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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 댓글:  조회:75  추천:0  2018-09-06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이은봉 정리           1. 머리말      유럽의 문예사조에서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술사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문학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아방가르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방가르드가 발전하는 데는 특히 라틴 문화권 사람들의 감수성이 옥토의 역할을 했다. 영미문학에서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구별하려는 의도도 별로 환영받고 있지 못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 두고자 하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아방가르드는 상대적으로 라틴계 문학에서 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레나토 포기올리의 지적대로라면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유희적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우상 파괴적인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주로 아방가르드가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이 유럽과 스페인 중남미에서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주로 프랑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아방가르드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위라는 뜻.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써 특히 남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타개해 가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던 20세기 초의 예술 운동, 즉 이탈리아의 미래파, 러시아의 구성주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등을 지칭해서 쓰인다. 예술 혁신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이 명칭이 쓰이지 않으나, 예술 영역에 따라서 전위미술, 전위음악 등으로 쓰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어떠한 몇몇 동일한 특성으로 쉽사리 정의내릴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서로 동질성을 찾기가 어려운 수많은 표현 방식과 문학 형태가 아방가르드의 이름 아래 모여 그것을 대표하며 그것의 의미를 분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自意나 他意에 의해 아방가르드에 포함되는 예술 사조는 40여개를 넘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적 특성이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현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있다. 아방가르드의 보편적인 특성인 ‘실험적인 예술의 전통과 관습’, ‘인습을 뛰어넘는 예술정신’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시대에 앞서고자 하는 창조적인 반항과 몸부림 등의 경우 문학작품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를 이러한 특징으로만 파악하면 그러한 오해는 일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가치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및 삶의 이해방식을 문학 일반이 지니고 있는 현상의 과도한 표현이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방가르드가 어느 특정한 예술 사조나 전통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 이상의 여러 예술 현상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파, 표현주의는 아방가르드 중에서도 가장 드러난 예술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입체파나 표현주의, 소용돌이파나 구성주의도 아방가르드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전 시대의 모더니즘과의 관계가 다른 예술운동만큼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고 있지는 않고 예술적 성과도 별로 크지 않아 아방가르드의 중심 현상으로 파악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아방가르드는 단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문학적 현상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사회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특성까지도 포함하는 주요한 사상의 흐름이었는데, 이는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작가들이 정치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1차 대전이 비참하게 終戰한 후에는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난 수많은 정치사상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대중들의 마음을 잡았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분출하기 시작한 이 무렵 이들 정치사상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의식을 거칠게 사로잡으며 역사에 온갖 사건을 연출한 바 있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다소 무궤도한 정신차원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아방가르드의 경우 처음부터 문학운동이나 예술운동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는 아니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군대의 용어로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특공대의 선봉, 곧 전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정치사상이나 사회혁명과 관련된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이처럼 정치개혁나 사회개혁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보편화되게 되었는데, 좀더 분명하게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미학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은 마르크스나 니체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대강 1845년 무렵에 와서이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드높게 비상함으로써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을 표현한다. 예술은 개척자이며 폭로자이다. 그런데 예술이 선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혹은 예술가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맨 처음 문학의 용어로 사용된 것은 빅토르 위고에 의해서다. 그러면서 샤를르 보들레르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용어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70년도에 들어서면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예술인들의 혁명적인 정신경향을 총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조금씩 의미가 확대되면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내포를 갖게 되고, 차츰 자신의 몸체를 형성해 온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들 기본적인 개념을 끌어안은 채 다양한 분야에서 당시의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들을 함유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형성해온 것이 아방가르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방가르드는 사상 및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갈등이 미만해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과거의 인습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구가 예술과 만나면서 나타난 일련의 반항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과거의 인습 및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우면서도 진정한 예술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삶과 예술의 영역에서 자유와 해방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문예운동이 다름 아닌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3. 아방가르드의 성격      1) 아방가르드는 개척정신과 선구자적인 자세를 지향한다.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앞장서 문화적 전선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치 군대의 특공대처럼, 전위병처럼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실험은 단순한 이론의 제시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표현으로 새로운 정신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다. 이러한 면에 대한 군중들의 호기심과 비난이 아방가르드의 열정과 생명력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용기와 진취적인 기상으로 적군에 대항하는 특공대처럼 자신의 운명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전포고는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결국 저 자신에게까지도 공격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상 다른 아방가르드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방가르드의 생명력은 불완전한 데에서 솟아 나와 미지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형태와 내용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여기서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필연적인 모순과 시간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2) 아방가르드는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자신을 펼쳐 나간다.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Russel은 사회적 반목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사회적 반목이란 아방가르드 작가가 현대문화의 지배적인 심미적, 윤리적, 정신적 가치로부터 자의식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그러한 가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를 공격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미래파의 선언문에는 용기, 공격, 투쟁의 美 등이 언급되어 있고, 표현주의의 선언문에는 행동, 폭풍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텍스트를 통해서는 물론 작가의 행동이나 언어, 즉 욕설이나 빈정거림 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3) 아방가르드는 전통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어떤 것과도 타협을 거부한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출발은 지금까지의 예술적 전통을 거부하는데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과거의 추억이 간직되기를 원치 않았다. 인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 현상의 하나로 태어난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르네상스 이후 어떤 예술도 자연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견해에 대해 반발하지 못했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입장에 대한 반발은 모더니즘 혹은 그 이후의 예술에서나,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에 와서야 가능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원칙하에 40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온 예술의 흐름,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는 예술의 흐름을 인상주의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했다. 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자신의 특징을 자연의 재현에서 찾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때까지는 예술적 흐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과거 예술과의 단절을 촉진시켜왔던 셈이다. 결국 전통과 인습을 매장시키면서 동시에 예술적 근원을 추구해온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방가르드는 현대적 의식의 일차적인 모습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를 거부한다.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인 무소속, 고립, 계급 탈락, 방랑 등과도 과감히 단절을 강화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그렇다. 아방가르드는 그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단절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이는 기존의 모든 문학적 전통들과 사고방식을 조소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원한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하지만 단절을 통한 자기 고립이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아니다. 예술의 원형을 복구하려 했기 때문에 아방가르드의 단절은 흔히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던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단절의 논리가 실질적으로 가져온 것은 허무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허무의 정신은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도덕적 파괴를 감행하도록 했고, 결국은 분노로 삶을 바라보도록 하는 태도를 형성하도록 했다. 아방가르드가 삶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이해 한 것도 실제로는 여기서 기인한다. 아방가르드의 끊임없는 반항이 급기야는 도덕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 미학은 결국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허무주의로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데, 이는 아방가르드의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아방가르드는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 참여는 실패로 끝나지만 도덕적 반항을 바탕으로 하는 허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지속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의 의미가 상실되기 시작하면서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부정의 행위는 더욱 과격하게 바뀌어 가는데, 그에 비례해 파괴의 양상도 더욱 심해진다. 결국 부정의 행위와, 그에 따른 파괴의 양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허무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이러한 과정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모든 계급 및 가치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잿더미만을 남겨놓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완전한 파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의 소산이다. 다다이즘에 따르면 善, 惡, 美의 기준은 상대적 가치이거나 단순한 언어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느끼는 허무주의는 이내 절대적인 예술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절대적 예술, 곧 역사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해방한 예술, 바로 그러한 예술의 자유를 그리려고 한 것인데,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유토피아를 추구한 예술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 아방가르드가 원하고 있는 자유는 이미 상당 부분 실현되어 있는 것 아니냐며 되물은 바도 있다. 결국 예술의 자유라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 아방가르드는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부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이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 자체를 다시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을 생명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이미 열린 문을 부수고 있다는 비판은 아방가르드가 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기막힌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오히려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詩와 관련해 시를 위해 존재한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에는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詩를 재생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본질적으로 시의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데, 이는 현대에 들어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는 과거의 시가 지니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순수와 서정, 곧 상상력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는 사실 아방가르드에게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이다.      아방가르드는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방가르드는 원형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깊이 있게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원상(原象)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의 인습과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의 모델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의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세계에서 심미적 절정을 이루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현실에 대해서는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비관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소간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에는 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미를 향한 강렬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5) 아방가르드는 미래 지향성을 갖는다.      아방가르드가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미래라는 말은 아방가르드의 선언문이나 작가들의 말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미래성 때문에 때로 폭동을 정당성하게 여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현재성, 곧 미래성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아직도 온갖 모욕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방가르드의 핵심 예술경향의 하나가 미래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성공은 먼 훗날에나 알 수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작가는 아예 자신의 성공 여부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작가는 영원히 산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의 아방가르드가 만드는 성공을 볼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내적 논리에 의해 작가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는 창조적 반항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더라도 말이다.      4. 유럽의 아방가르드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지성인들은 과거의 시대가 멀어져 갈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지적 유산과 전통이 전쟁으로 파멸버렸다는 것을통감한다. 이른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감지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다양한 작업에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던 것이 당대의 지성인들이다. 때마침 불거져 나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당시의 예술사상 일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인 모럴은 물론 기독교도적 가치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운 지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      문학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소재와 형식을 버리고 현대에 알맞는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이룩하려고 하는 모더니즘의 도전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보들레르에서 출발하는데, 아폴리네르에 이르러 형식과 내용면에서 적극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고 실험의 대상이 된다. 또한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글에서 “진실은 숭고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내재해 있으며, 驚異야말로 모든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해 그 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후에는 프랑스 미래파의 거장인 그 자신도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깊이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모든 예술계가 적극적으로 부응하는데, 1909년에는 마침내 이탈리아의 마리네티가 파리의 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미래파 운동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기계문명의 도래를 예고했는데, 이는 후에 새로운 시어 개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미래파는 인류의 미래와, 예술에 나타날 새로운 관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과거의 우상을 파괴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과 도서관을 부수자는 말조차 서슴지 않았으며, 갇혀 있던 예술을 일상적인 삶의 위치로 끌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미래파 시인들의 첫 시집의 이름이 『언어에게 자유를』이란 점도 그들의 이런 노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미래파 시인 중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앞장섰던 마야코프스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야 말로 이 시기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다다는 1916년 츄리히의 카바레 에 모인 젊은이들에 의해 출발되었다. 그런 뒤 초현실주의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1922년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해체를 선언하는 6년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크게 풍미했던 예술운동이었다. 다다의 의미는 매우 우연적이다. 다다라는 용어가 받아들여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다의 작가들은 다다의 무의미성이 정신의 소멸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의 붕괴라는 내적 의미를 갖는다고 믿었다.      다다는 무엇보다도 전쟁과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념과 논리에 대해 반발했다. 국가를 위한다는 논리로, 신을 위한다는 논리로 이루어진 전쟁의 비극과 파괴를 경험한 그들은 언어 및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문학과 예술은 물질세계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나타낼 뿐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도덕성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회의를 부르짖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18년에 이루어진 다다이즘의 선언에서는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다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우연과 직관에 의해서만 올바른 현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성과 필연은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다이스트들이다. 따라서 관습과 습속, 속박은 언제나 그들의 저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다다이즘의 주도자인 차라의 말이다.      나는 모든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든다. 가장 받아들일 만한 체제는 원칙적으로 말해 아무 체계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다다가 기존 예술의 역할을 혐오한 것은 그것이 제도화되어 있다고 믿었고 형식화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제도와 형식이 인간의 생생한 경험을 끊임없이 왜곡시킨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다이즘 운동은 표현의 직접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다이즘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정신을 함유할 수밖에 없다. 낡아빠진 기존의 표현방식에 대해 완전한 파괴를 추구하는 것이 다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쟝 뽈랑은 언어로부터 이처럼 범속하고 인습적인 형식 및 상투구를 완전히 제거하고,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함정을 피해 순수하고 신선하고 시원적인 영감에 호소하고 있는 이들 다다이스트, 즉 언어파괴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까지 부르기까지 했다. 따라서 이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에서의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다는 그 표현에서 언어의 연상 작용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이나 언어의 구문도 거부한다. 미래파의 영향을 받아 부사나 형용사를 되도록 쓰지 않으며, 구두점을 찍지 않고, 단어의 의미보다는 소리나 억양, 리듬 등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아폴리네르는 상형시 즉, 글자를 어떤 의미를 띤 형태로 배열하는 그림처럼 된 시(구체시)를 고안하기도 했으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를 읽는 동시시(영대시)를 주창하기도 했다.      다다가 인정하는 가치는 개인의 자발성에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진 것으로 인해 예술도 진정한 창조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발성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 각양각색의 예술적 실험을 했지만 따로 자신들 내부에서 이론적인 통일성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면이나 기교의 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유한 원칙도 없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하여 다다는 예술론과 창작활동 사이에서 모순점을 안고 있었으며, 떠들썩한 활동에 비해 창작의 면에서는 별다른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다다는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도 20세기의 예술의 진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해주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다이즘이 미래파에서 비롯되었다면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창시했다는 사실에도 잘 나타난다. 다다이즘의 자기부정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속박 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이성의 횡포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을 석방시키고자 한 예술운동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예술운동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11월, 앙드레 브르통이 을 발표하면서 개막되었다. 이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적인 경험과 무의식 속의 경험을 일치시켜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 합리적인 세계와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러한 예술관은 무엇보다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강조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낭만주의나 상징주의는 예술의 목적의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무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자동기술이다. 자동기술은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순식간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을 가리킨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을 재빨리 받아쓰는 것이 자동기술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자동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동기술은 말이다. ‘욕망’이 되는 말이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욕망에 몸을 맡기는 말이다.”      자동기술은 작가가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작가의 미학적 기준이 발동하게 된다는 점과, 의식을 잠재우게 되는 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자동기술에는 인위적인 면이 강하다.      자동기술법은 최면술과의 혼동으로 인한 오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절대적인 자동기술은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그것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또한 객관적이고 외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과연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ㄷ면 진정한 표현은 침묵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예술에서 침묵과 같은 지적인 자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초현실주의에서의 자동기술은 이처럼 모순적이다.      다다이즘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도 구체적인 창작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했다고 해야 옳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는 운동의 산물인 작품이 직접적인 예술적 성과와 가치를 획득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징주의 운동 말기에 이르면서 문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점과, 삶으로부터 단절되면서 문학이 갖게 되는 不毛性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도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스페인의 아방가르드      스페인의 아방가르드는 루벤 다리오(Ruben Dario)에 의해 모더니시모(modernismo)가 수입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한다. 그러한 과정에 스페인에서는 다시 새로운 문학 운동에 대한 열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물결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는데, 이 물결이 스페인라고 그냥 지나갈 리는 없었다.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이 있고 나서 스페인에도 아방가르드가 소개되었고, 그 이후 스페인식 아방가르드 운동인 울트라이스모가 모더니즘 운동의 뒤를 이어 중요한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울트라이스모는 모더니즘의 호화스러운 수사법과 이야기 스타일, 감상주의, 음악성 등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주의의 테마와 같은 현대문명의 산물들을 소재로 하여 비유와 이미지에 의거하는 시적 표현 방식을 추구한다.      초기에 아방가르드의 물결을 수용하고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구이레르모 데 토레)(Guillermo de Torre), 고메즈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와 게라르도 디에고(Gerardo Diego)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 문명 속에서 테마를 추구하고, 은유적 곡예(acrobacia metaforica)를 위해 감정적, 일화적 요소를 배재한다.      이들 중에서 특히 고메스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는 초기 서반아 아방가르드의 개척자적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는 간단한 형태의 유모적인 은유가 눈에 띄는 ‘그레게리아’라는 형태의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라면 “사물이 스스로 외치는 소리”이다. 그의 시작법은 사물이 가끔씩 보여주는 숨겨진 의미나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이러한 그의 ‘그레게리아’는 심각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단순함과 현실의 파괴를 기반으로 한 장난스러운 문학이었다.      울트라이즘이 시들고 나서 Vicente Huidobro(빈센트 후이도브로)의 창조주의(Creacionismo)를 표방한 Gerardo Diego(게라르도 디에고)는 뒷날 과거 공고라의 시풍은 물론 초현실주의의 시풍까지 받아들여 자신의 시를 현대적으로 승화시켰다. 디에고의 창조주의에 따르면 시는 자연이나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언어의 창조이다. 그의 기발한 이미지는 아방가르드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는 27세대의 복고주의의 시어 개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창조주의는 지금까지 시에서는 절대적인 법칙처럼 여겨져 오던 자연이나 인간의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방은 가장 인간적인 본능이며 쾌락이다. 당시까지 모든 예술은 이 모방에서 자신의 시작점을 찾고 있었다. 창조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을 탈피하려고 했다. 이제 디에고(Diego)부터는 말이 시를 쓰는 시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창조주의의 원조인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의 시학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디에고(Diego)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창조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표현방법일 뿐이다. 창조의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낸다거나 혹은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디에고는 창조주의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에도 능숙하기 때문에 전통시와 아방가르드를 적절히 조화해 극도의 상징적 미를 창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방가르드와 그 자신의 경험을 합쳐 독특한 詩世界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름으로 독립된 채 스페인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초현실주의의 경우 독자적으로 스페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방가르드라는 분위기 전체에 묻혀 들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스페인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도 없다.      아방가르드(특히 초현실주의)의 시작법은 로르카(Lorca)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그 반발로서 순수시(Poesia pura)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의 하이꾸에 대한 모방을 포함한 아방가르드의 표현기법은 스페인의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져 시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이는 나아가 극단적인 비논리, 비이성의 시학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기까지 했다.   5.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논할 때 첫 번째 주인공으로 거론해야 할 시인은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이다. 그는 창조주의(Creacionismo)의 선구자이며, 그의 창조주의는 전 스페인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창조이며,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모방론적인 시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시인이여, 어찌하여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 장미를 꽃 피우라.      이보다 더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 시론을 나타내는 말은 찾아 보기는 어렵다. 창조주의 시론에 따르면 시인은 자연을 흉내 내지 않고 작은 신이 되어 시 속에서 창조하는 자유를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시는 자연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연과는 상관이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창조주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감흥의 재료가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도 결국 주관적인 재창조의 결과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창조되어진 것이거니와, 시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창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창조주의 시학은 다다와 같은 완전한 파괴주의 문학경향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학의 재건에 더 치중한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노 브룰은 아방가르드의 가장 극단적인 개혁의 하나인 글자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글자시는 의미체계의 최소단위인 단어를 파괴해 시인의 독자적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그 고유의 언어로 이루어진 시를 말한다. 한 나라의 국어는 시인의 영감을 표현하는데 언제나 최후의 장벽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글자시다. 이것이 마리아노 브룰에게 수용되어 당시 아방가르드의 한 줄기를 이어갔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이후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띈다. 네루다의『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 절망의 노래』는 중남미 초현실주의의 최고봉을 이룬 시집이다. 그의 시 쓰기는 먼저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후에 수정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유럽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자동기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시작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무의식에는 불연속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네루다(Neruda) 이후 중남미의 초현실주의는 옥따비오 빠스에게로 넘어가는데, 옥따비오 빠스는 네루다와는 달리 프랑스 초현실주의에 직접 영향을 받아 시에 새로운 현실을 담아낸다.   6. 맺는말      아방가르드가 전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준 영향은 그렇게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어권 내에도 아방가르드가 수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에 수입된 아방가르드는 각기 독특한 형태로 각색되면서 시인과 문화권에 따라 크게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 작가는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은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실제로는 스페인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시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것에 불과한 듯싶기도 하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한 다음 스페인이나 중남미 작가들은 기존의 유럽의 반항아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일반, 그리고 유럽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성격과 표현방법을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히 기술을 하지 못했다.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각각의 詩人에 대한 기술이, 특히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시인에 대한 기술이 충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도 여기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이 가장 첨단적으로 실험되었던 것이 아방가르드 시대이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에 대한 공부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 오늘 여기서 아방가르드에 대해 탐구하는 가장 주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현암사, 1992), pp.131- 180. 민용태, 『서중남미 명시 사냥』, 《현대시학》 5-10월호 (1993). 민용태, 『서중남미 문학론- 제 3의 문학의 현장에서』(전예원, 1989), pp.291-325. 박 철, 『스페인 文學史』(삼영서관, 1989), pp.239-306. 신현숙, 『초현실주의』(동아출판사, 1992), pp.15-18, pp.61-66, pp.75-107.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ㆍ염무웅 共譯,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 - 現代篇』(創作과批評社, 1992), pp.227-240. 아드리안 마리노, 「아방가르드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외국문학》 제1호(1984., 장선영, 『西班牙 라틴아메리카 文學史’』(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87), pp.165-170. [출처]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작성자 옥토끼
314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댓글:  조회:88  추천:0  2018-09-06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                                     민 용 태(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고려대 명예교수)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는 초현실주의 시에 드리워진 말라르메나 렝보, 르뜨레아몽의 영향을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자동 필기법(Automatism)”이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주의 시인들의 갈고 닦아진 시어를 증오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히 빈상징주의자들이다. 초현실주의의 신은 절대 자유였다. 앙드레 브르똥은 말한다: “자유라는 어휘만이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전부이다. 이 어휘만이 안류의 낡은 영광주의를 무한히 유지하는 데 적합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휘만이 나의 유일하고 절당한 갈증에 답변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그 숱한 불명예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가 또한 우리에게 상속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의 자유를 지독하게 악용해서는 안 될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상상력을 노예 상태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소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조잡하게 불리는 명칭과 관계될 때 조차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정당성을 죄다 도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고, 상상력이 그 가공할 금기 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으며, 그리고 기만당할 두려움 없이 내 자신을 방임할 수 있는 곳 역시 이 상상력 속이다(더 이상 기만당할 수도 없겠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의 잘대적 정신의 자유에 대한 집념은 마침내 문학까지도 거부하게 만든다. 제1 선언에 이어, “1925년 1월 7일의 선언”은 더욱 단호하다. “첫째, 우리는 문학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에 따리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이용할 수는 있다. 둘째, 초현실주의는 새롭고 편리한 표현 수단도 아니며 시의 형이상학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수단이다.(이하 생략)” 즉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상상의 자유를 최대로 확장시켜,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까지를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쉬르레알리즘은 문학 뿐만 아니라 회화, 기타 모든 시각 예술을 비롯 모든 인간 해방 운동에 혁명의 기치를 든다. 그들의 해방운동적 성향은 마침내 엘뤼아르, 아라공,브르똥 등이 연 이어 공산당에 가입하는 정치적 색체까지 띠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실천이라는 변증법적 진실에 직접 참여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자유 해방 정신의 확장 과정에서 비롯된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리라. 초현실주의 이런 혁명적 성향은 일체의 전통과의 단절을 부르짖었던 “전위문학(1916-1923)”고도 일맥 상통한다. 쉬르레알리즘이 트리스탄 자라의 “다아이즘”에서 나왔다는 이론도 그래서 타당성이 있는 것. 아방 가르드 예술은 많은 경우 재래의 모습 예술 형식과 사상을 일체 거부하는, 매우 낙천적인 파괴주의였다. 이들은 일체의 형식의 파괴를 앞세웠던만큼 장난끼와 유모어로 가득찬 예술운동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별다른 시학도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전위예술의 해방 정신을 “자동필기법”이라는 시학으로 대치한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는 그러나 전위예술만큼 낙천적이지는 못 했다.억압된 본능의 해방을 위해 쓰여지던 “자동필기법”은 구겨지고 문드러진 잠재의식의 혼란스러운 표출이었던만큼 때로는 지극히 어둡고 염세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든 초현실주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창작의 산실로 초대하면서, 혼란과 우연을 그의 텍스트 속에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브르똥과 수뽀가 함 께 펴낸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에서 그들은 최초로 자동 필기법을 실험하는데, “꿈과 불면의 중간 상태에서 시적인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번 백지 위에 우연히 떨어진 말은 그대로 필연이 된다. 그것은 마치 “유리창에 부딪힌 말”처럼 더러는 투명하고 더러는 흩어져 사라진다. 이들 불가사의한 낱말들, 쇠붙이들이 서로 끌고 당기며 이룩하는 연상의 자장(磁場)이 바로 시라는 것.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의식의 눈에는, 우선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프로이트 같은 의사나 상상력이 자유로운 독자의 눈에는 또 의미가 보여지고, 때로는 황홀한 꿈의 체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말라르메나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법을 거부한 것은 힘들여 연상을 다듬고 짜 맞추는 그 인위적 과정이 위선이라는 것. 그것은 시작 과정에서 시인 자신들조차 자유롭지 못한 억압이니 행위라는 데 있다. 이미 말했듯, 초현실주의는 좋은 시 좋은 문학 만들기보다는 일종의 해탈을 위한 정신 수양에 있었만큼, 그 작업 행위 자체까지 정신 해방 연습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시적 영감이란 천재적 재능이 있는 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을 가장 자유롭게 끌어낼 수 있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어떤 시인의 천재성이나 개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을 표출하는 건강한 집단시(集團詩)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맛있는 시체 놀이(Exquisite 이다. 여러 가지인데, 첫번째 사람이 명사 하나를 쓰고 그 종이를 접는다. 다음 사람이 형용사, 또 다음 사람이 형용사...이런 식으로 앞 사람의 말을 모르고 써 나가면 하나의 부조리하고 신선한 시구나 정의(?)가 태어난다는 것. 또 다른 방법은 한 시인이 시 한 연을 쓰고 덮고, 다음 시인이 그 끝줄이나 맨 앞줄을 보고 다시 한 연을 쓰고....이런 식으로 여럿이 한 시를 만들어가는 놀이. 말하자면 하나의 시인이 작위적으로 뜻이나 연상이 통하는 이미지들을 엮어가는 것보다는, 놀이에 참여한 각 시인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우연히 떠오르는 말들을 적어감으로서, 이들 무작위한 시어들이 만들어가는 의미의 무늬들을 감상하는 재미를 즐기자는 것. 이런 놀이는 마치 우리의 선인들이 포석정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연작 시 놀이를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여기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더러 신선한 태어나는 기적을 맛보았다는 점. 그래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맛있는 시체가 새로운 와인을 마시리!” 하고 놀이를 즐겼다 한다. 물론 쉬르레알리즘의 이런 자동필기법은 실제로 상투적 시어와 참신하지 못한 시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들이 의식적으로 시 만들기에 쏟는 억압적 노력과 상황에서 해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린슨은 일본의 렝가(連歌)를 모방하여, 1971년 빠리 어느 호텔에서, 또 다시 “맛있는 시체 놀이”와 같은 연작시를 시도한다. 각각 스페인어, 이딸이아어, 불어, 영어로 씌여진 시는 우리 동양시가 기대한 만큼 기(氣)의 통일성이나 현묘성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시창작의 개인적 작위성을 누그려Em렸다는 점에서는 기억할만한 사건이었다. 이제 우리는 초현실주의 전개 역사나 인간정신 해방 운동의 성패(成敗)에 대해서보다는 쉬르레알리즘 시학의 수사학적 측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예술 운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현대시에 엄청난 시어의 개혁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서반아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카를로스 보우쇼뇨는 그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라는 책에서 초현실주의가 시표현의 새로운 상징의 문을 열었음을 상세히 파헤치고 있다. 형식주의 문학론이나 구조주의 시학은 시대적으로 아방가르드 문학의 봉기와 초현실주의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형식주의 발아 시기가 볼쉐비키 혁명 전후 1916년경이고, 그 때가 또한 구조주의의 원조 페르디난드 소쉬의 “일반 언어학 강론”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창작문학이나 언어 이론, 문학 이론의 일치점은 현상학적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언어가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다. 형식주의가 문학은 사상이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그 문학성이 달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해방은 그가 쓰는 언어의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언어의 중요성의 인식에서 일치한다. 이미 언급한 쟝 꼬앙의 “시어 구조”론이나 보우소뇨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 등의 이론은 형식주의와 함께 구조주의적 시어 분석이 뛰어나다. 구조주의 시학의 공헌은 문학어, 시어가 일반 산문어와는 다른 “반산문” 혹은 “일탈(desviación)” 현상이며, 그 저항 이유는 뜻하지 아니한 연상을 통한 숨겨진 일치점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데 있다. 말을 바꾸면, 마야코프스키를 비롯한 미래주의 시에 관심을 둔 형식주의의 발견처럼, 문학어는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일상어에 대하여 일부러 “낯설게 하기(singularization)” 언어인 것이 밝혀진다. 구조주의는 그 “낯설게 하기”가 다의미(polisemia) 산출의 방편이었던 것을 지적한다.즉 정서적, 영상적, 관념적 다의미를 지향하는 문학어는 일상어의 관습성, 논리성을 파괴하는 것을 항상 전제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카를로스 보우쇼뇨의 이론에 따르면 초현실주의 시는 시어의 사용에 있어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상징주의의 시에 비해 엄청난 시어 성격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전래의 시어나 상징주의 시가 구문이나 언어의 관습성에 있어서 “까만 하늘”같은 표현처럼 맞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자동차의 코”같은 표현처럼 상당하지 않는 부분에 “코”를 갖다 붙이는 이상한 표현을 일삼았다면, 초현실주의 시어는 “관계없음(inconexión)”, “구문 상으로는 일치하나 내용상 관계 없음”, “제멋대로의 표현(autonomía)”이 성행한다고 말한다. 초현실주의 시의 이런 반언어적 시어 구조는 그러나 연상 의미에 있어서 “선험적 일치점(ecuaciones preconscientes)”을 야기시키거나,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상상을 자극한다는 것. 초현실주의로부터 시어는 일상어의 이해와는 달리, 우연하게 떨어진 시어라할지라도 그 당위성을 가지며, 독자는 그 당위성의 바탕 위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 필연성을 요구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잘 번지는 창호지 위에 떨어진 붓 자국처럼, 그 점이 무슨 점, 무슨 강, 무슨 호랑이의 모습으로 번져갈 줄은 모르지만, 일단 떨어진 붓 자국의 무늬는 절대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자유라는 것. 보우쇼뇨는 몇 번이고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시인 비센떼 알레익산드레의 다음 두 구절을 예로 든다. 1. “나의 목 휘감지 말아요, 밤이 온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2. “너의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거야, 폭풍이 퍼렇게 멍이 드는 동안” 1의 경우는 그래도 연상이 가능하다. 목을 휘감으면 눈이 가려질게고, 그러면 나는 밤미아라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논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가린다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여기서의 알레익산드레의 독특한 사랑관, 사랑은 파괴요 죽음이라는 엄청난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 것. 2의 경우는 정말 부조리 그것이다. 이 시인의 시를 이해하려면, 우주의 현상이 시인의 내적 갈등에 지배된다는 새로운 기상 원칙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폭풍”은 원칙 없이 “너의 심장”의 어떤 고뇌스러운 현장이 되어야 한다. 심장이 어떻게 “입으로 튀어”나올 수 있느냐는 다음 문제이다. 이쯤 되면 시어사용은 그야말로 자유자제다. 나는 문득 이 태백의 “...나 술 취했으니 잘라네./ 생각나면 내일 거문고 들고 다시 오게나”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초현실주의 시법은 표면상 이처럼 무책임하면서 자유롭다. 예술혼이 도학(道學)의 경지처럼 극도의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통하는 언어이다. 역사상 초현실주의는 “사랑과 시와 자유가 동시에 추구되는” 현실적 혁명을 시도했다. 그것은 역사상 실패한 운동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초현실주의는 동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여물어졌다고 본다. 그것은 옥따비오 빠스의 일본 시나 당시에 대한 심취, 그리고 특히 탄트리즘과 노장사상, 역경에의 탐익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장자의 “소요유”의 경지에서처럼 의식이 우주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초현실주의는 또다른 차원의 커다란 자유를 느낀다.       현대 문예 사조에 있어서 동서양의 교류     동양의 20 세기 문예 사조는 서양의 영향 하에서 생겨난다. 일본의 근대 문학이 그렇고 중국의 “백화문학”이 그렇다. 또한 우리의 “신체시(新體詩)”도 서구의 낭만주의 상징주의의 영향 하에서 싹튼다. 실제로 동양의 오늘 문학은 서양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재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각각의 언어적 속성에 크게 지배 받는 것인만큼, 동양이 서양 문학 형식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국의 언어나 전통에 의하여 재각색된 형태들이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동양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나 소설, 연극의 원형들은 동양 전통의 계승 측면보다는 서양의 그것의 모방성이 두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늘 시를 쓴다면 누구나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소설을 쓴다면 사실주의적 기법을 생각하는 것도 모두 서양에서 온 사고들이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본에는 하이꾸(俳句)가 쓰여 지고 우리 문학에도 시조가 살아있다. 또한 문학 내용의 측면으로 살펴보아도 노장(老莊)이나 불교적 관조가 두드러진 것이 동양 문학들이다. 더구나 동양인적 섬세한 감수성과 심미주의에서 잉태된 많은 시나 소설들이 반드시 서양 문학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대상이나 소재도 모두 각 나라의 정서나 문화 환경에서 잉태된 독창성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사고 자체가 다분히 서양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가 “동서 문예 사조”를 이야기하면서 서양 문예 사조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은 비로 이 때문이다. 즉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한 통념이나 작법들이 대부분 서양 전통에 말미암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사고가 그 본거지에서 어떤 당위성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를 정확히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우리 동양에 이와 비슷한 전통의 뿌리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었던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했던 것. 이제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현대 문학 사조를 대별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현대 문학이 바로 이것들을 모방하며 자라왔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 문학을 모르고 오늘 동양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양 현대시의 일반적 형식인 자유시는 서양의 “상징주의”의 산물이며, 그 또한 시적 언어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형시에서처럼 시행을 음성적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자를 때와 자유시에서처럼 자유롭게 자르고 붙일 때의 차이는 크다. 자유시에서의 시행 바꾸기는 왜 꼭 거기에서 시행을 옮기는가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또 필요하다. 한국시가 서양의 자유시 형식을 본따고 자라오면서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양의 상징주의가 만든 자유 시 형식의 그 엄청난 혁명성이다. 그 때까지 서양시는 시(versus)라고 하면 곧 정형시를 일컬었다. “versus”의 어원 자체가 “되돌아온다”는 리듬의 뜻에서 발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상징주의는 시어나 시행의 모호성과 다의미 산출을 욕심냈다. 서양 시에서 종래의 시행(정형시행)은 소리 단위의 제약을 받은 의미 단위였다. 예를 들어 11 음절이면 무조건 10음절에 리듬의 축(axis rítmico)을 둔 각운(脚韻,rima,)을 필요로 했다. 10 음절부터 11,12 음절 안에 시행(verso,verse)은 끝난다. 그러다 보니, 소리의 제약에 따라 이따금 문장이 한 시행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다른 시행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런 “넘어가기”를 수사법적 용어로 “뛰어넘기(encabalgamiento)”라고 하며, 이런 경우 시행을 뛰어넘은 한 문장으로서의 의미와 주어진 시행 그대로의 단독 의미라는 두 의미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뛰어넘기” 수사법은 정형시에서는 흔히 음절 맞추기적 필요성에서 생긴 결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절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시에 와서는 시행 바꾸기가 그 때 그때마다 “왜?”라는 의미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자유시는 시행이 산문의 문장(oración,sentence)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장은 시행과 달리 하나의 소리 단위, 하나의 의미 단위이다. 자유시가 산문의 문장의 법칙을 시행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면서, 말하자면 시인의 마음대로 시행을 바꿀 수 있게 만들면서, 이제는 “왜 여기에서 시행을 바꾸는가?”라는 질문에 시시각각 대답해야 하는 의미 요구를 받게 되었던 것. 따라서 많은 의미 산출을 욕심내던 상징주의가 자유시를 도입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행 바꾸기 형식조차도 정형시의 의미 외적인 외재율보다는 또다른 의미 산출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한 문장은 한 소리 단위면서 동시에 한 의미 단위이다. 이제 시는 이런 산문의 문장적 성격을 시구 나누기에 도입함으로서, 자유시의 한 시구는 이제 반드시 하나의 의미 단위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 받게 된 것. 자유시 형식이 우리 시에서도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시나 시조가 모두 정형시였으니까. 그러나 우리 신체시는 중국의 백화문학처럼 우선 문학의 문어체, 한문시, 한문체에 대한 구어체로 쓰기에 더욱 열중했다. 김안서나 소월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은 구어체로 신시를 쓰면서 그 율격의 문제를 민요에서 따오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차차 자유시체로 우리 시가 정착해간다. 말하자면, 시 리듬 자체의 벽혁의 혁명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새로운 시형식, 말하듯이 놀해하듯이 자유롭게 쓰기라는 이상한 “신체시”가 생긴 것. 여기에서 우리 시는 민요조로 쓰느냐, 아무렇게 자유시로 쓰느냐에 대한 고민의 순간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왜 꼭 이 시를 자유시로 써야 하느냐 하는 고민조차도 우리 시인들에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는 상징주의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장치인 시형식의 묘(妙)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음(音) 상징의 묘(妙) 또한 우리 시에는 그다지 오묘한 것들이 드믈다. 그 이유인 즉, 우리는 서구 상징주의의 다의미 창출의 고뇌와 형이상학적 깊이보다는, 이와 너무 다르게 우리 시의 시표현이 흔히 안이한 감정주의적 서정성에 머문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상 서양의 상징주의는 동양의 예술이나 시를 많이 모방하려 애썼다. 내가 “서양 문학 속의 동양”에서 자세히 연구하고 있듯이, 호꾸사이 그림의 여백(餘白)의 아름다움이나 동양시의 여운(餘韻), 하이꾸의 의미성 등은 서구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학자에 따라서는 자유시가 동양시 형식의 모방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것은 라프까디오 헌이나 로띠 같은 동양을 서구에 소개한 작가들이 쓴 동양시의 자유로운 번역이나 서정적 글들이 새로운 시표현의 가능성을 여는데 기여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유 약우의 “중국의 문학 이론”은 동서가 비슷한 문학 이론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늘 이야기한다. 그는 중국의 심미주의 이론을 열거하고,“...서구에도 비슷한 것이 많다”는 식으로 개관한다. 그는 특히 에즈라 파운드의 “시각시(Phaopoea)”, “음악시(Melopoeia)”, “언어시(Logopoeia)”가 유협(劉勰)의 세 가지 무늬들 “형문(形文)”, “성문(聲文)”, “정문(情文)”과 비슷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이 추상적으로 미(美)를 논의하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오스카 와일드의 심미주의처럼 부도덕성까지 아름다움으로 간주한 경우는 중국 문학에 없었다고 못 박는다. 나는 동양시의 서정성이 다분히 서양의 후기 낭만주의적 감성하고 일치한다고 본다. 감정의 내적 성찰이나 암시성이 동양시에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성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동양시가 더욱 탁월한 것은 상징주의 시가 개척한 동감각(synaesthesia)의 시적 활용이다. 이미 에즈라 파운드가 중국시의 이미지즘을 격찬했듯이, 실제로 동양시, 특히 당시(唐詩))에는 뛰어난 이미지의 활용이 보인다. 정 상홍은 “중국의 시론과 화론 1--산수시와 산수화”라는 글에서 왕유의 시에 대한 소식(蘇軾)의 평을 인용한다. “왕유의 시를 맛보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즉 저 유명한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전통은 왕유뿐만 아니라 모든 동양시에 뿌리가 된다. 같은 글이 인용한 왕유의 “산중(山中)”이란 시를 보자.   “형계엔 흰 돌이 드러나 있고 날씨 차거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   위 시에는 엄청난 공감각이 높은 시취를 자아낸다. 먼저 “날씨 차가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는 붉은 색,즉 따뜻한 색과 차가운 날씨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촉각적 “차가움”과 시각적 “붉은 단풍”이 공감각(촉각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멋진 공감각 활용은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空翠濕人衣)”이라는 절구다. 파란 색깔이 어찌 옷을 적시랴. 이를 강조하기 위해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이라는 시구까지 달고 있다. 이런 표현이야 말로 공감각을 사용한 훌륭한 인상주의 그림이 아닌가. 우리는 상징주의와 인상주의가 상당히 혼동된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바꾸면, 동양시의 이런 인상주의 전통은 서구 상징주의가 그토록 탐내던 자연 속의 사물 사이의 교감을 이루어내는 장치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향 받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바로 동양 예술의 이런 영상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심취했던 것. 나는 동양시의 영상미가 서구의 상징주의처럼 심오한 형이상학적 시취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안다. 그것은 동양시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배, 거기에 직감(直感)을 존중하는 진솔성이 서양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동양시는 시도(詩道)를 추구하는 반면에, 서양시는 끝까지 상징적 의미 추구의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양 시인의 자연의 오묘성에 심취하여 삶의 향기를 이루어내려는 풍류정신이 앞서는 반면에, 서양은 신과 우주의 궁극적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열념이 시작에 있어서까지 앞서고 있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있어 모호성이란 결국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기대감의 확대이지, 천인(天人)합일이나 자연 속의 무아(無我)지경, 혹은 깨달음을 향한 열망은 아니었다. 동양 시인이 끝까지 시어나 말에 크게 무게를 주기보다는, 오하려 마음의 기(氣)나 풍경과의 합일에 마음을 쏟았다면, 서양 시인들은 마지막까지 말의 탐구, 시어의 표현 가능성의 확대에 더욱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 뜻에서 시인의 잠재의식의 해방까지 꿈꾸었던 초현실주의 또한 자연 중심, 풍경중심적 시학아라기보다는 인간중심의 해탈운동이었다. 자기를 버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불교나 노장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반(反)이성적 이성운동이었을 뿐이다. 동양이 서양에 배울 것이 있다면 시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보다 투철한 개척 정신이다. 서양은 17 세기 바로크 문학에서부터 “인공적인 것이 아름답다(공고라)”는 것을 발견하고 문학하기에 있어서 말과 수사학을 최대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어쩌면 해체주의의 주장처럼 어차피 진리나 자연을 원 모습, 원가(原價) 그대로 표현할 언어는 없다는 확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말을 바꾸면,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자연을 모방한다는 가능성을 벌써부터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말의 놀이 속에서 빛과 아름다움의 무늬를 산출하는 재미를 맛보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서양은 동양에서 언행일치(言行一致),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적 이상에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행동과 삶을 그대로 구현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거기에 중용(中庸)에서 주장하는 성(誠)이 촉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자연에 대한 성실한 사랑으로 언어를 빚을 때, 시인의 성실성에 흠이 없을 때, 인간은 성인스러운 절묘한 언어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이 최소한도 동양 시인의 믿음이다. [출처]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작성자 옥토끼
313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 현중문 댓글:  조회:62  추천:0  2018-09-03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시 작품을 중심으로 번역·소개하려고 한다.  이른바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는 고려하지 않았다.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통의 부정과  혁신의 연속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시인들이 "영향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한결 풍성한 시 작품으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려는 지난한 시도라고  평가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먼저 중남미 현대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의 시는  몇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고루해진 전통적이고 정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려는 중남미 최초의 시운동으로,  세기말적 감수성과 중남미 크리오요(criollo)의 비전을  담아내려고 했다.  ☞ 루벤 다리오:「백조」  백조  다리오 / 현중문 옮김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의 시학을 잘 표현한 작품  시 제목에서 '고니' 대신에 '백조'라는 말을 선택한 까닭은  희고 청순한 하얀색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고육책  원제는 El cisne. 출전은 『불경한 산문시』(Prosas profanas y otros poemas, 1896)  원문과 상세한 주석은 한글문서에 있습니다.  그때는 인류에게 신성한 시절이니  백조는 죽기전에 단한번 노래했다.  바그너 백조노래 멀리서 들려올땐  여명이 한창이고 재탄생 순간이니.  인간세 바다에서 춤추는 폭풍우 위  백조의 노래소리 끊임없이 들린다.  게르만 늙은신 토르의 망치소리와  아르간튀르의 칼 찬미가 잠재우며.  신성한 새 백조여! 백옥미녀 헬레네  레다의 청란(靑卵)에서 우아하게 태어난  절세미모의 공주, 불후불멸의 공주.  네 하얀 날개 아래 새로운 시는 빛과  조화의 영광으로 순수한 헬레네를,  영원한 이상의 헬레네를 생각한다.  Corregio(1490-1534)  Leda with the Swan(1531-32)  Oil on canvas, 152 x 191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이어 전위 운동(Avant-garde)의 시작과 더불어  기존의 시 형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시학이  1910년대 칠레의 시인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가  주창한 창조주의이다.  우이도브로에 따르면, 시적 대상이란 언어 내부에만,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언어로서만 존재한다.  ☞ 우이도브로:「시학」  시학  우이도브로 / 박병규 옮김  비센테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는  칠레 출신의 아방가르드 시인.  1916년부터 프랑스에서 르베르디(Reverdy)와 함께  활동하면서 창조주의 시학을 주창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높은 매』(Altazor, 1931)  시가 열쇠가 되기를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기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라,  그리하여 듣는 이의 영혼이 감흥에 떨도록.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언어를 조심하라.  생명 없는 형용사를 죽여라.  우리들은 신경 조직이다.  근육은 옛 유물이니  박물관에나 진열하라.  그렇다고 힘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활력은  머리 속에 있다.  시인들이여! 왜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서 장미가 피게 하라.  우리들이 보기에 만물은  오로지 태양 아래 살고 있다.  시인은 작은 하느님이다.  『물거울』(1916) 중에서  이러한 일련의 아방가르드적 시 개혁 운동 정점에  위치한 시인을 들라면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초기 네루다(Pablo Neruda)를 꼽겠다.  이 때의 네루다 시는 시인의 가슴에서 편린처럼 튀어나와  이내 명멸하는 덧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다.  ☞ 네루다: 시학 (Arte poética)  ☞ 네루다: 시  시학  네루다 / 조민현 옮김  어둠과 공간 사이에서, 성장(盛裝)과 처녀 사이에서  유별난 심장과 불길한 꿈을 안고,  때 이르게 창백한 안색, 시들어버린 이마  하루하루 삶을 여윈 분노로 상복을 입고,  아, 꿈결처럼 마시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과  전율하며 받아들이는 모든 소리 앞에서  나는 언제나 갈증 없는 목마름과 차가운 열병을 앓는다.  마치 도둑이나 유령이 나타나듯이,  불현듯 돋아나는 청각(聽覺), 종잡을 수 없는 고뇌.  그리고 두껍고 단단하게 펼쳐진 겉껍질,  망신당한 웨이터 같고, 약간 목쉰 종소리 같고  낡은 거울 같고, 외딴집의 냄새 같은  그곳에 밤이 되면 만취한 손님들이 들어온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 냄새, 꽃도 없는데,  ― 이렇게 얘기하면 훨씬 덜 우울하겠지 ―  그러나, 사실, 내 가슴을 후려치는 바람과  침실에 굴러 떨어진 밑도 끝도 없는 밤들과  희생으로 불타는 하루의 소음은  우울하게, 내 안에 있는 예언의 목소리를 요구하는데,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을 듣지 못한 사물들의 주먹질과  휴전 없는 동요와 혼미한 이름 하나 있으니.  『지상의 거처 I』(1933)에서  시 (詩)  네루다 / 김현균 옮김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 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 중에서  후기 네루다는 이러한 단련의 과정을 거쳐  누구나 읽어도 수긍할 수 있는 일반적인 비유와 이지미와  시상을 노래하는데, 보르헤스 또한 이와 유사한 도정을 걸어갔다.  보르헤스는 전위운동(극단주의, Ultraísmo)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만년에는 "유치하다"고 초기 시작품을 부정적으로 평했으며,  일부 작품은 재출판을 극구 반대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시학」은 만년의 작품인데,  우리는 시와 산문을 포함하여 보르헤스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를 접할 수 있다.  ☞ 보르헤스:「시학」  시학  보르헤스 / 현중문 옮김  보르헤스 후기 시에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도 물, 세월, 강물, 거울 같은 평범한 이미지를  중첩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리((琉璃))라는  미학적 응결물을 창출해내고 있다. 원제는 Arte poética  물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강을 보고  시간이란 또 다른 강임을 기억하라.  우리들은 강처럼 사라지고  우리 얼굴은 물처럼 흘러감을 알라.  깨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꿈이며  우리 육신이 두려워하는 죽음이란  밤마다 찾아오는 죽음, 꿈이라 생각하라.  나날의 일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유구한 세월의 상징을 보고,  세월의 전횡을 음악과  속삭임과 상징으로 바꾸어라.  죽음에서 찾아낸 꿈, 석양에서 찾아낸  서글픈 황금, 이것이 시일지니,  가난하고도 불멸하는 시일지니,  여명과 석양처럼 번갈아드는 시일지니.  오후가 되면 종종 거울 깊은 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얼굴 하나 있으니  예술은 그 같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  불가사의한 일에 신물이 난 율리시즈는  눈물이 났단다, 먼발치로 보이는 이타카  푸르고 소박한 고향, 예술은 그런 이타카  영원히 푸르지만 불가사의는 없는 이타카.  예술은 또한 흐르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르는  끊임없는 강물이며, 그 끊임없는 강물처럼  자신이면서 다른 사람으로 유전하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유리(琉璃)이다.  『제작자』(1960)중에서  20세기에 시를 쓰는 작업,  특히 네루다의 매끄러운 시와 시낭송 열풍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침묵으로 변한 이후에 시를 창작하는 작업은  성냥개비 하나로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의 거리를 밝히보려는  안타깝고도 안쓰러운 일임을 모두들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인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시란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다시 말해서, 시 창작을 다룬 시, 메타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메타시의 첫 운을 뗀 시인은, 내가 보기에,  멕시코 시인 파스(Octavio Paz)이다.  파스의 시세계는 매우 복잡하여 한마디로 축약하기 곤란하나,  이제는 시인의 의도를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의미의 주변이나 어슬렁거리는  시어(詩語)를 붙잡고 대판 씨름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 파스:「시인」 (업로드 예정)  이어 우리는 파라(Nicanor Parra)의 반시(反詩)를 만난다.  파라는 모데르니모에서 보여준 시어의 조탁을 거부하고  일상어를 도입하며, 네루다가 보여준 부드러운 리듬과 서정성에  반기를 들어 일상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시를 시답게 만든다고 여겨온 대부분의 자질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흙먼지 이는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 파라:「선언문」  선언문  파라 / 박병규 옮김  반시(反詩) 선언문으로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 1914-)가 거부하는  시의 전통과 옹호하는 글쓰기를 잘 드러낸 작품  원제는 Manifiesto(Manifiesto, 1963)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이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보기에  시란 사치품이었습니다만  우리들에게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정중하게 말씀드려  우리는 선조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시인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성벽을 쌓는 미장공이고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꾼입니다.  우리들은  일상 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뿐  언어의 연금술을 믿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시인이 저기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무는 올곧게 자란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들은 창조주 같은 시인  싸구려 시인  백면서생 같은 시인을 고발합니다.  공손하게 말씀 드려  이분들은 모두  피고소인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허공에 성채를 지으려고 한 죄  시간과 공간을 허비한 죄입니다.  달에 바치는 소네트를 만들면서  파리의 최신 유행을 따라  단어들을 우연하게 결합한 죄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상(思想)은 입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은  짙은 선글라스의 시  영풍 농월의 시  챙 넓은 모자의 시를 배격합니다.  그 대신  안경을 벗은 눈의 시  진솔한 가슴의 시  모자를 벗은 사람의 시를 옹호합니다.  우리들은 요정이나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시란 이런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삭으로 치창한 여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이제 정치적인 차원입니다.  우리 앞 세대는  -정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굴절하고 산란했습니다.  몇 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우리들은 그렇게 추정합니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민중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존경받는 부르주아 시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몇 분들만이 민중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지배적인 시를 비판하고  현재의 시를 비판하고  플로레타리아의 시를 비판했습니다.  우리들이 인정하는 공산주의자들,  그러나 시는 볼품이 없었고  초현실주의 아류였으며  삼류 퇴폐주의였으며  물 건너 온 낡은 도식이었습니다.  형용사의 시  후각과 미각의 시  자의적인 시  책을 베낀 시  그리고  언어 혁명에 기초한 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기초한 시  관념 혁명에 기초한 시였습니다.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악순환의 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런 시를 썼을까.  쁘띠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고?  한심하게도 시간만 낭비했으니!  쁘띠 부르주아는 먹거리가 아니면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로 놀라게 하려고 들다니!  지금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황혼의 시  밤의 시를 썼다면  우리들은  새벽의 시를 옹호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메시지입니다.  시의 광채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시는 누구나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료 여러분, 이것 뿐입니다.  젊잖게 얘기하면  우리들은  작은 하느님의 시  신성한 소의 시  분노한 투우의 시를 비판합니다.  구름의 시에 반대하는  우리들은  지상의 시를 주장합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들은 지상에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카페의 시에 반대하여  자연의 시를 주장하며,  살롱의 시에 반대하여  광장의 시  저항의 시를 주장합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선언문』(1963) 중에서  더 이상 내려딛을 곳이 없는 일상의 평면에서  시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테면,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의 작품에서 보듯이,  상호텍스트성으로서의 시 개념이 등장하고,  독자의 위상은 공동 창작자로 격상된다.  ☞ 파체코:「익명의 옹호」  ☞ 파체코:「동조운에 관한 고찰」  익명의 옹호 (인터뷰를 거절하기 위해 조지 무어에게 보내는 편지)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 1939-)는  멕시코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원제는 Una defensa del anonimato  친애하는 조지 씨, 나는 우리가 왜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써 놓은 것을 후에 출판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메시지가 담긴 병들과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에 병 한 개를 던지는 것입니다.  조류를 타고 누구에게로, 어디로 흘러갈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십중팔구 깊은 바다의 풍랑에 휩쓸려,  바다 밑바닥, 죽음의 모래에 처박힐 테지요.  하지만  조난자의 찡그린 얼굴이 영 부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일요일  콜로라도의 에스테스 파크에서 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으니까요.  당신은 병 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읽었으며  (바다를 통해 우리의 두 언어가 만났습니다.)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내가 단 한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나의 꿈은 읽히는 것이지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텍스트일 뿐 텍스트의 저자는 중요치 않고,  내가 문학 곡마단을 혐오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후에 장문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걸 보내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썼겠습니까.)  나는 회신을 보낼 수도 그렇다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시행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이건 시가 아니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의 특권을 꿈꾸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오늘날 산문으로 말하는 모든 것들  (이야기, 서간문, 드라마, 역사, 농사교본)의  도구로 운문을 사용할 뿐입니다.  당신의 전보에 답하지 않기 위해 말하겠습니다.  나의 시 안에 있는 것 말고는 덧붙일 게 전혀  없습니다.  나는 시를 논평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역사 속에서의 자리"  (혹 나의 자리가 있다해도)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들 모두에게 조난이  닥칠 테니까요.)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시의 절반만을  씁니다.  시는 백지 위에 그려진 검은 부호가 아닙니다.  나는 타인의 경험과 교유하는 만남의  광장을 시라고 부릅니다. 독자들이  내가 스케치한 시를 완성할(혹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읽습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 거울에 비쳐보인다는 건  기적과 같습니다.  여기에 가치가 있다면 ―뻬소아가 말했습니다―  그건 시의 몫이지 시의 저자의 몫이 아닙니다.  어쩌다 위대한 시인이라 해도  숱한 좌절과 허섭쓰레기 틈에서  너덧 편의 빼어난 시를 남길 뿐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들은  정말이지 별로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세상은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시인들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 가는데,  시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드니 말입니다.  시인은 이미 종족의 목소리이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인은 또 하나의 연예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의 술주정, 간음, 병력(病歷),  그리고 곡마단의 다른 광대들이나 곡예사, 혹은  코끼리 조련사와의 야합과 분쟁은  이미 시를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폭넓은 관객으로 확보했습니다.  나는 시란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시는 두 사람, 거의 영영 알지 못할  두 사람 사이의 밀약(密約) 속에  오직 침묵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형식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반세기 전에 환 라몬 히메네스가  한 잡지를 발간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잡지에 《익명》이라는 제목을 붙인 다음  서명이 아니라 텍스트를 발표하고,  시인이 아니라 시로 잡지를 꾸미려 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의 대가처럼  시가 익명이기를 바랍니다. 시는 집단적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나의 시와 나의 번역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도 내 생각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내 시를 읽었지만 나를 알지 못합니다.  영영 만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친구입니다.  내 시가 당신 맘에 드셨다면  내 것이든 / 타인의 것이든 /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읽은 시는 진정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시를 읽을 때 그것을 창작하는 저자입니다.  『바다의 일』(Los trabajos del mar, 1983) 중에서  동조운(同調韻)에 대한 고찰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e Emilo Pacheco)는  멕시코 태생의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문학평론가.  이 시의 원제는 Disertación sobre la consonancia  (동조운(同調韻)이란,  정형시의 율격 가운데 하나로  운(韻)을 구성하는 모음뿐만 아니라  이에 뒤따르는 자음까지도 동일한 형태를 일컫는다.)  때때로 스페인어의 소리 울림 때문에 여전히  시가 운율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운율에서 나와 운율을 지니며 운율을 생성한다고 해도,  최근 반세기 동안 씌어진 가장 좋은 시들은  과거의 학자들이나 규범가들이 얘기하던  〈시〉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시의 한계를 확장할 새로운 정의가  상정되어야 한다(만일 아직도 한계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가령 고전주의자들이 불굴의 도전으로도 발굴해내지  못했던 어떤 단어.  ―지당하게도― 한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이건 이미 시가 아니다" 라고 내뱉는  사람들의 놀라움과 노여움을 피할 수 있는  (암시가 용인되는) 하나의 명칭, 그 어떤 용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내게 묻지마』(1969) 중에서  이와 더불어 창작에 대한 자의식 또한 고개를 들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시가 바로  엔리케 린(Enrique Lihn)의 메타시(metapoesía)이다.  ☞ 린:「시를 올바르게 쓰려면」(업로드 예정)  이 글처럼 각 시인의 시학에 해당하는 작품을 통해서  중남미 현대시사를 조망하려는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시도는 필연적으로 몇몇 대가를 누락시키는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보유로서  서인도 제도와 브라질의 독특한 흑인 혼혈 문화,  즉 물라토(mulato) 문화를 노래한 쿠바 태생의 시인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 작품 「성벽」을 소개한다.  성벽(城壁)  기옌 / 현중문 옮김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은 쿠바 시인  원제는 La muralla  - 크리스티나 루스 아고스티에게-  성벽을 세우려니  일손을 빌려주게,  흑인은 검은 손을  백인은 하얀 손을.  아,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 쿵쿵  - 누구야?  - 장미와 카네이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대령의 칼...  - 성문을 닫아라  - 쿵쿵  - 누구야?  - 비둘기와 월계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전갈과 지네...  - 성문을 닫아라  우리편 가슴을 향해  성문을 열어라.  독약과 비수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도금양과 박하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뱀의 이빨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꽃에 앉은 나이팅게일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모두들 합세하여  성벽을 세워보세,  흑인은 검은 손으로  백인은 하얀 손으로.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비상하는 민중의 비둘기』(1958) 중에서 [출처]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작성자 옥토끼  
