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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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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    詩人은 풀잎같은 존재이다... 댓글:  조회:4352  추천:0  2016-10-01
  ·시집 [선명한 금], [사람 사람아], [물의 섬]이 있음. * 우리가 말하는 현대란 거대한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이-마트E-mart와 같다. 이 거대한 시장 속에는 현대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여러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이들 상품은 일련의 과학적인 편리함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완전무장 되어 자본과의 영합을 꿈꾸고 있다.  시장에 나가 보라. 언제부턴가 재래시장을 대신하고 있는 '마트'는 재래시장의 단점을 보완하여 편리하고 깨끗한 서비스로 값싸고 청결하게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감각의 마트는 재래시장의 규모를 축소하고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나 존재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현대적인 마트를 이용하면서도 재래시장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시말해,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도 불편하고 지저분했던 과거의 좌판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상반된 현상은 현대인의 삶이 도식화되고 기계화되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정情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삶은 '화폐 가치'로 환산된다. 즉, 화폐의 크고 작음과 정확한 단위 계산에 의해 내 것과 네 것이 구분된다. 그러므로 마트에서는 '한 주먹 더'란 있을 수 없다.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화폐로 환산된 상품이기 때문에 "에이∼ 기분이다." 혹은 "밑지는데…!." 하는 식의 '얹어주기'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사람을 앞서가고 사람이 물질을 쫓아가는 현 시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재래시장 곧, '정적情的인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사람 사는 냄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래시장에서 한 주먹 더 얹어주는 나물 한 움큼, 사과 한 알 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성격을 띤다. 여기서 '그 무엇'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情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값어치이며 재래시장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 이러한 재래시장의 상징적인 의미는 {시와산문} 가을호에 실린 김성수의 [밥]과 차옥혜의 [밥],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에서 물질화 된 자본주의의 암울한 일상으로 그려진다.  노변 좌판에서 인심을 끌고 당기며 에누리와 덤을 계산해 내던 우리의 정감 깊던 너그런 맘씨 다 어디 보내고 기계의 작동이듯 회전축을 따라 진행하며 바코드에 허리 구부리는 자본주의 그 거대한 호랑이 앞에 골목의 애잔한 점방들 밥이 되었다. ――김성수의 [밥] 전문 김성수의 [밥]은 "자본주의"에 의해 잠식당해버린 "노변 좌판"의 "점방"들과 "기계의 작동이듯/ 회전축을 따라 진행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너그런 맘"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랑이같은 자본주의에 먹혀버린 "우리의 정감"은 거대한 자본주의 속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고, 어느 날 문득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잡게 된다. 현대의 편리성이 좌판의 사람냄새를 대신하고 잘 포장된 상품이 구수한 입담을 대신할 때 사람들은 옛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현대화라는 편리함 뒤에 숨겨진 삶의 근원적인 모습이다. 시끌벅적한 노변에서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고, 밀고 당기는 실랑이 속에 환한 웃음과 정겨움을 나눌 수 있는 장소. 그 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이들에겐 그 시절의 생동감(인간적)이 마냥 그리워진다. 김성수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골목의 애잔한 점방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밥"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밥이 상징하는 의미 즉, "우리의 정감=점방"을 기억해두자. 왜냐하면 다음에 보여질 작품에서 밥이 어떤 의미를 띄고 변화되는지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02년 2월 3일 40대 여자가 굶어죽었다 쌀 재고량 1200만 섬이 쌓여 있는 나라에서 대구 수성동 임대아파트에 두 달 전 열두 살 딸과 함께  돈 2만원을 가지고 이사와 간간이 빵을 사먹다 관리비 6만원을 못 내어 수돗물과 도시가스까지 끊겨 약숫물을 길어 먹다 그 여자가 굶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을 빼려고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땀을 흘리는 도시에서 그 여자가 죽어가면서 본 하늘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사람들은 무슨 모습이었을까 봄이 와도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하나 ――차옥혜의 [밥-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전문 차옥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와 소외를 통해 현대인의 개인주의적인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 것이 아닌 것에는 관심이 없는 현대인들은 타인의 사생활에 간섭하려들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생활 침해라는 그럴 듯한 이유로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것 같지만 실상 이러한 배려는 우리의 이웃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어린 딸과 여자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김성수는 그의 [밥]에서 "너그런 맘씨"를 떠올리게 되고, 차옥혜는 "봄이 와도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하나"를 보여주게 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시인이 [밥]을 통해 내보이는 삶의 태도이다. 즉, 밥이라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정情)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과연 무엇의 밥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시쓰기의 괴로움을 선사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시가 돈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시인의 밥은 시가 된다. 이때 시인에게 밥이 되는 시는 돈이라는 물질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시인은 돈을 쫓기보다는 우리의 각박해진 현실을 들춰내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소설처럼 리얼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참다운 삶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비껴 서 있는 듯한 관조 또한 삶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인은 그 시대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는 없지만 올바로 가는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의 밥이며 밥의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밥은 잡곡밥일 수도 있고 오곡밥일 수도 있으며 찰밥이나 보리밥일 수도 있다. 밥은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나 정성에 의해 그 맛과 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밥인 동시에 시인 것이다. 쓰레기통에 버려져있는 빵조각을 보았다 한 입 베어 문 둥근 살점이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고 먹히기를 단념한 채 불안한 어둠이 거기 고여있어 골목의 오후는 더욱 쓸쓸하다 삶도 먹다버린 빵처럼 그늘에 묻힐 때가 있다 오래전에 거부당한 기억이 비낀 햇살에 드러나듯 선명하게 다가올 때 느닷없이 가슴저린 상처로 하여 심장이 쿵쿵 뛸 때가 있다 먹다버린 빵조각처럼 살다버린 삶이 오늘도 석간지면을 장식했다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 전문 "먹다버린 빵조각처럼/ 살다버린 삶이" "오래전에 거부당한 기억"으로 인해 "비낀 햇살"로 드러날 때 김행숙의 밥은 먹다버린 빵조각이 된다. 그녀는 먹다버린 빵조각을 통해 삶을 관조할 줄 아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은 것의 고통이나 버려진 것들의 고통을 찾아낼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거나 사라져버리기 쉬운 사소한 것들은 스스로의 아픔을 토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작은 아픔에도 선명하게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석간지면을 장식"하는 "살다버린 삶"일지라도 말이다. * [밥]을 시제로 한 김성수와 차옥혜,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은 "먹힘(밥)"이라는 의미를 통과해 "버려짐(밥)"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의 시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먹히고 버려지지만 결국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김성수에게는 '밥(정)↔자본주의'로 그려지고 차옥혜에게는 '밥(소외)↔가랑잎'으로 그려지며, 김행숙에게는 '빵↔먹다버린 삶'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밥은 우리의 생명을 지속시켜주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밥의 에너지만으로는 세상을 살아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밥이 내포하는 여러 가지 코드를 통해 보다 가까운 삶의 진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것이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 내가 눈물 적실 때마다 그대는 별빛으로 걸어"(이동녘)올 것이며, '시선'(주봉구)을 통해 새로운 통로를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     기사공유 |  외로운 사랑 : 동아닷컴" style="text-decoration: none; color: rgb(69, 71, 60);" target="_blank"> 외로운 사랑  ―이성선(1941∼2001)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세상의 신비를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일반적으로 시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을 비추고/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함께 꿈꾸며/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사람일 테다.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보려는 욕망이니 정치니 착취니 인기니 유행이니, 이런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맑고 순수하게 사는 사람. 세상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그 신비를 캐고 아름다이 노래하는 사람. 통념이 대개 그렇듯 기본은 맞는 생각이지만, 이런 이미지가 고정관념이 되면 시인을 세상과 멀찌감치 떼어놓는 힘으로 작용하며, 저 스스로 이 ‘보호구역’에 드는 시인도 많다.  하지만 시인 이성선이 그런 ‘시인이면 족하여라/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에는 간단치 않은 울림이 있다.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시의 어조가 시종 쓰라리다. 풀밭에서 지새우는 별이 빛나는 밤. 풀처럼 낮게 앉아 ‘사랑의 뿌리가 영롱해지도록’ 풀잎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본다. 풀잎은 떨고 그 떨림, 시인에게로 별에게로 전해진다. 전 우주가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으로 떨며 꽃피어난다.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시공간! 시인은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단다. 자연, 그 소박한 세계와 통하는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에 대한 시인의 순정한 사랑이 ‘된다’ ‘된다’ ‘된다’라는, 자신을 다독이는 듯 쓸쓸한 종결어의 반복으로 미묘하게 변주된다. 욕심은 없지만 긍지는 높은 시인 이성선…. 화려하고 교묘하고 장엄하고, 현란하고 때로 요사스러운 시가 백화난만한 시절에 풀잎 같은 시인의 외로움과 당혹이 엿보인다.    
1602    詩는 늘 등뒤에서 울고지고... 댓글:  조회:4311  추천:0  2016-10-01
  감태준의 시는 외면적으로 단순한 구성원리를 갖고 있다. 대립되는 가치를 지니는 두 방향 사이에 그의 일상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구조는 초기시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시행을 통하여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와 도시, 믿음과 싸움의 두 배경 사이에서  ― [길] 부분 중기시인 [鐘路別曲]의 부제 '이상과 현실'이나 [떠돌이새 7]의 "하늘과 땅"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것은 감태준의 시세계를 내내 지배하는 양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로 변주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미루나무 숲에서 솔숲에서, 내 절로 푸르게 누워 하늘을 보던 때 상쾌한 새소리가 내 귀를 울리던 때 그땐 내 생각에도 맑은 냇물 소리가 들렸으나  어리석고 무기력한 머리 금이 간 내 목소리 ― [鐘路別曲] 부분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관형사형 전성어미 '―던'이 품고 있는 앞의 여섯 행은 숲과 푸른 하늘 그리고 맑은 냇물처럼 이상을 보여주는 반면, 시에서 누락된 '지금은'으로 시작될 현재시제의 나머지 두 행은 부정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단조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런 이항대립의 구조는 그러나 이미지의 변주와 시적 진술의 혼합을 통하여 그 위험을 잘 넘어선다. 감태준의 시의 매력은 거기에서 나온다. 마치 늘 같은 수평선의 바다가 색을 바꾸고 몸을 뒤틀어 한없는 변화의 그림을 그리듯이. 그의 존재의 근원은 바다다. 1947년 마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바다는 그에게 세계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감태준의 바다는 보통 바다 이미지가 갖게 마련인 바다―양수―자궁―모성―여자의 의미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시세계에 여성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인 '달'에 이어져 있는 초기시의 어머니가 그러하고,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 [思母曲] 전문 중기시의 시인의 "아내와 딸([떠돌이새 7])"들이 그러하며, 다시 "또 볼 부비신다 우리 어머니/돌아가신 지 이십년도 더 지났는데"([너무 작은 이슬 8])처럼 '우리 어머니'란 부제를 달고 있는 시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그 외에 蘭이나 영희 등의 인물로도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미 초기에서부터 그 바다는 결국 남성들의 바다이다. 60년대적 난해시의 영향이 조금은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그것은 뚜렷해진다. 기억의 해변에는  꼬리 긴 초침의 행렬, 거기 숨은 나를 캐는 형성의 설익은 동작에서도 꽃게만 가려내는 어린날의 착한 혼들, 잃어버린 이마여 어머니의 긴긴 모래밭에서 우리가 완전한 平和를 짓고 있을 때, 나의 신선한 눈동자를  달려온 햇살들은 증명하고, 해일은 늘 아득한 곳에서 돌아섰다 들여다보면  고요한 영혼의 안팎 목마가 살아 있는 과거 속으로 오색 나의 깃발은 뛰쳐가고 한줌의 순수, 반짝이는 유리구슬을 버리면서  그때 나는 사나이들의 고독을 보았다. ― [來歷] 부분 유년의 순수에 바닷가 모래밭의 흔적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남아 있다 해도 결국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사나이들의 우수를 지울 수 없는 바다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 시인이 아주 어릴 적에 그의 장형(長兄)이 그 바다에 빠져죽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니는 바다 가까이도 가지 마/큰형 봐라, 바다에 빠지면/못살아나는 기라"([우리 사는 세상]). 바다가 나를 데리고 가는 날이 자주 왔다, 물결 위에  물결치는 달빛바다 마산 앞바다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 소리, 형을 따라 시내구경을 한 날 밤에는  바다에 빠져 죽은 열 살짜리 큰형도 우리 둥지를 찾아왔다 ― [떠돌이새 5] 부분 그게 사실이라면 바다는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눈물이 얼룩진 자리다. 거기에 덧붙여 갯벌이 드넓어 여성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서해안과 달리, 시인의 바다는 갯벌의 이용도가 높지 않은 남해의 바다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바다는 남자들의 세계이다. 이 바다엔 봄도 먼 길을 돌아서 온다 나아갈 무슨 돛배도 없는 개펄에서 봄은 이미 죽었고, 죽은 땅에서  시퍼렇게 눈만 남은 사나이들은  천길 어둠을 퍼올리고 봄은 허덕이며 꿈꾼다 물결 잔잔한 바다 ― [썰물 다음] 부분 그 바다를 그러나 시인은 떠났다. 도시로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시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능동적인 선택, 다른 하나는 수동적 귀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를 따라간 서울에는 능동적 선택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을 '떠돌이새' 연작을 예고하는 [철새]와 같은 작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번……" 우리 사는 바닷가 둥지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고향을 바꿔보자" (중략) "조심해라 얘야" 앞에 가던 아버지가 발을 헛딛었다 발 헛딛은 자리 서울이었다 ― [철새] 부분 하지만 그러한 능동적 선택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접두사 '헛―'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때 서울은 "흘러온 서울"이다. 그래서 이제 삶의 터가 된 서울에 시인은 수동적으로 밀려왔다고 말한다. 눈보라치던 날 시간의 희고 검은 손들이 나를 밀어붙일 때, 잔물결처럼 내가 밀려온 도시 미움과 사랑의 商街에서 나는 늘 내 이름을 찾아다녔다 ― [첫번째 鄕愁] 부분 그를 밀어내 것은 "미친 바람"이다. "바람이 뛴다/문득 도시로 돌아서는 길목에/칼날 센 바람은 나부낀다"([길]). 이처럼 바람이 아리게 칼날처럼 불어대는 도시는 믿음의 장소가 아니라 싸움의 장소이다.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곳이다. "내가 어디 있습니까?"([내게 묻는 말])라는 의문은 그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에게 ""웃지 않는 서울"은 능동적 선택의 대상이기보다는, 차라리 수동적 귀착지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결론적으로 감태준의 시의 근원 또한 유년의 잃어버린 고향으로서의 바다다. 하지만 그의 시세계의 매력은 고향을 그리는 망향가(望鄕歌)로서의 낭만주의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다가 여성이미지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의 차원에서 감태준의 시적 개성을 이룬다. 대신에 그는 추억과 현실의 대립을 성찰한다. 잃어버린 고향 바다의 푸른 하늘을 그리면서도 눈을 땅에서 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다, 내 눈은 땅에서 떠나지 못했다 ― [떠돌이새 7] 부분 여기에서 그의 '이야기 시' 혹은 김현에 의해 '연극적 공간'이라 이름 붙여진 어떤 특성이 나온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 고향과 서울 등의 이항 대립을 손쉽게 해소하지 않고, 그것이 부딪치는 다양한 긴장의 공간을 포착하려는 정신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상과  현실, 너와 나 생각과 행동, 비행동 날아다니는 것은 무엇이며 굴러다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왜 이럴까, 갑자기  왜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상해졌어, 앞이 안 보여 정전이에요. 정전이라고는 생각 안 돼 새가 먼저 손을 내밀어 둥지를 더듬어 찾는다, 체온을 잃었군요 어서 불 있는 데를 찾아야겠어요. ― [鐘路別曲] 부분 시적 화자가 복수가 되어, 그들 사이의 대화가 나타나기도 하고, 이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형식은 우리 시사에서 특이한 것이다. 추억의 공간을 불러오려는 낭만적 서정시가 하나의 서사시로 바뀌는 질적 변용을 가능케 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특성은 단순히 장시(長詩)적 길이를 갖는 특정한 작품 속에서 만의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감태준의 시를 상호 조응하는 하나의 전체적 이야기로 읽으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첫시집 {몸 바뀐 사람들}의 결미를 장식하는 [귀향]의 마지막 몇 구절은 두 번째 시집 {마음이 불어가는 쪽}의 '떠돌이새' 연작을 예고한다.  끝없이 몰리고 풀리는 행렬 속으로, 너는 이제 기적소리에도 가볍게 떠밀리고, 떠밀리는 너의 등에서, 아니, 너의 물결 소리가 들리는 머리 위 공간에서, 나는 그때 새들의 고향을 얼핏 보았다. ― [귀향] 부분 이야기만의 조응이 아니라 이미지로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바다를 끼욱거리며 자유롭게 날던 새인 "바다를 나온 갈매기"는 도시로 밀려오자 "작은 새"가 된다. 첫시집에서의 바다/도시의 대립은 두 번째 시집에서는 작은 새/큰 짐승의 대립으로 변주된다. 철 믿고 손 내민 참나무 새순이 얼어 있다 작은 새 한 마리, 또 한 마리 참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틀다 말고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죽지에 부리를 묻은 채…… 어디서 큰 짐승이 울고 있다 ― [어디서 큰 짐승이 울고 있다] 전문 큰 짐승으로 의인화 된 도시는 역시 '철새'나 '떠돌이새'로 의인화된 시적 화자의 지위가 상당히 불안한 것임을 잘 암시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이 새는 언제나 떨어지거나 처박히고 쫓기며, 그래서 마음속으로 들어갈 대상을 고대하는 혼자인 새이다. 몸과 마음이 언 새들이 허공에서 돌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나는 더 볼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 [희망병원에서] 부분 그의 두 번째 시집은 이처럼 떨어지는 새가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려는 희망을 품기까지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 이후의, 그러니까 두 번째 시집 이후의 시들에서는 이전보다 비관적 정조가 누그러지고 담담하게 생을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물론 아직까지 세상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작은 존재이긴 하지만 말이다. '투신'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작품은 그것의 한 예다. 어디로 갈까? 두 분 질끈 감고  냇물에 뛰어든 이슬 한 방울 간밤에는 냇물 따라 달빛 희미한 서초동 계곡을 어지럽게 헤맸으니 저 흰 물보라 속 폭포를 단숨에 뛰어내려 바다로 갈까? 등에 진 하루를 잠시 부려놓는 즐거움 흐르는 즐거움 달아나는 즐거움 등뒤에서 푸른 풀잎이 부르고  아내와 아이들이 부르고 함께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던 이슬들이 부르지만 오늘은 폭포 밑 개포동 허공에  온몸을 던진다 ― [너무 작은 이슬 5] 전문 물론 이슬은 바다의 한 부분이다. "골짜기를 뛰어내려/도도히/바다로 달려가는/이슬 한 방울"([인식의 한때 2]전문). 바다에 흘러들면서 통시에 바다로부터 올라온다. 그러니 육지로 올라온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냇가가 되기도 하고, 잠시 허공 중에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슬은 이리저리 구른다. 그래서 도시적 일상의 속박을 깨는 자유를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 우선 구르기 위해서라도 현실과 밀착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풀잎이든 땅이든 이슬은 자신이 머물 곳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감태준의 상상력이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맑은 이상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받아들이는 일이 곧 성찰의 시작이다. 성찰은 반성을 낳고. 반성이 있는 한 또한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현실에의 몸담음과 현실에 대한 비판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그는 동시에 밀고 나왔다. 나는 이것을 현실적 낭만주의란 역설로 부르고 싶다. 이슬의 이미지는 이런 역설로 그가 가 닿은 성숙한 개성이다.  이상의 시적 여정을 통해 감태준은 우리 현대사의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새로운 유이민(流移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의 시대적 진실을 노래했다. 그것도 단순히 고발로서의 저항이나, 사실주의적 관찰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변화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린 존재들의 내적·외적 진실을 시의 공간으로 불러내 여러 가지 음으로 구조화하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거기에다 그의 시는 단순한 이야기만도, 그렇다고 현란한 이미지를 지향하지도 않으면서도, 싫증나지 않는 변화의 색채를 띤다. 연극적 공간이나 이야기 시와는 또 다른 차원의 예가 다음 시에서와 같은 음성학적 감각이다.  동산 솔숲에서는 잘 들린다 산의 소리 돌의 소리 별들의 소리, 한자리에 서서 밤늦도록 서서 어깨를 비벼주는 나무들의 수런거림, 수수수 바람들의 소리 ― [우리 사는 세상] 부분 이 첫 번째 연에서 자음 'ㅅ'은 한 행도 거르지 않으며 가볍고도 경쾌한 음가(音價)로 "바퀴 없이도 한순간에 가고 오는" 추억의 세계를 호출한다. 그런 감각은 쉼표의 사용이나, 예기치 않은 행갈이, 혹은 어구의 반복을 통하여 증폭된다. 그것이 이항대립의 단조로울 수도 있는 시적 구조에 융통성의 출구를 만든다. 사나이들의 세계인 바다의 변주가 거칠거나 메마르지 않는 것도 이러한 부드러움 때문이다. 이슬은 그러한 부드러운 세계의 상징이다. 그러나 부드럽다고 여성적인 것은 아니다. 이슬은 모성의 달보다는 부성(父性)의 해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감태준의 '마음 가는 곳'은 이슬의 부드러움이 사내들의 것임을 넌지시 암시한다.  산을 끌고 산밑 마을로 바쁘게 뛰어내려가는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지치면 도로 강남 네거리 검은 아스팔트 위로 둥둥 떠내려오지만 벌거숭이 내 마음 가는 곳 언제나 때묻지 않은 이슬들이 영롱히 아침해를 껴안고 반짝이는 곳. ― [너무 작은 이슬 3] 전문 그렇게 해서 이슬이 된 사내 혹은 남성적 이슬은 구르는 힘으로 "바람의 심장"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을 껴안으며 굴러가는 미적 반항인 것이다. 떠돌이새의 굴러다님이 수동적인 떠밀림이라면, 이제 이슬의 구름은 능동적인 껴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계속 굴러가며 메마른 도시적 일상의 비판이라는 미학적 실천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간'이란 주제thema를 살피면 알 수 있다.  시간은 초기시부터 계속해서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주제였다.  나의 등뒤에서 두려운 이빨을 번득이며 시시각각 죽은 뇌를 씹고 오는 초침, ― [길] 부분 생각하면, 시간은 늘 얼굴을 가린 채 내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 [사람의 집] 부분 내가 만일  바람을 한 손에 쥔다면, 달리는 차들의 꽁무니에 매달려 지나가는 시간을 붙들어 세운다면, 한 손에  큰 숲을 들고 와 푸른 천지를 만든다면, 내가 만일 내가 만일  미친 바람의 덜미를 붙들어 하수구에 쓸어넣어 버린다면…… ― [鐘路別曲] 부분 그러나 나는  언제나 늦는다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하고 공중 높이 떠오르지만, 그건 언제나 몽상이고 거꾸로 처박히는 내 곁을 시간은 어김없이 지나간다 빌어먹을, 행복하게 사시우? ― [鐘路別曲] 부분 시인에게 시간은 미친 바람과 등가(等價)이며, 불길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어둠처럼 비관적인 운명이었다. 이러한 시간은 19세기 낭만주의 혹은 상징주의의 비관적 세계관의 반영인데, 그것의 단적인 예를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악의 꽃}에 실린 열 번째 시 [원수(怨讐)]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오 괴로워라! 오 괴로워라! 시간은 생을 먹어치우고, 우리의 심장을 갉는 그 정체불명의 원수는  우리가 흘리는 피로 자라나 강건해지는구나! ― [원수] 부분 그것은 모든 현대적 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감태준의 시간은 이러한 보들레르적 시간의 연장선에 있다. 60년대 서양의 난해시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없었던 시인은 그러나 차츰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한다. 초기시에 나타나는 시간의 생경한 이미지가 점차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시적 진술에 이르면 영향의 흔적은 지워지고 이미 시간은 시인 자신의 것이 되어 있다. 오늘 저녁에는 기차를 타고  기차 가는 데까지 한번 가볼까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 빌딩숲길을 함참 구르다 보면 어느새 인간시계가 되어  어제하고 똑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을 복도를 지나 다니는 발자국 소리 엘리베이터 문 여닫히는 소리 뜸해지고 째깍째깍, 초침 뛰어가는 소리 마침내 심장을 울리기 시작하는 아침 8시 30분에 커피 한 잔 정오에 백반 일인분 오후 여섯시에 석간신문, 그리고 일곱시에 거의 다 풀어진 눈에 태엽을 감으며 지하계단을 걸어올라가는 자 네온사인들이 불안하게 떨고 있는 강남대로를 지나 양재 네거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루한 얼굴을 하고 줄지어 선 가로등 그 밑에 맺혀 있는 메마른 눈물 하나 길을 잃고 싶어도 발길이 먼저 길을 찾아 걷고 있는 것을 오늘 저녁에는 시계바늘을 세워놓고 밤 끝까지 한번 가볼까 심장에 귀기울이면 여전히 초침 뛰어가는 소리 ― [너무 작은 이슬 4] 전문 초침은 여전히 제 속도로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나 시인은 이미 그 시간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그 자유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을 수락한 데서 오는 자유이다. 흐름과 함께 가면 그것은 더 이상 구속이 아니다. 거기에서 시계바늘을 세워놓고 끝까지 한번 가볼까, 하는 대결 의지가 싹튼다. 물론 그것은 너무 작은 시작이지만, 의미 있는 시작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성숙은 '작은 새'의 예에서도 확인된다. '바다를 나온 갈매기'와 작은 새의 이미지 변화는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에서 또한 볼 수 있다. 여기서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는 땅 위에서는 그저 볼품없는 초라한 지위로 추락한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 삼아 쓰라린 심연의 생을 지치는 배를  뒤쫓는 알바트로스, 항해의 무심한 동반자인 거대한 바다새를 붙든다. 갑판 위에 내려놓자마자 이 창공의 왕자들은 얼마나 어색하고 창피스러운지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그들 곁에 내버려둔다. ― [알바트로스] 부분 그러나 바다―갈매기―작은 새―이슬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시적 변용은 감태준의 상상력 안에서 이미 보들레르적 이미지의 영향이 완전히 용해되어 그 자신의 것이 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특별히 예외적인 존재라 생각하는 우월감도 없어, 이슬은 흔한 것이라 말한다. 그 평범함의 인식이 당당히 우리 현실과 맞설 힘을 갖는 것이다. "내 발붙일 곳/풀향기 풋풋한 풀밭이 아니면 어때/바람에 날려/청계천 고가도로 위에 떨어진다 해도/마음에 간직한 풀잎/푸르고 푸르니/돌밭이면 어때 // 이슬 흔한 세상/온몸에 먼지 쓰고, 말죽거리/보도블록 위에 혼자 서 있어도/누구 한 사람 발걸음 멈추지 않던 것을//이제 눈감지 않고/가서 부딪쳐보리라"([너무 작은 이슬 6]). 이슬은 눈감지 않는다. 세상 속으로 굴러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이슬이 들어가는 곳은 그러나 숲이다. 그것은 도시를 벗어난 도피와 은둔의 공간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의 숲이다. 이상과 현실이 융합된 공간인 것이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 아래 거대한 에너지가 있듯이 담담하고 밋밋해 보이기까지 하는 감태준의 세계에는 이런 힘이 숨겨져 있다. 어느 靑山에서 오셨습니까? 바다로 가다가 당신을 보고 그만 바다로 가는 길을 잊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서 계신 허리우드 극장 앞이  소나무 숲입니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을 이슬 한 방울 황홀하나 두려운 얼굴로 걸어갑니다 곧 저녁이 오고 어두워지겠지만 누가 뒤에서 등을 미는 것 같이  정신없이 걸어갑니다 ― [너무 작은 이슬 1] 전문 거기에는 육중한 나무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작은 이슬과 거목의 결합, 이것이 감태준의 상상세계의 힘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 이슬은 "한 마리 심약한 새의 방황과/시야에서 물살 짓는 사나이들의 우수"를 벗어 던진, 원목을 실어 나르던 강물과 바다, 그리고 유년의 원목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이제 그 나무와 물의, 소리와 냄새에 취해볼 차례다. 잃어버린 시간의 썰물을 타고 눈을 감으면, 유년의 주위에는 뗏목을 짜는 원목이 쿵쿵 원정처럼 건너온다. ― [길] 부분 *박철화(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수묵화 필 무렵  ―이순주(1957∼ ) 겨울 지나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의 붓질, 대지는 화선지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선이 굵고 힘찬  획이 그어졌다 바람이 운필의 속도를 조절하여 농담을 이룬 자리 쑥을 뜯던 당신 흰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때필법이능란하여비백(飛白)을만들어낸바람,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망울들을 매만졌다 툭툭 산벚나무의 꽃망울들이 터지곤 했다 당신 얼굴 주름살이 웃자 망울진 꽃망울들은 다투어 벙글었다 당신이 쑥대궁을 자를 때마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올랐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는 동안 정겨운 수묵화 한 폭 살아났다 이제 그만 내려가요 어머니, 대답 대신 당신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배가 불룩한 검정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가지런한 틀니 드러내며 내게 봄을 건네준 그 해 당신은 먼 길을 떠나시고 시시때때 꺼내보는 내 안에 소장된 수묵화 필 무렵 이 시가 실린 이순주 시집 ‘목련미용실’에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여럿이다. ‘기차가 미끄러져 간다 칸칸마다 아이들 코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냉장고 소리 어머니 해수 기침 소리를 싣고//돋보기안경 너머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애벌레처럼 밤 가운데 몸을 말고 앉아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한 땀 한 땀 박히는 일정한 걸음의 음보, 어둠을 밀어내며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한밤의 뻐꾸기 울음 두 번, 기차가 두 시를 지나가고 있다.’(시 ‘푸른 방’에서)  화자는 기억하는 것이다.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지키느라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던 젊은 어머니의 푸른 방, 푸른 밤을. 형제들 중 홀로 깨어, 그러나 기척 없이 누워서 어머니의 재봉틀 소리를 들을 때 느꼈던 안도감이며 걱정이며 어떤 서러움을.  세월이 흘러 그 어머니 연배가 된 화자가 얼굴에 주름살 가득하고 틀니를 한 노인이 된 어머니와 보낸 어느 봄날이 ‘정겨운 수묵화 한 폭’으로 그려져 있다. 말수가 적고, 드문드문 건네는 말도 나직하고 부드러우실 화자의 어머니. 삶이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으련만 기품을 잃지 않은 노인은 대개 ‘일하는 사람’이더라.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꾸려온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삶을 살아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은 인생을 담담히,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오르는’ 산기슭에서 모녀가 봄날을 나누는 풍경이 맑고 평화롭다.    
1601    詩속에는 시작과 시간이 흐른다... 댓글:  조회:3701  추천:0  2016-10-01
시간과 시작은 빨리도 지났네요. 별 생각없이 시작했는데 세월이 빠르네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겟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올렸습니다. 저 자신도 표는 안나지먄 글 올리면서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비록 돌아 서면서 잊었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확 오른 것은 아니지만 내공이 조금은 쌓였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반복된 세뇌 속에 자신도 모르게 실력이 느는게 아닐런지요? 지금도 시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기웃기웃  글쎄요......... 차라리 사랑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눈물에 씨앗이라고 답할수 있지만요. 보고 잊어버리고, 또 보고 잊고 순환 속에 즐기는 마음으로 읽어주십시요.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시길...... 지난 폭염 속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 선생님들 건강하고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     진도를 못 따라 잡으신 분 ^^*~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님들이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습니다. ㅎㅎㅎ 실은 저도 다 못읽어서요 ^^ 게시판 넘어가기 전에 한동안 밑에 있는 자료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같이 읽어 봅시다 여러분께 문학강좌가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     바람 ―신경림(1935년∼ )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서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시인 신경림’ 하면 시 ‘농무(農舞)’를 떠올리는 독자가 많을 테다. 특히 ‘민족문학권’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농무’를 비롯한, 기층 서민들의 한과 애환을 ‘우리끼리 퍼질러 앉으면 삶은 편하고/더러는 훈훈하기도 해서’(시 ‘진도 아리랑’에서)의 정조로 꽹꽹 울리는 농악 리듬이나 남도민요 가락에 담은 선생의 시편들은 ‘원한도 그리움이 되던가?’(시 ‘연어’에서), 그 삶을 지긋지긋하게 잘 아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고 모르는 이들에게도 가슴 시큰하거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바람은 안 가는 데 없겠지만 시인의 바람은 나지막하고 허름하고 흔한 곳, 이름 없는 곳으로 간다. 시인의 마음 가는 곳 따라, 돌아서, 건너서, 들러, 감겼다가, 기웃대고, 들여다보고, 지나서, 들어서서, 들추고, 간질이고, 날리고…. 종결 어미 없는 동사(動詞)들로 이어지는 바람의 행로에 재개발이 되려다 만 우리 동네같이 친근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도록 비어 있는 점포 유리문에는 지금도 ‘비디오’라는 글자가 적혀 있지. 윤기 없이 까칠한 거리를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달리는 바람. 그러나 봄바람이다.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는.’ 삶의 모든 습기 다 거둬가 먼지처럼 가벼이 말라가게 하는 바람, 언젠가부터 선생 시에서 종종 만나는 바람이다. 허무가, 따뜻한 허무가 깃든 바람…. 그러나 인생무상이거나 말거나 삶은 무상하지 않다고, 선생의 시는 그침 없이 거침없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우는 바람처럼 ‘팍팍하게 메마른’ 세상을 적신다.    
1600    詩는 피해자와 비피해자의 그림자 댓글:  조회:4046  추천:0  2016-10-01
[27강]이 빠졌습니다. 다시 보강합니다.       [27강] 이미지의 종류.2  강사/김영천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정신적 이미지를 계속하겠습니다.  김용호님의 를 읽어보시겠습니까?  천천히 무슨 이미지가 나올지  생각해가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디든지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路程(노정)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威儀(위의) 있는 송덕비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우리가 인생을 정처없는 나그네가 걸어가는 길로 흔히  비유하곤 하지요. 이 시도 인생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고단한 나그네 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시가 아니고도 유행가에서도 늘 만나는 이야기와 같아  서 좀 진부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인생의 모습을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나도 입술을 댄다"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막걸리 맛"이 미각적 이미지로  제시된 것이나, 역시 인생을 "소금보다 짜다"는 미각  적 이미지를 만들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박목월의 중에서 부분을 읽어 보실까요?  메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접대하는 것.  이 시에서는 '싱겁고 구수한' 메밀묵 맛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오히려 아름다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미각적 감각은  감각 자체로 끝나지 않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전  통적인 인간미로까지 확장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메밀묵이  새 사돈을 대접하는 상에까지 오르는 소중한 음식임을  환기시키면서 결국은 미각적 이미지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김명수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제사가 들던 날 밤은  차가운 동짓달 열엿새 밤이었다.  은함재를 넘어오는 싸늘한 밤바람에  문풍지가 울어대던 겨울날 밤이었다.  지방을 써 붙이고 향불을 피워도  아버지는 그 밤에도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몇 번이나 삽짝 밖을 기웃대도  멀리서 아득히 개만 짖었다.  제관도 없이 제사를 지낸 밤은  새벽도 좀체 오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좀 으스스 추운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차가운 동짓달 열엿새 밤'과 '싸늘한 밤바람'  '문풍지가 울어대던 겨울날 밤'이란 시행들이 연달아  나오며 우리의 촉각을 자극시켜, 마치 차디찬 겨울  바람에 살이 닿은 것 같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런 촉각적 이미지에 의해서 제관도 없이 제사를 지  내는 집안 분위기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추  운 겨울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관을 해야 할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고 새벽이 되어  가는 그 때의 어머니의 가슴 속을 아픔과 절망으로 휘잉  휘잉 불어가는 겨울 바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정현종님의 의 부분을 읽어보시지요.  젖은 안개의 혀와  街燈(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親和(친화)  이 시는 사물인 가등과 안개를 의인화 시켜서 시인 나름  의 느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안개 낀 밤 가등을 보면  안개는 빛을 빨아 없애려는 것 같고, 가등의 그 불빛은  안개를 빨아 없애 빛을 확산시키려는 모습처럼 느껴지는데  이를 두 사물의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  이고 있다는 다분히 촉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동순님의 를 한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버림을 받은 자식인가요. 어머니  오늘도 뙤약볕 내리쬐는  논바닥에 한 웅큼 물이 고인 곳을  그나마 물이라고 오르내리며  그게 마지막 헤엄인 줄은 몰랐지요  한많은 당신의 알보재기를, 어머니  왜 갈라진 논바닥에 뿌리셨어요  있는 듯 마는 듯 조금 물 고인 곳이  처음엔 우리들의 고향인 줄 알았답니다.  하기사 우리들 고향이란 별 것 있나요  하늘 아래 모든 늪이 내 집이요  끊임없이 세상은 균열되고  우리의 작은 늪이 말라붙네요  날마다 황토물 속을 오르내리며  부글대는 거품만 삼켰답니다  아, 숨이 가빠져요 어머니  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헐떡이는 아가미를 축이고 싶어요  여러분도 아마 숨이 막히는 꿈이라든지, 정말 목이 타는  꿈이나, 아니 실제의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어때요.  이 시를 읽으면서 마구 자기 목이 타오는 것 같지 않습  니까?  이렇듯 기관감각적 이미지란 심장의 고동이나 호흡, 맥박,  소화, 순환, 통증 등의 기본적 생명현상을 감각적으로 자극  하여 만드는 이미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부감각적 이미지  라고도 부르지요. 그러나 그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위의 시에서 '숨이 가빠져요', '헐떡이는' 등이 기관감각  적 이미지인데 그 외에도 '메슥거리다, 속이 울렁거리다,  숨이 차다, 속이 느글거린다, 가슴이 답답하다, 뱃속이  텅 비었다, 속이 거북하다, 숨이 막히다' 등이 있겠지요.  아마도 이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많은 것  들을 노트에 정리해보십시오.  위의 시는 기관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생존조차 힘든 올챙이  들의 척박한 삶의 환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용악의 의 한 부분을 읽어볼까요?  타지 않는 저녁 하늘을  가벼운 병처럼 스쳐 흐르는 시장기  어쩌면 몹시두 아름다워라  앞이건 뒤건 내 가차이 모올래 오시이소  눈 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는 '시장기'를 '모란'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  다. '가벼운 병'처럼 아파오는 시장기는 가난한 화자에게는  날이 저물면 언제나 찾아오는 일상의 체험입니다. 그 배고  픔을 잊으려 집 바깥에서 남몰래 겉돌던 보리 고개 시절,  시인의 눈에 뜨인 텃밭에 풍성스럽게 피어 있는 모란은  가난의 아픔을 견뎌낼 수 밖에 없는 화자의 정체성을 환기  시키는 존재이며, 배고팠던 고향의 이미지 속에 녹아들어  비극적 황홀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관적 이미지  는 기관적 이미지라고도 정의되기도 합니다.  다음은 나종영의 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소리내어 읽어 보세요  풀잎도 돌아눕는 저물녘  작은 새 한마리 이슬을 걷다가  날아가버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맨가슴 쥐며  쓰러진 하늘에  빛이 터지고 있다  훨훨 날아간 새와  울며 끌려간 사람들 발자국, 봄 들판에  오랜 세월 그리움 남아 있어  먼 산 넘어가는  누구 한 사람 뒷모습  부르는 울음이 붉게 타고 있다.  이 시에 대해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끝 행인 "부르는 울음이 붉게 타고 있다"는 공감각적  이미지에 해당한다. 공감각적 이미지는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감각의 전이(轉移)를 가져오기 때문에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이 서로 결합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울음'  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붉게 타고 있다"의 시각적  이미지로 전이 되어 청각과 시각이 결합한 공감각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감각의 결합뿐 아니라 감각과 관념  의 결합을 통해서도 공감각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에서 인용되었던 의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의 구절은 '맵고도 쓰다'는  미각과 '시간'이라는 관념을 결합시켜 만든 공감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이러한 공감각적 이미지는 단일한  이미지 보다도 더욱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대상  에 대한 선명하고도 참신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설명이 쉬우니 알아들으시겠지요?  너무 어려우시면, 오감에 의한 감각이미지 말고는 그냥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  예시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이번에는 조지훈의 의 부분을 읽겠습니다.  물에서 갓나온 여인이  옷 입기 전 한 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塔(탑)이여!  온 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이 시에서 중심적 소재는 탑입니다. 달빛 아래 서 있는  탑의 모습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물에서 갓나온 여인'  으로 바뀌면서, 종교적 심상인 성(聖)스러움과 관능적  심상인 성(性)스러움이 서로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있습니다.  달빛을 물의 이미지로 치환한 것은 시각의 촉각화이며,  '온 몸에 흐르는 윤기'를 '상긋한 풀냄새.로 옮기는 것도  시각적 이미지에서 후각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감각적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복합적 감각으로  시의 감각적 기능을 강화하면서 감각의 전이와 결합을  통해 시의 의미구조를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을 위의 시들로 알 수가 있습니다.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 이미지의 종류 중 정신적(심리적,  지각적)이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제 무엇인가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 것입니다.  이처럼 정신적 이미지는 시인이나 독자들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체험과 인상을 중요시합니다. 강의 초두에  이야기 했던 시의 씨앗이 마침내 성장 단계를 거쳐 이렇듯  여러 가지의 이미지 형태로 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는 이렇게 단순한 정신적 이미지로만 구성되진  않습니다. 이는 시가 감각적인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갖는 시적 체험이나 의미들은 더욱 다양하고 깊으며,  아주 풍부함으로 단순하고 직선적인 정신적 이미지만으로  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의 강의에선 시적 깊이와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비유적 이미지와 상징적 이미지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강행군하니 힘드시지요?  힘이 들지 않는 방법은 공부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이구요.  또한 잘 쓰던 못 쓰던 시를 쓰면서, 자기 시를 한 번  비교해보면서 공부하시는 것입니다.  =================================================       주사위 던지기 ―신해욱(1974∼) 주사위의 내부에는 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 이런 방에서 하녀로 일하며 정성스레 걸레질을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 동생의 그릇은 너무 아름다워서 물밖에 담을 수가 없고 나의 사념은 산성액에 녹아 기포가 되어 올라오고     모서리는 모서리는 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방수가 되기도 하지.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 진짜 복소수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야기를 잃은 사물들아, 그러니 근심을 접고 이리 와봐. 여기가 아주 좋아. 화자는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보는 중일 테다. 주사위는 여섯 면으로 이루어졌으니 모서리가 열두 개, 각각의 면에는 한 개에서 여섯 개까지 점이 찍혀 있다. 던져 올린 주사위가 떨어진 뒤 윗면에 보이는 숫자의 크기로 승패를 가르는 게 주사위놀이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 점칠 수 없고,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할 묘수도 없다. 그저 우연에 맡길 뿐이다. 주사위라는 작은 육면체에서 우연의 무변세계를 보며 화자는 ‘주사위의 내부에는/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감탄한다.     우리는 이미 던져진 주사위일까. 거기서 거기인 몇 개 안 되는 숫자로 운명이 결정되는데, ‘모서리는//모서리는//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복불복(福不福)으로 저마다 담겨진 운명의 그릇대로 살 수밖에 없을까. 곡절 많은 삶을 사는 기구한 사람들은 사람의 운명을 주사위놀이하듯 한 신에게 따지고 싶을 테다. 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주사위 한 번 던진 것으로 결판 짓다니. 삼세판으로 합시다!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진짜 복소수가 나올지’ 모른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아우른다. 허수라는 알지 못할 체계에 실수라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는 복소수! 신해욱은 관념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듯 갖고 노는 시인이다. 마지막 두 연의 어조를 보라. 얼마나 살가운지! ‘여기’는 주사위의 내부, 복소수의 세계며 신해욱의 시다.    
1599    詩는 "어떤 음계에서"의 암시투성이다... 댓글:  조회:4561  추천:0  2016-10-01
  [42강] 화자와 어조.3  강사/김영천  반갑습니다  오늘로서 42회에 걸친  시 창작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참여해 함께 공부해 주신 님들께  감사합니다  한 번 들어서 모두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 문학 이론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늘 복습하시기를 바랍니다.  4.화자와 청자의 존재 유형  시에 말을 하는 화자가 존재하듯 말을 듣는 청자가 존재하는 것  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개성론에서는 시인과 화자가 동일하기 때  문에 예외로 친다하더라도 몰개성론에서의 화자는 작품의 효과적  인 표현을 위해서 시인이 창조한 허구적 인물이었듯이 청자 역시  허구적인 장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우선 예문을 읽고 더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이 시는 최승자님의 입니다.  제목에서 벌써 드러나 있지만 '나'라는 화자가 '너'라는 알지  못할 청자에게 이야기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시 속에서 '너'라는 청자가 등장함으로써 화자의 고백적인  어조가 훨씬 효과적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창조한 허구적 인물인 화자가 궁극적으로 시인  자신인 것처럼, 청자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 시를 읽는 독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시 속의 화자와 청자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하면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S.채드먼의 도표를 보기로 하지요.  실제 시인→→실제 독자  여기에서 < > 안의 부분은 택스트(작품) 즉 시입니다.  즉 시의 궁극적인 화자와 청자인 시인과 독자는 작품 밖에  있습니다.  작품 안에 있는 함축적 시인과 함축적 청자란 것은 작품의 표면  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그래서 그 정체나 개성 파악이  어려운 숨어 있는 화자와 청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것을 이용하여 네가지로 분류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화자와 청자가 모두 표면에 드러나는 경우  설정식님의 을 읽겠습니다.  바람이 모든 꽃의 절개를 지키듯이  그리고 모든 열매를 주인의 집에 안어들이듯이  아름다운 내 피의 순환을 다스리는  너 태초의 약속이여  그믐일지언정 부디  내 품에 안길 사람은 잊지 말아다오  잎새라 가장귀라 불고 지나가도 종내사  열매에 잠드는 바람같이  바다를 쓸고 밀어 다스리는  너 그믐밤을 가로맡은 섭리여  그 사람마자 나를 버리더라도 부디  아름다운 내 피에 흘러들어와  함께 잠들기를 잊지 말어다오  이 시에서는 화자는 일인칭인 '나'이며 청자는 '너'로 의인화  된 달이다. 이처럼 화자와 청자 모두가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  을 드러내는 경우에는 화자의 태도와 말투를 곧바로 알 수 있고  청자 역시 화자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의 정체  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박목월님의 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屈辱(굴욕0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地上(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存在(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이 작품에서 가장이 일인칭 화자로 나타나 있고 '강아지'로  표현된 가족이 이인칭 청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자기 가족에게 말을 건내는 것이 이 작품의 형식입니다.  2)화자만 표면에 드러나는 경우  최동호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게들의 발자국  파도가 쓸고 간다.  바닷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직선은 원이 되고  바윗덩이는 모래가 된다.  푸른 바다가 밀려온다.  모래는 우주가 되고  나도 모래가 된다.  바닷가에서 수평선 바라보면  직선은 활이 되고  바윗덩이는 게가 된다.  푸른 바다가 밀려 온다.  모래를 먹고 사는 게는 우주가 되고  나도 게가 된다.  바닷가에서  모래를 먹고 사는 게와 더불어  비누거품을 가지고 놀다  수평선을 바라본다.  푸른 바다가 밀려간다.  바다가 눈물 한 방울이 된다.  작은 게들의 발자국  파도가 쓸고 간다.  이 시에서는 청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청자는 숨어  있고 화자만 나타나는 것은 청자보다 화자에게 무게 비중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서정시가 주관이 강한  장르라는 점에서 볼 때 일인칭 화자의 내면인 감정, 정서를  무엇보다도 잘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3)청자만 드러나는 경우  신동엽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중립)의 초례청 앞에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 시에선 화자의 정체가 누구인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화자의 말을 듣고 있는 청자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  다.  4)화자와 청자가 모두 드러나지 않는 경우  신경림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의 빛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도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 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컬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일인칭 화자를 현상적 화자라고 하고 이인칭 청자를 현상적  청자라 하는데 여기에선 현상적 화자도, 현상적 청자도 드러나  지 않습니다. 다만 서민의 생활과 감정이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  는 이 시는 화자도 청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메시지 형식이나 보고 형식의 서술이 됩니다.  김창완님의 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른 수수깡 사이로  콩잎 태우는 연기 사라지고  산그늘 늘어나 앞강 덮을 때  아이 부르는 젊은 엄마 목소리  들판 건너 하늘에서 별이 되도다  그 아이 자라 수수깡보다  목 하나는 더 솟아올라  부르는 노래 별이 되도다  잘 닦인 놋주발 같은 달이 떠서  기왓가루로 문질러 닦은 놋주발 같은  달이 떠서 슬픔의 끝 쪽으로 기울더니  노래는 가서 가서 돌아오지 않고  별만 살 속에 아프게 박혀  시멘트 벽 짓찧는 저 사내 이마에  돋아나는 아픔은 별이 되도다  눈물은 눈물 머금은 별이 되도다  아름다운 이름들은 별이되도다  이 시에도 현상적 화자와 현상적 청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화자와 청자가 모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시적  내용의 초점이 화자나 청자에 있지 않고 '화제'에 있게됩니다.  위의 시처럼 역시 화제 중심적, 메시지 중심적 성격을 띠웁니다.  마지막으로 어조의 중요성을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5.어조의 중요성  그 동안 공부한대로 시 작품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화자가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화자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니 말, 즉 목소리가 있게 마련  입니다.시 속에 나타나는 화자의 목소리나 말씨, 말투를 바로  '어조'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 어조를 통하여 화자의 태도나 심적 상태, 시의  분위기 등을 알게 되고 시인의 창작 의도 등도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어조는 결국 시의 내용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것은 사물을  말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표현된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조를 시인의 실제 육성으로 보건 화자의 창조된 목소리로 보건  시적 화자와 어조에 역점을 둔다는 것은 시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박정만 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나 이 세상에 있을 땐 한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짜피 한참이오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 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 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으 김 하나로 만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을 우리들 세상.  들뜸이 없이 차분하면서도 관조적인 어조이지요.  아주 강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며, 크고 우렁차지 않고  조용조용합니다. 시인이 이러한 어조를 선택한 것은 시적  내용이나 분위기, 청자에 대한 화자의 태도, 화자의 심리,  독자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어조가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시의 어조는 궁극적으로 시인의 개성을 반영합니다. 똑 같은  글도 서로 다른 사람이 읽으면 그 분위기가 다르듯이 같은 주제  나 같은 내용의 이야기도 화자가 지닌 어조에 따라 시의 전체  적인 이미지나 분위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영랑, 만해, 소월 같은 시인들에게선 여성적 목소리를, 육사,  청마 같은 시인들에겐 강한 남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는 이 시인들이 자신이 다루는 대상이나 세계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개성적인 표현을 위해 그런 자기 만의 목소리를  창조한 때문입니다.   ===========================================================     강천산에 갈라네  ―김용택(1948∼ ) 유월이 오면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 때동나무 하얀 꽃들이 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히면 환한 때동나무 아래 나는 들라네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가면 산딸나무 꽃도 있다네 아, 푸르른 잎사귀들이여 그 푸르른 잎사귀 위에 층층이 별처럼 얹혀 세상에 귀를 기울인 꽃잎들이여 강천산에 진달래꽃 때문에 봄이 옳더니 강천산에 산딸나무 산딸꽃 때문에 강천산 유월이 옳다네 바위 사이를 돌아 흰 자갈 위로 흐르는 물위에 하얀 꽃잎처럼 떠서 나도 이 세상에 귀를 열 수 있다면 눈을 뜰 수 있다면 이 세상 짐을 다 짊어지고 나 혼자라도 나는 강천산에 들라네 이 세상이 다 그르더라도 이 세상이 다 옳은 강천산 때동나무 꽃 아래 가만가만 들어서서 도랑물 건너 산딸나무 꽃을 볼라네 꽃잎이 가만가만 물위에 떨어져서 세상으로 제 얼굴을 찾아가는 강천산에 나는 들라네     김용택은 고향인 섬진강 강변마을에서 작은 초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살며 그 산천과 사람들을 순박하고 아름답고 싱싱한 시어로 길어냈다. 삶과 시가 어우러진, 이 행복한 시인에게도 그늘이 있었던가. 답답하기도 했던가. ‘유월이 오면/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라 한다. ‘하얀 꽃들이/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힌 때동나무 아래서 건너다보이는 산딸나무도 하얗게 꽃이 만발하고, 그 꽃잎들 하염없이 ‘바위 사이를 돌아/흰 자갈 위로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질 때란다. 유월이 오면, ‘아, 푸르른 잎사귀들이며/그 푸르른 잎사귀 위에/층층이 별처럼 얹혀’ 하얗게 마음을 밝히는 때동나무 꽃이여, 산딸나무 꽃이여! 아래에 흰 자갈 구르고 위로 흰 꽃잎 흘러가는, 맑은 개울이여! 하얗게, 하얗게 부서지는 유월이여! 세상의 그름에 마음 다친 이들에게 시인은 함께 가잔다. 옳고 옳은 유월 강천산, 맑고 깨끗한 거기서 귀를 씻고 눈을 씻잔다. ‘옳다’는 건 저절로 우러나는 호감이며 사랑일 테다. ‘그름’은 무겁고 칙칙한 감정,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유월이 오면, 어디라도 산딸나무 꽃 핀 개울에 가서 꽃잎처럼 마음을 띄우고 흘러가보고 싶다. 그러면 ‘가만가만’, 제 마음이 돌아올까….  
