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3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200 ]

1060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댓글:  조회:2218  추천:0  2019-12-21
출처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by 김용식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 문학은그 자체로 진공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 - 작품 - 독자'의 구도 속에서 '현실 세계'에 역동적으로구체화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문학의 참된 의미는 작자, 독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어디에다 중점을 두고 문학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관점이 나온다. 현실세계   ∥ 작가 〓 작품 〓 독자   표현론적 관점(생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작가의 체험, 사상, 감정의 반영물이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 능력의 소산이다. ⑵ 특징 ♠ 작품이 작자와 맺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관점 ♠ 문학 작품은 작가의 표현욕구가 드러난 대상이기에 작가의모든 것을 작품에 연관시켜 해석하려 함. ♠'작가론(作家論)'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님. ⑶ 방법 ♠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연구 ♠ 작가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연구 ― 성장환경, 가계, 학력, 교우관계, 취미, 사상, 병력 등의 조사. ♠ 작가의 심리 상태에 대한 연구 ⑷ 장 · 단점 ♠ 장점 : 작가의 개인적인 능력과 천재성을 중시함. ♠ 단점 : 의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작가가 표현하고자의도한 것과 그것이 실제로 표현된 결과인 작품이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 반영론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⑵ 특징 ♠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품과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임. ♠ 실제로 인간의 삶은 현실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으므로, 작품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할 수 있다. ♠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맺고 있는 관련성에촛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방법임. ⑶ 방법 ♠ 작품이 대상으로 삼은 현실 세계에 대해 연구한다. ♠ 작품에 반영된 세계와 대상 세계를 비교 검토한다. ♠ 작품이 대상 세계의 진실한 모습과 전형적 모습을 반영했는지검토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문학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출발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문학 작품에대한 이해가 삶의 현실, 시대 및 역사에 대한 이해로 확대될수 있게 한다. ♠ 단점 : 이 방법이 지나치면 작품을 작품으로서가 아니라실제 사실들의 조립체 또는 역사적 자료로 보게되는 단점이 있음. 효용론적 관점(수용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은 독자에게 미적 쾌감, 교훈, 감동 등의효과를 주기 위해 창작한 것이다. ⑵ 특징 ♠ 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 ♠ 능동적 참여자로서의 독자의 역할을 강조함.(독자가 작품을수용함으로써 의미가 구현된다는 점, 즉작품 해석이 수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점 등을 제시함) ♠ 작품의 가치를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어느 정도 주었느냐에따라 평가하려는 관점이다. ⑶ 방법 ♠ 독자의 감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품의 어떤면에서 촉발되는가를 검토한다. ♠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과 정신 등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도입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독자가 능동적인 주체가 되며, 일반 독자들이 쉽게실천할 수 있는 관점이다. ♠ 단점 : 독자의 주관적 느낌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는오류에 빠질 염려가 있음. 절대주의적 관점(구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고도의 형상적 언어로 조직된자율적인 체계이다. ⑵ 특징 ♠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작품밖에 없으며, 작품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함. ♠ 작품을 그 자체로 독립된 자족적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생각함. ♠ 작품을 작가나 시대, 환경으로부터 독립시켜 이해한다. ♠ 언어 표현의 방식과 작품의 내적인 짜임새를 중시함. ⑶ 방법 ♠ 작품의 언어적 구조를 중시한다. ♠ 문학의 언어가 지니는 특징 및 언어의 이미지, 비유, 상징등에 주목한다. ♠ 작품을 유기적 존재로 본다. 특히, 시에 있어서 시어와시어 사이, 행과 행, 연과 전체 작품의 상관 관계, 운율과 의미와의 관계 등을 분석적으로 이해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언어에 민감한 시의 분석에 뛰어난 성과를 보임. ♠ 단점 :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좁힐 수 있으며, 문학이궁극적으로는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고려하지 않는다. 종합주의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작품의 총체적이고도 통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위해서는 표현론적, 반영론적, 효용론적, 절대주의적관점을 통합하여 연구해야 한다. ⑵ 특징 ♠ 작품을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작품의 부분적의미만을 볼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함. ♠ 작품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총체적으로이해하려면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것이다. ⑶ 방법 ♠ 네 가지 관점을 통합한다. ♠ 네 가지 관점을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유기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 출처 : http://www.woorimal.net/ [출처] [공유]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작성자 옥토끼  
1059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끝 댓글:  조회:764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3-1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1) 홍문표   1. 문학의 길, 인간의 길   이 거대한 우주, 이 영원한 우주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야 무신론자라면 인간이란 지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의 하나로 자연환경 속에서 어떤 단백질 인자가 무수히 많은 진화와 변이를 거쳐 고등생물로 진화한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생명체들 중에 왜 인간만이 모든 만물을 대자적으로 사고하고 의식하는 존재가 되어 만물의 영장이 되었을까. 그것도 특별한 진화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현생 인류의 전 단계는 무엇인가, 원숭이인가, 침팬지인가. 만일 원숭이나 침팬지가 인류의 전 단계라면 왜 아직도 원숭이와 침팬지가 현존하는가, 그들은 아직 진화가 덜 된 것들인가. 이렇게 진화론과 창조론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진화론으로 볼 것인가. 창조론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인간의 존재이유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지금도 저 열대의 밀림에서 서식하는 침팬지가 우리 할아버지가 되고 인간이 더 진화하면 우리도 하늘을 나는 조류가 된다는 논리가 되는데, 만일 그런 논리에 동의한다면 우리 인간은 아직도 진화과정에 있는 동물의 하나일 뿐이며 그러기에 인간의 존엄이나 영혼의 소중함이 무시되는 유물론의 메마른 인생관만 남게 된다. 그러나 모든 생명들이 각각의 유전자와 각각의 생존질서를 가지고 탄생한 것이라면 여기엔 조물주의 창조적 계획과 목적을 생각해야 하고, 특히 모든 생명체들 중에 유독 인류만이 최고의 의식적 존재이며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이 지구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왜 우리 인간은 수백만 생명체 중에서 의식이 있고, 정신이 있고, 영혼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졌을까. 그냥 우연히 운 좋게 진화되어 만들어진 존재라면 우리도 개나 돼지처럼 잠시 세상에서 약육강식의 본능으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지만 모든 만물을 판단하고 경영하고, 지배할 수 있는 신의 속성을 가지고 창조된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면 영장으로서의 역할, 사고하고, 모방하고, 창조하고, 변형할 수 있는 지적 존재로서의 역할, 그 존재 이유와 삶의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사유와 행동이 요구된다. 그리고 창조적인 인간, 영장으로서의 인간, 영적존재로서의 인간, 로고스(loges)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면 마땅히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그 해답을 모색할 것이며, 그러한 존재 인식의 바탕에서 독특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 것이고, 문학도 해야 할 것이고 역사를 창조하고 기록해 가야 할 것이다. ​ 만물의 영장을 자인 한다면 인간의 첫 번째 작업은 마땅히 인간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인간의 연원, 인간의 출발, 인간의 탄생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출발지가 없다면 과정도 없고 종착지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성이니 정체성이니 하는 모든 존재들의 실체는 어떤 원인과 결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한다. 의식이 없는 목석이나 동물들은 이런 문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만은 정신과 영혼과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존재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상의 모든 민족들의 그 연원이나 탄생에 대한 생각들을 보면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히브리민족들은 야웨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고, 인간도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히브리와 대조를 이루는 인본주의 그리스 민족도 제우스 신으로부터 인류가 탄생되었고 로마에서는 주피터, 중국에서는 삼황이. 인도에서는 브라만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환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더러는 신화니 비과학이니 허구니 하지만 한국인에게 천손 사상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이고 정신이고, 믿음이고, 그러기에 그것은 진실이다. 이처럼 모든 인류의 출발은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목석이나 짐승과는 전혀 다른 정신과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다. 정말 신의 형상을 입은 영적인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의 기원을 자연이나 아메바나 침팬지에서 찾을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류의 출발은 이처럼 하늘로부터 천손으로, 로고스로, 신령한 존재로 시작했는데 인류의 역사과정과 현재는 매우 비관적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입고 창조된 인간이 득죄하여 실락원의 저주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지상의 형극을 걷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비관적 인생관은 기독교의 교리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그렇다. 불교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느 것도 고정적인 것이 없고 그러기에 실상도 없는 것인데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가변적인 사바세계에 집착하여 허망한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현실주의적인 공자의 유교적 사고에서도 도(道)가 상실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독백을 하게 된다. 이점에 대하여 혹자는 또 이들을 종교적 망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 그렇다면 가장 냉철한 이성적 사유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놀랍게도 철학자들도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 키엘케고르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안한 존재라 했다. 순진무구한 경우는 그 무지가 불안한 것이고, 삶은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의 불안이 있고, 득죄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형별, 그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했다. 인간이 불안한 존재이기에 결국 절망적인 존재라는 인식은 무신론의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목석이나 동물과 달리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하는 대자적 존재인 바 그래서 오히려 인간들은 늘 결핍을 느끼게 되고 걸신들린 아귀처럼 그 결핍을 채우고자 몸부림치는데 문제는 아무리 결핍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도 밑 빠진 항아리는 채울 수가 없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허무를 세계내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도 유한한 지상의 소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상황의 존재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프로이드는 인간을 욕망의 존재라 하였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욕구불만과 갈등을 느끼게 되는데 욕구를 채우면 또 다른 욕구가 분출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란 만족과 불만의 악순환을 거듭하는 불만의 존재라 하였다. ​ 그렇다면 문학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그동안 문학에 대한 정의를 보면 문학이란 인간의 사상 감정을 미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며 이를 통해 교훈과 쾌락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공통된 문학관이었다. 말하자면 감동적인 문학형식을 통해 기쁨도 주고 깨달음도 준다는 것이 과거의 문학관이다. 왜 인간에게 교훈과 쾌락이 필요했을까 그것을 역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인간이 무지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인간이 완전하고 행복했다면 교훈과 쾌락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문학에 대한 정의나 목적이 그러한 위안이나 교훈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문제해결의 문학, 치유의 문학, 구원의 문학이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왜 현대에 와서는 치유와 구원을 문학의 기능과 역할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인간이 과거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와 갈등에 빠져 있고, 중병에 걸려 있고, 죽을 지경의 절망에 있거나 뭔가를 상실했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이다. ​ 이처럼 인간은 신적인 형상을 입고, 탄생한 그 화려한 출발과는 다르게 그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종교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이나 모두가 자아의 상실, 주체와 타자의 분리, 또는 본질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과 좌절, 그 허무와 불안을 인간의 실상, 즉 실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영혼을 가진 인간의 당면 문제가 되고 문학의 과제가 되고 그러기에 종교나 문학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인간의 존재이유가 되고 문학의 존재이유가 되고 최고의 가치가 되고 최고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 물에 빠진 자, 잃어버린 자, 정상이 아닌 자, 얽매인 자, 배고픈 자, 그래서 마침내 고독과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된 자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물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며,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결핍을 채우는 것이다. 이를 포괄적으로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종교나 문학이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구원이 그 핵심이 된다. 그런데 종교가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학에도 구원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변별성이 있는가. 그리고 문학에서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창작하고 있는 내 작품들이 또는 우리들의 작품들이 정말 구원에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유행 따라 물결 따라 덩달아 춤이나 추는 맹목의 손짓인가 스스로의 문학에 질문하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문학적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 그렇다면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에는 어떤 과정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는데 이에 대하여 일찍이 키엘케고르는 구원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한 바가 있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 그것인데 이는 인류가 추구하는 예술, 도덕, 종교와 관련한 문화적 구원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이성을 통한 인간 구원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는 점에서 문학적 구원을 검토해보고자 하는 본 주제와 밀접한 것으로 사료되기에 이를 함께 검토하면서, 정말 문학을 하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과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도 문학적 구원이란 주제에 동참할 것인가 그 길을 물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 2. 미적 실존과 감성의 문학 ​ 키엘케고르는 그의 저서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인간만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인간은 불안에서 피할 수도,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절망이다. 그래서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하고 슬픈 존재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면 이를 극복 해야할 책임과 사명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근원적인 불안과 절망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고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 구원이란 결국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불가능과 가능, 구속과 자유, 죽음과 영생, 인간과 하나님, 지상과 천상이 분리된 단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상태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그러한 일치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인간이고 실존이고 근원적인 불안과 고독인 이유다. 따라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 그 원죄의 천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지만 불행하게도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력이 아닌, 타력, 어떤 절대자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신이 인간에게로 다가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이성적인 역설이기 때문에 과학과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인간들로서는 그러한 기적을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 시도 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가 미적 실존의 단계다. ​ 인간이 불안과 절망의 상태에서 시도할 수 있는 첫 단계는 미적 실존 또는 감성적 실존의 방식이다. 이는 가장 기초적이고 직접적이며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생활태도다. 사실 개개인의 현존재에 대한 출발점은 직접성이나 감성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미적 실존의 생활은 오직 그날 그날의 현실적인 생활에 만족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얻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든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 체험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고통 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활방식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감성과 관능에 따른 만족이나 향수의 입장에 서는 것이 미적 실존이며, 또한 심미적 실존의 인간관이다. 비근한 예이지만 인간이 불안할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술에 취하거나 심지어는 마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자극을 통해 이를 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더욱 악화 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보다 고상하게 승화시키는 방법으로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을 통한 초월의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미적 실존의 생활은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만을 주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향락과 쾌락을 추구할 뿐이다. 키엘케고르는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미적 실존의 결과는 언제나 무라고 하였으며 그러기에 미적인 생활에서는 아무것도 얻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감각적인 탐미를 통하여 현실을 도피하려 하지만 결국은 우수와 불안, 그리고 권태로 끝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실존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쾌락의 윤작(rotation of crops)을 되풀이 한다. 쾌락의 윤작이란 끝없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는 것, 즉 심미적으로나 또는 감각적으로 항상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전환 없이는 신선한 자극이 없고, 신선한 자극 없이는 그 생활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악순환이다. 이는 술이 술을 부르고, 죄가 죄를 부르고, 미가 또 다른 미를 부르는 탐미적이고 악마적인 것이기도 하다. ​ 이러한 탐미적 실존의 대표적인 인물이 돈 판이다. 그는 수많은 여성을 단지 감성적 쾌락으로만 사랑할 뿐이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부터 육체의 자유를 선언했을지라도 돈 판은 계속 불안에 쫓긴다. 아무리 새로운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쾌락의 순간이 끝 날 때마다 불안과 우수 그리고 권태는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탐미적 결과는 마침내 죽음을 수반한다. 따라서 심미적 실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쾌락의 생활은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은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정신 또는 영적인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심미적 관심의 대표적 문화양식이 바로 문학예술이다. 특히 문학의 경우 낭만주의나 예술주의 또는 실험적인 형식주의들은 모두 감각이나 정서를 통한 미적 실존의 구체적인 표현행위가 된다. 그런데 우리 문학사에서 보더라도 불안 심리가 극도로 고조되었던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보면 국권상실과 자아상실이라는 이중의 불안에서 이를 벗어나고자 찾은 곳은 오히려 어둡고 축축한 현실 도피적인 공간이었다. ​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없는 -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 이상화 「말세의 희탄」에서 ​ 이러한 병적인 감성의 시는 이상화뿐만 아니라 당시 황석우의 「태양의 침묵」, 홍사용의 「눈물의 왕」, 오상순의 「허무혼의 선언」, 박영희의 「일광으로 짠 병실」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이 절망과 불안의 심리를 벗어나기 위하여 모색한 탐미적 정서는 오히려 더욱 병적 정서에 침잠하는 퇴행적 자학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조와 퇴행이 일시적인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비판에 부닥치게 된다. ​ 미적 실존의 허구는 예술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 에서도 볼 수 있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나 「광화사」같은 소설을 보면「광염소나타」에서는 미적 욕망과 이상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주인공인 천재음악가가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하여 방화와 살인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광화사」에서는 주인공 화가가 눈먼 소녀를 범하고 죽이는 사건으로 미를 창조한다는 내용인데 모두가 미를 추구하지만 결과는 영혼의 공허함과 황폐함을 보일 뿐이다. ​ 한편 문학에서 미적인 관심은 특히 형식 창조라는 관점에서 끝없는 모색을 실험하고 있는데 새로운 형식의 실험, 낯설게 만들기, 기존 형식의 해체와 창조 등의 구호를 내걸고 도전하는 모든 형식주의들이 그것이다. 최근에 볼 수 있는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모더니즘, 이미지즘, 포멀리즘, 해체시, 메타시, 키치시, 하이퍼시 등 시대마다 새로운 구호를 내걸고 도전하는 실험시들의 반란은 모두 새로운 형식의 도전이며 미적 감성의 욕망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미적 탐구들이 분명 일시적으로는 정서적 충격이나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영원한 행복감이나 영혼까지 구원을 보장하는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예컨대, 이상의 「오감도」가 당대 현실에서 정서적 미학적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부정과 해체라는 돌발적인 용기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오감도가 인간의 영혼까지 구제하는 영원한 깃발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춘수의 무의미 시 가령 「눈물」같은 시가 독자들에게 일시적인 당혹감을 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식 실험의 시들이 불안과 절망과 상실감의 현대인을 구제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해체시나 하이퍼시도 그렇다. 그것이 시적인 미학의 탐구는 분명하지만 그래서 일시적으로 신선한 감성의 충격을 주고는 있지만 그러한 당혹감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시적 감동이나 충동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또는 영혼의 구원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홍문표 시 창작 강의 노트 53-2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2) ​ 홍문표 ​ 3. 윤리적 실존과 이성의 문학 ​ 그래서 지쳐버린 미적 실존 즉 감성적인 문학은 드디어 자신의 생활이 외면적, 육체적, 감각적, 개인적, 쾌락의 노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참된 자기의 모습을 찾기 위한 엄숙한 자각과 결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감성적인 것에서 이성적인 것으로 미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실존으로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실존의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실존을 미적 실존의 모순성을 의식하고 양심의 입장에 서는 실존이라고 했다. 즉 윤리적 실존의 인간은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 시간과 영원과의 대립에서 유래하는 자기모순의 사실에 직면하여 불안이나 절망을 회피함 없이, 그것을 사실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통합하려고 결의하는 실존의 모습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은 모순된 현실에 직면하여 엄숙한 양심을 가지고 보편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유한성인 자기 속에 실현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자각하여 그것을 결단하는 실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실존의 생활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같은 윤리적 실존의 생활태도에는 항상 양심과 엄숙 그리고 사회적 의무만이 요구된다. 양심의 입장에 서서 자기의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윤리적 실존은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미적 실존을 영위하는 자들을, 꿀을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이동해 가는 나비에 비할 수 있다면 윤리적 실존을 영위하는 자들은 자신의 임무에 절대 충직한 꿀벌에 비할 수 있다고 했다. ​ 이들은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미적 실존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표명하게 된다. 미적 실존에서는 결혼을 연애의 무덤으로 간주하므로 그것을 회피하고 계속 새로운 사랑을 찾아 유랑하는 반면 윤리적 실존은 결혼을 신이 제정한 성스러운 제도로 확신하고 평생토록 일편단심 충절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이른 자들은 어디까지나 칸트가 말했던 실천 이성의 지상명령, 즉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그 어떤 형편에서도 내적 균형을 잃지 않고 합리적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조와 정직, 성실과 충절을 그 무엇보다 중시한다. ​ 그러나 윤리적 실존에서도 인간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 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도덕률마저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유한성, 즉 자기 자신이 너무 무력하며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윤리적이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가 바라다보는 도덕적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현실의 자기가 너무나 추악하고 불순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키엘케고르에 의하면 윤리적 실존은 이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이 거짓된 진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윤리적 행동과 수고는 자기도취, 자기 신격화의 거짓된 진지성으로 끝나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자기를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 속에서는 아무리 성자 같은 구도자라 할지라도 불안과 절망이 깃들어 있으며, 자기의 내면성에 깃든 불안과 부자유를 아무리 윤리적으로 포장해도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 문학에서도 감성의 문학이 윤리적인 문학으로 전환하였는데 그것은 먼저 중세 문학이나 고전주의 문학에서 볼 수 있다. 중세에는 금욕주의적인 종교와 철학이 역사를 주도하면서 문학의 주제는 권선징악이라는 율법적인 윤리가 주도하게 되었다. 감성은 늘 죄악시되었고, 윤리와 도덕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 설은 관념이나, 이성 또는 도덕이나 철학이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그렇다. 특히 중국의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라하여 문학에 사특한 요소를 배제하고 오직 문학이란 도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했다. 이러한 도덕주의, 윤리주의 환경에서는 문학도 인간도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감성의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 근대 낭만주의였지만 지나친 감정의 과잉과 비현실적 이상의 추구는 다시 이성의 회복, 현실의 회복, 진실의 회복이란 사실주의 문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는 환상적인 미래보다 당장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는 이성의 윤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 1920년대 이 땅에서 제기된 리얼리즘의 양심은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의 인식이었다.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모두 뒈져버려라!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라고 했다. 최서해도 「기아와 살육」에서 “모두 죽어라! 이놈의 세상을 부수라! 복마전 같은 이놈의 세상을 부수라, 모두 죽어라!” 이러한 개인적 분노는 마침내 집단적 분노로 발전한다. 원래 양심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고 집단적인 공동체적 삶의 율법이다. 그래서 이성과 양심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실주의는 개인적인 저항에서 집단적인 저항, 계급적인 저항으로 발전한다. 이 땅에 계급적 정의와 양심이 등장한 것은 1925년대부터다. 그러나 계급주의 윤리는 결과적으로 조국 분단과 동족 상생의 비극적 역사에 기여했고, 아직도 민족 분열과 대립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그토록 빈궁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내세운 리얼리즘의 진보적 윤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빈부의 문제나, 사회적 모순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소란한 북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1960연대 이후 참여문학이나 민중문학의 그 치열했던 양심과 정의와 민주화와 평등의 윤리도 소리만 요란했을 뿐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불신과 갈등만 커져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인간 사회란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윤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만큼 도덕적으로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데서 미적 실존은 물론 윤리적 실존의 절망이 있는 것이다. ​ 4. 종교적 실존과 인간의 구원 ​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과 절망, 유한한 인생의 한계성에 대한 절망과 좌절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래서 감성적 실존, 즉 미적 실존에 투신해 보지만 감성은 더욱 감성을 요구하고, 쾌락은 더욱 쾌락을 요구하고. 미적인 창조적 욕망은 더욱 미적인 욕망을 요구하는 악순환 속에서 절망은 더욱 깊어만 간다. 우리는 감성적이고 미적인 문학을 통하여 낭만주의, 예술주의, 형식주의,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해체시, 낯설음의 시학, 메타시, 아방가르드, 무의미 시, 하이퍼 시 등 무수히 많은 미적 상상력을 탐닉하였지만 영혼은 여전히 공허할 뿐이며 돌아보면 그저 자아도취라는 허구의 환상에서 맴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집단, 주관보다는 객관, 감성보다는 이성, 환상보다는 현실에서 진리와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윤리와 도덕을 앞세워 투쟁을 하였다. 리얼리즘, 내추럴리즘, 공리주의, 계몽주의, 반영론, 컴뮤니즘, 소시얼리얼리즘, 민족주의, 민중주의, 계급주의, 역사주의라는 갖가지 진실과 정의와 평등과 총체성의 수식어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흔들며 가열차게 윤리적 투쟁을 전개했지만 여기서도 분열과 대립과 갈등만 더욱 조장되었을 뿐 현실은 여전히 모순과 대립의 이전투구가 있을 뿐이다. ​ 그렇다면 미적 실존이나 감성적 문학, 윤리적 실존이나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문학, 형식이냐 내용이냐, 순수냐 참여냐 하는 이원론적 흑백논리 등 불완전하고 유한한 이들 인간의 휴머니즘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구원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구원이나 영원한 행복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밖의 존재, 인간보다는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만이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전지전능한 신 앞에 참회하고 자비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키엘케고르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전능한 존재이고 무한한 존재이고, 그러면서도 우주만물을 창조한 존재이고, 지금도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정말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존재가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성이나 가능성은 오직 초월자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무한성과 가능성을 믿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인간의 유한성과 불가능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종교요, 그것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 휠라이트는 인간의 사고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수평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 사고다. 수평적 사고란 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 사고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이나 감성을 앞세운 모든 인본주의적 문명이 바로 수평적 사고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이성은 마침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헤겔은 말했지만 우주의 시작과 끝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수평적 사고로는 측정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도 그렇다. 그런데도 불가사의한 우주는 여전히 건재하고, 죽음의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를 엄습한다. 그러니 우주의 시간이나 공간, 사후의 시간이나 공간은 영원히 초월의 영역이고 신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 영역과 신성의 영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속의 영역은 감성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이지만 원천적으로 불완전한 영역이기에 결국은 불안하고 허무하며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하고 죽어야 하는 원죄의 공간이다. 그러나 신성의 공간은 모든 것이 가능한 무한한 공간이다. 신성의 공간은 죽음이니, 절망이니 하는 세속적 사고의 영역을 벗어난 절대 자유와 행복이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사고의 뒤뜰에는 천국이 있고, 낙원이 있고 극락이 있게 된다. 따라서 세속의 영혼들은 바로 이러한 신성의 세계로 가는 것이 절체절명의 소망이 된다. 그러나 수평적 사고의 원죄에 갇혀 있는 세속의 인간들로서는 신이 거처하는 신성의 세계로 갈 수 없는 단절이 있다. 그렇다면 이 단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수평적 사고가 아니라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사고만이 가능한 것이다. ​ 그런데 수직적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상승의 방법이다. 따라서 종교에는 인간이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는 종교와 절대자가 인간에게 다가와 역사하고 구속하는 종교가 있게 된다. 고행과 참선과 명상과 수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교이고 신이 하강하여 인간에게 섭리한다는 종교는 기독교가 그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인위적인 종교를 보자. 키엘케고르는 이러한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생활의 연장 위에 있는 실존으로 보며 자기 스스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닿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인위적인 종교라고 했다. 이것은 신적인 것들이 모든 인간에게 현존하며,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종교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실존은 윤리적 척도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에게 두고 있다. 윤리적인 실존이 보편성 가운데 자기 자신을 세우려 하는 반면 종교적 실존은 자신이 신의 요구에 합당한 실존이 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자기 자신을 멀리한 채 신이 보시기에 합당한 실존이 되고자 무한한 정열로 변혁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출처] 누구를 만나든 ------------티벳트 명상시|작성자 스타 ​ 이러한 종교적 실존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살아갈 뿐, 지상적인 쾌락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왜냐하면 유한성에 마음을 두게 되면 절대적인 신과의 관계는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유한성에 속하는 것을 얻으려 하자마자 무한성을 향한 추구는 정지되고, 유한성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 티벳 사원의 길가에서는 오늘도 맨땅을 수년간 엎드려 절하며 오르는 신심을 본다. 오체투지의 고행이다. 양 팔꿈치, 양 무릎을 땅에 대고 절하며 몇 번이고 수 천리 언덕길을 기어간다. 갠지스 강가에는 지금도 평생을 명상하는 수도자들이 있다. 더러는 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도 있다. 모두가 자신을 포기하고 신의 경지, 초월의 경지를 향한 고행의 행진이다. 그런데 키엘케고르는 인위적인 종교가 내면적 변혁 말고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이 절대적 목적을 위하여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실존을 그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위적인 상향적 종교는 절대적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은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전 실존을 걸고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정립된 정신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 이상 죄의 침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이미 들어와 있는 원죄에 대하여는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인간의 힘으로 신적 경지에 이르는 상향적 초월의 종교로는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절대 타자인 천상의 신, 절대자가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방식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말한다. 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종교의 경우 신의 영역 즉 신성(神聖)의 존재는 단지 인간이 상상하는 가공의 영역이 아니라 신성이 세속에 직접 현현됨으로 인간은 그 신성을 경험하게 된다. 엘리아데는 이 신성의 현현을 성현(hierophany)이라고 불렀다. 신성은 루돌프 오토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비와 공포와 매력이 신성에 접했을 때에 인간 쪽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렇듯 신성은 절대 타자로서 체험되는 종교적 실재다. ​ 성경의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였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성이 인자(人子)로 온 성현의 대표적 예인데 이를 기독교에서는 육화(incarnation)라고 한다. 이러한 성현은 물론 수평적 사고로는 인식할 수 없는 역설적 사건이다. 신이 인간이 되고 신성이 사물에 접신된다는 것은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성현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우리들 인간들의 삶 속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 사실 신이 하늘에서 하강한다는 신앙이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건은 우리의 오성, 우리의 과학,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계선 밖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로는 부조리한 것이며 그 무엇으로 증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역설을 시인하지 않는 한 진정한 구원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이란 유한자가 영원자를 통해서만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신에게로 다가간다거나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진정한 구원의 종교는 신이 하강한 종교만이 그 정당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과학적 논리,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이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를 믿는 데는 오직 이성과 감성의 인간적인 집착을 내어던지는 결단이 요구됨을 지적하였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결론은 감성적 실존이나 이성적 실존, 미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으로는 결코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하며, 종교적 실존으로 비약해야 하는데 종교적 실존이라 해도 인위적인 종교가 아니라 절대 타자인 신으로부터 내려받는 은총의 종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홍문표 시 창작 강의 노트 53-3 ​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3) ​ 홍문표 ​ 5. 구원의 문학과 영성의 문학 ​ 이처럼 인간적인 감성적 사고나 이성적 사고, 미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에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러기에 겸손히 신적인 세계, 초월적인 힘, 절대자의 능력과 자비를 통하여 보다 높고 넓은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수직적 사고 또는 그러한 신앙적 인식 태도를 우리는 영성(sprituality)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영성은 세속을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를 인정한다. 또한 인간이란 결코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영역 이상의 초감각적 초이성적 품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보다 깊은 가치들과 의미들을 찾아 명상하고 기도하며 소통한다. 바로 세속의 삶, 일상의 삶, 외적인 삶에서 내적인 삶, 내적인 생명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결코 특정한 인간에게만 부여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영성이 있다. 신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절박할 때는 누구나 신을 찾는다. 영성이 있다는 증거다. ​ 영성의 경지에서야 세속적인 자아는 더 큰 실재와 소통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더 커다란 자아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진정한 깨달음 또는 거듭남이라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세속의 진부한 집착에서 벗어나 분열된 너와 내가 하나 되고 자연과 우주와도 합일되며 마침내 신성의 영역(divine realm)과 합일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을 법열이니 충만함이니 엑스타시라고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진정한 자유요, 해방이요 구원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사물을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서 보게 되고, 예언과 계시의 신성한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데 문학이 이러한 경지에서 쓰여지게 될 때 영성의 문학이 된다. 따라서 영성의 문학은 궁극적인 실재, 즉 절대자가 있고, 초월이 있고, 속세의 집착을 벗어난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우주 자연과의 합일이 있고, 신성(神性)의 놀라운 예언이 있다. ​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사에서 오늘도 수없이 쏟아지는 문학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지금 어찌 살고 있으며 어떤 문학을 쓰고 있는가. 문학은 감성이고 예술이고 창조라 하여 이미지와 메타포와 리듬과, 구성과, 문체와, 형식의 미적인 실험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학은 이성과 양심과 자유라 하여 총체성과, 계급과, 빈부와 민주화와 반영과 비판과 투쟁과 혁명과 리얼리즘과 이데올로기의 깃발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이집트에서 사백 년이나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모세가 그의 민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네 아비에게 물으라”였다. 역사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말이다. 개화기 이후 신문학의 역사도 이제 백 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시인 작가들이 한국 문학이라는 영봉을 향하여 오르다 갔고, 지금도 수많은 문인들의 행렬이 문학의 등성을 타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이름 없이 갔고, 더러는 한동안 반짝이다가 역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의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빛나는 예언이 되고 감동이 되고 구원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몇몇 작품도 있다. 어떤 작품들인가, 이들은 놀랍게도 한결같이 영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일백 년 문학사를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감동을 주고, 영향을 주고 깨우침을 주고 있는 시들을 보자. 1920년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의 「산유화」를 들 수 있다. 이 시대 대부분 시인들이 낭만주의니 감상주의니 하면서 불안과 좌절의 정서를 어둠과, 동굴과 죽음으로 노래하던 병적인 분위기에서, 또는 암울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투쟁을 선언하던 리얼리즘과 계급주의의 치열한 분위기에서 한용운은 이들 양극화의 세속을 뛰어넘어 오히려 부재한 절대자 님을 향해 통곡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강한 영성을 보여 주고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비록 님과의 상실이 있지만 그래도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그 지극한 신앙에 민족적인 위로가 있고 구원이 있다. 김소월은 자연을 절대화하는 영성을 보여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여름 없이 꽃이 피네” ​ 1930년대 서정주의 그 많은 시중에서 그래도 생명력이 있는 시는 「국화 옆에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바로 수직적인 불교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서시」도 그렇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의 시는 하나님에 대한 부끄러움과 참회의 영성이 있어 지금까지 애송하게 된다. 이육사의 「광야」 한 구절이 생각난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는 유학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진 매우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암담한 현실을 초극하고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절대성을 긍정하는 영성의 시를 써서 계속 감동을 준다. 1940년대 조지훈의 「승무」도 그렇다. 그의 시가 단순히 춤사위나 보여주는 미적 표현이었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거기엔 현실을 초극하려는 불심의 지극한 영성이 있다. 1950년대 김춘수는 많은 미적 실험 시를 썼다. 무의미 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남은 시는 무의미 시가 아니라「꽃」이다. 존재성에 대한 깊은 성찰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김수영은 현실 비판의 많은 시를 썼다. 시대적 양심과 정의의 시들이다. 그러나 김수영을 기억하게 만든 시는 그러한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시가 아니라 「풀」이다. 민초를 절대화한 영성의 시만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 이는 세계적인 몇몇 소설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괴테는 젊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이미 약혼한 여인을 짝사랑하다 마침내 자살한다는 대중소설이다. 한 여인에 대한 집착, 이것을 사랑의 극치로 미화하는 미적 실존, 소위 탐미적 낭만주의는 결국 자기 파멸로 끝이 난다. 미적 실존의 한계다. 그런데 그의 「파우스트」는 세계적인 고전이 되고 있다. 어째서일까.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윤리적 실존의 대표적 인물이다. 노년에 이르러 허무함만 느끼고 있을 때 젊음과 여인의 유혹을 받는다. 미적 실존의 욕망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결국 그의 영혼을 구한 것은 윤리나 미가 아니라 천상의 음악이었다. 톨스토이에게도 「안나까레리나」가 있다. 부부생활에 실증을 느낀 안나가 다른 남자와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여의치 못하자 결국 자살한다는 대중소설이다. 미적 실존의 절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부활」은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다. 어째서일까.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이성과 양심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회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브스키의 「죄와 벌」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는 양심과 정의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윤리적 실존의 표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무익한 노파를 죽이고도 떳떳했다. 그러나 그의 참회는 신을 믿으면서도 몸을 팔아야 하는 소냐를 통해 이루어진다. 종교적 실존에 구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성의 작품이다. ​ 이처럼 소설에서도 인간적인 욕망과 이성, 미와 양심과 정의에 집착한 「젊은 벨텔의 슬픔」이나 「안나까레리나」나 「죄와 벌」의 라스코리니코프는 마침내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만일 거기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쾌락이나 정당성의 환상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신을 의지하고, 신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파우스트」나 「부활」이나 「죄와 벌」의 참회에 영원함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다. ​ 영성의 문학에는 절대적 가치가 있고, 초월이 있고, 신이 있고, 종교가 있고 영원한 구원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에서는 일상의 감성이나 이성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벗어나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세계에 대한 감동과 깨달음을 만나게 되고, 소통하게 되고, 그리하여 함께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렇다고 이들 영성의 작품들이 감성과 이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지금까지 감동과 깨달음과 예언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이들의 작품들은 모두가 문학성에 충실하면서도 신성이 있고, 초월자의 섭리가 있고, 자유가 있다. ​ 문학의 기본은 문학성이고, 시의 기본은 시성이다. 따라서 영성의 문학이라 하여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나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시의 경우 메타퍼와 리듬과 관념에 충실하면서 그 위에 영성이 있어야 한다. 소설도 그렇다. 리얼리즘이니 현실의 반영이니 하여 세상에 칼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소설 문학 형식에 더하여 영성이 있어야 한다. ​ 이는 오늘날 작품을 쓰는 모든 문인들이 경청해야 할 부분이다. 문학은 예술이라 하여 미학적 기교에만 집착하는 형식주의나, 문학은 내용이라 하여 윤리적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는 역사주의는 문학사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인기와 관심은 있었겠지만 영구히 행복한 문학은 아니었다. 모두가 유행가 가사처럼 시대마다 반짝이다 사라진 것들이다. 지금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무의미 시, 해체 시는 어디 있는가, 계급문학, 민족 문학, 참여문학, 민중문학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낭만주의 리얼리즘, 형식주의 역사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또 어디 있는가. 깃발을 흔들 때마다 그것만이 진리인 줄 알고 박수를 쳤던 우리들의 어리석음, 유한한 인간들의 무상한 시행착오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 그렇다면 이제 인생도 문학도 철이 들 때가 되었다. 깨달을 때가 되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그 험난한 세월 속에서 그래도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희망을 주고 보다 높고 깊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문학성에 충실하면서도 초월적인 세계와 소통하는 영성의 문학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신문학 일백 년 우리는 형식이냐 내용이냐, 순수냐 참여냐, 감성이냐 이성이냐, 낭만주의냐 사실주의냐, 보수냐 진보냐, 그 흑백의 양극화 논리에 모두들 매달려 상처뿐인 진창 놀이를 반복해 왔다. ​ 이제는 유한한 인간의 감성과 이성,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만으로는 결코 영원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인간 존재의 실상을 분명히 알고 그 양극화의 허망한 미로와 갈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유한한 인간의 실존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거대한 우주와 자연 속에서 초월자의 섭리와 사랑을 느끼며 지상의 절망과 불안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영성의 문학에서 우리들 문학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 영혼을 지닌 인간이 가야 할 길이며 문학자의 소명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시적인 구원이 아니라, 일시적인 놀라움이 아니라 영원한 놀라움과 영원한 구원이 약속되는 영성의 삶, 영성의 문학으로 비약하는 기적이 있어야 하겠다.
