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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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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8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12 댓글:  조회:162  추천:0  2019-12-21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47 ​ 시와 사회 시대 역사 ​ 홍문표 ​ (1) 문학과 사회 ​ 문학과 사회의 관계는 운명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은 개별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지만 태어나고 보면 가족이 있고 시대가 있고 국가가 있고 사회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사회라는 집단 속에 태어나 그 사회와의 관계를 맺고 살다 가는 사회적 존재다. 그러기에 문학적 상상력도 시대 역사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바다 속에 있는 한 문학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주제를 배제할 수 없다. 거기엔 사회적 언어가 있고 문화가 있고 정치. 경제 등 다양한 공동체의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날드는 문학은 사회적 표현이라고 했고 테느는 문학을 종족, 시대, 환경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연극은 인생의 거울이니 소설은 시대의 반영이니 하는 말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 (2) 삶의 두 세계 - 문학의 두 세계 ①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 그런데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니 문학을 사회의 거울이니 하는 논리만 고집하면 개인적 존재 개체적 존재로서의 삶이나 독자적인 문학성 등이 무시 된다. 따라서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나 존재가치를 논할 경우 크게 구분되는 것이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고자 하는 가치관에서는 문학도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독자성을 강조하게 되지만 인간의 가치를 더불어 사는 삶,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삶을 최대한 내세우고자 하는 인생관에서는 윤리적인 문학, 공리적인 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늘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 하는 이 이분법적 세계관의 굴레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 ② 상반된 두 세계의 길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유물론과 유신론, 정치나 경제에서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 갖가지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갈등하고 투쟁하는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된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헤겔의 말처럼 정반합의 변증법적 통합이니 발전이니 진보니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어느 한쪽만을 절대 진리나 가치로 하여 다른 쪽을 적대시하고 무참히 파괴하는 피의 역사를 만든다는 데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③ 문학의 두 갈래길 문학사에서도 이 두 세계는 개인적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을 만들었고 개인적인 문학이냐 사회적인 문학이냐로 끈질긴 논쟁의 역사를 만들었다. 교훈론과 쾌락론이 그 출발이다. 그 뒤 사회적 상상력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모방론, 반영론, 목적론, 계몽주의, 계급주의, 사회정의, 휴머니즘, 공리주의, 역사주의, 진실성 등 갖가지 사회적 세계관의 문학론을 만들어 깃발을 흔들었고 개인적 상상력은 본질주의 존재론, 모더니즘, 순수문학, 무목적의 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 심미주의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형식주의 등 개인적 세계관의 문학론을 만들어 또다른 깃발을 흔들었다. ​ ④ 상생과 상호보완으로 사회적인 시의 이해 최근 우리문학사에서도 내용이냐 형식이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순수냐 참여냐 진보냐 보수냐의 대립에서 갈등해왔고 문학단체 마저 양분되어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글로벌 시대로 전환하면서, 경계 허물기 시대,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종언, 다양성, 상호보완, 상생의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개인적인 상상력의 시와 사회적 상상력의 시는 대립보다 다양성 상호보완이란 측면에서 보아야하며 그러한 입장에서 사회의식의 시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3) 사회적 상상력의 다양한 문학 ①사실주의 문학과 이데올로기 문학 ​ 문학이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거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역사주의 문학론이나 사회학적 문학론은 그렇게 보았다. 그리하여 사회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사실주의(realism)라고 했다. 그런데 역사나 사회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 가는 공동체적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엔 삶의 목적과 윤리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한 당위의 논리를 진실이니 정의니 가치니 하는 것으로 이념화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이데올로기(ideologie)는 넓은 의미로 세계관, 가치관, 사상, 기본적 사고 방식이지만 행동지향적인 신념 체계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고전문학의 공통된 주제는 권선징악이다. 근대사상의 주제는 자유와 평등이다. 여기에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고 계급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다. 자유와 평등의 해석과 실천의 차이가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 ②변혁의 수단으로서 문학 그런데 문학의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 나머지 문학이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고 변혁을 도모하는 수단이라는 논리로 발전할 경우, 이는 상상의 문학이나 감성의 문학이 아니라 무기로서의 문학, 칼로서의 문학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반영론과 당위론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는 당연히 그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극단의 논리에서는 문학의 예술성이니 독자성이니 하는 것들은 유보 될 수밖에 없다. 로마의 호라티우스가 문학이란 쓰디쓴 철학을 약탕기에 달콤한 꿈을 바르는 것, 즉 문학당의설(文學糖衣說)을 주장한 것이나 도를 전하는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았던 유가들의 문학관이나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에 복무하는 문학을 말한 것들은 모두가 사회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1920년대 프로문학론에서 박영희는 “문예의 전목적은 작품을 선전 삐라화 하는데 있다”라고 했고 1950년대 김일성의 교시에는 문학이란 “인민들의 수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예리한 무기가 되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 ③ 우리에 관한 다양한 문학 문학의 사회적 관심은 윤리나 정치적 목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몽문학, 종교문학, 민족문학, 대중문학, 도시문학, 농촌문학, 노동자 문학, 민중문학, 계급문학, 생태문학, 여성문학, 사이버문학 등 나 아닌 우리에 관한 것이면 그 어느 것도 사회적 소재가 되고 주제가 된다. ​ ④한국 현대문학사와 사회적 상상력 개화기에는 개화계몽을 위한 계몽문학, 일제하에서는 항일민족주의문학, 계급주의를 수용하면서는 프로문학, 해방 공간기에는 좌익문학 우익문학, 1960년대는 참여문학, 1970년대에는 농민문학, 민중문학, 1980년대에는 노동문학, 통일문학 1990년대에는 생태주의 문학, 페미니즘문학 등 시대마다 우리, 민족, 역사,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문학으로 시로 드러내었다. 특히 북한의 경우는 광복이후 현재까지 줄곧 일관된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이나 주체사상문학의 전체주의적 당위를 위한 수단으로 문학이 봉사되고 있는 것이다. ​ (4) 고대시와 재도지기(載道之器) ① 고대시가의 서정성 우리의 시사에서 고대시가의 확인은 고조선의 「공무도하가」 고구려의 「황조가」 백제시대의 「정읍사」 신라시대의 향가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가시리」 「청산별곡」등을 볼 때 오히려 서정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 펄펄나는 저 꾀꼬리여 암수가 서로 정답구나 나의 외로움을 생각하니,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오. 고구려 유리왕 ‘황조가’   ​ ② 재도지기의 시 그런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서정적 전통을 볼 수도 있으나 치국이념이 유교적이어서 충효 등 교화적인 시가들이 많다. 이 시대 문학관은 공자의 사무사(思無邪) 주자학의 문학이란 도를 싣는 그릇 즉 재도지기(載道之器), 도덕적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 정철 ​ (5) 개화 계몽기의 교화시 ① 풍속개량과 교화 개화기 박은식은 「서사건국지」서문에서 소설이란 풍속계급과 교화정도에 관계가 심한 것이라 했다. 윤상현은 「천희당시화」에서 시는 국민언어의 정화라 하면서 건강한 시정신을 요구했다. ​ 잠을 깨세 잠을 깨서 사 천년이 꿈속이라 만국이 회동하여 사해가 일가로다. ​ 구구세절 다 버리고 상하동심 동덕하세 남의 부강 불어말고 근본 없이 회빈하랴 - 개화기 가사에서 ​ (6) 계급주의 이념시 ① 카프의 시단 1925년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FP)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계급주의 시를 쓰게 된다. 계급주의란 사회를 유산자인 브르조아와 무산자인 프롤레타리아로 구별하고 이러한 계급모순을 타파한 무산자 중심의 평등사회를 실현한다는 이념으로 시는 계급혁명이란 목적을 위하여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 ② 임화, 권환 의 경우 ​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에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안었에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잇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 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 - 임화 「우리오빠와 화로」에서 ​ ××과 끝까지 싸우게 하는 그대를 우리는 다만 한 광부 우리들의 좋은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다만 침착하고 세상일 잘 알고 정다운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다만 한 좋은 동무만으로 알았더니라 ​ 그러다가 인제야 알았다 그대를 ×들의 손에 뺏기고 난 인제야 그대를 다른 많은 용감한 동무들과 같이 ××× 에 끌려 보내고 난 뒤 한달 된 인제야 알았다 그대도 우리의 가장 미더운 지도자의 한 사람 땅 밑을 파고 다니는 숨은 지도자 조선의 ××의 한 사람인 줄을 - 권환 「그대」에서 ​ (7) 항일 민족시인 ① 일제하 시인의 선택 일제 36년간 일본의 총독과 일본의 헌병, 순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인의 선택은 일제에 굴복하거나 회피하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제하에 형무소를 드나들며 항거한 몇몇 시인들이 있다. 항일민족 시인이란 작품으로만 항일 정신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항일하고 작품으로 항일한 시인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삶은 늘 영어에 있었고 그들의 목숨도 무사하지 못했다. ​ ③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 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 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④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 내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깝치지 : 재촉하지 , 지심 : 기음 ​ ⑤ 이육사의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 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⑥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2) 식민지 시대 궁핍한 현실증언 ① 오장환의 「북방의 길」 눈 덮힌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 ② 이용악의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 - 중략 - ​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짓두광주리 : 반짓고리, 갓주지이야기 : 무서운이야기. 글거리 = 그루터기.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8 광복 이후 사회적 역사적 상상력의 시 홍문표 ​ (1) 광복의 감격과 좌우익의 시 ① 광복의 감격과 좌우익의 다른 목소리 1945년 광복은 전 민족적 감격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16일 과거 프로문학에 참가했던 좌익 문인들은 조선문학건설 본부를 만들고 민족진영의 우익은 1946년 전 조선 문필가 협회를 만들었다. 또한 우익에서는 「해방기념시집」 좌익에서는 「연간조선시집」을 만들어 각각 광복의 감격을 표현했다. ​ ② 해방기념시집과 우익의 시 ​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어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 사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 환희 트이는 이마 위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 조지훈 「산상의 노래」 ​ ③ 연간 조선 시집과 좌익의 시 ​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 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임화 「깃발을 내리자」 ​ (2) 한국전쟁과 초토의 시 ① 동족상쟁의 비극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쟁,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5백만이 넘는 국민이 죽었거나 부상당했다. 골짝마다 시산시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국권을 상실한지 36년 겨우 찾은 광복이지만 조국은 동강나고 사상이 무엇인지, 그 이데올로기는 동족애도 부모형제도 없었다. ​ 적의 콩볶는 듯한 속성 음향을랑 남기고 ​ 뽀뿌라 가로수에 낙렬(落裂)하는 칠십오밀리의 순발탄(瞬發彈) ​ 백오 고지를 점령한 우군이 적 소굴을 소탕하는 화염방사기의 불기찬 광채 그리고 불똥이 만무(滿舞)하여 훤히 비치는 서대문지구의 거리 거리와 큰 집 작은 집들 - 이영순의 「연희고지」에서 ​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荒廢한 風景이 무엇 때문의 犧牲인가를... ​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姿態대로 머리만 남아 잇는 軍馬의 屍體 ​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傀儡軍 戰士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生靈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多富院 ​ 진실로 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잊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安息이 있느냐 -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 (3) 4.19혁명과 시의 응전력 ① 4.19 정신 광복 후 국민이 열망하던 민주화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독재, 6.25전쟁, 3.15 부정선거로 왜곡되었다. 이에 학생들의 거국적인 의거는 죽음을 무릅쓰고 경무대를 향했다. 200여명의 희생이 있고서야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대통령이 하야하고 내각제 정부가 들어섰다. 학생들에 의한 민주화의 쟁취다. ​ ② 혁명과 시의 응전력 ​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이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 불로 외쳐 뿜는 / 우리들의 피 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는 못 막는/ 우리들의 피 대열에 흩을 수가 없다./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민족. 내가 살던 조국이여./ 우리들의 젊음 들./ 불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 내린// 악으로 불순으로 죄악으로 숨어내린/ 그 면면한. 우리들의 속의 썩은 것을 씻쳐내는,/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사뤄,/ 젊음이여! 정한 피여! 새 세대여!// 너희들 이미 일어선 게 아니냐/ 분노한 게 아니냐?/ 내달린 게 아니냐?/ 절규한 게 아니냐?/ 피 흘린 게 아니냐?/ 죽어간 게 아니냐?// ​ - 박두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에서 (4) 역사적 현실의식과 참여시 ① 실존주의와 현실참여 전후의 허무에서 실존주의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신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경우다.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갖고 현실에 참여(engagement)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현실참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정치적. 역사적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 했고 까뮈는 작품으로만 참여하는 것이라 했다. 한국은 6.25와 4.19를 거친 역사의식과 민주화 의식을 토대로 사르트르적인 논리를 내세워 문학의 현실참여를 실천하게 된다. ​ ② 신동엽의 반전 반외세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③ 김수영의 자유의 절규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은」 ​ ④ 이성부의 「전라도」 ​ 노인은 삽으로 榮山江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가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랑을 혼자서 퍼올린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 불을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 -이성부의 「전라도7」에서 ​ (5) 1970년대 민중시 ① 참여에서 민중으로 50년대의 한국시가 한국전쟁의 충격과 파장에서 전개되었듯이, 60년대의 시는 4.19의 파장과 영향권에서 형성되어 상황과 응전이라는 현실 참여적 경향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것이 70년대에 들어서는 유신 체제라는 통치체제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부정적 현실과 역사에 대한 강한 비판적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른바 민중문학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대표적 시인들로 김지하, 신경림, 고은, 조태일, 이성부, 정희성, 김명수, 이동순, 문병란, 김중태, 양성우, 이시영, 김창완, 김용범, 최하림 등을 지적할 수 있다. ​ ① 김지하의 현실 풍자 ​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 「오적」에서 ​ ② 신경림의 소외된 농민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리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농무」 ​ (6) 1980년대 민중시 ①고은의 통일시 ​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아라 저 끝에서 길이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 가야 한다 한평생의 길 오가는 겨레 속에 내가 살아 있다 남북 삼천리 모든 길 나는 가야 한다 기필코 하나인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 고은의 「길」에서 ​ ② 박노해의 노동자의 노래 ​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 박노해의 「하늘」에서 ​ (7) 문민정부 시대의 노래 ①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째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 이성부 「우리앞이 모두 길이다」  
1057    구조주의와 기호학/테렌스 호옥스 댓글:  조회:197  추천:0  2019-12-21
구조주의와 기호학 테렌스 호옥스   (서울시신아사, 1984년)   비꼬(vico)는 이탈리아의 법률가인데 (1725년) 그 당시에는 관심을끌지 못했던 기념비적작품. 비꼬의 연구는 … 영원히 계속되는 구조화의 과정이 인간정신에 대해서 지니는 마취적인 속박을 풀어버리는 최초의 근대적 시도의 하나로 손꼽힌다.17   진정 변별적이고 영원한 인간특성은, 라는 능력안에서 식별해 볼수 있는데 , 그것은 신화를 창조하며 또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필요성인것으로 나타난다… 시적예지라는 재능은 그러니까 구조주의 재능이라고할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에 성격을 부여하는 원리이기에, 인간이다 라는것은 구조주의자이다 라는것과 같다는 주장이다.17   삐아제(piaget) 삐아재는 구조를 전체성의 개념, 변환의 개념, 자기조적의 개념 등 세가지 개념으로 생각했다. 전체적이라는것은 내적인 결합체를 의미한다. 변환적이라는것은 정적이 아니다. … 구조는 변환의 절차를 행할수 있어야 한다. …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구조로서, 갖가지의 기본문장을 광범위하게 다양한 새로운 발화로  변환시킬수 있는터이나, 한편으로는 그 변환을 언어자신의 고유한 구조안에 머물러있게 한다. 자기조절적이란 변환수단을 유효한것이 되게 하기위하여 제자신을 넘어서는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변환은 그 변환을 수행하는 고유의 법칙을 유지하고 보장하도록 작용하며 다른 체계가 련관되지 않게 그 체계를 봉인하도록 작용한다. 개라는 낱말은 언어구조안에 존재하여 기능하고 있으며, 네개의 발을 가진짖는 피조물이 실재한다는것과는 관계가 없다.19   구조주의-세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방식   사물의 참된 본성은 사물 그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그리고 지각하는 사물들 간에서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것이다. 20   구조주의자의 생각의 궁극적인 원천은, 항구적인 구조, 즉 개개인의 행위, 지각, 자세가 그 안에서 조화되고 그것들의 최종적인 성질이 그로부터 이끌어내지는 구조라고 할수 있겠다… 인간본성의 그 측면에 , 즉 언어에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여 있다.21   언어학과 인류학 – 소쉬르( Saussure) 스위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이다.22   두개의 기본적차원에서… 즉 랑그라는 측면과 빠롤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24   빠롤은 물우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다.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 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자체는 모순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것이다.25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있는 물리적인 나무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 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 현실에의 보증할만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나무라는 낱말이 땅우에서 자라고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물체를 의미하는것은, 그 언어의 구조가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이미지시키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31   레비스트로스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언어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며,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사회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다.42   어떠한 경우에서든 ,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것은 그 현상자체의 어떠한 본래적인 양상도 아니고, 현상들간에서의 관계이다 라는것이 , 구조주의 (그리고 음운론)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44   문학에 관해서 말하면, 이것은 먼저 단순한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가 막연한 형식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는것을 의미한다.79   러시아 포르마리즘.(formalism)1920- 1930.Boris  Eichenbum, Vtor Shklobisky, Roman Yakobson,  Bris Tomasjevsky, Juri Tynyanov언어학자나 문학사가들. 모스크바언어학회와 뻬드로그라드 시적언어연구회.   초기의 포르마리즘(1920-30년대 쏘련형식주의)은 상징주의 및 실용될수 있는 코무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형식에 대한 상징주의자적 관심을 기본원리로 해서 구축되였었다. 즉 자립적이고 자기표현적이며, 언어외적 리듬, 연상, 암시를 리용해서 언어를 보통의 일상적인 의미 영력을 넘어서까지, 늘려나갈수 있는것으로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관심에서, 비평의 경우에도 문학적인 언어를 작동시키는 기술에 열심히 주목하게 되고, 또 이 기술들을 일상적인 언어의 양식mode과 구별해서, 그 특성을 규정하려는 관심이 생겨났었다.81   Shkrovsky는 ‘예술은 언재나 인생으로부터는 자유이고, 그것의 색갈은 도시의 성책위에 펄럭이는 깃발의 색갈을 결코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특히 문학이,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있다면, 문학의 학술적연구나 비평은 마땅히 애매함이 없이 분명하게 확정된 고유의 자동영력을 가지고 있는 통일된 지적활동이라야 할것이다. ‘예술형식은 , 예술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skrovsky의 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일반원칙에 따른다면, 위에 말한 그 령역은,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문학인가라는것에, 즉 언어예술전반에서의 특유한 성질에 밀접하게 연관되여 있다. 스크로브스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이란, 작품을 될수있는대로 예술적인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 따라 특수한 기법으로 창작되여진 작품을 말한다.를 용인하는것은 야콥슨의 결론인’문학연구의 대상은 , 문학의 총체가 아니고, 문학성, 즉 작품을  문학자품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를 역시 용인하는것이 된다….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작품자체의 내부에서, 즉 시인에서가 아니고  시의 내부에서 발견될수 있다는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사용된 언어의 독특한 용법에 깃들어있어야 한다83….   포르마리스트들은 전의적, 언어, 은유, 상징. 시각의영상 등은 시의 필요조건인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의 특징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분석에서의 그들의 흥미는 이미지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미지가 적용되는 용법에 있는것이리라.84   일탈은 포르마리즘의 중심적관심사…일상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문학언어는 일탈을 발생시킬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탈이기 때문이다… 장치, 기법은 문학예술의 근간이 되며, 문학의 모든 요소가 그곳으로 향해서 조직되고있는 기본적요소가 된다.그리고 그 요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85 시적술화는 … 단순한 실용성이나 지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정보의 전달이나 언어를 넘어서 저쪽에 있는 지식의 체계화에도 관여하지 아니 한다. 시적언어는 용이주도하리만큼 자기의식 적이며 자기각성적이다. 그것은 자체내에 포함되여 있는 메시지이기를 떠나서, 두드러지게 매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특색을 지니고있으며, 또 제자신의 언어적특질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고있다. 그 결과 시에 사용 되는 낱말들은 , 단순히 사상전달의 신분을 지니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율적인 구체적 실체 인것이다.86   시는 낱말과 의미를 분리시키기보다는 , 오히러 –놀라운 일이 겠으나- 낱말이 취하게되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런 점에서 시는 또 다시 보통의 언어활동의 정도를 한층 더 높인다… 낱말의 시적용법에 의하여 애매성은 낱말의 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옮겨가는 낱말이 낱말의 구조사의 역활이 전환되 여진다.87   에술작품은 모방(내용을 지니고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형식의 완전한 우월이라는 관념을 대치시키는 일이기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되여지는 문학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문학다운 것이다. 즉 다른 실체를 지각해볼수 있는 창문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것이다. 내용이란 문학형식의 한 기능에 불과하며, 형식을 넘어서서 혹은 형식을 통해서 감지될수 있거나 , 형식과 분리될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실은 작품이 내용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일뿐인 것이다. 사실인즉 작품은 스스로의 발생, 스스로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고있을 따름이다.91   예술이라는 과정의 생명력은 , 행동안에서 볼수있는 그것의 수법에 의존한다는것이 포르마리즘의 중심명제이다. 그리고 장치를 노풀시킴으로써, 자신이 집필할 때 의지하고있는 비친숙화의 기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학예술가는 모든 장치들중에서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장치에 접근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술을 작동케 하는 과정에 은밀히 통해있는 일탈감각인것이다.95   변혁은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기거나 혹은 그 부산물로서가 아니고, 내적요구에 의하여 재촉되고 추진되여서, 자기개성 적이고 자기 페쇄적인 문체나 장르의 연속을 펼치는 일이라고 볼수있는것이다. … 참신한 형식이나 문체는 낡은것에 반역하 는데서 출현하는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의 반대명제로가 아니고, 영속성이 있는 요소들을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 한에서이다. 이것 역시 일탈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의한것이 일상적인것이 되면 다른것으로 바뀌여질 필요가 생긴다.98   패로디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왜냐하면 패로디는 언제나 다른 문학작품을 배경으로 삼고, 그것의 수법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떠나기때문이다….페물이 되여버린 수법은, 내버려지는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아니 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반복되여…재차지각이 가능해진다.98   문학은 자신을 개신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의 경계선을 다시 긋곤한다…. 모든 에술은 연속성안에 있다는것, 고등예술은 자신을 갱신키 위하여 그 연속성의 범위내에서 경계선을 정기 적으로 옮기고 있다는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불변인것은 문학 항시 나타내어야 하는 문학다움의 감각이라는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든 문학을 규정하고있는것은 그것의 구조적역활 즉 그 시대의 비문학과의 대립인것이다. 99   유럽의 구조언어학   언어가 정보전달에 사용될 경우에는 인식적 혹은 지시적 기능에서 작동하고, 말하는 자나 글쓴 자의 기분이나 태도를 나타내기에 사용될 때는 표현적 혹은 정감적 기능을볼수있고… 언어가 …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사용되여진다   …체코의 언어학자 얀 무카로브스끼가 말하는것처럼, 이러한 전경화 현실화라는 행위는 중요하다. 시적언어는 코뮤니게이션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고, 표현행위 즉 언어행위 그자체를 전면에 내놓기위해서 사용 되고있다.103   야콥슨jakobson   은유—어떤유사점, 상합적, 공시적, 수직적, 직유. 초현실주의 , 능기생성, 시전경화,  해석불가 환유—인접성, 련합적, 통시적, 수평적, 제유, 입체파. 능기결합, 산문전경화,  해석거부   은유와 환유는 의 비유인것이다. ‘그차는 딱정벌레처럼 전진해 갔다’와 같은 은유에서는 ,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자동차의 그것에 등가인것으로서 제시되여있고, ‘백악관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한다’ 라는 환유에서는 , 어떤 특정의 건물이 합중국의 대통령에게 등가인것으로 제시되여있다.105   소쉬르의 개념을 적용하면 은유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질상 상합적이여서 언어의 수직관계가 리용되는데 , 환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성질상 연합적이여서 언어의 수평의 관계가 리용된다. 106   인접성위에 유사성이 들게 놓이므로서, 시는 완전히 상징적이고 다양하고 다의적인 본질을 부여받게 된다. 108   시는 보통언어를 그냥 장식하는것이 아니고 , 별개종류의 언어를 구축하는것임을 의미한다. 시적이라는것은 수사상의 장식으로 술화를 보완하는것이 아니고 , 술화와 그구성요소 모두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이다…. 시적이라는것이 경합해서 존재하는 다른 어떠한 기능들보다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아졌을 때, 시가 생기게 되는것뿐이다… 그래서 시적기능은 언어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고 다만 그중에서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기능인것뿐이다. 112   사실주의시는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현대시는 해석을 요구하면서 해석불가능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말)   의미는 그 특징상 전의할뿐만 아니라 , 전의될수가 있고 또 전의되여야 한다.116   만일 코뮤니케이션이 메시지 그자체에게로 지향하고 있다면, 이 때는 시적 혹은 미적기능이 우세해진다고 말할수 있다… 언어의 시적기능은 … 기호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촉진시킨다. 그 결과 능기와 소기, 기호와 대상간에서의 어떠한 관계라도 자연스럽다 거나 분명하다고보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부숴뜨리리게 된다.118   양식은 자기 지지적이며, 그 양식이 바로 주제인것이다. …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형식과 내용을 재통합하는데 소용되며, 또 본성을 유효토록 하기위해서 작품을 메시지의 용기가 아니라, 그 본성을 유효하도록 하기위해서 자신의 령역을 넘어서는 지시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조절적이고, 결국에는 자기존중적인  본질적통일체로 제시 하는데 소용되는것이다. 결국 작품은 Piaget의  말을 빌면, 하나의 구조인것이다.119   구조주의는 그자체가 언어학적 모델에서 발전했었는데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인 문학에서 그 모델과의 유사성 이상의것을 가진 대상을 발견하고 있다. 양자는 동질이다라는것이다.120   그레마스 A.J.Greimas   우리는 차이를 지각하고 , 그지각의 덕택으로 , 세상은 우리앞에 서 우리의 목적에 맞도록 형상을 취하게 된다121   행위의 내용은 노상 변하고 , 행위자도 바뀐다. 그러나 언술광경은 항상 동일하다. 121   또도로프TzvetanT0d0rop   문법이 어째서 보편적이냐 하면, 그것이 우주에 관한 정보를 모든 언어들에게 알려주고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마는, 그것이 우주자체의 구조와 일치하기때문이기도 하다.132   대담한 개인적창의력이라는 이름에서 낡은 체계를 파괴한다는 의미일것이다. 136   구조주의의 최대의 특색은, 바로 형식을 내용이 되게 하는 일종의 변환작업에 있는것같다… 즉 문학작품은 언어에 관한것이며 , 언어사용 그자체의 과정을 가장 본질적인주제로 삼고 있는것이다.137   형식이 곧 내용이다라는것을 자명한것으로 보고 있기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같다고 보는 낭만파후기의 생각을 시인하 는것이다. 141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서 모든 언어에 생래적으로 깃들여있는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그것이다. 문학의 술화의 본질은 언어를 넘어서가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문학의 존재이유는 없을것이다.) 문학이란, 언어가 자살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흉기와 같은것이다.147   바르트   인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있는것을 변경하고 재구축하는것이다. 148   글쓰기는 결코 코뮤니케이션의 도구도 아니고 , 말할 의도만이 통해가는 열려있는 통로도 아니다. 정밀이니 명료니 하는것과 같은 초역사적인 보편적문체의 양식이나 조건도, 이데올로 기적으로 무구명료함이이란 순수하게 수사학상의 속성이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시대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언어특성은 아니다. …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분류해내지 못하는것은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일체의 인간경험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과 합치되도록 고쳐서 그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것으로 승격시켜 나간다.151   이들 꼬드는 --우리가 인정하든말든—의미를 변경시키기도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생성하는 작용을 하는데 , 그 방법은 무구하다 거나 자유롭다고 하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바깥 어디엔가에 있는 객관적인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것에, 언어자체가 제자신의 중개적이며 형성적인 패턴을 부과할 때의 복잡한 방법에 많이 닮아있다. 그 결과, 적절히 분석되였을 경우의 텍스트가 드러내게 되는것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토도로브가 말하는 뚜렷한 일종의 다양성이다.153   다수성과 애매성은 문학의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보는 생각이라든가, 의미들 상호간에서 신중히 유발되여진 긴장에서 언어의 본성에 관한 많은것이 밝혀질수 있다.155   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가공하고 창조하기위해서 고안해낸 여러꼬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이란 , 어느 의미에서는, 꼬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는 꼬드의 중류장치일런지도 모든다. 문학은 독자에게 꼬드를 상기시키고, 그 꼬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그에게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비평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무슨 도구인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전달해주는 차량, 행동의 수단, 언어의 의복인양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156   저작자의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능기에 주목해야 한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능기를 넘어서서 능기가 암시하는 소기에게로 옮겨가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굴복해서는 안될것이다.158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서 예정된 현실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 언어자체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저작자와 더불어 자신의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위험은 있으나 상쾌한 작업에 독자를 끌어 넣는가… 독자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행진하는데 작가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춤을 춘다.160   쾌락의 텍스트란것은… 향락의 텍스트는 결락감(缺落感) 을 안겨주는것인데, 독자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심리적가정과 그의 취미, 가치관, 기억 등의 일관성을 (어쩌면 따분하리만큼) 불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독자와 언어와의 곤계에 위기를 가져온다.162   능기를 분석하는 꼬드   1.     해석학적꼬드; 설화적인 꼬드, 수수께끼를 구성해 풀어가는 꼬드. 2.     의미소 또는 능기의 꼬드; 의미의 깜박임 반시적꼬드-伴示 3.     상징적꼬드; 群化나 윤곽구축, 대조(2,3은 분별이 불투명) 4.     행동꼬드(프로아이젝트); 연속적사실. 5.     문화적꼬드(대상지시적꼬드); 격언적, 집합적.   예술은 다같이 주어진 자료, 주어진 능기 (즉 텍스트, 화음의 연계)에서 파생된다고는해도, 그것들에서 주어져있지 않는 새로운 현실, 새로운 능기를 창조하고, 또 창의와 미라는 량면에서 본래의것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예술은, 소기의 예술이 아니고 능기의 예술이겠는데 진실로 현대적 이라고 말할수 있다. 170   관계 그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것이지, 관계를 넘어서서 지향되고 있는 어떠한 현실의 세계도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의미의 작용은 언어의 어떤 레벨에서 딴 레벨로의 ,한 언어에서 딴 언어로의 이동에 불과하며, 또 의미란것도 그러한 꼬드전환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71   장미다발은 능기이고 정열은 소기이다. 183   대시작용이라는것은 보통으로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말해지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일이고, 반시(伴示)작용은 말해지고 있는 것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다. 선행되고있는 능기— 소기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호가 , 더높은 단계의 기호의 능기로 되는경우에, 반시작용이 생겨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첫째 세계는 대시작용의 차원이고 둘째는 … 반시작용의 차원이 되는것이다. 187-188   청각적기호는… 시간을 리용하고 …공간적기호는 공간을 점하고... 청각적이고 시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상 상징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에 있어서 도상(图象)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능기는 고도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애매성을 나타내고있다. … 기호론적으로 말하면 애매성은 꼬드의 규칙을 어기는 양식이 라고 규정되여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말씨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다 라는 야콤슨말에…200   파괴성은 –Umberto Eco (a) 상이한 레벨의 많은 메시들은 애매성을 지니고 조직화 된다  (b) 애매성은 정확한 설계에 따른다  (c) 어떠한 메시지에 있어서도 , 거기에 들어있는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은 다같이, 다른 모든 메시지에서의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에 대하여 맥락상의 압력을 느낀다 (d) 한체계의 규칙이 한 메시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있는 방식은 다른 체계의 규칙이 자신의 메시지에 의하여 깨뜨려지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 생겨나온것은 미적개인어 예술작품에 독특한 특수 언어인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대시를 새로운 반시로 부단히 전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질서—즉 확립되는 순간에 자기 확립된 의미의 레벨을 넘어서 끝없이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적메시지가 의미작용을 부단히 행하는 다차원의 체계이기에 , 의미작용이 한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이행하고 있어서 그것의 대시가 일종의 무한 급수적인 양상에서 반시로 된다는것인 듯하다. 그 결과로서, 미적메시지에 대한 최종적인 꼬드풀이나 글읽기에는 켤코 도달하지 못하는 터이다. 왜냐하면 애매성의 하나하나가, 다른 레벨들에서  더욱 많은 같은 계통의 규칙위 반을 생성시키고 , 또 예술작품이 어떤 점에서든 말하고있다고 생각되는것을 벗겨버리거나 다시 조립하거나 하도록 노상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200-201   다양성- 애매성-규칙위반-장식바꾸기-다차원-다의미   독자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글쓰기나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다르게 세계를 보게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예술도현실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처하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인것이다.202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술작품이란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이란 견해다. 이러한 예술가는 , 말과 이미지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의 건너편에 있는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류형의 예술가는 번역가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또 하나의 태도는, 예술이란 독립해서 존재하고있는것들로 성립되는 세계이다하는 견해다. 말, 그리고 말들과의 관계, 사고, 그리고  사고들의 비꼬임, 그것 들의 분산, 이러한것들이 예술의 내용인것이다. 예술이란것은 , 창문에 비해질수 있다손치더라도 .대강 그려진 창문에 불과 하다.204   책이라는것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하는것으로 보이는것은 , 현실의 물리적세계가 아니고 , 다른 차원으로 환원된 세계이다. 205   글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글이 만든다.(2015.1.23.)