1598    80년대이래 중국 詩歌 관련하여 댓글:  조회:3795  추천:0  2016-10-01
 /인터넷  건물 200층 높이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 중국 윈난(雲南)성과 구이저우(貴州)성 경계에 있는 베이판장대교(北盤江大橋) 건설작업 지난 10일 마무림. 이 대교는 수면 위로부터 565m 높이에 지어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 이전까지는 중국 후베이성에 있는 쓰두허(四渡河)대교가 560m 높이로 최고. 전체 교량 길이가 1341m에 달하는 베이판장대교. 교량은 난성 쉬안웨이(宣威)시와 구이저우성 류판수이(六盤水)시 사이 자동차 운행 시간이 기존 5시간에서 1시간으로 대폭 단축.     80年代以来的诗歌     语的专政之下/孤立的太久/终于在这一年揭竿而起/;(二)、“女性诗歌”;“女性诗歌”是出现在80年代中期的一个特殊的、亦;强烈的反叛意识和反传统道德的现代价值意识,是“女;翟永明(1955~)的组诗20首《女人》(198;……我的眼睛像;两个伤口痛苦地望着你;“活着为了活着,我自取灭亡,以对抗亘古已久的爱/;伊蕾(1951~)的作品表现出更加率直和猛烈的叛;     语的专政之下/孤立的太久/终于在这一年揭竿而起/占据不利的位置/往温柔敦厚的诗人脸上/撒一泡尿使分行排列的中国/陷入持久的混乱/这便是第三代诗人??”同时,也应该看到,“非非”的“前文化”写作主张未免带有乌托邦性质,任何意识与思维活动都无法真正超越既存的语言材料与工具,从他们的创作实践上,也可明显看出这种主张的空想性质,作者所做的,不过徒然在语言上做一些“挣脱”的实验而已。   (二)、 “女性诗歌”   “女性诗歌”是出现在80年代中期的一个特殊的、亦曾引起过广泛和持久争议的诗歌现象。不是泛指这个时期所有女性诗人的作品,而是特指以翟永明、伊蕾(孙桂贞)、唐亚平等为代表的一群青年女诗人的、以表现几千年民族女性道德压抑的痛苦和现代女性的解放呼声为主题的一批作品。受到弗吉妮亚·沃尔芙、西尔维亚·普拉斯等西方女性诗人的影响,她们已经明显地表现出了女性主义的思想与意识倾向。   强烈的反叛意识和反传统道德的现代价值意识,是“女性诗歌”最核心的主题。   翟永明(1955~ )的组诗20首《女人》(1984)是对几千年来女性生存价值及其道德传统的反诘与疑问,深刻的悲剧宿命感渗透其中:“一片呼救声,灵魂也能伸出手?/大海作为我的血液就能把我高举到落日脚下,有谁记得我?/但我所记得的,绝不仅仅是一生”(《独白》)。另一首《母亲》,更借与母亲的对话来表现女性的不幸,可谓令人惊心和颤栗:“听到这世界的声音,你让我生下来,你让我与不幸构成/这世界可怕的双胞胎。多年来,我记不得今夜的哭声/那使你受孕的光芒,来得多么遥远,多么可疑,站在生与死/之间,你的眼睛拥有黑暗而进入脚底的阴影何等沉重”   ……我的眼睛像   两个伤口痛苦地望着你   “活着为了活着,我自取灭亡,以对抗亘古已久的爱/一块石头被抛弃,直到像骨髓一样风干,这世界??”对母亲的本来的感恩之情与爱的情感,由于自己生为女性饱受痛苦而变成了对母亲的“恨”,这首诗巨大的张力使女性命运中注定的痛苦与矛盾淋漓毕现。   伊蕾(1951~ )的作品表现出更加率直和猛烈的叛逆精神。她的一系列作品如组诗14首《独身女人的卧室》(1985)等,将压抑于女性内心几千年的爱的饥渴、她们被传统道德束缚下的人性需求,作了痛快淋漓的表达。这些作品,刻意表现性爱情感的痛苦、焦虑、渴望与冲动,对世俗的道德准则恣意破毁和攻击。其中反复出现的“你不来与我同居”的句子,造成了惊世骇俗的效果曾引起了很大的震动、反响、甚至非议。对这些作品,显然不能作字面和个体行为的理解,而应该看作是几千年传统文化重压下女性全体的意识觉醒。伊蕾的作品充满了哀烈动人和焦灼激奋的情绪,如她的《绿树对暴风雨的迎接》中的诗句:“……千声万声的急骤的嘶鸣啊/纵然你是必给我震悚的蹄踏/我又怎能不仰首迎接你?!/迎接你,即使遍体绿叶碎为尘泥!/与其枯萎时默默地凋零/莫如青春时轰轰烈烈地给你。”在另一首《黄果树大瀑布》中,她用奔泻无阻、一往无前的瀑布形象表达了自己勇敢无忌的女性自主意识和对传统道德的挑战精神:“把我砸得粉碎吧/我灵魂不散/要去寻找那一片永恒的土壤”   强盗一样去占领,占领   哪怕像这瀑布   千年万年被钉在   悬   崖   上   除她们两人以外,唐亚平(1962~)也写过《黑色沙漠》(1985)等重要作品,在对“性意识的自觉”的揭示方面,唐亚平的作品是更为大胆和直接的,她的11首组诗《黑色沙漠》中充满了性的隐喻,并因此   招致了批评。但抛开这些表面的意象,向人们展示一种新的性爱价值观和女性的自我意识,则是其中心目的。当然,它的方式是激烈和破坏性的,“即使禁果已经熟透/不需要任何诱惑也会抢劫一空/??恶梦的神秘充满刺激/活着要痉挛一生”。   “女性诗歌”是当代中国社会发展和文化变革的必然产物。它所承载的女性主义意识不但持久地推动了女性诗歌的写作,而且还启示了90年代的女性主义小说思潮的发展。   七、海子的诗   80年代中后期,由新诗潮衍生出来的“第三代诗歌运动”曾经热闹一时。其最大的成果应该是它孕育了早夭的天才诗人——海子。   海子(1964~ 1989),本名查海生,生于安徽怀宁县,在农村长大,1979年15岁考入北京大学法律系,大学期间开始诗歌写作,毕业后分至北京中国政法大学哲学教研室工作,1989年3月26日在山海关附近卧轨自杀。1997年,上海三联书店出版了由西川编辑的《海子诗全编》。   海子“是中国70年文学史中一位全力冲击文学和生命极限的诗人”,是一个“在写作和生活之间没有任何距离”的诗人,他像一颗彗星一样燃烧自己,将诗歌看成是“突入”“原始力量中的一次性诗歌行动”。他在短短的几年间创作了200多首抒情诗与约10部长诗(诗剧)作品,还留下了一些诗论。海子将其中的7部长诗统称为《太阳》,海子的好友,已故诗人骆一禾将之称为《太阳·七部书》(1986——1988),包括《断头篇》、《土地篇》、《大扎撒(残稿)》、《你是父亲的好女儿(〈大草原〉三部曲之一)》、《弑》、《诗剧》、《弥赛亚》。另外海子还有作于1984至1985年间的另三部长诗《河流》、《传说》、《但是水、水》。   海子的诗歌世界是非常复杂的,他的诗歌观念是对古代史诗、近代抒情诗、浪漫主义诗歌和现代主义诗歌理念的综合。从思想上,他接近于一个存在主义者;从情感上,他接近于一个浪漫主义者;从精神上,他接近于一个“狂人”式的先知;从认知方式上,他又是一个充满神性体验色彩的理想主义者。在诗学观念上,他深受尼采、海德格尔等人的影响,相信“酒神体验”的力量,相信“大地”原始伟大的本质力量;在艺术观念上,他又特别认同凡高、荷尔德林那种疯狂的气质。   海子的抒情诗写得很美,充满了神启式的灵悟意味,笔下的事物放射着不同凡响的灵性之光。如他的《天鹅》:“夜里,我听见远处天鹅飞越桥梁的声音/我身体里的河水/呼应着她们//当她们飞越生日的泥土、黄昏的泥土/有一只天鹅受伤/其实只有美丽吹动的风才知道/她已受伤。她们在飞行”——   海子的诗中还充满着一种绝望的、执着地认同死亡的情感,但这种绝望并不显得颓废,而是显得非常壮美,这与他的内心气质和后来的命运是有关的,在《春天,十个海子》中,他写道:“春天,十个海子全部复活/在光明的景色/嘲笑这一个野蛮而悲伤的海子/你这么长久地沉睡究竟为了什么?//在春天,野蛮而悲伤的海子/就剩下这一个,最后一个/这一个黑夜的孩子,沉浸于冬天,倾心死亡/不能自拔,热爱着空虚而寒冷的乡村??”面对大地上自然的海子在春天到来时自动绽放出的生机,面对大自然的杰作,海子感到渺小、迷惘和缄默,并感到了死亡的降临。“倾心死亡”是海子对艺术和生命的一种终极式的哲学理解,是使他的作品焕发出神性与不朽力量的原因之一。1988年春天的一个夜晚,海子写下了只有三行的短诗《夜色》,以高度浓缩的语言概括了他的一生:   在夜色中   我有三次受难:流浪、爱情、生存   我有三种幸福:诗歌、王位、太阳   这首诗仿佛是镌刻在海子墓碑上的墓志铭,提醒人们理解这位天才诗人的痛苦和梦想。   海子诗歌的重心当然是他的长诗,这些作品表达了一位年轻的天才诗人对历史、宇宙、生命与人心的神性的、哲学与艺术的理解,是一笔仍待深入研究与开掘的宝贵财富。   第四节 90年代以来的诗歌探索   一、20世纪90年代的新语境与“后新诗潮”的民间倾向   “后新诗潮”是相对于“新诗潮”的一个概念,“新诗潮”基本上是指“朦胧诗”为代表的先锋诗歌运动,它到1986年“第三代”诗歌浮出地表之后,基本上就已告结束;而“后新诗潮”即是指以“第三代诗歌运动”为发端的另一阶段的先锋诗歌潮流。但由于人们往往习惯于单独地看待“第三代诗运动”,所以“后新诗潮”的概念就更倾向于指80年代末期、特别是90年代以来的先锋或新潮诗歌现象。   20世纪90年代是与80年代有很大差异的时期。一方面,80年代末社会文化的激变与震荡过于突然地结束了80年代的热闹,诗歌界一直高涨的社会激情与文化热忱突然冷却下来;另一方面,90年代市场经济的迅速发育,完全改变了计划经济时代诗人的生存环境与条件,改变了诗人的身份和心理角色,诗人具有精神和思想的优越权的特殊身份日渐模糊,他们日益陷入自身的生存困惑中,救世者的宏伟主体幻像开始瓦解崩塌。在此情形下,80年代新诗潮运动波澜壮阔的景象,以及诗歌关心社会历史、精神道义、文化变革的热情就不见了。代之出现的是诗人对自身生存处境的不无感伤与荒谬色彩的体察和言说,诗歌的调子变得低迷而软弱。   90年代新语境下,诗歌的发展向度出现了一个微妙的变化:转向“民间”。这一方向虽然自“第三代诗运动”时就已出现,但毕竟80年代的诗人们取道“民间”更多地是为了“曲线救国”,为了最终获取公开的“合法”身份,得到主流诗坛的接纳和承认。但在90年代,新诗潮可以说已经完全安于民间与“边缘”的角色与命运。这样一种心态使诗歌出现了重大的美学转向:一、就诗歌的功能来说,由原来作为推动社会、影响文化的策略性工具(在第三代那里实际上也还是如此),回到了作为个体精神劳动方式的角色,正是基于此,“创作”变成了“写作”,诗歌由此更接近于真实;二、诗歌的主体形象由朦胧诗中的“受难者”和文化英雄、由第三代中的语言“莽汉”和文化施暴者,变成了散落民间的精神游子和书斋与象牙塔中的沉思默想者,成了地地道道的不再是经过“化装”的平民;三、从修辞的角度看,除去特殊的个例(如伊沙)以外,朦胧诗式的单向度的唯美式与象征式风格的写作,第三代的群体性破坏式暴力式的写作与刻意的粗鄙化语言追求,被代之以个人化的朴素、黯淡、微型和中性的语言表达,辨析式的精确与自白式的茫然,使90年代的诗歌语言激情不再而软弱有加。因为写作者已的的确确变成了民间中人,而不再是某种权力的代言人。   “回到民间”的另一个显在的证据是出现了无以数计的民间诗歌资料和同人印刷品,没有人能准确地统计出这些民间诗歌刊物的数量,它们自生自灭,良莠混杂,生产着大量的诗歌文本。“好诗在民间”,这已不仅仅是对公开的和主流的诗歌刊物的批评,而是一个为所有诗歌中人公认的事实。   二、现象与概念   “新乡土诗”。 “新乡土诗”产生于文化与社会思潮相对沉寂的时期。1990至1992年最有影响的乡土诗歌作品有伊甸的《在桑葚的照耀下》、陈所巨的《为泥土的沉默与谷穗的芬芳》、华万里的《歌唱玉米》、曹宇翔的《家园》、白连春的《一个农民和他自己的庄稼》、佟石的《回归村庄》、丁庆友的《怀念那一片泥土》、林染的《在中原的土地上长大》等。“新乡土诗”具有强烈的感人魅力,它们用劳动来阐释生存的本质,用庄稼来暗喻人的价值,如游刃的《日出而作》:“劳动是一种习惯/它使我接近太阳崇高的部分”。曲直的《手把锄头》:“??手与锄头/组成了村庄/就像云和翅膀/构成了寥天??//祖先,你深谋远虑/良田不朽/我手把锄头/就能触到你热手的体温/大地上/一片壮丽的锄头/令我落泪”。劳动构成了生存的崇高悲壮的价值内涵。再如李麦的《麦子》写道:“??麦子啊!麦子/我应该和你躺在一片日光的刀下/我在对着你哭泣!”丁庆友的《望一片玉米眼里就有泪》中更是禁不住痛哭流涕:“望一片玉米就有泪/??望一片玉米/泪眼里/一棵是爹/一棵是娘”。庄稼的一生同劳动者的命运有着血肉的联系,通过歌颂庄稼,生存的苦难和崇高意义被揭示出来。   “边缘写作”。“边缘写作” 王家新提出,要求诗人自觉与现实、与主流社会保持距离,以甘于寂寞的、社会“边缘人”的、知识分子批判精神的立场介入写作,它不是要求诗人一定要迅速地回应或批评现实,但它强调诗人独立的意志与不苟同的思想,这实际上也是强调了写作的知识分子式的“职业道德”。这   一概念与此后得到广泛认同的“知识分子写作”实际上很有相近之处。   “知识分子写作”。这一概念的提出有不同的说法,西川、欧阳江河、王家新等人都曾经有过阐述。西川在《答鲍夏兰、鲁索四问》中说,他曾在80年代末最早提出知识分子写作的概念。欧阳江河在《89’后国内诗歌写作》一文中说,今天能够坚持下来的诗人,“几乎无一例外地成了知识分子诗人”。这一概念在现今已得到了诗歌界的广泛认同。   虽然其内涵尤为复杂,但概而言之:一是“专业性”,二是“人文性”,三是“独立性”。专业性是指诗歌越来越成为一门“高难度的技艺”和“关于痕迹的知识”,它是写作的长期专业训练与淘汰的结果,没有较大的智性含量和心血投入的写作是靠不住的;人文性是指它的人文知识者的批判精神,所传达的理想和道义的思想力量,它应具备较高历史理性与足够的现实启示力;独立性是指它所采用的话语方式是艺术的和能够经得起多种话语系统的覆盖与误读的,因而也是有独立的艺术品质和经得起时间淘洗和检验的。但是事实上在20世纪 90年代的语境中,知识分子写作这一概念的边界却常常是游移不定的。 “知识分子写作”的原则给许多写作者带来了一种沉醉的知识优越,以及沉溺于词语的游移与捕捉的快感中,它们因此把对现实与生存处境的言说的迟疑、繁复和含混当作了一种普遍的和合理的“职业”特征,并引入西方存在主义与后结构主义理论家关于语言与存在、能指与所指的复杂关系的玄妙论述,使之变成一种新的玄学。这种取向的负面作用也是明显的。   除此之外,“个人写作”、“民间写作”等也是有影响的说法,但和上述概念一样,它们大都是对20世纪90年代诗歌走向的一种描述、理解或阐释,而不是与80年代那样成为一种实践和运动。90年代后期的诗歌缺少“重大事件”,这表明诗歌正在持续地弥散和分化,“个体写作”、“个体诗学”成为诗人普遍的持守的信条。   1999年4月,中国当代文学研究会、北京作家协会、《诗探索》编辑部、《北京文学》编辑部等单位联合召开了“世纪之交:诗歌创作态势与理论建设研讨会”,这次会议上,出现了持“知识分子写作”和持“民间写作”两种立场的诗人的尖锐对立,以于坚、伊沙等为代表的持“民间写作”立场者(主要是一些“外省”诗人)对“知识分子写作”的立场进行了激烈批评,而王家新、唐晓渡等一些在京的诗人则为“知识分子写作”进行了激烈的辩护。这场论争是近年来诗歌写作两种主要流向的分化的显在化,会后又引起了持续未断的余波。尽管在这两个实际上并无根本矛盾的“词语”下的争论显得有几分人为“划界”的意味,尽管两种立场都有其长短和互补之处,但它表明,新诗潮内部俗与雅、解构与建构、活力与秩序、本土意识与西方资源、职责意识与自由意识、知识依据与现实背景等相关矛盾的因素之间,由于90年代文化语境的复杂特殊,还存在着很大的不平衡与内在的矛盾冲突。它表明,诗歌的分化已经深入到新诗潮自身的内部,这是新时期二十多年来诗歌发展演变的结果,也许从此诗歌界的论争不再是一些外部和表面的问题,一个新的起点已经出现。果真如此,这将是诗歌在新世纪的福音。   三、代表诗人——欧阳江河与西川   (一)欧阳江河   欧阳江河(1956~ )生于四川,青年时代曾下乡、参军,后转为自由写作,曾旅居欧美数年,现居北京。80年代前期曾是最早尝试文化诗歌的诗人之一,代表作是长诗《悬棺》(1983—1984)。之后有重要影响的作品有《汉英之间(1987)》、《玻璃工厂》(1987)、《快餐馆》(1989)、《傍晚穿过广场》(1990)等。   欧阳江河的诗最显著的特点是强烈的文化气质与时代意识,而且他善于对时代的重大思想或精神命题作深入的文化与哲学的思考,但这思考又是诗的、充满艺术灵感和精神震撼力的。比如《汉英之间》,他从语言的差异中间思索着传统与现代、历史与民族、人性与文化等复杂的关系,让人遐想不已:“我居住在汉字的块垒里/在这些和那些形象的顾盼之间??”“我看见一堆堆汉字在日语中变成尸首——/但在语言之外,中国和英美结盟/我读过这段历史,感到极为可疑/我不知道历史和我谁更荒谬”   一百多年了。汉英之间,究竟发生了什么?   为什么如此多的中国人移居英语,   努力成为黄种白人,而把汉语   看作离婚的前妻,看作破镜里的家园?究竟   发生了什么?我独自一人在汉语中幽居,   与众多纸人对话,空想着英语   并看着更多的中国人跻身其间,   从一个象形的人变成一个拼音的人   《玻璃工厂》中,欧阳江河甚至游刃有余地讨论了一个结构主义语言学的问题,“玻璃”这种透明而坚硬的、接近于水、火焰、石头的、接近于纯粹和空无的物质,给了作者异常丰富的哲学启示:存在(玻璃的实体)、名称(玻璃这个词语)、意义(玻璃作为精神、文化、隐喻和象征)三者之间充满了复杂微妙的转化、替代和包容的关系,玻璃的诞生犹似语言的出现和诗歌的诞生一样,“??这就是我看到的玻璃——/依旧是石头,但已不再坚固/依旧是火焰,但已不复温暖/依旧是水,但既不柔软也不流逝/它是一些伤口但从不流血/它是一种声音但从不经过寂静/从失去到失去,这就是玻璃/语言和时间透明/付出高代价”   ……最美丽的也最容易破碎。   世间一切崇高的事物,以及   事物的眼泪。   智性和玄学的趣味可见是欧阳江河长期追求的诗歌要素。但在90年代,他的作品似乎更加强了现实的及物性,更加注重对时代的思考,《快餐馆》、《咖啡馆》、《时装店》、《计划时代的爱情》、《傍晚穿过广场》等作品都体现了这一向度。其中《傍晚穿过广场》应该是一首最见历史透视力与现实体察力的作品,它通过处理一个词语,成功地完成了一个诗人对一个业已消失时代的透视,和对另一个完全不同的时代的审视。   欧阳江河的作品语感优雅、舒展自如,语言稠密而又澄澈,近乎与一种思想的自然绵延,充满思辩与玄想的色彩。   (二)西川   西川(1963~ ),祖籍山东临沂,生于江苏徐州,1985年毕业于北京大学英语系,现任教于中央美术学院。1988年曾参与创办很有影响的民间诗歌刊物《倾向》。主要长诗作品有《雨季》(1987)、《挽歌》(1987)、《远游》(1991)、《致敬》(1994)、《近景和远景》(1994)等。   西川的诗追求精确、简练、飘逸和幽玄之美,最有影响的是短诗。最著名的篇章如《在哈尔盖仰望星空》、《夕光中的蝙蝠》、《十二只天鹅》等,他在这些诗中很好地控制了“意义”的限度,他不排斥思想,但又尽量消弭掉思想的硬度和形状,让它无迹可寻。比如《十二只天鹅》可以说是对现代的人性丧失与陨灭的悲叹,对天鹅所象征的自然之美的倾心赞叹,但这些在诗中已完全被消融得了无痕迹,读者从中能够体察的只有天鹅那“纯洁的兽性”:“那闪耀于湖面的十二只天鹅/没有阴影//那互相依恋的十二只天鹅/难于接近//十二只天鹅——十二件乐器——/当它们鸣叫//当它们挥舞银子般的翅膀/空气将它们庞大的身躯/托举//一个时代退避一旁,连同它的讥诮//想一想,我与十二只天鹅/生活在同一座城市!”   湖水茫茫,天空高远:诗歌   是多余的   我多想看到九十九只天鹅   在月光里诞生!
1597    연변이 낳은 걸출한 서정시인 ㅡ 윤동주 댓글:  조회:4316  추천:0  2016-09-30
연변이 낳은 걸출한 서정시인 윤동주                                                          ///연변대학 교수 김 호 웅  우리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평론가 정판룡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윤동주는 우리 중국 조선족이 낳은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의 하나”입니다. 만일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여기  앉은 여러분들의 할아버지 또는 증조 할아버지 벌수가 되는 분입니다.  윤동주님은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윤동주님의  시에는 일제 폭압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겨져 있고 또 순결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담겨있습 니다. 윤동주님의 시는 중국조선족의 역사에서 가장 암흑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30 년대 말부터 광복 전 까지 집중적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정신적 시련과 고통이 반영되어있 습니다. 윤동주님의 결백한 지조는 바로 암흑기 중구조선족인민들의 정서의 집중적인 표현 입니다. 그 당시 영화처럼 타오르던 중국조선족의 항일무장 투쟁은 1930년대 중반 이후로 부터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항일무장 대오는 대부분 해산되거 나 소련으로 전입하거나 지하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윤동주 시인으로서 는 처절한 민족의 고뇌와 절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귀중한 시간을 빌어서 윤동주님과 우리 연변의 관계 그리고 윤동주님의 시 의 본질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一, 연변에서의 윤동주 시문학의 전파  윤동주님의 시는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교과서에 오르고 있는데, 그의 고향인 연변지역에 서는 냉전 체제 속에서 한국, 일본과 격리된 상황 속에서 살아왔기에 시인으로서의 윤동 주님의 존재를 오래 동안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윤동주의 존재를 제일 처음으로 연변에 알려준 분은 우리 민족이 아닌 일본인이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가 처음으로 연변에 윤동 주님을 소개했습니다. 이 분은 선후로 연변 사람들에게 잊혀 진지 오랜 윤동주의 묘소, 학 적부, 생가집터 그리고 송몽규의 묘소와 명동교회를 찾아냈습니다. 이로부터 윤동주님의  인생 궤적과 윤동주님의 많은 사실이 소상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윤동주님의 사실들을 찾아내기 위해 중국 동북지역에 서 동분서주하시면서 애 쓰시는 그 열정과 노력은 연변의 문이들을 감동시켰으며 미구에  연변에는 “윤동주 열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연변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연변의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은 연변 땅에서 태여 나서 자라났고 연변 땅에 묻혀 있는 윤동주 시인으로  하여 자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는 윤동주 시인이 남긴 주옥같은 시들은 사람들을  아주 감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에서는 윤동주님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연변에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윤동주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날로 증폭되어 가자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연 구원들은 윤동주님의 시 10수를 골라서 『문학과 예술』(1985년 제6기)에 실었는데, 중국 조선족의 많은 독자들속에서 열띤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로부터 용정중학교의 학생들은  「윤동주시연구회」가 발족되어 정기적으로 시가낭송회를 가졌고,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윤동주님의 묘소를 찾아서 참배하였습니다. 이하 때를 같이하여 연변의 학자들도 윤동주 의 인생과 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6월14일,용정에서는 「민족시인 윤동주 50 주기 학술 토론회의」가 열렸고, 또 한국 유지인사들의 도움을 맡아 윤동주 시인이 출생한 명동촌 생가 집터에다 윤동주 시인생가와 명동교회를 복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시인 윤동 주가 삶의 발자취를 남긴 명동촌, 용정중학교, 원용정동산기독교회 공동묘지 등은 일약  국내외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로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연변작가협회기관지 『 연변문학』, 『중학생』 등 문학지나 교양지들에서는 「윤동주문학상」을 설치하여 중국조 선족 동포문인들과 문학에 뜻을 둔 청소년들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1999년 연변대학 고적 연구소에서는 중한 두 나라의 문자로 『윤동주 유고집』을 출간하여 처음으로 13억 중국인 들에게 시인 윤동주를 소개했습니다.  二, 윤동주의 시와 북간도  윤동주님의 시심은 북간도, 바로 연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북간도는 시인의  사상의 출발점이자 회귀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윤동주님의 이름과 함께  이어져 있는 인구에 회자된 시중에는 「별 헤는 밤」이 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 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 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 스 쟘,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계십니다…  윤동주의 이름과 함께 가장 사람들의 애송을 받고있는 시 「별 헤는 밤」의 한 토막입 니다. 고향 북간도 명동을 멀리 떠나 있는 시인은 맑고 그윽한 가을의 밤하늘을 보면서 별 을 헤고 있습니다. 별 하나 하나에 고향의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며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어있습니다.  대관절 시인에게 북간도란 어떤 곳입니까? 시인 윤동주는 북간도에 이주한 집안의 제3 세대로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 북간도는 태를 묻은 고장입니다. 그러 므로 윤동주의 시심(詩心)은 북간도의 터전에서 움이 튼 것입니다. 하기에 시인은 북간도 에서 지낸 어린 시절을 , 그리운 모든 것을 별에 부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니, 잃어버 린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하늘의 별빛으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성좌의 복판에는 어머님이 계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ꡒ아슬히ꡓ 멀리 있는 북간도와 어머니를 비롯한 그리운 것들과 시인과의 수평적 관계는 별세계와의 대응, 즉 수직적 관 계로 변함으로써 시인의 추억은 그처럼 아름답게 승화하고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마치 아름다운 별세계와 같은 고향에 가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고 무서 운 상실감에 젖게 됩니다. 그에게는 김북원의 경우처럼 ꡒ낙동강물 에워 젖처럼 마 시며ꡓ 잔뼈 굵어진 고향도 없고, 송철리의 경우처럼 ꡒ하염없이 쓰러보는 파 란―꽃송이에/ 무지개마냥 아롱지는 흘러간 옛 마을ꡓ에 대한 추억도 없다. 말하자 면 북간도에서 살았던 많은 시인들의 경우엔 남쪽의 어느 특정된 고장이 향수의 대상, 그 리움의 대상으로 되지만 윤동주에게는 마냥 북간도와 함께 어머님이 성좌처럼 안겨온다.  윤동주에게는 북간도가 고향이요, 북간도가 시적 상상의 원점이 됩니 다.  하지만 정작 북간도를 찾아온 시인은 병들고 찌든 고향에 환멸을 느낀다. 어머님과 동 년의 꿈을 찾을 수 없는 시인은 별빛이 내린 언덕에 자기 이름자를 쓰고 그것을 덮어놓으 면서 슬픔에 젖기도 하고 잃어버린 자기, 소외된 자기를 두고 비탄에 잠기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쉽게 씌어진 시」에서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에서  이처럼 시인은 무서운 소외감과 고독감에 빠져 ꡒ손들어 표할 하늘ꡓ도 없 는 자신을 괴로워하지만 역시 고향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하기에 시「길」에 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방황한다. 시인은 이 길은 담을 끼고 뻗어있는  길이며 담 위에 푸른 하늘이 넓은 공간을 암시하여주지만 길을 막은 담으로 하여 잃은 물 건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찾기 전에 시인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었 다. 이 시의 마지막부분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인은 끝내 꿈결에나마 북간도를 찾는다. 하지만 북간도 역시 그가 뿌리내릴 땅이 아 니며, 그를 외면한다. 하여 실향의 아픔, 자기 상실의 그늘은 점점 짙어갑니다. 윤일주 씨 의 기록에 보면 시인은 1942년까지 매년 겨울과 여름 방학에 고향에 내려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은 그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고장이 아닙니다. 고향에 돌아온 시인은 역시 고향상실의 비애와 불안을 느꼈습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또 다른 고향」에서  역시 윤동주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시에서는 윤동주의 뿌리 깊은 고향 상실의식 과 그 비애, 불안한 심리, 강박관념과 함께 새로운 고향, 즉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 망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시인은 그처럼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고향은 이미 영혼과 육신이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닙니다. 이미 유년의 평화와 아름다 운 동심은 사라지고 어둠으로 가득 찬 불안의 장소로 퇴색한 고향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죽은 자신의 시신(屍身)과 만나는 음산한 곳이고 ꡒ어둔 방ꡓ으로 집약하여  표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고향은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움이 어두운 현실과 갈등을 이루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ꡒ백골ꡓ, ꡒ나ꡓ, ꡒ 아름다운 혼ꡓ이라는 이 시의 상관관계들이 밝혀집니다.  ꡒ백골ꡓ은 본질적인 자아, 즉 고향을 그리고 고향에 안주하려는 자아를 말 한다면, ꡒ나ꡓ는 현실적인 자아, 즉 고향의 어둠에 질식을 느끼고 쫓겨가는 자아를 말하고 ꡒ아름다운 혼ꡓ은 이상적인 자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중심 연으로 되는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라는 시구들은 어둠 속에서 점점 상실되어 가는 삶의 터전에 대한 본질적인 자아, 현실적 인 자아, 미래적인 자아의 탄식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또 이 세 가지 자아는 서로 모순되 고 갈등을 빚어내고 있으니 현실적 자아는 본질적 자아를 포기하고 미래적인 자아를 동경 하는 것이다. 하기에 시인은 밤을 짖는 지조 높은 개에게 쫓기듯 ꡒ아름다운 고향&# 43091;을 찾아 또다시 정처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고향상실과 그 비애 및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념과 동경은 윤동주 시세계의  정서적 원형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시인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대랍자로, 평양 으로, 다시 용정으로, 다시 서울로, 또 일본 동경으로, 경도(京都)로, 후코오카(福岡)으로 , 마침내 유골이 되여 북간도에 돌아와 묻힐 때까지 스물 여덟 짧은 생애를 줄곧 표박(漂 泊)의 혼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어두운 일제치하에 그가 뿌리내릴 고향은 끝내 없었던 것 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준 고향 북간도가 ꡒ어둔 방ꡓ으로 되고 자 기의 시신과 함께 자리를 해야 할 음산한 ꡒ병실ꡓ로 되였을 때 윤동주는 부 끄러움을 느끼고 참회하고 마침내는 그 어떤 비장한 사명감에 젖게 됩니다. 그의 시가 저 항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근거 또는 전환의 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둠속에 빛나는 찬란한 빛줄기―윤동주 시의 저항성  윤동주의 시창작은 1936년 중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초기에 동시를 많이 썼고 또 이렇게 시작된 1930년대의 시들에는 시인의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 니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역사적인 수난 속에서 발견한 자아가 아니라 그 같은 대사회적  사명감으로부터 고통을 의식하기 이전의 순수하고 행복한 자아였습니다.  하지만 실향의 아픔을 경험하고, 북간도는 물론 뿌리내릴 고향이란 전혀 없음을 깨달은 시인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고 비장한 죽음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서시」입니다. 이미 딱딱한 껍질 속에 동체(胴體)와 촉각을 움 츠리고 해와 달과 산과 들을 노래하던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와 역사를 떠나서 저 혼 자만의 서정적인 감각이 주는 쾌감과 그 피난처의 안식에는 그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이 불현듯 밝아지고 나 개인 속의 ꡒ나ꡓ가 아 니라 ꡒ역사 속의 나ꡓ, ꡒ민족 속의 나ꡓ를 하나의 사명감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미 6˜7년간 시를 썼지만 이 시에 「서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바로 그러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ꡒ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ꡓ  ―이 얼마나 고고하고 지순(至純)한 세계입니까? 물론 이와 같은 변화는 아무런 예고 없 이 다가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은 여러 시에서 어두운 현실에서 오는 울분, 아픔, 진 통, 반발을 조용히 읊고있습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 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 서는 안 된다.  ―「병원」중에서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 무나 괴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 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돌아와 보는 밤」중에서  시인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시인은 현실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어두운 현 실의 중압에 지쳐 있고 피로를 느낍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과의 결별을 다짐하며 비극적 인 감정에 젖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중에서  이처럼 윤동주는 고통과 시련의 동굴 앞에서 망설이다가 이렇게 드디어 십자가를 짊어 지게 된 것이며 ꡒ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ꡓ하고  그리고 ꡒ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ꡓ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저항시라고 하며 암흑기의 한줄기 빛이라고 합니다.  윤동주와 아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당시의 적지 않은 우리의 시인들을 포함한 문학인 지 성인들의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 단적인 실례를 하나만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백 척의 비행기와 / 대포와 폭발탄과 /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같은 병정을 싣고 / 우 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 원쑤 영미의 항공모함을”  예비지식이 없이 읽노라면 필경 북한의 한 시인이 미제국주의를 규탄한 시일 것이라고  생각한대도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이었다면 아마 한국의 국가 보안법에  걸렸을 법한 이 작품의 제목은 「마츠이 하사(松井伍長) 송가」이며 지은이는 미당 서정주 , 발표된 건 1944년 12월 9일자 『매일 신보』였습니다. 주인공 마츠이는 경기도 개성 인( 印)씨내 둘째 아들로 21세. 가미기제 특별 공격대원으로 필리핀의 레이터해전(1944.10.23 ~26)에서 희생됐다. 미당 서정주가 이런 무치한 친일시를 쓰고있을 때 우리의 윤동주님은 항일민족운동을 위한 사상범의 혐의를 받아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수 많은 일반인들은 아무런 명분없이 마츠이 오장 처럼 일제의 대포밥으로 부나비처럼 전쟁의 불길속에 스러져가고 서정주 같은 적지 않은 지성인들은 일제의 폭압에 못 견디어 아부하 고 굴종했던 암흑기에 윤동주 님은 말 그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비 록 짧지만 떳떳한 한 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자책했습니다. 지 금도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친일파 청산이 거론되기만 하면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왜 새삼 과거를 들추는가? 그 자식들이 받는 정신적인 고통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이것이 새로운  연좌법이 아닌가?”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현실이 아닙니까? 반민족 매국 행위는 참회 이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상쇄되지 않습니다. 이토록 참회의식의 결여된 사람이 아직도 가득 한 오늘의 한국의 현실에서 윤동주님의 시에서 표현된 “참회의 미학” 또는 “부끄러움의 미학”은 너무나도 귀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윤동주 시인은 우리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이신 의 김학철 선생처럼은 무장을 들고  항일의 성전에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슬픔을 슬퍼할 자유도 없어 서 자연과 원시와 신앙의 세계로, 또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해버린 백치의 세계(순수시의  경우)로 도피해 버리거나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의 총칼 앞에 아부, 굴종했던 시대 , 일반인에게는 그것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윤동주의 시는 그야말로 한줄기 빛 줄기처럼 소중한 것이요, 비록 그 당시 햇빛을 보지 못했지만 재만조선인시단의 가장 아름 답고 자랑스러운 시문학의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특히 아직도 한국에서는 일제식민지로부터의 해방된지 60년이되 지금까지도 의 시점에서 조차 친일파 청산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오늘의 시점에서 윤동주님의 저항정신은 새삼 음미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친일행각을 했던 사람들의 진정한 참회와 반성 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의 풍토에서 윤동님의 “참회의식”, “부끄러움의 미학” 은 아주 귀중한 정신적인 양약(良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윤동주 시의 매력―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서정화  스물 아홉의 아까운 나이로 이국에서 옥사한 윤동주의 저항적 생애가 숭고한 감동을 주 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시의 예술적 가치와 그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 은 아닙니다. 또한 그의 시가 가지는 최종적인 가치와 감동의 비밀은 저항적인 성격을 지 니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오무라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가지는 감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설파(說破)하고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 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 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 이해할 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 향기가 짙은 그의 시 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 있다. 특히 내가 좋 아하 는 ꡐ서시ꡑ, ꡐ자화상ꡑ, ꡐ별 헤는 밤ꡑ  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보고 싶다.  그의 시속에 담긴 저항의 소극성은 어딘지 가냘픈 감상에 흐른 면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나약한 저항적 요소가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캄캄한 일제 하 의 암흑기에 윤동주는 한 민족에게는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찬란한 빛줄기였다고 나 는 생각 해 왔으며 그의 삶에 대해 존경의 뜻을 지녀왔다. 윤동주의 시속에 그저 처절한  저항적인 면만이 부각되어 있다면, 나는 그처럼 그의 시속에 몰입하고 매료되지 않았을 것 이다.)  오오무라 교수의 견해는 윤동주 시에 대한 일반 독자층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실로 윤동주의 시에는 처절한 대결과 저항은 없거니와 설사 있다 해도 독자들은 또 그러한 저항의식에서 주되는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속에 녹아든 시인의  ꡒ순수하고 순결한 심성ꡓ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시를 읽고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은, 윤동주가 무엇보다도 욕되고 부끄 러운 자아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을 제기함으로써 인간적인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부단히 노력한 데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참회록」을 보기로 합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王朝의 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滿二十四年 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자기 성찰의 슬픈 시선이 느끼지는 시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얼굴이 어느 왕조의 유물 처럼 욕되게 느껴지고 ꡒ만 이십사년 일개월ꡓ을 보람없이 살아온 자신을 참 회합니다. 또 자기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자기는 슬픈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아 성찰의 느낌이요, 주조(主潮)가 되고 있는 것은 뉘우침 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참회록」에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욕됨, 부끄러움의 심상은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심상입니다. 그러면 윤동주의 욕됨, 부끄러움의 본질을 구명하기 위해 그의 작품들 중에서 부끄러움이 강조된 부분들을 뽑아 비교해 보기로 합시다.  (가)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참회록」에서  (나)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 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의 아침」에서  (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길」에서  (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마)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에서  (바)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해빛에 비춰, 날았다.  ―「사랑스러운 추억」에서  (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서시」 에서  이상의 시들이 씌어진 시기가 각기 다르지만 시인이 느끼는 욕됨, 부끄러움의 본질과  그 층위를 대개 아래와 같이 헤아릴 수 있다. (가)에서는 시인의 어리석음, 또는 삶의 허 무함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나)는 기독교적인 신앙을 기조로 하여 씌어진 것으로서 성 경에 나오는 설화를 시로 옮긴 것인데 ꡒ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ꡓ는 시 행으로 미루어보아 기독교적인 원죄의식으로 말미암은 겸손한 신앙인의 부끄러움이다. (다 )는 준엄한 윤리의식에 바탕을 두고있는데 하늘(동양은 天, 서양은 기독교의 하느님)을 우 러러볼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이다. (라)에서는 윤리적 삶에 대한 인간의 고뇌, 말하자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지식인의 부끄러움을 노래하고 있다. (마)는 심성이 나약하고 우유 부단한 식민지 시대의 창백한 지식인의 이름을 적어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다.  (바)에서는 하늘을 비상하는 비둘기와 땅에서 주춤거리고 서있는 시적 자아를 대비시키고 있다. 햇빛과 하늘은 시인이 동경하고있는 절대적 이상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그러 한 절대적 이상의 세계를 자유로이 날아 예는 비둘기는 ꡒ부끄러울 것ꡓ 없는 존재요, 또 시인은 그러한 비둘기의 삶을 동경한다. 여기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乖離) 에서 오는 시인의 부끄러움이 깔려있다. (사)에서는 이러한 진실한 자아 성찰과 뉘우침을  거쳐 순결하고 무사(無邪)한 윤리적 지향을 갖게 되는 시적 자아의 부끄러움을 말하면서  절대 이상의 세계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리라고 다짐하고있다.  윤동주의 시가 이런 진실한 자아 성찰에 의한 ꡒ욕됨, 부끄러움ꡓ의 정서 로 끝났다면 역시 감동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윤동주는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면서도 진실한 자아 성찰과 풀벌레우는 소리에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뼈 저린 참회와 인고의 노력을 통해 시대처럼 다가오는 새아침을 믿고 결연히, 그러나 조용히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렸던 것이다. 물론 그 의 저항의식이 기독교적인 속죄양의식과 인고의 정신에 바탕을 두었고 남성적인 대결과 저 항의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 그의 시의 가치는 저항시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의 그 너머에 존 재한다. 그의 시는 자아 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 고뇌 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을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 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의 마지막 단락이다. 시인의 예측은 적중했다. 시인의 이름 자 묻힌 언덕 위에는 풀이 자랑처럼 무성합니다. 문익환 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 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모두의 넋이 맑아집니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많은 어린 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 바가 되였습니다.  아무튼 북간도에 시심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의 아름다운 시편들은 재만조선인문 학이 남긴 가장 귀중한 정신사적 유산으로 되며 동시에 암흑기 한국현대문학의 명맥을 잇 고 그 거친 광야를 비춘 한줄기 밝은 별빛입니다. 
1596    나는 사람이 아니고 개다... 댓글:  조회:4113  추천:0  2016-09-29
모로코, 염소 달린 나무? ‘염소 풍년일세’ [ 2016년 09월 29일 02시 31분 ]     2016년9월28일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모로코(摩洛哥)에서 염소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발견됐다. 사실 게걸든 염소들은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탐내 타고난 균형 감각과 체력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타고 오른 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에 염소가 달린 것 같아 웃긴 장면이 만들어진다.   ...알고 싶어요.... ♬이선희♬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 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눈물 흘린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 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나를 사랑 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주세요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陽谷 蘇世讓과 나눈 사랑이라 한다.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날을 채운 뒤 蘇世讓 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다음의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았다 한다.  月下庭梧盡 달빛 새하얀 뜰엔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 서리 속에 들국화 노랗게 피였네  樓高天一尺 다락은 높이 솟아 하늘이 한자인양 가까이 보이고  人醉酒千觴 사람은 천상 술에야 취해 오누나  流水和琴冷 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에 섞여 차갑게 들리고  梅花入笛香 매화는 피리 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明朝相別後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뒤에도  情與碧波長 사랑은 푸른 파도처럼 변함이 없을 것을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냈으며, 侍婢(시비) 동선이를 시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전하게 했다는  글이 다음의 시 입니다. 소세양은 황진이가 유일하게 남자로 사랑했던 인물로  당대 제일의 문장과 일세를 풍미했던 재화의 멋과 격이 심금을 울린다...   ★ 알고 싶어요 / 詩 : 황진이 ★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 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 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 직역 * 簫蓼月夜思何事 ㅡ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오신지 寢宵轉轉夢似樣 ㅡ뒤척이는 잠자리는 꿈인듯 생시인듯 問君有時錄妾言 ㅡ님이시여 때로는 제가 드린 말도 적어보시는지 此世緣分果信良 ㅡ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을지요 悠悠憶君疑未盡 ㅡ멀리 계신 님 생각, 끝없어도 모자란듯 日日念我幾許量 ㅡ하루 하루 이 몸을 그리워는 하시나요 忙中要顧煩惑喜 ㅡ바쁜 중 돌이켜 생각함이라 괴로움일까 즐거움일까 喧喧如雀情如常 ㅡ참새처럼 지저귀어도 제게 향하신 정은 여전하온지요  . .         *** 위 곡 "알고싶어요"는 황진이가 쓴 시를 양인자씨가 번안한 것으로 알고있으나, 사실은 양인자씨가 작사를 한 것이 맞다고 합니다. "소설 토정비결"을 쓴 역사소설가 이재운씨가 조선일보에 연주한 "청사홍사' 의 황진이 편에서 양인자씨가 작사한 "알고싶어요"를 한학에 밝은 김승종 시인과 함께 운율에 맞춰 칠언율시로 제조해서 넣었는데, 그 소설의 내용을 사실로 착각한 사람이 인터넷에 올리면서 그런 오해가 생겼다고 하네요. *소세양은 평소 학문을 하는 사람은 여색을 경계해야 한다며, 친구들에게 내가 만약 여색에 빠진다면 개(犬子)라 불러도 좋다며 호언장담을 했는데,황진이와 천수원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낸 후 떠나려 했을 때 황진이가 누각에 올라 시를 읊으니, 차마 떠나지 못하고, "나는 사람이 아니고 개다" 라며 스스로 탄식하며 다시 며칠 더 머물렀다. 이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송별소양곡시(送別蘇陽谷詩) 랍니다......***      
1595    중국 조선족 시인 시묶음 댓글:  조회:5873  추천:0  2016-08-25
대장간 모루우에서 김철 대장간 모루우에서 나는 늘 매를 맞아 사람이 된다 벌겋게 달아오른 나의 정열 뜨거울 때 나는 매를 청한다 맞을 때는 미처 몰라도 맞고나면 나 매값을 안다 그래서 나 내 몸이 식을 때 노상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김철(金哲):1932년 8월 일본 시모노세끼 출생,1942년 중국에 이주,1950년이래 선후로 군대예술단단원,기자,편집,연변작가협회주석,주필력임,현 중국작가협회명예위원. 시집:등30여부출간.전국소수민족문학상,한국 해외문학상,중국계관시인상등다수 수상, 애창가요가 유명함. 진달래 김응준 긴긴 빙하를 건너 새언덕에 올라선  소녀의 바알간 미소다 연지곤지 살짝 바르고 꽃가마에 오르는 새색시의 찬란한 향기다 아직 추위가 채 가지 않았기에 무더기로 엉퀴여 살아가는 한 족속의 연소하는 넋이다 ▲김응준(金应俊):1934년 10월 훈춘시 말겅향출생.1959년 연변대학교 중문학부 졸업후 훈춘시2고중,훈춘시 외사판공실근무,1979년이래 문학편집,연변인민출판사 편심,중국작가협회회원,연변시인협회회장. 1954년 처녀작 발표,시집등17부출간,연변작가협회 문학상,문학상등 다수 수상,애창가요 가 유명함. 허수아비 리상각 한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제가 할 일은 다 한다 한마디 말이 없어도 두려워하는자 있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도 추위와 배고픔을 모른다 밤낮 외롭게 지내지만 욕심도 불평도 없다 팔 벌인 채 먼 산 바라보며 세상을 우습게 안다 ▲리상각(李相珏):1936년9월 조선강원도 양구 출생,1961년 연변대학교 졸업후 편집,주필,연변작가협회 부주석력임,중국작가협회 회원. 1956년 처녀작 발표후 시집등 19부 출간.중국소수민족문학상,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연변진달래문예상 공로상등 다수 수상,애창가요가 유명함. 갈대밭에서 리근영 온 여름  무엇을 했기에  텅-빈 속을 조금도 조금도 채우지 못했느냐 꼬물만한  욕심도 없이  빈속, 빈배로  천년을 만년을  살아온 갈대 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너를 버리고 떠나는  여름과 가을을 어찌하여  하아얀 손수건을 흔들며 바래주는 걸가… ▲리근영(李根英):1939년 4월 화룡시 용화향 출생, 1958년 처녀작 발표,시집, 등 3부 출간, 연변일보문학상 등 다수 수상.리근영 시비「고사리 손」이 화룡 선경대에 세워짐. 장기간 농업에 종사. 현 자유기고인, 연변작가협회 회원.  돌                   김건 태초에 철없는 돌은 정에 뜯기워 다듬어졌다 골 지나 벼랑에 부딪친 모래알같은  정소리 심산에 부서져 아픔으로 헤매이다 거칠은 손에 내려  장알이 되여 못으로 박혔다 돌은 광음에 실려 발돋움하고 인간은 초침우에 걸음마를 익혔다 어느덧 돌은 톱에 썰리여 다듬어졌다 다이야몬드의 굳음에 찢기여 돌이 혼칠한 몸매로 계단에 오를 때 거칠은 아픔에 제 몸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기구한 돌의 운명은 한때의 기억으로 빛나다 광풍이 몰아치던 어느날 돌은 물에 베이여 다듬어졌다 돌은 처음으로 아픔을 잊었다 그리고  멀지 않아 호텔에 들어설  그날을 머금고 눈부시고있었다 ▲김건(金建):1941년 3월 연길시 출생,1962년 통화시지질탐사학교 졸업후 지질탐사에 종사.지질공정사,1992년 하해하여 석재업에 종사.2005---2007년 중화전국공상련합회 석재업상회 회장 담당. 현 연변시인협호;리사. 1977년 처녀작 발표. 시,소설 장편통신 등 다수 발표. 고추타래 강효삼 산비탈 옹기종기 조촐한 마을 저 속에 누가 있을가 바람벽과 지붕을 보고서는 알수없구나 문득 내 시야에 맞쳐왔다,  처마밑에  조롱조롱 빨간 고추타래 ㅡ  저건 분명 우리 겨레의    집이지 모두들 간다는데 떠난다는데 그대 어이 외롭게 남아서 외태머리같은 빨간고추타래들을  폭죽처럼 조롱조롱 매달아 놓았느냐 저건 불꼬치 일게다 향토의 사랑이 자글자글   해볕에 익을대로 익어서 이제라도 다시 모여 활 ㅡ활 입김불어 일으킨다면 다시금 불길이 되여 온 마을에  노을처럼 번져갈 뜨겁디 뜨거운 2008 ▲강효삼(姜孝三): 1943년 3월 흑룡강성 연수현 출생, 1958년 상지중학 졸업 1985년 연변대학(통신학부) 조문전공 졸업. 1961년이래 교원, 1983년이래  상지현 하동향 문화소근무 ,연졉작가협회 회원. 1963년 처녀작 발표,
1594    詩리론은 쉬운것, 아리송한것, 어려운것들의 따위... 댓글:  조회:4566  추천:0  2016-08-24
[41강] 화자와 어조.2  강사/김영천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화자의 몰개성론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목이 개성론과 몰개성론으로 되어 있어  말이 어렵지 사실은 화자와 시인이 동일인이어서 시인의  개성이 그대로 화자로 투사되는 것은 개성론이고 시인과  화자가 다른 것을 몰개성론이라 한다고 간단하게 생각하  십시오.  어제는 우리가 시인의 개성론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그러나 모든 시가 시인과 화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시인이 남성의 화자를 내세운다던지, 남성의 시인이  여성의 화자를 내세운다던지, 어린아이를 내세우는 경우 등  시인과 화자를 동일하게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시인의 몰개성론이라고 합니다.  해방 이후 점차 시인의 자의식이 강화되면서 화자를 시인과  는 다른 인물로 재구성하고 있는 작품이 상당히 창작되기 시  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면모는 우선 여성 화자을 차용하고  있는 1920년대 중반의 김소월과 한용운의 대다수 작품에서  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노력 이후 점차 시에 현  대성이 강화되면서, 다시말해 시를 시인과 무관한 자율적  예술 체계로 이해하려는 형식주의적이고 몰개성적인 인식이  보편화하면서 많은 시인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를  분리시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형님,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가 있었다지요  일평생 연좌서명이나 하고 상소문만 올리다가  끝내는 역적으로 몰리고 말았다지요  모름지기 따스한 밥을 거부하고  등을 보이며,  다만 외로운 등을 보이며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아부라함처럼  여벌 신발이나 전대도 없이  천둥벌거숭이 되어 떠났다지요  .  .  .  형님,  이상도 하여이다  진나라 개자추가 뜯어먹던 산나물이  연하천 가는 길에 가득 돋았습니다  곰취나물 개취나물 떡취나물 참 취나물  파랗게 새파랗게 숲길을 덮고  그가 달빛 밟으며 뿌린 피눈물  가도가도 끝없는 진달래꽃으로 피었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남성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인 고정희 시인과는  동일한 인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한식의 고사에 나오  는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를 작품 안에 끌어들이면서 이 시의  분위기나 어조에 알맞는 남성화자를 차용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시인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별개의 인물임을 우  리는 설명 없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작품이  시인의 몰개성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몰개성의 시론에서 되도록 시인과 화자를 분리하여 받아들이  려고 하는 것은 시 쓰는 과정에 객관성과 미적 거리를 획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영랑님의 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시이니 읽는 것을 생략하겠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성  화자를 선택함으로써 영성의 모란과 봄과의 같은 성격을 포  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숨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화자 역시 시인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  니라 작품 안에서 어떠한 역할이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된 인물입니다.  이처럼 화자를 시인과 별 개의 것으로 여  기는 몰개성론의 중요한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 시인은 작품 "밖"에 있고 화자는 작품의 "안"  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 존재하는 화자의  인격적 요소는 허구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화자의 기능을 살펴보겠습니다.  1)시인의 자아와 세계를 확대시켜 줍니다.  화자(퍼스나)는 시인이 쓴 가면입니다. 따라서 그 가면 뒤에  숨어있는 시인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화자를 통해 다양한 인물로 확대 변용될 수 있으며,  그의 경험과 실제적 자아 세계를 폭넓게 만들어 갈 수 있습  니다.  노천명의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네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 시는 남사당패 한 사나이가 화자로 등장하고 있지요. 따  라서 노천명 시인과 화자는 별 개의 인물이며, 어떠한 유사점  도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인이 이 작품을 쓰고, 또 남사당  패의 유랑적이 삶과 거기에서 오는 한이나 슬픔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를 쓰면 이렇듯 다양한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실제적 자아의  폭을 넓힐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시의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김준태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 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이 시에서는 화자가 우리에게 척박하고 절망스러운 삶의  상황을 소상히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입신출세를 위해 모두  다 기차를 타고 도시로 도시로 가버리고, 남은 자들은 버림  받은 것들의 절망적 삶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객관적  보도보다 실감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3)화자는 작품 안에서 일관된 모습과 목소리로 작품에 통일  성을 부여합니다.  김영석의 을 읽겠습니다.  멍들거나  피흘리는 아픔은  이내 삭은 거름이 되어  단단한 삶의 옹이를 만들지만  슬픔은 결코 썩지 않는다.  옛 고향집 뒤란  살구나무 밑에  썩지 않고 묻혀 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 고무신처럼  그것은  어두운 마음 어느 구석에  초승달로 걸려  오래 오래 흐린 빛을 뿌린다.  여기에 나오는 '슬픔'은 다만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지만  화자에겐 변질되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결코 썩거나  없어질 수 없는 물질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즉 슬픔을 구체  적으로 육화시켜놓았습니다.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사물을  같은 의미로 슬픔 안에 수용함으로 유기적인 결합과 통일감  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4)화자는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 속내를 솔직하게 고백함  으로써 시의 진실성을 확인시켜줍니다.  나태주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어머니, 서두르시지요  따가운 햇살 퍼지기 전  이슬 마르기 전  보리를 베어야지요  종일 낫질을 해보았댔자  손바닥만 부르틀 뿐  반품삯도 나오지 않는 보리베기  빳빳하게 서서 사람을 노려보는군요  엇슥엇슥 보리를 베다보면 보리꺼럭들은  팔이며 모가지며 얼굴을  아프게 찌르는군요  어머니, 저는 보리밭에 익은 보리들처럼  빳빳하게 서서 세상을 노려볼 수 없는 것이 슬퍼요  밑동째 잘리면서도 사람을 찌르는 보리꺼럭들처럼  세상을 아프게 찌를 수 없는 것이 답답해요  어머니, 드디어  땀방울은 흘러 눈에 들면  쓰린 소금이 되는군요.  화자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 속의 서러움과 답답함을 털어놓  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진실 어린 목소리에 아마  쉽게 공감할 것입니다.  5)화자는 작품안에서 배경을 묘사하는역할을 합니다.  조정권님의 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가을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山頂(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덮어쓴 채  빛을 만들고 있다  화자는 겨울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얼어붙은 폭포와 계곡  바위 등을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겨울과 아침이라는  시간적 배경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자신을 비롯하여 시 속의 청자나 등장하  는 인물,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기능  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시인 백무산님의 중에서 일부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예로 든 시들은 모두 좀 어둡군요. 아무래도  어지러운 시절의 시들 같습니다.  용광로에서 일을 하고부터  에밀레 종소리를 듣는다  쇳물을 마주하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독가스에 폐가 폐품이 되면서  우리가 만든 쇠들이 실려가서  가는 곳마다 에밀레 종소리가 되어 돌아온다  쇠들은 실려가서  또 많은 벗들의 피를 묻힌다  벗들의 살을 자르고 어디론가 실려가서 우리를 속인다  윤전기가 되어 일당 4.000원을 비웃고  라디오가 되어 한 주에 80시간을 비웃고  TV가 되어 연중무휴를 비웃는다  근육을 태워 만든 쇠들은 또 실려가서  저들의 자가용이 되고 트로피가  고층건물이 되고 비행기가 되고  총칼이 되어 우리 귓전에  에밀레 종소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제1연에선 화자 자신의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작업에 대한 내용, 그 일에 대한 그의  생각 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연 3연에서는쇠가 어떤 일을 하는  사물인지 주관적, 객관적 관점에서 그 것의 쓰임에 대한 정보를  하고 있으며 아울러 근로자들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도 객관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쉽고, 또 쉬운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한 것이 오늘 배운 화자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내일 뵙지요.  * 삶을 여유있게 사는 30가지.. (글쓴이:♣ 詩가 있는 아침 ♣)  1. 일년에 한번쯤은 해가 뜨는 광경을 본다.  (내 문제가 다소 하찮게 느껴지면서 힘이 솟는다.)  2. 꽃한송이,작은정성,맑게 개인날 아침햇살,주변의 작은일에 감동을 한다.  (감동을 많이 할수록 체내항생제가 많이 생겨 건강에 도움이 된다.)  3. 웃음은 낙천적인 사람의 트레이드 마크다.  (미소에 자신이 없다면 거울 앞에서라도 웃는다.)  4. 샤워를 할땐 노래를 부른다.  (외국영화에서 처럼..)  5. 봄이 되면 꽃을 심는다.  (꽃이 피기까지 몇달간의 과정을 지켜봄으로서  인내를 배우고 꽃이란 결과를 봄으로서 생애에 대한 신뢰를 얻는다.)  6. 직접 연주할수 있는 악기를 하나쯤 배운다.  7. 만화책을 읽는다.  (만화를 포기하는것은 창조성,유머,젊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8. 길가다 빈자리가 있다면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지켜본다.  (타인의 삶을 상상할수 있는 좋은기회다.)  9. "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죄송합니다"를 자주쓴다.  10. 지금 느낄수 있는 기쁨을 뒤로 미루지 않는다.  11. 화가 치밀면 한시간 정도 여유를 갖고 화를 식힌후 상대를 대한다.  (중요한 일이라면 하루정도 생각할 여유를 갖는다.)  12. 아이들과 놀때는 반드시 져 준다.  13.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피한다.  14. 하고싶은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대망을 가진자가 현실적인 사람보다 강하다.)  15. 좀더 느긋해지자.  (당장 사느냐 죽느냐가 걸려있는 일이 아니라면  그다지 급한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16. 성공의 척도를 자신이 현재 느끼는 마음의 평화,  건강, 그리고 사랑에둔다.  17. 인생이 공평할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18. 수입의 일정액을 남을 돕는데 사용한다.  19. 남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시샘은 불행을 낳는다.)  20. 죽어도 후회가 없을 만큼 열정적으로 산다.  21. 행복은 권력,부,명예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행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에서 온다.)  22. 전화를 받을때는 항상 활기찬 목소리로 받는다.  (마찬가지로 울적할땐 전화를 하지않는다.)  (꼭 해야한다면 간단한 체조라도 한 뒤에 활기찬 목소리로 한다.)  23. 마음에 드는일이 있으면 실리를 따지지 않고 일단 시작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일이라면 곧 느낌이 전달돼 손해 볼일은 없을테니까.)  24. 남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지 않는다.  25. 사람들 앞에서 돈얘기를 하지 않는다.  26. 잘못한일에는 반드시 용서를 구한다.  (용서받지 못할,용서하지 못할 마음 이상 무거운게 있을까?)  27. 문제가 생기면 최악에 대비하고 최선을 바란다.  28. 나를 위해 작은 투자를 한다.  (새 잠옷,새 양말,꽃한송이,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음을 자각한다.)  29. 한달에 한번쯤은 나 혼자 외출을 한다.  (특별한 할 일이 없는 외출에서 의외로  나의 자신감을 만날수도 있으니까.)  30.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가지!! 잠을 충분히 잔다.  =================================================================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1965∼)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처마 밑에 던져 놓은 빈 맥주 깡통 위로 밤새 빗물이 떨어진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하고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서 깡통을 멀리 차버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 화자는 거기서 목탁소리를 듣는다. 비어 있는 알루미늄 깡통에 처마 끝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목탁소리와 닮기도 했겠지만, 우리는 대개 제 마음속에 담겨 있는 단어와 감정을 불러낸다. 쓸모를 다해 버려진 빈 깡통의 맑은 울음을 듣는 시인의 맑은 귀!  알 굵은 감자는 비싼 상품이지만 자잘한 감자는 손만 많이 가고 돈이 안 되니까 그냥 던져 버린다. 함부로 버려져 썩어가던 감자가 꽃을 피웠더란다! 그 감자의 애틋한 생명력과 쓸쓸한 용기를 시인은 기록한다. 크고 화려하고 힘센 것, 가령 돈과 정치와 권력과 개발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퍼져 있는데,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끌어가는 세상도 있다고, 그 세상을 무화(無化)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화자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삼라만상의 존재가치가 슬프게도 사람 입장에서 본 쓸모 여부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과 동식물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쓸모를 다해 버려진 것들, 하찮은 것들, 약자들의 존재가치를 옹호하는 시인의 섬세하고 여린 마음과 따뜻하고 맑은 세계관이 그려진, 참 드물게 고운 시다.  
