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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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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    아버지를 좀 안아 드려야 할것같은 가을이다... 댓글:  조회:3656  추천:0  2016-10-12
[ 2016년 10월 11일 10시 06분  ]     [ 2016년 10월 11일 10시 06분 ]         고향과 시인의 현실 접근 3월에 내린 폭설 속에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하는 王昭君(왕소군))의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언제 누가 읊느냐에 따라 뉴앙스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시의 매력을 흠뻑 풍긴다. 주식이 오르지 않는 것을 탓하는 사람에게도, 정치적 봄을 기다리는 정치가에게도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이 말은 그럴듯하게 곧잘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조사를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해석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문득 이 말을 새김하는 것은 오늘의 농촌, 바꾸어 말해 고향의 현실이 눈을 보고 풍년을 예감하거나 낭만적 감상에 빠질 수 없도록 궁핍하고 한기(寒氣)가 쌩쌩 몰아친다는 인식에 연유한다. 칠레와의 자유무역 협정을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절박함 앞에 폭설이란 농촌과 농민들에게 또 다른 엄청난 시련과 절망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도시에 소복 소복 내리는 눈을 감상하면서 동심에 젖기도 하고 설레임으로 가족의 손을 잡고 마을을 거니는 그윽한 풍경을 어찌 탓하겠는가? 봄이 봄같지 않다 해도 역시 봄은 봄이요 기필코 와서 착한 사람들 앞에 꽃을 활짝 피우고야 마는 것을, 믿고 힘을 낼 밖에. < 농민문학>에서는 ‘테마기획/고향’을 특집으로 실었다. 다대수의 작품은 내면적이든 외면적이든 낙원 의식(意識)에 근접해 있다. 무상(無常)의 세계에서 시시비비와 영욕의 짐을 부려 놓고 푸근함과 추억을 나누면서 고백하고, 어린 날의 꿈을 다시 꾸기도 하고, 눈 앞에 불러 올 수 없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며 찔레꽃과 송편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부칠 데 없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어둡고 음산했던 마음에 햇볕과 상상과 시원한 바람을 불어 넣는다. 한마디로 소외와 비판 보다는 성찰을 통한 ‘존재 탐구’에서 은유와 상징과 아이러니와 노래로 시의 성찬을 이뤘다. 마른 봄 산기슭에 올라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듣는 나는  얼빠진 고로쇠나무를 생각하네 진한 수액을 팔기 위해 근육에 관을 꽂고 애끓는 간장에 관을 꽂고 채혈을 하는 무고한 봄날의 고로쇠나무 빠른 속도로 불지르고 빠른 속도로 하강하네 봄볕이란 부피로 하강하는 계절 기력을 잃은 채 수혈하는 너의 생명선은 후미진 복강을 찾아 관을 꽂고 역설을 사뭇 퍼내네 동굴마다 칼끝 저미는 파아란 갈등  명산이란 생명이 아니었던들 아득히 먼 식솔을 위해 몸부림치며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까 오래 전 청양 칠갑산에도 예외할 수 없는  넋들이 허무로 살고 있었네 봄 향기 번지는 잔인한 4월의 하늘에 주사침을 무색하게 떠올렸나보다 인색하다는 저 인간을 치유할 수 있었을까 내 몸이 비록 삭은들 윤기가 났을까. - 홍윤표 시 (농민문학) 건강을 북돋우기 위해 나무의 가슴에 관을 꽂고 진을 빨아올리는 행위에 대해 평상의 어조로 비판을 가한뒤 ‘갈등’의 가치를 드러내 놓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하늘로 번지는 봄 향기와 자신의 몸을 대비하여 진정 치유해야 할 것이 삶 속에 내재한 ‘잔인’과 ‘인색’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고뢰쇠 나무’의 시편(詩篇)이 ‘콩밭 메는 아낙네와 칠갑산 산마루....’ 구성진 가락이 들리는 듯, 고즈넉한 장곡사와 명산(名山)의 풍광이 사람들로 하여 옛날 같지 않다고 슬몃 긴장(針)을 준다. 수없이 되묻고 물어본 그곳 풍설만 분분하게 떠돌고 있다 전설로 자라던 느티나무에는 검버섯 핀 껍질에 탄흔 아물지 않고 능구렁이 또아리 틀고 떠나지 않고 있단다 구름을 쓸고 가는 바람이 삭정이 끝에서 부러질 때면 까마귀 울음 한 마디가 외로워도 부러지지 않고 빈 하늘 하얀 낮달 감싸 안고는 저린 날개 접지 않는다든가 가난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가슴이 좁아 넘치던 정을 버려두고 매몰차게 주저 없이 떠났던 그 곳을 더 가난해진 가슴에 탱탱하게 키우며 갈 수 없는 아픔을 말로 못하고 풍설에 풍설을 꿰고 엮으면서 뜨내기 한 생을 지나가고 있구나. -이봉교 시 (농민문학) 도시 사람들 뿌리가 어디냐 파내려가면 십중 칠팔은 느티나무가 전설을 또아리 틀고 읖조리는 시골일 것이다. 문명의 밝음을 좇아 매몰차고 빠르게 달려온 고향 느리게라도 가고는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앞에 뜨내기처럼 화자는 서성인다. 검버섯과 탄환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닌 느티나무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시의 뼈대를 이룬다. 2연의 낮달이 내려다보는 허전한 심상들, 구름을 쓸고가는 바람이 삭정이 끝에서 부러지고, 까마귀 울음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비감(悲感)을 깊게도 파내지만 3연에 이르러 화자는 관조(觀照)의 태도를 잃지 않고 인생을 ‘풍설’이라는 상징적 언어에 꿰어 초월적 느낌으로 형상화 한다.  가을을 엿듣고 있으면 갈대는 흔들리지 않는구나 푸른빛도 보이지 않고 하얀 입술을 문지르고 있구나 달이 떨군 한숨인 듯 하얗게 휘청휘청 나부끼고 아무르강 흙두루미 순천만에 날라와 끼룩끼룩 울고 물면에 몸을 던져 부비 듯 스스스 서걱이는 마른 갈대잎 휘날리지만 갈대는 흔들리지 않는구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가슴끼리 맞부비고 흔들리지 않는구나 갯바람도 쓸어모아 자지러지게 부딪히는 소리뿐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장단에 춤을 출 뿐... 갈대는 휘모리로 휘모리로 귀가 열리네 가을에 갈대는 귀가 열리네 갈대는 가을에 휘모리로 귀가 열리네 내가 엿듣고 마는 나를 갈대는 나를 만나네 숨어있는 나를 향해 석양 빛을 길게 뻗고 강이 뒤채는 물면 그늘에 빛을 던지네 흰달이 흰물결 뒤로 떨어질 때까지 다소곳이 서서 뉘여진 갈대 잎사이로 속소리 바람도 스치다가 사쁜사쁜 그림자로 물러앉네 고요보다 더 아득한 정적의 속삭임을 눕히고 끝끝내 들키고마는 흰머리 쓰다듬는 소리 빠져나가네 바람만 빠져나가네 내 마음 울음이 포개진 듯 산란하게 술렁이는 마음 감았다가 얼르는 내음까지 빠져나가네 -손광은 시 (시와 상상)  시상(詩想)의 전개와 어조가 음악적이고 전형적인 서정시의 정서와 표현을 담고 있다. 인간의 내면심리를 갈대와 흙두루미, 바람, 자연에 빗대어 묘사하고 노래한다. 귀가 열려 있으니 진양조 중중모리 장단으로 들리고, 풍요로운 감성으로 자연 그 자체가 예술로 다가와 기쁨을 낳는다. 누가 누구를 엿듣는가? 갈대가 만나는 나는 또 누구인가? 이런 물음은 사색(思索)의 즐거움을 주며 의인화된 표현들과 함께 시의 깊이로 자리 잡는다. 바람이 분다 내 몸 속에 낡은 집 잡소리를 낸다 덜컹거리고, 삐걱이고 구들장까지 찬 소리를 내는 썰렁한 집 화사한 그림이나 가는 날짜 바라볼 달력 한 장 버젖이 걸 성한 벽면 한 곳 없구나 어느 세상에  낡지 않는 집 있던가 집 지은 지 60여년 낡은 소리가 없다면 그것은 집이 아니라 상하지 않는 시간의 집일뿐이지 살만큼 산 집 내 대신 낡은 소리를 낸다 -박명용 시 (시와 상상) ‘낡은 집’ ‘낡은 것’의 잠재된 아름다움을 간결한 어조로 보여준다. 삶의 체험을 드러내지 않고, 몇 개의 시어들을 성한 것 없는 벽면에 배열하고 잡소리가 정녕 잡소리가 아니 잖느냐고 되묻는다. 낡고 허물어진 집이라도 지니고 살았다면 아니 살아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어쩌겠는가? 살만큼 산 집,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손질하면서 노년(老年)에 올 여러 일들을 기꺼이 맞이하겠노라는 뜻도 감지된다. 이 시(詩)는 경륜과 말이 잡소리 혹은 잔소리로 취급되는 사회 인식의 문제를 행간의 바닥에 두텁지 않게 깔고 절제하면서 지혜를 주고 시의 맛을 낸다. 큰 너럭바위 끝에 아슬아슬 한쪽 엉덩이만 걸친 작은 바위가 기우뚱 떡갈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바위 모서리에 나무는 서서히 옆구리가 패여 들어간다 옆구리가 쑤셔도 가슴은 뿌듯하다는 듯 나무는 팔 한껏 벌리고 바위를 내려다본다 그가 바위로 있게 하는 일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하는 일 부서져 날 세운 돌이 되지는 않게 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나무는 통증을 견딜 수 있다고 비바람을 또 하루 버틸 수 있다고 하루에도 수차 갈잎 엽서를 띄운다 올해도 떡갈나무는 한 말 가웃 차돌 같은 도토리를 낳았다 -정채원 시 (정신과 표현) 화자는 떡갈나무와 작은 바위의 관계에서 상생의 진리를 깨닫는다. 서로 의지하면서 통증을 견디고 하루를 버티고 결국 차돌 같은 도토리를 낳고 옆구리가 쑤셔도 가슴은 뿌듯하고 하루에도 수차 갈잎 엽서를 띄우며 보람을 느낀다. 각박한 현대인들도 시를 읽으며 일상을 헹구고 맑아진 마음으로, 너럭바위와 작은 바위, 크기가 문제 되지 않는 화목한 세계를 가꾸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휴경지가 늘고 산천(山川)이 각종 폐기물로 오염 되며 젊은 영농 후계자들이 빚더미에 허덕이는 피폐한 현실을 작가는 ‘문학이라는 그릇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 를 심각하게 고뇌할 필요성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작가마다 리얼리즘이나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을 쓴다면 문학의 심미적 즐거움을 잃게 될 것이 뻔하니 그 또한 삭막하지 않겠는가? 꽃 봄을 맞으며 갈등처럼 내린 폭설 속에서 내면의 성찰로 문학적 성과를 얻은 작풍을 여러 편 읽을 수 있었음에 보람을 느끼며 작가의 소임을 다진다.. ======================================================================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1913∼1975)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가을’ 하면 김현승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가을의 기도’라는 시 때문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작품인데, 누구 시인지 몰라도 익숙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가을의 기도’ 말고도 유독 김현승의 시 중에는 가을에 어울리는 작품이 많다. 그중에서 한 편을 고르자면 ‘아버지의 마음’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아버지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아버지들이 있다. 바쁜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굳센 아버지, 바람과 같은 아버지도 있다. 폭탄을 만드는 아버지, 감옥을 지키는 아버지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있다는 점 말이다. 애당초 ‘아버지’라는 말은 자식이 없으면 성립이 될 수 없는 단어이다. 자식이 있어서 아버지가 된 모든 사람은 한마음으로 자식을 기르고 사랑한다. 난로에 불을 피우고, 참새처럼 조바심 내며 아이의 앞날을 걱정한다. 밖에서는 독한 사람도, 무서운 사람도 아버지가 되면 똑같이 자식바라기가 된다는 시인의 표현이 참 공감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게 아버지를 파악한 부분은, 눈물은 없지만 외로운 사람이라는 부분, 그리고 아버지의 때가 아이를 통해 씻긴다는 부분이다. 아버지는 오욕과 술에 젖어 밤늦게 돌아오지만, 잠에 든 자식을 보면 세상만사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 아버지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이런 아버지를 좀 안아 드려야 할 것 같은 가을이다.       
1642    굴레가 되고 싶지 않다... 댓글:  조회:4120  추천:0  2016-10-10
"허! 고것 참 찬란하다."  네 순배쯤 돌았을까. 잔에 그득하게 부은 막걸리를 쭈욱 들이켠 뒤 나온 감탄사였다. 전날 새벽까지 술을 들어부었다는 팔순 노시인은 이날 입맛을 다시며 질곡진 음주사부터 털어놨다.  "난 평생을 빼갈(고량주), 보드카, 소주 아니면 마시지 않았어요. 그 뒤 와인이 황홀했고….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또 증조할아버지가 삼킨 술이라 생각하니 그제사 막걸리가 나를 받아주더만, 으하하."  새 시집 '초혼'(창작과비평사)을 낸 고은 시인(83)과 지난 5일 저녁 오산시 두붓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수원시 창성사 옆집 주민인 고은 시인은 이날 오산문화재단 초청으로 강연한 터였다. 중절모를 쓴 시인은 애도가 흐르는 이번 시집을 소개하며 운을 뗐다.  "타자들의 죽음과 상관없는, 자기 삶에 열중하는 사회잖소. 물신문화가 물들어 죽음의 의미를 망실(忘失)했달까. 현대사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습니까. 그들 대신 살아남은 난 면목이 없고, 가책을 느껴요. 표제시인 '초혼'은 내 시의 고향인 폐허에서 쓴 시입니다."  304쪽인 시집의 2부는 62쪽에 걸쳐 적힌 원고지 기준 130장의 장시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동명 시를 차용해 현대사의 진혼곡을 올린다. '…지하세계 그 캄캄한 어둠 스민 소리/(중략)/청정무구한 새벽이슬 내린 풀끝 하나하나 다 섬겨/향 사르러 앙청하오니/이 뜻 받자와 해원하소서…'(248쪽) 원(怨)을 해(解)하기를 바라는 문장을 두고, 고은 시인은 "씻김굿"이라고 했다. 왜 애도였는지 묻자, 옆자리에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앉혔다.  "데리다는 인류에게 남은 가치를 우애라고 했어요. 배타적 세포로 유지되는 게 삶이니 우애가 허구일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린 사막의 박테리아가 아니잖소. 또 우린 삶과 죽음에 경계를 두지만 실상 인간은 죽음과 동행하는 존재다. 나는 그 마음으로 썼습니다." 관동대지진 학살, 일제식민시대,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현대사라는 모랫바람에 먼지처럼 사라진 그들을 애도하는 건 이 때문이다. 노시인이 타자(他者)의 고통을 꺼낸 이유는 뭘까.  "나랑 동갑인 수전 손태그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많이 썼지. 타인의 고통에 다가설 수 있을까 생각하면, 실천을 못하는 나로서는 많은 반성을 합니다. 타자는 자아의 존재 요건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있으니 내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만난 거잖아. 오호라, 타자가 아니라 타아(他我)이렷다!"    왜 시(詩)라는 형식이었을까. "백지(白紙)는 내 종교"라고 고 시인은 딱 잘라 말했다. "백지는 그렇게 나를 흥분시킵디다. 정신을 고양시킨달까." 주로 그는 파지에 시를 쓴다. "이면지, 광고지나 편지지의 빈 공간에 시를 씁니다. 종이는 나무를 죽이는 문명이잖소. 술은 아끼지 않아도, 종이는 아낀다오. 하하."  시 쓰기가 고통스럽지 않은지를 묻자 "평소의 나는 그저 사물로 있는지 모르겠다. 시를 쓸 때 비로소 시인이구나 생각한다. 시는 내 존재의 이유"라고 말했다. '민족시인'이란 수식어의 호불호에 대해선 "굴레가 되고 싶지 않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데, 작가가 애국하려 쓰나. 고은은 자유롭고 싶고, 작품은 운명대로 갈 뿐"이라고 덧붙였다. 13일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 예정인 노벨문학상을 두고 '매년 이맘때 선생을 괴롭히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고 하자 "술맛이 떨어지니, 제발 그 질문은 말아달라. 상에 연연하는 건 천박한 일"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고은 시인은 친구 나병재 화가가 그의 시 '폐결핵'을 몰래 투고해 1958년 느닷없이 시인이 됐다. 58년이 지났다.    시간을 되돌려 '폐결핵'을 쓰던 20대 고은태(高銀泰·본명)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었더니 "정말 매혹적인 질문"이라며 입맛을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올 것은…오고야 만다."  이날 오산시청 3층에서 열린 강연 말미에, 고은 시인이 "이제 질문을 받겠다"라고 하자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고 물었다. "시인 할아버지, 어쩌다가 시인이 되셨어요?" 아마도 '어떻게'를 '어쩌다가'로 잘못 말한 터였는데, 시인 고은이 박장대소하며 답했다.  "꼬마 숙녀여! 그래요, 맞아요. 나는 정말 '어쩌다가' 시인이 됐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나는 이 길에서 정말 헤어날 길이 없네…."  [오산 = 김유태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   시인 고은(83)의 삶과 문학은 요약이 어렵다. 그 세계가 워낙 방대하기도 하지만 어떤 틀이나 잣대로 재단되기를 태생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여서다. 때문에 문답으로 그를 낚아채기는 어렵다. 미끌미끌, 그는 빠져나간다.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김소월의 시에서 제목을 딴 『초혼(招魂)』(창비)이다. 소월 작품과 동명 신작 『초혼』펴내 “ 지난 4일 자택 정원의 고은 시인. 2009년 시선집 『오십 년의 사춘기』 제목처럼 웃음이 해맑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먼저 간 이들 애도, 그 몫까지 살아야”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올해 수상자 발표를 앞둔 미묘한 시점에 새 시집을 낸 그를 수원 광교산 자락 자택으로 찾아갔다. 미끌미끌한 대화를 나눴다. 질의 :3년 만에 새 시집이다. 응답 :“별 감회는 없다. 농부의 추수 같은 거다.” 질의 :제목이 ‘초혼’이다. 응답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살았다. 산다는 게 실은 죽음과의 동행이다. 6·25 전쟁이나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생각해봐라. 우리 조국 강토가 숱한 생명체가 쓰러진 현장이라고 생각하면 숨쉬는 공기까지 숙연하게 느껴진다. 그런 죽음과 무관하게 살 수는 없다. (나처럼)오랜 세월을 이 세상에서 견딘 생명체는 먼저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몫까지 대신해 살아야 할 사명도 있다. 그럴 때 우리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생존은 단순히 살아가는 거지만 인간의 삶은 과거와 미래가 합쳐져 만들어진다. 나는 사적인 존재이지만 사적일수록 다른 사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을 공적인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문학이 져야 한다. 시대의 짐이다.”   질의 :김소월의 ‘초혼’은 그냥 사랑시 아닌가. 응답 :“ 비련(悲戀)의 시로 알고들 있는데 아니다.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충격을 담은 시다. 소월은 과민한 사람이었다. 1920년대 혜성처럼 등장해 우리 시의 근대를 기적적으로 이뤘다. 하지만 민족의식이 강한 서북지방 출신이다.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기리는 ‘제이 엠 에스(JMS, 조만식의 이니셜)’라는 시를 쓸 정도였다. 그러나 섬세했지 당찬 사람은 아니어서 연시처럼 은유적으로 쓴 것이다.”   질의 :민족시인 고은다운 독법인 것 같다. 응답 :“외국 나가면 나를 민족시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두 들으니까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이제는 지친다. 그런 이름은 내려놔야지….” 질의 :지난 세월을 회고한 시가 많다. 응답 :“회고는 반드시 현재화되어야 한다.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회고는 내 운명에 없다. 기억도 상상이 개입되어야 하고, 상상 역시 어떤 체험이나 타자의 경험, 흔적들, 인류학적 화석이나 족적 같은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무한히 과거에 닿아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에 분명히 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간만을 긍정할 수는 없다. 무수히 많은 복수의 시간 중에 하필 지금에 내가 우연히 꽂혀 있는 거다.” 질의 :시집에서 다룬 죽음 이외의 관심사는. 응답 :“한 손가락으로 짚어서 이거다 하는 건 없다. 나는 항상 나침반처럼 떤다. 어디에 내 방위를 설정해야 할지 잘 모른다.” 질의 :광교산 자락으로 이사온 게 3년 전이다. 응답 :“예전에는 마시면 바로 신호가 오는 소주·보드카를 좋아했는데 여기 와서 잘 빚은 가양주를 마시며 막걸리 맛이 돌아왔다. 할아버지 밥상에서 맛봤던 조상들 술의 진미를 느낀다. 막걸리를 마시면 한 번도 뵌 적 없는 증조할아버지, 고향 산천 어딘가를 살다 갔던 사람들과 실제로 수작(酬酌)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굉장히 작은데 내 등 뒤에 누적된 조상의 정서를 생각하면 나는 작지 않 다. 더 이상 폭음은 하지 않는다. 천천히 몇십 잔 기울이면 어 좋지~.” 원고, 필기도구로 가득한 집필실 책상.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질의 :막걸리도 수십 잔이면 폭음이다. 응답 :“폭음은 속도가 폭음이지. 천천히 마시면 유장하다. 완행열차 가듯 쭉 마신다. TGV(테제베)처럼 가면 술맛 안 난다.” 질의 :30권짜리 『만인보』를 포함해 지금까지 시집만 80권 가까이 냈다. 동어반복을 어떻게 피하나. 응답 :“시 한 편, 시집 한 권을 내고 나서 바로 나를 떠난다. 백지가 된다. 항상 시 쓸 때 내가 최초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짤막한 한두 편을 빼고 내 시를 외우는 게 없다.” 질의 :다른 시인들은 그렇게 못하는 걸까. 응답 :“내 운명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누구와 유비(類比)가 될지 모르겠다.” 질의 :한국 시사(詩史)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응답 :“시사는 시에 대한 모독일 거다. 시가 다 끝난 뒤 역사화하는 거 아닌가. 그건 일종의 지옥이다. 나는 아직 그 시사 속에 있고 싶지 않다. 그런 무덤 속에 왜 들어가나.” 질의 :올해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응답 :“그거는 대답 없는 질문 아뇨, 허허. 김소월 시에도 있잖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대답 없는 질문이라니까….” 신준봉 기자  ====================================   고은 시인    ///연합뉴스 시집 ‘초혼’ =================================================== 고은 시인 시 '그 꽃' ​ ==================================================================================== 고은 시인 짧은 시 몇편 길갓 집 마당도 없다 울도 없다 신발 한 짝 어디 갔나 ----------- 고개 넘으면  아리따운 순이네 보리밭 거기 노고지리 되어 솟아 오르리 ---------------- 한번 더 살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 이던가 -----------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가던 길 고라니가 물속의 달 가만히 바라보네             백두산                                    고은 모든 산들을 저 아래에 두고  몇 억만 년 지나도록  아직껏 이것은 산이 아니었다  오, 너 백두산  그토록 나날이건만  새로이  네 열여섯 봉우리 펼쳐라  장군봉 망천후 사이  성난 노루막이 비바람처럼  가까스로 날라가 버릴 몸뚱어리 버티고 선  내 불쌍한 발밑조차  보이지 않아 캄캄하지만  수많은 어제였던 오늘이었고  내일이어야 할 오늘이었다  활짝 펼쳐라  여기 억만 년 세월의 가슴 있다면  그 가슴 삼아  열여섯 봉우리  네 이름을 부른다  열여섯 봉우리  스물여섯 봉우리에 걸어  이 나라 시원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너를 부른다  목 놓아  너를 부른다  푸른 피 엉겨  푸른 피 엉겨  너를 부른다  장군봉이여  백운 관명봉이여  삼기봉이여  천활 지반 왕주 제운봉이여  와호 고준 자하봉이여  화개 철벽 용문봉이여  관일 금병봉이여  오늘 네 이름을 부르고 부른다  네 이름 불러  하늘의 물  자손만대로 나아가는  천지여  네 거룩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 부른다  그리하여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의 나라  동방 옛 조선 이래  끝없이 앞을 향하여 가고 있다  그토록 숨돌릴 겨를 모르던 침노 한사코 물리쳤다  여기 백두산  힘찬 아기처럼 쩌렁 쩌렁 울어대는 환희일진대  눈부시어라  그 날을 네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  어서 오라  어서 오라 춤추는 빛발 아니고 그 무엇이리  여기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에 이어  삼천리 강토  수수천만 온갖 산 온갖 봉우리  온갖 골짜기  그 이름을 부른다  지난 날 이 겨레 극심하게 잃은 것들  기어이 칮아내는 기쁨으로  이름없는 모든 것 다  이름 붙여  그 이름 새로 부른다  이 나라 온통 하나의 백두산인 그 날을  네 이름으로  네 이름으로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른다  이여  이여  이여  이여  이여....  ////////////////////////////////////////////////////////////////////////////   - 고은  해 뜬다  이 삼천리 강산 모든 풀잎들 꽃잎 이슬들  아침 햇발 한 살 한 살에 눈 뜬다  물싸리꽃 곰치꽃  우정금꽃  기뻐라  1백년 전 하나였던 것  1백50년 전 하나였던 것  아니 3백년 전  어느 먹밤 터무니에도  오로지 하나였던 것  1백년 후  어찌 하나 아니겠냐는 것  1백년 전  1백년 후  이 사이 펄펄 살아난 지금  어찌 하나 아니겠냐는 것  이대로 쪼개어진 절반짜리로는 더 이상 못살아  돌아쳐  못난 가시철망 조용히 걷어내어라  못난 내 마음 속 굳은 벽 녹여  거기 문 연 푸른 들녘이거라  오늘 새벽 4시 백두영봉 정수리에 꽂히듯 올라  내 조국 전체를 깡그리 바라보며 바람 부른다  기뻐라  기뻐 어쩔 줄 몰라  어흥 호랑이 울음 운다  숨지 못해 젖어든 내 눈동자  열여섯 소년 그 시절의 그것  여기 백두 열여섯 봉우리에  내 핏줄 걸어 바라본다  내 몸의 여기저기  박힌 못들이  다 빠졌다  과연 장군봉 망천후 사이 날릴 듯 날릴 듯 날릴 듯  세찬 멍석바람에 휩쓸리매  내 조국 전체를 바라본다  소백 간백을 본다  북포태 남포태 마천령을 본다  구름장 비껴  온 넋 드러내는 무슨 산 무슨 산들을 본다  그리하여  내 온 운명이 노래 된다 춤이 된다  내 허파도 지친 쓸개도 춤이 되고야 만다  저 칠보 낭림 묘향  저 구월  저 금강 일만이천봉  그리하여 외설악 내설악을 본다  저 문수사리 오대산  치악 월악  태백 소백을 본다  한 생의 지리산 천왕봉 노고단을 본다  바다 건너  내 자손의 조국 한라산의 아침을 본다  아니  수수천만 산들 산골짝들  수수천만 산과 들에 길을 내고 가는  어머니와 누이 강물들  수수천만 겨레붙이 피붙이 얼붙이  그 삶과 죽음을 본다  몇해 만인가  다시 백두산 정수리 새벽에 올라  몇해 만인가 속 깊이 우짖어  남김 없이  내 빈 발걸음 터벅터벅 내려간다  내려가  삼지연 백두영봉 그림자를 오롯이 맞이한다  아니 둘이 아닌  하나의 삶 그것을 낳고야 말  햇빛 부신 하루를 맞이한다  저 바다 가득히 해 진다 
1641    김수영 시인을 다시 떠올리면서... 댓글:  조회:4460  추천:0  2016-10-10
  김수영 시 모음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시인 김수영 시인은, 백석 시인 다음으로 현존 시인들이 가장 칭송하는 시인 시로써 저항을 했고, 시로써 나라를 걱정했고, 시로써 사람을 달랬다. 김수영의 시가 현재까지 시인들과 우리들에게 칭송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시인이 그렇지만 김수영은 자신이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시 한 편을 써냈다. 419시인이라고 불리지만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의 625시인. 참담함과 꺼져가는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보면서 그 시대를 견뎌 내고 있었을까. 김수영의 글을 읽으며 잠시 눈을 감으면, 당시의 어려운 시대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김수영은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진정 민주주의가 된다는 착각. 못 사는 사람들이 잘 살게 될 거라는 착각.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착각.   근래에 가장 듣기 거북한 소리가 ‘착각하고 있네, 착각 좀 하지마라’ 하는 소리. 그런 소리를 하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미간은 좁혀지고 골이 깊게 생긴다.   심리학자들은 이 착각이 정말 인간이 벗어던져야 할 나쁜 관념인가에 대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 오히려 그 반대라고 . 착각이 때론 행복과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의 제시를 해 주기도 하기 때문.   어린이 집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심리실험이 이루어집니다. 3살짜리 아이들에게 그림책 한 권을 보여줍니다. 그림책에는 동화가 그려져 있는데 동화 속에는 또래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용선이. 용선이는 손가락이 4개 밖에 없습니다. 용선이는 태어날 때부터 새끼손가락이 없었습니다. 용선이는 손가락이 5개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용선이가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될까? 라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용선이의 손을 만져줄 거라는 대답을 하며 동화책을 끌어안아 줍니다. 또 한 친구는 용선이가 어른이 될수록 새끼손가락이 자꾸 생겨난다고 대답을 합니다. 새싹처럼 돋아난다는 것이죠. 이렇게 아이들은 (동화 속)용선이의 손가락에 힘을 불어 넣어 줍니다. 그럴 리 없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대답에서 착각이 일으키는 긍정의 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안 될 거라고 하는 걸 나는 될 거라는 착각. 내 아이가 첫발을 내디디면 어디든 달려갈 거라는 엄마의 착각. 누군가는 나의 능력을 믿어 줄 거라는 착각. 오늘보다 분명히 내일이 나을 거라는 착각.   이것이 우리의 긍정적 착각입니다. 잘 안되겠지만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그것이 착각의 ‘힘’입니다. 진정한 착각은 우리의 두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회원 여러분. 긍정적으로 착각을 하고 계십니까. 김수영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착각의 힘을 느껴볼만 합니다. 혹시 시를 눈으로 읽으시는 분들은 안계시죠? 시는 소리의 문학입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어서 읽어야 합니다. 매일 회장님께서 좋은 글과 시를 이 메일로 보내주시는데 안 보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소리를 내어서 그 글귀를 한 번 읽으며 하루를 시작해보세요. 그럼 안압이 떨어지는 착각이 듭니다. 어때요? 긍정적인 마인드. 긍정적인 착각.     (본관 김해김씨) 김수영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현대시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 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입니다. 그의 초기시는 난해한 성향을 띤 모더니즘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4·19 를 겪으면서 자유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의 비애를 성찰하는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발표한 대표적인 참여시인입니다.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시인의 대표시입니다. 2008년 조선일보에서 현존하는 문인 100명에게 애송시 100편을 뽑는 투표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1등으로 뽑힌 시가 이 시입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풀을 노래한 시로 읽어도 좋고, 민중시나 저항시로 읽어도 좋습니다. 읽는 우리들 마음이겠지만 저는 그냥 풀로 읽는게 더 좋네요.         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에다가 기침을 하고 가래라도 뱉자'고 외치는 아주 단순한 시이지만,,, 눈을 닮기 위해 자신을 정화하려는 시인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치는 시인의 순수하고 정정한 모습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혁명은 고독하다' - 자유를 향한 자의 고독한 의지가 우리의 가슴을 찡하고 울리네요. 김수영시인은 '시인은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혁명가와 같은 존재로서 그런 인식으로 시인은 시를 써야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미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지독히 비시적(非詩的)인 산문 문장을 그대로 시로 살려놓고 있는 이 시는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치 떨리게 서럽다. '몸이 까맣게 타버려서' 멀리 있는 사람의 가을까지 보인다. '여전히 바라는 것'이 있고, 나의 바람이 '으스러진 설움'이 될 것을 알기에 나는 악착같이 시를 쓰고 사랑하는 것이리라.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가 '나'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거미' 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설움은 가뭇하게 타버리고 가을 찬바람처럼 맑아져 다시 오리라. 모든 사랑을 첫사랑이라 생각하면서, 첫사랑처럼 마지막 사랑에 몸서리치리라. 까맣게 몸을 태우면서. (김선우, 시인)               공자의 생활난 /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矜持의 날 /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개의 번개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사랑의 변주곡(戀奏曲)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뱥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暴風의 간악한  信念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信念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冥想이 아닐 거다        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殘滓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거대한 뿌리 / 김수영   나는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 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팔·일오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사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일팔구삼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궁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입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삼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지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시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병풍 / 김수영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거미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사·일구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면상이 아닐 거다               꽃 잎 / 김수영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기 도 / 김수영 -사일구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  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  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革命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罪있는 몸의 억천만개의 털구멍에  罪라는 罪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1640    풀의 시인 김수영 非발표작 詩 공개되다... 댓글:  조회:4141  추천:0  2016-10-10
        김수영(1921∼68) =  ‘창작과비평’은 “김수영의 미발표 시 15편을 발굴했다”며 “김수영 연구사에서 실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창작과비평’의 발표는 일대 사건에 가깝다. 다름 아닌 김수영의 시여서다. 김수영은 스스로 한국 현대시의 한 줄기를 형성한 시인이다. 하나 그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170여 편에 그친다. 그 10%에 가까운 새 작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단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다. 한데 무언가 찜찜했다. 원고 성격부터 엇갈렸다. 원고를 공개한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가 간직해온 원고”라며 “『김수영 전집』이 간행된 뒤 부인이 일부의 원고를 돌려받았는데 이게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 『김수영 전집』을 제작한 시인의 여동생 김수명(60년대 ‘현대문학’ 편집장)씨의 설명은 다르다. “오빠는 죽기 전에 발표 원고를 직접 골랐고 목록 작업까지 손수 마쳤다. 나는 내가 받은 원고 그대로 책으로 만들었다. 점 하나 빼거나 더하지 않았다. 책을 만들고나서 언니에게 돌려준 원고는 당연히 없었다. 즉 이번 원고는 오빠가 마음에 안 차 묵혔던 미완성 초고로 보인다.” 김명인 교수도 이번에 찾아낸 시 15편 대부분이 미완성이라고 인정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생전의 시인이 덜 여물었다고 판단해 내다 놓지 않은 초고를, 후세의 연구자가 미발표작이라 이름붙여 발표해도 되는가. 미(未)발표가 아니라 ‘비(非)발표’ 아닌가. 유고작가의 작품을 발굴했다는 건 지면에 발표된 작품을 찾아냈을 때 적용되는 어법 아닌가. 일기 안에 들어있는, 운문 구조의 몇 줄 글을 떼어내 제목을 달면 시가 되는 건가.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김수영을 말하고 있다. 꼼꼼하다 못해 깐깐했던 시대의 인텔리겐차 김수영 말이다. 이 원고가 세상에 까발려지는 걸 김수영은 순순히 동의했을까. 김수영은 이 원고를 진정 ‘내 작품’이라 여겼을까. 김수영을 전공한 비평가 5명으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연구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대신 “김수영 문학의 진본(珍本)이라는 김명인 교수의 주장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자, 그럼 이 원고는 『김수영 전집』 1권(시 전집)에 추가로 수록되는 게 옳은가. 전집에 실린다는 건, 대중 앞에 김수영의 시라고 도장을 찍어 내놓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저승의 김수영에게 혹여 흠이 되는 건 아닐까. 정말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이번에 공개된 작품 중에 ‘...만세’란 게 있다. ‘연꽃’과 함께 완성도가 인정된 두 편의 시다. ‘...만세’는 1960년 ‘잠꼬대’란 제목으로 발표하려다 실패한 작품이다. ‘...만세’ 다섯 글자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이 김수영 일기에도 나와있지만(『김수영 전집 2』, 339∼340쪽), 전문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요즘 네티즌이 이걸 보고 쑥덕이는 모양이다. ...만세! 라니, 이런 반응이 대세란다. 하나 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얘기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이다. 김수영은 사회의 금기를 대놓고 따지고 싶었던 거다. 하니 이젠 제발, 이러지 말자. 시방 이딴 걸로 호들갑떠는 건 외려 우습다. 손민호 기자                   ...김수영(1921~68) 시인의 미발표 시 15편과 일기 등 산문 30여 편이 새로 발굴됐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교수(인하대 국어교육과)가 발굴해 다음주 발간되는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공개한 김수영의 미발표 작품은 '...만세','연꽃'등 시 15편과 미완성 습작 소설, 소설 구상 메모, 독후감을 포함한 일기 등 산문 30여 편으로 1954년 1월~1961년 5월에 작성된 것들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양의 김수영의 시와 산문이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원고들은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씨가 보관해 오던 것으로, 10여 권의 수첩과 노트, 서류 봉투와 엽서, 광고지 등에 남긴 것이다. 이 가운데 '...만세(...萬世)'라는 시는 4ㆍ19가 일어난 반년 뒤인 1960년 10월6일 탈고했지만 이념적인 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다.                 ...만세 김수영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 부분. 한자는 한글로,       표기는 현대어법으로 고침)     에 새로 발굴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공개하면서 ‘제 모습 되살려야 할 김수영의 문학세계’라는 해제를 쓴 김명인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김수영은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최대의 금기였던 ‘...만세’를 제목을 포함해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상당한 시적 울림을 확보한 문제적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5ㆍ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1년 3월에 쓴 이라는 시에서도 “긴장하지 말라구요/ 社會主義 동지들/ 사랑이 있지 않어/ 작란이 있지 않어/ 냄새가 있지 않어/ 해골이 있지 않어”라며 ‘社會主義’를 지지하는 듯한 표현을 쓰고 있어 주목된다.   김명인 교수는 “부인 김현경씨 말고도 김수영의 누이동생인 김수명씨 역시 김수영의 미발표 원고를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번에 대거 발굴된 새 작품들과 앞으로 더 찾아내야 할 추가 원고들을 포함해 명실상부한 ‘원본 김수영 전집’을 다시 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발굴 원고 전체를 포함한 상세한 내용물 발표.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도봉산 입구의 김수영 시비에 새겨져 있는 대표시 의 전문이다. 1969년 그의 1週忌를 맞아 조성된 시비는 시만큼이나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풀은 한사코 눕는다. 동풍에 나부껴 눕고, 울다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다가 다시 눕고, 종당에는 뿌리째 눕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다.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나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은 그의 卒詩다. 시를 쓴 지 보름 만에, 김수영은 대취하여 귀가하던 중 인도로 돌진한 좌석버스에 치어 비명횡사했다.     김수영은 두 얼굴의 사나이 정도가 아니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의 시는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소시민적 자학을 담고 있기도 하다. ‘서정주와 함께 한국 시문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라는 평론가도 있다. 그에 대한 호불호는 매우 극단적이다. 그가 6‧25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국군에게 총탄을 퍼부었던 경력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으니 이후 세상살이가 울매나 고단했을지 상상만 해도 그저 아득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위축되지 않고 우상을 파괴하고 완전한 언론자유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시는 세상의 편견에 맨몸으로 부닥친 용기 있는 외침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그가 좌익 인사였다면 마음속으로라도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시는 2012년 강신주의 評傳 「김수영을 위하여」에 처음 발표되었다. 신경림이 「시인을 찾아서」를 집필할 때까지는 이 시가 상굿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김수영을 저와 같은 좌파로 여기면서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옹골짜다. 한겨레신문을 비롯하여 좌파들은 이 시를 진정 ... 찬양詩로 알고 빠짐없이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김수영은 ...을 찬양하자는 게 아니라 이념이나 표현에 구애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의 시정신은 이미 이념을 넘어서 있었다.                      ...만세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은 선린상고 시절 오스카 와일드의 시를 영어로 모두 외울 정도로 일찍부터 시에도 조예가 있었고 영어실력도 뛰어났다. 왜국으로 건너가 동경상대에 다녔지만 학도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도망갔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잠시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47년 종합문예지 「藝術部落」에 시 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이듬해 박인환‧김경린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6‧25가 끝나고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에는 신문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며 詩作과 번역 일을 겸했다. 1959년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했다. 그가 죽은 뒤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이 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다.           김수영의 시를 난해하고 모호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의 시에 내재하는 시정신은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새롭게 깨어난다. 이러한 특성에 대한 신경림의 해석은 참으로 ‘난해하고 모호하여’ 소개할 마음이 없다. 신경림은 같은 문장으로 독자의 실망을 배가시킨다. ‘시인이다라는’과 같은 표현은 국어실력이 모자라는 자들이 쓰는 틀린 어법으로 ‘시인이라는’으로 써야 맞다. 맞춤법을 몰라도 크게 욕될 것 없는 인사들이 TV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모국어를 생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런 어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시는 몰라도 산문 쓰는 일은 당장 그만둬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수영이 현실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담고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김수영은 도덕적 순결성을 지향하는 시민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질타하기 위해 일부러 장황하게 여러 상황들을 끌어들였다. 김수영이 이 시를 쓴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시의 내용에 상당히 공감이 간다. 지난 시절에는 이러한 자유조차 누릴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요즘은 자유가 방종이 되어 오히려 자유를 얽매고 있다. 시가 절제된 언어로 인간의 내면과 세상을 표현하듯이, 자유도 누리는 자가 스스로 절제할 때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친북좌파들은 참여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며 순수문학의 가치를 폄하한다. 그러나 참여문학은 이기적인 특정 부류의 비위를 맞추는 데 국한되지만, 순수문학은 만인의 정서를 위무하고 교양을 함양시켜준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등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1639    저항시인 이육사 미발표 詩 발굴되다... 댓글:  조회:4726  추천:0  2016-10-10
  이육사 유고시 세 편, 53년만에 햇살...      제비야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 우에 힌 구름 한 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히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범하이     ('잃어진 고향' 모두)     일제 강점기 시절, 이른바 '장진홍 의거'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억울하게 옥고를 치렀던 저항시인 이육사(李陸史·1904-44)의 미발표 유고시 3편이 새롭게 발굴됐다.   21일 보도에 따르면 "해방 이후 48년부터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한 주간지 33호(49년 4월 4일자)의 문화면 '작고 시인들의 미발표 유고집'이란 별도의 코너에서 이육사의 친필 일부가 담긴 '山(산)' '畵題(화제)' '잃어진 故鄕(고향)' 등의 시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번에 새 롭게 햇살을 본 이육사의 시 3편은 이육사 유고 후 1946년에 처음으로 펴낸 이육사의 시집은 물론 그 이후 여러 차례 펴낸 이육사의 시 전집에도 실려 있지 않은 새로운 시들이다.   "제비야/너 도 고향이 있느냐/그래도 강남을 간다니"로 이어지는 '잃어진 고향'은 늦봄이면 우리 나라를 찾아왔다가 가을이면 우리나라를 떠나가는 제비, "제비야/너도 고향이 있느냐"를 통해 조국을 잃은 서글픈 심정을, "그래도 강남을 간다니"에서는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다는 새로운 희망을 담고 있다.   또 "불행히 사막에 떠러져 타죽어도/아이서려야 않겠지"라며 베이징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숨지는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엿보기도 하지만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범하이"라며 빼앗긴 조국에 새로운 희망을 심으며, 새롭게 다가올 조국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산' 역시 '잃어진 고향'처럼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심정, 다시 말해 빼앗긴 조국을 어쩔 수 없이 등지고, 끝없이 유랑민으로 떠돌며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망향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시 '산'에서는 산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시를 쓰는 이육사 자신이 바로 산이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서의 산은 바다와 제법 떨어져 있는 산이기도 하고, 항구 가까이 있는 산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의 산은 조국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기도 하고 이육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바다는 조국의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미래이기도 하고, 이방인의 땅이기도 하다.     도회(都會)의 검은 능각(稜角)을 담은   수면(水面)은 이랑이랑 떨여   하반기(下半期)의 새벽 같이 서럽고   화강석(花崗石)에 어리는 엽아(葉兒)의 찬꿈   물풀을 나근나근 빠는   담수어(淡水魚)의 입맛보다 애닳어라     丁丑(1937)00夜     ('화제(畵題)' 모두)     시 '화제'는 마치 시화를 보듯이 그림 곁에 깃들여진 짧은 시다. 이 시는 이육사의 시 가운데서도 제법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도시를 바라보는 시인 이육사, 이육사가 바라보는 도시는 "하반기의 새벽 같이 서럽"다. 즉, 이른 새벽에 조기가 걸린 것처럼 서러운 곳이 이육사가 바라본 도회다. 또 도시는 "엽아의 찬 꿈", 다시 말하자면 버려진 아이들의 차가운 꿈뿐이다.   아마 이육사는 이 시에서 대자연을 파괴하고 들어선 도시를, 조국을 강점한 일제로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도시 곳곳에는 이른 새벽부터 조기가 걸린 것처럼 절망만이 나부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교과서에 실린 '광야'와 '청포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이육사 선생은 지금까지 모두 29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발굴로 인해 32편으로 늘어난 셈.   또 이육사의 이름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이육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이활(李活)이었다. 하지만 24살 때인 1927년, 이육사는 이른 바 '장진홍 의거' 사건에 휘말려 장진홍 대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다. 그때 이활의 수인번호가 264(이육사)번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활이란 이름을 버리고 '뭍의 역사'(陸史)라는 한자를 붙여 지금의 이육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 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들여 오오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산' 모두)   -이종찬- 저항시인 이육사 미발표 시 발굴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 이육사(1904~44)의 미발표 유고시 세 편이 발굴되었다. (현 )이 발행한 주간지 1949년 4월 4일 치에 실린 가 그것으로, 이 시들은 이육사 전집에 묶인 시 32편(한시 3편 포함)에도 들어 있지 않은 작품들이다. 는 기사에서 이 작품들이 서울신문사(현 대한매일)에서 발행한 주간지 33호(1949년 4월 4일 치)의 문화면 `작고 시인들의 미발표 유고집’ 코너에 육사의 친필 일부와 함께 실렸다고 밝혔다. “제비야/너도 故鄕이 있느냐//그래도 江南(강남)을 간다니/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으로 시작해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범하이”로 끝나는 시 은 그의 명시 와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시 역시 떠돌아 다니는 뱃사람의 처지에 빗대어 고향 잃은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뱃사람들 부르는 望鄕歌(망향가)//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에서 실향과 망향의 정조는 극적인 표현을 얻는다. 는 이육사의 시 치고는 독특한 작품이다. “都會의 검은 稜角(능각)을담은/水面(수면)은 이랑이랑 떨여/下半旗(하반기: 조기)의 새벽같이 서럽고/花崗石(화강석)에 어리는 棄兒(기아)의 찬꿈/물풀을 나근나근 빠는/淡水魚(담수어)의 입맛보다 애어라­丁丑(정축: 1937년)00夜(야)”가 전문인 이 시는 도회의 풍경을 조기와 버려진 아이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문명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최재봉 기자  이육사/잃어진 고향    이육사 詩 3편 찾았다 1949년 주간지에 실린후 잊혀져 "시적 긴장감.짜임새 갖춘 秀作"   민족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44.사진)의 시 3편이 새로 나왔다. 이번 발굴은 이육사 전집에 실린 시가 32편(한시 3편 포함)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지는 21일, 해방 이후 48년부터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한 주간지 '주간 서울'33호(49년 4월 4일자)의 문화면 '작고 시인들의 미발표 유고집'이란 별도의 코너에서 이육사의 친필 일부가 담긴 '山(산)' '畵題(화제)' '잃어진 故鄕(고향)' 등의 시를 찾아냈다.  이들 작품은 46년 첫 발간된 이육사의 시집에는 물론 이후 간행된 육사의 시 전집들에도 빠져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서울대.국문학)교수는 "3편의 시에서 고향.바다.저항.희망 등 이육사 시의 느낌을 물씬 받을 수 있다"면서 "특히 '잃어진 고향'은 이미지도 선명하고 시적 긴장감과 짜임새도 갖춘 훌륭한 시"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이 작품들은 이육사의 시 세계를 더 풍성하게 할 게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시인이면서 육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종길(고려대.영문학)명예교수는 "3편 모두 육사의 시풍(詩風)이 틀림없다"면서 "시 '잃어진 고향'의 제비와 시 '산'에서의 산은 모두 육사가 자신의 처지와 희망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라고 평했다.  배영대 기자   --------------------------------------- '청포도' 이육사의 애끊는 망향가(望鄕歌) '잃어진 고향"산' 등 유고작 해방 뒤 '주간서울'에 게재 일제下 암울한 도시풍경 그린 특이한 형식의 '畵題'돋보여   '광야'와 '청포도'의 이육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29편의 시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앎과 행동이 일치한 몇 안되는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 그는 어린 시절 이활(李活) 등으로 불리다가 이육사(李陸史)로 이름을 바꿨다. 그가 스물 네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 발음에 '땅의 역사'(陸史)라는 뜻을 붙여 이름으로 삼았다. .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한 이래 40살의 나이로 중국의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숨질 때 까지 그는 고향인 경북 안동을 등지고 중국 등지를 떠돌아 다녔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조국의 독냄?대한 희망을 육사는 고향에 대한 향수의 이미지로 잡아냈다. . 문학평론가 권영민(서울대.국문학)교수는 "고향은 개인적 고향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꿈일 수도 있고, 조국과 민족일 수도 있다"면서 "포괄적 의미와 시적 이미지를 가진 어휘인 고향을 통해 육사는 자신의 꿈과 절망, 그리고 새로운 고향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번에 발굴된 3편의 시도 그런 저항과 향수의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시 '잃어진 고향'은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고향을 제비에 빗대 그리워 하고 있다. 육사기념사업회 회장 김종길(고려대.영문학)명예교수는 이 시에서 '제비'는 육사 자신을 빗댄 시어로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제비야/너도 고향이 있느냐'로 운을 뗀 육사는 앞부분에서 제비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부러워 하고 있다. . 하지만 시 중간부터 '불행히 사막에 떨어져 타죽어도/아 서러워하지야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심정을 이입시킨다. 서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제비 혹은 육사 자신은) 무리를 지어 날아 가도 홀로 높고 빨라/ 언제나 외로운 넋이었기'때문이다.  . 이에 대해 권영민 교수는 "육사 자신의 지고한 정신의 경지를 얘기하고 있다"면서 다음 결론 부분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까지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육사가 생각하는 '그 곳에 푸른 하늘이 열리면/어쩌면 (그곳이) 너의 새로운 고장 혹은 고향이 될 법도 하다'고 끝나는 이 시를 권교수는 '청포도'계열의 시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시 '산'에서도 고향을 떠나 쫓겨다니는 힘든 역정이 드러나 있다. 권교수는 산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며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고 했고, 김교수는 이 시의 '산'도 육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빗대어 표현한 시어라고 했다. . 평생을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뱃사람의 심정을 표현한 '망향가(望鄕歌)'란 시어 속에 육사의 심정도 들어있는 듯하다. '바다가 수건을 날려서 부르고/난 단숨에 뛰여 달려서 왔다'고 시작하는 이 시는 이어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엮어 보낸 날'이라며 고달팠던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들여 오기에' 자신의 삶이 외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 그 다음이 육사의 절창이다. '나라와 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이 부르는 망향가'소리가 '창자를 끊을'듯 구슬프지만 자신은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비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 시 '화제(畵題)'는 육사의 시 가운데서도 특이한 형식의 시다. 권교수는 실제로 도시의 암울한 현실을 형상화한 어떤 그림을 보고 시를 썼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도시 전체를 그림으로 보고 도시에 대한 느낌을 적은 시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 도시의 건물들이 비죽비죽 솟아난 모습을 육사는 '조기(弔旗)를 게양한 것처럼 서럽고' 또 '버려진 아이들의 차가운 꿈'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 배영대 기자  [출처] 이육사 詩 3편 찾았다|작성자 여함  
1638    윤동주 미발표작 詩 발굴되다... 댓글:  조회:3303  추천:0  2016-10-10
윤동주 시 발굴 ---------------------------------------------------------------------- [별헤는 밤]과 [서시]의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작품 중 그동안 전 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동시 육필원고 8편이 새로 공개됐다. 이와 함께 [죽 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유명한 [서시] 를 비롯, 그가 생전에 남긴 육필 원고 1백50점, 소장 도서와 메모, 신문  스크랩 등이 처음으로 일괄공개돼 일제 암흑기 비운의 요절 시인 윤동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미공개 시들은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윤동주 동생 일주씨 장남·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씨가 윤동주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컬러 사진으로 담아 학계 에 자료집으로 내놓기로 결심함에 따라 21일 공개됐다. 새로 공개된 작품은 시 [가슴 2]와 [울적] [야행] [비삥뒤] [어머니] [가로 수], 동시 [개], 동요 [창구멍] 등 8편이다. 1934∼1939년(18∼23세), 간도  은진-광명학교와 평양숭실중학교 연희전문 등을 다니며 시인의 꿈을 키우던  문학 습작기를 반영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윤동주의 제1습작시집 [나 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와 제2습작시집 [창]에 각각 실렸으나 그가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낼 때 빠졌으며, 광복후 윤동주 시집 을 내는 과정에서도 후손들이 공개하지 않아 실리지 못했다. {새로 공개된  작품들은 윤동주 자신이 마음에 들지않아 ×표를 한 것들이지만, 이중 [비 삥뒤]나 [어머니]같은 좋은 작품에 그가 왜 ×표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고 검토한 오오무라(와세다대·한국문학)교수는 말했다. 윤인석씨는 {50년 넘게 집안에서 보관해 왔으나 분실 훼손의 염려가 항상  있어 더 늦기 전에 모든 자료를 컬러 사진 판으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 고 말했다. 이 자료집은 [사진판 윤동주 육필 시고 전집]이란 제목으로 맞춰 민음사에서 발간된다. 
