미가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애절한 분위기의 주술적 충격으로만 전해 온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시니피에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뒤덮고 물결치는 시니피앙의 화려한 유희,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전복된 탈중심의 소용돌이(궤적)가 현저한 상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돌아가는 긴장으로 하여 팽이가 일어서듯, 그리고 현기증 나는 회전으로 하여 울음 울 듯 시니피앙의 유희와 울림의 효과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탈중심 탈이미지의 세계는 현기나는 리듬의 실존적 환열 바로 그것이다. (조명제). ------------------------------------------------------------------------ ✯   (1) p.184-7~9행:만일 구조주의가 영웅적으로 인위적인 기호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희극적이고도 반영웅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한신문화사)/만일 구조주의가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것이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희극적이고 반(反)영웅적인 것이 된다.(문학과지성사), p.185-4~6행:이것은 마치 다양한 언어들이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이념들의 세계를 다른 개념(기의)들로 조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단어들(기표)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한신)/그것은 마치 여러 언어들이 사물과 관념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개념(‘지시어’)과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지시 대상’)로 분리하는 것과도 같다.(문지), pp.185-맨 아래~186-1~2행:소쉬르는 언어가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하나의 총체적 체계라고 설정한 후, 비록 기호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킨 것이 기호의 일관성을 없애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호의 일관성에 관한 감각을 보유하고자 노력했다.(한신)/언어를 외적 현실과 독립된 완전한 체계로 확립시킴으로써, 그는(*소쉬르) 비록 기호를 둘로 나누는 것이 그것의 응집력을 위협하는 것이긴 했지만, 기호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문지)☯  
10    하이퍼시 시론/ 심상운 댓글:  조회:731  추천:0  2018-11-03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9    하이퍼시 연구 / 이 영 지[ 스크랩] 댓글:  조회:730  추천:0  2018-11-02
하이퍼시 연구 이 영 지   1. 거꾸로 된 수리 시제 4호의 하이퍼텍스트성   이 논문은 하이퍼 시에 대한 연구이다. 오늘날에야 하이퍼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하지만 이미 이상은 그의 오감도 시제 4호를 통하여 하이퍼시의 건재성을 보여준다.. 이상시 시제4호는 전후로 환자와 책임의사의 시어로 짜여 지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의 관계가 좌우의 대칭으로 거꾸로 된 수리가 나열관계의 진전에 따라 처음과는 다른 환자 치유가 되어 있다. 이상시에서의 시제 4호에 대한 하이퍼시라는 명제와의 연계는 하이퍼시란 인간이 이 지상에서는 완전한 상태를 이룰수 없는 즉 환자의 상태가 가상공간인 시를 통하여 환자를 고칠 수 있는 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하여 우선 환자와 책임의사의 전후관계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환기하게 된다. 이상시 시제4호는 전후로 환자와 책임의사의 시어가 놓여 있고 좌우의 대칭으로 수리가 나열되어 있다. ‘환자’와 ‘책임의사’라는 시어 때문에 시의 하이퍼텍스트성은 죽음과 삶의 문제로 놓여지고 이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상시 시제4호의 거꾸로 된 수리는 단순한 거꾸로 된 수리의 반복구조가 아니라 점을 대칭으로 한 수리의 반복이 되어 있다. 이 반복구조는 반복의 수리가 감소되면서 에 이르고 있다. 4호의 수리의 순차적 차례는 그 순서를 어긋나게 할 수 없는 수학적 공식을 가진다. 드디어 이상시에서의 하이퍼텍스성은 거꾸로 된 수리 0에 이르르고 진단 0.1이 됨을 책임의사인 이상이 기록하였기에 하이퍼시의 하이퍼텍스트성이 제시된다. 