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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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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에서 발췌한 글로서, 이상의 시에 대한 새로운 디지털 적 접근을 시도한 글입니다.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 와(詩第十一號)                                                                                                                                                  심 상 운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 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 "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4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상운 댓글:  조회:657  추천:0  2019-03-01
이 글은 월간 2006년 8월호에 발표한  글로서, 탈-관념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고 탈-관념의 이론을 새로 정립한 글입니다. 이 글의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아방가드르의 시론이 성립됩니다.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3    현장과 시--- 디지털 시의 현장성/ 심 상 운 댓글:  조회:687  추천:0  2019-03-01
이 글은   2006,1월호 에 발표한 를  2008, 1,21 대폭 수정한 글임                      현장과 시                                 --- 디지털 시의 현장성                                                                                                                심 상 운(시인)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풍성한 암시와 반짝이는 상상의 언어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잃어버렸던 신화를 되돌려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중세의 허풍장이기사騎士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다. 모더니즘도 우리들의 시에 언어의 꿈을 담아주었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약 시인들이 현실과 역사의 진보에만 매달려서 싸웠다면 시인들은 전사戰史에 기록될 수 있는 영웅은 되었을지 몰라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日帝에 침탈당한 국권상실시대에 일제에 직접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1930년대 이육사李陸史의 시편들 속에서 발견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아름다운 만남이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絶頂」전문      이 시의 끝 구절 에서 강철+무지개가 던져주는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의 경이로운 상상과 암시는 지금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더니즘의 이미지, 즉물적卽物的 감각이 우리의 현대시에 수놓은 금싸라기 같은 수사의 미학을 귀중한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시인과 독자들을 자연발생적인 시들의 고식적인 감상感傷과 영탄성詠嘆性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딱딱한 관념어의 굴레에서 시를 해방시켰다는 공적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한 개 벽돌이나 되겠다. 이 살덩이를 흙가루로 빻고 썩기 전에 이 피로 곱게 물들여 1천도의 시뻘건 불 속에서 다시 벽돌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 백 층이나 삼백 층의 빌딩이 되거나 반월형半月形 의 만리장성이 되거나  원수의 포탄이 우박처럼 박혀도 끄덕도 않는........ 구름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단단한 벽돌이나 되겠다. ----------문덕수의 「벽돌」전문      이 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과 , 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또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또 사물어事物語의 쓰임이 이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자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80년대의 사나운 현실 속에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모더니즘 언어의 바른 자세와 당당함이다.  이 시의 앞부분 는 사회적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신과 함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시 속에서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예술)과 리얼리즘(현실)의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더 이상 넓게 확산되지 못 했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들이 삶의 현장의 뒤쪽으로 물러서서 스스로 존재영역의 범위를 축소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면에서 더 검토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한국의 모더니즘 시가 안고 있는 현실회피와 현장성(사물)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일부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건강한 긴장감과 조화를 외면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나 환상과 상징을 잃어버린 편협偏狹한 언어 관념의 시로 변질되면서 모더니즘 시의 한계가 노정露呈된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압축하면 모더니즘 시의 언어 관념주의는 모더니즘 시의 함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과 꿈을 담은 시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병든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을 치유하고 개혁해야하는 당위성의 원천이 되었다.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 관념의 시’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정서, 직관, 관찰, 순수한 상상력에 의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표출하기 위한 시인의 수사적인 언어작업에 의해서 시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 수사적인 언어작업은 어떤 관념을 중심에 세우고 그것을 비유, 상징, 우유(allegory)로 포장하여 시인의 감정까지 관념이 만들어내는 의도성과 논리성으로 휘감아버린다. 