1593    詩창작은 곧 "자기표현"이다... 댓글:  조회:4658  추천:0  2016-08-24
[ 2016년 08월 24일 08시 48분 ]     장자제(張家界, 장가계) 대협곡 유리다리.   장자제 대협곡 유리다리의 바닥 면에는 총 99개의 유리가 깔려 있고 멀리서 보면 투명하고 아주 얇아 잘 보이지 않는다. 다리의 총 길이는 430m에 달하며 넓이는 6m 정도. 유리다리는 300m 높이에 설치. [40강] 화자와 어조.1  강사/김영천  강의가 어렵지요?  사실 여기에서 어려운 강의를 않는다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강의를 듣기 위해 여러분이 고생할 필요가 없지요.  반복해서 여러분께서 강의를 받으시면 일단 여러분은 시 창작  에 대해서만은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되실 것입니다.  화자와 어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퍼소나(persona)라고도 하는데 시 속에서 말  하는 사람을 가리켜 '시의 화자(話者)'라하구요 그 퍼소나의  말씨, 목소리 즉 시의 어투를 '어조(語調)'라 합니다.  화자와 어조는 시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함께 우리가 시를 쓰  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시다싶이 그 화자와 어조에  따라서 시의 전반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시의 주제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1.화자란 무엇인가  먼저 권영택, 최동호 역의 『문학비평용어사전』을 보면  퍼스나는 고전극에서 배우들이 사용하는 "가면"을 가리키는  라틴어였다. 여기서 극의 등장인물을 지칭하는 "극의 퍼스나"  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며, 결국에는 영어 작품에서 개인을  가리키는 "퍼슨(person)이 유래하게 되었다. 최근의 문학  논의에서 "퍼스나"는 흔히 설화체 시나 소설의 1인칭 서술자,  즉 "나"에 대해 적용되거나, 혹은 서정시에서 우리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서정적 화자에게 적용된다. 고 되어 있  습니다.  또 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사전』을 보면 "문학은 그냥  씌어진 채로 있는 글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어조  로 특정한 사물에 대하여 특정한 사물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가지 해석을 보면 시 역시 문학의 한 갈래인 이상  담화형식을 갖게되는데, 시 속에는 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하는  사람을 가리켜 화자라 하는 것입니다.  황동규님의 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요새 무서워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江에는  살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江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  에선 문득 暗號(암호)만 비쳐요. 읽어봐야 소용이 없어요. 혀  짤린 꽃들이 모두 고개들고, 不幸(불행)한 살들이 겁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에요. 곳곳에 쳐  있는 細(세)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워요.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여성입니다. 여성은 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탈(가면)중에 하나입니다. "황홀하게 무서워요"라는  역설까지 동원된 이 시의 화자는 주위의 사물이나 상황에 대  한 회의와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런 공포감은 여성화자가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을 관람할 때 사건이나 의미  못지않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  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공을 보고 극장에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극중의 사건에 잘 어울리지 않거나 주제와  동떨어진 개성이나 정체성을 보여줄 때 아무리 좋은 내용과  주제를 지녔다 하더라도 작품은 성공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시의 화자 역시 시의 다른 요소들과 긴밀하게  어울리고 일체가 되어야만 시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영랑. 김소월, 한용운시인 등의 시에서는 여성  화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오히려 여성화자가 나타남으로 그들  의 시가 성공하게 된 것은 역시 이 여성 화자가 시적 분위기  라든지 주제, 시인의 태도 등을 잘 살려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시라는 것 안에 따로 시인의 목소리 말고 무슨  주인공이 있느냐 생각도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  속에는 그 시인 자신이 되었던지 이처럼 다른 사람이 화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황동규는 분명 남자 시인입니다.  나희덕님의 를 한 번 읽어보黴윱求?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창밖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하늘에 대고 몇 장이나 사표를 썼다.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  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뒤로 하고  내가 밝히려고 찾아가는 그곳은  어느 어둠의 한 자락일까  이 어둡고 할일 많은 곳에서  師表(사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사표를 쓰게 된다면  그 붉은 노을을 언제 고개를 들고 다시 볼 것인가.  하늘에 대고 마음에 대고 쓴  수많은 사표들이 지금 눈발 되어 내리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  교실문을 가로막는데  나는 차마 종이에 옮겨적을 수가 없다.  붉게 퇴진하는 태양처럼  장렬한 사표 한 장 쓸 수는 없을까  이 시 속의 화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여선생님입니다.  날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퇴근을 하느라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갓난아이를 키우는 한 엄마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승으로서의 사명감이 투철한 선생님이기도 하구요.  아마 여러분께선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이미  마음 속에 한 편의 영상이 떠올르실 것입니다. 그 영상 속의  주인공이 바로 퍼스나, 화자인 것입니다.  이 시 속에는 지난 시간에 배운 아이러니 중의 펀이 있는데  아시겠습니까?  열째 행의 사표는 학식과 인격이 높아 세상사람의 모범이 되는  일, 작게는 선생으로서의 모범이 되는 일이구요.  열한번째 행의 사표는 사직한다는 뜻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두 개의 똑 같은 사표란 낱말을 병치함으로 주제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2.화자와 시인  시에는 화자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습니다. 의외로 화자의 개성이나 특성을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작품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숨겨져 있든  겉으로 드러나 있든 화자가 모든 시에 내재해 있고, 또 모든  시에 필수적인 요소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조와 운율, 이미지와 정서 등이 그렇듯이 화자도 시의 중  요한 구성원리인 것입니다.  또 시의 화자는 흔히 시적 자아, 상상적 자아, 가상적 자아,  서정적 자아,서정적 화자 등으로도 불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자에 대해 주목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화자와 시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  입니다.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 할 것이냐 이질시 할 것이냐  또 동일시 하면 어느 정도나 동일시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시 속에서 궁극적인 화자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  지만, 시의 화자와 시인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시인의 개성과 몰개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시는 어떤 장르보다도 시인의 주관적인 개성이 강하게 드러  나기에 시 창작은 곧 '자기표현'으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즉 시인은 시 세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 관념, 정서, 태도  등을 담아내고 자신이 주관적으로 보고 느끼고 발견한 사물  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의 화자를 시인  자신과 동일한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  입니다.  독자들이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시 속에서 만나는 화자와  그의 목소리를 시인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한 편의  시를 창작할 때 내 세우는 화자가 곧 그 시를 쓰는 시인 자  신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는 시인  개성의 표출이요, 시의 화자는 곧 시인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은님의 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두 살배기가  내 책상 원고지에  김형균이가 찍어다 준 원고지에  잉크를 몽땅 엎질렀다  글 쓴 원고지 흩어 거기에 엎질렀다  너 이놈!의 이까지 튀어나오다가  그 호통 앗차 하고 숨 돌려  내 얼굴 환한 웃음으로  잘했다 잘했다 하고 얼러주었다  이건 뭐  아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잘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애써 쓴 글  그 글이 잉크로 다 지워져 없어졌다  그 廢止(폐지)  그 소멸 지나서  나는 다시 쓰리라  죽음 없이 어이 새로우랴  이 땅을 실컷 노래하리라 밤이여  두 살배기 차령이가 이것을 가르쳤다  둥기둥기  새 세상 노래하리라  둥기  고은의 이 시에는 상상력에 기초한 예술적 가공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기억에 의해 체험을  그대로 밀고 나가며 그로부터 깨닫는 삶에의 지혜와 각오  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문필가로서 시인 고은 자신인 것은  우리 모두가 금방 알아 챌 수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일인칭 화자로 드러나 있는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면모  와 다짐을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늦동이로 얻은 딸 두 살배기 차령이가 원고지에 잉크를 엎  지른 일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시가 이루는 정경은 환히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 일로 하여 "죽음 없이 어이 새로우랴  "라는 깨달음을 얻고 있는 화자의 육성으로부터 자전적 인물  로서 시인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 독자들로서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이렇듯 시인과 화자와 시인이 동일인물로 설정되는 것이 개  성론입니다.  김남주님, 를 읽어보겠습니다.  봄이면 장다리밭에  흰나비 노랑나비 하늘하늘 날고  가을이면 섬돌에  귀뚜라미 우는 곳  어머니 나는 찾아갈 수 있어요  몸에서 이 손발에서 사슬 풀리면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어요 우리집  그래요 어머니  귀가 밝아 늘상  사립문 미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식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시고는 했던 어머니  사슬만 풀리면 이 몸에서 풀리기만 하면  한달음에 당도할 수 있어요 우리집  장성 갈재 넘어 영산강을 건너고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영암이라 월출산 천왕 제일봉도  나비처럼 훨훨 날아 찾아갈 수 있어요  조그만 들창으로 온 하늘이 다 내다뵈는 우리집  이 시인의 집은 전남 해남입니다. 그렇게 반국가혐의로 핍박  을 받던 시인이지만 지금은 군에서 생가를 복원한다고 하니  참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요.  아무튼 여기에서 화자는 옥중의 수인으로 나옵니다. 그 감옥  안에서 고향과 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노래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화자가 시인 자신이  아닌가하게 됩니다., 또 고향 해남을 향하듯 장성 갈재,  월출산 천왕봉을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화자와 시인은 별  개의 인물이 아니라 동일 인물입니다. 바로 화자의 개성론  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인 것입니다. ==   ====================================================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1965∼)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처마 밑에 던져 놓은 빈 맥주 깡통 위로 밤새 빗물이 떨어진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하고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서 깡통을 멀리 차버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 화자는 거기서 목탁소리를 듣는다. 비어 있는 알루미늄 깡통에 처마 끝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목탁소리와 닮기도 했겠지만, 우리는 대개 제 마음속에 담겨 있는 단어와 감정을 불러낸다. 쓸모를 다해 버려진 빈 깡통의 맑은 울음을 듣는 시인의 맑은 귀!  알 굵은 감자는 비싼 상품이지만 자잘한 감자는 손만 많이 가고 돈이 안 되니까 그냥 던져 버린다. 함부로 버려져 썩어가던 감자가 꽃을 피웠더란다! 그 감자의 애틋한 생명력과 쓸쓸한 용기를 시인은 기록한다. 크고 화려하고 힘센 것, 가령 돈과 정치와 권력과 개발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퍼져 있는데,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끌어가는 세상도 있다고, 그 세상을 무화(無化)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화자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삼라만상의 존재가치가 슬프게도 사람 입장에서 본 쓸모 여부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과 동식물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쓸모를 다해 버려진 것들, 하찮은 것들, 약자들의 존재가치를 옹호하는 시인의 섬세하고 여린 마음과 따뜻하고 맑은 세계관이 그려진, 참 드물게 고운 시다.  
1592    詩는 "어떤 음계에서"의 암시투성이다... 댓글:  조회:4270  추천:0  2016-08-22
[39강] 시와 상징.2  강사/김영천  3)암시성  상징의 특성으로 일체성, 복합성에 이어서 암시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상징언어는 보조관념으로 표현되어 원관념을 암시  함으로써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일체화합니다.  이 원섭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머언 어느 나라로 가자  例(예)를 들자면 모로코나 에치오피아 같은 곳,  나의 형제나 친구가 아무도 없는,  될 수 있으면 專制(전제)하는 王이 있고  봄 가을이면 人肉市場(인육시장)이 장엄히 벌어지는  그러한 나라에 가  나는 한 마리 奴隸(노예)가 되자.  이 거추장한 옷일랑 벗어 동댕이치고  개모양 陳列(진열)되어  商人(상인)들이 내 값을 흥정하게 내버려두자.  나는 나를 時價(시가)대로 판 다음  어느 主人(주인)을 개처럼 섬기자.  가실 뉘 없는 한 조각 丹心(단심)!  피 튀는 채찍도 은혜로 받자  어느날 나는 죽자. 나의 筋力(근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主人에게 바친 다음  늙어빠진 개모양 고요히 눈을 감자.  그리하여 아무의 기억에도 남지 말자.  永遠(영원)히 내 이름 숨긴채로  노창선 교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이 시에서 우린 시적 화자의 매우 비밀스러운 내면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마음 그 자체가 이 시를 통하여  시인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아님을 곧 알게 된다. '  머언 나라'라든지 '거추장스러운 옷일랑 벗어 동댕이치고',  '형제나 친구나 아무도 없는'곳이라는 등의 시어는 시적화자  의 현실이탈 의욕을 통하여 초월적 의지를 암시한다고 본다"  즉 현실을 벗어나려는 화자의 마음이 암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학과 구속, 어떤 이념에 대한 순응이나 굴종을  의식하는 시어들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상징이란 존재 양식이 본래적으로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만 제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감춤(concealment)과  드러냄(revealation)의 양면성을 필연적으로 지닌다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상징에서는 침묵과 담화가 함께 작용해서 2중의  의의를 가져 옵니다.  신동집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며  오렌지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가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아직 잘은 몰라도.  상징은 감춤의 성질만도 아니고 드러냄의 성질 만도 아닙니다.  이 작품은 상징의 양면성 자체를 테마로 한 것을 보입니다. 오렌지  에 대한 화자의 태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감추어진 작가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화자는 오렌지의 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오렌지으로 껍질을 벗겨 그 속살을 깔려고 손을 대면 그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라고 두려워 합니다. 여기에서 오렌지는 무엇일까  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작가의 설명이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김준오 같은 분은 인간의 지적 욕구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  욕구는 모든 사물의 내면을 다 들추어 내어 밝히려고 하지만 그 결과  는 사물에 대한 흥미도 가치감도 다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화자는 이 지적 욕구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오렌지를 새로 만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연인으로 정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은 적당히 모를 때 존경하다가도  너무 친해져 단점까지 다 알게 되면 그 동안 마음 속에 품었던 흠모의  정이 산산히 부서지고 말 수도 있어 두렵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이 오렌지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무엇을 암시하였을까?  궁리하여 보십시오.  그 것이 우리에게 다가온 삶을 뜻하는 것인지, 또는 알지못할 미래에  대한 상징은 아닌 것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약속대로 이런 것 있다고만 알고  마지막으로 긴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4)긴장성  여러분들이 위의 시를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파악  하기위해서 무척 긴장하셨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징의 감춤과 드러냄, 복합성, 암시성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정신적 긴장감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를 한 편 소개해보겠습니다.  김명수님의 을 읽겠습니다.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 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상징의 언어가 긴장의 언어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시의 언어가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문맥과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위의 시에서 달은 어둠에 대한 빛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삶  의 애환과 고통의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잠들어 빈 듯  한 마을과 다시는 짖지 않는 외로운 개와 말이 없어진 누님의  이미지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상시키면서 이 시의  내용의 중요한 암시적 모티프가 되고 있습니다. 비밀스런 분  위기를 배경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내의 정체와 누님의 관계  는 어떤 사건을 암시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습  니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무슨 역사적 상황 아닌가 하면서도  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압축되어버립니다.  2.상징의 유형  이 과목은 제목만 소개하는 것으로 끝내겠습니다.  1)개인상징  2)집단상징  3)원형상징  참고로 노드롭 프라이란 학자는 묵시적, 악마적, 로만스적,  사실적, 상위모방적으로 다섯 개로 분류하였습니다.  이형기님의 입니다.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맥스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참고로 제가 올리는 시들은 띄여쓰기나 부호 등, 책에  나온대로 옮기니 맞춤법과 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유안진님의 을 읽어볼까요?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보다도  마른 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며  눈 감은 채 고즈너기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 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이들은 앉아야 할 때  앉아서 두 손 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 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리거라  이가람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 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은 눈동자  먼 부재(不在)의 저 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마지막으로 김후란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산이 산을  에워싸고  비켜 가라네 강보고  지난 가을  끝내 불질러 버렸던 상처에  기나긴 겨울  참회하는 침묵뿐이더니  저 강  뫼뿌리에 잠든 언어  다 깨워 놓고  깊은 산  가슴에  강물소리 절로  차오르네  ============================================================       어떤 음계에서  ―문동만 (1969∼ )     자주 자는 집은 컨테이너이거나 달세를 주는 여관방, 자주 먹는 밥은 함바집의 백반이었던 그가 삼십년 객짓밥으로 얻은 만년 셋방에 곰팡이꽃을 피워놓고  밥상을 차려 기다렸다 늘 막막했던 그가 용돈까지 쥐어준다  ‘아무려면 혼자 사는 내가 낫지’가 그의 잠언 창을 열면 집 밖도 실내인 작은 집 소소한 몇 개의 반찬 냄새는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빗방울은 허공에 걸린 거미줄을 튕긴다 이십오년 된 창고형 상가를 털어 칸칸이 허술한 담을 쌓고 그것을 아파트라 부르는 곳에 그가 살고 있다 그는 살 수 있었다 그가 만든 수많은 집들의 바깥에서만 빗방울을 견디는 거미줄, 오로지 가볍고 질긴 장력으로 살았던 탁음이 깊은 말라깽이 사내의 집 복도엔 그만그만한 사람들의 생이 얽힌 물발자국 발바닥으로 부르는 노동가, 따라 부르기 버거워 어떤 음계에서 나는 미끄러지고 만다 건축 공사장 컨테이너나 달세 여관방을 전전하던 그 사내, 삼십년 만에 드디어 ‘만년 셋방’ 거주자가 됐다. 그래서 처음으로 제 집에 밥상을 차려놓고 친구인 화자를 초대한 날이다. 하루 벌어 하루 살면서 나이 든 이가 노숙의 공포에서 벗어난 형편이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기쁘게 축하하러 찾아간 화자, 그러나 반찬냄새 진동하는 좁은 방이며 천장에서 벽으로 흘러내리는 곰팡이꽃이며, ‘창을 열면 집 밖도 실내인’ 듯 바투 옆집 담벼락이 붙어 있는 꼴이며, 마음이 먹먹해진다. 마침 비까지 주룩주룩 내린다. 열린 창밖으로 거미줄에 빗방울 튕기고. 거미들은 자기 집이나 짓고 살았지, 이 친구는 평생 수많은 집들을 짓는 일손이었건만 그 집들의 바깥에서만 살 수 있구나. 그러면서도 마음씨는 어찌 그리 곱고 넉넉한지! ‘아무래도 혼자 사는 내가 낫지’, 식솔을 거느린 화자한테 용돈까지 쥐여준다. 아, 당신이나 나나, 왜 이렇게 살지? 우리가 게을렀던가? 방탕했던가? 화자의 삐치고 미끄러지는 마음이 만져질 듯하다. 시 속에 비가 내리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비 오는 날이 노는 날이다. 물론 급료는 없다. 유행가 가사처럼 ‘비 오는 날이면 공(空)치는 날’인 것이다. ‘일용직 근로자의 날’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근로자의 날’에서도 소외됐으니.    
1591    詩적 장치속에 상징이라는 눔이 있다는것... 댓글:  조회:4184  추천:0  2016-08-22
[38강] 시와 상징.1  강사/김영천  지난 시간까지 아이러니를 공부했는데 아이러니와 비슷하면  서도 다르게 취급되는 역설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이러니나 역설이나 모순된 상호 이질적인 가치들을 추구  한다는 것(세계와 삶에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모순이나 부조리  를 발견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같지만 역설은 아이러니와  달리 모순된 진술로서 표현하는 것이 다릅니다.  역설의 유형에는 표층적 역설, 심층적 역설이 있고 또 거기에  서 더 세분되기도 하나 깊이 분석하는 것을 피하기로 하고요  예문만 들고 오늘 본 강의로 들어가겠습니다.  유치환님의 중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란 문구는 역설을 표층적으로  나타내줍니다.  아우성은 요란한 소리가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역설의 기법  을 써서 소리없는 아우성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황동규님의 의 역설기법이 들어  있는 부분을 읽어보지요  눈 위에 쓴 말을 지웠다  따로따로 그러나 모여 서서 우리는  지워진 글을 다시 읽었다  여기에서 어디가 역설적 표현인가요?  그렇지요. 읽을 수 없도록 하는 행위가 지운다는 것인데요.  지워진 글을 다시 읽었다는 표현도 역설이지만요.  따로따로와 모여 서서도 서로 상반된 행위이지요.  이 것도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렇게 역설적 표현으로 화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중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오는데요.  눈 뜬 잠이요 있는 것이 바로 없는 것임을.  사랑은 티끌만큼도 느끼지 못하던 내가 이같이 사랑을 느끼다니  아마 여러분도 이젠 어느 부분인가를 바로 지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눈 뜬 잠이란 부분과 있는 것이 바로 없는 것이란  역설적 표현입니다.  상징의 유형과 실제는 시인이자 청주과학대 교수님이신  노창선 박사의 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1.상징이란 무엇인가  먼저 우린 상징적 비유법에서 상징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 본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상징이란 말도 평소에 많이 쓰셨지만 심볼이란 말도  많이 쓰셨을 것입니다. 이 심볼이 즉 영어로 상징입니다.  이 symbol은 그리스어 symballein에서 유래한 말로 '조립  한다' 혹은 '짜맞춘다'를 의미하며 명사형 symbolon은 '부호  증표, 기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어원에서 보면 상징이란 기호로서 다른 어떤 것을 대신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불명확하거나 추상적인 사물 혹  은 사물의 숨은 성질을 가시적이거나 명확한 대상으로 치환  시켜주는 행위입니다.  표현된 사물(보조관념)과 의도하고자 하는 관념이나 대상(원  관념)은 동일한 진술로 드러나기 때문에 문학의 상징은 안에  숨은 뜻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기호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 십자가가 교회를 상징한다  는 것 등 이미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2.상징의 특성  상징을 시에 사용함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에 강한 충격을  가함으로써 유추작용을 증대시켜 주고 시적 긴장감을 증폭  시켜주는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상징의 특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일체성  직유나 은유의 방법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사물을 짝을 지어  나타냄에 비해 상징은 원관념을 보조관념 속에 내장시킴으로  개념과 이미지를 하나로 일체화시킨 양식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말하고자하는 것들이 표현된 어떤 언어 속에  감추어져 있고, 독자들은 그렇게 암시되어 있는 세계를 파악  해냄으로서 시를 감상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부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한 분은  큰 집을 가졌으나 들지 못한 채  눈 멀어 귀가 멀어 쫒겨나고 말았다.  바다에 뜬 그리움, 바다에  바다에 떠서 별빛으로 눈을 씻고  흰구름 흐르는 소리 들어 따라 흐르다가,  흔적도 없는 상어밥이 되었는지  죽어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었는지  나라가 되었는지  아니면 거북 등에 업히어  지금 어디서 오고 있는지  내가 아는 사람 한 분 소식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상징을 끄집어 내기엔 여간 어려운 일입  니다. 이렇게 은유나 직유와 다르게 상징은 우리에게 다만  암시되어 있을 뿐이어서 그 파악이 매우 힘이듭니다.  편의상 노창선님의 해설을 그대로 옮깁니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내가 아는 한 분에 대한 그리움을 표  현한 것이다. 이러한 추방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 작  품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도덕적으로나 혹은 인륜적으로  추방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은 확인된다. 그는 '큰 집'을 가졌  기 때문이다. 개인적 진실 혹은 순수성이 비도덕적 원인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다는 전언, 그것을 시인은 '내가 아는 한 분'  을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 분'은 누구나  한 사람씩 있을 수 있는 아끼는 어떤 대상일 수 있거나 또는  역사적 인물로서 나라를 구원하려는 영웅일 수 있으며 또는  정신적인 구원의 상징일 수도 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설명을 들어도 모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상징은 암시적으로 감추어져 있어서 시인의 설명을 듣지  않고는 그 상징성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2)복합성  상징은 애매모호한 의미의 저층으로부터 확연한 의미층으로  까지 복합적 의미층의 양상을 갖는다.  여기에서 고은님의 중의 일부를 읽어보겠  습니다.  겨울 文義(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이 시에 나타난 주된 의식은 소멸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가 여러 개의 뜻을 포함하고, 모호합니다.  예를 들면 잠든 마을은 죽음에 관련된 이미지이고, 거기에  날리는 재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  눈은 또 죽음의 이미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색체가  소멸된 하얀 것으로서의 눈인 것입니다. 즉 하늘로부터의  죽음에 관한 전언과 같은 눈의 이미지가 우울하고 허무한  심상을 떠올려줍니다. 소멸되었던,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  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암시합니다. 또 죽음을 안고  있는 먼 산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죽음이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너무 어렵지요?  그러나 한 번 들은 것하고 전혀 듣지 않은 것 하고는 다르  거든요. 그러니 소설 책 읽듯 술술 읽어 내려가세요. 그리고  모르겠는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세요. 다만 상징이란 말 뜻  은 알아두시고 시적 장치에 상징이란 것이 있다는 것만 알  아두십시오. 나중에 여러분들이 시를 잘 쓰시게 된 후 다시  이 강의실에 오셔서 복습하십시오.  김영남 님의 입니다.  나는 등나무 꽃이 되리라  그대 머리 위에 모빌처럼 매달려서  향기를 넓게 뿌려 주리라 그 향기로  그대 앞길을 밝히는 등이 되리라  만일 향기가 다 떨어지면 나는  그대 하늘을 꾸미는 지붕이 되리라  지붕이 되어 서늘한 그늘을 선사하리라  벤치를 갖다 놓고 친구들도 초대하리라  아, 나는 등나무의 마음이 되리라  어두운 세상도 그대 하나만 붙들고  두 겹 세 겹, 아니 수없이 보듬고 도는  저 등나무의 끝없는 사랑이 되리라  다음엔 강신애님의 입니다.  시를 감상하는 방법은 제목을 먼저 보시고 작가의 입장이  우선 되는 것입니다.  언뜻, 핀잔처럼 스치는 빗방울  바람이 취객의 겨드랑이를 부축하다 팽개치고  먼저 버스에 오른다  전광판 즐비한 도시를 관통하는 버스 속  쏟아지는 빗줄기에 순간,  불빛이 번져 차선이 휘어진다  차도를 메우고 택시를 포위한 사람들,  인도 위의 여자가 뒤집힌 우산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빠진다  하루의 갈증을 비에 떠넘기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공중의 나뭇잎이여, 어느 뻘에서 풀어 놓았느냐  특색 없는 얼굴 등받이에 기대고  내 생도 막차를 탄 게 아닐까,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며  우줄우줄 졸며 가는 자정 넘어 어두운 빗길  풀라타너스 잎사귀 맺힌 생각 털어 내며  달리는 심야버스  마지막으로 하종오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이 밤을 지나야 너에게 갈 수 있다  내가 서성이는 곳에는 잎 떨군 나무들만 있다  아무것도 없이 가슴만 뜨겁다  나의 누구여  그러므로 길을 밝혀 내 스스로 갈 수 없구나  눈물이라든가 피라든가 뼈라든가  그런 것의 인간의 어딘가에서 식어내리는  맑은 물방울 몇몇 방울 따뜻하게 흘리고 나면  은유의 불빛은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나의 누구여  그러므로 나를 포옹하러 어두운 길로 오려무나  나무들은 나를 외면하고서 계속 잎을 떨군다  검은 산이 그걸 받아서 내 가슴을 덮는다  내 가슴에서 낙엽 타, 허공에 내가 연기되어 오른다  네가 날 보고 기뻐할 것이다  =================================================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1976∼)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한눈에 반한 여자건만, 그 여자 하필이면 시인이란 말인가! 순진하고 고상한 척하면서 하는 짓마다 이상한 여자, 그게 다 시 쓴답시고 그러는 거다! 그 머리에서 시를 박멸하고 어떻게든 사람 만들어 보려고 했건만 안 되겠구나. 그리하여 남자는 이별을 고하고 여자는 시를 쓴다. 잘 헤어졌네! 이건 코드 문제가 아니다. 시로 미루어 남자는, 허난설헌의 남편처럼, 독선적인 데다 옹졸하고 삐딱하다. 그 성격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해피’, 그 옛날의 강아지들처럼 그 의식을 물고 놓지 못한다. 피해의식에 물려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인 것이다. 어이없고 분한 마음이 살짝 드러나면서, 장난기 느껴지는 명랑함이 번득이는 시다. 김민정의 시는 발칙할 정도로 발랄하다. 재미있는 시들이 많은데, 이 지면에 올리지 못할 시어들이 난무한다. 예컨대 남자 어른의 성기를 뜻하는, ‘ㅈ’으로 시작하는 우리말 같은. 그런 시어들을 볼 때마다 독자를 놀라게 하며 깔깔깔 웃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여, 이런 게 그 여자의 시였답니다
1590    詩는 <<그저 그런...>>것, 젠장칠,ㅡ ... 댓글:  조회:4211  추천:0  2016-08-22
[ 2016년 08월 19일 09시 57분 ]      미국 마이크로 조각 달인 신디 친(Cindy Chinn) 나무 연필 ‘걸어가는 코끼리’ 작품.ㅡ [37강] 시와 아이러니.2  강사/김영천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말의 아이러니에 대해 계속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패러디  패러디에 대해선 한 번 이야기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회에서는 문학 외에도 이 패러디기법이 많이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잘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좀 살펴보겠습니다.  패러디는 '곁에서 부르는 노래'란 뜻의 그리스말 페로디아  (perodia)에서 나온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시어나  문장 또는 말투를 모방하되 그 내용은 뒤바꾸어 쓰는 표현법을 말합니다.  패러디에서는 모방도 중요하지만 그 뜻을 미묘하게 바꿀 수  있는가에 따라서 그 패러디의 성공 여부가 달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를 패러디하면서 장난 식으로 하면 안되겠습  니다. 오히려 패러디는 독자에게 일정한 지식과 재능을 요구  하며 더 나아가서는 화자의 교묘한 말 재주를 알고 있다는 식  의 지적 만족감을 독자에게 안겨주어야 합니다.  이성복님의 의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의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나는 당신이 떠나야할 줄 알면서도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이 시는 경어체의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가 갈데 없이 만해  한용운님의 시 을 상기시킵니다.  역시 한용운의 시 을 패러디화한 장정일의 의 부분을 소개할 테니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 노상에서 태어나 노상에서 자라고  결국 노상에서 죽는다. 하므로 우리들은 진실이나 사랑을 안  주시킬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끝에 끝없이  길을 만들고, 우리가 만든 그 끝없는 길을 간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다. 하므로 만났다 헤어질 때의 이  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100%< 우연에,바쳐진,  세대다.  이 작품은 이론과 문학의 언술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질 만큼  이론적이고 웅면적이며 그 어조가 선언적입니다. 이는 세대론  인데 과거와 현재와의 차이성, 이질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해 시대의 만남은 필연적이고 목적적이지만 의 만남은 우연적이고 목적적이 아닌 하나의 과정일 뿐입  니다.  과거의 전통 장르나 특정 작품을 모방하는 것은 패러디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은유와 함께 패러디는 70년대  이후부터 현대시에서 부쩍 많이 채용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김지하가 판소리를, 신경림이 민요를, 이동순.하일 등이 조  선조 후기의 서민가사를 채용했듯이 특히 민중시는 전통  구비문학 장르들을 패러다화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패러디를 더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  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패러디화한 시를 만나면 이 시  가 남의 것을 흉내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하에 패  러디한 시라는 것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말놀음(pun)  말놀음 즉 펀이란 표기는 같지만 두 가지 이상의 뜻을 가진  낱말의 사용,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낱말의 사용 등  독특한 낱말 구사로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표현법입니다.  여기서 송욱님의 의 한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시한 是是非非~  하늘처럼 하늘대는~  외마디를 마디마다~  民主 注意(칠)~  따라서 따라가면~  쌀쌀한 쌀~  데모하는 아아 데모크라시~  李朝末葉이 우수수 진다~  이 시의 시구들은 모두 표기는 다르나 발음이 같은 낱말들  을 재치있게 구사하였읍니다. 곧 음은 같으나 의미가 다른  말들을 사용하여 본디 낱말의 의미를 변용시키고 있는 것입  니다.  또 이와는 좀 다르지만 조승기님의 을 읽어  보겠습니다.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헤어져 나만 홀로 남아  어  거지  푸성귀에서 뜯어낸 잎으로  국 끓여 먹고 살자니  우  거지  식사 후 그릇 모아  깨끗이 씻는데도  설  거지  그래 나는 거지다  조시인은 아내와 헤어져 두 딸을 데리고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이런 펀의 기법으로 많은 시를 썼습니다.  ⓓ축소법  축소법이란 진술된 겉보기의 표현은 시치미를 떼듯 부드럽  거나 약하지만 의도하고 있는 속내의 의미는 오히려 강경한  표현법입니다.  여러분께서 너무나 잘 아시는 김소월님의 에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여기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는 오히려 배신하고  떠나는 님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실은 것입니다.  앞 서 예를 든 조승기님의 시 의 부분을 읽어볼까요.  술이 참 좋아요  모든 걸 잊게 해주거든요  그 여자 이름이 생각 안나  얼마나 기뻤다구요  여기에서 '그여자 이름이 생각이 안나/얼마나 기뻤다구요'  는 결코 그여자를 잊을 수 없어 가슴 아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축소법도 시에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과장법  과장법은 의도하고 있는 속내의 의미보다 겉으로 진술된  표현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격렬한 수사법을 말합니다.  김수영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그녀는 도벽이 발견되었을 때 완성된다  그녀뿐 아니라  나뿐이 아니라 천역(賤役)에 찌들린  나뿐만이 아니라  ..........  그녀가 온지 두 달만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여기서 '그녀는 도벽이 발견되었을 때 완성된다'는 진술은  일의 정황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린 것을 우린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60년대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남의 집에 식모  사는 일이 많이 있었는데 이 때 식모들은 도둑질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화자가 어느날 자기집 식모의 도벽이 발견되었을 때  사회 통념이 사실로 확인됨에 따라 비로소 가족답게 되었다는  부풀린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2)상황의 아이러니  여기에 속하는 아이러니의 종류만 말씀드리구요. 깊은 강의  는 생략하겠습니다.  오히려 혼동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극적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는 주로 비극이나 희극 같은 연극 가운데서  발견되는 아이러니고 극의 결말을 관객은 알고 있는데 주인  공들은 모르고 행동함으로서 빚어지는 아이러니입니다.  ⓑ실존적 아이러니  인간 존재의 내적인 모순이나 세계 내의 부조리를 발견하고  느낄 때 인식되는 아이러니입니다.  언젠가 한 번 올렸던 신경림님의 가 여기에 속합니다.  ⓒ낭만적 아이러니  ⓓ시적 아이러니  말의 아이러니는 알아두시는 것이 좋구요.  상황의 아이러니는 이런 말도 있다더라는 정도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읽어 보세요  비에 관한 명상 수첩 / 이외수  1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2  비가 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3  비는 뼛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4  빗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5  우리가 못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이  언제나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     그저 그런  ―백상웅(1980∼)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가방이 뜯어졌다./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밑바닥이 찢어져 더이상 제구실을 못할 정도로 오래 들고 다닌 가방. 가방이 찢어져 그 안에 든 것이 우르르 쏟아지는, ‘대략난감’한 사태를 모티브로 화자는 가방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본다. 그런데 당최 빛나는 일도, 신나는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 흔들리고 덜컹거린 일뿐.    가만히 가방을 보면 생활이 보인다. 재질이나 상표나 디자인 같은 겉모습도 그렇지만, 그 안에 든 물건들이 가방 주인의 삶을 보여준다.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항상 끼고 있었던, 가방은 알고 있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짖다가 그만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화자의 삶을. 내가 달리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방조차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지. 나름 열심히, 밑바닥이 입을 벌리도록 살았지! 그동안 애썼다. 고마웠다. 잘 가라, 가방이여, 내 청춘이여!  전망 없는 세대의 비관을 애면글면하지 않고 권태롭게 펼쳐 보여 시니컬한 맛이 난다. 사실 삶이라는 게 행복도 낭만도 없는 거 아니야? 그저 그런 것. 그게 현실이지. 휴학을 밥 먹듯 하고, 하루 세 차례 아르바이트를 뛰며 하루하루 발목 잡혀 사느라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88만 원 세대’의 마음풍경이다.  
1589    정지용 시인과 향수 댓글:  조회:3950  추천:0  2016-08-18
[박한범] = 정지용 시인은 충북 옥천이 고향이다. 그의 시 중 대표작인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제된 언어로 잘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후렴구의 반복으로 그리움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해냈다. '향수'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억압과 수탈에 시름하던 민족 현실을 대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전 국민이 애창하는 시로 더욱 사랑받고 있다. 윤동주 생가에 정지용 시비 건립  최근 중국 연변에 있는 윤동주 생가에 정지용 시비가 건립된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이 윤동주 시인보다 15세 연배가 많지만 두 시인은 일본 동지사대학(도시샤 대학)에서 함께 수학한 인연이 있다. 옥천군은 2005년 일본 동지사대학의 윤동주 시인 시비 옆에 정지용 시인의 시비를 세운 바 있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정지용 시인의 시를 높이 평가해 그를 멘토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 뒤 정지용 시인은 1947년 에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가 발표될 때나 유고시집 가 간행될 때 소개문이나 서문을 쓴 사실은 두 시인이 각별한 사이임을 뒷받침한다.   우리를 배회하는 친일문제  올해는 광복 71주년이 되는 해다.  ... ...  이렇듯 친일 문인들이 조국분단의 아픔을 이용해 슬며시 자리 잡으며 명성을 얻은 것에 반해, 정지용 시인은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조치 될 때까지 그의 시는 문학사에서 언급할 수가 없었다. 암울했던 시대 일제와 협력을 거부해 칩거하며 문학적 양심을 지켜내신 분을 너무 무심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노래에 화답을  예술 작품에서 '누구의 것이 더 훌륭하다'라는 것은 향유자의 주관성이 높아 적절치 않지만, 일신의 영달을 위해 예술적 재능을 일제 부역자에게 넘긴 문학인보다야 지조를 지키고 후진들을 등용시켜 현대시 발전에 기여한 정지용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문인이자 우리 고향이 낳은 정신적 자산이 아닌가 한다.  광복 71주년이 되는 올해부터라도 정지용 시인의 고향인 옥천과 충청북도에서는 시인에 대한 연구와 추모제, 문학제 등 행사를 지금보다 더 활발히 하여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한 가운데인 1927년, 정지용 시인은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노래했다. 광복 71주년이 되는 지금, 그의 고향인 충북은 누구보다 먼저 정지용 시인의 노래에 뜨겁게 화답을 해야 한다.  
1588    詩作을 할때 위장술(아이러니)을 변덕스럽게 사용하라... 댓글:  조회:4478  추천:0  2016-08-18
[36강] 시와 아이러니.1  강사/김영천  오늘부터는 아이러니와 역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시인이면서 동국대학교수로 계시는 홍신선 박사님의 글을 참  고로 하시겠습니다.  1.아이러니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들과 이성과 감정, 주관과 객관, 개인과 집단, 절대와  상대 등 우리의 삶과 세계 속에는 근본적이면서도 우리가 해  결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삶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반된 두개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그 하나는 합리적 의미와 가치,합목  적성의 세계이요. 다른 하나는 우연이나 부조리로 인식되는  불가지적인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 같아도 아주 긴밀  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 두 체계는 서로 모순 대립이 되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은 아이러니를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좋게 우선 이런  장황한 말을 늘어놓습니다만 혹시 철학 강의가 아닌가 할지도  모르겠군요.  1)아이러니의 어원과 정의  우린 여러 사람 앞에서 설명하라고 하면 약간 곤란한 지경에  처하긴 하지만 아이러니란 말을 많이 듣고 또 써왔으리라 믿  습니다.  아이러니는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파생된 말로 "은폐"  즉 감추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본래의 모습이나 실제를  숨기는 철저한 위장술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들은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언어이지만, 그 당시 그리  스의 희극에 주인공으로 에이론(eiron)이 등장하였는데 이  주인공의 성격이 겉보기에는 유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면서도  현명한 체 허풍떠는 알라존을 늘 골탕을 먹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닌척 하는' 이라는 의미가 더 생겼다고 합니다. 또 이 말  은 '모른 척 하는"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엉터리로 하거나,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아주 잘났어"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 잘 났다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못났다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과 실제 속내의 의미가 정반대인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것이 풍자나 비꼼과 거의 같게 생각하지만, 풍자는  보통 상대의 부도덕이나 악덕을 강하게 공격하고 비판하나  아이러니는 그 공격성이 아주 미약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W.워스워드의 의 전문  을 이상섭 번역으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땅 위에 저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떨리게 장엄한 저 광경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정녕 영혼이 무딘 이어라.  도시가 아름다운 아침을  두루마기처럼 입었구나. 말없이 벗은 채로,  배, 뾰쪽탑, 둥근 지붕, 극장, 사원들이  들판으로 하늘로 열려 있구나  한 점 연기 없는 대기 속에서 반짝이면서,  태양이 그 첫 광채로 계곡 바위 언덕을  저보다 더 곱게 물들인 적이 있을까?  저처럼 깊은 고요를 나 일찍 맛본 적이 없다!  강물은 스스로 착한 뜻 따라 미끌어 간다.  놀라와라! 집들마저 잠든 듯하다  그리고 저 웅대한 심장이 통째로 조용히 누웠구나  이 작품의 화자는 탬즈강 위의 웨스트민스트 다리 위에 서서  잠든 도시의 시가지들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보진 못했어도 가끔 사진으론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아무래도 여기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없습  니다. C. 브룩스의 이야기를 참고로 해보겠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시는 두 겹의 아이로니를 내장하고 있다  합니다. 하나는 근대문명의 대표적 산물인 도시 자체가 보여  주는 매우 이질적인 요소에서 인지되는 아이러니로 곧 깨어  나서 활발하게 북적대는 도시가 실은 가장 죽은 상태이고  오히려 죽은 듯 고요한 순간의 도시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다는 것이 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문명과 자연의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서 빚  어지는 아이러니입니다. 즉 자연과 문명은 서로 상극적이면  서도 그 둘이 서로 보완될 때 자연보다 문명이 더 아름다운  것이라는 시적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김광규님의 의 일부를 읽겠습니다.  한 줄의 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사료)가 될 것이니  이 작품은 화자가 시적 대상인 묘비에 대하여 맘먹고  비아냥대는 진술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곧 화자에 의하여  의도된 아이러니의 담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질  높은 정신의 삶보다는 세속적 가치(부귀와 명예, 권력 등)  만을 추구한 속물적 인간이 도리어 성공한 듯 기려지는  세상을 비록 소극적이지만 아이러니 형식으로 공격 비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의 이론이 아주 복잡하지만 모두 생략하고  아이러니의 유형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지요. 물론 유형도  학자에 따라 분류가 다 다르지만 여기서는 홍신선의 분류  를 따릅니다.  크게 말의 아이러니와 상황의 아이러니로 나누고  말의 아이러니에는 풍자,패러디,말놀음 등이 있고  상황의 아이러니엔 극적 아이러니, 실존적 아이러니, 낭  만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1)말의 아이러니  일반적인 의미의 아이러니를 말합니다.  겉으로 표현한 것과 속으로 의미되는 것이 상반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의 아이러니는 보통 시인이나 시 속의 화자가  아이러니를 기획하고 의도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말의  아이러니 속에는 풍자, 패러디, 말놀음(pun), 축소법과 과  장법이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풍자:풍자는 사회적 부조리나 인간생활의 결함, 악덕,  어리석음 등을 드러내어 비꼬고 조소하는 아이러니의 한  형태입니다. 아마 요즘 각종 언론 매체나 책들이 정치풍자  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풍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김영태님의 의 전문을 읽겠습니다.  한 아이는 꽃처럼  밤에 피어 있다  무척 두려울 것이고  처음으로 꽃으로 밤에  피고 있다.  葬禮式(장례식) 날엔 비가 내렸다  멜빵끈을 잡은 환도도 서 있다.  그 옆에 죽은 리스도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서 있다.  솔 담배를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대여섯명  이 시는 결혼과 장례라는 사람의 두 가지 큰 통과의례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약간의 두려움 속에서 성인으로 꽃  을 피우는 결혼과 모두가 황망한 가운데 슬픔에 젖는 장례  의 상반된 정황과 의미를 한 작품의 공간에 나란히 두었  습니다. 이 상반된 상황이 이야기하는 극단의 부조화를  통해서 우리는 정말 쓰디쓴 아이러니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과 비슷하게 지나치게 순진하고 무지한 사람과 매  우 약고 현명한 자가 동일 상황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는  순진과 무지에 의하여 현명한 자의 위선이나 편견이 폭로  됩니다.  또한 자기비하, 혹은 자기폭로의 아이러니는 풍자가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형편 없는 모습  이나, 위선, 편견, 어리석음 등을 보여주고 드러냄으로서  겸손한 척 은근히 안그런척 독자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김수영님의 의 일부를 읽어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나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 시는 자기를 戱畵化(희화화)하여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역으로 상대의 우스꽝스러운 약점을 찌리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냥 시에서 드러나쟎아요?  그렇지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그대로 입니다.화자가 자신의  옹졸함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면서 여지없이 폭로하는 형식  을 취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이발쟁이나 야경꾼에게 그것도  돈 몇 푼에 반항하고 있는 화자 자신의 옹졸하고 비겁한  모습을 직접적인 진술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철저하게 풍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 화자는 역으로 독자들의  반성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       지우개  ―김경후 (1971∼ ) 1 자정의 책상엔 지우개 또는 얼룩진 종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한때 사람들은 빵 조각으로 글씨를 지웠지 빵이 아니라 망각을 달라 2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 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3 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 화자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추악하고 고통스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기억이 난다. 제 잘못은 아무리 무거운 거라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화자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화자는 예민하고,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다.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기억을 지운다는 건 그저 숨겨버린다는 게 아니라 참회한다는 의미도 있다.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지웠다는 기억!’ 화자가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으면, 그 속이 썩어 문드러졌으면, ‘잿빛 성체’가 가루가 됐을까. 죄의식의 고독이 절절히 전해진다. 화자처럼 나도 잊고 싶은 일이 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 시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게 돼버렸다. 폐쇄회로(CC)TV나 e메일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등에 우리의 행적이 기록되고 보존되고 심지어 유통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너무 놀라지 마시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뒤통수를 치더라도.  
