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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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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7) 댓글:  조회:140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7)     두번째 노래(13)   나는 나를 닮았을 영혼을 찾고 있었는데,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땅의 구석구석 뒤졌으나 나의 끈기는 헛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성격을 지지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침이었다. 태양이 아주 웅장하게 수평선에 떠오르고, 바야흐로 한 젊은이가 내 눈에 떠올랐으며, 그의 출현으로 그가 지나는 길에 꽃이 피어났다. 그가 내게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너에게 왔다. 나를 찾는 너에게. 이 행복한 날을 축복하자----" 그러나, 나는 "꺼져라.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나는 네 우정이 필요없다---" 저녁이었다. 밤이 그 베일의 흑색을 자연 위에 펼치기 시작했다. 모습이 겨우 분간되는 아름다운 여자 하나가 역시 내게 황홀한 마력을 펼치며, 나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감히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나는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네 얼굴의 특징을 낱낱이 분간할 수 있도록. 별빛이 충분히 밝지 않아서 그 거리에서는 그 특징까지 비추지는 못하는구나." 그러자,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두 눈을 내리깔고 잔디밭의 풀을 밟으며 내 곁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선량함과 의로움이 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나는 알겠다. 우리가 함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너는 여러 여자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조만간 너는 내게 사랑을 바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내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시라도 내가 너에게 불충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도 마음 밑바닥까지 신뢰를 모아 내게 자신을 바친 여자에게. 나도 그만큼 마음 밑바닥까지 신뢰를 모아 나 자신을 바친다. 그러나 네 머릿속에 새겨 잊지 말라. 양과 이리는 서로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성에 들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까지도 그렇게 혐오하며 내치던 나에게,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겠는가! 나에게 필요한 것,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내 정신의 여러 현상을 철학이 권장하는 방법에 입각하여 엄정하게 이해하는 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바닷가의 바위에 앉았다. 배 한 척이 이제 막 돛이란 돛을 모두 펼치고 이 해역에서 멀어져갔다. 감지하기 어려운 점 하나가 이제 막 수평선에 나타나더니, 돌풍에 밀려, 급속도로 커지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태풍이 내습을 시작했고, 벌써 하늘은 거의 인간의 마음만큼이나 흡족한 검은 빛으로 변해 어두워졌다. 거대한 군함인 그 배는 해안의 바위 위로 쓸려가지 않으려고 이제 막 닻을 모두 내렸다. 바람이 사방에서 광포하게 씩씩거리며 돛폭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천둥소리가 번갯불 한가운데서 터져 나왔으나, 토대 없는 집, 저 움직이는 무덤 위로 들려오는 비탄의 외침보다 더 높을 수는 없었다. 물 더미의 돌무덤이 닻의 사슬을 끊지는 못했어도, 그 요동이 배 옆구리에 반쯤 물길을 열어놓았다. 엄청난 구멍이다. 산처럼 갑판을 덮치며 거품을 뿜고 밀려드는 짠물 더미를 펌프질로 물리치기는 역부족이다.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다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장엄하게. 폭풍과 번쩍이다 멈추는 번갯불과 더할 수 없는 어둠의 한가운데서, 배에 갇힌 사람들을 그대들도 아는 절망에 파묻으며, 침몰하는 배를 보지 못한 자는 인생의 변고를 알지 못한다. 마침내 배의 양 옆구리로부터 끝 모를 고통에서 비롯한 전원 합창의 비명이 새어나오는데, 바다는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두 배로 늘인다. 인간 능력의 포기가 내지르게 하는 비명이다. 저마다 체념의 외투에 싸여 제 운명을 신의 손에 맡긴다. 양떼처럼 궁지에 몰린다.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아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장엄하게. 그들은 하루종일 펌프질을 하였다. 헛된 노력이다. 어둠이, 짙게, 움직일 수 없게, 다가와, 이 우아한 광경에 정점을 찍는다. 일단 물에 잠기면 더는 숨을 쉴 수 없으리라고 그들은 저마다 생각한다. 제 기억을 아무리 멀리 거슬러 보낸다 한들, 어떤 물고기도 제 조상으로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삼 초라도 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가능한 한 가장 오랫동안 숨을 쉬지 말자고 스스로 격려한다. 그가 죽음에 던지려는 것은 바로 복수심의 아이러니---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아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장엄하게. 배가 침몰하면서 너울이 너울을 휘감는 강력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들떠오른 개흙이 혼탁한 물살과 뒤섞인다는 것을, 바다 위를 휩쓰는 폭풍의 반동으로 밑에서 솟구치는 힘이 발작적이고 신경질적인 운동을 자연력에 전달한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리 긁어모아 비축한 의연함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익사자는 온갖 궁리 끝에, 심연의 소용돌이 속에서, 좀 후하게 쳐서 평상시 호흡으로 반호흡만이라도 생명을 더 연장한다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죽음을 조롱할 수 없을 것이다.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아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장엄하게. 그런데 착오였다. 배는 이제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지 않는다. 가라앉지 않는다. 그 호두 껍떼기가 완전히 잠겨버렸다. 오, 하늘이여! 이렇게 크나큰 쾌락을 체험한 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내 동류들의 단말마에 현장 증인이 되는 임무가 방금 나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일 분 일 분, 나는 그들이 느꼈던 고통의 고비고비를 지켜보았다. 어떨 때는, 두려움으로 미쳐버린 어느 노파의 울음소리가 다른 소리를 젖히고 세를 떨쳤다. 어떨 때는, 젖먹이 아이의 날카로운 울음만으로도 선원들의 지시명령이 묻혀버렸다. 돌풍이 내게 실어오는 신음소리를 명확하게 파악하기에는 배가 너무 멀리 있었지만, 나는 의지를 통해 배에 접근하였으며, 착시는 완벽했다. 십오 분마다, 다른 돌풍보다 더 강한 돌풍이 질겁한 바다제비들의 비명 사이사이로 음산한 굉음을 내지르며 선체를 가로로 와지끈 깨뜨려, 대량학살의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의 탄식을 증가시킬 때, 나는 쇠꼬챙이의 날카로운 끝으로 내 빰을 찌르며, 은밀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더 고통스럽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비교의 대상이 있었다. 해안에서, 나는 그들을 불러대며, 그들에게 저주와 위협을 던졌다. 그들이 틀림없이 내 말을 들었을 것만 같았다! 내 증오와 내 말이 거리를 뛰어넘어 소리의 물리적 법칙을 무효화하고, 격노한 대양의 노호로 먹먹해진 그들의 귀에 명확하게 도달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틀림없이 나를 생각하고, 자기들의 복수심을 무력한 분노로 내뿜었을 것만 같다! 때때로 나는 견고한 대지 위에 잠들어 있는 도시들을 향하여 눈길을 던졌으며, 해변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맹금을 왕관으로 둘러쓰고 뱃속이 빈 물 거인을 좌대로 삼은 배 한 척이 침몰하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용기를 추슬렀고, 희망이 내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파멸을 확신했다! 그들은 달아날 수 없었다! 한층 더 신중을 기하여, 나는 내 이연발 소총을 찾았으니, 만일 어떤 조난자가 임박한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헤엄을 쳐서 바위에 접근하려 할 경우, 어깨에 쏜 총알이 그의 팔을 부러뜨려, 그 의도를 성취할 수 없도록 그를 훼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태풍이 최고로 광분하는 순간에, 나는 정력적인 머리 하나가 머리칼을 곧추세우고 필사의 노력으로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러 리터의 물을 삼켰으며, 부표처럼 흔들리며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머리칼에 물을 흘리며 다시 떠올라, 넓게 벌어진 피투성이 상처가 그 불굴의 고결한 얼굴에 칼자국을 내고 있었다. 열여 살을 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어둠을 밝히는 번갯불 너머로, 그의 입술 위로 복숭아솜털이 어렵사리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절벽에서 이백 미터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아서,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얼굴을 뜯어볼 수 있었다. 저 용기! 저 꺾을 수 없는 정신! 정말이지 그 머리의 꼿꼿함은 운명을 조롱하는 듯, 파도를 힘차게 가르니, 물이랑이 그 앞으로 어렵게 열리지 않았던가!--- 나는 일찌감치 결심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약속을 지켜야 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시간의 종이 울려야 했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어야 했다. 바로 이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어떤 것도 내 결심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한차례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그 머리가 곧바로 가라앉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 살인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기쁨을 얻지는 못했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물려 있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단순한 습관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이었는데, 그 습관을 버리고 살 수는 없으나, 그것으로는 가벼운 쾌락밖에 얻지 못한다. 감각은 무디어졌고, 굳어졌다. 일단 배가 침몰한 뒤에, 파도가 대항하여 마지막 싸움을 벌이며 내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수백 명을 넘을 때, 이 인간 존재의 죽음에서 어떤 쾌락을 느낄 것인가? 이 죽음에서, 나는 위험의 매력조차 얻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사법 정의는 이 끔직한 밤의 폭풍에 흔들리어, 내게서 몇 걸음 떨어진 집집에서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내 몸을 누르고 있는 오늘, 지고하고 엄숙한 진실로서 내가 성실하게 말하는바, 나는 사람들이 그뒤로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는 것만큼 잔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곱절로 그들의 악의는 여러 해 내내 그 끈질긴 쾌락을 실행하였다. 이 지경에서, 나는 내 분노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잔혹성의 발작에 사로잡혔으며, 나는 내 험상궂은 눈에 가까이 다가오는 자에게, 그가 비록 내 동족에 속한다 하더라도, 공포의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말이 개였을 때는, 그냥 지나가게 했다. 내가 방금 한 말을 들었는가? 불행히도, 폭풍이 치던 밤, 나는 이런 발작에 빠져, 이성이 날아가버렸으며(평상시에도 나는 똑같이 잔인하였지만, 그보다는 더 신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이 내 손에 떨어지건 모두 죽어 없어져야 했다. 내 잘못을 사과할 생각은 없다. 과오가 모두 내 동류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지금 있는 그대로 확인할 뿐이며, 머리부터 목덜미를 긁게 하는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최후의 심판이 내게 무슨 대수랴! 그대를 속이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의 이성은 하시라도 날아가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범죄를 저지를 때,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위 위에 서서, 폭풍이 내 머리칼과 내 외투를 후려치는 동안, 별 없는 하늘 아래서, 배 한 척을 악착같이 덮치는 태풍의 힘을, 나는 황홀감에 휩싸여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배가 닺을 던진 시점부터, 그 숙명의 옷이, 마치 망토를 입듯 저를 입은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의 창자 속으로 삼켜지는 순간까지, 이 드라마의 모든 고비를 눈으로 뒤쫓았다. 그러나 이 뒤죽박죽이 된 자연의 장면에 나 자신이 등장인물로 참여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가 싸움을 치렀던 그 장소에서 분명하게 보았던 것처럼, 배가 제 남은 세월을 바다의 밑바닥에 넘겨주고 있을 때, 너울에 휩쓸려갔던 사람들의 일부가 수면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두 사람씩, 세사람씩, 서로서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방해를 받을 터이고, 그들은 구멍 뚫린 단지처럼 아래로 가라앉을 터이고 --- 너울을 재빠르게 가르는 저 바다 괴물의 무리는 무엇인가? 놈들은 여섯이다. 놈들의 지느러미는 기운차서, 넘실대는 파도를 가로질러 길이 열린다.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이 대륙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저 인간 존재들을 모두 합해, 상어들은 이윽고 계란 없는 오믈렛 하나를 만들고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그걸 서로 나눈다. 피가 물에 섞이고, 물이 피에 섞인다. 놈들의 사나운 눈빛이 살육의 장면을 유감없이 비추어주고--- 그러나 저기 수평선에서 일어나는 저 물의 소란은 또 무엇인가? 마치 물기둥이 달려드는 것만 같다. 얼마나 강력한 노질이기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거대한 암컷 상어 하나가 오리간 파이에 한몫 끼어들어, 차가운 수육을 먹으러 오는 것이다. 암컷은 노발대발한다. 달려들고 보니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암컷과 다른 상어들 사이에 싸움이 한판 벌어져, 여기저기 붉은 크림의 표면에 말없이 떠다니며 꿈틀거리는 팔다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툰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암컷은 이빨을 들이대 치명상을 입힌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상어 세 마리가 암컷을 둘러싸고 있어서, 암컷은 사방으로 몸을 돌려 놈들의 작전을 직시해야 한다. 해변에 자리를 잡은 저 관망자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점점 높아지는 어떤 감동을 느끼며, 이 새로운 종류의 해전을 지켜본다. 그는 그리도 강한 이빨을 지닌 이 용감한 상어 암컷에 시선을 붙박았다. 그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거총을 하여, 그들 상어 가운데 한 녀석이 파도 위로 몸을 드러내는 순간, 능란한 솜씨로, 그 아가미에 두번째 총탄을 박는다. 남아 있는 상어 두 마리는 더욱 거칠어진 성깔을 증명할 따름이다. 바위의 높은 곳에서, 소금기 섞인 타액을 지닌 그 사내는 바다로 뛰어내려, 하시라도 그를 떠나지 않는 강철 단검을 손에 들고, 기분 좋게 채색된 융단을 향해 헤엄친다. 이후부터, 상어들은 한 마리씩 하나의 적과 맞붙어야 한다. 사내는 지쳐빠진 제 적수를 향해 나아가, 때를 기다려, 놈의 배에 그 날타로운 칼날을 박아넣는다. 움직이는 요새가 어렵잖게 마지막 적을 물리치고--- 헤엄치는 사람과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상어 암컷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서로 마주 바라보았으며, 저마다 상대방의 시선에서 그리도 강한 잔혹성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들은 원을 그려 헤엄쳐 돌려, 서로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지금까지 나는 잘못 생각하였다. 나보다 더 사악한 자가 저기 있구나." 여기서 그들은 마음이 일치하여, 두 물살 사이에서 서로 찬탄하며, 상어 암컷은 제 지느러미로 물살을 헤치고, 말도로르는 제 두 팔로 파도를 내젖히며, 상대방을 향해 미끄러져갔다. 그리고는 깊은 존경심에 잠겨, 각기 처음으로 자신의 살아 있는 초상을 살펴보려는 열망으로 숨을 멈추었다. 서로 삼 미터 떨어진 거리에 다다랐을 때,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그들은 두 개의 자석처럼 갑자기 서로 몸이 붙어버려, 형이나 누이를 포옹하듯 다정하게 포옹하며, 긍지와 감사의 마음을 모아 입을 맞추었다. 이 우정의 표명에 이어 곧바로 육체적인 욕망이 뒤따랐다. 힘찬 두 넓적다리가 두 마리 거머리처럼 괴물의 접착성 피부에 빈틈없이 달라붙었거니와, 팔과 지느러미는 적들이 서로 사랑으로 감싸고 있는 그 사랑받는 대상의 몸을 에워싸고 얼그러졌는데, 그들의 목과 그들의 가슴은 이윽고 해초의 냄새를 떨치고 있는 폭풍 한가운데서, 번갯불에, 거품 이는 파도를 혼례의 침대로 삼고, 요람 속에 있는 듯 해저의 조류에 실려가며, 심해의 알 수 없는 깊이를 향해 함께 구르면서, 그들을 순결하고도 추악한 장시간의 교합으로 맺어졌다!--- 마침내 나는 나를 닮은 누군가를 이제 발견했다!--- 이제부터, 나는 평생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쪽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나는 내 첫사랑과 마주하였다!  
94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6) 댓글:  조회:133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6)     두번째 노래(12)   (12) 내가 어린 시절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들어보라, 음경이 빨간 인간들아. "내가 이제 막 깨어났는데도 내 생각은 여전히 마비되어 있다. 아침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어떤 무거운 것이 들어 있음을 느낀다. 밤에 휴식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잠들기라도 하면, 무서운 꿈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내 생각이 기이한 명상에 빠져 피로한데, 내 두 눈은 하염없이 허공을 헤매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없다. 도대체 언제 자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자연은 제 권리를 주장하려고 안달한다. 내가 자연을 경멸하기에 그 자연이 내 얼굴을 창백하게 하고, 열병의 가혹한 불길로 내 두 눈을 이글거리게 한다. 그런데, 나는 내 정신을 고갈시켜가며 끊임없이 사색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그와 관련된 내 감정은 이 비탈을 향해 물리칠 수 없는 기세로 나를 끌고 간다. 나는 다른 아이들도 나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들은 더욱더 창백하고, 그들의 눈썹은 어른들의, 우리 형들의 눈썹처럼 찌푸려져 있다. 오, 우주의 창조주여, 나는 오늘 아침, 그대에게 내 어린 기도의 향을 잊지 않고 피워올릴 것이다. 가끔 나는 그것을 잊는다도, 요즘은 보통 때보다 더 행복한 느낌이 들고, 내 가슴이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꽃피고, 내가 훨씬 더 편안하게 들판의 향기로운 대기를 들이마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반면에,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그대에게 매일 찬양의 노래를 바친다는 고통스러운 하루, 힘들게 말을 지어내야 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권태가 따라붙는 그 의무를 이행할 때는,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얘기한다는 것이 논리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생각에 하루의 남은 시간 내내 슬프고 화가 나서, 거대한 고독이 들어설 만한 후미진 자리를 찾곤 한다. 내가 고독에게 내 마음의 어떤 이상한 상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싶고 숭배하고 싶지만, 그대는 너무 강력하고, 내 찬송가에는 얼마큼 두려움이 들어 있다. 그대가 그대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파괴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면, 나의 미약한 기도는 그대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며, 그대가 마음 내킬 때마다 콜레라를 내보내 도시들을 힙쓸게 하거나, 죽음을 내보내 인생의 메시지를 구별하지 않고 아무나 그 발톱으로 채어가게 한다면, 나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친구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증오가 내 사리판단의 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대의 증오이니, 그것은 어떤 변덕스러운 명령에 따라 그대의 마음에서 솟아나와 안데스산맥의 콘도르의 날개폭만큼이나 거대해 질 수 있다. 그대의 애매한 심심풀이 장난은 내 능력 밖에 있으며, 아마도 내가 그 첫번째 희생이 될 것이다. 그대는 전능한 자이며, 나는 이 칭호에 대해 그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직 그대만이 이 칭호를 지닐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욕망은 그 결과가 불길하건 행복하건 그대 자신밖에는 다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은 그대의 노예가 아니더라도, 조만간 노예가 될 수 있는 처지에서, 그대의 사파이어색 잔인한 튜닉과 나란히 서서 걷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지고한 행적을 검토하려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갈 때, 그대의 가장 충실한 친구도 항상 그대에게 복종해온 이 불행한 인류에게 지난날에 저질렀던 어떤 불의의 망령이 복수심에 찬 등골이 움직이지 않는 척추를, 그대 앞에 일으켜세운다면, 그대의 험상궂은 눈이 뒤늦은 회한으로 겁에 질린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며, 그때 머리카락이 곤두선 그대가 호랑이처럼 잔인할 그 상상력의 이해할 수 없는 작동을 허무의 가시덤불에 영원히 묶어두겠노라는 비통한 것이 아니라면 우수꽝스러운 것일 결심을 스스로 진지하게 다지려고 마음먹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나는 또한 불변의 인내심이 그대의 영원한 항심의 꺾쇠를 그대의 뼈 속에 완강한 뇌수처럼 고정시키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그대가 상당히 자주 그대와 더불어 과오의 검은 문둥병으로 뒤덮인 그대의 사고를 음산한 저주의 불길한 호수 속에 다시금 빠뜨리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저주가 생각 없이 저질러진 것이라고(그렇다고 그 저주가 치명적인 독액을 덜 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고 싶고, 한 몸으로 결합된 악과 선이, 어떤 눈먼 힘의 비밀스러운 마력에 힘입어, 괴저에 걸린 그대의 당당한 가슴으로부터 바위산의 급류처럼 맹렬하게 솟아올라 흩어진다고 믿고 싶지만, 얼마큼의 아주 미미한 잘못 때문에, 그대의 불결한 이빨이 진노로 덜그럭거리고, 시간의 이끼에 뒤덮인 그대의 장엄한 얼굴이 타오르르는 석탄처럼 붉어지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자주 보아온 탓에, 저 순진한 가설이 적힌 도로 푯말 앞에서 더 오래는 멈춰 설 수가 없었다. 날마다 두 손을 모으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그대를 향해 나의 겸손한 기도의 억양을 드높이겠지만, 그대의 섭리가 나를 생각지 말기를 내 그대에게 간청하노니, 땅 밑으로 기어가는 벌레처럼 나를 체쳐두라. 그대는 알아두라, 나로서는 그대가 나를 감시하고 나의 양심에 냉소하는 메스를 들이댄다는 것을 아느니보다 차라리 적도의 파도가 그 거품 이는 가슴에 품어 이 해역의 한가운데로 끌어오는, 알지 못할 미개한 섬의 해양식물에서 욕심껏 자양을 얻는 편이 더 나으리라. 내 생각의 전체가 이제 그대에게 낱낱이 밝혀졌으니, 내 생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간직된 이 양식(良識)을 그대의 신중함이 선선히 칭찬해주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내가 그대와 더불어 유지해야 하는 얼마큼 내밀한 관계양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이런 유보사항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내가 선에 대한 사랑에 자극되어 선량(善良)을 구하듯, 새벽이 여명의 비단 주름 속에서 빛을 구하며 푸르스름하게 솟아오르는 그 순간부터, 내 입은 하루의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대의 허영심이 인간 하나하나에게 혹독하게 요구하는 거짓의 홍수를, 마치 인위적으로 숨을 내뿜듯, 내뿜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연령이 많지는 않지만, 선량이란 단지 소리나는 음절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 벌써 느껴진다. 어디에서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성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틈새를 너무 많이 내준다. 더 능란하게 그걸 감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쩌면 내가 속은 것일 수도 있고, 그대가 고의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대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잘고 있는 터. 인간들이란 것들은 그대를 모방하는 일에 자기들의 영예를 거는데, 그것은 거룩한 선량이 저들의 사나운 눈에 제 성막(聖幕)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그대의 지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할지라도, 나는 불편부당한 비평가로서만 그것을 말한다. 내가 과오에 빠져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내가 그대에게 갖는 증오, 애지중지하는 처녀처럼 사랑으로 품고 있는 그 증오를 나는 그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것을 눈에 숨기고, 그대 앞에서는 오직 그대의 불결한 행위를 감시할 의무를 진, 엄격한 검열관의 태도를 지키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자칫했다간 그대 편에서 이 증오와의 모든 능동적 교섭를 그칠 것이며, 증오를 눈감아주어, 그대의 간을 갉아먹는 이 게걸스러운 빈대를 완전히 박살내버릴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대에게 몽상과 애정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렇다, 세계와 거기에 담긴 일체를 창조한 것은 그대다. 그대는 완전무결하다. 어떤 미덕도 그대에게 결여되지 않았다. 그대는 아주 전능하고,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다. 온 우주가 시간시간마다 그대에게 끝없는 찬가를 바칠지어다! 새들은 들판에서 날아오르며 그대를 축송한다. 별들은 그대 것이고---- 아멘!" 이런 첫모습 뒤에,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고 그대들은 놀랄지어다!  
