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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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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1>/심 상 운 댓글:  조회:31  추천:0  2019-07-12
*월간 2007년 2월호 발표   박명자 시인의 시-「누군가 4월에는」 「九月의 끝」   4월의 뜨락에 조용히 나서 보면 누군가 스르르 다가와서 목과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운다.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 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 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 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 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 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 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 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 지난 겨울 몸을 망친 땅 위에 누가 이라고 썼다가 얼른 지운다. 아침 무거운 커튼을 드르륵 열어 주고 동구 밖을 긴 망토를 이끌고 누군가 나가고 있다. ----------「누군가 4월에는」전문   그토록 많은 곤충들이 밤새도록 높은음자리표를 숲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물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 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 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 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 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 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 -------「九月의 끝」전문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근원이며 선천적인 틀이다. 그러나 공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데 비해 시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차이가 있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可逆性과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한다. 만약 시간에도 가역성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과거의 시간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영화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혼란스럽고 흥미로운 상황의 무대가 될까. 그런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불가역성이 우리들의 삶에 부여하고 있는 깊고 큰 의미를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시간의 엄숙한 법칙 속에 놓여있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박명자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의미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누군가 4월에는」에서는 모더니즘적인 언어감각의 연출도 돋보이지만 그 언어감각 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모습 즉 관념적 이미지에 눈길을 더 주게 된다. 이 시에는 ‘누군가(누가)’라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 ‘존재’는 독자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단순한 연극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시를 통한 존재자의 발견과 인식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의미가 주는 상상의 폭이 이 시의 이미지와 의미형성에 주는 변화는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라는 이 시의 중심구절에서 드러나는 대립적인 이미지 ‘허무의 굴헝’과 ‘생명의 향유’는 이 시가 단순한 계절의 시가 아닌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시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사실 속에서 새로운 대상의 인식이라는 시인의 시적 감각과 투명한 의식의 눈을 기억하게 한다. 관념의 동적인 형상을 발견하여 보여주는 그의 투명한 의식의 눈은「九月의 끝」에서는 체험적인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던 여름의 삶이 지나가고 가을의 초입 9월에 들어서면 지나간 시간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점차 사라지고 냉정하고 본질적인 인식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공통적인 감성의 변화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체험(사실적 또는 사유적 체험)으로 녹여서 깊이 있고 감각적인 사유의 시어로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꿈의 껍데기’를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숲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어떤 눈을 만난다. 그래서 그는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산마루에 올라서서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유과정은 집착이나 경계에서 해방될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는 도道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봄까지 살아남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이 꺼지지 않는 불덩이 하나를 간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박명자 시인의 시편 중에서 계절과 관련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나의 시간’의 의미와 한 생애의 허무를 극복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   *박명자(朴明子) : 1973년 에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이 천료되어서 등단. 시집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빛의 시내」「시간의 흔적을 지우다」 등   문인수 시인의 시- 「대숲」「창포」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인 유적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 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대숲」전문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 들은 척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롬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 느미/ 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 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창포」전문     조선 선비들은 사군자四君子를 마음의 표상으로 삼고 살아 왔다. 그 중에 무욕無慾 하면서도 춥고 매서운 겨울을 이기는 꿋꿋한 대나무의 기상은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나무는 선비들이 즐겨 그렸던 묵화나 산수화의 대상이 되었고, 대숲의 정경은 그림 속에서 운치를 드러냈다. 그것은 오늘 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한국화의 전통이다. 그러나 상징과 사실은 크게 다르다. 상징은 사물이 아닌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에 실제의 자연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상징은 생명의 기운이 말라붙은 관념의 뼈대로 존재하게 된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숲이 얼마나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 오는지 체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대낮에도 하늘을 가린 울창한 대숲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어둡고 우중충하다. 그리고 사방 천지가 대나무뿐일 때 대나무가 주는 압박에 공포감도 생긴다. 거기에는 운치니 기상이니 하는 말들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과 관념의 차이다. 예술의 미적가치는 생동감에서 우러나온다.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그려낼 때 거기에 생동하는 기운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인상파印象派 그림이 오늘날까지 색이 바라지 않는 것도 빛에 대한 그들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린 과학적 사고의 화풍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대숲」은 인상파의 그림처럼 생동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의「대숲」에는 어떤 관념에도 감염되지 않은 싱싱한 사물성의 감각이 살아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대숲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시라는 형식도 의식하지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글로 풀어놓고 있다. 그래서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는 구절들이 제각각 살아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의 문장과 문장이 인과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이 시가 주는 의미는 불분명해지고, 그 분명하지 않은 의미(무의미)는 이 시의 생명 감각이 되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어떤 관념이나 논리적인 사유를 시 속에 담기 위해서 비유나 상징적인 어법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시의 언어가 사물과 분리되어서 관념화 되었을 때의 감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지感知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줄 때의 감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문인수 시인의 이런 언어감각은 「창포」에서 더 친근하고 예민하게 드러난다. 우포늪에 우거진 창포들의 모습을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느미/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라고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이름과 연결 지어서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그 여인네들은 논밭에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간 농투성이 여인네들이다. 그 여인네들의 꿈과 삶, 질긴 생명력은 박경리의 소설「토지」속에 잘 담겨있다. 들병이란 1930년대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들에서 사내들에게 술과 몸을 파는 여인네의 별명이다. 시인은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창포 잎에다 붙이고 있다. 그 이름들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눈물 나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이름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이름들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 이름들의 이미지와 창포의 이미지를 겹쳐 보여주는 것으로 어떤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의미를 자기의 지식과 정서와 감각에 맞추어서 상상하고 음미하게 된다. 여기에도 어떤 관념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의 화면같이 장면이동을 하는 끝 구절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멀리 가버린다 창포,/긴 허리가 아름답다.”라는 영상이 깔끔한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문인수 시인의 이미지 조형 기법이 현대적인 디지털 감각과도 연결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이미지의 기법이 탈-관념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인수(文寅洙): 1985년 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늪이 늪에 젖듯」「세상의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뿔」「동강의 높은 새」등         고진하 시인의 시-「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라이락」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 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전문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디 향낭香囊을 움켜지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라이락」전문   시인들은 한때 문명을 예찬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를 전망한 적이 있다. 모더니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모더니즘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펼쳤다. 그러나 그 장밋빛 그림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공해나 생태계의 문제들이 인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관적인 징후와 예상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세계, 즉 남성, 과학, 인간 등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 신화, 자연을 찾아내어서 이성적인 것과 대면시킴으로써 기존의 이성적인 것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게 하였다. 그것이 질서와 규칙을 넘어서거나, 어긋나는 현상을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다. 요즘 보통으로 쓰이는 퓨전(fusion)이라는 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고진하 시인의「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시 속에 문명과 자연이라는 대립적인 이미지가 중심화두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들이 빚어내는 묘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명과 자연의 이미지는 마천루의 숲 속에서 퍼덕거리며 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박제剝製가 된 새 후투티를 상징하는 복합적인 요소가 된다. 시인은 후투티의 인공 눈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놀라면서 그것을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새어나오다니./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인의 감수성은 독자들에게 문명에 의해서 파괴된 자연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자연의 혼魂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현대의 도시문명을 동화 속 마법魔法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어둠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박제가 된 새의 “잘 길들여진 행복”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일깨우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인의 의식을 짚어보게 한다.「라이락」은「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와 같이 사실적인 체험의 진술이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밝고 단조로운 이미지가 생동감을 준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감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천수관세음보살이라는 불교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불교적인 사유보다는 직감을 통한 사물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라이락 꽃이 주는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무량의 공덕을 어떤 보살의 공덕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찬탄하고 있는데, 그 관념이 허황되지 않아서 공감을 준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는 구절이 사물성의 감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관념시와는 다른 선사물先事物 후관념後觀念의 인식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는 또 맑고 향기로운 시인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라이락의 공덕을 찬탄하는 그 마음이 불도의 경지에 이른 마음임을 알게 한다. 나는 이 시의 빛과 향기기 오래 내 마음에 남기를 바라면서 거듭 음미한다.   * 고진하(高鎭河): 1987년 에 「폐가」등을 발표하며 등단함. 시집 「지금 남은 골짜기엔」「트란체스코의 새들」「얼음 수도원」등
98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0> / 심 상 운 댓글:  조회:32  추천:0  2019-07-12
*월간 2007년 1월호 발표                                 손해일 시인의 시-「꿈꾸는 돌」「바람개비」   돌밭에 서서 나도 하나의 이름없는 돌이 된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게 돌이지만 돌다운 돌도 드물고 흔하디흔한 게 사람이지만 사람다운 사람 또 귀하다   알게 모르게 속세의 이끼도 조금씩 묻고 물살에 부대껴 모래알처럼 작아지는 정충精虫 살아 있는 날들의 이 헛헛한 목마름   네가 내게로 와서 명석名石이 되었듯이 나는 네게로 가서 이름없는 돌이 된다 먹돌의 진한 그리움으로 시조始祖새처럼 비상飛上을 꿈꾸며 -----「꿈꾸는 돌」전문   *바람독에 서서 강강한 바람을 맞는다.   속소리나무숲 칙칙한 어둠을 따라 눈발속에 날아간 당홍연唐紅鳶 속절없는 바람을 맞는다.   마파람, 높새바람, 하늬하늬 하늬바람, 우리가 사는데 이유가 없듯이 무시로 변신變身하는 너의 변덕과 영원永遠까지를 사랑하려 한다.   너 없이 내가 바람개비일 수 없지만 너를 거스르지 않고는 돌지 못하는 나의 모순矛盾   전폭적인 내 사랑으로도 바람난 바람들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꽃물 같은 상채기가 혓바늘로 돋는다. 머무르고 싶다. 바람개비. 역마살.   오오 누가 나에게 청청淸淸한 바람을 다오. 나도 한 줄기 힘찬 흐름이 되어 정녕 누군가의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거니. ------「바람개비」전문 *바람독: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곳. 전라도 방언   화창한 봄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나비가 아니고 장자莊子 자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 꿈과 현실이 헷갈렸다는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호접몽·胡蝶夢)‘은 단순한 우화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인 상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상無常은 무엇으로 변신하고 싶은 인간의 꿈을 담고 있다. 여기에 무상과 허무의 차이가 있다. 허무는 현재에 집착하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손해일의 시편들 속에는 무상의 꿈이 들어 있다.「꿈꾸는 돌」에는 돌밭에서 시인 자신이 하나의 이름 없는 돌이 되어서 사는 꿈을 꾼다. 그리고 이름 없는 돌을 명석名石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와 돌의 이런 자리바꿈은 시인의 마음이 자연과 일체가 되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정신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래서 라는 끝 구절은 깊은 의미로 다가 온다. 존재의 본원本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은 그의 형이상학적인 정신의 영역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조始祖새처럼 비상飛上을 꿈꾸는’ 시인의 정신은 어떤 고정관념에 묶이기를 거부하는 장자莊子의 자유로운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바람개비」에도 시인의 꿈이 들어 있다. 그 꿈은 자연이 아닌 세속 속에서의 꿈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서로서로 관계 맺기를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속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 속에 서서 무시로 변하는 것들과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변하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바람과 나의 관계로 환원하여 바람과 부딪쳐야만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은 나의 운명을 모순矛盾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순 속에서 모순을 사랑하며 살아가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는 그 깨달음을 라고 오도송悟道頌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람으로 변신하여 누군가의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열어 준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의미는 물론 그 존재들의 관계를 상승시킨다. 그것은 나와 너라는 분별 의식에서 벗어날 때 이 세상은 무한이 넓어지고 따뜻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일 시인의 초기 시편들을 읽으며 그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근원을 잠시 엿보았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에 촉촉이 젖어보았다. *손해일(孫海鎰): 1978년 에 「벌거숭이 노래」「빛의 탄주」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흐르면서 머물면서」「왕인의 달」등   최두석 시인의 시 -「심봉사」「성에꽃」   해방 조국에 돌아온 일가족이 굶어 죽은 꼴 볼 수 없어 심처이가 외국 뱃놈과 거래하듯 몸을 판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밀가루 포대로 산 남자는 흑인 로이 대위 남동생을 통역으로 취직까지 시킨 대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위가 귀국하던 날 그녀는 늙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떨어졌다 거울 뒷면 수은을 긁어 먹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둥이 아이를 데리고 진해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동두천으로 그녀는 이른바 양색시였다 미군들은 미제 물건 뒷거래한 돈으로 그녀를 데리고 살았다   삼단 같은 머리채 성긴 백발로 변하고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으되 한반도 미군 철수는 도무지 꿈도 꾸지 않는 할머니, 누가 그녀의 생애에 돌을 던지랴 이 땅의 심봉사인 사내들이여        ---------「심봉사」전문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성에꽃」전문    한 시대의 성실한 관찰자로서의 시인은 그 시대를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는 두보가 석호촌에 갔을 때 한 밤중 벼슬아치가 찾아와서 백성을 강제로 징발해 가는 이야기를 담담히 서술한 시로서 1천 5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울림을 준다.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의 시편들이 주는 감흥도 카메라로 동영상의 사진을 찍 는 듯한 그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현실관찰과 언어표현의 경제성에서 우러나온다. 그의 시 은 압축된 서사 속에 한 여인의 서러운 일생이 부각되어 있다. 이때 시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그려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인이 그 속에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넣고 의식을 넣으면 오히려 사실의 생생한 전달에 방해가 되고 시의 힘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두석 시인의 시편들도 시대를 관찰하는 그의 눈이 발굴한 사실들의 생생한 이미지가 가슴에 박힌다. 그의 눈은 시대의 힘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삶을 짓밟으며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희생된 개인의 삶에 연민의 정을 보내는 시인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심봉사」는 고대 소설 의 패러디가 시적 효과를 주고 있지만 시인의 그런 의도적인 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공주로 살아가야 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사실적 서사 속에 한 시대의 삶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는 서사는 한 시대의 냉혹한 삶과 연결되었으며 그것은 민족 공동체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끝부분에서 시인이 시의 주제를 의식하여 주관적인 감정과 해석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리얼리스트로서의 냉정함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쉬움을 남긴다.「성애꽃」은 「심봉사」와 같은 계열의 ‘이야기 시’는 아니지만 과학적인 관찰, 언어표현, 시인의 의식이 깊이 있게 느껴진다. 새벽버스 유리창에 피어나는 성에꽃은 간밤에 사람들이 남기고 간 입김과 숨결이 공동으로 모아져서 만든 결정체라는 진술은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을 가지면서 이 시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무심한 사실의 현상에 불과한 성에꽃은 이 시속에서 시각적인 아름다음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공동체의 꽃으로 상승된다. 가 그것이다. 그 아름다운 성에꽃은 막막한 숨결들과 푸석한 얼굴들이 남긴 것이다. 그래서 그 꽃은 시대적 상징성을 내포하면서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의 꽃으로 재탄생한다. 이 시에는 1980년대의 아픔을 담으려는 시인의 의도가 들어 있지만 그것보다도 그 시대 서민들의 살아 있는 삶의 숨결이 전달되어서 거듭 읽혀진다. *최두석(崔斗錫):1980년 의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대꽃」「성에꽃」「임진강」「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등   백무산 시인의 시- 「달」「침묵」   도시는 달을 끄고 불을 밝혀 낮을 연장시킨다 언제 달을 봤던가 달은 정전돼 있었다   산들이 웅성거리며 달을 밀어 올리고 나는 오랫동안 캄캄한 산길에 있었다 오래 어둠에 둘러싸여 있노라니 마음속 깊은 골짜기가 열리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보이고 그 물결 위에 달빛이 어린다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나의 반 대지의 반 세계의 반   달이 해의 잔해라면 저 하늘의 밤 별들도 문틈애 밀려오는 햇살에 부서진 작은 먼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 해는 살갗을 비추나 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   돌아보느니, 우리는 세상의 반만 가지고 살고 싸웠느냐 ---------「달」전문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으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이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들이 먼저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인간은 입이 달린 앞으로 말하고 싸운다 말없는 등으로 기대고 나눈다 --------「침묵」전문   백무산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시인이다.「만국의 노동자여」계열의 시편들은 그의 언어가 얼마나 격렬하고 날카로우며 한 쪽에 치우쳐 있는가를 섬쩍지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계급적이고 투쟁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노동의 즐거움,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기 전에 ‘노동’을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대립적인 계급의식의 눈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 그의 시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할 수는 있지만 독자들에게 넓고 깊은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와 선전에 의해서 흑 아니면 백, 어느 한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는 회색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시편에서「달」과「침묵」은 그의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어서 놀라움을 준다.「달」이 ‘관념의 시’에서 벗어난 ‘체험의 시’라는 것은 사상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그의 시작詩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의 중심소재인 달은 아무런 관념에도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달이다. 시인은 그 무의미의 달을 보면서 비로소 생각의 중심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세상의 반만 가지고 싸웠다는 것을 자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게 된다. 이 시에도 도시의 불빛과 자연의 달, 해와 달에 대한 분별의식 등이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없다. 그는 다만 라고, 산 속의 어둠 속에서 그 어둠에 동화되어서 물아일체의 경지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의 사색은<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해는 살갗을 비추나/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라고 하면서 여성적인 낮의 배후 즉 밤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자연을 발견하게 하고 인간의 증오와 투쟁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을 고치게 하는 계기를 주는 것 같다.「침묵」은「달」보다 도 깊은 사색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자연 상태의 그대로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의 언어를 통해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침묵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며 인간의 언어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공간이다. 그는 이 시에서 라는 명령조의 어투로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단호한 어투에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의 강한 의식이 들어 있다. 그 의식은 인간은 ‘인간의 관념’으로 자연을 인지하고 판단하려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먼저 자연에게 말을 할 때, 그 순간 자연은 인간의 관념에 오염되어 버려서 자연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대화를 할 때에는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침묵 속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의「꽃」에는 얼마나 건방진 인간의 자만自慢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백무산의 시「달」과「침묵」은 노동의 세계(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워주는 시로서 거듭 읽힌다. *백무산(白無産): 1984년 를 통해서 작품 활동.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인간의 시간」「길은 광야의 것이다」등
98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9> / 심 상 운 댓글:  조회:27  추천:0  2019-07-12
 *월간 2006년 12월호 발표                        최선영 시인의 시- 「해변海邊의 마을」「토요일土曜日 아침」   마을은 죽었다 바다에서 기어 나와 죽은 마을 해변에 빈 조개껍질처럼 누웠다   청춘이 빠져 나가버린 우리들의 잔해殘骸 도 파도가 거절하는 6월의 연서戀書도 모두가 여름이 목에 걸고 달아난 밀짚모자다   아쉬운 행여行旅의 길목에 겨울은 결코 서둘지 않는 귀먹은 우체통 이명耳鳴의 아픈 미로를 거쳐 미구에 봄의 사자는 도래하리라   그러나 아직은 식은 눈알의 인광燐光을 위해 무거운 칸타타는 들려오고 있다.          ----「해변海邊의 마을」전문 흰 벽壁은 나의 캔버스 한 폭의 신나는 추상화抽象畵를 던지며 일어나는 토요일의 건강한 안색顔色 아침은 하늘 높이 싱싱한 그네를 메어두고........... 잘 닦인 바깥 풍경風景은 활기 있는 안구眼球 속에 확대되어 빛나는 고전古典의 세계 큰 뉴스는 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가 띄우는 호망의 선율 영롱한 비누방울이 되어 집집을 방문訪問한다 ---「토요일土曜日 아침」   시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언어의 포장지에 감추어진 시인의 메시지라면 시와 산문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시의 의미는 매우 단순해진다. 그러나 독자가 상상의 들판에 나가 보물찾기하듯 각기 다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면 시의 예술성은 그 의미의 개체만큼 확대된다. 그것은 시가 언어(의미)를 표현도구로 하지만 예술성(무의미)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예술성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시의 예술성과 의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가 된다.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최선영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먼저 감지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시인의 생동하는 의식이다. 언어를 감정의 늪 속에 함몰시키지 않고 객관화하려는 태도와 언어의  사물성事物性을 감성표현의 도구로 환원하는 그의 시적 연금술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한다.「해변海邊의 마을」은 시의 의미 쪽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시인은 그 의미를 객관적인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시의 예술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첫 연 “마을은 죽었다/바다에서 기어 나와 죽은 마을/해변에 빈 조개껍질처럼 누웠다”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사건이다. 비록 그 다음 연 “청춘이 빠져 나가버린/우리들의 잔해殘骸”라는 구절에서 그 실체가 곧 해명되지만 이런 언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상상은 입체적이며 구상적인 사물성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개성적인 상상의 공간을 구축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음을 여름→겨울→봄이라는 계절의 순환으로 인식하고 허무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아쉬운 행여行旅의 길목에/겨울은 결코 서둘지 않는/귀먹은 우체통/이명耳鳴의 아픈 미로를 거쳐 미구에/봄의 사자는 도래하리라”는 구절이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식은 눈알의 인광燐光을 위해/무거운 칸타타는 들려오고 있다.” 고 칸타타(Cantata)의 배경음악을 통해서 낙관적인 생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토요일土曜日 아침」은「해변海邊의 마을」보다 더 감각적이고 예술적이다. 이 시는 논리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집합적 구성으로 되어 있고 의미보다는 감각이 시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사건이 없고 이미지의 나열만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이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여 밝고 아름다운 꿈이 담긴 상상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런 장면에서 독자들은 미적 쾌감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얻는다. “큰 뉴스는/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가 띄우는/호망의 선율/영롱한 비누방울이 되어/집집을 방문訪問한다”는 이 시의 끝 구절은 토요일의 생동하는 감각을 드러내는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영롱한 꿈의 비누방울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인생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와 절제된 감정 그리고 언어의 지성적 구성이다.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시를 낳는 모태가 된다. 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예술은 인생에 대한 희망과 자유정신 속에서 형성된 사리舍利 같은 보석이다. 그래서 시인은 꿈속의 파랑새를 찾아서 자신의 일생을 떠돌이로 보내는 것이다. 나는 최선영 시인의「거울의 형이상학形而上學」(1987년 6월호)을 읽고 월평에서 “다양한 의식의 흐름, 몽타주(montage) 수법 등이 매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유리알의 공간/가면을 쓴 다비떼의 춤/번쩍이는 속죄양의 눈물방울/우편배달부는 아무런 전보도/날라다 주지 않고/저승의 냄새가 점령하고 있는/ 그 장소”라는 시의 구절들이 불연속적인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과 충돌을 통해서 내면적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민중시라는 대중선동의 구호口號와 같은 시들이 범람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초현실적인 시의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영상언어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최선영(崔鮮玲): 1959년 에 「역사」「온실」「소심」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등   강우식 시인의 시- 「사행시초四行詩抄․1」「세족계洗足戒」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알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이 순수한 외계外界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돌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고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차게 새삼 피어오르던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사행시초四行詩抄․1」하나~넷 산사태 지자 개울물은 더욱 맑다.   습기진 돌틈 살모사새끼들이 오글거리고   북향한 상봉 어디쯤 동자삼도 있을 법한데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발보다 마음을 씻어내고 있으려니 은어새끼들이 와서는 발가락 때를 빨아준다. 나같은 사람에게는 산문 앞 개울에 발담그는 일만도 수계受戒 같아라.         ----「세족계洗足戒」전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理性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感性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감성의 숨은 힘이 들어있다. 현대시에서도 이 감성의 힘은 딱딱하게 굳은 이성(지성, 관념)의 껍데기를 부수고 원초적인 실체의 속살을 드러내는 동력이 된다. 서정시가 시의 원류로 존재하는 근원도 이 감성의 힘 때문이다. 모더니즘(지성)의 시가 현대시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도 독자들은 서정시를 선호했으며 시는 감정의 표출이라는 시의 정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의 표출을 어떻게 다듬어서 언어의 그릇에 맛깔스레 담아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다. 강우식 시인의 사행시편四行詩篇들의 서정은 그런 면에서 큰 느낌을 준다. 인간의 가식적假飾的인 것들을 다 걷어내고 본질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의 시편들은 사행四行이라는 시의 틀 속에 언어의 작고 예쁜 집을 짓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행시四行詩의 형태는 음보와 율격의 규정이 없어서 운율적인 면에서는 개방적이다. 그리고 기, 승, 전, 결의 구성법에도 억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3장 6구 45자 내외의 평시조平時調보다 여유롭다. 그러나 자유시의 형태에 비하면 너무 옹색하다. 하지만 시는 “언어의 경제”를 표현의 근본으로 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의 사행시四行詩는 시의 원리에도 부합하는 개성적인 작시법의 표출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그의 사행시四行詩는 한국 현대시의 한 형태로도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는 압축될수록 의미가 확장된다. 구체적인 설명이나 묘사는 오히려 시의 공간을 좁히고 상상력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소리(대사, 음악, 음향 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던 60년대 라디오 드라마가 현재의 칼라 TV의 리얼한 장면보다 상상력의 유발과 확대란 측면에서 더 효과적인 것과 같다. 그의 사행시四行詩에는 압축된 시행 속에 신선한 비유의 언어들이 박혀있다. 그 비유의 언어들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알의 사과 속 같다.”라는 구절에서 내외관계의 내밀한 장소가 되는 방房을 달고 수분이 많은 “사과 속”으로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이 “사과 속”에는 사과의 씨앗도 들어있어서 우리들 삶의 속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과즙이라는 미각으로 독자들을 미적 쾌감에 젖게 한다. 그러면서도 숨겨진 현실의 생생한 드러냄이라는 면에서 관념으로부터 해방된다. 두 번째의 시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먼 세상이나 내다보듯/초록의 물고비를 넘어나/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에서도 잎새와 순이를 연결하여 사춘기를 지난 후에도 떠오르는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먼 세상이나 내다보듯“이라는 철학적 사유의 언어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주는 거리감이 시를 한 단계 정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짝진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살아오는 느낌을 주는 “파랗게 쳐다보네.”라는 끝 구절은 언어의 감각적 표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하는지 알게 한다. 세 번째의 시에서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은  짧은 몇 개의 단어로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을 함축하고 있다. 그 언어는 그가 언어의 순도純度와 아름다움을 얼마나 높이고 있는지 알게 한다. 이런 세부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사행시초四行詩抄․1」의 시편들이 각각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가 집합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세족계洗足戒」는 비유譬喩의 언어에서 벗어나서 사물과 직접 부딪히는 실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가 아무리 시적 상상력을 높여준다고 하여도 실상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실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사물과 인지認知 사이에 구축된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탈-관념의 정신작업을 하고 있다.「세족계洗足戒」에 “수계受戒”라는 단어 외에 관념어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발보다 마음을 씻어내고 있으려니/은어새끼들이 와서는/발가락 때를 빨아준다.”는 이 사실적인 장면은 얼마나 맑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지 거듭 음미하게 한다.「세족계洗足戒」는 강우식 시인이 언어의 연금술에서 벗어나 실상의 세계로 나왔음 보여주고 있다. 실상은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시인은 실상을 추구하지만 언어를 도구로 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시인의 고뇌와 새로운 가능성이 숨어 있다.  강우식(姜禹植): 1966년 에 「박꽃」「사행시초四行詩抄․」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등 다수   최동호 시인의 시 - 「독서讀書」「몽당연필」   밤이 늦으니 책장 넘기는 소리에 손이 마른다.   마른 손의 관절을 꺽어 책장을 뚝뚝 잘라낸다.   갈대숲에서 잠자던 새가 쏠리는 바람 소리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이미 책 속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목의 향기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   무너진 개미의 둑 위에 쌓아올린 책 속의 모래알 글자들이 아른 거린다.   언제이던가 마른 손의 주름살 사이로 사라진   싱그러운 유년의 날들이 불빛 가린 손등너머로 보인다.   가을이 깊어가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맑아   빈 일기장엔 비쩍 마른 영혼의 향기만 외롭다.                  -----「독서讀書」전문 백지 위에 톡톡 부러진   까만 연필심 같은   송사리떼들 하얀 눈동자 깜박거리며   구름 일기장 맑은 물가에서 산들바람 친구와 놀다             -----------「몽당연필」전문   인간의 언어는 사물(대상, 의미)을 지시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허구의 관념이 들어 있다. 그런 언어를 또 1차적인 언어 (음성언어)와 2차적인 언어(문자언어)로 구분하여 하여 더 본질에 가까운 언어를 음성언어라고 하고 그 다음을 문자언어라고 한다. 음성언어가 1차적인 언어가 되는 이유는 음성언어는 지적 작용으로 질서화 되기 이전의 감정과 의미가 뒤섞인 원색적인 모양이 그대로 들어 있는 데 비해 문자로 기록된 언어에는 원색적인 모양이 다 지워지고 지성으로 질서화 된 가면假面의 언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시는 대부분 2차적 언어인 문자로 기록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사물의 본질이 주는 생생함에서 멀어진 박제같이 말라버린 관념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어떻게 하면 그 말라버린 관념의 껍질을 벗겨내고 생생한 원래의 언어를 살려내느냐 하는 언어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니, 무의미의 시니 하는 발상도 모두 시인들의 언어가 현실의 사물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최동호 시인의 시「독서讀書」에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가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밤늦도록 책을 읽으면서 학문(관념)의 세계에 침잠하지만 관념이전의 기억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기억들은 지성으로는 닿을 수 없는 원초적인 본래의 세계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를 “갈대숲에서 잠자던 새가/쏠리는 바람 소리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이미 책 속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목의 향기/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서讀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식의 전수 방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책 속에는 인간의 역사가 들어 있고 지식과 논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책 속에 들어있는 역사는 본래의 사실이 아닌 가공加工된 사실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실의 기록일 수가 없다. 지식과 논리도 그렇다. 그 지식과 논리는 자연의 지식과 논리가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세운 가공架空의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최동호 시인의 「독서讀書」는 가공加工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본래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1차적 사유의 도정道程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사유의 도정道程은 독서라는 중간단계를 지나서 사물의 본질과 대면하는 직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는 이 시에서 관념이전 기억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기억의 조각”들에는 이성적인 것보다도 더 소중한 맑은 향기의 서정이 들어 있다. 그 서정은 그의 마음 속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본래적 감성의 풋풋한 물기가 묻어있는 사실들이다. 그는 이 시에서 그것들을 끌어내어 소박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옷을 입혀서 맑은 서정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몽당연필」은「독서讀書」이후의 직관적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논리적 사유와 관념에서 뛰어나와서 대상과 직접 만나고 있다. 그 대상은 맑은 물가에서 산들 바람과 노는 송사리 떼다. 몽당연필의 톡톡 부러진 연필심은 어릴 적 기억을 재생 시키면서 송사리 떼를 연상하게 하는 보조언어가 된다. 그는 그 송사리 떼를 독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무런 사족蛇足을 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의 송사리 떼는 진리의 당체를 그냥 그대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석가가 수많은 제자들에게 말을 생략한 채 침묵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보여주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속에 들어 있는 논리를 초월하는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현대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 현대인들은 냉정한 논리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논리의 세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안고 있다. 특히 현대시의 독자들은 시인의 일방적인 설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시인의 관념과 해석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사물(사건)을 보여주고 그 해석과 감상을 독자들에게 전부 맡기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중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몽당연필」은 짧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직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시로 평가된다. 그래서 선禪의 맑은 정신이 담겨 있는 시인의 투명한 시선은 이 시의 인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최동호(崔東鎬): 1979년 신춘문예와 추천으로 등단. 시집 평론집 등  
98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8> / 심 상 운 댓글:  조회:28  추천:0  2019-07-12
* 월간 2006년 11월호 발표                                 이건청 시인의 시-「황야荒野의 이리 5」 「폐광촌을 지나며」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눈이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휘이게 하고 눈은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툭 하고 부러뜨린다.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눈에 덮인 저 비탈에 추운 斥候가 매복해 있다. 적들은 잠들고 말들만 깨어 있다. 눈을 맞으며 깨어 있다. 말들이 눈 내린 城 밖, 적들 곁에 서 있다. 말들은 적이 아니다.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기왓장이 하나 무너져 내린다. 말들은 적이 아니다. 눈은 풀에 내려 마른 풀들을 덮는다. 우물이 하나 지워진다. 우물이 둘 지워진다. 눈이 내린다. 깨진 기왓장과 척후 위에 내려 쌓인다. 얇은 옷을 입은 왕이 운다. 적들이 積雪을 이루고 있다. 밤새도록 쌓이고 있다. 南門이 닫혀 있다. 北門이 닫혀 있다. 東門 西門이 닫혀 있다. 눈은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툭, 툭, 툭 도처에서 가지들이 꺾이고 있다.                         ----------「황야荒野의 이리 5」전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맣게 몰랐다.
