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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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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    詩作을 할때 한쪽 다리를 들고 써라... 댓글:  조회:4094  추천:0  2016-07-28
[20강]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6  강사/김영천  오늘로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을 마칠까 합니다.  먼저 언어의 압축성과 간결성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지요.  7)언어의 압축성과 간결성  김준오의 『詩論』에 보면 "산문이 '축적의 원리'에 의한  설명이지만, 시는 '압축에 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을 그  본질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는 산문처럼 사건의  연속이나 줄거리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이나 직관, 감정 등이 최대한 집중되어서  하나의 결정체로 나타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요즘 젊은이들의 유행어로 엑기스로 뽑아야 합  니다. 엑기스는 양은 작지만 그 효능이나 강도가 아주 높  듯이, 시어가 지닌 이런 압축성과 간결성 때문에 언어가  각각 갖고 있는 무게와 비중은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 헤밍웨의 친구 하나가 자기가 쓴 원고를 가지고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헤밍웨이가 한 쪽 다리를  들고 서서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헤밍웨이  에게 그렇게 괴로운 자세로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을 물었  습니다. 그러자 헤밍웨이가 "앉아서 쓰면 아주 편안하네.  그러나 써 놓은 글을 보면 문장은 길고 지저분하네. 한 쪽  다리로 서서 글을 쓰면 다리가 아프니까 간결하게 쓰도록  내 자신을 핍박하게 된다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산문을 쓰는 헤밍웨이의 자세가 이러할진데,  그의 글의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아름다운  이유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문 보다 훨씬 간결성과 압축성을 필요로하는  시를 다루는 분들의 태도가 어떠해야할 지를 가르쳐주는  좋은 모범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김지하님의 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이 해설을 보겠습니다.  "인용한 시 역시 시어가 갖는 간결성과 압축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압축되고 간  결한 시어들이 시의 주제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점이다. 중  심의 괴로움은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져 나가려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 중심의 분산으로 인하여 틈이, 여백이, 공간이  생겨난다. 그런데 시어와 행, 연들 역시 지극히 간결함 속  에서 여백과 틈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시어들은 최대한  경제적으로 사용하면서 주제와 형식의 일치를 보여주고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간결한 시어들 속에 내재된 힘이다.  시어들은 한껏 수축되어 있는 용수철처럼, 씨앗들처럼  혹은 위 시에서 보여준 '중심의 힘'처럼 그 안에 저장된  에너지들로 인하여 무수한 울림으로 솟아 퍼져 나간다.  군더더기가 없이 정제되고 압축될수록 시어가 지닌 힘은  더욱 강해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위의 시는 오늘의 주제처럼 언어의 압축성과  간결성이 아주 전형적으로 나타난 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서정주님의 을 올립니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시 중의 하나입니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섭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1연 5행의 아주 간결한 시입니다.  이 시에 대해 황동규 시인이 해설한 것을 요약해보면  겨울 하늘은 텅 비어 있고 조각달만 하나 떠 있는 풍경입니다.  그 달은 꿈에 천 번이나 나타났던 임의 눈썹으로 보입니다.  그건 바람(꿈)으로 눈썹입니다.  화자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동지 섣달의 새까지  비끼어 갑니다. 그 것은 인간의 일에 자연히 참여하는  정신의 한 섬세한 극치인 것입니다.  이 시는 정말 많은 비평가들이 다룬 시입니다.  아주 간결한 시인데도요.  김재홍의 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는 (1936) 이후 만 30년째인 196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다섯 줄의 시는 20대에서 지천명의 나이 50대  로 접어든 시인의 정신적 성숙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  을 끈다. 이 시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역시 사랑이 문제  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사랑은 에서와는 현격히  다른 정신적 사랑으로 상승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주 해설이 길지만 오늘의 주제와 관계 없음으로 여기서  줄입니다.  이어서 좋은 시 소개하겠습니다.  주제하고는 관계가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론이 너무 어려우니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시 읽기를 하시고, 시인의 마음을 엿보자는 것입니다.  강현국님의 과 시인의 변을 읽어보  겠습니다.  너에게로 가는 길엔  자작나무 숲이 있고  그해 여름 숨겨 둔 은방울새 꿈이 있고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낮은 침묵의 草家가 있고  호롱불빛 애절한 추억이 있고  저문날 외로움의 끝까지 가서  한 사흘 묵고 싶은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미열로 번지는 눈물이 있고  왈칵 목메이는 가랑잎 하나  맨발엔 못 박힌 불면이 있고  "시는 필경, 피가 돌지 않아서 손발이 뻣뻣한 도서관  서책들의 근엄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춥고 쓸쓸했던  날들의 기억으로부터 말길을 트는 것이 좋겠다.  그해 겨울 내게는 괴이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볼품  사나웁게 어느 단체장 선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차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고약한 체험이었다. 글쟁이  들의 선거판도 예외는 아니었다.(중략) 그 무렵 나는  당연히 천사를 꿈꾸었다. 따뜻한 가슴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한.  나는 지금,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 위에  있다. 텔레비전으로부터, 삐걱이는 일상의 계단으로부터,  목 조이는 언 라인의 거미줄로부터, 정연한 제복과 가지  런한 넥타이로부터, 비누와 칫솔과 젖은 손수건으로부터,  길고 긴 죽음맞이 소말리아로부터, 끈질기게 달라붙는 파  리떼들로부터, 성급한 희망과 안이한 구원의 갈보들로부터,  여의도로부터, 마침내 돋보기 너머 먼지 앉은 도서관으로  부터 멀리 떠나 너에게로 가는 길 위에 있다. 타고 온  자동차는 人家 가까운 산발치에 두었다.  (중략)  나는 지금 너에게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비유컨데 시는  길 떠나기이다. 삶이 고단한 여정이듯이, 멀리 길 떠나기  이다. 길을 잃을 때까지 길 떠나기이다. 안개에 갇혀  길을 잃는다. 현자의 말씀처럼 길을 잃으므로 우리는 길을  찾는다. 길을 잃은 자만이 비로소 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길 찾기이다. 길은 상징이다."  이하 너무 장황하여 생략합니다. 여기서 작가의 말은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여성시인의 시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이번엔  강계순님의 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압력솥 하나 들여놓기로 했네  불을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래도  섭취할 수 없는 일용할 양식  쉽게 끓고 쉽게 넘치는 얇은 냄비로  걸핏하면 화상 입으면서  아리고 쓰린 자리 문지르고 또 문지르면서  팽팽하게 긴장하여 오랜날  두려움에 몸서리쳐 왔네  이제 끓여도 넘치지 않는 압력솥 하나  들여놓고 이만큼 비켜 앉아  지켜보고 있네  극도의 압축에도 터지지 않고  조용히 억장 무너지는 법  맹렬한 불길에도  넘치지 않는 법  곤죽이 되어 풀리는 법 이젠  알 것 같아  원래는 빛이던 것 초록이던 것  약속이던 모든 것 끓이고 또 끓여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듯 흔적없이  풀기로 했네.  (여기서는 마지막 부분에만 마침표가 있는데요.  아마 이 건 작가가 여기에서 시가 끝났다는 의미로  제일 마지막 행에만 마침표를 치는 것이구요.  도중에는 시가 그 언어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생략하는 것일 겁니다.즉 아직 시가 끊기지 않고  계속된다는 뜻이겠지요.시에서는 부호 하나가  한 행이 될 수도, 한 연이 될 수도 있을만큼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자기 주위의 모든 사물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범한 밥솥으로 남기도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남기도 합니다.  ===============================================================   ―존 던(1572∼1631) 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운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흘러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모래벌이 씻겨도 마찬가지, 그대나 그대 친구들의 땅을 앗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손상시킬지니, 나는 인류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종이나니.     산사(山寺)나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 문득 영원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는 듯하다. 존 던을 흉내 내자면, 현생의 순간순간은 영원의 한 조각이다.     이 시에서 제목을 취해 헤밍웨이가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주연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소설이나 영화나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종을 울리는 데엔 다 뜻이 있다. 사람을 모이게 하는, 귀 기울이게 하는 종소리. 이 시에 나오는 종은 조종(弔鐘)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소리. 그가 누구건, 한 사람의 죽음은 당신의 일부분이 죽은 것이다. 당신과 그가 함께 이루고 있던 시공간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니 그 종소리는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그나저나, 아, 존 던 선배! 유럽이 뭡니까? 섭섭하네요. 좀 더 써서 유라시아라고 하시지.  
1562    詩속에 음악성을 듬뿍듬뿍 띄워야... 댓글:  조회:3898  추천:0  2016-07-27
[19강]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5  강사/김영천  오늘은 언어의 음악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6)언어의 음악성  언젠가 말씀드리면서 원시시대엔 음악과 시가 하나였다고  말씀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제천의식에서 예술이 발전했다고 볼 때 원래는 하나에서  가사와 노래로 분리 된 것이지요.  그래서 시에는 곡조가 없지만 시를 읽으면 감동에  젖어 슬퍼지거나, 흥에 겨워 자연히 가락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처럼 곡조는 없어도 어떤 율격이 있어 음악성을 느끼게  하는 것은 운율이라 하는데 이는 시의 아주 중요한 특성이며,  다른 문학과 장르의 구별을 짓게 하는 핵심적 요소입니다.  조태일님은  "운율은 시가 갖게 되는 구조나 형식, 분위기,어조, 문장의  호흡, 음절 수, 음보, 음운의 반복 등에 의하여 형성 되지만  언어자체가 지닌 소리[형식]에 의해서도 생겨난다. 그러므로  의미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일상언어가 언어의 소리 부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는 달리 시의 언어는 소리  가 빚어내는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까지 그 음악적 효과를  살릴 수 있도록 사용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프랑스의 대문호이며 어느 누구보다도 언어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를 지녔던 작가 플로베르가 그의 대표작  『보봐리 부인』을 집할 때의 일화입니다. 책상 앞에서  창작에 열중하던 플로베르는 갑자기 펜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가서 난데없이 건반을 쳐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은 행여 남편이 작품을  구상하는데 혼란이라도 생길까봐 걱정스러워서 한 곳에  집중시키지 못하고 산만스러운 그의 행동을 나무라자  플로베르는 "내가 피아노를 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오. 나는 이 피아노 소리로써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의 단어들이나 구절들이 소리가 듣기 좋고 서로  조화가 잘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중이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프로베르가 소설을 쓰면서도 언어의 소리가  지닌 음악성이나 어감까지 살폈는데 시에선 그 음악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겠지요.  이런 점에서 음악을 전공으로 하신 분들은 유리한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산문시들도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그 안에  운율이 빠지면 이는 산문시가 아니라 바로 산문으로  빠질 염려가 있는만큼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언어의 소리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나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자아내게 하고, 분위기를 불러 일으키며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지요.  의성어나 의태어에게 그런 요소가 충분한데요.  보실까요?  돌돌, 졸졸, 살랑살랑, 출렁출렁, 모락모락,  우줄우줄, 철썩철썩, 사락사락, 옹알옹알, 팔랑팔랑,  설레설레, 옹기종기, 곤드레만드레, 불그락푸르락,  포실포실, 앙알앙알 덩실덩실, 꼬르륵꼬르륵,  얼마든지 있지요.  여러분들이 여기에 없는 것들을 한번 말 해보세요.  그러면 언어의 소리가 빚는 음악성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다는 평을 받는 김영랑님의 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 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 흐르네  돋쳐오르는 아침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 곳  내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면에 흐르는 강물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언어의 소리  그 자체에서도 느껴질 만큼 의미와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입니다. 예를 들면 4행의 '도도네'는 '돗  우네'의 사투리이지만 같은 음운을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리듬 감각을 살려낸 것이라든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유성음(ㄴ,ㄹ,ㅁ,ㅇ)이 깔려서  밝고 맑은 시적 분위기를 나타낸다고 평자들이 말하고  있습다.  이 언어의 음악성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시의  장치로 쓰는 이미지 중에 청각이미지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는 우리가 시를 통해 음향 등 모든 소리를 느끼는 것  을 말합니다. 시의 묘사에 있어서 청각적 이미지는 그 시를  생동감있게 또 역동적인 이미지로 전개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청각적 이미지는 언어의 음악성을 강조  하는 결과가 됨으로 여기 대표되는 시 몇 편을 옮겨 봄으로  서, 생동감 있는 시를 만드는 청각이미지를 살펴보는  한 편, 언어의 음악성이 시에 나타나는 모습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허영자님의 입니다.  나무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돌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조그만 귀또리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가을  어느 다 저녁 때  울고 싶은 나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이 시는 조용한 청각적 이미지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4개의 연마다 마지막 시행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고 동어반복을 함으로서 시끄럽게 우는 것보다 더욱  강하게 독자에게 아픔을 주는 청각적 이미지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리드미칼한 반복으로 음악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유성음(ㄴ,ㄹ,ㅁ,ㅇ)이 반복 사용됨으로  언어가 부드러움을 갖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나희덕님의 을 올립니다.  그냥 주변의 일상사를 담담하게 올린 것 같아도  그 행의 바꿈에 따라 운율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으로 읽지 마시고 낮게 소리를 내어  그 운율을 최대한 살리면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들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젖은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경주대학교 손진은 교수의 이 참고가 되실까  하여 그 일부를 발췌하여 봅니다.  "현대시는 전통 율격으로부터 벗어나는 시들이 많다. W.H  파울러의 말처럼 '파도의 모양과 크기 속도만큼이나 무한히  다양한 흐름'이 리듬을 갖고 있다. 그만큼 현대시는 형태적  으로 매우 다양해지고 도 운율에 관한 감각과 이론이 발달  하여 단순하게 적용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현대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의 의미상 중요성이나 정서의 변화가  리듬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인  들이 의미의 단위(단어, 어절, 문장 등), 음성단위(음운,  음절, 호흡), 음보, 어법 등을 일정한 틍에 맞추지 않고  개인의 창조성에 의해 변용시킨 리듬으로 창작을 하고 있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다.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이 세상 즐펀한 노름판은 어데 있더냐  내가 깜박 취해 깨어나지 못할  그런 웃음판은 어떼 있더냐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내가 걸어온 길은 삶도 사랑도 자유도  고독한 쓸개들뿐이 아니었더냐고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믿음도 맹서도 저 길바닥에 잠시 뉘어놓고  이리 와바 이리 와바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흰 배때아리를 뒤채는 속잎새들이나 널어놓고  낯간지러운 서정시로 흥타령이나 읊으며  우리들처럼 어깨춤이나 추며 깨끼춤이나 추며  이 강산 좋은 한 철을 너는 무심히 지나갈 거냐고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송수권,   이 시는 '니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라는 구절을  5회 반복하면서 반복을 통하여 의미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 사이의 행동은 첫 번째  구절(1행)과 두 번째 구절(5행)사이가 3행, 두번 째  구절과 세번 째 구절(8행) 사이, 세 번째 구절과 네 번  째 구절(11행)사이가 각각 2행, 네 번째 구절과 다섯  번째 구절(16행)사이가 4행이 되는 형태를 이루면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바깥의 3행,4행이 안의 2행을 감  싸고 도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또 이 구절들 앞에 놓인  행말의 어미도 "더나", "더냐고", "와봐", "거  냐고'의 변화를 주면서 시의 생기를 살리고 있는데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을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이 시의  반복은 시의 시적 화자의 호흡 조절과 함께 시의 리듬에  기여하는 면으로 작용한다."  아무튼 복잡한 이론은 잊어버리시고요. 시에는 내재율  이란 것이 있어 음악성을 띄우고, 여러가지 형태가 변해도  시에는 그 음악성이 있어야한다는 것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다랭이 논  ―오세영(1942∼) 깊은 바다나 옅은 강이나 자고로 물고기는 투망으로 잡았다. 저인망, 안강망, 정치망, 유자망, 채낚기, 통발을 던지고, 끌고, 쳐서 잡는 저 싱싱한 해산물의 펄떡임이여, 어찌 이뿐이겠는가. 나는 새, 기는 짐승 역시 혹은 그물을 치고 혹은 덫이나 올무를 놓아 포획하지 않던가. 무릇 살아 있는 생명은 공중이나 지상이나 물속이나 인연의 끈을 비비고, 꼬고, 묶고, 엮어 만든 매듭에 한번 얽히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나니 아하, 저 농부, 봄 되어 날 풀리자 논두렁, 밭두렁 손질이 부산하다. 비록 땅에서 소출하는 작물이라 하나 그 역시 뭍에서 사는 생물일시 분명할지니 어찌 투망치지 않고서 거두어 낼 수 있으랴. 봄에 던져 가을에 걷어 올릴 논둑의 저 성긴 저인망 그물이여! 그늘진 곳에 쌓인 눈도 채 녹지 않았고, 사월이 오기 전에 한두 차례 더 눈이 내릴 것이다. 예민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휘지게 하는 서울의 겨울 끝, 을씨년스러운 바람. 하지만 이제야말로 ‘봄 또한 멀지 않으리’! 이미 저 남쪽 지방의 산과 들은 속닥속닥 돋아나는 어린 싹들로 땅거죽이 들썩거리고 있으리.     다랭이 논(다랑논), ‘경사진 산비탈을 개간하여 층층이 만든 계단식 논’. 푸른 작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연출할 굽이굽이 다랭이 논. 하지만 보기 아름다우라고 만든 논이 아니다. 한 뼘이라도 더 논을 늘리려는 의지로 개간된 땅이다. 멀쩡한 논밭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숱하게 사라지는 이 마당에 외딴 산비탈에서, ‘아하, 저 농부,/봄 되어 땅 풀리자/논두렁, 밭두렁 손질이 부산하다’. ‘다랭이 논’은 강인한 농부의 감성이 살아 있는 시다. 한편 인간중심주의 시이기도 하다. 사람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근면 성실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시에 등장하는 저 숱한 그물과 덫과 올무… 잡힌 동물들 입장에서는 비참한 풍경이구나. 손에 땀 한 방울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곡물이고 물고기고 소고기고 돼지고기고,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면서 먹어 치우기나 하는 도시인의 배부른 감상에 불과한 건가….  
1561    흑룡강의 시혼과 함께...강효삼론/허인 댓글:  조회:3914  추천:0  2016-07-26
북방의 , 사실주의 창작거장 강효삼                    시인 강효삼과 인간 강효삼을 론함                                            평론 허인                     하고싶은 말       대개 북방시단하면 필자의 머리속에 제일 먼저 자연스럽게 떠오르시는 분이 곧바로 강효삼선배님이시다. 한일평생 민초의 삶을 꿋꿋히 살아오시면서 결코 곁눈 한번 팔지 않으시고 오직 현실주의와 사실주의 창작기법으로 외곬인생을 묵묵히 살아오신 북방의 ㅡ사실주의 창작거장 강효삼선배님ㅡ 매번 신문, 잡지에서 이제는7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로익장을 과시하고 계시는 강효삼선배님의 주옥같은 시 한수 또 한수를 읽을적마다 필자는 마치 잃어버린 고향소식을 어느 날 문득 인편에 다시 전해 듣는듯한 그런 느낌에 저도몰래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1944년 흑룡강성 연수현태생인 강효삼선배님은 1963년에 벌써 처녀작을 발표, 근 50여년간 시, 수필, 에세이, 아동문학작품 등 무려 300여만자 신문, 잡지에 발표, 고 담담히 이야기하시는 강효삼선배님은 필자가 보건대 아마 래생에 다시 태여나신다 하셔도 시만 쓰실 분 ㅡ 윤동주님의 서시처럼 인격이 대나무처럼 곧고 개성이 뚜렷한 시인님이시다.    1980년대초엽 , 북방시단의 첫 동인시집ㅡ 중 한분이셨던 강효삼선배님은 우리들의 대선배님이시며 누가 뭐라해도 우리들의 본보기로 되시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으신 너무나도 훌륭한 분이시다. 모두 알다싶이 80년대 초엽은 인터넷이 근본 없었고 교통마저 몹시 락후한 시대였던 만큼 각지 문단상황은 지극히 국한시 되다싶이 하여 타성 문인들의 작품을 읽는다는것은 마치 하늘의 별따기와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 시기에 북방시단에서  민초들의 애닲은 삶과 희노애락을 시로 , 희망으로 줄줄이 엮어 오신 분이 곧바로 강효삼선배님이시다. 여기서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80년대말, 90년대초엽, 그토록 날마다 목이 터져라 , 를 노래로 부르면서도 솔직히 작자가 누구인지조차 알지를 못하였으며 필자의 경우 썩후에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야 비로소  김성휘, 리상각선배님들의 시들을 점차 접할수가 있었다    박철준, 리삼월, 한춘, 한병국, 강효삼, 김동진(현재 훈춘에 거주), 리명재, 특히 리삼월, 박철준, 한춘시인마저 타계하신 이 시점에서  현재까지 북방의ㅡ완달산맥에 오롯히 거목으로 우뚝 서셔서 현재까지 아낌없이 꾸준히 로익장을 과시해 오시면서 한수 또 한수의 현실주의, 사실주의 시작품들을 한점 부끄럼도 없이 이 세상에 떳떳히 내여놓고 계시는 강효삼시인님은 누가 뭐라해도 북방조선족시단의 이시다. 혹자는 이게 무슨 억지인가고 질문해올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ㅡ 당신은 50여년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오직 민초의 삶과 애환을 시로 적어 노래 부르며 외곬인생을 꿋꿋이 살아올수 있는가고 되 묻고 싶다.그럴 자신이 없으시다면 아예 조용히 입 좀 다무시라고 권고하고 싶다! 솔직히 필자역시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강효삼선배님의 주옥같은 시 한수 또 한수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기억에 생생히 살로 돋아나는 참신한 이미지   고향시초   실바람 어서 가자 길잡이 해주고 시내물 목청 돋궈 반갑다 노래하네 잘 있었냐 고향아 어머니 품이여 아 동구밖 배나무 한 그루 어머님 모습인듯 두 팔 벌려 나를 맞아주네   꿈 많던 소년시절 그때를 잊으랴 나는야 고향 떠나 학창으로 달렸지 생각나냐 고향아 석별의 그 날을 아 흰 저고리 고름에 매였던 빨각돈 쥐여주던 어머님 그 사랑 나를 울리네   …  … … (1980년 흑룡강신문에 발표)      강효삼선배님의 50년 창작성과를 필자는 단 한마디로 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시인 은 언제나 민초들 삶속의 크나 큰 희로애락을 항상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피로, 살로 경험하시면서 때로는 웃음으로 , 때로는 눈물로 한수 또 한수의 사실주의 시를 쓰시는 -사실주의, 현실주의 시인이시며 인간 은 늘쌍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엮어가면서 언변이 청산류수이신ㅡ어쩌면 자그마한 체구와는 달리 너무나도 호방하신 분이시다. 특히 특정된 년대에 특정된 시, 즉 정치적인 구호시들을 써내여 명리에 눈이 어두웠던 그런 시인들과는 달리 과 의 70여성상 인생궤적을 아무리 낱낱이 살펴보아도 한점 부끄럼없이ㅡ 와도 같이 청백하신 분이시며 오직 사실주의창작기법 하나로 공평과 불공평한 현실속에서 진실한 자아와 결코 협상이나 타협도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외로웠을지도 모를 을 한없이 묵묵히 살아 오신 분이시기도 하다.     이 시는 지금 읽어도 감수가 너무 새롭고 또한 가슴이 순간 뭉클해지기도 한다. 어드바이스나 멘트조차 필요없이 필자가 알건대 강효삼선배님은 절대로 남이 알지 못하는 시들은 아예 쓰시지를 않으신다. 시 창작에 있어서 강효삼선배님은 항상 이미지화를 극대화하면서도 또한 괴상한 이미지 조합이나 폭력적인 이미지조합같은것은 아예 쓰질 않으시는 그런 특징이 있으시다. 거의 40여년전에 씌여진 시라고는 조금도 믿겨지지 않을만치 여기서 실바람, 길잡이, 시내물, 목청, 노래소리는 자연스럽게 를 견인해 내여 구체적인 형상화를 깔끔히 마무리해가면서 마치 언제 ㅡ 어느때 ㅡ 어디에서나ㅡ멀리에서부터 마주서기만 하여도 벌써 듯하여 읽는 이들의 가슴마저 저도 모르게 뭉클하게 한다. 특히 제 2련에서 이라는 이 참신한 이미지는 지금까지 조금도 녹 슬지 않은 반짝반짝 빛나는 하나의 거대한 보석이 되여 마치 꿈이 많았던 학창시절을 생각만 하여도 벌써 눈시울이 먼저 붉어지고야 마는 을 극대화 시켜 이 시의 매력을 증폭시킨듯 하다. 어쩌면 알수가 있는것이리라. 강효삼선배님의 시속에는 언제나 파워플한 패러다임 전환을 굳이 약속치 않으시는 꼭 우리들만의 방식, 우리들만의 정서, 우리들만의 비분, 강개와 긍지를 표현 그대로 과 으로  항상 풋풋한 휴머니즘정신, 즉 인문정신이 든든히 안받침 되여 있어 읽고나면  마치 더없이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 그럼 여기서 겨레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과 애증, 자신을 낮추어 민족을 부각시키고 있는 강효삼선배님의 어쩌면 자화상일지도 모를 와 를 잠간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늘 거기 있기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에 너른 세상 갈 곳 많아도 민들레는 아예 흙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제 본래 태여난 땅 그 한구석에서 순하고 천해도 항상 밝게 살기로 했다   누굴 닮았나 묻지 말자 무심히 보기엔 너무 고상한 꽃 그렇게 많이 모여있어도 서로 헐뜯는것 보지 못했다 그렇게 가혹하게 짓밟혀도 신음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다 흘리는 눈물은 더구나 없는 아, 우리 겨레 녀인들 같은 꽃이여 전문이다       사실주의 창작기법은 아마도 러시아 언어학자 로만 야꼽슨, 카르세프스키, 트루베츠코이와도 같은 이들의 상징주의 형식론에서부터 시작된듯하다. 구체적으로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1928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1차 국제언어학회에서 라는 용어를 프랑스에 망명중이던 러시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처음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사실주의창작기법은 빠른 급물살을 탄것으로 알고있다. 그럼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라틴어 동사 struere에서 온 stuctura)란 알기 쉽게 을 가르키는 낱말이다. 보줄라나 베르노가 언어를 하나의 건물이라고 파악한것과 마찬가지로 퐁트넬은 인간의 육체마저 하나의 건축물로 보았으며 시에서의 사실주의는 상징주의를 기초로 그렇게 탄생이 된다. 사실주의 창작기법이 오늘날 우리 조선족시단에 현실주의, 초현실주의와 더불어 모더니즘 점토우에 마침내 한떨기의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여 날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수많은 선배님들과 50여년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꾸준히 외곬 인생을 살아오신 강효삼선배님과도 같은 대선배님들이 계셨기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였을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늘 거기 있기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에/너른 세상 갈 곳 많아도/민들레는 아예 흙에 자신을 맡겨버리고/제 본래 태여난 땅 그 한구석에서/순하고 천해도 항상 밝게 살기로 했다/에서 볼수 있다싶이 독백성이 강한 제1련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자화상일수도 있으며 또한 풀뿌리와도 같이 얽히고 설킨  이 세상 민초들의 애잔한 삶을 직접 한눈에 들여다 볼수 있는듯 하여 결코 낯설거나 거리감이 전혀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또한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 바꾸어 말하면 어쩌면 시인자신의 옹근 삶 전체를 그대로 표현한것이 아닐가 싶을 정도로 이 구절은 읽을수록 무어라고 형언할수 없이 불쑥 딱딱한것이 문득 가슴에 맺혀와 읽고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알짜지근해나는것을 누구나 어쩔수가 없다. 특히 /누굴 닮았나 묻지를 말자/무심히 보기엔 너무 고상한 꽃/으로 다시금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제 2련에서 /모여 있어도 서로 헐 뜯는것을 보지 못했고/, /짓밟혀도 신음소리 한마디 없으며/./흐르는 눈물은 더구나 없는/우리 겨레의 녀인들/의 강인한 모습에 초점을 모아 공명감이 더욱 큰듯 싶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만큼 다재다난한 민족도 극히 드물것이다. 그만큼 결백하고 하얀 색을 즐기는 우리 민족 녀성들의 강인한 모습이 민들레와 흡사하다는 데는 필자 역시 많은 동감을 표시하며 멜랑시리한 고전음악을 감상해가듯이 이 시는 읽을수록 감회가 새록새록 새로웁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이렇듯 시란 회화성으로 뜻을 전해야 시 예술법칙에 부합되는 것으로 영구불멸적인 요구이기도 하다. 누가 저렇게 이글거리는 화로불을 황홀하게 지펴놓았는가 때가 되면 봄은 절로 익는줄 알았지 이렇게 누구인가 지성이 뜨거운 입김되여 지펴야 하는줄을 진달래꽃 타는 불길의 흐드러짐 알겠다 화로불에 잘 익은 고구마 같이 물씬 풍겨날 구수한 봄내음새… 진달래는 봄의 구미를 돋구려 산이 훌훌 입김불어 피워올린 숯불이 아니냐 아 봄은 이렇게 빨간 진달래 그 원초의 숯불에서 맛스레 익혀진 《불고기》여라   전문    아마도 강효삼선배님에게 있어서 는 영원한 시제이기도 하며ㅡ 수많은 시속의 이 되기도 하며 또한 그러한 겨레에 대한 사랑과 정서, 애착은 신선한 에너지가 되여 수많은 창작 동기가 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제1련중에서 /누가 저렇게/이글거리는 화로불을/황홀하게 지펴놓았는가/에서 은 벌써 읽는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기에 너무나도 충분하며 그 다음 제2련에서 과 은 마침내 제3련에서 /알겠다 화로불에 잘 익은 고구마 같이/물씬 풍겨날 구수한 봄내음새…/를 견인해 내여 로 시적 분위기를 무르익히고 한껏 고조시켜놓았으며 특히 제4련에서/산이 훌훌 입김 불어 피워올린 숯불/은ㅡ 제일 마지막 련에서 마침내 / 아 봄은 이렇게 /빨간 진달래 그 원초의 숯불에서/맛스레 익혀진 《불고기》여라/로 참신한 이미지를 등장시켜 시의 진수가 무엇인지 아낌없이 보여주는듯 싶다.   시인 강효삼과 인간 강효삼, 그리고 환유와 은유ㅡ직유와 비유ㅡ    력사는 련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시를 쓴다는것은 어쩌면 전통적인 시각에서 살펴볼때 을 기록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기도 하다.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은 현실에서 오는 이러한 소외를 항상 의식하면서도 또한 늘쌍 새롭게 시작이 된다. 즉 리성(理性)이 보여주는 반리성적인 특성, 그리고 엄연한 사실과 가치의 분리와의 재조합, 더 나아가서 구도적 효률성이 항상 시에서 소외의 조건으로 인식되기도 하며 그러한 리성의 종착역은 곧 바로 죽음일수도 있다는 가 가끔씩 가슴을 치기도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여난 이상 누구나 을 외면할수 없으며 또한 언젠가면 너나없이 받아 들여야 할 중요한 과업이기도 하다 .강효삼선배님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어떻게 표현하셨을까? 그럼 여기서 을 살펴보도록 하자   십자길에 앉아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하얀 로인 한분 지금 로인이 앉아있는 곳으로 두갈래 길이 나 있다 죽음과 삶의 길이 로인은 가고싶지 않다 그래도 죽음의 길로는 로인은 부득부득 앉아버틴다 제자리를 뭉개며 얼마를 더 버티려고 정녕 고집부리지 마시고 어서 가시라해도 로인은 거절하며 오히려 자신의 낡은 철학을 푼다 ㅡ날 그대로 두게 죽음을 앞에 둔 늙은일수록 더 살고싶다네.   전문이다      강효삼선배님의 시는 언제봐도 항상 질서 정연하고 일목료연하다. 질서 정연하고 일목료연하다고 할수 있는것은 그만큼 강효삼선배님의 삶 자체가 신의로 가득 넘쳐나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에서 공자는 라고 하였다. 뜻인즉 신과 의는 아주 근접한것으로써 신(信)은 의의 범수와도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시인 강효삼을 80점 이상이라고 할수 있다면 인간 강효삼은 90점 이상이다. 왜냐하면 시인 강효삼에겐 가 있다면 인간 강효삼선배님은 거짓 하나없이 너무나도  진솔하기때문이다 . /십자길에 앉아있다/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하얀 로인 한분/에서 볼수 있는것은 역시 자화상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닐듯 싶다.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지금 로인이 앉아있는 곳으로/두갈래 길이 나 있다/ 죽음과 삶의 길이/ 로인은 가고싶지 않다/ 그래도 죽음의 길로는/ 로인은 부득부득/ 앉아버틴다 제자리를 뭉개며 /얼마를 더 버티려고/ 정녕 고집부리지 마시고 어서 가시라해도/ 로인은 거절하며 오히려 자신의 낡은 철학을 푼다/로 삶에 대한 애착을 남김없이 표현하였으며 제일 마지막 련 /ㅡ날 그대로 두게 /죽음을 앞에 둔 늙은일수록 더 살고싶다네./에서는 인생에 대한 회유와 허전함, 공허함ㅡ그러한 인생에 대한 반추에서 오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을 즉 . , 사실주의 그대로 표현하여 어쩌면 쓸쓸하게  인생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끔 하는듯 하다. 필자가 알건대 강효삼선배님은 얼마전 사경에서 벗어나신줄로 알고 있는데 모쪼록 건강에 더욱 류의해가시면서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계속 써내시길 삼가 부탁 드리고 싶다.     모스 페컴(morse pekham)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 설파한적이 있다. 이여야 한다. 그럼 아래에 강효삼선배님의 를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한평생 락을 바라고 허위 허위 쫓았지만 그건 꿈에 본 신기루 쫓고 쫓아도 그냥 그만큼 멀리 있어 가다가다 지쳐누운 나지막한 산비탈에 허리 착 꼬부라진 늙은 비술나무 한구루 삼밭처럼 숨막히는 오두막 찢어진 문풍지를 비집고 젓가락처럼 새여드는 빛을 거친 피부에 바르던 못난 사나이였다 산해진미는 평생 팔자에 없어 다마토리 술 석잔 그것에도 취해서 목침베고 뽑는 가락은 그나마 앞에선 노래도 못 넘기고 가파론 산을 톱는 초부처럼 암벽을 쪼아대는 석공처럼 힘들고 아프게 흙을 뚜져 참께 기름같은 땀을 동이로 짜냈던 누렇게 말라도 독한 잎담배였던걸 그래도 때묻은 동저고리 옷고름 잡아 풀면 장작개비처럼 말라가는 가슴에도 남은 것은 비취색 하늘같이 깨끗한 마음  젖은 장작같이 바른 금 쫙쫙 서는 참나무였다 옹배기는 숭늉같이 근심과 걱정을 증발시키며 인내를 연덩이로 굳혀들고 굴종을 담배로 말아피우며 근로와 선을 새끼처럼 꼬아서 뒤로뒤로 넘겨주고 태여날 때처럼 맨주먹 저세상을 가시였다 아 흙을 앗기고 흙에 미쳐 흙을 찾아 지구를 류랑한 나그네 그때문에 고향도 혈육도 다 잃는 눈물에 젖은 무명수건아 무지와 순박 근로와 인내를 한데 버무려 소여물처럼 새김질한 늙은 황소여   전문이다     필자는 나름대로 강효삼선배님의 를 수작(秀作)으로 생각한다.여기서/한평생 락을 바라고 허위 허위 쫓았지만 그건 꿈에 본 신기루 쫓고 쫓아도 그냥 그만큼 멀리 있어 가다가다 지쳐누운 나지막한 산비탈에 허리 착 꼬부라진 늙은 비술나무 한구루 /로 멋지게 베이스를 깔고 /산해진미는 평생 팔자에 없어 다마토리 술 석잔 그것에도 취해서 목침 베고 뽑은 가락은 그나마 앞에선 노래도 못넘기고/를 포인트로 단단히 골격을 이룬 이 시에서/옹배기는 숭늉같이 근심과 걱정을 증발시키며 인내를 연덩이로 굳혀들고 굴종을 담배로 말아피우며 근로와 선을 새끼처럼 꼬아서 뒤로뒤로 넘겨주고 태여날 때처럼 맨주먹 저세상을 가시였다/는 환유(欢喻)와 은유(隐喻)의  절정을 이루며 /아 흙을 앗기고 흙에 미쳐 흙을 찾아 지구를 류랑한 나그네/고향도 혈육도 다 잃은 눈물에 젖은 무명수건아/ 무지와 순박 근로와 인내를 한데 버무려 소여물처럼 새김질한 늙은 황소여/는 직유(直喻)와 비유(比喻)의 신기를 아낌없이 보여주는듯 하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도합 7련으로 나뉘였지만 산문시에 가까워 읽기에 조금 어려운 감이 드는듯하다   한평생 ㅡ 락을 바라고 허위 허위 쫓았지만 그건 꿈에 본 신기루, 쫓고 쫓아도 그냥 그만큼 멀리 있어 가다가다 지쳐누운 나지막한 산비탈에 허리 착 꼬부라진 늙은 비술나무 한구루 삼밭처럼 숨막히는 오두막 찢어진 문풍지를 비집고 젓가락처럼 새여드는 빛을 거친 피부에 바르던 못난 사나이였다 산해진미는 평생 팔자에 없어 다마토리 술 석잔 그것에도 취해서 목침베고 뽑는 가락은 그나마 앞에선 노래도 못 넘기고ㅡ 가파론 산을 톱는 초부처럼 암벽을 쪼아대는 석공처럼 힘들고 아프게 흙을 뚜져 참깨 기름같은 땀을 동이로 짜냈던 누렇게 말라도 독한 잎담배였던걸 그래도 때묻은 동저고리 옷고름 잡아 풀면 장작개비처럼 말라가는 가슴에도 남은 것은 비취색 하늘같이 깨끗한 마음   젖은 장작같이 바른 금 쫙쫙 서는 참나무였다 옹배기는 숭늉같이 근심과 걱정을 증발시키며 인내를 연덩이로 굳혀들고 굴종을 담배로 말아피우며 근로와 선을 새끼처럼 꼬아서 뒤로뒤로 넘겨주고 태여날 때처럼 맨주먹 저 세상을 가시였다 아 흙을 앗기고 흙에 미쳐 흙을 찾아 지구를 류랑한 나그네 그때문에 고향도 혈육도 다 잃는 눈물에 젖은 무명수건아 무지와 순박 근로와 인내를 한데 버무려 소 여물처럼 새김질한 늙은 황소여       이렇게  다시 련을 나누웠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가 필자 나름대로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이외에도 강효삼선배님은 북방시단의 원로시인답게 북방의 산하(山河), 향토문화, 고향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과 애착을 시리즈로 무려 37수 련작시를 쓰신적이 있으시고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고도 많지만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는 일일히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우런 알몸뚱의 황토길 길의 운명이 된 그날부터 얼마나 많은 발길이 이 한몸 짓뭉개고 지나갔을가 깊고 낮은 그 상처 기워내느라 길의 처절한 몸부림이 보인다 하지만 세월이 핥퀴고 간 그 많은 상처 죄다 아물수 없는 길은 아픈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채 신음소리 없이 뒤척이고있다 세월이 가면 길도 늙는지 거친 피부 꼬부라든 몸뚱이 수림속에 묻혀가는 그 옛날 수레길 따라 걷노라니 아 이 길너머에 이 길을 짚고 가신 아버지의 쇠잔한 얼굴이 보인다 전문이다       이 아프다는것을 지극히 평범한 아버님의 형상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이 있었기에 너무너도 자연스레 우에서 걸음마를 익혔고 그렇게 을 따라 걸을수 있었던 우리들의 짧지도 길지도 않는 을 감성으로 재조명하고 있는듯 하며 어쩌면 누구나 너무나도 무심히 지나칠수 있었던 의 다운 존재를 다시금 생생히 눈앞에 떠올릴수 있게끔 특히 제2련에서는 /깊고 낮은 그 상처 기워내느라/길의 처절한 몸부림이 보인다/하지만 세월이 핥퀴고 간 그 많은 상처/죄다 아물수 없는 길은/아픈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채 신음소리 없이 뒤척이고있다/로 다시금 의 운명적인 숙명앞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경건히  여미고 숙연해지게 다음 제일 마지막 결구인 제3련에서 /세월이 가면 길도 늙는지 /거친 피부 꼬부라든 몸뚱이/수림속에 묻혀가는 그 옛날 수레길 따라 걷노라니/아 이 길너머에 이 길을 짚고 가신/아버지의 쇠잔한 얼굴이 보인다/로  어쩌면 나의은 아버님이 걸어가신 일수도 있으며 또한 가 누군가를 위하여, 혹은 자식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을 인생의 틀에 맞춰 뼈에 맺히도록 새롭게 각인시켜 주고 있는듯 싶다.    마무리하면서      북방시단에는 언제나 강효삼선배님과도 같으신 든든한 거목들이 계셨기에 문학기초는 상대적으로 튼튼하였다고 나름대로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어쩌면 망조가 들기 시작한 조선족문단 ㅡ이제 에 찾아가면 에는 다운 이 언녕 없어진지 오래고 어쩌다 찾아간 에는 웬 낯모를 타민족이 고 되묻는 세상 ㅡ 가령 40ㅡ50년후에도 조선족문단이 존속하여 있다면 그때 가서 강효삼선배님의 현실주의, 사실주의기법으로 씌여진 많은 주옥같은 시들은 이 세상 그 어디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명시였음을 아마 후세에 새롭게 재 평가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세상인심이 야박해서가 아니라 흔하면 누구나 수월하게 대하기 마련이고 금싸락같이 귀할때일수록 귀중한 보석이였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지 않을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끝으로 강효삼선배님께 문학에서 더욱 큰 와 함께 와 정진(精进)도  두손 모아 빌면서 후배된 도리로 시 한수를 증정하려 한다. 필자의 수준상 관계로 간혹 서툴지라도 그냥 이쁘게 봐주시고 성의로 받아주셨으면 한다   시인 강효삼   머나 먼 북방 완달산기슭에 버섯같이 아담한 초가집 짓고 한일평생 흰 저고리에 흰 고무신 신고 백발이 성성한 시인 한분이 해마다 봄마다 민들레를 읊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입니다 그가 바로 입니다 그가 바로 조선민족시인 강효삼입니다 시인은 오늘도 노래를 부르네     诗人 姜孝三   在那遥远的北方完达山脚下 盖着蘑菇般的草屋 一生只穿白衣白鞋 已满头白发的一位老诗人 每年每春都吟蒲公英 他-就是蒲公英 他-就是金达莱 他就是朝鲜民族诗人姜孝三   如今诗人仍然哼着自创的小调       2014년6월9일 심양에서 
1560    詩의 文脈은 山脈, 血脈 등과 간통해야 한다... 댓글:  조회:4190  추천:0  2016-07-26
[18강]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4  강사/김영천  5)언어의 문맥성  저는 언어의 문맥성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이의가 있습니다만  아마, 문맥에 의해 달라지는 의미에 대해 적당한 분류어가  없었으리라 생각되어 그대로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문맥이란 여러분이 잘 아는 그 뜻입니다. 산맥, 혈맥 등에  쓰이는 맥처럼 같은 용도로 쓰이는 말이지요. 사전에서는  "한 문장 안에 기술된 단어 ·구 ·문 사이에 성립하는 의미적 ·  논리적 관계."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시의 언어가 아니라도 일상의 언어도 문맥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쓰입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과 손을 끊다"라고 하면 교제, 사귐,관계,  친교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더 많이 아프기 전에 손을 써라"  하는 경우는 조치나 방법, 처방 등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손"이 가장 기본이 되는 중심의 의미라고 한다면  문맥에 따라 파생되는 의미들은 주변적의미라고 할 수 있는  데요. 일상의 의미가 아닌 시의 문맥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  들은 주변적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훨씬 더 자유롭고 넓게  시인의 주관적인 인식이나 통찰에 의해 새롭고 독창적인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여기서 이향아님의 를 읽어볼까요.  밤이 어둡다고 눈까지 감지는 말 일  부디 그러지 말 일  잠들지 못하면서 눕지는 말 일  억울해도 그냥 참고  죽지는 말 일  그럴수록 두 눈에 기름을 채워  등피 닦아 심지에 불을 당겨서  일어나서 앉을 일  일어나서 걸을 일  지금이 몇 시인가 궁금해 하지 말 일  새벽이건 오밤중이건 마찬가지다  구들장 밑으로는 지하수가 지나가고  지붕 위로는 별이 빛나서  어디선가 소리 죽여 흐느끼는 소리  죽지 않고 살아 있기  잘한 일이다  잠들지 말 일  불을 밝힐 일  제 그림자 밟고서 팔짱을 끼면  철학을 밭갈 듯이 걸을 일이다  삼백 리건 오천 리건 걸을 일이다  좋은 시이지요.  아무런 해설이 없어도 어렴풋이 여러분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해설을 붙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도의  오류'가 일어날 염려가 있지만, 참고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기니,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 얼마나 다른 지 확인해  보시고요. 여러분의 생각이 같던지, 혹은 전혀 달라도  아무 잘 못이 아니고, 여러분의 독창적 해석도 아주 중요  하니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 일상적으로 밤은 해가 진 뒤부터 날이 새기 전까지의 시  간적 의미를 나타낸다. 하지만 위 시에서 밤은 이런 시간의  의미를 포함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운명  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절망,불행, 고통, 좌절, 고난, 불우,  참담, 슬픔, 비극 등의 온갖 인생 역경을 의미하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나 이러한 '밤'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것을 어떻게 이겨내고  물리치느냐가 중요하다. 시인은 그 것을 불을 당기는 일  이라고 한다. 불은 어둠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은 희망이며, 꿈이며,  의지이고, 노력이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원동력  이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삶에 대한 열정인 것이다.  그러나 '밤'과 '불'이 환기시키는 여러 의미들은 결코  어휘의 단독으로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즉 '밤'과 '불'  이라는 단어가 시의 문맥 속에 놓여 있을 때 앞에서 살펴  보았던 다양한 내포적 이미들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문맥성은 언어의 지시적 의미들을 함축적  의미들로 만듦으로써 시어로서의 특성과 구실을 지니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강의에 들어가기로 하지요.  요즘 하루에 한 편 정도 좋은 시와 작가의 이야기를  올리고 있는데 이 것이 오히려 본 강의 보다 효과적일  것 같아, 진도가 좀 늦더라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기철님의 를  한 번 읽어 보세요  금호강가에 엎드려 나는 메밀싹 같은 한 生을 살겠네  누가 호미로 북 주며 메밀싹의 슬픔을 듣는가  온종일 푸름을 베어 먹은 소들, 망아지들  필생을 家業에 매달린 농부들  그 곁을 흘러가는 은하를 닮은 냇물들  하양을 지나면 청천,  사람들이 지은 땅 이름은 달라지지만  흐르는 물빛은 달라지지 않는다  풀의 슬픔, 풀의 기쁨 잘 알아듣는 소에게  이제는 고삐 매지 말아라  초록이 키우는 무한의 牧畜 앞에서 나는  내 생업의 초라함을 부끄러워한다  바라만 보아도 내 몸에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들판과 둔덕에서  마음이 반짝이는 날은 슬픔을 옷 갈아입히고  고통도 예쁘게 빗질하리라  흐르는 물결마저 제 집이고 발인 水鳥들 곁에서  두 발로 신 신고 물 위를 걷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미농지 같은 번뇌 한 장도 햇볕 아래 내어 말리고  백리 밖 산을 넘는 구름의 초현실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강가의 나무들에 서른 겹의 나이테를 감아놓고도  계절은 저 혼자 푸른 치마를 입고 처녀로 남아 있다.  너무 아름다운 시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푸른 마음이  철철 흘러 넘치는지 같은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그  감성에 감탄할 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시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볼까요?  "이 시 ≪금호강에 발을 씻고≫는 최근의 나의 삶의 양식을  노래한 것이다. 금호강은 나의 직장과 가까운 들판을 흘러  가는 여울에 불과한 강이다. 그러나 나는 강을 노래하러  하지 않고 그 강가에 깃든 삶의 이모저모를 노래하려 하였다.  나는 삶을 거칠게만 노래하려 하지 않는다. 거칠고 욕되어도  그 삶을 껴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우리의 생업이다. 바라  보면 거치름 뒤에도 따뜻함이 있고 욕된 뒤에도 유순함이  있다. 삶이 거칠고 욕되다고 노래한 시인이 어디 한 두 사람  인가. 그러나 그 것을 따스하게 길들이고 갈무리하자고 노래  한 시인은 우리 주위에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 누가 호미로 북주며 메밀싹의 슬픔을 듣는가>라고 했을 때,  메밀싹은 그저 메밀싹이 아니라 생명를 가진 모든 것, 혹은  이름없이 살아가는 隣人에 비유된 것이다. 농부, 냇물, 소,  水鳥들도 모두 메밀싹의 함의에 둔다.  < 마음이 반짝이는 날은 슬픔을 옷 갈아입힌다>거나 는 구절 역시 그런 내 정신과 마음의 표현  이라고 하겠다. 고통의 빗질이란 사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날, 많은 밤을 실로 고통과 싸워보기도 했고, 고통  을 등 두드리며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고통은 다루는 손길에 따라  거칠어지기도 하고 유순해지기도 하는 것을 나는 한두번  아니게 경험했고 이제 그것의 속성을 안 이상, 나는 거칠  기보다 유순하게 다루는 편을 택했다. 그것은 일락만을 택  하는 안일함과는 사뭇 다른, 자기성찰과 인내의 길임을 나는  겸손하게 고백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한 고통을 공부로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이 공부가 거칠어지기도 하고  유순해지기도 한다. 그럴듯 하쟎아요?  우리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이 시들을 읽고 받아들여 보세요.  참 밝은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책을 골라사서 보는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좋은 시들을 올리니, 조금 강의가 길어져도 이해하시고  읽어보세요. 많이 읽는 것 이상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  니다.  고영조님의   노파가 끄는 리어카를  조무래기들이 낄낄거리며  밀고 갑니다.  명아주 꽃들이 비탈길을 따라  하얀 이빨을 반짝거렸습니다.  오, 저렇게 작은 불빛들이  산동네 마을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김 남조 님의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번째 이와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김남조   불을 문  한가치 성냥에  치마끈 푸는  거푸거푸  치마끈 풀어 던지는  이  단풍숲   ===================================================     이력서   ―오은(1982∼)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첫 연에 이력서에 대한 모든 말이 들어 있다. ‘밥을 먹고 쓰는 것’, 밥 기운으로야 열과 성을 다해 쓸 수 있다!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자기성찰의 한 방편이나 취미로 이력서를 쓰는 사람도 아주 없으라는 법은 없겠지만.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더 말해 무엇하리. 이 세 줄 시구에 무한한 공감을 표할 독자가 수두룩하리라. 아, 이력서!     화자는 이력서를 쓰는 요령도 알려준다. 직장사회는 ‘잘나고 둥글둥글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원하니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야 한다. 자랑을 하되 겸손하게! 이력서를 쓰는 시간은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낯간지러운 이 짓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 지긋지긋하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힘이 빠지고, 허기가 진다. 취직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이름이여! 이력(履歷), 즉 ‘지금까지 닦아 온 학업이나 거쳐 온 직업 따위의 경력’을 적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문서로 작성한 것이 이력서다. 거기 한 줄이라도 더 올리면 취직하는 데 유리하겠지. 요즘 청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스펙’이란 말에 넌덜머리가 날 때가 있었다. 그들 머릿속에는 ‘스펙’이라는 말밖에 없는 듯했다. 삶의 본질과 아무 상관없는, 껍질뿐인 스펙. 거기 매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현실적 욕망만 강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생존이 걸린 취업의 길 위에서 치열하게 전술을 연마하는 것이었구나. 모쪼록 오늘밤 작성한 이력서로 직장의 문을 통과하시길!    