1058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5 댓글:  조회:747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1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1) ​ 홍문표 ​ 1. 시인의 꿈, 시의 꿈 ​ (1). 박완서의 「시인의 꿈」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헐리고 궁전 같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거지같은 생활에서 궁전 같은 도시문명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궁전 같은 아파트촌 구석에 아직도 어느 노인이 사는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그걸 보고 놀라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걸 철거해야 한다고 시청에 진정도 하고 반상회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다. 아니 곧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다시 그 판자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그림책이 있어 열어보니 거기엔 수많은 곤충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이로운 것만 쓸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시가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면서 다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어를 수집하러 다니는데 요즘 말은 모두 욕심을 위한 말뿐이어서 시어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를 쓰려면 욕심이 없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 여기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욕심으로 때 묻지 않은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과 욕망으로 때 묻지 않는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두 제정신이 나간 이 황무지 같은 삶이 아니라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동이 있는 삶,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는 삶, 그것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고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아닐까. ​ (2). 워즈워드의 「무지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말을 들으니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생각난다. ​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려서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하기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가 타고난 그대로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 시인 워즈워드의 꿈은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마음, 그 감정, 그 순수함이 어려서나 커서나 늙어서나 한결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울렁거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울렁거림이 없는 시인, 울렁거림이 없는 독자, 울렁거림이 없는 시, 울렁거림이 없는 세상, 거기엔 시인도 죽고, 시도 죽고, 세상도 죽은 것이라는 것이 바로 워즈워드의 시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싶은 좋은 시란 울렁거림의 시가 아닐까. 울렁거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다. 충격이다. 호기심이다. 깨달음이다. 깨어남이다. 기쁨이고 반가움이고 충만함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 2.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가. ​ (1). 좋은 시의 구별은 우선 주관적인 평가의 문제다. 좋은 시란 평가적 용어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망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를 누가 비판할 경우엔 누가 감히 내 시를 평가할 것인가 내 시는 내가 잘 안다 라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땀 흘려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물에 부딪친다. 그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고, 그 사물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평가는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려면 그 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만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저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다. 거기다가 과거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있고 미래에 대한 삶의 욕망도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떤 사물의 가치는 각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삶의 총체적인 인식이 된다. 이 때 나와 그 대상의 관계인식이 보다 긍정적인 때는 좋은 것으로 부정적일 때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 따라서 한편의 시를 보고 좋은 시라고 인식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경험과 지식과 소망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나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문학비평에서 개인의 주관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는 비평을 인상비평, 또는 주관비평이니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2). 그러나 문학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이나 드라마라고 하는 이 문학의 장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서 즐겨온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룰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제도와 관습을 갖고 있다. 제사에는 제례가 있고, 결혼에는 혼례가 있고, 공놀이에는 경기규칙이 있다. 특히 공놀이에는 축구도 있고 야구도 있는데 같은 공놀이이지만 저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를 상상력과 결합하여 즐기는 문학놀이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자 놀이이기는 하지만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룰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어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그 선수가 정해진 규칙, 즉 룰 안에서 공놀이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도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수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선수들보다 공놀이를 잘 하는 경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좋은 문학, 좋은 시를 말하는 것은 첫째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다른 시인 다른 작품보다 개성 있게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좋은 시이냐 나쁜 시이냐 하는 작품의 평가는 개인적 지식과 경험과 욕구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사적 제도와 관습이라는 객관적 룰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3). 문학 평가의 네 가지 관점 그런데 문학을 인간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축구나 야구의 제도는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문학에서 제도와 관습이란 민족마다 시대마다 보는 관점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옷 같은 사람은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한마디로 오류의 역사라고 지적한 바다 있다. 사실 문학이란 수치로 재기 어려운 사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분명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 시는 소설과 다르고, 소설은 드라마와 다르고,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같은 시라고 해도 작품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째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지를 구별해 보는 것이 비평이고 시학이고 시를 보다 잘 쓰려는 시인들의 관심이 된다. ​ 작품에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품 감상이라고 하고 그 느낌이 왜 다른지를 구별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잣대가 있어야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는 애당초 물건과 달리 여러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 문학을 보는 잣대가 다양한 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단지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도 있고, 그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도 있고, 또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을 보는 데는 적어도 작품자체의 입장,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작품의 재료에 관한 입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사를 보면 작품 작가 독자 재료라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방론·표현론·효용론·존재론이란 관점의 잣대가 되어 저마다 평가해 왔으며 좋은 작품에 대한 입장도 이 네가지 관점에 따라 다름을 볼 수가 있다 ​ 모방론이란 문학이 아무리 날고뛰는 창작이라 해도 결국은 자연이나 인생이나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단지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문학의 질서를 배우고 사회를 소재로 하여 문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회의 반영이니 인생의 거울이니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표현론의 입장은 문학이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감정이나 욕망이나 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을 촛불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를 실용성, 또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를 실용론 또는 효용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문학작품의 외적 조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작품 그 자체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반영이니 표현이니 실용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작품이라는 구조 안에 수용되는 것이기에 문학의 가치평가는 작품 그 자체에 한해야한다는 존재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 (4). 네 가지 문학관에서도 좋은 시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기 관점은 단지 이론이나 관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은 작품 그렇지 않은 작품의 구별이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방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문학은 현실을 잘 반영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이는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이런 시를 좋은 시로 추천한 경우가 있다. ​ 자식이 진정한 자식이 되는 길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지상의 모든 자식의 의무는 부모를 이기는 것 부모를 이겨라 낡은 세대를 이겨라 조금은 가슴 아프게 조금은 배반 스럽게 - 박노해 「부모를 이겨라」에서 ​ 이 시는 젊은이들이 부모와 과거를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라는 교훈적인 시다. 그러나 부모를 낡은 세대로 규정하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시를 상상과 창조의 미학으로 본다면 이 시는 행갈이만 있을 뿐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 있다고 모두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신경림의 「갈대」를 추천한 경우가 더 많다.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의 「갈대」 ​ 이 시에서 갈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갈대 같은 농민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울고 있는 갈대와 온몸이 흔들리는 갈대를 통하여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극적인 존재의 자각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시지만 앞의 박노해의 시와는 시적인 감동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같은 잣대의 시에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시의 경우도 그렇다. 다음 두 시를 보자.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의 「행복」 ​ 이 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로 추천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이기적인 세상, 이기적인 사랑으로 만연된 현실에 어르신 말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발」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이라는 데서 그 권위가 플러스되어 더욱 좋은 작품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같아서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는 아니다. 같은 사랑의 시 일지라도 다음의 시는 느낌이 다르다.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유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도 하늘에도 네가 있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도 하늘에도 내 안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유치환의 「행복」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계인식과는 많은 편차가 있다. 유치환의 화자와 연인 간에는 매일 편지를 보내는 관계이고, 연연한 진홍 빛 양귀비꽃의 관계이고 사랑을 주는 시혜(施惠)적인 관계다. 그러나 유시환의 화자와 연인간의 관계는 물에 하늘에 내 안에 가득찬 관계다. ​ 그들의 관계성을 각각 결론으로 말하는 대목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이고 훈계적인 고백이다. 그런데 유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그대와 내가 한 몸으로 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 크기에 늘 결핍을 느낀다는 패러독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시환의 작품은 내 안에 있는 이가 반드시 연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내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의 성찰을 가능하게도 한다. ​ 물론 유치환의 시 세계를 「행복」이란 작품 하나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비교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간의 차이는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행복」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도 편차가 크다.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 이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와 고독을 깃발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 애수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하여 독자들을 아득한 허공에서 울렁거리게 한다. 앞의 「행복」이란 작품에서 느끼는 떨림과는 전혀 강도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감동은 많은 편차를 보인다. ​ 이상에서 보듯이 같은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와 신경림의 「갈대」라는 작품을 비교할 때 신경림의 「갈대」가 보다 감동이 있고 충격이 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유치환의 「행복」과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비록 유치환이 문학사적으로 훨씬 비중 있는 시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의 시적 담론은 유시환의 것이 훨씬 간절하고 적극적이라는 데서 보다 좋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말하자면 같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느냐에 따라서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는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유치환의 경우 「행복」과 「깃발」은 확연히 느낌과 떨림에 차이가 있다. 물론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환의 「행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감동과 떨림이 시인의 꿈, 시의 꿈이라고 할 때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좀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그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우리는 시 몇 편 쓰고 시집 몇 권 냈다는 것으로 누가 내 작품을 평가할 것인가 라든지 작품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오만한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들 간에 이처럼 상대적 우위에 있게 되는 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비밀을 터득하여 보다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는 좋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시인이 되자는 것이다.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1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1) ​ 홍문표 ​ 1. 시인의 꿈, 시의 꿈 ​ (1). 박완서의 「시인의 꿈」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헐리고 궁전 같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거지같은 생활에서 궁전 같은 도시문명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궁전 같은 아파트촌 구석에 아직도 어느 노인이 사는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그걸 보고 놀라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걸 철거해야 한다고 시청에 진정도 하고 반상회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다. 아니 곧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다시 그 판자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그림책이 있어 열어보니 거기엔 수많은 곤충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이로운 것만 쓸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시가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면서 다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어를 수집하러 다니는데 요즘 말은 모두 욕심을 위한 말뿐이어서 시어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를 쓰려면 욕심이 없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 여기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욕심으로 때 묻지 않은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과 욕망으로 때 묻지 않는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두 제정신이 나간 이 황무지 같은 삶이 아니라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동이 있는 삶,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는 삶, 그것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고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아닐까. ​ (2). 워즈워드의 「무지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말을 들으니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생각난다. ​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려서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하기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가 타고난 그대로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 시인 워즈워드의 꿈은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마음, 그 감정, 그 순수함이 어려서나 커서나 늙어서나 한결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울렁거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울렁거림이 없는 시인, 울렁거림이 없는 독자, 울렁거림이 없는 시, 울렁거림이 없는 세상, 거기엔 시인도 죽고, 시도 죽고, 세상도 죽은 것이라는 것이 바로 워즈워드의 시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싶은 좋은 시란 울렁거림의 시가 아닐까. 울렁거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다. 충격이다. 호기심이다. 깨달음이다. 깨어남이다. 기쁨이고 반가움이고 충만함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 2.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가. ​ (1). 좋은 시의 구별은 우선 주관적인 평가의 문제다. 좋은 시란 평가적 용어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망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를 누가 비판할 경우엔 누가 감히 내 시를 평가할 것인가 내 시는 내가 잘 안다 라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땀 흘려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물에 부딪친다. 그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고, 그 사물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평가는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려면 그 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만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저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다. 거기다가 과거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있고 미래에 대한 삶의 욕망도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떤 사물의 가치는 각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삶의 총체적인 인식이 된다. 이 때 나와 그 대상의 관계인식이 보다 긍정적인 때는 좋은 것으로 부정적일 때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 따라서 한편의 시를 보고 좋은 시라고 인식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경험과 지식과 소망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나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문학비평에서 개인의 주관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는 비평을 인상비평, 또는 주관비평이니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2). 그러나 문학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이나 드라마라고 하는 이 문학의 장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서 즐겨온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룰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제도와 관습을 갖고 있다. 제사에는 제례가 있고, 결혼에는 혼례가 있고, 공놀이에는 경기규칙이 있다. 특히 공놀이에는 축구도 있고 야구도 있는데 같은 공놀이이지만 저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를 상상력과 결합하여 즐기는 문학놀이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자 놀이이기는 하지만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룰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어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그 선수가 정해진 규칙, 즉 룰 안에서 공놀이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도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수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선수들보다 공놀이를 잘 하는 경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좋은 문학, 좋은 시를 말하는 것은 첫째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다른 시인 다른 작품보다 개성 있게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좋은 시이냐 나쁜 시이냐 하는 작품의 평가는 개인적 지식과 경험과 욕구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사적 제도와 관습이라는 객관적 룰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3). 문학 평가의 네 가지 관점 그런데 문학을 인간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축구나 야구의 제도는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문학에서 제도와 관습이란 민족마다 시대마다 보는 관점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옷 같은 사람은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한마디로 오류의 역사라고 지적한 바다 있다. 사실 문학이란 수치로 재기 어려운 사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분명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 시는 소설과 다르고, 소설은 드라마와 다르고,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같은 시라고 해도 작품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째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지를 구별해 보는 것이 비평이고 시학이고 시를 보다 잘 쓰려는 시인들의 관심이 된다. ​ 작품에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품 감상이라고 하고 그 느낌이 왜 다른지를 구별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잣대가 있어야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는 애당초 물건과 달리 여러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 문학을 보는 잣대가 다양한 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단지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도 있고, 그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도 있고, 또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을 보는 데는 적어도 작품자체의 입장,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작품의 재료에 관한 입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사를 보면 작품 작가 독자 재료라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방론·표현론·효용론·존재론이란 관점의 잣대가 되어 저마다 평가해 왔으며 좋은 작품에 대한 입장도 이 네가지 관점에 따라 다름을 볼 수가 있다 ​ 모방론이란 문학이 아무리 날고뛰는 창작이라 해도 결국은 자연이나 인생이나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단지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문학의 질서를 배우고 사회를 소재로 하여 문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회의 반영이니 인생의 거울이니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표현론의 입장은 문학이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감정이나 욕망이나 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을 촛불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를 실용성, 또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를 실용론 또는 효용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문학작품의 외적 조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작품 그 자체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반영이니 표현이니 실용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작품이라는 구조 안에 수용되는 것이기에 문학의 가치평가는 작품 그 자체에 한해야한다는 존재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 (4). 네 가지 문학관에서도 좋은 시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기 관점은 단지 이론이나 관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은 작품 그렇지 않은 작품의 구별이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방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문학은 현실을 잘 반영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이는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이런 시를 좋은 시로 추천한 경우가 있다. ​ 자식이 진정한 자식이 되는 길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지상의 모든 자식의 의무는 부모를 이기는 것 부모를 이겨라 낡은 세대를 이겨라 조금은 가슴 아프게 조금은 배반 스럽게 - 박노해 「부모를 이겨라」에서 ​ 이 시는 젊은이들이 부모와 과거를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라는 교훈적인 시다. 그러나 부모를 낡은 세대로 규정하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시를 상상과 창조의 미학으로 본다면 이 시는 행갈이만 있을 뿐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 있다고 모두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신경림의 「갈대」를 추천한 경우가 더 많다.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의 「갈대」 ​ 이 시에서 갈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갈대 같은 농민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울고 있는 갈대와 온몸이 흔들리는 갈대를 통하여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극적인 존재의 자각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시지만 앞의 박노해의 시와는 시적인 감동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같은 잣대의 시에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시의 경우도 그렇다. 다음 두 시를 보자.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의 「행복」 ​ 이 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로 추천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이기적인 세상, 이기적인 사랑으로 만연된 현실에 어르신 말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발」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이라는 데서 그 권위가 플러스되어 더욱 좋은 작품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같아서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는 아니다. 같은 사랑의 시 일지라도 다음의 시는 느낌이 다르다.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유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도 하늘에도 네가 있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도 하늘에도 내 안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유치환의 「행복」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계인식과는 많은 편차가 있다. 유치환의 화자와 연인 간에는 매일 편지를 보내는 관계이고, 연연한 진홍 빛 양귀비꽃의 관계이고 사랑을 주는 시혜(施惠)적인 관계다. 그러나 유시환의 화자와 연인간의 관계는 물에 하늘에 내 안에 가득찬 관계다. ​ 그들의 관계성을 각각 결론으로 말하는 대목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이고 훈계적인 고백이다. 그런데 유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그대와 내가 한 몸으로 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 크기에 늘 결핍을 느낀다는 패러독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시환의 작품은 내 안에 있는 이가 반드시 연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내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의 성찰을 가능하게도 한다. ​ 물론 유치환의 시 세계를 「행복」이란 작품 하나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비교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간의 차이는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행복」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도 편차가 크다.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 이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와 고독을 깃발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 애수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하여 독자들을 아득한 허공에서 울렁거리게 한다. 앞의 「행복」이란 작품에서 느끼는 떨림과는 전혀 강도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감동은 많은 편차를 보인다. ​ 이상에서 보듯이 같은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와 신경림의 「갈대」라는 작품을 비교할 때 신경림의 「갈대」가 보다 감동이 있고 충격이 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유치환의 「행복」과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비록 유치환이 문학사적으로 훨씬 비중 있는 시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의 시적 담론은 유시환의 것이 훨씬 간절하고 적극적이라는 데서 보다 좋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말하자면 같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느냐에 따라서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는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유치환의 경우 「행복」과 「깃발」은 확연히 느낌과 떨림에 차이가 있다. 물론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환의 「행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감동과 떨림이 시인의 꿈, 시의 꿈이라고 할 때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좀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그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우리는 시 몇 편 쓰고 시집 몇 권 냈다는 것으로 누가 내 작품을 평가할 것인가 라든지 작품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오만한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들 간에 이처럼 상대적 우위에 있게 되는 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비밀을 터득하여 보다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는 좋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시인이 되자는 것이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2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2) ​ 홍문표 ​ 3. 좋은 시는 시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하다 ​ (1). 제도와 관습은 문화적 룰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인 좋은 작품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앞서 같은 공놀이라도 축구와 배구는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축구와 배구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우선 공에 차이가 있다. 경기장의 크기도 다르다. 선수 숫자도 다르다. 경기 방법도 다르다. 다시 말하면 축구와 배구는 경기규칙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와 소설은 엄연히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 어떤 차이가 시와 소설을 구별하게 하는가. 그것은 축구와 배구가 경기규칙이 다른 것처럼 시와 소설도 언어의 표현규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 물론 시와 소설의 규칙은 어느 날 몇 사람이 모여서 정한 운동규칙과는 다르다. 그러나 시와 소설과 드라마도 인류의 오랜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문화로 정착된 제도와 관습이 있고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 이는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알고 이를 창작에 잘 적용하는 것이다. ​ 축구는 축구규칙을 잘 아는 선수들이 직접 경기장에서 그 규칙의 범위 안에서 상대방과 대결하는 놀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시적 규칙, 시적 장르의 제도와 관습을 충분히 익혀서 작품을 창작하고 이를 독자들과 시적인 소통을 하는 언어놀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가장 기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적인 제도와 관습, 말하자면 시가 소설과 다른 규칙을 올바르게 숙지하는 일이다. 운동경기에서 규칙을 어긴 반칙선수는 관중의 비난을 받고 심판의 제제를 받는다. 문학에도 완장을 한 심판은 없지만 독자라는 심판관이 있고 비평가란 심판관이 있고, 문학사라는 심판관이 있다. 따라서 시인은 또는 문인은 자기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룰을 확실히 습득하는 일에 충실해야 하고 이 기본적인 룰을 지키고서야 좋은 시를 논의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를 모르고 멋대로 시랍시고 써대며 시인행세를 하려는 오늘의 많은 시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들을 시의 기초가 덜된 시인, 시가 뭔지를 모르는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 (2). 시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와 관습은 무엇인가. ​ 그렇다면 시가 소설이나 드라마와 다른 가장 근본적인 제도와 관습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시를 시답게 하는 기본 규칙은 무엇인가. 이 말은 이 요소들이 빠지면 시의 기본적인 속성이 상실된다는 말이기도 한데 시를 시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필자는 리듬(rhythm) 메타포(metaphor) 코노테이션(connotation)이라고 말하겠다. ​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모든 언어의 의미는 기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밤과 밥의 의미가 왜 다른지를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밤’과 ‘밥’은 ‘바’에 ‘ㅂ’받침인가 ‘ㅁ’받침인가 하는 음운의 차이에서 올 뿐이다. 따라서 시가 소설과 다른 점은 시는 소설보다 리듬이 보다 강조되고 보다 메타포가 강조되고 보다 코노테이션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소설과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경우 이 세 요소 중 어느 한 요소가 미흡하면 좋은 시의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시를 위해서는 이 세 요소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겠다. ​ (3). 시는 첫째로 리듬이다 ​ ⓵. 리듬은 음성만의 율동이 아니다. 시의 기본 룰은 첫째로 리듬이다. 리듬(rhythm)의 의미는 율동(律動)이다. 이 말은 규칙적인 동작이란 뜻이다. 따라서 리듬은 소리의 일정한 규칙만이 아니다. 우리는 주로 리듬을 음악의 요소로만 배워왔고 고대시가의 경우 운문(verse, 韻文), 율격(metre, 律格), 음수율, 음보율 등으로 작시법을 말하고 있기에 리듬이라면 음악의 요소나 소리의 일정한 규칙으로 알고 있고, 시에서 리듬이라면 당연히 음성적인 규칙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러한 선입관을 버려야 시의 진실을 체득할 수 있다. ​ ⓶. 리듬은 지상적인 인식의 단위다. 규칙적인 동작의 인식, 모든 것을 나누어 보고 같은 것끼리 모아보고 마디를 나누어 보는 것은 인간의 감성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사물의 변별성과 의미의 차이와 가치를 구별한다. 천상엔 영원한 시간 · 영원한 공간 · 영원한 감성만 있기에 길고 짧음, 시작과 끝의 변별성이 없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존재는 처음과 끝이 있고, 전체와 부분이 있고, 모든 전체는 부분과 마디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 ⓷. 모든 생명체는 리듬이 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호흡과 맥박의 리듬이 있고, 탄생, 성장, 죽음이란 성장의 리듬이 있다. 인간의 경우 유아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한다. 시간의 경우도 과거 · 현재 · 미래, 역사의 경우는 고대, 근대, 현대라는 마디의 리듬이 있다. 따라서 리듬이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변화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에도 리듬이 있다. 해달 별들은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우주 질서를 유지한다. 따라서 문학, 특히 시가 생명력을 갖는 것도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 ⓸. 뿐만 아니라 리듬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문학의 생명은 감동이다 그런데 감동이란 변화와 반복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자극의 길이, 강도, 성질에 따라 반응도 다르다. 따라서 리듬은 슬픔 · 기쁨 · 놀라움 등 인간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그 조절의 대표적 양식이 음악이고 시다. 음악은 소리의 리듬으로 감정을 조절한다. 시도 다양한 리듬을 통해 감정을 조절한다. 그러나 감정의 조절은 소리뿐만 아니라 색깔, 냄새, 일정한 동작과 의미 있는 언어의 반복으로도 가능하다. ​ ⓹. 시의 리듬 만들기 ​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 ​ 난초도 거문고도 백자항아리도 버리고 장서도 가족들도 꽃밭도 버리고 ​ 바다만 앞에 있는 바다만 뒤에 있는 바다만 옆에 있는 바다 망망한 가운데 심해선 저쪽 일렁이는 파도 위를 알몸 누워 간다. ​ 가슴에는 다만 하늘 가슴에는 다만 태양 ​ 갖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알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보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 처음 혼자 홀로인 혼자만의 나 순간이 그 영원 영원이 그 순간으로 출렁거리는 ​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 동해 파도 한가운데 바다로 간다. - 박두진「바다로 간다」 ​ ​ 행과 연의 반복 – 이시를 보면 전체를 6연 19행으로 나누어 전체적인 리듬을 조성하고 있다. 문장의 반복 – 인용한 시를 보면 우선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라는 문장이 처음과 끝에 반복된다. 구절의 반복 – 동일한 어구나 어절을 반복하는 경우다. 앞에 인용한 「바다로 간다」 에서 보면 이러한 방식이 두드러진다. 어휘의 반복- 인용한 시에서 ‘바다’라는 명사가 7회나 반복된다. 뿐만아니라 ‘간다’, ‘있는’, ‘버리고’, ‘싶던’, ‘아무것도’ 등의 낱말들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조사의 반복-조사의 경우 ‘도’ ‘는’ ‘만’ ‘에’ ‘로’ 등이 많고 어미의 경우 ‘ㄴ다’ ‘고’ 등이 있어 음악적 흥취를 고조시키고 있다. ​ ⓺. 의미의 반복 리듬이란 소리의 일정한 반복만이 아니다. 행동의 일정한 반복, 사고의 일정한 반복, 빛의 일정한 반복도 리듬이다. 모든 움직임의 규칙적인 반복이란 뜻이다. 따라서 현대시의 리듬, 현대시의 내재율을 이해하는 길은 반드시 시에 나타난 음성적 규칙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반복, 의미의 반복, 정서의 반복도 모두 시의 리듬이다. ​ 님은 갔습니다(a1)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a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지고 갔습니다.(a3)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b1)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습니다.(b2)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 다.(b3) - 한용운「님의 침묵」에서 ​ 위의 (a1) (a2) (a3)는 님과 이별 ‘갔습니다’의 의미상 반복 리듬이다. (b1)(b2)(b3)는 님의 부재에 대한 심정의 반복리듬이다. ​ ⓻. 이미지의 반복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a1) 비밀한 울음.(a2) ​ 한 번 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 흘림(a3) ​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의 위에 떨궈진 ​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a4) - 박두진「꽃」에서 ​ ​ 이미지(a1) (a2) (a3) (a4)는 모든 이미지의 반복리듬이다. ​ ​ 시는 이처럼 크게는 행갈이나 연 갈이를 통해서 구절이나 어휘나 심지어는 의미나 이미지들까지도 반복적인 구성을 통해서 강렬하고 적극적인 감정을 들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시인과 독자 간에 떨림을 공유한다. 물론 산문도 리듬이 있다. 그러나 산문의 리듬은 완만하여 그것이 감각적으로 직접 작용하지 못한다. 최근 시의 산문화 현상을 거론하는데 이는 산문과 다른 시의 제도와 관습이라는 원칙에서는 벗어나는 일이다. 시조 5백년사에 정형적인 평시조와 이를 이탈하는 엇시조, 사설시조, 즉 시조의 산문화현상이 있었는데 좋은 시로 성공하지 못했다. 감동적인 떨림이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라면 시의 리듬이야말로 시의 존재성, 시의 변별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핵심적인 규칙이다. ​ (4). 시는 둘째로 메타포다. ​ ⓵. 메타포의 바른 이해 시가 산문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변별성을 첫째는 리듬이라고 했다. 그다음 시를 시답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메타포다. 메타포(metaphor)란 meta 초월, 벗어남(over, beyond)의 뜻과, phor 이동한다(carring)뜻의 합성어다. 기존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동시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메타포를 수사법의 하나로 해석하면서 오해가 시작 된다. 수사법(修辭法, rhetoric)이란 말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다. 원래 그리스의 수사학은 말을 꾸미고 변론하는 정치꾼이나 철인들의 화법이었다. 그래서 시에서 메타포라면 사물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란 오해를 하게 된다. 더욱 웃기는 일은 비유어를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이라 하여 메타포를 시의 보조적 기능으로 오해하게 하는데 이것도 메타포를 왜곡하는 것이다. ​ ② 감추인 것의 드러냄 메타포의 본질은 첫째로 은유(隱 – 숨을 은 喩 – 깨달을 유)가 말하듯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기존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멸의 고전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마 13:34―35) ​ 비유의 본질은 감추인 것들을 드러냄에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 이다. 직유도 비유다. 그러나 직유는 수사적 요소가 있다. “꽃처럼 예쁜 그녀”, 여기서 꽃처럼은 다분히 수사적이다. 따라서 비유의 참뜻은 꾸밈이 아니라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表現, express)이고, 볼 수 없는 신이 인간에게 어떤 게시물을 통하여 보여주는 현현(顯現, epiphany, theophany)의 놀라운 신통력이다.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박두진의 「꽃」에서 ​ 박두진은 일상적인 꽃에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흘림, 엇갈림의 핏방울이란 이미지를 발견하여 꽃의 감추인 내면을 보여준다. ​ ③ 변화와 확장과 창조 메타포의 본질은 둘째로 트롭(trope)에 있다. 그 어원은 전환(turn)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유를 전이(transform)라고 한 것과 같다. 시를 포에트리(poetry) 라고 하는데 이는 만들다. 창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메타포는 사물, 의미 등 모든 기존 개념을 전환하고 바꾸는 것, 재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창조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전봉건의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 ​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엄원태,「물방울 무덤들」전문 ​ ④ 상호충돌과 낯설음 은유의 보다 근본적인 속성은 본래의 사물과 변경된 메타포의 사물이 대치나 전이를 통하여 두 사물 간에 낯설은 충돌, 각각의 존재들이 부딪쳐 낯설게 작용하는 구조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 곧 긴장의 원리로 보고 시의 경우도 이러한 투쟁의 원리가 은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투쟁이나 긴장은 두 사물의 유사성이나 친밀성보다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비 친숙의 관계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메타포도 리듬처럼 감동과 떨림의 메카니즘이다. ​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 김종삼 「나의 본적」 ​ ⑤ 육화와 화해와 구원의 시학 메타포의 최대 사건은 하나님이 인자로, 불가시의 존재가 가시적 존재로 육화(Incarnation)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회복 된 화해가 이루어 졌고 이로써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를 데오 메타포(Theo Metaphor) 신적 메타포, 우주적 메타포라고 말하고 싶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 앞서 시에서 꽃을 피 흘림, 본적을 마른 잎으로 메타포 했을 때 이를 드러냄 전환 충돌로 설명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분열된, 이질적인, 두 사물이 동격이 되고 하나가 되어 화해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구원이다, 그런데 육화라는 신의 데오 메타포는 단지 문자로만 들어내고 전환하고 충돌하는 언어적, 시적 립 서비스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 실물로 나타나 메타포를 현실화 했다는 데서 시적 구원과 종교적 구원의 편차가 있다. 그렇지만 메타포가 구원을 모색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에서 메타포의 참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 (5). 시는 셋째로 코노테이션이다 시를 시답게 하는 세 번째 룰은 코노테이이션(connotation)이다. 코노테이션이란 내포 또는 함축이라는 뜻이다. 언어는 사상과 감정의 전달수단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언어라도 과학적 용법으로 쓰여 지는 기능과 문학 특히 시로 쓰여 지는 언어의 기능과 의미가 다르게 작용한다.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두 기능을 외연(denotation)과 내포(connotation)로 설명한다, 외연은 언어가 지닌 사전적인 의미를 말하고, 내포는 그 언어가 풍기는 분위기, 다양성, 암시력, 연상과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뜻한다. 물의 외연적 의미는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수분이지만 시에서 물의 기능은 시의 문맥에 따라 생명, 탄생, 정화, 죽음, 이별, 마음 등 무수히 다양한 의미로 변신한다. 그러기에 리처즈는 시적 언어의 특성은 정서적이요, 내포적으로 사용된 모든 언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반대로 기술과 해명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의 특성은 지시적이요 객관적이요 말과 사물이 1:1의 관계다. ​ 이와 같이 시적인 언어는 내포적이어야 하고 함축적이어야 한다. 소설의 언어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기에 객관적인 언어의 사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어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외연적 의미 외에 묵시와 연상과 상징과 여운과 분위기를 수반하는 내포적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촌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에서 ​ 이 시에서도 시어가 갖는 다의적 내포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눈’은 외연적으로는 겨울의 눈이지만 내포적으로는 추위 · 괴로운 세상 · 시인 자신의 고독감일 수 있다. 매화향기 · 가난한 노래 · 백마 · 초인 · 광야 등도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보다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인’이란 말은 사전을 통해 보면 인간적인 것을 극복한 천재나 영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초인은 애국자 · 민족 · 시인 · 해방 · 미래 · 영광 · 권위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이처럼 지금까지 인류가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소설이나 희곡과 달리 기본적으로 시는 리듬도 있어야 하고 메타포가 있어야 하고 외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포적이고 함축적 의미인 코노테이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의 근본적인 룰이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이러한 기본 조건들을 충실히 갖추고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불문율이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3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3) ​ 홍문표 ​ 4.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시학 ​ (1). 스타플레이어와 보다 좋은 시 ​ 모든 운동경기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특히 축구경기를 보면서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것은 우선 선수가 경기규칙을 잘 지키는 경우라고 했다. 그래서 경기규칙에 따른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경기하는 태도를 페어플레이(fair play)라고 한다. 따라서 페어플레이어는 경기에 대한 기본 규칙을 철저히 인지하고 이를 경기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이다.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시의 경우 시는 시적인 리듬과 메타포와 코노테이션을 충분히 알고 이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면 일단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으로 간주할만하다. 그런데 축구 경기를 보게 되면 규칙을 잘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싸울 뿐만 아니라 규칙을 잘 지키면서도 또한 다른 선수보다 재빠르고 날렵하게 정말 신기에 가까울 만큼 볼을 잘 다루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꼴 문을 가르는 돋보이는 선수를 본다. 이 때 우리는 열광적인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그를 스타플레이어(star player)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시단에서도 기본적인 시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시인보다 월등하게 감동이 오고 충격이 오는 작품을 쓰는 시인이 있다면 이는 분명 스타 시인이 아닐 수 없다. ​ 작품에 분명 리듬도 있고, 메타포도 있고, 의미의 코노테이션도 있는데 어째서 작품마다 감동이 다르고 떨림이 다른 것인지, 따라서 시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시는 모두 좋은 시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처럼 보다 감동적인 시는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똑같은 재료로 음식을 했는데도 음식 맛이 다르고 그 중에서도 더 맛이 있는 음식이 있는데 그 비밀은 또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좋은 시 위에 더 좋은 시의 해법이 있는 것이다. ​ 언어학자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랑그라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빠롤이라는 언어다. 랑그(langue)는 언어활동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룰의 언어이다. 반면 빠롤(parole)은 그 규칙을 바탕으로 하되 현장에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능력으로 개성 있게 드러내는 언어다.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바로 보편적인 룰, 시의 경우 제도와 관습이라는 장르적 룰이다. 이처럼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대화현장에서는 같은 규칙의 말이라도 억양 태도 단어 구사 등이 달라 반응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공통의 룰인 랑그에도 충실하지만 실제 사람들과 소통하는 현장에서 그때그때 개성을 발휘하여 설득력 있게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 문학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공통적인 장르적 룰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 창작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같은 소재 같은 주제라도 보다 뛰어나게 표현해 낸다면 이는 좋은 작품에서 보다 좋은 작품으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이처럼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되는 비밀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다 놀라운 상상력이나 보다 뛰어난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포괄적으로 말하여 필자는 보다 창조적인 시 즉 창조 시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이 창조 시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 장르의 기본적인 제도와 관습이 리듬 · 메타포 · 코노테이션인 만큼 보다 좋은 시의 조건은 보다 창조적인 리듬 ·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 보다 창조적인 코노테이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2).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리듬 ​ 앞서 시인의 꿈을 울렁거림이라 했다. 울렁거림은 놀라울 때, 충격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시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자 하는데 있다. 그런데 일상을 벗어나려면 변화를 위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 잔잔한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돌팔매질이 있어야 파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파동은 지속적일 때 보다 효과가 있다. 시에 있어서 리듬이란 바로 잔잔한 호수에 돌팔매질이고 그 돌팔매질의 강도와 지속성에 따라 물결도 다르게 반응한다. 좋은 시와 보다 좋은 시의 논의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 과거에는 시의 리듬을 엄격하게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충실 한 시를 좋은 시라 했다. 그 당시로서는 시의 리듬규칙을 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다보니 익숙해져서 충격도 약해지고 떨림도 약해졌다. 첫사랑은 정말 떨림이 대단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황홀했던 떨림이 무뎌진다. 우리에겐 계속 떨림이 필요하다. 떨림이야말로 삶의 변화와 개혁과 활력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적인 리듬 규칙을 깨고 새로운 리듬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현대 자유시의 리듬 정신이다. 그렇다면 자유시의 리듬은 언제나 고정적인 것을 거부한다. 고정적이고 기계적인 것은 고인 물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창조적 리듬이 시의 기본조건으로 제기되는 이유가 있다. 시의 존재이유가 독자에게 떨림과 충격을 주어 변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떨림이 더욱 신선하고 강도가 있고,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것이 되도록 계속 창조정신을 발휘해야한다. ​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 ​ 그대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곤하던 목너머 마슬로 가는 나지막한 이 오솔길 ​ 인기척 혼자내고 가는 항가새꽃 핀, 이 길 서벌 「뒤 늦게 캔 느낌」 ​ 수백 년 간 헌법처럼 지켜온 3장 6구의 시조리듬이 서벌에 이르면서 고정적인 리듬을 탈피하고 보다 창조적인 시조의 리듬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랑그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개성 있는 빠롤의 창조적 모험을 통해 충격과 떨림을 신선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철시조와 같은 3행시를 아직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떨림의 강도나 신선도에 분명 차이를 느끼게 한다.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꽃의 시듬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새로이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 ​ 김동명의 「내마음은」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의 다양한 반복리듬을 시도하고 있어 좋은 시이기도 하지만 너무 기계적이고 규칙적이어서 노랫말이 되었다. 각 연이 2행으로 고정 되어 있고 시어 구성도 일정한 틀에 맞춘 느낌이어서 개성 있는 리듬의 창조성이 약하다. 반면 김현승의 「눈물」은 행과 연과 시어들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떨림이 신선하다. 개성적인 리듬의 창조가 보다 떨림이 좋은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3).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 시어에 메타포는 시가 산문과 달리 보이지 않는 세계의 드려냄이고 기존의 존재 의미를 변형하거나 새롭게 창조한다는 데서 변별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시를 시이게 하는 열쇠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시의 문학성 · 시의 예술성 · 보다 좋은 시의 논거는 바로 얼마나 시가 창조적으로 메타포를 구사했느냐에 있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 시조 ​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박두진「하늘」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 먼 볕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꽃」 ​ 같은 시조라도 앞의 정철의 시조와 황진이의 시조는 리듬은 동일한데 너무나 시적 떨림이 다르다. 무엇 때문일까, 창조적 메타포의 문제다. 황진이의 시조에는 밤의 허리, 춘풍 이불, 굽이굽이 펴리라는 뛰어난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조 중 황진이의 시조가 가장 애송되는 것은 바로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 같은 박두신의 시이지만 「하늘」과 「꽃」은 충격과 떨림이 다르다. 「하늘」도 “하늘이 내게로 온다” “나는 하늘을 마신다”에서 하늘에 대한 시인의 메타포가 좋은 시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 하늘은 호수처럼 푸른 하늘이고 향기로운 하늘이어서 하늘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드러내거나 새롭게 변형하여 독자에게 다가오는 은유적 충격이나 떨림이 약하다. 다만 하늘과 동화되는 자연 친화의 일반적 주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꽃」은 꽃의 상투적인 인식을 벗어나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흘림”, “엇갈림의 핏방울”, 등의 다양한 메타포를 통하여 꽃의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롭게 드려내고 새롭게 변형하여 충격과 떨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가 구사되어 보다 좋은 시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략- ​ 5. 그렇다면 결국 좋은 시란 무엇인가. 좋은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동과 떨림으로 다가오는 시다. 그래서 시인은 저마다 떨림의 시를 꿈꾼다. 물론 저마다 최선을 다해서 쓴 창작인데 좋은 시니 떨림이니 하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가 하는 비판도 있고 보는 관점에서 다르다는 이론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떨림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그 떨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 그렇다면 그 떨림의 차이의 비밀, 즉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축구나 배구에도 룰이 있듯이 시와 소설도 각기 다른 제도와 관습이 있는 만큼 그 제도와 관습을 기본적으로 익히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시를 시답게 하는 핵심적인 제도와 관습, 그 기본적인 룰은 리듬, 메타포, 코노테이션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인은 이 기본적인 룰을 충분히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기본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보다 좋은 시를 쓰려면 보다 창조적인 리듬,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보다 창조적 코노테이션이 요구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기본 룰에 더하여 끊임없이 개성적인 창조적 리듬, 창조적 메타포, 창조적 코노테이션을 위하여 노력하는 창조시학의 스타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논의해본 창조시학의 골자다. 그렇다면 아직 스타 시인도 아니고 보다 좋은 시로 각광받지 못하는 오늘의 대다수 시인들은 시인도 아니고 시도 아니란 말인가. 이 점에 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다시 정리한다. ​ 첫째, 내가, 좋으면 좋은 시다. 요즘 같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 따라서 남들이 뭐라든 내가 좋고 내가 만족스러우면 좋은 시다. 그러한 작업 속에서도 자신에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 둘째, 그러나 남들도 좋아하면 더 좋은 시다. 시는 우선 내가 좋아야 쓴다. 그런데 남들까지 좋아한다면 나도 시적으로 구원받고 남도 구원할 수 있었으니 마땅히 더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셋째, 나도 좋고 남들도 좋을 뿐만 아니라 읽을수록 새롭고, 읽을수록 떨림이 있고 읽을수록 깨달음이 있는 시는 더더욱 좋은 시다. 시는 일시적인 유행가가 아니다. 일시적으로 유명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더더욱 좋은 시는 언제나 살아있고 떨림이 있어야한다. ​ 넷째,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좋아 하는 시는 명시(名詩)다. 시간과 공간과 인종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 누구나 좋아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명시다. 다섯째, 하나님까지 좋아하면 성시(聖詩,Theo Poetry)다. 인간들끼리만 좋아하는 시가 아니라 신들도 좋아할 수 있는 영적인 시, 천상의 시, 신령한 영역까지 떨림일 수 있는 시야 말로 인간적인 정서적 구원을 넘어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신령한 시가 될 것이다.  