1056    자작시 해설 2 <물고기그림>/심상운 댓글:  조회:237  추천:0  2019-12-19
자작시 해설 2 물고기 그림 / 심상운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하이퍼 시의 심리적 장면 변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시 겨울저녁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있는 물고기와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가는 그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 이 시의 캐릭터다. 그들은 문맥 상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없이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내’가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의 새를 넣었을 때, 그가 설경 속을 나오는 장면은 물고기와 그와 내가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분명한 것은 그 관계가 현실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는 나의 심리적 현상이 만들어내는 관계 즉 마음의 관계(마음속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을 직관하면서 심리의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 이미지를 포착하여 한 편의 시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변화의 기법’은 인간의 내면의식을 포착하여 표현하는데도 하이퍼 시의 기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는 가상세계를 표현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를 보면서 나름대로 추리하고 상상하는데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 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문덕수 「내면세계의 미학」)라는 말에 동감한다.그리고 그 말은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김융희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시학」)는 말과 이음동의(異音同義)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시의 중심 포인트는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는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서 설경으로 떠나간 그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것은 하이퍼 시의 장면 변화의 기법을 시에다가 끌어들인 것으로 그 기법이 시인의 내면적 심리현상을 표현하는데도 효과적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논리적인 인과의 법칙에서 잠시 벗어나 시인이 보여주는 장면(이미지)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추리해보고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마그리트의 우산을 들고 찾은, 가을 강에서 만난 싯달타의 나비 이인선(시인, 평론가)   그 동안 문단의 원로시인들 위주로 평론을 연재하였다. 코스모스가 성큼 계절의 대문을 열고 들어선 가을날엔 이름과 나이를 잊고 싶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뭉개구름 따라, 들국화 따라 걷고 싶다.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하염없이 강가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기고 싶다. 다음 소개하는 정기만과 윤유점의 시 2편은 우리들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힐링 시다. 머리를 맑게 씻어주는 서정적 그리움의 세계를 만나보자. 정기만의 「싯달타와 나비」는 이미지 확장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거리가 먼 낱말들의 이미지 합성과 충돌로 상상력의 비약을 한다. 돌출된 이미지 연출을 실현하기 위하여 낯선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래 시는 정기만의 「싯달타와 나비」 전문이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냐?/ 나는 은둔한 꽃의 날개에서 온 잃어버린 왕국/ 갈가마귀 검은색 옷을 입은 암울한 상처// 협곡 사이로 선회하며 끼륵끼륵 여운을 끌고/ 백사처럼 휘는 물거울에 비친 내 모습//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달음질하는 흰 토끼, 하얀 등을 네가 본 것이냐?// 잊혀진 나라를 덮은 혼돈의 자아/ 마침내 껍질을 벗고/ 비린내 나는 선창을 배회하는 나비// 얼어붙은 이 계절이 끝나는 즈음/ 허물에 싸여 속살거리는 은빛 유혹/ 깨뜨리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 색깔을 벗은 싯달타의 나비// ― 정기만, 「싯달타와 나비」전문 위의 시는 시적 거리가 먼 것끼리 결합하여 이미지 충돌을 하고 있다. 싯달타와 나비의 낯선 대비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연상시킨다. 위의 시는 대조법을 사용하여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기만의 시는 김기림의 시와 차별화된다. 김기림의 시에서 ‘나비’의 역할보다 정기만의 시에서 보여주는 ‘나비’는 깨달음의 층위가 더 높다. 김기림의 나비는 거대 바다와 왜소한 나비를 대비시켜 감각적 미의식을 주는 표현주의를 강조한 유미주의 시다. 그러나 정기만의 나비는 ‘싯달타의 나비’로 표현주의에 의미화를 삽입하였다. 정기만의 ‘나비’는 ‘싯달타의 나비’로 깨달음의 여러 입자와 깨달음의 껍질이라는, 해탈의 외연과 내연을 내포하고 있다. ‘은둔한 꽃의 날개’와 ‘잃어버린 왕국’은 등가의 가치를 가지는 종속절로 감각적 미의식을 지닌 문장으로 서로 매치시켰다. 다음 시행 ‘협곡 사이로 선회하며 끼륵끼륵 여운을 끌고’ 의 종속절로, ‘백사처럼 휘는 물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치환되는 문맥은 청각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가 예리하게 맞물리며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랜 사유 후에 혼돈의 자아는 은둔의 왕국에 입성한다. 은 흰색을 주조로 한 그림이다. 흰색은 순수와 정결의 상징이다. ‘흰 눈, 흰 토끼, 하얀 등’ 흰색이 세 번 반복된다. 수도자는 몇 겹의 번뇌의 강을 건너야 선의 황홀한 하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일까? ‘푸른 하늘’과 ‘나비’는 ‘선창의 비린내’와 ‘은빛 유혹’을 밀어내고 마침내 무념무상 깨달음의 경지로 해탈한다. ‘색깔을 벗’고 ‘싯달타의 나비’가 된다. 억압을 벗어던진 싯달타의 나비는 몸이 가볍다. 팔랑팔랑 가벼운 날갯짓을 하며 눈부신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색깔을 벗는다는 것은 탈피다.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이며 창조행위다. 자유와 예지의 영역이다. 색은 사바세계의 거짓의 옷이다. 진리가 아닌 허욕이다. 싯달타의 나비는 순수의 결정이다. 위의 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고행의 과정을 원초적 생명력과 환희를 그리며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감각을 채색하였다. 위의 시가 상상력의 비약적 확장을 하면서도, 문장의 객관화를 유지하는 이유는, 선시의 예언서 같은 신비함을 사물시의 객관화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은 비약적이지만 시어에 사용한 사물은 지극히 현재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비약적인 상상력은 장치를 받쳐주지 않으면 문장이 날아가고 안정감을 상실한다. 시는 시적 논리에 맞는 상상력을 펼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에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으면 운동감이 없고 딱딱한 시가 된다. 표현주의의 감각적 미의식을 외면한 시는 답답하다. 정기만의 ‘싯달타의 나비’는 이미지들이 비상과 곡예를 펼친다. 아래 시는 윤유점의 「마그리트의 우산」 전문이다. 윤유점의 「마그리트의 우산」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그림의 패러디 시 작품이다. 그림을 패러디한 시는 객관화된 상상력을 획득한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기가 쉽다. 그 이유는 시를 쓰기 전에, 그림의 영상이 뇌에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미술의 시녀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시보다 늘 앞장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다. 그 한 예로 샤갈의 그림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샤갈은 이미지의 덩어리들을 그림에 뭉쳐놓고 있다. 샤갈 그림의 둥둥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자는 시각적 전위예술 작품이다. 윤유점의 시는 이미지를 객관화하여 감각적으로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겨울비는 한 방울의 눈물이다 한 잔의 물이 된 거리의 풍경으로 나는 흐려지는 우산을 편다 빗물에 뜬 내 발자국은 원점으로 일그러진다 수직으로 떨어진 비는 어느새 동심원을 그린다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늘 사선으로 떨어지면 가로수 사이로 희미한 빛들이 흔들린다 나는 출렁대는 내 흔적을 밟지 않는다 발걸음을 멈추는 동안 그림자는 빗물 속에서 서럽게 부유한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울음을 삼키며 나는 증발하고 하염없이 비에 젖는 나를 본다 우산 속은 절대공간이지만 수많은 우산들이 틈에서 내 소실점을 찾지 못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며 휘발된 나는 기억을 지우며 빗물에 젖은 모호한 익명을 그리워한다 뒤돌아보아도 내가 걸어온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빗물은 결코 빗물만은 아니다 ― 윤유점, 「마그리트의 우산」 전문   위의 시는 무채색 그림이다. 단문과 복문의 흔적이 빗물에 씻긴 발자국처럼 교차적으로 반복되며 무늬를 그린다. 겨울은 흐린 이미지의 빗방울 그림을 그린다. 눈물과 빗물과 발자국은 공통된 이미지가 있다. 지난 계절의 흔적을 지우고, 퇴락한 마음의 서정을 따라 흐른다. 조건절과 종속절로 이루어진 겨울비 그 쓸쓸함이‘내 발자국에 원점으로 일그러진다.’ 는 문장을 주목하여 보자. 윤유점의 시는 우울한 기분을 노래하지만, 시의 분위기는 신발이 밟는 빗물소리처럼 찰방찰방 경쾌하다. 빗물에 지워지는 발자국은 그 존재를 증명하려 하여도 부유하는 물방울로 흘러갈 뿐이다. 존재를 흘려보낸 우산은 그 울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현대적 감각이 물씬물씬 나는 윤유점의 시를 들고, 햇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숨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만난다. 드디어 우산 밖의 새와 우산 안의 새와 격렬하게 조우한다. 접혀진 우산을 펴고 날렵한 그림을 허공에 그려 본다. 무채색 그림 시에 하늘색 공감을 채색한다. 윤유점의 문장은 독자도 캔버스를 펼쳐 놓고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창작의욕을 갖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김선진   잠을 잃은 밤, 강물이 되어 흐른다 아주 긴 강이 밤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 바람도 없는 강기슭에 서서 자꾸만 머리속이 쓸려 감을 알아차린다 나를 건드려 주는 바람 한 점 없이도 밤은 충분히 내게 혼자임을 일깨운다 잠을 잃은 채 긴 긴 강기슭을 내려갔다 거슬러 오르는 물살 빠른 가슴을 아는가, 그대는 이런 밤이면 새벽에 이르는 길도 아주 먼 곳에 있다 아무도 건너지 않는 강나루 이편에서 저편 강나루의 어둠을 지켜본다 자꾸만 밥물이 끓은 후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편안한 아침이 기다려진다 아예 잠을 잃은 밤의 강물이 되감기 필름같이 빨리 흘러가 주었으면 세찬 강바람에 강물이 죄다 쓸려 가 강이었다는 흔적조차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 오늘 밤도 잠을 잃은 밤은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친다.   일상과 일탈을 꿈꾸는, 시적욕망의 불안한 반란 이인선(시인, 평론가)   김선진의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은 제목이 압권이다. 시의 내용에서 보이는 불안과 불면과 동떨어진 제목이다. ‘낯설게하기 기법’을 실현한 반전 매력이 있는 제목이다. 위의 시는 ‘일상과 일탈을 꿈꾸는, 시적욕망의 불안한 반란‘을 표출시킨 작품이다. 시적 화자의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불안과 욕망이 불면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술로의 승화를 기다리는 시적화자의 무의식의 발로다. 시는 불안한 밤을 연모하고, 밤은 불안에서 시를 잉태한다. 시인에게 불면의 밤이 없다면 시의 강물은 말라버릴 것이다. 역발상을 하면 반전이 있다. 잠 못 드는 시인이여, 시를 깨우기 위하여 불안과 불면의 고통 속으로 직진하라. 불면의 밤은 시의 강물을 도도하게 흐르게 한다. 시는 불안과 불면의 강에 돛단배 한척 띄우고 싶어한다. 욕망은 에너지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잉여에너지가 남아있으면 그것을 소모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잉여에너지는 ‘심심하다’라는 형용사를 초대한다. 심심해서 일탈과 반란을 도모한다. 무모한 자는 파멸과 파괴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성과 분별력 있는 사람은 파괴와 재난을 거부한다. 생각의 일탈과 반란에만 머문다. 불안과 불면은 내적 갈등의 표출이다. 감정이 장기간 억압되면 정신병을 앓거나 분노 유발을 하게 된다. 억압과 분노가 계속되면 ‘묻지마 살인’과 10대의 ‘이유없는 반항’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일탈은 시창작으로 실현된다. 연애시는 감정의 일탈의 대표적인 경우다. 상상력의 비약은 하이퍼시를 생산하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분류하였다. 그 부적응을 고뇌하는 과정을 통하여 ‘승화’시킨 것이 시 창작품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사회적 부적응자인 독자가 시인의 그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불안감을 폭력성으로 소모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서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지성은 ‘편안한 아침’을 기다리고, 감성은 ‘나를 건드려 주는 바람 한 점’을 원한다. ‘이편’에서 지켜보는 ‘저편’의 강 건너 어둠은, 발아하지 않은 시적 긴장감이다. 시적 화자는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일상적이고 안정된 주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불안증과 불면증은 갱년기의 호르몬의 불균형이나 노년기의 호르몬 감소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시인은 자신의 감정적으로 더 크게 인지한다. ‘오늘 밤도 잠을 잃은 밤은/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 치는 상황이 반복된다. 소모적이고 병리적인 반복적 패턴은 병을 유발시킨다. ‘되감기 필름같이 빨리 흘러가 주었으면’하고 바라는 시적화자의 바람은 ‘세찬 강바람에 강물이 죄다 쓸려 가/ 강이었다는 흔적조차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반란한다. 시적 화자가 왜 자신의 존재의 근원까지 소진시켜서 ‘무’이고 싶어할까? 상담심리 기법으로 심리적 이유를 분석하여 보자. ‘무’이고 싶어하는 심리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재의 갈등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회피하는 행위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다. 절대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도 자녀와 가정의 부조화로 후회하는 경우를 본다. 위의 시의 시적화자도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부정이다. 둘째, 새로 다시 시작하여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고 싶어 한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서 새로이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소망과 결부된다. 후회는 ‘출발점’이며 인생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다. 사실 새롭게 시작하지 못할 나이는 없다. 10년, 20년, 30년 더 살면 된다. 인생 60, 70, 80에서 더 산만큼 빼기하면 된다. 그러면 시작하는 출발점이 앞당겨진다. 젊은 나이로 새 포지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치는 것’은 생각을 버리고 행위를 도모하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 현존하는 꿈이다. 꿈틀대는 욕망의 분화구다. 터질 듯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완성된 시가 탄생할 것이다. 천재는 ‘계속, 계속 노력하는 자’라는 말을 며칠 전 TV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읽었다. 금방 싫증내고 탐구하지 않는다면 결과물도 평범하다. 시도 열정적으로 학문처럼 그 기법과 표현을 탐구하여야 한다. 노력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역사를 바꾼 예술작품은 지독한 에너자이저들이 만든 업적이라고 한다. 에너지가 없으면 흥미와 동기유발이 안 된다. 초기단계에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물살 빠른 가슴’이 되어 ‘새벽에 이르는 길도 아주 먼 곳’을 향하여 ‘혼자’ 가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라고 시인의 무의식은 예견하고 있다. 예술가의 번뇌와 불안, 불면은 창작의 동기며 과정이다. 불안과 욕망은 시소의 양쪽 끝에 앉은 대치적 상황이다. 일상적 평안을 원하면서도 일탈을 꿈꾸는 것은 예술의 속성이다. 시인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생산과 창조를 위한 신경의 줄타기 과정이다. 시는 안일한 일상을 거부한다. 일상을 탈피하여 일탈을 꿈꾼다. 새벽은 불면의 밤과 맞닿아 있다. ‘아주 긴 강이 밤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면 그 강물에 몸을 섞어보길 권고한다. 김선진의 시는 고통 없이 예술은 잉태되지 않는다는 명제를 일깨워준다. ‘불안과 불면’을 시창작의 필수조건으로 인정하고 역발상으로 접근하여 보았다. 김선진의 시는 새로운 시각으로 시를 바라보고, 시창작 기법을 논의하는 분기점을 제기하고 있다. 시의 물살에 맨몸을 맡기고 둥둥 떠내려가 보라. 절망의 꼭짓점에서 시의 꽃이 필 것이다. ♧
聞香에 들다 가영심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 꽃의자처럼 앉아있다 그윽한 향기에 마음을 입맞춤하듯 깊은 혼을 길어올린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   백리향 잎사귀를 손끝으로 비비면 분홍 입술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우면 나를 따라와서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머물던 그 향기. 백리향 차향으로 빚은, 정서해소와 심리치료의 시(詩) 이인선(시인, 평론가) 허브라는 이름은 몸에 유익한 치료효과를 주는 식물에만 붙여지는 이름이다. 백리향 차는 허브로 분류되는 치료효과가 좋은 차다. 좋은 시는 차향처럼 은근하고 향기로우며 정서해소와 심리치료 효과가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일상에 지친 소시민의 삶에 여유와 향기를 초대한다. 가영심의 시 「聞香에 들다」의 1-4연의 시행들은 차를 마시는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정서해소와 심리치료 효과를 그리고 있다. 백리향의 약효를 모르더라도 ‘분홍 입술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3연 2행)로 시작하는 아침은 상쾌하다. 또한 ‘분홍 향기’로 마감하는 저녁은 열심히 일한 하루의 피로와 노고를 위로받는 치유효과가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작은 사치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일에 쫓기고 마감날짜와 전쟁을 하는 삶은 여유와 향기가 없다. 긴장이 연속되는 생활은 스트레스를 받고 암의 공격에 쉽게 무너진다. 인사동에 가서 비싼 도자기 찻잔을 구입하고, 향기로운 차를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여 보자. 인사동에 간다는 사실은 바쁨과 현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실천이다. 현재를 버리고 옛스러움과 예스러움을 찾는 마음이다. 엥겔지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존감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입의 5% 정도는 문화비 지출항목에서 지출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특히 속도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그 정보를 벗어나서 고요한 침묵에 침잠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자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정서적 일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끔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대치와 억압에서 벗어나서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차향을 사랑하는 것은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달성하는 순간 멈춤이다. 시인은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1연 1행)다. 시인은 어느 시대에나 현재의 경제력과 인지도에 관계없이 자신의 등급을 최고로 설정한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존심이다. 더구나 시인은 시대를 표상하는 샤프한 지성이다. 위의 시를 읽으면 서울 도심의 인사동이 아닌 일상을 벗어나 더 먼 곳으로 여유를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4연 1-2행)우고 ’꽃의자처럼 앉아있다‘(1연 2행)는 가영심 시인의 여유가 부럽다. 위의 시는 먼 곳의 향기로운 백리향 분홍 꽃밭의 가야산 기억을 오늘에 재현한다. 시인은 꽃의자가 되어, 자신이 앉았던 꽃의자에 또 누군가 외롭고 슬픈 영혼을 초대하여 앉힌다. 백리향 꽃향기는 밟거나 흔들어 줄 때 멀리 멀리 퍼진다. 고독과 슬픔은 누군가 상처받은 마음을 정신차리라고 흔들어주어야 치유된다. 백리향 차는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약리작용을 한다. 위의 가영심 시와 백리향 차의 같은 점은 무엇인지 비교분석하여 보자. 첫째, 백리향은 향수의 재료다.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하여 백리향이다. 천리향 만리향도 있다. 백리향은 꽃향을 흔들어 주어야 더 멀리 간다. 시도 이와 같다. 인간의 정서를 흔들어 주어야 시향이 멀리까지 간다. 둘째, 백리향 차는 살균효과가 있다. 차갑게 마셔도 뜨겁게 마셔도 된다. 시도 같다.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키거나 차갑게 이성적으로 만들어 흥분을 가라앉혀 준다. 셋째, 백리향 차는 기관지를 확장하여 호흡을 고르게 해준다. 호흡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시는 분노와 화를 가라앉혀 주고 화병을 치료해 준다. 넷째, 백리향 차는 젊음을 회복해 준다. 소화불량에 좋다. 음식을 먹고 잘 소화시켜야 젊은이다. 젋은이는 과식을 하여도 금방 소화를 시킨다. 그러나 노인은 잘 체하고 소화를 못 시켜서 복부팽만감이 있거나 변비에 시달린다. 다섯째, 백리향 차는 감염을 치료한다. 비타민 A, C가 풍부하여 면역력을 길러준다. 모든 병은 면역력이 약해서 감염된다. 차를 마시는 것처럼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정신과 정서의 면역력을 길러준다. 여섯째, 백리향 차는 혈행 개선과 고혈압에 좋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몸 안의 노폐물을 잘 배출시켜 준다. 시를 읽는 행위는 뇌 안의 노폐물을 배출하여 정신을 정화시켜 준다. 일곱째, 백리향은 입냄새를 제거해 준다. 시를 읽으면 입과 뇌의 구린내를 제거해 준다. 나쁜 말을 하거나 옮기고 싶은 마음이 억제된다. 왜냐하면 콤플렉스와 억압이 해소되어 정서적으로 여유를 찾기 때문이다. 여덟째, 기분이 좋아진다. 억압이 완화되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차를 마시거나 시를 읽으면 하루가 행복하다. 시를 쓰면 일주일이 행복하다. 매일 시를 읽으면 일 년이 행복하다. 시는 백리를 향기를 퍼 나르는 백리향보다 향기가 진하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3연 1-4행) 좋은 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맑고 투명한 향기가 인터넷으로 온 세계로 배달된다. 위의 가영심의 향기로운 시는 백리향처럼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환히 밝혀 주는 행복 바이러스로 정서치유 효과가 크다. ♧
흔들의자     김인숙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래전 보았던 편백나무 숲속 그 아련한 술렁임처럼 고래의 허밍을 들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 그리고 젖은 바이올린의 고요한 선율을 귓속에 담고   곁을 내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소식 없는 소식을 기다리며 가끔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너무 많아서 금세 파동 속에 묻혀버렸지만   탄력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곁이란 그런 것, 흔들리고 싶을 때 맘껏 흔들릴 수 있도록 몸속에 풍향계를 심어주는 것   안락하고 편안한 양수(羊水)의 출렁임 속에 만삭인 여자가 앉아 있다   흔들림 속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 주는 정서치유 효과             이인선(시인, 평론가)  ‘흔들리다’와 ‘흔든다’ 사이에 끼인 자유와 억압을 더듬어본다. 온몸으로 전해오는 차가움과 가벼움을 체감해 본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흔들리지 않는 당신이 그녀를 품을 수 있을까?   사랑의 출발은 흔들림에서 시작된다.   아무 생각없이 사랑이 불현듯이 우연처럼 찾아들고 당신은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위의 시 1연처럼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싶은 때가 있다. 당신도 그녀도.   인간들은 그것에 ‘일탈을 꿈꾸다’라는 제목을 붙인다. 일탈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법적 구속을 받을 정도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자해를 할 정도의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흔들리다’라는 행위는 정서에 자유를 선물한다.   흔들리며 나무가 태양광선을 흡수하여 엽록소를 만들 듯이, 무수히 많은 서정시의 숲을 돌아다니다가 필자는 김인숙의 「흔들의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필자도 때로 흔들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분석이라는 평론의 틀에서 벗어나서 온몸으로 숲의 흔들림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단어 분석, 문장 분석, 작가 분석, 시대 분석, 이미지 분석의 건조하고 낡은 구조를 벗어나서 새로운 산소를 호흡하고, 일탈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거다. 필자는 일을 하면서 즐기고 싶은 두 가지 욕심과 본능이 늘 꿈틀댄다.  드라마와 노래, 미술작업, 무용, 시, 소설, 수필은 흔들리고 싶은 본능에 충실한 예술행위다. 그녀가 끊임없이 당신을 옥죄고 흔들 듯이, 또 당신이 그녀를 끊임없이 옥죄고 흔들 듯이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예술행위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대상을 향하여 흔들지 않고, 객체인 무생물을 대상으로 흔들어댄다. 사물과 사건, 무생물을 생물로 치환하여 객관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흔든다. 파격미가 심하여 전위예술로 치닫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할 정도로 극심하게 정서가 왜곡되도록 흔드는 예술을 싫어한다.   김인숙은 어떤 일탈을 꿈꾸는가?   또한 일탈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 그 과정을 더듬어 보자.  2연의 중심어는 이다.  일상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고요한 일탈이다. 여유로운 자유라고 이름 하여도 좋다. ‘내가 나에게 주는 작은 사치’다.    그러나 3연은 조금 더 진폭이 크다.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깊어진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라는 문장에 집중하여 보자. 죽은 남편, 애인, 또는 어머니가 대상일 수 있다. 그 대상들은 다시 만날 수 없기에 절실히 그립다. 김인숙의 흔들리는 문장에서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흔들리지 않고 꼿꼿한 나무들은 강풍에 부러질 것이다. 자신의 영역과 역할을 지켜내기 위하여 나무들은 나뭇잎을 흔든다. 바람에 몸을 모두 맡기고 흔들린다. 그대도 나도. 당신도 나도 흔들리고 흔든다.   흔들림의 강도가 강하여 쓰나미가 되어 다른 사람을 불행의 늪으로 내몰기도 한다. 소설적 구도다. 자신이 시궁창에 쳐박혀 부러지기도 한다. 시적 구조다. 소설가는 가해자가 되어 적극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 혁명가를 꿈꾼다. 그러나 시인은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어 소극적 방어를 하며 아파한다.  김인숙의 위의 시를 ‘흔들림 속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 주는 정서치유 효과’라고 명명하여 보자.  행위예술은 흔들림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다. 행위 예술가가 왜곡이 심할수록 전위예술을 한다. 그것은 유년기의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부모가 유전으로 물려준 상처를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스스로 자가 정서치료를 한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다. 그러나 딱히 대상이 있는 그리움은 아니다. 필자도 죽은 시인, 소설 속의 죽은 주인공 남자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애통해 한 적이 많다. 예술은 참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일탈이다.  무한대의 자유가 보장된 예술은 극심한 사회적 폐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억압이 계속되어 긴장이 계속되면, 반대급부적으로 적의감이 쌓여서 파괴본능과 폭력성이 증폭된다. 청소년들에게 시를 읽게 하면 긴장이 풀린다.  시에서 사랑을 빼어버리면, 긴장미가 없는 드라마처럼 지루하다.  4연은 드디어 일탈의 대상을 찾는다. 흔들리는 자아를 잡아줄 멘토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정서적인 대상인 예술일 수도 있다. 또는 육체적인 대상인 애인일 수도 있다.  ‘몸속에 풍향계를 심어주는 것’은 그 대상이 불타는 육체적 사랑일 수도 있고, 정신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플라토닉 러브일 수도 있다.   5연은 드디어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생산을 시작한다. 일탈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인간의 긴장감을 풀어주어 생산성을 높여준다. 자유가 주는 광활한 상상력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끝은 자유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다.  그 자유가 예술이다.  ‘안락하고 편안한 양수(羊水)의 출렁임 속에/ 만삭인 여자가 앉아 있다’라는 문장의 주체인 여자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생산의 주체다. 예술로 승화된 생산력이다. 예술행위는 이처럼 생산을 지향한다. 작은 일탈과 자유는 큰 범죄를 예방한다.   김인숙의 시는 점층적 구도를 가지고, 점점 일탈의 종류와 범위가 확대된다. 필자가 심심한 서정시 평론을 거부하는 이유다. 생각할 거리, 쓸 거리, 탐닉하고 즐길 거리를 주는 시는 좋은 시다. 평자와 독자를 지루하게 몸을 비틀게 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필자가 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평론을 쓰면서 시를 선정하는 기준은 독자를 힐링시켜 주는 시다. 문학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이나 어려운 작품보다 쉽고 정이 가는 느낌 있는 시를 선정하고자 한다. 시의 참맛을 느끼도록 자연스럽게 독자를 유도해 주고자 한다. 오늘 김인숙의 시를 읽으며 1단계에서 5단계까지 힐링을 업그레이드하기 바란다. 이인선 평론가 약력   필명 이선. 월간『시문학』등단. 신춘문예 평론 등단.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부회장, 한국문화예술공연협회 회장, 양천문화원, 광진문화원, 성동구민대학 시창작반 지도교수. 양평 시와 도자기 힐링캠프 대표. 완도전국시낭송대회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문학분야 유공 표창장, 한국현대시작품상, 푸른시학상 수상. 한국문학비평학회 문학비평상 수상. 평론 엔지오신문 2년 연재 100편, 한국문학신문 연재, 웹진시인광장, 가온문학, 시문학, 한국인문학 등 150여 편 발표. 시집: 이선 첫 퍼포먼스 시집『빨간 손바닥의자』, 이선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앵무새 죽이기 채수영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 구부러진 세상에 곧은 길을 가는 사람의 그림자는 길고 고독의 함량이 더해진 슬픔 앞에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와 아름다운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는, 흰색의 상징성 이인선 무지개는 빛의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신기루 같은, 곧 사라지는 꿈의 판타지다. 큰길 건너, 아파트 건너, 먼 산 위에 걸려있는 무지개 구름마을을 찾아 떠나지만 무지개는 만질 수가 없다. 꿈의 완성체로 무지개가 상징성을 갖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물방울이 모여서 태양광선이 반사 굴절되어 나타나는 반원들의 집합이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는 7가지 색깔이 조금씩 겹쳐진다. 그러나 각각의 색깔은 스펙트럼 효과를 나타내며 빛낸다. 채수영의 시 「앵무새 죽이기」를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는, 흰색의 상징성’으로 해석한 이유는 흰색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흰색이 흰색이기를 고집하면 흰색은 다른 색으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나 독창적인 예술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주장과 독립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한다. 『좀머씨 이야기』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ϋskind)는 세상과 단절하고, 수년 동안 숨어 지내면서 자전적 소설을 집필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문명으로부터 도피하여 자연의 원시적 삶을 살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독특함과 창조성을 획득하였다. 위의 시는 11-12행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주제다. 하얗게 살아남은 예술을 위하여, 시인은 1-10행의 아픈 통점을 거쳐야 했다. 위의 시 1행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라는 명제를 분석하는 일은 채수영 시의 흰색의 상징성을 분석하는 기본 틀이다. 흰색을 흰색이라고 말하기 겁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반반 양념통닭처럼, 빨강색과 파랑색이 분명하게 반반으로 나누어진 태극기처럼 우리는 좌파, 우파라는 2분법적 사고로 분류당하고 있다. 반반의 경계선에서 좌충우돌하며 집단적 불신은 개인의 존재적 불안감을 야기시키고 있다. 흰색의 삶을 사는 사람은 무향무취의 삶을 산다. 흰색을 주장하며 하얗게 살았기 때문에,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흰색의 이미지를 분석하여 보자. 흰색은 ‘순결하고 깨끗함’을 상징한다. ‘연약하고 고상하며 슬픈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백의민족이라 표현되는 집단 이미지도, 역설적으로 저항을 인내하는 순종의 착한 이미지를 대변한다. 백색 이미지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목련의 백색 이미지는 화사하고 찬란하며 고귀하다. 예부터 조상들은 흰색을 청백리의 상징으로 존귀하게 여겼다. 그러면 위의 시 1-10행에서 흰색을 지키기 위해서, 시적화자인 시인이 지불한 대가가 무엇인지 분석하여 보자. 흰색을 유지하는 것은 안과 밖, 경계를 긴장하며 지키는 수고가 따른다. 흰 색 옷을 입고 외출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상상이 된다. 흰색의 청결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사에 조심한다. 혹 음식을 먹다가 김칫국물이라도 튀면, 흰색 옷에 붉은 얼룩이 진다. 얼룩은 순수하지 않다. 흰색은 얼룩을 거부한다. 순백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시인은 백색의 본질을 지키는 청렴결백 이미지에 자신을 가둔다. 흰색은 흰색을 고집한다. 흰색은 흰색에게는 절대 선이다. 흰 옷에 튄 김치국물 같은 얼룩은 경계선 안의 영역에 속한 자아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경계선 밖에서 파생된 타자의 침략이 원인이 되기도 하다. 본질과 원인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흰색인 자아는 슬프다. ‘구부러진 세상에서 곧은 길을 가’려니 시적화자는 고독하다. 흰색을 고집하며 사는 일은 외로운 ‘개척자’의 길이다.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5-6행)으로 살아 본 사람만이 안다. 당당하게 의협심이라고 우기곤 하지만, 가끔 도발하는 눈빛을 만나면 확신이 의심이 되며 풀이 죽기도 한다.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7-9행)이다. 늘 구부러진 세상(3행)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끌벅적 재미있게 산다. 이상주의를 버리고 현재에 자족한다.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9-10행)로 흰색은 산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1-3행)이다. 홀로 고독한 도전과 실험을 하는 흰색은 빛의 삼원색. 밝고 큰 파장을 지향한다. 역경과 억압에 구속당하기도 하지만 당당한 자부심으로 산다. 궁극에는 흰색 무지갯빛 스펙트럼이 펼쳐는 황홀한 절정이 기다리고 있다. 무지개는 손에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존하는 대상이다. 그 무지개 마을에 당도하기 위하여 몇 개의 무지개 씨앗을 시인들은 기르고 있다. 그것은 땀과 용기있는 개척자 정신이다. 시를 쓰는 일은 구도의 길이다. 참 시인이 되는 길은, 매일 매일 걷는 ‘좀머 씨’처럼 흐트러짐 없이 쉬지 않고 정진하는 일이다. 놀고 마시고 춤추는 자, 세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자 누구인가?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기 위해, 시인은 에너지를 과잉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언어의 창조자로서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에 힘써야 진정성 있는 개척자다. 흰색이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기까지, 어쩌면 시인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저당잡힐 지도 모른다. 위의 채수영의 시를 읽으면 시의 도를 깨치기 위하여,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고독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그것은 형벌 같은 아름다운 고행이다. 앵무새가 붉은색, 초록색, 노랑색 털을 부리로 모두 뽑아버리고, 흰색 털만 키우는 잔혹한 아픔이 묻어난다. 흰색은 무념무상의 색이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영원한 이상주의다. 채수영은 상흔을 들추며 고백록처럼 시를 적어나간다. 탈색된 잠재력의 무의식이 표출된, 표백된 그림 같은 시다. 순수라는 그물로 짠 천사의 흰 날개도 휴식을 필요로 한다. 하늘에서 추락하거나, 나무 위에, 달의 옆구리에 비상착륙하는 천사의 흰 날개를 인간은 본 적이 없다. 주름살 없는 순백의 맑고 투명한 아기피부,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듯 푸른 눈은 예지를 관통한다. 원망이나 불평은 신의 영역이 아니다. 채수영의 시는 비상하는 흰색 날개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서, 흰색 스펙트럼 무지개를 관리하는 시인의 시창작 과업은 고단한 희락이다. ♧
1050    평론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1 인연설 / 문덕수 댓글:  조회:205  추천:0  2019-12-19
평론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1   인연설 / 문덕수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재해석한 선시(禪詩)의 상상력과 환타지 이인선(시인, 평론가)     문덕수의 「인연설」은‘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재해석한 선시(禪詩)의 상상력과 환타지로 집약된 인생에 대한 해석적 시각의 시다. 선시의 특징과 상상력의 확장이 주는, 꿈속 같이 아름다운 환타지한 이미지의 정원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꽃나무 밑에서 잠깐 낮잠을 자는 동안 꽃잎이 어루만져주는 세계는 인간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다. 여러분도 잠깐 눈을 감고 오수에 잠겨보기를 권유한다. 왜냐하면 위의 시는 아름다운 꿈속 여행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인연설 」은 장자와 나비 내편 제2편의 이야기의 모티브를 주제로 시를 구상한 것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스스로 즐겁게 느끼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한 장주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는 이야기는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장자와 나비는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넘나든다. 현대의 무의식 철학개념을 장자는 BC 300여 년 경 이미 마스터 하여 풍자시로 지었다. 그러나 문덕수의「인연설」은 장자의 나비를 뛰어넘는 완성도 있는 작품이다. 철학과 유미주의를 만족시킨 작품이다. 위의 시는 14행으로 씌어진 서화처럼 짧고 아름다운 시다. 지하철역에 게재하기 좋은 내용이다. 지친 시민들에게 주는 위로의 문학이다. 또한 시낭송가들이 낭송하면 대중이 좋아할 감각적인 시다. 위의 시는 두 부분으로 내용이 나뉜다. 시의 상반부 1-10행‘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9-10행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의 내용과 이어지는 11-14행 하반부는 선시 형태를 하고 있다. 위의 시의 선시적 요소는‘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9-10행)/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11-14행) 부분이다. 장자의 나비처럼, 시적 화자인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꿈속인 듯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을 날아간다. 비현실적 환타지가 몽상적이다. 시를 시적이게 만드는 모든 장치를 숨겨 놓은 압권의 문장이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도 장자의 시가 원본이지 않을까 필자는 유추해 본다. 필자는 위의 시를 라고 명명하여 본다. 시에 사건과 스토리가 있다. 1-2행은 영화의 전개 부분에 해당한다.‘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나다니얼 호오손(Nathaniel Hawthorne)의 데이비드라는 소설이 상상된다. 여행을 떠난 미소년이 샘물가에서 낮잠이 든다. 자식이 없는 부자 부부가 지나간다. 깨어나면 아들을 삼고 전 재산을 주겠다고 하나 소년이 깊이 잠들어 있으므로 깨우지 않는다. 그 다음 도둑이 지나간다. 잠이 깨면 돈을 빼앗고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으므로 소년을 깨우지 않는다. 그 다음 아름다운 처녀가 지나간다. 만약 그 미소년이 잠에서 깨어나면 결혼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으므로 깨우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자기에게 닥칠세 가지 위기를 모른 채 여행을 계속한다. 위의 시 3-6행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나다니얼 호오손의 소설보다 잠자는 동안에 펼쳐지는 자유로운 꽃잎의 희롱이 생의 단면처럼 아름답다. 허허로움이 선시적 형태미를 지니고 있다. 객체를 만져주는 대상이 꽃잎이다. 꽃잎이라는 사물은 생의 주인공으로 부각하여 으스대던 부정어를 여과시켜 준다. 전쟁, 불화, 시기, 질투, 불평등이 사라진 세계다. 위의 시 9-10행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부분은 드라마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11-14행은 위의 시의 주제부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 날아가고 있었다.’ 부분은 영화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필자는 이 부분을 소설의 부분으로 분류한다. 문덕수는 마지막 완결부를 환타지로 처리하고 있다. 나비는 애벌레가 그렇게도 꿈꾸던 이상향의 세계다. 인생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고, 꽃나무 밑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나비가 되어 긴 여행을 다시 떠나는 아름다운 여정으로 생을 미화하고 있다. 천상병과 문덕수 시의 관점 차이는 무엇일까? 천상병은 인생을 잠깐 소풍 온 것으로 보았다. 소풍의 시간은 하루의 개념이다. 문덕수의 인생관은 잠깐 낮잠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다. 1-2시간, 혹은 20-30분의 짧은 시간의 개념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잠깐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고 본 것이다. 위의 시의 시적 매력은 다음 구절이 압권이다.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 왼 몸을 안아보고 가고, 또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 입술, 이마를 부비고 문지르고, 한 잎이 내려와서 손끝 먼지를 닦아’낸다는 발상에 주목하여 보자. 시적 화자가 주인처럼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잘 때, 꽃잎은 마치 겸허한 젊은 남국 여인처럼 주인의 몸을 안아주고, 입술과 이마를 부비고, 손톱의 먼지를 닦아낸다. 꽃잎은 시적 화자의 세속의 때를 닦아주는 정화와 순수다. 또한 위로와 애무다. 고단하고 지친 인생의 새로운 에너지원이다. 지고지순의 선이다. 꽃잎은 신의 부드러운 손길 같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는 대단원이지만 미완이다. 현대 유행하는 영화처럼 끝이 아닌 미완성으로 독자에게 상상력의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쇼팽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영혼을 빗소리처럼 두드리는 여운이 길다. 필자도 이 시를 여러 번 읽다보니 시에 흠뻑 빠져든다. 애송하고 싶어진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싶어진다. 좋은 시가 주는 매혹적인 힘이다. 그 꿈길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또 내가 사랑한 보들레르의 시, 박남수의 시,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작품, 프리다 칼로의 그림일 수도 있다. 또한 이사도라 덩컨의 춤, 광기어린 또스또예프키를 만나기 위한 꿈길이다. 시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요소는 무엇일까? 필자는 아름다운 상상력이 이끄는 감각적 미의식의 공간이라고 본다. 시를 향유하는 것은 산만하고 복잡한 현실을 떠난 여유다. 계산과 욕심 버리고 잠깐 쉬는 휴지다. 미완의 공백이다. 인생은 생로병사, 희로애락 슬픔과 실패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모든 슬픔은 꿈과 같은 찰라의 순간이다. 문덕수 시는 독자를 흠뻑 적시는 위로의 문학이다. 경건한 아름다움이다. 꽃비로 정화된 독자는 새 힘을 얻어 또다시 노동 현장으로 향할 힘을 얻는다. ♧  
1049    하이퍼시의 탈구조 / 이인선(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178  추천:0  2019-12-19
하이퍼시의 탈구조     이인선(시인, 평론가)     하이퍼시는 기존의 서정시와 현대시의 구조를 변형하여 새로운 시 형태와 구조로 창작된다. 아래 제시한 시는 하이퍼시의 구조변형을 실현한 시다. 각각 시의 구조를 살펴보고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의 차별화된 방법을 논의하여 보자. 하이퍼시는 현대시의 서정과 회화적 이미지를 굴절하거나 단절, 삭제하여 새로운 감각적 자극을 시도한다. 비약적 상상력은 SF 공상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재현된다.   1. 하이퍼시의 추상화 기법   아래 시는 심상운의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전문이다. 심상운의 시는 하이퍼시의 여러 구성요소를 지니고 있다. 심상운의 시는 사건이 네트워크로 구성되며 시간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한다. 심상운의 시에서 보여주는 서사는 단일구조를 배제하고 다선구조를 보여준다.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 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 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 시 20 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 都市建築物 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 심상운 ,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전문   위의 시는 제목부터 도형을 활용하고 있다. 3차원, 4차원의 기하학 그림 같다. 하이퍼시는 분리와 삭제가 가능한 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각형이나 삼각형, 또는 원의 어떤 개체 한 개를 빼도 시의 형태를 잃지 않고 사각형의 틀을 유지한다. 위의 시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라는 도형언어를 사용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네모는 확장되어 와 결합과 분리를 한다. 사각형은 창문과 벽으로 대별되는 현대사회의 소외문제와 사각형 경찰차로 대별되는 대형사건을 링크한다. 은 도형들의 무형질의 데몬스트레이션 (Demonstration)이다. 노랑풍선은 사고로 죽은 ‘세월호’ 학생들을 암시한다. 심상운은 교사출신이라 학생들을 보는 마음이 더 애틋할 것이다. 풍선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빈다. 무의식에 내재된 불만을 폭로하는 도형들의 무언극이다. 노란풍선들의 물결은 대도시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 판타지를 그린다. 아이슬란드의 육각형 빙산과 육각수 바다가 사각형의 도시건축물을 파괴하는 장면은 심각한 인류의 재앙을 암시한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현장감이 있다. 극대화된 상상력이 의미확장을 한다. 2. 하이퍼시의 자동기술기법   자동기술기법 시창작 기법은 임의성과 우연성을 통한 다양한 의미확장과 탈개념을 추구한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아래 시는 박서영의 「홀수의 방」 1연이다. 자동기술기법 문장기법의 의식의 흐름을 좇는 탈구조의 시다.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위의 시에서는 앞의 문장을 뒤의 문장이 이어받는다. 받은 문장은 파생적으로 갈라지며 다음 문장과 이미지 분산을 하며 연결된다. 으로 이미지 파생을 하며 같은 낱말과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단어조합을 하며 의미가 확산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꿈이었나봐’라는 독백체 문장을 삽입하여 상황을 꿈으로 설정해 버린다. 위의 시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한 자동기술기법의 시다. ‘잊겠다는 말’은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의식의 소리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행위는 빨리 끝난다. 그러나 이별 후의 감정의 잔재는 길게 남는다. 자아를 냉정하게 분철한 연애 이별 시다. 애인과 이별을 한 순간부터 사랑의 감정은 시작된다. 한쪽은 연애를 끝냈지만, 다른 한 쪽은 연애기억을 삭제하지 못하고 대상을 그리워한다. 다음 문장은 로 확장된다. 그 다음 문장은 으로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였다. 그 다음 문장 ‘그곳은 어디인가 ?’라는 물음은 로 연상작용을 하며 명사와 동사로 단어가 이동하여 연결된다. 연상작용으로 무의식의 흐름기법이 상황을 바꾸면서 장면전환이 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시에서 문장을 세련되게 한다. 고백적 장면전환과 상황제시를 하며 초현실주의 시작품을 만들어낸다. 자동기술기법은 무의식의 흐름 기법을 실현하는 하이퍼시 시 창작 기법이다.   3. 하이퍼시의 통합구조     하이퍼시는 통합구조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시 개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구축한다. 시의 탈 영토화를 실현한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필명 이선으로 발표한 시다. 아래 「이혼 견적서 」 전문을 읽고 하이퍼시 방법론을 논의하여 보자. S# 3   상담 대기실에서 , 나는 행복지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시간과 욕망의 간극 사이, 퇴락한 문장의 절취선에서 쾌속냉동과 쾌락냉동의 빙하점에서, 부부의 비극과 응징은 시작되었다ㅡ 무대 전등이 꺼지고, 감독의 Q 사인. 그녀의 구겨진 실크블라우스, 3번째 단추가 풀어진다. “감독님! 여배우의 왼쪽 볼에 마릴린 먼로 섹시점을 찍을까요?”   그래요, 순수와 열정 따위, 자극과 감각 따위는… 잊었어요. 자정의 감정분기점을 지나 05:38 지하철이 개통되면 세상은 곧 문명한 이성을 회복할 테니까   침실문 밖에서 서성대는 그. 침실문 안에서 망설이는 나. “여전히 대치 중”이라는 말로 치환되는 21 세기 결혼공화국   “본능과 애욕의 나침반 좌표축을 흔드는 당신은 누구세요?” ― 어제는 내 행복의 시작점이었던, 당신. 오늘은 또 내 스트레스의 꼭지점인, 당신   구겨진 실크블라우스가 펴지고, 그녀의 3 번째 단추가 잠겨진다   (슬로우 모션으로 ). F.O(Fade Out)   ― 이선 , 「이혼 견적서 」 전문   위의 시는 시나리오 용어 ‘S# 3– 감독의 Q 사인- (슬로우 모션으로 ). F.O(Fade Out)’를 차용하고 있다. 시의 각 연들은 대사와 장면전환 등 시나리오 요소를 삽입한 탈 구조를 실현한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난해시로 단정하면 안 된다. 하이퍼시는 상황시다. 내용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절대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단어의 뜻을 해석하여 스토리를 연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필자의 졸시 「이혼 견적서」는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진 21 세기형 부부의 위기인 매너리즘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생은 연극이다. 감독의 Q 사인에 따라 부부는 일생 동안 드라마를 찍는다고 해석하였다. 신혼 때의 짜릿한 성생활도 권태기에는 서로 데면데면해진다. 파국을 맞아서 이혼 직전 상담심리치료를 받는 부부가 요즘 늘고 있다. 행복지수도 낮다. 성격차이라는 말은 성, 기호, 생활패턴에서 부부 쌍방이 불통함을 의미한다. 위의 시는 시나리오 형식의 추리극을 형식을 차용하였다. 추리영화처럼 장면전환이 될 때마다 또 다른 위기가 펼쳐진다. 읽지 못한 영화자막처럼 틈새가 주는 미학적 요소가 숨어 있다. 하이퍼시는 ‘보여주기’만하는 시다. 위의 시는 시나리오 기법의 시에 영상시의 색채감과 운동감을 합한 통합성을 보여 준다. 탈구조를 하여 시의 형태를 변형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3편의 하이퍼시의 형태는 탈 구조를 실현하고 있다. 기존의 서정시의 형태를  변형하여 비약적 상상력을 통한 가상현실세계를 추구한다. 또한 미술, 무용, 연극, 영화의 여러 요소를 시에 차용하여 새로운 시 형태를 모색하고 있다. 직접적, 고백적 문체로 독자에게 강렬하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하이퍼시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21세기 현대의 젊은 의식을 지닌 독자와 소통을 원한다.