1559    보리피리 시인=파랑새 시인 댓글:  조회:3703  추천:0  2016-07-25
  육영수 여사가 한하운 시인에게 보낸 편지 한하운 시인의 ‘삶과 문학’ 제전에서 공개…             ‘보리피리 시인’ 또는 ‘파랑새 시인’으로 불리는 한하운 시인(1919~1975)의 ‘삶과 문학’ 제전이 시인의 제2 고향인 인천에서 열렸다. 동 제전에서 육영수 여사가 한하운 시인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될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모은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 눈물의 언덕을 지나 /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1955)   ▲한하운 시인과 제2시집 〈보리피리〉. ⓒ 자료 사진     한하운 시인은 문둥병, 나병, 한센씨병으로 불리고 있는 천형(天刑) 같은 병고와 애환을 읊은 시로 한국문학사에 독특한 문학공간을 남기고 있는 인천 향토문화사의 대표적인 인물. 함경남도 출신으로 6.25때 월남해 인천에 정착, 나환자들과 동병상련의 벗으로 평생을 보내며 독특한 시문학의 경지를 이룩했다.   한하운 시인의 ‘삶과 문학’ 제전은 ‘파랑새 되어’라는 이름의 특별전으로 (재)인천문화재단(대표이사 심갑섭)이 마련했다.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에서 소설가 김별아와 시인 이기인이 한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 ‘파랑새’ 등을 낭송하고 가수 안치환은 이를 노래로 들려주는 콘서트를 맡았다.   더불어 ...한하운 시인의 친필 유고와 사진, 편지글 등을 한데 모은 ‘한하운 자료전’이 ... 인천문화재단은 올해 한하운 시인의 업적을 조명하기 위한 첫번째 행사로 〈한하운 전집〉 발간을 기획, 11월 중에 출간(문학과지성사)을 앞두고 있으며 “시인 한하운의 작품세계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취지를 밝히고 있다. 한하운 시인의 문학과 함께 그의 삶을 대변하는 나병과 관련하여 눈길을 모으는 육영수 여사의 편지는 ‘한하운 자료전’에 준비가 되어 있다.  편지는 나환자 정착촌(십정농장)에 거주하는 한하운 시인에게 양지회 회장이기도 한 육영수 여사가 김종필 총리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함께 서명해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영수 여사의 편지(1971.11.20). ⓒ 자료 사진   한하운 귀하 남달리 어려운 처지에서 그간의 시련을 극복하고 이제 자립의 경지에 이른 귀 정착장의 발전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보람찬 내 고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귀하와 그곳 십정농장의 주민 여러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우리 양지회에서는 유다른 사정하에 있는 전국 나정착장 주민들의 자활능력을 증대시켜 보고자 노력한 나머지 다소의 재원이 마련되었기에 그중에서도 아직 자립의 터전을 마련치 못한 동료 정착장의 양돈 사업을 전개키로 하면서 우선 전국 86개 정착촌에 영농서적 등을 갖춘 책을 한 상자씩 보내주기로 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책은 아니지만 귀 십정농장의 주민들에게 격려의 표시로 보내는 이 문고가 귀 정착장 주민 여러분에게 유익한 벗이 되기를 우리는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자립의 터전을 확보함으로써 후진 정착장 동료 여러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여러분의 노고를 다시 한번 높이 치하하며 귀 십정농장이 더욱 모범되고 빛나는 고장이 되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입니다.    귀하를 통하여 그 고장의 동료와 주민 여러분에게 우리들의 각별한 안부를 전하고자 하며, 여러분 가정에 항상 행복과 보람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1558    詩의 리론을 깨끗이 잊는것도 공부이다... 댓글:  조회:4050  추천:0  2016-07-25
[17강]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3  강사/김영천  요즘 강의가 좀 어려워서 시에 대한 매력이 없어지실까  사실 두려운데요. 너무 어려워하진 마십시오.  어려운 건 그 자리에서 읽고 잊어버리십시오.  이론을 많이 안다고 시를 잘 쓰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공부를 하느냐구요?  여러분이 외우기보다는 글 읽는데 취미를 갖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어려운 이론을 이해하는 것 보다는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면 그 것이 훨씬 좋습니다.  자 그럼 부담없이(?) 어려운 강의에 들어가볼까요  4)언어의 애매성  제목 그대로 시의 언어는 애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애매를 사전에서 보면 '희미하여 확실하지 못하다'고  되어 있고, 어원을 보면, 두 길로 몰고 간다고 하였구요  그러나 이것은 난해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단순함에 구속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의미를 확산  시키면서 시 세계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시를 읽고 설명을 하기로 하지요.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는 시 김소월의 를  복습하는 의미에서 한 번 읽어볼까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잘 아시는 시이니 두 연만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볼 때 '갈 봄'의 '갈'은 무슨 뜻입니까?  모두 학교에서 배울 때를 상기해봅시다.  어떤 분들은 가을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간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을 봄'도 되구요. '가는 봄'도 됩니다.  작가가 아니고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말 애매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또 '저만치'는 '저만큼'떨어져서 피어있다는  뜻인지 '저처럼' 혼자 외롭게 피어있다는 뜻인지  애매합니다.  이처럼 그 의미 파악이 여러가지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시의 세계가 애매하거나 불투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시세계의 풍부함은 물론 시적 깊이와 감동을 더해주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김승희님의 을 읽어보지요.  너무 오랫동안 안전벨트를 묶고 있어서인가  뼈가 펴지지 않는다.  이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안전벨트의 안전 속에  구속 당한 몸.  안전의 골방 속에 너무 깊이 묶여 있으면  안전의 골병이 생긴다.  어떤 격랑 속에서도 안전벨트를 묶고 앉아 있는  오너드라이브 그가 묶은 것은 무엇이고  그에게 묶인 것은 무엇인가?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석을 옮기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안전'은 그야말로 위험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런  위험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골병'이란 속으로  깊이 들어서 좀처럼 고치기 어렵게 된 병이다. 따라서  '안전'과 '골병'은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없는 배타적인  성질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안전의 골병'이라는  서로 의미가 모순된 어휘들을 결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안전의 진정한 의미가 지금까지 느껴왔던 것과는 달리  여러 방향으로 새롭게 그 것의 참 모습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골병'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  영국의 문학이론가 엠프스는  이 애매성이 시에서 새롭고도  풍부한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알고  이를 7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는데  참고로 적으니 외우실 필요 없구요.  한 번 읽고 모두 잊어버리기로 합시다.  첫째:하나의 단어나 문장이 동시에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  둘째:두 개 이상의 의미가 시인이 의도한 하나의 의미로  나타나는 경우  셋째: 두 개념이 문맥상 동시에 양쪽에 관계되어서 하나로  나타나는 경우.  넷째: 둘 이상의 의미가 서로 모순되게 결합하면서 시인의  복잡한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  다섯째: 일종의 직유로서 직유의 두 관념으로 옮겨감을, 즉  불명료한 것에서 명료한 것으로 나타나 있음을 암시하는 경우.  여섯째:하나의 표현이 모순 되거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경우에 독자가 그 시 속에 개입하여 자기 스스로 해석해야  할 경우.  일곱째: 하나의 표현이 근본적으로 모순되어 시인의 마음  속에 분열을 일으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경우  여러분 읽어보셨죠?  이젠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잘 잊는 것도 공부입니다.  그러면 오규원님의 를 한 번 읽어볼까요?  돌밭에서도 나무들은 구불거리며 하늘로  가는 길을 가지 위에 얹어 두었다  어떤 가지도 그러나 물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멈춘다  나무들이 멈춘 그곳에서 집을 짓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때마다  하늘은 새의 배경이 되었다 어떤 새는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날아올랐지만  거기서부터는 새가 없는  하늘이 시작되었다  시인의 시작노트 중 이 시와 직접 관계 있는 부분만  발췌하여 읽기로 하지요.  "나는 이 작품을 발표 이후 한번 고쳤다. 처음  발표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 고치는 과정을 보면  나의 작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돌밭에서도 나무들은 구불거리며 하늘로  가는 길을 가지 위에 얹어 두었다  어떤 가지도 그러나 물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멈추어야 했다  나무들이 멈춘 그 곳에서 집을 짓고  새들이 날아 올랐다 그때마다  하늘은 새의 배경이 되었다 어떤 새는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날아올랐지만  거기서부터는 보이지 않는  하늘이 시작되었다  1)1행에서 에서 괄호친 부분을 삭제하고 발표했는데,  그로 인해 이 은유의 성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은유는 일차적으로 대체 사물이므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2)4행에서 는 로 고쳤다. 그  이유는 는 것은 사실에 값하는 현상이긴 하지만  는 표현이 나무의 의지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나무에 덜 관여하기 위해서   는 보다 객관적인 현상 쪽을 선택했다.  3)9행의 은 그것 자체로는 시각적  상태의 사실적 현상이지만, 는 표현 속에서는 그 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관념이다. 그래서 라고 고쳤다. 은 무엇보다 먼저 사실적 존재이며, 다른  의미의 존재로의 존재전 이는 그 다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 위의 작품과 같은 시로 변했다.  여기 시인의 첫 작품과 시인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시를 고쳤는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으로 여러분께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경미 시인의 를 읽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여름 바다가 젖가슴처럼 출렁이는 거리  활짝 벗은 듯  샌들 신고 팔 없는 원피스 입고 나서고 싶어  그 여자들 일제히,  김치를 담근다  손톱 밑이 금세 새빨개진다. 습관적인 코피같이  작은 부엌 창으로  이 세상 것 아닌 팔월 하늘을 본다.  이른 저녁 준비  수저에만 부딪쳐도 파래진다  '그런 체질이 있어요 멍이 유난히 잘 드는.....  부엌에서 유난히 잘 넘어지고 부딪치고 떨어뜨리는 체질...  물끄러미 창을 내다보다 냄비를 자주 태워먹곤하는 체질  말예요.......'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쉽게 씻어지지 않는  아늑함과 평온함의 비늘  그 행복들이 너무하는구나 싶어 우는 여자들  매일 같이 찾아와 들여다 보고 가는  절연의  노을  싱싱하고 아름다운 거리들도 곧 사라지겠지  곧 김치 다시 담가야 하리라  한 번 나가 보기도 전에  ====================================================     절필(絶筆)  ―이근배 (1940∼)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여기서 절필은 붓을 놓아 글쓰기를 그만둔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겠으나 절세(絶世)의 글, ‘세상에 비할 것 없을 만큼 썩 빼어난’ ‘절대(絶代)’의 시를 뜻할 수도 있겠다. 만개한 벚꽃이 일순간 화르르 지며 흩날리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설악의 물소리’, 그러한 것이 아름다움의 절정(絶頂)이라고 시인은 느낀다. 아름다움은 꺾이는 순간 극대화된다고. ‘오오 꺾어봤으면/그것들처럼 한 번/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꺾어보고 싶다고 시인은 열망하지만, 아름다움을 꺾어 그 극치를 재현할 수 없는 제 언어의 무력함에 절망한다. 절망(絶望)이라니… 또 절(絶)이다. 꺾임으로써 열망도 아름다운가! 칼칼한 시어로 버무린 절필의 맛!  
1557    詩의 언어는 암시성을 강하게 장치해야 한다... 댓글:  조회:4205  추천:0  2016-07-25
[16강]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2  강사/김영천  3)언어의 암시성.  먼저 말씀드린 것은 여기에 나타난 분류는 조태일님의  분류이지, 문학적으로 확립된 학문이 아니니 구태여  차례대로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가벼운 지식으로만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암시의 의미는 우선 사전적으로 보면, 의미하는 것을  직접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감추어서 넌즈시  보여주는 것으로 앞의 언어의 함축성과 어떻게 보면  넓은 의미로는 같은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배울 시의 장치 중에 비유, 상징,  역설, 아이러니, 알레고리 등도 다 이런 언어의  암시성을 깔고 있습니다.  요즘 강의 중에 여기 올라온 시들이  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건 아주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암시성이 강한 시들이  주로 올라와 있거든요.  그래서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쓰시는데, 이 것 역시 말뜻이 명쾌하게 드러나는  일상언어의 쓰임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옛날 이야기 하나 할까요?  옛날 중국에서 한 스승이 세 명의 제자들을 두고 그림  그리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몇 년 동안 열심히  배운 제자들을 불러놓고 하루는 그 재능을 살펴보기  위해 '깊은 산 속에 숨은 절'이라는 제목을 주고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종이 한 가운데 절의 전체적인 모습이  번듯하게 들어 있는 그림을 그리고 그 주위 둘레에  기암절벽을 그리어 넣었습니다.  두 번째 제자는 절의 한 쪽 부분만을 보이게 하고 주위  에는 기복이 있는 푸른 산봉우리들이 서로 덮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요.  세 번째 제자는 그럼 어떻게 그렸을 것 같은가요?  그는 산길 사이에 나 있는 돌 층계 몇 개,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계곡에서 물을 긷는 스님의 모습을 그렸습  니다.  여러분 누가 제일 그 제목에 합당하게 잘 그렸습니까?  셋 다 제목에는 합당하지만, 세 번째 그림이 제일  잘 그려졌다고 스승이 말했는데 그 이유는 숨기는데 중  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경물을 숨기면 경계가 더 커지고, 경물을 드러내면  경계가 작아진다는 그 스승의 가르침은 두고라도  우리도 똑 같은 결론을 내렸잖아요.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의 언어가 지닌 암시성에 의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경물) 저 편에 있는 정신적인 세계, 불가사의  세계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 한편 읽고 계속하지요.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님의 전문입니다.  도대체 이 게 무슨 시인가. 여기서 눈이 가르키는 것은 무엇  인가? 기침은 또 뭣을 암시하는가?  실로 막연합니다. 다만 계속 눈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눈은 아마도, 시인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순결, 순수 등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어둡고 혼탁한 시대에 그 것과  대결하는 시인의 양심, 정의, 진실 등을 암시하고 있을 수도  있읍니다.  그러면 기침은 무엇일까요.  기침은 생리적으로 몸 속에서 터져나오는 현상이며, 참기  어려운 것이지요. 또 참아내지 못하고 반드시 밖으로 표출  해야하는 성질을 가졌지요.  기침과 가래는 병적인 것이며 괴로움이며, 탁함인 것으로  볼 때 눈으로 표상되고 있는 시인의 순수함, 순결함, 진실함,  정직과 양심을 더럽히고 타락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은 기침을 함으로서 밤새도록 괴롭게 만든 가래를 뱉어  내어 자신의 순결한 영혼과 육체를 되찾고 또 그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과 불의를 말끔히 씻어내고 싶은 열망을  직접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넌지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해도 어려운 대목이 있을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까지 시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어려우면  여기서 그만 읽은 것으로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나 오래 오래 후에 여러분께서 시를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을 때 다시 읽어보시면, 그 때에 아마 소용이 닿을  것입니다.  여기 오늘 주제와는 관계없지만 좋은 시 읽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신경림님의 입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여기서 시인의 이야기를 잠시 듣지요.  "목계는 내가 나서 자란 고장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강마을이다. 지금은 우체국과 교회가 있고, 수석가게와 매  운탕집이 여럿 있는 남한강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강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남한강 수운(水運)의 중심으로,  여기에서 큰 갯벌장이 섰다.  갯벌 장이란 닷새에 한번씩 서는 정기장이 아니라  배가 들어오면 서는 부정기 장이다.(중략)  물론 나는 목계 갯벌장이나 줄다리기를 본 일이 없고.  모두 얘기로만 들었을 뿐이다.(중략)  목계의 독특한 정서, 목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내  감정을 시로 표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주  오래다. 실제로 나는 를 쓰기 전에 두 번이나  비슷한 소재로 시를 써서 발표까지 했었다.  그러나 두 편이 다 발표되고 보니  너무 마음에 안 차 없애버리고  마침내 세 번까지 쓰게 된 것이 이 시다. 는  내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다."  여기서 우린 시의 씨앗이란 마음 속에 늘 그리움으로  자리한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이런  대 시인들도 시를 발표하고, 바꾸고 또 발표하고 바꾸  는 등 좋은 시가 될 때까지 부단한 시의 고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엔 나도 쓸 수 있겠다 하는 간단한 시 한 편 읽어볼까요?  여러분들 마음에도 늘 가지고 있어도 쓰는 연습이 되지  않아 놓치고 마는 시의 씨앗들이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정현종님의 을 읽어 보지요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아주 짧은 2연, 3행의 시입니다.  잠깐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늦가을이나 겨울, 내 일터의 뒷산을 걸어다니다가,  땅에 떨어져 쌓여 있는 마른 잎에 유심히 눈길이 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마른 잎이 내 눈길을 끈 까닭은 다름 아니라 그게 아주  깨끗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른 잎을 보면서 나는, 참  깨끗하구나........하는 생각에 잠겼고, 아울러 살아  있는 사람은 저렇게 깨끗할 수 없지.........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생각에는 나한테, 또는 우리한테 있을지도 모르는  더러움에 대한 관용의 뜻도 들어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느 정도 더러워지는  걸 감수하는 것이라는 그 더러워짐의 불가피성(여기에는  나의 나에 대한 느낌, 남의 나에 대한 느낌, 나의 남에  대한 느낌 따위가 얽혀 있는 것이지만)에 대한 느낌이  들어 있는 한편 거의 무의식적인 자기반성 행위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어떻든 마른 나뭇잎으로 돌아가서, 사람도 죽으면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는다. 죽는다는 건 욕망이 끝난다는  걸 뜻하며, 생전을 포함해서 보더라도 죽음은 결정적인  정화(淨化)를 위한 통과 의례이다.  물론 살아 있는 한 완전히 깨끗할 수 없다는 얘기는 이  세상의 명백한 악을 합리화하거나 용인하자는 게 아니다.  가령 요새 돈에 얽힌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비리나 타락  과 같은 정도의 것이라면 누군들 탄식을 하지 않을 것  인가......  그리고 마른 잎과 관련해서 또 좀 다른 얘기를 하자면.  < 마름>과 의 철학이라고 할까 하는 것에 대한 생  각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다.  물론 수도사나 성직자 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불교나 기독교(가령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성인)에서 강조  하는 이라든지   하는 얘기도 생각해 볼만한 것인데, 이건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종교적인 얘기여서 시하고는 크게 상관있는  것 같지 않지만 시 쓰기의 어느 대목하고 아주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고...."   ===========================================================     잔  ―이경례(1962∼)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 느티나무 상호야 느티나무 독서실 느티나무 식당 느티나무 슈퍼, 나무에 잎사귀 달리듯 하지만 바람의 기척에도 철렁, 가슴 쓸어내리는 꽃숭어리 잔들이 물구나무서기로 매달린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 가장 향기로운 한때를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 때죽나무들 저마다 향기로운 꽃 피워 올린 풍경을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란다. 도시 사람다운 표현이다. 바람이 살랑 불어 나뭇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린 칵테일 잔 모양의 꽃송이들 흔들리고, 물씬한 꽃향기에 화자는 어질어질 취한다. 눈으로도 취하고 코로도 취한다.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라니 발상이 순진하고 사랑스럽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이국풍 칵테일이 담긴 잔이다. 눈으로도 마시고 코로도 마시고, 그렇게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이란다. 때죽나무 꽃 흐드러지게 피어, 한 꽃송이 두 꽃송이 바람에 져 발치에도 쌓이는, ‘가장 향기로운 한때!’     나도 이렇게 흐드러지게 꽃핀 때죽나무 밑에 가서 앉아 있고 싶다. 머리 좀 쓰지 말고, 타인의 속도 들여다보지 말고, 돈 걱정도 잠시 잊고, 마냥 꽃향기에 취하고 싶다. 정서를 좀 회복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 생각도 감정도 근본만 남는 것 같다. 강파르게, 뼈만 남는 것 같다. 몸이나 좀 그러면 좋으련만….  
1556    詩作은 도자기를 만드는것과 같다... 댓글:  조회:3798  추천:0  2016-07-23
  [15강]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1  강사/김영천  오늘은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시의 언어라는 말을 늘 듣는데, 과연 시의 언어란 따로  있는가? 시의 언어란 어떠한 것인가? 시의 언어가 갖는  속성들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먼저 조태일의 분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언어는 존재의 집  2)언어의 함축성  3)언어의 암시성  4)언어의 애매성  5)언어의 문맥성  6)언어의 음악성  7)언어의 압축성과 간결성  8)언어의 고유성과 정확성  9)언어의 모순성  10)기표의 힘  이렇게 열 개의 소분류항목으로 나누었습니다.  가능하면 알기 쉽게 오늘 부터  며칠간 시의 언어를 다루어보겠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 흙이나 가지고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재료로서 가장 좋은 흙을 고르지만  그 재료도 결국은 하나의 흙일 뿐이듯이  시에 쓰이는 언어도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시의 재료가 될 때 그 독특한 성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언어는 어차피 의사의 전달을 그 주요 특성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 사이에 공통  된 약속에 기초하는 것이지요. 또 시도 이러한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쓰는 예술이고요.  즉 시에 쓰이는 언어는 의사전달을 뛰어넘는 그 무엇  인가가 있어야하는데 그 무엇에 대한 것을 이제 하나씩  배워나가겠습니다.  1)언어는 존재의 집  이는 하이데커의 말입니다.  언어는 원래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 수단으로 쓰이곤  하지만, 수단이나 도구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로서의  언어가 지니는 본질적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  시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주체로서,  사물들을 명명하고 사물들을 불러모아서 하나의 의미로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좀 추상적이어서 쉽게  이해가 안되니 시로 예를 드십시다.  언젠가 한 번 예로 든 시입니다만, 도중에 강의를 들으  신분들을 위해서 다시 옮기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님의 전문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이지요.  요즘 무의미의 시를 쓰는 김춘수님이 얼마 전 티비에  나오셔서, 김춘수시인을 말하면 모두 다 만 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시더라구요.  이렇게 언어로서 사물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꽃이 되게 한 그가 이제 와서 의미를 거부하고  무의미를 주장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1연에서 보듯이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그 것의  존재가 아직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것이며, 이 세상의  수많은 사물 속에 섞여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정체불명이며 그의 속성은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나 그 것들이 하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은 언어이며  그 존재를 통해 한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좀 설명이 어렵네요.  제가 강의하면서도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어렵다고 느껴질 때는 반복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2)언어의 함축성.  좀 어렵지만 일단 설명을 좀 하지요.  언어는 부호적 의미가 있는 기표(시니피앙)요 그 언어적  부호가 가리키는 기의(시니피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꽃을 처음에 비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비가 꽃이  되는 것이지요.  김춘수님의 시처럼 우리가 꽃이라 이름을 지어서 그 꽃이  꽃이 되었습니다만, 여기서 기표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꽃이라거나 비라거나 나무라거나 명명하는 사회적 약속  이며, 무어라 명명하던 그 기표(언어적부호)가 가리키는  개념이 기의가 되겠습니다.  조태일님의 글을 잠깐 옮기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언어는 일종의 사회현상이다.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약속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미로 여기도록 객관성 내지 보편성  을 띠게 된다. 예를 들면 태양, 꽃, 물, 사랑, 어둠,볼,  눈물...등의 언어들이 갖고 있는 의미는 그 것을 사용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의미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처럼 누구한테나 통용되는 언어를 지시적 언어 혹은  사전적 언어라고 하는데 이러한 지시적 언어는 일상생활  에서 서로의 의사 소통이나 의미 전달에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그 의미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가 환기하는 의미들은 사전적 의미로  쓰이지 않으며 그것을 초월하여 새로운 의미를 끝없이  창출해낸다. 즉 시인은 사전적, 지시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객관성, 고정성을 뛰어넘어 여기에 자기  만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처럼 개인  의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어서 의미가 새롭게 창조된  언어를 함축적 언어 혹은 내포적 의미의 언어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리송할 것입니다.  이제 쉽게 한번 이야기 해 볼까요  이름을 들어본다면 여울, 솔, 오리, 나뭇잎등이  일반인들에겐 지시적 언어만으로 이해할 뿐  내가 아는 분들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겠지요.  그들은 여울은 여울로 솔은 산중의 소나무로, 오리는  헤엄치는 오리로,....  모두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보편성,객관성.  고정성을 뛰어넘어 여기에 자기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솔님은 정귀매님으로 오리는 오경미  님으로 초록바다는 김순엽님으로 은빛연어는 김영님으로  그 내포하는 언어의 의미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지시적언어를 새롭게 함축적 언어, 내포적의미  의 언어로 창조하는 것이 시의 언어 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한용운님의  은 님을 의미하는 것이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는데, 먼저 실질적으로  사랑하는 님일 수도 있구요, 그가 독립투사였으니  잃어버린 조국일 수도 있고, 그가 승려인 점을 감안  하면 불교의 석가모니 일수도 있겠습니다. 학자에 따  라서는 한 인간으로서 추구하고 도달하고픈 절대의  세계이거나 경제일 수도 있겠지요.  좋은 시 한 편을 읽어보겠습니다.  임영조님의 입니다.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山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女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멍멍하게 살아온 生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볕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 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여기엔 참 여러가지의 물이 나옵니다. 비, 바다.양수  눈, 눈물, 그리고 맹물.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물들은 지시적 언어와는  전혀 다른 함축적 언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야기  를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요즘은 웬지 사람이 그립다.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나고 싶다. 도무지 맛도  색깔도 없고, 냄새도 향기도 없는 물같이 언제나 정 많은  사람, 맑고 조용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만나고 싶다.  만나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서 이 세상 끝까지 함께  흐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갖는다.  생전에는 너무  고고해서 섞이기 힘든 사람, 또는 짝사랑하기조차  너무 먼 여자라도 이 다음 내가 죽은 후 물이 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스며들 수 있을 것이라는 참으로 엉뚱  하고 황당무계한 몽상으로 이 시는 시작되었다.  시를 쓸 때마다 종종 경험하게 되는 일이지만 이처럼  이 나의 고달픈 작업에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곤 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 천하에 물보다 더 무르고  겸손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단한 것, 거친 것  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강하고 센 것도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예리하고 큰 칼로 베어도 물은 다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늘 높은 곳을 마다하고 낮은 데로  흐를 뿐 자신의 위치를 높이지도 않는다.  사람의 몸은 70%가 수분으로 채워져 있다는데 왜 물의  심성을 닮거나 배우지 못하는 모순의 덩어리일까?  그 나머지 몇 퍼센트에 불과한 자기 감정의 잣대로  온갖 선악과 증오와 슬픔을 재면서 살아가는 동물이라  그럴까? 물은 내려가게 하면 끝없이 내려가는데 사람은  왜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높은 자리만 탐할까? 물은  담긴 그릇 생긴대로 따르는데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할까?  물보다 참을성이 없는 탓일까?하는 따위의 자문을 통해  시적 공간을 넓히려 시도했었다.  가능하면 물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과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흥분과 교시적 충동을 억제하면서 상상력의 폭을  최대한 확대시켜 보려고 고심했다.  다시 말하면 물의  속성을 상관물로 채용하되 직설적인 언표는 피하고 언어  조형과 미적 탐구에 주력하고자 했다. 그리고 물의  긍정적인 인식을 통해 우리네 삶의 깨끗한 자세와 자연  에의 순응과 무욕을 일깨워 주는 암시가 함께 표현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물의 심오한 존재와 현상에 압도되는 자기 중심  적인 흥분과 관념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다소 형식미에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더욱이 불교의 윤회설을 믿어  온 바도 아니지만 지금 살아있는 것들이 종당에 죽으면  한 줌 흙이 되고, 몇 모금의 물이 된다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을 갖고 있다. 그러한 상식은 너무 보편적인 인식에  불과하지만 죽은 뒤에 이루어진 흙이나 물이 곧 새로  태어난 영원한 생명체라는 내 나름의 가설을 도출해내고  그 가설 위에 한 편의 시를 세웠다.  말 없고 유순하고 어찌보면 참 바보스런 물의 흐름이 곧  생명력의 표상이 되듯 사람의 흐름도 그가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음의 확인에 다름아니라는 유추도 이 시를 쓰면서  얻어낸 소득이다.  이렇듯 나의 시는 흔히 사소한 소재, 보편적인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요즘의 내가 사람을 부쩍 그리워하듯, 그 그리  운 사람들에게 쉽고도 재미있게 읽혀지기를 염원하며 쓴  편지 같은 시, 또는 시 같은 편지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좀 길지만 다 인용한 것은 작가들의 마음 자세를 여러분  들이 읽어보아야 더 좋을 것 같아서 입니다.  ==========================================================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 날 언니 따라 시집 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국민동요라 할 수 있는 노래 ‘섬 아기’가 떠오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를 집에 혼자 두고 굴 따러 다녀야 했던 엄마, 그 아기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돈 벌러 서울 가서 안 계시는 형국이다. 화자에게는 다행히도 곁에 언니가 있었다. 엄마 역할을 하던 그 언니가 시집가던 날, 어린 화자의 불안과 슬픔이 오죽했을까. 언니도 어린 동생이 안쓰러워 눈물을 쏟았을 테다.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먼 고장으로 시집 간 언니는 끝내 오지 못하고. 화자는 내내 교문 쪽을 흘깃거리며 공을 던지고, 달리기를 했을 테다. 점심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가족과 둘러앉아 맛있는 도시락을 먹었을 테지. 운동회가 끝나고 혼자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서 화자는 뒤란으로 간다. 그립고 그리운 언니가 꽃을 가꾸던 뒤란은 이제 고추밭이 됐다. 마치 꽃밭이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듯. 엄마하고만 사는 어린이, 아빠하고만 사는 어린이, 할머니랑 사는 어린이, 친척집에서 사는 어린이, 보육원에서 사는 어린이. 요즘 이런 어린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 어린이들은 대개 담담한 척한다. 슬픔은 받아줄 사람이 있을 때나 드러내는 것이기에. 외로움과 두려움뿐 아니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제 처지에 대한 수치심이 엉겨 있는, 소위 결손가정 어린이의 슬픔. 이 슬픔을 어떻게 달래줄까…, 대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네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할까….     황인숙 시인  
1555    詩作을 할때 詩적 은유를 많이 리용하라... 댓글:  조회:4287  추천:0  2016-07-21
[14강=2] 대상에 대한 표현.4  강사/김영천  오늘은 좀 어려운 이론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여러가지 문예비평이론 중  에서 "낯설게하기"이론을 윤석산 교수님의 글을 옮깁니다.  문예비평이론은 너무 어려워서 외울 필요는 없구요.  그냥 한 번 읽어보시기만 하시고  필요하신 분은 잘 기록해두시기 바랍니다.  [낯설게 만들기와 이미지 및 은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초기에 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차츰 시선을 산문 쪽으로 옮기면서 문학의  일반적 특성에 관심을 둔다. 슈클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에서 시의 모든 요소와 기법은  시인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독자의 습관적 수용에 충격을 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서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  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보 전달을 위주로 하는 산문에서  은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 반면에 시에서는  미적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낯설게 만드는 것이 목적  이라면서 와 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시의 운율도  실상 무미건조한 생활 언어의 억양을 일그러뜨려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는 수단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t)'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는 견해를 편다.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은 우리가 모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해준다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또는  낯선 정신 세계를 단번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의 경제적 전략임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낯익음', '친숙성'은 '자동화(automatization)'로 이어져  탈언어화(脫言語化) 다시 말해 기호화(記號化)된다는 생각  에서 비롯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며,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  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슈클로프스키는 이 기법이 실험적인 작가들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원칙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과 평화}  에서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무대장치를  '페인트칠한 마분지 조각들'로 묘사하고, {부활}의 미사  장면에서 성병(聖餠)을 '조그만 빵 조각'이라고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 지적한다. 그리고, ≪홀스토머≫(Xolstomer,  말이 화자인 일인칭 화법으로 씌어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에서 말의 주인과 그 친구들의 변덕과 위선을 말(馬)의  시각에서 보고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위선성을 새롭게  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톨스토이는 낯설게 된 사물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서, '사물을 낯설게 만든 것은 사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사물을 끊어 정말로 필요한 것-어떤 도덕적 가치-을  훨씬 더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돌을 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낯설게  된 사물을 배경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비판을 한 것은  슈클로프스키는 사물의 새로운 지각만 강조하고 그를 통해  표현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제거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야콥슨도 회화를 예로 들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편다.  그는 그림 같은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나, 삼차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인위적 방법을 채택하며,  그 그림의 박진성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관습적 방식이 계속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문과 같은 '표의문자'로 바뀌어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이그려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강하게 지각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poetic quality)에 대한 정의는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 만들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시가  를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가 있다면, 슈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와 간의 관계로 설명하여,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  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며 부정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형식주  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어느 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설은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희곡에서  '소외(疏外)의 기법'을 사용한다. '소외의 기법'은 종래  연극의 경우 관객을 작품 속으로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작품이 진행되는 도중에 이것이 연극임을 강조하여  몰입과 동화를 막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따져보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법을 말한다.  ====================================================================     지붕 아래의 잠  ―백현(1946∼) 언덕 위에 서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기와지붕을 인 한옥들을 본다 부신 봄볕 아래 소멸을 예감한 듯 검은 지붕들이 어둡다 기왓골에 한 뼘 넘게 풀들이 자라고 아직은 그 아래 깃든 삶을 덮어주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낙타처럼 꾸부정하게 좁은 길을 내려간다 남은 사람들도 곧 묵은 살림살이를 모아 오랜 터전을 떠날 것이다 잠 속으로 부드럽게 스미던 빗소리와 꽃밭과 장독대가 있는 작은 마당을 두고 사막처럼 퍼져 있는 길을 지나 해가 들지 않는 공동주택에서 천장을 지나는 물소리와 벽 속에서 웅얼대는 말소리에 힘들게 뒤섞이며 영영 잃을 것이다 거친 하루를 덮어주던 지붕 아래의 잠을 그 위에 낮게 드리워진 밤하늘을 불과 한두 해 전에 지어진 고층아파트 단지와 재개발지역 끄트머리 동네 사이에는 대공사를 앞두고 허물린 집터들과 공사장이 ‘사막처럼’ 가로놓여 있을 테다. 마치 사막 가운데 섬처럼 고립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 동네. 거기에는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을 테니, 대개 오랜 거주민이 살고 있을 테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기분이 이상할까. 고샅고샅 낯익었던 골목과 집들이 돌연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산맥 같은 아파트. 그 아파트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 살리라. 지형도 완전히 달라져 골목 밖으로 나서면 문득 꿈속을 헤매는 듯할 테다. 그 꿈의 예비된 끝은 쫓기듯 동네를 떠나는 것. 재개발 끄트머리 동네도 한 집 두 집 비어가고, 떠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만 남아 있다. 그들은 결국 어디로 가서 살게 될까? 전망 좋은 집이나 보다 넓고 안락한 집일 리가 없다. 곧 허물려 사라질 옛날 동네와 거기 남은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시선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오늘은 무주택자의 날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에세이 ‘노동의 배신’에 의하면, 가계 지출 중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 즉 엥겔 계수로 빈곤 정도를 측정하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란다. 오늘날에는 집세를 근거로 산출해야 한다고. 에구, 어찌나 금방 알아듣겠는 말인지!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낡은 지붕은 ‘잠 속으로 부드럽게 스미는 빗소리’를 들려준다네. 이 복락을 조금은 마음 편히, 오래 누리고 싶네.    
1554    詩란 진부한 표현을 말살하는 작업이다... 댓글:  조회:4344  추천:0  2016-07-20
[14강] 대상에 대한 표현.4  강사/김영천  4) 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께 강의하면서 "낯설게 하기"란  문학적 용어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 등이 주장한 문학비평용어인  데요. 쉽게 말하면 문학의 표현은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을 피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접해서 익숙해져버린 표현은 아무의 관  심도 끌지 못해서 좋은 글이 안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래서, 새롭고 참신한  맛을 느끼게 하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을 찾아  내야 합니다.  쉬클로프스키 이론을 보면 낯설게 하기를 세가지로  나누는데 그 첫째 이론을 보면 "낯설게 하기는 어떤  다른 양식에서 부터라도 문학, 즉 순전히 문학적인  체계로 가려내는 방식으로 쓰인다고 했는데 이 말은  문학이 아닌, 철학이나, 신문의 사설이나, 광고물이나  과학의 설명이나 이런 것들과 문학이 다른 점은  그 사용하는 글이 문학적이어야 한다. 즉 누가 읽어도  참신하고 독창적이며 상투적이거나 관습적이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해도 다른 사람이 쓴 표현을 그  대로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볼 때 초생달이 꼭 눈섭같이 생겼  어도, 그 표현은 옛부터 많이 써서 참신하지 못한 것  입니다.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손, 마늘쪽 같은 코,  뭐 이런 표현은 이미 많이 써서 진부한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면 좋은 시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말, 아직 발견하지 못한  표현을 자기만의 눈으로 찾아내야하는 것입니다.  옛날 강의하고 조금 중복되는 감이 있습니다만.  복습하는 차원에서 다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만을 기계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므로  사물은 더 이상 새롭거나 경이롭지 않지요.  나는 이미 별 것으로 보지 않는 물건도 집에 찾아온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있  습니다. 사실 내가 구할 때도 그렇게 좋아서 구했지만  늘 보면서 그 사물에 대해 자동화되고 관습화된 시선  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말을 맞아 바람쏘이러 가는 곳도, 새로운 곳  에 가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시로 쓰이는 단어들이  새로운 것이어야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지요.  그런 간단한 이치입니다.  여기서 천양희님의 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 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 진 어머니,.  조태일님의 해설을 여기 덧붙이니 한번 들어보십시오  "예로부터 하늘에 걸려 있는 둥근 보름달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이 되곤 했다. 세상 만물을 두루 감싸  안듯 둥글고 넉넉한 모습과, 삼라만상을 어린 새끼로  여기며 가슴에 품어 젖을 물린 것처럼 부드럽게 흐르  는 달빛은 영락없는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위의 시 역시 달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믐 달에서 가슴이 닳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은 시인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  즉 "가슴닳아/만월의 채 반도 못 산/달무리 진 어머니"  라는 구절은 새로운 그믐달에 대한 표현으로 아주 개성  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또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와 대비해서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하는 표현을 씀으로서 마치 팽나무에  달이 창백하게 걸린 것처럼, 내가 어머니의 가슴에  대롱대롱 내 걸린 달처럼 항상 어머니의 가슴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은 이 시인 외에는 아직도 전무 후무합니다.  이번에는 박라연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어 꽃눈을 튼다.  터서는 1백일 지지 못해  향기로운 혀 내밀고 서 있다.  밤이면  하얀 뿌리털 잘게 흔드는 한숨 소리  떠날 날을 미리 알고  한 점 벼랑에서도 대를 잇는 뿌리들아  이 땅의 잡초보다 처절하구나  숨진 네 그리움의 뿌리를  풀이끼로 포근히 감싸준 그날  삐죽이 고개 내민 새끼 촉 하나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사랑하므로  헤어져 사는 너희들은  여러분 중에 풍란을 길러보신 분들은 아주 실감이  생생할 것입니다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을  드리지요.  풍란은 남쪽 섬의 해안가에 많은데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소엽풍란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대엽풍란  이라하는 것은 학명으론 나도풍란이라 합니다.  그들은 기근(氣根) 즉 공기중에 뿌리를 내서 거기  에서 질소를 흡수하는 특이한 식물로 바위나 나무  등에 착근하여 산답니다.  풍란(소엽풍란)  나도 풍란(대엽풍란)  위시에서 우리에게 탁 뛰는 표현이 몇 군데 보입니다.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  이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해 꽃대가 하얗게 올라오는데  그 것을 긴 물관부로 보고, 아주 간절히 목이 마를 때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런 좋은 표현은  생각지도 못해보았지요.  또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새끼를 치는구나 사랑  하므로/헤어져 사는 너희들은"이라는 구절을 보면  참 기가 막힌 표현이지요.  좋은 시 또 한 편 감상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한 부분은 지금 기성 시인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늘 목표로는 삼되 당장에 그런 표현을 찾지 못함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것은 수 년 내지 수  십년을 노력하고 공부해야 겨우 이룩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선님의 를 한 번 읽어보시지요.  암자 안에 바다를 다 잠글 수 있다면  내 주머니 속에 바다를  감추고 떠돌 수 있다면  저 無音의 山노래가 더 잘 들리리.  오늘 아침에 가까이 설악이 또  구름의 옷고름 풀어  내게 속가슴 보이는구나.  여기 오래 앉아 있으려 하였으나  다시 떠나야겠다.  사람 없는 곳에 사람을 찾아  소리 없는 곳에 소리 하나 찾아  산아, 너의 무반주 노래  너의 무반주 육체 속에  하룻밤 파계로 일박.  그래도 못찾으면  더 멀리 떠돌다가  어느 산노을에 감추어진  작은 꽃잎 속에 일박.   ==================================================         보름  ―장승리(1974∼)     설익은 감이 옥상 계단 위로 떨어진다 쿵, 쿵쿵 누가 누굴 때리는 소리 같다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짖어댄다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썩는 순간부터 눈부셔지는 달빛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은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드는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 오늘 밤 저 달은 누가 누굴 계속 때리는 소리 같은데 옥상 계단에 감이 떨어진다니 단층집인가 보다. 아마 단독주택일 테다. 주위가 아주 조용할 때였을 것이다. 벽 너머에서 설익은 감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옥상 계단을 설익은 감이 굴러 떨어지는 ‘쿵, 쿵쿵’ 소리에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동시에 짖어댄다’. 뭣 모르고 짖어대던 강아지들은 이내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잠들었을 테다. 화자 혼자 바깥에 나가 본다. 강아지 한 마리쯤은 따라 나왔으려나. 화자의 짐작대로,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여기저기 감이 떨어져 있다. 어떤 감은 여러 날 전에 떨어져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하늘엔 두둥실, 미끈히 무르익은 보름달.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여기부터 감은 달로 마술적 변화를 일으킨다. 어쩌면 화자를 밖으로 끌어낸 것은 감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달빛일지도 모른다. 설익은 채 떨어져 흠집이 난 감이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오늘 밤 저 달’로 교차하는 상념들. 보름날의 만월은 화자의 마음을 때린다.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든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추락해 굴러 떨어지던 기억이 화자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달빛 아래서 으깨진 감을 내려다보던 화자는 옥상에 올라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한참을 서성거렸을 테다. 달이 너무 환해서!  감 하나 떨어진 거 갖고 이토록 섬세한 사유를 펼치누나. 시인이여!  
1553    詩란 內美之象적 언어를 뿜어내는 것... 댓글:  조회:4200  추천:0  2016-07-19
[13강] 대상에 대한 표현.3  강사/김영천  3)표현은 쉽고 순수하게  저도 학창 시절엔 시를 쓰면서 좀 어렵고 난해한 시가  좋은 것인 줄 알고 이상의 시나 읽고, 그렇게 난해한  시를 써서 대학신문에 발표도 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  하니 무척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를 읽으면 그 시에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감동은  커녕 시가 무슨 뜻인지도 알기 어려워서야 독자들이  시를 멀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여러분들도 이 강의를 받기 전까진 시는 시인들  이나 쓰는 어려운 것으로 알았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하, 나도 쓰겠다하는 것이구요.  물론 개인 차가 있습니다만, 제가 책임 지고 여러분  모두 시를 쓰실 수 있도록 할테니 강의만 빠지지 말고  들으시구요. 자꾸 복습도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독자들에게서 시가 멀어지는 것도 이처럼  현대시가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는 좋은 시들은 다 그 즉석에서 감동을 느  끼게 하는 쉬운 글들이지, 어렵고 난해한 시들이 아닙  니다.  조태일님의 글을 잠시 인용합니다.  " 표현이란, 본질적으로 주관의 객관화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을 때는 생각이나 느낌, 깨달음, 발견 등 모든 것  이 주관적인 것이지만 이 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철저히  객관화 되는 것이다. 이 객관화를 통해서 주관적인 세계  는 사적인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고 타인과 공유하게 된다.  이처럼 표현 그 자체가 자신만이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것을 타인과 함께 나눠 갖고 공감하도록 하는 것  이기에 표현이 쉬워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시  는 어떠한 문학 장르보다도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에  대한 표현이므로 그것을 온전하게 객관화시키기 위해서는  독자가 알기 쉬운 표현을 찾아내야 한다."  이어서 조태일님도 지적한 바가 있지만, 우리 시인들이  실제로 시를 쓸 때는 쉽게 쓰는 것이 어려운 표현을 그대  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지금 강의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분들은 학자들이어서  강의가 학문적으로 좀 어렵지요. 저는 이 것을 풀어서  알기 쉽게 하려니 교안 작성부터 무척 어렵네요.  여기에서 정진규님의
1552    詩作은 그림을 그리는 것... 댓글:  조회:4082  추천:0  2016-07-18
[12강] 대상에 대한 표현.2 강사/김영천 2)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시들을 보면 시가 막연하고 모호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는 시로서 이미 실패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시어들이 구체적 표현 을 하지 못하고 아주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어떤 대상이든 그것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명제로 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하거나 암시해야 합니다. 시는 더구나 주관성이 강하기때문에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면 누구의 감동도 끌어낼 수 없다. 자기 혼자만이 아는 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정주는 (저는 서정주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땄습니다. 그래서 인용할 때 서정주님을 많이 합니다.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한 언어조직으로 짜내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실감한 대로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상상시킬까?'하는 것이다. 상상을 시키지 않고서는 우리가 실감한 어떤 시의 감동도 독자에게 전할 길이 없다. 시인이 가령 어떤 의젓한 남자를 보고 감동했다고 하자. 그 의젓함으로 '기가 막히게 세계 제일로 씩씩하고 늠름하고, 엄숙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어쩌고 추상적으로 설명해 봤자, 독자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상상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구약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의젓하고 씩씩한 남자의 코를 표현하길, '다마스커스로 향한 레바논의 수루(戍樓)와 같이....'라고 쓴다면 '아, 그래 적의 땅 다마스커스를 향해서 용감히 우뚝 솟아 있는 레바논의 수로 같이 용감한 느낌을 주는 오똑 솟은 코로구나' 하고 그 느낌을 주니, 어떤 모양임을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늘 독자에게 작자의 실감을 상상시킬 수 있는-' 어떻게 생겼는가?'하는 궁금증에 대답하는 구체적인 영상의 조직을 보족하는 것들로만 쓰여져야 한다. 추상이란 원래가 어디에서나 말瓚?보족하기 위해서 쓰여져 온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 임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추상관념을 주로 해서 시라고 써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끔 보지만, 이 것은 나무 없는 그늘을 말하려는 어리석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말 그대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천사를 그리려다 짐승을 그린다'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겠지요. 시를 쓸 때도 추상어나 일반어보다는 구상어와 특수어를 써서 구체적인 표현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곽재구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해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 연분홍 사랑 좀 봐. 어때요? 우리가 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단어들로만 구성되었지요? 이 시를 두고 조태일님은 "위에 인용된 시의 언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상어들이 대부분이다. 물살, 발가락, 고사리순, 머리카락, 허벅지, 산, 눈물들은 이미 경험에 의해서 친밀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머리로 생각하기 앞서 우리들의 가슴으로, 몸으로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정호승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부활절날 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사람의 발 보다 개미의 발을 씻긴다 연탄재가 버려진 달빛 아래 저 골목길 개미가 걸어간 길이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답다. 시를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려면 묘사를 잘 해야합니다. 즉 시적 대상을 그림을 그리듯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세밀한 부분들을 잘 그려냄으로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여기서 개미는 열심히 일이나 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근로자들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달동네 풍경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이어서 이성복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물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어떤 사람들은 무덤 속의 어머니를 뜻한다고 하나, 저는 대지(大地)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의견이 맞던지 어머니의 무덤이나 땅으로 어머니를 대치해놓고 보면 참 구체적인 언어로 그림을 그리듯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비 오는 숲 속을 생각해보십시오.하나 하나 그 장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집이 생각나는 최하림님의 을 읽어 보세요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밤이 과거와 현재로 부유스럽게 흘러간다 뒤꼍의 우물도 물이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다음날 걸어갈 길들을 생각한다. ====================================================       모과꽃잎 화문석 ―공광규(1960∼)   대밭 그림자가 비질하는 깨끗한 마당에 바람이 연분홍 모과꽃잎 화문석을 짜고 있다 가는귀먹은 친구 홀어머니가 쑥차를 내오는데     손톱에 다정이 쑥물 들어 마음도 화문석이다 당산나무 가지를 두드려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꾀꼬리 휘파람 소리가 화문석 위에서 놀고 있다 대나무라면 국기 게양대밖에 못 보고 자라고, 모과나무도 열매는 봤는데 꽃은 본 적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남도로 내려가면 집집마다 뒤란에 대숲이 울울하다는, 그래서 초여름이면 고구마 뽑듯이 예사로 죽순을 뽑아 무쳐 먹곤 했다는 얘기를 그곳 태생 친구한테 신기해하며 들은 기억이 난다. 대나무 숲이 많으니까, 가령 꽃무늬 넣어서 짠 돗자리 같은,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도 발달했다고. 친구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뵈러 간 화자, 그 어머니가 한창 젊으셨을 때도 그 집을 드나들었을 테다. 온화하고 정갈한, 어쩌면 우아한 기품마저 감도는 시골 부인이 떠오른다. 누구나 가슴에 남는 친구 어머니가 있을 것이다. 이상(理想)의 어머니랄까. (무뚝뚝하고 드세고 욕쟁이인 내 어머니와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차마 한 적 없을 테지만.) 그러할 친구 어머니가 쑥차를 내오시는데 손톱에 쑥물이 들어 있다. 초봄에 부지런히 쑥을 뜯으셨을 테다. 쑥국도 끓이고 쑥차도 만들고, 말려 두었다가 겨울이면 두고두고 쑥떡을 만들 만큼 많이도 뜯으셨을 테다. 반가이, 조금은 수줍게 친구 어머니와 마주앉아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 집 마당을 내다보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을 테다. 모과꽃잎 흩날려 깨끗한 마당에 수를 놓누나. 딱따구리 소리, 꾀꼬리 소리도 화자 마음에 아롱아롱 수를 놓누나. 햇살 맑은 오월 어느 날의 남쪽 시골 마을 정경이 한 폭 그림같이 눈에 선하다.     