1057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4 댓글:  조회:754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1-1 일상의 시학과 메타포의 시학(1) ​ 홍문표 ​ 1. 들어가면서 (1) 몇 개의 이야기 ​ 개그;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 지식 중심 서열중심 개미와 베짱이, - 실용중심주의 풀라톤의 시인 추방설 - 내용중심주의 크라인 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 웰튼고교 키팅선생 토드 연극희망 부모 의사희망 자살 키팅 퇴출 학생들 오 캡틴 환송 –지식 실용중심 비판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인간 인공부화장 생산 매일 해피드럭, 존 부모의 자궁으로 탄생 반문명인 보호 구역 동물원 원숭이 취급, 죽으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다 술이다 시다 - 기술 진보 과학 중심 비판 별주부전, 용왕중병 토끼 간, 별주부 토생원 유혹 간이냐 용궁이냐- 물신주의 비판 ​ (2) 세상과 시인 세상은 객관적인 것, 합리적인 것, 물질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전통적인 것, 상식적인 것, 바로 일상적인 것들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 이를 달리는 세속적이니 통속적이니 현실적이니 함, 이러한 세상에서 시인의 존재감, 시의 본질 시의 목적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라신느의 “숨은신”, 신이 숨어 있는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모순된 현실에 타협하는 길, 현실과 대결하는 길, 현실을 도피하는 길, 현실을 초극하는 길, 시인의 길 – 현실을 뛰 넘는 것, 새 하늘 새 땅을 선취하는 것, 바로 현실을 초극하는 길,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시학의 원리가 웰렉과 워렌이 말한 “시는 리듬과 메타포다” metaphore(meta=over, phore=carryng) 넘다와 옮기다, 뛰어넘다, 초극하다, 따라서 시에서 모든 뛰어넘기의 논리가 바로 메타포의 시학이다. ​ 2. 뛰어넘기(메타포) 시학 정리 (1) 객관에서 주관으로 ㉠ 국화 : 명. 식물. 엉거시과에 속하는 식물. 줄기는 나무질화 하며 잎은 대개가 깊이 찢어지고 품종이 다양함. 대국. 중국. 소국으로 나눠지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하국. 추국. 동국으로 나누기도 함. - 현문사 「한국어 대사전」에서 ​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국화 옆에서」에서 ​ ㉠의 문장 :국화에 대한 객관적, 사전적, 학술적 서술, 국화의 생태, 종류, 특징들을 객관적으로 인식, 그러나 생명력 감동이 없는 문장 ㉡의 문장 : 국화에 대한 시인 자신의 주관적 견해, 비과학적 서술, 국화꽃과 소쩍새, 국화와 누님, 과학적으로 전혀 무관, 그런데 생명력, 감동, 풍요로움이 있음 객관적 세계 인식에서는 인간과 물질, 정서와 사상, 사물과 사물 모두가 개별화 고립화 되어 있다. 여기에 객관적 세계의 소외가 있고, 고독이란 비극이 있다. 따라서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뛰어 넘기는 바로 소외와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식이다. ​ (2) 이성에서 감성으로 ​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성(logos)과 감성(pathos)을 공유한 존재다. 그런데도 문명사는 이성, 지혜, 지식, 합리성, 과학성의 우월성만을 강조, 이성만능주의, “아는 것이 힘이다” 감성적 기능을 경시 최근의 뇌과학- 좌뇌-이성적 기능, 우뇌-감성적 기능. 두뇌의 좌측을 상한 사람은 이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우측을 상한 사람은 감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좌뇌를 상하면 수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뇌를 상하면 눈물이나 웃음을 모르는 목석같은 인간이 된다. ​ 최근의 천재교육- 우뇌를 키워라, 지능지수(IQ)보다 감성지수(EQ)를 높이는 것 신은 우리에게 좌뇌와 우뇌를 균형있게 개발하여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삶을 향유하도록 축복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좌뇌만 개발하여 이성적 사고, 이성의 문화에만 치중한 정신의 반신불수, 불구자의 삶을 살게 된다. 하버마스의 도구적 이성과 이성의 타락 - 지식, 기술, 이권만을 중시하는 이성중심주의가 인간의 물질적, 기술적, 지적, 권력 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적 이성으로만 수행되어질 때, 세상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으로 타락됨. 여기에 현대인의 비극이 있음. 오늘의 진짜 대도는 지식 기술이 우세한 고학력 계층의 정치 경제범, 여기에 이성을 뛰어넘어 감성의 메타포를 모색해야하는 당위가 있음 ​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얼굴이 보인다. 내게로 불 밝혀 가야 하는 땅이 보인다. 세상을 다 받아들고도 비어 있는 손 잠들지 못하는 나라 산맥이 일어서고 골짜기가 깊다. 강물이 꿈을 꾼다. 바다가 깨어 있다. 미래의 내 음성이 들리는 곳 손바닥 깊이 들어가면 고요하다. 이 고요한 길속에 길이 엇갈려져 끝이 없다. 혼돈과 창조의 거센 바람소리 우주의 숨소리 밤하늘 별의 운행이 화안히 비친다. - 이성선「손의 명상」에서 ​ (3) 추상적에서 구체적으로 감정은 섬세하고 예민한 것이어서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감정은 가장 주관적이며 개별적인 것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실 주관적이란 말은 사물을 공통된 것으로 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특성을 구별하여 보는 것이며 이는 개별적인 존재성을 살리는 시적 리얼리티이기도 하다.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라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 김수영 「사랑」에서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 김소월 「금잔디」 ​ (4) 과학적 진실에서 시적 진실로 ​ 시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이라면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 과학적 진리에 대한 우상- 과학만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에 이성중심의 인간들은 과학에만 진리가 있다는 우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과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진리와 패러다임- 최근에는 같은 과학이라도 관점이나 구성방식, 해석과정에 따라 그 진실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쿤은 어떤 사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전체적 관점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하였다. 가장 분명한 예로 물리학에서는 전기를 파장(波長)으로 보지만 화학에서는 미립자(微粒子)로 보는 것이다. 즉 어떤 패러다임이냐에 따라 과학에서조차 진실은 천의 얼굴을 갖게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패러다임조차 애당초 존재한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체계라는 것이다. ​ 시적 진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진리에 대한 겸허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즉 과학적 진실은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것이고, 종교적 진실은 종교적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며, 시적 진실은 시적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진실만이 진실이 아니라 종교적 진실도, 시적 진실도 각각 그들 나름의 진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 (5) 약물치료에서 시 치료로 ​ 일상을 뛰어넘는 문학의 최대 기능은 망과 정서의 해방감. 행복감, 만족감, 충만함을 주는 것인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catharsise)라고 했다. 인간은 어떠한 자극을 받는가에 따라 신체의 각 기관이 다양하게 반응하고 이에 따라 슬픔, 기쁨, 웃음, 노여움, 두려움, 놀라움, 그리움, 사랑스러움 등의 정서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시끄러운 소리는 불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는 소화기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짜증스런 기분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경쾌한 리듬은 소화기능을 돕고, 즐겁고 유쾌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바로 좋은 시는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 카타르시스는 바로 스트레스 해소, 정신 정서 심리적 힐링, 동시에 육체적 건강에 지대한 효과 - 시 치료, 문학치료 예술치료(대체의학)의 근거가 됨 ​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거나 양지바른 산자락에 앉아 시나 몇 줄 쓰고 싶다. ​ 청청한 하늘 바라보면서 새털구름 한 자락 잘라 백두산에는 바늘꽃 심고 한라산에는 미나리아재비 밤에는 초롱한 별빛을 세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나 부르고 싶다. ​ 가지는 꺾이어도 좋다. 허리는 부러져도 좋다. 잎들이 떨어져 너에게 짓밟혀도 좋다. ​ 봄이면 속살이 돋고 여름이면 또 꽃이 피는 것을 꺾어지면 어떠리 부러지면 어떠리 짓밟히면 어떠리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1-2 일상의 시학과 메타포의 시학(2) ​ 홍문표 ​ (6) 현실에서 상상으로 시, 또는 문학 그리고 예술은 어떤 존재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telling)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방법으로 감동하게 하는 세계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구체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구체적이란 어떤 존재를 감각적으로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showing) 방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예술의 행위는 바로 어떤 생각이나 심정을 구체적인 어떤 사물이나 사건으로 예를 들어 보여 주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여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사물을 이미지(image)라 하고 이러한 사고를 상상(imagination)이라 한다. ​ 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 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꺼야 ​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주는데 ​ 나무들에게도 정말은 눈이 있을 꺼야 ​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표현-“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 주는데” - 일상의 시학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표현-“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 거야” “나무들에게도 눈이 있을 거야” -메타포 시학, 이처럼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이 없다면 미래도 없고, 초월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삶의 확장도 없다. 그것은 시만이 아니라 인생도 그렇다. ​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 전봉건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 ​ (7) 낯익음에서 낯설음으로 ① 낯익음의 언어 ​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쉬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 반복적으로,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공식적인 언어는 이해는 있으나 감동이 없다. 바닷가의 파도소리, 친숙화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되었을 때 조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탈언어화 상태가 된다. 지각적인 의식의 언어가 생략될 때 남는 것은 기호뿐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호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이고 산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 존재하는 삶이란 이미 창조적 인간이 아니고 기계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비인간화의 무의미한 세계일뿐이다. ​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낯익음의 일상의 시 ​ ② 낯설음의 언어 시어의 참 기능 - 따라서 예술가가 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일상과 습관과 안일과 매너리즘의 권태다. 대상을 습관적인 문맥에서 뜯어내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함께 묶음으로써 시인은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기계적 반응(stock response)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texture)을 뛰어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바로 일상적인 낯익음의 용법의 일상적인 시학을 을 배제하고 보다 낯선 뛰어넘음의 메타포 시학 통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자유이고 해방이다. ​ 당신은 짐승, 별, 내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 됩니다 당신의 살갗 밑으로 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 이성복 「당신은 짐승, 별」 ​ (8) 워킹(walking)에서 땐싱(dancing)으로 ​ 시인 발레리는 산문과 시를 구분하면서 산문은 도보(walking)요 시는 무보(dancing)라고 했다. 도보 즉 걷기는 사건이나 행동의 시작이 있고 중간 과정이 있고 마침이 있다. 그러나 무보 즉 춤추기는 제자리에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시가 리듬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에 반복적인 리듬이나 메타포가 없다면 그것은 일상의 시학 ​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고 너는 내 욕망의 무지개가 되어 내 손에 가득한 장미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육질의 껍질을 벗고 날마다 비상하는 오월이 되어 육자배기로 돌아가는 자유가 되어 현재로 자족하는 서정시가 되어 아스라이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홍문표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 (9) 인접성에서 등가성으로 시인들이 시어를 선택하여 산문과 다른 낯설음을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야콥슨은 등가성(equivalence)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그는 시의 언어는 등가성의 규칙에 따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시어를 투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반 산문은 등가성의 원리를 선택의 축으로 하지만 결합의 경우는 접촉성에 의한다는 것이다. ​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의 「외인촌」에서 ​ 1) 일상어법       접촉성       접촉성                                   저       식사       한다     나 는 +     밥   을 +   먹는다     소인       끼니       때운다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2) 시의 어법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폭포     흐르는   퍼런   징소리     분수 처럼+ 흩어지는 + 푸른 + 종소리     빗물     뿌려지는   시퍼런   새소리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 산문의 문장은 낱말과 낱말이 인접성에 의하여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이고 시의 문장은 낱말들이 등가성에 의하여 은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다. 따라서 웰렉이 현대시는 은유(metaphor)다 라고 한 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시의 원리가 리듬이라는 것도 사실은 등가성의 원리에 있다. 어휘반복, 구절반복, 이미지반복, 의미 반복 등 모든 반복의 규칙은 바로 등가성의 원리와 일치하는 논리다. 시는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계열축의 언어를 선택의 축으로 하여 결합해 가는 언술이고, 산문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환유적 접촉으로 결합해 가는 언술이다. ​ (10) 분열에서 통합으로 메타포란 meta-over와 phore-carrying, 기존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기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옮긴다는 말이 또 다른 분열과 혼란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시에서 메타포의 본질은 분열에서 통힙이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 “인생은 나그네길”,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그대는 보름달” 등에서 마음과 호수, 인생과 나그네, 하나님과 목자, 그대와 보름달은 서로를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동일시하여 분열된 상태를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 과학적 사고는 사물을 분석하고 구별하여 너와 나를 분리하는 것이고 문명어 또한 모든 사물을 기호화, 상징화하여 모든 존재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상실되고. 주체와 타자의 분리,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조장했다. 메타포는 이처럼 신과 인간과 자연이 분열되고 소외된 정신적 절망에서 너와 나 주체와 타자의 화해와 통합을 통한 에덴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지상의 종교다.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어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 박두진의 「꽃」에서 ​ (11)통합에서 구원으로 ​ 메타포는 분열에서 통합이라고 했다. 이성과 과학은 세상을 분열시키지만 시의 상상과 메타포는 분열된 것들을 감성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다. 통합은 대결이 아니라 화해요 사랑이다. 그런데 분열된 것을 통합한다는 시정신은 좋으나 솔직히 “내 마음은 호수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등의 논리가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된다. 마음과 호수가 동일할 수 없으며, 죽음이 바위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상상과 메타포가 시적 방법이라 해도 이성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휠라이트는 시를 역설(paradox)이라했다. 여기서도 prra는 ‘넘어서다’이고 doxa는 ‘이견, 다르다’는 뜻이다. 시는 현실을 넘어선 다른 의견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것, 거기에 시적 구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파라독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설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기독교적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학에서도 상상이니 메타포니 하는 사실을 뛰어넘는 이 모든 역설들을 단지 기교로 볼 것인가. 그것은 분열에서 통합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러한 통합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단계에 이를 때, 진정 시적으로 구원된 경지라 하겠다. ​ 시인은 시를 왜 쓰는가. 취미인가, 심심풀이인가, 말장난인가, 분열된 세계를 사랑과 열정으로 통합하여 화해된 세상 모두가 하나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메타포의 시학은 바로 그러한 세상을 꿈꾸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지상의 종교다.  
1056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3 댓글:  조회:714  추천:0  2019-12-21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9 생태주의와 생태시 ​ 홍문표 ​ (1) 21세기와 에코토피아 ① 21세기의 환상 정보통신의 혁명 - 앨빈토플러의 제3의 물결(농업-산업-정보) 지구촌시대. 디지털시대. 하이 퍼리얼리즘. 싸이버리즘 생명공학의 혁명 - 생명연장, 생명체조작, 헉슬리의「Brave new world」 신중심주의 - 인간중심주의 - 물신주의 - 과학신주의 ​ ② 자연파괴와 종말론 환경오염 - 지구온난화, 천재지변, 쓰나미 현상 생태계 파괴 - 우주, 생명, 인간, 유기적 관계, 먹이사슬 관계, 생존질서파괴 유전공학 - 생명 체계변화, 난치병, 괴물, 변종의 재앙 ​ ③ 인간중심주의의 허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 인간. 생명체 모두 피조물-자연 인간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담의 원죄 - 선악과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 의 계율)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 인간의 영원한 유혹) 아담의 후예들 -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헤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인간중심주의 - 이성중심주의 - 인간우월주의 인간 - 만물의 영장 자연. 생물 - 하등한 것. 파괴의 대상. 인간 욕망의 대상. 자연파괴 정당화. 과학기술의 발달 - 자연파괴 가속화. 농업시대 - 산업화. 자본주의. 공장공업, 대량생산. 대 량소비, 자본. 재화 돈 중심의 물신시대. 인간상품화. ​ ④ 휴머니즘 - 인간중심주의 - 이성중심주의 모든 사물의 가치화 계량화 모든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 플라톤 - 본질과 비본질. 진리와 비진리. 인간의 서열화 공자 - 도와 비도. 군자와 소인. 인간의 서열화. ​ ⑤ 플라톤과 공자와 이성중심주의 그들은 이성적 가치기준을 정하여 본질과 비본질, 도덕과 부도덕, 문명과 야만, 선과 악 등 이분법적 사고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서열주의는 귀족과 평민, 양반과 상놈,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 등 계급주의를 정당화했고 마침내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전쟁이나 계급투쟁을 위한 피의 숙청,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운 나치즘의 유태인 학살 등 민족주의, 제국주의, 계급주의,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파괴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 ⑥ 인간중심적 디스토피아에서 생태시의 에코토피아로 이처럼 인간 우월주의, 이성중심주의가 가져온 기술문명과 물신주의가 자연환경과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고 인간 생존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디스토피아(distopia)의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생태문제를 인식하고 모든 생명체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자생력을 회복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공존 공영하는 생태회복의 낙원(ecotopia)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것이 21세기 비평의 최대 화두일 뿐만 아니라 생태시(ecolyric)의 목표가 된다. ​ (2) 생태시의 형성 ① 생태시의 의미 생태시(ecolyric)라는 명칭은 헤켈이 제시한 생태학(ecology)과 서정시(lyric)의 합성어다. 생태학이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시가 사물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생태시는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관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된다. ​ ② 생태학과 생태시 생태학이란 특정한 유기체와 주변환경 간의 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생태학적 인식구조와 생명존중의 철학,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 환경보호 운동의 여러 이념이 생태시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형성한다. 생태시는 이 같은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에 근거하여 인간, 동물, 식물이 생태계의 변화에 어떠한 반응과 변화를 나타내는가를 사실적인 언어로 재생해내는 현대시의 한 장르이다. ​ ③ 기존의 시, 인간중심의 시 지금까지 시라고 할 때 공통된 조건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음악적인 언어, 상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시의 주체가 철저히 인간이라는데 있다. 인간의 사상, 인간의 감정만을 유일한 시의 주제로, 시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비록 사물이나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일지라도 이것은 인간의 사상을 자연에 투사하거나 동화하여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냈을 뿐이다. 따라서 자연은 다만 타자이고 수단일 뿐이고 주체나 목적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 ④ 생태시의 특징 생태시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사실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시이며 환경파괴의 사회적 원인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의 비판의식과 개혁의지를 일깨우려는 목적성을 가진 시다. 그리하여 생태시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모든 생명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생명체뿐만 아니라 자연환경까지도 인간과 유기적 공동체임을 인정하고 생명과 우주의 유기적 질서를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여기에 상생주의(相生主義, win-win theory)라는 21세기 철학이 있다. ​ ⑤ 생태주의와 환경주의 생태주의는 환경주의와 다르다. 환경주의자들은 자연 파괴의 문제를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견지한다. 그들은 인간의 생활공간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조성하기 위해서라면 주변의 자연환경을 충분히 가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끝내 인간중심주의다. 따라서 생태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차등의식, 소유의식을 갖는 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자연과 대등한 관계, 공존의 관계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의식 개혁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생태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평등을 내세우는 인간중심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자연과 우주 모두가 평등한 생태학적 민주주의, 절대의 민주주의다. ​ (1) 독일 중심의 생태시 ① 생태시 운동의 출발 ​ 생태시 운동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 독일어권에서 1950년대 태동기를 지나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살포 등 환경오염. 각국의 핵무기 개발 등에서 반전 반핵 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녹색당. 그린피스가 가동되고 1970년대는 독일의 경우 환경정화노력이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운동이 시로 구체화되어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가 제작된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시인 92명이 쓴 206편의 생태시 앤솔로지 ​ ②「시조새의 꿈」 - 파충류와 인간이 공존했던 생태학적 에코토피아 ​ 오랜 세월동안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수천 년 동안 늪처럼 이끼처럼 웃음을 머금고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예감하는 나, - 발터 헤레러의 「시조새의 꿈」에서 ​ ③ 물, 공기, 대지의 오염 ​ 우리는 대지의 살점을 도려내고 대지의 피부로부터 털을 깎듯 숲을 베어 냅니다. 더구나 구멍 숭숭한 상처 속에 아스팔트를 메꾸어 숨통을 틀어막지요 ​ 어느새 우리는 대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인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강도가 되어 밤낮 구별 없이 대지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 엘케외르트겐의 「대지」에서 ​ ④ 산업화, 도시화, 기술문명, 물신주의 ​ 우리 모두 마음껏 즐겨보자 우리는 쾌락의 칼로 하늘의 내장을 도려내 버렸다 천사들은 이미 노래를 멈추었으니 뮤직박스를 틀어라 광란의 재즈로 발을 뜨겁게 달구어라 - 다그마르 닉의 「증명」에서 ​ ⑤ 지구 멸망의 묵시록 ​ 어제 우리는 마지막 남은 늑대들을 쏘아 죽였다 이제 들판은 영영 정복된 셈이다 사과나무도 잔디도 우리의 것이 되었고, 세상은 온통 정원으로 변해가 된다 - 한스 위르겐 하이제의 「징후」에서 (2) 미국의 생태시 ① 미국생태시의 형성 미국에서 생태학과 문학의 관계는 19세기 미국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에머슨과 소로우로 거슬러 갈 수 있지만 네이쳐 라이팅(Nature Writing)이라는 독자적인 장르명으로 생태학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시가 씌어진 것은 197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나 머윈(W.S Merwin), 시어도어 레스키(Theodore Roethke), 에이드리엔 리치(Adrienne Rich) 의 시들이 생태학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② 게리스나이더의 「거북이 섬」 해변가에 위치한 유레카. 핵발전소, 쌓아 논 목재더미. 타지 사람이 주인인 제재소들. 나무들이 잘려나간 산둥성이의 그루터기. 바다 안개 언저리에 서 있는 유레카. 여기 사는 사람은 누구도 이 마을을 다스릴 힘이 없다. - 게리 스나이더의 「유레카에서의 예술인들 모임」에서 ​ (3) 생태시의 두 유형 ① 고발적, 사실적, 르뽀적 생태시 ​ 1952년 런던 상공에 하얗게 피어오른 구름떼가 불과 일주일 만에 성인 4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 그 구름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스모그 이것은 스모그(연기)와 포그(안개)를 합쳐놓은 이름이다 (화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산화황과 질산이 결합된 물질로서 햇빛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흔히 광화학 스모그라고도 한다) - 한스 크리스토프 부흐의 「시 아닌 글」에서 ​ ② 은유, 상징 등을 사용한 세련된 문학형식의 생태시 ​ 새의 몸뚱이는 풍만하다 뼈들은 바닷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피에 젖은 감람 잎사귀들이 앞으로 앞으로 흘러가는데 깃털들이 흘러가고 물고기들은 날아가며 나는 목이 마르다 - 에리히 프리트 「홍수」에서 ​ (1) 생태주의와 동양사상 ① 불교와 생태주의 ​ 불교에서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초목조수에 깃들인다는 전주설(轉住說)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과 자연이 적대관계가 아니라는 생명사상이고 특히 자타불이(自他不二) 라는 아트만(Atman)사상도 생태주의와 관계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성불(成佛)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적 요소가 있다. ​ ② 노장사상과 생태주의 노장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 만물일체(萬物一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일체 인위적인 사고와 행동, 공자적 태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생태주의와 일치하나 적극적인 친자연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허무를 강조한 소극적인 생태주의라고 할 수 있다. ​ (2) 한국생태시의 형성 ① 과거 한국의 시와 생태 과거 한국시는 생태학적 관심보다 자연에 대한 관심, 향가에서 주술성, 고려가요에서 보는 현실 도피처로서의 자연, 조선조에서 보는 불변성에 대한 도덕적 가치, 서경적 자연, 현대 서정시들이 보이고 있는 심미적 자연, 모더니즘 시가 보여주는 탈 개성적 자연들이다. ​ ② 생태시의 확인 우리 문학사에서 생태문제가 거론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다. 사회단체로 환경보호단체들이 있었고 정부에 환경청이 생긴 것도 역시 이 시기에 이르러서다. 생태주의 비평으로는 신동춘, 최병현, 손유성, 이동승, 박이문, 송용구, 김욱동, 문덕수, 홍문표 「한국생태시의 과제」(1991)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 고진하와 이경호가 엮은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가 출간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연대의식이 가시화되었다. 그밖에도 김지하의 「중심의 괴로움」 신진의 「강」 강남주의 「흐르지 못하는 강」 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 고진하의 「우주배꼽」 정현종의 「한꽃송이」 문정희의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송용구의 「풀피리 소리보다 향기로운」 홍문표의 「지상의 연가」 「나비야청산가자」 등이 있다. ​ (3) 한국 생태시의 유형 ① 환경파괴 실상을 르뽀 형식으로 고발한 작품 ​ 그날 그 도시에 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수돗물을 마신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게 설사와 구토 피부병을 시작했고 임신중인 산모들이 태아를 유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 김용락의 「대구의 페놀수돗물」에서 ​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사옵니다. 낮은 땅의 뜻만 땅에서 창궐하고 이사옵니다. 동맥경화에 걸린 샛강과 폐암에 걸리고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공장들 피가 맑아야 한다는 동의보감은 휴지가 되고 있사옵니다. 자외선이 쏟아지는 하늘 구멍을 향해 사람들은 대패질을 계속합니다. - 강남주의 「비행기에서 보는 세상」에서 ​ ② 생태파괴로 인한 종말, 묵시록의 언어 ​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자면 흘러내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 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 최승호 「공장지대」 일부 ​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이 일어날 때의 시간인데도 산의 그늘만이 길게 뻗쳐 있다 햇빛이 해골의 눈 속을 통과하여 바람이 불고 오늘은 눈이 내린다 지구는 혼자 외로이 겨울을 빠져나가면서 공중에 떠 있을 분 인류는 모두 어디에 갔는가 - 고형렬의 「지구묘」에서 ​ ③ 생태주의 먹이사슬의 문화. 생물 평등주의 그 마지막 희망 ​ 똥보면 베먹고 싶어 새벽 샘물 샘 뒤 언덕 위 산죽닢 스쳐 오는 바람을 마셔 동트는 분홍 산봉우리 흰 안개구름 마셔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 먹고 싶어 내 몸이 곧 흙이어설 게야 흙이 똥을 마다 안함 오곡이 장차 가득가득히 익어 끝내는 열매 열리게 될 터이어설게야 똥 속에 배시시 애린이 웃어설 게야 꼭 그럴 게야 - 김지하의 「똥」에서 ​ 올해도 꾀꼬리는 날아왔다 마음 놓인다. 꾀꼬리야, (걱정 많은 생명계의 균형의 숨은 움직임을 번개처럼 알리니) 네 소리의 품속에 안기고 또 안긴다. 네 소리의 경전에 비하면 다른 경전들은 많이 불순하다. 번개처럼 귀밝히며 또한 천지를 환히 관통하는 이 세상 제일 밝은 광음(光音), 새소리! ​ 아, 올봄도 꾀꼬리는 날아왔다. 1991년 5월 7일 오전 9시 43분. - 정현종의 「한」에서 ​ 우리집 아이들은 딸기를 먹을 때마다 신을 느낀다고 한다 ​ 태양의 속살 사이사이 깨알같은 별을 박아 놓으시고 혀 속에 넣으면 오호! 하고 비명을 지를 만큼 상큼하게 스며드는 아름다움 잇새에 별이 씹히는 재미 문정희의 「딸기를 먹으며」에서 ​ 늘 푸른 강물이듯이 나는 당신의 목덜미를 잡고 당신은 내 외로움의 등줄기를 잡고 할딱거리는 대낮의 정사처럼 엉클어지는 운명이게 하소서 바다는 강물의 발목을 잡고 강물은 청산의 겨드랑을 잡고 해적선 노예들의 족쇄처럼 화인 맞은 엉덩이의 문신처럼 나는 당신의 폭력이 되고 당신은 나의 눈물이 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 훠이훠이 날아가는 서역 구만리 홍문표의 「늘푸른 강물이듯이19」에서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0 페미니즘과 여성시 ​ 홍문표 ​ (1) 페미니즘 운동 ① 아담과 이브 지상의 역사는 누가 쓰기 시작한 것일까. 아담일까. 이브일까.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었겠지만 에덴에서 득죄하고 추방되는 인간사의 주체는 단연코 이브였다. 어느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원시시대는 여인이 중심인 모계사회였다. 그만큼 당초의 여성은 강한 존재였다. 그러나 농경사회 이후 노동력이 생계의 수단이 되면서 또한 자본과 화폐가 모든 가치와 삶의 중심이 되면서 차츰 남성의 역할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이제 남성 중심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는 철저히 여성을 차별화하고 복종하게 하고 지배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문화다. ​ ② 분노한 이브 사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는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하였다. 그만큼 공평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는 오랜 동안 남성중심으로 왜곡되어 왔다. 최근 여성들이 이러한 불평등의 역사에 반기를 들었다. 남성중심의 역사를 바로잡고 여성을 여성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feminism)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문학이나 페미니즘 시는 여성의 제값 찾기를 위한 모든 활동이다. ​ ③ 경계허물기 시대의 전략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그리고 생태주의가 제기되면서 본격화된다. 이들 논리의 핵심은 기존의 모더니즘이 이성중심주의, 언어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남녀차별이 있고 서열이 있고 계급이 있고 불평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지금까지의 서구문화는 이성=합리=남성=진리, 감성=불합리=여성=비진리라는 등식의 가부장제, 남근중심주의였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사고체계의 해체를 주장했다. ​ ④ 여성비하의 논리 밀레트(K. Millet)는 『성의 정치학』에서 남녀문제를 기본적으로 성(性)의 권력투쟁으로 파악한다. 남자들이 그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고 여성들을 영원히 복종시키기 위해 거짓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그것을 진리로 제도화시킴으로써 여성들을 억압하고 속박해 왔으며 거기에 세뇌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이데올로기 속에 안주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제도가 가부장제(partriarchy)이고 대표적인 이데올로기가 바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라고 보았다. ​ 한편 남녀의 문제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보봐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을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라서 여성의 집단적 자각만이 이 불평등한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엘만(M.Ellmann)은 여성에 관한 사고에서 미국문학에 나타난 상투적인 여성의 속성을 보면, 무정형성, 수동성, 불안성, 제한성, 실용성, 순결성, 물질주의, 정신주의, 비합리성, 순종선, 반항성 등 11가지 유형이라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천사와 마녀라는 이원화된 이미지로 구분될 수 있다. 집안의 천사는 현모양처형 여성으로, 가사노동과 육아에 속박되어 가정의 평화를 위한 순종적인 여성형이고 마녀형은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주체적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고안한 모든 악의 조력자로서 여성형이다. ​ ⑤ 최근 여성문학의 과제 최근 여성의 문제나 여성의 글쓰기의 문제를 보면 여성의 역사와 여성 문학사의 재구성, 문학적 정전의 문제, 여성과 대중문화, 사회가 구성하는 성(gender) 개념과 생물학적 결정주의, 양성(androgyny)개념, 동성애 문학, 성적으로 읽기, 여성적 글쓰기의 본질과 이 글쓰기를 생산하는 조건, 성차별, 여성적 언어의 특수성과 이런 언어의 존재 여부, 가부장적 언어의 전복 문제, 주체성과 성적 정체성의 구성, 여성적 인식론의 가능성 등이다. 여기서 페미니즘 문학으로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여성으로서 글읽기, 여성적 글쓰기, 성차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 (2) 전통적인 여성시 양상-복종 애원 남성중심 ① 백제시대의 정읍사 달하 노피곰 도다샤 달이여 높이 좀 돋으시어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아! 멀리 좀 비치옵소서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 져재 녀러신고요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긔야 즌 대랄 드대욜세라 아! 진 곳을 디딜까 두려워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든 놓고 오십시오 ​ 어긔야 내 가논 대 졈그랄셰라 아! 내 님 가는 그 길 저물가 두려워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 출전 : 악학궤범, 백제시대 어느 행상의 아내, 행상을 떠난 남편의 무사 귀환 염원. ​ ④ 고려시대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날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증즐가 대평성대 ​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나더라 어찌 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증즐가 대평성대 ​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붙잡아 두고 싶지만 선하면 아니 올셰라 서운하면 오지 않을까 두려워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증즐가 대평성대 ​ 셜온님 보내압노니 나난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 나난 가자마자 다시 오소서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증즐가 대평성대 ​ 임과의 이별의 정한 기 - 원망적 애소 , 승 - 애소의 고조, 전 - 전제와 체념, 결-기도자적 애소. ​ ⑤ 조선조의 여류 시조들 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春風니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 ​ 임이 가신후 소식이 頓絶하니 窓밖에 櫻桃花가 몇 번이나 피였는고 밤마다 燈下에 홀로 앉아 눈물겨워 하노라 - 송대춘 ​ (1)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의미 ① 남성의 영원한 타자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은 영원한 타자다. 남성은 자기의 주체를 확립하려 할 때 그 주체를 한정하고 부정하는 타자가 필요했고, 따라서 여성은 비본질적인 타자가 되었다. 타자로서의 여성은 언제나 종속적이고 부차적이고 부정적이다. ​ ②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이분법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욕망이라고 보고 특히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남성 - 지팡이, 양산, 막대기, 나무, 모자, 칼, 창, 총, 수도꼭지, 연필, 넥타이, 뱀, 열쇠, 산, 하늘 등 여성 - 구멍, 웅덩이, 동굴, 항아리, 병, 트렁크, 상자, 방, 호주머니, 배, 종이, 책, 테이블, 달팽이, 조개, 교회, 사원, 숲, 사과, 복숭아, 구두, 마당, 셔츠, 물, 바다 등 융은 인간의 정신 내면에는 남성의 경우는 아니마 (anima), 여성의 경우는 아니무스 (animus)라는 심리적 원형을 지닌다고 했다. 아니마의 원형은 남성의 정신에 있어서 여성적 측면이며, 아니무스의 원형은 여성의 정신에 있어서 남성적인 측면이다. 아니마(anima) - 남성의 여성적 측면, 영원한 여성상, 처녀, 여신, 천사, 마녀, 악마, 거지, 창부, 친구, 악녀, 베아트리체, 헬렌, 이브, 춘향, 심청, 소, 고양이, 호랑이, 뱀, 동굴, 몽상, 꿈, 언어, 이상적 자아, 밤, 휴식, 평화, 부드러움, 선 아니무스(animus) - 여성의 남성적 소망, 명배우, 권투선수, 정치가, 지도자, 이상적 남성, 독수리, 황소, 사자, 창, 탑, 현실, 역동성, 낮, 염려, 야심, 동물, 능동, 분열, 합리적 추상적 사고, 국가, 사회. ​ ③ 신성과 타부로서 여성 그러나 여성을 타자로 해도 끝내 자연현상은 여성을 신성시하고 타부시한다. 이는 모든 생명들이 대지와 물에서 탄생하고 여성으로부터 종족이 탄생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생명은 대지로 돌아간다. 이는 여성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지는 탄생과 죽음이 있고 여성도 탄생과 죽음이 있다. 어머니인 대지는 그 뱃속에 그녀의 아이들의 유골을 내포한다. 인간 운명의 실(系)을 쥐고 있는 것은 여성인 것이다. 전설 속에 죽음의 모습이 여성의 얼굴로 되어 있고, 죽음 자체의 주재가 여성의 소관임은 흔히 쓰이는 「운명의 여신」 이라는 말이 뒷받침해 줄 것이다. ​ ④ 마녀재판과 처녀귀신 서양에서는 모든 불행이나 잘못된 일에는 늘 마녀나 마귀할멈 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7-8세기에는 이단이나 이상한 짓을 하는 여인을 잡아 처형했다. 동양에는 처녀 귀신이 귀신 중에도 가강 무서운 귀신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속설도 모두 남성중심주의가 낳은 것들이다. ​ (2) 남성의 여성지향적인 시 ① 여성 편향의 시 이상의 논거에서 볼 때 남성의 영웅적인 모습, 또는 독재성을 드러낼 때는 여성성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독재자나 영웅들은 여성을 제외한다. 그러나 남성이 또는 남성적인 사회가 죽음이나 탄생의 생사문제, 극단적인 선과 악의 문제. 민족, 집단, 사회가 이념적인 것을 지향할 때 감성적인 삶을 지향할 때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남성은 모성이나 여성을 지향하게 된다. 이브의 원죄를 저주한 남성의 역사는 마리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찾게 된다.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특히 일제하에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여성적 편향(female-complex)라고 한다. ​ ② 모성지향적인 시(mather- complex) 나는 王이로소이다 나는 王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 아들 나는 王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十王殿에서도 쪼끼어난 눈물의 王이로소이다. ​ 「맨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럿케 어머니서 물으시면은 「맨처음으로 어머니 받은 것은 사랑이엇지오만은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겟나이다 다른것도 많지오만… -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5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축축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니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신석정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 ③ 님 지향의 시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緣연分분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平평生생애 願원하요데 한데 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삼 일로 외오 두고 글이난고. 엊그제 님을 뫼셔 廣광寒한殿뎐의 올낫더니 그 더대 엇디하야 下하界계예 나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킈연디 三삼年년이라. 臙연脂지粉분 잇내마난 눌 위하야 고이 할고. 마음의 매친 실음 疊첩疊첩이 싸혀 이셔, 짓나니 한숨이오, 디나니 눈물이라. - 정철 「사미인곡」에서 ​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첨에 이별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하였읍니까 다른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하였읍니까 ​ 나는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한 줄로 압니다 만나고 이별이 없는 것은 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별하고 만나지 않은 것은 님이 아니라 길가는 사람입니다. - 한용운 「최초의 님」 ​ ④ 누이 지향(sister-complex) 의 시 ​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바져나와 바닷가에서자. ​ 비로소 가슴울렁이고 눈에 눈물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 비늘을 닮아야하리. 천하에 많은 할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 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박재삼 「밤바다」 ​ ⑤ 여성화자의 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그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덜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1) 개화기에서 1960년대까지 ① 이 시대 여성문학 개관 개화기 문학에서 여성문제가 거론된 것은 1900년 이해조의 「자유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부인들이 모여 남성에게서 억압받는 여성의 인권문제를 질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성의 문제가 시로 거론된 흔적은 찾기 어렵다. 1920년대에 김명순, 김원주, 나혜석 등 여성문인이 등장하는데 많은 에피소드만 있고 작품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930년대는 김오남, 노천명, 모윤숙, 백국희, 장정심 등이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여성 시인들이다. 그 중에서는 단연 모윤숙과 노천명이 돋보인다. 모윤숙이 기교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자유분방한 정열을 표출하는 시인이었다면, 노천명은 단아하고 명상적이며 회화적인 절제된 정서를 표현하는 시인이었다. 이 두 여성 시인들의 대조적인 시 세계를 후대에 와서도 여성 문학의 두 흐름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 광복, 좌우 대립, 6.25와 산업화 초기 단계를 거치는 동안 매우 두터운 여성 문인층이 형성되었다. 이때 활발한 활동을 보인 여성 시인들로는 이영도, 조애실, 이영희, 노영란, 홍윤숙, 김남조, 허영자, 김지향, 김하림, 김여정, 임성숙, 김윤희 등을 꼽을 수 있다. 많은 문예지들과 일간지의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한 이들 여성 문인들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말까지 이른바 여류문학의 전성기 동안 질적 양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시에 대하여 평자들은 ‘과거지향적’이며 ‘단조로운 방법으로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으며 ‘정서적인 긴장감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② 이 시대 여성시 애정 모티브 임이 부르시면 달려 가지요. 금띠로 장식한 치마가 없어도 진주로 꿰맨 목도리가 없어도 임이 오라시면 나는 가지요. ​ 임이 살라시면 사오리다. 먹을 것 메말라 창고가 비었어도 빚덤이로 옘집 채찍 맞으면서도 임이 살라시면 나는 살아요. ​ 죽음으로 갚을 길이 있다면 죽지요. 빈손으로 임의 앞을 지나다니요. 내 임의 원이라면 이 생명을 아끼오리. 이 심장의 온 피를 다 빼어 바치리다. ​ 무엔들 사양하리, 무엔들 안 바치리. 창백한 수족에 힘 나실 일이라면 파리한 임의 손을 버리고 가다니요. 힘 잃은 그 무릎을 버리고 가다니요. - 모윤숙 「이 생명을」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 ​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 「사슴」 ​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 김남조 「너에게」 ​ (2) 1970년대 이후 여성시 ① 이 시대 여성시 개관 1970년대 민중문학의 열기를 거쳐 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시, 90년대의 생태주의, 사이버리즘의 문화현상은 그동안 모더니즘이 고집해온 모든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이러한 세계의 변화는 여성의 경우 여성해방은 물론 여성의 정체성 찾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 70년대에 등장한 강은교의 사색적 허무주의, 그리고 김승희의 파괴적 내면주의는 고정희의 씩씩한 민중적 상상력과 짝을 이루고 있으며, 그녀들의 가열한 내면세계와 시대정신은 80년대의 최승자에 이르면 가장 치열한 종합을 이룬다. 이어 등장한 김혜순의 블랙유머를 기조로 한 경쾌한 악마주의는 성숙한 모성적 인식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황인숙은 아주 독특한 감각적 시세계를 그려 보인다. 90년대 시단의 한 징후로 보이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를 볼 수 있으며, 이선영,이진명 등의 한국 여성시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시인들을 한 줄에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원칙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들이 개인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 그녀들은 특히 남성들에 의하여 「여성적」이라고 여겨져 왔던 시문법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여성이 되기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이다. ​ ② 페미니즘 시대의 여성시 보기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허허벌판에 누워/ 깨끗한 남자를 기다린다.// 불꽃이 울면서 짐승같이/ 젖무덤 속으로 기어든다.// 나무들은 간지러워/ 푸른 소리를 지르고// 드디어 그 남자가/ 길을 무찔러오는 소리// 부끄러운 머리채를 이끌며/ 내가 어둠과 함께 도망친다.// 바람 지나가면/ 날개가 크게 걸리는/ 거미줄을 타고/ 얼굴 모르는 신과 만난다.// 뱀과 미친 깃털이/ 낄낄거리며 흩어진다.// 모든 것을 용납하는/ 그 야수의 무덤 속으로/ 나는 바삐 숨는다. - 문정희 「떠오르는 방」 ​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을 낳았기 때문에 국토분단 장벽보다 먼저 민족분단 장벽보다 먼저 남녀분단 장벽허물 일이 급선무 - 고정희 「여성해방출사표」에서 ​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어떤 마법의 한 마디를 이 타들어 가는 갈색 육체 위에서 간직할 수 있을까. 푸른 공작새를 위한 어떤 먹이. 어떤 황홀한 불의 최면 상태가 형태도 없이 떠가는 이 피의 방주를 다시 완전케 할 것인가 어떤 주문의 모차르트 어떤 장미의 원소. 어떤 태양의 기억이? - 김승희, 「어떤 흑연빛 시간의 오이디프스」 ​ 나의 눈 코 이 어깨 허리 다리 발 심장 신장 대장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이 모두가 한번은 버려져야 할 것들이다 낡아가는 것들. 종종 고장이 나고 마침내 수명이 다하는 것들과 함게 살아간다 그 어느 해 가을과 또 다른 해의 가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례로 그랬듯 버려질 엄마 아버지 남편 그리고 나 버려지기 전까지는 손발 닳도록 살아간다 - 이선영, 「버려진 냉장고」 ​ 조용하여라. 한낮의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만상이 흘러가고 만상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 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해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 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양식을 이야기 하리라. 만상이 흘러가고 만상이 흘러가고 - 이진명, 「청담(淸談)」  