98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7> /심 상 운 댓글:  조회:17  추천:0  2019-07-12
 *월간  2006년 10월호 발표                                                                            오탁번 시인의 시- 「애기똥풀」「라라에 관하여」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 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감황柑黃빛 꽃물 발라 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주고 떠난 누나여   2 새끼 자라가 눈을 뜨고 둠벙에서 나와 흐린 강물 헤엄치며 불러보아도 이젠 영영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송송 맺히던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감장종지만한 젖가슴도 쥐이빨 옥수수같은 앞니도 세상의 강물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빈 공책 빛 바랜 페이지에서 옹알옹알 속삭이며 그때 그 어린 눈망울로 내 사타구니의 다 큰 자라가 미운 듯 말똥망똥 눈 흘기는 애기똥풀이여 누나여                                                   -------「애기똥풀」 전문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雉岳山을 한참 바라다 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天井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 극장 나列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內部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高麗歌謠 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소리에서 깨어난 아침, 次女를 낳았다는 누님의 解産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風車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本能의 바탕이여. 아름다움이여.                        ------------------------「라라에 관하여」전문   시의 현실은 시인의 의식이 선택하여 재구성하고 의미를 붙인 가상현실(허구)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시나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오래 견디는 현실이냐 하는 것이다. 시대적인 이데올로기나 가치들은 그 시대가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蜃氣樓다. 물질적인 것들도 시간의 이빨에 오래 견디기 힘들다. 언젠가는 다 바스라지고 녹아서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정의한다. 시인들도 형이상학적인 인식을 통하여 해바라기처럼 진리를 향하여 언어의 날개를 펼친다. 그런데 진리는 이미 기성복같이 만들어진 것 즉 관념이기 때문에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각이나 정서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런 시들을 관념시 또는 형이상학 시라고 한다. 오탁번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시간성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대적 가치나 사상,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변하지 않는 시간성이 들어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본능本能이라는 원초적인 세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애기똥풀」에서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불러일으켜 순수한 본능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세계는 어쩌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같다. 눈곱만한 부끄러움도 분별심도 없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그 세계는 이 세상에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나는 일이 없어질 때까지 변하지 않을 세계이며 어른들 기억의 맨 밑바닥에 잠들어있는 본래적인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곳(낙원)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이 시의 구절들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언어보다도 영원성에 접근해 있다. 는 이 시에서 진외육촌누나와 나의 관계는 아담과 이브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기억의 재생이 환기시키는 정서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성의 힘으로 인해서 시간의 굴레를 뚫는다.「라라에 관하여」는 그런 원초적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사춘기를 지나서 직업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인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이고 간결한 사실의 나열과 압축, 그리고 냉정한 이성理性의 언어로 축조된 이 시는 본능과 이성의 갈등에서 끝내는 허물어지고 마는 이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시인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겨울바람, 형언할 수 없는 꿈, 누나의 해산,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 등은 결국 고려가요어석연구高麗歌謠語釋硏究를 읽는 이성理性의 나를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오탁번 시인의 이런 꾸밈없는 솔직함과 본능의 드러냄은 그의 시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여는 바탕이 되고 무상無常의 시간을 극복하는 에너지가 된다. 또 서사적인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재미를 주고 상상의 문을 열게 한다.   *오탁번(吳鐸藩):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당선되어 등단.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處刑)의 땅」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함.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오탁번 시 전집」등   임종성 시인의 시-「山行」「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내가 바위처럼 우뚝 솟으려 할 때 산은 낮게 낮게 멀리 가는 냇물을 보여주고   내 마음이 칡넝쿨처럼 얽힐 때 똑바로 뻗은 나무를 보여주고   계곡을 오르다 내가 잡풀처럼 억세어질 때 유유히 흐르는 흰 구름을 보여주고   날 저물어 내가 잎으로 떠돌 때 산은 환한 풀꽃으로 길을 밝혀준다 -------「山行」전문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좁은 행간 속에 높고 먼 하늘이 내려와 앉고 한낮에도 별들이 총총 반짝인다 내가 책을 펴기도 전에 나무는 시의 내부를 거의 파악한 듯 내 시선이 다음 시행 끝에 이르기 전에 나무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일 때 나무는 흐려진 그늘로도 연을 이루고 그다지 밝지 않은 문장 속을 모두 비추는가 잠시 어둠에 젖은 마른 잎처럼 졸다가 시퍼런 풀빛으로 깨어나면 내게로 거침없이 부딪쳐오는 한 세상 이 산에서 사는 하나의 풀이거나 풀 속에 맺힌 이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한 점 벌레 같다는 생각에 이르는 동안 나무에 기대어 다시 시를 읽는다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전문   자연은 현대시에서도 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인공적인 변화가 빠르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자연은 그 현실을 바르게 보는 마음의 중심기둥 역할을 한다. 시인은 자연을 통해서 변화하는 현실의 의미도 짚어보고 무상한 실체를 체험하기도 한다. 특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인 자연관은 자연이 객관적인 대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얻는 사유의 언어들이 비록 실제가 아닌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깨우침을 주는 새로운 감각의 언어로 변형시켜 독자들에게 부단히 접근한다. 임종성 시인의 「山行」은 산을 스승으로 삼아서 산의 가르침을 배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높은 것과 낮은 것, 얽히고 굽어진 것과 똑바른 것, 억셈과 유연한 것, 어둠과 빛의 대조를 통해서 삶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보는 시각視角의 균형감각을 잡아주고 있다. 우리들은 높이 솟은 바위를 부러워하고 그 바위 같이 솟아보려고 하지만 산은 낮게 흘러가는 냇물을 보여 줌으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삶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는 구절들이 비록 관념적인 교훈의 드러냄이라고 하여도 시인의 체험이 묻어난 살아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시적 생명력을 갖는다. 그 생명력의 바탕에는 시인의 담담한 서술의 언어가 한 몫을 하고 있다.「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은 자연물과 자아自我가 하나가 된 상태. 즉 대상물에 완전히 몰입沒入된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와 시인이 한 몸이 된 이런 경지에서 시의 주체는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는 상상 속의 사건이지만 시에 대한 나무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때 그 발상이 매우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는 그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자연을 단순히 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 시와 나를 같은 생명체로 인식하는 임종성 시인의 정신의 경지가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보통의 시들이 자연을 시의 보조물로 취급하고 비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자연관은 독보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정신의 출발점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그 지극한 사랑이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경지를 연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세계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임종성 시인의 시편들에서 감지되는 생명적인 것들이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뜨거운 감응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며 그의 시와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 임종성(林鍾成): 1977년 에 「새벽바다」「자정」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땅뺏기」「숨쉬는 상처」등   이혜선 시인의 시-「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고조선 빗물」   탐스런 젖무덤 실한 엉덩이 떡 버텨누운 자궁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만나는 눈빛 하나   시간의 끝에서 다시 끝끝까지 걸어들어가 반짝이는 꽃빛 하나 그립고그리운 너를 만난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 언제까지나 그리운 그이름을 만난다   꽃이슬 반짝이는 새아침의 붙잡을 수 없는, 핏줄속에 돌고있는 그이름을 만난다   억겁 후의 이름을 돌고있는 그별을 만난다 ---------「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전문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너 그리움으로 잠들지 않고 비가 되어 내린다. 한밤 내내   검은 땅 위의 나를 흔들어 나 빗속에 나와 서면 팔 벌린 네가 빗물이 되어 온다   마음하늘에 꽃 한 점 없어도 어둔 촉각소리 어디서 샘 솟아 그리움 되는 빛   날새 날갯죽지도 잠 못드는 마을 마다 짚단베개 고이고 잠을 청하랴   빈 뼈 속속들이 태우며 그대 지금 가고 없는 고조선 사람아 ----------------「고조선 빗물」전문   민족이니 역사의식이니 하는 사고思考의 산물들은 언어로 표현될 때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현재의 시간도 관념이 아닌 생생한 감각으로 건져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돌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다. 맑은 물속에서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면서 황홀하게 빛나던 수석水石은 물 밖으로 나와서 물기가 마르는 그 순간에 이미 물속의 돌멩이가 아닌 메마른 지상(관념)의 돌멩이로 변하고 만다. 사실 우리들이 시 속에서 현실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며 역사이고 가상적인 현실이며 역사일 뿐이다. 어디에도 지나간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보리에게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의 지극한 염원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다. 이혜선 시인은 어느 날 반파 유적지 모계씨족촌母系氏族村에서 고 했다. 그 만남은 우리들 핏줄의 실체와의 만남이고 본질적인 만남이다. 그는 그 만남을 생명의 본적지며 원형인 여성의 자궁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생동하는 언어로 잡아내고 있다. 그 현실은 그의 역사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다. 물속의 돌멩이같이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황홀한 꿈의 현실이다. 이런 역사의식에 몰입해 있는 이혜선 시인은「고조선 빗물」에서는 라고,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고조선古朝鮮 사람과 만나는 환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의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의 현형現形이다. 그 그리움의 원초原初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유의 세계를 탐구해야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움의 세계가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데서 약간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과거지향의 의식(꿈)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상실되었던 자궁내의 생활에 대한 재귀 본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과 꿈의 세계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 회복과 자기세계의 재발견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그리움의 원형세계原形世界로 나타나는 현실(환상)은 본래적 자아의 회복과 재생에 대한 지향이며, 환상과 상징(이미지)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확인된다. 민족의 역사의식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더 끈질기고 강하게 발현되는데, 그 원인도 이런 자기회복과 재생의식에서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혜선 시인의 역사의식의 시 속에는 자기발견의 깊은 내면 의식이 들어 있어서 독자들을 역사의 세계로 안내하고 때로는 독자들 스스로 자기의 원형을 찾아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나는 그의 시편들 중 역사의식에 젖어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을 만난다.「치술령 돌어미」에서는 신라시대 박재상 아내의 한恨을 만나고「서라벌 바람은」에서는 나라를 지키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소리에 담긴 염원을 듣는다. 그 한恨과 피리 소리는 과거의 역사를 뛰어넘어서 오늘의 현실로 다가오고 들려온다.   *이혜선(李惠仙): 1981년 ,시문학>에 「돌문」「나를 만남」「지장보살」「갈대밭 머리」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 「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등   * 월간 2006년 10월 호에 발표
98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6> / 심 상 운 댓글:  조회:23  추천:0  2019-07-12
문효치 시인의 시-「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觸手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 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전문   나는 이제 천년千年의 무게로 땅 속에 가 호젓이 눕는다.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 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 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버리고,   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 섬세한 서기瑞氣 로 남느니.   너는 이 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del 되어 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旋律이 되어 안개처럼 멍멍이 젖어 들어오는 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                 -----「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전문   문효치 시인의 시편 중에서 초기의 시에 속하는「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는 독자들에게 허공에 떠도는 무수한 사랑의 촉수를 상상하게 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게 한다. 그러면서 “허공에 태어나/수많은 촉수觸手를 뻗어 휘젓는/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가서 불이 될/온 몸을 태워서/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라는 절절한 사랑의 감성언어가 품고 있는 환상의 이미지는 허공에 떠도는 혼령들의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혼령들이 안고 있는 한恨을 풀어내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祈願의 언어-“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의 반복은 주술적인 비의秘義를 담고 있는 주문呪文 같이 독자들의 가슴에 묘한 울림을 남긴다. 그래서 그 사랑은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생명의 무한한 기운으로 연결되고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이렇게 허공에 떠도는 생명의 기운을 포착하여 간절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에서는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인 감각언어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죽음 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은 삶의 애착愛着이 만들어내는 환타지다. 그 환상의 이미지는 오랜 침묵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와 함께 죽음의 신비감을 드러낸다. 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일간 신문에 발굴현장의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을 때, 내가 가장 경이롭게 느낀 것은 벽돌로 쌓은 무덤 안벽에 놓여있는 등잔과 등잔에서 나온 그을음이 벽면에 까맣게 남긴 흔적이었다. 그 생생한 흔적은 천년의 시간을 현재와 같이 착각하게 했으며, 무덤이 죽은 이들의 현실玄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실居室같이 생각하게 했다. 왕은 동쪽에 왕비는 서쪽에 옻칠한 목관에 누워 있는데 나무 두침頭枕을 베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무덤을 치장하고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영생을 기원하는 고대 한국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것은 극소수의 권력층들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사후의 세계에서까지 누리고 싶어 하는 분묘양식墳墓樣式의 구조라고 생각되지만, 그 신비한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문효치 시인은 당시의 경이로움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현지답사를 오랜 동안 집중적으로 했으며 그 결과가 연작시 백제시편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백제시편 중「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은 고대한국인의 영생의 염원을 죽은 무령왕의 독백으로 담아낸 시다. 죽어서 육신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도 나의 영혼은 “한 덩이 푸르른 허공”이 되어서 서기로 남을 것이니 너(사랑하는 이)는 내 옆에서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서 그리운 노래로 서리어 달라는 것이 이 시의 중심 내용이다. 죽어서도 그 죽음을 거부하는 정신, 죽음을 삶으로 환원시키려는 의지는 어쩌면 한국인의 독특한 원형질을 형성하는 유전인자인 것 같다. 그래서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버리고,//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섬세한 서기瑞氣 로 남느니.//너는 이 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旋律이 되어/안개처럼 멍멍이 젖어 들어오는/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라는 구절은  몇 번을 거듭 읽어도 매력적인 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맛과 의미가 한국인의 독특한 감성과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감성과 의식意識을 잘 드러낸 문효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며 그의 유현幽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 문효치(文孝治): 1966년 에 「산색」「바람 앞에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연기 속에 서서」「무령왕의 나무새」등 다수    이하석 시인의 시-「못 2」「투명한 속 」   그들은 녹슨 몸속에서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 속, 헐어버린 건물 안, 이전해버린 공장의 빈 터, 폐쇄해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못 2」전문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 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부스러기 흙 속으로 깃들어 더욱 투명해 지고 더 많은 것들을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 간다. 비로소 쇠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투명한 속」 전문   이하석 시인의 시편들에서는 알레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풀, 흙, 쇠꼬챙이, 못, 건물” 등의 사물어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다. 따라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1차적으로 만나는 것은 어떤 관념이 아닌 현실現實이며 사물事物이다. 이 현실과 사물은 시속에서 비약하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과학적인 사실성을 확고히 구축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난해難解에서 벗어나 단순 명쾌한 의미를 드러내고 시대의 조류潮流에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사실적인 작시법作詩法은, 21세기 시의 키워드를 “사실, 생명, 현장”에 두고 그 중심에 사물을 놓으면서 관념이 배제된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에서 시의 새로운 방법론를 모색하는 문덕수 시인의 시론 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보인다. 이하석 시인의 이런 사실에 바탕을 둔 시적 감수성은 미세한 시각으로 사물과 현장을 응시하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는 힘을 발휘한다. 그는 또 언어의 배경에 깔려 있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지우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도 사물을 통해 함축적인 의미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관념과 탈-관념의 경계선에서 신선한 감각을 드러낸다.「못 2」에서도 그의 시선은 못의 다양하고 사실적인 일생을 끝까지 추적하면서 날카롭고 냉정한 관찰의 눈을 번득인다. 그러나 그 추적의 끝부분에서 환기시키는 것은 따스하고 온화한 화합의 감성이다. 그 감성은 녹슨 몸속에 쇠꼬챙이를 간직하고 어디서나 무엇이나 긁고 찌르던 못도 개울 물 속에 누워서 꼬부라진 쇠꼬챙이로 변해 가고 드디어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못의 일생은 쇠꼬챙이 같은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태어나 시비하고 싸우면서, 이웃들을 긁고 찌르면서도 자신만은 꼿꼿하다고 자부하면서, 그것이 부질없는 것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관棺 속에 누워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의 구조가 인공人工과 자연으로 대비되어 있기 때문에 인공(문명)의 귀착지歸着地는 결국 자연일 수밖에 없다는 문명비판의 시각으로도 읽혀진다. 그의 시에 대한 이런 해석과 독법讀法은 독자들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고思考의 기능이 만들어 낸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주제의식(의미추적)과 함께 이하석 시인만의 독특한 사물성의 감성이 안고 있는 현장중심의 시의식이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그는 침을 숨긴 채 물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사실적인 인식과 시의 기법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된다.「투명한 속」은「못 2」와 대조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은 광물성인 유리부스러기를 하나의 생명체로 변화시키는 감성의 작용이 만들어 낸 따뜻한 감각이 발현發顯하는 이미지다. 이 시에서 쓰인 감성적인 언어들-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유리부스러기의 날카로운 칼날들의 의미를 지우면서 인공과 자연의 화합을 유도한다. 그래서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비쳐들어 간다. 비로소 쇠조각들까지/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라는 끝 구절의 참신한 생명적인 이미지는 은은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감동은 그의 열린 마음이 자연과 화합하는데서 솟아오르는 울림으로 이 시의 정신적인 깊이가 상당함을 감지하게 한다. 나는 이하석 시인의 시편들을 1976년 봄에 발간된 동인지「자유시自由詩」에서 처음 읽었다. 그리고 “시는 우선 자유로워야 함을 믿고 있다. 모든 것에로의 자유, 혹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어쨌든 우리는 모든 사물들에 대하여, 모든 구조들에 대하여, 모든 기능들에 대하여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동인들의 에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시편과 명제가 얼마나 서로 부합하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명제를 시의 내적 과제가 아닌 당시의 억압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정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하석 시인의 언어가 현실문제나 고정관념의 무게, 고정관념의 그늘에서 홀가분하게 탈출하여 자유로운 언어공간을 마련한 것에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의 시편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 이하석(李河石): 1971년 에 「관계」「분위기」「이중의 처단」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백자도(공저)」「투명한 속」「김 씨의 옆얼굴」등 다수   강윤수 시인의 시- 「산(1)」「앨범에서」   말없음표다. 괄호 밖의 초연한 감탄부호다. 더 수식할 수 없는 간결체다. 오늘 같이 저 무거운 坐定이 두려운 때 으늑히 산마루로 오르던 나의 單語들. 單語들은 중턱에서 헐떡거리다가 점점이 흩어져 쉼표만 남기고 단 한줄기 문장도 이루지 못했다.   山은 山만이 아는 非文이었다.         ---------------「산(1)」전문   죽은 정자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노인의 아이 적, 할아버지 곁에 다시 자란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히 하늘을 보는 노인의 눈 렌즈의 셔터를 누르면, 더 이상 흐름은 멎을 것도 같은데 앨범 속 하나 더 할아버지의 무덤은 생겨나고, 산소길 등성이 정자나무 길 끝에 먼빛으로 새삼 태어나 호돌호돌 걸어오는 아이들, 아이들 앞에 밟히는 풀잎 같은 미련을 찰칵 셔터를 누르며 서 있는 또 다른 앨범 속의 아버지.             ---------「앨범에서」전문   이 세상 대부분의 시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화평하게 하거나 세속적인 깨달음을 주는데 익숙하고, 독자들도 그런 시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무질서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이론에 시인과 독자들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무엇보다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그 설득의 원천은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이 만들어 놓은