312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1972 ) 시론 간단정리[공유] 댓글:  조회:58  추천:0  2018-09-02
◎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1972 ) 시론   "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 (= 작은 작품에 집중하고 오랫동안 고쳐 써라.)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냈다. 이미지를 현대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끌어올렸다.     파운드의 시론= "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이미지" 가장 핵심에 있던 것은 이미지즘.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시조라면 에즈라 파운드는 현대시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시에 에즈라 파운드가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  이미지즘은 당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가 지배하던 영국시의 침체된 전통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으로 시도된 '혁신적 모험'이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흄을 만나게 된다.  파운드는 번역시집을 내면서 그 부록에 흄의 등 시 5편을 수록하고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란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이때 사용한 '이미지스트'와 '이미지즘'이란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파운드가 내세운 이미지즘 이론은 흄의 반 낭만주의 사상과 중세 문학 및 동양 시에서 추출한 고전주의 시론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은 프랑스 상징주의를 계승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단시 그리고 중국의 한시와 일본의 하이쿠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당시 영시가 지닌 감상주의와 느슨하고 장신적인 언어를 청산하게 만들었던 이미지즘 운동은 기본적으로 사물과 언어, 대상과 표현을 정확하게 1대1로 대응시키려는 '일사일언'을 목표로 했다. 시인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 대상을 굴절시켜선 안 되며,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낭만주의란 감정을 최대한으로 폭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반 낭만주의 = 감정 거부, 이성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감정이 함께 하는 시를 말한다. '시작법의 궁극적인 달성(ultimate attainments of porsy)'을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흄이 주장한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군말의 폐지'와 비슷한 입장이다.     1. 사물을 보듯이 그려내라 (= 회화적 기법, 보듯이 그려내는 것) 2. 미적(美的)이어야 한다. 3.교훈적 경향에서 탈피하라. (= 20c까지만 해도 고전주의적, 계몽주의적 이론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지금 현대시는 탈피 했다. ) 4. 다른 시를 더 좋게 또는 더 간단하게 반복해도 좋다.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 엘리아르의 와 김지하의 사이의 유사성과 같은 말을 하는 듯하다.)         파운드는 이와 같은 '시작법원칙'을 발전시켜 1912년 리처드 알딩톤, 힐다두리틀과 함께 '좋은 글의 3원칙'을 마련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룰 것. (사물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관념을 배제하고 너의 개념을 만들어 내야한다.)     2.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장식적인 말 사용 X ) 3. 리듬은 메트로놈의 규칙에 따르기보다 음악적 구절의 연속성을 따라갈 것. (외재율이 아닌 내재율로서의 리듬 형성을 말하고 있음)         파운드는 이를 보완하여 1913년 월간 에 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발표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서구 문단 최초로 이미지의 중요성을 논의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미지의 개념 : " 이미지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이성적이라고 바꿔말해도 무방하다.)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      이미지의 효과 : " 그러한 '복합체'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러운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 이미지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우리는 갑작스런 인지,인식하게 된다.)  -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어렴풋한 평화의 땅'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 시킨다. (= 평화/ 땅 중 무엇을 수식하는지 애매함. 의미 또한 불명확! ) -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 하려 하지 말라. - 자신의 마음을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우라. 그런데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외국어로 된 글들을 보라 - '그럴 듯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사람들에게 맡겨라.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화가가 당신보다 훨씬 잘 경치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구구절절 무언가를 표현X) - 각 행이 말미에서 뚝 그치는 일이 없이 하며, 다음 행을 매번 고양시켜 시작할 것. 확연한 긴 휴지(休止)를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다음 행의 시작을 리듬 물결이 올라갈 때를 택하라.     이는 '시어'와 '운율' 그리고 '표현방법'에 대한 논의였다.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의 수식을 피해야 한다는 말은 '추상화'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추상화'는 표현의 간결성과 정확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모호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일체의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직접 다룰 것을 주문했는데, 그러면서 시의 음악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기계적인 운율 대신 시어의 리듬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유시형(free verse)'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갈이의 리듬까지 고려해야 된다는 게 파운드의 주장이다. 게다가 파운드는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했다. 흔히 이미지라면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고 요즘도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데, 파운드는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시의 리듬'을 더욱 중시했다. 이 점이 바로 T.E 흄의 이미지 이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 즉 파운드는 이미지즘 창조, 이미지스트로서의 시를 창조했으나 음악성을 중요시 했다는 것!★ ) ​파운드는 좋은 예술은 참된 증언을 하는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시 표현의 정확성을 강조한 셈이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 그리고 저 좋은 예술은 아무리 '비도덕적'이라고 하여도 전적으로 훌륭한 것이다.결코 좋은 예술은 비도덕적일 수 없다. (※ 근데 여기서 논의 할 점. 예를 들어 작품 '로리타'도 훌륭..? 숙고가 필요하지 않나. ) 나는 좋은 예술을 가지고 참된 증언을 하는 예술, 가장 정확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막연한 것을 나타내는 데도 아주 정확할 수 있다.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다. … "예술의 최고의 기능은 고귀하리만치 풍부한 소리와 이미지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며, "시에는 음악을 지향하는 시와 조각이나 그림을 지향하는 시,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 첫째, 발화 되는 소리에 의해 충전되는 청각적 언어인 '음악시', 둘째는 시각적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가 투영되는 시각적 언어인 '회화시', 셋째는 직접적인 의미와 문맥에 기초를 둔 '언어시'라는 것이다.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시에 모두 나타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모든 글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고 여겼기 때문이다. (= 시에서는 음악성과 회화성, 언어성(의미성)이 적절하게 배합이 되어 나온 시가 좋은 시라고 보았다.) ​ 이와 같은 파운드의 시론은 당시 시인들의 산발적이고 혼돈된 시작 활동의 좌표가 되었고, 보다 새로운 시 쓰기의 지향점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파운드는, 흄이 을 이미지즘 시의 전형으로 써 보인 것 처럼, 자신또한 1913년 월간 를 통해 저 유명한 를 발표했다.       파운드의 시 에 드러나는 '감정의 객관화'는 후일 T.S 엘리엇에 의해 한층 발전 되어 '객관적 상관물'을 낳게 했다. 이것은 외부 대상과 창작자의 지성이 결합된 시적 감수성의 결정체이다.     ※ 여기서 알아 둘 것은, * '정서적 등가물' = 대상의 정서와 화자의 정서가 일치 * '객관적 상관물' = 대상의 정서와 화자의 정서가 꼭 일치될 필요X, 그렇지만 이를 통해 화자의 정서가 드러나는 것.         파운드가 말하는 시의 요체 =  간결한 언어, 객관적인 표현, 구어체     (특히 파운드는 형용사를 격렬히 싫어했다.)  시는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합니다.(=일물일어설을 주장했던 소설가들을 염두하는 말, 일물일어설을 주장하고 정확한 문장구사를 주장한 산문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  시의 언어는 훌륭한 언어이어야 합니다. 고양된 강렬성(즉 단순성)에 의한 경우를 빼면 구어체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책의 언어도, 에두르는 표현도, 도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는 모파성의 산문과 스탕달의 산문처럼 간결해야합니다. (=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대상을 접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각으로.)       감탄사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어떠한 말도 허공을 향하여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  1. 필요 없는 수사어구 X 정확한 문장 필요 2. 구체적으로 표현. 추상성 X) … 객관성, 그리고 다시 객관성, 그리고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앞뒤가 바뀌는 것도,("썩은 이끼 낀 각진 모서리"와 같이)양다리 걸친 형용사도, 테니슨이 사용하는 것 같은 말도, 어떤 환경, 어떤 감정의 압박 상태에 있어서, 실제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논의한 '구어체'는 '시의 음악성'과 결부되는 요소인데 '입말'이 '리듬'을 저절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 음악적인 시들은 외재율이 아니라 내재율. 각편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 리듬을 중요시. 외형을 가진 정형시 X)            이미지즘 운동이 정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 창출에만 매달리는 '인상주의'로 흐르게 되자 에즈라 파운드는 사물이 아닌 인간의 의식세계를 탐구 하기 시작했다. … 그는 사물의 존재보다 인식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당시 첨단 전위 예술이었던 '소용돌이 주의(Vorticism)'에 몰입했다.   그가 떠났어도 이미지즘 운동은 계속 되었다. <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이라는 시집에서는 이들이 합의 한 '이미지즘 6원칙'이 실려 있다.  1. 일상적인 언어를 쓰되 유사하거나 장식적인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말고 정확한 단어만을 사용한다.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도록 한다. 우리는 자유시를 유일한 시작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유의 원칙을 위해 싸우듯이 자유시를 위해 싸운다. (중략) 시에서 새로운 운율은 곧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 시조가 근대로 들어와 사상을 담기엔 역부족 (민족주의적 사상입장에서 시조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 3. 시 제재 선택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 세상 모든게 시가 될 수가 있다. +과거 ,현재 모두 좋은시가 될 수 있다.) 4.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시각적인 것에 기울여져있음)  5. 흐릿하거나 확실치 않는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견고하고 명료한 시를 쓴다. 6. 끝으로, 우리 대부분은 압축이 바로 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정확한 단어' = 정확히 모사 X 시인의 마음에 나타난 대상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라는 뜻. "새로운 운율은 곧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ex) 80년대는 왜 해체시인가? 기존의 시적 문법으로는 변화된 80년대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을 담아내려면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이 무렵 파운드는 이미 '소용돌이주의'로 발걸음을 옮겨가 있었다. … 이미지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는 '소용돌이주의'를 통해 객체적 사물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창조적 인식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 삼아 대하 서사시 를 집필해 나갔다. 이 작품에는 그가 영향 받은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도 개입되어 있는데, 이들 사조를 보다 새로운 시학을 추구하는 동인(動因)으로 삼았다.          는 이미지즘, 소용돌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을 거치면서 점점 확장되어 집필되었다.     흄 :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 언어란 개념이 정확하지X 언어는 우리의 개념을  추상화 시킨다. → 정확한 이미지즘을 창출하려 했음. 정확한 표현,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세계 But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는 강렬한 것을 전달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려고 파운드는 소용돌이 이론(시= 집중된 표상) 으로 발걸음을 옮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311    현대시 창작시론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공유] 댓글:  조회:138  추천:0  2018-09-02
  현대시 창작시론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1821~1867)   "저는 제가 유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오로지 악에 대한 공포와 혐오만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보들레르는 아날로지를 그의 시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아날로지 :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세계(상징적 외관)와 곤념세계(전신적 실재)를 하나 의 기호로 결합시키는 자이며, 이것이 바로 상징주의 문학의 ‘상응이론’이다. 이 러한 상응을 옥타비오 파스는 ‘아날로지’라고 명명했다.   보들레르에게서 특히 주목되는 건 ‘예술의 현대성’과 ‘추(醜)와 악(惡)의 미학.   그는 미에 공격적인 자극, ‘낯설게 하는 향료’를 부여하기 위해 변용해석과 역설이라는 보충 수단을 동원한다. 미를 범속성으로부터 보호하고 진부한 취향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미는 기이한 것이 되어야 한다. 미에 대한 그의 정의들 중의 하나는‘순수하고 기괴한 것’이라는 것.   “시인은 추로부터 새로운 마력을 일깨운다” 보들레르는 ‘추의 마력’을 살려내는 것이 바로 시라고 말했고, 시인은 “추함 자체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며 ‘추함’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추함을 즐기는 행위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더욱이‘추악함의 향락’은 불가사의한 감정에서 비롯되며, 그 감정엔 미지에 대한 갈증과 공포를 즐기려는 ‘끔찍스럽고 징글맞은 취미’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로테스크의 시학’ ⇒ ‘추의 미‘           (1842~1898)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상태(動員狀態)에 놓인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 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   말라르메는 맨 처음 보들레르처럼 현실도피의 이상세계를 시적 주제로 삼았고, 점차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을 지성적으로 탐색해나갔다.   “ 새로운 미학이란 바로 이런 걸세: 사물을 그려내지 않고 사물이 발산하는 효과를 그리는 것. 그리하여 거기서는 시가 낱말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로 이뤄지고 모든 언어는 그 감각 앞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네......”   언어를 통해 바라보는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공허 속에 완벽한 형태의 본질이 숨어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시인이 할 일은 바로 그 본질을 감지하여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말라르메는 평생토록 언어의 본질을 고민햇다. 시의 언어가 과연 의미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가? 잡다한 감정의 결함에서 울려나오는 ‘빈말’이 아닌가?   “모든 것은 허망하고, 오직 남게 되는 미, 그것이 바로 시”               (1854~1891)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감각의 착란” ⇒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 결국 시인은 그러한 착란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하며,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 받은 자”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된다는 것. 그때서야 비로소 시인은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고, 그곳이 바로 ‘시인이 태어나는 자리’ 이며, ‘견자로서의 시인’이 첫걸음을 내딛는 공간이 된다.   랭보의 시는 의미를 초월하는 ‘혼돈의 진동’이었고, ‘그 오랜 관습’의 원고지 위에 “낯선 세계의 얼굴”을 남기는 작업이었다.그러한 작업이 시인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시인은 결국 ‘침묵의 시’를 택하게 된 셈이었다.             (1871~1945)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시의 첫 구절은 공짜로 준다. 그것과 화음을 이룰 둘째 구절을 불러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이렇게 하나의 단어로 시작되는 시는 ‘아직 말을 더듬거리기 때문에’ 우발적인 단어를 빌려 쓸 수 밖에 없는데, 그 단어들은‘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또 다른 단어를 불러 온다.“     발레리는“순수한 물”과 같은 시,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시를 ‘순수시’라고 칭하면서, 여기엔 “산문에 딸린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음악적인 연속성이 절대로 중담되지 않아야 한다.” “순수시라는 말 대신 절대적인 시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며 단어들 사이의 공명 효과를 탐구하고자 했다.   산문은 보행이요, 시는 춤이다   ‘춤의 언어’, 즉 ‘시’가 지니는 리듬은 리듬 자체가 목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독자에게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져다 준다.   춤은 율동처럼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시의 리듬이란 시인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외부 세계와 교감하는 것이며 외부 세계를 호흡하는 것이다. 시의 리듬은 삼라만상의 우주로부터 시인의 몸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단어와 단어들이 호응하여 “음악화 되고” “화음적으로 대응하는” 공명관계를 이룰 때. “시적 우주”가 여린다는 것.   ‘수공업’처럼 언어를 매만지고 두드리고 밀고 나가는 창작 행위를 중시했다.   발레리는 시의 리듬과 이미지, 상징과 비유 등 말의 모든 힘을 구사하여 ‘언어 공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 따라서 시인은 ‘언어 공학’의 ‘기하학자’ ‘건축가’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1886~1956)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   벤은 평생토록 ‘새로운 시’ ‘새로운 현대시’ ‘새로운 서정시’를 탐문했다.   현대시가 될 수 없는시 : 1) 허구성; 외부세계를 모방하거나 거기에 기대어 자신의 감정을 노 래하는 언술 방식을 버려야! ‘경험적 자아’가 아닌 ‘시적 자아’로서만 시를 써야 한다. 2) ‘~인 양’ ‘처럼’ 등 직유의 빈번한 사용을 피해야! 이로 인해 언어의 긴장감이 이완되고 창조적인 변형이 약해진다. 3) 빨강 ‧ 보라 ‧ 금빛 등 색채의 빈번한 사용을 하지 말아야! 4)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킥 위한 해맑은 톤을 피할 것! ‘졸졸대는 샘물’ ‘아름다운 밤’ 등의 표현은 현실도피적 발상이며, 독자의 감상을 노리고 값싸게 머리를 짜내는 행위라는 것.             (1898~1956)   “시를 통해서는 개인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개인들이 속한 계급도 표현된다. 또한 여러 시대의 모습이 시 속에 표현되는가 하면 인간의 격한 감정 역시 펴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국 표현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다.”   시인이여, 이성(理性)을 두려워 말라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 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부분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은 이 시로부터 비롯되었다.   “새로운 내용만이 새로운 형식을 지탱할 수 있다.”               (1885~1972)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거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시를 인체에 비유하면, 메시지는 뼈에 해당되고 리듬은 핏줄과 같고, 이미지는 살갗이라고 볼 수 있다. 흄의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 ‘군말의 폐지’와 비슷한 입장.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룰 것. 2)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3) 리듬은 메트로놈의 규칙에 따르기보다 음악적 구절의 연속성을 따라갈 것.   1) 일상적인 언어를 쓰되 유사하거나 장식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정확한 단어만을.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도록. 3) 시 제재 선택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4)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애매하고 일반적이 아닌 구체적인 것을 정확하게. 5) 흐릿하거나 확실치 않은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견고하고 명료한 시를 쓴다. 6) 압축이 바로 시의 본질이다.   ‘시는 지성인들 사이의 의사전달’ ‘어떠한 예술도 대중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성장한 적이 없다’   (1888~1965)     "예술가의 과정은 계속적인 자기희생의 과정, 즉 계속적인 개성 소멸의 과정이다“   엘리엇은 ‘강한 감정의 자발적 유출’이라는 낭만주의적 시관에 반발하면서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서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적 변용 과정임을 역설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적 관정이란 비개성화 과정으로 요약된다. ‘개성적이고 사적인 경험’을 보편적이고 비개성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는 것이 그의 예술 작업이었다.   예술가의 과정은 계속적인 자기희생의 과정, 즉 계속적인 개성 소멸의 과정이다.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를 찾아야 한다는 것. 시인은 일상적 사건이나 풍경 그리고 기존의 예술 작품 등에서 시인의 감정을 대변해 줄 ‘정서적 등가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     자 이제 가자, 너와 나, 수술대 위에 마취당해 있는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쭉 뻗어 있는 이때, 가자, 반쯤은 썰렁한 길들을 지나 잠 못 이루는 밤 하루 묵을 싸구려 호텔로 굴 껍질이 뒹굴고 톱밥이 흩날리는 식당으로 중얼대며 들어가는 길들을 지나, 길들은 너를 감당하기 힘든 질문으로 이끌고 가려고 음험한 의도를 지닌 지루한 논쟁처럼 뒤따라오는데‧‧‧‧ 오 묻진 마, ‘그게 뭐냐’고 가서 방문이나 하지.   방에선 여인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를 들먹이며.   -T.S. 엘리엇, 이일환 옮김, 「J. 앨프렛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부분                 (1892~1966)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초현실주의’   ‘상상력의 극대화, 욕망의 해방’   * 초현실주의: 남성명사, 말이나 글 혹은 기타 그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사고의 실제적 기능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심리 적 자동 현상.                         이성에 의한 모든 조종에서 벗어나고, 모든 미적, 도덕적 편견을 떠나 사고 그 자체를 받아쓰는 것.     브르통은 ‘꿈’과 ‘광기’의 시 쓰기를 논리화시킨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삼아 인간의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광기를 인간의 가장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출이라고.   이미지란 순수한 정신적 창조물이다. 이미지는 어떤 비유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가지 현실을 접근시키는 데서 태어난다. 접근된 이 두 가지 현실의 상호관계가 멀면서도 적절할수록, 이미지는 더욱더 강렬한 것이 될 것이고, 보다 더 강력한 감동력과 시적인 현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1893~1930)     “왜 어째서 문학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야 하는가? 그것은 모든 신문에, 매일같이 모든 페이지마다 실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디저트 정도로만 내놓는 문학 따위라면 죽어버려야 한다.”   ‘미래파’ ‘선동가’ ‘혁명의 계관시인’ 그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시의 혁명’과 ‘정치혁명’을 꿈꾸고 노래한 20세기 러시아 최고의 시인이었다.       「어떻게 시를 만들 것인가」   1) 시는 생산품이다. 2) 시 쓰기의 연습은 새로운 기술 창조에 도움이 되는 생산 기술에 대한 공부이다. 3) 참신성, 재료와 방법의 참신성은 모든 시 작품에 필수적이다. 4) 시 만드는 사람은 매일의 연습을 통해 장인성을 연마하고 시적 자원을 저장해야 한다. 5) 이미 오래 전에 존재 가치를 상실한 운율법에 정확하게 맞는 시를 쓰는 능력보다 훌륭한 창작 노트를 작성하고 그것을 효과적      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6) 자신을 표현 할 수 있는 수단이 오로지 시뿐일 때 펜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소명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을 때에만 완      결된 시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 7) 사회적 소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인은 사물과 사건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8) 사회적 소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 시인은 자기 계급의 선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 비정치적 예술에 관한 동화는 완      전히 분쇄되어야 한다.       「새로운 언어 창조의 세부 방침」   1) 어휘를 조작할 것. (말의 혁신, 음성, 기억 편성 등) 2) 약강격이나 강약격 같은 관례적인 운율을 언어 자체의 다각적인 리듬으로 대체할 것. 3) 구문을 변형시킬 것. (단어 결합 형태의 단순화, 비일상적 단어 사용의 강조 등) 4) 단어와 단어결합의 의미론을 새롭게 할 것. 5) 교묘한 슈제트 구성의 모델을 창조할 것. 6) 말의 시각적 측면을 드러낼 것.     리듬은 시의 힘이자 에너지이다 “시인은 리듬 감각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전시켜야 한다.”             (1898~1936)     "예술 작품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기법 뿐 아니라 영감이라는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불꽃이 필요하다.“   시는 세상의 모든 것, 즉 추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것에서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 영혼의 깊은 늪 속에 잠들어 있는 그것을 찾아서 깨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지닌 놀라운 면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어떤 감정도 다양한 방법으로- 저마다 다 다르게, 또 때로는 아주 모순된 방식으로-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고독의 길’에 이르는 문에 당도하면, 마음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과 덕성, 그리고 죄업과 순결함이 담긴 잔을 깨끗이 비울수 있게 될 것이다.항상 우리의 영혼을 세상 사물에 따라 부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리는 영혼의 그림자를 보고, 또 마법과도 같은 우리의 감성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기타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리라 먼 곳을 그리워하며 기타는 눈물을 흘린다. 더운 남국의 모래는 흰 동백을 찾고, 과녁을 잃은 채 허공을 떠도는 화살, 아침을 잃어버린 오후,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서 제일 먼저 죽은 새를 슬퍼하며 기타는 눈물을 흘린다. 아, 기타여! 다섯 개의 칼에 의해 상처 입은 심장이여!   -로르카, 엄지영 옮김, 「기타」 부분           (1920~1970)     "시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며, 움직임이며, 또한 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 질문은 시계의 시침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왜냐하면 시는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시는 무한성에 대한 요청이 있지만 시대를 관통합니다. 시대를 관통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Flaschenpost)' 같습니다, - 분명 희망이 늘 크지 않은- 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주해 있는 겁니다. 열려있는 것,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   첼란은 인간에게 귀속되는 언어로서의 시를 추구했다. 시는 ‘언어 조작으로서의 시’가 아닌 ‘인간의 현시을 담아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 시란 “자신에게서부터 자신에게로 가는 우회로” “인지하는 너에게로 가는 목소리의 길”             (1914~1998)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시어는 적확한 의미 규정을 거부한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성” “맨 처음의 인간적 언어는 모방적이고 마법적인 무언극이었을 것” “아날로지적 사유 법칙의 지배를 받아 신체적 동작들은 대상과 상황을 모방하고 재창조하는 것” 따라서 오늘날 인간의 언어는 대상의 실재를 표현하려 들지만 사실은 실재의 일부분을 표상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시인은 현존의 언어를 일상적 의미의 획일적 세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       뒤집어엎어라, 꽁지를 잡아라(악을 쓰라고 그래, 똥갈보 년들), 집어 패라, 채찍에 묻혀 입에다 설탕을 먹여라, 풍선처럼 불어대, 그리고 터트려, 말려라, 공알을 까버려라, 짓이겨라, 멋진 수탉처럼, 울대를 비틀어라, 요리사처럼, 털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고, 투우처럼, 수소처럼, 짓이겨놓아라, 새말을 만들어라, 시인아, 제가 한 말을 혼자 다 들이마시게 하라.   -옥타비오 파스, 민용태 옮김, 「말들」 전문       이처럼 시인들이 일상의 언어를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는 것이다.이를 통해 시의 언어는 획일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원초적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파스의 시적 주제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이다. 이 또한 ‘나’의 ‘타자’를 발굴해내기 위한 몸짓이기 때문이다.           (1904~1973)     "대낮에 광장에서 읽는 시가 되어야 한다.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옮김, 「시(詩)」 전문         “최상의 시인이란 우리가 일용할 빵을 마련해 주는 사람” 모든 민중의 일상적 노동에 바치는 자신의 헌신과 애정“을 담아내야. “땀과 빵과 포도주와 모든 인간의 꿈”에 참여해야.     네루다는 “거리나 시장에서 주워온 말로 시를 쓴다”   책에선 배울 게 없다. 대자연의 경이와 생명에서 시를 느껴라. 굳이 혁신적인 시어와 형식미를 갖추지 않아도 ‘시적 정서’에 의해 시의 개성은 표출된다. “탁월한 시인이 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자연, 문화, 사회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통제하는 거싱 매우 중요하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출처] 현대시 창작시론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작성자 옥토끼  
310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댓글:  조회:110  추천:0  2018-08-25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2) 『신생Vita nuova』, XII.(원주) 3) 단테는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만났다고 했다. 다시 구년 뒤, 정확히 아홉시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환상은 오전이나 오후 아홉시에 일어났다. 베아트리체는 13세기의 90년에 죽었다. 즉 성스러운 숫자인 10이 아홉 번 겹친 해였던 것이다. 또한 네르발은 그의 작품 『아우렐리아』의 곳곳에서 자기 생에서 7이란 숫자가 가졌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주) 223     네르발은 흠칫 놀라며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우리에게 알리려 하지도 않았고,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꿈을 직시하여 그 비밀을 밝혀내고자 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길, 어쨌든 나의 감정들을 찾아내는 대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내 모든 의지로 무장한 채 이 비밀의 문을 열어제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매혹적이고 두려운 환상을 이겨내는 것, 우리들의 이성을 조롱하는 정령들에게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단테에게 영감은, 시인이 겸양과 겸손과 경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초자연적인 신비였다. 네르발에게 그것은 우리에게 싸움을 걸고 도전해오는 재난이며 신비였고, 밝혀내야할 그것이었다. '해독해야 할 신비'와 '풀어야 할 숙제' 사이의 왕래는 쉽게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이 점은 네르발의 계승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309    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95  추천:0  2018-08-22
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1. 소수와 다수    ‘시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비슷한 질문에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자신의 어느 시집에서 “거대한 소수에게 바침”이라는 헌사로 대답했다. ‘소수’라는 명사는 독자의 수를 스탕달의“행복한 소수”로 환원하지만, ‘거대한’이라는 형용사는 ‘소수’라는 명사를 별안간 ‘소수가 곧 다수’라는 뜻으로 확장시킨다. 히메네스는 헤아릴 수 있는 다수라는 상대적 개념에 반하여 비교 불가능한 소수라는 절대적 개념을 내세웠다.  시를 읽는 독자는, 아무리 그 수가 늘어나도 사회적으로 한상 소수에 속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거대한 무엇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소수이면서 다수인 시의 독자는 불가공약적인 현실로 들어가고, 그 언어의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발견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를 초개인적인 공간, 즉 말 그대로 거대한 공간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기술과 사회적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속될 것이다. 사회적 쟁점들과 영웅들은 간 곳 없지만, 시와 그림과 교향곡은 의구하다. 물론 과학과 철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예술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소수의 작업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수치상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가지 문제가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공간적인 분리로서 대중과 관람자의 다양성의 문제다. 둘째는 시간적인 지속성으로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독자와 청중의 연속성이다. 다양성과 지속성모두 단순한 숫자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은 늘 주의가 산만한 상태로 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일상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비밀스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산만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하찮고 무분별한 소란스러움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산만함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독서는 정찰이다. 광고와 의미 없는 의사소통이 난무하는 시대에 몇 사람이나 그런 독서를 할 수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라, 그 소수의 독자들에게 우리의 문명의 지속성이 달려 있다.    근대가 시작될 때부터 시는 근대성과 이중의 관계를 맺어왔다. 시와 근대성 사이의 갈등은 19 세기 말에 두드러졌고, 20세기 초반 전위주의에 이르러 갈등은 불화로 변했다. 시는 정통족인 도덕적, 미학적 가치를 무시했고 종종 비웃기까지 했다. 시는 언어의 지반을 붕괴 시켰고 기화와 그 의미를 변형시켰다. 또한 시는 매혹적인 언어의 과물이 거주하는 세계를 건설하기도 했고, 의식을 빨아들이는 투명한 누속임의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시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은 시인들이 매혹되었고 동시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던 근대성을 실현시킨 부르주아 계급이 시에 보인 반응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먼저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상징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전위주의자들에 의해서 불신되고 무시되었다. 근대 예술에 대한 반감을 정당화하고 부추긴 것은 적의에 찬 강단 비평과 악의적인 무지한 언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만큼 총체적이진ㄴ 않았고, 근대성과 시 사이의 불화는 필연적이었다.    근대시는 그것이 ‘근대적’이기 떼문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시를 읽는 독자들도 동일한 과정으로 인해 자신이 근대인이란 것을 느낀다. 근대성은 탄생과 더불어 스스로와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여기에 근대의 이중성이 있고, 지속적인 변화와 변모의 비밀이 숨어 있다.    2.양적기준과 가치    시는 다른 영역, 특히 에로티시즘, 우정, 쾌락, 신에 대한 경건함과 불운한 이웃에 대한 동정심(프리아모스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감정), 고독, 우울함에서 오는 쓰디쓴 쾌락, 허약한 기억 같은 친밀한 삶의 영역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시인들은 우리에게 선망, 관능성, 잔인함, 위선, 콤플렉스 같은 인간의 정념을 가르쳐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었다.  시적 전통은 공간 축과 시간 축이 교차한 결과이다. 공간 축은 끊임없이 상호 의사 소통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시간 축은 세대를 이어가는 시인과 독자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진다. 다양한 지역의 독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의사 소통은 신선한 젊음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시적 전통을 풍요롭게 한다.  근대적 출판체제에서는 모든 장소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조차도, ‘여기’에 있다. 여기는 바로 ‘지금’이다. 공간축은 시간축이 된다. 시장의 작용은 시적 전통을 형성하는 시간 축도 부식시킨다. 지금이 특권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키는 매듭을 끊어버린다. 18세기부터 서양문명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순례를 인도하는 안내자는 진보라는 개념의 북극성이다. 몇 년 전부터 그 별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가 그 영광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부동할 뿐 상승하지 못하며, 움직일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무게없는 현재이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재이다. 목표가 증발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수단이 증가한다. 현대인의 현재는 동쪽도 없고 북쪽도 없는, 그야말로 방향을 상실한 현재다. 문학적 전통 내에서 현재의 확장은 순간적인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추세로 나타난다. 이제 완전함의 속성은 지속이라기 보다는 재빠른 소비이다. 과거는 실종되고 미래는 희미하다. 현재 또한 순간을 향하여 날을 세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증발한다. 순간은 폭발음과 함께 사라진다.  시인 한사람 한사람은 전통이라는 강의 한 맥박이며 언어의 한 순간이다. 때때로 시인들이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전통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기적이며 근대에 들어와 더 두드러진다. 낭만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운동은 자신의 전통을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시인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패러디였으며 대학의 졸업 시험에 대한 패러디였다. 시인은 자신의 쇠사슬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즉 어제와 내일을 잇는 다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갑자기 그 다리가 두 개의 까마득한 심연-멀어져가는 과거라는 심연과 붕괴되는 미래라는 심연- 사이에 걸쳐져 있음을 발견했다. 시인은 시간 속에 길을 잃었음을 느낀다.  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시적 형식인데, 형식은 죽음과 세월의 마모에 저항하는 인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지속을 위한 것이다. 형식은 때로는 도전이며, 때로는 요새이고, 또 때로는 기념비 이지만, 언제나 오래도록 지속하려는 의지이다. 새롭게 응축되고 변형된 시간은 현실적 시간에 맞서 불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건축물이 되고자 한다.    3. 균형과 예측    시 운동의 부재는 우리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커다란 변화 중의 하나를 반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절의 전통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이 끝나고 있거나 혹은 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중의 하나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다른 시대가 시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대는 근대의 변형인가? 새로운 시작이건 근대의 변형이건 간에 세기말의 표식은 모든 것에 의문 부호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불확실성의 시대도 시적이고 예술적인 창조에서는 늘 풍성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시의 건강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황이다.  서로 다른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에 수익의 기준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을 타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생산을 자극한다. 어쨌든 시는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지만 살아남았다. 또한 시에 대한 긍정적인 표시들을 보면, 분산되어 있지만 광업위한 독자들이 있고 그 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시인들이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중남미와 다른 곳에서는 시인이 여전히 대중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와 중국, 중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시인들이 공산주의 관료제도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부정과 긍정, 단절과 유대의 이중적인 운동은 모든 문학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이며 특히 근대문학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운동이 보이지 않은 것이 불안한 징조이다. 근대에서 소우의 행동은 문학적 전통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잡지와 작은 출판사 같은 소수집단의 활동이 가설적인 전원 합의를 위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문학이라는 생명체를 불구로 만들고 혹은 죽일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의 몬든 영역에서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문학에 무엇인가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것은 ‘아니다NO’라는 말이 아니며, ‘아니다’는 그 다음에 올 대긍정을 예비하는 알람이다.  시가 노래하는 것은 지금 지나쳐가는 것들이다. 시의 기능은 일상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고 가시화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가장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 임무라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신곡이나 실낙원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혼재되어 있는 시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사랑이나 결투, 고독이나 집단적 환희를 표현하는 노래와 로망스가 만들어졌다.    *보들레르의「젊은 시인들에게 주는 충고」의 몇 구절을 보면 “나는 열심히 시를 쓰는 재능있는 젊은 시인들에게 결코 시를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는 결실이 풍요로운 예술이다. 시는 고양된 결실을 거두기 위한 일종의 투자지만 수확을 거두는 일은 매우 더디다.”    근대 과학 기술과 시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립을 제시해보면, 첫 번째 대립은 세계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 즉 세계를 바꾸려는 행동, 어떤 면에서는 세계를 추방시키려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대립은 언제나 세계의 비전에 관한 것이다. 시가 이미 새로운 의사소통의 방법들을 더욱 과감하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시인들에게 말한다. 대중 앞에서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는 시의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째 카세트의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시청률의 횡포에서 벗어나 대중을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 둘째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커다란 두 갈래의 시 전통, 즉 구어체의 전통과 문어체의 전통이 합류된다. 이런 방업은 책과 인쇄술만큼이나 심원한 방법으로 시의 발표와 수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각과 청각, 이미지와 말이라는 인간이 갖는 두 가지의 특권적인 감각 사이에 결합이 이우러질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미학적 쾌락과 시적 경험, 즉 축제와 관조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축제는 참여와 교감의 예술이며, 관조는 우주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이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미래의 시에서는 두 가지의 경험이 결합될 것이다. 축제와 관조: 화면이라는 살아 있는 페이지 위에 색깔과 움직임을 갖는 기호들, 선들, 이미지들이 솟아올라 인쇄될 것이다. 목소리들은 울림과 반향의 기호학, 소리와 의미가 결합된 공기의 천을 수놓을 것이다.    4. 타자의 목소리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시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 소리가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열과 계시의 소리이고,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 지금의 소리이며 동시에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태초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는 이단적이고 이교도적이며, 순수하면서 퇴폐적이고, 깨끗하면서도 진흙투성이이고, 하늘에 떠 있으면서 땅속에 숨어있고, 고요한 암자의 것이면서 동시에 거리 한 모퉁이의 카페의 것이고,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저 멀리 비껴 있는 존재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거나, 반복적이건 일회적이건 간에 그들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그 순간에 모든 시인들은 다른 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타인의 것이고, 누구의 것이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다. 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이 되는 그 드문 순간에 그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근대 시인의 특성은 그의 행동이나 사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에서 온다. 차라리 그 음성이 깃들여 있는 어조에서 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 할 수도, 혼동될 수도 없는 어조여서 필연적으로 그 소리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원죄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다름의 표시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갈라지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눈물과 데모크리토스의 웃음사이에서 동요된 우리 시의 반근대적인 근대성은 진정한 위반을 뜻한다. 그러나 그 위반은 거의 항상 무의식적으로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나타난다. 위반은 앞서 말했듯이 근원적인 차이에서 싹튼다. 그것은 근대에서 시가 부속품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는 그 주제, 언어,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근대적일 수 있지만 그 깊은 본성은 반근대적인 음성일 수밖에 없다. 시는 근대성과는 동떨어진 현실, 가장 오래되고 역사의 변화와 무관한 내부적인 심층세계를 표현한다.    시는 비록 그 땅의 현실과 역사에 매여 있으나 실제로 표현되는 각각의 시는 항상 저 너머의 초역사적인 것을 향하여 열려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저 너머의 종교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면에 대한 지각을 뜻하는 것이다.    시는 이미지화한 ‘기억’이고 또 음성으로 변한 이미지다. 다른 목소리는 저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각자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인간의 소리다.  시적인 사고가 작용하는 방식은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세계들을 관계지어주는 능력에 기초한다. 모든 형태의 시와 언어의 모든 형상은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상이한 사물들간에 감추어진 유사성을 찾고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대적인 것들까지도 서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시의 작용은 언어를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두 흐름에 의해 흘러가는, 살아있는 우주로 인식한다. 언어 내에서는 천체와 세포 간의, 입자와 인간간의 투쟁과 사랑 그리고 뭉침과 흩어짐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주제, 형식, 그리고 사상이 어떻든 간에 각각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살아 있는 소우주다.    *시는 기술과 시장에 대한 해독제다. 바로 이것이 우리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에서의 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특히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만일 상상력이 죽거나 썩게 되면 시도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시를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태초의 혼돈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흙의 자식들' 中 '시의 세기말'    
308    <언어>편/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17  추천:0  2018-08-22
편(옥타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 활과 리라 , 1998.)        1. 언어에 대한 인간의 태도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35쪽)      갑자기 단어의 효능에 대한 믿음이 상시되자, 시인(아르튀르 랭보)은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말일까?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말없이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36쪽)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36쪽)      말은 인간 자신이다.(37쪽)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일이다.(37쪽)        2.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것과 다른 점      (1) 인간의 일상어가 비할 데 없이 복합적이다.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하다.      (3) 마샬 어번이 설명하는 말의 세 가지 기능(39쪽)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이다.      -말은 감탄사와 의성어의 경우처럼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말은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어떤 외침에는 지시를 나타내는 미약한 징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상징적이거나 혹은 표상적 기능이 있다고는 증명되지 않았다.(40쪽)        3. 언어의 발생과 전개      언어의 발생과 전개를,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점차적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예를 들어, 감탄사, 외침 혹은 의성어로부터 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가설들 역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잡성을 과시한다.(40~41쪽)      일상 언어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문가들은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듯싶다 .(41쪽)      “시초부터 언어와 신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언어와 신화의 기본적인 특성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든 상징적 기능의 내부에 있는 철저한 은유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42쪽)        4. 인간과 언어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42쪽)        5. 언어와 시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상어는 시를 이루는 물질 혹은 자양분이지만 시는 아니다. 시와 시적 표현들—어제 발명되었거나 혹은 전통적 지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민중들이 오래 전부터 반복해온—의 차이점은,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43쪽)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혹은 결합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시는 계속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심원하고 원초적인 것을 만나러 가기 위한 많지 않은 방법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5쪽)        6. 시적 창조와 언어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47쪽)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고 민중들은 음송을 통하여 시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이다. 순환적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 방법으로, 시인과 독자는 번갈아가면서 시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47~48쪽)      유머는 시가 사용하는 주된 무기 중의 하나이다.(49쪽)        7. 현대사회와 시      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근대의 특징은 시인이 주변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사회에서 시는 부르주아 계급이 소화할 수 없는 양식이다. 계속해서 시를 길들이려고 시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군의 시인들이나 어느 시 운동이 이러한 시도에 굴복하여 사회적 질서에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비판과 물의를 야기하는 또 다른 창조가 솟아나게 마련인데, 이것은 때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49쪽)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50쪽)      근대의 정치적 당파들은 시인을 전도사로 만들어 타락시킨다.(51쪽)      우리 시대의 시는 사회와 인간 자신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고독과 반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 시인의 행위는 단지 개인과 소집단에만 행사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한계성이 역으로 이 시대에 현대시가 가질 수 있는 유효성과 미래에 풍요롭게 꽃필 수 있는 토대가 된다.(53쪽)      한 사회의 피폐가 반드시 예술의 사멸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며 시인의 침묵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즉, 고독한 시인과 작품의 출현을 유발하는 것이다.(55쪽)      시가 만드는 말의 우주는 사전의 단어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단어들로 만들어져 있다. 시인은 죽은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巨富)다.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를 뜻한다. 비의적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시인의 사명을 “부족의 말에 가장 순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57쪽)      시인은 말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인가?(57쪽)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양자 중의 하나가 사라지면, 시는 기계적인 감탄사로 복귀하거나 혹은 장황한 부연, 묘사 혹은 정리로 변한다.(58쪽)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이다.(58쪽)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말은 본래 다의적이다. 만일 시를 통하여 말이 자신의 본성, 다시 말해 동시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사물을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한다면, 시는 언어의 본질 자체인 의미화 작용 혹은 의미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쓸모없으며 동시에 기괴한 작업—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언어를 박탈하고 그 대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울림을 되돌려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시의 말들과 구문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60쪽)     
307    활과 라라 / 옥타비오파스 [스크랩] 댓글:  조회:240  추천:0  2018-08-11
시 →이중적 성격 앎 구원 힘 포기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 들숨과 날숨 근육 운동 공을 향한 기원 무의 대화 시의 양식 : 권태 고뇌 절망 기도 탄원 현현 현존 악마를 쫓는 주문 맹세 마법 무의식의 승화 보상 응집 계급과 국가, 인종의 역사적 표현이면서 역사를 부정 경험 느낌 감정 직관 방향성이 없는 사유 우연의 소산 계산된 결과물 세련된 형식을 사용하여 말하는 기술이자 원시적 언어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 선대를 흉내내는 것 실제의 모방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 광기 황홀경 로고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성교 낙원과 지옥, 연옥에 대한 향수 놀이 노동 금욕적 행위 고백 본래적 경험 비전 음악 상징 아날로지 교육 도덕 계시 춤 대화 독백 시의 기능 :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시적 행위 : 혁명적인 것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편 →시의 표면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 시편의 운율과 각운 :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 울림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시적 경험이 개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시적경험, 시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시를 표방하는 형식은 다양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은 시편을 하나의 장르로 환원시키려고 애쓰는데, 여기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1. 만일 시를 일단의 형식들, 즉 서사시, 서정시 극시로 환원한다면 많은 예외가 발생한다. 2. 분류가 가지는 표면적인 것에 대해서 한계가 드러난다. (이는 문체론에서부터 정신 분석학에 이르기까지 문학 비평이 이용하는 타문학적 방법론들에도 적용된다.)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 (부분이 곧 총체)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 다양성 역사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한 다양성이 존재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 그러나 같은 시인의 글일지라도 하나하나의 작품은 저마다 독특하고 개별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은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며 때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부정하기도 한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지니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까지도 드러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인간의 생산품, 작품 하나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 스타일 일군의 예술가나 한 시대에 적용되는 공통된 방법 상속이며 변화, 집단적 방법이라는 면에서 기술과 유사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동의 스타일을 뛰어넘으려 한다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스타일 없이는 시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지만 시편들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 시편 : 색깔이고 소리이면서 의미이기도 한 말로 이루어지는 애매한 존재 조형 예술, 조음 예술 :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 :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 의미와 작용이 결핍된 그 자체로의 색깔과 소리는 없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써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 - 모든 작품은 의미화 작용에 닻을 내림. 인간의 손길이 스치면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되는 것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 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언어 말하여지거나 씌어진 언어와 조형적이거나 음악적인 언어 사이의 차이는 대단히 크지만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언어, 즉 의미를 나타내고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표현의 체계라는 사실은 공통된다.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 모든 작품들은 ‘~를 위한 것’ 그리고 ‘~를 향해 가는 것’이며 이것들은 필연적인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닻을 내린다. (한 시대의 생산물들은 역사, 즉 스타일에 용해되어 있다.)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운문으로 씌어진 논문/ 그림- 교육적 삽화/ 가구- 조각 을 분리시키는 차이점, 차별적 요소는 시.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 : 시 -하나 : 산문 -다수 : 시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시적기능 ↔ 기술적 조작 도구로 전락하거나 모양이 일그러졌던 재료는 예술 작품 속에서 본래의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이미지 그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는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이며 동시에 다른 사물, 즉 이미지 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그러나 시편에 대한 경험-독서나 음송을 통한 재창조- 역시 혼란스러운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여준다. (독서는 거의 언제나 본래적 의미의 시와는 다른 것을 드러낸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참여 독자가 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 시편의 경험도 역사 속에서 주어지며, 역사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부정한다.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 : 중재 역할 ~ 태초의 시간 - 순간 속에 육화 ~ 직선적 시간 - 순수한 현재로 변화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 시편을 읽는 것 ≒ 시적 창조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   시편이란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가? 시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적 언어들은 어떻게 의사 소통하는가?   시편 :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 시 :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편   기호 ≠ 대상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위기의 시대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말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사물도 똑같이 피를 흘린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 →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 인간은 말로 된 존재 그리고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한 쪽에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단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언어 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것이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대상도, 체계도, 유기체도 아니다.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학문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언어의 기원 ○동물의 의미화 작용이 발전하여 사람의 언어가 되었다는 주장 이의 제기 : 1. 인간의 일상어는 복합적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 →이런 유의점은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마샬 어번 : 말의 세가지 기능 1.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 2.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감탄사 의성어) 3.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 →의미화 작용 : 지시적, 감정적, 표상적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해서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 언어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다.   ○단순한 것(감탄사, 외침 의성어) → 지시적, 상징적인 표현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합성을 지님. 거의 모든 고대 언어들에는 구나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는 말이 존재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이행은 자연 과학에서는 확실하지만 문화 과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어에 대한 동물적 기원의 가설~ “언어를 표현적인 운동의 장”에 포함시킨다는 면에서 독창성을 지님 제스처와 동작은 의미화 작용(지시, 감정, 표상)을 가진다.   언어와 신화 : 은유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 언어와 신화는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 언어의 본질 : 상징적인 것 ~ 실재의 한 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인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언어 한복판의 내전 :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여 투쟁하고 하나는 모든 것을 향해 투쟁한다.   시와 시적 표현(일상어)의 차이 시 :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 시적 표현 : 일상어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며 인구에 회자되는 언어들의 왕복 운동의 결과   말과 대상사이의 거리 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존재 사이에, 자신에 대한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다리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 소멸 1.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감 2.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거리 소멸의 시도는 근대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나타남 현대시 1.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 2. 혁명적 소명 양극으로의 운동 :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   세계와 인간 사이에 원초적인 단일성이 회복된다면, 소외가 사라지면 언어도 사라질 것이다.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의지 창조적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시가 존재할 수 없다.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언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 : 인간 모든 것은 의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   무심(無心)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위반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1. 말들은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2.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의 두 가지 적대적인 힘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째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중력의 힘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   공용어 결별과 복귀의 두 작용은 시가 공용어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 도시, 국가, 계급, 동아리 혹은 분파가 뜻하는 집단의 언어   유럽 민족들의 언어가 창조될 때, 전설과 서사시들은 그 민족 자체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그 민족들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의식을 부여함으로써 민족 수립의 토대를 세웠다. →시로 인하여 각 민족의 공용어는 원형의 가치를 지닌 신화적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근대시는 부르주아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탈퇴한 사람들의 양식으로 변했다. 반역의 시가 가능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회적 언어로 시가 쓰인다.   ‘시인이 속한 집단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인의 언어는 집단의 언어이다.’ 시인 - 연통관(통과의례, 공범관계) - 집단 현재, 분열의 과정   근대가 각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공허의 장벽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많은 현대 시인들은 잃어버린 청중을 찾으려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민중은 없고 조직된 대중이 있을 뿐이다. 시인이 관리로 변했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 말과 마주선다. 그 본래적 말을 하면서 인간은 성장해왔다.   시인이 자신의 추방 -진정한 반역의 유일한 가능성- 을 포기한다면, 시도 포기하는 것이 되고 그러한 추방이 합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이중의 오류 전도 시인 : 민중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믿음 민중: 시의 언어를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모호함 시적 창조는 언제나 수평적 완만함의 저항을 받기 마련 모든 작품이 갖는 어려움은 그것의 혁신성에 기인 습관적인 쓰임에서 떨어져 나와 대화와 담론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 편입된 말들은 자극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   모든 신성한 말은 비밀스러운 것 그리고 모든 비밀스러운 말들은 신성함과 닿아 있다. 비의적 시편의 시의 위대함과 역사의 빈곤함을 선언한다.   특정한 사회의 가치에 반대하는 위대한 비의적 시인 혹은 반역적인 시 운동이 나타날 때마다,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라 사회라는 사실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원인 1. 공통적 언어의 부재 2. 고독한 노래 앞에 사회가 귀를 막고 있다 시인이 고독하다는 것은 사회가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조는 언제나 일정한 높이에서 역사적 수준의 하강을 고발한다. 가끔씩 난해한 시인들이 더욱 높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관점의 오류이다. 그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영역을 떠나 시의 말이 될 때. 시인은 자신의 말을 선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릭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었다. 시인 = 시인의 말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 말인 것이다.   시의 말들은 모두 유일. 동의어가 없다. 유일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어서,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된다.   시인의 말도 역시 공동체의 말 시인은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   시가 말을 순화한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긴장 = 시 발전의 주체 :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가는 언어 시 :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   시인은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써,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며, 말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사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리듬 구 고립된 단어는 의미 단위를 구성할 수 없다. 토막난 단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가 아니다. 우연에 맡겨진 낱말들의 연속도 언어가 아니다.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기호들과 소리들이 의미를 암시하고 전달하도록 조합되어야 한다. 일상어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구성하는 것 : 구 혹은 문   각각의 시는 언어와 언어의 세포인 구와 같이 복합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성격을 갖는다. 모든 시는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총체성이다. 시의 세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핵 : 구 운문적 구를 구성하며 언어를 만드는 단위 : 리듬   시인과 리듬 단어가 갖는 마법적인 힘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상응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집합   사유, 구 역시 리듬, 부름, 울림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우리는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대화 : 함의 이상의 어떤 것. 화음   언어는 인간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 처음에 말들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 (리듬 = 자석) 시적 창조는 유혹의 동인으로서 리듬의 자연적 흐름을 이용한다   시인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활동   예 : 말라르메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의 긴장은 그 자신에게서만 수행된다. 그의 선명성은 자신을 태워버림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법적 복제 - 조화로운 우주로 인식되는 단 하나의 작품- 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시도와 특히 그러한 언어를 연극의 장으로, 인간과의 대화로 변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이렇게 지배적인 리듬의 기능은 시를 다른 모든 문학적 형태들로부터 구별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 타격과 휴지의 연속은 어떠한 지향성, 즉 방향과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낸다.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램을 떠받치고 있다. 리듬은 우리 안에 어떤 감정의 상태를 유발시키는데, 그 감정은 ‘어떤 것’이 돌출될 때에만 비로소 잠잠해질 수 있다. 리듬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그 어떤 것이 무언인지 모를지라도, 우리는 리듬이 어떤 것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느낀다. 리듬 : 방향성, 느낌, 원초적 시간   리듬이 우리 앞에 전개될 때, 시간과 더불어 우리가 지나간다. ‘……를 향하여 가는 것’ 그곳은 우리가 무엇인지 드러날 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는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인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쫓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 -기념하기 위한 것, 신화를 재생산하기 위한 것 -우주적 운율의 닮은 꼴, 인간이 원했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 힘 -제의   운문에는 이미 구와 구의 가능한 의미화 작용이 잠재태로 있다. 장중한 리듬이 있는가 하면 경쾌한 리듬도 있고, 춤추는 리듬이 있는가하면 장엄한 리듬도 있고, 희열에 찬 리듬이 있는가 하면 슬픔에 찬 리듬도 있는 것. 인간과 리듬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리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역사 자체가 리듬이다. 각각의 문명의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예) 중국인- 음과 양 / 아즈텍인 - 사박자 리듬 / 히브리인 - 이원적 리듬 / 그리스인 -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 / 서구의 근대 문명 - 삼박자 리듬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리듬은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   리듬을 동질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순수한 측량으로 환원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리듬을 추상화하고 합리적인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   리듬의 기능 리듬의 반복에 의하여 신화는 되돌아온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 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하는 것이다”(원초적인 시간을돌아오게 하는 것) 시에서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한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이야기 속의 시간은 연속성을 단념한다.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 재상되는, 재현되는 과거   시간의 재현 방법 1. 시적 창조의 순간 2.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이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은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이다. 이러한 구들이 우리가 운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의 기능은 시간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모방적 재생산이라는 말을 시인이 원형을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그런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적 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 자신을 현재화하는 것 시구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시간 : 리듬, 근원적 시간, 영원히 재창조 되는 것,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죽고 또 다시 새로 태어나는 것     운문과 산문      산문과 시를 구분하는 방법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모든 언어적 표현은 리듬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 리듬이 없이는 시가 될 수 없으며, 리듬만으로는 산문이 될 수 없다. 리듬은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인 반면, 산문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산문 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   시 : 인간 표현의 자연스러운 형태 산문 : 비판과 분석의 도구.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   산문의 진척도는 사유가 말을 정복한 정도로 가늠된다.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에 대항한 영원한 싸움을 통해 성장 산문의 가장 완벽한 형태 : 담론, 예증   시는 닫혀진 질서,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 산문 : 사열, 개념들과 사건들에 대한 사실적 이론, 선,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산문의 원형- 담론과 이야기, 사색과 역사 시 : 원형 혹은 구형으로 존재, 자기 자신에게 닫혀있는 어떤 것, 자족적인 우주, 그 안에서 종말은 되돌아오고 반복되고 재창조된다.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리듬   운율vs리듬 운율과 리듬은 동일하지 않다 리듬 : 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이미지이며 의미, 리듬 이미지 그리고 의미는 분리 불가분의 조밀한 단위들인 시구와 시행에 동시에 주어져 있다, 독자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질이고 구체적인 내용 운율 : 이미지와는 별개로 추상적인 음격, 각각의 시행에 필요한 음절과 강세, 의미가 빠진 음격   운율과 리듬의 구별은 바르게 운을 맞춘 많은 수의 작품들을 시라고 부를 수 없게 한다. 문학 안내서는 타성에 젖어 운율이 맞는 작품만을 시로 취급한다. 