1637    "윤동주 미발표 詩 더 있다" 댓글:  조회:4166  추천:0  2016-10-10
“윤동주 미발표 시 더 있다” - 윤동주 추모 66주기서 증언 나와     지난2월20일 도꾜 이케부쿠로(池袋)의 립교(立敎)대에서 시인 윤동주의 66주기를 기리기 위한 추모 행사가 거행, 윤시인이 1942년 류학했던 이 학교의 총장 등 한국. 일본인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동주시인의 조카인 윤인석(한국 성균관대 건축공학과)교수가 윤동주에게 미발표시가 있다는  증언을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윤동주는 “서시” 등 시 76편, “오줌싸개 지도”등 동시 35편, “달을 쏘다”등 수필 5편 등 도합116편의 작품을 남겼다.       1947년 12월,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은 남편 오형범과 함께 고향 룡정을 떠났다. 그때 윤혜원의 행리속에 오빠 윤동주의 시 편들이 들어있었다. 룡정에서 소학교 교사를 지냈던 윤혜원씨는 당시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윤동주의 대학노트 3권을 가지고 떠났다. 그 노트에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 대부분 포함되여 있었다.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은1948년 서울에서 처음 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들어있지 않은 시편들이 대부분이였다. 유고시집에 실린 31편은 윤동주의 연희전문시절의 친구 강처중과 가장 아꼈던 후배 정병욱에 의해 보관되였다. 동생과 친구들에 의해 보관된 현재 116편으로 알려져있는 윤동주의 시들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후배 정병욱,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 이들은 윤동주의 시편들을 보존해 세상에 알린 공신들이다.   많은 이들은 시인이 일본 립교대에 다니던 시절인 1942년 6월 이 학교 용지에 적어 연희대의 친구였던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속에 담긴 시 “봄”이 최후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몇 편의 시를 더 남겼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그중 한 가지는 1943년 교또(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중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교또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체포된 직후에도 시를 지었다는것이다. 1995년 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다룬 프로그램을 만든 전 NHK 프로듀서 다고 기치로(多胡吉郞)씨는 "당시 가족들이 경찰서로 면회하러 갔을때 시인이 자작시를 일본어로 바꿔 보여줬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시가 조선등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증언도 있다.   윤인석 교수는 시인의 매제이자 자신의 고모부인 오형범(오스트랄리아 시드니 거주)씨로부터 전해들은 증언을 전했다.       윤혜원과 오형범은 고향을 뜨던 당시1년간 조선의 청진과 원산에서 머물렀었다. 그때 청진에서 만난 김윤립이라는 고등학교 교사가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있을때 엽서에 사연과 시를 적어 보내왔다”고 했다고한다.   김윤립은 그 당시 립교대학을 다닌것윽로 추정되며 윤동주가 1944년부터1945년에 지었을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가 적힌 엽서는 그후 행방을 알수없는 김윤립에게 있다는것이다.   우리 민족이 가장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 그의 소량이지만 편편마다 주옥같은 시편들을 아쉬움속에 읽어왔고, 더 읽고싶은 독자들에 의해 미발표시에 대한 증언은 다시 한번 학계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김혁 기자
1636    詩란 사모곡(思母曲)이다... 댓글:  조회:3704  추천:0  2016-10-10
세계 최대 전파망원경 중국 ‘천눈’(天眼) [ 2016년 09월 29일 09시 06분 ]     ‘중국 천눈(天眼)’   물의 형식과 운명    박 남 희   물처럼 기구한 운명을 지닌 것도 없다. 흘러가다가 멈추고, 돌연 어디론가 증발하고, 약수물이 되었다가 빗물이 되고, 때로는 눈물이 되기도 하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 땅의 물들을 나는 시로 읽는다. 물의 형식은 시의 형식이며, 물의 운명은 시의 운명이다. 물에게도 운명이 있다고? 누군가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물에게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2000년 전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의 그 물은 운명의 물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불가사의한 변화 속에 물의 운명이 있고 형식이 있다. 그것은 곧 시의 운명이고 형식이다. 시의 형식 속에 시의 운명이 있고, 시의 운명 속에 시의 형식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물 그 자체를 선뜻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은 단지 시로 표현되기 이전의 어떤 것, 즉 에스프리나 포에지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 안에 어떤 형식이 되기 위한 운명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운명의 최초의 발현은 어떤 몸짓(Geste)에서 비롯된다. 어떤 몸짓이 갖는 삶의 가치, 그것은 삶에 있어서 형식이 지니는 가치이며, 삶을 창조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형식들의 가치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영혼과 형식』심설당, 1988 51쪽 참조) 여기서 루카치가 말한 '삶'은 곧 시이고 물이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일은 곧 시의 몸짓을 읽는 일이다. 김춘수가 그의 작품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한 구절의 '몸짓' 역시 꽃이 되기 위한 운명의 초발심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꽃의 운명은 호명되는 형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시나 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나 물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사물들은 운명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게 운명이고 그나마 그 운명을 거역치 않으려는 게 형식일까 바람이 일방적으로 나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바람이 나무의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나무의 허벅지 살을 꼬집고, 나무의 손목을 비튼다 나무가 바람에게 마냥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듯 나무가 바람의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무례하게 손을 집어 넣어, 바람의 급소를 더듬어간다 다정한 연인처럼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바야흐로 사랑싸움이다 아무렴 그렇지, 어차피 떨쳐낼 것은 떨쳐내고 부러뜨릴 것은 부러뜨리고서야 더욱 대담하고 당당하게 서로를 탐하는  저 바람과 나무들의 교향악이여    ㅡ 임동확, 일부(현대시, 11월호)   인용 시를 보면, 임동확은 바람과 나무에서 그것들의 운명과 형식을 읽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게 운명이고 / 그나마 그 운명을 거역치 않으려는 것이 형식"이다. 따라서 바람과 나무는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운명과 형식을 수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떨쳐낼 것은 떨쳐내고/ 부러뜨릴 것은 부러뜨"려야 한다. 이것이 나무의 삶의 방식이다. 그는 이 시의 후반부에서 "바람의 운명이 나무를 흔드는 것이라면/ 나무의 형식은 되도록 직립하려는 몸부림/ 나무의 운명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라면/ 바람의 형식은 가능한 한 소란스런 움직임"이라고 진술한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바람과 나무의 서로 상이하면서도 불가분의 운명과 형식과 만나게 된다. 여기서 바람과 나무의 운명과 형식은 시인의 삶에 내재해 있는 운명과 형식이면서 동시에 시의 운명과 형식이다. 시인은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결코 우린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데, 이러한 깨달음은 삶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성찰에서 우러나온다. 그에게 있어서의 삶은" 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 몸으로 버티어 보는 것"이며, "그렇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결국 뿌리째 흔들리고야 마는" 나무와 같은 어떤 것이다. 이 시가 보편적인 울림이 되어 우리를 흔들어주는 것은 바람과 나무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의 운명과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둘러 오는 동안, 그새 각주가 많이 붙었다 그러므로 나는 진술되지 못하고 다만 해석된다 그의 꼼꼼한 시선에 오래 붙들려 놓여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내가 연기한  온갖 방종의  내막과 배면이 샅샅이 읽혀진다 삼인칭으로 바뀐 술어까지의 까마득한 시간을 견딘 후 빛나는 오해가 난외주기로  필기되기도 한다 칸칸이 불이 켜지고 붉은 울음이 몇 줄 그어진다 침묵은 더욱 오물오물 씹히고 정독이 더욱 오독과 긴밀해진다 결국 잘 빚은 반역이 극명하게 번역된다 에둘러 오는 동안, 그새 각주가 많이도 붙었다 각주의 府下 그 안에서 그러므로 나는 진술되지 못하고 다만 해석된다 ㅡ 유춘희, 전문 (현대시학, 11월호)   우리의 삶의 내용은 곧잘 책의 내용으로 은유 되기도 한다. 인용 시에서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행위는 간접화된 비유적 문자로서 '에둘러' 오는 글쓰기로서의 삶이다. 따라서 책으로서의 그의 '몸짓'은 누군가에게 읽혀지기 위한 운명과 형식으로서의 몸짓이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의 세목들을 문자화시켜 백지 위에 공간화 하려는 몸짓이다. 책 속의 그의 삶은 "에둘러 오는 동안/ 각주가 많이 붙"은 삶이다. 그는 그의 삶이 다만 '진술'되기를 바라지만, 그의 삶은 진술되지 못하고 '해석'된다. 여기에 책으로서의 그의 운명이 놓여있다. 여기서 책이 '진술'되지 못하고 '해석'된다는 것은 책으로서의 그의 삶이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자화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삶에는 '각주'가 붙고, 일인칭이었던 '나'가 삼인칭인 '아무개 엄마'나 '부인'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그'의 독서는 곧잘 오독 되어, "빛나는 오해가 난외주기(欄外註記)로 필기되기도"하고 "정독과 오독이 긴밀해"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책인 '나'를 읽는 '그'의 눈은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신'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책을 제멋대로 읽고, 책에 제멋대로 낙서를 하는 '세상'일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세상'은 책인 '나'를 읽으며 가는 어떤 운명이고 형식이다. 나 또한 세상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읽은 세상은 불완전한 독서의 주체일 뿐이다. '그'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읽고 있다. "잘 빚은 반역"으로서의 내 삶 역시 '그'에 의해서 샅샅이 읽혀지고 해석된다. 즉, 타자화 된다. 이러한 '그'의 독서는 분명히 "온유한 독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온유한 독서"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 왜곡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상인 '그'가 시인에게 "온유한 독서"라는 역설적 이름을 붙이게 강요했을 것이다. 이사 온 날 밤, 빗소리를 듣는다. 야산에서 캐온 화분의 청죽(靑竹)도 잎새를 뒤척이며 비에 젖는다. 비에 젖어도 푸른 잎새엔, 비의 지문이 남지 않을 것이다. 중년이, 중년의 이사가 무거운 건 이삿짐에 포개온 타인의 지문 때문일까. 오래 덮던 이불을 덮어도 잠자리가 설어 잠이 오지 않는다. 어디서 밤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뻐꾹, 뻐, 뻐꾹…… 곁에서 뒤척이던 아내가 일러준다. 앞집 시계뻐꾹이예요. 딱, 열두번을 울리잖아요. (열세번은 아니고?) 고통과 불면의 시간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했던 중년의 이사, 밤새 뒤척이던 내 허망한 꿈자리 위로  문득 새벽을 알리는 뻐꾸기의 지문이 찍힌다. 이런!          ㅡ 고진하, 전문 (베스트셀러, 11월호)   자신의 삶의 지문이 묻어있는 보금자리를 싣고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행위는 자신의 삶의 형식을 바꾸어 보는 일이다. 이러한 '이사'는 중년이라는 삶의 무게, 즉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되고, 시 속의 화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 하지만 그의 이사는 중년의 무게만큼 무겁고, "오래 덮던 이불을 덮어도/ 잠자리가 설어 잠이 오지 않는다." 그의 "이사가 무거운 건/ 이사짐에 포개온 타인의 지문 때문일까"하는 진술은 자신의 삶 속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성을 암시해준다. 여기서 이사를 하는 행위는 단순히 장소만을 옮기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관계 맺어온 무수한 '타인'과의 멀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래 덮던 이불"도 예전에 덮던 그 이불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사'라는 삶의 형식의 변화를 통해서 그와 친숙했던 사물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낯설음'은 삶의 형식과 운명의 부조화로부터 생긴다. 시인이 꿈꾸는 이사는 현실로부터의 초월이라는 형식을 담고 싶어하지만 그의 운명이 지시하는 이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이사'는 현대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집 없음(homelessness)'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집 없음"은 단순히 살아갈 거처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에 관한 문제이며, 주체성 상실의 문제이다. 그가 살아가는 삶은 "고통과 불면의 시간"속의 삶이며, 그는 이사를 통해서 이러한 삶의 조건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만 시계뻐꾸기는 열세 번을 울지 않고 열두 번만 울뿐이다. (여기서의 열세 번의 '13'은 불안한 현실에 대한 초월의 의미를 지닌 숫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이사'를 통한 초월의 희망은 좌절되고 그의 꿈자리 위로 "새벽을 알리는 뻐꾸기의 지문이 찍힌다." 여기서의 "뻐꾸기의 지문"은 결코 이상화 될 수 없는 현실적 시간으로서의 지문이다. 이 시에서 '지문'은 삶의 형식과 운명으로서의 지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사를 통해 삶의 형식을 바꾼다고 삶의 운명까지 쉽게 바뀌어 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중년의 이사'는 비에 젖어도 '비의 지문'이 남지 않는 청죽(靑竹)의 푸른 잎새의 이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각의 棺 하나를 땅에 심었네 슬픔은 모르는 척 한 줌의 흙으로 던져졌네 사람들은 몸 속에서 투명한 울음을 꺼내 골고루 뿌려주었네 그의 생은 흠뻑 젖었네   한 장의 햇살이 달려왔네 그의 생애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네 그는 작은 씨앗 하나로 돌아갔네 그 씨앗 속에 혼돈과 좌절과 영광으로 우거진 거대한 숲이 밀봉되어있네                               ㅡ 손순미, 전문 (현대 시학, 11월호)   인용 시를 통해서 보면, 죽음은 삶의 또 다른 형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棺 하나'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고 심는다. 여기서 관을 땅에 묻는 행위는 또 다른 삶의 형식인 '주검'이라는 나무를 땅에 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한 장의 햇살"이 달려와서 "그의 생애를 따뜻하게 덮어"주는 장면은 죽음을 애도해야 할 하관식이 하나의 작은 축제임을 암시해준다. 이처럼 죽음을 삶의 또 다른 형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에는 '하관'이 "작은 씨앗 하나로 돌아"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형식의 바뀜이 '순환적 삶'이라는 생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천년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라/ 돌 밑에 누가 깔려 누워 있는 줄도 모르고 / 입맞춤에 열중하던  아주 싸가지 없는/ 한 사랑이 있었는지 몰라"로 시작되는 염창권의 (현대시, 11월호) 역시 삶과 죽음,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대비적 묘사를 통해서 '고인돌'이라는 죽음의 장소가 온갖 동물들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바뀐 것을 아이러니컬한 시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손순미의 시와는 달리 삶과 죽음을 순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 안에서 병치시켜서 바라보고 있다. 이 시에서 병치라는 기법으로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은 고인돌이 만들어졌던 '천년쯤 전'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과의 병치이다. 시인은 이처럼 이질적인 시간을 병치시켜 나란히 바라봄으로써 사랑의 영속성에 이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시인은 사랑의 영속성이 없다면 "아이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저 여자의 기쁨이/ 봉긋한 젖무덤이 만드는 두 섬 사이에서/ 어찌 저리 파도처럼 출렁일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햇살가루로 부서져 버릴 사진을 찍으며/ 햇살가루 같은 웃음을 피워 올릴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의 사랑의 영속성은 삶의 운명이고, 고인돌(과거)과 그 위의 현재적 삶은 각기 다른 삶의 또 다른 형식들일 뿐이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서 볼 때, 물은 포도주가 되어도 물이고, 이슬이나 눈물이 되어도 물이다. 물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형식이 바뀔 뿐이다. 이렇게 바뀐 형식으로의 물들이 물의 운명과 만나 포도주가 되고 빗물이 되고 바닷물이 된다. 물의 운명과 형식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물이 지금 우리 안에서 출렁이고 있다. ========================================================================     어머니 ―오세영(1942∼ )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 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사모곡(思母曲)’이라는 말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작자를 알 수 없는 고려의 노래라고 나온다. 다시 말해 사모곡은 특정 노래의 제목인 셈이다. 하지만 ‘사모곡’이라는 말의 주인은 고려 때 불리던 그 노래 하나만이 아니다. 생각할 ‘사(思)’에 어머니 ‘모(母)’, 즉 어머니를 생각하는 노래는 다 사모곡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는다. 게다가 어머니를 기리는 시는 퍽 많기도 하다. 시인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모든 자식에게 어머니는 가장 절대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모곡 중에서도 오세영 시인의 시를 골랐다. 시는 독자를 울려야지 제가 울면 좋은 작품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사모곡은 우는 시가 되기 쉬운데 이 시는 울지 않는다. 대신 한 아들의 전 생애에 걸쳐 있는 어머니의 의미를 잔잔하고 아름답게 펼쳐놓았다.     시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을 모르고 자랐다. 그 어머니의 삶은 오죽 팍팍했으랴. 아이의 눈에도 어머니는 외롭고 시렸는가 보다. 그는 일곱 살 적 어머니를 ‘하얀 목련꽃’으로 기억했다. 어머니는 한때 눈물짓는 ‘봉선화’였다가 아들의 곁을 지키는 ‘국화꽃’이기도 했다. 꽃으로 기억되는 어머니는 복되어라. 그런데 그 어머니는 이제 돌아가시어 하늘의 별과 바람이 되셨다. 봄의 목련 어머니, 여름의 봉선화 어머니, 가을의 국화꽃 어머니는 사라졌을까. 아들은 어머니가 마음 안에 여전히 살아 계신다고 말한다. 잃고도 잃지 않았다고 쓰는 이 마음이, 잃었으나 잃지 않아지는 그 마음이 참으로 절절하다. 절절함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든 그것을 알거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직 상실의 절절함에 닿지 않은 자식이라면 어머니를 한 번 더 안아드리라, 이 시가 말하는 듯하다.      
1635    詩는 리태백과 두보와 같다...처..ㄹ... 썩... 댓글:  조회:3895  추천:0  2016-10-09
詩를 쓰기위한 몇가지 준비  윤석산  젊은 날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글을 쓰고 싶어합니다 먼 훗날 이름도 모르는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읽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자신을 기억해준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싶다는 욕망 때문에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대개 몇 편쯤 쓰다가 이내 포기하고, 시인이나 작가가 되어도 자기 혼자 좋아서 쓸 뿐, 독자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기가 일쑤입니다.  우리들의 빛나는 꿈이 덧없이 스러지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해 잘못된 습관을 기르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려는 사람은, 그리고 문학사 속에 길이 살아남고 싶은 사람은 작품을 쓰기 전에 대한 자기 관점들을 검토해봐야 합니다. 이 장에서는 글을 쓸 때 누구나 잘못 생각하기 쉬운 문제 몇 가지를 골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글쓰기가 취미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이 시쓰기를 쉅게 포기하는 것은, 시인이 되는 것도 좋지만 자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거나, 그런 재능이 부족하다고 속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쓰기를 취미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고 싶어하는 욕망은 일종의 취미가 아닙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길러야 할 기초 능력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외면하면 자아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개발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신적 안정과 성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글쓰기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사르트르(J. P. Sartre)의 분류에 따라 자아를 와 로 나눌 경우, 자아의 가치는 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정치나 경제처럼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분야의 지도자가 되거나, 신문 방송 같은 매체를 통하여 자기를 들어내는 글을 쓰는 방법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나 경제 분야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다분히 자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자기 의도대로 이뤄질 확률이 적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이런 요소들은 바뀌기 때문에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글쓰기는 홀로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 앞에 서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빛나는 꿈을 지닌 젊은이들이나, 그를 실현하려다가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든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하는 것도 이 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글쓰기가 인간의 기본적 능력 가운데 하나이며, 반드시 길러야 할 기초능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 활동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情報)를 수용(受用)하는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表現) 활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이 가운데 수용 활동은 주로 언어를 통해 와 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언어를 통한 표현 활동은 와 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런데, 수용은 표현을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그리고 같은 표현이라고 해도 가 보다 고차적 기능에 속합니다. 말하기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대면하여 언어를 통해 주고받지만, 몸짓이나 표정 같은 연행적(演行的) 요소들의 도움을 받는 반면에, 글쓰기는 문자라는 추상적인 기호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웅변가나 달변가처럼 말할 수는 없어도 논리적으로 타인을 잘 설득할 수 있고, 인간과 인간 관계를 다루는 ·· 계열 학문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시쓰기는 인간에 관한, 또는 인간과 인간 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수학(數學) 과학(科學) 논리학(論理學) 같은 분야에서도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정신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직관(直觀)과 상상력(想像力)이고, 인문과학(人文科學)이냐 자연과학(自然科學)이냐 하는 차이는 상상력을 어떻게 발휘하고 입증하느냐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뉴톤이 발견했다는 "만유인력(萬有引力)"의 이론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뉴우톤이 가을날 사과밭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잘 익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곧바로 수학으로 풀어 그 이론을 입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곧바로 복잡한 계산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꼭지가 없는 데도 왜 떨어지지 않는데, 그보다 낮은 곳에 꼭지에 매달린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도 모르게 라는 동정화(同定化), 즉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 다음 계산에 들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상상한 것을 언어로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시인이고, 숫자나 공식으로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과학자이며, 효율적인 제도를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사회과학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글쓰기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초 능력 가운데 하나임을 입증하는 제도로는 과거(科擧)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근대까지 시문(詩文)에 능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임명해왔습니다. 그것은 문학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문사회는 물론 자연 과학적 능력 역시 탁월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글쓰기를 포기하는 것은 특수한 취미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춰야 할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말과 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듯 글을 쓰면 됩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듯 쓰면 논리가 비약할 뿐만 아니라, 엉성한 글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말은 문학적 담화와 일상적 담화의 제재와 어법이 별도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리어리즘 이후의 문학관을 대변하는 것일 뿐, 일상적 담화를 그대로 옮겨 써서 시나 소설 같은 문학적 담화가 됩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상적 담화에서 택하는 제제를 골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되, 문자언어와 음성언어의 차이를 알고, 문자언어를 통하여 표현할 경우 무엇을 보완해 줄 것인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콥슨(R. Jakobson)이 말했듯이, 문학적 담화든 일상적 담화든 모든 담화(discourse)는 의 역동적 관계에서 탄생됩니다. 이를 알기 쉽게 도해하면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습니다.  문학적 담화  일상적 담화  이와 같은 관계에서 는 작가나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는 독자나 듣는 이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 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부터 까지는 논리상으로 정해놓은 관념적 존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는 이야기 속에에서 그 화제에 대한 실제 화자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존재이고, 는 실제 시인이 예측한 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담화는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쌍방향의 화살표로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 , 라고 해도 문학적 담화와 일상적 담화는 화자와 청자가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느냐 여부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음성언어(音聲言語)를 매재로 하느냐 문자언어(文字言語)를 매재로 하느냐는 점에서 또 차이가 납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얼핏 생각하면 담화의 기본 구조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담화는 화자와 청자는 시간적(時間的).공간적(空間的) 과 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화자가 처한 , 라는 시간적·공간적 배경과 상황을 밝힐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 분리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문학적 담화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상황을 눈에 보이듯 묘사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글이 첫머리에 배경과 상황을 제시한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를 넘어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또 일상적 담화는 상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면 부연하여 설명하거나 이야기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에서는 청자의 반응을 살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매재(媒材)의 차원에서 살펴볼 경우, 음성언어는 , , , , , 등의 보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자세하기 이야기하면 장황하게 들립니다. 반면에 문자언어는 이런 보조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작중 인물의 행동을 묘사할 때에는 이와 같은 연행적(演行的) 요소들을 묘사하여 부각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다음 문장들을 비교해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는 나즉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아주 음산한 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는 그냥 고맙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처럼 "나즉히"이라는 음성적 요소를 묘사하고, ⓒ처럼 표정과 뉴앙스와 음성의 높낮이를 묘사하면 "고맙다"는 이야기는 보복하겠다는 협박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글로 바꿀 때에는 화자가 등장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음성적 특징과 표정 등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기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예로부터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독서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작(模作) 충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 동안에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든지, 내가 쓰면 이보다 더 잘 쓸 수 있다는 창작 의욕이 일어나고, 그러기 위해 꼼꼼히 살피며 읽기 때문에 문학적 관습(literary convention)을 터득하고, 자기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티프(motif)나 소재(material)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안목이 높아져 퇴고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글쓰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에서 문학사(文學史)나 창작론(創作論)을 가르치는 교수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문학 작품을 많이 읽은 사람들에 속하지만, 실제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것은 그들의 독서 방법이 글쓰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려는 사람은 글쓰기에 알맞은 독서 유형을 선택해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글만 읽지 말고 여러 유형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의 유형은 크게 , , , 로 나눌 수 있습니다. 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밑줄을 그으며 그 글의 주제를 잡고 낱말 뜻이나 숨은 의미를 파악하며 읽는 방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형의 독서는 정보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증가시킬 뿐 글쓰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읽고 있습니다.  < 감상의 독서>는 전체 줄거리가 주는 재미나 뛰어난 표현을 맛보며 읽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런 유형의 독서는 글을 쓰는 데 보다 한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뿐, 실제로 글을 쓰는 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품이 주는 재미에 빠져 그 글의 구조나 표현 기법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글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와 같은 차이가 어떤 특질로 나타나는가를 따져보지 않고 읽기 때문입니다. < 비판의 독서>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의 테마와 그를 구현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적합한가, 작중 인물의 행위는 개연성(蓋然性)과 개성(個性)을 지니고 있는가, 앞뒤 단락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가, 각 문장에 동원된 어휘들은 인물과 상황에 적절한가, 그 어휘의 음성 조직은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고 화자의 기분까지 드러내고 있는가 등을 분석하며 읽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런 방식은 우선 그렇게 읽기가 어렵다는 게 단점입니다. 따지는 일이 번거롭거니와, 자기도 모르게 그 글이 주는 재미로 끌려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글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상대방 글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단점을 발견하여 고칠 수 있어 앞의 두 방식보다는 글쓰기에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 유형인 는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유형으로서, 그 속에 등장하는 것들을 제재로 삼아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작품을 구상하며 읽는 방식을 말합니다. 가령,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있다고 합시다. 문장이 지시하는 의미만 떠올리지 않고, 작품 속에 그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해풍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릿결과, 군데군데 금발로 물드린 머릿결 색깔과, 간밤에 그녀 머릿결을 쓰다듬던 연인과, 그들이 앉아 있었던 카페 탁자 위로 내리던 조명의 빛깔과, 그 조명에 반짝이던 그라스를 떠올리면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독서는 그 작품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는 게 단점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한 소재를 떠올리기 어려울 경우에도 아무 데서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방법으로 상상에 빠지면 아주 훌륭한 글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문학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문인들의 작품만 골라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문학 연구자에게는 필요한 방법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작품만 읽으면 어느 덧 그 문인의 아류(亞流)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면서 장점을 반영시키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문학적 깊이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의 총화(總和)가 그 사람의 개성(個性)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와 를 구분해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문학사적 가치는 그 작품이 쓰여진 때의 미적 기준으로 삼아 판단합니다. 그리고 문학적 가치는 그 작품이 읽혀지는 현재의 미적 기준에 의하여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경우, 문학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반드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라든가 김소월의 [진달래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서정적 장르가 가요적(歌謠的) 차원에 머물던 시절에 최남선의 신체시(新體詩)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2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 창간호, 1908.1  그러나 오늘날의 비평적 안목으로 보면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거론되는 것은 시조(時調)나 창가(唱歌)와 같은 정형시 시대에 자유율(自由律)을 채택한 작품이라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작에 목적을 둔 사람들은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은 문학사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만 읽고, 현대문학적 특성을 띈 작품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많이 쓰고, 부지런히 다듬고, 꾸준히 발표하며 끝없이 되돌아봐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단번에 미끈한 작품을 써내려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브라크가 말했듯이 예술가는 아주 조잡한 악상을 다듬어 위대한 교향곡으로 만드는 과 단번에 완벽한 작품을 쓰는 이 있고, 단번에 모차르트처럼 완벽한 작품을 써내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번에 완벽한 작품을 써냈다고 해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작품은 어느 한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완성하는 것보다는 오랜 동안 고치고 다듬어야 깊이와 크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조(朝鮮朝) 때 과거를 보는 젊은이들을 위해 언해(諺解)한 시가 술잔을 앞에 놓고 칠보시(七步詩)를 지은 이백(李白)의 시가 아니라 오랜 동안 다듬고 고친 두보(杜甫)의 시였던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작품이냐 아니냐 여부는 문인의 작품이냐 비문인의 작품이냐 여부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문단에 나서지 않은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오랜 동안 고쳐 일정한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다면 작품이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조잡하고 깊이가 없으면 작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인이냐 아니냐 여부는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고치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치려고 마음을 먹는다고 무조건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개작(改作)의 정도는 그 사람의 문학적 안목에 좌우됩니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충 쓰고 팽개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작품을 고치려면 일정한 절차를 밟아 검토해봐야 합니다. 우선 그 작품의 의미적국면(意味的局面)이 자기가 쓰려는 것과 일치하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신비평에서는 와 가 일치한다고 보는 것은 라고 비판하지만, 의도에 어긋나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의 경우는 직접 말하려 하고 있는가, 비유하고 있는가, 전체를 비유하고 있는가 부분을 비유하고 있는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가 화제에 걸맞는가, 화자의 태도와 발언이 입체적인가 어느 한 요소만 나타내고 있는가, 화자에 적절한 배경과 상황을 부여했는가, 전경화(fore-grounding)한 곳이 있는가, 행(行)과 연(聯)은 바르게 설정되었는가, 동원한 시어는 적절한가 등의 구조(構造)와 조직적(組織的) 국면을 살펴본 다음 문맥과 어법과 맞춤법 등을 검토하면서 고쳐야 합니다.  작품을 고칠 때 마지막 유의할 것은 그 작품이 다른 사람의 작품은 물론 자기의 먼저 작품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검토하라는 겁니다. 다식판(茶食板)에 다식을 찍어내듯 계속 비슷비슷한 작품만 쓰고 있으면 일단 발표를 중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걸 개성(個性)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의사개성(擬似個性)으로서, 사고와 정서가 타성화 내지 고정관념화된 상태로서, 그런 작품은 존재성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타성화되었을 경우에는 우선 자기 문학관부터 검토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문예사조(文藝思潮)에서 말하는 관점과 자기 관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기 관점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판단되면, 이제까지 택해온 제재를 바꾸거나 다음 장에서 소개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기법상으로 관습화되어 있으면 자기 작품에서 작품을 이루는 데 참여하는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 과잉되고, 또 어떤 것들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작을 하려는 사람들이 문예이론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작품을 써서 책상 속에 채곡채곡 쌓아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개고나 퇴고의 능력은 문학적 안목과 직결된 것으로서 하루 아침에 높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싶으면 발표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글을 쓰려는 것은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는데 언제까지 이를 억누르면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로 바뀌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되었다고 생각되면 그 글을 완성했다는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읽어본 다음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발표해야 합니다.  발표 후 다른 사람의 평을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애써 쓴 작품에 대해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면 누구나 섭섭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정확히 말하지 못할 경우에는 괜한 트집으로 받아들이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남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그 부분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남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테두리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비판이 온당하지 않을 경우라고 해도 어딘가에 자기 작품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자기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을 보완할 것인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를 했나요? 그럼, 다음 장에서는 좀더 논리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잠시 쉬면서 다음 사항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윤석산 교수님 프로필  1946충남 공주군 계룡면에서 출생.  1965공주 교육대학 입학. 동인으로 활동. 동인으로는 이장희 이관묵 등.  1967 위 대학을 졸업하고 충남 당진군과 공주군에서 국민학교교사로 근무함(1975)  2000년 : , , , 등과 협력 약정을 체결하고, 인터넷에 구축에 전념 2001년 : 한일 신예 시인 1000인선 을 발간하고,  7월 20일부터 23일까지 제주도에서 한일 시인대회 개최.  마루치 마모루(丸地 守)와 공동 대회장을 역임. 계간문예 창간 현재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 한국문학도서관 대표 ======================================================================     소릉조―70년 추석에 ―천상병(1930∼1993)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시 ‘귀천’으로 유명하다. 더불어, 사람들을 만나면 소주 사먹게 100원만 달라고 졸랐다는 일화도 유명해서 천상병 시인 하면 천진함과 어눌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천상병은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똑똑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고전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어는 물론 미국 통역관을 맡을 정도로 영어도 잘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67년 옥살이와 고문을 겪으면서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1971년에는 거리의 행려병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소릉조’라는 작품은 바로 그 즈음, 시인이 아픈 몸과 마음으로 여기저기 떠돌 때의 것이다.     몸은 상하고 집도 돈도 없는데 추석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추석이 되면 고향에 가야지. 시인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이 시에서 말하는 고향은 경남 창원의 진북이다. 그곳에 부모님이 잠들어 계시니 보러 가야 하는데 갈 길이 없다. 여비가 없는 탓에 형제도 만날 수 없다. 이때 가난은 서러움이 되고 외로움은 배가된다. 이때 시인은 막막해하며 ‘두보’를 떠올린다. 한평생 객지를 떠돌며 시를 썼던 두보의 호가 ‘소릉’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보처럼 외롭고 가난한 마음이라 해서 제목을 ‘소릉조’로 붙였다. 쉽게 풀이하자면 가난한 추석의 노래인 셈이다. 추석의 풍성함이 가을 햇살 같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추석에도 일하는 사람이 있고, 일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천상병의 ‘소릉조’를 읽는다. 45년 전의 외롭고 슬픈 추석과 오늘의 외롭고 슬픈 추석을 잊지 않기 위해 ‘70년 추석에’라는 부제를 읽는다.       
1634    詩는 무지개의 빛갈과 같다... 아니 같다... 댓글:  조회:3742  추천:0  2016-10-09
3. 「전화이야기」의 수용 양상 (1) ‘전화’ 담화를 통한 수용 김수영이 남긴 170여 편의 시 중 ‘전화’라는 의사 소통 매체를 통한 담화 양상을 보여준 시는 「전화이야기」 단 한 편뿐이다. 그러나 김수영 이후의 많은 시인들이 「전화이야기」에서 김수영이 보여준 기법을 자신들의 시에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화’라는 소통 매체의 도입에 그치지 않는다.  여보세요 雨期야요 전화할 수 없었어요 어제도 없었어요 그저께도 없었어요 심연이야오 망설임이야요 가방을 들고 제3한강교를 기어갔어요 여보세요 내 말 들려요? 雨期야요 내 원고는 온통 가짜야요 내가 잘 알아요 흐느낌이 없어요 피를 흘리지 않아요 웃으면서 썼어요 발로 썼어요 개발 소발 웃음을 참으면서 지겹게 썼어요 찢어 버렸어요 내가 쓴 논문도 가짜야요 여보세요 거울이 웃어요 거울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비로소 산이 보여요 어제부터야요 산으로 올라가는 개미가 절망이 탄식이 욕설이 어제부터야요 부쓰의 아이러니야요 부쓰 부스 그래요 장화? 케네쓰 버크 놀이의 절망 모티프의 절망 구토 탐닉 거지같은 시야요 여보세요 그래서 기뻐요 전화할 수 없었어요 고마와요 오 윌리 닐리 여보세요 끊지 말아요 끊지.... -이승훈, 「전화」, 「당신의 방」, 문학과지성사, 1986, p. 91.  이 시는 김수영이 「전화이야기」에서 보여준 기법을 상당부분 이어받고 있다. 제목부터가 「전화」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의도적으로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전화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던 ‘절망’이 이 시 속에서도 중요한 시어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 「전화이야기」가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번역 원고에 대해 송화자가 이야기하는데, 「전화」에서도 자신이 쓴 ‘원고’, ‘논문’에 대해 송화자와 얘기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또 이승훈의 「전화」에서 ‘부쓰’와 ‘케네스 버크’라는 외국 문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점도 「전화이야기」에서 ‘앨비’를 거론한 것과 비슷한다.  이승훈이 이 시에서 보여준 독창적인 면이라면 ‘부쓰’를 ‘장화’에 연결시키는 펀(pun)의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것, 또 “거울이 웃어요 거울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비로소 산이/ 보여요”에서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가 강력한 선배 시인 김수영이 성공적으로 마련한 기법을 능가하는 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는 ‘내 원고’ ‘내가 쓴 논문’에 대한 회의를 통해 자의식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김수영의 시와는 변별된다. 이승훈의 「전화」에서 수화자와 발신자의 교호 작용이 「전화이야기」에서만큼 중요하지 않고 화자의 발화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자의식 탐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내 말 들려요”와 “여보세요 끊지 말아요 끊지……”는 수화자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승훈 시의 이러한 특성은 1975년 6월에 쓴 시 「겨울 저녁」에서도 이미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겨울 저녁」 역시 「전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분석하지 않는다.  어이 이봐 이거 공중전환데, 이리루 잠깐 얼굴 내밀 시간 없어? ∨ 어디냐구? 강서구청 뒤야. 땅에 포원이 진 서울 사람들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여긴 시골 학교 운동장 같은 빈터가 있어.∨ 아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구, ∨ 요즘 내가 신경이 좀 이상하다구? 이런! 아니 글쎄(이건 유행가 제목이군) 그 이야기가 아니구 잡풀 그래 잡초 말이야. 여긴 그게 많단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여긴 내가 매일 좀 앉았다가 가는 장소거든. 답답해 미치겠어. 잡풀에게도 이름이 있을 게 아냐? 아니 이것 봐, 이름을 알아야 불어내어 말이라도 좀 해 볼 것 아냐? ∨ 뭐라구? 지랄한다구! 그래 지랄이야 하든 말든 좋아. 넌 농림학교 출신이지? ∨ 식물 도감이 틀려! 식물 도감이 엉터리라구. ∨ 뭐라구? 잡풀은 잡풀이라구? 이런 빌어먹을. 아니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게 어디 있어! 글쎄, 나 원, 아니 그럼 대중도 사람 이름이냐? 군중도, 시민도, 행인도? 이거 나 참!  - 오규원, 「공중전화」, 「이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문학과 지성사, 1981, p. 66.(∨ 표시 인용자). 오규원은 ‘전화’라는 소통 매체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 전화를 ‘공중전화’로 바꾸어 놓는다. ‘공중전화’는 ‘전화’보다 운동장 빈터에 자라고 있는 잡풀들의 이름이 궁금해진 화자의 급한 심정을 전달하기에 보다 효과적인 매체이다. 여기서도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화자의 목소리 외에 화자와 같은 시간상에서 교호 작용을 하고 있는 청자의 목소리를 느끼게 된다. 이 시의 독자는 이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듯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표시를 한 부분은 수화자가 무언가 발화를 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부분을 통해 시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화자의 개성까지도 짐작하게 된다.  오규원의 「공중전화」는 ‘전화’와는 다른 측면에서도 김수영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이름없는 잡풀을 ‘대중’, ‘군중’, ‘시민’ 등에 비유함으로써 김수영이 그의 시 「풀」을 통해 이룩한 것으로 여겨져온 민중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오규원의 「공중전화」에는 김수영의 「전화이야기」의 기법과 「풀」의 민중 이미지를 결합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승훈, 오규원의 시가 김수영의 영향을 비교적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면, 다음에 인용할 시들에서는 김수영의 영향이 감추어져 있다.  보러 가자. 정확한 시간은 물라. 내가 어떻게 지들이 언제 그러고 있는지 알겠어? 바다와 달, 지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야. 우린 그냥 지들이 그러는 동안에 갈라진 바다 사이로 하섬 가면 되는 거야. 생각해봐. 장화를 빌려 신고 갈라진 바닷속을 걷는 거야. 불도 없는 섬을 향해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거야. 그리고, 또 다음날 보름달이 바다를 다 마셔버리면 우리는 또 그 섬을 나오면 되는 거야. 원불교 섬인데 지금 아무도 없어. 갈래? 시인이 그런 데 안 가면 되니? -김혜순,「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부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 지성사, 1994. p. 32.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은 1, 2, 3, 4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것은 1이다. ‘1’의 끝, “시인이 그런 데 안 가면 되니?”의 뒤에는 “이영자의 전화”라는 미주 표시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인용하지 않은 2, 3, 4는 화자의 발화이고 인용한 부분은 ‘이영자’의 발화를 화자가 재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의 친구 이영자가 ‘시인’인 화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섬이라는 곳에 같이 가기를 권유한 것을 화자가 다시 옮겨 적은 것이 인용한 부분인 것이다.  이 시가 ‘전화’라는 매체를 통한 담화임이 분명하고 송화자와 수화자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만, 여기서 수화자의 역할은 앞의 두 시에 비해 현격히 제한되어 있다. 이영자는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하섬이란 곳에 같이 가기를 권유하고 있지만, 굳이 ‘시인’의 반응을 살피지는 않는 듯이 보인다. 그냥 하섬의 신비로움에 대해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김혜순의 이 시는 전화라는 소통 매체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표면적 화자가 청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법이라고 생각된다. 김승희는 김혜순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전화’를 새롭게 활용하고 있다.  여보세요, 385의 2053입니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전화거신 분의 성함과 연락처를 말씀하시면 제가 곧 연락드리겠어요, 그럼 삐- 하는 소리가 난 후 말씀을 시작해 주세요……. 여보세요, 김 선생님, 저 문학사상 김명순인데요, 후기 원고 어떻게 되셨나 해서요, 마감날이 사흘이나 지났는데……외출하셨나보군요, 빨리 연락주세요!…… ―김승희, 「떠도는 환유2」 부분, ꡔ어떻게 밖으로 나갈까ꡕ, 세계사, 1991. 이 시는 송화자와 수화자가 뚜렷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발화가 모두 시의 표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 발화는 동일시간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시간을 달리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전화 중에서도 ‘자동응답기’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새로운 시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여보세요, 385의 2053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동응답기에 녹음해놓은 목소리와 “여보세요, 김 선생님, 저 문학사상 김명순인데요”라고 하면서 이 목소리와 교호 작용을 하는 또다른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교호 작용은 동시간대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다. 이 경우는 각각의 발화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기법은 ‘의미와 단절된 목소리의 유형들만이 떠도는 이 시대의 삶을 암시’ 한다.  ‘자동응답기’의 등장 이후에도 삐삐, 핸드폰 등이 등장해서 생활 양식의 변화는 물론, 시의 담화 형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이 ‘통신수단’의 발달 양상을 끝까지 추적하는데 있지 않으므로 삐삐나 핸드폰을 활용한 시들을 이 논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설명만으로도 김수영의 영향을 얘기하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2) ‘전화’ 담화의 변용을 통한 수용 김수영은 시에 전화라는 소통 매체의 특징을 도입함으로써 시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의 대표적인 것은 화자와 청자가 동일한 시간대에 발화하면서 서로의 발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 시의 독자는 화자와 청자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듯한 상황에 놓인다는 점 등일 것이다. ‘전화’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도 이러한 특징을 그래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낸 시인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황지우이다.  절망의 시한폭탄은 아니구요. 디 임파서블 드림예요. 가방이죠. 열어보라구요. 그러죠, 뭐. 사건은 없어요. 아 이게 뭐냐구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죠. 아편은 아니구요. 온건하지요. 다른 저의는 없어요. 필독서예요. 은유가 전혀 없구요. 알리바이에 대한 일종의 옹호에 불과해요. 아, 이건 또 뭐냐구요. 한국 경제의 전개 과정이죠. 이젠 굶는 사람은 없잖아요. 외채는 할 수 없어요. 1인당 70만 원이라메요. 몇 사람이라도 집중적으로 배부르게 해야죠. 그게 성장의 총량을 명시적으로 늘리는 방법이죠. ..... 이건 뭐냐구요. 어려워요. 오리지날이죠. .... -황지우, 「아, 이게 뭐냐구요」, ꡔ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ꡕ, 개정판, 민음사, 1995, pp. 47-49. 이 시는 ‘ 풍으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시는 김수영의 「전화이야기」의 영향을 상당히 짙게 보여주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예요’, “.............죠”라는 해요체의 종결어미이다. 그리고 주어를 생략한 짧은 문장들도 다분히 김수영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전화이야기」의 ‘아메리칸 드림’은 이 시에서 ‘디 임파서블 드림’으로 패러디된다. 무엇보다 이 시는 표면에 드러난 것은 화자의 일방적 독백이지만 이것이 시 속의 함축적 청자와의 교호작용에 의한 것으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전화이야기」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지우는 자신의 시 속에 김수영 시의 제목을 직접 노출시키는가 하면, 김수영 시를 직접 패러디함으로써 해체적 독서의 다양성을 다소 감소시키고는 있다. 그러나 황지우는 여기에 새로운 시도를 추가한다.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전화’를 통한 담화의 모습을 불심검문을 당하는 담화 상황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이 시의 현실 참여적 공간을 열어 놓은 것이다. 지식인으로 추정되는 이 시의 화자는 불심검문을 당해 가방을 열어보이면서 검문하는 사람과 담화하고 있다. 검문하는 사람의 말은 시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화자의 말을 통해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 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검문자는 화자를 향해 ‘이게 뭐냐’, ‘가방을 열어 보라’, ‘이 책은 뭐냐’는 등의 말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길에서 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이 검문 당한다는 사실, 책을 모두 불온서적이냐 아니냐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검문자의 태도 자체가 시대 고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 더불어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화자의 담화는 저항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외채는 할 수 없어요. 1인당 70만 원이라메요. 몇 사람이라도 집중적으로 배부르게 해야죠”라는 풍자와 역설을 통해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김수영에 대한 해체적 독서를 통해 「전화이야기」의 기법을 차용하는 한편, 여기에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는 내용을 추가하여 「전화이야기」와는 또다른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에 화자와 청자가 있고 두 사람이 교호 작용을 하고 있다고는 짐작되지만, 청자의 직접적 발화 내용은 들을 수 없는 형식의 시는 다른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① 보 신 먹 니 배 력 족 ? 기 죠 탕 어 까 하 넘 은 올 힘 복 그 을 보 ? 는 치 실 림 들 날 래 셨 섹 이 는 로 픽 게 개 도 니 읍 스 비 세 곤 어 됐 패 요 다 가 대 상 란 쩌 어 듯 절 강 식 지 하 에 한 구 요 이 을 요 무 고 서 일 하 어 란 강 당 의 하 정 양 이 더 떻 속 요 하 식 고 기 아 니 든 담 당 는 이 치 면 부 닙 보 개 까 하 性 모 밀 어 니 신 들 지 는 영 두 한 떻 도 까 탕 은 있 개 화 강 조 게 토 도 살 는 들 관 요 직 해 룡 만 먹 판 이 은 의 하 에 야 탕 저 난 나 줄 포 는 서 하 도 는 읍 거 라 지 스 性 벗 죠 먹 억 니 에 않 터 이 어 ? 고 눌 다 석 서 을 가 거 나 뱀 있 려 이 진 겝 의 대 려 탕 지 있 구 데 서 - 이승하, 「밀러 씨와의 외출」, ꡔ우리들의 유토피아ꡕ, 나남, 1989, p. 32.  ② 왜 내 마음은 단칼에 잘라지지 않는 걸까요? 깨끗이라고 말하면서 깨끗이 헹구어낼 수 없는 걸까요? 1980년엔 결혼을 했어요. 불이 났어요. 늑막염에 또 걸렸어요. 그 다음해부터 라일락 꽃잎이 냄새가 안 나요. 종이꽃들이 폈다가 져요. 물 속에선 물꽃들이 폈다가 지고, 불 속에 선 불꽃들이 피었어요. 죽은 나무도 정원에 서 있어요. 죽은 지 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서 있어요. - 김혜순, 「너와 함께 쓴 시」 부분, ꡔ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 지성사, p. 12. 위의 인용시는 모두 화자와 시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숨은 청자와의 교호 작용에 의한 발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교호작용이 중요하다기보다 화자의 발화자체가 중요한 것이 된다. ①은 제목이 ‘밀러 씨와의 외출’인 것으로 보아 화자의 질문 ‘보신탕을 먹어보셨습니까?’, ‘--양기 부족은 실로 곤란한 일이 아닙니까?’, ‘--이 거대하고 치밀한 조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는 ‘밀러 씨’를 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밀러 씨’의 발화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화자의 말 또한 청자 밀러 씨와의 교호작용 속에서 발화된 것이라기보다, 넋두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청자의 역할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밀러 씨와의 외출」을 읽는 독자는 화자와 밀러 씨와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것과 같은 위치에 처하게 되는데, ②의 경우 「너와 함께 쓴 시」에서도 독자는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에서는 청자의 역할이 앞의 시에서보다도 더 제한되어 있다. 이 시의 제목이 「너와 함께 쓴 시」인 것으로 보아,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청자가 발화를 했는지, 또 했다면 어떤 발화를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화자의 발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화자는 청자에게 굳이 그런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도 않다. 청자인 ‘너’는 화자의 말을 유발시키면서 그 말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존재라기보다 화자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그 의의를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청자의 역할이 줄어들고 화자의 발화 내용조차 불분명해지는 것은 현대인의 개인과 개인간의 단절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는 ‘전화’ 통화하는 것을 재현해 놓음으로서 서정시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한 시라고 생각된다. 「전화이야기」가 ‘구술 언어’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라는 의사 전달 매체를 시에 도입함으로써 화자와 청자의 역할에도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전화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송화자의 음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의 독자들은 수화자의 음성까지 짐작하며 읽게 된다. ‘전화’라는 매체는 송화자의 발화가 수화자에 의해 영향을 받고 수화자 역시 송화자의 발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전화이야기」의 언술이 이러한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의 독자는 송화자와 수화자의 사적인 전화 통화를 엿듣고 있는 듯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 또한 이 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170여편에 이르는 김수영의 시 중 ‘전화’를 활용한 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수영 이후의 많은 시인들이 「전화이야기」에서 김수영이 보여준 기법을 자신들의 시 속에 수용하고 있다. 이승훈의 「전화」, 오규원의 「공중전화」, 김혜순의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김승희의 「떠도는 환유 2」 등은 ‘전화’를 활용하여 화자의 발화 외에도 청자의 발화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황지우의 「아, 이게 뭐냐구요?」, 이승하의 「밀러 씨와의 외출」, 김혜순의 「너와 함께 쓴 시」 등은 ‘전화’라는 매체를 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시 속의 화자와 청자가 서로 교호(交互) 작용을 하고 있으며 시의 표면에는 화자의 발화만 드러난다는 점에서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를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김수영 당시 걸고 받는 기능만을 했던 전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게 되었고 의사 전달 매체도 삐삐, 핸드폰, 인터넷 등으로 훨씬 더 다양해졌다. 이러한 매체들의 등장은 당연히 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것까지를 모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의사 전달 매체의 변화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 김수영 시 「전화이야기」가 우리 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것은 이 글에서 다룬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1938∼)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고향에 간다. 이것은 가족 친지를 만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있다. 고향에 가는 것은 일종의 ‘돌아감’이다. 그곳에는 지금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나, 즉 과거의 내 모습이 여운처럼 남아 살고 있다. 그러니까 고향에 가는 일을 비유하자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과거 어린이로서의 본인이 뛰어놀던 장소들을 보게 되면 그때의 장면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그때의 어린 자신이 마음 안에서 살아나는 듯하다. 사람들은 이런 기억이나 현상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고향은 대개 어린 추억이 층층이 쌓인 곳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는 깊은 경험을 하게 만든다. 허영자 시인의 작품은 고향에 가지 않아도 유년의 추억과 눈부심을 만나게 해준다. 게다가 이 시인의 작품은 과거의 어린 추억이 지닌 가치를 ‘무지개를 사랑한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준다. 시인의 표현을 따라서 쪼그리고 앉아 풀잎에 맺힌 이슬을 한참 바라보는 아이, 개미를 신기하게 관찰하는 아이를 떠올려 보자. 어른의 눈에는 별 가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미물들을 사랑했던 그 행동들은 참으로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인은 바로 그 순수한 기쁨이야말로 너무나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것에도 눈을 반짝이던 그 시절은 이미 무지개처럼 사라졌다. 그렇지만 이 시를 보면서 순수한 어린 시절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웠음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      
1633    현대시사상 가장 다양한 시형의 개척자 - 김수영 댓글:  조회:4647  추천:0  2016-10-06
  시의 기법의 발견과 그 수용-김수영 시 「전화이야기」를 중심으로 』- 한명희 1. 문제 제기 2. 「전화이야기」의 기법 3. 「전화이야기」의 수용 양상 (1) ‘전화’ 담화를 통한 수용 (2) ‘전화’ 담화의 변용을 통한 수용 4. 결론 1. 문제 제기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시인의 첫째자리에 김수영을 놓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김수영은 시정신의 측면에서는 물론 시의 기법 면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바 크다. ‘반복의 효과’는 김수영이 완성한 새로운 기술로 고평되고 있으며 황동규, ‘언어의 범속화’는 ‘김수영에 의해서 개발된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의 형식에 있어서도 김수영은 ‘이상과 더불어 현국현대시사상 가장 다양한 시형을 개척한 시인’ 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수영이 시에서 구사한 ‘풍자’와 ‘아이러니’의 기법도 주목에 값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다양한 기법들은 김수영이 시의 작품성에도 민감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제 그는 산문에서 ‘최소한도 작품다운 작품’ , ‘ 단계에서 단계’,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어떻게 시의 수준에까지 올려놓느냐’ 등의 표현을 통해 ‘시의 예술성’  을 강조한 바 있다. 시인에게 있어 ‘기법’이란 그가 시의 주제를 발견하고, 탐험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 김수영이 시에서 개척한 새로운 형식과 기법들은 그의 시정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김수영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판단되는 기법을 사용한 시 「전화이야기」이다. 「전화이야기」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김수영 시에서 이러한 기법이 사용된 시를 더 이상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화이야기」의 기법이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후배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전화이야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이야기」에 대한 연구가 후배 시인들에게 수용된 양상까지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전화이야기」가 서정시의 양식에 어떤 변화를 몰고 왔는지를 ‘전화’라는 소통 매체의 특성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후배 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후배 시인들은 「전화이야기」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하려 한다.  2. 전화이야기의 기법  「전화이야기」는 김수영이 1966년 6월 14일에 써서 같은 해 9월에 「한국문학」에 발표한 시로 김수영의 후기작에 속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전화’라는 매체를 통한 화자의 발화라는, 이전의 우리 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담화 방식을 보여준다. 시에 의사 소통의 매체를 도입함으로써 화자의 발화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는 편지 형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임화가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편지 형식을 활용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화’라는 의사소통 매체를 도입하여 시의 목소리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전화이야기」이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예요. 절망예요. 八월달에 실려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모레면 다 돼요. 二백매예요. 特種이죠. 머릿속에 特種이란 자가 보여요. 여편네하고 싸우고 나왔지요. 순수하죠. 앨비 말얘요. 살롱 드라마이지요. 半島호텔이나 朝鮮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미해결이지요. 좋아요. 만족입니다. 新聞會館 三층에서 하는 게 낫다구요. 아네요. 거기에는 냉방장치가 없어요. 장소는 三백명가량 수용될지 모르지만요. 절망의 연료가 모자 란다구요. 그래요! 半島호텔같은 데라야 미국놈들한테서 입장료를 받을 수 있지요.  여편네하고는 헤어져도 되지만, 아이들이 불쌍해서요, 미해결예요. 코리안 드림이라구요. 놀리지 마세요.  아이놈은 자구 있어요. 구원이지요. 나를 방해를 안하니까요. 절망의 물방울이  튄 거지요. 내주신다면, 당신의 잡지의 八월호에 내주신다면,  특종이니깐요, 극단도 좋고, 당신네도 좋고, 번역하는 사람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하는 폭이 되지요. 앨비예요, 엘비예요. 에이 엘 비 이이. 네. 그래요. 아아, 그렇군요.  네에, 그러실 겁니다. 아뇨. 아아, 그렇군요. 이런 전화를, 번역하는 친구를 옆에 놓고,  생색을 내려고 하고나서, 그 訃告를 그에게 전하고, 그 무지무지한 騷亂 속에서 나의 소란을 하나 더 보탠 것에 만족을  느낀 것은 절망에 지각하고 난 뒤이다.  ― 「電話이야기」 전문 위의 시는 크게 1, 2연과 3연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2연이 전화를 통한 발화 내용을 옮겨놓은 것인데 반해 3연은 전화가 끝난 후의 화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먼저 ‘전화’를 통한 발화인 1, 2연에 주목해 보자. ‘전화’ 통화를 옮겼다는 것은 우선, 이 시가 ‘문자 언어’보다는 ‘구술 언어’의 특징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데 이 시에서는 ‘말하기’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전화 통화는 송화자와 수화자를 필요로 하는데 이 시에서는 송화자의 발화만 드러날 뿐, 수화자의 발화는 직접 언표되지 않는다. 이 시는 특정한 상황, 즉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원고를 실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 극적인 상황이 화자의 일방적 독백으로 전달되고 있어서 알프레드 테니슨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로버트 브라우닝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하는 ‘극적 독백’의 모습과도 일견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적 독백과는 다르다.  이 시가 전통적인 시의 발화 방식과도 다름은 물론이다. 엘리어트는 시의 음성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한 바 있다. 첫 번째 음성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시인의 음성이다. 둘째는 많거나 적거나간에 청중에게 말하는 시인의 음성이며, 셋째는 시인이 만들어 낸 한 극중 인물로 하여금 시로서 말하게 하려고 할 때의 시인의 음성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자기 자신이 말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상상적 인물이 다른 한 상상적 인물에게 말을 한다는 한계 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서정시는 이 세 가지 음성 중 하나로 씌어지거나 두 가지 이상을 결합해 씌어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는 이 세 가지 음성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음성으로 씌어진 시이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이시의 표면적 진술은 송화자의 그것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전화의 수화자가 되는 청자의 음성까지도 충분히 짐직할 수 있게 된다. 화자의 목소리 자체가 수화자의 영향을 받아 발화된 것이기 때문에 청자의 목소리를 짐작해가면서 이 시를 읽지 않는다면 시의 독해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청자(수화자)의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전화이야기」의 1, 2, 3, 4, 5연은 수화자의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수화자의 발화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화자의 발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9연 “신문회관 3층에서 하는 게 낫다구요. 아네요”에 이르면, 이것이 수화자의 발화에 대한 응답임이 분명해진다. 송화자는 6, 7연에서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문맥에 드러나지 않는 수화자의 발화, 아마도 “신문회관 3층에서 공연을 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을 발화가 이어졌기에 송화자의 9연의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네요./ 거기에는 냉방장치가 없어요.”는 수화자의 발화에 대한 송화자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코리안 드림이라구요. 놀리지 마세요” 역시 수화자의 발화가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운 말이다. 이 시에서 수화자가 발화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을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 ) 코리안 드림이라구요. 놀리지 마세요.  ( ) 아이놈은 자구 있어요. 구원이지요. 나를 방해를 안하니까요. 절망의 물방울이  튄 거지요. 내주신다면, 당신의 잡지의 八월호에 내주신다면,  특종이니깐요, 극단도 좋고, 당신네도 좋고, 번역하는 사람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하는 폭이 되지요. ( ) 앨비예요, 엘비예요. 에이 엘 비 이이. ( ) 네. ( ) 그래요. 아아, 그렇군요. ( )  네에, 그러실 겁니다.( ) 아뇨. ( )아아, 그렇군요. 위에서 괄호 표시를 한 곳이 수화자가 발화를 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것은 송화자의 발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곳이기도 하다. 괄호에는 순서대로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코리안 드림이다, 아이들은 뭐하는가, 작가 이름이 뭐라고 했는가, 잡지에 싣기는 어렵겠다,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다, 미안하다, 우리 입장은 이렇다 등의 내용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수화자의 발화는 독자에 따라 다르게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화내용을 독자나름대로 추측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도 독자들이 비슷한 추측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시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수화자의 발화를 독자들이 삽입해서 읽게 되는 방식은 ‘전화’라는 의사소통 매체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화’는 ‘상대방의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발화할 때 그 내용과 어조 어법 등이 화자의 개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전화이야기」처럼 청자의 목소리까지 추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청자의 개성까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의 독자는 무엇보다 송화자와 수화자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게 되는 입장에 놓인다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 시의 1, 2연에 대해서만 얘기를 해왔다. 3연은 1, 2연의 상황, 즉 전화 통화가 끝난 후의 화자의 발화이다. 그러니까 1, 2연은 통화 내용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시가 발화의 상태라는 전통적인 시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연에는 1, 2연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번역하는 친구’가 등장하는데, 이 친구는 1, 2연의 화자의 발화를 지켜보던 사람이다. 1, 2연의 화자의 전화는 이 친구를 위한 전화였던 것이다. 이렇게 전화의 용건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는 ‘절망’과 관련된 얘기- ‘절망예요’, ‘절마에서 나왔어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절망의 연료가 모자/란다구요’, ‘절망의 물방울이/ 튄 거지요’-와 가족과 관련된 얘기- ‘여편네하고/ 싸우고 나왔지요’, ‘여편네하고는 헤어져도 되지만, 아이들이 불쌍해서요’, ‘아이놈은 자고 있어요’가 불쑥불쑥 끼어들어 있다. 이렇게 송화자와 수화자의 대화가 통일성을 갖지 못하고 자꾸만 분산되는 것은 언어의 ‘구술’ 자체가 지닌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 문화에서는 동질성, 획일성, 연속성이 중심이 되는 반면, 구술 문화는 다원성, 특이성, 비연속성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3연의 청자, 그러니까 화자의 ‘번역하는 친구’는 화자인 송화자와 수화자의 담화를 엿듣게 된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화자가 친구에게 “생색을 내려고” 일부러 친구 앞에서 한 전화이기 때문에 친구가 엿듣게 되는 것은 화자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1, 2연의 화자의 발화를 듣는 청자가 있고, 화자와 청자의 대화를 엿듣는 청자가 또 존재하는 액자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화자의 목소리도 1, 2연에서 수화자와 직접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있는가하면, 전화 통화를 한 자신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시를 쓰는 화자의 목소리가 겹으로 존재한다.  「전화이야기」는 ‘전화’라는 소통매체를 통한 발화라는 점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김수영의 시는 그가 독서한 책들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이 시에도 그가 독서한 글과 그 글의 내용이 그대로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제시하고 있는 작가는 ‘앨비’다. 김수영은 그의 산문 「반시론」에서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이라고 하여 ‘앨비’를 거론한 바 있는데, 이 시 속에서도 앨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전화이야기」의 화자가 “앨비예요 엘비예요. 에이 엘 비 이이. 네”라고 표현한 에드워드 앨비(Edward Albee)는 1928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희곡작가이다. 1960년에 발표한 「동물원 이야기」로 유명해졌으며 1961년에 「모래상자」, 1962년에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발표했다. 1967년에는 「미묘한 균형」으로 퓰리쳐상을 수상했으며, 1975년에 「바다 풍경」으로 다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전화이야기」의 소재가 된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은 1960년에 앨비가 발표한 희곡 작품의 제목이다. 시 속에 “살롱 드라마지요.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전화이야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희곡 작품은 응접실이라는 단일한 무대에 마마, 대디, 그랜마, 미시즈 베이커, 더 영 맨의 다섯 인물이 등장하는 단막극인데, 「전화이야기」의 화자가 잡지사 직원에게 이 작품을 ‘살롱 드라마’라고 소개하는 것은 김수영이 이 희곡의 내용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전화이야기」는 김수영이 읽은 책을 시의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도 특징적이지만, 특히 ‘전화’라는 의사 소통매체를 시에 도입하여 서정시의 양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작품이다. 소설의 경우, ‘최초의 전화 텍스트’는 박완서가 1994년에 발표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 18여년 앞서 김수영은 「전화이야기」를 통해 전화를 통한 담화 형식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김수영이 「전화이야기」에서 보여준 기법은 많은 후배 시인들의 시에서 수용, 변형된다. 다음 장에서는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     지상에 없는 잠 ―최문자(1943∼)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명절은 ‘나’보다 ‘우리’가 되어 사는 시간이기 쉽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참 다정하고 좋다. 여럿이 모여 우리가 되면 마음은 든든하고 가슴은 따뜻해진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다툼도 일고 상처도 받고 염증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든든하고 따뜻한 말이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다 보면 무리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최문자 시인의 ‘지상에 없는 잠’은 떠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은 ‘우리’가 아니라 ‘나’로 돌아가야 함을 아름답게 강조하고 있다. 다시 ‘나’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미 많은 상처로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짐작건대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나 보다. 한 장의 나뭇잎을 차지하려고 ‘지상의 입들’이 서로 싸운다고, 시인은 썼다. 이 땅은 ‘짐승 냄새’를 풍기는 속된 일로 가득하다고, 시인은 썼다. 견디기 힘든 탓에 그들과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갈까. 이곳을 떠나는 것이 가능할까. 시인은 자신이 속한 모든 현실을 떠나기 위해 원고지로 돌아와 시를 썼다. 시 안에서 비로소 혼자만의 방을 찾고 그 안에 자기 자신의 영혼을 뉘여 쉬게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꽃나무’의 의미이다. 시를 한번 읽어보자. 여기에는 처연하게 병든 영혼을 정갈한 상상 나무의 가지에 걸어두는 한 여인이 보인다. 그 영혼은 상처 입었지만 정갈한 나무에서 쉬면서 스스로의 정화 능력으로 상처를 치유해갈 것이다.     누구든 세상과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심지어 가족과 연인으로부터도 자신을 격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것은 성정이 뾰족하거나 예민해서가 아니다. 혼자만의 방에서야 숨통이 트이는 것은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이 시를 읽자. 아픈 영혼의 자정 능력을 믿어보자. 때로 외로울 필요가 있다.       