이런 기법을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기법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한국 현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기법에 익숙하고 그것을 정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시인은 아주 엄밀하고 냉랭하게 계산된 논리적인 비유, 상징의 언어를 시의 중심에 넣고 감정까지도 객관화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하면서 시를 제작한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 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의자, 작은 방, 개미 , 염소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 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 30년 전부터 어디론지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훈 「오토바이」 전문       이승훈의 시는 비록 시인의 관념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은 현장(현실)에서 벗어나서 시라는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인과 독자들이 갈구하는 낯 설음, 새로운 기법의 언어, 경쾌한 감각의 현대성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 등의 언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존재의 탐구에만 전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환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모더니즘 시의 원형인 것처럼 독자들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삶의 현장감이 생동하는 시의 실체는 사라지고 관념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 시인의 의식만 드러내게 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의 1의 4」전문         김춘수의 시는 이승훈의 시와는 달리 실제의 현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의 사실성을 무화無化 또는 추상화抽象化시키는 것으로 시적 효과를 달성하려고 한다. 그 근거는 이 시에서 의 구절에서 찾아진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실제의 바다 풍경을 비현실의 바다 풍경으로 전환시키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서해 갯벌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이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에서도 ‘죽은 물새’가 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 물새는 문맥상으로 보아 여름에 본 물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를 비실제로 변환시키는 실체적 대상의 무화 또는 추상화의 근거가 된다. 이 추상화의 그림은 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개척한 세계로 이해된다. “바다는 가라앉고”나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현실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적인 상상의 세계에서는 전혀 모순성이 없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김춘수는 논리의 단절이라는 기법으로 일상의 의미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는 김춘수의 이런 기법을 그의 「시론」에서 ‘무의미의 심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도한 ‘무의미’는 사실적인 현상現象을 추상적인 현상으로 상태를 전환시켜 ‘또 다른 세계의 의미’를 창조하려는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의 남상은 한국의 고전시古典詩에서 발견된다. 이규호(李圭虎 대구대학 인문교수)는「한국고전시학론」에서 그런 표현방법을 ‘정석가식鄭石歌式 표현’이라고 한다.의 작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제시하여 현실적 시간을 무화無化시키고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철수산鐵樹山에노호이다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유덕하신님여아와지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인 조작으로 무의미를 추구하던 김춘수는 논리 단절의 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절망하여 관념(의미)의 세계로 회귀하게 된 것 같다. 논리적인 ‘모순어법’만으로는 의미(대상)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기호성과 가상현실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의 세계는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졌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무의미의 언어실험’은 삶의 현장에 대한 이탈, 단순 이미지의 나열에 그치고 있어서 그가 목적으로 한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 지대地帶"(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 1981년 12월호 「시문학」)에 도달하지 못하고, 현대시의 현장에 난해성만 남겨놓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무의미시는 한국 모더니즘 시에 대한 성찰의 근거가 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극단적인 언어논리주의 시에 대한 성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현장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향기 나는 생명체를 모셔놓은 언어의 집이라는 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언어예술로서의 시보다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더 본래적인 시에 가깝게 인식되기도 한다.    비오는 날 묵밭에 소를 먹이고 있으면 어디서 깊은 소리가 들리네.    온 天地가 共同墓地같은데 오동나무만 저승의 길잡이처럼 서 있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푹 빠졌을까. 안개사이로 인업이 꼭 걸어올 것만 같네.    喪輿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 곳엔 이상한 불빛이 서려 있었네. -------이성교「비오는 날(1)」 전문      자연발생적인 서정은 시인의 언어조직만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서정의 시에는 이성(지성)보다 감성이 주류를 이루어서 때로는 원시적인 야성의 감성이 시의 생명력을 키워내는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관념과 비유, 상징을 떨쳐버리고 직관의 눈으로 직접 대상과 만나자는(의식→대상→이미지) 디지털 시 운동은 시의 현장성과 내재적인 생명성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와 연결된다. 그것은 내면의식의 흐름 위에 자리한 디지털 시가 논리적인 관념의 시나 언어조작의 시보다 시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현장과 상상의 예술적 언어융합을 시의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북한산 비가 오락가락, 찜통 더위 속 , 땀을 흘리고 확 터진 능 선에 올랐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 얇은 구름이 그림이다. 주저 앉아 상상하며 가슴쯤 산의 옷을 벗기면서, 이렇게 시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 시인이한다. 나는 내색을  못하고 하고 이성理性을 말 했다. 그 때 지나가는 등산객이 했다. 멍! 