구는 개념적 질서 혹은 이야기에 복종하여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와 리듬의 법칙에 이끌린다. 거기에는 시의 확실한 표징인 이미지와 강세, 그리고 리듬의 간만이 있다. 자유시는 리듬의 통일성이다.   리듬이 언어 자체와 혼동되는 반면, 운율은 역사적이다. 근대 언어에서 운율은 음수율, 즉 강세와 휴지에 의해서 끊어졌다 이어지는 지속으로 이루어진다. 음수율적 음격은 추상성의 원리, 수사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반성을 암시한다.   서구 근대 언어들에서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성과 추상적 사유의 강제성 사이의 투쟁은 운율의 이중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예) 프랑스와 영국의 근대시의 발전 예) 스페인 스페인어권 근대시는 산문과 운문, 리듬과 운율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리듬과 이미지는 분리 불가능하다. 시행, 즉 리듬을 갖는 구가 또한 의미를 갖는 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단지 이미지만이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의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 모든 언어적 형태, 시인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 각각의 이미지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 이미지는 인간 조건의 표식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학적 법칙과 시의 차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을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지 ‘~이 될 수 있다’가 아니다   이미지를 이해하는 틀 시를 읽는 해석의 틀1 변증법 시를 읽는 해석의 틀2 뤼파스코 : 상보적 모순의 원리 But. 이는 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는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도 선언한다 각각의 용어가 갖는 특성을 환원시키는 것도 아니고 변형시키는 것도 아닌 이러한 화해는 아직껏 서양의 사유가 뛰어넘지도, 뚫고 나가지도 못하는 벽이다   찬도가야 우파니샤드 : “네가 바로 저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은 상대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이만, 베타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사이에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 과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 우리의 모든 활동 :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의미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언어로 되어 있으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때문이다. 장자 :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언어와 이미지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은 거두어 고양시킨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이미지의 의미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 창조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가치가 있다 시인은 이미지들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언인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시와 이미지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시심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   이미지의 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러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 →동일한 과정이 목격 ~실재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그 다양성이 최종적인 통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에서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름과 이름붙여진 것은 같은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그 자체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고 현실을, 문자 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 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것)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그 자신이며 타자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 시는 ‘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1부 시편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적계시   피안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 - 원초적인 순간의 재창조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의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부재에 대한 증거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   피할 수 없는 두가지 문제 1.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 2.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 종교와의 교전 :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   ‘신성한 것’에 대한 연구사 의식, 제의의 주체 → 원시인, 정신병자(우리와 다른 사람) ->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 → 사회제도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 제의, 신화, 축제, 전설 - ‘물질화’ 대상화 사물화 ->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 신성함 :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   신적인 것의 경험 :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포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   치명적 도약 성 -터부- 속 성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속의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 세계로 직접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치명적 도약’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하는 것 피안에 이름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것 예) 스페인 희곡 티르소 데 몰리나, 본성의 급격한 변화, 순간적인 전의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 폐기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 이중적 감정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 공간은 더 이상 연장이 아니라 질 어제는 오늘,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초자연적인 것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다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 - 연극 공연 중의 배우,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역시 재연 - 산은 용왕의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이중적 성격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낯설음 :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 일상 속의 자신,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 - 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 - 은 평범한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타자성의 느낌 루돌프 오토, 타자의 출현은 -타자성의 느낌까지도- 일종의 ‘가공스러운 신비, 우리를 전율케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 가공스러움 1. 성스러운 공포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 2. 현존 혹은 출현의 위험 : ‘무시무시한 위엄’ 3. 빛나는 에너지 :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 2,3은 종교적 신성의 속성,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 ‘신비’는 바로 다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 망연자실 - 무서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 현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   무서움을 근접할 수 없는 충만한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삶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모든 것은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이다”는 말과 동격이다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 번째 움직임의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는 사실 이 물러섬에 이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타자’는 나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엣 정점에 달한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사랑 : 우리는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신성의 경험 같은 연원에서 흘러 나온 현상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일 뿐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은 이룬다.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시적 계시       종교와 시 종교와 시 :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 본성을 바꾸는 것/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 종교적 언어-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신성 신성을 초자연적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신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 오토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 신성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함이 다른 모든 영역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인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간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 경험들을 서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경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 신성한 공포 -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 자아의 왜소화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 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 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을 뿐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우리들의 부족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듦. 죽음을 죽임으로써, 종교는 삶도 죽이게 된다.   시 종교처럼 인간의 원초적 상황,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   영감은 불모의 상태 다음에 온다 시적인 말은 가뭄의 시기를 거쳐 움튼다 시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시 언어는 이 땅 위의 삶을 긍정한다. 시편 개개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시적 행위,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리듬이며 끊임없이 솟아나고 소생하는 시간성 리듬이면서 또한 대립되는 것들을, 삶과 죽음을 한마디로 껴안는 이미지 실존 그 자체처럼, 한껏 고양된 순간에조차도 그 안에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삶처럼, 시간의 흐름인 시 언어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한다.   솟구쳐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 시의 단어가 갖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 (시적 행위의 의미)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결핍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 인간은 본래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생명을 가진 것은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키니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은 긍정적이다.   삶과 죽음, 존재 혹은 무는 별개의 실체나 사물이 아니라. 부정과 긍정, 결핍과 충만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아니 바로 우리다. 존재는 비존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를 암시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관조하자마자, 자신이 의미 없는 사물들과 대상들의 총체 속에 들어 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사물들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란 바로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우리 자신이 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게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는 존재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것은 삶 속의 죽음을 끼워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음 죽음과 삶을 재통합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를 통해서 무로 다가갈 수 있으며, 무를 통하여 존재로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부정의 근거’이면서, 또한 그러한 부정의 초월이기도 하다.   인간의 하찮음의 드러남은 존재의 드러남으로 변한다. 죽음과 삶, 우리는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   사랑~ 사랑 혹은 사랑의 기쁨은 존재의 드러냄이다. 사랑은 존재와 무의 동시적 드러냄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창조다. 그때 창조되어지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할 때 우리를 소멸시키며, 소멸시킬 때 창조한다   우리를 존재의 창조로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무에 던져진 인간은 무에 맞서서 자신을 창조한다   시적 경험 :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 : 우리 자신의 창조로 귀결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 (존재 : 만들어지는 것) 인간의 원초적인 조건은 가능성 인간의 자유 : 가능성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 -시인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창조해가는 인간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 또 다른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   결론 시의 말과 종교의 말은 역사를 통해 혼동되어왔다 종교적 계시(그것이 말인 한에 있어서) : 원초적 행동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 시 : 인간 조건의 계시. 이미지에 의한 인간의 창조. 시적 언어는 인간의 역설적인 조건 (타자성)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실현시킨다. 인간에게 존립 근거를 주는 것은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시적 언어다.   영감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 :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됨   시는 어떻게 씌여지는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 : 악마, 뮤즈, 영, 정령 :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   시인은 그저 영매로서 성, 일기,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개념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 경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 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인간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현대시의 역사 :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 그는 듣는 귀,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 시인의 꿈은 좀 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   말 :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함 시 쓰기 : 말로써 창조하는 것, 시를 창작하는 것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 시는 하나의 가능성.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 -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치 않았던 것-를 창조하는 것   시가 씌여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것-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 - 근대의 산물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 시인들의 불쾌함 -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에서 그 순간을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초현실주의 : 주체와 현상(객체)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 객체에 대해 공격했지만 객체를 녹였던 그 산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도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상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됨.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 시인의 사명 -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됨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하였다 단호한 의자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바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 영감 → 상상 → 주체와 객체 해체. 우리 자신 해체, 모순 제거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 → 세계관의 파괴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임을 고발하기 때문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았다   인간과 영감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말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 - 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 - 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영감 :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 사실 영감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인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인간은 세상을 자화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재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서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2부 시적 계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의 력사   순간의 성화       시편이란 다른 경험으로 환원 불가능한 시적 행위가 어떻게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지   시 작품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과 다른 어떤 것, 즉 그것 없이는 시편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어떤 것에 의지한다 시편 = 시 + α α = 시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순수 시편 : 시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만을 의미하기 위해서, 말이 특정한 의미를 갖거나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한 지시체이기를 포기하는 것. 말의 소멸을 요구. →말로 씌여질 수도 없고, 사실상 말해질 수도 없는 것   시편 : 말을 초월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말에 의존한다 말로 씌어진 시편은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에 근거를 제공하고 또한 역으로 시편이 근거를 제공하는 공동체와 역사가 없다면 시편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시인의 말 : 말이라는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의 것이며 타인의 것 : 역사적, 민중에 속하는 것이며 그 민중이 말을 사용하는 특정 시기에 속하는 것 : 역사적 시점의 말이자 모든 역사적 시점 이전의 말, 태초의 말   시편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언어 : 역사 역사는 시적인 말이 육화하는 장소   시편은 원초적 경험과 그 뒤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의 중재 시편은 특별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선을 긋는다 순간은 시에 의해서 성화되어 있다 - 시간은 살아 있고,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가득 찬 순간. 동시에 다른 순간에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자신의 빛으로 새로운 순간들, 새로운 경험들을 비추는 것   역사가 없이는 시편은 태어나거나 육화될 수 없다. 그리고 시편이 없다면 역사 또한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기원도 시작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적 1. 사회적 생산물로서 2. 역사적인 것을 뛰어넘는 창조물로서 ~ 시편이 다시 역사 속에서 육화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 ~ 잠재적이며 영원히 현재인 시간, 한정된 바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현재화됨으로써만 실현되는 시간 ~ 원형적 시간   시편의 이중성 시편이 갖는 다의성은 시편의 이원적 본성의 결화 갈등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내부에 존재 시적 작용의 이중 운동에 기인 시편은 역사적 시간을 원형적 시간으로 변화시키며, 그러한 원형을 다시 특정한 역사적 현재로 육화 이중적 운동 : 본래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존재 방법 시가 취하는 역사적 방식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자신이 부정하는 시간과 연속성을 다시 긍정하기 때문   이미지는 결코 ‘이것 혹은 저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말한다. 심지어 ‘이것이 저것’이라고 말한다.   시와 인간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순간을 순간으로 만들며, 시간을 시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유일하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순간, 그 시간과 하나가 되는 인간   자신의 시간적 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 속에 더 완벽하게 함몰 유일하며 한 번 뿐인 순간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에 기원을 제공 인간의 조건은 인간을 타자가 되도록 이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시적 경험은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 - 인간의 본질 시적 기능을 특징짓는 것 : 언표 - 모든 언표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무언가 -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   시인이 성화시키는 것 : 언제나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도,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으며 혹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다 모든 사건들, 느낌들, 경험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서 말할 때, 시인은 우리에게 다른 것, 즉 만들어가고 있는 것, 우리 앞과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에게 창조하고 이름 부르는 행위인 시 자체에 대해 말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를 반복하고 재창조하도록 한다. 그가 이름 부른 것을 다시 이름 부르게 하여 그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게 한다 시인은 시로부터 시를 만들어낸다   시인이 쓴 시와 독자가 읽는 시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조의 행위 자체는 동일하다. 독자는 순간을 재창조하며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시는 새로운 독자와의 만남으로 늘 완전해지려고 하는, 언제나 미완성의 작품이다.   시적 계시 - 시인이 드러내는 것 - 본래의 우리로 복귀하는 것 -결코 추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의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 -인간 조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드러나거나 혹은 밝혀지는 경험   시적 경험 - 자유 그 자체, 무언가에 다다르기 위해 펼쳐지며, 그렇게 순간적으로 인간을 실현시킨다 영웅적 세계       그리스 서사시 그리스 영웅들을 다른 영웅들과 구별짓는 것 -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 호메로스의 주제 : 영웅들의 운명 ~신들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고, 우주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종교적 주제가된다 그리스 서사시의 또 다른 특징 : 종교성 (도그마화된 종교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두 가지 종교 1. 신들에 대한 종교 - 자연신 숭배, 태양신 제우스 2. 조상들에 대한 종교 -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뛰어난 인물 숭배, 아가멤논   에게 해 문명 분열 영웅들은 이제 무덤 속에 있는 사자들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로 변함 신화는 종교적 찬양과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영웅들을 신화적 대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서사시의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덤 속의 영혼과 인간을 이어주던 신성한 끈이 끊어지면서, 영웅-신은 인간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화는 올림푸스의 신들도 감염시켜 그들 역시 인간화했다.   호메로스 : 끝이며 시작 끝-올림푸스 신들을 섬기는 종교의 승리와 조상 숭배의 패배로 완결된 기나긴 종교적 진화의 끝 시작-호메로스의 시들이 종교와 삶의 이상과 윤리의 바탕을 제공한 귀족적이고 기사도적인 새로운 사회의 시작   영웅 : 두 개의 세계-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가 합류하며 투쟁하는 장소 : 탄생에서부터 영웅은 독립적인 두 개의 힘이 결합하는 연결 고리의 이미지 영웅의 본질은 두 세계의 투쟁이다. 모든 비극은 영웅의 서사적 개념 속에 고동치고 있다.   영웅이 행동하는 세계에 대한 관념 형성 제거 “그리스 이전에는 몰랐고, 그리스에 와서 그들의 정신적 특징이 알아낸 것은사물의 내재적 합법성에 대한 의식이다.” 우주적 법칙, 충동, 리듬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역동적 총체의 개념 인간을 그러한 총체성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부분으로 보는 관념 ~인간이 갖는 책임 관념 모순적 이러한 모순 내에서 영웅적인 것의 뿌리와 나아가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발견   그리스 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반적인 운행 속에 삽입시키며, 여기에서 영웅됨의 갈등과 모범적인 가치가 비롯됨   영웅들과 신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우주. 살아있는 총체, 그것의 운동은 정의, 질서, 운명이라 불림 탄생과 죽음은 이러한 생생한 조호의 협주곡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극단적 음표이며,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나타남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가 합류하는 장소가 인간이기 때문   이러한 개념으로 총체적 자연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건강도 우주의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영웅의 광기나 병약함은 우주 전체로 전염되며, 하늘과 땅을 위태롭게 한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 존재를 생성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우주적 투쟁이 전개되는 장소로 여긴다.   그리스 비극 비극과 희극은 그리스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며, 자신을 세운 토대와 나누는 대화   아이스킬로스 :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의지가 참여하는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식 : 고통, 불행, 재난의 본래적 의미는 절제를 초과하려는, 다시 말해서 각자가 위치하는 영역의 극한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 너머로 감으로써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려고 하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형벌 : “모두에게 똑같이 태양을 비추어주는 하늘이여! 그대는 내가 이토록 부당하게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구나.” : 아무도 그를 고통에서 끌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비극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 : 비극적 행위가 운명이 갖는 우월한 힘뿐만 아니라 우주적 정의를 완수함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 참여 또한 내포하고 있다. : 비극이 가르치는 것은 무의식적인 체념이 아니라, 운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일이다. : 인간이란 신의 손아귀에 든 ‘도구’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거듭 확신했다.   운명과 자유라는 모순되면서 상보적인 두 개의 단어 덕분에, 인간은 인간일 수 있고 세계는 세계일 수 있다. 비극성은 이가적 대립물을 동등하게 보며 절대적으로 긍정하는데서 연유한다. 가혹한 운명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우리에게 만유적 질서의 빛을 던져주는 유일한 것은 운명에 대한 의식이다. 사유와 운명은 서로 대립되며 상보적인 단어이다. 그것의 신비는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 우주적 합법성의 신성함과 정의로움에 관해 감히 터놓고 질문한 첫 번째 사람 : 존재의 영역을 버리고 도덕적 비판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 과오 - 주관적, 심리적인 개념   운명의 정의로움을 부정하자마자, 고통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혼란이 찾아온다. 운명의 침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자신 안으로 숨거나 혹은 이상적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 개인적 신비주의, 정치적 유토피아 - 객관적 적법성을 상실한 세계가 나갈 수 있는 출구   우리는 벌을 받고 속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백하면서 죄인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인간의 가장 뛰어난 시적 창조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갈등에서 충만되고 심오하게 나타나는 ‘다른 목소리’-기본적인 인간 조건의 드러남-이다. 비극의 위대성 : 그러한 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가적 대립물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육화시켰다 비극적 영웅들은 의식을 버리지 않으며 그의 존재를 조건짓는 궁긍적인 이유에 대해 끊없이 질문한다 그리스 비극은 존재의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운명은 신성한가? 인간은 죄인인가? 정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 사회를 지탱하는 가설 자체에 대한 것. 폴리스를 세운 모든 가치 체계를 의문시하는 것   모든 행위의 앞면과 뒷면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기 위해서, 비극 시인들은 가장 성스러운 행동과 가장 지독한 신성모독까지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비극은 신선모독에 대한 광범위한 사색이며 애매한 가치 - 구원하고 벌하며, 벌하고 구원하는-에 대한 검토이다.   운명이 스스로를 완수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자유 행위를 요구한다 자유는 운명이 갖는 여러 얼굴 중의 하나이기 때문 비극은 우주와 인간의 이미지이다. 모든 비극적 행동, 모든 갈등은 한 가지로 환원 : 자유 ~필연성의 조건 그리스인에게 삶은 자유와 운명이 얽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엮어내는 무훈 매듭 : 인간 -인간 안에는 인간의 규칙, 신의 규칙 그리고 양자를 다스리는 불문율이 서로 얽혀 있다   유한하며, 늙고, 병들고, 터무니없는 열정과 심정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인 인간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운명에 의해 선택된 주체이다. 그러한 선택은 인간의 수락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의 범죄는 우주를 진동시키며, 그의 행위는 삶의 과정을 회복시킨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스페인 연극 서사적 전통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1. 로망스 시와 중세 전설의 보물 2.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인 기독교적 서사시 중세 스페인의 정치적 개념 : 만인지상 모든 사람은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며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 이중의 충성 양자에 대한 충성이 병립될 수 없을 때, 드라마가 생겨난다. →그리스 영웅들처럼 인간 조건의 신비와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용기가 빠져 있다 스페인 극작가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이미 만들어진 대답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희극 사건의 얽힘이거나 혹은 관습에 대한 비판일 뿐 진정한 희극은 일종의 발레 시 -인위적 유희로서 연극을 빛나게 하는 것 : 속도감 있는 행동, 상황의 얽힘, 우아한 대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은총이라는 중심 주제를 독창적이고 보편적으로 다루는 작품 국민 연극의 개념과 자유 의지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의 옹호와 계몽을 융합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진실로 어울리는 유일한 서양 연극 중요한 주제 : 영혼의 운명 문제에 대한 해답 - 스페인 극작가들은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 기독교 교리를 이용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들에게 자유는 신의 은총이다. 양립 불가능한 이가적 대비극 사이에서 움직인다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진정한 자유는 우리를 신에게 복속시키면서 실현된다 스페인 영웅들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반대로, 운명을 긍정하는 것은 인간이 비극적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 : 신과 악마라는 두 사람의 배우가 등장하는 무대 숙명과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 - 신학적 미로, 미로의 입구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은 무이거나 존재 신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인생은 꿈이고 인간은 그 꿈에 나타나는 환영일 뿐이다.   영국 연극 스페인 연극에서 신과 자유 의지가 차지하는 자리를, 그리스 연극에서는 자유와 운명이 차지하며, 영국 연극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차지한다. 그 본성의 신성한 성질은 오래된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을 저지르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시인 : 이제 막 인간을 발견 열정의 조수는 무대에서 신을 쫓아낸다. 인간의 본성은 이중적인 신성이다.   셰익스피어와 웹스터의 영웅들은 근본적으로 홀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규는 허공에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늘에는 더 이상 신과 운명이 살지 않는다. 신들이 사라져버리자 우주는 일관성을 상실하고 우연이 급습한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는 우연이 필연을 대신한다. 동시에 결백과 죄는 무가치한 말로 변한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연극의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유치함이 존재한다. 유치하고 야만적인. 잔인하건 부드럽건, 순결하건 부정하건, 용감하건 비겁하건 간에, 그들은 한 사발의 피와 한 줌의 해골이며, 신들린 본성의 갈망을 순간적으로 달래야하는 처지에 처한 신경질적인 존재들이다. 기운이 잦아진 호랑이(영웅)은 연극에서 퇴장하고, 무대 위에는 피투성이의 인간들만 남았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우리는 혼돈의 복귀를 목격한다. 사물과 존재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범죄가 덕이 될 수 있으며, 결백은 죄가 될 수 있다. 적법성의 상실은 세계를 동요하게 만든다. 현실은 꿈이며 악몽이다. 우리는 또다시 환영 사이를 걷는다.   유럽이 영국의 시인들에게 전해준 철학은 총괄적인 교리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철학이었다 유동적인 것, 이본, 정정,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해결책을 받아들인 것   프랑스 연극 프랑스 연극은 그리스 비극을 미학적 모델로 선택 라신의 인간 - 일종의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모습 - 인간을 더 순수하고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서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상위와 하위의 세계들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신비로운 차원도 제거해버렸다. 라신의 연극 :성격과 상황의 연극 라신의 등장 인물들은, 우주와 신성의 개념이 사라져버리고 구체적인 개별성조차 사라져버린 텅 비고 순수한 정확 속에서 움직인다. 라신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투명한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그 투명함은 애매하고 어두운 영역, 진정한 어둠의 입-그곳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과 합일하는 저 너머로 들어가는 문-을 녹여버린다.   독일 연극 괴테의 위대한 파우스트적 신화는 자신의 창조물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쳐보는 서양 정신-모든 것은 거울이다-의 끝없는 독백 괴테는 평생 동안 그러한 주관주의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가 보여준 ‘어머니들’에 대한 숭배-고대 신비의 반향-는 총체적 자연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 괴테 이후의 극작가들은 주관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셰익스피어도, 라신도, 칼데론도 세계를 의문시하지는 못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처단하고 그들의 연극은 세계에 대한 고소장이다. 시인과 역사의 관계는 급격하게 변화한다.   근대 연극 모든 근대 연극은 세계를 부정하며 거울의 장난으로 세계를 지워버린다.   세르반테스는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고, 셰익스피어는 연극 속에서 연극에 대한 비판을 행하며,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데,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자신의 얼굴이다.   근대의 영웅들은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모호하다.   근대에 출현한 유머는 겉모습을 해체시키고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만든다. 과거의 시는 프로메테우스 혹은 세히스문도, 안드로마케 혹은 로미오라고 칭하는 영웅들을 신성화했다. 근대 소설은 그 영웅들을 시험대에 올리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만큼 그들을 부정한다. 소설의 모호성       근대 근대 : 인간이라는 가치 위에 세계를 세우고자 했던 것 -근대적 우주를 떠받치는 초석은 인간의 의식 예 1. 맑스 역사란 소외된 인간이 역사의 최종적 단계에서 자기 자신, 즉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는 기나긴 과정 의식이 사회적 실존을 결정 예 2. 근대희 과학 개념 자연은 자극과 반응의 고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망 사실의 조각들을 선택해서 토막내고, 단지 관찰에 적합한 조건이 조성되었을 때만 실험 객관적 현실은 의식의 영상(이미지)이며 또한 의식의 가장 완벽한 생산물   우주와 자기 자신 앞에서 취하는 근대인의 태도는 과거의 인간들이 취했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인간은 자시의 지상의 거주지를 재구성한다는 조건으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고아로남게 되었다. -생을 정당화하고 역사에 근거를 제공해왔던 개념들의 소멸 -신성함, 신성 혹은 초월 등으로 알려진 복합적인 믿음의 체계가 붕괴 역사적인 변화, 혁명적인 변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치 체계가 다른 가치 체계로 대체되는 것   모든 혁명은 세속화 작업인 동시에 신성화 작업 혁명은 과거의 이미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에 세속화 운동이다. 하지만 이 몰락은 항상 그때까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것의 신성화를 동반한다.   근대의 혁명을 특징짓는 차별성은 자신이 서 있는 토대로서의 원리를 신성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경에 뒤이어 새로운 원리의 신성화가 뒤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의 진공 상태가 발생했다. 진공 상태 : 재가 정신, 중립성 “저기 신들이 죽은 곳에서, 유령들이 탄생한다.” 근대의 유령은 추상적이고 무자비하다. -국가 -기계에 대한 숭배 기술테크닉은 근대인들에게 아무런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인이 자연과 혹은 다른 인간들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오히려 닫아버린다.   부르주아지 혁명 인간의 권리 - 사유 재산과 자유 무역 자유 - 재화의 종속물 민중의 통치권과 인간의 평등 - 제국주의적 침략   근대의 혁명을 과거의 혁명과 구분짓는 것은 딱히 근대 혁명에서 원천적인 이상이 부패하고 자유의 원칙들이 새로운 억압의 기구로 변질되는 것뿐 아니라, 바로 ‘인간’을사회의 기초로 성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이성적 회의.   부르주아지가 사회를 통치하는 슬로건은 분명치 않다. 그 동안의 것들은 마치 요술사처럼 손을 재빨리 바꿔온 결과에 불과하다. 군주 체제와 귀족 사회를 몰락시킬 때 사용한 비판을 이제는 자신의 몫을 차지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왕위 찬탈자일 뿐이다. 그 어느것에 의해서도 아물지 않는 비밀스런 상처처럼, 근대 사회는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건설하고 그리하여 그 건설을 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시 부정하고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칙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비판은 근대 사회의 양식이며 동시에 독이다.   근대 사회의 서사시 시의 역사적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시급한 사명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순간을 원형으로 승화하거나 변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언어는 한 민족의 기초가 된다. 부르크하르트 “소설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서사시”   소설의 독특한 성격 언어 : 소설은 산문인가? 소설가는 논증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재창조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순간 혹은 일련의 순간들을 되살려서 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 그는 언어의 리듬이 갖는 힘과 이미지의 형상력에 의지 그의 작품 전체 = 하나의 이미지 시와 역사에, 이미지와 지라학에, 신화에 심리학에 동시에 이웃하고 있다 리듬이면서 의식의 실험이며, 비판이면서 이미지 →이중적 산문과 시, 개념과 신화 사이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에서 기인 →근원적인 비순수성   돈 키호테의 이성과 광기, 라스티냐크의 허영과 사랑, 베니그나의 탐욕과 관대는 모두 하나의 천을 짜고 있다.   근대 소설의 많은 인물들은 염세주의자이고, 다른 인물들은 차라리 반항아이고 반사회적 인간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세계와 공개적이거나 비밀리에 투쟁하고 있다. 그 소설들은, 자기 자신과 투쟁하고 잇는 사회의 서사시이다.   소설 속의 영웅이 자신에 대한 품는 의심은 그대로 그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의심으로 연결된다. 소설의 사회주의는 현실의 비판이며, 현실은 돈 키호테의 꿈과 환상처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의심해보기도 한다. 영웅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그 인물들처럼 그렇게 모호하기만 하다.   유머 덕분에, 세르반테스는 근대 사회의 호메로스가 되었다. 헤겔은 아이러니가 (비판적)주관성을 객관성의 체계에 삽입시킬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세르반테스의 가장 엉뚱한 인물조차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의식 →비판 비판 의식 앞에서 현실은, 비록 모든 것을 양도하지는 않지만, 주저한다. 유머는 그것이 가서 닿는 것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현실과 그 가치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이며, 그것들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일종의 임시적인 휴지이다.   아이러니와 유머는 근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비극적 갈등에 견줄 만한 것이다. 아이러니적 결합은 실질적인 결말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잠정적인 통합니다. 소설의 갈등은 비극의 예술을 탄생시킬 수 없다.   비판 위에 건설된 사회의 서사시인 소설은 그 사회 자체에 대한 암묵적인 심판이다. 현실이 현실에 대해 던진 질문이다. 문제 제기 자체에서 모든 해답을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가능한 답변을 기대할 수 없는 그 질문은 모든 사회 질서를 부식시키는 염산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에게 거슬러 돌아와 자신을 삼중으로 부정하는 서사시이다. 1. 산문에 의해 부식된 시적 언어 2. 유머와 심리 분석으로 영웅과 세계를 모호하게 창조 3. 소설의 언어가 성화하고 고양하려는 것이 분석과 비난의 대상으로 변하는 노래   프랑스 - 소설의 요람 불어는 현존하는 언어 중 가장 분석적인 언어, 근대 정신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에서 최고의 적확성과 명료성의 꽃을 피웠다. 그 어떤 나라와 언어도 라클로에서 프루스트에 이르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끊임없이 계승해온 프랑스 소설의 역사에 견줄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는 그 일련의 창작물들을 통해 일면 스스로를 성화하고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검증했다. 스스로를 노래하면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형벌을 내렸다.   근대 사회의 위기 :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원칙의 위기 소설 속에서 시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나타남 세르반테스에 의해 시작된 운동은 지금은 역방향으로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에게서 반복된다. 20세기 초반부터 소설은 다시 시로 돌아가고자 한다. 프루스트 : 느린 리듬, 마치 시적 영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억에 의해 유발된 이미지 조이스 : 논설적 사상의 맥락을 끊기 위하여 단어로 하여금 본래의 독자성을 회복 리듬의 밀물이 넘침 영웅적 성향의 재정복이 시도   근대 사회의 탄생과 더불어 내재되어왔던 산문과 시 사이의, 성화와 분석 사이의, 노래와 비판 사이의 투쟁은 시의 승리로 귀결지어져가고 있다.   이 시대의 연극과 소설은 한 경향의 탄생이 아니라 그 장례식을 노래한다. 즉, 이 시대의 종말과, 이 시대를 낳은 형식들의 종말을 노래한다. 시- 인간 조건의 계시.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의 성화 소설과 근대 연극 - 그 시대를 부정할 때조차도, 그 시대에 의지한다. 과거의 신성들은 죽고 객관적 현실은 의식에 의해 부정되었을 때, 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제외하고는 노래를 불러줄 아무런 대상도 가질 수 없었다. 시는 이제 말을 통해 육화되는 게 아니라, 삶 자체 속에서 육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언어는 역사를 성화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가 되고 삶이 될 것이다. 육화되지 못하는 언어       혁명과 종교 사이의 시 소설, 연극 : 비판적 정신과 시적 정신 사이에 상호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 서정시 :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열정과 경험들. 사랑에 대한 찬양 - 선동을 유발, 근대적 세계에 대한 도전 사랑이란 분석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는 예외적인 것   ‘저주받은 시인들’ 동화되지 않는 것들을 추방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부르주아지는 의사, 변호사, 성직자, 시인 그리고 과학자를 보수를 받는 봉사자로 변화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시인들에게 금고 문을 닫아버렸다. 시인은 하인이나 어릿광대가 아니라, 천민 계급이고 허깨비이며 부랑자이다.   시의 글을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 자신의 계시 근대시 = 시에 대한 이론 콜리지 : 시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시편이 진실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문하기 위하여 시적 창조에 몰입한 맨 처음 시인 상상력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재능으로 여김 상상력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 “인간 의식의 가장 본래적 기능” “상상력은 존재의 형상이거나, 진실로 지금-여기의 유일한 지식이며, 다른 모든 과학은 상상력의 상징적 표현일 때만 실제적이다.” 원래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었던 상상력과 이성은 상징적 표상, 즉 신화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될 수 없는 자명함 속에서 하나가 된다. 상상력 - 원초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 - 모든 지각의 필수 조건 - 신화와 상징을 통하여 최상의 지식을 표현하는 기능   시와 철학은 신화로 완결된다. “종교는 인류의 시이다.” 시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나타나는 제의와 역사로 변화된 형태가 종교 시 - 스스로를 비판 정신의 경쟁적 원리라고, 또한 과거의 신성한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 선언 -종교의 진리가, 억압적인 강요와 가면적 은폐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으로 드러나서 숨쉴 수 있는 태초의 원리   노발리스 “종교는 실천적 시 바로 그것이다.” 원초적 언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시인의 임무는 교회와 국가라는 도그마가 성립되기 이전의 원초적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 “시 정신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다. 모든 민족의 종교는 시 정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는 본래 시 정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성은 종교보다도 더 어두운 감옥을 만들었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 즉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 본래적인 인식 기관은 감각도 아니고 추론도 아니다. 양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최종적 본질인 끝없는 욕망에 대립된다. “그 무엇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인간은 상상력이며 욕망이다. 상상력의 작용으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채우며, 그 자신이 무한한 존재로 변한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 인간의 진정한 역사는 이미지의 역사, 신화   독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시는 진보적 보편 철학인데 그것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시를 집합시켜서 시와 철학 그리고 수사학 사이에 의사 소통을 확립하는 데 있다. 또한 그것은 시와 산문, 영감과 비판, 자연적인 시와 인위적인 시를 혼융시켜야 하고, 시를 생기 있게 하고 사회화해야 하며, 삶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정신을 시화하며, 예술적 형태들을 본래의 다양한 본질로 충만하게 가득 채우고 아이러니를 통하여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근대시는 탄생에서부터 흐름에 거스르는 독자적인 과업이었다. 비판과 조약을 체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의지할 수도 없었다.   시는 가장 혁명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계시인데, 그 이유는 원초적인 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시와 종교가 갈라지게 된 근원은 시적 정신이 합리적 정신과 출동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그 결과는 유사하다. 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시인들을 추방했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던 지난 세기의 시적 운동이 보여주는 들쭉날쭉하고 은밀한 흐름의 일화 -매번 찬동은 단절로 끝났으며, 매번의 개종은 추문으로 끝났다.   근대시는 역사의 정면에서가 아니라 지하나 후면에서 은밀한 신비와 비밀스러운 제의로서 육화되었다.   근대 시인 역사의 하층부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근대 시인은 고독하다. 어떤 법도 근대 시인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도록 강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추방된 자이다. 근대 개인이 사회 속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은 그가 사실상 ‘가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는 상업적 재화의 교환 체계게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아니라면, 현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진정한 실존을 갖지 못한다. 시의 기화 현상 시인이 말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상품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적이 아니다) 시적 창조는 직업이나 노동 혹은 일정한 생산 활동이 아니다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근대시가 ‘실제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태초부터 시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한 부분을 말소시켜버리기로 근대 사회에서 사전에 결정되어졌기 때문이다. 브르통 “환상적인 것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환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근대 예술의 모든 과업은 그 잃어버린 절반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중적 시의 유행, 꿈과 섬망 상태에 의지하는 일, 우주의 열쇠로 아날로지를 채택하는 일,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려는 시도, 신화로의 복귀, 밤으로의 하강, 원시 예술에 대한 애정 ~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편력   자기 자신과 인간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은 고독의 극단까지 가서야 형벌이 멈추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변방에서만 ‘타자’가 출현하며 ‘전인간’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던져져, 모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린 채 빈손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고독한 인간이 바로 원초적 인간이며, 실제적 인간이고, 잃어버린 반쪽이다. 원초적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다.   시를 공동의 자산으로 만들어내려는 가장 절망적이고 총체적인 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에서 발생 →초현실주의 시화를 위한 첫걸음인 객관적 현실의 파괴는 객체에 주체를 삽입하는 것으로 달성 낭만주의의 ‘아이러니’와 초현실주의의 ‘유머’의 결합 중심 : 사랑과 여성   낭만주의 vs 초현실주의 낭만주의 :독일철학 :역사를 부정했고, 꿈으로 도피 :과거의 봉건주의와 과격 혁명 세력의 자코뱅주의 정신의 공통된 무능을 고발     초현실주의 :아폴리네르의 시, 현대 예술, 프로이트, 맑스의 분위기 :역사 의식 명확 :당이 언어를 행동의 필연성으로 종속시킬 경우에조차도 당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허무주의와 관료주 . 의적 볼셰비키즘을 고발   ~ 양자는 기하학적 정신이 보여주는 정신적 불모에 대항한 항의이며, 당대에서 혁명을 겪었지만 그 혁명이 결국 무단적이거나 관료주의적인 독재로 변화되는 것을목격하고 말았으며, 마지막으로 둘 다 이성과 종교를 초월하여 새로운 신성을 성립시키려는 시도였다.   영감 : 무의식의 표명 시편을 집단적으로 창조하려는 시도 - 시적 창조의 사회화를 암시 영감은 공동의 자산이다. 이미지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적 천재성에서 모든 사람은 엇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시를 쓸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시가 될 수 있다. 시 속에 산다는 것은 시 작품이 되는 것이며,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영감의 사회화는 시 작품을 삶 속에 용해되어 사라지게 한다. 초현실주의가 의도하는 것은 시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 있는 시작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과 시, 시 작품과 독자, 너와 나라는 이율 배반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 : 자동 기술법 나는 너이고, 이것은 저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은 인식이 멈추는 상태인데, 왜냐하면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되는 대상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분수이다. 어려움 1. 현대 세계에서 유효한 모든 개념들과 반대 방향으로 실현되는 행위-노력의 가치를 공격 2. 시적 자동 기술법이 요구하는 수동성은 과격한 결단을 암시- 개입하지 않으려는의지 →언제나 사회성을 띨 수 밖에 없는 언어와 개체적 인간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사물, 인간 그리고 언어 사이에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는 방법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면, 사물과 언어, 언어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것. 언어를 발생시키는 것은 바로 그 거리이다. 자동 기술법이 희망하는 상태는 언어가 아니라 침묵   역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느낌과 이미지들-특히 자유, 사랑, 시가 결합한 백열하는 삼각형-은 대부분 초현실주의의 창조이며 또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시인들의 창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초현실주의는 유래 없는 정신적 위기와 전쟁을 겪은 뒤, 20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조 그것이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와 그것의 이념들이 미래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명한 것은 현대시의 지배적인 특징이 여전히 고독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는 역사 속에 육화되지 않았고, 시적 경험은 예외적 상태이며, 시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시들, 그림들 그리고 소설들을 창조해내는 오래된 길뿐이다. 미래의 시가 진정으로 시가 되고자 한다면, 위대한 낭만주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3부 시의 역사 (요약)|작성자 옥토끼   에필로그   회전하는 기호들       이 책의 주제는 시에 대한 사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시에 대한 성찰의 시작과 끝에서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표가 아닐까?   시는 사회적 삶을 시화하려 하고, 사회는 시어를 사회화하려 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후엔, 우리의 위대한 시인들은 시의 부정을 통해 최상급의 시를 창조해왔다. 그들의 시는 시적 경험에 대한 비판이며, 언어와 의미에 대한 비판이며, 시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시적 언어는 언어의 부정을 먹고 자란다. 이렇게 원은 닫히고 만다.   시적 전통이 맑시즘 못지않게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움직임에 근거하여 사회를 아우르며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그것은 능동적 이성이다.   새로운 시인들이 직면할 상황들의 몇몇 모습 - 세계의 이미지를 상실하는 것 - 기술이라는 능동적 기호로 이루어진 보편적 어휘의 등장 - 의미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세계 속에 외롭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언어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현존을 부여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란 타인들을 찾는 것이며,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술은 자기 자신을 상상력과 부딪치고, 세계의 이미지의 부재에 직면해서 상상력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형상을 갖도록 한다. 그 형상이 시이다. 기술의 기호들처럼 미정형의 것 위에 세워져서, 그들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의미를 찾아 헤매는 시는 급박함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다. 그것은 아직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미를 찾아 편력하고, 그러한 편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호의 다발이다.   우리들의 시대는, 상상할 수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라는 것이 종말을 맞이한 시대이다. 더욱더 좁아지는 현재 속에 갇혀 우리는 자문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제로는,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물음에 확실히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일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의 가속화와 지구를 동질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기술의 보편화는, 마침내 어느 곳이든 똑같은 장소에서 광란하는 부동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시는 여기- 지금의 탐색이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존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 시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위로해주지 않고, 오히려 삶과 죽음이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구체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짝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너를 재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분산되어 있는 파편들 속에서 세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주사위 놀이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못하리』 ‘관념론적’ 시에 대한 처단 『지옥에서 보낸 한 철』‘유물론적’ 시에 대한 처단   창조의 중심을 이동시켜서 언어의 본래적 기능을 언어에게 되돌려주는 것 인간은 말에 봉사하게 되고, 시인은 언어의 봉사자가 되었다. 우리들의 세기는, 의심해보지 않았던 길을 통해, 르네상스 이후 부정되었거나 혹은 최소한 무시당해왔던 힘인 옛 영감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시대이다.   조이스. 아담(모든 인간), 영어(모든 언어) 그리고 책 자체와 작가는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인 말’이라는 순환적인 담론을 통해 흐르는 단지 하나의 목소리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창조적 행위가 채택하는 비판적 경향을 표현 관심사 1. 학문적인 차원에서 창작과정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시의 구절, 리듬, 이미지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조사해보는 것 2. 시적 차원. 개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곳까지 창작의 마당이 넓어졌다   시는 음악도 회화도 아니다. 시의 음악은 언어의 음악이다. 시의 이미지들은 선이나 색채가 아니라, 말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영상들이다. 공간도 글씨로 변한다. 여백은 기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글씨는 하나의 전체를 투사하지만, 어떤 결핍에 의지한다. 그것은 음악도 침묵도 아니지만, 양자 모두에게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모든 예술에 참여하지만 그러한 모든 예술적 동반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만 생명을 갖는 것이 시의 이중성이다.   변화하는 공간 위의 글, 공중이나 백지 위의 단어 그리고 축제인 시는 하나의 의미를 찾는 기호들의 총체, 자기 자신을 맴돌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상형 문자이다.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현실은 있지만 이미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느 부재 주위를 돌고 있고 그 부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의미는 무효화된다. 순환의 궤도에서 시는 깜박거리는 빛을 발한다. 그 깜박임이 뜻하는 바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너와 나의 순간적인 결합니다. 시는 너를 탐색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침묵의 목소리, 즉 자신을 육화할 단어를 찾는 죽얼거림을 감지한다. 시인은 시간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종이 위에 몇 개의 단어들이 모이거나 흩어진다. 그 형상은 하나의 예시, 금방이라도 드러나고자 하는 현현의 급박함이다.   리라는 인간을 성화해서 우주 속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홀은 인간을 그 자신 너머로 쏘아 보낸다. 모든 시적 창조는 역사성을 띠지만, 반면 모든 시는 (역사의) 직선성을 부정하고 영속하는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이다.   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저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이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시는 현존이 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에필로그 (요약)|작성자 옥토끼
306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댓글:  조회:220  추천:0  2018-07-25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1)        이미지라는 단어도 다른 말들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아폴로 신이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처럼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 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은 심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결과물들이 이미지가 갖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 즉 시이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라는 것을 밝혀둔다.      수사학은 이러한 표현들을 분류하여 비교, 은유, 말의 유희, 유사어,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을 가르는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들오 이루어진 각각의 시편--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묵의 음악"이라는 시적 구를 사용하여 겉으로 보기에 화해 불가능한 두 단어를 걸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이다. 가령, 안티고네라는 인물은 선험적 가치인  효와 사회적 가치인 인간 법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사랑과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매혹과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다. 세히스문도에게서는 불면과 꿈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이디수스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얽혀 있고........이처럼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서사적이거나 희극적 혹은 서정적이거나 간에, 하나의 구에 농축 되어 있거나 혹은 천 페이지에 걸쳐 풀어 헤쳐져 있거나 간에,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 과학적 법칙이 의도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논리적 환원 덕분에 개체적 대상들--가벼운 깃털과 무거운 돌--은 동질적인 단위로 변화된다.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돌 일 킬로그램은 깃털 일 킬로그램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돌과 깃털을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돌과 깃털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임수에 의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든다. 시에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 이것이 저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돌은 여전히 거칠고, 딱딱하고, 불투명하고, 태양처럼 누렇거나, 이끼에 덮여 초록빛을 띄거나 간에 어쨌든 돌, 무거운 돌이다. 그리고 깃털은 여전히 가벼운 깃털이다.이미지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을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 중에서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 이미지(1)|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   이러한 반대되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 이지,'~이 될 수 있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 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서 어떤 이들은 변증법적 논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결국, 많은 이미지들은 변증법적 과정의 세 시기에 부합된다. 즉, 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며, 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 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지들을 무한히 열거할 필요는 없다. 어느 때는 첫번째 용어가 두번째 용어를 삼켜버린다. 또 어느 때는 두번째가 첫번째를 중화한다. 혹은 세번째 용어는 산출되지 않고 두 요소가 환원 불가능하고 적대적인 상태로 마주서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유머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모순은 단지 현실이나 혹은 언어의 복구 불가능한 부조리한 특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쓰인다. 결국,많은 이미지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질서에 의거하여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과 반의 진짜 동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함이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돌과 깃털은 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 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어미지 정확히 말해 가장 높은 이미지에서는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이다. 즉,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저것이다. 돌은 돌이면서 깃털이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인 환원도 없고, 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다. 요약하면, 변증볍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며, 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모습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 특히 모순의 법칙(이것이 이것이지 저것이 될 수 없다) 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보인다. 정은 반과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양자는 새로운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데, 새로운 긍정은 양자를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세 단계들의 각각에는 모순의 원리가 지배한다.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여타의 학문들처럼, 논리학도 모든 체계가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질문, 즉 자신들의 근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버틀란트 러셀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과, 러셀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훗설의 연구가 의미하는 것도 역시 논리의 근거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논리적 체계들이 출현해다.  어떤 시인들은 뤼파스크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들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뤼파스코는 대립되는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 각각의 개념을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즉, A는 B와의  모순적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A에서 발생하는 하나하나의 변화는 겨로가적으로 B에게 상반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과 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3)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 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의 기법들이 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 아는 것을 감소하지만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정중동이며 만중허, 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우파니샤드는 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고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 즉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 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 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 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 혈액 그리고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 12궁에 해당한다. 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위얽힌 현란한 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 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 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 돌은 불타오르고 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 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 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음양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 체.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 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다. 충만함에 도달했는지, 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체험적 앎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는 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들은 자주  이러한 모순적인 말을 한다. 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길은 길이라 말하면 늘 그 러한 길이 아니고,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상징 논리 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케 하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림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   결국, 의미하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4)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 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 기독교와 달 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 면, 언어로 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 이란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되어 있으 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은 이미지, 말의 유희, 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 다른 경전 들도 마찬가지이다.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대문이다. 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 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 그 말은 말의 유희, 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 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즉 "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가 어떻게 말하는 지 보기 위해서는 언어를 살펴봐야 한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3) (4)|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5)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깃털은 가볍고 돌은 무겁다.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가벼운 것이며, 어두운 것 은 밝은 것에 비교해서 어두운 것이다.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수의 경우에 왼쪽에 쓰인 영은 오른쪽에 쓰인 영과 같지 않다. 숫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단지 기타의 의미화와 의사 소통 수단에 비해 가변성의  폭이 더 넓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잇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낱말들의 다른 의미들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혹은 달리 말한다면,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의미는 구를 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게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상반되는 여러 힘들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명제들은 문법적이며 논리적인 구문으로는 완벽하게 옳지만, 의미상으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가르시아 바카가 그의 책 [근대의 논리학 입문]에서 인용하는 있는 것처럼 (" 숫자2는 두 개의 돌이다"). 논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모순도, 무의미도 아니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만일 다양하며 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서 투쟁한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 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르는 것이며, 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그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즉, 이미지들은 작품들이다. 공고라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지라도, 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즉,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한다. 즉,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적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며,  시인이 '물은 유리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물오리는 수양버들의 사촌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대해서 무엇인 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 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고 확신한다. 시적 이미지들에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보여주는 외견상의 모순 혹은 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각할 때, 이 대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성질들, 감각들, 의미들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합성은 접촉의 순간에 즉시 동일된 상태로 지각된다. 다양한 성질과 형태의 모순적인 총체를 동일시키는 요소는 의미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갖는다. 현상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가장 단순하고 우연적이고 방심한 상태로 지작하는 경우에조차도 어떤 지향성이 주어진다. 이렇게 의미는 언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 근거이다. 실제의 복합성과 모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의미 속 에 녹아든다. 일상적인 지각과 비슷하게, 시적 이미지는 실재의 복합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하는 바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재를 표현하는 다른 형태들과 이미지를 구별시켜주는, 이미지의 통합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6)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 --삼단논법, 묘사, 과학적 공식, 실천적인 수준의 논평 등--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혹은 묘사하는 데 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자를 본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의자의 색깔, 형태, 재료 따위를 지각한다. 이러한 분산적이고 모순적인 특성들에 대한 감지는 그것의 의미, 즉 의자가 기구이며 도구라는 것을 아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의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기를 원한다면, 세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맨 먼저, 의자의 형태, 그 다음에는 색깔 그리고 의미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한다.  묘사의 과정에서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어간다. 처음에 의자는 단지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나무의 종류가 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추상적 의미 '의자는 앉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다' 가 된다. 시에서 의자는 느닷없이 우리의 주의를 자극하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현존이 된다. 시인은 의자를 묘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의자를 보여준다. 지각의 순간에서처럼, 의자는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성질들을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지며, 그 순간의 정점에는 의미가 자리잡는다. 이렇게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리듬을 갖는 구인 운문은 일깨우고, 되살려내고, 환기시키고, 재창조한다. 혹은 마차도가 말했던 것처럼, 한 번 걸러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현시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그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의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이 된다. 앉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 잃었던 의미들과 가치들을 다시 획득 하게 된다. 지각의 순간에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 즉각적이고 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 일치를 이룬다. 만일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미지 덕분에 그 언어가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맨 처음의 상태로, 다시 말해, 의미의 복합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적 기능의 첫 번째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시적 이미지의 의미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모든 구는 다른 구와 관련되며, 다른 구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기호의 가변성 덕분에, 말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뜻이 모호한 구문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 나 혹은 저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말들에 의탁한다. 모든 구는 다른 구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의미는 말하고자 함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언표이다. 이와 반대로,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 될 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의마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의자를 볼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의 의미를 감지한다. 아무 말없이 우리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내게 "소리 얼음을 쌀쌀맞게 내뱉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는 새하얀 것 혹은 교만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 한다. 즉, 치아., 말, 얼음, 입술, 부조화한 실재가 느닷없이 우리 눈 앞에 출현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석도, 지시체도, 설명도 필요치 않다. 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이렇게 원초적인 복합성을 최복한 말은 이제 또 다른 당황스럽고 과격한 변형을 겪는다. 이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5/6)|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7)        언어의 중요한 성질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 속성이 단어를 특징짓 는다. 첫째는 가변성 혹은 상호 교환 가능성이며, 둘째는 이러한 가 변성에 힘입어 한 단어는 다른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 리는 가장 간단한 관념도 여러 가지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혹은 의미를 심하게 손상시키기않고 텍스트나 구의 단어를 바꿀 수 있 다. 혹은 하나의 구문을 다른 구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이 이미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산문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지만, 시에서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발가벗은 채 빛나는 별"이 의미하는 바는 "별은 빛난다. 왜냐하면 발가벗고 있기 떄문이다"와는 다르다. 후자의 표현에서 의미는 약 화되었다. 직관은 천박한 설명으로 바뀌었다. 시적 흐름의 긴장이 약해졌다.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 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 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초의 본성으로 언어가 복귀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과격한 작 용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 된다. 시심詩心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달리말하면 가변적이며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집합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제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말했던 것이 이해된다. 시는 산문이나 의사 소통에서 훼손된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어떤 것 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말에서 태어난 시는 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된다.       시적 경험은 말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 이미지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 시키지만, 이러한 화해는 언어이기를 그만둔 이미지의 언어를 제외 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 이렇게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 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 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이미지의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 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 미지 그 자체이다.       물론 모든 이미지들에서 상반되는 것들이 파괴되지 않은 채 화 해하는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비교라고 정의 했다--을 발견한다. 르베르티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 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 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유머의 구사와, 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재담들이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어 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 러낸다. 마지막으로, 언어학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 이는 것, 즉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 러한 모든 이미지들-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완전히 이해되 기도 어려운-에서 동일한 과정이 목격된다. 실재의 다양성을 구 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않은 채, 그 다 양성이 최종적인 동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이다. 깃털은 깃털이면서 돌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 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       장자가 말에 가했던 비판은 이미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언어적 기능이아니기 떄문이다. 결 국,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의미는 사물과 이름 사이의 연결이다. 이렇게 의미는 이름과 우리가 이름 붙이는 것 사이의 거 리를 암시한다. 우리가 "전화는 먹는 것이다", "마리아는 삼각형이 다"등의명제를 말할 때는 무의미가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말과 사물, 기호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즉 다리(의미)가 부서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에 갇혀 홀로 남는다. 그리고 현실은 언어없이 남겨지게 되는데, 왜냐 하면 뱉어내는 말들은 이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이 기 때문이다. 이미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넓혀지는 대신에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 진다.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은 이제 같은 것이다. 다리 구실을 하는 의미 역시 사라진다. 이제 포착해야 할 것도 없고, 지시해야 할 것 도 없다. 그러나 이떄 만들어진 것은 무의미나 반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신이다. 언어는 이 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 말할 수 없는 것-돌은 깃털이 다, 이것은 저것이다-을 말한다. 언어를 가리키며 표상한다.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따 금씩 성취한다.고로,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자체이다.       시의 진리는 시적 경험에 의지하는데, 이러한 시적 경험은 동양 사상과 일부 서양 사상에 의해서 지적된 것처럼, 인간이 '현실의 현실'과 일치하는 경험과본질적으로 다르지않다.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경험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의사 소통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속성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미지의 의사 소통 방법은 개념의 전달이 아니다-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는 좀더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않고 현실 을, 문자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 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 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 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변신이며, 변화이며, 연금술적 작용이다. 그래서 시는'이 사람'과 '저 사람' 을 변화시켜 자기자신인 '타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 종교, 그리 고 그 밖의 체제들과접해왔다. 우주는 더 이상 이질적인 사물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가 아니다. 항성, 신발, 눈물,전차, 수양버 들, 여자, 사전, 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 서로 의사 소통 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인간 은 마침내 그의욕망- 그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즉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句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한다. 시는'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작성자 옥토끼  