1632    詩란 무구(無垢)한 존재이며 무구한 국가이다... 댓글:  조회:4271  추천:0  2016-10-06
4.. 건강하고 순결한 영혼을 찾아서  정보화 사회라고 일컫는 오늘날 인간의 정서적 가치가 한층 더 강조되는 느낌을 주는 것은 과학이 주는 진보와 합리가 더 이상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각은 이미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인간과 생명의 문제에 대한 공동 관심에 그 기본을 두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갖는 소비적 욕망이 탐욕적 인간을 만들고 과학이 주는 허구적 환상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이때 서정에의 관심과 복귀는 점점 잊혀져 가는 인간의 문제를 새삼 발견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정과 존재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김기택, 장석남, 박용하의 시는 우리 시의 전망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먼저, 관찰과 묘사를 바탕으로 사물과 존재에 내재해 있는 생의 의지를 치밀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는 김기택은 ‘육체의 시학’이라 할 수 있는 몸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그의 시적 탐험을 계속한다.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 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 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나온다. 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 자라던 것이 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  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니, 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  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 머리카락 속에서 용쓰던 힘과 냄새는 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 -김기택,「머리카락 하나」부분 김기택 시의 특징은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을 예리하게 붙잡아 사물의 외양 뿐만 아니라 속성까지 치밀하게 재생산해 내는 데 있다. 고요하고 번득번득한 삶의 통찰자로서의 표정이 짙게 배어 있는 그의 시는 몸 안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온몸으로 삭혀 그 스스로를 무기화한다. 이런 까닭으로 그의 시는 부드러움보다는 강인함이, 낭만보다는 리얼리티가 문면에 자리잡는다. 남성적 자아로서의 세계 인식을 보여주며 육체의 건강함을 복원하고 있는 그의 시는 우리 시에서 부족한 논리로서의 시의 미감을 건강하게 보여주며 서정을 맥락화시킨다.「머리카락 하나」역시 난로 위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액체가 되는 단순한 사실을 치밀하게 관찰한 후 급기야 죽음으로 인식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시를 형상화 하는데 있어 얼마나 집요한가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80년대 거대 서사가 붕괴된 이후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 장석남은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세계를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완성도 높은 시를 써온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순수 서정’과 ‘탁마된 언어’이다. 요즘은 바람 불면 뼈가  살 속에서 한쪽으로 눕는다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친다 나는 안보이는 나라를 편애하는 것이 틀림없어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만큼 멀까  -장석남「진흙별에서」부분 장석남의 서정은 우리가 잃어 버리고 있던 꽃, 별, 나무, 바다 등과 같은 자연적 소재를 시 속에 끌어들인다. 디테일한 정서를 자연적 소재에 호흡을 입히고 있는 그의 시는 언어의 미감에 공을 들이는 한편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울림이 주는 여운적 감동에 힘을 기울인다. 그는 사물의 세계나 속성을 핍집하게 그리기보다는 재현적 세계를 무효화시키며 시가 주는 관념의 모형을 제시한다. 영롱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우리들 심층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순수 서정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그의 시는「진흙별에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흙별은 “뼈가/ 살 속에서 한 쪽으로 눕”고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치”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현실의 세계는 시적 언어에 전화되어 시의 내면에서는 관념화되어 나타난다.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나 멀까”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그가 현실 속에서 지향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만 제시할 뿐이다. 장석남이 시 속에 현실의 문제를 용해시키며 융화된 순수 서정을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데 반해, 박용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위기의 문제들을 시 속에 적극적으로 끌여 우리를 사로잡는다. 유년 체험에서부터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와 사회적 상황까지, 에두르지 않고 문맥화시키고 있는 그의 시는 우리에게 시를 읽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숨소리라니! 국가에 물들어 있지 않은 無爲의 나무들이 문을 잎여는 믿음의 전화 소리가 들린다. 국가가 괴물일진대 교회가 더 큰 죄를 키우는 휴식일진대 나에게 넉넉한 교회는  나무들의 뽐내지 않는 품. 나무들은 세상 밖과 안의 경계에서  인간들을 만난다. 그 경계의 밖으로 떠나지 않는 나무들의 마음 그 복판에서 나는 자연의 국가를 숨쉰다. -박용하「靑銅 구리빛 나무들의 노래」부분 박용하가 노래하고 있는 나무는 국가와 교회, 인간들과 구별되는 비세속적 대상이다. 나무는 박용하에게 있어 자신을 넉넉하게 받아 주는 무구(無垢)한 존재이며 무구한 국가이다. 박용하는 현실과 자아의 대립을 통해 자신이 속하고 있는 현실의 허위를 부정하고 냉소한다. 그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행복에 가깝게 가기 위해 역사와 사회 속의 불안정한 자아를 투명하게 그려내며 과거와 현실의 문제를 희망과 전망으로 전이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아와 사회가 서로 길항하면서 발견되는 세계의 모순을 적의적으로 바라보면서 영혼을 억압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조소한다. 우리들 삶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승리로 이끌려는 그의 ‘정체성의 시학’은 세계의 균열을 해석화하고 참된 질서를 실현시키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주체적이라 할 수 있다.  김기택, 장석남, 박용하의 시는 인간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순수 서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이들에게 있어 현실은 불화와 허위의 대상이며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를 통해 이들의 시는 육체와 정신의 건강함을 되찾는 한편 폭력과 허위로부터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폐허의 서정을 구출하고자 한다. 생명과 그 생명 속에 깃든 영성(靈性)을 찾아내 이를 사려 깊게 펼쳐 보이는 이들의 시에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눈여겨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5. 나오는 말 서정시는 인간의 감성에 감응을 요구하며 시대와 환경 혹은 시인의 경험과 개성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모해 왔다. 특히 오늘의 시는 후기 산업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다양한 가치와 탈근대로 치닫고 있는 주변 환경과 서로 맞물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적이며 중층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지배 담론을 형성해 왔던 거대 서사 담론의 붕괴 또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억압된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면서 우리 시의 지형도를 한층 더 높은 미적 세계로 바꿔 놓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본원적 가치와 생명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서정시는 응전과 반전을 거듭하면서 그 책임을 다 해왔다. 비록 그 목소리가 변화해 가는 문화 환경을 다 담해내지 못하고 권력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의 부정적 기능들을 다 파헤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 자신의 정체성을 않으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서정시가 지니고 있는 미적 양상은 다양하기 그지 없다.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여성의 권리 찾기를 노래하고 있는 페미니즘 시에서부터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을 적시하는 생태 환경 시 그리고 육체성과 인간의 내면 감정을 노래하는 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시에는 생산 조건이나 생산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을 대상화시켜 타자들과 교감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다는 점에서 또한 인간과 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존재를 거세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갖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 공간의 체험과 대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조화와 불화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김용택, 안도현, 이윤학, 이정록의 시는 원체험적 인식을 드러내며 물화된 자연과 인간의 내부를 결고운 언어로 담아낸다. 이에 비해 죽음, 소멸, 쇠약, 부도덕과 같은 사회와 인간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는 병리 현상을 은유 구조화시키고 있는 남진우, 송찬호, 박형준의 시는 고도의 시적 장치를 통해 깊이를 심원화시키고 넓이를 확장시키고 있다. 또한 김기택, 장석남, 박용하의 시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깃든 신성과 폐허의 서정을 강건하게 그려내며 순결한 영혼이 꿈꾸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서정시는 온갖 병폐와 대응하면서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을 순수한 정감을 드러나게 해야 하는 전략적 책무를 지닌다. 컴퓨터와 같은 전자 매체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생활 습관까지 바꿔놓는 오늘의 상황에서 서정시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정시는 위기로 인식되는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할 도덕적 책무를 지니며 동시에,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도 바르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만이 시가 확보하고 있는 주체의 자리를 지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약력 195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으며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꿈의 이동건축』『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사막의 별 아래에서』『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시론집『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과 평론집『반성과 성찰』『붉은 시간의 영혼』등을 펴냈으며, 제5회 현대시 작품상(2004), 제17회 경희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가을이 되면 소개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넣어 두었던 시가 이 작품이다. 이상국 시인의 이미지 자체도 쓸쓸하면서도 꽉 찬 느낌이어서 가을의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데 작품 중에서도 ‘국수가 먹고 싶다’는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국수가 국수답게 먹히는, 이런 가을 말이다.     제목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이 시는 국수 예찬론처럼 비치지만, 절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이 시는 울고 싶다는 말의 국수 버전, 즉 눈물 대신 삼켰던 국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을은 풍요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하늘은 깊어서 더 멀어 보이고 가을 노을은 울음처럼 붉어서 마음의 응어리를 꺼내 놓은 듯하다. 바람은 차가워 빈손은 더욱 허전해져만 가고 이래저래 허전한 마음이 더욱 황량해지는 때가 요즘이다. 그런 가을의 심사, 꼭 계절적으로 가을이 아니래도 지극히 가을스러운 심사에 대해 이상국 시인은 ‘허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삶은 언제고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울고 웃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시를 쓰게 된 날은 아마도 우는 날에 해당했나 보다. 시인은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게 되었다고 썼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식으로 마음을 다치고 보니 잘난 사람, 이긴 사람보다 조금 부족하고 역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인처럼 순박하고 속이 훤히 보여서 남을 속이지도, 잘 이기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 곁에서 뜨겁게 울고 싶다는 말을 국수가 먹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서글프게도 나이가 들면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눈물 대신 콧물을 흘리며 뜨거운 국수를 먹을 뿐이다.         
1631    詩는 추상의 반죽 덩어리... 댓글:  조회:3878  추천:0  2016-10-06
3. 비극적 세계관의 추체험적 인식  90년대의 시는 세기말적 불안과 휴머니티의 상실이라는 위협 속에서 비극적 현실 인식이 문면에 전포되어 있었다.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담론들과 결핍된 욕망만의 분열된 주체의 몸 안에 기생하고 있었다. 90년대의 시는 인문학적 사유가 사라진 파편화된 욕망을 환유한다. 과학에 지배된 반윤리가 새로움의 이름으로 시를 감염시키기며 폐허에 풍경을 만들어 냈다. 남진우, 송찬호, 박형준의 시는 이같은 비극을 내면화시키며 그 내면 속에서 겪는 불화와 혼돈을 정합화시킨다. 80년대에 독특한 개성의 시세계를 보여준 바 있는 남진우는 죽음과 소멸, 종말과 허무와 같은 비극적 세계관을 몽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를 떨쳐 버리기 위해 전부 그의 사유를 할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철저하게 죽음의 이미지에 천착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외부로부터의 단절이나 소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비극적 에너지에서 온다. 그는 죽음을 넘어서려 하거나 죽음 앞에서 무력한 비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내부에 가득찬 소멸과 죽음의 목소리를 그로데스크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낯설고 진기한 죽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밤 죽은 자를 태운 배가 내 집 앞에 도착했다 새벽이 오기 전 그 배에 불을 질러  더 먼 바다에 떠나보내야 한다 그 배가 삐걱이며 내 잠 속으로 가라앉아버리기 전에 죽은 자들과 한 모든 계약을 끝마쳐야 한다 식인 상어와 암초들을 피해 어렵게 흘러든 해안 간신히 잠에서 빠져나온 내가 눈을 비비고 일어서면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 저편 죽은 자를 태운 배는 서서히 떠나고 있다 -남진우「검은 돛배」부분 죽은 자를 태운 배가 집 앞에 당도했다고 믿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의식은 세계를 인식하는 그의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사로잡힌 망령은 지극히 병적이다. 그에게 공간은 죽음을 인식하는 기제에 불과할 뿐 그가 죽음을 인식하는 공간이 도시이거나 그의 집 혹은 그의 내부이거나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시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적 환경에 불과할 뿐 시간이 주는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집요한 죽음에 대한 천착은 그러나 우리들 의식 저 편 깊숙히 허무로 자리잡고 있는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 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무의식 속에서 역동적으로 파동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고 침묵적이다.  남진우가 우리들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세계를 비정하게 파헤치며 음울의 벽화를 통일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면 유추의 언어로 건조한 서정을 펼치고 있는 송찬호는 비약과 절제 같은 지적 조작을 통해 시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시는 감정을 최대한 감춘 채 대상을 장면화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시적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한편 이러한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조합을 보다 새로운 시각에서 맥락화시키고 보다 심원하게 의미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고소하고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 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러가는 달빛처럼 단단한 근 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송찬호,「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전문 송찬호의 서정은 고정되어 있는 사물의 관념을 일탈시키며 시적 주제까지 관습적 의미로부터 탈골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의 시는 언어가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텍스트 내 숨기거나 허구화된 관념을 코드화시킨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현실이 현실로서 읽히지 않은 채 우리에게 새롭게 부가되는 낯선 힙들을 강화한다.「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도 마찬가지다. 이 시 역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거세시키며 관념들이 빚어내는 추체험 인식을 요구한다. 그의 시는 명료성을 유예하는 대신 의미를 다중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는 언어가 빚어 내는 미적 세계로 관습적 시 문법에 감금되어 있는 담화 방식을 깨뜨린다. 송찬호가 언어적 상상력으로 낯선 힘들을 강화는데 비해, 박형준은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의 불화를 드러내며 자아를 속박하고 있는 억압을 끊임없이 해방시키고자 한다.  자전거를 타고 방죽에 왔다. 들끓는 잎의 물결이 바퀴살에 갈라져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섬을 지고 있는 거북처럼 논 사이에서  파닥거리는 수금 방죽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 침례교도들이 차가운 물을 헤치며 소름이 돋는 몸을 움직여 세례를 받는다. (····················) 아침 방죽을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거닌다. 산책만이 살아 있는 유일한 형식, 누군가 모과나무 사이에서 바라본다면 좋으리라 - 박형준,「수금 방죽」부분  박형준 시의 균형은 자아와 시적 대상과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상호 교환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있다. 자아와 대상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 습합되고 있는 그의 시는 흥분이나 과장 대신 치밀한 질서를 계량하고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되살려 놓는다. 이완과 긴장을 번갈아 가며 시의 전면에 펼쳐는 그의 서정은 시적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불순과 모멸을 정화시킨다. 그의 세계관은 우울하면서도 힘이 있다. 자아의 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음울하게 드러나는 그의 시는 우리의 감성적인 에너지를 자극하며 자아의 내부에서 충돌하고 있는 정서를 스팩타클하게 보여준다. 남진우, 송찬호, 박형준의 시는 자아 내부에서 일고 있는 감정을 감춘 채 현실에서 유추된 세계를 언어 미학적으로 구조화시키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의 시는 현실의 세계가 거의 거세된 채 상상력과 추체험적 인식들로 채워지는 은유 구조를 갖는다. 비록 생경스럽지만 우리 시의 관습에서 벗어나 현대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는 우리 시의 영역을 한층 더 넓히며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할 것이다.  ===================================================================================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가을이 되면 소개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넣어 두었던 시가 이 작품이다. 이상국 시인의 이미지 자체도 쓸쓸하면서도 꽉 찬 느낌이어서 가을의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데 작품 중에서도 ‘국수가 먹고 싶다’는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국수가 국수답게 먹히는, 이런 가을 말이다.     제목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이 시는 국수 예찬론처럼 비치지만, 절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이 시는 울고 싶다는 말의 국수 버전, 즉 눈물 대신 삼켰던 국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을은 풍요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하늘은 깊어서 더 멀어 보이고 가을 노을은 울음처럼 붉어서 마음의 응어리를 꺼내 놓은 듯하다. 바람은 차가워 빈손은 더욱 허전해져만 가고 이래저래 허전한 마음이 더욱 황량해지는 때가 요즘이다. 그런 가을의 심사, 꼭 계절적으로 가을이 아니래도 지극히 가을스러운 심사에 대해 이상국 시인은 ‘허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삶은 언제고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울고 웃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시를 쓰게 된 날은 아마도 우는 날에 해당했나 보다. 시인은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게 되었다고 썼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식으로 마음을 다치고 보니 잘난 사람, 이긴 사람보다 조금 부족하고 역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인처럼 순박하고 속이 훤히 보여서 남을 속이지도, 잘 이기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 곁에서 뜨겁게 울고 싶다는 말을 국수가 먹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서글프게도 나이가 들면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눈물 대신 콧물을 흘리며 뜨거운 국수를 먹을 뿐이다.     
1630    詩는 시골이다... 댓글:  조회:3686  추천:0  2016-10-03
[ 2016년 09월 19일 02시 04분 ]     ‘거액’의 꼬깃꼬깃한 1위안짜리와 5위안짜리...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고독은  나를 물의 노예로 만들었다, 또한 나의 東쪽은  기다림이 완성된 후에도 다시 기다림을 계속하고  먼 곳으로 달아난 강은 바람에 숨을 보태온다  불온으로 떠도는 의자들, 대답 없는 것들로 가득한  거리의 桶들! 내리는 눈은 하염없이 沈降하며 모독의 밑동을 파고드는데 머나 먼 지붕으로부터  조용한 문으로부터 추억들은 주름을 늘인 채  바람을 맞는다, 자신의 가르침을 흰눈 위에 기록하는 밤 비틀거리는 생 하나가 나무를 부여잡고  그 가르침을 읽어보는 자정 너머, 자신의 거처를  환하게 지은 불빛이 득의와 유혹을 섞어 뿜으면 바람은 또 다시 눈보라를 일으키며 이마를 살핀다  峽谷에서, 串에서, 아직도 과거의 포로인 廢墟의 주변으로  눈은 그의 法을 얼음에 적어 넣고 수많은 밤의 방언들은 겁먹은 나의 東쪽 앞에 죽음으로도 이기지 못하는  발자국 소리를 낸다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奇蹟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海岸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쓸쓸한 노래들이 한적하게 귀를 적시기도 했었지만  내게 病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새들이 지저귀어 나무 전체가 소리를 내고 덮거나 씻어내려 하는 것들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어느 한 고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네  나 다시 잠에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전율을 가르며 갈기털이 다 빠져나가도록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 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정적만 남을 때까지  夢魂에게  저문 산 너머 바다로 열린 발자취마다에 눈동자는 반짝이고 달은 살아서 백사장을 비춘다 자는 이들이 살아 있음에 꿈에서 먹이를 더듬고  또 죽은 자들은 말의 무덤인 所聞에게로 가서  잔을 높이 치켜든다, 봄밤 푸르러 진저리 봄밤 푸르러  용서할 듯 사람들이 大路 패스트푸드店에 앉아 꽃핀 가지가 흔드는 소란들을 내려다볼 때  밤은 부두도 없이 艶聞들을 받아들인다 한순간 夢魂이여, 불온이 꿈 속에서  새벽 숲에 닿을 때까지, 꽃이란 꽃 천지에 맑아  운명에게서 針을 뽑아낼 때까지 술집은 푸르고 또한 그 경계에 있는 객기도 푸르러서  살아 있음이 죽은 자의 오만보다 절절하도록  저 저문 산 쪽에 별을 박아다오 희미하게 사라진 그 한 쪽에, 잃어버려 헤매는  그 한 쪽에 밤낮 없이 그리워 한 그 흔적으로  눈물 어디쯤에 생생한 눈동자를 반짝여다오 - 물의 긴 今生의 골짜기 -박주택 1. 들어가는 말  전통적으로 서사시가 민족 공동체적 가치나 종족 혹은 국가의 위대한 인물의 행위를 설화체의 이야기시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반해 서정시란 시적 자아의 정서나 내면적 세계를 주관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일컬어져 왔다. 따라서 서사시가 객관의 세계를 구체화시키며 민족 집단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면 서정시는 객관적 세계를 시적 자아의 내면에 용해시켜 세계를 자아화시키는 특징을 지닌다.  서정시(lyric)는 칠현금 현악기인 리라(lyra)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원래 악기에 맞춰 부르는 노래의 가사였다. 이로 인해 서정시는 소리나 리듬, 율조 등의 음악성이 강조되며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내면 정서를 표출하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또한 개인의 감정을 미감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양식상의 특징으로 인해 기법이나 장치 등과 같은 수사미와 함께 개성이나 독창성 등이 함께 강조되는 특징을 보인다. 서정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시적 자아가 보편적 체계인 ‘우리’에서 비로서 주체적인 ‘나’로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 근대 이후로, 이로부터 장르적 개념은 주제, 표현 기법, 관찰, 기억, 지식, 감정 등이 복잡하면서도 점점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시의 경우, 근대 문학기에 서구의 서정시가 수용된 이래 그 양상이 다양하면서 중층적으로 변모해 왔다. 김소월에서 보이고 있는 한국적 율조와 애상적 정서, 한용운에서 보이고 있는 심원한 철학적 사유와 유장한 가락, 그리고 김수영에게서 보이고 있는 시대적 현실에 대한 조응과 외면 투사 등에 이르기까지 서정시의 갈래만큼 그 모습이 복잡하게 이어져 왔다.  서정시는 서사시, 극시 등과 분류되는 장르적 개념인 동시에 다양한 형태나 내용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부르고 있는 민중시, 도시시, 해체시, 여성시, 생태 환경시 등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 서정시의 범주에 들 수 있다. 80년대 민중시의 경우만 하더라도 비록 시가 정치적 상황이 지닌 금제와 폭압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 하더라도 시인이 세계에 대해 욕망이나 정서 등을 현실과 대립시켜 세계와 주관적 정서를 교환하고 있다는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본질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도시시 역시 도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나 진보의 허구를 지적하며 현실 세계에 대해 시인의 해석적 관점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서정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수많은 담론을 포괄하면서 시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이 서정시는 60년대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불안 의식의 노정과 근대 시민 사회로의 희원 의지의 시, 70년대의 문화 재편성에 따른 가치 혼란과 산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체 해체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시 그리고 80년대 정치적 금제와 폭압에 항거했던 민중시 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거대 서사 담론의 붕괴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육체, 여성, 생태 등을 노래한 시가 중심 담론를 이루고 있다.  서정시는 인간 내면에 일고 있는 섬세한 성정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욕망의 동맹 관계를 형성한다. 비록 시대나 작품 생산자에 따라서 시적 내용이 다양할 수는 있지만 길이가 비교적 짧은데다 인간의 내면과 미적 형식을 깊이 있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정서적 가치를 제공한다.  이상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필자는 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었고 앞으로도 그 문학적 성과를 뚜렷하게 거둘 것으로 기대되는 몇몇 시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시에 나타난 정서의 특징과 그들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관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다만 서정시의 갈래만큼 그 시적 개성이 서로 상이하고 특이한 만큼 논의의 폭을 좁혀 시인의 작품론을 중심으로, 세계관이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시인들을 묶어 그 특징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2. 근대 공간의 체험과 자연 서정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에서 오늘날의 서정은 그 미학적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이제까지의 담론들과 부단히 저항하면서 그것을 다시 포괄해야 하는 실천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서정은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욕망을 제어하며 인간이 지니고 있을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해야 하는 윤리적 책무를 지고 있으며 날로 정보화되고 기술화되고 있는 사회에 삶의 방식들을 적응하도록 해야 하는 조정 기능의 부담도 안고 있다. 이미, 진보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은 깨어진 지 오래다. 탈근대에 접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행복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 대한 미적 체험은 자연이 지니고 영성(靈性)과 유기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해 주었다.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우고 훼손되고 있는 ‘주체’를 복원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이 미적 체험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의미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떠올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형성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오늘의 서정시는 이같은 흐름에 기대어 있으면서 80년대 거대 서사의 붕괴 이후 그 공백을 농밀하게 메우며 현실의 여러 문제를 맥락화시킨다. 김용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산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체의 해체를 걸걸하면서도 섬세하게 묘파한 적이 있는 그는 남도의 구성진 가락을 바탕으로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섬진강’이라는 구체적 현실 공간을 아름답고 맑은 서정으로 그려낸다. 그는 해맑은 감성으로 무구(無垢)의 세계를 노래하며 사유의 건강함 속에 자연에 대한 사랑과 삶의 예지를 유장한 어조로 시 속에 아로새겨 놓는다.  섬진강 끝 하동에 가 보라 돌멩이들이 얼마나 많이 굴러야  저렇게 작은 모래들처럼  끝끝내 꺼지지 않고  빛나는 작은 몸들을 갖게 되는지 겨울 하동에 가 보라 물은 또 얼마나 흐르고 모여야 저렇게 말없는 물이 되어  마침내 제 몸 안에 지울 수 없는  청청한 산 그림자를 그려내는지 -김용택「강끝의 노래」부분  김용택 서정의 특징은 사물과 자연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닌다는 데 있다. 그의 시는 우리를 따뜻하면서도 풍요로운 감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시적 체계를 이루는 공간이자 근대 공간인 ‘섬진강’을 주로 노래해 ‘섬진강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에게 자연은 삶의 원천이며 근원의 공간이다. 그의 대지적 상상력은 자연의 오염이나 황폐를 노래한 문명 비판류의 시와는 다르다. 그는자연이 본래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온기를 꾸밈없이 그려낸다. 우리가 잃어 버리고 있던 마음의 고향을 섬세하게 복원시켜 놓는 그는 산벚꽃이 희게 핀 모습에서 고독을 발견하기도 하며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들판에서 가슴을 적시는 애틋한 서러움을 발견한다. 돌멩이가 수억 겁의 세월을 구른 뒤 작은 모래로 빛나는 것, 혹은 수없는 물이 모여 제 몸 안에 청청한 산그림자를 그려내는 것을 발견해내는 그의 서정은 건강하고 맑디 맑은 이데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에 비해,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윽한 사유를 이끌어 내고 있는 안도현은 시의 서사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선명한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의 시는 어렵거나 애써 무거운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산문적인 형식을 띠면서도 함축적인 여운을 주는 주제를 선택해 장면적이면서도 정확한 의미 전달을 지향한다.「가을의 전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는 재미성이 표징을 이룬다. 저수지 물가에 배 한 척이 매어 있어 단풍놀이를 즐겨볼까 싶은 심산으로 주인집을 찾아 갔더니 고추를 매만지던 주인 아낙이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 하는 말에 그만 아내가 부끄러워 불이 붙은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이 시는 언어 유희적 요소가 시의 곳곳에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어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재미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타는 배와 사람의 배, 매운 고추와 사람의 고추 그리고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요?”에 함의된 해학적 의미 등은 시적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시를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를 제공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 안도현「겨울 강가에서」부분 강물이 세차게 뒤척이는 까닭을 ‘어린 눈발이 사그러져지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라는 그의 시각은 독특하다. ‘어린 눈발’을 의인화시켜 우리에게 연민을 이끌어 내며 무형의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그의 시적 방법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소하게 흘러만 가는 강물에서 따스하고도 넉넉한 모성성을 이끌어내는 그의 서정은 그윽한 사유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아니면 만나지 못하는 삶의 예지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오늘날의 시에서 쉽고 평이한 언어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그의 시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답하고 있는 시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김용택과 안도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주변을 맑고 결고운 서정으로 따뜻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의 시의 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이윤학의 시는 근대 체험과 과거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 안에 숨어 있는 황폐의 감정을 현동화(acturlization)시킨다. 시적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시키는 그의 언어적 인식은 대상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 대상과 자신이 구별하기 힘들게 만든다. 자아와 대상이 서로 교호하며 삼투하여 동일화를 이루는 그의 시는 사물이나 풍경을 막연히 그려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통해 대상의 뒤에 숨은 의미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알레고리의 시학’을 보여주는 그의 시는 상징과 지시 대상이 중층화되며 입체성을 이룬다. 이를 통해 그의 시는 소읍과 변두리 도시 공간을 주 배경으로 삼고 이와 연계하여 음울한 자아의 모습을 흐린 흑백 필름처럼 아련하게 보여 준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겨울, 낮은 키의 울타리를 넘어오는 사람. 이불을 둘둘 말아 가슴속에 구겨넣고 먼 곳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야 했다. 밤새, 우리의 죄는 먼 곳에 있고······ 뼈 속으로 스미는 빗물에  그 무엇도 지울 수가 없었다. 입술의 푸른 멍이 몸 구석구석으로 녹아들고 부르튼 열매들이 붉은 꽃을 피워냈다. 시퍼렇게 도는 피를 닮은 잎들, 문신들, -이윤학「사철나무」부분 시적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전이시켜 문맥화시키는 그의 시는 주관적 감정과 체험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인다. 추억이 주는 통점과 자아와 세계와의 불화를 조직화된 감수성으로 농밀하게 그려내는 그는 공허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내면의 공간에서 발화하고 발효된 이미지들을 하나씩 불러내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를 시의 전면에 유포시킨다. 그의 시는 김용택과 안도현의 시와 구별된다. 김용택과 안도현의 시가 세계와 동화하며 조화와 균형을 노래하고 있다면 이윤학의 시는 세계와 대응하며 세계에 끊임없이 위협받는 자아의 불안과 불화를 노래한다.  이윤학과 같은 시적 공간에 잇대어 있으면서 구수한 충청도 방언과 위트 넘치는 입담으로 어둡게 보일 수도 있는 삶을 밝고 명랑하게 그려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정록은 가늘지만 질긴 생명력을 사물에 불어 넣는다. 믿음직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그의 목소리가 시의 곳곳에 포진하면서 완성미를 갖추고 있는 그의 시에는 밝은 사랑과 진솔한 삶이 묻어 있다. 큰애야 이따 돌아갈 때에는  네 아비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수덕여관엘 가봤으면 좋겠다 가슴 속 빨랫방망이를 꺼내어 눈물 찍으신다  피서 와서까지 그러시냐고 투덜거리자  나는 여기와서도 피가 서는구나 하신다 앞산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도토리만한 소나기를 훑고 지나간다 한바탕 빨래를 마친 하늘에 된장잠자리들 가득하다  저것이 다 먼저 간 것들이여 한참을 올려다보신다 광목 홑청처럼 하늘이 팽팽하다 - 이정록「피서」부분 할머니가 영면하시 전 ‘가곡’라는 곳으로 피서를 가서 건너편 산의 도토리는 누가 따갈까 걱정하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군더더기 없이 기술하고 있는 이 시는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려냄으로써 시적 호기심을 유도해 낸다. 슬픔을 슬픔으로 그리지 않고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강한 페이소스를 드러내 보이는 그의 시는 시적 주제에 압도당하지 않는 그의 감성적 여과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을 통어하며 서정의 건강함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시는 시인의 체험과 음성이 짙게 배어 있다는 점에서 시는 곧 그 사람이라는 텍스트적 의미를 지닌다.  김용택, 안도현, 이윤학, 이정록의 시는 각각 산, 강, 농촌, 도시 변두리와 같은 근대 공간을 배경으로 자신의 서정을 표현한다. 그들의 시는 서로의 개성에도 불구하고 늘상 부딪치는 현실의 체험을 어려운 수사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시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미감 있게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잃어 버렸거나 혹은 잊어 버리고 있던 자연의 아름다운 서정과 원체험적 인식들이 진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미의식이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전자 정보화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일깨워 줄 것이 틀림없다.  =========================================================================     서녘 ―김남조(1927∼) 사람아 아무러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보이면 어때 바다 밑 더 파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감기는 걸        2015년 10월 21일 클래식 음악 채널들은 하나같이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떤 연주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유튜브에 가면 실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연주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마음을 흔들 정도로 웅장하고 애상적인 작품이다. 사실 웅장이라는 특징과 애상이라는 성격이 공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웅장이란 거대한 것이고, 애상이란 미묘함의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웅장과 애상이 제대로 만나면 우리의 마음을 아주 먼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 마치 상냥한 거인처럼, 아주 센 힘으로 우리의 영혼을 들어 우주적인 차원으로 쏘아 올린다. 조성진의 쇼팽 연주를 들을 때 떠오르는 우리 시 역시 웅장하고 애상적인, 상냥한 거인의 것이다. 김남조 시인은 많은 시인들에게 정신적 지주와 같은 시인이어서 상냥한 거인이라고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다. 그가 10번째 시집에 수록한 ‘서녘’이라는 작품은 사람의 만남과 이별, 삶과 사랑과 죽음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아우르고 있다. 이 시는 ‘아무거나 뭐 어때’같이, 무심한 어조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시에서의 ‘어때’ 부분은 꾹꾹 참아가면서 읽어야 한다. 어둠과 아픔을 ‘어때’로 표현한다는 것은 고통에 무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언젠가는 함께할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에 이 시만큼 위로가 될 시도 없다. 이 시는 말하고 있다. 힘든 어둠의 터널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웃는 너와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다.       
1629    詩란 주사위 던지기와 같다... 댓글:  조회:3829  추천:0  2016-10-02
[ 2016년 09월 08일 09시 01분   조회:1600 ]     구불구불한 숲길을 공중에서 바라보니 마치 긴 용과 같은 복주(福州) 금우산(金牛山) 숲의 ‘푸다오(福道)’ 길   가을입니다. 풍요에 계절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저는 망각의 계절, 쇠퇴의 계절이란 생각이듭니다. 며칠 가을비가 내리네요. 시 한 편 생각나지 않나요?  옛 날의 추억들이............. 왜 비가 오는걸까요. 이유가 뭘까요.     가을비      /     하지연   창밖에 배롱나무 한그루 온 몸이 비에 젖는다 하늘은 창백해지고   . . . . -------------------------------------------------------------       길              윤 동 주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거울 속의 길      -윤동주의 시 「길」에 대하여      박남희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거울과 길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윤동주를 부끄러움의 시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동주 시의 거울 이미지와 연관이 있고, 반면에 그를 저항시인으로 보는 것은 그의 길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늘 자신을 내성적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이 땅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한 시인이고,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지닌 시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거울과 길은 윤동주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거울과 길의 이미지가 서로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으로 존재하면서 서로에게 발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윤동주의 서시를 보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하늘’은 일종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하늘이라는 거울을 보면서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기를 다짐해 보는 것이다. 윤동주 시에서 거울 이미지의 대표적인 것은 ‘우물’과 ‘하늘’인데, 우물이 자의식적 거울이라면 하늘은 종교적, 윤리적 거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시인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걸어갈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즉 거울로 인하여 시인은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길을 그냥 식식하게 걸어가지 못한다. 그는 길을 가다가 다시 거울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자신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길은 늘 거울이 필요한 길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시에서 길과 거울은 한 몸이다. 따라서 여기서 분석해 보려는 윤동주의 「길」은 일종의 ‘거울 속의 길’인 셈이다. 우선「길」의 첫 연을 읽어보자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1연을 보면 윤동주의 ‘길’은 결핍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본래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무언가 어디다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그가 걸어온 길을 다시 더듬어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시대적인 상황과 결부시켜보면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잃어버린 조국’에 연결되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그런 정황은 보이지 않고 다만 무언가 어디선가 잃었다는 것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의 6연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라는 구절로 미루어보면 시인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나’를 찾기 위한 과정임이 드러난다. 시인은 결국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걸어가는 길이 “풀 한포기 없는” 길이라는 점에서 그가 걸어가는 길 자체가 척박한 길이고 결핍으로서의 길이다. 그의 길은 2연에 보면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있는 돌담길이다. 여기서의 ‘돌’은 ‘풀’과 대비되는 이미지로 척박한 상황을 암시해주는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돌담으로 이루어진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걸어가는 길이 무언가 폐쇄된 상황과 끝없이 이어져 있는 길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김현자는 윤동주의 「길」을 해설하는 자리에서 돌담을 경계선으로 해서 ‘담 밖의 나’와 ‘담 안의 나’, ‘현재의 세계’와 ‘잃어버린 세계’,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로 양분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이 언뜻 보면 수긍이 가는 것도 같지만, 엄밀히 따져서 읽어보면 잘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선 돌담을 경계선으로 해서 ‘담 밖의 나’와 ‘담 안의 나’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담 안에도 ‘나’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시를 읽어보면 ‘나’는 담 밖의 길 위에 있을 뿐 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으리라는 암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디까지나 시적 상황은 담 밖의 길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시인이 찾고 싶어하는 ‘나’는 길을 한참 더듬어 가야 도달하게 되는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를 찾기 위한 것이다. 김현자는 여기서의 “담 저 쪽”을 폐쇄된 담장 안쪽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내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담장 안쪽의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보면 시인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고 하여 소망이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다음으로 ‘현재의 세계’와 ‘잃어버린 세계’의 대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의 5연을 보면“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돌담을 더듬어 가다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담 안쪽의 ‘잃어버린 세계’로 가기 위해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담은 막힌 세계의 경계이면서 시인이 걸어가는 길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담을 더듬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시인은 길을 가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담을 더듬어 눈물을 지으면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물론 여기서의 ‘하늘’은 이 글을 초두에서 밝힌 바 있듯이 ‘거울’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하늘이 푸른 것을 보면서 그것을 “부끄럽게 푸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늘이 부끄럽다는 것은 즉 자신이 부끄럽다는 의미와 동의어로서 하늘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즉 푸른 하늘에 비친 자아는 푸르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자아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상적인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현자가 담을 경계로 ‘현실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로 나눈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쇠문으로 굳게 닫힌 공간이 이상적인 자아가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시의 4연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해있는 길은 삶과 죽음이 끝없이 순환하는 인생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인의 부활신앙과도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의 인생을 상징하는 ‘길’은 담 안쪽과 두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시인이 여기서 걸어가는 길은 ‘현실적 자아’가 ‘이상적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고, 결핍된 현실 속에서 담 저쪽 편 길에 있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어찌 보면 여기서의 돌담 역시 암담한 현실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결핍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고, 하늘이라는 이상적인 거울과 돌담이라는 현실적인 거울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끝없는 인생길을 가는 것이다.  =====================================================================================     주사위 던지기 ―신해욱(1974∼) 주사위의 내부에는 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 이런 방에서 하녀로 일하며 정성스레 걸레질을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 동생의 그릇은 너무 아름다워서 물밖에 담을 수가 없고 나의 사념은 산성액에 녹아 기포가 되어 올라오고     모서리는 모서리는 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방수가 되기도 하지.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 진짜 복소수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야기를 잃은 사물들아, 그러니 근심을 접고 이리 와봐. 여기가 아주 좋아. 화자는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보는 중일 테다. 주사위는 여섯 면으로 이루어졌으니 모서리가 열두 개, 각각의 면에는 한 개에서 여섯 개까지 점이 찍혀 있다. 던져 올린 주사위가 떨어진 뒤 윗면에 보이는 숫자의 크기로 승패를 가르는 게 주사위놀이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 점칠 수 없고,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할 묘수도 없다. 그저 우연에 맡길 뿐이다. 주사위라는 작은 육면체에서 우연의 무변세계를 보며 화자는 ‘주사위의 내부에는/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감탄한다.     우리는 이미 던져진 주사위일까. 거기서 거기인 몇 개 안 되는 숫자로 운명이 결정되는데, ‘모서리는//모서리는//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복불복(福不福)으로 저마다 담겨진 운명의 그릇대로 살 수밖에 없을까. 곡절 많은 삶을 사는 기구한 사람들은 사람의 운명을 주사위놀이하듯 한 신에게 따지고 싶을 테다. 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주사위 한 번 던진 것으로 결판 짓다니. 삼세판으로 합시다!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진짜 복소수가 나올지’ 모른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아우른다. 허수라는 알지 못할 체계에 실수라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는 복소수! 신해욱은 관념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듯 갖고 노는 시인이다. 마지막 두 연의 어조를 보라. 얼마나 살가운지! ‘여기’는 주사위의 내부, 복소수의 세계며 신해욱의 시다.        
1628    詩란 100년의 앞을 보는 망원경이다... 댓글:  조회:3815  추천:0  2016-10-01
  시간을 잘 읽어야 문학을 안다 코끼리와 고래의 줄다리기 시합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어린 시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힘겨루기와 관련시켜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시킨 이야기다. 필자는 이 생각이 날 때마다 색다른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 고래와 코끼리가 누리는 시간 경험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이다. 고래와 메뚜기, 코끼리와 멸치, 원시인과 문명인, 일제 강점기의 우리 선인들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각각 그 시간 경험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선다.  이러한 상상이 남들에게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하나의 꼭 같은 사실에 대해 이들은 각각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상상이 발전하기 시작하면 좀더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태극기'라는 한 상징물을 놓고 볼 때 고려시대의 왕건, 조선시대의 세종대왕, 일제 강점기의 김구, 채만식의 [논이야기]에 나오는 해방공간의 '한생원', 월드컵 응원의 그 열정을 세계에 떨친 '붉은악마'들은 각각 이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통시적인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이고, 또 공시적 시간의 경우도 있다. 저 아프리카의 부시맨, 외국의 공사 현장에서 땀 흘리는 우리의 기술자, 노동자의 권익을 외쳐대는 사람들에 있어서 태극기는 똑 같은 태극기일 수 없다. 이렇게 동시대의 시간도 그 인식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시대의 문학사적 사실도 이와 마찬가지로 바라보는 사람마다 그 인식의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갑자기 오늘 이 자리에 현신하여 스티븐 호킹과 대화를 나눈다면? 또는 신사임당이 현신하여 요즘의 패션모델과 만난다면? 이런 상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상상들이 문학 속에서는 얼마든지 실현이 가능하다. 어느 과학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명이 하루밖에 안 되는 하루살이가 30,000 날이나 사는 인간의 일생을 조사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말은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100억 년 이상을 사는 별들의 일생을 조사할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이야기인 즉 이렇다. 머리가 매우 좋은 하루살이가 그들 수명의 3만 배를 살 수 있는 인간의 일생을 조사하려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장에 가서 어린 아이에서부터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연령대별로 조사하여 정리하면 하루라는 시간이지만 인간의 일생을 그런 대로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100년도 못 사는 인간도 그 억 배를 더 사는 별들의 일생을 충분히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별들이 많은 은하계에 가서 별들을 나이별로 조사하여 정리하면 별들의 일생을 조사 정리할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우주의 생성 원리도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단편 소설에서 인생의 한 단면을 그리되 그 단면이 그 인생의 전부를 내비쳐줄 수 있는 단면을 그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모두 시간에 관계된 이야기들이다. 문학이 시간 예술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문학에서는 시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가 있다. 작가 역량과 관련되는 시간 인식 문제, 소설이나 시에서 하나의 기법처럼 이야기되는 시간 착오, 그 외에 문학의 배경에 해당되어 그 속에 반영되는 새벽, 아침, 오전, 한낮, 오후, 저녁, 밤, 한밤중과 같은 하루 중의 시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문학 정신'과 관련시킬 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간 인식 문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문학을 잘 하려면 시간을 잘 읽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특히 소설일 경우에는 시간을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작가의 역량이자 작가 정신이기 때문이다. 시간 인식의 문제인 시간 읽기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이는 작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시대와 사회의 관심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역사 인식, 세계관, 가치관 등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때 7살 전후의 나이로 길거리를 헤매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이 이제 좀 살만했다 싶더니 외환위기 때에는 55세의 나이로 실직을 당하여 길거리에 나앉게 되어 그 자식들을 결혼도 시켜보지 못한 채 한숨만 쉬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을 수 있다.  작가는 이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가난과 시련의 대물림 같은 것을 읽어내는 것이 시간 읽기라고나 할까. 이런 경우는 하근찬의 [수난이대]를 예로 들 수 있다. 아버지 박만도가 일제에 징용되어 비행장 공사의 노역을 하다가 부상을 당하고 아들 진수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는 가족 수난사는 가족 문제의 차원을 넘어 민족 문제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또 정년을 맞아 퇴직금으로 노후를 편히 지내려던 사람이 그 퇴직금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자녀들이 한창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지만 그 기반이 든든하지 못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식의 부도 방지책으로 퇴직금을 내놓았다가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는 시간 읽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간 읽기는 운명과의 싸움같은 것으로 연계하여 읽어나가는 방법도 있다. 우리나라는 태풍이나 큰비로 인해서 재해를 겪을 때가 많다. 이 때에 재해의 모습을 보면 하나의 결과적 뼈다귀만 보이겠지만,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 개인의 과거와 미래를 바탕으로 쳐다보면 또다른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냥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에 거듭 실패한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여 이제 그 결실을 보는가 했더니, 그만 비바람의 위력 앞에 처참하게 무너져 버리는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문학이란 결과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는 바로 이런 시간 읽기에 기초하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이다. 이 시는 현실적 시간을 거부하고 과거의 시간을 추구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적인 시간을 과거의 순수한 시간을 빌어서 읽어내고 있다. 현실 거부의 한 방법으로 과거로의 회귀를 소망하고 있다. 현실의 부끄러운 시간과 과거의 순수한 삶은 서로 별개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시인에 의해 두 시간이 만나서 현실의 모순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과거로의 시간 읽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 읽기는 과거로 읽는 방법도 있고, 또 미래로 읽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 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는 작가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학의 일반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시간을 만나게 하는 것은 분명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두고 '그 시대의 산소(O2)'나 '민감한 렌즈'로 비유하거나 '특출한 눈을 가진 존재'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나 작가는 때로는 현미경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100년을 뛰어넘어 쳐다볼 수 있는 시간 망원경이기도 하다. ====================================================================================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서안나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무대의 조명을 꺼버리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추억 속에서 언제나 데뷔를 시작하는 가수랍니다.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리던 당신의 젊은 손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내 노래에 맞추어 박자를 짚어내던 손가락의 짧은 주파수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내 귀에서 한다발의 악보들을 빼내어 보여드릴까요. 내 눈동자 속에 담겨진 당신의 첫사랑의 곡조들을 연주할까요. 환호와 화려한 무대조명이 아직도 내 꿈속 구석구석을 밝게 비춰요.   거품처럼 흘러다니던 악극단시절 난 노래 한 소절이면 배가 불렀어요. 사랑보다 노래가 더 간절했지요. 간절한 것들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요. 넓은 무대에서 당신과 난 하나였지요. 무대에는 언제나 꽃들이 피고 서러운 계절들이 성급하게 몰려들어요. 난 더 이상 꽃이 아니듯 당신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내 눈가의 주름마다 당신의 추억들이 접혀져 있어요. 당신의 기억이 언제나 나를 노래 부르게 해요. 아직도 화려한 데뷔를 꿈꾸는 풋내기 가수랍니다. 나를 비웃지 마세요. 그 절정의 끝에서 나는 노래합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의 절정이지요.        일반적으로 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 기억과 체험과 상상력을 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은 우리의 삶을 통시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재라는 스크린에 과거를 새롭게 환기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현재적 삶이 고달프고 불안할수록 인간은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과거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서안나의 시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는 현재라는 거대한 망각의 늪 속에서 쉽게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새롭게 환기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 ‘가수’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 ‘시인’이 숨어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가수가 되어 관객인 ‘당신’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되짚어 보고 있다. 하지만 시적 화자인 ‘가수’는 현재 관객인 ‘당신’으로부터 잊혀져가는 가수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수는 당신에게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언제나 관객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데뷔를 시작하는 가수이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새로워지고 싶어하는 자기갱신의 태도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사랑보다 노래가 더 간절”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간절한 것들은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급하게 몰려드는 “서러운 계절”의 망각이라는 폭력을 딛고  “언제나 당신의 절정”이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시가 더 이상 전위가 아닌 시대, 더 이상 밥도 꽃도 아니 시대에 살고 있는 시인은 슬프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이면서 시인인 ‘나’는 나를 쉽게 망각해버리려는 시대에 절규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수이며 시인인 ‘나’를 당신의 절정에 서 있게 해달라고, 망각 쪽으로 기억의 채널을 너무 쉽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가수가 된 자들은 누구나 “거품처럼 흘러다니던 악극단시절”이 있게 마련이다. 시인이 이 시에서 그 시절의 아픔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이미 머나먼 기억이라는 시간의 거울 속에서 굴절되어버린 ‘변해버린 자아’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가수가 더 이상 꽃이 아니듯, 이 험난한 시대에 시인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가수가 ‘꽃’으로 상징되는 외모보다는 ‘노래’에 그 본질을 두고 있듯이, 시인 역시 꽃의 화려함보다는 ‘시’라는 언어에 최종적인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물신화된 시대가 시인을 비웃을지라도 시인은 늘 시대의 ‘절정’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안나의 시는 화려함이라는 현대적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시인의 반성적 내면을 새롭게 전경화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땅의 시와 시인이 더 이상 시대의 배경으로 우두커니 머물러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1627    詩는 가장 거대한 백일몽 댓글:  조회:3977  추천:0  2016-10-01
나의 시 나의 방법-황폐한 현실에서 불안한 몸으로  이상옥(시인 * 창신대교수)  나의 시 쓰기는 근자에 들어서 변모를 보이는 조짐이다. 첫시집 (1990)과 2시집 에서는 시의 호흡이 다소 거칠었던 것 같다. 그것은 황폐한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안(詩眼)이 충혈되어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꿈꾸는 애벌레는  흙냄새를 맡으면서도  푸른 공기를 마시고  슬픈 오늘보다  내일을 산다  땅을 밟고 다니지만  마음엔 나래를 달고  꿈꾸지 않는 애벌레는  부활 없는 영혼,  멸망하는 짐승처럼  오늘을 산다  나뭇잎에만 앉아 보아도  알 수 있지  풋풋한 내음이  속살까지 스며들고  새 눈을 달게 되지  별이고 싶고  꽃이고 싶고  오, 파란 꿈  꿈꾸는 애벌레만  내일을 산다  흙에 몸을 기대지 않고  마음에 나래를 달고  나비의 눈을 달고  -  이 때 나는 '황폐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을 이슈화하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낭만적 의지를 동반한 역설적 구조나 변증법적 통합구조를 선호했던 것 같다.  인용 시는 94년에 시문학사에서 출간한 2시집 표제시다. 문덕수 선생은 이 시가 "지상과 하늘, 상향(上向)과 하향(下向), 현재와 미래, 현실과 꿈이라는 구조 속에서 뭣인가의 강력한 메시지, 즉 현실지향과 이상지향의 생명 운동을 보여준다. 단선적(單線的) 메시지가 아니라, 상반된 두 세계를 통합하려고 하는 복선적(複線的) 메시지 속에는 갈등, 아픔, 이율배반(二律背反), 모순이 있고 또 그것이 생명의 실상이다. 이 시가 지닌 두 세계는 단절되어 있지도 않고, 또 한 세계를 포기하거나 부정하고 다른 한 세계만을 추구하는 선택 구조도 아니다. 흙냄새와 공기를 공유하려고 하며, 땅과 하늘을 통합한 하나의 세계에서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단절과 연속, 선택과 통합, 일원론(一元論)과 이원론(二元論)의 갈등과 긴장을 지닌 역설(paradox)의 구조요, 변증법적 구조라고도 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런 점에서 이상옥(李相玉) 시의 구조는 변화 없는 반복이나 형식적 내왕(來往)이 아니라 모순·상반된 두 인력(引力)의 방향이 부딪쳐 배척하고 다투면서 통합하려고 하는 제3의 명제(命題)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미완의 오벨리스크*                   김연숙 불꽃나무 타오르던 나일의 동쪽 아스완 달아오른 화강암의 땅 채석장 터엔 미완의 오벨리스크 누워있다 쏘아지지 않은 화살 깨어나지 않은 태양왕국의 너무 깊은 꿈 그 미끈한 옆구리를 한 발 한 발 걸어가 본다 치솟을 수 있는 정점까지 올라가 본다 41.7미터의 상향의지 ―땅과 하늘을 통교하리라 낯선 제국의 한가운데 볼모처럼 서 있는 고왕국의 화살탑들 제국의 힘으로도 반출하지 못한 여기, 가장 거대한 백일몽 매운 꼭지점을 향해 힘 모으던 대지의 심장박동이 환영처럼 증발하는 이 한낮 낙하해도 좋다 잠든 네 위에 서성대며 기념 촬영하는 이 삶의 관광객 우뚝 솟은 네 발치에 피꽃 튀는 한그루, 불꽃 되어 타고 싶다 일어서라, 장엄한 꿈의 증거 수천 년 누워만 있던 너의 직립을 이제 그만, 보고 싶다 *方尖塔             ―『문학사상』(2004. 2)       나는 김연숙의 「미완의 오벨리스크」를 읽으면서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아득한 신화를 생각했다. 거대화되고 신격화된 물질문명이 신화를 대신하고 있는 이 시대에,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태양을 향해서 쏠 꿈의 화살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현대인들이 잃어버렸던 ‘오벨리스크’라는 장엄한 꿈의 화살을 재발견해 내고 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세워놓은, 끝이 뾰족한 사각형 석탑을 말한다. 이 유물은 본래 서방세계가 아프리카를 식민화하기 위해서 약탈경쟁에 나섰던 16세기 이전에는 대부분 이집트에 있던 것들이었는데, 서구 열강들의 약탈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아마 이들 나라들은 오벨리스크를 자국의 주요 요충지에 세워둠으로써, 태양처럼 빛나는 권력과 영광을 이루려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벨리스크’는 승리와 영광과 최고 권력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약탈과 식민지 정책으로 얼룩진 근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이집트 남부 나일강 동쪽 아스완 채석장터에 미완인 채 관처럼 누워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잃어버렸던 고대인의 꿈과 물신화된 현대인들의 욕망이라는 엇갈린 단면을 읽어내고 있다. 이 시의 2연에서 시인이  ‘오벨리스크’를 “쏘아지지 않은 화살/ 깨어나지 않은 태양왕국의/ 너무 깊은 꿈”으로 읽고 있는 것은, 이 시가 라는 역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아스완 지역에 있는 이 오벨리스크가 완성되었더라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오벨리스크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미완의 것이기 때문에 세계 열강들에 ‘볼모’로 잡히지 않은 채  “제국의 힘으로도 반출”하지 못한 “가장 거대한 백일몽”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과거에는 위대한 태양신의 상징이었던 것이 지금은 한낱 관광 상품으로 전락했지만, 시인은 미완의 오벨리스크를 통해서 현대 물질문명이 이룩해 낼 수 없었던, 아직 이룩되지 않은 인류의 미완의 꿈을 읽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꿈이란 ‘완성’보다는 ‘미완’이기 때문에 더 값어치가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완’이야말로 그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서의 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벨리스크’가 단지 고대의 잃어버린 꿈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의 ‘오벨리스크’는 꿈을 잃은 현대문명과 현대인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시인 자신의 표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꿈을 잃어버린 채 아스완 채석강에 수천 년 동안 죽은 듯 누워있는 ‘미완의 오벨리스크’인 자신과 현대인들을 향해 외친다. 이제 그만 일어서라고,  너의 직립이 보고 싶다고.          