1551    詩란 의미전달목적과 론리설명언어표현도 아닌 정서적 울림! 댓글:  조회:4184  추천:0  2016-07-17
[11강] 대상에 대한 표현.1  강사/김영천  대상의 표현이라는 주제에 대해 조태일님은  1)표현은 정확하게  2)표현은 구체적으로  3)표현은 쉽고 순수하게  4)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  다른 설명이 없어도 여기까지 공부하신  여러분께서는 그냥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시문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좀더  깊이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한 항목씩  설명해보겠습니다.  1)표현은 정확하게  먼저 고려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문장가 김부식과 정지  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알기 쉽게 풀어놓은 시와 한자음을 달아놓습니다.  하루는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가 좋아서 이 구절을 내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이 거절했습니다, 그 후 김부식이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시인 즉,  "절에서는 불경소리 그치고 琳宮梵語罷(림궁범어파)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하루는 김부식이 봄이 되어 그 봄을 맞는 시를 지었  습니다.  "버들빛 천 줄기 푸르고 柳色千絲綠(류색천사록)  복숭아꽃 만 점 붉구나."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참 멋있는 시이지요? 그런데 느닺없이 정지상의  귀신이 나와서 김 부식의 뺨을 때리면서 "버들의 천  줄기 누가 세어 보았으며, 복숭아꽃 만 점을 누가  헤아려보았느냐" 하면서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 柳色絲絲綠(류색사사록)  점점이 복숭아꽃 붉다."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두 시가 다 내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글자씩만 바꾸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만큼 시를 쓰는  글자에 중요성입니다. 시어를 쓸 때는 그만큼  표현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그냥 생각나는 말로 써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어를 고를 때부터 지극 정성을  드리라는 말이겠지요.  좀 설명이 길지만 이 두 표현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정지상이 김부식의 따귀를 때리며 고쳐 쓴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점점이 복숭아꽃 붉다"는 구절은  내용 면에서 김부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시는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표현이  아니며,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언어표현  도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에  두 시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지맘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김부식이 표현한 '천 줄기'와  '만 점'은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왜냐  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그 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시인의 태도가 안일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시인  은 푸르른 버드나무와 붉은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리뭉실 '천 줄기'와 '만 점'이라  는 언어를 선택했지만 이 언어들에는 필연성, 즉 꼭  그 언어이어야만 하는 유일성이 없다.  즉 시인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적당하게 이 언어들을 씀으로써  시어의 생명인 정서적 울림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이 쓴 '줄줄이'와 '점점이'는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버드나무와 복숭아꽃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한번 상상해 보라.  '천 줄기'라는 언어보다 '줄줄이'라는 의태어가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할 것이다.  또한 '줄줄이' '점점이'라는 의태어가 빚어내는 음  악적인 효과까지 함께 곁들여져 버드나무의 무성한  푸르름과 복숭아꽃의 붉은 빛이 더욱 깊고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비교해 볼 때, 정지  상이 선택한 언어들이 대상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살려내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시어들이 빚어 낸 정확한 표현 때문  인 것이다."  여러분께서 조태일의 말 그대로 생동감이 무성한  푸르름이나 붉은 꽃의 색깔이 더욱 깊고 황홀한 것까지  느껴지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또 꼭 그의 의견에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어의 선택이 정확해야한다는 그의 의견만은  너무도 확실한 이야기이어서 길어도 옮겨보았습니다.  오늘은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했네요.  새 털 같이 많은 날이니 천천히 하시기로 하고  좋은 시들을 또 여러분을 위해서 몇 편 올립니다.  우선 서정주님의 을 올리는데요. 좀 어려  운 시인 것 같아도 시를 다루는 문학평론가라면  다 한 번씩은 다루었다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이며  서정주가 23세 때 쓴 시인 것을 알면서 읽기 바  랍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이 시를 읽어보면 시어가 아닌 일상적 언어  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심  하여 시어로 사용하였기에 그 정확한 표현은  감동과 함께 시를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빼고 다른 언어로 대치하면 바로  시의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독창적 언어체계입니다.  (팔할, 죄인, 천치, 혓바닥, 수캐 등은 이렇게  시 밖에서 볼 때는 일상에서나 흔히 쓰는 언  어임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시 김현승님의 를 올  립니다.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시기 위해서  시의 부분을 싣지 않고 전문을 실으니 강의가  그 때문에 좀 길어지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  랍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은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을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 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참고로 위의 시에 나타나는 플라타나스의 모습은  그냥 단순한 나무의 차원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었음을 인식하시고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와는 상관 없지만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이제무님의 입니다.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 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넌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 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 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시인은 죽음과 슬픔 등 여러가지 어두운  무덤에서 어두운 시의 씨앗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봉분, 밤에 떠오르는 보름달,  산을 오르는 꼬부랑 길 등 곡선의 부드러움.  포용, 원만함, 겸허한 마음 등을 깨닫고  직선의 마을 길과 대비시키며 그의 시를  완성시켜 나갑니다.   ====================================================       치매 걸린 시어머니  ―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이제는 전설 속에나 있을 캐릭터,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시인의 연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위 시가 실린 시집 ‘치자꽃 향기’에서 시인 소개를 보니, 시인은 열여덟 살에 결혼했다. 사십여 년, 그 긴 세월을 매운 시집살이 시키던 시어머니, 치매가 와서도 유난해서 시인은 ‘꼼짝 없이 붙잡힌’다. 시인도 젊지 않은 나이, 새삼 옛날 생각에 미운 생각이 버럭 나기도 하고, 어쩌면 고소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데,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혀요, 용서해 주시요 잉.’ 이 한마디에 마음이 풀린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 눈에 나이 든 여인이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보인다. 치매로 상한 머리에도 그 오래전 무서움이 지워지지 않는 시어머니! 우리 어머니들, 그렇게 제 며느리한테 호랑이 노릇 톡톡히 하고는 늙은 몸을 푹 맡겼단다. 고부(姑婦)간에 대를 물려 그랬단다.  진효임은 일흔 다 돼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니까 즐거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좋은 건 머릿속 생각들을 내 손으로 직접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자꽃 향기’ 앞머리에 적힌 ‘시인의 말’이다. 평생 소리(말)로 날려 보냈던 생각들을 이제 그림(글)으로 남기는 도취감! 소리를 붙잡아 앉히는 두근두근함을 그의 시 곁에서 숙연히 맛본다.    
1550    시어의 운률미/최균선//방순애시집평론/허인//김금용... 댓글:  조회:4585  추천:0  2016-07-15
시어의 운률미                                                      최 균 선       시ㅡ 시적대화의 특질을 다음같은 다섯가지로 개괄하고있다.     첫째, 느낌을 론리적언어로 설명할수 없기에 시에서 비유적어법으로 표술하거나 동화(同化) 또는 투사(投射)적인 어법을 택하는것이다. 둘째로, 이런 어법때문에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외연적이라기보다 내포적으로 쓰이는게 특질이다. 셋째로, 유기적이고 구조적이고 함축적이라는것이다. 넷째로, 간결한 양식을 취한다. 왜냐하면 시란 순간적정서의 발로라는데서 규정되기때문이다. 마지막 특질이지만 시가 시로서의 매력을 가지게 하는 음악성이다. 춤추는 글인 시의 음악성이 시의 매력이다.     서정시에 해당하는 리릭(Lyric) 이란 용어는 원래 리레(Lyre)라는 악기에서 온것으로서 노래로 불려지기 위한 쟝르임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특성이 유전되여 산문화된 현대시도 음악적인 성격을 띠도록 류의하게 된것이다. 아래에 박목월의 시 “산도화”에서 우리 말 시의 음악성ㅡ운률미를 흔상해보자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玉)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이 시는 전통적인 수법으로 기승전결의 형식에 맞추어 2행씩 4련으로 구성하였는데 각 련을 3보격으로 짜놓았을뿐만아니라 각 련마다 음악적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알심들여 특수한 음운들을 선택하고 있음이 감미롭게 느껴진다.     첫련의 경우, “산은/구강산//보라빛/석산” 인 각 음보의 의미상 초점은 “산(A)-산 (A)-빛갈(B)-산(A) ”이며 이들의 종성은 진동성이 큰 유성자음과 진동이 일어나지 않는 무성자음을 교차적으로 조직하여 유성(A) -(A)-무성(B) –유성(A)식으로 배렬하여 운률미를 고도로 살리고있다. 뿐만아니라 전개에 해당하는 셋째련을 제외하고는 밝고 작은 양성모음을 택하여 나무잎이나 풀잎들이 가볍게 소근대는듯한 인상을 주면서 산, 구강산, 석산, 산도화, 송이, 사슴,씻는다 등 단어들을 간헐적으로 제시하여 봄날의 산속풍경같은 뉴앙스를 형성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서 더없이 감칠맛을 돋군다.     줄글에서 이와같이 단락이나 문장의 길이를 비슷하게 나누는 관례는 드물다. 그리고 시에서라도 이처럼 음운을 고려하여 조직하는 례는 김소월, 박목월, 한용운 등 지난세기 우리 민족의 훌륭한 시인들의 붓끝에서만 찾아볼수 있다. 이는 독자들의 읽기, 시간을 고려하고 정서적색채를 한껏 느끼도록 하기 위한 창조적작업이였다.     하지만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이런 리듬적속성은 점점 배제되여 산문화적쩨마와 문체가 류행되고있다. 이와같은 형식미의 변화는 과연 현대독자들의 감각이 리듬이 지니고있는 주술적, 자동적속성을 은연중 거부하고있기때문인가? 현대독자들이 시인이 제시하는대로 시형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각성의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시를 자률적으로 수용하여 재조합하려는 경향때문인가? 그래서인지 현대파시는 쩨마만 서정적이면 형식이나 기법에서는 산문과 다를배 없는것을 흔히 볼수 있다.     쉘리의 주장처럼 시인은 비록 비리성적인 상상력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 상상력을 통하여 일상세계의 뒤면에 숨어있는 절대관념의 세계와 직접 접촉할수 있다는 가능성과 사색과정을 제공하여야 바람직하다. 쉘리는 시란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이미지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플라톤이 중시했던 리얼리트를 의미하였다.     한편 쉬끌로브스끼, 야꼽슨 등 형식주의자들도 시적언어란 일상어에“조직적폭력”을 가한 특수한 언어라고 주장하면서도 소리의 층차, 모음조화, 자음다발(多发), 압운, 운률, 률격 등을 외면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류의할 필요가 있다. 시에서 매력적인 시적기능은 파생적언어조합이다. 그만큼 서정적자아의 개방이라해도 지시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는 독자에게 미감을 주지 못한다고 단언해도 어페가 없을것이다.     언어는 의미와 음성을 자의적으로 결합시킨 기호이다. 사물의 구체적모습과 의미를 제거해버리고 추상화하여 음성기호로 바꾼게 주지시의 언어이다. 음운의 의미나 사물의 모습을 환원시킴에서 음운과 의미의 관계는 반드시 일치한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상관관계가 있다. 여기서 시의 운률미의 존재리유가 서는것이다. 양성모음은 밝고 명랑하고 깜찍한 느낌을 주며 음성모음은 어둡고 거칠며 큰 느낌을 준다는 우리 말의 특성을 무시하는것은 모든 시의 특성상에서 불가하다는 설명이 된다.     주정시이든 주지시이든간에 시작품은 “음소→음절→단어→문장→단락”의 층차로 짜여진 의미와 감각적구조물이라 말하고있다. 하여 시에서 내포적어법은 주체와 객체가 상호침투하면서 문맥적의미가 형성되도록 표현해야 한다. 현대파관점에서는 결국 “친숙함”과 “낯설음”의 대비와 차이에서 내포성이 증가된다고 여긴다. 즉 사물성을 상실한 현대언어를 가지고 시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려고 낱말들의 질감과 배경을 왕창 비틀고 감추면서 이미지를 낯설게 하려고 애쓴다.     례컨대 “길”을 “도로”라고 하면 낯선것은 아니지만 조금 달라보일수 있다. 길이란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진 자연적개념이고 “도로-고속도로” 와같이 현대적개념이기에 인공적이라는 현대문명의 냄새를 풍기는 경우와 같다. 이처럼 현대시에서 창조된 이미지는 구체적사물에서 얻어지는 직접적인 표상이 아니라 언어라는 간접적자극을 통하여 얻어지는 감각현상이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되고 일정한 지향성을 표백하면서 단순한 감각차원에 머무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과 감각을 창조하려는데 몰입하고있다. 이점에서 현대시의 장점이 긍정적이 된다.     하지만 독자의 시각에서는 사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언어적인 표상에 대한 리해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언어(시)를 통해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고 인생의 또 다른 정경을 흔상하면서 시인이 의도화하는 관념이나 정서에 도달해야 하는데 시인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가 독자리해와 융화되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언어의 퇴적으로 된다면 그 시는 원초적으로 가치성을 상실하게 된다.     언어와 시인의 심상, 또는 사물간의 단절이나 불균형문제는 랑만주의 시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시를 선호하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보편성도 부정하고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모습에 안주하게 되였다. 될수록이면 생경한것을 추구하다보니 자신에게조차 낯선것들을 설명적인 방법으로 전달할 의무는 아예 버린것이다. 환언한다면 시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제시하는 의미를 깨득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제시적인 언어를 포기하고 언어로 모호한 그림을 그리려 한다.     옛날 랑만주의시인들은 시예술이란 이미지를 창조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양식이며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것을 구체적으로 바꾸는 기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학자가 발견한 낯선세계를 누구나 다 알수 있는 세계로 바꾼게 시라는 워즈워즈의 주장이나 “이미지가 없이는 예술은 없다”고 이미지절대론을 주장한 로씨야의 뽀떼브나 이미지는 아무리 알기 힘든 대상도 순간적으로 선명하게 파악할수 있도록 두뇌작용을 절약하게 만든다는 스펜서의 견해들은 아주 교훈적이다.     시란 정서 또는 정서작용을 통하여 떠오른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상상력은 주관적이고 가변적이고 심리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르게 전달하려면 가시성을 완전해 배제할수 없다. 아래의 시를 음미해보자.           할일도 없이 물끄러미 앉아서           읽다버린 노자(老子)를 다시 읽는다.           연(정-필자)직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挺直以为器,当其无,有器之用)           흙을 이겨 항아리를 만들지만           항아리의 쓰임새는 텅 빈 곳에 있다             텅 빈 곳에 있다           빈 곳에 있다           곳에 있다           에 있다           있다           다 (중략)             앙금같이 갈앉은 토요일 창밖엔 무거운 먹구름이 차일을 치고           한 라유체와 백 두철쭉이 혼례를 치루는 강의실 벽을 향해           철벽을 향해           페경기의 노자(老子)가 물끄러미 앉아 있다             다           있다           아 있다           앉아 있다           미 앉아 있다           러미 앉아 있다           끄러미 앉아 있다           물끄러미 앉아 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 하려는것은 단지 대학가의 상황만이 아니다. 흙을 이겨 항아리를 만들지만 그 쓰임새는 오히려 텅 빈곳에 있다는 존재론적역설 역시 화자가 이야기하려는 화제가운데 하나일뿐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모호한 충동을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한다. 여기서 이미지가 시인의 정서를 육화하는 기능을 지녔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서 은유를 비롯하여 음절수를 줄이거나 증가하여 삼각형으로 배치한것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모두 무의미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것이다.     이처럼 시를 감상함에서 독자가 자률적으로 해석권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현대시에 담으려하지만 자칫 이미지를 등한시하는 관념시처럼 리해불능의 벽에 부딪혀 전전긍하게 할수 있다. 모더니즘은 언필칭 전통에 대한 반역, 파괴성인데 읊어서 정서가 출렁거리게 하는 시를 쓰려면 시적운률미를 등진 언어유희로는 실현불가이다.   //////////////////////////////////////////////         언어련금술의 화려한 탈변 그리고 무아의 기저에서 펼치는 환상의 랩들                       방순애 첫하이퍼시집에 부치는 편지                              평론 허인           이모저모 살펴보면서ㅡ      십여년을 문학과는 쭈욱 담을 쌓고 지내오다가 요즘들어 조심스레 살펴본 조선족시단은 말그대로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아직 생소하고 낯선 얼굴들도 더러 있긴 하지만 특히 중견시인으로 어엿이 자리매김을 하고서 맹활약중인 김승종 ,김영건 ,조광명 , 한영남 등 시인의 변화는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며 또한 놀라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란 구경 무엇인가 ?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볍게 단 한마디로 정의(定义)를 내릴수 없는 이 간거한 작업을 그들은 나름대로 소화해냈으며 또한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한폭ㅡ 또 한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며 립체화며 수묵화를 개성있게 그려내고 있다. 는 말이 있다. 어쩌면 아직도 제 자리매김에 집착하고있는 여러 동우시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지않을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며칠전 필자는 연길에서 부쳐온 조선족시단의 첫하이퍼시집 방순애시인의 를 읽으면서 또 한번 크나 큰 충격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 언어련금술의 화려한 탈변, 그리고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 과거의 대아(对我), 자아(自我)의 뿌리깊은 관습으로부터 당당하게 해탈을 웨치며 한결 숨결이 자유로와지고 시야가 맑아진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지(境界)ㅡ 겸손이 철철 넘쳐나는 그녀와의 짧은 통화에서 필자는 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지나온 행보를 뒤돌아보지 않을수가 없었으며 늦게나마 새로운 변화를 결심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필자가 알건대 방시인은 시공부를 시작한지 이제겨우 일년이 조금 지난 늦둥이시인이다. 평생을 경찰직에 몸담그고 살아온 그녀가 퇴직후 문학공부를 시작한데는 그녀만의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책을 내면서 그녀는 머리글에 이렇게 쓰고있다          시란 이미지를 기본으로 하는 표현예술이다. 이미지는 사물성과 회화성을 추구하며 관념을 배척한다. 영국의 비평가 시드니(Sir Philip Sidney, 1554-1586)는‘시를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가르치고 즐겁게 할 목적을 가진 “말하는 그림”(speaking picture)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여기서 알알이 통통 잘 여무른 88수로 엮여진 방순애시인의 금싸락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주옥같은 하이퍼시들을 잠깐 함께 살펴보자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 그리고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지에서 펼치는 환상의 바이브   수천개의 태양이 나무가지사이로 들어온다 태양줄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잎새들 땅구멍마다 숨어있는 진실을 본다   개미가 떡함지무대에서 댄스를 쳐댄다 무대등 달덩이는 가슴을 헤치며 내려오고 베짱이들은 악기들고 연주에 여념이 없는데 엿장수가 지나다 멍하니 보며 중얼거린다   태고의 텅 빈 배속에 희미한 생명의 맥박이 널뛰기하고 시간의 등에 업혀 굴러나온 생명이 따가운 태양을 마주하느라 시물거리는 눈     의 전문이다. 수천개의 태양과 거꾸로 매달려있는 잎새들이 땅구멍의 숨어있는 진실을 살펴보고 있다고 시작된 이 시의 텍스트는 단순구조가 아닌 다선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제목이 이지만 마치 한폭의 자연을 무아(无我)와 무의식(无意识) 그대로 그려놓은듯하여 독자들은 대나무숲사이로 수많은 해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느듯한 느낌을 받을수도 있으며 또한 한폭의 생동한 오감도(鸟感图)를 보는듯한 새로운 느낌을 준다. 여기서 다시점(多视点), 다초점(多瞧点)의 역할이 된 수천개의 태양, 개미 , 떡함지 , 댄스 ,달덩이 , 베짱이 , 엿장수 , 악기 , 널뛰기, 시물거리는 눈은 방시인의 숙련된 언어련금술을 통하여 서로 묘하게 새로운 조화를 이루면서 현시대 단순구조적 동화(同化)에 거부와 강한 저항의식이 깔린 다선구조로의 화려한 탈변을 선포하면서 환상적인 바이브와 랩을 펼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시는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 시적 분위기를 나름대로 고조시키려는 작자의 의도가 최소한의 개입이 되여 냉정한 지적 사색과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럼 하이퍼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서 잠간 하이퍼시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함께 료해하여 보자!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조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드 넬슨(Ted Nelson)이 만든 말이다. 단순구조가 아닌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문덕수선생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3차원보다 높은’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이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다… 더불어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수가 있다.]     무릇 모더니즘이든 포스터니즘이든 레알리즘이든 휴머니즘이든 필자가 알건대 시는 시인의 체험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진술, 전달하는것이 절대로 아니다. 더불어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시적언어라는 매개물이 있으며 이 매개물 역시 의미전달의 구조가 또한 아니여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형성을 위한 언어구조일뿐이다. 어디까지나“시는 예술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인정한다면 전통시든 현대시든 또한 하이퍼시든 시는 단순히 시를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려 하거나 전달받으려고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시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삶을 체험하게 하는 언어예술이 되여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를 한수 더 보자   지구가 점을 본다 너무 커서 보면 볼수록 어지럽다 지구가 지레대로 점을 앞으로 민다 요지부동이다 지구가  등으로 점을 굴려본다 꿈적거리는것 같더니 또 굳어버린다   바람이 쇠스랑 들고 은하수를 긁어어본다 표피가 떨어졌다가도 또 새살이 나온다 태양이 은하수를 바줄로 묶어 던진다 뒤로 번져지는 시늉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온다   컴퓨터 불이 켜진다 하나하나 또 하나가 켜진다 반짝이들이 세계표면을 덮는다 지구가 들린다 지구가 달린다   전문이다       보다싶이 전례의 자의였던 타의였던 아니면 피의였던간에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오랜 세월동안 주류를 이어온 대아(对我), 자아(自我)의 흔적은 꼬리마저 찾아볼수조차 없고 불교에서 달관의 경지에서나 찾아봄직한 무주(无住) , 무득(无得) , 무소위(无所谓),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계(境界)에서 작자는 마치 우주와 자연과 자연스럽게 남의 이야기하듯이 녀성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펼쳐진 이 시적화자는 우리들에게 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문명의 산물인 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로 현실적인 직시, 미래에 대한 불안정과 또한 불안함과 그러한 갈구, 생명운동을 다차원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 꼼꼼히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알수 있듯이 지구 , 지레대 , 잔등 , 바람 , 쇠스랑이 , 은하수 ,태양 , 바줄 , 컴퓨터ㅡ 등등 달라도 너무 다른 실물들이 이 시에서 직접 만나 방시인의 섬세한 가공을 거쳐 마침내 하이퍼시의 특유의 새로운 개성을 완성해나가면서 시적인 울림, 즉 허다한 공명과 긴 여운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시인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이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 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최룡관시인이 평론에서 한 말이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옳바른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너무나도 작은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내노라하는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많지만 진정 후배양성과 현대시보급에서 서슴없이 자신의 마저 선뜻이 문학도들에게 내여줄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가? 이 점에서 나는 최룡관선배의 로고에 나름대로 큰 긍정을 하고 싶다.  /시간이 우리를 버리고 간다/칼바람이 심장을 찢고 그늘들이 모여 몸의 골수를 빼먹는다/흐르는 피는 왜 저토록 푸른걸가?/바이올린 현줄을 켜면 떠나간 아픔이 다시 와서 신경을 켜댄다/노을이 머리를 빠끔히 내밀며 흩어진 가슴을 몰아세운다/바라보는 한순간 두눈길은 멈추고 얼어붙은 등뼈에서 시린 정이 빠져나간다/메마른 가슴에서 백양나무가 다시 잎사귀를 키울수 있을가?/어둠 저편에서 빤히 쳐다볼때 진달래 흐드러진 젊은 산이 내게로 와서 옷소매를 잡는다/문득 가슴이 부푸는 이 시각/초록빛하늘을 들이 마신다/   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는 특히 /어둠 저편에서 빤히 쳐다볼때 진달래 흐드러진 젊은 산이 내게로 와서 옷소매를 잡는다/와 /초록빛하늘을 들이 마신다/라는 이처럼 단단한 긍정어로 부재의 세상속에서 현실적 존재의 충일성을 노래하는것은 부재의 그 아픈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나갈수 있는 시인의 강한 힘, 그것은 곧바로 시인의 맘속에 포근한 휴머니즘정신이 자리하고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따라서 시인의 그러한 휴머니즘정신은 더없이 랭철하고 명석한것이며 또한 자성(自醒)이 밑거름으로 안받침되여있다고도 생각된다. 제목이 이지만 보시다싶이 결말에서는 부푸는 가슴이며 초록색하늘이여서 희망이 보여서 좋다. 이 시 역시 최룡관시인이 말한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것이 특징이라면 또한 특징으로 될것도 같다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 있는 커다란 바위우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 있다               >   상아는 검은 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 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스님이 되여 앉아 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 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입은 닫겨있다         이러한 시구들은 방시인이 얼마나 언어련금술을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으며 또한 숙련되여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좋은 근거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 보는이의 시각이 다 즐거워지고 둘째 촉각이 스스로 감미로와지고 셋째 미각이 어느새 시원해지는ㅡ더불어 이러한 시구들은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의 새로운 상징이며 또한 무아의 경지에서 오직 방순애시인만이 마음껏 펼칠수 있는 화려한 바이브이고 환상적인 랩이라고 한마디로 총괄하고싶다. 그럼 여기서 늦게나마 방순애시인이 이처럼 짧은 시간내에 크나 큰 성과를 이루어낸데 대하여 아낌없는 치하의 박수를 보내 드린다.   폭력적조합과 옴니버스기법처리       시에서의 회화성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여 객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옴니버스(낯설게 하기)기법은 여러개의 이야기를 배치하여 시의 새로운 구조를 선보이는 하이퍼시창작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로만야콥슨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사물, 언어, 사건을 충돌하여 낯선 구조와 낯선 의미의 새로운 감각과 미의식을 추구하였던 리론이다. 옴니버스기법은 제목과 내용, 련과 련의 연결고리를 끊어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한다. 즉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하면 구조의 새로움, 의미의 새로움, 감각의 새로움이라는 하퍼시성립조건을 충족시킬수 있기깨문이였다. 그럼 여기서 방순애시인은 폭력적조합과 옴니버스기법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잠깐 다시 살펴보고 가자     스님이 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 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 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 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 심에서 우는 천둥소리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 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전문       여기서 1련과 2련ㅡ 그리고 3련은 제각기 생판 다른 세 얼굴이다 , 달라도 서로 너무 다른 불협화음을 조성하는듯하지만(옴니버스기법처리) 마지막련의 제일 끝부분에서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와 절묘하게 어울려 돌아가면서 뜻밖의 아어효과(雅语效果)까지 창출해낸다. 흔히 진펄에 빠진 발걸음이 한결 무겁다로 표현하지만 방시인은 여기서 로 시를 느긋하게 마무리하면서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펄속에서도 발걸음이 자유로운 바람과 바람을 타고 둥둥 떠가는 마음을 엿볼수 있게끔 한다. 얼핏 보면 상호 모순이 되는 어구이면서도 또한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안겨주고있는가? 이것이 방시인의 놀라운 재치가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폭력적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잠깐 더 살펴보자 . 스님 ㅡ 법글 ㅡ전설 ㅡ 강 ㅡ이파리 ㅡ 구름 ㅡ펜 ㅡ 입술 ㅡ 천둥 ㅡ귀뿌리 ㅡ열쇠 ㅡ진펄ㅡ 어찌면 제법 글깨나 쓴다하는 이름있는 시인들마저도 제대로 잇기가 쉽지 않을것이라는 걱정이 슬그머니 든다 . 이렇듯 언어련금술은 아무나 자유자재로 사용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 언어련금술은 제대로 장악한 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기때문이다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 불을 지펴 지가 낳은 뿌리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우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전문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라고 서두를 뗀 이 작품은 마지막 련에서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우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고 마감하고 있다. 이는 자유의 혼이 구속의 쇠사슬을 박차고 아무런 구애없이 천애지각을 나름대로 미화해보려는 시인의 조심스런 양상인것 같다. 또 어딘가 모르게 본능에로 끌려가는 생명의 충동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제목이나 작중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가 암시해주는것은 과연 무엇일가는 독자마다 견해가 다를수도 있겠으나 이 시는 곱씹을수록 무언의 암시와 그런 색깔이 다분히 짙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총체적으로 방순애시인의 많은 하이퍼시는 한수 한수가 거의 환상적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가 완전무결하다는것은 절대 아니다./손에 들려 호강을 받을때/ 중에서/시베리아 풍차가 /장거리 려행을 떠난다/ 중에서 이러한 시구들은 표현이 너무 단순하고 형상적인 이미지보다 추상적인 이미지가 더욱 짙어 방순애시인의 특유의 시맛을 많이 떨어뜨리고 있다. 또 일부 시편이 주제가 모호하고 어디로 튈지 몰라 읽기에 불안한것도 더러 있다. 첫술에 배 부를수는 없다. 아무튼 다시한번 방순애시인이 짧은 시간내에 이룬 성과에 다함없는 성원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마무리하면서      조선족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변시단이나 북방시단(흑룡강)에 비해 료심시단은 아직도 개간중인 에 불과한것만 같다. 료녕조선문보 문예부간, 심양조선족문학회 기관지라고 할수 있는 잡지에서 가끔 생소한 얼굴들이 때때로 나타나긴 하지만 별로 읽을만한것이 적고 새로운 시도를 꿈꾸는 시인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하는 말이 있다 . 두꺼비 한번 눈섭을 찡그렸다 하여 금방 하늘이 흐려지는것도 아니건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바른 말 하기를 꺼려하며 또한 너무 회피하려고만 드는것은 아닐가?  혹시 가슴 깊숙히 간직한것이 향긋한 파인애플이 아니라 겉이 속보다 더 싱싱한 한알의 진렬된 사과알처럼 자신의 이미지에 기스라도 갈가봐 너무 전전긍긍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아픈 매가 어쩌면 문인이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촉매제가 되고 필연적인 파스효과가 되지 않을가 ? 그럼 여기서 료심시단 중견시인이라고 할수 있으며 십여년간 심양조선족문학회 회장으로 있다가 지금 다시 료녕조선문보 기자부주임으로 사업하고 있는 김창영시인의 시집 과 을 잠간 살펴보자   산은 나보고 산이 되라 하네 물은 나보고 물이 되라 하네   산앞에 산처럼 물앞에 물처럼   말을 버리네 고개 숙이네   전문   물은 나보고 흐르라고 하고 산은 나보고 거기, 서라고 하네 산속에 물이 흐르고 물속에 산이 있으니 나, 여기 오도 가도 못하고 뜬구름 더불어 바장임이여    김학송시인의 전문     김창영시인은 아마도 도를 딲고 있는상싶다. 시인지 감오문(感悟文)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ㅡ 장춘식연구원이 김창영시인의 련작시 평론중에 한 말이다.      그럼 여기서 료동문학 호롱불금상 수상자와 대상수상자인 서정순씨와 편도현씨의 근작시도 살펴보자. 본문에서는 이들의 수상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근작시만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며 더불어 아무런 폄하나 저의도 없음을 명백히 밝혀둔다    맨드라미(鸡冠花)     (심양)  서정순   올망졸망 장독대사이로   빠알간 벼슬만 내여놓은   수탉 한마리   사위오면 닭 잡아준다는   집주인 말에   제 먼저 놀라   장독사이에 숨죽이고   간이 달랑   빠끔히 내다보네 .시. 숙명   ㅡ어머니의 83세 생신을 맞으며    (심양)  편도현 그 흔하디 흔했던 밭머리의 흙도 아니였소이다 무너진 돌담밑에 얼기설기 그것도 아니였소이다 바위돌 틈새에 가는 실뿌리 훅€?불면 쓰러질듯 가냘픈 신세 그러나 질기디 질긴 그 힘은 쇠사슬처럼 강파르게 살았소이다 헐벗어 드러난 하얀 속살 눈물겹게 가슴 시린데 바위에 매달려 안간힘 쓰며 여린 새싹들을 키우는 크나큰 사랑 어설픈 삶 시작할 때 이른봄 서리찬 새벽하늘은 그리도 차거웠고 밤하늘에 우뢰 울고 비바람도 사나웠소이다 걸음걸음 피눈물 나도록 세상살이 너무도 고달팠소이다 밤이나 낮이나 따로없이 푸름을 이고지고 보듬으며 언제나 분주했던 그 세월 몸에 푹 배인 그 땀이 이슬되여 축축이 젖어왔소이다 그렇소이다 모진 세파 그속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살아왔소이다 한잎 두잎 푸름을 받들며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이 두편의 시 모두가 작년에 료녕조선문보 최룡관시인의 말을 잠간 인용해본다.      시는 한행에서 명사+동사를 중심으로 써야 하고 규정어를 쓸려면 꼭 한번 이상은 쓰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시어는 시인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창조력이 있기때문에 더욱 매력적이고 더욱 빛이 난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시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답하려면 우선먼저 시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까지도 시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간단한 것이 곧바로 [신과의 대화]이라는것 같다. 이렇듯 “시는 예술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우리 모두 인정을 한다면 전통시든 현대시든 또한 하이퍼시든 이제 공존에는 그늘이 없다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불교에 아집을 버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꼭 내것이 맞고 내것이 제일 좋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고집은 이제는 존재의 가치마저 상실된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것이며 또한 부대끼면서 배신과 배격마저 관용으로 보듬어안는것이다. 모르면 배워야 하고 배우고나면 항상 즐거운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오죽하면 공자마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였겠는가?   나오면서   십여년을 문학과 쭈욱 담을 쌓고 살아오다가 이제 겨우 시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 내가 주제넘게 너무 많은것을 지껄이고 있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세수의 시가 발표작도 아니고 다소 어설픈 곳이 있더라도 독자들이 관심있게 읽어주면 그것으로 이제 만족하겠다. 끝으로 새로운 한해 여러 동우시인들도 새로운 출발로 새로운 자아의 길을 새롭게 열어가길 진심으로 축원해본다       심양에서  2014년3월 5일   //////////////////////////////////////////////////////////////////////// 료녕문보                한 시인이 피워 올리는 중한 양국 시의 향기      올 여름 김금용시인을 만난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김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틈이 생길 때마다 그녀의 시를 음미하다보면 무더운 이 여름날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겠다는 예감에 나는 마냥 행복해진다. 시 하나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김시인이 내게 던져준 메시지는 경건함과 그 경건함 너머 가벼워지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시로 만났다. 지난 5월 한국 성남문화원과 심양시조선족문학회가 공동 주최하고 주심양한국총영사관이 후원한 시 낭송회에서였다. 심양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한국의 시인들과 심양의 시인들이 어우러진 시 낭송회에 김금용시인이 참석한 것이다. 그 날 시 낭송과 행사 후 뒤풀이장소에서 그녀가 부른 "옛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시가 왜 두루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김금용시인의 시사랑은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에 대한 사랑이 피워올린 시의 향기는 이미 국경과 민족을 뛰어 넘어 중국과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한국시단에 피워올린 한떨기 꽃--“중국 현대시”      2006년 김금용시인은 “문화혁명이 낳은 중국 현대시”란 번역시집을 출간하며 한국시단에 중국의 현대시를 번역 소개한 첫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8년 첫 개인시집 “광화문 쟈콥”을 발간한데 이어 2006년 두 번째 개인시집 “넘치는 그늘”을 발간한 그녀는 한국시단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1991년부터 남편을 따라 북경, 청도, 심양 등지에서 거주하며 지금까지 10년 넘게 중국에서 생활한 그녀가 유독 중국 현대시에 빠져들게 된 것은 순전히 시인다운 호기심 때문이었다.    “중국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무엇보다 현대 중국시단이 궁금하였어요.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 근대문학사의 발전과 그 경향에 대해서는 관련 논문이나 서적들이 많이 있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1967년부터 1977년까지 10년간 겪은 문화혁명 당시와 80년대초까지 그간의 문단 흐름이나 시 경향에 대해 많이 궁금하였어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김금용 시인은 2000년 3월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하며 연구대상을  6, 70년대 이후의 중국현대시로 선택했다.     “한국에서 중국시를 연구하는 사람은 적지 않아요. 하지만 대부분 당.송시에 국한되어 있지요. 한국의 저명한 한학자 허세욱선생님의 중국현대문학연구도 문화혁명 이전까지만 소개되어 있더군요. 당연히 6, 70년대 이후의 중국시들이 한국에선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있었죠. 저는 이것이 바로 중국의 특정적인 역사 시기의 사회현상과 문화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에 연구가치가 아주 크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현대시에 대한 김금용시인의 궁금증 저변에는 그녀의 시인다운 사명감이 깔려있었다.    중국 현대시의 생성과 발전에 대해서 중국 조선족시인으론 할빈의 한춘시인이 비교적 상세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한춘 시인의 연구에 따르면 70년대 말 80년대 초 조용하던 중국 시단이 흔들리며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이름 없는 청년시인들이 맘속에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안은 채 암흑의 과거와 타협을 거절하는 결단을 이색적인 시로 토로했는바 이들이 바로 "몽롱시"다.    몽롱시가 사회의 전면적인 승인을 받기까지는 결코 순풍에 돛단 격이 아니었다. 전국 시단을 석권하기까지 많은 설전과 필전을 겪었다. 몽롱파 시인들은 과거의 직설과 이론적 서정방식에서 탈피하여 생활의 비밀을 이미지에 용해시켜 심각하고 다층차적인 정감을 암시와 상징 속에 용해시킨 시작품을 퍼내였다. 현실의 시공간 질서를 그대로 재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시인 주체의 정서흐름과 상상의 론리에 따라 세계를 새롭게 조립했다. 이들의 시작품은 거의 다 언어의 생소화를 도입한 이색적인 작품들이여서 "몽롱시"라는 중성명칭이 생기게 되였으며 몇 년동안 중국 시단의 장안화제로 긍정과 부정의 도마 우에 놓여 이런 저런 주목을 받는 와중에 드디어 생존 입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금용시인은 중국 시단의 발전 전환점을 예리하게 보아낸 것이다. 김금용시인은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하여 석사과정를 지도해주던 우극곤교수의 도움을 받아 중국 당대시라 할수 있는 70, 80년대 시작품들을 대량으로 접하며 중국시단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고 중국의 현대시를 한국에 소개하기에 이른다. 그때의 심경을 김금용시인은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중국이 문혁시대를 넘기며 중국 시단엔 '귀거래파'가 등장하고, '몽롱시파'가 나오고, 다시 혼돈의 '신세대파'가 나왔어요. 그들만의 시대 상황 변화에 따라 시인들의 사회적 위치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나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였어요. 중앙민족대학의 우극곤지도교수님으로부터 현대시를 한 편 한 편 소개받고 해석을 해나갈 적마다 나는 그들의 시대적 아픔과 인성에 대한 련민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또 내 것이 되고 내 고통이 되였어요. 그때부터 시인으로서의 감수성과 리해만을 내 힘이라 믿고 중국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하였어요."    김금용시인은 애칭, 고성, 북도, 서정, 류사하 등 시인들의 시를 특별히 좋아하였는데 김시인은 매달 이들의 시를 한수씩 번역하여 한국에서 월간으로 나오는 "우리시"에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렇게 한국에 소개한 시가 무려 70여수에 달한다. 2006년 김시인은 그중의 40수를 엄선하여 "문화혁명이 낳은 중국 현대시"란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우극곤교수는 김금용시인의 단행본 출간에 즈음하여 "김금용녀사의 중국 신시집은 16명 시인의 40여편 작품만 수록하였지만 20세기 80년대 이래 중국 신시의 정수로서 같은 시기 시의 변화와 발전을 측면적으로 보여주며 한국 시인이자 학자인 김시인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시단에 주는 큰 선물--“나의 詩에게”      김금용시인은 "중국시를 공부하면서 오히려 우리시에 대한 애정이 날로 더해갔다."고 고백했다. 김시인의 이러한 애정은 당연하게 2008년 김남조, 정진규, 이승훈, 문효치, 박제천, 문정희, 조정권 등 저명시인의 대표시들을 묶은  "나의 詩에게"란 중문판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한국 대표시인들의 시를 건드린다는 것은 외도에 주제넘는 짓임을 잘 안다. 더군다나 시의 행간에 숨겨진 온갖 응축과 비유, 상징의 시어들을 어찌 감히 건드릴 수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도를 멈추지 못한 건 순전히 시에 대한 욕심, 사랑, 정열 때문이였다. 죽을 때까지 시를 놓을 수 없을 것이기에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이라도 멈출 수 없었다."는 김시인은 시를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시단의 경향과 위상을 중국어로 해외에 알리는 일에 동참했다는데 큰 기쁨을 느낀다고 심중을 토로했다.    1964년과 1992년 2차에 걸쳐 중역본 "한국시선"을 중국에서 출간한적 있는  한국의 저명한 한학자 허세욱교수는 "나의 詩에게" 출간을 두고 "중국이 점차 정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인간과 시의 시대로 탈바꿈해서 이미 우리와 한길로 들어섰다는 느낌이다. 그럴수록 시의 교류를 통해 한중 두 나라 사이에 령혼의 깊은 리해를 다져야 한다. 이럴때 그 도랑을 파고 다리를 놓는 이가 있다. 우리 시단에서 촉망받는 현역 시인 김금용씨가 한국 시단에서 대표적인 시인 일곱 분의 대표작을 중역 출간하는 일이 그렇다. 그것은 두 나라 문학교류는 물론 한국의 전위에서 행동하고 고뇌하는 한국 시인의 살아있는 심금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미거로 보인다. 김시인의 역간은 나에 비해 더욱 의지적이요 더욱 발전중이다. 이 시집의 출간함으로써 두 나라의 독자는 물론 두 나라에서 한중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부교재로 제공되였으면 한다."고 평가하였다.                     김금용시인과 수팅(舒婷)과의 만남        김금용시인의 시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인간면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저 그녀와 서정사이에 있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중앙민족대학에서 중국 현대시를 전공하며 김시인은 서정의 시에 빠져들게 된다. 서정의 시 "상수리나무에게"를 원문없이 줄줄 낭송하는 김시인은 졸업 론문 테마도 "서정의 시"로 정했을 정도다. 김시인은 론문을 완미하게 완성하기 위해 남편까지 동원하여 서정을 찾은 결과 서정이 사먼에 정착하였다는 것이였다. 얼마 후 북경에 회의하러 온 서정이 웬 한국 부인이 자신을 애타게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사관에 연락하였지만 그때는 김시인이 이미 한국으로 귀국한 뒤였다.    2004년 남편따라 청도에 거주하게 된 김시인은 마침내 청도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서정의 친구이며 같은 몽롱파 시인인 조안나 교수를 통해 서정과 연락할 수 있게 되었고 이어 한국 영동에서 열린 아시아 시인대회에 서정이 참가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김금용시인은 중국 청도에서 한국 영동으로 나가 극적인 상봉을 이루게 된다. 서정의 시를 읽고 서정과 만나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때 서정시인과 함께 온 중국 문학평론가인 부군과 함께 서울 시내를 돌며 주인으로서의 정성을 다했다.      김금용시인은 어디를 가나 시에 대한 뜨거운 열정만은 여전했다. 지금 심양에 거주하고있는 그녀는 올 9월 있게 될 심양 한국주에 맞춰 "심양한중시인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있다. 한국에선 김 남조, 오탁번, 김종해, 이근배,..등 대표적인 시인들이 참석할 예정이며 중국 심양의 사 주간이자 시인인 이수산과 조선족시인들 대표인 시인협회장 김창녕 시인이 역시 함께 중국과 조선족 대표시인들을 모시고 진정한 한 중 문화교류의 장을 열어갈 참이다. 이에 중국,한국, 조선족 자치주 모두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리라 믿는다.                                                             -  중국 심양 료녕성 료녕신문 이창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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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    詩란 전례를 타파하는것, 고로 쓰기가 힘든것... 댓글:  조회:4018  추천:0  2016-07-15
[10강] 시 창작의 단계.2  강사/김영천  지난 시간에 우린 시창작의 네 단계 중 우선 씨앗  얻기와 씨앗의 성숙과정에 대해서 공부한 바가 있  습니다. 이번 연휴 동안도 아마, 새로운 씨앗을  가슴에 많이 품어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는  매사를 시의 씨앗으로 보려고 하는 노력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지겠지요  오늘은 그 연속적인 강의로 세번째 단계인 구체적  인 언어찾기를 한 번 이야기해 볼까요?  우리는 시의 씨앗도 심었고, 그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여 이제 무성히 자라기 까지 했습니다만, 열매를  맺는 과정을 위해선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야합니다.  전에 누구시던가. 시를 쓰는걸 산모의 해산  고통에 비교하신 분이 계시는데요. 정말 그와 꼭  같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 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적당한 시어를 찾기 위해서 정신  집중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알맞는  시어를 찾기는 매우 힘이듭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곤 했구요. 시를 쓰다  막히면 노트를 덮고 남의 시를 읽곤 했지요.  이렇듯 정신집중을 하기 위해 시인들은 아주 괴팍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요. 보통은 커피를  계속 마시거나, 줄담배를 피워대지만,실러는 서랍에  사과를 넣어놓고 그 향내를 맡는 버릇이 있었다하며  웃으운 이야기이지만 온통 옷을 다 벗어부치고서야 시  를 쓰는 괴벽의 시인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무조건 시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이 번에 자기 스승인 서정주를 공격해서 구설수에 오른  고은은 서정주를 '언어의 정부'라고 칭할 정도로 서정주  시인은 언어 구사력이 능수능란했지만 그에게도 이런  고통은 마찬가지이었습니다.  그가 를 쓸 때 맨 먼저 쓴 것이 1연이  아니고 3연이었다합니다. 3연을 써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는 사이에 1연과 2연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 때의 심정을 시인은 "그 것은 마치 내게  있어서는 어느 구석에서 잊어버렸다가 앞서 찾아내어  쓰게 되는 낯익은 내 옛날의 소지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감개이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연만은 사정이 달라 며칠이나 걸렸다 합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볼까요?  "그러나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표현이 되지 않아, 새  벽까지 누웠다 앉았다 하다가 그만 자버리고 말았습니  다. 그리하여 이 것은 며칠 동안 있다가, 우연히 어  느날 새벽 눈이 뜨여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상당히 싸늘한  새벽이었는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 놈을 생각하자  그것이 용이하게 맺어졌습니다."  언젠가 한 번 인용한 시이기도 하고, 지면상 번거러워  여기 옮기지 않으니 위의 글을 참조하며 여러분들이  각자 한 번 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오세영님의 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가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쪽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늘 보면서 그냥 쉽게 지나처버리는 것  들이지요. 과일마다 다 둥글다 하는 것 여기  모르는 분들 없쟎아요.  능금을 먹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시의 씨앗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제 주위의 아주 평범한 곳에서  시의 씨앗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시는 "자기 희생으로서의 사랑의  정신"을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 이 시인의 생각이 어떠한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 표현하는지 시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  습니다.  "이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이다.  그리하여 우선 나는 열매와 대립되는 사물의 기능성  을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원래 대립되는 기하학적  모형은 직선이라는 것, 직선은 원과 달리 둥글지  않고 날카로운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지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서 생각은 다른 한 편, 원의  상징이 열매라면 직선의 상징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  으로 발달하여 갔다. 물론 쇠창살이나 젓가락이나  텔레비젼 안테나 따위의 사물도 직선의 상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제인 능금의  전체 의미만으로서는 적합한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쇠창살이나 젓가락이나 텔레비젼의 안테나  는 인식 대상인 능금과 아무 관련 없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능금과 관련 있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드디어 나뭇가지와 뿌리, 가시  라는 직선의 상징들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뿌리와  가지는 안테나나 젓가락, 쇠창살 등과 달리 능금  열매가 거느리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무책임한  사고인 환상과는 달리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시인의 말을 들어볼 때 우리가 시를 쓰며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말들을 조합해 놓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며 그렇게는 결코 좋은 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의 씨앗의 성장이나 발전, 그리고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시의  지망생들은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과 아울러 깊이 있는  시적 사고, 정확한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  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 다듬기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조태일은 지금 막 태어난 시를 천연의 옥이라고  한다면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 옥을  더욱 정련되고 세련되게 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에 제가 누구에겐가 이 말을 한 것 같습니  다만, 즉석에서 다듬는 것이 아니라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후에 하는 것이 좋다구요. 지금은 똑같은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하기에 다듬는 효과가 적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작가의 입장이 아닌  독자의 입장으로 보고 객관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다듬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 창작의 네 단계가 모두 끝이 났지만  여러분들을 위해서 좋은 시를 몇 편 올릴 테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를 쓰다가 막히면  좋은 시들을 꺼내놓고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강연호 님의   밑바닥 상처는 고요한 법이라고  나 어느 날 무심코 중얼거렸네 강물 위  빗방울에 흔들리는 무수한 파문처럼  사소하게 가슴 다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파서 자주 엄살 떨었는데  저 파문 이는 강물의 표면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도 제 힘 다 해  빗방울 튕겨내는 걸 보았네  깊은 속내까지는 덧내지 않으려  멈칫멈칫 맺혔다 풀리는 동심원을 보았네  이 사내 저 사내 다 받아주는 작부의 자궁 속에도  딱딱한 각질처럼 굳은 순정 하나는 있어  열리지 않고 끝내 고요하리라  나는 너무 쉽게 가장했나 보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아닌 상처를 들쑤셨더랬네  그 길의 상처에 빚 갚을 일 많았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  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  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네  강희안 님의   머물렀다 다시  떠나는 것 있데  삐비꽃 안고 쓰러진  깊은 강 물결 소리  뿌리 밑 남은 힘으로  풀이 다시 일어나데  시간의 깊이로 묻힌  파란 달빛 그늘 아래  강물이 지고 가데  시 들이 좀 어려운가요?  그러나 여러분들도 이런 시는 많이 읽어보셔야 합니다.  난해한 시는 읽으실 필요는 없지만 여기 올리는  시들은 아주 잘 표현된 것들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아주 흔히 보면서도 시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시로 써낸 좋은 시 한 편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오늘 강의를 마칩니다.  고형렬  그 곳에 가면 셋이시면서 혼자이신 분이  단연 방문을 닫아놓으시고 고요히 계십니다.  한 분은 오른 편 한 분은 왼 편에 계신데,  어느 한 분도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혼자이면서 셋으로 계신가 봅니다.  변함이 변함 없어 세상이 무료하지 않아  구멍이 없으면서 온몸으로 숨을 쉬시면서  남해를 숨긴 산을 내다 보시고 턱, 앉아 계십니다.  한 세월 더 넘게 셋이 방문을 내다보시며  말 한마디 나눔이 없이 아침저녁을 맞습니다.  아무래도 선암사 대웅전의 삼존불에서 시의  씨앗을 얻은 것 같은데요. 그 전개과정을  보면 은연 중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이론이  접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를 위해선  이렇게 전혀 다른 요소가 하나로 녹아들어  시를 만들 수도 있으니 우리가 아는 것 하나  하나가 다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여러분의 지식, 지혜, 마음들을 아주 소중히  다루시기 바랍니다.   ============================================================   ―신용목 (1974∼ ) 저녁이 하늘을 기울여, 거품 바다 그득 한 잔이다. 속에서부터, 모든 말은 붉다. 불길 몸으로 휘는 파도의 혀. 돌아와 한 주전자 수돗물을 받았다. 이 위로, 몇 척의 배가 지나갔을까. 불에 올렸다.     리듬이 탄력 있게 넘어가는 시다. 시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화자는 화가 나 있다. 누군가의 말에 큰 상처를 받은 것 같다. “말을 그따위로 해!”      울화로 부글부글한 화자는 바다로 달려간다. 아마 바닷가 횟집에 들어갔을 것이다. 횟집 유리창 너머 하늘 가득 노을이 넘실거렸으리라. 화자는 큰 잔 가득 소주를 붓고 벌컥, 그득 한 잔 노을을 삼키는 바다와 대작했으리라. 화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은 비분으로 붉은데, 그만큼이나 붉은 파도의 커다란 혀가 화자의 생채기 난 속을 핥아줬으리라. 술을 많이도 마셨나 보다. 집에 돌아와서 한 주전자 가득 수돗물을 받는다. ‘이 위로, 몇 척의 배가/지나갔을까.’ 주전자에 담긴 물만 봐도 그 심상이 떠오를 만큼 오래 들여다 본 바다. 바다의 위로가 화자를 어느 정도 진정시켜주었나 보다. 이제는 차분히 차를 끓여 마시려는 걸 보니.  