얼핏보면 이상이라는 시적 화자가 책임의사가 되어 환자를 고치고 그리고 진단 한 결과를 드러내는 것 같으나 실은 그 기록이 0.1이 됨으로써 인간의 한계성을 노출하는 동시에 신의 역할이 더 중요함을 제시함으로써 하이퍼시가 되게 하고 있다. 우선 환자로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화적인 용어로 접근할 경우 제 신의 질투를 받지 않고 이 지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 유한성으로 하여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것은 수리의 기본개념을 넘어서서 시 문학의 특성인 시의 내포로서 영(靈)의 세계를 여는데 있다. 일반적인 수리 0이 아니라 시를 통한 영(靈)의 세계에서 환자가 고쳐지기 때문에 하이퍼시가 되게 한다. 이에 부응하자면 책임의사가 얼마나 큰 위력으로 환자를 환자아니게 고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환자와 책임의사와의 관련성에서 병이 고쳐진 문제는 시에서 ‘책임의사 진단 0.1’로 제시된다. 0.1은 정수이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는데에 하이퍼시가 되게 한다.. 완전하지 못한 책임의사의 한계 노출은 책임의사가 환자를 그 상징으로 거꾸로 된 수리가 차츰 적어지며 바로 서 있게 되는 경지의 진단 0.1까지 오긴 했지만 책임의사가 환자를 완전하게 고쳐지니는 않았다는 데에 하이퍼시가 존재하게 한다. 이로써 시제 4호는 인간의 한계성과 영적 문제를 언급하는 의미심장함을 지니면서 하이퍼시가 되게 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하이퍼시가 갖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게 된다. 분명히 인간인 의사의 한계성을 노출시키기면서도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것은 0이 단순한 수리로서가 아닌 영(靈)의 문제이라고 문제제기를 한다. 곧 시만이 지닐 수 있는 시의 내포로서의 영(靈)의 암시는 철저하게 그 인도자 책임의사가 한다. 의사의 원형은 그리이스 의신 아스크레피우스에서이다. 그는 황금빛 건강을 가져다 주는 자여서 마법의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신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삶과 죽음사이를 해결하는 사람인 의사는 크리이스 의신 아스크레피우스의 상징인 뱀과 지팽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이상시 시제 4호와 그 짜임이 흡사하다.   「인간의 무의식과 상징」 p.158   "의사의 원형과 관련하여 시 제4호도 도형화하여 보면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①의 세계는 환자의 세계이고, ②의 세계는 완치의 세계로 점을 사선화 하였을 때 그것은 의사의 지팡이가 되어 사각의 테두리는 초월의 기능을 가진다.     오감도 시 제4호는 도형으로 되어있다. 숫자 사각형은 마법의 주제가 내면의 뜻에서 원형보다는 사각형에 있음을 상징한다. 사각형의 형태는 내적 의미의 전체가 되는 완전성을 지향한다.   1) 자기를 향한 치유   또 한 사람은 그의 정신과 육체의 환자일 수 있고 그의 정신과 육체의 "의사"일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다. "환자"와 "의사"가 동시에 되고 있는 자아는 보편적 질서의 법칙에서 인간은 환자보다는 "의사"29)의 기능일 경우 시에서 고통과 병의 상태가 - - 정도인 것을 진단한다. 우선 숫자가 거꾸로 된 예의 경우와 같이 정상이 아님을 진단하였고 그 치유책으로 -…-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정신 에너지는 그의 숱한 노력으로 0.1까지 간다. 그리하여 진단 결과가 소수점 이하 "0.1"이 된 것을 26.10.1931에 확인하고 또 스스로 "以上 책임의사 李箱"으로 진단서명한다. 인간은 이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의 내부적 정신작용으로 완어느 정도 곧 0.1까지는 치유를 할 수 있으나 그 힘을 절대자에게 넘기며 기대고 있다.   2). 삶의 혈연체를 향한 인간 수고의 경지 삶의 혈연체가 병들어 있는 것은 곧 인류의 멸방을 예측하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 집단격인 혈연의 "환자"는 초능력적인 신비의 힙이 아니고는 같은 날자에 진단하고 치유하며 서명확인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영웅적인 "의사"의 힘이 요청되며 이에 응하여 그는 초월적인 상징의 힘으로 삶의 혈연패들을 치유하여 나가려 한다. 그것은 그가 늙고 병든 세계를 신통기의 과정을 거처서 회복시켜 놓는 신화구조에 해당한다. 