97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5> /심 상 운 댓글:  조회:24  추천:0  2019-07-12
신규호 시인의 시- 「산책기散策記․1」「숯처럼」    길 위에 하나, 둘 흩어진 낙엽을 따라가 보면, 어느 덧 관산(冠山) 자락에 이르네. 후미진 산길을 밟고 오르면 매천(梅泉) 약수가 나오고, 거기 맑은 샘이 사철을 두고 반짝이며 밤낮으로 흐르네.     내 마음도 그러한 것. 저 깊은 심령의 골짜기에 숨어 남 몰래 샘솟고 있는 청정한 심성도 사시사철 밤낮으로 소리 없이 흘러 목마른 자를 기다리고 있나니.     내 할 일이란, 심신의 고통과 싸우고 싸워, 산짐승처럼 헐떡이며 가슴 속 타오르는 갈증을 부여안고, 영혼의 새 벽 샘가에 달려가 목을 축이는 짓이나 할 뿐 아닌가. *관산冠山: 관악산의 약칭                        ---------「산책기散策記 ․ 1」전문 한 백년 숨 쉬면서 하늘을 태우고 태워 목숨은 한 덩이 어둠이 되는가. 뻗쳐오르는 가지와 잎들이 춤추고 버리는 허공은 새카만 침묵이 되어 남고, 불타는 시간 속에서 번쩍이는 꿈은 차디찬 재 되어 흩어지는가. 젊음의 불꽃이 한바탕 사루고 버리는 텅 빈 공간. 돌아가 안길 수밖에 없는 대지의 품안에서 다시 윤회의 사슬에 매인다 해도 지워버릴 수 없는 이 삶의 느꺼움은 어쩔 것인가. 풀잎의 춤과 벌레의 울음이 한 생애를 설레이게 하고 밤하늘 별들의 눈짓이 이끌어 온 푸르른 목숨, 그 추억 한 덩이 아직 남아 타오를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 이 새까만 안타까움을 어쩔 것인가.                              ------「숯처럼」전문   형이상학 시를 시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천착해 온 신규호 시인은 형이상학 시의 근원을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유한하고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숨은 진실을 밖으로 끌어내어 표현함으로써, 고정관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미명에 갇혀 있는 새로운 진실(그것조차 또 다른 관념이지만)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정신의 혁명이며,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길이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일이다. 언어와의 싸움 없이 인간 구제나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그러므로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의 견해는 그만의 독창적인 사유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어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진실을 끌어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도구가 되고, 언어와의 싸움에서 획득한 신선한 정신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그의 시어들은 항상 긴장감에 싸여 있으며 지성과 감성의 조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산책기散策記 ․ 1」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은 관악산 산행의 체험이지만 자신의 정신적인 지향점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산행 중에 발견한 사철 반짝이며 흐르는 매천(梅泉) 약수는 형이하학적인 물에서 형이상학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심령의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승화되어서 인간의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는 영혼의 생명수로 창조되고 있다. “내 할 일이란, 심신의 고통과 싸우고 싸워, 산짐승처럼/헐떡이며 가슴 속 타오르는 갈증을 부여안고, 영혼의 새/벽 샘가에 달려가 목을 축이는 짓이나 할 뿐 아닌가.”라는 끝 구절에서 그런 의미가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구절은 자신의 삶의 정신적 내면을 드러내는 갈망의 행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있다. 이렇게 그의 형이상학적 시는 설득적인 기능을 내포한 종교적인 높은 의식의 세계를 지향한다.「숯처럼」은 그의 정신적 갈증을「산책기散策記 ․ 1」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면서 인생의 과정을 나무가 숯이 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뻗쳐오르는 가지와 잎들이/춤추고 버리는 허공은/새카만 침묵이 되어 남고,/불타는 시간 속에서 번쩍이는 꿈은/차디찬 재 되어 흩어지는가.”라고 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의미를 절절한 언어로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워버릴 수 없는 삶의 느꺼움은” 어찌해야 하느냐고 독백조로 호소하고 있는 데, 그 호소가 이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한 생애를 설레이게 하고/밤하늘 별들의 눈짓이/이끌어 온 푸르른 목숨,/그 추억 한 덩이 아직 남아/타오를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이 새까만 안타까움을 어쩔 것인가.”라고 쉽게 허무 쪽으로 기울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그의 싱싱한 감성의지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를 담아내고 상징하는 것이 이 시에서 숯이다. 그 숯은 객관적 상관물로서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타오르는 새로운 삶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숯은 이 시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숯이 되어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빨갛게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숯은 그가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산책기散策記 ․ 1」과 「숯처럼」을 읽으면서, 분출하는 감정을 지성으로 통제하면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감성의 싱싱함을 잘 살려내는 정통적인 모더니즘 시의 참맛을 한껏 느껴본다.     *신규호(申奎浩):1966년 에 「탄炭」「화가의 집」「등뼈」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입추이후」「사람아 사람아 슬픈 사람아」「맨발의 사람」「어둠의 눈」「누워서 가는 시계」「보랏빛 마음」   김용언의 시- 「청기와집 추억」「들개의 울음」   까까머리 어린 시절 좋아하던 계집아이는 청기와 집 높은 담 안에 살았다 발끝만 쳐다보다 얼굴 한 번 못 보았다 할 말이 있긴 있는데 언제나 청기와의 높은 담이 가로막았다   청기와 뜨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 허기진 가슴으로 휘파람 불면 뜨락에 얼비치는 계집아이 모습 불을 만지듯 질겁을 하고 언덕을 내려 왔다 그날 밤은 알밤을 새며 불안에 떤다 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 알맹이가 잡히지 않는다   좋아하던 계집아이는 철들어 떠나 버리고 불혹이 되어 주머니에 넣어둔 말 한마디 햇빛 한 번 못 본 채 숨어 있구나                          ------「청기와 집 추억」 전문 들개의 울음이 허기진 밤하늘에 흔들린다 피붙이를 찾는 소리라 했고 고독을 위한 깃발이라 했다 울음 이외엔 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막 사람들도 들개처럼 울어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절실한 것은 울음이었다 푸른 빛깔의 고독을 물리칠 수 있다면 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   귓속에 앉은 오물이 들개 울음 속으로 끌려나가고 모래알이 침몰한다 사막을 빠져나가는 날 귓속에는 송곳같은 바람소리 햇살의 흔적만 남으리라          -------「들개의 울음-사막에서 97-4」전문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추억은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은 보석이다. 그 보석은 이별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기 때문에 더 은은한 광채가 난다. 만약 그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면 그 추억은 단순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무지개처럼 떠 있다가 희미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추억은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아쉬움이라는 미련을 안고 더 오래 남는 것이다. 김용언 시인의 시「청기와집의 추억」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보석을 꺼내 놓은 것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지성이 서정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 구절 “햇빛 한 번 못 본 채 숨어 있구나”에서 감탄형 종결어미가 들어 있지만 그것은 참다 참다 터져 나온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느낌의 진동이 강하게 와 닿는다.“청기와 뜨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허기진 가슴으로 휘파람 불면/뜨락에 얼비치는 계집아이 모습/불을 만지듯/질겁을 하고 언덕을 내려 왔다/그날 밤은 알밤을 새며 불안에 떤다/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알맹이가 잡히지 않는다“라는 청기와 집의 예쁜 소녀와 내성적인 시골 소년의 짝사랑. 둘 사이에 어떤 작은 사건도 없었던 벙어리냉가슴의 일방적 사랑. 그 사랑을 불혹의 나이에도 간직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 시의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것은 황순원의 소설「소나기」나, 알퐁스 도데의「별」과 같이 불멸하는 인간 본연의 푸른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들개의 울음-사막에서 97-4」은 사막이라는 자연환경이 배경이 되어서 인간존재의 의미조차 내세울 수 없는 원시의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서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울음이 더 절실한 전달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전하고 있다. 김용언 시인의 이 시는 그런 의미가 그의 생생한 직접 경험에서 분출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힘을 갖는다. 관념이 아닌 체험의 언어는 단단한 돌멩이 같아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들개의 울음이 허기진 밤하늘에 흔들린다/피붙이를 찾는 소리라 했고/고독을 위한 깃발이라 했다/울음 이외엔/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막/사람들도 들개처럼 울어야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절실한 것은 울음이었다/푸른 빛깔의 고독을/물리칠 수 있다면 /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는 그의 체험담은 그래서 느낌의 진동이 오래 남는다. 시에서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김용언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사실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실을 전하는 그의 시적 방법론에 동감했다. 그리고 ”푸른 빛깔의 고독“ 이라는 새로운 감성의 단어가 어떤 상태의 고독을 의미하는지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달빛이 푸른 바다와 같이 넘치는 사막 한 가운데서 느끼는 생존의 위험과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자연,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인간 존재의 원초적 고독이라고 생각된다. 그 고독은 김현승 시인이 깊은 명상을 통해서 발견하고 추구한 절대고독과도 일맥상통하는 고독이다. 따라서 그 '푸른 빛깔의 고독'은 들개 같은 울음을 울게 하여 존재의 절망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주는 고독이 될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나는 리쳐즈(Richards)의 예술적 고민을 암시하는 시구詩句,'개성은 고독 속에서 길러내 지고/성격은 세파 속에서 이루어지다.'를 떠올려보았다.   *김용언(金勇彦) :1978년 에「눈」이 추천완료 되어 등단. 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숨겨둔 얼굴」「서남쪽 끝」「너 더하기 나」「휘청거리는 강」「사막여행」등   김용오 시인의 시- 「하늘」「눈사람과 장미」   봄밤의 폭신한 요 위에서 남성의 체온이 엎드린다. 하늘은 들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는 3월의 농부. 나는 헐떡거리며 짐승처럼 엎드려 겨울을 벗는다. 강 건너 불빛들도 스르르 두 눈을 감는다. 처녀를 주고 울던 입이 큰 사랑이 떠오른다. 서쪽에서 마른번개가 번쩍거리는 자정 갑자기 깊고 먼 육신의 입구 포근한 계절의 배꼽 밑으로 촉촉이 열리는 들의 마음. 파란 전기처럼 떨고 있는 클리톨리스. 하늘은 씨앗을 물으며 음모陰毛의 이랑을 적신다. 희멀건 엉덩이로 생명의 방아를 깊이 찧는다. 뜨거운 바람들이 아, 아 흐느끼듯 몇 번이나 흙의 자궁子宮 속을 길게 지나가고 어디서 마을의 벽시계가 새벽을 알린다. 강 건너 불빛들이 하나둘 다시금 눈을 뜬다. 언제나 하늘은 안개로 일어나서 들의 젖가슴을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3월의 농부. 사랑을 벗어주고 하얗게 웃던 알몸이 떠오른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강물소리를 천천히 마신다.                                      ------「하늘」전문 열리는 먼동을 바라보며 빌려 입은 사람의 육신이 허물을 벗듯 한꺼풀씩 벗고 있었습니다. (나는 태양의 혓바닥 위에서 아이스크림처럼 허물어지는 벌거숭이) 옛날집을 찾아 땅 아래로 내려가는 눈부신 영혼의 물소리가 졸졸졸 빛나 보였습니다. (나는 향긋한 뿌리의 유혹 앞에서 갈 길을 놓쳐버린 구름) 바위틈에 기대어 봄을 애태우는 장미의 갈증을 며칠 동안 깊숙이 밀어 넣고 흔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달콤한 여인의 살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가는 한 마리 물배암) 허벅지를 더듬으며 올라가는 아, 사랑의 가지 위로 푸른 정액精液이 돌고 입을 여는 바다조개, 주먹만한 햇덩이, 몇몇 송이 비릿한 꽃망울을 마알갛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눈사람과 장미」   성性은 이 세상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 원源이다. 그래서 성을 떠나서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꽃이 피고 꽃밭에 나비가 날아들고 열매를 맺는 자연현상은 성의 멋진 파노라마다. 들판의 짐승들은 물론 물고기가 암수 짝짓기를 하고 돌 틈에 알을 낳아서 수정하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성생활이다. 그리고 그 성은 생명체들에게 최고의 쾌락과 풍요를 부여한다. 따라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예술작품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행복은 성性의 푸른 들판에 피어난 향기로운 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 최고最古의 시라고 알려져 있는 4000년 전 수메르 여사제女司祭의 시에도 “내게 소중한 그대여, /그대의 멋진 모습과 달콤함에 빠져버렸다오./그대에게 사로잡힌 나를, /그대 앞에 떨고 서있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주오.”라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애정표현이 담겨있다. “얼음 위에 댓잎자리를 깔아 님과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 둔 오늘 밤이 더디 새기를 비는 고려시대의 속요「만전춘滿殿春」의 적극적인 애정표현도 사랑의 원천이 성에 있음을 드러낸다. 화산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18세기 중반이후 발견돼 발굴에 들어갔을 때 관계자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성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벽화, 부조, 조각 등 외설적인 유물이 대거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유물들이 많다. 문자를 모르던 시대, 사람들은 벽화나 청동기에 그림으로 성생활을 기록했다. 특히 신라인들은 성에 대해 심하다 싶을 만큼 개방적이어서 성 관련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토우, 과장된 성기나 자위행위, 출산과정을 묘사한 것 등은 무덤의 부장품인데도 표정이 매우 밝다. 고대 신라인들은 사후의 세계에서도 현세와 같은 쾌락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성을 자연스레 표현한 것이다. 이런 성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쾌락과 종족 보존에 대한 욕구, 즉 인간의 성에 대한 본연적 가치와 갈망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김용오 시인의 시편들은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 원源에서 출발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도덕이나 사회규범 등 가식적인 관념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인간생명의 원적지에 들어가서 미적 언어로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싱싱하게 담아내고 있다.「하늘」에서는 하늘은 남성을, 땅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늘은 씨앗을 물으며 음모陰毛의 이랑을 적신다./희멀건 엉덩이로 생명의 방아를 깊이 찧는다./뜨거운 바람들이 아, 아 흐느끼듯/몇 번이나 흙의 자궁子宮 속을 길게 지나가고/어디서 마을의 벽시계가 새벽을 알린다.”라고 자신의 개인적인 상상과 자연현상을 교직交織하여 복합적인 구성으로 성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그의 시 세계는 자연의 원리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행복(쾌락)을 미래가 아닌 현재의 행위에서 추구하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점에서 현세의 행복을 내세까지 이어가려는 고대 신라인들의 염원에 맥락이 닿는다.「눈사람과 장미」는 비유의 언어들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바위틈에 기대어 봄을 애태우는 장미의 갈증을 며칠 동안/깊숙이 밀어 넣고 흔들어 주었습니다.(나는 달콤한 여인의 살 속에서/스멀스멀 기어가는 한 마리 물배암)/허벅지를 더듬으며 올라가는/아, 사랑의 가지 위로/푸른 정액精液이 돌고/입을 여는 바다조개,/주먹만한 햇덩이,/몇몇 송이 비릿한 꽃망울을 마알갛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성적 쾌락의 절정을 감지하게 한다. 그 쾌락은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육체의 쾌락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또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같이 정신의 해방감解放感을 동반하여 제도와 이념, 관습, 윤리 등에 억압되고 굴절된 성의 세계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요인을 만든다. 그리고 독자들을 그의 독특한 정신과 향기로운 성감각의 세계로 유인한다. 나는 김용오 시인의 대담한 성 묘사가 관능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적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며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간다.   *김용오(金容五): 1982년 에 「들」「봄비」「개나리」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신의 수염」「동화작용」「두 사람에 관한 성찰」「멀티오르가슴」등                                                                                                                      2006년 8월호 계재  
97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4> / 심 상 운 댓글:  조회:21  추천:0  2019-07-12
이향아 시인의 시- 「후회」「문패」   비오는 날 시장 길에서 뒹구는, 고추, 가짓모 몇 그루를 주웠다. 나는 어두운 농사일 솜씨로 잔디를 쥐어뜯고 그것들을 앉히었다. 팔려가던 어떤 이의 손에서 도망쳐 하필 내 눈에 뜨인 연고, 혹은 이들을 버린 자로부터 내 손에 안기기까지의 연고, 그것들의 숙명이 미안스럽다.   겨우, 내 뜰에 오려고 씨앗에서부터 저들이 견딘 그 긴 역정을 생각해 보라.   올 여름 열릴 진보랏빛 가지 몇 개 루비빛 고추가 익을 늦가을까지 나는 황후처럼 걱정이 없을 것이지만 때때로 후회도 하면서 이들을 본다.           ---------「후회」전문   우리집 문패는 작고 초라하다. 남 보기에 하찮을 우리 행복의 크기, 남편의 겸손이 내 순종을 불러 거기 휘파람 불면서 걸려 있다.
97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3> /심 상 운 댓글:  조회:24  추천:0  2019-07-12
김석규의 시- 「오래된 우물」  「배를 깎으며」   앵두나무 그늘이 희미한 등불로 걸려 있다. 세월을 등지고 앉아 하얗게 늙어만 가는 연기 매캐한 부엌 쪽에서 타는 기침소리 기억의 먼 두레박줄을 타고 내려가면 아직도 이가 시려오는 새파란 물맛 어두컴컴한 바닥에 꽂혀 있는 은비녀로 새벽마다 별이 후둑이는 정화수 사발 조금은 서러운 후예들이 타관을 떠돌며 지치고 더위 먹을 때마다 생각하는지 한나절 내내 낮날이 하염없이 앉았다 간다. ----------------- 「오래된 우물」 전문   은빛 과도에도 향기가 번진다. 한 겹 젖은 문을 밀면 맨살의 과육 진한 과즙의 수심 아래로 유영하는 지나간 봄밤의 출렁이는 달빛 유역 흐드러지게 핀 꽃그늘 속으로 마을 큰애기들 떼지어 들어가고 그 뒤를 총각들이 우우 몰려가고 밤새도록 하얗게 들락거렸으니 한낮의 잉잉대던 꿀벌의 날개소리여 하루가 다르게 배는 불러오고 남풍 불어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 빗는 벽사창 환히 비쳐지는 구중심처 땡볕을 나서면 한 점도 흐트러짐 없이 더러는 태풍으로 모질게 부대낀 자리 단맛을 채우기 위해 수신제가하였던 이제는 둥그런 보름달로 높이 떠 사각거리는 향기 삼경을 다 채우고 남는다.   ------------------ 「배를 깎으며」전문   지나간 한 시대(1930,40년대)의 한국적 생활정서를 개성적인 화폭에 담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 요즘 가장 높은 호가呼價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를 업은 아이의 모습, 길거리에 광주리를 놓고 앉아 있는 아낙의 모습 등 아주 단순한 대상의 그 서민적인 것들이 우리들 집단의 기억 속 맨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그리움의 정서를 일깨우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나는 김석규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그의 시편들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가 주는 매력의 근원을 더듬으며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김석규의 시편에 담겨 있는 시적 대상과 정서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지나간 시절의 정서를 되살려주는 것과 어떤 주장이나 관념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김석규의 시 속에 담겨 있는 향토언어와 색채는 시인의 개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독자들을 아늑하게 감싸 안는 힘을 발휘한다. 그 향토색 이미지의 언어들은 박수근의 그림처럼 당시 사람들이 안고 뒹굴었던 슬픔과 기쁨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그 정서의 그림자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DNA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오래된 우물」에서 오래된 고향집 우물 속 새파란 물맛으로 남아 있는 시인의 의식意識의 원형을 만난다. 이 새파란 물맛은 어머니 마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앵두나무 그늘, 희미한 등불, 기침소리, 은비녀, 정화수, 낮달” 등은 흰 옷 입고 이 땅에 살다 가신 우리들 할머니나 어머니의 그림자와 잘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을 아련한 기억의 나라로 끌어들인다. 잊어버린 듯하지만 마음의 밑바닥에서 물무늬처럼 떠오르는 고향의식. 이것은 이미지의 형상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누구나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영원한 것이기에 공감의 폭이 깊어진다.「배를 깎으며」도 청각과 시각을 통한 회화적인 표현이 시의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배 하나가 익을 때까지의 과정이 진한 이미지의 영상으로 떠오르면서 감미로운 맛을 풍긴다. 라고 봄밤에 하얗게 핀 배꽃 아래서 마을 큰애기(처녀)들과 총각들이 벌이는 사랑놀이와 그로 말미암아 배가 불러오는 배의 이야기가 시의 질량을 풍성하게 부풀리면서 재미를 준다. 그리고 싱싱한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이 생명감은 생명의 기쁨이 뿜어내는 봄밤의 무르익은 향기다. 그 속에는 자연의 오묘奧妙한 관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것을 나타내려는 시인의 의식이나 의도가 잘 감춰져 있어서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시어의 쓰임에서도"벽사창, 구중심처, 수신제가, 삼경"등 고전적인 언어들이 풍기는 맛도 음미할만하다. 나는 김석규 시인의 항토색이 짙은 회화적인 이미지에 늘 시선이 끌리곤 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지속되어 온 그의 연 가름이 없는 줄 시 형태의 시형詩形에 이제는 친근한 느낌마저 갖는다. 그의 시형詩形이 그의 개성(캐릭터)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더 주목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하고 그 사실 속에서 압축된 정서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그의 시기법의 건강함이다. 그의 초기시「파장」이나「황톳길」「산동네 사람들」에서 발견되는 사실성과 서민의 애환과 저항의식의 건강함은 아직도 그의 시에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오래된 우물」과 「배를 깎으며」에서도 사실적인 영상미가 시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 김석규(金晳圭) : 1976년 에 「봄언덕」「초동」「삼천포 기행」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파수병」「늪에다 던지는 토속」「풀잎」「닭은 언제 우는가」「백성의 흰옷」등 다수   정연덕 시인의 시-「황토黃土길․8-황지黃池의 가을」「청풍고물상淸風古物商」   막장의 우리 모습 눈여겨 보았는가. 흰 이빨로 허허 웃는 검은 삶을 보았는가.   바람처럼 지나가는 우리의 세월 우린 벙어리가 아닌데 왜 말이 없는가.   석탄처럼 굳어진 우리들의 걸음걸이에 채여 휘청거리는  또 하나의 하늘을 보았는가.   말라가는 눈물도 얼고 젖은 이마에도 성에가 끼이는 산읍山邑 황지黃池의 가을은 춥고 우린 빙점氷點에 섰는가.  --「황토黃土길․8-황지黃池의 가을」전문   제천군 청풍면 사무소 산허리를 따라 내리면 전기다리미 가슴 뚫린 새마을 스피커 공사판 노동자의 곡괭이 날 삽날들이 고단한 소임을 다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다.   입 깨진 병들도 혼자 울던 쭈그렁 깡통들도 산골짜기 고물상에 고단한 육신을 맡기고 저마다 깊은 잠에 빠진다.   길 건너 능강집 미스장張이 부르는 동백아가씨와 그 빨알간 입술과 고물상 주인 박씨가 부르는 철늦은 유정천리有情千里 노랫소리가 우리의 가슴에 한 잎 두 잎 낙엽으로 쌓인다.   담장 밑에 피어난 들국화 몇 송이 하늘을 우러르며 흙먼지로 분칠을 한다. -------「청풍고물상淸風古物商」전문   시의 진정한 아름다음이 언어의 수사修辭에만 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언어의 분칠이 더덕더덕 묻어나는 시들은 허망하다. 그렇다고 시가 언어의 수사에서 너무 멀어지면 언어예술로서의 존재가치가 상실된다. 그래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갈등은 영원한 숙제로 시인들의 짐이 되고 있으며, 그 짐이 오히려 시의 무한한 매력을 낳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연덕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안고 있는 순수성이 언어의 기교를 뛰어 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자질구레한 기교를 뛰어넘어서 사실(진실)이라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그의 시는 이 땅의 서민들의 애환과 눈물을 맨 몸뚱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그의 시를 세우고 있는 든든한 기둥이다.「황토黃土길․8-황지黃池의 가을」은 강원도 태백산 깊은 골짜기 황지 탄광에서 석탄가루에 시커먼 검둥이가 되어 탄광의 막장에서 광부들의 모습을 생생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시로 열어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적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막장의 광부들은 이 땅의 변두리에서도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스한 시의 눈길을 주는 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면 쉽지 않다. 그리고 시인과 대상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감동의 파장을 일으킬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의 첫 연 가 더욱 가슴에 닿는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통해서 한 시대의 현장과 사물과 인물들을 사실적인 기록으로 남긴다.