1048    [공유] 구조주의 개관 댓글:  조회:211  추천:0  2019-12-17
출처 구조주의 개관 ① by 학습 연구 가르침   構造主義 槪觀   曺 惠 蓮(96207022)   Ⅰ. 여는 글   Ⅱ. 구조주의의 개념과 원리 1. 구조의 개념과 특성   1) 구조란 무엇인가   2) 구조의 특성   3)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Ⅲ.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 사상 1.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   1) 소쉬르의 생애    2)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 2.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   1) 레비스트로스의 생애   2) 레비스트로스의 기본적 사상   Ⅳ.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지리학과의 관계   Ⅴ. 구조주의의 문제점과      탈구조주의의 등장     Ⅰ. 여는 글   구조주의는 20세기초기에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인간 인식에 반기를 들고 나온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출발하여 프라그언어학파, 코펜하겐 언어학파로 그 정통성이 이어지고 발전되어 구조언어학으로 정식화되자 이 언어이론의 원리와 법칙은 반세기를 지난 1960~70년대에 구조주의로 개화되었다. 구조언어학이론은 이때부터 언어학을 벗어나 인간과학 제분야의 향토개념이 되어 신화․설화․문학․영화․TV․심지어는 요리와 의상유행에 이르기까지 그 내재적 구조분석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그 확산이 일시적인 붐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 이론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관점에서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므로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도 후기구조주의에서 포스터모더니즘까지 그 기저엔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 자체는 지리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구조주의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 이론에 대한 논의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레비스트로스를 중심으로 그 시작과 확산을 알아볼 것이다.     Ⅱ. 구조주의의 개념과 원리   1. 구조의 개념과 특성   1) 구조란 무엇인가 (1) 체계와 구조 구조(構造)라는 말은 일반용어로서도 또 학문적인 술어로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원래 건축구조물이란 건축용어로 쓰였던 말로 생물구조라든가 심리구조 등 생물․심리학에서도 예사로 쓰이는가하면 경제구조, 유통구조 또는 사회구조 등 사회과학적인 용어로도 쓰이고 있고 심지어 마르크스경제학에서도 상부구조라는 말이 하부구조에 대위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 구조란 말은 실은 19세기 실증주의에서부터 빈번하게 쓰이는 말로서 막연한 의미로 쓰여오기도 하고 있다. 구조의 어원을 살펴보면 멀리 라틴어의 structura(strutuere〈건조하다〉에서 파생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건조물, 건축물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2) 구조의 개념 구조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도는 이념적으로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우선 그 기본적인 개념부터 정밀하게 규정지어 놓는 것이 좋겠다. 구조의 개념은 그 시발점이라고 할 구조언어학에서 조작적 개념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은 옐름스레우의 정의이다. ① 내적 관계란 특성을 지닌 이 개념은 언어체계의 내부에서 각 요소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관계의 망이며 그 관계의 교차가 사항을 규정하여 상대적으로 제사항(諸辭項)을 구성하는 것이다. ② 구조를 규정짓는 관계의 망은 계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조라는 하나의 총체는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으며 그 부분들은 부분 상호간에 그리고 그 부분들이 이루고 있는 전체와도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③ 구조가 자율적 실체라 함은 구조가 그보다 큰 총체와의 의존성 또는 상호의존성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 그 자체에 특유한 내적 조직(내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④ 구조가 하나의 실체라 함은 그 실재론적 지위는 따질 필요가 없고 다만 조작개념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하나의 총체라는 뜻이다.   2) 구조의 특성 구조주의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문화활동의 전체성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과 그 사상적 자각으로서의 이념으로서 등장했다. 그것은 대상을 구성하는 제요소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것을 그대로 통합적으로 포착하려는 것이다. 그 전체로서 당연히 주체와 대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곧 인간의 문화활동의 전체성은 시각으로나 촉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험의 장이나 또는 서기자료나 통계적 자료의 장에서는 파악될 수 없고 항상 경험의 배후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란 계층(階層)으로 이루어진 내적 관계(relations internes)의 자율적(自律的)실체(實體)이다.   피아제(Jean Piaget)에 의하면 구조란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전체성 - 첫째로 구조가 실재 속에 숨겨져 있는 전체성을 발견하는 조작개념이라면 그 구조는 전체성이란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전체성의 요건이란 구조를 이루는 제요소가 단순한 고립된 집합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는 데 있다. 구조를 이루는 실체의 배치는 가치충족적이며 전체성이란 내재적인 통합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 전체성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그 배치의 성질 및 각 요소의 성질을 결정하는 고유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이러한 법칙은 그 구조내의 구성요소에 대하며, 그 구조를 떠났을 때 각각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개별적 특성 이상의 전체성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구조의 요소는 서로의 상관관계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속하고 있는 총체 또는 전체라는 전체성과도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조는 단순한 집합과는 다른 것이며 그 구조요소는 구조를 떠나서 구조 밖에 있어도 구조 내에 있는 바와 똑같은 형태로 대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고 다만 구조의 전체성에서의 관계의 망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가 자기충족적이면서 자기 폐쇄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2) 변환 - 구조는 실재를 산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적인 것이 아니다. 소쉬르가 정태언어학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언어의 변화성속에서의 어느 시점에 있어서의 공시적 대립관계를 연구해야 한다는 조작관점이지 언어가 정지상태에 있다는 주장의 표현은 아니었다. 언어의 공시대라는 것은 부동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계의 대립이나 결합에 의하여 결정지어지는 필요에 따라 혁신을 억압하거나 수용하거나 하는 것이다. 구조의 법칙은 단순히 그것이 구조화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구조 자체가 구조화를 행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소쉬르는 구조란 말을 쓰지 않고 체계란 말밖에 쓰지 않았는데 그것은 공시적 대립과 공시적 균형의 법칙을 특징짓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 균형의 개념은 구조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어떤 일정한 시점에서 구조는 한 언어의 제사항이 상호간에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 관계란 요소상호간의 결합규칙을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구조는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규칙의 일부, 다시 말해서 관계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대하여 구조는 단순히 구조화되는 수동적 수준에 떨어지지 않고 변환의 절차를 밟아 오히려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환은 구조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3) 자동제어 - 구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자동제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구조는 그 변환절차를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 그 자체를 넘어선 것에 의존하려 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균형성과 같은 구조의 특성은 구조의 불변성을 위협하는 제요소의 대립이나 잘못된 결합을 항상 점검하고 미지의 무수한 제요소가운데서 적합한 것만 선택하여 결합해 가는 기능 곧 자동제어 기능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구조화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제어(自動制御)란 어떤 행위계의 결과를 재도입함으로써 얻어지는 제어방식으로서 반송되는 정보에 의하여 그 계의 작용과 방법을 모델로 바꿀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이는 환류활동(還流活動)의 원리로서 이 원리에 의하여 언어는 고도로 발달된 컴퓨터처럼 스스로 기능장해를 제거하는 하나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도 하나의 자동제어기구라고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언어의 자동제어기능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예로서는 음성변화에 의하여 어떤 불편한 동음이의가 생겼을 대 이를 제거하는 과정이 그렇다. 언어에 이러한 자동제어기능이 없다면 언어는 상호이해에 필요한 최소한도의안정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기능이 공시적 균형을 이룩하게 하고 따라서 공시론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3)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야콥슨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라깡의 정신분석학, 푸코의 인식론, 알뛰세의 정치경제학, 바르뜨의 문예비평 그리고 Tel Quel의 저자들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결국 구조주의가 언어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우리는 ‘언어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단서를 잡아야 한다. 언어적인 것에 구조가 있다. 무의식은 그것이 말하는 한에서, 그것이 언어인 한에서 구조를 가진다. 신체는 그것이 징후들을 드러내는 한에서 그리고 그 징후들이 기호로서, 언어로서 읽히는 한에서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구조주의란, 단순히 표현해서, 결국 세계를 언어로 보는 한에서 성립한다. 사물들은 기호로서, 언어로서 해석된다. 그들은 침묵의 언설을 가지고 있다. 구조주의는 플라톤 이래의 인간의 강렬한 욕구인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하는 꿈을 사물의 기호(記號)와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식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을 포착함으로써 이루고자 한다. (1) 구조주의의 특징 ① 상징적인 것(le symbolique)에서 찾을 수 있다. 구조주의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들이 다루는 존재를 크게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으로 나누곤 했다.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대립에 대해, 때로 그들의 상보성에 대해 논하고 했다. 이들 사이에 복잡한 관계에 대한 틀 내에서 초험적 통일성과 경계선상의 긴장 그리고 상호간의 융합과 날카로운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주의의 발견 중 가장 첫 번째의 것은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제 삼의 질서로서의 상징적인 것의 발견이다. 우리가 언어에서 발견하는 실제적 차원, 즉 말의 시각적 모양과 청각적 감각의 차원 그리고 상상적 차원, 즉 우리가 그 말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이마쥬나 관념이 아닌 제 삼의 차원 즉 그 말의 구조적 차원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언어학은 시작되었다. 「상징적」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사람은 쟈크 라깡이었다. 정신분석학은 라깡에 의해 언어학과 접속된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19세기 프랑스심리학이 다룬 중심주제중 하나였다. 프로이트가 공헌한 점은 이 무의식에 어떤 의미(意味)를 부여했고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 역시 결국은 하나의 언어일 뿐이며 언어인 한에서 그것은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무의식은 이제 언어학적 기초를 가지게 된 것이다. 보다 더 들어가 말하면, 구조는 요소로서의 상징적인 것은 생성의 원리로 이해된다.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외에 상징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강조는 구조주의의 첫 번째 특성인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보는 것」과 「표상하는 것」외에 비가시적인 어떤 것을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② 구조의 국소적인(local), 위치에 관련해서의 특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구조의 요소들은 외적인 지시에 의해서도(실제적인 것) 내적인 의미작용에 의해서도(상상적인 것)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 구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의치란 실제공간에서의 위치도 아니며 상상적 공간 속에서의 위치도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공간 속에서의 위치이며 본질적으로 위상적topologigue)이다. 이 공간 속에서 중요한 것은 외정으로서의 거리가 아니라 이웃관계인 것이다. 사물이 있음으로써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있음으로써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희와 극장에 대한 구조주의적 선호가 나타난다. 레비 스트로스의 유희이론, 라깡의 유희에 대한 은유들, 알뛰세는 실제의 극장, 관념의 극장이 아닌 자리와 위치의 순수한 극장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유명한 구조주의적 표현이 나온다 : ‘사유하는 것, 그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결국 구조주의는 최근 형태의 유물론이며 무신론, 앙띠 휴머니즘이다. 신(神)은 죽었고 이제 인간(人間)도 죽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나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에 대해 라깡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내가 사유하는 그곳에 나는 있지 않고, 내가 있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사유한다”(사유(思惟)와 존재(存在)의 불일치(不一致))」 ③ 「변별적인 것」과 「단일한 것」을 들 수 있다. 언어의 경우에 있어 감각적 소리와 말에 연결된 이마쥬 외에 또 하나의 요소를 음소(音素)라 한다. 음소는 문자나 그 소리에 구현되어 있지만 그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음소는 그것이 속하는 관계체계 내에서 다른 요소들과 함께 상호 동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영역에 구조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상징적 요소들, 변별적인 요소, 단일한 점들의 유무에 따라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비가시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가시적인 것들에 구현되어 있으며 가시적인 것들을 넘어 이들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④ 「분화시키는 것」과 분화를 들 수 있다. 구조는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며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 미시구조이다. 그것은 실제적이지도 않고 허구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현실적이지도 가능적이지도 않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야콥슨이 말했듯이 음소는 문자나 음절, 그 소리 등과 또는 그에 연결되는 관념들과 동일시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구조 혹은 이론의 대상을 가장 적절히 가리킬 수 있는 말은 잠재성일 것이다. 잠재성은 직접적인 실재성과는 다른 그 나름대로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않은 나름대로의 관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잠재성으로서의 구조는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실제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관념적이다. 구조 속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공존한다. 그중 부분적인 조합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구조를 밝힌다는 것은 모든 현실적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모든 잠재성을 밝히는 것이다. ⑤ 구조의 계열적인 특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조의 반쪽만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구조가 실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요소들이 계열을 이루어야 한다. 모든 구조는 복수계열적이다. 우리는 음소와 형태소의 구분을 상기할 수 있다.     Ⅲ.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 사상   -Ferdinand de Saussure 의 구조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중심으로- 구조주의사상은 구성과 과정으로 양분된다.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사상은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꼬에 이르는 사상이고 과정으로서의 구조주의사상은 맑시즘의 토대위에서 성립되었다.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에서 관찰되는 현상들이란 인간의식에 선천적으로 각인된 심층주고의 표현이라고 간주하는데 비해서 과정으로서의 구조주의는 그 현상들이란 기저에 눌린사회구조의 표층이며, 그 사회구조의 토대는 물질적 존재 조건위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구조와 전에 말한 심층구조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없다. 구성구조주의와 과정구조주의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과정구주조의에 따르면, 변형은 자연적 수준에서보다는 차라리 사회적 수준(하부구조, 토대)에서 발결되는 구조에 속한다. ☞과정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차이점으로 인해 접근방식에서도 상이한 면이 많다. 여기서는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에서 구조주의의 시조인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아버지인 레비스트로스에 대해서 논하겠다.   1.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   ☞즈네브대학의 선사(先師)소쉬르(1857~1913)는 스스로가인구어의 역사언어학을중심과제로 하는 소장문법학파의 밭에서잘 약관 21세인 1878년에 「인구어 모음의 원초체계에 관한 논고」라는 독창적인 논물을 발표한 천재적인 학자였으나 그는 인구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언어학의 조류에 대해서도 널리 관시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언어현상을, 19세기가지의 인문․사회과학의 일률적인 방법에 회의를 품고 언어 자체의 형식적 체계화라는 과학적 분석의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반언어학강의」라는 책인데 이 책은 오늘날의 과학적 언어학의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고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 논의치고 소쉬르이론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없다시피할 정도로 크게 영향을 끼지게 된다. 소쉬르의 영향이 가장 직접적으로 미치기 쉬운 불어사용권에 있어서는 소쉬르이론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저조했던 데 비겨 1920년대에는 프라그학파1)에서, 그리고 1930년대에는 코펜하겐학파2)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론이 구조주의언어학으로 먼저 정립되고 다시 후술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그 뒤에야 구조언어학으로, 그리고 1960년대에 들어서야 그 폭발적인 구조주의의 유행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랄까, 적이 기이한 느낌마저 들지 않을 수 없다.   1) 소쉬르의 생애 소쉬르는 1857년 11월 26일 프랑스에서 이민온 즈네브의 위그노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과학자가 많이 배출된 명문집안이었다. 이러한 과학적 가문은 그 자체가 자랑할 만한 것이었고 그것을 이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할 만한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때문인지 소쉬르가즈네브의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875년에 즈네브대학에 들어갔을대 가족의 과학자적 전통에 어울리게 처움에는 물리화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조숙하여 그러한 조숙성이 어릴 때부터 두드러져서 다방면에 관심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학, 과학, 법률 등 여러 방면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러한 과학적 교양과 다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이 그의 일반언어학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그후 소쉬르는 파리언어학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남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즈네브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 외에 논저를 발표하지 않는 등 활동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소쉬르는 이 무렵 언어학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있었는데 언어학연구의 근본적인 것에 회의를 느낀듯 하다. 그러니까 언어활동의 연구에 있어서의 개념을 명백히 세우는 일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언어학의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에 고심하고 있었다는 그이 고뇌의 편린이 여기저기 나타나있다. 소쉬르의 즈네브대학에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제의 이 겸손하면서도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강의 〈일반언어학강의〉를 그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애정으로써 자기들이 필기한 노트를 면밀하게 정리하여 재현시켜 스승의 족적을 남기게 한 것이요, 그것이 오늘날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이다.   2)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 오늘의 구조주의적 사조의 대부분은 그의 업적에 바탕하고 잇다. 소쉬르는 전통적인 관심, 즉 세계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대상물로 되어 있어서 정밀하고 객관적인 관찰과 분류확 가능하다는 관점을 이어받았다. 언어학적 견지에서 말하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어관이 생긴다. 즉 언어는 「낱말」이라고 하는 분리독립해 있는 단위의 집합으로서, 그것의 하나하나는 각자에 부착되어 있는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전체는 통시적 즉 역사적 차원에서 존재하는데, 이런 것이 언어를 관찰가능한 그리고 기록이 가능한 변화법칙에 따르도록 한다라는 견해인 것이다. 소쉬르가 이룩한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인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방법에서의 더 큰 변화에 긴밀히 연관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또 언어는 개개의 부분이라는 견지에서 그리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부분들 상호간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그리고 공시적 관점에서, 다시말하면 그 언어의 현시점에서의 타당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던 것이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 공시적 연구를 통시적 연구로부터 뚜렷하게 구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데는 언어가 걸어온 역사적 경위의 인식도 그러하거니와 지금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구조상에 대한 인식도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독창성은, 언어가 하나의 전체적 체계로서, 그 한순간 전에 무엇인가가 그 체계에 변화를 주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언제나 그 순간마다 완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일이다. 즉 각 언어는 그 역사적 경위와는 상관없이 그 언어를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의 체계라는 점에서 온전히 정당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호언은 사실상 그 언어의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현상 전체의 고찰을 언어가 지니는 두 개의 기본적 차원에서 진행시키고 있다. 즉 랑그(langue)라는 측면과 빠롤(parole)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 그가 행한 이 양자간에서의 변증법적 구별은, 언어학 전반의 발전 특히 구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고안하고 구사하는 특성을 가진 짐승이라고도 말해질 수 있는데 이 언어라는 것은, 구별이 뚜렷한 기호와 이 기호가 변별적으로 연관되는 분명한 개념 즉 「의미」와의 사이에 맺어지는 대응관계에 의해서 성립되는 복잡한 체계 또는 구조인 것이다. 아마도 우연이기는 하겠으나, 현실세계의 사회적 교류에서는, 음성기관이 언어의구체적 실현의 주된 수단 방법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입으로 행하는 말이 아니고, 언어 즉 각각 다른 개념에 상응하는 구별있는 기호의 체계를 구성하는 능력이다. 이 「고유의 언어능력」이라는 능력은 실제로는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며, 「기호를 지배하는 더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생각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기호를 조립하는 그 능력이 언어에서 생성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 물리적 의미에서는 듣지도 보도 못하는 것이나, 실제의 인간의 발화에서 순간적으로 노출되는 것에서 연역적으로 추측이 가능한 더 큰 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랑그라는 것은 「언어능력의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개인이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부는 사회단체에 의해서 채용되고 있는 필요한 약정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니 빠롤은 물위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며,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 자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 것이다. 언어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며 또 결코 그 전체 모습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일이 없고, 개개의 학자에 의해서 그 목록의 일부분이 불완전하게 운용되는 데에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소쉬르 이후의 현대언어학의 앞날에 결실이 풍부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발화와 이해의 목표가 되고 또 전체가 되고 있는 체계화된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완전한 패턴을 기술하고자 하는 방향이 그것인데, Noam Chomsky와 같은 더 최근의 언어학자가 제안하는 수정된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면, 그것은 개개의 「언어운용」에 앞서서 존재하는 그리고 그 언어운용을 「생성」하는 「언어능력」의 체계를 설명하는 방향인 것이다. 언어운용이나 빠롤은 패턴이 없고 체계적인 긴밀성도 없어서 혼질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에 앞서서 있는 언어능력이나 랑그는 균질적인 것으로 보인다는데 대해서는 놀라울 것이 없다. 즉 그것은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언어는 결국 「낱말이라는 자료적인 실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추상적인 「기호의 체계」안에 있다는 것이다. 낱말들은 이 체계의 지엽말단일 뿐이다. 실제로 「기호 및 기호들의 관계가 언어학의 연구대상」이며, 기호 및 기호들간에서의 관계의 본질도 역시 구조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언어기호는, 그 「개념」과 「청각이미지」, -혹은 소쉬르의 저서에서 유명해진 용어를 사용한다면, 소기(signifie)와 능기(signifiant)라는 두 측면간에 존재하는 관계라는 견지에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나무」의 개념(즉 소기)과 「나무」라는 낱말의 청각이미지(즉 능기) 사이에 있는 구조적 관계는 이렇게 해서 하나의 언어기호를 구성하며, 언어는 이들 언어기호에 의해서 성립된다. 즉 언어는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청각적 체계이므로, 능기와 소기의 관계는 시가의 흐름을 통해서 성립된다. 그림은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동시에 제시하고 병치해서 보여줄 수 있으나 입으로 행하는 발화는 그런 종류의 동시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요소는 그 자체로서 유의적인 어떤 순서나 연쇄에 따라서 제시되어야 한다. 요컨대 능기와 소기의 관계의 양은 비록 사소하게 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계기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관계의 전체적인 특징은,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 있는 물리적인 나무 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는 「현실」에서의 연결을 보증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어기호는 바로 그 임의성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게 되어 있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문제라도 논의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기호의 임의성은 「합리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타당성을 고려하거나 논의한다고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기호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영어의 tree 대신 다른 어원에서 온 낱말인 arbre(프랑스어), baum(도이치어), arbor(라틴어), 혹은 제멋대로 만든 낱말인 fnurd를 더 좋아할 이유는 정녕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적절하다거나 혹은 더 「합리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나무라는 낱말이 따위에서 자라고 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 물체를 의미하는 것은, 그 언어의 구족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의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강한 보수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언어는 자기충족적인 「상관적」구조의 가장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구성부분은, 그 구조의 테두리 안에서 통합되지 않는 한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상호의존적인 사항의 체계인데, 여기서 각 사항의 가치는 다른 사항들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만 얻어진다」 이처럼 언어는 그 모든 측면이 「관계에 바탕하고」있는데,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 관계중에서 두 개의 차원이 특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소쉬르는 그것을 언어기호의 연합적 관계와 동시적인 상합적 관계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능기이든 소기이든간에, 언어에는 언어체제 이전에는 관념도 음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 체계에서 비롯하는 개념적 및 음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언어는 최종적으로, 「형식이고 실질이 아니다」로 판단되어야 한다. 즉 언어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항목의 집합이 아니고, 오히려 양식을 가지고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조절적인 형식은, 우리 이외의 세계를 만나서 그것에 대처해가는 우리의 독특한 수단이 되고 있는 터이므로, 그 형식은 아마도 특유한 인간구조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아마도 이 형식은 또 인간현실의 특징적인 구조가 되리라는 논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2.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   1) 레비스트로스의 생애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alude Levi-Strauss)-예술가의 아들이며, 랍비의 손자인-는 1908년에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에 양친을 따라 베르사이유로 갔다. 그는 이 시기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내성과 사색과 독서에 심취하면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는 혼자 걸으면서, 또한 그가 수집했던 여러 잡동사니들-그가 짜맞추기(bricolage)라고 부르는 돌멩이들, 자갈들, 식물들(그는 “모자이크”의 조립을 의도했다)-의 본성에 관해 사색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활동들이 자신의 지질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고, 후에는 자신의 구조주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늦게까지도 과학도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동안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2년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고, 고등학교의 교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 상파울로 대학의 인류학 교수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책은 브라질의 내륙지방을 수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 지역에서 그는 많은 원시 종족들을 연구했는데, 그들은 그가 훗날 발전시켰던 아이디어들을 그에게 제고해 주었다. 1939년에 그는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파리가 함락되자 뉴욕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신사회 연구원에서 강의했고, 야콥슨과의 친교가 도화선이 되어 구조언어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945년에는 「뉴욕 학단 연구지」에 ‘언어학과 인류학에서의 구조적 분석’이라는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종전이 되어 이 학원이 종신 재직 조건을 그에게 보장해 줄 수 없게 되자,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955년까지는 「슬픈 열대」를 저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행담이라든가 답사보고서라기보다는 지적인 재구성물 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된 기억과 경험적 지역 탐사와 과학적 연역이 묘하게 조화된 「슬픈 열대」는 뜻밖에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책이 1950년대 중반에 출판되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은 즉각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회상들과 해석들, 관찰과 사색, 사실과 자유연상이 혼합된 이 민족학적 자서전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같은 레비트로스의 친족 이론과 그의 신화론「신화의 구조적 연구」를 부상시켜 주었고 정당화해 주었다. 또한 이 학문적 저작들은 사변적 관념들을 상당한 정도의 과학적 지위로 올려놓았고 다시 이 관념들은 「야만적 사유」와 4권으로 된 「신화학」에서의 새로운 개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무튼 이 초기 저작들을 통해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의 명망있는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이 이론적 탐구들을 확장하여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연구를 구체화했다.   2) 레비스트로스의 기본적 사상 위와 같은 이론들은 검토하는데 있어서 다음과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신화들을 체계화하려는 레비스트로스의 시도-즉 여러 가지 경우의 모든 신화들은 그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말해야 한다는 시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진행중인 과업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접근 방식에 있어서 기초적인 가정들은 미국의 대부분의 체계 이론들과 판이하다. 후자의 경우 관찰 가능한 자료들만 취급하고 정신의 무의식적인 구조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과학적”이라는 개념의 불어 용법은 미국에서의 용법처럼 경험적 증명과 연결된 것이 아니다. 셋째로 프랑스 저술가들은 전통적으로 개인적 경험들을 역사 해석에 적용해 왔다. 이상과 같은 지적 습관들이 합쳐져서 매우 암시적인 언동 형식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레비스트로스의 초기 이론들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사변적인 관념들을 사실들에로, 과거의 반성들을 현재의 가정들에로 변형시킨다. 그는 지질학과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3명의 연인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개인적 경험과 지적인 해석의 혼합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소년 시절의 레비스트로스는 어떻게 식물들이 상이한 토양에서 자라는가라든가 혹은 어떻게 상이한 시대의 유물들이 암석의 복잡한 퇴화과정 속에 스며들었는가와 같은 문제에 주목했었기 때문에, 인류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지각에는 과거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과, 따라서 지각은 “시간과 공간을 뒤섞는…한 순간의 활동하는 다양성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점을 사색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즉 역사가들의 역사와는 달리 지리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이 보는 역사는 물리적이며 정신적인 우주의 근본적인 속성들을 시간 밖에서 - 차라리 일종의 활인화의 방식으로 -구체화하려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역사란 재수집될 때 현재의 일부가 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역사적인 조망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유쾌할 리는 없었다. 이는 특히 레비스트로스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 즉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지리학 및 정신 분석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이 세가지는 모두, 이해란 한 형태의 현실을 다룬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문제는 항상 이성과 감각적 지각 사이의 …관계에 기인하기 때문에…참된 현실이란 결코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 현실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한편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네 번째 애인이 있다. 그것은 음악인데 음악의 영향은 「날것과 익힌 것」에 잘 나타난다. 비록 그가 후에는 그 영향력을 감소시켰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다양한 경우의 종족 신화들이 음악의 보표처럼 읽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방법론 속에 음악의 3차원적 성격을 구체화했다. 「날것과 익힌 것」과 「벌거벗은 인간」의 종절은 음악적 주제들의 주변에서 형성되었다. 야콥슨에 의해 구조언어학이 소개되자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언어연구를 모든 언어적 기호들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 언어 체계와 개인의 언어표현사이라든가 청각이미지와 개념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제시하는 하나의 자족적인 체계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그 기본적 이원론 위에 야콥슨의 음성학적 분석 모형을 얹어 놓았다. 아큡슨은 구조언어학을 통해 언어구조란 항상 대칭적 구성들의 두갈래 길을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의 발견을 계시에 비유했으며, 그 발견으로 인해 언어학 뿐만 아니라 인류학과제반 사회과학이 대변혁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음소 체계에 관한 야콥슨의 연구를 친족 구조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반영시켰다. 그러나 그에 병행하여 음소적 방법이 단순하게 인류학적 분석으로 전치될 수 없음을 환기시켰다. 대신에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허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져야 한다. 즉 인류학에 있어서 미시 사회학적 분석에 의해 발견되는 법칙들은 거시 단계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친족 체계에 있어서 용어법의 체계와 예법의 체계 혹은 명명법의 체계와 사회 조직의 체계간에는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는 이들 모든 체계가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모두 유사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에서 볼 때 직접적인 경험적 관찰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나 친족체계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언어학에서처럼 상징적 제관계의 집합들로 취급되어야 한다. 거시단계에서 이 상징적 관계들은 언어와 문화 사이에 존재하며, 종족 사회들 내에서 그것들은 신화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모든 기지들의 신화들이 신화의 구조적 법칙에 의해 발견되고 따라서 현재의 무질서에서 질서정연한 분석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연에서 문명으로서의 전환이 어떻게 관습의 변화와 병행될 수 있었는가를 그는 보여줬는데 예컨대 음식을 날것으로 먹지 않고 익힌 것으로 먹는다든지 또는 손대신 식기류가 등장하는 것 등이다. 이런 예들은 단지 신화의 공통 요소를 설명하려거나 아니면 그것의 구성단위를 보이려고 하는 가정에 불과했다. 예컨대 두 편의 보로로족 신호는 문화의 출현을 한 공동체의 대학살과 대등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문화”로의 전환은 항상 신화의 사상 그대로 “연속적인 것”에서 “불연속적인 것”으로서 전이에 대응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항상 신화의 분석은 그것의 용어 혹은 내용의 분석 그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구조들을 파악하는 작업은 일종의 문화에 대한 심리분석이다. 또한 계속해서 신화의 구조적 “법칙들”을 발견함으로써 마침내는 옛날 이야기들을 과학으로 변형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대계획이 성공을 거든다면 원시적이고 무의식적 단계에서 모든 사람의 유년기의 환상이 신성시 될 것이다. ※사르트르의 레비스트로스 비판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를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인데 무의식의 세계를 부정한 사르트르에게 레비스트로스의 무의식적 정구조들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방법이 관념의 진리를 논증하는 방법론적인 동어 반복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레비스트로스는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주고나성의 환영에 사로잡힌, 참된 사유에 반대되는 것으로 무시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도 전통적인 진화론 혹은 발전 이론을 무시했다. 사르트르의 변증법은 인간과 그의 환경 그리고 인간의 이 주위 환경들과 관계하여 의식적으로 행위하는 과정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변증법과 대립된다. 실존주의자의 “표면”은 구조주의자의 “심층”과 대비된다.       Ⅳ.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지리학과의 관계   실증주의나 인간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가 지리학에 도입된 것도 역시 다른 사회과학을 통해서였다. 구성구조주의를 인문지리학의 연구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구성구조주의 중에서도 다만 Piaget의 연구만이 지리학에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그의 발달심리학에는 아동의 공간 및 기하학적 지식을 어떻게 습득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Piaget의 실험에서 제시된 바에 의하면 아동의 공간관 발달에는 4단계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결과는 지리학적인 연구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몇 사람의 연구자들은 아동이 어떻게 지리적 지식을 획득하는가라는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의 연구 역시 구조주의적 설명양식보다는 그 패턴에 관심을 가졌던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Piagetian적 연구의 잠재가능성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구조주의적 연구라고 할만한 것은 비교적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과정구조주의는 경제지리, 정치지리 등 많은 지리분야에 영향을 미쳐 구성구조주의와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구조주의의 문제점과 탈구조주의의 등장   1. 구조주의의 문제점   구조주의는 그 특성 자체가 처음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요인이 되어왔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우선 개개의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적 독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구조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가 작거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구문〉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 구조주의는 하나의 구조, 하나의 체계를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를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 구조주의의 이와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나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것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개체〉에 대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가 된다. ☞ 구조주의는 비록 지시어와 지시대상의 사이가 필연적이 아니고 임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재현가능성을 믿었던 직관주의에 근거하고있다. 다시 말해, 구조주의자들은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체계로 설명될 수있다고 믿었는데 언어체계는 곧 기호체계이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기호학적 특성을 띄게 되었고, 더 나아가 기호의 재현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탈구조주의의 등장3)   구조주의가 등장한지 불과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6가지 특성을 모두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하지만 탈구조주의가 구조주의 밖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인본주의적 태도를 지향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나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능력을 불신한다.  