305    옥타비오 빠스 _ 시적계시 댓글:  조회:174  추천:0  2018-07-25
옥타비오 파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가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란 대목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에 혹시 다른 분들께도 그러한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옮긴이들이 먼저 읽으라고 권해주신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2부를 올려드립니다.  시에 앞서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을 때의 당혹과 두려움, 고뇌와도 같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원초적인 정서 체험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인용들이 넘칩니다. 「랭보는 말하기를, 시의 혁신성은 "사상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감춰진 오의奧義를 보편적 영혼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잡아내는 능력에 있다"라고 한다.」 334 옮긴이의 글 『활과 리라』는 파스가 가장 애착을 느꼈던 책이다. 젊은 시절 고민하던 '존재의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풀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이 진지하다. 이 책은 1부 시란 무엇인가? 2부 시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3부 시와 사회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명증한 사색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그 중에서 2부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동양 사상을 인용하면서 시적 경험에 대해 써 내려간 그의 글이 우리에게 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옮긴 우리들에게도 매우 소중한 책이다. 오늘의 우리를 키워준 책. 평생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아가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현대가 어떤 시대인지…… 『활과 리라』는 파스를 격동의 대륙 중남미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 결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다. 단순한 시론서詩論書가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안목을 열어주는 고전 같은 책이다. 또한 20세기에 스페인어로 씌어진 대표적인 산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책의 문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글은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매우 시적이어서 존재의 내밀하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흐름에 취해 현기증이 일 때가 많다. 백척간두에 선 듯한 아찔한 현기증. 때때로 책갈피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의 이면이 홀연히 드러나고, 그때 시간과 공간은 역류逆流하기도 한다.  활과 리라  제1판 서문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책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 책에 씌어진 나의 대답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부응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일반적인 동의를 얻을 것인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글에서 표현된 내 대답의 깊이와 유효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필연성에 충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씌어지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까?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할까?  1942년에 호세 베르가민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탄생 사백 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 나를 초대했다. 이 강연회는 내게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질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다듬어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 글은 잡지『탕자El Hijo Prodigo』5호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ia de soledade y poesia de comunion」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책은 그때의 글이 성숙되고 발전된 것이며 어떤 점에서는 바로잡은 것이다. 이 책을 내면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이름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진 빚이 엄청난 것이어서 책 속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애썼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폰소 레예스*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Alfonsd Reyes(1889~1959). 멕시코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던 지식인 운동 가운데 하나인 '1910년 세대'에 속했다. 희랍의 고전과 유럽, 스페인 그리고 중남미의 문학, 사회학, 지리학, 문화,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친 박학함으로 중남미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가 보여준 우정과 모범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그가 썼던 책들 『문학적 경험La experiencia literaria』, 『경계 설정El deslinde』그리고 다른 작품들 속에 산발적으로 실려 있는 많은 귀중한 에세이들이 내게 모호했던 것을 명료하게 밝혀주었고 불투명했던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으며 복잡하게 얽힌 것을 쉽고 가지런히 바로잡아주었다. 한마디로 나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멕시코, 1955년 8월 옥타비오 파스 2부 시적 계시La revelacion poetica 피안彼岸  인간은 그가 시간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인 리듬에 자신을 담으며, 리듬은 스스로를 이미지로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의)입술이 가늘게 열리며 시를 낭송하자마자, 그 이미지는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창조적 반복인 리듬의 작용으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의미들의 다발인 이미지는 참여로 통하는 문을 연다.  시 낭송은 축제요 교감交感1)이다. 이러한 교감을 통해 분배되면서 재창조되는 성체는 바로 이미지이다.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이렇게 해서, 시에 대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이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만든다.  하지만, 원시적 의식 구조에서부터 유행, 정치적 광신, 심지어 범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성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정신분석학이나 역사주의라는 말만큼이나 남용된 '신성한'이란 개념이 지니는 의미의 다양함은 우리를 최악의 혼란 상태로 몰고갈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시란 단지 스스로에 의해서,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영접 교섭 혹은 가톨릭의 의식인 성찬식을 뜻하는 단어인 comunion을 교감이라고 번역한 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진의를 살려 되도록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서 파스 자신이 언급하듯, 현대시의 과업은 종교와 공유하고 있는 원초적 신성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를 낭송하며 공감하는 것은 미사에서 예수의 몸인 성체聖體를 신도들이 나누어먹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현대인이 발견한 사유와 느낌의 방식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 존재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성이나 윤리 혹은 현대적 관습이 감추거나 폄하하는 모든 것은, 그 옛날 소위 원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실재實在 앞에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태도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애써 무시해도 자기 무의식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인류학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상태나 신경 쇠약에 빠지지 않고도 꿈과 상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원시 예술이나 무의식의 심리학 혹은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재不在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와 종교는 같은 연원에서 솟아나온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交戰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류학자들이 호주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사회 제도를 연구하거나 혹은 고대 부족의 민속과 신화를 분석할 때, 마치 원대인의 눈에는 이성의 도전으로 보이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현상을 굳이 설명해보려는 의욕으로, 몇몇 인류학자들은 인과론을 잘못 적용한 때문이 아닌가 하고 해석했다.  프레이저Frazer는, 마법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해 취하는 가장 오래된 행동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사 과학이었던 마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 레비-브롤Levy-Brujl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전前논리적인 개념으로 해석했다. "원시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들을 논리적, 인과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을 인과의 사실로도 보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들로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들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무엇을 만지면, 물론 그 옆에 있는 사물도 변하고 또한 인간 자신도 변화된다고 믿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관점을 원시 사회 제도 연구에 적용시켜 보려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과 보편적 신화 원형론에 근거하여, 고대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도 인간이 자연에 던진 첫번째 거역(NO)인 근친상간에 대해 연구했다.  뒤메질Dumezil은 아리안족 신화를 연구하여 그들의 봄 축제(혹은 그의 책에서 시적으로 명명한 "불멸의 향연")에서 인도유럽어족들의 신화와 시의 원형을 발견했다. 카시러는 신화, 마법, 예슬 그리고 종교를 인간의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했다. 말리노 보스키는 또한…… 하지만 계속해서 열거하자면 끝이 없고, 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수시로 변하는 그 넓은 세계를 다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현상과 그에 대한 가설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먼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은 소위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라칸돈 부족은 지금도 실제로 고대의 생활 조건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던 가장 복잡하고 풍요로웠던 마야문명의 직계후손들이다. 라칸돈족의 사회 제도는 문화의 발생기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잔재에 해당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前논리적도 아니고, 그들의 마법 의식儀式 또한 전前종교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칸돈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일 뿐, 더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문화가 어떻게 탄생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다.  토인비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에스키모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문명이 그대로 화석화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그것이 쇠락하는 것이든, 화석화된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53-156 이제는 극복되어진 오래 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시적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은 직선적 역사관이 낳은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원시적 사고방식과 진보라는 개념은 양적 시간 개념의 산물이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레비-브롤은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원시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의사 전달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논리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확실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깊은 차원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정신 분열증은 마법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현실 세계는 우리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환상적 설명 중에서 거의 틀림없이 후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또한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했다. 여기서 더 이상 예증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 행위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단 시인, 광인狂人, 원시인, 어린이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꿈을 꾸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직업적, 사회적, 정치적 행사에 참여할 때, 우리 대부분은 카시러가 말한 마법적 믿음의 연원을 구성하는 광범위한 '생명계society of life'에 참여하고, 그 일부분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성에 의해 은폐되어 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거나 간에, 이 모든 현상들에게 '원시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대인이나 어린이들만의 것 혹은 정신 이상 증세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공통된 내재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53-157 어떤 사람들은, 의식儀式이나 제의의 주체가 원시인이나 정신병자처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제도라고 본다.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의, 신화, 축제, 전설 등 '물질화'되었다고 적절히 표현된 그런 것들은 저기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화되고 사물화되어 있다. 위베르와 모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신성함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감격은 개인적인 특수한 범주의 경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랑, 미움, 외경, 두려움, 배고픔, 목마름 등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제도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견이 현실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성함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 제도가 진정 폐쇄되고 유일한 무엇을 구축한다면, 축제나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그곳에 참석하기 몇 시간 전 숲 속에서 사냥하거나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자기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 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셋식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인 존재이다. 확실히, 종교적 경험의 가장 특정적인 사실은 갑작스런 도약, 본성의 돌발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은 신격화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또한 춘화春花를 볼 때의 감정과 티벳의 사원에 새겨진 남녀 교접상을 볼 때의 감정과 역시 서로 다르다. 158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양쪽 다 그것만으로는 신성한 것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양극단에서 벗어나 우리는 신성함을,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으로 포용하여야 할 것이다.  신성함의 세계는 인간을 배제한 사회 제도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제도와 절연된 인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적인 것의 경험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는 것도 역시 불충분하다. 그 경험은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표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2) 2) 이 글이 씌어지고 난 후 10년 뒤, 『야생의 사고』(1962)가 출판되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중요한 저서에서 '원시적 사고 방식'이 현대인의 사고 방식 못지 않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몇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성聖의 세계와 속俗의 세계로 이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터부는 그 두 세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계에 금지된 일들이 다른 세계에선 가능하다. 순결이라든지 혹은 불경不敬이라는 개념은 이 구분으로 인해 생겨난다. 단지, 위에서, 우리 자신을 배제한 단순한 사실은 표피적인 자료만 양산할 뿐이다. 또한 모든 사회는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각각의 영역에는 다른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는 독특한 규칙과 금기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상속세법의 운영 체계는 형법에 적용되지 않으며(비록 그 옛날에는 적용되었겠지만), 사회 관습에 따라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만일 공무원 사회에서 행해진다면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국가 사이의 외교 규범은 가정 내에선 적용되기 어렵고, 반면 가족끼리의 규범은 국제 통상 세계엔 적용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영역 내에서 인간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규범에 따라 처리된다. 따라서 성(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서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선, 그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만일 신성함이 별개의 세계라면, 우리가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도약'이나, 스페인어식으로 말하자면 '치명적 도약salto motal'을 통해서일 것이다. 7세기의 중국 선사(禪師) 혜능(慧能)은 불교의 핵심적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인도 산스크리트 용어인데, 중국어로 옮기자면 큰ㅡ지혜ㅡ피안ㅡ도달의 뜻이다…… 마하란 무엇인가? 크다는 뜻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지혜라는 뜻이다…… 바라밀다는 무엇인가? 피안에 이르다(到彼岸)의 뜻이다. 차안(此岸)이라고 불리는 대상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浮沈)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버리면,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무쌍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라밀다ㅡ'피안에 이름'이다.  많은 바라밀다 계열 경전들의 끝부분에는 여행 혹은 도약의 개념이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오, 가버린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버린 이여(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비록 영세, 영성체, 각종 성사 혹은 통과 의례들이 모두 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도약'의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他者)'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의례들은 흔히 우리가 막 탄생했거나 혹은 중생(重生)했다고 하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새 이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초적으로 경험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태아로서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인간 탄생의 신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각종 제의들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행위는 다름 아닌,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는 살아서 탄생하는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바람의 비유는 모든 문화권의 종교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인간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뽑혀서 저 너머 피안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떠밀려간다. 여기서 또 다른 특이함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만일 거대한 바람에 한번 떠밀리면,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의례에 정성껏 참여하더라도,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도약의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시 창작의 순간과 똑같이,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자유와 숙명은 인간 속에서 만난다. 스페인 희곡은 이 갈등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161 티르소 데 몰리나는 그의 작품 『믿음이 없는 죄인』에서, 구원을 찾아 10년 간 동굴에서 고행을 실천하는 수도자 파울로를 등장시킨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죽어 신 앞에 출두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심판 내용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깬 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악마가 천사로 변장하여 그의 앞에 나타나, 신이 그에게 나폴리로 떠나라는 명령을 했다고 알린다. 그곳에 가서 엔리코란 사람을 만나면, 그를 통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를 만나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운명을 당신도 똑같이 겪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엔리코는 효자이며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란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었다. 엔리코라는 모델을 보자 파울로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잠시 후, 뚜렷한 이유 없이, 그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울로가 본 모습은 단지 그의 외면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악한이 겉모습과는 달리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신의 품에 자신을 맡길 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엔리코는 속죄하고 즉시 스스로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바친다. 그는 치명적 도약을 하고, 구원받는다. 고집이 센 파울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치명적 도약, 즉 지옥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내부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심이 그의 내부를 공허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울로의 죄는 무엇인가? 신학자인 작가 티르소에 의하면, 불신과 의심이 죄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만이 그의 죄였다. 그는 결코 신에게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신성에 대한 그의 불신은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즉 악마로 변한 것이다. 파울로는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자는 신뿐이며,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자신을 신에게 온전히 맡긴 엔리코는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었으나, 자기 자신을 믿은 파울로는 파멸했다. 자유는 하나의 신비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신의 은총이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62 『믿음이 없는 죄인』이 내포하는 신학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주인공들이 겪는 본성의 급격한 변화와 순간적인 전이가 주목할 만하다. 엔리코는 금수(禽獸)였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참회 속에 죽는다. 파울로 역시 갑자기 수도사에서 방탕한 자로 탈바꿈한다.  미라 데 메스쿠아4)의 『악마의 노예』에서도 심리적 변화가 급격하고도 전면적으로 일어난다. 희곡의 앞부분에서 돈독한 신앙을 가진 선교사 돈 힐은, 우연히 어느 청년과 마주치는데, 그는 애인 리사르다의 발코니로 올라가려는 중이었다. 성직자는 그 젊은이를 설득하여 물러가게 한다.  혼자 남게 된 성직자는 자신의 선업에 대한 교만에 들떠, 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번개 같은 독백을 통해 돈 힐은 치명적 도약을 한다. 기쁨에서 교만으로, 그리고 교만에서 호색(好色)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젊은이가 오르던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어둠과 욕망에 신분을 감추고, 애인을 기다리던 아가씨와 동참한다.  다음날 아침 리사르다 아가씨는 그 남자가 성직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의 순간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가는데, 그 긍정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젊은이의 사랑이 그녀를 외면해서, 악을 껴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기증이 둘을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그들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사람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훔치고, 죽이고 마침내 리사르다의 부모까지 죽였다.  4) Mira de Mescua(1574~1644). 로페 데 베가 학파의 스페인 극작가로 종교극을 많이 썼다. 163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파울로와 엔리코의 경우처럼, 심리적인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 어두운 열정을 설명한 마땅한 이유는 없다. 자유롭게 동시에 무엇엔가 떠밀려 그들은 한 순간에 그들을 유혹하는 심연으로 전락한 것이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적 결정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떤 다른, 엉뚱한 힘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무엇엔가 홀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타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가능하다. 그들 역시 엔리코와 파울로처럼 도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를 떠미는 힘이 우리 자신의 것인지 초자연적인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를 이 세계에서 벗어나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행위이다.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첫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 우리가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도 유사한 이중적 감정이 생긴다.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찾아 헤매던 것으로부터 도망한다. 또한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성 후안 크리솔로고san Juan Crisologo의 말 "정신이 고양될수록, 더욱 뜨거워진다Plus drdebat, quam urebat"을 제사(題詞)로 따온 소네트에서 케베도는 순교자의 열락(悅樂)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렌초는 석쇠 위에서 불타며 즐긴다.  황색 불길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순교자의 항구적인 가치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폭군은 로렌초를 통해 불타며 고통 겪는다. 숯불은 황홀하게 번져 나가고 석탄 속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순교자의 갈비짝은 요리가 되어 사형 집행인에게 바쳐진다.  적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의 지고한 노력을 닮은 성사(聖事)의 불타는 재현. 하늘이 인간을 영원케 하는 것을 보라. 패배가 영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타락한 군주는 타들어가고 있다. 165 로렌초는 불타면서 자신의 순교를 블긴다. 폭군은 괴로워하며 적 속에서 스스로를 태운다. 이런 영광스런 순교와 비속한 고문 사이의 간극을 밝히기 위해선, 사드 백작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 세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희생양은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방탕자의 고독은 깨어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쾌락은 순수하고, 외로운 것이다. 그것은 쾌락이라기보다, 차가운 분노에 가깝다. 사드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세계는 의사불통의 세계다. 각자는 자신의 지옥에 외롭게 갇혀 있다.  케베도는 그의 소네트에서 교감comunion의 이중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석쇠는 고문과 요리의 도구이며, 로렌초는 요리와 태양으로 이중적으로 변한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이중성은 반복된다. 폭군의 승리는 패배가 되고, 로렌초의 패배는 승리가 된다. 어디서 고통이 끝나고, 어디서 쾌락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뒤섞일 뿐 아니라, 로렌초는 교감의 힘에 의해 폭군의 가해자가 되며 폭군은 그의 희생양이 된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聖)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한다. 공간은 더 이상 연장(延長)이 아니라 질(質)이다. 어제는 오늘이다.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시간과 사물들의 그 특이한 존재 방식을 들여다보면, 밀고 당기고, 고양시키고 추락시키며, 움직이고 멎게 하는 어느 중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우주는 자장(磁場)으로 변한다. 어떤 리듬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감정과 사고를, 판단과 행위를 각각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하나의 천을 짠다. 166 어제와 오늘, 여기와 저기, 구토와 감미(甘味)로 엮인 천을 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늘이다. 모두가 현존한다. 모두가 존재하고, 모두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다른 곳, 다른 때에 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충만 속에서, 요행으로 믿었던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낯설음은,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로렌초는 태양으로 변하지만, 동시에 타버린 잔혹한 고깃덩어리로 변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느 날 오후, 힌두교 성지인 무트라Mutra의 줌마 강가에서 거행되는 작은 의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 의식은 매우 간단했다. 석양녁에 한 사제가 조그마한 사원 모양의 나무 더미에다 성화를 붙이고, 강가의 거북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신자들이 종을 치고 노래하며 향을 사르는 동안, 그 사제는 송가를 읊조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는데, 그날 그 의식에는 크리슈나를 믿는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사제가 불을 당겼을 때(우리 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밤의 장막 앞에 그 불빛은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던가!) 신자들은 노래하고, 고함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지러운 동작과 고함소리는 나에게 역겨움과 고통을 주었다. 167 그 무절제한 열광은 너무나 엄숙하면서도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다. 불쌍한 고함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몇몇 벌거숭이 애들은 깔깔거리며 뛰놀고 있었고, 어떤 이는 무심히 낚시를 하거나 또 다른 이는 헤엄치고 있었다. 어느 촌부는 꼼짝 않고 서서 흐린 물에다 오줌을 누고 있었다.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모든 것이 일상 속에서 그대로 지나가고 있었고, 유일하게 신이 난 것은 목을 길게 빼고 먹이를 쫓는 거북이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침묵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거지들은 시장으로 돌아가고, 순례자는 여관으로, 그리고 거북이들은 강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크리슈나에 대한 경배의 전부인가?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representacion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은 마치 연극 공연 중의 배우와 같다. 그는 동시에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 역시 재현된다. 저 산은 용왕은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그렇다고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그 크리슈나의 경배자들도 재연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어느 종교극의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가지는 이중적 성격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평상시대로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 삶이 너무나도 통속적이라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은 성유(聖油)에 젖어 있다.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때때로 그 이중성은 유머스럽게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는 "똥막대기"라 대답했다. 선(禪)수련자는 엉뚱하고 자칫 무의미한 대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간화(看話)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갑작스런 깨달음[頓悟]에 이른다. 168 반야바라밀다 계통의 어느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교리를 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교리를 설하는 것이다." 어느 제자가 물었다. "줄이 없는 거문고를 쳐서 소리를 내실 수 있습니까?" 스승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들었느냐?" "아뇨, 못 들었습니다." 이 말에 스승이 응답했다. "이번에는 좀더 세게 쳐달라고 청해보지 그러냐?" 낯설음이란,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은 소위 '명백함의 땅'이 우리 눈앞에서 두 쪽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래, 나는 에이다가 아니야. 그 앤 머리가 곱슬곱슬한데, 내 머린 생머리거든. 난 확실히 메이블도 될 수 없지…… 어쨌든 그 애는 그 애고, 나는 나야. 맙소사, 이 모든 게 얼마나 희한한지!" 앨리스의 의심은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의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처럼 앨리스도 스스로 놀라움을 느낀다.  하지만 대체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은 평범한 현존(現存)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Otro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169 루돌프 오토는, 타자의 출현은-그리고 타자성의 느낌까지도―일종의 가공스러운tremendum 신비,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했다.6) 이 독일 사상가는 가공스러움의 내용을 분석하여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첫째는 성스러운 공포이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이다.  두번째 요소는 현존 혹은 출현(出現)의 위엄이다. 이다. 즉 '무시무시한 위엄'이다. 마지막으로, 그 위엄 있는 힘에 '빛나는 에너지'의 개념이 합쳐진다.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세번째 요소로 등장한다. 한편 세 요소 중 나중의 두 개는 종교적 신성의 속성이며,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을 배제하고 논의를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로 집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신비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느끼는 것이 늘상 공포와 두려움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쁨과 매혹 등 그 반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이다. 그 독일 철학자가 '신비mystetium'라는 용어를 그 체험의 '핵심적 개념'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신비―'절대적인 접근 불가능'―는 바로 '타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이다.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이다. 그의 출현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첫번째 감정은 망연자실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막막함은, 공포나 두려움 혹은 기쁨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6)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70 무서움 안에는, 뒷걸음 쳐지는 공포와 현존과 합치되고자 하는 매혹이 포함되어 있다. 무서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그것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 현현에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이며,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잔혹미와 불규칙미에 대한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 그 미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세례를 받은, 타자의 육화encarnacion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은 아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매혹에 빠지기 전에, 먼저 마비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몸이 굳어진다는 테마는 신화나 전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공포는 우리의 숨을 멎게 하고, 피를 얼어붙게 하며,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든다. 기묘한 현현 앞에서 마비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숨이 멎는 것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흐름인 호흡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공중에 띄운다. 우리는 무(無)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무다. 우주는 심연으로 변하고, 우리 앞에는 움직이지 않는 현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입을 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냥 거기 있기만 한다. 현전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장면은 크리슈나 신의 현현(顯現)이다. 크리슈나는 영웅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로 변신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와 대화한다. 영웅은 망설인다. 그는 겁이 나서가 아니라, 애정 때문에 망설인다. 171  적장들이 이복형제, 스승, 사촌들이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는 같이 피를 나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아르주나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상당수를 죽이는 것은 '카스트 제도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세계의 기저와 전 우주도 파괴될 것이다.  아르주나의 논리에 대해 크리슈나는 먼저 세속적인 논지로 맞섰다. 즉, 전사(戰士)에겐 전투가 그에게 주어진 '법dhama'이라는 것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배신이며, 자신이 전사라는 사실에 대한 배반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살인은 죄라고 믿는 아르주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살인은 끝없는 업業[karma]을 낳는 속죄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이 논리 못지 않게 강력한 논리를 세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의 판두족(族)을 패배와 죽음으로 몰고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군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주나가 처한 입장은 안티고네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 긴박함은 아르주나의 경우가 훨씬 더하다. 안티고네는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국사범을 매장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만, 오빠를 땅에 묻어주지 않는 것은 인의(仁義)에 어긋난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권유하는 것은, 법이나 인의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어느것도 아르주나의 갈등을 풀지 못한다. 마침내 모든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크리슈나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신이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현현이 일어나면, 존재의 감춰진 모든 형태가 시각적으로 확연하고도 생생히 드러난다. 신의 출현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아르주나는 자기가 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172 수많은 입과 눈,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여, 수많은 팔과 넓적다리와 발, 수많은 배와 수많은 끔찍한 송곳니를 지닌 당신의 위대한 형상을 보면서 세계는 전율하나이다. 그리고 저도 또한. 갖가지 색깔로 하늘을 찌를 듯 타오르며 딱 벌어진 입과 작열하고 있는 거대한 눈을 지닌 당신을 보고서 저의 내적 자아는 전율하며 안정과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오 비쉬누시여!7) 비쉬누는 '우주의 집'이며, 그가 출현할 땐 삶과 죽음의 모습 등 모든 형태가 뒤범벅되어 나타나기에 무서워보이는 것이다. 무서움은, 근접할 수 없는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크리슈나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는 나의 도구이다." 아르주나는 신의 손에 쥐어진 연장에 자나지 않는 것이다. 도끼는 자기를 부리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모른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행위―신적인 행위가 드러난 것이다. 아즈텍 문명의 조각상에서도 신성은 꽉 채워지고 충만한 모습으로 조각된다. 하지만 무서움은 단순히 형상과 상징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 한 모습 속에 존재의 두 면이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광경은 존재의 내부를 보여준다. 코아틀리쿠에Coatlicue[神像]는 이삭과 해골 그리고 꽃과 발톱으로 꾸며져 있다.  7) 이 부분의 번역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길희승 옮김, 현음사, 175쪽)에서 인용함. 173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소화 기관은 동시에 파괴 기관이기도 하다. 크리슈나의 입으로 창조의 강이 흐른다. 그의 입으로 우주는 자신의 폐허를 향해 줄달음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과 동격이다. 실제로, 무서움은 총체적 출현의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부재(不在)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촛불이 꺼지고, 형상이 붕괴되며, 우주가 피를 흘린다. 모든 것이 공을 향해 뛰어든다. 벌어진 입, 구멍, 보들레르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실감했다.  파스칼에게는 거동을 함께하는 심연이 있었다.  ―아! 모두 심연이다―행동, 바람, 꿈, 말도 역시! 쭈뼛 솟아오른 머리털 위로 '공포'의 바람이 수없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  저 높은 곳에나, 낮은 곳, 어디에나, 깊은 수렁, 모래톱,  침묵, 그리고 무서웁고도 매료되는 공간……  내 밤의 바닥에 신은 그 날렵한 손가락으로 갖가지 형태의 악몽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큰 구멍을 두려워하듯, 어디론지 모르게 나를 몰아가는 막연한 공포로 가득 찬 잠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창마다 보이고 비치는 건 오직 무한뿐 늘 혼미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은 허무도 시샘하는 감각의 무덤,  ―아! 절대로 수(數)와 존재를 벗어나지 못할 나여!8) 8) 인용된 시는 「심연Le gouffre」이다. 여기선 김기봉 교수의 번역을 인용한다. 현존한다. 『보들레르의 명시』, 세계출판사, 1944, 118쪽 174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번째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란 사실이다. '타자'는 우리의 머리칼을 쭈뼛쭈뼛 서게 만든다. 심연, 뱀, 환희,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괴물. 그리고 이 물러섬에 의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우리는 현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단애의 저 깊은 바닥을 향하여 몸을 숙인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無)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나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 '타자'는 나다. 만일 '타자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그 뿌리에서는, 이상하고 낯선 그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에 이어져 있지 않다면,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에 매혹을 느낀다는 감정은 설명될 길이 없을 것이다.  부동 속에서 전락하고, 전락하면서 상승한다. 나타남은 사라짐이고, 두려움은 저항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에서 정점에 달한다. 반대되는 두 운동은 합쳐진다. 뒷걸음질 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도약이 깃들여 있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175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 없이, 혹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볼 때가 있다. 그땐, 마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의 주름살과 심연을 보여준다. 무심한 흐름 속에 일상이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름대로 일종의 현신(顯身)이나 출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거리와 정원을 지난다. 우리는 매일 오후 도시적 삶에 찌든 저 벽돌담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아무 때나, 거리는 별세계가 되고, 정원은 막 창조되고, 피곤에 찌든 벽은 기호로 뒤덮인다. 언제 그것을 본 적이 있던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무나, 정말 압도적으로, 생생하다. 선명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게 진짜인지, 과거의 것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한다. 처음 본 것 같은 이것은 과거에도 분명히 여기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처음 들어가본 그 세계에는 거리와 정원과 담벽이 들어가 있었다.  낯설음에 이어 그리움이 뒤따른다. 사물들이, 태초에서 오면서도 이제 방금 태어난 것 같은 빛에 세례받고, 모든 것이 변함없는 그곳을 우리는 기억해내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왔다. 한 줄기 바람이 우리의 이마를 때린다. 우리는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춘 오후 한가운데서 허공 중에 떠 있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전생(前生)―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176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간다.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 있다.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우리와 살며시 합친다. 매일 아침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부재이며, 빈틈인가? 그들은 하나의 이미지인가? 하지만 그들을 배가시키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을 잊기 위해, 일상으로 도망치거나, 업무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은 소용없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偏在)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없인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앞에서, 그것이 진짜 현현이라면,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그 몸과 눈과 목소리는 우리를 위협하면서도 매혹시킨다. 우리는 이전에 결코 그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먼 옛날과 혼동하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낯설면서도, 너무도 친밀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몸을 만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굳건한 대지를 밟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먼 남[他人]도, 더 가까운 자신도 없다.  사랑은 우리를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177 사랑과 신성의 경험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같은 연원에서 흘러나온 현상들이다.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손쉬운 예를 들어보면,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신자의 본성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성스러운 음식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본성이나 원초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지고한 육체적 먹거리다"라고. 성적 식인canivalismo erotico에 의하여 인간은 변화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종교의 행위와 모든 신화,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에서까지 등장하는 회귀의 개념은 사랑의 인력(引力)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인은 우리를 고양하여 우리 밖으로 나오게 하고, 동시에 원래의 우리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떨어지는 것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에 대한 허기는 죽음에 대한 허기이다. 에너지의 약동, 분출, 존재의 팽창은 곧 게으름, 우주적 무기력, 무한으로의 전락이다. '타자' 앞에서의 낯설음은 자신으로의 회귀이다. 존재와의 궁극적 일치와 동일화의 경험이다.  사랑과 종교와 시가 공통된 연원(淵源)에서 나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지적한 사람은 시인들이었다. 근대 사상은 이 발견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차압하였다. 근대 염세주의는 시와 종교를 섹슈얼리티의 한 형태로 전락시켰다. 종교는 정신 착란이며, 시는 승화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다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시를 다시 다른 분야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는 경제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을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러 번 지적된 바와 같이, 이 모든 가설들은 19세기의 전형적인 연구 방식인 개체 분석법의 제국주의적 폐해를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사랑과 시에서와 같이 초자연적인 경험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단절의 느낌에 이어, 낯설게 보였으나 이제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분리 불가능한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따라 온다. 이 모든 경험들이, 섹슈얼리티나 경제적, 사회적 기구 혹은 그 어떤 다른 조직보다도 오래된 무엇을 공통적인 핵심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근대 사상가들과는 달리―우리는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신성은 섹슈얼리티와 그것을 구체화시킨 사회 제도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에로티시즘이지만, 성적 충동을 초월하는 무엇이며 또한 사회 현상이지만, 그와는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그 세 가지 경험은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존재의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대체 무엇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낯설음과 친숙함, 상승과 하강, 외경과 경배, 거부와 매혹 등 그것이 표현되는 상반적인 운동과 그 화해를 엿보고, 우리는 그 운동들이 통일성으로 용해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일까? 진정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미래의 나를 앞당긴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이다. 하지만 그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그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을 이룬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간성이나, 마차도가 말한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은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지향하는 그것이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만일 인간이란, '그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는 욕망의 존재이며, 존재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우리는 불가분한 결합 속에서 과일이며 동시에 입인 것이다. 근대인들은,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간적인 존재는 긴장을 이완시키기를 원하고, 갈증을 해소시키기를 원하며, 스스로에 대해 명상하기를 원한다. 시간적인 존재는 자기 충족을 위하여 샘처럼 솟아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하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가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180 시적 계시   우리는 종교와 시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성취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종교와 시는, 마차도가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이라고 부른, 그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그때 우리 자신인 그 '타자'가 나타난다.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하지만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이다. 반면 종교적 언어는, 정의 그대로,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이 상이성은 종교와 시 사이의 유사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한편에선 리듬과 이미지로, 또 다른 편에선 신의 현현(顯現)과 제식으로―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시란 일종의 종교의 혹이거나 또는 신성의 어둡고 희미한 예시인가? 종교란 교리로 굳어진 시인가? 앞글에서의 기술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82   루돌프 오토는, 신성(神聖)이란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로 구성되는 선험적a prior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인 요소는 "어떠한 감각적인 지각에도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필연적이고, 실체론적인 관념, 그리고 필연적이고 객관적 가치인 선(善)의 관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관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버리도록 강요하며,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 이성에 속하며 정신 그 자체의 원천적인 성향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1)  고백하건대, 내 생각 속에 완벽이나 필연 혹은 선(善) 같은 그런 관념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이성의 원천적인 성향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와 유사한 관념들이 의식을 구성하는 갈망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들을 한 가지 윤리적 판단으로 구체화할 때마다, 그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절대적으로 그와 관계된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하게 된다. 개개의 윤리적 판단은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선, 그 윤리적 판단 자체가 의지하는 선험적 관념이라는 것마저도 부정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한편 만일 실제로 그런 관념들이 지각 이전의, 혹은 지각의 해석 이전의 영역을 구성한다면, 신성(神聖)의 범주가 정말 근원적인 요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신성은 초자연적인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神性)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추정을 부정하는 것 같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패배하고 죄를 짓는 신(神)인 켓살코아틀을 숭배한다. 그리스나 다른 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시에 선과 필연의 관념들은 전지전능이라는 보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희생 제의에 대해 우리와 다른 해석을 한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들이 세계를 움직이지만, 그 신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피다.  이런 예를 더 제시할 필요는 없다. 오토 스스로 자신의 말의 한계를 이미 설정했다. "이성적인 표현은 신성(神性)의 본질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성은 통합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합리적 술어는 어떤 면에서는 발판이 되지만, 신성이 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이다. 그것은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신화에서, 악마적인 것은 대지의 중심에서 움터 나온다. 그것은 숨겨진 것의 발현이다. 동시에, 모든 드러남은 시간이나 공간의 단절을 수반한다. 그 상처나 틈새로 우리는 존재의 '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창조란 무의 심연에서 창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현기증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려 하고, 원초적인 공포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 할 때,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범주화를 시도하게 된다. 183  이런 작업에서 이원론과 더 나아가 소위 모든 이성적 분류의 원천이 연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경험의 몇몇 요소들은 시바 신의 파괴, 여호와의 진노, 켓살코아틀의 만취, 테스카틀리포카의 북면北面 등, 신의 어두운 혹은 난폭한 모습을 구성하는 속성으로 변한다. 다른 요소들은 신의 밝은 면을 표현하여 빛나는 얼굴이나 구원자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원론이 심화되어, 두 얼굴 혹은 두 모습을 지닌 신이라는 개념에서 빛의 왕자와 어둠의 왕자라는 독립된 신성神性으로 전이된다.  결국,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그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神聖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오토는 다음과 같이 비이성적 요소의 우선성과 원초성을 확립했다. "신령함의 관념들과 그와 연관된 감정들은 이성적 관념들처럼 완전히 순수한 관념과 감정들이다. 그것들엔 칸트가 '순수' 개념과 감정에 내재한다고 지적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적용된다." 즉, 관념과 감정이 비록 경험 속에 주어지며, 경험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지만, 경험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과 함께 오토는 "더 고양되거나 혹은 더 깊은 곳을 구성하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영역이 바로 신성神性이나 성스러움 혹은 신성神聖이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은 이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신성神聖은 인간 속에 내재한 신격화 성향의 발현이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의 유현遊絃한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과 대상물을 의식하려는 일종의 '종교적 본능'의 출현을 목적하게 된다. 184 그 근원적인 성향이 표상하는 내용은 그것이 기초하는 선험성처럼 비이성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성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니르바나(열반)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무는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개념으로, '타자성을 밝히는 진정한 상형문자'이다. "역설의 가장 강렬한 표현인" 이율 배반은 당연히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공통된 신비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를 형성한다.    오토의 정의는 노발리스의 금언을 상기시킨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종교가 탄생한다." 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에서는, 종교적 근본인 초월의 개념이 심각한 균열을 겪게 된다. 인간은 "신의 손끝에 매달린" 존재가 아니라, 신이야말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대상은 항상 내부에 있고, 모든 신비적 경험이 시작하는 텅 빔의 다른 얼굴, 즉 긍정적인 면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인간의 내부에서 신이 드러난다는 생각과,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현현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 성향 때문에 우리가 신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동시에 신성을 오히려 인간 주체성에 종속시키면서 그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 185   다른 한편,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을 다른 성향들, 그 중에서도 시적 성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노발리스의 말을 변형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도 조금도 어색하거나 문제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시가 탄생한다."  오토 자신도, "숭고함sublime의 개념은 신령함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된다."고 인정하고, 시적 감정과 음악적 감정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길, 단지 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고 했다. 이렇게 神聖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신성의 우선성은 역사적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 인간이 처음 출현한 그 순간, 그들이 무엇을 먼저 느끼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오토가 주장하는 우선성은 다른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의 모든 경험에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한'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숭고함 속에는 언제나 측량할 길 없는 미지의 것이 출현할 때의 신적인 공포가 자아내는 두려움, 불편함, 마비, 숨막힘 등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 속에는 에로틱한 힘이 강력히 개입되기도 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신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은 자아의 기저를 뒤흔드는 지진이며 계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는 신에 몸을 맡긴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창작의 순간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해석하고 분류할 때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신성함이 다른 모든 경험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추정하게 된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놀라는 존재이다. 인간이 놀랄 때, 시를 쓰고 사랑하고, 신을 찬양한다. 사랑에는 놀라움과 시와 신성과 대상에 대한 숭배가 들어 있다.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이런 경험들 중 그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런 경험들을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시인의 언어와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구별하는 특별한 색조는 그 말이 지향하는 대상에 달렸다.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은 특별한 정신의 빛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개개 경험의 진정한 독자성은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에 좌우된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어려움이 끼여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 대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의 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외적 대상들을 신성화의 목록 속에 기록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저 희미한 내적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이란 것도 앞에서 본 바대로 순수하지 않다. 결론짓자면,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길이 끊어졌다. 선험적이라는 관념이나 범주를 포기하고 신성神聖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수밖에 없다. 188   신성한 공포는 근본적인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은 일종의 자아의 왜소화를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을 거대함 속에서 길 잃은 미약한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작다는 감정은 비참함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바로 '먼지와 재'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macher는 이 상태를 '의존의 감정'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특징적인 차이가 이 '의존'을 다른 의존들과 구분짓는다. 상위의 존재와 상황에 대한 의존은 상대적이며, 그러한 요인이 사라지자마자 의존도 사라진다. 신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들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 죽음 뒤에 이르기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의존은 "스스로에 의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정신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무엇이다. 신성은 이렇게 추론에 의해 획득되어진다.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오토는 낭만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을 차용했지만, 그의 이성주의는 배격했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에겐 신성이나 신령함이 진정으로 모든 관념들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지의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결과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항상 현존하며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토는 이 근원적 감정을 '피조물의 상태'라 부른다. 이제 중력의 중심이 바뀐다. 진정으로 특징적인 것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말은, 우리들의 근원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유한성과 왜소함의 어두운 의식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얼굴과 대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이렇게 근원적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요소이다.  슐라이어마허와는 반대로, 오토에게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이다.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많은 종교가나 신비주의자들의 글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즉, 부정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창조자의 등장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기는 자기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느끼지 않고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뿌리뽑혀서 어느 낯선 세계에 던져졌다는 느낌뿐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고아의 감정은 모성과 부성에 대한 인식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오토는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한 논리를 단지 역으로 또 한 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토는 의지의 감정에서 신의 개념을 추출했으며, 슐라이어마허는 신성함을 피조물의 근원적 상태로 여겼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해석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오토는 핵심을 포착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결정적인 상태인 '태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189 그리고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그리고 왈렁스Waelhens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에서 "근원적 상태의 느낌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정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말했다.2)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하이데거의 분석에 의하면, 고뇌와 두려움은 우리들의 근원적 조건에 이르는 문을 열고 닫는 서로 대립되고 대칭적인 두 개의 통로이다. 스스로의 공동空洞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는 신성함의 경험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 조건인 우연성과 유한성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계시는 잠시 후 인간 조건의 외부적인 요소인 창조주와 신성神性 등에 의거하여 인간 존재 조건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가려지게 된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은 고뇌 속에서 발견되는 무를 잘 가려낸다. 하지만 곧 죄인의 왜소함을 신 앞에 고백하면서 이 계시의 의미를 왜곡하고 만다.  우리의 비참함은 죄의 사함과 구원에 힘입어 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원히 구원되었다는 느낌으로 회복된 전망은 우리 존재의 가치를 재건하고 잠깐 동안 무를 극복하게 해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일어났던 것처럼, 고뇌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게 된다."3) 2) 왈렁스 Alphonse de Waelhens,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tin Heidegger』, Lovania, 1948. 9(원주)  3) 왈렁스 Waelhens, 앞의 책. (원주) 190 우리는 여기에 미겔 데 우나무노와 특히 케베도라는(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의 시 「참회자의 눈물」과 「기독교인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또 다른 이름을 첨가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이제 결론내릴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그것을 알고 느낀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유한성이라는 형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대안은, 조금만 움직여도 벗겨질 가면에 불과하다. 이 점은 원죄와 속죄라는 개념을 검토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장엄한 것은 경외심을 유발하여" 숭배와 복종을 요구한다. "모든 도덕적 체계와 무관하게, 종교는 의식에 부여되는 내적인 의무이다…… "4)  원죄, 보상, 속죄 같은 개념들은 장엄한 것이 피조물에게 느끼게 하는 이 복종의 감정에서 싹터 나온다. 원죄 개념에서 구체적인 잘못이나 어떤 다른 도덕적 영향을 찾는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 전에 고아 의식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죄는 우리들의 잘못과 죄악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도덕보다 앞서는 것이다.  4)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91 "도덕적 영역 내에선 구원이나 보상 혹은 속죄 개념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토는 이어 말하길, "그것들은 신비주의 영역에서는 진실되고 필요한 것이지만, 윤리의 영역에서는 거짓이다." 속죄와 긴급한 구원의 필요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근원적인 '결핍'에서 싹터 나온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神性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이것이 성사聖事, 특히 영성체領聖體 의식의 의미이다. 이는 또한 희생의 궁극 목표이기도 하다. 즉, 신을 달래는 것이며 이것은 헌신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타인들의 희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부족함으로 인해, "신성神聖에 접근할 자격이 없다." 희생을 통하여 신이 우리에게 존재의 가능성을 되돌려주는 구원과 우리를 정화하는 희생인 속죄는 이 근원적인 자격 미달의 감정에서 태어난다.  종교는 이렇게, '죄의식'과 '죽을 운명'이 같은 차원의 용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들은 죽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죄는 속죄를 요구하고, 죽음은 영원을 요구한다. 죄와 속죄, 죽음과 영원한 삶은, 특히 기독교에서, 상호 완성되는 하나의 짝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양의 종교들은, 우나무노를 그토록 잠 못 이루게 했으며 병적 성격으로까지 몰고간 문제인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192    엄격한 의미에서, '결핍'과 '부족한 존재'가 원죄와 동의어가 된다고 추론할 만한 근거는 없다. "빚을 진 것 때문에 죄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도 낮아졌다고도 증명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 교리와 차이점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 세계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따라서 부족한 인간 존재를 원죄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완벽한 존재인 신 앞에서, 천사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결점이 많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존재로 상승하거나 무로 추락할 수 있는 힘에는 자유가 포함된다. 한편으로 우연은 자유를 생산하고, 다른 한편 자유는 우연 혹은 원초적 결함을 치료하고 순화시키는 가능성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가능성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굳이 가톨릭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생각이며, 스페인 희곡에서 크게 발전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서 살며, 이 세계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바로크 시대 멕시코의 수녀 시인 후아나 수녀가 유명한 편지에서 "부정적 호의"라고 표현했을 때도 포함해서, 은총이란 구원에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은총에 굴복한다.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는 진짜 부족하고, 작으며, 불충분하다. 이 사실은 은총이 자유를 대체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확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6) 가톨릭 사상은 개신교 사상보다 더 풍부하고, 자유로우며,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와 원죄 사이에 형성된 이 인과론적인 연결 고리를 완전히 해체시키지는 못한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기 전에 어떻게 자유가 악을 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존재보다는 무를 선택한 이 자유는 대체 어떤 자유란 말인가?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했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 속에 현존한다. 우리는 죽으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매순간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부터 죽음을 빼앗으면서, 종교는 우리에게 삶도 빼앗는다.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종교는 이 삶의 죽음을 확인한다.  5) 하이데거Ma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El ser y el tiempo』, traduccion de Jose Gaos, 2a ed.  6) 질송Etienne Gilson, 『중세 철학의 정신L、esprit de la philosophie meddievale』, Paris, 1944 (원주) 194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은, 그것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로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한다. 그리고 시인들의 불쾌함은,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한다.  부서지지 않는 유일한 바위이며 세계의 기둥인 자아라는 의식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의식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상한 요소가 나타난 것이다.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詩史에서 그것은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224   초현실주의는, 우리에게 주체와 현실이라는 형태로 불리는 객체 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로 등장했다. 고대인들에게 세계와 의식은 모두 충만하게 존재했고, 그들의 관계 또한 뚜렷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살벌한 투쟁의 형태로 다가온다. 한편으로 세계는 증발하여 의식의 이미지로 변하고, 다른 한편 의식은 세계의 반영이 된다.  