1548    詩作은 풍부한 사유를 많이 하는 것... 댓글:  조회:4056  추천:0  2016-07-14
[9강] 시 창작의 단계1  강사/김영천  시 창작의 단계는 따로 학문적으로 정립된 항은 아닙니다.  이는 다만 조태일님의 분류에 따르는 것이며, 이제 껏  강의해온 이야기들을 네 단계로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루이스란 비평가는 시 창작의 과정을  1.시의 씨앗을 얻는 단계  2.씨앗의 성장과 발전의 단계  3.구체적 표현을 찾는 단계로 나누었는데  조태일은 여기에 시다듬기 과정을 하나 더 첨가한 것입니다.  이는 그도 교재에서 밝힌 바 있지만 정답일 수 없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마다 시 창작과정이나 그 방법은 천차만별  이며 천인천색이기 때문입니다.  1)시의 씨앗 얻기  루이스는 시의 씨앗 얻기를 가리켜 "그 것은 어떤 감정,  어떤 체험, 어떤 관념,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나 한 행의  구절일 수도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불현듯 스쳐오는영감, 무의식 속에서 툭,하고  떨어져나온 하나의 생각, 강력한 심리적 충격이나  어떤 인상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  뭔가 모를 충동에 의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생기게 하는 것들이 모두 시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시를 하나 읽어 보고 살펴볼까요?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별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는 신경림의 전문입니다. 그러면 신경림은  어디에서 이 시의 씨앗을 얻었을까요? 시인 본인의  말을 들어볼까요?  "내 고향 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다. 나는 어려서 나무꾼을 쫓아 몇 번 그 꼭대기  까지 오른 일이 있다.  산정은 몇만 평이나 됨직한 널따란 고원이었다. 그 고  원은 내 키를 훨씬 넘는 갈대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강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에  갈대들은 몸을 떨며 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갈대들의 울음에서, 나는 사람이 사는 일의 설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이렇듯 시의 씨앗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체험한 데서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좀더 의도  적이며 집중적인 태도로 씨앗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모임에서 산행을 하더라도,  그저 옆사람과 재잘재잘 이야기만 하고 올라가서  밥먹고 술먹고 그냥 내려왔다가는,시를 쓰기 위해  고민하며 무엇인가 떠올리려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만 반드시 메모할 만한 연필과  노트를 가지고 가서 작은 풀꽃의 이름을 동행에게  물어서 적고, 그것들의 상태도 메모하는 것이 좋습니다.  옹기 종기 모인 것이 병아리떼 같다든지, 잎은 초라한데  꽃이 예쁘고 향기가 천리는 갈 것같다든지,  꽃이름을 모르면 그려가지고라도 오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절에 갔다하면 약수나 마시고 대웅전 부처나 보고  오는 것보다는 절의 내력을 적고, 부처님이나 문의 무늬  핑경(풍경)의 소리, 노거수(오백년, 천년된 나무들의  내력) 절에 있는 전설, 절의 뜰에 자라는 꽃들, 기타  우리가 그냥 흘러지나가버리는 여러가지 메모장을 빽  빽히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집안에서 일을 하다가도  문득 창 밖을 내다 보다가도  정말 갑자기 시의 씨앗이 툭 튀어나오면 바로 적어놓으라  는 것입니다. 물론 그 즉시 시를 쓰기시작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곧바로 메모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있다 써야지 하고 일이 끝난 다음엔 이미 기억은  사라지고, 내가 무엇을 시로 쓸려했더라 아무리 생각  해도 이미 늦습니다.  2)씨앗의 성장  이 과정은 부단히 시적 사고를 가짐으로서 쉽게  해결할 수가 있지요.  좋은 글을 쓰는데 3多를 주장했던 구양수는 다독, 다작  보다 多商量을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다상량은  생각을 깊고 풍부하게 많이하라.  사유를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젊은 학생들이 구양수더러 묻기를 나랏일에  그렇게 바쁜데 무슨 틈을 타서 그렇게 훌륭한 글을 줄줄  쓰느냐하니, 나는 정말 시간이 없다. 나의 시간은 전부  억지로 짜낸 시간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어떻게  시간을 짜내는가 묻는 학생들에게 아주 솔직히 대답합니다.  첫 째는 말을 탈 때, 둘째는 잠 잘 때, 셋 째는 화장실  에서 일 볼 때 시간을 짜낸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업무외의 시간은 모두 시적 사고를 하는데  썼던 것입니다. 우리도 시를 쓰는데 따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것이나 책상 앞에 백지를 펴놓고 시험  보듯하는 것은 오히려 시상을 막는 일입니다.  정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어딜 가나 메모지를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던, 손가락질을 하던 일일이 메모하곤 합니다.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얼른 일어나서 단 한 줄의  시상이라도 적어놓고 잠을 잡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그 시상에 연상 작용으로 시를 쓰곤 하였습니다.  이 시적 사고는 무수한 체험들과 상상력이 가장 큰  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입니다.  조태일에 의하면 "과거의 체험들이나 또는 앞으로 겪게  될 체험들이 적당한 햇빛과 물, 바람이 되어 시의 씨앗  들에 싹을 틔우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상상력은 여러  체험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면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체  적인 이미지들을 만들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사고란 상상력을 펼치면서 시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 보는 일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 한 편을 읽어 봅시다.  감정을 실어서 소리를 내어 읽어봅시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전문  시가 참 좋지요.  이 시를 쓰게된 과정을 씨앗을 얻으면서부터 성장하는  과정까지를 시인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곧 종이쪽지를 꺼내 '샘=슬픈 눈'이라고 메모를 해놓고  역시 평소의 버릇대로 한동안 이리저리 생각을 굴렸다.  그러자 이윽고 떠오른 것이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이라는 구절이다.마음에 드는 구절이  었다. 성숙한 영혼의 샘터에 고이는 맑은 물은 승화된  고통의 표상이 아닌가. 눈은 그러한 영혼의 창이다.  그리고 그 눈에는 그 수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동안에  느꼈던 갖가지 슬픔이 어려있을 수 밖에 없다.  다시 생각에 잠긴 내가 한참 만에 찾아낸 것은 '낙화  속의 이별'이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 발견이  우연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상 그 '낙화 속의 이별'은 그 무렵 내가 막연하게  품고 있던 감정의 한 갈래와 유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감정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다. 그러나  한창 여자가 그리운 나이에 객지에서 혼자 고달프게 살다  보니 때때로 그런 실연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해서 어느 날 나는 자신의 그 상상적  실연을 꽃잎이 지고 있는 벚나무 아래서 헤어진 아름다운  이별이었다고 역시 상상적으로 미화해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낙화 속의 이별'이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용문이 좀 길지만 왜 이렇게 다 여러분께 말씀드리냐면  우리가 시를 쓰는 방법의 예시와 같아서 입니다.  이제 그의 결론 부분을 다시 들어볼까요?  "일단 떠오른 그 말은 곧 새로운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그것은 낙화 자체가 바로 꽃과 꽃나무의 아름다운 이별  이요. 또 장차 열매를 기약하는 값진 이별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는 연상이다. 나는 이 연상의 내용을 처음에 얻은  마음에 들었던 구절과 결합시켰다, 그랬더니 낙화의 이별  의 고통이 인내를 통해 '슬픈 눈'을 가진 '성숙한 영혼'을  이루어 간다는 줄거리가 잡히게 된 것이다. 줄거리가  잡히면 시를 쓸 수 있다."  지루하신가요?  어려운 이론보다 시인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시를 써  나아가는가를 엿듣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론 강의와 이렇게 시인이 자기가 쓴 시를 설명하는  것을 한 편씩 넣으면 어떨까요?  그 것이 더 시 쓰기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종해님의 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시들 것은 다 시들고 떨어질 것은 모두 떨어졌다.  들판이여,  목마른 이땅을 기르던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숨고  새벽에 일어나 저희 우물을 긷던  그 부산한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집집마다 등불을 끄지 않고 이 밤에 다들 자지 않지만  오오, 이제 바람이 불면 마을의 문들은 꼭꼭 닫으시오  허나 대문에 빗장을 내다지르고도 저희는 잠들지 못한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익숙하게 비벼댈 이 깊은  어둠속에서  저희의 불빛은 더 희게 번쩍인다  캄캄한 숲속에서 컹,컹,컹,컹 울리는 저 울부짖음  사나운 한 마리 짐승의 울부짖음이 차라리 그리운  이 외롭고 어두운 날  목마른 대지에 젖을 먹여 기르던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숨고  들판은 새로 태어날 제날을 안고 머리를 숙이었다  이 외롭고 어두운 날, 아버지여  시들은 풀꽃의 죽지 않은 뿌리, 짓밟히고 억눌린  모든 것의 얼굴들에  이제 곧 저희의 배가 가까이 옴을 예언하소서.  ==============================================================   귀에는 세상 것들이 ―이성복(1952∼ )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 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시편 가득 영롱한 새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는 듯하다. 시인의 내면, 영혼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한편 그 소리를 도리질하는 시인의 내면, 영혼의 절망에 찬 탄식으로 더욱 자지러진다.  신기(神氣)가 오른 듯한 시집, ‘남해금산’에서 옮겼다. 1986년 7월 5일 초판 발행. 자서(自序)에 따르면 ‘대체로 지난 6년 사이 씌어진’ 시들이라니 1980년부터다. 책날개에 소개됐듯이 ‘서정적 시편들로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시집이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이란 말이 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읊으며 즐긴다’는 어여쁜 뜻을 가졌다. 그런데 그 쓰임이 혹독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개의치 않고 저 혼자 한가한 시를 읊는 시인들에게는.  탐미적 시인 이성복이 ‘홍방울새 소리’를 못 듣게 만든 ‘흐리고 흐린 날’의 시들, 그 서정에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그 서사에 가슴이 저리다. 이를테면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그때부터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개울음 소리를 질렀다.’(‘남해금산’에 실린 시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에서)  
1547    詩에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자... 댓글:  조회:3780  추천:0  2016-07-14
[8강] 시 창작의 바탕.2  강사/김영천  먼저 시간에 시창작의 바탕에는 체험과 기억,그리고  상상력이 있다고 했는데 이 시간엔 마지막으로 상상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상력이란 우리가 모두 너무나 잘 아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상상력 하나로 뉴턴이 보이지 않는 만류인력  을 발견했고, 에디슨이 발명품들을 만들어냈지요.  장님이었던 호머가 세계 최대의 훌륭한 서사시를 남긴  것이라든지 청각장애자인 베토벤이 위대한 교향곡을  남긴 것 모두가 다 상상력의 결과입니다. 오직하면  아인슈타인도 "지식보다 더 중요한 건 상상력이다"  하였겠습니까?  그러면 문학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의 밑바탕이 되는  이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 개념을 살펴보면  상상력이란 과거에 체험했던 사물의 이미지를 기억해  내고 이를 다시 재생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상황에 의해 환기된 감정을 하나의 시 작품으로  형상화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상상을 할 줄 압니다. 상상이란  쉽게 말하면 현재에 없는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꿈꾸고 갈망하고 그것들을 표현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또한 현실을 새롭게 재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진규님의 를 읽고 넘어가겠습니다.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지척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  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 오늘 가득하다 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만개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  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  미터 이상 왕복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  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광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사랑을 채밀하고 싶은 사람아,  그 건 아직도 유효해!  이 시는 벌이 날아드는 노오란 산수유 꽃을 매개로 하여  자신이 나타내려는 생각을 표현하였습니다. 시는 읽는  사람의 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하기에 다른 해설은  생략합니다만 아무튼 이 시의 상상력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사랑의 속성을 일상적인 자연 정경을 통해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정진규는 사물을 새롭게 보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독특한 인식의 차원을  얻어낸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를 많이 읽어보는 것이 좋으므로 여기에  이수익님의 를 올리니 함께 읽어볼까요  세상 물정 어두운 山 하나와  제 갈 길에 취한 계곡물 하나가  서로 잘 만나  단란한 一家를 이루며 사는 곳.  남루도 이쯤이면 괜찮다.  수척한 배낭 메고 入山하는 중늙은이  하나  가물가물 흔들리며 가는 閑中.  이 시에 대한 이숭원 박사님의 해설을 잠깐 빌려봅니다.  "대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다. 이 시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중늙은이가 등장하는데 그가 과연 한가한 마음으로  올라가는지 보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시인은 그 대상을 거의 자연과 동화된 듯한 상태로 묘사  하고 있다. 한 곳에 붙박혀 있는 산과 끊임없이 흐르느  물을 세상 물정어두운 산과 제 갈 길에 취한 물로 대비적  으로 비유한 것도 시인의 주관적 해석에 의한 변용이다"  그의 해설은 한참이나 더 이어지지만, 생략하기로 하고요.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늘 보면서도 알아내지 못한 것들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시로 형상화해내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더러 쓰라 하면 이렇게 쓰겠지요.  깊은 산  구비구비 골은 흐르고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는가  중늙은이 하나  바랑을 매었네  구름은 저리도 한가로운데.  이 시는 내가 지금 급조한 것인데 위의 시와는  그 품격이 다릅니다.  밑의 시는 자기가 보는 것을 아무 상상력의 재  창조 없이 그대로 사생화 그리듯이 그려낸 것이고  위의 시는 그야말로 자기의 모든 체험들을 녹여  상상력을 발동시킨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초보이신 분들에겐 아직 조금 어려운 단계이지요.  그래서 아래에 제가 강의하면서 바로 써내려간  그런 시이어도 만족합니다. 우선은 그렇게라도  시가 되겠다하는 것들은 바로 시로 옮겨보십시오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그 시들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보십시오.  자, 그럼 오세영의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잎이 지면  겨울 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무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 소리를 들어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서는 고음이  아랫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무는  현악기,  큰바위에서는 강음이  작은바위에서는 약음이 울리는 계곡은  관악기,  오늘처럼  천지에 흰눈이 하얗게 내려  그리운 이의 모습이 지워진 날은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감동은 눈으로 오기보다  귀로 오는 것,  겨울은 청각으로 떠오르는 무지개다.  정말로 상상력의 극치이지요.  우리가 늘 들으면서도 귓가로 흘러버리는 소리들을 잡아  하나의 심포니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겨울 날 우리들의 귀에 익은 일상적인  소리들을 전혀 새롭고 신선한 것들로 바꾸어 놓고 있습  니다.  여기서 잠시 조태일님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예전에 들을 수 없었던 자연의 소리를 시적 공간 속에  서 아름다운 세계로 창조해놓은 것이다.독자들은 이러한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연의 소리가 빚어내는 오묘하고도  깊은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체험 역시  독자들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변용하여서  그에 값하는 새로운 의미와 세계를 창조하게 하는 힘이  면서, 독자에게는 그 창조된 세계를 체험하고 공감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이 시인과  작품과 독자를 한데 묶어주는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정현종님의 을 한 번 읽어볼까요?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부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아주 짧은 시이지만 의인화된 나무는 여러가지 우리  삶의 이미지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시인의  이러한 상상력이 빚어낸 이미지들을 통해 황홀한  한 생명체로서의 나무의 존재를 체험하고 그 것의  구체적인 형상까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좀 길어졌지만 좋은 시 한 편을 더 올리니  조용히 묵상하듯 실지 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셔서  맘껏 상상력의 세계에 심취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준관의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녘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별이  태어난다   ========================================================       멋진 사람  ―김승일 (1987∼)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었어. 짱깨가 철가방에서 너를 꺼냈지. 너는 그렇게 태어난 거야. 고모가 자주 하는 얘기. 나는 그 얘기를 너무 좋아해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나만 그렇게 태어났지? 이것은 오래된 바람. 내가 배달된 해에, 할아버지가 둘 다 죽었다. 집안에 큰 인물이 태어나면 초상이 난다지. 이것 역시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 나는 얼마나 유명해질까? 기대가 된다. 그러나 손금이 평범해서 나는 울었지. 그래도 손금이 평범하다고 우는 애는 나밖에 없을 거야. 있으면 어떡해? 조금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실컷 울었더니 손금이 변했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었다. 나는 평범함보다는 평평함이 좋아. 모르는 사람들이 나한테 화를 냈다. 괜찮아요. 열차가 오려면 십 분 남았어. 나는 이목을 끄는 사람. 나중에 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싫었어요. 어쨌든     할아버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혹독한 현실. 하지만 사명감은 갖지 않을래. 사명감이 없는 애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있으면 어떡해? 있으면 좋지. 짱깨가 내 앞을 지나갔다. 폭주족처럼. 이목을 끌며 멋있게. 어쩐지 시인이 놀리는 것 같아. 누구를 놀리는 걸까? 세상을? 그렇다면 괜찮아. 그런데 나, 독자님을? 그건 옳지 않아! 그렇다, 시인은 까부는도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의 탈을 쓰고 까불까불 시를 이어가는 어법이 재미나다.      고모랑 할아버지들 얘기만 있고 엄마아빠는 그림자도 없으니 화자는 고아다. 고아는 만인의 아이. ‘너는 그렇게 태어난 거야.’ 아이는 제가 특별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는데 그 근거가 고아인 데다 태어난 해에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셨다는 것. 얼마나 특별한가! 아이는 거기 만족하지 않고, 제가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증표를 열심히 찾는다. 그런데 너무 평범해! 사람들이여, 나를 좀 봐 주세요! 아이는 외롭게 한심한 짓, 화를 돋우는 짓들을 저지른다. 나의 소년아! 누구든 몸 마음 머리를, 아니면 그중 하나를 지루하고 힘든 노력으로 열심히 닦으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단다! (이모님 말씀)  
1546    詩란 나와의 싸움의 결과물이다... 댓글:  조회:3957  추천:0  2016-07-12
[7강] 시 창작의 바탕.1  강사/김영천  어제 강의 중 多作은  무조건 시를 많이 쓰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요즘 기성 시인들 중에 일년에 한 편도 작품을 안 쓰는  경우도 있어요. 시란 것은 아무리 마음 속에 시심을 가지고  있어도 쓰지 않으면 필요가 없는 것이고.  시인은 시를 써야 시인이지  시를 좋아한다고 시인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숙제를 하듯 늘 시를 쓰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편이라도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고 며칠 만에 한 편씩, 적어도 1주일에  한 편씩은 써야한다고 봅니다.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계속 써보라는 것이지요.  시를 쓰지 않을 때엔 시작품을 읽고, 생각하고  자기 작품을 고치고  이런 것도 저는 시를 쓰는 행위의 연속으로 봅니다.  다작을 멸시하는 시인들도 있지요.  그러나 불과 수십편 밖에 없는 윤동주도 80까지 사셨다면  수 백, 수 천편을 남겼을 것입니다.  현금의 조병화님, 김남조님, 김춘수님들과 타계하신 서정주님도  아주 다작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 보석 같은 시는 몇 편 안되는데  일 년에 두 세편 써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작에 대해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시되  열심히는 쓰셔야지요.  왜냐하면 한 번 필을 놓으면 영 다시 잡기 힘드니까요.-  저는 이미 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강의 계획에서  조태일님의 『알기쉬운 시 창작 강의』를  사용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외에도 여러 시  이론 책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서적들이  너무 어려운 표현으로 되어 있어 그대로 옮기지 못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교재에서는 시 창작을 체험과 기억, 상상력의  세 가지 바탕으로 나누었는데, 우린 이미 제4강에서  는 강의를 들은 바가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복습하는 차원에서 간단히 설명하면 시를 창작  하는 이들에겐 의미있고 인상 깊은 체험, 고향이나 유년  시절의 경험처럼 가슴 속 깊은 곳의 체험,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체험들이 시상이 되고, 시 창작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전에 설명했으니 여기서는 체험을 씨앗으로 쓴 시를  한 번 감상해보지요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地圖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壁과 天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歷史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욱 자리마다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1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전문  이토록 우리의 체험은 우리의 가슴 속에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이 상상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릴케조차도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만약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 넘쳐 흘러 버릴 정도  로 시를 갖게 될 것이다. 진실로 시는 체험인 것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시창작의 두번째 바탕인 기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억은 과거의 경험들이 잘 보존된 창고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기억으로 발전하고 이 기억은 다시  상상력의 근원이 되어 결국은 시를 창작하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의 재료가 되기 위해서는 체험들도 의식  속에서 잘 삭아야 합니다. 모든 발효식품처럼 좋은 식품이  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숙성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체험이 중요하다고 당장의 체험은 오히려 감정  에 휩싸여 객관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감정만  노출되는 아주 좋지 않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앞 서 말했듯이 시는 체험이라고 주장했던 릴케도  되도록 체험을 빨리 잊어버리고 그에 대한 기억이  무의식 속에서 익어 과일처럼 떨어지는 그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시를 쓰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처럼 시는 체험 그 자체가 아니라 체험의 기억인 것입니다.  조금 길지만 김종길의 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마치 내 체험과 내 기억으로 쓴 시처럼 생각하고 읽어 보세요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봄이면 피는 산수유의 노란 꽃과 붉은 열매입니다.  -----------------------------------------  화자는 어린 시절 심하게 앓던 열병의 체험을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체험의식 속에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는  가난한 젊은 아버지, 약 한 첩 사오지 못하고  눈밭을 얼마나 헤메어 그나마 따온 빠알간  산수유 열매가 약효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껏 화자의 혈액 속에 뜨거운 사랑으로  녹아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화자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보니 더욱 새록  새록 느껴지는 사랑. 열병에 몹시 앓는 아들을  위해 약 한 첩 사지 못하는 가난한 아비의 마음과,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한 두 알 남았을  산수유 열매를 찾아 헤메었을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이 이제는 성인이 되어버린 화자에게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상력에 대해선 내일 강의해야겠군요.  박의상님의 짧은 시 하나 더 읽고 강의 마치겠습  니다.  < 나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른 새벽 꽃밭이었다  물을 한 잔 들고 있었다  꽃 한 포기에 그 물을  천천히 주고 있었다  주면서 반짝 웃고 있었다  그리곤 갔다  해가 떴다  -이어서 작가는 자신의 시에 "기억의 위대함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붙입니다.  아내를 잃고 나서 그가 맞는 세상은 꽃도 꽃이  아니고, 돈도 돈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자신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은 기억이란  힘이었습니다.  『나의시, 나의 시쓰기』란 책에 있는 그의 해설을 잠깐  옮깁니다.  "세계가 없었던 느낌, 당연히 그 속의 나도 아이들도  는 느낌이 어떻게 그렇게 는 쪽으로 달라  졌느냐. 기억의 힘 이외에 다른 설명의 방도가 없다.  기억, 추억, 회상, 반성 이런 힘, 에너지가 아니었으면  아이들이나 나나 전혀 새로운, 낯선 존재였을 것이다."  여러분, 기억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요?. 우린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많은 기억들을 일깨워야겠습니다.  시의 씨앗을 영원히 창고에 잠재울 것이 아니라 깨워서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어야 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그 상상력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         나의 싸움  ―신현림(1961∼ )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화자는 외로움과 슬픔에 취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고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지경이다. 이러다간 내 삶이 망가질 거야!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는데, 우울하고 쓸쓸하고 불안하기만 해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속이 까맣게 타고 죽을 맛이다. 그래도 일은 해야 먹고살지. 이럴 때 따뜻한 생기를 나눠 줄 한 사람이 그립구나. 내 처지가 어쩌면 이리도 외롭고 슬픈가. 마음이 습자지처럼 나약해진 화자, 삶을 갈아엎을 결연한 의지도 실행할 힘도 안 나니까 소리를 빽 지른다.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힘없는 사람이 악이나 쓰지 뭐. 그러고 나서 다시 첫 행으로 돌아가 투지를 다진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두둥! 박수치고 싶게 멋진 말!  일하는 건 망가지지 않은, 버젓한 사회인으로 사는 기본 조건일 테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돈이 생기기 때문에 일을 한다. 일하다 몸이나 정신이 망가지기도 한다. 망가져도 일을 한다. 그게 생업(生業)이라는 거다. 생업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다지 외롭지는 않다. 괴로울 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은 행운아다. 그들은 일을 하면 할수록 튼튼해진다.    
1545    詩作는 날마다 숙제를 하듯 쓰는 습관을 가져야... 댓글:  조회:4032  추천:5  2016-07-11
[6강] 多作-많이 써라  강사/김영천  오늘은 우선 구양수의 3多 중의 마지막인 "多作" 즉  많이 쓰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다했는데 여기서  달란트는 영어로 탈렌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  나름대로의 각기 재능이 있는데  대부분은 그 재능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에 들어오셔서 강의를 받으시는 분들은  분명 시에 대한 재능이 있으십니다. 꼭 지금이 아니라도  예전부터 시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나, 비록 작품  수는 적더라도 시를 써보았거나, 아무튼 시라면 무작정  좋고 스스로 한번 써보았으면 하는 분들은 모두 시에  대한 달란트가 있으신 것입니다.  이제 전시간의 강의대로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고  어떠한 마음을 갖어야 하는가를 알았는데 거기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말아버린다면 무슨 의의가 있겠  습니까? 옛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고 했듯이 여러분 마음 속에 아무리 좋은 시상이 있  거나, 좋은 시어들이 샘솟아도 시를 쓰지 않으면  아무 필요없습니다.  다 아는 소리이지요? 그러나 귀한 시간 내어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인들 중에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작품을 청탁받으면 안절  부절하는 것이지요. 갑자기 쓰려니 안되고 써놓은 건  없고요.  그러니 숙제를 하듯 날마다 쓰는 습관을 갖어야 합니다.  중국 진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의 필체는 힘차고 아주  생동감이 있는 신기에 가까웠다 합니다.  하루는 어느 젊은이가 찾아와 선생님의 필력의 비법을  물었습니다. 왕희지는 젊은이를 뒷뜰로 데리고 가서  후원에 있는 엄청나게 큰 물독 열여덟개를 가리키며  저 물독 속에 내 서예의 비법이 있다 하였습니다.  저 물을 다 쓴 후에야 비로소 내 말을 알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많은 물로 먹을 갈아 글을 써야한다니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해야한다는 것이겠습니까?  좋은 시도 그렇지요.  여기서 김춘수의 꽃을 한 편 읽고 계속 하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참 좋은 시이지요.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라고 이런 시를 못쓰란 법은 없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씁시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우린 우선 시를 씁시다.  시는 고도의 언어예술이기 때문에 물론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사적 기교나 방법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손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재주나 방법상의 기교  만으로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좋은 시 같으나 깊이가 없는 시이기  쉽습니다.  하나의 고려청자를 빚기 위해서 도공의 정성, 그의  숨결, 영혼까지 깃들이게 한 것처럼, 좋은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랑, 창작에 투신하는  혼신의 마음, 좋은 시를 쓰려는 정신력 이런 것들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혹자는 밤낮 아는 소리만 하지 말고  시적 기교나 방법을 강의하라고도 하겠지만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강의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기 쉽기 때문에 총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입니다.  좋은 시 하나 더 읽겠습니다.  박재삼의 입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바람에 비해서 사람은 얼마나 탐욕적이며  변화무쌍하며, 쉬이 지치는지  천년을 여일한 바람을 두고 시인은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장면을 가지고 우리는 이런  시를 쓰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시인은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동안 강의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이런 좋은 시를 많이  읽고, 아, 나도 써봐야겠다는 충동을 받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좋은 시를 복사하듯이 흉내를 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시인의 시각처럼 내가 보아서 시를 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즉각 실행에 옮기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과거시험이 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멋드러진 시 한편 쓴다고  과거 급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제 하나를  올바르게 원하는대로 쓸려면 수많은 한서들을  백번 천번 읽고 써야 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글 쓰는 솜씨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척 필요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독서를 많이  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야  감성지수의 발달은 물론 논술을 잘 쓰는 법을 배웁  니다. 요즘은 사회생활에서도 글을 잘 쓰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치는 방법의 최선이  엄마가 글을 쓰는 것입니다. 엄마가 글 쓰는 모습  은 아이의 평생에 깊이 각인될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와 같이 쓰면 더 좋겠지요.  시를 쓰려면 맑은 감성을 갖어야 된다고 지난 시간  말씀드렸읍니다만,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성적 지수  즉 IQ만 강조가 되는 세상이었지요.  그러나 미래의 세상은IQ보다는 EQ가 중요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현재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조태일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조화시대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개인의  창조성이며 창의성이다. 그런데 감성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무한한 창조성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개인마다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고유성이며, 끊임없이 사물과 부딪쳐서 다양한 새로움  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성  의 창조성이 가장 큰 구실을 하는 곳이 바로 문학이며.  그 중에서도 '시'이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시 두 편 더 소개 하고 마치겠습니다.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난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해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김용택 全文  어린 눈발들이 다른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들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全文  아마, 이 두 시를 읽고 여러분은 아하,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그러면 나도 쓸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펜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노트를 펼치십시오.  이제는 여러분들이 쓰실 차례입니다.  날마다 강의를 듣고 한 편씩 써나가는 습관을  들이면 여러분은 분명 1년 후엔 좋은 시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       와온(臥溫)  ―송상욱(1939∼) 마을 뒷산이 누워 계신 와불(臥佛)같다 품 안의 젖내음 나는 짐승들 누운 산이 따스하다 빈 속 쓸어내는 저녁답, 이맘때면 으레 그러듯     동네 삽살개 한 마리가 나룻배 닿는 갯가로 내려가 저만치서 뻘밭을 나오는 아낙들을 마중한다 바다 건너 화포 마을 포구에는 닻을 내린 어부들이 막사발 부딪는 소리, 뱃전에 끼륵이는 갈매기들 소리 귓전에 아련히 들려오다 파도에 쓸린다 해 저물어 누울 바다의 잠 자리 와온(臥溫) 속옷 갈아입는 듯 맨살 드러낸 뻘밭에 바닷물이 든다 갯펄에서 조개를 잡던 아낙들이 갯가로 나온 갯바구니 속, 바지랭이들이 뻘물 짜뜰름에 숨결 보챈다 밤이 되면 포구에 든 바다는 밤새 깊은 고뇌에 찬 듯 쏴아 쏴아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아침이면 고기잽이 배들 제 등에 둥둥 싣고 떠난다 소박하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 풍경이다. 하루 일을 마친 아낙들 개펄에서 나오고, 동네 삽살개 더펄거리며 갯가로 마중 가는 저녁 때. 고기잡이배들도 돌아올 테다. ‘바다 건너 화포 마을 포구에는 닻을 내린 어부들이/막사발 부딪는 소리, 뱃전에 끼륵이는 갈매기들 소리.’ 와온은 순천만 산기슭 아래 있는 포구마을. 만(灣)이란 ‘바다의 일부가 육지로 휘어들어가 있는 부분’이니 바다 건너편에 다른 포구마을들이 있을 테지. 바다 건너에서 막사발 부딪는 소리가 실제로 들릴 리 없고, 상상이다. 그 소리와 고기잡이배들에 몰려든 갈매기들 울음소리를 상상의 힘으로 끌어당겨 소리와 풍경의 입체감이 증폭된다. ‘속옷 갈아입는 듯/맨살 드러낸 뻘밭에 바닷물이 든다’니 근사한 비유다. 속옷을 갈아입으려면 일단 벗어야 한다. 그래서 뻘밭은 맨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닷물이 들다 나다 하는 것을 ‘속옷 갈아입는 듯’하다니! 시 속의 시간은 고정돼 있지 않고, 저녁에서 밤으로, 아침으로 흘러간다. ‘밤새 깊은 고뇌에 찬 듯 쏴아 쏴아/한숨을 내’쉬는 바다. 시인은 파도소리에서 고뇌에 찬 한숨소리를 듣는다. 시인 자신의 고뇌? 아니면 시인이 포구마을 사람들 삶에서 느낀 고뇌? 인생살이에 짜뜰름거리며 따라붙는 이런저런 자잘한 고뇌들…자잘한 거면 좋으련만…마지막 행이 좋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아침 바다!  
1544    詩는 예리한 눈에서 탄생한다... 댓글:  조회:3952  추천:0  2016-07-11
[5강]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강사/김영천  입추가 넘으니 아침 저녁으론 매우 쌀쌀해지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기가 영 어려워집니다. 아무런  원칙이 없는 것 같아도 계절만큼 정확히 제 궤도를  지키는 것이 없습니다.  시를 쓰는데도 아무런 원칙이 없이 자기 마음가는대로  쓰는 것 같아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원칙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청록파 시인 중의 한 분인 조지훈 시인은 글을 잘  쓰려면 눈은 과학자를 닮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물을 관찰하는데 치밀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지라는 이야기 입니다.  제가 강의 할 때마다 거의 강조해왔지만, 우리들은  사실 주변의 모든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낯이 익어서  별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주위의 하나도 어제와 똑 같은 것은 없습  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 모파상이 플로베르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 공부를 하였는데요. 그는 아무래도  자기의 표현력에 불만을 갖고 선생님께 그 표현의  비법을 물었습니다. 이 때 플로베르는 "매일 아침 자네  집 앞을 지나는 마차를 관찰하고 그대로 기록하게.  그 것이 글쓰기의 가장 좋은 연습이네"라고 대답하였  습니다.  모파상이 그 말대로 이틀간 지켜보았으나 너무 단조롭고  아무 변화 없는 그 모습을 보고 플로베르를  찾아가 선생님의 지도가 잘 못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선생님은 " 관찰이야 말로 글 쓰기의 훌륭한 연습인데  왜 쓸모 없다 하는가.자세히 살펴보게나, 개인날에는  마차가 어떻게 가고, 비가 오는 날에는 어떤 모습인가,  또 오르막길에서는 어떠한가. 말 몰이꾼의 표정도 비가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또는 뙤약볕 아래서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보면 결코 단조로운 것이 아님을 알  것이네"라고 답하였다 합니다.  자기의 잘 못를 깨닫고 선생님의 교훈을 따른 모파상은  역사에 남을 명작을 남기게 되었지요.  우리도 그렇게 관찷하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여기 황동규의 을 옮깁니다.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뛰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으로 한 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하게 눕는다.  사소한 물방울 하나도 관찰하는 눈으로 바라보니  이렇게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사물들을 우리도 관찰의 눈으로  바라보면 분명 좋은 시를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 왕희지도 그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필체가 거위가 연못에서 헤엄칠때  힘차게 물을 가르는 그 발동작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여기에서 새로운 운필법을 창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식적이고, 틀에 짜인 기계적인  관찰은 사물의 피상만을 보거나, 습관화의 연장일 뿐  임으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것의 감추어진 아름  다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하는 것입  니다.  다음으로 사물을 볼 때는 따뜻한 가슴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는 궁극적으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조태일은 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  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조건과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내어주며 한없이 베풀어주는 것이라  고 보았던 것입니다.  요즘 여성 시인 중에 가장 좋은 시를 쓰는 시인 중의 하나  가 나희덕 시인인데, 나희덕 시인의 시를 많이 읽으면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나희덕의 을 읽어봅니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엄마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여러분도 아마 산에 가다가 다람쥐를 마주 친 적이  가끔 있을 것입니다.  다람쥐가 우리를 지켜보는 것은 외려 무서워서이겠  지만 시인은 다람쥐 새끼를 보고도 젖이 도는 어머니  의 마음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조태일님의 글을 잠깐 옮겨봅니다.  "시 속에서도 이렇한 모성적 사랑이 근원적으로 흐르고  있다. 왜냐하면 시는 뭇 생명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안타까움의 노래이자, 생명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성이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며,  그 것들을 품고 기르는 위대한 창조성의 本인 것처럼  시 역시 온갖 사물들을 품으면서 그것들의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것이므로 모성과 시는  그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모든 사물을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보면, 정말  감동적인 시가 써지는 것이지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서로 사랑의 교환을 원합니다.  비록 영혼을 갖지 않은 무생물조차도 그렇습니다.  시인들은 시를 통해, 이러한 생명들에게, 아니 무생물에  까지 사랑을 주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린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또  그 사물을 따뜻한 마음으로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진정 감동적이고 좋을 시를 쓸 것입니다.  ==================================================         눈썹 ―1987년  ―박준(1983∼)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의 한 해 전, 누나도 어렸다니 화자는 더 어렸을 테다. 엄마가 ‘봄날 아침/일찍 수색에 나가’셨다니 화자가 살던 집은 서울 서북쪽 외곽인 수색보다 더 바깥쪽이다. 넉넉지는 않아도 알근달근한 한 가정, 저녁상 자리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아이들은 ‘노루처럼/방방 뛰어다’니며 울부짖고. 원인은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온 것. 시에 그려진 그 봄날, 엄마의 유유한 행보에는 아마 이웃 아낙 몇이 함께했을 것이다. 한 동네 아낙들이 우르르 목욕도 하고, 반점(飯店)에서 (아무렴, 반점에는 ‘화교 주방장’이지) 우동도 먹고, 미용실에도 들르고. 눈썹 문신을 하러 미용실에 들른 건 아닐 텐데 분명 미용사님께 꼬임을 당했을 것이다. 실력도 별로였을 미용사님한테 ‘야매’로 눈썹 문신을 시술받은 뒤 미용실 거울을 보며 엄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시커먼 ‘지리산’ 두 개가 이마에 턱 얹혀 있으니까. 미용사님은 예쁘다고 설레발치셨을 테고 엄마는 긴가민가하며 울상을 하고 웃었을 테다. 어쩌면 같이 간 동네 아낙 모두 같은 형상이 돼서 그날 저녁 집집마다 아내들이 남편한테 봉변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남편은 낄낄 웃었을라나? 당최 화를 참지 못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대한민국이 전반적으로 가난의 때를 벗기 시작한 1987년, 화자의 아버지는 그 대열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1543    詩作은 많은 문학적 경험에서 나온다... 댓글:  조회:4166  추천:0  2016-07-11
[4강] 많은 문학적 경험을 하라  강사/김영천  다시 반갑습니다  권일송 시인은 『이 땅은 나를 술마시게 한다』는  시집을 냈었지요. 저는 어제 하늘 때문에, 너무 너무  푸른 하늘 때문에 술을 좀 마셨지요.  아침부터 왜 술 이야기를 하느냐 하시면 죄송합니다만,  사실 어제 저희 문협 임원들과 여기 저기를 좀 돌아다녔  습니다.  그러면서 후배들에게 야생화의 이름도 가르쳐 주고, 문학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 창작의 비법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많은 문학적 경험을 해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것이지요.  상사화도 처음 본 친구가 있던데요.  잎과 꽃이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는데는 더욱 신기해  하더라구요.  도시에 가까이 있었어도 가보지 못한 절에 가서는 풍경  소리며, 해우소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정말 밖에 나가면 많은 시적 소재가 너무나 많이 있는데  우리가 쉽게 지나치거나 그 경험을 시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학 경험은 꼭 자연이나 시적 소재와 직접적인  접촉만 말하는 건 아닙니다.  풍부한 독서가 시 창작의 경험에 아주 큰 분야를 차지하지요.  이러한 독서체험은 실제의 체험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고대 중국의 당송팔대가 중의 하나인 구양수는 3다(三多)가  좋은 글을 쓰는 관건이 된다고 했는데,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우리가 해야 될 그 세 가지 중에 첫 째가 독서를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글을 쓰려면 이 삼다 정도는 알아야 겠지요.  요즘 학생들이 삼강오륜의 삼강을 쓰라하니까  한강, 낙동강, 영상강이라 했다하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지요.  삼다는 다독-많이 읽고,다사유-많이 생각하고  다작-많이 쓰라는 것입니다. 쉽지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독서체험을 풍부하게 가져야 하는  것이 시 창작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글 쓴이의 체험, 사고 , 감정, 인격, 사상 등의 총체적인  것과의 만남이 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조태일 선생님은 말하기도 했지요.  우리가 좋은 경치를 보거나 즐거움, 슬픔, 기쁨, 괴로움  등 여러가지 감정을 경험하여 시를 쓰게 되는 실제적 경험도  있겠지만, 우리는 어떤 좋은 시를 읽거나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와 같은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 다음은 사고를 깊게, 자유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조병화님의 시 를 한 번 읽어  볼까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우리가 평상시 늘상 만날 수 있는 안개 낀 인터체이지를  보고 쓴 시입니다. 거기서 서로 헤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자세히 읽어 보면, 무조건 그 경치나  자기 마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가 깊고,  아주 자유스러운 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우리가 늘 만나는, 늘 경험하는 것으로  시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일상의 것에서 시를 끄집어 낼려면  사물을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시를 쓰는 건 어떤 심오한  사상이나 거창한 사고가 아니라, 자기 삶 주변의 사물들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시 하나를 더 읽어볼까요?  고은님의 인데요.  지난 여름 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아주 짧은 시입니다.  산에 가면 빨갛게 익은 찔레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열매를 그냥 이쁘다 그렇게  넘어가지 않고 한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숱한  고뇌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땡볕, 불볕, 어둠, 귀뚜라미 울음소리들이  이 열매를 익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삶을 고통과 희락과 슬픔의 소리들까지가  다 우리를 성숙시킨다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시인은 찔레 열매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사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속에 지닌 진실과 아름다움  까지 찾아내어 시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훈련을 해야합니다.  지난 시간에 강조한 낯설게 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써놓으신 작품을 한 번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너무 깊은 생각 없이 겉에 나타난 것만 그대로  옮겨 쓴 것은 아닌가 하고요.  윤동주님의 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아주 깊은 뜻이 있는 시입니다.  이런 시 한 편 정도는 외워두면  어느 모임에서나 좋지요. 노래 대신 이 시 한 편 쯤  외우시면 두 배의 박수를 받으실 것입니다.  ========================================================       어떤 희롱꾼  ―보들레르 (1821∼1867) 수많은 사륜마차들이 지나간 눈과 진흙의 혼돈, 장난감 등속과 봉봉과자의 번쩍임, 탐욕과 절망의 범벅, 가장 강한 고독자의 뇌리조차 혼란케 하는 대도시의 이 모든 공공연한 광란……새해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혼잡과 뒤죽박죽의 한가운데를 채찍으로 무장한 무뢰한에 시달리며 분주히 뛰어가고 있는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다. 당나귀가 막 보도의 모퉁이를 돌아가려고 하는데 장갑을 끼고 잔인할 정도로 넥타이를 꽉 매고 꼭 맞는 옷 속에 감금당한 듯, 요란하게 차려입은 멀쩡하게 잘생긴 한 신사가 이 보잘것없는 짐승 앞에 정중히 몸을 굽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행복하고 복된 새해를 기원하나이다!” 그러고는 거만스럽게 누구신지 알 수 없는 동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 기쁨에 그들이 동의해 줄 것을 간청하기라도 하듯. 당나귀는 이 익살꾼을 보지 않은 채 그의 의무가 그를 부르는 곳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이 사치스러운 천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 천치야말로 그 자신 속에 프랑스의 모든 에스프리를 축소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보들레르 사후에 출간된 시집 ‘파리의 우울’에 실린 시다. 세련된 복장과 품위 있는 몸가짐으로 ‘정신적 귀족주의’를 내세우는 댄디즘, 그 주창자인 보들레르는 치장만 완벽할 뿐 느끼고 생각할 줄 모르는, 즉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속물들을 지긋지긋해했다. 이 시에도 속물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배어나온다. 때는 19세기 중엽, 세밑의 혼잡한 파리 시내, 번지르르 차려입은 멀쩡하게 생긴 신사가 차가운 진창에서 혹사당하는 당나귀를 대상으로 익살을 떤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보자고 기어이 오버액션을 하는 것이다. 머리는 비고 심장은 차가운, 이런 속물! 속물도 사줄 만한 점이 있다. 잘 보이려고, 예쁘게 보이려고, ‘옷 속에 감금당한 듯’ 그토록 외모를 아등바등 가꾸다니, 보는 입장에서는 고맙고 기특한 일이다. 만국의 속물들이여, 미적 감각을 키우자!  
1542    詩란 언어와의 사랑이다... 댓글:  조회:3965  추천:0  2016-07-07
[3강] 언어와의 사랑 강사/김영천 오늘은 시를 쓰는데 언어를 왜 사랑해야하는가 간단히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예술엔 여러 장르가 있는데 특히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이 바로 시입니다. 도공이 한낱 흙으로 그 아름다운 도자기를 구워내듯 이 시인은 아무나 쓰는, 어디에나 있는 그 말들로 참으로 빛나는 시를 빚어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쓰면 좋은 시가 되는가를 알면 되겠지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인은 언어를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언어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 이며 천생연분입니다.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노인들을 위한 퀴즈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한 노인 부부가 나와서 퀴즈를 풀었답니다. 이 때 사회자가 영감님에게 "천생연분"이란 카드를 주었습니다. 영감님이 설명을 하고 할머니가 맞추는 퀴즈인데 영감님이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이 것쯤이야 하고는 "할멈과 나 사이" 하니까 할멈이 생각도 할 필요도 없이 불쑥 "웬수" 하더랍니다. 방청석은 그야말로 폭소의 도가니가 되고 영감님은 안절부절하더니 "두 자 말고, 네 자, 네자" 하니까 할머니가 또 두 말 없이 "평생 웬수"하더랍니다. 우스개 소리 이지만 우리 시를 쓰는 사람들에겐 언어가 이렇듯 평생 원수가 되어서는 안되고 천생연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소원이 겠지요. 그러나 누구도 사람이 만든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쓰기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특히 좋은 경치를 보았거나, 아아, 이 건 시가 될 것 같아 하는 경험을 하였어도 막상 시를 쓸려하면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많을 것입니다. 저도 어디 경치 좋은데 가면 주윗 분들이 즉석 시 하나 지어보라고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때마다 "아, 좋다" 이 것이 시요. 하고 웃고 말아버립니다. 천상병 시인의 이란 시를 한번 읽어봅시다. 뭐라고 말 할 수 없이 저녁 놀이 져 가는 것이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나는 그 때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도 빨가니 타서 아, 쓰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깎아서 하루 빨리 내가 나의 無名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은 으로 유명하지요. 그의 시에는 어려운 말이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말로서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이런 대시인도 노을이 지는 모습을 표현하지 못하고 "뭐라고/말 할 수 없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랑해야 합니다. 시에 적합한 최상의 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말을 더욱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국어사전을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말들이나 알면서도 쓰지 못하고 버려두는 말,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좋은 말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그런 말들을 일부러 찾거나, 다른 사람의 글에서 보면 꼭 적어놓는 습관을 들입시다. 사투리나 고어도 시에서는 아주 긴히 쓰이는 말입니다. 언어의 정부라고 불리는 서정주는 특히 구수한 전라도 방언을 아주 잘 구사하였지요. 야생화나 나무들, 저 많은 산새와 벌레들 이름까지도 많이 알아두거나 기록하는 습관을 들입시다. 꽃이름이 예뻐서 그 이름 자체가 시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참 많지요. 여기 문학의 방에 있는 제 시중에 "눈부처"라는 순 한국말 이 있는데요. 이의 뜻은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의 형상을 두고 하는 말로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모습이 되겠 지요. 저는 처음에 이 단어를 알았을 때 너무너무 기뻤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이제부터라도 늘 쓰는 말을 버리지 마시고 자기의 가슴에, 머릿속에, 노트에, 메모장에 늘 외워두고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시기로 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시인의 좋은 시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너무 어려운 시를 택하시지 말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시나, 많이 알려진 시 또 처음보는 시라도 쉬운 시부터 보시는 게 좋습니다. 여기 박용철님의 시 를 조용히 소리내어 읽어보면서 오늘 강의는 이만 마칩니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쫒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헤살짓는다. 앞 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     도봉근린공원 ―권혁웅(1967∼)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즘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그래, 맞아. 어쩜 이리 똑같을까! 시의 풍경이 눈에 선해서 키득키득 웃게 된다. 도봉구나 용산구나, 이 근린공원이나 저 근린공원이나. 철봉이나 역기 등의 운동기구랑 오두막 정자는 기본, 맨발 지압로랑 산책로가 있고, 약수터가 있다. 이용객들 모습도 닮았다. 우리는 근린공원에서 살뜰히 놀고 쉬고, 악착같이 체력을 다진다. 심상히 지나칠 법한 그 풍경을 시인은 잘도 꼼꼼히 들여다보고 생생히 그려 보인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순발력이 여간 아니다. 예컨대, 약수터의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를 보면서 대개 ‘께름칙하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바가지에 입을 댔을까’, 요 정도 생각에 그칠 텐데 시인은 즉각적으로 ‘헤픈 처녀’ ‘뭇입이 지나간 참’이라 짚어준다. 금연운동과 더불어 근린공원 신설이 대세. 비행기나 고속철도(KTX)를 타고 멀리 떠나지 못하는 대개의 서민들, 저녁마다 근린공원에 간다. 전투 치르듯 치열한 그 여가(餘暇)에 시인은 움찔하고, 어쩐지 쓸쓸하단다.  
1541    詩란 고정관념틀을 깨고 그속의 비밀, 맘의 눈으로 보기 댓글:  조회:4345  추천:0  2016-07-06
[2강]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강사/김영천 2)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오늘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심안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늘 경험하거나 자주 만나는 것엔 쉽게 익숙해지지요.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은 어색하지만 몇 번 만나면 그냥 친숙해져서 말도 서로 트고, 장난도 치고 할 수 있쟎아요. 우리 주위의 사물도 그렇지요. 목포에 처음 오시는 분들은 유달산에 올라가면 머얼리 바라다보이는 다도해와 그 사이로 지나가는 배들을 보며 탄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늘 그 속에서 사는 목포사람들은 시큰둥합니다. 이 것은 그 풍경과의 접촉이 타성에 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아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합니다. 그래서 엄마, 이 거 뭐야? 엄마, 이 거 왜 이래? 수도 없이 반복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파견문록이라는 프로를 보십니까? 저는 가능하면 보고 있습니다만 거기에 나오는 아이들의 기발한 이야기에 누구나 감탄합니다. 그 것이 바로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보는 결과입니다. 시를 쓰려면, 그런 마음의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어제도 초생달을 눈섭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이 비유를 처음 쓴 시인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초생달에 대해서 시를 쓰면서 -그대의 눈섭같은 초생달이 뜨고- 어쩌고 하면 좋은 시가 되지 않습니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새로운, 지금 껏 아무도 써보지 않은 표현을 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인의 마음, 즉 자동화된, 습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새로운 눈 길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다가 보면 밥알을 마구 흐트러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것을 그냥 밥풀로 보지 않고 아하! 넓은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이구나. 하고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길러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문학적 용어로는 "낯설게 하기"라고 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처음 한 말인데 쉽게 말하자면 똑 같은 사물을 전혀 다르게 표현하자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서정주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잘 아시는 시이지요? 요즘 국화가 한창인 가을이어서 여러분들도 국화꽃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국화꽃을 보며 보통은 그 향기가 어떠며 그 질긴 꽃피움 등을 떠올리는데, 그런 것은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가는 국화꽃을 보며 '거울 앞에 선 내 누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의 타성적, 습관적 시각과는 전혀 다르지요? 그래서 이 시가 유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국화꽃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그렇듯 사물을 마음으로 보는 습관을 기릅시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 기법을 써서 시를 쓰는 것입니다. 이제껏 아무도 표현하지 않은 표현으로요. 우선 오늘 자기 주위에 있는 물건부터 마음의 눈으로 한번 바라보십시오. 내가 저 것을 시로 쓴다면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셀리는 "시는 세계의 감추어진 부분으로부터 베일을 벗기며, 혹은 눈에 익숙한 사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타성에 젖은 낡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의 눈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 사물들은 여러분께 그들이 지닌 비밀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 줄 것입니다. ================================================================       봄밤 ―최승호(1954∼)     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 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 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 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 할 일 없는 봄밤에 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 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핼쓱한 병자가 육신이 나른한 꽃향기에 취해 아픔도 없이 조용히 죽어가나 보다. 아름다운 용모의 귀신들이 우두커니 꽃나무 그늘에 서서 저승에도 못 가는 찬기운의 한숨을 쉬고 인간축에도 못 끼는 서러운 낯짝으로 누가 좀 따뜻이 나를 대해줬으면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봄밤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 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저승열차는 내 두개골 속을 지난다. 삶과 죽음이 섞여 있는 어둠의 세계가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이미지화돼 있어, 아찔하게 탐미적이다. 죽음과 혼(魂)과 귀신의 냄새가 시인의 외로움과 짝을 이루면서 물씬 꽃향기로 어지러이 휘돈다. 아편에라도 취한 듯 만드는, 이 쓸쓸하고 몽환적인 봄밤의 파토스! 세상에, 이토록 섬세하고 적나라한 귀기(鬼氣)라니! 시리고 아름다운 봄밤, 귀신들도 용모가 아름답다. 환상의 세계에는 추함이 있을 수 없다. 현실을 떠났기 때문에 귀신도 아름답다! 허나, 환상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면,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슬픈 환멸이 땅바닥 저 밑까지 곤두박질한다. 봄밤의 꽃향기여, 다시 짙어라. 시인이 거듭 취해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가게 하라. 가령 라일락 꽃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오면, 함께 밀려드는 아득한 그리움에 문득 코끝 치켜들고 발걸음 멈추게 되는 봄날. 그러하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봄밤과 완연히 다른 최승호의 독한 ‘봄밤’!  