945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5) 댓글:  조회:108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5)     두번째 노래(11)   (11) "오, 은빛 화구(火口)를 가진 동물아, 내 눈은 공중에서 성당들이 궁륭과 동무하는 너를 알아보고, 그렇게 매달려 있는 이유를 찾고 있다. 네 희미한 빛이 전능한 자를 예배하러 오는 그들 떼거리를 밤새 밝게 비추고, 네가 참회자들에게 제단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들 말한다. 네가 참회자들에게 제단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들 말한다. 어련하실까, 아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네가 아무런 빚도 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런 봉사를 할 필요가 있는가? 대성당의 열주를 암흑 속에 그대로 묻어두려니와, 마귀가 올라타고 회오리치며 허공으로 실려가는 그 태풍의 숨결이 그와 함께 이 성소에 침입하여 공포를 퍼뜨릴 때, 너는 악의 군주가 내뿜는 그 독기 서린 돌풍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려 들지 말고, 그 뜨거운 입김에 갑자기 꺼져, 마귀가 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무릎 끓은 신자들 사이에서 희생물들을 선택할 수 있게 하라.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내 모든 행복을 너에게 빚지게 될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 네가 어렴풋하지만 충분한 빛을 펼치면서 이렇게 다시 빛날 때, 나는 감히 네 성질이 사주하는 바에 나를 밑기지 못한 채 성스러운 회랑 아래 머물러, 반쯤 열린 현관문으로, 내 복수를 피해 주님의 품에 안긴 자들을 바라본다. 오, 시적인 램프야! 네가 나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내 여자친구가 될 너, 밤 시간에 내 발이 교회의 현무암을 밟을 때, 왜 너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기에 괴상한 모양새로 빛나기 시작하는 것인가? 너의 반사광은 그때 전광(電光)의 하얀 색조를 띠어 눈으로 너를 바로 볼 수 없거니와, 너는 마치 성스러운 분노에 사로잡히기나 한 듯이, 새롭고 강한 불꽃으로 창조주의 개집을 가장 하찮은 구석까지 비추고 있다. 그리고 내가 신을 모독하고 나서 풀려날 때는 겸손하고 창백해진다. 잠시 네 말을 들어보자, 네가 밤새워 지키는 자리에 내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나의 위험한 출현을 서둘러 밝히고, 예배자들의 주위를 인간들의 적이 나타난 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은 네가 내 마음의 곡절을 익히 알기 때문인가? 나는 이 의견에 기울어진다. 나 역시 너를 이제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스러운 회교 사원들을 매우 잘 지키는 늙은 무녀여,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안다. 용의주도한 불침번이여, 너는 무모한 사명을 띠었구나. 네게 경고하노니, 네가 네 인광의 불빛을 증폭하여 나를 내 동류들의 조심성에 표적이 되게 할라치면, 어느 물리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이 광학적 현상을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판이니, 나는 그 즉시 백선에 걸린 네 목덜미의 욕창에 발톱을 박고, 네 가슴팍의 거죽을 찍어올려, 너를 센강에 던질 것이다. 내가 너한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네가 고의적으로 내게 해롭게 행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 네가 흡족할 때까지 빛나기를 내 허락할 것이다, 자아, 그 꺼질 줄 모르는 비웃음으로 나를 조롱해보아라. 자아, 네 죄 많은 기름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마음 아프게 그것으로 오줌이나 싸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말도로르는 사원에서 나가지 않고, 그 성소의 등불에 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 계제 나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최고도로 자신을 자극하는 이 등불의 태도에서, 그는 일종의 도전을 본다고 생각한다. 어떤 혼이 그 등불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이 정정당당한 공격에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비겁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신경질적인 두 팔로 허공을 치는데, 등불이 인간으로 변신하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등불에게 시련의 십오 분이 흘러가게 할 것이다. 그는 약속한다. 그러나 등불이 인간으로 변하는 능력,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한심한 불탑 앞뜰에서 평평하면서도 날이 서 있는 조약돌을 찾는다. 그는 조약돌을 공중으로 힘차게 던진다--- 풀이 낫에 잘리듯, 사슬 한가운데가 잘려, 그 예배의 도구가 바닥에 기름을 쏟으며 땅에 떨어진다. 그는 등불을 집어들고 밖으로 옮기려는데, 등불이 저항하면서 커진다. 등불 허리에 날개가 돋치는 듯하더니, 윗부분이 천사의 상반신으로 둔갑한다. 그 전체가 공중으로 솟아올라 도약을 하려 하지만, 그가 완강한 손으로 다시 붙잡는다. 동일체를 이루고 있는 등불과 천사, 이야말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등불의 모습을 분간하고, 천사의 모습을 분간하지만, 그의 정신에서는 그 둘을 분할할 수 없다. 실제로 현실에서 그것들은 서로 들러붙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몸뚱이 하나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는 어떤 구름이 제 눈을 가려서, 그 시력의 탁월함을 약간 손상시킨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는 용감하게 전투 준비를 한다. 상대가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순진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바로는, 성스러운 문이 애통해하는 돌쩌귀를 타고 회전하여 저절로 닫히는 바람에, 그 우여곡절로 침해를 받은 성소의 경내에서 전개된 이 불경건한 싸움을 아무도 구경할 수 없었다. 망토를 입은 남자가 보이지 않는 검에 여기저기 잔인한 상처를 입고 있는 가운데 자기 입을 천사의 얼굴 가까이 가져가려고 애쓴다. 그는 그 생각밖에 없어서, 오직 그 목적을 향해 제 모든 노력을 쏟는다. 천사는 힘을 잃고, 제 운명을 예감하는 것 같다. 그는 이제 약하게만 싸울 뿐이며, 그의 적수가 그럴 생각만 있다면 제 마음대로 그에게 입을 맞출 수 있는 순간이 온 것 같다. 옳다구나, 때가 왔다. 그는 제 근육으로 천사의 목을 졸라, 그가 이제 더는 숨을 쉴 수 없게 되자. 제 혐오스러운 가슴에 천사를 끌어다 붙이고 그 얼굴을 뒤로 밀어젖힌다. 그는 자신이 기꺼이 친구로 삼았을지도 모를 이 천상의 존재를 기다리는 운명에 한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는 천사가 주의 사자라는 생각을 하니,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다. 이제 끝났다. 바야흐로 어떤 무서운 것이 시간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는 몸을 기울여 침에 젖은 혀를 내밀어 애원하는 시선을 던지는 이 천사의 빰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얼마 동안 제 혀로 그 빰을 핥는다 오! --- 보라! 어서 보라!--- 희고 장밋빛인 뺨이 석탄처럼 검어진다! 뺨은 부패한 장기를 발산한다. 괴저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침식성 악질이 온 얼굴에 퍼지고, 거기서부터 아랫도리로 그 기세가 맹렬하게 작동한다. 이윽고, 손톱이 거대하고 불결한 상처에 지나지 않는다. 제풀에 두려움에 사로잡혀(그는 제 혀가 그렇게 격렬한 독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등불을 주어들고 교회 밖으로 달아난다. 일단 밖에 나오자, 그는 공중에서거무스름한 형체 하나가 그을린 날개를 달고, 하늘 영역을 향해 방향을 잡아 어렵사리 날아오르는 것을 본다. 그들 두 존재가 서로 바라보는 동안 천사는 선의 정일한 높이를 향해 오르고, 그는, 말도로르는 반대로, 악의 현기증나는 심연을 향해 내려가고--- 그게 어떤 시선인가! 육십 세기 전부터 인류가 생각해온 모든 것이, 그리고 그뒤에 이어질 수많은 세기 동안 여전히 인류가 생각하고 있을 모든 것이 어렵잖게 거기에 포함될 수 있을 터이니, 그만큼 많은 것들을 그들은 서로 말하였으리라. 이 지고한 작별을 통해!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지성에서 솟아나은 사상보다 더 고양된 사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데, 우선은 두 사람의 인물 때문이고, 다음은 상황 때문이다. 이 시선은 그들을 영원한 우정으로 묶었다. 그는 창조주가 그렇게도 고상한 영혼을 지닌 선교사들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한순간, 그는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고,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악의 길을 따라야만 햇을지 자문한다. 혼란은 지나갔다. 그는 자신으 결심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의 생각을 따르자면, 조만간 위대한 전체를 무너뜨리고, 그를 대신하여 전 우주와 저렇듯 아름다운 천사 군단을 다스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천사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차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임을 말하지 않고도 그에게 이해시키고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려, 자신에게 괴저를 안겨준 자의 이마를 차갑게 식힌다. 그러고는 독수리처럼 구름 한가운데로 올라가며 점점 사라진다. 장본인은 앞서 일어난 사태의 원인인 등불을 바라본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길을 가로질러 달려가 센강으로 방향을 틀고는, 난간 너머로 그 등불을 던진다. 등불은 얼마 동안 맴돌다가 마침내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날 이후 저녁마다 어둠이 떨어지기기만 하면, 나폴레옹 다리1)께, 강의 수면에, 빛나는 등불 하나가 손잡이 대신 천사의 귀여운 두 날개를 달고 솟아올라 우아하게 떠 있는 것이 보인다. 등불은 천천히 물 위를 미끄러져 가르 다리와 소스테를리츠 다리의 아치들을 지나, 알마 다리까지 센강 위로 그 조용한 항진을 계속한다. 일단 이 자리에 이르면, 등불은 강의 흐름을 다시 쉽게 거슬러올라가서 네 시간 후에는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밤새도록 계속한다. 전광처럼 하얀 그 불빛이 강의 양안에 즐비한 가스등 화구들을 지우는데, 그 양안 사이로 들불은 침투할 수 없는 고독한 여왕처럼, 꺼지지 않는 미소를 띠고, 그 기름이 마음 아프게 쏟아지는 일도 없이, 나아간다. 처음에는 배들이 등불을 쫓아가 붙잡으려 했으나, 등불은 이 헛된 노력을 좌절시키고, 모든 추격을 피하여, 요염한 여자처럼 물속으로 잠겼다가, 더 멀리, 긴 거리를 두고 다시 나타나곤 했다. 이제, 미신적인 선원들은 그것을 보면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으며 노래를 삼킨다. 그대가 밤에 어느 다리를 지나게 되면, 자못 유의하라. 그대는 여기서나 저기서 등불이 빛나는 것을 보리라고 굳게 믿겠지만, 그것이 어느 사람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양심에 무언가 거리낄 것이 있는 인간 존재가 다리 위를 지날 때면, 등불이 갑자기 제 빛을 꺼버리기에, 행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강의 수면과 개흙을 절망적인 시선으로 훒어본다. 그는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는 천상의 빛을 보았다고 믿고 싶겠으나, 그는 제가 본 빛이 배의 이물이나 가스등 화구의 반사광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옳다 --- 그는 이 사라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서글픔 반성을 하며, 자신의 처소에 닿으려고 발길을 서두른다. 이때 은빛 화구를 지닌 등불이 수면에 다시 나타나, 우아하고도 변덕스러운 아라베스크를 그리며 제 항행을 계속한다.   1) 나폴레옹 다리는 1852년에 세워져, 1870년에 나시오날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뒤에 나오는 가르 다리는 현재의 베르시 다리다.  
944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4) 댓글:  조회:108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4)     두번째 노래(10)   (10) 오, 엄정한 수학이여, 꿀보다도 더 감미로운 그대의 정교한 수업이 내 마음에 상쾌한 물결처럼 스며들어온 이래로, 나는 그대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 나는 요람에서부터, 태양보다 더 오래된 그대의 샘에서 목을 축이기를 본능적으로 열광하였으며, 그대의 입문자들 가운데서 가장 충실한 자 나는 그대의 장중한 전당의 성스러운 안뜰을 여전히 밟고 있다. 나의 정신에는 모호함이, 연기처럼 두꺼운 어떤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지만, 나는 그대의 제단에 이르는 층계들을 경건하게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대는 마치 바람이 호랑나비들을 날려버리듯, 그 어두운 베일을 날려버렸다. 그 자리에, 그대는 극도의 냉정함과 완벽한 신중함, 그리고 가차없는 논리를 가져다놓았다. 몸을 튼튼하게 해주는 그대의 젖을 빤 덕택에, 나의 지성은 빠르게 발견되었고, 성실한 사랑으로 그대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대가 아낌없이 베푸는 이 황홀한 빛의 한가운데서, 나의 지성은 무한한 규모를 얻었다. 산술! 대수! 기하! 웅장한 삼위일체여! 빛나는 삼각형이여! 그대들을 모르는 자는 바보병정이다. 그는 가장 심대한 형벌의 시련을 받아 마땅하리니, 그의 무지한 무관심에는 맹목적인 경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를 알고 그대를 상찬하는 자는 지상의 행복이란 어느 것도 더는 원하는 것이 없으니, 그대의 마술적 쾌락에 만족하여, 그대의 어두운 날개를 타고, 가벼운 비행으로 상승 나선을 그리면서, 하늘의 둥근 궁륭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밖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지구는 그에게 도덕적인 환상과 마술환등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 오, 간결한 수학이여, 그대는 그 완강한 정리의 엄밀한 연쇄와 그 강철법칙의 항구성에 의해, 우주의 질서에 그 각인이 나타나는 저 지고한 진리의 강력한 반영을 부신 눈에 번쩍인다. 그러나 특히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피타고라스의 친구인 정방형의 완전한 규칙성으로 대표되는 법칙이 그보다 더 위대하다. 전능한 자가, 그와 그 속성들이, 그대의 보물인 정리(定理)들과 찬란한 광채를 혼돈의 내장에서 솟아나게 하였던 저 기념할 만한 작업에서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러 시기에도, 현대의 여러 시간에도, 인간의 여러 위대한 상상력은 불타는 종이 위에 그어진 그대의 상징적인 도형들을 숙고하는 가운데 제 정수를 발견하고 놀라니, 신비롭고 잠재된 숨결로 살아 있는 이 기호들은 모두 저속한 속인에게는 이해되지 않으나, 우주 창조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우주 멸망 이후에도 존속할 영원한 공리(公理)와 상형문자의 명백한 드러남일 뿐이었던 것이다. 상상력은 운명적인 의문부호의 심연을 굽어보며, 수학을 인간에게 비교한다면 인간에게서는 오직 거짓된 오만과 허위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인데, 수학이 어떻게 그만큼의 압도적인 위대성과 그만큼의 반박할 수 없는 진리를 끌어안게 되었는지 자문한다. 그래서 이 뛰어난 정신은 그대가 허물없이 베푸는 고결한 충고로 인간의 왜소함과 그 유례없는 어리석음을 더욱 통감하고, 슬픔에 빠져, 그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앙상한 두 손에 파묻고 초자연적인 명상에 빨려들어간다. 그 정신은 그대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존경심은 정의를, 전능한 자의 고유한 형상에 바치듯, 그대의 신성한 얼굴에 비친다. 내 어린 시절, 어느 오월의 밤에, 달빛 아래, 맑은 시냇가 푸른 초원 위에, 우아함과 정숙함에서 서로 맞먹는 그대 셋이 모두, 여왕들처럼 위엄이 가득 어린 그대 셋이 모두 내게 나타났다. 그대들은 안개처럼 물결치는 긴 옷을 입고 하늘 향해 몇 걸음을 걸어와서, 나를 축복받은 아들처럼 그 오만한 유방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뛰어갔으며, 내 손은 그 하얀 가슴팍에 매달렸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풍요로운 만나를 섭취하였으며, 내 안에서 인류가 자라니 더욱 훌륭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때 이후로, 오, 경쟁하는 여신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대리석 위에 새기듯 내 마음의 페이지 위에 새겼다고 믿은 얼마나 많은 단호한 계획들이, 얼마나 많은 공감들이, 마치 태어나는 새벽이 밤의 어둠을 지우듯, 내 각성한 이성으로 그 배열의 부속선들을 천천히 지워버렸던가! 이때 이후로, 나는 죽음을 보았으니, 무덤의 수를 늘이고, 인간의 피로 살찐 전쟁터를 휩쓸고, 아침의 꽃들을 음울한 해골들 위로 솟아오르게 하려는 그 의도가 육안으로도 명백하였다. 이때 이후로 나는 우리 지구의 갖가지 변혁을 규정하였다. 지진, 용암이 타오르는 화산폭발, 사막의 모래바람, 그리고 태풍에 휩쓸린 난파는 나의 존재를 비정한 방관자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나는 여러 인간세대들이 아침이면 제 마지막 탈바꿈을 축하하는 번데기처럼 아직 맛본 적 없는 기쁨에 취해 날개와 두 눈을 허공으로 들어올리고, 저녁이면 해가 지기 전에, 바람의 구슬픈 휘파람소리에 흔들리는 시든 꽃처럼 머리를 숙이고 죽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대, 그대는 언제나 똑같다. 어떤 변화도 어떤 독기 가득한 대기도, 그대 동일성의 깍아지른 바위와 막막한 계곡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대의 조촐한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 우둔함과 예종으로 세워진 개미탑보다 더 오래 남을 것이다. 세기와 세기를 거듭한 뒤 마지막 시간은 여전히 시간의 페허를 딛고 서서, 그대의 비의적 숫자들, 그대의 간결한 방정식들, 그대의 조각적인 선들이, 전능한 자의 오른쪽 징벌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볼 것이로되, 그동한 내내 별들은 우주의 무서운 밤, 그 영원 속으로 절망을 끌어안고 소용돌이처럼 꺼져내릴 것이며, 인류는 얼굴을 찌푸리며, 최후의 심판에 회계보고서를 작성하려고 궁리할 것이다. 감사한다. 그대가 네게 베풀었던 그 무수한 봉사에 감사한다. 내 지성을 풍요롭게 해주었던 그 야릇한 덕성에 감사한다. 그대가 없었다면, 인간과 맞선 싸움에서, 나는 필경 패배하였으리라. 그대가 없었다면, 인간은 나를 모래 속에 굴리고, 그 발길로 나를 차서 먼지를 끌어안게 했으리라. 그대가 없었다면, 그 음흉한 발톱으로, 인간은 내 살과 뼈에 고랑을 팠으리라. 그러나 나는 노련한 검투사처럼 방심하지 않았다. 그대는 내게 그대의 숭고한 개념, 정염이 제거된 그 개념에서 솟아나오는 차가움을 주었다. 나는 그 차가움을 이용하여 짧은 여정의 덧없는 쾌락을 오만하게 물리치고, 내 동류들의 동정적인, 그러나 기만적인 증여를 문간에서 되돌려보냈다. 그대는 내분석과 종합과 연역이라는 그 감탄할 만한 방법으로 한 걸음 한걸음 풀어나가는 그 끈질긴 신중함을 주었다. 나는 그 신중함을 이용하여, 내 치명적인 적의 위험한 술책을 따돌리고, 오히려 내 편에서 적을 능란하게 공격함으로써, 날카로운 단검을 인간의 내장에 꽂아, 그 몸에 언제까지나 박혀 있게 하였다. 그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내게 지혜 가득한 그대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그 진수 자체와도 같은 논리를 주었으니, 착잡한 미로이기에 더욱 잘 이해될 뿐인 그 삼단논법으로, 나의 지성은 제 대담한 힘이 두 배로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 무서운 조력자의 도움으로 나는 인간성 속에서 그 바닥을 향해 헤엄쳐나가며, 증오의 암초와 맞닥뜨리며, 유해한 장기 한가운데 괴어 제 배꼽을 찬양하는 시커멓고 흉악한 악심을 발견하였다, 최초로 내가 그 내장의 어둠 속에서 본 것은 악! 인간에게서는 선을 능가하는 저 불길한 악덕을 발견하였다. 그대가 내게 빌려준 이 독 있는 이 무기를 가지고, 나는 창조주 그 자신을, 인간의 비열함으로 구축된 그 좌대에서 끌어내렸다. 그는 이를 갈며 이 수치스러운 모욕을 받아들였다. 자기보다 더 강한 자를 적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노끈뭉치처럼 버려둘 것이다. 내 비상을 낮추기 위하여--- 사상가 데카르트는 언젠가 한번 그대를 토대로 하여 견고한 것은 아무것도 세워진 적이 없음을 고찰하였다. 그것은 그대의 측정할 수 없는 가치가 아무에게나 단번에 발견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시키려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사실, 위에서 이미 이름 불렀던 저 삼대 요소, 한 개의 화간으로 서로 얽혀, 그대의 거대한 건축물 그 장엄한 꼭대기 위로 솟아오르는 이들 요소보다 더 견고한 것이 무엇인가? 그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의 일상적인 발견과 그대의 망망한 영토에서의 과학적인 탐사로 끊임없이 커지는 기념탑, 오, 성스러운 수학이여, 그대와의 끝없는 교류로, 그대가 나의 남은 나날을 인간의 잔인함과 위대한 전체의 불의로부터 위로할 수 있기를!  
943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3) 댓글:  조회:94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3)     두번째 노래(9)   (9) 인간들이 제 비용으로 먹여 살리는 곤충이 하나 있다. 인간들은 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지만, 놈을 두려워한다. 포도주를 좋아하지는 않으나 피를 좋아하는 이놈은 제 정당한 욕구를 채워주지 않으면, 어떤 은밀한 힘으로, 코끼리만큼 커져서, 인간들을 이삭처럼 짓밟아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놈을 얼마나 존경하고, 얼마나 개 같은 경애심으로 둘러싸고, 창조된 동물들보다 얼마나 더 높이 존중하여 떠받드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놈에게 머리를 내주어 왕좌로 쓰게 하니, 놈은 위엄을 갖추어 머리칼 뿌리에 제 발톱을 건다. 나중에 놈이 살지고 연치가 높아지면, 옛날 백성들의 습속을 본받아, 노쇠를 느끼지 못하도록, 놈을 죽인다. 영웅에게 그렇듯이 놈에게 성대한 장례가 마련되어, 놈을 무덤 뚜껑으로 곧바로 인도할 관이 주요 시민들의 어깨 위에 얹혀 운반된다. 무덤 파는 인부가 그 명민한 삽으로 파헤치는 습한 땅 위에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인생의 허무에 대해, 그리고 섭리의 설명할 길 없는 의지에 대해 다채로운 문장들이 조합되고 나면, 부지런히 살이 오른, 이제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 이 존재 위에 영원히 대리석이 닫힌다. 군중은 흩어지고, 밤이 지체 없이 그 어둠으로 묘비의 벽을 덮는다. 그러나, 인간들이여, 놈을 잃어 고통스럽더라고 그대들의 슬픔을 달래시라, 보라, 놈의 무수한 가족이 전진하고 있으니, 이 가족을 놈이 그대들에게 너그럽게 베풀어놓은 것은 그 공격적인 조생아(早生兒)들의 존재를 통해 그대들의 절망을 덜 쓰라린 것으로 만들고, 그만큼 완화시키기 위해서였던바, 놈들은 훗날 주목할 만한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어, 멋진 이(虱), 거동도 슬기로운 괴물이 될 것이다. 놈은 제 어미 날개로 사랑스러운 서캐 여러 다스를 그대들의 머리칼에 슬게 했으니, 이 무서운 외래자들의 악착스러운 흡혈로 그 머리칼은 메마르고 말 것이다. 시기가 서둘러 다가와, 서캐들이 깨졌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놈들은, 이 젊은 철학자들은, 그 덧없는 생명을 통하여, 지체 없이 자랄 것이다. 놈들은 매우 커져서 그 발톱과 흡관으로 그대들에게놈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대들은 알지 못한다, 왜 놈들이 두개골을 삼키지 않는지, 왜 놈들이 그 펌프로 피의 정수를 빨아올리는 데 만족하는지, 잠시 기다리라, 내가 그대들에게 설명하리라, 그것은 놈들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놈들의 턱뼈가 놈들의 무한한 소원과 비례하여 크다면, 골수, 눈의 망막, 척추, 그대들의 온몸이 그 턱뼈를 넘어가게 될 것임을 확인하시라. 마치 한 방울의 물처럼, 거리를 헤메는 젊은 거지의 머리 위에 작업중인 한 마리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시라. 내 말에 이해가 갈 것이다. 불행하게도 놈들은 작다. 이 긴 머리칼 속의 강도들은 놈들을 신병으로 뽑기에는 마땅치 않을 터인데, 키가 법정 신장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놈들은 넙적다리가 짧은 자들의 세계인 소인국 소속이며, 장님들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놈들을 무한 소인들로 분류한다. 한 마리 이에 대항하여 싸우는 향유고래에게 불행이 있을진저. 고래는 제 크기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아먹힐 것이다. 그 소식을 알리러 갈 꼬리도 남지 않을 것이다. 코끼리는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다. 이는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이런 위험한 시험을 해보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손이 털투성이건, 오직 뼈와 살로만 구성되었건, 조심하라, 그대들의 손에는 손가락이 있다. 손가락은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삐거덕 꺽일 것이다. 피부는 희한한 요술에 의해 사라진다. 이(虱)들은 자기들의 상상력이 꿈꾸는 것만큼의 악행을 저지를 능력이 없다. 그대들이 길을 가다가 한 마리 이를 만나거든 가던 길을 그냥 가라. 그 혀의 돌기를 핥지 말라. 어떤 재난이 그대에게 닥칠지 모른다. 재난이 닥쳤다. 무슨 상관이냐. 나는 놈이 그대에게 행한 대량의 악행에 이미 만족하고 있다. 오, 인간 족속이여, 다만 나는 놈이 그대에게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르길 바랄 뿐이다. 언제까지 그대는 이 신에게 바치는 낡아빠진 예배를 준수할 것인가. 그대의 기도에도, 속죄의 희생제의에서 그대가 바치는 후원공물에도 무관심한 이 신에게? 보라. 이 무서운 마니투1)는 꽃다발로 경건하게 장식한 그 재단 위에 그대가 쏟는 피와 골수의 큰 잔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이 세상이 생긴 이래 지진과 폭풍우가 끊임없이 난리를 치지 않는가. 그렇건만, 관찰할 가치가 있는 광경은 신이 무관심하면 할수록, 그대가 더욱더 그를 찬미한다는 것. 그가 감추고 있는 이런저런 속성을 그대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대의 추론은 극도로 강한 힘만이 자신을 추종하는 종교의 신자들을 그토록 경멸할 수 있다는 의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는 도마뱀이, 저기에서는 몸 파는 여자가 신인 것처럼, 나라마다 가지가지 신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가 문제될 때는, 그 성스러운 이름을 듣자마자, 만방의 온갖 백성들이 한거번에 제 예종이 사슬에 입을 맞추며, 장엄한 전당 앞마당 위, 모양새도 추한 피 어린 우상의 받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타고난 포복의 본능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의 낯빛을 하는 종족이 있다면, 가차없는 신의 복수로 사멸하여, 가을 나뭇잎처럼, 조만간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오, 눈동자가 말라 오그라든 이여, 강이 심해에 그 물매진 길을 넓혀가는 동안은, 별들이 제 궤도의 오솔길을 따라 맴도는 동안은, 말없는 공허에 지평선이 없는 동안은, 인류가 불길한 전쟁으로 제 허리를 찢어발기는 동안은, 신성한 정의가 이 이기주의의 지구 위에 그 징벌의 벼락을 내리치는 동안은, 인간이 제 창조주를 낮추보고, 이유가 없진 않으나, 경멸을 섞어 그를 비웃는 동안은, 너는 확실하게 우주에 군림할 것이고, 너의 왕조는 세기에서 세기로 그 고리를 넓힐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경례한다. 떠오르는 태양, 천상의 구원자, 그대, 인간의 보이지 않는 적이여. 끊임없이 불결함에 말하라, 더러운 포옹으로 인간과 결합하라고, 먼지에도 써진 바 없는 갖은 맹세로, 영원토록 인간의 충실한 애인으로 남겠노라 서약하라고. 이 위대한 탕녀의 옷자락에, 그녀가 그대에게 빠짐없이 베풀었던 중요한 봉사를 기념하여, 때때로 입을 맞추라. 만일 그녀가 음탕한 젖가슴으로 인간을 유혹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너는, 이 합리적이고 일관된 결합의 산물인 너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오, 불결함의 아들이여! 너의 어머니에게 말하라. 그녀가 남자의 잠자리를 저버리고 고독한 길을 아무런 의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면, 그 존재가 위태로우리라고. 아홉 달 동안 너를 그 향기로운 내벽에 품었던 그녀의 복부가, 그리도 귀엽고 그리도 조용하나 벌써 냉혹하고 사나운 제 연약한 열매에 뒤미쳐 다치게 될 위험을 생각하고 한순간이라도 동요하기를. 불결함이여, 여러 왕국의 여왕이여. 그대의 굶주린 자식놈의 근육이 느낄 수도 없이 서서히 증가하는 광경을 내 증오의 눈에서 떠나지 않게 해다오. 이 목적에 이르려면 남자의 허리에 더욱 바싹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다. 부끄러워 거리낄 것은 없으니, 그대 둘은 오래전에 결혼한 부부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영광의 찬송가에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게 허락된다면, 사방 사십 리에 깊이 또한 그에 맞먹는 구덩이를 파게 했다고 말해야겠다. 여기 이들의 살아 있는 광상(鑛床)이 부정한 순결에 둘러싸여 누워 있다. 광상은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 넓고 밀도 높은 혈맥을 이루어 사방팔방으로 뱀처럼 기어간다. 내가 이 인공 광상을 구축한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인간의 머리칼에서 암컷 이 한 마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내가 연속 사흘 밤을 그 물건과 동침하는 것을 보았으며, 나는 그것을 구덩이 속에 던졌다. 