1047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댓글:  조회:195  추천:0  2019-12-16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대학을 나와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 8 대학 교수가 되었다. 구조주의(構造主義) 등 60년대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知的)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思考)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철학을 주저 《차이와 반복(1968)》에서 전개했다. 더 나아가서 F. 과타리와 공동으로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구성을 통합적으로 원용(援用)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파악하는 시도를 《반(反)오이디푸스(1972)》 《밀·플라톤(1980)》 등에서 전개하여 현대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       DELEUZE Gilles, pp.301-331,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 [1967(?)] 들뢰즈의 이 논문은 샤뜰레에 의해 1973년에 편집된 『20세기철학』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 논문에서 참고문헌 중에 최근 책이 1966년으로 되어있으며, 글의 내용상으로 1967년의 글일 것으로 우리는 추정한다.]   [후기 구조주의가 아니라 구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논문을 읽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후기 구조주의라는 것은 시간 즉 반복 존재론을 다루는 것을 말하며, 구조주의라는 것은 공간 즉 차이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 차이 존재론은 사실상 인식론의 관점의 형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조의 공리과 형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차이존재론은 자신이 배제되어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트교의 부시와 이슬람교의 라덴은 둘 다 '신'과 '정의'를 말한다. 그 이름(대상)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의미(구조)에는 실체가 있는가? 중성인가?]   수학과 논리가 지니는 구조는 선 가정에서 온 것이며, 여기서 개념의 분절은 사유의 본질로 여기며, 기본적으로 약속에 의해서 이다. 반면에 생명과 심리의 구조는 체험 즉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자연적인 분절을 인정하며 표면과 내면의 구별(차이)에서 구체적 현상을 파악한다. 전자에서 이미 주어진 자료가 있다는 약속에는 공간의 전제를, 후자에서 체험된 과정을 자료로 삼으면서 공감(합의)에 의한 시간적 생성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공연히 '구조'라는 개념(signifié)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 문제의 접근 방식을 갖고 있다. 양자의 설명 또는 표현의 매카니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조'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서로는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구조'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수 있다.   이런 전망에서 들뢰즈의 논문 「구조주의를 무엇으로 재인식하는가?」를 우리는 읽고자 한다.   프랑스철학에서 실존주의를 말하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구조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먼저 누가 구조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언어학자로서 자콥슨(Jakobson), 사회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정신분석학자로서 라깡(Lacan), 인식론을 새롭게한 철학자로서 푸꼬(Foucault), 맑스주의의 문제를 재해석한 맑시스트 철학자로서 알뛰세르(Althusser), 문학 비평가로서 바르트(Barthes), 뗄 겔 잡지에 관계하는 그룹의 저술가들이 있다. 이들 중 몇몇은 '구조주의'라는 개념보다 구조(structure, structural)를, 다른 이들은 체계(systeme)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더 좋아한다.   다른 한편 구조주의의 기원은 소쉬르(Saussure)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학파, 프라하 학파에 기원이 있다고 한다. 이런 기원과 더불어 구조라는 어휘는 다양하게 쓰인다. 언어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할 비의적(ésotérique)언어가 있다하더라도, 언어에는 구조가 있으며, 표출하는 무의식은 (언어로) 말한다는 정도에서 무의식에 구조가 있으며, 신체가 징후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같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체에 구조 있으며, 사물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침묵으로 표시(signes)를 내보낸다는 점에서 사물에도 구조가 있다. 여기서 구조는 기계의 골격이나 신체의 뼈와 근육의 구조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표현하는 그 무엇의 내용(성질) 또는 능력(권능)을 포함하면서, 일정한 기간에 또는 사물의 특성에 따라 그 무엇이 (외연적이 아니라 내재적)동일성 유지하면서, 표출하고 실현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사실 사물의 타성적 표출도 항상적 표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지속하는 한에서 한 사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구조는 한 개체(단일자)를 설명하는 열려진 단위이다. 이 단위의 총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이 이전까지는 일방적이었는데 비하여, 이제 규정할 있는 방식자체를 문제 삼아보니까 위계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방식의 규정가능성이 등장한다. 이런 기준들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방식이 없다는 것은 방식들이 여러 차원에서 서로 다른 위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기준의 수렴과정과 다른 발산과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위상적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이런 차이가 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눈에 띄게 등장했을까?   1. 첫 번째 기준: 상징(le symbole)   철학은 한편 진리로서 실재적인 것과 있는 그대로의 실재적인 것의 대립에 의해밝히는 경우, 다른 한편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결합하는 보충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첫 번째 기준은 제 3의 질서로서 상징의 질서를 세운다. 이 상징을 실재와 상상 사이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뗄赉 그룹의 소설가, 푸꼬, 알튀세도 심층적 영역을 발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 라깡(Lacan)이 중요하다. 라깡은 제3의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라깡에서 구조의 근본요소로서 상징은 발생(genèse)의 원리에 속한다. 라깡이 해석한 "늑대 인간"의 경우에서, 거세의 주제가 잘린 손가락이란 환각적 형태로 실재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거세의 주제가 상징화되지(배제. forclusion) 못했기 때문이다.   실재, 상상, 상징을 나열해 보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하나(un)인데, [인식론적으로] 이중화된다.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하나는 놀이하는 광대의 아버지로, 다른 하나는 노동하는 이상적인 아버지로 된다. 그리고 나서 보면, 상징은 세 가지이다. 그래서 구조에는 3원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자체는 제 3의 것이다. 이 첫 번째의 기준에서 보면, 상징적 질서의 지위는 실재적 질서나 상상적 질서에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구조라는 것은 지성의 본질(진리로서 실재)도 감성의 형식(있는 그대로 실재)도 상상의 모습(인격으로 상정한)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forme)도 상상의 모습(figure)도 본질(essence)도 아니다. 알뛰세르가 말하듯이 구조는 "이론(théorie)"에 동일한 것으로 지위를 부여해야 하고, 상징은 독창적이고 사변적인 이론 대상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구조주의는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해석적이다. 공격적이란 상징의 궁극범주에 대한 오해를 고발한 것이고, 해석적이란 이 상징이란 범주로부터 언어행위, 작품, 관념, 실천 등이 마주치는 근원적인 점(point original)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구조는 우선 상징으로 표상(재현)화 될 필요가 있다. - 구조는 대상도 표지도 아니고, 구조에는 하나님(아버지)과 같은 어떤 것이 상징으로 있다. 그것은 욕망의 거울에 있는 허상이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왕의 거울처럼 여왕의 부름에 등장하는 백설공주의 재현과 닮았다. 부르면 더 상위의 자격으로 또다시 나타나는...것처럼.]   2. 두 번째 기준 : 위치 즉 지위(local ou de position)   구조의 요소들(상상, 실재, 상징)이 지시화(désignation)도 의미화(signification)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에서는 이 요소들은 의미(sens)이다. 여기서 의미(sens)란 지위(position)이다. 그래서 구조란 공간이지만 비너비적 공간이며, 선존재 하는 공간이며, 순서적 의미를 지닌 인접에 의한 순수 공간(spatium)이다.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란 실재 존재와 사물이 관여하고 역할을 하는 것에 우선(première)한다는 의미이며, 이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양적이 아니라 위상적이고 관여적이다.   알뛰세르의 경우는 경제구조에 대하여 말한다. 위치란 생산(연관)관계에 의해 규정된 위상적이고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이다. 푸꼬의 경우에, 위치를 인접성의 질서에 따라 역할 하는 지위의 성격부여(qualification) 즉 지위부여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구조주의는 새로운 선험철학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306). 이 점에서, 선험적 위상학이 경험적 심리학을 기초 지우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될까?   이 위상적 지위로부터 여러 귀결이 나올 수 있다. 첫번째로, 상징적 요소가 지시화도 의미화도 아니라면, 진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기표가 아닌 요소들의 결합에서 의미가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는 결과물이고 결과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부조리의 철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 철학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모자란다. 그와 반대로 구조주의는 항상 의미가 과도하게 너무 많다. (그래서 알뛰세르는 과도한(포화된?) 규정(surdétermination)의 개념이 나온다.) 무의미는 불합리가 아니라 의미의 반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주의는 까뮈(Camus)에 힘입지 않고 루이스 케롤(Carroll)에 힘입고 있다.   두 번째로 놀이와 연극의 관점에서 구조주의가 어떤 취향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카드놀이의 중요성을 환기 시켰고, 라깡은 브릿지와 장기놀에서 놀이자의 말 운행놀이보다 더 깊은(심오한) 순수공간(spatium)이 있다고 한다. 알뛰세르가 지위의 순수극장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조주의는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라 선언한다. [주사위에 관하여, 『니체와 철학(1962)』,Ch. I, s. 11, pp. 29-31.]   세 번째로 구조주의는 새로운 유물론, 새로운 무신론, 새로운 휴머니즘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을 신의 지위에 놓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올 어떤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푸꼬에서 인간의 상상적 특성이 알뛰세르에서 인간주의(인문주의)의 이데올로기 특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지성의 자기반성에 의한 미신적 폐쇄적 종교성이 등장하는 매커니즘, 즉 베르그송의 우화적 기능이 나타난다. 상상적 특성들과 이데올로기적 특성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화적 기능인 셈이다.]   [상징으로 재현되는 구조는 (상상이든 실재이든) 놀이 할 수 자리를 마련한다. - 그래야 자리에는 요소(내용, 성질)들이 부여될 수 있으며, 그 구조는 (평면적 차이 상으로) 놀이할 수 있는 놀이터이다. - 프로이트의 꿈의 장면에서 꿈의 대상인 한 사물에 다양한 성질이 이전(déplacement)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베르그송에서는 신체(질료)라는 내부에서는 다양한 성질(과거 기억)들이 놀이(jouer)할 수 있고, 그것을 영혼(사유)라는 내부에서는 상상(imaginer)한다. (MM, 251)].   3. 세 번째 기준: 미분자와 단독자(le différentiel et le singuiler) (참조: 『차이와 반복』, CH. IV, s 2. p. 221- )   상징적 요소, 즉 지위의 단위(통일성)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실 구조의 내용성, 그중에서 외연적 구분을 다루면서 잠재성의 내용의 차이(공간적)를 구분한다. 이 구분 이후에 내재적 힘(권능, puissance)의 세분화(différenciation)로서 차이(시간적, 반복에서 오는 차이)를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공간적 차이로서 미분화의 예는 언어학에서 기표의 차이를 다루면서 순수 형식적(논리적이 아니다) 차이를 다룬다. 그 구성에 대한 논의로서 언어학에서 출발한다. 언어학에서 음소(phoneme) b/p는 두 단어를 구별(차이)하는 최소단위이다. 이런 관계를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요소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 3+2(산술적) 2/3 (기하적) 경우이다. 두 번째, x2 +y2 -r2= 0 경우이다. 항들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경우에서 [타원의 두 초점 사이 크기에서] 정해진 가치를 가진다. 셋째로 ydy +xdx =0, dy/dx = -x/y 경우가 있다. 각 항은 자체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관계에서 상호적으로 규정된다. 이런 상징적(symbolique, 기호적)관계는 미분적이다. 이런 구조주의 기원에는 수학자 집단 부르바키(Bourbaki)에서처럼 공리주의적(axiomatique) 측면이 있다. 들뢰즈는 부르바키 경우는 다른 측면의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공리라는 것은 상상적이며, 기호적(상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바이에르스트라스(Weierstrass)와 럿셀(Russell)의 정태적이고 서수적인 해석을 부여한 미분계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사물에서 미분화에 의해서 생긴 가루들, 즉 미분들은 [무의식에서 정태적으로 구분된 심리적 개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독자들이다. 수학적으로 예를 들면, 단독자들은 삼각형의 각 꼭지점들이다. 그래서 상징적 요소(수학적인 기호)들의 상호 규정(détermination réciproque)이 단독적 점들의 완전 규정(détermination complète)으로 이어진다. 이런 전망에서 단독자란 구조가 있는 모든 영역에 속한다.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주사위들 위에 나타난 점(단독성)들에 연관이 있다. 모든 구조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고 할 때, 하나는 미분적 연관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단독성들의 체계이다. 이 단독성은 구조 속에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수학적 은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다.   중요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에 요소적 구조를 파악하는 경우에서이다. 그는 음소(phonème)와 같은 지위를 지닌 단위들로서 친족소(parentème)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친족관계에서 네 개의 연관, 즉 형제/자매, 남편/아내, 아버지/아들, 외삼촌/생질의 연관은 단순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형성처럼 (외디푸스) 신화 속에서도 신화소(mythème)들이 상호 규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구조의 규정(détermination)은 구조가 작동하는 것을 표현하는 태도의 이론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단독성들은 기호적(상징적)요소들과 요소들의 연관에 상응할 뿐 이들과 닮은 점은 없다. 이 단독자들 중에 어떤 것은 변수가 되고 어떤 것은 함수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것은 구조 내에서 명칭의 영역이 되고 다른 것은 태도의 영역이 된다. [한 단독자의 두 성격(속성) 한편으로는 대상으로서 몸짓으로(corporel), 다른 한편으로는 소리 등의 비형체적(incorporel) 표현으로 드러난다. 몸짓에 이름을 붙여주고 표현을 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미분화에서는 이 둘 모두가 동태적인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라는 의미에서 잠세태가 아니라 잠복기(잠재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깡의 제자인 르끌레르(Serge Leclaire)는 무위식의 상징적 요소가 어떻게 신체의 리비도 운동에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자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에서도 보인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각 생산양식은 관계들의 가치에 상응하는 단독자들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다. 진실한 주체가 구조 자체, 즉 미분자와 단독자, 미분관계와 단독적 점들, 상호규정과 완전규정 등이다. 생산관계에서 "진실한 주체는 참여자나 행정인... 이 아니라, 오히려 지위와 기능의 분배와 정함(définition)이다. [주체가 프로레타리아의 인간이란 측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지위와 그 실행방식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실행방식을 단독성으로 파악하여 보라.. ]   [언어학적으로 음소의 문제제기가 중요하다. 단어에 내재해 있는 음소가 개별적이지만, 위치가 있고, 그와 다른 음소와 차이를 나타내면서 순서적 상호 연관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미분에서, 특히 포물 곡선에서, 기울기인 접선은 순서적이고 정태적 연관에서 그 힘의 방향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과 닮았다(라이프니츠와 럿셀). 이 세 번째 기준까지는, 정태적 의미에서 무의식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의식의 태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네 번째 기준은 의식의 내재적 힘으로서 무의식 내에서 기준을 발견한다.]   4. 네 번째 기준: 차별자(le différenciant, 분사형에 주의 할 것), 차별화(la différenciation): 참조: 『차이와 반복』결론 s3 p. 358. .   구조들은 요소들, 연관, 점(단독자)들 덕분에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다.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이고 소우주적 구조(micro-structure)이다. 쟈곱슨(Jakobson)이 음소의 질적 지위를 문제 삼으면서, 구조의 양태 또는 이론의 대상이 잠세성(virtualité)이라 한다. 여기서 잠재적이라는 것은 자신에 고유한 실재성(réalité)과 자신에 고유한 이상성(idéalité)을 지닌다. 그래서 구조에 대해 사람들은 현실적이지 않는 실재(réelle)이며, 추상적이지 않는 이상(idéale)이라 말하리라.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자주 일종의 저장소 또는 이상적 장부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모든 구조가 다수의 잠재적 공존(coexistence)이라 한다. 그리고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독창성이란 사회체계 요소의 공존과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방식에서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구조 속에 무엇이 공존하는가? 그것은 모든 요소들, 관계와 관계의 가치들, 관련된 영역에서 단독자들이다. 이런 공존은 혼융도 비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미분적 요소들의 관계이다.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현실화(actualiser)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화 여기 지금 현실화된다는 것은 그런 관계, 관계의 그런 가치, 그런 단독성들이고, 다른 시각에 다른 곳에서는 다른 것들이 현실화된다. [이 현실화란 인간의 인격이 이런(이슬람) 문화에서 이렇게(이맘), 저런(힌두교) 문화에서 저렇게(브라만) 실현화(réalisation)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체적 언어(langue)도 없고, 전체적 사회도 없으며, 우리가 덧보탠다면, 전체적으로 진과 선을 지닌 어떤 신적 존재도 없다는 것이 된다. 잠재성으로서 구조는 [공존이란 의미에서 보면] 미분화되어(différentiée)있다 하더라도, [공존의 속성들이 아직 발생적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아직 세분화되어(indifférenciée)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조라는 것은 음소관계 t/c를 구성하는 différent/cation이라는 명칭으로 지적될 수 있는 이중적 측면을 분리할 수 없다.   모든 세분화 즉 현실화는 두 개의 길, 종과 그 부분들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류와 종이란 생물적(양적 개체) 분류와 다르다. 종과 부분들이란, 한 덩어리와 그 덩어리의 일부가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덩어리의 현실화와 그 부분의 현실화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종과 부분들의 현실화의 과정에는 항상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잠재적 공존의 요소들은 다양한 리듬에 따라서 효과를 [시간 속에서] 발휘한다. 시간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에서 현실화로 이행하는 것이지, 한 현실적 형식에서 다른 현실적 형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질료(원질)의 자기 변형과정이며, 그리고 질료의 변형 과정에서 어떤 형태가 나타나났다고 해서 그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의 자기변형에서 일어나는(여기에 반복의 의미가 들어 있다) 것이다, 결국 질료의 자기 변형의 과정에서 보여진 단면들은 효과이며 결과물이며 사건인 셈이다. 이 사건에서 원형질료를 순수 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면, 순수사건은 기억의 혼재인 셈이다.] 이런 이행을 통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구조가 종들과 그 부분들을 생산한다(produire)고 들뢰즈는 말한다. 구조는 이들을 세분화된 종과 부분들처럼 생산한다. 그래서 생성(la genèse, 발생)은 시간처럼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로부터 구조의 현실화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내적 다양한 시간성과 정태적 순서로서 생성(발생)라는 두 개념은 구조의 놀이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생산을 스피노자에 비추어서 자연(질료)이 속성(종들)을 효과화하며 그 속성을 현실화하는 사물들(부분들)을 양태라 볼 수 있다. 이 양태가 질료적 차원과 달리 비형체적 차원에서 언어행위 즉 표현(문장)을 다룰 수 있다. 이 표현은 사유의 양태와 같다. 우리가 보기에 여기서, 들뢰즈는 질료의 차원에서 보아 이 비형체적 사유의 양태가 형체적 사물의 양태와 동시에 생겨나는 두 가지 길을 묘사하려한 것이 아니다. 설령이 두 가지 길이 같은 시간에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기표와 기의가 서로 필연적 연관이 없는 것처럼, 서로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두 양태는 구조와 뗄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두 양태사이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스피노자에 여러 속성들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듯이 (생명 현상의) 발생적 차원에서 보면 두 개는 생산되고 있는 중이며, 또한 권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들뢰즈는 이 세분화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 구조는 자체적으로 보면 미분화(différentielle)이나, 그 효과(결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분화의 작용(différenciatrice)이다.   레비스트로스와 푸이이용(Jean Pouillon)의 문제제기에 이어 뒤메질(G.Dumézil)은 종교들과 한 종교의 신들에서 류적차이와 종적차이를 구별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부처로 화한 것이 종이라면, 지혜를 밝혀주는 관음보살, 병을 고치는 약사여래, 성불로 이끄는 미륵 보살 등등은 부처의 부분들의 효과화 이다.] 이런 구별로부터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경계가 있다. 상상적인 것은 [부분적인] 각 항들에 총합적 매카니즘의 총체적 효과를 집결시키는 것이라면, 상징적인 구조는 항들의 미분화와 그 결과의 세부화를 확인 시켜준다. 라깡의 융에 대한 비판이나 "신비평"의 바슐라르에 대한 비판은 상상에 대해서이다. 뒤메질을 논평한 오르티그(Edmond Ortigue)는 "사람들이 질료적 상상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감소하며 사람들은 동등성에로 향하고, 사람들이 사회의 형상적 요소들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증가하며, 사람들은 구별된 형평성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제 들뢰즈는 탐험을 깊이로 향한다. 구조들은 무의식적이다. 구조들의 생산물 또는 결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결과(효과)로부터 구조들을 읽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재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의 제자 밀러(J.A. Miller)는 환유적 원인성(causalité métonimique)의 개념을, 알뛰세르(Althusser)는 구조적 원인성(causalité structurale)의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구조의 무의식이 미분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무의식이 구조이라는 측면에서 미분적이지만, 무의식이 생성의 권능으로 실현화의 과정에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세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밀러와 알뛰세르의 구조 읽기는 미분적 구조 읽기에 끝나는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작은 지각들을 미분적 무의식으로 제시했고, 반면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 힘들의 갈등 또는 욕망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서 무의식의 기원의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욕망의 수준, 연합적 이미지의 수준, 대립 관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무의식을 욕망도 표상도 아니고, 항상 비어있다(toujour vide)고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질료와 같아서 무미 무취 즉 비가치 개념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스피노자의 자연, 베르그송의 본성과 같다. 베르그송의 세 가지 본성은 구조(이마쥬)가 의미를 표출하는 장면인 셈이다.]   무의식은 항상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인간에 관한 문제제기는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제기한 방식을 따라가면 풀 수 있는 해결이 항상 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과 정신병환자의 치료처럼]. 알뛰세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제기된 문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우나, 라깡에 이어 르끌레르가 갈등의 전형에 의해서라기보다 문제 양식[문제제기방식]에 의하여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제제기나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주관적이거나 임시적이 아니라, 객관적 카테고리이며 충만하고 전체적인 객체성(objectité)이라는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조적 무의식이 미분적인 동시에, 문제제기적이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열(sériel)이 있다.   [구조는 규정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다. 구조는 결과물로서 그 근원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인-결과라고 말할 정도로 인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결과의 효과나 의미는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서 성립한다. 얼마나 많은 결과들이 현실의 장에서 원인(동기)에 관계없이 이루어지고 소멸하는가! 또한 의미 있다고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의미의 부여에서 계열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의미 부여자가 누구인가 라고 물음을 제기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가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대자아일 것이며, 자의식의 발동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   5. 다섯 번째 기준 : 계열(sériel)   지금까지 설명된 구조는 아직 작용(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가 (위의 네 가지와) 다른 절반의 기준을 회복한다면 구조는 움직이며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미분화된 상징적 요소들이 계열로서(en série)조직화 된다. 하나의 우선적(première) 계열과 파생된 다른 부차적 계열은 서로 자치적이지만, [비형체적인 것과 형체적인 것으로서] 음소들(les phonèmes)과 형태소들(les morphèmes), 경제적 계열과 다른 사회적 계열 [경제적 상품 생산과 문화적 작품 생산], 또는 푸꼬가 말하는 [말과 경제활동과 인간] 언어적, 경제적, 생물학적, 삼원적 계열처럼 필연적으로 연관을 맺는다. 문제는 이 우선 계열이 기초를 형성하는지, 우선 계열이 기표이면, 다른 계열은 기의인지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구조가 계열로 되어 있고 게다가 다양한 계열(multi-sérielle)이라고 만 말하자.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상상과 상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즉 한편으로 미분적 연관의 요소로서 동물 종의 계열과,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으로 파악된 사회적 지위의 계열 사이에 대치는 차이의 두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개별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고, 상호주관적(intersujectif)이다. 무의식은 계열로 전개되고, 기표와 기의로서 뿐만이 아니라 두 계열은 고려된 영역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된다고 한다. 그가 포우(Edgar Poe)의 『훔친편지』에 대한 유명한 논평을 하면서, 구조가 어떻게 두 개의 계열, 왕-여왕-장관 계열과 경찰-장관-뒤팡 계열을 연출하는지 보여주고, 프로이트의 『쥐 인간』에서 아버지-자식의 이중 계열을 기초로 하여, 각각(아버지와 자식)은 빚-친구, 가난한 여인-부유한 여인이라는 4개의 항들에게 역할을 한다.   구조가 계열로 조직화된 경우에 진실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의 결정은 상징적 요소들의 선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우선(일차적) 계열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차적(이차적) 계열의 구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음악과 가깝게 느껴진다. 그 예로서 솔러스(Philippe Sollers)의 소설『드라마(Drame)』와 페이(Jean-Pierre Faye)의 『유비들(Analogues)』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두 계열로 하여금 서로가 단순히 반영되지 못하게 하고 바로 그때도 그 항들 하나 하나에 정체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가? [우선 계열들이 상징적으로 연관 있기 때문이고, 그 연관이 실현화와 관련이 없으며, 단지 의식 내에서 구조적으로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 양상은 실재성도 아니고 상상성도 아닌 제 3의 것이다. 이 제 3의 것에는 다양하게 이전이 가능하다. 이 이전도 상징적 이전인데 두 부류로 은유적과 환유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꿈의 분석에서는 이 상징적 이전으로부터 상상성과 실재성을 구분하여, 환자의 병의 초발전조(초기 정신적 상흔)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상징적 이전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나 그 환자에게는 고유하다. 왜냐하면 환자의 과거경험은 분명히 있었으나, 지금 의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 전조는 환자의 자아에 자리가 없으나, 무의식에서는 그 자리는 (정해진 크기도 위치 없이) 있으며(유크리트의 점처럼 크기 없이 위치도 없이, 산술에서 0처럼),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은유로든지 환유로든지, 채우려 들어온다. 왜 이런 방식을 취하느냐는 검열의 논의이다. 그런데 이 위치를 우리는 위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무의식은 위상처럼 존속한다.] 자, 라깡의 『훔친편지』의 분석에 따르면 일차적 계열에서 장관은 이차적 계열에서 여왕의 위치에 있듯이, 『쥐 인간』에서 가난한 여인이 친구의 위치에 있듯이, 레비스트로스에서 높은 인격(personne d'en haut)으로서 쌍둥이(토템) 계열이 낮은 인격(personne d'en bas)으로서 새(토템)의 계열에 이른다. 이런 두 계열의 상대적인 이전(déplacement)은 전혀 부차적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적 즉 싱징적이며, 본질적으로 구조의 공간 속에서 위치에 속해 있다. 구조주의가 [프로이트로부터 라깡이 주목한] 이 은유와 환유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둘(은유와 환유)은 상상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 전혀 아니며, 구조적 인자들(facteurs)로부터이다. 그 두 인자들은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한 계열에서 동일 계열의 내부로 이전의 자유의 두 정도를 표현한다. 상상적이지 않는 [말하자면 상징적인] 이 둘은 이 둘에 의해 활성화된 계열들로 하여금 항들을 뒤섞게도 이중이 되게도 못하게 한다. 상대적 이전이란 구조 속에서 위치의 일부를 차지한다면, 그 상대적 이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상징으로서 위상은 아무 것도 무의식으로서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창고이다. 그 창고는 빈 창고로서 무(무능)가 아니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빈(의미) 창고라는 것이다. 즉 대상을 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담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고는 상징이 만든 것으로 이데아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라깡의 분석을 따라가면, 최고 관념(신)의 이데아처럼 등질적 성질로서 빈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질료로서, 가득 찬 그러나 아직 의미가 발현되지 않은, 그 무엇과는 반대의 방향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다섯 번째 기준인 계열에서 들뢰즈는 라깡을 충실히 따르면서 생물학적(질료적) 또는 심리학적(시간적) 관심으로서 시간성에 대하여 다루는 측면을 도외시 한 것 같다. 아니면, 이런 구조 해명으로 나아가 보라. 그러면 빈 것으로 밖에 안되지 않느냐라고 반어적으로 서술하고 난 뒤, 그 빈 것 자체가 무엇인가로 실재로는 충만 되어 있고.. 그리고 상징(징후)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6. 여섯 번째 기준 : 빈 상자(la case vide)   구조는 완전히 역설적(paradoxe)인 대상 또는 요소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훔친편지』에서 편지와 『쥐 인간』에서 빚의 경우에서 대상은 특출하게 상징적이다.   특출하게(éminemment)란 의미는 그 대상이 다른 계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해당하는 계열에서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계열에 동시에 내재하는 이것을 대상=x 즉 수수께끼의 대상, 대운동자(grand Mobile)이라 부르자. 라깡은 편지와 빚의 특별한 역할을 발견한 것을 인위적이며, 일반적 방법이며, 모든 구조에서 기준(critère)이라 하고 마치 노래에서 후렴처럼 순환한다고 한다. 그의 제자 그린(André Green)은 『오델로』에서 손수건이,『햄릿』에서 왕위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런 분석에서 상징적 대상(왕위)은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 대상으로 본 라깡의 장점이다(제1기준에서)] 다시 한번,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첫 번째 차이가 있다. [여기서 실재(기표)와 상상(기의)과도 다른 상징은 구체적 대상(자의식, 무의식)이 아니라, 자의식이 만든 허구의 대상(빈 상자)이다. 왜 들뢰즈는 여기서 언어학적 도식에서 배제된 '구체적 실물'에 대한 언급 없이 허구의 대상을 언급하는 것에 머물까? 이 논문은 후기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탐험이 시간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 설명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논문은 라깡과 푸꼬의 영향권 내에서 푸꼬의 『말과 사물(1966)』이후에 그의 저술『차이와 반복(1968)』이전에 썼을 것이다.] 상상의 [실재에 대한] 전투적 성격에 반대하는 제3자(상징적인 것)는 본질적으로 상징체계 속에서 개입한다.   라깡의 분석에 따라, 수수께끼의 대상은 자체적으로 이전한다. 그 대상의 성질은 그것을 찾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자기 장소가 없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화폐라는 상징은 물건이 있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토지난 창고의 상품처럼 자기 자리가 있지 않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금본위라고 하지만 주식처럼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 이 분석을 잘 들여다보면 라깡 만큼이나 들뢰즈가 자본주의 물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물신, 이름을 부르는 신의 모습, 자기 배타적인 모습의 신과 지정학적 위상이 없다는 신의 모습, 모두를 지니고 있다.] 라깡은 『쓴 글들(Ecrits)』속에서(p.25)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EC 4장)베르그송의 무의 분석에서 부정판단과 관련하여] 마치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책을 찾으러 갈 때, 그 책의 목록카드가 표현하는 것처럼..." 목록카드는 그 책이 그 서가에 있지 않으면, 빈 종이 인 셈이다. 이 카드가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그래서 모든 구조는 원본인 제3자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하고, 그런데 제3자는 자기의 기원이 없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대상, 즉 대상x는 차이 자체의 세분화능력(le différenciant)이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형상적 신을 잘 표현한 것인가? 기원이 없으면서도 존재하고, 그리고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상징이다. 이것을 소박한 실재론에서 보면, 바람소리일 뿐인데, 이 표지(상징)가 실물을 대체하는 능력이 있으니... 어휴, 여기에 매여 얼마나 많은 인민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놀이에는 빈 상자가 필요하다. 빈 상자 없이는 아무 것도 전진하지도 작동하지도 못한다. [데모크리토스를 연상해야 하는가? ] 대상=x가 매번 위치 이전하는 것이 그 자리이라고 하며, 라깡은 브릿지 게임에서 버려진 패의 자리(la place du mort)를 상기시킨다. 푸꼬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에서 벨라스케즈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왕의 위치(la place du roi)를 상기시킨다. 구조주의 있는 곳에는 Zéro(0) 등급이 있다. 솔러스와 페이 경우에는 문학에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맹점(la tache aveugle)을 상기하게 하며, 여기서 문학소들(littérèmes)로서 계열을 조직화하여, 문학을 허용한다. 밀러(Miller)는 프레게(Frege)에서 제로(Zéro)의 지위를 빌려왔다. 레비스트로스는 [토속 원주민 문화에서 권능있는 정령과 같은 실재인] "마나"(mana)를 "유동하는 기표"의 존재, 상징적 제로(0) 가치의 존재라고 인식한다(『의미논리』제8단원(p. 64)에서). 쟈콥슨의 경우에 음소 제로(le phonème zéro)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 비평의 대상은 언어행위 중에서 작품 속에 미리 존재하는 잠재성(virtualités)을 규정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자체는 자기의 고유한 잠재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캐롤(Lewis Carroll)과 조이스(Joyce)는 "단어들이 든 가방 (단어가방)"(mots-valises)란 개념을 창안한다. 『핀간의 각성(Finnegan's Wake)』속에서 한 글자가 우주이고, 세계의 모든 계열들을 재통합한다. 캐롤에서는 단어가방은 적어도 두 가지(말하고-먹고) 기초계열을 내포하고 있다. 신조어인 스나크(Snark, 『의미 논리』p. 60와 여러 곳에서)는 무의미(non-sens)이나 두 계열을 활성화시킨다. 이 단어는 문제 제기적(problématique) 대상, 즉 대상x를 지시하는 한, 단어x 이다. 이 대상x는 두 계열 사이의 홈을 파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을 채워 넣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마나"에 관해서 제시하고, 마나를 "거시기"(truc)나 "아무개"(machin)라 본다. 거시기라는 무의미는 의미화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과도함(l'excès)이다. 이런 의미를 푸꼬가 분석한 루셀(Reymond Roussel)의 음소적 차이에 의한 테크닉에서, 말라르메(Mallarmé)의 계열들 사이의 연관적 체계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이중 측면을 지닌 빈 상자의 효과성을 주목한 것이다.   대상=x라는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것은 이 논문의 제목처럼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인식해야 할까」이며, 정체성을 표시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지위의 문제에로 이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대상=x가 상징적 남근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 자기와 연관해서 항상 이전되어 있으면서, 어머니의 편에서 그것(상징적 남근)을 발견할 장소가 없다. 결국 상징적 남근은 편지, 빚, 손수건, 왕위, 스나크, 마나 등인데 비해, 아버지와 어머니 [왕, 장관, 여왕] 등은 상징적 요소들이다.   남근(팔루스)이 마지막 응답이 되지 못한다. 이 자리는 성적구조의 빈 상자에 특징을 부여하는 의문과 질문의 자리이다. 이 팔루스는 교환에 관계없는 "어떤 것"으로 있은 것이다. 이것이 "노동일반"으로서 가치이다. 가치와 팔루스, 경제적 물신과 성적 물신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이 문제는 의미 없다고 한다. 하여튼 대상x가 정체성을 지니려는 것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고,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모든 위치에 연관해서 스스로 이전되기 때문이다. 대상x가 구조의 각 질서에서 빈 장소 또는 구멍 뚫린 장소이다. [정체성과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는 의미에서 신성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구조의 질서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빈 장소에서 소통한다. [각 학문은 하나의 같은 계 내에서 공통적 원리를 갖지 못한다. 각각의 학문은 각기 자기 계 내에서 정합성과 무모순성을 확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속학적 사회구조를 위하여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언어학에서 구조들은 상징적 요소 즉 궁극적 기표로 간주될 수 없었다. 또한 푸꼬는 "매순간에 개인적 경험의 고유한 구조는 사회체계 속에서 몇몇 가능 한 선택들(과 배제된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반대로 사회적 구조들은 그 구조들의 선택점들 각각에서 몇몇 가능 한 개인들(과 가능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한다."(『말과 사물』, p. 392)고 말한다.   [구조를 무엇으로 재인식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대상x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상x는 자기 질서 속에 다른 구조적 질서들을 종속시킨다. 다른 질서라는 것은 현실화 영역으로서 개입한다. 2) 대상x는 다른 질서들 속에 있는 그 다른 질서에 대상 자체가 종속된다. (대상x는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에만 개입한다.) 3) 모든 대상들x와 구조의 모든 질서들은 서로 서로 소통한다. 각 질서는 우선적인 종의 차원으로 규정된다. 4) 이런 조건들로부터, 그런 역사적 계기 또는 그런 경우에서, 구조의 질서에 상응하는 그런 차원은 스스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질서의 현실화에 복종한다(여기서 라깡의 "배제"(forclusion)의 개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들뢰즈는 구조에 대한 재인식의 방식을 6가지로 해명하면서 공간적 의미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 반복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에로 탐험은 찾을 수 없다. 무의식의 대상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것은 빈 것이라고 한 점에서 최고 형상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데아를 빈자리이라고 하면, 종래에 이데아의 등질적 충만성과는 다른 차원이 된다는 점에서 상징적 존재로서 이데아는 플라톤의 실재적 존재로서 이데아와는 구별된다. 이 구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데아의 실재적 존재의미를 살리자는 것이다. 이데아라는 것이 내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성립하는가? 이 말의 성립이 존재, 즉 시간의 역동성,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된 것은 무엇인가? - 조각으로 흩어진 개체들, 단독자들(singuliers)이다. ]   7. 마지막(일곱번째) 기준: 실행에 놓여 있는 주체(Du sujet à la pratique)   이런 의미에서 장소(위치)는 구조가 현실화되는 정도에서 실재적인 존재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장소(위치)는 상징적 요소들로 채워진다. 존재자들에 채워지기 앞서 후자들이 채워진다는 점에서 후자가 우선적이다. 이것을 빈상자의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이 빈 것은 비 존재가 아니다. 푸꼬는 "이 빈 것은 모자람을 구멍파는 것도 아니고, 채워야 할 빈칸을 기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사유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의 펼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말과 사물』p. 353) 고 한다.   이 빈 장소에는 장소의 이전이 뒤따르는 특출하게 상징적인 심급(l'instance)이 있다. 주체(le sujet)가 정확히 빈 장소를 뒤따르는 심급이다. 또한 이 주체는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intersubjetif)이다. 신의 죽음을 알리고, 인간조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어떻게라는 방법만 남는다. 니체가 절대 신이 여러 방식으로 죽는다고, 그리고 신들은, 하나의 신이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웃으면서 죽는다고 제시하려 했을지 모른다. 구조주의는 주체를 제거하는 사상이 아니라, 주체를 바수어서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서 주체는 항상 노마드(유랑하는) 주체이며, 비인격적인 개별화로 되어 있고, 전 개별적(pré-individuelle, 개체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전의 개체)인 단일자로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푸꼬는 "산개"에 대해 말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주관적 심급을 대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 조건들에서 진리체계가 "동시적으로 다수의 주체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구조의 두 가지 큰 우발사건(accident)은 유동하는 빈 상자가 진실한 결핍이거나 또는 빈상자가 채워져 정착적 결과로 사라지거나 이다. 언어학적으로 표현하면, 기표가 사라지거나, 기의가 사라지거나 이다. 신학-인간학 용어로 말하면, 신이 사막을 증가시키거나 [황폐화를 증가시키거나], 인간이 그것을 채우거나 이다. 인간과 신은 땅, 즉 구조의 두 질병이다.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은, 대상=x를 가치로 보는 빈 상자의 구조가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본주의 구조를 특징 지우는 상품, 화폐, 물신, 자본 등으로 표시되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모순이 구조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제시한다. 모순은 상상적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모순은 구조에 고유한 내적 시간 속에서 결과에게 구조의 자격을 부여한다. 모순은 구조 속에서 빈 위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생성으로부터 파생된다. 일반적 규칙으로 보면,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이 양자의 관계는 시초에서 우선적 결과들을 가지는 구조적 작동에 의해 항상 부차적으로 생겨난다. 조금 전에 우발사건들이라 불렀던 것이 구조에 도달하는 것은 밖으로부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반대로 내재적 "경향성"이다. 구조의 빈 상자 또는 주체에 상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념적 사건(l'événenemnt idéel)들이 중요한데, 이 사건들을 들뢰즈는 우발적인 것(accident)이라 부른다.   복잡한 문제들의 집합이 구조주의에서 제기되고 있고, 푸꼬의 구조적 "변환"(mutation)이나 알뛰세르의 "이전 형식"(formes de transition)이란 것도 구조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들은 빈 장소에서 해결될 문제이다. 또한 구조주의적 영웅도 있다. 이 영웅은 신도 인간도 인격도 보편도 아니며, 정체성도 없다. 이 영웅은 과도와 결함으로 타격 입은 구조의 분열(l'éclatement)을 확신한다. 그리고 영웅은 자신의 이상적 사건(l'événement déal)을 우리가 이미 정의했던 이상적 사건들에 대립시킨다. 이 영웅이 새로운 구조에 속한다는 것은 이 영웅의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힘에 의존하고 위치 이전을 뒤따르고 간직하는 민활성에 의존한다.   "주체에서 실천으로"라는 마지막 기준은 가장 모호하며, 미래의 기준이다. 앞선 여섯 가지를 통하여 다양한 영역들을 탐험할 수 있다. 구조의 수준차이에 따라, 실재와 상상, 실재적 존재들과 이데올로기들, 의미와 모순 등은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결과"들이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어떤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구조주의에서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찬성하는", 그리고 그것을 생산할 줄 아는, 책들이 중요하다.   [이 주체에 대한 연구에서 전자 현미경이나 고도의 분석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독자의 진솔한 그대로 말씀 즉 진솔한 기록의 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기에, 결국 들뢰즈는 라깡이 분석한 진솔한 '작은 자아'를 설명한 것이다. 이 자아가 아직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경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아이다. 자아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은 미래와 연관 있다. 미래의 문제는 기억을 포함하는 자기의 반복과 더불어 풀어가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 논문은 그 당시(1967,?) 구조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분석인 셈이다.]                                                     ***   "차이와 반복(1969)" 영문판 서문에 관한 견해     들뢰즈 pp. xv-xvii   우리는 이 서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를 먼저 말하자.   우리는 들뢰즈(Deleuze)가 베르그송의 철학적 문제제기방식과 프로이트의 심리적 문제제기 방식과 동일한 방향에서 철학사적 개관을 하고 있다고 본다 . 물론 대 철학자는 철학사적 흐름에 대한 견해에서 거의 동등한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에서도 천상과 제작자와 생성의 3차원의 구분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사유의 사유가 있고,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의 합일로서 실현태가 있으며, 질료인으로서 잠세태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상, 현상에 대한 실재, 실재를 총괄하는 원리를 구분하는 개체성에 관한 논의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이미 죽은 것에서 생명의 현상을 보는 19세기에 와서야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재성이 이미 수 억년의 역사와 기억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죽은 시체는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과거의 축적이며, 살아있는 생명체도 살아온 과정의 축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서장에 나오는 파라독스 3 가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분신(쌍둥이) 파라독스 (P. des doubles) [일자(원리)-다자 관계 - 고대철학]   대칭 파라독스 (P. des objets symetriques) [일자(주체)-타자 관계 - 근세철학]   무덤 파라독스 (P. des des sepultures) [일자(자아)-내재성 관계 - 현대철학]   이런 견해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제3장 "명제논리의 세 파라독스"에서 설명하는 지시화, 표출화, 의미화의 세 파라독스와 같은 맥락이다. 지시체, 표출체, 의미체의 세 경우를 설명하는데, 이 설명에서 각 대상은 이미 구체적 개별 물체와 연관이 없다. 말하자면 소쉬르가 말하듯이 기표와 기의가 현실적(위부의) 물체와 연관 없다고 하듯이 명제 의미는 구체적 사건의 진상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연관 있는 문맥 즉 지정학적 위상과 관계를 말한다. 