1540    [재미있는 詩뒷이야기]-杜牧 唐代詩人의 詩 <淸明>과 련관되여 댓글:  조회:5124  추천:0  2016-07-05
淸明 杜牧 두목   淸 明 時 節 雨 紛 紛(청명시절우분분 ) 청명절 빗줄기 추적추적 내리니 qīng míng shí jié yǔ fēn fēn 路 上 行 人 欲 斷 魂 (노상행인욕단혼 ) 길 가는 나그네 혼 끊어질 듯 lù shàng xíng rén yù duàn hún 借 問 酒 家 何 處 在 (차문주가하처재 ) 묻노니 술집이 어디메뇨? jiè wèn jiǔ jiā hé chù zài 牧 童 笑 指 杏 花 村 (목동소지행화촌) 목동이 웃으며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mù tóng xiào zhǐ xìng huā cūn     청명/淸明 -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 |청명시절우분분  - 청명 시절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 淸明時節에 雨가 紛紛한다 路上行人欲斷魂 |노상행인욕단혼  - 길 가는 행인의 마음이 들뜬다  - 路上의 行人는 欲斷魂한다 借問酒家何處有 |차문주가하처유  - 술 파는 곳 어디 있나 물었더니  - 酒家는 何處에 有할까 借問했더니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요지행화촌  - 목동은 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  - 牧童은 杏花村을 遙指한다 [출처] 두목의 '청명'|작성자 야리담 william   =================/////////////////////============ @@=(1) 웃 시는 한반도에서 쭉 내리 전해진 唐代詩人 두목의 시 이고 아래 시도 역시 두목의 시 인데  중국 대륙에서 쭉 내리 전해왔었다... 근데, 여기에서 재미있다는것이 시속에서 두글자가 원문과 같지않게 한반도에 전해짐으로서  이미가 다르게 전달되고 있기때문이다. 즉, 아래 원본 시에서의  자가 웃 시에서는 로 되였고, 아래 원본 시에서 자가 웃 시에서는 자가 되여 전달되였었다... 이렇게 전달되였으니 그 당시의 시대배경과 맞지않을 뿐만아니라 또한, 시의 의미도 판이하게 리해해석되고 있는 형국이 출현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달하는 이이나 번역자들도 원문을 존중하는 각도에서 명시를 전달해야 마땅하고 명시가 옳은 대접을 받으며 빛을 발할것이다... / [竹琳] ===========================////================ @@=(2) 한반도에 계시는 한 지성인이 이 두목의 시 을 무척 애송한 나머지 중국 산동성 위방시의 어느 한 유명 서예가한테 부탁하여 휘호해 왔었다... 그래도 성차지않는지 한국 안동 유명 서예판각가한테 이 시를 판각하여 고래등같은 한옥집 기둥에 유난히 빛나는 곳에 붙쳐 놓으니 그렇듯 어울리는것이여다... 한반도의 이 지성인은 이 두목의 시를 중학교에 다닐 때 한문을 그렇게 좋아하던 력사를 가르치시는 력사교사한테서 배웠다 한다. 바로 웃 시대로 가 아닌 , 그리고 가 아닌 가 들어 있는 두목의 을 그렇게 좋아서 배웠다 한다. 그런데 60여성상 그냥 그런줄로 알고 배웠고 또한 그것으로 리해해석하기에 열을 올리군하였었다. 근데 중국 친구들이 드날들기 시작한 요즘, 자기가 배웠던, 그리고 한반도에서 해 온 이 시가 오역, 내지 잘못 리해전달되고 있음을 뒤늦게 나마 깨닫게 된것이다. 웃 시의 리해해석과 아래 시의 리해해석이 완판 다르기 때문. 그러하니 한시를 가르치는 이들이나 한시를 번역전달하는 이들 특히, 원 작자의 원본을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가르치거나 번역전달해야 함이 옳바른 행동인것만은 너,나, 타가 모두 자명한 일인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이 재다시 재연되지 말기를 기원하며 중한, 한중 문화교류가 더욱더 활발이 진행되기만을 간절이 기원하는바이다... / [竹琳]
1539    詩는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유래 댓글:  조회:3565  추천:0  2016-07-05
[1강]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강사/김영천  시 창작은 근세나 고대에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어 낸 예술의  분야가 아니고 원시시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즉 원시 종합예술에서 소리와 춤으로 나누어졌고 다시 춤은  무용과 연극으로, 소리는 다시 음악과 가사로 나누어 졌습니다.  여기 가사가 마침내 시와 소설로 나뉜 것은 비교적 근세의  일입니다.  1)시 창작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  사람의 마음은 감정을 생성해내며 사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또는 분노를 나타내는 것도 다  마음에 따름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그 느낌이  다른 것은 서로간에 마음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구요.  예를 들면 초생달을 보고 어떤 사람은 조각배와 같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여인의 눈섭과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초생달이 무엇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듯 사물을 서로 다르게 보는 것을 그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면 시가 됩니다. 시는 이렇듯 아주 주관적인 예술인  것입니다.  마음은 그 순수성에 따라 꿈을 꿀수도 있고, 헛된 욕망을  품을 수도 있지요. 시를 쓸 때는 전자인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온갖 상상력을  낳게 함으로서 시를 창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1930년대 , 지성적 시인을 대표했던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 등에서 우린 진솔한  마음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지성과 감각도 순수한 마음에  근원을 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선 우선 그의 시 을  예로 들어볼 터이니 여러분이 쓰신다고 생각하고, 이 시인의  마음이 한 번 되어 보십시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 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연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의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라갔구나!  -정지용, 전문  이 시에 대한 조태일의 해설을 옮기면  " 위 시의 창작 동기가 된 것은 사랑하던 아들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끓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자식을 앞에 둔 부모의 슬픈 마음이야  똑 같겠지만, 그 슬픔을 표현해내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위 시는 두 다리 뻗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우는 모습 대신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된 행위 속에서 오히려  한 어버이의 슬픈 마음을 더욱 지극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얼어 붙은 날개를 애처럽게 파닥이는 새의 영상을  통해서, 폐혈관이 찢어진 채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유리창에 기대어 서서 밤 내내 입김을 불며 유리창을 닦는 것은  죽은 아들을 향한 어쩌지 못하는 그리운 마음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누구나 이런 경우를 당하면 망연자실하여 말을 잃거나,  차마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넉두리를 하거나 할 것입니다.  더러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홧병을 얻기도 하지요.  옛부터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네 가슴엔 온갖 슬픔까지도  묻을 있는 무한한 감정의 창고입니다.  이 마음은 다른 사람들하곤 전혀 그 색깔이 다르지요.  천 사람의 지문이 천 가지 이듯 천 사람의 마음이 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하면 독창성과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 자기만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봅시다. 시의 첫 출발은 자기가 생활하며 얻은 마음,  또는 거기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상상력들을 글로써 표현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껏 유명한 시인들이 써 온 시가 꼭 내 마음과  같다고 해도 그 건 이미 내 마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니, 오직 내 눈으로 본 것, 내 마음으로 느낀 것을  써보도록 해야합니다.  그럴려면 먼저 사물을 보는 방법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무심코 보아 넘겨버리지 말고,  또한 잡스런 생각을 버리고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강의 하기로 하겠습니다.   ============================================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 ―성기완(1967∼ )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다던 당신이떠난그곳이어딘지 알수없어 매우멀어바다같아요 당신이남겨놓으신흔적들 파도에씻긴조가비같은것들 함께바다에여행갔을때당신이 무릎접고고개숙이고줍던 그시간이 매우멀어바다같아요 당신이나를버린이유 알수없어걷고또걷던새벽에얻은 몽유의버릇 주머니에가득한물음표 아이가쏟아놓은퍼즐조각처럼 그이유가망망(茫茫)해서대해(大海)같아요     언젠가부터긴긴잠을자고있어요 당신이어디사는지알지도못하는 그냥내가한참미워밤바다같아요 그리고너무멀어 오늘이 망망(茫茫)큰바다같아요       성기완은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다. 즉 뮤지션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들은 리드미컬하다. 이 시에서도 아련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실연은 쓰디쓴 것이나 실연의 노래는 달콤한 것. 어느 날 갑자기 연인이 종적을 감춘다. 왜? 도대체 왜? ‘당신이나를버린이유/알수없어’.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언젠가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다던’. 그랬나? 그랬어! 화자는 그녀의 말을 되뇌며 추억과 회한을 곱씹는다. 애달프구나, 사나이 순정. 세상의 연인들이여, 떠날 때는 말이나 하고 떠나시라. 문자라도 보내시라! 남은 사람 가슴 터지게 할 셈이 아니라면.      
1538    李相和와 李陸史 댓글:  조회:4545  추천:0  2016-07-0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광야' …항일문학 '불멸의 꽃'   대구 중구 계산동 이상화 고택(위)과 중구 남산동 지역주택조합 추진 아파트 건설 부지에 포함된 이육사 고택의 모습. 대구는 ‘한국문학의 발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 향가문학과 설화문학을 비롯한 한국 고전문학의 중심이었고, 현대문학의 창조적 진원지였다. 소설가 현진건·백신애·장덕조·김동리, 시인 박목월·조지훈·오일도·이장희·이병각·유치환, 시조시인 이호우, 아동문학가 윤복진·김성도·이응창 등 지역 출신 문인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한국 현대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대구 문인들은 항일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하며 민족의 자존을 깨웠다. 그 중심에 지역 출신 저항시인 이상화와 이육사가 있다.   ◁ 이상화 3·1운동때 대구학생봉기 주도 현진건 소개로 백조 동인 참여 나라잃은 비애·저항의지 강조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시 중구 계산오거리 근처 인도 바닥에는 이상화 시인(1901~43)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문장이 어절 단위로 나뉘어 적혀있다. 이 글귀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화 고택이 나온다. 대구 출신인 이상화 시인은 작고(1943년)할 때까지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대구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부터 저항정신이 남달랐다. 열아홉 되던 해인 1919년 3·1운동 때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했다. 비록 사전에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민족정신과 저항의지를 엿볼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돼 구금되기도 했다. 이상화 시인은 1921년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이듬해 ‘백조’ 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의 작품은 크게 감성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식민지하 민족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했다. 특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와 저항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1943년 3월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같은 해 4월 계산동 고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1948년에는 김소운, 이윤수, 구상 등 시인들이 중심이 돼 달성공원에 이상화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 이육사 40년 생애 중 18년간 대구 살아  수인번호 ‘264’를 호로 삼아 번역·평론 등 다양한 분야 두각 ◆대구서 인생 절반 보낸 이육사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의 시로 유명한 민족저항시인 이육사(1904~44). 그가 40년 인생에서 절반가량을 대구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동 출신인 이육사 시인은 16세 때인 1920년부터 1937년까지 18년간 대구에 살았다. 현재 대구시 중구 남산동(당시 대구부 남산정 662의 35)에 그가 거주하던 고택이 남아있다. 이육사 시인의 본명은 ‘원록’이다.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몇 차례의 피검과 투옥을 거듭하면서도 ‘절정’과 ‘교목’ ‘광야’ 같은 뛰어난 저항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면서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중외일보와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에도 종사하며 시 외에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1941년 폐병으로 잠시 요양했으나 1943년 독립운동을 위해 북경으로 건너갔다. 그해 4월 귀국했다가 붙잡혔고, 북경의 감옥에서 수감 중 1944년 옥사했다. ◆이들의 흔적 보존 위한 노력들 지역에서도 한국 문학사의 큰 족적을 남긴 이들 두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 흔적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우선 이상화 시인과 관련된 다양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상화기념사업회는 매년 상화문학제 및 이상화 시인상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이상화 헌시 시화전과 이상화 전기 독후감 공모 및 작품집 발간도 하고 있다. 연극 ‘비상’과 뮤지컬 ‘비 갠 하늘’ 등 이상화 시인을 중심으로 한 공연도 펼쳐지고 있다. 한때 철거 위기에 내몰렸던 이육사 시인의 고택도 보존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중구 남산동 일대에 주택 재개발을 위한 주택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문제는 재개발 대상 부지에 이육사 고택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에 대구시는 고택을 이전해 보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구시는 이상화·이육사 시인과 관련된 자료수집과 고증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인을 대거 배출한 ‘문향의 도시’인 만큼 우리나라 대표 문학관인 ‘국립한국문학관’의 지역 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대구시 관계자는 “대구를 빼놓고는 한국 문학의 역사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며 “이런 만큼 지역 출신으로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상화·이육사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고,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현창사업을 벌여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광일기자
1537    詩는 문학의 정점, 곧 시작과 끝... 댓글:  조회:4083  추천:0  2016-07-04
가슴과 머리의 시/하영  문학은 모든 예술의 정점에 있고 시는 문학의 정점에 있다. 정점은 시작이며 끝이다.  정점에 서면 시야가 확 트인다. 가슴이 후련해지고 앞이 잘 보인다. 곳곳에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이 옹기종기 얼굴을 맞대고 가슴을 부비며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하며 행간을 오르내린다.  시의 나무들이 여러 가지 입성을 지닐수록 더 따뜻하고 더 뜨겁고 더 차고 시리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품어내는 시가 된다.  나는 ‘시의 정점은 서정이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마다 서정을 먼저 생각한다. 서정은 가슴으로만 완성되지는 않는다. 가슴 일변도의 감상과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가슴에만 의존하다보면 감정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가슴과 머리가 합해져야만 큰 울림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릴 수 있다. 생략과 함축을 생명으로 한 시정신만이 상상력의 날개를 멋지게 달 수 있고 빛나는 시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런 생각들 때문에 많은 시간을 좌절의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시다운 시만 쓰자.  시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자. 이성적인 자세로 시를 쓰자. 이미지나 상상력은 현대시의 모든 것이다. 다의성이 많은 언어와 언어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자.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지 말자. 어미 처리는 깔끔하게, 직유와 은유는 적절하게, 조사 하나라도 소홀하지 말자. 항상 눈을 닦고 마음을 닦고 귀를 열어놓고 깨어 있자.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효과를 얻도록 하자. ‘언어의 경제성’이란 무언의 법칙이 있음을 명심하자. 퍼스나는 가능한 하나로 통일하자. 백 사람이 한 번씩 읽는 시보다 한 사람이 백 번씩 읽는 시를 쓰자. 보이는 정과 보이지 않는 정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균형을 이룬 시를 쓰자. 그리하여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자. 감사할 줄 알게 하자.  이런 생각들이 나를 압박한다. 압박에서 벗어나는 일은 곧 버리는 일이다. 백지로 돌아가자. 어린아이의 눈`,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자.  어느 날 저녁 빙벽 등반을 TV 뉴스로 보았다. 몇몇의 등반 대원이 너무나 깨끗한 빙벽을 콩 콩 콩 아이젠을 찍으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천지를 열어제치는 듯한 청정한 발원의 순간이 골짜기마다 꿈과 노래의 길이 되어, 빙벽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남의 끝에 천길 고요가 잠들어 있었다. 쾅쾅쾅 아이젠 소리가 겨울산을 울렸다. 고통을 한아름 안고 있는 겨울산. 고통이란 얼음덩이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화면이 바뀌었다. 생활오수·공장폐수로 썩어가는 낙동강·금호강의 처참한 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온갖 폐수로 찌들어버린 검은 강줄기는 이제 자정의 능력조차 잃어버린 채 곳곳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지구의 탕아였다.  눈부신 빙벽 등반, 시꺼멓게 썩은 강이 오버랩 되면서 갑자기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꿈틀댄다, 비장하다, 상처투성이, 상처는 검다, 어둡다. 빙벽, 물, 불, 화엄. 물은 불을 죽일 수 있다. 불도 물을 죽일 수 있다. ‘꿈틀댄다’ ‘비장하다’ ‘상처투성이’ 등이 시어로 적당치 않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자.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진실도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고…….  사랑의 눈, 용서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고통도 절망도 아름답다.  빙벽 혹은 화엄  산 그늘에 숨어 살던 쑥부쟁이의 웃음소리  빙벽에 달라 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뜬다  눈이 활짝 열린다  하반신이 썩어 시꺼멓게 흐르던 물줄기들  은빛으로 아름다이 갇혀 있다  상처 투성이의 위벽들도 비장하게 꿈틀댄다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한다①  산비탈 저쪽에서 쫓겨온 바람들이  꽝꽝 꽝 못을 친다②  못을 밟고 올라선다  새 숨소리 손 끝에 묻어난다  물이면서 불, 불이면서 물인  이 우주의 먼지 사이로  빙벽에 달라붙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내 물소리③  위의 시는 4연 17행의 비교적 어려운 시라 할 수 있다.  ①은(8행) 이 시의 눈이다. 그런데 눈이 맑지 않고 초점이 흐려 보였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첫행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빨리 읽어보고 천천히 읽어보고 눈으로 읽어보고 소리내어 읽으며 꼼꼼히 살펴보다가, 어미 처리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한다’라고 다른 행과 같이 어미를 ‘다’로 고쳤다. 그랬더니 영 아니었다. 내가 느낀 바를 다른 사람도 함께 느껴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용서한다’를 다시 ‘용서하는구나’로 원상 복귀시켜 놓고 괄호로 묶었다. 그제서야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②에서(10행) 거슬렸다. 반복해서 다시 읽어보니 긴장감·긴박감이 없었다. 8행에서 느슨하게 풀었던 호흡을 흐름이 빠르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꽝꽝 꽝’하고 띄어쓴 것을 ‘꽝꽝꽝’으로 붙여 쓴 다음 첫행부터 다시 읽어 보았다.  3연과 4연이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로 치면 둥치에 비해 잔가지와 나뭇잎이 너무 없었다. 어디에다 가지를 세워줄까, 어떤 잎을 달아줄까, 어떤 꽃을 피워줄까,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여 극적인 효과를 거둬 보자고 마음 먹었다. 쉽지 않았다.  3연에다 치장을 하면 긴박감이 떨어질 것 같아 마지막 연에다 치장을 하기로 하였다.  ③은 마지막 행으로 ‘내 물소리’ 앞에다 ‘미세한 가루가 된’을 더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조금은 맘에 드는, 단단한 시가 탄생되었다. 내 시의 전환점이 온 것이다.  빙벽 혹은 화엄  산 그늘에 숨어 살던 쑥부쟁이의 웃음소리  빙벽에 달라 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뜬다  눈이 활짝 열린다  하반신이 썩어 시꺼멓게 흐르던 물줄기들  은빛으로 아름다이 갇혀 있다  상처 투성이의 위벽들도 비장하게 꿈틀댄다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하는구나)  산비탈 저쪽에서 쫓겨온 바람들이  꽝꽝꽝 못을 친다  못을 밟고 올라선다  새 숨소리 손끝에 묻어난다  물이면서 불, 불이면서 물인  이 우주의 먼지 사이로  빙벽에 달라붙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미세한 가루가 된 내 물소리  이때까지의 나는 대부분 가슴으로 시를 썼다(첫시집 『너 있는 별』은 가슴이 승한 시의 표본이다.) 그러나 어떻게 가슴으로만, 마음으로만 시를 쓰는가.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머리도 있는데, 머리로 쓰는 시도 따뜻함이 있고 울림이 있는데…. (하 영)  쭑89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 등단. 남명문학상 수상. 시집 『너 있는 별』 『빙벽 혹은 화엄』이 있다  =======================================================================     앙상블  ―황병승(1970∼) 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 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 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     알약을 나눠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 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 이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술에 취해 뒹굴며 자해하는 노숙자들 육체가 마치 실패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각별하고 깊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침묵이 마치 그 해답이라도 되는 양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 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산뜻하고 명쾌하게 읽힌다. 과연 황병승은 재기 넘치는 시인!     각 연이 두 행씩인데, 늙은이와 죽음, 아가와 가시밭길, 배회하는 소녀들과 환각, 노숙자와 실패, 깊은 감정과 침묵 등등으로 위 행과 아래 행이 앙상블을 이룬다. 위 행 시구들은 실제 삶의 면모들이고 아래 행 시구들은 시인의 혜안으로 꿰뚫어 본 그 이면이다. 참, 이러고들 산다. 실상 그렇지 않아? 아닌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이별 앞에서 상욕을 하고, 좀체 감정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사연 넘치는 인생이여! 시인은 울적한 풍경들을 ‘쇼트컷’으로 전개하는데, 그 시각과 필치가 예리한 만큼이나 어딘지 조롱기가 느껴진다. (시인, 당신은 이렇게 인생을 잘 아는군요. 그래서 ‘쿨하게’ 사시나요?) 그 조롱기는 문장을 둥글게 매듭지으며 후렴구처럼 되풀이돼 음악성을 높이는 ‘되는 양’이란 시어에서도 오는 것 같다.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이 구절을 얻고 시인은 보석이라도 되는 양 미소 지었으리.    
1536    名詩들 앞에 선 초라하고 불쌍한 자아의 詩여!!! 댓글:  조회:3558  추천:0  2016-07-02
수정작품과 단번에 완성한 작품/정호정  나는 시를 어림으로 고친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고친다는 이론이나 전문 용어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고 하기보다는 ‘나의 시 이렇게 썼다’고 밝히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시를 완성해 가는 길이라는 동질성에서 감히.  써 놓은 시에 수정을 가한 것과, 초점이 잘 맞아 단번에 완성할 수 있었던 작품 두 편을 예시하기로 한다.  1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유기 응기(應器)를 보았다. ‘잘 살펴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능견난사’의 정보에 충실하기로 한다.  송광사 박물관 소장. 고려 후기. 전남 유형문화재 제19호. 구경 16.7cm, 높이 4.7cm. 두께 1mm. 송광사 구전에 의하면 금(金)나라의 장종황제의 황후가 쓰러져 기도할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사용했던 접시라 한다.  숙종조에 사찰을 중창하며 나라에 진상하였으며, 어떤 대장장이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함에 왕이 어필로 ‘能見難思’라 써 내린 것이 이름이 되었다 한다. 어필은 남아 있지 않다.  송광사 기록에는 500개, 1828년 충청도관찰사 홍석주의 기행문 「여천옹유산록」에서는 50개를 보았다 하나, 지금의 송광사에는 30개가 현존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로 가고 있었다. ‘능견난사’는 내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날아갈 듯이 고운 살결에 나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나의 별이며 나의 시였다. 조계산의 밤하늘에서 총총히 빛나던, 나의 유년의 별이 아니라, 살아오는 동안에 갈개다 찢긴, 상처자국들 그득한, 빛을 잃은 별이었다. 부득부득 태어나고 있는 나의 시집이 세상에 나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많은 좋은 시들 앞에서 얼마나 초라할지 모를 불쌍한 나의 시였다.  조계산을 넘으며①(초고분)  능견난사能見難思에서 너를 본다②  (너는 많이 일그러져 있다  능견난사는 송광사 박물관이 소장한  방짜유기접시  숙종때 사찰을 중창하며 진상한,  어떤 장인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해  왕이 어필로 써서 내렸다는 이름)  고운 살결에 가장자리를 가는 실금으로 말아올렸다③  (16.7cm의 구경이며 4.7cm의 높이, 1mm의 두께가  한결같다 차곡차곡 겹쳐진다)  겹쳐지는 놋쇠덩이를 주무른 망치의 힘을 본다④  스치며 날아앉는 얇은 사의,  스미는 물소리의,  깊이 가라앉은 하늘빛의,  유년의 냇가에 구르던 웃음소리의  춤,  춤의 흔적같은  너의 살결은 뭉쳐 있는가 하면 창이 나려 한다  돌산이 들판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능견난사’에 비치는 나의 너)  돌각다리 길을 오르며 내릴 때  내 안에서 이는 물 소리 바람 소리,  갈대의 서걱임마저 나를 깨운다  (누구도 재현하지 못한 신기만이 사랑이 아니라고  잘 생기지 못한 너를 다독인다.)  (괄호는 수정에 필요한 것임.  ⑴ ①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제목을 버리고, 구전을 참작하여 ‘누군가 방짜유기접시를 능경난사라 했네’로 개작하였다.  ⑵ ②에서 ‘능견난사’를 ‘방짜유기접시’로 수정하였다.  ⑶ 구전이나 사실의 서술 또는 군더더기로 여겨지는 괄호 안의 부분을 모두 삭제하였다.  ⑷ ③과 ④의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 방짜유기접시를 ‘能見難思’라 했네 (수정분)  방짜유기접시에서 너를 본다  겹쳐지는 놋쇠덩이를 주무른 망치의 힘을 본다  고운 살결에  가장자리를 가는 실금으로 말아올린  스치며 날아앉는 얇은 사의  스미는 물소리의  깊이 가라앉은 하늘빛의  유년의 냇가에 구르던 웃음소리의  춤  춤의 흔적같은  너의 살결은 뭉쳐 있는가 하면 창이 나려 한다  돌산이 들판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돌각다리 길을 오르며 내릴 때  내 안에서 이는 물소리 바람소리  갈대의 서걱임마저 나를 깨운다.  2  고산(孤山)의 세연지(洗然池)는 매우 아름답다. 굴뚝다리로 보(洑)를 삼은 계담(溪潭)으로 물이 소리 없이 스민다. 이리저리 늘어놓은 바위들을 돌며 ㄹ자의 물길을 따라 다시 회수담(回水潭)으로 흐른다. 나는 동산에 떠오르는 달이며, 춤추는 무희의 너울이 잠기는 물을 그려 보기로 하였다. 아무리 그려 보아도 세연지의 아름다움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세연지의 홍보원이 아니지 않은가.  문득 고요한 물에서 묵묵한 인종이 보였다.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이어온 아름다운, 그것은 바로 나와의 관계였다. 이 여인들의 인종이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모든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굴뚝다리에서 한바탕씩 갈등이 풀리고 있었다. 울리는 물소리를 즐기고 싶었을지, 물의 갈등을 풀어주고 싶었을지, 굴뚝다리를 놓은 고산의 의도를 내가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만 물의 입장을 헤아리면 그만이었다.  창으로 넘나드는 자연은 늘 신선하다  고산은 흐르는 물에 굴뚝다리를 놓아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고개를 숙이며 돌틈으로 스며듭니다  숨을 죽입니다 발뒤꿈치를 듭니다 소리 없이  이리저리 늘어놓은 바위며 배롱나무섬을 돕니다  산에서 흐른 암반 위에서 물은 맑고 고요합니다  맑고 고요한 물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서로 얼싸안고 싶은,  목놓아 울고 싶은, 위로받고 싶은,  살아 있음이며 반가움 서러움 고달픔들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납니다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암반 위에 양쪽으로 돌판을 세우고, 다시 돌판으로 덮은,  평소에는 건너다니는 다리가 되고, 물이 넘치면  폭포가 됩니다  물의 소리에 공명하는,  모두 다 내어준 이의 가슴입니다  때때로 차오른 나의 갈등이 풀리는 가슴으로 하여  계담의 물은 늘 아름답습니다.◑  ◇정호정 경기 안산 생. 98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당선. 시집 『프로스트의 샘』.  ====================================================================     발의 고향  ―최문자 (1943∼) 내가 나라는 때가 있었죠 이렇게 무거운 발도 그때는 맨발이었죠 오그린 발톱이 없었죠   그때는 이파리 다 따 버리고 맨발로 걸었죠 그때는 죽은 돌을 보고 짖어 대는 헐벗은 개 한 마리가 아니었죠 누구 대신 불쑥 죽어 보면서 정말 살아 있었죠 그때는 그때는 세우는 곳에 서지 않고 맨발로 내가 나를 세웠죠 그때는 내 이야기가 자라서 정말 내가 되었죠 불온했던 꽃 한철 그때는 맨발에도 별이 떴죠 그 별을 무쇠처럼 사랑했죠 날이 갈수록 내가 나를 들 수 없는 무거운 발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별똥별이죠 발도 고향에 가고 싶죠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아 발 가볍던 젊은 날과 많은 일에 옭아 매인 현재를 대비해서 들려주고 있다. 내용은 화자가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걸 짐작하게끔 무거운데, ‘∼죠’라고 되풀이되는 어미가 어린이처럼 무구한 느낌을 주고 리듬감이 있어 경쾌하게 읽힌다.   젊었던 ‘그때는’ 장식도 허위도 없고, 겁쟁이도 아니었단다. 그래서 가슴 닿는 데로만 갔었단다. 지금은 내키지 않아도 ‘세우는 곳에’ 서 있단다. 그런데 그게 강제로 세워졌던 걸까? 그걸 선택한 건 본인이 아니었나? 이익이나 의무감이나 체면, 혹은 허영 때문에 말이다. 화자도 그걸 알고 있다. ‘누구 대신 불쑥 죽어 보면서/정말 살아 있었’던 적이 있으니까. 화자가 들려주는 참으로 순수하고 거침없고 찬란했던 그의 젊은 날. 아, 옛날이여! 나이 든 남자들은 “내가 왕년에” 하며 잘나갔던 시절 얘기를 꺼내곤 하지. 맨발에는 별이 뜨고, 맨발로만 가슴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제 그 발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별똥별’이 되었네. 아, 별똥별은 자기가 본래 있었던 머나먼 그곳으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을까! 다른 많은 나이 든 사람들처럼 삶은 틀에 박혀 있지만 언어감각은 발달한 시인이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본래의 나’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1535    詩란 유산균이 풍부한 잘 곰삭은 맛깔스러운 국물! 댓글:  조회:4042  추천:0  2016-07-01
시를 삭히는 법 / 이섬  음식을 만드는 과정 중에 ‘삭힌다’는 말이 있다. 김치나 젓갈, 식혜 등을 제맛이 나도록 익히는 것인데 중요한 건 인위적으로 익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적당한 온도와 바람, 햇빛 등 자연적인 요소로 숙성시켜야만 잘 삭혀진다고 하겠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음식물 속에 있는 효모나 박테리아같은 미생물에 의해서 유기 화학물이 분해·산화·환원하여 유기산이나 탄산가스 등이 생겨서 발효되는 것이다.  잘 익고 맛있게 삭은 고추장만 해도 그렇다. 메주가루와 고추가루, 엿기름가루, 소금물 등을 골고루 섞어 버무린다. 이것을 항아리에 담아 통풍이 잘 되고 양지바른 곳에서 낮에는 햇빛을 쪼이고, 밤에는 뚜껑을 꼭 덮어 물기가 스미지 않게 해서 두 달 이상이 지나야만 제대로 삭혀져서 맛이 나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내가 좋아하는 반찬 중에 가자미 식해라는 것이 있다.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인데 잘 삭혀진 가자미 식해의 맛은 ‘입에 살살 녹는다’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겨우내 먹을 김장을 끝내놓고 나면 꼭 가자미 식해를 담그시는데 노르스름한 색깔이 도는 참가자미를 결대로 썰어 놓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좁쌀밥에 채로 썬 무와 엿기름가루를 섞은 다음 고추가루를 듬뿍 넣어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다. 버무린 것을 키작은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은 다음 웃소금을 살짝 쳐서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진 곳에 두었다가 열흘쯤 지난 뒤에 꺼내 먹는다.  요즘 들어서 건강에 신경들을 쓰다보니까 이처럼 발효된 음식이 항암 효과가 있다고 환영을 받기도 하는 듯하다. 폐일언하고, 앞의 예를 든 조리 과정을 보건대 ‘삭힌다’는 건 지적한 것과 같이 열을 가하는 등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익힐 수가 없다는 점,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에 빨리빨리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마다 다르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맛이 숙성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멸치젓갈같은 경우는 몇 달간의 낮과 밤이 지나야만 소금에 버무린 생멸치의 살과 뼈가 녹아서 잘 익은 젓국이 우러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나의 두번째 시집 『향기나는 소리』를 읽어 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섬 씨 삭힌다는 말을 좋아하나 봐.”  그랬었구나! 내가 ‘곰삭은’ 말을 좋아했었구나. 시집을 펼쳐 보았다. ‘상원사 종루에서 나무공이로 두들겨 삭아져서’ ‘우묵한 오지 뚝배기에 노랗게 삭은’ 등등.  이왕 내친 김에 덕담 한 마디 해야겠다. 잘 익어서 맛있게 삭은 시를 쓰고 잘 삭아져서 감칠맛나게 사는 삶, 좋지 않겠는가! 대전을 오가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자주 다닌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중부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가게 되었다. 도로가 16차선이나 되는 꽤 긴 편인 시멘트 동굴같은 델 들어갔는데, 바로 머리 위 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아니, 아니! 길이 울다니….”  비가 오기 때문이었는지, 차가 달리는 소리가 동굴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머리 위쪽 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사람 하나 없는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그것은 굉장한 놀라움이고 떨림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길도 울 때가 있더라」라는 제목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대부분 시를 먼저 쓰고 제목을 붙이는 평소의 습관과는 달리 제목이 쉽게 튀어 나왔다. 그때 들었던 울음소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울림으로 내게 닿았을까?  길도 울 때가 있더라  중부 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는데  바로 머리 위 길이 엉엉 우는 소리를 냈어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니까①  마음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불들을  쥐어뜯는 그런 울음이었어 검고 진했어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아픔도 눈물도 없는 줄 알았는데②  심장 안쪽에 피가 돌고 있었어③  끓고 있었어④  살아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길속에 또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살아 있음의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겹으로 포장된 뇌사의 길이  비 오는 날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어  다 드러내놓고 쓰기로 했다. 내가 겪었던 체험은 내 의식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도 있을 수 있는 갈등과 아픔 그들을 치유하고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①행을 좀 더 강조해야겠고, ②행과 ③행의 연결고리가 너무 느슨했다. 갈등을 화해로 전환하는 데 좀더 탄력있게 조여줄 수 있는 연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시를 쓰고 고치는 것도 성격대로인가? 서두르지 않았다. 석 달쯤 지난 후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그와 마주했다. 그를 한 등급 높여서 예우해 주기로 했다. 의인화시켜서 그에게 더운 피가 돌게 하고, 다시 ④행을 수정하여 맑은 공기를 흠뻑 들어마시게 해 주었다. 잘 삭혀진 것일까?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길도 울 때가 있더라  중부 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는데  바로 머리 위 길이 엉엉 우는 소리를 냈어  정말이야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니까  마음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불들을  쥐어뜯는 그런 울음이었어 검고 진했어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시멘트에 방수에 겹겹이 포장된 심장 안쪽에  아직도 더운 피가 돌고 있었어  펄펄 끓어서 맑아지게 하고 있었어  살아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길 속에 또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살아 있음의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겹으로 포장된 뇌사의 길이  비 오는 날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어  나는 시에서 운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읽으면서 걸리는 구절이나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몇 번씩 읽어보곤 한다. 또한 탄탄한 집을 지어주고자 한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는 구조가 탄탄한 집, 거기에 유산균이 풍부한 잘 삭은 맛깔스런 시의 국물까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 섬)  쭑93년 『문학과 의식』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연다』 『향기나는 소리』가 있다. 96년 국민문학상 시 부문 이천만원 고료 당선 ==================================================================================       그림자 미술관  ―홍일표(1958∼) 먼 기억처럼 바삭 마른 그림자 살살 긁어보면 피가 배어 나오기도 하는 아직 고양이 울음소리가 가느다란 잎맥으로 남아 있는 200년 전 그림 속으로 들어간 나비와 고양이가   그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저것은 어제 본 나비, 어제 본 고양이 일렁이는 그림자의 뿌리는 땅속까지 뻗어 있다 그림자가 출렁, 물고기 한 마리 뛰어오르듯 검은 허공을 열고 나오는 한 쌍의 나비 수 세기를 오가며 새까매진 어둠의 뒤편에 붙어 그림 속 봄을 매만지는 사이 손발이 다 녹아 날아가고 고양이가 펄쩍 뛰어오르는 순간 꽃잎 위의 나비가 200년 뒤로 얼른 숨는다 허공에 박힌 고양이의 몸이 빠지지 않는다     문득 한 음악이, 혹은 한 그림이 우리의 어떤 기억을 일렁일렁 일깨울 때가 있다. 우리 마음에 한숨의 웅덩이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고, 뽀얀 그리움의 신기루를 피워 올리기도 하는 기억들. ‘바삭’ 마르도록 오래전 일이어도 어떤 기억은 ‘살살 긁어보면 피가 배어나오기도 한다’.    시인에게 와 닿은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봄날과 꽃과 나비와 고양이가 수 세기를 가볍게 넘어, 마치 ‘어제 본 나비, 어제 본 고양이’처럼 생생하다. 그림 안과 그림 밖이 맞물리는 감각의 이 환각적 맥놀이를 세밀히 그린 시다. 시를 살살 긁어 보면, 그림을 보면서 일깨워진 시인의 ‘가느다란 잎맥으로 남아 있는’, 어쩌면 어둡고 슬픈 기억이 설핏 느껴진다. ‘200년 전 그림 속으로 들어간 나비와 고양이’라는 구절을 단서로 두 개의 그림을 찾았다. 18세기 중엽에 태어난 화가 김홍도의 ‘황묘롱접도(黃猫弄蝶圖·나비를 희롱하는 노란 고양이 그림)’, 그리고 18세기에 그려졌다는 장자크 바셸리에의 ‘나비를 노리는 흰색 앙고라 고양이’다. 이 중에 시인이 본 그림이 있을까? 이 겨울에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지 말고 바람도 쐴 겸 미술관에라도 갑시다!  
1534    詩는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것... 댓글:  조회:3975  추천:0  2016-06-30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날 / 박남주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인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 어둡고 칙칙한 구석에 처박혀있는 빛 바랜 사진첩이며 남에게 선뜻 열어 보이기 두려운 속내를 당당하게 환한 빛 한가운데로 끌어내는 일이라고 할지.  오브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하고 싶은 내 이야기를 은근슬쩍 토해내는 비밀스런 즐거움을 무엇에 비하랴. 보일 듯 말 듯, 결코 속을 다 내보이지 않으면서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도 그렇고 외양의 색깔과 모양, 냄새, 심지어는 보드라움이나 딱딱한 감촉을 통해 그 안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기쁨. 혼자 누리는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여러 사람과 함께 누려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기겠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표현해내는 달변도 행운이겠지만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정의 표출이나 분위기, 나아가 상상력을 글로 깨워 일으키는 일도 그에 못지않은 축복이리라.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나의 내면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으며, 사물이 지닌 속성을 낱낱이 파헤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글쓰는 사람의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를 지탱시키는 힘을 중심이라고 본다.  나의 중심은 무엇인가. 내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있는가. 사소한 일에도 시시때때 흔들리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늘 중심과제로 삼고 있는 ‘중심’에 대해 생각을 해 오다가, 이를 시로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오브제를 찾다가 문득 부채에 눈길이 갔다. 우리 모두가 곁에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은, 어쩌면 지극히 사소한 것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교적 우리와 친근하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오브제이기에, 혼자 오랫동안 생각을 해 온 탓인지 써 내려가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경우에도 시를 쓰기 전에는 오브제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게 된다. 우선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며 모양, 색깔이며 재료 등 눈에 보이는 특성을 자세히 알아야 세밀한 묘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은 나와 가까이 있으면서 손쉽게, 큰 도움을 주는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세밀한 묘사가 이루어져야만 제대로의 표현이 되는 법이다. 물론 묘사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그 표현이라는 것이 영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이건 비단 나만의 고민인지.  부채를 이루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주재료가 되는 화선지, 화선지를 단단히 떠받치는 대나뭇살, 말라 붙으면 단단해져 잘 떨어지지 않는 아교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별 거부감 없이 애용하는 태극무늬. 우리나라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는 태극무늬를 들여다보니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처음이 끝이 되었다가 끝이 다시 시작이 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그 연속무늬에 깊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곳에 힘을 잔뜩 모으고 있다가 밖으로 내보내고, 밖으로 내보낸 힘을 다시 뱃속 깊이 빨아들였다가 어느 새 밖으로 내보내는 쉼없는 작업. 마치 숨을 들이마셨다가 밖으로 내뿜고, 다시 들이마시는 행위로 내게는 비쳤다.  부채를 묘사하려는데 나를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그냥 ‘부채’ 하면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내용이 너무 막연해지고 관념적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 예로부터 우리의 미풍양속으로 자리잡은 부채를 주고 받는 단오가 생각났다. 단오와 부채. 그런 연유로 단오부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부채를 통해 나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단오부채  부채의 무게중심을 생각해 보았다  힘을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연속무늬가  한가운데 힘을 끌어모으고 있다가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운데서부터 부챗살이 사방으로 퍼지듯  살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부채의 힘이 고루 퍼졌으리라  가벼우면서도 탄력있는 대나뭇살이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곱고 부드러운 화선지가 그 위를 단단히 받치고 있다  아교풀을 적당히 먹은 화선지는 제 몸을 팽팽히 부풀린다  나는  하늘빛 바탕에  파도무늬를 넣어  내 안에 있는 한숨 한 방울  그리움 두 덩이를 알맞게 배합하여  팽팽하게 살이 오른 부채 하나 빚는다  바람 한 점 비집고 들어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시를 쓰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내가 언제 그 안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성급히 들어가서도 안 되며 시기를 놓쳐 너무 늦게 들어가면 흐름이 깨져 시를 망가뜨리게 된다.  독자들이 눈치채지 않게 시기 적절하게 나를 집어넣는 일, 딴청을 부리는 체하며 은근슬쩍 내 할 말을 다하고 끝을 맺는 능수능란한 솜씨는 언제나 가능해질런지.  부채 이야기 속에 내 이야기가 다 들어가 있는데도 왠지 내 이야기는 빠진 듯하여 결국 ‘나’를 집어 넣고는 흐뭇해 했으나 시를 망침을 어쩌랴.  이 시 역시 초보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쓰는 추상적인 단어, ‘한숨’ ‘그리움’을 쓰고야 말았다. 시의 격을 떨어뜨릴 수 있는 ‘외로움’ ‘쓸쓸함’과 같은 직설적 언어를 삼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알맞은 이미지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환 부분인 3연에서는 꼭 내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니까. 그리고는 이 단어 때문에 이 시를 쓰게 됐노라고 강력히 주장을 한다.)  시를 쓸 때는 시에 빠져 제 약점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런 때는 일단 접어 두었다가 일 주일 후 다시 열어 보고 확인을 하는 방법이 좋다고 한다. 감정이 사그라진 후, 즉 객관화가 된 시선으로 시를 보면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약점이 뚜렷이 보여 제 스스로 낯을 붉히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단어를 지우고 나면 시가 안 되는 것 같은 착각에 선뜻 지우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형상화’라는 작업이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내 시 ‘단오부채’ 의 경우도 그러하다. 불필요한 연이 전환 부분에 자리잡고 앉아 전체적인 시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3연을 지우고 나니 앞뒤의 내용이 훨씬 선명해졌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나를 버리고서야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단오부채」는 나의 등단작으로 위의 작품에서 3연이 삭제된 것이다.) 부채 이야기는 결국 내 이야기임을 뒤늦게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제목이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컴퍼스’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었다. 컴퍼스(사전적 의미―양다리를 자유롭게 오므렸다 폈다 하며 선을 긋거나 길이를 재거나 원을 그리는 데 쓰는 제도용 기구)의 모양이나 속성이 부채가 지닌 속성과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데 컴퍼스가 지닌 속성이 부채가 지닌 속성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보니 부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 의도가 약화되는 결점이 생기고 말았다.  알맞은 제목을 찾아 이리저리 궁리해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궁리 끝에 ‘부채’를 제목으로 하되 우리 민족의 풍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단오부채’라는 구체적인 제목을 달아주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부채 이야기를 하면서 ‘부채’라는 제목을 그대로 달면 의미가 부채에 국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시란 읽은 이의 몫이기에 어떻게 해석하든 결국 독자에게 맡길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행히 내가 의도한 이상으로 읽어준다면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다.  아, 참, 1연의 2행 ‘뱃속’이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리는 점을 빠뜨릴 뻔 했다. 힘이 나오는 곳에 있어서, 뱃속이 아닌 어디 근사한 단어를 넣어주고 싶은데 아직은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한계인가 보다.  실력이 향상되어 내용에 걸맞은 제목이나 단어를 척척 갖다붙일 수 있을 날이 언제 오려는지.◑  ◇박남주 상명대학 국문과 및 동국대 교육대학원 졸. 98년 『현대문학』 등단. 동인.   ===================================================================================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1980∼)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옮겼다. 질끈, 눈이 감긴다. 가슴 저 깊은 바닥에 한 마리 뱀이 스윽 지나가는 것 같다. 겁먹고 슬픈 눈으로 흘깃 돌아보면서. 대저 시인이라면 살면서 한 번은 고통의 ‘뻘’을 지나왔겠지만, 이리도 시리고 아린 시라니, 박연준은 대체 얼마나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삶을 뼈저리게 겪은 걸까. 아무 능력 없는 어린 딸 혼자서 아버지의 깊은 병환을 견뎌야 한다. 무능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나 ‘뱀이 된’, 그러니까 괴물이 돼 버린 아버지. ‘차라리, 저 아버지 없이 나 혼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활활 털어버릴 수 있었으면!’, 절규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질긴 인연. 버릴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너무도 험하고 높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안간힘 쓰고 넘으면서, 넘어가야 하면서, 화자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밖에 없다.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눈물, 아버지, 생의 난국.  