1626    詩人은 존재하지 않는 詩의 마을의 촌장 댓글:  조회:4126  추천:0  2016-10-01
'상상력'을 알면 문학이 보인다 어느 여기자가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온 북한의 아주머니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가슴과 배가 보이는 헐어빠진 셔츠를 보면서 본격적인 질문을 하다말고 얄궂은 생각으로 질문을 던졌다.  - 혹시 배꼽티라는 말을 들어 보셨어요?  "남쪽에서는 배꼽티를 입습네까?" - 그러면 배꼽티를 아시는군요.  "아니라요." - 그러면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으뜸가리개, 버금가리개, 또 배꼽가리개, 그런 거 아닙네까?" -예에? 배꼽가리개라니요?  "아 글쎄, 남쪽 아이들이 별 이상한 것들을 다 만들어내지 않습네까? 그래서 배꼽을 가리는 것을 만들어 입나 보지요. 뭐?"  그 여기자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겨우 웃음을 참은 기자는 그 아주머니에게 배꼽티에 대해서 남쪽의 젊은 여자들이 배꼽이 보이게 짧게 만들어 입으며, 요즘 한참 유행하고 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잘 산다고 하는 남쪽아이들이 왜 그렇게 짧게 입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이다. 북한을 예로 들어 비하하듯이 꾸며낸 것이 못내 씁쓸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그 사람의 능력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상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는 독서를 능가할 것이 없다. 영상매체에서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을 직접 보여주고 들려주기 때문에 애써 두뇌활동을 할 필요가 없지만, 문학 작품을 읽고 있으면 모습과 소리를 머리 속에 그려나가는 두뇌활동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 작품에서의 상상력은 언어적 상상력에 기초한 것이다. 또 문학 작품 그 자체가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다. 다만 그 상상력의 근원이 얼마나 치열한가에 따라서 작가 정신이 '안이하다'거나 '치열하다', 혹은 '느슨하다'거나 '치밀하다'는 말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상력은 그 종류가 무수히 많다.  ·현실적 상상력 -  비현실적 상상력  ·일상적 상상력 -  비일상적 상상력  ·시각적 상상력 -  청각적 상상력 ·여성적 상상력 -  남성적 상상력 ·노년적 상상력 -  유아적 상상력 ·과거로의 상상력 -  미래로의 상상력 ·가까운 곳에 대한 상상력 -  먼 곳에 대한 상상력 이러한 상상력은 우리들이 생각만 하면 헤아릴 수 없이 열거할 수 있다. 쉬운 예로 한 쌍이 남녀가 팔짱을 끼고 낙엽 지는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통속소설적 상상력'의 눈으로 쳐다보면 어떤 모습으로 보이겠는가. 이와 반대로 '순정적 상상력'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어떤 관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상상력의 차이가 바로 아름다움의 차이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 과정과 관련시켜 생각할 때 필자는 문학을 '여로(旅路), 만남, 의미'로 생각한다. 여로란 시간적 여행과 공간적 여행을 뜻하는 것이며, 만남은 서로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란 만남으로 형성된 관계의 가치를 뜻한다. 그러나 의미는 문학 작품에서는 생략되거나 축소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독자 개개인들이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작품 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여로란 단순히 여행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상상력이다. 따라서 시간적 여행은 현재만이 아닌 과거로의 여행이거나 미래로의 여행까지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공간적 여행은 현재의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을 상상하는 여행까지 생각할 수 있다. 우리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의 한 순박한 농촌 사람의 마음 속을 여행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방안에 앉아서 공간적으로 머리 떨어져 있는 물소리 시원한 바닷가나 산골짜기에 발을 담그고 첨벙대는 상상으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여행의 의미는 만남이다. 무엇과 만나느냐,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의 의미는 달라진다. 우리들은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설레면서 왠지 모를 즐거움에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진다. 이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찌든 사람이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하고, 술자리 친구의 과거 경험 속에 빠져 들기도 하고, 나의 공간에서 전혀 경험해 볼 수 없던 새로움과 만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팔이나 다리 한 쪽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 사람들은 '불쌍하다'거나, '어떻게 도와드릴까'를 생각하겠지만 [수난이대]의 작가 하근찬은 박만도와 박진수라는 아버지와 아들로 만나게 만듦으로써 우리 민족의 비극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상상력의 한 예라 할 것이다.  소꿉놀이를 할 때 실재 사물이 아닌 약속된 사물로 대신하는 것은 상호 약속이며, 약속한 사람들만이 상상력에 의해서 놀이를 진행한다. 이러한 소꿉놀이는 연상 작용을 통해서 하나의 작은 세상을 이루게 된다. 이렇듯 상상력은 무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며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라 할 것이다.  작가 정신은 이러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신선한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유별난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치열하다'거나 '치밀하다'는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그 무엇'과 만나는 것으로 끝나지만 시인이나 작가는 '그 무엇'과 만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난 것'을 바탕으로 또다른 만남(상상력)을 통해 또다른 세상을 보여 주고자 한다. 보통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들을 시인이나 작가는 상상력의 고리를 통해 서로 관계 지우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상상력이 바로 작가의 능력이자 작가 정신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건강한 정신에서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   존재하지 않는 마을                      김성규 처녀의 시체가 호두나무에서 내려진다 눈 위에 눕혀진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빛난다 이듬해부터 가지가 찢어지도록 호두가 열린다 나일론 줄에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뱃속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죽어간 것을 사내들은 알고 있다 노인들은 손바닥에 검은 물이 들 때까지 마당에 앉아 호두껍질을 벗긴다 어두워지면 검은 손이 나타난단다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이 손바닥을 바라본다 빈 하늘을 쓸어내리는 바람 소리 호두알처럼 영근 아이들은 밤마다 계집애들 이야기를 한다 다 익은 처녀들을 찾아다니는 수염 검은 아이들 폭설로 하늘이 하얗게 반짝이는 날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호두나무가 쓰러진다 참새 발자국만 한 눈송이 지상에 웅크린 지붕을 밟고 가는 날 아무도 나무 위의 세상을 묻지 않는다         -『현대문학』(2004. 4) < 단평>   김성규의 「존재하지 않는 마을」은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구조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의 존재성에 천착하고 있는 시이다. 이야기의 구조만 보면 아이를 밴 처녀가 호두나무에서 목매달아서 죽은 후 그 호두나무에는 호두가 주렁주렁 열리고, 노인들은 손바닥에 검은 물이 들 때가지 호두를 까면서, 어두워지면 검은 손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자라서 밤마다 계집애들 이야기를 하면서 처녀애들을 찾아다닌다. 언뜻 보면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이 시는 ‘애 밴 죽은 처녀’로 상징되는 호두나무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호두나무 열매, 호두껍질을 벗기면서 검어지는 노인의 손과 쓰러진 호두나무를 덮고 가는 흰 눈이 상호 유기적인 상상체계를 이루면서, 인간의 욕망을 순환적인 구조로 형상화시켜서 보여준다.    이 시에서 노인이 손바닥에 검은 물이 들 때까지 호두껍질을 벗기는 행위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검어지는 욕망의 손과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세속에 물들어가면서 검버섯이 피어나는 노인의 손과 인간의 내면에 숙명적으로 깃들어있는 욕망의 그림자를 ‘검다’는 시각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두워지면 검은 손이 나타난단다”는 노인의 말은 ‘마음의 어둠’과 ‘시간적 어둠(저녁)’의 이중적인 의미를 암시해주는 동시에, 사랑이나 욕망 때문에 죽은 처녀가 호두나무가 되어 호두알 같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은 또 다시 자신의 욕망을 따라 계집애들을 따라다니게 된다는, 인간 생명의 본질적이며 순환적인 생리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결말을 보면, 결국 죽은 처녀의 표상인 호두나무는 쓰러지고 그 위로 눈이 덮이게 됨으로써 나무의 존재성은 소멸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 시의 제목을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시인이 호두나무로 상징되던 마을에서 호두나무가 사라짐으로써 마을이 사라진 것과 같다는 제유적 인식을 했을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욕망의 순환구조 속에서 지워지고 없어지는 무화된 존재성에 천착해서 이런 제목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른다. 이 시는 근본적으로 모호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결론으로 우리를 선뜻 인도하지는 않지만, 겨울에서 그 다음 겨울로 이어지는 차가운 현실 속에 눕혀져 있는 호두나무의 존재성을 통해서 우리가 간과해버리기 쉬운 인간적 삶의 비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1625    詩人은 오늘도 詩作을 위해 뻐꾹새처럼 울고지고... 댓글:  조회:4304  추천:0  2016-10-01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시인                         성춘복시인 탐방 (문학과 창작 7월호) 90년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가뭄이 온 국토를 메마르게 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땅이 말라가고, 하늘이 말라가고 사람들의 마음마저 비틀어져 가고 있다. 누군가 건들기만 하여도 폭발하기 쉬운 날들이다. 아침 방송을 들으니 민노총에서도 폭발 직전이란다. 항공기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고, 민노총 산하 연맹에서도 자신들의 목청을 높인다고 한다. 물론 노동자는 정당한 보상은 받아야할 것이다. 다만 온 산하가 목말라하는 지금의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시인과 통화하고 날짜를 잡은 것이 하필 오늘인 것이다. 아침에 다시 한 번 시인과 시간 약속을 하였다. 3시까지 시대문학 편집실로 찾아 뵙기로 한 것이다. 시대문학이 혜화동로타리에 위치한 탓으로 종각에서는 집회가 열리는 대학로를 거치지 않고 비원 쪽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러나 한 쪽이 막히면 다른 한 쪽도 비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 느리게 가는 택시 안에서 시인과 이야기할 몇 가지를 추스리며 조급함을 달랬다. 사실 성춘복 시인은 그 전에도 몇 번 뵈었었고, 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신 탓으로 잘 알려져 있어 외면적으로는 특별하게 문의할 내용이 없어 보였다. 시인이 알려주신 주유소와 파출소 사이를 따라 20미터를 올라가자 소극장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출판사가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다시 전화를 드렸더니 극장 앞 건물 2층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마침 손님이 계신 관계로 책이 쌓여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시인과 마주 앉게 되었다. 시인께서 먼저 많이 본 얼굴이네 하시면서 낯설음을 씻겨주셨다.    시인과의 대담은 몇 가지의 질문과 시인의 답변, 그리고 시인의 최근 근황에 대한 순서로 이어졌다. 시인은 최근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시인은 그 동안 세계 방방곡곡 가보지 않는 나라가 별로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시인에게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체험과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여행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시인은 여행을 하면서 그냥 일반적인 체험 외에도 꼭 들려보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 나라의 유명한 작가들의 생가나 집필실 그리고 살았던 곳들을 방문하는 데, 무엇보다도 부러웠던 것은 단 6개월 밖에 하숙을 하지 않았던 곳마저도 잘 보관하여 팻말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고인이 된 작가의 안경이나 옷 및 서적 등이 너무 잘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시인이 자주 방문하는 곳은 시인들의 무덤이란다. 온 국민들에게는 문학의 현장이 될 뿐 아니라 유적지로도 발전하고 있단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실정은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은 늘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시인은 생가보전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고, 문학박물관과 문학도서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문화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누군가 앞장서서 추진해야할 것들이라고 말씀 하셨다.   오지에서 오지의 더욱 깊숙한  하늘은 둥글고 해 하나 중천에 떨어질 날이 없지만 빛으로 어두워진 내 눈은  사방이 무너져 황홀을 볼 수가 없다 빛이여 눈이 따가운 언제나의 대낮에 안락의 그림자를 흘려 어두움을 내리고 초라한 옷자락에도 선풍이 일어 고목도 바람의 갈대처럼 흔들게 하라 나그네여 가시일 줄 모르는 빛의 한복판, 타오르는 오지에 내가 성장하듯 모든 것을 소생케 하고 빛을 거두어 나의 정원을 떠나게 하라. -제1시집 에서 1965 이 시를 읽으면서 여행이란 의식과 인연을 떨어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기억해본다. 시인은 1936년 경북 상주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부산에서 성장하셨으며 55년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공부를 하셨다. 시인이 3학년 때 신석초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을 마쳤으며, 25세인 60년에 시 추천 완료하고 문단에  정식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2년에 걸친 3회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아주 젊은 나이에 문단에 나오셨고, 이후 40여년의 문단생활은 그리 흔한일은 아닐 것이다.  63년에는 이형기, 문덕수, 박재삼시인 등과 동인을 형성하여 활동하셨으며, 65년 제1시집 을 발간하였고, 동년 발간한 장시화첩 로 제1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하셨다고 그 때 나이가 31세 였다.    시인은 또 걸어간 거리만큼 사람은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남보다 더 많이 걷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은 그 만큼 많이 산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도 하고 새벽시간을 여유있게 갖으시며, 늦어도 7시에 출근해 일을 하시는데 그렇게 되면 오전에 5시간이라는 많은 시간을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것은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 주셨다. 그렇게 부지런히 살아온 탓으로 남보다 더 많은 여행을 하셨고, 남보다 많은 활동을 하게 된 것이 아닌 것인가 생각이 든다. 같은 나이를 살아도 두배, 세배를 더 많이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쯤에서 요즈음 자꾸 게을러져가는 나 자신을 조용히 반성해 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잠 묻은 눈 씻고 나면 나는 언제나 꿈 밖이다 가난도 따습던 너의 저쪽 세상 이야기와 함께 환히 비쳐 속 다 보이는 구름 위의 우리집 네 생각 같은 어지럼도 발 벗고 나서는 길 하나다 쓸쓸의 그 길에다 흩뿌리는 섦으나 아름다운 사랑 언제나 혼자였던 나를 깔끔히 씻어 주는 이 찬 바람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아득하고 서글픈 긴 날들을 어떻게 더 살아야 할지 씁쓸하고 혼자인 이 노릇을.        제 8시집 1990 새벽에 일어나 깔끔히 씻어주는 찬바람 앞에서 자신의 먼지들 다 털어 버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이제 시인에게는 하나의 삶의 절차요 기준점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시인은 40여 년의 문단생활을 하면서 13권의 시집과 4권의 산문집을 남기셨다. 등단을 하신 이후 연달아 시집을 발간하셨고, 70년대부터 5시집이 발간된 84년까지 잠시 휴식 공간이 있었을 뿐, 거의 매년 한 권의 시집이나 산문을 발간하시는 정열을 보여 주셨다. 93년 7월 발간된 예술가의 삶에는 산문과 시인이 모시던 몇 분의 스승, 월탄 박종화 선생님, 시인 신석초 선생님, 난계 오영수 선생님 등을 소개해 놓으셨고, 1시집에서 10시집까지의 대표시들이 실린 책이다. 나는 그 책의 사이사이에서 빛바랜 사진들과 서신왕래, 혹은 잊혀질 뻔한 삶의 귀중한 조각보들을 찾을 수 있었고,  그 조각보들을 연결하면서 우리 시단의 흐름과 사건들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대표 작품 중에서 제5시집 에 실린 몇 편의 서정적인 글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중년시절의 한 때를 회상보았다. 술래야 네가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네 속에 들어앉아 편히 두 발을 뻗고 가슴 깊은 골을 파고 있는데 바람처럼 일어난 너는 술래잡기만 하구나 두루마리로 펼쳐놓은 귀 넓은 마당, 살피고 찾아도 미궁인 너는  신열만 옮기누나 살아있는 자의 거리만큼 지독한 몸살로 아픔보다 더한 사랑을, 어떤 입맞춤으로도 구원될 수 없는 여기 나는 그대로 서 있노라 속의 속것 다 헤쳐놓고 바람으로 왔다가 쓰러져가는 두려움이여 소리치고 두드려도 술래로 숨는 비어 있음이여 돌아와 안겨라 돌아와 안겨라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또 한편의 시대적인 아픔을 끌어온 이 시는 80년대 초에 쓰여진 작품으로 추측이 된다.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은 시인의 나이 이순에 이르러 발간된 것으로 그 나이에 책을 내시면서도 뻔뻔스러움은 없는지 걱정스럽다고 시인은 서문에 적어놓으셨다.  그 날 내가 시인에게 받은 책이 무려 6권이나 되었는데, 시집이 세 권이었다. 그런데 세 권 다 양장본으로 된 시집으로 다른 시집들보다 귀한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권의 시집 속에는 시인의 노작이 실려 있는 것으로, 이런 작품을 두고두고 보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야한다고 시인은 말씀 하셨다. 물론 시집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도 튼튼해야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인 은 여행시들이 많이 들어 있다. 시인이 애초에 많은 여행을 다니신다는 맥락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예 땅을 밝으면서 얻은 것도 있고,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석림과 여강 등지를 지나며 쓰게 된 것도 있다.' '나이 들면서 늦게나마 깨달은 것의 하나는, 시는 짧아야 하고 감흥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절제미를 빚는 능력이 미숙하여 부지런만 피우고 있는 듯싶다. '꽃빛'과 '봄날'이 젊음의 장이라면 '노년'과 '몽유'의 장은 오늘의 내 형편이다'라는 서문을 읽으면서 시인의 시론과 내가 앞으로 가야할 시의방향도 정해본다.  열세번 째 시집에서 시인의 마음이 가득 실려있는 작품 한 편을 골라보았다. 돌 1 - 石林 거기 무덤들이 있지 않던가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굳은 시늉들만 포개놓아 나를 빤히 건너다보며 사설을 늘어놓지 않던가 가 닿을 수 있는 거리라며 발걸음을 끌어다 앉히고 어지러운 모양새를 가르친 다음 손을 뻗거나 짝을 맞추게 하여 어깨바람 엇구수하게 뿜지 않던가 많이는 표나지 않게 앞 뒤 맞춰 층층으로 쌓은 앞에 늘 내가 하는 버릇대로 활개쳐 맘껏 자유케 하는 저 울금색의 나무들 와,와 무덤들이 쏟구쳐 일어나서 좋은 것들의 모든 징표로 살아 있음을 자랑해 보이는 마음의 내 고향을 세워주지 않던가.   시인이 87년 관여하기 시작하여 금년으로 15주년을 맞이하게 된 '시대문학'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문학의 위기의식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도 없었던 같다. 언어의 혼탁으로부터 그 골격과 구조가 무너져가고 그 의미조차 상실해 가는 시대는 일찌기 없었던 싶다. 그러나 문학정신만은 더 첨예화되고 날카롭게 되어 내일의 정신세계가 결코 어둡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하고 있다. 그래서 창간 15주년이 되는 시대문학을 바꾸어 가장 비문학적인 시대와의 투쟁으로 '문학시대'로 개재하고 새로운 문학세계를 열고자 한다. 그런 뜻에서 새출발을 시도한다고 한다.'라는 명제 아래 첫걸음을 옮기셨단다. 문학시대의 안에 발표된 시인의 사진들이 유난히 시인답게 나온 것은 그 동안 시인이 꾸준히 다른 나라의 시인들을 실으면서 노력하신 결과란다. 사진 한 장이라도 시인을 시인답게 하는 요소가 된다면 각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 하셨다.   근래 문단에 우후죽순처럼 많은 문예지들이 발간되고 있는데, 너무 많은 것들이 질을 떨어지게 하는 요소가 되지 않는가 하고 시인에게 물었다. 일본은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의 수가 11,000명 정도 되는 데, 인구를 따져보아도 아직 우리 나라의 시인수는 그 절반에 못 미치고 있다고 하시면서 양적으로 많은 시인과 많은 문예지가 결코 나쁘지는 않다고 하셨다. 먹이사슬의 예를 드시면서 밑바닥에 많은 작가들이 포진해야만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할 우수한 작가들이 배출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으로 그 답을 해 주셨다. 자신이 없는 작가들만이 오히려 그런 것에 민감하다는 말씀도 곁들여 주셨다.   또 하나 외국에 나가서 시인들의 시낭송회를 가보면 우리와는 많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다. 시인은 자기 시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의 시를 100% 전달할 수 있도록, 독자의 시각, 청각, 후각을 건드려 줄 수 있도록 열심히 자신의 시낭송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를 들면 외국에서는 온 몸으로 땅에 뒹군다든가 더 나아가서는 옷을 다 벗고 독자의 시선을 끌면서 자신의 시를 전달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쯤에서 시인의 시 중에서 낭송에 적합한 시 한편을 골라본다. 뻐국새 운다 뻐국새 운다 내 꿈의 어둔 층계를 딛고 저녁이면 돌아눕는 산 그 산의 숲 어디서 못 견디게 설운 뻐꾹새 운다 너무도 가난하여 나는 늘 혼자이고 달이 밝지 않아도 외진 골방 인연 따위도 춥다 느끼며 어디서 뻐꾹새 운다 타다 남은 놀 끌어다가 불길 당기고 꽃들은 피었다 시들어 가슴엔 시린 눈발 뻐꾹새 운다 몇 점 별빛은 떠서 내 마음 병으로 깊어 가는데 눈물 속 이 적막 오, 사랑이여 나도 산꽃처럼 슬퍼 뻐꾹새 운다.                   -제9시집 1992 서정적이면서 독자의 청각 및 시각적인 이미지를 그려줄 수 있는 작품이라 보여진다. 시인은 오랫동안 문인협회에 관여해오시다 올해 3년의 문인협회 이사장의 임기를 마치고 이제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오셨다. 다시 돌아온 소감을 묻자 홀가분하시다면서 이제 다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들꽃사냥'이라고 시인은 모름지기 곤충과 식물의 이름을 세세히 알아야한다며 '이름모를 꽃', '이름모를 새'는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쓰는 부정확한 언어라는 말을 세기며 '문학시대'의 사무실을 나왔다. 찌는 날씨를 감안해서 시인과의 면담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금 나라의 중요한 경계령은 쏟아지는 빗방울일 것이다. 대학로를 걸어가면서 집회를 갖고 있는 노동자의 머리에서도 가뭄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오후 늦게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기쁨 마음을 적셔보며, 시인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본다. ========================================================================================     씨감자  ―정재영 (1963∼) 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재로 다스리며 땅에 묻히지 않고 어떻게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가 될 수 있을까? 반쪽의 감자로 나누어져서야 씨감자가 되는 달콤한 상처 티눈 몇 개를 두고 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 슬픔의 눈을 옆으로 옮겨 붙으며 서로에게 깊은 눈짓으로 이어지는 사랑 나는 왜 씨감자가 되지 못했을까 나누어야 밑드는 행복을 왜 알고도 노래하지 않았을까? 감자를 캐면서 이미 감자가 아닌 씨감자의 가벼워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감자는 감자를 되심어야 또다시 감자를 생산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영양번식작물의 대표적 작물이다.’ 그래서 그해 소출 감자 중 10분의 1을 씨감자로 남긴다고 한다. 어차피 식용이 되는 감자 입장에서는 씨감자가 되는 게 억울한 일은 아닐 테다. 땅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성체로 비로소 느긋이 말라가며 쉬고 있는데, 칼로 쪼개져 도로 땅에 묻히고 상처 입은 몸으로 열을 뿜으며 다시 생을 시작하는 건 틀림없이 고통스러울 테지만, 희열이기도 할 테다. 씨감자로 말미암은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는 씨감자의 보람이기도 하고 농부의 보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땅에 심겨진 씨감자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캐낸 뒤 무심히 뽑아버리는 감자 줄기 끝의, 까마득히 잊힌 ‘이미 감자가 아닌/씨감자의 가벼워진 죽음’을 화자는 기린다. 감자 작농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씨감자의 말로를 무화에서 건져내는 시인의 눈이며 마음이다.      ‘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상처를 재로 다스리며/땅에 묻힌’ 씨감자는 후세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표상인데, 부모 된 사람과 학교 선생님이 떠오른다. 시인 정재영은 고등학교 교사란다. ‘티눈 몇 개를 두고/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라는 시구에서 갖게 되는, 왜 ‘씨눈’이 아니고 ‘티눈’일까 하는 의문이 해소된다. 어쩌면 그는 발바닥에 티눈이 생기도록 가출한 제자를 찾아다니느라 헤맸는지 모른다. 빗나간 제자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고생해도 보람 없는, 사제 간의 사랑과 존경이 실종된 현실에 맥이 빠졌을 수도 있다. ‘나는 왜 씨감자가 되지 못했을까’, 더 무작정 사랑하고 헌신해야 했을까….    
1624    詩作에서 구어체 편지형식을 리용할수도 있다... 댓글:  조회:4102  추천:0  2016-10-01
  상황과 시적 자아 ―김영남 작품론 박철화(평론가) 김영남은 성실한 시인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단에 얼굴을 내민 이후 꾸준히 시 만들기의 길을 걸어왔다. 불과 한 해 뒤에 첫 시집 『정동진역』을 낸 것이야 긴 습작기간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과 그에 이어진 작품들을 보면 이 시인이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성실하다. 그는 또 열성적인 시인이다. 첫시집의 「자서(自序)」는 제목처럼 정동진역의 카페에서 쓴 것인데, 마치 이후 시인의 삶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시의 대상을 찾아서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다. 안 가는 곳이 없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멀리 제주도의 땅 끝 모슬포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여행은 단순한 공간적 자리 옮김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간을, 삶의 새로운 풍경을 찾아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의 대상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열정이 더 두드러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재미있는 시인이다. 실제 작품 속에서 구사하는 유머와 능청, 풍자 등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더해져 하나의 시론(詩論)을 이루고 있음이 더 흥미롭다. 여러 평자가 지적하기도 한 면모이지만, 그는 공급보다는 수요 위주의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반성하라! 경영, 경제학을 모르는 자. 효율, 효과를 모르는 자. 떠나라! 수요를 무시하는 자. 공급 위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자. 공부하지 않고 시위 현장에 따라나온 나는 아예 자폭하라! 그러나 벽, 인식의 벽, 고정관념의 벽…… 그 벽들을 올라타는 재미를 아는 또다른 나는 살아라! 그 모든 학문에서, 아 답답한 이 시(詩)의 현장에서…… ―「그 시위현장이 나를 성토하고 있다」 전문 ‘인식의 벽’ ‘고정관념의 벽’을 깨기 위해 그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다양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독자들이 읽고 즐거워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는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세계를 추구한다. 엘리트들의 언어의식과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전래의 시적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데서 그의 시는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대중 추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평이한 세계는 자칫 잘못해 언어의 밀도가 떨어질 땐 시적 긴장을 잃는다. 대중적인 시는 많은 경우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이미지와 평면적인 진술로 해서 독자들을 긴장시키지 못한다. 그에 반해 김영남은 시인과 독자를 함께 묶을 수 있는 시적 긴장을 찾아헤맨다. 시인은 그것을 “시의 오브제를 올라타”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첫시집의 해설자가 요령 있게 지적하고 있다. 시집을 덮고 딴 일을 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구절, 그 구절의 우스꽝스러움. 기발한 상상력. 유쾌한 유머 감각. 다음 수에 대한 궁금증과 게임 도중의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김영남의 시다. 설사 시인이 놓은 여러 개의 덫에 다 걸려들지 않더라도 독자는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는 예측 불허의 수를 무척 자주 놓기 때문에.  김영남은 독자가 수동적으로 편안히 시를 좇아오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치 어린 시절의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하듯 그는 곳곳에 단서를 마련해둔다. 그 단서 때문에 독자는 시적 엘리트주의의 난해함 앞에서 절망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대중적 진부함 속에서 권태로워하지도 않는다. 그가 감춰놓은 단서를 찾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흥미로운 시적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예를 보기로 하자. 와, 눈이다 눈! 눈이 가득 창을 메우니 갑자기 따듯해진다. 눈은 가볍게 살아 사각의 창을 자유롭게 한다. 나는 이 창을 친구에게 E-메일로 부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런 날 눈은 창을 넘고 산을 넘어 동서남북 저 아득한 곳까지 내린다. 산골마을에 내리고, 제주도에 내리고, 아메리카에도 내린다. 눈 감고 죽어라고 죽어라고 내리다가 팽이를 돌리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띄운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카드로 되돌아오며  눈은 잠시 멎는다. 눈을 밟자, 이럴 때 멎은 눈을 밟으면 달아오르고 길까지 행복해진다. 행복한 길들은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고 모두 아름다운 흔적을 갖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밟으면 미끄러진다 행복도 그대여, 눈을 밟자 더 아프게 미끄러지기 전에 우와, 다시 눈이다 눈! 분분한 눈이 창을 또 한번 메우니 이번에 나는 불행해진다. 눈은 분분하게 다투면서 내 앞 창을 자유롭게 하지만 내 책상은 자유롭게 하지 못해  불행해진다. 다투니까 자유로워지고 다투지 않으니까 갇히는 이 답답한 世上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불행해진다. 그리하여 오늘은 총체적으로 불행이다, 창도 세상도 나도 눈은 어둠을 켜면서까지 계속 불행하게 불행하게 내린다. ―「눈이 내리면 총체적으로 불행하다」 전문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시인의 평범한 내면 진술로 읽힌다. 하지만 곰곰이 시적 흐름을 좇아가면 의외로 사소하지 않은 시적 반전(反轉)이 숨겨져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선 겨울의 눈이 사람들에게 따듯하고 행복한 미소를 띠게 만드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가볍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눈은 솜털 같은 함박눈일 가능성이 높다. 싸락눈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무겁고 축축한 진눈깨비는 아니다. 그 가벼움에서 자유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담은 창을, 그 행복한 풍경을 친구에게 보내는 행복을 누린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건물의 유리창이 어느새 컴퓨터 윈도우로 바뀌었음을 본다. 거기서 창은 현실의 유리창이자, 사이버 스페이스의 출입구다. 마음 놓고 상상이 가능한 장소인 것이다.  현실의 유리창은 내부공간의 끝이자, 외부공간의 시작이다. 가상공간의 창 또한 현실의 끝이자 새로운 상상공간의 출발지이다. 그래서 시인은 상상력의 여행을 떠난다. 현실속의 ‘눈〔眼〕’을 감고서 죽어라고 ‘산골마을’ ‘제주도’ ‘아메리카’로 마음껏 누비는 것이다. 물론 눈〔雪〕의 가벼운 자유로움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다. 그게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는 “팽이를 돌리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띄운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천진한 동심(童心)의 이 상상력은 ‘크리스마스 카드’로 조용히 갈무리되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눈〔眼〕’을 감고서 눈〔雪〕이 되었던 이 복합적 이미지의 상상력이 멀리서 날아오는 우편물처럼 현실로 귀환하는 것은 따듯하면서도 새롭다. 김영남에게서 눈이 우선 동심의 행복과 연결이 된다는 것은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느티나무 집  부엌 아궁이에서 불 지피던 아낙이 우는 아이 달래러 방에 들어갔군요 느티나무 지붕 위에서 긴 손이 포근하게 나오는 걸 보니 그 손 또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 아이들 기저귀까지 갈아주고 있는 걸 보니 이윽고 온 하늘 메우는  저 향기로운 파우더, 파우더…… 예쁜 개울 토닥이다가 아낙도 함께 잠들었군요. ―「개울가 눈 오는 풍경」 전문 그런데 이 ‘향기로운 파우더’ 같은 행복 속에는 무언가 아슬아슬함이 있다. 마치 유년의 동화(童話)가 어른의 세계에서 깨져나가듯이, 깨끗한 눈을 뽀드득 소리 나게 밟는 행복은 미끄러질 위험의 가능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이 행복과 불행을 연결시키기 위해 시인은 잠시 눈이 멎은 풍경을 다리처럼 제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이 내린다. 이젠 불행의 눈이다. 그 “분분한 눈”은 여전히 자유롭긴 하지만 우선 책상 앞의 나까지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 거기서 시적 자아인 ‘나’는 눈이 오는 풍경을 시로 만들어야 하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실을 살아내는 생활인이다. 상상 속에만 머물 수 없는, 현실의 구속이 그를 불행하게 만든다. 게다가 분분한 눈은 다투니까 자유롭다. 그런데 다투지 않는 나는 갇힌다. 이 역설의 상황이 그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 다투지 않으면서 자유로워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창’과 ‘세상’과 ‘나’ 모두가 총체적인 불행을 겪게 된다. 이것은 눈이 환한 불을 켜는 대신 어둠을 켠다는 데서 극적으로 고조된다. 어둠 속에서 눈은 불행하게 내린다. 눈이 오는 풍경에 대한 평이한 진술로 보였던 이 작품은 여기까지 오면 답답한 세상에 대한 시적 풍자(諷刺)로 성격이 바뀐다. 그것은 함께 발표된 다음 작품과 이어지면 더 뚜렷해진다. 진보적으로 살까, 보수적으로 살까 금산 수통리 적벽강까지 한 사람을 데리고 와 걱정하는 내겐 저 절벽은 진보다 절벽 위에 재작년까지 보이지 않던 해오라기가 떼로 날아왔고 맞은편에는 작년에 없던 2차선 도로를 힘차게 뚫고 있으므로…… 진보적인 여자와 텐트를 칠까, 보수적인 여자와 물놀이를 할까 텐트를 치며, 물수재비를 뜨며 계속 고민하는 나의 여름휴가 이럴 땐 한번 물어보는 거다, 저 흔들리는 미루나무에게 가지의 모든 이파리까지 뒤집어 바람이 불 때마다 시스템적으로 사고하고 있으므로…… 뒤집어 사고해도 한결같은 목소리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는 사이 해오라기 한 마리가 날아와 미루나무 꼭대기에 앉는다 보라, 저 미루나무 꼭지점을 저건 진보와 보수의 교묘한 절충이다 내 고민의 정반합이다 아니다 저건 야합이다 금세 날아가버릴 새하얀 금언(金言)이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해오라기가 앉는다」 전문 풍자는 불완전한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의식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직설(直說)의 어법을 취하지 않는다. 딴전을 부리듯 하면서 어느새 비판의 대상을 전복(顚覆)시킨다. 그것이 풍자의 힘이다. 위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김영남의 풍자 취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위 작품은 시작부터 ‘진보’와 ‘보수’로 나뉜 현실에 대해 의외로 직설적인 칼날을 겨누고 있다. 하지만 그 인상은 바로 뒤에서 지워진다. 갑자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여자’ 이야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눈을 부릅뜨며 목청을 높이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 세력에 대해서도 그게 별게 아니라는 풍자의 말을 넌지시 건네고 있다.  그 말은 새로움을 경전(經典)처럼 내흔드는 진보를 향해 더 ‘커브’를 그리고 있다. 도덕을 내세운 배타적 선민(選民)의식과 계몽의 억압이 아마도 시인에게는 불편했기 때문이 아닐까? 진보란 보이지 않던 해오라기 새떼가 날아오고, 도로를 뚫고 있는 강 언덕과 같은 것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니 “진보적인 여자와 텐트를 칠까, 보수적인 여자와 물놀이를 할까” 하는 고민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여름휴가를 편치 않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일은 어딘가 옳지 않다는 항변이 그 안에는 들어 있다. 그렇다고 그가 절충주의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교묘한 절충”이 “내 고민의 정반합이”라는 생각은 바로 그에 뒤 이은 “아니다 저건 야합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부정 당한다. 김영남은 따라서 진보와 보수에 대해 아무런 확정적 답을 내놓지 않는다. 섣부른 절충주의는 진실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반합’이 ‘야합’으로 이어지는 시인의 말놀이다. “가지의 모든 이파리까지 뒤집어 / 바람이 불 때마다 시스템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말놀이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놀이는 언어의 현실 관련성을 높이는 풍자의 주요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이어지는 “뒤집어 사고해도 한결같은 목소리”라는 시구(詩句)에서 우리는 변함없음과 몰개성을 동시에 읽는다. 한결같음은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말놀이는 이렇게 중층적 의미를 가짐으로써 시의 내포를 확장하면서 풍자의 힘을 더한다. 어쨌거나 여름휴가 여행을 통해서 시스템이나 진보와 보수 등등의 정치 언어에 대해 비판적 성찰 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김영남의 시세계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거기에 대해서는 두 번째 시집 해설자의 적절한 지적이 있다. 여행을 통해 얻은 풍경의 발견은 자연 원리의 발견을 통한 삶에 대한 직관적 성찰과도 연계된다.  김영남은 이처럼 자칫 무겁게 우리를 짓누를 수 있는 현실의 언어에 대해 가볍게 문학의 언어를 대조시킴으로써 현실과 의식 사이의 풍자의 거리와 긴장을 확보한다. 눈과 눈, 정반합과 야합 등의 대조 어구는 단순한 말놀이를 뛰어넘어 이 시인이 현실 인식에 독자들이 함께 뛰어들 수 있는 ‘아름다운 흔적’의 역할을 한다. 거기에 덧붙여, “진보적인 여자와 텐트를 칠까, 보수적인 여자와 물놀이를 할까” 하는 대구(對句)도 비록 그것이 남성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통해 무거운 현실을 가볍게 뒤집는 시인의 낙관과 능청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면모가 김영남의 개성이자 장점을 이루는 세목들이다. 여기까지 오니 문득 김수영의 시가 하나 떠오른다. 1956년 발표한 「눈」이 바로 그것이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 전문 눈〔雪〕을 바라보는 눈〔眼〕을 내세워 당대 현실에 대한 시적 풍자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김수영의 어떤 전통이 김영남에게 들어 있다. 모더니즘의 현실 비판적 힘에 대한 신뢰를 보낸 동시에, 난해함이라는 지적 오만을 경계했던 김수영. 그의 가능성을 부디 마음껏 올라타고 누비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다 다치면? 나는 그가 두 번째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요청한 대로 기꺼이 그에게 ‘안티프라민’을 선사하겠다. 내가 첫 시집 『정동진역』에서 소재를 박력 있고 재미있게 올라타려고 노력했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아마 난해의 벽을 쉽고 아름답게 올라타보려 애를 썼지 않나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랫도리를 한번 내려다보니까 정말 양 무릎이 다 까졌다. 하여, 독자들이여! 나의 시를 읽고 짚이는 데가 있거든 ‘안티프라민’이라도 하나 선사해다오. ==================================================================================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1958∼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놈의 농사는 지먼 뭣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파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종이에 꾹꾹 눌러 쓴 낯익은 글씨에 벌써 딸은 와락 그리움이 치밀 테다. 어머니만의 말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에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아른거리리. 삭신은 꾹꾹 쑤시고 마음은 질컥거리고, 그래서 사는 게 팍팍하단다. 하나 있는 아들이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고 딸에게 일러바치며, 그리움과 외로움과 서운함을 알뜰히 전하신다. 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각별하신 듯하다. 그만큼 살갑고 미더운 딸이 수녀 종신서원을 했으니, 알지 못할 세계로 가버린 듯 가슴이 휑하실 테다. 보고자파라, 내 딸! 편지로 미루어 시원시원한 성격인 어머니시지만 눈 밑 주름 고랑을 타고 ‘달구똥(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셨을 테다. 그 마음 감추고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신다. 아,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복사꽃! 곡식을 거둘 때도 자식 생각, 복사꽃이 피어도 자식 생각.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생기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일래라. 길지 않은 시에 홀로 농촌을 지키는 노인이며 한 집안의 서사가 담겨 있다. 구어체 편지 형식의 맛깔스러운 사투리가 시를 생생히 전한다.  
1623    詩人은 약초 캐는 감약초군이다... 댓글:  조회:4255  추천:0  2016-10-01
[ 2016년 08월 31일 09시 05분 ]     호남(湖南)성 평강(平江)현 석우재(石牛寨)의 유리 잔도(棧道) 로천식당. 꽃과 섬과 별을 쏟아내는 물감상자 -강우식의 시세계 박남희 1.에로스와 섹슈얼리티 사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작품의 가장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도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그 어떤 존재의 사랑보다도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이고 그 사이의 진폭 또한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학작품에 존재하는 사랑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만나서 이루어내는 총화로서의 사랑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육체보다 정신이 고귀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육체가 없이 정신이 있을 수 없으며, 정신이 없는 육체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고도로 물질문명화 되면서 인간의 육체도 물질화 되고 감각화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정신 우위의 편향된 가치관도 차츰 육체적인 쪽으로 기울게 되어 전통적으로 억압, 은폐되어 있던 성이 자유롭게 표면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 문학에서 ‘몸의 시학’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여성주의 문학에서의 섹슈얼리티는 차츰 남성적 권위와 억압에서 해방되어 독자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흐름은 비단 여성주의문학에서 뿐 아니라 남성문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강우식 시인의 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현대문학의 에로스와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한 것은 강우식 문학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가 인간의 육체성을 강조한 것이고 에로스가 상대적으로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강우식의 문학은 초기에는 섹슈얼리티에, 후기에는 에로스에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강우식의 시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인 『雪戀集』(1988)을 기점으로 보다 에로스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초기 시의 강렬한 섹슈얼리티가 차츰 추억과 그리움으로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시집을 차례대로 검토해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인 『四行詩抄』(1974)와 『高麗의 눈보라』(1977)는 강우식 시인의 초기 시에 나타나 있는 섹슈얼리티를 전통적 시형과 민중적 정서를 바탕으로 고전주의적 절제와 균형 속에서 풀어내던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고,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인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와 『물의 혼』(1986)은 강우식 시인이 그의 시에 섹슈얼리티를 노골화해 보여주던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강우식 시인을 한 때나마 ‘우리나라 섹스 시의 선구자’로 불리게 한 것도 이들 두 시집의 공과가 크다. 하지만 강우식 시인의 시는 포르노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의 시가 섹스 자체에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는 특유의 섹슈얼리티를 통해서 전통적 권위의식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허위의식을 능청스럽게 에둘러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양상은 특히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인 『어머니의 물감상자』(1995)의 제 3부, 불교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씌어진 의 시들에서 보다 풍자적으로 드러나 있다. 동성연애하여도 에이즈에 절대 걸리지 않을 것 같은 아주 깨끗한 동자승밖에 아른대는 게 없는 아마 수삼년 전 명보극장에서 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오늘은 자다가 한밤중에 깨이어 ‘달마의 목자가 왕방울인 까닭’에 사념의 줄을 끊지 못하고 있다. 달마는 등을 돌리고 앉아서 불두덩에 굼실대는 이를 잡는 살생을 몰래 저지르고 있었다 한다. 아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미국으로 진출하는 파리크라상 제과점의 빵들을 아래 중들 몰래 먹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것도 아니다. 벽은 70밀리 초대형 TV 브라운관이어서 화면 속 스트립쇼를 즐겨 감상하시느라 동공 확대증에 걸린 것이다. -「면벽」전문 달마의 면벽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고 있는 달마선사의 눈매가 왕방울처럼 큰 것은 참다운 면벽은 하지 않고, 벽이 스트립쇼를 보여주는 TV 브라운관인양 벽을 보며 야한 잡생각만 했기 때문이라는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달마의 눈이 큰 것은 그가 졸음을 견디다 못해서 그의 눈꺼풀을 아예 잘라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시의 진술은 허구적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인의 관점은 시니컬한 어법의 이면에 시적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처럼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자리하고 있는 기존의 허위적 가치관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은 좀 더 본질적으로 캐들어가다 보면 그의 섹슈얼리티와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강우식 시인의 섹슈얼리티는 본질적으로 대 사회적 허위의식의 폭로와 맞물려있다. 그런 점에서 위선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기 위한, 섹슈얼리티를 통한 정직성 추구는 오히려 그의 시의 중요한 미덕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시에 시인의 비판의식이 많이 보이는 것은 그동안 강우식 시인의 ‘섹스 시’의 비판에 대한 안티테제적인 성격도 없지 않지만, 그의 ‘섹스 시’ 자체가 그 이면에 현대 사회가 숨기고 있는 허위성에 대한 비판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초기 시가 주로 섹슈얼리티를 바탕으로 한 비판의식의 산물이었다면, 의 시들은 단지 그 소재를 불교적인 것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태양에 그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와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마다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 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때로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 이름 새겨보듯 행복하기만 하랴 -「타는 사랑」전문 강우식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바보산수』(1999)에 실려 있는 이 시는, 그의 초기시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변모되어 나타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물론 이 시기의 시들에도 종종 육체적 사랑 이야기도 등장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사랑은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사랑이고 이미 그리움이나 아픔으로 내면화되고 정서화된 사랑이다. 시인은 8월의 바닷가에서 태양에 그을린 살갗의 쓰라림을 경험하면서, 젊은 시절의 뜨겁던 사랑을 떠올리고 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8월의 태양처럼 뜨겁지만, 젊은 시절 자신의 추억 속에 새겨져 있는 이름들을 떠올리는 것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인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내 몰래/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때로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언뜻 보면 시인이 자신의 여성편력을 죄의식과 연결시키고 있는 듯하지만, 1998년 여름 ‘바다와 섬’을 주제로 한 제주학술회의에서 그가 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경험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진술했던 것을 반추해 보면 시인의 여성편력이 결코 ‘죄의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인에게 있어서 그 때의 일들은 ‘아름다운 일’이며 그립고 때로는 가슴이 아려오는 추억인 것이다. 그의 일곱 번째 시집의 후편으로 읽혀지는 여덟 번째 시집『바보 산수 가을 봄』(2004) 소재의 시에서 “마흔의 이 봄날에도/나는 어쩐 일인지/ 사춘기 때 그 홍역 못 넘겨서는/ 가슴에, 가슴에는/ 그리움 같은 것들이/ 무시로 꼭 떠오르고//그것들을/ 너무나도 못 잊어하다 보면/끝내는/지금도 가물가물거리는구나.”(「아지랑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강우식 시인은 후기 시에 오면, 섹스를 육체적 욕망을 발산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놀이’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보 산수』소재의 시 「인도 소나기」에서 시인은 “도마뱀이 벽을 기어 다니는 방에서 그나마 불을 끄니 검은 피부의 인도 계집은 그대로 어둠이 되어 녹아 버리고 목소리만 살아서 지그지그 퍽퍽, 지그지그 퍽퍽,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나도 따라 지그지그 퍽퍽 하며 놀았다”고 사뭇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능청스러움은 그의 연륜과 무관하지 않지만, 이는 그가 어느덧 섹스를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대지와 꽃의 상상력-『四行詩抄』,『꽃을 꺾기 시작하면서』 강우식 시인의 시들이 성(性)이라는 소재를 즐겨 다루고 있으면서도 쉽게 비속함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단지 직설적 진술에 머물러있지 않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미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바다와 대지(산)와 하늘이 삼각형을 이루면서 각각 섬과 꽃과 별을 거느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초기 시는 주로 대지와 꽃의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 있다. 우선 그의 첫 시집인 『四行詩抄』의 연작시들을 살펴보자. 밤마다 배꼽 위에 쑥 한점 떼어 놓고 오뉴월 땡볕 같은 젊음을 뜸 들였거늘 꽃 피는 것 다 큰물 맞듯이 겪고나면 넋이야 괴로울 거 하나 없는 黃土되겠네  -「여섯」 미친년들의 엉덩짝만큼이나 흔들리는 꽃나무 가지마다 바람이 불어오면은 열댓살씩되는 처녀애들 속가랑이 벌리듯 꽃이 피네 -「열둘」 느릅나무 향나무 이깔나무들 계집같이 안 잊히는 때는 어느 때인가. 백일홍 복숭아 꽃숭어리들 가슴결에 피어나는 때는 어느 때인가 -「스물 아홉」 우선 첫 번째 인용 시를 보면 시인은 1~2행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을 쑥뜸 뜨는 일에 비유하다가, 3~4행에 오면 사랑을 대지위에 꽃이 피는 일로 비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꽃피는 일은 ‘黃土’에게는 “괴로울 것 하나 없는”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시 역시 꽃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는 행위를 “열댓살씩되는 처녀애들/ 속가랑이 벌리듯”꽃이 핀다고 하여 꽃피는 행위를 인간의 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쉽게 통속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인이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유기론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시에서 느릅나무나 향나무나 이깔나무를 ‘계집’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나, 사랑을 백일홍이나 봉숭아 꽃숭어리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처럼 강우식 시인의 초기 시는 흙과 나무를 중심으로 한 대지적 생명력이 사랑의 표상인 ‘꽃’과 어우러져 표출해내는 시인의 뜨거운 육성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四行詩抄』에 이어 대지와 꽃의 이미지가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는 시집은 세 번째 시집인『꽃을 꺾기 시작하면서』이다. 본격적인 섹스시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집의 4행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 95편의 연작시들에서 인간의 性은 주로 식물이미지인 꽃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내 아내 열 일곱으로 부끄러워하며 다른 사내에게 젖꼭지를 빨리고 있다. 어디선가 두 년놈의 일처럼 부흥, 부우흐흥. 봄날이면 괴로와 괴로와. -「앵두」  바지 주머니 뚫어진 속 깊이 손을 넣어 그 여자 몰래 내 물건을 잡았소. 그리고 그 여자가 쥔 한 묶음의 찔레꽃에 찔리고 싶다고 생각했소. -「찔레꽃」 빨치산에 겁탈당한 열아홉 내 누이다. 알몸되어 소름돋친 살갗을 떨다 모래벌에 혀를 박은 내 누이다 원통하게 핏빛으로 까헤쳐진 밑구멍이다. -「해당화」 위의 인용 시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성을 꽃나무와 연관시키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앵두」는 자신의 아내가 아직 자신에게 시집오기 전인 열일곱 살 때에 연애하며 다른 남자에게 젖꼭지를 빨리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고, 「찔레꽃」에는 시적 화자가 사모하는 여자를 훔쳐보면서 여자 몰래 자신의 물건을 잡고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젊은 시절의 욕망이 드러나 있으며, 「해당화」에는 빨치산에게 겁탈당한 누이의 원통한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이처럼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에 들어있는 시들은 단순히 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고, 성이라는 소재가 여러 가지 꽃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괴로움’, ‘원통함’같은 시인의 내적 정서와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여타의 포르노 시와 구별된다.  3.물과 눈의 상상력- 『고려의 눈보라』,『물의 혼』,『설연집』 강우식 시인의 시에서 ‘물’이미지는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에 속한다. 그의 시에서 물은 ‘바다’, ‘강’ ‘비’, ‘눈물’, ‘피’, ‘눈’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물의 이미지는 그의 모든 시집에 골고루 나타나있지만 특히 『고려의 눈보라』,『물의 혼』,『설연집』등에 많이 등장한다. 먼저 두 번째 시집인 『고려의 눈보라』에는 ‘바다’나 ‘강’의 이미지도 등장하지만, 이 시집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고려의 눈보라」연작시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의 비중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서 땅까지  막막한 공간을 덮으며 눈이 내린다. 잴 수 없는 거리의 폭이 이 나라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흙을 일구며 城을 쌓으며 살다간 수천억의 영혼들……. 그들의 일생이 한점 눈송이로 응결되어 점점 이어진다. 얼었던 마음도 눈물로 풀릴 줄 밖에 모르던 이웃들의 분노도 절규도 없는 이 조용한 下降. 지금 천지는 그저 오랜 잠. 역사도 잠 속에 빠져든 듯한 슬픔이 하늘에서 땅까지 내리는 눈발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신다. -「降雪」 「고려의 눈보라」연작시에 등장하는 ‘눈’은 우리 민족의 질곡과 억압의 역사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눈을 통해 “잴 수 없는 거리와 폭”을 지닌 종잡을 수 없는 이 땅의 역사를 보기도 하고, 힘겨운 역사의 질곡 속에서 “흙을 일구며 성을 쌓으며/ 살다 간 수천억의/ 영혼들”의 분노도 절규도 잊은, ‘오랜 잠’으로의 역사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바람」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 다음 시에서 ‘눈’은 흰옷 입은 조상들의 매서운 채찍이 되어 ‘죽은 자의 영혼’을 깨우기도 한다. 이렇듯 「고려의 눈보라」의 ‘눈’은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시인의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의 일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雪戀集』역시 ‘눈’을 소재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시집이다. “사랑하는 사람아, 눈이 풋풋한 해질녘이면/마른 솔가지 한 단쯤 져다 놓고/ 그대 방 아궁이에 지피고 싶었다/ 저 소리없는 눈발들이 그칠 때까지...”(「세수」)라든가, “너에게로 갈 때 나는 그저 하이얗다/ 눈이라는 이름도 붙이고 싶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내 심장에서만 새어나오는 입김/ 사랑은 상처이어도 끝내는 하얗게 아물어야만 한다”(「아흔네 수」)라는 구절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집은 눈을 소재로 그냥 사랑얘기를 하고 있는 시집이다. 따라서 이 시집에는 개인적 감정이나 단편적인 사유만 내포되어 있을 뿐 역사의식이나 민중의식과 같은 집단의식은 드러나 있지 않다.  『물의 혼』역시 앞에서 살펴본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와 쌍을 이루고 있는 소위 ‘섹스시집’이다. 다만 이 시집은 ‘꽃’ 대신 ‘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시집 또한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와 마찬가지로 4행 연작시 형태를 띠고 있는 159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시는 남녀 간의 사랑을 ‘파도’의 얽힘이나 물이 요동치는 행위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집도 『雪戀集』과 마찬가지로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주제의 진폭이 그리 넓지 않은 시집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넓게 보면 인간의 사랑행위를 자연의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범 자연적 인간관이 감지된다. 4.물과 대지의 외로운 합일- 섬 혹은 山水의 세계 강우식 시인의 시들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물’과 ‘대지’의 이미지가 길항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합일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를 일별해서 살펴보면 강우식의 시는『사행시초』(대지)-『고려의 눈보라』(대지/물)-『꽃을 꺾기 시작하면서』(대지)-『물의 혼』(물)-『설연집』(물)-『어머니의 물감상자』(대지)-『바보 산수』(대지/물)-『바보산수 가을 봄』(대지/물)의 흐름 위에 놓여있다. 특히 ‘山水’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마지막 두 시집은 ‘대지’와 ‘물’의 이미지가 하나로 합일되어 ‘山水’ 즉 ‘자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이 시기에 오면 ‘물’은 객체로서의 ‘물’이 아니라 인간화된 물로 변형되거나, 우주적 상상력 속에서 커다란 우주로 확대된 인간의 모습 속의 물이고, ‘지구’나 ‘섬’ ‘산’등으로 나타나 있는 ‘대지’이미지 역시 인간화되거나 우주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종전의 시들과 구별된다. 시인의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시인이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꽃들에게 강원도 감자알만큼씩한 불알 두 쪽을 흔들어 주며 십년 세월을 바람으로 살았다. 파도를 일으키기 위하여 좆물을 채우거나 빼듯이 했다. 溺死하지 못한 빈 술병 하나로 바다에 내던져져 흐르며 춤추던 춤, 텅빈 가슴으로 바람소리나 흉내내다 이 몸 물 되지 못하면 어차피 부서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몸 깨뜨릴 바위는 無量壽殿 바다의 어디에 있는가. -「자화상」전문 ‘자화상’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관조적으로 반추해 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이 ‘꽃’들에게 불알 두 쪽 흔들어 주며 바람으로 산 세월이었으며, 파도를 일으키기 위해 좆물을 채우거나 빼던, 익사하지 못한 빈 술병으로 산 세월이었음을 고백한다. 시인은 자신이 ‘물’이 되지 못하면 언젠가는 ‘바위’에 부서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의 바다에 내던져진 빈 술병은 그의 다른 시에서 ‘섬’으로 변주된다. 시인은 자신이 苦海에 떠다니는 외로운 섬임을 인식하고 ‘물’ 즉 ‘자연’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새로운 인식에 이르는 것이다.  섬인데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산 첩첩 구름 위에 산은 서 있고 파도처럼 기절하며 비가 내린다. 나는 한달에 세 번 해를 봤다. 어느새 구두 밑창이 되어버린 얼굴. 습기처럼 습기찬 팬티를 말리기에 바쁜 섬. 어떤 밤에는 여자보다 차라리 정이 그리워서 전기장판을 깐다. 전류는 해류처럼 출렁이고 나는 등이 따뜻해오는 섬이 된다. -「冬安居詩篇-(1)섬」전문 시적 화자는 동안거를 위해 산속에 있다.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어서 봉우리가 마치 섬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섬인데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것이다. 시적 화자는 첩첩 산중에서 한 달에 겨우 세 번 해를 보는, 습기에 둘러싸인 축축한 섬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이제 섬은 바다에도 있고 산에도 있다. 문득 돌이켜 보면 인간 자신이 섬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섬이면서/ 섬을 그리워하며 산다.”(「섬 또는 그리움」) 시인 역시 섬이 되어 이와 같은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그리움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순환적 시간의 흐름으로도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그리움이다. 강우식의 두 권의 시집 『바보 산수』와 『바보 산수 가을 봄』이 각각 여름과 겨울, 가을과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들 두 시집의 계절이 한 쌍으로 연결되어 순환적 시간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시집의 도처에 특정 계절과는 상관없이 ‘그리움’의 정서가 골고루 나타나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결국 “내 그대 그리움 속으로 기어들어가면/ 내 그리움 어느덧 잠자고/ 또 누가 있어 날 떠올리며/ 그리웁다 잠 못 이루리”(「윤회」)라고 하여 그리움을 윤회적 순환구조로 이해하고 있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강우식 시인의 후기 시에서, 끝없는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을 ‘섬’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데, 사실 ‘섬’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시에서 ‘바다’는 인생의 바다 즉 苦海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이 시기에 오면 바다는 시인의 의식 속에 내면화된 바다로 나타나게 된다. 시인이 시 속에서 ‘섬’을 외로운 섬으로 그리고 있는 것도 그의 ‘바다’가 심리적으로 내면화된 바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외로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한 섬에게 있어서 더 이상 자연인 ‘꽃’은 여자에 귀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초기 시에서는 대부분 ‘여자’를 ‘꽃’으로 인식했던 것이 이 시기에 오면 오히려 여자가 ‘꽃’, 즉 ‘자연’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저만치/ 얼굴 붉히고 선 여자도/ 더 꽃다히 타며 흔들리는/ 자연.-「五月微吟」) 다시 말하면 시인은 종전까지의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고 차츰 탈속을 위한 친자연적 세계관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라는 시집 제목만 보더라도, 시인이 인간을 ‘어리석은 자연’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강우식 시인의 후기 시에 유독이 ‘하늘’이나 ‘별’과 같은 천상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인의 최근 시들이 한층 강화된 정신지향의 토대위에 놓여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몸을 정신과 육체로 나눈다면, 초기시의 ‘바다’와 ‘섬’, ‘대지’와 ‘꽃’이 육체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데 비해, 후기 시의 ‘하늘’과 ‘별’은 상대적으로 정신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시인은 『바보 산수 가을 봄』소재의 첫 번째 시 「가을환상」에서 “내가 아는 어느 예술가의/ 생애보다 더욱 빛나는 이마를 가진/ 별을 나는 처음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기에 비로소 새롭게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천상과 지상을 하나로 잇는 자연의 오묘한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우식 시인의 시를 지탱해온 힘은 사랑이다. 그런데 나는 시인의 이러한 사랑이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생래적이고 근원적인 뿌리에 닿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의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시켜준 시는「어머니의 물감상자」이다. 먼저 시를 읽어보자.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장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 있는 물감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빛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족두리모양의 노란 국화꽃물을 꿈을 꾸듯 나눠주듯이 물감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장사를 하셨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나에게는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물감상자」전문 인용 시 「어머니의 물감상자」는 강우식 시인의 사랑의 뿌리가 단지 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장사를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물감을 파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꽃물을 나누어주는 행위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는 흡사 신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는 행위에 비견되는데, 이 시의 어머니는 단순히 강우식 시인의 어머니를 넘어서서 일종의 대모신으로 인식된다. 이는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꽃물을 “꿈을 꾸듯”나누어 주는 행위나,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가셨다는 말 등에서도 감지된다.  그런데 이 시의 어머니가 남겨놓고 가신 ‘물감상자’는 돌이켜보면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신이 세상에 선물로 내려 보낸 ‘판도라상자’에 비견된다. 그리스신화에서 판도라는 제우스신의 명을 어기고 보물상자를 자신이 열게 되는데, 그 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판도라 상자에서 나온 좋은 것들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질병이나 재앙, 슬픔, 괴로움, 미움 같이 나쁜 것들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빈 상자 속에도 마지막까지 ‘희망’만은 남아있게 된다. 물론 이야기의 줄거리만 보면 강우식 시인의 ‘물감상자’와 ‘판도라상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강우식 시인의 어머니를 제우스신이나 대모신의 위치에 올려놓고 보면,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시면서 남겨두신 ‘물감상자’는 시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판도라 상자’인 것이다.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이 ‘희망’이었다면, 어머니의 ‘물감상자’속에 남아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런데 이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랑은 ‘꽃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꽃물’은 수많은 色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섹슈얼리티와 에로스, 아가페 등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랑’의 색깔에 비견된다. 시인이 그리움이나 사랑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으로 인식 하고 있는 것도, 이 시에 나타나 있는 사랑의 근원적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우식 시인의 가슴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랑’이나 ‘그리움’의 감정은 그의 어머니가 물려주고 가신 ‘물감상자’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우식 시인의 전기 시에서 사랑의 표상으로 나타난바 있는 ‘꽃’이나, 후기 시에서 외로운 실존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섬, 그리고 이상적 실존의 상징인 ‘별’등도 근원적으로 어머니의 ‘물감상자’가 쏟아낸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물감상자’가 시인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섹스 시’는 저급한 것이고, 그의 후기 시는 보다 차원 높은 것이라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시들은 모두 어머니의 물감상자 속에서 ‘꽃물(사랑)’이라는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죄가 있다면 그것은 물감상자를 시인에게 물려주신 어머니에게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우리네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물려주신 ‘물감상자’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     약초 캐는 사람  ―이동훈(1970∼ )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가려 해. 짐승이 다니는 길로만 가는 그를 안간힘으로 따라붙으면 물가 너럭바위 어디쯤 쉬어가겠지. 버섯이나 풀뿌리 얼마큼을 섞어 근기 있는 라면으로 배를 불리면 마른 노래 한 소절이라도 읊게 될 것만 같아. 볕에 그을린 몸이 단단해지고 비탈을 평지처럼 걷게 되면 약초 이름도 더러 외게 되겠지. 외운 만큼 곁을 주는 건 산 아래와 다르지 않을 거고. 장마 지는 날엔 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 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 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 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이따금 장터에 내려서서 도매로 물건을 넘길 때 축농증 앓는 둘째를 위해 효험 있다는 약초를 따로 챙길 것이고 어디론가 송금이 끝난 그도 술 한 잔 받아줄 것이기에 한나절, 구름처럼 둥둥 떠 있게 될 거야.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이고 싶어. 이 시가 실린 이동훈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의 시편에서는 여린 마음과 정 깊고 선한 기운이 담뿍 배어난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은 해설을 ‘어떤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인간됨을 느끼게 해준다’라고 시작한다. ‘이 시인이 참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참 비슷하구나!  아직 일할 나이로 직장인인 화자가 봄날에 펼쳐보는 낭만적인 꿈이다. 일장춘몽이 아니라 건강하고 싱그러운 장래의 꿈.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즉 은퇴한 뒤에는 이렇게 살아보리라. ‘장마 지는 날엔/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도리바리는 호랑이를 이르는 심마니(산삼 캐는 사람) 은어라고 한다. 호랑이만 울까, 고라니도 울고 산새도 울고 뱀도 울겠지.  약초 캐는 산사람의 건강하고 떳떳하고 단순한 삶이 그 험함과 고됨과 외로움까지 살갑게,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독자도 한번쯤 따라다니고 싶다. 노년을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니, 화자의 각박하지 않은 현재 삶이 짐작된다.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다닐 근력을 착실히 키우시길.    