동일한 다른 경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인간 수정이 이번에는 운명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며칠이 지난 후, 수천 괴물들이 물질로 빽빽한 고리를 이루어 우글거리며 빛 속에 태어났다. 이 흉측한 고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거대해지고 수은과 같은 액체의 성질을 확보하여, 여러 갈래로 가지를 쳤으며, 내가 이제 갓 태어난, 그 어머니 쪽에서는 죽기를 바라는 사생아나, 밤 동안에 클로로포름의 힘을 빌려 어느 소녀에게서 잘라낸 한쪽 팔을 먹이로 던져주지 않으면 그때마다, 그들은 서로서로 잡아먹음으로써(출생률이 사망률보다 높았다) 영양을 취했다. 인간에서 자양을 얻는 이의 세대들은 십오 년을 주기로 현저하게 감소되어, 완전 소멸의 머지않은 시기를 스스로 오류 없이 예고한다. 인간이 자신의 적보다 더 영리해서 그들을 무너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힘을 증가시키는 지옥의 삽을 들고 이 무진장한 광상에서 산처럼 거대한 이의 덩어리들을 파낸 다음, 곡괭이질로 부셔서, 깊은 밤에 도시의 동맥에 옮겨놓는다. 거기에서 인간의 체온과 접촉하여, 그들 덩어리는 지하 광상의 구불구불한 갱도에서 저희들이 처음 형성되던 시기의 모습으로 용해되어, 자갈층에 하상을 파고, 시냇물을 이루어 해로운 정령들처럼 주거지로 퍼져간다. 집 지키는 개가 둔탁하게 짖는다. 알지 못하는 존재들의 군단이 벽의 미세한 구멍들을 뚫고, 수면의 머리맡에 공포를 실어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대는 살아가는 동안에 적어도 한 번은 고통스럽고 길게 이어지는 이런 종류의 짖음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다. 개는 그 무력한 두 눈으로, 밤의 어둠을 꿰뚫어보려고 애쓰는데, 개의 뇌일 뿐인 그 뇌가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웅성거림이 개의 화를 돋우고 개는 자신이 속았다고 느낀다. 수수백만 적들이 이렇게 메뚜기 구름처럼 모든 도시를 덮친다. 그 십오 년이 앞에 있다. 놈들은 인간과 전쟁을 벌여 인간에게 쓰라린 상처를 입힐 것이다. 이 기간이 지난 뒤에, 나는 또다른 놈들을 보낼 것이다. 내가 그 살아있는 물질의 덩어리들을 분쇄할 때, 어느 조각은 다른 조각보다 밀도가 더 높을 수 있다. 그 원자들은 자신들의 응집체를 가르고 인간을 괴롭히러 가려고 맹렬하게 힘을 쓴다. 그러나 응집력은 그 단단함으로 저항한다. 원자들이 사력을 다한 경련으로 막대한 힘을 쏟아낸 나머지, 제 살아 있는 성분들을 분산하지 못한 돌덩이가 화약의 폭발력이라도 얻은 듯 하늘 꼭대기까지 자신을 쏘아올렸다가 다시 떨어져서 땅 밑으로 확실하게 파고든다. 가끔 몽상적인 농부는 운석 하나가 옥수수밭을 향해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고 공간을 수직으로 가르는 것을 본다. 그는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이제 이 현상에 대한 명백하고도 간결한 설명을 파지했다. 해변이 모래알로 덮이듯, 대지가 이로 덮여 있다면, 인간 종족은 끔찍한 고통의 먹이가 되어 전멸할 것이다. 대단한 구경거리다! 나는 천사의 날개로 공중에 떠올라 움직이지 않고 그 사태를 관상할 것이다.   1) 마니투: 아메리칸인디언이 모시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942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2) 댓글:  조회:103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2)     두번째 노래(8)   (8) 한 여자가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울림 좋고 선율 고운 음을 내보낼 때, 이 인간 해조(諧調)를 들으며 내 눈은 드러나지 않는 불길로 가득차 고통스러운 불티를 내던지는데, 내 귀에서는 집중포격을 알리는 경종이 울리는 것만 같다.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 깊은 혐오는 어디에서 올 수 있는가? 화음이 악기의 줄에서 날아오르면, 대기의 탄력 있는 파동 너머로 장단 맞춰서 사라지는 이 낭랑한 음을 들으며 나는 쾌감을 느낀다. 그 지각능력이 내 청각에 전해주는 것은 오직 신경과 사고를 녹여낼 것 같은 부드러움의 인상뿐이다. 형언할 수 없는 졸음이, 대낮의 햇빛을 여과하는 베일처럼, 내 감각의 생생한 기운과 내 상상력의 강인한 힘을 마법의 양귀비로 둘러싼다. 내가 귀먹음의 품에 안겨 태어났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내 유년기 초기에, 나는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얘기가 들리지 않았다. 지독한 고역을 치르고, 어른들이 내게 말을 가르치기에 성공했지만, 나는 누가 종이 위에 써놓은 것을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 나름대로 사고의 가닥을 전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불길한 날, 나는 아름답고 순결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저마다 완전무결한 이 소년의 지성과 선량함에 감탄하였다. 영혼이 제 왕자를 놓아둔 그 맑은 용모를 응시하며, 많은 양심들이 얼굴을 붉히곤 했다. 오직 숭배하는 마음을 품고서만 그에게 다가갔던 것은 그의 눈에서 천사의 시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 소년기의 행복한 장미는, 모든 어머니들이 열광하여 입을 맞추는 그의 겸허하고 고결한 이마 위에서, 기발한 화환을 엮어가며, 영원히 꽃피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도 남았다. 우주가 그 무심하면서도 성가신 친구들로 무수하게 별을 박은 궁륭을 지녔다곤 해도, 어쩌면 내가 꿈꾸어왔던 가장 장대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지상 여행의 가파른 오솔길을 발로 밟느라고 지치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삶의 어두운 지하묘지를 누비느라고 지친 나머지, 창공의 오목한 곳을 향해, 푸르스름한 달무리가 넓게 둘러싸인 내 우울한 두 눈을 천천히 들어올려, 감히 하늘의 신비를 꿰뚫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도 어린 내가! 찾는 것을 발견할 수 없던 나는 질겁한 눈꺼풀을 더 높이, 더욱더 높이 들어 올리다가 마침내 인간의 배설물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좌 하나를 볼 수 있었고, 그 위에는 빨지 않은 병상의 시트로 지은 수의에 덮힌 육체가, 스스로 창조주라고 자처하는 그 자가, 바보처럼 오만하게, 군림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는 죽은 인간의 썩은 몸뚱이를 손에 쥐고, 그것을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으로 번갈아 옮겨가고 있었으니, 일단 입으로 옮겨가면 그가 그것을 무엇을 했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의 두 발은 끓는 피의 광대한 늪에 잠겨 있고, 그 늪의 표면에서는, 요강의 내용물을 뚫고 나온 촌충들처럼, 두세 개 신중한 머리들이 갑자기 솟았다가 이내 화살처럼 재빠르게 가라앉곤 했다. 고삐를 걷어차는 발길질이 바로 다른 환경의 공기를 마시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저 규율위반의 널리 알려진 보상이었더라! 아무튼 이 사람들은 물고기가 아니었던 것! 기껏해야 양서류인 그들은 이 불결한 액체 속에서 수면을 들락날락 헤엄치고 있었던 것!--- 마침내 창조주가, 손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면, 그 갈퀴발톱의 처음 두 개를 집게처럼 벌려 또 한 명 잠수자의 목을 움켜쥐고, 맛있는 소스, 그 불그스름한 개흙 밖으로 끌어내어 공중으로 들어올릴 때까지! 그놈에게 한 짓을 그는 다른 놈에게도 하였다. 그는 우선 그놈의 머리를, 두 팔과 두 다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뚱이를 집어삼켜,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뼈까지 바수어 먹어치웠던 것이다. 제 영원의 남은 시간까지, 그렇게 계속, 이따금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너희를 창조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을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너희는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내가 너희들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괴롭히는 것은 나의 쾌락을 위해서다." 그러고는 제 잔혹한 식사를 다시 시작하여, 아래턱을 움직였고, 그에 따라 골수가 잔뜩 묻어 있는 그의 턱수염을 움직이였다. 오, 독자여, 이 마지막 세부 묘사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하지 않는가? 그렇게도 맛있는, 아주 싱싱한, 물고기가 있는 호수에서 십오 분 전에 갓 낚은 그런 골수를 먹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먹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지가 마비되고 목에 맨 가운데, 나는 이 광경을 얼마 동안 응시하였다. 세 번, 너무 강한 감정에 복받친 사람처럼, 나는 넘어져 뒤집힐 뻔했으며, 세 번, 나는 용케 발걸음을 다시 추슬렀다. 나의 몸에서 움직이지 않는 심금은 한 가닥도 없었으며, 나는 화산의 일부 용암이 진동하듯 떨고 있었다. 끝내, 억눌린 나의 가슴이 생명을 이어줄 공기를 충분히 빠르게 내쉴 수 없었으므로, 내 입술은 반쯤 열렸고, 나는 그 사이로 비명을---- 그렇듯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으며----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리더라! 내 귀에 채워진 자물쇠가 갑작스럽게 풀리고, 나로부터 먼 곳에서 힘차게 밀려온 한덩어리 울림 높은 대기의 충격으로 고막이 툭툭거리며 열렸던바, 자연이 가둬놓았던 기관 속에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게서 다섯번째 감각이 살아났던 것! 그러나 이러한 발견으로 내가 어떤 기쁨을 찾을 수 있었던가? 이후, 인간의 소리가 내 귀에 닿을 때마다 거대한 불의에 대한 연민으로 빚어진 고통의 감정도 어김없이 따라왔다. 누군가 내게 말을 하면,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친구들 저 너머에서 어느 날 내가 보았던 그 광경이었고, 짓눌린 내 감정을 번역하는 맹렬한 절규였으니, 그 음색은 내 동류들의 음색과 다르지 않더라! 나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줏빛의 그 흉측한 바다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에 가해진 형벌들이 껍질 벗겨진 코끼리들처럼 울부짖으며 내 얼굴 앞으로 지나가며 그 불타는 날개로 내 머리칼을 검게 태워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인류를 더 많이 알았을 때, 이 연민의 감정에 저 못된 호랑이 어머니를 향한 강렬한 분노가 더해졌다. 그 냉혹한 자식들은 악을 저주하면서도 악을 행할 줄밖에 모른다. 거짓말의 뻔뻔함이여! 그들이 자기들에게서 악은 예외적 상태에만 있을 뿐이라고 말을 하다니! --- 이제, 그것은 오래전에 끝난 일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오, 그대여, 그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 곁에 있을 때, 그대의 성대가 어떤 음성도 내보내지 않기를. 그대의 굳어버린 후두가 나이팅게일을 능가하려고 애쓰지 말길. 그리하여 그대도 언어의 도움을 얻어 내게 그대의 마음을 추호라도 알리려 하지 말라. 겸허하게 포개놓고, 그대의 눈꺼풀을 아래로 내려보내라. 네 그대에게 말한바, 나에게 저 지고의 진실을 알려준 그 비전을 보게 된 이래로, 적잖은 악몽이 밤낮으로 내 목덜미를 탐욕스럽게 빨아대었으니, 그 끔찍한 지옥의 시간에 내가 느꼈던 고통들을, 그 기억으로 쉬지않고 나를 추격하는 고통들을, 비록 생각으로나마, 다시금 되살릴 용기를 얻게 된다. 오! 그대가 차가운 선악의 꼭대기에서 눈사태가 밀려오는 소리를 메마른 사막에서 암사자가 제 새끼들을 잃고 비탄하는 소리를, 태풍이 제 생애를 끝마치는 소리를, 그리고 광포한 문어가 헤엄치는 사람들과 조난자들에게 승리하였다고 바다의 파도에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대는 말하라. 그 장엄한 목소리들이 인간의 냉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냐고!  
941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1) 댓글:  조회:89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1)     두번째 노래(7)   (7) 저기, 꽃으로 둘러싸인 작은 숲속, 양성동체인간(兩性同體人間)이 잔디 위에 깊이 가라앉아, 눈물 젖은 얼굴로, 자고 있다. 달이 구름장에서 그 원반을 끌어내어, 창백한 빛으로 이 청년의 부드러운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의 용모는 가장 남성적인 정력과 하늘나라 처녀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나타낸다. 그에게서는 어느 것도, 여성적인 형태의 조화로운 윤곽을 헤치고 지나가는 그 육체의 근육조차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이마 위로 구부렸고, 다른 손은 가슴 위에 얹어, 어떤 속내 이야기에도 닫힌 채 영원한 비밀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한 심장의 고동을 억누르기라도 하려는 것 같다. 삶에 지치고, 자기와 닮지 않은 존재들 사이로 걷는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절망이 그의 영혼을 짓눌러, 그는 계곡의 걸인처럼 홀로 간다. 그는 어떤 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가는가? 인정 깊은 사람들이 가까이서, 감시한다는 의심이 들지 않게, 그를 돌보고, 그를 버리지 않는다. 그는 그만큼 착하다! 그는 그만큼 체념하고 인증한다! 이따금 그는 민감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과 기꺼이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손을 접촉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상상한 위험을 두려워하여 거리를 둔다. 왜 고독을 친구로 삼았느냐고 누가 그에게 묻기라도 하면, 그의 눈은 하늘을 우러르며, 섭리에 보내는 비난의 눈물을 어렵사리 참지만, 그 눈꺼풀의 하얀 눈(雪) 위에 아침 장미의 붉은 색조 번지게 하는 이런 경솔한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만일 이야기가 길어지면 그는 불안해져서, 가까이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적의 존재를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지평선의 사방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손을 들어 갑작스럽게 작별인사를 하고, 깨어 일어난 제 수치심의 날개를 타고 멀리 벗어나, 숲속으로 사라진다. 보통은 그를 광인으로 여긴다. 어느 날, 복면을 한 남자 넷이 명령을 받고 그에게 덤벼들어, 다리만 움직일 수 있게 그를 단단히 졸라매었다. 채찍이 그 거친 가죽끈으로 그의 등을 내리쳤으며, 남자들은 그에게 지체 없이 비세트르 정신병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라고 말했다. 그가 매를 맞으면서도, 미소를 띠우며 자신이 공부한 수많은 인문학을 넘치는 감정과 지성으로 이야기하여, 그 영혼의 시적인 고결함이 그 가운데 고스란히 드러나는지라, 감시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핏속까지 두려움을 느껴, 그의 결단난 팔다리를 풀어주었으며, 그의 무릎 아래 널브러져 용서를 구하려 용서을 받고는, 통상적으로 인간들에게는 바칠 수 없는 숭배의 표시를 하며 멀어져갔다. 많은 이야기가 오가게 된 이 사건 이후로, 누구나 그의 비밀을 짐작하였으나, 그의 고통을 더 키우지 않기 위해 알지 못하는 척했으며, 정부는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지급하여, 사전 검증도 거치지 않고 잠시라도 그를 정신병원 강제수용하려 했던 것을 잊게 하였다. 그는 그 돈의 반은 자신이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플라타너스가 심어진 작은 길에서 남자와 여자가 산책하는 것을 볼 때면, 그는 자신의 몸이 아래에서 위까지 둘로 쪼개져서, 새로 생긴 두 부분이 저마다 그 산책자들을 하나씩 포옹하러 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환각일 뿐이며, 이성이 지체없이 자신의 제국을 다시 탈환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들 사이에도 자기 존재를 쉬지 않는다. 자신이 괴물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그 지나친 수치심이 누구한테든 그의 타오르는 공감을 내어줄 수 없도록 그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욕되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욕되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그에게 이런 격언을 되풀이하여 들려준다. "저마다 제 본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느니라." 그의 자존심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가 자기 삶을 한 남자나 한 여자에게 결부하면, 조만간 그의 신체조차 형태가 마치 큰 잘못이나 되는 듯이 비난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직 자신에게서 기인할 뿐인 이 불경한 가정에 마음을 상한 나머지, 양성동체인간이 잔디 위에 깊이 가라앉아, 눈물 젖은 얼굴로, 자고 있다. 새들이 깨어나, 나뭇가지 사이로 이 우울한 얼굴을 황홀하게 내려다보고, 나이팅게일은 그 수정의 카바티나를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숲은 불운한 양성동체인간이 밤을 묵어 무덤처럼 엄숙해졌다. 오, 방황하는 나그네여, 가장 사랑스러운 나이에 네 어머니와 네 아버지에게서 떠나게 한 너의 모험정신 때문에, 사막에서 갈증이 네게 불러온 고통 때문에, 추방되어 이방의 땅에서 오랫동안 헤맨 뒤 아마도 내가 찾는 조국 때문에, 네 방랑기질에 못 이겨 네가 답사하였던 그 악천후와 유형을 너와 함께 견디어낸 너의 충실한 친구, 준마 때문에, 그리고 극지의 빙하 한가운데서, 혹은 작열하는 태양의 권세 아래서, 먼 대지와 미담의 바다를 가로지른 여행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그 위엄 때문에, 방황하는 나그네여, 흙 위에 펼쳐져 푸른 풀과 섞여 있는 이 곱슬머리를, 미풍이 한 번 떨리는 듯이라도, 네 손을 만지지 말라. 몇 발자국을 물러서라,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머리칼은 성스럽다. 이 양성동체인간 자신이 그러기를 원했다. 산의 숨결로 향기로워진 그 머리칼에도, 지금 이 순간 창공의 별들처럼 빛나는 그 이마에도, 인간의 입술이 경건하게 입맞추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바로 별 하나가 그 궤도에서 벗어나 공간을 가로질러 그의 위엄 어린 이마에 내려앉았다고, 그 다이아몬드 빛으로 그의 이마를 후광처럼 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 밤은 손가락으로 그의 슬픔을 떼어내며, 자신의 온갖 매력을 두르고 수치심의 이 화신, 천사들의 순결함에 대한 이 완전한 모상(模像)의 수면(睡眠)을 축하한다. 벌레들이 살랑대는 소리는 더욱 희미하게 들린다. 나뭇가지들이 그 무성한 우듬지로 그에게 드리워 이슬로부터 보호해주고, 산들바람이 그 선율 고운 하프의 줄을 울려 만상의 정적을 뜷고 즐거운 화음을 그의 감겨진 눈꺼풀을 향해 보내주니,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은 허공에 떠 있는 세계의 구성진 콘서트를 듣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행복하고, 제 육체의 성질이 변한 것을 본다. 아니, 적어도 자줏빛 구름을 타고 자기와 똑같은 체질을 지닌 존재들이 살고 있는 또하나의 천체를 향해 날아간 꿈을 꾼다. 애달프다! 그의 공상이 새벽빛이 잠 깰 때까지 계속되기를! 그는 꽃들이 거대하고 무성한 화환처럼 자기를 둥글게 둘러싸고 춤을 추며, 그 달콤한 향기를 자기에게 젖어들게 하는 내내 마법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 인간 존재의 품에 안겨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꿈을 꾼다. 그러나 그의 팔이 끌어안는 것은 저녁안개일 뿐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날 때, 그의 팔은 그것마저도 안고 있지 않을 것이다. 깨어나지 말라, 양성동체인간이여, 아직은 깨어나지 말라, 간청한다. 왜 너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는가? 자거라---- 언제까지나 자거라. 공상 속 행복의 희망을 쫓아가며 네 가슴이 부풀기를, 나는 너에게 허락한다. 그러나 눈을 뜨지 말라. 아! 눈을 뜨지 말라! 나는 네 깨어남이 목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너를 떠나려 한다. 아마도 어느 날인가, 나는 두꺼운 한 권의 책에 의지하여, 감동적인 여러 페이지를 통해 네 이야기를 할 것이며,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바와 거기서 풀려나오는 교훈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그러자고 마음먹을 때마다, 하 많은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지고, 노쇠한 탓도 아닌데 내 손가락이 뗠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그럴 용기를 가지려 한다. 나는 내가 여자보다 더 강한 신경을 갖지 못한 것이, 너의 막대한 불운을 생각할 때마다 어린 계집애처럼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분하다. 자거라--- 언제까지나 자거라. 눈을 뜨지 말라, 아! 그러나 눈을 뜨지 말라! 잘 있어라, 양성동체인간이여! 날마다 나는 잊지 않고 너를 위해 하늘에 기도할 것이다(나를 위해서라면 결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가 네 가슴에 깃들기를!    
940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0) 댓글:  조회:96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20)     두번째 노래(6)   (6) 튀일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이 어린애, 그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의 대담한 눈길을 허공 저멀리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쏘아보고 있다. 여덟 살 이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건만, 아이는 보통 그래야 할 것처럼 놀고 있지 않다. 아무튼 혼자 있기보다는 어떤 친구와 웃고 있거나 산택을 해야 마땅할 것이나, 그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다. 튀일리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이 어린애, 그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한 남자가, 숨긴 의도에 부추김을 받아, 수상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바로 그 벤치에, 아이의 옆에 앉는다. 그는 누구인가? 당신에게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의 음흉한 대화를 듣고 그를 알아볼 테니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방해하지 말자: - 얘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 하늘 나라를 생각했어요. - 네가 하늘나라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땅을 생각하는 것으로도 벌써 충분하다. 사는데 지쳤니, 이제 갓 태어난 네가? - 아니요. 하지만 누구나 땅보다 하늘나라를 더 좋아해요. - 그런가, 나는 아니야. 하늘나라도 땅처럼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거기서도 이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야지. 네가 죽은 후, 너의 선행에 따라 네가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 누가 네게 불의를 저지른다면(너는 나중에 실제로 그런 경혐을 할 것이다). 다음 생에도 그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네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은, 신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네가 네 자신에게 정의로운 대갚음을 해주는 일이야.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네 친구들 가운데 어느 녀석이 너를 해코지하면, 너도 그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겠니? - 하지만 그건 금지된 일일 텐데요. -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금지된 건 아니야. 잡히지 않는 것이 다만 문제일 뿐이디. 법률이 베푸는 정의는 아무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해코지 당한 사람의 볍률해석이다. 네가 네 친구들 중의 한 녀석을 미워하는데, 그 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네 눈앞에 떠오른다고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 아니겠어? - 그거야 그렇지요. - 결국 네 친구들 중 한 녀석이 너를 평생 불행하게 하겠구나. 네 증오가 단지 수동적일 뿐인 것을 알고, 그 녀석이 계속해서 너를 업신여기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네게 악을 저지를 테니까 그 상황을 끝낼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자기 원수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까지 하려는 것은, 지금의 이 사회가 어떤 바탕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네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저마다 저 자신에게 정의로운 대갚음을 해주어야 한다. 바보가 아니라면, 제 동류들을 누르고 승리를 쟁취하는 자는 가장 교활하고 가장 강한 자이다. 너는 어느 날인가 네 동류들을 지배하고 싶지 않니? - 네 그래요. - 그렇다면, 가장 강하고 교활한 자가 되어라. 네가 가장 강한 자가 되기에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오늘부터 너는 책략을 사용할 수 있다. 천재들의 가장 아름다운 도구지, 양치기 다윗이 돌팔매질 끈으로 돌 하나를 던져 거인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었을 때, 훌륭하다고 해야 할 것은 다윗이, 제 적을 오직 책략으로 무찔렀기에 망정이지, 반대로 그들이 완력으로 맞붙었더라면 거인이 그를 파리처럼 짓이겨버렸으리라는 걸 알아차리는 게 아니겠느냐?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네 의지를 펼쳐 다스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맞싸움으로는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술책으로는 너 혼자서도 모든 사람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 너는 부와 아름다운 궁전과 명예를 얻고 싶지? 아니면 네가 나한테 이런 고상한 포부들을 늘어놓으면서 나를 속인 것이냐? - 아니예요, 아니예요, 속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얻고 싶어요. - 그렇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텐데. 착하고 우직한 방법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보다 더 강한 지렛대와 더 영리한 술책에 일을 맡겨야 한다. 네가 너의 미덕으로 이름을 떨치고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백 명의 다른 사람들이 네 등에 올라탈 시간을 벌어 너보다 먼제 출세가도의 목적지에 이를 테니. 너의 좁은 소견으로 차지할 자리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크게, 현재 이 시간의 지평선을 두루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승리가 가져올 무한한 영광에 대해 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느냐? 그러나, 승리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승리를 만들어내어 정복자의 발아래 가져다 놓으려면, 피를, 많은 피를 쏟아야 한다. 살육이 꽈바르게 벌어진 평원에서, 네 눈앞에 흩어진 시체들과 찢겨진 팔다리들이 없이는 전쟁이 없을 것이며, 전쟁이 없이는 승리가 없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유명해지고 싶다면, 육체를 대포의 먹이로 바친 피의 강물에 우아하게 몸을 담가야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름을 떨치려면, 첫번째 할 일은 돈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돈이 없으니까, 사람을 죽여서 돈을 거머쥐어야 한다. 그러나 너는 단도를 다룰 만큼 힘이 세지 않으니, 팔다리가 굵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도둑이 되어라. 그리고 더 빨리 굵어지도록, 하루에 두 번, 아침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 체조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스무 살까지 기다릴 것 없이 열다섯 살에 범죄를 시험해보더라도 확실하게 성공할 것이다. 명예를 사랑하면 무슨 짓이라도 용서되며, 그래서 아마도 뒷날에는 네 동류들의 스승이 되어, 네가 처음에 그들에게 저질렀던 악행만큼의 선행을 그들에게 베풀 수도 있을 것이다!---   말도르는 제 어린 대화상대자의 머릿속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알아챈다. 아이의 콧구멍이 부풀고 입술이 가볍고 하얀 거품을 내뿜는다. 말도로르는 그의 맥을 짚어본다. 맥박이 급하다. 열이 이 섬세한 육체를 사로잡은 것이다. 아이는 뒤이어질 그의 말을 두려워한다. 불행한 자, 그는 이 아이와 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며, 슬그머니 사라진다. 성숙한 나이라 하더라도, 선과 악 사이에서 요동하는 제 정염을 다스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판에, 아직도 미숙함으로 가득차 있는 한 영혼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에 맞먹을 아주 많은 에너지가 그애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는 사흘 동안 침대에 누워있긴 하겠지만 별 탈 없이 끝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다르지 않아 어머니의 어루만짐이 이 민감한 꽃송이, 아름다운 한 영혼의 허약한 봉투에 평화를 담아주시길!