1055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12 댓글:  조회:761  추천:0  2019-12-21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47 ​ 시와 사회 시대 역사 ​ 홍문표 ​ (1) 문학과 사회 ​ 문학과 사회의 관계는 운명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은 개별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지만 태어나고 보면 가족이 있고 시대가 있고 국가가 있고 사회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사회라는 집단 속에 태어나 그 사회와의 관계를 맺고 살다 가는 사회적 존재다. 그러기에 문학적 상상력도 시대 역사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바다 속에 있는 한 문학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주제를 배제할 수 없다. 거기엔 사회적 언어가 있고 문화가 있고 정치. 경제 등 다양한 공동체의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날드는 문학은 사회적 표현이라고 했고 테느는 문학을 종족, 시대, 환경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연극은 인생의 거울이니 소설은 시대의 반영이니 하는 말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 (2) 삶의 두 세계 - 문학의 두 세계 ①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 그런데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니 문학을 사회의 거울이니 하는 논리만 고집하면 개인적 존재 개체적 존재로서의 삶이나 독자적인 문학성 등이 무시 된다. 따라서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나 존재가치를 논할 경우 크게 구분되는 것이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고자 하는 가치관에서는 문학도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독자성을 강조하게 되지만 인간의 가치를 더불어 사는 삶,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삶을 최대한 내세우고자 하는 인생관에서는 윤리적인 문학, 공리적인 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늘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 하는 이 이분법적 세계관의 굴레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 ② 상반된 두 세계의 길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유물론과 유신론, 정치나 경제에서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 갖가지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갈등하고 투쟁하는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된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헤겔의 말처럼 정반합의 변증법적 통합이니 발전이니 진보니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어느 한쪽만을 절대 진리나 가치로 하여 다른 쪽을 적대시하고 무참히 파괴하는 피의 역사를 만든다는 데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③ 문학의 두 갈래길 문학사에서도 이 두 세계는 개인적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을 만들었고 개인적인 문학이냐 사회적인 문학이냐로 끈질긴 논쟁의 역사를 만들었다. 교훈론과 쾌락론이 그 출발이다. 그 뒤 사회적 상상력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모방론, 반영론, 목적론, 계몽주의, 계급주의, 사회정의, 휴머니즘, 공리주의, 역사주의, 진실성 등 갖가지 사회적 세계관의 문학론을 만들어 깃발을 흔들었고 개인적 상상력은 본질주의 존재론, 모더니즘, 순수문학, 무목적의 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 심미주의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형식주의 등 개인적 세계관의 문학론을 만들어 또다른 깃발을 흔들었다. ​ ④ 상생과 상호보완으로 사회적인 시의 이해 최근 우리문학사에서도 내용이냐 형식이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순수냐 참여냐 진보냐 보수냐의 대립에서 갈등해왔고 문학단체 마저 양분되어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글로벌 시대로 전환하면서, 경계 허물기 시대,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종언, 다양성, 상호보완, 상생의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개인적인 상상력의 시와 사회적 상상력의 시는 대립보다 다양성 상호보완이란 측면에서 보아야하며 그러한 입장에서 사회의식의 시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3) 사회적 상상력의 다양한 문학 ①사실주의 문학과 이데올로기 문학 ​ 문학이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거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역사주의 문학론이나 사회학적 문학론은 그렇게 보았다. 그리하여 사회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사실주의(realism)라고 했다. 그런데 역사나 사회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 가는 공동체적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엔 삶의 목적과 윤리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한 당위의 논리를 진실이니 정의니 가치니 하는 것으로 이념화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이데올로기(ideologie)는 넓은 의미로 세계관, 가치관, 사상, 기본적 사고 방식이지만 행동지향적인 신념 체계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고전문학의 공통된 주제는 권선징악이다. 근대사상의 주제는 자유와 평등이다. 여기에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고 계급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다. 자유와 평등의 해석과 실천의 차이가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 ②변혁의 수단으로서 문학 그런데 문학의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 나머지 문학이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고 변혁을 도모하는 수단이라는 논리로 발전할 경우, 이는 상상의 문학이나 감성의 문학이 아니라 무기로서의 문학, 칼로서의 문학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반영론과 당위론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는 당연히 그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극단의 논리에서는 문학의 예술성이니 독자성이니 하는 것들은 유보 될 수밖에 없다. 로마의 호라티우스가 문학이란 쓰디쓴 철학을 약탕기에 달콤한 꿈을 바르는 것, 즉 문학당의설(文學糖衣說)을 주장한 것이나 도를 전하는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았던 유가들의 문학관이나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에 복무하는 문학을 말한 것들은 모두가 사회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1920년대 프로문학론에서 박영희는 “문예의 전목적은 작품을 선전 삐라화 하는데 있다”라고 했고 1950년대 김일성의 교시에는 문학이란 “인민들의 수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예리한 무기가 되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 ③ 우리에 관한 다양한 문학 문학의 사회적 관심은 윤리나 정치적 목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몽문학, 종교문학, 민족문학, 대중문학, 도시문학, 농촌문학, 노동자 문학, 민중문학, 계급문학, 생태문학, 여성문학, 사이버문학 등 나 아닌 우리에 관한 것이면 그 어느 것도 사회적 소재가 되고 주제가 된다. ​ ④한국 현대문학사와 사회적 상상력 개화기에는 개화계몽을 위한 계몽문학, 일제하에서는 항일민족주의문학, 계급주의를 수용하면서는 프로문학, 해방 공간기에는 좌익문학 우익문학, 1960년대는 참여문학, 1970년대에는 농민문학, 민중문학, 1980년대에는 노동문학, 통일문학 1990년대에는 생태주의 문학, 페미니즘문학 등 시대마다 우리, 민족, 역사,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문학으로 시로 드러내었다. 특히 북한의 경우는 광복이후 현재까지 줄곧 일관된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이나 주체사상문학의 전체주의적 당위를 위한 수단으로 문학이 봉사되고 있는 것이다. ​ (4) 고대시와 재도지기(載道之器) ① 고대시가의 서정성 우리의 시사에서 고대시가의 확인은 고조선의 「공무도하가」 고구려의 「황조가」 백제시대의 「정읍사」 신라시대의 향가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가시리」 「청산별곡」등을 볼 때 오히려 서정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 펄펄나는 저 꾀꼬리여 암수가 서로 정답구나 나의 외로움을 생각하니,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오. 고구려 유리왕 ‘황조가’   ​ ② 재도지기의 시 그런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서정적 전통을 볼 수도 있으나 치국이념이 유교적이어서 충효 등 교화적인 시가들이 많다. 이 시대 문학관은 공자의 사무사(思無邪) 주자학의 문학이란 도를 싣는 그릇 즉 재도지기(載道之器), 도덕적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 정철 ​ (5) 개화 계몽기의 교화시 ① 풍속개량과 교화 개화기 박은식은 「서사건국지」서문에서 소설이란 풍속계급과 교화정도에 관계가 심한 것이라 했다. 윤상현은 「천희당시화」에서 시는 국민언어의 정화라 하면서 건강한 시정신을 요구했다. ​ 잠을 깨세 잠을 깨서 사 천년이 꿈속이라 만국이 회동하여 사해가 일가로다. ​ 구구세절 다 버리고 상하동심 동덕하세 남의 부강 불어말고 근본 없이 회빈하랴 - 개화기 가사에서 ​ (6) 계급주의 이념시 ① 카프의 시단 1925년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FP)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계급주의 시를 쓰게 된다. 계급주의란 사회를 유산자인 브르조아와 무산자인 프롤레타리아로 구별하고 이러한 계급모순을 타파한 무산자 중심의 평등사회를 실현한다는 이념으로 시는 계급혁명이란 목적을 위하여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 ② 임화, 권환 의 경우 ​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에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안었에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잇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 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 - 임화 「우리오빠와 화로」에서 ​ ××과 끝까지 싸우게 하는 그대를 우리는 다만 한 광부 우리들의 좋은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다만 침착하고 세상일 잘 알고 정다운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다만 한 좋은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 그러다가 인제야 알았다 그대를 ×들의 손에 뺏기고 난 인제야 그대를 다른 많은 용감한 동무들과 같이 ××× 에 끌려 보내고 난 뒤 한달 된 인제야 알았다 그대도 우리의 가장 미더운 지도자의 한 사람 땅 밑을 파고 다니는 숨은 지도자 조선의 ××의 한 사람인 줄을 - 권환 「그대」에서 ​ (7) 항일 민족시인 ① 일제하 시인의 선택 일제 36년간 일본의 총독과 일본의 헌병, 순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인의 선택은 일제에 굴복하거나 회피하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제하에 형무소를 드나들며 항거한 몇몇 시인들이 있다. 항일민족 시인이란 작품으로만 항일 정신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항일하고 작품으로 항일한 시인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삶은 늘 영어에 있었고 그들의 목숨도 무사하지 못했다. ​ ③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 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 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④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 내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깝치지 : 재촉하지 , 지심 : 기음 ​ ⑤ 이육사의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 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⑥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2) 식민지 시대 궁핍한 현실증언 ① 오장환의 「북방의 길」 눈 덮힌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 ② 이용악의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 - 중략 - ​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짓두광주리 : 반짓고리, 갓주지이야기 : 무서운이야기. 글거리 = 그루터기.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8 광복 이후 사회적 역사적 상상력의 시 홍문표 ​ (1) 광복의 감격과 좌우익의 시 ① 광복의 감격과 좌우익의 다른 목소리 1945년 광복은 전 민족적 감격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16일 과거 프로문학에 참가했던 좌익 문인들은 조선문학건설 본부를 만들고 민족진영의 우익은 1946년 전 조선 문필가 협회를 만들었다. 또한 우익에서는 「해방기념시집」 좌익에서는 「연간조선시집」을 만들어 각각 광복의 감격을 표현했다. ​ ② 해방기념시집과 우익의 시 ​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어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 사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 환희 트이는 이마 위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 조지훈 「산상의 노래」 ​ ③ 연간 조선 시집과 좌익의 시 ​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 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임화 「깃발을 내리자」 ​ (2) 한국전쟁과 초토의 시 ① 동족상쟁의 비극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쟁,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5백만이 넘는 국민이 죽었거나 부상당했다. 골짝마다 시산시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국권을 상실한지 36년 겨우 찾은 광복이지만 조국은 동강나고 사상이 무엇인지, 그 이데올로기는 동족애도 부모형제도 없었다. ​ 적의 콩볶는 듯한 속성 음향을랑 남기고 ​ 뽀뿌라 가로수에 낙렬(落裂)하는 칠십오밀리의 순발탄(瞬發彈) ​ 백오 고지를 점령한 우군이 적 소굴을 소탕하는 화염방사기의 불기찬 광채 그리고 불똥이 만무(滿舞)하여 훤히 비치는 서대문지구의 거리 거리와 큰 집 작은 집들 - 이영순의 「연희고지」에서 ​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荒廢한 風景이 무엇 때문의 犧牲인가를... ​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姿態대로 머리만 남아 잇는 軍馬의 屍體 ​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傀儡軍 戰士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生靈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多富院 ​ 진실로 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잊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安息이 있느냐 -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 (3) 4.19혁명과 시의 응전력 ① 4.19 정신 광복 후 국민이 열망하던 민주화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독재, 6.25전쟁, 3.15 부정선거로 왜곡되었다. 이에 학생들의 거국적인 의거는 죽음을 무릅쓰고 경무대를 향했다. 200여명의 희생이 있고서야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대통령이 하야하고 내각제 정부가 들어섰다. 학생들에 의한 민주화의 쟁취다. ​ ② 혁명과 시의 응전력 ​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이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 불로 외쳐 뿜는 / 우리들의 피 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는 못 막는/ 우리들의 피 대열에 흩을 수가 없다./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민족. 내가 살던 조국이여./ 우리들의 젊음 들./ 불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 내린// 악으로 불순으로 죄악으로 숨어내린/ 그 면면한. 우리들의 속의 썩은 것을 씻쳐내는,/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사뤄,/ 젊음이여! 정한 피여! 새 세대여!// 너희들 이미 일어선 게 아니냐/ 분노한 게 아니냐?/ 내달린 게 아니냐?/ 절규한 게 아니냐?/ 피 흘린 게 아니냐?/ 죽어간 게 아니냐?// ​ - 박두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에서 (4) 역사적 현실의식과 참여시 ① 실존주의와 현실참여 전후의 허무에서 실존주의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신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경우다.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갖고 현실에 참여(engagement)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현실참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정치적. 역사적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 했고 까뮈는 작품으로만 참여하는 것이라 했다. 한국은 6.25와 4.19를 거친 역사의식과 민주화 의식을 토대로 사르트르적인 논리를 내세워 문학의 현실참여를 실천하게 된다. ​ ② 신동엽의 반전 반외세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③ 김수영의 자유의 절규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은」 ​ ④ 이성부의 「전라도」 ​ 노인은 삽으로 榮山江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가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랑을 혼자서 퍼올린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 불을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 -이성부의 「전라도7」에서 ​ (5) 1970년대 민중시 ① 참여에서 민중으로 50년대의 한국시가 한국전쟁의 충격과 파장에서 전개되었듯이, 60년대의 시는 4.19의 파장과 영향권에서 형성되어 상황과 응전이라는 현실 참여적 경향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것이 70년대에 들어서는 유신 체제라는 통치체제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부정적 현실과 역사에 대한 강한 비판적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른바 민중문학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대표적 시인들로 김지하, 신경림, 고은, 조태일, 이성부, 정희성, 김명수, 이동순, 문병란, 김중태, 양성우, 이시영, 김창완, 김용범, 최하림 등을 지적할 수 있다. ​ ① 김지하의 현실 풍자 ​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 「오적」에서 ​ ② 신경림의 소외된 농민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리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농무」 ​ (6) 1980년대 민중시 ①고은의 통일시 ​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아라 저 끝에서 길이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 가야 한다 한평생의 길 오가는 겨레 속에 내가 살아 있다 남북 삼천리 모든 길 나는 가야 한다 기필코 하나인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 고은의 「길」에서 ​ ② 박노해의 노동자의 노래 ​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 박노해의 「하늘」에서 ​ (7) 문민정부 시대의 노래 ①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째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 이성부 「우리앞이 모두 길이다」  
1054    구조주의와 기호학/테렌스 호옥스 댓글:  조회:1254  추천:0  2019-12-21
구조주의와 기호학 테렌스 호옥스   (서울시신아사, 1984년)   비꼬(vico)는 이탈리아의 법률가인데 (1725년) 그 당시에는 관심을끌지 못했던 기념비적작품. 비꼬의 연구는 … 영원히 계속되는 구조화의 과정이 인간정신에 대해서 지니는 마취적인 속박을 풀어버리는 최초의 근대적 시도의 하나로 손꼽힌다.17   진정 변별적이고 영원한 인간특성은, 라는 능력안에서 식별해 볼수 있는데 , 그것은 신화를 창조하며 또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필요성인것으로 나타난다… 시적예지라는 재능은 그러니까 구조주의 재능이라고할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에 성격을 부여하는 원리이기에, 인간이다 라는것은 구조주의자이다 라는것과 같다는 주장이다.17   삐아제(piaget) 삐아재는 구조를 전체성의 개념, 변환의 개념, 자기조적의 개념 등 세가지 개념으로 생각했다. 전체적이라는것은 내적인 결합체를 의미한다. 변환적이라는것은 정적이 아니다. … 구조는 변환의 절차를 행할수 있어야 한다. …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구조로서, 갖가지의 기본문장을 광범위하게 다양한 새로운 발화로  변환시킬수 있는터이나, 한편으로는 그 변환을 언어자신의 고유한 구조안에 머물러있게 한다. 자기조절적이란 변환수단을 유효한것이 되게 하기위하여 제자신을 넘어서는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변환은 그 변환을 수행하는 고유의 법칙을 유지하고 보장하도록 작용하며 다른 체계가 련관되지 않게 그 체계를 봉인하도록 작용한다. 개라는 낱말은 언어구조안에 존재하여 기능하고 있으며, 네개의 발을 가진짖는 피조물이 실재한다는것과는 관계가 없다.19   구조주의-세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방식   사물의 참된 본성은 사물 그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그리고 지각하는 사물들 간에서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것이다. 20   구조주의자의 생각의 궁극적인 원천은, 항구적인 구조, 즉 개개인의 행위, 지각, 자세가 그 안에서 조화되고 그것들의 최종적인 성질이 그로부터 이끌어내지는 구조라고 할수 있겠다… 인간본성의 그 측면에 , 즉 언어에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여 있다.21   언어학과 인류학 – 소쉬르( Saussure) 스위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이다.22   두개의 기본적차원에서… 즉 랑그라는 측면과 빠롤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24   빠롤은 물우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다.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 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자체는 모순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것이다.25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있는 물리적인 나무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 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 현실에의 보증할만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나무라는 낱말이 땅우에서 자라고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물체를 의미하는것은, 그 언어의 구조가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이미지시키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31   레비스트로스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언어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며,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사회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다.42   어떠한 경우에서든 ,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것은 그 현상자체의 어떠한 본래적인 양상도 아니고, 현상들간에서의 관계이다 라는것이 , 구조주의 (그리고 음운론)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44   문학에 관해서 말하면, 이것은 먼저 단순한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가 막연한 형식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는것을 의미한다.79   러시아 포르마리즘.(formalism)1920- 1930.Boris  Eichenbum, Vtor Shklobisky, Roman Yakobson,  Bris Tomasjevsky, Juri Tynyanov언어학자나 문학사가들. 모스크바언어학회와 뻬드로그라드 시적언어연구회.   초기의 포르마리즘(1920-30년대 쏘련형식주의)은 상징주의 및 실용될수 있는 코무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형식에 대한 상징주의자적 관심을 기본원리로 해서 구축되였었다. 즉 자립적이고 자기표현적이며, 언어외적 리듬, 연상, 암시를 리용해서 언어를 보통의 일상적인 의미 영력을 넘어서까지, 늘려나갈수 있는것으로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관심에서, 비평의 경우에도 문학적인 언어를 작동시키는 기술에 열심히 주목하게 되고, 또 이 기술들을 일상적인 언어의 양식mode과 구별해서, 그 특성을 규정하려는 관심이 생겨났었다.81   Shkrovsky는 ‘예술은 언재나 인생으로부터는 자유이고, 그것의 색갈은 도시의 성책위에 펄럭이는 깃발의 색갈을 결코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특히 문학이,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있다면, 문학의 학술적연구나 비평은 마땅히 애매함이 없이 분명하게 확정된 고유의 자동영력을 가지고 있는 통일된 지적활동이라야 할것이다. ‘예술형식은 , 예술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skrovsky의 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일반원칙에 따른다면, 위에 말한 그 령역은,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문학인가라는것에, 즉 언어예술전반에서의 특유한 성질에 밀접하게 연관되여 있다. 스크로브스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이란, 작품을 될수있는대로 예술적인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 따라 특수한 기법으로 창작되여진 작품을 말한다.를 용인하는것은 야콥슨의 결론인’문학연구의 대상은 , 문학의 총체가 아니고, 문학성, 즉 작품을  문학자품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를 역시 용인하는것이 된다….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작품자체의 내부에서, 즉 시인에서가 아니고  시의 내부에서 발견될수 있다는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사용된 언어의 독특한 용법에 깃들어있어야 한다83….   포르마리스트들은 전의적, 언어, 은유, 상징. 시각의영상 등은 시의 필요조건인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의 특징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분석에서의 그들의 흥미는 이미지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미지가 적용되는 용법에 있는것이리라.84   일탈은 포르마리즘의 중심적관심사…일상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문학언어는 일탈을 발생시킬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탈이기 때문이다… 장치, 기법은 문학예술의 근간이 되며, 문학의 모든 요소가 그곳으로 향해서 조직되고있는 기본적요소가 된다.그리고 그 요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85 시적술화는 … 단순한 실용성이나 지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정보의 전달이나 언어를 넘어서 저쪽에 있는 지식의 체계화에도 관여하지 아니 한다. 시적언어는 용이주도하리만큼 자기의식 적이며 자기각성적이다. 그것은 자체내에 포함되여 있는 메시지이기를 떠나서, 두드러지게 매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특색을 지니고있으며, 또 제자신의 언어적특질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고있다. 그 결과 시에 사용 되는 낱말들은 , 단순히 사상전달의 신분을 지니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율적인 구체적 실체 인것이다.86   시는 낱말과 의미를 분리시키기보다는 , 오히러 –놀라운 일이 겠으나- 낱말이 취하게되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런 점에서 시는 또 다시 보통의 언어활동의 정도를 한층 더 높인다… 낱말의 시적용법에 의하여 애매성은 낱말의 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옮겨가는 낱말이 낱말의 구조사의 역활이 전환되 여진다.87   에술작품은 모방(내용을 지니고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형식의 완전한 우월이라는 관념을 대치시키는 일이기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되여지는 문학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문학다운 것이다. 즉 다른 실체를 지각해볼수 있는 창문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것이다. 내용이란 문학형식의 한 기능에 불과하며, 형식을 넘어서서 혹은 형식을 통해서 감지될수 있거나 , 형식과 분리될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실은 작품이 내용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일뿐인 것이다. 사실인즉 작품은 스스로의 발생, 스스로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고있을 따름이다.91   예술이라는 과정의 생명력은 , 행동안에서 볼수있는 그것의 수법에 의존한다는것이 포르마리즘의 중심명제이다. 그리고 장치를 노풀시킴으로써, 자신이 집필할 때 의지하고있는 비친숙화의 기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학예술가는 모든 장치들중에서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장치에 접근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술을 작동케 하는 과정에 은밀히 통해있는 일탈감각인것이다.95   변혁은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기거나 혹은 그 부산물로서가 아니고, 내적요구에 의하여 재촉되고 추진되여서, 자기개성 적이고 자기 페쇄적인 문체나 장르의 연속을 펼치는 일이라고 볼수있는것이다. … 참신한 형식이나 문체는 낡은것에 반역하 는데서 출현하는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의 반대명제로가 아니고, 영속성이 있는 요소들을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 한에서이다. 이것 역시 일탈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의한것이 일상적인것이 되면 다른것으로 바뀌여질 필요가 생긴다.98   패로디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왜냐하면 패로디는 언제나 다른 문학작품을 배경으로 삼고, 그것의 수법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떠나기때문이다….페물이 되여버린 수법은, 내버려지는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아니 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반복되여…재차지각이 가능해진다.98   문학은 자신을 개신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의 경계선을 다시 긋곤한다…. 모든 에술은 연속성안에 있다는것, 고등예술은 자신을 갱신키 위하여 그 연속성의 범위내에서 경계선을 정기 적으로 옮기고 있다는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불변인것은 문학 항시 나타내어야 하는 문학다움의 감각이라는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든 문학을 규정하고있는것은 그것의 구조적역활 즉 그 시대의 비문학과의 대립인것이다. 99   유럽의 구조언어학   언어가 정보전달에 사용될 경우에는 인식적 혹은 지시적 기능에서 작동하고, 말하는 자나 글쓴 자의 기분이나 태도를 나타내기에 사용될 때는 표현적 혹은 정감적 기능을볼수있고… 언어가 …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사용되여진다   …체코의 언어학자 얀 무카로브스끼가 말하는것처럼, 이러한 전경화 현실화라는 행위는 중요하다. 시적언어는 코뮤니게이션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고, 표현행위 즉 언어행위 그자체를 전면에 내놓기위해서 사용 되고있다.103   야콥슨jakobson   은유—어떤유사점, 상합적, 공시적, 수직적, 직유. 초현실주의 , 능기생성, 시전경화,  해석불가 환유—인접성, 련합적, 통시적, 수평적, 제유, 입체파. 능기결합, 산문전경화,  해석거부   은유와 환유는 의 비유인것이다. ‘그차는 딱정벌레처럼 전진해 갔다’와 같은 은유에서는 ,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자동차의 그것에 등가인것으로서 제시되여있고, ‘백악관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한다’ 라는 환유에서는 , 어떤 특정의 건물이 합중국의 대통령에게 등가인것으로 제시되여있다.105   소쉬르의 개념을 적용하면 은유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질상 상합적이여서 언어의 수직관계가 리용되는데 , 환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성질상 연합적이여서 언어의 수평의 관계가 리용된다. 106   인접성위에 유사성이 들게 놓이므로서, 시는 완전히 상징적이고 다양하고 다의적인 본질을 부여받게 된다. 108   시는 보통언어를 그냥 장식하는것이 아니고 , 별개종류의 언어를 구축하는것임을 의미한다. 시적이라는것은 수사상의 장식으로 술화를 보완하는것이 아니고 , 술화와 그구성요소 모두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이다…. 시적이라는것이 경합해서 존재하는 다른 어떠한 기능들보다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아졌을 때, 시가 생기게 되는것뿐이다… 그래서 시적기능은 언어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고 다만 그중에서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기능인것뿐이다. 112   사실주의시는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현대시는 해석을 요구하면서 해석불가능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말)   의미는 그 특징상 전의할뿐만 아니라 , 전의될수가 있고 또 전의되여야 한다.116   만일 코뮤니케이션이 메시지 그자체에게로 지향하고 있다면, 이 때는 시적 혹은 미적기능이 우세해진다고 말할수 있다… 언어의 시적기능은 … 기호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촉진시킨다. 그 결과 능기와 소기, 기호와 대상간에서의 어떠한 관계라도 자연스럽다 거나 분명하다고보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부숴뜨리리게 된다.118   양식은 자기 지지적이며, 그 양식이 바로 주제인것이다. …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형식과 내용을 재통합하는데 소용되며, 또 본성을 유효토록 하기위해서 작품을 메시지의 용기가 아니라, 그 본성을 유효하도록 하기위해서 자신의 령역을 넘어서는 지시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조절적이고, 결국에는 자기존중적인  본질적통일체로 제시 하는데 소용되는것이다. 결국 작품은 Piaget의  말을 빌면, 하나의 구조인것이다.119   구조주의는 그자체가 언어학적 모델에서 발전했었는데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인 문학에서 그 모델과의 유사성 이상의것을 가진 대상을 발견하고 있다. 양자는 동질이다라는것이다.120   그레마스 A.J.Greimas   우리는 차이를 지각하고 , 그지각의 덕택으로 , 세상은 우리앞에 서 우리의 목적에 맞도록 형상을 취하게 된다121   행위의 내용은 노상 변하고 , 행위자도 바뀐다. 그러나 언술광경은 항상 동일하다. 121   또도로프TzvetanT0d0rop   문법이 어째서 보편적이냐 하면, 그것이 우주에 관한 정보를 모든 언어들에게 알려주고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마는, 그것이 우주자체의 구조와 일치하기때문이기도 하다.132   대담한 개인적창의력이라는 이름에서 낡은 체계를 파괴한다는 의미일것이다. 136   구조주의의 최대의 특색은, 바로 형식을 내용이 되게 하는 일종의 변환작업에 있는것같다… 즉 문학작품은 언어에 관한것이며 , 언어사용 그자체의 과정을 가장 본질적인주제로 삼고 있는것이다.137   형식이 곧 내용이다라는것을 자명한것으로 보고 있기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같다고 보는 낭만파후기의 생각을 시인하 는것이다. 141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서 모든 언어에 생래적으로 깃들여있는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그것이다. 문학의 술화의 본질은 언어를 넘어서가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문학의 존재이유는 없을것이다.) 문학이란, 언어가 자살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흉기와 같은것이다.147   바르트   인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있는것을 변경하고 재구축하는것이다. 148   글쓰기는 결코 코뮤니케이션의 도구도 아니고 , 말할 의도만이 통해가는 열려있는 통로도 아니다. 정밀이니 명료니 하는것과 같은 초역사적인 보편적문체의 양식이나 조건도, 이데올로 기적으로 무구명료함이이란 순수하게 수사학상의 속성이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시대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언어특성은 아니다. …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분류해내지 못하는것은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일체의 인간경험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과 합치되도록 고쳐서 그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것으로 승격시켜 나간다.151   이들 꼬드는 --우리가 인정하든말든—의미를 변경시키기도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생성하는 작용을 하는데 , 그 방법은 무구하다 거나 자유롭다고 하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바깥 어디엔가에 있는 객관적인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것에, 언어자체가 제자신의 중개적이며 형성적인 패턴을 부과할 때의 복잡한 방법에 많이 닮아있다. 그 결과, 적절히 분석되였을 경우의 텍스트가 드러내게 되는것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토도로브가 말하는 뚜렷한 일종의 다양성이다.153   다수성과 애매성은 문학의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보는 생각이라든가, 의미들 상호간에서 신중히 유발되여진 긴장에서 언어의 본성에 관한 많은것이 밝혀질수 있다.155   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가공하고 창조하기위해서 고안해낸 여러꼬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이란 , 어느 의미에서는, 꼬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는 꼬드의 중류장치일런지도 모든다. 문학은 독자에게 꼬드를 상기시키고, 그 꼬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그에게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비평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무슨 도구인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전달해주는 차량, 행동의 수단, 언어의 의복인양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156   저작자의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능기에 주목해야 한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능기를 넘어서서 능기가 암시하는 소기에게로 옮겨가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굴복해서는 안될것이다.158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서 예정된 현실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 언어자체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저작자와 더불어 자신의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위험은 있으나 상쾌한 작업에 독자를 끌어 넣는가… 독자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행진하는데 작가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춤을 춘다.160   쾌락의 텍스트란것은… 향락의 텍스트는 결락감(缺落感) 을 안겨주는것인데, 독자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심리적가정과 그의 취미, 가치관, 기억 등의 일관성을 (어쩌면 따분하리만큼) 불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독자와 언어와의 곤계에 위기를 가져온다.162   능기를 분석하는 꼬드   1.     해석학적꼬드; 설화적인 꼬드, 수수께끼를 구성해 풀어가는 꼬드. 2.     의미소 또는 능기의 꼬드; 의미의 깜박임 반시적꼬드-伴示 3.     상징적꼬드; 群化나 윤곽구축, 대조(2,3은 분별이 불투명) 4.     행동꼬드(프로아이젝트); 연속적사실. 5.     문화적꼬드(대상지시적꼬드); 격언적, 집합적.   예술은 다같이 주어진 자료, 주어진 능기 (즉 텍스트, 화음의 연계)에서 파생된다고는해도, 그것들에서 주어져있지 않는 새로운 현실, 새로운 능기를 창조하고, 또 창의와 미라는 량면에서 본래의것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예술은, 소기의 예술이 아니고 능기의 예술이겠는데 진실로 현대적 이라고 말할수 있다. 170   관계 그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것이지, 관계를 넘어서서 지향되고 있는 어떠한 현실의 세계도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의미의 작용은 언어의 어떤 레벨에서 딴 레벨로의 ,한 언어에서 딴 언어로의 이동에 불과하며, 또 의미란것도 그러한 꼬드전환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71   장미다발은 능기이고 정열은 소기이다. 183   대시작용이라는것은 보통으로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말해지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일이고, 반시(伴示)작용은 말해지고 있는 것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다. 선행되고있는 능기— 소기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호가 , 더높은 단계의 기호의 능기로 되는경우에, 반시작용이 생겨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첫째 세계는 대시작용의 차원이고 둘째는 … 반시작용의 차원이 되는것이다. 187-188   청각적기호는… 시간을 리용하고 …공간적기호는 공간을 점하고... 청각적이고 시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상 상징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에 있어서 도상(图象)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능기는 고도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애매성을 나타내고있다. … 기호론적으로 말하면 애매성은 꼬드의 규칙을 어기는 양식이 라고 규정되여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말씨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다 라는 야콤슨말에…200   파괴성은 –Umberto Eco (a) 상이한 레벨의 많은 메시들은 애매성을 지니고 조직화 된다  (b) 애매성은 정확한 설계에 따른다  (c) 어떠한 메시지에 있어서도 , 거기에 들어있는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은 다같이, 다른 모든 메시지에서의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에 대하여 맥락상의 압력을 느낀다 (d) 한체계의 규칙이 한 메시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있는 방식은 다른 체계의 규칙이 자신의 메시지에 의하여 깨뜨려지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 생겨나온것은 미적개인어 예술작품에 독특한 특수 언어인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대시를 새로운 반시로 부단히 전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질서—즉 확립되는 순간에 자기 확립된 의미의 레벨을 넘어서 끝없이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적메시지가 의미작용을 부단히 행하는 다차원의 체계이기에 , 의미작용이 한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이행하고 있어서 그것의 대시가 일종의 무한 급수적인 양상에서 반시로 된다는것인 듯하다. 그 결과로서, 미적메시지에 대한 최종적인 꼬드풀이나 글읽기에는 켤코 도달하지 못하는 터이다. 왜냐하면 애매성의 하나하나가, 다른 레벨들에서  더욱 많은 같은 계통의 규칙위 반을 생성시키고 , 또 예술작품이 어떤 점에서든 말하고있다고 생각되는것을 벗겨버리거나 다시 조립하거나 하도록 노상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200-201   다양성- 애매성-규칙위반-장식바꾸기-다차원-다의미   독자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글쓰기나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다르게 세계를 보게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예술도현실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처하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인것이다.202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술작품이란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이란 견해다. 이러한 예술가는 , 말과 이미지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의 건너편에 있는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류형의 예술가는 번역가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또 하나의 태도는, 예술이란 독립해서 존재하고있는것들로 성립되는 세계이다하는 견해다. 말, 그리고 말들과의 관계, 사고, 그리고  사고들의 비꼬임, 그것 들의 분산, 이러한것들이 예술의 내용인것이다. 예술이란것은 , 창문에 비해질수 있다손치더라도 .대강 그려진 창문에 불과 하다.204   책이라는것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하는것으로 보이는것은 , 현실의 물리적세계가 아니고 , 다른 차원으로 환원된 세계이다. 205   글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글이 만든다.(2015.1.23.)
1053    자작시 해설 2 <물고기그림>/심상운 댓글:  조회:1128  추천:0  2019-12-19