1622    詩人는 언어란 감옥의 감옥장이다... 댓글:  조회:4141  추천:0  2016-10-01
  시의 언어에 대하여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카는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모든 존재가 언어에 의하여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이름지어지기 이전의 존재는 이미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니 존재의미가 드러나지 아니한 상태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는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힘을 빌려서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 인식의 세계를 그 영역 안에 끌어들이게 된다. 혹자들은 시가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자로서 절대 권능을 갖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그가 인식한 존재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인식이 얼마나 새로우며 깊이 있는가에 따라 시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로서 미학적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다르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시가 예술의 영역에 있음을 고집하고자할 때 더욱 그렇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실용적 기능, 즉 사전적 의미인 개념 전달의 기능만으로는 미학적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시적 인식에도 방해가 된다. 시는 실재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적 세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함축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시에서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화된 언어는 시를 살아 있는 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이 존재를 어떤 언어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존재의 철학적 인식과 미학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시에서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시를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의 관념의 때가 묻은 언어를 시인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상상력의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시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을 모른다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느린 발자국 소리 시멘트 바닥을 울린다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  그리고 파수병의 섬엄한 총검도  그 소리만은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 소리는 겨울의 소리  천지가 골수까지 얼어붙는 소리  별빛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  사람들아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아는가  머리를 깎이운 복면의 삼손이  오늘밤도 그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들린다  --------이형기의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서 복면한 삼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변형된 의미, 또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복면한 삼손이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한 겨울의 소리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란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소리를 삼손의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기까지 시인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명명자로서의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과학적 개념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겨울의 소리와 복면한 삼손이 시안에서 같은 의미관계로 동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의 설득력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겨울의 소리에 대한 존재인식이 얼마만큼의 울림으로 시적 전달력을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의 소리는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찾아오는데,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로도 가둘 수 없고 파수병의 삼엄한 총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천지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고 별빛이 얼음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쯤되면 겨울을 세기의 역사 삼손에 비유하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겨울의 위력적 이미지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겨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떠올림으로써 시적 인식의 폭을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위력적 존재이기에 삼손으로 비유되는 겨울, 그 겨울의 향방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여 미학적 구조를 형성한다. 겨울의 움직임을 복면한 삼손이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로 형상화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미학적 구조 위에 있다는 것은 관념 진술의 언어가 거의 없고 시적 대사을 이미지화하는 구상적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그리고 시 전체가 내용상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각 개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주 심상을 중심으로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긴밀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덩쿨장미는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뻗어 오른다  담장 위로 지붕 위로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휘어지면서 끝쯤에 이르러  꽃을 달고 얼굴을  들어 내 보인다  그러나  따로 이름은 없다  -------이병훈의 전문  이병훈의 시 는 인식의 시에 속한다. 인식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의 예민함이 관건이다. 똑 같은 대상이라도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획득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자칫 이런 유의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누구나 쉽게 하는 평이한 인식을 평이한 진술로 드러냈을 때이다. 그 대 독자는 전연 시적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시의 생명인 경이감도 창출되지 못한다. 인식의 내용이나 표현이 경이감으로 전달되지 못하면 시는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시 는 서술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사어와 동사를 통하여 시적 대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과정을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덩쿨장미가 꽃을 달기까지의 과정을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또는 휘어지면서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배면에 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감지하게 한다. 찔리는 아픔과 서로 얽히는 고달픔과 휘어지는 좌절의 시간을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는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덩쿨장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외적 현상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당히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 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다. 거기에다 생명 탄생의 결과를 놓고 따로 이름은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적 허무를 암시한다. 무릇 모든 생명적 존재는 일회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상상력의 폭은 좁다. 원거리 이미지의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서술적 시어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느낌, 어떤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성을 느끼게 한다.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파도가 싱싱한 기억을 톡톡 건져낸다.  '나의 20년' 유행가 가사가 울려 퍼지던 사춘기 시절  철 이른 비인 해수욕장은  내 퇴화된 꼬리뼈에 자꾸만 방울을 달아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방울 소리가 난다  벚꽃이 도톰한 입술로 휘파람 소리를 내던 열아홉 살  작약도 별빛을 모두 삼킨 활화산이 된다.  백야의 아찔한 울렁거림으로 폭발하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뼈 속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맞던 어느 해 추운 겨울  해운대는 퉁퉁 부풀어오른 상처를 안고 넘어진다.  온종일 그 곳에서  하얀 얼굴로 내 이름을 지워낸다.  꽃샘추위에 마음을 베어버린 어느 해 새벽  무작정 강릉행 고속버스를 탄 싸락눈이  밤새 경포대에 뛰어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너를 안고  나도 바다에 뛰어든다.  수첩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바다가 된다.  ------박 윤의 전문  박 윤의 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감각화된 시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입체화시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언어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박 윤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조련사로서의 역량을 보인다. 물론 이 시의 언어가 일상성의 지시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으로 해서 일상성을 환기하는 지시적 기능을 일정 부분 갖는다. 그러나 그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약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에서 이 시인의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능력을 보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는 추억 속에 들어 있는 19살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과거의 바다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 하고 있는 이미 나와 일체가 된 바다다. 바다가 수첩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바다는 과거의 다른 기억과 중첩되어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바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용도 한다. 비인 해수욕장이 퇴화된 꼬리뼈에 방울을 달아준다. 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망을 형성한다. 퇴화된 꼬리뼈란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추억일 것이고 방울소리는 그것을 자꾸 의식선상에 떠오르게 하는 바다의 작용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추억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사춘기 시절에 얽힌 이야기다.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은 이런 고백적 진술을 이미지 속에 감추고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식이 잡힌다. 이 때 잘못하면 상투적인 서술적 진술로 흘러서 시적 긴장감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지시적인 언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꽤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의 막연한 기대와 황홀감에 젖어 들뜨는 심리 변화과정, 그리고 상처 받고 절망하는 그 시절의 상반된 의식이 감각화된 언어 속에 용해되어 경이감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감각화되면 경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의 효능에 대한 자각 없이 훌륭한 예술의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고유영역을 고집하는 한 이 명제는 절대 진리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언어의 창조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감동도 결국 언어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한다. 언어에 윤활유를 부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묻은 관념의 때를 벗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   장지동 버스 종점  ―최호일(1958∼ )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강북 구시가에 사는 내게는 멀기도 멀더라. 서울이 엄청 넓어졌다. 늦은 밤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야 눈을 뜬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을 테다. 택시요금이 꽤 나올 테다. 한남동이나 마포가 버스 종점인 시절이었다면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으련만. 다행히도 화자는 한낮에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졸지에 모르는 동네, 그것도 개망초 꽃 핀 공터며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한적한 옛날 동네에 떨어진 화자는 어리둥절하고 막막하다.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난단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 70년대 아닌가? 화자가 모르는 새 뚫고 지나온 시간의 막이 기이한 감촉으로 휘어지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긴 목적지가 아니지. 화자는 사이다 한 병 사서 마시고 장지동을 벗어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을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기발하게 펼쳐 보인다. 최호일은 일상을 날선 감각으로 집요하게, 그러나 유유히 음미하며 낯설게 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시인이다.             시의 언어에 대하여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카는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모든 존재가 언어에 의하여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이름지어지기 이전의 존재는 이미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니 존재의미가 드러나지 아니한 상태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는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힘을 빌려서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 인식의 세계를 그 영역 안에 끌어들이게 된다. 혹자들은 시가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자로서 절대 권능을 갖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그가 인식한 존재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인식이 얼마나 새로우며 깊이 있는가에 따라 시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로서 미학적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다르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시가 예술의 영역에 있음을 고집하고자할 때 더욱 그렇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실용적 기능, 즉 사전적 의미인 개념 전달의 기능만으로는 미학적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시적 인식에도 방해가 된다. 시는 실재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적 세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함축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시에서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화된 언어는 시를 살아 있는 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이 존재를 어떤 언어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존재의 철학적 인식과 미학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시에서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시를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의 관념의 때가 묻은 언어를 시인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상상력의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시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을 모른다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느린 발자국 소리 시멘트 바닥을 울린다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 그리고 파수병의 섬엄한 총검도 그 소리만은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 소리는 겨울의 소리 천지가 골수까지 얼어붙는 소리 별빛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 사람들아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아는가 머리를 깎이운 복면의 삼손이 오늘밤도 그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들린다 --------이형기의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서 복면한 삼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변형된 의미, 또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복면한 삼손이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한 겨울의 소리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란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소리를 삼손의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기까지 시인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명명자로서의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과학적 개념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겨울의 소리와 복면한 삼손이 시안에서 같은 의미관계로 동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의 설득력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겨울의 소리에 대한 존재인식이 얼마만큼의 울림으로 시적 전달력을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의 소리는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찾아오는데,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로도 가둘 수 없고 파수병의 삼엄한 총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천지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고 별빛이 얼음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쯤되면 겨울을 세기의 역사 삼손에 비유하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겨울의 위력적 이미지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겨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떠올림으로써 시적 인식의 폭을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위력적 존재이기에 삼손으로 비유되는 겨울, 그 겨울의 향방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여 미학적 구조를 형성한다. 겨울의 움직임을 복면한 삼손이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로 형상화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미학적 구조 위에 있다는 것은 관념 진술의 언어가 거의 없고 시적 대사을 이미지화하는 구상적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그리고 시 전체가 내용상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각 개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주 심상을 중심으로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긴밀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덩쿨장미는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뻗어 오른다 담장 위로 지붕 위로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휘어지면서 끝쯤에 이르러 꽃을 달고 얼굴을 들어 내 보인다 그러나 따로 이름은 없다 -------이병훈의 전문   이병훈의 시 는 인식의 시에 속한다. 인식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의 예민함이 관건이다. 똑 같은 대상이라도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획득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자칫 이런 유의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누구나 쉽게 하는 평이한 인식을 평이한 진술로 드러냈을 때이다. 그 대 독자는 전연 시적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시의 생명인 경이감도 창출되지 못한다. 인식의 내용이나 표현이 경이감으로 전달되지 못하면 시는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시 는 서술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사어와 동사를 통하여 시적 대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과정을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덩쿨장미가 꽃을 달기까지의 과정을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또는 휘어지면서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배면에 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감지하게 한다. 찔리는 아픔과 서로 얽히는 고달픔과 휘어지는 좌절의 시간을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는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덩쿨장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외적 현상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당히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 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다. 거기에다 생명 탄생의 결과를 놓고 따로 이름은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적 허무를 암시한다. 무릇 모든 생명적 존재는 일회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상상력의 폭은 좁다. 원거리 이미지의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서술적 시어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느낌, 어떤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성을 느끼게 한다.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파도가 싱싱한 기억을 톡톡 건져낸다.   '나의 20년' 유행가 가사가 울려 퍼지던 사춘기 시절 철 이른 비인 해수욕장은 내 퇴화된 꼬리뼈에 자꾸만 방울을 달아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방울 소리가 난다   벚꽃이 도톰한 입술로 휘파람 소리를 내던 열아홉 살 작약도 별빛을 모두 삼킨 활화산이 된다. 백야의 아찔한 울렁거림으로 폭발하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뼈 속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맞던 어느 해 추운 겨울 해운대는 퉁퉁 부풀어오른 상처를 안고 넘어진다. 온종일 그 곳에서 하얀 얼굴로 내 이름을 지워낸다.   꽃샘추위에 마음을 베어버린 어느 해 새벽 무작정 강릉행 고속버스를 탄 싸락눈이 밤새 경포대에 뛰어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너를 안고 나도 바다에 뛰어든다.   수첩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바다가 된다. ------박 윤의 전문   박 윤의 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감각화된 시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입체화시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언어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박 윤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조련사로서의 역량을 보인다. 물론 이 시의 언어가 일상성의 지시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으로 해서 일상성을 환기하는 지시적 기능을 일정 부분 갖는다. 그러나 그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약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에서 이 시인의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능력을 보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는 추억 속에 들어 있는 19살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과거의 바다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 하고 있는 이미 나와 일체가 된 바다다. 바다가 수첩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바다는 과거의 다른 기억과 중첩되어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바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용도 한다. 비인 해수욕장이 퇴화된 꼬리뼈에 방울을 달아준다. 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망을 형성한다. 퇴화된 꼬리뼈란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추억일 것이고 방울소리는 그것을 자꾸 의식선상에 떠오르게 하는 바다의 작용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추억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사춘기 시절에 얽힌 이야기다.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은 이런 고백적 진술을 이미지 속에 감추고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식이 잡힌다. 이 때 잘못하면 상투적인 서술적 진술로 흘러서 시적 긴장감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지시적인 언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꽤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의 막연한 기대와 황홀감에 젖어 들뜨는 심리 변화과정, 그리고 상처 받고 절망하는 그 시절의 상반된 의식이 감각화된 언어 속에 용해되어 경이감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감각화되면 경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의 효능에 대한 자각 없이 훌륭한 예술의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고유영역을 고집하는 한 이 명제는 절대 진리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언어의 창조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감동도 결국 언어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한다. 언어에 윤활유를 부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묻은 관념의 때를 벗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                 장지동 버스 종점 ―최호일(1958∼ )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강북 구시가에 사는 내게는 멀기도 멀더라. 서울이 엄청 넓어졌다. 늦은 밤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야 눈을 뜬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을 테다. 택시요금이 꽤 나올 테다. 한남동이나 마포가 버스 종점인 시절이었다면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으련만. 다행히도 화자는 한낮에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졸지에 모르는 동네, 그것도 개망초 꽃 핀 공터며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한적한 옛날 동네에 떨어진 화자는 어리둥절하고 막막하다.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난단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 70년대 아닌가? 화자가 모르는 새 뚫고 지나온 시간의 막이 기이한 감촉으로 휘어지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긴 목적지가 아니지. 화자는 사이다 한 병 사서 마시고 장지동을 벗어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을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기발하게 펼쳐 보인다. 최호일은 일상을 날선 감각으로 집요하게, 그러나 유유히 음미하며 낯설게 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시인이다.          
1621    詩人은 추상화와 결혼해야... 댓글:  조회:4280  추천:0  2016-10-01
추상화 속에 시가 있다/김성오 시의 다양성과 다의성으로 볼 때 시를 짓고 고치는 방법이 수학에서의 공식, 그것과 같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리라.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 마음 편하게 나의 경우를 말해볼 요량이다. 그것도 결국 전체의 모습 중에 어느 한 부위에 속하겠지만.추상화에는 무수히 많은 시가 묻혀 있다. 광물질처럼. 추상화를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 그것은 나의 시 쓰는 방법 중의 하나다. 추상화 한 점을 앞에 놓고 이것은 불, 혹은 아침, 혹은 슬픔이다 라고 내가 말했을 때, 누구나 반박의 여지없이 아 그렇구나!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탁월한 상상력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아니라, 고정관념 따위는 일찌감치 저세상으로 보내버려야 한다. 고정관념이 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서도 안된다. 무덤도 만들어 두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도 부족하고 막무가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나로서는 정말 힘이 들어서 기진맥진하기가 부지기수이지만, 그래도 즐겁기만 한 것은, 시를 캐낼 때의 삽질이나 괭이질이 주는 노동의 참맛 때문이리라. 정신이 땀을 흘릴 때의 그 신선한 기분을 나는 시의 끈질긴 추적에서 자주 느끼곤 했었다. 돈도 안 되고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손해만 주는 시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정신의 노동이 주는 상쾌함 때문일 것이다. 추상화에서 시를 캐내기 위한 터 닦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일반적 언어 체계가 아닌, 독특한 체계의 문장을 찾는다. 예컨대, 탁월한 상상력이 깃든 고정관념이 극락왕생한 그런…. 언젠가 추상화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실 안방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쌓여 있는 그림을 보고 무슨 천상의 창고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집 거실에 걸려 있는 80호 정도 되는 추상화가 대뜸 나에게 자기를 ‘아침’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림 앞에 붙잡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얻어낸 문장이, ‘나는/ 아침을 열어 햇빛을 꺼내기 시작했다’였다. 이 문장을 접한 것으로 나의 시를 캐내기 위한 터 닦기가 끝난 셈이다. 이제 정신의 삽과 괭이와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연장을 동원하여 시를 캐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때에 사용되는 일련의 도구들은 나의 여러 경험들, 나의 삶 전체이겠지만, 어떻게 딱 들어맞는 연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을 훨씬 쉽게 할 수 있다. 아무튼 작업을 통하여 내가 얻어낼 시의 성공 여부는 객관화의 성공에 좌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결과, 다음과 같은 시를 캐내었다. 아름다운 고독 나는 아침을 열어 햇빛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난한 나에게 아침은 주둥이가 좁았다 손등이며 손바닥 여기저기가 다쳤다 너무 가벼웠다 햇빛없는 아침은 우글쭈글해져서 보기에도 흉했다 나는 나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반딧불로 알맞게 아침을 채웠다 외로울수록 아침을 채우기란 쉬웠다. 물론, 시를 만드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됐든지 간에 공통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목재를 가지고 가구를 만들 때의 방법과 흡사하다. 목재가 가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패질이 되어야 하고, 용도에 맞게 톱질도 되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사포질을 해야 하는가 하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하기도 하고, 적당히 못도 박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 칠도 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칠은 제일 나중에 하게 되어 있지만, 또 못질을 한 다음에 사포질을 하게 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중에 칠을 하기도 하고, 못질하기 전에 사포질을 하기도 한다. 능률이라던지 필요에 따라 순서야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이지만, 과정 중에 어느 하나가 빠져서는 올바른 가구가 될 수 없다. 사포질을 안 했다고 쳐보라. 또는 칠을 안 했다고 쳐보라. 제대로 된 가구일 리가 없는 것이다. 이상은 내가 시를 쓸 때 염두에 두는 것들이기도 하다. 시를 퇴고하는 일은 가구를 만들 때의 사포질하는 과정에 속한다. 목재의 고유한 성질인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데는 사포질을 얼마나 끈질기게 오래 곱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포질이 잘 되어진 목재가 가구 전체의 분위기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다. 나는 위 시의 사포질을 다음과 같이했다. 1연은 너무 돌발적이라 이질감과 어색함을 느슨하게 풀어 주기 위해, 끝에 ‘부스러기까지 죄다’를 추가했다. 2연에서의 아침에 다친 손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친 손은 밝았다/ 환히 보였다/ 달동네 판잣집 연탄재’를 넣었다 3연의 나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것이 반딧불 하나로는 부족했으므로 같은 계열의 ‘야광충 도깨비불’을 넣어 다양화하고, 보다 선명함을 위해 시각적인 ‘따듯하게 모아’라는 행위를 넣었다. 4연은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듯하여 삭제했다. 이미지와 이미지와의 충돌이 시의 모습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충돌의 결과는, 비례관계에 있는 거리와 속도에 좌우된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체와도 같이. 아시다시피 그러한 충돌은 거리가 멀수록 효과가 크다. 거리, 그 역할을 제목이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제목을 다는 일이 어렵고 까다로운 일임은 분명하다. 나의 경우는 여지없이 실패했다. 「아름다운 고독」이라니 유치하지 않는가. 가구를 만들 때 칠을 하는 일은 시에서 제목을 다는 일과 유사하다. (흔히, 제목다는 일을 가구에 비교한다면 제목은 진열장, 신발장, 장롱… 이라고 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와 같은 것은 산문에서의 일이지 시에서는 아니라고 본다.) 어느 구석도 빠뜨리지 않고 칠붓은 지나간다. 목재의 무늬와 색깔은 다를지라도 칠은 어디라도 고루고루 일정하게 묻어 있다. 가구의 어느 한 부분만 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시 전체에 고루 묻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결과 1연의 ‘꺼낸다’ 2연의 ‘주둥이’ 3연의 ‘채웠다’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있었다. 병이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용으로 보아 흔한 병이면 안될 것 같고, 특별한 어떤 병이라야 했다. 그때 문득 박물관에서 보았던 고려청자니 이조백자니 하는 것들이 떠올랐는데, 책을 뒤져 마음에 쏙 드는 병 하나를 찾아냈다. ―진사채 양각란국충문병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싶을 때의 즐거움은 홀로 낯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와의 만남, 그럴 때의 따뜻함과 포만감이 있다. 쓸쓸하고 외로운 여정 중에 우연히 만난, 마냥 내 편이 되어주기만 하던 사람은 얼마나 따뜻하던가. 그냥 세상이 싫어서 무작정 도망다니던 한때의 외로운 섬 어중간에서 만났던 그 사람처럼. 결국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진사채 양각란국충문병 나는 아침을 열어 햇빛을 꺼내기 시작했다 부스러기까지 죄다 가난한 나에게 아침은 주둥이가 좁았다 손등이며 손바닥 여기저기가 다쳤다 다친 손은 밝았다 환히 보였다 달동네 판잣집 연탄재… 너무 가벼웠다 햇빛없는 아침은 우글쭈글해져서 보기에도 흉했다 나는 나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반딧불 야광충 도깨비불 따뜻하게 모아 알맞게 아침을 채웠다. 나에게 있어서 그 추상화는 아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침은 ‘진사채 양각란국충문병’이었다. 아침이 병이었기에 나는 손을 다치면서 햇빛을 꺼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햇빛을 꺼내다 다친 손에서라면 달동네 판잣집 연탄재…가 보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병이 된, 그래서 내가 내용물을 다 꺼내어 버린 아침이라면 그 속에, 내 안에 있는 반딧불, 야광충, 도깨비불… 이러한 것들로 채우는 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의 아침이란 그런 것이었다. (김성오) ◇95년 『현대시』 등단.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   자두  ―이상국(1946∼ )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1960년대의 한 농촌 소년 투쟁기가 가슴 짠하고 따뜻하게 펼쳐진다. 화자는 아들만 있는 집의 막내인 듯하다. 양 부모 건재하고 장성한 아들이 여럿인데, 공부도 잘했을 막내가 ‘사투’를 벌이며 소원하는 대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된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당최 비빌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착했던 아이가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해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투쟁을 해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고학을 할 각오로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니 화자는 독한 데 없는 순둥이였던가 보다. 어쨌든 대학교는 이쯤 열망하는 사람이 가야 하는 건데 공부에 뜻이 없고 집이 어려워도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대학에 다니는 오늘의 청소년도 가엾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화자가 누이 부르듯 ‘자두야’ 속삭이며 묻는다. 인생은 알 수 없죠. 그런데 빈속에 자두를 따 먹고 당신은 시를 낳았죠. 이상국의 시들은 진솔하고 따뜻하고 해맑다.(사족: 화자에게 누이가 있었다면 국면이 달라졌기 쉽다. 대개 누이들은 마음이 여리고 희생정신이 강하더라)    
1620    詩란 섬과 섬을 잇어놓는 섶징검다리이다... 댓글:  조회:3770  추천:0  2016-10-01
10강] 시의 연은 어떻게 만드는가  안녕하세요.  이번 강의를 받으시면서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꼭 지난 42강을 독학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러면 훨씬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은 시의 연에 대해서 공부할 계획인데요.  연도 행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로 구분하여 공부하기로 하겠  습니다. 조태일님은 강희근 시인의 주장대로 강조의 단락  으로 행을 구분하고 또 강조의 큰 단락으로 연을 구분하지만  우리는 행에서 공부한대로 리듬과 이미지, 의미의 단락으로  나누어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시의 구조에서 행이 하나의 작은 단락이라면, 연은 이 작은  단락이 모여서 만든 큰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은  시의 구절이며 가락, 의미, 이미지 등 내용의 통일성을 가지  는 시의 단위입니다.  1.리듬의 큰 단락으로 연 만들기  우선 황금찬 시인은 행과 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본  인이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행은 언제나 시각적인 효과와 청각적인 효과를 같이 생각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각적인 효과만을 노리는 경우 그 예로서 귀향선의 한 귀절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거북처럼  남태평양을  헤치며  귀향선이  온다.  최초에는 이렇게 행을 벌렸던 것을 다시 청각적인 효과를 같  이 노리기 위하여 시각 위주로 했던 것을 고쳐 본 것이다.  거북처럼  남태평양을 헤치며  귀향선이 온다.  시에 있어서 음악성과 회화성이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그  것은 행을 고정시킬 때 음악적인 효과와 회화적인 효과를 같  이 노려야 한다.  오래 전 시는 회화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가령  나비라는 소재로 시를 쓴다고 하면 나비의 날개 모양으로부터  글자를 배열하여 한편을 완성시켜 놓고 보면 꼭 나비의 모양  대로 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시를 시도 하는 사람이 없  지 않지만, 그것은 회화성을 중시했고 음악성을 무시한 행위  에 지나지 않았다.  한 말이 시작하여 끝이 날 때까지 그 말이 지니는 리듬이 있  게 마련이다. 그 리듬을 살리는 면에서 글자를 나열하여 행을  구성시켜야 할 것이다.  연의 경우에는 한 연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도록 완성 상  태여야 한다. 가령 한 연에다 시제를 달면 한편의 시가 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비가 온다.  목련화 마른 가지를  촉촉히 적시며  봄비가 내리고 있다.  이럴 경우 여기에 시제를 달면 한편의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  나 제2연은 같은 조건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누님이 가시던 날 아침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멎자  어머니 눈물 안에서  목련이 피어 났다.  각각 제목을 달면 두편의 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완성된 시가 아니라 누님으로 제한 4연으로 된 시의 1연이다.  행과 연은 역시 음악적인 면과 회화적인 면을 생각하여 나열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리듬의 큰 단락이 하나의 연을 이루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행을 이루는 리듬의 작은 단란이 운율을 형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리듬의 큰 단락에 의한 연의 형성 역시 시의  운율, 음악적인 부분에 중심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김억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은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이 시를 읽어보면 각 연들이 시의 운율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자세히 분석하기 전엔 좀 난해한 시입니다만, 소리 내어 읽  어 보십시오. 운율감이 잘 살아난 시라는 것은 그냥 느낄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제1연부터 제3편을 살펴보지요. 첫 음절은 '밤', '봄'.  '날' 같은 비슷한 소리를 배치하여 두운의 효과와 울림소리의  음악적 효과를 살리고 끝 음절 역시 '다', '데'의 똑같은 음  운으로써 각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4연은 자연스럽게 2행 모두 3음보율을 살리고 있습니다. 제  5연 역시 2음보율과 각운으로 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6연  은 2행 모두 음절 수가 똑같고 음보율도 똑 같습니다. 역시 울  림소리의 효과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강의를 하면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일일이 서로 맞는 두운  이나 각운으로 또는 유성음끼리, 단어를 배치하여야 하는 줄  아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학을 또 따로 공부해야지요.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시를 쓰면서 서로 어울리는 말끼리 모으면 자연히  서로 맞게 배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우리 모두 훌륭하게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우리가 시를  쓰면 음율이 잘 맞게 되어 있으니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한직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높새가 불면  唐紅(당홍)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지팽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黃(황)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그리고 산술도  다아 잊어버리고  白樺(백화)를 꺾어  墓標(묘표)를 삼고  凍原(동원)에 피어오르는  한떨기 아름다운  백합꽃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이 시 역시 리듬의 큰 단락에 의해서 연이 형성되고 있음을  우리는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2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2음보  율을 지니며, 음절의 글자 수도 또한 서로 비슷비슷해 음수율  까지 형성하고 있습니다. 끝 음절의 동일한 소리가 빚는 각운  도 각 연들이 운율을 살리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김종님의 의 일부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의 가슴을  내 것으로 할 수가 없다.  당신의 심장을  내 것으로 할 수가 없다.  당신의 온 몸을  내 것으로 할 수가 없다.  눈썹이 부족하고  입술이 부족하고  갈증이 부족하고  건네는 눈길이, 정열이  사랑이, 허리가 그리고 질투가 부족하여  웬지 당신의 사투리가  웬지 당신의 영혼이  웬지 당신의 행복이  내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갈증이 질투가 내 것이 아니다.  겨울날 방패연처럼 바람을 타고  공중에 떠올라 황홀한 얼굴  진정 내 것이 아니다.  각각의 연들이 아주 음악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리듬을 형성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  반복과 변화라고 볼 때 이 시의 각 연들은 이 반복과 변  화를 중심으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정공채시인의 행과 연에 대한 견해를 본인의 말로 듣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연은 한뭉텅이로 뭉뚱거려진 행의 집단으로서 연으로 나눠지  기도 하고 연이 없이 행으로만 전체의 시를 이루기도 한다. 또  어떤 작품은 불과 한행이 하나의 연으로 돼 있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에 연이 너댓 내지 대여섯이 모여져 있음이 많은  시들의 보편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굳이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되란 시 법은 없는 줄 안다.  시의 연과 행은 시가 대상으로 한 주제의 구성이나 처리, 그리  고 시의 흐름을 숨쉬게 하는 리듬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구분되  기도 하고 결합되기도 하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시는 어디까지나 언어작품이기 때문에 언어의 연결로 이뤄지고,  이 언어의 연결은 어차피 행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행  은 또 연으로 이뤄져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수 있겠  으나, 그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단 한행  의 시행이 형태상으로는 연으로 보긴 어렵다 할지라도 얼마든  지 연의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이 행으로 나열된 행의 집합으로서의 독립형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독립형태는 완전독립형태는 아니고 그 다음  연으로 연결지어 나가는 중간숙주같은 독립형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를 모두 표현하면서 완전 전달하는 기능을  다 갖춘 것이 아니라, 가교로서의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하겠다.  하지만 반개의 꽃망울같고 미완의 도정같은 이 연이 굳이 그  시 작품의 결연까지 다 이르지 않더라도, 손색없는 독립성을  보여주는 경우도 흔하다. 시의 형태로서 그리고 호흡의 [일  단멈춤]에서 요긴하게, 어쩌면 필요불가결의 수법으로 쓰이고  있는 연에 대해서 필자는 이를 의도적으로 쓰지 않으며, 그렇  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자연으 흐름같이 그냥 놔 두면서, 그래로의 흐름에따  라 행을 이루고 연을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단 한행이 하나의  연의 구실을 할 수 있으면, 이것으로서 연은 이뤄진 것으로 한  다. 때문에 필자의 시작법에서는 행을 더 중시하면서 한행 한  행을 이뤄가다 보면, 연은 행의 멈춤에서 자연적으로 이뤄짐  이 대부분의 경우이기도 하다.  이같은 작법이 어쩌다간 연이란 것이 전혀 없는 [줄행]으로  한 작품을 끝까지 이뤄두기도 한다."  이 번 강의에서는 선배 시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싣는 것은  여러분께서 더 피부에 와닿지 않겠느냐 해서입니다. 많은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시 한 편을 올리겠습니다. 늘 강조하지만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이론 강의를 듣는 이상의 중요한  것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김기택님의 를 올립니다.  유리창에 송충이 한 마리 붙어 있다  아파트 10층 창문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송충이가 기어 온 긴 높이를 생각해 본다  오를수록 더 높아지는 높이  아무리 힘차게 꾸물거리며 기어도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온몸이 허리로 된 송충이는 그래도  부지런히 뒤 허리로 앞 허리를 밀어 올린다  허리 밑 다닥다닥 점 같은 다리들이  유리창에 아슬하게 붙어 있다  흰 갈대잎 같은 털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몸도 털이 휘어지는 방향으로 기우뚱거린다  습관의 힘이 아니었다면  송충이는 벌써 10층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떨어져도 부러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그러다 갑자기 허리걸음을 멈추고  송충이는 허리로 된 머리를 높이 들어  여기 저기 허공을 한참 더듬는다  이 나무는 가도가도 거대한 평면 사각뿐이다  이파리 하나도 없이 어떻게 광합성 하나  아무래도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늘였다가  깊은 주름이 생기도록 줄이면서  송충이는 11층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남진우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김기택의 시선은 사물의 세부를 더듬는 탐정을 닮았  다. 그는 일상의 한 장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보고한다. 아파트  유리창에 붙은 송충이의 짐짓 무용해 보이는 동작을  화자의 시선은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까마득히 높은  유리창을 기어오르는 송충이의 은 일상에  매달려 사는 화자의 삶의 힘겨움을 반영하고 있다.  화자는 어쩌면 송충이가 자신이 오르고 있는 아파트  를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도시의 소  시민은 이 불가능한 나무에 매달려 사는  송충이와 다르지 않다."  비교적 리듬에 신경을 써서 연을 구분 지은 곽재구님의 을  올립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 건너는  이름도 모르는  바람 같아서  가지와  가지 사이 건너며  슬쩍 하늘의 초승달  하나만 남겨두는  새와 같아서  나는 당신을  붙들어 매는  울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한 번 떠나간  나루터의  낡은 배가 될 수 없습니다  ================================================   섬/손세실리아   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안경을 두고왔다.나직한 목소리로 늙은 시인의 사랑 예기들려주고 싶어 쥐 오줌 얼룩진 절판 시집을 두고 왔다 새로 산 우산도 밤색 스웨터도 두고 왔다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날을 몰라 거기 나를 두고 왔다.   섬은 외로워 보이지만사랑을 늘 묵상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섬은 사랑을 잃고 난 후의 통절한 울음 같기도 하고,섬은 사랑 혹은 기다림의 자세 같기도 하다. 연인이 여기 있다.섬을 떠나 뭍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있고, 그를 다른 곳으로 떠나 보낸후 섬에 남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떠나오는 이는 섬에 이것저것을 두고 떠나온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던 안경의 애틋한 시선을 놓아두었다. 사랑을 노래한 낡은 시집 속 언어들을  놓아 두었다. 궂은비가 내리는 날에 받쳐들 우산을 놓아 두었다. 털실로 두툼하게 짠 스웨터도 바람부는 날에 입으라고 놓아두었다. 끌리는 눈빛과 거짖 없이 수수한고백과 거짖 없이수수한 고백과 다정했던 날의 생활을 두고 떠나온다. 아니 그리하여 떠나오지 못한다.  떠나온 사람도 홀로 남은 사람도 섬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기억하는 한 섬은 섬이 아니다.(문태준 시인)      
1619    詩란 돌과 물과 바람들의 침묵을 읽는것... 댓글:  조회:3956  추천:0  2016-10-01
[9강] 시의 행과 연의 관계  오늘은 시의 행과 연의 관계를 먼저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연의 구분에 대해서 공부하고, 시의 첫 행을 공부  했으니 시의 마무리를 공부함으로 우선 시의 행과 연에 대한  단원은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1.시의 행과 연의 관계  시에서 반드시 행이나 연의 구분을 해야하느냐는 문제가 최근  더욱 부쩍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옛날 정형시에서는  그 형태적으로 행과 연이 정해져 있었지만 현대시로 발전해  오면서 그 형태와 내용의 자유스러움으로 인해서 최근에는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는 시들이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의 행이나 연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일단 행  에 대해선 앞 시간에 배우긴 했지만, 사실 그 동안은 본인의  기분에 따른 구분을 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은 시의 행과 연이 없는 시가 더 멋있게 보이  고, 더 현대적으로 보이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과 연의 구분이 없어도 아주 성공적인 시를 읽으면서  과연 행과 연의 구분이란 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아심  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과 연의 구분은 철저히 작가의 의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공간적, 시간적, 의미적, 조화적, 이미지적, 통일적  구분의 필요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하기도 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는 행과 연을 구분해야 그 이미지가 더 살아나고, 시  가 더 전달이 잘 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러나 구분에  큰 의미가 없고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는 산문시이면서도 그  운율이나 의미 전달, 이미지의 활용 등에 문제가 없다면 구태  여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조병무님의 설명을 참고하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허영자님의   꽃아  정화수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  그 어둠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조병무님의   돌들이 마주 앉아 침묵한다  물들이 마주 앉아 침묵한다  바람이 사이를 누비며  한올씩 한올씩 캐어내는 재미  구름밑에  하늘밑에  한폭의 그림으로 자리하는데  스님은 어디론가  바쁘게 간다.  흔적도 없이  빠르게 간다.  ⓒ조영서님의   저 속엔 스스로 트이는 하늘이 있습니다. 해는 한 변두리와  알맞은 빛깔을 내던졌고, 나는 의미가 익어 가는 눈짓을 보  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로 향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은 다시 차고 넘치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신동춘님의   꽃을 짓이기어 얻은 진한 진액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찾아보  지 못하듯 좋아하는 사람 곁에 혹처럼 들러 붙어 있어도 그  사람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꽃과 꽃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옆에 있을 때 굳이 멀리 두고  보듯 보아야 하고 떨어져 있을 때 애써 눈앞에 놓고 보듯 보  아야하느니. 우리는 서로 날 때와 죽을 때를 달리하기 때문에  꽃과 꽃처럼 사랑스러운 이에게 가는 데는 참으로 그 길밖에  딴길이 없다 한다.  지금까지 인용한 시들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는 행과 연의 구분이 있는 자유시 ⓑ는 행은 있되 연의 구  분이 없는 자유시 ⓒ는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 ⓓ는  연구분은 있되 행은 산문시로 되어 있는 특징이 각각 있습니  다.  ⓐ의 경우, 행과 행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인 쉼과 의미의 전  달, 리듬적 요소, 회화적인 생동감 등 복합적 요소가 모두 나  타나게 됩니다.  아무리 행과 연이 작가의 자유라하지만 우리는 분명 시의 연  이나 행 구분이 아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건 이미  배운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자유시엔 하나 이상의 연 구분이 가능하고 그 연  구분 자체가 시적 생명감을 더욱 불어 넣어 주기도 합니다.  그 것은 의미의 전달이 연과 연의 구분, 행과 행의 구분 속  에도 포함되어 있는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첫행이면서 첫연인 '꽃아'와 둘째 연 '정화수 씻은 몸/ 새벽마  다/참선하는' 은 도치되어 있습니다. 즉 정화수 씻은 몸 새벽  마다 참선하는 꽃의 모습을 그 연을 변경시킴으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도 '꽃아' 다음엔 잠시 쉼의 간격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에서는 연 구분이 없이 한 행, 한 행의 의미 전달과 음악적  요소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연 구분이 없으면 다소 그 탬포  가 빨라지지만 우린 그 행간의 시간적 개념을 생각하면서 감  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는 산문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운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자유시처럼 행과 연의 구분  으로 시의 호흡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전달 속도가 다소 빠르긴  하지만 오히려 생동감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는 ⓒ와 비슷한 산문시 형태지만 연의 구분이 있습니다. 앞  의 연과 뒤의 연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유지해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조향님의 이란 시의 마지막 세 연을 읽어보겠습니다.  건너편 언덕 신작로 오르막길.  이승의 버스가 씨근거린다.  永  訣  終  天  이 시를 보면 을 한 자씩 띄움으로써 영결이란 행사의  시간적 느림과 힘듬, 그리고 아쉬움이 나타나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天'을 한 연으로 잡은 것은 시각상  으로나 운율상 멀고먼 곳으로 망령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  다.  아마, '天'자를 앞 연에다 붙여서 썼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느낌도 사라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연의 구분에 의해  독자에 대한 의미나 감정의 전달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경순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구름에서 내려온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빈가지에푸름이피고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비비비비비비비비비  애타는가슴을적시고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물 위에로 흘러간다.  이 시는 세 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한 눈에 매우 회화적이고 청각적인 이미지의  시이구나 느낄 것입니다. 벌써 읽기 전부터 비가 주룩주룩  나리는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빗방울이 계속적으로 이어서 떨어지는 수직의 모양 속에  '빈가지에푸름이피고'나 '애타는가슴을적시고'는 추임새 정  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쏟아지는 시는 땅바닥에 고여 수평으로  흐릅니다.  아래 '물 위에로 흘러간다'는 고인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1연 '구름에서 내려온다'  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박목월님의 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명동  성니코라이 사원 가까이  이 시에서는 2연인 '아아' 한 행이 하나의 연이 되어 있습  니다. 시인 김춘수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여기서 연의 구실을 하고 있는 감탄사의 앞뒤에 배치된 연  들을 생각해보라. 앞의 연은 과거의 회상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뒤의 연은 완전히 현실의 어느 지점이  각성되고 있다. 즉 이 두 개의 연은 '아아'라는 감탄사를  사이에 하고 회상에서 현실로 완전히 각성하는 그 대목들이  다. 그러니까 이 '아아'는 감개무량과 가벼운 감탄을 나타  내는 '아아'인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의 주제로 보아 충분히  하나의 연을 차지할만한 중령을 지니고 있다."  한 연의 '아아'라는 감탄사를 가지고 과거의 회상에서 현실로  의 각성하는 것에 대한 감격이면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시키는  장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최근 시 중 시의 행은 존재하는데 연의 구분이 없는 시 하나를  예시로 올립니다.  고진하님의 입니다.  어떤 이가  새가 된 꽃이라며,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씨를 가져다 주었다  귀한 선물이라 두 손으로 받아  계란 껍질보다 두꺼운 껍질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놀라왔다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래졌다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의  새가 되고 싶은 꿈이 고이 포개져 있었다  그건 문자 그대로, 꿈이었다  바람이 휙 불면 날아가버릴 꿈의 씨앗이  깃털 가벼움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닌,  꿈의 씨앗도 아닌 박주가리의 生,  어떤 生이 저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어느 별의  토기에 새겨진 환한 빛살무늬의 빛살이  저보다 환할 수 있을까  몇며칠 나는  그 날개 달린 씨앗을 품에 넣고 다니며  어루고 또 어루어 보지만  그 가볍고  환한 빛살에 눈이 부셔, 안으로  안으로 자꾸 무너지고 있었다 ===========================================================   박남수의 '새' 그리고 시와 자연의 축복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새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 3연, 각 연 앞의 1,2,3 표시를 생략한 박남수의 '새......, 순수가치의 옹호와 추구를 주제로 하는 명편이다.  박남수는 평양 태생(1913)으로 일본 쥬우오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정지용의 을 통하여 1939년 박두진과 같은 해에 등단했다. 그 뒤 어떤 사유에선가 10수 년간 침묵타가 50년 대에 둘어 시작을 재개. 지적 서정의 새 경지에 힘써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즐겨 현실을 제재 삼았으나 앞의 시에서도 헤아려지는 바, 힘차거나 장엄하기보다는 매우 내향적인 것이 특색이다. 오영진 등과 협력, '문학예술'을 창간하여 상당 기간 편집을 주관했으며 제 5회 자유문학상(1957), 제1회 空超文學賞을 수상했다. 저서에 , 등 시집이 있으며 여러해 전 미국에 이주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타계(2001)했다. 김현승의 평설(한국현대시해설)을 보자. ......포수의 탄환으로 결국 붙잡는 것은 피에 젖은 새(육신)일 뿐 새의 순수는 아니라는 표현은 새의 진실을 잘도 표현하나 매우 시적인 표현이다. 시인 박남수는 순수 동경과 순수에의 지향을 그의 시 창작에까지 파급시켜, 되도록 의미를 배제한 언어와 언어의 엄밀한 결합으로서 예술적인 순수상태를 구축하여 그가 포착한 순수정신을 언어의 분야에서도 실현시키려 애쓴 듯 보인다...... 서두에 저 시편을 두게 된 것은, 지난 10월 하순, 도봉산 부근에서 있은 시낭송회(184회)에 초대시인 명색으로 과분 참여하여 새 소리를 들으며 대자연 순수무잡 가까이 자리했음에선가, 어린 날 가을 소풍 같은 싱그러움에 듬뿍 젖은 중에 아하 그렇구나 그렇구나 떠오른 것이 저 시편..., 그것은 작금 우리 시의 큰 낭패 중 하나인 애매모호 억지 꾸밈이 덜한, 맑고 깨끗한 자연에 동화 공존하는 우이시회 토속 서정에도 말미암았을 터이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우주의 지퍼를 내린다 대자연과 동화 공존하는 정성수의 환호'아침을 열다'..., 싱그럽다. 그리고 찬란하다. 김삼주의 '백로' 서두도 도봉 깊은 골짝 물 소리를 낸다. 이슬처럼 하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심을 향하여 물비늘들을 다독이는 백로의 비 이따금씩 찬이슬 같은 바람이 강변을 훑어 수거되지 못한 빈 술병들은 휘파람을 흘리고 시심을 후련히 씻어 내리는 칼날 같은 것일 수도 있음인데...... 아이는 아이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볼 비벼대며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나뭇잎 사이로 틈틈이 아침해의 긴 다리는 흰 살을 보이면서 아기자기 뛴다 기억이 향기로운 돌 주위엔 거울을 보지 않는 작은 꽃들 단정히 서 있다 김정화의 '벚꽃나무 아래를 걷다' 16행 중 5~13행, 물기 흥건한 승그러운 자연의 수채화......, 그것이 흘러간 노래......늘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닌 추억에 밀리어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걷는 세속으로 ......아하 허긴 이 또한 자연 아니던가. 임보의 '유리를 닦는 사내'에 이르면 그 자연 섭리는 밝은 거울이 되어 우리 앞에 선다. 보다 성실한, 보다 보람된 생을 위한 고뇌라 할 것이다. 사방 둬 뺨도 채 안된 작은 유리문을 닦고 있다 열리지 않는 한 영혼의 문 앞에 온종일 기대서서...... 볼이 깊은 젊은 사내 젖은 손수건이 아프다 납골당 위 6월의 하늘 저녁 구름이 붉다 생로병사의 자연 섭리를 알면서도 우리들 세속은 이를 앞질러 고뇌 비감 애통하며 영생 불사를 신앙에 의탁하기도 하거니와, 저 우리들 고뇌의 어떤 성취가 역사 발전의 공헌으로 이어지면 이 또한 견고한 자연 섭리일 터. 하늘과 바다가 한 몸이었다 물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늘과 바다 가운데로 하얀 돛폭이 지나가다가 그만 삼키어지고 말았다 주체할 수 없는 열망도 그렇게 삼키어지고 말았다 조성심의 '수평선' 전문, 바다의 자연 풍광이 음양 낭만의 색조로 아름답다. 하늘과 바다의 합일인 수평선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의 절정 -사랑의 합일을 외치고 있음인데 그 낭만의 색조가 전문 7행 짧은 것으로 넓은 바다를 출렁이게 하고 있음이다. < 우이시>에 보이는 이 시인의 시 대부분이 잘 정리정돈된 어떤 신혼의 거실처럼 산뜻하고 밝아 두루 아름다웠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이하 9행 생략) 홍해리의 27행 중 18행, 그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꽃이랄 것도 없는 고추꽃을 이토록 간곡히 이토록 황홀히 바라보는 눈빛이 은혜롭다. 자연에 대한 사랑의 일상이 이토록 싱그럽고 감개 깊음이다.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부근의 전전긍긍은 눈물겹기까지 한 시인의 진실......거듭 아름답다. 받아 준다면 날마다 함께 하고 싶은 싱그러운 자연, 싱그러운 사람들......, 답례 축복이자 한 것이 되려 주옥에 흠집됨이나 아닐까 아수선하다. 시작 에세이 이달의 화제는 *시작 동기- 시는 어떤 때에 만들어지는가로 한다. 감흥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지 않으면 시를 쓸 수 없다. 이것이 솟아오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이 감흥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감흥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바는 동서고금이 두루 같아서 옛적 어떤 부류 시인은 이를 인스피레이션-영감이라 하여 '신의 숨결'로 신성시......, 이 영감이 깃들어 들 때까지 한없이 기다렸다는 얘기조차 있다 하여, 평생토록 영감을 기다리다 덧없이 살다 간 자칭 시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얘기다. 감흥이 솟아 오르지 않으면 시가 쓰여지지 않는다는 말에는 물론 일리가 있다. 누구나 경험한 바일 터이지만, 쓰고자 하는 일이 머리 속에 몽롱하여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쓰여지지 않는 경우라든지, 옳지 써야지... 했다가도 이내 멈춰버리게 되는 경우, 그리고 한참 써 나가다가 문득 그것이 공허한 낙서임을 깨달으며 망연자실하는 따위......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이를테면 감흥이 일지 않는, 또는 솟아오르지 않는 경우가 되겠는데, 아닌게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들 마음-내면의 리듬을 환기할 만한 감동이 없으면 사상이건 감정이건 말로 표출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저 감동이라는 것이 다만 그저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해서 하늘에서 내려오듯 찾아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영감에 힘입는다고 해서 평소에 생각한 바 없는 시가 절로 생산되어 걸출한 작품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경멸한다. 실상, 예술에 '우연'이란 결단코 없는 것으로, 언뜻 그렇게 보이는 경우에도 평소 부지 불식중 경험에 의한 것이나 심중에 잠재해 있던 것이 어떤 기회를 얻어 문득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의 민감성이 표현의 기회를 포착 그 통각력이 표현으로 인도하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여, 이 기회를 포착하는 일이 감흥을 환기하는 일이 되는 것인데, 이 기회라는 것은 하나의 동기만 있으면 잡을 수 있다. 가령, 한 개 능금을 보는 경우에도 여러가지 연상을 환기하는 바, 능금 밭이 있는 고향에 돌아간 친구라던가, 그 친구와 주고 받은 작별의 밤의 대화라던가, 그때 시에 대하여 무슨 말을 했던가, 그 친구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저번 소식에 가정의 고민을 말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등등 추억에서, 상상에서, 우정의 문제, 인생 문제까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거기 따라 사상도 감정도 흐르고 움직여서 그것이 마침내 언어가 되고 시가 되는 것이리 터다. 이 하나의 '동기'에서 비롯하는 가지가지 연상작용과 그것이 표현에 이르는 과정-거기에 시인의 활동이 있음일 터다.      