939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9) 댓글:  조회:90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9)     두번째 노래(5)   (5) 나는 늘 하던 산보를 하며, 날마다 좁은 길 하나를 지나가곤 햇다. 날마다 열 살짜리 날씬한 소녀가 동정과 호기심이 어린 눈꺼풀로 나를 바라보며, 거리를 두고 공손하게 이 길을 따라 내 뒤를 쫓았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키가 컸으며,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머리 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검고 풍성한 머리칼은 따로따로 대리석 같은 어깨 위로 땋아 내려져 있었다. 어느 날은, 그녀가 평소처럼 나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한 여성 주민의 근육질 팔이 그녀의 머리칼을 마치 회오리바람이 나뭇잎을 휘어잡듯 휘어잡아, 그 당당하고 말없는 빰을 난폭하게 두 번 때리고는, 이 넋 나간 의식을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무관심한 척하였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때 아니게 나타나 나를 따라왔다. 내가 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다른 길로 접어들 때는, 그녀는 격렬한 노력으로 그 좁은 길의 끝에 침묵의 동상처럼 요지부동으로 멈춰 서서, 내가 사라질 때까지 그치지 않고 자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은, 이 소녀가 길에서 나를 따라잡더니, 발꿈치가 닿을 정도로 앞서가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추월하려고 거의 뛰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내가 걸음을 늦추어 그녀와 나 사이를 크게 벌려 충분한 간격을 두려 하면, 그녀 역시 걸음을 늦추고, 어린애다운 귀염을 띠는 것이었다. 그 길의 끝에 이르자, 그녀는 내 통행을 막는 식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몸을 빼낼 시간이 없어서 그녀와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그녀의 눈을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싶은데, 어떻게 걸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갑자기 시체처럼 창백해져서 내게 물었다. "지금 몇 시인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는 시계를 차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고 재빨리 달아났다. 불안하고 조숙한 상상력을 지닌 아이야, 너는 그날 이후로 그 좁은 길에서, 무거운 샌들로 구불구불한 갈림길들의 포도를 고통스럽게 밟아 울리던 그 신비스러운 젊은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이 불타는 혜성이 네 낙담한 관찰의 정면에 열광적인 호기심의 슬픈 대상처럼 나타나 빛나는 일은 이제 더는 없을 것이며, 너는 그 사람을 자주, 너무 자주, 아마도 날마다 생각할 터인데, 그 사람은 지금 이 삶의 악에 대해서도, 선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고, 무섭도록 사색이 된 얼굴, 곤두선 머리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운명의 가차없는 제설기에 몰려, 온 공간의 거대한 영역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희망의 피 흐르는 먹이를 거기서 찾기라고 하려는 듯, 에테르의 아이러니한 물속에서 두 팔을 맹목으로 허우적거리며, 무턱대고 가고 있었다. 너는 나를 이제 만나지 못할 것이다! --- 누가 알랴? 필경 이 소녀는 겉에 드러나는 그대로가 아니었다. 순진한 외피 밑에 그녀는 필경 거대한 술책과 열여덟 해의 무게와 악덕의 매력을 숨기고 있었다. 사랑을 파는 여자들이 영국의 섬들에서 희희낙락 망명하여 해협을 넘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은 날개를 반짝이며, 금빛 벌떼를 아루어, 파리의 불빛을 받아 선회하였다. 당신은 그녀들을 알아보고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애들이다 열 살이나 열 두살을 넘지 않았다." 실제로는 스무 살이었다. 오! 이렇게 추론하면, 이 어두운 길의 모퉁이들은 저주를 받은 것이로다! 무섭다! 무섭다! 거길 지나가는 것이. 나는 소녀가 제 직분을 충분히 민완하게 수행하지 않아서 그 어머니가 소녀를 때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그대는 어머니의 죄가 더 큰 것이다. 나는 가정에 지나지 않는 이 추론을 믿고 싶지 않으며, 이런 낭만적인 성격이라면, 너무 일찍 베일을 벗는 영혼을 사랑하는 쪽이 더 좋다---- 아! 아느냐, 소녀야, 언젠가 내가 이 좁은 길을 다시 지나가더라도,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네게 충고한다. 그러다간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벌써 피와 증오가 끓는 물결처럼 내 머리로 솟구친다. 나는 내 동류를 사랑할 만큼은 충분히 관대하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부터 그러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어느 인간 존재의 더러운 손을 만지기도 전에, 세계들이 파멸하고, 화강암이 한 마리 가마우지처럼 물결 이는 수면 위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뒤로--- 뒤로 물려라! 이 손을!---- 소녀야, 너는 천사가 아니며, 결국 너는 다른 여자들처럼 될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네게 애원한다. 내 찌푸린 사팔뜨기 눈썹 앞에 더는 나타나지 말라. 어느 미망의 순간에, 나는 네 두 팔을 붙들어 세탁한 속옷의 물기를 짜내듯 비틀거나, 마른 두 개비 장작처럼 우지끈 부러뜨리곤, 완력을 써서 네게 그걸 먹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두손으로 네 머리를 부드럽게 잡고, 그 무죄한 뇌엽에 내 탐욕스러운 손가락을 찔러넣어, 평생토록 끝나지 않는 불면에 시달리는 내 두 눈을 씻는 데 효과적인 지방을,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추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늘로 네 눈꺼풀을 꿰매어, 천지의 조망을 네게서 빼앗고, 네 길을 찾기에 불가능한 지경에 너를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네게 안내자가 되어줄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처녀인 네 몸을 내 강철 팔로 들어올려, 네 두 다리를 잡고, 투석기처럼 내 주위로 너를 내돌려 가장 큰 원주를 그려 힘을 모으고는 너를 담벼락에 내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피가 방울방울 한 인간의 가슴에서 솟아나와, 인간들을 두렵게 하며, 그들 앞에 내 악독함의 예를 보여주리라! 그들은 쉬지 않고 제 살을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내리라. 그러나 핏방울은 똑같은 자리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무슨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리라. 안심하라. 나는 내 반 다스의 하인들에게 네 육체의 존경할 만한 잔해를 지키고, 아귀 들린 개들의 허기로부터 그것을 보호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필경, 몸은 익은 배처럼 성벽에 눌어붙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들은, 누가 지키지 않는다면, 훌륭한 도약을 완수할 수 있다.  
938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8) 댓글:  조회:99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8)     두번째 노래(4)   (4) 자정이다. 바스티유에서 마들렌으로 가는 합승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틀렸다. 합승마차 하나가 갑자기 땅밑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나타나지 않는가. 귀가가 늦어진 몇몇 행인들이 마차를 주의깊게 바라본다. 여느 마차와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지붕 위 이층 좌석에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움직이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 밀어붙이며 앉아 있는 꼴이 생명을 잃어버린 것 같다. 더구나 정원이 초과된 것도 아니다. 마차꾼이 말들을 채찍질할 때, 그의 팔이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채찍이 그의 팔을 휘두르는 것만 같다. 이 기이하고 말없는 존재들의 결합을 무어라고 해야 하나? 달의 주민들인가? 그렇게 믿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들은 오히려 시체들을 닮았다. 합승마차는, 마지막 역에 도착하는 것이 급해, 허공을 집어삼키며, 포장도로를 삐걱거리게 한다--- 달아난다!---- 그러나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따라 악착스럽게 쫒아간다. "세워주세요, 제발 세워주세요--- 하루종일 걸어서 다리가 부었어요. ---- 어제부터 먹지도 못했어요.--- 부모님들이 나를 버렸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했어요. 자리 하나만 내주신다면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난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예요. 여러분들을 믿어요----" 마차는 달아난다!---- 달아난다!---- 그러나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따라 악착스럽게 쫓아간다.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차가운 눈으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찌르며, 자기 귀에까지 이르는 이 은빛 음색의 하소연에 마뜩잖은 기분을 그에게 표현하는 것 같다. 옆 사람은 동의한다는 식으로, 흐지부지하게 고개를 숙이며, 곧바로 거북이가 자기의 등껍질 속으로 숨어들듯, 제 이기심의 요지부동함 속에 다시 빠져든다. 다른 여행자들의 태도에서도 모든 것이 앞의 두 사람의 기분과 똑같은 기분을 나타낸다. 외침소리는 이삼 분 동안 더 들리고, 일 초 일 초 더욱 날카로워진다. 대로를 향해 창들이 열리고, 겁먹은 얼굴 하나가 손에 등불을 들고 차도 위에 눈길을 던지더니, 격렬하게 덧문을 다시 닫고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 마차는 달아난다!---- 달아난다!---- 그러나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따라 악착스럽게 쫒아간다. 오직 한사람, 몽상에 잠긴 젊은이만, 이 돌덩어리 인물들 가운데서, 그 불운에 동정을 느끼는 것 같다. 작고 아픈 다리로 마차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편들어, 그는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경멸과 위압에 찬 시선을 던지기 때문이며,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맞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그는 어안이 벙벙해서, 인간의 자비라 불리는 것이 진실로 이런 것인지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이 말이 이제는 시어 사전에도 발견할 수 없는 헛된 낱말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솔질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 그는 혼자 말한다. "사실, 어린애 하나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내버려두자." 그렇지만 이 청년의 빰 위로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욕설을 내뱉는다. 그가 손으로 고통스럽게 이마를 문지르는 모습이, 마치 그 불투명함으로 자기 지성을 어둡게 하는 구름을 그 이마에서 흩뜨려버리려는 것 같다. 그는 분발하나, 자신이 던져진 이 세기에서, 헛되이 분발한다. 그는 이 세기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느끼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무서운 감옥! 악랄한 운명! 롱바노여, 나는 오늘부터 너에게 만족하노라! 나의 얼굴이 다른 여행자들의 얼굴과 똑같은 무관심을 내보이는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너를 관찰하였다. 청년은 분개하는 동작으로 일어나서, 비로소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악행에 가담하지 않으려고 자리를 뜨려 한다. 내가 그에게 손짓을 하여, 그는 내 옆에 다시 몸을 내려놓는다.----- 마차는 달아난다! 달아난다!---- 그러나 형체을 알 수 없는 덩어리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따라 악착같이 쫓아간다. 외침소리가 갑자기 끊어진다. 아이가 솟아나온 포석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합승마차는 지평선으로 사라지고 조용한 거리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차는 달아난다! 달아난다! ---- 그러나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하나는 이제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따라 악착스럽게 쫓아가지 않는다. 희미한 램프를 늘어뜨리고 허리를 구부리고 지나가는 넝마주이를 보라. 그는 합승마차에 탄 그와 같은 족속들 전체가 지닌 것보다 더 많은 심장을 지녔다. 그는 이제 아이를 거두었다. 그가 아이를 치료할 것이며, 아이의 부모가 했던 것처럼 아이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시라. 마차는 달아난다!---- 달아난다!---- 그러나, 넝마주이가 서 있는 곳에서, 그의 통렬한 시선이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따라 악착스럽게 쫓아간다!---- 어리석고 바보 같은 종족이여! 그렇게 행동하다니, 너는 후회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후회할 것이다. 가라! 너는 후회할 것이다. 나의 시는 오직 이 야수 인간과, 그리고 이와 같은 해충을 만들어내지 말았어야 할 창조주를 공격하는 데 있을 것이다.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시집 위에 시집이 쌓일 것이로되, 그러나 거기에서는 언제까지나 나의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은 단 하나의 생각만을 보게 될 것이다.  
937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7) 댓글:  조회:97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7)     두번째 노래(3)   (3) 로엔그린과 내가 거리에서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바쁜 두 행인처럼 팔꿈치를 스치며 옆으로 지나가는 날이 오지 않기를! 오! 내가 이런 가정으로부터 언제까지나 멀리 도망칠 수 있기를! 영원한 자는 지금 이대로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만일 그가 망치를 한 번 내리쳐 여자의 머리를 박살내기에 필요한 바로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항성 같은 위엄을 접어두고, 삶이 작은 배의 밑창에 갇힌 물고기처럼 신비 한가운데서 질식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 신비를 계시한다면, 그는 많은 지혜를 보여주는 셈이련만. 그러나 그는 위대하고 고귀하다. 그는 그 이해력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만일 그가 인간들과 담판을 짓는다면, 온갖 치욕들이 그의 얼굴에 까지 용솟음칠 것이다. 그러나--- 가련하도다! 왜 너는 얼굴을 붉히지 않는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의 떼거리를 낳아놓은 것으로는 모자란다. 누더기를 둘러쓴 우리 운명의 비밀이 우리에게 폭로되지 않았다. 나는 전능한 자, 그를 알고---- 그도 분명 나를 안다. 우연히, 우리가 같은 오솔길을 걸어가면, 그의 꿰뚫는 시선은 저멀리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자연이 네게 혀 대신 주었던 혀 모양의 삼중 독침을 피하기 위해, 샛길로 접어든다! 오, 창조주여, 내 생각하는 바를 퍼붓도록 나를 내버려두어, 나를 기쁘게 해다오. 꿋꿋하고 냉정한 한쪽 손으로 무시무시한 아이러니를 다루며, 내 너에게 경고하노니, 내 가슴에 이 아이러니가 충분히 담겨 있는 만큼, 나는 삶의 끝까지 너에게 덤벼들 것이다. 나는 네 구멍 뚫린 해골을 칠 것이다. 그것도 매우 강렬하게 칠 것이니, 인간이 너와 동등해질 것을 필경 질투하여, 네가 인간에게 주려 하지 않았던 지성의 남은 파편들을 그 해골에서 쏟아져나오게 함을 내 임무로 짊어지는 것이다. 이는 또한 내가 너의 창자 속에 그 지성의 쪼가리들을 뻔뻔스럽게 숨겨놓은 탓이기도 하다. 이 교활한 산적아, 어느 날인가, 내가 항상 열려 있는 이 눈으로 그 쪼가리들을 이미 발견하고 끄집어내어, 나의 동류들과 함께 나누었을 것임을 네가 모르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이제, 나의 동류들은 너를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와 힘에는 힘으로 대응한다. 내가 나의 대담함을 후회하도록 나를 죽여보라. 나는 가슴을 내밀고 겸손하게 기다린다. 자, 어서 모습을 보여라. 영원한 징벌의 가소로운 역량이여!--- 지나치게 찬양되는 속성들의 과장된 전사여! 그는 자기를 조롱하는 나의 혈액순환을 멈출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다른 인간들의 숨결을, 때 이른 나이에, 그들이 인생의 기쁨을 겨우 맛보려 할 때, 주저없이 꺼버린다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저 잔학한 처사인데, 그러나 이는 단지 내 견해의 유약함에 따른 것일 뿐이다! 나는 창조주가 자신의 쓸데없는 잔인성을 몰아내어, 화재를 일으키고, 그 불에 늙은이들과 어린애들이 스러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팽이를 돌리듯, 강철 채찍 회초리로 자기를 돌리도록 나를 강요하는 것은 바로 그인 것이다. 자신에게 퍼부을 비난을 내게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가 아닌가? 나의 이 무시무시한 열변은 추호도 고갈되지 않으리라! 이 열변은 나의 불면을 괴롭히는 괴이한 악몽들을 먹고 자란다. 여기까지 쓴 것은 로엔그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그가 후에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는 그가 지순함의 나이를 갓 넘겻을 때, 그를 단도로 찔러죽이기로 우선 결심을 했다. 그러나 나는 숙고했고, 곧바로 내 결심을 슬기롭게 포기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십오 분간 위험에 처했던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칼도 사두었다. 이 단검은 예뻤는데, 그것은 내가 죽음의 도구에서까지도 우아하고 멋진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은 길고 날카로웠다. 목의 동맥 하나를 조심스럽게 찔러 상처 하나만 내면 충분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 처신에 만족하나, 후에 뉘우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로엔그린이여, 네가 바라는 바를 행하라, 즐거울 대로 행동하라, 나를 평생 동안 어두운 감옥에 가두고 내 억류 생활의 동료로 전갈을 함께 처넣을지라도, 혹으 내 눈알 하나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내 눈구멍을 후벼팔지라도, 나는 너를 추호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 것이다. 나는 너에게 속한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 네가 나에게 불러일으킬 고통이 크다 한들, 저 학살의 손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자가 그의 동류들의 기름보다 더 성스러운 기름에 적셔질 것임을 안다는 행복과 어찌 비교될 수 있으랴! 그렇다, 한 인간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악하지는 않다는 희망을 간직하는 것이 아직도 아름다운 일일진대, 이는 내 쓰라린 공감에서 나오는 의심스로운 혐오감을, 자기 쪽으로, 강제로, 끌어모을 줄 알았던 사람이 끝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93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6) 댓글:  조회:97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6)     두번째 노래(2)   (2) 나는 두번째 노래를 지을 깃털펜을 쥐고 있었으니--- 적갈색 흰꼬리수리의 날개에서 뽑아낸 도구가 아니던가! 그러나--- 도대체 나의 손가락에 무슨 탈이 났는가?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내 관절들이 마비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쓸 필요가 있다--- 그게 불가능하다니! 아, 이런, 되풀이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내 생각을 쓸 필요가 있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저 자연법칙에 따를 권리가 있다--- 그러나 안 된다, 안 된다, 펜이 움직이지 않는다!--- 자,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서 빛나는 번갯불을 보라, 뇌우가 허공으로 내달린다. 비가 온다--- 여전히 비가 온다---- 저토록 비가 온다!---- 벼락이 작열했다---- 벼락이 반쯤 열린 내창문에 떨어지고, 내 이마를 쳐, 나를 타일바닥에 눕혔다. 가엾은 젊은이여! 네 얼굴은 벌써 때 이른 주름살과 타고난 기형으로 충분히 덮여 있으니, 그 위에 유황냄새 나는 흉터가 필요치 않다!(나는 방금 이 상처가 아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빨리 낫지는 않을텐데) 이 뇌우는 웬일이며, 내 손가락의 마비는 웬일인가? 내가 글 쓰는 것을 막고, 내 네모진 입에서 침을 흘리면서 내가 무엇에 노출되어 있는지 더 잘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경고인가? 그러나, 아, 뇌우가 내게 두려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 폭풍우 군단이 내게 무슨 대수일 것인가! 내 상처난 이마를 굴려 개략적으로 판단컨대, 하늘의 경찰들이 자기들의 고달픈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전능한 자에게 그의 뛰어난 재주에 대해 감사할 필요가 없다. 그는 상처에 가장 취약한 부분인 이 이마로부터 시작하여 내 얼굴을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가르려고 벼락을 내려보내지 않았는가. 다른 인간이나 그를 찬양하시라! 그러나, 뇌우는 자기들보다 더 강한 자들 가운데 어떤 자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살모사의 얼굴을 한 소름 끼치는 영원한 자야, 그대는 광기와 분노 어린 생각들의 경계에 내 혼을 놓아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것들을 서서히 죽일 뿐이니, 너의 위엄에 걸맞도록, 그에 더하여, 농익은 실험을 한차례 거친 뒤에, 나의 이마에서 한 대접 피를 쏟아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했으리라!--- 하지만 결국, 너에게 어떤 것을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기는커녕 내가 너를 증오한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다. 왜 고집을 부리는가? 언제쯤이면 너의 행장은 기이함으로 그 겉모습을 감추기를 그만두려 할까? 친구에게 말하듯, 내게 솔직히 말하라. 너는 결국 그 추악한 박해중에 순진한 친절을, 너의 세라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우스꽝스러운 완성판을 다시 재연할 수는 없을 그런 친절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는 그걸 짐작도 못하는 것인가? 어떤 분노가 너를 사로잡았는가? 너는 알아야 하리라, 너의 추적을 피하여 살아가도록 나를 내버려둔다면, 너는 내 감사를 받아 마땅할 것임을--- 자, 어서, 술탄아, 방바닥을 더럽히는 이 피를 그 혀로 내게서 씻어다오. 붕대 감기는 끝났다. 닦인 내 이마는 소금물로 씻기고, 나는 내 얼굴에 좁은 헝겁 띠를 십자로 질러 묶었다. 결과가 무궁무진한 것은 아니다. 피가 홍건한 속옷 네 벌과 손수건 두 개--- 누구도 처음에는 말도로르가 그의 동맥에 그렇게 많은 피를 담고 있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 위에서 빛나는 것은 오직 시체의 반사광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와 같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몸에 담길 수 있는 거의 모든 피이며, 더는 그의 몸에 많은 피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됐다, 됐어, 탐욕스러운 개야. 방바닥을 그냥 그대로 놔두어라. 너의 배는 가득 찼다. 마시기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머지않아 토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적당히 포식하였으니, 네 개집으로 가서 자거라, 네가 행복 속에서 헤엄친다고 생각하라. 왜냐하면 너는 내가 네 목구멍으로 내려보낸 혈구 덕분에, 엄숙하리만큼 가시적인 만족감을 누리며, 망연한 사흘 동안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 레망이여,1) 대걸래를 들어라, 나도 하나 들고 싶다만 그럴 힘이 없구나. 너는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너의 눈물을 눈물주머니에 거둬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커다란 발자국을 네가 냉정하게 응시할 용기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 칼자국을 초래한 형벌이야 나로서는 지나간 시간의 어둠 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렸다. 너는 샘으로 물통 두 개를 찾으러 가거라. 일단 마루가 닦이면, 너는 이 속옷들을 옆방에 가져다놓아라. 빨래하는 여자가 저녁에 다시 오거든, 그러기로 되어 있으니, 이것들을 그 여자에게 맡겨라. 그러나 한 시간 전부터 비가 많이 오고 있고 여전히 내리고 있으므로, 그 여자가 자기 집에서 나올 것 같지 않구나. 그럼, 내일 아침에는 오겠지. 여자가 너에게 이피가 모두 어디에서 나온 거냐고 묻더라도, 네가 꼭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 나는 너무나 기운이 없구나! 상관없다. 그렇더라도 펜대를 들어올릴 힘과 내 생각에 골몰할 용기는 있을 것이다. 벼락을 수반하는 뇌우로,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나를 겁박해서 창조주가 무슨 이득을 얻었던가? 그렇더라도 나는 글을 쓰려는 결심을 고수한다. 이 좁은 붕대들이 나를 귀찮게 하고, 내 방의 공기가 피냄새를 풍긴다---   1) 레망, 로젠그린 등 에 나오는 여러 이름에 특별한 전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제 1절에서 이 이름들을 가리켜 "내 깃털펜이 한 뇌수에서 끌어냈던, 저 천사의 본성을 지닌 상상적 존재들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935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5) 댓글:  조회:106  추천:0  2019-07-06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15)     두번째 노래(1)     (1) 말도로르의 저 첫번째 노래는 어디를 지나갔는가? 노래의 입이, 벨라도나1)의 잎을 가득 물고, 깊은 생각의 한 순간에, 분노의 왕국을 가로질러, 쏟아보낸 이후로, 저 노래가 어디를 지나갔는가---- 그것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래를 붙잡아둔 것은 나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가던 도덕은, 이들 작열하는 페이지에 자신의 힘찬 옹호자가 있음을 예견하지 못한 채, 이 노래가 굳세고 곧은 발걸음으로 의식의 어두운 구석과 비밀스러운 바탕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적어도 과학에서 기정사실이 된 것은, 그때 이후로, 인간이 두꺼비의 낯짝을 하고도 더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저를 숲의 짐승과 닮게 하는 분노의 발작에 자주 빠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다. 어느 때나, 인간은 겸손의 물푸레나무에 눌려 눈꺼풀을 내리접고, 자신이 선과 극소량의 악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느닷없이 내가 나타나 그의 마음과 근성을 한낮의 햇빛에 드러내보이며, 그의 믿음과는 반대로 그가 악과, 입법자들이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고심하는 극소량의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그에게 가르친 것이다.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건만, 내가 알린 쓰라린 진실 때문에 그가 영원한 치욕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그러나 이런 희망의 실현은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으리라. 실제로 내가 그의 표리부동하고 진흙투성이인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내고, 저 자신을 속이는 그 숭고한 거짓들을, 은 대접 위에 상아 공을 떨어뜨리듯, 하나하나 떨어뜨리면, 그때, 이성이 오만의 암흑을 흩뜨려버릴 때조차도, 그가 평온함에게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라고 명령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 때문에, 내가 연출하는 주인공은, 박애적이고 황당한 장광설들의 틈바구니에서, 저 자신을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인류를 공격함으로써, 화해할 수 없는 증오를 샀다. 그 장광설이 인류의 수많은 책 속에 모래알처럼 쌓이고, 나마저도, 이따금 이성이 나를 저버릴 때면, 그토록 우스꽝스럽고도 짜증나는 그 익살극을 높게 평가할 지경이 된다. 그는 그 점을 예견했던 것이다. 도서관이 간직하고 있는 양피지 더미의 꼭대기에 선의의 상을 조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오, 인간 존재여! 이제 한 마리 벌레처럼 벌거벗은 채 금강석 칼 앞에 놓인 게 바로 너로구나! 네 방법을 버려라, 이제 더는 거만을 떨 때가 아니다. 나는 엎드린 자세로 너를 향하여 나의 기도를 들어올린다. 네 죄 많은 생애의 가장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관찰하는 어떤 자가 있다. 너는 그 가차없는 통찰력의 치밀한 그물망에 싸여 있다. 그가 허리를 돌린다고 해도 그를 믿지 말라. 그가 너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눈을 감는다고 해도 그를 믿지 말라. 그가 여전히 너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술책과 악의에 있어서, 너의 위험한 해결책이 내 상상력에서 태어난 아이를 능가한다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그 아이의 가장 하찮은 타격도 효과를 거둔다. 그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라면, 이리와 산적이라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을, 신중하게, 가르치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습속은 아니다. 그런고로, 네 생존에 대한 배려를 그의 손에 두려움 없이 맡겨보라. 그는 네 생존을 자기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끌고 갈 것이다. 믿지 말라.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네가 그의 관심을 어쭙잖게만 끌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내 진위확인의 친절한 척도인 총체적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자기와 똑같이 약해져서, 그 시간의 종이 울릴 때, 네가 자기를 따라 입을 크게 벌린 지옥의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정당하게 설복하는 과정에서, 그가 너에게 기꺼이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의 자리는 오래전부터, 사슬과 쇠고리들이 걸린 강철 교수대가 뚜렷한 곳에 표시되어 있다. 운명이 그를 그리로 데려갈 때, 을씨년스러운 구덩이의 아가리는 그보다 더 맛있는 먹이를 맛본 적이 없을 것이며, 그도 또한 그보다 더 알맞은 거처를 구경한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고, 인류는 불평할 권리가 없는 것 같다.   1) '아름다운 귀부인'이라는 뜻을 지닌 벨라도나(belladonne) 진정제나 마취제로 사용되는 약용식물이다. 이 식물이 마취와 진정 작용을 첫번째 노래의 최면효과와 연결시키려는 연구자들이 있다.  