「청풍고물상淸風古物商」은 시인의 눈이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서 1970년대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표정을 통해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1970년대의 흑백사진을 보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 시는 뛰어난 사실성과 기록성을 보여주는 시로 평가된다. 첫 연의 에는 시인의 어떤 관념도 정서도 주장도 들어가 있지 않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나열하였을 뿐이다. 이 무심한 듯한 사실의 나열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 하고 있는지, 굳이 사물시의 이론을 붙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둘째 연라는 구절이 서민들의 삶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우리들 인생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시의 깊이가 무한하게 느껴진다. 이런 정적인 이미지의 흐름이 셋째 연에서는 라고 동적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시의 사실적인 생명감이 활기를 띠고 있다. 나는 정연덕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음미하면서 시대의 거센 흐름 속에서 우리들의 시가 살아남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나 관념의 허망함을 되새겨 보았다.   * 정연덕(鄭然德): 1977년 에 「3월의 부유富裕 」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달래강」「박달재」「망종일기」「흐르는 산」 「풀꽃들의 변주」(시선집) 등   안혜경 시인의 시- 「밤의 정원에서 들려오는」「등나무의 노래도」   네가 가버린 후 혼자 남아 밤과 마주한다 너를 맞이하는 것은 따스한 불빛 밤의 정원에서는 결코 네가 들을 수 없는 고통에 찬 소리들이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손을 내려뜨리고 있는 나무들의 몸에서 새벽이 되도록 피가 흐르고 그제야 정원은 조용해진다 결코 네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내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바람조차 나무들의 손을 잡으러 오지 않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지 않는다 --------「밤의 정원에서 들려오는」전문   봄볕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다 뚫고 나갈 수 없는 울타리 틈새로 희미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결국 울타리 앞에서 끝난다   가로막혀 있는 길 앞에서 그림자조차 방금 멈추었다 벽이 수런거린다 누구인가 얘기를 한다   봄볕은 물밑보다 더 고요하여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의 한가운데 서서 길을 찾지 못하고   주위는 너무 익숙하다 어떤 추억도 생겨나질 않는다 등나무의 노래도 듣지 못한다   그림자와 나 그리고 봄볕의 한가운데 너무 환한 빛 속에서 길은 날아가버린다 -----「등나무의 노래도」전문   환상幻想은 현대시의 중요한 표현기법 중의 하나다. 현실의 욕구가 아무리 강해도 시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시적 공간으로 변모된 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환상 속에는 현실에 대한 풍자나 비판의 공간도 들어가지만, 공리적인 가치판단에서 벗어난 환상 속에는 시인의 심령적心靈的인 무한한 어떤 힘이 작용하여 생명의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축축한 물기가 도는 생명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시의 환상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언어 속에서 어두운 환상의 덩어리를 부둥켜안고 살아온 안혜경 시인의 단독자적인 고독한 시의 여행은 2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편들 속에 들어 있는 절망, 고독, 불안, 공포 등의 심리적 요소들이 그의 시에서 빚어내는 어둡고 칙칙하고 음울한 환상의 세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정서에 속하는 것이지만, 문명의 그늘 속에 숨어 있는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마음의 상처로 확대될 수 있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환상의 세계는 그가 현실인식과 대응에서 자기만의 세계와 기법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공리적인 가치나 관념 등 외적요소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시인의 내면의식과 답답할 정도로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독특한 정서와 감성이 빚어내는 언어의 세계는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특유한 개성의 세계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속 세계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짧고 함축된 형식의 언어로 자기의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의 시편들은 독자에 대한 배려나 무엇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순수한 독백언어일 수밖에 없다.「밤의 정원에서 들려오는」에서도 라는 구절에서 그의 독특한 환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에서 피를 흘리는 나무와 어둠과 정원과 바람은 자연현상이 아닌 시인의 심리적 내면을 은유隱喩하는 표현이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이렇게 환상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 동안 숨겨져 있던 자기내면의 빛을 향해 의식의 채널을 강하게 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어둠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둠과 빛 즉 환멸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 빛의 의식이「등나무의 노래」에서 드디어 라고 폭발적인 선언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의 끝 연에서 가로막혔던 길이 빛 속에서 날아가버리는 장면은 안혜경 시인의 시에서 중요한 의미를 암시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정신적인 순간을 그려낸 것으로도 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안혜경 시인의 정신을 억누르고 있던 절망적인 그림자들과 어두운 자의식自意識의 무거운 굴레가 빛 속에서 사라져버린 길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의 큰 변화를 의미하고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초기시에서 시작되어 20여년 간 지속되고 있는 그의 음산한 시세계는 박재릉의 한국 샤머니즘 시의 밤과 비교될 수 있는 한국 현대시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끔 그의 어두운 환상이 주는 마력魔力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 안혜경(安惠景) : 1982년 에 「망제가」로 추료 등단함. 시집: 「강물과 섞여 꿈꿀 수 있다면」「춘천 가는 길」「숲의 얼굴」「밤의 푸르름」「바다 위의 의자」 등
97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2> /심상운 댓글:  조회:14  추천:0  2019-07-12
배정웅 시인의 시- 「대어大魚」 「신神․사랑」    수중水中에서 난데없이 순백의 상아건반象牙鍵盤 두드리는 소리로 울리다가, 이 지구의 가장 높은 높이에서 낙하하는 내 영혼靈魂의 깨끗한 물소리로 출 렁이다가, 푸드득 서너 마리 새의 일제히 깃 치는 소리로 치달려 오다가, 돌 연 일진一陣의 돌풍으로 변신하여 불다가, 그믐 밤 하늘의 천둥처럼 비늘의 섬광閃光 번득번득이며 졸지간에 내게 몸 꽂혀오는 대어大魚 한 마리, 정작 피 흘리며 나둥그러지는 것은 대어大魚가 아니라 다섯 자 여덟 치의 나.                                                                                 ---「대어大魚」전문  내 일찍이 단 한 번도 뵈온 일이 없는 신神을, 이른 아침 생生의 혼미昏迷에서 깨어나 이를 닦다가 가을 높은 하늘을 치올려 보던 일순一瞬 , 처음으로 뵈었더이다.    내 일찍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무구無垢한 사 랑을, 통근버스 속에서 낮선 여자와 건전지乾電池 모양 몸을 잇대어져 있다가 처음으로 느꼈더이다.    ---신神은, 내 한 입의 물먹음이 이루는 공간空間과 질량質量 속에서 그득히 비취이시고 물결치시더이다. 나도 잘 모르는 무슨 부호符號 같은 거로 찌르르 찌르르 끝없이 수신受信되어 오더이다, 무구한 사랑 은.                                         --------「신神․사랑」전문   배정웅의 시편들에서는 생동하는 감각이 물질物質처럼 만져진다. 그것은 그의 시편들이 체험 속에서 태어난 현장의 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의 체험은 상상과 조화를 이루어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형이상의 감각과 만난다. 「대어大魚」는 어느 날 예당저수지에서 대어大魚를 들어 올릴 때의 감각을 "상아건반象牙鍵盤 두드리는 소리→ 내 영혼靈魂의 깨끗한 물소리→ 푸드득 서너 마리 새의 일제히 깃 치는 소리→ 그믐 밤 하늘의 천둥처럼 비늘의 섬광閃光 "등 점층적인 기법으로 보여주다가 라는 놀라운 체험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대어大魚와 내가 한 몸으로 인식되는 순간의 놀라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낚시꾼들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붕어 월척越尺을 낚는 것이다. 그래서 월척을 낚으면 어떤 사람은 탁본을 떠서 날짜와 장소,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전장에 나가서 획득해 온 전리품같이, 아니면 자신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기 위해서 액자에 넣어서 방의 벽에 걸어 놓는다. 그런데 그는 대어大魚 한 마리를 건져 올리던 날, 물고기 대신에 다섯 자 여덟 치의 내가 피투성이로 나둥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와 물고기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의 한 순간을 체험한 것으로 인식된다. 물고기 한 마리를 통해서 우주와 내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낚시 줄처럼 팽팽한 인연의 끈으로 묶여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주의 법칙을 발견한 것과 견줄 수 있는 발견이다. 이 시는 그러한 순간의 사실을 생동하는 감각의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어서 강한 느낌을 준다.「신神 ․사랑」에서도 그러한 인식의 순간이 담겨있다. 신의 존재와 사랑의 느낌을 감지하고 인식하는 순간을 일상생활의 사실적인 체험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사실 우리들이 잊고 사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세상 어디에도 진리의 모습이 없는 데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동양의 선불교에서는 이를 깨우치기 위해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라는 말이 사용되고 그것이 진리를 찾는 큰 길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이 말의 뜻은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천千 가지로 다르지만 그 문은 어디에나 있어서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神이나 사랑이 존재하는 곳은 어떤 특정한 장소만이 아니라 이 세상 구석구석 어디에나 다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신神을 만나는 시간도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어느 때나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에 신神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다고 한다. 그래서 그 순간의 경험을 온다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자신의 정신을 투명하게 유지하면서 사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존재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은 나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그곳에 온전히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의 시인은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한 순간
97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1> / 심 상 운 댓글:  조회:19  추천:0  2019-07-12
양채영 시인의 시-  「개망초 너무 작은 씨」「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언제부턴가 겨울 벌판에 팔짱을 끼고 혼자 서 있는 그런 나무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옆에 미농지 한 장 날리고 그 미농지 속에 무슨 불덩이가 싸여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겨울 국그릇을 뒤엎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잘 모르는 하이데커가 죽었다고 큰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를 압도시키지 못한 그의 콧수염보다 전염성이 강한 국제독감國際毒感이 네게 와 있다. 별 상관도 없는 것들이 나를 화상火傷입게 하고 얼게 하고 개망초의 너무 작은 씨앗들이 너무 큰 얼음덩이 속에 묻혀 겨울을 난다는 그런 생각의 얼음덩이가 덜 풀려 있다. -----「개망초 너무 작은 씨」전문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사이로 단조短調의 구름 몇, 비산비야非山非野에 비명에 간 울음 몇, 오기傲氣들은 빨갛게 익어서 산천에 떨어진다. 은사시나무잎 떨어지는 자리에 귀 밝은 바람만 쌓이고 아무리 흔들어도 묵묵부답黙黙不答인 저 쪽 커다란 응답應答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전문   양채영 시인의 시편들은 거듭 읽고 음미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 즉 대상을 일정한 거리에 떼어 놓고 응시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여백을 남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유롭게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개망초 너무 작은 씨」에는 그의 독특한 상상이 눈길을 끈다. 겨울나무 옆에 불덩이가 미농지에 싸여 있다는 그의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열게 한다. 이 시에서 겨울과 불덩이의 대립적인 관계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그리고 겨울과 뜨거운 국그릇의 관계는 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상반된 관계는 오히려 상반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게 확대된다. 죽음과 삶은 겉으로 볼 때에는 상반된 개념이지만 죽음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보면 결국 죽음과 삶은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겨울 속에 들어 있는 봄의 기운을 불덩이나 뜨거운 국그릇이라고 은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시는 그런 수사修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들은 왜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의 집을 짓지 못하고 외국의 철학에 매달려야 하는가를 하나의 화두로 제기하고 있어서 관심을 집중시킨다. 있다고 그는 독백조의 말로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 결론 짓는다. 독자들은 그의 논리보다도 그의 상상력과 직관에 더 동감하게 된다. 서양철학의 논리성보다도 동양의 직관이 더 날카롭고 파괴적일 때가 있다. 어떤 중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불佛(불법, 진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운문雲門스님은 한 마디로 건시궐乾屎橛(변소간의 뒷쓰개 작대기)이라고 대답했다. 불佛이 진리를 의미하는 숭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왜 운문스님은 더러운 것을 들어서 그것이 불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고정관념을 파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 말 속에는 불법에는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는 의미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깨달음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어법을 선禪에서는 도어법倒語法이라고도 한다. 이 시의 끝 부분는 구절은 자신의 사유에 대한 성찰과 서양철학의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꼬집는 은유다. 그러면서 생각의 얼음을 풀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은 이러한 동양적 직관의 세계를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대적인 아픔도 한 아름 안고 있다. 는 앞 구절을 살펴보면 시인이 얼마나 깊은 사유 속에 잠겨 있는지 알게 된다. 구름 몇과 울음 몇은 서로 대구對句가 되어 의미를 심화시킨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울음 몇 점의 의미는 구름보다 더 절실하고 크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구름 몇 점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그 응답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선禪에서 말하는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다. 그래서 이 묵묵부답은 그 자체가 우주의 실체를 드러내는 큰 응답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응시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영원을 보고 있는 직관의 눈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양채영(梁彩英:):1966년 에 「안테나 풍경」「가구점」「내실의 식탁」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노새야」「善․그 눈」「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지상의 풀꽃」」「翰林으로 가는 길」「그리운 섬아」「그 푸르른 댓잎」등   송수권 시인의 시- 「여승女僧」「시골길 또는 술통」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짓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 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숨어 산다는 걸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여승女僧」전문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물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시골길 또는 술통」전문   송수권 시인의 시편 속에 담겨 있는 서정은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그리고 사실성과 서사성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에너지를 전한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세련된 언어에 의해서 감칠맛을 내고 있다.「여승女僧」은 소재素材에서 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의 「여승女僧」을 떠올리게 하지만 서사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다만 여승의 모습이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연상聯想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 시를 찬찬히 읽으면 송수권 시인의 내밀한 정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의 시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를 조금 짐작하게 된다. 그의 순수 서정시는 가끔 꿈속에서 만나는 여승에 대한 감정의 순수한 발산이다. 는 구절은 미당未堂이「나의 시詩」에서 자기의 시는 봄날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풀밭에 앉아 있는 어느 친척 부인의 치마폭에 풀밭에 홍건히 떨어진  낙화를 주워 모아 놓는 수진무구한 마음의 행위였다고 고백하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순수무구한 감정의 행위가 아니면 서정시는 태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의 서정시들은 공리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현상에 영합하여 이미 정해진 수순에 따라 전개되는 시들이 그것이다. 그런 시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정시라고 말할 수 없다.「여승女僧」은 공리성이나 사회성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자기만의 순수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투명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그의 서사(추억담)는 독자들에게 어떤 논리적 해석으로도 풀이 할 수 없는 애련哀戀한 정서의 세계로 유인한다.「시골길 또는 술통」은 송수권 시인의 신명이 즐겁게 솟구쳐 나온 시다. 흡사 한 판 굿거리를 펼치듯 풀어내는 그의 신명은 정말 순진무구하여서 독자들의 마음까지 햇빛으로 가득하게 하고 그 여운을 오래 남긴다. 은 사물(술통)과 시인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신명의 세계다. 점층적으로 반복되는 동적인 이미지가 계속하여 뿜어내는 에너지는 허무의 길을 죽이는 에너지로 상승한다. 그것이 이 시의 의미공간이다. 나는 그의 정서가 그의 열린 마음에서 용암鎔巖처럼 타오르고 솟구치고 있기 때문에 더 가슴에 와 닿고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허무를 이겨내는 그의 시적 방법에 깊이 동감한다.   *송수권(宋秀權):1973년 에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다시 산문에 기대어」「야도」「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등 다수   오진현 시인의 시 -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밤비」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밤비」전문    오진현 시인의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그의 외롭고 치열한 시 쓰기의 한 결정체다. 1988년에 상재된 시집「탈관념」은 시단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2003년 디지털리즘의 선언으로 인해서 그의 시운동은 확실한 거점을 만들고 있다. 그의 탈관념은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 어떤 감상도 배경지식도 들어가 있지 않은 시「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은 직관적인 감성이 언어와 결합하여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여준다. 그 환상은 동적인 에너지를 안고 스스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깊은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콩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고정관념(사전지식)에 묶여 있는 독자들은 당돌하고 낯선 느낌이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는데 주저한다. 그리고 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가로수나 황단보도 빌딩의 콩크리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언어의 끈을 잡고 늘어진다. 사실 이 시는 그런 독자들의 의식혁명(언어혁명, 깨우침의 훈련)을 위해서 감성수련感性修練의 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시다. 이 감성수련은 언어에서 해방된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직관을 통해 체득하게 한다. 그래서 오진현 시인은 「탈관념」시집의 후기에서 이 시의 감상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이 시를 마음속으로 깊이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눈앞에 깨끗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을 상상해서 그린다. 다음에 시의 진행에 따라서 공을 튀기어 본다. 공이 점점 높이 뛰어오르도록 한다. 그래서 천정도 뚫고 올라가서, 하늘 높이 뛰어 오른다. 이렇게 뛰는 상상을 반복해서, 파란 하늘의 끝까지 뛰어 오르게 하여 별로 박힐 때까지 계속한다. 이런 일을 반복한다. 즉 이렇게 해서 실제로 뚫고 지날 수 없는 관념의 벽인 천정도 뚫고, 중력도 뚫고 나서 눈을 떠 보도록 한다. 그러면 이 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시의 모든 것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충동적인 의식의 흐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던 컵이며 휴지며 모든 사물이 뜨는 느낌(감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 보면 관념의 어떤 한恨이나 얘기(내용)로부터 오는 감동보다 더 깨끗한 탈관념의 본질적인 직감만으로서 느낀, 감동과 그것의 무의식 속에서 조합되어 나오는 깊은 내용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렇게 실제의 체험을 통한 탈관념의 훈련은 언어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선禪의 세계와 같다.「밤비」는 이런 탈관념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내면의식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순간 포착의 촬영기법 즉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라는 디지털리즘의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그는 깊은 명상(집중)의 의식 속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그때 그는 빗소리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 빗소리는 문득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의 미루나무을 떠올리게 하고 비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그는 아무런 관념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라고 자신의 내면의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과 깊은 의식의 세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파란 에너지의 불빛이다. 그것은「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 들어 있는 동적 에너지와는 다른 내면의 에너지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껍질을 벗은) 생동하는 물질(생명체)로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오진현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감지되는 이런 독특한 감각을 디지털리즘이 내재하고 있는 야성野性의 사고에서 솟아오르는 생생한 본질적인 감각이 아닌가라고 나름대로 짚어보면서도, 알 수 없는 그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즐거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진현(吳鎭賢): 1975년 에 「입술 푸른 뻐꾸기」외 2편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동진강 월령」「草民」「탈관념」「東學詩」「딸아 시를 말하자」등
97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0> / 심 상 운 댓글:  조회:20  추천:0  2019-07-12