1618    詩란 사라진 시간을 찾아 떠나는 려행객이다... 댓글:  조회:4308  추천:0  2016-10-01
[8강] 시의 행 만들기(2)  시의 이론을 알면서부터 시를 쓰기가 힘들다는 분들이 계신데요.  아마 그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를 보는 안목이  생긴 것이지요.  일반인들과 시를 공부한 사람들의 차이도 그 것입니다. 일반  인들이 좋아하는 시라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어서 우리  의 말초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연애와 눈물, 절망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시에서  영원히 떠날 수는 없지만 직접적으로 써서 눈물을 자극하는  유행가 같은 시는 결코 좋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적당히 감추고, 또 적당히 축약시키고, 더러 과감히 생략하며  어떤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서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하고  그 감동이 마음 속에 오래 남아있게 하는 것이 진정 좋은 시입니다.  그런 언어가 절제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여러분들 은 지금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의미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를  공부하겠습니다.  2)의미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에즈라 파운드의 말을 빌리면 시 속에 나타나 있는 의미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라는 예술 작품 공간에 자리잡고 있  는 모든 표현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시적  언술의 특성답게 묘사되어 있거나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러  니까 시 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 또는 진술되어 있는 것들이  곧 의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묘사되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서경적, 서사적,심상적  인 작품 구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있기도 하고, 그것들은  또 축어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할 만큼 그 의미의 가시적 양태는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니 시 속에 나타난 의미란 시만큼 다양하다고 보아야 하  겠지요.  그러나 의미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시의 리듬 부분에 대해서  혹은 이미지에 대하여 느슨해질 수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김준태님의 를 읽어보지요. 이 시는 언젠가  한 번 읽은 시이던가요?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온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이 시의 행은 어제 읽은 시들과는 완전히 그 형태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행 구분이 리듬의 단락에 의  거했을 경우에는 하나의 행이 뚜렷한 운율을 형성하게 되  지만 이 시에서는 운율감은 다소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행마다 의미들이 자연스럽게 담겨져 있어, 읽는 독자  들에겐 그렇게 거북하거나 거슬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미 단락으로 행을 놓으면 독자들에겐 시적 의미들이  오히려 쉽고 자연스럽게 살아날 수가 있는 장점은 있겠지만  리듬감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에 꼭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3)이미지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우리가 이미 이미지에 대해선는 공부를 했지요. 결국 이미지란  우리가 겪은 사실적 경험을 감각화 시킨 것, 육화(肉化)시킨 것  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미지가 언어 발달의 단계에 따라 정신적 이미지, 비  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나뉜다는 것도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복습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정신적(심리적)이미지는 감각  기관(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에 의해 이루어진 정  신 현상을 말하는 것이구요. 두 개 이상의 다른 감각이 합해  진 형태를 공감각(共感覺)이라고 한다는 것도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미지 단락에 의해서 행을 만들게 되면, 의미의 단락으로 만  든 행에서 느꼈던 자연스러움보다는 선명한 인상이 부각될 것  입니다.  김기림님의 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海峽(해협)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서 사라센의 비단幅(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한 풍경은 바로 午前(오전) 七時의 절정에 가로누웠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를 뿌리는  교당의 녹슬은 종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려무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輪船(윤선)을 오늘도 바래보냈다.  이 시의 첫 연의 행들을 한 번 살펴 볼까요.  이 행들은 자연스러운 의미 단락으로 행을 놓는 것이 아니라,  각각 시어의 이미지가 살아나도록 이미지의 행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만약 의미의 단락으로 구분했다면  비늘 돋힌 해협은  배암의 잔등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산맥들.  아마 이렇게 그 형태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 것을 시각적  이미지를 살아나게 각각 한 행으로 독립시킨 것입니다.  특히 당연히 붙어 있어야 할 조사 '처럼'을 떼어 다음 행에  배치함으로서 배암의 잔등이 더욱 더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이미지의 단락을 하나의 행으로 놓은 시인  의 의도가 시의 형태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관식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조그만 암캐  마아리가 있었다  토굴 속에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푸른 빗방울  宮 ...  商 ...  角 ...  徵 ...  羽 ...  오음이 和諧(화해)하는 소리  끼니가 없어도 호올로 晏如(안여)함은  갈색 피부에 주름살이 새겨진  인도의 숲 속 마하트마 깐디가  원탁회의에 양을 몰고 나가듯  젖만을 먹고 살기 때문이지요.  벼슬아치가  수레를 머무르고 찾아온다 할지라도  두 다리 쭈욱 뻗고 마루에 걸터앉아  괼타리를 까 배꼽을 내놓은 채  이를 잡으며 말할 것이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 시에서 3연을 한번 살펴보실까요?  난데없이 宮, 商, 角, 徵, 羽라은 다섯 개의 한자어가 각각  하나씩 행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러한 독특한 모습을 차용한 것은 똑,똑,똑,똑,똑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이미지화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동양 음악의 오음을 아울러  이르는 궁, 상, 각, 치, 우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독자에게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를 느끼  게 해주고 있어 이 시의 분위기는 감각적이면서도 재기발랄  하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수익님의 의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설레는  봄,  봄날이다  종다리는 까무라치게  자꾸  울어쌓고  이 시에서 감각적 대상은 '봄'과 '종다리'입니다.  그 둘은 '화냥기처럼 설레는' 특성과 '까무라치게 우는' 특성  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왜 이렇게 행을 놓았을까는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시의 행과 연이 아주 자유스럽고 특이한 시를 소개  합니다. 어디까지가 행이고 어디까지가 연인가 한번  씩 나누어 보십시오.  고재종님의 를 올립니다.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거나 굵은 것이거나 아예 실가  지거나 우둠지거나 모두 다 서로를 훼방 놓는 법이 없  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 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거리거나 휙휙 후리  거나 모두 다 제 깜냥껏 한 세상을 흔들거리는데  그 모든 것이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한 집의 주춧기  둥 같은 둥치에서 뻗어나간 게 새삼 신기한 일이다.  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만한 새 한 마리  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깜깜한 땅속의 그 중  깊이 뻗은 실뿌리에까지 거기 흙살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둠지에까지 올려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는 어느 여린 것 하나라도 어  떤 댑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 우린 너무 감동을 모르고 살았구나!   -----------------------------------------------------------------   장지동 버스 종점  ―최호일(1958∼ )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강북 구시가에 사는 내게는 멀기도 멀더라. 서울이 엄청 넓어졌다. 늦은 밤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야 눈을 뜬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을 테다. 택시요금이 꽤 나올 테다. 한남동이나 마포가 버스 종점인 시절이었다면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으련만. 다행히도 화자는 한낮에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졸지에 모르는 동네, 그것도 개망초 꽃 핀 공터며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한적한 옛날 동네에 떨어진 화자는 어리둥절하고 막막하다.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난단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 70년대 아닌가? 화자가 모르는 새 뚫고 지나온 시간의 막이 기이한 감촉으로 휘어지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긴 목적지가 아니지. 화자는 사이다 한 병 사서 마시고 장지동을 벗어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을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기발하게 펼쳐 보인다. 최호일은 일상을 날선 감각으로 집요하게, 그러나 유유히 음미하며 낯설게 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시인이다.        
1617    詩作란 황새의 외다리서기이다... 댓글:  조회:4926  추천:0  2016-10-01
[ 2016년 09월 07일 07시 36분 ]     ==='간담이 서늘'해지는 교통사고현장=== [7강] 시의 행 만들기(1)  3.행은 어떻게 만드는가  행은 시의 구조에서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 학자에 따라서 그 분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김춘수 시  인은 리듬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의미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이미지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이상, 셋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오규원씨의 현대시작법도 김춘수씨의 분류를 따르고있습니다.  이 말은 리듬이나 의미나 이미지 그 어떤 것을 중요시하였는  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에 강희근 시인은 힘 줌의 작은 마디를 하나의 행으로  놓는 경우를 첨가하여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박용래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능금의  떨어지는  당신의  地平(지평)  아리는  氣流(기류)  타고  수수 이랑  까마귀떼  날며  울어라  물매미  돌 듯  두 개의  태양  이 시는 리듬을 중시하여 행을 구분한 예입니다.  만약에 이 시를 의미를 중시해서 행을 재배치 한다면  능금이 떨어지는 당신의 地平  아리는 氣流 타고  수수 이랑 까마귀떼 날며  울어라  물매미 울 듯 두 개의 태양  아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나 이렇게 바꾸어  버리면 시인이 원래 강조하고자 했던 하나 하나의 단어의  그 이미지와 시 전편에 걸친 경쾌한 리듬이 죽고 말게 됩  니다. 따라서 시인이 처음부터 의미의 단락을 중시했다면  문체나 어휘 선택이 달라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렇듯 시인이 어디에 그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시 전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을 감안하시고 강의를 들어주시기 바랍니  다.  또 같은 시인의 이란 시를 보면요.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천연)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앞의 시와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앞의 시는 한 단어가 한  행이 되었고 또 시 전체가 한 연으로 되어 있지요. 다음 시  는 '천연히'라는 한 단어가 한 행인 동시에 한 연이 되어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듯 행과 연의 구분은 작가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  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순전히 작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의 마음이라 해도 충분하거  나 필요한 이유 없이 마음대로 하면 안되겠지요.  여기에서 보면 '천연히'는 단 한 마디의 단어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이 말 하나로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  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 속의 '천연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가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실제로 이 이미지는 한 행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을 만큼 효과적입니다.  정형시(시조)는 규칙적으로 행과 연이 규정되어 있으므로 시인  의 자유가 한정된다 하여도 자유시에서는 행과 연은 시인의  자유의사에 따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원칙이 있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는 김춘수 시인의 구분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리듬의 단락으로 행만들기  리듬을 중시하여 리듬의 한 단락을 행으로 놓는 경우입니다.  에즈라 파운드는 시를 음악시, 회화시, 의미시로 나눈 일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시가 언어의 음악적 성질 그것만으로,  회화적 이미지 그것만으로, 또는 의미 그것만으로 되어 있지  않고 시가 어떠한 것을 중요시하고 있느냐에 하는데 따른  구분이라는 주장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춘수의 행과 연을  리듬, 이미지, 의미의 단락에 따라 구분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오규원님의 이야기를 참고로 들어보겠습니다.  "시의 리듬이란 언어를 음악적 효과가 나도록 소리를 유형화  한 것이다. 소리와 의미의 복합체인 언어를 '의미를 수식하고  변형시키고' 의미를 확충하도록 소리를 작품속에 조직하는 것  이다.  그런 시의 리듬은 정형시의 그것과 자유시의 그것과는 다르다.  정형시의 리듬은 압운과 율격을 기본으로 한다. 압운은 영시  나 한시에서 볼수 있는 바처럼, 시행의 시작, 끝, 중간에 유  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리듬은 우리의 전통시가인 고시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조의 초.중.종의 3장은 지금 현대시에 나타나는 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각 행은 음수율과 음보율을 갖고 있는 규칙  적인 리듬에 근거하여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윤선도님의 의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한 것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아마 학교에서 배워서 잘 아시겠지만, 시조의 각 장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한 번 살펴 보시지요.  글자 수는 3.4조의 음수율이 일반적이며 자연스럽게 끊어 읽는  단위를 한 보라 할 때 보통 4번, 즉 4음보로 되어 있습니다.  그 글자 수도 종장의 첫구에서 3음절, 5음절을 제외하고는  대개 2자에서 5자까지 변형이 가능했었습니다.  현대시조가 그 형태를 많이 다양화하고 자유스러워졌다 하여도  아직은 그 정형성이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조병기님의 을 읽어볼까요.  누구의 목숨일까  기다리는 동구밖  속사연 아직 남아  뜬눈으로 밤새우고  이슬밭 남 먼저 일어나  뻐꾸기를 손짓한다  어머니 가시던 해  그토록 서럽더니  울타리 기대 서서  먼 산을 바라는가  때절은 옷자락 벗고  촛불 하나 켜느니.  이 시조는 각 장의 구들을 한 행으로 놓음으로써 한 행이  2음보율을 살려내고 있습니다만 행을 중첩하여 읽어보면  고시조와 같은 4음보율이 살아납니다.  김소월님의 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이 시의 행을 살펴보면 행을 구분하는 기준이 리듬에 의한 것  임을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소리 내어 읽  어보십시오. 아마 7.5조의 음수율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우리가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시조와 정형시들을 많이 읽어왔기에 그냥 구  분이 가리라고 봅니다.  시조와 같은 정형시는 아니라도 리듬의 단락으로 행이 구분된  현대시를 부분으로 한 번 읽어보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김수용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넙적다리 뒷살에  넙적다리 뒷살에  말이 빼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수챗가에 얼어빠진  수세미모양  그대신 머리는  온통 비어  움직이지도 않는다지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이 승훈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별안간 따분해  찾아간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별안간 천둥이 쳐  비가 내려  꽃잎이 떨어져  찾아간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별안간 너래도  만나고 싶어서  기막힌 치욕이  와락 나를 껴안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의 행과 연은 작가의 의도를 껴안  은 채 리듬을 창조하는 방향에서 운용되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과목과는 상관이 없지만 계절에 맞는 시  두 편을 올리겠습니다.  강계순님의 -작은 손 18입니다.  오랜 잠 속에 누워 있었네  숨 쉬고 있던 모든 것들 단칼에 베어내고  차디찬 뒷모습으로 떠나간 그대  깊이 벤 상처 땅 속에 묻고  아주 오래 어둠 속에 갇혀 있었네.  이제 밤낮 익은 암호가 어디선가  누설되지 않은 주파수를 변조하여  깊고 단단한 잠 속으로 삐삐삐삐  은밀하게 타전해 오더니  물빛 사발통문을 만들어 여기저기 뿌리면서  그대 다시 돌아와 내 앞에 섰네.  흙 묻은 손발 햇살로 씻어내고  삭고 찌든 어둠도 부드럽게 밀어내고  연초록의 화신으로 다시 일어서서  보이지 않던 빛 다시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 다시 들리게 하는  비밀의 주파수 삐삐삐삐  신비한 암호를 보내면서 여기에서 저기에서  호출부호를 누르고 있네.  다음은 김명리님의 를 올리겠습니다.  원추리 노란꽃 위에 남방나비가 앉았다  물봉선 붉은꽃 위에 작은주홍부전나비가 앉았다  비비추 보라꽃 위에 사향제비나비가 앉았다  하악을 찢어져라 벌리고 노려보며  말짱한 대낮에  꽃잎 우산살을 낱낱이 펼쳐 든 어수리  환삼덩굴잎 뒷면에다  마악 알을 낳은 네발나비가 이리로 날아올지  멧노랑나비, 큰흰줄나비  갈고리나비 떼가 날아들지  오오 모두들 가만히 스치고 날아가버릴지!  ===========================================================   경계  이영광(1965∼ )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 동안 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 사라지고 없다 백만 평의 어둠이 그의 텅 빈 자리에 밤새도록 새까맣게 들어앉아야 한다   발레의 기본동작 중 하나인 파세(passe)를 하고 있는 듯 우아하게 외다리로 선 모습이 특징처럼 떠오르는 황새. 문득 황새가 왜 외다리로 서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두 발을 다 들면 자빠지기 때문’은 웃자고 한 답이고, ‘대개 오래 서 있을 때에 체온이 땅으로 빠져나가는 걸 반으로 줄이기 위해서’가 정답일 테다. 과학 상식이 어떻든 외다리로 서 있는 황새는 고고하고 초연해 보인다.  해질녘, 물이 차 있는 논에 황새가 외다리로 서 있다.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고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외다리로 선 그 모습을 보며 시인은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찾지 못했다는 것일까/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없다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날이 컴컴해져 외다리는커녕 황새도 안 보이자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평생의 경계’를 본다. 시에서 외다리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등등 두 상반된 세계를 이어주는 점이(漸移) 지점이다. 중학생 때 영어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딘지 고결하게 느껴졌던 건 그분 성품이 닿은 거지만 한쪽 다리를 저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두 다리 동물이 두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딛고 있지 않을 때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면서 비세속적 세계로 한 발 이끈다. 시인 이영광의 세밀한 자화상을 보는 듯한 시.    
1616    詩란 한잔 2루피 찻집의 호롱불이다... 댓글:  조회:3889  추천:0  2016-10-01
  [6강] 시의 구조 - 행과 연.4  강의를 이제 두번째 하게 되다보니  오랫동안 이 강의실을 지키셨던 급우들과는  한 가족처럼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관계가 더욱 아름답게 발전하여  서로 서로 좋은 글을 쓸 수있는 격려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시의 구조 행과 연에서  여덟번째 내용입니다  8)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한 부분이나 핵심  이 되는 내용을 시의 첫 행에 내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시의 내용을 이루는데 있어 첫 행이  중심이 되기때문에 이어서, 오는 모든 행들이 첫  행을 향하여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첫 행이 시상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대학원 주임교수님이셨던 허형만교수님의  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가난이야 하나님이 주신 거  때로는 슬픔의 계곡까지 몰려갔다가  저리 흐르는 게 어디 바람뿐이랴 싶어  다시금 터벅터벅 되돌아오긴 하지만  도회지 화려한 꽃집이 부러우랴  밤안개 아침 이슬 모두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외로움이야 하느님이 주신 거  사람 속에 귀염받는 화사한 꽃들은  사람처럼 대접받고 호강이나 하겠지만  때로는 모진 흙바람 속에  얼마나 시달리며 괴로워하리.  때로는 무심히 짓밟는 발에 뭉개져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리.  시르렁 시르렁 톱질한 박일랑  우리사 연분없어 맺지 못해도  궂은 날 갠 날도 우리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이 시에 대해 조태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행을 이룬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는 이 시의 핵심이 되고 있는 행이며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첫 행을 바탕으로  다음 행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시의 중심적 의미나 핵심이 첫 행에  자리 잡으면 이 첫행이 다음 행들을 풀어나가는  데 단서가 되거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9)수식어와 그 수식을 받는 중심 단어로 첫  행을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에서 공부한 평서문이 첫 행으로 나오는 경우는  한 문장이 앞에 옴으로 시작에 좀 부담이 될 수가  있지만 이 경우는 그 보다 훨씬 자유스럽습니다.  마종기님의 겨울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눈이 오다 그치다 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래 아직도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 막이 빈 벌판을 헤메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역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하나의 관념인 '나이'를 중심으로 수식어들이  그를 적절하게 꾸며 줌으로써 '나이'라는 언어는  딱딱한 개념적 요소에서 벗어나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시는 개념을 피하고 정서를  증폭할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의미에서 수식어들은 한 단어를 치장하거나 한정  시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수식 받는 언어의 '의미  의 육화'를 만들어 줘야만 한다. 그래야 시의 첫  행이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 스며 들어 올 수가  있다.  10)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제시를 통해 시의  첫 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 다음에 오는 상황이나 풍경,  생각, 느낌 등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게  해주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첫 행에 '~하면'따위의 형태로 어떤 행동이  제시되었을 경우엔 그다음에 펼쳐질 내용들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이정록님의 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뒤뜰에 가면  무거운 침묵으로 항아리가 있고  힘이란 것이 저런 거야  뚜껑을 열면 반쯤 젖은 돌 하나  그 젖은 얼굴, 아니면  물끄러미 내려보는 겨울 낮달,  갈수록 돌절구처럼 말씀 없으신 아버지  이성부님의 를 읽어보십시다.  누군가는 그가 죽었을 거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가 아편쟁이로 묻혔을 거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가 촌부로 늙었을 거라고도 한다.  그래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죽음까지도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 그녀의 흔적 하나하나마저 되밟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아 그녀는 경주시 성건동 신라아파트 A동 몇 호에  우리네 흔한 할머니로 살고 있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웬수놈의 가난이야  복이라 하는 것을 어찌 허먼 잘 타는고오....  야윈 물 어디에서  그토록 힘찬 소리 터져 나오는가  이미 낯 선 곳 흘러와서 잃어버린 소리.  短歌 한 토막으로도  어떻게 그토록 九泉을 뒤흔드는가.  이 시에서는 '누군가가 그가 죽었을 거라 하고'와  같은 하나의 사건의 제시가 첫 행에 옴으로서 시에  이야기의 요소가 가미 되기 때문에 그 흥미를 높이  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1)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감탄사, 또는 의성어  의태어 등 하나의 낱말로써 시의 첫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낱말을 첫행으로 삼는 것은 그  언어를 강조하거나 시인이 의도하는 운율의 효과  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명사들의 경우엔  호격조사를 붙이거나 그 자체로서 호명이 가능  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청각을 자극하면서 친근  감을 자아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사와 동사에 비하여 형용사나 부사는  첫행을 만드는 경우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형용사  나 부사 등은 동사나 명사보다 첫행이 주는 긴잗감  이 덜 하기 때문입니다.  감탄사 또한 단독으로 시의 첫행을 만드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이 자칫  감상적으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버상에 보면 감상적인 시들이 난무하는데 이는  시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없이 사이버 독자들의  말초만 자극하는 것으로 그 생명이 결코 길지가  않을 것입니다.  의성어, 의태어 역시 가벼움이나 말장난으로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첫행으로 놓을 때는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더욱 요구되기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지 않  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첫 행을 청유형이나 명령법, 가정  법 등으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껏 설명을  드렸지만 말하자면 시의 첫 행에는 대부분의 언어의  수단이 올 수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다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어떤 방법으로  시의 첫 행을 만들든 간에 첫행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내장해야 하고,  다음에 오는 행은 물론 마지막 행까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유기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딱딱한 공부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시 창작에 사실 이론이 매우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론을 알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또 여기에 예문으로 올리는 시들은 좋은 시들이  많으므로 좀 어렵기는 하지만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시 읽기의 일환으로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남진우님의 입니다.  그 새벽  나는 사과나무 아래 서 있었다  휘어진 가지마다  붉게 익은 심장이 마악 솟아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번  뜩이고  어둠에서 풀려나온 잎사귀 끝에 맺힌 물방울들이 후두  둑 내 이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디에도 과수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반쯤 무너진 황폐한 돌담 옆으로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늘어서 있는 사과나무들  거기 두근두근 열린 태양의 과실들  나는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땄다  내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  붉고  동그란  심장  한입 가득 그것을 베어 물자  어디선가 맹렬히 타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보이지 않던 새들이 깃을 치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 새벽 내가 서 있는 곳은  우물가였다 나는 마른 우물 바닥 저 밑에서 홀로  붉게 빛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승훈님의 해설을 덧붙입니다.  "그의 꿈 속엔 사과나무가 있고, 그 아래 그가 서 있  고, 붉은 사과는 붉게 익은 심장이 되어 아침 햇살에  번득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그는 거기서  태양, 사과, 꿈을 따고 그걸 베어 먹고, 그때 종소리  가 들린다. 이 종소리를 매개로 그가 삼키는 태양,  사과, 새 들은 날아간다. 안이 밖이고 삼킴이 비상  이다. 새벽 우물 바닥에도 붉은 사과, 태양이 빛나  고, 사과 하나가 지상 천상 지하를 물들이는 이 유  토피아, 이 화엄(華嚴)의 세계에 누군들 가고 싶지  않으랴."  =======================================================       보순토바하  ―곽재구(1954∼ )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신이 내 꿈속의 마을을 방문한다면 그는 바로 저 빛깔의 사리를 입고 올 것이다 누군가 내 꿈속에서 지상의 별들을 모두 잠재울 노래를 부른다면 그는 바로 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아기를 잠재운 어머니들이 비로소 떠나고 싶은 한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꽃의 순결한 그늘일 것이다     동무여, 가난한 내 노래는 한 잔 2루피 찻집의 호롱불보다 침침하고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은 그믐의 조각배 위에 위태롭게 출렁거리나니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 이 꽃만큼만 피어라 언젠가 한번 빚을 죽음이거든 이 꽃만큼만 처절하게 시들어라 젊은 날에 푹 빠져서 읽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한 구절, ‘편도나무여, 내게 신의 이야기를 하여다오/그러자 편도나무는 활짝 꽃을 터뜨렸네’가 뭉클 떠오르게 하는 시다. 보순토바하는 ‘봄의 말, 또는 봄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느티나무만큼 큰 꽃나무’인데 노란색 꽃이 핀다고 한다.      인도를 여행하던 어느 봄날, 시인은 가지마다 노란색 꽃 가득 인 나무와 마주치고 영혼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늘도 순결하단다. 신의 숨결과 눈빛이 느껴지는 환하고 장엄한 꽃나무! 신성할 정도로 아름답게 꽃 피운 그 나무를 실제로 보았으니 이후로 시인은 ‘꿈속에서 꽃이 핀다면/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부러워라, 그런 축복은 방안풍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제 발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을 테다. 그 강렬한 순간이 세상을 떠돌고 헤매는 여행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일 테다. 누구 못지않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온 한 시인이 이제껏 써온시를 가난하고 침침하게 느끼고, 제 영혼이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걸 깨닫게 하는 이국의 봄나무 보순토바하. 너무 큰 것은 사람을 압도한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압도당하면서 찬미하고 다짐한다.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이 꽃만큼만 피거라!’ 죽음을 걸고 처절하게 아름다우리라. 지극한 그 노래는 지상의 삶, 그 환멸과 탄식의 고단한 때를 부드러이 씻어 주리라.            
1615    詩란 사라진 길을 찾는 광란이다.... 댓글:  조회:4392  추천:0  2016-10-01
[5강] 시의 구조-행과 연.3  6)평서형문장으로 시의 첫 행을 시작하는 경우.  이 평서형 문장은 시의 의미나 시인의 개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니 그의 형태야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어가 생략이 되버리거나  혹은 일인칭으로 되는 경우가 있으며 사람이 아닌  명사가 주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박노해님의 을 예문으로 들  어 보겠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 속에 흘러보낸다  푸르름 녹슬어가도록 아직 맛보지 못한  상쾌한 아침, 생기찬 의욕, 울컥이면서  우울한 월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생존 행진곡에 몸을 던져 놓는다  이 시는 작가가 시의 첫 행에 일인칭 주어인  '나'가 나오는 예로 들었지만 여기에서 주어  가 생략된다고 해도 그 의미 전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요. 하지만 여러분께서 '나'란  주어를 생략하고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주어의 생략으로 인해서 시적 분위기나  화자의 태도 등은 상당히 다르게 인식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이 자리에 '나'라는 주어  를 놓음으로써 다른 사람과 차별돠는 오직 자신  만의 삶의 모습이 확실하고 뚜렷하게 부각될 것  이며 그럼으로써 그의 언술이 보다 솔직하고  진실성 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주어인 '나'를  시인이 사용함으로써 거짖없는 독백의 어조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 잡을듯 강하게 어필될 것  입니다.  다음에는 주어가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 오는 경  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오장환님의 입니다  눈 덮인 철로는 더욱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두 예문을 올려드렸지만  평서형의 문장이 시의 첫 행으로 오는 경우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나 구체적 사물의 이름,  관념어들이 오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시를 읽으면  평서문이 나오는 경우에 그 주어들을 살펴보면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김명리님의 을 올립니다.  枯死(고사)된 배나무밭 사이로 길은 사라지고 없다  이미 반 년도 넘게 한쪽 옆구리가 기우뚱한  적산 가옥이 한 채.  한 겹의 얇은 슬레이트로  내려앉으려는 하늘을 간신히  떠받들고 있다  떠나가고 없는 사람들  죽은 나뭇가지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죽은 배나무 잎사귀들  쿵, 쿵쿵쿵  한 때는 저 잘 익은 먹골배의 씨방 속에  한 종지의 설탕물처럼 제법 흥건히 깃들었을  두근거림 따위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후려칠 기세로  앙상하게 배배 틀린 회초리 같은 배나무들  아직은 한 사나흘 더  죽은 나뭇가지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죽은 배나무들의 잎사귀들!  이 시를 해설한 이광호님은  -시는 "길은 사라지고 없다"는 묘사로 시작되는데  우리는 마치 어떤 존재의 길들을 본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주어는 길이란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다음엔 제3인칭인 경우를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김상미님의 을 보실까요?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우리가 배우는 주제와는 관계없지만 이왕 시를 읽  으셨으니 이남호님의 해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상미의 사랑 노래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절  실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남쪽에 있다. 이때 남쪽  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따뜻한 곳, 생명의 근  원인 곳이다. 그곳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화자는 꽃  핀다. 화자는 남쪽으로 젖혀지는 붉은 꽃이다.그  것으로도 모자라서 화자는 고 말하고, 그  길을 닦고 또 꽃으로 장식한다. 그리고 그 길 위로  새와 바람과 짐승들처럼 화자의 그리움은 지나다  닌다.  7)비유로써 첫 행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배우신 바와 같이 비유는 낯설게 하는 장치  등을 통해서 우리들의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  려 충격을 주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이르  키는데 크게 기여를 합니다.  유용주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도시는 거대한 솥,  펄펄 끓는다  반짝이며 수없이 떠오르는 고기떼들  썩은 고기들의 끝없는 악취  그래도 매운탕엔 향기가 나야 제맛이지  깻잎과 미나리와 쑥갓을 듬뿍 넣고  소주 한잔 카아악!  어디에선가 무지막지한 큰 손이  자꾸만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핀다.  여러분은 물론이고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면  누구나 당돌한 이 시의 첫 행에 관심을 가지고  다음 구절을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비유를 첫 행에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하며, 시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박형준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창을 두드리고 간 얼룩들.  물 빠진 담벼락에 기댄  꽃대가 허공에 밀어올리고 있다.  누구나 하나씩은  흘려보낸 바구니.  작은 창에  저녁별 들어와  그 환함이 오래오래  한 자리에 앉아 있게 할 때.  먼 세상의 내륙에 가 닿아  갈대밭에서 우는 새들.  바구니에 담긴  가엾은 아이  소금처럼 단단해져 꽃대 위 머문다.  비유와 이미지가 살아있는 시입니다.  첫 행이 비유인 예로 올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가능하면 예시를 많이 올려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시를 공부하다가 막히면  옛날 강의를 다시 한번 경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제 강의실에 들어가서 여러분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어보았습니다.  쉽게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딱딱하고 어려운 부  분이 많았으며, 오자가 가끔 발견되어서 미안했  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공부하면  그렇게 어렵게 생각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지금쯤 더러 저보다  앞 서 가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번 강의의 특징은 강의 말미에 따로 최근에  발표된 시 중 좋은 시 한 두 편을 올린다는 것  입니다.  그 날 강의한 주제와는 특별한 상관이 없더라도  좋은 작품 읽기의 일환이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김선우님의 을 올립니다.  월경 때가 가까워 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 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 주면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마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 때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 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이 시에 대한 남진우 님의 해설도 곁들입니다.  "달과 여인과 바다. 이 이미지의 연상망은 원형적인  만큼이나 상투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기계적이고 작위적으로 연결시켜 놓지 않고  구체적이고 토속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함으로  써 설드력을 얻고 있다. 여인의 몸은 바다의 조류가  넘나들고 달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흘러 나오는 무한한 생산성을 약  속한다. 여인의 몸에서 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발상 속에는 풍요를 기원하는 대지모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시인의 시가 지닌 건강성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기 힘든 에너지를  과시하고 있다."  시를 참 잘 썼습니다.  몇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평안한 하루 보내시구요.  내일 뵙겠습니다.    ==============================================     장독 하나 묻어 두고  ―이연희(1973∼ )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 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굵은 손마디 찬바람 속에서 한 해 먹을 고추장을 담그며 말하지 못한 속내를 어머니는 장독 속에 묻었다 새빨간 고추장에 싹싹 비빈 밥을 입속에 퍼 넣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 언니와 나는 흔적 없이 잘 삭은 어머니 속내를 먹었다 더러는 짜고 더러는 매웠던 소리 내지 않는 한 시절을 온가족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 장독대의 봄날처럼 베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덜 삭은 마음들이 맵고 짠 맛을 내며 가슴에서 밀려올 때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 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화자는 젊은 주부일 테다. 어쩌면 늙은 어머니가 담가 보냈을 그의 집 고추장이 냉장고에 있을 테다. 장독 항아리 같은 건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 화자가 화분 몇 개 놓여 있을 베란다에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장독대의 봄날’을 떠올린다.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에서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 시절 어머니의 ‘말하지 못한 속내’를 비로소, 사무치게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자의 마음이 시리고 아픈 것이다.      어머니는 소금과 고춧가루를 들이부은 것 같았을 그 마음을 잘도 삭히셨군요. 썩히지 않고 삭혀서 시어머니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있게 먹이셨군요. 그렇게 우리 식구를 지키셨던 거군요.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이렇게 맵고 짠 건 덜 삭혀서일까요? 어머니와 딸은 용모와 표정뿐 아니라 성정도 닮을 테다. 고추장처럼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안온한 삶의 껍질이 갑자기 벗겨진 듯한 화자의 마음이 고즈넉하게 와 닿는다.        
1614    詩는 한해살이풀씨를 퍼뜨리듯 질퍽해야... 댓글:  조회:4193  추천:0  2016-10-01
[4강] 시의 구조-행과 연 2  두 번째 단원에 들어가기 전에 신중신 시인의 시의 첫 행에  관한 주장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시를 쓸 의욕이 팽배해지면 나는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가 방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기 마련이다. 습작 노우트를 펼쳐  두고 볼펜을 손에 쥔 채 어떤 긴장의 늪으로 빠져 든다.  시는 현실 자체와는 분명히 다른 또 하나의 경험 세계이다.  현실과는 전혀 별개였던 어떤 것이 완성의 순간에 현실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 다시 말하면 변용의 과  정에서 미묘한 갈등과 모순을 겪어내야만 한다. 그것을 초월  에의 의지라 해도 좋고, 또는 창조적 투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첫 행은 이 투쟁의 전초기지가 되는 셈이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촉발성, 예민한 집중력이 이 첫  행에 요구 된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개체에 윤곽을 주어 구  체적 사물로 떠올리게 하는 일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가장 밝은 백열등 불빛을 받으면서 오랜 시간 펼쳐진 하  얀 백지의 강박감, 그 공포를 수없이 체험했다. 의의로 쉽게  술술 풀리면서 한 편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  지만, 대개는 황막한 관념의 벌판에 외로이 던져진 채 그 벌판  을 헤쳐 나오려는 초극에의 안간힘을 겪기 마련이다.  첫행이 출구의 열쇠가 됨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다. 그래서  좀체 시행이 만들어지지 않는 날엔 이것저것 낱말만 흩뜨려  적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하게 사화집 따위의 다른 시집  을 펼치면서 나의 시작품 첫 행이 어떻게 쓰여졌나 일별해 보기  도 한다. 실로 막연하고 불확실한 도노가 아닐 수 없다.  시의 첫행은 창조행위중 가장 지적 모험정신이 충일한 창조작  업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것은 나에게 있어선 끝없이 되풀이  되는 비상에의 출발점이다. 때문에 첫행이 풀려 나가면 그것을  중도에서 팽개치기 어려워 좋든 궂든 한편을 얻는데 귀착되는  점이 또한 나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잘 들으셨지요?  이러한 시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시를 쓰는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시의 첫행은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계속 강의하겠습니다.  2)공간적 언어  시간적 언어 만큼이나 공간적 언어는 시의 첫 행을 이루는  가장 일반적인 유형입니다.  그러나 이런 특정 공간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다음에 오는 행  들이 그 것을 구체적 의미로 형상화할 수 있도록 떠받쳐 주어  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할 사항은 한 시인이 똑 같은 장소를 너무 빈번하  게 사용하면 상투적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강형철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호남선 터미날에 나가면  아직도 파김치가 올라온다  고속버스 트렁크를 열 때마다  비닐봉지에 싼 파김치 냄새  텃밭에서 자라 우북하였지만  소금 몇 줌에 기죽은 파들이  고춧가루를 벌겋게 뒤집어 쓰고  가끔 국물을 흘린다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대처에서 사는 자식들을 못 잊어  젓국에 절여진 뻣뻣한 파들이  파김치가되어 오늘도 올라온다  우리들 어머니 함께.  여기서 '호남선 터미널'은 고유명사이면서도 대중공간이기에  보통명사나 다름 없이 쓰이고 있습니다. 아마 시골에 집을 두  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하는 장소이기에 더욱 친숙하  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강은교님의 을 읽겠습니다.  빠알간 망사주머지 속에서  빠알갛게 언 알몸을 비벼대고 있는  빠알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조심조심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일 킬로그램의 양파들에게  전해 주게 이 말을  지금 이 별엔 봄이 왔다,고  짧은 시이지요?  우리가 흔히 보는 양파의 빨간 망사주머니가 여기에선 시의 첫 행  으로 나오는 특정의 공간 언어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보면서도 뭐 저게 시어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첫 행으로 등장하여 우리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합  니다.  우리는 늘 자기 주위에 하찮게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것들도  다시 한 번 시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훈련을 쌓아야  겠습니다. 우선 그 것들에게 생명을 주어(肉化시키어) 시의  소재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에선 작고 하찮은 공간을 첫 행에 올림으로써 우리의 관  심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박용래님의 를 읽어 볼까요?  어디선가  原木(원목) 켜는 소리  夕陽(석양)에  原木 켜는 소리  같은  참매미  오동나무  잎새에나  스몄는가  골마다  끝에나  스몄는가  누님의  반짇고리  골무만한  참매미.  여기에선 "어디선가"라는 불특정 공간이 첫 행으로 나와서  그 불확실성과 막연함으로 인하여 한정적인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와 매력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첫 행이 이렇게 막연한 시어가 나올 경우에는 그 다음  행이 보다 극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겠지요. 말하자면  더욱 시적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 전체가 풀어지고 애매한 느낌을 주고 말 것입니다.  그렇쟎으면 불특정 공간의 여운이 사라지고 말던지요.  이 시에서는 참매미 소리를 원목켜는 소리로 비유함으로서  시적 긴장감을 확실히 살려주고 있습니다.  3)시간과 공간의 언어들이 함께 어우러져 시의 첫 행을  이루는 경우  시간이나 공간이 함께 어우러져 나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  운 것입니다. 거기에 구체성까지 확보할 수 있어서 독자들  에게 쉽게 흡수될 것입니다.  시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한다고 하지만 구체성이 없는  시는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두석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새벽 노을 속  까마귀떼 잠 깨어 날아오른다  깃들인 자리 대숲  댓잎에 내린 된서리에  부리를 닦고  사나운 꿈자리  날개짓으로 훨훨  털어내며 날아오른다  눈녹이물 다시 논밭에서  서릿발로 일어선  텅 빈 들판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칼날 바람 타고 잇따라  솟구쳐 오른다  어느새 수백 수천의 까마귀  결빙의 하늘에서 만나  원무를 춘다  거친 숨결 하늘에 뿜어  드디어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는다  위의 시에선 '노을 속'이란 공간과 '새벽'이라는 시간이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노을이라면, 석양 즉 일몰의 광경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선 저녁 노을이 아니라 새벽의 노을이라는 표현을  써서 솟구쳐 오르는 까마귀들에게 어떤 희망의 공간을 제공  하는 듯한,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  니다.  4)자연물이나 기후현상이 시의 첫 행으로 오는 경우  자연 대상은 시인들이 특히 즐겨 사용하는 소재입니다. 따라  서 이 중심 소재가 시의 첫 행에 자주 나타날 수가 있겠지요.  기후 현상도 거기에 따른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힘이  있으므로 시의 첫행에 자주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이문재님의 을 읽어보지요.  봄 풀 꽃, 저 햇빛의 작은 지문들  5월 늦은 오후, 깨끗하게 늙어가는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민들레들 길섶에서  달구어져 있다. 햇살이 지그시  민들레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노오란 이 빛의 방울들  작은 소리를 터뜨리며 번져나간다  세상에 같은 지문은 없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직도 문 밖에 계시다  언덕길 오르다 돌아다보니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눈길로 나를  떠밀고 계셨다  내 몸에 몇 개의 지문이 찍힌다  너무 좋은 시이지요. 비유적 이미지가 아주 잘  살아있는 시입니다. 아주 우리가 흔히 쓰는 시어  들이지만 긴장감이 살아있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나오는 풀, 꽃, 햇빛을 비롯하여 하늘, 별, 달, 강, 바다,  산, 나무, 비, 새, 바람, 바위, 파도, 눈, 이슬 등은 여러  시들 속에 아주 빈번히 나타나는 소재입니다.  이 자연 대상물들은 평소 우리 독자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시인들은 이들을 시의 첫 행에 즐겨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친숙하다는 건 익숙하다는 뜻도 되기 때문  에 보다 신선하고 참신한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황인숙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눈이 온다  먼 북극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우뚱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 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 앉는다  저 죽지에  뺨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저도 눈이 오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 날씨를 가지고  시를 많이 씁니다. 이 때 이런 눈이나 비가 오는 모습이  시의 첫 행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후변화에  민감한 우리들의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또 눈이나 비가 내리는 분위기 그 자체로서도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데 효과적이어서 우리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끌어  들이는 역할까지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참신한 이미지의 제시  참신한 이미지를 시의 첫행으로 제시하는 경우는 시인의  개성적인 시각이 돋보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  함으로소 시에 관심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참신한 이미지인 경우에 독자들에게 충격을 줄 수가 있는데  이러한 충격효과가 시의 첫 행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김명인의 를 예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철둑 가장일 끌고 오는 여우비,  저물 무렵  잠깐 놀러 나온 구름이 길을 묶는다  만곡 끝 닿는 곳까지 갖은 파랑 펼쳐놓고  바다 한쪽을 후둘겨 소낙빌 털어내는  여우비, 한 풍경에도 이렇게 확실한  두 세계의 경계가 있다.  "나, 지금 물든 풍경의 틈새에 끼어  한켠으론 젖고, 한켠으론 매마르며  땅거미 속 아득하게 지워져가는  저 철길 보고 있다"  길 사라져 헤맬 일로 고단해지면  우는 화상아, 그대나 나나 둑 아래 감탕밭  스쳐간 비 자리 엎어진  물 웅덩이로 주저앉아  갈 곳 없는 노을 텅 비게 담아내며  명지 바람에도 주름 접힐 파문으로 남았다  바다 건널 일도 힘에 부쳐  겨우 겨우 모래펄을 쓸고 있는 여우비,  어느새 몸 무거워진 가을머리 저 여우비  먼저 양해를 구할 것은 행이 계속되다가  " " 안의 글이 몇 단어가 들어가 글이 씌여 있으나  저의 기술 부족으로 " "로 묶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위 시의 첫 행 '철둑 가장일 끌고 오는 여우비,'는 비가 오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를 통  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 중에 비유나 이미  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시를 쓰는데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제 강의를 처음 받으신 분들은 꼭  지난 번 강의의 비유법이나 시의 이미지화 등을 공부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시를 읽고 신선한 감각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는 시인의 주관적인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것  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여느 때처럼 시 한편을 소개하며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다른 시의 첫 행에서 오늘 배운 것들이 제시 된 예  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척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또 몇 가지 예가 더 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시의 첫 행에 제시되는 것들은 꼭  이래야 한다는 원칙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시의 첫 행에 많이  쓰인 것들 끼리 모아 분류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구순희님의 입니다.  경포대 동쪽 하늘에 걸려 있다  신성한 몸일 때 잃어버린  새빨간 머리띠  출렁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어른이 다 되어 물구나무서는 바다  바다가 머리띠를 잡으려 하자  부화 직전의 계란, 실핏줄 툭툭 터진다  이슬이 비치고  쑥 빠져나오는 시뻘건 불덩어리  하늘 끝에 깊은 동굴이 생겼다  하룻밤 풋정 빠져나간 자리  선명한 구멍 깊숙이 따뜻한 불빛이,  산후의 안식이 찾아왔다  강사/김영천  ===============================================================     여뀌들 ―정병근(1962∼) 다 필요 없어 제발 버려줘 잊어줘 우리끼리 잘도 자랄 테니깐,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 모가지에 벌겋게 독 오른 놈들 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 모래밭에 떼거리로 서서 온몸을 긁고 있었다 무서워서 아들놈을 재촉하며 돌아오는데 야, 그냥 가냐. 그냥 가! 아스팔트 산책로에 들어설 때까지 등 뒤에서 감자를 먹였다     중랑천변 모래밭, 여뀌들 여뀌는 물을 따라 씨를 퍼뜨리는 한해살이풀로서 물가에서 자란다. 강한 매운 맛이 있어서 향신채로 쓰이는 그 잎을 짓찧어 물에 풀면 물고기가 배를 뒤집고 떠오른단다. 물고기같이 작은 생물에게는 독초일 테다. 사람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에 돋아나 거칠게 자라는 여뀌 같은 풀들을 우리는 잡초라고 부른다. 어른의 따뜻한 눈길에서 벗어나 잡초처럼 크는 아이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잡초라고 부르건 산야초라고 부르건, 여뀌만큼이나 관심 없다. ‘다 필요 없어/제발 버려줘 잊어줘’ 부르짖을 뿐이다. 그 아이들은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이다. 눈에 띄면 뽑아버릴 테니까. ‘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이 ‘모래밭에 떼거리로 서서/온몸을 긁고 있다’. 가진 것은 독기뿐인 무서운 아이들, 불량기 넘쳐 보이는 패거리를 중랑천변을 거닐다 맞닥뜨린 화자는 아들을 재촉하며 모래밭을 벗어나 아스팔트 산책로로 도망친다. 아이들의 독기가 화자의 등 뒤에서 잉잉거린다. 이 시가 실린 정병근 시집 ‘번개를 치다’에는 서울의 ‘아스팔트 산책로’ 밖 사람들의 초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때로 고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타자가 아니다. ‘좋은 경치 바위에게 다 주고/사지가 뒤틀린 채/사람 발 닿을 때마다/다부지게 몸 받치는 소나무’(시 ‘업(業)’에서) 같은 삶이나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가는’(시 ‘나팔꽃’에서) 삶이 시 속 아이들의 주위 어른들 모습이다. 힘없고 기죽은 그들이 누구를 해친다면 그건 그 자신일 테다. 저 아이들의 여뀌 시절이 그저 한때이기를….      
1613    나는 다른 시인이 될수 없다... 댓글:  조회:5137  추천:0  2016-10-01
어제까지 두 시간은 총론이라 생각하시면 되겠구요 오늘부터는 지난 강의를 이어하는 강의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강의 방법은 전과 같은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선 커피 한 잔 하시구요. 오늘은 제가 커피를 준비하였습니다. 내일부턴 누구 집 가까우신 분들이 좀 준비해주시면 고맙겠네요. 1.시의 행과 연 형태상으로 보자면 시의 구조는 행(行)과 연(聯)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행과 연은 시의 형태를 만들어 주는 구조의 기본골격이란 말과 같겠지요. 행은 단어, 구(句), 절(節) 또는 그 것들의 연합으로 되어 있고 연은 하나의 행, 또는 행의 연합으로 구성 됩니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는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한 편 의 시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이데거는 시를 가리켜 '언어의 건축물'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 건축물을 이루는 기본골격이 바로 행과  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자기 집을 새로 지으신 분들이 계 실 것입니다. 아니 아파트에 사신다고 해도 마찬가지 이지요. 아무리 훌륭한 재료를 썼다 하더라도 구조가  좋지 못하면 형태가 온전하지 못하지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시상과 좋은 시어를 사용하여 시를 쓴다 고 하더라도 행과 연을 잘 이루지 못하면 시적 성공률 은 그만큼 떨어질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처음 시를 쓰거나 아직 많은 시를 써보지 않으신 분들 은 아무런 필연성이나 계산성도 없이 뗐다 붙였다 행 과 연을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행과 연 의 구성은 전적으로 작가 개인의 마음대로 입니다. 그 러나 행과 연의 잘못으로 시적 전달이 잘 못 되거나  시적 감응을 반감시킬 염려가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 다. 어떤 경우는 불필요한 행과 연을 구분해서 오히 려 전체적인 형태마저 기형적으로 만드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매우 치밀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하는 강의를 잘 들으시어 여러분들의 시작 에 많은 참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첫 행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우리는 시작이 절반이란 말을 늘 합니다. 그만큼 시작 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여러분들도 시를 쓰거나, 꼭  시가 아니고 편지를 쓸 때도 첫 번 화두를 펴기가 제 일 힘들다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첫 줄만 시작하면 그 뒤로는 줄줄이 나오는 글들도  늘 그 첫 마디 한 마디에서 막히거든요. 그만큼 처 음 시작이 중요합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그 다음  단추도 바로 끼어지는 것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 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에서 첫 행은 독자들의 관심과 호기심까지  유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소 설이나 다른 글을 보더라도, 아니면 싸이버 세상의 모 든 글들도 첫 행에 이상한 글이 있다던지, 너무 흔한  말이라든지 이런 글이 있으면 더 이상 읽고 싶지 않 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처음 만나는 사람의 첫 인상 과 같은 것이지요. 거기에 시의 첫 행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들과 연들을  끌어 올리며 시 전체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스켈톤은 시의 첫 행의 이미지가 그 다음에 오는 모 든 이미지에 연결되어 그것이 전체의 이미지로 확산 이 되어진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 복잡 한 설명이어서 여기 생략합니다만 대개 그런 뜻입니 다. 다만 첫 행의 시는 시 전체를 압축적으로 하여  줄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라는 이상화의 시에서는 이 첫 행 에 시 전체의 주제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 나 이렇게 시 전체 주제가 첫 행에 압축되어 있는 것 은 아닐지라도 시의 첫 행은 전체 시의 내용과 직결된 다는 점을 늘 마음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그 첫 행 의 이미지가 무척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의 첫 행은 어떻게 해야하나 누가 한 번 이야기 해 보시지요. 대답하기 어렵지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마치 우리 가 무슨 일을 할 때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늘 그렇듯 답하기 어렵습니다. 조태일님도 이야기 했지만 첫 행에 대한 모범답안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하는 분류는 순전히 그 동안 써 온  많은 시인들의 시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을 참고하 시고, 다만 참고로 삼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시는 여러분 개인의 창작물임으로 시의 첫 행 도 보다 독창적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시간적 언어 즉 특정한 시간이나 계절 등을 첫 행으로 시작할 수 가 있습니다. 시간과 계절은 생명의 생성과 성장, 결실, 소멸가 관 계가 깊으며 우린 이 시간성과 계절성에 민감하게 반 응합니다. 아마 지난 가을을 아주 힘들게 지나신 분들 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이제 돌아온 봄을 견디기  힘들어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즉,나는 봄을 탄다, 나는 가을을 탄다 하시는 분들 이 계시는데 어떤 분들은 환절기를 견디기 힘들어하시 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이런 마음을 시의  첫 행에 끌어내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절에  대한 아픔이 없다고 그 계절에 대해 아무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 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외려 가슴 깊이 아픔을 삭히는 분도 있을 터이며 더구나 그런 이유로 시를 못쓰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는 다만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직접적 반응을 일으키는 시간적 언어 를 첫 행으로 사용하면 충분히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박봉우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늦은 밤 별밭을 찾아간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밤을 남몰래 울어 본다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이 더욱 無意味(무의미)로울 때 나의 고독은 더한층 심연이다 별들만이 아는 비밀 세상에 태어나 서 있을 때처럼 無意味로운 것은 더욱 없다 오늘도 별밭을 찾아 고독들 피흘리는 고독을 나누어 본다 시간으로 시작되는 첫 행은 아주 그 숫자만큼이나 많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앞으로 전개될 시적  담론의 배경을 미리 알려주는 효과는 있을지언정, 우 리에게 너무 익숙한 표현일 수가 있어 오히려 관심을  반감시킬 수 있으니,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영석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하늘이 시퍼렇게 얼어붙은 겨울날 手話(수화)를 나누던 너와 나의 하얀 손이 까마득히 낙엽진 날 마음속 깎아지른 벼랑을 떠나 온종일 허공을 맴도는 매 한 마리 사계절이 시의 첫 행으로 오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 습니다. 특히 봄과 겨울이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절이 첫행 으로 자리잡은 까닭은 시간의 흐름이나 바뀜이라는  단순성을 넘어서 하나의 원형이 되고 있는 보편적 의 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드롭 프라이에 의하면 봄은 영웅의 탄생신화, 희 극, 열광적 찬가, 광상곡의 원형이며, 여름은 인간으  신격화와 낙원에 관한 신화, 로맨스, 전원시, 목가의  원형입니다. 가을은 신과 영웅의 사망에 관한 신화,  비극과 엘레지의 원형이며,겨울은 대홍수와 혼돈의 신 화, 영웅 패배의 신화, 풍자와 아이러니의 원형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노드롭 프라이의 말을 이해하시려면 먼 저 이 원형이라는 문학비평용어를 알아야하실 거 같 아 여기 짧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문학의 원형 이론은 케임브리지대학의 비교인류학파로 부터 유래한다고 합니다. 이 학파의 기본 책자는 프레 이저의 『황금가지』인데, 이 책의 대부분은 다양한  문화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화나 제의의 기본적인 형태들이 있음을 주장했고,  또 그 것을 추적한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이론은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심층 심리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융은 "원형"이란 용 어를 "원초적 이미지"에 적용하였는데, 이 것은 바로  우리에게 옛 선조들의 생할에서 반복되던 경험 형태들 의 "심리적 잔존물"로서,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통 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신화, 종교,꿈, 개인적 환상뿐 만 아니라 문학작품 속에서도 표현되고 있다고 융은  주장하였습니다. 점점 더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군요. 쉽게 말하면 우리 의 글에는 알게 모르게 그 원형 즉 그 뿌리에 신화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알에서 조상이 나 온다는 것이 박혁거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을 그런 이야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는 이야기도 여러 나라에서 발 견됩니다. 그래서 어떤 소설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어떤 신화 에 도달한다고 보고 분석하는 것이 비평의 한 방법인  신화원형 비평입니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비약하고 있습니다만, 이 강의 실에서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분 중에 비평에도 관심  있으신 분이 있는 것 같아서 아주 조금 더 설명을 하 겠습니다. 이 원형이란 용어는 문학비평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 어 왔습니다. 비평에서 "원형"은 신화, 꿈 심지어는 사회적 행동인  제의 양식에서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속의 인물 유 형, 또는 이미지들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특히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에서 원형적 접 근을 성경에까지 확대시켜, 문학이론과 문학비평의 실 제에 있어서 많은 진보적 발전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 비평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문학 속에 내재한 신 화형태를 강조합니다. 즉 먼저도 설명했지만 모든 문 학 작품은 신화원형 이론에 의해 분석하면 그 원형은  신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보다 한정적이긴 하지만  문학 속에서 자주 재현되고 있는 다른 원형적 테마,  심상, 그리고 인물들로는 지하여행, 승천, 아버지를  찾는 행위, 낙원과 지하계 심상, 프로메테우스 같은  반역적 영웅, 속죄양, 대지의 여신, 죽어야 할 운명 에 놓인 여자 등입니다. 이를 더 자세히 하기엔 어려움으로 이 정도로 마치고  본 강의로 들어가겠습니다. (강의를 처음 들으신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는데요.  강의를 받을 때 어려운 인용이나 설명이 있을 것입 니다. 여기에서도 신화원형 같은 용어는 비평 용어 임으로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만 아시면 되지. 굳이 이해하거나 외우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배우는 이론임으로 참고하시 라고 올렸습니다. 싸악,,,,잊어버리세요. 후훗) 이가림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등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트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이 시에선 불특정의 시간이 첫 행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지의 시간적 표현이 오히려 막연 한 시간이 자아내는 울림으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 고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고로 유경환 시인의 시의 첫행에 대한 견 해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별다른 생각없이 시의 첫 줄을 써 왔었다. 지극히 자 연스럽게 첫 시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쓰려고  하는 것을 몇 달씩 가슴에 넣고 삭여오다가 잎이 돋 듯 그렇게 나오는 것을 원고지에 옮겨 써왔던 나의 시 작 태도에 기인했던 것일께다. 그러나 한 십여년 전부터 이런 나의 시작태도에 변화 가 생겼다. 난 그것을 겪어야 할 변화라고 생각하고 싶다. 쓰려 고 하는 내용을 유도하는, 그런 의미를 의식하게 되면 서 부터 내적인 작은 고민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첫 줄만 써놓고 버리는 원고지의 양을  차차 늘여서, 오히려 시 작업에 저해 요소로 까지 영향 을 미친다. 아마 이 것은 나만의 경우가 아닌듯 싶 다. 시의 첫 줄이 그대로 시제가 되는 예를 미루어 보 거나, 또는 내용 전체의 의미를 표상하는, 함축적인  감각을 지니게 되는 예를 미루어 볼 때에, 나만의 고 민이 아니구나 하고도 생각하게 된다. 이 것은 시를 어렵게 생각하게 되는 한 과정 또는 매 듭 단계에서 겪는 고민이 아닐까 여겨진다. 쓰지 않고선 못배길 정도로 내적인 발효가 이루어진  경우엔 쉽게 나오고, 그대신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당 위성을 가지고 시작할 때엔 어렵게 나오게 된다. 나의 경우 길을 가다가, 책을 보다가, 또는 산책을 하 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을 아무데나 한 줄씩 메모 해두는 버릇이 있는데 거의 이 한 두줄의 메모가 그대 로 첫줄로 등장할 때가 있다. 첫 시작의 첫 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시의  경직성을 띠고 전개되기 쉽고, 첫 시작의 첫 줄에 전연  의미를 내포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도입구의 역할만  하게 쓰면, 시는 자연스럽게 풀려 나갈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요즘 첫 시작의 첫 줄에 마음을 써야하 는 모순의 고민을 지닌다. 이것은 시를 어려운 것으 로 알기 시작했다는 한 반증이 아닐까 자위해 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강의지만 모두 경청하여주셔서 감사합 니다.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여러분들이 토요일 까지 강의를 받으시기에 힘이 드시는 것 같더라구요.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대신 밑에 좋은 프로그램 올리니 토,일요일에 많이 들어가 보세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   외로운 사랑  ―이성선(1941∼2001)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세상의 신비를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일반적으로 시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을 비추고/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함께 꿈꾸며/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사람일 테다.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보려는 욕망이니 정치니 착취니 인기니 유행이니, 이런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맑고 순수하게 사는 사람. 세상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그 신비를 캐고 아름다이 노래하는 사람. 통념이 대개 그렇듯 기본은 맞는 생각이지만, 이런 이미지가 고정관념이 되면 시인을 세상과 멀찌감치 떼어놓는 힘으로 작용하며, 저 스스로 이 ‘보호구역’에 드는 시인도 많다.  하지만 시인 이성선이 그런 ‘시인이면 족하여라/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에는 간단치 않은 울림이 있다.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시의 어조가 시종 쓰라리다. 풀밭에서 지새우는 별이 빛나는 밤. 풀처럼 낮게 앉아 ‘사랑의 뿌리가 영롱해지도록’ 풀잎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본다. 풀잎은 떨고 그 떨림, 시인에게로 별에게로 전해진다. 전 우주가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으로 떨며 꽃피어난다.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시공간! 시인은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단다. 자연, 그 소박한 세계와 통하는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에 대한 시인의 순정한 사랑이 ‘된다’ ‘된다’ ‘된다’라는, 자신을 다독이는 듯 쓸쓸한 종결어의 반복으로 미묘하게 변주된다. 욕심은 없지만 긍지는 높은 시인 이성선…. 화려하고 교묘하고 장엄하고, 현란하고 때로 요사스러운 시가 백화난만한 시절에 풀잎 같은 시인의 외로움과 당혹이 엿보인다.  