934    别说 文/王军 댓글:  조회:213  추천:0  2019-07-03
别说 文/王军     别说…… 别说水珠小, 它编织云儿轻柔的衣裳; 别说石头小, 它铸就大山厚实的胸膛; 别说花儿小, 它装扮大地美丽的梦想; 别说浪花小, 它唱响大海如诗的乐章。 别说娃娃小, 他将理想的火把燃烧得越来越旺。  
933    낭만적 영혼과 꿈 / 알베르 베겡 저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댓글:  조회:346  추천:0  2019-06-30
낭만적 영혼과 꿈 알베르 베겡 저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독일낭만주의와 프랑스 시에관한 시론       서문       꿈의 개화 현상   밤의 꿈들, 표면에 너무 근접해서 조그만 충격에도 표면으로 드러날 것같은, 낮에도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더욱 신비로운 꿈들, 거기에는 여러가지 기호들을 통해 자신의 영속성과 풍성함을 나타내는 또하나의 현실이 있다.     내가 소홀히 한 것, 망각속으로 사라져버린 것들이 어느날, 뜻하지 않게, 땅속에 묻힌 씨앗이 꽃이나 나무로 자라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자양으로 성장하여 변용된 모습으로 거기서 다시 솟아오른다.     그것은 나 자신보다 훨씬 더 먼곳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는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 또는 개체로서의 내 존재의 영역과는 다른 어떤 영역에서 오는 것만 같다.         상상력의 세계   상상을 통해 표출되는 이미지들은 바로 나의 내부에 있는 꿈을 자극하고 표면에 떠오르게 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에 투사하는 능력을 갖고있다. 또는 사물들이 나의 외부에 존재하기를 멈추고   마술적인 그들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름받고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위해 생동한다고도 말 할 수있다.     사상이나 예술작품은 실제로 우리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에 관계한다. 외관상의 개체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 자신에게로 향해진 그부분에 이르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근심밖에 남지 않는다.     징조와 신호들에 우리자신을 열고, 그럼으로써 한순간 완전히 생소하게 응시된 인간조건이, 그것이 가지는 위험과 전반적인 불안, 아름다움과 실망스런 한계들과 함께 불러일으키는 혼미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그 근심이다.           꿈 신화의 황금시대의 유적인 우리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성인이 된 인간은 사물들, 종이 조각들, 예전에 친숙했던 풍경들과 같은 마술적 잔해의 힘을 빌어, 자신 속 어딘엔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위해 끓어오를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일깨우려한다.     우리의 자애심 자체가 우리에게 깊이 감추려드는 가장 독특한 우리 존재에 대한 인식은, 거울이나 사진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죽어버린 우리의 초상에서 우리의 얼굴 혹은 어깨에 대한 미지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러한 조화 혹은 특수한 법칙을 포착하려면, 시간에 대한 관조를 통해 시간에서 벗어나거나, 귀를 귀울여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의 운명인 이 멜로디를 식별해 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류가 행하는 , 각 개인의 멜로디가 귀결되는 인류 자신의 멜로디에 대한 탐구이기때문이다.     꿈이란 말은 한편에서는 미학적이거나 특이한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는 밤의 꿈을 지칭하고, 또한편에서는 관념의 세계보다는 감성으로 채워진 , 안락처를 찾아 나선 정신을 이끄는 변함없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뜻한다.     또 달리는 시인과 신화적 상상력이 한결같이 그들의 부를 길어오는, 먼 과거에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무의식적 기억이라는 보물창고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때로는 유령들이 살고있는 위험한 장소이기도하고, 또 때로는 천국을 향해 열려있는 휘황찬란한 현관이기도 하다. 신 자신이 꿈을 통해 우리에게 엄숙한 경고를 전하기도 하고, 대지에 밖혀있는 우리의 뿌리가 꿈에 의해 자연의 풍요로운 품으로 뛰어 들기도 한다.     예술의 리듬에 영감을 불어넣는 몽환적 삶의 리듬은 별들의 영원한 운행과도, 원죄를 짓기 전에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인 박동과도 일치한다.     낭만주의자들은 무의식적 이미지들 속에서, 그것이 비록 병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미지의 영역으로 이끄는 길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병적 이미지를 정화시켜 지상의 삶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려는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시공 속에서 우리를 우리 너머로 연장시켜 현재의 우리존재를 무한한 운명의 선 위에 찍힌 한점으로 만드는 모든것의 비밀을 거기에서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제1장 낮에서 밤으로   낭만주의자들은 꿈이나 또다른 주관적인 상태들을 통해 자신 속에 침잠함으로써 우리의 의식보다 '더 우리자신인' 우리의 부분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일한 앎은 내적 심연으로의 침잠을 통한 앎, 개별적인 우리의 리듬과 전 우주적 리듬의 일치를 통한 앎,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어떤 실재에 대한 유추적인 앎이다.     1. 켜진 촛불 우리의 무의식적 기억과 향수는 우리가 육체화되어 생리적으로 개인이 되는 탄생의 신비에 앞서는 어떤 존재의 무엇인가가 우리 속에 계속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2. 지상의 미로 이중적 충동- 광활한 공간에 대한 갈망과 칩거생활에 대한 욕망, 감옥처럼 느껴지는 한계 밖으로의 도피와 그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 오게 만드는 현기증- 모리츠는 일찌감치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그 충동은 그의 내적 삶의 원초적이고 심원한 리듬, 그존재의 풍부함과 비극성을 형성한다.     팽창에서 자기 내부로의 귀환, 신비주의적 내적일치에서 행동의지의 고갈로 이행되는 동일한 리듬이 각운을 이룬다.     내적 숙명의 자각   모리츠는 인간이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될 미래에 대한 '마술적'이고 낭만적 생각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개인의 저주로 여기는 신비적 염세주의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신비학자들 그리고 이어 낭만적 사상가들은 원초적 통일성이 죄로 인해 깨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연에서 발효되어 요동치는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랑을 자신 속으로 들여마신다고 믿을 정도로 그 생각을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을 동시에 꽃이자 초목이자 새이자 노래이고 신선함이자 유연함이며 쾌락이자 평온으로 느낄수만 있다면! 수축에 '활짝 피어남'이 대응한다. 최상의 순간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모리츠에게도 무한속에서 자아가 완전히 망실되는 순간이 아니라, 팽창과 한정이 실재감 속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 존재의 팽창과 수축의 감정은 한순간 안으로 집약되며, 거기서 유래되는 혼합한 느낌에서 바로 그와같은 순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이상한 종류의 우울이 탄생된다.     그의 정신적 진화의 본질적인 문제는 두 세계,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실제 세계와 그가 안식처로 삼으려 했던 꿈의 '이상적인' 세계의 분열이었다. 거친 현실에 의해 손상을 입은 자아가 활짝 피어날 수잇는 자의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낭만적 영혼의 첫 움직임이다.     이러한 믿음을 획득한 영혼이 삶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빛으로 그 삶을 변모시키고, 무덤너머에 있는 고등한 삶의 '여기와 지금'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움직임 말이다. 꿈은 그에게 사람들이 은신처로 삼으려하는 하나의 다른 세계이다. 그것은 가시적 현실에 아직 마술적인 색깔들을 퍼뜨리지는 않는다.     그는 꿈이 의식적인 삶에 의해 망각된 기억의 수문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 기억들을 거대한 전체속의 혼돈이었던 이전의 삶과 연관시키고, 기억의 고리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갈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개별적인 존재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감한다.   제2장 꿈, 자연 그리고 복귀     한개인이나 한 세기의 우주는 우리 정신의 이미지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의 통일성은 자신의 통일성을 믿는 자에게만 존재한다.   '영혼'이라는 낱말에 그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전체적인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중심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통일성은 무한대로 분열한다.     합리주의자들의 오만은 가장 명백하지만 가장 깊이가 없는 우리의 능력에 집착하는데 있고, 신비주의자들과 시인들의 오만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면, 자신이 자신을 한없이 초월하는 어떤 신비한 실재와 유사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 오만은 결국 최고의 겸손이다. 그것은 인간조건의 불안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끊임없이 우리자신의 신비에 놀라움을 나타내며, 피조물은 알 수없는 운명에 따른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그운명이 자신의 존재에 관해 우리에게 보내는 모든 신호들을 포착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18세기 리히텐베르크와 모리츠, 하만과 헤르더, 젊은 괴테와 장 파울, 게다가 장 자크와 디드로까지, 그리고 경건주의자들과 신비론자들... 그들의 사고와 정서에 있어서도 그들 자신의 전 존재를 몰입시키는 일에만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앞선 경험적 시대와 뒤이어 오는 과학적 시대에 반하여 그들은 어떤 감정적 충격에 의해 강화되는 직관만을 믿는다. ......거대한 반항과 신비적 겸허함이 언제나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낭만주의가 모든 위험과 난파를 무릎쓰고, 또한 모든 운을 걸고 그 모험을 감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보편적 통일성, 세계의 영혼, 절대적 수와 같은 대신화들을 부활시키고 보물창고와 수호신인 밤- 우리가 지고한 실재와 성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성소인 무의식- 모든 광경이 변모하고, 모든 이미지가 상징과 신비적 언어가 되는 꿈과 같은 대신화들을 창조해낼 것이다.   3. 르네상스의 재발견   자신에 대한 앎만이, 이 지옥으로의 탐방만이 우리에게 신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 하만   19세기초 자연철학자: 사변가,실험가,신비론자,최면술사, 연금술사   비이성주의의 태동- 독일 르레상스의 신플라톤 학파: 낭만적 물리학자: 케플러/파라겔수스/쿠자/아글파/브루노/ 등에게서 우주는 영혼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     본질적인 하나의 정체성이 전체의 발현에 불과한 모든 개별자들을 연결시킨다. 보편적 친화의 관계가 삶의 모든 발현들을 지배하고, 르네상스의 모든 사상가들이 왜 마술을 믿었는지 설명해준다. 그의 울림들이 단계적으로 만물전체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마술적 작용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물이나 존재들에게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자연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유사는 각각의 운명이 별들과 성좌들의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사고할 수 있고 의식이 있는 피조물이라는 긍지, 우주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고 자신을 알게되는 거울이라는 긍지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중심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점한다. 또한 거꾸로 인간은 자신의 중심에서 만물의 전체를 되찾는다. 안다는 것, 그것은 내부를 탐방하는 일이다.     신비의 길은 내부로 향한다. 영원이 그의 세계들 과거와 미래와 함께 있는 곳은 우리의 내부이지 그외의 어느 곳도 아니다.     자연을 창조한 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 바로 거기에 인간적 운명의 모든 비밀이 있다.창조주와 인간의 주요한 유사점은 둘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갑자기 만물이 완전히 새롭게, 그들의 완전한 의미를 갖춘채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들은 특별한 순간에만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바로 이순간들을 포착한다.     내부의 인간은 하나이다. 그의 모든 열정은 보이지 않는 관계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한결같이 단 하나의 불꽃에 의해 생기를 얻는다.     헤르더의 생기론적 개념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내적 감각의 직관, 혹은 모든 존재와 그가 속한 유기체 전체 사이의 교감 뿐만 아니라, 자연은 살아있기때문에 그것을 포착하기위해서는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다.     생물학적 생성의 법칙   모든 존재들의 진화와 정련의 대신비이고 증오와 사랑, 매혹 변모의 심연이다. 신은 자연과 역사라는 평행적인 두진화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영원히 생성중인 하니의 힘으로 이해된다. 그 두 움직임 속에서, 끊임없는 투쟁은 앞선 형태들 보다는 항상 더 우월한 형태들의 탄생과 변모를 야기 시킨다.     전체 사이의 교감   만물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에 따른 리듬적 의미 - 인간의 본성과 신의 본성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자연의 진화 사이에도 존재한다.     우주와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예술작품의 법칙은 바로 영원을 포착하되 그러나 순간 속에서 포착하고, 무한을 인식하되 그러나 대상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괴테는 사물을 통해 그들이 상징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인간의 행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행위는 최상의 비전으로 사물들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포착된 각 순간 속에서, 파악된 각 사물안에서 그가 도달하는 것은 영원이라고, 영구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 생기에 찬 하나의 실재인 영원 자체라고 확신 하고 있다.     경험주의자들에 대한 신비주의자 낭만주의자들의 반발: 자연의 상징적 가치 그리고 감각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하는 세계의 우의성. 그것은 즉각적인 우주의 기계적인 힘이 아니라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실재들에 대해 발휘되는 권능이다.     자연에 대해 진실인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진실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는 단순한 유사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우주의 구조 사이에 무한히 많은 유사성이 설정된다.     4. 우주적 통일     고로 자연은 다양한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는 하나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생기에 찬 하나의 유기체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동물적 삶과의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외적 현상들의 다양성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 따랐던 모든 이에게 공통된 본질적 직관이다. 자연을 시간 속에서 바라볼때, 그것은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태어나고 죽으며, 총체에의 복종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무한한 순환으로 보인다.     공간 속에서의 자연은 모든 현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현상들 각각은 전체적인 삶을 반영하고 재생산 할 뿐이다.     오직 전체(절대)만이 살아 있다. 각 개인은 전체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느냐에 비례해서만, 다시 말해 엑스터시가 그를 그자신의 개체성에서 분리 시키는 한에 있어서만 살아있다: 바아더     그러므로 생명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영원한 움직임은 신적인 것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유동은 방향이 있으며 맹목적인 힘과는 구별된다.     "각자의 종에서 완벽한 모든 것은 자신의 종을 넘어 다른 무엇,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 괴테     생성 과정은 일정한 방향을 따라 진행되고, 개별적인 생명들의 진보는 생명 전체가 최초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게 해준다.     신비주의자들의 출발점   원초적으로 주어진 것은 신적인 통일성이고, 자신들은 그로부터 추방당했다고 느끼며, 신비한 결합을 통해 그것으로 되돌아 가고자 열망한다, 또한 낭만적 사상가들은 우주의 생성과정 자체를 상실된 통일성으로 돌아가는 도정으로 설명하려함.     분리된 존재는 악이다. 모든 개별적 존재는 전체의 불완전한 반영일 뿐이며, 자연이 그 전체성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의 절대적 관념을 표현하고자하는 미완성의 시도일 뿐이다.     모든 것 속에는 개별화와 분리의 근원과 상실되었지만 미래에 되찾을 통일성의 씨앗이 함께 비밀스럽게 살고 있다. 하지만 오직 통일성 만이 실재하기 때문에 복귀를 향한 삶은 불가피한 것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쌍들의 성향들 사이에서 하나의 방대한 유사체계가 세워진다. 낮과 밤의 리듬에 여러가지 층위의 성의 대립, 중력과 빛, 힘, 물질등의 원리들이 상응한다.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힘이 모든 존재를 서로 서로 그리고 전체와 연결시키며 전 우주적 생명을 관통한다. 자기에 대한 발견들에 영향을 받아 이힘은 친화력이라 명명한다.     우주-동물이라는 신플라톤 학파적인 인식과 더불어, 개별적인 영혼들을 통해 발현되거나,한 양상을 드러내는 , 모든 사물의 정신적 근원이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보편적 영혼의 개념이 다시 태어난다. 이 영혼은 정신적 실재와 우주가 발현하는 근원이다. 관념들의 초월적 차원과 자연의 차원사이에는 더이상 심연은 없고 공통된 관계만 있을 뿐이다.자연은 인간 정신 속에서 의식적인 것이되는 , 그리고 창조의 측면에서 볼때는 분리될 수없는 통일성인 이 영혼의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와 동일시된다.     신이 모든 것안에 있다면, 그는 동시에 결코 우주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원리, 그의 중심, 그의 영혼으로서 우주안에 현존해 있는 진정하고 유일한 존재라고 그들은 말한다.     인간은 '모든 순간에 살아있고 그 내부에 있는 그 무엇도 결코 우주에서 고립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하나의 내부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의 전체성을 반영하고 거기서 신을 발견한다. 분리된 각각 의 존재를 유기체 전체의 상징으로 만드는 유추에 우리의 정신을 우주의 완전한 상징으로 삼는 유추가 응답한다.     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형태속에 전체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인간은 지구의 멀고 먼 과거의 심연 속에서 만들졌다. 인간은 지구의 전 운명 그리고 무한한 우주의 운명을 자기자신의 운명처럼 그내부에 지니고 있다- 우주의 전역사가 우리 각자 속에 잠들어 있다. (슈터펜스)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내려가, 사랑과 언어, 시 그리고 무의식의 모든 이미지 속에서 그에게 아직 그의 기원들을 기억나게 할 수있는 다양한 모든 잔해들을 찾아야 한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신과의 유사점에 대한 감명을 모호하게라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자연 속에서 재발견 해야만 한다. 잠들어 있는 이 씨앗들을 취해 경작해야만 한다.     신비한 현존을 드러내주는 꿈의 씨앗들   5. 삶, 그 밤의 양상들     인간 -소우주는 내적 감각 혹은 보편적 감각이라 명명된 단 하나의 인식방법을 갖춘 완벽한 유기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신비신학의 교리에 따르면, 이 감각은 유추를 통해 우주를 알고 있다. 인간이 조화로운 자연과 유사하기때문에 그자신이 그대로 반영되는 현실에 도달하기위해서는 자기자신의 관조 속에 침잠하기만 하면 되었다.     현상태에 이르기까지 이감각은 지위지고 조각나기는 햇지만 우리 내부에 살아 남아 있다. 진정한 앎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감각까지 내려가야한다. 그감각은 자연을 지배하는 역동적인 힘 -자기작용 같은 것-과 유사한데, 최면, 몽유, 시적 고양의 모든 상태들, 다시말해 엑스터시라 불릴 수 있는 자연의 리듬 자체에 자신을 유기하는 상태들 속에서 나타난다.     엑스터시 ekstase 우리를 평상적인 상태 밖으로 데리고 가서 일시적으로 다른 존재로 복원시켜 놓는다.     랭보: 시인은 본질적으로 견자다. 시는 예언이며 과거, 미래, 전체성에 대한 엑스터시 상태의 비전이다.     프시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생명원리, 영혼을 나타냄.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정신현상의 총체를 가리킴.     영혼: 우리 마음 속의 현존, 우리를 한없이 초월하는 무엇인가의 신성하고 강력한 현존이다. - 마음 속에 현존하는 신     깨어있음과 잠의 교대는 우리가 우주적 생명에 속해있고 리듬의 유사가 보편적 관계라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다.     온갖종류의 '대지의 영향'에 의해 물리적 우주에 뿌리를 박고있는 우리는 모두 포로들이다. 하지만 이 포로들에게 는 그들을 묶고있는 사슬자체가 미래의 자유와 조화의 약속이다.     잠은 대지의 산물이며 깨어있음은 태양의 산물이다.     영혼은 잠에 빠져 있을때, 자연이라는 전체적인 유기체와, 그리고 동시에 바로 자신의 육체적인 생명과 보다 밀접한 공생관계를 이룬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두뇌가 지배하는 활동에서 벗어나 대지의 영향을 받던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고로 꿈은 생리학적 성장의 모든 무의식적 과정이 모호하게나마 예감되는 희미한 의식상태로, 전 우주에 생기를 불러넣는 생명의 유기적 존재로서의 행위와 가장 즉각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순간으로 인식된다.     꿈   꿈을 통해 우주적 실재에 참여 꿈은 아직 인간이 자연의 말씀이었던 황금시대에 인간이 처해있던 최초의 상태였고, 신화적 시간에 대한 이 무의식적 생각은 자연의 완전한 계시다. 꿈을 통해 우리는 신호들에 귀 기울이고, 우리 존재의 밤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유적들을 재발견해야만 한다.   6. 꿈의 형이상학     마음과 관능은 둘다 존재의 중심을 지칭하는데, '진정한 실재 속에서'사느냐 아니면 무의 변경에 있는 감각적인 현상의 세계즉 maya에 사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지각하고 자신의 관능 속에서 우주를 지각한다.     트록슬러: 인간의 물질적인 본성은 우주 안에 스스로를 드러낸 신의 발현인 반면에, 그의 정신적 본성은 신에게로 회귀하려는 성향     최초의 통일성이 우주와 인간이라는 자연의 창조 속으로 전개되었다면, 자연의 모든 진화는 최초의 상태에 다시 도달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회귀성향의 최고의 표현은 본질적인 갈망들로 목말라하는 인간의 영혼이다.     깨어있음은 삶의 밝은 면이고 잠은 어두운 면이다. 하나는 신 속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속의 삶이다. 이 교대의 삶은 죽음에 의해 해방되고 불멸에 이르러우주의 삶 속에서 새로이 자리잡을 때까지 계속된다.     꿈, 그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실재의 중심 자체이다. 원초적이고 영원한 인간 내부의 심원이며 '생명의 행위 그자체'이다.     정신이 물질 속으로 내려오면, 상상력은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성에 동반되는, 그리고 앎이라고 불리우는 그 꿈을 꾼다. 하지만 거꾸로 물질이 정신을 향해 상승하면, 앎은 자신의 '심연' 혹은 그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엑스터시라는 이름을 가진 상상력의 두번째 꿈이다.   그러므로 밤의 꿈은 영원한 꿈과 '유사한 것' 이상이다. 즉 그것은 영원한 꿈의 잔존물이고 우리 마음속, 우리내부 깊은 곳의, 최초의 통일성의 실제적 현존이다. 그것은 '깊이를 알수없고 탄생전과 죽음 후에나 그의 완전한 실재성을 가지게 되는 원초적 상태에 대한 암시'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부터 이심연들은 우리 모든 삶의 근원이 된다.   7. 꿈의 상징 체계     1814년 슈베르트 : 발간 바아더 를 통해 신비주의적 사상에 입문     사랑의 법칙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연적인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 금속은 공기와 결합하려는 욕망에 의해 녹슨다. 빛은 생명이 없는 존재들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형태이고 소리는 동성의 사물들 사이의 우정이다.     우주적 순간들에서 사물들은 자기를 통해 보다 발달된 종류의 존재 속으로 통합시켜주는 활발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성질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어디에서나 하나이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삶은 자연의 대주기, 즉 연 일 시를 주재하는 동일한 리듬에 따라 조직된다.     '생명은 서로 대립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보편적인 거대한 힘들과의 일치에 다름아니다.' 식물들에 있어서 '죽음의 순간이기도 한 개화의 순간은 동물적 존재에 대한 예감이다.' 이처럼 단계에서 단계로 모든 자연적 생성은 존재의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인간을 지향한다.     시적 리듬은 그자체로서 마법적 주문의 역할을 하고, 일깨어진 어떤 조화, 우리와 우리가 속하는 우주 사이에서 복원된 보다 심원한 어떤 교감을 나타내는 행복감을 발생시킨다. 노래는 낮의 기능들을 '잠들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삶의 내적인 탄생을 촉진 시킨다.     운명은 어떤 신성에 의해 계산된 길을 따라 우리의 삶을 이끄는 숙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생애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이다.     현 세계는 반대되는 두 힘에 의해 지배된다. 하나는 개별화를 지향하고, 다른 하나는 자석처럼 작용하여 모든 사물들 사이의 유대와 모든 사물과 신 사이의 유대를 창조한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을 통해 화해하게 되는 이 두경향의 포로이다.   8 무의식의 신화       프리드리히의 위대한 풍경화; '그는 풍경의 비극을 발견했다' -다비르당제르.   자신의 내적비극 , '황혼은 그의 기본요소였다' -카루스     인간의 본성을 찢어놓는 화해할수없는 이중성들에서 오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자신의 신앙심과 예술관이 동시에 표현되는 통일성의 획득을 통해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자연을 앞두고 있는 인간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   화가가 우주적 유기체의 생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앎.   이 두야망을 밀접하게 일치시켜야 했고 만물 속에 있는 신의 존재를 짐작하게 해주기위해 그토록 생생한 인상을 우리의 인상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상적인 풍경은 만물의 배면에 있는 무한을 우리에게드러내는 영혼의 주관적 상태들과 유한한 세계를 향해 있고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객관적 비전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카루스의     전 자연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 부터,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우주를 전체적으로 창조하는 영원한 생성, 모든 삶의 근원"에 의해 생기를 얻는다.   "이생명의 원동력이 우주의 변화 뿐만 아니라 아주 미세한 유기적 성장 속에서도 표출된다."   전체와 부분 사이에는 카루스가 리듬의 일치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유사의 관계가 존재한다. 천체들의 삶을 특징짓는 주기들의 광대한 리듬이 '신적인' 항구성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내적 삶의 극도로 작은 입자들의 존재 속에도 반영된다."     유기체의 각 부분은 그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전체적 유기체와 흡사하다. 모든 부분들은 서로 동일하고, "생체의 각부분의 성장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동일한 원초적 형태의 극히 다양한 증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형태는 바로 완벽한 원형, "전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그결과로 일종의 자율을 누리는 " 세포이다.     하지만 생명의 무한한 흐름은 방향이 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상승, 극에 도달하는 완벽은 끊임없이 태어나는 형태들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물리학과 우주발생론의 중심에 가치의 개념 재도입.   식물에서 동물 ,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함에 따라, 이 존재들과 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신과의 관계는 밀접.   " 자신의 종에서 완벽한 모든 것은 그 종을 초월하여 다른 ,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괴테의 생물학적인 원칙, 카루스의 사상에도 낯설지 않은 개별적 진보를 통한 분화와 향상의 원칙인 것만은 아니다.   신적인 것은 모든 것 속에 존재하지만, 신은 동시에 세계의 중심이고 영혼, 혹은 생명과 그부분들의 원동력이다.   무의식     의식적인 정신적 삶에 대한 앎의 열쇠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속에 있다.     관념, 영혼은 모든 피조물에 형태와 생명을 부여하는 제1원인이다. 하지만 개인의 전 형성과정은 그 개인 자신의 의식에서 벗어난다. 유기적 진전과정, 성장, 생리적 형성은 무의식이라는 생기에 찬 거대한 실재속에 속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주관적 표현이다."     그로므로 무의식은 그의 심원한 본질 속에서는 비개인적인 실재, 영원하고 끊임없는 생성, '신의 창조적 활동' 같은 것이다.     유기체적 통일   의식 속에서 기억과 예견이라고 부르게 될 시간들의 상관관계의 깊은 이유.     무의식은 의식의 본질적인 형태들에 대한 예시를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식물의 씨앗과 동물의 태아는 미래에 있을 성장들을 모조리 그안에 내포하고 있다.   카루스는 이러한 유기적 무의식의 예견에 프로메테우스의 원리라는 이름 부여.     다른 한편으로 유전은 과거가 현재의 진화 속에서 살아남아 활동하고 효율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증명 이것이 기억의 무의식적인 형태 , 에피메테우스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삶을 이루는 모든 순간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러한 유기적 기억은 그 내용물이 개인적 삶의 틀을 넘어서 존재의 근원들 자체에 이르는 일종의 무의지적 기억이다.         개인적인 삶은 '인류'라는 유기체의, 더나아가서 우주적 유기체의 한 부분이다.   인류의 영혼 그리고 세계 영혼의 모든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각각의 개별적 영혼을 거쳐 지나가야만 하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의 형상을 만들어야한다.     따라서 절대적 무의식은 우리 모든 삶에 있어서 극히 중요.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적 삶과 내부에 있는 , 개별적 진화와 개인적 독창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우리 종 전체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지휘한다.( 카알 융 과 일치)     본능의 형태로 각자의 삶 속에 잔존해 있는 무의식적 과정의 에피메테우스적 원리는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한 경험을 영속화 시킨다. 유리환 정화들 속에서 투여된 개인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피조물 자격으로 우리가 우주와 관게를 맺는 모든 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이 보물에서 방어수단과 삶의 창조적 근거를 빌어온다.     시적 창조와 사고의 일례, 직관- 가장 심원한 창조력은 개인의 의식적인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조상 대대로 경험을 통해 축적해온 것을 간직하고있는 무의식의 집단적 저장소안에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그 과정의 절대적 필연, 어떠한 학습도 필요로 하지 않은 즉각성, 우주적 생명 그리고 과거와 미래와의 법촉으로 특징지어진다.     감정은 무의식적 삶에 섞어들고 그 모든 특성을 함께하는 '의식적 영혼의 어떤 특수한 색조'이다.       감정을 통해, 영혼은 모든 영혼들의 공통된 통일성과 관계하고 있는 심원한 영역에 가 닿는다.   감정중 최고의 형태인 사랑은 "분리된 존재로 부터의 최초의 해방이고 전체로 되돌아가는 첫걸음이다."   꿈의 귀환적 상상력     꿈을 통한 이미지의 순환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귀환은 서로 다른 두가지 양상   혈액의 순환과 유사한 첫번째 순환은 어떤 특수한 이미지나 감정을 망각속에 잠기게 하고, 이 이미지와 감정은 의식적인 삶 속에 새로이 작용하기 위해 변화하고 풍성해져 망각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그사이 그것들은 발아되기 이전의 식물의 씨앗의 삶과 비교되는 잠재적 삶을 산다.     하지만 이런 분리된 이미지들과의 순환과는 별도로 보다 본질적인 또다른 리듬이 의식전체를 주기적으로 무의식의 밤 속에 잠기게 한다.   이 리듬은 "관념이라는 영원한 존재의 대 주기들, 우리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주기들을 재현"할 뿐이다. 꿈으로의 귀환은 식물적 삶 혹은 "아직 이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유아의 무의식적 삶"과 유사한 하나의 의식없는 잠이었던 태초의 상태로의 귀환이다.     "영혼이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이중의 삶을 끊임없이 영위하고" 이 양극사이를 영원히 오갈수있도록 잠은 그에 앞선 깨어있음을 통합한다.   그래서 카루스에 따르면 "표면적인 비존재 속의 존재의 연속성"이야말로 심리적 삶의 가장 큰 신비들 중 하나이다.     잠은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과 의식의 부분적인 퇴거에 의해 유발된다. 이처럼 식물적인 삶 속에 침잠함으로써 '영혼의 자연적인 부분들'은 새로운 활력을 취하고, 동시에 '자연 전체와의 보다 활발한 관계'가 무의식 속에 생겨난다.     일단 나라는 경계들이 무너지면, 존재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위대한 무의식과 보다 즉각적인 방법으로 소통하게되고, 한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달된 기억들의 불분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험은 의식의 세계에 우주에 대한 모호하고 심원한 인식을 가져다 준다.     그에게 있어 의식적 영역은 여전히 자율성을 지닌 이물질처럼 잠속에서 잔존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내밀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합에서 꿈이 생겨난다.     유기체의 어떤 내적 불균형들은 실제로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발생시키고, 이감정은 다시 어떤 내적 이미지, 어떤 시적 상징을 일깨워 그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자연 속에서 발현된 신적인 관념인 영혼은 스스로는 시간과 공간을 알지 못한다.   영혼이 자연에서 퇴거함에 따라, 발현된 세계에 대한 의식이 흐려짐에 따라 영혼은 "생각들의 연속, 즉 식간과 그것들의 병렬, 즉 공간이 사라지고, 그자리에 이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존재의 통일성이 들어서는 것"을 보게된다.     전체 유기체의 의식적 부분이 인격 개성 그리고 자유가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유기체의 무의식적 부분은 그 유기체를 일반적 생명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 요컨데 그를 보편화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의식이기때문에 우주의 모든 움직임에 의해 관통되고 그것에 참여한다. 더 나아가서 가가운 것과 먼것, 그리고 공간에 속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간에 석하는 모든 것도 그안에서 서로 만나고 섞인다.     "영혼의 건강한 성숙에 적합한 우리의 습관적 한계"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모든 현순간에 존재하고, 멀리 떨어져 공간들이 서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보편적인 생명의 얼마되지 않는 부분이외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다.   하지만 '정상적'인 우리 상태의 어떤 변모에 힘입어 우리는 보편적인 생명의 다른 양상들 , "우리로 하여금 멀고 먼 곳들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도 접촉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양상들"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예외적으로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 깊이 침잠해 있기때문에 영혼이 바로 무의식에 고유한 특성인, 만물을 연결하는 그물망 속에, 공간적인 모든 것과 시간적인 모든 것의 상호침투에 속에 더 깊이 침잠하게 되는 " 예외적인 상태들 속에 신비롭거나 불가사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ㅜ여기서 유기적 참여와 의식적 참여를 구분해야한다.   예감과 통찰력       예감   우주적 감각의 조건인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은 자신의 자율성을 유기함으로써 보편적 생명의 순환 속으로 삼켜진다.   그리고 그때그것은 인체의 변모와 동일하게 보편적 생명의 변모들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이처럼 인류 혹은 자연의 생명의 순환 속에 침잠하여, 일반인은 전혀 느낄 수 없는 ,   멀리 발생한 혹은 미래에 발생할 어떤 사건들이나 다른 작용들에 영향을 받아 이상한 불안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이러한 예외적인 사실의 설명할 수 없는 지각은 그들의 정신상태를 완전히 변모해 놓는다.   바로 이것이 흔히들 예감이라 칭하는 것이다.     통찰력   다른 한편으로 우주와 인류의 모든 생명과 가지는 이 관계가 인간의 의식적인 영혼 속에 드러나 새로운 종류의 민감한 지각의 형태를 취한다. 그때 그빛이 항상 우리 각자를 관통하고 있지만, 우리가 평상시에는 지각하지 못하는 보편적 생명의 양상들이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더이상 모호한 감정들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한정된 생각들로나타나는데 이것을 통찰력이라 부른다.     무의식을 통해 옛시대의 인류, 우리시대의 인류 그리고 우리 종의 미래적 운명들도 매순간 우리를 변모시킨다.   그리고 꿈의 이미지들 속에서 모호하게나마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 변모들이다.     카알 융은 이러한 낭만적 철학자 카루스의 직관을 이어간다.   '무의식 본래의 언어'인 이미지들에 말할때, 카루스는 슈베르트의 직계상속인이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천재성이 최초의 직관 속에 있었다면, 카루스의 힘은 이러한 각각의 통찰력을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삶에대한 전체적 비전에 연결시켜주는 일관된 구성에 있다.   명상   신의 의식에 그의 전능함을 되돌려주는 이 명상은 "사랑의 힘과 깊이로 심연을 메우고 극복하기위해" 열심인 우리의 노력이 도달할 수있는 최고의 진보이다.하지만 일단 이 정상에 도달하게되면 정신은 인간적인 삶 그자체로 되돌아 올수있다. 정신은 자신의 엑스터시로 인해 아름답게 변모된 인간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고귀한 종교적, 시적 영감들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이 변모이다.     이 각성된 영혼은 눈먼 유기적 생명의 심연 뿐만 아니라 신의 생명의 무한 속에서 '제2의 눈'을 담고 있을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우리안에 불멸하는 것은 관념, 영혼, 우리의 생성의 법칙이지 생성 중에 획득된 모든 특성들이 아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진보는 연속되는 모든 경험들, 감정들,사상들,관념이 신에게로 회귀하는 데에 소용이 되게하는데 있다. 유기적인 무의식은 생성의 모든 단계를 결합시키고, 그것들과 일치되며, 영원히 변함으로서 그 경계가 이동하는 과거와 미래로 나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신은 현재를 포착하기에, 다시말해 그본질에 있어 영구불변하는 관념 그자체를 응시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것의 발현을 통해서만 관념을 알 수 있다.     < 우리 영혼의 관념은 지고의 존재의 이중적 빛의 방사를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속에 함축하고 있다. 이 발현 중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신적인 원동력으로 우리 외양의 끊임없는 변모를 결정한다. 다른 하나는 지속되는 하나의 내적 현재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반쪽이고, 다른 반쪽의 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신과 맺고있는 이중적 관계가 설명된다. 만물에 속하는 우주적 존재들로서 우리는 무의식에 의해 신의 실재속에 뛰어든다   9. 순수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낭만주의 사상가들의 첫번째 공리는 오직 전체만이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여받았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분리된 존재는 악이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잃어버린 통일성에 이르는 길을 되찾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의 매개체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 그 설명이 의식 속에서 찾아질 개인적 영역으로 귀착하지 않고   - 우리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근원이 있는 초-개인적인 실재이고,   우리가 보편적 유기체와 접촉을 가지는 지점이다.     꿈과 다양한 열광들, 언어에서 인칭의 변화와 같은 사고들과 시적인 번득임들, 광기의 창조들과 유아기의 상상력들, 이모두가 태초에 자연의 생명과 함께한 협화음의 소중한 유물인 동시에, 결국에는 우리를 태초의 조화의 품으로 되돌려줄 근원들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은 사상가들에 앞서 제각기 독특하지만 모두 밤의 가장자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따라 무의식의 모습들을 포착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무의식의 양상들을 일깨우는 도구인 그들의 예술을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과 동일시했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그들은 영웅적인 정열을 가지고 그일에 달려 들었다.     정신속에 내재해 있는 집단적 무의식(신화) , 즉 우주적 통일성과 개인적 이미지 (직관)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징적 발현이 낭만주의의 근원적 미학이다.   이는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인바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로 나타난다.   이는 자연과 영혼의 합일에 이른다.   10 성운과 혜성     낭만주의의 핵심적소재(근원) -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 - 꿈의 미학   1) 집단적 무의식 (신화)   2) 개인적 이미지(직관)     우리의 상상력은 세계를 형성시킨 거대한 창조력의 알 수 없는 하나의 응답이다.   그의 활동이 우리에게 아주 생생한 행복감을 부여해 주는 것은 '정신이 창조한 이미지들이 바로 정신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휠더린   그가 전력을 다해 지향하는 소유는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할 그 마술적 권능이 아니다.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관조적이고 미학적인 소유이다.   세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만물이 갑자기 완벽하고 은혜로운 조화의 관계속에서 드러나 보일정도로 순수한 관조와 아름다운 비전을 되 찾는데 있다.      