이는 진리와 허위라는 가치가 문맥에만 연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위상이 일어난 사실의 내용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현상의 연결방식을 담론자가 의미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도 실재와 사실의 총체는 있었다. 문맥의 연결은 시각 즉 세계관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시각이 개념화되었다는 들뢰즈의 입장을 수긍한다. 그러면 총체와 내용은 개념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가? 어떻게 말하든, 말을 하는 것 자체는 표현이고 또한 시각이다. 이 시각들이 난무하는 세계가 바로 노마드의 세계이다.   들뢰즈는 노마드(nomade)의 세계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 또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까? 노마드의 세계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monad)는 자신 속에 모든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노마드의 개체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과정 중에 있기에,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시각을 보충하고 확충하면서 부풀어 간다. 말하자면 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가 시각의 자기 확장인 것이다. 모나드가 자기 한계 내에서 시각에 만족하고 있다면, 노마드에서는 시각의 한계가 자기를 비하시키고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본다. 천박하지 않는 노마드적 자아는 자연의 본성을 (극복하고자)넘어서 - 왜냐하면 그 본성이 자신의 한계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 자아의 새로운 형성 즉 자기 형성에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이는 자신의 형성을 넘어서 개체들 공동의 형성체를 성립시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제대로 보았을 것이다. 삶의 방식 자체가 무덤으로부터 이탈도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도 아니다. 무덤을 뒤에 유성처럼 달고 살아가며, 죽음의 신체를 데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무덤 즉 신체는 인간이 갖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체 이다. 왜냐하면, '삶의 양식'이란 문법에서, 또는 ?의미논리?라는 위상적 도식에서 죽음(무덤) 과 신체(추억)는 의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삶과 직접적 연관 중에 있음(연속성-기억)을 간직하고 표출하고 의미화 한다. 말하자면 이런 죽음과 신체를 반대 즉 대상(문자 그대로 앞에다 놓는)으로 여기고, 적으로 또는 무화 시키려는 의식자체가 병든 의식이다. 왜냐하면, 상대 없는 자신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미신이다. 상대가 있는 긴장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다른 한편 상대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천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그리스트교인은 믿는다. 마치 기하적 점이 위치와 크기 없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천국의 세계가 있단다.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 명제자체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세계이다"만큼 더도 덜도 아닌 만큼 의미 있다. 자족적 존재가 있는 세계에서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미 현실적 세계와의 문맥이 없는 백색의 세계에서 의미 있다.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이와 같다. 스스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살아가려는 생명체가 남(타 생명)의 살을 먹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도사들의 삶에서도.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지상의 세계이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세계도 의미 있다. 채소를 먹고산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할 때, 다른 의미란 전자의 두 세계와 후자의 세계의 차이로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비는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의미이다. 의미는 기본적으로 문장들 간의 관련 맺는 정도에서 의미가 표출된다. 누구(무엇)와 연관 맺었는가? 수 억겁의 인연 연기를 말할까? 그러고도 무엇으로 어디에서 진리와 가치를 말할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하여 한 시각.(Russ, 1993) .***   뤼스(Jacquline Russ) p. 237. Atlas de la philosophie, Kunzmann et 2, Paris, LGF, 1993, (Munich, DTV 1991)   독일에서 출판한 이 철학의 위상적 지도(Atlas de la philosophie)를 프랑스판을 만들면서 프랑스철학자 몇 명을 첨가했다. 그 중에 뤼스는 들뢰즈에 관해 반쪽을 할애한다. 여기서 그녀는 차이와 반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 "차이와 반복(1968)"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사물의 시각이 출현함을 알립니다. 들뢰즈는 사유된 실재를 익명의 영역 즉 주체 또는 인격적 개별성이 박탈된 영역으로서 표현한다. 그래서 주체의 정체성(동일성)은 부서져야 한다. 인격적 나(je)와의 모든 관련를 넘어서 자아의 동일성도 없고 주체도 없는 무한정한 우주가 나타난다. 결국 존재에는 인격이 없다.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72)와 더불어 인격 없는 욕망의 영역을 재발견하다. 이 욕망이 삶(la vie)을 감싸고 있고 또한 생활(la vie)도 생산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생의 창조이자 권능의 의지이다. 이 욕망은 결함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권능이다. *-   [우리는 여기에 몇마디 보태자. 뤼스의 견해는 정신 분석적 담론에 상당히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인격 또는 자아의 부서짐은 소자아(moi)의 행태이다. 제도와 관습에서 미신과 환상에 빠진 주체를 넘어서, 소자아라는 현상(겉모습)을 표출하는 권능인 실재 즉 대자아(Moi)를 발견한다. 이 빙산의 물밑에 있는 의식과 같은 대자아는 욕망이다, 대자아는 어느 누구가 아니라 그 무엇이다. 존재는 인격도 사물도 아닌 그 무엇이다. 이는 삶의 여러 양태를 생산하는 기본적 동력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있게 하는 근원이다. 들뢰즈의 사상의 전개로 보아, 차이와 반복에서 욕망이라 불릴 수 있는 권능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고서, 안티-외디푸스에서 존재적 능력이 실현하는 방식과 실현한 사태들에 주목한 것이다. 이 생산된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긍정 죽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영역판 서문의 개략***   철학사를 쓰는 것과 철학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는 위대한 사상가의 도구와 광활한 영역을 연구한다. 다른 한편 나의 도구를 잘 가다듬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작업의 결과물 다른 말로 하면 발견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서,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흄, 스피노자, 니체, 프루스트를 열심히 연구한 후에 그가 '철학한다'는 노력으로 차이와 반복을 썼단다. 이 책에는 가타리와 함께 했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왜 차이와 반복과 같은 특별한 문제에 대해 집착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고 많이 다루어진 문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는 차이를 동일률에, 동일자에, 유사성에, 대립자에, 유비추리에 종속시키며, 또한 이 차이를 개념의 정체성에 도입했으며, 차이를 개념자체에 두고,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개념적 차이에 도달했다.   우리는 차이를 여러 방식으로 종속시킬 것이다. 먼저 차이를 생각하기 위해서(즉 개념 또는 주어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종적 차이는 류적 형식에서 동일적 개념을 미리 가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킨다. 그 다음 차이를 (지각의 관점에서) 유사성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술어의 관점에서) 대립에, (판단의 관점에서) 유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차이를 그 자체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은 차이의 유기적(organique) 표상을 제공하고, 라이프니츠와 헤겔과 더불어 영(혼)적(orgique *1) 표상을 제공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차이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반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방식으로 반복도 동일성으로, 유사성으로, 동등 또는 대립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경우에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로서 취급한다. 그래서 두 가지(차이와 반복)는 둘 다 정확히 동일한 개념으로 표현되더라도 차이가 있을 때는 서로 반복한다. 반복이 변화를 일으킨 모든 것은 반복을 감추고 동시에 은폐하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양한 변종은 반복을 감추기 위하여 반복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종이 바로 반복의 조건, 반복의 구성적 요소, 특히 반복의 내부 이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런(반복이란) 개념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변장하고 이전하는 것은 반복의 일부이며 차이의 일부 즉 공통적 이동과 흩어짐이다. 극한에서 차이와 반복의 하나의 힘이 있기보다, 다자 속에서 작용하고 다수성을 결정하는 하나의 힘이 있지 않을까?   모든 철학은 예술과 과학과 연관을 맺는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해 말하는 자기 방식을 갖춘다. 그러나 이제는 어렵다. 철학은 초소한의 우월성조차 요구할 수 없어진 이래로 철학의 개념을 만들고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가지고 과학적 기능이나 예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 개념을 과학적 기능과 예술적 구조와 혼동해서 안되며, 과학의 이런 저런 영역에서 또는 예술의 스타일에서 이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과학적 내용과 예술적 내용은 매우 기초적이며, 이 내용이 과학 또는 예술을 진보하게 하기보다 얻어진 기능과 구조로부터 철학적 개념을 형성함으로서 철학이 진보한다. 철학은 과학 또는 예술에 대해 독립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념의 각각의 수준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이 두 개념 사이에 안정적 관계는 없는 지를 물으면서, 철학적 개념을 미분화(diffrentiatio)의 수학적 함수와 차이화(differenciatio)의 생물학적 기능으로 구성하고자 노력한다. 예술 과학 철학은 동적(mobile)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은 자체의 방식으로 서로서로 대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의 힘은 사유의 전통적 이마쥬를 문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마쥬에 의해서 우리는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생각하며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할 때, 목표를 결정하는 사유의 다소 은밀한 선가정적 이마쥬가 있다는 것을 들뢰즈는 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유란 훌륭한 본성을 소유하며 사상가는 (당연히 진리를 '원하는') 선한 의지를 소유한다고 가정한다. 인지과정을 모델로, 다른 말로 하면 상식으로 또는 가정된 동일한 대상에 관한 모든 능력의 사용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오류 단지 오류일 뿐인 것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진리는 해결에 관여한 것, 다른 말로 하면 대답에 사용할 수 있는 명제인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은 고전적 사유의 이마쥬이다. 비판이 이런 이마쥬의 중심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사유에 대해 이런 문제 - 명제적 양상을 넘어서 지적하는 문제 - 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모든 인지를 벗어나는 뜻밖의 만남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그 사유와는 아주 다른 진실한 적과 대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사유를 사유의 자연적 무감각과 악명 높은 나쁜 의지로부터 멀어져가게 하며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비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들뢰즈에게] 이제, 사유의 새로운 이마쥬, 오히려, 새로운 이마쥬를 가두는 저[고전적] 이마쥬들로부터 사유의 해방이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 차이와 반복에서 이런 탐구는 자치적이며, 이것은 이들 두 개념을 발견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것은 제3장이다. 이 제3장은 사유의 식물적 모델을 환기시킬 가타리와 더불어 행한 탐구에 이어갈 책의 입문으로 쓰인다. 사유의 식물적 모델(vegetal model)은 나무에 대립되는 뿌리이며 잔가지로 나뉜 사유 대신에 뿌리-사유(rhizome-thought)가 될 것이다.   *1) 뒤마는 'orgique가 그리스어 οργη에서 나왔다고 하고 격정(bouillonnement)으로 설명한다.   고전 그리스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orge: I. agitation interieure qui gonfle l'ame, - disposition naturelle de l'ame   II. sentiments violents ou passionnes, - ressentiment, colere - vengence, d'ou puniton, hatiment     참조 2)   경험론과 주관성 1953 [흄에 관한 연구]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8   니체와 철학 1962, 니체 1965   푸르스트와 기호 1964 - 증보 1970.   [왜 이서문에서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를 제외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송주의 1966]     안티외디푸스 1972(avec Felix Gattari)   카프카 - 미세 문학을 위하여 1975 (avec Felix Gattari)   뿌리 1976 (avec Felix Gattari)   천개의 고원 1980 (avec Felix G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 (avec Felix Gattari)    참조 3)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에 대한 한 견해 (Oriol, 1979)***   오리올(Timmt Oriol), p. 193, Histoire de la philosohie, Nathan 1979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68)에서 자식-부모관계에 근거한 전통적 정신분석만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다. "어린이는 아빠-엄마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법사 놀이, 카우보이놀이, 술래잡기놀이(도둑과 순경) 기차놀이, 작은 자동차놀이도 한다. 기차는 아빠가 결코 아니며, 기차역은 어머니가 아니다." 확실히 어린이의 '욕망하는 기계(기관 *4)(Les machines desirantes)' (충동들과 기관이 지향하는 다수의 대상들의 이상야릇한 통합인 기관차)는 부모관계를 위한 한 지위, 즉 단지 한 지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지위를 허용한다.   (리샤르 견해) 또한 오리올은 리샤르(Michel Richard)가 다음과 같이 썼다고 소개한다. ?만일 사람들이 안티-외디푸스에서 아빠-엄마-얘기라는 삼각관계의 밀접하고 폐쇄된 영역에서 작은 욕망들과 큰 욕망(le Desir)을 가두고 있는 부르주아 정신분석의 비판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들뢰즈가 이 작은 욕망(ce desir)을 생명의 활기와 복잡성에 닮은 보편적 흐름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욕망과 무의식적 힘들 때문에 그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관"이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욕망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임과 동시에, 특히 욕망의 혁명적 능력 지칭하고자 한다. 욕망은 개인적 무의식에서 보다, 큰 조직체와 억압장치에 대해 욕망이 대항하여... 항의하는 모든 형식들에서 더 [그럴듯한] 기준이 된다..."   (72년 들뢰즈 자신의 견해) 또한 오리올은 클레망(Catherine, Backes-Clement)이 대담한 들뢰즈와 가타리와의 대담(LArc, n. 49, 1972)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공격하는 것,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천에서 정신분석학 자체이다. 가족적이거나 분석적이거나 간에 외디푸스는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기관을 억압하는 장치이지, 무의식 자체의 형성체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를 너무나 허락하는 우리들의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성관계보다 소위 더 낫다는 이상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더럽고 작고 가정적인 비밀'로 환원되지 못하는 성관계의 이름으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우리는 외디푸스의 상상적 변이들과 구조적 불변이체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두 끝에는 욕망하는 기관들의 똑같은 막다른 골목과 똑같은 붕괴가 있기 때문이다. ...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신경증으로 만든다. 이런 신경증화 작업은 또한 정신병적인 사람을 외디푸스로 만들려는 작업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서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4) 여기서 기관은 기계적 기관이 아니라, 생명적 나아가 영(혼)적 기관이란 뜻으로 우리는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외화된 정신과 같은 형상이 아니라, 형성 과정 중인 질료적 성질의 것이다.  
1046    1950년대 시인의 <시와 시인의 말>1/정한모(鄭漢模) 댓글:  조회:291  추천:0  2019-12-14
1950년대 시인의  1/정한모(鄭漢模)       멸입(滅入)                                        한 개의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맑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별리(別離)       지금은 차라리 아름다울 수 있는 그것은   현악기(絃樂器) 혹은 목관악기(木管樂器)의 고음(高音) 그 가늘한 도레모로로 내 가슴에 금을 그으면서 사라져 간 몇 개의 이별(離別)들   녹아드는 빙과(氷菓)의 맛처럼 슬픔은 그런대로 자릿한 미각(味覺)이기도 하였으나   흔들리는 바다의 그 푸른 바탕에 떠서 하늘하늘 하얀 꽃이파리는 지고 우리들의 이별(離別)은 끝났다.   끝이 난다는 것은 홀가분한 휴식(休息) 아니면 고요한 기도(祈禱)와도 같은 것   뜨거웠던 입술 속에서 떠오르는 달무리 그렇게 번지어가는 추억(追憶)   창의 불빛 휘파람소리 숨소리 이슬 젖은 소롯길   빗소리 바람소리 하얀 눈길   가슴 조이는 통고(痛苦)마저도 불붙는 생명일 수 있었던   그것은 떨어뜨린 눈물로 지워진 흐릿한 글씨 또는 남은 향기   이제는 거리(距離)에서 아물아물 바람에 스치우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별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난해難解와 전달傳達                                                                                            정한모(鄭漢模)                                                                        는 말을 듣는다. 지당한 말들이다. 사실 현대시는 난해하다. 말라르메의 상징시 이래 T. S. 엘리어트 의 철저한 주지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도 이미 허다한 논란을 거듭하여 왔다. 이와 같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오면서도 시인을 있게 하고 더욱 더 시가 절실하게 요구되면서 현대시가 발전해 왔다는 것은 현대시의 난해성이란 어쩔 수 없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난해성은 긍정(肯定)되어야 할 것이다. 극도로 압축된 문학형식 속에서 현대 지성의 다양성과 그 논리를 처리하려고 하면 작품은 당연히 난해해질 수 밖에 없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로부터 읽고 생각하는 시로 그 매력의 중심을 이행해 온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으나, 현대시는 그 대부분이 읽는 시이지 애송(愛誦)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노래하는 시에서는 반복이 생명이며 언어의 형식이나 음률적(音律的) 요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복되기 쉬운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시인 현대시는 그 기억의 성질이 전연 다른 것이다. 노래하는 시의 경우엔 그 기억이 언어의 음에 더 많이 의존하지만 읽는 시는 이미지 혹은 의미로서 마음에 남는 성질의 것이다. 이리하여 노래하는 시로서의 전달성은 잃었지마는 그 대신 읽는 시로서의 전달성을 갖게 되었다. 즉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지각하는 기능을 현대시는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의 기능과 효용은 그 폭을 넓혔고 또 그 전달성에 있어서도 단순했던 과거의 시보다 복잡해졌으므로 자연 난해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시는 언어에 의한 표현활동의 최고의 형식이다. 시인들은 이것을 믿고 있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끊임없이 언어에 대한 시도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경험이 새로우면 따라서 언어표현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달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욕은 생활을 새롭게 하고자하는 지향(指向)과 근본적으로 결부되고 있다. 시인들이 그 표현에서 특이한 형식, 리듬, 신기(新奇)한 이미지, 또는 의미가 풍부한 메타포(metaphor)에 의하여 혹은 리듬을 뒤바꾸거나 이미지나 의미를 고의로 축소 내지 확대하거나 탈락, 단절시키거나 하여 그것 때문에 대단히 난해한 표현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시인의 기술의 미숙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생긴 혼란 때문에 난해해진 것까지 포함시킨다는 말은 아니지만 현대시의 난해성은 이런 필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의 난해성은 시에서 의미를 제거(除去)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시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데에도 본질적으로 뜻이 다른 두 계열이 있었다. 저 몽롱한 음악적 정서에 젖고자한 상징시(象徵詩)나 그 뒤 순수시 같은 것은 오직 심미적(審美的)인 목적을 위하여 의미를 버렸고, 같은 심미적 목적을 위함이면서도 몽롱한 음악의 경지를 지양(止揚)하여 명쾌한 시각적 심상을 찾는 초현실주의의 이후 모든 포멀리즘(formaism)은 회화적(繪畵的)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시에서는 음악을 듣거나 시화(詩畵)를 감상(鑑賞)하듯 다만 순수히 감각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감각하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는 이런 심미적 목적만이 아니라 보다 더 시인의 개체적 현실의식과 내적체험을 새로운 언어의 구성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주체적 리얼리즘(realism)을 기초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시가 난해한 경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편성을 가진 가치의식이 아니고 다만 현대적 자아 속에서도 사적(私的)이며 개인적인 현실의식과 내적세계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속에는 남에게 이해될 수 없는 많은 것이 불가피하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시인들이 전달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알기 쉬운 시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또한 아무리 난해한 시라 할지라도 완전히 불가해(不可解)한 시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시는 그 구성에서부터 긴장과 갈등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잘못 꾸며진 경우엔 그것은 산란한 단편(斷片)들의 어지러운 모습이거나 참으로 무엇인지 전연 짐작할 길 없는 그야말로 난해한 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짤 째어진 시라면 미묘한 색채(色彩)의 새로운 조화(調和), 또는 불협화음의 아름다운 화음(和音)의 매력을 지니게 된다. 좋은 시는 반드시 아름답게 이해될 것이며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난해성과 전달이 현대시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처럼 T. S. 엘리어트는 “진정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발레리는 “시는 천 명의 독자에게 한 번만 읽혀지는 것과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 읽히는 작품이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난해한 시라고 할지라도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이 아니라 열 번만이라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훌륭히 전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발레리의 이 말은 시의 고고성(孤高性)을 더 강조한 듯하나 T. S. 엘리어트의 이 말은 현대시의 난해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명(究明)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是認)한다. 더욱이 감상능력이 그 감상의 대상 내용인 시적미(詩的美)의 조직의 변화를 미처 따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난해성은 더욱 완고(頑固)할 것이다. ‘시의 빈곤(貧困)’이란 말이 어느 시대에도 잘 씌어진 말 같지만 오늘날 역시 ‘시의 빈곤’이란 말은 자주 논의되고 있다. 현대라는 시대와 현대의 인간성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면 현대만큼 절실하게 시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현대의 버스’를 미처 타지 못한 지참(遲參)한 인간이 자기의 낡은 시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낡은 시의 방법과 기술로 쓰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세계를 현대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의 빈곤’을 재래(齎來)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희극(喜劇)은 시의 빈곤의 원인이 자기의 낡아빠진 머리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매력을 불변의 규준(規準)으로 삼고 모든 사리(事理)를 단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청각이나 시각 같은 감관(感官)의 세계에서도 또한 논리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대의 진화와 변화를 쉽사리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시의 경우에도 낡은 감상능력을 한도로 하여 언제까지나 이것에 의거하여 오늘 날의 현대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러한 독자에겐 현대시는 다만 차단된 벽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다시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하며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시의 난해성이 불가피한 경향이란 사실에 현혹되어 난해한 시만이 가장 새로운 시인 듯 착각하고 일부러 불가해한 시를 써가지고 자랑으로 삼고 있는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시를 쓰는 사람이 오늘날 없지 않아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말이 시인에게 조금도 자랑이 될 수 없다. 현대시에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있으나 전달되지 않는 불가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빈약한 육체와도 같은 보잘 것 없는 사고(思考)를 감추기 위하여 불투명한 의미를 가진 의상(衣裳)으로 애매하게 감싸가지고 난해성이란 추세를 이용하여 현대시 속에 한 몫 끼어보려는 사이비(似而非) 현대시는 적발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난해성이 현대시의 운명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난해성에 편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시인의 시의 기술이 이러한 난해성을 얼마나 가능한 한도에서 막아내는데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시인들의 노력은 이 현대의 다양성(多樣性)과 착잡(錯雜)한 논리를 어떻게 정돈하고 질서를 세워 나가느냐 어떻게 논리적 이미지를 조형(造形)하여 현대시로서의 발랄한 생명을 지니게 하느냐 하는 방향에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난해성을 일종의 스타일처럼 착각한다든지 심한 경우 난해성을 도리어 과시하는 넌센스는 현대시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통찰과 그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정화(淨化)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韓國戰後問題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한자는 한글로 표기하고, 중요한 한자는 괄호에 넣어 표기하였으며 영어단어는 괄호속에 영문자를 넣었음.
1045    상징적 이미지 - 홍문표 댓글:  조회:236  추천:0  2019-12-14
상징의 의미 1. 홍문표 ​ 상징(symbol)이란 원래 짜 맞추다, 비교하다 등의 어원을 갖고 있으며 명사형은 표시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 헤어질 때 약속의 징표로 동전 따위를 둘로 나누었다가 후일에 만나 이를 맞추어 보는 절차가 있다. 우리의 설화 중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그의 아들 유리와의 부러진 칼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한 예가 된다. 주몽이 부여국에서 왕자들의 시기로 먼저 떠나면서 어린 아들 유리와 칼을 잘라 서로 징표로 삼고 후일을 약속한다. ​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된 뒤 유리는 갖은 고난 끝에 주몽을 만나게 되는데 부러진 칼을 맞추어 보고는 부자의 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칼이란 두 사람의 약속, 두 사람의 관계를 표시하는 기호(mark)나 징표(token) 또는 부호(sign)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부러진 칼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반드시 둘이 결합해야만 온전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이란 어떤 진술이나 이미지가 어느 한 쪽, 특히 나타난 반쪽으로 의미가 없고 나타나지 않은 타면과의 결합을 통하여 완성되는 표현 방식임을 알 수 있다. ​ 특히 흥미 있는 일은 상징(象徵)이란 한자어의 풀이를 주역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상(在天成象)이라 하고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형(在地成形)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징이란 하늘의 징조, 하늘이라는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근본적인 원리를 표상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상징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 즉 불가시적인 관념의 세계를 가시적인 사물, 감각적인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 상징의 근본적인 속성임을 알 수 있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그래서 이러한 상징화의 기능은 오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좀 더 깊게 해석을 한다면 신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신들은 자기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으로서는 그의 무궁한 능력과 섭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은 언제나 징조나 조짐을 통하여 그의 모습과 의지가 계시(啓示)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 계시하고 있는 계시물, 즉 상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을 파악하기 마련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를 이데아(Idea)라 하였고 표면의 세계를 현상이라 하여 본질의 그림자로 취급하였다. 말하자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 지상의 세계, 관념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상징이란 바로 이러한 두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신이나 본질이나 관념의 형이상 세계가 형이하의 세계로 다가오는 방식이 바로 상징이 된다는 말이다. ​ 자연은 하나의 사원, 그 살아 있는 기둥들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간다. 暗夜처럼, 광명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심오한 통합統合속에 머얼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인 양 香과 色과 음(音)이 서로 화답한다. 어린이 살결처럼 신선한 향기, 木笛처럼 은은한 향기, 草原처럼 푸른 향기 있고, - 그 밖에도 썩은 냄새,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정신과 감각의 앙양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닌 향기도 있다. - 보를레르「만상조웅」 ​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보를레르의 시집「악의 꽃」중에 나오는 작품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란 바로 신의 상징이며 그러기에 인간이란 신의 상징인 숲을 거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라고 할 대 그 사원의 주체는 바로 신일 것이다. 따라서 신은 자연이라는 우주적 사원에 계시는 존재가 되며 달리 말하자면 자연이란 신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감각적인 교류를 한다는 것이 둘째 연이겠고 셋째 연에서는 후각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보다 신비로운 신의 상징들이 감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문예사조에서는 상징주의를 사실주의 다음에 등장한 것으로, 낭만주의의 연장으로 본다. 그러나 상징주의 근원은 이 세상의 사물을 관념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플라톤 사상에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플라톤 사상과 관계가 깊지만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실들에 쾌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도덕이나 철학을 강조한 플라톤 사상에 위배 된다. 한편 상징주의자들은 감각과 정서와 상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낭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었으나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려 하지 않고 그것이 희미하게 암시한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 특징이다. 현실적인 사물들이 암시하는 영원히 아름다운 세계는 아무나 볼 수 없고 단지 섬세한 감각과 영감이 부여된 사람만이 직관할 수 있는 신비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단지 감각적인 세계에 대하여는 흥미를 잃었고 루소 등이 가르친 인간성의 아름다움, 그에 기초한 발전 사상, 낙관주의를 깊이 의심하게 되었고 더욱이 당시 새로운 실증주의에 자극 받아 생긴 사실주의에 반감을 느껴 그들 스스로를 퇴폐파(decadanist)라고 자칭할 만큼 다소 절망적, 비관적, 조소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를레르는 전원이 아닌 현대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 향유할 수 있는 신비의 세계를 암시하려고 하였다. 그 세계를 암시함에 있어 그는 세상의 사물과 정신적 세계의 상호 대응관계를 말하고 모든 사물은 다 정신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상적 자아를 비꼬는 태도를 보이고 의미를 배제하면서까지 음악성을 강조한 포우와 무한한 신비의 화음을 만든 음악가 바그너의 예술에 경탄을 보냈다. 그리하여 시의 음악성과 암시성을 통하여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한편 말라르메는 시의 음악성을 극단화하기 위하여 말의 외연적 의미나 문법마저 파괴하는 작업을 하였다. ​ 상징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주지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엘리어트로 이어지고 독일의 표현주의나 프랑스의 초현실에도 접맥이 되고 있다. 우리의 시사에 상징주의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소위 퇴폐적인 낭만주의였으며 특히 황석우의 시와 시론을 많이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한용운이나, 이육사, 윤동주 등에서도 상징적 시법을 발견할 수 있다. ​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터 되는 사막의 수풀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다보면서 - 이 애, 너의 온갖 오뇌, 운명을 나의 끓는 삶 같은 애(愛)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 황석우「벽모(碧毛)의 묘(猫)」 ​ 이 시가 발표될 당시만 해도 난해시니 몽롱체 시니 하면서 논쟁을 벌였던 상징적 수법의 시다. 난삽한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여 더욱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이 시에서 나와 고양이는 모두가 자아의 두 얼굴, 즉 선과 악, 순수와 비순수, 기독과 악마라는 양극적 의식의 상징일 수가 있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이 무엇인가를 대신하고 어떤 가치 개념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능력을 가진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은 상징력을 지닌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상징력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상상력의 최고 형식일 수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보더라도 그것은 일정한 의미를 지닌 음성 기호로서 음성 기호란 의미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상징을 통하여 사고하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 세상에 우주 만물이나 우주 조화가 신의 상징, 조물주의 상징이라면 그러한 만물이나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의식까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인간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 카시러는 상징성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라 하였다. 동물들은 본능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으로 살지만 인간은 그 위에 상징 체계를 더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영위한다. 그 구체적인 실제가 언어, 신화, 예술, 역사, 과학이다. 인간은 어떤 사물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다른 어떤 체계 속에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물을 추상화하고 다른 어떤 체계를 연상하여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바로 상징 능력이며 동시에 생과 시간의 지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선 공간, 즉 환경의 지각은 모든 생물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그들은 모두 공간과 자신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산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처럼 유기적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또 다른 세계를 전망한다. 카시러는 이러한 공간의 지각을 상징의 공간, 즉 추상적 공간이라고 한다. 기하학적 공간이나 예술가가 창조하는 미적 공간이 바로 그런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그런데 그 자체로서 다른 것을 대표하는 사물 일체를 상징이라고 할 때 여기서 대신함의 논리는 기호(sign)의 경우나 은유(metaphor)의 경우나 알레고리의 경우도 같은 논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의 한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과학에서는 물은 H₂O라는 기호로 사용하고 독약이 있는 약품의 표지에는 해골을 그려 놓는다. 그래서 카시러는 신호는 물리적인 존재 세계의 일부요 상징은 의미 세계의 일부라고 하였는데 가로등의 빨간 표시나 교통안내 표지판은 비록 의미의 세계이지만 상징이라 하지 않고 기호라고 한다. ​ 그렇다면 기호는 확정적인 것이지만 상징은 암시적인 것이다. ‘고양이’란 말이 있을 때 이는 고양이라는 동물을 대신하는 음성 기호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눈은 신비롭고 어떤 매력을 지닌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전자는 기호적 사고요, 후자는 상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기호는 그 지시 내용이 정확하고 직선적이다. 거기에는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상징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나 최근 기호론이 발달하면서 상징은 기호의 일부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모든 언어는 의미를 상징하는 기호라는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과 은유, 즉 상징과 비유에 있어서도 다같이 사물의 의미나 정신을 대신한다는 점은 일치하지만 몇 가지 구별되는 점이 있다. 첫째로 상징은 관념만을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지만 은유는 사물을 다른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상징의 경우는 본의는 생략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비유는 본의와 유의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 (1) 그의 머리는 최상의 순금이며 그의 머리는 텁수룩하고 까마귀처럼 검구나. (2) 그들이 포도원지기로 삼았구나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 구약성서 ‘아가서’에 나오는 구절들인데 (1)의 인용에서는 ‘머리는 순금’이라든지 ‘머리는 까마귀처럼’이란 문장으로 사물과 비유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은유와 직유의 방식이지만 (2)의 문장에 나타난 ‘포도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도원은 보조적 이미지일 뿐 원관념이 없다. 그러나 ‘포도원’은 서구적 관례로는 처녀성을 뜻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처녀성의 상실이란 의미를 대신하는 상징적 수법이라 할 수 있다. ​ 둘째로 은유에 유사성이나 비교와 대조의 관계로 대각선이 그어지는 것이지만 상징은 그러한 연결선이 없거나 회피한다. 따라서 은유보다 더욱 상상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웰렉과 워렌이「문학의 이론」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상징은 반복적이라는 사실이다. 은유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면 상징은 은유가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관례화 되어 원관념이 생략되는 상징어만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징이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휠라이트도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우리의 지각 경험 가운데 비교적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요소를 말하며 지각 경험 자체만으로 전달되지 않거나 충분히 전달될 수 없는 더욱 평범한 어떤 한 의미 혹은 일련의 의미를 뜻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존 던의 설교집에 나오는 은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구절을 훼밍웨이가 소설의 제목으로 하면서 당초에는 은유였던 것이 상징으로 된 경우가 그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알레고리(allegory)란 다른 것(allos)과 말하다(agoreuein)의 의미가 합쳐진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문제에다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 빗대어서 말하는 비유법이다. 따라서 본래의 뜻을 숨긴다는 점에서 상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 첫째로 수사적 측면에서 알레고리는 주로 의인화와 문답법의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의인화가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글을 쓸 때 작가가 개념보다는 술어에 구속되어 글을 쓰기 때문이며 또한 언어란 사람에 의해 지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개념에 관계된 명사보다는 사고, 행위, 감정과 관계된 술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의인화가 나타나며, 또한 사람에 지배된 언어는 본질적으로 인격성을 띠게 되어 의인화가 나타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솝의 우화(fable)나 우리의 고전 중 별주부전이나 장끼전 등도 그렇다. 한편 문답법은 사건이나 사리를 추상적인 데에서 구체적으로 명백하게 서술하기 위하여 문답의 형식을 취하는 수사법이다. 이는 지식이 낮은 사람에게 교리나 이론을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기독교에서 특히 예수와 그 제자들, 불교의 화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알레고리는 교훈적 입장을 가지므로 문답법의 형식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의인화와 함께 의동물화(擬動物化)도 일반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난다. ​ 둘째로 알레고리를 의미론적 측면에서 볼 때 현세성과 교훈성을 특질로 갖는다. 알레고리의 현세성은 이원론적 세계인식에서 비롯된다.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현실과 이상을 명백히 구분하는 태도로서, 현실적 인식에 근거되어 있다. 반면 상징은 일원론적 입장이며 현실과 이상을 통합한 실체는 현세성 보다는 신비성을 특질로 갖는다. 따라서 알레고리의 현세성은 분리적인 명백성을 갖게 되고, 상징의 신비성은 다의적이고 통합론적인 모호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명백한 현실인식은 우리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덕, 진리 등의 추상개념을 교훈적으로 지시한다. 왜냐하면 모든 교훈이란 현세의 행위를 그 적용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 테이트는 시를 양분하여 의지의 시와 상상력의 시로 나눠 전자를 알레고리 시와 동일시하였다. 또한 유럽 문학에 나타난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것을 순수한 알레고리라 하였고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알레고리가 필요하게 된다고 하였다. ​ 아버지가 말했다. 보아라 이 그림을 썰매가 나는 듯이 쫓고 있는 것을 마부는 죽어라고 토나카이에 채찍을 하고 나그네는 짐 뒤에서 돌아보며 쉴새없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시방 총구에서 샛빨간 불이 번뜩이는 것을. 아들이 말했다. 한 마리 맞았어요. 아아 또 한 마리 달겨 들었는데 그것도 피투성이로 나뒹굴어졌어요. 밤이군요. 끝없는 광야(曠野)가 눈에 덮혀 있네요. 그런데 나그네는 잡히지 않았을까? 썰매는 어디까지 달려가는 것일까? 아버지가 말했다. 이렇게 밤이 샐 때까지 어제의 뉘우침을 하나하나 사살(射殺)하고 시간처럼 내일로 달리는거야 이윽고 해가 솟는 길 저편에 빛나는 미래와 거리가 나타나는 거야 보아라 언덕 위의 하늘이 벌써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지 않니. - 마루야마 카오루「미래에」 ​ 인용한 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두운 밤, 눈 쌓인 광야에서 이리떼와 썰매를 탄 마부와의 싸움이 전반부에 서술되고 마지막에는 인생에게 있어서도 어제의 뉘우침과 싸우면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을 향해 간다는 교훈을 암시하고 있는 알레고리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의 유형은 크게 제도적 상징과 개인적 상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상징 또는 인습적 상징을 보다 역사적으로 소급하면 원형상징에 이른다. 우선 문자나 기호같은 것은 어느 개인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문화적 약속이나 오랜 인습으로 형성된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어떤 수량을, 한글 자모는 각각 어떤 소리를 대표한다. 화학에 있어서 분자식이나 기하학의 도표나 도형 등도 다 어떤 관념, 생각, 형상 등을 대표한다. 이러한 종류의 상징은 기호라고 해도 된다. 국기, 상표, 학교나 단체의 뺏지, 십자가 같은 종교의 표지 등은 일반적 기호와는 구별하여 제도적 상징이라고 부른다. 집단 공유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적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에게 제도적 상징은 큰 의미가 있으나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의 무의미하다. 이러한 제도적 상징을 프롬은 인습적 상징(conventional symbol)이라 했다. ​ 그런데 인습적 상징이란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 사이에 어떤 내재적 연관성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상’이란 말과 이 말이 지시하는 ‘대상으로서의 책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오직 인습적으로 우리는 그 상징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습적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징은 그 상징과 감정 사이에 내재적 연관 관계를 갖는다. 즉 ‘십자가’는 기독교의 인습적 상징이지만 십자가의 특수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또한 정신과 육체의 상호 관련성까지를 의미한다. 곧 단순한 인습을 초월하여 대상과 상징 사이에 연결 관계가 놓이게 된다. ​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옵소서 조그마한 미끼라도 저는 물겠나이다 날파리나 날빛 하나 놓치지 않고 이것저것 덥석덥석 물겠나이다. (그리하여 저 스스로 죄를 사하겠나이다) - 황인숙「기도」에서 ​ 인용한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물론 종교적 상징이겠지만 넓게는 문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교적 상징이든 문화적 상징이든 그것은 개인적인 표시의 대상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관습적이고 그래서 제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한편 상징은 인습이나 제도에 의해서 굳어진 문화적 상징도 있지만 시인이 창조하는 상징은 인습적인 관계와 무관한 전혀 개인의 상상력을 통하여 상징을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징을 문화적 상징, 우연적 상징, 긴장의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휠라이트는 개인적 상징의 특성은 긴장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실 시에서 십자가나 비둘기 등의 이미지를 사용한다면 관습적으로 이미 그 의미를 알아차린다. 이것은 대단히 반복적이고 자동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는 이미 그 의미가 고정적이어서 정서나 의미의 낯설음을 경험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의 창조적 어법은 상징의 낯설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표면적인 일상성에서의 문제이지 개인적인 상징도 엄격히 말하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적 원형과의 관련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김춘수「처용단장 제1부」 ​ 인용한 시는 제목을 보아 처용을 소재로 한 시다.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달밤에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가 역신과 동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용의 단장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용한 시를 보면 한 사나이가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은 바다란 무엇일까. 우리는 상징의 특징을 다의성, 신비성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죽은 바다의 본의는 난해한 신비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은 김춘수의 전혀 개인적인 상상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개인적 상징이라고 한다. 따라서 개인적 상징의 특징은 암시성, 다의성, 입체성, 문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적 이미지의 한 유형으로 원형적 상징을 들 수 있다. 원형(原型)이란 원래 근본적인 틀이라든지 어떤 제품의 기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발을 만들 때는 신발의 기본 틀에 맞추고 버선을 만들 때는 버선의 본에 맞춰 천을 재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모양의 물건을 만드는 데는 기본적인 틀이 필요하다. 이러한 틀에 의해서 계속 동일한 물건은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도 이러한 기본 틀에 의해서 사고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인습적 상징이나 제도적 상징의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든지 무궁화가 한국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둘기와 평화, 무궁화와 한국이라는 사고의 도식은 지역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결정된 제한된 약속에 속하는 것이지만 원형(archetype)상징은 그러한 특수한 상황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이 오랜 세월 자연과의 교섭 가운데 무의식 적으로 체득된 사고유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과 물의 관계를 보면 물은 모든 생물들의 필수적 요소다. 세척의 기능도 있고, 성장의 기능도 있고, 재생의 기능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본능적으로 창조의 힘이나 정화의 기능, 풍요와 성장의 의미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느 일부의 인간만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의 오랜 교섭 속에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자연에 대한 보편적 의미를 원형적 상징, 또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한다. ​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상징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물질이 서양에서는 물, 불, 공기, 흙이다. 우주가 이 네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4원소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기본적인 물질을 물(水), 불(火), 흙(土), 금속(金), 나무(木)라 하고 이를 오행(五行)이라 하였으며 이들의 상승 작용에 의하여 만물은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음(陰)과 양(陽)의 기(氣)에 의해서 더욱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이는 우주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리나 심리나 운명까지도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시인 예이츠(Yeats)는 4원소설을 자기의 시에 적용하고 있는데 물은 이슬, 파도, 피, 공기는 바람, 불은 별, 불꽃, 대지는 숲으로 확대하여 이미지를 사용하였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하였다. ​ 1. 대지의 두려움→밤 그리고 잠과 연관→어두움의 내포 때문에 惡意 →사탄→사탄의 위치→北 2. 물→눈물, 슬픔, 상실, 죽음→西(해가 지는 곳) 3. 불→정열의 불꽃→사랑의 상징→南(열 때문에) 4. 공기→공기, 떠오르는 해→희망→東 ​ 이 점은 바슐라르의 경우도 유사한데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이들 4원소의 상징적 의미는 물은 죽음과 상실을, 대지는 의지와 휴식을, 불은 정열을, 공기는 움직임과 초월을 표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늙은 사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 옷가지일 뿐이다. 육체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고,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이 곳 聖市의 「비잔티움」에 왔다. - 예이츠「비잔티움 항해」에서 ​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노인이 영혼의 세계의 가치를 모르고 육체적인 쇠퇴만 슬퍼한다면 그것은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육체란 영혼을 감싸는 보잘 것 없는 누더기와 같은 것, 오히려 그러한 육체를 벗어 던지는 영혼만이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인데 문제는 마지막에서 바다를 건너 성시 비잔티움으로 왔다는 말에서 그의 상상력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앞서 지적했듯이 바다는 물의 변형이고 물은 눈물, 슬픔, 상실, 죽음의 상징이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러한 절망의 극복이며 비잔티움은 영원히 성화가 타는 신성한 세계,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상적인 세계, 바로 불과 대지의 원형에 대한 상징이 되는 셈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제식을 비교 연구한 결과 신화 및 의식의 근본적인 양식이 공통된 것을 발견하였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 조상들이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반복하여 겪은 원천적인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고착되어 집단적 또는 민족적 무의식을 통하여 유전된다고 하였으며 그것이 신화, 종교, 꿈, 환상, 상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이미지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결국 원형적 의미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론이기도 하다. 원형상징에 대한 휠라이트, 궤린, 프로이드, 융, 프라이 등의 해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⓵ 휠라이트와 궤린의 원형상징 휠라이트와 궤린은 공간적인 상하 우리와 밀접한 피, 빛, 물, 말, 원, 바다, 강물, 태양 등의 원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상- 성위, 탁월함, 왕권, 지배, 소망, 선, 하늘, 아버지 하- 하강, 심연, 지옥, 무질서, 공허, 대지, 어머니 피- 선과 악, 긍정, 불길, 힘, 금기, 죽음, 처녀성, 탄생, 형벌, 맹세, 전쟁, 재생 빛- 정신, 영혼, 지적, 공간, 불, 공포, 상승, 원, 하늘 물- 정화, 생명, 순수, 속죄, 창조, 신비, 탄생, 죽음, 부활 말- 충동, 이성, 윤리, 정상성 원- 태양, 완전, 진리, 운명의 장난, 윤회, 남녀 결합 바다- 생의 어머니, 죽음과 재생, 영원성, 무의식 강물- 죽음과 재생, 세례, 시간의 영원, 생의 순환, 신의 화신 태양- 힘, 자연의 이치, 의식, 부성의 원리, 시간과 생의 추의 아침해- 탄생, 창조, 각성 저녁해- 죽음 검정- 혼돈, 신비, 미지, 죽음, 무의식, 사악, 우울 빨간- 피, 희생, 격렬, 무질서 초록- 성장, 감동, 희망 훌륭한 어머니- 인자함 땅의 어머니- 탄생, 포근함, 보호, 비옥함, 성장, 풍요 공포의 어머니- 무녀, 여자, 마법사, 마녀, 두려움, 죽음 공주, 숙녀- 영혼의 동반자, 정신적인 완성의 화신 배- 소우주, 항해 정원- 낙원, 천진무구, 순결미, 풍요 사막- 황폐, 죽음, 니힐리즘, 절망 ​ (1)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시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고 한다 - 김윤성「나무」에서 ​ (2)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內面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허만하「데스마스크」 ​ (1)의 시는 나무의 성장하는 속성을 통하여 인간의 상승 지향적 욕망을 보여 주고 있다. 나무는 늘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는 무한히 상승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원형적 상징으로 충분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성장이나 발전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은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들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 (2)의 시는 물의 원형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은 문학 작품에 반복해서 많이 나타나는 원형적 상징의 하나다. 이 물은 창조의 신비, 탄생, 죽음, 소생, 정화와 속죄, 풍요와 성장의 상징이며,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 가장 일반적 상징이다. 여기에 바다와 강이 포함된다. 바다는 모든 생의 어머니, 영혼의 신비와 무한성, 죽음과 재생, 무궁과 영원, 무의식 등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바다에 눈이 내려 소멸되는 장면의 연속을 통해 허무, 비애, 공포와 같은 죽음에 대한 일상적 반응은 전혀 유발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 그리고 영혼의 신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 ⓶ 프로이드의 성적 상징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 욕망이라고 보고 특히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 남성- 지팡이, 양산, 막대기, 나무, 모자, 칼, 총, 수도꼭지, 연필, 넥타이, 뱀, 열쇠, 산, 하늘 등 여성- 구멍, 웅덩이, 동굴, 항아리, 병, 트렁크, 상자, 방, 호주머니, 배, 종이, 책, 테이블, 달팽이, 조개, 교회, 사원, 숲, 사과, 복숭아, 구두, 마당, 셔츠, 물, 바다 등 ⓷ 융의 집단적 원형상징 융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들이 계속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체득된 반복되는 의식의 유형을 원형이라 하였고, 이러한 원형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즉 민족의 전통에 계승되어 문학, 신화, 종교 등에 반영된다고 하였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1044    강소이 시집 해설 댓글:  조회:205  추천:0  2019-12-14