초현실주의의 시인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다툼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과업은 근대 세계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낭만주의의 계승자인 초현실주의는, 노발리스가 '최상의 논리학'이라고 했던 그 과업을 완수하려고 했다. 즉, 우리를 찢는 '오래 묵은 이율배반'을 파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주체의 이름으로, 생으로 가득 찼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환각 껍질이 되어버린 현실을 부정했다. 초현실주의 역시 객체에 대해 공격했다. 그러나 객체를 녹였던 그 산酸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고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산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명은 그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되어버렸다.  '초현실주의의 대상물'은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침대이고, 바다이며, 동굴이고, 쥐구멍이며, 거울이고, 칼리 신의 입이다. 주체 역시 사라진다. 시인은 두 개의 단어 혹은 두 실재 사이의 만남의 장소인 시로 변한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자는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했다. 단호한 의지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비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된다. 영감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상상할 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를 해체하고, 우리 자신도 해체하며, 모순도 함께 제거한다. 225   영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이전의 시인들과는 달리,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무기로 삼고 칼처럼 휘둘렀다. 그렇게 하여 영감을 이념화하고, 또 이론화했다. 초현실주의는 단순한 시운동을 넘어 하나의 시학, 혹은 더욱 더 결정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표출된 계시인 영감은 주관주의의 미궁을 깨뜨린다. 그것은 의식이 잠들자마자 갑자기 우리를 엄습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경계警戒의 모든 문들이 닫힐 때만이 비로소 열리는 다른 문을 통하여 분출하는 그 무엇이다. 내면적 계시로서의 영감은 의식의 단일성과 동질성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자아란 없고, 우리들 개개인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싸운다.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는 우리들의 세계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fantasma임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바로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한다.  초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영감의 파괴적이며 재창조적인 활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초현실주의는 신이나 이성이 차지하고 있던 중심을 영감이 대신 차지하는 사회, 그런 시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영감은 단순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나 공허한 미신 혹은 비정상적인 상태로 치부되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근본 개념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관념이 되었다. 이것은 영감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26   초현실주의 이전의 모든 위대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은 영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몰두했지만―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시인들과 다른 점이었다―그 누구도 영감을 현대인의 세계관과 인간관과 합당하게 소화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전시대의 찌꺼기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영감은 과거로 돌아가 중세인, 그리스인, 야만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낭만주의자들이 고딕주의, 근대시의 일반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망명자로 사는 시인의 초상 등이 영감을 순화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초현실주의는 신, 자연, 역사, 인종 등의 외부 요인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인정함으로써, 시인의 저항과 추방을 멈추게 만들었다.  영감은 인간 속에 있고,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며, 인간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이것이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의 출발점이다. 또한 바로 이 점이, 아직도 간과되고 있지만, 브르통과 그의 동료들이 가지는 독창성이다.    자동 기술법, 자기 최면, 의도적 꿈꾸기, 집단 창작 등의 운동을 벌였던 '초기 모색기'에서, 시인들은 영감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한편으론 영감으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가장 용감한 시인들은 장애물을 부수고, 영감을 추적하여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초현실주의의 운동은 우리들의 개념이 보이는 결핍을 지적―특히, 인간의 모든 작품 속에서 어떤 '의지'의 개입을 읽어내는 것―하고, 위대한 발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종종 '방심', '우연', '부주의' 등이 끼여든다는 것을 밝혀냈다. 227 브르통은 명증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현상에 매혹되어, 인간과 '타자'가 만나는 장소이며 '타자성'의 선택된 장으로서 '객관적 우연'이라 불리는 신비한 메카니즘을 규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찾거나 혹은 찾는 것을 멈출 때, 여인, 이미지, 수학이나 생물학 법칙 등의 그 모든 신대륙이 대양의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들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 것이 교차하는 자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전부다.  우리는, 세심한 주의와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솟아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어디서 오며, 그렇게 갑작스럽게 왔다가 왜 또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것일까? 초현실주의의 고된 실험에도 불구하고, 브르통은 고백하기를, "여전히 우리는 목소리의 근원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보자.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기치 않은 그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본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서, 다시 듣고, 기억해내는 것 같다. 타자성의 느닷없는 출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느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들어본 일이 있으며 또한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의 근원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브르통의 고백이 나름대로 타당함에 주목해야 한다. 브르통은 영감을 단지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내심 저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초현실주의자들의 영감에 대한 관념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28   낭만주의 이후로 시인의 자아는 시적 세계가 움츠러든 것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커져갔다. 공장주나 농부가 자신의 공장이나 땅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주인인 것처럼―양쪽 다 그 소유가 타당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시인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시의 주인인 것으로 생각했다.  전시대 시인들의 개인주의와 이성주의에 대응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모든 창작의 무의식적, 비의도적, 그리고 집단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영감과 자동기술법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가장 시적인 것은 시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의 시 속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적 요소라는 것이다.  시는 방향성이 없는 사유다.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부수기 위하여, 브르통은 프로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는 무의식의 계시이고, 따라서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노발리스가 살펴본 바와 같이, 브르통이 깨달은 그 문제는 거짓된 것이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도 의도적인 행위가 된다. 수동성이 가능하려면 능동성이 전제된다는 의미에서, 그 수동성은 능동성을 내포한다. 전前-숙고라는 말은, 그것이 성립되려면 전前-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별의미가 없는 말이다.  기계적이고 생각 없이 '유용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에 대해 하이데거가 행한 비판은―이것에 관련하여, 근원적으로 인간을 점거하고 있는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채로 인간의 모든 작업의 전제가 된다―그대로 초현실주의 영감 이론에 적용된다.  무의식의 계시들은 그 계시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 자아ego의 검열이 검열될 대상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자유롭고도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그 계시들은 밖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욕망이나 충동을 억제할 때, 우리는 가면을 쓰고 변장하고 나타나는 의지를 통해서만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관여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하여 그 의지를 '무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그 '무의식'이 자유롭게 되는 순간, 이번에는 역으로 그 작용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수동성이라는 가면에 숨은 채 의지가 다시 개입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모두 의식이 개입한다.  229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을 무의식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밖으로 끄집어내거나 간에, 하나의 결정이 따른다. 이 결정은 분석 능력, 의지 혹은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결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존재의 총체성 자체이다.  전-숙고는 창작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전-숙고 없이 영감이나 '타자성'의 계시란 없다.  하지만 전-숙고란 의지보다 선행하여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몰두와 욕망보다 앞선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보여준 바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갈증이고 끊임없는 전前-존재인 인간의 존재 자체에 모든 소망과 욕망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심리학적인 설명이 항상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프로이트의 생각에 매우 동조했을 때조차 영감은 정신분석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그로 하여금 신비주의적인 가정을 모험해보도록 이끌었다.  한편 신비학은 그것이 신비학이 되기를 그만둘 때, 즉 그것이 계시가 되어 감추던 것이 드러날 때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일 영감이 하나의 신비라면, 신비학적인 설명은 그것을 두 배로 더 신비하게 만들 뿐이다. 신비학은, 영감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타자성'의 계시로 만든다. 따라서 그것은 유사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영감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면, 그것이 신비학자들이 말하는 계시와 비슷한 것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230 왜냐하면, 우리는 영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브르통이 신비학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설명의 가능성에 집착한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 집착은 심리학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자성'의 현상이 지속된다는 데 그가 점점 더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브르통에게 유효한 것은 영감의 개념이 아니라, 영감으로부터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현상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감추거나 단순한 심리적 메카니즘으로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타자성'의 숙제를 풀지 못했다고 해도, 초현실주의 이론은 요약적이고 끝내 표면적일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인 단언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채택한 심리적 설명이 불충분하여 결국 문제의 핵심이 '타자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전-숙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타자성'에 어쩌면 답이 있을지 모른다.    노발리스나 브르통 같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가 경험한 어려움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즉 어떤 본성은 가진 주체로 파악한 데 있다. 말하자면, 시적 창조란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말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의 가정에 의하면, 어떤 특수한 순간에 시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말들이 돋아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마음 깊은 곳'이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도 아니며, 그의 마음속에 별과 뱀과 보석과 맹수들이 웅크리고 있는 부동의 경직된 존재는 더 더욱 아니다.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 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231   여기 한 시인이 종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사전 계획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가 앞으로 쓸 것에 대해 길게 사색을 했건 안 했건, 번갈아가며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순결한 백지처럼 그의 의식이 비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글을 쓰는 행위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치 허공으로 던져지는 것 같은 이탈을 요구한다.  이제 시인은 혼자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신경쓰게 만들었던 모든 일상 세계가 사라진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때 두 가지 가능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희미해져서 중력을 잃고 떠다니다가 결국 녹아 없어지거나, 혹은 모두가 스스로를 닫아걸어 의미의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 무의미체가 되고 만다.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책상, 벽, 컵, 기억나는 얼굴 등 세계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균열없는 담으로 변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된다. 다시 세계를 창조하여, 저 위협적인 외부의 텅 빔을 하나하나 이름붙여야 한다.  책상, 나무, 입술, 별, 그리고 무까지도. 하지만 낱말 역시 증발하여, 도망가고 만다. 말 이전의 침묵이 우리를 감싼다. 혹은 침묵의 또 다른 얼굴인 무분별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중얼거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the sound and fury", 수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 등이. 232 세계가 사라질 때, 시인에겐 말 역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뒷걸음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말을 기억하려 하고, 학습했던 모든 것, 즉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외부로의 길을 열어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같던 그 아름다운 말들을 내부에서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뒤에, 혹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팽팽하고 긴장되게, 앞을 향해 던져진 시인은 문자 그대로 그를 벗어나 있다. 시인처럼, 말들도 저 너머, 언제나 저 너머에서,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이. 자신 밖으로 던져진 그는 결코 말과,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어떻게 말들을 창조하는가? 무에서는 무만 나온다. 만일 시인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해도, '언어를 발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란, 당연히, 대화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최소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두 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상 안도 밖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 존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자신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낯선,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233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시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투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말은 여전히 세상의 것이면서, 즉 말이기를 그치지 않은 채, 시의 정수 속에서 시인만의 독점적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어는 역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개인적이고 순간적이기도―창조의 순간의 표식―한 것이다. 시가 순간적이고 개인적인 표식이기 때문에, 모든 시는 같은 것을 말한다.  모든 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 즉 인간과 인간의 언어와 세계를 쉬지 않고 파괴하고 창조하며,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끊임없는 '타자성'을 계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역사적이며 공동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시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무엇을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호메로스나 라신과 똑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말하고,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234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지도 않고, 과거의 진흙으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존재처럼 뒤에 있지도 않으며, 굳이 말하자면 앞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무엇, 혹은 차라리 누구이다. 그 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사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자유는 좀더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 자신 저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이다.  자유와 초월은 시간성의 표현이며, 움직임이다. 영감과 '다른 목소리'와 '타자성'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현시켜서 흐르게 하는 시간성이다. 영감, '타자성', 자유 그리고 시간성은 초월이다. 하지만 그 초월과 존재의 움직임은 어디로 향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이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철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즉 우리들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내재하면서 바로 그 시간성을 육화하려는 끈질긴 욕망을 이미지로 바꾸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신화와 시적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은, 대개 매우 신비롭게 나타나는데, 이탈에서 귀환으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에 들어 있다. 235   인간은 세상을 자화磁化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를 겨냥해야 하나?  그는 그것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인이 되기 원하며, 그의 존재는 그를 항상 자신 너머로 가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순간 헛발을 짚고 발자국마다 비틀거리며, 존재이기를 상상하지만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타자와 조우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이 남자였고 여자였으며, 바위였고 "바닷속에서는 벙어리 물고기였다고 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흥분하면, '몰라보게 달라 보이고', '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우리 이름 속에는 누군가가 숨어 있고, 그 역시 우리 자신이라는 것 외에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인간의 특성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타자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그때, 도약의 절정에서, 인간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작렬하는 순간, 그는 순간적인 충만과 충만한 존재로의 생성 속에서 동시에 이것과 저것,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 삶과 죽음이 된다.  인간은 이제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된다. 그는 돌, 여자, 새, 다른 사람,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시이며, 대립물들의 결합인 이미지가 된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 육화한 인간의 이미지가 된다.    시적 목소리, '다른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이다. 인간의 존재는 이제 그가 되고 싶어했던 타자를 포함한다. 마차도가 말하길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에로틱한 의미로서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우리들의 존재 속에 갈증과 '타자성'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다른 몸, 다른 존재―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자신에게서 꺼내는 이상한 목소리이다. 존재는 다름 아닌 존재의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의 목소리는 존재 자신의 목소리이다.  나 밖의 저 멀리, 푸르고 빛나는 숲 속의 떨고 있는 가지 끝에서 미지의 누군가가 노래한다. 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낯선 이는 친밀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시의 목소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난 이미 그곳에 있어보았다. 고향의 바위는 아직도 내 발자국을 머금고 있다. 바다는 친숙하다. 저 별은 언젠가 내 오른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난 네 눈을, 네 머리칼의 감촉을, 네 뺨의 체온을, 네 침묵으로 인도하는 길목을 알고 있다. 너의 생각은 투명하다. 네 생각 속에서 네 모습과 겹쳐지는 내 모습을 보고, 이윽고 그 모습들이 천 번 만 번 겹쳐지다가 백열白熱에 이르는 것을 본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나는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 자신인 사람이다.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명사들은,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끝이고 한계이며 모든 언어를 양육하는 비밀스럽고 언명 불가능한 다른 대명사의 변조變調이며 굴절어屈節語이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237   ​
304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 [스크랩] 댓글:  조회:170  추천:0  2018-07-22
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거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그 글은 아무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은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시인의 숙명   말은?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나를 말들 속에 사라지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뉘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휴식   새 몇 마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검은 생각 하나. 나무들이 수런댄다. 기차소리, 자동차 소리. 이 순간은 가는 걸까? 오는걸까?   태양의 침묵은 웃음과 신음소리를 지나 돌들 사이 돌의 절규를 떠뜨릴 때까지 깊이 창을 꽂는다.   태양 심장, 맥박 뛰는 돌, 과일로 익어가는 피가 도는 돌;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행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세바스또 대로를 가고 있었지, 이 일 저 일 생각하며, 빨간 불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어. 위를 쳐다 보았지:                     위에는 잿빛 지붕 위에는, 검으잡잡한 새들 사이에 끼어 은빛으로 반짝이며 생선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어.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길을 건너면서 그는 문득 뭘 생각하고 있었지 하고 혼자 물었지    너의 눈동자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씌어진 말   첫마디 써놓은 말(결코 생각한 일이 없는 다른 말-이 말 즉 말도 않고 딴 소리를 하는 즉 말은 않지만 말을 하고 있는) 첫마디 써놓은 말(하나, 둘, 셋- 위에는 태양, 너의 얼굴 우물 한가운데 멍청한 태양처럼 박혀 있는 네 얼굴) 첫마다 써놓은 말(넷, 다섯- 조약돌이 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며 네 얼굴을 본다, 떨어지며 추락의 수직선을 헤아린다) 첫마디 써놓은 말 (다른 말이 없다. 밑에는, 떨어지고 있는 말이 아니라 얼굴과 태양의 시간을 떠받고 있는 지옥 위에 간신히 떠받고 있는 말 추락 전, 사고 전의 말) 첫마디 써놓은 말(둘, 셋, 넷- 부서진 네 얼굴을 보라, 흩어지는 태양을 보라, 부서진 물속에 돌을 보라, 똑같은 얼굴, 똑같은 태양을 보라, 똑같은 물 위에 새겨진 첫마디 써놓은 말(을 계속한다, 생각이 있는 말밖에는 말이 없다)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위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고드름 글로 쓴 기둥 하나씩 하나씩 글자 글자마다,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인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정확한 말의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의 자궁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말하지 않는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일지도 몰라   외침 한 마디 사위어간 통감 속- 다른 천체에서는 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은 한다. 마음은 마음 아프고 미친 마음 때면에 묘지는 묘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이야기를 하려면 말 안 하는 것을 배우라   우정   기라리라던 시간 책상 위에 끝없이 떨어지는 램프의 머리칼 밤은 창문만 키워놓고 아무도 없다 이름없는 실체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육체를 보며   마침내 어둠이 열리고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너의 머리칼, 짙은 가을, 태양빛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너의 입과 그 식인종 치아의 하얀 군대는 불길 속에 잡혀 있다. 갓익은 노란 빵 색깔의 너의 살결과 불에 태운 설탕 빛 너의 눈, 거기에서 시간은 흐름을 멈춘다. 오직 나의 입술만 아는 언덕이여, 가슴을 거슬러 너의 목까지 오르는 달의 행로, 목덜미의 굳어진 분수 폭포, 너의 배의 높은 고원, 너의 옆구리의 끝없는 해변   너의 눈동자는 응시하는 호랑이의 눈이다가 일 분이 지나면 물기 젖은 강아지 눈이 된다.   너의 머리칼에는 항상 벌이 있다   너의 잔등은 조용하게 나의 눈 밑을 흘러간다 불길 밑에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의 잔등처럼.   잠든 물결이 밤 낮 진실로 된 너의 허리를 두들긴다 달 빛 아래 모래벌 같은 크막한 너의 바닷가에서   바람은 내 입으로 불려나오고, 그 긴 신음소리는 이 육체와 육체의 밤을 잿빛 날개로 감싼다, 사막의 고적을 덮고 가는 독수리 그림자처럼. 너의 발가락의 발톱들은 한여름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너의 다리 사이에는 물이 잠든 우물이 있다. 밤 바다가 고요해지고 물거품의 검은 말이 머무는 항만, 보물을 감춘 산 자락의 동굴, 성스러운 빵을 빗는 화덕의, 반쯤 열린 사나운 입술의 미소, 빛과 그림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혼 (거기 육은 스스로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날을 기다린다.)   피의 조국,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아는 고향, 내가 믿는 유일한 조국, 영원으로 행해 열려진 유일한 문 하나.   새벽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의 한가운데   되풀이   심장과 그 성난 고동소리 피 속의 검은 말 눈먼 망아지 고삐 풀린 망아지 밤의 축제 행진 공포의 수레바퀴 벽을 향한 절규와 빨간 불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날을 곧두세운 사념과 육박전 날마다 심문을 해도 대답없는 아픔 이름도 부피도 없는 아픔 핀 하나가 뚫고 나간 동공 고생 많았던 날의 동공 때묻은 시간 침 뱉는 사랑 미친 웃음과 지독한 거짓말 고독과 세상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피와 괭이와 휘파람 소리의 광장 상처 위에 햇빛 죽은 물 위에 털보 하늘 분노와 온몸이 뒤틀리는 쓴 입맛 녹슬어가는 사고 병든 글씨 괴로운 새벽 잎에 자갈을 물고선 하루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밤 갉아먹는 밤의 뼈 항상 새로운 항상 되풀이되는 공포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물 한 컵 약 한 알 양철판 같은 혓바닥 한 밤 꿈 속에 개미굴 피 속의 검은 폭포 밤 속의 돌의 폭포 허무의 총 무게 커다란 도시에 차의 모터소리 나의 귀 주위에 멀리 가까이 멀리 눈이 나타나고 벽이 몸짓을 하고 절름발이 지하철이 나타나고 부서진 다리와 물에 빠져죽은 사람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뱅글뱅글 도는 사념 가족 분위기 내가 뭘 했는가 넌 뭘 했는가 우리는 무얼했는가> 죄없는 죄의 미궁 이의를 제기하는 거울과 상처를 내는 침묵 불모의 날과 불모의 밤 불모의 고통 잡동사니 고독한 사람이 없는 세계 이젠 아무도 없는 대기실 그 길이 그 길이고 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버리고 없다.   소녀   아직 사라지지 않는 하오의 빛과 쌓여 있는 밤 사이 한 소녀의 시선이 있다   노트와 글씨 쓰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모든 존재는 앞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뿐. 벽에는 빛이 사라진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종말인가? 시초인가? 그녀는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하리라. 영원한 투명한 것.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모르리라.     마지막 여명   지평선에 누운 채 너의 머리칼은 숲으로 사라진다 너의 발이 내 발을 만진다. 자고 있으면 너는 밤보다 더욱 크고 그러나 너의 꿈은 이 방에 찬다. 그렇게도 작으면서 그렇게도 큰 우리! 밖에는 택시 하나가 지나간다 도깨비들을 한 짐 가득 싣고 흘러가는 강물             항상 돌아오고 있는 강물.   내일은 진정 다른 날이 올까?             움직이는 것   네가 호박빛 암말이라면        나는 피의 길 네가 첫눈이라면        나는 첫새벽의 화롯불에 불 붙이는 사람 네가 밤의 첨탑이라면        나는 너의 이마에 박힌 불붙은 못 네가 새아침의 밀물이라면       나는 거기 첫새의 외마디 울음 네가 오렌지 바구니라면       나는 태양의 칼 네가 돌의 제단이라면      나는 성배를 하는 손 네가 가로누운 땅이라면      나는 푸른 갈대 네가 뛰어오르는 바람이라면        나는 땅 속에 묻힌 불더미 네가 물의 입이라면       나는 이끼의 입 네가 구름의 숲이라면       나는 구름을 가르는 도끼 네가 속세의 도시라면       나는 성스러운 비 네가 노란 산이라면       나는 리켄으로 된 빨간 품 네가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나는 피의 길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인 것 ; 광휘이면서 칼인 것,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칼, 이젠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드라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의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거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허나 나의 말, 내 죽은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 맛, 얼어붙은 금광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한, 자유로운,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인 것.     날   시간의 물결 속에 떨어진, 아 놀라운, 어느 하늘에서 떨어진 외로운 나그넨가, 이 고요한 사람아. 너는 길이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익어간다. 어느 크막한 순간에 투명해진다: 공중에 뜬 화살 하나, 표적을 잃은 마침내 화살의 기억을 잃은 공간 하나. 시간과 허공으로 이루어진 날들이여, 너는 나를 비우고, 내 이름을 지우고, 나의 실체를 없애고 대신, 너로 나를 채운다, 빛이며 허무뿐인 너로   그리고 나는 뜬다, 마침내 나를 잃고, 순연한 존재만으로.   수사학   1 새가 노래한다, 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신비   대기가 반짝인다, 반짝인다 정오가 빛난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투명함 속에 빠져 길을 잃고 나는 빛에서 현란한 빛 속으로 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그리고 해는 빛 속에 벌거숭이가 되어 빛살마다 묻는다 하지만 해도 해를 보지 못한다.   말들   뒤집어 엎어라, 꽁지를 잡아라(악을 쓰라고 그래, 똥갈보 년들), 집어 패라, 채찍에 묻혀 입에다 설탕을 먹여라, 풍선처럼 불어대, 그리고 터뜨려, 피고 골수고 빨아 마셔라, 말려라, 공알을 까버려라 짖이겨라, 멋진 수탉처럼, 울대를 비틀어라, 요리사처럼, 털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고, 투우처럼 숫소처럼, 짓이겨 놓아라, 새 말을 만들어라, 시인아 말은 제가 한 말을 혼자 다 들어 마시게 하라.    시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손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너의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창조한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짝수와 홀수   무게가 없는 한 마디 말 새 날에 인사를 보내는 돛 달고 날아가는 말 한 마디         아! ----------------   잠 못자서 네 눈자위에 생긴 커다란 쌍꺼풀 네 얼굴은 아직 밤.   ----------------------------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엮은 목걸이가 너의 목구멍에 달려 있다.    -----------------------------------   신문이 떨어지는 동안 너는 새들에게 휩싸인다 -------------   나의 품 속에  y 너의 다리 속에 우리가 있다. 물 속에 물처럼 비밀을 간직한 물처럼   ---------------------   내 손에 너의 두 가슴 다시 계곡을 내려오는 물 ----------------------   한 발코니에서 (부채가) 다른 발코니로 (펼펴진다) 태양이 뛰어나간다 (그리고 닫힌다)   상호보조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 중간에서   발사   생각보다 앞서 말 하나가 튀어나온다 소리보다 앞서 말이 말처럼 뛴다 바람보다 앞서 유황빛 송아지처럼 밤보다 앞서 두개골 속 거리로 사라진다 곳곳에 맹수의 발자취 나무의 얼굴엔 진홍빛 문신 첨탑의 이마에는 얼음 문신 교회의 음부에는 전기 문신 너의 목에도 맹수의 발톱 너의 배에도 맹수의 발 오랑캐빛 상흔 하얗게 될 때까지 돌아가는 해바라기꽃 비명이 터질 때까지, 이제 그만! 할 때까지 해바라기 꽃이 돌아간다 껍질이 벗겨진 비명처럼 너의 피부를 타고 줄줄이 새겨진 이름없는 도장 곳곳마다 눈을 멀게 하는 절규 생각을 덮고 마는 검은 물줄기 나의 이마에서 두들기는 성난 종소리 나의 가슴에 번지는 피의 종소리 탑 맨 꼭대기에서 웃는 영상 하나 말들을 터뜨리는 말 하나 모든 다리를 불지르는 하나의 영상 포옹의 순간 사라져버린 여인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거지 할멈 멍충이 거짓말장이 근친상간을 일삼는 쫓기는 암노루 점장이 거지할멈 삶의 한 가운데서 나를 일깨우는 나를 일깨우는 소녀 하나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은 내게서 태어난다, 나의 그림자에서 나의 피부로 오르며 동이 튼다, 조으르는 듯한 빛의 예명.   사나운 비둘기 너의 이름은 나의 어깨 위에서 마냥 부끄럽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들의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의 음절들,   붉으레한 너의 긴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루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 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눈 앞에 다가온 봄   투명한 보석의 잘 닦여진 광채, 기억을 잃은 석상의 훤칠한 이마: 겨울 하늘, 더욱 깊고 더욱 텅빈 어느 하늘에 되비친 공간.   바다는 거이 숨을 멈춘다, 거이 빛을 감춘다. 빛은 나무들 사이에서 눈을 감는다. 잠든 병사들.그들을 깨우는 것은 짙푸른 깃발을 들고 온 바람.   봄은 바다에서 태어난다, 언덕을 휘덮는다, 육체도 없는 물결은 노란 유칼토스 나무 숲에 가서 부딪기도 하고, 이내 메아리가 되어 평원으로 쏟아진다.   대낮이 눈을 뜨고 철 이른 봄 속으로 헤집고 들어간다. 내 손에 닿은 것은 모두가 날개를 단다. 세상이 온통 날으는 새뿐이다.   새   투명한 고요 속에 한낮이 머물고 있었다; 투명한 공간은 투명한 고요이기도 했다. 하늘의 단단한 빛이 풀잎의 자람을 고요히 잠재우고 있었다. 땅의 벌레들도, 돌들 사이에선 빛이 같아서, 그냥 돌멩이들이었다. 시간은 1분 속에서도 배가 불렀다. 고요한 침묵 속에 한낮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가느다란 화살 하나. 상처난 은빛 가슴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잎사귀들이 움직였다. 풀잎들이 잠을 깼다......... 그 때 나는 죽음이 누가 쏜지 모르는 하나의 화살인 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침묵   음악의 맨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듯이 하나의 음계가 솟아올라 떨리는 동안 커지다가 이내 가늘어진다 다른 음악이 오르면 그 음계는 입을 다물고 침묵의 맨 밑바닥에서 또다른 침묵이 솟아오른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탑이거나 칼 같은 것이 오르다, 커져가다, 머문다. 오르는 동안 또 떨어지는 것은 추억과 희망과, 우리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 소리치려해도 목구멍 끝에서 외침은 사라지고 우리는 수많은 침묵이 입다무는 그곳으로 또 다른 침묵이 되어 튀어나간다   새로운 얼굴   밤은 네 얼굴 위에 수많은 밤을 지운다. 메마른 너의 동공 위에 기름을 붓고 너의 이마 위에 생각을 불태운다. 생각 저편에는 추억만 남는다.   수많은 어둠들이 너를 없애고 또 다른 얼굴을 떠올린다 내 옆에 잠든 네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여기 잠든 건 네가 아니라 지나간 어떤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그 여인은 단지 네가 잠드는 이유가 다시 돌아와 또 다시 나를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었지.   연인들   풀밭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밀감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파도와 파도가 거품을 나누듯이.   해변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레몬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구름과 구름이 거품을 나누듯이.   땅 밑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말이 없다, 입맞춤이 없다 침묵과 침묵을 나눈다.   두 개의 몸뚱아리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파도 같다. 밤은 크낙한 바다.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두 개의 돌멩이 같다. 밤은 그땐 사막.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뿌리같다, 밤에 꽁꽁 얽어맨.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칼 같다. 밤은 번개.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두 개의 별똥별 빈 하늘에 떨어지고 있다.   잠깐 본 세상   바다의 밤 속에 물고기, 아니면 번개, 숲의 밤 속에 새, 아니면 번개.   육체의 밤 속에 뼈는 번개. 오 세상이여, 모든 것은 밤이다 삶은 번개.   흩어진 돌멩이들   1 꽃 외침, 부리, 이빨, 으르렁거리는 소리들, 살기등등한 허무와 그 혼잡도 이 소박한 꽃 앞에선 자취를 감춘다.   2 여인 밤마다 우물로 내려가곤 아침이면 다시 얼굴을 내민다, 품에는 새로운 뱀을 안고,   3 자서전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랬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랬던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이다.   4 밤중에 듣는 종소리 그림자의 물결, 눈먼 파도가 불 타는 이마 위에 밀려온다; 내 사념을 적셔다오, 그리고 아주 불을 꺼버려!   5 문 앞에서 사람들, 말들, 사람들, 잠시 멈칫했지: 문은 위에 있다, 홀로 떠 있는 달 하나.   6 보이는 것   눈을 감자 내가 보였다; 공감, 공간 내가 있고 내가 없는 이곳.   7 풍경 저토록 바쁜 벌레들, 태양빛 말들, 구름빛 당나귀들, 구름은 무게를 잃은 커다란 바위, 산은 내려앉은 하늘, 나무들이 무리져 내려와 골짜기 물을 마신다. 모두들 있다. 행복하게, 저기, 스스로의 분수만큼 행복하게, 우리 앞에, 그런데 우리는 없다 분노와 증오와 사랑에, 마침내 죽음에 송두리채 먹혀버린 우리는 없다.   8 무식장이 하늘을 쳐다보았지. 하늘은 비문이 닳아진 커다란 바위돌, 별들도 한 마디 내게 읽어주질 못했어.   불면의 기록노트   1   시계가 갉아먹는다. 내 심장을, 독수리가 아니다. 쥐다.   2   한 순간의 정점에서 나는 홀로 부르짖었다. 하나 그 순간은 떨어지고 있었다 또다른 순간 속에, 시간도 없는 심연 속에.   3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4 향수  똑같은 푸르름 속에 똑같은 샛별이 반짝이지만 우리는 몰라본다. ......하지만 수탉마다 제 헛간을 노래하는 것을.   그 많은 날들의 하나   태양의 홍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보인다 무게 없는 육체들 두께 없는 땅 우리는 올라가고 있는가 내려가고 있는가?   너의 육체는 금강석 하나 너는 어디 있는가? 너는 너의 육체 속에 묻혔다   이 시간은 조용한 번개. 발톱도 없다 결국 우린 모두 형제들 오늘 우리는 안녕하세요 할 수도 있고 심지어 멕시코인까지 행복해도 좋다 물론 다른 이방인까지도   자동차들은 풀잎이 그립다 집 꼭대기들이 걸어다닌다.                 시간은 멈췄다 두 서너 눈동자가 나를 못잊게 한다 석회빛 남녘의 반짝이는 해변같이 분노빛 바위 사이의 바다같이 분노한 유월, 그 벌떼의 이불같이   태양은 바다의 사자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아                  나를 보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우상이여                    우리를 보라 하늘은 돌며 바뀌어도 항상 똑같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태양과 사람들을 마주하고 나는 홀로 있다 너는 육체였다 너는 빛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날 나는 너를 다른 태양에서 발견했다   하오가 내려온다          산들이 자라난다 오늘은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발을 반쯤 벌리고 앉아 아가씨들이 커피를 마시며 지껄인다 내 책상을 연다           파란 날개로 가득하다 노란 엘레뜨르 꽃으로 가득하다 타자기가 혼자 간다 쉴 새 없이 똑같은 불타는 음절을 써간다 밤은 마천루 뒤에 숨어 있다. 식인종의 포옹의 시간이다 긴 손톱의 밤 기억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분노! 떠나기 전 태양은 모든 보이는 것을 불태운다   시간 자체   바람이 아니다 물이 아니다, 몽유병자 같은 물의 발걸음이 아니다 돌이 된 집들과 나무들 사이를 스쳐가는 붉으스레한 밤을 따라 흐르는 바다가 아니다, 층계를 밟고 올라가는 모든 것은 고요하다                     자연계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건 도시다, 스스로의 그림자에 휩싸여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항상 찾고 있는 스스로의 광대한 어둠 속에 묻혀 한번도 찾지 못한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한번도 스스로를 헤쳐나오지도 못한 도시. 나는 눈을 감는다,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이 켜졌다가 켜졌다가 켜졌다가  이내 꺼져간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더 이상 아는 게 있는가? 벤치에서 노인 한 사람이 혼자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혼자서 말을 할 때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과거는 잊었다              미래는 만져보지도 못할 것이다. 누군지 모른다 밤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일 뿐                          자기 말소리를 혼자 듣고 있다 담장 근처에선 남녀 한 쌍이 포옹을 하고 있다 여자가 웃는다, 뭔가 물어본다 그 물음은 떠올라 높은 곳에서 펼쳐진다 이때 하늘은 주름살 하나 없다 한 나무에서 이파리 세 개가 떨어진다 누군가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맞은편 집 창문 하나에 불이 켜진다 살아 있다는 감각ㅇ느 참 이상하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간다는 것 살아 있다는 비밀을 소리쳐 입증이라도 하듯이   소깔로에는 사람 하나 없는 새벽이 오간다 다만 미치광이 같은 우리의 열정과                                 전철들 따꾸바 따꾸바야 소치밀꼬 산 앙헬 꼬요야깐   밤보다 넓은 광장에 이들 정거장만이 불을 켜고            어딘가 우리를 데려갈 차비를 하고 시간은 있는 대로 넓게 잡고                이 세상의 마지막 끝까지 데려갈 차비를 하고 검은 선들 전차의 우뚝 솟은 가공선 접촉 촉수들만이                      돌 같은 하늘을 찌른다 불똥 튀기는 상투 끝, 불의 혓바닥 밤을 뚫는 화염                 새 새가 날아간다. 물푸레 나무의 칩칩한 그림자 사이로 산 뻬드로에서 미스꼬악까지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비비거리며 나르는 새 푸르뎅뎅한 하늘                젖은 침묵의 두께가 불타는 우리 머리 위를 누르고 있다 우리는 뒤늦게 다가오는 전차를 타고 무너져 내린 탑이 우글대는 빈민촌을 지나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다 돌 자잘, 밭길, 바로 그 길을 웅덩이를 넘고 진흙탕길을 누비며 유월에서 구월까지의 긴 포도를 현관을 지나고 높은 담장, 잠든 꽃밭을 지난다 지금 여기 눈 떠 있는 것은 오직                             하양 파랑 하양 꽃향기      손에 잡히지 않는 꽃가지들 어둠 속에       살아 있는 듯한 가로등 하나 죽은 담장에 기대어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짖는다 밤을 향한 물음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나무숲에 스며들었을 뿐 구름 구름 일어나고 무너지는 구름 구름 무너진 사원 새로운 왕조들 하늘에 떠 있는 암초와 재난들                     위에 뜬 바다는 고원의 구름, 다른 바다는 어디?   눈을 가르치는        구름은 침묵의 건축가 그리고 문득 다짜고짜 금방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눈조각같은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가느른 투명함 너는 말했다       내 그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야 겠어 음절의 성곽을 말이야       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하얀 눈송이 같은        꽃도 없고 향기도 없는 피도 없고 물기도 없는 석고 어디선가 잘려나온 하얀색 그것          목구멍 오직 목구멍만 남은 밑도 끝도 없는 노래  나는 오늘 살아 있다, 별다른 향수도 없이 밤은 흐르고       도시도 흐르고 흐르는 종이 위에 낱 글을 쓴다 흘러가는 말을 타고 나도 흐른다 세상이 나와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죽을 것도 아니다                          나는 생명의 맥박의 강 속의 하나의 맥박 이십 년 전에 바스꼰셀로스가 내게 그러더구먼 그리고 오르떼가 이 가셑은                    로다노 위에 있는 바에서 하더구먼.   나는 사실 시간이나 죽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간이 나를 통해 살도록, 되살아나도록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 오후는 다리 위에서 강물 속으로 태양이 들어간느 것을 보았다 모든 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석상들도 불타고 집들도 문짝들도 불타올랐다 정원에는 여성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열렸다 물빛 햇살의 토막들 태양빛 물그릇들의 신선함 포플러 나무 숲은 무성한 빛살의 축제 하늘 아래, 불붙은 세계 속에 물은 수평선처럼 꼼짝않고 서있었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고정된 눈동자 그 크막한 아름다움의 무게는 열려진 동공마다 반짝였다 시간의 줄기 끝에                머물고 있는 현실 아름다움은 무게가 없다               시간과 아름다움은 고요한 반영일 뿐 모두가 한가지다                 빛도 물도   아름다움을 받들고 있는 눈길 눈길 속에 황홀한 시간 무게를 잃은 세계               사람이 무게가 있다면 아름다움의 무게 이외 더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남는 것뿐이다.                       충분한 게 아니다 무지는 아름다움처럼 어렵다 언젠가 내 조금 더 모르게 되는 날 나는 눈을 뜨리라 어쩌면 시간은 무겁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건 시간의 영상이다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현제가 돌아온다 이 삶에는 또다른 삶이 없다 저 무화과 나무도 오늘 밤 다시 오리라 오늘 밤 또 다른 밤들도 돌아오리라   글을 쓰면서 나는 강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강이 아니라          저 강이 바로 이 강이다 순간과 영상이 맞부딪는 곳 앵무새 하나 잿빛 돌 위에 있다 삼월 어느 청명한 날                   까망은 맑음의 한 가운데 있다 올 것 같은 황홀의 순간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현실 더없는 현재           더 없이 가득하고 충일한 것 기억이 아니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원하지 않았던 것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시간 항상 다른 시간이면서 같은 시간이 들어와서 우리를 우리로부터 몰아낸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눈이 보지 못한다 시간 속에 또 다른 시간이 있다 시간도 무게도 그림자도 없는                             고요한 시간 과거나 미래도 없는                        살아 있기만 하는 벤치에 앉은 노인처럼 하나가 된 똑같은 영원한 시간 우리는 결코 볼 수는 없다               투명할 뿐        마이투나   나의 눈이 너를 벗긴다 벌거숭이로        그리고 이내 너를 덮는다 뜨거운 빗줄기 눈길 세례   소리가 갇힌 새장이                열린다   찬연한 아침         새하얗게 너의 허벅지보다 새하얗게         한밤중에 너의 웃음 아니, 차라리 너의 짙푸른 잎사귀 너의 달빛 속옷이           침대에서 펄럭일 때 곱게 쏟아지는 달빛           노래하는 소용돌이가 흰 실 꾸러미를 감는다            산골짜기에 심은 풍차의 날개              너의 밤 속       나의 대낮이 폭발한다       너의 탄성이 파편이 되어 튄다               밤이 너의 몸을 풀어 흩뜨린다  썰물 너의 흩어진 몸뚱아리들이 되모아진다  다시 너의 몸이 탄생한다   수직의 시간         가뭄이 거울 달린 바퀴를 돌린다 칼들이 피어난 정원               협잡의 축제 그 번뜩이는 눈길 사이로                너는 상처 하나 없이   들어선다         내 손의 강물로   신열보다 빠르게 너는 어둠 속에서 헤엄친다                     너의 그림자가 더욱 밝아온다 애무 속에서         너의 몸뚱아리는 더욱 검다 예측할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네가 뛰어넘는다 어떻게 언제 그게 그런 거야  
303    동시를 잡아라 / 글쓴이 / 동시를 잡아라 [스크랩] 댓글:  조회:226  추천:0  2018-07-11
동시를 잡아라 글쓴이 동시를 잡아라  풀잎에 파란 색이 있듯이/ 풀에는/ 풀로 된 시가 숨었다.//  도랑물에 졸졸졸/ 소리나듯/ 물 속에는/ 물로 된 시가 숨었다.//  꽃 속에/ 향기론 냄새가 있듯/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숨었다.//  아이들아/ 너희 눈으로/ 풀잎의 시를 찾아내어라.//  너희 귀로/ 물속의 시를 소리 들어라.// 꽃 속의 시를/ 냄새 맡아라.//  아이들아/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  -신현득 「시를 잡아라」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설레요.//  내가 어릴 때도 그랬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예요./  쉰 살, 예순 살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을 거예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하루하루가/ 자연 속에서 늘 함께 있고 싶어요.  -윌리엄 워즈워드 「무지개」  1. 가까운 것들부터 관심을 갖자  나를 처음 본 게 정확히 목요일이었는지 금요일이었는지, 그때 귀걸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전화 걸 때 처음에 여보세요 하는지 죄송합니다만 그러는지,  같이 걷던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여섯 개인지 일곱 개인지, 그때 우리를 조용히 따르던 하늘의 달은 초승달인지 보름달인지,  우리 동네 목욕탕 정기 휴일이 첫째 셋째 수요일인지 아니면 둘째 넷째 수요일인지,  지난겨울에 내가 즐겨 끼던 장갑은 보라색인지 분홍색인지, 그게 벙어리장갑인지 손가락장갑인지,  내 새끼손가락엔 매니큐어를 칠했는지 봉숭아물을 들였는지,  커피는 설탕 두 스푼에 프림 한 스푼인지 설탕 하나에 프림 둘인지,  동화 보물섬 해적 선장 애꾸눈 잭은 안대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만화 주인공 영심이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  고깃집에서 내가 쌈을 먹을 때 쌈장을 바르고 고기를 얹는지 아니면 고기부터 얹고 쌈장을 바르는지…….  -노영심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  선생님이 시를 지어보라고/ 글 제목으로/ ‘정거장, 개구리……’를 냈다.//  기차 정거장은 무슨 역,/ 자동차 정거장은 무슨 터미널․정류소/ 배 정거장은 무슨 항구 등/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일 것이고,//  개구리는 으레껏 개골개골/ 이렇게 쓰리라고/ 선생님은 생각했지만,//  제비 정거장은 전깃줄이고/ 갈매기 정거장은 고깃배라 쓰고,/ 해질녘에 개구리는/ 숙제해서/ 엄마의 칭찬 받으러/ 제 집으로 간다고 썼다.//  선생님은 아이들보다/ 생각이 모자라서/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김상문 「시 공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이 할 때/ 보물을 감춰 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뭇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허영자 「행복」  2. 보거나 들은 것, 한 일을 그대로 써 보자  우리 아버지는/ 신문 볼 때/ “신문 걸어와”/ 하고 말합니다.//  담배 피울 때/ “담배, 혼자서/ 걸어와”/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가지러 갑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 작품 「우리 아버지」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박두진 「돌아오는 길」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불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고재종 「파안」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숙제는 했니?//  당근도 안 먹어요./ 일기부터 써라.  -김미혜 「말이 안 통해」  사과 껍질/ 벗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피는/ 조금 나지만/ 겁은/ 더 난다.//  울까/ 말까/ 피가 괸다// 울까/ 말까/ 울까/ 새빨간 핏방울!//  그런데 그런데―// 울래도/ 집에는/ 아무도 없다.//  ―이종택 「울까 말까」  그렇게 만날/ 친구랑 싸움이나 하고/ 약속도 안 지키는 너,/ 거기다 목소리는 커서/ 시끄럽기만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걱정 마세요 엄마/ 저, 국회의원 될래요.  -박혜선 「장래 희망」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아,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물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 저녁 할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머리털이 허이언/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조려/ 두고두고 밥반찬으로 하기도 했다.  -장만영 「감자」  참새는/ 혼자서 놀지 않는다/ 모여서 논다//  전깃줄에도/ 여럿이/ 날아가 앉고/ 풀숲으로도/ 떼를 지어/ 몰려간다//  누가 쫓아도/ 참새는/ 혼자서 피하지 않는다//  친구들하고/ 같이/ 날아간다  -안도현 「참새들」  대구 대구 대구/ 아이구 시원테이.// 전주 저언주/ 거그 거그/ 어이 시원혀.//  서어울 서울/ 그래그래/ 아이 시원해.//  부산 부산 부산/ 거어 쫌 글거바라./ 부산은 옆구리니까/ 할아버지가 긁어요.  -김하늘 「할아버지 등 긁기」  아버지께서 집에 오시자/ 맨 처음 하시는 일이/ 양말을 벗어/ 목욕탕에 던지시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일찍 집에 오신 아버지는/ 양말도 안 벗으시고/ 낮잠을 주무신다.//  스르르 감으셨다 뜨셨다 하는/ 아버지의/ 힘없는 눈빛!//  참/ 피곤하신 모습이다./ 이때, 파리 한 마리/ 아버지의 얼굴 위를 맴돈다.//  나는 몇 번 손으로 쫓다가/ 살며시 방문을 열고/ 그 파리를 데리고/ 청마루로 나간다.//  ―이종택 「파리 한 마리」  줄은/ 기러기 줄./ 아이들이 갑니다./ 저수지 말라버린 하얀 바닥을/ 콩 콩/ 새 길을 내며 갑니다.//  ―하마 오리는 가차와졌제?/ ―앙이다. 십리는 가차와졌다.//  내도 마르고/ 들도 마르고/ 저수지 스무길도 말랐습니다.//  ―작두만한 잉어도 살았다는데/ ―멍석만한 자라도 살았다는데//  오늘 넷째 시간 국어 공부는/ 을 배웠습니다./ 책을 펴 놓고,/ 책을 펴 놓고,/ 한 사람도 읽지는 못 했습니다.//  ―돌이야, 와 손 안들었노?/ ―순이 너는 와 안들었노?//  / 선생님도 예까지 읽으시고는/ 말없이 그냥 나가셨습니다.//  ―우리 선생님 와 나가셨노?/ ―선생님도 목이 맨기라.//  들도 마르고/ 내도 마르고/ 저수지 스무길도 말랐습니다.//  ―작두만한 잉어도 살았다는데/ ―멍석만한 자라도 살았다는데.//  -이문석 「가뭄」  어머니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그것을 주워드신다/ 내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다시 그것을 주워드신다/ 내가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수저의 개수만큼/ 허리를 굽히시는 어머니  -이선영 「수저와 어머니」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 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김영승 「반성 100」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장편(掌篇)」  강아지가 남긴/ 밥은// 참새가 와서/ 먹고,//  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 쥐가 와서/ 먹고,//  쥐가 먹고 남긴/ 밥은// 개미가 물고 간다./ 쏠 쏠 쏠/ 물고 간다.  -이상교 「남긴 밥」  벼룩을 눌러 죽이며/ 입으로는 말하네/ ‘나무아미타불!’  -이싸 하이쿠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푸득푸득/ 구겨진 잎을 편다.  -권영상 「들풀」  엄만 옛날에/ 무엇이 되고 싶었나요?//  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엄만, 지금이/ 너무 좋단다.//  우리 예쁜/ 연이 엄마 됐으니까.  -이혜영 「엄마의 대답」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하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임길택 「흔들리는 마음」  콩 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김용택 「콩, 너는 죽었다」  감꽃 피면 감꽃 냄새/ 밤꽃 피면 밤꽃 냄새/ 누가 누가 방귀 뀌었냐/ 방귀 냄새  -김용택 「우리 교실」  엄마는 아침밥 해먹고 설거지하고/ 방 청소하고 빨래해서 걸어두고/  마당에다가 고추 널고 또 고추 따러 간다/  얼굴이 발갛게 땀을 흘리며/ 하루 종일 고추를 딴다/  해 지면 집에 와서 고추 담고/ 저녁밥 해먹고 설거지하고/  고추를 방에다 부어놓고/ 고추를 가린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가리며/ 꾸벅꾸벅 존다/ 우리 엄마는 진짜 애쓴다  -김용택 「엄마는 진짜 애쓴다」  아버지 밥상 펴시면/ 어머니 밥 푸시고/ 아버지 밥상 치우면/ 어머니 설거지 하시고/  아버지 괭이 들고 나가시면/ 어머니 호미 들고 나가시고/ 아버지가 산밭에 옥수수 심자 하면/ 옥수수 심고//  어머니가 골짝밭에 감자 심자 하면/ 감자 심고/  고무신 두 짝처럼/ 나란히 나가셨다가/ 나란히 들어오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서정홍 「고무신 두 짝처럼」  어머니는/ 연속극 보다가도 울고/ 뉴스를 듣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고//  가끔 말 안 듣고/ 속을 태우는/ 형과 나 때문에 울고//  자주 술 마시고/ 큰소리치는/ 아버지 때문에 울고//  어머니는/ 어머니 때문에 울지 않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웁니다.  -서정홍 「어머니」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니나니/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윤석중 「넉 점 반」  내 생일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어요./ 내 동생에게 비밀이 하나 있었던 거예요./  동생은 그 비밀을 며칠이고 계속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비밀에 대해 물으면 자그맣게 노래를 부르며 딴청을 피울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 비가 왔어요./ 잠에서 깨어나 보니 동생이 울고 있는 거예요./  동생이 나에게 말하더군요./  “누나, 정원에 내가 설탕 두 덩어리를 심어 놓았거든./ 누나가 설탕을 끔찍이 좋아하니까./  누나 생일이 되면 설탕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두 녹아 없어졌을 거야.”/  아이 참, 예쁜 내 동생!  -캐서린 맨스필드 「동생의 비밀」  눈으로 먼지가 들어갔다./ 암만 비벼도 안 나온다.//  뒷담에 기대섰더니/ 옆집 아저씨 하는 소리,/ “얘, 아빠한테 꾸중 들었니?”//  큰길로 나왔더니/ 앞집 누나 하는 소리,/ “얘, 어떤놈이 때렸니?”//  아무도 모르는 눈 속의 먼지/ 암만 비벼도 안 나온다.  -사이조 야소 「먼지」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영감님을 만났네./  “어른 앞에서 뒷짐을 지다니/ 허, 그놈 버릇없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뒷집 애를 만났네./  “얘, 먹을 거냐/ 나 좀 다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삽살이를 만났네./  “뒤에 든 게 돌멩이지./ 달아나자 달아나.”  -윤석중 「흙손」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들판으로 나가던 언니가 보고/  “얘, 너 선생님께/ 걱정 들었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동네 샘 앞에서 누나가 보고/  “얘, 너 동무하고/ 쌈했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삽작문 밖에서 아버지가 보고/  “얘, 너 어디가/ 아픈가 보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붴에서 밥 짓던 어머니가 보고/  “얘, 너 몹시도/ 시장한가 보구나.”  -권태응 「고개 숙이고 오니까」  추운 날/ 대문 앞에 서 있으면요,//  지나가던 아저씨가/ ―엄마를 기다리니? 발 시리겠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원 저런, 감기 걸리겠다. 집에 들어가거라.//  지나가던 강아지가/ ―야단맞고 쫓겨났군, 안 됐다, 컹컹//  대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내 마음/ 알지도 못하고…….//  코를 잡고 뱅, 뱅 돌고 싶은 팽이가/ 내 주머니 속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이준관 「추운 날」  3. 보거나 듣거나 한 일에 생각을 더해 보자  덕수궁 뒷담 벽에/ 몇 개의 낙서 그림이 있다/ 아이와 손 두 개/ 나무 한 그루 또 아이 얼굴 하나/ 고궁의 담벽에 낙서하는 건/ 나쁜 일인 줄 알 텐데/ 얼마나 심심한 아이가/ 제 모습을 그리다 갔을까/ 이 봄이 오고 벌써 두 번째/ 이곳을 찾아온 내 맘속에 그려져 있다/ 일요일 덕수궁 뒤뜰에 혼자서/ 난 자꾸 그 아이와 친하고 싶다.  -유경환 「일요일에 만나고 싶은 아이」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떡볶이, 참 맛있겠다!’//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팥빵, 참 맛있겠다!’//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통만두, 참 맛있겠다!’//  학원 갔다 돌아오는 늦은 저녁 길/ 침이나 꿀꺽꿀꺽./ 이러다 내 인생,/ 다 끝나겠다!  -이상교 「내 인생」  바삭바삭/ 붕어빵// 매일/ 학교 담벼락 옆/ 붕어빵을 굽던 아저씨//  감기라도 걸린 걸까?// 친구 옆에서/ 덤으로 얻어먹던 붕어빵//  오늘은 꼭 하나/ 사 먹으려 했는데…….  -최윤정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졌어.// 책가방 속에 따라온/ 너의 지우개.  =최윤정 「짝」  “한라산 한 갑 주세요.”//  귀찮은 마음을/ 아버지 좋아하는 한라산으로/ 꾹꾹 누르며/ 집 앞에 도착하는 잠깐 사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제일 높은 산 이름/ 우리의 제일 오랜 산 이름/ 백두산,/ 왜 백두산 담배는 없을까?//  이제 다섯 살/ 내 동생 새롬이/ 내게서 담배 심부름/ 물려받을 때쯤이면/ 서울에서/ 평양에서/ 이런 소리 들려올까?//  “백두산 한 갑 주세요.”/ “통일 한 갑 주세요.”  -남호섭 「담배 심부름」  소가 혀를 내밀었다./ 아주 길었다./ 사람한테/ 소 같은 혀가 있다면/ 급식 먹을 때도/ 우스워서 우스워서/ 견딜 수 없을 게다.//  -초등학교 1학년생 작품 「소의 혀」  날씨가 좋아 뜰에 나가니/ 개미가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볼록렌즈를 꺼내어/ 개미한테 빛을 쬐었다./ 개미는 어디까지나 달아났다./ 왜 그럴까?/ 빛에다 손을 대니 뜨거웠다./ 미안 미안/ 난 몰랐단다.//  ―초등학교 3학년생 작품 「개미야, 미안하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3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와! 이제야/ 숙제 다 했네/ 일기 다 썼네/ 이젠 편안히/ 꿈나라로 갈 시간//  오늘도 내 곁에서/ 힘들게 굴던/ + - × ÷ 수학책/ a b c d 영어책,//  컴퓨터 게임 그만 해라/ 공부 좀 해라 하시던/ 아빠 엄마 말씀,/ 이젠 안녕!//  더 이상 날 따라오지 마세요/ 꿈나라에서만은 싫어요/ 아셨죠!/ 그럼, 안녕!  -권오삼 「이곳만은 안 돼요」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가/ 6kg이나 불었다./ 일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터서/ 큰 나무로 자랄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김종상 「땅덩이 무게」  잔디 사이 씀바귀를/ 잡초라 하면/ 씀바귀는 잔디를 잡초라 하지/ 잔디도 풀이고 씀바귀도 풀인데/ 잔디는 밟지 말라 하고/ 씀바귀는 뽑아라 하시니/ 선생님도 참.//  가을 햇살이/ 자박자박 밟고 다니게/ 바람도 심심하면/ 몰고 다니게/ 이른 새벽 안개비에  낙엽이 곱게곱게 내렸는데/ 날마다 주워서 태우라고 하시니/ 선생님도 참.//  교실에 뽑혀 온/ 들찔레 열매/ 산새랑 들풀이랑/ 친구가 그리워/ 밤마다 빨간 볼에 눈물짓는데/ 산자락에 가만 놔두지/ 선생님도 참.//  -이정숙 「선생님도 참」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 동생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울리지 말고/ 잘 데리고 놀랬는데//  이 말썽꾸러기/ 찾기만 해봐 가만 놔두나//  어디로 갔는지/ 손바닥에 침을 뱉어 / 점을 쳐 보았다//  침이/ 사방으로 튀는 걸 보니/ 온 동네 다 돌아다니나 보다.  -신천희 「점치기」  아직,/ 신호등은/ 빨간 불인데//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그냥/ 길을 건넌다.//  “안 돼, 건너지 마!”/ 얘기해 줄/ 엄마도 없나 보다.  -최윤정 「그 강아지는」  유리접시의 물속에서/ 플라나리아 한 마리가 허리를 잘립니다./ 유유히 헤엄치다가/ 날카로운 면도날에 둘로 잘리니/ 바닥에 붙어 꼼짝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죽을 거라고 하고/ 머리가 있는 쪽만 살 거라고도 하고/ 둘 다 살 거라고도 했지만/ 나는 다시 붙을 거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과학실에 가보니/ 그놈들은 두 마리가 되어 꼬무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놈들은 본디 한몸인 줄 모르는지/ 제각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생명력이냐고/ 선생님은 감탄하셨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도/ 잃어버린 반쪽을 찾을 생각도 않는/ 바보 같은 벌레라/ 개울 바닥 돌 밑에서/ 햇빛을 피해 살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서로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따로따로 꿈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고흥수 「플라나리아」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어 주실 때마다/ 할머니도/ 아―/ 아―/ 입을 크게 벌리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릴 때마다/ 할머니도/ 내 동생을 따라/ 입을 우물우물하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윤동재 「할머니 입」  아이들은 나를/ ‘은영 세탁소’라고 부른다.//  이젠 괜찮지만/ 그래 괜찮지만// 내 이름을 간판에 걸고/ 일해 오신 아버지처럼//  나도 정말 남들을/ 깨끗하게 빨아 주고// 남들의 구겨진 곳/ 곧게 펴 주고 싶다.//  아버지의 주름살을 제일 먼저/ 펴 드리고 싶다.  -남호섭 「은영 세탁소」  방문을 열면/ 닭들이 나란히 서서/ 나를 지켜본다.//  울타리로 다가가면/ 쪼루루루 몰려나와서/ 고개를 갸웃거려//  혹시 모이 줄까 하고//  그런데 모이 안 주고/ 달걀만 꺼낼 올 땐/ 정말 미안하다.  -김은영 「닭들에게 미안해」  저기/ 포크레인 덜컹거리는/ 숲에는/  소쩍새 부엉이 비둘기 꿩 지빠귀 꾀꼬리 솔새 휘파람새 까치 까마귀 할미새 다람쥐 산토끼 들고양이 청설모 너구리 오소리 고라니 꽃뱀 구렁이 족제비 멧돼지 산나리 원추리 둥글레 고사리 취 으아리 두릅 잔대 더덕 머루 다래 칡 잣 솔방울 두메부추 소나무 잣나무 옻나무 참나무 밤나무 엄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영지버섯 국수버섯 싸리버섯 밤나무버섯 독버섯 진달래 철쭉꽃 찔레꽃 제비꽃 할미꽃 조팝꽃 싸리꽃 산나리 물봉숭아 엉겅퀴 패랭이꽃 산도라지 달맞이꽃 솔이끼 돌멩이 바위 개미떼 벌 나비 개구리 옹달샘 골짜기 바람소리 물소리 가을단풍 겨울눈꽃 오솔길  숲 하나에는/ 내가 아는 것만도 이렇게 많은데/ 너도 아는 것 동그라미 쳐가며 읽어보고/  내가 모르는 것도 써 주렴//  숲 하나/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마는데/ 숲 하나에 있던 모든 것들/ 다만 이름이라도 남겨 놓아야 하지 않겠니.  -김은영 「숲 하나」  소설가 박범신 선배 말에 따르면/ 중국 연변 땅에 가면/ ‘첫날 이불’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혼수품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집의 분홍이불 한 채 같이 덮고 자면/ 누구나 착한 짐승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찬란한 날이 올 때까지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눈비 오듯 해야겠지요  -안도현 「첫날 이불」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함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이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복효근 「쟁반탑」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 6kg이나 불었다./ 일 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터서/ 큰 나무로 자라날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김종상 「땅덩이 무게」  엄마가 사 온/ 굴비 한 두름// 몸은 꽁꽁 묶여 있어도/ 입은 쩍쩍 벌리고 있다//  고만고만한 게/ 분명 친구들이다// 그물에 걸린 그 때/ 바다 학교/ 음악 시간이었을까?//  아니 그런데/ 넌 뭐야?/ 입 꼭 다물고 있는/ 너!//  아, 친구들 다함께 노래 부를 때/ 넌 창 밖 내다보며/ 딴생각 하고 있었구나!//  그러다 덜컥/ 그물에 걸렸구나!  -한상순 「굴비」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띠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4. 사물의 모습(전, 지금, 미래)과 본질을 보자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감자꽃」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하이쿠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최계락 「꽃씨」  알 여섯 알/ 앵무새 둥지 속에/ 이마를 맞대고//  여섯 알 새알에 귀 기울이면/ 꿈꾸는 즐거움으로 소란하다/ 늪과 고원을 높이 날, 뒷날.//  그 꿈은 노래/ 소란스런 합창/ 알 속에 담긴 것.  -칼 샌드버어그 「앵무새 알 여섯 개」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소세키 하이쿠  노랑나비가 되어/ 꽃밭을 가로질러도/ 날,/ 징그럽다고 할까//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옮겨 주어/ 풍작이 들어도/ 날, 배추 몇 잎 갉아먹는다고/ 죽일까?  -김원석 「배추벌레」  연필은/ 산 그릴 때/ 쓱쓱 잘 그려요.// 연필은/ 새 그릴 때/ 쓱쓱 신이 나요.//  연필은/ 나무가 엄마거든요./ 숲이 고향이거든요.  -손동연 「연필이 신날 때」  5. 나만의 별명을 붙여 주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장 콕도 「귀」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아 놓은 꽃게들.  -이정석 「어린이」  봄비 오는/ 하늘은/ 물뿌리개지.// 땅 속의/ 씨앗만큼/ 꼭 그 수만큼,//  갖가지/ 씨앗만큼/ 꼭 그 크기만큼,// 뚫린 물구멍./ 고른 물구멍.//  ―김용섭 「물뿌리개 하늘」  바람은 물살/ 나뭇잎은 물고기//  물살이 일자/ 물고기들이 파들파들/  엄마 나무에 매달려 파들파들/ 엄마한테서 떨어져 나가게 될까 봐, 파들파들  -이상교 「바람 부는 날」  한겨울/ 잎 다 떨어진 아기나무에/ 참새 여덟 마리가 앉았다.//  한 마리가 뚝 떨어지더니/ 윗가지에 가 붙었다.//  두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한 마리는 땅에 떨어지고/ 한 마리는 꼭대기에 가 붙었다.//  우르르/ 다 떨어지더니/ 나무 한 바퀴 돌아/ 아까보다 더 예쁘게 달렸다.  -이복자 「참새 나무」  으르렁 드르렁/ 드르르르 푸우―//  아버지 콧속에서/ 사자 한 마리/ 울부짖고 있다.//  생쥐처럼 살금살금/ 양말을 벗겨 드렸다.  -김은영 「잠자는 사자」  광릉 숲에 들어서면/ 푸른 갑옷을 두르고/ 팔도강산에서 모여든/ 어기찬 아저씨들을 만난다.//  임꺽정의 팔뚝 같은 나무,/ 김정호의 다리 같은 나무,/ 활대 잡은 충무공처럼 훤칠한 나무.//  임진왜란의 의병들이 튀어나오고/ 동학의 장정들이 걸어 나오고/ 솔잎 수염이 따끔따끔 침을 찌르던/ 청산리 싸움의 독립군들을 만난다.//  바람을 맞으면 더 푸른 나무,/ 눈보라 휘몰아치면 더 곧게 서서/ 파리 부는 나무.//  광릉 숲에 들어서면/ 웃자란 내 몸도/ 한 그루 옹이 박힌 나무가 된다.  -서재환 「광릉 숲에서」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  오빠의 일선 고지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오빠 대신/ 무거워 주고 싶다.//  시집 간 언니 집에서/ 물동이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그 무게는 무게대로/ 바람이 된다./ 동생이 골목에서 울고 와도/ 그것이 엄마에겐/ 바람이 된다.//  뼈마디를 에는 섣달 어느 밤/ 엄마는 오빠 대신 추워 주고 싶다.//  그런 맘은 모두/ 폭풍이 된다.//  엄마라는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신현득 「엄마라는 나무」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줄을 선 글자들은/ 싱싱한 보리숲,/ 땀 젖은 흙 냄새/ 엄마 목소리.  -김종상 「어머니」  별을 보았다.// 깊은 밤/ 혼자/ 바라보는 별 하나.//  저 별은/ 하늘 아이들이/ 사는 집의/ 쬐그만/ 초인종.// 문득/ 가만히/ 누르고 싶었다.  - 이준관 「별 하나」  들길 위에 혼자 앉은/ 민들레./ 그 옆에 또 혼자 앉은/ 제비꽃.// 그것은/ 디딤돌.//  나비 혼자/ 딛/ 고/ 가/ 는// 봄의/ 디딤돌.  -이준관 「나비」  봄이/ 찍어 낸/ 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손동연 「나비」  내 얼굴은/ 답안지// 엄마가 읽는/ 답안지//  엄마!/ 오늘은 읽지 마세요// 터질지도 몰라요/ 내 울음보//  읽었더라도/ 모른 척해 주세요.  -유희윤 「시험 본 날」  “금방 가야 할 걸/ 뭐 하러 내려왔니?”// 우리 엄마는//  시골에 홀로 계신/ 외할머니의 봄눈입니다.// 눈물 글썽한 봄눈입니다.  -유희윤 「봄눈」  흰구름 건져 먹고/ 별 건져 먹고/ 새하얀 꽃이 된다./ 연꽃이 된다.//  갈대숲에도 한 송이/ 조으는 듯 동동/ 바위그늘에도 한 송이/ 꿈꾸는 듯 동동//  흰구름 건져 먹고/ 달 건져 먹고/ 떠다니는 꽃이 된다./ 연꽃이 된다.  -이동운 「고니」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 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 움이 트려나 봐요.  -신형건 「봄날」  마침표/ 아름다운 시작이다.//  시든 꽃이 떨군/ 마침표/ 까만 씨앗/ 꽃이 태어난다.//  돋보기로 모은/ 해님의 마침표/ 까만 점에서/ 다시 해님이 뜬다.  -김숙분 「마침표」  나무는/ 청진기// 새들이/ 귀에/ 꽂고/ 기관지가/ 나쁜// 지구의 숨결을 듣는다.  -정운모 「나무」  소말리아 아이들 다리는/ 겨울나무 가지./ 우리 반 친구 진철이, 용만이 다리는/ 여름나무 가지.//  소말리아 아이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지만/ 우리 반 친구들/ 핫도그, 만두, 떡볶이 보이는 대로/ 다 사 먹고는/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군것질 꾹 참고 돌아온 나도/ 덩달아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많이 먹고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내 친구 닮을까봐/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서정홍 「윗몸일으키기」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가가/ 의자 몇 개 내놓은 거여  -이정록 「의자」  6. 재미있는 특징(모습, 행동, 소리 등)을 발견하자  가갸 거겨/ 거겨고교/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한하운 「개구리」  저런,/ 등에/ 혹이/ 두 개씩이나?// 사막을 터벅터벅/ 무겁겠다, 얘//  아니야,/ 이건/ 내/ 도시락인걸!// 타박타박 사막이/ 즐겁단다, 얘//  ―손동연 「낙타」  코끼리야 코끼리야/ 네 그림을 그리는데/ 코가 어찌나 긴지/ 금방 도화지 밖으로/ 달아나 버리지 뭐니//  얼른/ 도르르 말아 줘//  ―손동연 「코끼리」  코끼리는 무엇이든지 귀찮다./ 커다란 몸뚱이를 하고서/ 먹을 것을 가지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저리 긴 코로 잡는다.//  ―초등학교 2학년생 작품 「코끼리」  소가/ 아기염소에게 그랬대요./ “쬐그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그 뿔은 뭐람?”//  그러자/ 아기염소가 뭐랬게요?/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하게?”//  ―손동연 「소와 염소」  기린은/ 하루에/ 한 끼씩만 먹어도 될 거야//  목/ 이/ 길/ 어/ 서//  뱃속까지/ 가는 데도/ 하루가 다 걸릴 테니까//  ―손동연 「기린」  7.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주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로 대답하며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 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 물방울도 처음이다  -정현종 「물방울- 말」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서정주 「춘향유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별은/ 별자리/ 제자리를 지켜요.// 하루 내내,/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심심할 거예요./ 그러니 가끔씩/ 자리를 바꿔 주세요./ 우리 선생님처럼요.//  그래야 별들도/ 새 친구를 만날 수 있잖아요./ 사귈 수 있잖아요./ 네, 하느님.  -손동연「별도 가끔 자리를 바꾸면 얼마나 신날까」  꽃게야, 꽃게야// 튼튼한 네 집게/ 잠깐만 빌려 줄래?//  동전만 집어삼키는/ 인형뽑기통에서// 내 맘에 쏙 드는 인형 좀 뽑아 보게……  -이봉직 「꽃게야, 꽃게야」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 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 보고 싶다./ 걸어 보고 싶다.  - 이준관 「길을 가다」  아직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송아지에게/ 아이가 먹을 것을 한 주먹 쥐고/  어서 먹어, 어서 먹어, 하고/ 먹을 것을 준다.//  아직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송아지가/ 아이의 손바닥에 있는 것을 다 먹고 나서/  아이의 손바닥을 귀여운 혀로 간질이며/ 간지럽니?/ 이 간지럼밖에는 네게 줄 게 없구나./  그래도 괜찮니?  -이준관 「그래도 괜찮니?」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산은/ 숲은 품고// 숲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둥지를 품고// 둥지는/ 새를 품고//  새는 새는// 노래로/ 온 산을 품고.  -김용섭 「산」  물이/ 산을 안고 돈다/ 산은 나무를 안고/ 나무는 새들을 안고//  아빠 엄마는/ 나를 안고 간다/ 나는 풀꽃을 안고/ 풀꽃은 개미를 안고//  우리는 모두가 서로서로 안고 산다.  -이성자 「우리는 서로 안고 산다」  8. ‘왜?’라는 의문에 ‘아하!’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주자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提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수하시진(大同江水何時盡)/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정지상 「송인(送人)」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에 났다니  -성삼문(成三問)  주려 죽으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었거니  헌마 고사리를 먹으려 캐었으랴  물성(物性)이 굽은 줄 미워 펴보려고 캠이라  -주의식(朱義植)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동안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선설」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반칠환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윤석중 「먼 길」  종일 헤매어/ 지친 애버러지/ 떨어져 시든 꽃잎 위에 엎드리니/  내일 떨어질 꽃잎 하나가/ 보다 못해/ 미리 떨어져 이불 덮어주는/ 저녁답.  -유안진 「자비로움」  옆집 아이가/ 화경으로/ 개미를 쪼이고 있다.// ( ).  -김영일 「( )」  키가 너무 높으면/ 까마귀 떼 날아와 따먹을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키가 너무 높으면/ 아기들 올라가다 떨어질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권태응 「땅감나무」  비가/ 그렇게 내리고// 눈이/ 그렇게 내리고//  또, 강물이/ 그렇게 흘러 들어가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건//  //  -박병엽 「바다」  넘어가는 해/ 잠깐 붙잡고,/ 노을이/ 아랫마을을/ 내려다본다.//  새들/ 둥우리에 들었는지,/ 들짐승/ 제 집에 돌아갔는지,/ 잠자리/ 쉴 곳을 찾았는지,//  산밭에서 수수가/ 머리를 끄덕여 줄 때까지/ 노을은/ 산마을에 머무르고 있다.//  -황베드로 「노을」  내가 복도에서 뛰는 건/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가벼운 걸음이/ 잰걸음이 되고/ 잰걸음으로 걷다 보면/ 복도 끝이 백 미터 결승선처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뛰다가도/ 멈추지 않는 건/ 차도처럼 반듯한 보도에/  좌측통행만 있고/ 신호등이 없기 때문이다  -김은영 「복도에서 뛰는 이유」  조그만 몸에/ 노오란 털옷을 입은 게/ 참 귀엽다.//  병아리 엄마는/ 아기들 옷을/ 잘도 지어 입혔네.//  파란 풀밭에 나가 놀 때/ 엄마 눈에 잘 띄라고/ 노란 옷을 지어 입혔나 봐.//  길에 나서도/ 옷이 촌스럴까 봐// 그 귀여운 것들을/ 멀리서/ 꼬꼬꼬꼬/ 달음질시켜 본다.  -엄기원 「병아리」  비는 아프다./ 맨땅에 떨어질 때가/ 가장 아프다.//  그렇다./ 맨땅에 풀이 돋는 것은/ 떨/ 어/ 지/ 는/ 비를/ 사뿐히 받아 주기 위해서다.//  아픔에 떠는 / 비의 등을 가만히/ 받혀 주기 위해서다.//  -이준관 「비」  봄 하늘 구름은/ 빨리/ 봄비가 되고 싶다.//  땅 속/ 촉촉이 젖어들고 싶다./ 바위 틈/ 촉촉이 스며들고 싶다.//  흙 속/ 여기저기 묻힌/ 바윗돌 이 틈 저 틈 끼인/  지금 막 눈 뜰/ 이름 모르는/ 풀씨를 위해.//  -이창건 「풀씨를 위해」  꽃이/ 예쁘지 않는 일은 없다./ 열매가/ 소중하지 않는 일도 없다.//  하나의 열매를 위하여/ 열 개의 꽃잎이 힘을 모으고/ 스무 개의 잎사귀들은/ 응원을 보내고//  그런 다음에야/ 가을은 / 우리 눈에 보이면서/ 여물어 간다.//  가을이/ 몸조심하는 것은/ 열매 때문이다./ 소중한 씨앗을 품었기 때문이다.//  -정두리 「가을은」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 )  -이싸 하이쿠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마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하이쿠  하얀 페인트로 담벼락을 새로 칠했어./ 큼직하게 써놓은 ‘석이는 바보’를 지우고/  ‘오줌싸개 승호’ 위에도 쓱쓱 문지르고/ 지저분한 낙서들을 신나게, 신나게 지우다가/  멈칫 멈추고 말았어./  담벼락 한 귀퉁이, 그 많은 낙서들 틈에/ 이런 낙서가 끼어 있었거든./  -신형건 「낙서」  어제 저녁에 난/ 늦잠 자는/ 게으름뱅이 별들을/ 찾아다녔어.//  고롱고롱 코고는/ 고 녀석들 몰래/ 옷에 달린 단추를/ 하나씩 떼어 왔지.//  그랬더니 글쎄,/ 한밤중에야/ 부시시 깨어나던 녀석들이/ 오늘은/ 초저녁부터 반짝 눈을 뜨지 않겠어?//  그리곤/ 자꾸 내 창가를/ 기웃거리지 뭐야!// 어떡할까?/ 돌려줄까? 말까?  -신형건 「기웃거리는 까닭」  엄마가 아기 손등을/ 잘근잘근 물었습니다/ “엄마, 내 손등을 왜 물어?”/ “응, 그건 엄마가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아기도 엄마 손등을’ 꽈-악 깨물었습니다/ “아야야! 아프게 물면 어떡하니?”/ “응, 그건 내가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야.”  - 김소운 「손등 물기」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정호승 「소년 부처」  겨울 산사에/ 자작나무라면 몰라도/ 작살나무라니/ 작살 모양으로/ 누구 도륙 낼 일 있나/ 비아냥거리다가/ 나무 이름 아래/ 뭐라 적힌 글씨를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새가 먹기 좋은/ 둥근 열매가 되려고/ 바람결에 제 살을 다듬었을까?/ 산을 내려오다 말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안준철 「작살나무의 보시」  9. 모든 사물은 살아있다고 생각하자. 의인화를 시키자  ― 통일이 됐다./ 나누어져 있기 싫어/ 통일이 됐다./  교실 귀퉁이에서/ 지구본이 돌면서 떠들어댄다.//  그 소식을 듣고부터/ 필통 안 컴퍼스가/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뒷벽 그림 속의 꼬마들도/ 그 바람에/ 모두 튀어나와/ 떠들며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도무지 / 그림 속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나라 지도를 다 그리고/ 신의주 가는 찻길을 그려 놓고,/  백두산까지 달리는 바람이/ 구름 밀고 가는 걸/ 내다보았다.//  교실은/ 책상들까지/ 덜컹거리는 것이었다.//  연필도/ 제가 필통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 이제부터 더 열심히/ 조약돌은 조약돌 노릇을 하고/ 소나무는 열심히/  산에 서서 푸르고/ 그럼 컴퍼스도/ 그만 필통 안 네 자리에/ 들어가거라.  -신현득 「통일이 되는 날의 교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이 옷을 뒤집고/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등을 굽힌다.  -김은영 「바람과 나무」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뿌리들이 일하는/ 방에 가 보면//  꽃나무가 가진/ 쬐그만/ 펌프./ 작아서/ 너무 작아서/ 얄미운 펌프.//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꽃씨들이 잠들고 있는/ 방에 가 보면//  꽃씨들의 / 쬐그만 밥그릇./ 아, 꽃씨보다/ 작아서/작아서/ 간지러운 밥그릇.  -오규원 「방」  어둠이/ 커다란 어둠이// 꽃들을 재웠다고/ 큰소리치지만//  꽃들은/ 자는 척/ 향기로 이야기 나누는 걸// 어둠은/ 고건 모르지요.  -이화주 「고건 모르지요」  목장에 갔더니/ 송아지가 물었단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마신 우리 엄마 젖이 몇 컵인 줄 아니?”/  송아지처럼 풀밭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내가 말했지./ “맞춰 봐. 네가 맞춰 봐.”//  과수원에 갔더니/ 사과나무가 내게 물었단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먹은 내 열매가 몇 바구니인 줄 아니?”/  사과 향기 폴폴 나는 뺨을 내밀며/ 내가 말했지./ “맞춰 봐. 네가 맞춰 봐.”  -이화주 「맞춰 봐」  안경을 써야 할 거야./ 까마득한 옛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눈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우주의 아이들을 바라보다/ 눈이 어두워졌을 거야./ 아이가 어른이 되고/ 새끼가 어미가 되고/ 새싹이 나무가 되고/ 시내가 강물이 되는 걸/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바라보다가/ 아마 눈이 어두워졌을 거야.//  이어폰을 꽂아야 할 거야./ 까마득한 갓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귀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우주의 소리만 듣다/ 귀가 어두워졌을 거야./ 재깔거리는 공장의 기계 소리/ 딱총 소리/ 천둥소리/ 태풍 부는 소리/ 기차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 비행기 소리……/ 핵폭탄 터지는 소리에/ 귀가 멀었을 거야.//  목발을 짚어야 할 거야./ 까마득한 갓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발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아이의 꿈만 쫓다/ 발이 아플 거야./ 아닌 밤중에 담 넘는 도둑을 쫓다/ 핏빛 전쟁터를 걷다/ 검은 밤을 쫓다/ 혼자 여럿을 쫓다/ 아마 발이 부러졌을 거야.//  우스워도 할 수 없지 뭐./ 온갖 보이는 거로부터/ 들리는 거로부터/ 느끼는 거로부터/ 하나밖에 없는/ 해님을 보호해야지.  -김흥수 「해님」  한낮,/ 해님이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입김 훅―// 살짝 바람이 딛는 순간,//  오롱조롱 매달려 있던/ 봉숭아 꽃씨 형제들/ 톡/ 토독//  나는 장독대/ 너는 우물가……// 누가 더 멀리 뛰나/ 내기한 거야.//  지금은 모르지/ 내년 이맘때/ 꽃피면/ 알지.  -한상순 「꽃씨들의 멀리뛰기」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유희윤 「비 오는 날」  신발주머니에 들어간 신발은/ 미안했어요,/ 흙이 묻어서.