1533    가짜 詩人과 진짜 詩人 댓글:  조회:3707  추천:0  2016-06-29
말을 줍는 사람과 말을 하는 사람     시인이 너무 많다. 시인은 원래 많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시인이란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솔직하게 노래하는 사람인데 그런 행위의 결과를 가지고 쉽게 돈으로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시가 그렇게 요긴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밥은 먹어야 살지만 시는 읽지 않고 쓰지 아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으로서 한 평생 살기를 감당해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면 몰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연유에서, 옛 부모들은 자식이 책을 가까이 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오히려 걱정들을 해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엔 시인이 너무 많다. 역설적인 현상이다. 아니, 시인이라기보다는 시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은 ‘진짜’라기보다는 ‘가짜’라는 뜻이다. 그 가짜들은 대체로 세상에 널려 있는 ‘좋은’ 말들을 주어 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경향이 짙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이란 정보바다가 늘 곁에 있고, 그 속을 손쉽게 헤엄치듯 검색해 볼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이 날로 다양해지면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꼭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야만 가능했던 일들이 언제 어디서든 노트북만 열면 되는 세상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손안에 들린 작은 핸드폰만 있으면 누워서도 정보 검색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환경적인 변화가 함께 맞물려 말을 줍거나 주운 말을 가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인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들 세계에서는 누가 먼저 좋은 말을 주어 담느냐와, 그 주운 말을 가지고 자신의 말인 양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이 곧 능력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말이란 무엇인가? 삶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나 통찰력이 반영되어 사실을 깨우쳐 주는 말과, 삶의 기술이나 방법으로서 지혜에 해당하는 말들과, ‘내’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담아낸 공통된 관심사에 대한 수사적 표현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시대인들의 관심과 욕구와 감정과 생각이 반영된, 그런 공유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시를 좋아하며, 또 퍼 나르기를 즐긴다. 즐긴다는 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면서 말만 좋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기 삶에 대한 진실한, 혹은 절박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남의 이야기만 이리 저리 옮기며 자신의 이야기인 양 퍼 나르는 것이다.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은연중 모방하고 변용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하면서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진짜 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이어야 하며, 개인의 주관적 정서로서 인간의 보편적인 진실을 일깨우고 환기시켜 주는 이야기이어야 한다. 우리가 장미를 중심소재로 노래한 시들을 뽑아서 읽어보아도 장미라는 꽃 그 자체를 노래한 듯 보인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최소한의 장미 특성에 자신의 인성을 투사시킴으로써 결국 시인은 장미를 빌려서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장미의 객관적인 본질을 이해하고자 함이 아니며, 그것은 과학에서 할 일이지만, 시인이 그 장미에 부여한 주관적인 의미 곧 시인의 개인적인 품성과 성격과 기질과 지식 등이 반영된 시인이라는 타인의 정신세계를 읽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어떤 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진 시인의 주관적인 사유나 감정 곧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공감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그 시인의 문장으로써 구축된,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통해서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짓는 사람을 두고 ‘소설가(小說家)’라 하고, 수필을 쓰는 사람을 두고 ‘수필가(隨筆家)’라는 말을 쓰지만 시를 쓰는 사람을 두고 ‘시가(詩家)’라고 하지 않는다. 소설이나 수필은 시설[工場=家]만 갖추어지면 양산(量産)이 가능한 ‘생산’에 가깝지만, 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뜻이다. 시는 시를 짓는 사람 그 자체를 드러내는 수단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온갖 대상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그 대상을 통해서 시인 자신을 노래할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에게의 솔직함이다.   가짜 시인이나 대중들이 좋아하며 ‘줍는’ 말이란 바로 본인들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자신의 살아있는 말이 아니고 남의 이야기이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바로 남의 이야기를 줍고 꿰어서 자신의 이야기인 양 말하는 사람들은 시를 짓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산하는 시들은 자신의 진실이 빠져버린 ‘앙꼬 없는 찐빵’을 내어 놓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앙꼬 없는 찐빵을 먹으며 맛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빵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훌륭한 혹은 진실한 시인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에는 말을 줍는, 잔꾀가 많은 시인들이 너무 많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며 깨달은 사실을 진실하게 말하는, 자신을 노래하는 시인은 결코 많지가 않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비애이다.   -2016. 06. 28. 이시환 (시집 『여백의 진실』저자)
1532    [생각하는 詩 여러 컷] - 탁발 / 소금 ... ... 댓글:  조회:4318  추천:0  2016-06-27
탁발 - 김영주(1959~ )   민달팽이 일보 일배 해탈문을 나섭니다 저 한 몸 달랑 들어갈 걸망 하나 지고 가다가     아니다 이 집도 크다 다 버리고 갑니다 /// 탁발 나가는 수도승처럼 아무런 장식도 화려한 수사도 없는 시다. 민달팽이처럼 걸망마저 버리고 걸음마다 대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삶은 얼마나 숙연한가. 십자로에서 대지에 키스하며 회개하던 라스콜니코프처럼 다 비우는 마음은 얼마나 상서로운가. 오직 감사와 겸손이 전부인 삶은 얼마나 복된가.   ================================ 소금 - 강기원(1957~)   소금이 온다 곰소만 염부는 이렇게 말한다 소금이 온다고 유령처럼 손님처럼 소금의 걸음 소금의 소리 소금의 체취 온몸으로 느끼며 염부는 소금을 잡는다 앉힌다 오래전 수장된 자들의 해골 가루 같은 소금 죽은 후에도 우는 자들의 응고된 눈물 눈꺼풀 없는 자들의 숱한 백야 어둠 속 아닌 한낮 뙤약볕 속으로 오는 뜨거운 귀신 (…) /// 비가시(非可視)적인 것의 가시화. 소금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나 한낮의 뙤약볕 속에서 현현(顯現)된다. 보이지 않는 “눈물”과 “숱한 백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백주대낮에 드러난다. 진실은 “유령처럼/손님처럼”, 어느 순간, 문득 “온다”.   =========================   소스라치다 / 함민복(1962~)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뱀이나 개구리를 만날 때 사람들은 소스라친다. 그러나 뱀이나 개구리가 더 놀란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뱀은 겁 많고 청각이 예민해서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쳐 달아난다. 뱀·바위·나무·하늘은 본디 그러함으로 늠름하니, 사람에게 그들을 놀라게 할 권리는 없다.   뱀에게 악업(惡業)의 굴레를 씌우고, 간계와 교활의 낙인을 찍어 혐오를 조장한 게 누구더냐? 바로 사람들이다. 종달새가 어여쁘다면 뱀도 그러할 것이다. 이 생령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러면 즐겁고 활력이 솟는다. 뱀을 만나더라도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장석주·시인> ===================================== 마음(心情)은 어디를 지나야 깊은 마음(深情)이 될까요. 깊은 마음의 자리는 어디여야 할까요.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은 심장이 뛰었기 때문. 물은 흘러가고, 나는 물이 아니어서 돌멩이로 남았지요. 심장은 돌멩이처럼 단단한 것이었지요. 말도 표정도 흐르는 것이어서 물결이 되었지요. 눈코입은 표정을 따라갔지요. 나는 눈물이 없고, 표정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물이 씻어주었으므로 물에 담겼으므로 나는 얼굴 없는 돌멩이가 되었지요. 심장은 돌멩이 속 돌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나는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느라 움직일 수 없고 번질 수도 없어요. 절망의 멈춤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심장은 단단해서 계속 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작은 물결처럼 골목이 부활하고 있어요. 독립책방들이 생겨나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지요. 얼마 전에는 서울에 시집만 파는 서점이 생겼어요. 시인과 독자가 함께 마주치고 책을 고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을 만들고 싶다, 이런 순진한 생각으로 서점을 연 패기만만한 이가 바로 유희경 시인이지요. 신촌기차역 앞, ‘위트 앤 시니컬’이라나요. 작정하고 한 번씩 들러주세요. 귀한 지면에 이런 사심을 노출하는 것은 ‘심정의 심장’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죠. 시를 사이에 두고 심장이 뛰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고 싶은 것이지요. 시 읽는 사회. 굳은 마음이 아니라 깊은 마음이겠잖아요! / 이원 시인 ==================================== 작은 상자는 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 밖에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작은 상자에도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더욱 작은 상자여서 젖니가 있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커지고 커지고 더 커진 상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해냈습니다. 애타게 고대한 끝에 다시 작은 상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세계인 작은 상자를 따라 그 안 세계도 도시도 방도 벽장도 줄어들었습니다. 작은 상자를 주머니에 넣으면 전 세계와 함께 다니게 되고, 슬그머니 잃어버리면 전 세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훔치면 내 것이 되니 전 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바스코 포파(1922~1991)는 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신화와 전통을 바탕으로 한 시를 썼습니다. ‘작은 상자의 적들’‘작은 상자의 피해자들’‘작은 상자에 관한 마지막 소식’ 등 여러 편의 연작이 있습니다. ‘작은 상자’를 ‘추호(秋毫)’로 바꿔 읽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 가을 짐승의 털끝보다 큰 것은 없다”는 장자의 구절 말입니다. 줄여도 줄여도 없어지지 않는 추호가 작은 상자입니다. 결정적이고 은밀한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면에서, 작은 상자는 위험하고 위협적이기도 합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추호도 없다’는 다른 상자를 주시하라.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 이원 시인 ================================ 계속 자라는 중입니다. 점점 더 사랑을 모르겠거든요. 암흑과 봉오리와 쪽빛이 한곳에서 빚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 곳에, 깊은 곳에 걸리는 작은 것이 있습니다. 작은 것은 자꾸 단단해져 갑니다. 욕망이여 입을 벌려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혼란에 빠질 때, 발음하는 구절입니다. 막간. 잠시 멈춤. 즉 간단(間斷)이 되어줍니다. 욕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라. 당장은 불가능한 주문입니다. 어지러운, 헝클어진 속에서 겨자씨를 찾아라. 절대 불가능은 아니다로 옮겨갑니다. 한 곳에서 빚어지는 열렬함과 절도. 사랑은 사랑으로만 의심할 수 있다에서, 단단한 고요함, 겨자씨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이 방향. 그날 멋지게 한 번 태어나 볼 작정입니다. / 이원 시인 ==========================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그림은 시,글씨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뤘다. 그림이 시가 되고 시와 서예가 한 몸인 고차원의 경지는 세 영역의 교양을 모두 갖춰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것 하나 빠져도 높은 격조를 인정받기 어려웠다. 청나라 중기에 활동한 이선(1688~1762 이후)의 그림은 시 · 서 · 화 합일이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를 흡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상사와 대판 싸우고 벼슬을 버린 대쪽 같은 선비답게 화가의 붓질은 거침이 없다. 야인의 소박한 삶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물고기와 그 아래 꿈틀대는 맛깔스런 글자가 마치 오누이 같다. 그 속에 담긴 시를 통해 우리는 다시 그림에 담긴 진한 속내를 음미한다.   '길고 뾰족한 내 인생도 어느새 노년일세.유유자적한 삶이 산해진미 부럽지 않네.아침저녁으로 거친 음식을 상 위에 올리고 늦은 밤에는 산중에서 쌀겨 죽을 끓여먹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이 골목의 아침은 자기 말만 늘어놓고 슬그머니 사라진 흔적들이 나뒹굽니다. 고되고 고된 것들이 뱉어낸 구겨진 말들, 조합해보려고도 했지요. 구겨진 담뱃갑, 카드 영수증, 무가지 뭉치, 대리운전 광고물, 정말이지 지나가고 싶지 않은, 사라지기도 뭐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 어디 감당이나 하겠는지요.     담뱃갑을 굳이 구겨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을 슬쩍 감으면 이 허접한 곳은 그대가 살던 곳, 이미 사라진 길을 낡은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가 지나가곤 합니다. 어떤 예쁜 당나귀가 타고 다녔는지 할머니는 가만히 밀고 와서는 전봇대 표시판에 끼인, 배수구에 반쯤 걸린, 불법 주차된 차의 윈도 블러시에 걸어놓은 허접한 것들을 수거해가곤 합니다. 일용할 양식.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실린 미치도록 가벼운 것들은 정말이지 일용할 양식이겠지요. 골목은 다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린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귀걸이를 한 여자와 다크 서클이 얼굴 전체로 흘러내리는 남자가 서로 바라보듯 허허롭기만 한데요. 저승 같기도 하고 이승 같기도 하고 산처럼 멈춰 있기도 한 이 뒤숭숭한 골목을 어떻게 지나가야 잘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당치도 않은 이 한평생. ‘구겨진 담뱃갑, 카드 영수증, 무가지 뭉치, 대리운전 광고물’이 나뒹군다니 주택가가 아니라 유흥가 골목일 테다.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참인지 이른 출근길인지, 아니면 밤새워 술 마시고 막 술집을 나선 참인지, 화자는 그 길을 지나가고 있다. ‘고되고 고된 것들이’ 간밤에 내뱉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처럼, 텅 비고 허접하고 구겨진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골목의 아침. 피로가 몰려오는구나. 어쩌면 이다지도 척박하고 쓸쓸한가! 이런 것이 내 인생의 길목이란 말인가! 당최 감당이 안 된다고 토로하던 화자는 그 길에서 이따금 마주치곤 하는, 폐지 모으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아,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실린 미치도록 가벼운 것들’, 미치도록 가벼운 할머니의 양식! 할머니의 슬픈 현실에 이르러 시인은 구질구질하게 보이지 않도록 상상력을 발휘한다.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예쁜 당나귀를 태워준다. 이런 섬세하고 고운 마음이 우리를 힘나게 한다! 과장 없이 단아한 문장과 차분한 어조로 들려주는, 도심 골목의 가당찮은 허허로움 와중에. 황인숙 시인     ==================================================         봄날 ― 윤제림(1960∼ ) 소리 없이 쏟아지는 저 햇살 그대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도 눈물 터지게 하는 얼음장 풀리는 소리만으로 응어리 풀리게 하는 아내의 야윈 뺨에도 화색이 돌게 하는 딸애의 흰 낯에도 푸르름이 비치게 하는 기척도 없이 다가드는 저 환한 햇살 그대로 온전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五感)이 있다. 이 오감이란 몸의 신호이고 또 언어다. 몸에 감각을 받아들이는 특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시각은 가장 직접적이고, 촉각은 가장 은밀하며, 후각은 가장 암시적이다. 이들은 비슷하면서도 퍽 달라 마치 몸이라는 한집에 사는, 서로 다른 다섯 형제와도 같다. 평소 이 다섯 형제는 제각기 놀다가도 무슨 큰 변화가 닥치면 다 같이 모여들어 한목소리를 낸다. 예를 들어 요즘 같은 때, 다섯 개의 감각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봄이 온다”고 말이다.  아직 겨울옷을 벗지 못했대도 감각의 말은 맞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고, 햇빛의 자극이 달라졌고, 풍경의 얼굴이 달라졌다. 밥상에는 나물이 오르고, 얼음 녹아 개울이 흐른다. 3월이 되니 응당 와야 할 봄이 온 것일 텐데,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은 아닐 텐데, 이유 없이 봄이 반갑다.  그런데 봄이 온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픈 사람 낫게 해주지 못하고, 없는 연봉 만들어 주지도 못하고, 간 사람을 돌려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이 무능한 봄은 서럽게도 반갑다. 생각건대 봄은 위대하고 거대한 자연신의 옷자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아무것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신의 얼굴을 하고 봄은 온 사방천지에서 찾아온다. 그래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 일말의 기대를 해보게 된다. 마치 이 시처럼.    시인에게 봄은 영 무능한 것이 아니다. 봄은 아내의 뺨과 딸의 낯이 더 건강하게 바뀔 것이란 상상을 하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뻔한 말이라도 좋다. 봄은 희망을 몰고 온다. 간절하게, 믿어 보고 싶다.  나민애 시인        
153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없다? 있다!... 댓글:  조회:4069  추천:0  2016-06-27
1. 현대ㆍ문명ㆍ문화ㆍ문학 오늘날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서 현대의 특질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가? 수렵생활과 뒤이은 농경사회로부터 시작된 인류사는 어느 새 산업화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줄달음쳐 가고 있다. 그만큼 급속히, 또한 눈부시게 인류의 문명은 진보하여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불안하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를 불연속성의 시대, 불확정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연속의 시대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물질 문명의 과도한 발달과 산업화의 촉진, 대도시화의 추세로 인하여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의 연속되지 못하고 끊어져버린 모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섬」 이 시에서처럼 현대인은 섬처럼 서로 단절되어 홀로 떠 있는 것이기에 누구나 고독감과 소외감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아에 비해서 외부의 세계, 정신에 비해 물질세계가 지나치게 거대화되어 자아는 세계에, 정신을 물질에 종속되고 짓눌려버림으로써 단절과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자아와 세계, 정신과 물질 사이의 등가화 또는 자아의 주체화를 획득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간절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불확정성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문명, 과학기술의 발달은 물론 거대 사업자본의 팽배화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미래가 더욱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위기의 인식을 말한다. 물질문명이란 인간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 고안하고 발달시켜온 것이지만, 동시에 그 과도한 발달은 인간에게 있어 정신문화의 위축과 불안감을 고조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물질문명과 산업의 거대화로 인해 빈발하는 각종 대형 재해와 사건․사고가 바로 그러한 불확정성 시대의 인간상실현상을 반영하고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질가치를 추구하는 문명의 속성이 정신가치를 추구하는 문화현상을 함께 섭수해 들이고 발전시켜오지 못한 필연적인 귀결이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가 그러한 것처럼 그 문화의 핵이자 정수라 할 수 있는 문학이 하나의 위기의 시대에 처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위의를 지키고 인간정신이 승리를 진지하고 깊이 있게 탐구하는 형식으로서 문학은 자본주의의 격랑에 밀려 좌초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값싼 대중문화와 상업자본의 폭력 아래 진정한 문학, 순수한 인간탐구의 문학은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고 위축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문학의 위기란 바로 인간의 위기이며, 인간정신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오늘날 문학다운 문학, 참문학 정신의 회복과 확립이야말로 현대가 처한 불연속성과 불확정성에 맞서 인간성을 수호하고 인간의 정신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소중한 관건이 아닐 수 없겠다. 2. 자아발견과 자아실현 또는 자기구원에의 길 무엇보다 필자는 오늘의 우리 문학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참된 시정신의 회복과 확립이 긴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참된 시란 무엇이고, 참 시인의 길이란 또 무엇인가? 오늘날에 있어 시의 회복이란 말 그대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를 쓰고 일고 또 학교에선 가르치고 연구하기까지 하는가? 첫째로 그것은 시를 통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현실에 있어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서 자기를 온전하게 실천하며, 궁극적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우물 속에는 달 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저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들어가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자화상」 시를 쓰는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바로 자아발견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나는 과연 무엇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또한 해서는 안 될 일은 무엇이며 해야하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아는 일이 중요하다. 또 나의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는 물론 어떻게 를 발견하고 완성해가야 할 것인가를 하는 명제들과 연관된다. 인용시에서 있어서도 나를 발견하는 일은 ‘들여다봄-미워서 돌아감-가엾어짐-다시 돌아가서 들여다봄-다시 미워짐-그리워짐’ 이라는, 다시 말해서 윤동주는 이 시를 통해 자아란 이미 완성돼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차츰 깨달음을 얻고 있다. 이러한 자아발견을 위한 노력이 윤동주가 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된 것이고, 또 우리들이 이 시를 읽고 내 삶을 비추어보고 배울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 하겠다. 두 번째로 시를 쓰고 읽는 일은 자기를 이기는 과정, 즉 자기극복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는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을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한용운,「님의 침묵」부분 삶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부족한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납득시키고 온갖 난관을 극복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한용운의 이 인용시는 바로 시가 이러한 자기극복의 과정을 탐구하는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시는 좌절에서 위안을, 슬픔에서 기쁨과 힘을,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행해 나아가려는 자기극복의 동기에서 시가 쓰여진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자신이 처한 정신의 어려움은 물론 온갖 삶의 위기를 이겨내고 좀더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찾고자 노력하는 데서 시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끗이다. 또 우리는 이러한 시인들의 참담한 자기극복의 노력과 인내를 읽고 배움으로써 자신의 처한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고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셋째로 시는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기를 실천하는 길, 자아실현의 길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절정」 우리는 왜 사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도 이에 선명한 해답을 던져주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이 있고 철학이 있으며, 사학과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한 자기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이육사는 이 시를 왜 썼겠는가? 열여섯 차례나 피검되고 중국과 만주를 오가는 피어린 고통의 연속사이에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시를 썼겠는가? 해답을 한 가지다. 그가 시를 쓴 까닭은 자신에 대한 존재확인이자 존재증명이고 자아실현인 까닭이다. 까뮈가 말했던가? 쓴다는 것 그것은 부조리한 삶에 있어서 존재증명을 위한 안간힘이자 몸부림이라고. 그렇다! 믿고 의지할 것 없는 배척간두의 현실에서 육사에게 시는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확인할 수 있는 존재증명의 방법이자 자아실현의 방법일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그러한 자아실현의 방법이 치열했고, 존재증명의 안간힘이 철절했기에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로 시는 궁극적인 면에서 자기구원의 길을 의미한다. 삶의 근원적 목표는 무엇인가? 한계지어진 인간 영혼이 종교를 통해 정신의 구원을 얻고자 하듯이 가난한 영혼은 운명의 형식으로서 시를 통해 정신의 구원을 갈망한다는 뜻이다. 3. 사회실천과 민족어 완성의 길 그렇지만 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너에게 묻는다」 원천적으로 삶은 ‘나’에게서 시작되어 ‘너’를 거차 다시 ‘나’로 회귀하는 자기도모 또는 근원회귀의 속성을 지닌다. 자아발견에서 시작되어 자기극복, 자아실현, 자기구원으로 마무리되는 속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시는 공적인 면에서는 더불어 사는 삶,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삶, 역사적 삶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한용운,「군말」 한용운의 ‘님’이 개인적인 의미에서 ‘연인/부모/형제/친구’ 일 수 있지만, 공적인 차원에서는 ‘조국/민족/민중’ 일 수도 있다는 구조적 원리이며 성층적 이치이다. 이 시가 쓰여진 사회․역사적 환경이 일제강점기이고 시인자신이 독립투사라는 점에서 그러한 해석은 논리적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는 개인구원의 길이지만 넓게는 사회, 역사를 향해 열린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하거나 사회․역사적인 시련에 봉착했을 경우에 시는 불의와 부정에 대한 싸움이고 반역일 수 있음을 물론이다. 황톳길 선연한/ 핏자국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은 해만 타는 곳/구 손엔 철삿줄/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메밀밭을 태우는/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 - 김지하,「황톳길」 그렇다! 시는 때로 잘못된 역사와 독재 권력은 물론이거니와 부정부패,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고 투쟁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고 (김지하,「들녘」부분)와 같이 혁명이고 반역이기도 한 것이다. 아울러 시는 그러한 인간정신의 높은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숙명적인 면에서 언어와의 싸움을 전제로 한다. 즉 문학, 특히 시는 언어와 변증법적 관계에 놓인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수 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서정주,「귀촉도」 한과 허무로서 사랑과 인생의 비극적인 모습을 이처럼 아름답고 슬픈 한국어로 표현해낸다는 일이 말대로, 그리, 쉽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고유어와 방언 및 토속어, 그리고 개인적인 조어를 활용함으로써 그야말로 한국어의 비극적 황홀의 한 경지를 열어 보여준다고 하겠다. 결국 시는 궁극적인 면에서는 민족어 완성을 향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의 정서와 혼의 형식을 탐구하고 완성해 나아가는 것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한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시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민족어 완성을 향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는 개인의 삶에서 시작되어 사회․역사적 삶의 지평으로 열려 가는 길이며 동시에 민족어의 완성을 위한 순례의 길, 구도의 역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시대현실과는 끊임없이 길항하면서 언제나 영원정신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고 보편적인 생명사랑, 인간사랑, 자유사랑의 길로 열려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시인의 길, 인간의 길, 생명의 길 오늘날의 사회현실은 과연 어떤한가? 바야흐로 현대시 100년 일제 강점의 질곡도 무너지고, 분단 이래의 고질적인 군사통치의 폭력도 점차 사라져 가는 이즈음 오히려 환경파괴와 오염은 날로 심각해가고 각종 사회병리 현상도 가중되어 가고 있다.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가 하면, 자식이 부모의 유산을 노려 부모를 살해하고, 헤아릴 수 없는 반인간적 대형사고는 물론 반인류적 사건․사고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너, 또한 우리 모두 그러한 폭력과 재앙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기에 바로 우리들 지친 마음에 참된 시심을 일러주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서시」 참된 인간의 길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시심을 간직하는 길, 진짜 시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데서 그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인용시에서 시인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첫째 그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기도하며 사는 자세가 그것이다. 그런 시가 있지 않던가? 못을 뽑습니다/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여간 여렵지 않습니다/못이 봅혀져 나온 자리는/여간 흉하지 않습니다/오늘도 성당에서/아내와 함께 고해성사를 하였습니다/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아내는 못 본 체 하였습니다/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아직도 뽑아낸지 않은 못 하나가/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 김종철,「고해성사」 와 같이 속죄하는 마음, 참회하는 마음이야말로 시의 근본이고 인간에게 영성을 회복시켜주는 근원적 힘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부끄러움을 알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서 인간의 인간다움, 인간의 위의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둘째로 그것은 진정으로 괴로움을 아는 마음이다.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괴로움이 없는 인간, 괴로움이 없는 인간이란 그야말로 인간성이 마비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기계인간, 무쇠인간이 아닌 이상 물질, 영혼과 육체 사이에 끊임 없는 갈등이 존재하며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향한 번뇌가 따를 수 밖에 없다는 듯이다. 부끄러움, 괴로움을 통해 인간은 죄의 길로부터 속죄의 길, 장죄의 길로 나아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인간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셋째로 시인의 길은 을 간직하는 일이다. 그것은 별이 상징하듯이 진․선․미를 향한 동경의 마음이자 갈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끊임없이 진실의 길, 착함의 길, 아름다움의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갈망의 삶, 형성의 삶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바로 ‘아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고, 하늘의 별과 땅의 꽃 그리고 고향과 조국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넷째로 그것은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겠다. 라는 이 시의 핵심 구절이 그것이다. 삶의 처음도 나에서 비롯되고 그 끝도 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스스로의 운명을 뜨겁게 끌어안고 참되게 사랑하는 길, 즉 운명애의 길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길,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자 최대의 행복일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운명을 사랑해야 하듯이 너의 운명, 나아가서 민족과 인류의 생명,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의 생명을 긍정하고 긍휼히 여겨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종일 헤매어 지친 에버리지 떨어져 시든 꽃잎 위에 엎드리니 내일 떨어질 꽃잎 하나가 보다 못해 미리 떨어져 이불 덮어주는 저녁답 -유안진,「자비로움」 운명애는 바로 인간애의 길이며, 생명사랑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과연 이 땅에 함부로 남을 해친다든지 나아가서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오늘날 인간의 위기는 바로 문학의 위기이자 시의 위기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 점에서 지금 오늘날 21세기의 화두는 단연 ‘생명’이다. 21세기는 시를 통해서 생명존중과 생명탐구, 그리고 생명사상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참문학의 회복과 진정한 시정신의 확립을 통해 문명의 위기, 인간상실의 비극을 극복해 나아가야만할 운명의 시간, 결정의 순간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학사랑, 시사랑의 등불을 이웃에게 하나씩 점화해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생명사랑, 인간사랑, 자유사랑의 정신을 새봄의 풀잎처럼 싱싱하게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마츠오 바쇼 이전의 작품(1118~1716년)  / 시인 최윤희           사이교 西行 (1118~1190)     사람의 발길도 끊어진 산골 마을 외로움이 없다면 살기도 괴롭겠지 원하건데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봄에     소기 宗祇 (1421~1502) 우는 풀벌레 아랑곳하지 않고 풀이 시드네 세상을 사는 것은 거듭 겨울비를 긋는 것       야마자키 소칸 山崎宗鑑 (1465~1554)   둥그렇게 나와도 긴 봄날 햇살이구나 쓰디쓰구나 언제까지 거친 바람 머위의 새순 음력 사월 날아와 크게 울어라 두견새 발을 짚고서 노래하는 개구리인가 사호 아가씨가 입춘날 오줌을 싸서 아지랑이에 옷자락은 젖었도다 달에 손잡이를 달면 부채이구나 바람은 차고 찢어진 문풍지의 음력 사월 흩날리는 매화 가볍게도 신의 봄 지는 꽃을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말하고 싶다 휘파람새의 딸인가 울지 않는 두견새 소리 나지만 보이지 않는구나 숲속의 대싸리와 두견새 오작교구나 오늘 오랜만의 은하수 꽃 향기 훔쳐서 달아나는 폭풍우여라 나의 아버지 돌아가실 때에도 방귀를 뀌어 추워도 불 가까이 가지마 눈사람 두 손 짚고 노래 불러 바치는 개구리여라 소칸은 어디 갔는가 하고 누가 물으면 잠깐 볼일이 있어 저세상에 갔다고 전해 주시오     아라키다 모리타케 荒木田守武 (1473~1549)  여름밤은 밝았어도 떠지지 않는 눈꺼풀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날아가는 매화 가볍게도 신들의 봄 내 전 생애가 나팔꽃만 같아라 오늘 아침은 동틀 무렵의 늦가을 차가운 비 마을에 스며 무엇인가 밟아서 부수는 소리 들리네 나팔꽃에 비바람 친다 곧 지겠지 꽃보다도 코 속에 있었네 꽃 향기는 장맛비에 빛의 비 섞인다 반딧불이     마쓰나가 데이토쿠  松永貞德  (1571~1653)   모든 사람이 낮잠을 자는 것은 가을 달 때문 시드는 빛은 무엇을 근심하는 살구꽃인가 아 혼자 서게 된 아이 해인가 안개조차 얼룩으로 피어올랐구나 범띠 해 대측천이 가지고 왔구나 요술방망이 용띠 해 매화도 먼저 향기를 내는구나 말띠 해 오늘 아침 매달린 고드름이여 침 흘리는 소띠 해 원숭이 재갈을 물었는가 두견새 편안하게 세상을 사는가 울지 않는 두견새 슬픈 이야기 들려주고 싶구나 두견새 먹는 것보다 마음의 약인가 사슴 울음소리 저녁 활을 쏘는 것은 잠든 새를 노리는 초승달 달의 벌이 내리는구나 구름에게 가을바람 정원의 모래도 모두 은백의 달밤이구나 먼저 머리에 두건을 쓰는 음력 시월인가 사납게 내리는 빗소리여 아프다고 말하는 초겨울비 산속의 마귀할멈이 오줌을 누네 초겨울의 산 주행 마음의 약 둥글게 빚어 내리게 하는 싸라기눈이여 내리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구나 애주가 미끄러져서 사람도 눈사람처럼 굴러졌구나 세차게 내리는 소리 아프다고 말하는 겨울비 내일은 이렇겠지 어제 생각한 일도 오늘 대부분 바뀌는 것이 세상일이라     스기키 보이치 杉木望一  (1586~1643)     꽃 속에 와서 사람들 웃음소리 듣는 봄의 산       마쓰에 시게요리  松江重頼 (1602~1680)     밤에 내린 눈 알지도 못한 채 잠이 갓 들어 술고래는 동쪽에 있는가 신년 축하 안주 소리 내지 않고 온 해여 원숭이 재갈 봄이 오고 작년은 어디로 원숭이띠 해 경사를 오늘 아침 가져 오는구나 오카에비스 계모 휘파람새인가 닮지 않은 두견새 자기 이름처럼 사계절 내내 울음소리 듣고 싶구나 소나기구나 두견새 목소리를 낫게 하는 의사 웃음소리 들으며 더욱 걸맞는 단풍이여 사랑하는 아이도 여행을 시켜라 가을 기러기 쉬고 있는 기러기 무리 속에 괴롭구나 쇠물닭 사라카와를 다니는 밤배구나 하늘에 떠 있는 달 천상으로 가는 배편이 되어라 초승달 산기슭이여 경대가 되는 초저녁달 산 지킴이와 돌아보기를 겨루는 초겨울비여 처음부터 벌어져 피는구나 눈꽃 가을이 옴을 이 아침 한 발로 느끼네 잘 닦인 툇마루 순례하는 막대기만 가는 여름 들판 산 물고기 칼자국의 소금이여 가을바람 잠깐 멈추게 꽃이 핀 쪽으로 종 치는 것은       니시야마 소인  西山宗因  (1605~1682)     흰 이슬방울 분별없이 내리네 어느 곳에나 산다는 것은 나비처럼 내려앉은 것 어찌 되었든 바라보느라 고개가 뻐근하다 꽃이 필 때면 꽃을 밟으니 함께 아쉬워하는 목화 면양말 유채꽃 한 송이 피어 있는 소나무 밑 바다는 조금 멀어도 꽃나무 사이에 늦게 핀 벚꽃 너에게 부는 저녁의 강풍 나에게도 결국 누군가의 살을 어루만지리 이 잇꽃은       야스하라 데이시쓰 安原貞室  (1610~1673)      시원함의 덩어리 같아라 한 밤중의 달 오는 해의 마음에 매달린 목숨이어라 녹아서 서로 화해했구나 얼음과 물 아, 이거! 이거! 이 말만 되풀이한 벚꽃 핀 요시노산       간노 다다토모  神野忠知  (1625~1676)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강둑에 제비꽃 하나 푸른 바다에 날개 희고 검은 오리 머리는 붉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서리 내리는 달 있는 것은 죽은 몸의 그림자       가와이 지게쓰  河合智月  (1633~1718)     나이가 드니 목소리 기운 없구나 귀뚜라미 내 나이 늙은 것도 모르고 꽃들이 한창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허수아비 소매 속에서       노자와 본초  野澤凡兆  (1640~1714)     눈 내리는가 등잔불 흔들리는 밤의 여인숙 꽃 지는데 절 문 닫아걸고 떠나다 겹쳐져 있다 눈 쌓인 산과 눈이 없는 산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네 길고 긴 한 줄기 강 눈 덮인 들판     이하라 사이카쿠  井原西鶴  (1642~1693)     섣달그믐날 정해진 것 없는 세상의 정해진 일들 궤짝 속으로 봄이 사라져 가네 옷을 갈아입으며 뜬세상의 달 더 본 셈이 되었네 옷을 갈아입으며 봄과 여름이 손마저 엇갈리는 옷 갈아입기       야마구치 소도  山口素當  (1642~1716)     오두막의 봄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게 있다 꼭지 빠진 감 떨어지는 소리 듣는 깊은 산 세상에 들러 잠시 마음 들뜨는 섣달그믐날 나를 데리고 내 그림자 돌아오는 달 밝은 밤 눈에는 푸른 잎, 산에는 두견새, 첫 가다랑어        
1530    <조문(弔問)과 죽음 묵상> 시모음 댓글:  조회:4110  추천:0  2016-06-26
  조문 / 유수경             스마트하게 도착한 부고를 연다.   오늘은   95세 곽씨 성의 어르신과   84세 유씨 성의 할머니가   환절기 저승학교의 동창이 되셨다.   시든 꽃 몇 개 빼내 재사용되는 화환처럼   이 쪽 식장에서 저 쪽 식장으로   모였다 흩어짐을 반복하는 사람들   예를 갖춰 망자 앞에 엎드리지만   고백컨대, 영정사진이 첫 대면이다.   산 자들은 죽은 자를 배경으로   모래밥 같은 한 끼를 공유하고   너댓 잔 술에 안색을 바꾼 후   화투나 윷으로 새 판을 짠다.   몇 번을 더 뒤집히고   얼마나 더 잡아먹혀야   생의 종착지에 도착하는 것인지   한 바퀴도 완주 못한 인생들이   육개장 트름 같은 훈수를 건네는   이 판과 저 판,   이승과 저승 사이로   차별 없이 자유로운 눈빛 한줄기.   적어 낸 실명을 다 암기한 부의함이   차기 주인공을 고르듯   문상객의 뒤태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다.     -------------------------------------     -조문- 이 일 영         (젊은 후배 부인의 장례식을 다녀와서)     사랑하는 두 아이와 남편의 곁을 떠난 젊은 여인의 죽음이 놓인 장례식장은 국화꽃 향기마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생전의 숨결을 담은 검은 액자 속에서 자신을 데려간 몹쓸 통증마저 용서한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여인 앞에 이별이 실감 나지 않는 울먹이는 남매와 참회로 서있는 남편의 손 떨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낯선 땅의 새벽은 더욱 어두워 다시 볼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기억이 캄캄한 미지의 새벽을 걷고 있었다 -----------------------------------   조문 / 공석진         진정 슬퍼하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의 것 관조자의 통곡으로 죽은 자의 넋이 다시 살아오는가       마지막 날까지 빛을 발하다 혼(魂)마저 소진되면 소생 불가한 촛불처럼 무흔히 스러질 몸이거늘     시간이 지나면 무심히 잊혀질 사람들 별이 떨어진들 장송곡을 부를것이냐 상여방망이를 잡을 것이냐       오로지 지금에 살아 있슴을 감사하고 죽은 자에게 시무룩이 고개 숙이는 가식은 하지 마라       꿈틀거리는 내일 독한 커피로 잠자는 뇌를 각성하여 죽어가는 시간에 조문(弔問)을 하라     --------------------------------------------   조문길 / 양용직           연초록 벼줄기들이 뾰족하게 고개 세우고 서해바람을 따라가던 먼길로 낮은 산들도 줄레줄레 따라가서 닿는다 쓴 소주 한 모금 털어 넣고 눈을 감는 상가집 한 생애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주거니 받거니 당겼다 놓는 목숨 조용한 서해 길로 해는 넘어가고 툴툴 털고 일어서는 야목리 들판 망초 꽃길에 피는 어스름 노래. ---------------------------------------------------------------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부터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내 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죽음은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올 것입니다. 우리의 누이, 죽음이여, 환영하노라! (작자 미상) + 죽음 앞에서 태어난 것이 나요  죽는 것이 나인데  사는 것은 정녕 나인가?  (작자 미상) + 죽어서  장군은 칼이 되고 제왕은 능이 되고 부자는 울타리 되고 가난은 돌이 되고 모래가 되고 나는 구름이 되어 좋은 바람 만나 천릿길 가리 무덤에 타는 풀잎에 비나 되리 (김광섭·시인, 1905-1977) + 고인돌  죽음이 너무나 가벼워서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돌로 눌러 두었다.  그의 귀가 너무 밝아  들억새 서걱이는 소리까지  뼈에 사무칠 것이므로  편안한 잠이 들도록  돌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대 기다리며  천년을 견딜 수 있겠는가. (염창권·시인, 1960-) + 마지막 지상(地上)에서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해진 지평선을 넘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김현승·시인, 1913-1975) + 진흙의 사람  아일랜드에서는 이런 점을 친다지 접시에 반지, 기도서, 물, 진흙, 동전을 담아 눈을 가린 술래에게 하나를 집게 하는데 반지를 집으면 곧 결혼하게 하고 기도서를 집으면 수도원에 가게 되고 물을 집으면 오래 살게 되고 진흙을 집으면 곧 죽게 되고 동전을 집으면 엄청난 부자가 된다지 내가 집어든 것은 진흙, 차갑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손끝에 느껴질 때 그것이 죽음이 만져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놀라기도 하지 그러나 우리는 오래 전 진흙으로 빚어진 사람, 아침마다 세수하면서 그 감촉을 느끼곤 하지 물로 씻어낼 때마다 조금씩 닳아가는 진흙 마스크를 잘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를 시작하지 아일랜드에 가지 않아도 반지, 기도서, 물, 진흙, 동전을 담은 접시는 식탁이나 선반 위에 늘 놓여 있지 내가 집어든 것은 진흙, 그것으로 빚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고 진흙이 마르는 동안 갈라지는 슬픔 또한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눈 어두운 진흙의 사람, 그러니 내 손이 진흙을 집어들더라도 부디 놀라지 말기를! 가렸던 눈을 다시 뜬다 해도 나는 역시 한 줌의 진흙을 집어들 것이니! (나희덕·시인,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 영정(影幀)의 말   일평생 독신을 고집하다   불치의 병을 얻어 떠나는 61세의 영혼  후손 없는 영안실은 썰렁하기만 한데    저승의 문턱 넘어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로 웃고 있습니다  저토록 아름다울 수가 ......  그때 눈빛 마주친  영정 안의 망자가 입을 열어 전해줍니다  덧없는 인생 살아 있을 동안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기회 있을 때   행복의 숲길 자유롭게 걸어야 한다고  생생하게 전해들은 망자의 말   이 세상에 꼭 한 사람  그대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붉은 해 서산에 지고 있습니다   어둠 찾아오기 전  별빛 사라지기 전   뜨겁게 사랑하십시다 (손희락·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조문(弔問)을 가면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어라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다' 무례치 않다면 관속에 누운 시신을 보라 한줌 흙으로 먼지로 돌아갈 한낱 물체이더냐 몸을 형성하던 원소들이 바로 너였더냐 값으로 환산되는 몇 푼 안 되는 물질이었더냐 모든 존재의 마지막 돌아가야 할 원형인 흙은 화해와 용서로 하나 되는 제단인 것을 네 장례식에 참여한 친인척과 벗들은 그들은 너에게 누구인가 너는 지금 그들에게 무엇인가 한 사람이 가고 나면 음영(陰影)도 없지 않는가 그대 있었기에 그만큼 세상은 밝았고 그대 숨결이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너는 밤이면 어김없이 우리 인생 여정의 밤길을 비추는 반짝이는 한 별로 떠 있고 싶을 게다 (김홍언 요한 보스꼬·신부) + 언젠가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조은·시인, 1960-) + 어머니는 수의를 거풍시키신다  환하게 피워 올린 목련꽃 옆에서 빨랫줄에 걸린 흰옷이 펄럭인다 어머니는 일 년에 한 번씩 수의를 거풍시키신다 서랍 속에서 꽃 피우길 기다렸다가 바지랑 끝에서 날리는 삼베 조각들 한때 꽃이던 시절 있었다고 준비해둔 수의를 봄날마다 목련 꽃잎과 견주시면 안동포 조각들이 목련 빛으로 물이 든다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사시다가 큰 맘 먹고 구입하신 평상시엔 입지도 못하는 옷, 꽃이 진 자리에서 더욱 빛나는 당신은 앙상한 손길로 남은 생을 미리 다독이신다 수의가 내다 걸린 하늘가 적멸로 가득차다 (김선호·시인, 충남 공주 출생) + 닿고 싶은 곳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다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최문자·시인, 1947-) + 아버지의 팔자  '야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까지 시켜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 만원이 넘는 큰돈을 삼일만에 펑펑 다 써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질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김나영·시인, 1961-)  + 돌아간다, 돌아온다  계절이 돌아온다 사람이 돌아온다 일하러 나갔던 가장이 저녁이면 집으로 들어오고 학교로 일터로 나갔던 아이들 밤이면 어김없이 들어온다 돌아간다, 아버지 고향에 묻히시고 추석에 찾고, 봄이 돌아와 기일에 찾은 무덤가 제비꽃, 조개나물, 구슬봉이 봄맞이꽃  앙증맞게 지상 위로 돌아와 자식보다 먼저 앉아 있다 아버지는 먼저 가신 큰 아버지 곁, 작은 아버지 곁,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계시니 세상 살다 가는 것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겠다 모두 돌아가고 돌아오는 길가에 우리가 있으니 산으로 물로 하늘로 돌아가는 것 오늘 또 어느 산자락에 무슨 꽃은  이 계절을 찾아와 피어 웃고 있을까 돌아가는 길, 돌아오는 길가에  그저 한 송이 꽃과 눈 맞추고 싶은 봄날 한 생각 위로 구름이 소리없이 제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구꾹, 꾸꾹 산에서 들리던 새 소리는 또 어느 숲 휘어진 길을 따라가고 있을까 (김영림·시인)  + 누구든 떠날 때는 누구든 떠날 때는 한여름에 모아둔 조개껍질이 가득 담긴 모자를 바다에 던지고  머리카락 날리며 떠나야 한다 사랑을 위하여 차린 식탁을 바다에다 뒤엎고 잔에 남은 포도주를 바다 속에 따르고 빵을 고기떼들에게 주어야 한다 피 한 방울 뿌려서 바닷물에 섞고 나이프를 고이 물결에 띄우고 신발을 물 속에 가라앉혀야 한다 심장과 달과 십자가와, 그리고 머리카락 날리며 떠나야 한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언제 오는가? 묻지는 마라. (Bachmann) + 어떤 식목                                   사각의 관(棺) 하나를 땅에 심었네 슬픔은 모르는 척 한줌의 흙으로 던져졌네 사람들은 몸 속에서 투명한 울음을 꺼내 골고루 뿌려주었네 그의 생은 흠뻑 젖었네 한 장의 햇살이 달려왔네 그의 생애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네 그는 작은 씨앗 하나로 돌아갔네 그 씨앗 속에 혼돈과 좌절과 영광으로 우거진 거대한 숲이 밀봉되어 있네 (손순미·시인, 1964-) + 죽음을 바라보며  제게 손을 놓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승의 삶을 부여잡으려는 저의 환상과  두려움과 집착과 열망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을 때  당신께서 저를 부르실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당신 사랑이  제가 미처 끌어안을 수 없는 기쁨을  제게 마련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부서진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저는 손을 놓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낯선 까닭에 무섭습니다.  당신이 제게 빛을 약속하신 그곳에서 저는 단지 어두움만을 바라봅니다.  참 삶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저는 단지 삶의 끝장만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저의 인간적인 집착을 이해하십니다  저의 불완전한 감각을 이해하십니다.  저를 지으시고 자라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시기에  제게 느낌과 환상을 주신 분도 바로 당신이시기에  당신은 보고 계십니다.  제가 붙잡혀서, 이끌려서  제가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함을  저의 기력은 쓰러지고  저의 총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저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만이  끝없는 사랑이시기에  늘 그러하셨듯이 제 곁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고독한 여정의 황혼에서,  당신께서 저를 붙잡으시고  저를 이끄시며,  저를 받아들이시고  저의 부서진 형체를 다시 맞추실 것입니다.  당신 앞에  저는 아무런 비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나 부족한 답변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약함과 힘없음과 두려움이  당신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당신 팔 안에 잠들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빛 안에서 깨어나기를.  저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무한히 자비하신 나의 하느님  저는 믿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당신께서 죽음 너머에 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당신의 이름 안에  저는 내어놓습니다. 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기 대령하였나이다!  저의 마지막 여정에 내내 함께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과 함께 머무를 집으로. 