강소이 시집 해설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21세기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현실과의 새로운 마주침이다. 여기서 마주침이라는 것은 사유를 유발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의미한다. 강소이 시인의 세 번 째 시집 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구현될 4차 산업혁명의 놀라운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일반적인 서정성에서 탈피하여 펼치는 가상공간의 이미지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치열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을 읽는 독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에서 "현실 문제를 반영하고 비판하며 문제의식을 제기함이 시인의 사명이기도 하다"는 은사님의 가르침이 내 뇌리에 늘 명징하게 박혀 있어서 물질문명 시대에 생명존중과 초월의식, 죽음, 전쟁에 유린된 생명, 현실 세상의 세태와 비판을 형상화했다. 또한 해녀, 광부, 임란 때 도공들의 애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현장을 탐색하는 여행자가 되어 과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현실의 문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존중을 내세우며 적극 대응을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는 그런 자신의 시작행위를 ”여행지에서는 풍경과 사유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오버랩(over lap)되기 때문에 여행지를 하이퍼시로 쓰는 건 재미있는 정신적 기쁨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제의식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은유, 직유, 이미지, 관념의 사물화, 아이러니(Irony), 패러독스(Paradox), 공감각적 심상, 객관적 상관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낯설게 하기 등의 표현 기교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기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가 여행지에서의 견문과 사유를 하이퍼시로 엮어내는 데서 정신적인 기쁨을 느낀 다는 것은 관념적인 의미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몰입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의 주류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소이 시인의 개성이 창출한 현대적인 감수성과 21세기의 시인정신이 형상화한 신선한 시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의 관점을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라는 데 두고 시편들의 면면을 나름대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십여년 전 중앙일보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이 시집의 첫 시「6차선 도로」는 그런 면에서 독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높은 정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시로 읽힌다. 러쉬아워(rush hour)의 6차선 도로에서 차바퀴에 깔려서 검붉은 내장을 토하고 쥐포처럼 뭉개져버린 고양이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카메라 기자 같이 그 끔찍한 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며 보도(reporting)하고 있다. 그리고 차바퀴에 깔려 죽은 고양이를 ‘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대시에서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있다. 휴머니즘(humanism)을 내세우는 현대인들은 인간이외의 생명체에 대해서 차별의식을 가지고 생명체의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시인은 이 시에서 사실적인 현장의 감각과 함께 오히려 죽은 고양이를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표출하여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깨우침의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출근길이면 산탄散彈처럼/쏟아져 나오는 6차선 도로/검은 등 흰 배 고양이가/도로에 검붉은 내장을 토했다/단말마斷末魔 /아직 놓지 못한 발끝 파르르 떨린다//퇴근길 달리는 6차선 도로/진회색 비둘기 몸통 으깨져/쥐포처럼 빨간 피로 뭉개져있다//먹이를 찾아 도로에 나섰을까/떠나간 짝을 찾아 잠시/6차선 도로에 날아 앉았을까//문명의 톱날 바퀴 밑에/깔린/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6차선 도로」전문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에서도 문명을 상징하는 화물트럭의 바퀴에 깔린 생명체(검붉은 창자)를 시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현대인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정신적(종교, 철학) 시원(始原)의 고향이다. 그러나 문명의 바퀴는 그 시원의 공간마저 침범해 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시인은 살아있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검붉은 창자 도로 위에 터져있다/아직 놓지 못한 숨결/파르르 떠는 발/질주하는 헤드라이트 바닥/찢긴 너의 너덜거리는 살/시뻘건 프린트 자국/밟고 간 바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울리지 않은 요란한 경적소리//20톤 화물트럭에 깔린 햇살 한 조각에서/파드득 /두레박 길어 날아올랐다//( 티베트 고원 꼭대기 찰진 바람을 가르는 경적소리 ...... )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전문 「별 무리 지는 강물」에서는 젊은 여인들의 낙태에 대해 시인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자궁 속에서 태아(胎兒)로 생을 마감하는 인간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문제의식은 생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경시하는 현대인들의 문명(의술)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여 독자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 틀에 묶인 창백한 여자의 손과 발.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 잉태를 꿈꾼 적 없는 밤의 동굴을 지나 자목련 벽에 콩나물 대가리가 위란강을 건너 딸깍 앉았던 곳. 그 문은 철문보다 단단해서 한 달에 한번만 문을 연다는데, 손발 묶인 그녀의 문으로 쏟아져 내렸던 스륵스륵 기계소리 덩이 피. 그런 날이면 하늘의 신들은 눈을 감았다. 뒷골목 허름한 이층집에서 그렇게 별들은 하나씩 떨어졌다. 감나무 가려진 감잎 쓰린 맛을 탓하지 마라. 태씨 아주머니는 감잎으로 별을 하나씩 감싸서 마을버스에 태워 보냈다. 별 무리 지는 강물 위로//--「별 무리 지는 강물」전문 *위란강 : 수정막과 난표면과의 사이 이 외에도 동백꽃의 모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안타까움을 하이퍼시의 구성으로 드러낸「찰라-여수에서」, 해안에서 자살한 시신들이 새벽마다 떠온다는 인천 무의도 명사길의 시신들에게 “무에 그리 서러워 무의도까지 버린 발로 떠왔느냐고 이제는 편히 가라”고. 위무의 마음을 전하는「무의도, 감은 눈에게」등이 생명존중의 시편들로 인상에 남는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21세기에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태어난 하이퍼시는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편을 결합하여 하나의 큰 이미지를 구성하는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을 바탕으로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기존시(旣存詩)의 아날로그(analog)적인 구성의 시와 대조되는 이미지의 망(網)을 형성하는 디지털(digital)적인 새로운 시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형식을 해체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을 기본으로 하는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하이퍼시는 기존시들의 설득적 구조에서 벗어나서 ‘이미지의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시론은 현대철학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와 질 들뤼즈(Gilles, Deleuze)의 리좀(Rhizome)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현대적인 시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하이퍼시는 21세기 최첨단의 사유와 철학이 만들어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새를 낳는 사람들」에서도 시의 구성에서 서술형식의 기존 시와는 다른 이미지들의 결합이 빚어내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이 교직(交織)된 심리적 현실의 보여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로 시작되는 #1은 심리적인 내면의 환상의 세계로, “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가 등장하는 #2는 현실의 의식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1의 “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유리 기억들”은 “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이 안고 있는 이승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사물 이미지로 표출한 시적 몽타주로 이해된다. 그리고 “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구절에서 50대의 사내와 천상의 그녀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심리적 갈등의 앙금이 이 시의 내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이 서사구조의 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 시와 기존의 서술형식의 시가 얼마나 다른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사물인터넷의 4차 산업혁명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1/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 /유리 기억들//영사기는 더 이상 돌지 않았다//#2/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돌아온 꽃잎이/“아앙 아아앙......”/십 수 년 전 무지갯빛 사진 스크린을/애교 띤 콧소리로 더듬어도/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푸른 달무리에 깨물렸던 한 톨 구슬/새를 낳는 사람들//--「새를 낳는 사람들」전문 「스마트폰의 하루」에서도 (F.I), (F.O) 등 영화의 기법을 넣어서 스마트 폰에서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들이 이미지들의 연상과 결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새로운 감각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정신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 폰의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강아지소리, 새소리, 임진왜란 때의 조총소리, 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손끝에 앉았던 나비 등으로 이어지는 불연속적인 단편(斷片)의 이미지들은 모사(模寫)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 가상이 실재같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이론과 연결된다. 그는『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시에서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독자들은 시인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현대문명의 현상을 나름대로 즐기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F.I)//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까만 네모 화면에서/졸라대는 애인처럼/ㄷㄹㄷㄹㄷㄹ 강아지 소리/ㅋㅌㅋㅌㅋㅌ 날개 없는 새소리/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날아오던/ㅁㅁㅁㅋㅋㅋ/ㅋㅌㅋㅌㅋㅌ/내 귓바퀴에 쏘아대는 조총소리/ㅅㅅㅅㅅㅅ허공에 날개 짓을 한다//(O.L)//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마지막 손 끝에/앉았던 나비의 날개마저 포르르 떨린다/책장 넘기는 소리에 너 울리는 줄 몰랐으니/하얀 꽃잎 하나 떨어진다//고구려 벽화에서 살며시 날아 나온 나비 한 마리/내 손바닥 까만 네모 상자 안으로/화살처럼 들어와 박힌다//(F.O)//송골송골 담징의 이마에 맺혔던 까만 밤/화룡정점의 순간에도/눈을 껌벅이는 불면의 아우성//--「스마트폰의 하루」전문 「이즈하라항의 달빛」은 기행시로서 하이퍼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덕혜옹주, 최익현 등 대마도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역사의식과 함께 쓰시마 사내와 연관되는 성적인 이미지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 두 개의 이미지가 하이퍼적인 구조 속에서 시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이 기행시로서 시의 맛을 풍기고 독자와 소통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즈하라항에 보슬비 내린다/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밤이면/성큼성큼 박수소리처럼/노를 저어오던 쓰시마 사내들//이즈하라항에 검은 가오리날개 매 한 마리/날아간다/바다를 유리창 가득 담은/회전초밥집에서 뜨거운 대마도 한잔을 붓는다//덕혜옹주도 낙선재로 돌아가고/최익현도 잠든 밤/검은 파도 소리에/목이 아프도록 시린/ 대마도 하루 빌린 내방엔 밤새/불을 끄지 못했다//수밀도 무성한 숲에/창호지를 찢고 쳐들어오는 쓰시마 팔뚝 달빛/찔레꽃 하얀 내 가랑이도 아팠다// ---「이즈하라항의 달빛」전문 * 이즈하라항: 일본 대마도 남단에 있는 항구 이름 「하얀 지평 너머」는 세 가지의 형태로 응집되어 있는 죽음의 정서가 서사적 모듈(module)을 형성하면서 울림을 준다. 중동건설 현장에서 죽은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가슴에 품고 우는 늙은 어머니, 중동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울부짖는 히잡 여인들의 실성한 모습, 어느 장례식장의 시계소리에서 시신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시선이 그것이다. 끝 부분의 “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이라는 이미지가 엉뚱한 듯하지만 '하얀 나비‘와 죽음을 연결하면 현실과 초월이라는 두 세계의 결합이 보인다. 1.옥양목 보자기에 싸인 배냇저고리, 하얀 기억을 꺼낸다/낡은 옷장 서랍에서 아기작거리듯 배냇저고리,/귀밑머리 하얀 그녀는 보자기 풀어 흰빛 먼지를 쓰다듬는다/중동으로 떠난 아들, 그녀는 흰옷 갈아입고 열린 서랍 배냇저고리 품고 울다 웃는다//2.6 ‧ 25 동란, 폭탄에 으깨진 건물더미, 철근덩이, 찢진 유리 파편들/길바닥에서 언덕배기 카키색 천막 아래/피 절은 천에 덮여 씌운 시신들./하얀 천 들춰보며 울부짖는 여자들 울음소리/“ 아이고, 이것이, 아이고, 우리 복덩이, 복뎅이는 여기에 없어야재 ”/실성한 어미들의 꺼억꺼억 오열, 시신이 널브러진 언덕빼기가/목화구름처럼 아침 화면을 가득 덮었다//3.장례식장 시계소리가 달랑거리는 동안 시신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검버섯마저 하얗게 눈부신 순간을 나는 본다/알코올 솜으로 삭신을 닦아내는 손놀림이 바쁘다 /살아생전 소원까지 닦아내며 염殮하는걸까//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 ------「하얀 지평 너머」전문 * 상화고택 : 대구시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시인(1901~1943)의 옛집. 이 외에도 도쿄여행기-황거, 하비야공원, 도쿄역 등의 이미지를 하이퍼(hyper) 적의 구성으로 조합한「도쿄일기」, 신라여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던 전죽소리, 비닐이 묻힌 땅에서도 죽음을 뚫고 나오는 파릇파릇한 생명의 소리, 월정사 길에서 듣는 산 속의 물소리 등 소리가 만들어 내는 의미를 세 가지의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는 「만파식적-소리가 만드는 세상」, 세월호의 비극적 상황을 하이퍼적 상상으로 엮은「바다에 촛불을 켜주세요」등 다수의 시편들이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로 기존의 시와는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 노자(老子)는『도덕경(道德經)』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도가 도라는 관념에 잡혀있으면 있으면 순수한 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된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의식의 시편들과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들과 함께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편들이 주목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에서 서정성은 기계속의 윤활유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사(敍事) 속의 서정성(抒情性)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에는 조선왕조 시대에 영화로웠던 운현궁의 퇴락한 가을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져 있다. 시의 제목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라는 비유와 “운현궁 마당에/찰깍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의 서사가 시대적인 풍자성을 엿보게 하지만 “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라는 현실 초월의 서정적 여유로움이 이 시의 탄력성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것이 서사 속 서정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겨진 갈햇살이 운현궁 툇마루를 쪼고 있다//가슴이 이랑처럼 패인 여자의 가슴팍에/쏟아지는 햇살은 갯벌 달랑게 걸음이다//해바라기가 졸다간 햇살바라기,/퇴락한 왕조의 으깨진 갈색 노을빛에/꾸벅이는 행랑채//운현궁 마당에/찰칵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막아도막아도 넘쳐나는 논두렁처럼//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주인 없는 툇마루에 걸린 놀/돌담을 넘어 오는 갈잎//-「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전문 「사북역」에서도 서사와 서정의 조화로움이 시의 맛과 멋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폐광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북역에 내려 역사(驛舍)에 핀 들꽃만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노을은 사자의 혀보다 붉은 노을이다. 그래서 그 들꽃과 붉은 노을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이글거리던 광부들의 분노와 희망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이 시에서 서사와 서정이 만들어 내는 시적 울림의 공간이 되고 있다. 사북역에 내려 막차가 올 때까지/기찻길 서너 시간, 역사驛舍에 들꽃들만 가슴에 담는다/폐광이라도 보고 싶다고 편지해 놓고//사자 혀보다 붉은 노을 기차에 가득 싣고/청량리역에 붉게 내려본 적 있는가//낮은 땅, /석탄가루 소주와 돼지고기로 씻어낸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사북역」전문 「유카리나무」에는 시인이 호주 시드니 파크의 유카리나무를 보고 느낀 시적 감성이 “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라는 개성적인 언어에 담겨 있다. 일종의 언어유희 같지만 “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고 술 취한 화가를 등장시켜 서정적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나무의 푸른 정액과 여자를 연결하여 성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올림픽 파크/분홍 플라스틱 포크 하나/잔디에 비스듬히 꽂혀있다/백 미터, 키 재기하는 유카리나무들/회백색 수피樹皮는 무우의 맨살처럼/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연두 빛 유카리나뭇잎 단추들 닥지닥지/나무 위에선 오물오물/검은 귀 흰 몸 코알라가 유카리나무의 푸른/정액을 씹고 있다/지나가던 여자가 분홍 포크로 나뭇잎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그녀의 입안에 푸른 물 고였다/칼로 잘라낸 돼지고지 한 조각/유카리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빛 밝은 한나절//-「유카리나무」전문 이외에도 이승과 저승이 한 매듭이라는 것을 드러낸 「통영점묘-매물도」, 감자탕 골목풍경을 사유의 언어와 결합한 「감자」, 화가 이중섭에 대한 연민과 사유가 담긴 「그의 草家」등 다수의 시편들이 주목되었다.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강소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새를 낳는 사람들』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의 전체를 조감(鳥瞰)하면서 관심이 가는 시편들을 선택해서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이라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감상의 시선으로 해설을 했다. 66편의 시편들 중에서 집중 조명된 시편들은 10편에 불과해서 더 좋은 시편들이 외면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선택된 시편들이 이 시집의 중심에 서 있는 시편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21세기의 중심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명의 구조가 지배하는 시대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시대의 환경에 대응하여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탄생된 ‘하이퍼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몰입을 보여주고 있는 강소이 시인의 시편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의 문명(culture)이 만들어낸 가치판단 속에서 소외된 생명체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과 문제의식을 비롯하여 인간정신의 원적지 훼손에 대한 지적(指摘)이 담긴 시편들이 먼저 선정된 것은 그 시편들에는 시의 형식적인 면보다 더 중요한 ‘시의 영원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정과 서사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시적 감성의 탄력성과 함께 시의 맛과 멋을 내포하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감각과 기법도 중요하지만 시의 근원은 서정성과 서사성의 조화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강소이 시인의 시편에서는 현대시의 이런 중심점이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의 시편들이 시적 균형(均衡)을 아름답게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정진이 얼마나 치열하였나를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21세기에 등단한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강소이 시인의 사유와 감각이 빚어낼 시편들의 새로운 변모와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시집의 해설을 줄인다.
1043    최성철 시집 해설 댓글:  조회:228  추천:0  2019-12-14
최성철 시집 해설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의식을 담은 모더니즘의 언어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최성철 시인은 197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그는 20대의 대학생 시절에 등단하여 1976년 3월에 발간된『시문학』출신들의 첫 사화집『환한 대낮』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는 등단 후 개인사 때문에 적극적인 활동을 유보해 왔지만 2002년에 시집 『간이역에 머무는 아픔』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시작활동의 결과물로『도시의 북쪽』을 상재하고 있다. 이 시집의 서문「찬란한 자줏빛」은 그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안내문의 역할을 한다. 이 짧은 산문은 그가 왜 도시를 자기 시의 중심에 두고 있는지. 그가 지향하는 이상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리고 시집의 제목 『도시의 북쪽』이 상징하는 그의 정신의 고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는 이 글에서 ‘도시의 시’를 쓰게 된 이유를 “도시와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면서 “아무 말 없이 각자 자기 표정을 가지고 총총히 제 갈 길로 사라지는 작은 도시인들의 모습도 좋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도시인을 “행복한 난쟁이”라고 한다. 이런 그의 낭만적인 감성의 시선은 그의 시가 도시를 시의 대상으로 하면서도 도시인들의 환경문제나 생존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도시인 또는 자신의 고독한 존재의 모습을 그리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외부적인 현실보다 개인적인 내면의 세계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어떤 관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낭만적 감성의 빛깔로 채색된 자신의 내면세계를 서술만이 아닌 모더니즘의 언어 이미지(가상현실, 사물 이미지의 집합)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그의 시에 대해서 시를 도구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그들의 편향된 시론으로, 시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인식하고자하는 이들은 그 나름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유혹에 끌려가지 않고 시를 순수한 감성의 언어표출이라는 입장에서 자기 시의 영역을 30여년 지켜온 그의 순수한 시관(詩觀)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시관은 시를 어떤 관념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시집 『도시의 북쪽』에 담긴 87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도시를 자기 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단단한 성벽처럼 의지하고 있는 ‘고독’의 근원을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는 한적한 시골보다 각종 소음과 사람들로 분비는 도시에서 더 절실하게 고독한 존재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고, 그 내면의 실체를 고향처럼 인식하면서 물을 만난 물고기같이 그 속으로 침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의식을 담은 모더니즘의 언어’라고 붙여 본 것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내면의식의 표출과 이미지의 환상적 결합 이 시집의 구성은 4부 (Ⅰ. 오십 너머 마신 술 Ⅱ. 가을을 지나 겨울 속으로 Ⅲ. 담장에 그린 그림 Ⅳ. 내 마음의 놀이터)로 분류되어 있다. 그 분류의 방법은 시의 형식이 아닌 내용에 의한 분류다. 먼저 「사람들은 금요일마다 술을 마신다」를 읽어 보자. 무너지는 서류더미 속에서 오후 내내/인생의 로드맵을 만들고, 또 파쇄기에 넣는다/어느덧 석양은 안개처럼 번지고/전동차는 여전히 소음 속으로 떠나고/어둠은 언제나 뒤척이다가 나타난다/멀리서 사람들이 돌아온다/어둠을 헤치며 흔들흔들 온다/불빛 희미한 사거리/휘청거리는 신호등이 길을 가로막는다/시계는 매번 정각을 맞추려고 숨을 죽이고/일단의 사람들이 폭탄처럼 몰려서서는/무의미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펄럭이는 자동차 불빛 앞에 /몇몇 남은 사람들은/손에 쥔 가방을 구겨버리며 술을 꺼내 마신다/쓱쓱 지우고 싶은 하루/그 금요일마다 사람들은 제 가슴을 열고/몰래 숨겨 놓은 술을 꺼내 마신다//-「사람들은 금요일마다 술을 마신다」전문 이 시 속에는 도시 직장인들의 삶의 현장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연결되어 있다. 서술보다는 묘사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독자들의 시선을 당긴다. 그 중심 이미지는 “어둠은 언제나 뒤척이다가 나타난다” “휘청거리는 신호등이 길을 가로막는다/시계는 매번 정각을 맞추려고 숨을 죽이고” 등 명사+동사 또는 동사+명사 형태의 동적 이미지다. 다방면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이 동적 이미지들은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퇴근 시간의 도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의 화자도 그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이지만 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서 객관적인 위치에서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금요일마다 제 가슴을 열고 몰래 숨겨 놓은 술을 꺼내 마시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밀실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탄생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밀실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태아를 보호하는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과 초조, 정신적 스트레스에 지친 도시인들은 술을 마시고, 그 공간 속으로 잠수하려고 하는 것이다.「새벽의 빛」은 그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고자 하는 시인(화자)의 무의식 속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이 누구인가/창문을 두드리는 이 누구인가/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안개꽃처럼 번져오면/땅에서 시작된 어둠은 /다시 땅으로 사라지고/하늘이 열리고 빛이 내려온다//적막하여 외롭게 서 있는 지평선/드리워진 휘장을 서서히 걷으며/바람도 움직이지 않고/구름도 그 흐름을 멈춘 이 새벽에/저기서 다가오는 이 누구인가/눈부신 손을 내미는 이 누구인가//-「새벽의 빛」전문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이 누구인가” 는 이 시의 화두다. 새벽마다 눈부신 손을 내미는 그 존재는 시인의 무의식 속의 모성(어머니)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자아의 존재다.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한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년 ~ 1981년)은 무의식 속의 자아는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끌고 통제하는 타자(他者)라고 한다. 따라서 그 타자는 본래적 자아의 은유나 환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 온 뒤」에는 그 본래적 자아가 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산을 접고 양지로 나오는 사람들/모두 눅눅했던 제 그림자를 벗고/환하게 피어나는 햇살을 만나러 간다/하늘은 이제 파랗게/나뭇잎에 걸린 물방울을 타고/지상으로 내려온다//그래서 세상은 하늘에서 온 도시/잔잔한 연못 속으로 지하철이 달리고/새소리, 바람소리 직조한 옷을 입으면/사람들은 차가운 분수에 못이 박힌 발을 씻고/마음속에 퇴적한 어둠을 털어낸다/다 보인다, 비 온 뒤에는/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이/무지개 틈새로 환히 다 보인다//-「비 온 뒤」전문 비 온 뒤 먼지가 다 빗물에 씻긴 세상은 “하늘에서 온 도시/잔잔한 연못 속으로 지하철이 달리”는 동화 속의 나라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이/무지개 틈새로 환히 다 보인다”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를 열어준다. 이런 시각의 열림이 이 시에서는 관념에서 벗어난 선명한 사물인식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2009년 겨울 독감」에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환상적 이미지(가상현실)가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미지 속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나타난다. 등산용 지팡이로 땅을 딛으며/어머니가 나타나셨다/어깨에 비스듬히 손가방을 둘러메고/어머니가 나타나셨다/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 백내장/주변을 자꾸 둘러보며, 한 손을 저으며/행길을 건너오셨다/오늘따라 시청 앞 횡단보도가 매우 넓었다/나도 얼른 길을 건너 우리는 한복판에서 만났다/괜찮다, 괜찮아/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고/그래 감기는 좀 어떠냐/또 그렇게 말씀하셨다/괜찮어, 이제/나는 어머니 앞에서 기침을 할 수 없었다/어머니를 한쪽 품에 안고 길을 건너오면서/어깨뼈가 닭뼈처럼 손가락에 잡혀/너무나 면구스러웠다/찬 바람이 콧속에 스며들었으나/기침을 할 수 없었다/통장과 카드를 전해드리고/나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어머니는 또 평상시처럼 한 손을 저었다//-「2009년 겨울 독감」1연 겨울 날 시청 앞 횡단보도에서 만난 어머니. 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 백내장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하시는 어머니. “통장과 카드를 전해드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평상시처럼 손을 젓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는 시인의 절실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다. 어머니는 시인의 정신적 안식처로 인식된다. 나. 도시인의 고독한 서정과 낭만적 피안의식(彼岸意識)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시편의 중심은 도시인의 고독한 서정이다. 연작시 「지하철․1」은 그의 그런 모습을 새벽에 출근하는 회사원의 모습으로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새벽의 징검다리를 건너/발목이 시리게 푸른 공기를 마시며/나는 출근길을 나선다/밤새 잠을 설친 새들은 새까만 머리를 서로 비비다가/졸린 눈으로 제 부리를 제 가슴에 파묻고/길게 늘어진 전깃줄을 바람이 두어 번 흔들고 간다/붉은 보도를 가로막고 선 지하철역 입구/하얀 불빛에 가지런한 계단을 내려서면/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에 밀려온다/아직은 다 깨어나지 못한 공간을 침묵만이 가득 메우고/희미한 전등불빛이 그 침묵더미를 조심스럽게 썰어간다/아무도 없다, 주변에는/항상 그렇게 살아왔다/바람 부는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언제나 혼자였던 사람들/혼자라는 것에 이제 익숙해져서/외로울수록 편안해지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빛나는 어둠이 수북이 쌓인 철로를 보며/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는다/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철로를 우우 구르며/바람과 같이 전동차가 나타날 것이다-「지하철․1」전문 심경토로가 들어있지만 사실적인 이미지가 더 가슴에 닿는다. 새벽에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밤잠을 설친 새들의 모습과 병치시킨 앞부분의 정경은 도시인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하고 피곤한 것인가를 사물의 이미지로 전한다. 그리고 끝부분 “빛나는 어둠이 수북이 쌓인 철로를 보며/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는다/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철로를 우우 구르며/바람과 같이 전동차가 나타날 것이다”에서는 도시인들의 삶은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순응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화자의 ‘빛나는 어둠’이라는 역설이 도시인의 고독한 삶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신선한 감각과 함께 내면적 슬픔을 남긴다. 그러나 고독감이 내면적 슬픔이라고 하여도 시인은 고독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고독의 각질 속에 들어가서 자신만의 낭만적 우주감각을 느끼고자 한다.「항아리 斷想」은 그의 그런 내면세계를 순수한 모더니즘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밤은 깊고 깊은 항아리/가도 가도 끝이 없는 우주가 /그 안에 천천히 내려온다/오늘 밤 별들은 /항아리 가득 부어진 물에 풀어져/한 그림 속 조용한 빛을 이룬다/그 안에선 모두가 정지해 있다/바람이 분다 해도/흔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일 뿐/무슨 상관이 있을 수 없다,/ 서로 간에/편안한 항아리 속/단단히 여문 침묵만이 제 그림자를 안고 서 있다//부동의 항아리 속/별빛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한다/별빛들이 일어설 때마다/그 빈자리를 어둠이 메워간다/나뭇잎들이 떨어져 은은히 쌓이듯이/어둠은 제 몸을 쌓아 빛의 자리를 천천히 메우며/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견고한 안식을 다져나간다/빛의 흔적은 모두 지워지기 시작한다/물어보라, 무슨 미련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건지/다 가지고 가거나, 다 놓고 가거나//이제부터는 이 단단한 공간에/모든 것은 오로지 태초의 제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내 숨소리가 천천히 내 눈을 덮는다//-「항아리 斷想」전문 이 시에서 밤, 항아리, 별, 빛, 바람 등의 언어들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서 시인의 고독한 세계를 치장하는 기표(signifier 記票)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공간은 실제의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시인의 상상이 꾸며낸 가상공간이 된다. 그는 그 항아리의 단단한 공간 속에서 그에게 정신적인 “견고한 안식”의 자리를 다지게 하는 고독의 실체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태초의 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 ‘항아리의 공간’은 선사(禪師)들이 본래적인 자아를 탐색하는 선(禪)의 공간과 통한다. 이 가상공간의 본질적인 풍경은「도시의 북쪽」에서 낭만적인 동영상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단풍은 아름다웠다/차를 한참 달려서 이제는/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찬 숲길/하얀 빛 한 줄기 나무 틈을 밀며/힘겹게 들어오고 있었다/피치 파인이라고 부르는 리기다소나무들은/떼를 지어 하늘을 막고 서서/바람이 불 때마다 탬버린 소리를 냈다/그중에는 키다리 더글러스소나무도 있는 것 같았다/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나를 에워싼 나뭇잎들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햇살들은 바람을 타고 내려와/뽀얀 분홍빛에서 찬란한 자줏빛으로/다시 뽀얀 분홍빛으로 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길을 달리며 나는 그런 색깔로 물들어 갔다//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수십 년 전에 헤어진 동네 꼬마친구가/길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나는 황급히 차를 세웠으나//그 아이는 온 데 간 데 없었다/아아, 이름이 뭐였더라,/그곳에는 한 무더기 코스모스만이 흐드러지고 있었다//-「도시의 북쪽」1,2,3연 승용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시의 세부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적 체험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이 시에서는 시인의 상상, 감성, 정서, 무의식 등에 의해 재구성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가상현실(假想現實) 속의 사건이 된다. 가상현실 속에는 물리적 가능성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판타지(fantasy)의 영상도 들어갈 수 있다. 시인은 차를 타고 도시의 북쪽으로 달려간다. 도시의 북쪽에는 아름다운 단풍이 있고,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찬 숲길엔 하얀 빛 한 줄기 나무 틈을 밀며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탬버린 소리가 난다. 그는 그런 세계의 풍경을 “나뭇잎들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라고, 또 길을 달리면 “수십 년 전에 헤어진 동네 꼬마친구가/길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라고 동화적인 낭만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인용된 시만으로도 ‘도시의 북쪽’이 시인(화자)의 정신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시의 화자가 왜 도시의 북쪽으로 여행을 떠나는지를 알게 한다. 그곳은 시인이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또는 우주의 어둠으로부터 떠나온, 그래서 시인의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이상향의 도시라고 유추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끝부분, 돌아오는 차 안 그의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찬란한 자줏빛 외투를 입은 어둠 하나” 는 시인이 갈구하는 이상향의 분위기와 빛깔을 암시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돌아갈 곳을 찾지 못했다//차의 머리를 돌렸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칠흑 같은 침묵을 헤치고 돌아오는 차 안 내 옆 좌석에는/찬란한 자줏빛 외투를 입은 어둠 하나가 /나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나는 그의 외투에 파묻혀/그 찬란한 자줏빛으로 물들고 싶었다//-「도시의 북쪽」끝부분 다. 시람 사는 풍경의 시편들과 사물성의 감각 이제까지 이 시집의 시편들 중에서 낭만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내용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은 시인의 시선이 외부로 돌려진 시편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본다. 그 외부의 시선 속에는 나와 남(타자)의 두 모습이 들어 있다. 그 둘은 시간과 공간의 틀(frame) 속에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서로 일정한 거리에서 각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독자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것이 시인의 고독감이 그려내는 도시의 풍경이다. 먼저 연작시 「사람 사는 풍경․1」을 읽어보자. 수서로 가는 전동차가 막 떠났다/먼지 섞인 바람이 가슴 가득 밀려오고/나는 낡은 나무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잠시 갈라졌던 공간이 다시 이어지면/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던 한 여자가/우연히 나를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고/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서로 모르는 사람일 뿐/태연스러운 서성임만이/그 여자와 나를 말없이 오갈 뿐/다시 적막감이 이곳을 휘감고 나면/침묵만 한가득 내려쌓이고/잠시 후 전동차가 이 침묵을 깨며 달려와/우리의 공간을 갈라놓으면/우리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어느 역, 어느 시간에 다시 만나도/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일 뿐/저 건너편 낯선 공간에 서 있는/희미한 그림자들일 뿐-「사람 사는 풍경․1」전문 수서로 가는 전동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나’는 영원히 모르는 사람으로 끝나고 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도 없다. 시인은 그 여자와 나의 소통에 대한 어떤 상상도 시 속에 넣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후 전동차가 이 침묵을 깨며 달려와/우리의 공간을 갈라놓으면/우리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어느 역, 어느 시간에 다시 만나도/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는 인연(因緣)을 시의 근원으로 삼는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시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시라고 판단하게 한다. 그것은 이 시가 이성적인 모더니즘의 과학적 태도에 가깝기 때문이다.「사람 사는 풍경․3」에서도 그런 시인의 자세는 변하지 않는다. 농협 양재동 마트에는/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늦은 밤에도 상품 진열대 사이로/손수레를 밀고 당기며/어린 새댁은 이미 잠을 설쳤고/어쩌다 낯익은 얼굴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밤새도록 밀양에서 올라온 단감은/진열대 위에서 졸고/어제 따온 사과는/종이상자 속에서 익어간다/계산대 앞에 줄 이은 사람들이/각자의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리고/지불을 마친 사람들은/하나 둘씩 빠져 나가는데/내 앞 손수레 안에는/한 아이가 잠들어 있다//-「사람 사는 풍경․3」전문 시인의 눈은 농협 양재동 마트의 풍경을 카메라의 렌즈처럼 객관적으로 촬영하고 있다. 그래서 진열대의 단감, 종이 상자 속의 사과, 계산대에 줄지은 사람들, 손수레 안에 잠든 아이들은 각자의 표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냉정한 시선은 그의 시편들이 대상에 대해 어떤 간섭(판단, 주장)도 배제된 영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념에 시달려온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 감각은 독자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는 사물성의 감각이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은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사람 사는 풍경․5」는 위에 인용한 시편들에 비해서 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밝은 풍경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시인(화자)은 철저하게 관찰자 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풍경을 촬영하여 보여주고 있다. 큰 수족관 앞에서/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선 계집아이 둘이/수족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한참 보다가 갑자기 한 아이가/허리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웃음소리에 놀란 듯 지나가던 여자가/수족관 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가던 길을 다시 가고 있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수족관으로 다가갔다/계집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수족관 안에는 커다란 열대어들만 오가고 있다//-「사람 사는 풍경․5」전문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최성철 시인의 시집 『도시의 북쪽』에 담겨 있는 87편의 시편들을 읽어보고 나름대로 해설을 하였다. 이 해설은 이 시집의 전체 시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인용된 시편들은 해설자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의해서 선택된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해설자의 편협한 시선에 의한 해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중심의 줄기는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성철 시인만의 독특한 색채의 내면세계, 고독한 자아의 눈으로 대상을 응시하는 냉정한 자세, 자신의 관념을 순수한 사물 이미지로 표출하고 뒤에 침묵의 여백을 남기는 기법 등을 접하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런 그의 세계는 새로운 창조적인 세계와는 대칭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독자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그들의 사유를 자유롭게 하는 시의 공간을 열어준다. 필자는 그의 시가 앞으로 더 단단히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서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절대의 고독’에 비견될 수 있는 ‘도시인의 고독’의 세계를 확고하게 형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줄인다.