1587    詩作할때 <<...것들>>로 잘 장식하라... 댓글:  조회:4313  추천:0  2016-08-17
[34강] 비유의 종류.2 강사/김영천 3)치환은유와 병치은유 미리 말씀 드리는대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까진 깊이 알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교재로 보고 있는 책에 나와 있어서 아주 간단한 소개로 끝낼까 합니다. 치환은유는 우리가 어제 배운 은유를 말합니다. 즉 A는 B이다 하는 일종의 서술형식을 가졌지요. 아리스토 텔레스가 내린 정의처럼 한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여 만드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은유가 바로 치환 은유입니다. 황지우님의 을 한번 읽어보지요. 한 점 죄(罪) 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이 시에선 원관념은 '가을 하늘'이고 보조관념은 '거대한 거울'입니다. 결합 방식도 'A는 B다'라는 전통적인 서술형 식이며 두 대상은 서로 유사성이 있습니다. 거울과 가을 하늘과의 유사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맑고 투명함이 우선 유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울이 우리의 겉모습을 비추어준다면, 가을하늘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양심을 비추어줄 것입니다. 이 시처럼 치환은유는 두 대상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원관 념이 보조관념으로 전이하여 시적 의미를 확대시키고 의미 의 변용을 만들어내는 은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치은유는 무엇일까요? 병치은유에서는 치환은유에서 보여준 유사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이질 적인 대상들이 병렬과 종합의 형태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김춘수님의 시 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純潔(순결)이다. 三月에 젊은 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이 시에선 원관념이 하나님이고 이 원관념을 비유하고 있 는 다른 대상들은 자연스러운 결합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보조관념들끼리도 전혀 아무 런 유사성이나 모방적 요소 없이 각기 독립적으로 늘어서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병치은유는 전혀 다른 대상들, 현실 속에선 결코 아무런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것들이 창조적인 시적 공간 에서 서로 만나고 관계를 맺어서 새로운 의미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남다를 상 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강의 초미에 말씀드린 바대로 그냥 은유만 알아두시고 치환은유나 병치은유는 그런 구분이 있다더라 는 정도만 알아두십시오. 4)환유와 제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환유는 종과 속의 대치 이론에서 종에 적합한 것을 속으로 사용할 때 환유에 해당된다고 했 습니다. 또 환유는 오히려 은유와 대립되는 은유의 형식이 라고 야콥슨은 말하기도 했지요. 너무 어려운 설명이라 저 도 좀 당황스러웁네요. 쉽게 풀어보지요. 이는 대상의 일종으로 어떤 사물을 나타낼 때 그 것과 관 계가 깊고 가까운 낱말을 빌려 표현하는 비유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에 금뱃지가 왔어" 라 하면 국회의원이 왔다는 이야기로 모두에게 통합니다. 여기서 금뱃지는 국회 의원을 대신 말하고 있는 환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하는 것도 환유입니다. "별"이 장군을 의미한다던지, "사각모"가 대학생을 의미한다던지, "상아탑"이 대학을, "백의의 천사"가 간호사를 의미하는 것이 환유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윤동주님의 을 읽어보지요.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를 보면 우린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고도 여기에서 쓰인,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 '흰 띠' 가 백의민족인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것을 금방 알아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백의가 우리 민족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는 환유입니다. 이제 환유에 대해선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고 제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유는 은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한 부분(보조관념)이 안으로 숨어 있는 전체(원관념)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드러나 있지 않은 전체를 그 사물의 일부분으로서 대신 표현하는 방법인 이 제유는 은유의 일종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빵"은 다만 빵집 의 빵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 먹을 것 전체를 대신 가리키는 제유인 것입니다. "푸른 눈"이 서양인을 가리키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호승님의 을 읽어보실까요.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우리들 서울의 전쟁과 평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꿈조차 지우는 밤이 와서 우리들 함께 자는 여관잠이 밤비에 젖고 찬비 오는 여관잠의 창문 밖으로 또 다시 세월이 지나가도 사랑에는 사랑꽃 이별에는 이별꽃을 피우며 노래하리라 비오는 밤마다 목마를 때 언제나 소금을 주고 배부를 때 언제나 빵을 주는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우리들 서울의 꿈과 눈물 여기에서 등장하는 '빵'은 아까도 말 했지만 먹을 것, 음식 의 전체를 대신 표현하는 제유입니다. 오늘 강의한 제유나 환유가 시에서 그렇게 많이 쓰이는 것 들이 아니므로 이 것 역시 치환은유나 병치은유처럼 있다는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니라도, 여러분은 이미 시 창작에 대해 전문적인 강의를 받고 계심으로 비유의 종류로서 그 내용 정 도는 가볍게라도 알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서 강의합니다. 좋은 시 몇 편 읽어보기로 하지요 공혜경님의 시 을 읽겠습니다. 깻단을턴다떨어지는깨알깨알로흩어져서 깨알로박혀서깨알의소리를여물지않은선소리까지 멍석에털어놓는다깍지를벗어나앞다투며등떠밀리며 세상수면위로떠올라서죽정이는죽정이대로알갱이는 알갱이대로뿌리를뿌리내릴터를찾아찾다가노르끼한 태깔로반짝이는씨눈을뜨고서깨알같은세상살이구구한 세상에고소하게고소하며볶아치며애태우며 진까지빼내어반들반들기름두르듯그렇게자르르르 한세상을 정호승님의 를 읽어보기로 하지요.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 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다음은 홍윤숙님의 입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는 스무 살 키는 중키 아직 태어난 그대로의 분홍빛 무릎과 사슴의 눈 둥근 가슴 한 아름 진달래빛 사랑 해 한 소쿠리 머리에 이고 어느날 말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십 년 안개 속에 묘연 누구 보신 적 없습니까 이런 철부지 어쩌면 지금쯤 빈 소쿠리에 백발과 회한 이고 낯설은 거리 어스름 장터께를 헤메다 지쳐 잠들었을지도 연락바랍니다 다음 주소로 사서함 추억국 미아보호소 현상금은 남은 생에 전부를 걸겠습니다   ==============================================           것들 ―이하석(1948∼ )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낸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운다 우리가 버린 것들을 바다 역시 싫다며 고스란히 꺼내놓는다 널브러진 생각들, 욕망의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 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 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 그것들은 우리 편도 아니다 더욱 제 몸들 부스러뜨릴 파도 덮치길 겁내며 몇 번이나 우리의 다리를 되걸어 넘어뜨린다 여름 홍수에 그런 것들 거세게 바다 파고 들지만 바다는 이내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 내놓는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워야 한다         지하방만큼은 아니겠지만 대개 날림으로 지어진 옥탑방도 폭우의 습격에 취약하다. 짧은 처마 밑에서 벽은 직격으로 퍼붓는 비를 흠뻑 머금어 벽지가 축축이 젖어 있다. 방 한가운데 누워 천장의, 질금질금 영역을 넓히는 한 뼘 얼룩을 바라본다. 모래로 지은 듯한 옥탑방에서 폭우 소리를 듣는다.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사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는 홍수 뒤 물 구경을 갔었지. 한남대교 난간에서 고개를 내밀고, 싯누런 강물이 포효하며 맹렬한 속도로 끝없이 지나가는 광경을 봤지. 상류에서부터 휩쓸려온 온갖 것이 어디로 떠내려가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 바다는 모든 것 받아줘서 ‘바다(받아)’일까? 아니다. 바다는 받아주는 척할 뿐 받아주지 않는다. 해변에는 스티로폼 박스나 페트병이나 망가진 그물, 소주병, 동물의 사체 같은 것이 널브러져 있다. 바다가 밀어낸 그것들은 원래 바다의 것이 아니다. 인간 욕망의 잔해다. 우리는 욕망하고 그 잔해, 내면의 더러움을 비롯해서, 모든 더러운 찌꺼기를 바깥으로 치워버린다. 바다로 떠내려 보낸다. 그리고 깨끗해진 줄 알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 더러움이 사라진 게 아니다. 바다는 우리가 쏟아버린 더러운 것들을 저도 싫다고 제 바깥, 우리에게 끝없이 되밀어낸다. ‘인간이 맹렬히 제 발밑만 생각하고 살아서 세상이 맹렬히 더러워진다’고 시인은 말한다.     
1586    詩作을 할때 살아있는 은유를 포획하라... 댓글:  조회:4712  추천:0  2016-08-16
사천성 모 수영장 피서객 인산인해 [ 2016년 08월 15일 11시 01분 ]     사천성 기상대 8월 14일,고온 등황색 조기경보 발령.최고 기온 섭씨 37도~40도. 서녕 대영현 중국 "사해"관광리조트 수영장 피서객 6000여명~~~ [33강] 비유의 종류.1  강사/김영천  오늘부터는 비유의 종류에 관해서 공부하기로 하지요.  비유에는 우선 직유,은유, 환유, 제유, 의인화, 풍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는 비유적 이미지를 설명할 때 이미 말씀드  렸습니다만, 여기에선 보다 세밀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1)직유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말합니다. 특별히 유사하지  않은 사물들을 ~같이,~처럼,~듯,~보다 등의 연결단어를 통하  여 직접 비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유의 특성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표면에 그대로 드러남으  로서 원관념의 구체성을 얻게 합니다. '목소리'라는 원관념과  '은방울'이라는 보조관념이 위에 열거한 연결단어에 의해  "은방울 같은 목소리"라는 직유의 모습을 띄우면서 '목소리'가  은방울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구체성을 얻습니다.  여기에서 보조관념은 자기의 특질이나 속성을 그대로 지니  면서 원관념의 의미나 특징, 성격,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표현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얼마간의 유사  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유의 형태가 단순하기 때  문에 독자로 하여금 고도의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많이 요구해야 좋은 시인 것으로 볼때  직유는 은유에 뒤떨어진 비유의 방법입니다.  또한 지난 시간 연속 말씀 드렸지만, 죽은 비유는 결코 써서는  안되며, 참신성이 있고 신선한 비유를 써야 합니다.  고미경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내 몸의 깊은 안 쪽에는  허리선이 버선볼 같은 강 하나 살고 있네  그 강물 속 맑기가  가을 햇빛 같아야만,  그 강물 속내가  어린 것에게 젖물린 어미 같아야만,  그대 전체!  나에게 살포시 보여주는데  강물의 한 끝을 닦아오는 사이  허리선이 버선볼 같은 강둑에는  들꽃들 하나 둘 찾아와 서로 사랑하더니,  철철이 아기꽃들이 태어나더니,  강물은  들꽃 향기로  들꽃 그림자로 흐르네.  위의 시에서 직유의 표현을 한 번 지적해보십시오.  원관념은 '강'이 되겠구요, 보조 관념은 '버선볼'  이 되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강물'을 원관념 '가을 햇빛'과  '어린 것에게 젖물린 어미'를 보조관념으로 보는  직유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인의 시각은 결코 흔하지 않은  개성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가벼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시를 쓸 때 이렇듯 개성적인 시각으로 사물들을  포착하고 그 것들의 동일성을 발견해냄으로서 살아있는  좋은 비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2)은유  최문자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시적 미학  은 새로운 인식과 시적 사유에서 탄생한다. 시가 사실을  사실대로 사진 찍듯 찍어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시가  만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설하는 일이나, 철저히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개인적으로 읽는 따위의 현란한 우리 문학 풍  토에서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즉 시가 어떤 사실을 그대로 복사하듯 표현한다는 것은  다분히 비창조적이고 다만 개인적인 푸념이나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시라는 것  입니다.  은유도 그 구조가 직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되어  있으나, 직유의 ~처럼, ~같은,~ 듯이 와 같은 매개어가 없  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런 매개어가 없기 때문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하여도 비유는 숨은 형태로 나타  나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미도 또한 직유와 다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서로 충돌하듯 결합하고 이 때 일어  나는 상호작용은 물리적 반응이 아닌 화학적 반응을 함으  로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유란 말을 메타포(metaphor)란 영어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의미의 전이(轉移) 즉 의미의 자리  옮김이란 뜻이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은유를 가리켜 "어떤 사물에다 전혀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metaphor가 meta(초월)와 phora(옮김)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은유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시인의 직관과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은유에 대해" 이 것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라고 말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김광섭님의 전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白鳥(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이 시에서 마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시적이고 구체적  인 수단을 통해 구상화 하였습니다. 아주 흔한 은유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물은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낙엽 한 장이 떨어지거나 물방개 한 마리만 지나가도 작은  파문이 입니다. 여기에 바람이 불거나 돌을 던지면 아주  커다란 파문이 일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물은 늘 제 원상을  회복하려는 성질이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 표면이 잔잔  하고 고요해지려는 것이 물의 특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구요. 우리가 '세파'  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인생을 물결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온갖 일에 흔들리기 쉬운 마음도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해지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조태일님의 해설을 들어보겠습니다.  " 위 시에 나타나는 은유는 원관념인 '마음'과 보조관념인  '물결'이 각기 이질적인 대상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유사성  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과 물결이 서로  충동하듯 결합함으로써 이 두 대상을 각기 떼어놓고 보았  을 때와는 다른 긴장감과 탄력성은 물론이거니와 불투명하  고 모호한 '마음'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며 관념에서 벗  어나 투명한 육체성까지 형성하게 된다"  오늘 은유에 대해서 공부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조태일님  의 말도 다 시인의 직관과 상상력에 밑바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은유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시를 살아나게 함을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좋은 시는 얼마나 좋은 은유로 구성되어 있는 시인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기 시 몇 편을 소개해드리니, 그 시들의 은유가 어떻게  살아있는가 여러분들 스스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고은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죽은 그대 이 세상에 두고 사는 일이  내 일입니다.  어느 날은 그릇 깨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고욤나무 열매 떨어지면서  내가 사는 일입니다.  죽은 그대 섬겨서  나와 함께 긴 겨우살이 사는 일이  내 일입니다.  어제 눈이 내렸습니다.  그대를 내 가슴에 두고 먼 데까지 부르니  그대가 열두어 살 단발머리로 달려왔습니다.  그대와 함께 살며  어제와 오늘 눈이 내립니다.  이것이 내 일입니다.  아니 여러 사람의 일입니다.  죽은 그대라는 그리움 하나가 나라입니다.  다음은 강은교님의 입니다.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배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다음엔 『문예연구』2001, 가을호에 실린 조말선(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내 낯바닥에 내가 방사하는 눈물 내 길바닥에 내가 방료하  는 열두 시 내 손바닥에 내가 방목하는 손금 나는 또 다시  내 눈물 속으로 돌아간다 누가 전원을 내려주기만 한다면  이 엘리베이터가 허공에서 멈출텐데 매 분 매 초 절정일텐데  나는 또 다시 내 손금 속으로 돌아간다 내 심장에 내가 투석  하는 혈액 돌아오고 돌아오는 현관 내 혓바닥에 내가 굴린 말  마지막으로 허형만 교수님의 를 올립니다.  슬픔 하나가 향로 속에서 더는 타지 않기 위해 차라리  무너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일곱 시간 만에 도착했다는  문상객이 머리와 외투에 덮인 하이얀 시간의 비늘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말년에 무일푼이셨던 아버지는 슬픔 하나 유산으로 남  기셨다 빛났던 날들 눈처럼 쌓였다가 서서히 얼어붙으니  그래 머쟎아 녹아 흐르리라 흘러흘러 저승 바다 넘치면  끝내 이승의 내 발목을 적시리라  =========================================================     가족의 힘 ―류근(1966∼)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에게 반려자란 어떤 문제건 고민이건 의논할 수 있는 최상의 존재이리. 그런데 불륜이라 불리는 연애나 그 실연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털어놓나? 제 가장 내밀한 희락, 혹은 고통과 슬픔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인 아내와 나누고 싶은 마음 간절한 남자도 있으리. 하지만 차마, 절대로 입을 열지 못하는데 화자는 대단하구나. 속이 없거나 속이 바다같이 넓은 여인과 부부가 되어 속 편하게 사는 이 남자에게 부러운 마음 가득한 유부남들 계시리. 화자여, 장하구려! 어쩜 아내를 이만한 경지에 올리셨소? 민승기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신화 속 사랑독법’이란 강좌에서 청중에게 물었단다. “여자들은 킹콩 같은 남자를 원한다. 남자들은 어떤 여자를 원할까?” 체격이나 체력이나 크고 강한 남자에게 여자들이 남성다움을 느끼고 욕망한다는 말인데, 그렇다 치고, 남자들은 어떤 여자를 원할까? 그래서 선택할까? ‘사이보그 같은 여자’란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해주는 여자, 자기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 여자. 그러면서 예쁘고, 돈 있고, 학벌 있고, 능력 있고, 대화도 통하고, 애 잘 키우고, 섹시하기까지 한 여자! 거기에 더해 남자의 모든 결함을 감싸 안아 주는 여자!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사이보그 같은 여자가 어디 있나? 그러니 남자들이 항상 헤매는 것이라지. 가만, 이 시 속의 ‘쿨한’ 아내가 혹시 사이보그? 남자들 욕망의 구조를 꿰뚫어서 진풍경을 진경으로 만드네.    
1585    詩人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련금사... 댓글:  조회:4878  추천:0  2016-08-12
[ 2016년 07월 20일 02시 55분 ]     드론스타그램(Dronestagram)의 제3회 드론 사진대회 수상 작품 [32강] 시와 비유(比喩).3  강사/김영천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시와 비유에 대해 더 알아보겠습니다.  3.비유의 힘과 효과  비유는 우리가 외출할 때 아름답게 화장을 하듯 글을 아름  답게 꾸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닦아서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계 기구의 활용법을 잘 알아야  그 것들을 이용하기 쉽듯이 비유의 진정한 힘과 효과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오늘까지 강의를 들으셔서, 쉽게 설명하긴 어렵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이 것이다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  바로 그 것이지요.  사물, 상황,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 즉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관념까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지름길  입니다.  이제 우리가 학문적으로 다루니까 그렇지 시가 아니고도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눈이 작은 사람보다 간재미 같은 눈, 단추구멍 같은 눈이라  한다던지, 꾀꼬리의 목소리라 하는 것, 바람처럼 사라지다  라는 영화제목, 아마 말의 종류만큼 많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교인인데요.  성경말씀에도 비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구절 말고도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알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뿐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그렇다하니, 비유는 우리  에게 보다 알아먹기 좋게 하는 표현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 가운데 그 형식의 대부분이 시적 형식을  취한 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성경도 비유문학이라 할 정도로 비유가 많이 쓰이고 있습  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곁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일일이 예를 들지 않으니 여러분께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위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집착이나 망상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비유를 통해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장황스러운 설교조의 말보다 휠씬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 것  은 비유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 뜻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에 가면 목사님들의 설교도 그렇구요.  티비에 나오는 유명 강사들의 강의도 마찬가지인데요.  모두 다 좋은 비유를 통해 청중들이 쉽게 알아먹게 하려고  애 쓰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지요.  그렇듯 시 역시 시인의 통찰력과 인지력,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생동하는 언어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 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면서 독자  들을 시인의 세계 속으로 흡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시인이 의도하는대로 비유가 시 속에서 강력히  힘을 발휘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한 기능과 에너지가  최대한 살아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좋은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집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비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줍니다. 비유에 의해 사물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확대 심화시켜 나감으로  우리의 인습과 고정관념의 무지와 타성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까지 말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가 지니는 리얼리티(사실성)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둘째) 좋은 비유는 시인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을 쉽게  가시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대웅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  술취한 아버지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어딜 그렇게 올라 가세요.  낙엽 긁어 모으며 바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계곡  녹슨 세월의 송전탑  숨은 아들 대답하지 않는데  되돌아오는 메아리만 가슴을 태우는 山  자꾸 뭐하러 올라가세요  그게 아니다 애야 그런게 아니라고  붉은 손 흔들어 길 막는 너도밤나무  온통 아픈 울음 가득 토해내도  아버지 넘어지며 자꾸 넘어지며.....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비유이지요.  술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로 가을 산을  비유했습니다.  왜 이 시가 좋은 시가 되냐하면요.  우리는 보통 가을 산이라하는 시를 쓰거나 내용에 가을 산이  들어가게 되면, 불타오르는 산, 불꽃 같은 산, 열정, 열애 등  을 금방 떠 올리거나 그렇게 표현하기 쉽지만은 이 시인의  독창적인 눈으로는 아주 색다른 비유로 아버지의 술 취한  얼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것도 술에 취해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울면  서도 자꾸만 넘어지는 아버지의 슬픈 초상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시면서 아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만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세월의 산을 느끼시지 않습  니까? 늙어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습  니까?  셋째)좋은 비유는 풍부한 시적 의미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모양일까요? 그 것은 하나의 점이나 선일까요?  평면이나 어떤 도면 같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비유는 입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해집니다.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비유를 잘 아십니다.  보이지는 않고 코끼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코를 만진 사람,  다리를 만진 사람, 꼬리나 배를 만진 사람의 코끼리에 대한  설명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듯이  독자들이 그 시를 읽는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가 일단 발표되면 이젠 독자의 몫이 된  다고 늘 강조하는 것은 나의 해석과 다른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복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이방)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같 밑으로 大地(대지)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좀 어려운 시이네요.그러나 분석해보지요.  여기서 원관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입니다.  그 원관념에 대한 보조 관념이 '짐승', '별', '정적'.'꽃씨',  '정적', '죽음','순간','머나먼 곳','내 손가락 끝' 등  여러가지이지요.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 밖에 없지만 이 시에서는 당신이란  원관념에 대해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키면서 '당신'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결합하는 보조관념의 대상들까  지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좋은 비유는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 있습  니다.  사실,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지 않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지요. 시를 읽어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 시  라면 그 것은 죽은 시 아니겠어요?  요즘은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실험적인 경향이 있어 현재  의 시경향을 해체시켜버리려는 의도도 있고요. 감동보다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효용론에 입각한 주장도 있지만 저는  일단 시는 감동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좋은 비유로 쓴 시는 마치 수문을 열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  우리의 감동이, 정서가 밀려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대흠의 이라는 시의 전문을 읽겠습니다.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  상 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 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그  곳에서 탕, 탕, 탕, 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너무 잘 쓴 글입니다. 봄을 '전쟁'과 결합시킨 이 당돌한  비유는 놀라운 발상입니다. 봄을 맞은 나무들이 꽃망울을  머문 것은 장전한 총이고 마침내 사격 개시와 더불어 사방  의 꽃들이 나무들이 꽃을 피워내는 것을 탕, 탕, 탕, 탕  사격하는 것으로 비유해냈습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힘은  우리의 정서를 강한 충격으로 때려줍니다. 우리가 전쟁이  라 하면 혐오하지만 이러한 꽃들의 전쟁에는 함께 하고싶지  않으십니까?  다섯째) 좋은 비유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원근님의 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밤에  눈물이 많았던 누군가  목선을 타고  바다로 간 것일까?  풀잎마다 가득  바람을 먹고 있는  돛자락들.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우리가 '이슬'이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맑고 투명한 것, 영  롱하게 빛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이 '이슬'  에서 '돛자락'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돛'  은 바람을 받아 배를 가게하기 위하여 돛대에 높게 펼쳐 매단  넓은 천인데, 이슬을 돛자락에 비유함으로 예전에는 결코 느  낄 수 없었던 광활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이슬에서 발견하  게 된다. 마치 푸른 바다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흰 돛자락  인 양 '이슬'이 한없이 크고 넓게 느껴지기 조차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좋은 비유는 시적 대상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역시 시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동주님의 전문입니다.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고향인 해남이 고향이신  이동주님의 시로 해남 대흥사 입구에 시비로 서있습니다.  다음에 해남 대흥사에 가시는 분들은 주차장 앞에 이 시  비를 보시면 강의를 받던 기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강강술래를 돌고 있는 모습이 한 폭  의 그림처럼 떠오르지요?  그들을 여울에 몰린 은어떼로 비유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달빛에 비추인 가녀린 팔목들을 여린 삐비꽃의 하얀 속살로  비유한 것이라던지, 강강술래의 원을 하늘에 떠 있는 달무리  로 비유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비유들은 훨씬 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특질을 선명하게 드러내줍니다.  또한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나 '열두발 상모가 돈다'나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등의 비유는 춤을 추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할 뿐만 아니라 그 춤의 역동성을  잘 나타내주어 독자로 하여금 절정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좋은 비유가 얼마나 시를 살려주는가 위의 여러 예들로  잘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옮겨 표현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비유를 독창적인 것으로 창조해 표현  한다면 여러분들도 분명 좋은 시를 쓰시게 될 것입니다.  좋은 비유와 죽은 비유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시가 아니고도 우리가 보통 잘 쓰는 죽은 비  유를 몇 개 더 들어볼테니 여러분도 더 찾아보시고, 이런  류의 죽은 비유를 시에 사용하시면 안되겠습니다.  -사랑의 불꽃, 교통 전쟁, 입시 지옥, 증권 파동, 무거운  침묵, 달콤한 말, 자연의 숨결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  니다. 이런 은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처음엔 아주  멋진 표현이며 살아있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은유는 언어를 새로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되겠지요.  ==========================================================              환상의 빛  ―강성은 (1973∼)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여름’이라면 한평생을 사계절로 나눴을 때의 여름, 청춘을 뜻하는 것이겠다. 나무로 치면,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보고, 왕성한 식욕으로 햇빛을 빨아들이고, 폭풍도 뇌우도 제 생장의 기폭제로 삼아 더욱 싱싱해지고, 이윽고 열매를 맺기 시작할 시기. 그런데 화자는 오직 ‘옛날 영화를 보다가/옛날 음악을 듣다가’ 그 시기를 보냈단다.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보고, 음악이나 들으면서 몽롱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세상 편하고 달콤한 일이다. 앗,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보다 내가 더 나이를 먹어버렸구나! 화자는 화들짝 놀라며 자기가 현실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음’을 깨닫는다.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 연애도 취직도 장래를 위한 공부도, 따라서 실연도 어떤 실패도 좌충우돌도 없이, 아무짝에도 쓰이지 않은 청춘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다’. 우두커니 우거지는 그 현실을 미처 보지 못했네. 몇 세기 전 사람과 몇 세기 전 장면, 그 환상을 사랑하고 그려서. 그 빛이 눈을 가득 채워서! 이제 더이상 자기가 젊지 않다는 깨달음은 꽤 기를 죽인다. 젊음에 대한 안달과 젊음을 헛되이 보냈다는 이런저런 자책과 회한이 유난히 가슴을 찌르는 시기가 있다. 시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고뇌를 삭일까. 혹은 새길까.        
1584    詩作을 할때 죽은 비유를 멀리하고 배척하라... 댓글:  조회:4370  추천:0  2016-08-11
[ 2016년 08월 08일 09시 13분 ]     [인민망 한국어판 8월 8일] 복건(福建)성 천주(泉州)시 천강(泉港)구 하루(下爐)촌의 한 폐공장에는 10m가 훌쩍 넘는 굴뚝 두 개가 솟아 있다. 신기한 것은 그 굴뚝 위에 용수나무가 자란다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현지 공장의 굴뚝은 50년 전에 지어졌고 용수나무는 30년 전부터 자라났다고 소개했다. 나무 모자를 쓴 두 개의 굴뚝은 언론 보도가 나간 후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31강] 시와 비유(比喩).2  강사/김영천  2.죽은 비유와 살아 있는 비유  여러분들도 아마 좋은 시를 읽으시면 인지(認知)의 충격과  경이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시란 감상적  인 시로 감동을 주는 시 말고요, 비유와 상징, 그런 적절한  시의 장치가 많이 되어 있는 시를 말합니다.  이런 좋은 시들은 우리의 삶과 체험을 활성화시켜주고 풍요  롭게하여주지요.  전에도 "낯설게하기"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는데요. 그 이론도 깊이 들어가  면 어려우니까 우리와 관계 있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우리들의 일상은 대부분 고정되고 관습화되고 자동화된 인  식에 길들여져 있지요.말하자면 모두다 너무 익숙해져 버렸  다 이 겁니다.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을 보고 마치 우리는  그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위의 모든 사물들은 더 이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며 새로움을 주지 못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덤덤하고 낯익고 진부할 따름입니다.  서울에 산 사람들이 남산 타워나 6.3빌딩이라고 해보아야  무덤덤하고 낯익고 진부할 따름이지만. 그러나 섬마을 소년  들을 거기에 풀어놓으면, 온갖 생경함과 호기심 뿐일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낯 익은 것들 안에서 또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듯이, 예를 들면 남산을 가지 않아서 그렇지  그 안에 수 만, 식물과 동물들이 있습니다. 서울 시민 대  부분이 무심하게 지나는 동안 그 안에서 날마다 그 생명을  확산시켜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을에 가보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있지요.  시인의 눈은 이렇게 관습적인 태도와 자세에서 벗어나 사  물이 숨기고 있는 미지의 부분을 찾아내고 독자들 앞에 처음  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때 타성에 젖은 관습적 인식은  깨어지고 사물의 새로은 모습과 의미 앞에서 독자들은 경이  감과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남산 안에서 새끼를 친 산토끼나 꿩의 둥지를 보여준다면  아마 서울 사람들은 많이 놀랄 것입니다.  천연기념물 식물이 몇 그루 있는 것을 처음 발견한다면  온통 신문에서 또 대서 특필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낯설기를 하는데 물론, 그 형식에 변화를 주어  부호를 없앤다거나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행갈이를  마음껏 하는 등,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이런 것들은 또 요즘 너무 많이 시도 되어 그들 자체가  자동화되어버리는 감이 있지요.  그래서 그 내용에서 많은 비유적 장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비유는 시인이 자신만의 독특한 인식  과 상상력에 의해 미지의 사물을 우리 앞에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적 원리이며 표현 방법인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  하여 사물의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발견, 새로운 의미, 새로  운 인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모두가 결혼을 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롤 부부간의 신비감이 없어집니다.더 이  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해요. 무덤덤하고 낯익고 진부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지낼 수는 없  지요.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오기 전에 방 안의 가구를 바꾸어  놓는다는지, 맛있는 음식과 술 한 잔이라도 준비해놓는다  든지 이런 것도 참 좋은 방법입니다, 머리를 예쁘게 하고  멋진 옷을 입고 기다리는 것, 무드 있는 음악을 틀어놓  는 것, 이런 것이 다 낯설게 함으로 남편에게 새로운 기분  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나의 내면에, 전혀 남편이 모르던 것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멋진 시를 한 편 써서, 도시락에나 손수건 안에 수첩 안에  노트북 안에 사알짝 너어놓고,  당신의 칭찬만이 나의 가슴을 살찌게 하네요.  이런 글 하나 써놓으면 그날은 아마, 남편이 감격할 것입  니다. 그러다가 여기 저기 응모해서 합격하고 또 그러다가  등단하면,  아 내 아내가 시인이었구나, 그 마음 안이 온통 꽃밭이었구나  감격할 것입니다.  이 것이 시 안에서라면 아주 훌륭한 낯설게 하기입니다.  그 낯설게 하기의 제일 좋은 방법이 비유와 상징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써먹던 것도 한 번 써먹은 것은 잘 안통  하듯이(여기에 주로 주부들이시라 이런 예를 드는 것을 이해  하십시오. 남편들도 아내를 위해서 물론 이런 방법을 써야  하거든요)  비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유를 이루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상상력을 필요치 않는 상식 수준이거나, 습관화된 인  식 속에서 나온 것이거나, 너무 낯익어서 진부한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세계와 사물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경이감과  충격을 안겨주지 못할 것입니다.  잠깐 쉬었다 가지요.  모래성 사랑  한 아이가 하얀 백사장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따스하고 하이얀 모래를  가득히 움켜 잡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랍니다...  손을 들어올리자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별이랍니다...  아이는 흘러 내리는  모래를 막아 보려하지만  그래도 모래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련이랍니다.  다행히도 손안에는 흘러 내리지 않고  남아있는 모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움이랍니다.  아이는 집에 가기 위해 모래를  탁탁 털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손바닥에 남아있던 모래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추억이랍니다.  우리의 사랑이 정말 이렇지 않은가요?  우린 이런걸 사랑이라 부릅니다..  다시 강의에 들어갑니다.  위에서 말한 죽은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우리는 이 죽은 비유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와 같은 인생", "세월은 유수와 같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네", " 쏜살 같은 세월"," 샛별 같은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살결". "목석 같은  사내", "여자는 여우",남자는 늑대", "여자는 갈대""쟁반 같은 달", "사랑은 불꽃" "토끼 같은 아이들", 등은 이미 죽은 비유입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습관화되고 상투화되었기 때문에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에서는 이런 자동화된 비유, 죽은 비유를 멀리하고 배척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두진의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靜寂(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호심)아  조태일님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위 시에 나타나 있는 '꽃'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정열, 사랑, 황홀 등 자동적,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꽃의 모습이 아니다. 시인의 눈에 의하여 발견된  '속삭임', '울음',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비유는  우리가 예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꽃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때 솟아나느  정서적 충격과 황홀한 경이감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확대  시키고 타성에 빠진 우리들의 시각을 깨뜨리게 한다."  그러면 이런 결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것은 당연히 시인이 관습적이고 자동화된 죽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살아  있는 비유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박인환님의 을 싣습니다. 좋은 시 올리는 것들은 모두  전문(全文)입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랴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홍윤숙님의 를 읽겠습니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서 눈처럼 하얗게 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 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운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이미경님의 < 바람 속에 보낸 노래>  유달산 외곽도로 따라 갔더니  잎 지는 나무들 서 있었네  아침 안개 속에 서 있었네  나 상수리 나무 옆에 섰네  딸이여 안녕  당신도 안녕  깃털처럼 드디어 무게도 버리고  상수리 나무 한 잎으로  바스러지고 싶었네  유달산 외곽도로  외길 따라 갔더니  바다 있었네  비단 치마폭 바람에 살랑이듯  그렇게 있었네  나 목선 옆에 누웠네  효부도  현모양처도  그리고 매력을 꿈꾸던  내 여성도  신발 옆에 나란히 나란히  벗어놓고 가라앉고 싶었네  머리도 가지런히 눕고 싶었네  =======================================================       시상식 모드  ―박상수 (1974∼) 처음 만났지만 차라리 고백을 해버린다면 어떨까? 블랙 미니 드레스에, 펄 립글로스를 바르고는 예전부터 당신을 존경해왔어요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당신은 짓밟혀왔고 평생 자신과 싸워왔군요, 그래요, 알아요, 당신이 내게 오신다면 척추가 무너진 것처럼 인사할 거예요 하지만 상이라는 것은 이제 너에겐 내리막길만 남았다는 저주일 텐데   내내 눈감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네요, 무례하군 참으로 마이너한 에너지다, 오늘 이 자리는 묘하게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있어서, 모아놓으면 병이 돌 것 같은데, 나무들은 비틀립니다 새들은 낮게 날아요 비바람 속 미친 노파가 욕을 해대지만 여기는 스카이 그랜드볼룸 나에 대해 좀더 얘기해주겠어요?   사람들과 손키스를 나누며 당신, 드디어 당신! 녹음한 내 목소리를 억지로 들은 것처럼 벌써 오줌이 마려워, 나는 힙을 조금 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만족해주겠다는 표정으로. 이 시가 실린 시집 ‘숙녀의 기분’은 현재 대한민국 ‘청소녀(靑少女)’들이 사는 모습을 르포처럼 보여준다. 시들의 화자들은 전부 청소녀인데, 연배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시인이 어찌 그리 그들의 일상과 심리를 면밀히 알고 목소리도 생생하게 모사하는지, ‘희한하네!’ 싶을 정도다. 시인은 그저 취향과 호기심으로 그들 세계를 기웃거린 게 아니다. 학교, 학원, 독서실, 아르바이트하는 곳 등의 무대에서 청소녀들이 자신의 실태를 방백(傍白)으로 펼쳐 보이는 시편들은, 주위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눈에 띄지 않았던 평범한 청소녀들과 그들 삶의 심각한 열패감에 주목하게 한다. ‘‘(상품성을 갖춘) 숙녀’라는 기표를 획득하기 위한 우리 시대 소녀들의 계급투쟁 실패기’(시집 해설에서), 하지만 ‘숙녀의 기분’으로 ‘샤라랑, 샤라랑’ 씌어져, 칙칙하지 않다. 도태되지 않으려 각고의 노력을 해서 어른 세계에 진입한 화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시상식장에 한껏 매력적으로 차려입고 참석한다. 주눅이 들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마음으로 화려하고 의례적이고 지루한 주위를 둘러보며, 화자는 그날의 주인공인 수상자를 ‘확 꼬셔버릴까’ 하는 당돌한 생각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삐딱한’ 생각을 한다. 화자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아마도 유명한 선배일 수상자에 대해 화자는 존경심이 일기는커녕 왠지 심사가 꼬인다. 그래도 정작 그를 만나면 ‘척추가 무너진 것처럼 인사할 거’라고 화자는 자신을 조롱한다. 젊은 여자의 꿈과 절망과 질투의 버무림! 이러면서 자라리. 그래서 혹시라도 운이 닿으면, ‘기득권녀’가 되리.
1583    詩作에서 어려운 리론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싹을 티우라... 댓글:  조회:4691  추천:0  2016-08-10
[30강] 시와 비유(比喩).1 강사/김영천 오늘은 시와 비유에 대해 강의하겠습니다. 아마, 학창 시절에 배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고등학교에서 배울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드립니다. 비유법을 알면 시를 절반은 쓰신겁니다. 우선 김준오님의 『詩論』에서 비유에 관한 것들을 찾아보기 로 하지요. 국내에 시론이 아주 많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사에서 나온 『시론』이 제일 많이 읽히고 있습 니다. 도서관마다 다 있는 책이니 필요하신 분은 빌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1)동일성의 원리 시인들은 어떤 묘사를 위해서만 이미지를 사용하진 않습 니다. 비교에 의해서 관념들을 표현하고 전달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비교가 비유적 언어, 즉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룩스와 와렌의 이론이 아니고도, 비유가 일종의 비교인 이유는 반드시 이질적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기 때 문이지요. 수사적 용어를 사용하면 원관념(元觀念)과 보조관념의 결 합을 말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미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지칭하는 용어 가 다르거든요. 원관념을 주지(主旨),본의(本義), 취의( 趣意), 주상(主想), tener, primary meaning,으로 보조관념 은 매체(媒體),유의(喩意), vihicle,secondary meaning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원관념은 비유(되는)이미지 또는 의미제이고 보조관념은 비유하는 이미지 곧 재료제입니다. 이 때 원관념과 보조관 념은 의 매개어로 결합되거나(이와 같 은 비유를 직유라 합니다), 의 형태로 결합됩니다. 다시말하면 비유의 근거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 속성에 있습니다. 즉 두 사물의 동일성에 의하여 비유가 성 립됩니다. 이쯤 이론 무장이 되셨으니 이제부터 하는 강의는 더욱 알아먹기 쉬우실 것입니다. 2)비유(比喩)는 시 창작의 원리 시인은 비유를 통해서 시인이 발견하고 창조한 의미나 진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시적 공간에 형성해놓기 때문 에 비유는 수사적 기교나 장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시 창작의 원리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인의 상상력과 직관에서 나옵니다. 스파크처럼 빛나는 불꽃입니다. 이 비유의 빛이 사물에 가 닿을 때 사물은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들에 게 경이감과 충격을 주게 됩니다. 조태일님 같은 분들은 비유를 모르는 시인은 결코 참다운 시인이 아니며, 비유 없는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 조하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래서 시인을 판단할 때는 그가 사용한 비유의 힘과 그 독창성에 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1.비유란 무엇인가 비유는 어떤 대상의 모양, 성질, 특성, 상태 또는 추상적 인 의미나 관념 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해 그것과 유사한 다른 대상에 비교하여 표현하는 언어적 법입니다. 즉 서로 다른 두 사물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결합시켜서 구체적인 이해나 인식을 얻는 언어적 표현인 것입니다. 일단 예문을 보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래로도 많이 불리웠던 김동명의 을 한 번 읽어 보기로 하지요.(한자는 제가 한글로 옮깁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잘 아는 시이지요. 아마 읽으시면서 속으로, 또는 콧소리로 노래로 부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노래로나 시로 부르거나 읽기만 했지 비유 같은 어려운 말은 생각해보 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에서 원관념은 무엇이고 보조관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원관념이구요. 보조관념은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입니다. 얼마던지 우리가 만들 수 있겠지요. 내 마음이란 원관념을 두고 하늘, 바람, 바다,.....등등 여러분들이 보조관념을 만들어 보세요. 그러나 이런 다른 이질적 대상들이 결합할 때 아무 근거가 없으면 안되겠지요. 그 근거가 앞에서 말한 동일성 혹은 유사성이란 것입니다. 내 마음과 호수는 분명 이질적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 두 대상 사이에서 우리는 동일성, 유사성을 찾아낼 수가 있습 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끔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하고, 깊고, 맑고 푸르른 것을 느낄 때가 있지요. 분명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호수와 내 마음이 닮았 습니다. 다른 예문을 하나 더 읽어보겠습니다. 정희성님의 전문입니다.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이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이 나오고 50원을 뒤집으니 벼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 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이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먼지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 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집는다 한 때 암울했던 시대에 이런 시들이 많이 씌어졌습니다. 다시는 이런 시들이 쓰이지 않는 시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에선 동전과 신문 기사에 실린 여공의 죽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화자는 각각 다른 이질적 대상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이질성 속에서 그들이 지닌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이 무엇일까요. 한번 말해보세요. 그렇지요. 그것은 이 사회로부터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지 니는 비애감이며, 별 볼일 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들이 느끼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좋은 시 몇 편 낭송하는 것으로 강의를 대신하겠습니다. 문학 이론도 중요하지만, 늘 강조하지만 좋은 시를 읽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시가 좀 어렵고, 새로운 형식이 나오더라도 그냥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형식이 다르다는 것은 낯설게 하기 위해서인데요. 뛰어쓰기를 않는다든지,행과 연을 무시한다던지, 글 체로 삼각형이나 어떤 도형을 만든다든지,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요즘 젊은 작가들이 실험적으로 발표하는 작품들은 더욱 다양하지요. 허수경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어 오늘은 지난 여름호 『문학동네』에 나온 시을 올립니다. 밤하늘언덕에풀을몰고다닌염소들 휘파람을불며연애편지를쓰던동네오라버니들 평상을펴고누워부채를부치던노치네들 멀리멀리까지끓어넘치던호박넣은수제비국물이놓인화덕 매일매일우물로걸레를빨러나오던노망난할망구 개를고우는냄새가진득하던마을입구에서복숭아나무가지라고 장티푸스를앓던아이는그앞에등을내밀고엎드려있었다 멀리멀리기차가지나가는소리 철도로난풀을밟고기차가사라질때그독하던풀냄새 장티푸스를앓던귀로코로몰려오던자지러지던것들 귓병을앓으며매일매일항생제를귀에넣고다니던술집여자 뚱뚱한중국남자가끓이던우울한우동 웃는얼굴로되를속이던짠된장상투를뜬싸전영감 벼멸구를잡아불태우던연기를향해침을퉤퉤뱉던동사무소에 댕기던안경잽이 집문서를팔아여당지방사무소소장을하던위인 농업실험실과수원에서자두에접붙인수박을만든다던폐병쟁이 막된장에무친날내나는나물 잘게썬풋고추를넣고조린피래미 호박잎에싼은어외 날개생긴오이에약든쇠고기를잘게썰어익힌오리찜짠멸치젓 을넣어만든쓴물나던고들빼기너덜너덜한쳔엽을끓여참기름 장에 곁들이던겨울날할아버지술상 자진자진햇살에말라가던고고마박,꿈으로생으로들어오는 그러다달이후영청떴지요 아직복숭아나무아래배를깔고아이가달을바라보았지요 그리고그리고이승으로돌아왔지요 다음은 『문예연구』2001,가을호에 실린 임영조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아주 잘 쓴 시이군요. 누가 저 논두렁에 박힌 말뚝을 죽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으랴 누군가의 완력으로 처박힌 뿌리를 그 무슨 비유로 정의할 수 있으랴 잔가지 다 치고 군살도 빼고 꼿꼿한 근성만 땅에 박고 서 있는 저 나무의 生死를 왈가왈부 조서를 꾸미기엔 아직 이르다 산에서 징발된 나무로 보면 일개 이름 없는 볼모가 되지만 산에서 출가한 나무를 보면 으스러진 머리에 하늘을 이고 알몸으로 버티는 순교가 된다 -번뇌와 보리는 본시 하나라 미혹하면 번뇌요 깨달으면 보리다 말뚝 안의 네 협잡은 로맨스이고 말뚝 밖의 내 이념은 치정이라고? 말뚝의 저쪽은 인민공화국이고 말뚝의 이쪽은 대한민국이라고? 날마다 말뚝에 매인 염소는 제 목줄로 잰 땅이 감옥이리라 저 말뚝도 한때는 이웃과 함께 눈부신 햇살로 나이테를 불리고 푸른 바람 소리로 산을 키웠으리라 이젠 죄없이 유배된 땅에 박혀 앙상한 통뼈로 모진 세월 견디는 말뚝을 보면 坑儒(갱유)가 생각난다 육탈로 맞선 환한 옹고집 당당하게 벌 받는 생이 보인다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 오늘 읽은 시들이 좀 어렵네요. 황금찬님의 을 읽기로 하지요 아직도 내 체온이 식지 않은 풀씨를 한 웅큼 창 앞에 뿌려 놓고 새를 기다린다. 늙은 참새 한 쌍이 날아와 마음 놓고 내 체온을 다 주워 먹었다. 따사한 정에 허기를 면하고 몸이 풀려서 서늘한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 얼마간 졸다가 구름밭을 지나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지금 창 앞에는 새가 두고 간 사랑이 풀잎으로 자라가고 있다. 다음은 김석규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기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마지막으로 오규원님의 를 읽겠습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 의 솜털,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 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 자 같은 슬픈 여자. 정말 좋은 시이지요?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너무 어려운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잊어버리려해도 끝끝내 가슴에 남아 새로운 싹을 티울 씨앗들이 남게 될 것입니다.   =================================================================         해수찜 ―노향림 (1942∼) 이따금 바다 갈매기들이 하얗게 똥을 떨어뜨린다. 그 똥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 상체를 내놓은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모여 찜질을 한다. 유황 성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수탕     질기고 비루한 일상을 벗어버리겠다고 바닥에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려 부항을 뜨거나 약쑥 냄새 자욱한 평상에 무릎관절 꺾고 앉아 있다. 만삭처럼 부른 배들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뜨거운 열기 속에 얼굴들이 복숭앗빛으로 불콰하다. 더운 수증기에도 잘 젖지 않는 젖가슴들 한때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을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 끝에 시든 꽃꼭지 같은 유두를 매달고 있다. 유난히 하복부가 나온 젊은 아낙이 통성명을 한다. 아따, 언니는 임신 팔 개월째여? 배만 징허게 나와부렀소. 삼십 대로 보이는 아낙이 저승꽃 핀 얼굴의 팔십이 넘어 보이는 늙은 아낙에게 말을 건다. 폐경기를 다 넘긴 여자들이 다시 회임했다고 깔깔댄다. 싸 온 도시락들을 나눠 먹으며 아따, 언니는 벌써 두 양푼째네. 요렇코럼 만수위 된 뱃속에 뭘 또 심고 싶소, 소나무 장작불 땐 해수탕에 와서 배 따땃하면 됐제. 그녀들은 유황 성분이 온몸에 녹아들었는지     불이 이는 홍조를 띠며 자매들처럼 앉아 있다. 솨솨솨솨솨, 바람소리나 쇄쇄쇄쇄쇄, 햇빛 쏟아지는 소리 들릴 듯 섬세하게 구축된 시각 이미지들을 슬며시 내보이는 게 내가 알고 있는 노향림 시인데 이 시는 완연 다르다. 왁자지껄 소리와 함께 여러 인물이 분주히 움직인다. 마치 정지시켜 놓았던 비디오가 갑자기 움직임에 돌입한 듯이. 추억처럼 아스라하고 쓸쓸한 노향림 시 특유의 아치도 근사하지만, 이 시의 불콰하고 후끈한 현장감도 썩 근사하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문득 겹쳐지는 반라의 여인들. 그러나 처녀의 긴장이 없어 그네들은 더 평화롭고 자유롭다.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과 만삭인 듯 불룩한 배를 하고 있지만 다들 마찬가지니까 부끄러움도, 질투도, 불만도 없다.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고, 자기 몫의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삭신이 쑤시는 여인네들이 모처럼 편안하게 수다를 떨며 해수찜을 즐기는, 떳떳한 낙원!  