932    활과 리라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55  추천:0  2019-06-30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Lozano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서론     시와 시편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들어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의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항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을 향한 기원이며 무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이고 현현이며 현존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에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시는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아날로지다.   시편은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 –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고통받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인이 시적 흐름을 유도하거나 변형시킬 때 현저히 다른 어떤 것 즉,   작품의 출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 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스타일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통의 스타일을 뛰어 넘으려 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을 갖지 않는다.   그때 생긴 이미지는 공동재산, 즉 미래의 역사가와 문헌학자의 전리품이 된다.   이런 저런 비슷한 돌들이 사용되어 예술적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이다.     문학적 언어, 스타일은 일상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혁신적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를 뛰어 넘는다.   더 적절히 말하면 반복불가능한 시적 행위,   즉 이미지, 색깔, 리듬, 비전등을 시편으로 용해시킨다.     시편이 가지는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성격은   그림이나 조각, 소나타나 춤, 기념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림과 송가, 교향악과 비극을 구별짓는 차이점을 뛰어넘어   그 모두가 동일한 우주를 선회하도록 하는 창조적 요소가 있다.     조형예술과 조음예술은 이러한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하지만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은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한 쌍의 음과 양은   철학이고 종교이며, 춤이고 음악이며, 의미로 충만한 주기적 운동이다.   또한 이것은 비유적 언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특징짓기 위하여   조화 주기성, 혹은 대조법과 같은 표현을 내포한다.     모든 작품은 의미화작용에 닻을 내린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서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된다.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활동범위와 직업이 무엇이든, 예술가이든 수공업자이든,   인간은 원료, 즉 색깔, 돌, 금속, 말을 변형시킨다.   변형이란 원료들이 맹목적인 자연의 세계를 포기하고 작품의 세계,   다시 말하면 의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조각을 새기고 계단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사용한 재료인 돌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조각에 쓰인 돌과 계단을 만드는데 쓰인 돌이 동일하며   이것이 모두 동일한 의미체계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변형의 속성은 다르다.   산문작가와 시인의 손에 놓인 언어의 운명이 그러한 차이점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산문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이다.   이러한 작용이 바로 분석적 특성이며 이것의 실현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되는 법인데   왜냐하면 말은 다수의 잠재태의 기의(significado)들을 포함할뿐 아니라   다수의 방향성과 의미들의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이런 현상은 형식, 소리, 색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얻게 되며 계단으로 만들어질 때 빛을 잃게 된다.   색깔은 그림 속에서 광채를 내고 몸의 운동은 춤을 출 때 빛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 반대이다.   시적기능에 힘 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서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말, 소리, 색깔 그리고 그 박의 재료들은 시의 궤도에 진입하자마자 변화를 겪는다.   여전히 의미작용과 의사소통이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한다.   기술의 영역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변화는 원래의 본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 들어간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실상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며   원래의 사물이란 태초부터 실재적인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각이 된 돌, 그림의 빨강, 시편의 말은 순수하고 단순한 돌이나 색, 말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은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 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즉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리듬, 색깔, 기의-이며 동시에 다른사물, 즉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   그때의 작품은 기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이미지이며 반복불가능한 시이다.   위대한 화가는 위대한 시인으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결국,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언어가 무엇이든간에 언어를 초월한다.   이런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기능이 이미지를 생산한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창조자, 즉 시인이다.   이미지가 됨으로서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 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며 역사를 초월한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다.   우리들의 열정과 일상의 간만(干滿)에 모든 것이 화해하는 순간이 있다.   적대적인 것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한 순간 융합한다.   그것은 판단중지하는 것이며 이순간 시간은 멈춘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아난다(ananda) 혹은 하나 속에 노니는 쾌락이다.   틀림없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찰라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해 보았다.   사랑은 인간에게 열려있는 일치와 참여의 상태이다.   사랑의 행동에 의해 의식은 부서지기 전에 장애물을 넘어 충만한 상태로 일어서는 파도와 같다.   이러한 충만한 일어섬 속에서   위를 향해 일어서는 힘과 중력등 모든 힘은 미묘한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동중정(動中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한 순간 충만한 생명을 엿보는 것처럼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찬다.     자력을 띤 사물.   그 덕분에 우리는 시적 경험에 참여할 수 있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시편은 가능성일 뿐이다.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컬는 상태에 참여 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他者性의 발현)     시편은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은 중재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시간의 시조인 태초의 시간이 순간 속에 육화된다.   직선적 시간은 순수한 현재로 변화하는데,   순수한 현재란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시 한편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   높은 파도처럼 분출하여 직선적 시간이 쌓아놓은 둑을 붕괴시키는 그 충만했던 감정은   독자들의 삶을 통해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된다.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제 1부     시 편 el poema     언 어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사람들은 사물과 이름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대상과 기호가 동일하다는 믿음이 사라지자마자 언어에 대한 학문들은 그들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말이란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조악한 도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말없이 인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인간은 말로 된 존재이다.     또한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카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모든 배움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에게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의 계시로 끝난다.   혹은 무지의 고백인 침묵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의미화 작용이다.   말은 표상적 작용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의미화 작용은 지시적이고 감정적이며 표상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하여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 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언어와 신화들은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들이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적인 것인데   은유는 실제의 한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말 하나하나와 혹은 구와 절은 하나의 은유이며 동시에 마법적인 도구이다.   즉, 말이란 다른 사물로 변화하기 쉽고 또 건드리는 것을 변용시키는 어떤 것으로,   예컨대 태양이라는 말이 빵이라는 말을 건드리면 빵은 별로 변한다.   그리고 태양자신은 빛을 내는 음식이 된다.     말은 상징을 발산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말 덕분에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 되려는 경향이 있다.   매일 말들은 서로 충돌하여 금속성의 불꽃을 튀기거나 혹은 파랗게 빛을 내는 짝들이 된다.   말들로 수놓아진 하늘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천체들이 생겨난다.   차가운 비늘 위로 채 마르지 않은 물기와 침묵을 떨구는 말들과 구들이   언어의 수면위로 날마다 솟아오른다.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다.   시는 일어서는 언어다.   시는 원초적 언어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즉, 말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었던 시간으로의 복귀이다.   혹은 사물과 이름이 동일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총체적 시의 실현이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원초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정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말과 대상 사이의 거리-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는 다른 현상의 결과이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존재 사이에,   자신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가교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가거나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하여야 한다.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양자의 시도는   근대인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연유로 현대시는 양극사이를 운동하는데,   한 쪽 극은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며 다른 한 쪽은 혁명적 소명이다.   이러한 양극으로의 운동은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역사적 실존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역사적 실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시도는 소외된 의식의 회복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역사적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법칙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은 실존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인류는 두 번째의 결정적 도약을 이룰 것이다.       언어는 시이며 모든 말은 비밀스런 발화점이 건드리자 마자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은유의 전하를 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무심의 언저리-텅빈 충만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면 ,   의지가 끝나고 순수한 수동성이 시작하는 곳을 분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정신작용은 총체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기능에는 다른 모든 기능들도 함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수용의 상태로 침잠해 있다는 것이 욕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증언 “없음을 욕망하며” 는 여기서 무한한 심리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즉, 욕망의 힘에 의하여 없음 상태가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열반 nirvana 도 이와 똑같이 능동적 수동성의 조화를 요구하고 정중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수동적 상태들- 내면적 빔의 경험으로부터 그와 반대되는 존재의 충만의 경험에 이르기 까지-은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원성을 깨기 위한 결연한 의지의 행사를 요구한다.     완벽한 요가 수행자는 적당한 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무심하게 자신의 코끝을 바라보면서”   망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제어한다.   무심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는   서구적 문명의 지배적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전체를 얻기위해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의 “텅빈 충만”이란 말을 상기해보자.   수동적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 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시키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을 뿌리채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에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채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이며   또다른 하나는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려는 중력의 힘이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의 말과 마주친다.   반면에 진정한 시인은 밑에서 위로, 공동체의 언어에서 시의 언어로 움직인다.   작품은 곧바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일의 대상이 된다.       시의 모호성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한다.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이다.   참여는 재창조를 암시한다.   독자는 시인의 몸짓과 경험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엇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책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는 뜻이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존재 자체와 혼동된다.   시인이 그의 말이다.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창조는 우리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말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말인 것이다.   시는 필연적이며 교체할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고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어떠한 수정이든 재창조이다.   즉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온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   쉼표 하나를 고치면 건물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시는 교체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살아잇는 총체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재창조에 다름 아니다.         계시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발전의 주체는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는 언어이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귀이다.   고통 혹은 열락의 외침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그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숨긴다.   즉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무엇 혹은 누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적 외침이 가리키는 실재는 결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그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로   이제 막 나타나거나 혹은 이제 막 영우너히 사라지려는 순간처럼 저기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닥쳐올 것같은 급박함,   발전한다는 것은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소집을 의미한다.   말하는 입이며 듣는 귀인 시는 감정적 외침이 지시만 하고   이름 붙이지는 못하는 것을 계시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게시이지 설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명이라면, 실재는 계시되지 않고 해명될 뿐이며 언어는 단지 이해될 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구가 될 것이다.   감정적 외침인 경우에, 말은 ‘빔’을 향하여 던져진 외침이다.   거기에는 대화자가 부재한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훼손 시킨다.   그러나 시인들은 말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서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고   말의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1부 시편     리듬   단어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들처럼 행동한다.   단어들은 언제나 ‘이것 그리고 이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동시에   ‘저것 그리고 저것 너머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유는 단어 다스리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사유는 부득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단어들을   자신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신뢰, 즉 사물과 이름은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이다.   단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신앙들에 대한 회상이다.   즉, 자연엔 영이 깃들여 있고, 각각의 사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갖는다.   객관적 세계의 닮은 꼴 언어에서도 역시 영이 깃들여 있다.   언어도 우주처럼 부름과 응답의 세계이다.   밀물과 썰물, 합일과 분리, 들숨과 날숨의 세계인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서로 상응한다.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집합이다.   가능한데까지 자동 기술법을 실천해 보았던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들의 기이하고도 당혹스러운 상호 연관 관계를 알고 있다.   불러드림 evocation과 불러모음 convocation.   브르통은 ‘단어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지들의 강에 휩쓸려서 우리는 순수한 실존의 끄트머리를 건드리고   우리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와 최종적으로 합일하는 통일된 상태를 예감한다.   조수에 대항하지 못한 채 의식은 요동한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은 최종적인 이미지에 닻을 내린다.   벽이 우리의 행로를 가로막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이와 반대의 상태들-의식의 지나친 긴장,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   이해력들이 부딪혀 불꽃 튀기는 대화들, 내면적 성찰이 무한으로 증대되는   투명한 화랑들-역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느닺없는 구의 출현을 돕는다.   그것은 불멸의 정진 뒤에 주어지는 보상같은 것이다. 이성의 저항 뒤에 열리는   통로를 지나 우리는 조화로운 지대를 밟는다. 거기서 모든 것은 용이해 지고,   모든 것은 말없는 대립이며 기다렸던 암시가 된다.   우리들은 개념들이 운을 맞추는 것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사유와 구도 역시 리듬, 부름, 울림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이며, 번쩍이는 물결이 우리를 건드리자 마자   몸을 떨게 된다.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은   똑같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전기 같은 힘을 가진 예기치 않은 구가 솟아오른다.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입으로 번개와 불꽃을 토했다.”........   저주받은 불순한 단어들이 난폭한 별처럼 폭발한다.   우주적 질서를 뒤흔드는 저주와 폭언.   사실 그러한 구들을 발설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고, ‘자신 밖에’ 있었던 ‘타자’였다.   사랑의 대화들도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종종 ‘말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휴지와 감탄사, 웃음과 침묵-은 동시에 발생한다.   대화는 합의 이상의 어떤 것, 즉 화음이다.   연인들 자신은 보이지 않은 입이 발음한 두 개의 조화로운 각운이다.   말은 처음에 말을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과 이후의 결별은 순수한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즉,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탕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런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가 끊임없이 변전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은 아날로지에 의거하여 창조한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이다.   리듬은 자석이다. 리듬을 재생산할 때-박자, 각운,변주,유사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통하여 - 시인은 말들을 불러 모은다.   불모의 상태에 뒤이어 언어의 풍요로운 상태가 이어진다.   내면의 수문이 열리자 구들은 샘물처럼 혹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시인과 마법사   시적 작용은 주문(呪文), 주술 그리고 다른 마법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행위는 마법사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시인과 마법사는 아날로지의 원리를 이용한다.   양자는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철학자, 기술자, 현자와 달리 마법사와 시인은 자싱의 힘을 스스로에게서 추출한다.   모든 마법적 작용은 정화를 위한 고통스런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내면적 힘을 필요로 한다.   마법적 힘의 원천은 이중적이다.   즉, 마법을 위한 공식과 그 밖의 방법들, 그리고 마법사의 정신적인 힘,   곧 자신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을 조화시켜주는 정신적 조율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내적 성찰 혹은 분석과 전혀 다른 탐색이다.   탐색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정신적 활동이다.   빈번히 마법사는 번역자와 비교된다.   마법사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긍정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다른 모든 반역은 최초의 이러한 반역에서 출발한다.   주술사의 모습에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긴장이 존재한다.   마법사에게서 신은 가정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처럼 달래고 사랑해야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유혹이거나 정복하거나 비웃어야 하는 힘이다.   마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항하여 인간의 힘을 긍정하는   위태롭고 신성모독적인 기도(企圖)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마법사는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다.   그를 위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고독이며   사회성의 결여로 언제나 종국적으로 불모를 초래하는 것도 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 결단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긍심의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한 선물로 변모되지 못하는 모든 마법은   자신을 삼켜버리며 끝내는 창조자까지 삼켜버린다.   마법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힘으로, 잠재된 에너지의 핵심으로 본다.   마법사의 반역은 고독한데,   그것은 마법적 행위의 핵심이 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사에 대항하여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르는데,   그는 서구적 상상력이 창조한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마법사나, 철학자나, 현자가 아니라 영웅이며 불을 훔친 자이고 박애주의자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반역은 인간이라는 종의 반역이다.   바위에 묶인 영웅의 고독에는 암시적으로 인간 세계로의 귀환이 내재되어 있다.   반면 마법사의 고독은 사회로 귀환하지 않는 고독이다.   마법, 즉 힘에 의한 힘의 탐색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서 끝을 맺기 때문에   마법사의 반역은 불임이다. 근대사회의 드라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법사의 이중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우주와 생생하게 관계 맺으려 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편적인 교감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법의 실현이 암시하는 것은 힘의 탐색 바로 그것이다.   마법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우주적 힘과의 의사소통과-인간이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될 때를 제외하고-   인간과 의사불통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법은 생명-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일한 흐름-의 친교 관계는 긍정하지만   인간사이의 친교는 부정한다.   시인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언어를 ‘생명의 사회’-카시러가 조화로운 우주의 마법적 비전을   정의한 것처럼-로 보는 시인의 개념은 마법의 개념에 접근한다.   시편은 주술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지만, 안수기도의 방법으로   시인은 어넝의 비밀스런 힘들을 일깨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를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이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줄기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리듬에서 솟아난다.   리듬과 시 언어의 관계는 춤과 음악적 리듬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모든 춤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춤이다.   리듬에는 이미 춤이 있고 춤에는 이미 리듬이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은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쫒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이다.   또한 리듬은 기념하기 위한 것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신화를 재생산 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적 운율의 닮은꼴로서   말 그대로 인간이 원했던 것- 기우, 풍요로운 사냥, 혹은 적의 죽음-을   마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힘이다.   춤은 이미 씨앗 상태의 표상을 품고 있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신화와 제의의 이중적 현실은 그들을 품고 있는 리듬에 의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은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대 중국인들은 우주를 두 리듬의 혼합으로 보았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을 도라고 한다.’   그라네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음과 양은 서양적 의미의 관념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소리나 표시도 아니다.   우주의 구체적인 표상을 품는 기장이며 이미지이다.   실재들의 창조적 역동성을 갖는 음과 양은 서로 바뀌고, 서로 바뀌면서 총체를 낳는다.   그러한 총체 속에는 아무것도 말소되거나 추상화 되지 않는다.   각각의 모습이 특수성을 잃지 않고 생생하게 존재한다.   음은 겨울이며 여성들의 게절이고 집이며 그늘이다.   그것의 상징은 문門 이며 어둠 속에서 성숙하는 것, 숨어 있고 닫힌 것이다.   양은 빛이며 농사일이고 사냥이며 낚시이고 대기이며 남성들의 시간이고   열려 있음이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충만한 시간과 결핍의 시간, 남성적 시간과 여성적 시간-용의 모습과 뱀의 모습-   그러한 것이 생명이다.“   우주는 상호 대립하며 교류하고 보완하는 리듬의 양가적 체계이다.   리듬은 식물의 성장과 제국의 팽창, 수확의 증대와 제도의 확장을 다스린다.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이 도이다.   우주를 리듬의 모임, 흩어짐, 그리고 다시 모임으로 느낀 것은 중국인 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리듬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 유한한 존재, 죽을 운명의 존재,   그리고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하여, ‘다른 것’ 즉 죽음,신, 사랑하는 사람,   우리와 닮은 사람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리듬은 하나의 태도이며 의미이고 세계에 대한 사이하고 독특한 하나의 이미지이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삶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태도-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잇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이다.   운율은 구체적인 시간성, 즉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이다.   단테는 항성들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을 사랑이라고 인식했다.   노자와 장자는 상보적 대립물로 된 다른 리듬을 듣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리듬을 투쟁으로 여겼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다.   우주적 리듬과 신화     어떤 사회나 두 개의 달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상의 삶과 세속적 행위들을 다스린다.   다른 하나는 신성한 시간, 제의 그리고 축제를 다스린다.   세속적 날짜와 달리 신성한 날짜는 측량단위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   현현하는 초자연적 힘을 싣고 있는 생생한 실재이다.     모든 문화는 ‘시간의 종말’에 대하여 공포를 느껴왔다.   ‘출입(등장과 퇴장)의 제의’가 존재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멕시코인들에게는 불의 제의는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유발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별의 언덕에 모닥불이 피워지자마자 그때까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멕시코 시 전체가 반짝였다.   이 순간 다시 한 번 신화가 현현했다.   공허한 연속성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적 시간이 재생하는 것이다.   삶은 적어도 그 순간이 다 소모할 때까지는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의 재생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배grial의 신화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으려고, 사멸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낡은 시간의 완고함을 이야기하는 신화들이 있다.   이러한 신화들에게는 불모가 지배한다.   평원은 고갈되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한다.   ‘나감(퇴장)의 제의’는 낡은 시간으로 하여금 젊은 후계자에게 평원을 내놓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신화는 거의 언제나 젊은 영웅의 구세주적 개입에 근거한다.   신화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는 매듭이다.   신화는 과거이며 과거는 또한 미래이다.   신화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영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끝나고 수정 불가능한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과거이다.   신화는 원형적 시간에서 진행된다.   원형적 시간이란 신화가 다시 재현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성한 달력이 리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현재에 실현될 준비가 되어있는 미래적 과거이다.   시간의 일상적 개념에서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이지만 숙명적으로 과거에 닻을 내린다.   신화적 질서는 용어들을 전도시킨다.   과거는 현재에 닻을 내리는 미래가 된다.   현재 속에서 총체적인 현존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껴안고 있는 원초적 시간에   도달 할 수 있는 문들이 있지만, 세속적 달력은 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의 삶을 자신의 총체 속에 포괄한다.   리듬을 통하여 원형적 과거를,   다시 말해 현재에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잠재적 미래인 과거를 현실화 한다.   우리가 ‘좋았던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처럼 흐름 속에 죽어간다.   반대로 신화적 시간은 죽지 않고 반복되어 현현한다.   시간에 대한 다른 표상들로부터 시화적 시간을 구별짓는 것은 원형적 특성이다.   언제나 오늘이 될 수 있는 과거로서의 신화는 언제나 반복하여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부동하는 실재이다.     리듬의 반복에 의해 신화는 되돌아온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위베르와 모스는 신성한 달력의 불연속적 성격을 보여주며   리듬의 마법에서 이러한 불연속성의 기원을 발견한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시키는 것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들이 시는 아니지만 모든 시는 신화이다.   신화에서처럼, 시에서도 일상적 시간은 변화를 겪는다.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것, 다시 현현할 무엇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이나 지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이다. 재생되는, 재현되는 과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재현된다.   첫째는 시적 창조의 순간에, 그리고 둘째는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히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이다.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을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들이다.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욕망은, 최고의 욕망인 사랑의 충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거리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 ‘...같은, 제발 ....했으면’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   즉, 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   욕망이 행동을 취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비교하거나 유사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사물들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유발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재창조 된다는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이다.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 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은-어린아이, 원시인들, 그리고 요컨대 가장 깊숙하고 자연적인 자신의 본능을 붙잡아 매었던   고삐를 자유롭게 풀어 놓았을 때의 모든 인간들처럼 – 직업적 모방자라고 확신해도 역설은 아니다.   그러한 모방은 독창적 창조이다.   시간의 근원에 있고 모든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   시간 그 자체와 혼동되고 우리 자신과 혼동되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어떤 것을   불러내고 부활시키고 그리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적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자신을 현재화actualization하는 것이다.   시구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리듬이며 근원적 시간이고 영원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   리듬은 언어를 구성하는 가장 오래되고 항존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일상어보다 앞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 할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그렇다면 산문과 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이다.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런 중력의 법칙에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또한 사유가 언어인 한에 있어서, 사유도 동일한 매혹을 경험한다.   사유를 이리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리듬으로 돌아간다.   이성은 교감으로 변화되며, 삼단논법은 아날로지로 변환되고   이성적인 행진은 이미지의 흐름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산문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는 모든 시대에 속한다.   반면 산문은 특정사회의 고유한 표현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시는 진보나 진화를 무시하며, 시의 기원과 종말은 언어의 기원이나 종말과 혼동된다.   원래 비판과 분석의 도구인 산문은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이다.   시가 닫혀진 질서처럼 보이는 반면에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의 모습이 되려고 한다.   발레리는 산문을 행진에, 시를 춤에 비유하였다.   산문이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형상은 선이다.   이와 반대로 시는 원형 혹은 구형으로 주어진다.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어떤 것, 즉 자족적인 우주로,   그안에서 종말은 되돌아 오고, 반복되고 재창조 된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가 다름아닌 리듬이며,   밀려갔다 밀려오고,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조수(潮水)이다.   산문의 작위적 성격은 산문작가가 언어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마다 증명된다.   시인, 혹은 음악가의 방법처럼 언어의 흐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언어에 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힘에 이끌리도록 내버려 두자마자,   산문작가는 합리적 인 사유의 법칙을 위반하고   시의 울림과 교감의 분위기에 진입한다.   많은 현대 소설에서 바로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라사키 부인이 쓴 는 끊임없이 산문과 리듬 사이에서,   개념과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설의 모호성을 가장 멀리 밀고나갔던   프루스트를 연상시킨다.   모든 언어적 리듬은 자신 안에 이미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완전한 시구를 구성한다.   운율은 리듬에서 생겨나서 리듬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양자 간의 경계는 희미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율은 고정된 형태로 결정화 된다.   광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마비의 순간이기도 하다.   언어의 간만(干滿)의 흐름에서 고립되면 시행은 소리나는 음격으로 변하고 만다.   언어는 산문과 시, 리듬과 담론사이에서 흔들린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보들레르는 “자연에서처럼 정신 세계에서도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지며,   상호적이고 상응적이다.....모든 것은 상형문자이다....그리고 시인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즉 번역자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는 혁명적 시로 평가받았다.   그것의 주제는 단순히 냉혹한 근대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적 질서에서 모범을 찾고 있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향수이다.   엘리엇은 근대 사회의 현실과 기독교적 질서를 대립시켰다.   그는 기독교적 질서를 다시 수용하고 변화시켜서 이교도들의 오래된 풍요의 제식에   개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독교적 가치의 세계, 그것의 중심은 천국과 지상과 지옥 사이의 보편적 아날로지   혹은 상응인데, 이러한 세게가 사라진 뒤에 인간에 남은 것은 사유와 이미지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연상뿐이다.   근대세계는 의미를 상실하였고 그러한 방향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언은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리듬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념들이 일으키는 연상의 자동성이다.   의 반대편에 이 있으며 바로 앞의 선례는 이다.  