이광석 시인의 시---「석류를 따며」「나무 1」  그대 내 어둔 가슴속 설레임 하나 기다림 하나 키우더 니 마침내 노을빛 작은 등 나를 향해 켜들었네. 옷고름 푼 늦가을 억새들 취한 듯 수줍은 듯 젖은 어깨 가릴 때 나는 그대 정수리에 알몸의 달빛으로 꽂히리. 아무리 사는 일 에 부대끼고 두렵고 낯선 어둠 세상의 빈집들을 기웃거릴지 라도 따뜻했던 아름다웠던 해질녘 그대 몰래 불 밝힌 입맞춤 불러내진 못하리. 먼 훗날 우리 사랑 몸져 쓸쓸한 추억 속으로 떨어질지라도 이별의 예감만은 아껴두리. 찬 서리 하얗게 그대 창문에 커튼을 내릴지라도 내 가슴속 은밀히 숨겨둔 작은 방 한 칸 높고 깨끗하게 비워두리. 안 으로 안으로만 묻어온 빠알간 애모 가지가지마다 총총 걸 어놓고 그대 오는 길목 다시 환히 비추리.                         ---「석류를 따며」전문   나무는 제 몸 속 어딘가에서 목탁소리를 듣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천년 푸른 남해 해조음海潮音소리도 듣는다 제재소에서 갓 쓸려나온 톱밥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도 듣는다 나무는 하루 종일 필요한 소리만 듣는다 새 움을 틔우고 잎을 내리고 헐벗은 가지마다 깊은 생각 헹구어 낼 때도 나무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전기톱으로 고문을 당하고 뿌리까지 뽑혀도 나무는 낼 수 있는 소리가 없다 겨울밤 달빛들이 실핏줄처럼 풀어내는 대금 산조 한 소절도 흉내낼 줄 모른다 나무는 오로지 남의 소리 듣는 것이 그지없이 행복하다             -----「나무1」전문     이광석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진동振動”이란 말을 생각했다. 마음의 진동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솟아오르는 기쁨이나 환희의 감정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상승의 에너지다. 그래서 그 진동은 모든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다. 그의 서정시가 관념의 장벽을 넘어서는 생생한 마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도 그런 에너지의 작용과 관련되는 거 같다. 그 서정은 그의 깊은 사색과 명상瞑想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석류를 따며」에서는 석류라는 은유隱喩의 심상을 통해서 자신의 영원한 기다림(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대중적인 흔한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그의 기다림은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는 지순한 감정으로 승화되어서 독자들의 정신에 진동의 파장을 남긴다. 그것은 기다림(그리움)이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상승시키는 근원적인 정신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는 이 시의 끝부분의 구절들이 더욱 향기롭게 감지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 속의 화자가 은밀한 작은 방 한 칸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그대는 누구일까. 에 대한 해석은 만해시萬海詩의 님과는 다른 차원에서 해석되겠지만 앞에서 말한 시인의 정신을 상승시키는 존재, 생의 근원이 되는 빛과 같은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나무 1」과 연관시켜보면 더 분명해진다.「나무 1」에서는 자신의 소리 즉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서 공空 또는 무無의 세계에서 감지하는 그지없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제 몸 어디에선가 목탁소리를 듣는 나무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고 한다. 고 한다. 이러한 정신의 경지는 앞의 시「석류를 따며」에서 보여준 기다리던 그대를 맞아들인 후의 세계인 것 같다. 그대(깨달음)가 들어 와 앉아서 목탁소리를 들려주는 환희의 세계에서는 외부의 그 무엇도 모두 그지없는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밝고 긍정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광석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맑고 환한 세계로 들어가는 기쁨을 안아 본다.   *이광석(李光碩):1959년 에 「바위」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겨울나무들」「겨울을 나는 흰새」「겨울 산행」「잡초가 어찌 낫을 두려워하랴」「삶 그리고 버리기」(시선집) 등   노향림 시인의 시---「창」 「꿈」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김 스테파노가 운명했다.   그에게는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벗어놓은 전자시계에서 풀려나간 무진장한 시간이 전부였다.   그가 나간 하늘 뒷길 쪽으로 창문이 무심히 열린 채 덜컹거린다.   한평생 그에게 시달렸던 쑥부쟁이꽃들이 따사로운 햇볕 속 상장喪章들을 달고 흔들리는   조객弔客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곳.       ---「창」전문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밭 사이에 쳐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 소나무들은 앙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 방房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냄새 바람사이의 흐릿한 호얏불, 오래 문닫힌 대장간에 쌓여있는 정적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아,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꿈」 전문   인식과 표현은 시의 중심축이다. 그래서 시의 대상은 시인이 감지하고 인식한 주관적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노향림 시인은 자신이 감지하고 인식한 대상을 감각적으로 객관화시키는 언어표현에 남다른 특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개인적인 감정표현을 억제하고 객관적 시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모더니즘(주지주의)의 기본적인 기법이기도 하다.「창」에서도 그런 그의 언어기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그의 시를 대하는 독자들은 그의 독특한 시각, 신선한 감각, 깔끔하고 냉정한 언어에 호감을 갖기도 하지만 너무 감정을 죽이고 있어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지 않는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깊이 읽어보면 그의 차가운 언어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용암鎔巖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섬세한 눈길이 집어내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들의 실존의 모습도 만나게 된다. 「창」에서 보여주는 김 스테파노의 죽음과 그의 한 생애를 증언하고 있는 것들 - 손바닥만한 밭,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벗어 놓은 전자시계-를 통해서 무소유無所有의 삶이 어떤 모습의 삶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끝부분 이 시의 감동과 여운을 더 길게 남긴다. 그 속에는 남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모두 주어버리는 이타행利他行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 스테파노의 가난한 삶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최대한으로 절제된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향기로움과 이 암시하는 우주적인 인식 속에 들어 있는 김 스테파노의 죽음이다. 어쩌면 그 무진장의 시간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끈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무심한 듯 슬쩍 드러내고 있어서 인상적인 그림을 남기고 있다.「꿈」에서는 사람냄새를 그리워하는 노향림 시인의 시세계의 원형原形을 만난다. 이 시 속에 들어가 있는 바다, 뻘밭, 집 한 채, 호얏불, 대장간, 육조 다다미 방房,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는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꿈의 세계다. 시 속의 화자는 복막염을 앓고 누워 있다. 누워 있는 곳은 육조 다다미가 깔린 방. 그는 누워서 어릴 적 뛰어 놀던 고향의 뻘밭과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대장간 집의 고요한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환상의 세계는 그의 정신(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원형적인 무의식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그는 이러한 무의식속의 생명세계를 라고 매우 세련된 감각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노향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냉정한 시선으로 무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창」도 호감이 가지만 어릴 적 고향 바다의 생명감으로 가득한「꿈」의 세계가 노향림 시인의 출발점이면서 귀착지歸着地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정감이 갔다.   *노향림(盧香林):1970년 에 「불」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K읍기행」「눈이 오지 않는 나라」「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연습기를 띄우고」(시선집) 등   안수환 시인의 시- 「겨울산」「그 후」   겨울산은 비우는 곳입니다 비워서 바람을 채우고 다시 굳은 몸을 풀어 춤추고 메마른 떡갈나무 잎이 춤추는 곳입니다   숨은 새도 다 날아간 산에 햇빛은 거기 와서 별볼일이 없습니다 벌레들은 죽고 절벽은 더욱 무너져 혹은 생명과 부활과 믿음까지 꺼져 구름은 거기 와서 별볼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쓸쓸한 겨울산은 우리들의 한계가 아닙니다 비로소 완전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감추고 감추던 물소리가 다만 골짜기에 박힌 돌이 되거나 탐내고 탐내던 집중이 북망산에 드러누운 봉분이 된 연후 그래서야 몸을 비우는 겨울산입니다   이렇게 한가지로 흘러다니는 바람에게 골격을 보이는 겨울산은 이승으로 무르녹아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습니다   이 겨울산에 깊이 들어 온 후 우리는 비로소 남은 힘이 있습니다 찬찬히 겨울산을 밟고 내려서는 남은 힘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조금 있다가 새도 부르고 벌레도 부르고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춥니다  -----「겨울산」전문   두보 논어를 읽다가 덮어버리고 나는 이따금 중앙시장 뒷골목으로 나가본다 채소전 홍씨 아주머니가 내 친구라는 것을 홍씨네 실파 꼬부라진 됫박 새우들이 다 안다 정말이지 호고好古 호고라고 떠들은 공자의 말씀이 실없는 소리였다   잡쉬봐 잡숴봐 이 새우젓국물이 얼마나 달다고       -----「그 후」전문   현대시에서 시의 건강성을 진단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래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중심에 놓고 본다는 것은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건강성에서 삶의 현실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안수환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현실과 대결하는 건강한 정신의 빛이 살아 있는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예언자적豫言者的인 시인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어서 읽은 후에 생각의 여운을 남긴다. 「겨울산」도 그런 시편에 속한다. 이 시는 발표시기로 보아서 1980년대의 정치적 현실과 관련지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의 현실과 결부시킬 때 현실참여(저항)의 시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겨울산」은 그런 시대적 현실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 현실을 버린 겨울 산으로 비유하면서 견실한 시적 구조로 우리들의 삶의 내면을 투시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이 시가 단순한 현실저항이나 민중시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죽음의 참된 의미와 절망을 이기는 힘의 원천을 암시하고 숨어있는 세계를 발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힘의 근원을 스스로 비우는 것(공空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비워서 바람을 채우는이라고 희망의 근원을 드러낸다. 그것은 겨울 산과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묶어주고 있는 튼튼한 밧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절정을 이루는 끝 연가 던져주는 의미의 확산은 우리들의 삶의 현실로 치환되면서 큰 울림을 남긴다. 절망적인 현실을 날카롭고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냉철한 이성으로 극복(부활)의 발판을 제시하는 이 시는 안수환 시의 건강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그 후」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물인식의 생생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따금 중앙시장 뒷골목에 가서 상인들과 만나고 그곳에 있는 실파, 꼬부라진 됫박 새우들을 만져보는 시인의 정신적 산책은 책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얻는다. 그것은 문자(관념)를 떠나서 선수행禪修行으로 들어가는 스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시의 끝 구절하는 새우젓장수의 말이 책속에 갇혀 있는 언어들보다 얼마나 더 자연(일상생활)과 가까운가를 일깨워 준다. 이렇게 깨어있는 현실인식의 시가 주는 의미와 감동은 시대를 초월하면서 관념의 장식성裝飾性에 치중하는 시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안수환(安洙環):1973년 에 「구양교九陽橋」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멍게나무」「신들의 옷」「징조」「검불꽃길을 붙들고」「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달빛보다 먼저」「충만한 시간」「가야할 곳」「풍속」「하강시편」등  
97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9> / 심 상 운 댓글:  조회:13  추천:0  2019-07-12
  윤석산 시인의 시- 언어의 환상성과 사물성-말의 오두막집 남쪽언덕에서-                       땡초를 위해       1  현대인들은 말의 껍데기만 가지고 산다.      가령 라는 말만해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너를  니 니 하고 나누지만 그  런 에게는 네 마알간 피부, 네 부드러운 머리칼, 네  가 아침마다 사용했을 샴프 냄새, 그걸 헹구던 수도꼭  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투명한 울림 같은 것  들은 모두 증발되고 라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내가  똑두새벽에  홀로 일어나  우두커니 뜨락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간밤 와 잔 게 아니라  너라는 말과 잤기 때문이다.    - 「언어의 환상성과 사물성-말의 오두막집 남쪽언덕에서-」1˜2    말과 말 사이를 떼어놓았다.  조금씩 조금씩 떼어놓았다.  햇살을 받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송사리 소금쟁이 중태기가 헤엄 쳐 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더 떼어놓았다.  남실거리는 물살을 타고 중태기 갈가리 모래무지 빠가사리가 퍼득대고  물비늘이 빤짝인다.  말과 말 사이가 너무 멀어  오늘 밤 달빛을 나눠주러 마을로 내려간 땡초를 위해  징검다리를 놓아야겠다.       ---「땡초를 위해」전문   언어에 대한 성찰은 그것이 사물의 본질로 들어가는 입구入口가 되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는다. 특히 사람들의 눈은 늘 본질보다는 언어의 기표에 현혹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이 본질(실상)보다는 허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에 더 매혹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언어의 그늘진 뒷면을 들여다보는 언어의 껍질 벗기기는 시기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윤석산 시인의 시편에는 이런 현대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다. 그의 시의 바탕에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현대의 언어들이 너무 추상화抽象化(기호화) 되어서 언어의 본적지인 사물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시인의 인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언어 이전의 싱싱한 사물성의 세계를 환기시켜 주면서 본질의 세계로 안내하는 그의 시편들은 현대시에서 독특한 가치를 드러낸다. 그런 그의 언어의식이「언어의 환상성과 사물성-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에서는 실험적인 시도試圖로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그의 사유와 시각이 매우 사실적이고 감각적이어서 신선하게 감지된다. 그것은 《가령 라는 말만해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너를 / 니 니 하고 나누지만 그/ 런 에게는 네 마알간 피부, 네 부드러운 머리칼, 네가 아침마다 사용했을 샴프 냄새, 그걸 헹구던 수도꼭/ 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투명한 울림 같은 것/ 들은 모두 증발되고 라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라는 짧은 시구詩句 속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런 그의 시구는 언어에 대한 그의 깊은 의식과 예리한 촉각을 느끼게 하면서 현대 시인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중요한 도구(언어)에 대한 심층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언어는 본질적으로 사물이 아닌 기호이며 상징(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시인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언어의 한계는 극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한국 현대시에서 보여준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의 실험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시인들은 탈관념의 언어 찾기, 사물과 언어의 거리 좁히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당위성과 언어의식을 강조한다.「땡초를 위해」는 말과 말 사이를 떼어 놓음으로써 생기는 침묵의 세계를 통해서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말이 사라진 침묵 속에서 생기를 되찾는 사물(자연)의 세계는 선禪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참선과 함께 묵언의 시간 속에 머무는 산사山寺의 스님들의 수행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고 극단적인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의 공해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치유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들도 현란하고 난삽한 언어의 사고思考에서 잠시 벗어나 묵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생생한 마음만으로 사물과 직접 대면을 해 보는 것이 자기 시세계의 실상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시향」에 발표된 윤석산 시인의 실험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독특한 발상과 함께 깨어있는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섬뜩함을 느끼면서도《말과 말 사이를 떼어놓았다./ 조금씩 조금씩 떼어놓았다./ 햇살을 받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송사리 소금쟁이 중태기가 헤엄쳐 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더 떼어놓았다./ 남실거리는 물살을 타고 중태기 갈가리 모래무지 빠가사리가 퍼득대고/ 물비늘이 빤짝인다.》라는 그의 참신한 감성感性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은 그의 시편들이 우리들의 의식을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아득한 원시原始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또 새로운 깨우침의 사유와 함께 일상과는 다른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 윤석산(尹石山) : 1972년 에 「接木」「巫女」「용왕굿」이 천료되어 등단함. 시집: 「亞細亞의 풀꽃」「벽속의 산책」등   박명용 시인의 시-  「구경거리」「몸」     울안에 갇힌 곰을 보러 갔더니 곰은 는 듯 줄줄이 밀려드는 인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인간이 곰을 구경하는지 인간이 곰의 구경거리인지 하느님 이 세상 울은 어딥니까. -------「구경거리」 전문   태풍 루사가 지나간 강변에 남루한 양복상의 하나 볼썽사납게 축 늘어져 있었다 무심코 집어들어 모래를 훌훌 털며 이리저리 훑어보는데 단추에 묻었던 햇살 한 줄기 사정없이 내 눈을 찔렀다 순간, 정신 번쩍 들어 그 자리에 급히 놓았다 저 옷 입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다가 문득, 내 옷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집어들어 보았다 아, 그것은 양복이 아니라 이른 새벽 깨어나 두렵게 만져보던 내 몸의 일부였다      --「몸」 전문   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는 읽고 난 뒤에 묻어나는 언어의 맛과 곱씹어보는 생각이다. 이런 곱씹음의 여지가 남아 있는 시는 독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리고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시각視角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준다. 박명용 시인의 시「구경거리」는 그런 면에서 다른 시들과 구별된다. 그는 어느 날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곰을 구경하다가 우리에 갇힌 곰이 오히려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상황전환狀況轉換의 생각에 빠져든다. 그래서 《곰은 는 듯/줄줄이 밀려드는 인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생각 속에 갇혀서 순간적으로 당황한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이 세상 울은 어딥니까.》라는 물음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역설逆說로써 한 순간의 착각이 빚어낸 생각의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각視角을 바꿔보면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는 구경하러 몰려드는 인간의 무리가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편견과 우월감에 젖어 있는 인간들이 오히려 지능이 낮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은 몇 개의 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육안肉眼이고 둘째는 천안天眼 셋째는 혜안慧眼 넷째는 법안法眼 다섯째는 불안佛眼이다. 우리들은 보통 육안肉眼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이 육안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의 중심은 차별(분별)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대립과 갈등을 조성하고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다투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육안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육안에서 벗어난 시각에서 볼 때 비록 우리 속에 갇혀 있지만 분별심이 없는 존재인 곰은 자유롭고 우리 밖에서 차별의 울타리를 쌓고 있는 인간들은  우리에 갇힌 의식(구속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박명용 시인의「구경거리」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화두를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이런 시각 바꾸기는「몸」에서 오도송悟道頌과 같은 새로운 자기 존재 발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태풍 루사가 지나간 강변에서 주운 남루한 양복상의를 보고 그 양복상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옷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양복이 아닌《이른 새벽 깨어나 두렵게 만져보던/내 몸의 일부였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 이 시의 중심 내용이다. 이 시는 시 전체가 점층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독자들에게 시각 전환의 단계를 보여준다. (남루한 양복상의의 주인→ 알 수 없는 누구→ 내 옷 →이른 새벽 만져보는 내 몸의 일부) 그러니깐 이 시의 핵심은 태풍 루사가 지나간 강변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양복상의를 통해서 잃어버렸던(또는 새로운)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과정이다. 그 참모습 찾기는 너/나라는 분별의식에서 벗어난 시인 자신의 열린 의식意識의 눈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의식의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내적 수련 없이는 불가능한 정신의 높은 경지다. 나는 박명용 시인의 사유가 던져주는 존재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는 그의 시적 방법론(시각전환)을 곰곰이 내 나름대로 짚어보면서 그의 시편들이 함축하고 있는 사색의 깊은 맛을 음미하며 거듭 읽는다. 그리고 환한 빛이 보이는 길을 따라가 본다.   *박명용 (朴明用): 1977년 에 「햇살」「모발지대」「편집」등이 추료되어 등단. 시집: 「알몸 序曲」「강물은 말하지 않아도」「꿈꾸는 바다」「안개밭    속의 말들」「날마다 눈을 닦으며」「뒤돌아보기」등       김시종 시인의 시- 「상흔」「우는 농」   민보단民保團 시절에 몰매맞아 미친 영수永壽 흰 수염을 흩날리는 백수광부白首狂夫로 새파란 예비군모를 쓰고 있다   사상이 불온하다고 뭇매 끝에 돌아버린 사내 삼십년이 훨씬 넘은 요즘도 포수만 보면 기겁을 한다   미치면 단명하다는데 이름 잘 지어 장수하는 늙은 광부 영수永壽   오늘밤도 공터에서 모닥불을 지핀다   수염 속에 파묻힌 착한 얼굴 나에게 묘한 감동을 준다 -----「상흔」 전문   머리맡에 놓여 있는 오동장롱이 밤만 되면 웁니다.   오동장롱은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해 오신 거랍니다.   장롱 속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던 입성도 들어 있었습니다.   오밤중에 홀로 깨면 따닥따닥.....장롱 우는 소리에 소름이 끼쳐   장롱을 할머니 방으로 옮겼으면 싶어도 청상靑孀인 어머니는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우는 장롱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장롱에 아버지의 넋이 깃들어 운다는 점장이의 말을 듣고 나서부턴 장롱에 흠이 질까봐 장롱 옆에서 나를 못 놀게 하셨습니다. -----「우는 농」전문   김시종의 시편들은 현실과 밀착되어 있으며 실제의 경험이 들어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언어의 특별한 수사修辭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도 시 한 편이 한 시대의 단면斷面을 예리하게 도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시가 하나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상흔」에서는 우리들이 역사라고 말하는 한 시대의 거대하고 냉혹하고 광적인 체제 속에서 한 인간의 인간성이나 존재성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상이 불온하다고 뭇매 맞아 미쳐버린 백수광부白首狂夫 영수永壽라는 인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언제나 피해만 받고 살아가는 이 땅 민초들의 상징적인 원형을 해학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민보단民保團 시절에/몰매맞아 미친 영수永壽/흰 수염을 흩날리는 백수광부白首狂夫로/새파란 예비군모를 쓰고 있다//사상이 불온하다고/뭇매 끝에 돌아버린 사내/삼십년이 훨씬 넘은 요즘도/포수만 보면 기겁을 한다.》에는 그런 이미지가 압축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시는 이렇게 큰 주제를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무겁지가 않다. 그것은 맑은 눈으로 정확하게 현실의 심층深層을 투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포수만 보면 기겁을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시대의 또 다른 광풍 속에서 집을 나온 영수永壽 같은 인물들이 광화문 지하도나 지하철역에서 웅크리고 자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래서 김시종 시인이 발견해낸 인물은 역사성과 함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백수광부白首狂夫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고대시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처妻의 애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강물에 빠져 죽은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남자) 시대를 넘나드는 그의 현실감각과 풍자성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의미공간을 확대시키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흥미롭게 자극하는 그의 독특한 시 기법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현실감각에 뛰어난 그의 시는「우는 농」에서는 모진전란戰亂 속에서 살아온 이 땅 여인들의 아픈 삶의 일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남편을 잃은 청상靑孀의 여인이 밤마다 듣는 장롱의 소리는 죽은 남편의 울음소리다. 그것은 또 시인 자신의 아버지의 울음소리인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가슴에 그 울음소리의 그림자를 전하고 있다. 시인 자신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솔함이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현대시에서 시를 발견하는 눈은 다양하다. 언어의 기적은 우리들에게 가지각색의 풍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념이 아닌 실제의 사물事物로 만져지는 민중언어의 생명력은 언제나 그 중심에 꿋꿋하게 뿌리박고 있다. 나는 김시종 시인의 풍자 시편들의 단순명쾌함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역사 속에서 진솔하게 다시 살아나는 민중적인 언어들의 영상을 더 인상 깊게 기억한다.    * 김시종(金市宗 ) :1967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69년 에 자   유시 타령조」발표로 등단. 시집 「오뉘」「청시」「 불가사리」 「창맹 의 입」「 교정의 소리」「 흙의 소리」「외팔이 춘희 등」 다수   