1042    허순행 시집해설 댓글:  조회:197  추천:0  2019-12-14
허순행 시집해설   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에 담긴 60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속에서 무수히 탄생하고 움직이는 무의식(無意識) 속 환상(幻想)의 이미지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로서 감지될 뿐 어떤 의미를 붙여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허순행 시인의 시편들 중 하이퍼시(hyperpoetry)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시편들을 비롯해서 다수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기의(signified)보다는 현실적 사실에서 이탈하여 행위하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의식의 세계 속의 기표(signifiant)로 인식되었고, 그 기표의 이미지 덩이들이 시의 속살을 뜨겁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궁극을‘언어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의 시가 차지할 자리는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시를 열고 감상하는 시론(詩論)의 근거와 키(key)를 문덕수 시인의 시론「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과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1915년~1980년)의『S/Z』(1970)에서 찾아보았다. 문덕수 시인은「내면세계의 미학」에서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지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anarchism)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내면세계에 관한 시론은 무의식의 영역을 1960년대 한국현대시(韓國現代詩)의 새로운 영역으로 도입(導入)하고자 한 매우 혁신적(革新的)이고 개방된 시론으로 인식되고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構造主義)에서 탈피한 롤랑 바르트는『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text,글, 책)에 대해“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말은 현대시는 기의(의미)에 구속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무의미시(無意味詩) 또는 기호시(記號詩)의 탄생을 선언(宣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의 선언 속에는 시에서 ‘진리나 실재’에 대해 기존 관념을 위압적으로 강요하는 전통언어에 대한 반발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消費者)에서 생산자(生産者)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래서 위의 두 전위적(前衛的) 시론은 허순행의 시편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바탕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은 그의 감성이 뜨겁게 흐르는 서사(敍事)와 감각적 표현이다. 그가 즐겨 활용하는 활유(活喩 personification)와 무의식 속에서 분출하는 성적(性的) 이미지의 환유(換喩)는 그의 시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물성의 에너지가 되어 독자들에게 시적 긴장감, 감각적 충격,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집 해설의 표제를‘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라고 명명(命名)한 근거도 거기에 있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시   허순행 시에서는 환상적이고 서사적인 이미지, 성적감각(性的感覺)의 이미지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생명의식(生命意識)이 사물처럼 만져진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외부적인 가치관(價値觀)이나 교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이 아닌 실제의 감각과 무의식의 흐름에 시의 원적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서 순수한 이미지는「귀뚜라미가 울고」라는 시로 알려진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년 - 1886년)의 회화적인 선명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시에서 신선함과 놀라움을 주는 것은 시어의 감각적 결합이다. 그의 시에서 무생물을 동물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활유는 표현의 생동감, 정서의 상승, 시적 긴장감에 큰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시집의 첫 시「보름달」에서는 그의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을 통한‘무의식 속의 나의 발견’을 감지하게 된다. 1연의“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에서는 밤의 활유가 일으키는 신선한 동물적 상상을 느끼게 된다. 2연의 말과 거울과 애(아이)의 이미지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의 상상계⟶상징계의 구조로 해석의 실마리를 잡아보게 된다. “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는 거울(상상)의 세계에서 언어(상징)의 세계로 이동하는 아이의 성장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3연의 “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는 어릴 적 상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 유추되고, 4연의 “벌거벗고 누워도/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라는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행복한 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이 시에서 아이는 화자(시인)의 내면(무의식) 속의 아이로 인식된다.   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온갖 물상을 꺼내 손가락에 옮기고 제왕처럼 호령하던 졸병들 내다버렸어요/퍼즐 속에서 꺼낸 말이 그 애를 끌고 다녀요/조각 하나하나를 끼워 맞춰 입술 단정히 하고 높은 시렁 위에 올려놓은 말들이 그 애를 거느리기 시작했어요/종자처럼 말의 시중을 들었어요/어여쁜 그 애는//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평생을 끌고 다녔던 그림자 받아들고 강물이 강물을 건너가요/보름달이 따라와서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를 쏟아요//벌거벗고 누워도 /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보름달」전문   「꽃샘바람」은 이른 봄날 쌀쌀한 꽃샘바람을 여자로 비유해서 신선하고 놀라운 상상으로 독자들을 자극하면서 생명감이 출렁이는 소설적(小說的) 서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덕으로 올라간 여자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주정꾼을 만나자 사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중략)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밤새도록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적셨다”의 역동, 환상, 성적 이미지는 읽을수록 맛을 낸다. 호흡이 길고 사건이 중첩되는 장편 서사시의 가능성을 예지(豫知)하게 한다.   여자가 왔다// 머리는 갈기처럼 풀어졌고 메마른 얼굴에 버짐이 허옇게 피어있다 마을로 들어선 여자는 아이들이 노는 양지쪽에 끼어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웃었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민 꽃다지가 마른 숨을 토해냈다// 해가 설핏하게 기울자 여자는 갑자기 아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놀라서 울어대는 아이의 목도리를 잡아채 멀리 던지고는 개울물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앙상한 맨발에 핏물이 돌았고 깔깔깔 웃어대는 귓볼이 붉었다 개울물에 비친 그 여자의 속살도 붉었다// (중략)다음 날, 산수유나무에서 그 여자의 혼백이 노랗게 피어났다//-「꽃샘바람」처음과 끝부분   「열사흘 달」도 생명의식을 바탕으로 한 무의식 속의 성적 이미지 속에 여자애들과 사내애들을 등장시켜 짧은 서사구조로 갈무리하면서 시적 감각을 뿜어내고 있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에서 해방되어서 시인이 만들어 놓은 열사흘 달밤의 서사적 환상의 공간 속에 들어가서 놀고 느끼면 된다. 예술의 끝이 천진한 놀이라고 할 때 이 시의 자리는 확실해진다.   은사시나무 잎새들이 허연 정액을 쏟아낸다// 이런 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하얗게 날선 어둠이 젖어들기 시작하면 골목에선 웃자란 신음이 번지고 쓰레기더미 속에선 버려진 울음이 아기로 태어나기도 한다 사내애들은 휘파람을 불고 여자애들은 깔깔거리고 어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달빛이 더 높게 제 몸을 걸러내고 있다/ 소금밭보다도 더 낮게 몸을 웅크린 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귀를 털어내고 음모처럼 드리워진 어둠이 어둠을 껴안은 채 어둠 속으로 든다// 중천을 지나 서쪽 보리암 마당을 지나던 달이 땅바닥에 누운 제 몸에 입술을 대 본다 얕게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둥글다//-「열사흘 달」전문   「꽃잎만 붉다」에서는 4월의 이미지를 종아리에서 기어나 온 뱀 한 마리, 돌단풍의 붉은 혓바닥, 남자애의 허벅지를 적시는 붉은 물 등 시인의 내면적 생명의식이 무의식의 욕망으로 드러내는 기표의 무리들과 만나게 된다. 그 기표의 무리들은 외부세계의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시인 자신의 내부의식이며, 의미로 환원되기 어려운 감성의 환유(metonymy) 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인간의 숨은 욕망의 노출(露出)이라는 면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길이 하루 종일 나를 끌고 다니다가 나무의자에 내려놓았을 때, 종아리에서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돌단풍이 붉은 혓바닥을 내밀어 목덜미를 애무하고 벚꽃은 흔들리며 흔들리며 땅 위에 눕고 己巳年에 태어난 나의 욕망은 제 다리에서 생겨난 돌단풍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등 뒤에 바짝 붙어 몸을 비벼대는 남자애의 아랫도리 사이로 붉은 물이 쏟아져서 허벅지를 적셔도 좋을 일// 낮잠을 깬 4월,/ 나무 그늘 아래로 천천히 멀어지는/ 낙타 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한데/ 도랑물 따라 떠내려가는/ 꽃잎만 붉다//-「꽃잎만 붉다」전문   이외에도 「그네」「장마」「사랑은」「빈집」에서 보여주는 선명한 사물성의 감각적 이미지의 시들은 허순행 시인을 서사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즘(imagism)의 시인으로 평가하게 하는 근거가 될 것 같다.   나. 하이퍼(hyper) 구조의 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인과적(因果的)인 시의 구조가 배제되고 이미지의 비순차(非順次)와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하이퍼 구조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생각을 상상의 네트워크(network)로 퍼져나가게 함으로써 새로운 연결구조의 맛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나 저자(著者)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이미지만으로 끝나는 하이퍼 시의 구조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허순행의 시에서 다선구조는 내면세계의 연상공간(聯想空間)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백꽃」에서는 1연의 붉은 노을, 2연의 사내를 더듬는 형수, 3연의 동굴이 바다를 건너가는 이미지, 4연의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기억, 5연의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는 사막의 이미지, 5연의 흔적을 지우는 어둠, 6연의 여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등의 단절적(斷絶的)인 이미지가 다선구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하이펴 시에서는 연을 단위라고도 한다) 이 다선구조는 시를 의미에서 벗어나서 감각과 감성으로 읽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동굴, 사막, 어둠 등이 의미하는 것은 독자의 유추와 상상과 시적 분위기에 맡기게 된다. 2연의“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의 성적인 감흥(感興)은 빨갛게 피는 동백꽃에 대한 감각적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뿜어내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발현(發現)으로 인식된다.   가지마다 붉은 노을 매달았어요//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숨어있던 동굴이 어둠을 밀어내고/씻지도 않은 몸으로 바다를 건너가요//젖은 머리칼에서/허기진 기억들 흘러내려요//사막이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요/그림자도 없이 어둠은 흔적을 지워요//여자 몸에서/젖은 핏방울 뚝뚝 떨어져요//-「동백꽃」전문   「소나기」에서도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가 선명하다. 1연의 문을 두드리는 밤비 소리, 2연의 말안장에 앉아 채찍을 흔드는 사내, 3연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유월의 장미꽃, 4연의 사내의 꿈과 고시원의 1인용 침대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시 속에 극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그 효과는 인과적 연결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시의 감각과 의미를 함축한다. 이 시에서 사막횡단의 꿈을 가진 사내와 유월의 장미꽃, 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사는 여자, 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가는 사내와 1인용 침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미의 유추(類推)는 독자의 몫이 되어 독자가 의미의 생산자(生産者)가 되는 것이다. 주제의 다양성은 다선구조의 시가 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밤이 놀라 깬다/쏴하고 쏟아지는 비/시원한 바람 한 줄기 흐르고 베란다 문 열려 있어/순식간에 방안 젖어든다//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빗줄기를 뚫고 서쪽으로 사라진 다음/여자들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산다/산을 넘어가는 저녁이 여자들 눈 속 들여다보다가/마음 적막해져서 어둠 속으로 드는데//유월이 장미꽃을 피워 울타리를 넘어 간다/햇살은 나무 그늘 아래 숨었다가 스커트가 짧은 허벅지에 붙어/스마트폰을 따라가고/엉덩이에서 튀어나온 말이 옷을 벗은 채 그 뒤를 따라 간다/그 애들의 시한은 200일/여름이 가기도 전에 기념잔치를 끝낸 사진이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간다//사막횡단이 꿈인 사내는/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간다/책상 위로 수북이 쌓이는 모래바람/1인용 침대가 고시원에 누워서 너덜너덜 늙어간다//-「소나기」전문   「석류」에도 하이퍼(hyper)시의 다선구조의 기법이 보인다. 1연의 한강다리에서 벌어지는 사내의 아랫도리 퍼포먼스(performance), 2연의 세헤라자데의 혀에서 돋아나는 붉은 꼬리, 3연의 간통 혐의의 여자 자하라의 검붉은 피, 4연의 한 낮의 태양의 흔적이 남은 석류의 붉은 속살 등의 이미지가 불연속적(不連續的)인 관계로 이어지면서 시인의 무의식(無意識)의 흐름을 엿보게 한다. 석류의 붉은 빛에서 연상되는 다채로운 성적(性的)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통일된 의미보다는 각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별적인 가상현실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의미가 흥미를 끈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집합에서 발생하는 시의 총체적 효과에 관심을 갖게 한다.   보름달은 황갈색으로 변했고 *세헤라자데의 말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때때로 혀에선 붉은 꼬리가 돋아나기도 한다 바람소리를 엿들은 왕들은 눈먼 소문을 찌르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별빛이 일곱 번이나 죽고도 살아난 바람을 나무에 매단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낮달이 환하게 눈을 뜨고 천 년 밖으로 도망갔던 발자국들이 검은 눈물을 훔쳐 달아나는데/밤새도록 모래바람이 불던 여자의 입술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들린다//*자하라가 건넨 테이프에서 늑대들이 기어나왔다 충혈된 음모가 말 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컴컴하고 빠르게 자라난 혀끝에서 거짓말은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지고 단단해진 거짓말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사내들은 사방에 눈알을 매달아놓고 돌아갔다 눈처럼 하얀 여자가 저녁노을을 끌어다가 제 주검을 덮었지만//-「석류」2,3연 *세헤라자데 :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실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여자, 아내에게 배신당한 왕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준다.*자하라 : 간통 혐의를 씌워 아내를 돌로 쳐 죽이는 남자들을 고발한 영화 (더 스토닝)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에서도 하이퍼 시의 구조가 인식된다. 1연의 그 애의 거미줄에 걸린 말, 2연의 살모사를 묻던 10살 아이가 말의 포식자가 된 것, 3연의 사전 속의 살모사 4연의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보름달을 버렸다는 엉뚱한 생각 등이 각각 하이퍼 시의단위(unit)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인과적 논리의 시와 비교할 때, 이 시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형성한 극적인 영상의 시로 읽히게 된다. 그 공간 속에는 엄마, 아이, 살모사, 보름달, 거미줄 등의 생동하는 이미지가 있다. 이 시에서 말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이미지 속에 암시(暗示)되어 있다.   내 말이 그 애의 거미줄에 걸렸다 끈끈하다/넘어가는 저녁노을이 목덜미에서 뜨겁다// “살모사를 알아? 엄마 ”/10살이 되던 조그만 입으로 종알거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이후로 그 애는 포식자가 되었다 길고 차가운 포박 팽팽하다 밧줄은 두껍고 내 몸은 터질 듯하다 부풀어 오르는 말// 사전 속에는 굵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살모사 (살무사) : 몸빛은 엷은 회색이고 몸통의 측면에 암회색 얼룩무늬가 있으며 몸길이는 70㎝쯤 까치 살무사, 남도살무사, 독사, 殺母蛇 깔깔거리며 웃는 그 애의 입 속에서 속살이 꽉 찬 독사 한 마리가 기어 나온다 시린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문득 중천에 걸린 보름달을 버렸다//-「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전문   이 밖에도「우두커니 앉아 있는 날들은 」에서 보여주는 시간을 매개로 하여 나열하는 이미지의 다선구조, 아들과 아빠의 갈등과 화해를 희곡적(戱曲的)인 대화로 구성한 「내 몸을 떠난 별이 천년을 건너와서 네 발등에 닿는 다면」, 연의 순서를 바꾸어도 시가 구성되고 긴장감을 주는 「보이스피칭」등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   다. 서사적 구조와 가족의 이미지   허순행의 시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사적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가족의 이미지다.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딸의 이미지, 갈등을 조성하면서도 끈끈한 연민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아빠(남편)와 아들과 엄마의 이미지는 우주공간속의 암흑의 물질(dark matter)같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 속에서 전쟁은」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기억이 서사의 구조 속에 생생한 이미지로 담겨있다. 그 기억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의 이미지로 남아 60이 넘은 나이에도 꿈속에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진땀을 흘리게 한다. 이 시속에는 얼굴이 까만 병사를 흠모하는 사촌언니,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머리칼을 자른 딸애가 등장하여 입체적(立體的)인 서사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차올린 허공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가요 날개를 반짝이며 전투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이불 속으로 숨어야 했어요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이불 속은 가마솥처럼 뜨거웠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어둠 속에서 소리에 어두운 귀가 소리를 먼저 들어요//개들이 어슬렁거려요 주둥이에 핏물을 묻힌 채 시궁창을 뒤지기도 해요 사촌언니는 다락으로 숨어들어 얼굴이 까만 병사들을 흠모했어요 벼슬이 붉은 수탉이 뒤뚱거리며 허공을 쪼았어요 연두색 저고리에 엄마가 남기고 간 눈물 자국을 아이는 오래 오래 만져보았어요//-「기억 속에서 전쟁은」2,3연   「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에는 제삿날 죽은 남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1연의 죽어서도 질투심이 남아서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 가는 남편과 그 남편을 연민하는 아내의 마음, 2연의 시인의 무의식 속에 등장하는 피부가 검은 사내애와 붉은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이미지, 3연의 울고 있니? 하고 묻는 죽은 남편과 검은 달덩이의 이미지, 4연의 비명을 지르는 아내와 떠오르는 달의 이미지가 무의식의 단절적 구조 속에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죽어서 학생이 된 그는/죽어서도 질투할 힘이 남아 있어/김이 오르는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갔다는데/마음까지 멈춘 그가 흰 달덩이 하나를/서쪽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까//그 애의 책상은 15쪽에 머물러 있다 글자들은 목소리를 숨겼고 피부가 검은 사내애들은 암막 커튼을 쳤다 운동장을 저벅저벅 걸었던 그 애들도 커튼 안으로 들면 옷을 벗었다 숫자는 넘어가지 않았다 수억 년 전에 사라진 꼬리뼈가 날을 세우고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들이 코 밑에서 가랑이를 벌리고/붉은 뱃속에서 아이가 숨죽여 울고//울고 있니?/학생이 된 그가 누군가에게 묻고 사라지는 밤/창문이 열리고 검은 달덩이 하나가 문 밖으로 던져졌을 때/모든 집들이 등뼈가 휘도록 제 몸을 껴안았다/신음이 빠르게 연골을 빠져나가 그의 등짝을 때렸다//아내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아이는 면사포처럼 하얀 제 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그리고 달이 떠올랐다//-「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전문   허순행의 시에서 딸의 이미지는 왕성한 생명력과 연결된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서 시인은 그 생명력을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라는 감각적 사물 이미지로 만들어서 독자들이 실제같이 느끼고 감지하게 한다.   딸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 지구가 공전하는 소리도 들렸다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는 소리에 흡수되고 그런 밤에는 그 애의 푸른 이마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새빨간 핏물이 흘러넘쳐 바위덩어리를 태웠다 돌들이 숯덩이처럼 투명해졌다/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2연   이와 함께 사망 1주기에 딸과 아내 곁으로 온 남편 혼령의 독백을 환청으로 듣고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보면서 그림자로 보이는 혼령에게 말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그려진「1週忌, 사진」이 가족애(家族愛)를 담은 서사적 구성의 시로 감동을 주고 있다.   아내와 함께 달빛이 하얗게 누워 있네 맞은 편 방에서 딸애도 얕게 코를 골고 있네 어둠은 물에 젖은 무명옷처럼 축축하네 비에 젖어 돌아오면 딸애는 늘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네 밤새도록 그 애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며 아내는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네/ 얼굴 가만히 만져보네 그녀가 몸을 뒤척이네 당신은 긴장하고 그녀가 잠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네 개울물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검은 물속을 걸어나와 어둠으로 앉아 있네 어둠 속에서 그녀 어둠 더 깊어지고 당신은 그림자도 없이 방안을 서성거리네/-「1週忌, 사진」1연 앞부분   3. 나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의 시편들을 읽고 나서 필자는 외부의 가치관이나 공리적 교훈성에 전혀 물들지 않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빛의 굴절에 작용하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현실과 환상의 교직(交織)에 작용을 하는 이미지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지 막연했다. 그래서 무의식의 자유로운 연상 작용의 시적활용을 말한 문덕수 시인의「내면세계의 미학」과‘이상적 텍스트의 언어들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는 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롤랑바르트의 탈구조주의 이론에 대입하여 문제를 풀어보았다. 이런 접근이 허순행의 시를 이해하는 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장기(長技)라고 평가할 수 있는 서사적 구성과 이미지의 감각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서사능력(敍事能力)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어울려서 장편의 판타지 시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단선구조의 시와 하이퍼의 다선구조의 시가 섞여있다. 그 시편들의 내부에는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가족애가 들어있다. 그의 의식은 외부세계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부세계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성으로 인해 21세기에 빛을 받는 동양의 노장철학(老莊哲學)과 연결되는 끈이 되기도 한다. 인용된 시편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시편들이다. 더 좋은 시편들이 선택되지 못하였음을 부기하면서, 허순행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대한다.  
1041    김순호 시집 해설 댓글:  조회:195  추천:0  2019-12-14
김순호 시집 해설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                                                                     심상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김순호 시인의 첫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 』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 시편들의 진솔한 독백獨白의 힘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갔다. 극적장면劇的場面을 보여주는 서사敍事와 상상想像,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적 이미지, 끝 연의 의미의 함축, 등은 개성적이고 세련된 미적 감각을 느끼게 했다. 또 일정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내는 독백의 언어 속에 들어있는 여성적인 사랑과 열정의 정서는 자기응시와 생명의식과 현실인식의 밑바탕이 되어 단편적 이미지들을 뜨거운 감동과 깨달음의 언어로 다가오게 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성적 감각의 언어는 잘 숙성된 술과 같이 독자들에게 시적 감흥을 안겨주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그의 시의 감각과 사유가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공간을 안고 있어서 독백의 언어가 객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시편들은 경험을 밑거름으로 한 시적 에너지의 발산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이 시집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시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서 오랜 세월 잠재되었다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자연스럽게 언어로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김순호의 시를 읽으면서 ‘시는 경험과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한 R.M.릴케의 산문집『말테의 수기手記』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씌어질 것이다. ” R.M.릴케의 이 말은 너무 과장되어 반박을 당할 여지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시의 창작’은 시인의 일생에 걸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창작의 교훈으로 영원히 남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해서 필자는 해설의 제목을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라고 붙이고, ‘사랑과 열정의 언어’ ‘생명의식과 자연’ ‘자기응시의 이미지’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를 소제목으로 해서 시의 내용과 함께 김순호의 시를 매끄럽게 하고 피부에 닿게 하는 언어의 절제와 감각, 시적 구성에 대해서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사랑과 열정의 언어   20세기의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여 현대시를 19세기 낭만주의의 ‘감정의 유로流露’(워즈워드)에서 탈출하게 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현대시에서 대상에 대한 낭만적浪漫的 인식까지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전광판에/그 남자의 집이 있는 동(洞) 이름이 써 있으면/난 하염없이 그 글씨들을 쳐다본다./그 남자는 지금 무엇을 할까/내가 사는 동(洞) 이름을 보면 그 남자도 나를 생각할까/반가움인지 쓸쓸함인지 모를 뒤엉킴 들이/혈관을 타고 발끝까지 퍼져간다.//그 남자의 집/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남자의 집은/꿀벌들이 꿀을 나르며/수없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하고/빨간 모자를 쓴 성냥개비들이 꼿꼿이 서있는/성냥곽을 포개 놓은 것 같기도 한 아파트/멀리서 바라보다 뜨거운 눈에 어른거려/하나, 둘, 층수만 세어보다 돌아서는 집/언제나 풍경으로만 서있는 그 남자의 집//그 남자/달밤엔 달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다고/비 오는 날엔 옥상에 올라/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전화선에 태우고/내게로 내게로 달려오는/그 남자/창밖엔 지천으로 봄이 왔다간다고/울울창창 까맣게 여름이 퍼져간다고/애틋한 가을이 그만 가고 있다고/무릎 끓은 겨울이 긴긴 밤 울고 있다고/소리로 소리로 소리로/풍경을 그려주는 그 남자//그 남자가 사는 집/막막한 열정에 우는 내 영혼이 연기처럼 스며들어가 서성이는 집/내 영혼이 사는 집 //-「그 남자의 집」전문   이 시집의 첫 시「그 남자의 집」은 시인의 낭만적인 꿈이 일상적인 형이하形而下의 언어를 넘어서서 ‘내 영혼이 사는 집’에 도달하는 형이상적形而上的 상승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반복의 언어 속에서 솟아나는 정서의 뜨거운 열기를 감지하게 한다. 그리고 사실적 이미지에 섬세한 언어로 녹아든 여성女性의 풋풋한 감성이 농익은 시의 맛을 한껏 맛보게 한다. “그 남자의 집/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남자의 집은/꿀벌들이 꿀을 나르며/수없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하다는 상상의 언어는 독자들에게 사랑의 감미로운 감각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것은 관념이전의 사물적인 언어의 이미지가 주는 사랑의 원초적 감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감미로운 맛을 더 느끼게 되고 사랑의 진실에 동감하게 된다. 이런 순수한 정서의 전달이 주는 감동은 김순호 시인의 가식假飾이 없는 의식이 허공 같이 자유로운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꽃을 품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가/매화꽃 두런거리는 광양 매화마을로 떠났다//'꽃바람 없는 건 남자도 아니지'//그 남잔 스마트폰으로/꽃불 번지는  매화마을을 /소방사가 물을 뿌리듯 구석구석/찍고 또 찍어 보내왔다//지금/매화꽃 고것들은/송곳 같은 꽃술은 감추고/언뜻언뜻 별 같은 심장을 흔들어대며/눈 시리게 활짝 웃고 있겠지//'앙큼한  고것들'//그러다 어느 순간/치명적인 향기를 내뿜어/봄마다 그 남자/꽃병이 들어 허둥지둥 달려오게 만들 거야//-  「매화꽃 고것들은」전문   「매화꽃 고것들은」에서도 감각적인 사랑의 언어가 생동한다. 남자와 매화꽃이 육감적인 사랑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 시는 시인의 언어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세련되어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꽃바람’ ‘꽃불‘ ’꽃술’ ‘꽃병이 들어’ 등의 언어가 단순한 암시에 머물지 않고 시 속에서 걸림이 없는 낭만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 언어들은 독자들에게 맛깔스럽고 풍요로운 시의 맛을 맘껏 즐기게 하는 시적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혹한을 견뎌낸 송곳 같은 순결/꺾고 싶은  도발적인 자태/너를 보고 떨리지 않을 바람이 어디 있으리//다가가면/사르르 벗어버릴 것 같은/투명한 옷자락/실핏줄 비치는 살내음의 유혹/네 앞에서 미치지 않을 가슴 어디 있으리//도도히 온몸을 불사르며/스러지는 교태의 몸짓/그 장엄한 뒷모습/서럽지 않을 영혼이 어디 있으리//아 바람을  타고 싶다/너와 나/태풍에 실려/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순정한  바람//-「꽃1」전문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주방에선/분수처럼 불기둥이 솟는다/푸른 바다 푸른 산 푸른 들이/후라이팬 속에서 오그라들고 있다//그 죽음을 난 먹는다//이제 알겠다/최후의 그날/내손을 잡아줄 이는/사랑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 아닌/용암처럼  성난 저 불덩이라는 걸//-「불덩이」전문    「꽃1」도 “다가가면/사르르 벗어버릴 것 같은/투명한 옷자락/실핏줄 비치는 살내음의 유혹” 등 성적 감각의 이미지가 꽃을 육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성적감각의 언어와 상상은 김순호 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파악된다. 이런 개성이 애정이나 탐애貪愛에 머물지 않고 더 활달한 어법-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깊고 넓은 자연의 생명력을 담을 때, 전통적인 감성이나 관념의 좁은 울타리를 과감히 부숴버리는 ‘생명의 시’를 탄생시킬 것 같다.「불덩이」는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탐애에서 생명력으로 넘어가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는 시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단서가 이 시의 끝 연 “최후의 그날/내손을 잡아줄 이는/사랑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 아닌/용암처럼 성난 저 불덩이라는 걸 ”에서 발견된다. 이외에도 「애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열병」등이 뜨거운 인상을 남긴다.   나. 생명의식과 자연   그리스 신화에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이룬 마이더스 왕이 금덩어리가 된 사랑하는 딸을 안고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탐욕을 경계하는 교훈으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신화는 돈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를 각성시키는 경종이 되기도 한다. 현대철학에서 인간중심주의humanism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공생인간共生人間이라는 호머심비우스Homo symbious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21세기 인류생존의 활로가 인간이 쌓아놓은 자본資本에 있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현대시에서 ’생명의식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가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20세기 말 독일의 시단에서 태풍을 일으킨 ’생태시生態詩 운동‘이 증명하고 있다. 생태+시로 형성된 생태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보존을 기반으로 한 지구의 생태환경의 보존이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은 시운동으로 세계의 시단에 큰 반향과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생태시의 언어가 인간양심의 소리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싱가폴에선 킹크랩을 먹어야한다고/부둣가 노천식당에 사람들이 구불구불  쇠사슬같이  늘어서있다/자릴잡고 앉아 /빨갛게 삶아져 사람들의 입으로 쓸려 내려가는/킹크랩들의 최후를 본다 //사람들이/가위로 자르고 꼬챙이로 살점을  파내는 형을 집행하고 있을때 /그들의 벌거벗은 살육장에선/긴 다리로 허공을 할키며  질러대는  비명이 천장에 몰려 웅웅운다//부딪혀 꺾이는 소리/수증기 뿜는 소리/포연인 듯 넘실대는 비린 안개가 꽉찬다//싱가폴에선 킹크랩을 먹어야 한다고/먹이사슬의 맨 꼭대기 인간들이 줄지어 몰려온다/그들의 목숨도 줄줄이 끌려온다//싱가폴 부두가 붉디붉다//-「킹크랩」전문   * 킹크랩* 대게와 같은 갑각류* 킹크랩은 대게에 비해 몸통도 더 크고 껍질에 가시가 있으며 색도 대게보다 붉다.   「킹크랩」은 그런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시인은 관념이 아닌 현실 속에서 킹크랩을 먹는 인간들의 행위를 사물적 언어로 생생하게 현장감을 느끼게 표현하여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잔혹한지를 생태적인 입장에서 관찰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가위로 자르고 꼬챙이로 살점을 파내는 형을 집행하고 있을 때/그들의 벌거벗은 살육장에선/긴 다리로 허공을 할키며 질러대는 비명이 천장에 몰려 웅웅운다”라고. 그리고 “싱가폴 부두가 붉디붉다”라는 구절로 킹크랩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감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종로 5가에/반라半裸의 여자그림 광고판이 빙글빙글 돌아간다/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드는  쇼 윈도우/네온사인 불빛이 여자들을 난자 한다 //맞은편  바다횟집/물고기들이 납작하게 엎드린 체/오고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쳐다본다/그러다 뜰 체가 다가오면/피할곳 없는 수족관 벽에 온몸을 부딪치고 부딪치다/거품은 가라앉히고  진한 비린 향을 고요로 남긴다//-「종로5가에 」전문   「종로5가에 」에서도 시인의 눈은 화려한 쇼윈도우에만 머물지 않고, 뜰 체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부딪치던 물고기들의 모습이 사라진 바다횟집의 작은 수족관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날 서울 종로 5가의 단순한 소묘素描이지만 화려한 쇼윈도우의 대칭적 구성이 바다횟집의 수족관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그 장면은 인간과 물고기의 현실을 단편적 이미지로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생명체의 공존의 문제를 화두話頭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주에 혁명이 일어났다//하늘은 흰 천을 풀어/순식간에 세상을 덮어버리고/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엎드려 항복 한다/백기를 흔들며 빠져나간 바람이/그들의 편이 되어 미친 회오리를 일으킨다//하늘은 드르륵 드르륵/거대한 빙산을  갈아 뿌리며  아래로 내려오고/눈을 찌르고 입을 막고 목을 조이며 휘날리는 눈보라/그것은 세상을 뒤엎는 혁명//나는 종종걸음으로 다지듯이 눈을 밟아나간다/뽀득 뽀득 소리 지르며 납작하게 죽어가는 눈의 무리들/땅은 높아지고 덩달아 나도 높게 들어 올려 진다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낙하하는 살아있는 눈덩이들//백주에 혁명이 일어났다//-「폭설」전문   「폭설」은 폭설暴雪을 통해 세상을 개혁하는 혁명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은 흰 천을 풀어/순식간에 세상을 덮어버리고/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엎드려 항복한다”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낙하하는 살아있는 눈덩이들”이란 구절들을 생동하는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문명이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무심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을 평등한 눈으로 성찰하게 한다.     집을 나오니/이게 웬일인가/몽실몽실 솜사탕을 문 벚꽃들이/안개처럼 새절역 거리를 삼키고 있다//내가/사관생도들이/칼을 높이 들어 도열해 만든 터널 속을/수줍은 신부가 되어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내가/목숨을 걸고 불속을 뛰어들어 걷고 있는 것인가/아니면  내가죽어/꽃상여를 타고 떠나는 것인가//아니다/그것은 햇살을 찢어발기는 태평소 소리/열두 발 상모를 돌려대는 서러운 남사당패의 한마당 같은/꽃들의 살풀이춤/꽃들의 이별이다//-「벚꽃 날리던 날」전문   「벚꽃 날리던 날」은 봄의 벚꽃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생명의 환희’를 포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사관생도들이 도열한 터널 속을 걸어 들어가는 신부, 목숨을 걸고 뛰어든 불꽃 속, 꽃상여 등의 이미지가 시인의 화려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끝 연에서는 시인의 마음과 꽃의 마음이 한 덩이가 되어 춤을 추고 있다. “열두 발 상모를 돌려대는 서러운 남사당패의 한마당 같은/꽃들의 살풀이춤”의 장면은 시의 현실은 비현실의 꿈같은 것이지만 그 꿈이 진정한 의미의 현실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시의 현실은 가장 본질적인 생명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다. 자기응시의 이미지    자기응시는 자기도취나 자기탐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크게 다르다. 자기응시는 주관에서 탈피한 객관적 시각에 의한 자기존재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불교佛敎의 선禪은 자기응시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실존적實存的 자기의 존재를 깨닫는 수행법이다.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한 성철成徹스님은 법문집『자기를 바로 봅시다』에서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항상 자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라고 자기존재의 원형原形을 깨닫게 하였다. 김순호 시인의 자기응시는 이런 철학적 사유와는 사뭇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무구無垢한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거리에서/쇼 윈도우를 스치며 언뜻 본 내 모습/아직은 괜찮다 싶다//백화점 화장실 거울은 젊은 여자들이 다 차지하고 붙어있다/그 젊음에 주눅이 들어/나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도둑처럼 쓰윽  훔쳐보며 나온다//그러다 아무도 없을 땐/나도 그녀들처럼 거울로 기어 들어갈 듯 붙어 서서 훑어보는데/씨앗 주머니를 매단듯 늘어진 눈이 그렁그렁 웃으며 답한다/다음 이마를 슬적 들춰서/생선가시처럼 뻗대고  서있는 하얀 머리카락을/검은머리 속으로 꼭꼭 숨바꼭질 시키고/콤팩트를 쇼 윈도우 꺼내 거뭇하게 얼룩진 잡티를 공격한다/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배춧잎을 기어간 벌레의 안간힘처럼 퍼져가는 주름들//샤워를 하고/온 몸을 거울에 비춰본다/촉촉한 물기 때문일까/오. 괜찮다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도도하게 턱을 위로 치켜들고 서있다//-「쇼 윈도우와 거울」전문   「쇼윈도우와 거울」은 중년여성이 자기의 육체적 젊음을 젊은이들과 비교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장면을 솔직담백하게 가벼운 터치로 그리고 있다. 언제나 젊고 싶은 욕망으로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면서 여성에게는 강한 자극을 주는 욕망이다. 이 시는 자신의 존재성을 ‘이성적 의식’(데카르트)이 아닌 ‘무의식의 욕망’(프로이트, 라캉)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더 시적 미감을 풍긴다.   뜨겁게 포옹한다/그리고 화들짝 놀라서 깬다/웬 에로틱한 개꿈!//두 남녀를/바라다보고 있는 게 나인지/안겨있는 여자가 나인지 분간키 어렵다/이왕이면 안겨있는 여자이고 싶은데/바라다본 것도 같으니/꿈에서도 나는 아니다//아침 겸 점심을 먹고/잠시 누웠다 잠이 들었는데/사춘기 소녀처럼 야릇한 춘몽이라니/평생 딱 맞추는 꿈 한번 꿔보지 못했는데/심지어는  태몽조차도//송골송골/얼굴에 맺혀있는 땀을 닦으며/방금  꿈에 보았던/실루엣 같은 영상을 떠 올린다//-「개꿈」전문   「개꿈」에서도 무의식 속의 자기와 만나는 시인의 욕망이 적나라赤裸裸하다. 이런 성적인 욕망의 표출은 이성 쪽에서는 감추고 숨기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의 이성은 위선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꿈속에서도 안겨있는 여자이고 싶다는 시인의 개방적이고 솔직한 욕망의 표출은 외설적 표현으로 문제가 되었지만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의 회복‘ 이라는 평가를 받은 D. H. 로렌스의『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외에도 젊은 연인들이 길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포착하여 “축복받은 그들이 보란 듯이 키스하고 있다”면서 나도 저렇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 「그들이 우리였으면」이 싱싱한 야생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라.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   시는 비현실의 꿈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언어예술이지만 현실 속에서 사는 시인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떠나온 공간은 돌아갈 수 있지만 떠나온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의 조건이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과 시간의 불가역성이라고 한다. 김순호 시인은 불가역적인 시간을 시속에 담아내고 있다.       북촌 정독도서관엔/낡은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닌다/공지사항과 문학 강연 광고는/옛날 영화 포스터 같이 나를 붙들고/어둑한 복도의  CCTV 카메라는 죄도 없이 무서운데/와본 적도 없는 오래된 복도를 걸으며/아득한 유년의 풍경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50 년 전 시립병원에서 죽어간 한 소녀가 웃으며 걸어온다/그림자처럼  복도를 느리게 걸어 다니던 아이/ 어느날 해맑게 웃으며 외출하듯 떠나간 아이/그때도 이렇게 햇살이 너울너울  유리창을 기웃거렸지// 그 애의 침대가 비워지고 /병실가득 뿌려지던 크레졸 냄새가 순간 퍼져온다/와락 달려와 안기는 날카로운 냉기/잊었던 시간들이 때 묻은 벽을 뚫고 있다//무심히 내다본 조각난 유리창 밖/까까머리 소년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다닌다/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 /흙먼지 날리는 쎈 바람도 찢어진 낙엽도// -「 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 」전문          「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는 제목 그대로 시간 속에서 떠나는 것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연민의 정이 물수건같이 촉촉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정독도서관 내부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에 50년 전에 죽은 한 아이의 영상을 넣어서 현재와 과거를 하나로 결합하는 입체적인 이미지를 연출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런 시의 구성을 하이퍼적 구성이라고도 한다. 이런 시간의 영상적 기법은 「저 여인 은 누구인가」에서도 시적 공간의 입체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터널속을 달리는 지하철/거울처럼 까만 차창에  박혀있는 한 여인이/손잡이를 잡고  바라본다/저 여인은 누군가/낯설다//눈을 깜박인다/물처럼 맑은 한 계집아이가 천진하게 웃는다/또 눈을 깜박인다/짙푸른 청춘이 터질듯 풋풋하게 웃는다/다시 눈을 깜박인다/이번엔 절정의 중년이 우아하게 웃는다//흔들리는 지하철/까만 차창 속에 박혀있는/한 늙은 여인이 쳐다본다/손잡이를 바꿔 잡자/차창 속 늙은 여인도 바꿔잡는다/까맣게 말라버린 마른 꽃처럼/만지면 바스라질것 같은 모습/저 여인은 누군인가/낯설다//-「저 여인은 누구인가 」전문     터널 속을 달리는 지하철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여인의 모습이 영화의 장면변화 같다. 그것은 한 여인의 일생을 단편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디지털적인 영상감각의 기법으로 비현실을 현실화하여 시적현실을 창조한다. 현실의 냉혹성을 보여주는「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는 서사적 구성을 현재⟶ 과거⟶현재로 해서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기법으로 서사를 영화의 장면같이 보여주고 있다.   (전략)//'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어려서 엄마에게 배워 간직한 유품같은 노래하나/구전동요인지 이후론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그러나 지금도 완벽하게 부를수있는 노래/오늘도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젖이 떨리며/살갗을 파고드는 냉기처럼 그날이 밀려온다//(중략)//외딴 초가의 문간방/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방문은 국방색 담요로 급히 가려지고/깡마른 몸에 푸르스름한 빛의 남루한 옷차림/신발도 벗지 못한 채 산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지아비와/깔끔하게 핀으로 고정된 신여성풍 까미 머리의 지어미가 마주보고 앉아있다/아이는 밥그릇 위로 빙 돌려 올려놓은/물에 씻은 김치를 밥에 얹어 먹으며 힐끔 거린다//(중략)//-「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부분      이 시에는 1950년 한국전쟁(6.25)로 인해 부모와 헤어진 시인의 아픈 기억이 하얀 서리꽃같이 피어있다. 필자는 이 시를 거듭 읽으면서 그 아픔의 사연을 냉정하게 객관화시켜 영화의 화면처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밝은 이미지로 끝맺음한 시인의 마음을 꽃동산의 빛으로 느꼈다.   3. 나가는 글   필자는 김순호 시인의 첫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 』의 66편의 시편들을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읽고 이해하고 해설의 제목을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라고 붙이고, ‘사랑과 열정의 언어’ ‘생명의식과 자연’ ‘자기응시의 이미지’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를 소제목으로 시를 분류하여 해설했다. 앞의 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김순호 시인의 진솔한 독백의 언어는 독자들의 가슴에 공감의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극적장면劇的場面을 보여주는 서사敍事와 상상想像,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적 이미지 등은 오랜 수련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했다. 특히 그의 시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성적 감각의 언어는 잘 숙성된 술과 같고 시적 감흥과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항아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김순호의 시가 또 어떤 놀라움을 줄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오래 잠재되었다가 나오는 매력적인 시의 이미지들이 더 완숙한 경지에 이르리라 여겨진다.  