1612    詩는 국밥집 할매의 맛있는 롱담짓거리이다... 댓글:  조회:3887  추천:0  2016-10-01
오늘까지는 몸을 푼다는 형식으로 시의 전반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내용을 모두 아시는 분들은  강의 도중에 있는 시들을 새로 읽게 되는 재미로 강의 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왕에 시작한 공부를 빶지 않고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시간을 정해놓고 가능하면 그 시간이면 규칙적으로 공부를 하시도록 자신과의 약속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 일찍 강의를 올릴 터이니 편리한 시간은 여러분이 정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일단 차 한 잔 하시지요. 차들 드셨어요? 그럼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2.시는 언어로 쓰여진 문학작품 문단에서나 일반 학계에서조차 시의 위기를 주장해 온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사실 오늘 날의 시의 독 자는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실정입니다. 그러나 사이버 세상의 발전은 다시 시의 발전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마다 작고 큰 시와 시인의 방을 갖고 있으며, 아름다운 시화가 많이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고 지루한 산문보다는 짧고 얼른 읽어서 감동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란 장르가 사이버세대의 취향 에 맞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의 입장에선 아주 바람직한 일로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등단한 정식 시인은 아니더라도 시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나아가서 시를 써서 자기의 감정을 옮길 수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 합니다. 여기에서 안도현님의 최신작 을 한 번 읽어보 기로 하겠습니다. 장하다. 목련 만개한 것 바라보는 일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애인은 울지 말아라 절반쯤만, 우리 가진 것 절반쯤만 열어놓고 우리는 여기 머무를 일이다 흐득흐득 세월은 가는 것이니 참 좋지요? 한참 피어나는 목련이나 그 사이로 아직 절반쯤만 열고 있는 꽃봉오리,  흐득흐득 지는 꽃잎들. 뭐 그런 것이 연상되지요?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하시면 이런 시를 쓰시게 될 것 입니다. 시는 언어로 쓰여진 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따라서 시가 무엇이냐를 알려면 시의 언어가 무엇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의 언어란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분명 또 일상의 언어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미꽃을 보면 다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쓰면 일상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늘에 있는 장미의 아름다움이나, 비 맞은  장미의 아름다움, 또는 무리지어 핀 장미나 외롭게 한 송이만 남은 장미의 아름다움은 시적 언어 로만이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집에 문상 가서 위로의 말을 전할 때, 그 상대방 의 대답 또한 여러가지 일 것입니다. 그냥 대답 없이 흑흑 울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매우 슬프다든지, 말로 할 수 없다든지 할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우리가 시적 언어 외에는 달리 그 감정 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겠지요. 이렇듯 시는 일상의 언어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대상 의 어떤 실제를 특별한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시창작 강의에서 아주 자세히 강의가 되었 으니 처음 오신 분들은 꼭 그 강의를 들어보시기 바 랍니다. 참고로 지난 번 강의한 총 42강의 내용을 예습하는 차 원에서 제목을 열거해보면 1)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3)언어와의 사랑 4)많은 문학적 경험을 하라 5)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6)多作-많이 써라 7)시창작의 바탕 8)시창작의 단계 9)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 10)이미지의 유형과 실제 11)이미지는 언어의 그림 12)이미지와 상상력 13)이미지가 시 속에서 하는 일 14)이미지의 종류 15)시와 비유 16)비유의 종류 17)시와 아이러니 18)시와 상징 19)시와 어조 잠시 쉬었다 가는 의미로 윤동주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부를 수 없도다. 그신 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것이 산문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상력을 많이 원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의 본질이 감정의 환기 및 상상력 의 깊은 원용이라 하는 것은 결국 시가 지녀야 할 다 른 조건들을 결정 시켜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것은 곧 시의 언어가 이미지, 상징, 은유,신화, 역설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 형상화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는 일차적으로 그 언어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 직설적 진술이어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은 슬프다. ⓑ내 마음은 벌레먹은 능금이다. 이 두 문장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시를 공부하지 않은 분들은 처음 문장처럼 시를 씁니다. 그러나 이 것은 시적 언어가 아닙니다. 단순히 슬픔이란 감정을 사실대로 써놓은 것일 뿐이지요. 그러나 두번 째 글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 자신에게 환기된 독특한 감정이 형상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비결 은 시인이 그의 상상력을 통해서 자신의 체험한 바 정서적 반응을 은유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있습니다. 아마, 강의를 처음 들어오신 분은 잘 모르는 소리 일 것이나 강의를 들어오신 분은 그냥 알아 들으 실 것입니다. 시를 많이 읽은 것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비결 입니다. 강의도 중요하지만 도중 도중 들어있는 시들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번 강의는 지난 번 강의와 중복되어서는 안되 므로 자세한 강의는 지난번 강의를 참고하시고요. 내일부터는 지난 번 강의에 하지 못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의하겠습니다. 좋은시 두 편을 소개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 다. 좀 어려운 시라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시를 읽어보라고 할까하며 몇 번씩 읽어보십 시오. 사랑시는 쉽고 알기 좋지만 이젠 이런 시들을 자꾸 읽어보면 그 안에 삶이 있고 철학이 있답니다. 먼저 감태준님의 입니다. 쉬지 않는 것이 강이다 떠나면 이어서 오고 떠나면 이어서 온다 우리 곁에서 서러워하는 세월의 희망이 저기에 있다 우리 곁에서 서성거리는 눈물의 뿌리가 저기에 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지만 버스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어내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을 닮은 아이들이 저 강가에서 놀고 있다 이기철님의 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 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생은 피우는 만큼 붉게 핀다고 .................................................. *하늘빛님 홈에서 옮김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여기에 올린 시가 좋아서 올린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화로 되어 있는 많은 시가 마치 있어 올립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를 구별하는 것도 공부의 방법입니다. ============================================================     이 맛있는 욕!  ―이가을(1964∼ ) 근엄하신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는 날마다 가마솥에 욕을 끓인다 가마솥 절절 끓을수록 욕설이 구수하다 손님 탁자마다 돌아다니면서 욕으로 안부를 건넨다 할머니 욕해주세요∼ 저, 염병할 놈, 또 왔네 아직도 그 타령이여? 욕설을 얹어야 국밥이 맛있다 국밥을 비우면 국밥 그릇에 조금쯤의 반성이 남는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내일이 아이고, 이 배라먹을 놈아 염병할 놈! 쯧쯧, 저 재수 없는 놈을 어쩐댜― 불쌍시런 놈아 잘 처먹고 잘 살으랬지? 옜다, 이놈아 국밥이나 잘 처먹어라― 칼보다 펜보다 강한 할머니의 욕을 가슴에 새긴다 나를 때리는 욕을 목구멍에 삼킨다 들을수록 통증이 오지만 통증이 멈추면 새살이 올라오는, 오늘도 욕 먹으러 국밥집에 간다 욕은 욕먹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듣는 사람에게 불쾌한 자극을 준다.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가 꾸리는 이 국밥집에는 단골이 많은 듯하다. 그들은 마조히스트인가? 왜 욕을 들으며 밥을 먹을까? 할머니의 욕이 비속어이기는 하지만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정이 뚝뚝 흐르기 때문이다. ‘저, 염병할 놈, 또 왔네 아직도 그 타령이여?’ ‘쯧쯧, 저, 재수 없는 놈을 어쩐댜’ ‘불쌍시런 놈아 잘 처먹고 잘 살으랬지?’ 할머니의 욕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배어 있다. 하는 일마다 재수도 참 없는, 사는 게 늘 그 타령인, ‘불쌍시런 놈’들은 친할머니 같은 할머니의 욕을 듣고 펄펄 끓는 국밥을 먹으며 속이 확 풀리고 배가 든든해진다. 욕도 해본 사람이 잘할 테다. ‘들을수록 통증이 오지만 통증이 멈추면/새살이 올라오게’ 하는 ‘맛있는 욕’을 하는 할머니. 이 욕의 달인이 끓여낸 국밥도 맛있을 테다. 욕 좀 먹으려고 맛없는 국밥을 먹으러 가지는 않을 테니까. 욕은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한다. ‘갑’이 ‘을’에게 한다. 손님은 ‘갑’인데 ‘을’인 밥집 할머니에게 기꺼이 욕을 먹으며, 대개 ‘을’로 살아가는 손님들은 어떤 균형감을 맛보리라.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욕 대결을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어쩜 그렇게 기상천외한 욕들을 ‘차지게’ 쏟아내던지 포복절도했었다. 세계 모든 욕에는 성(性)과 관련된 게 흔한데, ‘황산벌’ 욕의 성찬에는 그게 없었다. 그래서 관객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시원스레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욕은 웃음을 주는 해학이기도 하다. 욕도 창의적으로 하면 좋을 테다.    
1611    詩란 심야를 지키는 민간인이다... 댓글:  조회:4127  추천:0  2016-10-01
  안녕하십니까? 어제까지 찌푸린 듯한 날씨가 오늘은 아주 화 창하게 개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 때에 여러분과 함께 시창작 강의를 새로 개설하게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번 제1강부터 42강까지 한번씩 아니면 두번 이상을 강의를 받으신 분들도 많이 계십니 다만, 처음 이 강의를 듣는 분이 계실지도 모 르니 시에 대해 다시 강의를 몇 시간 하겠습 니다. 그러나 전 번에 했던 강의와는 중복되지 않게 새롭게 강의함으로써 지루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선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십 시오. 그리고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가실 때 꼭 저에게 들렸다 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차 한 잔 마시고 시작하기로 하지요. 아니 누구신가요? 강의실 안나오시고, 편하게  집에서 인터넷상으로 공부하시는 분은요? 자, 그럼 강의에 들어갈까요? 우선 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1.시란 무엇인가 연 전에 제가 섬진강 시인 김용택시인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또 작년엔 목포문협 행사에 와서 아주 짧게 강의를 하고 간 적이 있는데요. 그가 근무하는 학교는 섬진강가 언덕위에 있는 학교인데 아주 작은 미니 초등학교랍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폐교가 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요즘 학생들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합니다. 그 학교 학생들이 전부 시인이 되어서 시집도  내고 한다는 소문에 글솜씨가 있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전학을 오기 때문이지요. 그럼 이 시인은 그 아이들에게 어떤 시 교육을 시키는 것일까요? 그는 결코 아이들게게 따로 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 자연을 보는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시간만 나면 산으로 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을 보는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그 것들을 본대로 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훌륭한 시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시를 잘 쓰는 세 가지 이론이 들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물론이지만 시집도 많이 읽으라는 것입니다. 간접 경험도 중요한 것이니까요. 둘째는 많이 써보는 것입니다. 많이 보았으면 또 본대로 쓴다면 많이 쓸 것은 분명하지요. 셋째는 아이들의 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눈길은 순수하지요.  아무런 가식이 없습니다 시는 가식이 있으면 좋지 않은 시가 되기 쉽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좋은 시인이 되려면 많은 경험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많은 경험도 그 경험 중에 들어갑 니다. 그 다음에 그 경험들을 시로 써내는 것입니다. 다만 순수한 마음으로요.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하며 또 써보고자하는 시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 모두는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안도현님이 금년 새로 발간한 책에 나와 있는 이란 시의 첫 연을 보면 생각해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 로 잽싸게 손을 밀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초가집 지붕 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참새를 잡던 경험을 그대로 늘어놓고 있습니다.아 무리 읽어보아도 그 경험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쓰는 것이 시라면 여러분이 못쓸 것이 무엇입니까? 안도현이라면 지금 제일 잘 팔리는 시인 중에 하나 이거든요. 또 시도 아주 잘 쓰는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어렸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참새의 펄떡이는 심장을 손에 쥐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던 사랑이 들어있기에 시가 되는 것입니다. 김억이란 시인의 시를 한 번 볼까요.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이 것의 그의 시 의 첫 연입니다. 정말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입니다. 몇 행으로 구분해놓아서 그렇지 그저 한 줄로 늘어놓으면 누가 시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이 시가 되는 것은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사이지만 사알짝 웃어주고 간다든지 아는 척을 하고 가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기에 그런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에 시가 됩니다. 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가 젊어서 피가 끓을 때 특히 이성에게 많은 관심을 가질 때는 그 누구 하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하루에 절반은 시인으로 하루에 절반은 철학자 로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여러분도 그랬지요? 그래서 그 나이에 시들을 많이 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그 절절한 사랑을 옮기기만 하면 시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생 그렇게 뜨거운 사랑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또 그런 감상적인 시만 계속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것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을 한 사람 연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내 주위의 모든 자연 과 사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만큼 시의 소재가 많아지겠지요. 그리고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난을 사랑해서 난에 관한 연작시를 쓰기 도하고 어떤 분은 바둑이나, 화초, 바다, 도자기, 강, 여행, 등등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시들을 많이 쓰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아름다운 말과 추한  말이 있듯이 우리가 시가 될 말을 골라서 써야 할  것입니다. 아무 언어나 자기의 관심사를 기록하면 그 것은 시가 아니라 일지나 단순한 기록서가 되고 말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시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요. 작은강의실 제1강 시창작 강의를 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하는 강의는 실제로 시를 쓰실 분들에게 시의 행과 연의 구분이라든지, 제목을 붙이는 방법 이라든지 시의 마무리에 관한 것을 서로 연구해보 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니 이 정도로 강의를 마치구요. 김용택시인을 찾아갔다가 썼던 제 시 한편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 시인을 찾아서-김용택 ** -김영천 그 작은 운동장도 얼마나 크냐고 대견해하며 몇 명 안되는 아이들과 궁그르며 뛰놀고 끙끙거리며 시도 쓰고 더러 강으로 고기잡이도 가는 시인은 우리더러 너무 어른이라 한다 강이나 들길에서 함부로 만나는 자운영이나 사철쑥이 아니고 쇠똥이나 반딧불이나 개구리가 아니고 우리더러 너무 사람이라 한다 왕방울 같은 눈을 쓰윽 쓱 돌리며 쳐다보더니 아이들이 시를 참 잘 써요 쉽게 쓰거든요 우리를 얼른 보내고 밖에 나가서 너무도 넉넉한 햇살이나 이제 막 물오른 들녘이나 강물하고 뛰놀고 싶을까 사진 찍는 것도 마다하고 서둘러 들어간다 시인을 보러 가서야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골 풍경이나 순한 아이들이나 쉽게 쓰는 시가 다 똑 같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안도현님의 최근작 을 올립니다.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본다  ============================================================   김종삼「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1921 - 1984)「민간인(民間人)」전문    김종삼 시인은 작가의 말을 아끼는 간결한 시를 주로 썼다.  위 시에서도 간단한 상황만을 그리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1947년 심야에 초병을 피해 월남하고 있는 몇 사람 중엔 영아가 끼어있었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모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 영아를 물에 빠트려 죽이고 만다.  그 때로부터 스무 몇 해가 아니라 쉰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분단은 여전하다.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죽이고 목숨을 구한 사람들의 가슴에 흐르는 강물의 깊이를 누가 알랴. 황해도 해주 앞바다 그 수심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1610    詩는 한매의 아름다운 수묵화 댓글:  조회:4474  추천:0  2016-10-01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까지  시에 대하여 얘기하다보면 흔히 받는 질문이 있다. 그건 "영감(靈感․인스피레이션)이 뭐예요"라든가 "시를 쓰기 전에 시인은 영감을 받아야 하나요"라든가 아니면 "선생님은 영감을 받으셨나요"라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며 특히 세 번째 질문은 매우 신랄하기까지 하다. 영감을 받았다 하면 시인이 무슨 무당 같은 생각이 들고 안 받았다 하면 재능 없는 시인으로 몰릴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난 그런 질문에 대개 농담으로 대신한다. "왜 처녀를 받지 영감을 받습니까?"라고.  얼마 전 TV사극『명성황후』중 황후시해 장면에서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아 현장을 총지휘한 하수인이 황후를 시해, 소각한 후에 왕궁 뒷길을 홀로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나온 인텔리겐차이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이었던가. 마침내 중얼거리는 것을 넘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그가 왜장쳐대는 말은 놀랍게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영감이!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단박에 표현할 그 시 한 줄이 떠오르지 않아. 아이구 이 돌대가리야."라는 게 아닌가. 영감을 무슨 신적 계시 같은 걸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악마에게 무슨 영감이 주어지겠는가. 영감이 풍부한 천부적 시인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둘 것은 시인이 자기 펜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쓰기까지 시를 만드는 작업의 대부분은 이미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그 시의 대부분을 시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다는 말도 아니다. 역시 시인에 따라서 지적조작의 방법으로 시를 만드는 시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한 편의 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순서를 거쳐 만들어진다.  1  < 한 편의 시의 씨, 또는 싹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인의 상상력을 강하게 때린다. 그것은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감정이나 어떤 특정의 경험, 또는 하나의 관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맨 처음에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또 한층 더 나아가서 아마도 이미 말이라는 옷을 입은 시구의 형태로, 아니면 또 완전히 한 줄의 운문 형태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어느 새벽 흉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홀로 느끼는 고독이나 불안감, 나아가서 얼마 후엔 이 삶도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소멸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감, 그러다 보니 지금이라도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그리움의 감정을 겪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형태로 느껴진 감정이지만 어쨌든 나는 이때 존재의 본질에까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햇빛 좋은 날 옥상 위에서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환히 열리는 경이로운 순간, 사랑하면서도 피치 못해 떠나보내야 하는 애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뒷모습을 하고 빗속을 터덜터덜 돌아서 가는 걸 볼 때처럼 명치끝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슬픈 순간, 요즘 탄핵정국에서 보듯 국민을 안하무인으로 여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민의 이름을 빌리는 우리나라 모든 정치인의 몹쓸 행태를 볼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격렬한 분노의 순간, 그리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경쾌한 발걸음 혹은 그런 손자를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할머니의 그윽하고 흐뭇해하는 눈길을 보는 때 느끼는 즐거움의 순간들을 늘 경험하게 된다. 그런 경험은 우리의 희로애락의 사생활에서부터 사회적 삶에서까지 곧잘 겪게 된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다가 이런 말들을 발견한다. 빈자의 등불 하나, 자유의 종, 신비의 꽃, 야생, 슬픈 열대, 욕망의 불꽃, 주체상실, 매우 가벼운 담론, 슬픔의 온도, 나무의 신화, 풍류, 빵과 수선화,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슬픔만한 생의 거름이 어디 있으랴,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등 관념․이미지․말․시구․한 줄의 운문들이 가슴을 흔들고 영혼을 흔들고 삶을 흔든다. 본질에 대립하는 실존만이 아니라 본질과 실존의식이 동시에 인생 속으로 삼투해버리는 이런 흔들리는 순간은 책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남과 대화할 때도 오고 강의를 들을 때도 오고 나날의 삶 속에서도 곧잘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여러 감정이나 관념이나 이미지 등을 그의 습작노트에 적어 놓거나 머릿속에다 잠깐 저장해둔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것을 아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다음 정호승「들녘」은 어린 날 겪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분출한 시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지금 시인은 삼십여 년을 서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농촌 경험이 느닷없이 분출한 것이다. 왜 어린 시절인가. 볏잎에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농약 때문에 메뚜기나 미꾸라지도 없는 실정인데 거미가 거미줄을 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오늘 여기에서 이 시가 튀어나오는가.  요사이 생태학적 상상력의 시들이 많이 나온다. 서구 중심의 근대문명이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만물은 생명의 그물 속에서 동동한 목숨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가진 시인들이 시대정신에 부응한 시들이다. 이 시에서도 오월 푸르른 날 아버지는 모를 내고 먹왕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농촌풍경을 선연하고 깨끗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의 핵심은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라는 구절이다. 비 온 뒤 모를 내는 아버지나 거미줄을 치는 먹왕거미나 ‘두 분 다’ 부지런하시다 라고 말함으로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는 장자의 말처럼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중심, 이성중심, 욕망중심의 현대인의 심성에 맑고 깨끗한 구원의 힘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요새 근대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면 이 시의 씨앗은 시인의 무의식이나 기억의 창고 속에서 영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2  < 그러나 그 시의 씨앗은 시인의 몸 안에, 이른바 ‘무자각적 의식’ 부분 안에 숨어든다. 거기서 그 씨앗이 점점 자라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때 물론 그 씨앗과는 다른 많은 시적 씨앗이 함께 자라는 수도 있다. 시인은 자기 몸 안에서 몇 편의 시가 동시에 자라나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까 어느 새벽에 느낀 죽음에 대한 시의 씨앗은 자꾸 자란다. 일어나 기지개 켜다가 고혈압으로 죽은 사람, 봄 내내 일한 남편의 몸보신을 시킨답시고 아내가 사온 산낙지의 다리가 목구멍에 붙어 기도를 막는 바람에 되레 죽어버린 남편, 군사통치 시절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사람, 공사장 앞을 지나다가 골재가 머리 정수리에 떨어져 죽은 사람, 방금까지도 희희낙락 얘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른 심장병 때문에 숨이 억 막혀서 죽는 사람, 그뿐인가, 온갖 고생고생 끝에 이제 아이들 대학도 다 졸업시키고 나서 살만하니 덜컥 암이 걸려 죽는 사람, 아흔 일곱을 사는 할머니 앞에 일흔 두 살 먹은 딸이 먼저 죽자 예순 살 먹은 며느리가 “아이고 똥오줌 받아내는 우리 어머니나 돌아가시지 고모가 돌아갔다”고 탄식하자 “아 제 년 제 명대로 살고 나는 내 명대로 사는데 너는 내가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느냐”며 역정을 냈다는 결코 안 죽겠다는 사람, 또 요사이 나온『자살』이라는 책에서 보듯 각종 이유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자살을 택해 죽은 사람, 불로장생을 위해 수많은 신하와 많은 국가예산을 들여 불로초를 캐러 보냈으나 끝내 죽은 진시황 같은 사람 등등에 대한 생각들이 자꾸 되고, 그 죽음 의식은 마침내 동물, 식물과 온갖 생물에까지 이어져 결국 죽음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나 해석에까지 미친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죽음들을 타인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 나의 실존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될 때부터 그 인식의 성장속도는 급격히 빨라진다.  또 우리가 어떤 이별을 보았다 하자. 마침 이시영 시인의「어떤 이별」이란 시가 있어 그것을 먼저 여기에 적는다.  여름 한낮의 햇빛 속을  맨 손의 한 여자가 울면서 길을 가고 있다  저 적요의 뒷모습에 쏟아져 내리는  한낮 여름의 강렬한 함성!  여름 한낮의 햇빛의 그늘 속에서  가방을 든 한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그 여자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아, 사라지고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는  흰 길 위의 두 점의 가없는 펄럭임  보다시피 이 시는 어떤 이별의 광경을 그 이유나 사정에 대한 시시콜콜한 천착이 없이 거시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기본적 이별의 경험 뒤에 나의 생각은 더더욱 자란다. 그녀를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떠나보내면 더 서럽겠지, 소슬한 바람에 낙엽이 지는 날 보내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니까 차라리 벚꽃 만발한 그 화려한 날 보내는 게 더 서럽겠지, 불치병에 걸린 걸 알리지 않고 떠나는 여인의 속내를 모르는 남자의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천착해보는 게 났겠지, 산모퉁이를 기적소리와 함께 돌아서 떠나버린 여인 뒤의 철로에 주저앉아 그 많은 눈물로 주변에 무더기무더기 망초꽃을 피우거나 언약의 징표였던 구리반지를 구겨버리는 남자의 속마음에 대해 탐구해보는 게 났겠지…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는데 그 관념의 실제를 겪는 자의 서러움과 고통에 대한 생각은 날로 자라서 시인은 실제로 삶에서 이별을 겪고 마는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바로 탄생하려는 순간이 온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씨앗의 자람이 며칠이 될 때도 있고 몇 년이 걸릴 때도 있다. 더구나 시의 씨앗은 우리의 의식 속에도 자라고 꿈같은 무의식 속에서도 자란다. 그 씨앗의 배경과 전경, 그 씨앗의 본질과 실존, 그 씨앗의 꿈과 현실, 그리고 씨앗의 형태의 구체성과 본질의 철학성에까지 미치도록 자란다.  3  이제 드디어 시인은 하나의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 욕망은 단순히 욕망이라기보다는 마치 육체에까지 스며드는 實感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지금까지 시의 씨앗이 뿌려짐과 그것의 자람은 밖으로는 먼 곳을 나는 시조새의 실루엣처럼 막연하게 보이거나 안으로는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의 숨결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그것이 내 몸에 확연히 들이닥치려 하거나 내 몸에서 뜨겁게 분출하려는 찰나에 시인은 흥분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펜을 잡기를 계속 주저하기도 하고 온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이때가 바로 시가 탄생하려는 순간이다.  시인은 숨을 죽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아니면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아니 미친 듯이 시골길을 헤매고 돌아다녀도 상관없다. 아니면 기차로 여행하고 있어도 괜찮다. 무엇이든 좋다. 시를 자기의 태내에서 끄집어내는 데 주의를 집중시키게 해주는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좋다. 시인은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시의 속을 들여다보고 몇 주일이나 몇 달 전에 처음으로 머리에 떠오르거나 겪은 그 씨앗, 그러니까 그 뒤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있던 그 씨앗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느새 그 씨앗은 훌륭하게 성장하고 발전해 있는 것이다.  < 한마디로 이번 단계는 방안에 갇혀 있던 시가 문에 몸을 부딪치면서 빨리 내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이 열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맨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완성된 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시의 대체적인 모습과 관념이다. 때로는 그 시의 1절이 얼렁뚱땅하게 맞추어졌을 뿐인 경우도 있다. 실은 시를 쓰는 괴로운 작업이 시작되는 것은 이때부터인 것이다.>  사실 과장할 것 없이 그것은 괴로운 작업이다. 시인은 그 시의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끌어 내와야 한다. 여기다 형태를 맞추어주어야 한다. 그 시 속의 하나하나를 개개 시인이 각종 자재들을 골라 집을 짓는 건축가나 데생 위에 각종 색을 칠해 입체적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처럼 말이다. 이는 참으로 괴로운 작업이다. 시에 따라서는 비교적 쉽게 순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괴로운 작업이어서 자기 스스로 납득할만한 단 한 줄을 쓰는데 몇 시간 또는 며칠이나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기서 나의 독특한 경험을 한 가지 말하고자 한다. 시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것이 무척 자라있는데도 그것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헤맨다. 그렇게 헤매다 보면 내게는 출산을 돕는 어떤 계기가 대개 찾아온다. 그것은 특히 그 마음속에서 분출을 기다리는 시, 곧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감정, 새로운 해석의 심리적 상태가 찾아왔을 때이다.  가령「직관」라는 다음의 제 시를 보자.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 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 오르며 눈 털어 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대나무 고장인 담양, 그것도 대밭 밑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폭설이 내린 대숲의 장관을 해마다 몇 번씩 보고 살았다. 그 폭설에 밤이면 뒷문으로 대 부러지는 소리가 밤새 들리고,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어른 팔뚝만한 대들이 팽팽히 휘어져 고샅길을 아치인양 덮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팽팽히 휘었으면 거기에서 톡, 날아오른 참새 한 마리의 발짓에도 일순 패앵, 소리가 날 정도로 튕겨져 오르며 그 우듬지를 창공 깊숙이 바르르바르르 떨겠는가. 그런 장관이 진즉 마음속에 시의 씨앗으로 심기고 그것이 대나무처럼이나 자라있음에도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출산시킬까 몇 년을 망설였는데 어느 아침 그 계기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 전날 낮에 아내와 경제 문제로 심하게 다툰 뒤, 밤에 어찌어찌 화해하고 그 긴장된 몸과 마음으로 섹스를 나누었는데, 부부 싸움 칼로 물베기요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 일이라고 하더니 그것이 딱 들어맞더라는 것이다. 기분이 상쾌해져 아침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오니 예의 그 장관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순간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며 앞에 펼쳐진 대숲의 장관이 금방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다. 휘어진 참대는 절정을 향한 그 팽팽한 긴장의 순간, 그런 대가 새 한 마리 톡 건들자 패앵 튕겨져 오르는 순간은 절정이 터지는 순간, 그 대 우듬지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순간은 절정의 환희와 여진의 순간,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은 오르가슴 뒤의 죽음과 같은 적막과 혹은 평안의 순간, 큰눈 곧 폭설은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상징화하는 순간이었다.  혹자는 이 시를 단순한 풍경시로 보아 2연은 없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했지만 그러나 그 부분이 없었으면 아예 이 시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잘 눈치 챈 어느 평론가는 이 시에 대해 “사랑은 절대순결의 충만이며 그 탄력이다. 마침내 저 무한 穹窿의 아득함으로 치솟아 올라 가물가물 점 하나로 잦아들게 하는 몰입이 있다”고 했으니 나의 의도와 잘 들어맞는 평문이었다.  < 어쨌든 그런 형편이니 비록 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마침 황금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의 홍수가 시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와 그것이 솜씨 좋게 자연적으로 시의 한 행 한 행에, 한 절 한 절에 늘어놓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감은 결코 전가의 보도나 요술지팡이가 아닌 것이다. 영감이란 한 편의 시에 있어 첫 씨앗이 시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때를 말한다.> 여기서 ‘뿌리를 내리다’라는 말에 주의하자. 시인은 온갖 경험을 가질 수가 있다. 온갖 관념이나 이미지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을 몇 개의 시의 씨앗으로 삼으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그것들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즉 반드시 시인의 상상력 안에 깊이 뿌리박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배양한다고만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시인은 과연 자기의 온갖 경험 가운데 어느 것이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서 한 편의 시가 되어, 마치 그 시가 제발 나를 낳아달라고 조르는 그러한 시가 되는가: 그 줄거리는 바로 당자인 시인으로서도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영감이란 단어를, 시가 만들어지는 단계의 이러한 순간, 즉 시인이 금방이라도 한 편의 시를 낳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마음을 두근거리면서 자각하는 순간으로 적용해도 틀림없다.  이 순간을 설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치 우리가 어딘가 먼 방송국에서 오는 방송을 캐치하려고 우리의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는 것과 같다.「다이얼을 돌린다, 1밀리미터만 틀려도 안 된다, 오랜 침묵이 있다, 기계가 열을 띠어온다, 한참 있으면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온다, 말이 점점 알아듣기 쉽고 알기 쉬운 말이 된다.」 도대체 이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 정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치 어느 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전파를 잡기 위해 우리가 라디오 세트를 필요로 하듯, 시인은 영감의 메시지를 잡기 위하여 자기 몸 안에 장치된 일종의 예민한 기계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 기계장치가 곧 시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의 상상력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또 몇 가지 특수한 방법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얼마 전 시적 상상력을 잘 구사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다. 앞으로 시의 일곱 가지 재료와 그것의 사용법을 강의하여서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드리겠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인이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즉 시를 쓰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쓰는 일이다. 이 습관은 직업적인 진짜 시인과 가끔 심심풀이로 시를 써보는 사람을 구별하는 차이점의 하나다. 또한 시인은 마치 마술사가 무의식적으로 늘 동전을 만지작거려서 오른손을 가만두지 않듯이 늘 언어를 만지작거림으로서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만일 여러분이 언어라는 것-그 음운과 모양과 의미(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에 몹시 매력을 느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머릿속에서 회전시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시인이 되기 힘들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시인은 凝視라는 것을 통해서 그의 시적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세계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같이 가만히 바라보는 일, 자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인생의 불가사의와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일과 또 끊임없이 인생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신비적인 바탕무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이 자기의 직무에 아무리 충실하다 해도, 아무리 응시와 연습을 쌓아도, 아무리 교묘한 말의 장인이 된다 해도 시인은 영감을 자기 힘으로 좌우할 수는 절대 없다. 영감은 몇 달간이나 시인 곁에 머물러 줄지 모른다. 또 몇 년 동안이나 시인을 팽개쳐버릴지도 모른다. 언제 그것이 찾아올지, 언제 그것이 사라져 버릴지 시인 자신도 모른다. 셸리가 말했듯이「창조하는 정신은 꺼져 가는 석탄의 불꽃과 같다. 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불꽃을 불어 순간적인 밝음을 준다.」  그러면 이제부터 몇몇 시인의 구체적인 시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며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외국시부터 한 편 본다.  Children look down upon the morning gray  Tissue of mist that veils a valley"s lap:  Their fingers itch tear it and unwrap  The flags, the roundabouts, the gala day.  They watch the spring rise inexhaustibly―  A breathing thread out of the eddied sand,  Sufficient to their day : but half their mind  Is on the sailed and glittering estuary.  Fondly we wish their mist might never break,  Knowing it hides so much that best were hidden:  We"d chain them by th spring, lest it should broaden  For them into a quicksand and a wreck.  But they slip through our fingers like the source.  Like mist, like time that has flagged out their course.  아이들은 아침 안개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 보얗게 서린 아침 안개를:  아이들의 손끝은 이 베일을 찢어버리고 싶어 설렌다.  깃발과 회전목마와 명절날을 싸고 있는 걸 벗겨버리고 싶다.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그칠 줄 모르는 샘물을 지켜보고 있다―  잔모래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숨쉬고 있는 한 가닥의 실,  어린 날엔 그것으로 충분하리 : 그러나 어린 마음의 절반은  돛이 달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河口쪽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아이들의 아침안개가 내내 끊이지 않길 바란다,  안개는 숨겨져도 좋은 것을 그렇게도 많이 감추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저 샘물로 묶어두고 싶다, 샘물이 흘러 개울폭이 넓어지면  거기에는 모래더미와 難破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샘물처럼 우리의 손끝에서 빠져나간다.  안개처럼, 또한 경주로의 길가에 있는 깃발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과도 같이.  이 시는 아일랜드 출신의 세실 데이 루이스라는 시인의 이란 시인데 시인의 시작과정을 직접 들어보자.  “이 시의 씨앗은 나의 두 아이에 대해 내가 느낀 어떤 격렬한 감정이다. 이건 세상의 대개의 부모들이 조만간에 갖는 감정, 즉 자기의 아이들도 얼마 안 가서 어른이 되어 부모 곁을 떠나 위태롭고 살기 힘든 세상 한가운데로 진출해야 한다는 슬픔의 감정이다. 누구나 젊을 때에는 자기 부모가 이런 기분을 갖는 데 대해 가끔 불만을 느끼는 법이다. 아이들은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혼자 독립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런데 한번 더 앞의 시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두 개의 테마 또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뒤의 6행에 나타나 있는 내 자신의 감정으로 그것이 본디 테마다. 또 하나는 처음 8행에 나타나 있는 안타까운 듯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아이들의 감정으로서, 이들 두 개의 테마가 서로 밸런스를 유지하며 서로 대비되는 듯한 기분으로 이 시는 씌어지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펜을 잡기 전에 나는 시의 1행이 실제로는 이미 내 머릿속에 떠올라있음을 흔히 발견한다. 그 1행은 그 시가 전개하는 그 시의 주제와 바탕모양에의 계기를 내게 주는 것, 즉 음악으로 말하자면 主調音에 해당하는 일종의 主調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14행 시를 쓰려고 내가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런 의미의 한 행이 곧 내 머리에 떠올라왔다. 그 한 행은(이 한 행만이 나중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는데) 이었다. 나는 이 한 행에 대해 생각하고 이 한 행이 명절날, 즉 아이들이 몹시 기다리는 것의 이미지임을 알았다. 분명히 이 이미지는 어린이가 들어가 보고 싶어하는 어른의 세계를 상징(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안타까움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다시 또 다른 행― 처음의 3행을 덧붙이기로 했다. 여기에서 강 유역을 덮고 있는 새벽안개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린이들이 생일날에 받는 선물의 얇은 종이를 찢어보고 싶은 하는 하나의 막―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에서 가로막고 있는 막을 말한다. 이 이미지는 몇 년 전의 어느 날 나의 기억이다. 내가 나의 아이를 데번셔 주의 초등학교에 데리고 가서는 어느 언덕 위에서 쉬면서 안개로 덮인 아래 골짜기를 바라보았을 때의 기억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때 그 안개가 마치 얇은 종이처럼 보이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 사건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처음의 4행에 표현된 테마의 변주곡으로서 그 테마를 보조하는 다음 이미지를 바라게 되었다. 여러분은 5행에서 8행까지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땅위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샘과 숨쉬고 있는 한 가닥의 실을 바라보려고 앞으로 쭈그리고 있는 어린이의 묘사다. 라는 단어가 이전의 이미지에 대한 손잡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샘은 생명의 원천이요, 젊은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생명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다. 은 마치 시냇물이 확대되어 하구가 되듯, 그들의 생명이 확대되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지극히 많은 생활을 영위할 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샘의 이미지도 안개의 이미지와 같이 나의 기억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저택 근처에 있던 실제의 샘으로, 나는 어릴 때 그 샘에 몹시 매력을 느꼈었다. 나는 몇 시간이나 그 샘을 지켜보며 어째서 이렇게 자그마한 한 가닥의 물줄기가 이 대지에서 힘차게 솟아나는지 이상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또 하나의 다른 테마를 덧붙일 필요를 느꼈다.―즉 아이들이 세상에 진출해 가는 데 대해 부모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 주기 바라는 것은 이 테마는 이 시의 근본씨앗이 되고 있으나 이 시에서는 비교적 작은 부분(9행에서 12행까지)을 차지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시를 쓸 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완성된 시는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한 편의 시가 어떤 형태의 것이 되는지 그 시를 다 쓰기 전까지는 짐작을 못하는 수가 많다. 사실 한 편의 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작자와 관계없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9행에서 12행까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우리 어른은 어린 시절의 안개가 어린이를 위해 제발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안개가 걷히면 어린이는 이 세계가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기분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므로」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린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유년시대에 매어두고 싶다, 인생에 상처를 입는 일()에서 구해주고 싶다, 누구든 어른이 되면 인생에서 상처를 입는 일은 늘 있는 일이므로. 그러나 시는 이런 결말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역시 아무리 부모라도 자기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 비록 부모로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또 사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2행에서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떠나 성장해 가는지, 마치 안개나 물()이 우리의 손끝을 빠져나가듯 빠져나가는 것을 묘사했다. 어린이는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자기의 경주를 달려야 한다. 시간은 이미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6행에 대해 뭔가 깨달음이 없는지? 모래더미와 난파의 이미지를 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는 문구 (사실 이 문구도 나의 기억에서 따온 이미지로, 내가 14세의 소년이던 때 2마일의 장애물 경기를 했을 때의 기억이다.) 속에 있는 flag(깃발로 경주로의 표시를 하는)라는 동사는 4행의 flags(깃발)의 반향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이미지를 쓰는 대신 처음 8행의 이미지―안개와 샘과 하구와() 깃발의 이미지로 반복했다. 이따금 시에서 반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복이란 단순히 단어나 프레이즈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많은 거울이 있는 복도를 지나면 자기 모습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듯이, 나의 두 개의 주제를 몇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보아달라기 위해서다.  끝으로 이들 각각 다른 특정한 이미지의 원천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이 참고해준다면 한 편의 시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 나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나의 일생의 각각 다른 시기에 내가 겪고 그 뒤에 잊어버린 몇 개의 경험을 내가 전혀 깨닫지 않는 동안에 어찌된 셈인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았다. 그 씨앗은 데번셔 주의 안개와 아일랜드의 샘과 도우셋 주의 장애물 경주를 잡았다. 그리고 또 요트가 돛을 올리고 달리고 있는 어느 강의 하구를 덧붙였다. (이 광경은 어디서 따오게 됐는지 나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고 보니, 이들 네 개의 이미지가 이 시의 주제를 조명하기 위해 나의 마음속에서 자연히 떠올라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쓸 때의 실제의 줄거리는 다이아몬드 브로우치가 만들어지는 순서와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마치 광부가 산허리에서 구멍을 파듯이 자기의 마음속을 파내려 가서 가장 귀중한 보석―시의 주제와 이미지를 발견하려고 한다. 광부가 아무리 그 기술이 뛰어나고 부지런히 일해도 산에 다이아몬드가 없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에 시가 없으면, 즉 우리의 상상력이 높은 열을 내뿜고 굳센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경험을 시의 소재인 보석이 될 때까지 융합하지 않고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단 한 편의 시도 낳을 수는 없다. 그것은 땅속의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 어떠한 몇 가지 화학적 조건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시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시를 쓸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캐내어지면 그것을 선별되고 순위가 정해지고 잘리어서, 비로소 장식품으로 쓸 수가 있다. 이 순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시인이 그의 상상력이 낳은 소재로부터 완성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보석쟁이의 손에 들어오는 다이아몬드의 질과 크기에 따라 그가 만드는 브로우치의 디자인이 정해지듯이, 시인의 소재의 성질과 품질이 완성된 시의 바탕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커다란 힘이 된다. *    ===========================================================================     수묵화 필 무렵  ―이순주(1957∼ ) 겨울 지나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의 붓질, 대지는 화선지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선이 굵고 힘찬  획이 그어졌다 바람이 운필의 속도를 조절하여 농담을 이룬 자리 쑥을 뜯던 당신 흰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때필법이능란하여비백(飛白)을만들어낸바람,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망울들을 매만졌다 툭툭 산벚나무의 꽃망울들이 터지곤 했다 당신 얼굴 주름살이 웃자 망울진 꽃망울들은 다투어 벙글었다 당신이 쑥대궁을 자를 때마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올랐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는 동안 정겨운 수묵화 한 폭 살아났다 이제 그만 내려가요 어머니, 대답 대신 당신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배가 불룩한 검정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가지런한 틀니 드러내며 내게 봄을 건네준 그 해 당신은 먼 길을 떠나시고 시시때때 꺼내보는 내 안에 소장된 수묵화 필 무렵 이 시가 실린 이순주 시집 ‘목련미용실’에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여럿이다. ‘기차가 미끄러져 간다 칸칸마다 아이들 코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냉장고 소리 어머니 해수 기침 소리를 싣고//돋보기안경 너머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애벌레처럼 밤 가운데 몸을 말고 앉아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한 땀 한 땀 박히는 일정한 걸음의 음보, 어둠을 밀어내며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한밤의 뻐꾸기 울음 두 번, 기차가 두 시를 지나가고 있다.’(시 ‘푸른 방’에서)  화자는 기억하는 것이다.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지키느라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던 젊은 어머니의 푸른 방, 푸른 밤을. 형제들 중 홀로 깨어, 그러나 기척 없이 누워서 어머니의 재봉틀 소리를 들을 때 느꼈던 안도감이며 걱정이며 어떤 서러움을.  세월이 흘러 그 어머니 연배가 된 화자가 얼굴에 주름살 가득하고 틀니를 한 노인이 된 어머니와 보낸 어느 봄날이 ‘정겨운 수묵화 한 폭’으로 그려져 있다. 말수가 적고, 드문드문 건네는 말도 나직하고 부드러우실 화자의 어머니. 삶이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으련만 기품을 잃지 않은 노인은 대개 ‘일하는 사람’이더라.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꾸려온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삶을 살아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은 인생을 담담히,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오르는’ 산기슭에서 모녀가 봄날을 나누는 풍경이 맑고 평화롭다.    
1609    詩는 신비한 혼혈아이다... 댓글:  조회:4380  추천:0  2016-10-01
박노해, /최지연             함께하는 일터의 노래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흘리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13일 낮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절규는 노동자계급 최초의 자기선언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수출 드라이브의 뒷전에서 나사못보다 못한 대우에 시달리던 한 노동자의 분노는 스물셋 젊은 몸뚱어리를 장작 삼아 불타올랐다. 그것은 노동해방이라는 미륵세상을 갈구하는 지성의 소신공양이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84년 가을, 노동자계급은 또 한 사람 그들의 대변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 몸을 불사르는 방식은 아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가지/이러다간 끝내 못가지”(박노해 `노동의 새벽' 첫 연).  전태일의 분신과 박노해 시집 의 출간은 그 형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용에서는 동일한 것이라 할 만하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고발, 계급해방에의 간절한 열망, 동료 노동자들을 향한 각성과 단결에의 외침이 그 두개의 형식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14년이라는 시간의 진행이 남한 노동자계급의 일과 삶에는 아무런 질적인 차이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노해(본명 박기평·39)씨가 공식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83년 황지우·김정환씨 등의 시동인 `시와 경제' 제2집 에 `시다의 꿈' `하늘' `얼마짜리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긴 공장의 밤/시린 어깨 위로/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드르륵 득득/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시다의 언 손으로/장미빛 꿈을 잘라/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끝도 없이 올린다”(`시다의 꿈'1·2연).  노동해방을 가리키는 필명을 앞세운 박노해의 등장은 남한 노동자 계급의 자기표현이 문학적 성숙을 이루었음을 뜻했다. 그의 시들은 송효순 유동우 석정남 등의 노동수기류를 계승하면서 발전적으로 넘어섰다. 수기와 생활글이라는 직접적이고 무기교적인 형식이 좀더 세련된 장르인 시로 넘어갔다는 점에 박노해 등장의 의미가 있다.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노해의 노동시편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일제시대의 뜨내기 노동자 출신 작가 최서해에 비견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슷한 무렵에 등단한 농촌 교사 시인 김용택과 함께 논의됐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 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 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 박노해의 등장이 촉발한 문학창작의 주체 논쟁은 87년 김명인씨의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민중문학의 구상'이라는 논문을 거치면서 민족·민중문학의 급격한 이념 분화로 이어진다.  박노해의 시집을 지금 읽어보면 당시 던진 충격은 많이 완화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박노해씨의 뒤를 잇는 여러 노동자 시인들의 시에 우리가 익숙해진 데다, 창작 주체에 관한 강박에서 벗어나 박노해 시의 성취와 한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 노동의 새벽>의 시들은 예외없이 노동자의 일과 삶을 노래한다. 거기 그려진 노동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힘겨운 작업에 시달리며, 그 과정에서 프레스에 손목이 잘리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위험에까지 노출돼 있다. 신혼의 노동자 부부는 작업시간의 차이로 인해 얼굴을 마주보기조차 쉽지 않으며, 모처럼 “찾아먹는” 휴일에도 별다른 오락과 취미생활을 즐길 경제적 여유가 없다.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는 소일거리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에 막걸리 몇 잔 걸치며 냉정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분노를 영영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줏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 마지막 연).  <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박노해는 흔히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56년 전남 출생, 15살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는, 시집 갈피의 간략한 소개말고는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은 `박노해'라는 이름이 노동시를 쓰는 창작집단이 편의상 내세운 공통의 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세상의 호기심과 상상에는 아랑곳없이 박노해는 새로 창간된 격월간 에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 형태파괴적인 `시사시(時事詩)'들을 선보이는가 하면, 남북노동자회담 제안, 현대자동차 파업 격려, 문익환 목사 방북 환영 등의 시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노동자 시인에서 노동운동가이자 혁명가로 변신하는 듯했으며, 그의 행보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박노해 현상'이라는 조어를 낳는다.  무릇 모든 절정은 파국과 추락을 예비하고 있음인가. 그는 91년 봄 사노맹의 `수괴'로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해 송년호에 실린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 그가 “그해 겨울,/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고 갈파하거나, 옥중시집 에 덧붙인 산문에서“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데에서 이 혁명가 시인의 강파른 세계관이 변모를 겪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구로공단과 가리봉 일대에는 구둣발에 밟히는 낙엽과도 같은 쓸쓸함이 흘러다닌다. 시속에의 적응이 잰 눈에는 10여년 전과의 차이가 분명히 보인다. 치떨리는 분노와 강고한 희망이 공존했던 노동자들의 얼굴에서는 적당한 체념과 그만큼의 안락이 잡히는 것 같다. 진한 살색의 외국인노동자들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 역시두드러진 변화다. 가리봉역의 영어 안내방송은 그 한 부수효과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숫자가 줄어든 만큼 시장과 가리봉 오거리의 상점들 또한 흥청거리던 활기가 한결 덜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파업과 시위와 플래카드를 보기 어렵게 됐다. 박노해는 글렀던가? 적어도 그의 초발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등단작 가운데 하나인 `시다의 꿈'을 읽어 보자.  “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허청이며 내달리는/왜소한 시다의 몸짓/파리한 이마 위로/새벽별 빛나다”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재단사 보조)의 꿈, 그 꿈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전태일의 26주기를 맞아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들의 함성과 열기는 노동자 시인의 초발심이 역사의 한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노해 시집을 중심으로  어릴 적 길옆에 노랗게 익은 탱자를 따려고 하다가 가시에 찔려 피가 나오는 것도 그저 탱자를 따는 재미에 아픈 줄 몰랐었던 기억과,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도 탱자를 먹는 상상만 하여도 입안에 침이 가득 생성되고 얼굴엔 반사적으로 신맛을 표현해 내곤 한다. 갑자기 탱자먹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아픔과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 등 1980년대의 우울한 추억이 취류탄의 매운맛과 버무려져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출생하여 고흥, 벌교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섬유,금속, 운수 분야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1983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 (풀빛. 1997년 해냄 재출간)을 간행한 후 '참된 시작'(창작과 비평사,1993년), '겨울 꽃핀다'(해냄,1999)시선집 머리띠를 묶으며(미래사,1991년), 산문집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노동문학사,1989년) '사람만이 희망이다'(해냄,1997년),'오늘은 다르게'(해냄,1999년) 등을 간행하였고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8년 8 .15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제1회 노동문학상(1988년)을 수상하였다. 박노해는 1980년대 산업분야 노동시의 기수이다. 박노해의 시는 '우리'와 함께 한 것이기에 특히 주목된다. 그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총 42편의 작품 중에서 '우리'라는 주체적 대명사가 나오지 않는 작품은 '한강', '그리움', '바겐세일', '시다의 꿈', '봄', '떠다니냐' 등 6편이다. 이 작품들이 초기의 것이라는 사실을 감한 한다면 박노해의 시세계는 단적으로 '우리'의 삶을, 즉 노동자의 삶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신경림, 김지하 등의 앞 시대 민중시에도 '우리'라는 주체는 많이 나타나지만 지식인 시인들의 동정심이 내포된 것과 박노해의 주체적인 '우리'와는 차별되는 것이다. 박노해의 시세계는 첫시집 '노동의 새벽' 단계와 1988년 '노동해방문학' 단계, 그리고 사노맹 사건 이후의 단계 등으로 구분된다. 그에 의해 지식인 위주의 민중시가 노동자가 창작 주체가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는 우리의 문단 풍토를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고, 좋은 시의 기준으로 여겨오던 비유, 상징, 운율 등의 형식적인 면분만 아니라 내용도 중요함을 인식시켰다. 또 시가 텍스트의 대상을 넘어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운동의 매개체로까지 유용함을 갖게 하였다. 박노해의 시는 구체적인 노동 현장성을 확보한 데다가 시대의 문제로 집중 시켰기 때문에 시대인들로부터 공감대를 샀다. '포장마차, 손무덤, 신혼일기, 지문을 부른다'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모래에 싹이 텃나 / 사장님이 애를 뱄나 / 이 좋은 토요일 잔업이 없단다  이태리타올로 기름낀 손을 닦고서 / 작업복 갈아입고 담배 한 대 붙여 물면  두둥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떠 / 누구라 할 것 없이 한잔 꺽자며  공장 뒷담 포장마차 커튼을 연다 / 쇠주파 막걸리파 편을 가르다  다수결 두꺼비로 통일을 보고 / 첫딸 본 김형 추켜 곰장어 굽고  새신랑 정형 얼러대어 / 정력에 좋다고 해삼 한 접시  자격증 시험 붙어 호봉 올라간 / 문형이 기분 조오타고 족발 두 개 사고  걸게 놓인 안주발에 절로 술이 익는다.  새벽에 안서는 놈은 빚도 주지 말랬는데  잔업에 곯다 보니 요게 새벽까지 기척도 안해  일주일째 아내 고것 곰팡이 슬겠다고 /킬킬거리고, 이제 신혼 한달째인  정형 새신부 토실한 히프 모양이 첫아들 날 상이라며  좌우삼삼 일심구천 김형 5단계 노하우 전수에  헤 벌리는 놈, 심각한 놈, 키득대는 놈,  한 잔 두 잔 술잔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녹아들어 하나가 되어  송형은 문형에게 감정풀이 화해주를 청하고  서씨는 전기과 박형과 찜짐했던 오해를 털어놓고  노씨는 왕년에 광빨나던 시절 타령이 시작되고  장단 맞추는 김형, 만주에서 개장수하며 독립운동하던  뻥까는 야화가 기세를 올리면 부산 자갈치 공형,  야야 치라 치라 벌써 백번째다 마 / 내 한 곡 뽑제, 니 박수 안치나  두만강을 노저어 오륙도 돌아 / 개나리처녀 미워미워  울고 넘는 박달재로 발길을 돌려 / 젓가락 두들기며 주전자뚜껑 드럼에도  어깨 우쭐, 방뎅이 들썩, / 쿵따라 닥닥 조코 좆커  영자야 안주 한 사라 더 주라잉 / 2차 가자 집에 가자 고고장 가자는 걸  알들꾼 신씨가 눌러앉히고 한 병 두 병 더할수록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 좆같은 노무과장, 상무새끼, 쪽발이 사장놈,  노사협의회 놈들 때려엎자고 / 꼭 닫아둔 울화통들이 터져나온다  문형은 간신자식들 먼저 깨야 한다며 / 벌겋게 달아오르고  정형은 단계적으로 구내식당부터 / 시정하자고 나직이 속삭인다  상고 나와 기름쟁이 된 회계담당 김형은  외상장부 넘겨 가며 / 계산을 한다  냉수 한 사발 돌려 마시고 / 자욱한 연기 속 포장마차 나서면  어깨를 끼고 비틀비틀 / 일렬횡대로 서 담벽에 오줌 까기고  씨팔, 내일도 휴일특근 나온다며 / 리어카장수 떨이쳐 딸기 천원어치씩  옆주머니에 꿰차고 / 작별의 손 흔들며 잔업 없는 오늘만은  두둥실 토요일 밤을 흥얼거리며 /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공장 가까이에 위치한 포장마차에서 잔업이 없다는 행복에 취해 오순도순 모여앉아 소주한잔 마시며 노동자의 아픔을 토로하던 기억처럼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용속에 저절로 노동자의 피곤한 하루가 쉽게 와 닿는다. 어느 곳에서나 갈등은 있게 마련이지만 모든 갈등의 원인은 대화의 시간이 없는데서 나오는 사소한 불신의 벽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포장마차는 갈등과 오해를 푸는 만남의 장소인 것이다.  올 어린이날만은 /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후에 /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사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않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은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수 있는-  선진 조국의 종로거리를 / 나는 ET가 되어 /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메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묻는다 /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 묻고 또 묻는다  한 순간의 찰나에 손목이 날카로운 기계에 잘려도 고함한번 지르지 못하고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묘사한 손무덤을 읽다보면 문득 진열장에 늘어선 많은 차가운 손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온다. 아마 진열되어 있는 저 숫자만큼 담벼락에 눈물로 뭍혀있을 노동자의 따듯한 손을 대하는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힘들고 어렵던 시절에 노동자의 안전을 무시하고 생산에만 매달려온 노동의 현장에서 공장 모퉁이 작은 공간에서도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며 새싹을 틔우는 민들레처럼 아직도 백열등 아래에서 야간작업에 피곤한 몸으로 졸린 듯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새벽을 기다리는 노동자들을 만날 것만 같다.    Ⅰ.  1980년대 초반은 보통 시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중후반은 노동 문학으로 대표되는 민중 문학의 도도한 흐름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런 지난 시대에 대한 평가의 한 가운데 놓인 시집이 있다. 그 시집이 지금 내가 읽어가고 있는 박노해의 시집 이다.  지금부터 10여년 전 그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무엇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아울러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여러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예를 들면 구로 공단 옆 뚝방의 벌집에서 한 착한 노동자인 삼촌, 재수생이었던 동생과 같이 했던 자취 시절. 그리고 이런 우리의 서울 생활을 보고 가슴아파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 등이다. 또 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체 특별 학급의 담임으로 부임한 신출내기 중학교 선생님이 겪은 기억도 되살아났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하다가, 여섯 시까지 학교에 왔던(결석일수보다 등교일수가 조금 많았던) 얼굴에 핏기조차 없는 학생들의 얼굴. 풋내기 총각 선생님과 연애하자고 할 나이의 '말만한 처녀'인 중학생 옥자, 정희 ......  제도 교육의 틀 속에서 잘 길러진 시골뜨기였던 나는 서울에 와서 많은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런 삶을 살기보다는 이런 서울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이런 체험들은 내게 이 시집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많은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이런 생각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나는 이 시집을 읽고 있다. 그러면서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우리 자신들이 맡은 일에 대해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우리들의 일이 행복한 일이라고 스스로가 자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박노해 시인의 삶은, 세속적인 의미의 행복과는 거리가 있지만 역시 행복한 사람 중의 하나다. 1956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상업학교를 졸업하고도 산업전사의 길을 택했던 시인이자 전위 노동 운동가. 또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했다는 이유 때문에 영어(囹圄)의 몸이 된 사상가. 박노해는 이처럼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2집에 '시다의 꿈'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1970년대 전태일과 같은 전위 노동자가 있었고, 유동우의 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의 요구는 여전히 묵살되는 상황이었으며, 노동 현장의 외침은 불온한 것으로까지 치부되던 때이다.  더구나 반민중적이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당시의 신군부는 철저하게 이런 노동자와 민중의 요구를 탄압하고 있었다. 이런 1980년대 초반에 박노해는 이 사회의 공인(公人)이 되었다. 이 후 (풀빛, 1984), (미래사, 1989), (창작과 비평사, 1991) 등의 시집과 (노동문학사, 1989)와 같은 산문집을 간행했으며, 1991년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구속되어 복역하였다.  Ⅱ.  특히 은 얼굴 없는 시인이었던 그를 일약 1980년대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았다. 특히 광주민중항쟁 이후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 세력의 성장과 그 외침을 이 시집은 전달하고 있다. 억눌려 살기만 했던 민중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요구가 적극적인 문학적 형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비인간적인 조건에 묶여 있는 노동자들의 고뇌와 꿈을 노동자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함으로써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최원식, '노동자와 농민')을 보여주었으며, 운동의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이전 시기에 비하여 "노동자로서의 자기 인식, 현실 인식, 상호 인식을 온전히 달성"(신승엽, '노동문학의 현단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평가가 지금도 유효한지는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1980년대 중후반에 활발히 창작된 노동 문학이 민족 문학 속에서 정당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1980년대 후반 우리 비평사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족 문학 주체논쟁을 촉발하는 계기도 제공하였다.  여기서는 이런 그의 시 세계를 이라는 시집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우선 그의 시 세계는 1980년대라는 특수한 현실 속에 처한 노동 현장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 열악한 자본과 빈약한 천연 자원 위에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려 했던 우리의 현실은, 노동자의 땀과 피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리 사회의 희생양 중의 하나였던 노동자. 이 노동자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 시집에는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진솔함이 모든 독자들(노동자, 농민, 소시민, 학생)에게 진한 감동으로 와 닿았다. 이를 통해 산업화의 양지 반대쪽에 있는 그늘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 같은 삶의 모습에 우리의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노동의 새벽'은 이런 노동자의 삶을 특히 잘 나타내고 있다. 세 그릇의 짠밤으로 진이 빠진 노동자들은 야간 작업을 하고 나와서 새벽 공복(空腹)에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야간 작업, 철야 특근, 휴일 특근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현실. 그리고 이렇게 일해도 그들은 여전히 밑바닥 인생길을 걷고 있는 "돌이"와 "공순이"를 면할 수는 없었다.    또 주민등록을 갱신하려고 동회에 갔다가 닳아 없어진 지문을 부르고 있는 '지문을 부른다'나 한 여성 노동자가 남성들에게 짓밟힌 삶의 역경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여성상을 그린 '남성 편력기', 가난한 노동자 가족의 사랑을 노래한 '이불을 꼬매면서', 전자 회사에 다니면서도 어린 동생의 영어 공부를 위해 카세트 하나 사주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를 삶인 '영어회화' 등에도 우리의 노동 현실의 어두운 면이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다.  프레스에 잘린 동료 노동자의 손을 묻고 있는 '손무덤'을 보자.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 '손무덤'의 부분  36살 가장의 소박한 꿈과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산재의 희생양이 된 우리의 노동 현실이 자본가나 있는 자와의 대비를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접을 바라는 노동자의 요구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그리고 눈매가 서글한 아내와 초롱한 아들을 둔 노동자와 그들의 피의 대가로 얻어진 고급 승용차가 이런 현실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산재 관계 책을 구하려 종로의 큰 서점을 들렸지만 구할 수 없는 현실에 봉착한다. 오히려 자신들과는 다른 번화한 봄날의 종로 거리에서 자신들의 비참함만을 확인한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와 프로 야구로 대표되는 독재 정권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노동자의 현실 인식은 박노해의 시에 절실하게 형상화된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는 이렇게 불합리한 현실을 알아차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이 현실 인식을 통하여 새로운 각성(覺醒)에 이르고 있다. 자신들이 소외되고 불평등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사랑과 적대 세력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다. 바로 이 점이 이전의 노동 문학과 크게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 '손무덤'의 부분  이처럼 노동 현장의 보고서는 이제 새롭게 깨어나는 노동자의 정신과 외침을 노래하기에 이른다.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형상화되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인 차원의 희망이나 한풀이가 아니라, 진정한 노동자의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집단의 의지가 표현되고 있다. 노동자들이 '기쁨의 손짓'을 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간절한 바램. 이것이 박노해의 시가 꿈꾸었던 세상이다.  Ⅲ.  이제 이런 박노해 시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를 형상화의 방법 측면에서 살피기로 하자. 그의 시 대부분은 서정 단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읽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에 실린 시들은 긴 사설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 형식의 전통을 많은 부분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형식상의 특징은 동일한 시구나 비슷한 구조를 지닌 시행을 반복하거나 대구(對句)로 표현하고 있다. 즉 반복이나 대구를 통해 나름의 시적 운율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교적 긴 내용을 전달하면서도 빠른 호흡을 지닐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그의 시는 짧은 시행을 반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이런 형식적 모색은 '노동의 새벽'에서 보이는 방식으로, 이미 신동엽, 김지하와 같은 선배 시인들의 시 전통에 맥이 닿아 있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나 "오래 목사도 / 끝내 못가도", "우리들의 사랑 / 우리들의 분노"(윤여탁, '노동 그리고 참된 시작')와 같은 예에서 이런 형식 실험을 찾을 수 있다.  또 그의 시에는 긴 사설을 주워섬기는 판소리 사설과 같은 가락과 표현을 계승하고 있다.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광대가 내용 전달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비슷한 표현(formula)을 끊임없이 동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형식 역시 운율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남도적(南道的) 판소리의 가락에 얹혀져서 이야기가 전달된다.(특히 풍자시로 실험되고 있는 후기의 '시사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자본가나 있는 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시들에서 이런 방식은 널리 쓰인다. 그의 많은 시들이 현실에 대한 비판과 폭로를 통해 우리의 노동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풍자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다음 시를 보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 걸로야 TV 탈랜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를 견줄 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써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꽂이야 학원강사 따르것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 '천생연분'의 부분  시인은 아내이자 동지에게 보내는 이런 연애 편지를 자주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서 살고 있는 삶과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 서정시'의 고상하고 조탁(彫琢)된 언어와는 거리가 있는 표현이다.  이런 형식적 장치가 가지는 장점 외에도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결점도 만만치 않다. 그의 시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긴 사설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시인에 의해 이야기가 의해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우선 지적될 수 있다.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이 직접 서술되거나 설명되는 시 형식은 우리의 민중시 일부가 보이는 결점이기도 하다.  즉 박노해의 시도 역시 서정시의 넓은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름의 형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현실, 그리고 각성하는 노동자의 의식이 다른 대상을 통해 형상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비유나 상징적 형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사랑과 분노를 털어버리듯이 뱉어내고 있다.  이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만큼 절실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는 행사시와는 달리 순간의 공감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어야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절실하게 다가와야 한다. 이것이 문학적 표현이나 형상이 가지는 감동의 본질이기도 하다.(그렇다고 해서 박노해의 시가 감동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사실도 여기서 다시 밝혀 둔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거리가 멀다. 비교적 서정시의 본령과 가까운 시 예를 들면, '한강', '봄', '석양', '사랑'이나 '어머니' 등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그의 시에는 전투에 임하는 전사(戰士)의 결의만이 나타나 있다. 감상적인 속성을 지닌 서정에 안주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현실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제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어머님의 간절한 소망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비원을 위하여  짓눌리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불효자가 되어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 '어머니'의 부분  우선 어머니는 자식이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가 되기보다는 행복을 찾는 여행자가 되기를 바란다. 현학적인 신화 비평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다정다감하고, 우리가 몸과 마음을 쉬면서 안주할 수 있는 고향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박노해의 시에 나타난 어머니는 시인과 같이 한(恨)을 간직하고 있는 민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필자도 1980년대가 노동자가 아니 민중들이 행복하게 살기 어려웠던 시대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좀더 따뜻한 사랑과 아름다운 사랑을 찾을 수는 없었을까?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나 악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 많지 않은가? 때로는 세상의 밝은 면을 찾아 읽을 수 있는 여유는 없었을까? 이것이 노동자의 아니 민중의 서정이라면 더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Ⅳ.  지금까지 필자는 을 새롭게 읽으면서, 그 장점과 단점을 살펴보았다. 이 글을 맺으면서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상기하고자 한다. 1990년대를 반이나 지낸 지금의 현실은 지난 10여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의 최근 시집 에서 혁명적인 사상가였던 시인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엄연히 사실로 존재한다. 부정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 시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해 온몸으로 부딪쳤던 박노해 시의 성과는 부정될 수는 없다. 다만 아쉬움이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는 새롭게 논의될 수 있으리라. 1980년대라는 격동의 시대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로서의 역할,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한 각성을 보였던 노동자 외침으로의 역할을 그의 시집 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채광석은 일찍이 이 시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한 적이 있다. 이런 평가는 세월이 흐르고 사회 현실이나 국제 정세마저도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유효하다. 그리고 필자가 많은 지면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요약적으로 이 시집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 실린 그의 시들은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절망과 슬픔, 원한과 분노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담아낼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인간다운 삶을 향한 주체적 일어섬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일궈 내는 민중해방의 정서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노동현장의 눈동자'에서)   ===============================================================================   장영수「메이비」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줏으려고 아이들은 밀려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르던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부르지 않을 메이비.        장영수 (1947 - )「메이비」전문    이 시는 전쟁 혼혈아 친구에 대한 기억들을 사실적으로 기술한다. 짧은 에피소드들이 연결된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 친구는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는 바람에 메이비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얻게된 메이비라는 이름처럼 툭 던져진 자신의 앞날이 결코 평탄치 않으리라는 불안감을 갖기에는 메이비도 화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화자는 모두가 고아였다는 인식 속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을 메이비에 대해 동질감과 연민을 갖게 된다. 화자는 메이비를 더 이상 메이비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해 결국 메이비라고 그를 지칭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들의 인생이 곧잘 그렇듯, 슬픈 아이러니다.   