//  “괜찮아./ 주인을 위해 일했잖아.”/ 신발주머니는 신발을/ 꼭 안아 주었어요.//  둘이는 똑같이/ 흙투성이가 되었어요.  -이혜영 「둘이는 똑같이」  참새가 수수 모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아이고 무거워/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김용택 「참새와 수수 모가지」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뿌리들이 일하는/ 방에 가 보면//  꽃나무가 가진/ 쬐그만/ 펌프./ 작아서/ 너무 작아서/ 얄미운 펌프.//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꽃씨들이 잠들고 있는/ 방에 가 보면//  꽃씨들의/ 쬐그만 밥그릇./ 아, 꽃씨보다/ 작아서/ 작아서/ 간지러운 밥그릇.  -오규원 「방」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겨울이 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몇 송이 코스모스를/ 계속 피게 하는 일이다.//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만/ 마중 가는 일이다.  -오규원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오은영 「고쳐 말했더니」  오늘 새벽/ 장닭보다 먼저 일어나 들판을 걸었어//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겠지/ 마음을 솔솔 부풀리고 있었지//  아, 그 순간/ ―난 밤새 잠 한 숨도 안 잤다/ 돌돌돌 도랑물이 말을 걸며 지나가는 거야//  그런데 그 도랑물을/ 들판이 벌컥벌컥 마시고 있잖아/  우리가 잠든 사이 도랑물이 들판에게/ 그런 착한 일 몰래 하고 있었다니…….  -정갑숙 「도랑물이」  해님은 날마다/ 출석을 그림자로 확인한다.//  온 세상 모두가/ 일 학년 교실처럼 대답하다가는/ 지구의 귀가 터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키 큰 가로수는 길게/ 세 살배기 우리 아가는 짧게/ 육 학년 언니는 조금 길게/ 모두모두 그림자로 대답을 한다.  -윤이현 「그림자로 대답하기」  우리 할머니가/ 산 속 마을/ 작은 무덤집으로 이사 간다//  산에 사는 짐승들/ 풀꽃들은 참 좋을 거다/ 할머니랑 함께 살 수 있어서/ 날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재미난 이야기 먹으며/ 무럭무럭 자리고/ 할머니의 자장가 들으며/ 토실토실 살찌고//  정말로 좋을 거다/ 오늘부터/ 우리 할머니의 손자, 손녀가 될 수 있어서  -이성자 「참 좋을 거다」  여름 가뭄 때/ 물 한 통이라도 준 일 있니? 아―니요.//  비바람 몰아칠 때/ 한 번이라도 지켜 준 일 있니?/ 아―니요.//  그래도 가을 되니/ 가져가라고/ 예쁜 열매 아낌없이 떨어뜨리는//  밤나무 대추나무 도토리나무…….  -권오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상수리나무 밑에서/ 상수리알 줍다가/ 꿀밤 많이 먹었다.//  톡!/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안 준 것들이!)//  톡!/ (벌레 물려 아플 때 약 한번 안 발라준 것들이!)//  톡! 톡!/ (줍기나 하지 쿵! 쿵! 발길질까지 하다니!)//  아빠랑 상수리알 줍다가/ 상수리나무에게/ 나 많이 혼났다.  -서재환 「상수리알 줍다가」  10.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보자  조그만 파리 눈에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크게 보일까?//  장미 꽃봉오리는 비단 침상만해 보이겠지.// 뾰족한 가시는 창만해 보이겠지.//  이슬 방울은 경대만하고/ 머리카락은 금빛 철사만하고/ 작고 작은 겨자씨는 불붙은 숯덩이만해 보이겠지.// 빵덩이는 높은 산으로,/ 꿀벌은 무서운 표범으로 보일까?/ 조금 집어 든 흰 소금은/ 목동들이 지켜 주는 흰 양떼처럼/ 환해 보이겠지.//  -월테 데 라 메어 「파리」  11.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해 보자  내가 만일 사과라면/ 그리고 가지에 달려 있다면/ 나처럼 얌전하고 착한 아이 앞에/ 뚝 한 개 떨어져 주지.//  착한 아이를 기쁘게 해 주지 않고/ 왜 맨날 가지에 달려 있나?//  착한 아이가 오기만 하면/ “자, 어서 맛있게 먹어봐.”/ 하고 그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가 주지.  -베이야드 테라 「내가 사과라면」  만약에/ 빗방울이/ 세모나 네모여 봐// 새싹이랑/ 풀잎이/ 얼마나 아프겠니?  -손동연 「빗방울은 둥글다」  만일에 제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아니고/ 강아지라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으려 할 때/“저리 비켜! 요놈의 강아지.”/ 하고 야단을 치고 내쫓으시겠어요?/ 그러시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집을 나가 버리겠어요./ 아무리 불러 보세요, 돌아오나.//  만일에 제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아니고/ 앵무새라면,/ 날아가지 못하게 쇠사슬로 묶어 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치시면서/ “요놈의 새는 밤낮 쇠사슬만 물어뜯네.”/ 하고 흉을 보시겠어요?/ 그러시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날아가 버리겠어요./ 숲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뭐./ 어머니 손에 다시는 안 잡힐 걸.  -타고르 「동정」  12. 호기심과 엉뚱한 생각, 상상한 것 등을 써 보자  바다가 한데 모여/ 한 바다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바다가 되겠지.//  나무가 한데 모여/ 한 나무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되겠지.//  도끼가 한데 모여/ 한 도끼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끼가 되겠지.//  사람이 한데 모여/ 한 사람이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 되겠지.//  큰 사람이 큰 도끼로 큰 나무를 베어서/ 큰 바다로 쓰러뜨린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물결이 출렁거리겠지.  - 영국 「마더구스」에서  서로 등을 돌린 채 보이지 않은 곳까지 달려갔다. 들꽃이 한들거리며 말을 걸어도 둘 다 말이 없었다.  뿌앙― 기차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달려갔다. 기적소리 멀어질 때쯤 귓불을 스쳐가며 바람이 말했다. 어디 깊숙한 터널 속에서, 아니면 산모롱이 돌아갈 때쯤에 둘이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을 거라고. 그러고는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넸을 거라고.  은빛 등을 반짝이며 나란히 나란히 철길 두 줄 달려갔다. 향긋한 들꽃의 웃음과 함께.  -신형건 「철길 두 줄」  키가 작아진/ 내 동생/ 크레파스.// 작아진 키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흙담이 되고/ 아른아른/ 흙담벽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되었을 거여요.//  풀잎이 되고/ 꽃잎이 되고/ 팔랑팔랑/ 노랑나비가 되어/ 날아갔을 거여요.//  장독대에 돋은/ 몇 오라기/ 머리카락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닻을 내린/ 통통배가 되고.//  그래요./ 또/ 무지개가 되고…….//  키가 작아진/ 내 동생/ 크레파스.// 몽당/ 크레파스.//  -손광세 「크레파스」  내가/ 학교로 가는 아침/ 8시에는//  히히덕거리며 친구들과/ 학교로 가는 아침/ 8시에는//  이 세상 골목길마다/ 학교로 가는 어린이들로/ 꽉/ 차 있겠지.//  태백산/ 작은 소릿길에도/ 제주도 한라산/ 풀밭길에도/  나와 같은 나의 친구들/ 형과 같은 형의 친구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학교로 가는 우리 친구들.//  8시 반에는/ 학교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마다/ 들어오신다.//  “차렷, 경례”/ 아아,/ 이 세상 어린이는 일제히 일어서서/ 선생님께/ 경례를 드릴 테지.  -박목월 「아침 8시 반」  사슴아, 사슴아,/ 네 뿔엔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엔 언제 꽃이 피니?  ―강소천 「뿔」  아기돼지가/ 엄마에게 물었답니다.//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병아리는//  소/ 말/ 개/ 닭의/ 아기 이름인데// 왜/ 나는 없어?//  ―손동연 「돼지」  라디오 꼭지를 틀면/ 갇혀 있던 소리들이/ 우르르 와글와글/ 쏟아져 나오고.//  수도꼭지를 틀면/ 갇혀 있던 물방울들이/ 쏴아 쏴르르/ 쏟아져 나오고.//  바람의 꼭지는/ 누가 틀어 놓았기에/ 온종일 풀려/ 돌아다니는 걸까?//  누가 열어 놓고/ 잠그지 않은 꼭지에서/ 비는 쉬지 않고/ 쏟아지는 걸까?//  가볍고 상큼한 것 말고/ 지나쳐 넘치는/ 모든 것에/ 꼭지를 달아 주고 싶다.//  필요할 때마다/ 열고 닫을 수 있는/ 조그만 꼭지를/ 달아 주고 싶다.  -민현숙 「꼭지」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이문구 「산 너머 저쪽」  새소리보다/ 고운 소릴 내는/ 악기가 되고 싶었어요./ 지팡이가 된 나무.//  폭풍우에 조금씩 뒤틀리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번개가 스치고 갔을 땐/ 정신을 잃었지요./‘이젠 악기가 될 수 없구나.’//  그래도 나무는/ 꿈을 버리지 못했어요./ ‘한 사람을 위한 소리라도 낼 거야.’//  -똑 똑 똑/ 높낮이는 없지만/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온몸으로 소리내는/ 지팡이가 됐어요.//  -똑 똑 똑/ 고운 소리는 아니지만/ 나무는/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이 되었어요.  -이혜영 「악기가 되고 싶었던 나무」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따스함’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물 것 같다./  그 따스한 몸무게 아래엔/ 잠자는 풀벌레 풀벌레 풀벌레 ……/ 꿈꾸는 풀씨 풀씨 풀씨……/  제 몸을 갉아먹던 벌레까지도/ 포근히 감싸주는/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물에 달면/ 이번엔/  ‘너그러움’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신형건 「가랑잎의 몸무게」  우리 집에서 제일 야위신/ 우리 엄마./ 그러나/ 저울 위에 올라서면/ 바늘이 빙그르르/ 아빠의 눈금보다/ 더 돌아갈 거예요.//  엄마의 마음 속엔/ 걱정의 무게가 있고/ 안타까움의 무게/ 너그러움의 무게/ 참고 견딤의 무게/ 그 잔잔한/ 사랑의 무게가 있으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눈금이 모자랄지도 몰라요.  -윤이현 「엄마의 몸무게」  유리병 속의 사마귀가/ 어젯밤에/ 메뚜기의 배를 먹어 버렸다.//  먹을 때 사마귀는 뭐라고 말했을까?/ “네 배를 한 입만 먹어야겠다./ 정말 미안하다.”/ 하고 사마귀말로 사과했을까?//  메뚜기는 뭐라고 말했을까?/ “죽기는 싫어./ 내 배를 너에게 줄 수 없어.”/ 하고 메뚜기말로 말했을까?//  -초등학교 5학년생 작품 「사마귀와 메뚜기  」  얄미운 생쥐가/ 하늘에도 사나 봐요.// 낮에는 숨었다가/ 밤만 되면 야금야금//  둥근 달/ 다 갉아먹고/ 손톱만큼 남았어요.  -서재환 「초승달」  13. 고정관념에 똥침을 주자  내가 얼룩말에게 물었다/ 너는 검정 바탕에 흰 줄무늬니?/ 흰 바탕에 검정 무늬니?/  얼룩말이 대답했다/ 너는 나쁜 버릇의 좋은 애니?/ 좋은 버릇도 있는 나쁜 애니?  - 쉘 실버스타인「얼룩말의 줄무늬」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추위에 웅크리던 나뭇잎이/ 팔랑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그리고 모여든다./  “다치지 않게.”/ 저마다 손을 벌려/ 나뭇잎의 등을 받쳐 준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내려서서//  땅 위에 뉘인다.  -권영상 「바람」  ‘훠어이!’/ 아기 참새/ 쫓는 척만 하고.// ‘네끼놈!’/ 아기 참새/ 겁준 척만 하고.//  정말은……//  //  두/ 팔/ 벌렸다.  -박정식 「허수아비」  그토록 많은 삼림의 나무들이 땅에서 뿌리뽑혀/ 마구 쪼개지고/  으깨어져 생명을 잃고/ 윤전기에서 돌고 있다//  그토록 많은 삼림의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종이 펄프를 만드느라고/  숲과 삼림의 벌목의 위험에 관한 이야기로 해마다 독자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수천 수만의 신문에 쓰이는 종이를 만드느라고  -쟈크 프레베르 「그토록 많은 나무들이…」  사람들은 참 웃겨/ 다리 하나 잡고/ 한 쪽 다리로만 싸우며/ 닭싸움이래/ 닭은 다리가 두 갠데/ 차라리 허수아비 싸움이라 하지//  사람들은 참 웃겨/ ‘윷놀이’라 이름 붙이고/ ‘윷’ 나오는 거보다/ ‘모’ 나오면 좋아해/ 윷이 주인공인데/ 차라리 ‘모놀이’라 하지//  너도 참 웃겨/ 오리싸움이면 어떻고/ 닭싸움이면 어때?/ ‘윷놀이’면 어떻고/ ‘모놀이’면 어때?/ 괜히 트집 잡고/ 너도 정말 웃겨  -김미희 「참 웃겨」  아무렇게나 버려진/ 밭 모퉁이에서도/ 쑥쑥 크는 가시나무.//  그 가시나무/ 조그마한 그림자 속에 들어가면/ 땡볕을 막고 선/ 시원한 바람이 있다.//  아무 짝에도 쓰잘 데 없는/ 가시나무가/ 뜨거운 햇볕을/ 가로막고 선다는 걸//  가시나무 그림자 속에/ 들어가기 전엔/ 나는 몰랐다.//  ―권영상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요.  -쉘 실버스타인 「일찍 일어나는 새」  감이 열면 감나무/ 밤이 열면 밤나무// 다래 열면 다래나무/ 머루 열면 머루나무//  고욤 열면 고욤나무/ 개암 열면 개암나무// 오디 열면 오디나무/ 아니, 방귀 뽕나무.  -김은영 「뽕나무」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바다를 와서야 비로소 이제껏 헛돌았다는 것을 안다// 튜브 속에 거북한 바람을 품지 않고/ 고무 타는 냄새 없이도/ 질주할 수 있다니// 목선 양 겨드랑이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폐타이어,/ 지상에서 밀려난 게 외려 다행스럽다// 하지만 여럿을 다치게 했던 기억을 뿌리치지 못하고/ 파도 속을 자맥질한다// 소금기에 절고 삭아서 어느 새 둥그래진 상처,/ 닳고닳은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제 몸 깊이 충격을 받아들인다  -손택수 「바다를 질주하는 폐타이어」  까치 주려고 따지 않은 감 하나 있다?//  혼자 남아 지나치게 익어가는 저 감을 까치를 우해 사람이/  남겨 놓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 땅이 제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감나무가 웃을 일 제 돈으로 사 심었으니 감나무가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해가 웃을 일 그저 작대기가 닿지 않아 못 땄을 뿐 그렇지 않은데도 저 감을 사람이 차마 딸 수 없었다면 그것은 감나무에게 미안해서겠지 그러니까 저 감은 도둑이 주인에게 남긴 것이지//  미안해서 차마 따지 못한 감 하나 있다!  -이희중 「까치밥」  미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고/ 러시아에도 없고/ 프랑스에도 없는,/  그런 밭이/ 우리 나라에 있대요./ 뭔지 아세요?//  감자밭? 고구마밭? 옥수수밭?/ 참깨, 들깨, 보리, 밀, 고추, 담배밭?/  아니면 콩, 배추, 무, 포도밭?/ 아이구, 모르겠다. 뭐꼬?//  휴전선 155마일 비무장 지대에 있다는,/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2억9천7백6십만 평짜리/  지뢰밭이래요.  -권오삼 「수수께끼」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뒤편」  눈 덮인 새벽/ 관음사 올라가는 길/ 얼음 녹은 여울물 속에/ 송사리 떼 분주한 몸짓/ 햇살 퍼지는 산골짝에 오늘은/ 꼬끼요오 수탉의 목청이 빠졌다/ 민박집 뒤뜰의 토종닭/ 모조리 백숙으로 고아먹고/ 부처님 앞에 지그시 합장하는/ 관광호텔 손님들.  -김광규 「토종닭」  제단에 돼지머리를 받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반칠환 「어떤 기구(祈求)」  친구야,/ 이름 때문에/ 놀림 당한 적 많았지?//  아무리 고운 빛을 내도/ 개똥 개똥/ 개똥벌레.//  말똥 쇠똥/ 뎅글뎅글 말아/ 아기 밥 주는 게 뭐가 나빠?/ 말똥구리, 쇠똥구리/ 웃기부터 하잖아.//  사람이 먹을 음식 들쑤시는/ 집파리 보단/ 몇 배 착한 똥파리.//  그래 그래/ 지저분한 이름 때문에/ 속상한 벌레들아/ 여기 모여라./ 똥방개 너도 왔구나.//  그런데 문 밖에서/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넌……?!/ 벌레도 아닌 네가/ 얼마나 속상했으면.  -박혜선 「‘똥’자 들어간 벌레들아」  ‘엄마’의 반대말은/ ‘아빠’래요./ 아녜요 아냐./ 아빤 엄마의/ 참 좋은 짝인걸요.//  ‘남’의 반대말은/ ‘북’이래요./ 아녜요 아냐./ 북은 남의/ 참 좋은 짝인걸요.//  ‘하늘’의 반대말은/ ‘땅’이래요./ 아녜요 아냐./ 땅은 하늘의/ 참 좋은 짝인걸요.//  - 우리 가족,/ 우리 나라,/ 우리 별 지구……/ 자꾸자꾸 불어나는/ 참 좋은 짝인걸요.  -손동연 「짝ㆍ1」  모자야, 모자야/ 슬픈 모자야/ 군인 아저씨가 쓰면/ 그리 용감해 보이더니/  지하도 입구 계단에/ 뒤집어놓은 모자야/ 딸랑, 동전이 담기는/ 슬픈 모자야  -안도현 「모자」  새로 들어온 1학년 동생들을/ 힘 약하다고 얕잡아 봐선 안 돼요.//  1년만/ 기다려 봐요.//  언니들을 한 계단씩 위로/ 쑥 밀어 올리게 힘이 자랄 테니까요.//  그땐 힘이 넘쳐서/ 맨 위에 있는 6학년 언니들/ 아마 학교 밖까지 떠밀려 나갈 걸요.//  1학년 1년 동안은/ 힘이/ 열 배로 스무 배로/ 크거든요.  -박정식 「힘이 열 배로 스무 배로」  갈매기 한 떼가/ 어거적어기적/ 선창 바닥에 돌아다닌다.//  미끈한 몸매 어디다 두고/ 피둥피둥한 날개/ 접지도 못할까!//  나른한 햇살 받으며/ 무거운 몸 뒤뚱뒤뚱/ 쓰레기통 뒤지는 뚱보들//  빵 쪼가리/ 과자 부스러기/ 달콤한 과일 맛에 푹 빠져서//  사람들 속에서/ 사람인 양/ 똑같이 먹고 산다.  -김기리 「사람 갈매기」  별자리들을 보았어요.//  독수리, 까마귀, 사자, 큰곰, 전갈, 토끼, 돌고래, 백조, 물고기……//  한자리에 살아요/ 날짐승/ 들짐승/ 바다짐승까지//  삼팔선 같은/ 은하수 띠 두르고 있어도/ 곰이 물괴를 잡아먹지 않고/ 독수리와 토끼가 함께 뛰고 놀아요.//  밤하늘의/ 동물 친구들은.  -이봉희 「밤하늘」  14. 매혹적인 제목을 붙이자  ○ 고건 모르지요 ○ 바다는 한 숟갈씩 ○ 무릎 학교  ○ 쿵 쿵 쿵 쿵 ○ 신발 속에 사는 악어 ○ 콩, 너는 죽었다  ○ 처음 안 일 ○ 우리 집 콩쥐 ○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 지구는 코가 없다 ○ 텔레비전으 무죄 ○ 별, 돌려줘요!    1. 시심과 동심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되, 착상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맞추자. 그러나 아이들에게 영합하려 말자.  2. 주제와 교훈은 내 몸의 흉터처럼 숨겨라. 아이들은 설교를 싫어한다.  3. 시각적 구상 표현을 하자. 아이들은 리얼리틱한 걸 좋아한다.  4. 쉽게 쓰되 평범하지 않게, 재미있게 쓰되 비속하지 않게 쓰자.  5. 상상력을 친구로 삼고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자.  6.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에는 낡음이 된다.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라.  7. 불량품 방지를 위해 내일도 다듬고 모레도 다듬고 글피도 다듬어라.  8. 말에도 아이엠에프가 적용된다. 동시의 언어도 마찬가지. 긴축!  9. 생산품에도 실명제가 있다. 내 작품도 그와 같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10. 특색(개성) 있는 작품을 생산하자.  11. 깨끗한 우리말로 쓰자.(이건 특별 준칙!)  詩作을 위한 열 가지 방법/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 곤충류, 어패류, 동물들의 이름. 가령 종달새, 굴뚝새, 파리, 물거미, 소라고둥,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 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 폭풍, 빗소리, 구름, 4계절의 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닌다고 표현한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비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유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 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 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 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 으며 뚫려 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 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는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 려 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 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마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터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 번을 되풀이해 자유자 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 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302    [스크랩]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댓글:  조회:306  추천:0  2018-06-25
 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저자 신영삼 1958년 부여 출생     ​ 머리말   이상의 시가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의학 박사님들은 이상의 두개골과 가슴을 절개하고 병인을 찾았다. 두개골에서는 뚜렷한 병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가슴에서는 폐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방을 내리고, 입원 시키고, 치료하고, 퇴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함은 계속되었다. ​ 그러자 저마다 한 가닥 한다는 박사님들이 나름대로 진단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신의 의술을 과시하기 위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 더러는 먹고 살기 위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두개골과 가슴에만 머물렀다. 두개골과 가슴은 수없이 절개되고 봉합되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자들의 두통과 가슴 답답한 증세는 악화되었다. ​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한 어떤 박사님 중에는, 이상 시가 외계인의 말로 되었기 때문에, 지구인들은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상의 정신병적 병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초현실주의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하는 박사님들도 있었다. 그들의 진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시골 돌팔이까지 타났다. 자기도 한 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증을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접근 방식은 지극히 형이하학적이었고, 말은 어눌했으며, 주로 민간요법에 의존했다. 호기심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2012. 1. 20 보령에서 신영삼 ​ ▣ 차례 ▣   엮으면서 12 1. 異常한 可逆反應 異常한可逆反應 14 破片의景致 22 ▽의遊戱 29 수염―― 36 BOITEUX · BOITEUSE 45 空腹 ―― 51   2. 烏感圖 (1) 二人…… 1 …… 60 二人…… 2 …… 63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66 運動 72 興行物天使 76 ​ 3. 三次角 設計圖 線에關한覺書 1 88 線에關한覺書 2 97 線에關한覺書 3 105 線에關한覺書 4 109 線에關한覺書 5 112 線에關한覺書 6 115 線에關한覺書 7 124 ​ 4. 建築 無限 六角體 AU MAGASIN NOUVEAUTES 136 出版法 149 且8氏의出發 161 대낮 170 ​ 5. 烏感圖 (2) 烏瞰圖 詩第一號 178 烏瞰圖 詩第二號 183 烏瞰圖 詩第三號 186 烏瞰圖 詩第四號 188 烏瞰圖 詩第五號 192 烏瞰圖 詩第六號  196 烏瞰圖 詩第七號 203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211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221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224 烏瞰圖 詩第十一號  228 烏瞰圖 詩第十二號 231 烏瞰圖 詩第十三號 234 烏瞰圖 詩第十四號 238 烏瞰圖 詩第十五號 244 ​ 6. 易斷 火爐 254 아침 260 家庭 263 易斷 271 ​ 7. 危篤 禁制 282 絶壁 285 白書 288 買春 292 生涯 295 自像 299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306 꽃나무  309 이런詩 312 普通記念 315 거울 322 紙碑 328 明鏡 331 ​ 9. 遺稿 肉親의章 338 最後 344 悔恨의章 346   1. 異常한 可逆反應 ​ ​ ▣ 異常한可逆反應 任意의半徑의圓 (過去分詞의 時勢)   圓內의一點과圓外의一點을結付한直線 二種類의存在의時間的影向性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直線은圓을殺害하였는가   顯微鏡 그밑에있어서는人工도自然과다름없이現象되었다.   ☓    같은날의午後 勿論太陽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에存在하여있었을뿐만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步調를美化하는일까지도하지아니하고있었다.   發達하지도아니하고發展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憤怒이다.    鐵柵밖의白大理石建築物이雄壯하게서있던 眞眞5"의角바아의羅列에서 肉體에對한處分法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目的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冷靜하였다.   太陽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前方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便秘症患者는富者집으로食鹽을얻으려들어가고자希望하고있는것이다」 라고 ............ ​ ― 1931. 7 ―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의 제목으로는 낯설다. ‘이상한 가역반응’은 원래 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가역반응이란 정반응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의 역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다. 따라서 가역반응이란 어떤 동일한 현상을 놓고 정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역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시에서는 이상하게도 동일한 현상을 놓고 서로 다르게 보는 반응이다. ​ 이 시의 구체적 상황을 설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생각하면 대체적인 시적 상황의 윤곽이 잡힌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시로 보인다. 이상 시인의 몇 편의 다른 시들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시들을 읽어본 것을 바탕으로 소설(fiction)을 쓰겠다.   『소년인 화자는 어느 과부의 집에 가끔 놀러 갔다. 우연히 과부를 통해 여자를 알게 되었던 소년은, 이후로도 가끔 과부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과부와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과부도 좋아했고, 소년도 좋았다. 사흘 전에도 과부의 집에 갔었다. 어제 밤, 어떤 놈이 몰래 담을 넘어서 과부를 겁탈하고, 과부의 금반지며 목걸이까지 훔쳐서 달아났다. 과부는 경찰서에 신고 했다. 곧 수사관이 왔다. 과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지문도 채취했다. ​ 오늘 정오, 소년은 강간범으로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하고 있다.』   任意의 半徑의 圓 (過去分詞의 時勢) ​ 화자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조사관이 임의의 반경의 원을 볼펜으로 그렸다. 임의의 반경을 가진 원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을 그린 것이다. 아니다. 과부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 분사의 시세다. 이미 어떤 사건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 圓內의 一點과 圓外의 一點 을結付한 直線 ​ 원 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결부시키는 직선이 그려진다. 화자가 과부의 집에 침입하여 과부를 겁탈하고 물건을 훔쳐가지 않았느냐고 심문하는 것이다.   二種類의 存在의 時間的 影向性 / (우리들은 이것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두 종류의 존재의 시간적 영향성 즉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갔던 시간과 어떤 놈이 과부의 집을 침입한 시간이, 화자가 범인인가 아닌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들’이라는 말로 봐서 화자와 조사관 모두 이 시간성에 무관심한 채 심문하고, 심문을 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문 과정은 이랬을 것이다. 조사관 : 너, ○○집에 침입하서 강간하고 강도질 했지? 화자 :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조사관 : 증거가 있는데……. 바른 대로 불어. 화자 : 절대로 강간하고 강도질 한 적 없습니다. 위 대화에는 범인이 그 집에 침입한 시간과 화자가 그 집에 간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 대화다. 시간적 영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直線은 圓을 殺害하였는가. / 顯微鏡 / 그 밑에 있어서는 人工도 自然과 다름없이 現象되었다.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화자가 어제 밤 과부를 겁탈했는가? 조사관은 화자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화자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사관은 증거로 지문을 제시하는 것 같다. 현미경 아래에서는 인공도 자연과 다름없이 현상되었다. 현미경에는 세포 관찰을 할 때처럼, 지문도 자세히 나타났다. 꼼짝없이 강간범으로 몰린 것이다. 같은 날의 午後 / 勿論 太陽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處所에 存在하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步調를 美化하는 일까지도 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물론 태양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인 중천에 존재하였고, 태양은 아주 느리게 서쪽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화자는 아주 지루하게 오후 내내 취조를 받았다. 發達하지도 아니하고 發展하지도 아니하고 / 이것은 憤怒이다. 조사 방법이 발달하지도 아니하고 발전하지도 아니한 것에 화자는 분노를 느꼈다. (순전히 자백과 고문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수사 방법이다.) 鐵柵 밖의 白大理石 建築物이 雄壯하게 서 있던 / 眞眞 5"의 角바아의 羅列에서 / 肉體에 對한 處分法을 센티멘탈리즘하였다. 대리석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 도회의 어느 철책 안,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진진5"’는 ‘진~진~하는 오 초’라고 읽자. 취조실에 있는 전기 고문기의 스위치를 올리면, 5초 동안 ‘진~~~진~~~’하고 소리가 난다. 전기 고문기와 각목이 늘어서 있는 취조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 자백을 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目的이 있지 아니하였더니 만큼 冷靜하였다.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나, 과부를 겁탈할 목적이 있지 아니하였던 것인 만큼 냉정하였다. 거짓 자백을 하지 않기로 했다. 太陽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쬐었을 때 / 그림자는 잔등 前方에 있었다 ‘태양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 쬐었을 때 그림자는 잔등 전방에 있었다.’는 말과, 앞에 나왔던 ‘태양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에 존재하였다’는 구절과 연관시켜 보자. 그러면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태양이 질 때까지 오후 내내, 아주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취조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사람은 말하였다. / 「저 便秘症患者는 富者 집으로 食鹽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希望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 ............ ‘사람’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과부다. 과부가 경찰서 취조실로 찾아왔다. 범인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범인이라는 자가 바로 자기가 잘 아는 총각이 아닌가! 과부는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석방 됐다. 그러면 과부가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과부는 왜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는가?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가는 것은 식염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여기서 식염은 정액을 비유한 것이다. 암염을 절구에 넣고 절구 공이로 찧으면 소금가루를 얻을 수 있듯이, 남자가 여자의 음부에 남근을 절구질하면 소금가루와 같은 하얀 정액이 나온다. (의 ‘血紅으로 染色된 巖鹽의 粉碎’라는 구절은 이와 유사한 상황의 비유다.) ‘변비증 환자’는 똥을 누고 싶어도 누지 못하는 자다. 성적 욕구가 생겨도 해결할 대상이 없는 화자도 변비증환자다. 변비증 환자가 소금을 먹으면 효험이 있듯이,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대상이 없는 화자는 과부를 찾아가, 과부의 음부에 절구질을 하고, 그리고 하얀 소금가루와 같은 정액을 내보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부가 “저 총각은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염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에서 ‘있는’이라는 말의 시제에 유의하면, ‘화자는 식염을 얻으려고 부자의 집에 들어가고자 늘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과부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의미다.  그러면 왜 과부의 집이 ‘부자의 집’일까? 그 집에는 소금이 많아서 부자의 집이다. 과부의 음부에는 과부를 겁탈했던 어떤 놈의 소금도 있을 것이고, 가끔 찾아가 암염을 절구질하는 화자의 소금도 있을 것이니, 과부는 참으로 부자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부자의 집은 과부의 집이다. 아니 과부의 음부인지도 모른다.       ▣  破片의景致  △은나의AMOUREUSE이다 ​ 나는하는수없이울었다   電燈이담배를피웠다 ▽은 I/W이다        × ▽이여! 나는괴롭다   나는遊戱한다 ▽의슬리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떻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 쓸쓸한들판을생각하고 쓸쓸한눈나리는날을생각하고 나의皮膚를생각하지아니한다   記憶에對하여나는剛體이다   정말로 「같이노래부르세요」 하면서나의무릎을때렸을터인일에對하여 ▽은나의꿈이다 스티크! 자네는쓸쓸하며有名하다   어찌할것인가         × 마침내▽을埋葬한雪景이었다 ― 1931. 7 ―      破片의 景致 /  △은나의AMOUREUSE이다 ​ 제목 '파편의 경치'라는 말에서부터 무슨 말인지 읽기 어렵다. 이 시를 끝까지 읽어보아도 파편의 경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파편의 경치, 조각난 경치, 조각나서 완전하지 않은 경치, 전체가 아닌 조각난 몇 개의 경치, 그 경치를 가지고, 그 조각난 경치를 맞추어서 완전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각난 몇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겠다. ​ 이 시에는 × 표를 중심으로 네 개의 경치가 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완전한 경치를 만들어야 한다. 조각난 네 개의 경치를 가지고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조합을 해야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된다. ​ 부제 '△은나의AMOUREUSE이다'는 프랑스 말로 ‘△은 나의 연인’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화자는 △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은 나오지 않는다. ▽만 나온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면 ▽은 화자에게 괴로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 화자가 좋아하는 대상, △과 대비되는 ▽은 싫어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부호나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의 방식이다. 이상은 서양 학문 특히 수학과 과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 학문에서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는 그 발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화자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왜 울었으며, 왜 하는 수 없이 울었으며, 우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뒤에 나오는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라는 말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화자는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은 화자가 살아오면서 갖은 아픔들이다. 이를테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든가, 대를 잇기 위해서 돈을 받고 양자로 간 것 등은 이상의 삶에서 가장 큰 아픔들이다. 그래서 집을 나와서 여급들과 동거도 하고, 금홍이도 만나게 된다. 물론 폐병도 이상에게는 커다란 아픔이었을 것이다. 화자에게는 그동안 삶에서 고통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왜 울까? 그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이 시에서 우는 행위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우는 행위는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고통을 울음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잊는 행위다. 무엇인가 아픔을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電燈이 담배를 피웠다 / ▽은 I/W이다 아픔이 많았던 화자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그런데 전등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 담배 연기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뿌옇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등이 뿌옇게 켜졌으니까 전등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은 I/W이다. ‘I/W’에서 ‘I’는 전류를 나타내는 기호다. ‘W’는 전력을 나타내는 기호다. 보통 V=I/W라는 공식이 있다. 전압은 전류를 전력으로 나눈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은V 즉 전압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는 ‘전등을 켜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화자가 싫어하는 ▽은 ‘전등을 켜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등을 켜는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기호화하여 표현하는 서양의 수학이나 과학의 발상이다.   ▽이여! 나는 괴롭다 ▽ 곧 전등을 켜는 것이여! 나는 괴롭다. 화자는 아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등을 켜는 것이 괴롭다. 밤에 편안히 잠도 못자고 일어나 전등을 켜고 있는 것이 괴롭다.   나는 遊戱한다 / ▽의 슬리퍼어는 菓子와 같지 아니하다 /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화자는 유희를 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즐거운 놀이를 한다. ▽의 슬리퍼어, 밤에 고통 때문에 전등을 켜고, 슬리퍼를 신고, 남들이 다 잠자는 시간에 화장실도 가고, 또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과자와 같지 않다. 과자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나는 나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지금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고통스러울 때 우는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따라서 어떻게 울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고통을 잊을까, 무엇으로 고통을 잊을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고통을 잊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쓸쓸한 들판을 생각하고 / 쓸쓸한 눈 나리는 날을 생각하고 / 나의 皮膚를 생각하지 아니한다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들판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들판에 혼자 놓여 있었던 것과 같이 외로웠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등을 켜고 그것을 글로 쓴다. 글로 쓰는 행위는 우는 행위와 같다. 고통을 글로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하는 행위다. ​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눈이 내리는 날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눈이 내리던 지난 시절,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폐결핵을 인해서 창백해진 현재의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폐결핵의 고통보다는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고통이 더 크기에, 폐결핵으로 망가져가는 몸도 잊고 밤에 글을 쓴다.   記憶에 對하여 나는 剛體이다 기억에 대해서는 화자는 강한 육체를 가졌다. 화자는 과거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매우 강하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쓰는 데는 소질이 있다.   정말로 / 「같이 노래부르세요」/ 하면서 나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에 對하여 / ▽은 나의 꿈이다 / 스티크! 자네는 쓸쓸하며 有名하다 정말로, ‘같이 노래 부르세요’ 하면서 화자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무릎을 툭 치면서, 자꾸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만 하지 말고 ‘같이 노래 부르세요. 즐겁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함직한 일이다. 결국 그 일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 ▽ 곧 전등을 켜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전등을 켜고 그 슬픔과 고통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화자가 가지고 있는 꿈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것을 글로 적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그래서 그것을 전등을 켜고 글로 쓴다. 그러면 고통을 잊을 수 있다. ​ 스티크는 필기도구다. 이를테면 만년필이다. 만년필은 쓸쓸하며 유명하다. 만년필은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려서 그것을 밤에 홀로 전등을 켜 놓고 외롭게 기록하는 도구다. 그래서 스티크는 쓸쓸하다. 사실은 화자가 스티크를 가지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인가 기록하면서 쓸쓸해 한다. 또 만년필은 유명하다. 화자가 과거의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만년필은 마치 유명한 의사와 같은 존재다.   어찌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쓸까? 시로 쓸까? 소설로 쓸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자는 만년필로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을 埋葬한 雪景이었다 ​ 마침내 ▽ 곧 전등을 켠 것을 매장한 설경이었다. 전등을 켠 것을 매장했다는 것은, 전등을 켠 것이 생명을 다 해서 땅에 묻었다는 것인데, 이는 전등을 껐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등을 매장한 설경은 눈이 하얗게 내리듯이 밖이 하얗게 밝은 아침이 되었다는 의미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을 떠올렸고, 그리고 그 기억들을 기록하는 가운에 밤이 지나갔다. ​ 결국 화자는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나온 삶, 슬프고도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을 시나 소설 혹은 수필로 썼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상의 문학 작품들이 모두 이상의 과거의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 ​ ▣ ▽의遊戱――    ▽은 나의 AMOUREUSE이다.   종이로만든배암을종이로만든배암이라고하면 ▽은배암이다.   ▽은춤을추었다.   ▽의웃음을웃는것은破格이어서우스웠다.   슬립퍼어가땅에서떨어지지아니하는것은너무나소름끼치는일이다. ▽의눈은冬眠이다. ▽은電燈을三等太陽인줄안다.          ×  ▽은어디로갔느냐. 여기는굴뚝꼭대기다.   나의呼吸은平常的이다. 그러한데탕그스텐은무엇이냐. (그무엇도아니다.)   屈曲한直線 그것은白金과反射係數가相互同等하다. ▽은테이블밑에숨었느냐.         × 1 2 3 3은公倍數의征伐로向하였다. 電報는아직오지아니하였다. ― 1931. 7 ―     ▽의 遊戱―― 시인은 지금 ▽를 가지고 유희를 하고 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다. 우매한 독자를 향하여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 이러한 시를 써 놓고 시인은 즐기고 있다. 사실 이상의 시를 아직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상이 저승에서도 즐거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으로 봐서 아마 즐거운 유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이상의 시에서 ‘――’이 있는 경우는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은 나의 AMOUREUSE이다. 부제에 나오는 ‘AMOUREUSE’는 프랑스어로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라는 의미다. 화자는 ▽을 자신이 연인처럼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추리해 보아야 한다.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은 비록 가짜 배암이지만, 이것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가정한다면, ▽은 배암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을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으니 이제부터 ▽은 실제로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은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은 배암과 같은 것이고,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 이렇게 ‘▽은 배암이다’처럼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 하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발상은 서양식 학문에서 비롯한다. 서양학문에서는 어떤 것을 기호화하거나 부호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발달한 학문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수학이나 과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기차가 시속 120km로 2시간 동안 달릴 때, 그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또 기차가 시속 150km로 3시간 동안 달릴 경우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하는 것들을 서양 학문에서는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합니다. 즉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기차의 속도에 시간을 곱하면 됩니다.’ 이것을 서양 학문에서는 s를 거리라고 하고, v를 속도라고 하고, h를 시간이라고 하면, ‘s = vh’라고 간단히 부호화합니다. 여기서 다시 속도는 어떻게 구하는가 하는 것을 v = s/h 라고 간단히 공식화한다. 이러한 방식이 서양 학문의 부호화, 기호화 방식이다. 이상 시인도 이러한 서양식 부호화, 기호화 방식을 이용하여 ▽을 배암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배암’은 다시 무엇인가의 비유한 것인데, 여기서 ‘배암’은 화자를 비유한 것이다. ▽은 춤을 추었다. ​ ▽은 춤을 추었다. ▽은 배암이니까, 배암이 똬리를 튼 상태에서 대가리를 들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은 배암과 같은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똬리를 틀고 머리를 들고 춤을 추는 배암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화자가 밤에 일어나 앉아서 기침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기침을 할 때는 상체가 앞뒤로 몹시 흔들린다. 이 시는 1931년에 지은 시인데, 이때부터 이상은 폐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이상이 밤에 일어나서 기침을 하는 모습이다. 똬리를 틀고 앉아서 머리를 들고 춤추는 배암이 화자다.   ▽의 웃음을 웃는 것은 破格이어서 우스웠다. ​ ▽의 웃음을 웃는 것 즉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똬리를 틀고 앉아서 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웃는 것은 아주 파격(破格)이어서, 도리어 우스웠다.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기침을 하고 있는 장면은 결코 우스운 장면이 아니다. 우스운 장면이 아닌데 이를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아주 파격이고, 그것이 도리어 우습다는 것이다. 화자가 폐병으로 똬리를 틀고 고개를 들고 있는 뱀이 춤을 추듯이, 앉아서 상체를 앞뒤로 심하게 움직이면서 기침을 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 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화자는 기침으로 인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을 못 자는 화자는 슬리퍼를 신고 이를테면 화장실도 가고, 물도 먹고 해야 할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밤에 홀로 일어나 돌아다니려면 조용조용 다닐 수밖에 없다. 슬리퍼를 조용히 끌면서 다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슬리퍼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밤에 홀로 조용히 다니는 것이며, 밤에 기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서 다녀야 하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 ▽의 눈은 冬眠이다. ▽의 눈은 동면(冬眠)이다. 화자는 눈을 배암이 동면하듯이 감았다. 그러나 완전히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눈만 감고 누워 있다.  ▽은 電燈을 三等太陽인 줄 안다. ▽은 전등을 삼등 태양인 줄 안다. 배암인 화자는 전등을 세 번째 등급의 태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밤에 전등을 켜 놓고 일어나서 잠을 자지 않고 있다. 태양이 있는 낮에는 우리는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전등을 삼등 태양으로 아는 화자는 밤에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은 어디로 갔느냐. /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은 즉 배암인 화자는 어디로 갔느냐.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화자가 간 곳은 굴뚝꼭대기다. 굴뚝 꼭대기는 연기가 난다. 연기가 나는 곳에서는 기침을 할 수밖에 없다. 화자가 기침을 아주 심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의 呼吸은 平常的이다. / 그러한데 탕그스텐은 무엇이냐. / (그 무엇도 아니다.) 화자의 호흡은 평상적이다. 평상시와 같이 숨을 쉬고 있다. 죽은 것은 아니다. 호흡이 평상시처럼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텅스텐은 무엇이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괄호를 치고 그 안에 그 무엇도 아니라고 했다.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은 텅스텐이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닌 것 중에서, 호흡과 관련시켜 상상해 보면, 호흡에서 마치 텅스텐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난다 뜻이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으나 호흡은 매우 가쁘며, 텅스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屈曲한 直線 / 그것은 白金과 反射係數가 相互 同等하다. ​ 굴곡한 직선. 화자가 배암이다. 배암은 원래 긴 직선이다. 그 직선의 배암이 굴곡 상태로 있다. 길게 펼쳐져 있어야 할 화자가 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기침이 멈추고 화자는 몸을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다. 몸을 옆으로 뉘어 웅크리고 잠을 자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원래 직선이 굴곡한 모습이다. ​ 또 그것은 백금과 반사계수가 상호 동등하다. 백금은 하얗다. 굴곡한 직선 즉 화자가 광선을 반사하는 계수가 백금과 상호 동등하다는 것은, 화자가 백금처럼 하얗다는 뜻이다. 화자의 창백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폐병을 앓는 사람의 창백한 모습이다. ​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배암이, 화자가 마치 테이블 밑에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다. 시끄럽던 것이 조용하면 어디에 숨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기침이 가라앉았다. 1 / 2 / 3 / 3은 公倍數의 征伐로 向하였다. 기침을 한 번 한다. 조용해졌던 기침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기침을 두 번 한다. 기침이 조금 잦아졌다. 기침을 세 번 한다. 기침이 조금 더 잦아진 것 같다. 3은 공배수의 정벌로 향하였다. 잦아진 기침이 마치 3의 공배수를 정벌하려는 듯이 삼의 공배수 쪽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가고 있다. 3, 6, 9, 12~~~ 이런 식으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 이런 식으로 기침이 자주 나고 있다. 기침이 점점 잦아진다. 電報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누가 죽었을 때 멀리 있는 사람에게 급히 알리기 위한 통신 수단이다. 편지는 여러 날이 걸린다. 그래서 전보를 보낸다. 전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것은 결국 매우 위독한 상태라는 것이다. 화자는 매우 위독한 상태다. ​ ​ ​   ▣  수염―― ​  (鬚 · 髭 · 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 · 모두를이름)               1   눈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는森林인웃음이存在하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幽靈은水族館이지만大端히流麗하다 그것은陰鬱하기도하다            4   溪流에서―― 乾燥한植物性이다 가을            5   一小隊의軍人이東西의方向으로前進하였다고하는것은 無意味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運動場이破裂하고龜裂할따름이니까            6   三心圓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布袋 簡單한須臾의夜月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計劃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乞人이기는하였다           9   疎한것은密한것의相對이며또한 平凡한것은非凡한것의相對이었다 나의神經은娼女보다도더욱貞肅한處女를願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X     余, 事務로  써散步하라하여도無防하다   余,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閉鎖主義로다 ― 1931. 7 ―     1931년 6월 21세의 젊은 혈기의 이상, 어느 날 아메리카의 젊은 남녀의 벌거벗은 사진을 보았나 보다. 젊은 여자의 나체 사진, 그리고 젊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 수염―― /  (鬚 · 髭 ·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 모두를 이름) 제목 '수염――'은 차마 여자의 음모를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수염이라고 말하면서 한참 생각하는 것 같다. 독자가 못 알아차릴까 봐서 괄호를 하고, 그 안에 상상할 수 있도록 썼다. 수―턱수염, 자―콧수염,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모두를 말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여기서는 수염은 여자와 남자의 성기 주변에 난 음모라고 상상하는 것이 좋다.   눈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處所는 森林인 웃음이 存在하여 있었다 눈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곳은, 눈이 원래 있어야 한 곳이다. 눈에는 삼림처럼 음침한 웃음이 존재하였다. 화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나체의 남녀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는 화자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속눈썹만 삼림처럼 보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음침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홍당무 화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화자의 성기가 벌겋게 발기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아메리카의 幽靈은 水族館이지만 大端히 流麗하다 / 그것은 陰鬱하기도 하다 아메리카의 유령 곧 여자의 나체 사진은 비록 수족관이지만 대단히 유려했다. 유령은 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없다. 여자도 형상은 사진 속에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는 지금 화자 앞에 없다. 그래서 유령이다. 수족관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은 볼 수는 있으나, 유리가 가로막아 그 물고기를 만질 수는 없다. 사진 속의 여자 또한 그 형상은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를 만질 수가 없다. 수족관이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여자는 대단히 유려하다. 미끈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음울하기도 하였다. 음울(陰鬱)은 그늘지고 울창하다는 뜻이다. 사진 속의 여자의 음모가 매우 많아서 숲으로 말하면 짙은 그늘이 질 만큼 울창했다.   溪流에서―― / 乾燥한 植物性이다 / 가을 여자의 사타구니를 보고 있다. ‘――’으로 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건조한 식물성이다”라고. 음모는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즉 여자의 음부의 갈라진 양옆에서, 건조한 식물성이다. 건조한 식물성은 계곡의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의 계곡에서 애액이 흐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을이다. 여자의 음모가 단풍이 들었는가 보다. 아니 음모의 색갈이 단풍의 색처럼 붉다. 금발의 백인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一小隊의 軍人이 東西의 方向으로 前進하였다고 하는 것은 / 無意味한 일이 아니면 아니 된다 / 運動場이 破裂하고 龜裂할 따름이니까 ​ 일개 소대의 군인은 많은 숫자의 군인이다. 군인은 남근이다. 군인은 머리에 철모를 썼다. 철모를 쓴 군인은 남근의 모습이다. 일개 소대의 군인이 계곡에서 동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동쪽으로 전진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였으면 제자리다. 전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행위 장면을 연상해 보자. 열심히 전진하고 후퇴를 거듭한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왕복 운동을 하는 것이다. 결국 제자리에 있는 셈이다. 그것은 전진한 것이 아니라 운동장 즉 여자의 음부가 파열하고 균열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음부가 갈라져 열리고, 제자리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였다는 말이다. 성교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여자의 음모가 난 계곡을 보면서, 많은 남자들의 남근이 여자의 성기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三心圓 이제는 남자의 나체 사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삼심원은 세 개의 중심이 있는 세 개의 원이다. 남근과 고환 두 쪽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삼심원이다. 정면으로, 발기된 남근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사진 속의 아메리카 남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말이다.   조(粟)를 그득 넣은「밀가루」布袋 / 簡單한 須臾의 夜月이었다 이제는 고환을 바라보고 있다. 고환은 조를 그득 넣은 밀가루 포대다. 고환 속에는 정액이 있고, 정액 속에는 정자가 들어 있다. 정액과 정액 속의 정자는 고환이라는 포대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조는 정자, 밀가루는 흰색의 정액, 그리고 포대는 그것이 담겨 있는 고환이다. 사진 속의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상상한다. 남근은 간단(簡單)한 수유(須臾)의 야월(夜月)이었다. 성교는 잠깐 동안 쾌감에 젖는, 간단한 정액의 사정일 뿐이었다. 야월? 밤에 뜨는 달은 초승달, 보름달, 하현달처럼 커졌다가 작아진다. 그리고 커졌다가 작아지는 남근에서 방출되는 정액은 달처럼 뿌옇다. 언제나 도둑질할 것만을 計劃하고 있었다 /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乞人이기는 하였다 남근은 도둑질할 것만 계획하고 있었다. 도둑질은 몰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근은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피울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걸인이기는 하였다. 걸인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애걸하는 사람이다. 남근은 여자를 보면 한 번 잠자리를 함께 하기를 애걸하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疎한 것은 密한 것의 相對이며 또한 / 平凡한 것은 非凡한 것의 相對이었다. 성기다고 하는 것은 빽빽하다는 것의 상대이며, 평범하다고 하는 것은 비범하다는 것의 상대였다. 화자는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 그리고 자신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를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있다.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는 빽빽하고 무성하고 자신의 음모는 거기에 비하면 성기게 났는가 보다. 사진 속의 남자의 성기는 대단히 커서 비범하며, 자신의 성기는 작아서 평범한가 보다. 나의 神經은 娼女보다도 더욱 貞肅한 處女를 願하고 있었다. 화자의 신경은 창녀보다도 더욱 정숙(貞肅)한 처녀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의 흥분된 신경은 창녀를 원하기 보다는 즉 흥분된 성적 욕망을 창녀에게 가서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정숙한 처녀를 원하고 있습니다. 정숙한 처녀처럼 창녀가 있는 곳에 가지 않고 정조(貞操)를 지키면서, 조용하고 엄숙하게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는 남녀 나체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말(馬)―― / 땀(汗)―― 그래서 오랫동안 말을 달리듯이 자위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말을 달렸다는 것은 자위를 했다는 것이다. 자위 할 때의 동작은 말을 타고 달릴 때의 동작과 흡사하다. 기수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말 등을 중심으로 사람이 앞으로 몸이 쏠렸다가 뒤로 쏠렸다가 하는 동작을 한다. 손으로 성기를 잡고 자위를 하는 장면이 이와 유사하다. 땀은 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땀처럼 조금 비쳤다.   余, 事務로써 散步하라 하여도 無防하다. 나는 이제 사무로써 산보하라 하여도 무방하다. 사무(事務)는 ‘볼일’이다. 소변을 보는 것을 ‘볼일’ 본다고도 한다. 자위를 마친 화자, 이제는 소변을 보기 위해서 천천히 걸어가라 하여도 괜찮다. 조금 전까지는 남근이 발기하였기 때문에 소변을 보려고 해도 남들이 볼까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위가 끝났고, 발기된 성기가 작아졌다.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가라고 하여도 괜찮다. 余, 하늘의 푸르름에 지쳤노라 이 같이 閉鎖主義로다 화자는 하늘의 푸름에 지쳤다. 우리의 사회는 이같이 폐쇄주의다. 푸른 하늘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맑은 우리 사회다. 아메리카에 비해서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맑고 깨끗한 것만을 강요한다. 화자는 이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쳤다. ​ ​ ​ ▣   BOITEUX · BOITEUSE ​ 긴것   짧은것   열十字       ×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묻어있었다   墜落   不得已한平行   物理的으로아팠었다     (以上平面幾何學)        ×   오렌지   大砲   葡萄        ×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오―― 沈默을 打撲하여주면좋겠다 沈默을如何이打撲하여나는洪水와같이騷亂할것인가 沈默은沈默이냐   매쓰를갖지아니하였다하여醫師일수없는것일까 天體를잡아찢는다면소리쯤은나겠지   나의步調는繼續된다 언제까지도나는屍體이고자하면서屍體이지아니할것인가 ― 1931. 7 ―   ​ BOITEUX · BOITEUSE 절름발이 남성명사, 절름발이 여성명사. 절름발이는 길이가 하나가 길고 하나는 짧은 것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두 막대기도 길이가 다른 절름발이다. 보통 남자와 여자도 길이가 다르다. 절름발이다.   긴것 / 짧은것 / 열十字 긴 것, 짧은 것, 크로스 된 열십자. 기독의 상징 십자가.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 묻어 있었다 / 墜落 / 不得已한 平行 / 物理的으로 아팠었다 / (以上 平面幾何學) 그러나 십자가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십자가의 추락. 기독의 타락. 긴 것과 짧은 것이 부득이하게 평행을 이뤘다. 남녀가 십자가 아래에서 평행을 이루어 서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아팠었다. 사물의 이치로 당연히 괴로워했었다. 과거완료형 시제다. 과거에 그랬다. 화자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했던 듯하다. 평면기하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복잡한 사람의 삶을 마치 평면기하학에서 간단한 도형을 그려 설명하듯 설명을 했다. 화자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 아마 화자가 과거에 과부와 십자가가 매달려 있는 어느 방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 , , , , 가 모두 같은 상황이다. 화자는 과부의 집 십자가가 걸린 방에서, 과부와 관계했다.   오렌지 / 大砲 / 葡萄 오렌지처럼 표면이 오톨도톨한 고환, 대포처럼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 정액 속의 포도알과 같은 정자들.   萬若 자네가 重傷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리었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만약 자네가 중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상을 입은 기독의 모습을 보고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멋쩍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만족을 하기도 전에 사정을 하여 남근이 힘없이 늘어져, 마치 중상을 입은 기독처럼 되었다 할지라도, 이를 사정을 하였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화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성급하게 사정을 했고, 그래서 참 멋쩍었다.   오―― / 沈默을 打撲하여 주면 좋겠다 / 沈默을 如何이 打撲하여 나는 洪水와 같이 騷亂할 것인가 / 沈默은 沈默이냐 ​ 오―― 그래서~~ 화자는~~ 침묵을 타박하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지 않도록 두드려 주면 좋겠다. 여기서 침묵은 바로 상대 여자가 흥분하지 않아 교성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남근을 가지고 여성의 음부를 힘차게 타박한다. 힘차게 두드린다. 침묵을 어떻게든지 두드려서 홍수와 같이 소란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정하여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액과 함께 여자를 소란하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냐? 아니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음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嬌聲)이 나지 않는 것이다.   매쓰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醫師일 수 없는 것일까 / 天體를 잡아 찢는다면 소리쯤은 나겠지 매스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의사일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사가 아니어도, 매스가 없어도 천체(天體)를 잡아서 찢는다면 소리쯤은 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사가 아니겠는가.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다. ​ 남녀가 성교를 할 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을 치료하는 의사는, 여성의 천체 즉 머리 부분, 그 중에서도 입을 잡아 찢어야 교성이 난다. 여성의 음부에 남근이 들어가서 격렬하게 성행위를 하는 것은 곧 여성의 입이 열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체를 잡아 찢는 행위다. 그러면 자연히 천체 즉 머리 부분에 있는 입이 열리고, 교성을 낼 것이다. 그러면 화자는 비록 메스가 없어도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인 셈이다.   나의 步調는 繼續된다 / 언제까지도 나는 屍體이고자 하면서 屍體이지 아니할 것인가 ​ 나의 걸음걸이의 속도는 일정하게 계속된다. 나의 성교의 보조는 언제까지 일정하게 계속된다. 성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도 나는 시체이고자 하면서 즉 남성이 사정을 마치고 축 늘어진 시체를 갈망하면서도, 시체이지 아니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남근이 발기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성행위가 오래 지속되어야, 상대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이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사정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 ▣   空腹 ―― 바른손에菓子封紙가없다고해서 왼손에쥐어져있는菓子封紙를찾으려只今막온길을五里나되돌아갔다         × 이손은化石하였다   이손은이제는이미아무것도所有하고싶지도않다所有된물건의所有됨을느끼기조차하지아니한다 只今떨어지고있는것이눈(雪)이라고한다면只今떨어진내눈물은눈(雪)이어야할것이다 나의內面과外面과   이件의系統인모든中間들은지독히춥다   左右 이兩側의손들이相對方의義理를저바리고두번다시握手하는일은없이 困難한勞働만이가로놓여있는이整頓하여가지아니하면아니될길에있어서獨立을固執하는것이기는하나   추우리로다 추우리로다          × 누구는나를가리켜孤獨하다고하느냐 이群雄割居를보라 이戰爭을보라          ×   나는그들의軋轢의發熱의한복판에서昏睡한다 심심한歲月이흐르고나는눈을떠본즉 屍體도蒸發한다음의고요한月夜를나는想像한다   天眞한村落의畜犬들아 짖지말게나 내體溫은適當스럽거니와 내希望은甘美로웁다 ― 1931. 7 ―     空腹 ―― ‘공복(空腹)’을 보통 빈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腹’은 ‘가운데’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비어있는 가운데’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腹’은 ‘앞, 전면(前面)’을 의미하기도 한다. ‘등(背)’이 ‘뒤, 후면(後面)’을 의미한다면, ‘배(腹)’는 ‘앞, 전면(全面)’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빈 앞, 즉 텅 비어 있는 미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상의 시 중에 제목 옆에 ‘――’처럼 표시되어 있는 시들이 몇 편 있다. 이를테면 , , , 등의 시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에 시인은 ‘――’ 혹은 ‘……’을 심심해서 붙여놓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목 ‘空腹’은 단순히 ‘비어 있는 배’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1930년대 초반, 이른바 조선 땅에는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양적 학문이 바른 학문이라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논쟁을 하던 시기였던가 보다. 물론 필자가 조사해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공복(空腹)’을 읽고,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이다.  이상 시인이 생각하기에는 서양적 학문은 실용적이기는 해도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적 학문만이 전부 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상의 시에서 많은 부분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비판한 시들이 있지만, 이 시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바른손에 菓子封紙가 없다고 해서 / 왼손에 쥐어져 있는 菓子封紙를 찾으려 只今 막 온 길을 五里나 되돌아갔다 단순히 문장을 읽기도 어렵다. 화자는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른손에는 과자봉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봉지를 찾으려 막 온 길을 오 리나 되돌아갔다. 결국 지금 화자의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좌우 양손에 모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과자봉지다. 화자가 바른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동양의 학문이다. 동양의 학문에는 과자봉지에 담긴 과자처럼 당장 먹기에 달콤한 것이 없다.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가 들어 있는 과자봉지는 서양의 학문이다. 지금 화자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과자봉지 속에는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 즉 서양의 실용적 학문들이 담겨 있다. 서양의 학문은 당장 현실에 적용하기 용이한 학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는 동양적 학문, 왼손에는 서양적 학문을 모두 쥐고 있다. 사실 이상은 처음에는 동양적 학문인 한학을 했고, 다음에 서양 학문을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부모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서 서양의 학문도 공부한 사람인 것 같다. 결국 이상은 동서양의 학문을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는 많은 시를 쓴 것을 보면, 서양 학문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동양의 학문이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더욱 소중한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적절히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손은 化石하였다 화자의 두 손은 굳어서 돌이 되었다. 바른손에는 동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고, 왼손에는 서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는데도 두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차차 나온다. 미리 설명하면, 세상에는 서양적 학문이 실용적이어서 바르다(옳다, 좋다)는 사람과 동양적 학문이 바르다는 사람 이렇게 둘로 갈라져서, 서로 열을 내면서 싸우고 있다. 이상과 같이 동양적 학문도 하고, 서양적 학문도 함으로써, 두 학문의 장점과 문제점을 고루 알아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던가 보다. 세상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화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손은 이제는 이미 아무것도 所有하고 싶지도 않다 所有된 물건의 所有됨을 느끼기조차 하지 아니 한다 그래서 이 화자의 손은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다. 소유된 물건의 소유됨을 느끼지도 못한다.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화자는 무엇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양적 학문이건 서양적 학문이건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고,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모두 소유되었음에도,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느끼기조차 아니하고 있다. 여기서 ‘아니 한다’는 것은 화자의 의지의 부정이다. 능력의 부정이 아니라, 의지의 부정이다.   只今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只今 떨어진 내 눈물은 눈(雪)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지금 화자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淚)은 눈(雪)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雪)이나 화자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淚)나 결국 같은 것이다. 모두 H2O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서양식 사고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가 떨어뜨린 눈물은 그 성분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같을 수 있으나, 정신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흘린 눈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고는 다양한 현상을 종합하여 개념화 추상화 일반화는 데는 뛰어나지만, 인간이 가진 다양한 정신과 문화와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학문이다. 따라서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의 적절한 조화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나의 內面과 外面과 이 件의 系統인 모든 中間들은 지독히 춥다 화자는 내면적으로는 동양적 학문을 중시한다. 외면적으로는 서양적 학문을 했다. 서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과 동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만 있는 세상에서, 두 가지의 적절한 보완과 종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외롭다. 左右 / 이 兩側의 손들이 相對方의 義理를 저바리고 두 번 다시 握手하는 일은 없이 /  困難한 勞働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整頓하여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길에 있어서 獨立을 固執하는 것이기는 하나 좌우, 즉 서양적 학문과 동양적 학문, 이 양측의 주장들이 상대방의 의리 즉 상대방의 학문이 서로에게 기여하는 바른 이치를 저버리고, 두 번 다시 서로 악수 즉 화해하는 일이 없이, 곤란한 근심스러운 일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정돈하여 가야할 길에, 화자는 또 화자대로 자신의 독립을 고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보면, 화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세상에서 홀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우리로다 / 추우리로다 화자는 생각한다. 동양적 학문만 옳다고 주장하거나, 서양적 학문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는 지금의 현실로 볼 때, 우리의 미래는 추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제목 ‘空腹(공복)’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미래는 텅 비어 있다. 배가 고플 것이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孤獨하다고 하느냐 /  이 群雄割居를 보라 /  이 戰爭을 보라 누구는 화자를 가리켜 고독하다고 하느냐?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에, 고독할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였나 보다. 그러나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과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이 제각각 군웅할거 식으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화자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    나는 그들의 軋轢의 發熱의 한복판에서 昏睡한다 / 심심한 歲月이 흐르고 나는 눈을 떠 본 즉 / 屍體도 蒸發한 다음의 고요한 月夜를 나는 想像한다 화자는 그들의 ‘알력의 발열’ 즉 서로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열나게 싸우는 한복판에서 혼수한다. 여기서 혼수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잠을 잔다는 말이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죽고, 시체도 썩어서 증발한 다음의 고요한 달밤을 상상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모두 고요한 달밤처럼 조용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라는, 화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러한 미래를 상상한다.   天眞한 村落의 畜犬들아 짖지 말게나 /  내 體溫은 適當스럽거니와 /  내 希望은 甘美로웁다 천진하고 순진하리만큼 어리석은, 시골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개와 같이 미련한 놈들아, 짖지 말게나. 떠들지 말게나. 엉터리 주장 하지 말게나.  내 체온은 적당스럽다. 서양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동양에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희망은 감미롭다. 미래에 분명히 내 말이 맞을 것이라는 달콤한 희망을 갖고 있다. ​ ​ ​ ▣  2. 烏瞰圖 (一) 二人…… 1 …… ​ 基督은襤褸한行色하고說敎를시작했다. 아아ㄹ· 카아보네는橄欖山을山채로拉撮했다        x 一九三○年以後의일――. 네온사인으로裝飾된어느敎會의門깐에서는뚱보카아보네가볼의傷痕을伸縮시켜가면서入場券을팔고있었다. ― 1931. 8 ―     二人…… 1 …… 제목 에서 은 ‘二人’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냥 ‘二人’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인데, ‘二人’이라고 써 놓고 그 옆에 ‘……’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시에는 이런 식의 표시가 되어 있는 시들이 있다. 이를테면 , 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그냥 단순히 ‘수염’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단순히 ‘공복 즉 비어 있는 배’라고 해석할 수 없다. 이상 시인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표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이중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기독(基督)’과 ‘아아ㄹ 카보네’는 동일 인물이다. 基督은 襤褸한 行色하고 說敎를 시작했다. / 아아ㄹ· 카아보네는 橄欖山을 山채로 拉撮했다. 기독(基督)과 같은 사람은 마치 기독처럼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여기서 ‘기독’은 ‘사람들이 그를 마치 기독인 듯이 생각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사욕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남루한 행색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그러한 목사를 기독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그 목사는 사실은 ‘아아ㄹ 카보네’다. 그리고 그 아아ㄹ 카보네는 감람산을 山(산)채로 납촬해 왔다. 알(Al)은 흔히 서양에서 남자의 이름에 붙는다. 그리고 ‘카보네(carvone)’는 ‘카본’(carvon)의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우리말로는 탄소라고 한다. 연탄이나 흑연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연탄이나 흑연은 검을 색을 띠고 있다. 따라서 ‘아아ㄹ 카보네’는 마음이 시커먼 교회의 목사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어느 교회의 목사가 처음에는 기독과 같은 남루한 행색으로 설교했으나, 사실은 마음이 시커먼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목사가 이제는 감란산을 통째로 교로 가져왔다. 기독의 감람산 연설을 듣기 위해서 많이 모여 있던 군중들을 교회로 데려 온 것이다. 기독과 같은 훌륭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一九三○年 以後의 일――. / 네온사인으로 裝飾된 어느 敎會의 門깐에서는 뚱보 카아보네가 볼의 傷痕을 伸縮시켜가면서 入場券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교회의 목사는 남루한 행색을 하던 기독이 아니었다. 달라졌다.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느 교회의 문간에서는 잘 먹어서 뚱보인, 마음이 시커먼 목사가 열변을 토한다. 기독의 볼에는 피를 흘리는 상처가 있는데, 이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볼에는, 잘 먹어 살이 쪄서 생긴 주름살이 있다. 그 주름살을 씰룩거리면서 열변을 토하면서, 천국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교회에 다녀야 천국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간다고, 기독 팔아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목사는 사기꾼이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기독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이제는 기독을 팔아서 사욕을 채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목 ‘二人 ……’은 이중성을 가진 어느 목사다. ​ ​ ​   ▣   二人…… 2 …… ​ 아아ㄹ · 카아보네의貨幣는참으로光이나고메달로하여도좋을만하나基督의貨幣는보기숭할지경으로貧弱하고해서아무튼돈이라는資格에서는一步도벗어나지못하고 있다.    카아보네가프렛상이래서보내어준프록코오트를基督은最後까지拒絶하고말았다는것은有名한이야기거니와宜當한일이아니겠는가. ― 1931. 8 ―      아아ㄹ · 카아보네의 貨幣는 참으로 光이 나고 메달로 하여도 좋을만 하나 基督의 貨幣는 보기 숭할 지경으로 貧弱하고 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資格에서는 一步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 헌금이라는 것을 한다. 십일조를 바치기도 한다. 교회에 들어온 돈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살림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독의 뜻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런데, 마음이 검은 아아ㄹ 카아보네 목사에게 들어오는 돈은 빛이 난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그 이름은 영광된 것이다.  그래서 아아ㄹ 카보네의 교회에 들어온 헌금은 메달(medal)로 하여도 좋다. 메달은 목에 건다. 메달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영광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의 이름과 그가 낸 돈의 액수를 기입하여 메달처럼 게시한다. 그래프로 그려서 헌금의 실적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를 보고 더욱 더 많은 헌금을 한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자랑스럽다. 더 많이 하고 싶다. 헌금을 적게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하여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돈벌이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온 헌금 중에서,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기독의 뜻에 따라,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기독의 화폐’는 보기 흉할 정도로 빈약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자격에서는 일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돈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아보네가 프렛상이래서 보내어 준 프록코오트를 基督은 最後까지 拒絶하고 말았다는 것은 有名한 이야기거니와 宜當한 일이 아니겠는가. 카아보네가, 기독이 프렛상(flatちん)이라고 해서 즉 십자가의 기독이 마치 가난해서 잘 먹지 못하여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빈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듯이, 그리스도에게 프록코오트를 보내 주자, 기독은 최후까지 거절하고 말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아아ㄹ 카보네의 자선을 거절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옷을 벗은 채, 겨우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다. 기독은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거절하여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 고개를 모로 돌린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기독의 모습을, 화자는 마치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기독이 거절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기독이 사기꾼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당한 일이다.   ​ ​ ▣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은나의AMOUREUSE이다 ​ ▽이여  씨름에서이겨본經驗은몇번이나되느냐. ▽이여  보아하니외투속에파묻힌등덜미밖엔없고나. ▽이여  나는그呼吸에부서진樂器로다.     나에게如何한孤獨은찾아올지라도나는xx하지아니할것이다.     오직그러함으로써만나의生涯는原色과같이하여豊富하도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 1931. 8 ―      神經質的으로 肥滿한 三角形 / ――△은 나의 AMOUREU -SE이다 제목은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다. 부제는 ‘――△은 나의 AMOUREUSE이다’이다. 부제를 보면, ‘――’이 있다. 혹시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 있다. ‘――’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뭔가 약간 수상하다. △은 화자가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그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호화하여 말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 즉 현대 수학이나 과학에서 일반화된 표현 방식이다.  이를테면 반지름과 원주의 길이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서양의 학문에서는, 반지름을 r이라고 하고,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하고,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면, π=ℓ/2r= 3.14 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반지름을 r 이라고 한다,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한다,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는 서양식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제목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에서 ‘삼각형’은 화자가 연인처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기호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삼각형이 비만하다. 따라서 삼각형(△)으로 기호화된, 그 무엇을 화자는 연인처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신경질적으로’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삼각형(△)은 ‘신경’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비만하여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어떤 대상임을 추리할 수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經驗은 몇 번이나 되느냐. △을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 놓고, 이 시에는 △은 나오지 않고, ▽만 나온다. 그렇다면 ▽은 무엇일까? △과 ▽을 나란히 놓고 곰곰 생각해 보면, ▽은 화자가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라는 제목과 관련시켜 보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화자가 신경질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그 어떤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화자는 ▽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경험은 몇 번이나 되는냐”하고. 