1582    인습적인것들을 사용하면 좋은 詩가 될수 없다... 댓글:  조회:4644  추천:0  2016-08-09
[29강] 이미지의 종류.4  강사/김영천  3)상징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를 알기 위해선 먼저 상징이 무엇인지 알아야  겠지요? 상징은 비유와 함께 시의 내용을 이미지화 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비유는 두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반면 상징은 하나의 이미지만을 표면에 내 세웁니다.  그러나 비유적 이미지에 대한 연구는 순차적으로 상징적  이미지에 대한 연구와 중첩이 됩니다.  상징은 어떤 대상이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부합되는 다른 의미나 관념을 표상하는 것인데, 대상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을 원관념, 거기에 부합되는 다른 의미나  관념을 표상하는 것을 보조관념으로 이해하시면 앞으로의  강의가 알아듣기 좋습니다.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기로 하지요.  여러분 비둘기, 그러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평화지요?  우체국이라고 하신 분도 맞습니다만, 여기서는 평화로 하지요.  또 십자가와 연꽃은요.  그렇지요. 교회와 불교를 표상합니다. 그렇듯이 푸른 소나무  는 절개를, 떠오르는 태양은 희망을 표상하게 되며, 그 대상  물들은 하나의 상징이 됩니다.  여기에서 비들기나 연꽃, 십자가, 소나무, 태양은 우리의  감각적, 지각적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지가 되며, 이러한  이미지들이 상징으로 기능하므로 상징적 이미지가 되는 것  입니다.  기관감각적 이미지를 배울 때, 슬프다는 것이나 기쁘다.  즐겁다, 아름답다는 것은 기관감각적 이미지가 될 수  없는가 물어오신 분이 계시는데 여기에 그 답이 있군요.  기관은 우리 신체의 기관을 말하구요. 감각은 느끼는 것  이니 우리 신체의 기관이 감각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이미지는 이런 감각이나 지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  지각적 대상이어야 함으로 슬프다 나 기쁘다 이런 것은  이미지가 안되는 것입니다. 슬프다나 기쁘다는 감정을  시어로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각한 이미  지로 이런 기쁨과 슬픔을 나타내어 주어야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흘렀네요.  아무튼 쉽게 말하면 어떤 대상이 원래의 뜻과 다른 뜻으로  표상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이버 상에서 많이 보는 것인데요. 하트 표시가 많이  이용되더라구요. Heart 의 원 관념은 심장입니다.  ♡♥은 심장을 그려놓은 것이구요. 그러나 이 표시는  무엇으로 쓰입니까? 심장입니까? 아니지요. 그렇지요.  사랑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심장은 원관념, 사랑은 보조 관념이며 심장이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 좀 아시겠지요?  상징적 이미지는 원관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유와 서로  닮아 비유적 이미지와 서로 헷갈리는 면을 가지고는 있습니  다만, 상징의 특성은 어떻든 은유와 다르게 처음부터 원관  념이 전제되지 않고 보조관념을 내세우기 때문에 그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상징적 이미지는 강한 암시성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용직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하지요.  "한편 상징적 심상의 기본 개념의 정립을 위해서는 당연히  상징의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그러니까 상징은  그 개념의 차원이 비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유는 그  함축성이 아무리 강한 경우에도 그 상상력의 뿌리가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상징은 대체로 그것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 동기 자체가 우리 자신의 의식의 뿌리를 내린 광막한  영역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좀 어려운가요?  말하자면 비유는 두 이미지를 결합시키기 때문에 아무리  감추어도 상상력으로 그 뿌리를 찾아낼 수 있으나, 상징은  하나의 이미지만 표면에 내세우니 그 실체를 잡기가 어렵  다는 말이지요.  예문을 들어가며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시는 유치환의 를 읽어  보실까요?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애련)에 물들지 않고  喜怒(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億年(억년) 非情의 緘默(함묵)에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분명 이 바위는 그냥 자연물  의 바위가 아니라 무엇을 상징한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바위가 그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무엇을 표상하는가?  그 이면에 어떤 의미들을 숨기고 있는가? 그 것이 바로  바위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바위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나  시적 의미들을 통해 그 것이 암시하는 바를 추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위가 일반적으로 연상시키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무거움, 그렇지요. 강함, 그렇지요.단단함도 뭐 강한하고  같으니까요. 그럼 단단함도 넣읍시다. 신중함을 들 수 있겠  지요. 그리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과 대비해서 감정의  기복, 변화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하지요.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곁들이니 한번씩 읽어보  십시오.  "여기에서도 의인화된 비유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애련에 물들지 않"는 비정함과 노여움, 성냄, 기쁨 따위의  감정에 물들지 않고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저 함묵한  채 자신을 지키고 견디며 안으로 더욱 강해지는 게 바로  바위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도 망각"하는 초  월의 경지에 이르러 그 어떤 외부 자극에 흔들림이 없는  존재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바위는 이러한  세계를 소망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나 신념, 초연함 ,초극  의 경지, 달관의 세계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일  체의 생명에 대한 허무 의식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읽는 사람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해석에 따라서 또  다른 다양한 의미들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기형도님의 을 들어보겠습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시가 좀 어려운 것 같지요? 아주 많은 비유적 이미지들이  쓰였기 때문인데요. 보실까요?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이 다 비유적 이미지들입니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이 여러 비유적 이미지들을 구사하면  서 사랑의 열망을 보내고 난 후의 절망감과 허무를 '빈 집'  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이 '빈집'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는 이 시의 전체의 문맥을 떠나면  창의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먼 인습적 상징이지만,  이 시에서는 개인적인 실연의 체험을 통해 시인이  구사한 섬세한 비유적 이미지들의 다발 때문에 독창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훌륭한 시적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강의 시간에 내 주위의 사물이 너무 익숙하듯이  그런 익숙한 비유나 상징은 시에서 좋지 않습니다. 독창적  이면서도 보편성인 것들을 써야하겠지요. 그 것이 바로  낯설게하기라고 배웠지요.  비유나 상징도 모두 너무 흔하게 사용했던 것들, 인습적  인 것들을 사용하면 좋은 시가 되지 않는 것을 오늘의 주  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윤동주님의 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서 돌아갑니다  의 부분입니다.  이 시의 중심정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우물이지요? 맞습  니다. 우물입니다. '우물'의 상징적 이미지 속에는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같이 이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다발로 들어 있고 '한 사나이'  의 이미지도 들어 있습니다. 우물은 화자의 순수한 정신적  깊이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며, 다른 이미지들도 화자의 정  신 속에 존재하는 사유들을 구체적 사물로 육화(肉化)시켜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한 사나이'의 이미지는 물질주의의 세상에 대한 내  면적 고뇌 속에 갈등을 겪고 있는 고독한 자아를 반영하는  상징이지요.  한 시인이 자기의 시에 계속된 상징어를 사용함으로서  보편성을 갖게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갯땅쇠라 하면  그 말 뜻도 몰랐던 분들이 이제는 갯땅쇠 하면, 김영천을  떠올리는 것도 아마 갯땅쇠가 김영천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독창적으로 만든 상징이 그 시인의 시에서  만은 어떤 상징적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겠지요.  오늘 너무 강행군 하셨나요?  오늘로 해서 이미지에 대한 강의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 이미지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번 주말에는  이미지만 한 번씩 복습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또 내일 뵙지요.  좋은 글이 있어서 옮겨왔습니다.  가벼운 맘으로 읽어보십시오.  가을에는 유치한 사랑을 하자  속살 환한 단풍  사흘 전에 산보를 하다가 너무 예뻐서 단숨에 안아버렸습니다  뒤꿈치 들고 살금살금 다가와 두 눈 살짝 가리고는  "내가 누구게?" 하고 찾아오는 가을은  언제나 가슴이 먼저 알아채고 저 혼자 콩닥거리는 것일까.  버스를 기다리다가 빨간 우체통을 보니 가슴이 설렌다.  막 내려앉은 고추잠자리 날개 같은 이파리 한 장을 주워 책갈피에 넣어 두었다가 편지 봉투에 우표 대신 붙여 보내도 그리운 사람에게 전해질 듯 하다. 벌레에게 한입 베어 먹힌 놈이거나 몽고반점 같은 초록이 엉덩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놈이면 더욱 그러할 것 같다. 가을이 깊어져 좀더 쓸쓸해지기 전에 서둘러 사랑을 시작해야겠다.  딱히 연애다운 연애도 못해 본 놈이 괜히 또 사랑 타령을 하다가 상처만 하나 더 키우는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이 가을에 시작할 생각이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적어도 나는 좀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하여도 가을은 사색하고 연애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지거든 가을하늘을 한번 보라. 맨손체조 하던 바람이 상쾌한 공기를 깊게 들이키면 잘 닦인 하늘이 빨려 내려와 깨질 듯 위태롭게 맑을 것이다. 기차라도 지나가면 덜컹거리다가 쏟아질 것 같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그리운 사람과 함께 코스모스가 핀 어느 간이역을 걷고 싶다면, 오랫동안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부쳐도 좋을 것이고 좀더 용기를 내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가을에는 직설적이어야 하는 여름의 사랑과는 다른 유치한 사랑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유치해진다고 흔히들 말한다. 나는 그 유치함을 아름다운 낭만이라 부른다. 평소에는 낯간지럽게 여기던 것들도 내가 애인과 직접 해보면 낭만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한적한 공원에서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는 연인이 그렇고, 단숨에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를 손잡고 조심조심 건너는 일이 그러하며, 들꽃을 애인의 머리에 핀처럼 꼽아 주고 깔깔거리는 것이 그럴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술렁이는 사람들로 인해 다시 한번 단풍이 들기 전에 사랑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끼는 편지가 한 통이 있다.  대학 시절에 받은 것인데 나는 지금도 그것을 서랍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들국화 꽃잎 과 코스모스 꽃잎으로 편지지 구석구석을 빽빽하게 메워 보내 온 연애편지가 그것이다. 물론, 그녀는 시집가서 남편에게 사랑 받으며 아이도 셋이나 낳고 잘 산다고 누군가에게 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아직 그 꽃편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예쁘고 고운 마음을 함부로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사랑했어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해본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거나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좀더 특별한 연애를 하고 싶거든 정성들인 편지를 우체통에 넣기 바란다.  가까운 공원에서 찾은 네잎 클로버도 좋고 예쁘진 않지만 개성 있는 낙엽이나 들꽃 등으로 편지지를 장식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정성을 들인 한 통의 편지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아마 '너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라는 말을 하며 어쩔 줄 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하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는 말도 있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좀 서툴긴 해도 사랑을 하는 순간 이미 시인이 되어 있을 테니까.  예쁜 강아지풀이나 억새풀, 개망초꽃 같은 들풀이나 들꽃을 한 다발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꽃집에서 예쁘게 포장된 꽃을 사주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감동적이다. 정성껏 다듬어진 그것들을 어설프게 포장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특한 정성이 한몫을 단단히 할 것이다. 방치해 두었던 조약돌이나 조개 껍데기를 함께 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는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는 일도 새로운 추억이 될 것이다. 버스를 이용해 올망졸망한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좋겠다. 혼자이어도 좋을 것이고 함께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이다. 쓸쓸히 들길을 걷다 보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생각나는 법이고, 함께 걷고 있다면 서로에게 숨겨진 마음이 좀더 환해질 것이다. 풀꽃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고 간판조차 없는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불량 과자를 사 먹어도 좋으리라.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아늑한 방 하나를 쉽게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 후배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며 울었다.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사귄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으니 한달 조금 넘었다고 했다. 나는 일회용 밴드 같은 사랑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담배 한 대 피우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을에는 유치한 사랑을 해보자. 서로에게 진지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해보자는 것이다.  또 생각난 듯 등나무 이파리 하나가 벤치에 슬쩍, 가벼운 어깨를 기댄다.  =====================================================================       철새  ―윤후명 (1946∼) 철새들 乙乙乙 날아간다 乙乙乙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乙乙乙 고개를 들라고 날개를 친다 모름이 곧 앎이니 날아갈 뿐이니 삶이 곧 낢이니 날개를 친다 너는 어느 땅에 붙박혀 있는가 묻는 상형문자 乙乙乙 음역하여 내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 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의     소리글자 날개 춘분도 지나고 이제 겨울철새들 날아갈 때인가. 추운 고장을 향해 먼 길 떠나는 새들이 딱하다. 하지만 내가 따뜻한 걸 워낙 밝히듯이 그들은 추운 날씨를 좋아할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설레고 있을지도. 저마다 타고난 체질과 성정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 높이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면 겨드랑이가 들썩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깃털 달린 영혼의 소유자들. 비행기를 봐도 그들은 발바닥이 간지러울 것이다. 그 유랑의 무리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먼 고장, 다른 고장에 대한 향수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이나 몸이나 끊임없이 떠돌아야 사는 체질 때문이리라. 사실 우주의 본질은 움직임 그 자체이니 그들의 삶이야말로 우주의 이치에 합당한 것일 테다. 시인은 말한다.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 것, 움직이는 것, 곧 날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정체해 ‘어느 땅에 붙박여 있구나!’ 철새들의 비행 행렬을 보며 시인은 한 삶에 안착한 자신의 모습을 새삼 깨닫고 호흡곤란을 일으킬 지경이다. 새 을(乙). 과연 둥긋하게 앉아 있는 새의 형상이다. 상형문자의 형상을 이용해서 시 속에 새를 그려 넣었다! 그 글자의 소리를 ‘을을을을을을을…’적어서 아득히 날아가는 새떼들의 날갯짓과 날개소리, 그로부터 땅으로까지 전해지는 공기 가득한 떨림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살갗에 느끼게 한다. 그 발상과 솜씨가 기발하고 신선하다.    
1581    좋은 詩들을 많이 읽고, 詩를 쓰고 싶은대로 쓰라... 댓글:  조회:4322  추천:0  2016-08-08
[28강] 이미지의 종류.3  강사/김영천  안녕하세요?  대답 소리가 아주 저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네요.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러냐, 능청 떨지 마라 하시나요?  시인이 되면 안보인 소리도 보고, 안 들리는 소리도 듣고  그러는 겁니다. 전 여러분의 소리가 잘 들리는데요.  여러분도 제가 보이지요?  예, 제가 잘 보인다구요.그러면 여러분들도 모두 훌륭한  시인들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 오늘 모두  거짓말장이가 되니까요.  오늘은 시 한 편 먼저 읽고 강의에 들어가지요.  『문예연구』에 실린 시인데 발표는 아마『창작과비평』  2001. 여름호에 되었던 것입니다.  김진경님의 입니다.  1.  촛불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시럭부시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방울 떨어트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툭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시를 잘 감상하시려면 한 번만 읽어서는 안되고  반복해서 두 세번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잘 쓴 시이네요.  그럼 이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2)비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의 일반적 유형들은 제유(synecdoche).  환유(metonymy), 직유(simile), 은유(metaphor), 의인화  (personipication), 풍유(allegory) 등 6가지로 나누며  이와 관련되지만 좀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상징  (symbol)이 있습니다. 이들 비유들은 각각 말해지고, 의미  하면서 언어장치를 담게되는데 비유물(말해지는 것)이든  실체(의미하는 것)이든 아니면 둘 모두 이미지를 내포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그 여자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고 했을 때 "그 여자의 눈동자"(실체)와 "밤하늘의 별"(비  유물) 사이에 형성되는 직유는 "그 여자의 눈동자"를 시각  적인 이미지로 구체화시켜줍니다.  그러나 비유의 중요성이 너무 큼으로 뒷장에서 따로 분리  하여 공부하기로 하구요. 여기에선 그 비유적 이미지의 개  요 정도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로서 시  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 만큼 중요한 장치입  니다.  이 비유적 이미지의 특징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정신적 이  미지의 주요 기능, 즉 대상에 대한 감각적 체험을 직접적  으로 불러일으키는 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비유된 이  미지(대상) 속에 숨겨진 시적 의미나 관념을 환기시키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이미지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  니라 그 속에 다른 의미들을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다는 말  이 되겠지요.  비유적 이미지는 앞서 말한 정신적(심리적, 지각적)이미  지들을 통합하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만들어 시의 주제  와 관련된 시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고은님의 의 전문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大地(대지)의 告白(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비교적 조태일님의 해설이 쉽고 자세하게 되어 있으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없이 그대로 옮기기로 합니다.  - 위 시에 나타난 핵심적 이미지인 '눈길'은 우리들에게  단순한 감각체험만을 재생시키는 정신적 이미지가 아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의미, 관념, 주체 등을 빗대어  서 표현한 대상물이다. 즉 '눈길'은 우리 독자들의 상상력  을 동원하여 짚어내야 할 시적 의미들을 표상하고 있는  비유적 이미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눈은 그 새하얀 빛깔에서 오는 인상 때문에  순결함, 순수함, 정화(淨化), 신선함 등의 의미를 지니며,  겨울날 만상을 두루 덮으며 내리기에 포용과 너그러움,  관용, 포근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위 시에서도 눈은 이  러한 의미들을 지니면서도 시의 화자가 오랫동안의 고통  스러운 방황과 갈등, 고뇌에서 벗어나 내면 속에서 새롭  게 발견하는 무념의 명상적인 경지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온 겨울을 떠돌고' 왔다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의 삶은 방황과 고통으로 채워진 것들이  었다. 그 길고 숱한 방황의 끝에 서서 지금은 '설레이는  평화'라는 지극히 평온하면서도 감격적인 내면세계를 얻  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마음의 눈으로 '온갖 것의 보  이지 않은 움직임을' 보고 마음의 귀로 '대지의 고백'을  듣는 지고한 정신 세계를 맛보게 된다. 이처럼 눈길은  지난 모든 날들의 고통과 갈등이 정화되어서 화자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고요함과 평화로운 경지를 나타낸 것이며,  인간이 지닌 희노애락에 오욕의 번민에서 벗어난 무념 무  상의 내면적 세계를 표현한 비유적 이미지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비유적 이미지는 정신적 이미지  와는 달리 시적 세계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현종님의 의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이 시에서 "술'의 이미지와 '바다', '구름', '사랑'의 이  미지는 서로 이질적인 존재로 병치되고 있지만, 시인의 의  식 속에서 그 것은 일차적 물을 매개로 결합되고, 이차적  으로 물과 술이 매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주고  받는 사랑의 대화 속에서 젖은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그렇지요?  공부를 하면서 점점 시를 쓰기가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이 좋은 시가 나옵니다.  시는 이렇듯 은유적 이미지나 상징적 이미지 등으로 표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선 서로 술을 마시며 잔을 주고 받는  다든지 하는 직접적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 힘들더라도 자기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과 정서를 잘 조화시켜야 합니다.  이승훈교수의 『시론』에서 보면 " 은유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상과 감정, 이성과 정서를 결합하여 화해  시키며, 시적 상상력을 통해 경험의 전체성을 추구한다."  고 한 말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처음으로 이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이나, 이제 처음으로  시를 쓰는 분들은 아직 이런 이론에 적합한 글을 쓰는 것  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오래 써왔지만 아직도 이런  은유적 비유를 찾아내지 못해 애를 먹거나 시를 실패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초보자들은 자기가 쓰고 싶은대로 쓰십시오. 그러  면서 좋은 시들을 많이 읽으십시오. 그러면 점차적으로  이 교육받은 내용이 떠오르며 시가 좋아질 수 있을 것이  니까요.  비유에 대해서는 따로 공부를 합니다.  오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또 한 번 싸악 잊어버리세요.  ====================================================     나의 연봉  ―김요아킴(1969∼)     세상의 모든 가치는 몸이다 월요일 새벽 출근을 서두르는 신문 가판대로 비싼 몸을 보았다 FA 시장에 나온 거물급의 한 타자 프로가 뭔지를 보여 주는 값을 1면으로 채웠다 땀으로 퇴적된 실력은 범접조차 힘든 연봉으로 관중들을 불러 모으고 아쉽게 어제 경기를 비긴 나는 얼핏 내 몸값을 더듬어 보았다 한국인 평균보다 모자라는 키에 약간 넘쳐나는 몸무게 어린 시절 동네 야구에서 틔운 싹을 석삼년 사회인 팀에서 꽃 피우는 나의 연봉은 마이너스 유니폼을 맞추고 글러브를 사고 꼬박꼬박 회비를 부으며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기울이는 술잔의 수 덤으로 일요일을 차압당한 마누라의 잔소리와 딸들의 원성 나의 통장에 찍히는 몸값은 확실한 마이너스 여전히 세상의 가치는 몸이 지배하지만 센터를 가르는 시원한 안타와 역동적으로 아슬하게 아웃시킬 송구를 꿈꾸며 다음 경기가 또 설레어지는 나에겐 사실 연봉이란 말은 사치일 뿐이다 요리사에게 인생은 요리다. 등산가에게 인생은 등산이고, 건축가에게 인생은 건축. 인생은 포커라고 부르짖는 도박사도 있을 테다. 우리는 저마다 제가 몸 바쳐 사랑하는 것에 인생을 비춰본다. ‘야구를 통하여 인간의 한계와 비애, 희망과 기쁨을 노래한’ 시집 ‘왼손잡이 투수’에 의하면 인생은 야구다. 삶의 면모들을 야구에 빗대 보여주는 이 야구시집은 꽤 재밌다. 나는 야구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텔레비전 앞에 아버지랑 남동생이 앉아 야구 경기를 볼 때면 내내 방을 들락거리면서 ‘왜 이렇게 오래 하느냐!’며 절망적일 정도로 지루해했던 기억밖에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사회인 야구팀 선수가 신문 1면에 실린 거물급 프로야구 선수 기사를 보고 그와 저의 몸값을 재보는 모습을 그린 ‘나의 연봉’도 얼마나 웃음을 자아내는가? 시인 김요아킴은 사회인 야구팀 선수이면서 야구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타쿠’가 됐든, 아마추어가 됐든 이렇게 사랑하는 게 하나쯤 있으면 사회생활의 웬만한 아픔이나 고달픔은 의연히 이겨낼 수 있을 테다. “시인이 시 쓰기를 그만두면 무엇이 될까? 스포츠맨이 되리라.” 알베르 카뮈가 한 말이다. 예술과 스포츠는 닮았다. 순수한 집중으로 희열을 느끼면서 초라한 삶을 낭만적으로 고양시킨다. 승부와 연봉에 매일 수밖에 없는 프로 선수보다는 아마추어 선수가 진정한 스포츠에 더 가까울 테다.      
1580    83세의 한국 아동문학가 - 신현득 童心에 살다... 댓글:  조회:4205  추천:0  2016-08-04
[83세의 童心… 아동문학가 신현득 선생] "공룡이 재미있으려면 고양이처럼 아주 작아져 개에게 쫓겨 다니다 '공룡 살려' 외쳐야" "남들처럼 요령이 없어 돈 못 벌고 생활에 어두워… 할마이한테 늘 꾸지람 듣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글 썼네"   신현득 선생은“요즘 동시 신세가 참 가엾게 됐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전화로 신현득 선생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童詩)에 대해 들으려면 한두 시간으로는 안 됩니다. 하루는 취재하셔야 됩니다. 헤헤." 내 삶이 동심(童心)과 무관해서인지, 지금껏 동시집 30권을 냈고 웬만한 국내 아동문학상들은 다 받았고 등단 햇수로도 가장 오래된 아동문학가를 몰라봤다. 그는 83세인데도 여전히 동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가 사는 서울 쌍문동의 오래된 30평형 아파트에는 갓을 쓴 부친과 쪽진 머리 모친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좁은 방과 거실은 해묵은 책들로 빽빽했다. 앉을 데가 마땅찮아 거실 바닥에 소반(小盤)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궁금한 것은 생물학적으로 아주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의 마음으로 동시를 쓸 수 있느냐는 거죠? "아이처럼 생각해왔으니까요. 나이가 들어도 늘 재미있고 별나고 엉뚱한 생각을 하지요." ―아이처럼 생각한다는 게 뭡니까? "경이(驚異) 선호성이라고, 경이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거죠. 사람의 키로 말하면 아이들은 구름 위까지 얼굴이 올라갈 정도로 크든지, 키가 작아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이든지 돼야 좋아하지요. 짐승은 머리가 두서너 개쯤 달려야 재미있지요. 공룡이 재미있으려면 고양이처럼 아주 작아져 개에게 쫓겨 다니다 '공룡 살려' 외쳐야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지요." ―배움과 경험, 세상의 때묻은 정도가 다른데, 어떻게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와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 동시를 썼으니 생각의 습관이라는 게 있지요. 가령 개미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지요. 너는 발도 머리도 입도 눈도 새카맣다. 네 눈으로 다른 물체를 보면 모두 새카맣게 보이지 않을까. 땅도 나무도 달도 새카맣고…." ―새카만 개미 눈에는 모든 게 새카맣게 보인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개미에게 정말 그런지 한번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겠지요. '내 눈에도 나무는 파랗고 하늘은 푸르고 아름답게 보이지'라고요." ―개미와 대화가 되는군요. "쥐와는 '네가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은 곡식이나 음식을 훔쳐먹어서지. 이제 춤이나 재롱을 배워 사람을 찾아가보렴' 요런 식으로 대화를 하지요. 요즘 매미가 많이 울면 '매미 울음을 귀뚜라미 소리와 바꿀 수 없을까. 매미가 귀뚤귀뚤 울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을 해보죠. 또 감나무에는 한번씩 사과가 열리고 사과나무에서는 대신 감이 열려도 재미있겠지요." 교과서에 실린 그의 동시 '참새네 말 참새네 글'은 이렇다. 〈참새네는 말이란 게/ '짹짹'뿐이야/참새네 글자는/ '짹' 한 자뿐일 거야./ 참새네 아기는/ 말 배우기 쉽겠다./ '짹' 소리만 할 줄 알면 되겠다./ 사투리도 하나 없고/ 참 쉽겠다/ 참새네 학교는/ 글 배우기 쉽겠다./ 국어책도 "짹짹짹…"/ 산수책도 "짹짹짹…"/참 재미나겠다.〉 그와의 대화에는 금방 적응이 될 수 없었다. 팔십 노인이 이런 얘기로 재미있어하니까 말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별나고 엉뚱하죠. 헤헤. 봄여름가을겨울이 겨울가을여름봄으로 흐르면 어떨까도 생각하지요.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 늙은 나무가 젊어지고 젊은 나무는 자꾸자꾸 작아져 싹이 되고, 그게 땅속에 씨앗으로 들어간다든지…." ―뭔지 모르겠지만 생각의 끝이 없을 것 같군요.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 중 하나가 과자로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로켓을 타고 올라가 그 과자를 먹어봤으면 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봉이 단 하루 동안 뒷동산처럼 키를 낮춰주면 아이들도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생각도 해보죠. 투표하러 갈 때 강아지를 데려가면서 '강아지도 투표하면 안 되나' 생각도 해보죠. 아주 심심하면 손가락에게도 '너는 하는 일이 뭐지?' 수작을 걸어봅니다. 그러면 손가락이 '숫자를 세지, 숟가락으로 밥 먹도록 해주지, 옷도 입혀주지…' 대답하지요."   ―모든 게 다 대화 상대가 되는군요. "아이들은 사물(事物)이 다 살아있다고 여기죠. 말하고 생각하고 아픔도 알고…, 우리 같은 동시 시인은 사물이 전하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들의 얘기로 시를 짓는 거죠. 돌멩이와도 얘기하죠. 너도 싹을 틔워라. 거기서 돌멩이꽃이 피고 돌멩이열매가 열리면 너희들끼리 아빠 엄마 자식들이 함께 사는 돌멩이 가족이 만들어지고…." 그는 벌떡 일어나 깡통 두 개를 들고 왔다. 그 안에는 몽당연필〈아래 사진 오른쪽〉들과 하얗게 빈 볼펜심〈아래 사진 왼쪽〉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요즘에는 컴퓨터를 쓰지만요, 과거에는 몽당이 될 때까지 연필로 썼어요. 그걸 다 모았어요, 볼펜도 다 닳으면 이렇게 심을 모아놓았지요." ―이런 걸 모은 분은 처음 만납니다. 취향이 독특하군요. "여태까지 연필은 사람에게 몸이 깎이고 심이 부러지고 몽당이가 되도록 봉사만 했어요. 버려지면 한살이가 끝납니다. 하나의 도구가 내 친구로서 있었으니 버리기가 아까웠지요. 모든 사물은 자기가 맡은 일을 잘하고 있으므로 사랑받을 권리가 있지요." ―어렸을 때는 동요를 많이 불렀습니다. 지금 나이에서 보면 '나리 나리 개나리 잎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같은 동시는 정말 탁월한 감각으로 봄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윤석중 선생의 동시였어요. 이분은 평생 동시만 써 작품의 질과 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전 세계에서 윤석중을 따라갈 만한 시인이 없지요. 시인 박목월도 윤석중 선생의 영향을 받았지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라는 동요도 많이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작품으로 윤극영 선생은 '반달 할아버지'였고,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를 쓴 한정동 선생은 '따오기 할아버지'로 불렸지요."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동요도 있지요? "최순애 선생의 '오빠 생각'이지요. 이분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쓴 이원수 선생의 부인이었지요." ―요즘에는 동요를 안 부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TV에 동요 프로그램이 없어지고. 아이들을 출연시켜 유행가나 사랑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내 동시도 300편이나 곡을 붙였고 CD로 많이 제작해놓았지만 불러주는 아이들이 없어요. 그래도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나 싶어서 하고 있는 거죠. 동시 신세가 참 가엾게 됐지요." ―동시 시집도 잘 안 팔리지요? "안 팔리는 건 일반 시도 마찬가지일 테고. 자비 출판을 할 때가 많아요. 그래도 시집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는 10판까지 찍었어요, 아동용 책들이 잘 팔리는 편이에요. 지금껏 동시 시집만 서른 권 냈으니, 매년 인세도 들어와 먹고삽니다." ―얼마나? "… 작년에는 68만원. 헤헤. 물론 그걸로 먹고사는 것은 아니고, 조금 보탬이 되지요." 그는 다시 일어나 자신의 시집 '해적을 잡으러 우리도 간다!'를 들고 왔다. "작년에 출간된 서른 번째 시집입니다. 자비로 500부를 찍어 동시 회원들에게 돌렸지요. 오늘 오셨으니 한 권 드리지요." 그는 붓펜으로 시집 안쪽 표지에 사인을 하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직함을 '시인'으로 쓸까요?" "저는 시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직함을 '선생님'으로 쓸까요? 손자가 있으면 '아무개 할아버지'로 쓰면 좋은데." "자녀가 아직 대학생입니다." "초등학교 아이가 있으면 '아무개 아빠'라고 쓰겠는데, 집에 그런 어린애는 없을끼고. 낙관(落款)도 찍어야겠지요?" 그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인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구멍'으로 가작 입선했다. '빠꼼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가 전문(全文)이다. 당시 우편봉투에 '상주 국민학교 신현득'이라고만 썼더니, 심사위원인 윤석중 선생이 초등학생이 쓴 줄 알고 당선을 보류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전화로 확인해보는 게 힘든 시절이었다. 그는 이듬해 신춘문예에서 '산'으로 당선돼 등단했다. ―왜 동시를 썼습니까? "사범학교 시절에는 소설을 썼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겸 동시를 썼어요. 동시는 쓰면 쓸수록 재미가 있었어요. 사실 모든 것에서 재미를 포착하는 게 동시이니까요." ―(소반에 놓인 살구를 가리키며) 어떻게 재미를 포착합니까? "나무에 달려있다면 이렇게 말하죠. 풋살구를 익혀야지, 바람과 햇빛을 부르고, 벌레가 못 먹도록 말려야지. 살구가 익으면 말하죠.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씨앗은 심어주세요 라고." ―단순한데요. "무슨 말씀을, 동시는 우주도 담습니다. 비눗방울에 집을 매달고 태평양을 건너는 동시가 있는데, 얼마나 스케일이 큽니까. 내 작품 중에는 '화성에 배추 심으러 간다'는 시도 있어요." ―일반 시인들은 동시 시인을 좀 낮춰 보지 않나요? "잘못된 인식이지요. 문단에서 계급을 만들어놓고, 맨 끄트머리에 아동문학을 두고 홀대해요. 우리 현대시의 시작인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가 아동문학입니다. 하지만 1957년 조연현(趙演鉉·문학평론가)씨가 펴낸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아동문학을 빼버렸어요. 이 때문에 윤극영·윤석중·이원수·마해송 등 쟁쟁한 문인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겁니다. 지금 대학에서는 아동문학 전공자가 없어요. 아동문학 하는 이들은 통분합니다." ―아이의 마음으로 동시를 쓰니까 술 같은 건 입에도 안 대겠군요? "몸뚱이는 어른이니까 마시지요. 일반 문인들과는 스타일이 다르지요. 일반 문인들의 모임에 가보면 야한 소리도 하고 어지러워요. 하지만 아동문학 모임에는 아예 그런 걸 입에 담지도 않고 다들 얌전하지요."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까? "남들처럼 요령이 없어 돈은 못 벌고 생활에 어두워요. 날마다 할마이한테 꾸지람이나 듣지요. 그래도 나는 재미있게 글 쓰면서 살아왔어요. 요즘 늙으니까 혹시 내가 잘못해서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걱정은 듭니다만." 이제 일어서려고 하자, 그는 내 속을 들여다본듯 말했다. "아주 어려운 얘기를 듣느라, 영 고생 많이 하셨네요." [출처] 조선닷컴
1579    복습, 예습하는 詩공부하기... 댓글:  조회:4131  추천:0  2016-08-04
  사물과 기호 ― 사물시와 기호시의 가능성                                       문 덕 수(시인, 예술원 회원)        1. 탈관념(脫觀念)은 유행어인가, 시론의 한 중심개념인가. 탈이데올로기, 탈서구(脫西歐), 탈모더니즘 등이 갖는 비슷한 유행성 및 인문학적 개념 등과의 이중성을 갖는다. 우연히 걸리는 길바닥의 지푸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덮치는 강력한 회오리 같은 것이 아닐까. ‘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낡은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다는 뜻이다. 벗어 던져야 할 ‘관념’이란 어떤 관념의,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관념을 벗어던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물’(物 또는 사물)이라면 물이란 관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이란 또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물음이 서로 얽혀서 꼬리를 문다. ‘탈관념! 탈관념!’ 하고 외쳐도 이론이 뒷받침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빈 양철 두들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그리스어의 이데아(idea)의 역어라고 한다. ‘notion’도 이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불타나 진리를 관찰하고 사념(思念)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관상념불’(觀想念佛)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한자의 ‘관(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두루 자세하고 똑똑하게 본다’는 뜻이고, ‘염’(念)은 생각하여 마음 속에 굳게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데아’도 ‘본다’는 의미의 동사인 ‘에이도스’(eidos)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어원적으로 ‘본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데아는 보이는 모습, 형상(形狀), 형식 등, 이른바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념이건 이데아건 ‘감각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어원을 공유한다. 근대 이후 ‘관념’은 사유(思惟)의 대상으로 한정되어 사물을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떨어져 버린 것 같다. 한편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갈려 논의되는 경향도, 관념에서 감각적 경험이 떨어져 버린 것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의 형상을 관념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상’이라고 하고, 사유를 형성하는 능력을 ‘오성’(悟性)이라 하여 구별하는 것도 관념에서 감각적 기능이 탈락되고 있는 추세다. 관념에는 가상성(可想性)과 가감성(可感性)이 논란의 핵으로 불거지면서, 어느새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상성’만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관념이란 넓은 의미의 정신적 원리(의지, 이성 등)에 의하여 세계의 현실을 해석한 내용을 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론에서 그런 것 같다.      2. 탈관념시 운동의 효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부터인 듯하다. 정지용(鄭芝溶)과 이상(李箱)이 그 주역이다. 이 때가 탈관념시 운동의 제1기라면 오늘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제1기가 지닌 아방가르드성(性), 실험성 등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적 의미의 요청으로 변용․계속되고 있다. 정지용과 이상은 외부와 내부, 외면 사생(寫生)과 내면 기록의 대립상을 보이나, 기존의 시적 관념세계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둘의 전위적 성과의 물량은 적으나 퍽 감동적이다. 광복 후 조향(趙鄕)도 방황을 거쳐 이 노선에 합류한다.(탈관념 운동의 3인방이라고나 할까.)   바다는 뽈뽈이 달어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 정지용, 「바다 2」에서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 임화, 「玄海灘」에서   두 편 모두 30년대의 작품으로서 ‘바다’가 대상이다. 정지용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는, 그냥 벌거숭이 바다이나, 임화는 한․일간의 역사적 굴곡이 투영되어 있다. 30년대의 모더니즘이 역사주의 회피를 위한 탈출구가 아니었지만, 역사주의 쪽에서는 그런 비난을 한다. 이런 비난은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 있다. 분단상황과 통일 및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반민족적 예술지상주의라는 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 탈관념 시론은 관념주의의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물’(사물) 자체를 중요시하고, ‘관념’은 그 다음 것으로 본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 이상, 「꽃나무」에서   ‘꽃나무’에는 역사주의적 관념이 없고, 정지용과 같은 외적 객관적인 존재도 아니다. 주체(이상)의 내면 속에 상상된 점에서 정지용의 사물 점묘(事物點描)와는 다른 심리주의적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심리 속의 사물이긴 하나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니다. 30년대 탈관념론은 사회주의에 편승한 카프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운동이다. 카프계와의 골치 아픈 논전을 피하고(카프계의 조직적․전투적 논리의 과격성이 싫었던 것 같다), 정지용은 모던한 감각적 물리성에서, 이상은 내면의 역설적 고뇌의 회오리에서 조용히 사물을 응시하는 탈관념 시쓰기로 혁명한다. 그런데, 조향은 이 두 선배보다 더 치열하고 극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탈관념 시쓰기와 더불어 탈관념 이론(초현실주의 수법, 단절의 논리, 오브제론 등)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노선은 이상 쪽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손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 조향, 「EPISODE」에서   광복 후, 문단이 좌우로 분열되면서 관념시의 정치적 폭위에 맞선 조향의 탈관념 운동의 보기다. 초현실주의 시론의 영향에 압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조향이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서정주의 전통적 서정주의나 정지용 계열의 모더니즘(이미지즘)에도 맞섰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로 많이 다가간 오늘의 탈관념론 운동의 한 방향을 시사한다.   조향의 초현실주의 클럽의 멤버이면서조향의 지도를 받은 이선외(李善外)의 글이 있다. “논리적 계산하에 뒤에 올 말이 빤히 집히는 수직적인 언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진 언어들보다는 벌거숭이 언어, 인간의 현실적인 지휘(指揮)를 받지 않는, 생동하는 언어, 존재로서의 언어가 더 시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이선외, 「의식(존재)의 확대」, 초현실주의문학 예술연구회 편, ������오브제������, 덕문출판사, 1980. 3, p. 44) ‘날 이미지’나 ‘날 것’보다 훨씬 앞선 “벌거숭이 언어”라는 말이 유난히 돋보인다.      3. 탈관념 시쓰기는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고 물 또는 물체를 중시한다. 기존의 관념을 배제한다는 뜻은, 구문(構文) 구조에서 굳어진 기존의 선조적(線條的)․시간적인 단선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구문의 종지점(終止點)이건 구문의 중간 지점이건 간에 어디든 접속되어(링크하여) 새 맥락의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 맥락에서 다시 새 구문이 발생하여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도 포함된다. 이리하여 ‘물’ 또는 ‘물체’의 의미는, 내면세계의 무질서와 비슷한 하이퍼텍스트 속의 사물이나, 외적 현실 세계의 사물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세계에서 흔히 날 것, 벌거숭이 언어, 날 이미지, 있는 그대로의 사물 등을 강조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김소월, 「가는길」에서   ‘그리움’은 사물인가, 관념인가. 이 시에는 ‘이별의 현장’이 전제되어 있지만, 며칠 몇 시, 어느 곳에서, 누구와의 이별이라는 구체적․개별적 현장체험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실제의 체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도 ‘이 사람’ 또는 ‘저기 계시는 저분’에 대한 그리움임이라고 특정할 수 가 없다. 시행(詩行)의 연결에도 관념적 연속성이 있고 또 인간중심주의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도 관념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위」에서   유치환의 ‘바위’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1인칭 주체의 의지세계를 강조한 인간중심주의가 돋보이고, 사물 자체도 개념화되어 그것에 흡수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가 이어져, 바위가 지닌 물성(物性) 즉 바위의 견고성, 무게와 부동성, 풍화작용 등의 물리성을 암시하지만 바위에 대한 관념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관념이긴 하나 해석에 의하여 물성 또는 물리성을 파악할 수 있고, 이 물성을 근거로 ‘바위’라는 실물에까지 닿게 된다. 그러나 이 시를 탈관념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 서정주, 「문둥이」에서   서정주의 「문둥이」도 체험적 현장성이 약하다. 특히 문둥이의 서러움이 어떤 모양의, 어떤 성질의 서러움이냐고 묻는다면 그 구체성을 대답하기 어려운 즉 구체성이나 개별성이 없는 추상된 관념성이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밀어」),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부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귀촉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당도 청마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여서 인간 바깥에 실재하는 사물이 개념화되어 인간 쪽으로 수렴되고 있다.   -나의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 다오 -나의 더러운 몸을 말끔히 씻기게 해 다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에 물줄기는 끊기고 몇 군데 웅덩이에 웅덩이물만 남았다 그 변두리에 어떤 돌은 옆으로 서 있고 어떤 돌은 자폭(自爆)인가 엎드려 있고 어떤 돌은 엉거주춤 앉고 어떤 돌은 손을 들고 기도하듯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다 -내 죄가 있다면 물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입니다 -내 죄가 있다면 수석가의 선별 대상이 되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박명용의 「돌」 전문   이 시는 ‘돌’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타자’(他者 other)로 인식하고 있고, 돌이 의인화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그렇다고 돌을 자기화(自己化)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치사한꼴…”의 ‘나’는 의인법을 말해주는 근거이나,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바위」), “노오란 네 꽃잎이 필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 「국화 옆에서」)와 같은 ‘나’와 비교해 보면 돌과 나와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박명용은 ‘사물과 주체 사이와의 거리’를 많이 떼어 놓고, 사물을 비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바로보는 한 계기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람과 날개」, 「춤꾼」, 「숯」, 「보길도」 연작시 등이 모두 그런 작품이고, 특히 「보길도․2」 등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려는 태도를 훨씬 짙게 드러내고 있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 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에서   이 시는 박명용의 태도를 더욱 철저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 자체가 주체(시인)로부터 떨어져 거의 별개의 존재(실재)로 독립되어 있는 대상이 되어 있다. 표현에서 관조하는 시인의 감각적 시선(視線)이 감지되나, 시인의 인간주의적 어떤 감정이나 어떤 사회적 관념(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의 개입을 최대한도로 억제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이 시인은 마치 관찰의 기술자나 시 제작의 직공처럼 사물의 미세한 운동을 놓치지 않고 더듬는 운동을 보여준다.(그러나 이런 시의 경향만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성질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존 로크(1632~1704)는 사물의 성질을 세 갈래로 분석해서 보여준다. (1)물체의 고성(solidity)이 지닌 양, 형태,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靜止). 이것을 물체의 1차성질(primary Quality)이라고 한다. (2)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는 색, 성, 향, 미 등. 이것을 2차성질(second Quality)이라고 한다. (3)물체의 1차성질이 다른 별개 물체의 양, 형태, 조직, 운동을 변화시키는 능력. 이것을 물체의 능력(Power)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물 그 자체가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성질과, 물이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성질로 대별된다. 1차성질과 2차성질은 전자에, (3)의 능력은 후자에 해당된다.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 -박명용 「보길도․2」에서   파도라는 사물의 모양이나 운동을 묘사한 이 시는 존 로크가 말하는 사물의 1차성질이다. 앞에 예로 든 이솔의 시도 역시 1차성질의 것이다. 사물을 강조하는 시는 존 로크가 든 사물의 성질(1차성질, 2차성질 및 능력)을 읊은 것, 사물에서 기존의 어떤 관념을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오규원, 조영서), 사물 자체가 다른 어떤 관념이나 의미를 배후에 거느리고 마치 상징이나 메타포의 유의(喩義)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마지막 경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카프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주의적 관념이다. 청마의 의지나 미당의 서정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이다. 모두 휴머니즘을 지향하지만, 탈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임화나 청마나 미당이나 모두 오십보 백보의 관념세계다. 오늘의 분단을 강조하고 통일과 평화를 외치는 민중시도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나 역사주의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4. 이제 모더니즘의 또 한 갈래인 좀더 과격한 전위시를 보기로 한다. 이 경향은 물리주의(사물을 중시하는 모든 경향을 일단 이렇게 부른다)보다는 대상(사물)과 주체(시인)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기호의 매개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사물의 실체와 그 실체의 성질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보다는, 그 사물을 표현하는 ‘매개적 기호’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이다. 이미 이상(李箱), 조향(趙鄕) 등이 그렇게 해 왔다. 그런대로 의미 있는 이 계열의 상속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황지우, 박남철은 해체시 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기호파’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심상운, 양준호, 박찬일 등의 최근 실험은 모두 이 계열로 보인다.   앞 바다를 빨래처럼 걸어 줄에 매어놓고 나면 나부끼는 바다 핏빛 선명한 해가 미끈, 미끄러지며 캄캄하게 사라졌다 -오남구 「서해」에서   이 시는 고군산군도 근처 서해의 일몰(日沒) 현장 풍경의 이미지이지만 결코 서해 일몰의 리얼한 사생(寫生)은 아니다. 서해라는 현실적 현장의 일몰풍경이, 하이퍼텍스트 이미지 형성의 모티프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시인 자신의 자유로운 원근법에 의한 별개의 기호세계를 이루고 있다. ‘원근법’도 매개적 관계자다. 이 텍스트는 바깥에 존재하는 현장의 사물을 지향대상(referent)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자체는 사물의 세계를 넘어선 기호세계의 텍스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에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시문학, 2007. 6)의 제1연만으로는 여느 물리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분명히 사생(寫生)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2연은 다음과 같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 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심상운 윗 시의 제2연   시위 장면의 촬영현장과 제1연의 안개 속의 나무, 사회와 자연이라는 두 장면이 한 작품의 구조 속에서 몽타주처럼 연결된다. 더욱이 이 시의 제3연, 제4연에서는 계속 더욱 이질적인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연결되어 겹쳐진다. 즉 제3연은 촬영한 안개 속의 나무를 벽에 걸어놓은 식탁의 한 광경이고, 제4연은 회를 먹는 리포터의 입이 화면 가득히 확대되는 TV의 사이버 이미지다. 이 작품은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집합적 결합’(문덕수 「나의 시쓰기」)이라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분명, 우리 시의 미지의 세계다. 조향의 “유리창에 시꺼먼 손바닥/따악 붙어 있다/指紋엔 나비의 눈들이/(M․S)/쇠사슬을 끊고”로 시작되는 「검은 SERIES」는 역사주의도 아니고 인간중심주의도 아니다.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은 물체이면서 그 기호(記號)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론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일종의 혁명적 징조다. 임화, 미당, 청마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성질의 시다. ‘물체에의 접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호의 혁명적 전환에 의한 기호의 외적 지향성의 관련사물일 따름이다. 임화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물론 아니요, 청마류의 의지나 미당류의 서정 같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이퍼텍스트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물체의 벌거숭이, 날 것 그대로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 이미지’에는 내적 맥락의 연속성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맥락의 연속성도 관념이다.) 「아시체놀이」는 그런 맥락도 없다. 더욱 과격하다. 「아시체놀이」의 관념은 더욱 철저히 배제했다고 볼 수 있다. 「雅屍体 놀이」라는 시는 조향이 서울에서 주도한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연구회에서 발행한 ������오브제������(덕문출판, 1980. 3)에 수록된 작품이다. ‘놀이’라는 말에서, 여러 사람의 합작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조향 씨 주동의 학습클럽 멤버들(김요환, 이용진, 김병만, 민장호, 이선외 등 제씨)이 참여한 합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검은 SERIES」가 보여준 행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는 그것마저 단절되고, 마치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처럼 엉뚱하고 기발하고 충격적이다. 다음에 양준호의 시 「눈뜨는 나뭇잎의 9월」과 「아시체놀이」를 함께 든다.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양준호의 하이퍼텍스트도 「아시체놀이」와 비슷하다. 송시월, 박유라도 이 계열에서 논할 수 있을 것 같다.(다음 기회에는 ‘서정시와 관념시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 시궁창에 쳐 넣어진 거야. 안경알에 비친 무지개 빛깔은? 머리카락이다 세모꼴의 치아의 촌수는? 미학의 꽁무니다 -「雅屍体놀이(문답시 1)」 전문   내가 깔고 앉았던 바다를 공중변소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온 날, 뜰 앞의 노오란 민들레는 눈 멀어 종일 바닷새가 회항(回航)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준호 「눈뜨는 나뭇잎의 9월」 전문    
1578    밤중에만 詩공부하는 눔이라구라... 댓글:  조회:4069  추천:0  2016-08-04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정리 : 조 명 제     ☞ 구조주의의 한계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공허하고 분명치 못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면을 ‘언어의 감옥’이라고 비판한 경우도 있다(프레드 리 제임슨『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72).   ②본디 반역사주의적인 성향에서 오는 문학의 배경 등에 걸친 입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③언어구조 등에 치우치는 데서 오는 탈사물화(脫事物化)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 다.   이런 취약성을 안고 있는 구조주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해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구조주의의 특성과 제문제   196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 특성은, 우선 그것이 ‘언어(기호)’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 곧 구조의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대별된다. 이 같은 관념은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문화, 문학, 인류학, 신화 및 기타 사회적 관습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저에 숨어 있는 공통된 체계나 법칙, 혹은 틀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그 특성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개별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켜 버리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첫째 구조주의자들은, 리얼리티는 작가의 언어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가 창조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공시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통시성을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 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서 생성되고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개체’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특권을 부여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랑그/빠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자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을 이분화한 다음, 전자(前者)에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이항대립적)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기호의 재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없는 포스트구조주의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포스트구조구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에서 ‘해체’ 또는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가진 포스트구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우선 전술한 여섯 가지 구조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면서 시작된다.     1)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2)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이성 중심적 태도를 지양 한다. 3)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 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4)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5)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이는 곧 형이상학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 능력을 불신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서 하라리는 여섯 번째 것, 즉 재현에 대한 차이를 든다. 그에 의하면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들의 재현 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 그리고 기호와 대상 사이의 연계성을 믿는 이상주의적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구조주의의 그러한 이상주의적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안정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낙관적인 생각이 틀린 것이며, 사실 의미란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유보적인 상태일 뿐이며,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및 기호학 이론가로 자신을 해체시켜 가면서 탈바꿈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 계열의 주요 저작으로는『S/Z』(1970)가 있다.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인「사라진느(Sarrasine)」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적 책읽기를 통해 반재현적 독서를 유발하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S/Z』에서 바르트는 독자가 어떻게 고정된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후기의 바르트는,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와 가치 있는 텍스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유희(play)'할 줄 아는 작가와 텍스트를 의미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저작인『글쓰기의 영도』를 보면, 당시 사상의 중심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관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여는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르트르의 언어의 도구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관과는 달리, 바르트는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신화(myth)'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작용에는 두 수준의 질서가 있다. 제1차의 질서는 현실의 수준 또는 자연의 수준이며, 제2차의 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다. 의미작용의 제1차 질서는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외시(外示) 의미만을 생산한다. 이 수준에서 ‘한 알의 모래’는 모래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제2차 질서는 기호의 두 기본 소자들, 즉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들로부터 비롯된다. 기호가 두 개의 기본 소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2차 질서 또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함축적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신화의 질서이다. 먼저, 함축은 기표의 제2차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표가 기호의 형태를 결정한다. 기호 형태의 변이와 변용들이 여러 가지 주관적 함축 의미를 일으킨다. 이 수준에서 예의 ‘한 알의 모래’는 모래 이상의 것이 된다. 영국의 시인 W.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토목 건축업자들이라면 ‘한 알의 모래’라는 기표에서 거대한 건축 구조물을 떠올리고, 반도체 공학자들은 거대한 인공 통신조직을 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표는 보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 의미들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니는 함축 의미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 함축 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호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째로 기호를 통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신화에 의한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화를 ‘함축 의미의 체계’라고 정의하는데, 이 신화는 끊임없는 변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고전적인 신화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호의 ‘의미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섬유조직 자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패션의 체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그 텍스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의상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제 의상이 아니라 패션잡지에 글로 기술된 의상이라는 점이다. 그 글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이미 소쉬르의 제안들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에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이 언어학에 속해 있는 학문임을 주장한다. 그러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할 때는 항상 그 대상을 언어화해서 이해하도록 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피할 도리 없이 의미를 짓는 언어체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며, 나아가서 언어체는 현실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뿌리 깊은 신념인 것이다.   후기의 바르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영향과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 아래에 서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텍스트이다. 그는 텍스트의 유희성을 다룬『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비롯해서, 포스트구조주의 문학 논쟁으로 번진『저자의 죽음』(1968)을 썼는데, 다원적 텍스트론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쓸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히 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의 개념은 고정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수용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한 창조적인 하나의 저자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 있어서, 수용미학(독자 지향 이론)과 더불어 독자의 위치를 높이고 독자의 능동적 독서 행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반적인 텍스트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 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영화, TV프로그램,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code)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정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나중에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낳게 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같은 학자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리다의 초기 3부작인『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이』『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했던, 후서얼의 기호학 체계 비판과 소쉬르의 언어 중심주의 비판에는 흔히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알려진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에 있었다. 그래서 존재신학 혹은 서구 중심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공격하는 이런 데리다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논문의 핵심은 섣부르게 오해되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거 작가들에 대한 신화를 전복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바르트 역시 단일한 의미란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소설이나 미슐레의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세부 사항에 주목한다. 그것은 지시 사항과 기표의 직접적인 공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의는 기호에서 추방되고 지시 대상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형성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장치는 사실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J.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기호(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연구는 초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기표의 물결을 뒤덮는다. 데카르트 이래 소쉬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의였으며, 그것은 구조주의자들과 초기 롤랑 바르트에게까지는 중요한 입장으로 실천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와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전복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사람은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그의 강의 속에서 그 같은 전복의 관계를 설명한다. 어떤 구조 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공존하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또는 이원항)이라고 할 때, 그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보드리야르에 이르게 되면 기의는 사라지고 오직 기표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데리다는 라캉과 보드리야르 사이에서, 라캉식으로 보자면 기존의 담론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보드리야르식으로 보자면 기표들의 유희를 만들어 낸다.   데리다가 문학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 내부에서가 아니었다. 데리다의 이론은 동시대인인 미셀 푸코와 함께 빠르게 미국 학계에 전해졌는데,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인 폴 드 만을 비롯해서 해롤드 블룸에 이르기까지 해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강단에서 환영받게 된다.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파는 버로우즈나 토머스 핀천 같은 기존의 비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른바 해체비평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들   언어로 표명되는 성욕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적인 ‘무의식’을 추구하면서 특히 세 가지 주요 양상, 즉 저자(‘등장인물’), 독자, 그리고 텍스트를 취급했다. 정신분석 비평의 시작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학작품을 예술가의 징후로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 정신분석 비평은 정신분석적 독자반응 비평을 통해 포스트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문학작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는 칼 융의 ‘원형’ 비평에 의해 논박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 의해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었다. 이들은 ‘욕망’의 역동적인 개념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형을 결합시켜 영향력 있는 쇄신 작업을 해 왔다.   1.자크 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혼합한 것 같은 자크 라캉의 이론은 우선 주체(주관Subject)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조주의와 정면 충돌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불안정한 지시어에 비교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처럼 지시 어와 지시 대상 사이도 역시 불안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술행위는 만족이 아닌 욕망만을 가져다 주는데, 이 욕망은 물론 무의식과 상통하고 있다. 모든 지시어는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권하며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를 제안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따르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미끄러진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어와 혁명     문학적 의미에 관한 크레스테바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특별한 사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정렬되고 합리적으로 수용돤 것이 ‘이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에 의해 계속 위협당하는 과정을 천착하려 한다. 크리스테바의 제목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견해로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권위 있는 담론들의 분열과 연루되어 있다. 시적 언어는 사회의 ‘닫힌’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학적’인 것의 전복적인 개방성을 도입한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 분석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앙띠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5)과『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1972)에서 정신분석을 과격하게 비판하고-라캉을 끌어들이나 그를 초월하면서-동시에 그들이 ‘정신분열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을 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 분석’은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며, 편집증적 무의식적 욕망과는 달리, 분열증적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총체성의 전복을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를 한다. 문학과 정신분열의 관계는 문학도 역시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고 체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텍스트도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담론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을 해방시키는 독자’, 즉 ‘분열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rhizome)이다[엘리자베스 라이트].   해체 이론     해체비평(Deconstruructive Criticism)은 더러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해체주의는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하부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평방법을 지니고 있는 해체비평은 재래적인 작품 읽기나 해석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주장한다. 소쉬르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주의 기호학에 의해 발달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태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띤 이론이다.     1. 