972    이브 본느프와 詩選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열음사, 1987) 댓글:  조회:11  추천:0  2019-07-12
이브 본느프와 詩選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열음사, 1987)     극장   1 나는 보았다 그대가 테라스 위를 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대가 바람과 싸우는 것을, 추위가 그대의 입술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대사 부서져 즐거이 死者가 되고자 하는 것을, 번갯불이 훤한 유리창을 그대의 피로 얼룩지게 할 때 오오 번갯불보다 더욱 아름답게.     4 나는 잠을 깬다, 비가 온다. 바람이 그대에게 스며든다, 두우브여, 내 곁에서 잠자는 송진내나는 광야. 나는 테라스 위, 죽음의 구멍 속에 있다. 무성한 이파리들 속에 큰 개들이 떨고 있다.   문 위에, 문득, 그대가 스치는 팔이, 여러 세기를 통해 나를 바친다. 나는 잉걸불의 마을, 순간마다 나는 그대가 태어나는 것을 본다, 두우브여.   순간마다 죽는 것을.   6 어떠한 창백함이 그대를 때리는가, 지하의 강이여, 어떠한 동맥이 그대 속에서 끊어졌는가, 어디에서 메아리가 그대의 추락을 울려퍼지게 하는가?   그대가 문득 쳐드는 팔이 벌려져, 불타오른다. 그대의 얼굴이 떨어진다. 깊어가는 어떠한 안개가 내게서 그대의 눈길을 빼앗아가는가? 그림자의 느슨한 낭떠러지, 죽음의 경계선.   말없는 팔들이 그대를 반긴다, 다른 강변의 나무들이.   7 이파리들 속에서 확실치 않은 상처에 시달리는 사람, 하지만 길을 잃은 발자취의 피에 사로잡혀, 그러고도 여전히 살 수 있는 공범자.   나는 보았다, 싸움 끝에 모래에 파묻혀 그대가 침묵과 물의 경계선에서 망설이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별들이 더러혀진 입 그대의 밤 속에서 밤샘하는 것의 두려움을, 외침으로써 깨뜨리는 것을.   오오 싸늘한 대기 속에서 갑자기 바위와도 같이 석탄의 아름다운 몸짓을 일으키며.   13 오늘 저녁 대지 위에서 밝게 비춰진 그대의 얼굴, 그러나 나는 그대의 눈이 썩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굴이라는 말은 더 이상 뜻을 갖지 않는다.   선회하는 독수리의 밝게 비춰진 내부의 바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이다. 나는 그대를 차디찬 채로 소유한다, 이미지들이 더 이상 뿌리박지 못하는 깊이에서.         나무에게   그녀의 통로 위에서 모습을 감춘 그대들, 그대들은 그녀 뒤에서 그대들의 길을 닫아버렸다 두우브가 죽었을지라도 無가 아닌 채 여전히 빛을 비친다는 비정한 보증인들.   섬유질의 물질인 딱딱한 그대들 죽은 자들의 배[船] 안에서 입을 다물어 그녀가 굶주림과 추위와 침묵의 하찮음을 위해 몸을 던졌을 때, 내 가까이 있는 나무들이여.   나는 듣는다, 그대들을 통해서 개들과 형태없는 뱃사공들과 그녀가 어떤 대화를 시도할 것인가를. 그리고 나는 그대들에게 속한다 많은 밤을 통해, 이 모든 흐름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녀의 걸음에 의해서.   그대들이 가지 위에 내리치는 세찬 우뢰, 그 우뢰가 한여름에 불타오르게 하는 축제는 그대들의 엄숙함을 매개로 하여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내 운명에 맺어주는 것임을 뜻한다.   무엇을 붙잡는다는 말인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원한다는 말인가 죽는 것이 아니라면, 말하는 것, 찢겨지는 것이 아니라면?   내 가까이 있는 말이여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그대의 침묵이 아니라면, 어떤 어렴풋한 빛을 깊이 묻혀진 그대의 의식이 아니라면,   근원과 밤 위에 물질로서 던져진 말이여.               단 하나의 증인   6 진흙투성이 더러운 겨울에, 두우브여, 나는 떠올리고 있었다, 그대 숲의 나지막한 빛나는 얼굴을. 모든 것이 해체되고, 모든 것이 멀어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되돌아올 길도 없이 웃으며 그대를 다시 보았다, 풍성한 계절의 저녁에, 그대는 머리카락으로 창백한 얼굴의 빛남을 감추었다.   나는 사라져가는 그대를 다시 보았다. 가을이 나뭇잎새에 강풍소리를 내며 스산해질 때 그대는 숲의 경지에서 불처럼 나타났다.   오오 더욱 까맣게 거칠어진 그대! 마침내 나는 죽은 그대를 보았다, 허무가 떠받치고 있는 달랠길 없는 번갯불 이내 꺼지는 캄캄한 집의 유리창           참다운 이름   나는 이름 붙일 것이다, 그대가 있었던 그 城을 사막이라고 그 목소리를 밤이라고, 그대의 얼굴을 不在라고 그리고 그대가 불모의 땅에 쓰러지게 될 때 나는 이름 붙일 것이다, 그대를 데려간 번갯불을 허무라고   죽음으 그대가 사랑했던 나라. 그러나 나는 간다, 영원히 그대의 어두운 길을 통해서. 나는 부순다, 그대의 욕망, 그대의 형태, 그대의 기억을 나는 연민의 정을 품지 않는 그대의 敵   나는 그대를 싸움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나는 그대에 대해서 싸움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 또한 나는 가질 것이다, 내 손에 그대의 어두운 꿰뚫어진 얼굴을, 내 마음 속에 천둥치는 비바람 훤히 비치는 그런 나라를.           불사조   새는 우리들 머리 앞으로 날아갈 것이다, 피의 어깨가 새를 위해 치켜 세워질 것이다. 새는 즐거워서 날개를 접을 것이다, 그대가 새에게 내맡긴 몸, 그 나무 꼭대기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멀어져가는, 새는 오래 노래할 것이다. 그림자가 그 외침의 경계를 지워버릴 것이다. 나뭇가지마다에 새긴 죽음을 거부하며 새는 감히 밤의 봉우리를 넘어서 날아갈 것이다.           참다운 몸   입이 다물어지고, 얼굴이 씻겨지고 몸이 깨끗해져, 그 빛나는 운명 언어의 땅에 매장되어, 가장 나지막한 결혼이 완료되었다.   우리들은 살벌했고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내 얼굴을 향해 외치던 목소리는 스러졌다. 그 눈이 감겨져, 이제 나는 두우브를 죽은 채로 간직한다, 나와 함께 자아의 격렬함 속에 갇힌 채로.   그리하여 그대의 존재에서 올라오는 차거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들 친밀함의 결빙이 아무리 타오를 듯 할지라도 두우브여, 나는 그대 속에서 말한다, 그리고 그대를 껴안는다 안다는 행위와 명명한다는 행위 속에서.           詩法   첫 나뭇가지들로부터 분리된 얼굴 나지막한 하늘 아래 온통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미   어느 난로에다 그대 얼굴의 불을 지를 수 있을까, 오오 머리를 아래로 떨군 채로 붙잡힌 메나드*여?   * 메나드(Ménade) 는 酒神 Bachus의 무녀               두우브는 말한다   1 때때로 그대는 말했다, 새벽에 헤매며 캄캄한 길 위에서, 나는 돌의 최면 상태를 나누어 가졌으며 나는 돌처럼 눈멀었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와 나의 코메디는 죽은 행위를 밝히고 말았다.   나는 여름을 바랬었다, 나의 눈물을 말리기 위한 광포한 여름을, 그런데 추위가 닥쳐와 내 사지에서 심해져 나는 깨어나 괴로워했다.   2 오오 운명적인 계절이여, 오오 칼날처럼 벌거벗은 땅이여! 나는 여름을 바랬었다 누가 낡은 피 속에서 이 쇠를 끊었는가?   참으로 나는 행복했었다 그 죽어가는 순간에 눈은 멍하니, 나의 손은 영원한 비의 불결함에 벌려져 있었다   나는 외쳤다, 나는 얼굴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왜 미워하는가, 왜 우는가, 나는 살아 있었고, 그 깊은 여름 대낮은 나를 안심시켜 주었는데.   3 우리가 드러나 있는 이 존재의 표면 위에서 유한성이라는 바람만이 부는 이 메마름 위에서 말은 꺼져다오   한 그루 포도나무처럼 선 채로 타오르던 가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소재를 비추며 정상에서 구르는 최고의 가수.   그대가 나를 만나는 나지막한 방에서 말을 꺼져다오, 외침의 아궁이는 닫혀다오 발갛게 물드는 우리들의 말로 해서.   내 죽음 때문에 추위가 일어나 의미를 띠게 해 다오.         오렌지 밭   그리하여 우리들은 걸어갈 것이다, 끝없는 하늘의 폐허 위를, 목적지가 멀리서 나타날 것이다, 생생한 빛속의 운명과 같이.   오랫동안 찾아헤맸던 가장 아름다운 나라는 우리들 앞에 살라망드르의 땅으로 펼쳐질 것이다.   이 돌을 보라고, 그대는 말할 것이다 : 이 돌은 죽음의 현존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의 몸짓 아래 타고 있는 돌이야말로 은은한 램프, 그리하여 우리들은 걷는다, 램프에 비치어.           싸움터   1 패배한 슬픔의 기사가 여기 있다 그가 샘물을 지켜주었기에, 나는 깨어난다 그것은 나무들 덕택이다 물소리 속에 계속 이어지는 꿈.   그는 말이 없다. 그의 얼굴은 온갖 샘물과 절벽을 쏘다니다, 내가 찾아낸 죽은 형제의 얼굴. 정복당한 밤의 얼굴, 찢어진 어깨의 새벽에 고개 수그린 얼굴.   그는 말이 없다. 패비한 자가 싸움이 끝난 뒤 변명할 만한 말로써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처참한 얼굴을 땅바닥에 떨군다 죽는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외침, 참다운 휴식이다.   2 하지만 그는 운다, 깊은 샘물가에서 죽은 자의 다알리아꽃처럼 과연 그는 피어날 수 있을까? 우리들에까지 죽음 세계의 소리를 내지르는 11월의 흐릿한 물의 앞뜰에서.   내게 책임이 있는 날, 내가 다시 정복한 그날의 참담한 새벽에 기대어, 나는 영원히 매장된 내 비밀스런 악마의 영원한 존재가 흐느끼는 것을 들은 듯하다.   오 내 힘의 기슭이여! 그대는 다시 나타나리라 나를 이끌어간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게 해다오 그림자여, 그대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림자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밤 속에서 그리고 밤을 통하여 그렇게 되리라.           살라망다르가 사는 곳   놀란 살라망드르는 꼼짝하지 않고 죽음을 가장한다. 이것이야말로 돌 속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첫걸음. 가장 순수한 신화. 정신 자체인 커다란 불, 가로 질러가는 커다란 불.   살라망드르는 유리창의 빛 속, 벽 한가운데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의 심장이 영원히 고동치는 것을.   오오 나의 공범자여, 나의 思考여, 모든 순수한 것의 알레고리여, 이렇듯 자신의 침묵 속에서 오직 하나의 즐거움의 힘을 억제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꼼짝하지 않는 몸 전체로 하늘의 별들과 어울리는 것을, 자신의 승리 시간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름다운 여름   불이 우리들 대낮에 붙어다니다 대낮을 완성시켜가고 있었다, 쇠가 더욱 회색빛으로 물드는 새벽마다 시간을 상처내고 있었다, 바람이 우리들 방의 지붕 위에서 죽음과 부딪치고 있었다, 추위가 우리들 마음을 에워싸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아름다운 여름, 빛바랜, 파괴하는, 캄캄한 여름이었다, 그대는 여름 비의 부드러움을 사랑했었다 또한 그대는 그 회색빛 날개를 떨리는 별장에서 여름을 지배하는 죽음을 사랑했었다.   그 해 그대는 거의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돌, 바람, 물, 그리고 나뭇잎으로 그대의 눈앞에 다가오는 언제나 까만 하나의 기호를.   그리하여 쟁기날은 벌써 경작하기 쉬운 대지를 파헤쳤다, 그리고 그대의 오만함은 사랑했다 그 새로운 빛을, 여름의 대지 위에서 두려워하는 도취를.           램프가 낮게 타고 있었다   램프가 낮게 타고 있었다, 그대를 향해 회색 얼굴을 기울이고, 나무들의 공간에서, 상처 입은 죽음을 지닌 새처럼 그것은 떨고 있었다. -재투성이 바다의 항구에 겉도는 기름은 마지막 날빛으로 빨갛게 물들 것인가, 물거품 헤치고 해안에 닿으려는 배는 마침내 낮의 빛속에 나타날 것인가?   여기서 돌은 홀로이며 광막한 회색빛 영혼, 그대는 낮이 오지 않는데도 걷고 있었다.         철교   내가 어린 시절에 거닐곤 했던 길다란 거리 끝에는 언제나 기름의 늪이, 캄캄한 하늘 아래 묵직한 죽음의 長方形이 있었다.   詩가 다른 물로부터 스스로의 물을 분리시킨 이후, 어떤 아름다움도, 어떤 새깔도 그 늪을 간직하지 못한다, 늪은 쇠와 밤을 위해 괴로워한다.   늪은 죽은 물가의 기다란 슬픔을 기르고 있는데, 보다 몽상적인 저쪽 기슭으로 걸쳐 있는 철교는 그의 유일한 기억이며 오직 하나의 참다운 사랑이다.           미완성이 절정이다   파괴하고, 파괴하고, 파괴해야만 했다. 구원은 그 댓가로써만 이루어졌다.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을 파괴할 것, 모든 형태 모든 아름다움을 파괴할 것.   완성이란 입구이므로 완성을 사랑할 것, 하지만 알게 되면 곧 그것을 부정할 것, 죽게 되면 곧 그것을 잊어버릴 것,   미완성이 절정이다.           불의 연약성   불이 붙었다, 불은 나뭇가지의 숙명, 그것은 나뭇가지의 조약돌처럼 차가운 마음을 스치려고 한다, 모든 태어난 사물의 항구에 찾아든 불. 물길의 기슭에서 그것은 쉬게 될 것이다.   불은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알리라, 순수한 열망 속에서, 벌거벗은 땅의 공간이 불 밑에서 나타나리라는 것을, 죽음의 별이 우리들의 길을 비춰주리라는 것을.   불은 사그라져버릴 것이다. 그림자 짙게 드러운 개여울은 그 발걸음 아래, 잠시 반짝거릴 것이다. 이데아도 그것이 사용하는 물질을 넘어서 구원할 수 없는 시간을 포기하리라.           골짜기   돌 무더기 속에 한 자루의 劍이 꽂혀 있었다. 손잡이는 녹슬어 있었다, 고대의 쇠가 회색빛 돌의 옆구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대는 두 손으로 不在를 붙잡아야 했고 밤의 광맥에서 어슴프레한 불꽃을 빼앗아야 했음을 알았다. 몇 마디 말이 돌의 피 속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아는 길과 죽는 길을 말하고 있었다.   不在의 골짜기에 들어가, 멀어져가라, 항구인 것은 조약돌뿐인 여기. 한 마리의 새의 노래가 새로운 강변에서 그대에게 그것을 가리켜줄 것이다.           여기, 언제나 여기   여기, 밝은 곳. 이것은 더 이상 새벽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욕망을 지닌 대낮. 그대의 꿈 속에서 노래의 신기루 가운데 남아 있는 건 다가오고야 말 돌의 이 반짝임뿐.   여기, 그리고 저녁 무렵까지. 그림자의 장미는 벽 위에서 돌고 있으리라. 시간의 장미는 소리도 없이 꽃잎을 떨어뜨리리라. 밝은 鋪石 바닥은 대낮에 넋을 빼앗긴 이것들의 발걸음을 제멋대로 이끌어가리라.   여기, 언제나 여기. 돌에 돌을 쌓아 추억에 의해서 말해진 나라를 세웠다. 이제 막 떨어지는 다순한 과일의 소리가 더 한층 그대 속에서 치유되어가는 시간을 열광시킬 것인지.         폐허의 새   폐허의 새는 죽음에서 멀어진다, 새는 햇빛 비치는 회색 돌 속에 둥우리를 짓는다, 새는 온갖 고통, 온갖 기억을 뛰어넘는다, 새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영원 속에서 내일이 무엇인지를.           하나의 소리   불이 타들어오는데 그대는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것인가, 무슨 검을 글자를 써주고자 하는 것인가?   오랫동안 나는 그대의 記號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대는 나를 온갖 밀도로서 옭아매었다.   하지만 이제 한없는 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나는 검은 말을 타고 그대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또 하나의 소리   모든 것이 멈출 때 머리칼을 흔들거나 의 재를 뿌리면서 그대는 무슨 몸짓을 시도하려 하는가, 그리하여 존재의 자정이 책상을 바치는 것은 언제인가?   모든 것이 침묵을 지킬 때 그대의 검은 입술 위에서 그대는 어떤 기호를, 어떤 가난한 언어를 지키려고 하는가, 아궁이에 불이 꺼져버릴 때 마지막 불씨를 지키려 하는가?   나는 그대 속에서 살아가리라, 그리고 나는 그대 속에서 모든 빛을 꺼내리라, 모든 化肉, 모든 암초, 모든 법을.   그리하여 내가 그대를 끌어올린 허무 속에다 나는 번갯불의 길을 열리라, 아니면 아직껏 소리친 적이 없는 가장 커다란 외침을.           하나의 돌   그는 바랐다. 아무것도 아지 못한 채 그는 사라졌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나무, 연기, 바람과 실망의 모든 실이 그가 사는 거처였다. 한없이 그는 껴안았다 자신의 죽음만을.           죽은 자들의 장소   죽은 자들의 장소는 어디인가, 죽은 자들은 우리들처럼 길을 걷는가, 그들은 말을 하는가, 그들의 말은 우리보다 진실한가, 그들은 나뭇잎의 魂인가, 나뭇잎보다 더 높은 나뭇잎의 혼인가?   불사조는 그들을 위해 하나의 성을 세웠는가, 그들을 위해 하나의 책상을 만들었는가? 어떠 나무의 불더미 속에서 울부짖는 어떤 새의 외침소리가 죽은 자들이 모두 밀어닥치는 공간인가?   아마도 그들은 송악의 이파리 속에 누워 있는 것이리라, 그들의 일그러진 말[言語]의 이파리는 밤이 찾아오는 항구, 찢겨진 말의 이파리의 항구이리라.           새벽의 땅에서   눈물의 딸, 새벽이여, 다시 일으켜 세우라 방을 그 회색빛 사물의 평화 속에, 그리고 그 질서 속에 마음을 숱한 밤이 시들어, 사라져 버리기를 이 빛에게 요구했었다, 우리들은 죽은 얼굴 곁에서 밤샘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램프의 o는 항구에 들어갈 것인가, 여기 책상 위 재가 된 불꽃은 딴 곳의 다른 광명 속에서 커다랗게 타오를 것인가? 새벽이여, 일어나라, 그늘 없는 얼굴을 쳐들어라 다시 시작하는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색칠하라.           베네란다   오오, 쪼개진 빵 속이 이 무슨 불빛인가, 희미해진 별빛 속에 이 무슨 순수한 새벽인가! 나는 돌들 사이로 햇빛 비쳐드는 것을 바라본다, 그 밝음 속에 그대 혼자서 검은 빛을 두르고 있다.           또 다른 죽음의 강변   1 피닉스가 되는 것에서 자유로와진 새는 죽기 위해 나무에 홀로 머물러 있다. 새는 상처의 밤으로 몸을 감싸고 자신의 심장을 찌를 劍을 느끼지 않는다.   램프 속에서 기름이 낡아지고 시커멓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그토록 많은 길처럼, 새는 나무의 물질에 천천히 돌아온다.   어느 날인가 새는 그렇게 되리라, 어느 날인가 새는 분명 죽은 동물, 피가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갈라진 목을 지닌 부재가 되리라.   풀숲 속에서 모든 진실의 깊이를 찾아낸 새는 풀숲에 떨어지리라. 피의 맛은 그 강변을 물결로 부딪칠 것이다.   2 새는 깊은 비참으로 해체되리라, 새는 거짓말하기를 바라지 않는 목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부심과 타고난 성격으로 새는 오직 허무, 죽은 자들의 노래일 수밖에 없으리라.   새는 늙어가리라. 벌거벗은 엄한 모습을 지닌 나라는 그 목소리의 또 하나의 비탈이 되리라. 파도가 치지 않는 끌어올려진 배는 그리하여 마멸된 모래바람에 시커멓게 되리라.   새는 침묵을 지키리라. 죽음은 그리 장중하지 않다. 새는 존재의 무익성 속에서 쇠에 날개를 찢기운 그림자의 몇 발자욱을 만드리라.   새는 장중한 빛 속에서 죽어가리라. 그것은 또 하나의 어두운 세계 속에 세워 놓은 더 한층 행복한 빛의 이름으로 말해질 수 있으리라.   램프, 잠자는 사람들     1 내려가는 계단을 아예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사 나는 알아차렸다, 죽음 속을 내려가는 길이 있는 이 땅이 또그대 없이는 잠들 수가 없었다, 그대 없이는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바랐다 내 열병의 베갯머리에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를. 그대가 밤보다도 더 어두운 존재이기를. 그리하여 무용한 세계 속에서 내가 소리 높이 말했을 때 너무도 광막한 잠의 길 위에서 나는 그대를 붙잡았다.   내 속에서 짓누르는 神, 그것은 내가 떠도는 기름으로 빛나게 했던 강기슭, 그대는 알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줄곧 괴롭히는 내 심연의 발걸음을, 밤이면 밤마다 찾아오는 나의 새벽, 이룰 수 없는 사랑을.   2 -나는 그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숱한 돌의 골짜기여 나는 듣고 있었다 그대의 묵직한 휴식의 소리를, 나는 보고 있었다 그대를 가리는 그림자 속에 아주 나지막이 잠의 거품이 허옇게 이는 슬픈 장소를.   나는 그대가 꿈꾸는 것을 듣고 있었다. 오오 단조로운 둔한 자여, 때때로 보이지 않는 바위에 부서져 얼마나 멀리 그대 목소리는 사라져갈 것인가! 그 목소리의 그림자 속에 가냘프게 속삭이는 기다림의 격류를 밀어헤치면서   저쪽, 울긋불긋한 꽃빛깔의 뜰 가운데, 방자한 공작 한 마리 죽음의 빛으로 자라고 있다. 하지만 그대,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꿈틀거리는 나의 불꽃뿐, 그대는 유연한 말의 밤에 살고 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대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미완성 儀式의 놀람과 서두름분 그대는 책상 꼭대기에서 어둠을 나눠갖는다, 오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여, 그대의 손은 얼마나 벌거벗었는가!             하나의 돌   그대의 다리, 매우 짙은 밤, 맺어진, 몹시도 검은 그대의 가슴, 나는 눈을 잃어버렸는가? 돌보다도 싸늘한 이 어두컴컴한 속에서 끔직스런 내 눈의 신경을 잃어버렸는가? 오오 내 사랑이여.   빛의 한가운데서 나는 없애버린다 처음에는 가스로 하여 벗겨진 내 머리를, 그리고 나선 여러 나라와 함께 내 이름을, 단 하나 똑바른 내 손만이 끈질기게 남는다.   행렬의 선두에서 나는 쓰러졌다 神도 없고, 들을 수 있는 목소리도 없고, 죄도 없이, 울부짖는 삼위일체의 짐승으로서.             하나의 돌   떨어져라, 하지만 얼굴 위에, 부드러운 비여. 꺼져가라, 하지만 서서히, 몹시도 가난한 샬레이유*여   *샬레이유(chaleil)는 호야가 없는 고풍스런 옛날 램프의 일종.             쟝과 쟌느   그대는 황폐해진 나지막한 이 집의 이름을 묻는다, 그것은 또 하나의 나라에 있는 쟝과 쟌느.   널따란 바람이 지나갈 때 노래 부르는 자도 나타나는 자도 없는 문지방.   그것은 쟝과 쟌느. 그들의 회색 얼굴에서 낮의 회반죽이 떨어져, 나는 다시 본다 지나간 옛 여름날의 유리창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멀리서 아주 뚜렷이 빛나는, 그림자의 딸 聖櫃를.   오늘 이 저녁, 우리들은 불을 지피리라 커다란 방에. 우리들은 떠나가리라, 우리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그 불을 살려두리라.             하나의 소리   우리들은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나뭇잎 나는 샘물, 그는 약간의 햇빛, 나는 심연 그는 죽음, 나는 삶의 지혜.   나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조종하는 기색 없이 웃는 牧神의 얼굴을 그림자 속에서 우리들에게 내미는 것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자를 실어오는 바람이 일어서는 것을.   어두컴컴한 샘물에서 죽는다는 것은 송악이 마시는 바닥 없는 물을 뒤흔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영원한 꿈 속에 서 있었다.         나무, 램프   나무가 나무 속에서 늙어가는 여름이다. 새가 새의 노래를 넘어서 달아난다. 옷의 붉은 빛깔이, 저 멀리 하늘에서 고대적인 고통의 수레를 빛나게 하다가 산산이 흩뜨려 버린다.   오오 들고 다니는 램프의 불꽃처럼 연약한 나라여, 세계의 수액 속 잠은 가깝고 헤어진 영혼의 고동소리는 단순하다   그대는 또한 사랑한다 램프 빛이 날빛 속에서 생기를 잃어 꿈꾸는 순간을. 그대는 또 알고 있다 그대 마음의 어둠이 치유되고, 배가 강 기슭에 닿아 가라앉아 버리는 것을.           미르트(桃金孃)   때때로 나는 그대를 흙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입술에서, 뜨거운 돌 속에서 솟아나올 때의 샘물의 고뇌를 마셨다. 그리하여 여름은 행복한 돌과 물 사니는 자를 힘차게 지배했다.   때때로 나는 미르트에 대해 그대에게 말했다. 나는 온종이 그대 몸짓의 굴대를 불태웠다. 그것은 베스타 무녀의 빛의 간결하고 위대한 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대를 그대의 밝은 머리카락 속에서 만들어냈다.   위대한 여름 내내 우리의 꿈을 말라붙게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녹슬게 하고, 우리의 몸을 자라게 하고, 우리의 쇠를 망가뜨리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때때로 침대는 선회하고 있었다 앞바다에 닿아가는 자유로운 한 척의 배처럼.   * 미르트(myrte)란 도금양과(桃金孃科)에 속하는 식물의 이름.           하나의 돌   하나의 불이 우리들 앞을 지나간다. 나는 순간마다 그대의 목덜미, 그대의 얼굴을 알아본다. 그 다음은 불꽃만을, 불더미만을, 죽은 자들의 울부짖음만을.   석양의 빛 속에서 그대를 불꽃으로부터 떼어놓은 재, 오오 현존이여, 그대의 은밀한 궁륭 아래서 우리들은 맞아들인다 어두운 축제를 위해.           변화된 빛   우리들은 서로 똑같은 빛 속에서 더 이상 보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똑같은 눈, 똑같은 손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 나무는 보다 더 가까이 있고, 샘물 소리는 보다 더 생생하며, 우리들의 발걸음은 보다 더 신중하다.   지금 여지 있지 않는 신이여, 우리들 어깨 위에 그대 손을 얹으라, 그대 再臨의 힘으로 우리들 몸을 지으라, 우리들 영혼에 이 별들, 이 나무들, 이 새들의 울음소리, 이 그림자들, 이 날빛들을 섞어라.   과일이 째지듯 우리들 속에 그대 스스로를 버리라 그대 속에 우리들을 사라지게 하라. 우리들에게 밝혀라 오직 단순할 뿐인 것의 신비로운 의미를, 사랑 없는 말 속에 불도 없이 떨어졌던 것의 신비로운 의미를.           고뇌와 욕망의 대화   1 때때로 나는 나 이상의 어떤 희생적인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 얼굴의 빛은 마치 갈아엎은 밭의 흙과 같다. 입술과 눈은 웃음을 짓고, 이마는 음울하다, 바다 소리는 지루하고 둔중하다. 나는 얼굴에게 ‘내 힘이 되어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얼굴의 빛이 더욱 환해진다. 그 얼굴은 어슴프레한 박명의 싸움의 나라를, 굽이굽이 돌아 비옥한 땅을 확실이 보장해주는 강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한 시간과 괴로움이 필요했던 것에 놀란다. 왜냐하면 과일들이 벌써 나무 속에서 군림하고 있었으며, 또한 해가 이미 저녁의 나라를 빛나게 하고 있었기에. 나는 내가 거기서 살 수 있는 높은 지대를 바라보고 있다, 또 하나의 딱딱한 손을 붙잡고 있는 이 손, 미완의 가을 노고의 짐을 들어올리고 있는 이 부재의 호흡   2 그리고 나는 부재의 여인 꼬레를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 손에 꽃들의 반짝이는 검은 심장을 치켜들어, 그 검은색을 마시면서, 빛과 그림자의 목장에서, 끝내 밝혀지지 않는 여인으로서 쓰러졌다.   나는 이 오류, 이 죽음을 이해한다. 백합과 쟈스민은 우리들 지방으 산물이다. 그렇게 깊지 않은, 맑고 푸른 물의 강기슭은 세계의 중심의 그림자를 떨게 하고 있다······ 그렇다, 꺾어라. 꽃을 꺾는 잘못이 우리에겐 허용되어 있으니까. 영혼 전체가 단순한 말의 둘레에 몸을 구부리고 있고, 그리자이유 그림은 무르익은 과일 속에서 사라져간다.   싸움의 말의 쇠는 되돌아올길 없는 행복스런 물질 속에서 스러진다.   * 회색의 농담만으로 그리는 화법에 의한 그림 또는 장식유리창을 가리킴.   3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오래된 말 속에 깃들어 있는 찬란함. 생생한 물이라는 무기가 밝혀준, 행복스런 바다와 같은 머나먼 우리들 모든 생명의 단락   우리들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이미지 같은 것은. 저기, 저 나무만으로 우리에겐 충분하다, 빛으로 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저 나무. 겨우 몸을 입기 시작한 神의 겨우 불러주기 시작한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저 나무.   아주 가까이서 가 타고 있는 드높은 나라.   단순한 시간이 슬픔도 없이 손으로 대고 있는 벽의 초벌바름, 손이 그것을 재고 있다.   4 그리고 그대, 그대야말로 나의 자랑, 오오 逆光의 위치에서 떠나, 더욱 사랑받던 여인이여 내게 더 이상 낯선 여인이 아닌 그대여 나는 알고 있다, 우리들은 똑같은 어두운 뜨락에서 자라고 있음을. 우리들은 나무 밑에서 똑같은 어려운 물을 마셨다. 똑같은 천사가 가혹하게 그대를 위협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발걸음은 똑같아진다. 잊어버리기 쉬운 어린시절의 나무딸기를 떠나서 똑같은 불순한 저주를 떠나서.   5 저녁 지상에는 작별이 빛아 아직 남아 폭풍우의 손, 증여의 손을 벌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손바닥은 우리들의 장소, 괴로움과 희망의 장소다. 빛이 죽음의 장소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자이며 분명 멀리 떨어져 있는 검은 신에게 복종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오후는 자줏빛이었고 단순한 描線이었다. 상상은 우리들 쪽으로 맑으 은빛 미소의 얼굴을 향한 채 거울 속에서 깨어졌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금 늙어버렸다. 행복이 부재의 가지에 열매를 익어가게 하고 있었다. 내 순수한 물이여, 그건 보다 가까운 나라인가? 쓸데 없는 말 속으로 그대가 나아가는 길 그것은 영원히 그대의 사는 거처가 있는 강변 위 음악을 연주하고, 풀어져 가는 길일까?   6 오오 그대 흙의 날개, 그림자으 날개로 우리들을 깨우라, 대지처럼 웅대한 천사여, 그리고 지금 어떤 시작을 찾아서 우리들을 데려가라, 죽은 대지와 똑같은 곳으로. 오래된 과일은 겨우 다스러져니 우리들의 굶주림이며 갈증이어라. 불은 우리들의 불이어라. 기다림은 다가오는 운명, 이 시간, 이 머무름 속에서 변한다.   쇠, 절대의 밀이며 우리들의 몸짓, 우리들의 저주, 우리들의 손이 쉬는 사이에 싹트는 밀이여 가까운 별들의 운행처럼, 마음씩 착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시간의 황금을 따버린 씨앗으로 떨어진 말이여.   여기, 우리들이 가는 곳 우리들이 보편적 말을 배운 곳.   활짝 마음을 열어라, 우리들에게 말하라, 부수어라, 불타는 왕관이여, 투명한 고동이여, 태양의 마음을 지난 琥珀이여.           틴토레트의 피에타*   괴로움이 햇빛 쪼이는 이 검은 쇠창살 속에서 이다지도 우아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또한 우아함이 이다지도 정신적인 요인이 됐던 적도 없었다. 석양의 쇠창살 위에 서 있는 이중의 불.   여기서는, 위대한 희망이 바로 화가였다. 오오 바라던 괴로움, 또는 그려진 이미지에 대해 이보다 더 진실한 것이 어디 있을까? 욕망은 이미지의 장막을 찢고 이미지는 핏기 없는 욕망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내려진 그리스도의 몸을 무릎 위에 안고 슬퍼하는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함. 라틴어로 마테르 돌로로자(mater dolorosa)라고 함.           피, 시 音標   길고 긴 나날. 진정되지 않는 피가 피와 부딪친다. 헤엄치는 사람은 장님. 진홍빛 계단을 지나 그대 심장의 고동 속으로 내려간다.   목덜미가 팽팽히 당겨질 때 언제나 황량한 외침이 순수한 입을 때린다.   그리하여 여름은 늙어가다. 그리하여 죽음은 꿈틀거리는 불꽃의 행복을 둘러싼다. 그리고 우리들은 약간 잠든다. 시 음표가 붉은 천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울린다.           마음, 흐려지지 않는 물   그대는 즐거운가 아니면 슬픈가? -내가 그것을 안 적이 있었던가, 되돌아올 길 없는 마음에는 아무것도 무거운 짐이 되는 게 없다는 것밖에는.   뜰과 그림자를 가로질러간 마음의 유리 상자 위에는 새의 발자욱이 하나도 없다.   나의 삶을 마셔버린 그대에의 걱정 하지만 나뭇잎 그늘 속에는 추억이 하나도 없다.   나는 단순한 시간 흐려지지 않는 물이다. 죽지 않고서 그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시의 작용   이 밤의 밖에서 시선은 샅샅이 파헤쳐졌다. 손은 꼼짝 못하게 되고 텅 비게 되었다. 열병은 누그러졌다. 마음에는 마음이라고 일러주었다. 혈관 속에 데몽이 있어, 외치면서 도망쳤다. 입 속에 음울한 피투성이 목소리가 있어, 씻겨지며 다시 불러들여졌다.  