1529    詩적 상상력을 키워야... 댓글:  조회:4793  추천:0  2016-06-25
상상력 연습 1. 동물의 시체를 방치 하면 어디선가 구더기가 생겨나서 그것을  해체 시킨다.구더기는 지구의 청소자라 할 수 있다. 이런 구더기를 우리는 더러운 것으로만 보고 있으니 딱하다.지구를 깨끗이 치워주는 청소자가 왜 더럽단 말인가.치워지지 않은 상태, 그리하여 동물의 시체가 자꾸만 쌓여 가는 그 상태야 말로 더럽다면 더러운 것이다.이런 사실은 관점을 어떻게 설정 하느냐에 따라 미와 추가 근본적으로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그러니 자기에게 익숙한 어느 한 관점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편협일 뿐이다. 2.사물은 수많은 형상과 내포를 가질 수 있다. 비근한 예를 들어 한 종지의 물을 보자. 코끼리 한테는 눈에 띄기도 어려운 소량의 그것이 개미 한테는 빠져 죽을 수도 있는 홍수의 재앙을 의미하는 것이다.같은 물을 각자의 위치와 관점에서 결코 같지 않게 받아 들일것이 분명하다.시인은 이와 같이 다양한 사물의 모양을 함께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코끼리의 눈도, 개미의 눈도.그리고 다른 온갖 사물의 눈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3. 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끝없는 지연으로 이어진다. 오지 않는 님과도 같은 것이다.오지 않기에 천만 다행이 아니냐. 님이 만일 온다면 그날로 시인은 끝장이다. 님은 결코 오지 않기 때문에 시인은 언제 까지나 죽지않고 살아서 그 님을 기다릴 수 있다. 4.돌은 말이 없다. 허공도 말이 없다. 그러나 귀를 잘 기울이면 그것들은 모두 말을 한다. 그것도 참으로 오묘한 말이다. 상상력이란 그런 말을 알아 듣는 귀의 다른 이름이다. 5.이미 씌어진 한편의 시는 완성품이라는 일면을 갖는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들은 흔히 “내 시에는 토씨 하나도 보태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시는 언제나 미완의 가능성으로 존재 한다. 이때 시를 완성 시키는 것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이 제대로 불타오르기만 하면 한 편의 시는 그 불꽃의 크기와 뜨거움에 비례하는 내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시는 독자의 상상력을 촉발 시키기위한 한 개비의 위험한 성냥이라 할수 있다. 6.영향을 받는다고 두려워할 까닭은 조금도 없다. 영향을 두려워 할 만큼 허약한 정신은 아무것도 창조해 내지 못한다.겨우 모방꾼이 될 뿐이다.참으로 독창적인 정신은 영향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로는 뻔뻔 스럽게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한다.훔친것도 삼켜서 소화 해 버리면 내것인 것이다. * 이형기 시인의 시집 중.산문 ‘불꽃속의 싸락 눈’에서 발췌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김 영남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 기둥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 보는 고구마 순, 벽을 기어 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 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꺽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 대나무 뿌리 같은 손이 있고, 그 손 속에 들녘으로 나가는 어머니 호미자루가 쥐어져 있다. 꺽인 자리를 지우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 펴는 새순 속에는 또 얘야,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뒤져 네게 올려 주마 하시던 고무 신발 같은 말씀이 달리고 있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묵은 순 속에는 딱딱한 매듭으로 남거나 삭정이로 부러지는 줄기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숨어 있다. 땅을 기어 가는 것들, 절벽을 기어 오르는 줄기들에는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 아름다운 등이 있다. 변환 스위치가 필요하다                 김 영 남 좋은 사고를 제조하기 위해선 우선 작동이 잘 되는 변환 스위치가 여럿 필요하다. 관점을 신속하게 거꾸로 바꿀줄 아는 reversal 스위치 진부한 상상을 버리고 컬러풀한 상상으로 이동 을 모색하게 하는 po 스위치 적개 적소에 디딤돌을 놓아 건너 뛰게 하는 stone 스위치 무작위 대입을 통해 제 작을 찾게 하는 random 스위치 고정관념으로부터 탈출을 모색하게 하는 domi- nant 스위치 자, 준비가 끝낫으면 파워를 넣고 한번 시험 가동을 해 보자. 연료로는 뚱둥한 여자, 주근깨, 토종개, 달빛, 누룩, 청 포도, 홍시 ,장작불, 개오동 열매 잠시 경험, 지식, 정보의 작업 라인이 분주히 움직이더니 창조적 접근만 허용하는 관리 체계의 결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품질 좋은 사고가 제조 되었다. < 토종개 한 마리, 검정깨 네 홉, 청포도 3kg, 누룩 두 되 가웃, 대추 한 사발을 달빛에 발효시 켜 가양주(家釀酒)를 양조 하겠다>는 개오동 열매  같은 시(詩), 허약체질과 발기부전에 특효인. 모두가 들국화 시인이 되게 하라                           김영남 이번 가을은 농부들 마음위에서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라. 그리하여 섬돌 아래에서 사발로 줍게 하라. 튕겨 낼 듯 댓가지 휘고 있는 가을 과일들도 그 꽉 찬 결실만 생각하며 따게 하라. 혹 깨물지 못할 쭈그린 얼굴이 있거든 그것은 저 빈 들녘의 허수아비 몫으로만 남게 하라 더 이상 지는 잎에 까지 상처 받지 않고 푸른 하늘과 손 잡고 가고 있는 길 옆 들국화처럼 모두가 시인이 되어서 돌아오게 하라.               ====================================================   마츠오 바쇼 작품(1644~1694년) / 시인 최윤희           마츠오 바쇼  松尾芭焦  (1644~1694)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장맛비 내려 학의 다리가 짧아졌어라 가는 봄이여 새는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자세히 보면 냉이꽃 피어 있는 울타리여라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 스미는 바람 여행자라고 이름 불리고 싶어라 초겨울 비 무덤도 움직여라 나의 울음소리는 가을바람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죽은 사람의 소매 좁은 옷도 지금 볕에 널리고 한밤중 몰래 벌레는 달빛 아래 밤을 뚫는다 흰 이슬도 흘리지 않는 싸리의 너울거림 첫눈 내리네 수선화 잎사귀가 휘어질 만큼 휘파람새가 떡에다 똥을 누는 툇마루 끝 여름에 입은 옷 아직 이를 다 잡지 못하고 산길 넘는데 왠지 마음 끌리는 제비꽃 야위었지만 어쩔 수 없는 국화는 꽃을 맺었네 소금 절인 도미의 잇몸도 시리다 생선 가게 좌판 모란 꽃술 속에서 뒷걸음질 쳐 나오는 벌의 아쉬움이여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다 가을 저물녘 여름 장맛비 다 모여서 빠르다 모가미 강 둘이서 본 눈 올해에도 그렇게 내렸을까 나무 뒤에 숨어 찻잎 따는 이도 듣는가 두견새 울음 더 보고 싶어라 꽃에 사라져 가는 신의 얼굴을 울적한 나를 더욱 외롭게 하라 뻐꾸기 봄비 내려 벌집 타고 흐르네 지붕이 새어 쇠약함이여 치아에 씹히는 김에 묻은 모래 날 밝을 녘 흰 물고기 흰 빛 한 치의 빛남 말을 하면 입술이 시리다 가을바람 일어나 일어나 내 친구가 되어 줘 잠자는 나비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시게 나 역시 외로우니 가을 저물녘 땅에 떨어져 뿌리에 다가가니 꽃의 작별이라 몸에 스미는 무의 매운맛 가을바람 죽지도 않은 객지 잠의 끝이여 가을 저물녘 불을 피우게 좋은 걸 보여 줄 테니 눈 뭉치 자, 그럼 안녕 눈 구경하러 넘어지는 곳까지 잊지 말게나 덤불 속 피어 있는 매화꽃을 나팔꽃이여 너마저 나의 벗이 될 수 없구나 의지할 곳은 언제나 잎사귀 하나 벌레의 노숙 손에 잡으면 사라질 눈물이여 뜨거운 가을의 서리 일생을 여행으로 쟁기질하며 작은 논을 가고 오는 중 어리석게도 어둠 속 가시 잡은 반딧불이 제비붓꽃을 이야기하는 것도 여행의 하나 나무다리 위 목숨을 휘감는 담쟁이덩굴 나의 집에서 대접할 만한 것은 모기가 작다는 것 첫 겨울비 원숭이도 도롱이를 쓰고 싶은 듯 얼마 동안은 꽃에 달이 걸린 방이겠구나 조만간 죽을 기색 보이지 않는 매미 소리 이 가을에는 어찌 이리 늙는가 구름 속의 새 흰 이슬의 외로운 맛을 잊지 말라 한겨울 칩거 다시 기대려 하네 이 기둥 겨울비 내리네 논의 새 그루터기가 검게 젖도록 가을 깊어져 나비도 햝고 있네 국화의 이슬 이 길 오가는 사람 없이 저무는 가을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가을 깊은데 이웃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겨울 해여 말 위에 얼어붙은 그림자 물들었구나 두부에 떨어져서 옅은 단풍잎 기다리지 않았는데 야채 팔러 왔는가 두견새 오징어 파는 이의 목소리 헷갈리는 두견새 두견새 정월은 매화꽃이 피고 겨울 모란 물떼새여 눈 속의 두견새 바위 철쭉 물들이는 눈물이구나 두견새 논이랑 밭이랑 그 속에도 여름의 두견새 나무에 가려져 차 잎을 따는 이도 듣는구나 두견새 두견새 가다랭이를 물들였던 것이구나 꽃의 화려한 얼굴에 감동되어 으스름달 산길에 와서 왠지 마음 끌려라 제비꽃 입춘이구나 신년 묵은 쌀 다섯 되 새해 첫날이여 생각하면 쓸쓸한 가을 해질녘 나이는 사람에게 주고 언제나 젊은 에비스신 장식 소나무여 생각하면 하룻밤 삼십년 많은 서리에 사려 깊은 장식 소나무 누구의 아내인가 풀고사리에 떡을 얹은 소띠 해 곤약에 오늘은 이기는 풋나물인가 오오츠 그림의 첫 그림은 어떤 부처 저울이여 쿄토 에도를 재고 천년의 봄 오두막집도 주인이 바뀌는 시절이요 하나 인형의 집 영험하게도 녹음과 신록 위에 빛나는 햇빛 잠시 동안은 폭포 속에 틀어박히네 초여름 여름 산에 수행 나막신을 배례하는 출발이어라 딱따구리도 암자는 쪼지 않고 여름 숲 들판을 가로질러 말머리 돌려다오 두견새 풍류의 시작이여 오쿠의 모내기 노래 세상 사람이 찾지 않는 꽃이여 처마 밑 밤꽃 모내는 처녀의 손이여 옛날 베 치치던 정취 카사지마는 어디메뇨 오월의 젖은 길 벚꽃보다 소나무는 두 갈개를 하고 삼월 넘기다 여름풀이여 무사들의 꿈꾸던 자취 고맙구나 눈의 향기 감도는 마다마다니 서늘함이여 초승달의 하구로산 구름 봉우리 수없이 무너져 내리고 츠키노야마 이야기할 수 없는 유도노에 적시는 옷소매구나 키사카타여 비에 서시가 자귀꽃 시오코시여 학의 다리 젖고 바다는 시원하도다 칠월의 밤이여 칠석 전야 초엿새도 평소와는 다르네 거친 바다여 사도섬을 가로지르는 은하수 올벼 향기여 헤쳐 들어간 오른쪽은 아리소 해변 가을은 시원하도다 모두 손에 들고 벗기세 참외와 가지 따가운 햇살은 변함없이 가을바람 어여쁜 지명이여 어린 소나무 나부끼는 싸리꽃 억새꽃 참혹하도다 갑옷 아래의 귀뚜라미 석산의 바위보다 하얗도다 가을바람 야마나카여 국화 꺾을 일 없네 온천의 향기 오늘부터는 글자를 지워야겠다 삿갓의 이슬 달이 밝도다 유우교 고승이 지고 온 모래 위 망월이여 호쿠리쿠 날씨는 알 수가 없네 쓸쓸함이여 스마보다 더 심한 해변의 가을 파도 사이여 조가비에 섞이는 싸리꽃 조각 대합조개가 두 몸으로 헤어져 가는 가을이로다 여름 장맛비 누에는 뽕나무 밭에서 병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비의 현실이여 애처로워라 아홉 번 달 때문에 일어났어도 아직 새벽 4시 나비의 날개 몇 번이나 넘는가 담장의 지붕 종 치지 않는 마을 무엇을 하나 봄날 저녁 풀잎에서 떨어지자마자 날아가는 반딧불이 고추에 날개를 붙이면 고추잠자리 매화 향기에 쫒겨서 물러가는 추위여라 나팔꽃 보며 나는 밥 먹는 사나이 나팔꽃은 솜씨 없이 그려도 애틋하여라 떠나는 가을 손을 벌렸구나 밤송이 두 손으로 뜨자 벌써 이가 시린 샘물이어라 일 년에 한 번 소중하게 뜯는구나 냉이풀 한들한들 더 이슬 같아라 마타리꽃은 눈 그친 사이 연보라색으로 돋아나는 땅두릅나물 볼만하구나 폭풍우 지난 뒤의 국화 초겨울 찬 바람에 향기 묻어나는 늦게 핀 꽃 이슬 방울방울 시험 삼아 덧없는 세상 씻고 싶어라 찬 바람 분다 이 몸은 돌파리 의사 같아라 국화꽃 빨리 피어라 국화 축제 다가오니 작별의 시 부채에 쓰고 찢는 아쉬움이여 도롱이벌레 소리 들으러 오라 풀로 엮은 움막 파 뿌리 하얗게 씻어서 세워 놓은 추위여라 어찌 되었든 죽지 않았다 눈 속의 마른 억새꽃 구름처럼 친구와 헤어져 기러기 잠시 생이별하네 두견새 울고 울다가 또 날다가 분주하여라 봄밤은 벚꽃에 날이 새며 끝이 나누나 향기 찾다가 매화를 바라보는 헛간 처마 끝 물이 불어나 별도 객지 잠 자네 바위 위에서 작은 새끼 게 발등에 기어오르는 맑은 물 저 떡갈나무, 꽃에는 아주 관심 없는 모습이어라 파도 사이 작은 조개에 섞인 싸리 꽃잎을 물풀에 모이는 흰 물고기 잡으면 사라지겠지 남의 말 하는 사람마다 입 속의 혀 아래쪽 붉은 단풍잎 어디서 겨울비 내렸나 우산 손에 들고 돌아온 승려 재 속의 불도 사그라드네 눈물 끓는 소리에 여름 장맛비 한밤중에 물통테 터지는 소리 문학적 재능은 내려놓으라 모란꽃 국화 진 후에 무 뿌리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객지 잠 자면 내 시를 이해할 수 있으리 가을바람 첫눈 내리네 다행이 오두막에 있는 동안에 평소 얄밉던 까마귀도 눈 내린 아침에는 바다 저물어 야생 오리 우는 소리 어렴풋이 희다 대합조개가 입을 다물고 있는 무더위여라 외로움을 물으러 오지 않겠나 오동잎 한 잎 주인 없는 집 매화조차 남의 집 담장 너머에 나팔꽃 피어 낮에는 자물쇠 채우는 문의 울타리 가진 것 하나 나의 생은 가벼운 조롱박 나를 닮지 말라 둘로 쪼갠 참외일지라도 물 항아리 터져 한밤중 빙결에 잠을 깸이여 어두운 밤 둥지를 잃고 우는 물떼새 보름 다음 날 밤 적지만 어둠의 시작 온갖 풀꽃들 제각기 꽃 피우는 공덕이어라 무슨 나무의 꽃인지는 몰라도 향기가 나네 돌산의 돌보다 하얗다 가을바람 돌산의 돌에 세차게 흩날리네 싸라기눈 정월 초나흘 죽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 있을까 하룻밤 묵을 곳 구해 이름을 말한다 첫 겨울비 두견새 사라져 간 쪽에 섬 하나 색이 묻는구나 두부에 떨어져 옅은 홍단풍 달과 꽃을 아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들 나무 끝에서 덧없이 떨어지는 매미의 허물 병든 기러기 추운 밤 뒤쳐져서 길에서 자네 오늘만은 사람도 늙는구나 초겨울 비 서리를 입고 바람을 깔고 자는 버려진 아이 부러워라 속세의 북쪽에 사는 산벚나무 때때로 나 자신의 숨을 본다 겨울의 칩거 나비 날 뿐인 들판 한가운데의 햇살이어라 좁은 길 씨름꽃 위에 얹힌 이슬 첫 겨울비 내가 처음 쓰는 글자는 첫 겨울비 생선 가시 햝을 정도로 늙은 자신을 보네 사람 소리 들리네 이 길 돌아가는 가을 저물녘 나비가 못 되었구나 가을이 가는데 이 애벌레는 싸락눈 듣네 이 몸은 본디 늙은 떡갈나무 흰 물고기 검은 눈을 뜬 진리의 그물 파초에는 태풍 불고 대야에 빗물 소리 듣는 밤이여 교토에 있어서 교토가 그리워라 소쩍새 울음 이슬 한 방울도 엎지르지 않는 국화의 얼음 춥지 않는 이슬이어라 모란꽃의 꿀 벼루인가 하고 주워 보는 오목한 돌 속의 이슬 초겨울 찬 바람 볼이 부어 쑤시는 사람의 얼굴 오래된 마을 감나무 없는 집 한 집도 없다 물은 차갑고 갈매기도 쉬이 잠들지 못하네 야 아무렇지도 않네 어제는 지나갔다 복어 국이여 구름이 이따금 달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쉴 틈을 주네 사람들 보이지 않아도 봄이구나 손거울 뒤에 그려진 매화 여러 가지 일 생각나게 하는 벚꽃이어라  
1528    詩作은 금기를 풀고 틀을 깨는것... 댓글:  조회:4458  추천:0  2016-06-25
시의 속성은 금기를 푸는 데 있다         시의 속성은 금기를 푸는 데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애초에 과학적 용법을 정서적 용법으로 말을 바꾸어 쓰는 것 자체가 금기 풀기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굳어있는 사물이나 세계를 정서나 상상으로 변형. 굴절시키다 보면 종래의 문화나 틀이 깨어져 나가게 마련이다 -- 김용택의 제 그림자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 시꺼멓게 그을려 있다 풀꽃들이 저물어 낮은 처마 밑으로 찾아들고 있다 집으로 드는 맛이 난다. 이 시는 초가를 여자로 둘러 말하면서 해가 지면서 만들어지는 긴 그림자를 "제 그림자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로 말하고 있다. 사물을 의인화하고 또 그 뒤에다 어떤 상태를 행동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말의 맛이 살아나고 있다. '풀꽃들'도 그 자체로 보는 경우와 아이들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어떤 경우든 현실의 비틀기에 관계된다. 현실을 비튼다는 말은 어떤 금기를 풀어 버린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김용택의 시처럼 이런 수준의 말하기에 시가 깃들어 있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실험적인데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정상적인 시가 비틀리게 되는데 시를 산문으로 쓴다든가 띄어쓰기를 무시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기막히게 쓴 맛이다. 사람들은 다 병이 들었는데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화자가 말을 하는 그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왜 운문의 금기를 풀어 버린 것일까. 내리닫이로 산문으로 풀어나간 이유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이 시가 운문으로 토막을 내고 호흡을 가지런히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 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전방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여기까지만 줄갈이를 해 놓고 바라보자. 아무리 따라 읽어 내려와도 국물밖에 없지 건더기가 건져지지 않는다. 암시나 속뜻, 감각이나 비약중에서 그 어느 것 하나도 만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줄갈이를 해 놓고도 줄갈이가 갖는 기능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줄갈이 자체를 원인 무효로 깨어 버리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긴장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지극한 일상사를 말해야 할 처지라면 일상사의 모습을 닮은 산문을 원용하면 내용과 현실의 일치라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는 전략이다 또 산문형은 어느쯤에서 무엇이 나타날지 예측 불허의 복마전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읽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진땀이 나게 한다 산문으로 시를 써내려 가는 것이 이런데 의미가 있음을 훨씬 앞에서부터 눈치 챈 사람이 많을 것이다.  ======================================================================     마츠오 바쇼 이후의 시인들(1647~1795) / 시인 최윤희       스기야마 산푸 杉山杉風 (1647~1732)        초겨울 찬 바람 어쩐지 새 한 마리 추워 보여라 낮잠 자는 사람 손에 들린 부채는 동작을 멈추고 추켜올린 괭이의 번쩍임 봄날의 논밭 이름 몰라도 모든 풀마다 꽃들 애틋하여라       히로세 이젠 広瀬惟然  (1648 ?~1711)     친해졌지만 헤어져야만 하는 허수아비여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무거운 눈 아무리 털어 내도 털어 내어도 헤치며 가는 눈밭이 움직이면 벌써 봄나물 헤어진 뒤 감 하나 먹으며 오르는 언덕 깊어 가누나 물 채운 논에 내린 은하수       가와이 소라 河合會良 (1649~1710)     아픈 승려가 마당을 쓸고 있다 매화가 한창 걷고 걷다가 쓰러져 죽더라도 싸리꽃 들판 병꽃을 꽂고 관문을 넘는 나들이 옷이여 밤이 새도록 뒷산에 부는 가을바람 듣네         고사 쇼하쿠  江左尚白 (1650~1722)     북쪽은 아직 눈으로 씻을 거야 봄의 기러기 시월이어서 아무 데도 안 가고 아무도 안 오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밥을 먹는 가을날 저녁 어제는 무궁화 오늘은 나팔꽃으로 저무는구나 큰 바람 불어 소리 잦아드는 가을비 두견새 운다 오늘 만큼은 아무도 없다       이케니시 곤스이  池西言水 (1650~1722)     초겨울 찬 바람 끝은 이곳이구나 바람의 소리       무카이 교라이 向井去來  (1651~1704)     네, 네 하고 말해도 계속 두드리네 눈 덮인 대문 고향에서도 이제는 객지 잠 신세 철새는 날고 손바닥에서 슬프게도 불 꺼진 반딧불이여 무슨 일인가 꽃구경하는 사람 허리에 찬 검 도의 마음이 일어나네 꽃봉오리 맺힐 때 돌도 나무도 눈에 빛이 나는 무더위여라       다치바나 호쿠시 立花北枝 (? ~1718)     매화 한 송이 한 송이만큼의 따스함이여 젖은 툇마루 냉이 나물 넘치네 흙 묻은 채로 얼굴에 묻은 밥알을 파리에게 떼어 주었네 아기 못 낳는 여자 인형 모시는 것 애처로워라 초겨울 찬 바람에 불려 가는 뒷모습 잎 하나지네 아, 잎 하나 지네 저 바람 위 칠석날 나도 하룻밤을 유곽에서 은하수 깨어진 종 울림마저 덥다 한여름 달 사마귀가 허공을 노려보는 늦더위 불타 버렸네 그렇긴 하나 꽃은 이미 진 다음 연못의 별 또 후드득 내리는 겨울비 쓰고 보고 지우고 마침내는 양귀비꽃 모란꽃 져서 아무 미련 없이 헤어지네 사마귀가 잡아당겨 엎지른 싸리의 이슬 한 논에서 다음 논으로 흘러가는 물소리 적막한 손 깜박이며 한 자씩 사라지는 반딧불이       쓰보이 도코쿠  坪井杜国  (?~1690)     서리 내린 아침 멀구슬나무 열매 흩어져 떨어져       고니시 라이잔  小西來山  (1654~1716)     봄날의 꿈 미치치 않는 것이 한스러워라 흰 물고기 마치 움직이는 물빛 같아라 벚꽃 피어서 죽고 싶지 않지만 몸이 병들어 오늘 밤의 달 그저 어둔 곳만이 보여라 내 잠자는 모습 고개 들어서 보니 춥구나 나의 봄은 초저녁에 끝나 버렸다 라이잔은 다만 태어난 죄로 죽는 것일 뿐 원통할 게 아무것도 없다       모리카와 교리쿠  森川許六 (1656~1715)     없는 소매를 흔들어 보이는 참억새꽃 법회 참석한 파르스름한 머리 신참 비구니 쑥뜸이 다 탄 사이에도 춥구나 봄바람 불고 경전을 읽는 사이 나팔꽃은 활짝 피었네 나팔꽃의 뒷면을 보여 주네 바람의 가을       마즈타 마사히데  水田正秀  (1657~1723)     장작으로도 쓸 수 없게 된 썩은 허수아비       핫토리 도호  服部土芳  (1657~1730)     오동잎 위에서 빛 넓어지는 반딧불이       이와타 료토  岩田涼菟  (1659~1717)     괭이질 한 번에 눈 구경하는 봄나물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아지는 늘그막의 봄 알았네 새벽에 울음 우는 저 소쩍새       다카라이 기카쿠  宝井其角  (1661~1705)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삿갓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첫눈 위에 오줌을 눈 자는 대체 누군지 단칼에 베인 꿈은 정말이었나 벼룩 문 자국 저 걸인 하늘과 땅을 입었네 여름옷으로 여름 소나기 혼자서 밖을 보는 여인이여 겨울 찾아와 허수아비에 앉은 까마귀 초겨울 찬 바람 불어 간 후에 달팽이 빈 껍질 목소리가 쉰 원숭이 이가 희다 봉우리의 달 고추잠자리 날개를 뽑으면 고추 첫눈 내리네 집 안에 있을 사람 누구인가 한 사람씩 계속 눈 속으로 사라지는 눈 구경 사립문에서 나는야 여뀌 먹는 반딧불이 한 해의 끝 물의 흐름과 같아라 인간의 운명은       우에시마 오니쓰라  山島鬼實  (1661~1738)     동쪽을 향하고 있는 뻐꾸기 너도 무엇인가 말해 봐 땅에 묻으면 내 아이도 꽃으로 피어날까 목욕한 물을 버릴 곳 없네 온통 풀벌레 소리 여기야 여기 불러도 반딧불이 떠나 버렸네 해골의 겉을 옷으로 치장하고 꽃구경하네 나무를 쪼개 보아도 그 속에는 아무 꽃도 없네 매화를 아는 마음도 자기 자신 코도 그 자신 피기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꽃 지기만 해도 애인이 없는 몸에게도 기쁘다 옷 갈아입기 세상을 진흙이라 보는 것도 하얀 연꽃 산골짜기 물 돌도 노래를 하네 산벚꽃 피고 휘파람새가 매화나무 잔가지에 똥을 누고 새는 아직 입도 풀리지 않았는데 첫 벚꽃 헤매 다니는 꿈 불타 버린 들판의 바람 소리 이 가을에는 무릎에 아들 없이 달구경하네 무슨 까닭에 긴 것 짧은 것 있나 고드름 봄의 물 여기도 또 저기도 눈에 보이네 엿샛날과 여드렛날 사이 이레날의 냉이풀이여       오가와 하리쓰  小川破笠  (1663~1747)     아내로 삼고 싶은 사람 많아라 꽃구경할 때       가가미 시코  各務支考  (1665~1731)     추워서 잘 수 없다 잠들지 않으면 더욱 춥다 부러워라 아름다워져서 지는 단풍나무 잎 서 있는 것 아무것도 없는 시든 들판에 학의 머리 연잎 위에다 오줌을 누니 사리가 구르네 술을 마시면 더 잠 못 드는 눈 내리는 밤 꾸지람 듣고 옆방으로 가니 더욱 춥구나 여기저기 흩어진 봄이여 모란 꽃잎 위 지금 한 가마니 사 둘까 봄눈 내리네 들에서 죽으면 들을 보며 나를 생각하라 들꽃 불타 버렸네 그렇긴 하나 꽃이 아직 피기 전 미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미친 것이다       구보타 쇼히  窪田松琵  (1672~1750)     나팔꽃이여 나도 바라는 것은 영겁의 세월       야코이 야유  横井也有  (1702~1783)     나와 나의 허물을 애도하는 매미의 울음 매화 꽃잎 져서 안으로 들어가네 빈 숯 가마니 짧은 밤이여 나에게는 길고 긴 꿈 깨어나네 떳다 가라앉았다 울며 세월 보내는 개구리 늙은이의 배 입춘에도 춥구나 재채기하다 눈에서 놓혀 버린 종달새 초겨울 찬 바람 바다로 들어가는 종소리       가가노 지요니 加賀千代尼  (1703~1775)     봄날 밤 꿈꾸고 피었는가 다시 온 꽃 나팔꽃 넝쿨에 두레박줄 빼앗겨 얻어 마신 물 손으로 꺾는 이에게 향기를 주는 매화꽃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파닥이나 줍는 것마다 모두 다 움직인다 물 빠진 갯벌 잠자리 잡으러 오늘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니 굴러떨어지면 그저 그런 물일 뿐 잇꽃의 이슬 강물에서만 어둠이 흘러가는 반딧불이여 가을 밝은 달 아무리 가도 가도 딴 곳의 하늘 모자 멀어져 나비가 될 때까지 그리워하네 동틀녘이면 어제의 반딧불이 둔 곳을 잊어 썰물에 발끝으로 서 있는 나비여라 백 개의 열매 덩굴 한 줄기의 마음으로부터 보름달 뜬 밤 돌 위에 나가 우는 귀뚜라미 붉은색 바른 입술도 잊어버린 샘물이어라 어찌 되었든 바람에 맡겨 두라 마른 억새꽃 물 시원하고 반딧불이 사라져 아무도 없네 잎도 쓰레기도 한 꽃받침이어라 눈꽃은 아쉽고 아쉬워라 질 때까지 보지 못한 매화꽃 나비들 여자가 걷는 길 앞과 뒤에서 아홉 겹 교토를 홀꽃잎으로 걸어가는 나리꽃 봄비 내리네 다 아름다워지는 것들뿐 매화꽃 핀다 무엇이 내려도 봄은 봄 차꽃 피어서 날조차 저무는 걸 뒤로 미루네 달그림자조차 잠시 멈추었다 꽃의 새벽 소리 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작별인가 고양이 사랑 첫눈 내리네 글자 쓰면 사라지고 쓰면 사라지고 꽃도 되었다 물방울도 되었다 이 아침의 눈 말할 것도 날개로 움직일 뿐인 나비 헤치고 들어가면 물소리뿐 봄의 풀들 두견새 두견새 생각하다 날이 밝았네 아침저녁으로 물방울 부풀어 오르는 나무의 싹 흐르는 물에 자기 그림자를 쫓는 고추잠자리 혼자 자다가 눈떠져 깨어 있는 서리 내린 밤 첫 기르기 난다 더욱 길어지는 밤의 길이 원앙새도 혼자 떠 있는가 초겨울 비 뿌리를 내린 여자의 욕망이여 제비꽃 박꽃이여 숨어 있어서 아름다워라 보름달 눈 속에 두고서 멀리서 걷네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워지는 달구경 수선화 향기 흩어져도 눈발 긴 밤 번갈아 가며 우는 풀벌레 소리 달도 보았으니 나는 세상에 대해 이만 말 줄임 넘어져도 미소 지을 뿐인 인형이어라 들에 산에 움직이는 것 없는 눈 내린 아침       단 다이키  炭太祇  (1709~1771)     개에게 던질 돌멩이 하나 없다 겨울 달밤 황매화 피네 잎에 꽃에 또 잎에 꽃에 또 잎에 꺾지 마시오 하곤 꺾어서 주네 뜰에 핀 매화 옮기는 손에 빛나는 반딧불이 손가락 사이 아름다워라 눈 내려 쌓인 후 맑게 개인 날 파리를 치는 목도 엄격하다 국경의 관리 느리게 흘러가는 날들을 본다 안경을 쓰고 동백꽃 꺾는 사람 나무에 숨어 대답하네 불어서 날려도 하늘에서 또 내린다 봄의 눈 배와 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봄날 긴 하루 반딧불이 날자 저것 봐 하고 소리칠 뻔했다 나 혼자인데도 지붕에서 자는 주인 없는 고양이 봄비 내리고 바람에 넘여져 세우면 또 넘어지는 허수아비       다카기 도자쿠  高城都雀  (?~1799)     사색의 시간은 들국화의 긴 꽃대를 바라보면서 겨울 눈꽃의 시새움인가 꽃의 눈보라       미조구치 소마루 溝口素丸  (1713~1795)     파도의 꽃 흩어지네 물가의 벚꽃 조개 올려다보면 내려다보는 것보다 벚꽃다워라                                                                                                                                                                                 물 시원하고 반딧불이 사라져 아무도 없네 잎도 쓰레기도 한 꽃받침이어라 눈꽃은 아쉽고 아쉬워라 질 때까지 보지 못한 매화꽃 나비들 여자가 걷는 길 앞과 뒤에서 아홉 겹 교토를 홀꽃잎으로 걸어가는 나리꽃 봄비 내리네 다 아름다워지는 것들뿐 매화꽃 핀다 무엇이 내려도 봄은 봄 차꽃 피어서 날조차 저무는 걸 뒤로 미루네 달그림자조차 잠시 멈추었다 꽃의 새벽 소리 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작별인가 고양이 사랑 첫눈 내리네 글자 쓰면 사라지고 쓰면 사라지고 꽃도 되었다 물방울도 되었다 이 아침의 눈 말할 것도 날개로 움직일 뿐인 나비 헤치고 들어가면 물소리뿐 봄의 풀들 두견새 두견새 생각하다 날이 밝았네 아침저녁으로 물방울 부풀어 오르는 나무의 싹 흐르는 물에 자기 그림자를 쫓는 고추잠자리 혼자 자다가 눈떠져 깨어 있는 서리 내린 밤 첫 기르기 난다 더욱 길어지는 밤의 길이 원앙새도 혼자 떠 있는가 초겨울 비 뿌리를 내린 여자의 욕망이여 제비꽃 박꽃이여 숨어 있어서 아름다워라 보름달 눈 속에 두고서 멀리서 걷네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워지는 달구경 수선화 향기 흩어져도 눈발 긴 밤 번갈아 가며 우는 풀벌레 소리 달도 보았으니 나는 세상에 대해 이만 말 줄임 넘어져도 미소 지을 뿐인 인형이어라 들에 산에 움직이는 것 없는 눈 내린 아침       단 다이키  炭太祇  (1709~1771)   개에게 던질 돌멩이 하나 없다 겨울 달밤 황매화 피네 잎에 꽃에 또 잎에 꽃에 또 잎에 꺾지 마시오 하곤 꺾어서 주네 뜰에 핀 매화 옮기는 손에 빛나는 반딧불이 손가락 사이 아름다워라 눈 내려 쌓인 후 맑게 개인 날 파리를 치는 목도 엄격하다 국경의 관리 느리게 흘러가는 날들을 본다 안경을 쓰고 동백꽃 꺾는 사람 나무에 숨어 대답하네 불어서 날려도 하늘에서 또 내린다 봄의 눈 배와 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봄날 긴 하루 반딧불이 날자 저것 봐 하고 소리칠 뻔했다 나 혼자인데도 지붕에서 자는 주인 없는 고양이 봄비 내리고 바람에 넘여져 세우면 또 넘어지는 허수아비       다카기 도자쿠  高城都雀  (?~1799)   사색의 시간은 들국화의 긴 꽃대를 바라보면서 겨울 눈꽃의 시새움인가 꽃의 눈보라       미조구치 소마루 溝口素丸  (1713~1795)   파도의 꽃 흩어지네 물가의 벚꽃 조개 올려다보면 내려다보는 것보다 벚꽃다워라  
1527    詩는 時와 空을 초월해야... 댓글:  조회:4976  추천:0  2016-06-23
소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라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 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본다고 할 때, 한쪽에서 보는 한, 4면을 보지 못하고 항상 3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어떤 사물에서 얻어지는 측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바퀴 돌아야 하며, 공중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피라미드들 그냥 거대한 입방체의 구조물로만 보아선 안된다.  도대체 망망한 사구(沙丘) 위에, 인간의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워 놓았으며 그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불가사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의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누비고 지나가다가  사막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피라미드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멍하니 숨을 죽여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시대에 그리스의 성현들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할 때,  피라미드를 그 첫째로 꼽았다.  피라미드가 불가사의한 것은 이 구조물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있다.  피라미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정확히 그 용도와 위치 선정, 건축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의 국토 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하류 이집트의 지도를 완성했을 때 이 중심 경선이 나일강 하구에 의해 형성된,  사실상 하류 이집트 전역을 이루고 있는 델타 지역을 정확하게 이분하고 있다는 우연의 일치에 놀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직각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그 안에 델타 지역이  완전히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또한 연구 끝에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단지 이집트의 중심 경선으로서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중심 경선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피라미드는 정확히 세계지도의 중앙분할선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대피라미드의 위치에서 기인한다.  피라미드를 통과하는 세로 선을 그으면 그 동편에 있는 육지의 면적은  서편의 육지 면적과 동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피라미드의 경도는 자연히 지구를 통틀어서 제로 선이 된다.  지구에서 대피라미드가 접하고 있는 위치는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피라미드의  네 사면(斜面)이 나침반의 네 방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물이 세계의 중심선에 놓여야 한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힘으로써 상상을 강요한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매달린다.  사막 한 가운데 마주치는 고대 인류가 세운 가장 거대한 구조물인 이 피라미드는  풀리지 않는 영원한 물음표로 탐구와 명상의 화두를 던져 준다.  피라미드는 이 불가사의성으로 인류가 피운 고대 문명의 꽃이 되고,  명상의 한 복판에서 삼각뿔의 위용을 조금도 변색시키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나일강만은 알고 있을 테지만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낸 것 중에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는 곧 신비성의 획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막 가운데서 조우하는 피라미드는 기하학적 단순성을 취하고 있지만,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에 견딜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견고한 구조체인 것만 분명하다.  이것이 무덤으로 ‘영혼의 집’으로 건축된 것인지,  아니면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능과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기념물로 지어진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영원성의 꽃으로  당시의 모든 역량과 총체성을 다 기울여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재화가 투입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지혜와 경험이 보태어졌다.  사막의 한 가운데 덩그랗게 하늘 높이 치솟은 피라미드를 보면서,  한 시대의 총력을 다 끌어 모아 저것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었던가,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을가.  생사(生死)와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와 믿음을 포용한 신앙적인 힘을 터득한 소치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한가운데엔 언제나 ‘인간’이란 화두가 있다.  피라미드를 보면서 그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 앞에 서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사후의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인간으로 풀 수 없는 영원한 물음 앞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모든 힘을 기울인 끝에 건립해 놓은 것이 바로 피라미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피라미드는 불가사의한 의문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피라미드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이런 불가시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튀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음 동시, 시 한편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꽃씨 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 최계락 ‘꽃씨’ 전문>  답답할 땐 귀 대고 / 바다 소리를 듣노라/ 네 목소리 듣는다  격정의 성난 파도/ 어떻게 잠 재웠나  피가 맺혀 뼈가 된 /빠알간 산호초  비늘 고운 물고기떼/ 헤일 길 없는 네 가슴 속  그 세상이 꾸는 꿈은 / 미주알 고주알까지  알고 싶어 슬픈 날엔 / 귀 대고 듣는다    ‘꽃씨’라는 소재에서 외형적으로 보는 것은, 꽃씨의 모양(생김새)이지만,  이 보이는 것과 접촉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아란 잎’ ‘빠알간 꽃’ ‘노오란 나비떼’가 있다.  글쓰는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라 껍질’이란 소재는 그냥 외형적으로는 한낱 조가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바다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난 파도, 천길 물속, 헤아릴 길 없는 네 가슴속을 응시하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소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단번에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이 소재를 면밀히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오랜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소재와 친근해지지 않으면 그 소재가 지닌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컨대,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정성껏 기르던 난초에 꽃이 피었을 때,  할아버지에게선 1년만에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큰 일이 되겠지만, 무관심했던 다른 가족들은 감격하지 않는다.  미지의 별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으로 우주공간을 탐색했던 천문학자가  드디어 새로운 별을 찾아냈을 때, 충격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곧 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소재와 대화를 나누고 정을 들여야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학자, 법률학자, 의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보는 법과 시각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움과 개성이 빛을 말한다.  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이치를 깨닫는 일이며 글을 쓰는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가시영역의 것만 보지 않고 불가시 영역의 것을 보는 법, 가청영역의 것만 듣지 않고,  불가청영역의 것도 듣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보는 법’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바깥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본다.  *시(時), 공(空)을 초월해 본다.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거꾸로 본다.  *일시적으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본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  *형식만 보지 않고 내용을 본다.  사물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     요사 부손의 하이쿠 작품 / 시인 최윤희         요사 부손 與謝蕪村 (1716~1783)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여름 장맛비 큰 강을 앞에 두고 집이 두 채 저녁 바람에 물결이 왜가리의 정강이 친다 꿈속 일인 듯 손끝으로 잡아 본 작은 나비 모란꽃 져서 고요히 겹쳐지네 꽃잎 두세 장 나팔꽃 한 송이 깊이 모를 심연의 빛깔 외로움에 꽃을 피웠나 보다 산벚나무 봄날의 바다 온종일 쉬지 않고 너울거리네 한 촛불을 다른 초에 옮긴다 봄날 저녁 짧은 밤 벌레의 털에 맺힌 이슬방울들 몸에 스민다 죽은 아내의 빗을 안방에서 밟고 모기 소리 난다 인동초 꽃잎 떨어질 적마다 큰 짐수레가 요란하게 울리자 떠는 모란꽃 홍매화 꽃잎 떨어져 불타는 듯 말똥 위에서 가을의 시작 무엇에 놀라는가 점치는 사람 초겨울 찬 바람 무엇으로 세상 건너나 집 다섯 채 문을 나서면 나도 길 떠나는 사람 가을 저물녘 국화 키우는 그대는 국화의 노예여라 가엽은 민들레 꽃대가 부러져서 젖이 흐르네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파를 사 들고 겨울나무 속을 돌아왔다 꽃에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머나먼 들길 큰스님께서 똥을 누고 계신다 마른 들녘에 앉아서 졸며 내 안으로 숨어드네 한겨울 칩거 내가 나를 손짓해 불러 본다 가을 저물녘 이 달팽이 무얼 생각하나 뿔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고 시원함이여 종에서 떠나는 종소리 외로움에도 즐거움이 있어라 저무는 가을 혼자서 오는 술병이라도 있다면 한겨울 칩거 짧은 잠이여 갈대 사이 흐르는 게들의 거품 상자를 나온 얼굴 잊을 수 없다 인형 한 쌍 인형 가게가 불 끌 무렵 봄비 내리고 두 그루 매화 그 느림과 빠름을 사랑하노라 느린 날들이 모여서 멀어져 간 옛날이어라 여름 장맛비 이름도 없는 강의 무서움 겨울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도 나와 같았으려니 쫓 질 때마다 늙어 가는 매화의 우듬지여라 석공의 손가락 찢어져 철쭉은 피고 유채꽃 피었다 달은 동쪽에 해는 서쪽에 화장한 뼈를 줍는 사람 가까이 제비꽃 흰 이슬 찔레나무 가지마다 하나씩 맺혀 봄비 내리네 물가의 작은 조개 적실 만큼만 마른 정강이 병들었다 일어난 학의 추위여 지고 난 후에 눈앞에 떠오르는 모란꽃 우물 바닥에 얇은 식칼 떨어뜨린 한기여 휘파람새 운다 그토록 작은 입을 벌려 휘파람새 운다 서쪽을 보고 이쪽을 보고 종이 연 어제의 하늘에 있던 그 자리에 연못과 시내 하나가 되었어라 봄비 내리고 가는 봄이여 머뭇거리며 피는 철 늦은 벚꽃 여름 소나기 풀잎을 부여잡은 참새 떼들아 다리 없는데 해 떨어지고 있는 봄날의 강 눈에 부러진 가지 눈 녹여 물 끓이는 가마솥 아래 겨울 강으로 부처님께 바친 꽃 떠내려오네 연꽃 향기 물 위로 솟아오른 줄기 두마디 흰 팔꿈치 괴고 승려가 졸고 있네 봄날 저녁 흰 매화꽃에 밝아져 가는 밤이 되리니 두견새가 관을 붙잡고 구름 사이에서 떡국 세 그릇 돌아오는구나 가장의 모습 떡 곰팡이를 없애면 새 축하의 나무 아침 햇살 비치는 궁인의 가게에 복수초 귀족의 종자도 보이는구나 꽃과 같은 봄 귀향길이여 나니와를 떠나 나가라강 봄바람이여 둑이 길어 집이 멀구나 한 채의 찻집 버드나무 늙었어라 귀여운 민들레 줄기 꺾으니 젖이 흘러라 찔레꽃 고향 길을 닮았어라 근심스러워 언덕에 오르면 찔레꽃 흰 이슬이여 찔레꽃 가시에 하나씩 바지를 발로 벗는 밤이여 으스름달 토바전으로 대여섯 기마 서둘러가는 세찬 바람이여 더운 날 칼을 바꾸는 부채인가 색종이 못자리에 노니는 개구리인가 봄비여 이야기하며 가는 비옷과 우산 꽃을 밟았던 짚신에도 보이고 늦잠을 자는 구나 모란꽃 떨어져 겹쳐져 있는 두 세 잎 연꽃 향기여 물을 벗어나 줄기 육 센티 일행의 기러기 서산에 달을 가리킨다 나부끼는 매미의 양 날개여 산바람에 날려 두견새 호박을 이루고 가고 아침 안개여 마을 집 천 채의 시장 소리 목도리의 누런색에 남은 추위인가 봄물이 산하를 흘러가도다 물이 빠지자 허수아비 다리가 가늘고 길어라 모란 꺾으니 뜰에는 아무것도 안 남았어라 어제도 저물고 오늘도 또 저물어 가는 봄이여 작은 새 오는 소리 반가움이여 판자의 차양 둥근 엉덩이 빛을 발하며 가는 반딧불이여 걸인의 아내 이를 잡고 있다 매화꽃 아래 초겨울 찬 바람 종에 작은 돌들 불어 가 부딪치네 봄바람 불고 둑이 길기만 하여 집도 멀어라 잠깐 졸다가 추워서 깨어 보니 봄은 저물고 문을 나서서 죽은 사람을 만났다 가을 저물녘 저녁 어스름 빗속에 말없이 핀 제비붓꽃 이 드러내고 붓 끝의 얼음 씹는 밤이여 초겨울 찾아가려 했던 사람 찾아왔네 짧은 밤 지나고 얕은 우물에서 감꽃 길어 올린다 밭을 간다 길을 묻던 사람 보이지 않고 별꽃잎 지는 못자리 물 위에 별 비치는 밤 인형도 나와서 잠시 덧없는 세상의 먼지를 쓰네 부모님이 손가락으로 집었구나 인형의 코 봄비 내려서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오늘이어라 초겨울 바람 아가미에 분다 갈고리에 매달린 물고기 화로에 태워 연기로 잡아 보는 단풍잎이여 연인이 살던 집 울타리에 냉이꽃 피었네 피는 것으로도 지는 것으로도 보이는 산벚꽃 지는 해보다 더 쓸쓸한 가을 저물녘 차꽃 피었네 흰색인지 노란색인지 의심스러워 씨앗 든 자루 적시며 봄비 내리네 봄비 내리네 사람 사는 집 벽에서 연기 새어 나오고 첫서리 내려 병든 학을 멀리서 보네 모란꽃 꺾어 기운 아주 없어진 저녁이어라 적막하게도 손님 끊긴 사이의 모란꽃이여 저 뻐꾸기도 나무 가랑이에서 태어났겠지 저기에서 어제도 울었던 뻐꾸기 봄비에 젖는 지붕 위에 얹힌 공놀이 공 매화꽃 꺾어 주름진 손 안에 향기를 가둔다 한겨울 매화 어제쯤 져 버렸나 돌 위의 꽃잎 봄의 물줄기 산이 없는 고향을 흘러서 가네 재 속의 불 마침내 끊는 냄비 요리 오월 장맛비 고인에게 바친 꽃 버리러 가네 개연꽃 두 줄기 꽃이 피었네 내리는 빗속 동백꽃 떨어져 어제 내린 비를 엎지르네 나도 죽어서 비석 근처에 서 있으리 마른 억새꽃 민들레 하나 잊혀진 꽃 있구나 서리 내린 길 모기장 안에 반딧불이 날리니 재미있구나 비 그친 달밤 누군가 밤낚시하는 하얀 정강이 구름 삼키고 꽃잎을 토해 내는 요시노 산 도끼질하고 향기에 놀랐어라 겨울나무 숲 하얀 연꽃을 꺾으면 마음먹네 때중 녀석이 국화에 고인 이슬 받아서 쓰는 벼루의 목숨 병든 사람의 가마도 지나간다 보리의 가을 가을바람에 허수아비도 움직여 걸어가네 밭 주인이 허수아비 안부 묻고 돌아오네 초겨울 찬 바람 들여다보고 달아나는 연못의 색 어제 떠나고 오늘 떠나 기러기 없는 밤이여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추위여 매화꽃 피고 복어 국 먹고 나 살아서 잠에서 깨어났다 겨울비 내리고 귀는 거문고 위를 건너가고 온천 밑바닥의 내 발을 보는 오늘 아침의 가을    
1526    詩는 광고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댓글:  조회:4368  추천:0  2016-06-23
[11강] 삶의 체험으로부터 길어올린 미학  강사/나 호열  도종환의 시세계  봄이 오는 듯 싶더니, 아카시아 하얀 꽃들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고 읊었던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지난 겨울과 봄은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간을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은 시집은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직선』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은 1998년 7월에 창작과 비평사 창비시선 177로 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입니다.  195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4년에 동인지 에 『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85년에 시집『고두미 마을에서』를 발간하였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었고, 1986년에 시집『접시꽃 당신』을 펴내면서 세인들에게 도종환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지금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1989),『당신은 누구십니까』(1993)등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온 바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전교조 활동으로 말미암아 오랜 기간을 교단을 떠나야 했고, 제가 알기로는 지금은 다시 교사로 복직되어 충북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도종환 시인은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을 직시하고, 그 아픔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할 것임을 시를 통해서 알리고자 노력한 시인이었습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도종환이라는 이름은 『접시꽃 당신』을 통해서였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처절한 극복과정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도 시인의 시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누구나 한 번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생노병사, 희노애락의 분기점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시의 대중화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른바 , 또는 라 불리는 현실 모순에 대한 비판과 지사적 토로에 있어서 도 시인이 거두어들인 성과가 얼마만큼인가는 조금 더 시간이 경과해야 할 것 입니다만, 도 시인에게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신의 인생관 내지 철학에서 비롯되는 삶과 자신과의 힘겨루기에서 한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인식 범위내에 포착된 현실 상황을 시로서 직정적으로 그려내려 하였다는 점이 시인으로서 도종환의 미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이 쓴 글을 통해서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돌보는 자위행위일 것입니다. 이 강좌를 보고 계신 여러분이나 저나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삶의 고단함, 외로움, 불행함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하고, 위로의 따듯한 손길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은 이렇게 자신이 자신을 돌보는 행위, 자신을 스스로 따뜻하게 하려는 몸짓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의 원천은 삶의 체험입니다. 삶의 체험은 시인에게 반성과 비판 그리고 각성을 요구합니다. 체험으로부터 빚어지는 것은 비단 비판과 각성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한 비판과 각성을 넘어서서 있는 그 무엇,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세계를 기웃거리는 경지가 바로 훌륭한 시와 그렇지 못한 시의 경계선입니다. 시가 아니더라도 삶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일러주는 동서고금의 경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고전이나 수상록들이 아닌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서 미(학)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학)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잠깐 美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미학 Aesthetics는 18세기 중엽 서구의 라이프니쯔-볼프 Leibniz-Wolff 학파의 알렉산더 고토리프 바움가르텐 Alexander Gottolieb Baumgarten(1714- 1762)의 『Aesthetica』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로 감각을 의미하는 '아이스테에시스'란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Logica가 고급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되는 노에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에 반해서 Aesthetica는 저급 인식능력에 의하여 파악되는 '아이스테타'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성적인 인식의 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미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성격을 부여한 사람은 관념철학을 집대성한 칸트Kant입니다  동양에서는 1867년 일본의 계몽주의자 西周 - 이 사람은 phiosophy를 哲學이라는 용어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가 '善美學'으로 번역 소개 하였으며 이는 孔子가 말한 盡善盡美를 염두에 두고 명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 미학의 대상영역은 예술 및 자연의 미적 현상을 포괄하며, 이에 관한 직접적인 관찰과 다양한 성찰, 쉽게 말하여 미적인 것 일반에 관한 학문, 예술과 자연에서의 미적 현상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적 체험, 미적 대상, 미적 범주, 미적 가치, 예술체계, 예술기능, 예술사, 예술비평 등에 관한 제반 문제를 논구하는 가운데 미적 혹은 예술적 현상의 원리를 정립하고 그 본질을 추구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든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미(학)적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그 미적 요소는 창작자의 인격의 완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뜻에서 입니다.  今道友信  미는 인간의 감각기능에 의한 감성적 인식의 상관자임과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것, 즉 가시적, 가청적인 것으로서의 미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비가청적인 미 - 단순한 감각적인 미를 초월한 인간의 행위나 정신상태, 덕의 미 등과 같은 인격적, 정신적 미 등의 현상도 존재하므로 미의 문제를 단순히 감정적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에 미를 존재라고 볼 때, 미에 관한 학으로서의 미학은 존재로서의 존재 해명을 위한 존재론적 미학이 되고, 미를 존재의 현상으로 볼 때의 미학은 현상적 존재로서의 미의 현상을 해명하기 위한 현상 존재론적인 미학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 繪事後素(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만든 뒤에 한다)의 정신  회사후소는 공자가 그의 제자 子夏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질문은 이러합니다.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이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의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회사후소는, 즉 아름다운 자질을 갖춘 후에 문식(치장)을 더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고, 외면적 미적 형식은 내면적 수양을 거친후에야 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充實之謂美(충실함을 일러 미라고 한다)  孟子는 본성의 욕구대로 하는 것을 착하다 하고, 생득적 착한 것을 몸에 지니는 것을 신실하다 하고, 몸에 지닌 것을 충실케하는 것을 아름답다하고, 충실케하여 광휘가 있는 것을 위대하다 하고 위대하여 남을 감화시키는 것을 성스럽다하고 성스러워 남이 알 수 없는 것을 신령스럽다고 하였습니다.  * 詩를 통하여 순수한 감정을 일으키고, 禮로서 자신의 주체를 확립하고, 樂을 통하여 자신의인격을 완성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시는 감흥을 일으킬 수 있고, 상고하여 볼 수 있게 한다. 사람과 사람을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하게 탓할 수 있게 한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군주를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위에서 간략히 말씀드린 바는 창작자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미야말로 참된 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인격완성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요?  * 得手應心(손에 익숙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의 세계  다음 글은 郭熙라는 사람이 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붓을 놀려 쉽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만 아는데, 사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않다는 사실을 모른다. 장자는 "화가가 옷을 벗고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경지야말로 진실로 화가의 법을 터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마음 속을 너그럽고 유쾌하게 하고 뜻이 사리에 맞도록 수양해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평이하고 바르고 사랑스럽고 신실한 마음이 생긴다,  이같이 여유있고 침착한 마음이 생기면 곧 사람의 웃고 우는 온갖 모습과 사물의 뾰족함, 기울어짐, 옆으로 누움의 갖가지 모양이 자연히 마음 속에 터득되어서 저절로 표상이 떠올라 화필로 나타난다........ 그렇지 못하면 뜻과 생각이 억압되고 침체되어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리고 말 것이니, 어찌 사물의 실정을 그릴 수 있으며 사람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겠는가?..... 경계에 이미 익숙해지고 마음과 손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비로소 자유자재로 법도에 맞고 전후좌우가 근원에 맞게 제대로 그려지게 된다.  * 大巧若拙(큰 기교는 졸렬한 것과 같다)의 정신  노자도덕경 45장에 나오는 윗 글은 인위적인 기교와 의식을 떨쳐버리고 재물이나 명예등의 外物에 전혀 지배를 받지 않는 최고의 경지인 무의식 상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완벽한 기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莊子는 정신수양의 방편으로서 技 숙련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인위적인 것을 가미하면서도 사물의 본성에 적합한, 사물의 본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기교의 운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莊子 : 養生主 : 抱丁 포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칼을 놀림에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두 음율에 맞고, 은나라 탕왕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과 조화되며, 요임금 대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절에도 맞는다.  문혜군은 감탄하면서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하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포정은 칼을 내려놓으며 말하였다."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신은 기술을 넘어서 도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어디에 어떻게 칼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겨우 소가 하나의 작은 덩어리로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각과 지각이 멈추어진 채 정신이 행하고자 하는 대로 따를 따름입니다. 천리를 좇아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의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칼놀림의 잘못으로 티끌만큼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의 칼은 십 구 년이나 되었고 수 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이 움직이는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충분히 경계하여 눈길을 거기에 모으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으면, 칼을 든 채 일어서서 둘레를 살펴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득의만면한 채 한없는 즐거움을 맛보면서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위의 글들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창작자의 인격의 완성이 미의식의 근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위적이고, 감각적인 작품들이 유용성이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작품은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반응을 요구하며, 그 반응은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으며 그 반응은 반성 또는 각성, 비판적 사색으로 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강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또는 좋은 시는 어떤 것일까? 하는 점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강좌의 첫 머리에 저는 도종환의 시를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시인이 체험한 세계  2.시인의 체험으로부터 빚어진 사색의 결과에 대한 정서적 공감  3.정서로부터 빚어지는 미의식의 발로  이 세 가지가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합니다. 이 세가지의 통로는 시인과 작품 그리고 독자를 하나로 묶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소설은 사건을 통해서,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저자의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시를 만들어가는 話者는 시인 자신일수도, 가공의 인물일수도 있을 것이며 시에 나타나는 정경도 가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인이나 독자는 시에 나타난 화자나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제, 『부드러운 직선』의 시들을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1) 화자가 "나"로 드러난 경우  봄  아무도 들꽃이 겨우내 비겁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나 같은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들은  힘은 없지만 비겁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크게 달라질 것 없어  마음 허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 같이 허약한 사람도 쫓기며 끌려가며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위해 싸웠다고  그 생각을 하며 이 저녁 자신을 위로한다  꽃샘바람에도 순이 터 올라오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산천에 봄소식이 오고 강물이 풀려도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 있는 게 가슴 아프다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돌아보는 이 저녁에  이 시의 모티브는 이른 봄, 아무 것도 다시 돋아오를 것 같지 않고 죽어서 더 이상 잎을 낼 것 같지 않던 나무에 푸르름이 솟는 광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심상입니다.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있는 게 가슴 아프다  평범한 시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대는 과거 속에 존재하며 그 투쟁은 인간으로서 비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복권되지 않은 상태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어떤 상태를 드러내고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지만 더 이상의 이미지의 발산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이른 봄의 소재성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4행의 시대, 나같은, 희망,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등등의 어휘로부터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첫 번 째 시 「길」도 위와 같은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자의 체험은 이 시대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성과 투쟁성을 지니고 있지만 화자의 의도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면 날수록 오히려 독자들은 그 의도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 읽기는 發憤이 아니라 정서의 기묘한 가라앉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쓸 때 1)주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주제에 알맞는 소재를 찾아서 창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2)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感想에서 야기되는 시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한 편의 시에서 주제와 소재를 명확하게 판명해 내기란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고 굳이 그런 식으로 시를 짓거나 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만, 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인은 분명 일반인보다 다양하고 특이한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일반인들보다 깊은 통찰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감각과 예지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시인의 세계와 인간,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태도가 시의 소재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는 기법을 생성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어려움은 소재로부터 감흥을 이끌어내고 그 감흥을 시로 옮기려 하는 수동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꽃이 핀다. 비가 온다. 안개가 끼었다. 바람이 분다. 등등의 자연적, 외적인 조건이 나에게 다가올 때 시적 반응을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이별을 하거나 등등의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이 자극적으로 반사될 때 시작에의 욕구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시작에의 욕구는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주관적이면서도 독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인생관과 철학이 확립되어 있어 소재를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시에 녹여낼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소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꽃' 자체에 대하여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제한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개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재는 연극에서의 무대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몇몇의 시인- 도종환 시인도 포함되지만-을 제외하고는 극적인 삶의 체험을 가진 시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發話者로서의 시인은 작품에 나타난 세계에 대해서 일정부분 책임을 가져야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반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부분이 다른 예술 장르와 변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추억  추억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 많다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이 있다  몸으로 부닥친 시간보다  말로 풀어놓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운동  현재가 없는 운동을 현재로 끌어오는  그들의 공허함  위의 시는 한 시대가 끝난 후 태평성대(?)에 와서 투사연하는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을 쓸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옆으로 비껴가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전방에서 총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구국과 민족을 이야기하는 현실을 짚어내는데 이 시 또한 너무도 충실하게 사실을 사실답게 표현하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시적 감흥을 제한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체험, 사실의 전달에 주안점을 둘 때 시의 완성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2) 사실적 체험에서 사색의 경지로 나아감  지난 사월은 잔인하였습니다. 나라의 곳곳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아까운 삼림이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강원도 고성지역은 계속해서 산불의 피해를 입어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방장비를 완비해야 한다!. 산불예방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끓었었습니다. 산불이 나서는 안됩니다. 아까운 인명과 삼림이 파괴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큰 나라에서도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삼림의 면적이 넓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국에서는 자연발생적이고 인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산불을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비등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200년에 한 번 꼴로 산불이 일어나서 생태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0년에 한 번 큰 불이 난다는 사실은 우리의 감각적 체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온갖 오염물질을 옮기기도 하지만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지요.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 편의 시를 짓는데 있어서 사실적 표현(체험)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모든 시구가 시적 표현(비유)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실적 진술이 시적 진술보다 훨씬 많습니다. 위의 시는 자연의 재생성을 사실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런데 중간 부분의 3행은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체험을 넘어서서, 체험을 꿰뚫은 진실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언명은 나에게 주어진 자연적 현상을 투시해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3) 의인법을 활용하라  시인들이 소재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대상,-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사건이든간에 -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나와 동일한 인격으로 구름과 달, 별과 바람을 대한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전해주는 말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시편 중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주로 2 부, 3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부분들은 나무와 꽃들을 의인화하여 삶의 체험과 등치시킨데 있습니다.  「복숭아 나무」,「가죽나무」, 「숲」,「겨울나무」등의 시편은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의인화해서 이루어낸 삶의 진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히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가죽나무는 장자에도 나오는, 쓸모없어 베일 염려 없이 오래 사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가죽나무를 화자 자신으로 삼고 가죽나무가 말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아주 작지만 소중하고, 힘 없지만 더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민중들의 삶을 의인화하므로서 앞의 시들에서 보이는 지사적 토로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들은 소재에 대한 면밀한 관찰 없이는 지어낼 수 없습니다. 