이 세계는 신의 배경, 영웅의 세계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신의 세계를 상징하며, 죽음과 불사의 관계에서 불사의 세계가 된다.31) 늙고 병든 세계를 신통기의 과정을 통해 이루고 있는 초월적 기능의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 되며 이러한 역할은 책임의사"의 이미지를 통한 초월적 상징의 존재만이 인간을 영원불사로 존재하게 0.1로 스스로 내 노력결과보다는 신의 힘을 빌려야 함을 제시한다.   3) 병든사회를 향한 인간의 노력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질형태의 구성인원환자 백병(숫자상으로)은 "책임의사"의 초월적 상징과 대극 관계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인원도 그가 전부 치유하여 가는 과정으로 질서정연하게 전개된다. (1) (2) (3) 진단 0 · 1 혹은 0 : 1 (4) 환자 : 책임의사 위의 1)2)3)4)항 중 어느 항이라도 초월적 상징의 세계를 향한 "오르기"가 실시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가능성은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는 (1)의 ‥0의 경우 비유된 환자의 용태가 아무리 위중한 거꾸로의 상태에서도 고쳐진다. 그 힘은 개인의 힘이 아닌 도 "0"(靈)의 일이다. (2)에서 "환자의 용태"는 치유되어 가는32) 거꾸로의 방향으로 와 같이 · 을 넘어설 때에는 환자의 용태가 어둠에서 밝은 방향으로 변화된다. 이것은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모인 정신적 혈연 관계가 그 상징성으로 "악마 → 천사" "속(俗) → 성(聖)" "인간세계 → 하늘의 세계" 의 밝은 방향으로 전이해33) 간다. 그 절차는 반드시 절대자의 상징성을 띤 통과의례의 치료를 통하여 완전한 변이의 세계인 밝은 공동 사회가 이룩되게 된다. (3)의 진단 0.1 혹은 0 ; l을 확인함으로서 전자의 경우 환자의 용태가 소수점 이하의 밝은 상태임이 드러나고 있고 후자일 경우에는 "책임의사"의 이미지로 초월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책임의사"가 탐색한 그의 세계를 마지막 꿈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 되겠다. (4)의 "환자"와 "책임의사"의 관계는 전자가 끊임없이 축소되고 그것이 마침내 0의 상태로 소멸하여 버리는 것은 인간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상징하게 된다. 이의 상징자는 순수한 하늘에까지 다다르고 빛나는 공기 중에 앉아있고 제식의 집행자로서 제단에 있으며 그리고 법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능력을 가진 자는 인간이 아닌 절대자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자이다.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시에서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것은 0을 넘어서면서, 인간이 영(靈)적 존재이기에 시를 통해서 곧 신의 품안에서 체험하는 일을 말한다. 아울러 삶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문제라는 점을 지시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를 맞본 시제 4호의 공간은 가상공간이다. 사람이 사는 일은 신앙적 개념용어로서는 기적이다. 곧 목숨이 붙어 있는 일이다. 인간이 병이 나아 회복이 되는 일은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신의 영역이다.     2. 4차원의 구수략   일차적으로 이상시만이 가질 수 있는 하이퍼시의 특징은 일반적인 마방진과는 구별되는 시제 4호에 있다. 이 시제 4호가 구수략의 마방진과는 차별성이 있는데서 하이퍼성의 시가 되게 한다. 구수(9數)략에는 최석정의 구수략이 있다.   9 8 7 6 5 4 3 2 1 0 8 7 6 5 4 3 2 1 0 9 7 6 5 4 3 2 1 0 9 8 6 5 4 3 2 1 0 9 8 7 5 4 3 2 1 0 9 8 7 6 4 3 2 1 0 9 8 7 6 5 3 2 1 0 9 8 7 6 5 4 2 1 0 9 8 7 6 5 4 3 1 0 9 8 7 6 5 4 3 2   무극지전(無極之前) 음함양고위공위음수(蔭含陽故僞空爲蔭數)      
8    [스크랩] 현대시, 하이퍼 시란 / 임선영 댓글:  조회:763  추천:0  2018-11-02
현대시, 하이퍼 시란 / 임선영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필자는 ‘하이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 1888.4.30~1974.7.4)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1770.4.7~1850.4.23)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 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 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 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헀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현대시 하이퍼 시란 / 임선영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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