자크 데리다의 해체 이론     롤랑 바르트가 구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었다면, 자크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기본 명제들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며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36세 무렵의 무명학자이던 그는 1966년 미국의 존즈 홉킨즈 대학에서 열린 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여 세계적인 구조주의 석학들을 놀라게 한 논문「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이론은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의 해체적 이론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구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지만,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의 구조 개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첨예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에 새삼 주목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며,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의미가 형성된다고 여겼다. 하나의 기표는 시대의 흐름과 변천에 따라 새로운 기의가 덧씌워지곤 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들은 ‘중심’을 원한다. 중심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例)의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의 내면에서 그것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어떤 의미의 ‘중심(center)’이 ‘완전한 현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중심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욕망과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데리다는 서구의 ‘말(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 또는 ‘음성 중심주의’(『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를 들고 있다. ‘로고스’(희랍어로 ‘말’을 뜻함) 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다. 글은 말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음성을 글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 중심주의의 고전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호 체계 즉 글은 현존해 있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회의를 던지며, 근원과 현존의 부재를 주장한다. 만일 현존에 도달, 완전한 재현이 가능한 것이라면 모방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예술이나 언어도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존이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글의 서열제도를 없애 버렸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들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왜 기호는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말 중심주의는 틀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diffe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프랑스어 동사인 ‘differer’는 ‘차이나다(다르게 하다), to differ’와 ‘연기하다(지연시키다), to defer’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것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과 맥락에 의해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현존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영원히 ‘차이’를 갖게 되며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상호텍스트성 또는 범텍스트성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중심과 근원이 유보되어 있는 현 상태는 작가들에게 활발한 유희 를 유발시키며, 현실은 곧 꿈의 속성을 띠게 된다. 또한 절대적 진리의 유보는 곧 해석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고정된 결합까지도 부정하고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열린 지평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태도나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비이데올로기적이고 비투쟁적이며 텍스트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과 괴리된 비평가라는 비판을 가져다 주고 있다.   2. 미국의 해체 이론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신비평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자 수많은 외국의 이론들을 자유롭게 섭렵하고 있었다. 노드롭 프라이의 과학적 ‘신화비평’, 루카치의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뿔레의 현상학, 그리고 엄격한 프랑스 구조주의가 각각 유행하였다. 데리다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미국의 해체론과 프랑스 해체론 간의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는 비평적 글쓰기의 양 식에 있다. 예컨대 데리다와 바르트가 때로(특히 1970년대 이래로) 파편화되고 장난스러운 담론을 선보이는 데 반해, 드 만과 밀러 그들은 잘 짜여진 관습적 텍스트를 내놓는다. 그러니까 미국의 해체론자들은 온갖 텍스트성의 자유 유희를 주창하면서도 전통적인 담론 양식을 실천한다.   ✿폴 드 만(Paul de mann)/ 드 만은 모든 언어는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반대의 뜻을 갖는 것은 언어의 지칭력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언어의 수사성’이라고 불렀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상반된 뜻을 갖는 경우에 해석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신비평의 모호성과는 다르다. 모호성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이지만, 드 만의 수사성은 이미 언어 자체가 서로 반대 의미를 품고 있어 해체되어 버리므로 엄밀히 어느 쪽 의미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헤이든 화이트/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사적 유형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바, 역사 편찬학(역사 이론)에서 화이트는 잘 알려진 역사가들의 저작들에 대해 과감한 해체를 시도했다.『담론의 수사학』(1978)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서술을 객관적이 라고 믿지만, 구조와 관계되는 그들의 기술 행위는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롤드 블룸/ 블룸은 전통에 대항하는 시인의 강한 자기 주장이 괴기한 오독을 낳는다고 했다. 시인은 늘 앞선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강한 에고는 선배의 시를 잘못 읽는다. 그러나 억압된 선배의 시는 흔적으로서 후배의 시에 수정되어 나타난다. 블룸은 ‘시적 오독’에 관한 4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후 영미의 주요 시인을 탐구했다.   ✿제프리 하트만/ 하트만은 모든 것이 자리바꿈이고, 다만 과정에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비평의 사회적 책임 역시 텍스트를 서로 공유하는 상호 관련성에 있을 뿐이다. 그는 ‘연기(delay)’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면서 의미의 결정이 늦춰지는 게 아니라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스스로 해체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J. 힐리스 밀러/ 밀러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라고 설파한다. 그의 수사비평은 데리다의 ‘차이’와 폴 드 만의 수사성이 묘하게 혼합되어 단어, 이미지, 작품들의 관계가 모두 반복이고 자리바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셸 푸코의 언술과 권력     미셸 푸코는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언어를 모든 역사적, 사회적 틀에서 분리시켜 언어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이다.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푸코는 ‘글쓰기’란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언술의 힘을 통해, 그리고 특정 의미의 부여를 통해 저자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언술행위라는 것은 곧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그래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배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개념이란 사실 그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합법화시킨 것일 뿐, 혁명 후에는 그것이 곧 불의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절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곧 임의적인 것이 되고 불안하게 되며, 드디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영합한 공식적인 언술행위와 그것의 억압에 대한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그러한 공식적인 언술행위가 오랫동안 제외해 온 또 다른 소외된 언술행위로 눈을 돌리게 해 주었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온갖 억압을 합법화,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당화는, 압제자에게는 스스로 당연한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그리고 피압제자에게는 압제가 당연한 것으로 순응토록 만든다는 점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감시와 규율과 교화의 목적은 비정상인의 정상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정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문제려니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간 정상화되었다고 판정을 받는 비정상인들은 대부분 모범수가 되어 이번에는 제도적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동료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결탁과, 제도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문제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형무소, 복지원, 고아원, 학교, 정부, 성(性) 등의 모든 사회제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푸코는 시사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교묘히 모든 것 속에 들어가 있고 너무도 널리 편재해 있어서 밖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푸코는 바로 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탐색하여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 비평가의 작업이라고 했다.『광기의 역사』『말과 사물』『지식의 고고학』『감시와 처벌』『감옥의탄생』『性의 역사』등 그의 저서들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에 큰 획을 그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작 이론/ 푸코의 미국쪽 제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중요한 저서『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푸코의 담론 이론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데리다를 세속성(worldiness)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한 더욱 급진적인 비평가이다. 사이드는 텍스트가 산출되고 위치해 있는 역사적 순간이나 그 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무시한 채, 텍스트 내면의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 문학비평의 현황을 개탄하며, 텍스트는 고고한 고립에서 벗어나 보다 더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사이드가 말하는 세속화란 물론 텍스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텍스트와 현실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을 의미한다. 사이드의『시작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우선 그것이 그 동안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지배적 언술행위의 군림과 횡포에 저항하여, 그것과 다른 언술행위를 찾아 내고 인정하며, 또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   신역사주의 비평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던 해체론이 80년대 후반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역사 또는 역사주의를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는 비평 이론의 하나로 등장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이론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신비평과 해체비평에 이르는 여러 비평 경향들을 원용하여 낡고 고착된 ‘역사’의 개념을 다시 꺼내어 재조정하고 재조합해 보려는 일종의 역사 새로보기 작업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모든 표현적 행위는 유물론적 실천의 그물망에 내재되어 있고, 문학과 비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그 전략을 살펴보면 신역사주의 이론이 해체비평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와의 근친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신역사주의가 푸코의 역사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 이론과 카니발 개념까지 넘나들면서 해체주의와 변별성을 유지하고 이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유물론이란 용어는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좌파 전통의 진보적 정치비평가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것의 실천적 활동은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 진행되어 온 문화 분석의 여러 형태를 토대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역사학, 사회학, 문학연구 분야의 영문학, 여성론, 대륙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혼합, 수렴되어 왔다. 알뛰세와 미하일 바흐찐의 영향하에 있는 영국 문화유물론의 기본 가설과 개념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깔려 있는데, 문화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을 특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설사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렇듯 사회적 과정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보편적 진리라든가 인간의 본질적 본성 등에 집착해 왔던 관념적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코 한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조의 이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심문을 하면서 비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형이상학 전체의 전제와 가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 그것이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항해 해체되도록 하는 비평태도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현대 서구 문학비평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 방대한 지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으며,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절대적 의미의 안정된 근원을 교란시키고 해석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며 모든 결론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 체제나 지배 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개체’의 해방을 외치며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끔 인정하듯이 주장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숙명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만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려는 것조차도 그들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신역사주의자들은 그 이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도와 주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입주의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 텍스트적인 역사 이론을 창시한다. 문화유물론의 경우 그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하는 반면에 의미의 순진한 자유 유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 ❧   ⓛ.담론(談論): ‘discourse’의 역어인 ‘담론’은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학문분야와 사상조류들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말로 하는 언어에서는 한 마디의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을 가리키고,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 말 또는 한 문장만을 분석하는 언어학적 방법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문장이 다른 말 또는 다른 문장과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론이란 한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이론의 범위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셸 푸코는 담론을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고 자기 지시적인 집합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 형성, 권력의 체계 및 행사에서 담론과 권력은 구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담론이 비평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전개, 편입되면서 담론비평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담론비평의 이론적 원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반기를 든 바흐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흐찐은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언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언어를 이데올로기, 물질성, 계급 투쟁과 분리시키려는 일체의 언어론에 맞서고 있다. ②.의미작용(의미화):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③.코드와 코드화: 코드화란 기의와 기표간의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작을 말한다. 의미 작용과 코드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코드화가 자의적 조작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려면 기호 사용자들에게 코드화된 것을 관습화시켜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화를 필요로 하지만, 의미 작용은 코드화와 동시에 탈코드화를 허용한다. 탈코드화는 예술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술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예술에 생명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코드란 메시지를 한 가지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변환시켜 주는 명료한 규칙들의 묶음이다. 즉, 코드란 ‘기호를 위한 명료한 사회적 관습들의 체제’이다. --------------------------------------------------------------------------- ❧ 라만 셀던 외(정정호 외 譯)-현대문학 이론 개관(한신문화사), 레이먼 셀던(현대문학이론연구회 譯)-현대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문덕수-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시문학사), 이명재-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권택영-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민음사), 김용권-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윤호병-후기구조주의(고려원), 인문과학연구소(편)-현대 문학비평 이론의 전망(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움베르토 에코-기호학 이론(문지), 자크 라캉(권택영 엮음)-욕망 이론(문예출판사),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한국기호학회 엮음-문화와 기호(문지), 한국기호학회 엮음-현대사회와 기호(문지), 이상우 외-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이승훈(편집)-현대시사상ㆍ2(고려원, 1988) 외. ------------------------------------------------------------------------ ❧   ‘살려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김춘수「처용단장-제2부, 3」,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同,4). ☞ 대상과 주제가 없이도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해체적 인식 끝에 얻은「처용단장」제2부는 일체의 관념이나 설명이 제거되고 증발된 탈관념의 세계요, 통일된 어떤 아이콘[像]으로서의 이미지도 없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언어와 언어, 또는 문맥과 문맥 사이의 단절과 차단으로 중심이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기호는 그 고유한 의미를 잃고 오직 무한한 상호지시의 관계로 존재할 뿐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도 춤추며 노래한 처용의 그 기이한 행위처럼, 일상적 혹은 논리적 의미체계를 일거에 소거시킨 이 비논리적 리듬의 연속성은 의미가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애절한 분위기의 주술적 충격으로만 전해 온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시니피에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뒤덮고 물결치는 시니피앙의 화려한 유희,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전복된 탈중심의 소용돌이(궤적)가 현저한 상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돌아가는 긴장으로 하여 팽이가 일어서듯, 그리고 현기증 나는 회전으로 하여 울음 울 듯 시니피앙의 유희와 울림의 효과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탈중심 탈이미지의 세계는 현기나는 리듬의 실존적 환열 바로 그것이다. (조명제). ------------------------------------------------------------------------ ✯   (1) p.184-7~9행:만일 구조주의가 영웅적으로 인위적인 기호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희극적이고도 반영웅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한신문화사)/만일 구조주의가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것이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희극적이고 반(反)영웅적인 것이 된다.(문학과지성사), p.185-4~6행:이것은 마치 다양한 언어들이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이념들의 세계를 다른 개념(기의)들로 조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단어들(기표)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한신)/그것은 마치 여러 언어들이 사물과 관념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개념(‘지시어’)과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지시 대상’)로 분리하는 것과도 같다.(문지), pp.185-맨 아래~186-1~2행:소쉬르는 언어가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하나의 총체적 체계라고 설정한 후, 비록 기호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킨 것이 기호의 일관성을 없애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호의 일관성에 관한 감각을 보유하고자 노력했다.(한신)/언어를 외적 현실과 독립된 완전한 체계로 확립시킴으로써, 그는(*소쉬르) 비록 기호를 둘로 나누는 것이 그것의 응집력을 위협하는 것이긴 했지만, 기호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문지)☯    
1577    재다시 현대시 공부하기... 댓글:  조회:4451  추천:0  2016-08-04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576    다시 詩공부합니다... 댓글:  조회:3989  추천:0  2016-08-04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      
1575    詩作하는데는 시험도 숙제도 없다... 댓글:  조회:4040  추천:0  2016-08-04
[26강] 이미지의 종류.1  강사/김영천  반갑습니다  갈수록 강의가 좀 어렵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학문은 어떤 과목이라도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듣고 다음에 또 듣고, 어디선가 같은 이야기를  만나면 그래도 반갑고 알 것 같은 것이랍니다.  시험도 없고, 숙제도 없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어려운 곳은  그냥 넘어갔다가 표시해 둔 후 언젠가 여유있는 시간에 다시  와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러면 또 곧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요.  오늘부터 강의하는 이미지의 분석까지는 꼭 알아야하진 않습  니다.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면 되지요.  다만 시 속에서 어떻게 이미지를 살릴까 더 연구하시고 싶은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자세히 합니다만 지금 사용하는 교제가  다 대학교나 대학원의 강의에 쓰이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대학교나 대학원 국문과의 강의에 버금가는  공부를 하신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고, 도중에 포기하지  마시고 열심히 하십시오.  다음엔 이미지만큼 중요한 비유(직유, 은유 등), 상징, 아이  러니 등 정말 중요한 부분이 남았고요. 제목 붙이는 방법도  공부할 것입니다. 시를 쓰면서 제목 정하기가 얼마나 힘드는  지 모릅니다. 우리 함께 열심히 하십시다.  그럼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미지는 그 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만큼 학자들에 따라서 분류하는 방법도 다른데요.  우선 이미지(언어)가 환기하는 범위와 작용에 따라 분류하는  경원대학교 이영섭교수에 의하면  1)심리적 이미지  2)비유적 이미지  3)상징적 이미지로 나누고 있으며  홍윤기씨는  1)시각적 이미지  2)청각적 이미지  3)촉각적 이미지  4)운동적 이미지 로 분류하고 있읍니다.  최동호 교수는  1)지각적 이미저리  2)비유적 이미저리  3)상징적 이미저리로  조태일님은  1)정신적 이미지  2)비유적 이미지  3)상징적 이미지 로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조태일님의 분류를 중심으로 다루어  나가면서 다른 분들의 의견은 필요시마다 참고로 하겠습  니다.  또한 정신적 이미지는 지각적 이미지나 심리적 이미지와  같은 의미로 볼 때 홍윤기씨의 분류외에는 모두 한 맥락이며  그 부르는 이름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홍윤기씨의 분류는 정신적 이미지를 세분한 목록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정신적(지각적,심리적)이미지  정신적 이미지는 대상에 대하여 감각적 체험의 재생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대상을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느끼  게 해주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미지를 논할 때 가장 많이 거론  되는 것이 정신적 이미지인데 이를 다시 세분하면 시각적  이미지(명암, 선명도, 색체, 동작 등)와 청각적이미지,  후각적이미지(향기, 악취 등), 미각적이미지, 촉각적이미지  (열기, 냉기,감촉 등),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다섯 가지  감각은 우리 들의 감각을 대표하는 오감으로서 정신적이미지  를 만들어 내는데 원천이 됩니다. 이 밖에도 학자에따라서  감관적(신체조직기능-심장박동,혈압,호흡,소화등의 인식,  근육운동-근육의 긴장과 이완), 역동적(운동적), 공감각적  이미지 등으로 세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가면서 공부를 하면 쉽게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조병화님의 전문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먼 하늘에 둥근 사발물이 꽁꽁  얼어 붙어 있다  하얗게  위의 시는 겨울의 맑디 맑은 밤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을  꽁꽁 얼어붙어 있는 '둥근 사발물'에 비유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자극시켜서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지난 시간에 읽은 김광균님의 에서 볼 수  있는 청각적 이미지의 시각화는 이 시가 발표되던 1930년대  후반에는 탁월한 사례로 임화,김기림에 의해 평가되었습니다.  허영자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 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 밖에는-  어떻습니까?  '떫고 비린'이란 미각적 이미지를 '붉은 단감'이라는 시각  적 이미지 속에 용해시켜, 젊은 날의 고통과 가을 햇살 속  에서의 인간적 성숙을 붉은 단감 속의 감각 이미지로 간명  하게 형상화 시키고 있습니다. 시의 문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말들이 두 개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축약되었습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시적 방법은 현대시에서  두드러지게 하용되는 언어적 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라연님의 전문입니다.  우면산 가랑이에서  떡갈나무 등걸에서  삐요시 삐요시 삘릴리이  삐요시 삐요시 삘릴리이  숫매미가 자지러지면  집 떠난 처녀들  귀 가렵고  아파트에 혼자 누운 그 사람들  속 쓰리다  삐요시 삐요시 삘릴리이  삐요시 삐요시 삘릴리이  우리는 보통 매미 우는 소리를 매암 매암 매암,또는  맴맴맴, 이라고 표현하지만 여기서 시인이 창조한  독특한 매미 울음 소리는 그 낯설게하기로 새롭고  신선하게 우리의 청각을 자극시키고 있습니다.  박재삼님의 에서 보면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기뻐 그려낼  수 있는  明明한 明明한 매미가 우네  이는 이도령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춘향이의 시점에 선  화자가 한 여름 숲에서 우는 매미의 소리를, '明明한'  소리로 들음으로서 반가운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대님 푸는 소리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상시켜 임에 대한 간절  한 그리움을 자연스럽게 연상시켜 줄 뿐만 아니라, 맴맴이라  는 의성어를 한자음 明明이라고 표현해 의미적 요소와 결합  되어 기다리는 이의 어두운 마음을 스스로 밝은 마음으로  바꾸어내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의  성어의 낯설게하기로 우리의 청각을 신선하게 자극하고 있습  니다. 이 청각적 이미지에 의해 시의 분위기가 훨씬 더 생동  감 있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용악님의 입니다.  들창을 열면 물구지떡 내음새 내달았다  쌍바라지 열어제치면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  뒷산에두 봋나무  앞산두 군데군데 봋나무  주인장은 매 사냥을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  오래 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  "물구지떡 내음새"와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  웠다"는 우리의 후각을 자극시키는 후각적 이미지이지요.  특히 위의 시는 단순히 후각적 이미지 뿐만 아니라 향토적,  토속적 분위기까지 자아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엔 황동규님의 중에서 후각적 이미지가 나타  나는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혼자 몰래 마신 고량주 냄새 조금 몰아내며  거실 창을 여니 바로 봄밤.  하늘에 달무리가 선연하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비릿한 비 냄새.  겨울난 화초들이 심호흡하며  냄새 맡기 분주하다.  이 작품은 고량주 냄새를 조금 내보내려던 화자가 창을  여니, 오히려 몸밤의 비릿한 비 냄새가 코끝에 스쳐오고,  겨울을 난 화초들도 심호흡하며 봄냄새 맡기에 분주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이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이 서로의 체취를 맡  으며 서로 교감하는 왕성한 생명력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습하는 의미에서 우선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이미지가 잘 나타나 있는 시를 더 읽어보겠습니다.  감태준님의 의 전문입니다.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  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  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이 시는 시 전체를 통해서 시각적 이미지가 압도해오는  작품입니다. 특히 이 시는 포장 술집 멀리 뒷산의 단풍이  든 나무들이 시의 서두와 말미에 표현되고 있어서 시각적  이미지가 짙은 서정성에 의해서 더욱 두드러진 표현미를  이루고 있는 특징이 있지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가 동시에 표혀됨으로시 전체를  발랄하고 신선하게 해 주는 시로 김종길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 정구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재거리고 있었다.  청각적 이미지의 예로 문충성님의 의 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호이호이 해녀들 휘파람 속  새빨갛게 타는 협죽도 꽃울음  濟州 바다  일렁이는 물결이  잴 수 없는 넓이를 만들어내고  한 길 두 길  그 깊이를 재어 넓이를 캐어내고 자꾸만  전복만한 삶을 자멱질하고 호이호이  핏줄 부푸는 꿈을 일구어내고  알몸뚱이 나의 여름이여  뙤약볕 정적을 깨내는 소리 호이호이  그 속으로 내달리고  그 속으로 잠기어 들고.  오늘은 강의가 너무 길었네요.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감으로 인한 분류임으로 비교적 이해하기 쉬우  실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정신적이미지를 더 공부  하겠습니다.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메리 올리버(1935∼)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어린이의 순수함이 예쁘게 그려져 있다. 이 시의 화자, 참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네! 어린이가 이렇게 속 편하게 살아도 되는 환경이 부럽다. 그런데 우리 세대 사람들은 어렸을 때 비슷하게 행복한 여름방학을 보냈다. 개학을 한 이틀 남기고 밀린 방학숙제를 하느라 낑낑거릴 정도로 펑펑 놀았었지. 우리 인생의 아르카디아인 초등학생 시절의 여름방학! 요즘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는 영원히 갈 수 없는 유토피아다. 어른의 간섭 없어도 스스로 다잡아 방학 기간 공부 계획을 세우는 어린이도 있단다. 만약 엄마 아빠가 방학에는 ‘그동안 배운 걸 잊’고 놀라고 권한다면 오히려 징징거리겠지?  어느 철학자인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생애의 중간도 아니요 끝도 아니요, 꼭 앞에 두셨다고 투덜댔었지. 지금 어린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어디 있을까!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늙어지면 못 노나니.’ 아주 오래전에 이런 가사의 유행가를 흥얼거린 기억이 난다. 젊어서 놀기를 바라지는 못할지언정 유년시절에는 방학에라도 자연 속에서 뒹굴며 오직 놀아야지! 우리 어른들도 이번 주말에는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을 싹 잊어버리고 어떻게든 놀아보세!    
1574    詩에서 작은 이미지 하나로 시전체분위기를 만들라... 댓글:  조회:4224  추천:0  2016-08-04
[25강] 이미지가 시 속에서 하는 일,2  강사/김영천  셋째) 이미지는 시의 주제와 시적 의미들을 제시합니다.  물론 시적 주제가 선명히 들어나 있는 것도 있지만, 좋은  시들은 주제나 의미를 노출시키지 않고 이미지에 의하여  독자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미지에  의하여 자신의 시에 들어 있는 시적 의미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입니다.  김남조님의   내 마음은 한 폭의 旗(기)  보는 이 없는 時空(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 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旗는  눈의 음악이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이 없는 日沒(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降書(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悲哀(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旗  보는 이 없는 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원문에는 한자로만 되어 있으나 한글 세대를 위해 제가  괄호 안에 한글로 달아놓았습니다.  이 시에서 나타난 '깃발'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앞으로 상징에 대해서도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여기서 깃발은 주제를 형상화한 주요 이미지입니다.  갈등을 표상하면서도 오히려 그 것을 뛰어 넘어 지극한  평화와 순수함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내면의 세계를 나타  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관념과 테마를 육화  시키는 것입니다.  넷째) 이미지는 시적 분위기나 배경, 상황을 제시합니다.  뭐,이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분위기나 배경, 상황은  시 세계의 사실감을 자아내고, 시적 공간과 정서를 특정한  색체로 물들게 하면서 그 시적 의미를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입니다.  임화의 중에서  (여기서 -중에서란 말은 그 시의 일부라는 이야기입니다.  전문을 실을 땐 그 옆에 전문이라고 쓰는데 저는 지금  편의상 거의 전부를 전문을 싣기 때문에 전문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허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러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골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젓갈이나 걷어 가주올 게지......"  혀를 차는 제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잔은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은.........  그믐밤이라 정거장 푯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내는지?  나으리들뿐이랴. 누구한테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쟁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面所(면소)에서 준 표紙(지)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뵈니까  그렇지!  우선 임화란 시인을 아셔야 겠지요. 해방후 우리나라  문단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었어요.  이 때 사회주의 세상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해 문학을  해야한다는 파들이 소위 카프 계열이였고 최근까지  금서로 그들의 작품을 우리가 접할 수 없었습니다.  임화는 그 카프계열의 시인이어서 아마 처음 듣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요즘 임화 등 그 동안 취급할 수 없었던  카프계 문인들의 연구가 학계에서 아주 활발한 실정입니다.  여기 그의 간단한 프로필을 실으니 그냥 한번 가볍게  읽어만 보시기 바랍니다.  임 화(林和/1908.10.13~1953.8.6)  시인·문학평론가. 본명 인식(仁植). 필명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성아(星兒)·  임화(林華) 등. 서울 출생.  보성중학(普成中學) 중퇴, 잡지 《학예사(學藝社)》  주간을 거쳐 1926년 카프에 가입한 이래 조직활동에서  줄곧 중추적 역할을 했다. 32년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한 후 서기장이  되었으며, 35년에는 카프 해소파의 주류를 형성, 카프  해산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9년  무렵부터로, 이때 그는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橫濱]의 부두》 《네거리의 순이》와  같은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카프를 중심  으로 하는 그의 비평은, 조직론에서부터 창작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강력한 지도성을  발휘하였다.  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세악화로 카프가 해산  되고 정치투쟁에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활동은 좀더  문학내적 방향으로 회귀하게 되고, 여기서 세태소설론·  내성소설론·통속소설론·본격소설론 등 일련의 ‘소설론’  이 제기된다.  이 가운데, 그는 성격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본격소설을 문학의 정도(正道)로 파악하고, 이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론을 전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문학사의 서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그의 《개설 신문학사》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최초의 근대문학사가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8·15광복 이후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그  후신인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월북하였고, 53년 남로당 숙청 때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으로는 시집에 《현해탄(玄海灘)》《찬가(讚歌)》  《회상시집(回想詩集)》 등이 있으며, 평론집에 《문학의  논리》가 있다.  위의 시는 일제 식민지 아래서 고향을 등지고 '되놈'의  땅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우리 민족의 한 단면이 밤  열차 속의 구체적인 상황들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  니다. 조태일님의 해설을 그대로 옮깁니다.  "타지방의 사투리라서 시적 화자인 나에게 그 것이  낯설게 들리지만, 밤 열차 안에서 냄새 나는 도시락을  먹는 모습과 검게 그을린 낯빛들은 너무나 눈에 익은  모습이다.  그 까닭은 그 당시 살기 위해서 고향을 버리고  만주나 북간도로 떠나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흔하고 많았  기 때문이다. 왁자지껄한 사투리와 냄새를 피우며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검게 탄 얼굴로 밥을 먹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코를 막는 점잖은 신사 숙녀들, 시적 화자의  답답한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모든 상황들을 그 당시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고단한 삶을 시적 공간에서  실감나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인 것이다."  다시 김영무님의 를 읽겠습니다.  춘분 가까운 아침인데  무덤 앞 상석 위에 눈이 하얗다  어머님, 손수 상보를 깔아놓으셨군요  생전에도 늘 그러시더니  이젠 좀 늦잠도 주무시고 그러세요  상보야 제가 와서 깔아도 되잖아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오가는  이심전심의 애정을 느낄 수가 있지요?  그러면서도 모자간의 따뜻함과 애틋함이 배어나오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이미지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시를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것입니다.  모두 아마 똑 같은 그림일 것입니다.  무덤 앞 상석을 소복이 덮고 잇는 흰 눈에서 발견한 상보의  이미지, 이 상보의 이미지는 아들을 기다리며 밥상을 차리던  , 또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을 위해 꼭두새벽 일어나서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의 사랑을 가시화한 것입니다.  작은 이미지 하나로 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시적  정서나 의미들을 온전히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위의 시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제와는 상관 없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  은 여기서 한 번도 어머니를 향해, 그리운 어머니,보고싶은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이미지를 통해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를 쓰면서 감정의 직접적 표현이나 설명적 표현  이 아니라 이런 이미지를 통해서 주제나 의미를 전달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주 좋은 시입니다.  잠시 쉬며 좋은글 보세요  하나.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다..  둘.  사랑 때문에 고뇌해 본 사람은 잘못된 사랑에도  비웃음을 보내지 않는다..  셋.  불순물이 여과기를 통해 제거되듯.  세월은 추억을 정화 시킨다..  넷.  사랑의 감정은 그것을 감추려고 할수록 노출된다..  다섯.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 밖에서 헤매고.  사랑은 홀로 안에서 기다리는 그런 이상스런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여섯.  고뇌의 치유는.  그것에 대한 긍정에서부터 비롯된다..  일곱.  사랑에 있어 죽음보다 슬픈것은 망각이다..  여덟.  진정한 고뇌는 삶을 이끄는 힘의 원동력이며.  인생의 지혜의 산실이 된다..  아홉.  누구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  전과자나 환자가 된 듯 해진다..  열.  기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값져진다..  열하나.  이별후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새로워지는 추억이 되는것은.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증거다..  열둘.  추억이란 영혼의 스크린에 남는 감성의 메아리..  열셋.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이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열넷.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다섯.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열여섯.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열일곱.  사랑은 고뇌의 결과로서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로서의 고뇌의 과정이다..  열여덟.  꿈..정신병..여행..술..사랑.......  제자리에 돌아오면..모두..아쉬워지는 것들.....  잘 쉬셨지요.  무언가 생각하게 하지요  다시 공부시작 해요  다섯번째) 이미지는 시 세계의 강렬함을 보여줍니다.  전봉건님의 를 먼저 읽고 살펴보기로 하지요.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러분은 무슨 그림이 떠오릅니까?  아주 생그러운 피아노 소리와 그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의 두 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시인은 아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하다가 청각적이미지, 시각적이미지라는 말들이  자꾸 나오는데 이 것은 다음 시간부터 따로 강의 할  제목들이니 염려치 마시기 바랍니다.  위의 시에서 특히 1연의 "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라는 이미지는 손가락 끝에서 튀는 건반의  흰 음계, 검은 음계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으로서 생동  하는 빛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해 주며,  제2연에서도 "시퍼런/파도의 칼날 하나"의 이미지는  정말 섬뜩하리만큼 대담하고 강렬합니다.  한참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최영미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단 두 줄짜리 시입니다.  이 것이 시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지 저는 의심이 갑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자기들 출신이 아니면 그 외 시인들은  아주 우숩게 보는 문단의 귀족 출판사에서 발행한 시집에  버젓이 실려 있으니 시는 시인 모양입니다.  저로서는 시로 인정하기 싫은데 조태일님의 책에 실려있으니  조태일님의 해설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 상투성에서 벗어난 시인의 시각이 대상에 대한 특정 인상  을 개성적으로 표현해 놓았을 때, 우리는 지금껏 갖지 못  했던 강렬한 느낌을 맛보게 마련이다. 위 시도 지하철의  전동차를 순대의 이미지로, 거기에 기를 쓰며 탑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밥벌레'의 이미지로 당돌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섯번 째입니다.  시 속에서 이미지는 신선감을 불러 넣어줍니다.  혹시 우리에게 낯익은 일상적인 사물일지라도 시인에 의해  낯설게 보여지도록 하여 설레임과 신선감을 갖게 됩니다.  김종철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가지의 暖冬(난동)의 빨간 열매가 繡(수)실로 뜨이는  눈내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神(신)의 아내들이 짠 銀(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內部(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假縫(가봉).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天使(천사0에게 주문 받은 아이들의 전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神의 겨울.  그 길로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懷孕(회잉)의 고요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雨雷(우뢰)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김종철의 중에서  옛날 시이지요. 아마 이 시도 많은 분들이 읽어 본 시일 것  입니다. 이 시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그림이 떠오르십니까?  눈 내리는 겨울날이 우선 떠오르시지요?  그 일상적인 겨울날을 아주 새롭고 신선하게 여기도록 만  들어주고 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가듯 싶고,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이 신비하게 살고  있는 원초적인 생명의 세계, 신들이 거주하는 신화의 세계  가 눈 오는 겨울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필경,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에는 저  아득한 마음결에서부터 들려오는 베틀 소리와 신의 아내가  은빛의 털옷을 짜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슴 설  레는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강의가 길었으므로  좋은 시 보기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요즘 강의가 조금 어렵지요.  시간 나시는대로 복습을 하시면 좀 낫겠지요.  ========================================================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빛 어린 수없는 잎새 같은 바위 위를 걸어서 저기 하얀 길을 혼자 갈 수도 없고, 지상의 짐을 벗어나는 부엉이의 꿈꾸는 동작으로 떠다닐 수도 없다. 아, 땅이여, 네가 가두어 둔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이승의 친구보다 많구나.     절벽 옆 바다 등나무는 푸른빛 은빛으로 번득인다. 이 나무들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천사의 창이었다. 그러나 상실 속에서 더 굳건한 것이 자라나서 그건 돌 같은 냉철한 광채를 띠어, 달빛을 견뎌내고, 절망보다 더 멀리, 바람처럼 굳세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저 등나무 숲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옛 모습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결점이랑 모두 함께, 옛날보다 고상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아무리 사교적인 사람이라도, 친구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라도, 더이상 사람을 사귀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게 되는 시기가 있다. 사람마다 품이 다르니까 무한정 친구를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사십대 중반쯤 되면 이미 친구가 충분히 많다고 포만감을 느낀다. 매사에 그렇거니와 타인에 대한 호기심도 관심도 엷어지기 시작하는, 즉 타인에 대한 의욕이 줄어드는 나이.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건 의욕만이 아니다.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둘 사라진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느덧 이승의 친구보다 죽은 친구가 더 많아지게 된다. 시인은 그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자기의 죽음도 멀리 있지 않은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가 절벽 위 등나무 아래서.  나무는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 같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측백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벚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한다. 남산 하얏트호텔 건너편에 야외식물원이 있다. 그 맨 꼭대기에 플라타너스 길이 있었다. 한 아름이 넘는 둥치에 아주 높다랗게 키가 커서, 그 아래 있으면 깊은 숲에 숨어든 듯 아늑했고, 우듬지를 따라 하늘을 헤엄치는 듯 머리가 시원했다. 재작년엔가, 그 플라타너스들이 전부 사라졌다. 쉰 살은 족히 넘었을 그 나무들을 누가 왜 베어버렸는지 꼭 밝혀내리라. 그리운 플라타너스들….    
1573    詩人은 이미지에게 일을 시킬줄 알아야... 댓글:  조회:3933  추천:0  2016-08-02
[24강] 이미지가 시 속에서 하는 일.1  강사/김영천  시 속에는 이미지가 하는 일이  몇가지가 있는데 하나씩 설명을 해보지요.  경원대학의 이영섭 교수 같은 분은 이미지의 시적 기능을  크게 의미 전달과 정서 환기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태일님의 분류를 따르겠습니다.  첫째)우리들의 마음 속에 우리가 그 동안 오감을 통해 지각하  거나 감각한 체험이나 그 대상을 재생시켜서 시 세계의 구체  성을 만들어내 줍니다.  이미지는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구상의 언어들이지, 비  구상이나 추상의 언어가 아니기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주관적  정서와 새롭게 창조한 의미들을 구체적인 세계로표현해내야  합니다. 이 것이 바로 이미지인 것이지요.  그러면 박남수님의 를 읽어볼까요?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돌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참 좋은시입니다. 가만히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면서  다시 한 번 조용히 읽어보세요. 정말로 종소리가 그  청동 쇠붙이에서 나와, 하나의 울음소리가 되어  우웅우웅, 돌에서는 푸름이 되고,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 악기가 되는 그림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실 이 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유의 모습을  구체화시키는 이미지입니다. 여기 1연에서 볼 수 있듯이  종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  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바뀌면서 자유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종소리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나타냅니다.  2연에서는 자유를 상징하는 종소리와 대비된 상황으로  '청동의 벽'과 '칠흑의 감방'이란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서  억압과 고통이라는 관념을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고 있습  니다.  3.4연에서는 이러한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난 종소리가 평  화의 색깔인 푸르름이되고 화해의 모습인 웃음으로 피어나고  기쁨의 상징인 악기로 표현되면서 '자유'라는 관념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이상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추상성으로 떨어  지지 않고 구체적인 세계를 형성합니다. 이는 이 시의 이미  지가 만들어낸 구체성 때문입니다.  둘째)이미지가 하는 일은 정서 환기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지만 시는 정서의 세계이며, 그 정서  의 표현입니다. 너는 정서적이지만 나는 정서가 메말라서  시를 못쓰겠다던지 할 때 보통 쓰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시 속의 정서는 시인의 노골적인 진술에 의해서 형성  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이미지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입  니다.  시인은 생경한 감정을 직접적인 진술로 쓰게 되면. 그 시는  설명적인 시로 빠져 산문과 다름 없는 실패한 시가 될 것입  니다. 시인은 직접적 진술이 아닌 이미지들로써 시적 정서를  환기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슬픔의 시적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아, 슬프다'라고 하는 대신, 슬픔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 즉 이미지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송수권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새로 오신 섬님이 한 번 읽어보실래요?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섭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도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이 시에 흐르는 맑고도 뜨거운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는  시인의 직접적인 감정 토로나 감정의 진술이 아닌 '객관적  상관물'에 의하여 형성되고 있습니다. 즉 구체적인 여러 이  미지들을 통해서 시적 정서를 자아내고 독자들의 마음 속에  서도 이러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쉬었다 하지요  재미있는 글하나 보세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소년은 그 나무에게로 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그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속의 왕자 노릇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그리고 사과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때로는 숨바꼭질도 했지요.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갔습니다.  그리고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무는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기쁨에 넘쳐 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얘야,내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즐겁게 지내자.  “난 나무에 올라갈 만큼 한가롭지 않단 말야.”하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겐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집이 필요해,  아내도 있어야겠고 어린애들도 있어야겠고 그래서 집이 필요하단 말야.  너 나에게 집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니? 나에게는 집이 없단다.  “나무가 말했습니다. “이 숲이 나의 집이야,  하지만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짓지 그래.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 아냐.“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는 자기의 집을 지으러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자 나무는 하도 기뻐서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온,얘야.”나무는 속삭였습니다. “와서 놀자.  “난 너무 나이가 들고 비참해서 놀 수가 없어.”소년이 말했습니다.  “난 여기로부터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갈 배 한 척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 내게 배 한 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내 줄기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렴.“하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멀리 떠나갈 수 있고...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으나...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 난 이가 나빠서 사과를 먹을 수가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뛸 수도 없고... "  "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뛰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타고 오를 수도 없고..."  " 타고 오를 기운이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 미안해," 나무는 한숨을 지었습니다.  "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단 말야  나는 다만 늙어 버린 나무 밑둥일 뿐이야, 미안해..."  " 이제 내게 필요한 건 별로 없어.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난 몹시 피곤해." 소년이 말했습니다.  " 아,그래."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굽은 몸뚱이를 펴면서 말했습니다.  "자,않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이리로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 The End ...  잘 쉬셨습니까  무언가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죠?  자 그럼 위에 말씀드린 객관적 상관물에 대해 잠깐 설명  하겠습니다.  엘리어트는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  물'을 찾아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객관적  상관물'은 다름아닌 이미지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햄릿론"에서 밝히고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예술의 형태 속에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길은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특수한 정서의  공식이 되고 독자에게 똑같은 정서를 환기시키는 일련이  사물, 정황,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객관적 상관  물이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이 바로 시에서 말하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되겠지요.  좀 어려우면 '객관적 상관물'이란 말이 있다는 것만 알고  싸악 잊어버립시다, 다만 좀 깊이 알고자 하는 분이 한 분  이라도 있을 지 몰라 비평용어사전의 해설을 여기에 옮겨  둡니다.  -이 용어는 T.S.엘리엍의 이라는 에세  이에서 우연히 소개된 것인데 그 후 문학 비평에서 빈번한  사용은 엘리어트 자신이 고백하였듯이, 그 것을 만들어 낸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이었다. "예술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  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에 의하는 것  이다. 달리 말하면, 특별한 정서에 공식이 되어야 하는,  사물의 한 장면, 상황, 사건의 한 연쇄를 발견하는 것-  골치가 지끈거리시지요.  다 잊어버리세요, 시를 쓰는 시인들도 이 걸 알고 쓰는  시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교재로 보고 있는 책에 나  오기 때문에 설명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낯설게 하기"란 단어를 알게 되었듯이,  또는 "아브람스 이론"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듯이  또 어제 배웠던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듯이 오늘은 "객관적 상관물"이란 단어 하나를  그냥 알아두시기만 하십시오.  좋은 시 몇 편을 읽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습니다.  2001년 『시와 사람』 가을호에 실린 노향림님의 을  읽어 보겠습니다.  바닷바람 속에는 수천 수만의 갈매기들  날개 비비는 소리가 들린다.  벼랑 위에서나 갯벌에 앉은  괭이갈매기들의 머리와 가슴은 하얗다.  민박집 커단 등이 내걸리고  바다를 향해 앞가슴 풀어헤친  상수리나무 잎새에 몰린  파도소리가 쏴아쏴아  쏟아질 때쯤  폐선들은 빈 채로 폐기된다.  누구도 바다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배가 뜨지 못한다고  바다는 빈 채로 경고판을 들고 대기중이다.  바람소리 사나워지면  한 마리 공기조차 날지 않는다.  오로지 위태롭게 벼랑에 매달려  알을 품는 괭이갈매기들  평생 바다에서만 살고 사람을 피하지 않는  그들도 벌써 며칠 째 움직이지 않는다.  만리 밖에서 태풍이 오는지  경전처럼 누군가 몰고 올 적막을 기다린다.  멀리 상수리나무의 옷이 다 헤졌다  같은 책에 나오는 김용택님의 를 읽어볼까요?  겨울 달빛으로 시를 썼다  밤새가 운다고  추운 물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든다고  달이 자꾸 가고 있다고  언 손을 부비며  겨울 달빛으로 시를 썼다  달빛에 목이 마르면  꽝꽝 언 마당을 밟고  텃밭에 나가  어두운 무 구덩이 속에서  무를 꺼내다가 깎아 먹었다  바람든 무를 베어 물때마다  이가 시리고  흰 무에 빨간 피가 묻어났다  어둡고 캄캄한 무 구덩이 속에는  무순이 길어나고  긴 겨울밤  휘몰아쳐 오는 외로움과 적막,  그렇게 나도 어둠을 뚫고 빛을 찾았다  시가 내 빛이었다  시가 어둠 속에서 나를 찾는 흰 손이었다  같은 책에 있는 김정란님의 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오, 달빛  뼛속 깊은 곳에  슬픔의 강물이 흐르네  천 년 전 나를 향해 떠난  네 눈빛  ===========================================================       지상의 방 한 칸  ―이시영(1949∼)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 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커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 칸. 난곡(蘭谷), 난초의 골짜기. 서울 도심 판자촌 철거 정책에 떠밀려온 사람들이 실개천 흐르는 이 난초의 골짜기에 마을을 이룬 게 1967년. 그 뒤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하나가 됐다. 교통 불편한 건 더 말할 것 없고, 위생과도 안락과도 거리가 먼 주거환경. 시에 나오는 것 같은 한 칸 방에 대개 8, 9명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이 된 지금, 그들은 거의 어디에론가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채 철거되지 않은 집에 산다고. 루핑, 아스팔트를 입힌 천으로 지붕을 덮은 집. 그게 어떤 거지? 요즘 젊은이들에겐 상상도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 수제비란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이랑 애호박이랑 감자를 사골국물에 숭숭 썰어 넣고 끓여서, 다진 쇠고기 볶음이랑 계란지단을 올린, 어쩌다 별미로 먹어주는 그런 수제비일 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의 시대적 배경은 사십여 년 전, 1960년대나 1970년대. 방 한 칸에서 다 큰 남정네가 홀로 된 누나랑 어린 조카들이랑 ‘오골오골’ 산다. 화자는 식구 중 유일한 장정이니 경제적으로도 힘이 되면 좋았겠지만 병약한 대학생. 평범하고 초라한 일상사를 그렸는데 묘하게 아름답다. 가난해도 각박하지 않은 삶이 거기 있기 때문이리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누나의, 그리고 화자 자신의 젊은 날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 화선지에 붓질한 먹물처럼 번진다.  
1572    詩人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언어의 그림 곧 이미지이다... 댓글:  조회:4402  추천:0  2016-08-01
  [23강] 이미지와 상상력  강사/김영천  1)상상력의 전개 양상  먼저 상상력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도 늘 많이 쓰고  또 잘 알고 있는 상상력에 대해서 막상 시에 대비하여선  낯설어지는 단어입니다.  상상력이란 과거에 체험했던 이미지를 재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즉 어떤 상황에 의해 생긴 감정을 하나의 詩작품  으로 형상화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숭원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제가 이렇게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말씀 드리는 것은 좀 어렵기는 해도  여러분의 지식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니, 너무  어려우면 그냥 읽고만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전환되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상상력의 작용이다. 상상력은 시심을 발동  시키고 사유를 발전시켜 구체적인 시작품으로 시상을 완결  지어 주는 창조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시인이  체험한 다양한 내용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상상력이 중시된다.  이 시적 상상력은 우리의 메마른 삶에 생기를 주고 허무의  사막과 암흑의 동굴을 의미있는 삶의 터전으로 전환시킨다.  우리는 시작품을 통하여 시인의 상상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수용한다. "  이어서 그는 미학자나 문학이론가들이 상상력을 구분하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했는데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보기  쉽게 나누어서 설명드려보지요.  < 콜리지>  제1상상력: 인간이 어떤 대상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지각능력  제2상상력: 대상을 재구성하고 부분과 부분을 통합하는  의식적인 상상작용을 뜻한다.(시에서 중시)  < 러스킨>통찰적상상력, 연상적상상력, 명상적상상력  창조적상상력, 연상적상상력, 해석적상상력  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깊이 알 필요없고 그렇게 나누는 것이다  라고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문학비평에 가장 많이 쓰이는 바슐라르의 상상력  을 말씀드리는데요. 이 이론은 가능하면 알고계시면 좋습니다.  문학비평에 이 이론을 적용하거나, 그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 바슐라르>  상상력을 창조의 원동력이자 존재생성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상상력은 인간이 접촉하는 네 가지 근원적 물질  즉 불, 물,공기,땅이라는 물질의 본질과 관련되어 생성된다고  본 것이지요. 대상의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 물질의 본성을  꿈으로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상과의 진정한 만남에  이르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것이 유명한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입니다만, 다 외우지 마시고 그냥, 바슐라르  의 물질적 상상력의 이론은 불, 물, 공기, 땅 이 네가지의  물질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 정도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서정주시를 연구한 논문의 제목을 보면 조금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예를 들면 , , 여기서 바람은 공기로  보면 되겠습니다.   등 문학작품을 바슐라르 물질적 상상력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논문이 아주 많습니다.  오늘 강의는 너무 딱딱하네요.  그러나 어차피 거쳐야할 과정이니 그렇게 아시고, 지금까지  배운 것 중에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이란 것이 있고,  여기엔 물, 불, 공기, 흙이 있다더라는 것만 아시면  아주 잘 배운 것입니다.  2)이미지는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힘  상상력은 영어로 imagination 이구요. 이미지는 image로 그  어원이 같습니다. 어떤 이는 상상력과 이미지는 동전의 양면  처럼 불가분의 관계라 하지만 어원상으로 보면 분명 한 몸과  같습니다.  루이스는 "이미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그런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하여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고 말했습  니다. 이 말은 결국 이미지에 의해 독자들이 시적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상상력을 빼놓고는 이미지를 이야기 할 수 없고  이미지를 빼놓고는 상상력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상상력에 의하지 않고는 이미지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독자들 또한 이러한 이미지에 의히여 시적 세계와 의미들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상상을 불  러 일으키는 근원이며, 시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합  니다. 따라서 시인은 이미지라는 장치를 통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는 그 상상력을 통해 시인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정현종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神殿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즈시 주고 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다 읽으셨으면 모두 한번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마음껏  상상을 해보세요. 어떤 그림이 떠오르십니까?  봄날 숲 속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축제를 느끼십니까?  아마도 여러분의 상상은 푸르른 나무들의 온 몸에서 배어  나오는 생명의 환희, 싱그러움, 경이와 아름다움이 마음  의 눈을 통해 하나의 선연한 그림으로 띄어 올릴 것입니다.  출렁이며 내려오는 햇빛의 살결, 그 햇빛으로 만들어진  왕관, 그 왕관을 저마다 쓰고 있는 초록, 꽃들의 모습, 스  스로도 어쩔 줄 모르고 솟아나는 초록의 기쁨들을 떠올리면  어느새 여러분도 하나의 꽃이나 초록이 되어 그 생명의  향연에 동참하는 착각에 빠질 것입니다.  김광균님의 를 아주 예쁘고 낮은  목소리로 두 번만 연속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매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희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태일님의 해설을 잠깐 들어보지요.  "위의 시 역시 이미지를 통해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들의 상상에 호소해 온다. 우리에게 눈 내리는 겨울 밤  을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황홀한 체험으로 느끼게 해주며,  깊고 그윽한 정서의 세계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순전히  이미지 때문인 것이다. 특히 눈 내리는 모습을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바꾸어 버린 청각적 이미지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켜서 강렬한 힘으로 우리들을  사로 잡아버린다."  앞으로 이미지의 종류에 가서 청각적 상상력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쉬운 이야기들을 학문으로 만드니 복잡한 감이 있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에서 마치기로 하구요.  좋은 시 감상에 들어가지요.  『시안』2001,가을호에 실린 길상호님의   를 한번 읽어보지요.  그녀가 쓰던 나무주걱을 꺼낼 때  나는 지나온 길과 만나게 된다  나무의 결을 따라 깊이 새겨 있는  발자국, 그 소리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여자,  돌아오지 않는 사내를 마음에 묻고  그을음 어두운 부엌에 혼자 서서  뚝뚝 수제비 반죽을 떼 내고 있다  주걱 위에 올려진 새하얀 반죽이  숟가락 끝에서 잘려 나갈 때  거칠게 일어나곤 하던 나무의 결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걱 위에서  그녀 지워 버렸을까. 끓는 가슴에  하나 둘 응어리로 떠올랐을 얼굴  휘휘 저으며 익혀내고 있던 것일까  이제 다시 주걱의 결을 더듬어 보니  그녀 옹이로 단단하게 박혀 있다  결은 옹이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더 촘촘하게 파장을 그린다  그 상처를 쉽게 지나칠 수 없어  오래 서성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나무의 결을 더듬어 가며 나는  아궁이의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 작가는 신춘문예출신의 전도가 유망한 작가의 글입니다.  같은 책에 실린 오규원 교수님의 을 싣습니다.  마른 잎들이 서로 몸을 말며 포도는  서로 몸을 밀치며 둥글둥글해져 있습니다  먼저 익은 포도송이는 덩굴의 길 밖에 붙어  어둑어둑 썩고  썩고 있는 포도송이와 포도송이 밑으로  망가지며 뭉개지며 문드러지며 달콤한 길  오늘은 여기서 강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여기 올린 시들은 여러분들께서 잘 소화시키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읽었지만 오규원님의 시는 아주 잘 된 시이군요.  시는 이렇게 써야 합니다.  그렇게 쓰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합니다.  앞으로 시간들은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말 알아야할 것들이 많으니 더욱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       폐선에 기대어  ―남진우(1960∼) 이른 아침 눈뜨면 머리맡에 배 한 척 밀려와 출렁이고 있네 찢긴돛폭사이말간햇살들바삭거리며부서져내리고있네 그 배 문가에 기대어 놓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한없이 걸어가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어디론가 가고 없는 배 잠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종이를 접어 배를 만드네 한 척 두 척 내 손을 떠난 배는 내 방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나가고 험한 물살에 시달리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리고 다시 누워서 눈을 감으면 이 밤도 저 멀리서 흔들리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네 물살에 실려 그 배는 이리저리 떠돌다 잠에서 깰 무렵이면 어느덧 내 머리맡에 와 있네     배를 얻고 잃기를 되풀이하며 매일 낮 매일 밤 나 세상을 떠돌았네 닿을 길 없는 부두를 찾아 덧없이 헤매 다녔네 어느덧 늙고 지친 내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와 나를 굽어보고 있는 낡은 배 한 척 부서진 뱃전에 머리 기대고 나 다시 떠나야 할 하루의 먼 길을 헤아려보네     “내 얘기네….” 이 시의 설득력 있는 쉬운 은유에 동감할 직장인이 많을 것이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폭삭 지쳐서 집에 돌아오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어느새 노년! 대다수 현대인의 삶이다. 그중 어떤 이는 간간, 잠들기 직전이나 잠에서 막 깼을 때, 까마득히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찰랑거리며 밀려와 가슴이 아리기도 할 테다. 그런 때가 있었지. 훤칠한 돛을 올리고 꿈을 향해 늠름하게 떠날 참인 새 배 같았던 나!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요,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 채, 이제는 아무 지향도 없이 용골 삭은 배가 되었구나.  화자는 어영부영하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걸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세파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배도 흔들려 마모됐단다. 자아의 투영이며 자아실현의 꿈인 배. 그 배는 화자가 현실을 버텨나가게 하는 힘이 돼 주기도 하지만, 배 때문에 그와 현실의 관계는 차가운 미지근함으로 어딘지 외롭다. 화자의 몸은 현실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다른 곳을 떠돈다. 그의 얼굴에는 그 다른 곳의 그림자가 어룽거린다. 폐선, 낡아버린 꿈의 유령이.    