자작시 해설 2 물고기 그림 / 심상운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하이퍼 시의 심리적 장면 변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시 겨울저녁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있는 물고기와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가는 그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 이 시의 캐릭터다. 그들은 문맥 상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없이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내’가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의 새를 넣었을 때, 그가 설경 속을 나오는 장면은 물고기와 그와 내가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분명한 것은 그 관계가 현실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는 나의 심리적 현상이 만들어내는 관계 즉 마음의 관계(마음속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을 직관하면서 심리의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 이미지를 포착하여 한 편의 시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변화의 기법’은 인간의 내면의식을 포착하여 표현하는데도 하이퍼 시의 기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는 가상세계를 표현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를 보면서 나름대로 추리하고 상상하는데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 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문덕수 「내면세계의 미학」)라는 말에 동감한다.그리고 그 말은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김융희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시학」)는 말과 이음동의(異音同義)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시의 중심 포인트는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는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서 설경으로 떠나간 그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것은 하이퍼 시의 장면 변화의 기법을 시에다가 끌어들인 것으로 그 기법이 시인의 내면적 심리현상을 표현하는데도 효과적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논리적인 인과의 법칙에서 잠시 벗어나 시인이 보여주는 장면(이미지)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추리해보고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마그리트의 우산을 들고 찾은, 가을 강에서 만난 싯달타의 나비 이인선(시인, 평론가)   그 동안 문단의 원로시인들 위주로 평론을 연재하였다. 코스모스가 성큼 계절의 대문을 열고 들어선 가을날엔 이름과 나이를 잊고 싶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뭉개구름 따라, 들국화 따라 걷고 싶다.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하염없이 강가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기고 싶다. 다음 소개하는 정기만과 윤유점의 시 2편은 우리들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힐링 시다. 머리를 맑게 씻어주는 서정적 그리움의 세계를 만나보자. 정기만의 「싯달타와 나비」는 이미지 확장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거리가 먼 낱말들의 이미지 합성과 충돌로 상상력의 비약을 한다. 돌출된 이미지 연출을 실현하기 위하여 낯선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래 시는 정기만의 「싯달타와 나비」 전문이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냐?/ 나는 은둔한 꽃의 날개에서 온 잃어버린 왕국/ 갈가마귀 검은색 옷을 입은 암울한 상처// 협곡 사이로 선회하며 끼륵끼륵 여운을 끌고/ 백사처럼 휘는 물거울에 비친 내 모습//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달음질하는 흰 토끼, 하얀 등을 네가 본 것이냐?// 잊혀진 나라를 덮은 혼돈의 자아/ 마침내 껍질을 벗고/ 비린내 나는 선창을 배회하는 나비// 얼어붙은 이 계절이 끝나는 즈음/ 허물에 싸여 속살거리는 은빛 유혹/ 깨뜨리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 색깔을 벗은 싯달타의 나비// ― 정기만, 「싯달타와 나비」전문 위의 시는 시적 거리가 먼 것끼리 결합하여 이미지 충돌을 하고 있다. 싯달타와 나비의 낯선 대비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연상시킨다. 위의 시는 대조법을 사용하여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기만의 시는 김기림의 시와 차별화된다. 김기림의 시에서 ‘나비’의 역할보다 정기만의 시에서 보여주는 ‘나비’는 깨달음의 층위가 더 높다. 김기림의 나비는 거대 바다와 왜소한 나비를 대비시켜 감각적 미의식을 주는 표현주의를 강조한 유미주의 시다. 그러나 정기만의 나비는 ‘싯달타의 나비’로 표현주의에 의미화를 삽입하였다. 정기만의 ‘나비’는 ‘싯달타의 나비’로 깨달음의 여러 입자와 깨달음의 껍질이라는, 해탈의 외연과 내연을 내포하고 있다. ‘은둔한 꽃의 날개’와 ‘잃어버린 왕국’은 등가의 가치를 가지는 종속절로 감각적 미의식을 지닌 문장으로 서로 매치시켰다. 다음 시행 ‘협곡 사이로 선회하며 끼륵끼륵 여운을 끌고’ 의 종속절로, ‘백사처럼 휘는 물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치환되는 문맥은 청각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가 예리하게 맞물리며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랜 사유 후에 혼돈의 자아는 은둔의 왕국에 입성한다. 은 흰색을 주조로 한 그림이다. 흰색은 순수와 정결의 상징이다. ‘흰 눈, 흰 토끼, 하얀 등’ 흰색이 세 번 반복된다. 수도자는 몇 겹의 번뇌의 강을 건너야 선의 황홀한 하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일까? ‘푸른 하늘’과 ‘나비’는 ‘선창의 비린내’와 ‘은빛 유혹’을 밀어내고 마침내 무념무상 깨달음의 경지로 해탈한다. ‘색깔을 벗’고 ‘싯달타의 나비’가 된다. 억압을 벗어던진 싯달타의 나비는 몸이 가볍다. 팔랑팔랑 가벼운 날갯짓을 하며 눈부신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색깔을 벗는다는 것은 탈피다.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이며 창조행위다. 자유와 예지의 영역이다. 색은 사바세계의 거짓의 옷이다. 진리가 아닌 허욕이다. 싯달타의 나비는 순수의 결정이다. 위의 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고행의 과정을 원초적 생명력과 환희를 그리며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감각을 채색하였다. 위의 시가 상상력의 비약적 확장을 하면서도, 문장의 객관화를 유지하는 이유는, 선시의 예언서 같은 신비함을 사물시의 객관화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은 비약적이지만 시어에 사용한 사물은 지극히 현재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비약적인 상상력은 장치를 받쳐주지 않으면 문장이 날아가고 안정감을 상실한다. 시는 시적 논리에 맞는 상상력을 펼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에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으면 운동감이 없고 딱딱한 시가 된다. 표현주의의 감각적 미의식을 외면한 시는 답답하다. 정기만의 ‘싯달타의 나비’는 이미지들이 비상과 곡예를 펼친다. 아래 시는 윤유점의 「마그리트의 우산」 전문이다. 윤유점의 「마그리트의 우산」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그림의 패러디 시 작품이다. 그림을 패러디한 시는 객관화된 상상력을 획득한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기가 쉽다. 그 이유는 시를 쓰기 전에, 그림의 영상이 뇌에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미술의 시녀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시보다 늘 앞장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다. 그 한 예로 샤갈의 그림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샤갈은 이미지의 덩어리들을 그림에 뭉쳐놓고 있다. 샤갈 그림의 둥둥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자는 시각적 전위예술 작품이다. 윤유점의 시는 이미지를 객관화하여 감각적으로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겨울비는 한 방울의 눈물이다 한 잔의 물이 된 거리의 풍경으로 나는 흐려지는 우산을 편다 빗물에 뜬 내 발자국은 원점으로 일그러진다 수직으로 떨어진 비는 어느새 동심원을 그린다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늘 사선으로 떨어지면 가로수 사이로 희미한 빛들이 흔들린다 나는 출렁대는 내 흔적을 밟지 않는다 발걸음을 멈추는 동안 그림자는 빗물 속에서 서럽게 부유한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울음을 삼키며 나는 증발하고 하염없이 비에 젖는 나를 본다 우산 속은 절대공간이지만 수많은 우산들이 틈에서 내 소실점을 찾지 못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며 휘발된 나는 기억을 지우며 빗물에 젖은 모호한 익명을 그리워한다 뒤돌아보아도 내가 걸어온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빗물은 결코 빗물만은 아니다 ― 윤유점, 「마그리트의 우산」 전문   위의 시는 무채색 그림이다. 단문과 복문의 흔적이 빗물에 씻긴 발자국처럼 교차적으로 반복되며 무늬를 그린다. 겨울은 흐린 이미지의 빗방울 그림을 그린다. 눈물과 빗물과 발자국은 공통된 이미지가 있다. 지난 계절의 흔적을 지우고, 퇴락한 마음의 서정을 따라 흐른다. 조건절과 종속절로 이루어진 겨울비 그 쓸쓸함이‘내 발자국에 원점으로 일그러진다.’ 는 문장을 주목하여 보자. 윤유점의 시는 우울한 기분을 노래하지만, 시의 분위기는 신발이 밟는 빗물소리처럼 찰방찰방 경쾌하다. 빗물에 지워지는 발자국은 그 존재를 증명하려 하여도 부유하는 물방울로 흘러갈 뿐이다. 존재를 흘려보낸 우산은 그 울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현대적 감각이 물씬물씬 나는 윤유점의 시를 들고, 햇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숨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만난다. 드디어 우산 밖의 새와 우산 안의 새와 격렬하게 조우한다. 접혀진 우산을 펴고 날렵한 그림을 허공에 그려 본다. 무채색 그림 시에 하늘색 공감을 채색한다. 윤유점의 문장은 독자도 캔버스를 펼쳐 놓고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창작의욕을 갖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김선진   잠을 잃은 밤, 강물이 되어 흐른다 아주 긴 강이 밤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 바람도 없는 강기슭에 서서 자꾸만 머리속이 쓸려 감을 알아차린다 나를 건드려 주는 바람 한 점 없이도 밤은 충분히 내게 혼자임을 일깨운다 잠을 잃은 채 긴 긴 강기슭을 내려갔다 거슬러 오르는 물살 빠른 가슴을 아는가, 그대는 이런 밤이면 새벽에 이르는 길도 아주 먼 곳에 있다 아무도 건너지 않는 강나루 이편에서 저편 강나루의 어둠을 지켜본다 자꾸만 밥물이 끓은 후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편안한 아침이 기다려진다 아예 잠을 잃은 밤의 강물이 되감기 필름같이 빨리 흘러가 주었으면 세찬 강바람에 강물이 죄다 쓸려 가 강이었다는 흔적조차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 오늘 밤도 잠을 잃은 밤은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친다.   일상과 일탈을 꿈꾸는, 시적욕망의 불안한 반란 이인선(시인, 평론가)   김선진의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은 제목이 압권이다. 시의 내용에서 보이는 불안과 불면과 동떨어진 제목이다. ‘낯설게하기 기법’을 실현한 반전 매력이 있는 제목이다. 위의 시는 ‘일상과 일탈을 꿈꾸는, 시적욕망의 불안한 반란‘을 표출시킨 작품이다. 시적 화자의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불안과 욕망이 불면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술로의 승화를 기다리는 시적화자의 무의식의 발로다. 시는 불안한 밤을 연모하고, 밤은 불안에서 시를 잉태한다. 시인에게 불면의 밤이 없다면 시의 강물은 말라버릴 것이다. 역발상을 하면 반전이 있다. 잠 못 드는 시인이여, 시를 깨우기 위하여 불안과 불면의 고통 속으로 직진하라. 불면의 밤은 시의 강물을 도도하게 흐르게 한다. 시는 불안과 불면의 강에 돛단배 한척 띄우고 싶어한다. 욕망은 에너지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잉여에너지가 남아있으면 그것을 소모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잉여에너지는 ‘심심하다’라는 형용사를 초대한다. 심심해서 일탈과 반란을 도모한다. 무모한 자는 파멸과 파괴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성과 분별력 있는 사람은 파괴와 재난을 거부한다. 생각의 일탈과 반란에만 머문다. 불안과 불면은 내적 갈등의 표출이다. 감정이 장기간 억압되면 정신병을 앓거나 분노 유발을 하게 된다. 억압과 분노가 계속되면 ‘묻지마 살인’과 10대의 ‘이유없는 반항’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일탈은 시창작으로 실현된다. 연애시는 감정의 일탈의 대표적인 경우다. 상상력의 비약은 하이퍼시를 생산하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분류하였다. 그 부적응을 고뇌하는 과정을 통하여 ‘승화’시킨 것이 시 창작품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사회적 부적응자인 독자가 시인의 그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불안감을 폭력성으로 소모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서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지성은 ‘편안한 아침’을 기다리고, 감성은 ‘나를 건드려 주는 바람 한 점’을 원한다. ‘이편’에서 지켜보는 ‘저편’의 강 건너 어둠은, 발아하지 않은 시적 긴장감이다. 시적 화자는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일상적이고 안정된 주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불안증과 불면증은 갱년기의 호르몬의 불균형이나 노년기의 호르몬 감소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시인은 자신의 감정적으로 더 크게 인지한다. ‘오늘 밤도 잠을 잃은 밤은/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 치는 상황이 반복된다. 소모적이고 병리적인 반복적 패턴은 병을 유발시킨다. ‘되감기 필름같이 빨리 흘러가 주었으면’하고 바라는 시적화자의 바람은 ‘세찬 강바람에 강물이 죄다 쓸려 가/ 강이었다는 흔적조차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반란한다. 시적 화자가 왜 자신의 존재의 근원까지 소진시켜서 ‘무’이고 싶어할까? 상담심리 기법으로 심리적 이유를 분석하여 보자. ‘무’이고 싶어하는 심리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재의 갈등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회피하는 행위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다. 절대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도 자녀와 가정의 부조화로 후회하는 경우를 본다. 위의 시의 시적화자도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부정이다. 둘째, 새로 다시 시작하여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고 싶어 한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서 새로이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소망과 결부된다. 후회는 ‘출발점’이며 인생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다. 사실 새롭게 시작하지 못할 나이는 없다. 10년, 20년, 30년 더 살면 된다. 인생 60, 70, 80에서 더 산만큼 빼기하면 된다. 그러면 시작하는 출발점이 앞당겨진다. 젊은 나이로 새 포지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치는 것’은 생각을 버리고 행위를 도모하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 현존하는 꿈이다. 꿈틀대는 욕망의 분화구다. 터질 듯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완성된 시가 탄생할 것이다. 천재는 ‘계속, 계속 노력하는 자’라는 말을 며칠 전 TV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읽었다. 금방 싫증내고 탐구하지 않는다면 결과물도 평범하다. 시도 열정적으로 학문처럼 그 기법과 표현을 탐구하여야 한다. 노력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역사를 바꾼 예술작품은 지독한 에너자이저들이 만든 업적이라고 한다. 에너지가 없으면 흥미와 동기유발이 안 된다. 초기단계에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물살 빠른 가슴’이 되어 ‘새벽에 이르는 길도 아주 먼 곳’을 향하여 ‘혼자’ 가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라고 시인의 무의식은 예견하고 있다. 예술가의 번뇌와 불안, 불면은 창작의 동기며 과정이다. 불안과 욕망은 시소의 양쪽 끝에 앉은 대치적 상황이다. 일상적 평안을 원하면서도 일탈을 꿈꾸는 것은 예술의 속성이다. 시인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생산과 창조를 위한 신경의 줄타기 과정이다. 시는 안일한 일상을 거부한다. 일상을 탈피하여 일탈을 꿈꾼다. 새벽은 불면의 밤과 맞닿아 있다. ‘아주 긴 강이 밤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면 그 강물에 몸을 섞어보길 권고한다. 김선진의 시는 고통 없이 예술은 잉태되지 않는다는 명제를 일깨워준다. ‘불안과 불면’을 시창작의 필수조건으로 인정하고 역발상으로 접근하여 보았다. 김선진의 시는 새로운 시각으로 시를 바라보고, 시창작 기법을 논의하는 분기점을 제기하고 있다. 시의 물살에 맨몸을 맡기고 둥둥 떠내려가 보라. 절망의 꼭짓점에서 시의 꽃이 필 것이다. ♧
聞香에 들다 가영심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 꽃의자처럼 앉아있다 그윽한 향기에 마음을 입맞춤하듯 깊은 혼을 길어올린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   백리향 잎사귀를 손끝으로 비비면 분홍 입술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우면 나를 따라와서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머물던 그 향기. 백리향 차향으로 빚은, 정서해소와 심리치료의 시(詩) 이인선(시인, 평론가) 허브라는 이름은 몸에 유익한 치료효과를 주는 식물에만 붙여지는 이름이다. 백리향 차는 허브로 분류되는 치료효과가 좋은 차다. 좋은 시는 차향처럼 은근하고 향기로우며 정서해소와 심리치료 효과가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일상에 지친 소시민의 삶에 여유와 향기를 초대한다. 가영심의 시 「聞香에 들다」의 1-4연의 시행들은 차를 마시는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정서해소와 심리치료 효과를 그리고 있다. 백리향의 약효를 모르더라도 ‘분홍 입술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3연 2행)로 시작하는 아침은 상쾌하다. 또한 ‘분홍 향기’로 마감하는 저녁은 열심히 일한 하루의 피로와 노고를 위로받는 치유효과가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작은 사치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일에 쫓기고 마감날짜와 전쟁을 하는 삶은 여유와 향기가 없다. 긴장이 연속되는 생활은 스트레스를 받고 암의 공격에 쉽게 무너진다. 인사동에 가서 비싼 도자기 찻잔을 구입하고, 향기로운 차를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여 보자. 인사동에 간다는 사실은 바쁨과 현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실천이다. 현재를 버리고 옛스러움과 예스러움을 찾는 마음이다. 엥겔지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존감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입의 5% 정도는 문화비 지출항목에서 지출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특히 속도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그 정보를 벗어나서 고요한 침묵에 침잠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자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정서적 일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끔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대치와 억압에서 벗어나서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차향을 사랑하는 것은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달성하는 순간 멈춤이다. 시인은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1연 1행)다. 시인은 어느 시대에나 현재의 경제력과 인지도에 관계없이 자신의 등급을 최고로 설정한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존심이다. 더구나 시인은 시대를 표상하는 샤프한 지성이다. 위의 시를 읽으면 서울 도심의 인사동이 아닌 일상을 벗어나 더 먼 곳으로 여유를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4연 1-2행)우고 ’꽃의자처럼 앉아있다‘(1연 2행)는 가영심 시인의 여유가 부럽다. 위의 시는 먼 곳의 향기로운 백리향 분홍 꽃밭의 가야산 기억을 오늘에 재현한다. 시인은 꽃의자가 되어, 자신이 앉았던 꽃의자에 또 누군가 외롭고 슬픈 영혼을 초대하여 앉힌다. 백리향 꽃향기는 밟거나 흔들어 줄 때 멀리 멀리 퍼진다. 고독과 슬픔은 누군가 상처받은 마음을 정신차리라고 흔들어주어야 치유된다. 백리향 차는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약리작용을 한다. 위의 가영심 시와 백리향 차의 같은 점은 무엇인지 비교분석하여 보자. 첫째, 백리향은 향수의 재료다.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하여 백리향이다. 천리향 만리향도 있다. 백리향은 꽃향을 흔들어 주어야 더 멀리 간다. 시도 이와 같다. 인간의 정서를 흔들어 주어야 시향이 멀리까지 간다. 둘째, 백리향 차는 살균효과가 있다. 차갑게 마셔도 뜨겁게 마셔도 된다. 시도 같다.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키거나 차갑게 이성적으로 만들어 흥분을 가라앉혀 준다. 셋째, 백리향 차는 기관지를 확장하여 호흡을 고르게 해준다. 호흡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시는 분노와 화를 가라앉혀 주고 화병을 치료해 준다. 넷째, 백리향 차는 젊음을 회복해 준다. 소화불량에 좋다. 음식을 먹고 잘 소화시켜야 젊은이다. 젋은이는 과식을 하여도 금방 소화를 시킨다. 그러나 노인은 잘 체하고 소화를 못 시켜서 복부팽만감이 있거나 변비에 시달린다. 다섯째, 백리향 차는 감염을 치료한다. 비타민 A, C가 풍부하여 면역력을 길러준다. 모든 병은 면역력이 약해서 감염된다. 차를 마시는 것처럼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정신과 정서의 면역력을 길러준다. 여섯째, 백리향 차는 혈행 개선과 고혈압에 좋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몸 안의 노폐물을 잘 배출시켜 준다. 시를 읽는 행위는 뇌 안의 노폐물을 배출하여 정신을 정화시켜 준다. 일곱째, 백리향은 입냄새를 제거해 준다. 시를 읽으면 입과 뇌의 구린내를 제거해 준다. 나쁜 말을 하거나 옮기고 싶은 마음이 억제된다. 왜냐하면 콤플렉스와 억압이 해소되어 정서적으로 여유를 찾기 때문이다. 여덟째, 기분이 좋아진다. 억압이 완화되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차를 마시거나 시를 읽으면 하루가 행복하다. 시를 쓰면 일주일이 행복하다. 매일 시를 읽으면 일 년이 행복하다. 시는 백리를 향기를 퍼 나르는 백리향보다 향기가 진하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3연 1-4행) 좋은 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맑고 투명한 향기가 인터넷으로 온 세계로 배달된다. 위의 가영심의 향기로운 시는 백리향처럼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환히 밝혀 주는 행복 바이러스로 정서치유 효과가 크다. ♧
흔들의자     김인숙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래전 보았던 편백나무 숲속 그 아련한 술렁임처럼 고래의 허밍을 들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 그리고 젖은 바이올린의 고요한 선율을 귓속에 담고   곁을 내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소식 없는 소식을 기다리며 가끔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너무 많아서 금세 파동 속에 묻혀버렸지만   탄력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곁이란 그런 것, 흔들리고 싶을 때 맘껏 흔들릴 수 있도록 몸속에 풍향계를 심어주는 것   안락하고 편안한 양수(羊水)의 출렁임 속에 만삭인 여자가 앉아 있다   흔들림 속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 주는 정서치유 효과             이인선(시인, 평론가)  ‘흔들리다’와 ‘흔든다’ 사이에 끼인 자유와 억압을 더듬어본다. 온몸으로 전해오는 차가움과 가벼움을 체감해 본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흔들리지 않는 당신이 그녀를 품을 수 있을까?   사랑의 출발은 흔들림에서 시작된다.   아무 생각없이 사랑이 불현듯이 우연처럼 찾아들고 당신은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위의 시 1연처럼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싶은 때가 있다. 당신도 그녀도.   인간들은 그것에 ‘일탈을 꿈꾸다’라는 제목을 붙인다. 일탈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법적 구속을 받을 정도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자해를 할 정도의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흔들리다’라는 행위는 정서에 자유를 선물한다.   흔들리며 나무가 태양광선을 흡수하여 엽록소를 만들 듯이, 무수히 많은 서정시의 숲을 돌아다니다가 필자는 김인숙의 「흔들의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필자도 때로 흔들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분석이라는 평론의 틀에서 벗어나서 온몸으로 숲의 흔들림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단어 분석, 문장 분석, 작가 분석, 시대 분석, 이미지 분석의 건조하고 낡은 구조를 벗어나서 새로운 산소를 호흡하고, 일탈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거다. 필자는 일을 하면서 즐기고 싶은 두 가지 욕심과 본능이 늘 꿈틀댄다.  드라마와 노래, 미술작업, 무용, 시, 소설, 수필은 흔들리고 싶은 본능에 충실한 예술행위다. 그녀가 끊임없이 당신을 옥죄고 흔들 듯이, 또 당신이 그녀를 끊임없이 옥죄고 흔들 듯이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예술행위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대상을 향하여 흔들지 않고, 객체인 무생물을 대상으로 흔들어댄다. 사물과 사건, 무생물을 생물로 치환하여 객관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흔든다. 파격미가 심하여 전위예술로 치닫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할 정도로 극심하게 정서가 왜곡되도록 흔드는 예술을 싫어한다.   김인숙은 어떤 일탈을 꿈꾸는가?   또한 일탈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 그 과정을 더듬어 보자.  2연의 중심어는 이다.  일상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고요한 일탈이다. 여유로운 자유라고 이름 하여도 좋다. ‘내가 나에게 주는 작은 사치’다.    그러나 3연은 조금 더 진폭이 크다.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깊어진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라는 문장에 집중하여 보자. 죽은 남편, 애인, 또는 어머니가 대상일 수 있다. 그 대상들은 다시 만날 수 없기에 절실히 그립다. 김인숙의 흔들리는 문장에서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흔들리지 않고 꼿꼿한 나무들은 강풍에 부러질 것이다. 자신의 영역과 역할을 지켜내기 위하여 나무들은 나뭇잎을 흔든다. 바람에 몸을 모두 맡기고 흔들린다. 그대도 나도. 당신도 나도 흔들리고 흔든다.   흔들림의 강도가 강하여 쓰나미가 되어 다른 사람을 불행의 늪으로 내몰기도 한다. 소설적 구도다. 자신이 시궁창에 쳐박혀 부러지기도 한다. 시적 구조다. 소설가는 가해자가 되어 적극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 혁명가를 꿈꾼다. 그러나 시인은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어 소극적 방어를 하며 아파한다.  김인숙의 위의 시를 ‘흔들림 속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 주는 정서치유 효과’라고 명명하여 보자.  행위예술은 흔들림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다. 행위 예술가가 왜곡이 심할수록 전위예술을 한다. 그것은 유년기의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부모가 유전으로 물려준 상처를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스스로 자가 정서치료를 한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다. 그러나 딱히 대상이 있는 그리움은 아니다. 필자도 죽은 시인, 소설 속의 죽은 주인공 남자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애통해 한 적이 많다. 예술은 참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일탈이다.  무한대의 자유가 보장된 예술은 극심한 사회적 폐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억압이 계속되어 긴장이 계속되면, 반대급부적으로 적의감이 쌓여서 파괴본능과 폭력성이 증폭된다. 청소년들에게 시를 읽게 하면 긴장이 풀린다.  시에서 사랑을 빼어버리면, 긴장미가 없는 드라마처럼 지루하다.  4연은 드디어 일탈의 대상을 찾는다. 흔들리는 자아를 잡아줄 멘토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정서적인 대상인 예술일 수도 있다. 또는 육체적인 대상인 애인일 수도 있다.  ‘몸속에 풍향계를 심어주는 것’은 그 대상이 불타는 육체적 사랑일 수도 있고, 정신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플라토닉 러브일 수도 있다.   5연은 드디어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생산을 시작한다. 일탈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인간의 긴장감을 풀어주어 생산성을 높여준다. 자유가 주는 광활한 상상력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끝은 자유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다.  그 자유가 예술이다.  ‘안락하고 편안한 양수(羊水)의 출렁임 속에/ 만삭인 여자가 앉아 있다’라는 문장의 주체인 여자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생산의 주체다. 예술로 승화된 생산력이다. 예술행위는 이처럼 생산을 지향한다. 작은 일탈과 자유는 큰 범죄를 예방한다.   김인숙의 시는 점층적 구도를 가지고, 점점 일탈의 종류와 범위가 확대된다. 필자가 심심한 서정시 평론을 거부하는 이유다. 생각할 거리, 쓸 거리, 탐닉하고 즐길 거리를 주는 시는 좋은 시다. 평자와 독자를 지루하게 몸을 비틀게 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필자가 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평론을 쓰면서 시를 선정하는 기준은 독자를 힐링시켜 주는 시다. 문학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이나 어려운 작품보다 쉽고 정이 가는 느낌 있는 시를 선정하고자 한다. 시의 참맛을 느끼도록 자연스럽게 독자를 유도해 주고자 한다. 오늘 김인숙의 시를 읽으며 1단계에서 5단계까지 힐링을 업그레이드하기 바란다. 이인선 평론가 약력   필명 이선. 월간『시문학』등단. 신춘문예 평론 등단.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부회장, 한국문화예술공연협회 회장, 양천문화원, 광진문화원, 성동구민대학 시창작반 지도교수. 양평 시와 도자기 힐링캠프 대표. 완도전국시낭송대회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문학분야 유공 표창장, 한국현대시작품상, 푸른시학상 수상. 한국문학비평학회 문학비평상 수상. 평론 엔지오신문 2년 연재 100편, 한국문학신문 연재, 웹진시인광장, 가온문학, 시문학, 한국인문학 등 150여 편 발표. 시집: 이선 첫 퍼포먼스 시집『빨간 손바닥의자』, 이선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앵무새 죽이기 채수영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 구부러진 세상에 곧은 길을 가는 사람의 그림자는 길고 고독의 함량이 더해진 슬픔 앞에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와 아름다운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는, 흰색의 상징성 이인선 무지개는 빛의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신기루 같은, 곧 사라지는 꿈의 판타지다. 큰길 건너, 아파트 건너, 먼 산 위에 걸려있는 무지개 구름마을을 찾아 떠나지만 무지개는 만질 수가 없다. 꿈의 완성체로 무지개가 상징성을 갖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물방울이 모여서 태양광선이 반사 굴절되어 나타나는 반원들의 집합이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는 7가지 색깔이 조금씩 겹쳐진다. 그러나 각각의 색깔은 스펙트럼 효과를 나타내며 빛낸다. 채수영의 시 「앵무새 죽이기」를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는, 흰색의 상징성’으로 해석한 이유는 흰색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흰색이 흰색이기를 고집하면 흰색은 다른 색으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나 독창적인 예술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주장과 독립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한다. 『좀머씨 이야기』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ϋskind)는 세상과 단절하고, 수년 동안 숨어 지내면서 자전적 소설을 집필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문명으로부터 도피하여 자연의 원시적 삶을 살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독특함과 창조성을 획득하였다. 위의 시는 11-12행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주제다. 하얗게 살아남은 예술을 위하여, 시인은 1-10행의 아픈 통점을 거쳐야 했다. 위의 시 1행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라는 명제를 분석하는 일은 채수영 시의 흰색의 상징성을 분석하는 기본 틀이다. 흰색을 흰색이라고 말하기 겁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반반 양념통닭처럼, 빨강색과 파랑색이 분명하게 반반으로 나누어진 태극기처럼 우리는 좌파, 우파라는 2분법적 사고로 분류당하고 있다. 반반의 경계선에서 좌충우돌하며 집단적 불신은 개인의 존재적 불안감을 야기시키고 있다. 흰색의 삶을 사는 사람은 무향무취의 삶을 산다. 흰색을 주장하며 하얗게 살았기 때문에,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흰색의 이미지를 분석하여 보자. 흰색은 ‘순결하고 깨끗함’을 상징한다. ‘연약하고 고상하며 슬픈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백의민족이라 표현되는 집단 이미지도, 역설적으로 저항을 인내하는 순종의 착한 이미지를 대변한다. 백색 이미지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목련의 백색 이미지는 화사하고 찬란하며 고귀하다. 예부터 조상들은 흰색을 청백리의 상징으로 존귀하게 여겼다. 그러면 위의 시 1-10행에서 흰색을 지키기 위해서, 시적화자인 시인이 지불한 대가가 무엇인지 분석하여 보자. 흰색을 유지하는 것은 안과 밖, 경계를 긴장하며 지키는 수고가 따른다. 흰 색 옷을 입고 외출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상상이 된다. 흰색의 청결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사에 조심한다. 혹 음식을 먹다가 김칫국물이라도 튀면, 흰색 옷에 붉은 얼룩이 진다. 얼룩은 순수하지 않다. 흰색은 얼룩을 거부한다. 순백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시인은 백색의 본질을 지키는 청렴결백 이미지에 자신을 가둔다. 흰색은 흰색을 고집한다. 흰색은 흰색에게는 절대 선이다. 흰 옷에 튄 김치국물 같은 얼룩은 경계선 안의 영역에 속한 자아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경계선 밖에서 파생된 타자의 침략이 원인이 되기도 하다. 본질과 원인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흰색인 자아는 슬프다. ‘구부러진 세상에서 곧은 길을 가’려니 시적화자는 고독하다. 흰색을 고집하며 사는 일은 외로운 ‘개척자’의 길이다.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5-6행)으로 살아 본 사람만이 안다. 당당하게 의협심이라고 우기곤 하지만, 가끔 도발하는 눈빛을 만나면 확신이 의심이 되며 풀이 죽기도 한다.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7-9행)이다. 늘 구부러진 세상(3행)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끌벅적 재미있게 산다. 이상주의를 버리고 현재에 자족한다.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9-10행)로 흰색은 산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1-3행)이다. 홀로 고독한 도전과 실험을 하는 흰색은 빛의 삼원색. 밝고 큰 파장을 지향한다. 역경과 억압에 구속당하기도 하지만 당당한 자부심으로 산다. 궁극에는 흰색 무지갯빛 스펙트럼이 펼쳐는 황홀한 절정이 기다리고 있다. 무지개는 손에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존하는 대상이다. 그 무지개 마을에 당도하기 위하여 몇 개의 무지개 씨앗을 시인들은 기르고 있다. 그것은 땀과 용기있는 개척자 정신이다. 시를 쓰는 일은 구도의 길이다. 참 시인이 되는 길은, 매일 매일 걷는 ‘좀머 씨’처럼 흐트러짐 없이 쉬지 않고 정진하는 일이다. 놀고 마시고 춤추는 자, 세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자 누구인가?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기 위해, 시인은 에너지를 과잉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언어의 창조자로서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에 힘써야 진정성 있는 개척자다. 흰색이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기까지, 어쩌면 시인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저당잡힐 지도 모른다. 위의 채수영의 시를 읽으면 시의 도를 깨치기 위하여,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고독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그것은 형벌 같은 아름다운 고행이다. 앵무새가 붉은색, 초록색, 노랑색 털을 부리로 모두 뽑아버리고, 흰색 털만 키우는 잔혹한 아픔이 묻어난다. 흰색은 무념무상의 색이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영원한 이상주의다. 채수영은 상흔을 들추며 고백록처럼 시를 적어나간다. 탈색된 잠재력의 무의식이 표출된, 표백된 그림 같은 시다. 순수라는 그물로 짠 천사의 흰 날개도 휴식을 필요로 한다. 하늘에서 추락하거나, 나무 위에, 달의 옆구리에 비상착륙하는 천사의 흰 날개를 인간은 본 적이 없다. 주름살 없는 순백의 맑고 투명한 아기피부,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듯 푸른 눈은 예지를 관통한다. 원망이나 불평은 신의 영역이 아니다. 채수영의 시는 비상하는 흰색 날개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서, 흰색 스펙트럼 무지개를 관리하는 시인의 시창작 과업은 고단한 희락이다. ♧
1047    평론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1 인연설 / 문덕수 댓글:  조회:1042  추천:0  2019-12-19
평론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1   인연설 / 문덕수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재해석한 선시(禪詩)의 상상력과 환타지 이인선(시인, 평론가)     문덕수의 「인연설」은‘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재해석한 선시(禪詩)의 상상력과 환타지로 집약된 인생에 대한 해석적 시각의 시다. 선시의 특징과 상상력의 확장이 주는, 꿈속 같이 아름다운 환타지한 이미지의 정원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꽃나무 밑에서 잠깐 낮잠을 자는 동안 꽃잎이 어루만져주는 세계는 인간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다. 여러분도 잠깐 눈을 감고 오수에 잠겨보기를 권유한다. 왜냐하면 위의 시는 아름다운 꿈속 여행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인연설 」은 장자와 나비 내편 제2편의 이야기의 모티브를 주제로 시를 구상한 것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스스로 즐겁게 느끼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한 장주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는 이야기는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장자와 나비는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넘나든다. 현대의 무의식 철학개념을 장자는 BC 300여 년 경 이미 마스터 하여 풍자시로 지었다. 그러나 문덕수의「인연설」은 장자의 나비를 뛰어넘는 완성도 있는 작품이다. 철학과 유미주의를 만족시킨 작품이다. 위의 시는 14행으로 씌어진 서화처럼 짧고 아름다운 시다. 지하철역에 게재하기 좋은 내용이다. 지친 시민들에게 주는 위로의 문학이다. 또한 시낭송가들이 낭송하면 대중이 좋아할 감각적인 시다. 위의 시는 두 부분으로 내용이 나뉜다. 시의 상반부 1-10행‘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9-10행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의 내용과 이어지는 11-14행 하반부는 선시 형태를 하고 있다. 위의 시의 선시적 요소는‘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9-10행)/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11-14행) 부분이다. 장자의 나비처럼, 시적 화자인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꿈속인 듯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을 날아간다. 비현실적 환타지가 몽상적이다. 시를 시적이게 만드는 모든 장치를 숨겨 놓은 압권의 문장이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도 장자의 시가 원본이지 않을까 필자는 유추해 본다. 필자는 위의 시를 라고 명명하여 본다. 시에 사건과 스토리가 있다. 1-2행은 영화의 전개 부분에 해당한다.‘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나다니얼 호오손(Nathaniel Hawthorne)의 데이비드라는 소설이 상상된다. 여행을 떠난 미소년이 샘물가에서 낮잠이 든다. 자식이 없는 부자 부부가 지나간다. 깨어나면 아들을 삼고 전 재산을 주겠다고 하나 소년이 깊이 잠들어 있으므로 깨우지 않는다. 그 다음 도둑이 지나간다. 잠이 깨면 돈을 빼앗고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으므로 소년을 깨우지 않는다. 그 다음 아름다운 처녀가 지나간다. 만약 그 미소년이 잠에서 깨어나면 결혼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으므로 깨우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자기에게 닥칠세 가지 위기를 모른 채 여행을 계속한다. 위의 시 3-6행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나다니얼 호오손의 소설보다 잠자는 동안에 펼쳐지는 자유로운 꽃잎의 희롱이 생의 단면처럼 아름답다. 허허로움이 선시적 형태미를 지니고 있다. 객체를 만져주는 대상이 꽃잎이다. 꽃잎이라는 사물은 생의 주인공으로 부각하여 으스대던 부정어를 여과시켜 준다. 전쟁, 불화, 시기, 질투, 불평등이 사라진 세계다. 위의 시 9-10행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부분은 드라마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11-14행은 위의 시의 주제부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 날아가고 있었다.’ 부분은 영화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필자는 이 부분을 소설의 부분으로 분류한다. 문덕수는 마지막 완결부를 환타지로 처리하고 있다. 나비는 애벌레가 그렇게도 꿈꾸던 이상향의 세계다. 인생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고, 꽃나무 밑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나비가 되어 긴 여행을 다시 떠나는 아름다운 여정으로 생을 미화하고 있다. 천상병과 문덕수 시의 관점 차이는 무엇일까? 천상병은 인생을 잠깐 소풍 온 것으로 보았다. 소풍의 시간은 하루의 개념이다. 문덕수의 인생관은 잠깐 낮잠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다. 1-2시간, 혹은 20-30분의 짧은 시간의 개념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잠깐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고 본 것이다. 위의 시의 시적 매력은 다음 구절이 압권이다.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 왼 몸을 안아보고 가고, 또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 입술, 이마를 부비고 문지르고, 한 잎이 내려와서 손끝 먼지를 닦아’낸다는 발상에 주목하여 보자. 시적 화자가 주인처럼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잘 때, 꽃잎은 마치 겸허한 젊은 남국 여인처럼 주인의 몸을 안아주고, 입술과 이마를 부비고, 손톱의 먼지를 닦아낸다. 꽃잎은 시적 화자의 세속의 때를 닦아주는 정화와 순수다. 또한 위로와 애무다. 고단하고 지친 인생의 새로운 에너지원이다. 지고지순의 선이다. 꽃잎은 신의 부드러운 손길 같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는 대단원이지만 미완이다. 현대 유행하는 영화처럼 끝이 아닌 미완성으로 독자에게 상상력의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쇼팽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영혼을 빗소리처럼 두드리는 여운이 길다. 필자도 이 시를 여러 번 읽다보니 시에 흠뻑 빠져든다. 애송하고 싶어진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싶어진다. 좋은 시가 주는 매혹적인 힘이다. 그 꿈길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또 내가 사랑한 보들레르의 시, 박남수의 시,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작품, 프리다 칼로의 그림일 수도 있다. 또한 이사도라 덩컨의 춤, 광기어린 또스또예프키를 만나기 위한 꿈길이다. 시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요소는 무엇일까? 필자는 아름다운 상상력이 이끄는 감각적 미의식의 공간이라고 본다. 시를 향유하는 것은 산만하고 복잡한 현실을 떠난 여유다. 계산과 욕심 버리고 잠깐 쉬는 휴지다. 미완의 공백이다. 인생은 생로병사, 희로애락 슬픔과 실패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모든 슬픔은 꿈과 같은 찰라의 순간이다. 문덕수 시는 독자를 흠뻑 적시는 위로의 문학이다. 경건한 아름다움이다. 꽃비로 정화된 독자는 새 힘을 얻어 또다시 노동 현장으로 향할 힘을 얻는다. ♧  
1046    하이퍼시의 탈구조 / 이인선(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1014  추천:0  2019-12-19
하이퍼시의 탈구조     이인선(시인, 평론가)     하이퍼시는 기존의 서정시와 현대시의 구조를 변형하여 새로운 시 형태와 구조로 창작된다. 아래 제시한 시는 하이퍼시의 구조변형을 실현한 시다. 각각 시의 구조를 살펴보고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의 차별화된 방법을 논의하여 보자. 하이퍼시는 현대시의 서정과 회화적 이미지를 굴절하거나 단절, 삭제하여 새로운 감각적 자극을 시도한다. 비약적 상상력은 SF 공상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재현된다.   1. 하이퍼시의 추상화 기법   아래 시는 심상운의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전문이다. 심상운의 시는 하이퍼시의 여러 구성요소를 지니고 있다. 심상운의 시는 사건이 네트워크로 구성되며 시간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한다. 심상운의 시에서 보여주는 서사는 단일구조를 배제하고 다선구조를 보여준다.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 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 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 시 20 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 都市建築物 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 심상운 ,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전문   위의 시는 제목부터 도형을 활용하고 있다. 3차원, 4차원의 기하학 그림 같다. 하이퍼시는 분리와 삭제가 가능한 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각형이나 삼각형, 또는 원의 어떤 개체 한 개를 빼도 시의 형태를 잃지 않고 사각형의 틀을 유지한다. 위의 시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라는 도형언어를 사용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네모는 확장되어 와 결합과 분리를 한다. 사각형은 창문과 벽으로 대별되는 현대사회의 소외문제와 사각형 경찰차로 대별되는 대형사건을 링크한다. 은 도형들의 무형질의 데몬스트레이션 (Demonstration)이다. 노랑풍선은 사고로 죽은 ‘세월호’ 학생들을 암시한다. 심상운은 교사출신이라 학생들을 보는 마음이 더 애틋할 것이다. 풍선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빈다. 무의식에 내재된 불만을 폭로하는 도형들의 무언극이다. 노란풍선들의 물결은 대도시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 판타지를 그린다. 아이슬란드의 육각형 빙산과 육각수 바다가 사각형의 도시건축물을 파괴하는 장면은 심각한 인류의 재앙을 암시한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현장감이 있다. 극대화된 상상력이 의미확장을 한다. 2. 하이퍼시의 자동기술기법   자동기술기법 시창작 기법은 임의성과 우연성을 통한 다양한 의미확장과 탈개념을 추구한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아래 시는 박서영의 「홀수의 방」 1연이다. 자동기술기법 문장기법의 의식의 흐름을 좇는 탈구조의 시다.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위의 시에서는 앞의 문장을 뒤의 문장이 이어받는다. 받은 문장은 파생적으로 갈라지며 다음 문장과 이미지 분산을 하며 연결된다. 으로 이미지 파생을 하며 같은 낱말과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단어조합을 하며 의미가 확산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꿈이었나봐’라는 독백체 문장을 삽입하여 상황을 꿈으로 설정해 버린다. 위의 시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한 자동기술기법의 시다. ‘잊겠다는 말’은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의식의 소리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행위는 빨리 끝난다. 그러나 이별 후의 감정의 잔재는 길게 남는다. 자아를 냉정하게 분철한 연애 이별 시다. 애인과 이별을 한 순간부터 사랑의 감정은 시작된다. 한쪽은 연애를 끝냈지만, 다른 한 쪽은 연애기억을 삭제하지 못하고 대상을 그리워한다. 다음 문장은 로 확장된다. 그 다음 문장은 으로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였다. 그 다음 문장 ‘그곳은 어디인가 ?’라는 물음은 로 연상작용을 하며 명사와 동사로 단어가 이동하여 연결된다. 연상작용으로 무의식의 흐름기법이 상황을 바꾸면서 장면전환이 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시에서 문장을 세련되게 한다. 고백적 장면전환과 상황제시를 하며 초현실주의 시작품을 만들어낸다. 자동기술기법은 무의식의 흐름 기법을 실현하는 하이퍼시 시 창작 기법이다.   3. 하이퍼시의 통합구조     하이퍼시는 통합구조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시 개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구축한다. 시의 탈 영토화를 실현한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필명 이선으로 발표한 시다. 아래 「이혼 견적서 」 전문을 읽고 하이퍼시 방법론을 논의하여 보자. S# 3   상담 대기실에서 , 나는 행복지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시간과 욕망의 간극 사이, 퇴락한 문장의 절취선에서 쾌속냉동과 쾌락냉동의 빙하점에서, 부부의 비극과 응징은 시작되었다ㅡ 무대 전등이 꺼지고, 감독의 Q 사인. 그녀의 구겨진 실크블라우스, 3번째 단추가 풀어진다. “감독님! 여배우의 왼쪽 볼에 마릴린 먼로 섹시점을 찍을까요?”   그래요, 순수와 열정 따위, 자극과 감각 따위는… 잊었어요. 자정의 감정분기점을 지나 05:38 지하철이 개통되면 세상은 곧 문명한 이성을 회복할 테니까   침실문 밖에서 서성대는 그. 침실문 안에서 망설이는 나. “여전히 대치 중”이라는 말로 치환되는 21 세기 결혼공화국   “본능과 애욕의 나침반 좌표축을 흔드는 당신은 누구세요?” ― 어제는 내 행복의 시작점이었던, 당신. 오늘은 또 내 스트레스의 꼭지점인, 당신   구겨진 실크블라우스가 펴지고, 그녀의 3 번째 단추가 잠겨진다   (슬로우 모션으로 ). F.O(Fade Out)   ― 이선 , 「이혼 견적서 」 전문   위의 시는 시나리오 용어 ‘S# 3– 감독의 Q 사인- (슬로우 모션으로 ). F.O(Fade Out)’를 차용하고 있다. 시의 각 연들은 대사와 장면전환 등 시나리오 요소를 삽입한 탈 구조를 실현한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난해시로 단정하면 안 된다. 하이퍼시는 상황시다. 내용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절대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단어의 뜻을 해석하여 스토리를 연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필자의 졸시 「이혼 견적서」는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진 21 세기형 부부의 위기인 매너리즘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생은 연극이다. 감독의 Q 사인에 따라 부부는 일생 동안 드라마를 찍는다고 해석하였다. 신혼 때의 짜릿한 성생활도 권태기에는 서로 데면데면해진다. 파국을 맞아서 이혼 직전 상담심리치료를 받는 부부가 요즘 늘고 있다. 행복지수도 낮다. 성격차이라는 말은 성, 기호, 생활패턴에서 부부 쌍방이 불통함을 의미한다. 위의 시는 시나리오 형식의 추리극을 형식을 차용하였다. 추리영화처럼 장면전환이 될 때마다 또 다른 위기가 펼쳐진다. 읽지 못한 영화자막처럼 틈새가 주는 미학적 요소가 숨어 있다. 하이퍼시는 ‘보여주기’만하는 시다. 위의 시는 시나리오 기법의 시에 영상시의 색채감과 운동감을 합한 통합성을 보여 준다. 탈구조를 하여 시의 형태를 변형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3편의 하이퍼시의 형태는 탈 구조를 실현하고 있다. 기존의 서정시의 형태를  변형하여 비약적 상상력을 통한 가상현실세계를 추구한다. 또한 미술, 무용, 연극, 영화의 여러 요소를 시에 차용하여 새로운 시 형태를 모색하고 있다. 직접적, 고백적 문체로 독자에게 강렬하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하이퍼시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21세기 현대의 젊은 의식을 지닌 독자와 소통을 원한다.