모두 몽둥이로 한 대씩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날 산행은 흰수염을 휘날리고 아슬히 바윗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희죽이 웃으며, 리모콘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비밀한 얇은 비단을 밀어 올리고,                ---------오진현 「산행」 전문       오진현 「산행」은 때 묻은 감각과 지식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맑은 현장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관념도 미리 들어가 있지 않은 탈-관념의 빈 마음은 새로운 감각이 모여드는 맑은 못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감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디지털 시대의 시인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쉬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면서 움직이는 자신의 심리적 현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초논리超論理, 비논리非論理)의 눈이 살아 있다. 따라서 그 현상을 언어 카메라로 찍어내는 디지털 감각(염사念寫, 접사接寫)의 이미지 시와 어떤 관념을 솟대같이 중심에 세워놓고 언어의 수사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모더니즘의 이미지 시와는 선명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한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밤비」전문       직관적인 염사의 시에서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런 에너지가 흐르는「밤비」는 시인 자신의 내면이 시의 현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적 의식의 흐름 속에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보이지 않는다. 직관의 눈이 의식의 현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할 뿐이다. 의식의 집중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자동기술과 구별된다. 그리고 디지털 감각은 시인이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  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 무장한 미 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엎은 40대의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 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흰 거품을 토하며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상운 전문     이 시에는 현실과 가상현실이 결합된 디지털시의 현장성(하이퍼 세계)이 들어 있다. 이 디지털 시의 현장은 시의 구조에서 다선구조를 형성한다. 다선구조는 ‘선택과 집중’ ‘설득’을 중시하는 단선구조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상상의 결합과 연결’, ‘현실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시 속에 구축한다. 이 시에서는 눈 덮인 12월의 숲 속에 들어가서 북소리를 듣고 있는 그와 벽에 붙은 여름바다 사진, 식탁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TV를 켜는 나, TV화면 속의 이라크 아이들과 달래강의 풍경 등의 이미지 결합이 그 원천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의 시점도 평면적인 단일시점에서 입체적인 다시점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다선구조의 이미지는 시를 어떤 목적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에 입체성과 현장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다선구조는 우리들의 일상이 단일시점이 아니고 다시점(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이라는 점에서 더 자연스럽게 총체적인 실존의 모습을 형성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우리들의 삶이 논리성보다는 심리적인 이미지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 흐르는 내적 의식의 흐름이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이러한 이미지 결합의 디지털 시는 또 문명적 사고(객관적이며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 대립되는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구체적 사고)에 맥이 닿는다.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는 구체적이고 주술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신화적 사고라고 한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 이런 면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 디지털 시는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가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현장의 긴장감을 내포한 매우 인간적인 직관과 감성에 의해서 탄생하는 탈관념의 새로운 감각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사실, 생명,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중시하는 21세기적인 감수성(디지털 감각)과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는 야성적 감각이 만나서 순수 직관의 이미지(탈관념, 시공간 초월), 즉 신화적인 언어 표상(image)으로 탄생되는 시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것은 문명적인 면에서 볼 때, 과학적 사고(문명)와 야생의 사고(문명이전)의 융합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과 언어의 수사修辭에 의해서 제작되는 정통적 모더니즘의 시에 비해서 시의 일반화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의식이 전제가 되고 이제까지 사용된 익숙해진 언어(비유, 상징)로부터 벗어나서 때 묻지 않은 원초적 현장언어와 디지털 감각(염사, 접사,가상현실)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 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신화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도정이 예상된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처에서 새로운 변화(IT, DNA 등)의 구름을 계속 몰아오고 있어서 시인들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2    나의 시 나의 방법-자작시 해설/심상운 댓글:  조회:739  추천:0  2019-03-01
 나의 시 나의 방법-자작시 해설 / 심상운       시의 언어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에서 획득한 뜨겁고도 선연鮮姸한 빛깔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감각과 생명을 얻은 시가 탄생한다.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좋은 시들은 모두 이러한 언어로 표현된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황진이의 시조 이나 1930년대 미당 서정주의 등을 읽어보면 그 언어의 싱싱한 기운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바로 그 시에 담긴 시어가 뿜어내는 힘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 내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다.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소박한 생각도 시어의 신선한 감각과 생명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시인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정통적인 시의 일반론一般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반론이 안고 있는 방법론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서 방향을 바꾸면 “비대상非對象, 무의미無意味, 탈관념脫觀念, 초현실超現實” 등 여러 가지 현대적 기법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 기법들은 일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적 피안彼岸을 보여준다. 