아마 ▽은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그래서 화자는 ▽을 아주 싫어할 것이다. 그러면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관련시켜 ▽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자. 씨름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잡고, 힘을 쓰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호흡이 가빠오면서, 이기려고 하는 경기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씨름과 같은 어떤 행위에서 이겨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2행과 제3행의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 ▽이여,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와 관련하여 곰곰이 상상해 보면, ▽은 신경질적으로 지나치게 잘 발기되지 않는, 힘이 빠진 화자의 남근임을 추리할 수 있다. 화자는 힘이 빠져서 늘어진 남근으로 여자와의 씨름 즉 성교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여자를 제대로 만족시켜 준 적이 별로 없었는가 보다. 그렇다면 △은 잘 발기된 화자의 남근을 의미한다 할 것이며, 그러한 남근을 화자는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처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화자는 잘 발기된 남근으로 여성과 성교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할 것이다.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다. 남근을 사람의 형상에 비유한다면, 귀두 부분을 머리, 그 아래 잘록한 부분을 목, 그리고 그 아래 부분을 등 아래쪽의 몸의 형상과 유사하다. 따라서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 밖에 없는 ▽은 힘이 빠진 남근의 모습이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힘이 빠진 남근은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귀두를 감싸서 잘 보이지 않다. 외투가 감싸고 있는 등덜미만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여  나는 그 呼吸에 부서진 樂器로다. / 나에게 如何한 孤獨은 찾아올지라도 나는 xx하지 아니할 것이다. / 오직 그러함으로써만 나의 生涯는 原色과 같이하여 豊富하도다. 화자가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자신의 남근을 보면서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하고 독백하듯이, 탄식하듯이 말하고 있다. 호흡은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화자의 가쁜 호흡이다. 성적으로 흥분했을 경우의 가쁜 호흡 때문에 화자는 자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 행에 있다. 부서진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도구다. 부서지지 않은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듯이, 잘 발기된 남근은 여자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자위로 인해서 힘이 빠진 남근은 부서진 악기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여성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내도록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약간 행을 들여쓴 것은 화자가 속으로 생각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다.) 화자에게 여하한 고독은 찾아올지라도 xx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고독은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를 홀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도 xx하지 않겠다 즉 자위를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평소에 흥분이 되어 이를 해결할 수 없어서 오는 고독이 찾아올지라도, 자위를 하지 않고 힘을 비축해 두어야, 다음에 여자와 성교를 할 때, 여자라는 악기를 교성이 나도록 잘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오직 홀로 있을 때 자위를 하지 않음으로서 나의 생애는 원색과 같이 즉 남근이 본래의 붉은 색으로 잘 발기되어 화자의 삶이 풍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아주 잘 발기된 남근의 기호화다. 신경질적으로 ▽은 신경질 적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의 기호화다.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화자가 독백하는 것 같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반복되었다. 이것을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라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함으로써 강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캐러반은 대상(隊商)이다. 무거운 짐을 낙타나 말에 싣고 여기저기 장사를 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캐러반인가? 맞다. 화자는 △만 있다면, △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혼자 자위도 하고 여자와 성교하기도 좋아하는 캐러반이다. 또 이 여자와 저 여자와 성교하기를 좋아하는 캐러반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화자는 캐러반이 아니다. 화자는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이 있을 뿐이다. ▽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제대로 자위는 할 것이며, 여자와 제대로 성교는 할 수 있겠는가. 또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이 여자 저 여자와 성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화자는 결코 캐러반이 아니다.   ​ ​ ▣   運動 ​ 一層우에있는二層우에있는三層우에있는屋上庭園에올라서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밑에있는三層밑에있는二層밑에있는一層으로내려간즉東쪽에서솟아오른太陽이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은맞는것이지만時計는나보담도젊지않느냐하는것보담은나는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 1931. 8 ―      運動 '운동(運動)'이 제목이다. 무슨 뜻일까? 보통은 사람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운동이라 한다. 그런데 '물체의 운동'이라고 말할 때의 '운동'도 있다. 이때의 운동은 이동(移動)과 같은 의미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 운동 혹은 이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 난해하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겠다. 一層 우에 있는 二層 우에 있는 三層 우에 있는 屋上 庭園에 올라서 일층 위에 이층, 이층 위에 삼층, 삼층 위에 옥상, 그리고 그 옥상에는 정원(庭園)이 있다. 우리는 보통 아내를 ‘집’이라고 한다. 내 아내는 우리 집사람이다. 따라서 집에서 운동하는 것 혹은 이동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의 순서 혹은 단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부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는, 먼저 입을 맞추면서 서로의 사람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입을 맞추면서 서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일층이다. 첫 번째 단계다. 그 다음 남자는 아내의 유방을 애무한다. 그러면서 서로 서서히 흥분이 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감정을 고조시켜 나간다. 따라서 입이 일층이라면, 유방은 이층이다. 두 번째 단계다. 다음으로 아내의 음부를 애무한다. 육체적 사랑을 위한 준비는 최고조에 이른다. 삼층이다. 세 번째 단계다. 이처럼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는 성교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자의 음부를 향한다. 음부가 옥상이다. 옥상은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옥상에는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잘 가꾸어진 꽃과 풀과 나무가 있다. 초목이 자라는 정원은 음모가 나 있는 음부와 유사하다. 옥상 정원에 올랐다는 것은 아내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해서 屋上庭園 밑에 있는 三層 밑에 있는 二層 밑에 있는 一層으로 내려간 즉 東쪽에서 솟아오른 太陽이 西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서 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 西쪽에 떨어지고 그런데 한참 열심히 하다가 남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북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남쪽은 따뜻한 곳이다. 뜨거운 곳이다. 아내와 화자 모두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북쪽은 차가운 곳이다. 추운 곳이다. 그런데 북쪽에도 아무것도 없다. 아내와 화자 모두 차갑게 식은 것도 아니다. 아마 한참 서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서 미지근한 상태다. 아내도 제대로 달아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음부 애무 아래 단계인, 유방 아래 단계인, 입으로 갔다. 화자는 입맞춤에서부터 유방 애무, 그리고 음부 애무, 그리고 삽입의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입에서부터 솟아올라 유방을 거쳐 음부에 이르렀을 때 뜨겁던 태양이, 한참 하다 보면 서쪽으로 떨어진다. 열기가 식어버린다.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열기를 고조시키고, 하다 보면 또 떨어지고,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을 거쳐 음부로 그리고 옥상에 올라보면 또 식어버리고~~. 열심히 운동한다. 이동한다. 東쪽에 솟아올라 하늘 한복판에 와 있기 때문에 時計를 꺼내 본 즉 서기는 했으나 時間은 맞는 것이지만 時計는 나 보담도 젊지 않느냐 하는 것보담은 나는 時計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없는 고로 나는 時計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동쪽에서 뜬 태양이 한복판에 와 있어서, 즉 사랑의 열기가 다시 가장 뜨겁게 고조된 상태가 되었기에, 시계를 꺼내서 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동하면서 운동했는가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를 꺼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시계는 서기는 하였으나 맞는다. 그런데 시계는 나보담 젊지 않느냐 하는 것 보다는, 나는 시계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서 시계는 화자보다 젊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오래도록 멈춰 있다. 그러나 화자의 남근은 커졌다가는 이내 줄어들었다.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했다. 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멈춰선 시계는,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한 화자보다 젊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는 발기된 남근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하였다고 말해도 그것이 믿어진다. 멈춰선 시계는 운동하지 않았으나, 화자는 여러 번 운동을 하였다.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음부로 그리고 삽입하여 노력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고 잘 못하는 사람이 늙은이라면, 화자는 멈춰선 시계보다 운동을 많이 했으니까,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 하였다고 하는 것도 또한 믿어진다. 그래서 화자는 시계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시계보다 늙지 않은 화자,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삽입으로, 일층에서 삼층 위 옥상까지 열심히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다.   ​ ​ ▣   興行物天使   ――어떤後日譚으로―― 整形外科는여자의눈을찢어버리고形便없이늙어빠진曲藝象의눈으로만들고만것이다. 여자는실컷웃어도또한웃지아니하여도웃는것이다. 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 北極은초겨울이다. 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여자의눈은바닷개(海狗)잔등과같이얼음판위에미끄러져떨어지고만것이다. 世界의寒流를낳는바람이여자의눈을불었다. 여자의눈은거칠어졌지만여자의눈은무서운氷山에쌓여있어서波濤를일으키는것은不可能하다. 여자는大膽하게NU가되었다. 汗孔은汗孔만큼荊刺되었다. 여자는노래부른다는것이찢어지는소리로울었다. 北極은鐘소리에戰慄하였던것이다.        ◇ 거리의音樂師는따스한봄을마구뿌린乞人과같은天使. 天使는참새와같이瘦瘠한天使를데리고다닌다. 天使의배암과같은회초리로天使를때린다. 天使는웃은다. 天使는고무風船과같이부풀어진다. 天使의興行은사람들의눈을끈다. 사람들은天使의貞操의모습을지닌다고하는原色寫眞版그림엽서를산다. 天使는신발을떨어뜨리고逃亡한다. 天使는한꺼번에열個以上의덫을내어던진다.        ◇ 日曆은쵸콜레이트를늘인(增)다. 여자는쵸콜레이트로化粧하는것이다. 여자는트렁크속에흙탕투성이가된즈로오스와함께엎드러져운다. 여자는트렁크를運搬한다. 여자의트렁크는蓄音機다. 蓄音機는喇叭과같이紅도깨비靑도깨비를불러들였다. 紅도깨비靑도깨비는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입지않은펜긴은水腫이다. 여자는코끼리의눈과頭蓋骨크기만한水晶눈을縱橫으로굴리어秋波를濫發하였다. 여자는滿月을잘게잘게썰어서饗宴을베푼다. 사람들은그것을먹고돼지같이肥滿하는쵸콜레이트냄새를放散하는것이다. - 1931. 8 -   興行物 天使 / ――어떤 後日譚으로―― ‘흥행물 천사’는 축음기 레코드 판 속에서 노래하는 여자 가수다. 레코드판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물건이다. 천사는 천국에서 인간 세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다. 축음기의 레코드판도 실제 가수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다. 부제 ‘――어떤後日譚으로――’는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썼다는 의미로도 보이고,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그 후에 벌어질 경과에 대하여 덧붙이는 이야기로 썼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整形外科는 여자의 눈을 찢어버리고 形便없이 늙어빠진 曲藝象의 눈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여자는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정형외과는 여자 가수의 눈을 찢어버리고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하는 코끼리의 눈처럼 커다란 레코드판을 만들고 만 것이다. 레코드판은 커다란 코끼리의 검은 눈동자와 같다. 검은 눈동자에는 그 안에 검은 동공이 있는데, 이는 레코드판 전체가 커다란 코끼리의 눈과 같다면, 동공은 음악이 기록되지 않은 안쪽 부분이다. 코끼리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홈이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래서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상의 눈이다. 그래서 코끼리의 눈은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주름 모양의 홈이 있으니 웃거나 웃지 않거나 웃는 모습처럼 보인다.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 北極은 초겨울이다. 여자 가수의 눈인 레코드판은 레코드 바늘과 위쪽에서 만났다. 위쪽이 북쪽이다. 북극은 초겨울이다. 레코드판 위에 처음 레코드를 재생하기 위해서 레코드 바늘을 올려놓으면 마치 북극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잡음이 들린다. 그 잡음 소리가 마치 초겨울에 부는 바람 소리 같다. 여자의 눈에는 白夜가 나타났다. 여자의 눈은 바닷개(海狗) 잔등과 같이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백야가 나타났다. 북극의 얼음판 위에 백야가 나타나면 햇빛이 얼음판에 반사되어 빛난다. 마찬가지로 레코드판에는 홈에 햇빛이 반사되어 마치 지평선 위에서 해가 비친 것처럼 햇빛이 반사된다.  마치 바닷개의 잔등과 같은, 눈의 흰자위에서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진 눈동자처럼, 레코드판의 표면이 빛에 반사되어 빛난다. 世界의 寒流를 낳는 바람이 여자의 눈을 불었다. 여자의 눈은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은 무서운 氷山에 쌓여 있어서 波濤를 일으키는 것은 不可能하다. 세계에 한류를 불러오는 북극의 바람과 같은 잡음이 레코드판에서 일었다. 그래서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은 주름이 있어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인 레코드판은 빙산과 같이 딱딱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의해서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는 大膽하게 NU가 되었다. 汗孔은 汗孔만큼 荊刺되었다. 여자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北極은 鐘소리에 戰慄하였던 것이다. 여자 가수는 대담하게 NU가 되었다. 여자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수가 된 것이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여자 가수의 땀구멍은 땀구멍 수만큼 레코드 바늘로 찔렸다. 레코드 바늘이 찌르는 대로 레코드판 속의 가수는, 땀을 흘리는 듯이,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북극은 종소리에 전율하였던 것이다. 종소리의 파문처럼 나 있는 홈에, 레코드바늘이 얹히고, 홈의 요철을 따라 레코드 바늘이 지나가자, 마치 찢어지는 듯 절규하는 목소리로, 전율하는 듯 소리를 냈다. 거리의 音樂師는 따스한 봄을 마구뿌린 乞人과 같은 天使. 天使는 참새와 같이 瘦瘠한 天使를 데리고 다닌다. 거리의 음악사는 따스한 봄을 마구 뿌린 걸인과 같은 천사다. 따스한 봄은 쵸콜레이트가 잘 녹는 계절이고, 쵸콜레이트처럼 녹은 레코드판의 원료로 레코드판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코드판을 거리에 마구 뿌리고, 그 뿌린 레코드판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마치 걸인과 같이 돈을 요구하면서 음악을 전해주는 천사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축음기 속의 가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요구하면서, 돈을 요구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걸인과 같다. 축음기 속에서 노래 부르는 실제 가수는, 참새와 같이 수척한 천사, 참새와 같이 자그만 레코드판 속의 노래 부르는 가수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 가수를 흥행시켜서 돈을 벌고자 한다. 天使의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天使를 때린다. / 天使는 웃은다. 天使는 고무風船과 같이 부풀어진다. 천사의 똬리를 틀고 있는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천사를 때린다. 가수는 똬리와 같은 홈이 있는 레코드판을 찍어낸다. 천사는 돈이 많이 들어오니까 좋아한다. 천사는 부풀어진 고무풍선처럼 많은 돈을 번다. 天使의 興行은 사람들의 눈을 끈다. / 사람들은 天使의 貞操의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原色 寫眞版 그림엽서를 산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노래는 사람들의 주위를 끈다. 사람들은 천사의 정조한 모습, 실제와 변함없는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그 원색 사진판 그림엽서 즉 원래 가수의 목소리를 그대로 찍어 놓은 레코드판을 산다. 天使는 신발을 떨어뜨리고 逃亡한다. 여자 가수는 자신의 자취만을 레코드판 속에 남겨 놓은 채 사라진다. 레코드판 속에 실제 여자 가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자취만 남겨진다. 신발을 떨어뜨리고 간 것은 자취만 남기고 간 것이다. 天使는 한꺼번에 열 個 以上의 덫을 내어 던진다.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 하나에 열 개 이상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래를 판 속에 실어 놓는다. 日曆은 쵸콜레이트를 늘인(增)다. / 여자는 쵸콜레이트로 化粧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레코드판을 많이 낸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을 새롭게 고쳐서 단장하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속에 흙탕투성이가 된 즈로오스와 함께 엎드러져 운다. 여자는 트렁크를 運搬한다. 여자 가수는 여자가 들어가는 큰 가방과 같은 축음기 속에서, 흙탕투성이가 된 속바지와 함께 엎드려서 운다. 축음기 속에는 많은 가수들의 레코드판이 들어가 재생된다. 따라서 그 축음기 속은 많은 가수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므로 흙이 많다. 그리고 축음기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 바늘이 땀구멍을 찌를 때마다 땀을 흘리면서 마치 아파서 우는 것처럼 열심히 부른다. 그러니 흙과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흙탕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 여자들은 마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속옷과 같은 팬티를 입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레코드판은 축음기 위에 납작하게 놓여 재생된다. 엎드러져 우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 즉 축음기를 운반한다. 레코드판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축음기가 있어야 한다. 축음기를 운반해야 한다. 축음기를 사게 하는 것이다. 여자의 트렁크는 蓄音機다. / 蓄音機는 喇叭과 같이 紅도깨비 靑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여자를 담는 큰 가방은 축음기다. 축음기는 소리를 크게 들리게 하는 나팔과 함께 홍도깨비와 청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 이렇게 축음기와 레코드판이 보급되자, 도깨비처럼 사람을 홀리는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가 모여들었다. 紅도깨비 靑도깨비는 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 입지 않은 펜긴은 水腫이다. / 여자는 코끼리의 눈과 頭蓋骨 크기만 한 水晶 눈을 縱橫으로 굴리어 秋波를 濫發하였다. 사람을 홀리는 가수는 펭귄과 같은, 하얀 와이셔츠에 턱시도를 입고 노래 부른다. 사루마다 즉 팬티밖에 입지 않고 노래 부르는 가수는 몸이 붓는 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납작한 레코드판에 들어갈 수가 없고, 노래 대신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노래로 사람들의 관심을 살 수 없으니까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가수다. 여자 가수는 코끼리의 눈과 두개골 크기만 한, 수정처럼 딱딱한 레코드판을 종횡으로 굴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서 가로로, 그리고 밖에서 안쪽으로 세로로 눈을 굴리면서 사람들에게 추파를 남발하였다. 레코드판 속의 노래는 주로 이성을 유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滿月을 잘게잘게 썰어서 饗宴을 베푼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돼지같이 肥滿하는 쵸콜레이트 냄새를 放散하는 것이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보름달과 같은 레코드판을 홈을 따라서 잘게 썰어서 노래로 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여자가 주는 노래를 먹고, 돼지 같이 돈을 버는 레코드판 냄새를 방산하는 노래를 부른다. 레코드판 속의 가수가 주는 노래에 가수는 돈을 벌고, 대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3. 三次角 設計圖 ​ ▣   線에關한覺書 1       1  2  3  4  5  6  7  8  9  0 1 ⦁ ⦁ ⦁ ⦁ ⦁ ⦁ ⦁ ⦁ ⦁ ⦁  2 ⦁ ⦁ ⦁ ⦁ ⦁ ⦁ ⦁ ⦁ ⦁ ⦁  3 ⦁ ⦁ ⦁ ⦁ ⦁ ⦁ ⦁ ⦁ ⦁ ⦁  4 ⦁ ⦁ ⦁ ⦁ ⦁ ⦁ ⦁ ⦁ ⦁ ⦁  5 ⦁ ⦁ ⦁ ⦁ ⦁ ⦁ ⦁ ⦁ ⦁ ⦁  6 ⦁ ⦁ ⦁ ⦁ ⦁ ⦁ ⦁ ⦁ ⦁ ⦁  7 ⦁ ⦁ ⦁ ⦁ ⦁ ⦁ ⦁ ⦁ ⦁ ⦁  8 ⦁ ⦁ ⦁ ⦁ ⦁ ⦁ ⦁ ⦁ ⦁ ⦁  9 ⦁ ⦁ ⦁ ⦁ ⦁ ⦁ ⦁ ⦁ ⦁ ⦁  0 ⦁ ⦁ ⦁ ⦁ ⦁ ⦁ ⦁ ⦁ ⦁ ⦁     (宇宙는冪에依하는冪에依한다)  (사람은數字를버려라)  (고요하게나를電子의陽子로하여라) 스펙톨   軸 X 軸 Y  軸 Z   速度 etc의 統制例컨대光線은每秒當三○○○○○킬로미터달아나는것이確實하다면사람의發明은每秒當六○○○○○킬로미터달아날수없다는法은勿論없다. 그것을幾千倍幾萬倍幾億倍幾兆倍하면사람은數十年數百年數千年數萬年數億年數兆年의太古의事實이보여질것이아닌가. 그것을또끊임없이崩壞하는것이라고하는가. 原子는原子이고原子이고原子이다. 生理作用은變移하는것인가. 原子는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다. 放射는崩壞인가. 사람은永劫인永劫을살수있는것은生命은生도아니고命도아니고光線인것이라는것이다.   臭覺의味覺과味覺의臭覺      (立體에의絶望에依한誕生)    (運動에의絶望에依한誕生)    (地球는빈집일境遇封建時代는눈물이나리만큼그리워진다) ― 1931. 10 ―     이 시는 무한히 팽창하며 펼쳐진 우주,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 광선과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원자 물리학 등을 공부한 이상이, 광선을 중심으로 현대 서양의 과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제목 에서 ‘선’은 광선이다.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첫 번째 시로 적었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한다. 이상한 그림 맨 처음에 나오는 숫자와 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그림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를 나타낸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숫자들이 씌어 있고, 계속해서 그 숫자들이 증가하면서 무한히 펼쳐지는 우주를 형상한다.  (宇宙는 冪에 依하는 冪에 依한다) 이상 시인은 이 이상한 그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친절하게도 아래에 괄호를 하고, 그 안에 몇 자 적어 놓았다. 서양의 과학에 의하면, 우주는 제곱에 의하는 제곱에 의한다고 했다. 제곱이 거듭 제곱되는 것에 의해서 무한히 펼쳐진다. 이러한 문제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數字를 버려라)  사람은 숫자를 버리라고 했다. 서양 과학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30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향해 달아나고, 그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인간은 몇 살까지 산다는 숫자를 버려도 된다. 서양 학문에서는 숫자를 버리라고 한다. 또 서양의 과학인 양자역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중심부에 양자가 있고, 양자의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간, 이를테면 80세, 90세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람은 죽어서도 그 물질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양자와 전자가 다른 형태로 우주의 어디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과연 옳은지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고요하게 나를 電子의 陽子로 하여라)  고요하게 나를 전자의 양자로 하라고 하였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적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양자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간도 결국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화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에 잠겨 있다. 스펙톨 스펙톨. 분광(分光). 물체에서 반사된 광선이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달아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광선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그 광선은 반사되어 우주로 날아간다. 그 날아가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수없이 많은 광선으로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나누어져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이 된다.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우주에서 수없이 많은 같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과연 서양의 과학의 이론대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지금 화자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軸 X 軸 Y  軸 Z X축과 Y축과 Z축으로 이루어진, 삼차원의 입체 공간을 표현한 것이다. 우주는 삼차원의 입체 공간이다.   速度 etc의 統制 例컨대 光線은 每秒當 三○○○○○킬로미터 달아나는 것이 確實하다면 사람의 發明은 每秒當 六○○○○○킬로미터 달아날 수 없다는 法은 勿論 없다 속도 기타의 통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속도와 기타 이를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예컨대, 광선은 매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람의 발명 즉 사람이 발명한 타임머신과 같은 것은 매초당 육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법을 논하지 말라는 것은 없다.  화자는 광선이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인간이 만든 물건 즉 타임머신 같은 것이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간다는 모형을 설정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은 초당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勿論(물론)’이라는 글자 위에 강조점이 있다. 이것은 ‘논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것을 幾千倍 幾萬倍 幾億倍 幾兆倍하면 사람은 數十年 數百年 數千年 數萬年 數億年 數兆年의 太古의 事實이 보여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발명품의 속도를 몇 천 배, 몇 만 배, 몇 억 배, 몇 조 배 높여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수억 년, 수조 년의 아득한 옛날의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을 따라가면 아득한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또 끊임없이 崩壞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原子는 原子이고 原子이고 原子이다.  태고로 가서, 또 거꾸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죽고, 죽고, 죽고 하는 것을, 끊임없는 원자가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원자는 다시 원자(붕괴의 근본이 되는 것)가 되고, 다시 원자가 원자가 되어야 한다. 즉 사람이 죽어서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 붕괴한 원자가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수없이 반복하여야 한다.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데 그것이 어찌 다시 붕괴의 근원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어찌 죽음을 끊임없이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生理作用은 變移하는 것인가. 原子는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다. 그러면 생리작용은 변하여 이동하는 것인가? 태고로부터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할 때, 그 태어나고 죽는 사람마다 생리작용이 다른데, 그러면 그 생리작용은 변이하는 것인가? 변이한다면 원자 붕괴의 근본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원자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또 다시 붕괴의 근원이 되는 그 사람은 원자로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는 모든 종류의 물질에서 동일한 성질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放射는 崩壞인가 인간의 몸에서 출발하여 우주로 날아가는 광선을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도 있고, 다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광선이 사방을 반사되어 달아나는 것이 곧 물질이 붕괴하여 원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인가. 광선이 우주를 향해 달아나는 것이 곧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永劫을 살 수 있는 것은 生命은 生도 아니고 命도 아니고 光線인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사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광선이라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빨리 우주로 나아가면 태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광선에 있는 것인가.   臭覺의 味覺과 味覺의 臭覺 인간이 단순히 원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관점에서 존재를 설명한다면, 취각이 미각이 될 수도 있고, 미각이 취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후각도 물질로 이루어졌고, 후각을 구성하는 물질이 흩어졌다가 다시 미각으로 결합하면 후각이 미각이 된다. 그게 과연 그러한가. 현대 물리학적 이론에 대해서 이상 시인은 상당한 회의를 품은 채 생각하고 있다.   (立體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運動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동양에서는 인간은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 훌륭한 시를 쓴 사람은 그가 죽어서도 시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가 죽은 후에도 역사 속에서 그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을 원자의 구성체로 보는 서양 과학의 사고는, 서양 사람들이 인간을 죽어서도 살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절망에서 인간을 쪼개서 원자로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살아서의 삶이 죽어서의 삶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가 죽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자, 서양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도 그 사람에게서 방사된 광선은 계속하여 우주로 날아가고, 그 광선을 따라가면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地球는 빈집일 境遇 封建時代는 눈물이 나리만큼 그리워진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지구는 빈집이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에 따라서 인간을 본다면, 지구에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원자의 집합체, 물질의 집합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빈집이다. 그렇다면 봉건시대 즉 현대 물리학이 없던 시대인 봉건시대, 인간을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던 봉건시대는 눈물이 날만큼 그리워진다. ​ ​   ▣   線에關한覺書 2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 + B + C = A A + B + C = B A + B + C = C   이선의교점 A 삼선의교점 B 수선의교점 C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太陽光線은, 凸렌즈때문에收斂光線이되어一點에있어서爀爀히빛나고爀爀히불탔다. 太初의僥倖은무엇보다도大氣의層과層이이루는層으로하여금凸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樂이된다. 幾何學은凸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死亡해버린오늘유크리트의焦點은到處에있어서人文의腦髓를마른풀과같이燒却하는收斂作用을羅列하는것에依하여最大의收斂作用을재촉하는危險을재촉한다. 사람은絶望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絶望하라.) ― 1931. 10 ―       이 시는 볼록렌즈와 볼록렌즈를 통과하여 한 점에 수렴하는 光線(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문명,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수학 등이, 인류의 다양한 사고를 말살시키고 결국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생각을 표현한 시다. 이 시의 제목 는 선 즉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광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광선은 서양 과학 문명의 상징이다.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위 숫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것은 전체적으로 볼록렌즈 모습을 하고 있다. 예전에 세로쓰기 할 때의, 이상의 시집에 나타난 모습하고는 방향이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는 가로쓰기를 한다. 그래서 위 숫자들, 그리고 숫자들로 이루어지는 그림을 가로쓰기 방식으로 적었기 때문에 원래 이상의 시집에 나오는 모습하고는 다소 다르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돌리면 윗면이 평평하고 아래고 볼록한 볼록렌즈가 되는데 원래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있건 시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불편을 주지 않아서 이렇게 썼다. 괜찮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이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은 한 점으로 수렴된다.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모두 한 점에 수렴된다. 볼록렌즈의 초점에 모두 수렴된다. 그러면 이상 시인은 광선이 통과하는 볼록렌즈의 각 지점을 왜 ‘1+3’의 형태로 표현하였을까? 다른 숫자도 많은데 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을까? 1+3은 4가 되고 4=死(사)이다.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것을 태워 죽인다. 모든 것을 말살한다. 그래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다. 서양문명으로 상징되는 볼록렌즈를 통과해서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인문적 정신을 말살하는 서양 학문의 상징이다.   線上의一點 A / 線上의一點 B / 線上의一點 C // A + B + C = A / A + B + C = B / A + B + C = C  // 이선의교점 A / 삼선의교점 B / 수선의교점 C 임의의 광선 하나가 볼록렌즈를 통과한다. 그 임의의 한 선상의 어느 한 점을 A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한 점을 B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점을 C라고 하자.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A점을 통과한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한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각각의 광선을 합해도 결국 C점을 통과하는 광선 하나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두 광선의 교점을 A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두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A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세 광선의 교점을 B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세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여러 광선의 교점을 C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여러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C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여기의 볼록렌즈는 처음의 볼록렌즈와 유사하다. 그러나 숫자가 조금 다르다. 숫자가 달라도 마찬가지다. 3+1을 통과한 광선이나, 1+3을 통과한 광선이나 어떤 숫자를 통과한 광선도 결국 한 점에 수렴된다. 그것이 볼록렌즈를 만든 서양 문명인 것이고, 그것이 서양 학문의 근본적 사고다.    (太陽光線은, 凸렌즈 때문에 收斂光線이 되어 一點에 있어서 爀爀히 빛나고 爀爀히 불탔다. 太初의 僥倖은 무엇보다도 大氣의 層과 層이 이루는 層으로 하여금 凸렌즈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樂이 된다)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볼록렌즈로 상징되는 서양 문명, 한 점으로 수렴되는 서양 문명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삭막한 문명인지를 독자들이 잘 알아들으라고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했다. 태양광선은, 볼록렌즈 때문에 수렴광선이 되어, 한 점에서 혁혁히 빛난다. 아주 밝게 빛난다. 그리고 혁혁히 불탄다. 아주 거세게 불타버린다. 태초의 요행 즉 이 지구가 처음 생겨날 때의 요행은 무엇보다도 대기의 층과 층, 이를테면 대기권 성층권 등이 이루는 층으로 하여 볼록렌즈가 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즐거움이 된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을 대기의 각 층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도록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것이 볼록렌즈처럼 태양 광선을 한 점으로 모았다면 지구는 불타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래서 인류는 지구에서 살게 되었고, 다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인문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정신적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幾何學은 凸렌즈와 같은 불장난은 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 死亡해 버린 오늘 유크리트의 焦點은 到處에 있어서 人文의 腦髓를 마른 풀과 같이 燒却하는 收斂作用을 羅列하는 것에 依하여 最大의 收斂作用을 재촉하는 危險을 재촉한다 기하학은 볼록렌즈와 같은 불장난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의 기하학은 모든 현상을 기하학적 사고로 해결한다. 인류의 모든 삶을 기하학에 수렴되고 그것으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 한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이 한 점에 수렴되면 그 곳에서 혁혁히 불타듯이, 인류의 다양한 삶을 기하학에 수렴시켜 해석하려는 서양문명은 다양한 문명을 태워 없애지 않을지 염려한다. 유클리드는 사망해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유클리드의 초점은 도처에 있다. 원과 초점 이야기가 나오는 기하학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도처에 남아 있다.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사망 후에도 남아서 도처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따라서 인문의 뇌수로 이룩한 인문학의 정수들을 마른 풀과 같이 태우는 수렴 작용을 나열하는 것에 의해, 즉 모든 인문학을 유클리드 기하학 하나로 수렴하여 해결하는 것들에 의해, 더욱 더 수렴 작용을 재촉하는 위험을 점점 더 재촉하고 있다.   사람은 絶望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絶望하라 따라서 화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볼록렌즈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변되는 서양 문명에 대한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새롭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탄생하라. 동양의 학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하라. 동양 학문을 간절히 그리워하라. ​ ​ ​ ▣   線에關한覺書 3 3   2    1    •    •    •    1 •    •    •    2 •    •    •    3 ​ 1   2    3    •    •    •    3 •    •    •    2 •    •    •    1   ∴ nPn = n (n-1) (n-2) …… (n-n+1) (腦髓는부채와같이圓까지展開되었다. 그리고完全히回轉하였다) ― 1931. 10 ―     제목 는 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선은 광선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광선을 말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이 시는 서양의 현대 학문의 상징인 기하학, 기하학 중에서도 원을 통하여, 서양의 현대문명이 인간이 이룩한 다양한 가치, 문화, 종교, 인문 등을 어떻게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 혹은 서구문명의 한계를 지적한 시라 할 것이다. 3   2    1    •    •    •    1 •    •    •    2 •    •    •    3 이 숫자와 점들을 기하학적으로 바라보면 부채꼴이다. 원의 중심을 기준으로 가로와 세로로 잘랐을 경우, 이 그림은 원의 오른쪽 위 부분에 해당하는 부채꼴이다. 다만 부채꼴에는 위에서 아래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다. 그러한 부채꼴이다. 1   2    3    •    •    •    3 •    •    •    2 •    •    •    1 이 그림도 앞의 그림과 유사하다. 그러나 앞의 부채꼴과는 다른 부채꼴이다. 이 부채꼴은 앞의 부채꼴에 비해서 숫자가 다르다. 가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고,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따라서 두 부채꼴은 서로 다르다.  만약 이것을 단순히 부채꼴로 보지 않고 인류의 다양한 사고, 문화, 역사, 삶, 인문 등으로 해석한다면 두 개의 부채꼴은 서로 다른 사고요, 문화요, 역사요, 삶이요, 인문이다. ∴ nPn = n (n-1) (n-2) …… (n-n+1) 위 그림 외에 또 다른 부채꼴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위에 있는 두 개의 부채꼴 외에도 다양한 부채꼴이 이 세상에는 더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부채꼴이 존재한다. 만약 부채꼴을 우리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수학에 약한 분을 위해서 복잡한 수식을 설명하겠다. (사실 필자도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한테 물었다. 아들이 설명해 주어서 이해했다.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다.) 부채꼴의 호에 있는 숫자들을 보자. 만약 숫자가 n개 있다고 하면 부채꼴의 종류는 nPn 만큼 있는 것이다.  nPn은 n 개의 숫자에서 n 개만큼 뽑아서 이를 나열하는 방법의 수를 나타낸다. n! 만큼 다양한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n! 은  n (n-1) (n-2) …… (n-n+1)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하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腦髓는 부채와 같이 圓까지 展開되었다. 그리고 完全히 回轉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을 생각해 낸 그들의 뇌수 즉 사고는 부채와 같이 펼쳐져서, 원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회전하였다. 서로 다른 숫자가 적힌 다양한 부채꼴을 회전시켜 보라. 그러면 다양한 숫자가 적힌 부채꼴은 각각의 다른 부채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존재한다. 동일한 모양의 원이 된다. 부채꼴 호에 아무리 다양한 숫자가 적혀도 이를 회전하면 부채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원만 남는다. 이처럼 다양한 것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설명하려 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은 인류의 다양한 가치, 사고, 역사, 문화, 인문 등을 모두 말살하고, 이를 하나의 원으로 단순화시킨다. 이것이 서양 학문의 특성이다. 이러한 서양 문명은 결국 인류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서양 과학의 핵심은 귀납추리에 의한 일반화, 추상화에 있다. 다양한 사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이 서양의 학문이요 문명이다. 이러한 사고는 일견 위대해 보이지만, 개별적인 것들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정신을 낳을 우려가 있다. 시인은 서양적 학문과 문명의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이와 같은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는 서구문명 혹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라 할 것이다. ​ ​   ▣   線에關한覺書 4            (未定稿)     彈丸이一圓壔를疾走했다 (彈丸이一直線으로疾走했다에있어서의誤謬等의修正)   正六雪糖 (角雪糖을稱함)   瀑筒의海綿質塡充 (瀑布의文學的表現) ― 1931. 10 ―                                                          제목 는 광선에 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광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의 상징이다. 이 시는 서양의 학문과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가치들을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제목 밑에 미정고(未定稿)라고 적혀 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원고라는 의미로 보인다. 아니면 원래는 미정고로서 확정되지 않은 원고인데,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미정고라는 말을 지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미정고라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彈丸이 一圓壔를 疾走했다 (彈丸이 一直線으로 疾走했다에 있어서의 誤謬等의 修正) 만약 우리가 서서, 전방을 향하여 총을 한 방 쏘았다고 하자. 우리는 보통 그것을 탄환이 일직선으로 빠르게 달려갔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을 서양의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탄환이 일직선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고, 탄환이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빠르게 달려갔다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탄환도 자연히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날아갔다는 것이다.   正六雪糖 (角雪糖을 稱함) 지금 화자는 앞에 각설탕, 정육면체의 각설탕을 놓고 생각에 잠긴다. 이 각설탕을 맑은 물이 든 유리컵에 넣었다고 상상해 보자. 컵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각설탕은 뽀글뽀글 하얀 공기를 뿜어내면서 가라앉게 되고, 마침내 녹아서 설탕물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서양의 과학으로는, 각설탕의 입자 사이의 공극에 물이 침투하게 되고, 그 결과 공극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오고, 설탕이 녹은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것이 설탕이 녹는 현상을 설명하는 서양 과학의 발상이다.   瀑筒의 海綿質 塡充 (瀑布의 文學的 表現) 그렇다면, 마치 각설탕이 물이 든 컵의 바닥으로 떨어질 때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면서 녹는 것처럼, 하얀 물거품을 내면서 떨어지는 저 폭포는, 해면질로 된 지구의 공극을 메우기 위해서 저렇게 하얀 물거품을 뿜으면서 떨어지는 것이란 말인가. 폭포를 보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서, 서양의 과학적 설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장엄함과 그리고 거센 기세와 자신을 투신하는 헌신 등의 다양한 문학적 상상,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학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각설탕이 컵에서 녹는 방식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서양의 과학적 사고는 결국 우리의 다양한 인문적 사고를 말살시키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 ​ ​ ▣   線에關한覺書 5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光線을보는가. 사람은光線을 본다. 年齡의眞空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結婚하는가.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未來로달아나서過去를본다. 過去로달아나서未來를보는가. 未來로달아나는것은過去로달아나는것과同一한것도아니고未來로달아나는것이過去로달아나는것이다. 擴大하는宇宙를憂慮하는자여, 過去에살으라. 光線보다도빠르게未來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라.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速度를調節하는사람은나를모은다. 無數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無數한過擧를傾聽하는現在를過擧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反復되는過去. 無數한過去를傾聽하는無數한過去. 現在는오직過去만을印刷하고過去는現在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境遇에있어서도區別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過去를現在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健忘이여. 永遠한忘却은忘却을求한다. 到來할나는그때문에無意識中에사람에一致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未來는새로웁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光線을드디어先行하고未來에있어서過去를待期한다. 于先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體操의技術을習得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過去의나의破片을如何히할것인가. 思考의破片을反芻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不完全이다.聯想을죽이라. 하나를아는者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의다음은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最大限달아나라. 사람은두번分娩되기前에xx되기전에祖上의祖上의祖上의星雲의星雲의星雲의太初를未來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留保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永遠에살고過去를愛撫하고過去로부터다시그過去에산다. 童心이여. 童心이여. 充足될수야없는永遠의童心이여. ― 1931. 10 ―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정하고 이 시를 읽어 보자. 나의 몸에서 반사되어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그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무수한 나를 만날 수 있다. 조금 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어제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작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10년 전의 나도 만날 수 있다. 10년 전의 나로부터 반사된 광선은 지금도 우주의 어딘가를 초당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아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전제로 해서 이 시를 읽어 보자. 그러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처음 한 연만 읽어 보겠다.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면 사람은 光線을 보는가. 사람은 光線을 본다. 年齡의 眞空에 있어서 두 번 결혼한다. 세 번 結婚하는가.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라.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쫓아서 타임머신을 타고 빠르게 따라가면 사람은 그 광선을 보는가. 사람은 광선을 본다. 달아나는 광선보다 빨리 따라가면 볼 수 있다. 연령의 진공에 있어서 즉 나이를 먹지 않는, 따라가서 본 광선에서 우리는 두 번 결혼한다. 한 번은 현실에서 결혼하고, 한 번은 그 광선에서 결혼하는 것을 본다. 세 번 결혼하는가? 현실에서 한 번 결혼하고, 광선에서 한 번 결혼하던 것을 보고, 아니 그 이전의 광선을 본다면, 그 광선이 시간이 지나면서 또 결혼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세 번 결혼을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서양 학문에 의하면 광선을 따라가면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읽어 보라.) ​ ​ ​ ▣  線에關한覺書 6 數字의方位學      數字의力學   時間性(通俗思考에依한歷史性)   速度와座表와速度   +   +   +   +   etc   사람은靜力學의現像하지아니하는것과同一하는것의永遠한假說이다. 사람은사람의客觀을버리라.   主觀의體系의收斂과收斂에依한凹렌즈    第四歲    一千九百三十一年九月十二日生    陽子核으로서의陽子와陽子와의聯想과選擇   原子構造로서의一切의運算의硏究   方位와構造式과質量으로서의數字의性態性質에依한解答과解答의分類   數字를代數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疾患의究明과詩的인情緖의棄却處)   (數字의 一體의性態  數字의一切의性質  이것들에依한數字의語尾의活用에依한數字의消滅)   數式은光線과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는사람에依하여運算될것.   사람은별 ―― 天體 ―― 별때문에犧牲을아끼는것은無意味하다. 별과별과의引力圈과引力圈과의相殺에依한加速度函數의變化의調査를爲先作成할 것 ​ ― 1931. 10 ― ​ ​ 제목 는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이다.   數字의 方位學 / 여기에 사용된 ‘’는 일단 방위를 나타내는 기호다. ‘’는 위쪽의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왼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오른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은 아래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다.   數字의 力學  이제 ‘’는 숫자를 나타낸다. 따라서 ‘’는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時間性(通俗思考에 依한 歷史性) 이제 ‘’은 시간성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의 흐름, 통속적으로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 기호다.  速度와 座表와 速度 / +/+/+/+/ etc 이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의 관계 속에서 아래 기호들을 생각해 보자. 화자는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과 관련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즉 우리가 통속적으로 역사성이라고 말하는 그 시간성이 포함된다. ‘+’은 평면 좌표에서 오른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갔다(시간성)가, 다시 왼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간(시간성) 것을 나타냅니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러한 경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결국 아무 방향으로도, 또 얼마만큼도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자리에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돌아온 것은, 원래 제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4+(-)=0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이러한 경우 분명히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있었고,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서양 학문에서는 좌표 평면에서, 4+(-4)=0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를 처음부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행위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서양 학문이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되었을 때의 잘못된 점이다. 나머지 +,+,+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는 ‘+’, 위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아래로 4만큼 간 ‘+’, 아래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위로 4만큼 간 ‘+’은 모두 처음의 제자리에 돌아오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리에 돌아왔어도 각각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일어났고, 나머지도 각각 마찬가지다. 심지어 서양의 학문에서는 ‘+’과 ‘+’과 ‘+’과 ‘+’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원래의 위치에서 모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etc 즉 기타 다른 것도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속에서 서양의 학문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빠른 속도로 가면 과거의 나의 모습은 볼 수 있고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나로부터 출발한 광선을 쫓아간다고 해서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靜力學의 現像하지 아니하는 것과 同一하는 것의 永遠한 假說이다. 사람은 사람의 客觀을 버리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4보를 걸어간 다음 뒤로 돌아서서 다시 4보를 걸었다고 하자. 이것을 서양의 학문 방식으로 수식화하면 4+(-4)=0이 된다. 그렇다면 서양식 학문에서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 학문은, 제자리에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동일시하는 영원한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에 대한 객관을 버려야 한다. 사람 즉 인간의 행위는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4보 갔다가 뒤로 돌아서 4보를 간 행위를 객관화하여 서양학문에서는 4+(-4)=0 이니까 결국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고 객관화하여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객관화가 타당하지 않다. 사람에 있어서는 서양 학문식의 객관을 버려야 한다. 主觀의 體系의 收斂과 收斂에 依한 凹렌즈 /第四歲 /  一千九百 十一年 九月 十二日生 / 陽子核으로서의 陽子와 陽子와의 聯想과 選擇  주관의 체계의 수렴과 그리고 수렴에 의한 오목렌즈. 주관의 체계는 같은 것을 놓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각자의 주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사고는 하나의 현상을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보고, 또 각각이 본 것을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오목렌즈와 같다. 오목렌즈는 다양한 광선을 받아들여 수렴시키지 않는다. 각각의 광선을 받아들이되 이를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광선에 따라 발산시킨다. 예를 들어 4라는 수자를 생각해 보자. 개인의 주관적 사고로 4를 바라보면 그것은 나이가 4살 이라는 의미로도 파악된다. 또 4는 일천구백삼십일 년 구월 십이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날짜에 탄생한 넷째 동생을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4는 양자 핵으로서의 양자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양자의 관계로도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4라는 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해서 선택되어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原子構造로서의 一切의 運算의 硏究 / 方位와 構造式과 質量으로서의 數字의 性態 性質에 依한 解答과 解答의 分類 서양 학문에서는, 일체를 원자 구조로서의 운산으로 연구한다. 모든 것을 원자의 집합체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다. 또 방위와 그것을 구조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연구한다. 질량으로서의 본성의 모습과 본성의 바탕에 대해서 숫자로 그 해답과 해답을 분류한다. 그것이 서양의 현대적 학문이다.   數字를 代數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 疾患의 究明과 詩的인 情緖의 棄却處) 서양의 학문은 숫자를 대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숫자를 어떤 것을 대신하여 표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 연구한다. 즉 숫자를 숫자적인 것 자체로 연구하고 표시하고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그것은 어떠한 서양 학문 이를테면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 어디에서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왜 서양 사람들은 1,2,3,4,5,6,7,8,9,0의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하는지 그 질환의 규명이 필요하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서양 학문은 시적인 정서의 소각처가 된 것이다.   (數字의 一體의 性態  數字의 一切의 性質  이것들에 依한 數字의 語尾의 活用에 依한 數字의 消滅) 모든 것을 태도를 숫자로 파악하는 성향, 모든 성질의 바탕을 숫자로 파악하려 하는 것들에 의해서 숫자의 어미 즉 모든 것에 숫자가 꼬리처럼 달리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숫자로 수렴되어 소멸되고 만다.   數式은 光線과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는 사람에 依하여 運算될 것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고, 만약 사람이 이 광속보다 더 빠른 기계, 이른바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시간도 되돌려서 우리는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수식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광선과 그 광선보다 빠르게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 의해서 연산되어야 한다. 이제부는 숫자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운행되고 계산되어야 한다.   사람은 별 ―― 天體 ―― 별 때문에 犧牲을 아끼는 것은 無意味하다. 별과 별과의 引力圈과 引力圈과의 相殺에 依한 加速度 函數의 變化의 調査를 爲先 作成할 것 사람이 별 즉 천체 때문에 희생을 아끼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양 과학자들이 별 곧 천체는 무한히 펼쳐진 진공 상태의 우주의 공간에 떠 있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대고 돼지 소 등을 잡고 이를 제물로 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천체를 주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양의 과학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별―― 천체 ――별’을 잘 관찰해 보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서양 사람이 별에 대해서 어떻다는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소나 돼지를 잡고 제사지내는 것을 미신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서양 사람들의 사고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희생을 아끼는 주체’가 우리가 될 수도 있고, 서양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과 ‘――’을 이상 시인이 그냥 심심해서 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의 관점에서 바라본 별과, 동양적 사고에 의해서 바라본 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그 가치를 상쇄시키는지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숫자로 파악한 서양 학문에서 바라본 별과, 인문학적으로 바라본 동양의 별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인간의 삶을 말살하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동양의 인문학적 사고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서로의 가치를 얼마나 상쇄시키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결국 시인은 서양의 과학이 인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 ​ ​ ▣   線에關한覺書 7 空氣構造의速度―音波에依한―速度처럼三百三十미터를模倣한다 (光線에比할때참너무도劣等하구나) 光線을즐기거라. 光線을슬퍼하거라. 光線을웃거라. 光線을울거라. 光線이사람이라면사람은거울이다. 光線을가지라. ―― 視覺의이름을가지는것은計劃의嚆矢이다. 視覺의이름을發表하라. □ 나의이름 △ 나의안해의이름 (이미오래된過去에있어서나의 AMOU ―REUSE는 이와같이聰明하도다.) 視覺의이름의通路는설치하라. 그리고그것에다最大의速度를附與하라. ―― 하늘은視覺의이름에對하여서만存在를明白히한다 (代表인나는代表인一例를들것)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갑갑한地方色이나아닐는지) 하늘은視覺의이름을發表했다. 視覺의이름은사람과같이永遠히살아야하는數字的인어떤一點이다. 視覺의이름은運動하지아니하면서運動의코오스를가질뿐이다. ―― 視覺의이름은光線을가지는光線을아니가진다. 사람은視覺의이름으로하여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날필요는없다. 視覺의이름을健忘하라. 視覺의이름을節約하라. 사람은光線보다빠르게달아나는速度를調節하고때때로過去를未來에있어서淘汰하라. ― 1931. 10 ― ​ ​ 空氣構造의 速度 ― 音波에 依한 ― 速度처럼 三百三十미터를 模倣한다 (光線에 比할 때 참 너무도 劣等하구나) 인간의 주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동양의 학문은 각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그것은 마치 대기 속에서 전파되는 음파처럼 대상을 파악하는 속도가 느리다. 반면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서양의 학문에서는 어떤 대상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파악하고 표시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은 마치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처럼 대상을 빠르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홍길동이가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장길산이도 한 달에 10만원식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도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홍길동이는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고, 장길산이는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이 경우 동양적 사고에서는 홍길동이의 저금과 장길산이의 저금과 성춘향이의 저금을 각각 다르게 본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집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자식을 가르치기 위한 저축을 서로 다른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금의 의미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자 한다. 홍길동이를 A라고 하고, 장길산이를 B라고 하고, 성춘향이를 C라고 한다면, 이들이 저금한 것을 각각 이렇게 파악한다. A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B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C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따라서 홍길동이 저축한 것이나 장길산이 저축한 것이나 성춘향이가 저축한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아니 서양 학문의 관심은 저축한 금액이 같다는 것에만 주로 주목한다. 이처럼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은 그 주목의 대상이 다르다. 따라서 ‘공기 구조의 속도’는 동양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견 서양식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디고 느린 것으로 보인다. 마치 소리가 공기 속에서 초당 340미터 전파되듯이 느리게 파악된다.  이에 비해서 서양 학문에서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고, 기호화하여 파악하려고 하고,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파악하는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저축은 '매달 저축액 x 일 년 중의 달의 수 x 저축한 햇수'로 파악한다. 그래서 10만 x 12달 x 5년 = 600만원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은 마치 빠른 광선처럼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에 적용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빠르다. 동양적 학문은 어쩌면 서양 학문에 비해서 너무 열등하고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光線을 즐기거라. 光線을 슬퍼하거라. 光線을 웃거라. 光線을 울거라. 서양 학문이 편리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선을 즐겨라. 그러나 그 서양 학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서양적 사고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 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 학문을 제대로 알면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다양성을 말살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참으로 서양 학문을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 光線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거울이다. // 光線을 가지라. // ―― 서양 과학에서는,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 광선이 진짜 사람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거울에 불과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도식화, 기호화, 추상화하여 인식하고자 하는 서양 학문에서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삶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 서양 학문이 좋은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광선과 같은 허상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라. ―― 과연 그 광선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가.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視覺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計劃의 嚆矢이다. 視覺의 이름을 發表하라. // □ 나의 이름 // △ 나의 안해의 이름 (이미 오래된 過去에 있어서 나의 AMOUREUSE는 이와 같이 聰明하도다.) ‘시각의 이름’을 가지는 것 어떤 것을 계획하는 맨 처음이다. 서양 학문은 어떤 것을 계획할 때, 그 대상을 기호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먼저 시각의 이름을 발표해야 한다. 자, 지금부터 시각의 이름을 갖자. □은 나의 이름이라 하자. △은 나의 아내의 이름이라 하자. 이미 오래 된 과거에 화자는 이처럼 총명하게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었다. 이를테면 , 라는 시에서 이미 시각의 이름을 발표한 적이 있다. 視覺의 이름의 通路는 설치하라. 그리고 그것에다 最大의 速度를 附與하라. // ―― 시각의 이름으로 기호화한 것이 두루 미칠 수 있는 길은 마련해 놓아라. 그리고 그것에다 최대의 속도를 부여하라. 가장 간단히 하라는 말이다. 간단한 것은 가장 빠르게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서양식 학문이 대상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늘은 視覺의 이름에 對하여서만 存在를 明白히 한다 (代表인 나는 代表인 一例를 들 것) //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 갑갑한 地方色이나 아닐는지) 하늘은 視覺의 이름을 發表했다. 서양 학문에 따르면, 하늘은 시각의 이름에 대해서만 존재를 명백히 한다. 여기서 ‘시각의 이름’은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가장 간단한 기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전을 찾아보면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다’라고 나온다. 서양식 학문에서는 이것만이 가장 객관적으로 하늘의 존재를 명백히 한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은 모든 하늘을 대표하는 하늘이다. 그래서 화자도 모든 자신을 대표하는 화자가 하나의 예를 들고자 한다. 하늘 하면, ‘蒼空(창공)’도 있고, 秋天(추천)도 있고, 蒼天(창천)도 있고, 靑天(청천)도 있고, 長天(장천)도 있고, 一天(일천)도 있고, 蒼穹(창궁)도 있다. 이렇게 하늘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갑갑한 촌스러운 것이나 아닐는지 모른다. 그래서 드디어 하늘에 대한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다.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라고. (여기서 보면 서양 학문은 바로 하나의 현상을 다양하게 인식하는 주관적 인식을 배제한다. 따라서 인간의 대상에 대한 주관적으로 인식해온 것들을 말살하는 역할을 한다.) 視覺의 이름은 사람과 같이 永遠히 살아야 하는 數字的인 어떤 一點이다. 視覺의 이름은 運動하지 아니하면서 運動의 코오스를 가질 뿐이다. // ―― 시각의 이름은,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수자적인 일점이다.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므로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다. 또 숫자적인 어떤 하나의 점과 같이 간단히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시각의 이름은 운동 즉 이동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의미가 변하지 않고, 그 의미가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그 자체는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이동의 속성을 가진다. 그 자체의 의미는 움직이지 않으나, 그것은 다른 구체적인 것들에 두루 이동하면서 적용되어야 하는 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넓이를 S라 하고, 밑변의 길이를 a라고 하고, 높이를 h라고 한다면, ‘S=ah/2’이다. 이 공식이 바로 시각의 이름이다.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숫자적 일점과 같이 간단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이것은 다른 구체적인 삼각형들에도 두루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동의 코스를 가진다.  ‘――’ 화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視覺의 이름은 光線을 가지는 光線을 아니 가진다. 사람은 視覺의 이름으로 하여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을 가지는 그 광선을 갖지 아니한다. 광선은 구체적인 사물만이 갖는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이 없는 허구적인 것이기에, 사람은 시각의 이름으로 하여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그 허구적인 서구 이론으로 인하여 거기에 매달려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視覺의 이름을 健忘하라. // 視覺의 이름을 節約하라. // 사람은 光線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速度를 調節하고 때때로 過去를 未來에 있어서 淘汰하라.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어라. 시각의 이름을 절약하라. 사람은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하고, 때때로 과거를 미래에 있어서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여기서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고, 절약하고 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시각의 이름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가변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변의 영원한 진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기 속에서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별을 보면서 꿈을 꾸기도 하고, 달을 보면서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별’은 빛을 관측할 수 있는 천체 가운데 성운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진 천체를 제외한 모든 천체를 의미할 뿐이고,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서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 밝은 빛을 내고, 표면에 많은 분화구가 있으며 대기는 없는, 공전 주기는 27.32일, 반지름은 1,738km인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별을 보면서 미래를 꿈꾸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달을 보면서 멀리 있는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의 별과 달의 개념을 잊거나, 절약하거나, 혹은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기에서 우리 삶을 적용시켜서 바라볼 때, 인간의 다양한 정신, 감정, 문화는 이룩되는 것이다. 서양적 학문이 만능은 아닌 것이다.       4. 建築 無限 六角面體   ▣   AU MAGASIN DE NOUVEAUTES ​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비누가通過하는血管의비눗내를透視하는사람. 地球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儀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 去勢洋襪. (그女人의이름은워어즈였다.) 貧血緬絲. 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平行四邊形對角線方向을推進하는莫大한重量.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香水의마지한東洋의가을快晴의空中에鵬遊하는Z伯號. 蛔蟲良藥이라고씌어있다. 屋上庭園. 猿猴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彎曲된直線을直線으로疾走하는落體公式. 時計文字盤에Ⅻ에내리워진一個의浸水된黃昏. 도아―의內部의도아―의內部의鳥籠의內部의카나리야의內部의嵌殺門戶의內部의인사. 食堂의門깐에方今到達한雌雄과같은朋友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角雪糖이三輪車에積荷된다. 名啣을짓밟는軍用長靴. 街衢를疾驅하는造花金蓮.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下半은저남자의上半에恰似하다. (나는哀憐한邂逅에哀憐하는나) 四角이난케―스가걷기始作이다. (소름끼치는일이다.) 라지에―타의近傍에서昇天하는굿빠이. 바깥은雨中. 發光魚類의群集移動. - 1932. 7 -     AU MAGASIN DE NOUVEAUTES ‘MAGASIN’은 프랑스어로 상점이다. ‘NOUVEAUTES’는 새롭다, 참신하다, 신기하다는 의미다. ‘AU MAGASIN DE NOUVEAUTES’는 신기한 상점 혹은 새로운 상점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화자는 서양 영화를 본 것 같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내용이 서사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화자는 서양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그것을 시로 쓴 것 같다. 구체적으로 서양의 어느 영화인지는 필자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서양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시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창녀를 사고자 한다면 창녀가 있는 사창가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창녀가 자동차를 타고 손님이 부르는 곳으로 가는가 보다. 이것을 시인은 ‘AU MAGASIN DE NOUVEAUTES’ 즉 신기한 상점이라 말하고 있다.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 창녀는 사각형 건물의 내부에 있는, 사각형으로 된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 간 다음, 사각형으로 된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거실에서 다시 사각형으로 된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방 안에는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가 들어간 집은 연립주택 형태의 이층일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사각형의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도어 안으로 들어가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다시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그 집을 들어가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방으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는 어느 남자의 주문을 받고 그 사람이 사는 집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 방안에는 최종적으로 침대가 있는 것이다.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 사각형의 침대 위에는 남자가 있다.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은 발기되어 끄덕거리는 남자의 남근이다. 발기된 남근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둥근 원의 모양이다. 그런데 남근은 원이면서도 사각이 나서, 움직이고자 하지만 굴러가지 못한다. 끄덕끄덕 하는 것은 마치 둥근 원 모양의 남근이 굴러가고자 하지만, 사각이라서 굴러가지 못하고, 들썩거리기만 하는 모습이다. 비누가 通過하는 血管의 비눗내를 透視하는 사람. 이 사람은 창녀를 보자,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에 적당한 매력적인 여자인지, 그녀의 몸을 투시한다.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몸을 투시하여, 성욕을 해결하기에 알맞은 여자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성욕의 때를 씻고자 하는 욕망의 움직임이다. 옷을 오래 입으면 때가 끼듯이, 성욕도 오래 참으면 때가 낀다. 때가 낀 옷을 빨아서 입으면 기분이 상쾌하듯이, 오래 묵은 성욕도 해결하면 상쾌하다. 따라서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의 비누 냄새를 투시하는 사람은, 창녀를 보면서 자신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의 때를 잘 씻어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남자다. 이 사람은 성욕의 묵은 때를 씻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에도 나온다. 地球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儀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 옷 속에 감춰진, 남자에 의해서 투시된, 여자의 엉덩이는 잘 발달되어 있다. 이 남자의 성욕의 때를 잘 씻어 줄 것으로 보인다. ‘지구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의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는 여자의 엉덩이다. 발기된 남근은 마치 지구와 같은 둥근 여자의 엉덩이,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마치 지구라도 뚫을 듯이 힘차게 남근을 넣고 절구질하고 싶은 것이다. 음부가 있는 엉덩이와 음부에 삽입된 남근은 마치 북극과 남극을 축으로 돌아가는 지구의와 유사하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면서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남근을 넣고, 성교하기에 적당한지 상상하고 있다. 창녀의 엉덩이는 지구처럼 둥글게 잘 발달되어 있다. 去勢洋襪. (그 女人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창녀는 양말을 벗어 던진다. 서양식 버선인 양말은 스타킹이라고 해도 좋다. 벗어서 던져놓은 스타킹은 원래 신었을 때의 형상이 거세된 채로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놓인다. 그리고 그 여인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워어즈’는 영어로 ‘Wars’다. ‘전쟁(戰爭)’이다. ‘전쟁’은 싸우고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워어즈는 창녀다. 창녀는 마치 남자와 싸우고 다투듯이, 서로 끓어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거리는 여자다. 이러한 발상은 에도 나온다. 도 결국 남녀의 성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시다. 貧血緬絲. 당신의 얼굴 빛깔도 참새다리 같습네다. 여자가 옷을 모두 벗었다. 알몸이 된 창녀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핏기 없는 가는 실처럼 하늘거리는 하얀 몸매. 창녀의 얼굴 빛깔도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을 하고 있다. 백인 여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 말이 있다. 새 발의 피라는 말이다. 조그만 새 발에서 피가 나와야 얼마나 나오겠느냐는 말인데, 새 발의 피처럼 창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곧 그 창녀는 백인 여자다. 平行四邊形 對角線 方向을 推進하는 莫大한 重量. 창녀가 침대로 올라와 나란히 눕자 남자가 거대한 중량으로 달려들어 애무한다.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직은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애무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직선을 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창녀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하고 격렬하게 성교를 하는 것이라면,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을 추진하는 것은 남자가 창녀의 몸을 애무하는 것이다. 애무를 통해서 다음에 이어질 성교를 예비한다. 마르세이유의 봄을 解纜한 코티의 香水의 마지한 東洋의 가을 快晴의 空中에 鵬遊하는 Z伯號. 蛔蟲良藥이라고 씌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애무하자, 여자는 마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라고 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마치 청춘의 배가 닻을 풀고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듯이 쾌감에 젖는다. 그녀가 쾌락에 젖어들자, 남자는 마치 코티 향수를 맞이한 것 같은, 동양의 가을 하늘처럼 쾌청한 기분으로, 공중에 붕새처럼 붕 뜬 기분으로, Z기처럼 힘차게 창녀의 음부를 향해 질주할 최고의 남자가 된다. 남자가 창녀를 향해서 성교를 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그녀에게는 회충양약이라 씌어 있다. 회충양약은 회충을 구제하기에 좋은 약이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하는 남자에게 좋은 약이다. 회충과 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정액이 잘 뿜어져 나오게 하는 여자다. 이 창녀는 남자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데는 아주 좋은 재주를 가진 여자다. 屋上 庭園. 猿猴를 흉내내이고 있는 마드무아젤. 옥상 정원은 창녀의 음모가 나 있는 음부다.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에도 나온다. 여자와 입을 맞추는 애무의 첫 단계가 일층이라면, 다음으로 유방을 애무하는 단계가 이층이다. 그리고 다음 음부를 애무하는 단계가 삼층이며, 그 삼층 위에는 옥상이 있다. 옥상은 바로 여자의 음부다. 그 음부에는 마치 옥상의 정원에 자라는 풀처럼 음모가 자라고 있다. 지금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다. 그러자 창녀는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다. 원숭이는 상대의 털을 골라주는 습성이 있다. 창녀가 쾌감에 못 이겨 남자의 머리를 잡고, 좌우로 자신의 몸을 흔들면서 쾌감에 빠져 있는 것을, 마치 원숭이가 상대의 머리털을 고르거나 이를 잡아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彎曲된 直線을 直線으로 疾走하는 落體 公式. 만곡된 직선은 쾌감에 젖어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고 있는 창녀다. 원래 사람은 직선 모양이다. 그래서 직선이다. 그런데 쾌감에 젖어서 몸을 뒤로 활처럼 젖혔으니, 그 창녀는 만곡된 직선이다. 그 창녀를 직선으로 곧 곧바로 질주하는 낙체 공식이다. 