1045    [공유] 구조주의 개관 댓글:  조회:1051  추천:0  2019-12-17
출처 구조주의 개관 ① by 학습 연구 가르침   構造主義 槪觀   曺 惠 蓮(96207022)   Ⅰ. 여는 글   Ⅱ. 구조주의의 개념과 원리 1. 구조의 개념과 특성   1) 구조란 무엇인가   2) 구조의 특성   3)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Ⅲ.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 사상 1.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   1) 소쉬르의 생애    2)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 2.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   1) 레비스트로스의 생애   2) 레비스트로스의 기본적 사상   Ⅳ.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지리학과의 관계   Ⅴ. 구조주의의 문제점과      탈구조주의의 등장     Ⅰ. 여는 글   구조주의는 20세기초기에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인간 인식에 반기를 들고 나온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출발하여 프라그언어학파, 코펜하겐 언어학파로 그 정통성이 이어지고 발전되어 구조언어학으로 정식화되자 이 언어이론의 원리와 법칙은 반세기를 지난 1960~70년대에 구조주의로 개화되었다. 구조언어학이론은 이때부터 언어학을 벗어나 인간과학 제분야의 향토개념이 되어 신화․설화․문학․영화․TV․심지어는 요리와 의상유행에 이르기까지 그 내재적 구조분석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그 확산이 일시적인 붐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 이론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관점에서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므로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도 후기구조주의에서 포스터모더니즘까지 그 기저엔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 자체는 지리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구조주의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 이론에 대한 논의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레비스트로스를 중심으로 그 시작과 확산을 알아볼 것이다.     Ⅱ. 구조주의의 개념과 원리   1. 구조의 개념과 특성   1) 구조란 무엇인가 (1) 체계와 구조 구조(構造)라는 말은 일반용어로서도 또 학문적인 술어로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원래 건축구조물이란 건축용어로 쓰였던 말로 생물구조라든가 심리구조 등 생물․심리학에서도 예사로 쓰이는가하면 경제구조, 유통구조 또는 사회구조 등 사회과학적인 용어로도 쓰이고 있고 심지어 마르크스경제학에서도 상부구조라는 말이 하부구조에 대위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 구조란 말은 실은 19세기 실증주의에서부터 빈번하게 쓰이는 말로서 막연한 의미로 쓰여오기도 하고 있다. 구조의 어원을 살펴보면 멀리 라틴어의 structura(strutuere〈건조하다〉에서 파생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건조물, 건축물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2) 구조의 개념 구조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도는 이념적으로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우선 그 기본적인 개념부터 정밀하게 규정지어 놓는 것이 좋겠다. 구조의 개념은 그 시발점이라고 할 구조언어학에서 조작적 개념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은 옐름스레우의 정의이다. ① 내적 관계란 특성을 지닌 이 개념은 언어체계의 내부에서 각 요소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관계의 망이며 그 관계의 교차가 사항을 규정하여 상대적으로 제사항(諸辭項)을 구성하는 것이다. ② 구조를 규정짓는 관계의 망은 계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조라는 하나의 총체는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으며 그 부분들은 부분 상호간에 그리고 그 부분들이 이루고 있는 전체와도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③ 구조가 자율적 실체라 함은 구조가 그보다 큰 총체와의 의존성 또는 상호의존성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 그 자체에 특유한 내적 조직(내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④ 구조가 하나의 실체라 함은 그 실재론적 지위는 따질 필요가 없고 다만 조작개념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하나의 총체라는 뜻이다.   2) 구조의 특성 구조주의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문화활동의 전체성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과 그 사상적 자각으로서의 이념으로서 등장했다. 그것은 대상을 구성하는 제요소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것을 그대로 통합적으로 포착하려는 것이다. 그 전체로서 당연히 주체와 대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곧 인간의 문화활동의 전체성은 시각으로나 촉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험의 장이나 또는 서기자료나 통계적 자료의 장에서는 파악될 수 없고 항상 경험의 배후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란 계층(階層)으로 이루어진 내적 관계(relations internes)의 자율적(自律的)실체(實體)이다.   피아제(Jean Piaget)에 의하면 구조란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전체성 - 첫째로 구조가 실재 속에 숨겨져 있는 전체성을 발견하는 조작개념이라면 그 구조는 전체성이란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전체성의 요건이란 구조를 이루는 제요소가 단순한 고립된 집합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는 데 있다. 구조를 이루는 실체의 배치는 가치충족적이며 전체성이란 내재적인 통합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 전체성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그 배치의 성질 및 각 요소의 성질을 결정하는 고유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이러한 법칙은 그 구조내의 구성요소에 대하며, 그 구조를 떠났을 때 각각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개별적 특성 이상의 전체성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구조의 요소는 서로의 상관관계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속하고 있는 총체 또는 전체라는 전체성과도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조는 단순한 집합과는 다른 것이며 그 구조요소는 구조를 떠나서 구조 밖에 있어도 구조 내에 있는 바와 똑같은 형태로 대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고 다만 구조의 전체성에서의 관계의 망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가 자기충족적이면서 자기 폐쇄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2) 변환 - 구조는 실재를 산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적인 것이 아니다. 소쉬르가 정태언어학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언어의 변화성속에서의 어느 시점에 있어서의 공시적 대립관계를 연구해야 한다는 조작관점이지 언어가 정지상태에 있다는 주장의 표현은 아니었다. 언어의 공시대라는 것은 부동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계의 대립이나 결합에 의하여 결정지어지는 필요에 따라 혁신을 억압하거나 수용하거나 하는 것이다. 구조의 법칙은 단순히 그것이 구조화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구조 자체가 구조화를 행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소쉬르는 구조란 말을 쓰지 않고 체계란 말밖에 쓰지 않았는데 그것은 공시적 대립과 공시적 균형의 법칙을 특징짓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 균형의 개념은 구조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어떤 일정한 시점에서 구조는 한 언어의 제사항이 상호간에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 관계란 요소상호간의 결합규칙을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구조는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규칙의 일부, 다시 말해서 관계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대하여 구조는 단순히 구조화되는 수동적 수준에 떨어지지 않고 변환의 절차를 밟아 오히려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환은 구조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3) 자동제어 - 구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자동제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구조는 그 변환절차를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 그 자체를 넘어선 것에 의존하려 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균형성과 같은 구조의 특성은 구조의 불변성을 위협하는 제요소의 대립이나 잘못된 결합을 항상 점검하고 미지의 무수한 제요소가운데서 적합한 것만 선택하여 결합해 가는 기능 곧 자동제어 기능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구조화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제어(自動制御)란 어떤 행위계의 결과를 재도입함으로써 얻어지는 제어방식으로서 반송되는 정보에 의하여 그 계의 작용과 방법을 모델로 바꿀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이는 환류활동(還流活動)의 원리로서 이 원리에 의하여 언어는 고도로 발달된 컴퓨터처럼 스스로 기능장해를 제거하는 하나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도 하나의 자동제어기구라고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언어의 자동제어기능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예로서는 음성변화에 의하여 어떤 불편한 동음이의가 생겼을 대 이를 제거하는 과정이 그렇다. 언어에 이러한 자동제어기능이 없다면 언어는 상호이해에 필요한 최소한도의안정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기능이 공시적 균형을 이룩하게 하고 따라서 공시론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3)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야콥슨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라깡의 정신분석학, 푸코의 인식론, 알뛰세의 정치경제학, 바르뜨의 문예비평 그리고 Tel Quel의 저자들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결국 구조주의가 언어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우리는 ‘언어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단서를 잡아야 한다. 언어적인 것에 구조가 있다. 무의식은 그것이 말하는 한에서, 그것이 언어인 한에서 구조를 가진다. 신체는 그것이 징후들을 드러내는 한에서 그리고 그 징후들이 기호로서, 언어로서 읽히는 한에서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구조주의란, 단순히 표현해서, 결국 세계를 언어로 보는 한에서 성립한다. 사물들은 기호로서, 언어로서 해석된다. 그들은 침묵의 언설을 가지고 있다. 구조주의는 플라톤 이래의 인간의 강렬한 욕구인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하는 꿈을 사물의 기호(記號)와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식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을 포착함으로써 이루고자 한다. (1) 구조주의의 특징 ① 상징적인 것(le symbolique)에서 찾을 수 있다. 구조주의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들이 다루는 존재를 크게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으로 나누곤 했다.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대립에 대해, 때로 그들의 상보성에 대해 논하고 했다. 이들 사이에 복잡한 관계에 대한 틀 내에서 초험적 통일성과 경계선상의 긴장 그리고 상호간의 융합과 날카로운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주의의 발견 중 가장 첫 번째의 것은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제 삼의 질서로서의 상징적인 것의 발견이다. 우리가 언어에서 발견하는 실제적 차원, 즉 말의 시각적 모양과 청각적 감각의 차원 그리고 상상적 차원, 즉 우리가 그 말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이마쥬나 관념이 아닌 제 삼의 차원 즉 그 말의 구조적 차원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언어학은 시작되었다. 「상징적」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사람은 쟈크 라깡이었다. 정신분석학은 라깡에 의해 언어학과 접속된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19세기 프랑스심리학이 다룬 중심주제중 하나였다. 프로이트가 공헌한 점은 이 무의식에 어떤 의미(意味)를 부여했고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 역시 결국은 하나의 언어일 뿐이며 언어인 한에서 그것은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무의식은 이제 언어학적 기초를 가지게 된 것이다. 보다 더 들어가 말하면, 구조는 요소로서의 상징적인 것은 생성의 원리로 이해된다.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외에 상징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강조는 구조주의의 첫 번째 특성인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보는 것」과 「표상하는 것」외에 비가시적인 어떤 것을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② 구조의 국소적인(local), 위치에 관련해서의 특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구조의 요소들은 외적인 지시에 의해서도(실제적인 것) 내적인 의미작용에 의해서도(상상적인 것)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 구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의치란 실제공간에서의 위치도 아니며 상상적 공간 속에서의 위치도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공간 속에서의 위치이며 본질적으로 위상적topologigue)이다. 이 공간 속에서 중요한 것은 외정으로서의 거리가 아니라 이웃관계인 것이다. 사물이 있음으로써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있음으로써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희와 극장에 대한 구조주의적 선호가 나타난다. 레비 스트로스의 유희이론, 라깡의 유희에 대한 은유들, 알뛰세는 실제의 극장, 관념의 극장이 아닌 자리와 위치의 순수한 극장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유명한 구조주의적 표현이 나온다 : ‘사유하는 것, 그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결국 구조주의는 최근 형태의 유물론이며 무신론, 앙띠 휴머니즘이다. 신(神)은 죽었고 이제 인간(人間)도 죽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나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에 대해 라깡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내가 사유하는 그곳에 나는 있지 않고, 내가 있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사유한다”(사유(思惟)와 존재(存在)의 불일치(不一致))」 ③ 「변별적인 것」과 「단일한 것」을 들 수 있다. 언어의 경우에 있어 감각적 소리와 말에 연결된 이마쥬 외에 또 하나의 요소를 음소(音素)라 한다. 음소는 문자나 그 소리에 구현되어 있지만 그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음소는 그것이 속하는 관계체계 내에서 다른 요소들과 함께 상호 동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영역에 구조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상징적 요소들, 변별적인 요소, 단일한 점들의 유무에 따라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비가시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가시적인 것들에 구현되어 있으며 가시적인 것들을 넘어 이들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④ 「분화시키는 것」과 분화를 들 수 있다. 구조는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며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 미시구조이다. 그것은 실제적이지도 않고 허구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현실적이지도 가능적이지도 않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야콥슨이 말했듯이 음소는 문자나 음절, 그 소리 등과 또는 그에 연결되는 관념들과 동일시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구조 혹은 이론의 대상을 가장 적절히 가리킬 수 있는 말은 잠재성일 것이다. 잠재성은 직접적인 실재성과는 다른 그 나름대로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않은 나름대로의 관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잠재성으로서의 구조는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실제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관념적이다. 구조 속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공존한다. 그중 부분적인 조합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구조를 밝힌다는 것은 모든 현실적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모든 잠재성을 밝히는 것이다. ⑤ 구조의 계열적인 특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조의 반쪽만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구조가 실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요소들이 계열을 이루어야 한다. 모든 구조는 복수계열적이다. 우리는 음소와 형태소의 구분을 상기할 수 있다.     Ⅲ.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 사상   -Ferdinand de Saussure 의 구조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중심으로- 구조주의사상은 구성과 과정으로 양분된다.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사상은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꼬에 이르는 사상이고 과정으로서의 구조주의사상은 맑시즘의 토대위에서 성립되었다.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에서 관찰되는 현상들이란 인간의식에 선천적으로 각인된 심층주고의 표현이라고 간주하는데 비해서 과정으로서의 구조주의는 그 현상들이란 기저에 눌린사회구조의 표층이며, 그 사회구조의 토대는 물질적 존재 조건위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구조와 전에 말한 심층구조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없다. 구성구조주의와 과정구조주의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과정구주조의에 따르면, 변형은 자연적 수준에서보다는 차라리 사회적 수준(하부구조, 토대)에서 발결되는 구조에 속한다. ☞과정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차이점으로 인해 접근방식에서도 상이한 면이 많다. 여기서는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에서 구조주의의 시조인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아버지인 레비스트로스에 대해서 논하겠다.   1.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   ☞즈네브대학의 선사(先師)소쉬르(1857~1913)는 스스로가인구어의 역사언어학을중심과제로 하는 소장문법학파의 밭에서잘 약관 21세인 1878년에 「인구어 모음의 원초체계에 관한 논고」라는 독창적인 논물을 발표한 천재적인 학자였으나 그는 인구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언어학의 조류에 대해서도 널리 관시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언어현상을, 19세기가지의 인문․사회과학의 일률적인 방법에 회의를 품고 언어 자체의 형식적 체계화라는 과학적 분석의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반언어학강의」라는 책인데 이 책은 오늘날의 과학적 언어학의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고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 논의치고 소쉬르이론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없다시피할 정도로 크게 영향을 끼지게 된다. 소쉬르의 영향이 가장 직접적으로 미치기 쉬운 불어사용권에 있어서는 소쉬르이론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저조했던 데 비겨 1920년대에는 프라그학파1)에서, 그리고 1930년대에는 코펜하겐학파2)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론이 구조주의언어학으로 먼저 정립되고 다시 후술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그 뒤에야 구조언어학으로, 그리고 1960년대에 들어서야 그 폭발적인 구조주의의 유행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랄까, 적이 기이한 느낌마저 들지 않을 수 없다.   1) 소쉬르의 생애 소쉬르는 1857년 11월 26일 프랑스에서 이민온 즈네브의 위그노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과학자가 많이 배출된 명문집안이었다. 이러한 과학적 가문은 그 자체가 자랑할 만한 것이었고 그것을 이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할 만한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때문인지 소쉬르가즈네브의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875년에 즈네브대학에 들어갔을대 가족의 과학자적 전통에 어울리게 처움에는 물리화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조숙하여 그러한 조숙성이 어릴 때부터 두드러져서 다방면에 관심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학, 과학, 법률 등 여러 방면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러한 과학적 교양과 다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이 그의 일반언어학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그후 소쉬르는 파리언어학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남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즈네브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 외에 논저를 발표하지 않는 등 활동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소쉬르는 이 무렵 언어학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있었는데 언어학연구의 근본적인 것에 회의를 느낀듯 하다. 그러니까 언어활동의 연구에 있어서의 개념을 명백히 세우는 일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언어학의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에 고심하고 있었다는 그이 고뇌의 편린이 여기저기 나타나있다. 소쉬르의 즈네브대학에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제의 이 겸손하면서도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강의 〈일반언어학강의〉를 그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애정으로써 자기들이 필기한 노트를 면밀하게 정리하여 재현시켜 스승의 족적을 남기게 한 것이요, 그것이 오늘날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이다.   2)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 오늘의 구조주의적 사조의 대부분은 그의 업적에 바탕하고 잇다. 소쉬르는 전통적인 관심, 즉 세계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대상물로 되어 있어서 정밀하고 객관적인 관찰과 분류확 가능하다는 관점을 이어받았다. 언어학적 견지에서 말하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어관이 생긴다. 즉 언어는 「낱말」이라고 하는 분리독립해 있는 단위의 집합으로서, 그것의 하나하나는 각자에 부착되어 있는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전체는 통시적 즉 역사적 차원에서 존재하는데, 이런 것이 언어를 관찰가능한 그리고 기록이 가능한 변화법칙에 따르도록 한다라는 견해인 것이다. 소쉬르가 이룩한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인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방법에서의 더 큰 변화에 긴밀히 연관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또 언어는 개개의 부분이라는 견지에서 그리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부분들 상호간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그리고 공시적 관점에서, 다시말하면 그 언어의 현시점에서의 타당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던 것이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 공시적 연구를 통시적 연구로부터 뚜렷하게 구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데는 언어가 걸어온 역사적 경위의 인식도 그러하거니와 지금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구조상에 대한 인식도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독창성은, 언어가 하나의 전체적 체계로서, 그 한순간 전에 무엇인가가 그 체계에 변화를 주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언제나 그 순간마다 완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일이다. 즉 각 언어는 그 역사적 경위와는 상관없이 그 언어를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의 체계라는 점에서 온전히 정당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호언은 사실상 그 언어의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현상 전체의 고찰을 언어가 지니는 두 개의 기본적 차원에서 진행시키고 있다. 즉 랑그(langue)라는 측면과 빠롤(parole)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 그가 행한 이 양자간에서의 변증법적 구별은, 언어학 전반의 발전 특히 구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고안하고 구사하는 특성을 가진 짐승이라고도 말해질 수 있는데 이 언어라는 것은, 구별이 뚜렷한 기호와 이 기호가 변별적으로 연관되는 분명한 개념 즉 「의미」와의 사이에 맺어지는 대응관계에 의해서 성립되는 복잡한 체계 또는 구조인 것이다. 아마도 우연이기는 하겠으나, 현실세계의 사회적 교류에서는, 음성기관이 언어의구체적 실현의 주된 수단 방법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입으로 행하는 말이 아니고, 언어 즉 각각 다른 개념에 상응하는 구별있는 기호의 체계를 구성하는 능력이다. 이 「고유의 언어능력」이라는 능력은 실제로는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며, 「기호를 지배하는 더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생각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기호를 조립하는 그 능력이 언어에서 생성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 물리적 의미에서는 듣지도 보도 못하는 것이나, 실제의 인간의 발화에서 순간적으로 노출되는 것에서 연역적으로 추측이 가능한 더 큰 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랑그라는 것은 「언어능력의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개인이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부는 사회단체에 의해서 채용되고 있는 필요한 약정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니 빠롤은 물위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며,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 자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 것이다. 언어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며 또 결코 그 전체 모습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일이 없고, 개개의 학자에 의해서 그 목록의 일부분이 불완전하게 운용되는 데에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소쉬르 이후의 현대언어학의 앞날에 결실이 풍부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발화와 이해의 목표가 되고 또 전체가 되고 있는 체계화된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완전한 패턴을 기술하고자 하는 방향이 그것인데, Noam Chomsky와 같은 더 최근의 언어학자가 제안하는 수정된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면, 그것은 개개의 「언어운용」에 앞서서 존재하는 그리고 그 언어운용을 「생성」하는 「언어능력」의 체계를 설명하는 방향인 것이다. 언어운용이나 빠롤은 패턴이 없고 체계적인 긴밀성도 없어서 혼질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에 앞서서 있는 언어능력이나 랑그는 균질적인 것으로 보인다는데 대해서는 놀라울 것이 없다. 즉 그것은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언어는 결국 「낱말이라는 자료적인 실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추상적인 「기호의 체계」안에 있다는 것이다. 낱말들은 이 체계의 지엽말단일 뿐이다. 실제로 「기호 및 기호들의 관계가 언어학의 연구대상」이며, 기호 및 기호들간에서의 관계의 본질도 역시 구조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언어기호는, 그 「개념」과 「청각이미지」, -혹은 소쉬르의 저서에서 유명해진 용어를 사용한다면, 소기(signifie)와 능기(signifiant)라는 두 측면간에 존재하는 관계라는 견지에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나무」의 개념(즉 소기)과 「나무」라는 낱말의 청각이미지(즉 능기) 사이에 있는 구조적 관계는 이렇게 해서 하나의 언어기호를 구성하며, 언어는 이들 언어기호에 의해서 성립된다. 즉 언어는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청각적 체계이므로, 능기와 소기의 관계는 시가의 흐름을 통해서 성립된다. 그림은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동시에 제시하고 병치해서 보여줄 수 있으나 입으로 행하는 발화는 그런 종류의 동시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요소는 그 자체로서 유의적인 어떤 순서나 연쇄에 따라서 제시되어야 한다. 요컨대 능기와 소기의 관계의 양은 비록 사소하게 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계기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관계의 전체적인 특징은,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 있는 물리적인 나무 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는 「현실」에서의 연결을 보증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어기호는 바로 그 임의성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게 되어 있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문제라도 논의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기호의 임의성은 「합리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타당성을 고려하거나 논의한다고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기호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영어의 tree 대신 다른 어원에서 온 낱말인 arbre(프랑스어), baum(도이치어), arbor(라틴어), 혹은 제멋대로 만든 낱말인 fnurd를 더 좋아할 이유는 정녕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적절하다거나 혹은 더 「합리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나무라는 낱말이 따위에서 자라고 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 물체를 의미하는 것은, 그 언어의 구족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의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강한 보수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언어는 자기충족적인 「상관적」구조의 가장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구성부분은, 그 구조의 테두리 안에서 통합되지 않는 한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상호의존적인 사항의 체계인데, 여기서 각 사항의 가치는 다른 사항들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만 얻어진다」 이처럼 언어는 그 모든 측면이 「관계에 바탕하고」있는데,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 관계중에서 두 개의 차원이 특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소쉬르는 그것을 언어기호의 연합적 관계와 동시적인 상합적 관계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능기이든 소기이든간에, 언어에는 언어체제 이전에는 관념도 음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 체계에서 비롯하는 개념적 및 음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언어는 최종적으로, 「형식이고 실질이 아니다」로 판단되어야 한다. 즉 언어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항목의 집합이 아니고, 오히려 양식을 가지고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조절적인 형식은, 우리 이외의 세계를 만나서 그것에 대처해가는 우리의 독특한 수단이 되고 있는 터이므로, 그 형식은 아마도 특유한 인간구조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아마도 이 형식은 또 인간현실의 특징적인 구조가 되리라는 논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2.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   1) 레비스트로스의 생애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alude Levi-Strauss)-예술가의 아들이며, 랍비의 손자인-는 1908년에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에 양친을 따라 베르사이유로 갔다. 그는 이 시기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내성과 사색과 독서에 심취하면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는 혼자 걸으면서, 또한 그가 수집했던 여러 잡동사니들-그가 짜맞추기(bricolage)라고 부르는 돌멩이들, 자갈들, 식물들(그는 “모자이크”의 조립을 의도했다)-의 본성에 관해 사색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활동들이 자신의 지질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고, 후에는 자신의 구조주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늦게까지도 과학도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동안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2년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고, 고등학교의 교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 상파울로 대학의 인류학 교수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책은 브라질의 내륙지방을 수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 지역에서 그는 많은 원시 종족들을 연구했는데, 그들은 그가 훗날 발전시켰던 아이디어들을 그에게 제고해 주었다. 1939년에 그는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파리가 함락되자 뉴욕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신사회 연구원에서 강의했고, 야콥슨과의 친교가 도화선이 되어 구조언어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945년에는 「뉴욕 학단 연구지」에 ‘언어학과 인류학에서의 구조적 분석’이라는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종전이 되어 이 학원이 종신 재직 조건을 그에게 보장해 줄 수 없게 되자,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955년까지는 「슬픈 열대」를 저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행담이라든가 답사보고서라기보다는 지적인 재구성물 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된 기억과 경험적 지역 탐사와 과학적 연역이 묘하게 조화된 「슬픈 열대」는 뜻밖에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책이 1950년대 중반에 출판되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은 즉각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회상들과 해석들, 관찰과 사색, 사실과 자유연상이 혼합된 이 민족학적 자서전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같은 레비트로스의 친족 이론과 그의 신화론「신화의 구조적 연구」를 부상시켜 주었고 정당화해 주었다. 또한 이 학문적 저작들은 사변적 관념들을 상당한 정도의 과학적 지위로 올려놓았고 다시 이 관념들은 「야만적 사유」와 4권으로 된 「신화학」에서의 새로운 개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무튼 이 초기 저작들을 통해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의 명망있는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이 이론적 탐구들을 확장하여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연구를 구체화했다.   2) 레비스트로스의 기본적 사상 위와 같은 이론들은 검토하는데 있어서 다음과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신화들을 체계화하려는 레비스트로스의 시도-즉 여러 가지 경우의 모든 신화들은 그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말해야 한다는 시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진행중인 과업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접근 방식에 있어서 기초적인 가정들은 미국의 대부분의 체계 이론들과 판이하다. 후자의 경우 관찰 가능한 자료들만 취급하고 정신의 무의식적인 구조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과학적”이라는 개념의 불어 용법은 미국에서의 용법처럼 경험적 증명과 연결된 것이 아니다. 셋째로 프랑스 저술가들은 전통적으로 개인적 경험들을 역사 해석에 적용해 왔다. 이상과 같은 지적 습관들이 합쳐져서 매우 암시적인 언동 형식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레비스트로스의 초기 이론들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사변적인 관념들을 사실들에로, 과거의 반성들을 현재의 가정들에로 변형시킨다. 그는 지질학과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3명의 연인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개인적 경험과 지적인 해석의 혼합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소년 시절의 레비스트로스는 어떻게 식물들이 상이한 토양에서 자라는가라든가 혹은 어떻게 상이한 시대의 유물들이 암석의 복잡한 퇴화과정 속에 스며들었는가와 같은 문제에 주목했었기 때문에, 인류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지각에는 과거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과, 따라서 지각은 “시간과 공간을 뒤섞는…한 순간의 활동하는 다양성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점을 사색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즉 역사가들의 역사와는 달리 지리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이 보는 역사는 물리적이며 정신적인 우주의 근본적인 속성들을 시간 밖에서 - 차라리 일종의 활인화의 방식으로 -구체화하려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역사란 재수집될 때 현재의 일부가 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역사적인 조망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유쾌할 리는 없었다. 이는 특히 레비스트로스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 즉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지리학 및 정신 분석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이 세가지는 모두, 이해란 한 형태의 현실을 다룬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문제는 항상 이성과 감각적 지각 사이의 …관계에 기인하기 때문에…참된 현실이란 결코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 현실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한편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네 번째 애인이 있다. 그것은 음악인데 음악의 영향은 「날것과 익힌 것」에 잘 나타난다. 비록 그가 후에는 그 영향력을 감소시켰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다양한 경우의 종족 신화들이 음악의 보표처럼 읽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방법론 속에 음악의 3차원적 성격을 구체화했다. 「날것과 익힌 것」과 「벌거벗은 인간」의 종절은 음악적 주제들의 주변에서 형성되었다. 야콥슨에 의해 구조언어학이 소개되자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언어연구를 모든 언어적 기호들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 언어 체계와 개인의 언어표현사이라든가 청각이미지와 개념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제시하는 하나의 자족적인 체계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그 기본적 이원론 위에 야콥슨의 음성학적 분석 모형을 얹어 놓았다. 아큡슨은 구조언어학을 통해 언어구조란 항상 대칭적 구성들의 두갈래 길을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의 발견을 계시에 비유했으며, 그 발견으로 인해 언어학 뿐만 아니라 인류학과제반 사회과학이 대변혁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음소 체계에 관한 야콥슨의 연구를 친족 구조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반영시켰다. 그러나 그에 병행하여 음소적 방법이 단순하게 인류학적 분석으로 전치될 수 없음을 환기시켰다. 대신에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허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져야 한다. 즉 인류학에 있어서 미시 사회학적 분석에 의해 발견되는 법칙들은 거시 단계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친족 체계에 있어서 용어법의 체계와 예법의 체계 혹은 명명법의 체계와 사회 조직의 체계간에는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는 이들 모든 체계가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모두 유사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에서 볼 때 직접적인 경험적 관찰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나 친족체계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언어학에서처럼 상징적 제관계의 집합들로 취급되어야 한다. 거시단계에서 이 상징적 관계들은 언어와 문화 사이에 존재하며, 종족 사회들 내에서 그것들은 신화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모든 기지들의 신화들이 신화의 구조적 법칙에 의해 발견되고 따라서 현재의 무질서에서 질서정연한 분석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연에서 문명으로서의 전환이 어떻게 관습의 변화와 병행될 수 있었는가를 그는 보여줬는데 예컨대 음식을 날것으로 먹지 않고 익힌 것으로 먹는다든지 또는 손대신 식기류가 등장하는 것 등이다. 이런 예들은 단지 신화의 공통 요소를 설명하려거나 아니면 그것의 구성단위를 보이려고 하는 가정에 불과했다. 예컨대 두 편의 보로로족 신호는 문화의 출현을 한 공동체의 대학살과 대등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문화”로의 전환은 항상 신화의 사상 그대로 “연속적인 것”에서 “불연속적인 것”으로서 전이에 대응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항상 신화의 분석은 그것의 용어 혹은 내용의 분석 그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구조들을 파악하는 작업은 일종의 문화에 대한 심리분석이다. 또한 계속해서 신화의 구조적 “법칙들”을 발견함으로써 마침내는 옛날 이야기들을 과학으로 변형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대계획이 성공을 거든다면 원시적이고 무의식적 단계에서 모든 사람의 유년기의 환상이 신성시 될 것이다. ※사르트르의 레비스트로스 비판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를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인데 무의식의 세계를 부정한 사르트르에게 레비스트로스의 무의식적 정구조들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방법이 관념의 진리를 논증하는 방법론적인 동어 반복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레비스트로스는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주고나성의 환영에 사로잡힌, 참된 사유에 반대되는 것으로 무시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도 전통적인 진화론 혹은 발전 이론을 무시했다. 사르트르의 변증법은 인간과 그의 환경 그리고 인간의 이 주위 환경들과 관계하여 의식적으로 행위하는 과정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변증법과 대립된다. 실존주의자의 “표면”은 구조주의자의 “심층”과 대비된다.       Ⅳ.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지리학과의 관계   실증주의나 인간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가 지리학에 도입된 것도 역시 다른 사회과학을 통해서였다. 구성구조주의를 인문지리학의 연구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구성구조주의 중에서도 다만 Piaget의 연구만이 지리학에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그의 발달심리학에는 아동의 공간 및 기하학적 지식을 어떻게 습득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Piaget의 실험에서 제시된 바에 의하면 아동의 공간관 발달에는 4단계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결과는 지리학적인 연구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몇 사람의 연구자들은 아동이 어떻게 지리적 지식을 획득하는가라는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의 연구 역시 구조주의적 설명양식보다는 그 패턴에 관심을 가졌던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Piagetian적 연구의 잠재가능성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구조주의적 연구라고 할만한 것은 비교적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과정구조주의는 경제지리, 정치지리 등 많은 지리분야에 영향을 미쳐 구성구조주의와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구조주의의 문제점과 탈구조주의의 등장   1. 구조주의의 문제점   구조주의는 그 특성 자체가 처음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요인이 되어왔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우선 개개의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적 독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구조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가 작거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구문〉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 구조주의는 하나의 구조, 하나의 체계를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를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 구조주의의 이와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나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것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개체〉에 대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가 된다. ☞ 구조주의는 비록 지시어와 지시대상의 사이가 필연적이 아니고 임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재현가능성을 믿었던 직관주의에 근거하고있다. 다시 말해, 구조주의자들은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체계로 설명될 수있다고 믿었는데 언어체계는 곧 기호체계이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기호학적 특성을 띄게 되었고, 더 나아가 기호의 재현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탈구조주의의 등장3)   구조주의가 등장한지 불과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6가지 특성을 모두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하지만 탈구조주의가 구조주의 밖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인본주의적 태도를 지향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나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능력을 불신한다.  
1044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댓글:  조회:985  추천:0  2019-12-16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대학을 나와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 8 대학 교수가 되었다. 구조주의(構造主義) 등 60년대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知的)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思考)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철학을 주저 《차이와 반복(1968)》에서 전개했다. 더 나아가서 F. 과타리와 공동으로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구성을 통합적으로 원용(援用)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파악하는 시도를 《반(反)오이디푸스(1972)》 《밀·플라톤(1980)》 등에서 전개하여 현대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       DELEUZE Gilles, pp.301-331,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 [1967(?)] 들뢰즈의 이 논문은 샤뜰레에 의해 1973년에 편집된 『20세기철학』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 논문에서 참고문헌 중에 최근 책이 1966년으로 되어있으며, 글의 내용상으로 1967년의 글일 것으로 우리는 추정한다.]   [후기 구조주의가 아니라 구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논문을 읽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후기 구조주의라는 것은 시간 즉 반복 존재론을 다루는 것을 말하며, 구조주의라는 것은 공간 즉 차이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 차이 존재론은 사실상 인식론의 관점의 형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조의 공리과 형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차이존재론은 자신이 배제되어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트교의 부시와 이슬람교의 라덴은 둘 다 '신'과 '정의'를 말한다. 그 이름(대상)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의미(구조)에는 실체가 있는가? 중성인가?]   수학과 논리가 지니는 구조는 선 가정에서 온 것이며, 여기서 개념의 분절은 사유의 본질로 여기며, 기본적으로 약속에 의해서 이다. 반면에 생명과 심리의 구조는 체험 즉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자연적인 분절을 인정하며 표면과 내면의 구별(차이)에서 구체적 현상을 파악한다. 전자에서 이미 주어진 자료가 있다는 약속에는 공간의 전제를, 후자에서 체험된 과정을 자료로 삼으면서 공감(합의)에 의한 시간적 생성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공연히 '구조'라는 개념(signifié)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 문제의 접근 방식을 갖고 있다. 양자의 설명 또는 표현의 매카니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조'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서로는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구조'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수 있다.   이런 전망에서 들뢰즈의 논문 「구조주의를 무엇으로 재인식하는가?」를 우리는 읽고자 한다.   프랑스철학에서 실존주의를 말하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구조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먼저 누가 구조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언어학자로서 자콥슨(Jakobson), 사회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정신분석학자로서 라깡(Lacan), 인식론을 새롭게한 철학자로서 푸꼬(Foucault), 맑스주의의 문제를 재해석한 맑시스트 철학자로서 알뛰세르(Althusser), 문학 비평가로서 바르트(Barthes), 뗄 겔 잡지에 관계하는 그룹의 저술가들이 있다. 이들 중 몇몇은 '구조주의'라는 개념보다 구조(structure, structural)를, 다른 이들은 체계(systeme)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더 좋아한다.   다른 한편 구조주의의 기원은 소쉬르(Saussure)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학파, 프라하 학파에 기원이 있다고 한다. 이런 기원과 더불어 구조라는 어휘는 다양하게 쓰인다. 언어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할 비의적(ésotérique)언어가 있다하더라도, 언어에는 구조가 있으며, 표출하는 무의식은 (언어로) 말한다는 정도에서 무의식에 구조가 있으며, 신체가 징후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같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체에 구조 있으며, 사물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침묵으로 표시(signes)를 내보낸다는 점에서 사물에도 구조가 있다. 여기서 구조는 기계의 골격이나 신체의 뼈와 근육의 구조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표현하는 그 무엇의 내용(성질) 또는 능력(권능)을 포함하면서, 일정한 기간에 또는 사물의 특성에 따라 그 무엇이 (외연적이 아니라 내재적)동일성 유지하면서, 표출하고 실현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사실 사물의 타성적 표출도 항상적 표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지속하는 한에서 한 사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구조는 한 개체(단일자)를 설명하는 열려진 단위이다. 이 단위의 총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이 이전까지는 일방적이었는데 비하여, 이제 규정할 있는 방식자체를 문제 삼아보니까 위계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방식의 규정가능성이 등장한다. 이런 기준들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방식이 없다는 것은 방식들이 여러 차원에서 서로 다른 위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기준의 수렴과정과 다른 발산과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위상적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이런 차이가 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눈에 띄게 등장했을까?   1. 첫 번째 기준: 상징(le symbole)   철학은 한편 진리로서 실재적인 것과 있는 그대로의 실재적인 것의 대립에 의해밝히는 경우, 다른 한편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결합하는 보충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첫 번째 기준은 제 3의 질서로서 상징의 질서를 세운다. 이 상징을 실재와 상상 사이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뗄赉 그룹의 소설가, 푸꼬, 알튀세도 심층적 영역을 발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 라깡(Lacan)이 중요하다. 라깡은 제3의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라깡에서 구조의 근본요소로서 상징은 발생(genèse)의 원리에 속한다. 라깡이 해석한 "늑대 인간"의 경우에서, 거세의 주제가 잘린 손가락이란 환각적 형태로 실재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거세의 주제가 상징화되지(배제. forclusion) 못했기 때문이다.   실재, 상상, 상징을 나열해 보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하나(un)인데, [인식론적으로] 이중화된다.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하나는 놀이하는 광대의 아버지로, 다른 하나는 노동하는 이상적인 아버지로 된다. 그리고 나서 보면, 상징은 세 가지이다. 그래서 구조에는 3원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자체는 제 3의 것이다. 이 첫 번째의 기준에서 보면, 상징적 질서의 지위는 실재적 질서나 상상적 질서에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구조라는 것은 지성의 본질(진리로서 실재)도 감성의 형식(있는 그대로 실재)도 상상의 모습(인격으로 상정한)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forme)도 상상의 모습(figure)도 본질(essence)도 아니다. 알뛰세르가 말하듯이 구조는 "이론(théorie)"에 동일한 것으로 지위를 부여해야 하고, 상징은 독창적이고 사변적인 이론 대상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구조주의는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해석적이다. 공격적이란 상징의 궁극범주에 대한 오해를 고발한 것이고, 해석적이란 이 상징이란 범주로부터 언어행위, 작품, 관념, 실천 등이 마주치는 근원적인 점(point original)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구조는 우선 상징으로 표상(재현)화 될 필요가 있다. - 구조는 대상도 표지도 아니고, 구조에는 하나님(아버지)과 같은 어떤 것이 상징으로 있다. 그것은 욕망의 거울에 있는 허상이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왕의 거울처럼 여왕의 부름에 등장하는 백설공주의 재현과 닮았다. 부르면 더 상위의 자격으로 또다시 나타나는...것처럼.]   2. 두 번째 기준 : 위치 즉 지위(local ou de position)   구조의 요소들(상상, 실재, 상징)이 지시화(désignation)도 의미화(signification)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에서는 이 요소들은 의미(sens)이다. 여기서 의미(sens)란 지위(position)이다. 그래서 구조란 공간이지만 비너비적 공간이며, 선존재 하는 공간이며, 순서적 의미를 지닌 인접에 의한 순수 공간(spatium)이다.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란 실재 존재와 사물이 관여하고 역할을 하는 것에 우선(première)한다는 의미이며, 이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양적이 아니라 위상적이고 관여적이다.   알뛰세르의 경우는 경제구조에 대하여 말한다. 위치란 생산(연관)관계에 의해 규정된 위상적이고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이다. 푸꼬의 경우에, 위치를 인접성의 질서에 따라 역할 하는 지위의 성격부여(qualification) 즉 지위부여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구조주의는 새로운 선험철학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306). 이 점에서, 선험적 위상학이 경험적 심리학을 기초 지우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될까?   이 위상적 지위로부터 여러 귀결이 나올 수 있다. 첫번째로, 상징적 요소가 지시화도 의미화도 아니라면, 진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기표가 아닌 요소들의 결합에서 의미가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는 결과물이고 결과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부조리의 철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 철학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모자란다. 그와 반대로 구조주의는 항상 의미가 과도하게 너무 많다. (그래서 알뛰세르는 과도한(포화된?) 규정(surdétermination)의 개념이 나온다.) 무의미는 불합리가 아니라 의미의 반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주의는 까뮈(Camus)에 힘입지 않고 루이스 케롤(Carroll)에 힘입고 있다.   두 번째로 놀이와 연극의 관점에서 구조주의가 어떤 취향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카드놀이의 중요성을 환기 시켰고, 라깡은 브릿지와 장기놀에서 놀이자의 말 운행놀이보다 더 깊은(심오한) 순수공간(spatium)이 있다고 한다. 알뛰세르가 지위의 순수극장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조주의는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라 선언한다. [주사위에 관하여, 『니체와 철학(1962)』,Ch. I, s. 11, pp. 29-31.]   세 번째로 구조주의는 새로운 유물론, 새로운 무신론, 새로운 휴머니즘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을 신의 지위에 놓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올 어떤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푸꼬에서 인간의 상상적 특성이 알뛰세르에서 인간주의(인문주의)의 이데올로기 특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지성의 자기반성에 의한 미신적 폐쇄적 종교성이 등장하는 매커니즘, 즉 베르그송의 우화적 기능이 나타난다. 상상적 특성들과 이데올로기적 특성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화적 기능인 셈이다.]   [상징으로 재현되는 구조는 (상상이든 실재이든) 놀이 할 수 자리를 마련한다. - 그래야 자리에는 요소(내용, 성질)들이 부여될 수 있으며, 그 구조는 (평면적 차이 상으로) 놀이할 수 있는 놀이터이다. - 프로이트의 꿈의 장면에서 꿈의 대상인 한 사물에 다양한 성질이 이전(déplacement)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베르그송에서는 신체(질료)라는 내부에서는 다양한 성질(과거 기억)들이 놀이(jouer)할 수 있고, 그것을 영혼(사유)라는 내부에서는 상상(imaginer)한다. (MM, 251)].   3. 세 번째 기준: 미분자와 단독자(le différentiel et le singuiler) (참조: 『차이와 반복』, CH. IV, s 2. p. 221- )   상징적 요소, 즉 지위의 단위(통일성)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실 구조의 내용성, 그중에서 외연적 구분을 다루면서 잠재성의 내용의 차이(공간적)를 구분한다. 이 구분 이후에 내재적 힘(권능, puissance)의 세분화(différenciation)로서 차이(시간적, 반복에서 오는 차이)를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공간적 차이로서 미분화의 예는 언어학에서 기표의 차이를 다루면서 순수 형식적(논리적이 아니다) 차이를 다룬다. 그 구성에 대한 논의로서 언어학에서 출발한다. 언어학에서 음소(phoneme) b/p는 두 단어를 구별(차이)하는 최소단위이다. 이런 관계를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요소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 3+2(산술적) 2/3 (기하적) 경우이다. 두 번째, x2 +y2 -r2= 0 경우이다. 항들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경우에서 [타원의 두 초점 사이 크기에서] 정해진 가치를 가진다. 셋째로 ydy +xdx =0, dy/dx = -x/y 경우가 있다. 각 항은 자체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관계에서 상호적으로 규정된다. 이런 상징적(symbolique, 기호적)관계는 미분적이다. 이런 구조주의 기원에는 수학자 집단 부르바키(Bourbaki)에서처럼 공리주의적(axiomatique) 측면이 있다. 들뢰즈는 부르바키 경우는 다른 측면의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공리라는 것은 상상적이며, 기호적(상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바이에르스트라스(Weierstrass)와 럿셀(Russell)의 정태적이고 서수적인 해석을 부여한 미분계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사물에서 미분화에 의해서 생긴 가루들, 즉 미분들은 [무의식에서 정태적으로 구분된 심리적 개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독자들이다. 수학적으로 예를 들면, 단독자들은 삼각형의 각 꼭지점들이다. 그래서 상징적 요소(수학적인 기호)들의 상호 규정(détermination réciproque)이 단독적 점들의 완전 규정(détermination complète)으로 이어진다. 이런 전망에서 단독자란 구조가 있는 모든 영역에 속한다.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주사위들 위에 나타난 점(단독성)들에 연관이 있다. 모든 구조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고 할 때, 하나는 미분적 연관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단독성들의 체계이다. 이 단독성은 구조 속에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수학적 은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다.   중요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에 요소적 구조를 파악하는 경우에서이다. 그는 음소(phonème)와 같은 지위를 지닌 단위들로서 친족소(parentème)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친족관계에서 네 개의 연관, 즉 형제/자매, 남편/아내, 아버지/아들, 외삼촌/생질의 연관은 단순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형성처럼 (외디푸스) 신화 속에서도 신화소(mythème)들이 상호 규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구조의 규정(détermination)은 구조가 작동하는 것을 표현하는 태도의 이론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단독성들은 기호적(상징적)요소들과 요소들의 연관에 상응할 뿐 이들과 닮은 점은 없다. 이 단독자들 중에 어떤 것은 변수가 되고 어떤 것은 함수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것은 구조 내에서 명칭의 영역이 되고 다른 것은 태도의 영역이 된다. [한 단독자의 두 성격(속성) 한편으로는 대상으로서 몸짓으로(corporel), 다른 한편으로는 소리 등의 비형체적(incorporel) 표현으로 드러난다. 몸짓에 이름을 붙여주고 표현을 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미분화에서는 이 둘 모두가 동태적인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라는 의미에서 잠세태가 아니라 잠복기(잠재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깡의 제자인 르끌레르(Serge Leclaire)는 무위식의 상징적 요소가 어떻게 신체의 리비도 운동에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자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에서도 보인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각 생산양식은 관계들의 가치에 상응하는 단독자들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다. 