1571    詩는 말하는 그림, 그림은 말없는 詩... 댓글:  조회:4125  추천:0  2016-08-01
[22강] 이미지는 언어의 그림  강사/김영천  시의 이미지는 언어에 의해 조직화된 그림이며,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적 체험을 신선하고 강렬하게 환기시키  면서 비유와 상징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는 " 전형적인 이미지즘의 시는  자유시로 가능한 한 정확하고 간결하게, 논평이나 일반화를  하지 않고,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에 대한 작가의 반응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흔히 이러한 인상은 은유를 통해서, 혹은  한 대상의 묘사를 또 하나의 다른 대상의 묘사와 병치시켜서  표현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좀 어렵게 표현되었지요. 그러면 그냥 읽고만 넘어가시지요.  "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 멋진 말이지요.  그림이 우리의 육감 중에 시각을 자극하고, 시각에 호소  하여 구체적이고 선명한 인상과 생생한 느낌을 얻는 것이라면  시는 우리 마음의 눈을 자극하고 호소해서 구체적이고 선명한  인상과 생생한 느낌을 얻는 것입니다.  즉, 시에서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간세계가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두 눈으로 하나의 그림을 보고 감상  하듯, 마음의 눈을 통하여 시적 세계와 공간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가 있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시적 세계를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주며, 구체적인  의미의 말들을 감각적 지각적 대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미지인 것입니다.  천상병님의 를 읽어보시지요.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 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아주 이해하기 쉽고, 또 금방 그림 하나가 뚜렷이 떠오르지요.  환한 달빛과 그 달빛을 받아서 눈부신 갈대, 그리고 이 속에서  화자의 모습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달빛 아래서 눈물에 젖어 있는 화자의  맑고 투명한 슬픔까지도 들여다 보임으로서 실제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슬픔이라는 관념까지도 , 또한 이 시적 공간에  흐르는 정서까지도 이처럼 마음의 눈을 통하여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미지 때문인 것입니다.  조태일님의 말을 들어볼까요?  "이미지만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시적 세계를 구체적인  회화로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단순히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장식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물들의 새로  운 모습과 의미들을 시인의 통찰력과 직관에 의해서 우리의  눈 앞에 보여주는 시언어의 핵심이며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미지에 의하여 마음 속에 뻗어오는 시적 의미들  과 사물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박재삼님의 을 읽어보겠  습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대,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江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보겄네.  이 시에서도 여러분은 마음 속에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지요? 어떤 그림이 떠오르시나요?  해가 지고 있는 저녁 무렵 노을빛에 타는 강의 모습,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저녁강의 이미지는 일상적  이고 타성에 젖은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의 의미로서  우리에게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다시 조태일님의 해설을 들어보겠습니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보다도,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나는 나(시적 화자)보다도 더 깊은 사랑의 슬픔과  기쁨으로 인하여 붉게 울음 우는 강의 모습과 만나기  때문이다.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긴 시간을 견뎌  마침내 '사랑의 완성'으로 바다에 이르러 가는 저녁강의  이미지를 통하여 사랑의 아픔과 아름다움, 스스로 완성  해 가는 사랑의 의미들을 우리에게 구체적인 하나의 세  계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시적 의미나 정서  마저도 추상이 아닌 구체적 형상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기  에 이미지를 언어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최동호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미지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포괄적으로 정의한  루이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시의 이미지를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가장 단순하게 말하여 그것은 말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한 개의 형용사, 한 개의 은유, 한 개의 직유로 이미지  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는 이미지는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묘사적이지만 우리의 상상에 외적 현실의 정확한  반영 이상의 어떤 것을 전달하는 어구나 구절로 제시  될 수도 있다."  위에서 루이스는 이라  정의하면서 직유나 은유는 물론 형용사나 묘사적 어구나  구절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의 포괄적인 관점은 , 즉 독자가  시를 읽으며 마음에 어떤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느냐 아니  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학자들에 따라  직유나 은유 같은 비유적 표현만이 이미지에 해당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심리학의 용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라는 말의 본래적인 뜻을 루이스의 경우는 문학  에서 가장 넓게 확장시킨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은 이 이미지가  시에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잡한 말들을  다 정리해도 이미지는 말로 만들어진 그림, 시의 회화성  바로 그 것입니다.  이제 이미지에 대해 잘 알게 되셨을 줄 믿습니다.  또 좋은 시 감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젊은 여성 시인 허수경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사카린 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폭한 세월아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저  꽃대 위 팔랑  앉았다 간 청춘  지난 봄 나는 서울에서의 밥벌기를 그만 두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온 2년 반 동안 밥만 벌었다. 책 읽기도, 글 쓰기도, 知人  들과의 만남도 2년 반 동안 멈추었고 나는 시골서 올라온 촌  사람답게 밥만 벌었다. 방송사에서 원고품을 팔았는데 나는  언젠가 선배로부터 정신적 매춘이라는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  다. 오, 정신적 매춘이라니, 나는 그냥 정직하게 밥을 벌었을  뿐이다. 하지만 방송사의 고도화된 소외 매카니즘을 나는  견디지 못했고 어느 날 집어치웠다.  그리고 오래 앓았다.  그때 나의 집은 보광동이었는데 서빙고역의 철길로 개나리가,  노란 현기증이, 황색의 데까당이 밀려와 나는 천지의 것들과  나의 지친 앓음이 노곤하게 근친상간하는 꿈을 오래 꾸었다.  내가 살던 지하 셋방의 윗층 지상에는 미군속 데이빗의 화장  실 물내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밥벌기에 밀려난 내가 예뻐 보였다. 그리고  이사를 결심했고 서울 근교로 옮겼다. 서울 근교 원당의  역시 지하 셋방에서 나는 라면을 끓이며 희희낙락했다. 저녁  답 내 궁핍의 붉은 국물을 얼큰하게 먹어치우며 나는 지난  봄, 천지와 근친상간하는 노곤한 꿈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 것은 기실, 내가 한 문명의 여자라는 것을 열심히 생각  해보고 싶다는 고백에 다름아니었다.  시도 어렵지만, 작가의 이야기는 더 어렵네요. 그러나  이런 시도,이런 시인도 여러분은 알아야겠기에 올립니다.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1945∼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크리스마스 풍속이 달라진 모양이다. 12월 거리를 달뜨게 하던 캐럴을 도통 들을 수 없었다. 연애 풍속도 달라졌다고 한다. 신자유시대,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가 사람의 심성을 더욱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양심이나 정의나 온정이나 애린(愛隣) 같은 말들을 잃어버리고, 그리워한다든가 기다린다든가 하는 정서를 잊어버렸다. 시대의 이 추운 길목에서, 기다림과 그리움이라는 고전적인 정서를 한 올 한 올 지순하고 처연한 무늬와 결로 짜낸 정희성의 시를 읽는다. 고마운 일이다.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손을 내주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그윽한 눈을 들여다’보는 세계라니,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움과 기다림의 힘차고 그윽한 침묵으로 독자를 따뜻하게 이끄는, 고전미랄까, 묘한 매력이 있는 시다.  
1570    검정 망아지가 큰 검정 馬(말)인 韓春을 그리다... 댓글:  조회:3987  추천:0  2016-07-30
  한춘(韩春)그는 누구?       (1)략력 본명: 림국웅, 필명: 한춘, 1943년 3월 11일 흑룡강성 연수현 출생, 1966년 동북농학원(현 동북농업대학) 토지규획전업 졸업, 1968년 8월 흑룡강성 수리국 설계대 취직, 부대장 력임, 1979년 12월 흑룡강신문사 입사, 문예부 편집, 부주임, 주임 력임, 2003년 3월 정년퇴직. 고급편집. , 흑룡강작가협회 리사, 흑룡강조선족작가협회 회장 력임, 2013년 7월 17일 별세. @!@ (...2013년 07월 03일 별세전, 필자가 하르빈 어느 큰병원에서 큰 검정 馬인 韓春翁을 만나뵜을 때는 그 텅치가 컸던 검정 馬이 아닌, 새하아얀 白馬가 되여  이 작디 작은 검정 망아지의 처절한 눈시울속으로  성큼성큼 밟혀옴을 어쩔수 없었는데...)   (2)창작성과 시집 《쌍무지개> (1988년 연변인민출판사), 시집 (1990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시집 (1992년 한국 도서 출판 혜화당), 시집 (199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 시집 (20003년 민족출판사), 시평론집 (2004년 료녕민족출판사 ), 시집< 높은 가지끝에 달린 까치둥지>, 수필집 , , , 등.   (3)수상경력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3차, 흑룡강성문예 대상, 은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1등상 등 다수 수상.   ================================ 검정말을 잃고...                               ㅡ고 한춘스승님께                                                            김승종           그날 따라 유난히 비가 짖찌져지고 있었습니다...   비물 밟는 이내 발길이 참 무겁기만 하였습니다       신문사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대학가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세미나실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중앙대가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선술집으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하지만 하지만,ㅡ   그날, 낯설은 홍십자로 향해지는   열둬가락 발길이 참 무섭기만 하였습니다   천갈래만갈래 손톱여물 참 피멍든지 오랩니다   ...   송화강반에서 효용하던 검정말이였습니다   북방의 하늘에서 별을 따던 시채굴인이였습니다   프랑스 파리 베르톤 예술리론대학과   서울 이상예술창작대학의 독학인이였습니다   하늘이 높고 땅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7천만 영탄조를 읊조리는 풍유인이였습니다   하지만 하지만,ㅡ   그날, 낯설은 병동을 엉거주춤 한정없이 지키는   백발로인을 마주하기가 참 내내 찧혔습니다   깜장말은 검정말앞에서 참 빻지 못했습니다   ...   0307/2013   깜장말은 검정말한테 총총 쫓기웠습니다...   1707/2013    깜장말은 검정말의 리력서에 검정테를 두릅니다...   1708/2013   깜장말은 검정말의 이메일에 문안편지 띄웁니다...   ...   시의 본연기빨을 들었을 때에도    음양님들의 눈총을 새총으로 맞불놓았었다고,-   평론의 맞바람기빨을 찢을 때에도   보리삭은 독주님들과 새벽안주 정나미 했었다고,-   수필의 채색기빨을 휘날릴 때에도   독초님도 곁들어 곁공해를 무척 구수히 주었었다고,-   ...   하지만 하지만,ㅡ   오늘, 모든것 결곱게 문학궁전으로 모셔 드립니다...   정말 모든것 맘 너머너머 활시위 놓아 드립니다...   깜장말은 혼백과 함께 홑길을 되묻고 되묻습니다...           오늘   도,-   유   난   히   깜장말은 검정말의 詩의 들녘을   처절히 처절히 갈퀴질하는 까닭은 또,-       韓봄詩伯翁,ㅡ   무사함둥...     ========================== 단풍잎                                                                             一고 한춘스승님께                                                                                          김승종                                                              1초,                                      60분,                                      삼시절(3时节)...                                      눈을 열다 빠금히                                      눈을 펼친다 푸르통통                                       눈을 비빈다 뱌비작바비작                                      눈에 피멍울 맺혔다 빨긋빨긋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1 2 3 * 5...                                                        A B C D...                                               도레미파...                                                   ...                                      시험 끝마친                                        온 동네 칠색카니발들,                                      구멍난 팔만리 창공 향해                                      열두가락 만만장(輓卍章),ㅡ                                                     펑펑                                                     날린다                                                     빨강빨강...    
1569    한국 현대시 100년을 빛낸 시집 5권 댓글:  조회:5078  추천:1  2016-07-29
백석의 '사슴' 가장 밝게 빛났다    한국 현대시 100년을 빛낸 시집 5권 선정  세대 아우른 대표시인 156명 설문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서 우리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은 백석(1912~1995) 시인의 ‘사슴’(1936)인 것으로 조사됐다. 시인별로는 서정주, 정지용이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계간 ‘시인세계’는 15일 발간한 여름호에 기획특집 ‘현대시 100년사 5권의 시집’을 실었다. 김종길 김남조 홍윤숙 신경림 등 원로 시인서부터 정진규 김종해 천양희 오세영 오탁번 강은교 노향림 신달자 이성복 정일근 안도현 함민복 문태준 손택수 등, 세대를 아우른 대표시인 156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다.  질문은 “지난 100년간 간행된 시집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 또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 한 권을 뽑아 달라”였다.  그 결과 백석의 ‘사슴’은 신경림 천양희 시인 등 12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이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1974)는 강은교 이성복 등 10명이,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1935)은 이건청 이성부 등 9명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는 안현미 이윤학 등 8명이, 서정주의 ‘화사집’(1941)은 문정희 오세영 등 6명이 각각 추천했다.  정지용의 ‘백록담’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상의 ‘이상 전집’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은 각 5명의 추천을 받아 공동 6위, 김춘수의 ‘꽃의 소묘’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각 4명이 추천해 공동 10위에 올랐다.  시인별로는 서정주, 정지용 시인이 각 14명의 추천을 받아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서정주의 경우 ‘화사집’ ‘동천’ ‘서정주 시선’ ‘질마재 신화’ 등이, 정지용은 ‘정지용 시집’ ‘백록담’이 추천을 받았다.  이어 백석(12명), 김수영 이성복(각 11명), 김종삼 김춘수(각 6명), 이상 김소월(각 5명), 기형도 황동규(각 4명)의 순이다.  문학평론가 김인환 고려대 교수는 ‘우리 시대를 빛낸 다섯 권의 시집’이라는 글에서 “지용(芝溶)과 미당(未堂)은 채(彩)요/ 백석(白石)과 수영(洙暎)은 기(氣)요/ 성복(晟馥)은 기채간(氣彩間)이라”고 요약했다.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두 계보, 즉 예술가의 계보와 투시자의 계보로 나눌 때 정지용과 서정주가 전자의 계보에 있다면, 백석과 김수영이 후자의 계보를 형성하며, 이성복에 와서 이들 계보가 모아져 최근의 시인들에게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말미에 이런 글을 적었다. “다섯 권의 시집들은 새로운 시인들이 전진해 나아가야 할 처녀지를 비춰주는 등대들이다. 젊은 시인들은 그 시집들이 성취한 것뿐 아니라 실패한 것에서도 모험의 질료를 찾아내야 한다. 정신의 탐구에는 무임승차가 있을 수 없다. 시의 역사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곡절들과 위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대의 성공이 후대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작품의 가치는 시인이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가지는 어떤 참됨에 비례한다.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시는 어느 시대에도 가능한 존재의 사건이다.  존재의 개현과 영혼의 접촉은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자신을 맡기는 수동적인 길과 의도적은 고행을 자진해서 떠맡는 능동적인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출처] 한국 현대시 백년을 빛낸 시집 5권 선정|작성자 비바라기
1568    한국문학 100년을 빛낸 기념비적 작품들 댓글:  조회:4027  추천:0  2016-07-29
  한국문학 100년을 빛낸 기념비적인 작품들   글쓴이: 장석주 한국문학 100년을 빛낸 기념비적인 작품들  1  고전이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들이다. 오래된 것이라고 다 고전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네의 정서와 심성이 고스란히 담고, 그 형식도 새로워야 한다. 당대는 물론이고 미래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언제 읽더라도 현재적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 심미적 텍스트여야 한다.  당대성을 머금고 나오는 무수한 작품들은 시간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한다. 소멸하는 것들은 그 소멸로써 의미를 다 소진한다. 소멸은 그 텍스트가 고전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시대와 더불어 그 의미를 갱신하는 텍스트. 바로 그런 작품들만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다. 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넓고 큰 우주이되 어떤 근원과 향수로 속절없이 깊어진 심연이다. 삶의 심연, 언어의 심연, 의식의 심연이다. 한국문학 100년은 고전의 반열에 든 무수한 작품들이 별들로 반짝이는 심연이다.  2  이광수의 ‘무정’(1917년)은 근대문학의 초기에 푯대처럼 우뚝 서 있다. 스타일의 미숙과 소통에 대한 성찰이 떫고 둔탁한 것은 불가피하다. ‘무정’에 스타일이 있다면 외래에서 이식(移植)된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캄캄한 먼동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이 다가오는 새 날빛의 언어를 보여주고, 근대적 주체의 욕망과 계몽에의 의지를 잘 새겨 넣었다. 김유정의 ‘봄봄’(1935)과 ‘동백꽃’(1936)은 욕망이 표출하며 부딪치고 화응하는 삶의 원초적인 모습을 토속 언어로 담아낸 수작들이다.    소설이라는 근대적 양식은 더 이상 외래적인 것이 아니다. 생래적이라 할만큼 몸-삶에 밀착한다. 이 소설에 돌올하게 솟은 골계(滑稽) 미학은 소설이 계몽이나 윤리의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보여줌에 있을 드러낸다. 김유정이 출현한 지 반세기 쯤 뒤에 나올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1983년)나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1년)은 소설의 또 다른 낯선 층위를 보여준다. 이인성과 하일지는 발화 방식의 새로움을 통해 욕망으로 들끓는 삶의 환멸을 드러낸다.    이인성이 의도된 말 더듬기와 발화 주체의 분열을 통해 삶의 불모성을 보여준다면, 하일지는 끈질긴 반복과 변주를 통해 삶이 감춘 환멸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두 작가는 소설의 속/겉이 하나이고, 그 본질이 기억-이야기가 아니라 반(反)-기억이고 해체며,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스타일임을 보여준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년)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년)은 농경사회가 해체되고 산업화로 들어서는 1970년대 한국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떠돌이 노동자, 생산조직 속의 노동자의 삶을 사실주의적 문체로 그려낸다.    농경 유림의 전통 속에서 유구하게 이어지는 삶들을 회고적 문체로 다룬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1978년도), 그리고 멸실하는 농업 노동의 현장을 인류학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에 사실적 언어의 실감을 불어넣은 신경림시집 ‘농무’(1974년)와 더불어 문학과 시대의 상동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작들이다. 박경리 ‘토지’(1994년)는 최씨 일가의 흥망성쇠를 중심축으로 펼쳐지는 대하소설이다.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며 다양한 인물들이 부침을 거듭하며 날줄과 씨줄로 얽히는 역사를 그려낸다.    홍명희의 ‘임꺽정’(1939년), 이병주의 ‘지리산’(1974년), 조정래의 ‘태백산맥’(1989 ), 황석영의 ‘장길산’(1984), 최명희의 ‘혼불’(1996) 등도 기억에 남을 만한 대하소설들이다. 최인훈의 ‘광장’(1961년),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년), 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1971년) 등은 지식인 소설의 범주에 든다.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에 눈뜬 후진국 지식인은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 떠돈다. 이들은 주체의 의지나 선택을 압도하는 분단 역사 속에서 좌표를 잃거나, 개별자의 공간으로 퇴행하거나, 중심에서 튕겨 나와 주변을 맴돈다.  3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년)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과 시름을 바탕에 깔고 유장한 리듬으로 잃어버린 님과 집과 밥을 노래한다. 민요와 설화의 능란한 차용, 우리말 리듬의 능숙한 구사로 이루어진 시들은 경박하고 투박한 신체시들을 단번에 앞지른다.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하는 서정시의 원형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년)은 상실과 부재에 따른 공허를 형이상학의 층위에서 조명한다. 님은 원융(圓融), 우주의 충만함, 그리고 삶의 중심적 가치이자 지향점이다. 그것을 잃은 자는 날카로운 상실감과 함께 깊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있다 사라진 님도 님은 님이다. 없는 님은 있어야 할 님이다. 님의 가는 길과 님이 오는 길은 하나로 겹쳐진다. ‘님의 침묵’은 잃어버린 것, 혹은 잊어버린 것에 기억을 부여하기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아울러 한국어가 훌륭한 예술적 기반이며 형이상학적 관념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언어임을 증명한다. 백석의 ‘사슴’(1936년)은 한반도 서북 지역의 토착적 풍속과 언어의 곳간이다. 일제 강점기의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처지에 놓인 채 끊임없이 허드렛일과 거친 방황으로 내몰린 청년의 내면을 맑고 품격 높은 언어로 형상화해낸다.    서정주의 ‘화사집’(1941년)은 관능의 비등점으로 치닫는 젊음이 내장한 매혹과 징그러움을 고압(高壓)의 언어로 포획한다. 서정주의 언어들은 들끓는 욕망에 속절없이 투항한다. 욕망의 장력은 아주 강력해서 금욕의 윤리학은 어디에도 깃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파열하듯이 드러나는 맹목과 치기의 언어들은 영혼의 어떤 저급함, 혹은 악에 이끌리는 한 젊은이의 내면 모습이다.  추악할 수도 있는 그 내면을 탐미의 언어들로 대체함으로써 부정적인 것들을 긍정으로 감싼다. 서정주의 시적 뛰어남은 주술적 언어의 부림과 위악의 능청스러움에서 나온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6년)는 일본의 한 감옥에서 숨진 한 무명 문학청년을 일약 민족시인의 맨 앞자리에 세운다. 인격적 성숙에로 가는 도상에 놓인 청년시인의 내면에 대한 고백의 언어들은 촘촘하다. 그 언어의 촘촘함이야말로 비상한 윤리감각의 물증이다. 이 내향적인 청년 시인은 아주 짧은 서정시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쓴다. 내면에 대한 철저한 돌아봄에서 비롯된 양심의 예민함과 날이 선 윤리성은 놀랍기만 하다.    박목월·박두진·조지훈의 ‘청록집’(1946년)은 해방기의 도처에 끓는 정치적 열기 속에서 돌연 탈정치적 자연 미학을 추구함으로써 눈길을 끈다. 아마도 선전·선동의 언어들에 멀미와 피로를 느낀 이들에게 이 ‘순수한’ 언어들은 휴식과 위로의 기쁨을 주었으리라. ‘자연’이라는 화두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세 시인이 미묘하게 차이를 보인다. 정지용이 ‘문장’지를 통해 문단에 내보낸 이들 청록파 시인들은 제 시에서 일체의 정치색을 탈색함으로써 몽환적인 의고(擬古)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4  이상은 ‘오감도’(1934년)와 ‘날개’(1936년)를 동시에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이 모던 보이는 그 출현 자체가 문학사의 스캔들이다. 이상의 극단적 실험주의 시들은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는 비난을 받고, 신문사는 게재를 중단한다. 당대를 훨씬 앞질러간 ‘첨단’, 이 도저한 정신분열적 언어의 파행을 당대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날개’는 근대 자본주의에 포섭된 1930년대의 청년 지식인의 심리를 따라간다. 성과 노동력은 상품화되는 타락한 물신주의에로 치닫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 위를 미끄러져가는 ‘나’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화폐를 변소에 집어넣는 행위 등으로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나’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폐적 의식에 갇혀 한없이 나른한 권태 속에서 자본주의에 추동된 욕망들이 춤추는 것을 관조할 따름이다. “날자 날자 한번 더 날아보자꾸나”고 스스로를 독려하지만 그것은 메아리 없는 독백일 따름이다.    패러독스의 언어들은 반세기 뒤에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79년)에서도 작렬한다. 유신 독재의 시대를 건너온 20대의 이성복은 억압자들과 누이와 어머니 같이 여린 존재들을 짓밟는 시대의 초상을 악성 부성신화(父性神話)로 재현한다. 짓이겨지고 지리멸렬해진 삶의 참담함을 패러독스의 언어로 증언한다.    이상의 모더니즘 일부를 유산으로 받은 김수영은 ‘풀’(1968년)에서 풀과 바람의 어우러짐에서 생명 운동의 벅찬 슬픔과 기쁨을 찾아내 노래한다. 풀의 현재는 다가옴과 물러남 사이에 있지 않다. 풀은 바람의 타자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사건의 흐름이며 운동이고 유출이다. 풀은 바람을 끌어안고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그때마다 웃음과 울음을 되풀이한다. 풀과 바람은 주체와 객체, 혹은 힘의 서열에서 아래와 위에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은 동시성의 존재 역학 안에 있으며, 차라리 사랑의 인력 안에 있는 밀고 당기며 유희에 열중하고 있는 연인 관계다. 존재함의 순간들은 사건의 연속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풀’은 한국시의 형이상이 도달한 한 정점이다. 김수영의 문학적 DNA는 고은과 김현과 황동규에게로 이어진다. 고은의 ‘만인보’(2008)는 한 세기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인물군상으로 그린 대형벽화다. ‘만인’은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며 그 사람들로 이룬 이 세상 전체다.    고은의 문학적 성과는 초기 탐미주의에 기운 서정시나 선시(禪詩)들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꿰뚫으며 ‘만인’이라는 인류 보편으로 나아가는 이 전무후무한 연작시집은 시적 성과와 상관없이 기념비적이다.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1977년)은 문학이라는 속꽃 핀 열매의 내부를 보여준다. 김현은 보이는 것 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안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는 것을 찾아내고 사유한 사일구 세대 문학가의 대표적인 이론가다. 문학은 관념도, 시대에 복무하는 운동의 도구다 아니다. 아무것도 억압하지 않음으로 억압의 실체를 드러내고는 문학은 그 자체로 자율적 완성체다. ‘한국문학의 위상’은 이 재기발랄한 비평가가 문학은 생활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궤라는 사실을 기어코 밝혀낸 비평집이다.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는 후진적 정치의 억압 속에서 왜소해진 자아에 대한 환유를 보여준다. 폭압의 시대는 풍자를 낳고 은유를 키운다. 같은 폭압의 시대를 건너오며 김지하가 풍자를 낳았다면(「오적(五賊)」), 황동규는 은유로 나아간다. 황동규의 시적 스타일은 환유의 시학에 기대어 있다. 눈들은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고, 병든 삶을 가면으로 가린 채 춤을 춘다.   
1567    한국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다... 댓글:  조회:6057  추천:0  2016-07-29
  특강 : 상처입은 용들의 노래 ― 현대 한국시 100년을 기념하며       한국 현대시 100년이라고 한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가 『소년』에 발표된 1908년을 그 기점으로 한 것이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라는 의성어를 내세워 육지의 단단함에 부딪치며 깨어지는 파도의 역동성으로 구시대의 질서와 유습을 깨고 나가려는 새 시대의 기운을 드러낸 시다. 새 시대의 기운은 안에서 밖으로 일고 나가야 하는데, 이 시는 거꾸로 새 기운이 밖에서 안으로 밀려드는 것으로 묘사한다. 생동하는 기운을 만들어내야 할 나라의 내부적 역량이 쇠진하여 안이 텅 비어 있는 까닭이다. 시인은 예지력으로 구한말 우리 민족이 당면한 총체적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현실 앞에서 헐벗은 ‘소년’을 불러내 그의 어깨에 희망을 의탁한다. 소년이 감당해야 할 민족의 운명은 “끝없는 장애와 의구심을 앞에 한 깜깜한 어둠 속의 외로운 행로”(이청준)였다. 최남선은 개항 이후 열강들의 외세에 앙바틈한 동아시아의 한 소국에서 바로 어른들 틈바귀에 낀 ‘소년’의 운명을 설핏 보았다. ‘소년’의 운명은 양자역학의 진공 상태 속에 놓인, 빅뱅을 눈앞에 둔 검은 물질 바로 그것이다. ‘소년’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 서 있다. 그 ‘소년’에게 장벽을 향해 온몸을 부딪쳐 나가는 바다의 기세를 실었던 것이다. ‘소년’은 꺼져가는 숨결이요, 어둠을 뚫고 동터오는 새벽이요, 높고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할 어린 나귀요, 상처받고 신음하는 물속에 엎드린 용龍이다.   2008년은 한국 현대시 100년에 대한 기념으로 넘치는 해였다. 한 신문에 ‘한국인의 애송시’라는 이름으로 주요 명시들이 소개되고, 나중에 책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전2권, 김소월 등 지음, 정끝별·문태준 엮음, 민음사)가 바로 그 책이다. 여기 현대 한국시 100년에 대한 감회와 더불어 그 책에 대해 읽고 느낀 것에 대해 한 잡지에 내가 쓴 글을 옮겨 놓는다.   백년의 압축이다. 그 백년 장엄하다. 청맹과니로 살아온 장삼이사의 눈을 밝히고 귀를 열어주는 100년 동안의 시심詩心이 하나의 압축파일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발원한 현대시 100년의 역사가 굽이굽이 돌아온 흔적들, 그 안에서 명멸했던 시인들의 삶과 상상세계, 그이들이 모국어로 가 닿고자 했던 생명-우주의 비밀들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무진장無盡藏한 콘텐츠가 뿜어내는 섬광들이 번쩍인다.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박두진, 「해」)라고 속에서 치미는 그 뜨거움과 벅참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밀어내며 노래할 때 화자話者의 리듬은 청자聽者인 우리 내면으로 직격하며 들어온다. 슬픔과 어둠과 절망에서 솟구친 이 리듬은 우리 안에 들어오며 기쁨과 빛과 희망으로 전환한다. “앳되고 고운 날”의 누림이 필경 불러올 “생생지락生生之樂”과 “시시지락詩詩之樂”을 꿈꾸는 일은 욕심이 아니다. 욕심이 아니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    시가 무엇이냐? 시는 삶의 볼품없음과 꾀죄죄함에서 벗어나보려는 우아한 문화적 몸짓일까? 그 언어적 스침과 고임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보상 행위의 산물일까? 시가 먹고 사는 일에서 화급을 다투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굶주린 자가 한 끼의 끼니를 구하기 위해 육즙을 짜내고 뼈가 휘는 노동에 견준다면 시쓰기는 한가로운 생산에 지나지 않으며,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의 아픔에 견준다면 시를 토해내는 고통은 저 혼자 뀌는 물방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터다. 어쨌든 “삶 자체에 견주면, 시라는 것은 하찮은 물건”(고종석)이다. 이 하찮은 물건이, 그토록 시름과 주림에 겨워 헐떡이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구원의 손길을 내밀리라고는 기대를 갖지 않은 이것이 기어코 시름을 덜고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 지천으로 널린 풀에게서 생명의 역동성을 끌어낼 줄 아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공익을 더하고 세우는 일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수로 여겼던 자들이 저 흔하디흔한 풀에서 바람과 희롱하며 울고 웃는 감정의 연금술을 찾아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문태준)   시인은 익숙한 것들의 기억과 인상을 새롭게 만든다. 같은 체험을 하고도 다른 체험으로 드러내는 게 시인이다. 그리하여 “이 다른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 그 숨겨진 진실”(문광훈)을 보는 것이다. 이성부가 봄을 두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라고 쓸 때, 혹은 김광규가 이젠 늙어갈 일만 남은 중년의 사내들의 허전한 심중을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노래할 때, 이 익숙한 것들은 돌연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의 낯섦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그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것임을 깨닫고 안심한다. 시인들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서 놓쳐버린 것, 흘려버린 것들을 끌어다가 새롭게 갱신해서 다시 보여준다. 다시 보여줄 때 그 익숙한 것들은 숨은 진실을 드러내고 그 진실은 우리 안에서 삶을 갱신하고 조형하는 동력이 된다.   정지용의 「향수」에서 매 연마다 후렴구로 되풀이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구절은 송곳이 되어 여린 마음의 한쪽을 후빈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인들이 고향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저간의 곡절들을 환기시키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빼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게 만든다. 우리는 함부로 쏘아올린 화살이었다. 만주의 너른 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토로, 중앙아시아의 무연고 허허벌판으로, 일본의 탄광촌으로, 저 멀리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그건 내 탓도 네 탓도 아니었다. 우리 의지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우리를 저 바깥으로 떠밀었던 것이다. 너무 멀리 갔기에 원심력에 붙들려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향수’는 고향을 잃은 자가 앓는 마음의 질병이다. 그것은 치유할 길이 없는 불치의 병이다. 20세기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앓은 전염병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귀환하는 기획에 성공했다. 그런 비극의 보편화가 있었기에 「향수」가 일러바치는 내가 없는 고향의 풍물들은 더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100명의 시인들이 지난 100년간의 시에서 100편을 골라내고, 정끝별과 문태준 두 시인이 그 시들에 일일이 해설을 붙였다. 이 시들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누린 지복至福이다. 이 시들을 읽으며 마음의 눌리고 맺힌 데를 펴고 풀 수 있었고, 주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시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 두 번 세 번 거푸 발을 담글 수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 시편을 읽으며 세월의 더께에 눌려 희미해진 첫사랑의 설렘과 기쁨이 늦가을 해질 녘 붉은 햇빛을 뒤채며 흐르는 강물에 고양되어 다시 타오르는 경험은 나만 했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 시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통과해온 그 비바람치는 나날의 고된 삶의 누적이 아무 뜻이 없는 게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장욱이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라고 쓸 때, 어이없는 겨울은 그 어이없음으로 유일무이하게 눈부신 겨울로 바뀌고, 최승자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 /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노래할 때, 농담에 지나지 않을 이 삶을 수식하기 위해 호명된 곰팡이, 오줌 자국, 죽은 시체와 동위同位에 놓일 정도로 뜻없는 그것의 하찮음 때문에 돌연 삶은 의미의 지평으로 솟는다.   김소월에서 이장욱까지 100명의 시인을 호명해서 한 자리에 모았다. 이런 선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선집이 기왕의 것들을 제치고 으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정끝별·문태준 두 시인의 신실한 시읽기와 권신아·잠신 두 일러스트레이터의 빼어난 그림이 만나 일으킨 예술 장르 간의 화학작용 때문이다. 시와 그림은 본디 두 개가 한 쌍으로 나왔다고 믿을 만큼 상호연관의 빛을 상대에게 던지며 상호조응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들어갈 시인과 들어가지 말았어야 할 시인들이 서로의 자리를 바꾼 경우가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짜게 걸러내도 오장환, 김구용, 김관식, 구자운, 박정만, 김남주, 이제하, 이승훈, 채호기, 이수명, 유홍준, 권혁웅, 김행숙 들은 마땅히 들어가야 할 시인들이다.1)   최남선 이래 20세기 한국시의 하늘에는 별들이 명멸했다. 별들은 저마다 빛의 세기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국어의 하늘에 떠서 빛나는 별들도 저마다 그 광도光度가 다르다. 한국 현대시가 펼쳐놓은 상상력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그 스펙트럼 속에서 나-너-한-님-슬픔-어둠-자연-이향-도시-육체-연애-자아-역사-혁명-가족-생활-청춘...... 따위의 주제어들은 두드러진다. 한국 현대시를 투박하게 다섯 개의 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념의 길: 김소월-백석-김영랑-이용악-윤동주-박목월-노천명-조병화-김남조-김현승-박성룡-유안진-신달자-강은교-정호승-곽재구-김사인-허수경-최정례-김용택-안도현-김경미-박형준-나희덕. 둘째, 자유의 길: 이육사-유치환-임화-김광섭-박두진-김수영-박인환-신동엽-고은-신경림-조태일-정희성-이시영-김지하-고정희-김정환-하종오-박노해-백무산. 셋째, 인식의 길: 이상-김춘수-송욱-김종삼-전봉건-허만하-정현종-이승훈-박의상-오규원-노향림-이하석-최승호-이성복-황지우-최승자-김혜순-김정란-송재학-고진하-박찬일-최종천-이수명-김행숙-이장욱-황병승-이근화-김경주. 넷째, 탐미의 길: 서정주-정지용-박재삼-박용래-김관식-천상병-이형기-허영자-김영태-이근배-이수익-서정춘-김형영-박정만-조정권-임영조-나태주-송수권-문인수-장옥관-오태환-전동균-장석남-박형준-문태준. 다섯째, 존재의 길: 한용운-조지훈-김종길-황동규-마종기-이유경-정진규-김종해-최하림-오탁번-천양희-문정희-김광규-김명인-김승희-신현정-고형렬-김영승-김신용-황학주-이문재-황인숙-김중식-송찬호-채호기-고재종-김기택-이승하-기형도-김태형-정끝별-권혁웅-유홍준. 각각의 길들이 언제나 다른 길과 변별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길들은 겹치고, 심지어는 세 개, 혹은 네 개의 길이 하나로 몸을 포갠다. 정념의 길이 탐미의 길과 겹쳐지고, 인식의 길은 존재의 길과 자주 겹쳐진다. 자유의 길과 정념의 길이 겹치고, 존재의 길이 탐미의 길과 겹쳐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자유의 길로 분류된 시인의 상상세계 속에 탐미 본능이 작동한다고 이상할 게 없다. 시인들의 상상력은 늘 불확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에 어느 하나에 편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시인의 시세계를 통시적으로 볼 때 그 피의 기질과 본능으로 인해 어느 길로의 편재성은 불가피하게 드러난다.   한국 현대시를 통시적으로 가로지를 때 가장 큰 정서적 자원은 한, 어둠, 슬픔이다. 삶의 보람이자 기쁨인 님들은 항상 ‘나’를 떠나 달아난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김소월, 「진달래꽃」, 1922). ‘나’의 간절한 바람과 의지를 배반하고 떠난 님의 부재는 홀로 남은 ‘나’의 있음을 덧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실존의 요소다. 미처 떠나보낼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항상 님들은 떠난다. ‘나’의 슬픔과 고통 따위는 떠나려는 님의 의지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떠나는 님은 ‘나’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없는 이기적 욕망의 존재다. 님이 떠나면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 혼자 남고, 님 앞에서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김소월 이래로 한국시에는 님의 떠남을 피동적으로 감당하는 서정적 주체들의 눈물로 넘쳐난다. 그 눈물은 이루지 못한 욕망으로 움푹 팬 곳을 굽이굽이 흘러간다. 해질녘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강을 “울음이 타는” 것으로 본 시인의 심미 감각은 수일하다. 그 강은 자아 밖에 있는 것이지만 자아와 교호 작용을 하며 자아와 접속하며 자아화된 외부 풍경이다. 울음이 타는 강은 그걸 바라보는 자의 내면을 되비춘다. 실제로 강은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오래 눌리고 찢겨 설움이 쌓인 우리 마음이다. 울음이 타는 강은 슬픔을 가진 화자의 슬픔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1959)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가을 햇볕, 제삿날 큰집 불빛, 해질녘 타오르는 듯 지는 해의 빛에 드러난 강물....... 이런 것들은 들뜬 마음 안에서 하나로 엉겨 맺히고 쌓인 설움을 자극한다. ‘나’의 설움이 마침내 공연한 울음으로 터져 나올 때 강은 대상화된 ‘나’의 자아다. 아니, 마음 안에서 자아와 햇빛, 강 따위의 자연세계가 하나로 녹아들어 혼융한 가운데 ‘나’는 한껏 고양되는 것이다. 이때 울음은 맺힌 것을 푸는 해원解寃과, 쌓인 찌꺼기들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정화淨化로서의 울음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1925)   한용운의 님은 ‘나’를 버리고 냉정하게 떠날 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존재다. 이것은 버림이다. 버림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힘의 균형을 잃은 상태, 한쪽의 힘이 다른 쪽의 힘을 압도적으로 누르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님은 늘 먼저 ‘나’를 버리고 떠난다. ‘나’는 그 떠남을 피동적으로 받는다. 떠난 뒤의 상황을 감당하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상호 인식이 배제된 이 뒤틀린 관계 속에서 폭력과 희생의 윤리학이 만들어진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최만치도 없읍니다.”(한용운, 「쾌락」) 욕망의 대체물인 님이 떠난 뒤에 무슨 보람과 기쁨이 남겠는가. 슬픔은 외기러기의 발자취만큼도 없다. 님은 ‘나’라는 내부를 감싸는 외부다. 님은 외부이기 때문에 비非자기다. 외부가 있을 때 비로소 내부가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님은 ‘나’라는 주체를 완성시키는 객체, 기초적 환경이다. 님이 없다면 ‘나’는 외부를 갖지 못한 내부에 머문다. 외부가 없다면 내부도 있을 수 없듯, 님[외부]이 없다면 ‘나’[내부]도 없다. 님이 없는 ‘나’는 없음, 공허 그 자체다. 존재성이 발현되지 않는 질료, 무의미로서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김소월과 한용운의, ‘나’를 떠난 님의 뒤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상처받고 신음하는 용들의 노래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1937/ 1935?)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시적 화자는 최남선의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한 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첫 구절에 암시되어 있듯이 원초의 어둠은 아직도 우리의 운명을 두텁게 감싸고 짓누른다. 외할아버지는 먼 바다로 나가 실종되어 부재 상태고, 할머니는 파뿌리처럼 늙었다. 애비는 남의 집에 매인 종이고, 어매는 풋살구 하나가 먹고 싶지만 제 힘으로는 그 작은 소망조차 실현할 수 없는 가난하고 헐벗은 존재다. ‘나’는 가족들의 보살핌이나 돌봄을 받을 형편이 아니다. ‘나’는 함부로 방치되어 제멋대로 자라난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이다. 따뜻한 양육과 인생의 바른 지침들을 받을 수 없는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 계통도 없고 질서도 없는 바람에게서 훈육된 영혼이란 천민의 영혼이다. 바람은 외압과 세속의 전언을 실어 나른다. 바람은 지조도 없고 자존도 없이 물리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 팔 할의 바람으로 예측할 수 없는 저주받은 영혼이 되었다는, 제 신분과 처지에 대한 이런 환멸스런 확인은 필경 자기모멸과 자기 부정을 낳는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시인이 본 우리 안의 그림자, 억압된 자아는 죄인, 천치, 수캐다. 이것들은 자기실현의 존재와는 거리가 먼 일그러진 자아상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1941)   투명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형편과 운명을 바로 본다. 윤동주는 드물게 고요하고 깨끗한 청년의 영혼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부끄러움이다. 파란 녹이 슨 구리거울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욕된 얼굴이었다(「참회록」). 그는 제 욕된 얼굴에서 부끄러움을 찾아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서시」) 수난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자에게 내면의 괴로움은 곧 존재의 원형질이다. 서정주와는 달리 윤동주에게 바람은 자기반성의 유력한 근거다. 시인은 살랑이며 불어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에서 윤리적 실재를 투시해낸다. 윤동주에게 괴로움은 깨끗한 양심이 이끄는 삶, 인격의 고결성을 지향하는 모색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윤동주 시의 주조음인 부끄러움은 내면적 인간의 소극적인 자기부정이다. 이 경우 자기부정은 대긍정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필연의 과정이다. 서정주나 윤동주가 시대의 어둠을 인지한 것은 닮았지만, 그 어둠에 반응하는 생의 형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윤동주가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 백골을 들여다보며 /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 백골이 우는 것이냐 /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또 다른 고향」)에서 볼 수 있듯이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 “곱게 풍화하는 백골”을 바라봤다면, 서정주는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중략) / 알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바다」)고 극렬하게 외부를 지향하고, 외부를 향해 뻗치는 힘이 장애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자멸의 길을 선택한다. 현저한 자기성찰적 내면지향을 하는 윤동주와 내부 모순을 외부에서 해결하려는 외부 지향을 하는 서정주는 상상력의 원소는 같되 기질과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저마다 한국 현대시의 별자리에서 광도가 다른 별들로 반짝인다.   최남선에게 나타났던 그 계통발생의 기억이 박두진의 「해」(1946)에서 다시 나타난다. 박두진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라고 노래한다. 최남선의 시대에서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현실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은 어둠의 수형자受刑者 처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어둠의 항로는 그렇게도 길고 지루했다. 어둠의 비극적 운명에 처한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밝은 세상에 대한 열망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라고 거듭되는 외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해를 부르는 시인의 외침은 빼앗기고 짓눌린 자의 절망과 고통에서 솟아나는 목소리다. 박두진의 거칠 것 없이 뻗어 나오는 남성적 율격의 소리는 이육사의 「광야」(1937)의 소리와 겹쳐진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 이육사는 천고의 뒤에 올 초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초인은 저 먼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길러지는 존재다. 초인은 ‘나’를 뿌리치고 떠났던 그 님일까. 초인은 천고의 뒤에나 당도할, 아주 늦게 오는 손님이다. 광야에서 기다리지 않는다면 초인은 오지 않는다. 소월과 만해의 님이 오래된 미래라면, 이육사의 초인은 먼 미래의 님이다. 님이 떠나간 길과 님이 돌아오는 길은 한길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1968)   김수영의 「풀」에 와서 주체의 내면에 짓누르는 한을 극복하고 타자성을 동렬에 놓고 생성하며 사유하는 주체를 발견한다. 풀은 여전히 작은 주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구에서 모래·바람·먼지·풀은 쩨쩨하고 소소한 자아의 표상물로 호명된다. 그러나 풀은 큰 것의 위세에 눌려 제 주체를 잊고 부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풀은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영향을 받지만, 그것에 눌리지 않는다. 오히려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은 바람에 피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도 더 빨리” 주체적으로 눕고, 울고, 일어난다. 풀이 획득한 능동성은 자신감의 산물이다. 셋째 연을 보라. 풀은 “늦게 누워도 / (중략) 먼저 일어나고 / (중략) 늦게 울어도 / (중략) 먼저 웃는다”. 바람과 풀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약동을 확인하고 유희하는 상대적 관계다. 풀은 바람이 오기 전에 먼저 눕고, 바람이 지나가기 전에 먼저 일어선다. 바람이 왔다가 돌아가진 전에 울음을 웃음으로 바꾼다. 김수영에게 와서 한과 슬픔은 더 이상 소모적 감정이 아니다. 시인은 슬픔도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맥락에서 “결의하는 비애 / 변혁하는 비애”(김수영, 「비」)를 읽어야 한다. 한국 현대시를 추동하는 DNA는 김수영에게 와서 한과 슬픔에서 힘과 생성에의 의지로 바뀐다. 김수영의 시가 보여주는 모더니티는 외래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자생한 모더니티다. 한국 현대시의 큰 흐름을 바꾼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중요한 시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1952)    산다는 것은 타자와 연루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타자화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타자와 연루되지 않은 하나의 인간, 타자의 시선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인간이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란 신체가 없는, 혹은 아직 인격적 개별성이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실존이다. 타자는 ‘있음’이라는 익명의 비인격적 개별성에 머물고 있는 ‘나’를 주체의 표상활동을 하는 ‘나’로 거듭 태어나게 한다. 김춘수는 이런 철학적 깨달음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수, 「꽃」)라고 썼다. 이렇듯 타자는 ‘나’의 ‘나-됨’을 보증하는 존재다. ‘나’의 ‘나-됨’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존재함을 위협하는 외부[타자]와의 투쟁이라는 역사 속에서 ‘나’의 개별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살아가려는 의지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욕구를 통해 타자가 곧 ‘내’ 존재 실현의 물적 기반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타자는 언제나 우연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타자의 출현은 ‘나’를 감싸고 있는 실존의 베일을 걷고, ‘나’의 현존을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되게 한다. 타자는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객체화하고 ‘나’를 향유한다. 모든 삶은 세계를 채운 것들에 대한 ‘나’의 향유이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 「농무」(1971)   해방을 맞고 빼앗긴 주권을 찾아왔지만 눌리고 빼앗기는 삶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은 더욱 살림을 옥죄고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지체가 높고 쌓은 재물이 많은 소수의 사람이야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배운 것 많지 않고 가진 것이 없는 민중들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했고, 그 맺힌 걸 풀 길이 없었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를 돌고날라리를 불며 신명 돋궈보지만 뻥 뚫린 가슴 한켠의 허전함을 채울 도리는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못난 얼굴끼리 모여 술추렴을 하거나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두고 푸념이나 할 따름이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신경림, 「목계장터」). 산서리가 맵찰 땐 얼굴 묻을 풀이 있고, 물여울 모질 땐 그 뒤에 몸을 피할 바위가 있다. 하지만 맵고 모진 삶은 피해 숨을 곳이 없다. 「농무」(1974)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가는 시대에 희생자로 남아버린 소규모 자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상실감과 울분을 담은 시다. 시인은 농사가 더는 아무 희망이나 보람이 없는 시대의 답답함과 울분들을 사실적 언어로 토로한다. 이 시는 아무리 악을 쓰고 농사일에 달라붙어도 나날의 살림이 줄고 사는 게 팍팍해지는 사정에서 비롯된 억울함과 답답함을 세상에 일러바친다. 이 일러바침의 사연 안쪽에는 적게 일하는 자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뼈가 휘도록 일하는 사람이 고달프게 사는 세상은 잘못되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바로 고쳐져야 한다는 옹골진 속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1975)   전근대에서 근대에로, 농촌에서 도시에로, 독재에서 민주에로, 성장에서 분배로, 억압에서 자유에로 달려온 100년이다. 애비는 종이었고(서정주), 님은 막무가내로 떠나갔다(김소월, 한용운). 모란이 뚝뚝 진 뒤 봄을 여읜 설움에 잠겨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며 새 봄을 기다렸다(김영랑). 아내도 떠나보내고, 아내와 살던 집도 잃고, 부모와 동생들과도 떨어져서 낯선 거리를 헤맸다. 그러다가 어느 집 헛간을 얻어들어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면서도,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혼자 그려보는 것이다(백석). 그 드문 갈매나무를 바라고 그려보는 마음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윤동주)은 한마음이다. 가진 걸 빼앗기고, 살던 곳에서 내쫓기고, 눌리고 찢긴 마음엔 맺힌 한과 쌓인 설움이 그득했지만, 우리는 초식동물같이 견디고 참을 줄만 아는 족속이었다. 우리가 한 건 겨우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중략)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보았을 뿐이다(노천명, 「사슴」, 1938). 우리가 걸어온 100년의 길은 어두운 길이었고, 비바람 몰아치는 불순하고 날씨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상실의 세월, 헤맴의 세월, 유형의 세월이었다. 상실과 가난과 근심들을 고요히 참고 견디며 깊은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떼며 앞으로 걸어온 세월이었다. 우리 시는 전환과 격동의 시대를 건너오며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부른 노래다. 한국 현대시는 100년을 맞고 새로운 100년의 들머리에 서 있다. 달려온 시간이 100년이었다면 앞으로 나아갈 시간도 100년이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고향을 잊은 세월이 100년이다. 버린 헌신짝처럼 떠난 뒤 까마득히 잊은 고향으로 온전히 돌아가는데 걸릴 세월도 100년일 터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한다.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 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죽편 1」)라고. 우리 앞의 100년이 백화제방의 시절이었다면 미래의 100년도 백화제방의 시절일 터다. 꽃은 한 가지에서 피어나도 제각각이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들은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김수영, 「꽃 2」). 시는 혀끝에서 맴도는 언어들 속에 있다. 개화되지 않은 꽃봉오리들! 그것들은 이미 있는 시와 앞으로 와야 할 시들 사이에서 개화를 기다린다. 무수한 시들이 언어와 사유 사이에서, 자연과 존재 사이에서, 죽은 시인과 태어나는 시인 사이에서 떠돈다.     1) 장석주, 『뉴스메이커』 2008년 7월 1일자, 781호.  