1608    詩作에는 그 어떠한 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4020  추천:0  2016-10-01
세대별 현대시의 유형 / 신재한  시는 정서의 표현인 점에서 큰 범주로 다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시는 서정시라 하더라도 장르가 여러 부류로 갈린다.  각기 장르별로 장, 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장르가 좋은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여러 장르의 시들을 접하기 위하여 20대에서부터  원로시인까지 많이 만나보기도 했고 고견도 들었다.  각 분야별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기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도 할 겸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20대의 젊은 감각이 선호하는 시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 일류미나시옹 Illuminations등의  대표작을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발표한  프랑스 상징주의 천재시인 랭보가 추구했던 시 계열이다.  랭보의 경우 종교에서나 느낄 수 있는 法悅같은  알맹이도 없는 超自然의 세계라는 虛無 속에서  자기 스스로가 이야기한 정신의 싸움, 세기의 운명을 노래했다.  이러한 시 계열은 어렵고 무겁고 피흘리는 싸움만큼이나 처절하다.  혈기가 강한 젊은이들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시풍일 것이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가미되어 파토스적 감정을 배제하고  잔인한 모습도 냉냉한 시선으로 서늘할 정도로 무덤덤 하게 바라보는  시풍을 추구하고 있다.  샘플로 젊은 감각의 시를 보도록 한다.  얼음의 방 2 / 이현호  그의 수행법은 독특했다. 온종일 목탁을 치는 듯한 기침 소리. 태양의 궤도를 따라 그림자를 옮기며, 그는 그늘 속에 한 덩이 얼음을 키웠다.  영혼의 잠버릇이라는 핑계를 대며 그는, 많은 날을 술로 죽였다. 유령처럼 그에게 다가갔던 나날은 시간을 죽이는 그의 노련한 솜씨에 질려, 유령처럼 사라져 갔다.  이 얼음이 녹지 않으면, 내 영혼은 자유를 찾으리라. 좌선하는 술병과 酩酊한 공기 속에서, 얼음이 녹는 정도에 따라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얼음이 녹으면 그는 울고,  물 고인 자리에 새 얼음을 가져다 놓는, 그는 영락없는 사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功力으로 허기처럼 일어나는 불신의 흔적을 가릴 수는 없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술병들을 방풍림 삼아 죽었고, 끝내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 호사가는 그의 死體에서 얼음 알갱이들이 열꽃처럼 피어났다고 전하지만, 내 생각에 그는 얼음이 남긴 舍利에 불과하다.  그는 얼음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를 바라보면 소설 '만다라'에서 지산 스님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오만가지 고통을 혼자서 지는 있는 모습,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하고 선각자의 삶을 살고자 하지만  고통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30, 40 대가 좋아하는 시풍은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문장이면서도  숨겨진 고도의 은유가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시풍은 삶에서 느끼는 회한이나 자신의 선했던 모습을 돌아보는  그런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감정이 많이 배제되어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시풍이면서 시적 기교는  통통 튀는 감각과 밝음에서부터 잔잔한 슬픔까지 표현되는  여러 가지 기교가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샘플시를 살펴보자  수건 한 장 / 문성해  수건 한 장을 덮고 아이가 잔다  수건 한 장으로 덮을 수 있는 몸이 참으로 작다  수건 한 장 속에서 아이는 참 따뜻하게도 잔다  가위눌리는 꿈도 너끈히 막아주는 수건 한 장  그것은 평소 낯을 닦을 때보다 더 크고 폭신해 보인다  수건 한 장은 지금 완벽하다  어떤 바람도 무서움도 스며들지 못한다  굴곡진 아이 몸을 휘감아 안고 수건 한 장이 가고 있는 곳  요람처럼 흔들리며 아이가 가고 있는 곳  나는 끝내 가지 못하리라  내 몸도 수건 한 장 속에 감춰질 때가 있었던가  나는 더 이상 수건과 한 몸이 되지 못한 채  아침마다 수건 속으로 부끄런 낯이나 묻을 뿐,  아이가 수건 한 장을 비늘인양 걸치고 방 전체를 유영한다  수건 한 장 속에서 아이는 지금 안전하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수건 한 장  그것을 벗겨냈을 때 아이는 천둥소리를 지르며 깰 것이다  이 시는 평이한 언어로 쉽게 쓴 시임에도 불구하고  수건이 주는 이미지를 잘 구사하였다.  수건의 따스함과 포근한 감촉의 이미지를 가지고  아이적 삶이 순수하고 착하며 희망의 꿈으로 가득한 것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현재 인생이 저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회한을 담고 있어  인생에 찌들은 40대에게 잔잔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또 한편의 샘플시를 보면,  1월 판화 / 이인평  말죽거리, 생선 좌판의 정씨.  겨울 오후.  칼 번득이는 인심  단번에 토막토막 잘리는 햇살 담아 주는 정씨.  생태 국물맛 나는 세상이라도 왔으면  비늘 가지런한 시절이라도 한번 와 봤으면  말발굽 소리에 기쁜 소식 하나 누가 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 아직 차다.  말죽거리, 양재 사거리에서 한빛은행 쪽으로  쏟아지는 겨울 빛이  생선비늘을 번뜩일 때, 가슴 환해진 정씨  세월 토막토막 자른다.  생선구이처럼 탄 얼굴로 건네주는  거스름 잔돈 같은 날들이 빛에 젖는다.  빚진 세상 끄트머리 툭탁 잘린,  지느러미 쌓인 통 속으로  에누리 떨어져 나간 세상 주둥이들도 보여  정씨, 발로 툭 한번 차고는  매운탕 얼큰한 웃음 한 봉지씩 담아내는  말죽거리, 생선 좌판  해가 좀 짧다.  이시는 시적 기교가 좋은 시다..  시는 이미지인데 이미지의 경쾌하고 빠른 모습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변환이 어려운 삶에서도 긍정을 나타내고 있어 좋다.  세모가 네모가 되고 네모가 원이되고 원이 다시 세모가 되는 것이  이미지의 변환이라는 시적 기교이기도 하지만  시적 마음이 따스하다.  생태를 잘라주는 정씨가 아닌 햇살을 담아주는 정씨,  얼마나 마음이 따스한가!  정말 생태 국물맛 나는 세상이라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다.  원로 시인들의 시풍은 전통 서정시를 고수하고 있다.  전통 서정시를 고수하는 원로 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므로  우리 시단을 지켜 가는 뼈대 같은 그룹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서정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대 감각에 뒤떨어지므로 비교적 고루하다는 시풍이다.  샘플시 소개는 생략하겠지만  주로 꽃, 나비, 벌, 바람, 산, 자연 등의 순수서정을 노래한 시 계열의 풍이 많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시풍의 전부는 아니다.  이외의 시풍으로 사랑시, 해체시, 정신분석 심리시 등등 많은 장르가 있다.  사랑시는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시풍이고,  해체시는 시의 장르를 개척하려는 특정 분들이 추구하는 시 세계이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어떤 장르의 시가 제일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각기 장, 단점이 있기 때문이고,  시라는 것이 읽는 독자의 감각에 맞으면 좋은 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 선생님들이 말했듯이  시를 쓰면서 악한 감정이 들게 하는 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악한 감정은 읽는 독자들에게도 악한 감정으로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시풍이 바로 30, 40대의 시풍인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서정도 남의 나라 이야기고  실체도 없는 허상을 따르는 것도 공소(텅 빈)한 사유라 할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현대시의 시풍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우리 시단의 시풍을 이끌고 갈 것이라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상징주의는 죽었다는  한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내 생각의 정리를 끝내고자 한다.  어느 상징주의자의 전향 / 한기홍  서른이 넘어서도  시집도 안가고 첨단유행에, 높은 격조 따지던 외동딸이  아비 몰래 카드를 돌려 막다가  이윽고 억대로 불어난 빚을 쓰윽 밀어 주었을 때,  상징주의를 신봉하던 풍(豊)씨는  십 칠 평 임대 아파트 뒷동산에 정장 차려입고 올라가  가끔씩 베란다에서 우두망찰한 하얀 바위 밑  굵은 참나무 등걸에 넥타이를 동그랗게 말아 걸었다.  귓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아우성, 곧 이태 전 먼저 간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비롯한 머구리떼 들끓듯 퍼지는  온갖 이명(耳鳴)의 소요가 있었다.  이제는 삼류詩도 접어야 하구, 억울해 봤자  그저 담담해질 뿐인 *데카당스의 빚도 까먹어야 하네  굳이 무덤까지 끌고 갈 채무가 있다면  못난 죽음, 묘비명보다도 더욱 아프게 심장에 끌로 새겨질  *보들레르와의 아름답고 추했던 추억이네  이를테면  ∼ 그의 思潮에 一爛慢한 文化의 꼿이 한껏 피어, 그 花辯을  버리고 바람도 업는 저녁에 徵光에 떠러질가 말가하는 懊惱의  아름다운 疲榮이며 밝음도 어두움도 안인 陰鬱, 絶望, 壓生의  悲調를 가진 思惟에 한결갓치 새 洗禮를 밧앗다 ∼*(1)  는 선지자의 웅변에서 이제 전향하는 것이네  참나무 밑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풍씨의 구두가 석양에 빛날 때,  '수사중' 금줄을 치던 형사가 너스레를 쳤다  그 양반 차암 깔끔하게 가셨네  ~~~~~~~~~~  *데카당스(decadence) : [퇴폐, 타락의 뜻]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풍조로서, 퇴폐적인 문화에 미적 동기를 추구하는 관능주의를 널리 이르는 말  *보들레르(1821∼1867) : 프랑스 출신으로 상징주의의 문을 연 시인.  시집 '악의 꽃'은 문학사상 최초의 근대적 상징주의 작품으로 평가됨.  *註(1) ∼ 김억, 「프란쯔 詩壇」. 《태서문예신보≫10집(1918.12.7)p.6  註(1)의 맞춤법 틀린 부분은 원문이 그런 것이므로 그대로 적음  ===================================================================   박두진「해」부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 (1916 - 1998) 「해」부분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자연을 노래했던 청록파 시인답게 그는 떠오르는 해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밝은 희망을 노래했다.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쓰여진 이 시 속에 들어있는 '어둠'은 암울했던 일제의 탄압이나 해방후의 혼란한 상황이라는 걸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어둠을 살라 먹고 고운 얼굴의 해가 솟아오르라고 시인은 반복해서 노래한다. 흥겨운 사설이나 타령의 한 자락처럼 그 반복은 흥을 돋운다. 그 흥에 겨워 해는 떠오를 것이다.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로 이 시는 끝을 맺는다.  고운 해가 떠서 자연과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날을 누리게 되기를 바랬던 시인의 꿈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보면 아직도 이 시는 우리의 염원을 담은 주문이자 기도가 될만하다.  해야 솟아라.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1607    詩는 길위에서 길찾기... 댓글:  조회:4157  추천:0  2016-10-01
현대시 서평/장병천 시집 『추억의 푸른 이끼』 길 위에서 길 찾기   박남희   장병천의 세 번째 시집『추억의 푸른 이끼』는 앞의 두 시집에 비해서 뚜렷한 진경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것은 이 시집이 종전 시집들에 언뜻언뜻 보여지던 직설적 감정토로와 소재중심적 시 쓰기 방식이 상당부분 해소되었다는 차원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과 끈질긴 사유의 힘이 시집 전체를 긴장감 있게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시집은 ‘길’에 대한 사유가 두드러진 시집으로, 그의 삶에 대한 사유방식이 ‘길’에 대한 성찰과 직관을 통해서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나 있다. 인간의 삶을 길 찾기의 한 과정으로 본다면, 그의 이번 시집은 인간의 삶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인 ‘길’에 대한 집중적 사유의 궤적을 보여주는 시집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의 시집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노을의 길」, 「길 밖의 길을 내려」,「숲의 길」,「어둠의 길」,「물의 길」,「바람의 길」,「적에게 가는 길」,「길 위의 나날」,「변방 가는 길」,「벽의 길」,「풀의 길」,「딱 하루치의 길이」,「길 끝에는 마을이 있다」,「먼 길」등 제목에 ‘길’이라는 낱말을 포함하고 있는 시들 뿐 아니라, 그 밖의 시들도 상당수가 길과 연관되어 있다.   예로부터 길은 인간의 문명과 함께 발전해왔고, 우리의 생활환경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어왔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70년대를 전후해서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로확장 사업이나 고속도로 건설, 최근에 와서 지하철 건설과 고속전철 건설 등이 그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구불텅한 동양적인 길에서 출발해서 차츰 속도와 결부된 직선적 서양의 길을 닮아가게 되고,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서구화된 의식의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차원의 의미를 훌쩍 뛰어 넘는다. 이것은 길이, 벨트 Welt(물리 현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움벨트 Umwelt (환경으로서의 세계)를 거쳐 레벤벨트 Lebenwelt(생활세계)로 발전하는, 다시 말하면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의 세계로 발전하는 역사의 형이상학적 기록임을 말하고 있는 박이문의 글(「길」)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길은 그 속에 로고스의 의미를 함의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물리적 공간 개념을 넘어서 정신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고 할 때의 ‘Logos’는 본래 말과 길(道)의 두 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의적이다. (박종홍의 「길」) 이렇듯 ‘길’은 ‘말’과도 연관성을 지니게 되고, 단순한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우선 이 시집의 표제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추억의 푸른 이끼」를 읽어보자. 낡고 하찮은 것들은 때때로 얼마나 끈질긴 힘이던가 한 때의 추억이 더 이상 길이 되지 못하는 이건 아니라고 고개 휘휘 젓던 그 길에도 자잘한 일상이나 응어리들을 모아서는 묵묵히 자리를 넓혀가는 새파란 청춘도 아닌 것이 또다시 새 길을 닦는다 철거당한 영세민들인가 그늘진 세상의 한 쪽  끝에 터를 잡고서는 밝은 쪽의 어떤 힘에 대항하여 서로의 빈틈을 최대한 좁혀서는 악착같이 아주 조금씩 양지 쪽으로 뿌리를 뻗는다 평생 음지 쪽에서만 살아본 것들이 내 뿜는 물기는 저리도 절실하고 투명한가 미처 새기지 못한 지난 날의 아픔처럼 세상이 밝을수록 더욱 파릇파릇 빛이 난다       ―「추억의 푸른 이끼」전문    이 시는 인간의 길이 아닌, 추억 속에서 보았던 푸른 이끼들이 그늘진 곳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초두의 “한 때의 추억이 더 이상 길이 되지 못하는/ 이건 아니라고 고개 휘휘 젓던 그 길에서도/ 자잘한 일상이나 응어리들을 모아서는/ 묵묵히 자리를 넓혀가는/새파란 청춘도 아닌 것”이라는 구절을 분석해보면,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길 위에서의 길 찾기’임이 드러난다. 즉 시인은 어릴 때의 추억이 그의 삶에서 더 이상 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늘진 세상의 한 쪽 끝에 터를 잡고서는/ 밝은 쪽으로 어떤 힘에 대항하여/ 서로의 빈틈을 최대한 좁혀서는 악착같이/아주 조금씩 양지 쪽으로 뿌리를 뻗는”이끼를 통해서 낡고 하찮은 것들이 보여주는 위대한 힘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밝은 쪽의 어떤 힘”을 문명의 힘이라고 본다면, 그늘진 곳에서도 파릇파릇 빛이 나는 이끼는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한 때의 추억이 더 이상 길이 되지 못하는” 문명의 시대에도 자연은 하찮은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위대한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끼가 보여주는 자연의 새로운 길은 인간의 길과는 다른 길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인간의 길 위에서 이렇듯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길이 본질적으로 ‘결핍으로서의 길’이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도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완전한 길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낡고 하찮은 것들이 걸어가는 길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한 또 다른 힘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낡고 하찮은 것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들만의 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놀라운 발견이며 위안이다. 그의 또 다른 시 「모래가 사는 법」이나, 「무좀은 피어서」,「작고 가벼운 티끌들이」,「우유주머니」,「가버린 백색 티코에게」,「이슬방울」,「산그늘 아래서」등도 제목에서 보듯이, 작고 하찮고 외진 곳에 있는 것들이 가는 길의 구체적인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읽히는 시들이다. 침묵하는 그의 입을 두고 세간에선 지금 설전이 한창이다 ‘의리이다’ ‘저항이다’ 일견 단순한 듯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의 속 현세를 주름잡는 고도의 셈수나 현란한 능변에 대해 일체 등을 돌리고 굳게 다물어버린 입 무뚝뚝한,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에선 한동안 거리낌없이 주고 받던 우리들의 음험한 거래나 등락을 거듭하는 논리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낯선 무게를 느낀다 가끔 짧은 미소를 동반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 부드럽게 치켜 올려지던 제스처도 요즘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난세에는 침묵이 제일이던가         ―「참새와 자물통」부분   인용 시는 말 많은 백성들을 참새로, 말없이 과묵한 사람을 자물통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는 일종의 알레고리 시로서, 난세에 침묵하는 자와 말이 많은 자들의 심리적 간극을 풍자적 어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자물통은 “현세를 주름잡는 고도의 셈수나 현란한 능변에 대해/ 일체 등을 돌리고 굳게 다물어버린 입”, 즉 ‘침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물이다. 이렇듯 시인은 말 많은 세상이 보여주는 허위적 삶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작고 하찮은 것들’과 더불어 ‘침묵’의 힘이야 말로 난세를 지탱해나가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묵도 뭉치면 힘이 되는가/ 말없는 다수가 뿜어내는 힘 사뭇 완고하다”(「작고 가벼운 티끌들이」)는 구절에서 보듯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과 침묵을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시인이 이렇듯 침묵을 상찬하는 데는 그가 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의 침묵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이 속 시원히 털어버릴 수 없었던 것들을 고백하고 싶어한다. 그가 「목감기」에서 “(누군들 할 말이 없겠는가)/(중략)/한번은 밝혀야 한다/이 기나긴 묵시의 변을/짧게 아주 짧게 그러나 힘 있게/한밤내 아프게 울었던 부자유와/늘 목구멍 저 안쪽에서 뱅뱅 돌던/그 많은 목울음에 대해/많이 비겁했음을/참회해야 할 수많은 자신의 몫들에 대해서도/실은 한 번도 당당하지 못했음을/ 한 번은 맑은 목소리로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침묵’의 이면에 숨어있는 자신의 속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이 시 「먼 길」에서 “말이 없어졌다는 것은/길을 내는 것이다”라는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 시집의 중심 이미지인 ‘길’을 내는 원동력이 ‘침묵’에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시인이 침묵함으로써 내는 길은 “네게로 향하는, 가슴이 저리는” 그리움과 애증의 길이다. 이 길은 시인이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침묵함으로써 얻어지는 길이고, “길이 될 수 없다는/ 세상의 모든 억측과 맞서”싸움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길이라는 점에서 ‘먼 길’일 수밖에 없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연민이나 말 없음(침묵)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그의 소시민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늘 가장자리로만 밀려다녀 중심이 어딘지도 모르는” (「찬물」) 조모(祖母)나, “버려진 어머니의 한 뼘 땅뙈기”(「변방가는 길」)에 마음 아파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작은 것이 주는 위안이나 희망은/ 또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가버린 백색 티코에게」)를 가슴 깊이 느끼고, “고달픈 생활의/지친 육신으로 인해/ 더 이상 뭉쳐지지 못하고/이리 저리 떠도는 것들에 대한 서글픔이나 외로움 같은 것”, 즉 “떠도는 가난한 이웃들의 참 맑은 슬픔”에 대하여 연민과 동류의식을 느낀다. 이렇듯 그는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큰 것 보다는 작은 것을, 시끄러운 것 보다는 침묵하는 것을, 밝은 곳 보다는 그늘진 곳을 더 선호한다. 이러한 시인의식은 본질적으로 소시민의식에 닿아있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반성 위에 도출된 존재론적 ‘불안’과도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길 위의 날들 불편한 누군가의 길이 되다 삐걱삐걱 지친듯 돌아오는 실은, 제 몸 하나도 가눌 수 없는 목발의 삶은 불안하다 고단한 하루의 외출에서 돌아와 한갓진 어디에 몸 누이는 그 날이 어쩌면 끝일지도 모르는 목다리 혹은 협장脇杖의 삶은 서 있어도 불안한 것이다 한 때는 시퍼런 혈기 하나만으로도 온 산을 품을 수 있으리라던 푸르른 직립의 꿈이, 그동안 얼마나 거칠고 험한 길들을 거쳐왔는지 누워서도 쉽게 구부러지지 않는다         ―「길 위의 나날」부분   이 시에 의하면 시인의 삶은 “수많은 길 위의 날들”로 정의된다. 시인이 현재 길 위에 서있으면서도 또 다른 길에 관심을 갖고 또 다른 길로의 모색을 시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인 자신의 ‘불안’의식에 기인한다. 시의 내용에 비추어보면 여기서의 ‘불안’은 존재론적 결핍으로서의 불안이고, 홀로 있음에 대한 불안이고, 서 있음 자체에 대한 불안이다. 인용 시에서 길을 걸어가는 시인의 다리는 온전한 다리가 아닌, ‘목발’이다. 불편한 누군가의 다리가 되어주고 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시인의 의식은 타자에 대한 연민에 바탕을 둔 공동체의식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 본령을 캐 들어가 보면 홀로 있음에 대한 불안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그 속내를 살펴보면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역설적 행동기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인에 의하면 자신의 삶은 실은 제 몸 하나도 가눌 수 없는 목발의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서있는 것조차도 불안하다. 목발의 삶은 누군가의 무게를 쉴 새 없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단한 삶이다. 이렇듯 시인의 존재론적 결핍은 길의 결핍과 더불어,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결핍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저 벽에도 피가 있고 살이 있어 밤마다 신음소리를 낸다 울음을 참아내는 그 힘에 대해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으려는  빡빡한 삶에 대해 속수무책, 아무런 그늘도 되어주지 못한다 철저히 무너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그 막막함에 대하여 섣부른 동조도 할 수 없는 길 없는 길을 내는 너를 위해 외마디 작은 비명, 나의 몸은 아프다 천년을 썩지 않는 슬픔, 콘크리트 크고 깊은 단단함으로 차갑게 벼리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단壇을 쌓는 독한 싸움 분홍빛 상처, 나의 슬픔은 위험하다     ―「벽의 길」전문   앞의 시에서 보여준 시인의 불안의식은 급기야 생의 본원적인 슬픔에 가 닿게 되고, 이러한 슬픔은 결국 ‘독한 싸움’을 낳는다. 시인이 ‘벽의 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론적 부정의식에 기인한다. 이러한 부정의식은 “철저히 무너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막막함’과 동의어이다.  ‘벽’의 상징적 의미에서 도출되는 이러한 막막함은 ‘길 없는 길’ 찾기의 과정으로 귀결된다. ‘길 없는 길’찾기는 역설일 뿐 현실적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마디 작은 비명’소리를 내는 아픈 몸을 지닐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는 ‘분홍빛 상처’는 위험한 ‘슬픔’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이러한 슬픔은 그의 또 다른 시 「빙산의 울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시인은 「빙산의 울음」에서 “그 슬픈 울음이 낳는/ 사람 같은 여자 같은/또 하나의 새 같은 얼음덩이들/ 저들도 전생에는 분명/가슴에는 더운 피가 흐르는 생명들이었으리/아마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그리움의 덩어리들이었으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벽의 길」에서 시인이 “벽에도 피가 있고 살이 있”다고 보는 관점과 동일한 것으로, 인간 뿐 아니라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사물에도 생명이 있고 길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시인의 상상력은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사상이나 동양적 애니미즘과도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장병천의 세 번째 시집 『추억의 푸른 이끼』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길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 ‘길 위에서의 길 찾기’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시인이 자신이 걸어가는 길 위에서 탐색해 보는 수많은 사물들의 길은 시인의 길과 은유적 또는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먼 길’이 사랑에 대한 은유적 의미의 길이라면, ‘벽의 길’은 나의 몸을 아프게 하고 나를 슬프게 해주는, 내 주변적인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길이라는 점에서 환유적인 길이다. 이렇듯 시인의 주변적 사물들의 길들은 시인의 길과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주변적인 길들이 아파할 때 시인의 길도 아프다. 시인에게 있어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길들은 결국 시인의 길이고 시인의 길은 본질적으로 타자성을 아우르는 우주적인 길이다. 그런데 시인의 길은 ‘길’이 로고스적 차원에서 ‘말’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시 자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시인의 길 찾기는 시인의 시 쓰기과정의 은유인 셈이다.  =============================================================   박남수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 (1918 - 1994) 「새」전문    1975년부터 약 20년간 미국의 뉴저지에 거주했었기에 미주동포에게는 더욱 친밀감이 느껴지는 고 박남수 원로시인의 대표작이다. 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활자로 인쇄된 시보다도 대중가요로 만들어진 통기타 가수의 목소리로 먼저 기억해내기도 할 것이다.    이 시는 슬픈 결말을 갖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새는 총에 맞고, 포수는 자기가 노렸던 순수 대신에 매양 한 마리 상한 새만 보게 될 뿐이다.         행복이나 순수, 사랑과 같은 고귀한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겨냥하고 있다면 한 덩이 납과 같은 차가운 물질을 사용해서는 어림도 없다. 노 시인이 피에 젖은 새를 손에 들고 이래도 모르겠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1606    詩에는 정착역이란 없다... 댓글:  조회:3970  추천:0  2016-10-01
좋은 시에 나타나는 상징(은유)의 예 / 신재한  우리는 시를 쓰면서 '메타포(Metaphors)'란 용어를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메타포'는 우리말에 딱 이거라고 표현할 만한 단어는 없으므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사전에는 '은유', '비유'라고 나오긴 하지만, 실제의 의미는 뉘앙스가 좀 다르거든요.  메타포는 단지 수사법의 일종일 뿐 아니라  대단히 많이 쓰이는 언어의 광범위한 현상입니다.  원래 구상적 사물을 가리키는 언어가 추상적, 비유적으로 사용되면 메타포가 됩니다.  따라서 전의적(轉義的)인 언어는 모두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은유보다는 보다 더 상징적이고 함축적인데,  그렇다고 '상징' '함축'하고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메타포'는 일반적으로 비유, 은유, 암유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이,  사물을 생각하거나 설명할 때에 "비슷한 것"을 빌려서,  또는 모방하여 전달하는 것이라 편의상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 속으로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 여자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쇼팽의 '녹턴'이 떠오른다든가,  아니면, 벚꽃이 휘날리는 게 떠오른다든가  상징을 구사하는 대표적 방법이 메타포의 일종인 은유인데  "A는 B와 같다"의 직유 형식이 아니라, '같이, 처럼, 같은, 듯'이 등의 연결어가 없이  본의(本意,원관념)와 유의(喩義,보조관념)를 결합시키는 비유법을 말합니다.  보통 은유는 'A는 B다', 'A의 B'와 같은 구조형태를 취합니다.  메타포(은유)는 직유와는 달리 설명은 완전히 생략하고  비유할 목적을 숨기면서,  표면에 직접 그 형상만을 꺼내어 독자와 상상력으로써  그 본질적인 想事性을 알게 해 나갑니다.  이러한 은유는 시인의 언어에 관한 인식과  대상에 대한 태도 및 표현에 대한 정신의 긴박감 등이 문제가 됩니다.  은유가 만일 안이하게 사용되면 이미지가 아니라 혼란만 야기 시키게 됩니다.  시를 확실한 은유의 결정체라고 했을 때 확실한 은유는  시작 기술에서 '낮설게 하기' 표현도 되고  결과적으로 시를 멋지게도 하지만, 어떤 이는 무조건 은유를 구사하여  시를 혼란에 빠지게도 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에서는 확실한 은유의 구사에 대하여 그러면서 나타나는  상징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들을 보면  원관념 따로 보조관념 따로 노는 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라는 용어에서  우리는 '결합'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결합'이라는 부분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는 것이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로 백날 설명을 해보았자 이해하기 어려우니  샘플 시를 놓고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샘플1시>  - 미루나무 -  詩 - 이 영숙  키 큰 그 사람 옆에 예쁘장한 여인처럼  나도 풀꽃 같이 기대고 싶은 날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사람마다 한 번씩 쉬어 가는 곳  낙엽이 떨어질 때까지 사랑했지요  가끔 빗방울이 떨어져 옷깃을 적셔도  얼굴에 튈까봐 조금도 움찔하지 않고  가을이 와도 내 눈에만 새파랗게 보이는 사람  강물이 술이라면 취하도록 마시고 싶은 날  창문이 심하게 덜커덩거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물빛에 파르스름하게 스며드는 가슴  담배연기 연거푸 품어대는 갈대꽃 허리 꺾이듯 기울고  그 사람 숨기고 있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나의 눈 먼 사랑이여, 고백도 하기 전에  낙엽 되어 사방에 뒹굴었습니다  그리 넓어 보이지도 않은 그의 가슴 속에  작은 대문 열어놓고 하늘을 잡으려는 듯  덩그런 빈집 지키는 아내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향 가는 길 내내,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요  일평생 꼼짝 못하고 한 자리만 있었던 사람  그 사람,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았는데  어머! 몰랐어요.  혼자가 아니라는 걸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산다는 건 어쩌면  누군가 의해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거  추위에 독하게 취해 있는 나는  그의 아내가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이 작품은 등장 인물이 3명(편의상 명이라 함)나옵니다.  미루나무, 까치집,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  이것을 원관념이라 하며 이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이  미루나무 --> 키 큰 남자  까치집 --> 키 큰 남자 아내  화자 --> 키 큰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  이렇게 구성됩니다.  이 시를 해석하면  미루나무 키 큰 그 남자가 혼자였는 줄 알았는데  낙엽 하나 둘 떨어지며  숨기고 있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덩그런 빈 집 지키는 그의 아내가 까치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항상 남편의 그늘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던 초라한 아내라도  남편의 품에 안긴 아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인 것이지요.  만약에 이 시에서 미루나무는 온데 간데 없고  보조관념인 키 큰 남자일행만 나오게 되었다면 이는 은유면에서  죽은 시에 해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샘플시가 잘 된 이유는 원관념의 미루나무의 의미가 끝까지 살아있고  보조관념인 키 큰 남자의 의미도 끝까지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 시는  요즘은 시에서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막연한 추상보다는 테마가 있는 이야기를 담아내려 하는데  그 추세를 발 빠르게 따라가고 있어 보여 더욱 좋은 시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의 샘플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 샘플2시>  조개는 입이 무겁네    詩 - 마경덕  조개는 나이를 등에 붙이고 다니네. 등딱지에 너울너울 물이랑이 앉아 한 겹, 두 겹, 주름이 되었네. 끊임없는 파도가 조개를 키웠네.  저 조개, 무릎이 닳도록 뻘밭을 기었네. 어딜 가나 진창이네. 평생 몸 안에 갇혀 짜디짠 눈물을 삼켰네. 조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네.  조개장수 아줌마. 쪼그려 앉아 조개를 까네. 날카로운 칼날이 앙다문 입을 여는 순간 찍, 조개가 마지막 눈물을 쏟네.  “지랄한다, 이놈아가 오줌빨도 쎄네.”  조개 까는 아줌마 쓱, 손등으로 얼굴을 닦네. 조개껍질 수북하네.  이 시에서는 원관념은 조개이고 보조관념은 화자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읽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원관념인 조개의 이미지를 잃지 않았지요.  그러면서도 보조관념인 화자의 인생을 적절하게 표현하였지요.  그런데 이 시는 앞서 샘플로 든 시보다 좋은 것이  전체적 원관념 보조관념이냐, 개별적 원관념 보조관념이냐 부분으로 보았을 때  개별적 원관념 보조관념이 들어있어  시에 있어 조금 더 품격이 있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개 등에 있는 주름 --> 나이 --> 화자의 연륜  조개껍질의 맨질거림 --> 무릎이 닳도록 --> 화자의 인고의 세월  조개장수 아줌마 --> 조물주(또는 주님, 절대자) --> 화자의 인생을 통제하는 그 무엇  결국 이 시를 해석하면 인간이 아무리 연륜이 있고 경험과 학식이 많아도  조물주 앞에서는 초라한 인간이 듯이  조개 까는 아줌마의 손끝에서는  한낮 남들과 똑같은 수북한 조개에 불과하다는 내용입니다.  샘플1시는 전체적 은유를 통한 서정을,  샘플2시는 전체적이면서도 개별적 은유를 통한 생의 철학을 담고 있는데  두 시 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끝까지 살아있다는 점이  두 시를 좋은 시로 만든 것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사용하는 방법은  시의 내용(전문)상에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고  제목은 원관념 내용은 보조관념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후자의 방식은 전자의 방식보다 조금 쉬운 측면이 있어  기교면에서는 떨어지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따로 노는 경우는  어떤 글(원문)을 놓고 개별 개별 비슷한 단어로 단순 대치하였을 경우  주로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여러분은 생각하시고 시작을 하신다면  좋은 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END]    ==============================================================   곽재구「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1954 -  ) 「사평역(沙平驛)에서」 전문 1980년대 젊은이들의 한 정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시다.  작품 속의 사평역이 지금은 없어진 남광주역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고 곽 시인의 고향에 있는 남평역의 이름을 고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두의 가슴에는 뚜렷이 느껴지는 시골 역의 대합실에서 잠시 피곤한 몸을 녹이는 나그네가 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한줌의 눈물을 불빛에 던지며 때론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1605    詩와 윤동주 <<서시>> 댓글:  조회:3942  추천:0  2016-10-01
  서시 육필원고 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이것은 시 쓰는 이들 모두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로렌스 페린의 저서『소리와 의미』(Laurence Perrine “Sound and Sense", 조재훈 역, 형설출판사, 1998)를 통해서 그 해답의 일단을 들어본다. 저자는 는 첫째, 그 의도를 충실하게 달성한, 곧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것이어야 하고, 둘째, 그 의도가 중요(훌륭)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오행속요 'There was a young lady of Niger', 에밀리 디킨슨의 시 'It sifts from leaden sieves',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That time of year'를 예로 들어 와 , 에 대해 설명한다. 01. 먼저 에 대해 말한다. 니제르의 아가씨가 있었네 호랑이를 타고 미소지었네; 그녀를 품에 안고 그들은 돌아왔네 호랑이 얼굴에 미소지으며  ―작자 미상의 오행 속요 ‘니제르의 아가씨’ "이들 각각의 시는 아마도 유능한 비평가에 의해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가'하는 평가의 측면에서 아주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이 되었을 것이다. 오행속요는 불필요한 단어나 잘못된 단어의 수반 없이, 율격과 압운에 의해 규정된 문장의 어순에 따라 그것의 작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오행속요 형식은 작가의 유머러스한 의도에 이상적으로 부합된다. 과소, 과장을 수반한 이야기의 전개방식, 숙녀의 미소와 자세의 산뜻한 변화는 경제적이고 유쾌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오행속요를 모든 면에서 엄격히 고찰해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그것을 거의 시(poetry)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의 경험을 전달하지 않으며, 그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간단한 일화를 유머러스하고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려 시도할 뿐이다." 02. 이번에는 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납으로 만든 체로 체질하고, 모든 나무를 가루낸다. 희고 매끄러운 양털로 길의 주름살을 가득 채운다. 그건 산과 평지의 평평한 얼굴을 조각한다.- 동에서 또 다시 동으로까지 상처입지 않은 이마를 지닌 채.  그것은 담벼락까지 닿아 있고 울타리와 울타리로 감싼다. 그것이 양털 속에 잠길 때까지; 그것은 천국의 면사포를 나누어준다.  그루터기와 볏가리 줄기에- 여름의 텅 빈 방에- 그러나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수확이 기록되지 않은 채, 이어진 수 에이커의 땅에.  그것은 파발꾼의 손목을 어지럽힌다. 마치 왕비의 발목처럼, 그리고 유령처럼 예술가들을 고요케 한다. 예전에 그들이 예술가였음을 부인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납으로 만든 체로 체질하고’ "반면에 에밀리 디킨슨의 시(poem)는 시(poetry)이며, 아주 좋은 시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에 강렬히 호소하고, 시의 의도면에서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곧 자연의 매력과 신비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외적인 자연의 모습과 적설량, 새롭게 떨어지는 눈의 정경을 전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수한 시를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비교할 때, 우리는 다시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하게 된다. 비록 디킨슨의 시가 느낌과 상상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경이감에 젖어들게 하고, 자연에 대한 묵상으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정서와 지성에는 깊게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인간 삶의 중심과 고통의 핵심부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그것은 일차적으로 작은 이야기의 주제인 기후에 관련되어 있다." 03. 마지막으로 에 대해 말한다. 그대 내게서 이런 때를 보리라. 한 때는 달콤한 새들이 노래했지만, 지금은 앙상한 저 합창단, 나뭇가지에 누렁잎 몇 개 매달려 있는 그런 때를. 그대 내게서 이런 노을을 보리라. 일몰의 저녁 하늘에 물든 노을을, 죽음 속에 모든 걸 감출 죽음의 검은 밤이 언젠가는 빼앗아 갈 그런 노을을. 그대 내게서 이런 꺼지다 만 불씨를 보리라. 태워버린 젊음을 주검삼아 누워있는 그런 불씨를, 생명의 젖줄기 다하는 날 임종의 자리에서 꺼져갈 그런 불씨를. 그대 이런 걸 깨달을 때, 사랑 더 강해져 버리고 떠날 모든 것을 힘껏 사랑하리라. ―세익스피어의 ‘일년 중 그때’ "한편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사랑과 죽음에 접근하며 늙어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비극에 관련되어 있다. 이들 세 작품 중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나 오행속요의 말, 그 이상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보다 풍부한 경험을 전달하면서 보다 중요한 의도를 성공적으로 성취한다.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그것으로부터 보다 심오한 기쁨을 얻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즐거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풍부한 자양분을 섭취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시는 감각, 상상, 정서, 지성 등 인간의 전체적인 반응에 관여한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제한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시는 단지 독자의 기쁨만을 추구하지 않고, 그에게 순수한 기쁨과 함께 신선한 통찰력, 다시 새롭게 탄생한 통찰력, 중요한 통찰력을 지니게 하면서 인간 경험의 본질로 이끌어간다. 위대한 시는 독자로 하여금 삶과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서 보다 폭넓고 심오한 이 해를 하게 만든다. 물론 그러한 통찰의 문학적 성격이 항상 단순히 '교훈'이나 '도덕'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앎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비극의, 고통의 복잡성을 통렬히 느끼는 앎(felt knowledge)이고, 인간 경험을 특징짓는 흥분과 기쁨에 대한 새로운 앎(new knowledge)이다." 04.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위대한 시인가? 그것은 적어도 위대한 소네트이다. 좋음처럼 위대함도 상대적이다. 만약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어떤 소네트와 그의 가장 훌륭한 극작품들―'맥베드', '오델로', '햄릿'―을 비교해 본다면,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비극들에서 착수되고 성취된 바는 하나의 소네트에서 착수되고 성취될 수 있는 것보다 엄청나게 크고, 더 어렵고 보다 복잡하다. 사실, 문학의 위대성을 전적으로 규모와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농구나 축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도, 우수하면서 큰 사람이 우수하고 작은 사람보다 낫다. 시의 위대성은 우리에게 전달하는 경험의 범위와 깊이, 그 경험의 강렬성과 비례한다. 곧 그것은 삶의 총체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14행의 소네트로서 결코 압축될 수 없는 인생의 다양성과 삶의 깊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 희곡들은 생의 거대한 복잡성을 체계화시키고 경험을 통합으로 이끈다. 결국 우리는 문학적 판단을 위한 손쉬운 비교의 척도나 눈대중의 척도를 제공할 수 없다. 기계적인 테스트도 없다. 최종적인 척도의 막대는 단지 교양 있는 독자의 반응, 성숙도, 감식력과 분별력일 뿐이다. 그러한 감식력과 통찰력은 부분적으론 선천적인 재능이고, 일부는 성숙과 경험의 소산이며, 또 일부는 의식적인 연구나 훈련 혹은 지적인 노력의 대가로 얻은 성취이다. 그것들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성취될 수는 없다. 또한 결코 완벽하게 성취될 수도 없다. 노력은 길고 고된 하나의 요건이다. 그러나 성공은 비록 상대적 성공이라 할지라도 삶의 풍요와 삶의 조망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다." 그리고 이 책을 펼치면 다음 글을 맨 처음 만나게 된다.  글쓰는 일이 진정 쉽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기술, 마치 춤을 배운 사람이 아주 쉽게 몸을 움직이듯이. 거친 음이 거슬리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소리는 의미에 대한 반향으로 울려야 하느니. ―포프의 '소리와 의미'(439쪽) 중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1917-1945) 「서시」전문 몇 년 전 한국의 동서문학관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과 시로 윤동주 시인과 그의 '서시'가 뽑혔다고 한다. 물론 그가 일제치하에서 사상범으로 복역 하다 해방을 앞두고 사망할 정도로 후손에 부끄러움 없는 면모를 보였던 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이 시를 가장 좋아한다는 얘기는 부끄러움 없이는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최소한의 양심을 아직도 우리 한국인들이 갖고 있다는 얘기처럼 나에게는 들린다. 그래서 새해 들어 서시를 새로 읽으며 조국의 미래에 희망을 갖는다.  
1604    詩는 리별의 노래 댓글:  조회:3637  추천:0  2016-10-01
  어렸을 때, 할머니는 침침한 눈을 씻어내며 “아가, 저 속에 있는 토끼 보이쟈? 저기 저 방아찧고 있는 놈 보이쟈?” 하고 물으셨다. 할머니께서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달 속에는 희미하게나마 토끼 한 마리가 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맘에도 왜 토끼가 저기서 방아를 찧고 있는 지, 달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궁금했다. 더구나 토끼가 갔다면 나도 갈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토끼 잡으러 가자’고 한밤내 할머니를 졸라댔다. 할머닌 이가 빠져 주름진 입을 오몰오몰 하시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 하시고, 다음날엔 낮에는 달이 안 보이니 이따 저녁에 가자 하신다. 저녁이 되면 너무 늦었으니 다음날에 일찍 나서자 하시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토끼잡이는 어느 순간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렸고, 그후 달 속에 산다는 토끼 이야기는 그리움처럼 내 기억에 남아있다. 같은 이야기를 요즘 아이들에게 해주면 대번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정말이라고 끝까지 우기려고 들면 인터넷을 검색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사람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는지, 달에는 토끼는커녕 어떤 생물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조목조목 가르쳐준다.  이에 질세라 부처의 ‘본생담’을 검색해 달로 올라간 토끼 이야기를 찾아주면 그건 옛날이야기라며 믿으려들지 않는다. 사설이 길어진 이유는 우리의 과거와 오늘의 과거를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가 아름다웠다느니, 정서적으로 풍요로웠다느니 하는 입발린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구지일수일지俱狙一竪一指에 구지화상이 스승의 흉내를 내기 좋아하는 어린 동자의 손가락을 칼로 잘랐다는 일화 즉,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고 있느냐.’ 라는 말이 조경옥의 「모자란 달이 만월을 꿈꾼다」를 통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팔월 열사흘 밤 덜 여문 달빛 아래서 만월을 꿈꾼다. 제각각 작은 섬으로 떠돌다 길다랗게 달빛 길이 열리면 이끌리듯 달빛 아래 모여든다. 주춤거리던 산들도 허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가만가만 내려선다.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밤 달빛 받아 안으니 시원의 노래가 터져나온다 노래를 더한 달빛 중천을 지난다 얼추 보름달이다. 때때로 서로에게서 떠나 달빛 아래서 만나야겠다 열사흘 달 같은 우리, 조금 모자란 곳에 서로를 채워 우리의 만월을 뜨게 해야지. 모자란 달이 만월을 만든다. ―조경옥 『모자란 달이 만월을 꿈꾼다』 전문 같은 달을 보고서도 어떤 이는 ‘달’만 쳐다보고 어떤 이는 ‘달 속의 그 무엇’을 찾아낸다. 그 무엇이 시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일까. 아니다. 눈이란 보이는 것만 인식認識하기 때문에 그 너머의 세계는 눈과 마음으로 인지認知해야 한다. 다 같은 눈이라 하더라도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다가옴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하는 것과 ‘모자란 달이 만월을 만든다’는 것은 대상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느낌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시인이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이유기도 하며 토씨 하나 때문에 밤을 지새는 원인이기도 하다. 조경옥에게 있어 달빛은 “제각각 작은 섬으로 떠돌다”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린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다가 시원始原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때때로/ 서로에게서 떠나” 있어야 하는 삶의 지혜마저 얻게 된다. 여기서 조경옥이 말하는 “열린 길”이란 “조금 모자란 곳에 서로를 채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달의 속성처럼 채우고 비워내는 과정 즉, 제각각 작은 섬으로 떠돌다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조경옥이 ‘달’을 보고 인지하는 ‘그 무엇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바라봄의 시선을 통해 조경옥이 지향하고 있는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보름달’, ‘달빛’, ‘열린 길’로 제시되는 시어들은 둥근 세계를 꿈꾸며 ‘덜 여문’, ‘제각각 작은 섬’, ‘모자란’ 등과 같은 시어들을 한데 아우른다. 이는 둥근 것(긍정)이 모난 것(부정)을 끌어안음으로써 나와 너, 나와 대상을 하나로 만들고 화합된 세계를 창출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화합하려는 과정 속에서 상처를 받는다.  불 곁에 가지 않아도 화상으로 뒤척이는 밤이 있다 설익은 말․말․말 깍두기로 썰어진 말꼬리가 한밤중 불티로 살아나 가슴에 지지직 화인을 찍는다 얼음주머니 얹고 연고로 달래도 세포마다 일어서는 얼얼한 이 아픔 맞불이라도 질러야 할까보다 산불이라도 내야 할까보다 ―한영숙 『화상』 전문 신체에 가해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아 아픔을 잊는다. 하지만 말로 받은 상처는 가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가 어느 순간 불쑥 치받쳐 오르기도 하고, 심하면 곪아서 덧나기도 한다. 한영숙이 “설익은 말” 때문에 받은 상처는 “한밤중 불티로 살아나” “세포마다 일어서는 얼얼한” 아픔을 준다. 시에 있어 시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듯 인간관계 역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말 한 마디가 깊은 상처를 내듯, 시어 하나가 그 작품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시어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씌어져 시의 이미지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작품의 완성도를 운운하게 된다. 굳이 시에 관한 이론이나 창작기법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시를 찾아낼 수 있다. 좋은 시란 그 어떤 훌륭한 이론보다 마음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순전히 읽어내는 자의 몫이다.  그 몫을 ‘달’에서 찾든 구지화상의 ‘손가락’에서 찾든 그것은 읽는 자의 시선(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에 있어 한영숙이 말하는 것처럼 “맞불이라도 질러”서 그 아픔이 치유될 수 있다면, “산불이라도 내”서 활활 타오르는 시의 화상火象을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간절함이기도 할 터이다. ==================================================================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1950 - )「이별노래」전문 떠나지 말아달라는 게 아니다. 단지 조금만 더 늦게 떠나달라고 한다. 그러면 참으로 멋있는 이별장면이 연출될 참이다. 떠나는 그대의 배경으로 노을이 깔리고 별이 부르는 노래가 주제가로 연주되는 기막힌 영화의 한 장면이 되겠다. 그래서 조금만 더 그대가 늦게 떠나준다면 떠난 뒤에도 사랑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다려주는 이별을 보았는가. 야속한 이별은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치곤 해서 늘 사랑하기에 늦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늦게 떠나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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