971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3) 댓글:  조회:11  추천:0  2019-07-1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3)           네번째 노래(8)       (8) 밤마다, 내 날개폭을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잠그고, 나는 팔머1)의 기억을 떠올렸다--- 밤마다, 그의 금발, 그의 달걀형 얼굴, 그의 위엄 어린 표정이 여전히 내 상상력에 찍혀 있었다--- 지울 수 없이---- 특히 그의 금발 머리가. 그러니 치워라, 머리카락이 없는,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반들거리는 이 머리를. 그는 열네 살이었고, 나는 그보다 한 살이 더 많을 뿐이었다. 저 침울한 목소리는 침묵하라. 이 목소리가 왜 나와서 나를 고발하는가? 그러나 말하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의 혀를 사용하여 내 생각을 내보내면서, 나는 내 입술이 움직이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내 젊은 날의 이력을 이야기하며,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회한을 느끼며---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나 자신이다. 말을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한 살이 더 많을 뿐이었다. 내가 암시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지난날에 가졌던 친구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렇다. 나는 이미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말했으며--- 또다시 그 여섯 글자의 철자를 한 자 한 자 짚어 말하고 싶지 않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한 살이 더 많다고 되풀이하는 것도 역시 쓸데없는 짓이다. 누가 알겠는가? 하여튼 되풀이하자. 그러나 고통스러운 중얼거림으로; 내가 한 살이 더 많을 뿐이었다. 그렇더라고, 내 체력의 우위는 오히려 인생의 거친 오솔길을 헤쳐나가며 나에게 몸을 의탁한 자를 부축하는 동기였지. 눈에 띄게 더 약한 존재를 학대하는 동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그가 더 약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내가 지난날에 가졌던 친구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 체력의 우위는--- 밤마다--- 특히 그의 금발이, 대머리를 본 적이 있는 인간은 하나둘이 아니다. 노화, 질병, 고뇌는(이들 셋이 함께든 따로 따로든) 이 부정적인 현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한다. 어느 학자에게 내가 그 현상에 관해 묻는다면, 적어도 그가 내게 해줄 대답이 이와 같다. 노화, 질병, 고뇌. 그러나 내가 모르지 않는바(나도 역시 학자다), 어느 날 내가 한 여자의 가슴을 찌르려고 단검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가 내 손을 저지한 까닭으로, 내가 강철 팔로 그의 머리칼을 잡아쥐고 하도 빠르게 그를 허공에 내돌린 나머지, 그 머리칼이 내 손에 남고, 그의 육체가 원심력으로 내던져 떡갈나무의 둥치에 처박히고--- 나는 어느 날 그의 머리칼이 내 손에 남은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도 역시 학자다. 그렇다, 그렇다. 나는 이미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말했다. 나는 어느 날 내가 수치스러운 것을 자행했으며, 그때 그의 육체가 원심력으로 내던져졌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열네 살이었다. 정신착란이 발작하는 가운데, 내가 성유물처럼 오래 간직해온 피 흐르는 물건을 가슴에 끌어안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갈 때, 나를 쫓는 어린아이들--- 돌팔매질을 하며 나를 쫓는 어린아이들과 늙은 여자들은 비통한 신음소리를 내 지른다. "저걸 봐라, 팔머의 머리칼이다." 치워라, 그러니 치워라. 거북이의 등딱지처럼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피 흐르는 물건을. 그러나 말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의 달걀형 얼굴, 그의 위엄 어린 표정. 그런데 나는 사실 그가 더 약했다고 생각한다. 늙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그런데 나는 사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 했던가?--- 그런데, 나는 사실 그가 더 약했다고 생각한다. 강철 팔로, 이 충격이, 이 충격이 그를 죽였는가? 그의 뼈가 나무에 부딪쳐 부러졌는가--- 돌이킬 수 없이? 이것이 그를 죽였는가, 한 장사의 힘에서 태어난 이 충격이? 그는 생명을 보전했는가. 그의 뼈가 돌이킬 수 없이 부러졌어도---- 돌이킬 수 없이? 이 충격이 그를 죽였는가? 나는 감긴 내 두 눈이 목격하지 못한 그 일을 알게 될까봐 두렵다. 사실---- 특히 그의 금발, 사실, 나는 그때부터 용서할 줄 모르는 앙심을 품고, 밤마다, 영광을 꿈꾸는 한 젊은이가, 육층 방에서, 한밤의 고요한 시간에, 작업대에 엎드려 있다가, 무엇의 탓이라고 해야 할 지 알지 못하는 낮은 소리를 감지할 때. 그는 명상과 먼지 낀 수고(手稿)로 무거워진 머리를 사방팔방으로 돌리지만, 어느 것도, 손에 잡힌 어떤 징후도, 그에게는 확실하게 들리지만, 그리도 희미하게 들리는 원인을 밝혀주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제 촛불의 연기가 주위의 공기를 가로질러 천정으로 날아오르며, 벽에 박힌 못에 걸린 종이 한 장을 거의 감지할 수도 없이 떨리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육층에서, 영광을 꿈꾸는 한 젊은이가 무엇의 탓이라고 해야 할 지 알지 못하는 낮은 소리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내 귀에 속삭이는 구성진 목소리 하나를 듣는다: "말도로르!" 그러나 제 착각을 끝내기 전까지는, 한 마리 모기의 날갯소리를 듣고 있다고----작업대에 엎드려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단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무슨 대수인가? 나는 냉정한 마음으로 날카롭게 직시한다. 비록 장밋빛 도미노와 가장무도회의 시간이지만, 내가 눈을 뜨고 있음을. 전혀---- 오! 아니다, 전혀! 어떤 죽음의 목소리가 이런 천사 같은 억양으로 고통에 찬 우아함을, 그리도 떨면서 내 이름의 철자를 들려주지 않았다! 한 마리 모기의 날갯소리---- 그 목소리는 얼마나 친절한가---- 그는 그럼 나를 용서했는가? 그의 육체는 떡갈나무 둥치에 처박혔다---- "말도로르!"       1) 팔머: 원문의 표기는 Falmer. 연구자들은 이 이름에 의거해, 로트레아몽이 소개하는 이상형 가운 하나인 이 인ㅁ눌을 영국계로 추론한다.   네번째 노래 끝  
970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2) 댓글:  조회:14  추천:0  2019-07-1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2)           네번째 노래(7)       (7) 자연법칙의 잠재적이거나 가시적인 기능에서 비정상적인 일탈을 목격하게 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저마다 자기 생애의 갖가지 단계를 찬찬히 뜯어보는 창의적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단 하나의 단계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주장하는 바의 증거를 제공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단계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상황에서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정도로 놀라지 않고는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 있을 터라, 제일 먼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날, 자신이 관찰과 경험에 의해 제공된 기지의 관념을 확실하게 넘어선 것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넘어섰던 어떤 현상의 목격자가 되었던 기억이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두꺼비 비 같은 것으로, 그 마술적인 광경이 처음에는 학자들에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주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하겠는데, 다른 어떤 날, 자신의 영혼이 심리학의 탐구적인 시선 앞에서, 이성의 착란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착란은 덜 흥미롭기는커녕 한결 더 흥미롭다). 적어도 내 과장된 언어에서 생겨난 명백한 졸작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몇몇 냉담한 사람들에게 까다롭지 않은 말로 하자면, 이례적이면서 꽤 자주 매우 심각한 상태를 드러내보이는데, 그 상태는 양식이 상상력에 허용한 경계가 때로는 그 두 힘1) 사이에 체결된 덧없는 계약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의지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그러나 또한 대부분의 경우는 효과적인 협력의 부재에 위해 무너졌음을 나타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자. 아무쪼록 주의깊은 절도를 반려로 삼기만 한다면, 그 적절함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나는 두 개의 예를 제시한다. 분노의 열광이 오만의 병. 나는 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내가 문장을 지나치게 빠르게 전개하면서, 꺾어내는 문학의 몇몇 아름다움에 대해 막연하고 하물며 잘못되기도 한 관념을 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아아! 내가 내 추론과 비교를 천천히 그리고 대단히 장려하게 펼쳐내어(그러나 누가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겠는가?).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내 공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 경악을 더 잘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은, 어느 여름날 저녁, 태양이 수평선에 기울어졌다 싶을 무렵에, 다리 끝과 팔 끝 부분에 달린 넓적한 오리 물갈퀴를 놀리며, 비례적으로 돌고래의 등지느러미만큼 길고 뾰쪽한 등지느러미를 단, 근육도 튼튼한 인간 존재가 바다 위에서 헤엄을 치는 것을 보았을 때인데, 수많은 물고기떼가 (나는 이 행렬에서, 다른 여러 수중 주민들 가운데, 전기가오리, 그린란드아나르다 고래와 쭈굴감팽을 보았다). 최대치의 감탄을 매우 과시적으로 드러내며 그 인간을 뒤따르고 있었다. 이따금 그가 잠수를 하면, 그의 점착성 육체가 이백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거의 즉시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쇠물돼지들은, 내 의견이지만 훌륭한 헤엄 선수라는 명성을 훔쳐오지 못한 것들이라. 이 신종 양서류을 멀리서 겨우 따를 수 있었다. 독자가 내 서술에 어리석은 맹신이라는 해로운 장애물보다는 깊은 신뢰라는 최상의 도움을 바친다면, 그에게 후회할 이유가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바, 이신뢰는 시적 신비를, 내가 책임지고 밝혀야 할 독자 자신의 의견에 따르면 수가 너무 적다는 이 신비를, 비밀스러운 공감의 힘으로 조목조목 검토할 터이며, 그때마다 수중식물의 자극성 냄새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그런 기회가, 오늘날에는 기회가 뜬금없이 나타나는 만큼, 나타날 터이고, 물갈퀴 조류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제 것으로 삼은 괴물 하나가 담겨 있는 이 장절에 서늘한 북풍이 그 냄새를 옮겨올 터이다. 여기서 누가 제 것으로 삼았다고 말하는가? 인간은, 다양하고 복잡한 그 본성에 의해, 여전히 경계를 확장할 방법을 모르지 않는다는 점을 익히 알아야 할 것이나, 물속에서는 해마처럼 살고, 대기의 상층부를 가로지르기로는 흰꼬리독수리와 같으며, 지하에서는 두더지, 쥐며느리와 같고, 유충의 숭고함과 같다. 더 간결하거나 덜 간결한(그러나 덜 보다는 더) 인간의 형태를 놓고, 내가 머리를 짜내 생각해보았자, 최고로 든든한 위안의 범주란 게 이 정도이기게, 나는 아주 먼 거리에서 그 인간 존재가, 가장 장대한 가마우지도 결코 그럴 수 없을 만큼, 파도의 수면에서 사지를 놀려 헤엄치는 것을 보고, 아마도 그 팔과 다리 끝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는 어떤 알지 못한 범죄의 속죄징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머리를 썩여가며 연민의 우울한 알약을 미리 제조할 필요는 없었다. 두 팔로는 쓰디쓴 파도를 번갈아 후려치고, 그사이에 두 다리로는 돌고래의 나선형 어금니들이 지닌 힘과 맞먹는 힘으로 층층의 물을 후방으로 밀어내는 이 사내가 형벌로 그 이상한 형태를 둘러썼다기보다는 자진해서 그걸 제것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진실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이 유동하는 원소 속에서 삶을 연장하다보니, 여러 바위투성이 대륙에서 스스로 망명한 이 인간 존재 속에, 중요하지만 본질적이지 않은 변화가 느낄 수도 없이 서서히 일어난 것이고, 그게 내눈에 띄었던 것이고, 그 물건이 처음 나타났던 순간부터, 자못 당황한 시선이 그 기이한 형태에 따라 물고기라고 여겼던 것인데(차마 말하기 어려운 경솔함 때문인데, 그게 빗나갈 경우 심리학자들이 신중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온다.) 그 형태는 아직 박물학자들의 분류체계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내가 비록 너무 불확실한 조건에서 상상한 다음의 가정 쪽으로 기울려는 허용 가능한 의도를 품은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저 학자들의 사후 저작에는 기록되리라고 본다. 사실, 이 양서인간은(양서인간이 존재하고, 그 반대를 주장할 수는 없으므로). 물고기들과 고래들을 별도로 친다면, 오직 나에게만 보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몇몇 농부들이 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당황하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멈춰 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는 온갖 종류의 측정 가능하고 일정한 양의 물고기떼밖에 보이지 않는 바다의 한 곳을 왜 내 두 눈이,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인내심으로,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헛되이 애를 쓰면서, 커다란 제 입구멍을 필경 고래만큼 크게 벌렸다. "그걸 보고 자기들은 미소를 짓지만, 하나 나처럼 창백해지지는 않는데". 그들은 정취 넘치는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길, "자기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정확히 내가 물고기들의 목가적인 선회 이동은 보지 않고, 내 시선이 훨씬 더 앞쪽에 막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나와 관련된 것을 말하자면, 그 강력한 입들의 주목할 만한 크기를 향해 내 눈을 기계적으로 돌리고, 혼자 속으로, 우주 전체에서 산만큼이나, 아니 적어도 곶벼랑만큼이나 (청하옵건대, 찬양하시라. 어느 구석 한 뼘 땅도 놓치지 않는 유보표현의 섬세함을) 거대한 펠리컨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에는, 어떤 맹금의 부리나 어떤 야수의 턱뼈도 이 벌어진, 그러나 너무나 음울한 이 분화구들 하나하나를 결코 능가할 수도, 심지어 이에 맞설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은유의 호의적인 사용법에 많은 여지를 남겨둔다 하더라도(이 수사법은, 선입관이나 잘못된 사고나, 실은 그게 그거지만, 그런 것에 물든 자들이 흔히 애써 머릿속에 그리는 것 이상으로, 무한을 향한 인간의 갈망에 훨씬 더 많는 도움을 준다). 농부들의 우스꽝스러운 입이 향유고래 세 마리를 삼킬 만큼 넓게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우리의 생각을 더 줄이자. 진지해지자, 그리하여 이제 갓 태어난 세 마리 아기 코끼리로 만족하자. 단 한 번 팔을 휘저어, 양서인간은 자기 뒤에 일 킬로미터의 거품 이는 물이랑을 남겼다. 다시 물속에 잠기기 전, 앞으로 뻗은 팔이 공중에 떠 있는 매우 짧은 순간에, 일시 벌어졌다가 피막의 형태를 지닌 피부의 움추림 덕택에 다시 합해진, 그의 손가락들이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별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 내가 바위 위에 서서, 두 손을 갈매기처럼 모아, 소리치자. 게와 갯가제들이 가장 은밀한 바위틈의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오, 그대, 수영으로 군함조의 긴 날개의 비상을 이기는 자여, 인류가 그 내면의 생각을 충실하게, 말로 바꾸어 힘차게 내 던지는 저 울림도 거대한 목소리의 의미를 자네가 아직도 이해한다면, 그 빠른 행보를 잠시 중단하고, 자네가 밟아온 진실한 이력의 고비를 나에게 간략하게 말해주게. 그러나 자네에게 경고하건대, 내게 우정과 존경심을자아내게 하는 것이 자네의 대담한 의도라면, 내게 말을 던질 필요가 없네. 그런 감정이야 상어처럼 우아하고 힘차게 그 굽힐 줄 모르는 일직선의 순례를 완수하는 자네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내가 자네에게 느꼈던 것." 한줄기 한숨소리가 내 뼈를 얼어붙게 하고, 내 발바닥을 올려놓은 바위를 흔들며(그런 절망의 울부짖음을 내 귀에 전하는 음파의 거친 침입으로 나 자신이 흔들린 것이 아닌, 이상). 지구의 내장에까지 들렸으며, 물고기들이 눈사태의 굉음을 내며 파도 아래도 잠겨들었다. 양서인간은 감히 너무 가까이 해안까지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제 목소리가 내 고막까지 또렷하게 도달한다는 것은 확인하자. 해초에 덮인 제 상체를 울부짖는 물결 위로 띄운 정도로, 물갈퀴가 달린 사지의 움직임을 줄였다. 나는 그가 지고한 명령을 받들어, 방황하는 한 무더기 기억들을 소환하려는 듯,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이 성스러운 고문서적 작업을 하는 그를 나는 감히 방해할 수 없었다. 과거 속에 잠겨들어간 그는 한 덩이 암초와 방불했다. 그는 마침내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네는 적이 없지 않다네, 수많은 발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동물들의 호감을 끌어모으기는커녕 놈들에게 십중팔구 질투심 어린 분노나 유발하는 강력한 자극제일 뿐이지. 그래서 나는 이 토충이 강렬하기 그지없는 증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알고도 놀라지 않을 것이네. 나는 자네에게 내 출생지를 감추겠네. 그거야 내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지만, 내 가족을 생각하면 다시 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은 내 의무와 상관이 있지.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이여, 그분들을 용서하소서!) 일 년을 기다린 후, 하늘이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준 걸 알았다네. 두 쌍둥이. 내 형과 내가 태어났지. 그런 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욱 당연하지. 내 이야기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야. 둘 중에 내가 더 아름답고 더 영리해서, 형은 나에게 증오를 품고, 제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지. 이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랑의 가장 큰 부분을 내게 쏟아부었고, 나도 성실하고 변함없는 우애로, 같은 혈육에서 출생한 자에게 격분할 권리가 없는 한 영혼을 달래려고 노력했다네. 그런데 내 형은 제 분노의 한계를 모르고, 전혀 엉터리도 없는 중상으로, 우리 공동 부모의 마음에서 내가 미더움을 잃게 했지. 나는 십오 년 동안 지하토굴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유충과 흙탕물밖에는 없이 살지 않았겠나. 이 부당한 장기 유폐에서 내가 체험했던 전대미문의 고통을 세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네. 이따금, 하루의 어느 시간에, 형리 셋이 하나씩, 차례로 돌아가며, 갑자기 들이닥치곤 했다네. 집게와 장도리와 가지가지 고문도구를 들고 말일세. 고통이 내게서 뽑아낸 비명이 그들의 완고함을 흔들지 못했고, 내가 흘린 대량의 피가 그들을 미소짓게 했지. 오, 내 형이여, 나는 너를 용서한다. 내 모든 고통의 제일 원인인 너를! 눈먼 광분이 끝에 가서라도 제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는가! 영원한 감옥에서 나는 많은 성찰을 했다네. 인류에 대한 내 전반적인 증오가 어떤 것이었을지. 자네는 짐작하겠지 점차적인 쇠약, 육체와 정신의 고립이 아직 이성을 완전히 잃게 하지는 않아서, 내가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들한테 원한을 품을 정도는 되었지. 나를 노예로 삼은 그 삼중 질곡을 말이야. 나는 꾀를 써서 내 자유를 되찾지 않았겠나! 비록 내 동류들이라고 불리긴 하나, 이날까지 나와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대륙의 주민들에게 진저리가 나서(그들이 내가 자기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면, 왜 나에게 고통을 주었겠는가?). 만일 바다가 숙명적으로 살아온 생애보다 앞선 생애의 먼 기억을 내게 보여준다면, 죽음을 끌어안으리라는 결심을 단단히 굳히고, 나는 해안의 자갈밭을 향해 달려갔지. 자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내 부모의 집에서 도망친 그날 이후, 바다와 그 수정 동굴에서 살게 된 것을,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한탄하지는 않는다네. 섭리는, 자네가 보다시피, 내게 백조의 기관을 일부 마련해주었지. 물고기들과는 평화롭게 살아서, 너석들은 내가 자기들의 군주라도 되는 듯이, 필요한 양식을 구해주지. 자네가 불쾌하게 여기지만 않는다면, 내가 한번 특별히 약정된 휘파람을 불어보겠네. 그럼 녀석들이 어떻게 다시 나타나는지 보게 될 걸세." 그가 예고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자기 신하들의 행렬에 둘러싸여, 그 왕자의 위엄이 어린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몇초 후에 그가 내 육안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망원경을 통해서는, 그와 수평선의 마지막 변을 여전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헤엄을 치고, 다른 손으로는 단단한 땅에 접근한 데서 오는 두려운 긴장으로 핏발이 선 두 눈을 닦았다. 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나는 깍아지른 절벽에 그 고자질쟁이 도구를 집어던졌다. 망원경은 이 바위 저 바위에 부딪쳐 튀어올랐으며, 그 흩어진 조각들을 삼킨 것은 파도였다. 마지막 표현과 마지막 작별이 그와 같았으니, 그로써 나는 고결하고 불운한 한 지성 앞에, 마치 꿈속에서처럼, 인사를 하였더라! 그렇지만, 그 여름 날 밤에, 일어난 일에서, 모든것이 사실이었다.       1) 다시 말해서 양식과 상상력  
969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1) 댓글:  조회:10  추천:0  2019-07-1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1)           네번째 노래(6)       (6) 나는 절벽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하루종일 사막을 가로질러 타조를 쫓았으나 붙잡지 못한 사람은 먹을 것을 먹고 눈을 감을 시간을 누리지 못한다. 내 글을 읽은 자가 그사람이라면, 어떤 수면이 나를 짖누르고 있는지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폭풍이 그 손바닥으로 배 한 척을 바다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수직으로 눌렀을 때, 전체 선원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피곤과 온갖 종류의 박탈로 기진하여 뗏목 위에 남아 있다면, 파도가 인간의 생애보다 더 길어진 시간 동안 그를 표류물처럼 흔들어댄다면, 그런데 깨어진 배 밑바닥의 떠돌고 있는 이 비탄의 해역에 프리깃함 한 척이 항적을 그리다가 난바다 위로 제 앙상한 해골을 끌고 가는 그 불행한 사람을 보고 하마터면 늦을 뻔한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내 생각에 이 조난자는 내 감각이 졸음기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훨씬 더 잘 짐작하리라. 동물자기1)와 클로로포름은, 그것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가끔 이런 가면증 강직과 동일한 상태를 낳을 수 있다. 이 상태는 죽음과는 아무런 닮은 점도 없다. 닮았다고 말하면 큰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꿈속으로 들어가,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독서에 굶주려, 임신한 암컷 때문에 서로 다투는 머리 큰 향유 고래떼처럼, 울부짖지 않게 하자. 나는 꿈을 꾸었으니, 내가 어느 돼지의 몸에 들어갔는데, 빠져나오는 일이 쉽지 않아, 순전히 진흙투성이인 늪 속에서 내 털가죽을 굴렸다. 보상과 같은 것이었을까? 내가 원하던바, 나는 더이상 인류에 속하지 않았다! 나는 이와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고, 더할 나위 없이 심오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섭리의 편에서 베푼 이 각별한 호의에 어울릴 만한 어떤 미덕의 행위를 수행했는지 열심히 탐구했다. 화강암의 복부에 무서울 정도로 달라붙어, 죽은 물질과 살아 있는 살의 이 환원 불가능한 혼합물 위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수가 두 차례나 지나가는 동안, 그렇게 납작 몸을 붙이던 여러 단계를 기억 속에 되새기고 난 지금, 이 전략이 십중팔구는 신의 정의에 의해 내게 떨어진 형벌일 뿐이었다고 단언하는 것이 필경 쓸모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적 필요성이나 그 악취 풍기는 기쁨의 원인을 누가 알겠는가! 변신은 내가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완전한 행복의 높고 고결한 메아리로밖에는 결코 내 눈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돼지가 되는 그날이 왔구나! 나는 나무껍질에 내 이빨을 시험하였다. 돼지 주둥이를, 나는 기쁨에 겨워 바라보았다. 신성의 가장 작은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내 영혼을 이 형언할 수 없는 쾌락의 극단적인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따라서 내게 귀를 기울이고, 얼굴을 붉히지 말라. 아름다움의 무궁무진한 캐리커처들아, 더할 수 없이 경멸스러운 너희 영혼의 우스꽝스러운 당나귀 울음을 진지하게 여기는 자들아. 전능한 힘이 그로테스크한 거대한 일반법칙을 분명코 넘어서지 못하는 뛰어난 광대놀음의 희귀한 순간에, 왜 인간이라 불리는, 붉은 산호와 재질이 닮은, 기이한 미생물 존재들을 어느 날 한 행성에 살게 하고는, 그것을 놀라자빠질 기쁨으로 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아. 물론 뼈와 지방인 너희가 얼굴 붉히는 것은 옳다만, 그러나 내게 귀를 기울여라. 나는 너희의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 너희에게 내보이는 혐오감 때문에 너희는 지성에게 피를 쏟게 할 것이다. 그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일관성을 지켜라--- 자, 이제 구속은 없다. 나는 죽이고 싶을 때 죽였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기조차 했고,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종족을 평온하게 남겨두고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의 법률이 복수를 하겠다고 내내 나를 쫓아왔다. 그러나 내 양심은 내게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나는 내 새로운 동류들과 싸웠으며, 땅에는 응고된 피가 수없이 널판처럼 흩어져 있었다. 내가 제일 강자였으며, 나는 모든 승리를 거머쥐었다. 쓰라린 상처가 내 몸을 덮었으나, 나는 그걸 모르는 척했다. 지상의 동물들이 나에게서 멀어졌으며, 나는 찬란한 권위 속에 홀로 남아 있었다. 내 광포함으로 생명이 전멸한 그 지방을 멀리 떠나, 다른 지방에 도착하여 내 살인과 살육의 습속을 삼으려고, 강을 헤엄쳐 건너간 뒤에, 내가 그 꽃 핀 강변을 걸어가려 했을 때, 내 놀라움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두 발이 마비되었으며, 어떤 움직임도 이 강요된 부동의 진실을 밝혀주려 하지 않았다. 내 길을 계속 나아가려는 초자연적인 노력 한가운데서, 나는 그때 정신이 들었으며, 내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섭리는 이렇게 꿈에서라도 내 숭고한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닌 방식으로, 나에게 이해시켰다. 내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온 것이 나에게는 매우 큰 고통이어서 밤이면 밤마다 나는 아직도 울고 있다. 내 시트는 물에 담가졌던 것처럼 줄곧 젖어 있어서, 나는 날마다 시트를 갈게 한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나를 찾아오라. 너희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내 주장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진실 자체를 검증할 것이다. 아름다운 별빛 아래서, 절벽 위에서 보낸 그날 밤 이후, 얼마나 여러번 나는 이 돼지떼 저 돼지떼에 섞어들어가, 내 깨어진 변신을 하나의 권리로 반환하려 하지 않았던가! 이 영광스러운 추억을 떠날 때가 되었다. 추억은 지나간 자리에 영원한 회한의 창백한 은하수밖에는 남기지 않는다.       1) 최면술을 실시했을 때 시술자로부터 피술자에게 흐른다고 생각되는 액체, 또는 힘. 에서 중요한 요소로 나온다. 뒤카스는 보들레르가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을 통해 이 말을 알게 됐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96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0) 댓글:  조회:11  추천:0  2019-07-1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40)     네번째 노래(5)       (5) 내 방의 벽에 도대체 어떤 망령이 제 딱딱한 실루엣의 몽환적 투영을 유레없이 강력하게 그리는 것이냐? 내가 이 착란의 소리 없는 질문을 가슴에 품을 때, 이와 같이 문체의 간결함이 이루어짐은 형식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네가 누구든, 너를 지켜라. 