의인법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관찰의 극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물의 관찰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하나 읽어 볼까요  잎차례  하늬바람에 모과나무잎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파리 하나 내는 데도 순서가 있다  해 뜨는 쪽으로 하나 내보내면  해 지는 쪽으로도 하나를 내고  그 사이에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잎 하나를 꽃 세워둔다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꼭 그렇게 잎을 낸다  밤나무나 동백나무도 오른쪽에서 잎이 나면  다음에는 왼쪽에서 잎이 돋는다  마주나는 건 마주나고 돌려나는 건 꼭 돌려난다  하찮은 들풀이나 산기슭 작은 꽃들도  꽃잎이 다섯 개인 건 꼭 다섯 개만 내고  여덟 개인건 여덟 개만 낸다  냉이나 민들레나 우리가 보기엔 그저  이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도  저희끼린 다 정교한 질서를 따르고  생명의 사소한 일 하나를 끌어가는 데도  반드시 지킬 줄 아는 차례가 있다  이파리 하나에도  이 시에서 시인의 주관적인 주장은 마지막 3행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적 관찰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어렵거나 장식적인 어휘 또한 눈에 띠지 않습니다.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을 통해서 자연의 보이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것들의 질서지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 주위를 잘 살펴보면 시로서 형상화할 수 있는 진실과 생명현상이 곳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4) 훌륭한 시는 체험 자체가 특수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체험 속에서 특수성을 찾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분명히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없었던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들이 도 시인을 시인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시가 신념을 강화하고 실천력을 드높이는 역할을 했다는데 주목을 해야 합니다. 繪事後素의 정신은 시인 자신의 인격수양과 행동양식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詩作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벼려내고 자신의 시작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세계(현실세계)에 동화될 것을 권유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美的 세계에 인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언어는 물감이나 음률과는 또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이야기하는 의미의 애매성을 보다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의미를 드러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의미를 감추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망이 작고 단순할수록 詩作은 쉽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길, 희망, 운동과 같이 의미망이 넓은 언어를 소재로 다루게 될 때에는 그 소재를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의미로부터 시인은 몇 개 또는 단 하나의 의미를 선택하지 않을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난점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독자들은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면서도 자신만의 영역으로 그 의미를 끌고 들어가서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하고자하는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 의미의 드러남과 감춤의 경계 설정은 매우 어렵다고 보여 집니다. 드러남과 감춤은 의도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기지고 있는 타성,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른 단어와 충돌할 때 빚어지는 또 다른 이미지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은 시를 쓰는데 필수불가결한 첫 번 째 관문입니다.  (5) 연상(聯想)의 사용을 생활화하라  이미 지난 번 강의에서 연상의 법칙이 우리의 사유를 성립케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관찰의 방법으로서 연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화사하게 꽃이 피어 있고, 무엇인가 그 꽃으로부터 빚어지는 감정의 움직임이 있다면 꽃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미지들을 낱말잇기식으로 전개시켜 봅니다. 꽃 - 푸름 - 하늘 - 편지 ....... 이와 같은 식으로 연결되어지는 이미지들을 정리해 보면 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느낌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옴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등잔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요즈음은 전기 공급이 잘 되어서 두메산골에도 형광등 불빛이 환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등잔불은 우리의 밤을 지키는 소중한 존재였지요. 등잔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갑자기 불이 나갈 때, 제사때 쓰는 촛불을 생각해도 되겠지요  위의 시는 등잔을 소재로 화자의 생각을 펼쳐 나갑니다  1연은 등잔의 심지를 내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심지가 많이 올라와 있으면 그으름이 생기고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지요  2연은 등잔의 속성에 대한 관찰입니다  3연은 그 등잔이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상징적 존재로 그려집니다.  등잔의 심지를 내리는 행위 - 등잔의 속성 - 내 마음 속의 등잔 - 따뜻한 마음의 빛  우연히 시인은 등잔불을 바라봅니다. 심지가 많이 올려진 탓에 그으름이 생깁니다. 그래서 심지를 내립니다. 등잔을 가만히 보니 등잔 기름을 담는 종지가 작습니다. 방안 하나를 비추는 등잔 하나가 밤을 지탱할 때까지의 용량. 그런 등잔이 내 마음 속에 존재 합니다. 은은한 빛으로 법구경 한권 읽을만큼의 마음의 빛을 냅니다.  이 시는 욕망의 덧없음을 눈 제대로 뜰 수 없음, 심지만 못 쓰게 됨, 소나무 등잔대를 쓰러뜨림, 창호지와 문설주를 태움과도 같은 사실로 빗대면서 節欲의 상태를 감동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등잔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우리네 인생사와 대입시켜 나가면서 평화로운 상태의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심지를 조금 내리는 사태에 대한 시인의 해석, 등잔불이 밝혀주고 있는 공간의 좁음에 대한 인식, 좁은 내 마음에 존재하는 등불에 대한 느낌들을 배열하므로서 등잔이 주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상징들을 평화로움으로 바꾸는 신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특수한 경험은 일상사에서 내버려지는 수많은 사태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관찰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한 편의 시를 더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놓은  외설악의 전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2 연 對句 형식으로 구성된 위의 시는 잘 짜여진 구도 때문에 시적인 감동이 감소되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습작을 하는 분들께는 시작법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시인은 겨울여행을 떠납니다.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으며 설악 준봉을 보고 동해 바다로 갑니다. 눈이 덮힌 산은 웅장함, 비장함, 올곧음, 부동성을 상징하고, 파도는 역동성, 깨어짐,도전, 허망함을 상징합니다. 산은 정(靜)의 상징이고 파도는 동(動)의 상징입니다. 겨울은 또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이 생명력을 버린 허망한 시간이면서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절망이면서 희망인 겨울, 그래서 예로부터 동지가 지나면 봄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으로 선인들은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요.  1 연에서는 눈 덮힌 설악산을 한 장의 사진으로 고정시켜 놓고 멀리서 바라보며 느끼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2 연에서는 허망하게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모습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묘사하므로서 시의 활력을 더해 줍니다. 이 시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시를 읽는 재미는 반감되어 질 것입니다. 이 시는 화자가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대상에게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구비치는 산맥과 끊임없이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는 험난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이며 바로 당신입니다. 그대(들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단어는 화자와 독자와의 간격을 좁히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입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부단한 각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독자는 시를 통하여 시와 더불어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창조적 인간은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져 있는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바꾸려는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일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는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은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이 시도 시인이 어는 절집 처마를 보며 허공을 부드럽게 감싸안은 모습을 보면서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정도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그러나 이 시의 미덕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곡선을 이루고 있는 지붕 밑에 올곧은 기둥들을 상기해 내는데 있습니다. 外柔內剛의 정신은 안으로는 자신을 준엄하게 다듬고 밖으로는 약자를 포용하고 어루만질 줄 아는 삶의 예지를 표현하는데에서 이 시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반성적 사색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형식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강의 모두에 盡善盡美의 정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에 절실한 것 그러면서도 독자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체험을 통하고 난 후에야 시에서 갖추어야할 형식 (비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정리 *  1. 시는 정보의 전달 수단이 아니다. (정서의 전이)  2. 자신의 느낌과 이야기할 내용을 정리한다.  3. 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소재를 발굴한다.  4. 시의 얼개를 구상한다.  5.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전달 내용을 이미지화 한다.   ===================================================================   요사 부손 이후의(1718~1829) 시인들 / 시인 최윤희          오시마 료타  大島蓼太  (1718~1787)   쫒겨 다니다 달 속에 숨어 버린 반딧불이 저 뻐꾸기 올여름 한 곡조만 부르기로 결심했구나 아주 말 없이 손님과 집주인과 하얀 국화와 외로워라 병든 아이들 위한 반딧불이 통 내 그림자 벽에 스미는 밤 귀뚜라미 소리 깊어 가는 밤 숯을 가지고 숯을 부수는 소리 등불을 보면 바람이 분다 눈 내리는 밤 나비여 걸식하는 꿈 아름다워라     가와카미 후하쿠 川上不白  (1719~1807)   고요함 속 꽃도 건드리지 않는 종소리     오토모노 오에마루  大伴大江丸  (1722~1805)   못자리에 작은 뱀 건너가는 저녁 햇빛 잡으러 오는 이에게 불빛을 비춰 주는 반딧불이     구로야나기 쇼하  黒柳召波  (1727~1771)   살아서 세상에 잠을 깨니 기뻐라 늦가을 찬비 괴로운 일을 해파리에게 이야기하는 해삼 초겨을 하늘에 불려 가는 거미줄 꽃 묵직하게 싸리나무에 물 흐르는 들판 끝 수레 소리에 잠 깨어 떠나가는 풀잎의 나비     요시와케 다이로 吉分大魯  (?~1778)   여름풀이여 꽃을 피운 것들의 애틋함이여 모란꽃 꺾어 아버지 화내신 일 그리워라 등잔불에 언 붓을 태운다 내가 짊어진 죄는 아내와 자식을 모기가 물어뜯는 것     미우라 조라  三浦樗良 (1729~1780)   나팔꽃 이슬도 엎지르지 않고 나란히 피었네 나팔꽃에부터 불기 시작하는 가을바람 휘파람새 운다 어제 이맘때 바로 그 시간 밤은 기쁘고 낮은 고요하여라 봄비 내리고     가토 교타이  加藤曉台  (1732~1792)   마음만큼 움직이는 것 없는 저무는 봄 나를 위해 불 늦게 켜 주시게 저무는 봄날 바람 묵직하고 사람 달콤해지는 봄날은 가네 아지랑이 속 모든 것들 바람의 빛 불을 밝히면 매화 꽃잎 뒷면이 비쳐 보여라     에노모토 세이후 榎本星布  (1732~1815)   가는 봄이여 쑥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해골 흩어지는 꽃 아래 아름다운 해골     우에다 아키나리  上田秋成  (1734~1809)   산 씻는 비 그러나 색깔 없는 가을의 물 벚꽃잎들 떨어져 미인의 꿈속에 든다     다카이 기토  高井几董  (1741~1789)   뒤쪽으로 잔물고기 흘러가는 맑은 물이여 다 보여 준 봄의 모퉁이에서 늦게 핀 벚꽃 인쇄물 위에 문진 눌러놓은 가게 봄바람 불고 등 켜지지 않고 봄을 아쉬워하네 호수의 물 기울여 얻은 쓰는 모내기 아름다워라 보이는 것마다에 봄은 지나고 짧은 밤 게의 껍질에 부는 아침 바람 초겨울 찬 바람과 겨루는 듯 들리는 종소리여라     나쓰메 세이비 夏目成美  (1749~1817)   다리 벌리고 힘껏 잡아당겼는데 뿌리 작은 무 패랭이꽃 마디마디 비치는 저녁 햇살 비가 내리면 사람을 곧잘 닮은 허수아비여     엔도 아쓰진  遠藤日人  (1757~1836)   세상을 나무 아래 둔 벚꽃이어라     후지모리 소바쿠  藤森素檗  (1758~1821)   내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의 눈의 고요함 해마다 벚꽃 적게 피는 고향이어라 문 열고 찻잎 버리려 가는데 눈보라 저 달에 배우는 달구경이어라 바라본 만큼 꽃들이 짐이 되는 날들이어라     료칸  良寬  (1758~1831)   숨 막히는 초록 속 목련꽃 활짝 피었네 탁발 그릇에 내일 먹을 쌀 있다 저녁 바람 시원하고 제비붓꽃 내 오두막 옆에서 나를 취하게 해 불 피울 만큼은 바람이 낙엽을 가져다주네 쓰러지면 쓰러지는 대로 마당의 풀 아이들 떠들어 잡을 수 없는 첫 반딧불이 오늘 오지 않으면 내일은 져 버렸겠지 매화꽃 도둑이 남겨 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뒤를 보여 주고 앞을 보여 주며 떨어지는 잎 기왕이면 꽃 아래서 하룻밤 잠들어라     사카이 호이쓰  酒井抱一  (1761~1829 )   꽃잎들이 산을 움직이는 벚꽃이어라  
1525    [장마전, 한무더운 아침 詩 둬컷] - 밥 / 산경 댓글:  조회:3807  추천:0  2016-06-23
밥 - 양동식(1944~ ) 할머니는 평생 밥 밖에 몰랐다 아가 밥 먹어라― 밥 먹다가 동냥치 밥 주고 설거지 끝나면 개 밥 주고 벽시계 밥 먹이고 성냥골로 귓밥 파다가 감나무에 남은     까치밥 쳐다보다가 대처로 나간 큰아들 생각한다 (밥 이나 먹었는지…) 밥은 생명의 줄이다. 밥 먹기가 어려웠을 때 밥이 안부고 인사였다. 밥은 시작이자 끝이었고, 모든 생명이 밥 앞에 줄을 섰다. 그 줄의 끝에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생명의 수호자였고 기원이었으며, 그리하여 어린 생명을 밥 앞으로 불렀다. “아가 밥 먹어라”―이것은 생명을 호출하는 명령어였다.   =============================                                                                                                 산경( 山景 )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도 안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종일 티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1524    詩란 천장을 뚫고 하늘의 높이를 재보는것... 댓글:  조회:4380  추천:0  2016-06-21
[10강] 언어의 특성  강사/나 호열  시라고 하는 것은 낮은 현실의 천장을 뚫고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높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며, 사방을 둘러싼 어둠의 장벽을 뚫고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내는 일이며, 아스팔트로 뒤덮힌 지상의 각질 같은 두께를 뚫고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이며, 냉동인간처럼 굳어진 우리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뜨겁게 불어넣는 일이다.  『몽상의 시학』중에서 인용 (정효구, 민음사, 1998년)  사이버 시창작 교실의 가족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습작시들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분은 일상의 틈을 쪼개어,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작은 부분에 감성의 촉수를 들이대고 시로써 표현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12주부터 15주 사이에 진행될 작품실기 시간에는 매우 풍성한 상차림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봅시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시의 역할이랄까, 효용이라 할까  하여튼 시인의 입장이거나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이거나를 막론하고  총체적으로 시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현실의 천장을 뚫고 하늘의 높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2) 어둠의 장벽을 뚫고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지상의 각질같은 두께를 뚫고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4) 우리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뜨겁게 불어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시를 쓰는(읽는) 행위는 理想을 꿈꾸는 행위입니다.  현대의 인간은 그 이전의 인간보다 더욱 경제동물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사실 돈 없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꿈은 부자가 되겠다, 출세를 하겠다하는 현실적인 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 말하자면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등등 무형의 정신적 가치를 꿈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낸다는 것은 개인지향이 아니라 어울림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이 군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단순한 군집생활이 아니라 위계와 질서를 갖추고서 나만을 위하는 삶이 아닌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함임을 아는 利他的 삶에 무게를 둔다는 것입니다.  3)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相爭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相生의 관계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라고 정의하였고, 지금까지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연을 약탈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의식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시절 중앙 아시아의 아랄호 주변은 거대한 목화 재배지로 관개를 위하여 아랄호의 물을 마구 끌어다 썼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자 아랄호의 면적은 1/3로 줄어들었고 목화 재배지는 사막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그 맑던 팔당호 물이 3급수로 전락한 것 잘 아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생수를 사다 먹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우리들 자신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상 쓰는 샴푸, 한 번 머리 감을 때마다 정화를 위해서는 수 톤의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합니다. 물가에 골프장, 호텔, 음식점 마구 지어놓고, 거기서 놀고 마시고 그 오수를 우리가 마셔야할 그 물에다 마구 버립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노자가 말한 無爲自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 즉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위는 '하?않음'이지요.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것' 자연의 일부인 나. 영어권에서는 nature를 자연으로 번역하고 (인간의)본성으로도 해석하지요. 동양의 사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發明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동양세계에서는 숨어져 있던 이치의 發見으로 이해되는 것,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화약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에 하나입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발명의 의미이지만 동양(중국)의 사고에서는 화약의 이치를 발견한 것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배를 만든 것도 가벼운 것이 물에 뜨는 이치를 발견한 것 뿐이라는 것이지요.  4)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명령어를 집어넣고 디지털 계산에 의해 출력이 되는 기계가 아니라 자연의 숨결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고 반응하는 '몸'을, 그 '몸'에서 탄생하는 '정신'을 가진 존재입니다. 대체적으로 정신을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몸'과 '정신'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몸은 more life를 지향하지요? 정신은 more than life 즉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지향합니다. 단순히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보다 가치있게 사는 것 그것이 생명을 올바로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시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시를 한 편 읽어 볼까요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최 승 호  1.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황량한 밤이다. 누군가 죽은 딸 곁에서 울고 있다.-  2.  시화호에선 시체 냄새가 난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 이 거대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3.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느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왜들 떠나시오?」마을 사람들이 대답했다. 「악취 때문에 떠납니다」달마가 보니 바다 속에서 대총이라는 큰 이무기가 썩고 있었다. 달마는 해안에 육신을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 해안에 벗어놓았던 몸이 사라진 걸 알고는 당황한다. 달마는 결국 자신의 육신을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군가가 바닷가에 벗어놓은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4.  시화호에선 악취가 난다. 관료들에게서도 악취가 난다. 구역질, 두통, 발열, 숨막힘,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개펄은 거대한 조개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쩍 벌어진 조개껍질 위로 허옇게 소금바람이 분다. 갯지렁이들도 떠났다. 도요새들은 항로를 바꾸었다.  5.  무력감에서도 악취는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는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달마는 시화호에 오지 않는다. 시화호에 달이 뜬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누가 죽은 시화호를 딸처럼 부둥켜 안고 먼 바다로 걸어나가며 울겠는가.  6.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청부자?  7.  내가 시화호의 살인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다오. 달 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나를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든지.  이 시를 읽어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시화호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워낙 많아서 어린 학생들이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화호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내용일지 염두에 두시고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A.  경기도 시흥시와 화성군 및 안산시에 걸쳐 있는 시화호 간척사업은 60년대부터 그 가능성이 검토되다가 87년 6월부터 사업이 시작되어 94년 1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그러나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5 천억 원이 투입된 시화호 방조제 사업의 결과 남은 것은 「썩은 물이 넘실대는 죽은 호수」뿐이다. 주변환경은 돌이킬 수 없도록 망가졌고 현지 주민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같이 대규모 개발사업에 의한 물리적 환경변화가 현지 주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변화의 물질적, 상징적 의미를 「거대한 사기극」의 개념으로 인식한 「시화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가 발간돼 눈길을 끈다.  어느 누구도 일부러 현지주민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불편을 안겨주려 의도한 바 없지만 결과적으로 주민들은 「사기꾼 없는 사기극」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화호 사업 이전 전적으로 바다에 의존해 살아온 이들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대체 생계를 찾는데 실패했으며 자신감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지역은 바다가 막힌 후 갯벌이 마르면서 소금이 하얗게 드러났고, 바람이 불면 미세한 먼지와 함께 소금이 날려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였다. 생활의 터전이던 바다를 잃은 대신 새로운 삶을 기대하면서 융자를 얻어 심어 논 포도나무들은 말라비틀어지고 빚만 남았다.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는 깨어지고 염분으로 인한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같이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결정되고 시행된 사업 대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직접적인 피해자이면서도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는 시화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 책의 저자들은 「환경의 파괴는 바로 인간의 삶과 미래에 대한 파괴행위」임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개발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환경변화와 함께 주변환경이 심하게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지 주민들은 국가적 필요와 공익성을 내세운 사업 시행자들의 강압적 태도나 법률적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금전으로 환산될 수 없는 상징적, 문화적 변화나 정신적 피해, 미래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안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  - 1999년 6월 12(금) 조선일보  B.  < 시화호> 태어나선 안될 호수였다.  시화 담수호가 결국은 '사망선고'를 받게 됐다. 농림부가 시화호 남쪽 간척 농경지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우정호로부터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을 확정함으로써 담수호로서의 기능이 포기된 것이다. 1천 8백만 평 규모로 조성될 도시와 공단지역의 용수(하루 90만T)는 한강으로부터 공급할 것이라는 수자원공사의 설명이고 보면, 시화호의 용도는 사실상 사라졌다.  정부의 담수화 포기는 어떤 방법으로도 시화호의 오염을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정부는 시화호의 오염이 사회적 쟁점으로 대두된 후 96년 7월 4천 5백억 원을 수질개선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 뒤 정부는 안산시 하수처리장의 용량을 늘리고 ,시화공단 종말처리장의 방류수를 먼 바다로 뽑아내는 등의 대책을 시행해 왔다. 그럼에도 수질은 계속 악화돼 97년 6월 화학적 산소 요구량 22.8ppm을 기록했다. 결국 수자원공사는 97년 7월부터 바닷물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지금은 해수화가 완료됐다.  시화호 수질개선 관련 용역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한양대 신응배 교수는 "담수호로 유지하면서 수질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해다. 정부는 4천5백억 원의 투자를 밝혔지만 적어도 1조원 이상이 소요되리라는 의견이다. 특히 축산폐수의 처리가 어렵다는 신교수의 설명이다.  정부는 시화호 건설계획을 세우면서 호숫물 위로 유람선이 떠다니는 수도권 서남방의 대형 유원지를 조성하겠다고 큰 소리 쳤었다. 87년 4월 29일 시화개발사업 착공식 때 찍은 당시 사진에는 이규호 건설부 장관과 김용래 경기도 지사 등이 장미빛 구상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장면이 잡혀 있다.  하지만 96년 7월 수질대책을 내놓으면서 환경부장관이던 정종택씨는 "태어나서는 안 될 호수였다" 고 얘기했다. 공업도시들을 끼고 있는 수도권 소하천 최하류의 물을 가둬놓고 이걸 용수로 공급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무모했다는 것이다. 시화호로 흘러드는 반월천 동화천 안산천  등 7개 소하천의 유량을 합해 봐야 연간 3억 7천만 톤이다.  여기에 저수용량 1억 8천만 톤의 방조제를 쌓아놓고 보니 물이 거의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면서 오염도가 급속히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무리한 계획이 강행된 것은 환경을 도외시한 개발 일변도의 정책 마인드 때문이었다. 시화호 방조제 사업은 80년대 초반 중동 건설붐이 퇴조한 후 국내로 되돌아온 유휴 건설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겠다는 정치적 고려에서 입안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더구나 시화개발사업에 대한 환경평가 협의가 환경당국에 접수(87년 10월)된 것은 착공(87년 4월)후 여섯 달이 지난 다음이었다. 애당초 환경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는 증거다. 또한 환경당국은 하수처리장 방류수를 먼 바다로 빼내기 전에는 방조제를 막지 말라고 협의조건을 달았지만, 수자원 공사는 이를 무시하고 94년 1월 둑을 막아버렸다.  - 1999년 11월 27일 조선일보  C.  경기 안산시 사동 시화호 북쪽 간석지에 서식하는 갯지렁이가 대량 폐사돼 한국수자원공사가 원인 조사에 나섰다. 22일 위원장 최종인씨는 "시화호 상류에 대한 생태조사를 벌이던 중 갯지렁이가 갯벌에 대량 폐사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폐사된 갯지렁이들은 폐사된 지 3∼4일이 지난 듯 흰색으로 탈색되어 바다위에 떠다니고 있으며, 일부는 갯벌에 묻혀 악취를 풍기고 있다. 죽은 갯지렁이들은 한국해양연구소 앞에서부터 목내동 반월 열병합발전소, 시화공단 입구에 이르는 간석지 7.5㎞ 구간에 걸쳐 있다.  - 1999년 6월 23일 조선일보  D.  시화호에서 3천 여 년 전에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굴껍질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경기도 안산지역 환경운동가 최종인(45)씨에 의해 지난 7월 처음 발견된 이 굴껍질은 한국해양연구소와 여수대학교의 공동분석 결과 3천 여년 전 서식했던 것으로 12일 판명됐다.  이 굴껍질은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껍질과 같은 타원형이며, 긴 쪽의 길이가 25㎝로 보통 굴껍질의 10 배 가량 된다. 여수대 이영규 교수는 "탄소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확인한 결과 3015∼3253년 전에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 "이 굴은 하천과 바다가 접하는 갯벌지역에서 자라는 참굴의 일종으로 국내에서 발견되기는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굴껍질을 발견한 최씨는 "안산시 대부동 방아머리와 탄도 중간 지점에서 탐사작업을 벌이다 무릎 깊이의 물에 잠긴 갯벌에서 찾아냈다"며 "갯벌 속에 상당량이 묻혀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화호에서는 지난해 9월 공룡알 화석지가 발견되는 등 우리나라 자연상태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1999년 11월 12일 , 조선일보  * 1, 2, 3, 4, A, B, C, D는 편의상 필자가 임의로 붙여놓은 것임.  최승호 시인의 시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를 읽기 전에 신문기사 A,B,C,D를 먼저 읽는 것이 순서인데.... 좋습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시에 나타난 내용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 잡지,TV의 기사, 오락 프로그램 등등에는 무수한 정보가 있습니다. 저도 시화호에 대한 위의 글들을 인터넷 신문 검색을 통해서 찾았습니다. 시화호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이렇게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로 써야할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사회적인 문제라든지, 개인적인 문제라든지 그 어느 것을 가리지 않고 시로 써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집니다. 문제화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 봅시다. 위의 기사들을 시인은 빠트리지 않고 다 읽습니다. 읽고보니 슬슬 시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옮긴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는 것이 아니지요. 사실을 정서를 지닌 다른 그 무엇으로 묘사한다는 것이지요. 어폐가 있을지 몰라도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의 내면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현상에 대해 시인은 반성 작용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다'라는 정보를 "꽃이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성찰의 단계로 끌어가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기사를 요약해 봅시다.  A : 시화호는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위주의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에 터전을 둔 주민들의 생활을 황폐화시켰다  내가 그곳에 터전을 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B : 시화호는 정치인들의 책략에 의해서 천문학적인 세금을 낭비하고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었다. 그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 문제> 국민의 세금을 사리사욕에 채우고 지도자라고 으시대었던 정치인들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을까?  C : 시화호는 완전 오염된, 갯지렁이도 살 수 없는 호수가 되어버렸다. 오,폐수를 방류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오,페수시설을 할 수 없다. 내가 공장을 가동하는 운영자이거나, 축산업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D : 시화호 지역은 옛날부터 민물과 바다물이 만나는 지역으로서 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공룡도 살았었다.  < 문제> 그 옛날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원래의 자연상태의 시화호 - 그곳에 살던 각종 생물들, 사람들 - 정책입안자들 - 사화호 공사로 부를 축적한(부정부패) 사람들 - 오,폐수를 버리는 사람들 - 망가진 자연 - 시화호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 - 시화호가 어찌 되었던 무관심한 사람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아마도 두, 세개의 항목에 다 걸치게 될 것입니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모순...... 작년인가요? 모 공영방송에서 영월 동강지역을 집중취재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실 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총괄한 PD가 저의 친구여서 더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흥미로웠지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남한강에는 홍수를 조절할 수 있는 댐이 충주댐 하나 밖에 없어서 큰 비가 내리면 아주 난처해지지요, 충주댐 수문을 열자니 서울지역이 범람하고, 수문을 닫자니 충주지역의 농경지가 아수라장이 되고. 그래서 아예 상류지역에 댐을 만들자. 이렇게 생각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영월지역은 석회암 지역이라 수많은 동굴이 있고..... 오히려 물이 오염되고, 수몰지역이 생기고, 이런저런 이유로 지역의 갈등 (주로 경제적 이익에 관한 다툼이지만)은 증폭되고 말았지요.  서울 강남의 모 치과의사께서 사비를 털어 영월 동강 지역에 사람들을 데리고 갔지요. '자, 봐라, 얼마나 아름다운 환경이냐, 자연생태계의 보고! 댐 만들면 이게 다 무너지고 결국 우리 생활도 파괴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강의 비경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래프팅 한다고 사람들이 몰려가서 시끌벅석...... 마시고 버리고, 누구 탓을 해야 할까요?  시를 쓰는 마음은 반성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화호을 놓고 여러분은 무엇을 반성하겠습니까? 무엇을 시로 옮기시겠습니까?  <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는 프롤로그(서언)을 포함하여 7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말할 때 單刀直入的으로, 요약해서, 간단하게 이런 등등의 말을 하게 됩니다. 서론, 본론, 결론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시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합시다. 옛날 우리 한국 영화는 30분 정도 보면 그 결말이 뻔해서  재미가 없었지요.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적인 내용, 사람들은 '에이, 시시해, 재미없어' 그랬지요. 전 번 시간에 임보 시인이 '시는 우선 재미있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고 한 그 내용을 기억하시지요. 시도 처음부터 무겁게 나가거나 내용이 뻔하면 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시를 오래 쓰다 보면 시의 서두와 결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독자를 흡인하는 능력, 독자의 상상력을 뒤집고 뛰어넘는 재치, 이런 것들이 시인들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의 내용은 인용한 A, B, C, D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시화호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카피하는 형식으로는 시로서의 의미를 찾기 힘듭니다.  프롤로그를 봅시다.  1)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 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 본다. 황량한 밤이다. 2) 누군가 3) 죽은 딸 곁에서 울고 있다.  시인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 순리대로 생명을 나누는 그 시절을 아름다운 처녀시절이라고 묘사합니다. 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기법은 묘사입니다. 언어의 기능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지시기능, 정보기능 등등 6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했지요. 다른 측면에서는 언어를 과학적 언어(숫자, 수학공식)와 정서언어로 구분하기도 한다는 것, 기억하시지요? 정확한 표현(묘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합니다. 나의 주관이 개입될 때, 언어는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지시적이기도 하고 정보 전달기능이기도 하고 ......  시인은 시화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서 프롤로그로 암시를 줍니다. 2)의 누군가라는 표현은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의 죽은 딸은 무엇입니까? 바로 시화호입니다. 2)는 1)과 연결 시켜 볼 때 내가 죽은 딸 곁에서 운다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시인은 누군가라고 우는 대상을 확정시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내가 운다라고 하면 왜 내가 우는 까닭을 계속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시를 마칠 때까지 내내 그런 부담을 지울 수도 없고 읽는 독자도 그런 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라고 표현하면 그 범위는 매우 불확실하면서도 한 둘이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그래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서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절묘한 시적 장치입니다.  1 연은 시화호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생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 무엇들, 시체냄새는 물질이 썩는 것일 수도, 잃어버린 양심이 썩는 소리일 수도 있고, 문명 자체가 썩는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라는 표현을 잘 생각 해봅시다. 완전히 썩으면 냄새가 사라진다라는 생각은 매우 시적인 발상입니다.  2 연은 달마가 등장합니다. 장면의 전환이지요. 달마는 누구입니까?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그 도통을 이어받은 달마는 37대 쯤 되지요? 달마는 동쪽으로 갑니다. 물론 동쪽은 중국이지요. 몇 년 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뜻은?' 이런 영화도 있었지요. 저도 철학공부 시간에 우스개 소리로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달마는 동쪽으로 갔게? 학생들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왜일까?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중국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달마는 불교가 더 이상 펼쳐질 수 없는 인도를 떠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상륙합니다.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시조가 되지요, 禪佛敎는 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敎外別傳 : 경전공부를 좋아하지 않지요. 불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고, 기원하고 그런 것을 거부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궁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불법을 주장하지요. 어째든 역사상의 달마는 매우 신비화된 존재입니다. 2 연에 나타난 달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 미루어 놓읍시다. 믿거나 말거나 달마가 행한 일들이 사실적으로 2연에 전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의 우화를 통하여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우회적으로, 자 이 이야기는 나의 주관이 아니라 어디에 근거가 있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야 라고 심리적으로 독자를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시적 장치이지요. 는 상징이 깊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욱체를 벗어놓는다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淨化한다는 것? 희생한다는 것?  얼굴 흉측하다는 것은 敎化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까요?  3 연은 시화호 악취의 근원을 파고들어 갑니다. 악취의 근원이 관료들이라고 적시하면서 시화호의 황폐로 인한 결과를 보여 줍니다.  4 연은 어찌할 수 없는 시화호의 부패에 대해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되돌아 보면서 2 연에서 등장한 달마조차도 오지 않는 비극적 상황, 교화할 수 없는 나락의 상태, 절망의 상태를 처연하게 읊게 됩니다.  5 연은 드디어 시화호를 오염시킨 주역이 자신이라는 반성에 이르게 됩니다. 앞 연에서 무력감에서도 악취가 난다고 했지요? 나는 무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악취가 납니다.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시화호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도 살인청부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프롤로그에서 누군가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자리를 위해서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는 우리 모두. 꼬박꼬박 세금을 내면서도 생색을 내고 배불리는 것은 위정자들, 그런 위정자들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 그 모두가 살인청부자이고, 악취가 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결코 국외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연은 그러므로 처형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당당하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처연함. 눈 푸른 달마는 무엇입니까? 사실적으로 인도인인 달마는 눈이 푸를 수도 있겠지만 이 시에서 표현된 눈 푸른 달마는 한국외적인 것, 서양적인 것, 현대문명을 일으켜 세운 서양의 시스템, 과학, 이런 것들을 총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신문기사를 스크랩 해 드린 것도 시에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한 번 생각 해보고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사실적 정보를 어떻게 시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하는 것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시는 반성의 힘을 키워준다고 믿습니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先知後行할 것이냐, 아니면 知行合一할 것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해 왔습니다. F.Bacon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것은 선지후행의 계열에서는 내용이겠지만 저는 '아는 만큼 행동해야 한다' 쪽에 서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지사일수도 선각자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로 표현되는 자기반성이 없는 시인은 시를 써야하는 존재이유를 찾기 힘든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혼을 불사르지 못하는 예술가는 그 생명이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언어의 특성이었습니다. 강의의 의도는 여러분들에게 시는 언어를 도구로 한다는 것을 우선 말씀 드리고 나서 시에서 씌여지는 언어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比喩法 등 수사학적인 내용을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유법에 대한 강의는 실제 작품토론 시간에 게재할 것이니 기다려 주세요)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가 지닌 특성을 먼저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의 시에서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단어가 몇 개나 있었습니까? 시에서 표현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연유합니다. 멋있는 것, 시적인 어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배열, 조합에 의해서 아름다움이 생성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고가 깊어지면, 언어의 사용 또한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겠지요, 그런 수련 기간이 경과하면 아마 여러분은 몰라보게 아름다워지고 시적인 상태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는 지시적인 기능을 대단히 강조하고, 사전적 의미로 해석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되, 상투적인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시는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고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상식적인 내용으로 전락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정말 시적이야'라고 말합니다. 詩的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어떤 美의 형태를 갖추고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관점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의미망이 매우 넓습니다. 그리고 하나 이상의 단어가 서로서로 결합할 때 그 의미망은 크게 증폭합니다. 한 권의 시집을 여러 사람이 읽고 나서 어느 작품이 좋으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각양각색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시각에서 시를 해석하기 때문에 선호하는 작품은 그 편차가 매우 큽니다.  언어는 그 하나마다 內包와 外延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 지시하는 사물을 적용시킬 수 있는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내포란 '한 사물이 함유하고 있는 속성의 집합'입니다. 언어의 조합과 배열이란 이렇게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내포와 외연을 틀을 조화시키거나 깨트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망을 경험하게 하는 喚起의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어트Eliot는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매우 숙고해 보아야할 내용입니다. 새로운 의미망은 처음 '아! 이것을 시로 써 보아야 하겠다'라고 자신을 환기하는 동시에 어떤 사태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재해석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시에서 쓴 언어가 보편적 일상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해서 피해야할 어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 소리, 문자, 가로, 세로 등등의 단어'는 내포와 외연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시로 드러날 때에는 매우 모호한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모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뒤죽박죽 되어서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가 아니겠어요? 시의 특성은 曖昧性이다라고 한다면 그 애매성은 다양한 내포와 외연의 결합으로 다각적으로 해석 가능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움, 슬픔, 외로움' 이런 단어들은 시에서 항용 사용되는 것이지만 시에서 정작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움의 상태, 외로움, 슬픔의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서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한용운 시인의 ' 님의 침묵'이 훌륭한 시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님'이 상징하는 바의 의미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는 데 있는 것이지요.  어느 사람에게는 한 편의 연애시로 읽힐 수도 있겠고, 또 어느 사람에게는 구도의 의미로, 또 어느 사람에게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라고 廣義로 해석할 수 있는 그 다양성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점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강조점 :  1.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관습적 표현이 되어서는 안된다.  2. 詩語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3. 하나의 언어는 그 하나마다 지닌 의미가 있다 (배열, 조화: 바둑에서의 무궁한 포석처럼 언어의 무수한 포석을 생각하라 4. 시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묘사를 통하여 미적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이가림 시인의 시인데 시 제목은 여러분에게 숙제로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물에 관한 이미지를 통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 수작입니다.  언제부터  1) 잉겅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2)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나  3)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4) 어지러운 충만이기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5)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6)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이 시도 특별하게 어렵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은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직유법은 A는 B처럼(같이)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요.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직유법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직유법을 많이 쓰는 시인들이 거의 없지요. 1)의 잉겅불과 그리움의 결합, 잉걸불이 어떤 불인지 잘 모르는 분들도 바짝 마른 잎들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잉걸불은 정감이 있는 순수한 우리말이지요. 여러분들은 象徵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보셔야 합니다.  언어는 약속이지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서로 약속을 하므로서 지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지요. 사회가 발전해 나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늘어나게 되고 하나의 단어는 점차적으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의미로 분화해 나갑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상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심상(이미지)을 생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다음을 볼까요.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이글거린다. 불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그리움이 이글거린다는 이미지는 근접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3) 영혼의 가마솥이라는 표현도 재미있지요. 시를 공부하는 여러분은 이와같은 'A는 B이다'의 형식을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영혼과 가마솥이라는 두 단어, 영혼은 추상적이지요. 가마솥은 현존하는 물질입니다. 추상적인 것을 물질화(구상화)하는 연습이 시를 잘 쓰는 한 방법입니다. 4) 어지러운 충만,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어지럽다와 충만의 결합 어지럽다라는 동작과 충만이라는 추상이 결합되는 상태는 어떤 상태가 될까요 얼마나 절실하게 가득찼길래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6) 홍보석의 슬픔, 홍보석은 이 시가 스케치하고 있는 어떤 사물의 색깔인데 그것을 홍보석이라고 비유하고 슬픔을 연결시켜 놓아 확연하  게 어떤 슬픔인지 알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떤 무드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어요? 슬픔의 빛깔화, 붉은 슬픔? 5)는 아픔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찾아낸 문구입니다. 지구가 깨지는 소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제조건은 이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가 없으면 우리는 그 존재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 지구가 깨진다? 지구가 깨지면 60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구가 깨지는 소리는 그 어떤 아픔보다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 그 소리가 어떤 소리냐고 묻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를 쓰는 재미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책방에 들러 상징어사전을 한 권 구입하십시오. 물, 불, 눈, 밤, 말.......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무수한 말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둔다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력을 한껏 키워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또 여유가 있으시다면 시어사전도 한 권 구입하십시오. 우리가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결곱고 살겨운 우리말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마도 여러분들은 놀라실 것입니다.  <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와 위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치밀한 구성력에 눈길을 둡니다. 좋은 시일수록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을 품어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이면서 마치 카펫트를 짜듯이 한 올 한 올 짜 올려 한 폭의 아름답고 포근한 양탄자를 만들어 내는 것,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상태까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 내는 것. 독자는 한 조각 한 조각의 풍경을 맞추어나가는 행위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한 폭의 큰 풍경화를 보게 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성급하게 나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안으로 감추려고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도 언어행위는 드러나는 것 입니다.  여러분들께 현대시인에 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응답을 해 주셨는데 안도현, 기형도, 도종환, 정호승, 장석남, 나희덕, 최영미, 김정란, 등의 시인을 거명해 주셨습니다.  이 다음 주에는 먼저 안도현 시인의 시집 을 다루고, 그 다음에는 도종환 시인의 을, 마지막으로는 최영미 시인의 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시집을 구해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 강의록이 늦어지고 있는 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고바야시 잇사 작품 (1763~1827) / 시인 최윤희           고바야시 잇사 小林一茶 (1763~1827)         벼룩 네게도 분명 밤은 길겠지 외로울거야 이상하다 꽃그늘 아래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여위 개구리 가지 마다 잇사가 여기 있다 연잎 위에서 이 세상의 이슬은 일그러지네 나의 별은 어디서 노숙하는가 은하수 죽은 어머니 바다를 볼 적마다 볼 적마다 옷 갈아입어도 여행길에는 같은 이가 따라나서네 자식이 있구나 다리 위의 걸인도 부르는 반딧불이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 빌고 발로도 빈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 낀 손톱 냉이풀 앞에서도 부끄러워라 사람이 물으면 이슬비라고 답하라 동의하는가 내 옷소매를 풀잎이라 여기니 기어오르는 반딧불이 무엇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나 마타리꽃은 쇠못 같은 앙상한 팔다리 가을 찬 바람 저녁 제비여 나에게는 내일도 갈 곳 없어라 새끼 참새야 저리 비켜 저리 비켜 말님 지나가신다 나무 아래 나비와 머무는 것도 전생의 인연 고향에는 부처 얼굴을 한 달팽이들 사람도 한 명 파리도 한 마리다 넓은 방 안에 쌀 주는 것도 죄짓는 일이구나 싸우는 닭들 이 세상은 나비도 아침부터 분주하구나 돌아눕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 줘 귀뚜라미 재주 없으니 죄지은 것도 없다 한겨울 칩거 잠이 든 나비 들불의 연기가 뒤덮을 때까지 봄날 저녁 물 있는 곳에는 남아 있는 빛 무를 뽑아서 무로 길을 가르쳐 주네 눈 녹은 온 마을에 가득한 아이들 사람이 오면 개구리로 변해라 물 속 참외야 모 심는 여자 자식 우는 쪽으로 모가 굽는다 젊었을 때는 벼룩 물린 자국도 예뻤겠지 이슬방울 함부로 밟지 마라 귀뚜라미여 휘파람새는 왕 앞에 나와서도 같은 목소리 평등하게 새해의 눈비 맞는 작은 집 고아인 나는 빛나지도 못하는 반딧불이 혼자라고 숙박부에 적는 추운 겨울밤 몸에 따라다닌다 전에 살던 사람의 추위까지도 나는 외출하니 맘 놓고 사랑을 나눠 오두막 파리 사립문 위에 자물쇠 대신 얹은 달팽이 하나 나팔꽃으로 지붕을 새로 엮은 오두막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 물리다니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어 버렸네 좋은 눈으로 봐도 추운 기색이다 초겨울 바람 길어서 날 저무는 거리의 악사 주무시는 모습 파리 쫓아 드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고향 땅이여 닿는 것 스치는 것 가시나무꽃 달과 꽃이여 마흔아홉 해 동안 헛걸음이라 고요함이여 호수 밑바닥 구름의 봉우리 이곳이 바로 마지막 거처인가 눈이 다섯 자 올빼미여 얼굴 좀 펴게나 이건 봄비 아닌가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첫 반딧불이 왜 되돌아가니 나야 나 가을바람 속 꺾고 싶어 하던 붉은 꽃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다만 있으면 이대로 있을 뿐 눈은 내라고 극락세계에 가지 않은 축복 올해의 술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종잡을 수 없음 아름다워라 찢어진 문틈으로 보이는 은하수 죽으면 나의 날을 울어 줘 뻐꾸기 구석구석 내리는 새해 비를 맞는 작은 짐이며 새해도 길 떠난 그대로인 넝마주의구나 집 없이 에도의 새해를 맞이하도다 또 올해도 현세는 춥구나 초가집 흙벽으로부터 비스듬히 비치는 새해 아침 햇빛이여 신춘이여 연기가 나는 것도 겉모양 올해부터 고스란히 돈을 벌겠다 사바 놀이 붓글씨 쓰고 받을 밀감 보면서 정원 첫 붓글씨여 우는 고양이에게 빨간 눈을 하고 공놀이인가 한결같이 성대의 큰 연 작은 연이구나 축복으로 눈도 내리는 정월 보름 불태우기 도망가려고 할 때구나 물로 축복받는 오십된 신랑 물든 나막신 진흙으로부터 봄이 왔구나 정원이여 매화 대신 큰 눈보라 사람은 무사 왜 죠닌이 되어 오나 무사여 휘파람새마저 사용하는구나 흰 이슬에 첨벙 내딛는 까마귀인가 수레에 짓눌려 시든 제비꽃 무슨 벚꽃인지 금전 세상이 되었도다 나와 놀자꾸나 어미 없는 참새 학의 새끼의 천년도 하루는 줄었구나 곡물 가격 자꾸 떨어지는 더위이구나 하룻밤 넘긴 두부 불빛에 우는 모기여 새벽녁이여 희미한 안개가 밥상을 덮네 시원한 바람이 구불구불 돌아서 왔도다 가을밤이여 장지문 구멍이 피리를 부네 덧없는 세상은 덧없는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월화여 사십구년의 허송 세월 고향은 파리마저 사람을 찌르는구나 고요함이여 호수 바닥에 산봉우리 구름 걸으면서 우산 말리는 두견새 가을바람에 걸어서 달아나는 반딧불이 좁긴 하지만 뛰는 연습이라도 내 집의 벼룩 번뇌의 세상 아무리 벚꽃이 피었다 한들 이슬이 지네 추한 이 세상에는 볼일 없다고 이슬의 세상 이슬 속에서도 다툼이 있네 홀로인 것은 나의 별이겠지 은하수 속에 두 말할 필요 없이 뻐꾸기는 울보 스님 원숭이도 자식을 업고 가리켜 보이는 반딧불이 아무것도 없지만 마음의 편안함이여 시원함이여 저무는 날이 그리도 반가운가 풀벌레 소리 휘파람새가 흙 묻은 발을 닦는 매화꽃 갈퀴덩굴에서 저런 작은 나비가 태어나다니 달고 짜다면 필시 나의 이슬 남의 이슬 옆방에서 새는 불빛으로 밥 먹는 밤의 추위여 어린 은어는 서쪽으로 지는 꽃잎은 동쪽으로 야윈 국화도 비틀비틀거리며 꽃을 피웠네 수레에 눌려 짓뭉개어져 버린 제비꽃이여 달팽이야 봐, 봐, 너의 그림자를 오늘도 장구벌레 내일도 또한 쓸모없는 이 몸도 초대하네 모내기 새참 여름 매미의 울음은 이 세상에 주는 선물 사이좋구나 다시 태어난다면 들판의 나비 가엾어라 나를 따라오는 나비 달팽이 그 몸 그대로 자고 일어나고 달팽이 부처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이 들었네 오늘부터는 우리나라 기러기다 편히 자거라 노천탕에서 사람들 머리 세는 어린 나비 사람이 있으면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나를 보면서 얼굴을 찌푸리는 개구리여라 불안하게 빗속을 나는 봄날의 나비 덧없는 세상 저런 작은 새조차 둥지를 짓네 구석의 거미 걱정 마 대청소는 안 할 테니까 귀뚜라미도 따라서 들어오는 한겨울 칩거 나도 너처럼 늙을까 가을의 나비 그런 목소리라면 춤도 한번 추어 봐 개구리야 좀 거들어서 이 좀 잡아 줘 어린 참새야 백어 우르르 태어나는 아련함이여 한쪽 구석의 그을린 인형 한 쌍의 부부 한마음으로 피려고 하지 않는 문 앞의 매화 내 집의 벼룩 가엾어라 어느새 수척해지네 그 돌 위험해 머리를 부딪겠어 반딧불이야 휘파람새 오줌을 누면서도 경전을 외네 커다란 불상 콧구멍에서 제비 날아 나온다 모기는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아나 자꾸 또 오네 젊었을 때는 소문날 정도로 사랑받았지 늙은 벚나무 이 세상은 풀벌레까지도 잘 우는 놈 못 우는 놈 불평을 말할 상대는 벽뿐 저무는 가을 쓸쓸함이여 어느 쪽을 향해도 제비꽃 자벌레까지 자로 재고 있다 내 단칸방 기둥을 봄은 오는데 마흔세 해 동안을 남의 밥이라 얌전하게 빈집 잘 지키고 있어 귀뚜라미야 나와, 반딧불이 방문을 잠글 거야 어서 나와, 반딧불이 아침에 내리는 비 어느새 곁에 있는 달팽이 달팽이 천천히 올라라 후지산 풀벌레 운다 어제는 못 보았던 바람벽 구멍 그네를 타네 벚꽃을 한 가지를 손에 쥐고서 이러나저러나 말하는 것도 잠시뿐 눈사람 나비가 안다 나의 몸도 먼지 같은 것 재 속의 불 살 나이 줄어듦도 저리하겠지 좋게 보려고 해도 역시 추운 그림자 달팽이 나와 함께 살자 첫 겨울비 살아남은 나에게 걸리는 풀잎의 이슬 다만 살아 있을 뿐이어라 나와 이 양귀비꽃 마음으로부터 고향에 눈이 내리네 음력 정월 매화 대신 날리는 큰 눈보라 나비 날아가네 마치 이 세상에 바랄 것 없다는 듯 첫 반딧불이 휙 하고 벗어나는 손바람 휴지에 싸여 있어도 빛나는 반딧불이 반딧불이 이리 와 반딧불이 이리 와 혼자 마시는 술 우는 풀벌레 너에게도 어머니가 있니 아버지가 있니 이슬의 세상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하지만 울지 마 풀벌레 헤어지는 사랑은 별에도 있어 휴지를 깔고 앉는데 제비꽃 눈이 녹는다 어제는 못 보았던 '집 세놓음' 팻말 흩날리는 눈 반쯤 섞여 내린다 봄비 극락세계가 가까워져 오지만 몸은 춥구나 불을 끄러 때맞춰 왔구나 나방이 외로운 무덤 언제나 함께 있는 굴뚝새 이 모기 여인의 방 불빛을 보고 몸을 불살랐구나 뛰어라 벼룩 이왕이면 연꽃 위에서 술잔에 떨어진 벼룩 어서 헤엄을 쳐 헤엄을 쳐 번개에 휘청거리며 다리를 건넜어라 내 오두막은 풀들도 여름이면 여위어 가네 오는 반딧불이 내 오두막이라고 깔보는 건가 산 위의 달 꽃 도둑에게 빛을 내려 주시네 비 내리는데 어딘가로 향하는 달팽이 저녁달 아래 허리까지 옷 벗은 달팽이여라 이 달팽이는 못었을 먹고 사나 가을 저물녘 도망쳐 와서 한숨을 쉬는 거니 첫 반딧불이 날뛰는 벼룩 내 손에 걸려들어 부처 되어라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쓸모없는 풀 너도 높아져 가고 해도 높아지고 흔들리면서 봄이 사라져 가네 들판의 풀들 오고 또 와도 서툰 꾀꼬리 우는 집 담장 뛰는 솜씨가 서툰 요 벼룩 귀여움은 한 수 위 나의 가을 달은 흠 없는 달 그렇지만 지는 억새꽃 점점 추워하는 게 눈에 보이네 그럴 가치도 없는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 늙은 몸은 허무가 길어도 눈물이 나네 나팔꽃이여 사람의 얼굴에는 결점이 있다 이슬의 세상 이슬을 노래하는 여름 매미 오는 사람이 길을 내 주네 대문 앞의 눈 울지 마 풀벌레 때가 되면 세상이 나아질 거야 저녁의 벚꽃 놀이 집이 있는 사람들은 바삐 돌아가네 무슨 일로 그리 심사숙고하나 달팽이 내 집에서는 휘파람만 불어도 모기가 달려오네 위를 향하고 떨어지며 우네 가을 매미         고바야시 잇사 전후(1769~1938)의 작품     사쿠라이 바이시쓰  桜井梅室  (1769~1852)     그러고 보니 저 달이 울었는가 두견새       이치하라 다요조 市原多代女  (1776~1865)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모두 봄바람 부는 둑길 너무 오래 살아 나도 춥구나 겨울 파리여 마침내 가는 길 어디인가 꽃구름 무릎 끌어안고 말 없는 두 사람 달 밝은 밤       오키타 소지  沖田総司  (1844~1868)     움직이지 않으면 어둠으로 멀어지는 꽃과 물이여       나이토 메이세쓰  内藤鳴雪  (1847~1926)     이른 아침 떠나는 말 머리의 은하수 첫 매와가 땅바닥 기어가는 아침의 습기       무라카미 기조  村上鬼城  (1865~1938)     여름풀 위에 고치를 만들고 죽는 풀벌레 정신줄 놓으면 죽을 수도 있는 무더위여라 추운 봄 부딪치며 걷는 장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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