1566    중국 현대시의 일단면/李陸史 댓글:  조회:4718  추천:0  2016-07-29
  중국현대시의 일단면 저자: 이육사   1941년 6월 《춘추》(春秋)에 발표   이런 문제(問題)를 우리가 생각해볼 때 무엇보다도 먼저 머리우에 떠오르는 것은 중국(中國)의 현대문학(現代文學)이란 전면적문제(全面的問題)를 위선 염두(念頭)에 두고서 고찰(考察)해보지 많으면 안된다는 것은 {혁명문학(革命文學)}에란 중국현대문학(中國現代文學)의 일대전환(一代轉換)이었던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민국 사십년(民國 四十年)의 [五州事件]이 일어나기까지는 소위(所謂) [문학건설(文學建設)]의 시세였으므로 자연히 기교방면만을 중시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는 문학이란 그 자체의 내용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는 로-만티즘의 단꿈을 그리며 상아탑 속에 들어앉어 한일원(閒日月)을 노내던 문학인들도 이 시대적 격류(激流)에 휩쓸려서 십자가두(十字街頭)로 걸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신문학건설의 시대로 올라가서 시대 시(時代 詩)의 발전과정을 더듬어보는 것이 현대중국시단(現代中國詩壇)을 이해하는 첩경일 듯 하다.   그러면 시대 중국시는 그 발전과정에 있어 어떠한 길을 밟어왔는야하면 먼저 시체(詩體)를 파괴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이절의 산문이 사육병체(四六騈體)를 무시한 것과 같이 현대시는 이때까지의 중국시가 가지고 온 생명이며 전통인 오언칠률(五言七律)의 형식을 완전히 말살하는데 있었다. 시체(詩體)의 해방이란 중국의 신문학건설의 초기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의 한 개였던만큼 신믄딘에서 그 생장도 소설이나 희곡에 비할여 훨씬 더 빨랐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신시즉백화시(新詩절卽白話詩)는 한 개 작품을 볼때는 어느것이나 유치한 것이였으니 그 예를 백화시(白話詩)의 수창자인 호적박사(胡適博士)의 [상시집(嘗試集)]에서 보거나 그뒤에 나온 호회침(胡懷琛)의 [大江集]이나 유대백(劉大白), 유복등(劉復等)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다 어찌 어색한 것이 마치 청조관리(淸朝官吏)가 대례복(大禮服)을 입고 여송련(呂宋煙)을 피우듯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전무후한 태동기를 지나오면서 강백정(康白情), 유평백(愈平伯), 왕정지(汪靜之), 곽말약(郭抹若) 등의 무운시라거나 사완영(謝婉瑩), 종백화(宗白華), 양종대(梁宗岱) 등의 소설형식이 이 시대의 대표 작품이었고, 세체해방(詩體解放) 후에 가장 성공한 작품들인데도 불구하고 비록 오언절률의 시체는 파괴했다고는 할지언정 옛날부터 내려오던 사(詞)에 대한 취미(趣味)를 완전히 탈각하지는 못한 혐의는 사람마다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씨의 [상시집]은 백화(白話)로 써진 최초의 시집인만큼 현대 중국시 남본(藍本)인 것이고 이와거의 동시에 시단에 등장한 것이 호회침(胡懷琛)의 [대강집(大江集)]이였는데 이것은 백화로 서진 구체시(舊體詩)라 문제가 되지 않으며 유대백은 [舊夢]이란 처녀시집이 있고 그 뒤 [풍운(風雲)] [화간(花間)] [홍색(紅色)]을 써서 4부작으로 되었으며 그 외에도 [중국문학사]가 있고 그 후 복단대학문과주임(復旦大學文科主任)을 거쳐 국민정부 교육차장이 되고는 시와는 인연이 멀어졌으며 유복은 [양편집(楊鞭集)] [와부집(瓦釜集)] 등의 잡품이 있으나 원내가 읍리대학의 문학박사인 만큼 국립북경대학중법대핟의 교수, 주임, 원장 등에 영달하였고 본시 그 작품보다도 그는 음성학의 전문가인만큼 그 방면의 공헌이 더 큰 것이다.   그러면지금부터 보다더 현대시를 진보시킨 무운파를 찾아보면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강백정, 유평백으로 강은 {초아(艸兒)}를 유는 [동야(冬夜)]를 내놓은 것이 이 파의 최초의 간물이고 또 시단에서 상당히 중시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도 왕정지와 곽말약은 서정시로서 유명했는데 이 두시인은 어느 점으로나 대차적인 처지에서 볼 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과말약의 [여신(女神)]이 전체의 운명을 위하여 모든 정세를 기울이는데 비해서 왕정지의 [혜적풍(蕙的風)]은 대담하게도 한 개인의 청춘에 정화를 분출하는 것이었는데 이 두 시인의 성공 불성공은 차치하고 하여간에 당당한 시대의 폭로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어느 때나 공통된 [하-트]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와 무운시라는 말이 났으니 한말 더하면 둘것은 심윤묵(沈尹默)(1883)의 존재인 것이다. 그는 절강성오흥현 사람으로 나종북대 교수로 평대학교장까지 지냈지만은 그의 작품이 민국 6년에 [월야(月夜)]로 출판되었을 때 신체시로서 상당히 평가될 조건이 구비된 것이었으며 실로 무운시의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유명한 조작인도 그 시대는 시를 써서 [소하(小河)]라는 당대의 명작을 발표하였고, 시집으로 [과거적 생명(過去的 生命)]이 있는 것은 기억해 둘바이나 그는 적시 유-모러스한 소작문에 장처가 있는 것이며 일본문학연구가로서 생명이 더 긴 것이다.   그 당시에 소시를 쓰던 사람으로는 누구보다도 윤수시인(閏秀詩人) 사영심(謝 心)을 찯아야 한다. 그는 1903년에 복건성 민조에 나서 연경대학을 마치고 아메리카의 웰즈레-대학인가 단일때 [신보부간(晨報副刊)]에 [기소독자]라는 아동통신문을 써서 유명해뎠고 시집 [춘수(春水) [번성(繁星)]이 있으며 때로는소설도 쓴다고 하나 본일이 없고 그의 고백에 들으면 자신 인도 시성 타-골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는 것이다. 시인으로 다른 시인의 영향을 받는 것이 옳고 그은 것은 그 자신이 아닌 이상에 말할 바 아니나 기왕 영향의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바로 파에 속하는 종백화야 말로 그 고백과 같이 [유운(流雲)]에도 꾀-테의 냄새가 적지않게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사장의 청신함을 높이 헤아리는 수 있으나 격조가 왕왕히 진부함은 이 시인이 얻는 것도 적지 않는 대신 잃은 것도 컸었다. 그 다음 [훼멸(毁滅)]과 [사적( 跡)]을 세상에 보내서 알려진 주자청(朱自淸)이 있다는 것은 잊어서 안될것이다···(이 시인을 위해서는 후일 구체적인 것을 써 볼가한다.)   이 시기에 누가 중요하니 어떠니해도 중국의 현대시를 시로서 완벽에 가깝도록 쓴사람은 서지마(徐志摩)는 (1899-1931) 절강성 해영현에 낳고 일찍 영국검교대학을 마치고 국립중앙대학과 북경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작품으로는 [지마적 시비(志摩的詩翡)] [취냉적 일야(翠冷的 一夜)] [猛虎集] [雲遊集] 외에 산문집으로 [낙낙(落落)] [자부(自部)] [파리적인조(巴里的麟爪)]가 있으며 기부희곡(幾部戱曲)과 번역이있고 민국이십년 가을 상해서 북경으로 오는 도중 제남서 비행기의 고장으로 떨어져죽자 전국문단으로부터 비상히 애석해마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그의 생전에 있어 남들이 지목하기를 지마(志摩)는 한소능로 중국신시단을 정정한 [시철(詩哲)]이라고 했고 현대시의 동양이라고 한 것은 비록 과분한 평가일른지 모르나 그의 현대중국시단에의 위치는 누구나 부인치 못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중국의 현대시단에 남긴것도 그 내용방면보다는 형식과 기교방면에 있는 것이니 용운이나 비예에 있서 신규율을 창조한 헌(獻)만이라도 중국시단 전체로 볼 떄에는 실로 역사적 공헌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방면으로 보면 마침내 유한시인을 면치못했다는 것은 그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지위가 그로하여금 한걸음도 실제사회의 진실면에 부다치게 못하고 개인주의 고성속에 유한시키고만 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현실의 조대에 말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왕왕히 동정과 연민을 볼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이 시인의 환각만이 아니고 중국사회의 그 시대적 성격과 문단전체의 동향을 짐작해 볼때 이 시인의 휴머니티를 재여 볼 수 있는 것이다.   拜 獻   산아 네 웅장함을 찬미해서 무엇하며바다 네 광활함 을 노래한들 무엇하랴 풍파 네 끝없는 威力도 높이 보진 않으리라 길가에 버려지면 말할곳도 없는 고아과수(孤兒寡守) 눈속에도 간신히 피려는 적은 풀꽃들과 사막에선 돌 아가길 생각해 타죽은 어린제비 그를! 우주(宇宙)의 온갖 이름 못활 불행(不幸)을 어엽비해 나는 바치리 내 가슴속 뜨거운 피를 바치련다 힘줄에 흐르는 피와 영대(靈臺)에 어린 광명(光明)을 바처 나의시(詩)-노래 가락도 요량(  )한 그동안 만이라도 하늘밖에 구름은 그를위해 질기운 비단을 짜리 길-다란 무지개 다리가 이러나고 그 들로 끝끝내 소요(逍遙)할수 있다면야 요량(  )한 노래가락에 끝없는 괴롬을 살어지게하리.     再別康橋   호젔이 호젔이 나는 돌아가리 호젔이 호젔이 내가 온거나같이 호졌이 호졌이 내손을 들어서 서(西)쪽 하늘가 구름과 흐치리라 시내ㅅ가 느러진 금빛 실버들은 볕에 비껴서 신부(新婦)냥 부끄러워 물결속으로 드리운 고흔 그림자 내맘속을 삿삿치 흔들어 놓네 복사 위에는 보도란 풋 나문잎새 야들야들 물밑에서 손질 곧하고 차라리 「강교(康橋)」 잔잔한 물결속에 나는 한오리 그만 물품이 될가 느름나무 그늘아래 맑은 못이야 바루 하늘에서 나린 무지갤러라 부평초 잎사이 고히 새나려와 채색도 영롱한 꿈이 잠들었네 꿈을 찾으랴 높은 돋대나 메고 물풀 푸른곳 따라 올나서 가면 한배 가득히 어진 별들을 실어 별들과 함께 아롱진 노래 부르리 그래도 나는 노래쫓아 못부르리 서러운 이별의 젓대소리 나면은 여름은 버레도 나에게 고요할뿐 내 가는 이밤은 「강교」도 말없네 서럽듸 서럽게 나는 가고마리 서럽되 서럽게 내가 온거나같이 나의 옷소맨 바람에 날여 날리며 한쪽 구름마저 짝없이 가리라 (年十一月六日中國海上)   이 이상더 지마를 역해본댔자 그것은 나의 정력의 허실외에 아무것도 아니란 것은 원래에 이 시인의 묘미가 백화를 구라파의 언어사용법과 같이 부단히 단어를 두치해 섰는데있고 백화로 읽을 때에 음률과 격조를 우리말로 이식하기는 여간 곤난한 것이 아니다. 이만하고 두기로하며 본의로는 좀더 많은 작품을 역해서 한사람의 시를 완전히 이해토록 하고저했으나 필자의 시간과 생활이 그다지 여유가 없는 것과 재능이 부족함을 심사해두며 이 외에도 주상(朱湘), 변지림(卞之淋), 왕독청(王獨淸) 等 유수한 시인들의 중국현대시단에 남겨준 공적과 작품에 대하여 대개나마 소개해보려던 것이 뜻대로 되지못했으나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하고 이 고(稿)를 끝내지 않는 것이다.   ---(四月二十五日夜於元出臨海莊)-----  
1565    한국 시인 중국 기행 시모음/중국 현대시 개요 댓글:  조회:4818  추천:0  2016-07-29
중국 기행시 모음     1.  金鞭溪谷에서  이시환  누가, 눈먼 내 소맷자락을 잡아끄는가?  낯선 그대 손길에 이끌리어 한 걸음 두 걸음  더딘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 놓을수록  어느새 이 몸에도 초록빛 물이 들어  물가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가 되고 마네.  누가, 벙어리가 된 내 귀에 속삭여대는가?  가도 가도 끊기지 않을 물길 따라  이미 나도 흐르기로 했네, 흘러가기로 했네.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저 깊은 하늘에 이르는,  숨 쉬는 물이 되기로 했네, 구름 되기로 했네.  -2004. 12. 24. 22:37  2.  장가계를 빠져나오며  이시환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바다가 솟아올라  높고 깊은 산이 되었는가.  실로 오랜 세월,  안개에 가리우고 구름에 덮이어서  알몸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던 네가,  오늘 비로소 한 마리 거대한 地鬼가 되어  꼬리는 깊은 산정호수에 두고,  머리는 구름 밖으로 내민 채 꿈틀대는구나.  나는 분명 그런 너를 보았으나  보지 아니한 것으로 하리라.  가슴 속에 다 묻어두고 내가 죽는 날까지  침묵을, 침묵을 지키리라.  내 입을 여는 순간,  네가, 네가 굳어버린 돌산 숲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리라.  -2004. 12. 28. 23: 14  3.  황룡동굴(黃龍洞)  이시환  있지도 않는 용(龍)을 각별하게 좋아하는 백성들이  ‘天下第一奇觀’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는 황룡동굴에  나도 잠시 틈을 내어 가 보았네 그려.  그렇게 높지도 않은 산허리로 뚫린  지하문(地下門)으로 들어서면 놀랍게도  그곳에도 높은 하늘이 있고, 깊은 강물이 흐르네.  그 하늘 그 땅 사이로는  온갖 꿈틀대는 생명체들의 동작이 일순간에 정지 된 듯  모두 숨을 죽이고 있네.  하지만 저들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을  내 어떻게 피할 수 있으랴.  하늘을 떠받드는 것인지,  저마다 기운을 뽐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고 놈들을 요리조리 눈이 빠지게 쳐다보노라면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마녀(魔女) 중의 마녀의 깊은 자궁 속임을 알아차리고는  스스로 놀라고 마는 것을.  그대여, 저들을 꿈틀거리게 하라.  그대여, 저들을 제 멋대로 움직이게 하라.  그리하여 음기(陰氣) 가득한 이 왕국, 이 골짜기에  생명의 기운이 요동치게 하라.  그리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라.  일으켜 세우시라.  **중국에는 시인다운 시인이 없는 듯하다. 이 황룡동굴 앞에 몇 자 끄적거린 것이  고작 “中華最佳洞府 天下第一奇觀”과 같은 글들이고 보면,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비문에 그럴 듯하게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현대를 살고 있어도 그들은 옛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내 이 시를 짧은 시간에 지어 기쁜 나머지 잠시 오만을 부려본다.  -2004.12.30.19:32  4.  구름바다  이시환  비행기 창밖으로 내다보는  저 뭉실뭉실한 구름바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햇솜을 막 펼쳐 놓은 듯  뛰어 내려  마냥 뒹굴고 싶어라.  오늘은 이곳  천자산(天子山)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그가  마치 비단 치맛자락을 깔아 놓은 듯  나를 유혹하네.  저 거룩한 왕국의 침대로  저 황홀한 침실의 왕국으로.  -2005.01.02. 20:29  5.  너와 나  -금편계곡에 부쳐  이시환  안개인가, 구름인가?  이곳 계곡에서 보면 안개이고,  저곳 산위에서 내려다보면 구름이리라.  이쯤에서 한 사나흘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밤낮없이 흐르는 물소리를 듣노라면  눈을 감아도 저들의 알몸이 보이고,  그 알몸 속 투명한 영혼의 옷자락도 보이리라.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저들이 내게 건네는 말소리 들리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들리고,  저들의 숨을 죽이는 숨소리마저 들리리라.  안개인가, 구름인가?  이곳 계곡에서 보면 안개이고,  저곳 산위에서 보면 구름이리라.  이젠 내가 뒹굴던  호남평야 끝자락 허허벌판에 서 있어도,  배회하던 서울 시내 칙칙한 뒷골목에 서 있어도,  멀리 아프리카 초원이나 사막에 서 있어도,  그 어디에서든 나는 듣는다, 너의 속삭임을.  발뒤꿈치 들고 종종 따라다니는 너의 숨소리를.  -2005.01.02. 11:45  6.  그리운 이에게  -장가계에 부쳐  이시환  너와 함께 살고파라.  너와 함께 살고파라.  너와 함께 찬란한 아침해를 맞고  너와 함께 영롱한 저녁별을 맞으며  너와 함께 밤낮을 얼굴 마주 보리라.  하지만, 하지만  너를 가까이하메 내가 더 외로워지고  너를 가까이하메 내가 더 숨 막히고  너를 가까이하메 내가 더 두려워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그 사연이 무엇이더냐?  사시사철 말없이 天衣無縫 드러내 보이는  장엄한 너의 품에 안겨 내가 죽는다면 몰라도,  아침저녁 말없이 안개 구름바다 피워내는  신비로운 너의 품에 안겨 내가 다시 산다면 몰라도  네 곁에 머물 수가 없구나.  네 품에 안길 수가 없구나.  나는 그저 멀리서 너를 바라보리라.  나는 그저 멀리서 너를 그리워하리라.  나는 그저 멀리서 노래하리라, 너를, 너를.  -2005.01.01. 18:44  7.  만리장성(萬里長城).3  이시환  목이 타는 가뭄.  끝내 해갈이 되어도  가뭄이 그리워지는 가뭄이다.  -2005.01.02:53  8.  만리장성(萬里長城).2  이시환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얼마나 많은 인권을 유린하였을까?)  인간의 욕망이 욕망을 짓이기면서 쌓아올린  장엄한 무지렸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아니면 변방 요새에  그런 성(城)을 견고하게 쌓고 싶어하지.  2005.01.01. 02:44  9.  만리장성(萬里長城).1  이시환  맑고 푸른 하늘이었으면 좋겠다.  아주 길게 한 모금 빨고서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리며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제 손등으로 떨어지고 마는  담뱃재 같은 것.  흐린 구름떼가 몰려온다.  -2004. 12 31.23:35  시화 1  -중국 장가계張家界*  도지민  천지창조 때가 이러했을까  모진 산통 끝에  낳은 아가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그 전율이  이러했을까  전신이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고  눈 앞의 오색몽롱함이 걷히고  이어 눈부시게 등장하는  숨이 터억 막힐 듯한 장가계의 무릉원  하늘 닿을듯 주욱죽 뻗은  울창한 석림石林들  높고 낮은 그 자태마다  다투어 읊어내는 명시들의 합창  몸소 구름을 생산해 내는 듯  온세상의 폭포란 폭포가 다 모여  함께 어울어진 무희들같기도 하고  곧 본 막이 오를 듯  숨 죽인 비경 사이로  선녀들이 흰 옷자락을 폴폴 날리며  몹시도 분주하게  골짜기마다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듯  겹겹이 걸쳤던 뭇 언어 대신  와아 와아 탄성들만 빗발치는 곳  온김에 나 이곳에 움막을 짓고  영영토록 눌러 살면 아니되오리까  문득 떠오르는 우리 부모님  나 먼저 이 곳에 와 훔쳐 본 죄  정말로 죄송합니다.  시화 2  -천자산, 토가족의 노래  도지민  용암을 녹여 마시면  저리 고운 음색이 될까  석림에 푹 젖은 오색안개를  고농도로 압축하여  가느다란 현을 빚어 목젖에 걸면  저리 고운 소리가 날까  천자산 꼭대기  보석같이 맑은 호수를 유람하다  먼데서 방문한 손님을 향해  덤으로 들려주는 토가인의 노래 소리  천만년을 익혀온 현악 연주에  깊은 계곡 새벽이슬만 마신 목청이라  그 청아한 음악에  이미 혼은 빠져나가고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절벽에 달라붙은 달팽이 계단을 밟고  끝도없이 뱅그르르 돌고돌아  어찔한 채 몸만 겨우 빠져나오다  무릉의 문턱을 넘어갈 때  다른 것 다 잃어도 혼만은 잃지말라는  가이드의 누누한 당부가  괜한 말이었을까  토가인이 뺏어간 나의 혼  지금쯤 발등까지 밟혀  천자산 기슭 어느 아담한 토가네에서  그만 눌러 사는가 보다.  시화 3  -무릉원, 십리화랑길  도지민(綾波)  모노레일 열차를 타고  십리 풍경 속으로 서서히 잠수를 하는데  세모네모동그라미 그 어느모양으로 보아도  하늘과 완벽한 구도를 이루는 신의 명화들  누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가  그럼 저 그림을 어느 유명 화가가 그렸단 말인가  어찌 십리만 화랑이라 이르는가  십리 밖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까지  일단 눈의 화폭에 담기만 하면  모두가 살아 숨 쉬는 그림 그림들  그러고 보니  이 세상 어느모로나 문명의 이기만 빼면  하늘 아래 모두가 화랑이겠다  이 그림들에 합류하는 이들은  옥의 티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걸어서 가야 하리  모자를 벗고  신발을 벗어 놓고  남녀 모두 자유롭게 알몸둥이 그대로......  시화 4  -황룡동굴에서  도지민(綾波)  선악과 사건 이전의 이브, 혹은  태초를 잉태했던 동정녀의 자궁같은  굴의 입구에 서면  꼭히 머리를 숙여야 들어 설 수 있는  행복문과 장수문이  양쪽 나팔관처럼 열려 있고  어느 문턱을 넘든지 비집고 들어서면  어찌 행복과 장수 뿐이겠는가  보라  천만년 걸쳐 세공을 하던  일천 칠백의 오묘한 석순과 석주들이  여느 왕 대하듯  일시에 하던 일 뚝 멈추고  길 양 옆으로 엄숙히 비켜 서 있고  끝보이지 않는 양수같은 호수에는  어여쁜 처녀 뱃사공들이 열지어 기다리고  하늘보다 더 아득한 천정까지 이어진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오르면  모태를 통한 맥박처럼  여기저기서 들리는 물방울의 하모니  감미로운 그 음악에  스르르 두 눈을 감으면  태반의 자리에 건설된 자궁 속의 궁전  어느 누구라도 앉으면 주인이 될  텅 빈 권좌權坐가  태초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시화 5  -북경, 의화원* 장랑길을 걸으며  도지민  참으로 좋았겠구나  하루 밤 정사  단 한 번 뼈와 살을 불살라 치러 주고  감쪽같이 사라져 주었던  의화의 눈에 들었던 수 많은 장골들이여  이래저래 개죽임 당한 천인들에 비한다면  단 하룻밤  별을 따기보다 더 힘들 그 아리따운 왕비 품에서  마지막 성찬에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리 죽은 목숨이야 호강 받은 죽임이지  보아하니 그 여자  세상 호령하던 서태후도 지레 겁 먹은  으시시한 색골을 아마 타고났었나  왕도 어쩌지 못해 저 성깔대로 내버려 둔 듯  의화원의 천인공노, 아연실색할 현장  오늘에  의화원의 장랑길 발 아프게 걷다보니  지금쯤 그 여자  단 하루밤 즐겁게 해준 이름조차 모를  헤아릴수도 없는 장골 귀신들 틈에서  죽고 싶어도 이젠 죽어지지도 못하고  아랫도리 썩어 문드러지도록  이내 또 이내 번갈아 끌려다니며  네네네네 그럽죠 그럭허죠  영원토록 그짓거리에  천벌 받는 꼴을 보네.  돌숲  박종해  세상에 돌의 숲이 있다는 것을  머나먼 중국 운남성 곤명시  석림石林에 와서 보았네.  기기묘묘한 뾰족한 돌들이  삼라만상의 모양으로 숲을 이룬  돌의 나라.  저 아름다운 침묵.  자연의 황홀한 연출 앞에  잠시 숨이 멎어 푸른 하늘을 보니,  거기 우둑 솟은 돌의 산.  세상의 신비란 신비는 다 불러모아  나의 걸음을 붙잡고 있는 너희들은  억만년 전에 누구였던가.  아리따운 남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돌문을 열고 걸어나와 춤을 춘다.  아! 너희들 앞에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화원에서  이하영  아름다운 침실이며 태산 같은 금은보화  천하를 호령하던 어제의 비단금침  오십 년 세도 정치에 죽은 백성 얼마인가.  서태후 걷던 길을 호사하게 걸어본다  곤명호에 배를 타고 금수산을 바라보니  하룻밤 놀이개로 죽어간 원혼들이 보인다.  자금성에서  이하영  어린 황제 뛰어놀던 구만 평 넓은 뜨락  허수아비 황제들 갇혀 살던 구석까지  단단한 붉은 벽돌을 여섯 겹을 깔아다나.  풀도 나무도 자랄 수 없는 넓은 마당  호통은 서릿발인데 역모만 무성하다  대궐 안 호사스런 삶도 알고 보면 바늘 방석.  금색으로 도금한 궁궐 보기야 좋다만는  공짜로 준다 해도 나는야 그건 싫어  산속에 작은 내 집이 궁궐보다 좋더라.     //   /////////////////////////////////////////////////////////   격동의 20세기를 이겨낸 중국 현대시         _ 문화혁명 이전의 여러 유파를 중심으로 -                 김 금용 시인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외세침입에 의한 봉건주의 붕괴와 함께 서구 세계의 문예사조가 일시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신시와 근대시, 그리고 현대시의 시대 구분이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문단에서는 1917년에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탈바꿈한 白話운동을 포함한 신 문학운동을 기점으로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를 현대시의 발생기로 본다. 즉, 백화운동으로 중국문자혁명이 일어난 1910년대부터 개인과 문학이 말살된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를 통틀어 현대시라고 부르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중국문단의 통설에 따라 1907년 루쉰魯迅이 서구의 셀리, 바이런, 키이츠, 푸슈킨 등의 시들을 白話로 소개함으로써 시작된 중국의 신시와 문화혁명 이전까지를 ‘현대시’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7,80년대 이후의 시를 중국문단에서는 ‘당대시當代詩’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필자는 중국 당대시를 크게는 현대시의 범주에 넣어서, 각 시대별 유파들의 특성과 그 시정신을 짚어보려 한다     “白話”를 매개로 한 신문학운동   본격적인 신시운동은후스胡適(1891~1962)가 1917년《신청년》 2월호에서 “한정된 형식에는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없다”며, 시의 형식 타파를 주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전통적 정형시 형식으로부터 이론적 탈바꿈만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현대시의 특징이 되는 낭만성, 상징성, 산문성 및 사회성을 도입함으로써 일약 시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후스胡適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할 때 접하게 된 서구 문예사조는 후스 뿐만 아니라 중국 신지식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으며 그들은 앞다퉈 전문 시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시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활발한 시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국,공 내란의 정치적 압박과 항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20,30년대는 중국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롭고도 치열한 심도의 시 전성기를 이뤘다고 할 것이다.   까마귀                후스*   나는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사람들 지붕 모서리에 서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네 사람들은 내가 불길하다고 미워하네 나는 그네들 사랑 받자고 재잘거릴 줄 모르네 몹시 춥고 바람센 날에도 돌아가 쉴 곳이 없네 …후략… 『상시집嘗試集』에 수록   老鴉                                  胡適 我大清站在人家屋角上啞啞的啼/人家討嫌我,說我不吉利;--/我不能呢呢喃喃 寒風緊,無枝可棲。/我整日裏飛去飛回,整日裏又寒又飢。---/                                                              윗 시는 후스가 1924년(32세)에 발표한 시이다. 까마귀는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한편,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건왕조가 붕괴된 새 체제의 불안 속에서 자신이 품고있는 이상과 현실의 갭을 잘 투사하고 있다. 시인은 항상 군중 " 群" 과 나 자신 "己" 속에서 갈등하면서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다. 첫 행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홀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이며, 또한 깨어나 먼저 나라의 앞날을 짊어진 젊은이의 고뇌의 모습이기도 하다. 4.5행의 "無枝可棲""又寒又飢" 역시 춥고 배고파도 돌아가 쉴, 혹은 머물 나뭇가지 하나 없는 자신의 선구자적 존재의 고뇌와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백화문으로 쓰여지고, 격률시의 정형성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20년대 초기 작품이지만, 상징과 은유, 역설적 표현이 잘 드러난 최근 현대시로도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등과 함께 의 대표적인 시인인 원이둬聞一多는 시“여신의 地方色彩”에서 음악미와 건축미를 내세우며 현대시 리듬을 주창했으며, 리진파李金髮 는 프랑스의 상징시에 영향을 받아 를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오늘날도 애송하는 국민시인 궈뭐루어郭沫若 역시 이 시인으로 를 통해 유미서정 경향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 가 루쉰魯迅과 빙신氷心, 주즈칭朱自淸, 조우줘런周作人 등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을 수용, 비약을 시작했다.     상징파 시의 출현   상징은 현대시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중국 고대 시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창작법이나, 5.4운동 당시 『소년중국』『소년월보』『신청년』『창조주보創造週報』『어사語絲』등을 통해 소개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상징시가 소개된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어사語絲』에 상징주의 수법의 시를 처음 소개, 가장 왕성한 상징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5년부터 27년까지 3년간 《이슬비微雨》,《행복을 위한 노래爲幸福而歌》, 《식객과 흉년食客與凶年》등 세 권의 시집에 총 450 여편을 발표했다.      버림받은 여인                            李金髮리진파   긴 머리칼이 내 눈앞을 가리자 일체의 부끄러운 질시와 붉은 피의 급류, 앙상한 뼈다귀의 깊은 잠과 단절되었다. 칠흑의 밤이 모기떼를 몰고 천천히 다가와 낮은 담 모서리를 넘어와 결백한 내 귀에 대고 울부짖는다 황야를 휘돌며 노호하는 광풍이 무수한 목자들을 전율케 하듯   棄婦 長髮披遍我眼之前/ 遂隔斷了一切羞惡之疾視/ 與鮮血之急流, 枯骨之沉/黑夜與蚊蟲聯步徐來 /越此短墻之角/ 狂呼在我淸白之耳後,/如荒野狂風怒號./戰慓了無數遊牧   윗 시는 《이슬비微雨》에 수록된 대표시 중 하나로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거주한 스무 살의 리진파의 문화적 충격과 이방인으로서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 ‘棄婦’는 삶의 고달픈 숙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실 리진파 자신이 유학 중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외로움, 조국에 대한 고뇌, 방황, 절망에 이르는 비극성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시 프랑스에서 팽배하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와 퇴폐성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전반에는 현실에 대한 허무, 비애, 무능, 권태 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기떼를 몰고 오는 칠흑 같은 밤은 무고한 그의 귀에 와서 울부짖으며 그를 괴롭힌다. 외우내환으로 들끓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자화상을 호소력 있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詩怪’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그가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갖고 부유한 생활을 했음에도 시에선 상당한 퇴폐성과 삶의 절망 등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新詩운동을 전개시키며 서구의 문예사조를 재빨리 흡수, 바로 현대시로 발전시킨 당대 시인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이 구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라는 점이다. 상징파 대표시인인 리진파는 홍콩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후에 외교관이 되어 미국에도 건너갔다가 뉴욕에서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대 상징파시인의 하나라고 불리던 왕두칭王獨淸 일본과 프랑스에서, 무무티엔穆木天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펑나이차오馮乃超 역시 동경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자연스레 외국문물을 접했던 시인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순수시를 표방하고 신비주의, 유미주의 경향을 나타냈는데, 리진파는 베를렌을, 무무티엔穆木天은 라파르그(Lafargue)를, 다이왕수戴望舒는 야메스(Jammes)를, 스민石民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모두 인정하였다. 이들의 시에선 공통적으로 상징수법의 하나인 강렬한 암시와 음감과 색감을 동시에 결합시킨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특히 왕두칭王獨淸(정+힘) + (음 + 색)=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라마틴(Lamartin)으로부터 情을, 베를렌에게선 音을, 랭보(Arthur Rlmbaud)에게선 色을, 라파르그(Lafargue)에게선 ‘힘’을 전승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 대두   중국인민들이 지금까지 애송하는 국민시인,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모두 신월파 동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색은 대체적으로 마르크스시즘에 대항하며 우파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국민당의 독재와 부정부패에는 저항하였다. 때문에 한때 국민당의 사찰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전국이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바뀌자 5,60년대 중국학자들로부터는 ‘매판자본주의 문학단체’ 혹은 ‘반동적집단’이라고 비판을 받다가, 8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는 사실 인도의 타고르의 시집『초승달』(중국어로 新月)이란 이름에 매료되어 滿月이 되자고 1923년 북경에서 쉬즈뭐徐志摩가 발기한 사교 모임이었다.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는 해외유학파였으므로 여러 계층의 신사들을 모아 자유롭게 연극을 감상하고 문학을 품평하다가 사회개혁을 시도하자는 뜻으로 동인들의 자본을 모아 1924년 12월에 『현대평론』을 창간하였다. 1927년, 북벌군에 쫓겨 상해로 온 시인들과 남경이나 해외에서 들어온 전국시인들이 모여    후스胡適를 세워 도 열고 19세기 말 영국의 문예지 『Yellow Book』을 닮은 정사각형 종합지도 발간했다. 의 공동신념은 자유주의, 인도주의, 개성해방이었으며 격율시를 제창했다. ‘격율시’란 시행의 장단이나 시의 韻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시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전통시가 무너지면서 실험시가 넘쳐 만 여 편 이상이 발표되었으며, 방만한 낭만주의나 산문시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하고 전통시의 절구시나 율시의 형식을 일부 이식, 조화롭게 정리, 발전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시어의 음악화, 방언의 시어화를 시도했다. 원이둬聞一多는 특히 음악미, 회화미, 형식상 균형을 지키자는 건축미를 주창했다. 일부는 를 ‘말린두부시(豆腐乾詩)’‘모꼴시(方塊詩)’ 라고 비아냥을 하기도 하였으나, 인권, 자유, 민주, 법치 등을 강조하는 서구 영향 아래 ‘中體西用’을 실험적으로 응용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혁명문학의 팽배와 항일운동의 봉기, 후에 좌익작가연맹으로 조직화된 사회주의 문학의 등장으로 이들이 이끌던 『현대평론』은 1928년 정간이 되었다. 다시 쉬즈뭐徐志摩가 『詩刊』을 매주 한 번씩 발간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요절함으로써, 동년 6월, 11호로 정간되고 말아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고요한 밤                             원이둬    이 등불, 등불은 사방의 벽을 하얗게 씻어내고 점잖게 놓인 탁자와 의자는 친구처럼 친밀하다 고서의 종이 향내가 간간이 밀려오는데 소중한 찻잔들은 정숙한 여인처럼 청결하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홀짝홀짝 젖을 빨고 큰아이는 건강하다고 알리는 듯 코를 곤다   這燈光, 這燈光漂白了的四壁 / 這賢良的卓椅, 朋友似的親密, / 這古書的紙香, 一陣陣的襲來/   要好的茶杯, 貞女一般的潔白,/ 受哺的小兒, 接呷在母親懷裏/鼾聲報導我大兒健康的消息...//                                             聞一多 中 一部   윗 시에선 그의 주장대로 각 행 머리를 ‘這’로 시작하였으며 행의 중간마다 ‘的’을 넣어줌으로써 ‘節의 균형’과 ‘句의 규제’가 반복적으로 쓰여 리듬과 일정한 건축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격율’이란 단순한 음률상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 회화적, 건축적인 복합 차원의 형식의 규제이다. 따라서 자연대로의 수용이 아닌, 예술의 구성을 통한 唯美性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와 를 수용한   1930년대 대표적인 유파는 현대파이다. 는 본질적으로 를 계승, 발전했다. 두 파간의 상호 인적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시의 생명을 표현에 두고 시의 궁극목표를 순수시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는 1932년 5월, 의 출자와 시저춘施蟄存. 두헝杜衡의 편집으로 간행된 종합문예지 《현대》에서 시작되어 다이왕수戴望舒가 본격적으로 현대주의의 기치를 들고 『新詩』를 창간하면서부터 전 중국시단을 휩쓸게 된다. 와 의 쇠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종전의 인물이었던 다이왕수戴望舒가 를 접수하고 여기저기에서 현대파 경향의 신 잡지들이 탄생하게 된다. 36년부터 37년까지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 시단이 항전체제로 전환되기까지 는 최고의 성숙기를 맞아 다이왕수戴望舒는 비엔즈린卞之琳, 펑즈馮至, 쑨다이위孫大雨, 등과 공동편집으로 현대시의 조류를 강렬하게 펼침으로써 5.4운동 이래 중국 시 최고의 황금시기를 맞았다. 가 궁극에 둔 것은 순수시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중국전역이 의 낭만과 신비로움, 난해한 시가 넘쳐 난데 대한 반발로 ‘자각적인 상징파’*3로 불리던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즉, 밖으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의 암시법과 상징법, 의 낭만성과 격율시 등을 조화시켜 몽롱미와 복합적 이미지의 조합을 이뤘다. 또한 순수시정, 시의 산문미의 특성을 갖춤으로써 를 수정, 계승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파는 상징파보다 훨씬 화해적이고 통일적이며 주지적이고 의 지나친 암시와 상징으로 인한 난해함을 벗어나 좀더 직관적이고도 단순적 이미지로 시의 영역을 훨씬 명랑하고 격율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비관적 서정풍과 이미지 조합에 실험성을 가미한 심상풍, 직설이나 격정을 유보하면서도 현실비판에 맘을 둔 사실풍, 초현실적인 수법으로 첨예화된 현대의식을 표현하려던 회화풍 등 여러 가지 경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현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정적 낭만과 격율적 형식을 배제하지 못했으며 고전적 이성으로 현대적 상징과 심상의 융합을 꾀하는 시인들도 많았다.  이런 의미에선 는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영미계 현대주의와는 그 특징을 조금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 내리는 골목                                 다이왕수戴望舒   종이우산을 받들고, 혼자 길고 긴, 텅 빈 비 내리는 골목을 방황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라일락처럼 근심과 원한을 맺은 소녀와 만나게 되기를   撑着油紙傘, 獨自 / 彷徨在悠長, 悠長 / 叉寂寥的雨巷,我喜望逢着 / 一個丁香一樣地 / 結着愁怨的姑娘//                                               中 一章   윗 시는 다이왕수가1927년 4.12사태에 연루되어 스저춘施蟄存 시인의 집에 숨어 지낼 때, 프랑스 시인 베를렌에 도취되어 쓴 시로 이 시는 1928년 《소설월보》에 발표되면서 일약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르렌의 와 견주어지곤 하는데, 슬픈 리듬이 노래처럼 강물처럼 흐느끼는 걸 느끼게 한다. 종이우산이나 긴 방황이 끝나지 않는 골목, 빗속에 남보라 빛 그늘을 드리우는 라일락, 그 라일락처럼 향과 슬픔을 함께 지닌 소녀와의 마주침 등이 ‘이슬비’ 속에 연결되어 창으로 번지는 빗물같이 물안개같이 읽는 독자들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인식이나 설명이 없이도 응축된 서정이 흐르며 시어가 절제되어 해이하지 않고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파의 특성 중, 애원적 정서를 바탕으로 고독과 우울을 서정풍이면서 삽화풍으로 그려낸 초창기 다이왕수의 대표시이다.     단장                                   비엔즈린   그대는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밝은 달은 그대의 창을 장식하고 그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断章                              卞之琳 你在桥上看风景/看风景的人在樓上看你/ 明月装饰了你的窗子/ 你装饰了别人的梦.   1935년 10월에 발표된 이 시는 장시의 한 부분으로 후에 독립시켜 《断章》 제목을 달았는데, 중국 현대문학사상  짧으면서도 내포한 함의가 풍부한 명시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품고 있는 철학은,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도 "나의 의도는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중시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시는 응축과 절제가 잘 이뤄진 현대파의 대표적인 시이다.    의 출현   시의 열풍이 강해질수록 독자들과는 소원해지는 당시 중국 상황은 일부 시인들이 복잡다단한 외세와 내부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성과 우울한 정서에만 치중한 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괴리가 한창 심각해질 때, 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체가 항일전쟁 수행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그 바람에 상징파, 신월파, 현대파 시인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유파와 관계없이 항일을 위한 민족적 위기감으로 그들은 뭉쳐서 시 낭송회와 좌담으로 민심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정권의 "외세를 축출하기 전에 먼저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반공 주장 때문에, 그들은 반공 열기 속에서 항일전쟁보다는 국.공 대립에 밀려 좌.우익으로 갈리고, 갈등과 분쟁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문예를 위한 문예가 아니라’ ‘붓을 무기로 삼아’ ‘거리로, 시골로 뻗치는’ 가두시나 선동적 낭송시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8년간(1937, 7월- 1945.8월)이나 계속된 항전은 급기야 시의 변화를 가져왔다. 낭송시의 단소화, 민족형식의 장편서사화, 정치시의 대중화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 때부터 낭송시, 가두시, 전단시라는 단어가 생겼으며 1938년엔 ‘가두시가운동선언’까지 나왔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항전문학도 1942년 공산화가 자리 잡히고, 모택동이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문예정책’은 모든 인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시여야 하고 정치노선을 찬양하며 정치보다 더 우위에 설 수는 없다’고 연설하면서는 사실상 모든 예술은 파괴되었다.   시인들은 외국의 침략과 좌파와의 충돌이란 두 가지 짐을 져야 했다. 한창 누렸던 민주화 물결 속의 개인의 사상이나 사고, 자유의지 등은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받기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며 대중화되고 통속적, 산문적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항전시기의 시는 20여 년의 신문학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좌익 정치노선의 구호에 내밀리며 대중화 시가 되었으며 민족화의 요구로 인한 개념화, 공식화의 현상을 가져와 예술성의 조잡함과 과도한 사상의 노출 등 결함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전초기엔 애국애족의 민족사상과 함께 불붙어 모든 시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즉,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국민과 위기의 조국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합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모두 대외투쟁에 나서자’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된 뒤, 시인들 중에는 항일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일으키는 시를 쓴 아이칭艾靑 같은, 후세까지 존경받는 시인이 있었으며, 다이왕수戴望舒와 비엔즈린卞之琳, 허치방何其芳, 무무티엔,穆木天, 좡커자臧克家, 루이스路易士, 루위엔綠原, 무단穆旦, 신디辛笛, 자오링이趙令儀 시인들도 시의 형상화, 심오한 경지화, 내성적인 시를 씀으로써 끝까지 순수시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국가의 위기는 시인들을 더 많이 고무시키고 단합하게 만들어 한편에선 항전과 무관한 순수예술이 계속 발표되었다.   나는 이 대지를 사랑한다  아이 칭 내가 만일 한 마리 새라면 나는 응당 목이 쉬도록 노래할 것이다 저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 저 우리들의 비분이 영원히 용솟음치는 강줄기, 저 멈추지 않고 불어대는 격노한 바람, 그리고 숲 사이로 다가오는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여명,..... _____ 그 후에야 난 죽을 것이다 깃털조차 토지 속으로 썩어 들 것이다   왜 나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이는 걸까 내가 이 대지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我爱这土地                               艾 青 仮如我是一只鸟, / 我也应该用嘶哑的喉咙歌唱:/ 这被暴风雨所打击着的土地 / 这永远汹涌着我们的悲愤的河流 / 这无止息地吹刮着的激怒的风, /和那来自林间的无比温柔的黎明..... /___然後我死了,/ 连羽毛也腐烂在土地里面 // 为什麽我的眼里常含泪水? /因为我对这土地爱得深沈........   아이칭의 이 시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전국이 항일전쟁의 기치 하에 뭉쳤던 1938년 작으로서 절절히 표현된 조국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중국인민들이 사랑하는 애송시이기도 하다. 이 시 외에 라는 시에서도 절절하게 애국애민의 순애보를 느낄 수 있다. 아이칭은 원래는 프랑스 미술유학생이었으나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연루,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면서, 이 때부터 시를 전념했다. 그런 만큼 정치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중국인민들을 위한 열렬한 시를 발표했다. 아이칭은 국민당이 몰려난 즉 후에 다시 우익으로 몰려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 절필선언을 했다. 장장 10여 년의 문혁이 끝난 뒤에야 신분회복이 이뤄져 북경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생활을 한 민족시인이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정치 대립 사이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민족을 위해 한 줄의 시로 목쉬도록 아침을 깨우는 새 한 마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음을 이 시는 절규하고 있다.    시의 암흑기: " 정치는 모든 예술에 앞선다"   일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부정부패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중국 공산주의는 한창 서구 문예사조를 일시에 섭렵한 시인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즉, 시인들에게 정치 노선에 봉사하는 찬양 선동적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즉,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1942년 5월) 발표와 함께 시는 “정치적 표준이 예술적 표준에 앞선다”는 강령 아래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나 의지, 남.녀간의 사랑표현 등, 시인의 개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표현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시 정신이나 시인의 지위는 왜곡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1949년 공산주의 신중국이 성립되고 곧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정치와 군사가 압도하면서 중국 시단은 함께 선동의 깃발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특히 이상적 공산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정권 탈취와 연장을 위해 1966년부터 10여 년간 실시된 문화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든 예술의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정치선전을 위한 목적시가 우선되면서 진정한 시 정신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대시의 경계를 다시 문혁 그 이후로 잡아야 하느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화남호랑이(华南虎)                           뉴 한牛 汉*⁴ 너의 건장한 다리는 꼿꼿이 서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네 내가 보는 너의 발가락은 하나하나가 모두 깨지고 망가져 짙고 짙은 선혈이 응고되어 있네 너의 발가락은 사람들에게 묶여서생으로 잘려나갔는가 아니면 비통한 분노 때문에 그 부숴진 이빨로 뜨거운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것인가   나는 철창우리를 바라보네 회색 시멘트 담장 위 한 길 한 길 피 묻힌 도랑이 있어 섬광처럼 현란하게 눈 찌르는 것을   마침내 알았네,..... 부끄러운 마음으로 동물원을 떠날 때 갑자기 외치는 한 소리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외침, 속박할 수 없는 영혼이 내 정수리를 내리치고 허공으로 사라지네 나는 보았네, 불타오를 듯한 무늬와 불 타오르는 눈동자를 1976년 6월, 1982년2월호에 실림    你的健壮的腿/ 直挺挺地向四方伸开 / 我看见 的每 趾瓜 / 全都是破碎的,/ 凝结着浓浓的鲜血! / 你的趾瓜 / 是被人綑綁着 / 活活地鉸掉的 ? /还是由于悲愤/ 用同样破碎的牙齿/ 把他们和着热血咬碎的.....//     我看见铁籠里 / 灰灰的水泥墙壁上/ 有一道一道的血淋淋的溝壑 / 像闪电电那般耀眼刺目! //       我终于明白....../ 我羞愧地離开了动物园, / 恍惚之中听见一声 / 石破天驚的咆哮 /有一不羁的灵魂//      掠过我的斗顶/ 腾空而去, / 我看见了火焰似的斑纹 / 火焰似的眼睛!//               윗 시를 쓴 뉴한牛汉이 를 통해서 밝힌 시정신은 아래와 같다. " 나는 신장이 190센티로 우리 고향의 고량 나무 만큼이나 키가 크다. 그만큼 나의 뼈가 나를 가련히 여기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뼈마디들이 이를 악 물고 나를 액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소리를 들었다.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나의 뼈에 감사하고, 나의 시에 감사할 일이다. 노동을 많이 해서 손바닥에는 딱딱한 못이 적지 않게 박혀 있고, 깊고 가벼운 상처들도 많다. 수십 년 동안 나는 아픈 손으로  시를 써 왔고, 시 한 줄, 글자 하나 쓰는 것이 모두 아픔이었다....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뼈마디, 그리고 외관과 영혼 속의 상흔이다." 윗 시는 물론 汗血马(피땀 흘리는 말), 悼念一棵樹(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半棵树(반쪽나무) 같은 시들은 오랜 전쟁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혁명까지 닥치면서 휘돌아 치는 격랑에 지치고 다친 중국인민들의 상흔을 그리고 있다. 이 시도 뉴한이 감옥에서 나와 노동개조소에 오래 노동을 하다가1976년, 문혁이 끝나는 시점에서야 쓰여진 것으로 6년 뒤에야 발표를 했다는 데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가 빠지고 발톱이 생으로 빠져나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구경꾼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외마디 포효를 함으로써 불 타오르는 그의 눈빛과 분노를 통한 그 절절한 삶에의 의지와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인성의 말살을 실험하였던 문혁기간 중에도 견뎌낸 그의 시정신도 바로 이 화남호랑이 같았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70년대 文革 기간 중 감옥이나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도 문학은 지하에서도 지속되어, 중국 현대시사는 결코 정치로 인해 중단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면, 70년대까지 이어진 정치서정시는 가송시, 생산시를 낳았지만, 예술성의 실험은 버리지 않고 지켜내어 80년 이후 다양한 새 영역으로 중국 현대시의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시인의 정신은 더욱 단단히 단련되는 것일까, 노동개조소나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인들에 의해, 문혁 이후에는 새로 탄생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고매한 시 정신과 시의 예술성, 순수성이 지켜져 오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 홍보용 꼭두각시가 아닌 ‘현대시’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표되었다. 거기에 실험성도 가미되면서 현재 중국시는 보다 자유로운 풍토에서 2,30년대를 방불케하는 시적 열기가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존엄한 인성을 찾는 발걸음도 늦추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 참조, 1) : 후스: 1891년 상해 따칭大清태어나 시인으로 학자로 철학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5.4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제일 먼저 백화문으로 신시를 썼으며 모택동에게 제안하여 湖南自修대학을 설립하게 했다. 후엔 《자유중국》잡지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민주사상을 흠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대만에서 살다가 1962년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2) 李金髮(1900年11月21日-1976年12月25日) 현대상징주의 시인으로 조각가이며 교수,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그 역시 1919년에 프랑스에서  조각과 유화를 배웠다. 1920년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받아들여 시를 쓰기 시작, 중국상징주의 대표시인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항주국립미술원, 중산대학미대교수로 있다가 1932년《현대》잡지를 통해 현대파 시인이 되었다. 1941년 항일문예운동에 뛰어들어 《문단文坛》창간을 도왔으나 그 해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관으로 나가면서 후엔 아예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서 76세에 생을 마감했다. 3) 盧斯飛, 劉會文 《馮至戴望舒的詩歌創作》 廣西敎育出版, 南寧,1989, 6月   이 책에서 인용함. 서구문화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 전통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징수법을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창안했다는 뜻. 4) 뉴 한 (1923- ) : 원명은 史 成汉 山西省 定襄에서 태어남. 몽고족으로 1980년대 "칠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아이 칭(艾 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복귀하자 "귀래(归来"파에 흡수되어 8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시의 주류가 되었다. 그도 우파로 몰려 1955년에서 57년까지 감옥생활을 했으므로 발표나 시집 출판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 참고문헌 :   1, 『中國現代文學史』 上,下 冊 : 朱棟 丁 帆 朱曉進 主編  《高等敎育》出版 2000년 6월 2, 『20世紀 漢語 詩選 』: 康 耕玉 選編  上海敎育出版社 1999. 12월  3.『중국현대시 연구』,허세욱, 1992년 6월 《명문당》 4.『중국 현대문학사_ 혁명과 문학운동_ 』 菊地三郞 저, 정유중, 이유여 옮김, 1986년, 《동녘》출판사  3. 『문혁이 낳은 중국 현대시』 김금용, 2006.4월, 《찾기》츨판사 4. 『中国现代诗歌史』 维基百科 自由的百科全书중에서                                                               2011. 겨울호에 발표  
1564    詩의 생명이며 극치는 곧 이미지이다... 댓글:  조회:3687  추천:0  2016-07-29
[ 2016년 08월 11일 09시 22분 ]     [인민망 한국어판 8월 10일] 진검병(陳劍兵)은 2010년 사천(四川) 다천(達川)구 만가(萬家)진 일대의 밭을 임차해 수박 농사를 짓기 시작. “저는 현재 3.3헥타르의 부지에 수박을 심었고, 한 해 수확량은 20만kg이 넘습니다”. 2015년 11월, 대형 수박 재배에 관한 홍보자료를 보고 호기심이 생긴 천젠빙은 수박 씨앗을 사서 다주(達州)로 돌아와 시험 재배. “대략 2월쯤 심은 씨앗이 6월이 되면 자라났어요. 당시에는 그저 시도해본다는 생각이었고,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천젠빙은 당시 4명이 함께 들어야 수박을 옮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거대 수박의 무게는 약 52kg, 지름은 50cm를 웃돈다. 당분이 없는 거대 수박은 보통 식용이 아닌 주로 관상용이나 조각용으로 쓰인다.  ================================================   [21강] 이미지의 유형과 실제  강사/김영천  지금까지의 강의도 중요하였지만,  이제부터의 강의가 더욱 중요하니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강의는 가볍게 읽고 넘어가시더라도  오늘부터의 강의는 마음에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영미의 1910년대 이미지즘 운동이후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사물을 사물스러움 그대로 제시하고자 했으며, 전 시대 관  념의 시에 감각이 마비되었던 독자들은 이미지즘 시를 환  영했다고 합니다. 관념의 횡포를 증오하는 새로운 독자들  의 환영을 받으면서 현대시에서는 시의 회화성이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독자들이 철학적, 종교적,관념적인 시  보다는 그림을 보듯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가시적인 시를 좋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시를 이루고 있는 세 요소를 볼까요?  첫째는 시에는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겠지요.  둘째는 어제 배운 음악적 요소입니다.  셋째가 오늘 배울 회화적 요소인데요.  이 회화적 요소가 이미지 즉 심상입니다.  이 심상은 말 그대로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일 터이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시는 이미지다" 라고 하거나 또는 "이미지는 시의  생명이며 극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시 창작하는데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세분하여 공부해보겠습니다.  1)이미지란 무엇인가  시에서 이미지는 마음 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는 의미, 운율과 더불어 시를 구성  하는 원리로서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시킬 수 있  도록 해주는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는 어떤 대상을 우리들의 정신이나 마음  속에서 감각적으로 재생시키는 언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끼거나  육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마음 속에서 다시  그림으로 떠오르는 것이 모두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람스는 이미지를 세 가지의 일반적 의미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넓은 의미의 이미지로 한 편의 시나 문학작품 속에서  언급된 감각.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는 것입니다.  예문으로 박이도님의 을 한 번 읽어볼까요?  돌쇠네 마을은 과부네 마을  밤마다 등잔불에  너울대는 남정네들이  온 마을을 돌아다닌다.  웃음도 한숨도 아닌  휘청거림이  검은 그림자로 번져난다.  칼바람이 불어와도  헛간의 황소가 암내를 내도  돌쇠네 마을은  숨은 한숨이 번져난다.  전쟁놀이에 죽은 아비가  돌쇠 고추만한  등잔불에 와  못다한 사연을 불태운다.  돌쇠네 마을은  마른 쇠똥이 널려 있고  어둠 속에 내리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  과부가 나들이 간다.  먼데 개 짖는 이웃에  숨죽여 숨죽여  고무신 자국 남기며  나들이 간다  몰래 애기 낳으러  성황당 고개를 넘어간다.  위 시에서는 지각적 감각적 언어들이 이미지화하여 있는 것  이 많이 있습니다.  1.2연의 예를 보면, 밤, 등잔불, 남정네들, 돌쇠, 과부,  마을, 그림자, 칼바람, 황소 들이 지각적 감각적 대상이  되겠으며 이 것들을 구체화시키는 특질들로는 너울대는,  돌아다닌다, 검은, 휘청거림, 번져난다, 불어와도, 암내  를 내도, 등이 있습니다.  둘째)이 보다 좁은 의미로서 이미지는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예문으로 이시영님의 을 읽겠습니다.  관악산 머리 위로 불쑥,  새 한 마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아니다 관악산 머리 위로 불쑥,  보잉 707 한 대가 넘어오고 있었다  아니다 관악산 머리 위로 천천히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아니다 관악산 머리 위로 천천히  보잉 707 한 대가 선회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온통 금빛 잠자리 나래들로 분주하다  이 시는 시각적 대상과 장면으로써 이미지를 이루고 있  습니다. 루이스는 이런 시각성, 회화성을 가리켜 "언어의  그림'이라고 말 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셋째) 이미지는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와 직유의  보조관념을 가리킵니다. 비유는 나중에 따로 공부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혹자들은 시는 메타포다 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유강희님의 을 읽겠습니다.  주름의 집이 기우뚱 하수구 위로 기운다.  금방 쓰러져 캄캄한 하수구 맨홀 속으로  빨려들 것처럼 구부린다.  아주 주저 앉는다.  집이, 오랜 세월을 견뎌온 주름의 집이.  그리고는  차창에 스치는 붉은 꽃을 마구 토해낸다.  환한 대낮, 수많은 주름이 집을 의지한 채  길가에 비틀비틀 부지런히 方向을 찾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주름의 집'이라는  이미지이지요. 이 이미지는 노인을 '주름의 집'에 비유함으  로써 새롭게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줍니다. 이처럼 비유적  표현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주긴 하지만 꼭 이러  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도 시 작품 전체를 통하여 결코  잊혀지지 않는 멋진 이미지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시의 이미지를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보다 쉽게 설명해보지요.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느낌이 바로 그 시의 이미지  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 대한 시에서는 독자는 하늘의  여러가지 모습을 느끼게 되고, '강'이나 '바다'에 대한 시를  읽으면서는 '강'이나 '바다'의 여러 광경을 마음 속에 떠올릴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시를 읽어서 여러가지 그림이 마음 속에 떠오르게  되면 바로 그것이 이미지가 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란 마음 속에 그려지는 그림 또는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심상(心象, 心像)이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시 몇 편 소개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강연호님의   저 강물  내가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나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 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되어 흐를 수도 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이 손짓할 뿐  ...........................................  김은정님의   저 것 좀 봐  사뿐 뛰어내리는 흰 버선발의 햇살  눈 맑게 뜨고  깊숙이 지상 내려다보는 가을 하늘 목덜미  저 것 좀 봐  흐를수록 세상은 목이 마르고  잠시 휘모리로 몸이 패이는 인당수  저기 좀 봐  화사하게 낙화하는 무지개  스란단의 햇살  눈부신 발목을 적시는 가을  .............................................  나희덕님의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 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 가고 살을 가져 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     한마디의 말  ―고트프리트 벤(1886∼1956) 한마디의 말, 한 편의 글―. 부호로부터 올라오는 삶의 인식, 의미의 돌출, 태양은 뜨고, 대기는 침묵하네. 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에 몰리듯 굴러가네. 한마디의 말―. 한 개의 빛남, 한 번의 비상, 한 개의 불, 불꽃 한 번 튕기고, 흐르는 한 번의 별빛―. 다시 어둠이 오네, 이 세상과 내 둘레의 텅 빈 공간에 무섭게 내리네.   --- 언어에 대한 엄격하고 명철한 정리! 허튼 말 한마디 없이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시구로 제가 정리한 바 그대로를 보여주는 시다. ‘삶의 인식, 의미의 돌출!’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경건하게 되새기면서, 나도 이렇게 ‘태양은 뜨고, 대기는 침묵하고/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에 몰리듯 굴러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나는 시인이다. 시인은 언어의 기술자도 아니고 언어의 ‘파티맨’도 아니다. 언어의 경작자이며 파수꾼이며, 연금술사. ‘한 개의 빛남, 한 번의 비상, 한 개의 불’ 같은 언어를 향해 정진해야지!     대담집 ‘언어 감각 기르기’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말한다.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상태가 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나 사고나 감정 같은 것이 희미하게나마 형태가 갖추어져, 간신히 그걸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나, 문장 형태, 혹은 표현, 스타일 같은 게 결정돼 소리로 나오는 게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말이 있다. 말이 탄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말. 그런 말은 상대방 마음을 파고들 수 없다.’ 우선 평소에도 생각 없이 말하지 말자. 말을 귀하게 쓰자. 물 쓰듯 쓰지 말고, 돈 쓰듯 쓰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도 있고. 언어가 없다면 우리 인간이 무엇으로 서로의 존재를, 사물들을, 세상을, 삶을 깨달아 알겠는가? 한마디, 한마디, 소중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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