진실한 주체가 구조 자체, 즉 미분자와 단독자, 미분관계와 단독적 점들, 상호규정과 완전규정 등이다. 생산관계에서 "진실한 주체는 참여자나 행정인... 이 아니라, 오히려 지위와 기능의 분배와 정함(définition)이다. [주체가 프로레타리아의 인간이란 측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지위와 그 실행방식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실행방식을 단독성으로 파악하여 보라.. ]   [언어학적으로 음소의 문제제기가 중요하다. 단어에 내재해 있는 음소가 개별적이지만, 위치가 있고, 그와 다른 음소와 차이를 나타내면서 순서적 상호 연관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미분에서, 특히 포물 곡선에서, 기울기인 접선은 순서적이고 정태적 연관에서 그 힘의 방향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과 닮았다(라이프니츠와 럿셀). 이 세 번째 기준까지는, 정태적 의미에서 무의식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의식의 태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네 번째 기준은 의식의 내재적 힘으로서 무의식 내에서 기준을 발견한다.]   4. 네 번째 기준: 차별자(le différenciant, 분사형에 주의 할 것), 차별화(la différenciation): 참조: 『차이와 반복』결론 s3 p. 358. .   구조들은 요소들, 연관, 점(단독자)들 덕분에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다.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이고 소우주적 구조(micro-structure)이다. 쟈곱슨(Jakobson)이 음소의 질적 지위를 문제 삼으면서, 구조의 양태 또는 이론의 대상이 잠세성(virtualité)이라 한다. 여기서 잠재적이라는 것은 자신에 고유한 실재성(réalité)과 자신에 고유한 이상성(idéalité)을 지닌다. 그래서 구조에 대해 사람들은 현실적이지 않는 실재(réelle)이며, 추상적이지 않는 이상(idéale)이라 말하리라.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자주 일종의 저장소 또는 이상적 장부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모든 구조가 다수의 잠재적 공존(coexistence)이라 한다. 그리고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독창성이란 사회체계 요소의 공존과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방식에서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구조 속에 무엇이 공존하는가? 그것은 모든 요소들, 관계와 관계의 가치들, 관련된 영역에서 단독자들이다. 이런 공존은 혼융도 비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미분적 요소들의 관계이다.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현실화(actualiser)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화 여기 지금 현실화된다는 것은 그런 관계, 관계의 그런 가치, 그런 단독성들이고, 다른 시각에 다른 곳에서는 다른 것들이 현실화된다. [이 현실화란 인간의 인격이 이런(이슬람) 문화에서 이렇게(이맘), 저런(힌두교) 문화에서 저렇게(브라만) 실현화(réalisation)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체적 언어(langue)도 없고, 전체적 사회도 없으며, 우리가 덧보탠다면, 전체적으로 진과 선을 지닌 어떤 신적 존재도 없다는 것이 된다. 잠재성으로서 구조는 [공존이란 의미에서 보면] 미분화되어(différentiée)있다 하더라도, [공존의 속성들이 아직 발생적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아직 세분화되어(indifférenciée)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조라는 것은 음소관계 t/c를 구성하는 différent/cation이라는 명칭으로 지적될 수 있는 이중적 측면을 분리할 수 없다.   모든 세분화 즉 현실화는 두 개의 길, 종과 그 부분들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류와 종이란 생물적(양적 개체) 분류와 다르다. 종과 부분들이란, 한 덩어리와 그 덩어리의 일부가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덩어리의 현실화와 그 부분의 현실화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종과 부분들의 현실화의 과정에는 항상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잠재적 공존의 요소들은 다양한 리듬에 따라서 효과를 [시간 속에서] 발휘한다. 시간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에서 현실화로 이행하는 것이지, 한 현실적 형식에서 다른 현실적 형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질료(원질)의 자기 변형과정이며, 그리고 질료의 변형 과정에서 어떤 형태가 나타나났다고 해서 그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의 자기변형에서 일어나는(여기에 반복의 의미가 들어 있다) 것이다, 결국 질료의 자기 변형의 과정에서 보여진 단면들은 효과이며 결과물이며 사건인 셈이다. 이 사건에서 원형질료를 순수 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면, 순수사건은 기억의 혼재인 셈이다.] 이런 이행을 통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구조가 종들과 그 부분들을 생산한다(produire)고 들뢰즈는 말한다. 구조는 이들을 세분화된 종과 부분들처럼 생산한다. 그래서 생성(la genèse, 발생)은 시간처럼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로부터 구조의 현실화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내적 다양한 시간성과 정태적 순서로서 생성(발생)라는 두 개념은 구조의 놀이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생산을 스피노자에 비추어서 자연(질료)이 속성(종들)을 효과화하며 그 속성을 현실화하는 사물들(부분들)을 양태라 볼 수 있다. 이 양태가 질료적 차원과 달리 비형체적 차원에서 언어행위 즉 표현(문장)을 다룰 수 있다. 이 표현은 사유의 양태와 같다. 우리가 보기에 여기서, 들뢰즈는 질료의 차원에서 보아 이 비형체적 사유의 양태가 형체적 사물의 양태와 동시에 생겨나는 두 가지 길을 묘사하려한 것이 아니다. 설령이 두 가지 길이 같은 시간에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기표와 기의가 서로 필연적 연관이 없는 것처럼, 서로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두 양태는 구조와 뗄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두 양태사이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스피노자에 여러 속성들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듯이 (생명 현상의) 발생적 차원에서 보면 두 개는 생산되고 있는 중이며, 또한 권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들뢰즈는 이 세분화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 구조는 자체적으로 보면 미분화(différentielle)이나, 그 효과(결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분화의 작용(différenciatrice)이다.   레비스트로스와 푸이이용(Jean Pouillon)의 문제제기에 이어 뒤메질(G.Dumézil)은 종교들과 한 종교의 신들에서 류적차이와 종적차이를 구별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부처로 화한 것이 종이라면, 지혜를 밝혀주는 관음보살, 병을 고치는 약사여래, 성불로 이끄는 미륵 보살 등등은 부처의 부분들의 효과화 이다.] 이런 구별로부터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경계가 있다. 상상적인 것은 [부분적인] 각 항들에 총합적 매카니즘의 총체적 효과를 집결시키는 것이라면, 상징적인 구조는 항들의 미분화와 그 결과의 세부화를 확인 시켜준다. 라깡의 융에 대한 비판이나 "신비평"의 바슐라르에 대한 비판은 상상에 대해서이다. 뒤메질을 논평한 오르티그(Edmond Ortigue)는 "사람들이 질료적 상상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감소하며 사람들은 동등성에로 향하고, 사람들이 사회의 형상적 요소들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증가하며, 사람들은 구별된 형평성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제 들뢰즈는 탐험을 깊이로 향한다. 구조들은 무의식적이다. 구조들의 생산물 또는 결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결과(효과)로부터 구조들을 읽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재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의 제자 밀러(J.A. Miller)는 환유적 원인성(causalité métonimique)의 개념을, 알뛰세르(Althusser)는 구조적 원인성(causalité structurale)의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구조의 무의식이 미분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무의식이 구조이라는 측면에서 미분적이지만, 무의식이 생성의 권능으로 실현화의 과정에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세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밀러와 알뛰세르의 구조 읽기는 미분적 구조 읽기에 끝나는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작은 지각들을 미분적 무의식으로 제시했고, 반면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 힘들의 갈등 또는 욕망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서 무의식의 기원의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욕망의 수준, 연합적 이미지의 수준, 대립 관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무의식을 욕망도 표상도 아니고, 항상 비어있다(toujour vide)고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질료와 같아서 무미 무취 즉 비가치 개념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스피노자의 자연, 베르그송의 본성과 같다. 베르그송의 세 가지 본성은 구조(이마쥬)가 의미를 표출하는 장면인 셈이다.]   무의식은 항상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인간에 관한 문제제기는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제기한 방식을 따라가면 풀 수 있는 해결이 항상 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과 정신병환자의 치료처럼]. 알뛰세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제기된 문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우나, 라깡에 이어 르끌레르가 갈등의 전형에 의해서라기보다 문제 양식[문제제기방식]에 의하여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제제기나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주관적이거나 임시적이 아니라, 객관적 카테고리이며 충만하고 전체적인 객체성(objectité)이라는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조적 무의식이 미분적인 동시에, 문제제기적이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열(sériel)이 있다.   [구조는 규정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다. 구조는 결과물로서 그 근원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인-결과라고 말할 정도로 인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결과의 효과나 의미는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서 성립한다. 얼마나 많은 결과들이 현실의 장에서 원인(동기)에 관계없이 이루어지고 소멸하는가! 또한 의미 있다고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의미의 부여에서 계열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의미 부여자가 누구인가 라고 물음을 제기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가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대자아일 것이며, 자의식의 발동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   5. 다섯 번째 기준 : 계열(sériel)   지금까지 설명된 구조는 아직 작용(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가 (위의 네 가지와) 다른 절반의 기준을 회복한다면 구조는 움직이며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미분화된 상징적 요소들이 계열로서(en série)조직화 된다. 하나의 우선적(première) 계열과 파생된 다른 부차적 계열은 서로 자치적이지만, [비형체적인 것과 형체적인 것으로서] 음소들(les phonèmes)과 형태소들(les morphèmes), 경제적 계열과 다른 사회적 계열 [경제적 상품 생산과 문화적 작품 생산], 또는 푸꼬가 말하는 [말과 경제활동과 인간] 언어적, 경제적, 생물학적, 삼원적 계열처럼 필연적으로 연관을 맺는다. 문제는 이 우선 계열이 기초를 형성하는지, 우선 계열이 기표이면, 다른 계열은 기의인지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구조가 계열로 되어 있고 게다가 다양한 계열(multi-sérielle)이라고 만 말하자.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상상과 상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즉 한편으로 미분적 연관의 요소로서 동물 종의 계열과,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으로 파악된 사회적 지위의 계열 사이에 대치는 차이의 두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개별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고, 상호주관적(intersujectif)이다. 무의식은 계열로 전개되고, 기표와 기의로서 뿐만이 아니라 두 계열은 고려된 영역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된다고 한다. 그가 포우(Edgar Poe)의 『훔친편지』에 대한 유명한 논평을 하면서, 구조가 어떻게 두 개의 계열, 왕-여왕-장관 계열과 경찰-장관-뒤팡 계열을 연출하는지 보여주고, 프로이트의 『쥐 인간』에서 아버지-자식의 이중 계열을 기초로 하여, 각각(아버지와 자식)은 빚-친구, 가난한 여인-부유한 여인이라는 4개의 항들에게 역할을 한다.   구조가 계열로 조직화된 경우에 진실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의 결정은 상징적 요소들의 선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우선(일차적) 계열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차적(이차적) 계열의 구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음악과 가깝게 느껴진다. 그 예로서 솔러스(Philippe Sollers)의 소설『드라마(Drame)』와 페이(Jean-Pierre Faye)의 『유비들(Analogues)』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두 계열로 하여금 서로가 단순히 반영되지 못하게 하고 바로 그때도 그 항들 하나 하나에 정체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가? [우선 계열들이 상징적으로 연관 있기 때문이고, 그 연관이 실현화와 관련이 없으며, 단지 의식 내에서 구조적으로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 양상은 실재성도 아니고 상상성도 아닌 제 3의 것이다. 이 제 3의 것에는 다양하게 이전이 가능하다. 이 이전도 상징적 이전인데 두 부류로 은유적과 환유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꿈의 분석에서는 이 상징적 이전으로부터 상상성과 실재성을 구분하여, 환자의 병의 초발전조(초기 정신적 상흔)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상징적 이전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나 그 환자에게는 고유하다. 왜냐하면 환자의 과거경험은 분명히 있었으나, 지금 의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 전조는 환자의 자아에 자리가 없으나, 무의식에서는 그 자리는 (정해진 크기도 위치 없이) 있으며(유크리트의 점처럼 크기 없이 위치도 없이, 산술에서 0처럼),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은유로든지 환유로든지, 채우려 들어온다. 왜 이런 방식을 취하느냐는 검열의 논의이다. 그런데 이 위치를 우리는 위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무의식은 위상처럼 존속한다.] 자, 라깡의 『훔친편지』의 분석에 따르면 일차적 계열에서 장관은 이차적 계열에서 여왕의 위치에 있듯이, 『쥐 인간』에서 가난한 여인이 친구의 위치에 있듯이, 레비스트로스에서 높은 인격(personne d'en haut)으로서 쌍둥이(토템) 계열이 낮은 인격(personne d'en bas)으로서 새(토템)의 계열에 이른다. 이런 두 계열의 상대적인 이전(déplacement)은 전혀 부차적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적 즉 싱징적이며, 본질적으로 구조의 공간 속에서 위치에 속해 있다. 구조주의가 [프로이트로부터 라깡이 주목한] 이 은유와 환유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둘(은유와 환유)은 상상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 전혀 아니며, 구조적 인자들(facteurs)로부터이다. 그 두 인자들은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한 계열에서 동일 계열의 내부로 이전의 자유의 두 정도를 표현한다. 상상적이지 않는 [말하자면 상징적인] 이 둘은 이 둘에 의해 활성화된 계열들로 하여금 항들을 뒤섞게도 이중이 되게도 못하게 한다. 상대적 이전이란 구조 속에서 위치의 일부를 차지한다면, 그 상대적 이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상징으로서 위상은 아무 것도 무의식으로서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창고이다. 그 창고는 빈 창고로서 무(무능)가 아니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빈(의미) 창고라는 것이다. 즉 대상을 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담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고는 상징이 만든 것으로 이데아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라깡의 분석을 따라가면, 최고 관념(신)의 이데아처럼 등질적 성질로서 빈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질료로서, 가득 찬 그러나 아직 의미가 발현되지 않은, 그 무엇과는 반대의 방향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다섯 번째 기준인 계열에서 들뢰즈는 라깡을 충실히 따르면서 생물학적(질료적) 또는 심리학적(시간적) 관심으로서 시간성에 대하여 다루는 측면을 도외시 한 것 같다. 아니면, 이런 구조 해명으로 나아가 보라. 그러면 빈 것으로 밖에 안되지 않느냐라고 반어적으로 서술하고 난 뒤, 그 빈 것 자체가 무엇인가로 실재로는 충만 되어 있고.. 그리고 상징(징후)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6. 여섯 번째 기준 : 빈 상자(la case vide)   구조는 완전히 역설적(paradoxe)인 대상 또는 요소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훔친편지』에서 편지와 『쥐 인간』에서 빚의 경우에서 대상은 특출하게 상징적이다.   특출하게(éminemment)란 의미는 그 대상이 다른 계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해당하는 계열에서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계열에 동시에 내재하는 이것을 대상=x 즉 수수께끼의 대상, 대운동자(grand Mobile)이라 부르자. 라깡은 편지와 빚의 특별한 역할을 발견한 것을 인위적이며, 일반적 방법이며, 모든 구조에서 기준(critère)이라 하고 마치 노래에서 후렴처럼 순환한다고 한다. 그의 제자 그린(André Green)은 『오델로』에서 손수건이,『햄릿』에서 왕위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런 분석에서 상징적 대상(왕위)은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 대상으로 본 라깡의 장점이다(제1기준에서)] 다시 한번,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첫 번째 차이가 있다. [여기서 실재(기표)와 상상(기의)과도 다른 상징은 구체적 대상(자의식, 무의식)이 아니라, 자의식이 만든 허구의 대상(빈 상자)이다. 왜 들뢰즈는 여기서 언어학적 도식에서 배제된 '구체적 실물'에 대한 언급 없이 허구의 대상을 언급하는 것에 머물까? 이 논문은 후기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탐험이 시간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 설명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논문은 라깡과 푸꼬의 영향권 내에서 푸꼬의 『말과 사물(1966)』이후에 그의 저술『차이와 반복(1968)』이전에 썼을 것이다.] 상상의 [실재에 대한] 전투적 성격에 반대하는 제3자(상징적인 것)는 본질적으로 상징체계 속에서 개입한다.   라깡의 분석에 따라, 수수께끼의 대상은 자체적으로 이전한다. 그 대상의 성질은 그것을 찾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자기 장소가 없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화폐라는 상징은 물건이 있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토지난 창고의 상품처럼 자기 자리가 있지 않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금본위라고 하지만 주식처럼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 이 분석을 잘 들여다보면 라깡 만큼이나 들뢰즈가 자본주의 물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물신, 이름을 부르는 신의 모습, 자기 배타적인 모습의 신과 지정학적 위상이 없다는 신의 모습, 모두를 지니고 있다.] 라깡은 『쓴 글들(Ecrits)』속에서(p.25)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EC 4장)베르그송의 무의 분석에서 부정판단과 관련하여] 마치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책을 찾으러 갈 때, 그 책의 목록카드가 표현하는 것처럼..." 목록카드는 그 책이 그 서가에 있지 않으면, 빈 종이 인 셈이다. 이 카드가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그래서 모든 구조는 원본인 제3자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하고, 그런데 제3자는 자기의 기원이 없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대상, 즉 대상x는 차이 자체의 세분화능력(le différenciant)이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형상적 신을 잘 표현한 것인가? 기원이 없으면서도 존재하고, 그리고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상징이다. 이것을 소박한 실재론에서 보면, 바람소리일 뿐인데, 이 표지(상징)가 실물을 대체하는 능력이 있으니... 어휴, 여기에 매여 얼마나 많은 인민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놀이에는 빈 상자가 필요하다. 빈 상자 없이는 아무 것도 전진하지도 작동하지도 못한다. [데모크리토스를 연상해야 하는가? ] 대상=x가 매번 위치 이전하는 것이 그 자리이라고 하며, 라깡은 브릿지 게임에서 버려진 패의 자리(la place du mort)를 상기시킨다. 푸꼬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에서 벨라스케즈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왕의 위치(la place du roi)를 상기시킨다. 구조주의 있는 곳에는 Zéro(0) 등급이 있다. 솔러스와 페이 경우에는 문학에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맹점(la tache aveugle)을 상기하게 하며, 여기서 문학소들(littérèmes)로서 계열을 조직화하여, 문학을 허용한다. 밀러(Miller)는 프레게(Frege)에서 제로(Zéro)의 지위를 빌려왔다. 레비스트로스는 [토속 원주민 문화에서 권능있는 정령과 같은 실재인] "마나"(mana)를 "유동하는 기표"의 존재, 상징적 제로(0) 가치의 존재라고 인식한다(『의미논리』제8단원(p. 64)에서). 쟈콥슨의 경우에 음소 제로(le phonème zéro)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 비평의 대상은 언어행위 중에서 작품 속에 미리 존재하는 잠재성(virtualités)을 규정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자체는 자기의 고유한 잠재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캐롤(Lewis Carroll)과 조이스(Joyce)는 "단어들이 든 가방 (단어가방)"(mots-valises)란 개념을 창안한다. 『핀간의 각성(Finnegan's Wake)』속에서 한 글자가 우주이고, 세계의 모든 계열들을 재통합한다. 캐롤에서는 단어가방은 적어도 두 가지(말하고-먹고) 기초계열을 내포하고 있다. 신조어인 스나크(Snark, 『의미 논리』p. 60와 여러 곳에서)는 무의미(non-sens)이나 두 계열을 활성화시킨다. 이 단어는 문제 제기적(problématique) 대상, 즉 대상x를 지시하는 한, 단어x 이다. 이 대상x는 두 계열 사이의 홈을 파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을 채워 넣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마나"에 관해서 제시하고, 마나를 "거시기"(truc)나 "아무개"(machin)라 본다. 거시기라는 무의미는 의미화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과도함(l'excès)이다. 이런 의미를 푸꼬가 분석한 루셀(Reymond Roussel)의 음소적 차이에 의한 테크닉에서, 말라르메(Mallarmé)의 계열들 사이의 연관적 체계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이중 측면을 지닌 빈 상자의 효과성을 주목한 것이다.   대상=x라는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것은 이 논문의 제목처럼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인식해야 할까」이며, 정체성을 표시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지위의 문제에로 이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대상=x가 상징적 남근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 자기와 연관해서 항상 이전되어 있으면서, 어머니의 편에서 그것(상징적 남근)을 발견할 장소가 없다. 결국 상징적 남근은 편지, 빚, 손수건, 왕위, 스나크, 마나 등인데 비해, 아버지와 어머니 [왕, 장관, 여왕] 등은 상징적 요소들이다.   남근(팔루스)이 마지막 응답이 되지 못한다. 이 자리는 성적구조의 빈 상자에 특징을 부여하는 의문과 질문의 자리이다. 이 팔루스는 교환에 관계없는 "어떤 것"으로 있은 것이다. 이것이 "노동일반"으로서 가치이다. 가치와 팔루스, 경제적 물신과 성적 물신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이 문제는 의미 없다고 한다. 하여튼 대상x가 정체성을 지니려는 것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고,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모든 위치에 연관해서 스스로 이전되기 때문이다. 대상x가 구조의 각 질서에서 빈 장소 또는 구멍 뚫린 장소이다. [정체성과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는 의미에서 신성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구조의 질서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빈 장소에서 소통한다. [각 학문은 하나의 같은 계 내에서 공통적 원리를 갖지 못한다. 각각의 학문은 각기 자기 계 내에서 정합성과 무모순성을 확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속학적 사회구조를 위하여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언어학에서 구조들은 상징적 요소 즉 궁극적 기표로 간주될 수 없었다. 또한 푸꼬는 "매순간에 개인적 경험의 고유한 구조는 사회체계 속에서 몇몇 가능 한 선택들(과 배제된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반대로 사회적 구조들은 그 구조들의 선택점들 각각에서 몇몇 가능 한 개인들(과 가능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한다."(『말과 사물』, p. 392)고 말한다.   [구조를 무엇으로 재인식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대상x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상x는 자기 질서 속에 다른 구조적 질서들을 종속시킨다. 다른 질서라는 것은 현실화 영역으로서 개입한다. 2) 대상x는 다른 질서들 속에 있는 그 다른 질서에 대상 자체가 종속된다. (대상x는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에만 개입한다.) 3) 모든 대상들x와 구조의 모든 질서들은 서로 서로 소통한다. 각 질서는 우선적인 종의 차원으로 규정된다. 4) 이런 조건들로부터, 그런 역사적 계기 또는 그런 경우에서, 구조의 질서에 상응하는 그런 차원은 스스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질서의 현실화에 복종한다(여기서 라깡의 "배제"(forclusion)의 개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들뢰즈는 구조에 대한 재인식의 방식을 6가지로 해명하면서 공간적 의미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 반복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에로 탐험은 찾을 수 없다. 무의식의 대상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것은 빈 것이라고 한 점에서 최고 형상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데아를 빈자리이라고 하면, 종래에 이데아의 등질적 충만성과는 다른 차원이 된다는 점에서 상징적 존재로서 이데아는 플라톤의 실재적 존재로서 이데아와는 구별된다. 이 구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데아의 실재적 존재의미를 살리자는 것이다. 이데아라는 것이 내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성립하는가? 이 말의 성립이 존재, 즉 시간의 역동성,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된 것은 무엇인가? - 조각으로 흩어진 개체들, 단독자들(singuliers)이다. ]   7. 마지막(일곱번째) 기준: 실행에 놓여 있는 주체(Du sujet à la pratique)   이런 의미에서 장소(위치)는 구조가 현실화되는 정도에서 실재적인 존재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장소(위치)는 상징적 요소들로 채워진다. 존재자들에 채워지기 앞서 후자들이 채워진다는 점에서 후자가 우선적이다. 이것을 빈상자의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이 빈 것은 비 존재가 아니다. 푸꼬는 "이 빈 것은 모자람을 구멍파는 것도 아니고, 채워야 할 빈칸을 기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사유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의 펼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말과 사물』p. 353) 고 한다.   이 빈 장소에는 장소의 이전이 뒤따르는 특출하게 상징적인 심급(l'instance)이 있다. 주체(le sujet)가 정확히 빈 장소를 뒤따르는 심급이다. 또한 이 주체는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intersubjetif)이다. 신의 죽음을 알리고, 인간조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어떻게라는 방법만 남는다. 니체가 절대 신이 여러 방식으로 죽는다고, 그리고 신들은, 하나의 신이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웃으면서 죽는다고 제시하려 했을지 모른다. 구조주의는 주체를 제거하는 사상이 아니라, 주체를 바수어서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서 주체는 항상 노마드(유랑하는) 주체이며, 비인격적인 개별화로 되어 있고, 전 개별적(pré-individuelle, 개체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전의 개체)인 단일자로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푸꼬는 "산개"에 대해 말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주관적 심급을 대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 조건들에서 진리체계가 "동시적으로 다수의 주체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구조의 두 가지 큰 우발사건(accident)은 유동하는 빈 상자가 진실한 결핍이거나 또는 빈상자가 채워져 정착적 결과로 사라지거나 이다. 언어학적으로 표현하면, 기표가 사라지거나, 기의가 사라지거나 이다. 신학-인간학 용어로 말하면, 신이 사막을 증가시키거나 [황폐화를 증가시키거나], 인간이 그것을 채우거나 이다. 인간과 신은 땅, 즉 구조의 두 질병이다.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은, 대상=x를 가치로 보는 빈 상자의 구조가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본주의 구조를 특징 지우는 상품, 화폐, 물신, 자본 등으로 표시되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모순이 구조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제시한다. 모순은 상상적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모순은 구조에 고유한 내적 시간 속에서 결과에게 구조의 자격을 부여한다. 모순은 구조 속에서 빈 위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생성으로부터 파생된다. 일반적 규칙으로 보면,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이 양자의 관계는 시초에서 우선적 결과들을 가지는 구조적 작동에 의해 항상 부차적으로 생겨난다. 조금 전에 우발사건들이라 불렀던 것이 구조에 도달하는 것은 밖으로부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반대로 내재적 "경향성"이다. 구조의 빈 상자 또는 주체에 상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념적 사건(l'événenemnt idéel)들이 중요한데, 이 사건들을 들뢰즈는 우발적인 것(accident)이라 부른다.   복잡한 문제들의 집합이 구조주의에서 제기되고 있고, 푸꼬의 구조적 "변환"(mutation)이나 알뛰세르의 "이전 형식"(formes de transition)이란 것도 구조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들은 빈 장소에서 해결될 문제이다. 또한 구조주의적 영웅도 있다. 이 영웅은 신도 인간도 인격도 보편도 아니며, 정체성도 없다. 이 영웅은 과도와 결함으로 타격 입은 구조의 분열(l'éclatement)을 확신한다. 그리고 영웅은 자신의 이상적 사건(l'événement déal)을 우리가 이미 정의했던 이상적 사건들에 대립시킨다. 이 영웅이 새로운 구조에 속한다는 것은 이 영웅의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힘에 의존하고 위치 이전을 뒤따르고 간직하는 민활성에 의존한다.   "주체에서 실천으로"라는 마지막 기준은 가장 모호하며, 미래의 기준이다. 앞선 여섯 가지를 통하여 다양한 영역들을 탐험할 수 있다. 구조의 수준차이에 따라, 실재와 상상, 실재적 존재들과 이데올로기들, 의미와 모순 등은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결과"들이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어떤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구조주의에서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찬성하는", 그리고 그것을 생산할 줄 아는, 책들이 중요하다.   [이 주체에 대한 연구에서 전자 현미경이나 고도의 분석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독자의 진솔한 그대로 말씀 즉 진솔한 기록의 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기에, 결국 들뢰즈는 라깡이 분석한 진솔한 '작은 자아'를 설명한 것이다. 이 자아가 아직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경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아이다. 자아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은 미래와 연관 있다. 미래의 문제는 기억을 포함하는 자기의 반복과 더불어 풀어가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 논문은 그 당시(1967,?) 구조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분석인 셈이다.]                                                     ***   "차이와 반복(1969)" 영문판 서문에 관한 견해     들뢰즈 pp. xv-xvii   우리는 이 서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를 먼저 말하자.   우리는 들뢰즈(Deleuze)가 베르그송의 철학적 문제제기방식과 프로이트의 심리적 문제제기 방식과 동일한 방향에서 철학사적 개관을 하고 있다고 본다 . 물론 대 철학자는 철학사적 흐름에 대한 견해에서 거의 동등한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에서도 천상과 제작자와 생성의 3차원의 구분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사유의 사유가 있고,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의 합일로서 실현태가 있으며, 질료인으로서 잠세태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상, 현상에 대한 실재, 실재를 총괄하는 원리를 구분하는 개체성에 관한 논의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이미 죽은 것에서 생명의 현상을 보는 19세기에 와서야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재성이 이미 수 억년의 역사와 기억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죽은 시체는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과거의 축적이며, 살아있는 생명체도 살아온 과정의 축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서장에 나오는 파라독스 3 가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분신(쌍둥이) 파라독스 (P. des doubles) [일자(원리)-다자 관계 - 고대철학]   대칭 파라독스 (P. des objets symetriques) [일자(주체)-타자 관계 - 근세철학]   무덤 파라독스 (P. des des sepultures) [일자(자아)-내재성 관계 - 현대철학]   이런 견해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제3장 "명제논리의 세 파라독스"에서 설명하는 지시화, 표출화, 의미화의 세 파라독스와 같은 맥락이다. 지시체, 표출체, 의미체의 세 경우를 설명하는데, 이 설명에서 각 대상은 이미 구체적 개별 물체와 연관이 없다. 말하자면 소쉬르가 말하듯이 기표와 기의가 현실적(위부의) 물체와 연관 없다고 하듯이 명제 의미는 구체적 사건의 진상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연관 있는 문맥 즉 지정학적 위상과 관계를 말한다. 이는 진리와 허위라는 가치가 문맥에만 연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위상이 일어난 사실의 내용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현상의 연결방식을 담론자가 의미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도 실재와 사실의 총체는 있었다. 문맥의 연결은 시각 즉 세계관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시각이 개념화되었다는 들뢰즈의 입장을 수긍한다. 그러면 총체와 내용은 개념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가? 어떻게 말하든, 말을 하는 것 자체는 표현이고 또한 시각이다. 이 시각들이 난무하는 세계가 바로 노마드의 세계이다.   들뢰즈는 노마드(nomade)의 세계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 또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까? 노마드의 세계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monad)는 자신 속에 모든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노마드의 개체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과정 중에 있기에,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시각을 보충하고 확충하면서 부풀어 간다. 말하자면 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가 시각의 자기 확장인 것이다. 모나드가 자기 한계 내에서 시각에 만족하고 있다면, 노마드에서는 시각의 한계가 자기를 비하시키고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본다. 천박하지 않는 노마드적 자아는 자연의 본성을 (극복하고자)넘어서 - 왜냐하면 그 본성이 자신의 한계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 자아의 새로운 형성 즉 자기 형성에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이는 자신의 형성을 넘어서 개체들 공동의 형성체를 성립시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제대로 보았을 것이다. 삶의 방식 자체가 무덤으로부터 이탈도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도 아니다. 무덤을 뒤에 유성처럼 달고 살아가며, 죽음의 신체를 데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무덤 즉 신체는 인간이 갖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체 이다. 왜냐하면, '삶의 양식'이란 문법에서, 또는 ?의미논리?라는 위상적 도식에서 죽음(무덤) 과 신체(추억)는 의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삶과 직접적 연관 중에 있음(연속성-기억)을 간직하고 표출하고 의미화 한다. 말하자면 이런 죽음과 신체를 반대 즉 대상(문자 그대로 앞에다 놓는)으로 여기고, 적으로 또는 무화 시키려는 의식자체가 병든 의식이다. 왜냐하면, 상대 없는 자신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미신이다. 상대가 있는 긴장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다른 한편 상대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천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그리스트교인은 믿는다. 마치 기하적 점이 위치와 크기 없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천국의 세계가 있단다.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 명제자체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세계이다"만큼 더도 덜도 아닌 만큼 의미 있다. 자족적 존재가 있는 세계에서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미 현실적 세계와의 문맥이 없는 백색의 세계에서 의미 있다.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이와 같다. 스스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살아가려는 생명체가 남(타 생명)의 살을 먹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도사들의 삶에서도.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지상의 세계이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세계도 의미 있다. 채소를 먹고산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할 때, 다른 의미란 전자의 두 세계와 후자의 세계의 차이로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비는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의미이다. 의미는 기본적으로 문장들 간의 관련 맺는 정도에서 의미가 표출된다. 누구(무엇)와 연관 맺었는가? 수 억겁의 인연 연기를 말할까? 그러고도 무엇으로 어디에서 진리와 가치를 말할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하여 한 시각.(Russ, 1993) .***   뤼스(Jacquline Russ) p. 237. Atlas de la philosophie, Kunzmann et 2, Paris, LGF, 1993, (Munich, DTV 1991)   독일에서 출판한 이 철학의 위상적 지도(Atlas de la philosophie)를 프랑스판을 만들면서 프랑스철학자 몇 명을 첨가했다. 그 중에 뤼스는 들뢰즈에 관해 반쪽을 할애한다. 여기서 그녀는 차이와 반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 "차이와 반복(1968)"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사물의 시각이 출현함을 알립니다. 들뢰즈는 사유된 실재를 익명의 영역 즉 주체 또는 인격적 개별성이 박탈된 영역으로서 표현한다. 그래서 주체의 정체성(동일성)은 부서져야 한다. 인격적 나(je)와의 모든 관련를 넘어서 자아의 동일성도 없고 주체도 없는 무한정한 우주가 나타난다. 결국 존재에는 인격이 없다.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72)와 더불어 인격 없는 욕망의 영역을 재발견하다. 이 욕망이 삶(la vie)을 감싸고 있고 또한 생활(la vie)도 생산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생의 창조이자 권능의 의지이다. 이 욕망은 결함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권능이다. *-   [우리는 여기에 몇마디 보태자. 뤼스의 견해는 정신 분석적 담론에 상당히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인격 또는 자아의 부서짐은 소자아(moi)의 행태이다. 제도와 관습에서 미신과 환상에 빠진 주체를 넘어서, 소자아라는 현상(겉모습)을 표출하는 권능인 실재 즉 대자아(Moi)를 발견한다. 이 빙산의 물밑에 있는 의식과 같은 대자아는 욕망이다, 대자아는 어느 누구가 아니라 그 무엇이다. 존재는 인격도 사물도 아닌 그 무엇이다. 이는 삶의 여러 양태를 생산하는 기본적 동력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있게 하는 근원이다. 들뢰즈의 사상의 전개로 보아, 차이와 반복에서 욕망이라 불릴 수 있는 권능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고서, 안티-외디푸스에서 존재적 능력이 실현하는 방식과 실현한 사태들에 주목한 것이다. 이 생산된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긍정 죽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영역판 서문의 개략***   철학사를 쓰는 것과 철학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는 위대한 사상가의 도구와 광활한 영역을 연구한다. 다른 한편 나의 도구를 잘 가다듬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작업의 결과물 다른 말로 하면 발견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서,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흄, 스피노자, 니체, 프루스트를 열심히 연구한 후에 그가 '철학한다'는 노력으로 차이와 반복을 썼단다. 이 책에는 가타리와 함께 했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왜 차이와 반복과 같은 특별한 문제에 대해 집착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고 많이 다루어진 문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는 차이를 동일률에, 동일자에, 유사성에, 대립자에, 유비추리에 종속시키며, 또한 이 차이를 개념의 정체성에 도입했으며, 차이를 개념자체에 두고,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개념적 차이에 도달했다.   우리는 차이를 여러 방식으로 종속시킬 것이다. 먼저 차이를 생각하기 위해서(즉 개념 또는 주어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종적 차이는 류적 형식에서 동일적 개념을 미리 가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킨다. 그 다음 차이를 (지각의 관점에서) 유사성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술어의 관점에서) 대립에, (판단의 관점에서) 유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차이를 그 자체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은 차이의 유기적(organique) 표상을 제공하고, 라이프니츠와 헤겔과 더불어 영(혼)적(orgique *1) 표상을 제공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차이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반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방식으로 반복도 동일성으로, 유사성으로, 동등 또는 대립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경우에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로서 취급한다. 그래서 두 가지(차이와 반복)는 둘 다 정확히 동일한 개념으로 표현되더라도 차이가 있을 때는 서로 반복한다. 반복이 변화를 일으킨 모든 것은 반복을 감추고 동시에 은폐하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양한 변종은 반복을 감추기 위하여 반복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종이 바로 반복의 조건, 반복의 구성적 요소, 특히 반복의 내부 이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런(반복이란) 개념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변장하고 이전하는 것은 반복의 일부이며 차이의 일부 즉 공통적 이동과 흩어짐이다. 극한에서 차이와 반복의 하나의 힘이 있기보다, 다자 속에서 작용하고 다수성을 결정하는 하나의 힘이 있지 않을까?   모든 철학은 예술과 과학과 연관을 맺는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해 말하는 자기 방식을 갖춘다. 그러나 이제는 어렵다. 철학은 초소한의 우월성조차 요구할 수 없어진 이래로 철학의 개념을 만들고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가지고 과학적 기능이나 예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 개념을 과학적 기능과 예술적 구조와 혼동해서 안되며, 과학의 이런 저런 영역에서 또는 예술의 스타일에서 이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과학적 내용과 예술적 내용은 매우 기초적이며, 이 내용이 과학 또는 예술을 진보하게 하기보다 얻어진 기능과 구조로부터 철학적 개념을 형성함으로서 철학이 진보한다. 철학은 과학 또는 예술에 대해 독립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념의 각각의 수준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이 두 개념 사이에 안정적 관계는 없는 지를 물으면서, 철학적 개념을 미분화(diffrentiatio)의 수학적 함수와 차이화(differenciatio)의 생물학적 기능으로 구성하고자 노력한다. 예술 과학 철학은 동적(mobile)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은 자체의 방식으로 서로서로 대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의 힘은 사유의 전통적 이마쥬를 문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마쥬에 의해서 우리는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생각하며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할 때, 목표를 결정하는 사유의 다소 은밀한 선가정적 이마쥬가 있다는 것을 들뢰즈는 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유란 훌륭한 본성을 소유하며 사상가는 (당연히 진리를 '원하는') 선한 의지를 소유한다고 가정한다. 인지과정을 모델로, 다른 말로 하면 상식으로 또는 가정된 동일한 대상에 관한 모든 능력의 사용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오류 단지 오류일 뿐인 것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진리는 해결에 관여한 것, 다른 말로 하면 대답에 사용할 수 있는 명제인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은 고전적 사유의 이마쥬이다. 비판이 이런 이마쥬의 중심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사유에 대해 이런 문제 - 명제적 양상을 넘어서 지적하는 문제 - 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모든 인지를 벗어나는 뜻밖의 만남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그 사유와는 아주 다른 진실한 적과 대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사유를 사유의 자연적 무감각과 악명 높은 나쁜 의지로부터 멀어져가게 하며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비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들뢰즈에게] 이제, 사유의 새로운 이마쥬, 오히려, 새로운 이마쥬를 가두는 저[고전적] 이마쥬들로부터 사유의 해방이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 차이와 반복에서 이런 탐구는 자치적이며, 이것은 이들 두 개념을 발견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것은 제3장이다. 이 제3장은 사유의 식물적 모델을 환기시킬 가타리와 더불어 행한 탐구에 이어갈 책의 입문으로 쓰인다. 사유의 식물적 모델(vegetal model)은 나무에 대립되는 뿌리이며 잔가지로 나뉜 사유 대신에 뿌리-사유(rhizome-thought)가 될 것이다.   *1) 뒤마는 'orgique가 그리스어 οργη에서 나왔다고 하고 격정(bouillonnement)으로 설명한다.   고전 그리스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orge: I. agitation interieure qui gonfle l'ame, - disposition naturelle de l'ame   II. sentiments violents ou passionnes, - ressentiment, colere - vengence, d'ou puniton, hatiment     참조 2)   경험론과 주관성 1953 [흄에 관한 연구]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8   니체와 철학 1962, 니체 1965   푸르스트와 기호 1964 - 증보 1970.   [왜 이서문에서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를 제외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송주의 1966]     안티외디푸스 1972(avec Felix Gattari)   카프카 - 미세 문학을 위하여 1975 (avec Felix Gattari)   뿌리 1976 (avec Felix Gattari)   천개의 고원 1980 (avec Felix G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 (avec Felix Gattari)    참조 3)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에 대한 한 견해 (Oriol, 1979)***   오리올(Timmt Oriol), p. 193, Histoire de la philosohie, Nathan 1979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68)에서 자식-부모관계에 근거한 전통적 정신분석만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다. "어린이는 아빠-엄마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법사 놀이, 카우보이놀이, 술래잡기놀이(도둑과 순경) 기차놀이, 작은 자동차놀이도 한다. 기차는 아빠가 결코 아니며, 기차역은 어머니가 아니다." 확실히 어린이의 '욕망하는 기계(기관 *4)(Les machines desirantes)' (충동들과 기관이 지향하는 다수의 대상들의 이상야릇한 통합인 기관차)는 부모관계를 위한 한 지위, 즉 단지 한 지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지위를 허용한다.   (리샤르 견해) 또한 오리올은 리샤르(Michel Richard)가 다음과 같이 썼다고 소개한다. ?만일 사람들이 안티-외디푸스에서 아빠-엄마-얘기라는 삼각관계의 밀접하고 폐쇄된 영역에서 작은 욕망들과 큰 욕망(le Desir)을 가두고 있는 부르주아 정신분석의 비판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들뢰즈가 이 작은 욕망(ce desir)을 생명의 활기와 복잡성에 닮은 보편적 흐름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욕망과 무의식적 힘들 때문에 그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관"이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욕망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임과 동시에, 특히 욕망의 혁명적 능력 지칭하고자 한다. 욕망은 개인적 무의식에서 보다, 큰 조직체와 억압장치에 대해 욕망이 대항하여... 항의하는 모든 형식들에서 더 [그럴듯한] 기준이 된다..."   (72년 들뢰즈 자신의 견해) 또한 오리올은 클레망(Catherine, Backes-Clement)이 대담한 들뢰즈와 가타리와의 대담(LArc, n. 49, 1972)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공격하는 것,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천에서 정신분석학 자체이다. 가족적이거나 분석적이거나 간에 외디푸스는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기관을 억압하는 장치이지, 무의식 자체의 형성체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를 너무나 허락하는 우리들의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성관계보다 소위 더 낫다는 이상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더럽고 작고 가정적인 비밀'로 환원되지 못하는 성관계의 이름으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우리는 외디푸스의 상상적 변이들과 구조적 불변이체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두 끝에는 욕망하는 기관들의 똑같은 막다른 골목과 똑같은 붕괴가 있기 때문이다. ...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신경증으로 만든다. 이런 신경증화 작업은 또한 정신병적인 사람을 외디푸스로 만들려는 작업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서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4) 여기서 기관은 기계적 기관이 아니라, 생명적 나아가 영(혼)적 기관이란 뜻으로 우리는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외화된 정신과 같은 형상이 아니라, 형성 과정 중인 질료적 성질의 것이다.  
1043    1950년대 시인의 <시와 시인의 말>1/정한모(鄭漢模) 댓글:  조회:1534  추천:0  2019-12-14
1950년대 시인의  1/정한모(鄭漢模)       멸입(滅入)                                        한 개의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맑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별리(別離)       지금은 차라리 아름다울 수 있는 그것은   현악기(絃樂器) 혹은 목관악기(木管樂器)의 고음(高音) 그 가늘한 도레모로로 내 가슴에 금을 그으면서 사라져 간 몇 개의 이별(離別)들   녹아드는 빙과(氷菓)의 맛처럼 슬픔은 그런대로 자릿한 미각(味覺)이기도 하였으나   흔들리는 바다의 그 푸른 바탕에 떠서 하늘하늘 하얀 꽃이파리는 지고 우리들의 이별(離別)은 끝났다.   끝이 난다는 것은 홀가분한 휴식(休息) 아니면 고요한 기도(祈禱)와도 같은 것   뜨거웠던 입술 속에서 떠오르는 달무리 그렇게 번지어가는 추억(追憶)   창의 불빛 휘파람소리 숨소리 이슬 젖은 소롯길   빗소리 바람소리 하얀 눈길   가슴 조이는 통고(痛苦)마저도 불붙는 생명일 수 있었던   그것은 떨어뜨린 눈물로 지워진 흐릿한 글씨 또는 남은 향기   이제는 거리(距離)에서 아물아물 바람에 스치우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별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난해難解와 전달傳達                                                                                            정한모(鄭漢模)                                                                        는 말을 듣는다. 지당한 말들이다. 사실 현대시는 난해하다. 말라르메의 상징시 이래 T. S. 엘리어트 의 철저한 주지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도 이미 허다한 논란을 거듭하여 왔다. 이와 같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오면서도 시인을 있게 하고 더욱 더 시가 절실하게 요구되면서 현대시가 발전해 왔다는 것은 현대시의 난해성이란 어쩔 수 없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난해성은 긍정(肯定)되어야 할 것이다. 극도로 압축된 문학형식 속에서 현대 지성의 다양성과 그 논리를 처리하려고 하면 작품은 당연히 난해해질 수 밖에 없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로부터 읽고 생각하는 시로 그 매력의 중심을 이행해 온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으나, 현대시는 그 대부분이 읽는 시이지 애송(愛誦)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노래하는 시에서는 반복이 생명이며 언어의 형식이나 음률적(音律的) 요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복되기 쉬운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시인 현대시는 그 기억의 성질이 전연 다른 것이다. 노래하는 시의 경우엔 그 기억이 언어의 음에 더 많이 의존하지만 읽는 시는 이미지 혹은 의미로서 마음에 남는 성질의 것이다. 이리하여 노래하는 시로서의 전달성은 잃었지마는 그 대신 읽는 시로서의 전달성을 갖게 되었다. 즉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지각하는 기능을 현대시는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의 기능과 효용은 그 폭을 넓혔고 또 그 전달성에 있어서도 단순했던 과거의 시보다 복잡해졌으므로 자연 난해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시는 언어에 의한 표현활동의 최고의 형식이다. 시인들은 이것을 믿고 있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끊임없이 언어에 대한 시도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경험이 새로우면 따라서 언어표현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달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욕은 생활을 새롭게 하고자하는 지향(指向)과 근본적으로 결부되고 있다. 시인들이 그 표현에서 특이한 형식, 리듬, 신기(新奇)한 이미지, 또는 의미가 풍부한 메타포(metaphor)에 의하여 혹은 리듬을 뒤바꾸거나 이미지나 의미를 고의로 축소 내지 확대하거나 탈락, 단절시키거나 하여 그것 때문에 대단히 난해한 표현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시인의 기술의 미숙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생긴 혼란 때문에 난해해진 것까지 포함시킨다는 말은 아니지만 현대시의 난해성은 이런 필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의 난해성은 시에서 의미를 제거(除去)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시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데에도 본질적으로 뜻이 다른 두 계열이 있었다. 저 몽롱한 음악적 정서에 젖고자한 상징시(象徵詩)나 그 뒤 순수시 같은 것은 오직 심미적(審美的)인 목적을 위하여 의미를 버렸고, 같은 심미적 목적을 위함이면서도 몽롱한 음악의 경지를 지양(止揚)하여 명쾌한 시각적 심상을 찾는 초현실주의의 이후 모든 포멀리즘(formaism)은 회화적(繪畵的)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시에서는 음악을 듣거나 시화(詩畵)를 감상(鑑賞)하듯 다만 순수히 감각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감각하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는 이런 심미적 목적만이 아니라 보다 더 시인의 개체적 현실의식과 내적체험을 새로운 언어의 구성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주체적 리얼리즘(realism)을 기초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시가 난해한 경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편성을 가진 가치의식이 아니고 다만 현대적 자아 속에서도 사적(私的)이며 개인적인 현실의식과 내적세계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속에는 남에게 이해될 수 없는 많은 것이 불가피하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시인들이 전달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알기 쉬운 시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또한 아무리 난해한 시라 할지라도 완전히 불가해(不可解)한 시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시는 그 구성에서부터 긴장과 갈등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잘못 꾸며진 경우엔 그것은 산란한 단편(斷片)들의 어지러운 모습이거나 참으로 무엇인지 전연 짐작할 길 없는 그야말로 난해한 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짤 째어진 시라면 미묘한 색채(色彩)의 새로운 조화(調和), 또는 불협화음의 아름다운 화음(和音)의 매력을 지니게 된다. 좋은 시는 반드시 아름답게 이해될 것이며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난해성과 전달이 현대시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처럼 T. S. 엘리어트는 “진정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발레리는 “시는 천 명의 독자에게 한 번만 읽혀지는 것과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 읽히는 작품이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난해한 시라고 할지라도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이 아니라 열 번만이라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훌륭히 전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발레리의 이 말은 시의 고고성(孤高性)을 더 강조한 듯하나 T. S. 엘리어트의 이 말은 현대시의 난해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명(究明)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是認)한다. 더욱이 감상능력이 그 감상의 대상 내용인 시적미(詩的美)의 조직의 변화를 미처 따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난해성은 더욱 완고(頑固)할 것이다. ‘시의 빈곤(貧困)’이란 말이 어느 시대에도 잘 씌어진 말 같지만 오늘날 역시 ‘시의 빈곤’이란 말은 자주 논의되고 있다. 현대라는 시대와 현대의 인간성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면 현대만큼 절실하게 시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현대의 버스’를 미처 타지 못한 지참(遲參)한 인간이 자기의 낡은 시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낡은 시의 방법과 기술로 쓰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세계를 현대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의 빈곤’을 재래(齎來)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희극(喜劇)은 시의 빈곤의 원인이 자기의 낡아빠진 머리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매력을 불변의 규준(規準)으로 삼고 모든 사리(事理)를 단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청각이나 시각 같은 감관(感官)의 세계에서도 또한 논리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대의 진화와 변화를 쉽사리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시의 경우에도 낡은 감상능력을 한도로 하여 언제까지나 이것에 의거하여 오늘 날의 현대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러한 독자에겐 현대시는 다만 차단된 벽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다시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하며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시의 난해성이 불가피한 경향이란 사실에 현혹되어 난해한 시만이 가장 새로운 시인 듯 착각하고 일부러 불가해한 시를 써가지고 자랑으로 삼고 있는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시를 쓰는 사람이 오늘날 없지 않아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말이 시인에게 조금도 자랑이 될 수 없다. 현대시에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있으나 전달되지 않는 불가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빈약한 육체와도 같은 보잘 것 없는 사고(思考)를 감추기 위하여 불투명한 의미를 가진 의상(衣裳)으로 애매하게 감싸가지고 난해성이란 추세를 이용하여 현대시 속에 한 몫 끼어보려는 사이비(似而非) 현대시는 적발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난해성이 현대시의 운명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난해성에 편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시인의 시의 기술이 이러한 난해성을 얼마나 가능한 한도에서 막아내는데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시인들의 노력은 이 현대의 다양성(多樣性)과 착잡(錯雜)한 논리를 어떻게 정돈하고 질서를 세워 나가느냐 어떻게 논리적 이미지를 조형(造形)하여 현대시로서의 발랄한 생명을 지니게 하느냐 하는 방향에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난해성을 일종의 스타일처럼 착각한다든지 심한 경우 난해성을 도리어 과시하는 넌센스는 현대시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통찰과 그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정화(淨化)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韓國戰後問題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한자는 한글로 표기하고, 중요한 한자는 괄호에 넣어 표기하였으며 영어단어는 괄호속에 영문자를 넣었음.