931    심상운 시모음 댓글:  조회:191  추천:0  2019-06-30
심상운 시모음   헤드라이트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 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모형 전시실 또는 깨진 유리창       6월의 태양이 눈부신 한낮 국립박물관 모형 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 근육질 젊은 사내의 돌칼 가는 소리가 난다. 사내는 숫돌에 칼을 갈다 가끔씩 고개를 들고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을 움켜쥐고 유리 상자를 깨고 뛰쳐나오려는 듯 허연 수은등 불빛을 노려보고 있다.     12월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세찬 눈보라로 뒤덮인 겨울날 뻘겋게 이글거리던 드럼통 석탄 난로 곁에 둘러서서 외지外地로 떠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방금 검은 탄 속에서 나온 듯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젊은 광부들의 뿌연 입김이 깨진 유리창에 묻어 있는 30년 전의 K역을 찾아서 눈길을 떠나는 그녀.     낮 12시 20분, 나는 그녀의 모형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컬러사진 검붉은 고철古鐵들의 무더기 사이로 돋아난 풀잎의 푸른 혈관 위에 앉아 있던 벌 한 마리가 잉잉 잉잉 방안을 돌며 유리창에 몇 번 몸을 부딪칠 듯하다가 열린 유리창 밖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뱀과 그녀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겨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 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소리가 묻어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빛 또는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노랑나비       비오는 날 번쩍이는 빛을 향해   어두운 헛간을 뛰어나간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랑나비 하나   내 숲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반짝인다     李箱은 에서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 본다. 그것은靈界에絡繹   되는秘密한通風口“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영계의 컴컴한 숲속에서   죽은 나비와 춤을 추고 있을까?     정리해고 된 40대의 사내가   중고 트럭 조수석에 아내를 태우고   휘파람 불며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날고 있다.         블랙홀(black hole)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되어 소멸하는 거대한 별에는 정지된 시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고요? 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석化石 속의 물고기처럼 박혀 있을 거라고요?     아산병원 영안실에 있는 그녀의 시신屍身도 자세히 관찰하면 연료가 모두 소모된 마지막 순간에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어 생성하는 죽은 별들의 검은 구멍과 다르지 않다고요?     오늘 밤 당신은 35000피드 상공의 비행기가 컴컴한 허공 벽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우주의 얼음덩이 속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여름 풍경                 뱀 굴에서 미끈미끈한 몸뚱일 좌우로 흔들며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뱀 세 마리 뱀 네 마리 나온다. 가늘고 긴 혀 날름거리며 나온다. 엊저녁 기억들은 푸른 가지 사이에 허연 비닐봉지같이 걸어놓고 햇빛 속으로 스르르르 스르르르 미끄러지며 나온다.     발가숭이 햇빛들은 분수噴水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고 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을 빨아먹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로 풍선 하나 풍선 둘 풍선 셋 풍선 넷 둥둥 떠오른다. 찢어진 풍선들은 보이지 않고 새 풍선들이 떠오른다.     초여름 풀 향기 풍기며 19살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청계천 물속에서 나온다. 눈이 큰 헵번, 입이 큰 헵번이 눈웃음치며 나온다. 휴대폰을 들고 시청 앞 광장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목이 긴 헵번은 빨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다.     가슴에 철퇴를 맞고 허물어진 50년 전 건물들의 폐자재 더미 속에서 나온 유리창의 파편 조각들이 반짝인다. 덤프트럭에 실린 우그러진 창틀을 향해 반짝인다. 원주민들의 구멍 난 양말짝, 찌그러진 양재기, 찢어진 홑이불에 묻어있는 얼룩을 보며 반짝인다.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 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 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가방 또는 붉은 바닷물       나는 나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그는 그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켠다     내 가방은 빨간 토마토들이 제각기 불을 반짝이는   도시의 상공을 떠다니고   그의 가방은 하와이 푸른 해변 위로 둥둥 떠간다     나는 가방 속에서 방울토마토를 깨물며   젊은 가방들이 터뜨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0대의 백남준이 도끼를 휘두르고   부서지는 피아노가 비명을 지른다     피아노의 비명 속에서 튀어나온 붉은 바닷물이   허공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순간 내 가방도 꿈틀대며 다른 허공으로 치솟는다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중계동 은행사거리 40대 사내의 붕어빵틀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전자상가 TV 화면에는 시리아 반정부군의 자살폭탄으로   반쯤 부서진 건물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상자들     나는 제주산 노란 감귤 한 봉지를 사들고 행인들이 붐비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고     내 옆을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10대 여자 아이들     아파트 화단 젖은 흙속에서 10cm 가량의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통화       아 아, 여보세요. 40대의 사내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아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는 걸 봤다구요. 그 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구요. 3월의 하늘에선 확성기를 든 경찰과 구경꾼들에게 주는 선물인양 하얀 눈송이를 흩뿌렸다구요.     말수가 적은 40대의 회사원 K씨는 1년에 한두 번 손에 날카로운 못을 들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 고급 승용차들의 차체에 굵은 금을 긋고 다닌다구요.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아 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구요?     * 조주 선사(778-897):『육조단경』에 나오는 중국의 선승. 선가(禪家)에서는 조주고불(趙州古佛) 또는 조주라 부른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말을 했다.       자살폭탄 또는 푸른 울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봉오리를 만지며 은밀한 욕망 속으로 잠입하는 영화 속의 그녀. 밤마다 폭탄을 준비하는 그녀의 몸은 800만 화소의 선명한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사과를 도막내어 빨갛게 익은 사과의 중심에 박혀서 스스로 소리 없는 폭발을 꿈꾸고 있던 까만 씨앗 몇 개를 들여다본다. 그들도 촉촉한 살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있던 걸까?         TV 뉴스 자막이 사라지자, 한여름 밤 안동 지레 마을 산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쏟아내는 푸른 울음소리가 달빛 속을 벗어나서 무한허공으로 출렁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시 20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都市建築物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물고기 그림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파란 의자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환각제 복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의 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볼록한 가슴 선에선 노란 봄꽃냄새가 물씬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있던 둥근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가득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 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사각형 스크린       비 그친 아침, 나는 닫힌 창문을 연다. 스르륵 열린 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구름 A, 구름 B,구름 C. 이어서 펼쳐지는 파란 여름바다의 영상.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출렁인다 동해 화진포에는 빨간 사과 빛 안개. 나는 그곳에 푸른 비늘 덩이로 살아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았다 그 집은 환상의 집.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시간 밖에서 일하는 푸른 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별빛이 찬란한 밤바다 모래 위를 걷는다 사각형 스크린은 무한 공간. 그 속에 가득한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는 나뭇잎에서도 출렁이고 땅강아지 집에서도 출렁이고 아스팔트 속에서도 출렁이고 노래방에서도 출렁인다 젊은이들은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가자며 매일 밤 어깨동무를 하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그들에게 바다는 황홀한 전율의 출렁임. 햇빛 번쩍이는 검푸른 등을 보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각형 속 스크린도 부르르 부르르 온 몸을 떤다. 스크린은 사각형을 확 밀어버리고 수영복차림으로 뛰어나가려는 거 같다 그때 사각형 스크린 밖에서 사람 A가 열무, 가지, 오이, 호박을 트럭에 싣고 와서 스피커로 “무공해 싱싱한 채소를 싸게 팝니다”라고 소리친다. 캄차카 바다 돌고래들이 펄떡펄떡 솟구치고 있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한 아침이다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에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그림 또는 링크           산 너머에서 산 너머로 오가면서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는 것은 구름? 그 구름들은 수분덩이. 사람보다 더 많은 수분을 안고서도 유유하다 한 목동이 언덕 풀밭에 앉아 풀피릴 불고 있다 메에 메에 우는 양들은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경사진 돌밭 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 머리 위에는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있다 19세기 그림이 21세기의 나를 유유하게 휘감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그 구름과 양을 만날 수 있나? 지하철 4호선 분실물 센터에는 양털실로 짠 모자가 있다. 그 모자는 울지 않는다 그 모자의 DNA에는 고산지대의 기억이 들어있지 않을까? 나는 양털의 기억 속 좁은 경로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는다. 양털 속에는 하얗게 말라버린 양의 숨소리만 묻어있다 나는 햇빛이 환한 내 의식의 방으로 들어가서 양이 걸어갔음직한 북한산 향로봉 계곡 바위 길을 링크한다. 순간 양은 지워지고 5월의 하얀 아카시아 꽃향기가 물씬물씬 솟아나며 쌔애롱찍 쌔애롱찍 능선의 산새들 소리가 귀를 울리는 사이사이로 "순수한 떨림은 기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그 소리에 취해 일행들과 더 깊은 산속 숲길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다가, 깜박하는 사이에 하루 종일 녹취한 북한산 계곡 물소리와 어른 손바닥보다 큰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푸른 숨소리가 출렁이는 등산 가방을 지하철 4호선 전동차 바닥에 놓고 내렸다     * DNA: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 모든 살아 있는 세포에서 볼 수 있고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복잡 한 유기 화학적 분자구조           우주의 시간         그 미술관 대형 바다 그림 속에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의 가족들이 푸른 살 번득이며 파도치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밤 11시20분, 사이언스 TV에선 은하계 넘어 어느 별에 납치되었던 지구의 사람들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귀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400명의 귀환인 들은 우주의 0의 시간 속에서 살다왔다고 한다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은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 애태우다가 떠나간 이들이 만나서 산과 들과 바다에 눈부신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하얗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눈의 입자 속에서는 눈물을 안고 살아온 1000년도 우주의 0의 시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공과 아이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쫒아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거리의 유리창들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침 9시, 공을 따라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 공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통통통통 공장 굴뚝을 오르기도 하고, 통통통통 푸른 가로수 가지 위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건너뛰기를 하다가 초록 들길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 내려 앉아 잠시 멈춰 있다 아이도 버스지붕 위에서 흰 구름을 보며 쉬고 있다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 아이의 집은 해초들이 나부끼는 바다 속인 거 같다고요? 아이의 몸에선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요? 빨간 공은 수평선의 해 같다고요?       버스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아이가 빨간 공과 함께 노랗게 불타는 한낮의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밀짚모자를 쓴 이중섭이 화판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30대 여인 또는 구렁이       한 청년이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딴다. 검푸른 살의 꽁치 한 마리가 책처럼 잘 요약되어   삭아 있다. 이집트 미이라의 여인이 관棺 속에서 꿈틀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신전古代神殿의 조각상에서 나온 30대 여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면을 쓴 사내가 칼을 들고 말했어” “신神은 인간의 피를 좋아 한다고” “나는 그와 잔 적이 있어”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붉은 노을이 TV 화면 가득 이글거린다     작은 새들이 찌르르 쫑쫑 찌르르 쫑쫑 경쾌한 소리로 날고 있는 5월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어젯밤 드라마 속 여인이 자신의 검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녀의 허리가 푸른 잎 사이에서 구렁이처럼 햇빛에 번득인다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 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 꽃들과 어우러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 종일 은백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UFO:미확인 비행물체       이미지 여행             너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것들이 웅숭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만 무엇이 휘익 휘감는 느낌만 든다고? 너는 그림자여서, 그 느낌은 빛이 발산하는 백색의 전율이라고?     어디서 둥둥둥둥 소리가 들려오고 막이 오르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소가 된다고? 그곳에는 시간을 지워버리는 안개의 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으로 둥둥 떠올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너는 아침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나일 강을 내려다보다가 히말라야 하얀 눈 산 위를 지나간다고? 너는 도시의 전동차 안을 떠돌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나는 너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 숲 푸른 공기 속을 둥둥 떠간다. 그때 사원의 짙은 그늘과 무한 질량의 환한 햇살 사이를 넘나들며 UFO처럼 번쩍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       맨살에 링크하기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아스팔트 위의 맨살 여자       아스팔트 위에서 30대의 여자가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넣고 앉아있다. 둥근 여자의 몸은 매끈한 살덩이 바퀴가 되어 아스팔트 도로를 굴러갈 것 같다     (화가는 왜 여자를 달팽이같이 둥글게 말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은 것일까?)     (여자는 화가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일까?)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굴려 본다 그녀는 공기가 팽팽한 고무공같이 가볍게 구른다 그녀는 통통 튀기도 한다 구름이 그녀를 태워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파란 바다로 굴러가며 깔깔거린다 그때 100km로 달려오던 육중한 화물차가 삐익 소리를 내며 간신히 그녀를 비켜간다 핏발선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휙 스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도로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 맨살로 앉아있는 30대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너무 뜨겁다           우아우아 아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검푸른 파도 펄떡이는 돌고래   (산의 어깨 위로 솟구치는 검붉은 불길)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다시마 미역 멍게 해삼 조개   (풀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불길 속의 주택들)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란 바다 빨간 구름 허연 맥주 거품   (47인치 모니터에서 풀썩풀썩 뿜어져 나와 중계동 은행사거리 상공을 떠도는 LA의 검은 연기 검은 연기)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도소리 기타소리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   (거대한 공동묘지 상공 떼 지어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위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 하얀 눈)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뜨거운 모래밭 달빛 속 엉덩이   (당신은 죽은 30대 여인의 목에서 반짝이던 나비날개 모양의 보석을 보았다고요?)   (그녀는 나비가 되어서 봄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모닥불 하얀 잿더미 빈 맥주병   (당신은 사람들이 모두 복제품 같다고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가슴을 껴안고 싶다고요?)       꿈틀꿈틀 아침 바다 붉은 핏덩이 핏덩이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노란 색을 주조로 한 세 개의 그림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뻗은 큰 도로 옆엔 봄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꽃 울타리가 석재상 마당 한쪽과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돌부처 돌마리아 돌사자 돌여인 돌사슴의 머리와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그 석물들과 손잡고 노는 상상을 하며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일까? 돌부처와 돌마리아가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둘레를 돌사자 돌사슴 돌여인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들이 뛸 때마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늘진 석재상 마당이 환해지곤 한다     목만 있는 늘씬한 젊은 여인이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서 있는 대형 마트 의류 코너. 그 건너편 쪽에는 목만 있는 청년이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다                   강남 터미널 대형 TV에서 갑자기 콸콸콸콸 흙탕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떠내려 온 가재도구들이 큰 물살에 둥둥 떠가다가 나무그루에 걸려있는 게 보인다 주민들은 무너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무어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멀리서 털털털털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노란 조끼를 입은 구조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경을 하던 청년 셋이 TV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모니터에서 튀어나온 흙탕물이 내 몸에 확확 끼얹힌다 내 옷에서는 노란 개나리꽃 향기가 난다
930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의 실제 / 이선 댓글:  조회:209  추천:0  2019-06-28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의 실제 / 이선     필자는 양천문화원, 광진문화원, 성동구민대학 수강생들에게 수년간 시창작을 가르쳤다. 아래 소개하는 하이퍼시 창작기법은 필자가 연구하여 수강생들에게 가르친 하이퍼시 창작 기법의 실제다. 학생들의 예시 작품은 익명으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 (1) 하이퍼시 문장 만들기 1: 언어충돌 아래에 제시한 낱말들을 연결하여 시적인 문장을 만드시오. 예제 1) 배, 연못, 유리컵, 반사경, 지붕, 김밥, 안개, 뛴다, 흐른다, 사라진다 고향/ 최〇〇// 연못 속 하얀 지붕/ 반사경처럼 비친다/ 안개 닮은 고향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김밥을 나눠먹으며/ 뛰어놀던 순자 얼굴/ 뱃고동 따라 흐른다 정〇〇: 고흐의 잘린 귀가 연못에/ 떨어져 별빛 언어를 듣고 있다/ 유리잔에 비친 얼룩진 얼굴/ 반쪽만 남아 홀로 웃고 있다 예제 2) 전봇대, 청기와집, 봉지, 강(한강), 낙엽 임〇〇: 겨울의 눈썹 밑으로 난 물길을 따라/ 조약돌들이 흘러간다// 한강 바닥의 낙엽 속으로 작은 강물이 흐른다/ 넓은 강을 전봇대들이 껑충껑충 뛰어 건너간다 예제 3) 이슬, 칠판지우개, 색소폰, 드럼, 은행나무, 푸른 바다 정〇〇: 색소폰 멜로디에 풀잎 이슬이 떨어진다/ 푸른 바다가 은행나무에 걸터앉아/ 이슬을 뿌리고 있다 김〇〇// 모기 목 땀띠에/ 백분 곱게 바르고/ 코스모스 향기 나들이할 때/ 고추잠자리 편대가 한가롭다 신〇〇: 지각한 날/ 미끄러진 아침이/ 커피잔 속, 미세먼지에 갇혀 있다 김〇〇: 참새가 울고 간 거리마다 편지만 걸려 있다 정〇〇: 누드화 숲 사이를 꼬불꼬불 도는/ 산꿩 울음소리/ 나목이 되어 서 있다 임〇〇: 우편배달부가 세계지도 위에 봄을 엎지른다. 온 세상이 꽃향기에 취했다. 신〇〇: 유리창에 비친 12월 말 달력/ 등굽은 나무 아래 참새 한 마리/ 눈썹 빠진 단풍 하나 입에 물어/ 바람난 숫고양이 물통에 살짝 빠뜨린다 〇기〇: 내 구부러진 시선에 들킨/ 기와지붕 위 고양이 한 마리/ 하늘 물에 세수를 하고 있다 〇순〇: 지도 한 켠에서 꽃향기가 날아와/ 집앞 정원에 내려앉았다/ 아련한 기억 속의 기차가 봄날을 실어와/ 나른한 즐거움에 젖어 있다 위의 시창작 방법은 거리가 먼 낱말들의 결합으로 언어충돌을 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시의 내용을 제한하거나 한정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물에 대한 지식에 근거할 때 객관화를 획득한다. (2) 하이퍼시 문장 만들기 2: 낯설게하기 * 교사는 학생들에게 낯설게하기를 실현할 이미지 시를 쓰도록 한다. 교사 예제 작품 1: 깃털꼬리구름/ 국립중앙박물관 앞 거울호수에 내려앉다가/ 날개가 부러져 물 밖으로 삐져나온다// 허공에 부딪힌 아픈 기억들/ 물살이 흔들린다 유〇〇: 섬진강 쪽빛 물 위에/ 얇은 그림자로 일렁이는 벚꽃 춤사위/ 봄햇살 반짝이는 흰구름 사이로/ 나란히 손잡고 흐르는 벚꽃 십리 길/ 그대와 나의 얼굴에도 팝콘처럼 번져가는 연분홍 봄날 〇〇석: 민들레꽃 피고/ 밀잠자리 날 때/ 자전거를 탄 청년이/ 라일락 향기나는 마을로 내달린다 송〇〇: 나는 벚꽃 만발한/ 4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되어/ 들길을 홀로 걷는다 〇〇이: 물안개 피어오른/ 새벽 강물 속으로/ 침묵이 스며들고/ 테두리 안경 안에서/ 한 폭의 수묵화를 이루네 함〇〇: 활짝 핀 벚꽃 잎이 바람 타고 꽃구경 간다/ 노란 민들레 꽃잎 위에/ 부드러운 개나리 입술 위에/ 달콤한 키스가 흐른다 최〇〇: 앵두빛 서녘하늘에/ 석양이 입술 루즈 칠을 한다/ 산 아래 절 마당엔 은은한 풍경소리/ 달콤한 여름밤 내음 하이퍼시는 사물시에서 출발한다. 거리가 먼 사물끼리 결합하여 낯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꽃을 바라보고 시를 쓰면 기록문이 된다. 꽃이 되어서 꽃의 목소리로 말을 하면 시가 된다. 사물이 되어서 사물의 관점으로 오래 관찰하면 사물이 말을 걸어온다. 심상에 있던 무의식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시를 쓸 때 내용을 중요시하면 관념시가 되거나 설명적이거나 논술이 되기 쉽다. 또 자기 이야기를 그대로 쓰려고 고집하면 사변적인 문장이 된다. 시는 표현이다. 유미주의는 시의 목적이며 결과다. 시를 쓰는 이유는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좋은 시를 쓰게 된다. 하이퍼시 기법 중에서 이미지에 운동감을 주는 방법은 시에 상상력이 들어갈 때다.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시각 이미지를 공감각 이미지로 확장하면 감각적 미의식을 획득한다. (3) 하이퍼시 문장 만들기 3: 상상력 ☆ 발상의 전환과 이미지 확장 미끈한 종아리를 드러내고/ 봄날 버드나무 잎새가 연초록으로 물들어갈 때/ 네 치마길이는 점점 짧아진다(이〇〇) 역사가 햇볕 속에서 잘 익은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검은 흑보자기에 싸여/ 천년 동안 뿌리도 없이 수많은 눈들을 비껴/ 어질어질 흩어져 내리는 흙먼지/ 메마른 동굴 속에 혼자다(〇〇만) 잠자리/ 〇천〇/ 연 잎에 살포시 앉은 밀잠자리/ 두 눈을 부라리며 꽃향 맡는다/ 백련, 꽃향기를 빨아대더니/ 향긋한 내음을 밖으로 퍼 나른다 〇윤〇: 지각한 날/ 미끄러진 아침이/ 커핏잔 속, 미세먼지에 갇혀 있다 달빛/ 〇〇석/ 달빛은 이슬을 머금고서/ 그윽한 기타소리에 젖고/ 차가운 물기를 담은 소리/ 그녀의 창문을 두드린다 최〇〇: 분주히 오가던 발자국이/ 긴 수면에 든 거리/ 경계석을 베고 누운 단풍잎 위로/ 늦은 가을이 녹아든다 정〇〇: 허공에 치솟은 미루나무 위에/ 뭉게구름 부리가 꽃잎에 젖어 자욱이 걸려 있다 신〇〇: 지붕 아래 버들가지, 묘목이 하품을 한다/ 안경 너머 시력이 기지개를 켠다/ 모자 테두리가 노랗게 꿈틀거린다 〇〇지: 겨울의 눈썹 밑으로 난 물길을 따라 조약돌들이 흘러간다 위의 학생들의 시는 낯선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상상력을 객관화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시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운동감을 주어 흔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산문과 운문은 발상이 다르다. 산문을 줄인 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반전이 필요하다. 시는 정직하게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일상적인 것을 거부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거꾸로 생각하기, 반대로 생각하기, 짐짓 시치미 떼기를 일상에서 연습해야 좋은 시를 쓴다. (4) 하이퍼시 문장 만들기 4: 이미지 확장 이미지 만들기는 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 교사는 ‘나는 간다’라는 문장을 제시한다. 종속절을 넣어 긴 문장을 만들도록 한다. 〇 꽁무늬바람 한 무리 흩날리는 조팝 꽃잎을 양떼처럼 몰고 징검다리 건너간다(〇〇란) 〇 휘파람 새는 봄빛을 물고 시린 겨울강을 건너왔다(조〇〇) 〇 별박이왕잠자리가 구름을 물고 와 옹달샘에 내려놓는다(정〇〇)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미지 만들기 공부를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시 하는 점은 다음 사항이다. 첫째, 시가 되는 것과 시가 되지 않는 것을 구별한다. 둘째, 감각적이고 미의식이 있는 문장을 만든다. 셋째, 객관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하이퍼 사물시를 쓰도록 한다. 넷째, 이미지에 운동감을 주어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하도록 한다. 다섯째,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시각 이미지를 청각이미지로 교환하여 공감적 이미지를 만들도록 한다. 여섯째, 구체적인 지명과 사물 이름을 넣어 시가 구체성을 획득하도록 한다. 일곱째,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상투어를 피하도록 한다. 자기가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한 독특한 장면을 시에 쓰도록 한다. 여덟째, 특이한 고유명사를 찾아서 시에 쓰도록 한다. 아홉째, 고정관념을 버리고, 기성 시인의 잘못된 시창작 기법을 모방하지 않도록 한다. 개성적인 작품을 쓰도록 한다. (5) 하이퍼시 문장 만들기 5: 조건절, 대귀법 ☆ 조건절과 대귀법을 이용하여 문장을 만들어보자. 예)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교사 예시 작품: 흰 나비는 봄날 민들레꽃을 따라가지만/ 그 노랑 꽃잎의 발자국을 만나지 못하였다 〇〇〇: 황혼을 덮어 쓴 조약돌/ 밀물 썰물의 언어로 몸을 씻는다 첫사랑/ 〇혁/ 나는 그의 꿈속으로 들어가 별이 되었다/ 그는 내 꿈속으로 들어와 이슬이 되었다 임〇〇: 내가 너를 향해 날린 종이 비행기/ 아직도 날아가고 있나 보다/ 내가 아직도 멀미를 하는 것을 보면 조건절과 대귀법은 서양과 동양의 많은 고전에서 볼 수 있는 시창작 기법이다. 무의식 중에 한국의 현대 시인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퍼시에서 조건절과 대귀법을 사용하여 시창작을 학생들에게 실시하였다. 재미있는 하이퍼시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6) 하이퍼시 문장 만들기 6: 패러디 패러디 시는 베끼기가 아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지명과 작품을 배경으로 시를 창작하는 확장된 영역이 패러디의 범주에 속한다.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표절은 패러디가 아니다. 아래에 제시한 방법은 문화원에서 시를 전혀 모르는 학생들에게 시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한 제언서다. 기성 시인에게는 패러디 방법론을 추천하지 않는다. 1) 패러디: 학생 학습과제 1 아래 시는 박남수의 대표시 「종소리」 전문이다.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 박남수, 「종소리」 전문 필자는 문화원 학생들에게 박남수 「종소리」에서 3연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를 발췌하여 패러디 과제를 내주었다. 아래 문장은 수업 시간에 작성한 학생들의 패러디 작품이다. 고〇〇: 리듬을 탄 물방울은/ 풍금소리의 반주가 되고/ 차가운 음률로 그녀에게/ 다가가서 눈가 웃음꽃이 된다 최〇〇: 나는 소주잔을 타고/객줏집에서 노래가 된다/ 산에 올라 막걸리잔 높이 들어/ 건배사를 외치고,/ 비가 오면 중국집 지하에서/ 배갈잔에 독백을 담는다 〇〇숙: 냉이꽃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아가의 배냇짓이 된다/ 초록을 만나 웃는 작은 꽃망울들/ 아지랑이 봄을 위한 합창이 된다 함〇〇: 활짝 핀 벚꽃 잎이 바람타고 꽃구경 간다/ 노란 민들레 꽃잎 위에/ 부드러운 개나리 입술 위에/ 달콤한 키스가 흐른다 박남수의 「종소리」의 문장공식은 A=B+C+D다. A(나)는 B(푸름)와 C(웃음)과 D(악기)가 된다. A는 전혀 다른 사물로 치환된다. 시를 처음 쓰는 학생들은 시를 어떻게 쓸지 당혹스러워한다. 학생들은 시를 좋아하고 향유하는 독자로서 문화원 시창작반을 찾지만, 자신이 직접 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목공 공작소에서 처음 목공을 배울 때 기술자가 사전에 목공의 기초를 가르친다. 톱 사용법, 주의할 점, 재단하는 방법, 못 박는 법, 사포질, 칠하기 등 목공의 각 단계를 가르친다. 사전 주의사항과 제작과정, 작품의 보관정보까지 주지시킨다. 목수는 절대 초보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고를 미연에 막기 위함이다. 적어도 십년이 흘러야 기술자가 된다. 먼저 기술자를 따라다니며 눈으로 익히고 뒤치다꺼리를 하며 곁눈질로 배운다. 그러나 시는 언어유희다. 한글을 알고, 손을 다칠 염려도 없다. 오랜 연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 번에 이루려고 조급해 한다. 시도 목공 기술처럼 오랜 시간 단련의 기간이 필요하다. 좋은 시를 읽고, 교사로부터 어떻게 쓰는지 배우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사랑 몇 번 하고 이별시를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연습하고, 버리고, 연습하고 버리는 오랜 수련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는 수학처럼 A는 B가 아니다. 정확하고 똑같이 재단해야 하는 목재가 아니다. A는 B, C, D로 형질이 변형된다. 시는 같으면 틀린다. 시는 창의성이 요구된다. ♧    