내 너에게 무시무시한 고발의 투석기를 몰아갈 테니. 그 두 눈은 네 것이 아니다--- 어디서 그걸 탈취했느냐? 어느 날, 나는 내 앞으로 지나가는 금발의 여인을 보았는데, 네 눈과 똑같은 눈을 가졌더구나. 그 여자에게서 너는 두 눈을 빼앗았다. 네 아름다움을 믿게 하려는 속셈이 보인다마는, 아무도 속지 않으며, 나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속지는 않는다. 타자의 살을 먹기 좋아하고 추격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자들이며, 아칸소주의 파노코코1) 잎을 스치는 해골들처럼 아름다운 맹금류 한 무리 전체가 순종하고 공인된 하인들처럼 네 이마를 둘러싸고 파닥거린다. 그런데 이마인가? 그렇다고 믿기에는 여러 번 머뭇거리지 않기 어렵다. 그 이마란 것이 매우 낮은지라, 있는지 없는지 싶은 그 존재에 대한 수적으로 매우 빈약한 그 증거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너에게 이마가 없기에, 너는 몽환적인 춤의 흐릿하게 비친 상징처럼 벽에다 네 요추의 열띤 흔들림을 데려올 것이다. 도대체 누가 네 머리가죽을 벗겼느냐? 그게 한 인간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 네가 그를 스무 해 동안, 한 감옥에 가두었더니. 그가 달아나 제 앙심에 알맞은 복수를 준비한지라. 그는 제 할 일을 한 것이며, 나는 그를 칭찬하긴 했으나. 다만, 오직 다만 한 가지, 그는 충분히 가혹하지 않았다. 이제 너는 적어도(이 점에 미리 주목하자), 머리칼의 명백한 결여로, 포로로 잡힌 아메리칸인디언을 닮았다. 동물들에게서 제거된 뇌수조차도 결국은 다시 돋아난다는 것을 생리학자들이 발견하였으니 네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은, 내가 방금 깨달은 사소한 것에 따르면 거대한 쾌락이 없는 것은 아닌 단순한 사실 확인에 머물러, 가장 대담한 추론으로도 네 자유에 대한 소망의 경계에까지는 못 미치고, 그와 반대로, 매우 의심스러운 그 중립성을 가동하여, 어디까지나 네 머리를 덮고 있는 피부의 일시적 상실밖에는 네게 가능한 것이 없음을 한결 거대한 불행의 전조처럼 여기는(또는 최소한 희망하는) 데에 근거를 둔다. 나는 네가 내 말을 이해했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네가 우연의 허락을 얻어, 터무니없지만 때로는 이치에 얽매이는 것은 아닌 어떤 기적에 의해, 네 적의 세심한 감사가 제 승리의 감동스러운 기념물로 간직해온 그 귀중한 두피를 되찾는다면,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인 체온 저하에 대한 너의 정당한, 그러나 약간 과장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만큼 당연히 너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네 머리에 줄곧 얹어두는 것이 너에게 허락될(내가 그걸 부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터) 쓰개머리에 의해서, 기초적인 예의의 가장 단순한 규칙들을 어긴다는 항상 불쾌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네 뇌수의 다양한 부분을, 특히 겨울철에, 대기와의 접촉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중요하고 유일하기도 한 기회를, 비록 갑작스럽긴 하지만 운좋게 나타날 기회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 확률법칙을 수학적 관점에서만 검토했어도(그런데, 주저하다시피 이 법칙은 유추에 의해 지성의 다른 분야에도 쉽사리 옮겨 적용할 수 있다) 거의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점도 아울러 이해했기를 희망한다. 네가 내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는 게 진실이 아니냐? 네가 내 말을 더욱 깊이 새겨듣더라도, 네 슬픔이 그 붉은 콧구멍 내부에서 멀어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주 불편부당하고, 응당 너를 증오해야 하는 만큼 증오하지도 않는 만큼(내 말이 틀렸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라). 네 뜻이야 어떻든, 우월한 힘에 밀린 것처럼, 너는 내 연설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너만큼 사악하지 않다. 왜 너의 재능이 내 재능 앞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겠느냐--- 사실, 나는 너만큼 사악하지 않다! 네가 방금 이 산허리에 세워진 도시에 시선을 한 번 던졌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얼 보고 있는가? ---- 주민들이 모두 죽어버렸구나! 나는 다른 사람만큼 자존심을 지녔으며, 아마도 더 지닌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악덕이다. 좋다. 들어보라--- 들어보라,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흐르는 해저 조류 속에서 상어의 모습으로 반세기를 살아왔던 기억을 떠올리는 한 사내의 고백이 너에게 아주 생생하게 흥미로워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면 말이다. 쓰라린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가 너에게 불러일으키는 혐오감을 내비치려는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고 들어보라. 내가 네 발끝에 미덕의 가면을 벗어던져, 있는 그대로의 나를 네 눈에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가면을 한 번도 쓴 적이 없기 때문이며(그렇긴하지만, 이 말로 변명이 된다면),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네가 내 용모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너는 내가 패덕이라는 점에서는 너의 무시무시한 적수가 아니라, 너를 존경하는 제자인 것을 알아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와 악덕의 종려수관을 다투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이 그러리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먼저 나와 겨루어야 할 터인데, 그게 쉽지 않고--- 들어보라, 네가 안개의 허약한 응결이 아니라면(너는 어딘가 네 몸을 감추니, 나는 그 몸을 만날 수 없다). 어느 날 아침, 장미색 연꽃을 꺾으려고 호수에 몸을 기울인 어린 소녀를 보았는데, 그애가 조숙한 경험으로 발을 확고하게 딛고 물에 몸을 숙였을 때, 그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정말이지 내 편에서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에, 그 애는 바위 근처에서 조수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처럼 비틀거렸고, 그애의 다리가 휘청거렸으니, 보기에 경이로운 사건이자 내가 너와 이야기하는 것만큼의 진실성으로 이룩된 현상으로, 그애는 호수의 바닥에까지 떨어졌다. 기묘한 결말로, 그애는 더 이상 어떤 수련도 꺾지 않았다. 그애는 물밑에서 무엇을 할까?--- 나는 알아보지 않았다. 필경, 해방의 기치 아래 정렬되는 그애의 의지는 부패와 악착스러운 싸움을 벌이리라! 그러나 너, 내 스승, 네 시선을 맞고, 이 도시 저 도시의 주민들이, 코끼리의 발꿈치에 부서지는 개미 둥지처럼, 일시에 파멸한다. 나는 그 증명의 한 예를 방금 목격하지 않았던가? 보라 --- 산은 더이상 즐거워하지 않는다--- 산은 늙은이처럼 고립되었다. 집들은 존재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네가 똑같이 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낮은 목소리로 단언하더라도,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벌써, 시체들이 발산하는 냄새가 나에게까지 왔다. 너는 맡지 못하느냐? 저 맹금들을 보라. 거창한 식사를 시작하려고 우리가 멀리 떠나기를 기다린다. 그 끊임없는 구름떼가 지평선 네 구석에서 몰려온다. 아아! 놈들은 벌써 와 있다. 그 맹렬한 날개가. 범죄를 서두르라고 너를 재촉하기라도 하듯이, 네 위에 나선형 건축물을 그리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너의 후각은 가장 미미한 악취도 맡지 못하는가? 사기꾼이란 게 별다른 것이 아니다--- 너의 다리를 안고 싶지만, 내 팔은 투명한 안개만 그러잡는다. 나로서는, 그것에 진지한 감탄의 표지를 가장 많이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유령은 나를 조롱한다. 놈은 저 자신의 육체를 찾도록 나를 돕는다. 내가 놈에게 제자리에 있으라고 신호를 하면, 놈도 내게 똑같은 신호를 보내고--- 비밀이 밝혀졌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건대, 내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큰 세목과 가장 작은 세목이. 이런 세목들은, 예를 들어, 금발 여인에게서 갈취한 두 눈처럼, 다시 마음 속에 떠올릴 가치가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다름없고!--- 그러니까 나도 내 머리가죽이 벗겨졌음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그가 나 같은 존재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우정을 나에게 당당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느끼는 고통의 모습을 목격하려고, 내가 그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 고작 오 년간이지만(하마터면 정확한 연수를 잊을 뻔했다). 내 시선이 허공에 도는 행성들에게까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체했기에, 내가 기억능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그가 주장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니리라. 네가 해야 할 남은 일은, 돌맹이의 도움을 얻어, 이 거울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리는 것--- 일시적 기억상실의 악몽이 내 상상력 속에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어서, 그때마다 확고한 광학법칙에 의해, 나 자신의 상을 잘못 보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구나!       1) 파노코코는 흑단의 일종으로 미국 중남부 서부의 아칸소주가 아니라 남미의 가이아나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67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39) 댓글:  조회:11  추천:0  2019-07-1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39)           네번째 노래(4)       (4) 나는 더럽다. 이(虱)들이 나를 물어뜯는다. 돼지들이 나를 보고는 토한다. 문둥이의 딱지와 욕창이 누런 고름 범벅인 내 피부를 비늘처럼 덮고 있다. 나는 강에 흐르는 물도 구름의 이슬도 알지 못한다. 내 목덜미에서는 산형화서(繖形花序)의 꽃가루를 지닌 거대한 버섯이 퇴비 더미라도 만난 듯 돋아난다. 볼썽없는 가구 위에 앉은 채로, 나는 4세기 전부터 수족을 움직이지 않았다. 내 두발은 땅에 뿌리를 박아 복부까지 더러운 기생식물이 가득 돋아난 일종의 다년생식물이 된 꼴이지만, 그렇다고 식물에서 파생한 것도 아니고 더는 인간의 육체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 심장은 고동친다. 그러나 어떻게 고동치겠는가, 내 시체(감히 육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의 부패와 발산이 풍부하게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내 왼쪽 겨드랑이 아래서는 두꺼비 가족이 거주하여,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고물거리며 나를 간지럼 태운다. 한 녀석이 거기서 빠져나와 당신의 귓속에 들어와 그 주둥이로 긁어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라. 녀석이 이어서 당신의 뇌수 속으로 들어올 수도 있으리라. 내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는, 카멜레온이 한 마리 있어서 굶어죽지 않으려고 두꺼비 녀석을 끊임없이 사냥한다. 저마다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이 다른 편의 농간을 완전히 주저앉히면, 양쪽 녀석들은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내 양 옆구리를 덮고 있는 맛있는 지방을 빨아댄다. 나야 길이 들었다. 악독한 독사 한 년이 내 음경을 삼키고는 대신 들어앉았다. 그년이 나를 고자로 만들었다. 그 더러운 년이. 오! 내가 마비된 팔로 나를 지킬 수만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기는커녕 두 팔이 장작으로 바뀌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간에, 피가 그 붉은 색을 데려오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는 자라지 않는 작은 고슴도치 두 마리가 내 고환을 빼내 개한테 던졌으며, 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 겉껍질은 정성스럽게 씻어서, 놈들이 그 속에 터를 잡았다. 항문은 게 한 마리가 막아버렸다. 내 신체 무력에 용기를 얻어, 놈이 그 집게발가락으로 입구를 지키며 나를 몹시 아프게 하는구나! 두 마리 해파리가 어긋한 적 없는 기대에 곧장 끌려, 바다를 건너왔다. 그년들이 인간의 엉덩이를 구성하는 살덩어리 두 개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그 불룩한 윤곽에 들러붙어 그칠 줄 모르는 압력으로 하도 짓이겨대는 바람에 두 덩어리 살이 사라지고, 점착성의 왕국에서 온, 색깔도, 모양도, 잔인성도 똑같은 두 마리 괴물만 남았다. 내 척추 기둥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시라. 그건 한 자루 칼이니까. 그렇다. 그렇다--- 나는 그거야 걱정하지 않는다. 당신의 의문은 당연하다. 그것이 어떻게 내 허리에 수직으로 박혀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게 아주 또렷하게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분명 꿈에 불과한 것을 추억으로 여기기를 결심하고 말한다면, 내가 창조주를 정복하는 그날까지 병고를 안고 부동성을 지키며 살려고 서원했음을 안 인간이 있어서, 그가 발끝으로, 그렇다고 내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지는 않게, 내 뒤로 다가왔음을 알아두시라. 길지 않은 한순간, 나는 아무것도 더는 느끼지 못했다. 이 날카로운 단검이 축제에 쓸 황소의 두 어깨 사이에 자루까지 박혔으며, 그 골격이 지진처럼 전율했다. 칼날이 몸에 아주 강력하게 달라붙어서, 지금까지 아무도 그 검을 빼낼 수 없었다. 격투기 장사, 기계공, 철학자, 의사 들이 차례차례 지극히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인간이 저지른 악이 이제는 풀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타고난 무지의 깊이를 용서하고, 눈꺼풀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나그네여, 내 옆을 지나가거든, 간청하건대, 내게 추호라도 위안의 말을 던지지 마라. 그대가 내 용기를 허물어뜨릴지도 모른다. 스스로 맞이하는 순교의 불길에 내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다시 덥히도록 나를 놔두라. 가거라--- 내가 너에게 어떤 동정심도 불어넣지 않기를 증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기이하고, 그 행업은 물에 꽂힌 몽둥이가 부러진 것처럼 보이듯 설명이 불가능하다. 네가 보는 내 모습 그대로, 나는 살인자 군단의 선두에 서서 하늘의 성벽까지 소풍을 하고, 돌와와 이 자세를 다시 취하고, 복수의 고결한 계획을 새로이 궁리할 수 있다. 잘 가라, 네 발걸음을 더는 붙잡지 않을 터이니, 네 앎을 쌓고 너를 보존하기 위하여, 필경 내가 선하게 태어났음에도 나를 반항으로 이끌었던 저 숙명적인 팔자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너는 네가 본 것을 네 아들에게 이야기하겠거니와, 아이의 손을 잡고 별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신비를, 울새의 둥지와 주의 신전을 찬양하게 하라. 너는 아이가 아버지의 충고를 그리도 유순하게 따르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며, 그래서 한줄기 미소로 아이에게 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자기를 감시하는 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녀석에게 눈길을 던지면, 너는 미덕에 침을 뱉고 있는 녀석을 볼 것이다. 인간 종족의 후손인 그 녀석이 너를 속였지만, 더는 속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앞으로 녀석이 무엇이 될지 알게 되리라. 오, 불행한 아버지여, 네 노년의 발걸음에 길동무로 삼기 위해. 준비하라. 조숙한 범죄자의 목을 자를 저 지울 수 없는 단두대를, 그리고 너에게 무덤으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줄 저 고통을.
96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38) 댓글:  조회:10  추천:0  2019-07-1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38)           네번째 노래(3)       (3) 교수대 하나가 땅 위에 솟아 있고, 지면에서 일 미터 높이에, 팔이 뒤로 묶인 한 인간이 제 머리칼에 매달려 있다. 두 다리는 자유롭게 풀려 있는데, 그 고통을 증가시키기 위함이며, 그 팔의 묶임과 반대되는 것이면 무엇이 됐건 더 많이 욕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마의 피부는 매달림의 무게에 하도 많이 늘어나서, 자연스러운 표정의 부재상황에 처한 그의 얼굴은 종유석의 딱딱한 응고를 닮았다. 사흘 전부터, 그는 이 고문을 견디고 있었다. 그는 소리질렀다: "누가 내 팔을 풀어줄 것인가? 누가 내 머리칼을 풀어줄 것인가? 내 머리에서 머리칼의 뿌리를 더욱더 뽑아낼 뿐인 흔들림으로 나는 찢어지는구나. 나를 잠 못들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아니다. 내 삶의 그 연명을 한 시간의 경계 밖으로 밀고 나가기는 불가능하다. 날카로운 돌조각으로 내 목구멍을 갈라줄 사람 누구 없는가!" 말 한마디마다 격렬한 울부짖음이 앞서고 뒤따랐다. 나는 몸을 숨기고 있던 덤불에서 뛰쳐나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 아니 비곗덩어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반대편에서 술 취한 두 여인이 춤을 추며 내달았다. 한 여인은 자루 하나와 납끈을 단 채찍 두 개를, 다른 여인은 역청이 가득 담긴 통 하나와 귀얄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더 늙은 여인의 반백 머리카락이 찌어져 너덜거리는 돛폭처럼 바람에 흩날렸으며, 다른 여인의 두 발목을 서로 엇갈리며 배의 뒤전 갑판에 부려놓은 참치가 꼬리라도 치듯 퍼덕이는 소리를 냈다. 그녀들의 두 눈이 어찌나 검고 어찌나 강렬한 불꽃으로 이글거리는지 나는 처음에 그 두 여인이 나와 같은 종족에 속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들의 그렇게도 이기적으로 냉정하게 웃고 있었고, 그녀들의 낯짝이 그만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기에 나는 인간 종족의 가장 추악한 견본을 내 눈앞에 두고 있음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덤불 뒤에 다시 몸을 숨기고, 둥지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있는 아칸토포루스 세라토코르니스1)처럼,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은 밀물의 속력으로 다가왔으며, 땅에 귀를 대보니,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가 그녀들의 발걸음이 서정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 두 마리 오랑우탄 암컷들은 교수대 밑에 도착해서는, 몇 초 동안 공기의 냄새를 맡더니, 그 장소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음을 알아차리자, 자기들의 경험에서 나온 바의 참으로 주목할 만한 분량의 경악을 그 기괴한 몸짓으로 나타냈다. 그녀들의 소원과 맞아떨어지는 죽음이 결말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들은 소시지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지 알기 위해 수고롭게 고개를 쳐들지도 않았다. 한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목숨이 끈질기기도 하네, 내 사랑하는 남편아." 성당에서 두 성가대원이 시편의 창구를 번갈아 노래할 때처럼, 두번째 여자가 화답했다: "너는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구나. 오, 내 귀여운 아들아? 네가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보나마나 무슨 주술일 텐데) 독수리들이 덤벼들지 못하게 했는지 말해라. 하긴 네 몸뚱이가 이렇게도 앙상해졌으니! 산들바람에도 그게 등불처럼 흔들리는구나." 그녀들은 저마다 귀얄을 들고 매달린 자의 몸뚱이에 칠을 하고--- 저마다의 채찍을 들고 팔을 처들어--- 나는 흑인과 맞붙어 싸우며 그의 머리칼을 감으려고 악몽에서 자주 보는 헛고생을 할 때처럼, 금속날이 피부의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대신, 역청 덕택에, 뼈의 방해가 마땅히 허락할 수 있는 만큼의 깊은 고랑이 파인 살의 안쪽까지 얼마나 정확하고 힘차게 파고드는지 감탄하며 바라보았다(나처럼 하지 않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과도하게 호기심을 끌긴하지만, 기대해도 좋을 만큼 심히 우스운 것은 아닌 이 구경거리에서, 나는 쾌락을 찾고 싶은 유혹을 자제했다. 그렇긴 하나, 미리 내린 좋은 결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의 힘을, 그 팔의 근육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굴이나 아랫배처럼 가장 예민한 부분을 어김없이 후려갈기는 그녀들의 교묘한 솜씨는 내가 총체적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야망에 들뜨지 않고서야 내 입에서 언급될 리 없으리라!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붙여, 특히 수평 방향으로 다물고(그러나 이것이 이런 압력을 낳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임을 누구라도 모르지 않지만), 내가 기꺼이 눈물과 수수께끼로 부풀어오른 침묵을 지키지 않는 한, 침묵의 고통스러운 실현이 내 말을 감추는 것만큼 훌륭하게, 그뿐 아니라 훨씬 더 훌륭하게 메마른 장골과 건장한 관절을 작동시키는 격정에 따라 일어난 불길한 결과들을 (능란함의 가장 기초적인 법칙을 어기지 않고는 원칙적으로 실수의 가정적 가능성을 명백하게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기에 하는 말이지만) 감추기에는 무력할 터이나, 공정한 관찰자와 노련한 모럴리스트의 관점에 서지 않을지라도(다소간 기만적인 이런 양보를 내가, 적어도 전적으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상당히 중요하다), 의심이 이 점에서는 그 뿌리를 뻗어나갈 능력도 없으려니와, 그게 초자연적인 권능의 수중에 있다고는 잠시라도 생각하지 않기에 하는 말인데, 영양섭취와 독물의 결여라는 동시적 조건을 채워주는 수액의 부족으로, 아마도 갑작스럽게는 아니겠지만, 틀림없이 죽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 글을 읽지 마시라, 나는 내 의견의 소심한 성격만을 등장시킨다. 그렇긴 하나, 내가 이론의 여지없는 권리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 물론, 내 의도는 서로 이해하는 더 단순한 방법이 있다는 주장, 확실성의 기준이 빛나는 이 주장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방법을 오직 두세 마디 말로, 그러나 천 마디 말보다 더 가치가 있는 말로 번역하자면,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리라.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일반 대중이 흔히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토론한다는 말은 문법적인 말이며, 많은 사람들은 내가 방금 종이 위에 눕혀놓은 것을, 두꺼운 증거 자료집도 없이, 반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능이 어떤 희귀한 통찰을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더욱 신중해지거나, 허풍의 연안을 따라가는 어떤 대담함으로 판단을 내려, 이 점에서는 내 말을 믿으시라, 그 판단이 달리 보이게 될 때는, 사태가 현저히 달라진다. 돌이킬 수 없는 한심하고 그만큼 운명적으로 흥미진진한 (자신의 최근 추억을 상세히 검토했다는 조건에서는, 누구라도 이 점을 확인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으리라) 이런 시시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괜찮은 방법은, 완전하게, 아니면 더 훌륭하게 균형잡힌 능력들을 구비하고 있다면, 우둔함의 저울대가 이성의 고결하고 멋진 속성들이 실려 있는 저울접시보다 훨씬 더 무겁지만 않다면, 더 분명하게 말할 요량으로 (이는 지금까지 내가 오직 간결할 뿐이었기에 하는 말인데, 몇몇 사람들은 내 문장의 길이 때문에 이 말을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나, 상상에 불과한 이 길이가 분석의 메스를 들고 진리의 덧없은 출현을 그 최후의 보루까지 추격하겠다는 목적으로 가득차 있는 이상 내 문장은 간결하다) 다시 말해서, 지성이 결점보다 충분히 우세하여 그 결점의 무게 아래서 습관과 천성과 교육에 의해 부분적으로 질식되지 않았다면, 괜찮은 방법은, 내가 이 말을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반복하는 것은, 반복 덕택에, 거의 언제나 이건 거짓이 아니다. 서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지만, 꼬리를 내리고 (다만 내가 꼬리 하나를 가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 장절 가운데 시멘트로 굳혀놓은 그 드라마틱한 주제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내 작업에 다시 착수하기 전에 물 한 컵을 마시는 것이 이롭겠다. 그렇게 끝내기보다는 차라리 두 잔을 마시는 편이 더 좋다. 이와 같이, 숲을 가로질러 도망친 노예를 추격하는 중에, 적절한 시기에, 추격대원들은 저마다 총을 칡넝쿨에 걸어두고, 울창한 숲 그늘에 함께 모여, 갈증을 해소하고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다. 그러나 휴식은 몇 초에 지나지 않으며, 추격은 악착같이 계속되고 사냥의 함성은 울려퍼지기를 늦추지 않는다. 그런데, 산소가 이런저런 발화점을 갖춘 성냥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는, 자만하지 않고 지니고 있는 바의 속성에 의해 인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문체로 다시 되돌아오려는, 내가 보여주는 바의 열의에 의해 내 의무의 완수가 인지될 것이다. 암컷들은 채찍을 움켜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피곤이 그것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두 시간 가까이 실시하였던 체조작업을 현명하게 끝마치고, 미래를 대비한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닌 기쁨에 달떠서 돌아갔다. 나는 얼어붙은 눈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 사내쪽으로 가서(그가 피를 많이 잃어서 기진한 탓에 말을 할 수 없었고,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얼굴과 하복부에서 출혈이 발생했다는 것이 내 소견이었던 터라), 그의 팔을 풀어준 다음 그의 머리칼을 가위로 잘랐다. 그가 내게 하는 말인즉 자기 어머니가 어느 날 저녁 자기를 침실로 불러서 옷을 벗고, 자기와 함께 한 침대에서 같이 밤을 보내자고 명령했으며, 어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어머니라는 것이 자기 앞에 옷을 홀딱 벗으며, 그러는 사이에 가장 음란한 동작을 엮어넣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는 물러났다. 게다가 그 끈질긴 거부로 그는 제 아내의 분노를 샀는데, 아내 편에서는 남편을 끌어들여 늙은 여자의 육욕에 몸을 빌려주게 하는 일에 성공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의 기대에 설레고 있었다. 그녀들은 공모하여, 어느 인적 없는 지역에 미리 준비해둔 교수대에 그를 매달고, 모든 재앙과 모든 위협 앞에 벌거벗겨, 서서히 죽어가게 버려두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들의 마침내 그 교활한 형벌을 선택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뛰어넘을 수 없는 난관으로 점철된, 아주 오래 익힌 여러 가지 궁리가 없지 않았으나, 나의 개입에 따른 뜻밖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 형기가 종료를 맞을 수 없었다. 더할 수 없이 강렬한 감사의 기색이 표정 하나하나에 밑줄을 그었으며, 그 속내 이야기에는 가장 하찮은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나는 사내를 가장 가까운 초가집 농가로 옮겼는데, 그가 곧 기절한 때문이었으며, 나는 농부들에게 내 지갑을 맡겨 그 부상자를 돌보게 하고, 자신들의 친아들을 대하듯 그 불우한 사내에게 끈끈한 동정의 표시를 아낌없이 베풀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에야 그들을 떠났다. 이번에는 내가 그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문으로 다가가 오솔길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일백 미터 정도를 간 다음, 나는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돌려, 다시 농가로 들어와 그들의 순박한 집주인들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아니요 아니요, 그 때문에 내가 놀랐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이번에는 결정적으로 떠났지만, 발바닥이 안전하게 땅에 붙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이제 늑대는 어느 봄날 아내와 어머니의 얽힌 손이 세운 교수대 아래로, 제 매혹된 상상력이 허망한 식사를 찾아 길을 밟게 했을 때처럼 지나가지는 않는다. 늑대는 지평선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이 검은 머리칼을 보고는, 제 관성저항을 부추기는 일 없이 비교 불가능한 속력으로 도망치는구나! 동물이 어찌 그걸 헤아리지 못할 것인가. 인간이란 것들 자신이 말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이성의 제국을 내팽개치고, 그 폐위된 여왕의 자리에 잔혹한 복수밖에는 남겨주지 않은 판에!       1) 딱정벌레과의 초시류에 속하는 긴 더듬이와 가시 달린 흉갑을 가진 곤충. 인도와 적도 아프리카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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