시작과정에서 그것들의 깊이를 헤아리고 응용하는 것은 시인의 정신과 시를 젊게 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에 들어가든 그 중심中心에 자리잡고 있는 샤먼의 우주목宇宙木 같은 시인의 개성적인 시어가 좋은 시를 탄생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언어와 관념을 안고 뒹굴며 밤잠을 설치는 운명을 감수甘受하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시작과정에서 시의 이미지image를 중시하였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하고,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돌파하고 무한히 넓혀준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시들은 첫 시집 「고향산천故鄕山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 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이 시는 단순한 환경문제에 관한 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명이 지향하는 근원적인 삶의 모양을 환상적幻想的인 언어의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윤강원尹江遠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시류성時流性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의미와 미감美感을 가진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과 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전문     앞의 시 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진연崔進淵 시인은 이 시의 앞부분 를 인용하여 "검은 꿈의 바다"를 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로 해석하고, “은 불자로서 그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정토淨土라는 관념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라고 이 시의 내용을 불교의 구도 행위로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떤 고정된 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에서 의 의미를 절망적인 상황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꿈이든 꿈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를 배제하고 구상어具象語를 사용했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월간 2003,년9월 호 발표)   
1    시의 자유의지와 자연 / 심 상 운 댓글:  조회:726  추천:0  2019-03-01
시의 자유의지와 자연 / 심 상 운                                                                        세상의 모든 시들은 자유를 꿈꾼다. 이미 태어난 시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들도 영혼을 가진 생명체들처럼 자유를 꿈꾸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꿈틀거린다. 존재의 형태로부터 또는 내용으로부터. 그래서 정형에서 벗어난 자유시(自由詩)가 태어났으며 이 자유시는 가장 보편적인 현대시로 인정받고 있다.   지식과 교양이 만들어 낸 시의 틀은 시의 미적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하지만, 시가 일부 교양인들에게 향유되고 시를 사회의 계층에 고정시키는 구실을 하게 하였다. 자유를 지향하는 시의 내적욕망은 그런 언어의 틀로부터 분출하여 언어의 운율형식을 파괴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형태의 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시의 욕구는 시의 심장 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그래서 현대시의 생명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목표로 형이상학의 영역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절대 권력의 군주시대에는 군주의 권력을 칭송하고 복종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세속으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자유를 노래하고 향유한 시들이 있었다. 그 시들은 자연을 지향하면서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꿈꾸는 것으로 시의 자유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들은 동양사상의 원류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거점을 두고 들꽃처럼 피어나서 그 향기를 천 년의 세월 너머로 보내오고 있다. 그런 시들 가운데 중국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의 시는 질박한 여운을 풍긴다. 그의 오언고시(五言古詩)「귀전원거(歸田園居)」는 관계(官界)의 그물에서 벗어나 전원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농부가 되어서 사는 사실적인 생활을 읊고 있다. 種豆南山下(종두남산하) 草盛豆苗稀(초성두묘희) 侵晨理荒穢(침신리황예) 帶月荷鋤歸(대월하서귀) 道狹草木長(도협초목장) 夕露沾我衣(석로첨아의) 衣沾不足惜(의첨부족석) 但使願無違(단사원무위) 콩을 남산 아래 심었더니,  풀이 무성해 콩 묘종이 드물다. 이른 새벽 기심을 매어 밭을 손보고,  달빛을 몸에 받으며 괭이를 메고 돌아온다. 길은 좁은데 초목들은 자라서  저녁 이슬이 내 잠방이를 적시누나.  옷이야 젖더라도 아까울 것 없으나,  다만 농사나 잘 되기 바라는 것이 절실한 소원이다. -최인욱(崔仁旭) 역(譯) 『고문진보(古文眞寶)』에서  이 시속에서 달빛을 몸에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정경(情景)은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시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정신의 자유로움 즉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실적인 표현이다. 이런 자연으로의 귀환은 동양에서 시의 자유가 거처하는 공간이 되었다. 어떤 무거운 관념도 사상도 정치도 침범할 수 없는 그 자유 공간은 현대시에서도 매우 소중한 정신의 안식처를 제공한다. 현대인들의 공해에 찌든 심신도 그 속에 들어가면 화평해지고 사색의 세계가 열린다.    한국의 서정시인 김소월(金素月)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거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가를 그의 짧은 시 「엄마야 누나야」에 담고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걍변 살자 인공적인 거대한 구조의 공해(公害)와 물질의 욕망 속에 빠져서 미래의 밝은 청사진을 펼치기 어려운 21세기에도 자연은 변함없이 인간의 정신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성의 회복은 물론 인간의 존재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21세기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정립(正立)해야 하는 시대이다. 상처입고 파괴된 자연이 언제까지 인간의 의지처(依支處)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자유의지를 자연 속에서 꽃 피워온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동북아 시인들의 역할이 기대되는 것이다.  2006년 사단법인 한국현대시인협회 발간『한중시집(韓中詩集)』1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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