1042    상징적 이미지 - 홍문표 댓글:  조회:1221  추천:0  2019-12-14
상징의 의미 1. 홍문표 ​ 상징(symbol)이란 원래 짜 맞추다, 비교하다 등의 어원을 갖고 있으며 명사형은 표시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 헤어질 때 약속의 징표로 동전 따위를 둘로 나누었다가 후일에 만나 이를 맞추어 보는 절차가 있다. 우리의 설화 중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그의 아들 유리와의 부러진 칼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한 예가 된다. 주몽이 부여국에서 왕자들의 시기로 먼저 떠나면서 어린 아들 유리와 칼을 잘라 서로 징표로 삼고 후일을 약속한다. ​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된 뒤 유리는 갖은 고난 끝에 주몽을 만나게 되는데 부러진 칼을 맞추어 보고는 부자의 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칼이란 두 사람의 약속, 두 사람의 관계를 표시하는 기호(mark)나 징표(token) 또는 부호(sign)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부러진 칼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반드시 둘이 결합해야만 온전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이란 어떤 진술이나 이미지가 어느 한 쪽, 특히 나타난 반쪽으로 의미가 없고 나타나지 않은 타면과의 결합을 통하여 완성되는 표현 방식임을 알 수 있다. ​ 특히 흥미 있는 일은 상징(象徵)이란 한자어의 풀이를 주역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상(在天成象)이라 하고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형(在地成形)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징이란 하늘의 징조, 하늘이라는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근본적인 원리를 표상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상징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 즉 불가시적인 관념의 세계를 가시적인 사물, 감각적인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 상징의 근본적인 속성임을 알 수 있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그래서 이러한 상징화의 기능은 오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좀 더 깊게 해석을 한다면 신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신들은 자기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으로서는 그의 무궁한 능력과 섭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은 언제나 징조나 조짐을 통하여 그의 모습과 의지가 계시(啓示)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 계시하고 있는 계시물, 즉 상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을 파악하기 마련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를 이데아(Idea)라 하였고 표면의 세계를 현상이라 하여 본질의 그림자로 취급하였다. 말하자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 지상의 세계, 관념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상징이란 바로 이러한 두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신이나 본질이나 관념의 형이상 세계가 형이하의 세계로 다가오는 방식이 바로 상징이 된다는 말이다. ​ 자연은 하나의 사원, 그 살아 있는 기둥들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간다. 暗夜처럼, 광명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심오한 통합統合속에 머얼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인 양 香과 色과 음(音)이 서로 화답한다. 어린이 살결처럼 신선한 향기, 木笛처럼 은은한 향기, 草原처럼 푸른 향기 있고, - 그 밖에도 썩은 냄새,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정신과 감각의 앙양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닌 향기도 있다. - 보를레르「만상조웅」 ​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보를레르의 시집「악의 꽃」중에 나오는 작품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란 바로 신의 상징이며 그러기에 인간이란 신의 상징인 숲을 거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라고 할 대 그 사원의 주체는 바로 신일 것이다. 따라서 신은 자연이라는 우주적 사원에 계시는 존재가 되며 달리 말하자면 자연이란 신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감각적인 교류를 한다는 것이 둘째 연이겠고 셋째 연에서는 후각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보다 신비로운 신의 상징들이 감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문예사조에서는 상징주의를 사실주의 다음에 등장한 것으로, 낭만주의의 연장으로 본다. 그러나 상징주의 근원은 이 세상의 사물을 관념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플라톤 사상에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플라톤 사상과 관계가 깊지만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실들에 쾌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도덕이나 철학을 강조한 플라톤 사상에 위배 된다. 한편 상징주의자들은 감각과 정서와 상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낭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었으나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려 하지 않고 그것이 희미하게 암시한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 특징이다. 현실적인 사물들이 암시하는 영원히 아름다운 세계는 아무나 볼 수 없고 단지 섬세한 감각과 영감이 부여된 사람만이 직관할 수 있는 신비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단지 감각적인 세계에 대하여는 흥미를 잃었고 루소 등이 가르친 인간성의 아름다움, 그에 기초한 발전 사상, 낙관주의를 깊이 의심하게 되었고 더욱이 당시 새로운 실증주의에 자극 받아 생긴 사실주의에 반감을 느껴 그들 스스로를 퇴폐파(decadanist)라고 자칭할 만큼 다소 절망적, 비관적, 조소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를레르는 전원이 아닌 현대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 향유할 수 있는 신비의 세계를 암시하려고 하였다. 그 세계를 암시함에 있어 그는 세상의 사물과 정신적 세계의 상호 대응관계를 말하고 모든 사물은 다 정신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상적 자아를 비꼬는 태도를 보이고 의미를 배제하면서까지 음악성을 강조한 포우와 무한한 신비의 화음을 만든 음악가 바그너의 예술에 경탄을 보냈다. 그리하여 시의 음악성과 암시성을 통하여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한편 말라르메는 시의 음악성을 극단화하기 위하여 말의 외연적 의미나 문법마저 파괴하는 작업을 하였다. ​ 상징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주지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엘리어트로 이어지고 독일의 표현주의나 프랑스의 초현실에도 접맥이 되고 있다. 우리의 시사에 상징주의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소위 퇴폐적인 낭만주의였으며 특히 황석우의 시와 시론을 많이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한용운이나, 이육사, 윤동주 등에서도 상징적 시법을 발견할 수 있다. ​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터 되는 사막의 수풀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다보면서 - 이 애, 너의 온갖 오뇌, 운명을 나의 끓는 삶 같은 애(愛)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 황석우「벽모(碧毛)의 묘(猫)」 ​ 이 시가 발표될 당시만 해도 난해시니 몽롱체 시니 하면서 논쟁을 벌였던 상징적 수법의 시다. 난삽한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여 더욱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이 시에서 나와 고양이는 모두가 자아의 두 얼굴, 즉 선과 악, 순수와 비순수, 기독과 악마라는 양극적 의식의 상징일 수가 있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이 무엇인가를 대신하고 어떤 가치 개념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능력을 가진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은 상징력을 지닌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상징력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상상력의 최고 형식일 수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보더라도 그것은 일정한 의미를 지닌 음성 기호로서 음성 기호란 의미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상징을 통하여 사고하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 세상에 우주 만물이나 우주 조화가 신의 상징, 조물주의 상징이라면 그러한 만물이나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의식까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인간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 카시러는 상징성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라 하였다. 동물들은 본능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으로 살지만 인간은 그 위에 상징 체계를 더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영위한다. 그 구체적인 실제가 언어, 신화, 예술, 역사, 과학이다. 인간은 어떤 사물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다른 어떤 체계 속에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물을 추상화하고 다른 어떤 체계를 연상하여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바로 상징 능력이며 동시에 생과 시간의 지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선 공간, 즉 환경의 지각은 모든 생물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그들은 모두 공간과 자신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산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처럼 유기적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또 다른 세계를 전망한다. 카시러는 이러한 공간의 지각을 상징의 공간, 즉 추상적 공간이라고 한다. 기하학적 공간이나 예술가가 창조하는 미적 공간이 바로 그런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그런데 그 자체로서 다른 것을 대표하는 사물 일체를 상징이라고 할 때 여기서 대신함의 논리는 기호(sign)의 경우나 은유(metaphor)의 경우나 알레고리의 경우도 같은 논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의 한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과학에서는 물은 H₂O라는 기호로 사용하고 독약이 있는 약품의 표지에는 해골을 그려 놓는다. 그래서 카시러는 신호는 물리적인 존재 세계의 일부요 상징은 의미 세계의 일부라고 하였는데 가로등의 빨간 표시나 교통안내 표지판은 비록 의미의 세계이지만 상징이라 하지 않고 기호라고 한다. ​ 그렇다면 기호는 확정적인 것이지만 상징은 암시적인 것이다. ‘고양이’란 말이 있을 때 이는 고양이라는 동물을 대신하는 음성 기호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눈은 신비롭고 어떤 매력을 지닌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전자는 기호적 사고요, 후자는 상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기호는 그 지시 내용이 정확하고 직선적이다. 거기에는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상징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나 최근 기호론이 발달하면서 상징은 기호의 일부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모든 언어는 의미를 상징하는 기호라는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과 은유, 즉 상징과 비유에 있어서도 다같이 사물의 의미나 정신을 대신한다는 점은 일치하지만 몇 가지 구별되는 점이 있다. 첫째로 상징은 관념만을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지만 은유는 사물을 다른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상징의 경우는 본의는 생략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비유는 본의와 유의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 (1) 그의 머리는 최상의 순금이며 그의 머리는 텁수룩하고 까마귀처럼 검구나. (2) 그들이 포도원지기로 삼았구나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 구약성서 ‘아가서’에 나오는 구절들인데 (1)의 인용에서는 ‘머리는 순금’이라든지 ‘머리는 까마귀처럼’이란 문장으로 사물과 비유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은유와 직유의 방식이지만 (2)의 문장에 나타난 ‘포도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도원은 보조적 이미지일 뿐 원관념이 없다. 그러나 ‘포도원’은 서구적 관례로는 처녀성을 뜻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처녀성의 상실이란 의미를 대신하는 상징적 수법이라 할 수 있다. ​ 둘째로 은유에 유사성이나 비교와 대조의 관계로 대각선이 그어지는 것이지만 상징은 그러한 연결선이 없거나 회피한다. 따라서 은유보다 더욱 상상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웰렉과 워렌이「문학의 이론」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상징은 반복적이라는 사실이다. 은유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면 상징은 은유가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관례화 되어 원관념이 생략되는 상징어만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징이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휠라이트도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우리의 지각 경험 가운데 비교적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요소를 말하며 지각 경험 자체만으로 전달되지 않거나 충분히 전달될 수 없는 더욱 평범한 어떤 한 의미 혹은 일련의 의미를 뜻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존 던의 설교집에 나오는 은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구절을 훼밍웨이가 소설의 제목으로 하면서 당초에는 은유였던 것이 상징으로 된 경우가 그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알레고리(allegory)란 다른 것(allos)과 말하다(agoreuein)의 의미가 합쳐진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문제에다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 빗대어서 말하는 비유법이다. 따라서 본래의 뜻을 숨긴다는 점에서 상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 첫째로 수사적 측면에서 알레고리는 주로 의인화와 문답법의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의인화가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글을 쓸 때 작가가 개념보다는 술어에 구속되어 글을 쓰기 때문이며 또한 언어란 사람에 의해 지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개념에 관계된 명사보다는 사고, 행위, 감정과 관계된 술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의인화가 나타나며, 또한 사람에 지배된 언어는 본질적으로 인격성을 띠게 되어 의인화가 나타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솝의 우화(fable)나 우리의 고전 중 별주부전이나 장끼전 등도 그렇다. 한편 문답법은 사건이나 사리를 추상적인 데에서 구체적으로 명백하게 서술하기 위하여 문답의 형식을 취하는 수사법이다. 이는 지식이 낮은 사람에게 교리나 이론을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기독교에서 특히 예수와 그 제자들, 불교의 화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알레고리는 교훈적 입장을 가지므로 문답법의 형식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의인화와 함께 의동물화(擬動物化)도 일반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난다. ​ 둘째로 알레고리를 의미론적 측면에서 볼 때 현세성과 교훈성을 특질로 갖는다. 알레고리의 현세성은 이원론적 세계인식에서 비롯된다.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현실과 이상을 명백히 구분하는 태도로서, 현실적 인식에 근거되어 있다. 반면 상징은 일원론적 입장이며 현실과 이상을 통합한 실체는 현세성 보다는 신비성을 특질로 갖는다. 따라서 알레고리의 현세성은 분리적인 명백성을 갖게 되고, 상징의 신비성은 다의적이고 통합론적인 모호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명백한 현실인식은 우리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덕, 진리 등의 추상개념을 교훈적으로 지시한다. 왜냐하면 모든 교훈이란 현세의 행위를 그 적용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 테이트는 시를 양분하여 의지의 시와 상상력의 시로 나눠 전자를 알레고리 시와 동일시하였다. 또한 유럽 문학에 나타난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것을 순수한 알레고리라 하였고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알레고리가 필요하게 된다고 하였다. ​ 아버지가 말했다. 보아라 이 그림을 썰매가 나는 듯이 쫓고 있는 것을 마부는 죽어라고 토나카이에 채찍을 하고 나그네는 짐 뒤에서 돌아보며 쉴새없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시방 총구에서 샛빨간 불이 번뜩이는 것을. 아들이 말했다. 한 마리 맞았어요. 아아 또 한 마리 달겨 들었는데 그것도 피투성이로 나뒹굴어졌어요. 밤이군요. 끝없는 광야(曠野)가 눈에 덮혀 있네요. 그런데 나그네는 잡히지 않았을까? 썰매는 어디까지 달려가는 것일까? 아버지가 말했다. 이렇게 밤이 샐 때까지 어제의 뉘우침을 하나하나 사살(射殺)하고 시간처럼 내일로 달리는거야 이윽고 해가 솟는 길 저편에 빛나는 미래와 거리가 나타나는 거야 보아라 언덕 위의 하늘이 벌써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지 않니. - 마루야마 카오루「미래에」 ​ 인용한 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두운 밤, 눈 쌓인 광야에서 이리떼와 썰매를 탄 마부와의 싸움이 전반부에 서술되고 마지막에는 인생에게 있어서도 어제의 뉘우침과 싸우면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을 향해 간다는 교훈을 암시하고 있는 알레고리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의 유형은 크게 제도적 상징과 개인적 상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상징 또는 인습적 상징을 보다 역사적으로 소급하면 원형상징에 이른다. 우선 문자나 기호같은 것은 어느 개인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문화적 약속이나 오랜 인습으로 형성된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어떤 수량을, 한글 자모는 각각 어떤 소리를 대표한다. 화학에 있어서 분자식이나 기하학의 도표나 도형 등도 다 어떤 관념, 생각, 형상 등을 대표한다. 이러한 종류의 상징은 기호라고 해도 된다. 국기, 상표, 학교나 단체의 뺏지, 십자가 같은 종교의 표지 등은 일반적 기호와는 구별하여 제도적 상징이라고 부른다. 집단 공유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적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에게 제도적 상징은 큰 의미가 있으나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의 무의미하다. 이러한 제도적 상징을 프롬은 인습적 상징(conventional symbol)이라 했다. ​ 그런데 인습적 상징이란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 사이에 어떤 내재적 연관성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상’이란 말과 이 말이 지시하는 ‘대상으로서의 책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오직 인습적으로 우리는 그 상징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습적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징은 그 상징과 감정 사이에 내재적 연관 관계를 갖는다. 즉 ‘십자가’는 기독교의 인습적 상징이지만 십자가의 특수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또한 정신과 육체의 상호 관련성까지를 의미한다. 곧 단순한 인습을 초월하여 대상과 상징 사이에 연결 관계가 놓이게 된다. ​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옵소서 조그마한 미끼라도 저는 물겠나이다 날파리나 날빛 하나 놓치지 않고 이것저것 덥석덥석 물겠나이다. (그리하여 저 스스로 죄를 사하겠나이다) - 황인숙「기도」에서 ​ 인용한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물론 종교적 상징이겠지만 넓게는 문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교적 상징이든 문화적 상징이든 그것은 개인적인 표시의 대상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관습적이고 그래서 제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한편 상징은 인습이나 제도에 의해서 굳어진 문화적 상징도 있지만 시인이 창조하는 상징은 인습적인 관계와 무관한 전혀 개인의 상상력을 통하여 상징을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징을 문화적 상징, 우연적 상징, 긴장의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휠라이트는 개인적 상징의 특성은 긴장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실 시에서 십자가나 비둘기 등의 이미지를 사용한다면 관습적으로 이미 그 의미를 알아차린다. 이것은 대단히 반복적이고 자동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는 이미 그 의미가 고정적이어서 정서나 의미의 낯설음을 경험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의 창조적 어법은 상징의 낯설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표면적인 일상성에서의 문제이지 개인적인 상징도 엄격히 말하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적 원형과의 관련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김춘수「처용단장 제1부」 ​ 인용한 시는 제목을 보아 처용을 소재로 한 시다.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달밤에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가 역신과 동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용의 단장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용한 시를 보면 한 사나이가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은 바다란 무엇일까. 우리는 상징의 특징을 다의성, 신비성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죽은 바다의 본의는 난해한 신비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은 김춘수의 전혀 개인적인 상상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개인적 상징이라고 한다. 따라서 개인적 상징의 특징은 암시성, 다의성, 입체성, 문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적 이미지의 한 유형으로 원형적 상징을 들 수 있다. 원형(原型)이란 원래 근본적인 틀이라든지 어떤 제품의 기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발을 만들 때는 신발의 기본 틀에 맞추고 버선을 만들 때는 버선의 본에 맞춰 천을 재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모양의 물건을 만드는 데는 기본적인 틀이 필요하다. 이러한 틀에 의해서 계속 동일한 물건은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도 이러한 기본 틀에 의해서 사고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인습적 상징이나 제도적 상징의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든지 무궁화가 한국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둘기와 평화, 무궁화와 한국이라는 사고의 도식은 지역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결정된 제한된 약속에 속하는 것이지만 원형(archetype)상징은 그러한 특수한 상황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이 오랜 세월 자연과의 교섭 가운데 무의식 적으로 체득된 사고유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과 물의 관계를 보면 물은 모든 생물들의 필수적 요소다. 세척의 기능도 있고, 성장의 기능도 있고, 재생의 기능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본능적으로 창조의 힘이나 정화의 기능, 풍요와 성장의 의미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느 일부의 인간만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의 오랜 교섭 속에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자연에 대한 보편적 의미를 원형적 상징, 또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한다. ​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상징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물질이 서양에서는 물, 불, 공기, 흙이다. 우주가 이 네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4원소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기본적인 물질을 물(水), 불(火), 흙(土), 금속(金), 나무(木)라 하고 이를 오행(五行)이라 하였으며 이들의 상승 작용에 의하여 만물은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음(陰)과 양(陽)의 기(氣)에 의해서 더욱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이는 우주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리나 심리나 운명까지도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시인 예이츠(Yeats)는 4원소설을 자기의 시에 적용하고 있는데 물은 이슬, 파도, 피, 공기는 바람, 불은 별, 불꽃, 대지는 숲으로 확대하여 이미지를 사용하였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하였다. ​ 1. 대지의 두려움→밤 그리고 잠과 연관→어두움의 내포 때문에 惡意 →사탄→사탄의 위치→北 2. 물→눈물, 슬픔, 상실, 죽음→西(해가 지는 곳) 3. 불→정열의 불꽃→사랑의 상징→南(열 때문에) 4. 공기→공기, 떠오르는 해→희망→東 ​ 이 점은 바슐라르의 경우도 유사한데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이들 4원소의 상징적 의미는 물은 죽음과 상실을, 대지는 의지와 휴식을, 불은 정열을, 공기는 움직임과 초월을 표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늙은 사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 옷가지일 뿐이다. 육체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고,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이 곳 聖市의 「비잔티움」에 왔다. - 예이츠「비잔티움 항해」에서 ​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노인이 영혼의 세계의 가치를 모르고 육체적인 쇠퇴만 슬퍼한다면 그것은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육체란 영혼을 감싸는 보잘 것 없는 누더기와 같은 것, 오히려 그러한 육체를 벗어 던지는 영혼만이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인데 문제는 마지막에서 바다를 건너 성시 비잔티움으로 왔다는 말에서 그의 상상력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앞서 지적했듯이 바다는 물의 변형이고 물은 눈물, 슬픔, 상실, 죽음의 상징이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러한 절망의 극복이며 비잔티움은 영원히 성화가 타는 신성한 세계,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상적인 세계, 바로 불과 대지의 원형에 대한 상징이 되는 셈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제식을 비교 연구한 결과 신화 및 의식의 근본적인 양식이 공통된 것을 발견하였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 조상들이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반복하여 겪은 원천적인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고착되어 집단적 또는 민족적 무의식을 통하여 유전된다고 하였으며 그것이 신화, 종교, 꿈, 환상, 상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이미지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결국 원형적 의미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론이기도 하다. 원형상징에 대한 휠라이트, 궤린, 프로이드, 융, 프라이 등의 해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⓵ 휠라이트와 궤린의 원형상징 휠라이트와 궤린은 공간적인 상하 우리와 밀접한 피, 빛, 물, 말, 원, 바다, 강물, 태양 등의 원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상- 성위, 탁월함, 왕권, 지배, 소망, 선, 하늘, 아버지 하- 하강, 심연, 지옥, 무질서, 공허, 대지, 어머니 피- 선과 악, 긍정, 불길, 힘, 금기, 죽음, 처녀성, 탄생, 형벌, 맹세, 전쟁, 재생 빛- 정신, 영혼, 지적, 공간, 불, 공포, 상승, 원, 하늘 물- 정화, 생명, 순수, 속죄, 창조, 신비, 탄생, 죽음, 부활 말- 충동, 이성, 윤리, 정상성 원- 태양, 완전, 진리, 운명의 장난, 윤회, 남녀 결합 바다- 생의 어머니, 죽음과 재생, 영원성, 무의식 강물- 죽음과 재생, 세례, 시간의 영원, 생의 순환, 신의 화신 태양- 힘, 자연의 이치, 의식, 부성의 원리, 시간과 생의 추의 아침해- 탄생, 창조, 각성 저녁해- 죽음 검정- 혼돈, 신비, 미지, 죽음, 무의식, 사악, 우울 빨간- 피, 희생, 격렬, 무질서 초록- 성장, 감동, 희망 훌륭한 어머니- 인자함 땅의 어머니- 탄생, 포근함, 보호, 비옥함, 성장, 풍요 공포의 어머니- 무녀, 여자, 마법사, 마녀, 두려움, 죽음 공주, 숙녀- 영혼의 동반자, 정신적인 완성의 화신 배- 소우주, 항해 정원- 낙원, 천진무구, 순결미, 풍요 사막- 황폐, 죽음, 니힐리즘, 절망 ​ (1)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시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고 한다 - 김윤성「나무」에서 ​ (2)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內面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허만하「데스마스크」 ​ (1)의 시는 나무의 성장하는 속성을 통하여 인간의 상승 지향적 욕망을 보여 주고 있다. 나무는 늘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는 무한히 상승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원형적 상징으로 충분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성장이나 발전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은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들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 (2)의 시는 물의 원형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은 문학 작품에 반복해서 많이 나타나는 원형적 상징의 하나다. 이 물은 창조의 신비, 탄생, 죽음, 소생, 정화와 속죄, 풍요와 성장의 상징이며,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 가장 일반적 상징이다. 여기에 바다와 강이 포함된다. 바다는 모든 생의 어머니, 영혼의 신비와 무한성, 죽음과 재생, 무궁과 영원, 무의식 등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바다에 눈이 내려 소멸되는 장면의 연속을 통해 허무, 비애, 공포와 같은 죽음에 대한 일상적 반응은 전혀 유발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 그리고 영혼의 신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 ⓶ 프로이드의 성적 상징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 욕망이라고 보고 특히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 남성- 지팡이, 양산, 막대기, 나무, 모자, 칼, 총, 수도꼭지, 연필, 넥타이, 뱀, 열쇠, 산, 하늘 등 여성- 구멍, 웅덩이, 동굴, 항아리, 병, 트렁크, 상자, 방, 호주머니, 배, 종이, 책, 테이블, 달팽이, 조개, 교회, 사원, 숲, 사과, 복숭아, 구두, 마당, 셔츠, 물, 바다 등 ⓷ 융의 집단적 원형상징 융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들이 계속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체득된 반복되는 의식의 유형을 원형이라 하였고, 이러한 원형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즉 민족의 전통에 계승되어 문학, 신화, 종교 등에 반영된다고 하였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1041    강소이 시집 해설 댓글:  조회:1129  추천:0  2019-12-14
강소이 시집 해설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21세기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현실과의 새로운 마주침이다. 여기서 마주침이라는 것은 사유를 유발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의미한다. 강소이 시인의 세 번 째 시집 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구현될 4차 산업혁명의 놀라운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일반적인 서정성에서 탈피하여 펼치는 가상공간의 이미지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치열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을 읽는 독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에서 "현실 문제를 반영하고 비판하며 문제의식을 제기함이 시인의 사명이기도 하다"는 은사님의 가르침이 내 뇌리에 늘 명징하게 박혀 있어서 물질문명 시대에 생명존중과 초월의식, 죽음, 전쟁에 유린된 생명, 현실 세상의 세태와 비판을 형상화했다. 또한 해녀, 광부, 임란 때 도공들의 애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현장을 탐색하는 여행자가 되어 과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현실의 문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존중을 내세우며 적극 대응을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는 그런 자신의 시작행위를 ”여행지에서는 풍경과 사유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오버랩(over lap)되기 때문에 여행지를 하이퍼시로 쓰는 건 재미있는 정신적 기쁨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제의식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은유, 직유, 이미지, 관념의 사물화, 아이러니(Irony), 패러독스(Paradox), 공감각적 심상, 객관적 상관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낯설게 하기 등의 표현 기교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기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가 여행지에서의 견문과 사유를 하이퍼시로 엮어내는 데서 정신적인 기쁨을 느낀 다는 것은 관념적인 의미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몰입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의 주류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소이 시인의 개성이 창출한 현대적인 감수성과 21세기의 시인정신이 형상화한 신선한 시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의 관점을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라는 데 두고 시편들의 면면을 나름대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십여년 전 중앙일보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이 시집의 첫 시「6차선 도로」는 그런 면에서 독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높은 정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시로 읽힌다. 러쉬아워(rush hour)의 6차선 도로에서 차바퀴에 깔려서 검붉은 내장을 토하고 쥐포처럼 뭉개져버린 고양이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카메라 기자 같이 그 끔찍한 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며 보도(reporting)하고 있다. 그리고 차바퀴에 깔려 죽은 고양이를 ‘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대시에서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있다. 휴머니즘(humanism)을 내세우는 현대인들은 인간이외의 생명체에 대해서 차별의식을 가지고 생명체의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시인은 이 시에서 사실적인 현장의 감각과 함께 오히려 죽은 고양이를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표출하여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깨우침의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출근길이면 산탄散彈처럼/쏟아져 나오는 6차선 도로/검은 등 흰 배 고양이가/도로에 검붉은 내장을 토했다/단말마斷末魔 /아직 놓지 못한 발끝 파르르 떨린다//퇴근길 달리는 6차선 도로/진회색 비둘기 몸통 으깨져/쥐포처럼 빨간 피로 뭉개져있다//먹이를 찾아 도로에 나섰을까/떠나간 짝을 찾아 잠시/6차선 도로에 날아 앉았을까//문명의 톱날 바퀴 밑에/깔린/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6차선 도로」전문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에서도 문명을 상징하는 화물트럭의 바퀴에 깔린 생명체(검붉은 창자)를 시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현대인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정신적(종교, 철학) 시원(始原)의 고향이다. 그러나 문명의 바퀴는 그 시원의 공간마저 침범해 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시인은 살아있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검붉은 창자 도로 위에 터져있다/아직 놓지 못한 숨결/파르르 떠는 발/질주하는 헤드라이트 바닥/찢긴 너의 너덜거리는 살/시뻘건 프린트 자국/밟고 간 바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울리지 않은 요란한 경적소리//20톤 화물트럭에 깔린 햇살 한 조각에서/파드득 /두레박 길어 날아올랐다//( 티베트 고원 꼭대기 찰진 바람을 가르는 경적소리 ...... )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전문 「별 무리 지는 강물」에서는 젊은 여인들의 낙태에 대해 시인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자궁 속에서 태아(胎兒)로 생을 마감하는 인간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문제의식은 생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경시하는 현대인들의 문명(의술)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여 독자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 틀에 묶인 창백한 여자의 손과 발.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 잉태를 꿈꾼 적 없는 밤의 동굴을 지나 자목련 벽에 콩나물 대가리가 위란강을 건너 딸깍 앉았던 곳. 그 문은 철문보다 단단해서 한 달에 한번만 문을 연다는데, 손발 묶인 그녀의 문으로 쏟아져 내렸던 스륵스륵 기계소리 덩이 피. 그런 날이면 하늘의 신들은 눈을 감았다. 뒷골목 허름한 이층집에서 그렇게 별들은 하나씩 떨어졌다. 감나무 가려진 감잎 쓰린 맛을 탓하지 마라. 태씨 아주머니는 감잎으로 별을 하나씩 감싸서 마을버스에 태워 보냈다. 별 무리 지는 강물 위로//--「별 무리 지는 강물」전문 *위란강 : 수정막과 난표면과의 사이 이 외에도 동백꽃의 모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안타까움을 하이퍼시의 구성으로 드러낸「찰라-여수에서」, 해안에서 자살한 시신들이 새벽마다 떠온다는 인천 무의도 명사길의 시신들에게 “무에 그리 서러워 무의도까지 버린 발로 떠왔느냐고 이제는 편히 가라”고. 위무의 마음을 전하는「무의도, 감은 눈에게」등이 생명존중의 시편들로 인상에 남는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21세기에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태어난 하이퍼시는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편을 결합하여 하나의 큰 이미지를 구성하는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을 바탕으로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기존시(旣存詩)의 아날로그(analog)적인 구성의 시와 대조되는 이미지의 망(網)을 형성하는 디지털(digital)적인 새로운 시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형식을 해체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을 기본으로 하는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하이퍼시는 기존시들의 설득적 구조에서 벗어나서 ‘이미지의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시론은 현대철학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와 질 들뤼즈(Gilles, Deleuze)의 리좀(Rhizome)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현대적인 시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하이퍼시는 21세기 최첨단의 사유와 철학이 만들어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새를 낳는 사람들」에서도 시의 구성에서 서술형식의 기존 시와는 다른 이미지들의 결합이 빚어내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이 교직(交織)된 심리적 현실의 보여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로 시작되는 #1은 심리적인 내면의 환상의 세계로, “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가 등장하는 #2는 현실의 의식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1의 “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유리 기억들”은 “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이 안고 있는 이승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사물 이미지로 표출한 시적 몽타주로 이해된다. 그리고 “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구절에서 50대의 사내와 천상의 그녀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심리적 갈등의 앙금이 이 시의 내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이 서사구조의 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 시와 기존의 서술형식의 시가 얼마나 다른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사물인터넷의 4차 산업혁명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1/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 /유리 기억들//영사기는 더 이상 돌지 않았다//#2/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돌아온 꽃잎이/“아앙 아아앙......”/십 수 년 전 무지갯빛 사진 스크린을/애교 띤 콧소리로 더듬어도/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푸른 달무리에 깨물렸던 한 톨 구슬/새를 낳는 사람들//--「새를 낳는 사람들」전문 「스마트폰의 하루」에서도 (F.I), (F.O) 등 영화의 기법을 넣어서 스마트 폰에서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들이 이미지들의 연상과 결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새로운 감각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정신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 폰의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강아지소리, 새소리, 임진왜란 때의 조총소리, 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손끝에 앉았던 나비 등으로 이어지는 불연속적인 단편(斷片)의 이미지들은 모사(模寫)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 가상이 실재같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이론과 연결된다. 그는『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시에서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독자들은 시인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현대문명의 현상을 나름대로 즐기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F.I)//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까만 네모 화면에서/졸라대는 애인처럼/ㄷㄹㄷㄹㄷㄹ 강아지 소리/ㅋㅌㅋㅌㅋㅌ 날개 없는 새소리/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날아오던/ㅁㅁㅁㅋㅋㅋ/ㅋㅌㅋㅌㅋㅌ/내 귓바퀴에 쏘아대는 조총소리/ㅅㅅㅅㅅㅅ허공에 날개 짓을 한다//(O.L)//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마지막 손 끝에/앉았던 나비의 날개마저 포르르 떨린다/책장 넘기는 소리에 너 울리는 줄 몰랐으니/하얀 꽃잎 하나 떨어진다//고구려 벽화에서 살며시 날아 나온 나비 한 마리/내 손바닥 까만 네모 상자 안으로/화살처럼 들어와 박힌다//(F.O)//송골송골 담징의 이마에 맺혔던 까만 밤/화룡정점의 순간에도/눈을 껌벅이는 불면의 아우성//--「스마트폰의 하루」전문 「이즈하라항의 달빛」은 기행시로서 하이퍼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덕혜옹주, 최익현 등 대마도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역사의식과 함께 쓰시마 사내와 연관되는 성적인 이미지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 두 개의 이미지가 하이퍼적인 구조 속에서 시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이 기행시로서 시의 맛을 풍기고 독자와 소통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즈하라항에 보슬비 내린다/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밤이면/성큼성큼 박수소리처럼/노를 저어오던 쓰시마 사내들//이즈하라항에 검은 가오리날개 매 한 마리/날아간다/바다를 유리창 가득 담은/회전초밥집에서 뜨거운 대마도 한잔을 붓는다//덕혜옹주도 낙선재로 돌아가고/최익현도 잠든 밤/검은 파도 소리에/목이 아프도록 시린/ 대마도 하루 빌린 내방엔 밤새/불을 끄지 못했다//수밀도 무성한 숲에/창호지를 찢고 쳐들어오는 쓰시마 팔뚝 달빛/찔레꽃 하얀 내 가랑이도 아팠다// ---「이즈하라항의 달빛」전문 * 이즈하라항: 일본 대마도 남단에 있는 항구 이름 「하얀 지평 너머」는 세 가지의 형태로 응집되어 있는 죽음의 정서가 서사적 모듈(module)을 형성하면서 울림을 준다. 중동건설 현장에서 죽은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가슴에 품고 우는 늙은 어머니, 중동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울부짖는 히잡 여인들의 실성한 모습, 어느 장례식장의 시계소리에서 시신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시선이 그것이다. 끝 부분의 “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이라는 이미지가 엉뚱한 듯하지만 '하얀 나비‘와 죽음을 연결하면 현실과 초월이라는 두 세계의 결합이 보인다. 1.옥양목 보자기에 싸인 배냇저고리, 하얀 기억을 꺼낸다/낡은 옷장 서랍에서 아기작거리듯 배냇저고리,/귀밑머리 하얀 그녀는 보자기 풀어 흰빛 먼지를 쓰다듬는다/중동으로 떠난 아들, 그녀는 흰옷 갈아입고 열린 서랍 배냇저고리 품고 울다 웃는다//2.6 ‧ 25 동란, 폭탄에 으깨진 건물더미, 철근덩이, 찢진 유리 파편들/길바닥에서 언덕배기 카키색 천막 아래/피 절은 천에 덮여 씌운 시신들./하얀 천 들춰보며 울부짖는 여자들 울음소리/“ 아이고, 이것이, 아이고, 우리 복덩이, 복뎅이는 여기에 없어야재 ”/실성한 어미들의 꺼억꺼억 오열, 시신이 널브러진 언덕빼기가/목화구름처럼 아침 화면을 가득 덮었다//3.장례식장 시계소리가 달랑거리는 동안 시신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검버섯마저 하얗게 눈부신 순간을 나는 본다/알코올 솜으로 삭신을 닦아내는 손놀림이 바쁘다 /살아생전 소원까지 닦아내며 염殮하는걸까//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 ------「하얀 지평 너머」전문 * 상화고택 : 대구시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시인(1901~1943)의 옛집. 이 외에도 도쿄여행기-황거, 하비야공원, 도쿄역 등의 이미지를 하이퍼(hyper) 적의 구성으로 조합한「도쿄일기」, 신라여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던 전죽소리, 비닐이 묻힌 땅에서도 죽음을 뚫고 나오는 파릇파릇한 생명의 소리, 월정사 길에서 듣는 산 속의 물소리 등 소리가 만들어 내는 의미를 세 가지의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는 「만파식적-소리가 만드는 세상」, 세월호의 비극적 상황을 하이퍼적 상상으로 엮은「바다에 촛불을 켜주세요」등 다수의 시편들이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로 기존의 시와는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 노자(老子)는『도덕경(道德經)』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도가 도라는 관념에 잡혀있으면 있으면 순수한 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된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의식의 시편들과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들과 함께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편들이 주목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에서 서정성은 기계속의 윤활유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사(敍事) 속의 서정성(抒情性)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에는 조선왕조 시대에 영화로웠던 운현궁의 퇴락한 가을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져 있다. 시의 제목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라는 비유와 “운현궁 마당에/찰깍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의 서사가 시대적인 풍자성을 엿보게 하지만 “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라는 현실 초월의 서정적 여유로움이 이 시의 탄력성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것이 서사 속 서정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겨진 갈햇살이 운현궁 툇마루를 쪼고 있다//가슴이 이랑처럼 패인 여자의 가슴팍에/쏟아지는 햇살은 갯벌 달랑게 걸음이다//해바라기가 졸다간 햇살바라기,/퇴락한 왕조의 으깨진 갈색 노을빛에/꾸벅이는 행랑채//운현궁 마당에/찰칵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막아도막아도 넘쳐나는 논두렁처럼//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주인 없는 툇마루에 걸린 놀/돌담을 넘어 오는 갈잎//-「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전문 「사북역」에서도 서사와 서정의 조화로움이 시의 맛과 멋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폐광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북역에 내려 역사(驛舍)에 핀 들꽃만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노을은 사자의 혀보다 붉은 노을이다. 그래서 그 들꽃과 붉은 노을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이글거리던 광부들의 분노와 희망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이 시에서 서사와 서정이 만들어 내는 시적 울림의 공간이 되고 있다. 사북역에 내려 막차가 올 때까지/기찻길 서너 시간, 역사驛舍에 들꽃들만 가슴에 담는다/폐광이라도 보고 싶다고 편지해 놓고//사자 혀보다 붉은 노을 기차에 가득 싣고/청량리역에 붉게 내려본 적 있는가//낮은 땅, /석탄가루 소주와 돼지고기로 씻어낸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사북역」전문 「유카리나무」에는 시인이 호주 시드니 파크의 유카리나무를 보고 느낀 시적 감성이 “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라는 개성적인 언어에 담겨 있다. 일종의 언어유희 같지만 “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고 술 취한 화가를 등장시켜 서정적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나무의 푸른 정액과 여자를 연결하여 성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올림픽 파크/분홍 플라스틱 포크 하나/잔디에 비스듬히 꽂혀있다/백 미터, 키 재기하는 유카리나무들/회백색 수피樹皮는 무우의 맨살처럼/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연두 빛 유카리나뭇잎 단추들 닥지닥지/나무 위에선 오물오물/검은 귀 흰 몸 코알라가 유카리나무의 푸른/정액을 씹고 있다/지나가던 여자가 분홍 포크로 나뭇잎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그녀의 입안에 푸른 물 고였다/칼로 잘라낸 돼지고지 한 조각/유카리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빛 밝은 한나절//-「유카리나무」전문 이외에도 이승과 저승이 한 매듭이라는 것을 드러낸 「통영점묘-매물도」, 감자탕 골목풍경을 사유의 언어와 결합한 「감자」, 화가 이중섭에 대한 연민과 사유가 담긴 「그의 草家」등 다수의 시편들이 주목되었다.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강소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새를 낳는 사람들』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의 전체를 조감(鳥瞰)하면서 관심이 가는 시편들을 선택해서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이라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감상의 시선으로 해설을 했다. 66편의 시편들 중에서 집중 조명된 시편들은 10편에 불과해서 더 좋은 시편들이 외면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선택된 시편들이 이 시집의 중심에 서 있는 시편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21세기의 중심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명의 구조가 지배하는 시대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시대의 환경에 대응하여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탄생된 ‘하이퍼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몰입을 보여주고 있는 강소이 시인의 시편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의 문명(culture)이 만들어낸 가치판단 속에서 소외된 생명체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과 문제의식을 비롯하여 인간정신의 원적지 훼손에 대한 지적(指摘)이 담긴 시편들이 먼저 선정된 것은 그 시편들에는 시의 형식적인 면보다 더 중요한 ‘시의 영원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정과 서사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시적 감성의 탄력성과 함께 시의 맛과 멋을 내포하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감각과 기법도 중요하지만 시의 근원은 서정성과 서사성의 조화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강소이 시인의 시편에서는 현대시의 이런 중심점이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의 시편들이 시적 균형(均衡)을 아름답게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정진이 얼마나 치열하였나를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21세기에 등단한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강소이 시인의 사유와 감각이 빚어낼 시편들의 새로운 변모와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시집의 해설을 줄인다.
‹처음  이전 3 4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