1040    김이원의 시집 해설 댓글:  조회:214  추천:0  2019-12-14
김이원의 시집 해설   내면의식 속 ‘나’의 진실을 탐구하는 뜨거운 감각의 언어                                                                                                                            심 상 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김이원의 시집『말에 대하여』의 시편들은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린 자신의 내면의식을 벌거숭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 감각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벌거숭이 의식의 언어 속에는 성적욕망과 몽상과 좌절, 그리고 희망이 돌출하면서 시와 진실 또는 실상(實相)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시편을 통해 인생의 진실은 무엇인가? 시는 인생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붙어 있는 화두는 ‘내 존재의 탐구’다. 그의 시에서 ‘나’는 ‘육체의 나와 정신의 나’, ‘욕망의 나’와 욕망 속에서 탈출하여 ‘욕망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나’로 구분된다. 욕망 속의 나는 무의식(無意識)의 나이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는 의식(意識)의 나라고 할 때, 그 ‘분열된 나에 대한 탐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의 시편들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Lacan, Jacques 1901~1981)의 무의식(unconsciousness) 이론에 대입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관점에서 김이원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시편에서 언어의 무의식적 구조가 중시된다. 그리고 기표(signifiant)보다 그 기표의 내면에 잠겨있는 의미를 더 중시하게 된다. 표면의 언어는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로 변형된 언어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그는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 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성애적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김이원의 시에서 시의 표면으로 솟구치고 노골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어 시적 긴장감과 자극적 감각을 유발하는 성애적 표현도 인생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그의 무의식의 환유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의 시편에서 발랄하고 자유롭게 분출하는 낭만주의적 언어 표현의 내면에도 성적 에너지’가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의 시편들의 언어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이고 야생적(野生的) 생명력을 분출하는 언어가 된다. 이는 어떤 유파(類派)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의 선천적 언어감각의 분출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편을 형성하는 무의식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그의 언어감각은 전통적 서정시들의 통념화(通念化)된 언어구조를 쳐부수는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논리적 이미지, 압축과 생략의 모더니즘적 기법은 그의 시편들의 메시지가 암시적으로 함축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필자는 해설의 제목을 라고 붙였다.   2. 시편 들어다보기   가.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이었네」에서는 삶의 겨울을 느끼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시인(시적자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주먹만한 눈덩이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을 때/나는 자신의 안녕을 한없이 괴로워했었네”라고 독백한다. 그리고 “이미 마음의 눈(目)을 다쳐/보이지 않아/몸의 눈(目)마저 캄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의 시적자아는 자신의 눈 먼 육체와 정신을 “길 잃은 욕망”이라고 한다.   1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 이였네/그때 나는 이미 스스로 계획한 인생을 다 살아 버렸고/그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었네//주먹만한 눈덩이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을 때/나는 자신의 안녕을 한없이 괴로워 했었네//나의 안녕은 수치스러운 것/죽어간 인생들에게 어떠한 안부도 건네지 못했으므로// 2 마음은 우연, 말도 우연 /마음의 눈도 우연, 몸의 눈도 우연/그 겨울 눈꽃 천지의 세상도 우연//우연이 우연을 만날 때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욕망,//하지만 나/이미 마음의 눈(目)을 다쳐/보이지 않아/몸의 눈(目)마져 캄캄해//(길 잃은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죠/불길한 미래의 추억들은 어떠한 인생도/차용하질 못하거든요 )//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이었네」1-2 연   「오오,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에서 시적자아는 “가면과 가발을 눌러쓰고 척추 뼈를 짓누르며/ 전대미문의 쾌락을 요구하는 사내들!”과의 정사장면을 그려내면서 육체적 욕구의 허망함을 토로한다. 이는 길 잃은 욕망의 처절한 몸부림의 환유로 인식된다.   오늘도 면책 특권을 누리는 자칭 천재들의 원반던지기 시합/한창 어지러운데//나는 믿었지/내 정신의, 꽃의, 향기를 /놀라운 가속도의 그 휘발성을//가면과 가발을 눌러쓰고 척추 뼈를 짓누르며/전대미문의 쾌락을 요구하는 사내들!/(흥! 바람은 바람의 상승무드를 타고 바람과 함께 잘도 사라지더라)//나는 흥정했지/하룻밤의 숏 타임 정사를!//어지럽고 습기 찬 계곡사이를/꿀벌의 날개로 붕붕 날으며//밤하늘 히닥닥 요란한 신선놀음에 썩어 가는 건/내 나날의 힘없는 도끼자루들!//오오 내 인생이 단 한번이라도 행복해 질 수만 있다면//---「오오,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전문   이런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은 「시를 써야 한다」에서 정신적 또는 예술적 욕망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써야 한다면서도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 시켜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시를 써야한다/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고상틱한 시?”라고. 그래서 그에게 시란 “무당벌레, 집게벌레, 그것들의 화려한 등껍질”로 비유될 뿐이다. 이는 ‘기의(signifié)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는 자크 라캉의 언어관과 상통한다. 그것은 진실에 닿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시를 써야 한다/살아남기 위해서//라이프 이스 숏, 아트 이스 롱/책들은 친절하다/책들은 X 세대다/X 세대의, X 세대에 의한, X 세대를 위한,//책들은 가르쳐 준다/시대정신에 늦고/문학사조에 어두운 /무식한 예술가에게 나름의 세계관을 가르쳐 준다/그것은 시의 합법적 처세술이다, 테크닉이다//난 바퀴벌레가 아니다/그러니 바퀴벌레 따위와 놀지 않는다/굳어버린 빵 속에서 숨쉬는/바퀴벌레의 속사정쯤으로/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시를 써야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고상틱한 시?//너는 알겠지/내가 밤새워 공부한 세계관/그 세계관이 그려낸 무당벌레, 집게벌레, 그것들의 화려한 등껍질 그래 너는 알겠지/.................알겠지!/..................알아?//손과 손이 인도하는 피아노 건반과/음표사이엔, 그러나 그러나 /그딴 세계관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는 것쯤을?--「시를 써야 한다」전문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 속의 욕망은 모체이탈(母體離脫)의 원초적인 결핍에 대한 충족욕망이다. 이 욕망은 ‘떠나온 곳(잃어버린 곳)을 향한 강렬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의 정신적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적 혼(魂)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그 욕망은 허상(虛像)에 집착하는 번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에서 “불량 지도를 들고서/천국의 여행을 꿈꾸었던 나”라는 구절은 허상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을 꿈꾸는 천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크 라캉이 말한 유아시절의 나르시즘(상상계) 속에 있을까? 아니면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에 있을까? 또 아니면 인간의 언어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실재계에 있을까? 불교 경전『금강경』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형상으로 여래를 찾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이원의 시편들은『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 같이 ‘육체와 정신’을 편력하는 체험적 사유(思惟)를 통해서 천국에 대한 갈망과 허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의 일부 시편들은 인생의 어둠 속을 헤매는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태양을 마주보고 랄랄라 서 있는 자들//당신의 여행은 즐거웠냐고/성급하게 물어 오지만/잘못 그려진 불량 지도를 들고서/천국의 여행을 꿈꾸었던 나여/그럼요/천국은 여자 혼자서 여행하기엔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랍니다/그러니 내 붉은 입술이 흘리는 어떤 말도 당신은 믿지 마세요/그러니/길 떠나온 길 위에서 떠나갈 길 따윌 묻는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범하지 마세요//-「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1부   이런 자신의 존재 탐구 여정은「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에서는 절정에 이른 정신적 생존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 시의 나(시적자아)는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죽음에 처한 처절한 운명의 한 여자로 등장하여 거대한 조직 속에서 소외된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었어//죽음이 제 스스로의 의미로 가득 차/제 목을 조를 때//나는 알지/세계는 다음날,/조간신문에 난 기사화된 죽음을 즐긴다는 사실을”의 구절이 비인간적이고 몰개성적인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의 단면을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부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외된 존재상황을 파닥거리는 벌레에 비유한 야성적인 언어 감각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한다.   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파닥거린 죄?/세상은 너무 어두웠고 너무 너무 어두워/닫혀진 창문사이로 나는 소리 질렀지/질러지지 않는 끓는 쇳소리 넘쳐 흘렀어/캑캑 꺽꺽//여보세요!/여보시죠!/여어기 좀 봐 주시죠!/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었어//죽음이 제 스스로의 의미로 가득 차/제 목을 조를 때//나는 알지/세계는 다음날,/조간신문에 난 기사화된 죽음을 즐긴다는 사실을//아무렴 알지 난/4월과 5월 사이/불법의 공포와 금지된 발광사이에/한 여자 숨 막혀 길바닥에 누운 날/대다수의 시민들은 시청율 60% 이상/TV 심야 영화를 즐겼다는 사실을//아무도 다른 그 누구에게 관심 없었어/모두들 스스로의 율법 속에서/생의 찬가를 높이 높이 불렀어//--「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전문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도 제목부터 충격적이다. 그리고 “번개속 생각들은 천둥에게 괜한 날벼락을 때렸다/아픈 줄도 모르고 피뢰침위에 제 몸뚱이를 눕혔다” 등의 언어들이 보여주는 가상현실 속의 나의 모습도 전율적이다. 이런 전율과 자극의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퍼포먼스(performance)는 생의 허무와 미궁에 대한 존재론적 도전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찾지 못했다/앞서가는 저기 저 검은 구름위의 검은 옷 입은 한 사내/뛰어가 잡지 못했다”라는 구절의 이미지에서 유추된다.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입버릇처럼 중얼거린 허무에 대해/그 정교한 치 떨림에 대해/기술한/그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미궁은 불꽃 속을 날으고/번개속 생각들은 천둥에게 괜한 날벼락을 때렸다/아픈 줄도 모르고 피뢰침위에 제 몸뚱이를 눕혔다//찾지 못했다/앞서가는 저기 저 검은 구름위의 검은 옷 입은 한 사내/뛰어가 잡지 못했다//무한창공의 무한불꽃이 번쩍이는/창세기의 무한질주 굉음 사이로//그렇게 부질 없었다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전문   나. 형이상적 인식-바다의 발견   이런 처절한 정신적 존재상황의 과정을 거친 시인의 갈망은「바다에 갔다」에서 ‘말이 없는 바다’라는 공간을 획득한다. 그는 바다에서 무심(無心)의 의미에 접근하고 “어떤 위안들은/소리 내어 발음되어지지 않은/무형태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에서 바다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옛 바다이다. 그 바다는 무심하게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모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진실은 말의 허상 속에 있지 않고 아무 형태가 없는 침묵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은 위안이 되고 말의 허상을 벗겨내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존재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다에 갔다/내가 아는 몇 개의 바다가 있었지만../오직 그 바다만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나는 그 바다로 갔다//내가 좀 피곤해 있었기 때문일까//바다는 말이 없었다/모래 한 알의 흐트러짐 조차도 여전한 예전 그 바다/그 모습 그대로였기에/나는 그 무심함에 좀 슬퍼졌다//그 무심함 속에서/어떤 쓸쓸함 들은 전혀 공유되지 못함을/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남는다는 것을/나는 조금 이해해야 했다//그리고 생각해 보았다/어떤 무심함이란/가장 최선의 사랑방식일지도 모른다고//어떤 위안들은/소리 내어 발음되어지지 않은/무형태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고//-「바다에 갔다」 전문   이런 ‘바다’의 이미지가 그의 시에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제목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유의 옷을 입고 있는 시,「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 인줄 알았다」는 독백의 언어로 시적자아의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사유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같이 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이다. 물질적 형상에서 벗어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선불교(禪佛敎)의 수도승 같은 시인의 모습이 감지된다. 그것은 이 시의 “태양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몸을 비틀기 전에/나는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사생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시인이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치열한 구도(求道)의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 바다의 이미지이다. 그는 “바다로 배를 띄워야한다/내 헛되고 헛된 희망이 다시 자해의 심한 욕구를 느끼기 전에”라고 한다. 이 바다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쳐진 본질적인 세계로 유추된다. 그것을 깨달은 시적자아는 오도송(悟道頌) 같이 확신에 찬 말을 한다. 그리고 외친다. “안개, 자욱한, 어디선가/오오 누군가의 낮은 휘파람 휘파람 소리/오오”라고.「바다에 갔다」에서는 바다가 위안의 장소라는 의미였지만 이 시에서는 바다의 이미지가 “성분미정의 합성체”라는 통합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바다는 이 시에서 헛된 희망을 주는 허상의 공간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의 이미지로 부각된다.   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인 줄 알았다/길고 검은 역사를 지닌 자궁의 생성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오해였다, 그건, 내, 특유의//태양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몸을 비틀기 전에/나는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사생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어깨 너머로 도끼를 번쩍 휘둘렀다/핏물 고인 채 부릅 뜬 눈동자의 물고기들/사방으로 흩어지며 죽음을 노래하였다//바다로 배를 띄워야한다/내 헛되고 헛된 희망이 다시 자해의 심한/욕구를 느끼기 전에//사람들은 말하겠지/얘야 아서라 참아라//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단다/태양이 뜨고 지는 걸 막을 수는 없단다//오해였다, 세상은, 질컥이는 오해의 푸른 바닷물/염도32%의 짜디짠 성분미정의 합성체였다//지구가 태양을 돌리든/태양이 지구를 돌리든 어차피/내 이미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였다/근심과 희망의 태양은/내 왼쪽 어깨에서/떠서 내 오른쪽 어깨로 지거든//그러니/이 막막의 망망 바다위에서 내 돗단배, 너무나, 외로워 다시 살고픈 욕망과 다시 죽고픈 욕망이/만 오천 번 쯤 휘돌며 솟구치는데//안개, 자욱한, 어디선가/오오 누군가의 낮은 휘파람 휘파람 소리 /오오//-「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 인줄 알았다」전문   다. 주관적 시각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객관화된 시각은 대상을 관조(觀照)하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시도 ‘체험의 시’에서 ‘관조의 시’로 바뀐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는 주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각변화의 언어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나’가 ‘그’로 바뀌는 것도 주관에서 객관으로 전환되는 인식의 변화를 표출한다. 그러나 초점이 맞지 않은 영상물을 보는 듯한 복잡한 인상은 의식의 미분화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심야택시의 경련성에 비유된 그의 모습,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집을 지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 그를 당황하게 하는 인류에 대한 생각, 목적지 없는 열차표 같은 감정의 무책임성, 무용의 동작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 누군가의 사실들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사실대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 등’으로 표출 되는데, 이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돌출하는 무질서한 이미지와 사유 때문이다. 이런 시의 구조는 어디에도 초점이 없는 다시점(多視點)의 시를 탄생시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실험적인 텍스트’로 인식된다.   심야 택시들은 모두 어떤 경련성들을 지니고 있다/발작과도 같은 어떤 힘들을 지닌 채 /제 흔적들을 두려워하듯 /달려가고 있다는 점에서/그것들은 어딘가의 그의 모습들과 아주 흡사하다//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이런 바람들 때문일까/주변의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집을 짓고/사랑을 나누는 모습들을 보게 될 때/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어떤 힘들은 이 거대한 인류구성에 참신한 활력이 되기도 한다/이런 생각들은 그를 당황케 한다, 해서 그는 당황한다/어떻던 그는 그 당황함 들에게 보여 주었던/잠시의 존경심들을 접어 두기로 작정한다//감정이란 원래가 그토록 무책임한 것이다/그는 목적지 없는 열차표를 읽어 본다//그 사소한 무용한 동작에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떠나야 할 곳이 없기에 머물러야 할 어떤 곳도 없다는 사실/누군가의 사실들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그 사실대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대체로 이런 방식의 인생에는 어떤 희망도 살아남지 못한다/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 왔기에 더 이상 잃어야 할/어떤 것도 남아 있지 못한 사람들//그 무표정한 얼굴들이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고 있다면/이것은 명백히 하나의 허위일 것이다//그는 비웃는다 최근의 가장 위태했던 그의 집착을/그는 떠나려 한다 떠날 곳이 없기에/어떤 선택의 망설임도 없는 그/그는 그를 증오한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전문   「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에서 보여주는 교훈적인 어조는 ‘깨달은 자’의 객관화된 발언으로 이해된다. ‘-이여’라는 감탄형 종결어미의 사용이 그것을 증명한다. 끝 구절 “아우성치는 사랑이란 이름의/저 조심성 없는 갈가마귀 떼들을“은 객관화된 이미지로 과거 자신의 모습도 투영(投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집이 있어도 돌아가 누울 곳 없는/이방의 마음들이여//한 때 그대의 앞 발이 정처없이 할퀴었을/기억의 앙가슴팍이여/눈을 떠라/비극이 난무했던 순정의 시대는 갔다//반복은 얼마나 지루할 것이며/증오란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네가 마련한/식탁의 음식들만큼/네 위장은 부풀어 오르는 법//너는 충분히 배부르다/지금까지 먹어 온 상처의 검은 고깃덩어리만으로도//그러므로 거부하라/다시 죽음의 힘을 빌려 달라고/다시 죽음의 장미 향기를 맡게 해달라고//아우성치는 사랑이란 이름의/저 조심성 없는 갈가마귀 떼들을//-「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전문   「지상의 나날」은 열탕 같은 주관에서 벗어난 관조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관조는 객관적 상상을 만들어내고 질서가 잡힌 인식의 공간을 열어 준다. 시인은 과거회상의 상상적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정신적 성장과정을 형상화 하고 있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와 대조되는 선명한 이미지는 내면의식 속 ‘나’의 진실을 탐구하는 깊은 사유와 함께 시적미감을 높이고 있다.   지상엔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나는 땅속에 있었다/무풍지대의 평화와 안락을 즐겼다//태양은 따스하게 내려 쪼이고/사람들은 한가로웠다/아무도 땅위의 말 따위에 근심하지 않았다//꿈속에 가끔씩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누군가의 음울한 휘파람소리도 따라 들렸다/내 파리한 목덜미 뒤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느다란 비명이/새어나왔다//나는 눈을 떴다/참을 수 없었다//서서히 지상으로 기어 올랐다/동그랗게 모은 나의 눈과 귀사이로/바람이 휙휙 무리져 지나쳐 갔다/간혹 번개처럼 스치는 묘비명을 읽었다//나는 기다렸다//다시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 갈/지상의 무시무시한 칼의 나날//-「지상의 나날」전문   「오늘 밤은 오늘 하루보다 분명 더 길고 길 것이므로」,「지친 자들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는다」,「나는 처녀야」 등의 시편도 성애적인 이미지의 객관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탐구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3. 나가는 글   필자는 김이원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읽으면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언어감각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성애적 이미지를 무의식 속 욕망의 환유라는 관점에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대입해서 그 비밀을 풀어 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의 변화과정을 가.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 나. 형이상학적 인식-바다의 이미지, 다. 주관적 시각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이 분류는 임의적인 것으로 필자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붙어있는 화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이 탐구를 위해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환유의 언어로 내면적 욕망의 실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사생결단의 구도의 과정을 거쳐 존재의 해방을 의미하는 바다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자크 라캉이 말한 ‘기의의 심연(深淵)’을 뛰어 넘어 실상에 도달하려는 언어의 치열한 몸부림이 얻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불교경전『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상투적인 언어에서 벗어나 시 속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투영하여 집요한 내면탐구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서 김이원의 존재는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특이한 개성의 시인으로 평가될 것으로 생각한다.  
1039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11 댓글:  조회:266  추천:0  2019-11-01
홍문표 시창작강의 노트 45 광복이후 모더니즘 시의 전개 ​ 홍문표 ​ (1) 광복기 모더니즘 ① 광복 공간기 시단 ​ 좌파시단- 오장환 이용악 설정식 박아지 임학수 등 우파시단 -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신석정 유치환 서정주 등 중간파시단 - 김광균 구상 김춘수 조병화 박인환 김종길 김규동 전봉건 등 ​ ② 김기림의 모더니즘 퇴조와 절필 초기 - 모더니즘 시론의 대표자, 새로운 감수성 주장 (1930) 중기 - 모더니즘의 위기, 전체시론 강조(친일) (1939) 후기 - 시와 정치의 결합. 모더니즘 시 퇴조 (1945) 1947년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를 발표하고 절필 ​ 철쭉꽃 피면 강화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좋아하던 ‘존슨’ ‘브라운’ ‘테일러’와 맥주를 마시며 저 세상에서도 흑인시를 쓰고 있느냐 ​ 해방후 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 땅 진흙밭에 너를 묻고 온 지 스무 날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 -김기림“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 없고나”1947 ​ ​ ③「신시론」동인과「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 모더니즘 시가 새로운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은 1948년 김경린, 박인환, 등이 중심이 된 ‘신시론’ 동인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1948년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하고 1949년 동인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을 발간한다. 신시론 동인은 1950년 『신시론』을 『후반기』로 개제하고 조향, 이한직 등이 새로 참여한다. ​ ④ 시인, 시민, 도시 ​ 시민들은 샘물이 흐르는 도심지대를 향하야 질주하고 있었다. - 김경린「나부끼는 계절」 ​ 폭풍이 머문 정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력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 박인환「열차」 ​ (2) 19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 ① 모더니즘시의 새로운 모색 1930년대의 열정 1940년대의 퇴조 -「신시론」,「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50년대의 새로운 모색 -「후반기」동인 6.25와 폐허의 도시, 현대인의 불안, 새로운 존재인식 ​ ② 후반기동인 1949년 김수영, 김경린, 박인환 등이 모더니즘을 표방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을 펴내고, 그해 이한직, 조향, 박인환, 김경린 등이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후반기’ 동인을 결성한다. ‘후반기’ 동인은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활동했다. ​ ③박인환, 김규동, 김경린의 전쟁과 도시 ​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박인환「목마와 숙녀」에서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피 묻은 육성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 기계처럼 작열할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 김규동「나비와 광장」에서 ​ 오늘도 성난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 김경린「국제열차는 타자기처럼」에서 ​ 목마와 숙녀 - 산문적 리듬감, 전후의 서울, 불안, 허무 나비와 광장 - 6.25와 상처에 대한 관심, 신선한 발상 국제열차는 타자기처럼 - 도시의 역동성 ​ ④ 조향의 초현실주의와 데뻬이즈망 ​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 -왜그러십니까? ​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바다의 층계」 ​ 데뻬이즈망이란 자리바꿈, 곧 전위를 의미한다. 조향에 의하면 전위시키는 방법으로는 서로 관계없는 것들을 한데 갖다 붙이는 방법 ​ ⑤ 김춘수의 존재탐구와 언어중심주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 ​ 언어는 존재의 집 - 하이데거 언어가 있기에 사물이 존재한다. - 언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모더니즘, 존재탐구 소쉬르,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기표의 독립성 - 무의미시의 계기 ​ ⑥ 김수영의 반이성적 아이러니 시작 ​ 흥분할 줄 모르는 나의 생리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서 있는 서가와 서가 사이에서 도적질이나 하듯이 희끗희끗 내어다 보이는 저 흰 벽들은 무슨 조류의 분뇨와도 같아 ​ 오 죽어있는 방대한 서책들 ​ 너를 보는 설움은 피폐한 고향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예언자가 나지 않는 거리로 창이 난 이 도서관은 창설의 의도부터가 풍자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립도서관」에서 ​ 책의 죽음 - 이성의 죽음 책 - 근대 - 전통에 대한 아이러니 역사적 현대의식 - 참여적 관심 ​ (3) 1960년대 모더니즘 시 ① 1930년대 시단 순수시 - 박용철, 김영랑 카프시 - 임화, 권환, 이용악 모더니즘 - 이상,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 ② 1945년대 문단 좌파시, 우파시, 중간파 모더니즘 퇴조 ​ ③ 1960년대 시단 참여시 - 김수영(모더니즘), 신동엽, 이성부, 조태일, 최하림, 김준태 순수시 - 김춘수, 전봉건, 김구용, 김종삼, 김광림 (모더니즘) 전통시 - 서정주, 박목월, 이동주, 박재삼, 이형기, 박용래 ​ ④ 4․19와 참여시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하늘을」 ​ 4․19직후 작. 문학의 현실참여. 정치참여고취 ​ ⑤ 김춘수의 무의미 ​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김춘수 「처용단장」 1-4 ​ 언어-기표(응성기호)와 기의(의미) ​ 기표만의 언어, 의미 배제 관념적인 참여시, 목적시 반대 - 관념의 공포- 서술적 이미지 추구 비유적 이미지(의미 대리) - 서술적 이미지(의미 배제) - 순수시 자유연상 - 대상의 사라짐 액션페인팅 - 기하학적 추상에서 추상적 표현주의, 행위중심(퍼포먼스), 글쓰는 행위. ​ ⑥「현대시」동인들의 다양한 모색 ‘현대시’ 동인은 1962년 처음 발행된 시집 『현대시』1집부터 1972년 마지막 발행된 26집까지 10년 동안 26권의 동인지를 펴내면서 60년대 우리 모더니즘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전봉건, 김광림, 김요섭, 김종삼, 박태진, 주문돈, 신동집, 허만하, 김하림, 민웅식, 장만영, 김수영, 박양균, 한성기, 이수익, 정진규, 장호, 박남수, 김춘수, 김윤성, 등 ​ 월광의 물 비늘과 비늘이 부서지는 라벨의 비단 손 가을의 차고 선명한 물의 월광 광란의 여름을 전송하고 그는 돌아온다 성으로 바람이여 빈 천정을 울리는 월광의 물결소리 - 김형태의「월광」에서 ​ 현실이 탈락한 추상의 공간 - 시인의 내면 자유연상, 초현실주의, 밝은 환상, 환각적 유희. ​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이승훈「사물A」 ​ 젊은 시절의 내면풍경, 어두운 환상, 환각적 유희. ​ 내가 한마디의 말을 알았을 때 처음 내가 한마디의 말을 알았을 때 나의 나무엔 슬기의 이파리 하나 피어나고 점 점 그것은 예지의 숲을 이루어 가던 그러한 나의 영광이여, 집중의 때여 - 정진규「집중」에서 ​ 나뭇잎이 처음 피어나는 순간의 감각, 황홀감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사랑의 ​ 풀잎되어 젖어 이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 이수익「우울한 샹송」 ​ 상실한 사랑과 현대인의 우수 - 내면풍경 - 우체국 ​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가등 붉고 따뜻한 가등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 - 정현종「교감」 ​ 사물들의 감각교환, 사물의 친화 - 욕정, 에로티시즘 ​ 고요한 환상의 출장소 뜰,뜰의 달콤한 구석에서 언어들이 쉬고 있다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언어들 중의 몇몇은 위험한 나뭇가지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떨어져죽고 나의 고장난 수도 꼭지에서도 뚜욱뚜욱 언어들이 죽는다 - 오규원「환상의 땅」 ​ 언어의 휴식과 죽음. 추상과 사물에외 언어의 죽음 ​ (4) 1970년대 모더니즘 시 ① 1970년대 시단 민중시 - 김지하, 조태일, 신경림, 고은, 최하림, 이성부, 정희성 전통시 - 조정권, 나태주, 이성선 외 전통적 서정시인들. 도시적 감수성의 시 (모더니즘 계열) 언어시 - 김춘수, 황동규, 김영태, 이승훈, 정현종, 오규원. 도시시 - 감태준, 김광규, 이성복, 최승호, 정호승. ​ ② 도시적 감수성 -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경계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 가고, 어디서 불볕에 닳은 매미들 울음소리가 간간이 흘러 왔다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은 거기, 꿈을 이어 담을 치던 집 폐허에서 못을 줍고 있었다 ​ 그들은, 꾸부러진 못 하나에서도 집이 보인다 헐린 마음에 무수히 못을 박으며, 또 거기. 발통이 나간 세발자전거를 모는 아이들 옆에서, 아이 들을 쳐다보고 한번 더 마음에 못을 질렀다 - 감태준 「몸바뀐 사람들」에서 ​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된 삶 - 리얼리즘 상실한 자아, 분열된 삶 - 모더니즘 ​ 한줄의 시는커녕 단 한줄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들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 김광규 「묘비명」 ​ 삶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 리얼리즘 낯선 언어형식의 추구 - 모더니즘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신경림 「농무」에서 ​ 대상 - 집단, 민중 역사적 주체, 통합된 자아. ​ ③ 이성복의 새로운 모더니즘 실험 ​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별의 아들과 고관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없이 해고 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 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캬바레에서 춤추던 유부녀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문단에 데뷔하거나 미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 오세영 - 파격적 산문시, 회화의 직접 도입 대위법적 이미지, 내면 독백 형식의 자유연상, 언어 실험 이승훈 - 그는 기존문법을 파괴하고, 우연의 미학을 강조하고, 유물적 초현실주의를 지향 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무슨 결론이나 해결이나 종합이 아니라 끝없는 부정이고, 이 부정이 아방가르드적 요소가 된다. 그가 보여주는 이런 특성은 80년대에 이른 바 해체시라는 용어를 낳는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6 1980년대 이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홍문표 ​ (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①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리얼리즘 - 총체성의 회복 (이성중심) 모더니즘 - 질서회복(이성중심) 포스트 모더니즘 - 질서와 총체성 부정 (이성중심 거부) ​ ② 작가란 무엇인가 모더니즘 리얼리즘 -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 포스트 모더니즘 - 작가의 특권 부정, 작가의 죽음, 독자 중심, 다원주의 ​ ③ 진리의 현현이 가능한가 모더니즘 리얼리즘 - 진리의 현현(epihany) 가능, 중심, 절대 신봉 포스트모더니즘 - 진리는 계속 유보됨. 디페랑, 계시록적 시대. ​ ④ 확실성의 문제 모더니즘 리얼리즘 - 언어에 의한 확실성 포스트모더니즘 - 구심점, 축, 절대적 확실성 없음 ​ ⑤ 양극화의 극복 리얼리즘 - 예술의 이념화, 모방, 산문적 모더니즘 - 예술의 형식성, 차이, 시적 포스트 모더니즘 -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양극성 초월 ​ ⑥ 제임슨의 포스트 모더니즘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문화형태로 규정하고 있다. 초기 시장자본주의가 사실주의를 독점자본주의나 제국주의가 모더니즘을 등장시킨 것이라면 다국적 자본주의 형태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미학적 대중주의, 역사의식의 빈곤, 의미의 해체, 행복감, 비판적 거리의 말소, 반영이데올로기의 약화를 들고 있다. ​ (2) 1980년대의 해체시 운동 ① 해체시의 의미 80년대 우리 시를 지배한 건 리얼리즘과 해체이다. 민중시나 해체시나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현실 부정이고, 현실 파괴이고, 현실을 지배하는 질서 파괴이고, 질서를 구성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죽이기이다. 그러나 방법은 다르다. 리얼리즘이 형식을 지킨다면 해체시는 형식을 파괴한다. ​ 80년대 해체시의 감각은 우선 ‘광주’로 대표되는 한국 근대성의 파산에 기초하고 있다. 60년대 이래의 근대화가 이룩한 한국 산업자본주의와 그 문화인 한국 모더니즘이 모순의 한 극점에 이른 것이 ‘광주’로 시작된 80년대라 할 수 있다. 해체시는 80년대가 보인 한국 근대성의 끔찍한 얼굴에 직면하면서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몸짓에서 생성되었다. 전면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해체시는 전위적이다. ​ ② 해체시의 전략 -형태파괴 그러니까 형태파괴의 전략은 1) 우리 삶의 물적 기초인 파편화된 모던 컨디션과 짝지워진 ‘훼손된 삶’에 대한 거울이며, 2) 파시즘에 강타당한 개인의 ‘내부파열’ 에 대한 창이며, 3) 의미를 박탈당한 언어의 넌센스,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교란이었으며, 4) 검열의 장벽 너머로 메시지를 넘기는 수화의 문법이었다고 할까요? ​ - 황지우 「끔찍한 근대성」 ​ 오늘 오후 5시 30분 일제히 쥐(붉은 글씨)를 잡읍시다 벽4 1984년은 쥐띠 해이다 재앙의 날들이여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다오 - 황지우「오늘 오후 5시 30분 일제히 쥐를 잡읍시다」 ​ 벽보라는 일상의 세계와 시적 상상력의 경계해체. 시니피앙의 강조, 콜라주기법(다다이즘) - 신문기사인용 인쇄효과 (미래파) ​ ③ 유물적 초현실주의 바퀴벌레들이 동요하고 있어 꿈이 떠내려가고 있어 가라앉는 산, 길이 벌떡 일어섰어 구름은 땅 밑에서 빨리 흐르고 어릴 때 돌로 쳐죽인 뱀이 나를 감고 있어 깨벌레가 뜯어먹는 뺨, 썩은 나무를 감는 덩굴손, 죽음은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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