여기서 ‘질주한다’는 말은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질주하는 행위와 성행위는 유사하다. 숨이 가쁘고, 땀이 나고, 격렬한 행위다. 따라서 질주하는 행위는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행위다. 낙체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몸을 떨어뜨리는 행위 곧 성교 행위다. 공식은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을 말한다. 이제 창녀의 몸에 남근을 삽입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뻔하다. 時計 文字盤에 Ⅻ에 내리워진 一個의 浸水된 黃昏. 성교가 끝나고 축 늘어진 남근을 표현한 것이다. 시계 문자반에서 12에서 아래로 바늘이 일직선으로 내리워지면, 그것은 6시를 의미하고, 오후 6시는 황혼이다. 성교가 끝나고 남근이 아래로 늘어진 모습은, 마치 시계 문자반에서 바늘이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같다. 창녀의 음부에 빠졌다가 결국 죽어서 늘어진 남근은, 한 개의 물에 빠진, 그래서 황혼을 맞이한 남근이다. 도아―의 內部의 도아―의 內部의 鳥籠의 內部의 카나리야의 內部의 嵌殺門戶의 內部의 인사. 남자의 요구에 의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해 준 창녀가 떠나려고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도아―의 내부의 도아―의 내부의 조롱의 내부의 카나리야의 내부의 감살문호의 내부의 인사’다.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남자에게, 창녀는 도아를 열고 들어와서, 또 도와를 열고 남자의 집으로 들어와서, 조롱과 같은 방 안에 있는 남자에게, 카나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교성으로, 계곡처럼 움푹 패인 음부로, 남근을 죽여 준, 그 음부의 내부의 인사인 것이다. 즉 성욕을 해결해 준 대가, 화대를 달라는 것이다. 食堂의 門깐에 方今 到達한 雌雄과 같은 朋友가 헤어진다. 서양의 주택 구조는 거실 한편에 식당이 있다. 지금 남자와 창녀는 거실에서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식당의 문간에는, 방금 도달한, 자웅과 같은, 붕우가 헤어진다. 남자와 여자는 자웅이지만, 그러나 성교를 마친 창녀와 남자는 이제 암컷과 수컷에서, 친구로 돌아와 헤어지고 있다. 방금까지 자웅으로 성교를 했으나, 이제는 친구처럼 헤어지는 것이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와 성욕의 해결을 돕기 위해서 온 창녀가 이제는 일이 끝났음으로, 그저 친구들이 헤어지듯이 남녀의 감정을 모두 버리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화대를 놓고 계산만 남은 것이다. 파랑 잉크가 엎질러진 角雪糖이 三輪車에 積荷된다. 파란 잉크가 엎질러진 것처럼 색깔이 파란 달러가, 창녀가 좋아하는, 각설탕과 같이 달콤한 네모진 돈이, 삼륜차인 남자에게 부과되면서 서로 다툰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는 덜 주려고 한다.  창녀는 많이 받으려고 한다. 서로 돈의 액수를 놓고, 자웅이 아닌 붕우처럼 옥신각신한다. 적하(積荷)는 돈이 포개지고 또 책망한다는 의미다. 남자가 달러를 얼마간 얹어 주자, 여자가 더 달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는 삼륜차다. 남자의 발기된 남근과 그리고 두 쪽의 고환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세 개의 원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에 ‘삼심원(三心圓)’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남자는 그 남근과 고환으로 창녀에게 성교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삼륜차’는 성교를 한 남자다. 名啣을 짓밟는 軍用長靴. 街衢를 疾驅하는 造花金蓮. 헤어지면서 남자는 창녀의 이름을 물었을 것이다. 남자를 상대하는 기교가 좋은, 매력적인 그녀를 다음에 또 찾고 싶은 마음에서다. 군용장화와 같은 긴 부츠에 이름이 재갈 물려서 짓밟혔다. 창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마치 “쳇~ 짠돌이~~” 라고 말하듯이 입을 삐죽 내밀며 굳게 다문 채, 부츠를 신은 발로는 땅을 한 번 “탁” 차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명함이 군용장화에 짓밟힌 것이다. 그 여자는 온 거리를 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듯이 질주하는 가짜 꽃이다. 그러나 걸음걸이가 예쁜 미인이다. 여기서 조화는 진짜 누구를 사랑해서 그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가 아니다. 금련(金蓮)은 걸음걸이가 예쁜 여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바쁜 듯이 급히 나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가고,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간 사람은,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시인이,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가 누군인지 잘 구분하지 못할까 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한 사람, 즉 위에서 열심히 성교한 사람 즉 남자는, 이층의 계단 밑에서 집으로 올라오고 그리고 일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간 사람인 창녀가 아니고, 또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즉 처음부터 위에 있던 사람이고,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즉 일이 끝나고도 계단을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남자이고, 그 창녀가 남자의 집에 다녀간 것이다. 여자는 이른바 서양의 콜걸(call girl)인 것이다. 저 여자의 下半은 저 남자의 上半에 恰似하다. (나는 哀憐한 邂逅에 哀憐하는 나) 四角이 난 케―스가 걷기 始作이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저 남자의 상반신과 흡사하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엉덩이가 잘 발달한 육감적인 여자라면, 저 남자는 상반신의 근육이 잘 발달된 매력적인 남성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슬프고 가련한 잠시의 만남에, 도리어 화자 자신이 슬프고 가련하다. 화자도 그런 엉덩이가 잘 발달한 여자와 한 번 해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가련하게 생각한다. 사각이 난 케이스 즉 상자가 걷기 시작한다. 여자가 자동차를 타고 떠나려고 한다. 자동차는 남자가 사는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사람을 담는 케이스와 같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자동차가, 사람이 소름을 끼칠 때 몸을 부르르 떨듯이, 자동차는 시동을 걸자 부르릉 하고 진동한다. 라지에―타의 近傍에서 昇天하는 굿빠이. / 바깥은 雨中. 發光魚類의 群集移動. 창녀가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손으로 입을 가져갔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서 뻗으면서, 굿바이라고 인사하면서 떠난다. 자동차의 앞좌석은 라지에타 근처에 있다. 서양식 인사법이다. 키스 대신에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그 손에 입맞춤 한 다음, 그 손을 이층에 있는 화자에게 날려 보내는 인사를 하고 있다. 손이 승천한 것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헤드라이트에서 빛을 내는 자동차들이 떼를 지어 달리고 있다. 아니, 물고기처럼 싱싱한 창녀들이, 비가 내리는 도시를,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몸을 파는 창녀의 모습. 신기한 상점이다. ‘AU MAGASIN DE NOUVEAUTES’다. ​ ​ ​   ▣   出版法 ​      Ⅰ 虛僞告發이라는罪名이나에게死刑을言渡하였다. 자취를隱匿한蒸氣속에몸을記入하고서나는아스팔트가마를睥睨하였다.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其父攘羊 其子直之 나는아아는것을아알며있었던典故로하여아알지못하고그만둔나에게의執行의中間에서더욱새로운것을아알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는雪白으로曝露된骨片을주워모으기始作하였다. 「筋肉은이따가라도附着할것이니라」 剝落된膏血에對해서나는斷念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     Ⅱ 어느警察探偵의秘密訊問室에있어서 嫌疑者로서檢擧된사나이는地圖의印刷된糞尿를排泄하고다시그것을嚥下한것에對하여警察探偵은아아는바의하나를아니가진다. 發覺當하는일은없는級數性消化作用.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卽妖術이라말할것이다. 「勿論너는鑛夫이니라」 參考男子의筋肉의斷面은黑曜石과같이光彩나고있다한다.      Ⅲ 號  外  磁器收縮을開始 原因極히下明하나對內經濟破綻에因한脫獄事件에關聯되는바濃厚하다고보임. 斯界의要人鳩首를모아秘密裡에硏究調査中. 開放된試驗管의열쇠는나의손바닥에全等形의運河를掘鑿하고있다. 未久에濾過된膏血과같은河水가汪洋하게흘러들어왔다.       Ⅳ 落葉이窓戶를滲透하여나의禮服의자개단추를掩護한다. 暗殺 地形明細作業의至今도完了가되지아니한이窮僻의地에不可思議한郵遞交通은벌써施行되었있다. 나는不安을絶望하였다. 日曆의反逆的으로나는方向을紛失하였다. 나의眼睛은冷却된液體를散散으로切斷하고落葉의奔忙을熱心으로幇助하고있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의猿猴類에의進化) - 1932. 7 -   出版法 ‘출판법(出版法)’이란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어렵다. 이상 시인은 하나의 용어에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 사용하기에, 어느 하나의 의미만으로 제목이나 시어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적 사고의 습성은 끊임없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의미만을 찾는데 열중한다. 그래서 의미의 혼란이 온다. 이상의 시어들은 많은 경우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낸다. 따라서 ‘출판법’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출판법’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는 법이며, 그것은 출판된 족보에서 화자가 나오는 법이며,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의 뚜껑이라는 판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방법이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단어가 ‘출판법(出版法)’이다. 이상이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자로 간 줄을 모르고 자라다가,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갈등했던 이상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기 위해서, 아니 이미 출판된 족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그 족보를 하수구에 버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족보가 하수구를 치우던 어떤 사람에게 발견되고, 중요한 문서라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이 때 족보에 적혀 있는 대로 큰아버지가 경찰서로 불려오고, 이상은 경찰서에 따라갔다가, 혹시 자신이 버린 족보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해서 다시 하수구 속으로 들어갔다가, 하수구 뚜껑을 인부들이 닫는 바람에 갇혀서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고, 그 사건을 시로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의 내용은 서사적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4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虛僞告發이라는 罪名이 나에게 死刑을 言渡하였다. 자취를 隱匿한 蒸氣 속에 몸을 記入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睥睨하였다. 이 문장은 이 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허위고발’의 주체는 누구일까? 화자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큰아버지인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양자로 데려왔다는 것에 대해서 허위로 화자에게 알렸다. 화자를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죄명으로 인하여 화자가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자신을 족보에서 지우기로 한 것이다.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은 곧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출생의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한 것이다. 자취를 은닉한 증기는, 증기처럼 감쪽같이 자신의 태어난 자취를 감춘 족보다. 그 족보 속에 어렴풋한 기록되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 즉 ‘아스팔트의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았다.’ 하수구에 그 족보를 넣어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출판법이다. 출판된 족보라는 판에서 나오는 방법이다. 또 이 나중에 이 족보는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고, 큰아버지가 경찰서에 불려간 뒤에도 화자는 모르는 체한다. 따라서 ‘허위고발’의 주체는 화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버렸던 족보가 궁금하여 하수구에 들어가게 되고, 하수구에 갇혀서 죽을 뻔하게 되는데, 결국 경찰서에서의 허위고발이 자신을 죽게 할 뻔한 사건을 두고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라는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또 족보의 자취를 감춘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갇히게 된 화자는 하수구를 나오기 위해서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게 된다. 따라서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하였다.’라는 문장도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 其父攘羊 其子直之 우선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일직에 관한 전고 일 즉 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어야 할지 애매하다. 세로쓰기에서 양쪽의 ‘|’을 한일자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괄호로 읽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렵다. 한일자(一)와, 괄호 개념의 한일자(―) 형태가, 고딕체 글씨에서는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앞뒤의 맥락과 의미로 봐서는 괄호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겠다. ‘직’에 관한, 책보다 오래된 하나는 곧 ‘기부양양(其父攘羊) 기자직지(其子直之)’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아들이 이를 바로잡았다. 큰아버지가 화자를 화자 몰래 양자로 삼자, 이를 화자가 몰래 바로잡는다. 그래서 화자는 족보를 큰아버지 몰래 하수구에 넣었다. 나는 아아는 것을 아알며 있었던 典故로 하여 아알지 못하고 그만 둔 나에게의 執行의 中間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아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사온 양자라는 것을 알며, 논어에 그 아비가 무엇을 잘못하였더라도 그 아들이 숨겨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르는 체해 온 화자에게, 이번에 족보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집행하는 중간에, 더욱 새로운 사실을 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여기서 화자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흥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을 더듬고 있다.) 나는 雪白으로 曝露된 骨片을 주워모으기 始作하였다. /「筋肉은 이따가라도 附着할 것이니라」/ 剝落된 膏血에 對해서 나는 斷念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흰 눈처럼 환하게 드러난 조상의 계보의 줄기를 주워 모으기 시작하였다. 골격에 붙는 살은 이따가라도 붙여볼 것이다. 족보에서 벗겨져 떨어진, 대신 돈을 받고 살이 찐 핏줄에 대해서는 화자는 단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의 핏줄에는 자신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Ⅱ 어느 警察 探偵의 秘密 訊問室에 있어서 화자가 하수구에 버린 족보가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어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 족보가 하수구에 버려진 것과 관련하여 경찰관이 조사한다. 嫌疑者로서 檢擧된 사나이는 地圖의 印刷된 糞尿를 排泄하고 다시 그것을 嚥下한 것에 對하여 警察探偵은 아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 發覺當하는 일은 없는 級數性 消化 作用.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卽妖術이라 말할 것이다. 족보를 유기한 것으로 의심되어 경찰서로 불려온 큰아버지는, 족보의 인쇄된 친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화자를 씻어내고, 다시 그것을 삼켜서 자기의 아들로 만든 것에 대해서, 경찰 조사관은 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경찰 조사관은 버려진 족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단 하나 화자가 혐의자의 양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족보에는 화자가 혐의자의 아들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범인일 것이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다. ‘아아는’은 말을 더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화자가 경찰서에서 마음을 졸이면서 조사가 진행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찰 조사관이 화자가 양자로 들어온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화자가 큰아버지의 아래 층계에 기록됨으로써 족보를 유기한 범인으로 발각당하는 일이 없는, 일종의 급수성 소화 작용이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즉요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勿論 너는 鑛夫이니라」/ 參考 男子의 筋肉의 斷面은 黑曜石과 같이 光彩나고 있다 한다. 화자는  ‘물론 너는 광부이니라.’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수구에서 족보를 발견한 인부를 두고 이르는 말 같다. 참고 남자 즉 족보를 발견한 남자의 근육의 단면 즉 근육을 자른 면 한쪽이 마치 흑요석처럼 검게 광채가 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 남자의 근육에서 하수구의 흙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마치 무엇으로 자른 듯이 보이고, 흙이 묻은 부분이 검게 빛났다는 말이다. 화자가 하수구에 아무도 모르게 유기한 족보를 인부가 발견한 것을 두고, 그 인부를 마치 지하에 있는 흑요석을 캐낸 광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수구의 흙은 흑요석처럼 검고, 물기가 있는 하수구의 흙이 발이나 손에 묻으면 그 묻은 부분이 번들번들하게 광채가 난다. ​ Ⅲ 號外 / 磁器 收縮을 開始 ‘호외(號外)’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유기된 족보 사건으로 인해서 경찰서에 ‘불려온 사람 이외의 사람’이라는 의미다. 어린 화자는 불려온 자가 아니다. 혐의자로 불려온 것은 큰아버지요, 참고인은 유기된 족보를 발견한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다. 따라서 불려온 사람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화자다. 화자가 바로 ‘호외(號外)’다. 자기 수축을 개시했다. 종이 위에 철가루가 있고 종이 아래에 자석을 가져다 댔을 경우, 철가루들이 자석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모이듯이, 여러 조사관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原因 極히 下明하나 對內 經濟 破綻에 因한 脫獄事件에 關聯되는 바 濃厚하다고 보임. 斯界의 要人 鳩首를 모아 秘密裡에 硏究 調査中. 족보를 유기한 원인은 극히 밝힐 수 없으나, 가문의 경제를 파탄내고 이로 인해서 족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건과 관련이 깊다고 보임. 이 분야의 요인들이 모여, 비둘기가 머리를 맞대고 모이를 쪼듯, 머리를 맞대고 비밀리에 연구 조사중임. 開放된 試驗管의 열쇠는 나의 손바닥에 全等形의 運河를 掘鑿하고 있다. 未久에 濾過된 膏血과 같은 河水가 汪洋하게 흘러 들어왔다. 경찰서의 조사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 조사에 몰두하는 사이, 화자는 개방된 시험관 즉 시험관처럼 생긴 수직의 하수구 뚜껑 열쇠가 개방되어 있어서, 화자는 손바닥을 짚고 전등형 운하를 굴착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하수구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유기한 족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머지않아 여과된 기름과 피와 같은 물이 강물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  Ⅳ 落葉이 窓戶를 滲透하여 나의 禮服의 자개단추를 掩護한다. 낙엽이 하수구의 창호처럼 구멍이 뚫린 곳에 빨려 들어와 화자의 예복의 자개단추를 가린다. 그래서 인부들은 그 안에 화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하수구 뚜껑을 닫는다. 하수구 안이 깜깜해진다. 暗殺 깜깜한 하수구 안에 갇힌 화자, 어두운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시의 맨 앞에 나오는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드디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地形 明細 作業의 至今도 完了가 되지 아니한 이 窮僻의 地에 不可思議한 郵遞交通은 벌써 施行 되었있다. 나는 不安을 絶望하였다. 공사가 끝나고 지형을 자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은 지금, 화자는 궁벽한 하수구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누구와 논의할 사람조차 없는 가운데, 하수도 뚜껑을 두드려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는 불안을 절망하고 말았다.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하수구 밖으로 나가려던 희망을 포기했다. 日曆의 反逆的으로 나는 方向을 紛失하였다. 나의 眼睛은 冷却된 液體를 散散으로 切斷하고 落葉의 奔忙을 熱心으로 幇助하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나의 猿猴類에의 進化) 일력을 돌이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화자는 방향을 분실하였다. 하수구에 들어와서 며칠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화자의 눈동자는 냉각된 액체를 이리저리 흩으면서 단절하였다. 하수구 구멍에서 화자의 눈동자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눈을 껌벅거렸다. 낙엽이 바쁘게 달아나는 것을, 화자도 낙엽의 패거리가 되어, 열심히 돕지 아나하면 아니 되었다. 하수구 뚜껑을 가로막는 낙엽을 열심히 치우면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화자는 하수구라는 우리에 갇혀서, 마치 우리를 탈출하고자 하는 원숭이 종류로 진화한 것이다. ​ ​ ​ ▣   且8氏의出發 ​ 龜裂이生긴莊稼泥濘의地에한대의棍棒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樹木이盛함.     以上꽂는것과盛하는것과의圓滿한融合을가리킴. 沙漠에盛한한대의珊瑚나무곁에서돛과같은사람이산葬을當하는일을當하는일은없고 심심하게산葬하는것에依하여自殺한다. 滿月은飛行機보다新鮮하게空氣속을推進하는것의新鮮이란珊瑚나무의陰鬱한性質을더以上으로增大하는것의以前의것이다.   輪不輾地  展開된地球儀를앞에두고서의設問一題.   棍棒은사람에게地面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리키는데사람은解得하는것은不可能인가.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生理作用이가져오는常識을抛棄하라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疾走하는 일들을停止한다. 沙漠보다도靜謐한絶望은사람을불러세우는無表情한表情의無智한한대의珊瑚나무의사람의脖頸의背方인前方에相對하는自發的인恐懼로부터이지만사람의絶望은靜謐한것을維持하는性格이다.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사람의宿命的發狂은棍棒을내어미는것이어라.   *事實且8氏는自發的으로發狂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且8氏의溫室에는隱花植物이꽃을피워가지고있었다. 눈물에젖은感光紙가太陽에마주쳐서는희스무레하게光을내었다. ― 1932. 7 ―   且8氏의 出發 부부가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고상하지만, 그 아이를 낳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다. 부부가 성교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이를 갖겠다는 고상한 뜻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부부가 서로 성적 쾌감을 즐기다 보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이룬 부부가 낳는 아이는 남근과 고환의 씨앗인 ‘且8氏’가 되는 것이다. 龜裂이 生긴 莊稼泥濘의 地에 한대의 棍棒을 꽂음. / 한대는 한 대대로 커짐. / 樹木이 盛함. / 以上 꽂는 것과 盛하는 것과의 圓滿한 融合을 가리킴. ‘균열이 생긴 장가니녕의 지’는 찢어진, 씩씩하게 심는, 진창이라는 의미다. 여성의 음부를 묘사한 것이다. 여성의 음부에는 발기되어 딱딱해진 한대와 같고, 곤봉과 같은 남근을 꽂는다. 그리고 남근은 남근대로 커진다. 남근이 음부에 담긴다. 이상 꽂는 것과 담긴다는 것과의 원만한 융합을 가리킨다. 즉 남근과 여성의 음부가 원만하게 하나가 된다. 沙漠에 盛한 한대의 珊瑚나무 곁에서 돛과 같은 사람이 산葬을 當하는 일을 當하는 일은 없고 심심하게 산葬하는 것에 依하여 自殺한다. 사막은 물이 없다. 사막은 식물이 자라지 않고 따라서 꽃도 피지 않는 공간이다. 아직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의 음부에는 물이 없고, 임신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은 꽃이 자라지 않는 사막과 같다. 한대는 남성의 발기된 남근이다. 산호나무는 발기되어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남근이다. 돛은 배의 중심에 돛대가 꽂혀 있고, 돛대에는 커다란 돛이 달려 있다. 따라서 여성이 배라면 남근은 돛대에 해당하며, 남성의 몸은 돛에 해당한다. 남근이 산채로 매장을 당하는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남근이 음부에 살아있어 발기된 채로 죽은 듯이 있는 일은 없다. 발기된 남근을 음부 깊숙이 넣고 그리고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즐기다 보면, 남근은 사정을 하고 죽는 것이다. 滿月은 飛行機보다 新鮮하게 空氣 속을 推進하는 것의 新鮮이란 珊瑚나무의 陰鬱한 性質을 더 以上으로 增大하는 것의 以前의 것이다. 만월(滿月)은 보름달이다. 여성이 임신을 하여 배가 둥그렇게 부른 상태를 암유한다. 아이를 갖겠다고 남근을 여성의 음부에 담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월 즉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비행기보다 신선하게 공기 속을 추진한다. 임신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산호나무 즉 남근의 음울한 성질 즉 남근의 줄어드는 성질을 더 이상으로 증대하는 것 이전의 것이다. 여성에 삽입하고 나면,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근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성적 욕망만 남는다. 輪不輾地  展開된 地球儀를 앞에 두고서의 設問一題. 바퀴는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 여기서 바퀴는 둥그런 수레바퀴와 같은 여성의 엉덩이를 암유한다.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는 것은, 땅에서 떨어져서 오른쪽으로 구른다는 의미다. 즉 여성이 엉덩이를 들고 있고, 남성이 이를 향한 모습이다. 뒤에서 성교하는 자세다.  ‘윤부전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화자는 다음에 설명하고 있다. ‘윤부전지’라는 말은 화자의 눈앞에 펼쳐진 지구의를 앞에 두고서 설문하여 정한 하나의 제목이다. 지구의는 여성의 둥근 엉덩이와, 그 엉덩이의 중심에 남근이 꽂힌 모습과 같다. 여성의 뒤쪽에서 남성이 성교하는 자세다. 棍棒은 사람에게 地面을 떠나는 아크로바티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解得하는 것은 不可能인가. 화자의 남근은 사람에게, 지면을 떠나는 아크로바티 즉 지면에서 떨어져 허공에 있는, 그래서 곡예처럼 삽입하여야 하는 음부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인가’라는 말은 스스로 깨우쳐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잘 삽입이 되지 않는 상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生理作用이 가져오는 常識을 抛棄하라 지구에 구멍을 뚫어라. 지구는 지구의를 닮은 여성의 둥그런 엉덩이를 의미하며, 굴착하는 행위는 힘차게 남근을 여성의 음부를 향하여, 마치 지구를 뚫듯이 힘차게 내리 꽂는 행위다. 동시에 생리 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포기해야 한다. 남녀가 교접을 하면 반드시 사정을 해야 한다는 상식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사정하지 말고 참으라는 말이다. 사정을 억제하고 참을 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 疾走하는 일들을 停止한다. 열심히 질주하여 열심히 성교에 몰두한다. 질주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나다. 성교를 열심히 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난다. 그래서 성교는 질주하는 것과 같다. 열심히 질주하고,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질주하는 것을 정지한다. 열심히 성교를 하면서 사정하는 것을 멈춘다. 사정을 억제할수록 그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다. 사정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沙漠보다도 靜謐한 絶望은 사람을 불러세우는 無表情한 表情의 無智한 한대의 珊瑚나무의 사람의 脖頸의 背方인 前方에 相對하는 自發的인 恐懼로부터이지만 사람의 絶望은 靜謐한 것을 維持하는 性格이다. 사막은 물이 없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만족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보다도 정밀한 절망 즉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데서 오는 절망은, 사람을 불러 세우는 무표정한 표정이다. 사람을 불러 세운다는 것은 질주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여자가 교성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성적 욕망이 사그라지는 것이다. 남근이 줄어드는 것은 첫째, 무지한 한대 즉 성적 기교에서 지혜롭지 못한 남근에서 기인하고  둘째, 산호처럼 붉은 남근을 가진 남자가 등 쪽에서 전방을 향하여 상대하는 자발적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지만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그대로 지켜가는 아내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사람의 宿命的 發狂은 棍棒을 내어미는 것이어라. 지구를 뚫어라. 지구의와 같은 엉덩이를 마치 지구를 굴착하듯이 힘차게 뚫어라. 동시에 사람의 숙명적 발광 즉 성적으로 흥분되어 숙명적으로 미쳐서 날뛰는 것은 곤봉 즉 발기된 딱딱한 남근을 여성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내어 미는 데에 있다. 마지막 힘차게 남근을 내어 밀었을 때, 아무리 아내가 고요함을 유지하는 성격이라 하더라도 숙명적으로 발광하게 되어 있다. * 事實 且8氏는 自發的으로 發狂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且8氏의 溫室에는 隱花植物이 꽃을 피워 가지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感光紙가 太陽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光을 내었다. 사실 남근과 고환은 스스로 발광하였다. 아이를 만들어 자손을 번식한다는 무슨 고상한 뜻에 의해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욕망에 의해서 스스로 발광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덧 남근의 온실 즉 남근의 씨앗을 키우는  따뜻한 여성의 음부에는, 마치 포자로 번식하는 은화식물처럼 정자로 번식하는 생명이, 꽃을 피워가지고 있었다. 즉 어린 생명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가 태양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빛을 내었다. 감광지는 사진의 감광지다. 빛을 받으면 사진 속의 형상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햇빛 속에서 아이의 잉태를 알게 해주는, 불러오는 여인의 배가 감광지다. 배가 점점 불러옴에 따라서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는 쾌락으로 땀에 젖은 여인의 배라는 의미로 쓰였다. 성적 쾌락으로 땀에 젖어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불러오는 배가, 햇빛이 비추면 약간 뿌옇게 빛을 내며, 희미하게 아이가 잉태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 ​ ​ ▣   대낮    ―― 어느 ESQUISSE ―― ​ ELEVATER FOR AMERICA          ○ 세마리의닭은蛇紋石의層階이다. 룸펜과毛布          ○ 삘딩이吐해내는新聞配達夫의무리. 都市計劃의暗示          ○ 둘쨋번의正午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어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 있다.          ○ 男子를搬揶하는石頭          ○ 男子는石頭를白丁을싫어하드키싫어한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 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詩人. 꼭끼오――. 瞬間 磁器와같은太陽이다시또한個솟아올랐다. ​ ― 1932. 7 ― ​ 이 시는 1930년대 초반, 조선의 젊은이 이상이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간단히 스케치한 내용이다. 이상 시인이 아메리카에 간 것 같지는 않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던 적이 있는 이상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영화 혹은 잡지 등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30년대 초반의 조선의 젊은이가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농경 사회였다. 농경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착하여 살아간다. 아침에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 새벽부터 그렇게 바쁠 것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봄에 곡식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가을에 가서 수확하는 것이 농경 사회의 생활이니, 그렇게 바쁠 것이 없다. 한가하다. 그런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산업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에 사는 이상 시인으로서는 제법 신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이래, 꼭두새벽부터 전등불을 켜놓고 바쁘게 살아간다. 새벽부터 신문이 배달되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그날 할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메모를 한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해는 떠오른다.  대낮 /  ―― 어느 ESQUISSE ―― 제목 ‘대낮’은 전등불로 인하여 환하게 밝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쁘게 활동을 하는, 아직 날이 새지 않은 새벽이다. 전등불이 인공 태양이라면, 깜깜한 새벽은 인공 태양으로 인하여 어둠이 밀려가고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된다. 아메리카인은 깜깜한 새벽부터 돌아다닌다. 부제는 ‘어느 ESQUISSE’는 어느 스케치라는 말이다. 아메리카인의 일상 중에서 어느 한 때의 풍경을, 마치 스케치하듯이 시로 표현했다. 시의 본문에는 ‘○’을 중심으로 입곱 개로 나뉘어 있는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중에서 어느 장면, 장면들을 간단히 그린 것이다. ELEVATER FOR AMERICA 아메리카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는 높은 건물을 올라가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높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 이외에 계단이라는 것도 있다. 계단으로도 건물을 올라갈 수 있는데, 산업화된 사회 아메리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엘리베이터를 고안했을까? 빨리 올라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엘리베이터는 바쁜 아메리카인을 위한 것이다. 세 마리의 닭은 蛇紋石의 層階이다. 룸펜과 毛布 세 마리의 닭은 무엇일까? 닭은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새다. 그렇다면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닭과 같은 세 가지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이 시 전체를 읽어봐야 추리가 가능하다. 미리 말하면, 실제의 닭과, 자명종 시계와, 그리고 새벽부터 움직이는 산업화된 사회 속의 사람들이다.  닭이 울면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샐 때 닭은 운다. 닭이 울면 우리는 날이 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이 샜으니 일어나라고 알리는 것에는 자명종도 있다. 그런데 닭도 없고, 자명종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날이 샌 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거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많은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면서 두런두런 소리를 낼 때, 우리는 잠자리에서도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 마리의 닭은 ‘사문석의 층계’와 같다. 층계는 똬리를 튼 뱀처럼 되어 있다. 밑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 층계를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 세 마리의 닭이다. 우리가 층계를 통하여 한 층 한 층 올라가듯이, 날이 새는 것도 세 마리의 닭이 차례로 울어야 한다. 신문배달부가 움직이고 ―> 자명종이 울리고 ―>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 마지막으로 실제 닭이 울어야 날이 새고 태양이 떠오른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는 세 마리의 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새기도 전에 아메리카인들은 벌써 바삐 활동한다. 룸펜과 毛布 룸펜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거지와 유사하다. 그래서 그들은 모포를 덮고 잔다. 조선인 이상은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잔다면, 부랑자와 같은 아메리카인은 거지처럼 담요를 깔고 덮고 잔다. 산업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 조선에서 살았던 이상이 보기에 이상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도시를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조선에서는 거지들이 애용하는 모포를 일상으로 깔고 덮고 자는 것도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기야 원래 유목민의 후예인 아메리카인은 본질적으로 떠돌이, 마치 거지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가는 부랑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동하면서 덮고 자기에 편리한 모포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농경 사회 조선 사람들은 먼 조상 때부터 농토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 솜을 둔 이불과 요가 침구다. 솜을 둔 이불과 요를 들고 떠돌 수는 없다. 삘딩이 吐해 내는 新聞配達夫의 무리. 都市計劃의 暗示 날이 새기도 전부터 아메리카인은 마치 날이 샌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신문배달부의 무리들이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다. 각 가정에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세 마리의 닭 중에서 날이 샜음을 알리는 첫 번째 닭이다. 이들이 배달해 주는 신문은 도시 계획을 암시한다. 신문을 보면서 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다. 기업가는 앞으로 어떠한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주가가 오를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도 신문을 통하여 짐작한다. 신문은 바로 도시 계획의 암시다. 둘쨋 번의 正午 싸이렌 다음으로 새벽 6시를 알리는 사이렌 아니 자명종이 울린다. 여기서 첫째 번의 정오는 열두시다. 시계의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둘째 번의 정오는 6시다.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작은 바늘은 큰 바늘과 일직선으로 된다. 일직선으로 있는 두 개의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12시 이후에 두 번째로 12라는 숫자를 가리켰기에 둘째 번의 정오다. 비누 거품에 씻기어 가지고 있는 닭. 개아미 집에 모여서 콩크리―트를 먹고 있다. 아침 일찍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아침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메리카인은 닭이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서 아메리카인은 몸에 비누를 바르고 샤워를 하는가 보다. 그들은 개미집과 같은 연립주택 형태의 집단 거주지에서 산다. 그리고 우리가 밥과 국을 중심으로 아침밥을 먹는다면, 아메리카인은 빵이나 고기를 칼로 썰어서 먹는다. 마치 딱딱한 콩크리―트를 먹는 것과 같다. 男子를 搬揶하는 石頭 남자를 나가라고 희롱하는 돌머리는 괘종시계다. 돌로 된 머리로 종을 들이 받아 소리를 내면서, 남자에게 “이제 그만 출근해라. 출근해라. 어서 출근해야지~~”하면서 마치 희롱하는 듯이 놀리면서, 어서 밖으로 나가라고, 출근하라고 놀린다. 男子는 石頭를 白丁을 싫어하드키 싫어한다. 남자는 이 출근을 강요하는 시계를 마치 백정을 싫어하는 닭처럼 싫어한다. 이른 새벽 거리에 나감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닭인 아메리카인은, 괘종시계가 시각을 알리면서 밖으로 나가라, 출근하라 놀리면서 재촉하는 것을, 닭이 자신을 죽이려는 백정을 싫어하여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한다. 마치 자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처럼 여겨서, 괘종시계를 싫어한다. 얼룩고양이와 같은 꼴을 하고서 太陽群의 틈사구니를 쏘다니는 詩人. / 꼭끼오――. / 瞬間 磁器와 같은 太陽이 다시 또 한 個 솟아올랐다. 날이 새기도 전에 출근하는 아메리카인은 각종 불빛에 반사되어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마치 얼룩고양이다. 그러한 꼴을 하고서, 태양군 즉 전등불빛 사이를 쏘다니는 시인이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면서도, 마치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듯이 중얼거리기도 하고. 시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메모하듯이 무엇인가 적기도 한다. 그들은 그날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 생각난 중요한 일은 수첩에 적기도 하는 것이다. 꼭끼오―― 하고 진짜 닭이 울자, 순간 그 소리에 자석처럼 끌려 올라오듯이, 사기그릇처럼 둥글고 환한 태양이 다시 또 한 개 솟아올랐다. ​ ​ ​ 5. 烏瞰圖 (二) ▣   烏瞰圖 詩第一號 ​ 十三人의兒孩가도로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1934. 7. 24 ―     ‘오감도(烏瞰圖)’는 제목부터 난해하다. 흔히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까마귀가 조감한 세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타당하다. 현대인의 온갖 추한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鳥瞰)한다는 말로 보인다.  '아해(兒孩)'라는 말이 우선 눈에 띈다. 아이라고 하지 않고 왜 아해라고 했는가. 한자 지식이 풍부했던 이상은 ‘아해(兒孩)’의 파자를 생각하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해는 兒+(子+亥)의 파자다. ‘아해’는 아이를 만드는, 돼지와 같은 축생의 씨앗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말이다. 따라서 ‘아해’는 축생과 같은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관련이 있는, 정액 속의 정자를 의미한다. ‘십삼 인의 아해’에서 13이라는 숫자는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로 사용된다. 서양적 학문과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이상으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서양적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十三人의 兒孩가 도로를 疾走하오. /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고 해 놓고서, 사람들이 그 도로가 무엇인지 모를까 봐 괄호를 해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그 도로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막다른 골목은 더 이상 앞으로 질주 할 수 없는 골목이다. 일정한 거리만큼 가다가는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골목이다. 상상해 보면, 여성의 음문에서부터 자궁에 이르는 질(膣)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第一의 兒孩가 무섭다고 그리오. ∼ 第十三의 兒孩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일의 아해로부터 제십삼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 무수한 아해들이 도를 질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질에 사정한 정액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정자들이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무섭다고 그런다. 수많은 정자들의 여성의 질을 따라서 질주하지만 대부분 난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고, 한 개 혹은 두 개의 정자만이 난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정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 (다른 事情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런데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둘 뿐이라고 한다. 질주하여 난자에 먼저 도달한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우리가 흔히 무슨 일을 목숨을 걸듯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컬어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정자들을 물리치고 난자에 도달한 그 하나 혹은 두 개의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그리고 나머지 정자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나머지 정자들은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면서도 죽음을 무서워한다. 다른 사정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다. 두 가지 결과밖에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그런데 이제는 그 중에서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하고 해도 좋다.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고 해도 좋다. 이제는 성을 생식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무서운 아해거나 무서워하는 아해거나 구별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정자는 난자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適當하오.) /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를 疾走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길은 뚫린 길이라도 적당하다. 13인의 아해가 도로 즉 여성의 질을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남성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뚫린 길은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손이다. 이제는 성을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위를 통해서 즐기기도 한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어차피 자위를 통해서 배출된 정자는 모두 질주를 하지 않으며, 그대로 죽는다. 따라서 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현대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과연 이러한 시를 두고 음란한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현대인의 우울한 삶의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한 시로 볼 것인가?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 ​ ​ ▣  烏瞰圖 詩第二號 ​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 1934. 7. 25 ―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냐. 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는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이 어떠한 상황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아버지가 조을 적에,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상의 연보를 보면, 이상은 1910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강릉김씨 演昌(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해경(金海卿)이다. 아버지 김연창은 차남이었고, 큰아버지 김연필은 구한말 총독부 기술직에 종사한 전형적인 서울의 중인층이었다. 김연필은 소생이 없는 때여서, 이상의 탄생은 집안의 경사였다고 한다. 세 살 때 큰아버지가 이상 김해경을 양자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상의 연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는 집안의 장자로서의 대를 이어야 하는 이상의 장자의식(長子意識)이 반영된 시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조을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자손을 번식할 기력이 없고 늙었다는 말이다. 조는 상태는 활발히 활동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다. 아버지가 늙어서 이제 더 이상 자손을 번식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가문을 이어갈 자식을 낳아야 한다. 만약 큰아버지처럼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것은 조상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생각이 달랐는지 혹은 기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개인이 자신의 삶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아버지가 옆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된다. 나의 아버지처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일 뿐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서 드디어 먼 조상의 대를 잇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한다. 화자는 답답하다. ​ ​ ▣   烏瞰圖 詩第三號 ​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1934. 7. 25 ―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싸움한다'의 이미를 이해해야 한다. ‘싸움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남녀가 마치 싸움하듯이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쓴다.’는 의미다. 싸움하는 것과 성교를 하는 것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서로 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을 몰아쉬면서, 격렬하게 행동한다. 또 ‘싸움하는 사람’은 아내와 성교를 하는 화자, 화자의 성교 상대인 아내, 그리고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 아내를 잘 만족시키지 못하여 애쓰는 화자, 이렇게 셋이다. 그러면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기력이 달려서 아내와 자주 성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싸움하지 않는 형태, 즉 자위와 같은 방식으로 성욕을 해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금홍이와 사는 이상의 생활을 상상해 보자. 금홍이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금홍이와 자주 잠자리를 할 수 없던 이상이, 낮에 자위로써 혼자 성욕을 해결하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금홍이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낮에 자위를 한 사람이 그날 밤에 또 아내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또 성교를 할 경우 잘 되겠는가. ‘싸움하지 않는 사람’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동음 이의어를 사용하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설명을 해도 그말이 그말이라 하나도 무엇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싸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하는 것이며,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행위다. 기본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각자 의미를 적용하여 읽어 보라.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하였으면 그만이다   ​ ​ ▣   烏瞰圖 詩第四號  患者의容態에關한問題.  診斷 0.1   26. 10. 1931     以上   責任醫師 李   箱  ― 1934. 7. 28 ―     오늘날 서양의 발달한 문명의 밑바탕이 되는 수학과 과학에서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 기술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서는 수학적 원리, 과학적 법칙 등을 숫자로 간명하게 기호로 표시한다.  그러나 간단한 기호로 표시하는 수학과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아니 도리어 인간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한다. 이런 내용을 다룬 대표적인 시로는 , 등이 있다. 이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患者의 容態에 關한 問題. 이상한 숫자들 위에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숫자는 서양의 문명을 낳은 수학과 과학의 상징이다. 거꾸로 쓴 이 이상한 숫자들은 서양 학문의 용태와 관련된 숫자들이다. 그리고 책임 의사 이상이 진단했다.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진단한 것이다. 이상한 그림 숫자들은 거꾸로 씌어 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겉모습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거울을 본다. 몸 안에 있는 질병의 상태는 엑스레이 촬영을 통하여 본다. 이상이 살았던 1930년대 초반에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여 병을 진단하였던 것 같다. 를 보면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은 환자의 몸 안에 있는 병의 상태를 보여 준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엑스레이를 찍는다. 그래서 숫자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듯이 좌우가 바뀌어 있다. 인체의 내부에 병이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서 해부를 하고 치료한 다음, 다시 봉합한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을 보고 진단하고, 절개하여 병을 제거하고, 다시 봉합해야 한다. 거꾸로 된 숫자는 바로 엑스레이로 촬영한 서양 학문이다. 이 숫자들을 조망해 볼 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안 하얀 줄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해부한 자국이다. 그리고 가운데 점들은 그것을 다시 봉합한 바늘 자국이다. 봉합하고 나니, 숫자들이 어긋나 있다. 꿰맨 자국을 따라서 아래 부분의 숫자들이 왼쪽으로 한 칸씩 밀렸습니다. 이는 숫자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치료하나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독자를 위해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서양 과학에 의하면 광선은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 만약 인간이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쫓아간다면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젊어질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 인간의 삶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겠는가. 이상 시인이 보기에 서양의 과학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診斷 0.1 / 26. 10. 1931 / 以上 責任醫師 李 箱 그래서 이상 시인은 모든 것을 어떤 숫자로 도식화해서 표현하는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림 아래에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로 결과를 0.1이라고 진단했다. 1이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면 서양의 학문은 0.1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방식대로 그 아래에 날짜를 적었다. 년, 월, 일 순서가 아닌 일, 월, 년 순서로 적었다. 그리고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을 했다고 서명했다. ​ ​ ▣  烏瞰圖 詩第五號 前後左右를除하는唯一의 痕跡에있어서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神의眼前에我前落傷한故事를有함           臟腑 라는것은 侵水된畜舍와區別될수있을것인가 ​  ― 1934. 7. 28 ―    前後左右를 除하는 唯一의 痕跡에 있어서  ‘전후좌우를 제거하는 유일의 흔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모습이다. 기독(基督)이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전후좌우의 복잡한 말보다,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기독의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 준다.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 神의 眼前에 그런데 그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게 보지 못한다. 원래 ‘翼殷不逝 目不大覩’는 의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말이다. 산목편에는 ‘翼殷不逝 目不大覩’ 라고 나오지 않고 ‘翼殷不逝 目大不覩’라고 나온다. 에서 말하는 '翼殷不逝 目大不覩'는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大’자와 ‘不’자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날개는 크지만 날지 못하고, 눈은 멀리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변형하여 활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것을 날개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멀리 보지 못한다. 지금 십자가 아래에서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데, 그 민망한 꼴을 보고서도, 십자가에서 큰 날개를 펼친 듯 양팔을 벌리고 있는 기독은, 높이 날아서 피하지도 못한다. 눈은 멀리 바라보아 외면하지 못하고, 고래를 아래로 숙여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십자가의 기독은 그 고난을 상징하듯 갈빗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다. 따라서 '胖矮小形의神(반왜소형의 신)'은 갈빗살이 빈약한 기독이다. 따라서 화자는 그리스도의 상이 새겨진 십자가 앞에서~~ 我前落傷한 故事를 有함 자신이 앞으로 넘어졌던 고사가 있다. 앞으로 넘어진 것은 여자와 성교를 하였다는 말이다. 여자가 뒤로 넘어져 밑에 있고, 남자가 그 위를 앞으로 넘어지면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이다.           臟腑라는 것은 侵水된 畜舍와 區別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위의 그림이 나온다. 그 그림 아래에 ‘장부라는 것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다. 아니 인간의 내장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그림은 물이 침투한 축사의 모습이다. 물이 침투한 축사는 가축의 배설물과 물이 뒤범벅이 되어 매우 지저분하다. 또한 위 그림은 인간의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으로 가득 찬 더러운 공간을 연상할 수 있다. 위 그림은 여성의 음부의 내부를 그린 것이다.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남성의 성기가 들어가는 곳이며, 그 안의 넓은 공간은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이 들어와, 마치 축사와 같이 지저분하게 된 곳이다.  따라서 위 그림은 여자의 음부의 내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화자는 십자가가 달린 방에서 어떤 여자와 성교를 한 것이다. 이 시는 , , 등과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 화자는 어느 과부와 성교한다. 과부와 성교하는 과부의 집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 ​ ▣   烏瞰圖 詩第六號      鸚鵡  ※ 二匹           二匹        ※ 鸚鵡는哺乳類에屬하느니라. 내가二匹을아아는것은내가二匹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勿論나는希望할것이니라. 鸚鵡   二匹 『이小姐는紳士李箱의夫人이냐』 『그렇다』 나는거기서鸚鵡가怒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붓그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鸚鵡   二匹        二匹 勿論나는追放당하였느니라. 追放당할것까지도없이自退하얏느니라. 나의體軀는中軸을喪失하고또상당히蹌踉하여그랫든지나는微微하게涕泣하얏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獸類처럼逃亡하얏느니라. 勿論그것을아아는사람은或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果然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1934. 7. 31 ― ​ 이상은 여러 명의 여자와 동거했다. 주로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들과 동거했다. 서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젊은 남녀의 짧은 동거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도 그런 여인 중의 하나다.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으나, 그래도 여급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여급들과 동거하면서 한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상의 생각에 그때그때 함께 사는 것이 남편이요 부인이라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부처럼 한평생을 같이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화자가 앵무새처럼 생긴 어떤 여급과 살고 있던 중에, 또 전에 살던 다른 앵무새처럼 생긴 여급이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싸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상은 그 두 여자에 대해서 각각 함께 살 때는 각각을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鸚鵡  ※ 二匹 / 二匹 / ※ 鸚鵡는 哺乳類에 屬하느니라. 앵무새 두 필이 있다.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 ‘匹(필)’은 말이나 소 등의 가축을 세는 단위다. 그리고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는 말로 봐서, 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유류에 속하는, 앵무새와 유사한 두 여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는 겉모습이 아름답다. 외양이 화려하다.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은 보통 여염집 여자보다 외양이 화려하다. 따라서 앵무새 두 필은 이상이 잠시 함께 살았던, 여급 생활을 하던 여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 앵무새는 지금 살고 있는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앵무새는 지금 여자와 살고 있는 곳에 찾아온, 전에 이상과 함께 살았던 여자로 보인다. ‘앵무새 두 필, 두 필’하고 반복하는 것은 ‘왜 두 여자가 여기에 함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 같다. 내가 二匹을 아 아는 것은 내가 二匹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勿論 나는 希望할 것이니라. 화자가 여급 생활을 하는 한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예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가 찾아와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앵무새 두 필을 아 아는 것은 사실은 화자가 두 필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두 여자 앞에서 당황하여 말을 더듬고 있다. 당연히 당황하였을 것이다.) 화자가 두 여자를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다.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다.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여자가 왜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두 여자를 아는 것은 결국 두 여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두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왜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이유를 알기를 희망한다. 鸚鵡 二匹 / 二匹 앵무새 두 필, 앵무새 두 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왜 두 여자가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 화자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되뇌고 있다. 『이 小姐는 紳士 李箱의 夫人이냐』 『그렇다』/ 나는 거기서 鸚鵡가 怒한 것을 보았느니라. 나는 붓그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겠느니라. “이 소저는 신사 이상의 부인이냐?”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전에 살았던 여자를 가리키면서, 화자에게 말한다. 화자는 “그렇다”고 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여자를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이 들어오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화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부인이 아니지만 전에 함께 살고 있을 때는 그 여자도 부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화자는 거기서 앵무새가 노한 것을 보았다. 지금 함께 사는 여자가 노한 것이다. 화자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화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붉어졌었겠느니라’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보통 붉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화자의 부인이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얼굴이 붉어질 이유가 없다. 鸚鵡 二匹 / 二匹 / 勿論 나는 追放 당하였느니라. 追放 당할 것까지도 없이 自退하얏느니라. 나의 體軀는 中軸을 喪失하고 또 상당히 蹌踉하여 그랫든지 나는 微微하게 涕泣하얏느니라. 앵무새 두 필, 두 필. 화자는 그 여자 둘이 왜 서로 자신을 놓고 서로 부인인지를 따지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부인이고, 지금 사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인데 그것을 왜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화자는 거기서 추방당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화자를 추방하였을 것이다. 아니 추방당할 것까지도 없이 스스로 물러나왔다.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하는 두 여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온 것이다. 화자의 몸은 중심축을 잃어버리고 또 상당히 비틀거려서 그랬던지 미미하게 흐느껴 울었다.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눈물도 났다. 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하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가 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저기가 저기지' 그래 두 여자가 모두 여급이지. 나는 신식교육을 받은 신사 이상. 나의 아내가 여급? 너와 나는 부부가 될 수 없다? 나는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화자는 지금 비로소 자신이 아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두 여자와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두 여자는 앵무새와 같은 여급이고, 두 여자의 대화에서 나왔듯이 나는 신사다. 자신을 신사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사람들은 여급들과 산다는 것을 스캔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화자는 스캔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캔들에서 s자는 소문자로 작고 CANDAL은 대문자로 크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캔들’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마주하여 앉은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환하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촛불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어둡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사 이상이 여급과 사는 것을 SEX SCANDAL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너』『너구나』/『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 함뿍 젖어서 그래서 獸類처럼 逃亡하얏느니라. 勿論 그것을 아 아는 사람은 或은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果然 그럴는지 그것조차 그럴는지. 너. 너구나. 너지. 너다. 너는 아니다. 너로구나. 화자는 지금 자신이 함께 살았던 여급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사실 이상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상 시인은 4~5명의 여급들과 살았다고 한다. 이상 시인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이상 시인과 여급들과 산 것을 두고, ‘가벼운 동거’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정식 결혼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여튼, 화자는 함뿍 생각에 젖어서, 짐승의 무리처럼 도망하였다. 짐승처럼 섹스 스캔들이 될 만한 생각들을 더듬어 본 것이다. ‘獸類(수류)’는 성적 욕망만을 추구했다는 짐승과 같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와, 빠르다는 의미를 동시에 비유하는 말이다. ‘도망하였다’는 말은 현재의 화자의 위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과거로 생각을 되짚어 본 것이 도망하는 것이다. 물론 화자가 과거의 함께 살았던 여급들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혹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과연 그 여급들과 살았던 것도 그렇게 생각할는지~~~, 그것조차 사람들은 그렇게 즉 스캔들로 생각할는지~~~ 생각하고 있다. ​ ​   ▣    烏瞰圖 詩第七號 ​ 久遠謫居의地의一枝·一枝에피는顯花·特異한四月의花草·三十輪·三十輪에前後되는兩側의明鏡·萌芽와같이戱戱하는地平을向하여금시금시落魄하는滿月·淸澗의氣가운데滿身瘡痍의滿月이劓刑當하여渾淪하는·謫居의地를貫流하는一封家信·나는僅僅히遮戴하였더라·濛濛한月芽·靜謐을蓋掩하는大氣圈의遙遠·巨大한困憊가운데의一年四月의空洞·槃散顚倒하는星座와星座의千裂된死胡洞을跑逃하는巨大한風雪·降薶·血紅으로染色된岩鹽의粉碎나의腦를避雷針삼아沈下搬過되는光彩·淋漓한亡骸·나는塔配하는毒蛇와같이地平에植樹되어다시는起動할수없었더라·天亮이올때까지.  ― 1934. 8. 1 ―     이상은 192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한다. 그러나 1933년 23세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된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라는 다방을 차리고 금홍이와 동거에 들어간다. 화자가 지금 떠올리는 ‘구원한 적지’는 ‘일봉가신’을 받은 시점에서 회상하고 있는, 과거에 요양차 갔던 백천온천이다. 일봉가신을 받은 것은 시를 쓰는 시점인 현재보다 과거다. 따라서 시를 쓰는 시점보다 앞서서 일봉가신을 받았고, 일봉가신으로 인하여 화자가 회상했던, 금홍이와의 만남은 더 앞선 과거다. 대체로 문장이 명사형으로 끝난다. 무엇인가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대목 같다. 서술어가 제대로 표현된 것은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와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두 군데 뿐이다. 그것도 회상 시제 선어말어미 ‘―더―’가 사용되었다. 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일봉가신을 받았던 시점의 상태를 회상하면서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시에는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과연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 어느 상황에서 화자에게 왔는가. 그 내용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을 잘 설정해야 시의 전체적 의미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이 추리해 보겠다. 화자가 서울에서 금홍이와 함께 살던 시절에, 집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지금 화자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는 과거에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고, 그래서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대하거나 질책하는 내용의 편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 금홍이를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였고, 지금 시를 쓰는 시점에 그 편지를 받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복잡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기에, 이 시는 그 의미를 쉽게 알기 어렵다. 久遠謫居의 地의 一枝. 一枝에 피는 顯花 시간적으로도 오래 되었고 공간적으로 먼 유배지 백천온천지. 그리고 그 유배지에 심겨진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롭게 심겨진 화자. 그 나뭇가지와 같은 화자의 머리에 피어나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 그 달과 같은,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명의 여자. 금홍이. 여기서 화자는 집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과거의 유배지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꼼짝 않고 앉아서 생각하고 있는 화자는 나뭇가지다. 나뭇가지에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이 떠오르고 있다.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는 초저녁, 머릿속에 떠오르는 달과 같은 모습의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 달과 같은 그 여자는 금홍이다. 금홍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화자가 금홍이를 만났던 백천온천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 때문이다. 特異한 四月의 花草 / 三十輪 / 三十輪에 前後되는 兩側의 明鏡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떨기 꽃, 즉 금홍이는 사월에 피어나는 화초와 같이 특이한 화초다. 삼십일에 한 번씩 찼다가는 기우는 보름달. 보름달에 전후되는 양측의 명경과 같은, 보름달보다는 다소 갸름한, 화초였다. 여기서 금홍이를 화초로 비유한 것은 금홍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금홍이는 보름달보다는 약간 갸름한, 손거울과 같은, 아름답고도 특이한, 화초와 같은 여자였다. 萌芽와 같이 戱戱하는 地平을 向하여 금시금시 落魄하는 滿月 돋아나는 어린 싹과 같이 희희하는 지평은 곧 금홍이와 처음 만나서 즐거움이 싹트던 백천온천지다. 그 백천온천을 향하여 지금 바로 빛을 보내고 있는 보름달과 같은 금홍이를 떠올리고 있다. 淸澗의 氣 가운데 滿身瘡痍의 滿月이 劓刑當하여 渾淪하는 / 謫居의 地를 貫流하는 一封家信 /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 맑은 산골물의 기운 가운데에 있는 백천온천지. 만신창이의 만월처럼 기생으로서 혹은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은 동그란 얼굴의 금홍이. 비형을 당한 사람이 고통으로 소리치듯이 콧소리로 교성을 지르고 있는 혼돈의 땅, 화자가 유배와 사는 백천온천지를 꿰뚤어 보는 듯한 일봉가신. 이로하여 화자는 간신히 금홍이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청간의 기운 가운데’은 맑은 산골물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이는 백천온천지다. 만신창이의 만월이 비형을 당하여 혼륜하는 적거의 지는, 기생으로서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고, 밤마다 코를 베인 형벌을 받는 듯이, 콧소리를 내면서 교성을 지르는 혼돈의 땅이면서, 화자가 유배를 갔던 땅 백천온천지다. 화자는 일봉가신을 받고 그때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근근히 저대하였다’는 말은 ‘근근이 이것을 머리에 이었다.’는 말인데, 간신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의미다. 濛濛한 月芽 / 靜謐을 蓋掩하는 大氣圈의 遙遠 / 巨大한 困憊 가운데의 一年四月의 空洞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금홍이와의 생활의 시작, 금홍이와의 생활의 고요함의 뚜껑을 덮었던 대기권의 멀고 아득함(백천온천에서의 금홍이와의 생활이 화자가 살던 서울과 멀어서, 그 소문이 서울에 있는 가족에까지 나지 않았음을 의미함). 거대한 어려움 속에서 보낸 1년 4개월의 텅 빈 골짜기의 생활.   槃散顚倒하는 星座와 星座의 千裂된 死胡洞을 / 跑逃하는 巨大한 風雪 / 降薶 / 血紅으로 染色된 岩鹽의 粉碎 남녀가 만나서는 서로 즐기다가 헤어지며 또 다른 계집의 몸 위에 넘어지는, 뭇사람들이 서로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죽음이 드리운 골짜기. 그 골짜기를 따라 죄를 짓고 도망치듯 달아나는 거대한 눈바람 즉 교성. 남근으로 내리쳐서 구멍 즉 음부를 메우는 소리. 피처럼 붉게 염색된 발기된 남근으로 암염(巖鹽)을 분쇄하기 위해 절구질 하듯이, 음부를 내리치며 정액을 쏟아내는 곳. 환락가로서의 백천온천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의 腦를 避雷針삼아 沈下搬過되는 光彩/ 淋漓한 亡骸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밑으로 투과되어 지하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홍이의 기억들. 여기서 화자는 기억(뇌)을 통해서 달로 비유된 금홍이에 대한 기억(광채)이 뇌리를 스쳐가는 모습을, 마치 달빛이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내려온 다음 화자의 뇌를 통과하여 지하로 스며드는 달빛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흠뻑 젖어보는, 잊었던 금홍이 모습. ‘임리’는 흠뻑 젖는다는 말이다. ‘망해’는 까마득히 잊었던 금홍이 모습을 의미한. 따라서 오랜만에 금홍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금홍이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추억에 흠뻑 젖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塔配하는 毒蛇와 같이 地平에 植樹되어 /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 天亮이 올 때까지 화자는 탑과 짝을 이루는 독사와 같이 평지에 나무로 심겨져, 다시는 일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서 화자는 움직일 줄 모르는 탑의 짝인,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처럼 앉아서, 금홍이와 만났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치 평지에 심겨진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이 올 때까지. ​ ​   ▣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第一部試驗   手術臺             一              水銀塗抹平面鏡     一              氣壓               二倍의平均氣壓              溫度               皆無    爲先痲醉된正面으로부터立體와立體를爲한立體가具備된全部를平面鏡에映像시킴. 平面鏡에水銀을現在와反對側面에塗沫移轉함. (光線侵入防止에注意하여)徐徐히痲醉를解毒함.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支給함.(試驗擔任人은被試驗人과抱擁함을絶對忌避할것) 順次手術室로부터被試驗人을解放함.翌日.平面鏡의縱軸을通過하여平面鏡을二片에切斷함. 水銀塗抹二回. ETC 아직그滿足한結果를收得치못하였음.   第二部試驗  直立한平面鏡       一             助手               數名 野外의眞空을選擇함. 爲先痲醉된上肢의尖端을鏡面에附着시킴. 平面鏡의水銀을剝落함. 平面鏡을後退시킴. (이때映像된上肢는반드시硝子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假說함) 上肢의終端까지. 다음水銀塗抹. (在來面에) 이瞬間公轉과自轉으로부터그眞空을降車시킴. 完全히二個의上肢를接受하기까지. 翌日. 硝子를前進시킴. 連하여水銀柱를在來面에塗抹함. (上肢의處分)(惑은滅形)其他. 水銀塗抹面의變更과前進後退의重複等. ETC 以下未詳  ― 1934. 8. 2 ―   시인이 아팠는가 보다. 병원에 갔는가 보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였는가 보다. ‘제일부시험’은 엑스레이 촬영하는 내용이다. ‘제이부시험’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바탕으로 수술을 받는 장면이다. 시인이 직접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詩第八號  解剖 소제목 '해부'는 이른바 이상이 몸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는 장면을 바탕으로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第一部 試驗 ‘제일부시험, 제이부시험’에서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화자가 서양식 치료 방식에 대한 신뢰를 보내지 않는 상태에서, 과연 그들이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해 본다는 의식 즉 의사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또 전체적으로 시험을 보는 장면을 연상하도록 한다.   手術臺 : 一, 水銀塗抹 平面鏡 : 一, 氣壓 : 二倍의 平均氣壓, 溫度 : 皆無  제일부 시험을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수술대 한 개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수술대는 엑스레이를 찍는 기계를 의미한다. 수은도말평면경이 한 개 필요하다. 여기서 수은도말경은 수은을 바른 거울이라는 뜻인데, 엑스레이 필름이다. 보통 엑스레이 찍는 기계에 넣는 필름으로서, 필름통 속에 들어 있다. 수은을 입힌 거울은 보통 거울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엑스레이 필름을 거울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울에 사람의 형상이 그대로 비추듯이 엑스레이 필름에도 사람의 내부에 있는 병의 형상이 그대로 비춘다는 의미에서 거울로 표현했다. 기압은 두 배의 평균 기압을 준비한다.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있으면 숨이 막혀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엑스레이를 찍을 때 숨을 멈추는 것을 상상한다면 왜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찍을 때 답답한 채로 숨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온도는 개무하다. 전혀 없다. 웃옷을 벗고, 차가운 기계에 몸을 부착하여 찍는 것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차가운 것은 온도가 없는 것이다. ‘溫’은 따뜻할 온 자다. 따뜻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온도인데, 차가운 것 밖에 없다는 발상이다.   爲先 痲醉된 正面으로부터 立體와 立體를 爲한 立體가 具備된 全部를 平面鏡에 映像시킴 마취된 정면이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마치 마취 된 듯이 정면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을 말한다.  ‘입체와 입체를 위한 입체’에서 앞의 두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몸체, 마지막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다.  사람의 몸체와 엑스레이 기계 전부를 평면경에 영상 시킨다. 방사선은 어디에선가 나와서 사람의 몸을 통과하여, 사람이 서 있는 기계 속의 필름으로 들어가서 사람의 형상을 필름에 나타나게 한다. 따라서 사람과 기계를 모두 영상 시키는 것이다.   平面鏡에 水銀을 現在와 反對 側面에 塗沫移轉함 거울에서는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도말함으로써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엑스레이 촬영에서도 사람의 형상이 필름에 나타나도록 하자면, 현재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필름의 반대 측면에 수은을 도말해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표현이다.   (光線 侵入 防止에 注意하여)徐徐히 痲醉를 解毒함 엑스레이 필름은 광선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광선침투에 유의하면서 서서히 마취를 해독한다. 마취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꼼짝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마취를 해독하는 행위는 꼼짝 않던 몸을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기계 앞에서 물러난다.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 支給함.(試驗 擔任人은 被試驗人과 抱擁함을 絶對 忌避할 것) ‘일축철필’은 쇠로 된 지팡이이다. ‘일축’은 그것을 짚고 의지하는 것이다. ‘철필(鐵筆)’은 쇠로 된 붓과 같은 것, 즉 쇠로 지팡이다. 환자들이 짚는 것이다. ‘일부시험’과 연결하여 지팡이를 철필로 표현했다. 일장백지는 한 장의 백지다. 원래는 진료기록 서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병이 심각한 환자의 입장에서 진료기록 서류의 글이 전혀 보이지 않고, 또 시험 볼 때 백지를 지급하는 것과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진료 기록을 받아서 촬영실을 나오는 장면이다. 시험을 담당한 의사는 환자와 포옹함을 절대 꺼리고 피한다. 환자로부터 병이 옮을까봐서 부축하기를 기피한다.   順次手術室로부터 被試驗人을 解放함 순차수술실은 엑스레이 촬영실과 수술실이다. 여기서는 엑스레이 촬영실이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엑스레이 촬영실에서 촬영을 하고, 다음으로 수술실에서 수술을 순차적으로 해야 한다. 피시험인은 환자다. 환자가 촬영실에서 나온다. 힘겹게 촬영을 마치고 촬영실을 나오는 것은 해방이다.   翌日. 平面鏡의 縱軸을 通過하여 平面鏡을 二片에 切斷함 다음 날, 평면경 즉 엑스레이 사진의 세로축을 통과해서 평면경 즉 엑스레이 필름 통을 두 조각으로 절단한다. 필름 통에서 필름을 꺼내는 장면이다.   水銀塗抹 二回 엑스레이 필름을 현상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수은을 도말한 거울에는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 엑스레이 필름에는 환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수은도말을 2회 했다는 것은 엑스레이 필름에서 다시 형상이 드러나도록, 약품을 처리하여 현상한 것으로 보인다.   ETC 아직 그 滿足한 結果를 收得치 못 하였음 기타, 아직 그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화자는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엑스레이만 찍는다고 병이 낫지 않는다. 이부 시험을 볼 수밖에 없다. 이부시험은 수술이다.   第二部 試驗,  直立한 平面鏡 一, 助手 數名  제이부 시험 즉 수술을 하기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직립한 평면경 한 개가 준비된다. 직립한 평면경은 세로로 세운 에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병원에 가면 벽면에 있는, 불빛이 있는 판 위에 엑스레이 필름을 걸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수술을 한다. 직립한 평면거울은 걸어 놓은 엑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조수 수명이 준비된다. 조수는 간호원이다. 간호원은 의사가 환자를 시험하기 위해서 준비한 조수다. 여러 명이 필요하다.   野外의 眞空을 選擇함 시험 즉 수술을 야외의 진공을 선택해 그곳에서 한다. 야외는 자신의 온 몸이 드러난 공간이다. 수술을 할 때 온 몸을 벗은 채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다. 진공의 공간에서 시험 즉 수술을 한다. 진공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은 마취 상태와 유사하다. 옷을 벗고, 마취를 했다는 뜻이다.   爲先 痲醉된 上肢의 尖端을 鏡面에 附着시킴 우선 마취된 상지 즉 팔의 첨단 즉 뾰죽한 것을 거울면에 부착시킨다. 마취된 상지의 첨단은 수술 도구를 잡고 있는 의사의 손끝에 달린 수술 도구다. 의사의 팔을 마취된 상지로 표현한 것은 의사가 수술할 때 경직된 자세로 수술을 함을 표현한 것이다. 경직된 모습이 마치 마취된 모습과 흡사하다. 첨단을 경면에 부착시킨다는 것은 수술 도구를 엑스레이 필름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수술 도구의 뽀족한 끝을 환자의 몸에 부착시키지 않고, 필름에 부착시키는 것인지는 다음에 나온다.   平面鏡의 水銀을 剝落함 (수술 도구로) 평면경 즉 필름의 수은을 벗겨 낸다. 환자의 환부가 필름에 나타났고, 그 필름이 거울과 같다면, 거울 뒷면의 도말된 수은을 벗겨낸다면 환부가 거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수술을 통하여 환부를 제거하는 것을 거울의 뒷면에 있는 수은을 벗겨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平面鏡을 後退시킴. (이때 映像된 上肢는 반드시 硝子를 無事通過하겠다는 것으로 假說함) 上肢의 終端까지 평면경 즉 필름을 환자의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 때 필름이라는 평면경에 영상된 상지 즉 의사의 팔은 반드시 초자 즉 유리를 무사히 통과하겠다는 것을 가설한다. 필름 즉 거울에 영상된 의사의 팔이 거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의사의 팔은 필름에 찍힐 것이고 결국 환자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의사의 팔이 필름 즉 거울에 비쳐서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여야 환자의 실제 몸에 의사의 팔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부분이다. 팔의 종단 곧 잡고 있는 수술 도구까지 거울을 무사히 통과하여야 한다.   다음 水銀塗抹. (在來面에) 이 瞬間 公轉과 自轉으로부터 그 眞空을 降車시킴. 完全히 二個의 上肢를 接受하기까지 다음으로 박락한 필름 즉 벗겨낸 거울에 수은을 다시 입힌다. 앞에서 거울의 수은을 벗겨 냄으로써 환부를 도려낸다고 하였는데, 수은이 벗겨진 부분을 그냥 두면, 그 부분은 환자의 영상이 투과해 버린다. 그러면 환자는 구멍이 뻥 뚫린 상태의 사람이 되고 만다. 따라서 수술 후에 다시 거울 면에 수은을 도말하여야 환부를 치료한 부분이 다시 필름에 촬영되고, 결국 환자의 몸이 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재래면은 본래부터 있었던 화자의 몸이다.  이 순간 공전과 자전으로부터 그 진공을 해방시킨다. 공전과 자전은 화자가 마취된 상태다. 마취가 되면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이를 공전과 자전이라고 표현했다. ‘진공을 강차시킨다’는 것은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차를 타면 어지럽고 멀미를 한다. 마취도 이와 유사하다. 차에서 내리면 멀미가 사라진다. 두 팔을 환자가 완전히 접수할 때까지 마취를 해독한다. 상지를 접수하는 것은, 환자가 마취가 되었을 때는 두 팔을 양쪽으로 늘어뜨리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면 늘어뜨렸던 팔을 거두는 모습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翌日. 硝子를 前進시킴. 連하여 水銀柱를 在來面에 塗抹함. (上肢의 處分)(惑은 滅形) 다음날, 유리를 전진시킨다. 환자의 몸 쪽으로 유리를 전진시키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