현상 저 너머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4)       김철교(시인, 평론가)         7. 읽기       문덕수는 시가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제 ‘이미지의 시’의 단계에 도달하여 ‘이미지의 지적 주권’ 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시인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문덕수, 『현실과 초월』, 시문학사, 2014, 13-22쪽).       문학비평용어사전에 의하면, 시의 이미지는 표현상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시적 상황을 암시하여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엘리엇(T.S Eliot)의 ‘객관적 상관물’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녁노을을 통해 독자는 죽음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섭에 의하면, ‘이미지는 철학에서는 실체의 환영,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체험을 단순히 재생하는 심리적 작용, 시에서는 마음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으로 운율과 더불어 시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는 역할을 한다’(이영섭, 「이미지의 유형과 실제」, 『시창작 이론과 실제』,(오세영 외 편) 시와시학사, 1998, 252-276쪽).       미술용어 사전에서는 ‘자연주의 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주의적인 현대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 가지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월간미술편, 『세계미술용어사전』, 369쪽).       어떤 정의를 인용하든 이미지는 實在(the real)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다.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인간이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다.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파이프를 그리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써넣었다. 그림의 제목을 이라고 붙여 놓은 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미지)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란 뜻도 담겨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는 파이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어떤 나무로 되어 있고, 얼마나 낡았는지, 그리고 실물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지 등 어떤 특성도 파악할 수 없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파이프’라는 단어는 파이프의 참된 성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파이프’라고 부르자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약속한 것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 멋있는 단어인 ‘곰방대’가 있다.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와 이미지(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한 원본은 인간인 이상 누구도 볼 수 없다) 사이의 정확한 의미 전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시각에 의존하여, ‘이것은 천국이다’, ‘이것은 죽음이다’라고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 아래에 써놓는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여, 애연가의 경우 파이프 담배를 피움으로써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담배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현존 너머의 원본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예술가에게는, 특히 시인에게는 언어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자신의 이미지로 무한히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물론 언어의 한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시인도 적지 않다.           *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   1929, 캔버스에 유채, 60×81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바짝 마른 장미꽃 다발에서 앵앵거리는 꿀벌의 날갯짓 들리나요? 닳아빠진 촛불에서 넓디넓은 꿈을 읽을 수 있나요? 장맛비에 휩쓸려온 뼛조각에서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나요?       지금 우리 자리는 죽은 자들 이미지의 묘지가 아닌가요? 우리 삶은 또 다른 복제물 복제물, 복제물이 아닌가요? 원본의 기억은 살아있나요? 원본은 있기는 있나요?       우리는 어디에 둥지를 마련할 수 있나요? 내가 눈을 감은 후에도 저 바다는 저 산은 감히 저기 저 자리에 버티고 있을 건가요? 아니 내가 있는 이곳은 도대체 어딘가요?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시인은 촛불이 다 닳아빠져 흔들리고 있는 서재에서 마른 장미꽃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전 산보하다 길가에서 마른 뼛조각을 발견했던 것을 문득 떠올린다. 지금-여기 내가 있는 것은, 오래 전에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이라는 이미지와 언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진정한 모습’, ‘사물의 실재(the real)’와는 먼 시뮬라크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죄를 짓기 이전의 하나님 형상(Imago Dei)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낙원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에 젖어 있는 것이다. 시인의 먼 미래, 사후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질문형을 반복하며 대위법적 기교를 활용함으로써, 그 질문의 절실함을 담아내고 있다.       김유중은 “시인은 여기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가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이미지의 묘지’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또 다른 복제물’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원본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추방되고 지워져버렸으며, 따라서 이 시대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창조적인 활동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삶의 원형으로서의 원본, 예술가의 절대적인 이상으로서의 원본은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되찾기에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물로서의 원본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그것이 남긴 이미지만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 현재, 우리 시대인 것이다”라고 평설에서 언급하고 있다(김유중, 김철교의 시집 『무제2018』평설, 2018, 시와시학, 141쪽).       8. 읽기       예술작품은 좋은 시뮬라크르다. ‘좋은 시뮬라크르’라 함은, 현상 저 너머에 대한 꿈을 머금고 있는 시뮬라크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시뮬라크르는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플라톤의 에이콘의 개념에 가까울 수도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개념은, 가상, 모조품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로,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즉 원본을 알 수 없는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이다.       넓은 의미의 이미지, 보통명사로서의 이미지는 복사물(플라톤의 eidolon의 개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에이돌론(eidolon)을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으며, 에이콘은 원본이 반영된 복사물이라는 이미지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의 복사물로 원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만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은 이 시뮬라르크를 악마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에이콘은 실재를 닮은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에이콘을 복사한 것으로 원본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원본(이데아 + 실재)을 반영하지 않은 복사물은 저급한 것이다. 여기서 ‘이데아’는 지성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머리로서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실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오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들뢰즈는 원본이 반영되지 않은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 이데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탈중심의 세상, 이데아를 재현하지 않는, 이데아를 바라보지 않는 재현파괴의 세상, 카오스적 다양성을 가진 개인중심의 세상,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이어서 유희적인 유목성을 가진 개인 중심의 세상, 무질서를 내포한 질서를 중시했다. 시뮬라크르 세계는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버려야할 악마적인 것이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시뮬라크르가 탈중심화된 체계의 중심을 여는 새로운 사유매체이자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한국외국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60~79쪽).       그러나 시뮬라크르에도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 않을까? 복사의 복사를 반복하다보면 차이가 누적되게 되고 결국 원본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는 몰라도 원본의 그림자는 남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 것이지, 원본의 그림자조차도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창조’와 다름 아니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써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읽힐 때, 그 시가 원본이냐? 시뮬라크르냐? 시인은 그것이 ‘원본’이라고, ‘실재’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독창적이어서), 그러나 그 시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수용된다는 것은, 환경과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복사한)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의미한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1-26쪽).         시인은 신에 가깝다고? 에라이, 시뮬라크르 너는 어떤 모습으로 복제된 거지? 어느 것도 원본은 없고 그저 차이만 반복된다면서?       y = ax + b, 변수들의 변치 않는 정의는 무엇일까? y = 나 x = 너 아니 하나님 a와 b는?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은 양 두툼한 책을 서슴없이 써내지만 행간에는 그저 황무지만이 널따랗고 위안을 주는 작은 풀꽃 하나 찾을 수 없다       인식 저 너며 이성 저 너머 감성 저 너머 거기엔 아무 것도 없는데 용량이 부족한 두뇌로 열심히 삶의 프로그램을 짜서 돌려본들 루핑이 걸려 평생 그칠 줄 모르고 쳇바퀴를 돌릴 뿐이다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원본(Imago Dei)이라면 지금의 시인 역시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이어진 복제과정을 반복되어 온 ‘지금의 나’이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잊지 않고 복락원의 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y = ax + b가 간단한 삶의 방정식이라고 한다면, 나(y)는 하나님(x) 혹은 이웃(x)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a와 b는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치 혹은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x가 하나님일 때 a가 0인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겠고, -인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이 삶의 공식이 참인가? 여기서는 단순하게 1차방정식으로 표시했지만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기에 무한대의 다차원방정식일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그림 속 텍스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의미도,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글씨그림’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들뢰즈의 시각에 의지하면, 온갖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마치 원본을 찾은 양, 실재(實在)를 찾은 양, 사람들은 많은 책을 써내지만 그 글 중에서 진실의 양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직후 죄짓기 이전의 모습을, 온갖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찾으려 해도 여전히 죄악과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에 루핑(looping)이 걸리면, 프로그램 속에서 동일한 명령이나 처리과정을 반복하여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뇌세포의 10%도 가동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언제 우리는 원본, 실재, 이마고데이를 찾아내어, 저절로 의인으로 살아질 날이 온단 말인가?       9. 읽기       예술의 본령은 현상 저 너머의 탐구라 하겠다. “다른 상징주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랭보에게도, 현실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외관을 지닌 모든 사물들은 단지 본질을 나타내고 투영하는 일부분일 뿐이지, 결코 본질 그 자체이거나 또는 본질을 충분히 투영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 파괴와 해체를 통해 현실적인 외관을 제거하고,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실체’를 ‘재건축’, ‘재창조’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랭보에 의하면 진정한 시인이란 ‘투시자’가 되어, 의식과 이성으로 느끼기보다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궁극적 본질을 ‘무의식’과 ‘상상력’에 의해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곽민석 역, 『랭보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48-154쪽).     * 미로(Joan Miro, 1893~1983), ,   1978, 캔버스에 유채, 92x73Cm, 마르요카 호안 미로 재단. 스페인.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 그 안에는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 천국의 지도를 완성하러 별나라에서 온 그가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는 그림과 음악으로 외우는       함께 가자 함께 가자 함께 가자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 2018) 전문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왜 자기 작품에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고, 특히 미술가들은, 즐겨 「무제」라는 제목을 쓸까. 작곡가들도 대부분 작품의 제목대신 일련번호를 즐겨 쓴다. 베토벤 도 작곡 당시「운명」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아니다. 베토벤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가 붙인 이름이다. 특정 제목이 붙지 않은 예술작품은 수용자에게 무한자유를 허용한다. 호안 미로의 「무제 1978」라는 그림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그림을 보고 이라는 시를 쓴 시인은 미지의 별에서 온 우주선을 떠올렸다.     이성은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감성은 자주 우리를 욕심에 휘둘리게 한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모두 천사일 수 없는가?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는가? 내 멋대로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우리가 선하게 살도록 자동프로그램화 될 수 없는가? 모든 인간이 선하게 남을 배려하도록 프로그램된 칩을 머릿속에 심을 수 없을까?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주기도문’에서 외우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시에 대한 이덕주의 평설을 인용해보자. 시인은 이 그림을 보면서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을 연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쩌면,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라며 삶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려 한다. 화자는 호안 미로에게, 타고난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라고 신뢰를 보낸다. 예술가에게는 “천국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기에 긍정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별나라에서 온 그”이기 때문에 자신이 희원하는 근원적 해답을 반드시 줄 것이라고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며 기대치를 높여보는 것이다. 반복적인 “함께 가자”라는 구호는 후안 미로가 상상해내는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에 동승하려는 화자의 기원이 내포되어 있는 주문이기도 하다(이덕주, 「화가의 영혼과 교류하는 심미안」, 한국시문학아카데미 발표원고, ).       예술세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본다. 호안 미로가 초대하는, 천국에서 온 우주선이 초대하는, 예술세계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원본(Imago Dei)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음악의 옷을 입은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3)       김철교(시인, 평론가)         4. 읽기           * 클레 (Paul Klee, 1879~1940) ,   1929, 캔버스에 유채, 83.7×67.5Cm, 루드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은 과 함께 클레가 음악의 대위법(對位法)을 활용하여 그린 그림이다(김광우,『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321~323쪽).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의 돌들이 반복되어 쌓이면서 길을 만들고 있다.   ‘예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클레는 스위스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화가가 되었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클레는 색을 소리처럼 사용하였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지만, 사실상 이를 먼저 주장한 사람을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었다. 고갱은 “생활이나 자연에서 가져온 주제를 가지고 선과 색을 배열하여 일종의 교향곡과 화음을 만든다”고 하였다.       대위법(對位法, counterpoint)은 음악에서 두개 이상의 선율(멜로디)을 동시에 결합하는 다성음악(多聲音樂)이다. 규칙적인 시차를 두고 같은 음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연결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러 성부(聲部)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각 성부가 선율적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음악에서는 일반적으로 음의 수직적 결합(화성, 화음)과 수평적 결합(선율, 멜로디)을 통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대위법은 수평적 결합에 해당한다. 캐논과 푸가는 대위법의 일종이다. 캐논은 하나의 성부에서 주제가 노래되면, 시간의 차이를 두어 다른 성부가 그 주제를 그대로 ‘모방’하여 뒤따른다. '돌림 노래'는 캐논형식의 전형이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에서 주제가 제시되면, 이어서 제2의 성부가 이것을 모방하는데 이것을 ‘응답주제’라 한다. 그 동안에 제1의 성부는 응답주제에 대위(對位)하는‘대주제(對主題)’를 부르면서 진행한다. 주제, 응답주제, 대주제의 관계가 모든 성부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것이 푸가형식이다.       문학에서의 대위법은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으로,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어구를 연결하여 대비의 느낌을 강하게 강조하는 동시에 그 대립 자체가 하나의 통일성을 갖게 한다. 김종삼의 시에서 이러한 음악기법들이 잘 활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조용훈, 「김종삼 시에 나타난 음악적 기법 연구」, 『국제어문』, 2013, 321-346쪽), 푸가 형식을 활용하여 시의 의미를 한층 풍성하게 한 사례를 첼란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박미리, 「음악과 문학의 상호 매체성 – 한 예로서 푸가 형식과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 『독일어 문학』제56집, 2012, 121-146쪽).       클레의 그림 에서 그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곧게 뻗고 안정적인 길이다. 그 옆의 수많은 샛길들은 좁고 불안정하고 아무렇게나 생겨난 오솔길이다. 우리의 삶은 고속도로처럼 평탄한 한 평생을 보내든, 불안정하고 흔들리며 어렵게 살든 결국은 하나의 지평선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게 될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결국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났을 때, 후회 없는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클레가 그린 을 보면서, 대위법을 염두에 두고 을 썼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주어진 길이 어떤 길이더라도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푸른 바다로 향하는 길 모두에게 넓고 모두에게 좁은 모든 길 가지각색으로 가지각색의 길을 닦고 있다       바다 건너 아주 먼 바다 건너 내가 온 별자리를 향해 층층마다 다른 색깔로 비틀거리기도 하며 뜀박질도 하며 때로는 목적지를 환히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목적지를 잊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       점. 선. 면. 색을 통해 가야할 길 가는 길을 알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화가의 붓질 속에 아득하게나마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붙들자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들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도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첫째 연과 둘째 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푸른 바다를 향하는 길을 가는 길손이며 각각의 길은 다르다. 푸른 바다란 각각이 지향하는 낙원, 본향, 고향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며, 연어도 알을 낳고 죽기 위해 고향으로 회귀한다. 물론 그 고향, 즉 삶의 목적, 가고자하는 종착지는 모든 사람에게 다르다. 또한 가는 방법(삶의 노정)도 다르다. 어느 것이 정답이고 옳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연에서는 가는 길을 멈출 수 없는 숙명을 말하고 있다. “내가 온 별자리를 향해/ 층층마다 다른 색깔로/ 비틀거리기도 하며/ 뜀박질도 하며/ 때로는 목적지를/ 환히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목적지를/ 잊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인 것이다.       셋째 연은 예술가의 길을 노래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가야 좋은지 고민 없이 그저 간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가야할 길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른 길들은 어떤 길들일까? 길 너머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가는 사람이 예술가다. “점. 선. 면. 색을 통해/ 가야할 길/ 가는 길을 알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화가의 붓질 속에/ 아득하게나마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붙들자/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들/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도” 꼭 그림 속에서 만이 아니다. 모든 예술, 더 넓혀 모든 학문 속에서 삶의 목표를 향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그저 아무 할 일 없이 세월을 소비하는 것을 시인을 참지 못한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목적, 꿈, 소망(죽음을 앞에 두었더라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라도 가져야 한다)이 없는 삶은 동물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물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동물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시는 음악적 기법 중에 대위법을 잘 활용하였다. 대위법을 통해 리듬을 살리고 있고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또한 색채 이미지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은 도, 미, 솔을 색채로 나타낸 것이다.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1-1915)은 음과 색채와의 상응관계를 연구한 바 있다.       삶의 조화로운 것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비록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아무 것도 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나의 모습을 찾아 예술 속에 한 평생을 던지겠다는 것이다.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리듬과 색이 합쳐진, 즉 ‘보는 리듬’도 클레의 이론에 따라 도입한 것이다.         5. 읽기                         피카소의 15m의 조각 작품 는 시카고 시청 앞에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을 보고 쓴 시 에서, 시인은 거대한 조각 앞에 서 있다가, 자신이 조각 작품이 되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앞을 지나가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을 관조하면서, 대위법적 구성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나름의 해답으로 자족한다. 반야심경에서 세상 모든 삶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저 있는 자리에서 자족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작품화 하였다. 없는 해답을 찾아 애쓰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구원이요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자문자답하면서.         거대한 몸짓이 우리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듯 행복한 듯 무심한 듯       거리를 초점 없이 거닐고 있는 노인들 손잡고 휘파람 부는 정다운 애인들, 애인들, 천방지축 재잘대는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존재마다 무슨 제목을 붙일 수 있나요? 사람마다 딱 맞는 옷이 있나요?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데 있나요?       도서관에 꽉 찬 책들이 해답을 줄 수 있나요? 책장마다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그림자를 알 수 있나요? 책 속에 뭔가 있긴 있나요?       그냥 저 거리에 부는 매연 섞인 바람 속이지만 웃고 싶은 웃음이나 실컷 웃지요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6. 읽기                 미로,         호안 미로의 그림(, 1974, 216x174Cm, 캔버스에 아크릴과 목탄,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은 사람의 얼굴을 단순화 시킨 모습이다. 위쪽에는 머리를 표현하는 듯한 검은 색이 있고, 그 아래 검은 눈, 그리고 그 아래는 회색 얼굴빛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크기는 제법 커도 아주 간결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시로 쓴 에서는 빛의 3원색이 등장하고, 그러한 밝고 맑은 색깔에서, 다장조의 화음까지 읽어낼 수 있다. 사방에서 우리는 지켜보는 하나님의 눈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을 응시하고 얻은 이미지를 시로 옮긴 것이다. 검은 색과 회색으로 그려진 그림 앞에 서면, 수용자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을 법하지만, 시인은 이 그림에서 항상 우리를 따뜻한 눈으로 보살피는 창조주의 마음을 읽고, 삶을 평화롭게 관조하는 행복한 얼굴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도 대위법을 염두에 두었으며, 색깔의 이미지도 도입하여 미술과 음악 기법을 동시에 활용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하늘에도 눈 뒤에도 눈 앞에도 눈 바다에도 눈       마음 깊은 곳에도 눈 너머 저 너머에도 눈 온 세상에 눈 눈 눈       정염이 맴도는 빨간 눈 세상 빛으로 가득한 파란 눈 교회 종소리 가득한 초록 눈   도 · 미 · 솔 저 너머 투명한 눈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그분의 눈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우리 주위에는 많은 눈들이 있다. 하늘도 바다도 미지의 세계도 시인을 응시하고 있다. 주위 온갖 세상 사람들의 눈도 시인을 향하고 있다. 내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과 내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인식의 눈은 그 분의 눈 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은 확인한다. 이해할 수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삶의 속박 속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 분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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